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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향기 속에서

라일락 향기 속에서

한기홍

 

철이가 라일락꽃이 활짝 핀 나무 그늘에서 누군가를 기다려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같은 동네에 사는 하늘이에게 빌려줄 '홍길동전' 책을 두 손으로 소중히 꼭 쥐고 있었는데, 여름이 아직 안 되었는 데에도 손바닥에 눅눅한 땀이 배어나고 있다. 오늘이 일요일이니 틀림없이 하늘이는 이곳에 올 것이다. 이렇게 라일락이 활짝 피었으니 꽃을 좋아하는 하늘이는 꼭 오고말고. 철이는 마음속으로 몇 번을 중얼거렸다.

어제 집 앞 슈퍼에서 우연히 마주친 하늘이에게 뭐라고 말을 건넬까 눈치만 보다가, 불쑥 생각나는 대로 내뱉은 말이

". 너 독서반 이라며? 홍길동전 봤니?" 였었다.

하늘이는 잠시 멋쩍어하다가

"아니! 아직 안 봤어. 이번 여름 방학 때 볼려고 그래."라고 했었다.

철이는 마음속으로 잘되었구나 싶어

"? 그렇다면 내가 그 책 빌려줄까?" 하였으나, 하늘이는 빙긋 웃기만 했었다.

라일락 꽃향기가 진하게 코를 간지럽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동네에서도 제법 외진 이곳은 언덕배기 중턱에 나무들이 무성하게 가지를 드리우고 있는 꽃동산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인 재작년 봄 만해도 철이와 하늘이가 동네 아이들과 자주 놀러 오던 곳이었다. 술래잡기하면서 짓궂게 하늘이 허리를 잡아당겨도 보고, 두 팔로 우왁스럽게 하늘이의 하얀 얼굴을 감싸기도 했던 기억이 떠올라 철이는 입가에 빙그레 웃음을 머금었다.

확실히 하늘이는 작년에 중학교에 다니면서부터 많이 달라졌다. 같은 중학교 2학년이지만, 몸집도 상당히 커졌고 제법 어른스러운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얼굴이야 전에부터 예쁘기로 소문나 있었지만 새침떼기처럼 말도 없어져 초등학교 때처럼 허물없이 야! ! 하기에는 무언가 조심스러워졌다.

틀림없이 올 거야. 이렇게 라일락이 만발한 일요일인데. 하늘이는 꽃 중에서도 라일락을 제일 좋아했거든. 철이는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느끼며 슬쩍 홍길동전 책을 펼쳐보았다. 책갈피에 꽂아놓은 앙증맞은 엽서 한 장, 하늘이에게 다음 주 일요일에 '인천대공원'으로 놀러 가자는 메모가 들어있는 분홍빛 쪽지다.

언덕배기 끝으로 나 있는 기역 자로 구부러진 골목길에서 금방이라도 하늘이가 나타날 것 같아 촉촉한 손바닥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두 시간 동안 라일락 향기를 맡다 보니 머리가 띵해지는 것 같았다. 손목시계는 오후 세 시를 가리키고 있다. 철이는 엉덩이를 툭 툭 털고 일어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 놀러갔나? 에이 그렇다면.' 철이가 골목 쪽으로 두어 걸음 옮겼을 때, 골목에서 두 사람이 불쑥 나타났다. 철이는 갑자기 당황스러웠다. 두 사람은 하늘이와 아랫동네 약국집 건물에 사는 중3 태수였다. 태수는 덩치가 고등학생처럼 크고, 씨름을 한다는 소문이 나 있는 일 년 선배였다.

". 철이 아니니? 왠일이니?"

하늘이가 먼저 알아보고는 아는 체했다. 철이의 가슴은 무안함으로 콩딱거리기 시작했다.

". 그냥 심심해서 나왔어."

갑자기 태수의 걸죽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면서

"야아! 이게 누구야. 너 철이구나. 이녀석! 선배를 보면 인사를 해야지. 너 많이 컷구나"

얼굴이 벌게진 철이는 머뭇거리다가 하늘이의 눈길이 자신의 손에 쥐어진 책에 머무르고 있음을 느끼고는 슬그머니 등 뒤로 책을 감췄다. 그 때 가까이 다가온 태수가 별안간 철이의 어깨를 잡더니, 등 뒤로 돌린 책을 홱 나꿔챘다.

"이런이런! 니가 홍길동이냐? ! 이 녀석아. 넌 아직도 소설책이나 보냐? 공부 좀 해라. 하하하"

철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자, 말없이 서 있던 하늘이가 갑자기 태수의 손에서 책을 빼앗았다. 어리둥절한 태수를 밀치고 앞에 나선 하늘이의 하얀 얼굴을 본 철이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하늘이의 낯선 얼굴을 본 것 같아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자아. 철이야, 이 책 가지고 가. . 홍길동전 여름 방학 때 읽는다고 했잖아

집으로 돌아온 철이는 어머니도 본체만체하며 방문을 소리 나게 닫고는 책상에 앉아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턱밑에 놓인 홍길동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냅다 방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하늘이 너, 다시는 안 볼 거다

방바닥에는 책갈피에서 빠져나온 엽서가 철이처럼 부끄러운지 분홍빛으로 얼굴을 붉히고 있다.

저녁나절. 요즘 들어서는 차츰 흥미가 없어지기 시작하는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시큰둥하게 하고 있는 철이에게, 낭낭한 어머니 목소리가 거실에서 들려왔다.

철이야! 전화 왔다

철이는 옆집 사는 정식이 녀석이겠구나 싶어서

나 전화 안받아! 그냥 끊어줘 엄마!”

방문이 열리며 어머니가 웃으셨다.

여자 친구인데두?”

? 여자애라구? 누굴까.”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저쪽에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면서 진한 라일락 꽃향기가 풍겨왔다. 철이는 침을 꼴깍 삼키면서 수화기를 귀에 바짝 붙였다.

나 하늘이야. 아까는 미안했어. 태수가 요즘 우리 집 앞에 자주 온다. 우리 앞집에 걔네 학교에서 씨름 같이하는 친구가 이사 왔대. 근데 난 태수정말 밥맛이다. 지금 기분 괜찮아? 조금 있다가 아까 그리로 올래? 그 책 가지고.”

철이의 가슴이 다시 콩딱거리기 시작했다. 더욱 진해진 라일락 향기에 질려버린 철이는 옆에 바짝 붙어서 엿듣고 있는 어머니도 모른 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철이가 방바닥에 던져져 있는 홍길동전을 다시 집어 들었을 때, 철이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아지랑이 비슷한 야릇한 그 무엇이 있었다. 그것이 라일락꽃 활짝 핀 봄날의 능청스런 요술쟁이 할멈의 마술인지혹은 마음씨 좋은 꽃님의 선물인지운동화 끈을 조이는 철이의 가슴엔 온통 라일락 닮은 하늘이의 하얀 얼굴만 일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