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일문학의 발견
미시마 유키오
제1장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나에게 자주 금각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마이즈루 동북부의, 일본해로 튀어나온 쓸쓸한 곶이다. 아버지의 고향은 그곳이 아니라, 마이즈루 동쪽 근교에 위치한 시라쿠라는 마을이다. 절간에 입양되어 승적에 오른 후, 외딴 곶에 위치한 절의 주지가 되었고, 그곳에서 신부를 맞이하여 나를 낳았다.
나리우 곶의 절 부근에는 마땅한 중학교가 없었다. 이윽고 나는 부모님 슬하를 떠나 아버지 고향에 있는 숙부 집에 맡겨지게 되어, 그곳에서 하가시마이즈루 중학교에 통학하였다.
아버지의 고향은 햇빛이 유별나게 눈부신 곳이었다. 하지만 1년 중, 11월이나 12월 무렵에는 구름 한 점 없어 보이는 쾌청한 날씨에도 하루에도 너덧 차례나 소나기가 지나갔다. 나의 변하기 쉬운 성격은 그 땅에서 형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5월의 저녁 무렵이면, 학교에서 돌아와 숙부 집 2층에 있는 공부방에서 건너편의 산을 바라보곤 하였다. 신록으로 덮인 산중턱이 석양을 받아, 벌판 한복판에 금병풍을 세워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것을 볼 때마다 나는 금각을 상상하였다.
사진이나 교과서에서 현실의 금각을 이따금 접하기는 하였지만, 내 마음 속에서는 아버지가 들려준 금각의 환상이 훨씬 멋진 것처럼 여겨졌다. 아버지는 결코 현실의 금각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는 식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금각처럼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었고, 또한 금각이라는 글자, 그 음운으로부터 내 마음이 그려낸 금각은 터무니없이 멋진 것이었다.
멀리서 논의 표면이 햇빛에 반짝이는 광경을 보거나 하면, 그것을 보이지 않는 금각의 투영이라고 생각했다. 후쿠이 현과 이쪽 교토 부의 경계를 이루는 기치자카 언덕은, 바로 동쪽에 위치한다.
그 언덕 언저리에서 해가 솟는다. 현실의 교토와는 반대 방향이지만, 나는 산간의 아침 햇살 속에서 금각이 하늘에 솟아 있는 것을 보았다.
이처럼 금각은 곳곳에 모습을 나타내었으며, 더구나 그것이 실제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지방의 바다와도 흡사하였다. 마이즈루 만은 시라쿠 마을에서 서쪽으로 15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바다는 산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고장에는 언제나 바다의 예감과도 같은 것이 떠돌고 있었다. 바람에서도 때때로 바다 냄새가 풍겼고, 바다가 거칠어지면 수많은 갈매기들이 피신하여 근처의 논에 내려앉았다.
몸도 약할뿐더러, 달리기를 하여도 철봉을 하여도 남에게 뒤지는 데다가, 선천적으로 말더듬 증세가 더욱더 나를 내성적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모두들 내가 절간의 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짓궂은 아이들은 말더듬이 중이 더듬더듬 불경 읽는 흉내를 내며 놀려대었다. 옛날 이야기 속에 말더듬이 포졸이 등장하는 것이 있는데, 그러한 이야기를 일부러 소리내어 내 앞에서 읽어 대곤 하였다.
말더듬 증세는 말할 필요도 없이, 나와 외계와의 사이에 하나의 장애로 작용하였다. 첫 발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 첫 발음이, 나의 내계와 외계 사이를 가로막는 문의 자물쇠와도 같은 것이었으나, 자물쇠가 순순히 열린 적이 없었다. 일반 사람들은 자유로이 말을 구사함으로써, 내계와 외계 사이에 있는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바람이 잘 통하도록 해 둘 수 있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자물쇠가 녹슬어 버린 것이다.
말더듬이가 첫마디를 소리내기 위해서 몹시 안달하는 동안은, 마치 내계의 농밀한 끈끈이로부터 몸을 떼어 내려고 버둥거리는 새와도 흡사하다. 겨우 몸을 떼어 냈을 때에는 이미 늦은 것이다. 물론 외계의 현실은 내가 버둥거리는 동안, 휴식을 취하며 기다려 줄 것처럼 생각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기다려 주는 현실은 이미 신선한 현실이 아니다. 내가 애써서 간신히 외계에 도달하여 보아도, 언제나 그곳에는 순식간에 변색되어 신선하지 못한 현실, 거지반 썩든 냄새를 풍기는 현실이 가로놓여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소년은, 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두 종류의 상반된 권력 의지를 품게 된다. 나는 역사 중에서 폭군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하였다. 내가 말더듬이에다가 과묵한 폭군이라면, 신하들은 내 안색을 살피며 항상 주눅이 들어 지내게 되리라. 나는 명확하고 유창한 말투로 자신의 잔학성을 정당화시킬 필요조차 없다. 나의 무언만이 모든 잔학성을 정당화시키리라. 이런 식으로 평소에 나를 업신여기는 교사나 학우들을 모조리 처형시키는 공상을 즐기는 한편, 나는 또한 내면 세계의 제왕이자 조용한 체념에 잠긴 위대한 예술가가 되는 공상도 즐겼다. 외모는 보잘것없었지만 나의 내계는 누구보다도, 이토록 풍요로웠다. 무언가 씻어 없앨 수 없는 열등감을 지닌 소년이, 자신을 은근히 선택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이 세상 어디엔가, 아직 내 자신도 모르는 사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러한 이야기가 하나 생각난다.
히가시마이즈루 중학교는, 넓은 운동장을 앞에 두고 길게 늘어선 산들에 둘러싸인 신식의 밝은 건물이었다.
5월의 어느 날, 중학교 선배인, 마이즈루 해군 사관 학교의 생도 하나가 휴가를 받아서 모교에 놀러 왔다.
그는 햇볕에 잘 탄 피부에, 깊게 눌러쓴 제모의 차양 밑으로 멋진 콧날을 드러낸 모습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야말로 젊은 영웅이었다. 후배들 앞에서 고된 규율투성이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비참한 생활을, 마치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이야기하는 듯한 어투로 말하는 것이었다. 일거수일투족이 긍지에 넘쳤고, 젊었음에도 겸손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제복 가슴의 줄무늬를, 마치 바닷바람을 가르며 나아가는 뱃머리의 조각처럼 활짝 펼치고 있었다.
그는 운동장으로 내려가는 두세 단의 오야석(역자주:우쓰노미야 시 오야마치 부근에서 채석되는 녹색 응회암)으로 만든 돌계단에 앉아 있었다. 그 주위에는 이야기에 넋을 잃은 네댓 명의 후배들이 있었고, 튤립, 스위트피, 아네모네, 양귀비와 같은 5월의 꽃들이 경사진 화단에 일제히 피어 있었다. 그리고 머리 위에는 후박나무가 하얀색의 크고 탐스러운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야기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마치 동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2미터쯤 거리를 두고 운동장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것이 나의 독특한 예의였다. 5월의 꽃들과 긍지로 가득한 제복, 밝은 웃음소리 등에 대한 예의였다.
그러나 젊은 영웅은 숭배자들보다도 재 쪽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나만의 위풍에 흔들리지 않는 듯이 보였고, 그렇게 보인다는 점이 그의 긍지를 손상시켰다. 그는 모두에게 내 이름을 물었다. 그리고는,
"어이, 미조구치."
하고 초면인 나를 불렀다. 나는 입을 다문 채로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나를 향한 그의 웃음은 권력자의 아무와도 비슷한 데가 있었다.
"왜 대답이 없어? 벙어린가, 자네는?"
"마, 마, 마, 말더듬이입니다."
하고 숭배자 하나가 나 대신에 대답하자, 모두가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비웃음이란 얼마나 눈부신 것인가! 나에게는 같은 반 소년들의, 소년 사절 특유의 잔혹한 웃음이, 눈부시게 빛나는 무성한 나뭇잎처럼 찬란하게 보였다.
"뭐야, 말더듬이야? 자네도 해기(역자주:"해군 기관 학교"의 준말)에 들어오지 않겠나? 말더듬이 따윈, 하루에 두들겨 고쳐 줄 테니."
나는 어쩐 일인지, 얼떨결에 명료한 대답을 했다. 말은 줄줄 흐르듯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순식간에 나왔다.
"안 들어가겠습니다. 저는 증이 될 겁니다."
모두들 조용해졌다. 젊은 영웅은 고개를 숙이고는, 그 옆의 풀을 뜯어 입에 물었다.
"그래? 그렇다면 몇 년 후에는 나도 자네의 신세를 지게 되겠군."
그해에는 이미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때 나에게 분명하게 하나의 자각이 생겼다. 어둠의 세계를 향하여 팔을 크게 벌린 채 기다리면 된다는 것. 머지않아 5월의 꽃들도, 제복을 입은 자들도, 짓궂은 급우들도, 내가 벌리고 있는 팔 안에 들어오리라는 것. 내가 세상을 바닥으로부터 쥐어짜서 움켜쥐고 있다는 자각을 지녀야 한다는 것. 하지만 이러한 자각은 소년의 긍지가 되기에는 너무도 무거웠다.
긍지는 좀더 가볍고 밝고 눈에 잘 보이며, 찬란한 것이어야만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 누구나 볼 수 있으며, 그것이 내 긍지가 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좋으련만. 이를테면, 그가 허리에 차고 있는 단검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중학생들 모두가 동경하는 단검은, 정말로 아름다운 장식이었다. 해군 생도들은 그 단검으로 몰래 연필을 깎는다고 하는데, 그토록 장엄한 상징을 일부러 사소한 용도에 사용하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마침, 기관 학교의 제복은 벗어 놓은 그대로 하얀 페인트 칠을 한 울타리에 걸쳐져 있었다. 바지도, 하얀 속 셔츠도... 그러한 것들은 꽃 가까이에서 땀에 젖은 젊은이의 체취를 풍기고 있었다. 꿀벌이 잘못 알고 그 하얗게 빛나는 셔츠의 꽃에 날개를 쉬고 있었다. 금실로 장식한 제모는, 그의 머리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단정히, 깊숙히, 울타리에 씌워져 있었다. 그는 후배들의 도전을 받고 뒤쪽 모래사장에 씨름하러 간 것이다.
벗어 놓은 그러한 것들은, 긍지의 묘지와도 같은 인상을 주었다. 5월의 수많은 꽃들이 그러한 느낌을 더해 주었다. 그 중에서도, 차양이 칠흑처럼 빛을 반사하는 제모나, 그 곁에 걸어진 혁대와 단검은, 그의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오히려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발산하며, 그 자체가 추억만큼이나 완전하여... 마치 젊은 영웅의 유품과도 같아 보였다.
나는 주위에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하였다. 씨름터에서 환성이 솟았다. 나는 주위에서 녹슨 연필깎이 칼을 꺼내어 조심스레 다가가, 그 아름다운 단검의 검정색 칼집 뒤쪽에 두세 가닥의 보기 흉한 칼자국을 새겼다...
이상과 같은 기술을 보고 나를 시인 기질이 있는 소년이라고 속단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시는 고사하고 수기조차도 쓴 적이 없다. 남에게 뒤지는 능력을 다른 능력으로 보충하여, 그것을 가지고 남보다 앞서겠다는 충동이 나에게는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 나는 예술가가 되기에는 너무도 오만하였다. 폭군이나 위대한 예술가가 되겠다는 꿈은 꿈일 뿐, 실제로 착수하여 무엇인가를 해내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남에게 이해되니 않는다는 점이 유일한 긍지였기 때문에 ,무엇인가 남들을 이해시키겠다는 표현의 충동을 느끼지 못했다. 남들 눈에 띄는 것들이 나에게는 숙명적으로 부여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고독은 자꾸만 살쪄 갔다. 마치 돼지처럼.
돌연히 나의 회상은, 우리 마을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으로 옮겨간다. 이 사건과는 실제로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나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가 관여하고 참가하였다는 생생한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사건을 통하여 단숨에 모든 것들에 직면하게 되었다. 인생에, 관능에, 배신에, 증오와 사랑에, 모든 것들에. 그리고 그 속에 숨겨진 숭고한 요소를, 내 기억은 고의로 부정하고 간과하였다.
숙부 집에서 두 집 건너에 예쁜 소녀가 살고 있었다. 우이코라는 이름이었다. 눈이 크고 맑았다. 집이 부자라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태도가 도도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지냈으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시기심이 강한 여자들은 우이코가 아마도 아직 처녀일 터인데도, 저런 인상이야말로 석녀상이라는 등의 소문을 퍼트렸다.
우이코는 여학교를 갓 졸업하고, 마이즈루 해군 병원의 특지(역자주:'특별 지원'의 준말) 간호사가 되었다. 병원은 자전거로 통근할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아침 출근은 동트기 전에 집을 나서기 때문에, 우리들이 등교하는 것보다 2시간 정도 빨랐다.
어느 날 밤, 우이코의 육체를 생각하며 암울한 공상에 빠져서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나는, 날이 밝기도 전에 잠자리를 빠져나와 운동화를 신고, 여름 새벽의 어둠이 깔린 집 밖으로 나섰다.
우이코의 육체를 생각한 것은 그날 밤이 처음은 아니다. 이따금 생각하고 있던 것이 점차로 고착되어, 마치 그러한 생각의 덩어리처럼, 우이코의 몸은 하얗고 탄력이 있으며, 희미한 어둠에 잠긴, 냄새를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육체로 응결되어 보린 것이다. 나는 그 육체를 만질 때 손가락에 솟는 열기를 상상하였다. 또한 그 손가락에 거부하듯이 느껴지는 탄력과, 꽃가루와 같은 향기를 생각하였다.
나는 어두운 새벽길을 곧장 달렸다. 돌멩이도 나의 발길을 방해하지 못하였고, 어둠이 내 앞에 자유자재로 길을 터 주었다.
얼마 안 가면 넓은 길이 나와, 시라쿠 마을의 읍인 야스오카 부락 주변으로 이어진다. 그 곳에 한 그루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다. 느티나무 둥치는 아침 이슬에 젖어 있었다. 나는 그 밑에 몸을 숨기고, 부락 쪽에서 우이코가 자전거로 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기다려서 무슨 짓을 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기는 했지만, 느티나무 그늘에서 숨을 돌리고 나니, 자신이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러나 나에게는, 외계라는 것과 너무도 무관하게 살아왔던 탓으로, 일단 외계로 뛰어들면 모든 것이 쉽고 가능해지리라는 환상이 있었다.
숲모기가 내 다리를 물었다. 여기저기서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길 쪽을 엿보았다. 멀리 하얗고 희미한 물체가 나타났다. 그것은 새벽의 색깔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우이코였다.
우이코는 자전거를 타고 오는 모양이었다. 헤드라이트가 켜져 있었다. 자전거는 소리도 없이 미끄러지듯이 다가왔다. 느티나무 그늘에서, 나는 자전거 앞으로 뛰쳐나갔다. 자전거는 위태롭게 급정거하였다.
그 순간, 나는 자신이 돌로 변하고 만 것을 느꼈다. 의지도 욕망도 모두가 돌로 변하였다. 외계는, 나의 내면과는 무관하게, 다시금 내 주위에 확고히 존재하고 있었다. 숙부 집을 빠져나와, 흰 운동화를 신고, 어두운 새벽길을 이 느티나무 그늘까지 달려온 나는, 단지 자신의 내면을 무작정 달려온 것에 불과하였다. 어두운 새벽 속에 희미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마을의 지붕들에도, 시커먼 나무들에도, 아오바 산의 시커먼 산꼭대기에도, 눈앞의 우이코조차도, 끔찍할 정도로 완전히 의미가 결여되어 있었다. 내가 관여할 틈도 없이 현실은 이미 부여되어 있었으며, 더구나 내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무게로, 무의미하며 크고 어두운 이러한 현실은 나에게 부여되어 나에게 다가와 있었다.
말이 아마도 이 상황을 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리라고, 여느 때처럼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나 특유의 오해이다. 행동이 필요한 때에, 언제나 나는 말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입에서 말이 나오기 힘들기 때문에, 거기에 신경을 쓰다가 행동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나에게는 행동이라는 휘황찬란한 존재가, 언제나 휘황찬란한 말을 동반하고 있으리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우이코는 처음에는 겁을 먹은 듯하였으나, 나를 알아차리고는 내 입만을 주시했다. 그녀는 아마도, 어두운 새벽 속에서 무의미하게 꿈틀거리고 있는, 보잘것없는 작은 구멍, 자그만 들짐승의 소굴처럼 지저분하고 모양 없는 작은 구멍, 즉 내 입만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외계로 이어지는 힘이 무엇 하나 튀어나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심하였다.
"뭐야, 이상한 짓도 다 하네. 말더듬이 주제에."
하고 우이코가 말했으나, 그 목소리에는 아침 바람과도 같은 단정하고 상쾌한 느낌이 있었다. 그녀는 벨소리를 울리며, 페달에 다시 발을 올렸다. 돌멩이를 피하듯이 나를 피하여 우회하였다. 사람이라곤 그림자 하나 없는데도, 멀리 논 건너편으로 사라져 가는 우이코가 이따금 조롱하듯 울리는 벨소리를 나는 들었다.
--그날 밤, 우이코의 고자질로, 그녀의 엄마가 내 숙부 집에 찾아왔다. 나는 평소에 온화하던 숙부에게서 심한 질책을 당했다. 나는 우이코를 저주하며 죽기를 바랐는데, 수개월 후에 그 저주가 이루어졌다. 이후로 나는 남을 저주하는 일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자나깨나 나는 우이코가 죽기를 바랐다. 내 수치의 입회인이 없어져 버리기를 바랐다. 증인만 없다면, 지상에서 수치는 근절되리라. 타인은 모두 증인이다. 그러나 타인이 없으면 수치라는 것도 생기지 않는다. 나는 우이코의 모습, 어두운 새벽 속에서 물처럼 빛을 발하며 내 입을 잠자코 주시하던 그녀의 눈 뒤에서, 타인의 세계--즉, 우리들을 결코 혼자 내버려 두지 않고, 자진하여 우리들의 공범이 되며 증인이 되는 타인의 세계--를 본 것이다. 타인이 모두 멸망하여야 한다. 내가 정말로 태양을 향하여 얼굴을 들기 위하여는, 세계가 멸망하여야 한다.
고자질을 한 2개월 후, 우이코는 해군 병원을 그만두고 집 안에 틀어박혔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 갖가지 소문이 나돌았다. 그리고 가을이 끝나 갈 무렵, 그 사건이 발생하였다.
...우리들은 이 마을에 해군 탈영병이 숨어들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단지 점심 무렵 촌사무소에 헌병이 왔다. 그러나 헌병이 오는 것은 신기해할 일도 못되었기에, 별다른 느낌은 받지 않았다.
그날은 10월 말의 맑게 갠 하루였다. 나는 여느 때처럼 학교에 다녀와, 밤 공부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등불을 끄려다가 내려다본 길 쪽에서 많은 사람들이 개떼처럼 숨을 헐떡이며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현관 입구에는 학교 친구 하나가 와서, 자다 말고 일어나 나온 숙부, 숙모와 나에게, 눈을 둥그렇게 하고 소리쳤다.
"지금, 저쪽에서, 우이코가 헌병에게 잡혔어! 같이 가자!"
나는 신발을 걸쳐 신고 뛰쳐나갔다. 달 밝은 밤이라, 수확이 끝난 노의 군데군데에 볏단이 선명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나무숲의 그늘 한쪽에, 사람들의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검정색 양장 차림의 우이코가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 얼굴이 몹시 하앴다. 주위에는 너덧 명의 헌병들과 부모가 있었다. 헌병 하나가 도시락 보자기 같은 것을 들이대며 호통치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리저리로 얼굴을 움직이며, 헌병에게 사과하기도 하고, 딸을 질책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웅크리고 앉아서 울고 있었다.
우리들은 밭 건너편 논둑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구경꾼들은 점점 불어나, 조용한 가운데 서로의 어깨가 부딪쳤다. 쥐어짜 놓은 듯이 조그만 달이 우리들의 머리 위에 있었다.
친구가 내 귓전에 대고 설명하였다.
도시락 보자기를 들고 집에서 빠져나와 인근 부락으로 가려던 우이코가, 잠복 중인 헌병에게 붙잡혔다는 것. 그 도시락은 탈영병에게 갖다주려던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 탈영병과 우이코는 해군 병원에서 사귀게 되어, 그 때문에 임신한 우이코가 병원에서 쫓겨났다는 것. 헌병은 탈영병이 숨어 있는 곳을 대라고 윽박지르고 있지만, 우이코는 그 자리에 앉은 채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입을 꼭 다물고 있다는 것...
그러한 이야기를 듣는 나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우이코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붙잡힌 광녀처럼 보였다. 달빛 아래에서, 그 얼굴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지금까지, 그토록 거부로 가득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나는 자신의 얼굴을,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한 얼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이코의 얼굴은 세계를 거부하고 있었다. 달빛은 그녀의 이마와 콧등과 얼굴 위에 가차없이 흘러내리고 있었으나, 부동의 얼굴은 다만 그 빛에 씻기고 있었다. 조금만 눈을 움직이고 조금만 입을 움직인다면, 그녀가 거부하려는 세계는 그것을 기화로 한꺼번에 밀어닥치리라.
나는 숨을 죽이고 그 얼굴을 주시하였다. 역사는 거기에서 중단되었고, 미래를 향하여도 과거를 향하여도 무엇하나 말을 건네지 않는 얼굴. 그러한 불가사의한 얼굴을 우리들은 방금 잘려 나간 나무의 그루터기 위에서 보는 때가 있다. 신선하고 풋풋한 색을 띠면서도, 성장은 거기에서 멈추고, 예기치 못한 바람과 햇빛을 받아, 원래 자신의 소속이 아닌 세계로 돌연히 드러난 그 단면에, 아름다운 나뭇결이 그려낸 불가사의한 얼굴. 단지 거부하기 위하여 이쪽 세계로 향하여진 얼굴...
나는 우이코의 얼굴이 이토록 아름다운 순간은, 그녀의 생애에 있어서도, 그것을 보고 있는 나의 생애에 있어서도 다시는 없으리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그 얼굴이 유지된 시간은 의외로 짧았다. 그 아름다운 얼굴에 돌연히 변화가 생긴 것이다.
우이코는 일어섰다. 그때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달빛에 하얀 앞니가 빛났던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더 이상, 이 변모에 관하여 기술할 수가 없다. 일어선 우이코의 얼굴이 환한 달빛에서 벗어나, 나무 그림자에 가려졌기 때문이다.
우이코가 배신을 결심한 때의 변모를 내가 볼 수 없었던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것을 자세히 보았더라면, 나에게도 인간을 용서할 마음이, 모든 추한 것들까지도 용서할 마음이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우이코는 인근 부락인 가하라 산 그늘을 가리켰다.
"금강원이다!"
하고 헌병이 소리쳤다.
그러자 나에게도 어린애 같은 축제 분위기의 즐거움이 생겨났다. 헌병들은 편을 나누어 금강원을 사방에서 포위하기로 하였다. 마을 사람들에게 협력이 요청되었다. 심술궂은 호기심에서, 나는 다른 5, 6명의 소년들과 함께, 안내하는 우이코를 앞세워 가는 선두 그룹에 가담하였다. 달빛이 비치는 길을, 우이코가 헌병들과 함께 선두에 서서 걸어가는, 그 확신으로 가득한 발걸음에 나는 놀랐다.
금강원은 유명하다. 그것은 야스오카에서 걸어서 15분 정도의 산그늘에 위치한, 다카오카 친왕이 몸소 심은 비자나무와, 히다리 진고로(역자주: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서 활동하였다는 유명한 석공. 그러나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라 옛날이야기의 등장 인물)가 세웠다고 전하여지는 우아한 삼층탑이 있는 이름난 절이다. 여름에는 자주 그 뒷산의 폭포를 맞으며 놀았다.
강가에 본당의 담이 있다. 허물어진 토담 위에 억새풀이 무성하여, 그 하얀 이삭이 밤중에도 윤기 있게 보였다. 본당의 문 옆에는 산다화가 피어 있었다. 일행은 묵묵히 강을 따라 걸었다.
금강원의 어당은 좀더 올라간 곳에 있었다. 통나무 다리를 건너면, 오른편에 삼층탑이, 왼편에 단풍나무 숲이 있고, 그 안쪽으로 105단의 이끼 낀 돌계단이 솟아 있다. 석회암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미끄러지기 쉬웠다.
통나무 다리를 건너기 전에 헌병이 뒤돌아보며 손짓으로 일행의 발길을 멈추어 세웠다. 옛날에는 여기에 운케이, 단테이(역자주:가마쿠라 초기의 불상 조각가. 단케이는 운케이의 장남)가 세운 인왕문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보다 더 깊숙한 곳에 있는, 쓰즈라 골짜기의 산들은 금강원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
...우리들은 숨을 죽였다.
헌병은 우이코를 재촉하였다. 그녀 혼자서만 통나무 다리를 건너고, 잠시 후 우리가 그 뒤를 따랐다. 돌계단의 아래쪽은 그늘에 가려 있었다. 그러나 중간보다 위쪽은 달빛 아래에 있었다. 우리들은 돌계단 아래쪽의 그늘 이곳저곳에 몸을 숨겼다. 물들기 시작한 단풍은 달빛에 검게 보였다.
돌계단 위에는 금강원의 본전이 있고, 그 왼쪽에 비스듬히 복도가 설치되어, 신락전과 같은 빈 어당으로 통하고 있다. 그 빈 어당은 공중으로 높게 세워진 건축물로, 가면극 무대를 본떠서 짜여진 수많은 기둥과 횡목들이 벼랑 아래에서 그것을 지탱하고 있었다. 어당도 복도도, 이를 지탱하는 기둥들도, 비바람에 시달려서 청아하고 하얗게 변한 모습이, 마치 백골처럼 보였다. 단풍이 한창일 때에는, 단풍 색깔과, 이 백골과도 같은 건축물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지만, 밤이 되면 군데군데 얼룩처럼 달빛을 받은 하얀 기둥들은, 괴이하게도 보이고, 요염하게도 보였다.
탈영병은 무대 위의 어당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헌병들은 우이코를 미끼삼아 그를 잡으려고 하였다.
우리 증인들은 그늘에 숨어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10월 하순의 차가운 밤공기에 싸여 있으면서도, 내 뺨은 뜨거웠다.
석회암으로 쌓은 105개의 돌계단을 우이코 혼자서 올라갔다. 관인처럼 자연스럽게...검은 양장과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아름다운 옆모습이 유달리 희게 보였다.
달과 별, 밤하늘의 구름과, 즐비한 삼나무 능선이 하늘과 접하는 산, 얼룩 같은 달 그림자와 허옇게 솟아 있는 건물, 이러한 것들 속에서, 우이코의 배신이라는 투명할 정도로 맑은 아름다움이 나를 도취시켰다. 그녀 혼자서 가슴을 펴고 이 하얀 돌계단을 걸어올라갈 자격이 있었다. 그 배신은, 별이나 달, 혹은 창 모양의 삼나무와 동일한 것이었다. 즉, 우리 증인들과 함께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자연을 받아들이는 행위였다. 그녀는 우리들의 대표자로서 그곳을 걸어올라간 것이다.
숨이 가빠 오는 가운데,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신 행위로 인하여 드디어 그녀는, 나까지도 받아들였다. 그녀는 이 순간에야말로 내 것이다!'
...사건이란 우리들 기억 속의 어느 지점에서인가 실추하고 만다. 105단의 이끼 낀 돌계단을 올라가는 우이코는 아직 눈앞에 있었다. 그녀는 영원히 그 돌계단을 올라갈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윽고 그녀는 돌변하고 말았다. 돌계단을 다 올라간 우이코는, 다시 한번 나를, 우리들을 배반한 것이었다. 그 이후의 그녀는 온 세상을 전적으로 거부하지도 않았고 전적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단지 애욕의 질서에 굴복하여, 한 남자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여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기에 나는, 이 사건을 낡은 석판 인쇄와도 같은 광경으로밖에 생각해 낼 수가 없다... 우이코는 복도를 건너가, 어당 속의 어둠을 향하여 누군가를 불렀다. 사내의 모습이 나타났다. 우이코는 무엇인가 말을 걸었다. 사내는 돌계단의 중간을 향하여 권총을 쏘았다. 그에 응사하는 헌병들의 권총이, 돌계단 중간의 숲 속에서 발사되었다. 사내는 다시 한번 총을 겨누더니, 복도 쪽으로 도망치려는 우이코의 등에 몇 발인가 연달아 쏘았다. 우이코는 쓰러졌다. 사내는 총구를 자신의 관자놀이에 대고 발사하였다...
--헌병들은 물론, 모두가 앞을 다투어 돌계단을 뛰어올라 두 사람의 시체로 몰려가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단풍나무 그늘에 몸을 숨긴 채 잠자코 있었다. 하얀 기둥들이 종횡으로 얽히어 내 머리 위에 솟아 있었다. 그 위에서 널빤지가 깔린 복도를 밟아 대는 신발소리가 아주 경쾌하게 들려왔다. 어지럽게 움직이는 손전등 불빛이 두세 가닥, 난간 건너에 있는 단풍나무의 가지까지 비치었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먼 옛날의 사건이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둔감한 사람들은 피가 흐르지 않으면 허둥대지 않는다. 하지만, 피가 흘렀을 때에는 비극은 끝나 버린 다음인 것이다. 어느 새 나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모두가 떠나 버리고 혼자 남은 내 주위는 새들의 지저귐으로 가득하였고, 아침 햇살이 단풍나무의 밑까지 깊숙히 비치고 있었다.
나는 일어나 몸을 부르르 떨고는, 몸의 이곳저곳을 비볐다. 추위만이 몸 속에 남아 있었다. 남아 있는 것은 추위뿐이었다.
*
이듬해 봄방학 때에, 아버지가 국민복에 가사를 걸친 모습으로 숙부 집을 찾아왔다. 나를 2, 3일 교토에 데려가겠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폐병은 상당히 악화되어 있었기에 나는 그 수척한 모습에 놀랐다. 나만이 아니라, 숙부 내외도 교토에 가는 것을 말렸으나 아버지는 듣지 않았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나를 금각사 주지에게 소개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물론 금각사를 방문하는 것은 나의 오랜 꿈이었지만, 일부러 활기 있는 척하여도 누가 보나 중환자로 보이는 아버지와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아직 본 적도 없는 금각에 드디어 접할 순간이 다가옴에 따라, 내 마음에는 주저가 생겼다. 무슨 일이 있어도 금각은 아름다워야만 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은 금각 자체의 아름다움보다도, 금각의 미를 상상할 수 있는 내 마음의 능력에 달려 있었다.
소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한도내에서는, 나도 금각에 관하여 통달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미술 서적들은 금각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서원사 가문으로부터 기타야마라고 불리는 저택을 이어받아, 여기에 대규모 별장을 세웠다. 그 주요 건축물은, 사리전, 호마당, 참법당, 법수원 등의 불교 건축과, 신전, 공경간, 회소, 천경각, 홍북루, 천전, 간설정 등 주택 관계의 건축이었다. 사리전은 가장 공을 들여 세운 것으로, 훗날 금각이라고 불리게 된 건물이다. 언제부터 금각이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확실히 선을 그을 수는 없지만, 오닌의 난 이후인 듯 분메이(역자주:1469년부터 1487년까지) 무렵에는 상당히 보편적으로 금각이라 불렀다.
금각은 넓은 연못--경호지--에 면한 3층 누각의 건축으로서,1398년경 완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1, 2층은 침전 모양으로 만들어 덧문을 달았고, 3층은 4면 3자의 순수한 선당, 불당식으로 만들어, 중앙에 잔당호(역자주:틀을 짠 다음 얇은 판자를 붙인 문),좌우에 화두창(역자주: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창)을 달았다. 지붕은 노송나무 껍질로 이은 네모 반듯한 모양으로, 금동의 봉황이 올려져 있다. 또한 연못에는 ㅅ자형 지붕을 올린 수청이라는 낚시터를 돌출시켜, 전체의 단조로움을 없앴다. 지붕의 경사는 완만하며, 처마는 산뜻하게, 가느다란 나무로 경쾌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내는 등, 주택식 건축에 불당 양식을 가미하여 조화를 이룬 정원 건축의 수작으로서, 귀족 문화를 도입한 요시미쓰의 취미와 당시의 분위기를 잘 전하여 주고 있다.
요시미쓰의 사후, 기타야마 저택은 유언에 따라 선찰로 바뀌어, 녹원사로 불리게 되었다. 그곳의 건물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지거나 황폐되거나 했지만, 금각만은 다행히도 남아 있다...
밤하늘의 달처럼, 금각은 암흑 시대의 상징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꿈꾸는 금각은, 그 주위에 몰려드는 어둠을 배경으로 할 필요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 아름답고 가날픈 기둥의 구조가, 안으로부터 희미한 빛을 발하며 고요히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이 건축에게 어떠한 말을 건네더라도 아름다운 금각은 잠자코 섬세한 구조를 드러내 보이며 주위의 어둠을 참고 견디어야 한다.
나는 또한 그 지붕 꼭대기에서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시달려 온 금동 봉황을 생각했다. 이 신비스러운 금빛 새는 알리지도 않고 날갯짓도 하지 않고, 자신이 새라는 사실조차 잊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날지 못할 듯이 보이는 것은 착각이다. 다른 새들이 공간을 난다면, 이 금으로 만든 봉황은 번쩍이는 날개를 펴고 영원히 시간 속을 나는 것이다. 시간이 그 날개에 부딪힌다. 날개에 부딪혀서 뒤쪽으로 흘러간다. 날아가기 위하여, 봉황은 단지 부동의 자세로 눈을 부라린 채, 날개를 높이 들고 꼬리 깃을 휘날리며, 당당한 금빛의 양 다리를 힘차게 버티고 있으면 되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나에게는 금각 그 자체도 시간의 바다를 건너온 아름다운 배처럼 생각되었다. 미술 서적에서 말하는 '벽이 적고, 바람이 잘 통하는 건축'이라는 설명이 배의 구조를 상상하게 하였으며, 이 복잡한 3층의 지붕 달린 배가 임하고 있는 연못은 바다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금각은 수많은 밤을 노 저어 왔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항해. 그리고 낮 동안은, 이 신비스러운 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얼굴로 닻을 내린 채 뭇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밤이 오면 주위의 어둠으로부터 힘을 얻어, 지붕을 돛처럼 부풀려 출범하는 것이다.
내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직면한 문제는, 미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아버지는 시골의 소박한 승려로, 어휘도 부족하기에, 단지 "금각처럼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다."라고만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나는 자신도 모르는 곳에 이미 미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에, 불만과 초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미가 명백히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면, 나라는 존재는 미로부터 소외된다.
그렇다고 해서 금각이 나에게 결코 하나의 관념은 아니었다. 산으로 막혀 있다고 해도, 보고 싶으면 직접 가서 볼 수 있는 하나의 물체였다. 미는 그처럼 손으로 만질 수도 있고 눈에도 확실히 비치는 하나의 물체였다. 여러 가지로 변모하는 가운데, 불변의 금각이 버젓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으며 믿고 있었다.
금각은 내 손 안에 잡히는 작고 정교한 세공물처럼 생각되는 때도 있었고, 혹은, 하늘 높이 끝없이 솟은 거대한 괴물과도 흡사한 건물이라고 생각되는 때도 있었다. 미라는 것은 작지도 크지도 않고, 적당한 것이라는 생각이, 소년인 나에게는 없었다. 그렇기에 여름철의 꽃들이 아침 이슬에 젖어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는 듯이 보일 때, 금각처럼 아름답다고 나는 생각했다. 또한, 구름이 산 저편을 가로막고 천둥을 머금은 채 암담한 테두리만을 금빛으로 번쩍일 때에도, 그 웅대한 광경을 보며 금각을 연상했다. 심지어는 아름다운 사람의 얼굴을 보아도 마음 속으로, '금각처럼 아름답다'고 형용하기에 이르렀다.
그 여행은 어딘지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 마이즈루 선은 니시마이즈루로부터, 마구라, 우에스기 등의 작은 역들에 정거한 후, 아야베를 지나 교토로 향하는 선으로, 객차는 지저분하였고, 호즈 골짜기 주변의 터널이 많은 곳에서는 매연이 가차 없이 차내로 불어 들어와, 그 숨막히는 연기 때문에 아버지는 몇 번이고 심하게 기침을 했다.
승객은 해군에 관계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3등 칸은, 하사관, 해군 사병, 기능공, 해군에 면회 다녀오는 가족들로 만원이었다.
나는 창밖의 뿌연 봄 하늘을 보았다. 아버지의 국민복 가슴에 걸쳐진 가사를 보고, 혈색이 좋은 젊은 하사관들의 금단추가 퉁겨질 듯한 가슴을 보았다. 나는 그 중간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머지않아 성년이 되면 나도 군에 징집당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설령 군인이 되더라도, 눈앞의 하사관들처럼 역할에 충실히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나는 두 종류의 세계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나는 아직 이토록 젊지만, 보기 흉하고 완고하게 생긴 이마 속에서, 아버지가 관장하는 죽음의 세계와 젊은이들이 속한 삶의 세계가 전쟁을 매개로 하여 연결되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그 이음새가 되리라. 내가 전사해 버리면, 눈앞에 있는 이 갈림길의 어느 쪽으로 가건, 결국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판명될 것이다.
나의 소년 시절은 희미한 빛으로 흐려져 있었다. 캄캄한 그늘의 세계가 두렵기도 했지만, 대낮처럼 뚜렷한 인생도 내 것이 아니었다.
심하게 기침하는 아버지를 돌보는 한편으로, 나는 이따금 호즈천을 창밖으로 보았다. 그것은 화학 실험에서 사용하는 황산 구리처럼 칙칙한 군청색이었다. 터널을 빠져나올 때마다 호즈 골짜기는 선로에서 멀어지기도 하고, 또한 의외로 가까이 다가오기도 하면서, 매끄러운 바위에 둘러싸여, 그 군청색 물결이 요란스럽게 소용돌이치기도 했다.
아버지는 흰쌀로 만든 주먹밥 도시락을 차 안에서 펼치기를 부끄러워하였다.
"암시장에서 사 온 쌀이 아니야. 단가(역자주:절에 시주하는 사람의 집)의 성의니까, 고맙게 먹으면 되지."
주위에 들리도록 그렇게 말하고 먹었지만, 아버지는 그다지 크지도 않은 주먹밥 하나를 드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에게는 이 검정투성이의 낡은 열차가, 도회지로 향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 기차는 죽음의 역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듯이 여겨졌다. 그러고 보니 터널을 지날 때마다 차 안에 가득한 연기에서 화장터 냄새가 풍겼다.
...하지만 역시 녹원사 정문 앞에 섰을 때, 내 가슴은 두근거렸다. 이제부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보게 된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고, 산들은 뿌연 안개로 덮여 있었다. 관람객 몇 명이 우리 부자를 전후하여 문안으로 들어섰다. 왼편의 종루 주위에는 철 지난 꽃을 피운 매화 숲이 있었다.
아버지는, 커다란 상수리나무 앞에 있는 본당의 현관에 서서 안내를 청하였다. 주지는 손님을 접대하고 있으니 20∼30분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금각을 돌아보고 오자."
하고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는 아마도 안면만 갖고 무료로 참관문을 들어서는 모습을, 자식인 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입장권을 파는 사람도, 참관문에서 검표하는 사람도, 10여 년 전에 아버지가 자주 들렀던 때의 사람들과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이다음에 올 때는, 또 바뀌어 있겠지."
하고 아버지는 쓸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이다음에 올 때'를, 이미 아버지가 확신하고 있지 않음을 나는 느꼈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소년답게--나는 이런 때만, 고의적인 연기를 할 때만, 소년다웠다--명랑하게 앞장서서 달음질치듯이 갔다. 그리하여 그토록 꿈에 그리던 금각은 너무도 싱겁게 내 앞에 그 전모를 드러내었다.
나는 연못의 이쪽에 서 있었고, 금각은 연못 건너편의, 기울기 시작하는 햇빛에 그 정면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청은 왼쪽 저 건너에 절반 가려져 있었다. 물풀 잎사귀가 드문드문 떠 있는 연못에는, 금각의 정교한 투영이 비치어, 그 투영이 오히려 완전한 모습으로 보였다. 연못 물에 반사된 석양이 각층의 추녀 밑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원근법을 파장시킨 그림처럼 고압적인 금각은, 몸을 약간 뒤로 젖힌 듯한 느낌을 주었다.
"어때, 멋있지 않아? 일층을 법수원, 이층을 조음동, 삼층을 구경정이라고 하지."
병환으로 메마른 아버지의 손은 내 어깨에 놓여 있었다.
나는 이리저리 각도를 바꾸어, 혹은 고개를 기울여 바라보았다. 아무런 감동도 일지 않았다. 그것은 낡고 거무튀튀하며 초라한 3층 건물에 지나지 않았다. 꼭대기의 봉황도, 까마귀가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아름답기는커녕 부조화하고 불안정한 느낌마저 들었다. 미라는 것은 이토록 아름답지 않은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만약 재가 겸허하고 공부를 좋아하는 소년이었더라면, 그토록 낙담하기 전에, 자신의 감상력이 부족함을 한탄했으리라. 하지만 내 마음이 그토록 아름다움을 기대하였던 대상으로부터 배신당한 고통은, 다른 어떠한 반성조차도 빼앗아 버렸다.
나는 금각이 그 미를 숨기고, 무언가 다른 물체로 둔갑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미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좀도 금각에 접근하여, 내 눈에 추하게 느껴지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하나하나 세부를 점검하여, 미의 핵심을 이 눈으로 보아야 한다. 내가 눈에 보이는 미만을 믿고 있었던 이상, 이러한 태도는 당연하였다.
하편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조심스럽게 법수원의 툇마루로 올라섰다. 나는 우선 유리 상자에 들어 있는 정교한 금각의 모형을 보았다. 이 모형은 내 마음에 들었다. 이쪽이 오히려 내가 꿈에 그리던 금각에 가까웠다. 그리고 커다란 금각의 내부에 이토록 똑같은 모양의 작은 금각이 들어 있는 모습은, 대우주 속에 소우주가 존재하는 듯한, 무한한 대응을 연상시켰다. 비로소 나는 상상할 수 있었다. 이 모형보다도 훨씬 작은, 그러면서도 완전한 금각과 실제의 금각보다도 무한히 커다란, 마치 세계를 감쌀 듯한 금각을.
하지만 내 발은 언제까지고 모형 앞에만 멈추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어서 아버지는 유명한 국보인 요시미쓰상 앞으로 나를 안내하였다. 그 목상은 요시미쓰가 삭발하고 난 후의 이름, 로쿠온 인도노 요시미쓰의 상이라고 불렀다.
그것도 나에게는 검게 그을린 기묘한 우상으로 모였을 뿐 아무런 아름다움도 느낄 수 없었다. 이어서 2층의 조음동에 올라가, 가리노 마사노부(역자주:무로마치 시대의 화가)가 그렸다는 천인주악의 천장화를 보고, 꼭대기의 구경정에 구석구석 남아 있는 초라한 금박의 흔적을 보았으나,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가느다란 난간에 기대어 멍하니 연못 위를 내려다보았다. 연못은 석양을 받아, 녹슨 고대의 구리와도 같은 표면에, 금각의 그림자를 단정하게 드리우고 있었다. 물풀보다도 훨씬 밑에 저녁 하늘이 비치고 있었다. 그 저녁 하늘은 우리들의 머리 위에 있는 하늘과는 달랐다. 그것은 청명하며, 석양을 가득 받아, 아래로부터, 내부로부터, 이 지상의 세계를 통째로 삼키고 있었기에, 금각은 그 속에 검게 녹슨 거대한 순금의 닻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주지인 다야마 도센 스님은 아버지와 선당 시절의 친구였다. 도센 스님과 아버지는 3년에 걸친 선당 생활을 경험하였으나, 두 사람은 그동안에 기거를 같이 한 사이였다. 두 사람은 역시 요시미쓰가 건립한 상국사의 전문 도량에, 전통적인 옥외 기거와 문간방 기거의 절차를 밟아 입문하였다. 뿐만 아니라, 훗날 도센 스님이 기분 좋을 때 한 이야기지만, 아버지와는 이러한 고생만 같이 한 것이 아니라, 취침 시간 후에 담을 넘어 유곽에 드나드는 재미를 같이 본 사이이기도 했다.
우리 부자는 금각 구경을 끝내고 다시 본당의 현관을 찾아갔다. 길고 널찍한 복도를 지나, 유명한 육주송이 있는 정원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대서원의 주지 방으로 안내되었다.
나는 학생복의 무릎을 공손히 꿇고 긴장하여 앉아 있었지만, 아버지는 여기에 오자 갑자기 여유 있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아버지와 이곳의 주지와는, 같은 출신이라도 풍채가 전혀 달랐다. 아버지는 병들어 쇠약하며, 초라한 인상에 까칠까칠한 피부를 하고 있는 반면, 도센 스님은 마치 분홍빛 과자처럼 보였다. 스님의 책상 위에는 화려한 절간답게, 각지에서 보내온 소포나 잡지류, 책, 편지 등이, 개봉도 되지 않은 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스님은 통통하게 살찐 손끝으로 가위를 집더니 소포 하나를 능숙하게 벗겼다.
"도쿄에서 보내온 과자야. 요즈음, 이런 과자는 드물지. 가게에서는 팔지 않고, 군이나 관청에만 납품한다더군."
우리는 차를 마시며,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는 서양 과자 같은 것을 먹었다. 긴장하면 긴장할수록, 가루가 자꾸만 나의 번질거리는 검정색 바지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아버지와 주지는, 군이나 관료가 신사만 중시하고 절을 경시하며, 경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압박까지 하는 데 분개하고는, 앞으로의 절간 경영은 어떤 식으로 해 나갈 것인가 등의 논의를 하였다.
주지는 통통한 체구에, 물론 주름도 있었지만, 주름 하나하나의 속까지도 청결히 씻겨 있었다. 동그란 얼굴에 코가 유달리 길어서, 흘러내린 수액이 응고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한 얼굴과는 달리, 깎아 올린 머리 모양은 위엄이 있었으며, 정력이 머리에 몰려 있는 듯하여, 머리만이 무척 동물적인 느낌을 주었다.
아버지와 주지의 화제는, 승당 시절의 추억담으로 옮겨갔다. 나는 정원의 육주송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거송의 가지가 낮게 뒤엉키며 배 모양을 이루어, 뱃머리 쪽의 가지만이 일제히 높게 솟아 있는 나무였다. 폐문 시간이 다 되어 단체 관람객이 들어온 듯, 담 너머로 금각 쪽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발소리도 목소리도, 봄날의 해질 무렵의 하늘에 흡수되어, 소리가 예리하게 들리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원만하게 들렸다. 발소리가 또한 썰물처럼 멀어져 가는 것이, 과연 지상을 거쳐가는 중생의 발소리라고 여겨졌다. 나는 저물어가는 석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금각 꼭대기의 봉황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이 아이를 말일세... 하고 말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나는 아버지 쪽을 돌아다보았다. 어둠이 짙어진 실내에는 내 장래가 아버지로부터 도센 스님에게로 위탁되고 있었다.
"나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니, 그때에는 저 아이를 말일세."
도센 스님은 과연 형식적인 위로의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알겠네. 책임지지."
놀랍게도, 그 후로 두 사람의 흥겨운 대화는, 여러 명승들의 임종에 얽힌 일화였다. 어떤 명승은 '아아, 죽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며 죽었고, 어떤 명승은 괴테처럼 '좀더 빛을'이라며 죽었고, 어떤 명승은 죽는 순간까지도 절의 돈 계산을 하였다는 것이다.
약석이라고 불리는 저녁 식사를 대접받고, 그날 밤은 절에서 묵기로 하였다. 저녁 식사 후 나는 아버지를 졸라서 다시 한번 금각을 보러 갔다. 달이 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주지와의 오랜만의 대면에 흥분하여 무척 피곤해 있었지만, 금각이라는 말을 듣자, 숨을 헐떡이며 내 어깨를 잡고 따라왔다. 달은 후도 산 언저리에서 떠올랐다. 금각은 뒤쪽으로부터 달빛을 받아 검고 복잡한 그림자를 겹겹이 드리운 채 조용하였고, 구경정의 화두창 틀만이 달의 매끄러운 그림자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구경정에는 벽이 없었기에, 그곳에는 희미한 달빛이 살고 있는 듯이 여겨졌다.
아시하라 섬의 그늘에서 밤새가 소리치며 날아올랐다. 나는 내 어깨에 아버지의 여위어 가늘어진 손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그 어깨에 눈을 주었을 때, 달빛의 조화로, 나는 아버지 손이 백골로 변하여 있는 모습을 보았다.
*
그토록 실망을 주었던 금각도, 야스오카에 돌아온 후 나날이 내 마음속에서 다시 아름다운 금각이 되었다. 어디가 아름답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몽상에 의하여 성장한 것이 일단 현실의 수정을 거쳐, 오히려 몽상을 자극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미 나는 눈에 보이는 풍경이나 사물에서 금각의 환영을 좇지 않게 되었다. 금각은 점차로 깊숙히, 견고하게, 실재하게끔 되었다. 그 기둥 하나하나, 화두창, 지붕, 꼭대기의 봉황 등도, 손으로 만지듯이 선명히 눈앞에 떠올랐다. 섬세한 세부와 복잡한 전모는 서로 상응되어, 음악의 한 소절을 떠올리면 그 전체가 흘러나오듯이, 어느 한 부분을 집어 내어 보아도 금각의 전모가 울려 퍼졌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금각이라고, 아버님이 말씀하신 것은 정말입니다."
하고 처음으로 나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아버지는 나를 숙부 집에 데려다 놓고는 곧바로 쓸쓸한 곶의 절간으로 떠나 버렸다.
곧이어, 어머니에게서 전보가 왔다. 아버지는 심한 객혈을 하고 죽은 것이다.
제2장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하여 나의 진정한 소년 시절은 끝났으나, 자신의 소년 시절에 인간적인 관심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에 나는 놀랐다. 그리고 이 놀라움은, 아버지의 죽음을 내 자신이 조금도 슬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놀라움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일종의 무력한 감회로 변하였다.
내가 달려갔을 때, 아버지는 이미 관 속에 누워 있었다. 왜냐하면, 우치우라까지 도보로 가서, 그곳에서 배를 타고 해안을 따라 나리우로 돌아가는 데에는 하루 종일 걸렸기 때문이다. 계절은 장마 직전의 불볕같이 더운 나날이었다. 내가 대면하고 나면 곧바로 관을 황량한 곳의 화장터로 옮긴 후, 바닷가에서 화장시키기로 되어 있었다.
시골 절간 주지의 죽음이란 특이한 느낌을 준다. 너무도 적절하기에 특이하다. 아버지는 소위 그 지방의 정신적인 중심임과 동시에, 단가 사람들 모두의 생애에 대한 후견인이기도 하며, 그들의 사후를 위탁받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한 아버지가 절에서 죽었다. 그것은 마치, 직무를 너무도 충실히 수행하였다는 감명을 주었기에, 죽는 방법을 가르치며 다니던 사람이 손수 실연하다가 잘못하여 죽은 것 같은, 일종의 과실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실제로 아버지의 관은, 용의주도하게 준비된 곳에 맞추어 넣은 듯이, 너무도 그럴싸한 느낌이 들게끔 놓여 있었다. 어머니와 나이 어린 중과 단가 사람들이 그 앞에서 울고 있었다. 나이 어린 중의 더듬거리는 독경도, 어쩐지 관 속에 있는 아버지의 지시에 따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초여름의 꽃들에 묻혀 있었다. 꽃들은 여전히 기분 나쁠 정도로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꽃들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의 얼굴은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 지니고 있던 존재의 표면으로부터 무한히 함몰되어, 우리들을 향하고 있던 탈의 테두리 같은 것만을 남기고, 두 번 다시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곳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물질이 얼마나 우리들로부터 멀리 존재하며, 그 존재 방법이 얼마나 우리들로부터 소원한가 하는 점을,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여실히 설명해 주는 것은 없었다. 정신이 죽음에 의하여 이토록 물질로 변모함으로써, 비로소 나는 그러한 국면에 접하게 되었으나, 지금 나에게 서서히, 5월의 꽃들이라든지, 태양, 책상, 학교 건물, 연필...그러한 물질이 어째서 그토록 나에게 서먹서먹하고, 나로부터 먼 거리에 존재하는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편, 어머니와 단가 사람들은 나와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대면이 암시하는, 살아 있는 자들이 속한 세계의 유추를, 나의 완고한 마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면이 아니라, 나는 단지 죽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있었다.
시체는 다만 보여지고 있었다. 나는 다만 보고 있었다. 본다고 하는 것, 평소에 아무런 의식도 없이 하고 있는 대로, 본다고 하는 것이, 이토록 살아 있는 자의 권리의 증명이며, 잔혹함의 표시일 수도 있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참신한 체험이었다. 큰소리로 노래 부르는 일도 없고, 소리치며 뛰어다니지도 않는 소년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생을 확인하는 방법을 배웠다.
비굴한 점이 많은 나였지만, 그때, 조금도 눈물에 젖지 않은 밝은 얼굴을 단가 사람들에게 보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절은 바다에 임한 절벽 위에 있었다. 조문객들의 뒤쪽으로는 여름철의 뭉게구름이 일본해 저편을 가로막고 있었다.
발인 전의 마지막 독경이 시작되자, 나는 거기에 참가했다. 본당은 어두웠다. 기둥에 걸린 깃발, 내진 중인방의 장식, 향로나 꽃병 따위가, 등불의 깜박이는 빛을 받으며 반짝이고 있었다. 이따금 바닷바람이 불어 들어, 내 승복의 소매를 부풀게 했다. 나는 독경을 하고 있는 자신의 눈가에, 강렬한 빛을 머금고 있는 여름날의 구름 모습을 끊임없이 느끼고 있었다.
끊임없이 내 얼굴의 한쪽에만 퍼붓는 그 엄청난 빛. 눈부신 그 모멸...
--장례 행렬이 화장터의 한두 구역 앞까지 다다랐을 무렵, 우리들은 돌연히 비를 만났다. 마침 인심 좋은 단가의 앞이었기에, 관과 함께 모두가 비를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행의 비옷을 장만하고, 관에는 기름종이를 덮어서 화장터로 옮겼다.
그곳은 마을 남동쪽으로 불쑥 내민 곳의 밑부분으로, 돌멩이투성이의 조그만 해변이다. 그곳에서 태우는 연기는 마을 쪽으로 번지지 않기에, 옛날부터 그곳이 화장터로 사용되어 온 모양이다.
바위가 많은 그곳 해안은 파도가 유달리 거세다. 파도가 동요하며 부풀어 부서지려는 사이에도, 불안한 수면에는 끊임없이 빗발이 내리치고 있었다. 광택이 없는 빗발은 심상치 않은 해면을 냉정히 꿰뚫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바닷바람이 이따금 빗발을 황량한 암벽에 몰아붙였다. 하얀 암벽은 먹물을 흩뿌려 놓은 듯이 검게 변하였다.
우리들은 터널을 빠져나와 그곳에 도착하여, 인부들이 화장 준비를 하는 동안, 터널 속에서 비를 피하였다.
바다 경치라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파도와 젖어 있는 검은 돌과 비뿐이었다. 기름을 발라 윤기가 나는 관의 나뭇결은 비를 맞고 있었다.
불이 붙여졌다. 배급받은 기름이 주지의 죽음을 위하여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기에, 불은 오히려 빗발을 거역하여, 채찍질하는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대낮의 불길이 엄청난 연기 속에서, 투명한 모습으로 뚜렷이 보였다. 연기는 탐스럽게 겹쳐지면서 조금씩 벼랑 쪽으로 밀려가, 어느 틈엔가, 빗속 한가운데에 불길만이 단정한 모습으로 일고 있었다.
나는 곁에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염주를 양손으로 잡고 서 있었다. 그 얼굴은 몹시 경직되어, 손바닥 안에 들어갈 정도로 단단히 응고되어 작게 보였다.
*
아버지의 유언대로 나는 교토로 가서 금각사의 도제가 되었다. 그때 주지 밑에서 득도하였다. 학비는 주지가 내어 주고 그 대신에 청소를 하거나 주지의 잔심부름 따위를 하게 되었다 일반 가정의 서생과 같은 것이다.
절에 들어와 곧바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성질이 까다로운 사감은 군에 가고, 절에는 노인과 아주 젊은 사람밖에 없었다. 여기에 오니, 여러 가지 점에서 나는 일단 안심할 수 있었다. 일반 중학교처럼, 중놈 자식이라고 놀려 대는 일도 없고, 이곳에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만 있으니까... 나는 말더듬이에다가, 남들보다 약간 추하게 생겼다는 점만이 달랐다.
히가시마이즈루 중학교를 중퇴하고 다야마 도센 스님의 주선으로 린자이 학원 중학교로 전학하게 된 나는, 한 달도 안 있으면 시작되는 가을 학기부터 전학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학교가 시작되면 어차피 곧바로 어딘가의 공장에 근로 동원되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지금 내 앞에는 새로운 환경에서의, 몇 주일 간의 여름 방학이 남아 있었다. 상중의 여름 방학, 쇼와 19년(1944)의 전쟁 말기에 처한 기묘하게도 조용한 여름 방학... 절간의 도제 생활은 규칙 있게 지냈으나, 나에게는 그것이 최후의 절대적인 휴가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의 매미 울음소리도 역력히 들린다.
...수개월 만에 보는 금각은, 늦여름의 햇빛 속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득도 때에 깍은 푸르스름한 머리를 하고 있었다. 공기가 머리에 착 달라붙어 있는 듯한 그 감각, 그것은 자신이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얇고 민감하며 연약한 피부 한 겹을 경계로, 외계의 사물과 접하고 있다는 기묘하고 위험한 감각이다.
그러한 머리로 금각을 올려다보니, 금각은 내 눈에만이 아니라, 머리에도 스며들 듯이 여겨졌다. 그 머리가 햇볕에 뜨거워지고, 저녁 바람에 선선하여지는 것처럼.
'금각이여. 마침내 네 곁에 와서 살게 되었구나.' 하고 나는 빗자루를 든 손을 멈추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릴 때가 있었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좋으니, 언젠가는 나에게 친근감을 보여주고, 나에게 너의 비밀을 알려다오. 너의 아름다움은, 지금 당장에라도 확실히 보일 것 같으면서, 아직 보이지 않는구나. 내 마음속에 그리는 금각보다도, 실물이 훨씬 아름답게 보이도록 해 다오. 그리고 만약에, 네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면, 어째서 그토록 아름다운가, 어째서 아름다워야 하는가를 말해 다오.'
그해 여름의 금각은, 잇달아 비보가 날아드는 전쟁의 어두운 상황을 재물로, 한결 생생히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6월에는 이미 미군이 사이판에 상륙하였고, 연합군은 노르망디의 벌판을 질주하고 있었다. 관람객의 숫자도 눈에 띄게 줄어들어, 금각은 이 고독, 이 정적을 즐기고 있는 듯이 보였다.
전란과 불안, 수많은 시체와 엄청난 피가, 금각의 미를 풍족하게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금각은 불안이 세운 건축, 한 사람의 장군을 중심으로 수많은 어두운 마음의 소유자들이 세운 건축이었던 것이다. 미술사가 양식의 절충밖에 발견하지 못한 3층의 부조화한 설계는, 불안을 결정화할 양식을 추구하여, 자연히 그렇게 만들어진 것임이 틀림없었다. 만약 금각이 하나의 양식으로 세워진 건축이었더라면, 그 불안을 포섭하지 못하고 일찌감치 붕괴되어 버렸으리라.
...그렇다 하더라도, 빗자루를 쥔 손을 멈춘 채 몇 차례고 금각을 우러러보는 나에게는, 그곳에 금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신기하였다. 언젠가처럼, 단 하룻밤, 아버지와 함께 여기를 찾아왔을 때의 금각은, 오히려 이런 느낌을 주지 않았건만, 앞으로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동안, 언제나 금각이 내 눈앞에 있으리라고 생각하니, 믿기 어려운 심정이었다.
마이즈루에서 생각하면, 금각은 교토의 한구석에 항상 있는 것처럼 여겨졌었으나, 여기에 살게 되자, 금각은 내가 볼 때만 내 눈앞에 나타나고, 본당에서 밤잠을 자거나 할 때에는, 금각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때문에, 나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금각을 구경하러 가서, 동료 도제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나에게는 아무리 보아도, 그곳에 금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기하여, 일단 구경한 다음 본당 쪽으로 돌아가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서 다시 한번 보려고 하면, 금각은 에우리디케(역자주: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나무의 요정)처럼, 모습이 홀연히 사라져 없어졌을 것 갖은 느낌이 들었다.
일단 나는 금각 주번의 청소를 끝내고, 서서히 열기를 더해 가는 아침 햇살을 피하여 뒷산에 들어가, 석가정으로 향하는 오솔길을 올라갔다. 개원 전이었기에, 사람 그림자라곤 아무 데도 없었다. 아마도 마이즈루 항공대 소속인 듯한 전투기 일개 편대가, 금각 위를 아주 저공으로, 짓누르는 듯한 굉음을 남기며 지나갔다.
뒷산 안쪽에, 잡초가 부성하고 쓸쓸한, 안민택이라는 못이 있었다. 그 못 가운데에 작은 섬이 있고, 백사총이라 불리는 5층 석탑이 하나 서 있다. 그 주변의 아침은,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시끄러우나, 새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숲 전체가 지저귀고 있는 듯하였다.
연못 바로 앞에는 여름 풀이 무성하였다. 오솔길은 낮은 울타리로 그 풀숲과 구분되어 있었다. 그곳에 하얀 셔츠의 소년이 누워 있었다. 옆쪽의 조그만 단풍나무에는 갈퀴가 기대어 세워져 있었다.
소년은 그 주위에 감도는 여름날 아침의 고요한 공기를 도려낼 듯한 기세로 몸을 일으켰으나, 나를 보더니,
"뭐야, 너니?"
하고 말했다.
쓰루카와라는 그 소년과는 간밤에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쓰루카와의 집은 도쿄 근교의 유복한 절이라, 학비도 용돈도 식량도 풍족히 집에서 받으며 단지 도제 생활을 맛보게끔, 주지의 연고로 금각사에 맡겨져 있었다. 여름 방학에 귀성했다가, 일찌감치 간밤에 돌아온 것이다. 또박또박한 도쿄 말투로 이야기하는 쓰루카와는, 가을부터 린자이 학원 중학교에서 나와 같은 반에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으나, 그 빠르고 쾌활한 말투가 간밤에 이미 나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도, "뭐야, 너니?"라는 말에, 내 입은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나의 무언이 그에게는 일종의 비난처럼 여겨진 모양이었다.
"괜찮아, 그렇게 열심히 청소하지 않아도. 어차피 관람객들이 오면 더러워질 거고, 게다가 관람객 숫자도 적으니까."
나는 빙긋 웃었다. 이렇게 내가 무의식적으로 흘리는 쓸데없는 웃음이, 일부 사람들에게는 친근감을 주는 계기가 되는 모양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언제나 자신이 남에게 주는 인상을 일일이 책임질 수는 없었다.
나는 울타리를 넘어가, 쓰루카와 곁에 앉았다. 다시 주운 쓰루카와의 머리에 베인 팔은, 바깥쪽은 상당히 햇볕에 그을었지만, 안쪽은 정맥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하얬다. 그곳에 나무 사이로 비치는 아침 햇살이, 풀잎의 엷고 푸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나는, 이 소년이 아마도 나만큼은 금각을 사랑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금각에의 집념을, 오로지 자신의 추한 모습 탓으로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며?"
"응."
쓰루카와는 재빨리 눈동자를 움직이며, 소년다운 추리에 열중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고, "네가 금각을 정말로 좋아하는 건, 그걸 보면, 아버지 생각이 나기 때문이니? 가령 아버님이 금각을 아주 좋아하셨다든지 말이야."
절반 맞은 이 추리도, 나의 무감동하게 생긴 얼굴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했다고 느낀 나는, 그것이 약간 기뻤다. 쓰루카와는 인간의 감정을, 곤충 표본 만들기를 좋아하는 소년이 곧잘 그러하듯이, 자기 방의 잘 정돈된 서랍에 가지런히 분류해 놓고는, 때때로 그것을 꺼내어 그 자리에서 살펴보는 따위의 취미가 있는 듯했다.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몹시 슬펐겠지? 그래서 넌 슬픈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거로구나. 어젯밤의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거든."
이런 말을 들으니, 나는 아무런 반발심도 느끼지 않고, 자신이 쓸쓸해 보였다는 상대방의 감상으로부터 일종의 안심과 자유를 획득하여, 말이 거침없이 나왔다.
"별로 슬플 건 없어."
쓰루카와는 성가실 정도로 긴 속눈썹을 올려서 이쪽을 모았다.
"그래? 그럼 넌, 아버님을 미워했니? 아니면 싫어했니?"
"미워한 것도 아니고, 싫어하지도 않았어..."
"그래? 그렇다면 어째서 슬프지 않니?"
"어쩐지, 그래."
"모르겠군."
쓰루카와는 난문에 봉착하여, 풀 위에 다시 일어나 앉았다.
"그렇다면, 그 밖에 더 슬픈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지?"
"뭔지, 몰라."
하고 나는 말했다. 말하고 나서, 나는 남에게 의문이 일게 만드는 것을 어째서 좋아하는지 반성하였다. 내 자신에게 있어서 그것은 의문도 아무것도 아니다. 자명한 사실이다. 내 감정에도, 말더듬 증세가 있었던 것이다. 내 감정은 언제나 시기를 놓쳐 버린다. 그 결과,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사건과 슬픔이라는 감정이 각기 다른, 고립된, 서로 연결되지 않고 서로 침범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미미한 시간의 엇갈림, 미미한 지체가 언제나 내 감정과 사건과를 전혀 다른, 마치 그것이 본질적으로 무관한 듯한 상태로 바꾸어 버린다. 나에게 슬픔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어떠한 사건이나 동기와도 관련 없이, 돌발적으로, 이유도 없이 나를 엄습하리라...
...또다시 나는 이러한 모든 사실을 눈앞의 새 친구에게 설명하지 못하고 말았다. 쓰루카와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넝말, 별난 친구로군."
그가 입은 셔츠의 하얀 복부가 파도쳤다. 그 위에 움직이고 있는 햇살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이 친구 셔츠의 주름살처럼, 내 인생은 주름살투성이다. 하지만 이 셔츠는 어째서 이토록 하얗게 빛나는 것일까, 구겨져 있는데도... 혹시나 나도?
속세와는 관계없이, 선찰은 선찰의 관습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여름이라서 매일 아침 늦어도 5시에는 기상한다. 기상하는 것을 개정이라고 한다. 일어나면 곧바로 조과인 독경이다. 삼시회향이라 하여, 세 번 읽는다. 그리고는 옥내 청소를 하고, 걸레질을 한다. 아침 식사는 죽좌이다.
죽유십리
요익행인
과보무변
구경상락
이 죽좌의 경을 읽고, 죽을 먹는다. 식후에 풀뽑기, 마당 청소, 장작 패기 등의 작업을 한다. 학기가 시작되면, 그 일을 끝낸 다음 학교에 갈 시간이 된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곧 약석이다. 그 다음에 이따금, 주지가 경전 강의를 해 주는 일이 있다고 한다. 9시에는 개침, 즉 취침을 한다.
내 일과는 이상과 같으며, 매일 기상하는 신호는 주방 담당인 전좌가 울리며 다니는 종소리였다.
금각사, 즉 녹원사에는 본디 12~13명의 사람들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소집이나 징병으로, 70세가 넘은 안내원과 접수원, 60세에 가까운 취사부 이외에는, 집사, 부집사, 그리고 우리 도제들 3명이 있을 뿐이었다. 노인들은 이끼가 낀 산송장이나 다름이 없고, 소년들은 요컨대 아직 어린애였다. 집사를 부사라고 하는데, 회계일로 항상 바빴다.
며칠 후, 나는 주지 -우리는 그를 노사라고 불렀다-의 방에, 신문을 갖다 주는 역할을 맡았다. 신문이 오는 것은 조과가 끝나고, 걸레질이 끝날 무렵의 시간이었다. 적은 인원으로 짧은 시간에 방이 30개나 되는 절간의 복도를 닦자니, 자연히 일을 대충대충 하게 된다. 현관에서 신문을 집어, 사환 방 앞의 복도를 지나, 객실 뒤쪽을 한 바퀴 돌아, 중간 복도를 건너서, 노사가 있는 대서원까지 간다. 거기까지의 복도는, 적당히 마르겠지 하는 생각에, 양동이의 물을 거의 퍼붓다시피 하며 걸레질을 하기 때문에, 바닥의 움푹한 곳에는 군데군데 물이 고인 채로 아침 햇살에 반사되며 발목까지 적신다. 그것이 여름철이라, 기분 좋게 느껴진다. 하지만 노사의 방문 밖에 무릎을 꿇고, "신문입니다."
하고 알린 후,
"으응."
하는 대답을 듣고서 방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젖은 발을 승복의 옷자락으로 재빨리 닦아 두는 비법을, 나는 동료들로부터 배웠다.
나는 인쇄 잉크가 내뿜는, 속세의 선명하고 강렬한 냄새를 맡으며, 신문의 큰 표제를 흘낏흘낏 들여다보면서 복도를 바삐 걸었다.
이상하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나는 금각을 공습과 결부시켜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이판이 함락된 이후로 본토 공습도 불가피하게 되었기에 교토 시의 일부에도 강제 소개령이 내려졌으나, 그래도 금각이라는 반영구적인 존재와 공습이라는 재앙과는, 나의 내부에서 서로 무관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금강불괴의 금각과 과학적인 불과는 서로 이질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마주치더라도 서로 슬쩍 몸을 비킬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금각은, 공습의 불길에 타 없어질지도 모른다. 이대로 간다면, 금각이 재로 변할 것은 확실하였다.
...이러한 생각이 싹트면서, 금각은 다시금 그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더하여 갔다.
내일이면 학교가 시작되는, 여름 방학의 마지막 날 오후였다. 주지는 부집사를 동반하여, 어딘가의 법사를 부탁받아 외출하고 없었다. 쓰루카와는 나에게 영화 보러 가자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기에, 그도 곧 포기하였다. 쓰루카와에게는 그런 점이 있었다.
우리 둘은 몇 시간의 휴식을 얻어, 카키색 바지에 각반을 두르고 린자이 학원 중학교의 제모를 쓰고는 본당을 나섰다. 햇볕이 뜨거운 여름철의 대낮이라, 관람객은 한 사람도 없었다.
"어디로 갈까?"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여, 어딘가로 가기 전에 금각을 차분히 봐두고 싶어, 내일부터는 이 시간에 금각을 볼 수 없을 테고, 우리가 공장에 가 있는 사이에 금각은 공습으로 불타 버릴지 몰라, 하고 말했다. 나의 우물거리는 대답은 중간중간 더듬거렸고, 쓰루카와는 그 동안에 질린 듯이 답답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그것밖에 이야기하지 않았는데도 내 얼굴에는, 무언가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고 난 다음처럼 심하게 땀이 흘렀다. 금각에 대한 나의 기묘한 집념을 털어놓은 상대는 오로지 쓰루카와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듣고 있는 쓰루카와의 표정에는, 나의 더듬거리는 말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초조감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이러한 얼굴에 직면한다. 중요한 비밀을 고백할 때에도, 미에 대한 격렬한 감동을 호소할 때에도, 자신의 내장을 꺼내어 보여주는 듯한 경우에도, 내가 직면하는 것은 이러한 얼굴이다. 인간은 평소에 인간을 향하여 이러한 얼굴을 하면 안 된다. 그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충실히, 나의 우스꽝스러운 초조감을 그대로 흉내 내어, 마치 나의 무시무시한 거울처럼 변하여 있었다. 아무리 잘생긴 얼굴이라도, 그럴 때에는, 나와 똑같이 추한 얼굴로 변모한다. 그것을 본 순간, 내가 표현하려고 생각했던 중요한 것들은, 기왓장이나 다를 바 없는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쓰루카와와 나 사이에는, 여름철의 강렬한 직사광선이 있었다. 쓰루카와의 젊은 얼굴은 기름기로 번질거렸고, 햇빛 속에서 속눈썹이 하나하나 금빛으로 불타올랐으며, 찌는 듯한 열기로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내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말을 끝냈다. 끝냄과 동시에 화가 치밀었다. 쓰루카와는 처음 만난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내가 말더듬이라는 것을 놀려대려고 하지 않았다.
"왜지?"
나는 그렇게 다그쳤다. 동정보다도, 비웃음이나 모멸 쪽이 훨씬 내 맘에 든다는 사실은, 수차 언급한 바와 같다.
쓰루카와는 더없이 다정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난, 그런 건 조금도 상관하지 않는 성격이거든."
나는 놀랐다. 시골의 거친 환경에서 자란 나는, 이러한 종류의 다정함을 몰랐다. 나라는 존재로부터 말더듬 증세를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나일 수 있다는 발견을, 쓰루카와의 다정함이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나는 홀딱 발가벗겨진 상쾌감을 몸 전체로 느꼈다. 쓰루카와의 기다란 속눈썹에 둘러싸인 눈은, 나에게서 말더듬 증세만을 여과시켜, 나를 받아들이고 바로, 나라는 존재를 말살당하는 것이다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감정의 조화와 행복을 느꼈다. 그때 보았던 금각의 정경을 내가 오랫동안 잊지 못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우리 둘이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접수 담당 노인의 앞을 지나, 인적이 없는 길을 담벼락 따라 바삐 걸어서, 금각 앞으로 갔다.
...나는 생생히 기억할 수 있다. 연못가의 한구석에, 각반을 두르고 흰 셔츠를 입은 소년 둘이서 어깨동무를 하고 서 있다. 그 두 사람 앞에, 금각이, 아무것에도 가로막히지 않은 채 존재하고 있었다.
마지막 여름, 마지막 여름 방학, 그 마지막 하루...우리들의 젊음은 어지러울 정도의 벼랑 끝에 서 있었다. 금각도 역시 우리들과 같은 벼랑 끝에 서서, 대면하고 대화하였다. 공습에 대한 기대가, 이처럼 우리들과 금각을 가깝게 만들었다.
늦여름의 고요한 일광이 구경정의 지붕에 금박을 입히고, 곧바로 내리쏟는 빛은, 금각의 내부를 밤과 같은 어둠으로 가득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는 이 건축의, 불후의 시간이 나를 압박하며, 나를 멀리하고 있었으나, 머지않아 소이탄의 불에 타 버릴 그 운명은, 우리들의 운명으로 접근해 왔다. 금각은 어쩌면 우리들보다 먼저 멸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금각은 우리들과 같은 생을 살고 있는 듯이 여겨졌다.
금각을 에워싼 소나무의 산들은 매미소리로 가득하였다. 셀 수 없이 많은 보이지 않는 중들이 소재주를 외고 있는 것처럼. "갸갸. 갸키 갸키. 운눈. 시후라시후라. 하라시후라하라시후라."
이 아름다운 것이 머지않아 재가 되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에 따라서, 심상의 금각과 현실의 금각은, 생견을 대고 덧그린 그림을 원래의 그림 위에 겹쳐 놓듯이, 서서히 그 세부가 서로 겹치어, 지붕은 지붕에, 연못으로 돌출한 수청은 수청에, 조음동의 난간은 난간에, 구경정의 화두창은 화두창에 겹쳐지게 되었다. 금각은 이미 부동의 건축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위 현상계의 덧없는 상징으로 바뀌었다. 현실의 금각은, 이렇게 생각하니, 심상의 금각과 다를 바 없이 아름답게 보였다.
내일,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면, 그 가느다란 기둥, 그 우아한 지붕의 곡선은 재로 변하여, 두 번 다시 우리들 눈에 띄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앞에는, 섬세한 모습이, 여름의 불덩이 같은 빛을 흠뻑 받으며, 태연자약하게 있었다.
산모퉁이에는 아버지가 침경을 외는 동안 내가 눈가에 느꼈던 것과 같은, 여름 구름이 위엄 있게 솟아 있었다. 그 구름은 울적한 빛은 머금은 채 이 섬세한 건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금각은 이토록 강렬한 늦여름의 햇살 아래서는, 세부의 정취를 잃고, 내부에 컴컴하고 차가운 어둠을 품은 채, 다만 그 신비한 윤곽으로 번쩍이는 주위의 세계를 거부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꼭대기의 봉황은 홀로, 태양에 비틀거리지 않으려고 날카로운 발톱을 세워 대좌를 꽉 붙잡고 있었다.
나의 기나긴 웅시에 질린 쓰루카와는, 발 밑의 돌멩이를 주워서 멋진 투수 폼으로 그것을 연못에 비친 금각의 투영 한가운데에 던졌다.
파문은 수면의 물풀을 밀며 번져 나가더니 순식간에 아름답고 정교한 건축을 무너뜨렸다.
*
그로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의 1년간이, 내가 금각과 가장 친했고, 그 안부를 걱정하며, 그 아름다움에 빠졌던 시기이다. 다시 말해서, 금각을 나와 같은 높이까지 끌어내려, 그러한 가정하에, 두려움 없이 금각을 사랑할 수 있었던 시기이다. 나는 또한 금각으로부터 나쁜 영향, 혹은 그 독을 받지 않았다.
이 세상에 나와 금각에게 공통되는 위험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고무하였다. 미와 나를 연결시키는 매체를 발견한 것이다. 나를 거절하며 나를 소외시키고 있는 듯이 여겨졌던 것과의 사이에, 다리가 놓였다고 느꼈다.
나를 태워 죽일 불이 금각도 태워 없애 버리라는 생각은, 나를 거의 도취시켰다. 똑같은 재앙, 똑같은 불의 불길한 운명 아래에서, 금각과 내가 사는 세계는 거의 동일한 차원에 속하게 되었다. 나의 연약하고 보기 흉한 육체와 마찬가지로, 금각은 단단하면서도 불타기 쉬운 탄소의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때로는, 도망치는 도둑이 고귀한 보석을 삼켜서 숨기듯이, 내 육체의 속, 내 조직 속에 금각을 숨겨 갖고 도망칠 수도 있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1년간, 내가 경도 배우지 않고 책도 읽지 않고, 매일같이 수신과 교련과 무도, 그리고 공장이나 강제 소개를 도우며 지냈다는 사실을 생각해 주기 바란다. 나의 꿈꾸기 좋아하는 성격은 더욱더 그러한 성향을 더해 갔고, 전쟁 덕분에 인생은 나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전쟁이란 우리 소년들에게 있어서, 단순히 꿈처럼 실속 없이 바쁜 체험이며, 인생의 의미로부터 차단된 격리 병실과도 같은 것이었다.
쇼와 19년(1944) 11월, B29의 도쿄 폭격이 있었던 당시는, 교토 역시 내일이라도 공습을 당할 듯이 여겨졌다. 이 도시는 너무도 낡은 것들을 원래의 모습대로 지키고 있었고, 수많은 신사나 불당들은 그 속에서 생겨났던 작렬하는 재의 기억을 잊고 있었다. 오닌의 난이 얼마나 이 도시를 황폐시켰는가를 상상하면, 나는 교토가 너무나 오랫동안 전화의 불안을 잊고 있었기에, 그 아름다움의 일부를 상실 한 것이리라고 생각하였다.
내일이야말로 금각이 불타리라,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 형태가 사라지니라... 그 순간 꼭대기의 봉황은 불사조처럼 되살아나 날아가리라, 그리고 형태에 속박되어 있던 금각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닻에서 벗어나 도처에 모습을 나타내어, 호수 위에도 어두운 바다의 조수 위에도, 희미한 빛을 흩뿌리며 자유로이 떠돌아다니겠지...
기다려도 기다려도 교토는 공습을 당하지 않았다. 이듬해 3월 9일, 도쿄의 번화가가 불에 휩싸였다는 소식을 들었건만, 재화와는 무관히 교토의 상공에는 투명한 초봄의 하늘만이 있었다.
나는 거지반 절망에 빠져서 기다리며, 이 초봄의 하늘이, 마치 반짝이는 유리창처럼 내부를 보여 주지는 않지만, 내부에는 불과 파멸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였다. 나에게 인간적인 관심이 희박하다는 사실은 이미 기술한 바와 같다. 아버지의 죽음도, 어머니의 빈곤도, 거의 나의 내면 생활을 좌우하지 않았다. 나는 다만 재화를, 큰 파국을, 인간적인 규모를 초월한 비극을, 인간도 물질도, 추한 것도 아름다운 것도, 깡그리 동일한 조건하에서 말살시켜 버릴 거대한 하늘의 압착기와도 같은 것을 꿈꾸고 있었다. 때로는 초봄 하늘의 심상치 않은 광채가, 지상을 덮어 버릴 정도로 커다란 도끼날의 시퍼런 빛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단지 그 낙하를 기다렸다. 생각할 틈도 주지 않을 정도로 신속한 낙하를.
나는 지금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점이 있다. 원래 내가 암흑의 사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내 관심은, 나에게 주어진 난문은 미뿐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나에게 작용하여 암흑의 사상을 품게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겠다. 미라는 것만을 골똘히 생각하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암흑적인 사상에 자기도 모르게 직면하게 된다. 인간은 아마도 그렇게 만들어진 모양이다.
전쟁 말기에 교토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하나 생각난다. 그것은 거의 믿기지 않는 사실이지만, 목격자는 나 하나가 아니다. 내 곁에는 쓰루카와도 있었다.
정전일인 어느 날, 나는 쓰루카와와 함께 남선사에 갔다. 아직 남선사를 가 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넓은 드라이브웨이를 가로질러, 인클라인(역자주: 비탈, 사면)에 걸쳐진 나무다리를 건넜다.
5월의 맑게 갠 날이었다. 인클라인은 대부분 잡초에 뒤덮여 있었다. 그 잡초에는 희고 작은 십자형의 꽃들이 바람에 산들거리고 있었다. 인클라인의 경사면이 시작되는 곳까지 더러운 물이 고여, 이쪽 둔덕의 벚나무 가로수의 그림자를 완전히 적시고 있었다.
우리들은 그 작은 다리 위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이 수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쟁 중의 추억에는 군데군데, 이러한 짧고 무의미한 시간이 선명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으며 지내던 방심의 짧은 시간이, 때때로 구름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처럼 군데군데 남아 있다. 그러한 시간이 마치 통렬한 쾌락의 기억처럼 선명한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정말 좋군."
하고 나는 또, 아무런 의미도 없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응."
쓰루카와도 나를 보며 미소지었다. 둘이는 이러한 2, 3시간이 자신들의 시간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넓은 자갈길이 계속되는 곁으로 아름다운 물풀을 흔들며 맑고 차가운 물이 흐르는 개천이 있었다. 이윽고 유명한 산문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절 안에는 전혀 인기척이 없었다. 신록 속으로 수많은 탑두의 기왓장이, 녹슨 은빛 책을 덮어 놓은 듯이 튀어나와 있었다. 전쟁이라는 것이 이 순간에는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특정한 장소, 특정한 시간에 있어서 전쟁은 인간의 의식 속에만 존재하는 기괴한 정신적 사건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이시카와 고에몬(역자주:이즈치 모모야마 시대의 전설적인 도적)이 그 누상의 난간에 발을 걸치고, 활짝 핀 꽃들을 즐겼다는 곳은 아마도 이 산문이리라, 우리들은 아이들 같은 기분에서, 이미 꽃이 져 버린 계절이었지만, 고에몬과 같은 포즈로 경치를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안 되는 입장료를 내고는, 색이 완전히 검게 변색되고 경사가 급한 나무 계단을 올라갔다. 거의 다 올라간 곳은 층계참에서 쓰루카와가 천장에 머리를 부딪쳤다. 그것을 보고 웃던 나도 곧이어 부딪쳤다. 둘이는 한 바퀴 돌아서 계단을 올라가, 누상으로 나갔다.
동굴같이 좁은 계단에서 웅장한 경관 앞으로 단숨에 몸을 드러내는 긴장감은 상쾌하였다. 무성한 벚나무와 소나무, 그 건너의 가옥들 저편에 위치한 헤이안 신궁의 숲, 교토 시가지의 끝부분에 희미하게 보이는 아라시 산, 기타노카타, 기부네, 미노노우라, 곤피라 등의 산들이 늘어선 모습, 이러한 경치를 마음껏 즐기고 나서, 절간의 도제답게, 신발을 벗고 공손히 당리로 들어갔다. 어두운 어당에는 24장의 다다미를 깡아 놓은 곳에, 석가상을 중앙으로 16나한들의 금빛 눈동자가 어둠에 빛나고 있었다. 여기를 오봉류라고 한다.
남선사는 같은 임제종이라도, 상국사파의 총본산이다. 우리는 동종이파의 절에 소속되어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일반 중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둘이는 안내서를 손에 들고 가리노탄유 모리노부(역자주:에도 시대 초기의 화가)와 도사호겐 도쿠에쓰가 그렸다는 선명한 색채의 천장화를 둘러보았다.
천장의 한쪽에는, 비상하는 천인과, 그가 연주하는 비파와 피리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다른 쪽에는 하얀 모란을 받쳐 든 가릉빈가가 날개 치고 있었다. 그것은 천축설산에 살며 기묘한 소리를 내는 새로, 상반신은 탐스러운 여자 모습을 하고, 하반신은 새 모습이었다. 또한 중앙의 천장에는 금각 꼭대기에 있는 새와 같은 종류이지만, 그 위엄에 넘치는 금빛 새와는 전혀 달리, 화려한 무지개 같은 봉황이 그려져 있었다.
석존상 앞에서, 우리는 무릎 꿇고 합장하였다. 어당을 나섰다. 하지만 누상에서 떠나기 싫었다. 그래서 올라왔던 계단 옆의 남쪽으로 향한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나는 어딘지 모르게 무언가 아름답고 자그마한 색채의 소용돌이 같은 것을 느꼈다. 그것은 지금 보고 온 천장화의 천연색 잔상인 듯 여겨지기도 하였다. 풍부한 색이 응집된 느낌은, 가릉빈가를 닮은 새가 눈앞의 신록이나 소나무 숲 어딘가의 가지에 숨어서, 화려한 날개 끝을 살짝 엿보이고 있는 듯하였다.
그것이 아니었다. 우리들 눈 아래에는, 길 건너로 천수암이 있었다. 나지막한 나무들을 간소하게 심어 놓은 한적한 정원을, 네모난 돌의 모서리만 맞대어 늘어놓은 돌길이 꼬불꼬불 가로질러, 문을 활짝 열어 놓은 방으로 통하고 있었다. 방안에는 장식벽과 선반이 모두 보였다. 그곳은 자주 헌차를 행하거나, 다과회 장소로 대여되는 듯, 주홍색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젊은 여자가 혼자 앉아 있었다. 내 눈에 비친 것은 그것이었다.
전쟁 중에 이토록 화려한 기모노의 여자 모습을 보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런 복장으로 집을 나섰다가는, 길가에서 주의를 받고 되돌아가야만 하리라. 그럴 정도로 그 복장은 화려하였다. 자세한 무늬는 보이지 않았지만, 옥색 바탕에 꽃무늬가 그려져 있거나 새겨져 있었고, 주홍색 허리띠에도 금실이 빛나는 모습이, 과장하여 말하자면, 주위가 빛나고 있는 듯하였다.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단정하게 앉아 있었기에, 그 하얀 옆얼굴이 독보여, 정말로 살아 있는 여자인지 의심스러웠다.
"저건, 도대체, 살아 있는 건가?"
"나도 지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인형 같군."
쓰루카와는 난간에 가슴을 딱 밀어붙인 채, 눈도 떼지 않고 대답했다.
그때 안에서, 군복 차림의 젊은 육군 사관이 나타났다. 그는 예의바르게 여자의 한두 자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여자와 대면하였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은 가만히 마주 앉아 있었다.
여자가 일어섰다. 조용히 복도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여자는 찻잔을 받쳐 들고, 산들바람에 긴 소맷자락을 날리며 돌아왔다. 사내 앞에서 차를 권하였다. 예법대로 묽은 차를 권하고 나서,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사내가 무엇인가 말했다. 사내는 좀처럼 차를 마시지 않았다. 사내가 무엇인가 말했다. 사내는 좀처럼 차를 마시지 않았다. 그 시간이 기묘하게도 길고, 기묘하게도 긴장되는 듯이 여겨졌다. 여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진 것은 그 다음이다. 여자는 자세를 바로 한 채, 갑자기 옷깃을 풀었다. 내 귓전에는 뻣뻣한 허리띠를 안쪽에서 잡아당기는 비단소리가 들려오는 듯하였다. 하얀 가슴이 드러났다. 나는 숨을 죽였다. 여자는 하얗고 풍만한 젖가슴의 한쪽을, 그대로 자기 손으로 꺼냈다.
사관은 짙은 색 찻잔을 받쳐 들고, 여자 앞에 무릎 꿇은 채로 다가갔다. 여자는 젖가슴을 양 손으로 주물렀다.
나는 그 장면을 보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짙은 색 찻잔 속에서 거품을 띄우고 있는 연둣빛 차에, 희고 따듯한 젖이 뿜어나와, 방울을 남기며 잔 속에 담기는 모야, 고요한 차의 표면이 하얀 젖으로 흐려져 거품을 일으키는 모양을, 바로 눈앞에 보듯이 역력히 느꼈다.
사내는 찻잔을 들고, 그 기이한 차를 남김없이 마셨다. 여자의 하얀 가슴도 감추어졌다.
우리 둘은 긴장하여 이 광경을 바라보았다. 나중에 차분히 생각하니, 그것은 사관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와 싸움터로 나가는 사관과의, 이별의 의식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하지만 그 당시의 감동은, 어떠한 해석도 불가능하였다. 너무도 넋을 잃고 바라보았기에, 어느 틈엔가 남녀가 방에서 모습을 감추고, 넓은 주홍빛 양탄자만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나는 그 하얗게 돋보이던 옆얼굴과, 더없이 하얀 가슴을 보았다. 그리고 여자가 사라진 뒤, 그날 하루의 나머지 시간도,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나는 집요하게 생각하였다. 분명히 그 여자는, 되살아난 우이코임에 틀림없다고.
제3장
아버지의 1주기가 되었다. 어머니는 기묘한 생각을 해내었다. 근로 동원 중인 나의 귀향이 어렵기 때문에 어머니 자신이 아버지의 위패를 갖고 올라와, 다야마 도센 스님의 독경을 옛 친구의 기일에 단 몇 분이라도 부탁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원래 돈은 없으니, 단지 자비심을 기대하고 스님에게 편지를 보냈다. 스님은 승낙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뜻을 나에게도 전하였다.
나는 그 소식을 기쁜 마음으로 듣지는 않았다. 이제까지, 고의로 어머니에 관하여 붓을 생략해 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 어머니에 관하여는 그다지 언급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모종의 사건에 관하여, 한마디도 어머니를 책망한 적이 없다. 입 밖에 낸 적도 없다. 어머니도 분명히, 내가 그 일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그 사건 이래로, 내 마음은 어머니를 용서하지 않고 있었다.
히가시마이즈루 중학교에 입학하여, 숙부 집에 맡겨진 후, 1학년 여름 방학이 되어 처음으로 귀성하였을 때의 일이다. 그 무렵 어머니의 친척인 구라이라는 사내가, 오사카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나리우로 돌아왔으나, 그 부인은 자기 소유의 집이라는 이유로 그를 받아 주지 않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형편이 풀릴 때까지 구라이는 아버지의 절에 기거하게 되었다.
우리 절에는 모기장이 몇 개밖에 없었다. 요행히도 감염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어머니와 내가 결핵인 아버지와 같은 모기장에서 자는 곳에 구라이가 끼어들었다. 나는 여름날 한밤중에 정원수 사이로, 찌릭찌릭 하는 무언가에 얽힌 듯이 짤막한 울음소리를 내며 매미가 날아다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그 소리에 나는 잠을 깬 듯하다. 파도소리가 높았고 바닷바람은 모기장의 연둣빛 자락을 흔들었다. 모기장의 흔들림이 심상치 않았다.
모기장은 바람에 부풀었다가, 바람을 여과시킨 후, 부자연스럽게 흔들렸다. 그렇기 때문에 바람에 밀리는 모기장의 모양은, 바람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는 관계없이 각도가 변하였다. 다다미를 대나무 잎사귀처럼 비벼 대는 소리는, 모기장 자락이 내는 소리였다. 그러나 바람에 의한 것과는 다른 움직임이 모기장에 전하여져 왔다. 바람보다도 미세한 움직인. 모기장 전체에 잔물결처럼 번지는 움직임, 그것이 성긴 천을 팽팽히 당겨 대며, 안쪽에서 보는 커다란 모기장 전체를 불안으로 가득한 호수의 수면, 안쪽에서 보는 커다란 모기장 전체를 불안으로 가득한 호수의 수면처럼 만들었다. 호수 위에 멀리 떠 있는 배가 일으키는 파도의 첫 도래, 혹은 이미 지나간 배가 남긴 여파의 먼 반영...
나는 조심스레 눈길을 그 근원지로 돌렸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크게 뜬 눈이, 송곳에 찔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4명에게는 비좁은 모기장 속에서, 아버지의 옆에서 자고 있던 나는, 몸을 뒤척이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아버지를 한구석으로 몰아붙였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와 내가 본 것과의 사이에는, 주름살 투성이의 하얀 시트가 있었고, 내 등뒤에서 웅크린 자세로 자고 있는 아버지의 숨결이 내 목 언저리에 직접 닿았다.
아버지가 잠을 깬 사실을 안 것은, 기침을 참으려는 호흡이 거칠고 불규칙하게 내 등에 닿았기 때문이다. 그때 갑자기, 열세 살인 내가 뜨고 있는 눈은, 크고 따뜻한 물체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곧 알아차렸다. 아버지의 두 손바닥이 등뒤로부터 뻗어나와 내 눈을 가린 것이었다.
지금도 그 손바닥의 기억은 살아 있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한 손바닥. 등뒤에서 넘어와, 내가 보고 있던 지옥을 순식간에 그 눈으로부터 뒤덮어 가려 버린 손바닥. 타계의 손바닥. 사랑인지, 비애인지, 굴욕 때문인지는 모르나, 내가 접하고 있던 끔찍한 세계를 순식간에 중단시키고, 어둠 속에 묻어 버렸던 손바닥.
나는 그 손바닥 속에서 가볍게 끄덕였다. 양해와 합의가, 내 자그마한 얼굴의 끄덕임으로 즉시 전하여지자, 아버지의 손바닥은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손바닥이 명령하는 대로, 손바닥이 치워진 다음에도, 불면의 아침이 밝아 와서 눈꺼풀이 눈부신 햇살을 통과시킬 때까지, 완고히 눈을 감고 있었다.
--훗날, 아버지의 발인 때에, 내가 그 죽은 얼굴을 보기에 급급하여,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점을 상기해 주기 바란다. 그 죽음과 더불어 손바닥의 속박은 해제되고, 내가 오로지 아버지의 얼굴만 바라보는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확인하였다는 점을 상기하여 주기 바란다. 나는 그 손바닥, 소위 세상 사람들이 애정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이토록 성실한 복수를 잊지 않았지만, 어머니에 대하여는, 그 기억을 용서할 수 없는 것과는 별도로, 나는 여태까지 한 번도 복수를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기일 전날 금각사에 와서 하룻밤 묵게끔 되었다. 기일 당일은 나도 학교를 쉴 수 있도록 주지가 편지를 써 주었다. 근로 동원은 절에서 다니고 있었다. 그 전날이 되자 나는 녹원사로 돌아가기가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투명하고 단순한 마음을 지닌 쓰루카와는 오랜만의 어머니와의 대면을 기뻐해 주었고, 절간 동료들도 호기심을 품고 있었다. 나는 가난하고 초라한 어머니가 싫었다. 어째서 내가 어머니와 만나고 싶지 않은가를, 친절한 쓰루카와에게 설명하느라 애를 먹었다. 게다가 그는 공장이 끝나자마자,
"자, 뛰어서 돌아가자."
하고 내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내가 전혀 어머니와 만나고 싶지 않다는 건 과장이다. 어머니가 그립지 않을 리가 없다. 단지 나는 육친의 노골적인 애정의 발로에 그립지 않을 리가 없다. 단지 나는 육친의 노골적인 애정의 발로에 직면하기가 싫었기에, 그 때문에 갖가지 이유를 붙여 본 것에 지나지 않을 리가 없다. 단지 나는 육친의 노골적인 애정의 발로에 그립지 않을 리가 없다. 단지 갖가지 이유를 붙여 본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나의 나쁜 성격이다. 하나의 솔직한 감정을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서 정당화시키는 동안은 좋으나, 때로는 자신의 두뇌에서 만들어 낸 무수한 이유들이 자신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감정을 나에게 강요하게 만든다. 그 감정들은 원래의 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 혐오감만큼은 어딘가 정확한 데가 있다. 내 자신이, 혐오해야 할 인간이기 때문이다.
"뛰어 봤자 소용없어. 힘만 들지. 다리를 끌며 가면 된다구."
"그래서 어머님께 동정을 받아, 어리광부릴 작정이로군."
쓰루카와는 언제나 이런 식의 오해로 가득한 나의 해설자였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는 조금도 성가시지 않은, 필요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는 나에게 정말로 선의의 통역자, 내 말을 현세의 말로 번역해 주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그렇다. 때로는 쓰루카와가, 납에서 황금을 만들어 내는 연금술사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사진의 음화, 그는 양화였다. 한 번 그의 마음으로 여과되면, 나의 혼탁하고 어두운 감정이 하나도 남김없이 투명한 빛을 발하는 감정으로 변하는 것을, 나는 몇 번이나 놀라움에서 바라보았던가! 내가 말을 더듬으며 주저하고 있는 사이에, 쓰루카와의 손이 내 감정을 뒤집어서 외부로 전하여 준다. 이러한 놀라움에서 내가 배운 것은, 단지 감정에 머물러 있는 한에는, 이 세상의, 최악의 감정도 외선의 감정도 차이가 없다는 것, 그 효과는 마찬가지라는 것, 살의도 자비도 겉보기는 다를 바 없다는 것 등이었다. 입이 닳도록 설명하여도 쓰루카와에게는 이러한 사실들이 믿어지지 않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엄청난 발견이었다. 쓰루카와 덕분에 내가 위선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위선이 나에게는 상대적인 죄에 불과하였다는 점도 이유가 되었다.
교토에서는 공습을 당하지 않았으나, 공장에서 출장 명령을 받고는 비행기 부품의 발주 서류를 갖고 오사카의 본사에 갔을 때, 우연히 공습이 있었기에, 창자가 노출된 공장 노동자가 들것으로 운반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어째서 노출된 창자는 처참한 것일까? 어째서 인간의 내부를 보면 끔찍해서 눈을 가려야만 하는가? 어째서 피의 흐름이 사람에게 충격을 줄까? 어째서 인간의 내장이 추한 것일까? 그것은 매끄럽고 젊음에 넘치는 피부의 아름다움과 완전히 동질의 것이 아닌가? 내가 자신의 추함을 무로 돌리는 이러한 생각을 쓰루카와에게서 배웠다고 한다면, 그는 어떠한 얼굴을 할까? 내부와 외부, 가령 인간을 장미꽃처럼 속도 겉도 없는 물체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이러한 생각이 어째서 비인간적으로 보이는 것일까? 만약에 인간이 그 정신의 내부와 육체의 내부를, 장미의 꽃잎처럼 유연하게 뒤집어 감아서, 햇빛이자 5월의 산들바람에 드러나도록 할 수 있다면...
--어머니는 이미 도착하여 노사의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와 쓰루카와는 초여름 저녁의 툇마루에 무릎을 꿇고서, 지금 돌아왔습니다, 하고 인사하였다.
노사는 나만 방으로 불러들여, 엄니를 앞에 두고, 이 아이는 아주 성실합니다, 하는 내용의 말을 했다. 나는 어머니를 거의 보지 않은 채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깨끗이 빨아 입은 감색 몸빼의 무릎과, 그 위에 놓인 지저분한 손가락이 모였다.
노사는 우리 모자에게 물러가도 좋다고 말했다. 우리는 몇 번이고 인사를 하고는 그 방을 나왔다. 소서원 남쪽의, 안뜰을 향한 두 칸 반짜리 헛간이 내 방이다. 그곳에 단둘이 되자 어머니는 울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되리라고 짐작하고 있었기에, 나는 냉정할 수가 있었다.
"난 이미 녹원사에 맡겨진 몸이니까 출세할 때까지 찾아오지 말어."
"알아, 안다구."
나는 어머니를 잔혹한 말로 맞이하는 것이 기뻤다. 하지만 옛날처럼, 어머니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점이 답답하였다. 그러면서도 어머니가 자칫 경계선을 넘어 나의 내부로 들어오리라는 사실은, 상상만 해도 두려웠다.
어머니는 햇볕에 탄 얼굴에, 작고 교활하게 보이는 움푹 들어간 눈을 하고 있었다. 입술만은 별개의 생물처럼 빨갛게 윤기가 흘렀고, 시골 사람 특유의 튼튼하고 견고하며 커다란 치열을 하고 있었다. 도회지의 여자라면 짙은 화장을 하여도 괜찮을 나이였다. 일부러 보기 흉하게 하고 있는 듯한 어머니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웅덩이의 물처럼 육감을 남기고 있는 것을 민감하게 느낀 나는, 그것을 증오하였다.
노사의 앞에서 물러나 마음껏 울고 난 후, 요번에는 어머니는, 햇볕에 탄 가슴을 풀어헤치고 배급받은 인조 섬유 수건으로 닦았다. 동물과도 같은 빛을 발하는 천으로 만든 수건은, 땀에 젖어서 번쩍일 정도였다.
등산 가방에서 쌀을 꺼냈다. 노사에게 드릴 것이라고 했다. 나는 잠자코 있었다. 이어서 어머니는 낡은 쥐색 솜으로 겹겹이 싼 아버지의 위패를 꺼내어 내 책꽂이 위에 놓았다.
"고맙기도 하지. 내일 스님께 독경을 부탁드리면 아버지도 기뻐하시겠지."
"기일이 지나면 엄마는 나리우로 돌아갈 거야?"
어머니의 대답은 의외였다. 어머니는 그 절의 권리를 이미 남에게 넘겼을 뿐만 아니라, 얼마 되지 않는 논밭도 처분하여 아버지의 요양비로 빌렸던 빚을 모두 청산하고, 이제부터는 맨몸으로, 교토 교외의 가사 군에 있는 백부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이야기해 두고 온 것이었다.
내가 돌아갈 절은 없어졌다! 그 황량한 곶의 마을에는, 나를 맞이할 곳이 없어진 거이다.
이때 내 얼굴에 나타난 해방감을 어머니는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어머니는 내 귓전에 입을 대고 이렇게 말했다.
"알겠냐? 이제 너한테 절은 없는 거야. 앞으로는, 이 금각사의 주지가 되는 수밖에 없어. 스님께 잘 보여서, 후계자가 돼야지. 알겠어. 엄마는 그것만 낙으로 살고 있으니까."
나는 깜짝 놀라서 어머니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두려워서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방은, 이미 어두웠다. 내 귓전에 입을 가까이하였기에, 이 '자모'의 땀냄새가 내 주위에 풍겼다. 그때 어머니가 웃었던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어렸을 때의 젖 먹던 기억, 거무스레한 젖가슴의 기억, 그러한 심상들이, 몹시 불쾌하게 내 속에서 교차하였다. 좋지 못한 야심에 불을 댕길 때에는, 무엇인가 육체적인 강제력과도 같은 것이 있어서, 그것이 나를 두렵게 만드는 듯이 생각되었다. 어머니의 곱슬곱슬한 귀밑머리가 내 뺨에 닿았을 때, 어둠이 깔린 안뜰의 이끼 낀 돌대야 위에서 한 마리의 잠자리가 날개를 쉬고 있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저녁 하늘은 그 자그마한 원형의 물 위에 비치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 마치, 녹원사는 그때 사람이 살지 않는 절간처럼 생각되었다.
간신히 나는 어머니를 직시하였다. 매끄러운 입술 언저리에, 금니를 반짝이며 웃고 있었다. 내 대담은 몹시 더듬거렸다.
"하지만, 언젠가는 군대에 끌려가서, 전사하게 될지 몰라."
"바보야. 이런 말더듬이가 군대에 간다면 일본도 끝장이게."
나는 몸을 경직시키며 어머니를 증오하였다. 하지만 더듬거리며 나오는 말은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공습으로, 금각이 타 버릴지도 몰라."
"이런 식으로 간다면, 교토에 공습은 절대 없을 거야. 미국이 사양하고 있거든."
나는 대담하지 않았다. 어둠이 깔린 절의 안뜰은 바다 밑과 같은 색으로 변하였다. 정원석들은 심한 격투라도 벌인 듯한 모양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내 침묵에는 아랑곳없이, 어머니는 일어나, 다다미 방을 에워싼 판자 문을 거칠게 바라보며,
"저녁밥은 아직 멀었냐?"하고 말했다
--훗날 생각하니, 이때의 어머니와의 대면은 내 마음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어머니가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고 느낀 것도 이때였고, 어머니의 생각이 처음으로 강력히 나에게 작용한 것도 이때였다.
어머니는 아름다운 금각과는 태어날 때부터 무연한 인종이었지만, 그 대신에 내가 모르는 현실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교토에 공습 걱정이 없으리라는 것은, 내 몽상과는 무관하게, 사실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만약 금각이 공습당할 위험이 앞으로 없다고 한다면, 당분간 내가 살아갈 보람은 사라지고, 내가 살고 있던 세계는 무너져 버리게 된다.
한편, 뜻하지 않았던 어머니의 야심은, 그에 대한 증오심을 느끼게 하면서도, 나를 사로잡았다. 아버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어머니와 같은 야심에서, 나를 이 절에 보낸 것일지도 몰랐다. 다야마 도센 스님은 독신이었다. 스님 자신이, 선대의 촉망을 받아서 녹원사를 계승하였다면, 나도 마음먹기 따라서는, 스님의 후계자로 지목될지도 몰랐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금각은 내 것이 된다!
내 생각은 혼란스러웠다. 제2의 야심이 부담스러우면, 제1의 몽상—금각이 공습을 당하는 것--으로 돌아갔다가, 그 몽상이 어머니의 명확한 현실 판단에 의하여 깨어지면, 다시 제2의 야심으로 되돌아가는 등, 너무도 이것저것 생각하다 지쳐 버린 결과, 목밑에 빨갛고 커다란 종기가 생겼다.
나는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종기는 뿌리를 내려, 목 뒤에서,뜨겁고 무거운 힘으로 덮쳐 눌렀다. 잠을 깊이 이루지 못하는 가운데, 나는 순금의 후광이 내 목에서 솟아나 머리 뒤를 타원형으로 에워싸려고 조금씩 번지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잠을 깨면, 그것은 못된 종기의 통증에 부과하였다.
마침내 열이 나서 나는 드러누웠다. 주지가 나를 외과 의사에게 보냈다. 국민복에 각반을 찬 외과 의사는, 이 종기에 프룬켈이라는 간단한 이름을 붙이고는, 알코올이 아깝다는 듯, 불에 쬐어 소독한 메스를 들이대었다.
나는 신음하였다. 뜨겁고 답답한 세계가, 내 후두부에서 터지며 오그라들어, 쇠퇴하는 것을 느꼈다...
*
전쟁이 끝났다. 공장에선 종전 선언의 낭독을 듣는 동안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금각에 관하여였다.
절에 돌아가자마자, 내가 금각 앞으로 달려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참관로의 자갈이 한여름의 햇볕에 달아올라, 내 운동화의 조잡한 고무 바닥이 돌멩이 하나하나에 달라붙었다.
종전 선언을 듣고, 도쿄라면 황궁 앞으로 가겠지만, 교토에서는 아무도 없는 어소 앞에 눈물을 흘리러 간 사람들이 많았다. 교토에는, 이러한 때에 눈물을 흘리러 갈 만한 신사나 불당이 많다. 어느 곳이나 그날은 붐볐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역시 금각사에 오는 사람은 없었다.
뜨거운 돌멩이 위에는, 그리하여 내 그림자만이 있었다. 금각이 저쪽에 있고, 나는 이쪽에 있다고 하는 편이 옳으리라. 이날의 금각을 첫눈에 본 순간부터, 나는 '우리들'의 관계가 이미 변하였다고 느꼈다.
패전의 충격, 민족적 비애 따위에는, 금각은 초연하였다. 혹은 초연을 가장하고 있었다. 어제까지의 금각은 이렇지 않았다. 결국 공습으로 불타지 않았다는 사실, 오는 이후로는 이미 그러한 걱정이 없다는 사실, 이러한 사실들이 금각으로 하여금, 다시금, '옛날부터 나는 여기에 있었고, 미래에도 영원히 여기에 있으리라.'는 표정을 되찾게 하였음에 틀림없다.
내부의 낡은 금박도 그대로, 외벽에 칠한, 여름 햇빛에 빛나는 옻의 보호를 받으며, 금각은 쓸데없이 고귀한 가구처럼 묵묵히 서 있었다. 타는 듯이 푸른 숲 앞에 놓인, 거대하고 텅 빈 장식 선반. 이 선반의 크기에 맞는 장식품은, 터무니없이 커다란 향로라든지, 터무니없이 방대한 허무라든지, 그러한 것들밖에 없으리라. 금각은 그러한 것들을 깨끗이 잃고, 실질을 즉각 씻어 버린 채, 이상하게도 공허한 형태를 그곳에 쌓고 있었다. 더욱 기묘한 것은, 금각이 이따금 보여 주는 미 가운데서도, 이날만큼 아름답게 보인 적은 없었다는 점이다.
내 심상으로부터, 아니, 현실 세계로부터도 초탈하여, 변하기 쉬운 모든 것들과는 무관하게, 금각이 이토록 견고한 미를 보여 준 적은 없었다! 모든 의미를 거절하고, 그 미가 이토록 빛난 적은 없었다.
과장하지 않고 말하겠는데, 보고 있는 내 다리는 떨렸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언젠가, 금각을 보고 시골에 돌아간 후, 그 세부와 전체가 음악과도 같은 대응으로 울려퍼졌던 것과 비교하면, 지금 내가 듣고 있는 것은 완전한 정지, 완전한 무음이었다. 그곳에는 흘러가는 것, 변화하는 것이 전혀 없었다. 금각은 음악의 엄청난 중지처럼, 울려퍼지는 침묵처럼, 그곳에 존재하며, 우뚝 서 있었다.
'금각과 나와의 관계는 끊겼구나.'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것으로 나와 금각이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는 몽상은 깨어졌다. 다시 원래의, 원래보다 훨씬 절망적인 사태가 시작되리라. 미가 저쪽에 있고, 내가 이쪽에 있는 사태. 이 세상이 계속되는 한 변함없을 사태...'
패전은 나에게 있어서 이러한 절망의 체험 그 자체였다. 지금도 내 앞에는, 8월 15일의 불길과도 같은 여름 햇빛이 보인다. 모든 가치가 붕괴되었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나의 내부에서는 그와 반대로, 영원이 잠에서 깨어나 소생하여 그 권리를 주장하였다. 금각이 그곳에 미래에도 영구히 존재하리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영원.
하늘에서 내려와, 우리들 뺨에, 손에, 배에 달라붙어서, 우리를 묻어 버리는 영원. 이 저주스러운 것... 그렇다. 주위의 산에서 들리는 매미소리에서도, 전쟁이 끝나던 날, 나는 이 저주와도 같은 영원을 들었다. 그것이 나를 금빛의 흙벽 속에 매장시켜 버렸다.
그날 밤에는 취침 독경에 앞서서, 특별히 천황의 안전을 기원하고 전몰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기나긴 독경이 있었다.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각 종파들은 간략한 가사를 사용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날 밤 특별히, 노사는 한동안 간직해 두었던 붉은 줄의 가사를 걸쳤다.
주름살 속까지 깨끗이 씻은 뜻이 청결하고 통통한 그 얼굴은 그날도 매우 혈색이 좋았으며, 무언가에 흡족해 있었다. 무더운 밤이었기에 옷자락을 끄는 소리가 서늘하고 냉랭하게 들렸다.
독경이 끝나고 모두들 노사의 방으로 불려가, 그곳에서 강화를 들었다.
노사가 선택한 공안은 무문관 제14칙의 남천참묘였다
'남천참묘'란, 벽암록에도, 제63칙 '남천참묘아', 제64칙 '조주두재초혜'의 둘로 나와 있다. 예로부터 난해하기로 소문난 공안이다.
당나라 시절, 지주의 남천산에 보원선사라는 명승이 있었다. 산 이름을 따서, 남천 스님이라 불렀다.
절간 승려들이 모두 나와서 풀베기를 하고 있을 때, 이 한적한 산 속 절간에 한 마리의 새끼 고양이가 나타났다. 신기한 느낌에 모두가 달려들어 이것을 사로잡았으나, 그만 동서 양당의 다툼이 벌어졌다. 양당은 서로가 이 새끼 고양이를, 자기네가 키우겠다고 다툰 것이다.
그것을 모고 있던 남천 스님은, 당장에 새끼 고양이의 목덜미를 잡고 풀 베는 낫을 들이대며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들이 올바른 해결책을 구하면 살려 줄 것이고, 구하지 못하면 즉각 베어 버리겠다."
중들은 대답이 없었다. 남천 스님은 새끼 고양이를 베어 버렸다.
날이 저물어, 수제자인 조주가 돌아왔다. 남천 스님은 사건의 전말을 설명하고는 조주의 의견을 물었다.
조주는 곧바로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서 머리 위에 올린 채 나가 버렸다.
남천 스님은 탄식하며 말했다.
"아아, 오늘 네가 있어 주었더라면 고양이 새끼도 목숨을 건졌을 텐데."
--대체로 이상과 같은 이야기로, 특히 조주가 머리에 신발을 올려놓은 대목이 난해하다고들 한다.
하지만 노사의 강화에 의하면, 이것은 그다지 난해한 문제는 아니었다.
남천 스님이 고양이를 벤 것은, 자아의 미망을 끊어 망념과 망상의 근원을 제거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비정한 실천으로 고양이의 목을 자르고, 일체의 모순, 대립, 자타의 확집을 끊은 것이다. 이것을 살인도라 일컫는다면, 조주의 그것은 활인검이다. 흙투성이가 되어 사람들에게 천대받는 신발을, 무한한 관용에 의하여 머리 위에 올려놓음으로 해서 보살도를 실천한 것이다.
노사는 이렇게 설명하고는, 일본의 패전에 대해서는 조금의 언급도 없이 강화를 끝마쳤다. 우리들은 여우에게 홀린 듯하였다. 어째서 패전한 이 날에, 특별히 이 공안을 선택한 것인지 전혀 몰랐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는 복도에서, 나는 쓰루카와에게 그러한 의문을 호소했다. 쓰루카와도 머리를 저었다.
모르겠군. 승당 생활을 하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지. 그래도 오늘밤 강화의 핵심은, 전쟁에서 패한 날에,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느니, 고양이를 베는 이야기를 한 점이라고 생각해."
전쟁에 졌다고 해서, 나는 결코 불행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노사의 그 흐뭇하고 행복스러워 보이는 얼굴은 마음에 걸렸다.
어느 절이나 통상적으로 주지에 대한 존경심이 절의 질서를 유지시켜 주지만, 지난 1년간 신세를 지면서도, 나에게서는 노사에 대한 깊은 경애심이 우러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그런대로 좋았다. 하지만 어머니에 의하여 야심에 불이 당겨진 이래로, 열일곱 살인 나의 눈은 이따금 노사를 비판적으로 보게끔 되었다.
노사는 공평무사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만약 노사라면, 그 정도는 공평무사할 수 있으리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공평함이었다. 선승 특유의 유머도 노사의 성격에는 결여되어 있었다. 보통 그 같이 통통한 체구에는 유머가 따르기 마련이건만.
노사는 온갖 계집질을 다 해 본 사람이라고 들었다. 노사가 놀고 있는 장면을 상상하면 우습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분홍빛 찹쌀과자와도 같은 몸에 안기면, 여자들은 어떤 기분이 들까? 이 세상 끝까지 그 분홍빛의 유연한 살이 계속되어, 살의 무덤에 묻힌 듯한 느낌이 들겠지.
나는 선승에게도 육체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신기하였다. 노사가 온갖 계집질을 다 한 것은, 육체를 떼어버리고, 살을 경멸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도, 그 경멸하는 살이 마음껏 영양을 섭취하여, 반질거리며, 노사의 정신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은 신기하기만 했다. 잘 길들여진 가축처럼 온순하고 겸허한 살. 노사의 정신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첩과도 같은 그 살...
나에게 있어서, 패전이 무엇이었는가를 말하여 둘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해방이 아니었다. 결코 해방이 아니었다. 불변의 것, 영원한 것, 일상 속에 숨어들어 있는 불교적인 시간의 부활을 의미하였다.
절간의 일과는 패전 다음 날부터, 다시 이전처럼 계속되었다. 개정, 조과, 죽좌, 작무, 재좌, 약석, 개욕, 개침. 게다가, 노사는 암거래 쌀의 구입을 엄금하였기 때문에, 단가에서 기부한 쌀이라든지, 혹은 부사가 한창 자라는 우리들을 위하여, 기부라는 구실로 사들이는 약간의 암거래 쌀이, 빈약한 죽그릇에 가라앉아 있었다. 때때로 고구마를 사러 가기도 했다. 죽좌는 아침만이 아니라, 낮에도 밤에도 죽이나 고구마가 계속되어, 우리들은 언제나 굶주리고 있었다.
쓰루카와는 도쿄의 생가에 부탁하여, 이따금 달콤한 과자 같은 것을 보내오도록 하곤 했다. 밤이 깊어지면, 내 머리맡에 와서 함께 먹었다. 심야의 하늘에는 때때로 번개가 스쳐 갔다.
그토록 부유한 생가와 자애심 많은 부모님 곁으로, 어째서 돌아가려 하지 않는지 나는 물었다.
"하지만 이것도 수행인걸. 어차피 나도, 아버지 절을 이어받을 거니까."
그에게는 조금도 걱정되는 일이 없어 보였다. 젓가락통에 꼭 맞게 넣어져 있는 젓가락처럼. 나는 이야기를 이어서, 이제부터 상상도 할 수 없는 새로운 시대가 올지 모른다고 쓰루카와에게 말하였다. 그때 나는, 종전 후 3일째 되던 날에 학교에 갔을 때, 공장의 지도자인 사관이 트럭에 가득한 물자를 자기 집으로 갖고 갔다는 이야기를 모두들 하고 있던 일이 생각났다. 사관은 공공연히, 이제부터 자기는 암거래상을 할 작정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대담하며, 잔혹하고, 날카로운 눈을 지닌 사관이 본격적으로 악을 향하여 달리기 시작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가 장화를 신고 달리는 길목에는, 전쟁에 있어서의 죽음과 꼭 닮은 얼굴의, 아침노을과도 같은 무질서가 있었다. 가슴에 흰색의 비단 머플러를 휘날리며, 훔친 물자를 등이 굽을 정도로 짊어지고, 밤기운이 남아 있는 바람을 뺨에 맞으며, 그는 출발하리라. 그는 무서운 속도로 마멸하리라. 하지만 훨씬 멀리에서, 훨씬 가볍게, 무질서의 눈부신 종루의 종은 울리고 있다...
그러한 것들 모두로부터 나는 격리되어 있었다. 나에게는 돈도 없고, 자유도 없고, 해방도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라고 내가 말할 때, 17세의 내가, 아직 그다지 뚜렷한 형태를 이룬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결의를 굳히고 있었음은 확실하다.
'세상 사람들이 생활과 행동으로 악을 맛본다면, 나는 내계의 악에 가능한 깊숙이 가라앉아 버려야지.'
하지만 최초로 내가 생각한 악은, 노사에게 잘 아부하여, 언젠가 금각을 손에 넣겠다는 정도에 불과하였고, 또한 단순히 공상 속에서, 노사를 독살하고 그 후임으로 내가 들어앉는다는 따위의, 허황된 꿈에 불과하였다. 이 계획은, 쓰루카와에게 똑같은 야심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자, 내 양심의 평온함이 되기도 했다.
"너는 미래에 대해서 아무런 불안도 희망도 없냐?"
"없어, 아무것도. 그까짓 것, 지니고 있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냐?"
이렇게 대답하는 쓰루카와의 어조에는 일말의 어둠도, 자포자기적인 느낌도 없었다. 그때 번개가, 그의 얼굴에서 유일하게 섬세한 부분인 가늘고 완만한 눈썹을 비추었다. 이발소에서 하는 대로, 쓰루카와는 눈썹의 위아래를 밀도록 놓아 두는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가느다란 눈썹이 더욱더 인공적으로 가늘어져, 눈썹 가장자리의 일부에 밀어낸 자국이 파랗게 나타나 있었다.
나는 힐끗 그 파란 자국을 보고, 불안을 느꼈다. 이 소년은 나 같은 인간과는 달리, 생명의 순결한 말단에서 불타고 있었다. 타오르기 전까지 미래는 숨겨져 있는 것이다. 미래의 등심은 투명하고 차가운 기름 속에 잠겨 있었다. 누가 자신의 순결과 순수를 예견할 필요가 있겠는가? 만약 미래에 순결과 순수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그날 밤, 쓰루카와가 자기 방에 돌아가고 나서, 나는 찌는 듯한 늦더위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더구나, 자위 행위의 습관을 참으려는 생각이 잠을 빼앗았다.
이따금 나는 몽정을 하는 때가 있었다. 그것도 확실한 욕정의 영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령 어두운 거리를 한 마리의 검은 개가 달리고 있을 때, 그 불길 같은 입이 울림에 따라 흥분이 고조되어, 방울소리가 극도에 달하면, 사정을 하는 것이다.
자위행위를 할 때면 나는 지옥과도 같은 환상을 보았다. 우이코의 젖가슴이 나타나고, 우이코의 허벅지가 나타났다. 그리고 나는 더없이 작고 흉한 벌레처럼 변하여 있었다.
--나는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서원 뒤쪽으로 빠져나왔다.
녹원사 뒤에, 석가정이 있는 곳의 동쪽으로, 후도 산이라는 산이 있다. 소나무 사이로 무성한 조릿대와 뒤섞여, 병꽃나무, 철쭉 등의 관목이 있다. 그 산에는 밤길이라도 전혀 지장 없이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 있었다. 꼭대기에 올라가면 가미교, 나카교, 멀리로 에이 산과 다이몬지 산을 바라볼 수 있다.
나는 올라갔다. 놀란 새들의 날개소리 사이를, 곁눈도 주지 않고 그루터기를 피하며 올라갔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이 등반으로, 금세 기분 전환이 되는 것을 느꼈다. 정상에 이르렀을 때, 서늘한 밤바람이 불어와 땀투성이의 몸을 감쌌다.
눈앞의 조망에 눈을 의심하였다. 오랜만에 등화 관제가 풀린 교토 시는 온통 불빛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한 번도 이곳에 올라온 적이 없었기에, 이 광경은 나에게 있어서 거의 기적이었다.
불빛은 하나의 입체를 이루고 있었다. 평면의 여기저기에 흩어진 불빛이 원근감을 잃고, 등불만으로 만들어진 투명한 대건축 하나가, 복잡한 뿔을 달고 날개를 펼친 채, 밤의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듯이 보였다. 이것이야말로 도회지였다. 크고 검은 동굴처럼, 어소의 숲에만 불빛이 없었다.
멀리, 에이 산의 한구석으로부터 어두운 밤하늘에 걸쳐서, 이따금 번개가 번쩍였다.
'이것이 속세다.'하고 나는 생각했다. '전쟁이 끝나자 이 등불 밑에서, 사람들은 사악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수많은 남녀들이 등불 밑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바로 눈앞에 다가온, 죽음과도 같은 행위의 냄새를 맡고 있다. 이 무수한 불빛이 한결같이 사악한 불빛이라고 생각하니, 내 마음은 위안이 된다. 부디 내 마음속의 사악이 번식하여 무수하게 불어나 광채를 발하며, 이 눈앞의 무수한 불빛과 하나하나 대응할 수 있도록 해 주소서! 그것을 감싸는 내 마음의 암흑이 이 무수한 불빛을 감싸는 밤의 암흑과 동등하게 되도록 해 주소서!'
*
금각을 찾는 관람객은 점점 늘어났다. 노사는 시에 신청하여, 인플레에 따른 입장료 인상에 성공하였다.
지금까지의 금각 관람객들은, 군복이나 작업복 혹은 몸빼 차림의 검소한 손님들이 약간 있었을 뿐이었다. 이윽고 점령군이 도착하자, 속세의 난잡한 풍속이 금각 주변에도 몰려들게 되었다. 한편, 헌차 습관도 되살아나, 여자들은 여기저기 소중히 숨겨 두었던 화려한 의상을 입고 금각을 찾았다. 그들의 눈에 비친 우리들, 우리들의 승복 차림, 그것은 이제 뚜렷한 대조를 이루어, 마치 우리들은 술 취한 기분에 승려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느 지방의 진기한 풍속을 보러 온 관광객을 위하여 일부러 옛날의 진귀한 풍속을 고수하는 주민들처럼... 특히 미군들은 멋대로 내 승복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웃어 대곤 하였다. 때로는 돈을 몇 푼 내고 기념 사진을 찍게 승복을 빌려 달라고 조르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영어를 못하는 안내인 대신에 이따금 쓰루카와나 내가, 서툰 영어에도 불구하고 안내자로 불려나갔기 때문이다.
전쟁 후의 첫 겨울이 되었다. 어느 금요일 밤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토요일에도 계속 내렸다. 학교에 있는 동안에도, 정오에 파하면 돌아가서 눈에 덮인 금각을 볼 생각만 했다.
오후에도 눈이 내렸다. 나는 고무장화를 신고 어깨에 가방을 걸친 채, 참관로를 거쳐 연못가로 나왔다. 눈은 빠른 속도로 내렸다. 어린 시절에 곧잘 그랬듯이, 나는 지금도 하늘을 향하여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러면 눈송이는 아주 엷은 은박을 들이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내 이에 닿기도 하고, 또한, 따듯한 입 안에 온통 눈이 날려 들어와, 내 빨간 살의 표면에 녹아 스며들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나는 구경정 위에 있는 봉황의 입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 금빛 괴조의 매끄럽고 뜨거운 입을.
눈은 우리들을 소년다운 기분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나는 새해가 되어도 아직 18세였다. 내가 소년다운 약동을 몸 속에 느꼈다고 해서, 그것이 거짓말이겠는가?
눈에 덮인 금각의 아름다움은 비할 바가 없었다. 바람이 잘 통하는 이 건축은, 눈 속에서, 눈이 날려 들어와도 아랑곳않고, 가느다란 기둥을 즐비하게, 산뜻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어째서 눈이 더듬거리지 않는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팔손이나무의 잎사귀에 닿거나 하면, 더듬거리듯이 내려와 땅에 떨어지는 때도 있었다. 하지만 가로막는 것이 없는 하늘에서 유려하게 내려오는 눈을 맞고 있노라면, 내 마음의 굴곡은 잊혀지고, 음악을 듣는 듯이 내 정신은 순순한 율동을 되찾았다.
사실, 입체적인 금각은 눈 덕분에 아주 온순하고 평면적인 금각, 그림 속의 금각이 되어 있었다. 단풍나무가 많은 양쪽 산의 마른 가지에는 눈이 전혀 쌓이지 않았기에, 그 숲은 평소보다도 발가숭이로 보였다. 여기저기 소나무에 쌓인 눈은 장관이었다. 연못의 얼음 위에는 한층 눈이 많이 쌓였으나, 이상하게도 쌓이지 않는 곳의 희고 커다란 반점은 장식화의 구름처럼 대담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규센핫카이석도 아와지섬도 연못의 얼음을 덮은 눈과 연결되어, 그곳의 무성한 소나무들은 마치 얼음과 눈에 덮인 벌판 한가운데에 우연히 자라난 것처럼 보였다.
사람이 살지 않는 금각은, 구경정과 조음동의 지붕들과, 또한 수청의 작은 지붕을 합쳐서 3개의, 뚜렷이 하얀 부분을 제외하고는, 어둡고 복잡한 목조가, 눈 속에서 오히려 생생하게 검은색을 드러내고 있었으나, 우리들이 남화의 산중 누각 같은 곳에, 문득 사람이 살고 있지나 않을까 하고 그림 가까이 얼굴을 대고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 낡고 검은 나무 색의 우아함은, 금각에 누군가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아심이 들게 하였다. 하지만 설령 내가 얼굴을 가까이하였다 하더라도, 차가운 눈으로 된 비단 그림에 부딪혀서 그 이상 접근할 수는 없었으리라.
구경정의 문은 오늘도 눈이 내리는 하늘을 향하여 활짝 열려 있었다. 그곳을 올려다보는 내 마음은, 날려 들어간 눈송이가 구경정의 아무것도 없는 작은 공간을 날아다니다가, 이윽고 벽면의 낡고 녹슨 금박에 머물러 목숨을 다하여, 조그만 금빛 이슬을 맺을 때까지의 전말을 빠짐없이 보았다.
...이튿날인 일요일 아침, 늙은 안내인이 부르러 왔다.
개장 전 시간에, 외국인 병사가 구경을 온 것이다. 늙은 안내인은 손짓으로 기다리게 해 놓고, '영어를 할 줄 아는' 나를 부르러 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쓰루카와보다도 영어를 잘 했으며, 영어라면 더듬거리지 않았다.
현관 앞에는 지프가 서 있었다. 술에 만취한 미군 병사는 현관기둥에 손을 집고서 나를 내려다보며 경멸하듯이 웃었다.
눈이 갠 앞뜰은 눈부셨다. 그 눈부신 경치를 등지고, 기름진 살이 뒤룩거리는 청년의 얼굴은, 내 얼굴에 하얀 입김과 더불어 위스키냄새를 뿜어 대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토록 크기가 다른 인간의 내부에서 움직이고 있는 감정을 상상한다는자체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무슨 일이건 반항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있었기에, 개장 전이지만, 특별히 안내하겠노라고 말하고는, 입장료와 안내료를 청구하였다. 커다란 취한은 뜻밖에도 얌전히 지불하였다. 그리고는 지프 속을 들여다보며, '이리 나와' 하는 의미의 말을 하였다.
눈의 반사가 눈부셨기에, 지프의 어두운 차내는 그때까지 보이지 않았다. 차창 속에서 무엇인가 하얀 물체가 움직였다. 토끼 같은 것이 움직인 듯한 느낌이었다.
지프의 발판 위로, 하얀 하이힐을 신은 발이 모습을 보였다. 이 추운 날씨에 양말도 안 신었기에 나는 놀랐다. 여자는 외국 군인 상대의 창녀라고 한눈에 알 수 있는, 타오르듯이 새빨간 외투를 입고, 손톱도 발톱도 역시 같은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외투 자락을 가다듬을 때, 더러운 타월 천의 잠옷이 보였다. 여자도 몹시 취해서 눈에 초점이 없었다. 남자 쪽은 그나마 군복을 제대로 입고 있었으나, 여자는 잠자리에서 일어난 채로 잠옷 위에 목도리와 외투를 걸치고 나온 모양이었다.
눈에 반사된 여자의 얼굴은 몹시 창백하였다. 핏기가 거의 없는 피부에, 루주의 주홍색이 무기적으로 돋보였다. 내려선 순간 여자가 재채기를 하자, 가느다란 콧날에 잔주름이 잔뜩 생기며, 취기에 피로해진 눈이 일순 먼 곳을 보는가 싶더니, 다시금 생기를 잃고 깊숙히 가라앉았다. 그리고는 잭을, 잭크라고 발음하며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재--크, 투--콜--드! 투--콜--드!"
여자의 목소리는 애절하게 눈 위에 퍼졌다.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러한 몸파는 여자를, 내가 아름답다고 여기기는 처음이었다. 우이코와 닮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모든 점에서, 우이코와 가능한 한 닮지 않도록 음미하며 그린 초상화 같았다. 그것이 어딘가, 우이코의 기억에 대항하여 만들어진 영상의, 반항적이고 신선한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인생에서 최초로 느꼈던 미에 대한 그 후의 관능의 반항에, 애교부리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단지 한 가지 점이 우이코와 공통되었다. 승복도 안 입고, 지저분한 잠바와 고무장화 차림의 나에게, 여자는 눈도 주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날 아침 일찍, 절간 사람들이 총동원되어, 간신히 참관로의 제설 작업을 끝마쳤다. 단체 손님이라도 오면 곤란하지만, 평소와 같은 인원수라면, 일렬로 걸을 수 있을 정도의 통로를 만들었다. 그곳을 나는, 미군과 여자의 앞에 서서 걸었다.
미군은 연못 부근까지 와서 전망이 넓어지자, 양팔을 펴고 무언가 모를 소리를 외치더니 환성을 올렸다. 여자의 몸을 거칠게 흔들었다. 여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오--, 재--크. 투--콜--드!"
하고 말할 뿐이었다
미군은 눈이 수북히 쌓인 나무 그늘 사이로 보이는 상록수의 탐스러운 붉은 열매를, 저게 뭐지 하고 나는 물었지만, 나는 '상록수'라고밖에 대답하지 못했다. 커다란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그는 서정 시인인지도 몰랐으나, 그 투명하고 푸른 눈은 잔혹하게 느껴졌다. "머더 구즈"라는 외국 동요에서, 검은 눈을 심술궂고 잔혹하다고 노래하지만, 이국적인 것에서 인간은 잔혹함을 꿈꾸는 것이 보통일지도 모른다.
나는 형식적으로 금각을 안내하였다. 몹시 취해 있는 군인은, 비틀거리며 구두를 아무 데나 벗어던졌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추위에 곱은 손으로, 이러한 경우에 읽어 주는 영문 설명서를 꺼냈다. 하지만 미군이 옆에서 손을 내밀어 이것을 빼앗더니, 익살맞은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내가 안내할 필요는 없어졌다.
나는 법수원의 난간에 기대어, 엄청나리만큼 햇빛을 받아 반사시키는 연못을 바라보았다. 금각의 내부가 이토록 불안할 정도로 밝게 보인 적은 없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수청 쪽으로 가 있던 남녀 사이에, 입싸움이 벌어졌다. 다툼은 점차 심하여졌으나, 나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여자도 무언가 거센 말투로 대꾸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영어인지 일본어인지 알 수가 없었다. 둘이는 다투며, 이미 내 존재는 잊어버린 채, 법수원 쪽으로 되돌아왔다.
여자가, 얼굴을 들이대고 욕설을 퍼붓는 미군의 그 뺨을, 힘껏 손바닥으로 때렸다. 그리고 몸을 돌려 도망쳐, 하이힐을 신고, 참관로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나도 무슨 일인지 모르는 채, 금각을 내려와 연못가를 달렸다. 하지만 여자에게 가까이 달려갔을 때에는, 이미 다리가 긴 미군이 쫓아가서 여자의 새빨간 외투 멱살을 잡고 있었다.
그 상태로 청년은 내 쪽을 힐끗 보았다. 여자의 빨간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가볍게 놓았다. 하지만 그 놓는 손에 주어졌던 힘은 보통 정도가 아니었던 듯싶었다. 여자는 눈 위에 나뒹굴며 자빠졌다. 빨간 옷자락이 찢어져, 눈 위에 하얀 맨살의 허벅지가 드러났다.
여자는 일어서려고도 하지 않았다. 밑에서는 잠자코 구름처럼 높은 곳에 있는 사내의 눈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두 무릎을 꿇고 여자를 부축하여 일으키려고 하였다.
헤이, 하고 미군이 소리쳤다. 나는 돌아보았다. 가랑이를 넓게 벌린 채 버티어 선 그의 모습이 눈앞에 있었다. 손가락으로 나에게 신호하고 있었다.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차분한 목소리가, 영어로 이렇게 말하였다.
"밟아. 네가, 밟아 봐!"
무슨 소린지 나는 몰랐다. 하지만 그의 파란 눈은 높은 곳에서 명령하고 있었다. 그의 넓은 어깨 뒤에는, 눈에 덮인 금각이 빛나고, 씻어 낸 듯이 파란 겨울 하늘이 촉촉이 어리어 있었다. 그의 파란 눈은 조금도 잔혹하지 않았다. 그것을,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서정적이라고 느낀 것은 어째서일까?
그의 굵은 손이 내려와, 멱살을 잡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명령하는 목소리는 역시 따듯하고 부드러웠다.
"밟아. 밟으라니까!"
저항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나는 고무장화의 발을 들었다. 미군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내 발은 내려와 봄날의 진흙처럼 부드러운 물체를 밟았다. 그것은 여자의 배였다. 여자는 눈을 감은 채 신음하였다.
"더 밟아. 더!"
나는 밟았다. 처음 밟았을 때의 위화감이, 두 번째에는 솟구치는 희열로 변하였다. 이것이 여자의 배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것이 가슴이다, 하고 생각했다. 타인의 육체가 이토록 공처럼 정직한 탄력으로 대답하는 것은 예상 밖이었다.
"이제 됐어."
하고 미군은 또렷이 말했다. 그리고 예의 바르게 여자의 몸을 안아 올려 흙과 눈을 털어 주고는,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앞에 서서 여자의 몸을 부축하며 걸었다. 여자는 시종 내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지프가 있는 곳까지 오자, 여자를 먼저 태우고는, 술이 깬 위엄 있는 얼굴로, 미군은 나에게 생큐라고 말했다. 돈을 주려고 했기에 나는 거절하였다. 그는 좌석에서 미국 담배를 두 상자 꺼내어 내 가슴에 들이밀었다.
나는 현관 앞의 눈에 반사되는 햇빛 속에서, 뺨을 불덩이처럼 하고 서 있었다. 지프는 눈보라를 일으키더니, 조용히 흔들거리며 멀어져 갔다. 지프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내 몸은 흥분되어 있었다.
...간신히 흥분이 가라앉았을 때, 나에게는 위선의 기쁨이라는 음모가 떠올랐다. 담배를 좋아하는 노사는 얼마나 기뻐하며 이 선물을 받을까? 아무것도 모르고.
전혀 고백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나는 명령에 의하여, 강제로 행하였음에 불과하다. 만약 반항하였더라면, 내 자신이 어떤 보복을 당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대서원의 노사 방으로 갔다. 삭발에 능숙한 부사가 노사의 머리를 깎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가득한 툇마루에서 나는 기다렸다.
정원의 육주송에 쌓인 눈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기에, 그것은 마치 접어 놓은 새 돛처럼 보였다.
머리를 깎고 있는 동안, 노사는 눈을 감은 채 종이를 양 손에 들고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받고 있었다. 깎인 머리는 점차로 그 동물적이며 생생한 윤곽을 뚜렷이 드러내었다. 다 깎고 난 부사는 따듯한 수건으로 노사의 머리를 감쌌다. 잠시 후 그것을 벗겼다. 그 밑에서, 갓 태어난 것처럼, 따끈따끈한, 삶은 듯한 머리가 나타났다.
나는 그제야 용건을 말하고는, 두 상자의 체스트필드를 내밀며 머리를 숙였다.
"으응. 수고가 많았군."
노사는, 입가에 웃는 듯한 미소를 약간 보이며 말했다. 그것뿐이었다. 두 상자의 담배는, 노사의 손에 의하여 매우 사무적으로, 여러 가지 서류와 편지가 쌓여 있는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졌다.
부사가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하자, 노사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물러나야만 했다. 불만이 내 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자신이 행한 불가사의한 악의 행위, 그 보상으로 받은 담배, 그런 줄도 모르고 그것을 받은 노사...이 일련의 관계에는, 보다 극적이고, 보다 통렬한 무엇인가가 있음에 틀림없었다. 노사 정도나 되는 사람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노사를 경멸하게 만드는 하나의 커다란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물러나려는 나를 노사라 불러 세웠다. 그는 때마침 나에게 은혜를 베풀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너를 말이야." 노사는 말하였다. "졸업하는 대로, 오타니 대학에 보낼까 생각하고 있어. 돌아가신 아버님도 틀림없이 걱정하고 계실 테니까, 공부를 많이 해서, 좋은 성적으로 대학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지."
--이 뉴스는, 곧바로 부사의 입을 통하여 절간 전체로 퍼졌다. 노사 쪽에서 대학 진학의 이야기가 나왔다는 사실은, 무척 촉망받고 있는 증거라는 것이었다. 옛날에는 도제가 대학에 가기 위하여, 주지의 방에 어깨를 주무르러 100일 밤이나 드나들어 겨우 소망을 이루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있다. 집에서 보내오는 비용으로 오타니 대학에 가게 된 쓰루카와는, 내 어깨를 치며 기뻐하였고, 노사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없는 다른 도제 하나는, 이후로 나와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제4장
내가 이윽고, 쇼와 22년(1947) 봄에, 오타니 대학의 예과에 들어갔을 때, 노사의 변함없는 자애와 동료들의 선망에 둘러싸여 의기양양하게 입학하였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남의 눈에는 아마도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진학에 관하여는,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사정이 있었다.
노사가 그 눈 내린 아침, 나에게 대학 진학의 허락을 내리고 나서 1주일 후,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자, 대학 진학 소식이 없었던 그 도제가 무척이나 기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때까지 이 사내는 나와 말도 하지 않았었다.
잡역부의 태도에도, 부사의 태도에도, 무언지 모르게 평상시와 다른 데가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평상시와 다름없게끔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쓰루카와의 침실에 가서 사람들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하소연하였다. 쓰루카와도 처음에는 나와 함께 고개를 꺄우뚱거렸지만, 감정을 속이지 못하는 그는, 이윽고 겸연쩍은 얼굴을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녀석."하고 또 하나의 도제 이름을 말하고는, "그 녀석에게서 전해 들었는데, 왜냐하면, 그 녀석도 학교에 가 있어서 몰랐으니까...하여튼 네가 없을 때 묘한 일이 있었다더군."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세한 것을 물었다. 쓰루카와는 비밀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나에게 받고는, 내 안색을 조심스레 살피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날 정오가 조금 지났을 무렵에, 주홍색 외투를 입은 외국인 상대의 창녀가 절에 찾아와 주지에게 면회를 요구하였다. 부사가 대신에 현관에 나갔다. 여자는 부사에게 욕을 하며, 무조건 주지와 만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때 노사가 복도를 걸어오다가 여자의 모습을 보고는 현관 앞으로 나갔다. 여자의 말에 의하면, 1주일 정도 전의 눈 내린 날 아침, 외국 병사와 함께 금각을 보러 왔을 때, 젊은 중이 외국 병사에게 아부하여, 외국 병사가 쓰러뜨린 여자의 배를 짓밟았다. 그날 밤, 여자는 유산하였다. 그래서 얼마간의 돈을 받아야겠다. 내놓지 않으면 녹원사의 비행을 세상에 알리고 고소하겠다는 것이었다.
노사는 잠자코, 돈을 주어 여자를 돌려보냈다. 그날의 안내인이 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내 비행을 목격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노사는 이 일을 절대로 나에게 알리면 안 된다고 말했다. 노사는 모든 일을 불문에 붙인 것이었다.
하지만, 절간 사람들은 부사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고는, 내 비행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쓰루카와는 눈물을 글썽이며 내 손을 잡았다. 그 투명한 눈은 나를 바라보았고, 그 소년다운 순수한 목소리는 나를 감동시켰다.
"정말로 너는 그런 짓을 했니?"
...나는 내 자신의 암흑 같은 감정에 직면하였다. 쓰루카와가 이렇게 추궁하는 듯한 질문으로, 나를 그 감정에 직면하게 만들었다
어째서 쓰루카와는 나에게 그것을 물었을까? 우정에서였을까? 나에게 그러한 질문을 함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역할을 포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자신은 알고 있을까? 그가 그러한 질문으로 나의 깊은 곳에서 나를 배반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나는 수시로 말하지 않았던가, 쓰루카와는 나의 양화라고... 쓰루카와가 만약 그 역할에 충실하였다면, 나를 추궁하지 않고,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나의 어두운 감정을 몽땅 그대로, 밝은 감정으로 번역하여야 했다. 그러면, 거짓은 진실이 되고, 진실은 거짓이 되었을 것이다. 쓰루카와 특유의 그러한 솜씨, 모든 그늘을 양지로, 모든 밤을 낮으로, 모든 달빛을 햇빛으로, 모든 밤의 이끼에 찬 습기를 대낮의 가볍게 흔들리는 눈부신 새싹으로 번역하는 솜씨를 보았더라면, 나도 말을 더듬거리며 숨김없이 참회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때에 한하여, 그는 그러한 번역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의 암흑 같은 감정이 힘을 얻은 것이다...
나는 애매하게 웃었다. 난방이 되지 않은 절간의 심야. 싸늘한 무릎. 우뚝 서 있는 굵은 기둥들이,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있는 우리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내가 떨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추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으로 공공연히 친구에게 거짓말을 하는 쾌락도, 잠옷을 입은 내 무릎을 떨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니깐."
"그래? 그렇다면, 그 여자는 거짓말을 하러 왔던 거로군. 빌어먹을. 부사까지 그걸 믿다니."
그의 정의감은 점점 고조되어, 내일은 나를 위하여 반드시 노사에게 가서 해명해 주겠노라고 흥분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내 마음에는 문득 노사의 그 삶은 야채와도 같은 갓 깎은 머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분홍색의 무저항한 뺨이 떠올랐다. 이러한 상상은, 어쩐지 갑자기 심한 혐오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쓰루카와의 정의감이 외부로 노출되기 전에, 내 손으로 땅속에 묻어 버릴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노사는 내가 한 짓이라고 믿고 있을까?"
"글세."하며 금방 쓰루카와는 난처해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수군대건, 노사님만큼은 잠자코 다 이해해 주실 테니까 안심하라구. 나는 그렇게 생각해."
또한 나는, 쓰루카와의 해명이 오히려 나에 대한 모두의 의심을 깊게 만들 뿐이라고 납득시켰다. 노사만은 나의 무고를 알고 계시기 때문에, 모든 일을 불문에 붙인 것이다, 하고 나는 말하였다. 말하는 도중에 내 가슴에는 기쁨이 솟아나, 기쁨은 점차로 견고한 뿌리를 내렸다. '목격자는 없다. 증인은 없다.'는 기쁨...
하지만 나는, 노사만이 나의 결백을 인정하고 있다고 믿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모든 일을 노사가 불문에 붙였다는 것은, 오히려 나의 이러한 추측을 증명하고 있었다.
어쩌면 체스트필드 두 상자를 내 손에서 받아 뉘었을 때, 노사는 이미 전부 알아차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불문에 붙인 것은 단지, 나의 자발적인 참회를, 멀리서 잠자코 기다리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그것만이 아니다. 대학 진학이라는 미끼를 주어 놓고는, 그것과 나의 참회를 교환조건으로 삼아, 만약 내가 참회하지 않으면 그 부정직에 대한 벌로서 진학을 금지시키고, 만약 참회한다면 개전의 정이 뚜렷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요번에는 각별한 은혜를 베풀기라도 하듯이 대학 진학을 승낙할 생각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장 큰 함정은, 노사가 부사에게 이 사건을 나에게 알리지 말라고 명령한 데에 있다. 내가 만약 정말로 결백하다면, 따라서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날그날을 보낼 수가 있다. 반면에, 내가 만약 비행을 저질렀다면, 그리고 나에게 다소의 지혜가 있다면, 결백한 내가 보내게 될 순결한 침묵의 나날을, 즉 결코 참회의 필요가 없는 나날을 완전히 모방할 수가 있다. 아니, 모방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며, 그것이 나의 결백을 주위에 알리는 유일한 길이다. 노사는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 함정에 나를 빠뜨리려 하고 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분노가 치밀었다.
나로서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 내가 여자를 밟지 않았더라면, 외국 병사는 권총을 들이대어 내 생명을 위협하였을지도 모른다. 점령군에게 반항할 수는 없다. 나는 전부 강요당하여 한 짓이다.
하지만 고무장화의 바닥에서 느껴지던 여자의 배, 교태 부리는 듯한 탄력, 신음소리, 짓밟힌 살의 현란한 감촉, 감각의 도취, 그때 여자의 내부로부터 나의 내부로 꿰뚫고 들어왔던 은밀한 번개와도 같은 것... 그러한 것들까지 내가 강요당하여 맛보았다고는 할 수 없다. 나는 지금도 그 감미로웠던 일순간을 잊지 않고 있다.
노사는, 내가 느꼈던 핵심, 그 감미로움의 핵심을 알고 있었다!
그 후로 1년간, 나는 새장에 갇힌 새와 같았다. 새장은 내 눈에 항상 보였다. 결코 참회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하면서도, 나는 하루라도 안도할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당시에는 조금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던 행위, 여자를 밟았다는 그 행위가, 기억 속에서 점차로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여자가 유산하였다는 결과를 알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행위는 사금처럼 내 기억에 침전되어, 언제까지고 눈부신 광채를 발하였다. 악의 광채. 그렇다, 설령 사소한 악이라 하더라도, 악을 범하였다는 명료한 의식은, 어느 틈엔가 나에게 갖추어져 있었다. 훈장처럼, 그것은 내 가슴 안쪽에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실제적인 문제로서, 오타니 대학의 입학시험을 치를 때까지, 노사의 의향을 이리저리 억측하며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없었다. 노사는 단 한 번도 진학에 관한 언약을 번복하는 듯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수험 준비를 서두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어느 쪽이건, 나는 얼마나 노사의 한마디를 기다렸던가! 노사는 심술궂게도 침묵을 지키며, 나를 기나긴 고문에 처하였다. 나도 또한, 두려움에서인지, 혹은 반항심에서인지, 진학에 관하여 노사의 의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이전에는 남들 못지 않게 경의도 표하고,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던 노사의 모습이, 서서히 괴물처럼 거대하여지며, 인간적인 마음을 지닌 존재로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아무리 눈길을 피하려 해도 그곳에 존재하는, 기괴한 성처럼 그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늦가을의 일이다. 어느 옛 단가의 장례식에 초청받고, 기차로 2시간이나 걸리는 장소였기에, 노사는 아침 5시 반에 출발한다는 뜻을 전날 밤에 미리 분부하였다. 부사가 따라가기로 되었다. 우리들도 그 시간에 노사가 출발하는 때에 맞추어, 4시에는 일어나서 청소나 식사 준비를 하여야만 했다.
부사가 노사의 시중을 드는 동안, 우리들은 기상과 동시에 조과인 독경을 하였다.
어둡고 추운 주방 쪽에서, 두레박 끌어 올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절간 사람들은 서둘러 세수를 하고 있었다. 늦가을 새벽의 어둠을 뚫고, 뒤뜰에서 닭 울음소리가 맑게 들려왔다. 우리들은 승복의 소매를 여미며 객전의 불단 앞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숙소로는 사용되지 않는 넓은 다다미방은, 새벽녘의 냉기 속에서, 거부하는 듯한 감촉을 주었다. 촛대의 불꽃이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들은 삼배하였다. 선 채로 숙이다가, 징소리가 나면 앉아서 머리를 숙인다. 그것을 3번 되풀이하는 것이다.
조과인 독경 때에, 나는 언제나 합창하는 사내들의 목소리에서 생생한 느낌을 받곤 하였다. 하루의 일과 중에서도 조과인 경 읽는 목소리는 유달리 힘차게 들리지만, 그 힘찬 목소리가 밤 사이의 망상을 주위에 발산하여, 마치 성대에서 검은 물보라가 뿜어 나오는 듯하였다. 내 자신에 대하여는 모르겠다. 모르기는 하지만 내 목소리도 역시 사내로서의 불결함을 발산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기묘하게도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우리들이 죽좌를 마치기 전에, 노사의 출발 시각이 되었다. 절간 사람들은 현관 앞에 정렬하여, 전송하는 것이 예의이다.
아직 날은 새지 않았다. 하늘에는 별이 가득하였다. 산문까지의 사이에 돌을 깔아서 만든 길은 별빛을 받으며 뿌옇게 뻗어 있었으나, 상수리나무, 매화나무, 소나무 등 거목들의 그림자가 사방에 드리워져 있었기에 서로 맞붙은 그림자들이 지면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었다. 구멍이 뚫린 스웨터를 입고 있는 내 팔꿈치로 새벽녘의 냉기가 스며들었다.
모든 일은 말없이 진행되었다. 우리들은 잠자코 머리를 숙였다. 노사는 거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윽고 노사와 부사의 나막신 소리가, 돌길 위를 따각따각 소리내며 멀어져 갔다. 뒷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전송하는 것이 선가의 예의이다.,
멀리서 보이는 것은 뒷모습 전체가 아니었다. 승복의 하얀 나락과, 하얀 버선뿐이다. 이제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되는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나무그늘에 가려진 탓이었다. 그늘 저편에 다시금 하얀 옷자락과 하얀 버선이 나타나, 나막신 소리의 메아리는 도리어 높아지는 듯이 생각되기도 한다.
우리는 잠자코 그것을 전송하였다. 정문을 나선 두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전송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길었다.
그때 나의 내부에는 기묘한 충동이 일고 있었다. 중요한 말이 튀어나오려 할 때 더듬거리는 버릇에 방해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충동은 나의 목 안에서 불타고 있었다. 나는 해방되고 싶었다. 어머니가 이전에 암시하였던, 주지 자리를 물려받을 가망은 고사하고, 대학 진학의 가망도 이때에는 없었다. 무언으로 나를 지배하며, 나를 짓누르고 있는 것으로부터 빠져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 당시 나에게 용기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고백하는 사람의 용기란 대수로울 것이 없지 않은가! 20년 동안이나 입을 다물고 살아온 나에게는, 고백이란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내가 과장되게 말한 것일까? 노사의 무언에 대항하여, 고백도 않고 버텨 온 나는, '악이 가능할까?'하는 문제 하나만을 시험해 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내가 마지막까지 참회를 하지 않는다면, 아주 조그만 악이라도, 악은 이미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나 노사의 하얀 옷자락과 하얀 버선이 나무그늘 사이로 어렴풋이 새벽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내 목 안에서 불타는 힘은, 거의 억누를 수 없을 정도의 힘이 되었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노사를 쫓아가서, 그 소매에 매달려, 큰 소리로 눈 내린 날에 있었던 일을 실토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노사에 대한 존경이 그러한 생각을 들게끔 한 것은 결코 아니다. 노사의 힘은 나에게 있어서 일종의 강력한 물리적인 힘과 비슷하였다.
...하지만 만약 실토한다면, 내 인생에 있어서 최초의 조그만 악도 와해되어 버리리라는 생각이 나를 저지시키며, 무언가가 내 등을 세차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정문을 나선 노사의 모습은 새벽녘의 하늘 밑으로 사라졌다.
모두들 갑자기 해방되어, 떠들어 대며 현관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멍하니 서 있는 내 어깨를 쓰루카와가 두드렸다. 내 어깨는 잠에서 깨어났다. 이 야위고 초라한 어깨는 긍지를 되찾았다.
...이러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내가 오타니 대학에 진학하였다는 이야기는 이미 언급하였다. 참회는 불필요하였다. 그로부터 수일 후, 노사는 나와 쓰루카와를 불러서 간략하게 수험 준비를 시작하여야 하리라는 것, 시험 준비를 위하여 잡무를 면제한다는 것 등을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으나, 그것으로 모든 일이 일단락지어진 것은 아니었다. 노사의 이러한 태도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않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고, 후계자의 내정에 관하여도 무엇 하나 짐작할 수가 없었다.
오타니 대학. 이곳은 내가 평생 처음으로 사상을, 그것도 내가 멋대로 선택한 사상을 가까이하고,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장소이다.
이 대학은, 300년 가량 옛날인 간분 5년에 축자관세음사의 대학 기숙사를, 교토의 기코쿠데이로 옮긴 것이 그 시초였다. 이후로 오랫동안 오타니파 본원사 자제들의 수도원으로 이용되었으나, 본원사 제15대인 쇼뇨 종주 때에 나니와(역자주:현재의 오사카 주변의 일대) 출신의 문하생인 다카기 소켄이 재산을 희사하여, 라쿠호쿠 가라스마가시라인 이 땅을 선정하여 본 대학을 세웠다. 1만 2,700평의 대지는, 대학으로서는 결코 큰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오타니파뿐만 아니라, 각 종파의 청년들이 여기에서 공부하며 불교 철학의 기초적이 지식을 습득하고 있었다.
낡은 벽돌 문은, 전찻길과, 대학 운동장 너머로 서쪽 하늘에 솟아 있는 히에이 산과 마주하고 있다. 문을 들어서면, 자갈을 깐 찻길이 본관 앞의 차 대는 곳으로 통하고 있다. 본관은 낡고 침울한 빨간 벽돌의 2층 건물이다. 현관 지붕의 꼭대기에 청동의 망루가 우뚝 서 있으나, 종루라고 하기에는 종이 보이지 않고, 시계탑이라고 하기에는 시계가 없었다. 그렇기에 이 망루는, 가느다란 피뢰침 아래로 공허한 방형의 창문을 통하여 푸른 하늘을 보여 주고 있을 뿐이었다.
현관 옆의 수령이 오래된 보리수는 그 장엄한 잎사귀에 햇빛을 받아 구릿빛으로 반짝였다. 학교 건물은 본관을 여러 차례 증축한 관계로 무질서하게 이어져 있었으나, 대부분은 낡은 목조의 단층 건물로서, 건물과 건물 사이는 낡아 빠진 널빤지를 잔뜩 늘어놓아 만든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다. 널빤지는 수시로 부서진 부분만 교체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 건물에서 다른 건물로 건너갈 때에는, 가장 새로운 나무색으로부터 가장 낡은 나무색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짙고 옅은 모자이크가 발에 밟혔다.
어느 학교나 신입생이 그러하듯이, 나는 매일 신선한 기분으로 통학하면서도, 어수선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는 사람이라곤 쓰루카와 한 사람뿐이었다. 아무래도 쓰루카와하고만 이야기하게 된다. 그래 가지고는 모처럼 새로운 세계로 나온 의미가 없다고 쓰루카와 쪽에서도 느끼고 있었던 듯, 며칠이 지나자, 쉬는 시간에는 일부러 둘이 떨어져서 제각기 새로운 친구를 개척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말더듬이인 나에게는 그러한 용기도 없었기에, 쓰루카와의 친구가 불어남에 따라서, 나는 점점 더 외톨이가 되었다.
대학 예과 1학년에는, 수신, 국어, 한문, 중국어, 영어, 역사, 불전, 논리, 수학, 체조의 10과목이 있었다. 논리 강의는 처음부터 나를 괴롭혔다. 어느 날, 그 강의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자, 이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학생에게, 나는 두세 가지 질문을 해보려고 하였다.
이 학생은 언제나 혼자 떨어져서, 뒤뜰의 화단가에서 혼자 도시락을 먹었다. 그 습관은 일종의 의식 같아 보이기도 했고, 맛없다는 듯이 먹는 그 식사 태도는 몹시 염인적이기도 하였기에, 아무도 그의 곁에 가는 자가 없었다. 그도 학우들과는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기에, 친구 사귀기를 거절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이름이 가시와기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가시와기의 두드러진 특색은, 상당히 심한 안짱다리였다. 걸음걸이가 정말로 특이했다. 언제나 진흙탕 속을 걷듯이, 한쪽 다리를 진흙탕에서 간신히 빼내면, 다른 한쪽 다리가 다시금 진흙탕 속에 빠져들어가는 듯한 자세였다. 그에 따라서 전신이 약동하였고, 보행이 일종의 과장된 무용과도 같았기에, 일상성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
입학 당시부터, 내가 가시와기에게 주목하였던 에에는 이유가 있다. 그의 불구가 나를 안심시켰던 것이다. 그의 안짱다리는 애당초 내가 처해 있는 조건에 대한 동의를 의미하고 있었다.
가시와기는 뒤뜰의 토끼풀이 무성한 곳에서 도시락을 펼치고 있었다. 당수부와 탁구부의 대부분 유리창이 부서져 없어진 폐가와도 같은 부실이, 이 뒤뜰에 면하고 있었다. 대여섯 그루의 빈약한 소나무와, 텅 빈 자그마한 온상이 있었다. 온상에 칠해 놓은 파란 페인트는, 벗겨져 일어나, 말라 버린 조화처럼 돌돌 말려 있었다. 그 옆에는 두세 단의 분재용 선반과 폐품 더미가 있었고, 히야신스와 앵초 화단도 있었다.
토끼풀밭은 앉기에 놓았다. 햇빛이 그 부드러운 잎사귀에 흡수되어 자잘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기에, 그 일대가 지면으로부터 약간 들떠 있는 듯이 보였다. 앉아 있는 가시와기는, 걷고 있을 때와는 달리, 남들과 다름없는 학생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일종의 험악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육체적인 불구자는 미모의 여자와 마찬가지로 대담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불구자도 미모의 여자도, 남들에게 보여진다는 사실에 지치고, 보여지는 존재라는 사실에 질려서, 궁지에 몰린 끝에, 존재 그 자체로 마주 쳐다보는 것이다. 먼저 보는 쪽이 이긴다. 도시락을 먹고 있는 가시와기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눈이 자기 주변의 세계를 훤히 내다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햇빛 아래에서 혼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한 인상이 나의 가슴에 와 닿았다. 봄날의 햇빛과 꽃 속에서, 내가 느끼는 부끄러움과 어색함을, 그는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그 모습을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주장하고 있는 그림자, 아니, 존재하고 있는 그림자 그 자체였다. 햇빛은 그의 단단한 피부에 스며들지 못함에 틀림없었다.
열심히, 그러면서도 전혀 맛이 없다는 듯이 먹고 있는 그 빈약한 도시락은, 아침에 주방에서 내가 스스로 싸는 도시락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쇼와 22년(1947)은 아직 암시장에 가지 않으면 영양분을 섭취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나는 공책과 도시락을 들고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도시락이 내 그림자로 그늘졌기 때문에, 가시와기는 얼굴을 들었다. 힐끗 나를 보더니, 다시 눈을 깔고, 누에가 뽕잎을 먹는 듯한 단조로운 입놀림을 계속하였다
"잠깐, 아까의 강의에서 모르는 곳을 가르쳐 주겠니?"
나는 더듬거리며, 표준어로 말했다. 대학에 들어가면 표준어를 쓰려고 작정했던 것이다.
가시와기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말을 더듬어 대기만 하니."
하고 불쑥 말했다. 내 얼굴은 붉어졌다. 그는 젓가락 끝을 빨며, 잇달아 단숨에 말하였다.
"네가 나에게 어째서 말을 걸어오는가, 다 알고 있어. 미조구치라고 했지, 너? 불구자끼리 친구가 되려는 것도 놓지만, 너는 나에 비해서 말더듬이라는 점을, 그토록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냐? 너는 자신을 너무 소중히 여기고 있어. 그렇기에 네 자신은 물론, 자신의 말더듬 증세도 지나치게 소중히 여기고 있는 거 아니냐?"
훗날 그가, 같은 임제종의 선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 최초의 문답에, 다소나마 그의 선승 기질이 나타나 있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이때에 내가 받은 강렬한 인상을 부정할 수는 없다.
"더듬어! 더듬으라구!" 가시와기는,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향하여, 재미있다는 듯이 말하였다.
"너는, 이제야 안심하고 말을 더듬을 수 있는 상대를 만난 거야. 그렇지? 인간은 모두 그런 식으로 상대를 찾게 마련이지. 그건 그렇고 너는 아직 동정이냐?"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가시와기의 질문하는 수법이 의사와 비슷하였기에,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편이 몸에 이로울 듯이 여겨졌다.
"그렇겠지. 너는 동정이로군. 전혀 아름다운 동정이 아니야. 여자에게도 인기가 없고 몸파는 여자를 살 용기도 없지. 그것뿐이지. 하지만 네가 동정끼리 어울리겠다는 생각으로 나와 사귀겠다면, 잘못 생각한 거야. 내가 어떻게 동정을 벗어났는지, 이야기해 줄까?"
가시와기는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산노미야 시에 있는 선사의 자식으로, 날 때부터 안짱다리였다... 하지만 내가 이런 식으로 고백을 시작하면, 너는 나를, 아무에게나 신상 이야기를 하는 불쌍한 병자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누구에게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야. 내 쪽에서도, 창피한 이야기지만 처음부터 너를 고백 상대로 여기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마도 내가 해 온 짓들이 분명히 너에게 가장 가치 있고, 내가 해 왔던 대로 한다면, 분명히 그것이 너에게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종교가는 그런 식으로 신자의 냄새를 맡고, 금주가는 그런 식으로 동지의 냄새를 맡는다는 사실을 너도 알고 있겠지?
그래. 나는 자신의 존재 조건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했지. 그 조건과 화해해서, 사이좋게 지내는 건 패배하고 생각했어, 원망하자면 끝이 없지. 부모님은 내가 어렸을 때, 교정 수술을 해 주어야 했어. 이제는 이미 늦었지. 하지만 나는 부모님에 대해서 무관심했고 더구나 원망한다는 건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
나는 절대로 여자들한테서 사랑받지 못하리라고 믿었어. 이건 남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안락하고 평화로운 확신이라는 건, 아마 너도 알고 있는 바와 같아. 자신의 존재 조건과 화해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이 확신과 반드시 모순되지는 않아. 왜냐하면, 만약 내가 이대로의 상태에서 여자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만큼, 나는 자신의 존재 조건과 화해하는 게 되기 때문이지. 나는 현실을 정확히 판단하는 용기와, 그 판단과 싸울 수 있는 용기는, 쉽사리 가까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 가만있으면서도 나는 싸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거야.
이러한 내가, 친구들처럼 몸파는 여자를 상대로 동정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하다고 해야 하겠지. 왜냐하면, 몸파는 여자들은 손님을 사랑해서 받는 것이 아니거든. 노인이건, 거지건, 애꾸눈이건, 미남이건, 모른다면 문둥이라도 손님으로 받겠지.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평등성에 안심하고 첫 여자를 사겠지. 하지만 나에게는 이 평등성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사지가 멀쩡한 사내와 내가, 같은 자격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었고, 그건 나에게 있어서 엄청난 지기 모독으로 여겨졌거든. 내가 안짱다리라는 조건이 간과되고 무시된다면, 나의 존재는 사라지고 만다는, 네가 지금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은 공포에 나도 사로잡혀 있었던 거야. 내 조건을 전적으로 시인하기 위해서는, 평범한 인간보다 몇 배나 호화스러운 구상이 필요할 테니까. 인생은 하여간에 그런 식으로 되어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지.
우리들과 세계를 대립 상태로 만드는 무서운 불안은, 세계이건 우리들이건 어느 쪽인가가 변하면 해소되겠지만, 변화를 꿈꾸는 몽상을 나는 증오하니까, 몽상을 아주 싫어하게 됐지. 하지만 세계가 변하면 나는 존재하고, 내가 변하면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적으로 밝혀 낸 확신은, 오히려 일종의 화해, 일종의 융화와도 비슷하지. 있는 그대로의 내가 사랑받지 못한다는 생각은, 세상과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불구자가 결국에 빠져드는 함정은, 대립 상태의 해소가 아니라, 대립 상태의 전적인 시인이라는 형태로 나타나지. 그러니까 불구는 불치가 되는 거야...
어느 날, 청춘--이 말은 내가 아주 정직하게 사용하는 거지만—인 내 신사에 믿기지 않는 사건이 발생했어. 절의 단가 아이로 그 미모가 유명한데다가 고베의 여학교를 나온 부잣집 딸이, 우연한 일로 나에게 사랑을 고백했거든. 잠시 동안 나는 내 귀를 의심했지.
나는 불행한 덕분에 인간 심리를 통찰하는 에 능숙해 있었기 때문에, 간단히 그녀가 나를 사랑하게 된 동기를 동정이라 생각하고 일부러 심술궂게 굴었던 것은 아니야. 동정만으로 여자가 나를 사랑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거든. 내가 추측하건대, 그녀의 사랑의 원인은 유별난 자존심이었다. 굉장히 아름답고, 여자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감 넘치는 구애자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지. 자신의 자존심과 구애자들의 자만을 저울로 잴 수가 없었다. 소위 천생연분일수록 그녀에게 혐오감을 준 거야. 결국에는, 사랑에 있어서의 모든 균형을 결백하게 물리치고—이 점에서 그녀는 성실했다--나한테 관심을 갖게 된 거야.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지. 너는 웃을지 모르겠다만, 여자를 향해서, 나는, '사랑하지 않아'라고 대답했다구. 이것말고 다른 대답이 있었을까? 이 대답은 정직했고, 조금도 과장이 없었어. 여자의 고백을 듣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해서, '나도 사랑해'라고 대답했더라면, 우스꽝스러운 걸 넘어서, 거의 비극적으로 보였겠지.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사내는, 잘못하여 자신이 비극적으로 보이는 것을 현명하게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거든. 만일 비극적으로 보이게 되면, 사람들이 절대로 자신에게 안심하고 접근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야. 자신을 비참하게 보이지 않도록 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타인의 영혼을 위해서 중요하지. 그러니까 나는 간단히 말해 버렸지, '사랑하지 않아'라고
여자는 당황하지 않더군. 내 대답이 거짓이라는 거야. 그리고는 여자가, 내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끔 조심하면서, 나를 설득하려고 취한 방법이 볼 만했지. 그녀에게 있어서는, 사내치고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인간이란 상상할 수가 없었고,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사내는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 그녀는 그래서, 나에 관하여 세밀한 분석을 한 결과, 결국 사실은, 내가 그녀를 이전부터 사랑하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지. 그녀는 총명했어. 만약 그녀가 정말로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감당할 수 없는 상대를 사랑한 게 되고, 아름답지도 않은 내 얼굴을 아름답다고 말한다면 내가 화를 낼 테고, 내 안짱다리를 아름답다고 한다면 나는 더욱 화를 낼 테고, 내 겉모습이 아니라 인격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면 나는 더욱 더 화를 내리라는 점을 계산에 넣어, 단지, 나를 '사랑해'라고 되풀이 말한 거야. 그래서 나의 내부에서도, 분석의 결과, 그것과 대응하는 감정을 찾아 낸 거지.
나는 이러한 부조리가 납득되지 않았어. 사실 내 욕망은 점점 격렬하게 솟구쳤지만, 욕망이 그녀와 나를 맺어 준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어. 그녀가 만약 딴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나를 딴사람과 구별하는 개별적인 것이 있어야만 되지. 그것이 바로 안짱다리야.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입 밖에 내지 않아도 내 안짱다리를 사랑하는 게 되고, 그런 사랑은 내 생각으로는 불가능했지. 만약에, 나의 개별성이 안짱다리 이외에 또 있다면, 사랑은 가능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안짱다리 이외에 나의 개별성을, 나의 존재 이유를 인정한다면, 나는 그러한 점을 보충적으로 인정한 게 되고, 따라서, 상호 보완적으로 타인의 존재 이유도 인정한 게 되고, 나아가서는 세계 속에 둘러싸인 자신을 인정한 게 되지. 사랑은 있을 수 없어. 그녀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착각이고,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래서 나는 거듭 말했지. '사랑하지 않아'하고.
이상하게도,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 할수록, 그녀는 더욱 더 깊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빠졌어. 그러던 어는 날 밤, 드디어 내 앞에 몸을 던지는 짓을 하고야 말았지. 그녀의 육체는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웠어. 하지만 난 불능이었어.
이러한 대실패는, 모든 것을 간단히 해결해 주었지. 그제야 그녀에게는,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증명된 모양이더군. 그녀는 내 곁을 떠났지.
나는 창피했지만, 안짱다리라는 창피에 비하면, 어떤 창피라도 대수로울 건 없었어. 나를 낭패스럽게 만든 건 전혀 다른 사실이야. 불능의 이유를 알고 있었지. 당시에, 나는 자신의 안짱다리가 그녀의 아름다운 다리에 닿으리라는 걸 생각하고는 불능이 되었던 거야. 그 발견은, 결코 사랑받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지니고 있던 편안함을, 내부로부터 무너뜨리고 말았지.
왜냐하면, 그때, 나에게는 진지하지 못한 기쁨이 생겨나서, 욕망에 의하여 그 욕망을 수행함으로써 사랑의 불가능을 실증하려 했던 것인데, 육체가 해 버렸기 때문이지. 나는 모순에 봉착했어. 굳이 속된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사랑받지 못한다는 확신을 이용해서, 사랑을 꿈꾸고 있었던 게 되지만, 최후의 단계에서는, 욕망을 사랑의 대리로 두고 안심했던 거야. 그런데도 욕망 그 자체가, 내 존재 조건의 망각을 요구하고, 내 사랑의 유일한 관문인 사랑받지 못하리라는 확신을 포기하도록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지. 나는 욕망이란 아주 명석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것이 조금이라도 내 자신을 꿈꾸기를 필요로 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
이때부터, 나에게는 정신보다도, 갑자기 육체가 관심을 끌게 되었어. 하지만 내 자신이 순수한 욕망의 화신이 될 수는 없었기에 단지 그것을 꿈꾸었지. 바람처럼, 상대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 이쪽에서는 모든 것을 몰 수 있으며, 상대에게 손쉽게 접근하여 상대를 마음껏 애무하고, 심지어는 그 내부에 숨어들어갈 수 있기를... 너는 육체의 자각이라면, 일정한 질량을 지닌, 불투명하고 확고한 '물체'에 관한 자각을 상상하겠지. 나는 그렇지 않았어. 내가 일개의 육체, 일개의 욕망으로서 완성된다는 사실, 그것은 내가, 투명한 것, 보이지 않는 것, 즉 바람이 되는 일이었거든.
하지만 곧바로 안짱다리가 나를 저지하러 오지. 이것만은 절대로 투명해지는 일이 없다구. 그건 다리라기보다는, 하나의 완고한 정신이었거든. 그건 육체보다도 훨씬 확고한 '물체'로서,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지.
거울을 보지 않으면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겠지만, 불구라는 사실은 언제나 눈앞에 놓여 있는 거울이야. 그 거울에 종일, 내 전신이 비치고 있지. 망각은 불가능해. 그러니까 나에게는, 세상에서 말하는 불안 따위는 어린애 장난처럼 보일 뿐이지. 불안은 없어. 내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건, 태양이나 지구나, 아름다운 새나, 보기 흉한 악어가 존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한 거지. 세계는 비석처럼 움직이지 않아.
불안이 전혀 없고, 발붙일 곳이 전혀 없는, 그러한 상황에서 나의 독창적인 삶이 시작되었지. 자신은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가? 이러한 점에 사람들은 불안들 느끼고, 자살하기도 하지.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야. 안짱다리가 내 삶의 조건이고, 이유이며, 목적이자, 이상이고...삶 그 자체이니까.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충분하니까. 원래 존재의 불안이란, 자신이 충분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치스러운 불만에서 생겨나는 게 아닐까?
나는 우리 마을에, 홀로 살고 있는 늙은 과부를 점찍었지. 예순 살이라는 말도 있고, 그 이상이라는 말도 있었어. 죽은 남편의 기일에 나는 아버지 대리로 경을 돌리러 갔지만, 친척이 하나도 없고, 불전에는 노파와 나뿐이었어. 독경이 끝나, 별실에서 차를 대접받고 있을 때, 여름이라, 나는 좀 씻고 싶다고 부탁했지. 노파는 발가숭이가 되어 내 등에 물을 끼얹어 주더군. 노파가 안쓰러운 듯이 내 다리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내 마음에는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지.
아까 있었던 방으로 돌아가자, 몸을 닦으며, 나는 그럴싸한 말을 하지 시작했어. 내가 태어났을 때, 어머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이 아이가 어른이 되면, 이 아이의 다리를 성심껏 떠받든 여자는 극락왕생한다는 계시가 있었다고 내가 이야기했지. 믿음이 깊은 과부는, 염주를 헤아리며, 가만히 내 눈을 직시한 채 듣고 있었어. 나는 적당히 경을 되며 염주를 든 손을 가슴 앞에 합장하고는, 시체처럼, 발가벗고 누웠어. 나는 눈을 감았지. 입으로는 여전히 경을 외면서.
내가 어떻게 웃음을 참았는지 상상해 봐. 내 속에는 웃음이 넘치고 있었어. 그리고 나는 조금도 내 자신을 꿈꾸지 않았지. 노파가 경을 되면서, 내 다리에 열심히 절하는 것을 알겠더군. 나는 절을 받는 내 다리만 생각하면서, 우스꽝스러워 숨이 막힐 지경이었어. 안짱다리, 안짱다리, 단지 그것만을 생각하며, 그것만을 뇌리에 보고 있었지 그 기괴한 모습. 그 다리가 처해 있는 추악하기 그지없는 상황. 그 엉터리 싸구려 연극. 사실 이따금 절하는 노파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발바닥에 닿으니까, 간지러움이 더욱더 우스꽝스러운 걸 부채질하더군.
나는 이전에, 그 아름다운 다리에 닿아 불능이 되었을 때부터, 욕망이란 것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아. 왜냐하면 이때, 추악한 예배 도중에, 나는 자신이 흥분하고 있음을 느꼈거든. 추호도 자신을 꿈꾸지 않으면서! 이러한 조금도 가차 없는 상황 하에서!
나는 일어나, 노파를 단숨에 쓰러뜨렸지. 노파가 조금도 놀라지 않는 걸, 이상하게 생각할 틈도 없었어. 늙은 과부는 나자빠진 채로, 잠자코 눈을 감고, 경을 외고 있었지.
기묘하게도, 이때 과부가 외던 경이 대비심타라니의 한 구절이었던 것을, 나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지.
이혜이혜. 실나실나. 아라삼. 불라사리. 벌사벌삼불라사야.
너도 알고 있겠지만, '해'를 보면, 이건 이런 의미야.
"초청합니다. 초청합니다. 탐진치 삼독을 괴멸시킬 무구 청정한 본체를."
내 눈앞에는, 눈을 감고 나를 나를 받아들이고 있는 예순이 넘은 여자의' 화장도 하지 않은, 햇볕에 탄 얼굴이 있었지. 내 흥분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더군. 그리고 이것이 싸구려 연극이라는 증거로, 나는 알게 모르게 유도 당하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알게 모르게라는 문학적 표현을 쓰면 안 되겠지. 나는 모두 알고 있었거든. 지옥의 특색은, 구석구석까지 명료하게 보인다는 점이지. 그것도 암흑 속에서
늙은 과부의 주름살투성이 얼굴은, 아름답지도 않고, 신성하지도 않았어. 하지만 그 추하고 늙었다는 점이, 아무것도 꿈꾸지 않는 나의 내적인 상태에, 부단한 확증을 주는 듯이 여겨졌어. 어떠한 미녀의 얼굴이라 할지라도, 전혀 꿈도 없이 쳐다볼 때, 이 노파의 얼굴로 변모하지 않는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니? 나의 안짱다리와 이 얼굴과... 그렇지, 요컨대 실상을 보는 게 내 육체의 흥분을 유지 시키고 있었던 거야. 나는 처음으로, 친화의 감정으로 자신의 욕망을 믿었지. 그리고 문제는, 나와 대상 사이에 있는 거리를 어떻게 좁힐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대상답게끔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거리를 유지할까 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
알겠니? 그때 나는, 그곳에 정지하고 있으며 동시에 도달하고 있다는 불구의 논리, 결코 불안에 휩싸이지 않는 논리에서, 나의 에로티시즘의 논리를 발명한 거야. 이 세상 사람들이 탐닉이라고 칭하는 것과 닮은꼴의 허구를 발명한 거지. 은폐물이나 바람과도 비슷한 욕망에 의한 결합은 나에게 있어서는 꿈에 불과했으니까, 나는 보는 것과 동시에, 숨김없이 보여지고 있어야만 했지. 내 안짱다리와 내 여자는, 그때 세계의 밖으로 내던져져 있었지. 안짱다리도 여자도, 나로부터 같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어. 실상은 그쪽에 있었고, 욕망은 가상에 불과했지. 또한 보고 있는 나는, 가상 속에 끝없이 전락하면서, 보여지는 실상을 향하여 사정하는 거야. 내 안짱다리와 내 여자는, 결코 서로 접촉하는 일이 없이, 결합하지도 못하고, 함께 세계의 밖으로 내던져진 채로... 욕망은 끝없이 솟구쳤지. 왜냐하면, 그 아름다운 다리와 내 안짱다리와는, 이미 영원히 접촉하지 않아도 되니까.
내 생각이 이해하기 힘든 걸까? 설명을 필요로 할까? 하지만 내가 그 이후로, 안심하고, '사랑은 있을 수 없다.'고 믿게 되었다는 사실은, 너도 알겠지? 불안도 없어. 사랑도 없고. 세계는 영원히 정지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도달하고 있는 거야. 이 세계를 일부러, '우리들의 세계'라고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이런 식으로, 세상의 '사랑'에 관한 미몽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가 있어. 그것은 가상이 실상과 결합하려는 미몽이라고--이윽고 나는, 결코 사랑받지 못한다는 내 확신이,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양태라는 걸 알게 됐지. 이것이 내가 동정을 버린 전말이야.
가시와기는 이야기를 끝냈다.
듣고 있던 나는 간신히 숨을 돌렸다. 서글픈 감명에 휩싸인 채, 지금까지 상상도 못 하던 생각에 접한 고통으로부터 깨어나지 못했다. 가시와기가 이야기를 끝내자, 잠시 후, 봄날의 햇빛이 내 주위에서 살아나며, 환한 토끼풀밭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뒤쪽의 농구 코트에서 들려오는 환성도 되살아났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똑같은 봄날의 대낮인 상태에서, 의미를 완전히 달리하여 나타난 듯이 느껴졌다.
잠자코 있을 수가 없었기에, 나는 무언가 대꾸를 하려고, 더듬거리며, 당치도 않은 말을 하였다.
"그래서 너는, 그 이후로 고독한 거로군."
가시와기는 다시금 짓궂게도 잘 안 들린다는 표정을 지어서, 나에게 다시 한번 그 말을 되풀이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대답에는 이미 친근감이 있었다.
"고독하다구? 어째서 고독하지 않으면 안 되지? 그 이후의 나에 관하여는, 사귀는 동안에 점차 알게 될 꺼야."
오후 강의의 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나는 일어서려고 하였다. 가시와기는 앉은 채로, 내 소매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내 제복은 선문 학원 시절의 것을 수선하여 단추를 새로 달았을 뿐 천은 낡고 헐어 있었다. 게다가, 몸에 맞지도 않았기에 빈약한 체구를 더욱더 작게 보이게끔 하였다.
"요번은 한문이지? 시시하잖아, 근처에 산보하러 가자."
가시와기는 그렇게 말하고는, 일단 몸을 조각조각 분해하여 다시 조립하듯이 대단한 수고를 들이면서 일어섰다. 그것이 영화에서 본 낙타의 동작을 연상시켰다.
나는 한 번도 강의를 빼먹은 적이 없었지만, 가시와기에 관하여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에,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정문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정문을 나설 때, 가시와기의 그야말로 독특한 보행 방법이 문득 눈에 들어오자, 나는 부끄러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그렇게, 남들과 같은 표정으로, 가시와기와 함께 걷기를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기이한 일이었다.
가시와기는 나에게 수치심의 근원을 확실히 알려 주었다. 동시에 나를 인생으로 재촉하였다... 나의 모든 부끄러운 감정, 모든 사악한 마음은, 그의 말에 의하여 도야 되고, 일종의 신선한 것이 되었다. 그 때문인지, 우리들이 자갈길을 밟으며 붉은 벽돌의 정문을 나섰을 때, 정면에 보이는 히에이 산은, 봄날에 촉촉하게, 오늘 처음 보는 산처럼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것도 또한, 내 주위에 잠들어 있던 수많은 사물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의미로 재현된 듯이 느껴졌다. 히에이 산의 꼭대기는 우뚝한 모양을 하고 있지만, 그 기슭이 완만하게 한없이 퍼진 것이, 마치 한 주제의 여운이 끝없이 울려퍼지고 있는 듯이 보였다. 나지막한 지붕들이 늘어선 저편으로 히에이 산 산주름의 그늘진 곳은, 그 산주름의 부분만, 산중턱의 봄날다운 빛깔의 농담이 어둡고 짙은 남색 하늘 밑에 묻혀 있었기에, 그곳만이 유달리 가깝고 선명하게 보였다.
오타니 대학 문 앞은 사람들의 통행이 적고, 자동차도 적었다. 교토 역전으로부터 가라스마 차고 앞까지를 잇는 선로에도, 간혹 전차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길 건너편에는 대학 운동장의 낡은 문기둥이 이쪽 정문과 마주 보고 있었고, 왼쪽으로 새잎이 돋은 은행나무가 늘어서 있었다.
"운동장을 잠시 거닐까?"
가시와기가 말했다. 내 앞에 서서 전찻길을 건넜다. 몸 전체를 맹렬히 움직이며, 거의 차가 다니지 않는 차도를 물레방아처럼 요란하게 건넜다.
넓은 운동장에는, 강의를 빼먹었는지 휴강인지 모를 학생들 몇 팀이 멀리서 캐치볼을 하고 있었고, 이쪽에서는 대여섯 명이 마라톤 연습을 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2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청년들은 다시금 정력 소모를 기도하고 있었다. 절간의 초라한 식사가 생각났다.
우리들은 낡아 빠진 놀이 기구 위에 걸터앉아, 타원 위를 달리는 마라톤 연습자들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엉뚱한 곳에서 보내는 시간의, 새로 산 셔츠와도 같은 촉감이, 주위의 햇빛이나 산들바람에서 느껴졌다. 경기하는 학생들은 한 그룹을 이루어 괴로운 숨을 내쉬며 천천히 다가와, 피로가 심해짐에 따라서 흐트러진 발소리를, 흩날리는 흙먼지와 함께 남기며 멀어져 갔다.
"멍청한 녀석들."하며, 조금도 분하다는 투가 아닌 어조로 가시와기가 말했다. "저 꼬락서니가 도대체 뭐야. 녀석들이 건강하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건강을 남들에게 뽐내는 게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이야?
스포츠가 도처에서 공개되고 있지? 그야말로 말세의 징조야. 공개하여야 할 건 조금도 공개하지 않고 말이야. 공개하여야 할 것이란... 즉 사형이지. 어째서 사형을 공개하지 않는 걸까?" 하며 꿈을 꾸듯이 말을 이었다. "전쟁 중의 안녕 질서는, 비명에 죽어 가는 사람들의 죽음을 공개함으로써 유지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니? 사형을 공개하지 않는 건, 인심이 살벌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군. 바보 같은 소리지. 공습 때의 시체를 처리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정하고 쾌활한 모습을 하고 있었어.
남의 고통과 피와 단말마의 신음을 보는 게 인간을 겸허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마음을 섬세하고, 밝고, 부드럽게 만드는데도 말이야. 우리들이 잔인해지거나 살벌해지거나 하는 것은 결코 그러한 때가 아니야. 우리들이 갑자기 잔인해지는 건, 가령 이렇게 화창한 봄날 오후에, 잘 다듬어진 잔디밭 위에,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비치는 모습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을 때와 같은, 그러한 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이 세상의 온갖 악몽, 역사상의 온갖 악몽은 그런 식으로 생겨난 거야. 하지만 백일하에 피투성이가 되어 몸부림치는 사람의 모습은, 악몽에 뚜렷한 윤곽을 주게 되고 악몽을 물질화시켜 버리지. 악몽은 우리들의 고뇌가 아니라, 타인의 격심한 육체적 고통에 불과하게 되지. 하지만 타인의 아픔은, 우리들에게는 느껴지지 않거든.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러한 가시와기의 피비린내나는 독단보다도—물론 그것은 그 나름대로 매력적이긴 했지만--동정을 버린 후의 그의 편력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내가 오로지 가시와기에게서 '인생'을 기대하였다는 사실은, 앞에서도 기술한 바와 같다. 나는 그의 말을 가로막고는 그러한 질문을 암시하였다.
"여자 말인가? 흥! 나는 최근에 안짱다리 사내를 좋아하는 여자를 육감으로 척 알아 낼 수 있게 됐지. 여자들 중에는 그런 종류가 있다구. 안짱다리 사내를 좋아한다는 건, 아마도 평생 숨기고 있다가, 무덤까지 갖고 갈지 모르는, 그런 종류 여자들의 유일한 악취미, 유일한 꿈이거든.
그렇지. 안짱다리를 좋아하는 여자를 한눈에 식별하는 방법. 그건 대체로 유별난 미인에다가, 콧날이 차갑게 오뚝하고, 게다가 입 언저리가 약간 단정치 못한..."
그때 여자 하나가 저쪽에서 걸어왔다.
제5장
그런데 그 여자는, 운동장 가운데를 걷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운동장 바깥쪽으로, 주택가와 접하는 길이 있었다. 길은 운동장의 지면보다 두 자 정도 낮았다. 그곳을 걸어왔다.
여자가 나온 곳은, 웅장한 스페인식 저택의 쪽문이었다. 두 개의 굴뚝과 비스듬히 격자로 짠 유리창과 넓은 온실의 유리 지붕이 있는 그 저택은 무척이나 나약한 느낌을 주었지만, 아마도 그 집 주인의 항의로 만들어진 듯한 높은 철망이, 길 건너 운동장의 한 구석에 우뚝 솟아 있었다.
가시와기와 나는 철망 밖의 놀이 기구에 앉아 있었다.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본 나는 깜짝 놀랐다. 그 고상한 얼굴은, 가시와기가 설명한 '안짱다리를 좋아하는' 여자의 인상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윽고 나는 그러한 놀라움이 어리석었다고 여겨졌으나, 가시와기는 그 얼굴을 훨씬 이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선망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우리들은 여자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봄날의 햇살이 가득한 가운데, 저편에는 히에이 산의 짙푸른 봉우리가 있고, 이쪽에는 점차로 다가오는 여자가 있었다. 나는 방금 전에 들은 가시와기의 이야기, 그의 안짱다리와 여자는 두 개의 별처럼 서로 맞닿지 않고 실상의 세계에 점재하는 상황에서, 그 자신은 가상의 세계로 끝없이 빠져들며 욕망을 충족시킨다는 기괴한 말, 그 말이 준 감동에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구름이 해의 표면을 가로막아, 나와 가시와기는 희미한 그늘에 덮였기에, 우리들의 세계는 순식간에 가상의 모습을 드러낼 듯이 여겨졌다. 모든 것이 회색으로 변하여 불안하였고, 내 자신의 존재도 불안하여졌다. 그리고 저편에 있는 히에이 산의 짙푸른 봉우리와, 천천히 걸어오는 고상한 여자와, 이 두 가지만이 실상의 세계에서 빛을 발하며, 확실히 존재하고 있는 듯이 여겨졌다.
여자는 분명히 걸어왔다. 하지만 그 시간의 추이는 점점 심하여지는 고통과도 흡사하여, 여자가 다가오기는 하지만, 그와 더불어, 아무런 연관도 없는 타인의 얼굴이 점차로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가시와기가 일어섰다. 내 귓전에, 무겁고 짓눌린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걷자.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나는 걷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와 나란히, 같은 방향으로, 여자가 걷고 있는 길보다 두 자 정도 높은 돌담을 따라서 우리는 걸었다.
"이쯤에서 뛰어내리자."
가시와기의 뾰족한 손끝이 내 등을 밀었다. 나는 아주 낮은 돌담을 넘어, 길 위로 뛰어내렸다. 두 자의 높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어서, 안짱다리인 가시와기가,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며 내 곁에서 나뒹굴었다. 당연히, 그는 잘못 뛰어내려 자빠진 것이었다.
검은 제복의 등이 내 눈 아래에서 커다랗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지만, 엎드려 있는 모습은 인간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일순간 그것이 무의미하게 커다란 검은 얼룩, 비 내린 길 위의 흙탕물 구덩이처럼 보였다.
가시와기는 여자가 걸어오는 바로 앞에 쓰러진 것이었다. 그러자 여자는 걸음을 멈추었다. 가시와기를 부축하여 세우려고, 천천히 내가 무릎을 꿇었을 때, 그녀의 싸늘하게 높은 코, 단정하지 못한 입 언저리, 촉촉이 젖은 눈, 그러한 것 전부에서, 일순간, 나는 달빛 아래의 우이코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곧바로 환영은 사라지고,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여자가 나를 경멸하는 눈초리로 보며 지나치려는 모습이 보였다.
가시와기는 나보다도 민감히 그 낌새를 알아차렸다. 그는 소리쳤다. 그 어마어마한 고함은, 인기척이 없는 대낮의 주택가에 메아리쳤다.
"못된 것! 나를 내버려 두고 갈 작정이냐? 너 때문에 이 꼴이 됐다구!"
뒤돌아본 여자는 떨고 있었다. 메마르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핏기가 가신 얼굴을 문지르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간신히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쩌란 말인가요?"
이미 얼굴을 든 가시와기는, 여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한마디 한마디 또렷하게 말했다.
"당신 집엔 약도 없단 말이야?"
잠시 동안 잠자코 있더니, 여자는 등을 돌려서, 방금 왔던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나는 가시와기를 부축하여 세웠다. 부축하여 세우기까지는 몹시 무겁고, 아픈 듯이 숨이 거칠었으나, 내가 어깨로 부축하여 걷기 시작하자, 그 몸은 의외로 가볍게 움직였다...
--나는 달음질쳐서, 가라스마 차고 앞의 정류장에 이르렀다. 전차에 뛰어올랐다. 전차가 금각사를 향하여 달리기 시작했을 때, 간신히 나는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손바닥은 땀투성이였다.
가시와기를 부축하여 그 스페인식 양옥의 쪽문을, 여자를 앞장세워 들어선 순간, 공포에 휩싸인 나는 가시와기를 그곳에 팽개친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 나왔다. 학교에 들를 여유도 없었다. 조용한 거리를 달렸다. 약방, 빵집, 전기 상점들이 늘어선 곳의 앞을 달렸다. 그때 내 눈가에, 보라색과 빨간 색이 어른거린 것은 아마도 매화꽃 화분 모양의 문장이 새겨진 초롱불을 검은색 담장 위에 늘어놓고, 문에도 똑같은 매화꽃 화분 모양의 문장이 새겨진 보라색 장막을 두른 천리교 고토쿠 분교회 앞을 달려서 지나친 때였던 모양이다.
어디를 향하여 달리고 있는지, 내 자신도 몰랐다. 전차가 서서히 시노에 접근할 무렵, 나는 자신의 성급한 마음이 금각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관광철이었기에 그날의 금각을 둘러싼 인파는 엄청났다. 안내하는 노인이, 사람들을 헤치며 금각 앞으로 서둘러 둘러 가는 내 모습을 의아스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이리하여 나는, 흩날리는 먼지와 너저분한 군중들에게 둘러싸인 봄날의 금각 앞에 섰다. 안내인의 고함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금각은 여느 때의 미를 살짝 감추고는 시치미를 떼고 있는 듯이 보였다. 연못에 비친 그림자만이 맑고 투명하였다. 그러나 보기에 따라서는, 성중내영도의 여러 보살들에 둘러싸인 내영의 미타처럼, 구름 같은 먼지는 보살들을 감싸고 있는 금빛 구름과도 비슷하였고, 금각이 먼지에 아른거리는 모습도, 오래 되어 퇴색한 물감이나 닳고 닳은 그림과 비슷하였다. 이러한 혼잡과 소음이, 섬세한 기둥들이 즐비한 내부로 스며들어, 조그만 구경정과 꼭대기의 봉황이 점차로 가늘어지며 높게 솟아서 접하고 있는 하얀 하늘로, 빨려들어가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었다. 이 건축물은 그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것들을 통제하고 규제하였다. 주위의 소란이 심하면 심할수록, 서쪽에 수청을 두고 2층에는 유달리 가느다란 구경정을 올려놓은 금각, 이 불균형하며 섬세한 건축은, 흐린 물을 맑은 물로 바꾸어 놓는 여과기와도 같은 작용을 하였다. 사람들이 제각기 떠들어 대는 소음은, 금각에게 거부당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바람이 통하는 기둥 사이로 스며들어가, 이윽고 하나의 정적, 하나의 징명으로까지 여과되었다. 그리하여 금각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연못의 투영과 똑같은 모습을, 어느 틈엔가 지상에도 성취시키고 있었다.
내 마음은 안정되고, 점차로 공포도 사라졌다. 나에게 있어서 미라는 것은, 이러한 것이어야만 했다. 그것은 인생으로부터 나를 차단시키고, 인생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있었다.
'저의 인생이 가시와기와 같은 것이라면, 부디 지켜 주옵소서. 저로서는 도저히 견디어 낼 수 없으니까.'
나는 기도하였다.
가시와기가 암시하며, 내 앞에서 즉흥적으로 연출하여 보여 주었던 인생에서는, 산다는 것과 파멸하는 것이 똑같은 의미밖에 지니지 못하였다. 그 인생에는 자연스러움도 결여되어 있거니와, 금각과 같은 구조의 아름다움도 결여되어, 말하자면 끔찍한 경련의 일종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에 내가 크게 이끌리고, 그곳에 자신의 방향을 설정하였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우선 가시투성이인 삶의 파편으로 손을 피투성이로 만들어야만 하는 것은 두려웠다. 가시와기는 본능과 이지를 같은 정도로 경멸하였다. 기괴한 모양의 공처럼, 그의 존재 그 자체가 굴러다니며, 현실의 벽을 부수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행위조차 되지 못하였다. 요컨대 그가 암시한 인생이란, 미지로 가장하여 우리들을 속이고 있는 현실을 무너뜨리고, 다시는 조금이라도 미지를 포함하지 못하도록 세계를 청소하기 위한, 위험하고 천박한 연극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훗날, 그의 하숙방에서 다음과 같은 포스터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니혼알프스를 그린 여행 협회의 아름다운 석판 인쇄물로서, 푸른 하늘에 솟은 하얀 산정에, "미지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하는 글자가 가로로 쓰여 있었다. 가시와기는 짙은 빨간색 글씨로, 그 글자와 산정을 십자형으로 지우고, 그 옆에다가 안짱다리를 연상시키는 그의 춤추는 듯한 글씨로,
"미지의 인생이란 견딜 수 없다."
하고 갈겨써 놓았다.
이튿날 나는, 가시와기의 몸을 걱정하며 학교에 갔다. 그때 그를 내팽개치고 도망쳐 온 것은, 다시 생각해 보니 두터운 우정의 표시라고도 생각되었기에 그다지 책임감은 느끼지 않았으나, 만약 오늘 교실에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러나 강의가 시작되기 직전 가시와기가 여느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부자연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며 교실에 들어오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쉬는 시간에 재빨리 나는 가시와기의 팔을 잡았다. 이러한 쾌활한 행동이 이미, 나에게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는 입가를 일그러뜨려 웃으며 나를 복도로 데려갔다.
"다친 데는 괜찮니?"
"다친 데라고?"--가시와기는 비웃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언제 다쳤냐? 응? 너는 어째서 내가 다쳤다고 헛소리를 하냐?"
나는 할 말을 잊고 있었다. 가시와기는 나를 잔뜩 안달하게 만든 다음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했다.
"그건 연극이야. 그 길에 떨어지는 연습을 여러 차례 해서, 정말 뼈라도 부러진 듯이 멋지게 허풍을 떨며 넘어지는 방법을 연구해 두었지. 여자가 모르는 척하며 지나치려고 했던 것은 뜻밖이었지만. 하지만 보라구. 이미 여자는 나에게 반하게 됐으니까. 아니 잘못 말했군. 즉, 내 안짱다리에 반하게 된 거지. 그 계집애는 내 다리에, 요오드팅크를 발라 댔다니까."
그는 바지 자락을 걷어올리고, 엷은 노란색으로 물든 정강이를 보여 주었다.
그때 나는 그의 사기술을 본 듯한 느낌이었다. 일부러 그렇게 길바닥에 자빠진 것은, 여자의 주의를 끌기 위한 행동이었음은 물론이지만, 부상을 가장하여 그의 안짱다리를 숨기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 의문은 전혀 그에 대한 경멸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친근감을 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나의 극히 정년다운 느낌에 의하면, 그의 철학이 사기술로 가득하면 가득할수록, 그만큼 그의 인생에 대한 성실성이 증명되는 듯이 여겨졌던 것이다.
쓰루카와는 나와 가시와기와의 교제를, 호의적인 눈으로 보지는 않았다. 우정에 찬 충고를 해 왔지만, 나에게는 귀찮게 여겨졌다.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꾸하여, 쓰루카와라면 좋은 친구도 얻을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가시와기가 제격이라는 투의 말을 하였다. 그때 쓰루카와의 눈에 비친,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는 슬픈 빛을, 훗날 나는 얼마나 심하게 후회하며 되새겼는지 모른다.
*
5월이었다. 가시와기가 휴일의 인파를 피해서, 평일에 학교를 쉬고 아라시 산에 놀러 갈 계획을 세웠다. 가시와기답게, 만약 날씨가 좋으면 가지 말고, 잔뜩 찌푸린 날씨면 가자고 했다. 그는 요전의 스페인식 집의 딸을 동반하고, 나를 위하여 자기 하숙집 딸을 데려오기로 하였다.
우리들은 보통 란덴이라고 불리는 교후쿠 전철의 기타노 역에서 만났다. 그날은 다행히 5월임에도 구름 낀 울적한 날씨였다.
쓰루카와는 무언가 집안에 복잡한 일이 생겨서, 1주일 정도 휴가를 받아 도쿄에 돌아가고 없었다. 결코 고자질할 그는 아니었지만, 나는 아침에 함께 등교하여 도중에 종적을 감추어야 하는 찜찜한 짓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다. 그 야유회의 기억은 나로서는 씁쓸하였다. 하여튼 야유회의 일행은 모두 젊었음에도 불구하고, 젊음이 지닌 어두움과 초조함과 허무감이, 그 야유회날 하루를 온통 뒤덮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가시와기는 아마도 모든 것을 예상하고, 그처럼 암울한 날씨를 선택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날 바람은 남서쪽에서 불어와, 갑자기 심해지는가 싶으면, 뚝 멈추었다가, 불안한 산들바람소리가 들리곤 하였다. 하늘은 어두웠으나, 해가 있는 곳을 전혀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구름의 일부분이, 여러 겹으로 겹쳐 입은 옷의 목 언저리로 살짝 보이는 하얀 가슴처럼, 흰빛을 발하여, 그 흰색의 희미한 속에 해가 있다고 알 수 있었으나, 그것은 다시 금방, 구름 낀 하늘 전체의 둔탁한 색에 빨려들고 말았다.
가시와기의 약속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두 명의 젊은 여자들 사이에 끼여서 개찰구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한 사람은 분명히 그 여자였다. 높고 차가운 코, 단정치 못한 입 언저리, 외제 옷감으로 지은 양복 어깨에 물통을 걸친 아름다운 여자. 그녀와 비교하니 퉁퉁하게 살찐 하숙집 딸은, 차림새도 용모도 초라해 보였다. 작은 턱과 튀어나온 입술만이 처녀다웠다.
가는 도중의 차 안에서 이미, 즐거워야 할 야유회 기분을 깨졌다. 그 내용은 확실히 들리지 않았지만, 가시와기와 부잣집 딸은 끊임없이 다투었고, 여자는 이따금 눈물을 참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숙집 딸은 모든 일에 무관심한 듯, 나지막이 유행가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하숙집 딸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집 근처에 아주 예쁜 꽃꽂이 선생님이 계시는데, 요전에 자신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들려 주더라구요. 전쟁 중에 그 선생님께 애인이 있었는데, 육군 장교로 결국 전쟁터에 나가게 돼서, 잠깐 동안, 남선사에서 마지막 대면을 했대요. 부모님이 반대하는 사이였지만, 헤어지기 직전에 임신한 것이 불쌍하게도 사산이었대요. 남자도 무척이나 슬퍼한 끝에, 마지막으로, 엄마로서의 네 젖을 먹고 싶다고 해서, 시간도 없으니까, 그 자리에서 찻잔에 젖을 짜 넣어, 마시게 했다는군요. 그리고 한 달 후, 애인은 전사했지요. 그 후로, 선생님은 정조를 지키며 혼자 살고 계시다는군요. 아직 젊고 예쁜 여자인데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전쟁 말기에 남선사 산문에서 쓰루카와와 둘이서 본, 그 믿기지 않는 광경이 되살아났다. 하숙집 딸에게는 일부러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만약 입을 열면, 지금 이 이야기를 들은 감동은 그때의 신비한 감동을 배신할 듯이 여겨졌고, 입 밖에 내지 않음으로 해서, 지금의 이야기는 신비스러운 수수께끼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신비스러운 구조가 이중이 되어 한층 깊어질 듯이 여겨졌기 때문이다.
전차는 그때, 나루다키 주변의 대나무 숲 옆을 달리고 있었다. 대나무는 한철이 지난 5월이라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작은 가지를 스치는 바람에, 마른 잎을 무성한 숲 속으로 떨어뜨리건만, 밑둥치는 그것과 상관없다는 듯이, 깊은 속까지 굵은 줄기를 어지럽게 교차시킨 채로 조용하였다. 단지 전차가 질주하는 바로 옆의 대나무들만이, 거창하게 휘며 흔들렸다. 그 속에 유달리 어리고, 푸른 윤기가 나는 대나무가 한 그루 눈에 띄었다. 그 대나무의 크게 휘는 모습이, 요염하고 기이한 운동과도 같은 인상을 내 눈에 남기고 사라졌다...
아라시 산에 도착하여, 와타리즈키 다리 언저리까지 온 우리 일행은, 지금까지는 모르고 있었던 고고노 쓰보네(역자주:다카쿠라 천황의 사랑을 받던 궁녀)의 무덤에 참배했다.
다이라노 키요모리를 피하여 사가노에 몸을 감춘 쓰보네를, 어명을 받들어 찾아 헤매던 미나모토노 나카쿠니는, 추석날 밤, 희미하게 들리는 가야금소리를 듣고, 쓰보네의 은신처를 찾아 내었다. 이 가야금 곳은 "고고"에는, "달빛에 이끌려, 법륜사에 참배하니, 가야금소리가 들리도다. 산봉우리에 부는 바람소리인가 소나무 숲을 지나는 바람소리인가, 아니면 찾는 사람의 가야금 소리인가, 곡명이 무엇이냐 물으니, 임 생각 그리는 상부련이라 하니 기쁘도다."라고 되어 있으나, 쓰보네는 그 후에도 사가노의 암자에서, 다카쿠라 임금의 극락왕생을 빌며 여생을 보냈다.
무덤은 좁은 오솔길 안쪽에 있었으나, 커다란 단풍나무와 썩은 매화 고목의 사이에 끼여 있는 자그마한 석탑에 불과하였다. 나와 가시와기는 그럴싸하게 간단한 경을 올렸다. 가시와기의 유달리 진지하고 모독적인 독경이 나에게도 전염되어, 나는 보통 학생들이 콧노래를 부르는 듯한 심정으로 독경을 해 버렸지만, 이 사소한 독신 행위가 상당히 나의 감각을 해방시켜, 활기차게 만들었다.
"우아한 무덤이란 초라한 거로군."하고 가시와기가 말했다. "정치적 권력이나 금력은 멋진 무덤을 남기지. 당당한 무덤을 말이야. 그 자들은 생전에 전혀 상상력이 없었으니까, 무덤도 자연히 상상력의 여지가 없는 자가 세우게 되지. 하지만 우아한 쪽은, 자타의 상상력에만 의지하며 살았으니까, 무덤도 이런, 상상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게 남게 되지. 이쪽이 나는 비참하다고 생각해. 사후에도 계속해서 남의 상상력에 의존해야만 하니까."
"우아는 상상력 속에만 있는 건가?" 나는 쾌활하게 그 이야기를 받았다. "네가 말하는 실상은, 우아한 실상이로군."
"이거야." 하며 가시와기는 이끼 낀 석탑 머리를 찰싹찰싹 손바닥으로 때렸다. "돌, 아니면 뼈, 인간의 사후에 남는 무기적인 부분이지."
"제법 불교적인데."
"불교고 나발이고 없어. 용안사는 아니지만, 돌멩이에 불과하지. 철학, 이것도 돌멩이, 예술, 이것도 돌멩이야. 그리고 인간의 유기적인 관심이래야, 한심하게도, 정치뿐이지. 인간은 모름지기 자기 모독적인 생물이니까."
"성욕은 어느 쪽인가?"
"성욕 말인가? 음 그 중간이겠지, 인간과 돌멩이와의.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격이지."
나는 그가 생각하는 미에 대하여 곧바로 반박하려 했지만, 논쟁에 질린 두 여자가 오솔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기에, 그 뒤를 따랐다. 오솔길에서 되돌아가기 시작했기에, 그 뒤를 따랐다. 오솔길에서 호즈천을 바라보니, 그곳은 와타리즈키 다리의 북쪽으로, 바로 둑이 있는 부분이었다. 강 건너 아라시 산에는 음울한 녹음이 울창했지만, 강의 그 부분만은 활기찬 물거품의 하얀 선이 하나 뻗어 있고, 물소리가 주위에 가득 울려퍼졌다.
강에 떠 있는 보트는 적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일행이 강변로를 걸어, 막다른 곳에 있는 가메야마 공원의 문을 들어섰을 때, 후지 조각만 흩어져 있을 뿐, 이날 공원에 행락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문이 있는 곳에서 우리들은 돌아서서, 다시 한번, 호즈천과 아라시 산의 신록 풍경을 바라보았다. 맞은편 언덕에는 작은 폭포가 떨어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경치는 지옥이로군."하고 또 가시와기가 말했다.
아무래도 가시와기의 이러한 말투는, 나에게는 억측처럼 생각되었다. 하지만 나도 역시 그를 따라서, 그 경치를 지옥처럼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신록에 싸인 조용하고 평범한 듯한 눈앞에 풍경에도, 지옥의 흔적이 있었다. 지옥은, 낮에도 밤에도, 언제 어느 곳이건, 마음 내키는 대로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우리들이 부르면 들리는 장소, 바로 가까운 곳에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13세기에 요시노 산의 벚꽃을 옮겨 심었다고 하는 아라시 산의 나무들은, 이미 꽃은 지고 잎사귀뿐이었다. 꽃철이 지나면, 꽃은 이 고장에서는, 죽은 미인의 이름처럼 불릴 따름이었다.
가메야마 공원에는 소나무가 가장 많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계절의 색이 변하지 않았다. 커다란 기복이 있는 광대한 공원으로, 소나무는 한결같이 쑥쑥 뻗었으나, 상당히 높은 곳까지 잎이 없는 수많은 벌거숭이 가지들이 불규칙하게 교차되어 있었기에 공원 경치의 원근감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올라가는 듯 싶다가 다시 내려가는 넓은 길이 공원을 통과하였고, 여기저기에 그루터기, 관목, 작은 소나무들이 있었으며, 거대한 바위의 하얀 표면이 절반 흙 속에 묻혀 있는 부근에 붉은 보라색의 진달래가 잔뜩 피어 있었다. 그 빛깔은 구름 낀 하늘 아래에, 악의를 품은 듯이 보였다.
우리들은 지면이 낮은 곳에 설치된 그네에 젊은 남녀가 타고 있는 곁을 지나, 작은 언덕 위에 있는 우산 모양의 정자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그 곳에서는 동쪽으로 공원의 전모가 대부분 보였고, 서쪽으로는 호즈천의 물이 나무 사이로 내려다보였다. 그네의 삐걱거리는 소리는, 끊임없이 이를 가는 소리처럼, 정자 위로 들려왔다.
부잣집 딸이 보자기를 풀었다. 가시와기가 도시락은 필요없다고 말한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거리에는 4인분의 샌드위치와, 입수하기 힘든 외제 과자와, 심지어는 점령군에게만 공급하기 때문에 암시장에서나 살 수 있는 산토리 위스키가 있었다. 당시의 교토는, 관서 지방의 암거래 중심지로 불렸다.
나는 거의 술을 못 마셨지만, 가시와기와 함께, 앞에 놓인 술잔을, 합장하고 나서 손에 들었다. 두 여자는 물통의 홍차를 마셨다.
나에게는 부잣집 딸과 가시와기가 그토록 친한 사이라는 사실이, 아직도 반신반의였다. 까다로울 듯이 보이는 이 여자가, 어째서 가시와기와 같은 안짱다리의 가난한 학생과 친숙히 지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까 전차 속에서 다투고 있었지? 그건 말이야, 그녀의 집에서 그녀에게 싫어하는 남자와 결혼하라고 볶아대기 때문이야. 그녀는 금방 마음이 약해져서 시키는 대로 할지도 몰라. 그래서 내가 그 결혼을 철저히 방해하겠다며, 위로도 하고 협박도 했지."
이것은 원래, 당사자 앞에서 할 말이 아니었지만, 가시와기는 마치 곁에 그 여자가 없기라도 한 듯이 태연히 말하였다. 그것을 듣고 있는 여자의 표정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늘씬한 목에는 사기 조각을 엮은 파란 목걸이를 걸고, 구름 낀 하늘을 배경으로, 탐스러운 머리카락의 윤곽이, 지나치게 선명한 얼굴의 초점을 흐리게 하였다. 눈이 몹시 촉촉하기에, 그 때문에 눈만이 생생한 나체와도 같은 인상을 주었다. 단정하지 못한 입 언저리도, 여느 때처럼, 살짝 벌어져 있었다. 그 입술 사이의 가느다란 틈으로, 가늘고 날카로운 치열이, 맑게 건조된 모습으로 하얗게 엿보였다. 그것은 작은 짐승의 이빨처럼 느껴졌다.
"아야! 아파!" 가시와기가 갑자기 몸을 구부려, 정강이를 만지며 신음하였다. 나도 당황하여 내려다보며 도와 주려 하였으나, 가시와기는 손으로 나를 밀어젖히고는, 묘하게 냉소하는 듯한 눈짓을 나에게 주었다. 나는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
"아이구, 아야!" 가시와기는 정말 같은 목소리로 신음하였다. 얼떨결에 나는 옆에 있는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에는 뚜렷한 변화가 나타나, 눈은 안정을 잃고, 입은 다급하게 떨리며, 차갑고 높은 코만이 태연한 모습이 기묘한 대조를 이루어, 얼굴의 조화와 균형을 무너뜨렸다.
"미안! 미안해요! 제가 봐 드릴 테니까! 지금 즉시!" --그녀의 날카롭고 방약무인한 목소리를 나는 처음 들었다. 그녀는 긴 목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는 듯했으나, 곧바로 정자의 돌 위에 무릎을 꿇고, 가시와기의 정강이를 안았다. 뺨을 비벼 대고, 심지어는 그 정강이에 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금 예전과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 하숙집 딸을 보았다. 그녀는 다른 곳을 바라보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때 해가 구름 사이를 빠져나온 듯이 여겨졌으나, 내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용한 공원의 전경에는 그 구도에 위화감이 생겨, 우리들을 에워싼 맑고 밝은 화면, 그곳의 소나무 숲, 강에서 반사되는 빛, 먼 산들, 하얀 바위면, 여기저기 피어 있는 진달래...이러한 것들로 가득한 화면의 구석구석까지, 가느다란 균열이 전체에 퍼진 듯한 느낌을 주었다.
실제로, 당연한 기적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가시와기는 점차로 신음을 멈추었다. 얼굴을 들어 올려다보며, 또다시 나에게 냉소적인 눈짓을 하였다.
"나았다! 신기하지? 아플 때 당신이 그렇게 해 주면, 언제나 통증이 멈추거든."
그리고는 여자의 머리를 얀 손으로 잡아 들어올렸다. 머리를 잡힌 여자는, 충실한 개와도 같은 표정으로 가시와기를 올려다보며 미소지었다. 구름 낀 날의 하얀 광선을 받아, 이 순간, 나에게는 아름다운 그 여자의 얼굴이, 언젠가 가시와기가 이야기한 60 먹은 노파의 바로 그 얼굴처럼 보였다.
--그러나 기적을 이룬 가시와기는 신이 나 있었다.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신이 나 있었다. 그는 큰 소리로 웃었고, 서슴없이 여자를 무릎 위에 안아올려 키스하였다. 그의 웃음은 지면이 낮은 그 곳의 소나무 가지에 메아리쳤다.
"모처럼 너를 위해서 아가씨를 하나 데려 왔는데. 혹시 말을 더듬거리다가 웃음거리가 될까 창피한가? 더듬어! 더듬으라구! 그녀도 어쩌면 말더듬이에게 반할지 모른다구."
"말더듬이였나요?" 하며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하숙집 딸이 말했다. "그렇다면 병신 셋 중에 둘은 모인 거로군요."
이 말은 강렬하게 나를 자극하여,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에게서 느낀 증오심이, 그러나 일종의 현기증 같은 것을 동반하며, 그대로 돌연한 욕망으로 바뀐 것은 기묘한 일이었다.
"두 쌍이 따로따로 어딘가에 몸을 숨기도록 하자구. 두 시간 지나면 다시 여기 정자에 돌아오자."
가시와기가, 아직도 질리지 않고 그네를 타는 남녀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가시와기와 부잣집 딸과 헤어진 나는, 하숙집 딸과 함께, 정자가 있는 언덕에서 북쪽으로 내려가, 다시 동쪽으로 우회하는 나지막한 언덕을 올랐다.
"그 사람은 아가씨를 '성녀'로 만든 거예요. 언제나 그 수법을 쓰거든요."
하고 하숙집 딸이 말했다. 나는 몹시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어떻게 알지?"
"왜냐하면, 저도, 가시와기 씨와 관계가 있거든요."
"지금은 아무 사이도 아니지? 하지만 잘도 태연할 수가 있군."
"태연하죠. 저런 병신, 상관없어요."
이 말이 요번에는 반대로 나에게 용기를 주어, 다음 질문이 거침없이 나왔다.
"당신도 그 녀석의 병신 다리를 좋아한 게 아닌가?"
"무슨 소리예요, 그런 개구리 같은 다리. 난, 그래요, 그 사람 눈은 아름다운 눈이라고 생각하지만요."
이 말에 다시 나는 자신감을 잃었다. 가시와기가 어떻게 생각하건 여자는 가시와기가 느끼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있는 게 되지만, 자신에 관하여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의 거만함이, 그러한 아름다움의 존재를, 자신에게서만은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하숙집 딸은, 언덕 위로 올라가 한적하고 자그만 평지에 이르렀다. 소나무와 삼나무 사이로, 다이몬지 산, 뇨이가타케 등의 먼 산이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대나무 숲이 이 언덕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비탈을 덮고 있었고, 숲 주위에 한 그루 철 늦은 벚꽃이 아직도 피어 있었다. 그것은 정말로 철 늦은 꽃으로, 말더듬이처럼 더듬더듬 피어났기 때문에 이토록 늦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나는 가슴이 답답하고, 위가 무겁게 느껴졌다. 술을 마셨기 때문이 아니었다. 막상 여자를 눈앞에 두고 보니, 욕망은 무게를 더하면서, 내 육체로부터 분리된 추상적인 구조가 되어, 내 어깨를 짓눌렀다. 그것은 마치 새까맣고 무거운 철제 공작 기계처럼 느껴졌다.
가시와기가 나를 인생으로 재촉하여 주는 친절 또는 악의를, 내가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 차례 언급한 바와 같다. 중학교 시절에 선배의 단검 칼집에 흠을 냈던 나는, 인생의 밝은 표면에 대한 무자격을, 이미 내 자신의 위에 명확히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가시와기는 뒷면에서 인생에 도달하는 어두운 샛길을 처음으로 가르쳐 준 친구였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파멸로 돌진하는 듯이 보이면서도, 또한 의외의 술수에 능하기에, 비열함을 그대로 용기로 바꾸어, 우리들이 악덕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시금 순수한 에너지로 환원시키는, 일종의 연금술이라 해도 좋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역시 그것은 인생이었다. 그것은 전진하고, 획득하고, 변모하며, 상실할 수가 있었다. 전형적인 삶이라곤 할 수 없지만, 삶의 모든 기능이 그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만약 우리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모든 삶의 무목적이라는 전제가 부여되고 있다면, 그것은 더욱더 다른 일반적인 삶과 등가의 삶인 것이다.
가시와기라고 해서 술에 몹시 취하는 일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어떠한 암울한 인식에도, 인식 그 자체의 취기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것은 하여간에 술인 것이다.
...우리들이 자리잡은 곳은, 색이 바래고 벌레 먹은 철쭉꽃 그늘이었다 하숙집 딸이 어째서 그런 식으로 나와 어울릴 마음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 자신에 대하여 일부러 심한 표현을 하자면, 어째서 하숙집 딸이 자신의 몸을 '더럽히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에는 수치심과 다정함이 넘치는 무저항도 있겠지만, 그녀는 통통하고 자그마한 손 위에, 낮잠 자는 사람 몸에 달라붙는 파리처럼, 내 손을 그냥 달라붙게 해 놓았다.
그러나 기나긴 키스와 그녀의 부드러운 턱의 감촉이 내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무척이나 꿈에도 그리던 행위였지만, 현실감이 옅고 희박하여, 욕망은 별개의 궤도를 달리고 있었다. 하얗게 구름 낀 하늘, 대나무 숲의 바람소리, 진달래 잎사귀를 기어오르는 무당벌레의 필사적인 등반...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아무런 질서도 없이 제각기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오히려 눈앞의 여자를, 욕망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자체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다. 이것을 인생이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전진하여 획득하기 위한 하나의 관문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인생은 나를 찾아오지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나의 조급한 마음에는, 더듬거리며 제대로 말을 꺼내지 못할 때의, 온갖 굴욕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결단코 입을 열어, 더듬거리면서라도 무엇이건 말을 하여, 인생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가시와기의 그 잔혹한 재촉, '더듬거려! 더듬거리라구!' 하는 그 거리낌없는 외침이 내 귓전에 되살아나, 나를 고무하였다... 나는 서서히 손을 여자의 옷자락에 밀어넣었다.
그때 금각이 나타났다.
위엄으로 가득한, 우울하고 섬세한 건축, 벗겨진 금박을 여기저기에 남긴 호사의 주검과도 같은 건축. 가까운가 싶으면 멀고, 친하면서도 소원하고 불가사의한 거리에, 언제나 선명하게 솟아 있는 그 금각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나와, 내가 지향하는 인생과의 사이를 가로막고 서서, 처음에는 미세화처럼 조그맣던 것이, 점차로 커지면서, 그 정교하고 치밀한 모형 속에 거의 전세계를 감쌀 듯한 거대한 금각의 대응이 보였듯이, 그것은 나를 둘러싼 세계의 구석구석까지도 메워, 이 세계의 치수를 꽉 채울 정도가 되었다. 웅장한 음악처럼 세계를 채우고, 그 음악만으로 세계의 의미를 충족시킬 수 있게끔 되었다. 때로는 그토록 나를 소외시키고 나의 외부에 우뚝 서 있는 듯이 여겨지던 금각이, 지금 완전히 나를 감싸, 그 구조의 내부에 내 위치를 허용하고 있었다.
하숙집 딸은 멀리 조그마하게, 먼지처럼 날려 가 버렸다. 그녀가 금각에게 거부당한 이상, 내 인생도 거부당하고 있었다. 남김없이 미에 감싸이면서, 어떻게 인생에 손을 뻗칠 수 있겠는가? 미의 입장에서도, 나의 단념을 요구할 권리가 있으리라. 한 손으로 영원을 만지며, 다른 한 손으로 인생을 만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인생에 대한 행위의 의미가, 어느 순간에 대하여 충실을 맹세하여, 그 순간을 멈추게 하는 데 있다면, 아마도 금각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잠시 동안 나의 소외를 취소시키고, 금각 자신이 그러한 순간으로 변신하여, 인생에 대한 내 갈망의 허무함을 알려 주러 온 것이리라 생각되었다. 인생에 있어서, 영원으로 변신한 순간은 우리들을 도취시키지만, 그것은 이때의 금각처럼, 순간으로 변신한 영원의 모습과 비교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금각은 잘 알고 있었다. 미의 영원적인 존재가, 진정 우리들의 인생을 가로막고, 삶을 해치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이다. 삶이 우리들에게 잠시 동안 보여 주는 순간적인 미는, 이러한 독소 앞에서는 맥도 못 춘다. 그것은 순식간에 붕괴되고 멸망하여, 삶 그 자체까지도 멸망의 퇴색한 빛 아래에 노출시키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환상의 금각에게 완전히 포옹당하였던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제정신이 들었을 때, 금각은 이미 숨어 버렸다. 그것은 여기에서 동북쪽 멀리 기누가사 지방에, 지금도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하나의 건축에 불과하며, 보일 리도 없었다. 그처럼 금각이 나를 받아들여, 포옹하고 있던 환영의 시간은 지나갔다. 나는 가메야마 공원의 언덕 꼭대기에 누워 있었고, 주위에는 풀과 꽃과 곤충들의 둔탁한 비상과 더불어, 난잡한 모습으로 엎드려 있는 여자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내가 갑자기 주눅이 든 것을 보고는, 곁눈으로 노려보며 몸을 일으켰다. 몸을 돌려 뒤돌아 앉아서, 핸드백에서 꺼낸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경멸은, 마치 옷에 붙은 가을철의 도깨비바늘처럼, 내 살갗을 온통 찔러 대었다.
구름이 낮게 덮여 있었다. 가벼운 빗방울이 주위의 풀잎과 진달래 잎사귀를 때리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황급히 일어나, 방금 전의 정자로 발길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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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유회가 비참하게 끝난 것도 그렇지만, 그날 하루가 무척이나 어두운 인상을 남긴 것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날 밤 취침 전에, 노사 앞으로 도쿄에서 전보가 도착하여, 그 내용이 즉각 절간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쓰루카와가 죽은 것이다. 전문에는 간단히 사고로 죽었다고만 되어 있었으나, 나중에 알게 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날 밤 쓰루카와는 아사쿠사의 백부 집에 가서,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대접받았다. 그리고 자기 집으로 가는 길에, 역 부근의 골목에서 갑자기 나타난 트럭에 치여서, 두개골 골절로 즉사한 것이다.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던 가족들이, 녹원사에 전보를 쳐야 한다고 간신히 생각해 낸 것은, 이튿날 오후였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나는 흘렸다. 왜냐하면 쓰루카와의 죽음은 아버지의 죽음보다도 훨씬, 나의 중대한 문제와 관련되어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가시와기를 알고부터 쓰루카와를 약간은 멀리하였던 나였지만, 잃고 나서 지금 새삼스러이 느끼는 것은, 나와 밝은 대낮의 세계를 잇는 한 가닥의 실이,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끊어지고 말았다는 점이다. 나는 잃어버린 낮, 잃어버린 빛, 잃어버린 여름 때문에 울었다.
당장 도쿄에 문상을 가려고 해도, 나에게는 돈이 없었다. 노사에게서 받는 용돈은 월 500엔에 불과하였다. 어머니는 원래 가난하였다. 1년에 한두 번, 200~300엔씩 송금해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재산을 정리하고 가사 군의 숙부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된 것도, 남편의 사후, 단가에서 들어오는 월 500엔 정도의 식비와, 당국에서 주는 약간의 보조금만으로는 생활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나는 쓰루카와의 유해도 보지 못하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 어떻게 쓰루카와의 죽음을 내 자신의 마음 속에 확인시키면 좋을까 망설였다. 이전에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받으며 파도치듯이 움직이던 그의 하얀 셔츠의 배는 지금 화장되고 있다. 그토록 오로지 빛을 위하여 만들어지고, 빛에만 어울리던 그의 육체와 정신이, 묘지의 흙에 묻혀서 편안히 잠들리라고 어찌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에게는 요절의 징후라곤 조금도 없었고, 불안이나 우수와는 태어날 때부터 무관하였으며, 죽음과 유사한 요소를 조금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의 돌연한 죽음은 그야말로 그러한 요소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순수한 혈통의 동물은 생명력이 약한 것과 마찬가지로, 쓰루카와는 삶의 순수한 성분만으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막을 방도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그것과 반대로, 저주받을 장수가 약속되어 있는 듯이 여겨졌다.
그가 살고 있던 세계의 투명한 구조는, 항상 나에게는 깊은 수수께끼였으나,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수수께끼가 한층 두렵게 느껴졌다. 이 투명한 세계를, 마치 너무도 투명하여 보이지 않는 유리에 부딪히듯이, 옆에서 튀어나온 트럭이 분쇄시킨 것이다. 쓰루카와의 죽음이 병사가 아님은, 너무도 이러한 비유에 어울렸으며, 사고사라는 순수한 죽음은, 그의 비길 바 없이 순수한 삶의 구조에 적합하였다. 한갓 순간적인 충돌에 인한 접촉으로, 그의 삶은 그의 죽음과 화합된 것이다. 신속한 화학 작용... 이토록 과격한 방법이 아니면, 그림자가 없는 불가사의한 젊은이는, 자신의 그림자, 자신의 죽음과 결부될 수 없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쓰루카와가 살고 있던 세계가 밝은 감정이나 선의로 가득 차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오해나 단순한 판단에 의하여 그곳에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 세상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밝은 그의 마음은, 하나의 힘, 하나의 강인한 유연성에 뒷받침되고, 그것이 바로 그의 운동 법칙이었다. 나의 어두운 감정을 하나하나 밝은 감정으로 번역해 주었던 그의 행동에는, 어딘가 아주 정확한 데가 있었다. 그의 밝은 삶은 나의 어두운 삶과 너무도 구석구석 대응되고, 너무도 상세한 대비를 보여 주었기에, 이따금 쓰루카와는 내 마음을 여실히 경험한 적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되었다. 그렇지 않았다! 그의 세계가 밝은 것은, 순수하면서도 편파적이라서, 그 자체의 치밀한 체계가 형성되고, 그 치밀함이 악의 치밀함과 아주 흡사하여진 것인지도 모른다. 이 젊은이의 굽힐 줄 모르는 육체의 힘이, 끊임없이 그것을 떠받치며 운동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 밝고 투명한 세계는 곧바로 와해되어 버렸을 지도 모른다. 그는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트럭이 그 육체를 들이받은 것이다.
쓰루카와가 남들에게 호감을 주는 원인이 되었던 그야말로 명랑한 그 용모나 늘씬한 체구는, 그것을 상실한 지금, 또다시 나로 하여금 인간의 가시적인 부분에 대하여 신비적인 생각을 지니게끔 만들었다. 우리들의 눈에 보이며 거기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들이, 그토록 밝은 힘을 구사하였다는 불가사의를 생각했다. 정신이 이처럼 소박한 실재감을 지니기 위하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육체로부터 배워야 하는가를 생각했다. 선은 무상을 체로 만든다고 하며, 자신의 마음에 형도 상도 없음을 깨닫는 것이 바로 견성이라고 하지만, 무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견성의 능력은, 아마도 또한, 형태의 매력에 대하여 극도로 예민하여야만 가능할 것이다. 형과 상을 무사의 예민을 통하여 볼 수 없는 자가, 어떻게 무형이나 무상을 그토록 명확히 보고, 명확히 알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쓰루카와처럼, 소위 삶을 위한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잃어버린 지금으로서는, 그 명료한 형태가 불명료한 무형태의 가장 명확한 비유이고, 그 실재감이 형태도 없는 허무의 가장 실재적인 모형이며, 쓰루카와라는 인간 자체가 이러한 비유에 불과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가령, 그와 5월의 꽃들이 제대로 잘 어울리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 5월의 돌연한 죽음으로 인하여, 그의 관에 던져진 꽃들과 적절하게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의미하였다.
하여간에 나의 삶에는 쓰루카와의 삶과 같은 확고한 상징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러운 것은, 그가 나와 같은 독자성, 혹은 독자적인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의식을, 추호도 갖지 않은 채 삶을 마쳤다는 점이었다. 그 독자성이야말로, 삶의 상징성을, 즉 그의 인생이 다른 무엇인가의 비유일지도 모른다는 상징성을 박탈하고, 따라서 삶의 확대성과 연대감을 박탈하여, 항상 붙어 다니는 고독을 낳게 하는 본원인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허무와도, 연대감을 지니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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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의 고독이 시작되었다. 하숙집 딸과는 그 후로 만나지 않았고, 가시와기와도 이전처럼 친하게 지내는 일이 없게 되었다. 가시와기의 생활 방식에서 느껴지는 매력은 여전히 나를 강력히 구속하고 있었으나, 조금이라도 그것에 반항하여, 스스로 원하지 않더라도 소원히 지내는 것이, 쓰루카와의 명복을 비는 일이라고 여겨졌다. 어머니에게는 편지를 써서, 출세할 때까지는 찾아오지 못하도록 단단히 일러 두었다. 그것은 이전에도 어머니에게 입으로 말한 적이 있지만, 다시 한번 강력히 일러 두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답장에는, 어설픈 문장으로, 숙부의 농사일을 돕느라 바쁜 상황과, 단순한 교훈 같은 것이 잔뜩 씌어 있었고, "네가 녹원사의 주지가 된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고서 죽고 싶다."는 문가가 덧붙어 있었다. 나는 이 문구를 증오하였고, 그로부터 수일 후, 이 문구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여름 동안에도, 나는 어머니가 있는 곳을 찾아가지 않았다. 빈약한 식사 때문에 여름은 견디기 힘들었다. 9월도 열흘이 지난 어느날, 큰 태풍이 올지 모른다는 예보가 있었다. 누군가가 금각에 숙직을 하여야 되었기에, 내가 자진하여 그 임무를 맡았다.
이 무렵부터 미묘한 변화가, 금각에 대한 나의 감정에서 생겨났던 것으로 생각된다. 증오라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내부에 서서히 싹트고 있는 것과, 금각이, 결코 서로 용납되지 않는 사태가 언젠가 오고야 말리라는 예감이었다. 가메야마 공원의 사건이 있은 후로 이 감정은 명백하여졌으나, 나는 그것에 대해 언급하기가 두려웠다. 하지만 하룻밤의 숙직 동안 금각이 나에게 맡겨지는 것은 반가웠기에, 나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나는 구경정의 열쇠를 받았다. 3층은 가장 소중히 여겨지는 층으로, 상인방에는 고코마쓰 천황의 친필인 편액이, 지상 42척의 높이에 품위 있게 걸려 있었다.
라디오는 시시각각 태풍의 접근을 알리고 있었으나, 그러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오후에 이따금 내리던 비는 멈추고, 밤하늘에는 환한 보름달이 떠올랐다. 절간 사람들은 뜰에 나와 하늘을 살피고는, 태풍 전의 고요함이라며 수군대었다.
절간이 조용히 잠들자, 나는 금각에 홀로 남았다. 달빛이 들어오지 않는 곳에 있노라니, 금각의 육중하며 호화스러운 어둠이 나를 감싸고 있다는 생각에 황홀감을 느꼈다. 이 현실의 감각은 서서히 나를 깊은 곳에 잠기게 만들어, 그것이 그대로 환각처럼 되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가메야마 공원에서 나를 인생으로부터 격리시켰던 그 환영 속에, 지금 내가 여실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단지 홀로 있고, 절대적인 금각은 나를 감싸고 있었다. 내가 금각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야 옳을까, 소유당하고 있다고 해야 옳을까? 아니면 모처럼 균형을 이루어, 내가 금각이고 금각이 나인 상태가 가능해지려는 것일까?
바람은 밤 11시 반경부터 심해졌다. 나는 손전등을 비추며 계단을 올라가, 구경정의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았다.
구경정의 난간에 기대어 섰다. 바람은 동남풍이었다. 그러나 하늘에는 아직 변화가 없었다. 달은 연못의 물풀 사이에서 빛나고, 벌레소리와 개구리 울음소리가 주위에 가득하였다.
처음에 거센 바람이 정면으로 내 뺨에 부딪혔을 때, 거의 관능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전율이 내 피부에 전하여져 왔다. 바람은 그대로 겁풍처럼 무한히 거세어져, 나와 금각을 한꺼번에 붕괴시킬 징후처럼 여겨졌다. 내 마음은 금각 속에도 있고, 동시에 바람 속에도 있었다. 내 세계의 구조를 규정하고 있는 금각은, 바람에 흔들리는 장막도 없이, 마음껏 달빛을 받고 있었으나, 바람, 나의 흉악한 의지는, 언젠가는 금각을 뒤흔들어, 잠에서 깨어나게 하여, 붕괴의 순간에 금각의 오만한 존재 의미를 빼앗아 갈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 그때 나는 미에 감싸여, 그야말로 미의 내부에 있었으나, 무한히 거세지는 흉포한 바람의 의지에 의존하지 안았더라면, 그토록 내가 완벽하게 미에 감싸일 수 있었을지 의심스러웠다. 가시와기가 나를 '더듬어! 더듬으라구!' 하며 질타하였듯이, 나는 바람을 채찍질하여, 준마를 재촉하는 소리를 외쳐 보려 하였다.
'힘을 내! 힘을 내! 더 빨리! 더 힘차게!"
숲이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연못 주변의 나뭇가지들이 서로 부딪쳤다. 밤하늘의 색깔은 평온한 남색을 잃고, 침울한 회색이 가미되어 혼탁해졌다. 벌레소리는 여전한데도, 이 일대를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게 하는 바람의, 멀고도 신비한 피리소리가 접근하고 있었다.
나는 달 앞으로 수많은 구름이 떠가는 광경을 보았다. 남쪽에서 북쪽을 향하여, 산 저편으로부터, 잇달아 대군단처럼 밀려왔다. 두꺼운 구름이 있다. 엷은 구름이 있다. 광대한 구름이 있다. 몇 개의 작은 구름 조각이 있다. 그러한 것들이 한결같이, 남쪽에서 나타나, 달 앞을 지나, 금각의 지붕을 덮고, 무언가 큰일을 서두르듯이, 북쪽으로 달려가 자취를 감추는 것이었다. 나는 머리 위에서 황금의 봉황이 소리치는 것을 듣는 기분이었다.
바람은 문득 멈추었다가, 다시 거세진다. 숲은 민감하게 귀를 곤두세우고, 잠잠하다가도 술렁이곤 했다. 연못의 달 그림자가, 그럴 때마다 어두워지기도 밝아지기도 하였고, 때로는 흩어져 있던 빛이 모여서 연못의 수면을 한 차례 비추기도 하였다.
산 저편에 가로놓인 겹겹의 구름이, 커다란 손처럼 하늘 가득히 퍼지면서, 꿈틀거리듯 술렁이며 접근하여 오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구름 사이로 절반가량 맑게 보이던 하늘도, 순식간에 다시 구름에 뒤덮였다. 하지만 아주 엷은 구름이 통과 할 때에는, 이를 통하여, 희미한 후광을 그리고 있는 달이 보였다.
밤새도록, 하늘은 이러한 모양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이 이상 바람이 거세지는 느낌은 없었다. 나는 난간 밑에서 잠이 들었다. 맑게 갠 아침 일찍, 잡역부 노인이 나를 깨우러 와서, 태풍이 다행히도 교토 시를 비켜 지나갔다고 알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