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25시(The 25th Hour) 2

44

그다음 날 준위는 멋진 새 군복을 차려입고 나타났다. 포로들은 수로를 따라 줄을 지어 늘어서서 점심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온다던 장군은 그날도 오지 않았다.

사흘째 되는 날, 준위는 항상 입은 군복으로 다시 바꿔 입고 나타났다. 준위는 장군이 화가 나서 운하를 보러 오지 않는다고 알려 주었다. 그로부터 1주일 동안 포들에게는 작업량이 할당되지 않았다. 그리고 요한이 소속된 수용소는 북쪽으로 이동되었다. 지금까지는 보드랍고 노란 찰흙을 파는 일이었지만 앞으로는 굵은 돌과 바위를 깨뜨리는 작업을 해야 했다.

준위는 트럭을 타고 새로운 연장을 구하러 떠났다. 지금까지의 도구는 흙을 파는 데밖에는 쓰지 못하는 것이었다. 준위는 사흘 동안 자리를 비우더니 돌덩어리를 깨뜨리고 가루를 만드는 데 필요한 연장들을 트럭 두 대에 잔뜩 싣고 돌아왔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진행되는 작업은 무척 힘겨운 것이었다. 포로들은 겨우내 고된 일을 했다. 급식 사정도 나빠 사람들은 파리처럼 쓰러져 갔다. 앓는 사람도 있었고 또 몇 명은 죽어갔다. 요한은 잘 견디어 나갔다. 1주일 정도 목감기에 걸렸을 뿐 쓰러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작업은 진척되지 않았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4월이 되었으나 작업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겨우 몇 십 미터밖에 파지 못했다. 사람들 얘기로는 지난겨울부터의 이 작업은 여름 내내 계속될 것이고 가을이나 되어야 물이 들어올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5월 초순에 접어들자 갑자기 이를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준위는 참모 본부가 이 운하 작업을 취소했다고 알려 주었다. 국왕 샤를 2세가 퇴위하고 망명하는 바람에 이 수로 계획에 관여했던 장군들도 모두 망명을 했거나 파면되었던 것이다. 이제 왕궁에는 다른 장군들이 들어와서 왕이 한 운하 설계가 불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작업을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기차에 실려서 루마니아의 서부 국경으로 수송되었다. 거기에서 헝가리의 침공을 막을 요새를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요한 모리츠는 자기 작업장을 떠나면서 국왕의 설계가 실패로 돌아간 것을 섭섭하게 생각했다. 모든 작업이 헛수고였던 것이다.

 

 

45

새로운 수용소는 루마니아와 헝가리의 국경에 인접한 숲 속이었다. 그들은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기차에 시달리면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떠날 때 포로들은 수로를 파던 연장들을 가져갔고, 준위는 자기 사무실 전체를 다시 말하면 나무로 된 바라크 하나를 그대로 기차에 실었다. 스트룰은 명부를 운반했다. 포로들은 이가 득실거리는 옷을 그대로 입고 갔다. 포로 한 사람이 여남은 마리는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수용소에서는 수로를 팔 때에 쓰이던 연장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하여 나무를 찍어 넘어뜨려야 하는 일이었다. 요한 모리츠는 방어 요새라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도 알지 못했다. 하여튼 그들은 숲 속의 나무를 전부 찍어서 국경으로 운반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붙어서 나무를 찍어서 골짜기로 보내는 일을 했다.

요한 모리츠는 방어 요새를 어떻게 쌓는지 보려고 했으나 좀처럼 그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는 아마 이렇게 잘라 낸 나무들로 헝가리와 루마니아 사이에 거창한 벽을 쌓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 계획도 보나마나 참모 본부가 세웠겠지만, 나무만 쓰러뜨리는 일을 하는 요한으로서는 더 이상 알 도리가 없었다. 아무튼 두 나라사이에 굉장히 큰 벽이 서는 걸 하루 속이 보고 싶었다. 벽이 완성되면 그들이 일하고 있는 숲의 제일 높은 곳에 가서 볼 수 있으리라.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헝가리 사람들도 국경 저 쪽 자기들 땅에다 방어선을 구축한다고 했다. 요한 모리츠는 어느 쪽이 더 높은지 보고 싶었다. 그는 준위에게서 헝가리 사람들이 만든 요새를 보잘것없이 허술한 것이어서 루마니아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하룻밤 사이에 넘어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퍽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루마니아 사람들은 그럴 생각이 없어 진격하지 않는 것이었다.

요한 모리츠는 가끔 루마니아 군인이 헝가리로 진군해 가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그것은 상상만 해도 유쾌한 일이었다. 그리고 눈으로 직접 그 군인들을 보고 싶었다. 만일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에도 이곳에 있게 된다면 그때는 산꼭대기에서 그 군인들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준위의 말에 의하면 루마니아 방벽은 너무 높아서 나는 새도 그 위를 넘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요한 모리츠는 방벽이 상당히 높을 거라고 나름대로 상상했다.

새 중에는 지상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하는 높이 나는 새도 있다. 그 새들까지 루마니아 방벽을 넘을 수 없다면준위 자신이 보증한 얘긴데아래에서 쳐다보면 그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만큼 높아 구름 속까지 뚫고 들어갈 정도라는 말일 것이다.

요한 모리츠는 제 손으로 찍어 넘어뜨린 나무가 어느 부분쯤에 놓여질까 생각해 보았다. 무슨 표적이라도 남겨서 그 방벽이 완성되었을 때 어디쯤 있는지 알아볼 수 있었으면 했다. 어쩌면 아주 높은 꼭대기에서 사용될지도 몰랐다. 숲 속에서 나무를 자르며, 요한 모리츠는 매일 이러한 생각을 했다. 어리석고 무가치한 짓일는지도 모른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다른 사람들은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웃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가 좋았다. 집과 마을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만 하면 피가 머리로 솟구쳐 오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스트룰이 숲 속으로 요한을 찾아와서 사무실에서 그를 부른다고 했다. 이혼 서류에 서명을 한 이래 요한은 한 번도 사무실 출입을 하지 않았다. 사무실로 들어가 책상과 준위를 보기만 하면 그날 그 서류가 놓여 있던 책상 모서리와 팔꿈치를 대고 서명하던 자기 모습이 눈앞에 떠오를 것이다. 그래서 그는 두 번 다시 그 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호출을 당했으니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사무실에는 준위는 없고 아브라모비츠 의사와 스트룰과 수용소 요리사 후르틱 세 사람뿐이었다. 요한은 인사를 했다. 그들은 다정스럽게 인사를 받고는 의자 하나를 그에게 내주었다. 요한은 준위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숲 속에서 사람을 보내어 자기를 불러온 걸 보면 준위가 무슨 중대한 일을 맡기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준위는 나가고 없네. 우리끼리 마음 놓고 얘기할 수 있다네."

하고 말하면서 의사 아브라모비츠는 요한에게 담배를 권했다. 아브라모비츠 의사는 맛이 좋고 값비싼 담배를 늘 가지고 있었다.

"양켈, 자네는 이혼을 했지?"

하고 아브라모비츠 의사가 말했다. 요한의 얼굴빛이 파랗게 변했다.

"그래 그게 어쨌단 말이오? 그건 내게 생긴 일이니까 다른 사람이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자네가 수용소를 나간다 해도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없으리라는 걸 말하는 것뿐이야. 내 개인 생각으로는 전쟁이 끝나기 전엔 한 사람도 여기를 벗어나지 못하겠지만, 전쟁은 앞으로도 10년을 더 끌는지 알 수 없어."

요한 모리츠는 한숨을 쉬었다 수용소에서 10년을 더 있다간 자기는 아주 백발이 될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요한, 자네 혹시 다른 나라로 가고 싶은 생각은 없나?"

아브라모비치 의사가 물었다. 요한은 자기가 이온 키챠와 함께 미국으로 가려고 했던 일을 회상했다.

'그날 비만 왔더라도 난 지금 미국에 있을 거야. 그날 밤 스잔나와 만나지만 않았더라면 말이야.' 하고 생각했다. 사실 그가 그날 밤 스잔나를 만나지만 않았던들 지금 그는 멀고 먼 나라에 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런 수용소에 와 있지도 않을 것이다.'

"떠나고 싶습니다. 전에도 미국으로 가려고 한 적이 있었지만, 일이 잘 되지 않아서..........."

하고 요한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번엔 실행될 거야. 자네가 떠날 결심만 한다면 자넨 몇 달 후에는 미국에 가 있을 걸세."

아브라모비치가 즉시 대꾸했다. 요한은 아브라모비치와 스트룰, 그리고 후르틱을 쳐다보았다.

그들도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자기를 놀리고 있는 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만일 그게 장난이 라면 숲 속에까지 와서 자기를 불러 낼 리는 없었다.

"꼭 가고 싶습니다."

요한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와 함께 가세나. 우리 세 사람과 함께. 우리는 헝가리로 빠져나갈 거야. 탈출하는 게 무섭나?"

의사가 물었다.

"헝가리에는 유대인을 억압하는 법률이 없네. 내 누이동생이 부다페스트에서 결혼해 살고 있는데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네. 후르틱 씨도 헝가리에 친척이 있지. 그런데 우리에겐 짐을 운반해 줄 사람이 필요해. 난 짐이 많아. 가방이 여섯 개야. 돈이 될 물건들을 갖고 있지. 국경을 넘어 헝가리 영토에 들어가서도 약 10킬로미터는 걸어야 하는데, 난 혼자서는 도저히 운반할 수가 없어. 그리고 우리들은 아무도 헝가리 말을 못 한단 말이야. 그래서 자네를 생각한 걸세."

"여기를 어떻게 빠져나갑니까?"

요한이 물었다.

"준위가 트럭으로 우리를 수용소에서 국경까지 데려다 줄 걸세.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이곳을 탈출할 수 없을 거야. 어느 길을 가든 순찰대가 지키고 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버젓이 군용 트럭을 타고 가는 거야."

하고 의사가 말했다.

"준위가 우리의 탈출을 알고 있습니까?"

"물론이지! 그 사람은 가족이 많아. 돈이 필요해. 그 사람의 입장에 있다면 자네라도 그렇게 할 걸세."

하고 후르틱이 말했다. 요한은 잠자코 있었다.

", 한 대 더 피우고 얼른 가서 짐을 꾸리게.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않도록 조심하고."

의사 아브라모비치가 말했다.

"당장 떠나는 겁니까?"

요한이 물었다.

"될 수 있는 한 빨리. 준위가 9시에 트럭을 가지고 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기로 했어. 가서 자네 물건을 가지고 곧장 사무실로 오게. 우린 여기서 자넬 기다릴 테니까. 짐을 너무 많이 가지고 오지 말게. 자넨 내 짐을 운반해야 하니까."

요한 모리츠는 사무실에서 나와 세수수건 하나에다 셔츠 한 벌, 그리고 빵 한 조각을 싸 가지고 곧 돌아왔다. 그들은 9시 정각에 수용소를 빠져나갔다. 정말 준위가 트럭을 몰고 와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준위는 세 사람을 태우고는 곧장 국경을 향해 전속력으로 트럭을 몰았다.

그로부터 6시간 후 요한 모리츠는 아브라보비치의 가방을 들고 헝가리 영토를 밟고 있었다. 동이 틀 무렵, 그들은 어느 역 앞에 도착했다. 아브라모비치 의사는 요한에게 돈을 주어 부다페스트로 가는 2등 열차표 네 장을 사 오게 했다. 부쿠레슈티에 있는 핀란드 공사관에서 베푼 만찬회에서 드라이얀 코르가는 루마니아의 국방부 장관인 투아르 장군을 알게 되었다. 드라이얀은 며칠이 지난 후 장군을 만나러 가서 요한 모리츠의 일을 건의했다. 장군은 그의 얘기를 관심 있게 들었다. 요한 모리츠의 이름과 직업, 생년월일과 억류된 날짜를 적어 놓고 이렇게 말했다.

"늦어도 1주일 이내에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겠습니다. 즉시 조사를 시켜 석방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라고 명령을 내리지요. 오늘이.....,"

장군은 달력을 쳐다보며

"821일이군요. 28일에 다시 한 번 들러 주시면 그의 석방장을 직접 내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이렇게 물었다.

"요한 모리츠라는 이 사람은 당신 부친의 심부름꾼입니까?"

"아뇨, 아버님이 신임하고 있는 사람이지요. 엄밀히 말하자면 심부름꾼과는 다릅니다."

"요즈음 시골에는 일손이 모자라 무척 곤란하더군요."

장군은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계속 말했다.

"당신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위해 그처럼 동분서주하는 이유도 이해가 갑니다. 한 사람이 더 있으면 그만큼 수확이 늘 테니까요. 특히 요즘은 농번기라 더할 테죠."

드라이얀은 자기가 요한 모리츠를 위해 힘쓰는 것은 아버지가 농삿일 때문에 그를 필요로 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가 부당하게 억류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장군에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제 방문은 순전히 인도적인 입장에서 비롯된 겁니다. 부탁을 받은 것도 아니고 보수를 받는 것도 아닙니다."

", 그렇겠지요. 나도 때때로 그런 일을 하니까요. 가끔 농민들의 세례식과 결혼식 같은 것이 있어 시골에 가 보지만, 그들에게 일을 시키려면 요즘은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해야겠더군요. 그들이 이쪽과 친구라는 생각을 갖도록 그들과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정도까지 돼야겠더군요. 당신의 말씀은 잘 알아듣겠습니다. 당신의 아버님도 나와 똑같은 입장이실 것입니다."

장군은 혼자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는 책상 서랍을 열고 드라이얀의 최근 소설을 꺼내어 책상 위에 놓았다. 새 책으로 아직 한 번도 들춰보지 않은 것이었다.

"조금 전에 서점에 사람을 보내 사 왔습니다. 수고스럽겠지만 제 딸에게 증정한 다는 글을 한자 써 주시겠습니까? 엘리자베스라고 부르죠. 나이는 열여덟 살인데, 소설을 아주 좋아해요. 그 중에서도 특히 당신의 책을 좋아한답니다. 점심때 당신이 나를 보러 왔었다는 말을 하면 아마 여러 가지를 물어 볼 거예요. 당신이 어떤 옷을 입었더냐, 어떤 넥타이를 맸더냐, 담배는 무엇을 피우더냐 등을 말입니다. 젊은 애들이란 그런 거죠. 안 그렇습니까?"

드라이얀은 이번엔 틀림없이 요한 모리츠의 석방이 성공할 거라는 확신을 갖고 국방부 계단을 내려 왔다. 그는 꽃가게에 들러 아침에 주문해 둔 백장미 다발을 받아들고 우체국으로 가서 아버지에게 전보 한 장을 보냈다.

"829, 요한의 석방장을 가지고 약혼자와 함께 귀향하겠습니다."

"829일에 판타나의 아버지 댁에 간다고요? 빨리 가고 싶어요!"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앞으로 1주일밖엔 안 남았군요."

그녀는 드라이얀 코르가의 손에서 백장미를 받아 꽃병에 꽂으며 말했다. 드라이얀은 그녀의 목과 까만 비단 드레스 위로 늘어진 곱슬곱슬한 다갈색 머리카락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늘씬한 몸매와 가느다란 다리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노라! 당신을 바라볼 때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아?"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를 마주 보았다.

"난 마음속으로 시인 튜도르 알게지와 같은 질문을 하게 돼. '그대의 어머니는 요정이었던가, 암사슴이었던가, 아니면 갈대였던가? 그녀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는 어떤 아이일까? 그것은 실로 정령 아니면 요정의 아기이리라. 왜냐하면, 그대는 실로 인간의 종자가 아닌 것 같기에.' 노라, 당신은 정말 아름다워. 아무래도 당신의 몸에는 요정이나 암사슴의 피가 섞여 있는 것 같아. 당신의 두 눈은 놀란 다람쥐 눈 같고, 당신의 경쾌한 동작은 그 피를 물려받은 탓일 거야. 당신의 조상 가운데에 해조(海潮)도 들어 있었나 봐. 당신 몸에도 물풀과도 같은 조화가 깃들여 있어. 당신은 앙고라 고양이의 아양처럼 변덕도 많지."

엘리오노라 베스트는 드라이얀에게서 등을 돌린 채 백장미 다발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내가 뭐 언짢게 한 거라도 있소?"

드라이얀이 물었다.

"아녜요."

"그런데 기분이 나쁜 모양인걸. 눈을 보지 않아도 당신이 우울한 기분인 걸 난 알 수 있어. 내가 한 말이 불쾌한가?"

"아녜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다만 제 혈통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슴이라든가 요정이라든가 해조라든가 다람쥐 같은 건 찾아볼 수가 없는 걸요......"

노라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참나무로 된 낡은 가구들이 있는 커다란 식당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의 집은 부쿠레슈티에서도 손꼽히는 대저택이었다. 그녀 자신이 설계하여 건축한 집으로 가구, 양탄자 등 모든 것이 그녀의 취미에 맞게 꾸며져 있었다.

29세인 엘레오노라는 루마니아에서 제일 가는 신문인 '웨스턴'의 사장이었다. 유럽에서도 유명한 대학을 몇 군데나 나온 그녀는 신문에 사설을 쓰는가 하면 직접 편집도 했다. 그밖에 출판사와 문예 잡지사도 경영했다. 그래서 정계와 문화계와 사교계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드라이얀이 그녀를 안 지 벌써 6년째 접어들고 있었다. 그들의 애정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뜨거웠다. 그러나 그들은 결혼하지 않았다. 드라이얀이 그녀에게 청혼을 하면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매번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결코 좋은 아내가 될 수 없을 거예요. 저는 제 직업을 너무 사랑하나 봐요. 만일 일을 그만둔다면 저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버린 것 같은, 이를테면 모든 걸 포기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것 같아요."

"요한 모리츠가 석방될 것 같아! 국방부 장관이 오는 28일에 석방해 주겠다고 약속했거든. 아버지한테 약혼녀인 당신과 함께 요한 모리츠의 석방장을 가지고 간다고 판타나로 전보를 쳤소. 기뻐하실 일이 두 가지인 셈이지."

하고 드라이얀이 말했다.

"당신은 저를 약혼자로 부모님께 소개하고 싶으세요?"

노라가 물었다.

"그래, 꼭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만 당신이 싫다면 그만둘 수밖에. 아버님이 서운해하시겠지만 무슨 일이든 용서해 주시는 분이야."

"약혼녀가 아니라 아내로 소개할 수는 없으세요? 모레 아침에 결혼하면 판타나에 도착했을 땐 이미 부부가 돼 있을 텐데요."

드라이얀 코르가는 그녀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2년 동안이나 그녀를 설득하려고 노력했었지만 그녀는 누구의 아내도 되고 싶어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갑자기 결혼을 제의해 오는 것이 아닌가.

"나와 결혼해 주겠소?"

드라이얀은 일어나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무슨 일이 있은 건 아녜요! 29일 판타나에 갈 때 우린 결혼한 사이가 되어 있는 거예요. 당신도 여러 차례 청혼 했었잖아요. 그 동안 마음이 변하셨나요? 그렇다면 그렇다고 말씀해 주셔야죠."

드라이얀 코르가는 분명히 그녀에게 무슨 중대한 사건이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어떤 사건이 노라를 자기 아내가 되라고 밀어 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그로서는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우선 호적상의 수속만을 해 놓았다가 결혼식은 후에 판타나의 아버지 교회에서 올리기로 해요. 당신은 언제나 당신 아버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면 했잖아요. 제가 흰 드레스를 입고 시골 처녀들에게 둘러싸여 제단을 향해 걸어가는 걸 상상하시곤 했죠......... 호적상의 결혼 증서를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겠어요. 제가 전화로 검찰 총장에게 알아보지요."

"노라, 말해 봐요. 무슨 일이오? 무슨 중대한 일이 생긴 게 틀림없지?"

하고 드라이얀이 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 아무 일도요. 일이 있다면 제가 당신의 아내가 되겠다고 결심한 일뿐예요. 전 자연스럽게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어떤 일이 생겨 방해를 받기 전에 빨리 그 일을 실행시키고 싶어요. 저에게 닥친 이 행복이 저에게는 너무도 귀중한 것이어서 이젠 더 이상 지연시키고 싶지 않아요. 너무 기다리다 놓쳐 버릴까 두려워요. 이것이 전부예요. 제 말이 믿어지지 않으세요?"

 

 

47

점심을 먹고 난 후 드라이얀 코르가와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서재에 남아서 책과 그림을 보고 있었다. 드라이얀은 엘레오노라가 한 말이 진실이라는 것은 믿었지만, 어째서 갑자기 그녀의 마음이 변했는가는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혼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두 사람 다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그 생각에서 벗어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둘은 벽에 걸린 피카소의 그림 앞에 나란히 섰다.

"피카소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작가야."

드라이얀은 루이스 멈포드의 피카소에 대한 평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되풀이했다.

"그는 인간이 이룬 업적과 실패를 어떤 예술가보다도 잘 나타내고 있거든. 그의 전 작품 활동이 충격의 연속이며, 그 하나하나의 충격이 우리 인간 문명의 구조와 붕괴를 상징하고 있거든. 그런데 원숙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빈곤과 비참을 그림의 소재로 삼기 시작하고 있어. 말하자면 우울한 시대에 있어서 휴머니티를 추구하는 것이지........."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격심한 고뇌로 인해 인간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흉한 얼굴을 한 여자를 그린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찢긴 육체의 모습이며 고통으로 기계처럼 분해된 인간의 초상화였다.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은 눈과, , , 귀와 같은 근본적인 요소들뿐이었다. 그 하나하나가 고립되어 개개의 생명으로 살고 있었다. 고뇌로 말미암아 인간의 육체가 통일성을 포기한 상태였다.

드라이얀코르가는 노라를 돌아보는 순간 그녀가 초상화와 닮은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어떤 사진기도 그 순간의 그녀의 표정을 찍어 낼 수는 없었으리라. 너무도 깊은 고뇌에 찬 표정이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의 얼굴은 피카소가 그린 여인의 얼굴과 똑같이 허물어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힘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감전사(感電死)를 시키지 못하는 고주파 전류가 통과한 듯한 얼굴이었다.

"무얼 생각하오. 노라?"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아요. 커피 드시지 않겠어요?"

그녀가 대꾸했다. 그러고 그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그녀는 돌아섰다. 그가 조금 전에 그녀의 몸속에 암사슴의 피가 섞여 있지 않느냐고 말했을 때와 똑같은 태도였다.

드라이얀 코르가와 엘레오노라 베스트의 호적상의 결혼식이 시청에서 거행되었다. 신랑 신부는 평상복 차림이었다. 드라이얀의 친구 두 사람이 증인으로 입회하였다. 결혼 절차를 끝낸 후 그들은 교외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교회에서 식을 올릴 땐 좀 성대하게 베풉시다."

드라이얀이 말했다. 그는 루마니아 시골의 결혼 풍속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시골에서 결혼식을 할 떄는 먼저 말을 탄 청년들이 앞장서서 교회로 가지. 우리 고유의 옛날 옷차림을 한 청년 50명이 흰말을 타고 앞장서는 거야. 그 뒤로 소 네 마리가 끄는 수레가 따라가지. 수레에는 신부가 받은 선물과 또 신부가 시집으로 가져가는 물건들을 실어 여러 사람에게 보여 주는 풍습이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 수레에는 꽃만 가득 싣게 해야지. 입회인은 열두 사람이야.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신랑 신부와 입회인들이 손에 손을 잡고 춤을 추기 시작하면 교회의 높은 곳에선 사탕 과자를 비를 뿌리듯 쏟지. 그걸 주우러 신랑 신부 발 밑에까지 아이들이 몰려온단 말이야. 우리 결혼식 때엔 주머니째로 던져주어 판타나 아이들이 모두 배불리 먹도록 해야지. 어렸을 땐 나도 결혼식이 있을 때마다 그걸 주우러 갔지만 한 번도 흡족하게 주워 본 적이 없어. 네 개 이상 주워 본 적이 없어요. 우리 결혼식 때는 모든 마을 아이들의 호주머니가 가득 차도록 해 주고 싶어. 그리고 바이올린 과 기타를 갖춘 12인조의 집시 악단을 불러야지. 또 술은 통으로 갖다 놓고 온 마을 사람들이 취하게 할 거야. 우리의 피로연을 숲 속의 빈 터 에서 열어 많은 사람들을 초대합시다. 그래서 한 1주일 동안 계속해서 잔치를 벌이도록 합시다."

노라는 시계를 보았다. 15분 후엔 변호사 레오폴드 스타인과의 약속이 있었다.

"약속이 있어서 가 봐야겠는데 어쩌지요? 사무실에서 급한 용건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드라이얀은 하는 수 없이 판타나에서의 결혼식 이야기를 중단하고 함께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노라를 신문사까지 바래다주었다. '웨스턴' 신문사의 웅장한 건물은 흰 대리석 현관을 갖춘 초현대식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원래 인쇄소였는데 그것을 헐어 버리고 엘레오노라 베스트가 새로 지은 것이었다. 그는 햇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이는 7층 건물을 바라보며 싱긋이 웃었다. 이 건물이야말로 노라의 정성이 깃들인 그녀의 자랑스런 작품인 것이다.

"차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가 말했다. 그는 노라가 사무실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는 언제나 손수 운전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결혼식을 올린 오늘은 예외라고 생각했다.

"일이 끝나는 대로 혼자 들어갈게요."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드라이얀이 떠나는 것을 보고는 대리석 층계를 올라가 금테를 두른 제복을 입은 문지기가 활짝 열어 주는 육중한 문안으로 들어섰다.

 

 

49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당당한 태도로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자기가 들어서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의 존재를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핸드백과 장갑을 책상 위에 놓고 그 노인에게 앉으라는 몸짓을 했다. 그녀는 담배를 한 대 꺼내 손가락이 떨리는 걸 간신히 참으며 불을 붙였다. 그러고 나서 안락의자에 앉으며 노인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됐어요. 스타인 씨?"

노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무릎 위에 놓았던 손가방을 열고 서류 뭉치를 꺼내어 책상 위에 놓았다. 노라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의 모든 동작을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 일은 결말이 났습니다. 이것이 그 서류입니다."

그는 서류 뭉치에서 서류 두 장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프로에스티 등기소에 있는 서류는 이것뿐인가요?"

노라가 물었다.

"이것이 오늘 아침 등기소에 있던 유일한 서류들이죠. 지금은 그 서류가 당신 책상 위에 있지 않습니까. 등기소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고 노인이 대답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경멸에 찬 눈초리로 서류를 훑어보고는 접어서 책상 서랍 속에 집어넣었다.

"지금 곧 처분해 버리는 것이 좋을 겁니다."

하고 노인이 약간 겁먹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라는 그 노인의 금테 안경과 숨이 답답할 정도로 빳빳한 칼라와 구식 양복을 바라보았다.

"서류가 내 책상 속에 있는 이상 염려할 건 없어요, 스타인 씨."

 

"나는 상관이 없습니다만 베스트 양으로서는 당장 불살라 버리는 편이 좋을 텐데요."

"이 일에 돈이 얼마나 들었나요?"

노라가 물었다. 그녀는 화제를 딴 데로 돌리고 싶었다. 노인이 겁을 먹고 있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그 서류는 물론 불살라 버릴 작정이었으나 그전에 한번 읽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10만 레이 들었습니다."

하고 레오폴드 스타인이 말했다.

"그러면 당신의 수수료는?"

"전부 포함해서입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책상 서랍에서 두 다발의 지폐 뭉치를 꺼내어 노인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것을 받아 잠자코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이제 용건은 끝났죠?"

노라가 말했다. 그녀는 혼자 남아서 그 서류를 읽어보기 위해 노인을 보내려 했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도 남은 게 있나요?"

"아니오. 이제 끝났습니다. 이번 일은 생각대로 정리가 잘 되었습니다."

레오폴드 스타인이 대답했다.

"완전히 끝난 거죠?"

"물론, 그러나 서류를 없애 버렸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났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당신 부친과는 친구요, 또 함께 일해 온 사람이었고, 당신이 어렸을 때는 내 무릎에 앉혀 놓고 귀여워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서류가 소멸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문제는 임시적으로밖에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뜻인가요?"

"그야 명백한 일 아닙니까, 베스트 양. 당신은 양친의 혈통이 유대계라는 것을 증명하는 서류를 입수하기를 원했고, 이제 그 서류가 당신 손에 들어왔습니다. 그걸 내가 등기소에서 꺼내 왔으니까요."

"그러니까 문제는 해결된 거잖아요?"

"서류를 없애 버릴 수는 있지만 사실 그 자체를 없애 버릴 수는 없습니다. 온갖 방법을 연구해도 당신은 역시 유대인이니까요. 만일 누군가가 그걸 밝히려고 한다면........"

"무슨 증거로 그것을 밝힐 수가 있을까요?"

"그렇다면 유대인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잖습니까?"

"그 서류는 갖출 수 있어요 돈만 들이면 내가 원하는 서류를 갖추는 것은 문제가 아니죠."

"그야 그렇죠. 하지만 그것은 형법에 저촉되는 행위입니다. 법률을 농락하는 건 불장난을 하는 것처럼 위험하고 어리석은 짓입니다."

변호사가 대답했다.

"오늘 아침 프로에스티 등기소에서 서류를 훔쳐 낸 사람은 바로 당신 자신이 아니던가요? 그런데 무슨 자격으로 내게 그런 설교를 하시는 거죠?"

노라는 아픈 곳을 찌르며 비웃는 투로 말했다.

"이건 설교가 아닙니다. 단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사실을 뒤엎는다는 건 극히 위험한 일이며, 언제까지나 그런 당치도 않은 승부를 계속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고 노인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당신도 잘 알다시피 이것이 나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고 노라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달리 도리가 없어요. 이 사회가 내 나름대로의 생활을 금하고 집과 직업과 남편을 선택하는 것까지 금하는 이상, 나는 내가 가진 모든 무기를 동원해서 필사적으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요. 상처 입은 짐승처럼 싸울 거예요. 자기 보존의 본능으로 이 승부에 집착하겠어요."

"베스트 양, 문제는 싸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데 있습니다."

"그럼요! 나는 이기고 말 거예요."

그녀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당신은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사업을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은 지금까지 자신이 유대계라는 걸 숨겨 왔는데 그야말로 젊은 혈기에 찬 대담한 행동이었어요. 그리고 운도 좋았고요. 당신이 무서워서인지 겁이 나서인지 지금까지 그 누구도 감히 당신의 신분을 조사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인종법이 발효되고 나서 인쇄소와 신문사를 징발하라는 고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당신은 조사 담당자를 매수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또 승부에서도 이겼던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양친이 유대계라는 걸 증명하는 서류를 없애 버렸으니 시간적인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종법의 적용은 날이 갈수록 점점 엄해집니다. 어떤 유대인도 이 법망을 피할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큰 고비에 이르지는 않았어요. 그러니까 유대인이기 때문에 법률상으로는 단 한 줄의 글도 발표할 권리가 없는 당신이 아직도 이 큰 신문사의 사장직을 그대로 유지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나 앞으로가 문제입니다."

"천만에요. 앞으로도 나는 '웨스턴'의 경영주이며 사장일 겁니다."

노라는 반박했다. 레오폴드 스타인은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여성의 냉철한 지성을 믿어 왔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대답은 맹목적인 신념이었다. 맹목적인 신념에는 이론이 서지 않는 법이다. 그는 그녀의 말에 반대하려 들지 않았다. 인간이 각성을 거부할 때는 반대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녀에게 진실을 가르쳐 주려고 애써 봤자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 정오에 나는 한 기독교인과 결혼했어요. 앞으로 신문사는 남편의 명의로 운영할 것이니까, 만일 루마니아가 독일보다도 유대 인 압박이 더 심해진다 해도 '웨스턴'만은 징발하지 못할 거예요."

"아니, 정말 결혼했습니까?"

레오폴드 스타인에게는 노라의 말이 도무지 곧이들리지 않았다.

"이제 내 이름은 엘레오노라 베스트 코르가입니다. 내 남편은 작가 드라이얀 코르가예요. 수일 내로 그가 신문사 사장 겸 소유자가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내 것이 되는 거죠."

노라 베스트는 만족한 듯이 웃었다. 그러나 레오플드 스타인은 엘레오노라의 시선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공연히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가 마음을 가라앉혀서 노라의 얘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믿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문사를 넘겨주고 사장직에서도 물러난다는 말이군요?"

그는 손수건을 입에다 대고 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천만에요. 신문사를 양도하는 것이 아니라 새 간부 체계를 만들어 조직을 재편성하는 거지요.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것에 불과해요."

"그건 비범한 착상인데요! 탁월한 착상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께서는 이러한 조건을 승낙하셨나요?"

"이해 못 할 말씀을 하시는군요."

노라는 냉정히 말했다.

"남편 되시는 드라이얀 코르가 씨도 동의하셨나 말씀입니다. 남자로서 이러한 일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닐 겁니다. 그건 어떤 정해진 계획 아래 한 여성에게 매수당하는 게 되는 거니까요."

"매수라니요? 나는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 거예요."

노라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레오폴드 스타인은 그녀에게 축하한다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노라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책상 서랍을 열어 양친의 출생 증서를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두 눈에 눈물이 어려 번득였다.

"인간은 죽을 때가 아니면 축복 받을 권리가 없어요. 객관적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당신도 잘 알게 될 거예요. 그러나 일단 죽고 나면 인간은 축복 받을 수가 없어요. 유감스런 일이요. 정말 축복 받을 유일한 기회를 놓치고 마는 데 안타까워요."

노인은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기가 취한 태도를 후회했다.

"당신은 정말로 애정 때문에 결혼을 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내가 연애도 못 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당신같이 박식하신 분이 그런 말도 알아듣지 못하시나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괴로워하시는 겁니까? 당신은 지금 울고 계신 것 같은데."

"몹시 피로하신 모양이군요, 스타인 씨.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당신이 그것을 모르시다니. 당신 말씀을 이해할 수 없군요. 유대인답지 않아요. 난 드라이얀 코르가를 사랑해요. 그는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남자예요. 벌써 몇 해 전부터 그를 사랑해 왔어요. 나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를 사랑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 결혼한 건 아니에요. 인종 법 때문에 결혼했어요. 신문사를 살리기 위해서, 또 내 생활을 구하기 위해서. 그래도 모르시겠어요?"

레오폴드 스타인은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는 엘레오노라 베스트의 손에 키스를 하고 문을 향해 나갔다. 그녀는 그를 불러 세웠다.

"이번 주말에 나는 남편의 양친을 뵈러 시골 시댁에 가요. 드라이얀의 부친은 그리스 정교의 신부예요. 며칠간 거기서 묵을 예정이에요. 제가 돌아올 때까지 신문을 포함한 내 동산과 부동산 전부를 드라이얀 코르가의 명의로 바꾸는 증여증서를 만들어 주세요. 증여 증서를 꾸미는 데 사무상 곤란한 점이 있으면 아예 매도 증서를 만들어도 좋고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어요."

"당신은 정말 총명하십니다."

노인이 말했다.

"총명한 게 아녜요. 나는 단지 나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능력과 자신의 본능과 그리고 자신의 투시력을 총동원시켜 싸우는 거랍니다. 나를 잘 이해하시고 수고해 주세요, 스타인 씨."

 

 

50

노인이 나간 후 엘레오노라는 책상 앞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울기 시작했다. 온몸으로 우는 여자만이 울 수 있을 것 같은 울음이었다. 눈만이 우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가 울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후에 수화기를 들고 드라이얀을 불렀다.

"부탁이니 편집국까지 저를 데리러 와 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소?"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냥 절 데리러 와 주세요.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하지만 빨리 와 주세요."

드라이얀 코르가는 일어섰다. 그는 서재를 나오며 다시 한 번 피카소가 그린 초상화의 여인을 쳐다보았다. 눈 하나가 절반은 웃고 다른 절반은 울고 있었다. 한 눈으로 동시에 심각하게 웃고 울 수 있도록 그 얼굴은 두 개로 나누어져 있었다.

 

 

51

드라이얀 코르가를 기다리면서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수화기를 들어 레오폴드 스타인을 불렀다. 그는 신문사 가까이에 살고 있어 방금 집에 들어온 길이었다.

"스타인 씨, 솔직히 말해 주세요. 내가 애정 때문에 결혼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해관계로 결혼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서슴지 마시고 솔직한 의견을 들려주세요."

"당신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스타인이 물었다.

"모르겠어요. 누가 내 머리를 자른다 해도 명확히 대답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어떤 때는 순수한 애정으로 움직인 것 같고, 어떤 때는 양쪽을 동시에 생각하고 움직인 것도 같아요. 그러나 이런 설명은 내게 아무런 가치가 없어요.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건 단 한 가지뿐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는 것과 아무래도 그래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거예요. 하지만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요."

"그 어느 쪽도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나는 여느 여자들처럼 이해관계만으로 결혼한 것은 아니군요!"

평소에는 냉정하고 이성적인 그녀의 목소리도 이때만은 애원하는 투였다.

"그렇지는 않아요, 코르가 부인. 당신은 전 재산과 신문사가 위험한 지경에 빠진다 해도 결코 이해타산 때문에 결혼할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기에는 너무도 자부심이 강하거든요."

"정말이에요?"

"그렇말고요."

"그렇다면 순전히 애정만으로 결혼한 건가요?"

"진정으로 누구를 사랑하려면 미래를 믿어야 하고 행복을 믿어야 합니다. 특히 그 행복은 영원한 것이며,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믿어야 하는 것이지요. 코르가 부인, 당신은 그런 믿음을 갖기에는 너무 총명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이런 말은 실례가 되겠지만 애정만으로 결혼한 것도 아니라는 이유가 되겠지요."

"그렇다면?"

그녀는 초조하게 물었다.

"애정도 아니고 타산도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공포라고 할 수 있겠지요. 공포에서 나오는 행동은 갑작스러운 발작으로 놀랄 만한 신속성을 가지고 나타납니다."

레오폴드 스타인은 대답했다.

"그렇다면 애정은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았다는 말씀인가요?"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초조한 음성으로 물었다.

"애정도 얼마만큼은 작용을 했겠죠. 그러나 당신의 사랑은 인간이 아직 원시적인 상태로 숲 속에 살고 있었을 그때, 밤낮으로 야수들에게 습격 받을 위험이 있었을 때의 여성들이 느낀 건 사랑과 같다고 봅니다. 그럴 때에 여성은 비로소 필사적으로 남성의 무릎에 매달려 보호와 사랑과 생명을 요구하며, 모든 걸 그만큼 열렬한 정열을 가지고 바라는 것입니다. 여성들이 이와 같은 애정을 느끼는 때는 지진이나 홍수, 그밖에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경우뿐입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때 말입니다."

"왜 아까 내 앞에서는 그런 말씀을 안 해 주셨어요?"

"당신 자신의 힘이나 능력에 대해 회의를 품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거지요. 당신이 공포에 떨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어요. 공포심에서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도요. 당신이 가엾은 생각이 들었어요. 당신이 어렸을 때 나는 늘 당신을 무릎 위에 앉혀 놓고 귀여워했다는 걸 잊지 말아 주십시오."

드라이얀 코르가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노라는 수화기를 놓고 그를 맞이했다. 그녀는 그에게 매달리며 웃어 보였다. 드라이얀은 그녀에게 키스를 해 주었다.

"당신의 기분이 다시 좋아진 것을 보니 기쁘군. 전화 목소리는 울고 있는 것 같았는데."

 

 

52

판타나로 떠나기 전날인 828, 드라이얀은 요한 모리츠의 석방장을 받으러 국방부를 찾아갔다. 그는 마치 주머니에 벌써 석방장이 들어 있기나 한 것처럼 즐거웠다. 그는 층계를 뛰어올라갔다. 장관과 드라이얀 코르가가 친한 사이라는 걸 아는 부관이 곧 그를 장관실로 안내했다. 드라이얀은 장관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는 삽화까지 들어 있는 자기의 호화판 처녀작을 한 권 들고 갔다. 책 속에는 정성이 깃들인 증정사까지 적혀 있었다. 장관은 그를 맞으러 나오지 않았다. 맨 처음 면회하러 왔을 때처럼 의자에서 일어서지도 않았다.

"방해를 해서 안됐습니다, 장관님."

드라이얀이 말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앉으시오."

장관은 웬일인지 쌀쌀하게 대답했다. 그는 악수도 청하지 않았다. 드라이얀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의뢰하신 용건에 대해 좋지 않은 소식을 드리게 되어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지난 주일에 의뢰를 받았고, 또 오늘 그 일 때문에 오신 그 문제의 인물은 석방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지금 당장엔 말입니다. 우리는 우선 그 인물의 인종적 혈통에 관한 당신의 증언이 옳은지 어떤지 그 여부를 조사해 봐야겠습니다."

장관이 말했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당장 그 방을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요한 모리츠를 생각하고 그대로 참고 있었다.

"할 말은 그게 전부입니다, 코르가 씨. 이젠 조사 위원회의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으로 면회는 끝났다. 장관은 그에게 어서 사무실을 나가 달라는 눈치를 역력히 드러냈다. 드라이얀은 그걸 눈치 챘지만 그대로 있었다. 내일 그는 판타나로 떠나야 한다. 아버지가 요한의 석방장을 마음 졸이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장관님, 바로 1주일 전에 모리츠의 석방장을 주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전번 말씀으로는 증언만으로도 충분한 증거가 되니 조사할 필요도 없다고 틀림없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드라이얀이 말했다.

"1주일 전에는 상황이 달랐지요."

"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한 모리츠는 루마니아 사람인데도 유대인 수용소에 감금당해 있습니다."

"바로 그 점을 조사 위원회가 밝혀 줄 겁니다."

"그러나 위원회의 조사가 끝나려면 앞으로 몇 달이 걸릴는지 모릅니다. 그 가엾은 사람은 벌써 1년 반 전부터 무고하게 억류당해 있습니다."

"물론 조사가 끝나려면 1년이 걸릴 수도 2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전시라 워낙 바빠서 평화 시처럼 조사하는 데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제 증언만 가지고 우선 요한 모리츠를 석방시키고 그 다음에 조사를 할 수는 없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장관이 말했다.

"장관께서 1주일 사이에 그렇게 달라지시다니 매우 유감스럽군요."

드라이얀은 자리를 뜨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도 유감스럽소. 하지만 그것은 내 마음대로 하는 일이 아니니까요!"

"개인적으로 어떤 것을 암시하시는 말씀인가요, 장관님?"

"어떤 암시가 아닙니다. 구체적인 사실에 의거해서 말하는 겁니다."

장관의 차가운 대꾸에 드라이얀은 얼굴을 붉혔다.

"그럼 제가 여쭈어 보겠는데요, 장관님. 구체적인 사실이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코르가 씨, 말해 드리지요. 전 세계의 유대인이 볼셰비키에 가담해서 우리나라에 항거하고 우리 조국을 굴복시키려 드는 이때에, 순수한 루마니아 사람이자 우리나라의 가장 위대한 작가인 당신이 사회의 지도자적인 입장을 망각하고 구태여 유대인을 아내로 맞는다는 건 대체 무슨 뜻입니까!"

장관은 화가 치밀어 얼굴이 벌개졌다. 그러나 듣고 있는 드라이얀의 얼굴은 반대로 점점 더 창백해지고 있었다. 장관은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군인으로서, 이 나라 국방 책임자로서 당신의 행동을 반역적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알아들으시겠습니까? 조국에 대한 반역입니다. 당신의 이번 행동을 보고 내가 어떻게 당신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석방시키려고 애쓰는 걸로 보아 요한 모리츠라는 인물도 유대인이 틀림없다고 믿어집니다. 나중에 나의 이 추측이 사실로 드러나더라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겁니다. 이래도 내가 아직 당신 말을 믿어야 할까요?"

"물론 믿을 수가 없겠죠."

드라이얀은 이렇게 대답하고 묵묵히 밖으로 나왔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그는 손에 든 책이 생각났다. 드라이얀은 책을 펴서 서명한 페이지를 북 찢어 버렸다. 그러고 자동차에 올랐다.

 

 

53

"노라가 유대인이라! 그녀는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하고 드라이얀은 혼자 중얼거렸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시당하고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내를 빠져나가는 어귀에서 그는 자동차를 세웠다. 그는 차 문을 열고 들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말을 물어 본 적이 없었고. 그런 말을 물어본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럽지 뭐야. 어느 남자가 자기 아내에게 인종적 혈통을 물어 보겠는가!'

그는 몇 번이나 그녀의 혈통에 관해 이야기를 했고 심지어 암사슴과 해조와 다람쥐와 요정을 닮았다고 까지 했던 일을 생각했다. 그럴 때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어두운 얼굴을 했었다. 드라이얀은 이제야 겨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얘기를 했던 것을 뉘우쳤다.

'그때 그녀는 내 말이 자기의 유대 혈통을 암시하는 줄 알았는지도 모른다.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는 차 문을 닫고 다시 거리 쪽으로 향했다. 그는 피카소가 그린 초상화의 여자를 생각했다.

'좀 더 빨리 알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구나. 좀 더 일찍 알고 있었던 것들 그녀의 괴로움을 덜어 주었을 텐데. 가엾은 노라!'

드라이얀은 맨 먼저 눈에 띄는 꽃가게 앞에 차를 세우고 노라가 좋아하는 백장미 한 다발을 샀다. 꽃 파는 아가씨는 웃으면서 장미를 싸 주었다.

 

 

54

"지금 쓰고 계시는 작품 얘기를 들려주세요."

노라가 말했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새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엘레오노라는 그가 새벽 4시면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을 걸치고 방을 나가는 걸 알고 있었다. 둘이서 같이 하는 조반 시간에만 그는 서재에서 나왔다. 결혼한 지 두 달이 지났다. 탁자 위에 놓인 꽃병에는 꽃이 꽂혀 있었다.

"저에게 들려주시지 않겠어요?"

노라가 말했다. 그녀는 몹시 듣고 싶었다. 드라이얀은 자기 작품에 대한 얘기를 그녀에게 들려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매번 회피해 왔으나 계속 거절할 수만은 없었다.

"나는 전에 잠수함으로 항해를 한 적이 있는데, 1천 시간 동안을 물속에서 보내야 했어. 잠수함 속에는 환기를 위한 정확한 시간을 표시하는 특수 기계 장치가 있지. 그 기계가 없었던 옛날에는 그 대신 흰토끼를 싣고 다녔었지. 산소가 부족해 토끼가 죽어 버리면 수부들은 이제 대여섯 시간밖에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돼. 그러면 함장은 최후의 결정을 내려야 하지. 필사적인 노력을 해서 바다 표면으로 떠오르든가 아니면 그대로 바다 속에서 전원이 모두 죽어 버리든가 해야 한단 말이야. 이럴 때 보통 사람들은 스스로 죽어 가는 걸 보지 않으려고 서로 권총을 쏘아 쓰러뜨렸다고 해. 내가 탄 잠수함에는 기계 장치가 되어 있었어. 함장은 내가 산소량이 조금만 줄어들어도 민감하게 알아차린다는 걸 눈여겨보았어. 그는 처음엔 나의 감수성을 흰토끼 같다고 비웃었지만 나중엔 그 기계를 전혀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만 쳐다보면 저절로 알 수 있으니 말이야. 나는 산소의 양이 부족한지 아닌지를 계량. 기계와 조금도 틀리지 않게 언제나 정확히 그에게 알려 주었지. 공기가 부족해 호흡 곤란을 일으키게 되는 시간을 다른 사람들보다 두 시간 앞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흰 토끼와 나타고난 재능이었어. 그런 데 얼마 전부터 나는 마치 잠수함에 탔을 때처럼 숨이 가빠서 견딜 수가 없구려."

"어디의 공기가 말예요?"

노라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현대 사회가 갖고 있는 공기 말이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이젠 더 이상 견디어 낼 수 없을 것 같은 호흡 곤란증에 걸려 있소. 관리, 군대, 정부, 국가조직, 행정 등 모든 것이 힘을 합하여 인간을 질식시키고 있는 거야. 현 사회는 기계와 기술 노예한테 봉사하고 있거든. 그것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말이야. 인간은 모두 질식할 운명에 놓여 있지만, 그들은 아직 그걸 느끼지 못하고 있지. 인간은 모든 것이 정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고집스럽게 믿고 있어. 그들은 마치 앞으로 여섯 시간밖에 살지 못할, 내가 탔던 잠수함의 승무원들과도 같은 운명에 처해 있는 거지. 그러나 나는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 났다고 봐요."

"그것이 당신 소설의 주제예요?"

"나는 작품 속에서 이 땅 위의 인간들이 탁한 공기에 질식되어 무서운 고통을 당하며 죽어 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지. 그런데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삼을 순 없기 때문에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여남은 사람만을 등장시키고 있소."

"어디까지 쓰셨나요?"

"아직 제1장이오. 그 등장인물들 중의 한 사람이 우리들에게서 떨어져 나갔는데....."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지금까지 그는 자기의 자유와 아내와 자식들과 집 등을 빼앗기고 말았어. 이젠 그의 이빨까지 뽑히기 시작했어. 좀 더 있으면 눈과 아직 뼈에 붙어 있는 살도 발라내어질 거고 뼈는 분질러질 거요. 그의 마지막 고통은 아마 자동 기계나 전기 장치에 의해 가해질 거요."

"모두 실제로 있는 일인가요?"

"전부 사실이야. 나는 작품 속에 작중 인물이 사는 거리의 이름, 도시 이름, 나라 이름까지도 적어 넣었고, 심지어 전화번호까지 밝혔지. 최초로 등장하는 인물은 당신도 아는 사람이오. 그러니까 이 작품에 씌어진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당신도 알 수 있을 거요."

드라이얀이 말했다.

"누구예요, 그 첫 등장인물이?"

"요한 모리츠."

노라의 이마가 찌푸렸다. 요한 모리츠에 관해서 드라이얀이 말한 것은 전부 사실이었다.

"그 사람은 정말 가여워요! 그러면 제1장의 주인공은 그 사람이고 제2장의 주인공은 누가 되나요?"

노라가 물었다.

"그것은 아직 나도 모르겠소. 우리 아버지가 될는지 우리 어머니가 될는지 혹은 나 자신이 될는지. 여하튼 우리들 가운데의 그 어느 사람이 되겠지."

"그러면 어느 장이나 모두 요한 모리츠의 얘기와 비슷한가요? 당신 소설 속에는 행운을 가진 운명, 다시 말하면 행복하게 끝나는 것은 하나도 없나요?"

하고 노라가 물었다.

"하나도 없어. 흰토끼가 죽은 이상 행복이 있을 수 없지. 종말이 오기 전에 남은 시간이란 겨우 공포의 몇 시간뿐이니까."

하고 드라이얀은 대답했다.

 

 

55

요한 모리츠가 헝가리의 땅에 들어선 지 벌써 두 시간이 지났다. 세 사람의 유대인과 그는 역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들 끊는 대합실로 들어가는 게 두려웠던 것이다. 잠시 후에 기차가 들어왔다.

아브라모비치 의사와 스트룰, 후르틱은 2등 칸에 올라탔다. 요한은 플랫폼에 남아서 차창 너머로 트렁크를 넣어 주고 기차가 막 떠나려는 순간 열차 발판에 뛰어 올랐다. 후르틱이 그의 팔을 붙잡아 안으로 끌어들였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기차를 타지 못할 뻔했다. 혼자 플랫폼에 남아 있을 뻔했다고 생각하니 요한은 몸서리가 쳐졌다. 낮선 헝가리에서 일행과 헤어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제때에 기차에 뛰어오를 수 있었던 것을 하느님께 감사했다.

아브라모비치 의사와 후르틱은 곧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스트룰과 요한 모리츠는 객차 안을 모조리 돌아보았다. 불이 꺼진 객차 안의 승객들은 모두 잠이 들어 있었고, 빈자리라곤 한군데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두 사람은 트렁크를 놓고 앉았다. 얼마 후에 한 여자가 내리는 바람에 스트룰이 재빠르게 그 자리를 잡았고, 요한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브라모비치가 객실의 문을 열고 말했다.

"자지 말게. 트렁크를 도둑맞을지도 모르니까."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의사가 문을 닫자마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얼마나 고단했던지 그는 부다페스트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기차에서 내렸을 때는 벌써 날이 밝아 있었다. 요한은 목이 말랐지만 후르틱은 그가 역 구내 식당에 가서 레모네이드 한 잔 마시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경찰관이 식당에서 그를 찾아내어 그가 루마니아에서 탈출해 온 것을 알면 네 사람이 다 붙잡힐 염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내 누이 집에 도착하기만 하면 물은 얼마든지 마시게 해 주지."

하고 아브라모비치가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역 앞 광장으로 나가 자동차와 마차가 늘어서 있는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마차를 타는 것보다 걸어서 다니는 편이 더 현명할 거야. 마부가 우리를 밀고할는지도 모르니까. 부다페스트까지 와서 붙잡힌다는 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야."

일행은 걷기로 했다. 요한은 무거운 트렁크를 어깨에 매고 양손에는 하나씩 들었다. 트렁크는 아주 무거웠다. 그러나 어젯밤 국경을 넘어올 때보다는 훨씬 수월했다.

'산길이 아니고 아스팔트길이라 힘이 덜 드는 군.'

이런 생각을 하며 요한은 맨발바닥에 힘을 주어 아스팔트를 밟았다. 전차는 아직 다니지 않았다. 아직 이른 모양이었다. 날이 차츰 밝아지자 가로등이 저절로 꺼지는 걸 보고 요한은 후르틱에게 누가 불을 끄느냐고 물어 보았다.

"이 멍청아! 입 닥치지 못해! 여기까지 와서 그렇게 루마니아말을 쓰면 어떡하겠다는 거야? 누가 듣는 날이면 우린 끝장이야!"

후르틱은 얼굴을 붉히며 악을 썼다.

"왜 루마니아 말은 하면 안 되죠?"

"헝가리는 루마니아의 적국이야. 여기서는 루마니아인은 발각되는 대로 수용소행이야. 알아들었어?"

후르틱이 나직히 소리쳤다.

"그러면 어느 나라 말을 해야 하죠?"

"유대 말을 해야지."

아브라모비치가 말했다.

"헝가리에서는 아직 루마니아에서처럼 유대인을 억압하는 법률은 없으니까."

요한 모리츠는 루마니아말을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그렇다고 그가 유대 말을 한 것도 아니다. 그는 몹시 지쳐 있었던 것이다. 페트피 거리에 있는 아브라모비치의 누이 집에 도착할 무렵, 요한은 트렁크의 무게로 다리가 휘청거릴 만큼 지쳐 있었다.

그가 문 앞에 트렁크를 내려놓자 안에서 하녀가 나왔다. 요한은 하녀가 트렁크를 올리는 걸 도와주었다. 요한은 그녀와 같이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푸른 옷을 입고 있었는데, 요한은 이 옷을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한참 만에 그는 스잔나가 지난날 그런 옷을 입었던 것이 생각났다.

 

 

56

아브라모비치의 누이는 상당히 뚱뚱한 여자였다. 요란스럽게 붉은 꽃무늬가 그려진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생긴 대로 수다스러운 여자였다. 그녀는 아브라모비치와 후르틱과 스트룰과 자기의 남편이 있는 방으로 요한 모리츠를 불러 모두에게 위스키를 대접했다. 요한은 앉을 의자가 없어 곁에 서 있었다. 의사의 누이가 차를 가지고 들어와 식탁 가운데에 놓으며 요한에게 말했다.

"당신 자리가 없으니 부엌에 가서 차를 마시세요."

"그래 주면 고맙겠는데, 우리끼리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서."

그녀의 남편인 나기가 헝가리 어로 말했다. 요한은 이 사람들이 자기와 같이 식사하기를 꺼린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는 별로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녀 율리스카는 요한이 부엌으로 들어가자 반색을 하며 설탕과 레몬을 듬뿍 넣은 차를 석 잔이나 부어 주었다. 그러고 나서 햄과 버터를 넣은 커다란 빵을 세 조각이나 주었다. 배가 몹시 고팠던 요한은 재빨리 먹어치웠다. 다 먹고 난 뒤에 그는 세수를 하고 싶었으나 율리스카가 "그전에 나와 함께 시장에 가요! 갔다와서 씻어요." 하고 청했다.

요한 모리츠는 바구니를 들고 율리스카의 뒤를 따라 장을 보러 갔다. 이리하여 그 다음부터 매일 아침 그는 그녀를 따라 시장에 가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시장에서 돌아오면 나무를 패서 부엌으로 날라다 주고, 점심 식사 후에는 율리스카와 같이 설거지를 했다. 그녀는 성격이 명랑하고 상냥한 여자라 언제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요한 모리츠는 이 집에 있는 것이 마냥 즐거웠다.

 

 

57

부엌일과 율리스카의 농담에 휩쓸려 요한은 아브라모비치와 그 밖의 사람들은 하루 종일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어느 날 점심 무렵, 요한은 일행의 안부를 아브라모비치의 누이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그들은 낮잠을 자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서는 요한은 자기 일에 골몰하여 그들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눕자 비로소 오늘도 그들 중 어느 누구와도 얘기 한마디 나누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여기서 점심을 먹었다는 것은 부엌으로 나온 식기의 수로 보아 확실했다. 저녁 무렵에 모두 커피를 마셨다는 것도 분명했다. 다섯 개의 찻잔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녁 식사 때의 그릇 수는 기억나지 않았다. 율리스카가 접시를 겹쳐 쌓아 들고 왔기 때문에 그 수를 헤아려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마음이 불안하여 잠이 오지 않았다. 저녁 식사 때의 접시의 수가 적었던 것 같이 생각되었던 것이다. '후르틱도 자기 친척집으로 간 모양이지.' 하고 생각하니 요한은 후르틱이 자기를 만나 보지도 않고 가 버린 것이 섭섭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가 이 집에서 저녁을 먹었는데도 접시의 숫자가 적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고 요한은 스스로 자신의 불안을 달랬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요한은 자기의 추측이 들어맞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후르틱은 어제 저녁에 떠났기 때문에 이삭 나기의 집에서 저녁을 먹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모비치와 스트룰은 아직 이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10시쯤 율리스카가 그 두 사람의 구두를 가지고 왔기에 그는 정성을 들여 닦았다. 그런 다음 그 구두를 집안으로 들고 가려 했더니 율리스카가 문간에서 말렸다. 그녀는 자기가 구두를 받아들고 들어갔다 돌아와서 말했다.

"안주인이 당신을 들여놓지 말라고 했어요. 본래 성미가 그런 사람이에요. 누가 들어와 도둑질할까봐 겁이 난다나요."

 

 

58

이날 오후에 의사 아브라모비치가 식당에 앉아 요한을 불렀다.

"이 트렁크를 들고 나와 같이 가세."

그는 명령조로 말했다. 요한은 고맙게 생각했다. 자기를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자기를 잊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넨 왜 맨발인가?"

함께 한길로 내려오자 의사가 난처한 표정으로 물었다. 요한은 낯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구두가 없으니 별 도리가 없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맨발로 걸어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머리를 수그리고 잠자코 길을 걸으며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모두들 단화가 아니면 장화를 신고 있었다. 요한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요한이 의사에게 사과하려고 고개를 들어보니 그는 요한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인 것처럼 양쪽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채 혼자서 저만큼 앞서 걷고 있었다.

 

 

59

의사는 꽃이 만발한 조그마한 정원이 있는 어떤 낡은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요한에게서 트렁크를 받아 들고 혼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요한은 홀로 남아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벽에 걸린 간판을 보니 영사관이라고 씌어있었다. 아브라모비치는 그리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았다. 트렁크는 어떻게 했는지 혼자 빈손으로 내려오며 싱글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벽에 기대서서 그를 기다리는 요한을 보자 웃음이 금세 입가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는 그의 앞에 다가오더니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찌른 채 양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에 잠겨 서 있었다. 요한 모리츠는 의사가 맨발의 사나이와 동행이라는 걸 사람들이 짐작하지 못하도록 그의 뒤에서 멀찍이 떨어져 걸었다. 아브라모비치에게 창피를 주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이삭 나기의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춘 의사는 요한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서 이렇게 말했다.

"양켈, 자네 경우는 매우 복잡하더군. 유대인 단체는 우리 유대인들에겐 미국으로 갈 서류를 만들어 주지만 자네만은 곤란하다는 거야. 우리와 같이 왔으니 도와 달라고 부탁은 해 봤지만 영 듣지 않는단 말이야. 기독교도의 뒷일까지 봐 줄 수 없다는 게 그들의 대답이야. 유대인 위원회는 유대인의 편의를 봐 주기 위해서 조직되었기 때문에 '유대인 위원회'라고 부른다는군. 그런데 자네는 유대인이 아니거든. 사실이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의사 선생님."

"그러니 그들의 말도 일리는 있단 말이야. 하지만 나로서는 일이 이렇게 된 것이 섭섭하네.

자넬 미국으로 데리고 갈 생각이었는데. 그러나 난 자네를 그대로 죽으라고 내버려둘 사람은 아니야."

사무엘 아브라모비치는 지갑을 열고 지폐를 세기 시작했다. 요한 모리츠는 그가 세고 있는 헝가리 지폐가 너무 작은 데 놀랐다.

"여기 20팽고가 있으니 받아 주게. 이건 내 짐을 운반해 준수고 값이야. 적지 않은 돈일세. 이곳 헝가리에서 20팽고를 벌려면 적어도 1주일은 중노동을 해야 하네. 그런데 자네는 겨우 몇 시간 트렁크를 운반해 주고 그만한 돈을 번 거야."

요한은 그의 트렁크를 들고 국경을 넘어올 때부터 돈을 요구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삯을 받기 위해 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사는 계속 손을 내밀고 있었으므로 요한은 할 수 없이 돈을 받아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양켈,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자네를 수용소에서 구출해서 이곳까지 데리고 왔다는 사실이니 잊지 말게."

하고 의사 아브라모비치는 말을 계속했다.

"만일 우리들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자네는 아직도 거기서 썩어 가고 있을 거야. 그렇다고 공치사를 하거나 내가 자네에게 그 대가로 무엇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 아니야.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푼 여하한 일에 대해 그 무엇을 요구하는 그런 비열한 인간은 아니라네."

 

 

60

요한 모리츠가 아브라모비치의 누이동생 집에서 헝가리 공기를 마신 지도 벌써 1주일이 지났다. 그는 날마다 처음 오던 날과 똑같은 일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율리스카를 따라서 시장에 가고 장작을 패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설거지를 했다. 저녁에는 부엌을 청소하고 바닥과 계단을 닦았다. 어느 일요일 아침, 복도에서 마주친 이 집주인 이삭 나기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일자리를 못 구했나? 여기 온 지도 벌써 1주일이나 됐는데. 아예 나한테 붙어 평생을 얻어먹을 생각은 아니겠지?"

그러고 나서 이삭 나기는 한마디도 덧붙이지 않고 나가 버렸다. 요한 모리츠는 일자리를 구해 보지 않은 걸 뉘우쳤다. 그런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자기는 이삭 나기 집의 하인으로 채용된 줄로 알고 있었다. '어쩌면 바보처럼 여태 일자리를 구해 보지 않았을까? 그 사람 말이 옳아. 저들이 평생 날 먹여 살릴 순 없으니까.'하고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날 저녁 요한이 율리스카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그녀는 곧 일자리를 구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초콜릿 공장에 아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만약 취직을 시켜 주면 내게 초콜릿을 갖다 주겠어요? 갖다 줄 딴 여자가 없다면......."

하고 율리스카가 말했다.

"다른 여자라니?"

요한은 율리스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섭섭했다.

"초콜릿이 생기면 다 갖다 줄게요. 난 입에도 대지 않고."

그날 밤 요한 모리츠는 벌써 초콜릿 공장에서 일하는 꿈을 꾸었다. 그다음 날 아침, 아브라모비치 의사는 자기 누이와 매부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집을 떠났다. 요한은 또 그의 트렁크를 들고 역까지 따라가 침대차에 그것을 올려 주었다.

"멀리 가시는 겁니까?"

그는 물었다.

"스위스로 가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거기서 몇 주일 쉴 생각이야."

의사는 대답했다. 기차가 떠나려고 기적을 울리자 아브라모비치는 요한에게 악수를 청했다. 요한은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플랫폼에 있던 신사들이 아브라모비치가 신발도 신지 않은 사나이와 악수하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기차가 움직이자 아브라모비치는 차창으로 목을 내밀고 외쳤다.

"잘 있게, 양켈! 자넬 잊지 않겠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자넬 도와 줄 테야!"

"안녕히 가십시오."

요한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기차가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되자 요한 모리츠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이제 마지막 한 사람에게까지 버림을 받고 혼자 남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후르틱과 스트룰은 그에게 작별 인사도 한마디 없이 떠나 버렸는데, 이제 아브라모비치마저 떠나 버렸다. 요한은 넋을 잃은 사람처럼 한동안 플랫폼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자 초콜릿 공장 생각이 떠올랐다. 요한은 다시 기운을 차리고 페트피 거리를 올라가며 생각했다.

'일자리를 얻게 되면 율리스카에게 유리알로 된 예쁜 목걸이를 사다 줘야겠다.'

요한 모리츠와 율리스카는 여느 때 보다 약간 일찍 시장으로 나갔다. 그리고 서둘러 장을 보고서 나지막한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거리로 접어들었다. 오른손에 시장 바구니를 든 요한은 왼손으로 율리스카의 팔을 부축했다. 두 사람은 재게 발을 옮겼다.

"초콜릿 공장은 이 거리 끝에 있어요 빨리 걸어야 해요."

율리스카가 요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두 사람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너무 시간이 걸리면 율리스카가 점심 준비할 시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녀가 초콜릿 공장에서 일하는 고향 사람에게 요한의 일을 부탁했더니 공장장과 상의한 결과 일손이 모자라니 즉시 채용하겠다는 연락을 해 왔던 것이다.

"정말 즉시 채용해 줄는지 몰라?"

요한은 길거리에 모여 있는 혼잡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가며 말했다.

"정말 즉시 나를 써 준다면 오는 월요일엔 첫 봉급을 타게 될 거야. 그러면 아마 당신은 초콜릿을 받게 될 걸."

요한은 이날따라 율리스카가 유난히 귀엽게 보여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 쳐다보고 웃었다.

"그리고 방도 하나 얻어야지. 평생토록 당신 주인 신세를 질 수는 없거든? 공장 근처에다 방을 하나 구해 보아야지."

"그럼 내가 놀러 가도 될까요?"

율리스카가 물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율리스카도 걸음을 멈추고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 사람들을 보려고 하려다 빨리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다른 길로 가요. 그렇지 않으면 점심 준비할 시간이 없어요."

하고 율리스카는 말했다. 두 사람은 잠깐 동안 허비한 시간을 벌기 위해 더욱 걸음을 빨리 하였다. 그런데 길 한쪽에는 헌병들이 비상선을 치고 지키고 있었다. 율리스카는 곁눈질로 헌병을 슬금슬금 쳐다보면서 날쌔게 빠져나갔다.

"헌병과 군인들처럼 세상에서 변변찮은 인간들도 없어! 저런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시집 안 갈 테야."

율리스카는 요한이 그 말을 어떤 표정으로 듣고 있는지 알고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요한은 보이지 않았다. 율리스카는 군중 속에서 그를 찾으려고 살펴보았다. 헌병 곁에 서 있는 요한이 손짓을 해 보이는 게 눈에 띄었다. 율리스카는 그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이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불심 검문에 걸린 것이다. 헌병들이 길을 막아 놓고 통행인들의 신분 증명서를 조사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내버려두었기 때문에 율리스카는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율리스카는 요한이 아무런 증명서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자 걱정이 되었다. 그녀는 다시 헌병이 쳐 놓은 비상선을 넘어갔다. 헌병 하나가 율리스카의 팔을 잡으려고 했으나 그녀는 뿌리치고 필사적으로 요한이 있는 데로 가까이 갔다. 요한은 어느 새 총검을 멘 한 헌병에게 떼 밀리며 트럭으로 끌려가는 무리 속에 끼여 있었다. 요한은 바구니를 높이 들어올려서 율리스카가 그것을 받아 갈 수 있도록 내밀었다. 그러나 그녀도 헌병들의 제지를 받아 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녀는 물건이 든 바구니를 받으러 가야 한다고 설명했지만 헌병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화를 내며 욕을 퍼부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요한 모리츠는 트럭에 실렸다. 그는 바구니를 바깥으로 내밀어 보이며 율리스카가 와서 받아 가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이런 사정에는 아랑곳없이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채소 바구니를 무릎 사이에 놓았다. '율리스카가 시장바구니를 들고 들어가지 않으면 나기 부인에게 매를 맞을 텐데.'하고 그는 생각했다. 트럭에서 뛰어내려 그 바구니를 가져다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칼을 꽂은 총을 둘러멘 헌병 둘이 긴 의자의 양쪽 구석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험상궂은 그들을 바라보자 비로소 요한 모리츠는 율리스카와 시장바구니 걱정을 잊고 자신이 또 붙잡혔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62

그로부터 4주일이 지났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감방에 들어앉은 요한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체포된 날부터 요한은 햇빛을 구경도 하지 못했다. 감방 들창은 안마당을 향해 있었으나 그 곳은 잿빛의 높은 벽돌이 시야를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4주일 동안 그는 한 모금의 신선한 공기도 마시지 못했다. 다른 포로들은 적어도 하루에 한 시간씩 마당으로 나가 시원한 공기를 마시고 체조도 할 수 있었지만 요한에게는 그것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이웃 감방에선 죄수들이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요한은 바깥 공기를 쐬러 나갔다. 돌아온다는 걸 발소리를 듣고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복도가 조용했다.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요한은 눈을 떴다. 눈까풀이 간신히 떨어졌다. 눈까풀을 만져 보니 퉁퉁 붓고 피가 엉겨 있었다. 언제 감방에 데려다 놓았을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들이 나를 업어다 놓았겠지.'

그는 매일 매를 맞았다. 때로는 그들의 부축을 받으며 감방으로 돌아올 때에는 어디를 걷고 있는지도 모를 때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몇 시간이나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때도 있었다. 근래에 와서 그는 늘 안겨서 감방으로 돌아왔는데, 언제 고문이 끝났는지 또 언제 간수가 부축해서 감방으로 데려와 침대 위에 뉘었는지를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너무 심하게 맞은 모양이야!"

그는 마치 낯선 사람에게 얘기하듯 혼자 중얼거렸다. 손으로 얼굴을 만져 보니 숱이 많은 수염은 뻣뻣했다. 콧수염과 머리털과 눈썹에는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바싹 마른 흙처럼 덩어리진 피가 손가락 밑에 말라붙어서 바삭바삭 소리를 냈다. 요한 모리츠는 혀로 입술을 더듬었다. 입술이 부풀어 터질 듯한 종기처럼 아팠다. 앞니 네 개가 빠져 달아났다. 그는 어느 날 턱을 주먹으로 얻어맞은 뒤 피와 함께 복숭아씨를 뱉어 내듯 이빨을 뱉어 냈다. 그날도 오늘만큼 턱이 아팠었다.

'이 이상 더 이가 빠져 버린다면 나는 빵도 먹지 못할 거야.'

조금만 움직여도 몸이 아팠다. 요한은 다시 눈을 감았다. 시간이 흘렀다. 누군가 복도를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는 보통 때처럼 그것이 누구의 발소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사라지는지 알아보려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몸 전체가 상처를 입어 그의 사고력마저 마비되어 있었다.

요한의 감방 앞에서 발소리가 멎더니 철문이 덜컹 소리를 내며 열렸다. 간수가 들어와 고문실로 데려가려고 그를 침대에서 끌어내렸을 때 요한은 비명을 질렀다. 발바닥이 방금 구워 놓은 빵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언제 발바닥에 매를 맞았는지 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간수가 마구 떠다 밀었다. 요한은 감방 문턱을 넘어섰다. 간수가 떠다 민 등이 눈물이 날 지경으로 아팠다. 그 아픔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발이 아프기 시작했다. 한 발짝씩 옮겨 놓을 때마다 살점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취조관인 바르가의 방까지는 100걸음 정도의 거리였다. 그런데 이런 발바닥을 가지고 어떻게 100발짝을 옮길 수 있겠는가. 요한은 다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자 간수가 달려와 겨드랑이 밑으로 팔을 질러 넣어 일으켜 세웠다. 요한 모리츠는 어린애같이 가벼웠다. 뼈와 가죽 외에는 무게가 나갈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살과 지방은 말할 것도 없었다. 체포되기 전까지의 요한의 모습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었다.

 

 

63

구류되던 날 요한 모리츠는 사실대로 말했다. 어떻게 해서 그가 헝가리로 오게 되었으며 어떤 경위로 왔는지를 자세히 얘기했다. 그러나 경찰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사실을 자백하라면서 마구 때리기만 할뿐이었다. 고문을 당하고 나서도 요한은 똑같은 식으로 자기 얘기를 되풀이했다. 그러면 또다시 때리기 시작했다. 지금 그는 헝가리 비밀경찰의 감옥에 있었다. 그래서 매일 신문을 받고 한 차례씩 얻어맞았다.

"무슨 임무를 띠고 헝가리로 들어왔느냐 말이야?"

취조관이 물었다.

"무슨 임무를 띠고 온 것이 아닙니다."

"준위가 군용 트럭으로 국경까지 데려다 주었다고 말하지 않았어?"

"그건 사실입니다. 중위의 이름은 아포스톨 콘스탄틴입니다. 그가 수용소 소장이었습니다. 아브라모비치 의사의 친구였는데, 보초에게 붙잡히지 않도록 우리를 데려다 준겁니다."

"거짓말 마라. 루마니아 첩보 기관의 타나세 이온 사령관이겠지. 우린 모든 걸 다 알고 있어. 그는 매달 우리 쪽으로 첩보원을 보내고 있단 말이야. 너를 보낸 것도 그 자야. 그런데 우리가 알고 싶은 건 무슨 목적으로 그가 너를 여기에 보냈는가 하는 것뿐이야. 네 임무가 뭐야?"

"저는 모든 걸 사실대로 얘기했습니다."

요한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이런 대답을 하면 몇 분 후엔 지하실로 고문을 받으러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렸다.

"그런 연극은 소용이 없어. 더 이상 고집을 부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야. 너는 18개월 동안 유대 인 수용소에 있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또 거짓말을 하는군. 너는 거기 갔을 리가 없어. 네놈은 틀림없는 루마니아 놈이잖아."

", 저는 루마니아 사람입니다."

"그런데 유대인 수용소에는 왜 들어가나? 헝가리에 와서 네놈은 유대인으로 행세할 작정이었지? 그래서 우리들을 믿게 하려고 루마니아에서 유대 인 수용소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더구나 하나도 아니고 셋씩이나 넘어왔다고?"

"그것도 사실입니다."

"거짓말 마라. 넌 혼자 왔어. 넌 우리가 네 말만 믿고 조사를 더 이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이 조서에는 나기 부부가 쓴 진술서가 들어 있어. 그 부부는 네 이름조차 들어 본적이 없다는 거야. 로자 부인에게는 의사인 오빠가 없어."

"그분들이 저를 모른다고 했습니까?"

요한 모리츠가 물었다.

"그 부인이 그런 말씀을 했을 리가 없을 텐데요. 저는 그 집에서 일했습니다. 율리스카와 함께 시장도 보고 접시도 닦았는데요........."

요한 모리츠는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취조관이 호통을 쳤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훌쩍거려! 로자 나기 부인 집에는 율리스카라는 하녀가 없어. 거짓말을 하려거든 이름이라도 똑똑히 알아둬야잖아!"

취조관은 한바탕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 집 하녀에 대해서도 이미 조사를 다 해 봤어. 그 집 하녀는 8년 전부터 그 집에서 일해 오고 있는데, 율리스카라는 이름은 네가 지어낸 이름이더구먼. 넌 우릴 속일 속셈이었지. 그렇지? 타나세 사령관이 네게 율리스카 얘기를 외우게 하면서 그렇게 반복하라고 하더냐?"

요한 모리츠는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다. 이제 간수가 부르기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지하실로 끌려가는 일만 남은 것이다. 이젠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기 부인이 자기를 모른다고 말했다는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요한 모리츠는 문이 열리고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것은 자기를 지하실로 끌고 갈 간수의 발소리는 아니었다. 눈을 떠보니 이삭 나기가 앞에 서 있었다. 밤색의 새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는 요한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 놈을 아시오?"

취조관이 물었다.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

이삭 나기는 요한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루마니아에서 탈출한 유대 인 세 명이 당신 집에 머문 일이 있습니까?"

취조관이 물었다.

"수년 전부터 우리 집엔 내 처와 그리고 하녀뿐입니다. 내 집에 묵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고맙소!"

취조관이 말했다. 이삭 나기가 취조실에서 나가자 곧 이어서 그의 아내가 들어왔다. 그녀 역시 요한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본 적도 없고 이름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당신 오빠 되는 분이 루마니아에 의사로 있습니까?"

"저는 외동딸입니다."

로자 나기가 분명히 대답했다. 취조관은 요한 모리츠에게 험악한 시선을 던지고는 로자 나기에게 물었다.

"당신 집에 율리스카라는 이름을 가진 하녀를 둔 적이 있습니까?"

"아니오. 부다페스트에 온 뒤 8년 동안 내가 데리고 있는 사람은 조세피나라는 하녀뿐입니다."

나기 부인이 냉랭한 표정으로 취조실을 나가자, 그 뒤로 한 노파가 들어와서 자기가 조세피나인데 8년간 줄곧 나기 씨 집에서 일해 왔다고 증언했다. 그녀가 나가 버리자 다시 취조관과 요한 모리츠만 남게 되었다.

"이쯤 되면 이젠 네가 거짓말을 했다고 실토하겠지! , 너는 무슨 목적으로 헝가리로 들어왔지?"

요한 모리츠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64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요한 모리츠는 취조관 바르가의 방에서 곧장 고문실로 끌려갔다. 요한은 오늘따라 고문 받는 것이 유난히 두려웠다. 지하실 방으로 들어서자 불빛이 얼굴을 들이비쳤다. 이방에는 언제나 백묵처럼 하얀 광선이 가득 차 있었다. 전등은 크고 촉수가 강했다. 요한은 눈을 감았지만 뜨거운 전등 불빛은 사정없이 그의 얼굴을 때렸다.

"또 왔구나. 옷을 벗어!"

고문 담당 간수가 능글맞게 웃으며 명령했다. 그는 언제나 여기서 카드놀이를 하는 뚱뚱한 두 사나이 중의 한 사람으로서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요한은 두려움에 떨면서 셔츠를 벗기 시작했다. 꾸물거리다가는 그 두 간수 중 하나가 밧줄로 얼굴을 갈긴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손가락이 퉁퉁 부어 있어서 조그만 셔츠 단추를 빨리 풀 수가 없었다. 요한은 그 두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몹시 두려웠다. 이렇게 매가 무서워 보긴 처음이었다.

요한은 계속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두 간수 쪽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그들은 카드놀이에 열중해서 요한의 행동이 느린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요한은 겨우 셔츠를 벗었다. 그의 눈앞에 연장걸이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군대에서 총을 청소할 때 사용하는 꽂을대 같은 가느다란 쇠 회초리가 죽 놓여 있었다. 엄지 손가락만한 굵기에서부터 지푸라기처럼 가는 것까지 모두 20종류의 등급인데, 한 등급에 각각 두 개씩이다. 요한은 쇠 회초리 한 개 한 개가 주는 아픔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

둘 중의 한 간수가 일어서며 말했다.탁자 위에는 카드가 흐트러진 채로 있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지어다."

요한은 그 사나이가 이렇게 말하며 기지개를 켜는 걸 보았다. 그는 몸에 찰싹 들러붙는 푸른 셔츠를 입고 있었다. 졸음이 오는 듯한 표정이었다. 다른 간수도 뒤따라 일어서며 담뱃불을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는 요한을 힐끗 쳐다보았다.

"어때? 오늘은 순순히 불 테냐?"

간수의 음성은 마치 담뱃불이라도 빌려 달라는 듯한 다정한 어조였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아까 사나이와 마찬가지로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아무도 나를 보낸 사람은 없습니다."

요한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두 간수는 요한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들은 벌겋게 달군 쇠붙이에 닿았을 때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화가 난 눈들이 번쩍번쩍 빛났다. 요한 모리츠는 몸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한 간수가 다가와 요한의 턱 밑을 냅다 갈겼다. 두 번을 연거푸 맞자 요한은 턱의 감각을 잃어버렸다. 두 번째 사나이는 그를 끌어다가 연장걸이 옆에 있는 긴 의자 위에 엎어놓고 말 타듯이 그 위에 걸터앉았다. 간수가 매일 이렇게 올라 탈때면 요한은 숨이 막혀 죽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가슴의 움푹 들어간 부분이 의자 위에 납작하게 짓눌리고 간수의 몸무게로 해서 마치 연자방아에 깔린 것처럼 납작하게 된 허파는 더 이상 공기를 들이마실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말하겠어?"

얼굴을 갈긴 간수가 물었다. 요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발바닥에 제 일격이 날아왔다. 그가 꿈틀 하고 다리를 구부리자 타고 앉은 간수가 다리를 꽉 붙잡아 긴 의자 위에 못박듯 올려놓았다. 두 번째 매질이 가해졌다. 굵은 회초리 같았다. 매질이 비 오듯 쏟아지자 두뇌에서는 아픔을 더 이상 느끼지 못했다. 그 대신 가슴이 아팠고 그 다음에는 어깨가 아팠다. 그러고 나서는 아무 느낌도 없었다. 그의 육체는 빳빳해졌다. 그러나 계속 그런 상태로 두지는 않았다. 이젠 발바닥이 몹시 난도질을 당하는 것 같았고 불로 지지는 듯한 아픔이 몰아쳐 왔다. 그것은 틀림없이 가느다란 회초리였다. 회초리가 빗발치듯 내리쳐질 때마다 아픔이 무릎을 통해 허리로 퍼져 갔다.

방광과 배의 감각이 없어졌다. 그런데도 매질은 빗발치듯 계속되었다. 요한모리츠는 구역질이 났다. 노란빛이 눈앞에서 아물거렸다. 그러자 아까 게걸스레 먹은 음식물이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흠뻑 젖은 바지는 살에 바짝 달라붙었다. 그가 삼킨 물과 빵은 그의 위 속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요한은 사방에서 내리쬐고 있는 노란 광선이 자기를 삼켜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쓰고 푸르스름한 액체가 입 속에 가득 찼다. 그 액체는 코, 입 할 것 없이 몸뚱이의 모든 구멍을 통해서 흘러내렸다. 그것은 두꺼비의 입에서 나오는 정액처럼 푸른 거품과 뒤섞였다.

요한 모리츠는 몸 전체에서 생명이 빠져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오직 정신만이 아직도 살아 남아있었다. 회초리는 점점 가늘어졌으나 요한은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피마저도 그 매질을 견디지 못했는지 고문을 다해 찢어진 피부에서 벗어나려고 뚫어진 모든 구멍에서 뿜어져 나왔다. 코와 귀를 거쳐서 요한 모리츠의 몸밖으로 튀어나왔고 오줌에까지 섞여 나왔다. 피도 이젠 고통으로 가리가리 찢어진 육체 속에서 더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았다.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어디로든지 빠져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65

정신이 돌아오자 요한 모리츠는 어젯밤 이삭 나기 부부를 취조실에서 만났던 일이 생각났다.

'그들이 사실대로만 말해 주었다면 나는 석방되었을 것이고 어제 그런 고문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어제처럼 지독하게 맞아 본 적은 없었다. 몸 전체가 상처투성이였다.

'이삭 나기가 나를 모른다고 하다니........... , 그 부인까지도.'

아침마다 이삭 나기의 구두를 닦고 장작을그의 분부로패고 부엌 바닥을 닦던 자기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율리스카라는 하녀는 본 적도 없다고 주장하지 않던가.'

요한 모리츠는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심신의 모든 감각 기능이 마비되어 어제는 어떻게 매를 맞고 어떻게 감방으로 끌려 들어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이삭 나기 집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 집 하녀는 분명히 율리스카라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이삭 나기는 '아니오.'라고 말했다. 그의 마누라도 '아니오.'라고 했다. 요한은 자기의 두 귀로 아니라고 한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어쩌면 그들의 비인간성은 그리도 잘 조화되어 있단 말인가? 요한 모리츠는 두 눈을 감았다.

 

 

66

잠시 후에 또 누가 그를 찾으러 왔다. 요한의 상처투성이인 몸은 다시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난생 처음으로 그는 자살을 생각해 보았다. 이젠 더 이상 이런 고통을 견디어 낼 수가 없었다. 간수가 문을 열어 제치고 문간에 서 있었다. 간수의 웃는 얼굴이 희미하게 요한의 눈에 비쳤다.

"자아, 어서 일어나!"

간수가 말했다. 순간 요한 모리츠의 눈앞에 취조관 바르가의 환상이 떠올랐다.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고문실과 갖가지 크기의 쇠 회초리들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등을 타고 앉은 간수의 무거운 몸무게마저 느껴졌다. 요한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오늘만은 제발 놓아주십시오. 내일 모레, 그리고 죽는 날까지 날마다 가겠습니다. 매일요. 취조든 고문이든 얼마든지 받겠습니다만 오늘만은 제발..........., "

"오늘 너는 석방이다!"

간수가 큰 소리로 말했다. 요한 모리츠는 좀처럼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는 그날 석방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루마니아 사람이었으므로 강제 노동 수용소로 실려 갔다. 감옥을 나오기 직전에 요한 모리츠는 율리스카가 보낸 편지 한 장을 받았다. 취조관 바르가의 부하가 그걸 가지고 왔다. 그는 요한이 감방을 나오려는 순간에 들어왔다. 서둘러 편지를 펼쳐 보니 율리스카의 귀여운 필적이 나타났다.

 

그리운 요한,

저는 나흘 전에 나기 씨 집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그걸 알려 드리는 것이니, 석방되시더라도 저를 찾으러 페트피 거리로 가지 마세요. 저는 고향에 계신 어머니 곁으로 갑니다. 티사 지방의 바라톤 마을이에요 거기서 언제까지든 사랑하는 당신을 기다리겠어요. 감옥에서 나오시는 대로 찾아 주세요.

율리스카로부터

 

그리고 오른편 구석에 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어제 나기 씨 집으로 제 짐을 가지러 갔었어요. 나기 씨와 그 부인이 취조관에게 당신을 모른다고 한 것을 아무쪼록 노여워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여기서도 유대인들을 체포하는 중이기 때문에, 그 분들은 자기 집에 유대인들을 유숙시켰다는 걸 말하기가 두려웠던 거예요. 당신 칭찬도 하더군요. 그리고 나기 씨는 당신에게 주라고 새것과 다름없는 깨끗한 양복을 한 벌 주셨어요. 석방되어서 저의 집에 오시면 드리겠습니다. 나기 씨는 훌륭한 사람이에요. 로자 부인도요. 단지 붙잡혀 가는 게 무서워 당신을 모른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정말 험악한 세상입니다. 자신의 일신상의 안전을 위해서는 자기 아버지, 어머니도 죽일 수 있나 봅니다. 당신께 키스를 보냅니다.

율리스카.

 

 

68

헝가리 정부의 각료들은 벌써 세 시간 전부터 레자스 궁전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있었다. 회의가 거의 끝날 무렵 외무장관이 일어나서 말했다.

"5만 명의 노무자 동원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문제는 이미 해결되지 않았소?"

수상이 안경 너머로 외무장관을 바라보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만장일치로 가결된 거요."

장관들은 가방을 들고 자리를 뜰 참이었다. 그러나 외무장관은 이에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어떤 것이든 독일에 제공할 걸 찾아내야 합니다. 독일과의 우호 관계 유지는 우리에게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와 독일과의 관계는 결코 대등한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와 독일의 동맹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종속 관계에 있습니다. 굴욕적인 일이긴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입장은 보다 더 불리한 입장, 즉 군사적 피점령국으로 전략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처음에 그들은 노무자 30만을 제공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것을 온갖 방법으로 설득하고 겨우 5만으로 줄인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이5만만은 제공해야 합니다."

"우리 정부는 헝가리 인을 단 한 명이라도 독일에 노예로 넘길 수 없소. 이 문제는 그것으로 결론이 난 거요."

수상은 벌개진 얼굴로 단호히 말했다.

"독일은 이 문제를 굉장히 중대시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이 같은 요구는 우리나라에 대한 최후통첩과도 같은 것입니다. 독일은 지금 산업 부흥을 위해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의 제의를 거절한다면 그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며, 그 결과 우리는 독일의 무력 침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는 거의 명백한 사실로 점령을 당하느냐 아니면 그들의 요구 사항의 받아들이느냐 하는 양자택일의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본인은 직책상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니 책임질 각오가 되어 있으시다면 거절해도 좋습니다."

외무장관도 지지 않고 반박했다.

"무슨 타협책이 없습니까?"

한 장관이 말했다.

"만일 단 한사람이라고 우리 국민을 독일의 노예로 보낸다면 사태는 더욱 중대한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사는 이런 행위를 절대 용서하진 않을 겁니다. 따라서 그 요구에 대한 우리나라 회담은 단호한 거절뿐입니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타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수상이 말했다.

"그렇다면, 만일 우리가 노무자 5만 명을 독일로 보내긴 하되, 5만 명을 헝가리 시민이 아닌 다른 사람들로 보내면 어떨까요? 우리나라 적대국인() 수용소에는 30만이 넘는 외국인이 있습니다. 그들을 독일에 제공하면 어떻습니까?"

내무 장관의 제안이었다.

"본인으로서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외무장관이 반박했다.

"그런 방법은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뿐입니다. 그것은 포로와 감금된 적대국에 관한 국제법 규정에 위반됩니다. 우리에게는 외국의 동정이 무엇보다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 방책을 취하면 테티엔 왕조의 명예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될 겁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새로운 적을 만들게 됩니다."

치열한 논쟁이 30분간 더 지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타협책이 마련되었다. 장관들의 결론은 국적이 분명치 않은 포로 중에서 헝가리 인이 아닌 5만 명을 골라 독일로 보내자는 것이었다. 내무장관은 그 안을 기초로 국적이 분명치 않은 외국인 5만 명을 추려 내는 임무를 맡았다.

"이제 겨우 국가의 체통을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후세의 역사가들도 우리를 비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찌할 수 없는 곤경에 빠진 상태에서 우리가 찾아낸 이 타결책을 그 누구도 비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고 내무 장관은 말했다.

 

 

69

헝가리 정부의 정보 부장 발트리 백작은 사무실에 들어서자 자기 비서를 불렀다. 각료 회의의 결정 사항을 발표하는 공문을 받아쓰게 할 참이었다.

'다른 사람에게서 명예와 자존심을 인정받지 못하는 인간은 노예다!'

발트리 백작은 이렇게 생각했다.

'오늘날 진정한 긍지를 가지고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스스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다. 현대 사회는 개인의 자존심과 명예, 다시 말하면 자유스런 인간의 생활을 탄압한다. 허용되는 것은 다만 노예 생활뿐이다. 그러나 이것도 그리 오래 계속되지는 못할 것이다. 모든 인류가장관에서 하인에 이르기까지노예가 되어야 하는 사회는 반드시 멸망한다. 무너지려면 하루 속히 무너지는 것이 더 좋겠지.'

"뭐라고 하셨습니까? "

비서가 방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아니야, 내가 부르는 대로 받아쓰게. 공고(公告). 내각의 비공식 회합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정하였음. 이 나라에 있는 포로들 중에서 각종 기술 산업 부문을 전문적으로 배우고자 독일로 가기를 희망하는 자에 한하여 정부는 특별히 여행 조건의 편의와 비자를 제공하기로 함. 이 특혜를 받을 수 있는 노무자의 수는 5만 명으로 제한함. 이상. 이것을 곧 각 신문사에 전하고 제 1면에 내도록 말하게."

발트리 백작은 명령했다.

 

 

70

발트리 백작은 그날 저녁 자기 비서실장인 아들과 함께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커피를 마시며 백작은 아들에게 물었다.

"너는 5만 명의 포로를 독일로 보내는 일에 어떻게 생각하니?"

"정치 무대에서 바로 KO를 한 대 먹인 셈이죠! 그 처리법이 참으로 훌륭했다고 봅니다. 헝가리 노무자를 보내는 대신에 감옥이나 강제 수용소에서 외국인들을 모아 독일로 보낸다는 건 독일의 거만한 태도에 당연히 주어져야 할 교훈입니다. 법적으로는 적어도 아무 결점이 없으니까요. 참으로 천재적인 착안입니다."

루시안이 대답했다.

"그들과 교환 조건으로 우리가 독일에서는 얻는 이득이 어떤 것인지 넌 아느냐?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우리는 그 5만 명의 노무자를 넘겨주고 그 값을 받는단 말이다."

백작이 말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대가도 없이 독일에 노동력을 제공할 수는 없지 않아요?"

루시안이 말했다.

"그러면 너는 네 아비가 오늘 인신매매에 가담했다는 걸 알고도 조금도 불쾌하지 않단 말이냐? 이런 거래야말로 인간의 도의적 타락 가운데서도 가장 악질적인 단계야."

"아버지도 참 이상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 내내 그처럼 우울한 얼굴이시군요 ............. ."

"딴 데로 말을 돌리지 말고 솔직히 말해 봐. 내가 노예 매매에 관여했다고 보느냐, 그렇지 않다고 보느냐?"

"아버지께서 굳이 그런 식으로 보신다면 노예 매매에 관여하셨다고 볼 수도 있겠죠."

루시안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도 넌 수치스럽게 생각지 않는단 말이냐?"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울적해진 원인이 다른 데 있는 줄 알았습니다. 이런 문제로 우울해진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입니다. 우리는 부득이 독일에 노무자를 보내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만일 그런 방법이라도 생각해 내지 않았더라면 우린 꼼짝없이 헝가리 사람을 보내는 수밖엔 없었습니다. 그러니 거기에 비하면 얼마나 다행스런 일입니까?"

"그건 그래. 헝가리 처지에서 보면 그 편이 훨씬 나은 문제지. 그러나 인류의 처지에서 보면 어느 편이나 다 마찬가지로 중대한 일이야. 요는 우리가 독일에 인간을 판 것이니까 말이야."

"그러나 현재로선 부득이한 일입니다.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사정이었지 않습니까."

"유럽은 이미 몇 백 년 전에 노예 매매를 그만두었지. 맨 마지막으로 매매된 것이 미국의 흑인들이었어. 오늘날에는 이 지구상의 어디에서도 노예 매매가 금지되어 있어. 노예 제도의 폐지는 인류 문명의 가장 으뜸가는 업적의 하나라고 생각해.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지금 시대를 역행하여 다시 노예 매매를 시작하고 있거든. 20세기에서 르네상스와 중세기를 뛰어넘어 별안간 그리스도 이전의 시대로 되돌아갔단 말이야. 이것은 역사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지."

"하지만 아버지, 무엇 때문에 만사를 그렇게 비관적인 각도에서만 보십니까? 독일로 보내는 노무자들은 어디까지나 노무자일 뿐 쇠사슬에 묶여 가는 노예는 아니잖습니까. 일을 하러 가는 거예요."

루시안이 말했다.

"그들이 도망갈 염려가 없기 때문에 사슬을 묶지 않는 것뿐이야. 현대 사회에서는 노예를 붙잡아 두는 독특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 사람들이 가지지 못했던 방법이야. 나는 단순히 기관총이라든가 전류가 통하고 있는 철조망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인간을 통제하는 관료 기술의 온갖 방법을 말하는 거야. 즉 식권을 지급 받는 데도 호텔에 잠자리를 얻는 데도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데도 길거리를 걷는 데도 또는 주소를 바꾸는 데도 경찰의 허가증이 있어야 하는 거야. 만일 그리스 사람들과 이집트 사람들이 우리 현대 사회가 행사하는 이러한 통제법을 알았더라면 그들 역시 노예들을 쇠사슬에 묶진 않았을 거다. 그러나 노예임에는 틀림없어."

"이젠 그만 생각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회를 바꿀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독일에 노예를 판 것은 우리뿐만이 아닙니다.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프랑스, 이탈리아, 노르웨이 등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가 다 그랬어요. 노예를 팔고 산다고 해서 지금의 우리 정부가 독일에 대항해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독일은 필연코 다른 나라들로부터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노무자를 충당할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치 독일을 무너뜨린다 해도 그걸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독일인 대신 러시아인으로 바꾸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러시아인은 세계 최대의 노예 매매업자입니다.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모든 개인은 국가의 소유이니까요.......... "

"그래, 너는 이런 절망적인 상태를 보면서도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느냐?"

"별로 느끼지 않습니다."

"이거야말로 정말 심각한 문제야. 그것은 말하자면, 네가 인간을 존중하지 않게 되었다는 걸 의미하는 거야. 그런데 너 또한 한 인간이거든. 그렇다면 너는 이미 제 자신을 존중하지 않게 된 거지."

"그러나 아버지, 저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적인 가치에 따라 존중합니다. 이런 저 자신의 평가 기준에 대해서 저를 나무라시지는 않으시겠죠?"

"너는 인간이 어떤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즉 가격에 따라 상품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인간을 존중한다는 말이구나."

"그게 뭐가 나쁜가요?"

"그렇다면 너는 인간을 본질적인 가치, 즉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통해서도 존중하고 있느냐?"

"물론입니다. 제가 어떤 사람에게 고통을 주었을 경우엔 반드시 상대방을 가엾게 생각하게 되고 후회를 하게 되거든요."

"그건 상대가 짐승이라도 마찬가지일 게다. 채찍으로 때리고 나서 고통스러워하는 개를 보면 금방 때린 것을 후회하고 측은하게 여길 거다. 그러니까 너는 어떤 동물에 대해서든 품을 수 있는 동정을 인간에게도 품고 있다는 것에 불과하단 말이야.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과연 네가 인간을 인간 그대로, 비록 아무런 사회적 가치를 갖고 있지 않아도 그리고 동물처럼 연민이나 애정을 너에게 느끼게 하지 않아도 너는 과연 인간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유일한 가치의 대상으로 존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거기까진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다만 인간을 그 사회적 가치에 따라 하나의 살아 있는 동물로 존중할 따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렇게 느끼고 있을 겁니다."

"루시안, 세상 사람들이 모두 너처럼 생각하고 느낀다는 게 사실이냐?"

"그럼요. 이건 가장 타당하고 논리적인 결론입니다. 인간이란 사회적 가치를 지닌 개체입니다. 그 위의 모든 주장은 억설에 지나지 않아요."

"그건 실로 심각한 일이다."

"무엇이 그리 심각합니까?"

"내 말이 사실이라면 그건 현대 문명을 의미하는 거야. 루시안 우리유럽의 문화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지. 첫째, 미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거야. 그건 그리스 사람들이 터득한 습성이지. 둘째, 법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거다. 그것은 로마 사람들이 터득한 습성이지. 그리고 기독교 사상에 입각한 인간존중 사상이야. 이 마지막 특징이야말로 그 옛날 많은 고난을 무릅쓰고 크리스트 교도들이 터득한 습성이지. 바로 이 세 가지 상징을 존중함으로써 우리 서양 문화는 비로소 오늘날을 이룩한 거야. 그런데 이제 우리는 유산 중에서 가장 귀중한 부분 즉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잃어버리고 만 거야. 이것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생명의 원천이지.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없는 유럽 문화는 이미 끝장난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나 아버지, 과거의 역사는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시대보다 훨씬 비인간적인 때도 있었죠. 인간이 대중 앞에서 불살라지기도 하고 제단 앞에서 재가되기도 하고 수레바퀴 밑에 깔려 죽기도 하고 물건처럼 사고 팔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현대의 그것에 대해 그처럼 가혹한 판단을 내리신다는 건 좀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네 말도 일리는 있다. 그런 암흑시대에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가치를 모르고 있었고,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야만적 행위도 실제로 있었지. 그러나 우리들은 지금에야 겨우 그 야만성을 극복하고 인간을 인정하기 시작한 거야. 아직도 우리는 출발점에서 아직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어. 앞으로 배워야 할 것들이 많아. 그런데 기계 사회의 출현은 아직도 여러 세기를 거쳐서 획득하고 창조한 모든 것을 파괴하고 말았어. 기계 사회는 다시 인간 멸시의 관념을 끌어 들인 거야. 이제 우리 인간들은 오로지 사회적인 가치라는 관점에서만 평가되고 있으며, 인간이란 본연의 가치는 전혀 쓸모없는 장식품으로 전락하고 말았어.

"이제 그만 가 봐야 하지 않니? 밤도 늦었는데."

루시안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제 시계가 섰군요. 몇 시입니까, 아버지?"

"25시다!"

"?"

루시안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너도 물론 모르겠지.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지금은 25시다. 유럽문명의 시간이야."

 

 

71

"이봐, 모리츠. 당신은 이제 독 안에 팔린 몸이야. 당신 몸값은 얼마였을까? 하지만 아주 비싼 값은 못 받았을 거야. 고작 탄약 한 상자 값일걸. 소문에 의하면 말이지 독일 놈들은 절대로 현금을 주지 않는다더군. 무기나 탄약 같은 걸로 대금을 치른대. 독일 놈들은 당신 몸값으로 탄약 한 상자 이상은 보내지 않았을걸!"

작업반장이 빈정거리며 요한에게 말했다.

"그래도 꽤 준 편이야. 소련 놈들이었다면 그만큼도 주지 않았을 거야. 소련에서는 사람 값이 더 싸다니까."

요한 모리츠는 그런 농담이 못마땅했지만 묵묵히 듣고 있었다. 반장은 부쿠레슈티의 대학생이었는데, 그 역시 헝가리에 억류되어 8개월 전부터 요한과 함께 참호를 파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요한은 그가 본래 실없는 소리를 즐겨하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 내 말을 안 믿는군."

학생이 말했다.

"물론이지. 사람은 수용소에 처박히고 감옥에 들어가고 노동을 하고 때때로 고문을 당하고 죽음을 당할 수도 있지만 팔릴 수도 없거든."

하고 요한 모리츠는 대답했다.

"어쨌든 당신은 팔렸단 말이야. 신에게 맹세해도 좋아. 당신과 나, 그리고 이곳 노동 수용소에 있는 루마니아 인, 세르비아 인, 그리고 루테니아 인 전부가 독일에 팔려 간단 말이야. 헝가리와 독일은 5만 명의 노무자를 사고 팔기로 매매 계약서까지 벌써 교환했어."

학생은 이렇게 말하고 가 버렸다. 요한 모리츠는 반장이 한 말을 곰곰 생각해 보았다.

'나를 놀리려고 그런 말을 했겠지. 얼토당토않은 소리야.'

그러나 온종일 작업반장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독일 사람들이 탄약 한 상자를 지불하고 자기를 샀다는 그 말을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런 터무니없는 농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자기가 한심하게도 생각되었다. 지금 요한이 있는 수용소는 루마니아와 헝가리의 국경에 있었다. 그들은 모두 참호를 파는 작업에 동원되고 있었는데, 안팀이라는 작업 반장의 말에 의하면 참호가 완성되려면 아직도 10개월은 더 걸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사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헝가리 당국에서는 계속해서 새로운 포로들을 끌어 왔다. 벌건 낙인이 찍힌 도형수까지 투입하는 판국이었다. 일손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출발 명령이 떨어졌다. 요한이 있는 수용소의 루마니아인과 세르비아 인들은 모두 기차에 실렸다. 표면상의 이유는 루마니아 인과 세르비아 인의 작업 능률이 나빠서 보다 능률을 낼 수 있는 다른 패들과 교체시킨다는 것이었다. 안팀은 자기들은 팔려서 독일로 끌려가는 거라고 주장하였다. 루마니아인들 중에는 간혹 안팀과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요한과 마찬가지로 그걸 믿으려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기차가 멈췄을 때 요한은 용변을 보려고 기차에서 내렸다. 기차 안에는 변소가 없었으므로 모두 기차가 설 때까지 참아야만 했다. 차가 서면 여기 저기 흩어져서 경비병의 감시를 받으며 볼일을 마쳤다. 기차는 들판 한가운데에 멎어 있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요한은 여느 때와는 달리 빨리 기차에 오르지 않고 기차 주변을 서성대다가 기차 칸마다 분필로 무엇인가 써 놓은 것을 보았다. 요한 모리츠는 바싹 다가가서 그 독일어를 읽어 보았다.

'헝가리 노동자는 대 나치 독일의 동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다음을 읽어보았다.

'헝가리 노동자는 추축국(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3개국 동맹의 편에 속했던 나라)의 승리를 위해 투쟁한다.'

요한은 그제야 비로소 독일로 끌려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요한 모리츠는 안팀을 불러 그 글을 함께 보았다.

"! 이제 알겠지? 헝가리 놈들이 우릴 독일에 팔아넘긴 거야!"

"아니야! 그래도 난 믿을 수 없어. 세상에 어떻게 사람을 팔고 사나?"

"좀 기다려 봐, 확실해질 테니까!"

요한은 기차에 올라 기다렸다. 기차는 저녁때까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해질 무렵, 총을 멘 경비병들이 여기 저기 들판에 흩어져서 꽃을 꺾었다. 요한은 무장한 군인들이 장교의 명령에 따라 꽃을 꺾는 광경을 난생 처음 보았다. 장교들도 꽃을 꺾고 있었다. 마침내 꽃묶음을 한 아름씩 안고 돌아와 잎과 가지를 곁들여서 열차 칸 하나하나를 마치 결혼식 때처럼 장식했다. 포로들이 실린 기차는 금세 화려하게 치장되었다.

날이 저물자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한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잠을 자지 않으려 했는데 어느 새 잠이 들고 말았다. 그가 눈을 떴을 때는 환한 대낮이었다. 찻간의 문이란 문은 모두 잠겨 있었는데, 바깥에서는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까지는 황량한 들판이 아니면 시내에서 좀 떨어진 곳에 정거하던 기차가 이번에는 어느 역에 정거했던 것이다. 들창 아래에서 사람 소리와 기관차 소리가 났다. 요한은 귀를 기울여 찻간 바로 옆을 큰 소리로 지껄이며 지나가는 사람의 말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분명 독일 말이었다. 그제야 요한은 안팀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독일에 팔려온 것이다.

"독일 놈들이 정말 내 몸값으로 헝가리에 탄약 한 상자를 준 모양이야. 내 뼈와 살과...... 결국 내 전부를 탄약 한 상자와."

"우리들은 모두 종신 노예로 팔려 온 거야."

안팀이 말했다. 그 자신도 이제 독일 영토 안에 들어와 있다는 걸 절감했다. 안팀은 일어서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모두 귀를 기울여 그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요한은 듣지 않고 있었다. 요한의 정신은 안팀이 말한 '종신 노예'라는 소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지금껏 수용소 살이를 하면서 운하를 파고 참호를 파고 배를 곯고 매를 맞고 이에게 뜯기던 자기의 모습을 눈앞에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수용소에 갇힌 채로 죽어 가는 자신의 모습도 그려보았다. 지금까지 그는 포로들이 죽는 광경을 많이 보아 왔다. 그 자신이 죽은 사람의 무덤을 판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포로가 일단 숨지면 사람들은 그가 입고 있던 누더기까지도 모조리 벗겼다. 마치 죽은 짐승을 묻기 전에 가죽을 벗기는 것처럼 죽은 자의 옷을 벗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개처럼 알몸으로 구덩이에 처넣는 것이다.

'개는 파묻기 전에 장갑을 만들기 위해 가죽을 벗긴다. 포로는 옷을 벗긴다. 사람 가죽으로 장갑 만드는 법을 만드는 날에는 살감의 가죽까지 벗기게 될지도 모르지. 아마 내가 죽기까지는 그 방법을 알아 낼 것이다.'

요한은 수용소에서 죽을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요한은 벌떡 일어섰다.

'나를 한평생 수용소에 가둬 놓아도 좋다. 그러나 제발, 제발 죽을 때에는 나에게 자유를 다오. 죽기 전에 단 몇 시간만이라도 나에게 자유를 주면 나는 자유인으로서 죽을 수 있을 것이다. 갇혀서 죽는다는 건 자유에 대한 모독이요, 크나큰 죄악이다. 그러나 독일에 팔려 온 이상 평생 일만 하다 죽게 되리라. 죽기 전엔 석방시켜 주지 않을 테니까.'

 

 

72

"늦어도 열흘 안에는 여기서 떠나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체포 영장이 이리로 날아올 거예요.

열흘, 이 기간이 내게 허락된 최대의 기한입니다. 실은 그것도 긴 시간인지 모르지만."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여느 때처럼 같은 의자에 앉아서 자기 앞에 있는 레오폴드 스타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기가 너무 지나치게 과장하지 않았는가 싶어 다시 머릿속으로 자기가 처한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유대인들이 자진하여 내무 당국에 신고하는 기간은 벌써 지나갔다. 이 수속을 밟지 않은 사람들은 새 법령에 의해 10년 징역을 받게 되어 있었다. 물론 그녀는 자진 신고를 하지 않았다. 검찰청에서는 밀고에 의해 이미 그녀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고 있었다. 검사는 그녀가 모르고 있는 자료로써 그녀가 유대인이라는 뚜렷한 증거를 갖고 있었다. 그 서류들을 소멸시킬 수는 없었다. 그전처럼 조사를 담당한 사람들을 매수하려던 계획도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이번엔 우리가 졌어요, 스타인 씨. 이젠 싸움을 그만두고 도망칠 수밖에 도리가 없어요. 내 힘으로 가능한 것은 오직 그 길뿐입니다. 2년 반 동안 나는 최대한으로 버티었습니다. 모든 공격에 잘 견디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끝났어요. 이젠 운도 다 됐나 봐요."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말했다.

"용기를 내세요. 아직 완전히 졌다고 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촉박하군요. 인쇄소와 신문사와 집을 팔되 좋은 값을 받아야 하니까요. 부동산과 마찬가지로 그림과 서적 등도 쉽게 팔 수 있을 겁니다. 거기서 나오는 돈은 스위스 은행에 맡기는 게 좋을 겁니다. 하지만 열흘 안으로 코르가 씨가 취임하는 일과 여권을 얻는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레오폴드 스타인은 말했다.

"이제 우리가 이 나라를 떠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공무를 띠고 해외로 나가는 길뿐입니다. 그러니 스타인 씨, 남편이 라구세의 루마니아 문화관 관장으로 임명되도록 무슨 방법이든지 써야겠어요. 그이가 외교관만 되면 나는 그의 아내로서 여권과 비자를 받게 될 거예요. 정말이지 한시가 급해요. 검사가 나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은 이번 조사 기간을 열흘 더 연장시켜 주는 거라고 귀띔해 주더군요. 그 기간을 놓치면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에 자신도 체포 영장을 발부할 수밖에 없답니다."

"부군한테는 아직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알 일인데. 그건 잘못 생각한 것 같군요. 한시라도 속히 아신다면 우리들의 이 곤란한 처지를 혹 도와 줄 수 있을는지 누가 알아요. 그 자신이 신청하지도 않은 임명장과 여권을 보신다면 부군께선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나로선 도저히 말할 수가 없어요. 2주일 후에는 공공연한 사실이 될 것을 구태여 숨길 이유가 없는데 그래도 고백할 수가 없어요. 내가 유대인이라는 걸 그이도 알게 되겠지요. 하지만 나는 지칠 대로 지쳐 이 이상 용기를 낼 수가 없어요. 2년 동안이나 숨겨 온 유일한 비밀을 그이에게 털어놓기 위해서는 굉장한 용기가 필요해요. 지금 나에겐 그 용기가 없어요. 너무나 오랫동안 긴장했기 때문에 지쳐 버렸어요. 정말 지쳤어요."

레오폴드 스타인은 정말 지쳐 보이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토록 활달하던 그녀가 지금은 애처롭기 그지없게 생각되어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지금의 그로서는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다. 그는 기가 죽어 얼굴을 두 손에 파묻고 앉아 있는 그녀를 더 이상 보기가 민망하여 자기의 무릎 위에 놓인 손가방을 열었다. 가방 속에는 엘레오노라 베스트의 집과 토지, 인쇄소, 신문사 그리고 그림 등의 매매증서, 그밖에 드라이얀 코르가라는 금빛 글자가 새겨진 지갑이 들어 있었다. 레오폴드 스타인은 그것을 책상 위, 엘레오노라 앞에 갖다 놓았다.

"내일은 두 분께서 결혼하신 지 2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부인께서 여러 가지로 경황이 없어 부군께 드릴 선물도 마련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되어서 제가 대신 마련했습니다. 아마 그 분의 마음에 드시리라 생각합니다."

"내일이 결혼2주년이라고요? 전 깜박 잊고 있었어요. 대신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타인 씨, 드라이얀이 퍽 좋아할 거예요."

그녀는 지갑을 바라보고 귀엽다는 듯이 어루만졌다.

"나 자신도 무엇 때문에 비밀을 간직하려는지 모르겠어요. 그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인가 봐요. 이번 일을 그가 안다면 내게 커다란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거예요. 나는 그걸 굳게 믿어요. 그런데 말할 수가 없어요. 그이를 잃을까봐 두렵기 때문이에요. 이건 어리석은 공포심이라고, 꼭 말해야겠다고 마음은 먹지만 번번이 용기를 잃고 말을 못 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이 지긋지긋한 비밀을 지키고 있답니다. 드라이얀만이 내 생명을 이끌어 주는 유일한 존재예요. 만일 그이를 잃는다면 나는 차라리 죽어 버릴 거예요."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지갑을 제자리에 놓으면서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불쑥 덧붙였다.

"검찰 총장이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글세, 우리 결혼은 법적으로 무효라는 거예요. 물론 일리는 있어요. 우리가 결혼한 것은 루마니아 인과 유대인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령이 발표된 뒤였으니까요. 법령은 4월에 발표됐는데, 제가 드라이얀과 결혼한 건 8월이었으니까요. 법적으로 따지면 우리의 결혼은 무효지요. 그 이후의 결혼은 그 법률을 알았든 몰랐든 자동적으로 모두 무효가 된답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도 검찰 총장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했다.

'드라이얀 코르가 씨는 당신의 남편이 아닙니다. 법률에 의하면 그 분은 아직 미혼입니다. 당신들의 결혼은 그 자체가 무효니까 코르가 씨는 언제든 다른 여자와 결혼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해도 이중 결혼이 되지 않습니다. 아이가 생겨도 그 아이는 사생아가 되므로 코르가라는 성을 따르지 않고 베스트라는 성을 가져야 합니다. 부인, 당신 자신도 엘레오노라 코르가라고 서명하는 건 위법적 행위입니다.'

"돈은 얼마든지 들어도 좋아요, 스타인 씨. 우리들은 아주 빠른 시일 내에 어떤 값을 지불하더라도 여권과 비자를 손에 넣지 않으면 안 돼요. 코르가 부부의 여권을........"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노인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73

닷새 후 레오폴드 스타인은 드라이얀 코르가를 라구세의 루마니아 문화관 관장으로 임명한다는 임명장과 푸른 가죽 표지의 여권을 가지고 엘레오노라 베스트 앞에 나타났다.

"부인, 이번에도 우리가 이겼습니다."

그는 만면에 희색을 띠며 말했다.

"빈까지 가는 침대차를 예약해 놓았습니다. 월요일에 떠나십시오. 당신들이 떠날 수 있게 돼서 여간 기쁘지 않습니다."

레오폴드 스타인은 안경을 벗어 들고 닦기 시작했다. 줄곧 여권을 들여다보고 있던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그제야 노인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노인의 얼굴이 며칠 사이에 퍽 수척해진 것 같았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그에게 같이 탈출할 생각이 없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녀가 막 입을 열려는데 레오폴드 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밤에도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트란스트니스트리아로 이송되었습니다. 나는 당신들이 이곳을 떠나게 된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앞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해도 부쿠레슈티엔 한 사람의 유대인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나도 예외는 아닐 겁니다. 나 같은 늙은이가 수용소에서 견딘다고 해도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74

드라이얀 코르가는 서재에 틀어박혀 글을 쓰고 있었다. 노라는 남편이 일하는 동안엔 결코 서재에 들어가는 일이 없었으나 오늘은 여권을 가지고 곧장 뛰어 들어갔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머리를 두 손으로 싸안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우리의 결혼2주년을 기념하는 근사한 선물을 가지고 왔어요. 당신을 라구세의 루마니아 문화관 관장으로 임명한다는 임명장이에요"

그녀는 임명장을 보여 주며 덧붙였다.

"달마티아 해안은 세계적으로 이름난 아름다운 곳이에요. 당신은 그곳에서 작품을 조용히 구상하실 수 있을 거예요."

"어떻게 그런 일을 혼자서 했소? 그리고 그런 비밀을 어쩌면 그렇게 감쪽같이 지키고 있었지?"

드라이얀은 아내를 껴안고 키스를 했다.

"노라, 당신은 과연 천재야! 내가 얼마나 기쁜지 당신은 모를 거요. 그렇잖아도 작품을 계속 쓰려면 환경을 좀 바꾸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거든. 다음 장이 잘 되지 않아 고민이었소. 이젠 좀 풀릴 것 같구려. 아마 이 장이 이 소설 전편을 통해서 가장 두드러진 장이 될거요."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남편에게 다가가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녀는 다음 장의 내용을 듣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75

"너한테는 쉬운 일만 시키라는 주의를 받았어. 너는 아직 환자니까. 빌어먹을! 우리한텐 환자만 보내 주니 날더러 어쩌란 말이야!"

공장 감독관이 불만스레 투덜거렸다. 그는 요한 모리츠를 얄밉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손에 든 서류를 한번 훑어보더니 다시 의심쩍다는 표정으로 요한을 쳐다보았다. 독일에 온 지 2년 동안 모리츠는 항상 이 같은 눈총을 받아 왔다.

"헝가리 사람이야? 전에도 헝가리 사람들이 왔었는데 별로 신통치가 않았어. 자네야 설마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감독은 싱긋이 웃더니 손에 든 종이를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야노스 모리츠,

헝가리 인,

32,

미숙련공,

1941621일 독일에 왔음.

 

요한 모리츠는 서류에 그렇게 적혀 있었으므로 자기가 2년 전부터 헝가리 시민이 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요한 모리츠는 그가 지금까지 일해 온 나치 독일의 공장, 제작소, 수용소 등의 목록을 읽고 있는 감독의 눈길을 눈으로 따랐다. 리스트는 매우 길었다. 여러 가지 공장 이름도 들렸다. 요한은 자기가 이렇게 여러 장소를 거쳐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 새삼 대견하게 느껴졌다.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10여 군대의 수용소, 지금까지 일해 온 10여 군데의 강제 노동 수용소, 공장, 거리, 또 자기가 몸소 받아 온 고통들이 한순간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요한은 여기에 오기까지 수없이 많은 고초를 참고 견디어 온 자기의 용기를 칭찬해 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감독은 요한이 쓰라린 고초를 당해 온 여러 장소의 이름에는 흥미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종잇장을 넘기더니 맨 끝에 와서 눈길을 멈췄다.

"194338, 707 외국인 노무자 병원 퇴원."

요한은 한 인간이 자기의 눈물 어린 고난의 리스트를 아무 감정도 없이 읽어 내려가는 걸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감독은 눈썹 하나 까닥 하지 않고 연필을 집어 서류 한구석 여백에다 다음과 같이 적어 넣었다.

'1943310일 코노프 운트 존 단추 공장에 배속됨.'

그리고 이것과 똑같은 리스트들이 잔뜩 들어 있는 서랍 속에 집어넣고 나서 다시 요한을 쳐다보며 말했다.

"규칙 엄수와 명령 복종, 그리고 근면과 질서! 이것이 외국인 노무자들이 우리 공장에서 일할 때 지켜야 할 기본 원칙이다. 이 공장에서는 우리 독일의 부녀 노무자들도 있으니, 특히 이 점에 관해서 몇 가지 주의를 준다. 독일 여성에게는 절대로 눈독을 들이지 말 것. 독일 여성과 접촉하는 자는 최저 5년간의 형을 받게 된다. 우리 공장은 이 조항에 특히 엄격하다. 독일 여성은 모두 몸에 호신용 패를 지니고 있는데, 이것을 건드리는 날에는 5년간 징역살이다. 그러니 독일 여자의 몸에는 최저5년형의 선고장이 붙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 하는 게 좋아. 만져서는 안 될 데를 만지면 어떻게 된다는 것쯤은 말할 필요도 없을 줄 안다. 그리고 여자에게 다른 기대를 갖는다는 건 상상하지도 말아야 한다. 네가 오기 전에 여기 있던 헝가리 녀석은 지금 감옥에 있는데, 그 녀석이 왔을 때도 나는 오늘 네게 말한 것과 똑같은 주의를 자세히 주었다. 그 녀석은 내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았어. 아마 컴컴하니까 여자와 함께 이불 속에 숨어 있으면 아무도 모를 줄 알았던 모양이지. 하지만 우리 대 나치 독일에서는 너희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샅샅이 알 수 있어. 이불 속에 숨어 있더라도 네 일거일동은 당장 우리에게 들키고 만다. 심지어 네가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까지도 알아맞힌다. 네가 생각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하루에 몇 번씩이나 사진을 찍어 둔단 말이다. 다음으로 명심할 것은, 지금 전시의 생산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곳에서 네가 보는 것 듣는 것은 모두 군의 기밀이다. 외국인 노무자는 공장의 제품 종류, 제조 방법, 수량 등을 알아서는 안 돼. 만일 알려고 하다간 목이 달아날 각오를 해야 해. 지난 1월에는 이탈리아 녀석 하나가 사형 당했어. 현재도 체코슬로바키아 녀석 하나가 코노프 운트 존 공장의 비밀을 탐지하려다 발각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중이야."

감독은 일어서서 요한 모리츠를 데리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오늘까지 이 공장에서 일했던 헝가리 녀석들은 모두 신통치 않았어. 그 놈들은 모두 감옥에 들어갔지 한 녀석은 태업을 하다가 20년의 강제 노동형을 받았어. 나는 예외라는 걸 믿지는 않지만 제발 너만은 그 예외이기를 바란다!"

감독은 큼직한 상자를 운반하는 콘베이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레일 한쪽 끝에서 노동자 한 사람이 콘베이어에 실려서 밀려오는 상자를 들어 그의 곁에 있는 수레 옮겨 싣고 있었다. 감독이 그의 곁으로 갔을 때, 상자를 잔뜩 실은 손수레가 레일 위로 밀려가고 다른 빈 수레가 노동자 곁으로 굴러왔다.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열심히 상자를 들어 빈 수레에 싣고 있었다. 무척 무거운 상자라는 걸 눈으로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내일부터 네가 할 작업이다. 간단한 일이지. 공장에서 나오는 상자를 받아서 창고로 가는 빈 자동 수레에다 옮겨 싣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규율을 엄수해야 돼. 이것은 가장 중요한 규칙이니까. 너는 전에 공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지?"

요한 모리츠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생각지 않고, 그렇다고 무슨 딴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기계적으로 몸을 굽히고 기계적으로 팔을 벌려 단추 상자를 들어 자동 수레에 옮겨 놓는 노동자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기 옆에 누가 와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기계는 규율의 문란을 용서하지 않는다. 기계는 무질서와 태만, 그리고 인간의 나태를 용서하지 않는단 말이야!"

요한 모리츠는 감독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일할 때는 절대 딴 생각을 해서는 안 돼. 만일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면 기계가 당장에 너한테 벌을 내릴 거야. 모든 주의력을 네 동료인 콘베이어에 쏟아야해. 네게 상자를 가져다주는 기계 노동자에게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야. 넌 그저 허리를 굽혀 기계의 손에서 상자를 받아 자동 수레에 싣기만 하면 되는 거야."

감독은 요한에게 주의를 주면서 줄곧 웃고 있었다. 요한 모리츠는 자기 동료라는 콘베이어의 팔을 잡아 보려고 했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감독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감독은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

"기계가 인간에게 적응하는 게 아냐. 언제나 네 자신이 그에게 적응해야 하고 네 동작을 기계의 동작에다 맞추지 않으면 안 돼. 그것이 타당한 거야. 왜냐하면 저쪽은 완전무결한 노무자이지만 넌 그렇지 못하거든. 어떤 인간도 완전무결한 노무자가 될 수는 없어. 오직 기계만이 가능할 뿐이야. 그러니까 일을 배우려면 기계를 열심히 주시해야 하는 거야. 알겠나? 기계는 네게 규율과 질서와 안전을 가르쳐 줄 거야. 그걸 흉내 내면 너는 1급 노무자가 될 수 있어. 그러나 너는 절대로 1급 노무자가 될 수 없을 거다. 너는 헝가리 인이니까. 헝가리 인은 공장에 들어오면 기계는 보지 않고 여자에게만 눈독을 들인단 말이야."

요한 모리츠는 자기가 헝가리 인이 아니라 루마니아 인이라는 걸 밝히고 싶었다. 자기의 신상 얘기도 하고 자기가 있던 감옥의 이야기와 부다페스트에서 고문당한 얘기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감독은 말없이 규칙적인 간격으로 상자를 날라 오는 기계만을 대견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어 좀처럼 말머리를 꺼낼 수가 없었다. 감독이 천천히 기계에서 눈을 돌려 요한을 쳐다보았다. 기계에 감탄하고 있던 그의 눈빛은 싸늘하게 경멸하는 눈초리로 변했다. 요한은 그 경멸이 자기의 온몸을 결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요한은 부다페스트의 감옥과 취조관 바르가의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말았다.

"인간은 절대로 기계를 따라갈 수 없어. 특히 동방인은 더하지. 너희들 동방인은 기계에 뒤떨어진단 말이야. 너는 동유럽 사람 중에 헝가리 인이야. 게다가 병원에서 갓 나온 환자야! 그러니 네 실력은 뻔해."

요한 모리츠는 감독이 자기를 신통찮게 여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제 이만한 일에 열이 오르거나 속이 뒤집힐 요한은 아니었다. 그는 앞으로 열심히 일하겠다는 것을 말해서 그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너 같은 놈은 도저히 기계와 비교할 수 없어! 너는 너 자신의 모자라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해."

감독은 머리끝에서 발끝에까지 요한을 훑어보았다.

"너를 기계와 비교한다는 건 기계에 대한 모욕이야. 완벽한 기계에 비한다면 너 같은 건 기계의 노예로도 쓸수가 없는 인간이야. 나를 따라와. 작업복을 줄 테니. 공장 안에선 작업복 이외의 옷은 입을 수 없어. 노무자의 옷은 성직자의 제복과도 같은 거야. 너는 이 말을 못 알아들을 거다. 너희 헝가리 인들은 여자에게만 눈이 팔려 있거든. 야만인들 같으니라고!"

 

 

76

이튿날 새벽 4, 요한 모리츠는 혼자서 어젯밤에 감독에게 지시받은 콘베이어 곁으로 갔다. 작업 시작까지는 아직 5분이 남아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아래위가 붙은 푸른 작업복을 입고 나막신을 신고 있었는데, 발을 옮길 때마다 나무로 된 신바닥이 시멘트 바닥을 때려 마치 망치질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처음엔 발끝으로 걸으려고 했다. 혼자서 그렇게 요란한 소리를 내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막신은 여전히 요란스러웠다. 방 한가운데까지 왔을 때 요한은 누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자기 이름을 부르는 건 아니었지만 자기한테 말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건 확실했다. 고개를 돌렸을 때 두 번째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살베 스크라베!(안녕하셨습니까, 노예님!)"

검은머리에 커다란 눈과 검은 수염, 그리고 사기처럼 하얀 이를 가진 얼굴이 철창으로 된 작은 들창 너머로 보였다. 해골처럼 여윈 젊은이가 번쩍번쩍 빛나는 검은 두 눈으로 요한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몸뚱이는 보이지 않았다. 요한이 그를 바라보자 그는 오래도록 만나지 못했던 친구라도 본 듯이 말을 걸었다.

"살베 스크라베!"

"내 이름은 야노스 모리츠."

요한은 그 젊은 사나이가 살베 스크라베라는 딴 사람과 자기를 혼동하는 줄 알고 이렇게 말했다. 그때 작업 시작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자 기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한은 난간 위 자기 자리로 가서 섰다. 검은머리의 사나이는 잠시 서서 머뭇거리더니 한 번 더 요한을 바라보고 소리를 질렀다.

"살베 스크라베!"

요한은 콘베이어를 타고 온 첫 상자를 들어 빈 자동 수레에 실었다. 상자가 그처럼 무겁지만 않았다면 일곱 살 먹은 아이들도 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일이었다. 요한은 상자에 들어 있는 것이 단추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는 그걸 한번보고 싶었으나 모두 봉해져 있었다. 혹시 열려 있다 해도 덮개를 열고 그 속의 단추를 들여다볼 용기가 그에게는 없었다.

'지난번에 이탈리아 놈 하나가 사형을 받았다. 현재는 체코슬로바키아 녀석이 재판 중에 있고......."

요한은 그 체코슬로바키아 사람이 코노프 운트 존 공장의 기밀을 탐지하려다가 체포되었다는 말이 생각났다. 요한은 그 체코슬로바키아 사람을 생각해 보았다. 그는 지금쯤 판사들 앞에 서서 단추 공장의 비밀을 알려 한 것을 틀림없이 사죄하고 있으리라. 요한은 또 목이 떨어져 달아난 이탈리아 사람을 생각했다. 그는 지금까지 많은 이탈리아 사람을 보아 왔다. 아주 명랑한 사람들이었다. 사형을 당한 그 사나이도 틀림없이 명랑한 성격을 가졌으리라 생각되었다. 검고 예쁘장한 콧수염을 기른 이탈리아 사람의 얼굴이 웃음을 머금은 채 단두대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요한 모리츠는 우연히 덮개가 열린 상자가 오더라도 절대로 그 안을 들여다보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단추를 보았다는 것만으로 목이 달아난다는 것은 참으로 억울한 일이었다. 그는 그 단추들이 모두 군수품일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상자를 가득 실은 자동 수레는 저절로 미끄러져 갔다.

요한은 계속 상자를 실으며 상자 속에 대체 어떤 단추들이 들어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해군용일지 육군용일지 아니면 공군용일지도 모른다. 검은 단추도 금단추도 감색 단추도 있겠지. 요한은 자기가 안고 있는 상자 속엔 금단추가 들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작은 금화 같은, 해군들이 다는 그런 것 말이다.

'이 상자 속엔 틀림없이 해군용 단추가 들어 있을 거다.........'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요한 모리츠는 문득 감독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들은 너희들의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까지 전부 안다. 네 생각을 사진까지 찍어 놓을 수 있단 말이야.'

요한은 더 이상 상자 속에 든 단추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기밀이고 공장의 기밀을 알려 하는 것은 큰 죄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후 요한은 문득 독일군이 이 많은 양의 단추를 만들어 도대체 무엇에 쓰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가 본 독일의 사병이나 장교들의 군복과 외투에는 이미 단추가 달려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만들어 내고 있는 단추들은 모두 새 군복에 달 것임이 분명했다. 요한 모리츠는 꼬리를 물고 자기 앞으로 실려 오는 수없이 많은 상자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많은 단추라면 독일군 전원의 군복에 있는 단추를 바꾸고도 남겠다. 그렇지 않다면야 이 많은 단추를 다 어디에다 쓰겠는가? 전쟁이 끝나면 새 군복을 입혀 행진하는 데 쓰려는 것일까?'

요한 모리츠는 저도 모르게 싱긋이 웃었다. 그는 벌써 그 요란한 행군을 구경하는 군중 속에 끼여 있는 것 같았다. 모든 장교와 사병들, 그리고 장군들이 달고 있는 단추까지도 자기 손을 거쳐 간 것임을 알고 매우 자랑스러워하는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이 상자 속의 단추는 어느 장군의 군복에 달아질 거야. 그리고 장군들의 외투와 군복은 공교롭게도 모두 이 상자 속에 든 단추로 장식될는지도 몰라. 장군 한 사람에게 한 상자 모두가 필요할는지도 모르지.'

엉뚱한 생각에 잠기느라 요한은 잠시 자기 앞으로 밀려오는 상자를 드는 것을 깜박 잊고 있었다. 그러자 콘베이어 끝까지 밀려온 상자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깜짝 놀란 요한이 급히 그걸 끌어올리려고 허리를 굽히는 순간 또 다른 상자가 요한의 등을 때리며 굴러 떨어졌다. 요한은 그것도 잡아 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먼저 떨어진 상자를 팔에 안았을 때 세 번째 상자가 또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팔에 안고 있던 두 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요한은 그 순간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런 공포는 난생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느껴 보지 못한 공포가 그의 온몸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상자는 그대로 두고 밀려오는 상자들을 받아 자동 수레에 싣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굴러 떨어진 상자들을 주워 수레에 실을 수 있도록 잠깐만이라도 기계가 멎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계를 쳐다보았지만, 기계는 규칙적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상자들을 실어 올뿐이었다. 요한은 공포에 찬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벌을 받는 것이 무서웠다. 그러나 야단치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2시가 되자 기계는 멎었다. 벌을 받을까봐 줄곧 불안에 떨고 있던 요한은 얼른 떨어뜨렸던 상자들을 주워 수레 위에 올려놓았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으니 누구도 자기가 범한 실수를 모를 것이다. 그러나 기계가 멎어 버리자 상자 다섯 개를 실은 자동 수레도 레일 위에 오뚝 멈춰 버렸다. 요한은 수레를 밀어 보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직 자동적으로만 움직이는 것이었다. 상자를 안아 저 쪽 창고에까지 나르고 싶었으나 겨우 수레가 드나들 만큼밖에 안 되는 창고의 문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요한은 가슴에다 상자 두 개를 안은 채 우뚝 서 있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던 것이다. 그때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요한은 깜짝 놀라 들었던 상자들을 자동 수레위에 올려놓고 뒤를 돌아보았다. 작은 들창 안에 아침에 자기를 불렀던 깡마른 젊은이가 서 있었다. 그 젊은이는 다정한 웃음을 머금고 아침에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살베 스크라베!"

이 말을 듣자 요한은 상자와 그가 저지른 실수를 잊어버리고 정답게 마주 웃어 보였다.

"내 이름은 그게 아니래도. 나는 야노스 모리츠라고 해. 자네는 아마 나를 다른 사람으로 잘못 알고 있나 봐."

그 젊은이는 입을 크게 벌려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고 다시 한 번 "살베 스크라베!" 하고 외치고 창문에서 사라졌다. 요한은 그 검은 눈의 사나이가 자기 이름을 가르쳐 줘도 그렇게 부르는 걸 보니 그 살베 스크라베라는 사람은 자기와 퍽 닮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러나 요한은 얼마 후에 그 젊은이가 이 공장에서 일하는 외국 동료들을 모두 '살베 스크라베'라고 부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 사람이었는데, 자기 자신을 보고도 살베 스크라베라고 불렀다. 훨씬 후에 알 일이지만 그의 이름은 조세프였다.

 

 

77

요한 모리츠가 단추 공장에서 일한 지도 어느덧 5개월이 흘렀다. 요한은 이제 상자를 놓치는 실수를 하지 않게 되었다. 상자가 자기 앞으로 오기가 무섭게 곧 자동 수레로 옮겨 놓았다. 일일이 눈여겨보지 않아도 실수 없이 실을 수 있었다. 상자에 담겨 있는 단추에 대한 생각도 하지 않고 이 단추를 복장에 달 장군들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면 자기 손에 들려 있는 상자 속의 빛나는 단추를 새 군복에 달고 광장을 행군할 군인들에 관한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상자를 옮겨 놓는 일에만 열중했다.

요한은 이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공상도 하지 않았다. 벙글벙글 웃으면서 단두대 이래로 굴러 떨어졌을 이탈리아 사람의 얼굴도 상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그는 그가 공자에 오던 바로 그날 재판을 받는다던 그 체코슬로바키아 사람의 소식이 궁금했다. 유죄 선고를 받았는지 혹은 사면이 되었는지?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뿐 지금에 와서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어졌다.

그가 기계실로 들어가면 언제나 그 프랑스 인이 들창으로 얼굴을 내밀고 "살베 스크라베!' 하고 외쳤다. 요한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살베 스크라베!'하고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별 의미도 없이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곧장 자기 자리로 가서 콘베이어에 실려 오는 단추 상자를 기다렸다. 한번은 일을 좀 간단하게 해 볼 생각으로 상자 두 개를 한꺼번에 들어서 자동 수레에 옮겨 놓으려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기계가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쇠사슬이 상자 끝에 닿는 순간 요란하게 물어뜯는 듯한 소리가 났던 것이다. 요한은 누가 자기 이빨이라도 뽑아 내는 듯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 그는 상자를 한꺼번에 두 개씩 실을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기계가 그걸 허용하지 않는 이상 기계가 원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설령 상자를 한꺼번에 다섯 개를 실을 수 있다 해도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똑같은 일만을 되풀이하다 보니 마침내 그는 기계에 리듬을 맞추게 되어 버렸고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숙달되었다. 일은 쉽지도 않고 또한 어렵지도 않았다. 전에 힘든 노동을 할 때는 땀도 흘렸고 힘에 겨워 불평도 했었지만 이 일은 땀도 나지 않았고 지치지도 않았다. 일을 하는 것같이 느껴지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노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전에는 힘든 일을 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했었기 때문에 별로 지루한 줄을 몰랐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상자를 들어서 자동 수레로 옮겨 싣는 동안에도 수만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지만 이제 그의 머릿속은 텅 비어 있어서 아무런 영상도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과 공상이 그의 머리를 떠난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몸에 밴 일이긴 해도 그 일은 팔과 허리와 다리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요한은 잘 알고 있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자기 심장과 뇌는 딴 곳에 가 있어야 할 텐데 항상 거기 상자 곁에, 기계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 요한 모리츠는 자기가 물기 빠진 식물처럼 메말라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밤에 자리에 누울 때는 상자를 들어올리려고 허리를 굽히는 것 같았고,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날 때는 상자를 옮겨 놓고 한순간 허리를 펴고 다음 상자가 올 때까지 빈손으로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일단 잠이 들면 꿈도 꾸지 않았다. 결국에는 대지의 빛깔이 사라지고 거무스름한 기계의 빛깔이 서리기 시작했다. 요즈음 요한 모리츠는 자기가 싣는 상자 속에 단추가 들어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간혹 그것이 생각날 때는자주 생각나는 건 아니지만빙긋이 웃었는데, 그것은 마치 가뭄으로 메마른 땅처럼 윤기가 전혀 없는 씁쓸한 웃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요한은 병에 걸렸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수용소의 의무실로 옮겨졌다.

 

 

78

요한 모리츠는 천막으로 된 수용소 의무실의 막사에 누워 있었다. 창문에는 철망이 쳐져 있었다. 그가 이곳에 온 지도 벌써 한 달이 되었다. 그는 폐를 앓고 있었다.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그대로 녹아 버리는 느낌이었지만 요한은 하루속히 단추 공장으로 돌아갈 일만 생각하고 있었다. 종일 병상에 누워 나날을 보낸다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어느 날 주위가 떠들썩했다. '의사들이 회진을 도는 것이겠지.' 하고 요한은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깨끗이 씻은 몸에서만 나는 향긋한 살 냄새가 풍겨 왔다. 오랫동안 맡아 보지 못했지만 낯익은 냄새였다. 요한은 미소를 머금고 눈을 떴다. 군복을 입은 한 여자가 자기 침대 곁에 서 있었다. 금발의 젊은 여자였다. 그녀의 몸에서는 비누 냄새와 신선한 공기 냄새가 났다. 그녀는 험상궂은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면서도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헌병 두 사람과 의무실 의사들이 서 있었다. 그 여자가 자기를 바라보는 동안에 의사 하나가 물었다.

"이 녀석입니까?"

그녀는 요한의 침대 머리맡에 있는 병상 기록을 훑어보고는 의심쩍은 눈초리로 요한을 내려다보았다. 독일인들은 누구나 요한을 이와 같은 의심을 품은 눈초리로 보아 왔다.

"헝가리 사람?"

하고 그녀가 물었다.

"헝가리 사람과 이탈리아 사람은 위험분자예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요한이 덮고 있는 이불자락을 홱 들쳤다. 그리고 요한의 가슴을 보았다. 그러고 나서

"아니에요, 이 사람은 우리가 찾는 놈은 가슴에 털이 잔뜩 났어요."

하고 말했다 그녀는 요한의 침대 곁을 떠나 다른 모든 환자의 얼굴을 살피고, 몇 사람은 이불을 들쳐보기도 했다. 결국 그녀는 찾던 사람을 찾지 못하고 방을 나갔다. 헌병이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갔다. 그 냄새, 단지 물과 비누와 향수 냄새만은 아닌 그 냄새는 그녀가 나간 뒤에도 한동안 방안에 감돌았다. 요한은 스잔나와 율리스카의 몸에서도 이런 냄새가 났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의사가 환자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중의 하나가 어젯밤 독일 여자를 건드렸어. 지금 여기 왔던 여자에게 그 현장을 들킨 거야. 여자는 붙잡혔으나 남자는 도망쳐 버렸어. 갈색 피부에 가슴엔 털이 많이 났다는데, 여자가 끝내 이름을 대지 않고 있어. 하지만 결국에는 체포되고 말걸. 그렇게 되면 5년간 영창 신세지. 불쌍한 녀석!"

그러고 그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더니 소리쳤다.

"저것 봐, 붙잡히고 말았지!"

하고 소리쳤다. 요한은 윗몸을 일으켜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두 손목이 묶인 세르비아 인 한사람이 창문 아래로 지나가고 있었다. 검은머리의 미 남자였다. 그는 두 헌병 사이에 끼여 걸어갔다. 요한은 그 사나이를 알고 있었다. 製絲(제사) 공장에서 일하는 아주 쾌활한 청년이었다. 군복을 입은 그 여자가 그 뒤를 따라갔다.

"꼭 찾아내고 말 거라고 하지 않았어!"

하고 의사는 말했다.

 

 

79

요한은 조세프가 곁에 있을 때만은 공포심을 잊을 수 있었다. 조세프는 그에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하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요즘의 요한은 모든 것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작업실에 있을 때는 상자를 떨어뜨릴까봐 두려웠고 또 레일 위에 너무 늦게 옮겨 놓을까 싶어 두려웠다. 우연히라도 독일 여자를 보게 될 것 같아 무서웠고, 또 어쩌다가 단추에 관한 비밀을 알게 될까봐 겁이 났다. 결국 독일사람 전부가 무서웠다. 독일 사람뿐만 아니라 독일의 땅과 독일의 말, 그리고 호흡하는 공기까지도 독일 것이기 때문에 두려웠다. 요한 모리츠는 루마니아에서도 감금당하고 굶주리고 매를 맞았지만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았었다.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심한 고문을 하던 헝가리 사람들도 그다지 무섭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런대로 그들에게는 인간미가 느껴져 그렇게 무서워하지는 않았었다.

요한은 한 번도 사람들 앞에서 공포에 질려 본 적이 없었다. 인간은 누구나 착하면서도 동시에 심술궂은 면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보다 더 착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보다 덜 착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더 심술궂은 그 차이뿐이지, 모든 인간은 착한 동시에 심술궂은 존재인 것은 사실이다. 루마니아 수용소에 있던 준위만 하더라도 주먹으로 때려 그의 이를 두 개나 부러뜨렸으면서도 나중엔 담배를 권하기도 했다. 벌겋게 달군 쇠로 그의 발바닥을 지지던 헝가리 헌병들도 나중엔 물과 담배를 주었었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한 번도 두들겨 맞은 적이 없다. 여기서는 매일 더운 커피와 빵과 스프를 먹을 수 있다. 하는 일만 해도 루마니아에서의 운하 파는 일, 또는 헝가리의 참호 공사보다 훨씬 쉬웠다. 그래도 요한은 독일에는 배겨 낼 수가 없었다. 터무니없는 망상일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요한은 독일인들이 반드시 자기 목을 베어 버릴 것 같은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 생각들이 아주 어리석은 줄은 알았지만, 언젠가는 자기도 아무런 죄 없이 두 손에 수갑을 차고 끌려갈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여기 사람들은 기계처럼 성질이 고약했다. 어쩌면 기계는 고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독일 사람도 고약한 사람들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한 모리츠는 기계 곁에서는 살 수가 없었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움츠러든다. 모든 기계와 그리고 기계를 닮은 인간들이 무서웠다. 그는 독일인과 기계의 틈바구니에 끼여 진한 고독을 느끼고 있었다. 너무도 외로워서 갑자기 큰 소리라도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요한이 프랑스 사람 조세프를 좋아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살베 스크라베!"

조세프가 요한의 곁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살베 스크라베!"

요한은 빙긋이 웃으며 인사를 했다. 조세프는 상대가 이런 식으로 대꾸해 주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는 모두 노예들이거든. 한순간이라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루에 수천 번이라도 서로 상기시키는 것이 좋아. 우리가 노예라는 의식을 잊는 순간 모든 것은 끝장이야. 우리는 항상 그걸 의식해야 해."

조세프는 자신의 논리를 이렇게 늘어놓았다.

어느 일요일 오후였다. 요한 모리츠와 조세프는 막사의 그늘진 잔디에 드러누워 있었다. 조세프는 요한에게 자기가 사랑하던 여자 얘기를 들려주었다. 요한은 그녀의 이름이 베아트리스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파리에 살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검은 눈의 그녀는 조세프가 포로가 된 이후로 매일 밤 울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너무나 여러 번 그녀 이야기를 들었으므로 요한은 나중에 군중들 틈에서 그녀를 만난다고 해도 그녀를 선뜻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때에는 그녀의 목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음성은 샹송과도 흡사했다. 요한에게는 베아트리스가 자기와 조세프 사이에 끼여 있는 존재같이 느껴졌다. 조세프의 곁에 있으면 언제나 세 사람이 모여 함께 얘기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베아트리스가 그들 두 사람의 대화에 뛰어들지도 않고 대답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스럽게 여겨질 정도였다.

 

 

80

"전원 막사에 집합!"

수용소 소장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하여 흘러나왔다.

"또 몸수색을 할 모양이지?"

요한이 일어서며 말하자, 조세프도 뒤따라 일어나며 투덜거렸다.

"왜 또 야단이야?"

조세프는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이렇듯 좋은 일요일 오후까지 꼼짝 못 하고 막사 안에 틀어박혀 있어야 할 생각을 하니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외국인 노무자들은 여기저기서 몇 사람씩 떼를 지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밖은 햇볕이 따뜻했다. 요한과 조세프는 창문 쪽으로 가다가 마당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내다보았다.

"그 말이 정말이었구나!"

요한이 말했다. 군용 트럭 세 대가 수용소 마당으로 들어와서 그들이 서 있는 창문 밑에서 멈췄다. 최근에 수용소에 여자들이 온다는 소문이 떠돌았었다. 다른 수용소에서는 이미 여자들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외국인 노무자들은 그걸 믿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들을 위해 여자들이 여기에 와 있는 것이다. 세 대의 군용 트럭에는 갈색 머리, 금발 머리, 빨간 머리의 여자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

"저것 봐, 헛소문이 아니었군!"

하고 요한 모리츠가 말했다. 그는 자기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들은 틀림없이 와 있었다. 요한 모리츠는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하고 얇은 옷들을 입고 있었다. 여자들은 창가에 포로들이 겹겹이 몰려 있는 것을 쳐다보고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여자들은 트럭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뛰어내릴 때마다 얇은 치맛자락이 바람에 펄럭여서 허여멀건 허벅지와 거기에 담배종이처럼 얇게 달라붙은 가지각색의 슬립과 팬티가 보였다. 요한의 등 뒤에서는 다른 외국인 노무자들이 괴성을 지르며 웃어댔지만 요한은 웃을 기분이 나지 않았다.

"누가 내리랬어? 아직 트럭에서 내리면 안 돼!"

확성기를 통해 수용소 소장의 명령이 울려 나왔다. 확성기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딱딱하고 위협적이었다. 소장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소장실에 앉아 명령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들은 돌아서서 내릴 때처럼 재빨리 다시 트럭에 올라붙어 섰다. 지시를 받기도 전에 내렸다고 벌을 받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여자들이 트럭으로 다시 올라갈 때 포로들은 다시 한 번 그녀들의 무릎과 슬립과 보드라운 자기각색의 팬티를 보았다. 그 여자들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처음의 그것과는 달리 약간 겁을 먹은 듯했다.

"한 방에 여자 10명씩 배당이다! 모두 배당 받은 막사에서 밤 9시까지 봉사할 것! 각 방 반장은 이 계획의 실시와 진행을 감독하고 그에 맞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 질서 및 규율은 유지에 관한 책임은 모두 반장이 져야 한다!"

확성기는 잠잠해졌다. 트럭에 탄 여자들은 조용했다.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망할 놈의 자식들!"

조세프가 이를 갈며 욕설을 퍼부었다. 요한은 그가 자기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는 줄 알고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그러나 조세프는 요한을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여자들은 막사별로 질서 있게 차에서 내려야 한다."

확성기에서 명령이 내려졌다. 여자들은 그걸 기다리고 있었던 참이다. 트럭에서 뛰어내린 여자들은 다섯 개 반으로 나누어졌다. 그러자 각 막사에서 다섯 명의 반장이 나와 여자들을 자기 막사로 데리고 갔다. 여자들은 앞서 걷고 있는 반장 뒤에서 낄낄거리며 뒤를 따라갔다.

요한은 이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되어 갈 것인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여자들이 포로들과 자러 온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독일인들은 포로들에게 주기적으로 여자를 안겨 주지 않으면 일의 능률이 제대로 오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자들을 안겨 줌으로써 외국인 노무자들이 단추 공장에서, 제사 공장에서, 그리고 주조 공장에서 보다 능률적으로 일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었다. 요한 모리츠는 남자가 왜 여자와 자야만 일을 더 잘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각 방에 배치된 10명의 여자들이 그 많은 남자들을 어떻게 모두 만족시켜 줄 것인지 궁금했다.

막사는 넓고 침대도 많았다. 그러나 남자 수는 많고 여자 수는 너무 적었다. 그래서 포로 한 사람이 여자 하나씩을 갖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아마 여자들이 이 침대에서 저 침대로 옮겨다니겠지!' 요한은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다른 침대로 옮길 때마다 여자들은 얼마나 창피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이런 막사 안에서 여자들을 보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여자들은 지금 문 앞에 와 있는 것이다.

반장이 여자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실행 방법에 대한 지시를 하는 모양이었다. 여자들은 아주 큰 소리로 웃어대고 있었다.

"밖에 나가지 않겠어?"

하고 조세프가 물었다. 요한은 조세프와 같이 방을 나왔다. 다른 막사에서도 더러 사람들이 나왔다. 두 사람은 문턱에서 여자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싸구려 향수와 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밖으로 나오려는 조세프와 요한 모리츠를 쳐다보고 그녀들은 깔깔대며 웃었다. 그녀들을 피해 도망치는 것을 비웃는 것이었다. 한 여자가 요한과 스치면서 그의 얼굴을 쓱 문질렀다. 향내가 나는 축축한 손이었다. 요한은 눈을 내리깔았다.

"살베 스크라베!"

조세프가 여자들 곁을 지나치며 말하자 여자들은 대답 대신 큰 소리로 웃어댔다. 조세프 자신은 웃지 않았다. 그는 침울한 얼굴이었다. 마당으로 나온 그는 풀밭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았다. 요한도 나란히 누워 그 여자들을 생각했다. 조세프도 여자들을 생각하고 있었겠지만 그의 본심을 알 수는 없었다.

"자네 들어가고 싶거든 들어가게."

조세프가 말했다.

"아니, 그럴 생각은 없어."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조세프가 요한 곁에 있으면서 베아트리스의 얘기를 하지 않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저것들은 강제 수용소의 폴란드 여자들이야. 수용소에 들어온 여자들은 반년 동안만 저 노릇을 하면 석방이 되지. 그러나 반 년 동안에 그녀들은 완전히 폐인이 되어서 나가게 돼. 수용소에서 곧장 병원이나 보호소로 실려 가거나 아니면 공동묘지 행이란 말이지. 비참한 종말이지."

"난 그게 저 여자들의 직업인 줄 알았는데."

하고 요한 모리츠가 말했다. 그는 비로소 그 여자들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로들인 줄은 몰랐다.

"직업적인 창녀들이 아냐, ! (조세프는 요한을 늘 장이라고 불렀다.) 저 여자들은 자유를 얻기 위하여 온갖 수모와 고통을 감내하며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인간 노예들이야. 아무 연장도 없이 가냘픈 육체 하나로 자기들을 얽매어 놓은 사슬을 끊으려고 눈물겨운 치욕을 받아들이고 있는 거야. 참으로 용맹스런 일이지. 그런데 가엾게도 쇠사슬을 끊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몸만 스스로 깎을 따름이야. 노예를 묶는 쇠사슬은 항상 인간의 육체보다 더 강한 법이지."

9시가 되자 여자들은 수용소 막사에서 나왔다. 트럭에 올라타는 그 여자들은 올 때와는 달리 웃지 않았다. 웃는 대신 해쓱하게 지친 얼굴을 하고 담배만 피워댔다. 조세프는 떠나는 그 여자들에게 같은 노예의 신세로서 동정 어린 음성으로 "살베 스크라베!" 하고 외쳤다. 그날 밤 조세프는 수용소를 탈출했다.

 

 

81

"장교님들이 발칸 어() 통역을 찾고 계신다. 그러니 그 분들 앞에서는 실례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해. 총사령부 장교님들이야."

요한 모리츠를 사무실로 데리고 가면서 공장 감독관이 말했다. 요한 모리츠는 문 앞에서 한 시간이나 기다린 후에야 들어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방안은 담배 연기와 술 냄새 때문에 숨통이 막힐 지경이었다. 둥근 탁자 위에는 술잔과 빈 병들이 뒹굴고 있었다. 요한이 들어가도 누구 하나 머리를 돌려 쳐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요한은 묵묵히 문을 등지고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연기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는 공장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적어도 공장은 이곳보다도 조용하고 숨이 막힐 지경의 담배 연기는 없는 것이다.

장교들의 바지 옆에 쳐진 붉은 띠가 참으로 근사하게 보였다. 장교들은 모두 일곱 명이었고 한결같이 젊은 사람들이었다. 그중 한 장교가 갑자기 요한 곁으로 다가와서 손을 요한의 머리 위에 올려놓더니 마치 고무풍선을 가지고 놀 듯 이쪽저쪽으로 돌렸다. 그는 오른쪽 옆얼굴을 살펴보고는 또 왼쪽 옆얼굴을 주시했다.

"돌아섯!"

하고 뒤로 세워 놓고는 뒤통수를 살핀 다음 어깨를 두드리기도 하고 턱 아래에 손을 넣어 보기도 했다. 그리고 입을 벌리라고 하고는 잇속까지 들여다보았다. 그 다음엔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다. 요한 모리츠가 작업복을 벗어 벽 쪽의 바닥에 놓는 동안에 장교는 요한의 일거일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얘기하는 데 정신이 팔려 그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여러분, 여러분!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하나의 사실을 증명해 보이겠소."

요한에게 옷을 벗으라고 명령을 내렸던 친위대 대령이 다른 장교들에게 말했다. 모든 사람이 이야기를 멈추고 벌거벗은 채 어쩔 줄을 모르고 서 있는 요한 모리츠의 주위를 빙 둘러쌌다. 통역으로 호출 당해 여기까지 온 사람을 가지고 증명을 해 보이겠다니 요한으로서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요한은 문득 곡마단 같은 데서 하는 마술사들의 증명이 생각났다. 그 증명을 할 때는 객석에서 한 사람을 무대로 올라오게 하고, 마술사가 그 관객의 호주머니에서 산 고양이나 토끼 혹은 새들을 끄집어내 보이는 것이다. 요한이 알고 있는 증명이란 그런 것 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몰랐다.

그런데 지금 대령이 그를 세워 놓고 증명을 하겠다는 것이다. 요한은 군대에 있을 때 곡마단에서 본 적이 있는 그런 증명이려니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퍽 재미있을 거라는 호기심이 생겨 요한은 싱긋이 웃었다. 그 정도의 일이라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마술사에게 불려 나와 그가 시키는대로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요한은 잘 알고 있었다. 단지 깜짝 놀라는 것으로 그칠 뿐일 테니 자기도 대령이 겨드랑이나 주머니에서 토끼나 고양이나 새를 끄집어낼 때 깜짝 놀라는 척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요한은 줄곧 대령을 쳐다보며 빙긋이 웃고 있었다. 요한 모리츠는 마술사를 좋아했다.

'1천년을 연습해도 나는 그들같이 하지는 못할 거야.'

하고 요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대령이 요술을 부릴 줄 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러다가 요한 모리츠는 어머니가 '마술사는 악마의 종'이라고 하던 말을 생각했다. 그 말이 생각나자 약간 겁이 났다. 요한 모리츠는 이제 더 웃지 않았다. 악마는 언제나 무서운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러분, 이 사람은 바로 10분 전에 방에 들어왔을 때 처음 본 사람이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여기에 들어왔는지도 알지 못하오."

"대령님께서 부탁하신 발칸 어 통역을 하려고 온 자입니다."

공장 감독관이 설명했다.

", 내가 자네에게 통역 부탁한 것을 깜박 잊고 있었군. 난 저 사람이 들어오자 그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네."

대령은 이렇게 말하면서 요한 모리츠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는 벙글벙글 웃었다. 요한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대령이 자기 겨드랑이에서 토끼를 끄집어 낼 때를 초조히 기다렸다. 대령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요한 모리츠는 곡마단의 마술사들은 늘 이런 근엄한 표정을 짓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구경꾼들이 허리를 꼬며 웃어도 마술사는 심각한 표정을 하니까. 요한은 폭소가 터져 나올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거기에 맞추어 자기도 웃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음 놓고 웃어 본 지도 정말 오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불과 10분전에 이 사람을 처음으로 보았고, 아직 말 한마디 주고받은 일이 없지만 나는 과학적인 근거를 출발점으로 해서 이 사람의 생애와 3세기에 걸친 가문의 역사를 아주 자세히 여러분에게 말해 줄 수 있네."

전에 본 곡마단의 마술에도 이 같은 순서가 있었다. 마술사가 객석에서 누군가를 불러내다가 그 사람의 나이와 이름, 또 결혼 여부 등등 개인적인 내력을 알아맞히기도 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요한 모리츠는 그런 종류의 마술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좋아하는 건 사람의 몸에서 고양이나 토끼 등을 꺼내는 마술이었다. 그는 대령이 그런 마술을 할 줄 모르는 것이 유감스러웠다. 자기 호주머니 속에서 고양이가 튀어나오는 걸 정말 보고 싶었던 것이다. 예전에는 마술사 앞에 바짝 다가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마술사는 그 아닌 딴사람을 골라내곤 했었다.

"인종학에 대한 연구는 우리 사회주의 국가 체제하에서 굉장한 발전을 했네. 그 분야에 관한 한 우리 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 적어도 100년은 더 앞섰을 것이네. 이 벌거벗은 사나이를 보고 나는 그의 조상이 어떤 사람이었고, 또 그 조상들이 어떠한 혼인을 했는지, 또 그 가족이 어떤 풍습을 가졌는지를 여러분에게 말해 줄 수 있어. 나중에 본인에게 직접 물어 보면 여러분은 내 말을 확인할 수 있을 걸세."

뮐러란 이름의 그 대령이 말했다.

"믿어지지 않는데!"

장교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요한 모리츠의 주위를 좁게 둘러쌌다.

"두개공의 구조와 앞이마, , 얼굴의 골격, 그리고 특히 흉곽의 구조와 쇄골의 위치로 미루어 보아, 이 사나이는 오늘날 라인 강 연안, 룩셈부르크, 트란실바니아, 그리고 오스트리아에 소수로 잔재해 있는 게르만족에 속한다고 단언할 수 있어. 또 중국과 미국에도 열여덟 가족이 존속해 있다고 하나 그 사실은 전쟁발발 직전에 발견되었기 때문에 아직 확실한 통계는 낼 수 없네. '영웅족'이라고 불리고 있는 이들 게르만족에 관해서는 후에 특집으로 간행될 예정인 우리들의 통계에서 처음으로 정확하고도 완전한 자료를 우리가 제공할 걸세. 이 일족은 800명 정도가 이 지구상에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들의 조상은 16세기와 17세기 사이에 독일 남서부에서 외국으로 집단적으로 이동해 갔어. 이 종족은 가장 순수한 게르만족으로서, 그 동안 외국에서 숱한 고난과 압박을 받고 살아오면서도 오늘날까지 자기들의 순수한 혈통을 지켜 온 거야. 이 종족들은 개인 보존의 본능보다 훨씬 강한 종족 보존의 본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 지금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이 청년이 소속된 영웅족은 우리 민족이 가진 종족본존의 본능이 얼마나 강인한가를 실증해 주는 유일한 표본이네. 이 청년의 조상들의 주위에는 훨씬 더 매력적인 다른 종족의 여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3, 4백 년 동안 오직 자기 종족에 속하는 여성만을 아내로 맞아들인 이유를 무엇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그것은 민족의 자체 보존 본능, 다시 말하면 자기 가족의 구성원으로 하여금 타민족과의 혼혈이라는 치명적인 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한 피의 절규가 있었기 때문이네. 이 가족의 계통을 들춰보면 다른 민족의 여성과 결혼한 예가 단 한 번도 없었네. 그것은 4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이 청년이 역시 그의 조상과 조금도 다름없이 닮고 있다는 사실이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거든. 금은 명주 같은 이 머리칼을 보게. 이것이 바로 영웅족의 머리카락이네. 4세기 전의 그 머리칼과 꼭 같은 것이네. 이것은 다른 것과 혼동될 수 없는 것으로, 전문가들이 보면 금방 구별되는 것일세. 이것을 게르만 계통의 주요 민족의 머리칼과 비교하면 약간 더 부드럽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 모근은 같은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네. 이 청년의 코, 이마, , 턱은 4세기 전에 그려진 판화의 인물들과 조금도 다름없네. 그 동안에 아무 변화가 없었다는 걸 보여 주는 것일세."

장교들은 요한의 머리와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감탄하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요한은 모든 시선이 자기에게 집중됨을 느꼈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에게 자기를 자세히 선을 보인 건 난생처음이었다. 그는 영웅이 된 것이다. 그러나 장교들에게 실망을 안겨 줄 일이 두려웠다. 그는 그들의 찬양을 받을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그런 찬양은 보석과 떡갈나무 잎으로 장식된 철십자장(鐵十字章)을 받은 사람에게나 보낸다는 걸 모리츠는 잘 알고 있었다. 뮐러 대령은 마치 트로아 이메라르트 교회의 성녀(聖女) 파라쉬바하 미라크르즈의 유물을 만지는 것과 같은 감탄과 존경이 담뿍 어린 표정으로 요한 모리츠의 어깨를 만졌다. 요한 모리츠는 발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부 전선에서 싸운 적도 없고, 또 아무런 무훈도 세우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 두 눈을 내리 깔았다.

"우리가 영웅족이라고 부르는 이 종족은 가장 위대한 민족적 영웅주의의 전형적인 표본이네. 오늘은 내게 운이 참 좋은 날이야. 이런 전형적인 표본을 발견했으니 말이야. 이것은 여담이지만, 내 조상 가운데에도 이 영웅족의 처녀와 결혼 한 인물이 한 사람 있었네. 불행히도 신혼 3개월 만에 전사해 버려 후손을 남긴지 못하고 말았지만. 아무튼 나는 이 청년의 사진을 찍어 체위표와 역사적 참고 자료를 첨부해서 현재 내가 준비 중에 있는 논문에 삽입할 생각이야. 로젠베르크 박사의 지도 아래 벌써 10년 전부터 연구해 왔는데 이제 이 사람을 발견함으로써 내 연구는 마무리를 짓게 되었어."

"축하드립니다."

장교들은 부동의 자세로 거수경례를 하며 말했다. 감격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뮐러 대령은 오른팔을 들어 답례를 하고 일일이 장교들과 악수를 했다. 요한은 부동의 자세로 서서 대령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네 고향은 네덜란드인가, 룩셈부르크인가? 아니면 트란실바니아인가?"

대령이 물었다.

"트란실바니아입니다."

요한 모리츠가 대답했다. 장교들은 감탄하여 환성을 질렀다. 대령의 얼굴은 기쁨으로 희색이 만면했다.

"이 청년의 정확한 원적지를 맞혀 보겠네."

의기양양해진 뮐러 대령이 말했다. 그는 요한에게 물었다.

"자네는 티미시와라 아니면 브라쇼브, 그렇지 않으면 제클러스 지방 출신이지?"

"제클러스 지방입니다."

요한이 대답했다.

"그럼 그렇지!"

뮐러 대령은 두 손은 비비며 말을 계속했다.

"틀릴 리가 없거든. 이 청년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박물관의 영웅적 초상화의 인물이 우리들 속으로 내려오는 것 같았어. 영웅족의 모습은 내 인상에 깊이 새겨져 있어서 언제 어디서 만나더라도 첫눈에 알아볼 수가 있지. 여러분은 나중에 내 저서에서 보게 될 거네. 이 영웅족의 얼굴을 원색판으로 확대해서 출판할 작정이니까. 거듭 말하거니와 이 청년은 영웅족의 전형적인 인물이야. 내 이론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바로 그 인물이야."

대령은 감독에게 요한의 신상 카드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어!"

대령은 요한의 신상 카드를 읽어보더니 화를 벌컥 냈다.

"영웅족에는 야노스라는 이따위 이름은 없어. 이 이름은 영웅족에 대한 모독이야!"

대령은 요한을 돌아다보았다.

"자네 아버지가 야노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나?"

대령이 물었다.

"아닙니다, 대령님. 제 이름은 야노스가 아닙니다."

요한 모리츠가 말했다. 자기 이름은 이온이라고 일러주고 싶었다.

"물론 아니겠지. 영웅족의 가정에서 자기 자식들에게 독일 족보에도 없는 이름을 붙여 줄 리가 만무해. 이런 일은 과거 100년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일이야. 영웅족의 이름이 야노스라니 그따위 말이 어디 있어!"

대령은 다시 요한을 쳐다보았다. 이번엔 만족스런 표정이었다. 요한의 이름이 야노스가 아니라는 말이 반가웠던 것이다.

"누가 야노스란 이름을 붙였지?"

"모르겠습니다. 2년 전에 독일로 왔을 때 제 서류에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야노스가 아니야. 영웅족들은 이 따위의 수모를 얼마나 받아왔는지 몰라. 그들이 살고 있는 나라의 이름을 따라 영웅족의 이름은 자주 바뀌어졌는데 결코 그들의 혈통만은 바꿀 수 없었어. 영웅족의 피가 그야말로 수정처럼 순수하게 보전되어 왔어."

대령은 공장 감독관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이 청년을 오늘부터 국립 민족 문제 연구소의 관할로 배치하겠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표본이니까."

"그럼 공장에서 일을 시키지 않습니까?"

"물론! 그에게 일을 시켜선 안 돼. 앞으로 이 청년에 대해서는 특별 지시를 내리겠다."

대령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대령은 요한 모리츠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과학은 참으로 눈부신 진보를 했다. 그러나 궁극적인 완성은 아직 멀었다. 이 엄선된 표본, 극히 흥미 있는 한 인종의 대표적 인물은 귀중한 전형을 보호하는 인류원(人類原)에 보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인류원은 아직 만들어져 있지 않다. 유럽에는 갖가지 종류의 조류와 짐승을 보존하는 동물원은 많이 있다. 그러나 아직 여러 가지 편견이 '인류원' 창설을 방해하고 있다. 이것은 막대한 과학의 손실이다. 이 분야에 있어선 미국이 우리보다 앞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멸종되어 가는 인디언을 보호하는 법을 만들어 일정한 장소(인디언 보호 구역)에 그들을 보호하고 있다. 그러나 장차 유럽에도 그것이 창설될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전쟁에 이겨야 한다. 다음 회합에서 나는 인류원 창설을 제의해 봐야겠다. 그렇게 해야만 희귀한 인종의 표본을 우리 과학자들이 자유로이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청년이야말로 그 인류원에 들어갈 표본 제 1호가되겠지. 나는 기꺼이 그 기증자가 될 것이니까.'

뮐러 대령은 요한을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는 요한이 인류원, 즉 독일 민족관에서 아내와 자식을 거느리고 사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반드시 그런 날이 오겠지.'

여기까지 생각한 대령은 다른 장교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현재로서는 이 청년에게 그 혈통에 적합한 직책을 알선해 주지 않으면 안 되오. 제일 알맞은 것은 군인이 되는 일일 게요. 나는 영웅족을 잘 알고 있으니까. 이 족속은 게르만 족 중에서도 가장 호전적인 인종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군인이 되도록 해 줘야겠소."

장교들 역시 찬성했다. 대령은 싱글벙글하며 당번병에게 자기 가방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그는 정보국이라는 도장이 찍힌 종이 위에 요한 모리츠를 돌격대 사병으로 추천한다고 쓰고, 병적 등록을 위한 추천장을 썼다. 그리고 그 종이를 공장 감독관에게 내밀며 명령했다.

"필요한 모든 수속 절차를 밟게. 지금 즉시 말이야."

뮐러 대령은 웃음을 머금고 요한 모리츠를 바라보았다.

"내달 중으로 자네가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필요하네. 자네가 속해 있는 영웅족에 관한 내 연구에 매우 귀중한 것이야. 제벨 박사에게도 한 장 보내야겠어. 그렇게 되면 머지않아 자네는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자네 얼굴을 보게 될 걸세."

 

 

82

"군복무에는 부적당해!"

징병계의 군의관 대위는 요한 모리츠의 신체검사를 마치고 이렇게 말했다. 그의 오른쪽 폐에는 여러 개의 반점이 나타나 있었다.

"군인들은 튼튼한 폐를 가져야 하거든."

요한 모리츠가 뮐러 대령과 만난 지가 벌써 3주일이 지났다. 요한 모리츠는 처음엔 군인이 되면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물이 새지 않는 구두를 신을 수 있고, 따뜻한 옷을 입을 수 있을뿐더러 담배도 피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수용소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군인이 될 자격이 없다는 말을 듣고 보니 한편으로 잘 되었다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다.

"총사령부와 국립 민족 문제 연구소에 계신 뮐러 대령이 추천했구먼!"

그러자 요한의 서류를 뒤적이고 있던 다른 군의관이 말했다.

"그러면 떨어뜨릴 수 없지."

세 사람의 군의관이 요한 모리츠의 문제를 논의했다.

"자네, 그럼 사무 같은 건 볼 수 있겠나? 민간인으로서의 직업은 뭐였지?"

하고 군의관 대위가 물었다.

"농사꾼이었습니다."

요한이 대답했다. 그들은 의논을 해서 결정지을 때까지 밖에서 결과를 기다리라고 말했다. 조금 후에 다시 불리어 들어가니, 군무에 적당하다고 인정하니 영장을 가지고 부대로 가 보라고 말했다.

"자네는 보초 임무를 맡게 될 걸세. 자넨 사무 계통을 볼 수 없으니 경비대에 배치될 거야."

군의관 대위가 말했다.

 

 

83

징계자 수용소 소장의 점심시간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에 사병 요한 모리츠는 자기가 지금 보초 근무 중이라는 것도 깜박 잊고 밥그릇을 가지고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다 곧 깨닫고 창피한 생각이 들어 얼굴이 빨개졌다.

'난 왜 이렇게도 바보일까!'

그는 총대를 양손에 꽉 거머쥐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제 포로가 아니라 그들을 감시하는 보초라는 걸 잊어먹었으니 말이야.'

이 경비대에 들어온 지 사흘이 지났지만 그는 호루라기 소리가 울릴 때마다 이와 같은 착각을 되풀이했다. 자신이 군인이라는 생각이 아직도 머리에 박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수용소를 둘러싸고 있는 철조망이라든가 포로들이 줄지어 서 있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자기도 꼭 그 속에 섞여 있는 포로처럼 생각되었다. 하도 여러 해 동안을 수용소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는 종신 포로라는 생각이 머리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포로 신분을 면했다는 생각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다른 사병이 교대하러 와도 요한은 그 사병이 자기를 잡으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겁부터 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프 솥 앞에 줄지어 늘어선 포로들을 보면서, 요한은 자기가 보초를 서고 있다는 걸 잊고 자기 차례가 왜 이렇게 늦는가 하고 생각했다. 자기도 그 포로들 틈에 끼여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요한은 첫날부터 포로들 속에 아는 사람이 없나 하고 눈으로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아는 사람이라곤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독일에서 만도 열두 군데나 되는 수용소를 옮겨 다녔으니 이 스트라플라제의 포로들 가운데 한두 명쯤은 아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포로들과 얘기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요한은 멀리서라도 아는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어느 날 요한 모리츠는 아는 얼굴을 하나 발견했다. 그는 자기가 군인으로서 보초라는 걸 잊어버리고 무심코 소리쳤다.

"조세프, 조세프!"

식기를 들고 마당에 모여 있던 포로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보았다. 조세프도 그를 쳐다보았으나 그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요한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요한은 또 한 번 불렀다. 그러자 조세프는 밥그릇을 든 채 긴장함 몸짓으로 그를 주시했다. 그래도 역시 못 알아보았는지 다시 몸을 돌렸다.

"이봐, 조세프! 나 야노스 모리츠야!"

하고 요한은 외쳤다.

"야아! 살베 스크라베!"

그제야 요한을 알아본 조세프는 식기를 바닥에 놓고 철조망 쪽으로 달려왔다.

"자네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지? !"

조세프가 물었다. 요한 모리츠는 어떻게 해서 자기가 군인이 되었는가를 대충 얘기해 주었다. 조세프는 그전보다 독일 말을 잘 알아들었지만 두 사람의 거리가 너무나 떨어져 있어서 그들은 상대방의 말소리를 간신히 들을 수 있었다.

"자네는 어떻게 되어서 이곳으로 왔지?"

"탈출한 지 닷새 만에 붙잡혔어."

조세프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베아트리스에게 편지 한 장 좀 전해 줄 수 없겠나? 이곳에 와선 편지를 보낼 수가 없어서 벌써 넉 달 동안이나 소식이 끊겼네."

하고 말했다. 요한은 주소를 묻자 조세프는 종이쪽지에다 주소를 적었다. 그가 쭈그리고 앉아 주소를 적는 동안 요한은 어젯밤에 부대에서 배급받은 담뱃갑을 호주머니에서 꺼내 철조망 너머 조세프의 발밑에다 던져 주었다.

"내일 또 담배와 빵을 갖다 줄게........ 편지는 오늘 저녁에 꼭 부치겠네."

조세프는 허리를 굽혀 담뱃갑을 주운 다음 베아트리스의 주소가 적힌 종이를 작은 돌멩이에 싸서 요한에게 던졌다. 그런데 그 종이는 철조망과 철조망 사이에 떨어졌다. 조세프는 다시 주소를 적으려 했다.

"그만둬 내가 가서 집어올게. 나는 철조망 가까이 가더라도 총살당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요한이 초소 계단을 내려서는 순간 저 멀리서 교대할 보초가 자기 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요한은 재빨리 계단을 올라가 조세프를 향해 소리쳤다.

"교대할 보초가 와서 지금은 주울 수가 없어!

내일 아침 9시에 내가 또 근무하니 그때 종이를 주워 오지. 그럼 잘 있게!"

"살베 스크라베!"

조세프가 말했다. 조세프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막사 쪽으로 사라져 갔다. 이전과 똑같은 회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옷은 그전보다 약간 더 해지고 얼굴도 유난히 수척해 보였다. 이곳 수용소의 급식이 말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보초 교대를 하면서 요한 모리츠는 멀어져 가는 조세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일은 빵 한 덩어리를 온전히 갖다 줘야지.' 하고 생각했다.

 

 

84

그날 밤 요한 모리츠는 심한 열이 나서 그다음 날 날이 새기가 바쁘게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고열에 시달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서도 빵과 담배를 얻기 위해 철조망 근처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조세프를 생각했다. 그리고 베아트리스의 주소가 적힌 종잇조각도 생각했다. 그는 조세프가 헛되이 자기를 기다리다 실망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언짢았다.

'가엾은 조세프! 빵과 담배를 얻으려고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을 텐데'

요한 모리츠는 며칠만 지나면 몸이 완쾌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달랬다. 그러면 조세프에게 매일같이 빵과 담배를 갖다 줄 수 있을 것이고 베아트리스의 편지도 전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요한 모리츠의 병은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양쪽 폐가 모두 고장이 나서 두 달 동안이나 육군 병원에 누워 있어야 했다. 21, 군의관이 그에게 말했다.

"이번 주일 안으로 퇴원할 수 있겠네. 퇴원하면 한 달 동안의 요양을 위한 휴가를 받을 수 있어."

요한 모리츠는 휴가를 얻게 되면 조세프를 만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맨 먼저 떠올랐다. 조세프는 아마도 매일같이 요한이 베아트리스의 주소를 가지고 가서 자기 대신 편지를 보내 주기를 기다릴 것이고, 그가 약속한 빵과 담배도 가져다주기를 기다릴 것이었다. 요한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조세프를 두고 휴가를 갈 수가 없었다. 그는 요양 휴가를 단념하고 곧 중대로 돌아갈 결심을 했다.

"자넨 아직 몸을 돌봐야 하네. 잘 먹고 안정할 필요가 있어 무리하면 생명을 잃게 돼. 어디 가서 휴가를 보낼 작정인가?"

하고 군의관이 물었다. 이렇게 되자 요한은 휴가를 가지 않겠다는 말을 할 용기가 없었다. 그저 얼굴을 붉히며 고개만 떨굴 뿐이었다.

"자네 사정도 이해하네. 휴가를 얻어도 갈 곳이 없어서 그렇지? 회복기 환자들이 가는 결핵 요양원으로 자넬 보낼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자네에게 알맞은 곳은 그런 곳이 아닐세. 지금의 자네에게는 좀 더 따뜻한 가정적인 분위기, 인간적인 훈훈한 정이 필요하거든......."

요한 모리츠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군의관이 자기 마음을 너무나 잘 알아맞혔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를 이렇게 깊이 이해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그가 바라는 것은 돈도 아니고 좋은 음식도 아니었다. 가족적인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아늑한 장소가 그리웠다.

"자네에게는 자네를 간호해 주고 보살펴 줄 여성이 필요하단 말일세. 환자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가져야 해. 그렇지 않으면 회복이 힘들어. 요양원에 가면 물론 여자가 많지. 그러나 그 여자들은 그저 성적인 만족만을 제공해 줄 뿐이야.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지금 자네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물질이 아니라 애정이야. 자극이 필요한 것은 아니란 말일세."

의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자신이 내린 진단에 확신을 갖고 있었고 자기의 환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직업의식은 이 환자의 회복에는 애정과 가정적인 분위기, 자신감과 한 여성의 헌신적인 봉사가 가장 좋은 처방이라고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이 환자에게 이와 같은 약을 줄 수는 없었다. 환자에게 꼭 필요하지만 의사로서는 줄 수 없는 약이었다. 군의관의 눈은 진료 카드를 손에 들고 자기 곁에 서 있는 간호원에게 쏠리었다.

"힐다 양! 어머니와 함께 이 근처에서 산다지?"

의사가 물었다.

", 병원에서 아주 가까워요."

그녀가 대답했다. 힐다는 엄숙하게, 상관의 명령을 기다리는 사병들이 갖는 그러한 신뢰감에 찬 시선으로 의사를 바라보았다. 군의관은 싱긋 웃었다. 자기가 필요로 하는 대상을 발견했다는 눈치였다.

"힐다 양에게 이 환자를 맡길 테니 남편처럼 돌봐 줘야겠어. 한 달 후에는 완전히 회복시켜서 데리고 와야 해. 원대 복귀하기 전에 한 번 더 진찰해 봐야겠어. 지금 이 사람에게는 애인도 되고 누나도 되고 어머니도 될 수 있는 그런 여자가 필요하거든!"

"알겠습니다, 선생님."

장밋빛 두 뺨에 포동포동하게 살이 찐 힐다의 나이는 스물이었다. 키는 좀 작은 편이었으나 그런대로 밉상은 아니었다. 군의관은 만족한 표정으로 그녀를 살펴보았다. 요한 모리츠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약을 그녀는 지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의사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금발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갈색 머리카락은 환자에게 덜 좋거든. 금발은 곁에서 보기만 해도 환자의 마음이 가라앉는데.........'

"힐다 양에게도 15일간의 휴가를 주겠어. 그 동안에 성심껏 보살펴 주도록 해. 음식은 매일 병원 식당으로 가지러 와도 좋지만 집에서 손수 만든 음식이 더 좋을 거야. 이 환자에게는 공동 취사장에서 만든 음식보다 정성 들여 만든 음식이 더 필요하니까."

"알았습니다, 선생님."

힐다는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에 은근히 자부심을 느꼈다.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군의관이 자기에게 그런 명령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료들이 모두 부러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에 빈방이 있나?"

", 있어요."

힐다는 이 대답을 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힐다는 이 사람에게 반한 모양이지?"

군의관은 혼자 중얼거리더니 그녀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다시 명령했다.

"이 사람의 퇴원증과 당신들 두 사람의 휴가증, 그리고 30일간의 두 사람의 식량권, A급 특별 배급권을 타도록 준비해."

", 알겠습니다."

힐다는 문을 열고 달려 나갔다. 의사는 문을 나가다 말고 요한 모리츠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빨리 회복되어서 돌아와 주게."

 

 

85

요한 모리츠는 병원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멀리 마당 끝에 철조망이 보였다. 그는 철조망을 바라보며 한동안 창가에 서 있었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나면서 별안간 차가운 손이 그의 눈을 가렸다. 간호원 힐다였다. 요한은 그녀를 깜박 잊고 있었다.

"군복을 입고 회계과에 가서 봉급을 받아 오세요. 퇴원증과 휴가증은 제가 가지고 있어요. 제 휴가증도 받았답니다."

힐다의 말은 빨랐다. 그녀는 요한이 군복 입는 걸 거들어 주었다. 스웨터 밑으로 손을 밀어 넣어 규겨진 옷을 바로잡아 주었다. 힐다의 손길이 가슴께를 더듬자 요한은 오래 전부터 그렇게 해 온 것처럼 친근한 체온을 느꼈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자기의 자식이나 자기의 남편인 것처럼 요한에게 옷을 입혀 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힐다는 그에게 냉정한 태도로 대해 왔었다. 약을 줄때나 열을 잴 때나 사무적인 일만 치르고는 곧 나가 버리곤 했었다.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고분고분하고 다정스러워진 것이다. 스잔나와 율리스카보다도 더 다정스럽게 느껴졌다. 요한은 힐다가 자기에게 갑자기 반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의사의 명령 한마디로 갑자기 요한을 열렬하게 사랑하게 되다니........ 그의 스웨터를 바로잡아 주고 웃옷의 단추를 채워 주는 그녀의 손길은 사랑에 빠진 여인의 손길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의사가 요구하는 것 이상의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선생님이 병원 침대를 하나 가져가도 좋다고 하셨어요. 외과용 침대인데 무척 커요. 양털로 된 이불도 두 채 주신대요. 제 침대는 둘이서 자기엔 너무 좁아요."

힐다는 벌써 침대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당신을 너무 흥분시키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옳은 말씀이세요. 당신은 중병을 치르고 나셨으니까요. 그러니 1주일간 식이 요법을 한 후 영양가 있는 음식을 섭취하고 안정을 하면 모든 게 금방 달라지겠죠."

"뭐가 달라진단 말이오?"

요한이 묻자 그녀는 재빨리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하며

"차차 알게 되겠죠."

하고 말했다. 요한 모리츠는 봉급을 탔지만 별로 즐겁지가 않았다. 모든 것이 군의관의 명령에 의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명령은 참호를 파는 공사나, 단추 공장에서 일을 하거나 수용소의 보초를 서라는 명령과는 그 성질이 달랐다. 한 달 동안 귀여운 처녀와 함께 살면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을 회복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니 명령치고는 근사한 명령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명령은 명령이다. 그것이 명령인 이상 요한에겐 어떤 명령도 반갑지 않았다.

 

 

86

"우리가 결혼을 하면 저는 2주일간의 휴가를 더 얻을 수 있어요."

요한 모리츠와 함께 1주일을 보낸 힐다가 이렇게 말했다. 요한은 다정한 눈으로 힐다를 쳐다보았다.

"지난밤에 결혼하자고 하셨잖아요."

", 그건 진심으로 한 말이야."

요한은 고개를 끄덕여 시인했다. 지난밤 힐다와 그녀의 어머니와 같이 포도주를 다섯 병이나 마신 기억이 떠올랐다.

"더 이상 꾸물거리고 있을 필요가 없잖아요? 빨리 서두르면 전 추가 휴가를 받을 수 있어요. 당신도 추가 휴가를 받게 될 거예요. 그럼 휴가가 연장될 수 있어요. 그리고 아파트와 가구와 2천 마르크의 장려금도 받게 돼요. 당신은 근무가 있는 날만 부대에서 주무시고 비번일 때는 집에서 잘 수 있어요. 어머니도 우리의 결혼에 찬성하셨어요."

요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힐다는 그가 그 수속을 밟기 위해 휴가를 낭비하게 되는 것이 싫어서 그러는 줄 알았다.

"당신은 가만히 계셔도 돼요. 모든 수속은 제가 밟겠어요. 호적계와 주택계, 배급소, 노동청, 경찰서 등등 가야 할 곳은 모두 제가 다니겠어요. 당신은 피로하면 안 되니까요."

요한 모리츠는 힐다의 말에 동의했다. 그녀의 말은 모두 사리에 맞았다. 두 사람이 결혼하면 그 결과는 이득뿐이었다. 마침내 두 사람은 결혼했다. 덕분에 방 셋에 욕실과 부엌이 딸린 아파트가 배당되었다. 2천 마르크도 받았다. 침구와 속옷, 가구, 부엌, 세간들, 나무, 석탄, 포도주, 결혼식용 고기와 라디오 등 여러 가지 물건들을 배급받았다.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억울할 뻔했지 뭐예요. 이렇게 많이 생기는데 말예요."

힐다는 부대로 나가는 요한의 옷시중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부대에서 자는 것보단 집에서 주무시는 게 훨씬 더 편하시죠? 그렇죠?"

"그야 물론이지."

"제가 만든 음식이 부대에서 먹는 것보다 맛있지 않아요?"

힐다는 말할 수 없이 행복한 표정이었다.

"두 달 후엔 임신 신고를 할 거예요. 그러면 또 휴가를 얻을 수 있어요. 당신이 점심도 집에서 먹을 수 있도록 휴가를 받겠어요. 그 뿐인줄 아세요? 식량 배급도 더 많이 타게 돼요. 임신한 여자는 3인분의 식량을 받을 권리가 있거든요. 그렇게 되면 당신의 모습을 더 잘 대접할게요. 살이 찐 당신의 모습을 보고 싶어요."

요한이 웃으면서

"힐다, 당신은 참 착한 여자야!"

하고 말했다.

 

 

87

판타나의 헌병 파견소는 상부로부터 두 장의 게시용 전단을 받았다. 소장 니콜라이 도브레스코는 그 서류를 읽었다.

 

유대인 모리츠 이온. 별칭은 요한 또는 야곱, 또는 양켈,

위 사람은 전국 경찰서에서 지명 수배를 받고 있는 인물임.

이 자는 노동 수용소를 탈출했음.

이자를 숨겨 준다거나 그 소재를 알면서도 이를 알리지 않는 자는 범인 은닉죄로 징역에 처함.

 

전단 오른쪽 귀퉁이에는 요한의 정면과 측면 사진이 붙어 있었다. 소장은 그걸 읽고 나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니, 그렇다면 놈은 정말 유대인이었구나!"

그는 사병을 불렀다.

"총을 들고 가서 이 유대인의 아비와 어미를 당장 잡아와! 그리고 이걸 바깥 게시판에 잘 붙여 놔. 바람이 불어도 날아가지 않도록 말이야."

판타나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소장은 창문 너머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때 마침 알렉산드르 코르가 사제가 지나가고 있었다. 어깨를 움츠리고 옆구리에 가방을 끼고 있었다. 잠시 후에 소장의 명령으로 달려나갔던 부하가 돌아왔다.

"마누라만 데리고 왔습니다. 영감은 누워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소장은 화를 벌컥 냈다. 그는 두 사람을 한꺼번에 신문하려고 했던 것이다.

"명령이라면 강제로라도 끌고 오겠습니다만 그는 일어설 수도 없습니다. 이불을 들쳐보았더니 전신이 마치 가죽 부대처럼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소장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요한 모리츠의 아버지를 신문하는 건 단념하기로 했다. 그는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노파를 들여보내라고 사병에게 명령했다. 아리스티샤는 화가 치밀어 푸르뎅뎅해진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섰다.

"도대체 무슨 일로 큰 죄인이나 다루듯이 총 자루를 둘러멘 헌병을 시켜 선량한 나를 끌고 오는 거야? 도둑놈과 죄인이 그렇게 모자라더냐? 그렇지 않으면 내가 무슨 죽을죄라도 저질렀단 말이냐? 어서 말해봐!"

아리스티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헌병이 집안에 들어와 같이 가자고 했을 때, 그녀는 헌병대 소장의 두 눈알을 빼놓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신에게 죄가 있는 게 아니라 당신 아들이 전국에 수배된 죄인이라서 그런거요."

아리스티샤는 소장이 내미는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자기 아들의 사진을 보자 노파는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아이고 가엾어라! 어쩌면 이렇게도 말랐지. 불쌍한 자식!"

요한의 깡마른 모습을 보자 노파는 요한이 틀림없이 고생을 무척 많이 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이 노파는 아들에 관한 일 외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읽어보시오!"

헌병이 명령조로 말했다.

"읽어보면 뭘 해?"

노부인은 눈물을 닦았다.

"이 사진만 봐도 내 아들이 굶주리고, 이한테 물어뜯기고, 매를 맞아 가면서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뻔한데. 그런데 또 뭘 읽어보라는 거야? 난 이것만 봐도 충분해! 더 알고 싶지도 않아."

그러자 소장은 큰 소리로 그 전단을 읽기 시작했다. 아리스티샤는 첫 구절을 듣고 곧 소장의 말을 가로막았다.

"다시 읽어 봐. 아마 내가 잘못 들었겠지. 당신은 유대인 모리츠 이온이라고 했는데, 만일 정말 그렇다면 이건 내 아들이 아닐 거야! 내게는 유대인 아들이 없으니까!"

소장은 다시 게시용 전단을 내밀었다. 아리스티샤는 아들의 몹시 여윈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또 눈물을 쏟았다.

"어때? 틀림없이 당신 아들이지?"

소장이 물었다.

"아이고 가엾어라! 내 자식을 잡아넣은 그 죄 많은 놈들을 하느님은 결코 용서하지 않을 거다!"

아리스티샤는 대꾸했다.

"아들이 틀림없다면 무엇 때문에 유대인이 아니라고 고집하는 거야? 쓸데없이 시간만 끌지 말고 내가 읽는 걸 들어 두는 게 당신에게 유리할 거야. 떠들어 봤자 아무 소용도 없으니까. 할멈의 말은 단순히 개인 의사에 불과하지만, 이 서류는 당국이 보낸 문서이므로 감히 거역 못 할 신성한 것이야. 여기에 당신 아들이 유대인이라고 씌어 있으니 그는 유대인이야."

소장이 말했다.

"한번만 더 내 아들이 유대인이라고 말해 봐. 눈깔을 후벼 놓을 테다! 불쌍한 자식! 집을 나갈 때는 참나무처럼 튼튼하고 자랑스러워 보였는데 이 꼴이 되다니........ 뼈와 가죽만 남았구나!"

"당국을 모욕하면 큰코다칠 줄 알아! 끝내 말을 듣지 않으면 정부 관리를 모욕한 죄로 고소할 테야!"

소장이 으름장을 놓았다.

"이보라고. 이온을 내 남편하고 만들었지 경찰 당국하고 만든 건 아냐! 그 자식을 뱃속에서 키운 사람도 나고 젖을 먹인 것도 바로 나지 당국이 아니란 말이야. 그런 내가 그 자식이 유대인인지 아닌지를 모른다는 게 말이나 돼?"

"아까도 말했지만 개인의 주장보다는 당국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어. 내무 장관이 발행한 문서에 그렇게 되어 있단 말이오."

"내무 장관인지 뭔지 그런 말을 할 배짱이 있거든 여기 내 앞에 와서 하라고 해. 내 뱃속에 있던 것을 나보다 더 잘 안다고 떠들어만 봐라. 그 놈의 낯짝에다 침을 뱉어 줄 테니!"

"할멈이 루마니아 사람이 틀림없다면 아마 당신 남편이 유대인이겠지. 어쨌든 당신들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유대인임에 틀림없어. 이것은 공문서란 말이오. 하긴 당신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지."

"지금 제 정신으로 말하는 거야? 나 자신이 내가 무슨 종교를 믿는지 모른단 말이야?"

"종교가 문제가 아니오. 유대인이면서 크리스트교를 믿을 수도 있으니까. 문제는 혈통이오."

"내가 가진 피나 우리 양반의 몸속에 흐르는 피나 분명히 크리스트교의 혈통을 이어받고 있어. 오히려 내 아들을 감옥에 가두어 놓고 고초를 겪게 하는 자들이야말로 이교도들이지!"

"당신 남편이 크리스트 교도라는 건 확실하오?"

소장이 다소 누그러진 어조로 물었다.

"그 동안 같이 살면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소? 여자와 달라서 남자들은 보다 쉽게 그 증거가 눈에 띄거든. 어떻소?"

"35년간 그 옆에서 잠을 잔 내가 모르다니, 그런 말을 당신이 할 수 있어?"

아리스티샤는 울부짖듯 소리를 질렀다..

"매춘부도 하룻밤 같이 잔 남자를 알 텐데 하물며 35년이란 세월을 한 이불 속에서 잔 내 남편을 내가 모를 것 같아? 어떻게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우리가 그 애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당국이 나보다 더 잘 아는 모양이지? 내 뱃속에서 나와 내 젖을 먹고 자란 그 애의 일이라면 네 상관들이나 네가 나한테 와서 그러한 것들을 물어 봐야 당연하지 않아?"

아리스티샤는 흥분을 억제하지 못하고 치뜬 눈으로 자기 앞에 놓인 잉크병을 노려보고 있었다. 모든 게 붉어 보였다. 그녀가 집어서 헌병에게 던지려는 그 잉크병도 붉었다. 벽도 붉었고 헌병의 얼굴도 붉었다. 소장은 노파가 잉크병을 노려보고 있음을 알고는 슬그머니 자기 앞으로 잉크병을 끌어당겼다.

아리스티샤는 무기를 빼앗긴 기분이었다. 그녀는 이를 부드득 갈면서 흥분을 못 이겨 치맛자락을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것을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아리스티샤의 주름 잡힌 넓은 치마는 마치 바람에 날리듯 올라갔다. 그 바람에 윗도리도 걷어 올려져 푸르죽죽한 주름이 늘어진 노파의 알몸이 드러났다. 거무스름한 빈 주머니 같은 젖이 양쪽 가슴에 매달려 있었다. 소장은 한참동안 멍하니 아리스티샤의 발가벗은 몸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헌병은 보다 못해 두 눈을 감았다. 사무실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벽이 울리고 천장에서 흰 횟가루가 떨어졌다. 아리스티샤가 나간 것이다. 목쉰 아리스티샤의 목소리가 소장의 귀청에 왕왕 울려왔다.

"너희 놈들에 대한 내 대답이다! 네놈이나 네가 떠받드는 상관 놈들이 차례차례 이 꼴을 당해 보면 알 게다!"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