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눈보라
Chalotte Lamb
1
미란다는 서재로 달려 들어가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스탠드의 불만 켜져 있을 뿐 긴 방안은 어둠에 가려 있었다. 단 5분간이라도 혼자 있고 싶었다. 오랜 시간 웃는 낯으로 손님 접대를 하여 두 볼의 근육이 뻣뻣하고 관자놀이도 욱신거렸다.
미란다는 신을 벗어버리고 융단 위를 걸어 들어갔다. 하이힐을 신고 몇 시간이나 서 있어서 발도 아팠다. 내일은 결혼식이 있으므로 오늘밤은 푹 쉬고 싶었다. 친척들을 불러서 파티를 열자고 한 아빠의 제의에 단호하게 반대하지 못했던 것이 몹시 후회스러웠다. 이래서야 언제 잠자리에 들 수 있을까 난감했다.
내일은 긴 하루가 될 텐데... 미란다는 어두컴컴한 벽에 걸려 있는 금테를 두른 거울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이것이 진짜 내 얼굴이야? 스스로도 의아하게 느껴졌다. 짙푸른 눈동자에는 피로의 빛이 감돌고 표정은 상기되어 있었다.
"내일!"
큰 소리로 외쳐 보았다.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미란다는 달아오른 볼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숀의 생각으로 킥킥거렸다. 숀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뭘 하고 있을까? 어느 술집에서 친구들과 밤새껏 퍼마시고 있을지도 몰라. 미란다는 그날 오전 숀과 주고받은 대화를 되씹고 있었다.
"남자들끼리 아침까지 법석을 떨면서 총각으로서의 마지막 밤을 지샐 테죠?"
"밤새워?"
숀은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미란다를 쳐다보았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군. 나쁘진 않지."
"이튿날까지 취해 있지만 않다면요. 교회에 가는 걸 잊지 말아야 해요."
"물론 가지. 염려 말라구"
숀은 언제나 그랬듯이 미란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쉰 듯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살며시 키스해 주었다. 그와의 키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때때로 미란다는 그에 대한 생각이 너무나 강렬해지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육체적으로 사랑이 맺어지는 게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첫날밤의 일을 상상하면 가슴이 무섭게 뛰었다. 그녀가 두렵게 여기는 것은 숀에게 너무 열중한 나머지 자기 자신이 무방비 상태가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숀이 미란다를 사랑하고 있는 이상으로 그에 대한 미란다의 애정은 두터웠다.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언젠가는 그로 인해 고통을 맛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엄습해 오는 것이었다.
미란다는 거울에서 얼굴을 돌려 창에 걸려 있는 빨간 우단 커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커튼 사이로 들어가 유리창에 얼굴을 대보았다. 차가운 촉감이 오히려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었다.
초승달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뜰에는 온통 은빛이 드리워져 있었다. 곱게 다듬어진 잔디 위에는 이슬이 내리고 뜰의 한쪽 구석에는 앙상한 나무들이 달빛을 받고 서 있다. 미란다가 막 돌아서려는 순간 서재의 문이 열리면서 낮은 말소리가 들려왔다.
"됐어. 아무도 없어요."
미란다는 숨을 죽이고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가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이 닫히는 소리에 이어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넌덜머리나는 사람들뿐이잖아요. 후닥닥 빠져나가고 싶지만 딴사람보다 먼저 가버리는 것이 퍼디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나중에 불호령이 내리거든요. 그 사람은요, 자기 밑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은 몸도 마음도 다 자기에게 바쳐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단 말이에요."
콧소리가 섞인 간드러진 목소리였다. 미란다는 불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비서인 다이아나 코볼드가 아버지의 험담을 하는 걸 듣는 일은 처음이지만 그 정도는 족히 할 여자라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곱게 물결치는 금발에다 녹색 눈을 가진 늘씬한 여자였다. 사람들 앞에서는 상냥한 미소를 뿌리고 다녀도 고양이 같은 눈에는 접근하기 어려운 앙칼짐이 서려 있었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
미란다는 귀를 기울여 상대 남자의 목소리를 알아내려 했다. 분명히 들어 본 목소리긴 한데 얼른 생각이 나지 않는다.
"자, 그 위스키를 비워 버려요. 여기 어디에 포트와인이 있을 거예요. 어디였더라"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생기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 여기 있군요. 폴, 이 한 병은 당신의 일주일분 급료와 맞먹을 거예요."
사내가 나직하게 휘파람 소리를 냈다.
"그 사람이야 가질 만하지. 결혼하고 나서 그 아가씨 재산을 도대체 얼마나 물려받을 것인지 알고 싶군."
다이아나의 웃음소리와 글라스에 와인을 따르는 소리, 그리고 병마개 닫는 소리가 잇따라 들렸다.
"아가씨는 숀 힌튼의 아내 자리에 들어가는 것뿐이에요. 득을 보는 것은 숀 쪽이구요. 몇 달 전에 퍼디와 숀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결혼하는 대가로 전무이사 자리와 막대한 재산이 굴러 들어온다지 뭐예요. 숀은 참 약아요! 청혼하기도 전에, 결혼하면 무엇이 손에 들어올 것인지 그녀의 부친에게 확인을 하다니, 결국 퍼디가 딸에게 돈으로 숀을 사준 꼴이지 뭐예요. 모두가 다 그것을 알고 있는데 그녀가 로맨틱한 연애로 맺어진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을 듣노라면 공연히 속이 메스꺼워진단 말예요. 퍼디는 부하의 몸도 마음도 제 것으로 만들지 않고선 만족하질 못하거든요!"
미란다는 금방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누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다이아나의 말을 더 이상 참고 들을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어느 한 마디도 믿기지 않았지만 그래도 불쾌했다. 하지만 엿들은 것을 다이아나가 알게 되는 것은 더한 치욕일 것이므로 미란다는 그대로 숨죽인 채 있었다.
"퍼디는 너도 자기 거로 알고 있는 거야?"
사나이가 물었다.
그 목소리에 담긴 암시가 너무 혐오스러워 미란다는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본인은 그런 걸로 생각하죠."
"몸도 마음도 ?"
사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사람은 그렇게 하고 싶어 하죠. 하지만 전 그렇게까지 어리석진 않아요. 물론 전에는 그런 관계의 여성이 몇 있었겠지만 그 어느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았어요. 전 그렇게는 할 수 없어요. 미란다가 결혼해 버리면 퍼디는 저와의 관계를 정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할 거예요."
"대단한 자신감이군."
사내는 감탄하듯 말했다. 미란다의 눈에 다이아나의 득의양양한 얼굴이 떠올랐다. 고양이 같은 날카로움만 없다면 다이아나는 참으로 아름다운 여성이다. 위로 치솟은 녹색 눈에 작은 코, 윤기 있는 분홍색 루즈를 바른 입가에는 어딘지 모르게 심술궂은 싸늘함이 감돌고 있다.
"그의 마음쯤은 빤히 들여다보고 있어요."
다이아나는 아주 확언을 했다.
"허영심이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것이 그의 약점이죠. 자신이 60살에 가깝다고는 생각하기 싫어하거든요. 젊은 나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은 거죠."
"하지만 아무와도 결혼하지 않았다고 방금 말하지 않았어?"
사내의 목소리에도 다이아나와 마찬가지로 악의가 느껴져 미란다는 다이아나가 마음을 털어놓는 상대로서 그런 남자를 고른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가 당신에게 열을 올리고 있다는 건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분명하지만, 결혼하자는 말을 꺼내게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아닐까?"
"왜 지금까지 그가 재혼을 안했는지 알고 있어요?"
다이아나가 걸으면서 물었다. 미란다와의 거리가 벌어졌으므로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죽은 부인과 단단히 약속을 한 거예요. 부인은 귀여운 미란다를 계모 손에 맡기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퍼디에게 미란다가 시집갈 때까지 재혼하지 않을 것을 약속케 했던 거죠. 똑똑한 여자죠? 그 부인이 죽었을 때 미란다는 12살이었으니까 퍼디는 10년간을 독신으로 지내온 셈이죠. 미란다만 치우고 나면 그도 자신의 결혼을 생각할 수 있게 되죠. 내가 만약 그와 결혼하여 사내아이를 낳는다면 숀의 계산은 헛수고로 끝나는 셈이 된다 그 말이에요."
"당신도 대단한 계략가야"
사내가 웃었다.
"아무튼 잘 해봐. 다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나도 영업부 일에는 진력이 났으니 좋은 자리가 있으면 당신 힘으로 어떻게 안 될까?"
"걱정 말아요, 폴. 당신 일은 잊지 않아요. 숀 힌튼과 싸우려면 동지가 필요하거든요."
"그럼 유대를 강화하는 의미에서 퍼디의 값비싼 와인으로 한 잔 들까?"
"안 돼요. 너무 자릴 비우고 있을 수가 없어요. 내가 보이지 않는 걸 퍼디가 신경 쓰고 있을 텐데요. 먼저 돌아가 있을 게요."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좀 더 여기 있다가 적당할 때 나오세요."
사내가 웃으면서 손짓으로 키스를 보내는 소리가 들렸다. 미란다는 창틀에 붙어버린 듯 몸을 긴장시킨 채 서 있었다. 사내는 와인을 한 잔 더 따라 단숨에 마셔버리고는 다이아나와 마찬가지로 발소리를 죽이며 나갔다.
미란다는 마치 즐거운 꿈에서 깨어났을 때 얼굴 위로 뱀이 기어가고 있는 것 같은 불쾌한 기분이었다. 모두가 터무니없는 소리인 것이다. 아빠에 대한 말, 미란다 자신에 대한 말, 그리고 숀에 대한 말, 그 모두가 엉터리 같은 말들이다.
다이아나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지껄여댄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이 아니란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갑자기 뱀에게 물린 상처가 뜻밖에 깊어져 미란다의 혈액 속으로 들어간 독이 온몸에 퍼지기 시작한 것 같았다.
숀은 나를 사랑하고 있어. 설혹 내가 무일푼이 된다 하더라도 숀의 마음은 변함없을 거야. 청혼하기 전에 아빠와 숀이 거래를 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어. 거짓말이야, 거짓말! 결혼 후에 숀이 전무이사로 승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결혼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나와 결혼하든 하지 않든 아빠는 숀을 전무이사로 앉힐 작정이었다. 일상 업무가 힘에 부친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고, 슬슬 일선에서 물러나 회장으로 나앉아 골치 아픈 일은 숀에게 맡기고 싶다고 하셨다.
다이아나는 표면적인 현상만 보고 일부러 사실을 왜곡하여 말한 거야. 미란다는 평상시 그녀가 자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방에 함께 있게 되면 언제나 차가운 적의 같은 것을 느꼈다.
하지만 미란다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빠의 비서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어차피 비서란 몇 년 지나면 그만두는 것이니까. 하지만 지금까지의 비서들을 생각해 보면서 모두가 매력적인 여성들뿐이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미란다는 미간이 찌푸려졌다.
다이아나의 말에도 약간의 진실이 있는 게 아닐까. 미란다는 우단 커튼을 밀어젖히고 발걸음을 옮겼다. 서재 안이 조금 전과는 전혀 달라 보였다. 미란다를 중상하고 그녀가 사랑하는 두 남자를 헐뜯는 험담이 뿌려진 곳이다.
그늘진 부분은 더욱 그 농도가 짙게 보였고, 탁자 위에 놓인 빨간 가죽 제품은 불길한 핏빛으로 비쳤으며, 벽면에 나란히 꽂혀 있는 책들의 금박 글씨가 자기를 위협하듯 다가서는 것 같았다.
미란다의 아버지 퍼디는 자신의 부유함을 드러내어 자랑하고 싶어 하는 성미였다. 저택 안의 장식이나 설비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은 대성공을 거둔 실업가지만 어려서는 빈곤한 가정에서 자라 그날그날의 끼니조차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의 잠재의식 속에는 늘 가난과는 멀어졌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미란다는 아빠의 그런 치기 어린 면을 대하게 될 때마다 가슴이 저렸다. 남들은 아빠가 쌓아올린 사업이나 재산에 관심을 돌리겠지만 미란다는 그의 인간적인 면을 존경하고 있었다.
막대한 재산을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응석받이 사장이었다면 고가품 속에 묻혀서 희열에 잠기는 퍼디와 같은 호인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다이아나로부터 아빠를 새롭게 보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미란다는 다이아나가 하던 말을 떠올리고 다시금 몸을 떨었다. 아빠에게 애인이 있다는 건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일방적인 생각으로만 보아온 자신이 어리석게 여겨졌다. 사랑하는 아빠-그것이 미란다에게 있어서는 퍼디의 전부였던 것이다.
얼마나 철부지였고 얼마나 세상을 몰랐던가. 미란다의 마음속에 불현듯 싸늘한 질문이 던져졌다. 그렇게 철부지인 너라면 숀의 본심도 간파하지 못했을 것 아니냐? 미란다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방을 나가야겠어. 엿들은 걸 모두 잊고 싶어! 다이아나와 폴이 지껄이기 전에 나가 버려야 했었는데... 미란다는 문 앞에까지 와서야 맨발임을 깨달았다.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 벗어 던졌던 하이힐이 탁자 밑에 뒹굴고 있다. 몸을 웅크려 손을 뻗치니 겨우 손가락에 닿는다. 하이힐을 집어 들고 일어서려다가 그녀는 그만 탁자 모서리에 이마를 찧고 말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잠시 웅크린 채 한 손에 신발을 들고 또 한 손으로는 이마를 문질렀다.
"이젠 정말..."
미란다는 힘없이 일어나 거울 앞으로 갔다. 핏기 없는 얼굴이 훨씬 야위어 보였다. 조금 전의 그 상기됐던 얼굴과는 너무도 달라져 있어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그 얼굴은 어디로 가버렸단 말인가.
악의에 찬 다이아나의 거짓말에 꿈결같이 사라져 버린 것일까? 미란다는 이마의 혹을 만지작거리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뭐라고 둘러댄담... 찬물을 끼얹은 듯 몸이 움츠러지고 일시에 피로가 몰려왔다.
신을 신고 거울 옆을 떠났다. 엿들은 것에 대해 아빠에게 확인해 볼 것인가. 그건 안 돼.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는 없어. 설령 다이아나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아빠가 선선히 그것을 시인하리라 생각해?
다시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싸늘한 목소리가 의문을 던졌다. 사실일 리가 없어! 미란다는 자신에게 타이르듯이 부정하고는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문 쪽을 향했다. 대답을 듣는 것이 두려워 아빠에게 도저히 물을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의혹을 간직한 채 숀과 결혼할 수도 없지 않은가. 어지러워진 머리에는 이렇다 할 해결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이아나의 말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아빠는 지금까지의 비서들과 과연 관계를 맺고 있었을까? 내가 결혼한 뒤에 회사를 물려준다고 숀에게 약속한 걸까?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의문을 미란다는 하나하나 부정해 갔으나 마음속의 의혹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다이아나가 뿌린 의혹의 씨는 이미 그 싹을 피우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문을 여는 순간 이제까지 그 두터운 문에 가로막혀 있던 파티의 왁자한 소리가 일시에 미란다의 귀로 밀려들어왔다.
사람들은 마실 것을 손에 들고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걸어 다니면서 스테레오 음악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즐기고 있었다. 미란다는 친척들의 모습을 먼발치로 보면서, 그저 몰래 빠져 2층으로 올라가 침대에 눕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하면 아빠가 찾아올 테지.
"어머, 미란다. 기운이 없어 보여. 이젠 지겨워진 거야?"
외사촌인 폴리 스탠스필드가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미란다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피로한 기색이잖아?"
폴리는 갈색 눈동자를 크게 떴다.
"어머, 어쩐 일이야, 혹시 설마 벌써 숀이 폭력을 휘두른 건 아닐 테지?"
미란다는 혹을 손으로 만지면서 웃어 보였다.
"바닥에 떨어진 걸 주우려다가 탁자에 부딪쳤지 뭐야. 그렇게 표나니?"
"수건 찜질이라도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애... 더 커지면 곤란하잖아"
폴리는 미란다의 팔을 잡았다.
"욕탕으로 가. 내가 해줄 테니"
미란다보다 한 살 아래인 폴리는 병원에서 비서 일을 보고 있어서 응급처치 방법을 알고 있었다. 미란다 이모의 딸인 폴리는 어려서부터 자상했는데 그 성격은 어른이 돼서도 조금도 변함이 없다.
스탠스필드 집안은 유복하지는 않았지만 미란다로서는 가족이 많은 폴리가 늘 부럽기만 했다. 앤 이모에게는 폴리를 합쳐 여섯 명의 아이가 있어 집안은 늘 흥겨운 웃음이 넘쳤다. 도중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모두 미란다에게 미소를 던졌다.
"D데이까진 이제 12시간 남았는데?"
하며 농담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고, 이마의 혹을 알아보고는 "누구에게 당했어?"하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는 이도 있었다.
"몸이 불편하진 않아?"
찬 물수건을 이마에 대주면서 폴리가 물었다.
"약간 두통이 날 뿐이야"
폴리는 의아한 듯이 미란다의 표정을 살폈으나 더 이상은 캐묻지 않았다.
"그 드레스 멋지다. 얘"
"그래? 고마와"
미란다는 애써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네가 입던 것을 꽤나 많이 물려받았었지. 생각나? 너에게 작아지면 그대로 나한테 돌아오는 거야. 못 견디게 탐나는 옷을 입고 있는 걸 보면 빨리 네가 커서 몸에 맞지 않게 되었으면 하고 초조하게 기다렸던 적도 있었지."
폴리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미란다는 그녀의 진의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내 옷을 내가 살 수 있게 되었지만 별로 좋은 옷은 없어."
폴리는 물수건을 떼어내고 얼굴을 가까이 하여 혹을 보았다.
"어때?"
"아까보다 많이 나아졌어."
미란다는 고마운 기분으로 미소 지으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머리가 헝클어졌네"
"내 빗을 빌려줄 게"
빗을 건네준 폴리는 욕조의 모서리에 우두커니 앉아서 미란다가 짙은 갈색 머리를 빗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안색이 밝지 못할 뿐이지 미란다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모두 뚜렷하다. 곧게 뻗은 코, 서글서글한 눈매, 도톰한 볼, 활 모양으로 부푼 핑크빛 입술.
"숀을 어떻게 생각해?"
폴리에게 빗을 돌려주면서 미란다는 의견을 물었다. 뜻밖의 질문에 폴리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글쎄, 잘 모르니까... 퍽 매력적인 남자라고 생각되지만..."
잘 다듬어진 갈색 머리가 폴리의 어깨 위에서 출렁거린다.
"그런 사람의 부인이 된다니 행복하지 뭐야. 입던 걸 물려받듯이 너에게 맞지 않을 때까지 기다려나 볼까?"
폴리의 농담에 미란다는 웃었지만 그 눈동자에는 시름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층계를 내려가 넓은 홀로 돌아갔다. 한쪽에서 미란다의 아버지와 다이아나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미란다는 지그시 두 사람을 바라보며 그 웃는 얼굴 밑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를 읽어내려고 했다.
미란다의 아버지 퍼디, 즉 퍼디넌드 보스턴은 체격이 좋은 50대 후반의 남성이다. 사자의 털같이 더부룩한 머리는 전엔 미란다와 같은 갈색이었지만 지금은 회색으로 변해 있다. 눈동자 색깔도 미란다와 같은 푸른색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공통점은 그것뿐이었다.
미란다의 몸매나 얼굴 모습 등 용모는 모두 가냘픈 어머니 쪽을 닮았다. 퍼디는 억세고 고집 센 성격을 그림으로 그린 듯한 남성적인 얼굴 모습이며, 남과 이야기할 때는 똑바로 얼굴을 쳐들고 턱을 내밀었다.
아무리 보아도 퍼디는 이 우아한 실내의 분위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차분히 가라앉은 크림색과 금빛의 벽지나 커튼, 보풀이 낀 융단이나 집기, 마호가니 테이블, 그 위에 놓인 금시계, 실크 갓이 달린 스탠드 등이 모든 것이 그가 고른 물건들인데도 말이다.
퍼디의 우직한 체격은 주위의 우아한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지만, 미란다는 그가 이 방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자기가 자란 런던의 가난한 집과 비교해 보는 것인지 곧잘 만족스런 표정으로 실내를 둘러보곤 했다.
여기까지 키워온 회사를 이어줄 아들이 없는 것만이 마음의 여한일 것이다. 미란다의 뇌리에는 갑자기 아빠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숀과 둘이서 아빠에게로 가 결혼을 시켜달라고 청했던 것이다.
그때 퍼디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둘이 말을 끄집어내기 전부터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저 난로 가까이에 서서 온화한 눈길로 바라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이셨다.
"이제 나에겐 딸만이 아니라 아들도 생긴 셈이야"
미란다는 너무나 기뻐서 아빠에게 달려가 키스했다. 퍼디는 계속 말했다.
"숀이라면 틀림없이 행복하게 해줄 거다. 그 이상의 남성은 없어요. 내가 고른다 해도 아마 그를 고를 거야"
미란다는 웃으면서 숀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아빠와 숀이 의미 있는 듯한 시선을 주고받는 것을 눈치 챘지만 굳이 그 의미를 알려고 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의심할 수가 있을까. 이제까지 미란다의 신변에 일어났던 일은 모두 퍼디가 결정해 왔었다.
학교도, 패션도, 회사 안에서의 일도 그가 딸을 위해 골라 주었다. 치열한 비지니스 현장은 미란다의 성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마음껏 기를 펴고 일할 수 있는 디자인 부문으로 배속시켜 주었다.
퍼디의 생각은 옳았다. 미란다는 외부와의 접촉이 많은 부서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햇볕이 잘 드는 널찍한 사무실에서 자기 일에만 열중했다. 업무처리 능력도 꽤 우수하여 3년 동안 두 번이나 승진했다.
두 번 다 사장의 딸이라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능력을 인정받은 결과였다. 미란다는 학생시절부터 미술에 소질이 있었다. 지금 하는 포장이나 광고 디자인을 하는 게 그녀에겐 알맞았다.
그녀는 아버지의 배려가 없었더라도 충분히 혼자서 훌륭하게 일 해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다른 회사에서라도 자리를 얻을 자신이 있었다.
"저 금발 여자 누구지?"
라고 폴리가 묻기까지 미란다는 옆에 서 있는 외사촌에 대해선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빠의 비서인 다이아나 코볼드야"
"어떤 여자야?"
미란다는 대답하기가 난처했다.
"글쎄, 잘 몰라"
"화사해 보이는데..."
폴리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울워드 백화점의 싸구려 팔찌 같은 인상인 걸. 겉만 번드르한 게 조금만 손톱으로 긁으면 금세 도금이 벗겨져 밑에서 쇠가 드러날 것 같애"
미란다는 웃으며 동조했다.
"알겠어, 그 느낌"
"저 여자 언제나 저렇게 사근사근해?"
미란다는 폴리의 그 거침없이 내뱉는 말투가 부러웠다. 미란다로서는 흉내도 내지 못할 일이다.
"잘못 짚었는지는 몰라도 저 여자 이모부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애. 저런 여자야말로 돈 많은 사람의 애인이 되고 싶어 안달하는 족속이니까"
미란다는 짐짓 우스운 듯이 가만히 있었다.
"아빠에게 주의시켜 드리겠어."
샴페인과 캐비어가 나온 다음 큰이모가 뒤뚱걸음으로 다가와 미란다를 껴안았다.
"예쁜 새색시가 되는구나, 네 엄마처럼. 네 엄마는 우리 자매 중에서 제일 아름답고 멋있었지. 네가 신부가 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는 게 한스럽구나"
"고마와요, 패치 이모님"
미란다는 큰이모의 볼에 입을 맞췄다.
"즐겁게 보내세요."
"오냐. 퍼디는 이런 일을 썩 잘하거든! 미란다는 훌륭한 아빠를 두었어."
패치 우드는 작은 몸매에 약간 뚱뚱하며 활달한 여자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널 응석받이로 만들지 않은 것이 놀라와. 그처럼 몹시 귀여워했었는데도 말야. 이상적인 아버지야. 우리 집 영감은 자기 아들 이름을 잊어버릴 정도라니까. 글쎄, 언젠가는 옆을 지나는 아들에게 "넌 누구지?"하고 묻질 않겠어!"
폴리가 호호 하고 웃었다.
"그게 조니의 일이죠? 그렇다면 이모부만을 나무랄 수도 없어요. 조니는 펑크 족에 물들어서 머리를 분홍색으로 염색하고 헌 옷을 질질 끌고 다니는 걸요. 그래 가지고야 원..."
패치 우드는 목 안에서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러다가 그 애도 펑크 족을 졸업하겠지. 분홍빛 머리를 처음 보았을 때는 나도 깜짝 놀랐지 뭐야. 그래도 차차 눈에 익어지던데..."
"조지 이모부는 그렇게 안 되었던 거죠?"
폴리가 농담을 던지니까 패치는 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조지는 머리가 굳었어요. 옛날 자신이 젊었을 때 일은 잊어버리고 있거든. 그에 비하면, 미란다. 너의 아버지는 젊어서 좋아. 오늘밤에도 파티를 즐기고 있잖아? 저것 봐, 젊은 축들과도 잘 어울리고 있잖아. 마음이 젊으면 사람이란 늙지 않는 법이야. 우리 집 조지 영감은 벌써부터 백 살 넘은 할아버지같다구"
미란다는 몸을 돌려 하녀가 받쳐 들고 있는 쟁반에서 샴페인 잔을 집어 들었다. 입술로 가져가다가 손이 떨려 크림색 실크드레스에 술방울이 떨어졌다. 퍼디가 아주 기분이 좋은 듯이 한쪽 팥로 다이아나의 몸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은 취기와 흥분으로 홍조를 띠고 있었다. 미란다와 눈이 마주치자 퍼디는 다이아나 곁을 떠나 주위의 사람들과 함께 딸에게로 다가왔다.
"얘야, 파티는 즐겁니?"
미란다의 코에 키스를 하다 말고 그 이마에 눈이 가더니 혹을 가리고 있는 앞머리를 헤쳤다.
"어떻게 된 거야, 이건? 어쩌다 혹이 다 생겼어?"
일순 푸른 눈동자가 무디게 빛나며 염려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탁자에 부딪쳤어요..."
미란다가 우물쭈물 대답하자 폴리가 옆에서 거들어 주었다.
"샴페인을 너무 마신 것 같아요."
미란다도 억지로 웃었다. 퍼디는 혹이 가려지도록 살며시 앞머리를 내려 주었다.
"아프니? 조심하지 않고서. 우선 머리칼로 잘 가려 두어라. 상처 입은 신부를 보내 주었다고 숀이 투덜거리면 곤란하니까"
폭소의 와중에 미란다는 혼자서 창백한 얼굴을 아래로 숙였다. 두세 시간 전만 같아도 아빠의 말을 단순한 농담으로 받아들이며 함께 웃었을 텐데...
"어째 얌전하구나. 머리라도 아프니?"
미란다는 구원받은 느낌으로 끄덕였다.
"이제 그만 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미란다가 대답하자 다시 와 웃음이 일었다.
"결혼식 긴장이 벌써 시작된 거니?"
패치가 끼어들었다.
"숀 힌튼과 결혼한다면 나라도 상당히 긴장할 거예요."
폴리가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미란다. 네가 부러워. 정말 최고 신랑감이야"
"그야 그렇지. 내가 골랐으니까"
만족스러운 아빠의 맞장구에 미란다는 눈길을 돌렸다.
"여러분에게 인사하고 오겠어요."
미란다는 자기 방으로 가기에 앞서 사람들에게 인사하며 한 바퀴 돌았다. 친구나 친척들 중에 단 한 사람 기억에 없는 남성이 있었다. 어떤 관계로 아는 사람일까 하고 미란다는 생각을 더듬었다.
"매우 피곤하신 것 같군요."
미란다가 가볍게 인사하자 그 사나이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미란다의 몸이 굳어졌다. 아까 서재에서 다이아나와 이야기한 사람이다.
"전에 뵌 일이 있었던가요?"
미란다는 침착성을 잃은 목소리로 되받았다. 사나이는 미소를 머금고 의례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개암나무 빛깔의 눈은 다이아나 그대로였다.
"폴 코볼드라고 합니다. 사촌이 아버님의 비서로 일하고 있지요. 저도 아가씨 아버님 회사 영업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 번 싱긋 웃었다.
"아버님께서도 전에 말씀하셨지만 집안끼리 회사를 지켜나가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아빠의 방침이니까요. 안녕. 오늘 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란다는 애써 침착을 가장하면서 그 장소를 떠났다. 마음속에서는 의문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다이아나의 말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참말같이 들리지만 거짓된 부분은 얼마만큼일까? 아빠가 숀과 거래를 했다는 것은 사실일까? 이 결혼은 나도 모르는 곳에서 은밀히 꾸며진 것은 아닐까? 미란다는 대충 인사를 마친 다음 퍼디에게 말했다.
"이젠 자고 싶은데요, 그전에 잠깐 아빠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요."
"이제 와서 겁이 난 거니?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야"
"아빠, 5분이면 돼요."
미란다의 진지함에 눌려 퍼디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얹고 층계 쪽으로 걸어갔다.
"집에 돌아왔을 때 네가 있어주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퍼디는 가는 한숨을 쉬었다.
"쓸쓸해지는구나, 숀에게 너를 빼앗기고 혼자 살 생각을 하니까..."
"아빠를 쓸쓸하게 하지는 않겠어요."
미란다는 아버지와 침실로 갔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 무릎 위에 손을 얹고 아버지를 주시했다.
"아빠, 아빠는 왜 재혼하지 않죠?"
뜻밖의 질문에 퍼디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결혼하고 싶은 상대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지."
그도 미란다의 옆에 앉았다.
"자 자, 내 걱정 같은 건 말아. 날마다 일에 쫓기어 나에겐 쓸쓸해 할 겨를도 없어요. 그리고 보고 싶으면 언제라도 너희들 집에 들르면 되잖아. 나 때문에 마음 쓸 건 없어."
딸의 손을 쥐고 가볍게 토닥였다.
"난 보기보다는 강한 사람이야!"
미란다도 희미한 웃음으로 되받았다.
"죽은 엄마가 아빠에게 재혼하지 말라고 약속하게 했다는 말을 언뜻 들었어요..."
순간 퍼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정말 여자들의 수다는 못 말리겠군. 누구야, 그런 말 한 사람이? 패치야? 너의 이모는 좀 더 분별있는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정말인가요 ?"
미란다는 다그쳐 물었다. 퍼디는 어깨를 으쓱하며 일어섰다.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것에 마음 쓰고 있었어. 그러니까 나도 네가 결혼하기까지는 재혼하지 않는다고 약속했지.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냐. 내가 너 때문에 자신의 행복을 희생시켰다거나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재혼하고 싶은 여자를 만나지도 못했고 언제나 일에 쫓기다 보니 가정적인 남편이 될 자신을 잃어버린 거지.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퍼디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너도 행복하지?"
"아빠, 결혼한 후에 가가 회사의 몫을 나눠 받게 되나요?"
퍼디는 몸을 돌려 딸을 보았다.
"그 이야기는 들었잖아? 숀과 약혼했을 때 변호사가 전부 설명해 주었잖아. 주는 너희 아이를 위해 숀이 보관해. 지금에 와서 또 그건 왜 묻니? 그때 얘긴 오른쪽 귀로 들어 왼쪽 귀로 흘렸니?"
"아빠는 전부터 숀과 내가 맺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미란다는 지그시 아버지를 쳐다보며 계속 물었다.
"물론이지. 숀 같은 신랑감이 어디 또 있을 듯싶어? 네가 별 볼 일없는 남자와 결혼해 그 자에게 회사를 빼앗기는 환상에 시달리는 모양인데, 숀이라면 안심하고 맡길 수 있어. 유능한 사람이니까"
미란다는 눈을 내리깔고 웃었다.
"그래서 그를 골라 주었단 말씀이죠?"
퍼디도 덩달아 웃었으나, 미란다의 말에 순수한 기쁨 이외의 것이 숨겨져 있음을 깨닫지는 못했다.
"난 너희들에게 사랑의 화살을 쏘아 준 큐피드야"
그는 문을 열고 미란다의 뺨에 키스했다.
"자, 푹 자거라. 내일은 일생에 가장 중요한 날이니까"
문이 닫히고 아버지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도 미란다는 허공을 쳐다보며 계속 서 있었다.
만일 아빠가 꾸며서 하게 된 결혼이라면 숀은 날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이 된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랑해 주는 척하는 연기를 몇 달씩이나 계속할 수가 있을까? 두 사람이 빈번히 데이트하게 된 것은 반년 전부터이며, 3개월 전 약혼한 후로는 한 주에 두세 번 만나고 있다.
그 동안 줄곧 나를 사랑하는 척 했다니 믿을 수가 없어. 못할 것도 없겠지. 마음속에서 짓궂은 소리가 속삭인다. 어떻게 하면 사랑의 진위를 확인할 수 있을까? 숀은 언제나 황홀한 키스를 해주었다. 극장에 갔을 때는 무대를 보고 있는 동안 내내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바다에 가서는 천진스레 모래펄을 달리며 뛰어 놀았던 적도 있었다.
미란다는 지금까지의 즐거웠던 일들을 되새겨 보았다. 그녀는 행복의 절정에 올라 있었으며, 숀 역시 같은 기분일 것이 틀림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확인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직접 숀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언제 물어 보지? 순간 미란다의 얼굴은 흐려졌다. 숀과 이야기를 나눌 시간 따위가 어디 있어. 내일 11시면 식을 올리게 되어 있는데. 미란다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꼭 14시간 후면 교회로 들어가야 한다. 숀과 만나는 것은 강단 앞이며, 서약의 말을 나눈 다음에는 이미 늦는다. 숀에게 결혼식을 연기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해 보면 어떨까? 숀이나 아버지의 반응을 상상만 해도 미란다는 가슴이 아팠다.
두 사람은 그녀의 의혹을 물리치고, 큰일을 치를 막바지에 이르러 신경이 과민해졌을 뿐이라고 웃어넘길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갑자기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다이아나의 이야기를 엿들은 탓인가? 그녀의 말에 어느 정도의 신빙성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미란다는 다이아나의 말 속에 진실이 있었음을 상기했다.
미란다가 결혼할 때까지 재혼하지 않겠다고 어머니가 아버지더러 약속하게 했다는 건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숀과의 결혼이 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이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결혼식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데 이렇게 밤새 애태우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수는 없다. 시간이 다하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지...
차가 떠나가는 소리와 이야기 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파티가 끝나고 손님들이 돌아가는 모양이다.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어! 아버지나 숀의 압력에서 벗어나 냉정히 생각할 수 있는 곳으로.
미란다는 어두운 얼굴로 크림색의 실크드레스에 눈길을 떨구었다. 미란다는 드레스를 벗고, 갈 곳도 없으면서 진바지 두 벌과 두툼한 스웨터를 끄집어냈다. 누구에겐가 의논하고 싶었다. 친척이 아니라 제삼자의 입장에서 냉철히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마땅한 사람이 있을까? 소형 여행가방에 옷과 소지품들을 집어넣으면서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꼽아 보았다. 하지만 대개는 나뿐만 아니라 숀과도 친구였으므로 중립적인 입장에서 들어 줄 것 같지 않았다.
클레어! 갑자기 미란다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렇다. 클레어야! 학생시절의 친구 중에서 유일하게 지금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 클레어 홈. 클레어는 이곳에서 4km떨어진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녀는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고 마음도 넓으며 냉철하다. 그녀에게라면 솔직한 기분을 털어놓을 수 있어. 클레어도 적절한 조언을 해줄 것이다. 미란다가 조용히 방문을 열었을 때 집안은 고요했다.
"죄송하지만 이대로 결혼식을 올릴 수는 없어요."
아버지에게 쓴 메모엔 그 이상은 쓸 수가 없었다. 발소리를 죽이며 층계를 내려가는데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 미란다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소리를 듣고 아버지가 층계참으로 나타나는 것이나 아닐까 하여 몇 번이나 돌아보았다.
현관문을 열고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내가 지금 큰 실수를 저지르려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대로 돌아가 숀과 결혼하는 게 올바른 선택이 아닐까? 미란다는 눈을 감았다. 몸이 떨렸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의혹의 그림자를 뿌리치기까지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다. 이 행동이 어떠한 파문을 던진다 해도 재산이 목적인 사람과 애정없는 결혼을 하는 실수는 저지르지 않아야 한다.
숀이 진정으로 미란다를 사랑하고 있다면 소란이 가라앉은 다음 모두 이해해 줄 것이다. 이외에는 딴 방법이 없었음을 알아 줄 것이다. 미란다는 살며시 문을 닫고 3월 한밤중에 인적이 드문 거리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골목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클레어의 주소를 일러주었다. 가지고 있는 돈이 얼마 안 되는 것을 깨달은 것은 차가 달리기 시작하고 나서였다. 겨우 택시 요금을 지불할 돈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 판단이 옳았노라고 자신에게 타이르며 불안과 두통으로 욱신거리는 머리를 시트에 기댔다.
2
미란다가 몇 번이나 벨을 누른 뒤에야 겨우 불이 켜지고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클레어가 얼굴을 내밀었다.
"미란다?"
클레어는 자고 있었던 듯 가운에 맨발 차림이었지만 얼굴은 졸음이 확 깬 듯한 표정이었다.
"미안해, 잠을 깨워서. 하지만 아무래도 누구에겐가 얘길 하고 싶어서..."
미란다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를레어는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미란다를 맞아들였다.
"어쨌든 들어와"
미란다를 작은 주방으로 데리고 가서 불을 켰다.
"커피를 준비할 테니 거기에 앉아 있어."
클레어는 전기 포트에 스위치를 넣고 스푼으로 인스턴트커피를 떠서 두 개의 컵에 넣었다.
"기억상실증에 걸려 내일 결혼하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클레어는 시계를 펴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잖아! 2시나 됐어!"
클레어는 키가 훤칠하고 머리와 눈동자는 갈색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쉽게 동요하지 않는 눈이 그녀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너밖에 없으니..."
미란다는 목구멍에서 짜내는 듯한 소리로 말하였다.
"누구에겐가 의논하고 싶었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서..."
클레어는 두 개의 컵에 끓는 물을 붓고 스푼으로 저은 다음 그 하나를 미란다에게 내밀었다. 그리고는 맞은편에 앉아서 김이 오르는 컵에 살짝 입을 대고 나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살 것 같군."
클레어는 재촉하듯 미란다를 보았다.
"그래 문제는 뭐야? 어떻게 하면 너에게 도움이 되어 줄 수 있을까?"
미란다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 밤 파티에서의 일이었어. 친척이 많아서 처음부터 내키지 않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피곤하길래 서재로 피해 갔었지. 파티 손님이 없는 곳은 그곳뿐이었으니까..."
클레어는 때때로 컵을 입으로 옮기면서 조용히 미란다를 바라보며 귀를 기울였다. 미란다는 서재에서 우연히 엿들은 것과 그 뒤에 알게 된 것들을 차분히 얘기해 나갔다.
"비서가 한 말이나 이모들의 이야기, 아버지의 말, 그 어느 것도 별로 중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해"
클레어는 미란다를 빤히 바라다보면서 말했다.
"중요한 건 네가 숀을 사랑하고 있는가 어떤가 하는 거야. 그래, 어떠니?"
미란다는 눈을 크게 뜨고 클레어를 마주보았다.
"응, 난 그를 사랑하고 있어. 하지만..."
"하지만 그쪽은? 그도 널 사랑하고 있니?"
클레어는 미란다가 말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되물었다. 미란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묵묵히 컵에 손을 댔다. 완전히 식어 있었다. 클레어가 꽤 진하게 탔으므로 맛이 씁쓸했다. 그래도 미란다는 그것을 목에다 흘려넘겼다.
"내 생각엔 말야, 전부터 네 마음에 그를 의심하는 기분이 깔려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심술궂은 여자의 험담쯤으로 기분이 흔들릴 리가 없다고 생각해"
클레어가 부드럽게 말했다. 미란다는 얼굴을 찡그렸다. 너무나 정확했으므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의혹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마음 어딘가에는 자신이 그에게 품고 있는 만큼의 애정이 숀에게도 있을까 하는 느낌은 종종 있었다.
어째서 그런 기분이 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때때로 숀이 미란다와 결혼할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순수한 애정에서가 아니라 아내로서의 조건이 좋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들 때도 있었다.
"넌 의논할 상대를 잘못 찾았어."
클레어는 웃으며 말했다.
"나에게 할 게 아니라 숀에게 말해야 해"
"하지만 그가 진실을 말할 것 같애? 만일 다이아나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아빠와 숀이 나 모르게 뒷전에서 거래를 한 것이라면... 내가 추궁해 봤자 숀은 인정하지 않을 거야. 그렇지 않아?"
클래어의 눈길이 차가와졌다.
"미란다. 넌 그 사람을 모르니? 난 두 번밖에 만나지 않았지만 솔직하고 무뚝뚝하다는 느낌을 받았었어. 도저히 거짓말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어."
미란다는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런데 말야..."
그녀는 말을 끊고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렇게 혼란된 상태로 어떻게 결혼할 수 있어?"
"결혼은 인생에서 가장 큰일이잖아. 망설이게 되는 네 기분도 알겠어. 결단을 내리기도 어려운데 한 번 마음을 정한 다음에 의혹이 일어나는 일 따위가 생기면 혼란상태로 빠지게 마련이야"
미란다는 머리에 손을 얹었다.
"머리가 아파, 클레어 넌 분별이 있어서 부러워. 나도 너처럼 냉정해지고 싶어."
클레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미란다는 두통이 심하여 눈앞이 흐릿했다.
"편두통인 모양이야"
클레어가 일어났다.
"진통제를 줄게. 잠도 오게 될 거야. 자명종을 8시에 맞춰 놓을게, 식장으로 갈지 어쩔지는 내일 아침에 결정해도 돼"
클레어는 컵에 물을 따르고, 작은 핑크색 약상자에서 알약 두 알을 꺼내어 미란다의 손바닥에 놓았다.
"이걸 먹고 잠좀 자. 예비침실은 좁지만 침대에 새 시트가 깔려 있어. 내일 어머니가 오실지 몰라 준비해 놓은 거야"
"고마와, 여러 가지로"
미란다는 약을 입에 넣고 물을 마신 후 클레어에게 컵을 되돌려 주었다. 두 사람은 침실 쪽으로 걸어갔다. 클레어가 물었다.
"잠옷은 갖고 왔니?"
미란다는 끄덕였다.
"옷가지등은 일단 가방에 집어넣고 나왔어. 그런데 돈을 갖고 오는 것을 잊었지 뭐야... 택시 요금이 빠듯했거든. 팁이 적어서 운전수가 싫은 얼굴을 하더라"
클레어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 운전수에겐 안됐군. 걱정 마. 필요한 대로 빌려줄게"
"고마와"
미란다는 말하면서 그녀를 껴안았다.
"얘는, 너라면 안 그러겠니?"
"응, 언제라도"
미란다가 다짐했다.
"하긴 나에겐 그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겠지만 말야"
클레어가 말했다.
"우리 아빤 내 연애 따위엔 아예 관심도 없으니까. 그의 머리엔 소중히 기르는 잉꼬 생각뿐이란다."
그녀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작은 방안을 둘러보면서 "안됐다 얘, 네 방과 같지 않아서"라고 말했다.
"지금의 나에겐 최고의 방이야"
미란다는 한숨 지으며 말했다.
"아무런 중압감도 없이 조용히 생각할 장소가 필요했던 거야. 집에선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어.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까지도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어."
"생각 따윈 하지마! 그냥 자는 거야. 지금 너에게 필요한 건 잠뿐이야. 모든 시름은 내일로 미뤄"
그녀가 나가자 미란다는 천천히 옷을 벗고 좁은 침대로 미끄러져 들어가 불을 껐다. 베개에 머리를 얹자마자 무거웠던 눈꺼풀이 감기더니 이내 잠에 빠지고 말았다. 큰 소리에 그녀는 깜짝 놀라 잠이 깼다.
팔을 짚고 일어나 침대 옆의 시계를 보았다. 8시 반이었다. 방안은 밝은 아침 햇살이 가득했다. 미란다는 겨우 30분밖에 자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처음엔 자신이 어디에 누워 있는지도 모르고 눈을 깜박이며 하품을 참으면서 작은 방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기억이 되살아나 자신이 어디에 있으며, 왜 그곳에 있게 되었는지 생각났다.
8시 반? 맙소사, 클레어가 8시에 깨워주기로 했는데, 늦잠을 잔 모양이군. 미란다는 급히 침대에서 나왔다. 밖에서 뭐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그것이 귀에 익은 목소리임을 깨닫고 미란다는 깜짝 놀랐다.
"숀..."
그녀는 뻣뻣해지는 몸으로 중얼거렸다. 설마하니... 어떻게 여기 왔을까? 클레어가 연락을 했을까? 아냐, 클레어는 그럴 애가 아니야. 그녀는 문께로 살그머니 걸어가 귀를 기울였다. 이렇게 거친 목소리는 여지껏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 말투에 담겨 있는 분노를 깨닫자 그녀의 몸은 떨리기 시작했다.
"이 문 체인을 벗겨줘요. 안 그러면 발길로 부숴 버릴 테니까"
"그런 짓은 안하는 게 좋아요."
클레어의 태연한 대답이다.
"결혼식 날에 유치장 신세를 져서야 되겠어요?"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다시 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란다가 여기 있죠? 그녀와 얘기할 권리가 내게 없다고 생각하는 거요?"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는 일예요. 중요한 건 미란다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거란 말예요."
하고 클레어가 대꾸했다.
"미란다?"
숀이 소리쳤다.
"제발 소리 좀 지르지 말아요."
짜증스런 목소리로 클레어가 말했다.
"아파트 사람들이 전부 깨겠어요. 이제 겨우 아침 8시 반이란 말예요."
숀은 막무가내였다.
"미란다! 당신과 이야기하기 전에는 여길 떠나지 않을 거요, 제발 나와서 열라고 해요."
미란다의 가슴이 미친 듯이 방망이질했다. 식은땀이 등과 가슴 안으로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은 백지장같이 창백했으며 그대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었다.
숀이 문을 부수게 둘 수는 없다. 그의 얼굴을 대하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문을 열었다. 클레어가 어깨 너머로 돌아보았다.
"내키지 않으면 만나지 않아도 돼, 미란다."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해도 좋다면 경찰을 불러서 데려가게 할 테니까..."
"남의 일에 무슨 상관이야?"
숀이 밖에서 외쳐댔다. 클레어가 싸늘하게 그를 쏘아보았다.
"우린 7살때부터 친구예요. 얘는 여기에 도움을 청하러 왔어요. 그런데도 상관이 없단 말예요? 마음이 혼란해 있는 아이를 위협해서 어쩌자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고함을 쳐대면 일은 점점 악화될 뿐이란 걸 아세요."
미란다는 천천히 복도를 걸어내려갔다. 숀은 문틈으로 검은 눈을 번득이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체인을 벗겨 줘"
그가 또 소리쳤다. 클레어는 미란다를 돌아보며 어쩔 셈이냐는 듯이 눈썹을 한 번 찡긋해 보였다.
"그의 말이 옳아. 그와 얘기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애"
공허한 목소리로 미란다가 대답했다.
클레어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체인을 벗겼다. 뒤이어 숀이 문 안으로 들어섰고, 미란다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를 작은 거실로 데리고 갔다. 클레어는 거실 문 앞에 서서 말했다.
"시비를 가려 줄 사람이 필요하거든 불러 줘"
"필요없어요."
숀이 거칠게 되받았다.
"당신에게 말한 게 아녜요."
미란다는 힘없이 클레어에게 미소를 보냈다.
"괜찮아. 고마와, 클레어."
클레어는 문을 닫았다. 미란다는 못 박힌 듯이 그 자리에 선 채 숨을 죽이고 숀이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그에게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사고력은 정지되어 있었다.
그제서야 미란다는 자신이 얇은 잠옷밖에 걸치고 있지 않음을 깨닫는 순간 다른 생각은 전혀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얼른 가운을 걸치는 건데... 하고 그녀는 후회했다.
숀은 아까 클레어에게 마구 고함을 퍼붓던 때처럼 분노로 몸을 떨면서 미란다를 노려보고 있다.
두 사람만이 있게 되니까 그 역시 미란다와 마찬가지로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힐끔힐끔 곁눈질로 숀을 쳐다보았다. 심장이 금세라도 멈출 것만 같다. 숀을 볼 때마다 그의 남성적인 육체의 매력에 끌리곤 했다. 그처럼 매력을 느끼게 하는 남자를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숀은 잘생긴 사내는 아니다. 너무나 윤곽이 뚜렷한 그의 얼굴은 잘생겼다기보다는 강렬한 인상을 준다. 소년시절 럭비 시합에서 코뼈를 다쳐 지금도 코가 좀 비뚤어져 있다. 검은 눈동자만이 그의 얼굴에서 유일하게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 빛나는 눈을 보고 있으면 우악스러운 턱의 윤곽이나 무뚝뚝한 입 모양도 다 잊어버릴 만큼 매료당한다. 지금 그의 머리는 막 잠자리에서 나온 듯이 흩어져 있지만, 평소에는 가지런히 빗어 잠재워져 있다.
키는 크지만 몸놀림은 민첩했다. 스쿼시 테니스를 즐기며, 가을에는 아마추어 럭비 클럽에도 나간다. 그러니 군살이 붙을 겨를이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그가 침묵을 깼다.
"왜 이런 짓을 했어? 그 동안 멀쩡하던 사람이 이 무슨 뚱딴지같은 짓이야?"
그녀는 다리에 힘이 쭉 빠져서 머리를 정리할 시간을 갖기 위해 의자에 앉았다.
"어떻게 내가 여기 있는 줄 알았죠?"
목소리만은 제법 야멸차게 나왔다. 숀이 짧게 웃었다.
"당신 아버지는 잠이 오질 않아서 더 운 우유라도 마실까 하고 방을 나왔는데 그러다 당신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셨던 모양이야"
미란다는 숨을 몰아쉬었다. 무슨 바보짓이었담, 불을 꺼두는 것을 잊어버리다니.
"그래서 아버지는...?"
"어떻게 했을 것 같애? 당신이 써놓은 쪽지를 보고 즉시 나에게 전화를 주신 거야. 곧바로 나는 당신 집으로 달려가 둘이서 당신을 찾기 시작했지. 우선 생각나는 집으로"
숀이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당신은 온통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은 거야. 친척들은 간밤에 한숨도 못 자고 당신 걱정을 했어."
"미안...해요."
빈정거리는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그녀는 더듬거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집을 나서기 전에 어떤 결과가 생길지를 생각했어야지. 문득 내가 클레어 홈 생각이 나지 않았더라면 우린 당신을 못 찾을 뻔했어. 그녀가 아직도 당신과 연락을 주고받는 유일한 학교 친구라는 게 생각났어. 그녀에게 전화한 건 한 시간 전이었어. 그녀는 딱 잡아떼더군. 내 전화에 놀라는 기색도 없이 말이야.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깜짝 놀라는데 말이지. 그녀가 너무나 침착했기 때문에 오히려 수상하게 생각돼 곧바로 달려왔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거예요."
미란다가 나직이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들으려고 숀의 몸이 그녀에게로 기울어지자 그녀는 그만 입이 다물어졌다.
"생각? 대체 뭘 생각한단 말야?"
"소리치지 말아요."
기운을 내서 미란다가 말했다. 그녀는 거친 그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고 있음을 느꼈다.
"우리 결혼식 날에 내게서 도망쳐 놓고는 소리치지 말라는 거야?"
그녀는 움찔하여 소파의 한쪽 구석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숀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그녀를 잔뜩 노려본다. 감정을 억제하느라고 콧구멍이 벌름거린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로부터 몸을 돌렸다.
"당신 아버지에게 전활 해야겠어. 찾았다고 알리지 않으면 경찰에 수색원을 낼 테니까. 아버진 당신이 정신착란이라도 일으켜 멍하니 배회하고 있지나 않나 걱정하고 계셔. 이만저만 걱정하고 계신 게 아냐. 하긴 당신은 아버지에게 별로 관심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숀은 가시 돋친 미소를 머금고 비웃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럴까?"
그는 고개를 저으며 문을 열었다. 복도에서 서성거리는 클레어와 마주쳤다.
"도청인가요?"
비양거리며 물었지만 그녀의 변명을 들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전화 어디 있죠? 미란다의 아버님에게 연락해서 안심시켜 드려야겠어요."
"내 침실에요."
클레어가 말하며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숀은 복도를 내려갔다. 클레어는 거실로 들어와서 힐끗 미란다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미란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 목은 조르지 않았구나"
클레어는 천연덕스럽게 농담을 했지만, 미란다는 웃지 않았다.
"커피를 끓였는데 ... 좀 들래?"
"응, 줘"
미란다는 입안아 바싹 말라 침도 삼키지 못할 지경이었다. 클레어가 커피잔을 들고 와 미란다에게 건네주는데 숀이 돌아왔다. 클레어는 돌아서서 그에게 물었다.
"커피 드시겠어요?"
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밤새 커피만 마셨어요. 보기도 싫어졌소."
클레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문을 닫았다. 미란다는 눈을 아래로 깔고 커피를 조금씩 마셨다.
"왜 도망쳤는지, 그리고 그 쪽지가 무엇을 뜻하는 건지 이젠 슬슬 말해도 되잖을까?"
숀은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그녀 앞에 서서 재촉했다. 수그린 그녀의 눈에 검은 코르덴 상하의를 간단하게 받쳐 입은 그가 보였다. 그가 자켓의 지퍼를 내리고 앞을 열자 흰 실크 셔츠가 드러났다.
"아까도 말했지만 난 갑자기... 뭐라고 해야 할지 난..."
미란다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더니 그녀에게서 잔을 빼앗아 탁자 위에 놓았다.
"결국 나와는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려는 거지?"
거칠게 그는 물었다.
"마음이 변했다는 건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야?"
그녀는 냉철히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숀의 남성적인 육체에 신경이 쓰여 말머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숀은 몸을 돌이켜 초조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우리 아버지 딸이 아니었다 해도 당신이 나와 결혼하려고 했을지 그게 의심스러워진 거예요."
중얼거리듯이 그녀는 말했다.
"당신은 회사의 실권을 장악하고 싶은 거죠, 숀? 그래서 나와 결혼하려는 거죠?"
그의 몸이 굳어졌다. 그녀는 그 물음에 대한 반응을 가늠하려고 무심결에 쳐다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글이글 타오르는 검은 눈동자의 번득임에 부딪치자 잘못 쳐다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힐 곳을 노리는 검은 화살처럼 그녀의 얼굴을 훑고 있는 그 눈빛에 그녀는 움찔하여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휴우..."
그는 긴 한숨을 쉬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군. 내가 당신의 돈 때문에 당신과 결혼하려 한다고 생각했었단 말이지?"
"아버지의 돈이에요."
아버지도 이 계략에 한몫 끼고 있다는 생각이 집요하게 그녀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같은 말 아니야? 퍼디 씨는 딴사람에게는 결코 그것을 넘겨주지 않을 테니까... 당신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를 잘 알 텐데!"
그러자 숀의 분노는 다시금 불타올라 집어삼킬 듯이 물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어? 나의 애정에 대해서 믿지 못하겠다는 것은 그렇다 쳐도, 목숨보다도 더 당신을 사랑하고 계시는 아버지에게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야? 당신이 나가버린 것을 알고 난 후에 걱정으로 미칠 지경이 되어 있는 것을 알고나 있어? 온갖 불길한 생각에 시달리고 계셔. 그는 당신이 어젯밤 좀 이상했었다고 하시더군. 이상한 말을 하고 묘한 질문을 하기도 했지만 그저 결혼식을 앞에 놓고 신경이 예민해진 탓이려니 했다는 거야. 하지만 당신이 집을 나간 것을 알자 저녁에 당신이 머리를 부딪친 것이 생각나 혹시 뇌에 이상이 생긴 것이나 아닌가 염려하셨어. 여기저기 헤매다가 차에라도 치이지 않았을까, 불량배에게 당하지나 않았을까, 온갖 불길한 생각에 시달리셨어."
"아빠를 걱정시켜 드린 건 죄송하게 생각해요. 거기까지는 생각 못했거든요."
"물론 그렇겠지."
그는 힘주어 말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어요. 생각을 하려고 했는데 워낙 시간이 없었거든요. 그대로 집에 있자니 아버지는 내 말 따위는 들어 주시려고도 하지 않고 무턱대고 결혼식만 올리라고 하실 테니... 그렇게는 할 수 없어요."
"뒤늦게야 나와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말이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너무나도 윽박지르는 소리에 미란다는 그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보지 않고서도 격한 그의 분노가 온몸에 느껴졌다.
"일이 너무 빨랐던 거예요."
그녀가 말을 시작하려는 때였다. 숀이 갑자기 몸을 구부려 그녀의 팔을 잡아채어 소파에서 일으켰다. 그녀는 깜짝 놀라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뭘 하려는 거예요?"
그녀는 놀란 나머지 목소리마저 더듬거렸다.
"실험을 좀 해봐야겠어."
그녀의 입으로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보자 그 의도를 알아차린 미란다는 몸을 흔들며 반항했다.
"안 돼요!"
하고 외쳤으나 더 말할 겨를이 없었다. 벌렸던 입술 위로 그의 입이 덮쳐 와서 그 달아오른 관능의 침범을 뿌리칠 도리가 없었다. 뜨거운 전율이 그녀의 몸속을 짜릿하게 흘렀다. 흥분하기 시작한 그녀는 머리가 아찔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이었다. 어느새 그의 어깨를 꼭 부둥켜안고 머리를 뒤로 젖힌 채 그의 키스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머리를 들자 미란다는 눈을 감은 채 그에게 매달리어 격렬히 몸을 흔들었다.
현기증이 심하게 났다. 숀은 언제나 이렇듯 그녀의 감각을 마구 휘저어놓는 것이다. 그녀는 욕구에 불타 입술을 내밀어 반쯤 벌리고 떨면서 다시 키스해주기를 기다렸다.
"됐어, 됐어."
그의 기묘한 음성에 그녀는 퍼뜩 눈을 떴다. 한껏 녹아 흐르던 도취감이 일시에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가고 그녀의 사고가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그의 입술은 냉소로 일그러졌고 그의 검은 눈은 놀랍다는 듯이 그녀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이것이 애정 없는 사람에 대한 설득력 있는 표시인가?"
그는 비양거렸다. 미란다는 그를 밀쳐버렸다.
"그것과는 상관없어요."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거야!"
"결혼은 성적 매력과는 다른 거예요."
그녀는 턱을 쳐들고 맞섰다.
"당신이란 사람을 믿을 수가 없어요."
그의 눈매가 다시 험악해졌고 입은 굳게 다물어졌다.
"나를 믿을 수가 없어?"
그의 얼굴은 서서히 붉어져 갔다. 눈싸움을 하고 있는 순간의 정적을 깨고 부드러운 시계의 차임벨 소리가 들렸다. 숀은 눈을 떼고 얼굴을 찡그리며 자신의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9시 반이군."
그렇게 말하더니 그는 미란다의 팔을 잡아 문 쪽으로 거칠게 밀어 붙였다.
"뭘 하는 거예요?"
미란다는 분노와 불안이 엇갈린 속에서 물었다.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숀은 복도로 그녀를 내밀었다. 주방문에 클레어가 나타나 그들을 지켜보았다. 숀은 미란다를 문이 열려 있는 작은 방으로 밀어 넣고 따라 들어왔다.
"옷을 혼자 입을 거야, 아니면 내가 입혀 줄까?"
그녀는 물러섰다.
"안 갈 거예요. 갈 수가 없어요. 이러지 말아요."
"이것 봐"
숀이 부드럽게 말했다.
"숀, 나 진심이에요... 당신과 결혼할 수 없어요."
그의 입이 굳어지며 여린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방안을 둘러보더니 미란다의 벗어놓은 작은 옷더미를 보고 성큼 그리로 다가갔다. 미란다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좋아요, 내 손으로 입겠어요."
그녀는 다급히 말했다. 숀이 나에게 강제로 옷을 입히다니 어림도 없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방에서 나가 줘야 해요. 당신이 보는 앞에서 옷을 갈아입을 순 없으니까요."
"왜 안 돼?"
비꼬는 듯 되받는다.
"오늘부터는 그런 것에도 익숙해져야 해"
"결혼 안한다고 했잖아요!"
그는 문으로 걸어갔다.
"5분간이야. 5분 후 돌아왔을 때 옷을 입지 않았으면 내 손으로 그 잠옷을 벗기고 옷을 입혀 주겠어. 어쨌든 간에 미란다 당신은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 해. 당신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돌아가서 아버지께 설명하면 돼. 지금까지 당신은 나에게 이유를 말하지 않았어."
문이 쾅 닫혔다. 그녀는 휘청휘청 걸어가서 문을 잠그려 했으나 자물쇠도 없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돌아서 옷을 서둘러 갈아입었다. 스웨터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아래로 잡아 내리는 그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화가 난 클레어에게 숀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틀림없이 클레어는 일의 자초지종을 따지며 왜 어린애처럼 미란다를 밀치고 다녔느냐고 힐난하는 것 같았다. 미란다 역시 복도로 그녀를 밀치며 옷을 입으라고 몰아대는 그의 난폭한 짓에 화가 났지만, 아버지와 숀을 대면하여 치러야 할 싸움에 대비하여 에너지를 축적해 두어야 한다.
왜 결혼할 생각을 바꾸었는지를 설명해야만 하는 것이다. 단 한 가지 말할 수 없는 것은 그녀가 다이아나가 하는 말을 엿들었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 소리를 한다면 모든 것은 꾸며낸 이야기라고 간단히 부정되고 곧장 결혼식장으로 끌려가고 말 것이다.
이 일은 나 자신이 결정한 일이며, 진지하게 생각하여 행한 일임을 그들이 믿도록 해야 한다. 단순히 악의에 찬 뒷공론에 놀아난 것으로 여긴다면 두 사람은 자기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클레어의 말을 빌 것도 없이 두 사람은 다이아나의 간교한 말이 미란다에게 쓴맛을 안겨 주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요 몇 달 동안 미란다로서는 그녀에 대한 숀의 진심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그녀의 마음에 의혹을 일으키게 하는 몇 가지 사실이 있었다.
즉, 성공에 대한 냉정하고도 용의주도한 결의,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야심, 매몰찬 의지의 흔적 같은 것을 말이다. 그는 절대로 그러한 것을 그녀에게 드러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편린을 문득 문득 엿볼 수 있었다. 단지 그런 것들이 무엇을 암시하는 것인지 그녀로서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을 뿐이다.
사랑에 빠진 나머지 다른 것을 볼 여유가 없었다. 그녀가 진실을 보지 못한 것은 어느 정도 그녀 자신의 책임이기도 했다. 사실 미란다는 그은 본성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었다. 그와의 미칠 듯한 관능적인 탐닉이 그녀로 하여금 숀의 의도 따위는 의심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마치 벼랑 위에 쳐진 줄 위를 겁없이 걸어온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 발밑으로는 깊은 허공이 있음을 그녀는 알고 있지 않았던가? 최소한 의심은 가져도 보았다. 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도 강렬하여 모든 생각을 버리고 그냥 돌진했던 것이다.
조금 전 그의 키스에 마음이 타오르던 것이 생각나자 그녀의 눈은 굴욕감과 고통으로 충혈되었다. 숀에게 강제로 키스를 당한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욕망에 굴복한 때문이다. 그러나 숀은 자신이 하고 있는 바를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냉소 어린 눈과 그 번득이는 득의의 광채가 머리에 떠오르자 그녀는 순간 몸을 움찔했다. 그렇게 무기력한 반응을 보이고 나서 어떻게 그를 설득하겠단 말인가?
문이 열리는 바람에 그녀는 깜짝 놀랐으나 손으로 머리를 매만지는 척했다. 숀은 그녀를 죽 훑어보고 나서 입을 씰룩거렸다.
"준비됐어?"
그의 뒤엔 클레어가 서 있다. 숀과 언쟁을 한 뒤여서 그녀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다.
"함께 가지 않아도 돼, 미란 다. 알겠니?"
그녀가 말했다.
"네가 후회할 일은 강요하지 못하도록 해"
"더 이상 토론할 시간이 없어."
숀이 미란다에게 말했다. 숀이 그 특유의 검은 눈동자를 번득이며 그녀를 응시하자 미란다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끌리는 것을 느꼈다.
"미란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을 할 필요는 없어."
클레어가 거듭 당부했다.
"이 사람도 알고 있어요."
숀은 말하면서 미란다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미란다는 몸을 돌려 클레어를 끌어안았다.
"여러 가지로 고마왔어. 가야 할 것 같아. 아무래도 아빠한테 얘기를 해야겠어."
"두 사람이 우긴다 해도 네가 원하지 않는 결혼이라면 받아들여선 안 돼"
클레어가 당부했다.
"미란다는 결혼하기를 원하고 있소."
숀이 그녀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그래요? 그렇다면 왜 얘가 도망쳐 나왔죠?"
클레어는 고슴도치처럼 빳빳이 대들었다.
"얘에겐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는 걸 모르나요?"
"미란다는 아이가 아니오. 22살이나 되는 어른이란 말이오. 당신의 충고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아요."
숀은 미란다를 밀치듯이 데리고 나갔다.
"그럼 교회에서 뵙겠소."
그는 허리에 손을 얹고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클레어를 돌아보며 빈정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숀이 미란다의 집을 향해 마구 차를 몰아대는 통에 미란다는 조마조마해서 시트를 잡아야 했고, 커브를 돌 때면 타이어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천천히 가요."
발끈해서 그녀가 소리쳤다.
"클레어에게도 거칠게 대하더군요."
"화나게 만들잖아!"
"그 앤 나의 오랜 친구란 말예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그 애만이 나를 걱정해 주고 있어요."
"그 여잔 남자 혐오증에 걸린 거 아냐?"
숀이 짜증스런 표정으로 말하면서 다음 커브를 급하게 꺾었다. 차가 몹시 기우는 바람에 미란다는 차가 뒤집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숨을 죽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차는 다시 수평으로 돌아와 안전하게 달렸다.
"남자라면 기를 쓰고 대드는 페미니스트 같았어."
그는 말을 이었다.
"말도 안 돼요. 그 애를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다만 당신이 싫었기 때문에..."
그녀는 말끝을 맺지 못했다.
"그 여자도 그랬어. 한데 이 소동 뒤의 흑막은 그 여자인가? 대체 그 여자가 무엇을 당신 머리에 불어넣었지? 내가 당신의 돈을 노리고 결혼하는 거랬어? 그 여자가 내게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 당신에게 청혼하기 전에 당신 아버지와 거래를 한 것이 아니냐고 감히 묻더란 말야. 내가 원하는 것이 당신이냐, 아니면 회사냐고 뻔뻔스럽게 다그치는 거야. 내가 억지로 참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라면 손이 올라갈 뻔했어."
미란다는 바싹 긴장을 한 채 곁눈으로 그를 훔쳐보았다. 클레어는 미란다보다 더 직선적이어서 미란다가 묻고 싶었던 것 이상으로 그에게 다그치며 물었을 것이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죠?"
그녀는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숀은 무서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 험악한 거세에 눌려 그녀는 몸을 떨었다.
"나를 화나게 하지마"
그는 닫혔던 입술 사이로 한마디 한 마디 내뱉듯이 말했다. 차는 그녀의 집안으로 들어가, 가지에 새싹이 움트고 있는 마로니에 나무 밑으로 달렸다. 미란다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붉은 벽돌집의 넓은 전면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푸른 잔디는 따뜻한 봄볕에 녹기 시작한 서리로 덮여 있었다. 집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현관 앞에 차를 세운 숀은 한쪽 팔을 핸들 위에 얹어 놓은 채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물을 감추느라 미란다는 얼른 눈을 밑으로 깔았으나 그는 한쪽 손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아버님은 60세가 다 되었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해"
그는 싸늘하게 말했다.
"손자를 원하고 계셔. 기력이 있는 동안 손자와 놀아 주고 싶으신 거야. 게다가 만약 당신을 보호해 줄 적당한 사람도 없이 당신과 회사를 남겨 놓고 돌아가시게 될까봐 걱정을 하고 계신 거야"
거친 목소리로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래서 당신들은 거래를 한 건가요? 당신은 나와 회사를 함께 맡겠노라고 약속한 거죠?"
"당신에 대해선 걱정하실 게 없다고 약속해 드렸지."
그녀는 숀이 신중하게 말을 골라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은연중에 미란다의 의혹이 사실임을 시인한 셈이었다. 그는 회사 때문에 그녀와 결혼하려 했던 것이다. 그녀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숀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현관문이 열리자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면서 얼굴빛을 고쳤다.
"아버님이야. 미란다. 아버님은 이 결혼을 무엇보다도 바라고 계셔. 그것을 염두에 두고 엉뚱한 결정 따윌 내릴 생각은 말아야 해. 나와 결혼하면 당신은 행복해질 수 있어. 지금은 감정 때문에 머리가 혼란해져 있는 거야. 결혼식 전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니까"
그는 씁쓸한 미소를 그녀에게 던졌다.
"몇 주일 전에만 말해 주었어도 우리는 충분히 얘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이젠 딱 한 시간밖에 없어. 이제 와서 모든 것을 취소할 수는 없어."
그는 그녀를 달랬다.
"모든 선물과 초대한 손님들을 그런 간단한 말로 돌려보내야 할 일을 생각해 봐. 내가 혼자 식장에서 있을 수는 없잖겠어?"
미란다는 곤혹스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할 수 없을까요?"
그녀가 차에서 내리자 그녀의 아버지가 달려왔다. 창백한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 죄책감이 복받쳐 올랐다.
"미란다!"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그는 팔을 덥석 껴안았다. 순간 그가 얼마나 걱정했었는지를 그녀는 가슴 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흰머리와 주름진 얼굴에도 불구하고 항상 젊고 변함없는 억센 남성으로 여겨져 왔었는데, 처음으로 아버지가 젊지 않다는 느낌이 실감으로 다가왔다.
하룻밤 사이에 몇 살이나 더 늙으신 것같이 여겨졌다. 다시는 딸을 못 볼 것으로 여겼던 듯 그는 딸을 꼭 껴안았다. 이제는 숀과 결혼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는 몸을 떨었다. 숀의 말대로 이미 돌아서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아버지에게 너무나 큰 충격을 주게 될 것이다. 설사 숀과 뒷거래가 있었다 해도 그것은 딸을 보호해서 안전하고 행복한 인생을 보내게 해주려는 부모의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물론 미란다는 아버지에게 그런 식으로 자신의 인생을 결정할 권리는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의도가 선의였고 자신을 그토록 사랑하는 마음에서 행하신 일이라 생각하니 차마 따질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아버지가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죄송해요."
퍼디는 잠깐 몸을 떼어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괜찮니?"
그의 눈에는 불안과 고뇌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다.
"네"
그녀가 대답하는데 숀이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아버님, 미란다는 괜찮습니다. 마음의 혼란이 가라앉았어요. 그보다 결혼식에 늦지 않으려면 어서 옷을 갈아입어야 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퍼디 보스턴은 맥없이 그를 보았다.
"그럼 식을 올리는 거지?"
미란다를 돌아보며 묻는 말에 그녀가 입을 열 사이도 없이 숀이 대답했다.
"네, 예정대로예요."
퍼디는 안도의 숨을 쉬었으며 미란다는 그의 표정에서 안도하는 빛을 읽었다.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집쪽으로 걸어갔다. 다만 어두운 그늘이 깃든 그녀의 푸른 눈만이 마음의 동요를 비치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그녀는 마음 내키지 않는 결혼식장으로 나갈 수밖에 없이 되었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지 않고서는 빠져나갈 길이 없는 것이다. 그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앞으로 숀의 아내 역할을 감당해 나갈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와 숀에게는 문제가 해결되었을지 몰라도 그녀에게 있어서는 이제부터가 시작인 셈이다.
3
아직 쌀쌀한 봄기운을 느끼며 강단 앞에 숀과 나란히 서게 되자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며 지난 몇 주 동안 자나깨나 꿈꾸어왔던 일들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깨닫기 시작했다.
마음에도 없는 혼인서약을 하는 자신의 음성을 들으면서, 그녀의 손을 잡는 숀의 손가락을 감지하면서, 그녀는 그것들을 뿌리치고 이 교회에서-그녀의 모든 꿈을 엉망으로 만든 희극에서-도망쳐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숀에게 끌려서 집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한순간도 홀로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집에는 이모들과 외사촌들이 초조해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앤 이모가 부산을 떨며 그녀를 2층으로 떠미는 것을 보고서야 다른 두 이모는 식의 거행을 확신하고 신부 들러리들을 준비시켰다.
30분 가량 지난 후에 폴리가 브랜디 잔을 들고 미란다의 침실로 들어섰다.
"이것 좀 마셔봐"
미란다의 손에 잔을 건네주면서 그녀가 말했다. 미란다는 창백한 얼굴로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교회에서 쓰러지지 않으려면 마셔야 해"
"오히려 좋지 않을 것 같은데..."
"아냐, 그렇지 않아. 아무 말 말고 마시라니까"
폴리는 달래듯이 생긋 웃었다.
"마셔 두면 종일 괜찮을 거야"
미란다도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래? 그러면..."
미란다는 브랜디 잔을 들어 입술에 갖다댔다. 폴리는 그녀의 뒤에 서서 긴 거울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미란다의 얼굴은 입고 있는 엷은 상아빛 공단 드레스보다 더 창백했으나, 브랜디가 짜릿하게 목을 적시자 발그레한 빛으로 되살아났다.
잠시 후 알콜 열기가 혈관 속으로 들어가 몸을 녹이자 그녀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그제서야 아침부터 아무 것도 먹지 않은 것을 알았다. 입에 댄 것이라곤 클레어가 준 커피뿐이었던 것이다.
"빈 속에 브랜디가 좋지 않은 것 같애"
미란다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하자 폴리가 놀라 소리를 질렀다.
"아침을 안 먹었어, 미란다? 이 바보처럼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내가 먹을 걸 갖다 줄게"
앤 이모가 말하며 서둘러 나갔다.
"미란다. 드레스를 입은 채 앉아선 안 돼. 교회에 가기도 전에 구겨져 버릴 테니까"
미란다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신부 모습에서 눈을 떼 폴리를 바라보았다.
"참 근사해, 폴리. 그 색깔이 네겐 꼭 맞는구나"
들러리들이 입을 드레스의 빛깔이나 모양은 폴리가 중심이 되어 정했었다. 폴리가 서슴없이 주장한 엷은 레몬빛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잘 어울렸으며, 폴리의 갈색 머리 빛깔과도 잘 조화되었다. 또한 들러리들이 머리에 쓰는, 가는 은빛 망사에 작은 진주를 박은 머리 장식 역시 폴리가 고른 것이었다.
"차는 대기하고 있고, 퍼디 이모부는 홀을 왔다 갔다 하시면서 출발신호를 기다리고 계셔"
폴리는 명랑하게 말했으나 한시도 미란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밝은 어조와는 달리 그 눈은 사뭇 진지했다. 시계는 무심하게 똑딱거리고 있었다. 미란다는 이 집을 떠나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숀의 비참한 아내 생활을 시작할 시각이 다가오고 있음을 새삼 느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얘"
폴리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드레스가 정말 로맨틱해"
미란다의 입술이 저절로 일그러지며 쓴 미소가 흘렀다.
로맨틱한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그녀가 고른 드레스였다. 하트 모양의 네크라인, 길고 품이 넓은 소매, 그 소맷부리에는 진주 단추가 붙어 있다. 허리는 꼭 죄어져 있고 사각사각한 스커트를 넓게 퍼지도록 밑에는 여러 겹의 주름이 진 페티코트를 입었다.
"미란다. 왜 그러니?"
갑자기 폴리가 심각하게 물었다.
"도무지 못 봐주겠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러 가려는 신부가 아니라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람 같잖아"
미란다가 입을 열려는데 앤 이모가 버터를 바른 토스트 조각과 사과와 우유잔을 들고 돌아왔다. 딸 폴리를 의심스런 눈으로 힐끗 보더니 말했다.
"폴리야. 여기서 꾸물거리지 말고 다른 들러리들이 준비되었는지 확인해 봐. 곧 교회로 떠나야 하니까"
폴리는 잠시 주저하다가 선뜻 미란다의 볼에 키스했다.
"행복해야 돼"
하곤 어머니의 재촉하는 눈초리에 쫓기듯 방을 뛰어나갔다.
"아무렇게나 먹어도 좋은데 드레스엔 절대로 흘려선 안 돼"
이렇게 말하면서 앤 이모는 한 입씩 먹기 좋게 자른 토스트 접시와 냅킨을 미란다에게 넘겨주었다.
"너무 급히 먹지 마, 미란다. 시간은 충분해, 먹고 나서 베일을 쓰기만 하면 되는 거야"
층계를 내려가 아버지를 만나러 갔을 때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이미 베일을 내려 가리고 있었다. 레이스의 베일 저쪽으로 아빠의 얼굴이 마치 꿈속처럼 아련하게 보인다. 딸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그녀 자신의 눈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의 눈에도 딴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한껏 부푼 스커트 때문에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발이 땅을 딛고 있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퍼디는 딸의 손목을 잡고 미간을 찌푸렸다.
"손이 차구나"
미란다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닥쳐올 일들을 묵묵히 받아들이도록 몸도 마음도 마비되어 있는 것이다.
만일 말을 하려면 생각을 해야 하는데 생각하기조차도 싫었다. 그저 유령처럼 걸음을 옮겨 문을 나갔다. 교회로 태워다 줄 흰색 리무진에 두 사람이 올라타자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아직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니?"
그녀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무언의 거짓말이었지만 또한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식을 치르도록 나는 온힘을 기울여야 한다.
"누구나 결혼식 때면 신경이 예민해지는 법이란다."
퍼디는 여지껏 잡고 있던 딸의 손을 다독이면서 달랬다.
"어젯밤 집을 뛰쳐나가는 게 아니었어, 얘야. 나에게 말했어야지. 네 생각을 말해 주었어야지. 결혼이란 중대한 것이니까 깊이 생각해야 되는 거야. 물론 지금은 하찮은 일에 신경을 쓰지만 한두 주일 지나면 아무 것도 아닌 걸 가지고 그랬구나 하고 웃게 될 거다."
"그럴 테죠."
베일 뒤에서 그녀가 대답했으나 입술이 굳어져 또렷하게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이 섰는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가 딸에게 말한 것은 교회 문 앞에 서서 오르간 소리가 울리기를 기다릴 때였다.
"참 예쁘구나.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걸 잊지 말아라. 네가 어려움에 처하면 언제라도 달려갈 거다."
그는 나직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미란다는 그녀를 감싸고 있는 아버지의 팔을 꼭 안았다. 금세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음악 소리가 흐르기 시작하고 두 사람은 좌석 사이의 통로를 걸어갔다. 정면의 밝은 빛속에 서있는 예복 차림의 훤칠한 숀의 뒷모습이 베일을 통해서 그녀의 눈에 비쳤다. 신랑의 들러리는 힐끗 그녀를 돌아보았으나 숀은 계속 강단을 향하고만 있어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도 않았고 그의 눈과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 상태로만 계속된다면 그럭저럭 식은 마쳐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베일이 뒤로 젖혀지고 맨 얼굴로 그를 본 순간 현실이 앞에 와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숀은 검은 눈동자를 번득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꼭 쥐고는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제하고 있었다. 얼굴은 더욱더 창백해졌다.
저 눈동자의 광채는 승리의 광채 바로 그것이 아닌가? 숀은 바라던 것을 손에 넣었다. 그녀는 그의 아내가 되었고, 그럼으로써 차기 사장 자리가 보장되었다. 고통과 증오가 뒤섞인 아픔이 끓어올랐다.
그녀를 사랑하는 척만 하지 않았어도 자신을 이용한 것쯤 용서할 수가 있을 것이다. 사랑을 가장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다.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척 가장하지 않고 단지 거래로서 결혼하고 싶다고 했더라면 어떻게 대답했을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숀을 사랑하고 있었다 해도 그녀는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몇 달 동안 거짓된 사랑을 꾸며왔던 것이다. 그녀는 참을 수 없는 굴욕감을 느꼈다. 그는 그녀를 우롱하여, 흡사 굶주림에 못 이겨 사냥꾼 그물에 날아든 새의 꼴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혼인증서에 서명을 하고 있는 미란다에게 결혼 반지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서명하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숀은 부드럽게 웃었다.
"이제 미란다 힌튼이 된 것을 잊지 마"
"가능한 한..."
그녀가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이 얽히었다.
"잊지 않도록 해주겠어."
숀이 농담처럼 말하자 다른 입회인들은 덩달아 웃었다. 오직 퍼디만이 미란다를 향해서 얼굴을 찡그리며 앞으로 나와 자신의 이름을 서명했다. 말쑥한 예복 차림을 한 그의 모습이 여느 때보다 한층 위엄을 풍겼고, 희끗희끗한 그의 머리가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났다.
나이 든 부인들 몇몇이 경탄의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미란다의 눈에 들어왔다. 퍼디는 아직도 상당한 남성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다. 여자들이 그에게 관심을 두는 것은 단순히 그의 재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이아나는 곧 아빠에게 결혼을 졸라댈까? 미란다는 엿들은 내용을 모조리 아빠에게 알려 드리고 싶었으나, 그것은 좋은 쪽보다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럴 생각도 없었는데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다이아나와 결혼할 생각을 갖게 될지도 모를 일이며, 그렇게 된다면 뒤에 다이아나가 미란다의 개입을 알게 될 때는 미란다에 대한 적의가 더욱 깊어질 것이다.
부녀간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무엇이든 꾸며댈 것이며, 더욱더 미란다를 미워할 게 뻔한 일이다. 식에 참석한 낯익은 얼굴들은 신랑신부를 주시하고, 음악에 맞추어 두 사람이 걸어나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뒤를 봄꽃 부케를 든 신부 들러리들이 따랐으며, 프리지어의 향기가 코를 찔렀다. 미란다는 숀의 팔을 잡고 또 한 손에는 큼직한 부케를 들고서 얼굴에 애써 미소를 띠며 걸어나갔다.
그녀가 프리지어를 고른 것은 그 색깔과 향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는데, 이제 그 꽃은 보기도 싫어졌다. 그 향기의 여운만으로도 속이 뒤집혀질 것 같았다. 식을 올리는 동안 몹시 긴장해 있었으므로 교회를 나와 햇빛을 쬐었을 때 미란다는 일시에 긴장이 풀림을 느꼈다.
이제는 저 리무진을 타고 돌아가는구나 싶었는데, 그것도 잠시일 뿐 카메라를 들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일단의 사람들이 보이자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기념촬영이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숀의 팔을 끼고 있던 그녀의 손이 바르르 떨렸고, 놀란 숀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괜찮겠어?"
그녀는 눈을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걱정할 거 없어.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숀이 나직이 속삭였다. 미란다는 갑자기 귀머거리가 되어 숀의 입술의 움직임을 읽어야 하는 것처럼 그의 입술을 응시했다. 그러나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 전 식을 끝내고 강단 앞에서 그가 한 키스를 생각한 것이다.
순순히 얼굴을 든 그녀의 입가를 숀의 입술이 스쳤다. 그러나 감각을 잃고 있었으므로 감촉을 느끼지도 못했다. 지금 그 일을 생각하니 다시금 몸이 떨려왔다. 이런 식의 관계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앤 이모와 패치 이모가 가족사진을 찍도록 양가의 사람들을 미란다와 숀의 둘레에 배치시켰다. 사람들은 모두 웃거나 농담을 했다. 미란다도 덩달아 웃으면서 그들이 걸어오는 말에 대꾸했다.
봄바람에 베일이 뒤로 나부꼈고 드레스가 사각거리며 위로 날렸다. 한 손으로 그것을 다듬어 내리다가 다시 결혼 반지가 느껴졌다. 무의식중에 그 반지를 만지작거리면서 일그러진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참담한 기분이 와락 몰려왔다. 생애에 가장 행복한 날이어야 할 텐데 생각하기조차 싫은 날이 될 것 같았다.
"자, 이젠 신랑 신부만 찍을까요?"
어느 카메라맨이 말했다. 주위의 사람들이 물러나고 카메라 앞에 숀과 미란다만이 섰다. 언론 관계의 카메라맨 한 사람이 놀리듯 소리쳤다.
"그렇게 딱딱해서야 쓰겠소, 미세스 힌튼?"
와하하 모두 가 웃었다.
"벌써 이름을 잊으신 모양이야. 결혼식을 하면 신부들은 잠시 기억상실증에 걸린단 말씀이야. 전에도 그런 예를 많이 보았어요."
미란다는 애써 웃으려다 그의 다음 말에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자 키스하세요. 이건 결혼식이니까"
숀은 미란다의 긴장을 감지하고 있었으나 표정은 냉정하고 미소까지 머금고 있다. 그는 미란다에게로 돌아서서 그녀를 껴안았다. 그녀에게는 항거하거나 뿌리칠 틈도 없었다.
숀의 뜨거운 키스를 받으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고통과 기쁨이 뒤범벅이 되어 밀려왔다.
하객들이 떠드는 소리와 카메라가 돌아가는 소리가 아스라히 들렸다. 플래시의 라이트가 비치고 있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어린 조카들이 킬킬거리거나 더러는 헛기침을 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소리들이 귀에 거슬렸다.
잠깐 동안의 달콤한 순간 때문에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하였던 모든 일들이 다시 떠올랐다. 그가 입술을 떼자 그녀는 곧 베일을 내렸다. 홍조를 띠었던 얼굴에 대해서 더이상 이러쿵저러쿵하는 소리를 듣기가 싫었던 것이다.
빨리 사진촬영을 끝내 주기만을 바랐다. 아직도 피로연이 남아 있다. 언제까지 이런 연기를 계속하며 미소를 흘리고 있어야 하나. 참으로 진저리가 났다. 미소를 짓느라고 턱이 아팠다.
백색 리무진에 몸을 실었을 때 그녀는 떨고 있었다. 숀은 흐트러진 그의 검은 머리를 한 손으로 빗어 넘기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보았다.
"피곤한 것 같군. 피로연에는 2시간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을 거야. 늦어도 5시까지는 공항에 도착해서 탑승절차를 마쳐야 하니까. 옷을 갈아입기도 해야 할 테니 3시 반에는 연회장에서 떠나야 해. 히스로 공항까지는 차로 한 시간밖에 안 걸리지만 차가 밀릴 것도 생각해서 일찌감치 나가도록 하지."
미란다는 베일의 형태를 가다듬고 머리를 매만지면서 끄덕였다. 그러나 숀쪽을 보면서도 그와 시선이 마주치는 것은 피했다. 차가 흔들려 그의 몸이 움직일 때마다 그녀는 신경이 곤두섰다. 차 안에 두 사람만이 있다는 것이 곤혹스럽게 의식되었다. 차는 칸막이가 되어 있어 운전사는 거울로 그들을 볼 수는 있어도 그들의 말은 듣지 못한다.
미란다는 양미간을 찌푸렸다. 차 안에서조차 숀의 존재가 이렇게 신경을 괴롭히는데 하물며 그가 빌었다는 친구의 별장에 가서 단 둘만이만 있게 될 때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 별장은 신혼부부에게는 안성맞춤으로 멀리 떨어진 아름다운 곳에 지은 것이라고 했다.
처음 바하마에 있는 그 별장에서 허니문을 지낸다고 들었을 때엔 멋진 생각이라고 좋아했었는데, 이제 2주일 동안이나 그와 단둘이 지내야 할 것을 생각하니 온몸이 오싹해졌다.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 것인가? 그녀의 몸에 그가 손대는 것을 어떻게 견디어 낸단 말인가.
이것은 진정한 결혼이 아니다. 회사의 병합과 같은 거야. 그러면서 숀과 함께 침대에 들어가야 할 생각을 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이제 몇 시간만 있으면 편해질 거야"
숀이 말하자 미란다는 가시 돋친 소리로 되받아 쏘았다.
"편해져요? 웃기지 말아요. 제발 사람들이 옆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어요. 계속 연기를 하고 있으면 되니까요. 하지만 신혼여행 가기 전에 한 가지는 분명하게 해두어야겠어요. 나는 당신과 함께 잘 수는 없어요. 법적으로는 부부가 되었을지 몰라도 우리 관계는 거기까지예요. 만일 손가락 하나라도 내 몸에 댔을 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 거예요."
그 순간 숀은 미소를 거두고 크게 떴던 두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며 양미간을 찌푸렸다.
"최후 통첩 같군."
그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래요! 진정이에요, 허튼 소리가 아녜요."
"그래?"
조소의 빛이 그의 입가에 흘렀다. 미란다는 눈을 돌리고 등을 꼿꼿이 세웠다.
"어디 한번 시험해 보세요!"
"권유하는 건가 아니면 협박하는 건가?"
"노닥거리고 있는 게 아녜요, 나는"
그녀가 꽥 소리쳤다.
"사람들 앞에서는 당신과 아버지를 위해 행복한 신부 연기를 했지만 둘이 있을 때는 치근덕거리지 맡아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게 다 끝장나버릴 거예요."
차는 집 가까이로 다가가면서 속력을 늦추었다. 숀은 거울을 통하여 그들을 기묘한 눈으로 보고 있는 운전수를 흘깃 쳐다보았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어도 두 사람의 표정으로 무엇인가 다투고 있음을 눈치 챘을 것이다.
미란다는 숀의 표정을 살폈다.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굳게 다문 입은 짜증 때문일까, 분노 때문일까? 그녀는 그와 맞설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며 앞으로의 변화를 자기 뜻대로 이끌어가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숀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만만치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진짜 싸움은 둘만의 시간이 올 때에 벌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얼굴에 일어나는 사소한 빛이라도 읽어내서 미리 그의 의도를 알고자 한 것이다. 속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사랑했다는 데 처음부터 그녀의 실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적으로서 그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의 배후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숀이 중얼거렸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지?"
그는 눈을 옆으로 돌려 그녀의 옆모습을 훑으면서 그 얼굴에 홍조가 돋는 것을 날카롭게 주시했다.
"나와 헤어지고 당신이 집을 뛰쳐나간 그 사이에 무엇인가 있었던 거야 그렇지?"
그의 목소리는 무엇인가 생각해 내려는 듯한 어조였다.
"도대체 무엇이...?"
그가 말을 멈추었을 때 미란다는 씨근대는 숨소리를 들었다.
"어제 저녁 파티에서 누구를 만난 거야? 틀림없이 옛 애인을 만났지?"
그녀는 화가 치밀어 입술을 뒤틀었다. 그것을 보고 숀도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 그렇진 않은가 보군. 하지만 그렇게도 갑자기 태도가 변한 이면에는 무언가 있는 거야. 누군가를 만난 게 틀림없어. 다른 남자?"
차가 집 앞에 와 닿았다. 운전수가 내려서 문을 열었다. 숀의 질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란다는 차에서 내렸다.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봄바람을 받아 더욱 부풀었고 베일이 날아갈 듯했다.
그녀는 한 손으로 베일을 누르고 집 쪽으로 걸어갔다. 집 앞에는 하녀가 함빡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멋진 결혼식이었어요, 미란다 아씨. 참으로 예뻐요. 어찌나 기뻤던지 눈물이 났어요. 꽃도 아름다왔구요. 교회는 환했고 오르간 반주는 보통 때보다 더 좋았어요. 난 오르간 소리는 좋아하지 않지만, 어쩐지 졸려서요..."
해먼드 부인은 미란다와 숀이 혼인 서약서에 서명하러 성물실(聖物室)로 들어갔을 때 피로연 준비를 마쳐놓기 위해 한발 먼저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준비는 다 되어 있어요."
그녀는 뒤에 다가오는 숀 쪽을 보면서 말했다.
"연회를 준비하는 요리사들이 아침 내내 바쁘게 일했어요. 큰 차일도 훌륭하구요. 비가 오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에요. 바람이 더이상 세게 불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식사중에 차일이 날아가는 일이라도 있으면 큰일이거든요."
"아냐, 괜찮을 거야"
숀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축하드려요, 서방님과 미란다 아가씨. 아니, 힌튼 부인이라고 해야지... 행복하시기 바래요."
"고맙소."
숀이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함빡 웃으면서 그 손을 잡고 흔들었다. 새로 파마한 그녀의 은빛 머리가 상기된 얼굴 둘레에 물결치고 있었다. 해먼드 부인은 10년 동안 보스턴 가를 섬겨왔으며, 자신을 그 가족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미란다는 그녀를 껴안고 눈물이 어린 미소를 던졌다. 해먼드 부인은 딸기빛 드레스의 주름을 펴면서 혀를 찼다.
"이 드레스를 입고는 파티 감독을 못하겠네요. 전 돌아가서 요리사들을 감시해야겠어요. 그렇잖으면 캐비어가 반이나 없어져 버리거든요."
그녀가 돌아설 즈음엔 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거의 다 돌아왔다. 숀은 그들을 힐끗 보고는 빠른 소리로 미란다에게 말했다.
"어젯밤 당신이 다른 사람을 만난 것으로 생각 한 건 내 잘못이었기를 바래. 어쨌거나 이젠 너무 늦었어, 미란다. 당신은 내 아내가 되었어. 난 당신을 놓치지 않아. 부부가 된 이상 거기에 어울리게 생활해 나가야 돼. 그런 최후통첩 같은 말을 하는 게 아냐. 자꾸 그렇게 우긴다면 내 분통이 터져 버릴 테고 그렇게 되면 당신에게도 이로울 게 없잖아"
그때 마침 긴 차의 행렬이 멈추고 아버지와 이모들이 내렸으므로 그녀는 그의 말을 묵살해 버릴 수가 있었다. 그 다음 반 시간 동안 미란다는 사람들의 키스와 축하를 받기에 바빴다.
피로연은 대부분 신부측 친척들로 가득 차 있었다. 숀의 가족으로는, 양친을 여의어 오직 대학 졸업반인 동생 데클란 하나뿐이었다. 먼 친척뻘 되는 몇 사람이 식에 참석했으나 미란다는 그들을 본 적이 없었으며, 그들도 숀과 그렇게 친근한 것 같지 않았다.
그들과 이야기해 보니 숀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고독하다는 것을 알았다. 친척들과 가깝게 지내는 대가족 출신인 그녀와는 아주 달랐다. 숀은 20대 초반에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었으며, 당시 11살인 데클란을 보살피며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육촌과 이야기하고 있는 숀을 바라보면서 젊은 나이에 동생을 기르기에는 짐이 너무도 벅찼을 거라고 미란다는 생각했다.
손님들이 모두 도착한 다음 미란다와 숀은 잔디 위에 세운 커다란 차일 아래서 하객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 먹음직스러운 요리도 미란다는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냉연어 젤리와 샐러드를 집었을 뿐, 샴페인을 조금씩 마시면서 그녀를 보는 사람에게 계속 미소를 지어 보이려고 애를 썼다.
미란다는 식탁에서 저만치 떨어져 앉아 있는 다이아나 코볼드를 한두 번 바라보았다. 그녀를 볼 때마다 미란다는 이가 갈리는 심정이었다.
다이아나는 가슴까지 넓게 패인 남빛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가슴의 속살이 엿보이는 것으로 보아 밑에 블라우스를 입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뿐더러 몸의 곡선이 또렷하게 드러나는 것으로 보아 속옷조차 입었는지가 의심스럽다.
금발머리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뭇 남성들의 시선을 한데 모으며 쾌활하게 웃어대거나 옆에 앉은 남성과 장난을 치고 있다.
아버지와 숀 사이에 앉아 있는 미란다는 힐끗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역시 다이아나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다이아나의 모자, 예쁘죠?"
그녀의 목소리에 흠칫하며 퍼디 보스턴은 딸을 보았다.
"응? 그래, 그녀는 항상 옷을 예쁘게 입지."
"아주 매력적이에요."
미란다는 되도록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이아나를 좋아하니, 얘야?"
그 말에 미란다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잠시 망설였다. 다이아나에게 청혼하기 전에 미리 딸의 의견을 들어 두려는 것일까? 미란다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좋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저 여자는 여성들에겐 호감 살만한 여자는 못돼요. 같은 여자들과 있기보다는 남자들과 함께 있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퍼디는 미간을 찌푸리고 놀란 눈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저쪽에선 너를 좋아하는데..."
미란다는 짧게 웃었다.
"저 여자가 그랬어요? 참, 여자란 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다를 때가 많으니까요."
퍼디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가 짜증 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자의 생각이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난 너에 대해서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미란다. 때때로 넌 나를 당황하게 하는구나"
그녀는 억지로 웃었다.
"때때로 저도 스스로에게 당황해요."
그녀는 가볍게 말했지만 결코 솔직한 심정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미란다는 아버지나 다른 친척들에게서 줄곧 아이 취급을 받아왔었다. 이 집의 후계자로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애지중지 자라왔다.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보냈었고 남들이 흔히 겪는 사춘기의 감정적 갈등도 그다지 겪지 않았다. 따뜻한 애정과 이해에 감싸여 아무런 문제도 없이 자라온 것이다. 여느 아버지들 이 흔히 그렇듯 관심 없이 돈만으로 아이를 키우는 식이 아니라,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그녀와 함께 지냈으며 언제나 딸을 사랑해 왔음을 그녀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미란다는 어젯밤에 이르러서야 그가 아무리 딸을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그녀 모르게 일을 꾸며 온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는 모든 것이 딸에게 유익할 거라는 생각에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평생의 반려자를 스스로 고르고 또 스스로 인생을 결정하는 성인으로서의 자유를 인정받지 못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그녀의 심경에 커다란 변화가 일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였다 해도 사랑한다고 하여 한 사람의 일생을 결정 짓는 중대한 일을 꾸미거나 속일 권리는 없는 것이다. 어젯밤 미란다는 갑자기 어른이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은 이미 어른으로서의 생각을 하고 있는데도 아빠와 숀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앞으로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미란다는 성숙한 여인으로 변해 있었다. 이젠 주위의 사람들이 언제나 그렇게 있기를 바라는 소녀가 아닌 것이다.
갑자기 미란다는 가슴이 뭉클하여 아빠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든 사람은 변화에 대해선 당혹하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행복했던 시대를 그리워하면서 그대로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퍼디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붙들어 맬 수 없는 시계바늘은 무자비하게 계속 움직여 가는 것이다.
"예복을 입으시니 매우 당당해 보이세요, 아빠. 이젠 자주 입으셔야겠어요."
"천만에"
퍼디는 딱딱한 옷깃을 손가락으로 잡아당기며 얼굴을 찡그렸다. 익살스런 그 표정에 미란다는 웃었다. 접시를 치우기 위해 왔던 웨이터가 반도 먹지 않은 그녀의 접시를 보면서 싱긋 웃었다.
"신부들은 모두 많이 먹지를 않아요. 머리에는 딴 생각들뿐인가 보죠."
하며 낄낄거렸다. 미란다는 숀의 조소 어린 눈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이제 곧 두 사람만 있게 될 생각을 하니 새로운 두려움이 가슴을 죄었다. 언제까지 냉정을 지탱해나갈 수 있을는지...
4
미란다는 어둠 속에 서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공포와 긴장으로 온몸이 굳어 있었다. 캄캄하여 아무 것도 안 보였지만 방안에 누가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천천히 움직이는 그의 발소리와 숨소리가 들리자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다. 그러나 그녀 자신의 고동 소리가 다른 모든 소리를 지워 버릴 만큼 컸다.
"미란다. 빠져나가지 못해!"
그의 속삭임을 듣자 엄습하는 공포를 쫓기 위해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벙어리가 된 채 도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엿보면서 그저 서 있는 수밖에 없었다. 냉정하기만 하다면 이 캄캄하고 숨 막히는 방에서 빠져나갈 방도를 생각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이 있을 것이다. 나 아니면 숀이 자물쇠를 잠가 버렸을까? 순간 그녀는 방에 들어오면서 자신이 문을 잠근 것이 생각났다. 그가 안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밖에서 솨악솨악 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래사장을 치는 파도 소리일까? 여느 때라면 마음을 가라앉혀 줄 소리련만 지금은 오직 그녀의 두려움만 더해 줄뿐이었다. 갑자기 그의 손이 와 닿았다. 그녀는 그것을 뿌리치려고 몸을 돌렸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고 귀가 멍멍했다.
문득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이글이글 타는 불꽃이 그녀를 마비시켰다.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았을 때 어질어질한 현기증으로 그녀는 아무 반항할 힘도 없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 왔던가. 그녀의 육체가 달아올라 그녀는 그에게 키스를 퍼부으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숀은 부드럽게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숨 막히는 두려움과 수치감이 일시에 몰려와 그녀는 그의 팔에서 벗어나려고 억지로 몸을 비틀다가 언뜻 잠에서 깨어났다.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안도의 숨을 몰아쉬느라고 미처 주위의 상황을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바하마 군도로 가는 비행기 안에 있음을 깨달았다. 땀에 젖은 그녀의 몸에 담요가 반쯤 덮여 있고, 좌석은 몸을 눕히는 위치로 낮추어져 있다. 옆을 보니 숀이 이쪽으로 얼굴을 돌린 채 잠들어 있다.
이윽고 숀이 눈을 떴다. 희미한 불빛 속에 그가 고개를 들고 눈을 뜨는 것이 보였다.
"잠이 오지 않아?"
그가 속삭였다. 미란다는 다시 누워 담요를 어깨가지 끌어올리고 숀에게 등을 돌렸다. 몇 시쯤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기내의 불이 꺼진 것은 10시였었다. 미란다는 다시 잠을 청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로에 지쳐 있었으므로 깊은 망각의 세계로 빠져드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비행기를 탈 때까지 숀과는 별 어려움 없이 평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들이 비행기를 탄 순간부터 스튜어디스가 숀에게 신문이다. 음료수다 담배다 음식이다 연신 날라 대며 얼쩡거렸다. 때때로 미란다에게도 필요한 것이 없냐고 묻기는 했으나 그 시선은 미란다에게보다는 거의 숀에게로 가고 있었다.
만일 미란다 없이 숀 혼자서 여행을 했더라면 더욱 적극적인 행동을 보였을 것이다. 미란다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혼여행이라는 인상을 받기가 싫었다. 그래서 공항으로 떠나기 전에 데클란 힌튼이 혼례식에 던지는 색종이라도 쑤셔 넣지나 않았을까 하고 가방 안을 살폈었다.
데클란은 피로연에서 샴페인을 여러 잔 비워, 그의 형과 새 형수가 보스턴 집을 나올 즈음에는 한껏 취해 있었다. 두 사람이 탈 차에다 스프레이어로 "신혼"이라고 쓰고는, 범퍼에다 헌 구두와 빈 깡통들을 매달아 딸랑거리게 한 것도 데클란이었다.
다행히도 그가 사용한 스프레이어는 면도 크림이었으므로 집에서 벗어나자 숀이 곧 지워 버릴 수 있었다. 출발 전 마지막으로 미란다에게 키스한 것도 데클란이었다. 그녀는 아빠와의 포옹을 끝으로 할 셈이었는데 퍼디가 손을 풀고 뒤로 물러났을 때 다리가 긴 데클란이 잽싸게 사이로 끼어들어 그녀에게 키스를 했던 것이다.
그전에 미란다는 그가 신부 들러리들에게도 뜨거운 키스를 해주는 것을 보았다. 들러리들도 그와 키스하는 것을 모두 즐기는 눈치였다. 데클란은 형과는 달리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얼굴에 드러냈다. 붙임성 있는 그의 미소를 대하면 누구나 따라서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더러운 손을 내 신부로부터 떼 줬으면 좋겠어."
데클란이 오랫동안 미란다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을 보자 숀은 차 안으로 들어가면서 명령조로 말했다. 마지못해 그녀에게서 떨어지며 데클란은 숀에게 히죽 웃었다.
"흥을 깨버렸어. 좋아요, 이젠 형수가 되었으니까 언제든지 키스할 수가 있겠지."
"해보렴, 어떻게 되나"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숀은 운전석과의 사이에 긴 다리를 뻗었다.
"자, 문을 닫아. 우리가 떠난 뒤에도 너무 마시진 말고"
히스로 공항으로 향하는 도중 미란다는 데클란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데클란은 퍽 재미있군요. 이번 여름에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무엇을 할 건지 결정해 두었나요?"
"글쎄,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져. 올해 1년 동안은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일단 고삐가 풀리기만 하면 그 반동으로 발작을 일으켜 미치광이 짓을 저지를지도 몰라"
"아주 패기가 있던데요."
미란다는 웃으며 말했다.
"전 가끔 남동생이 일었으면 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쓸쓸하게 변했다.
"아빠도 아마 그랬을 거예요."
다소 침통하기까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숀은 공항으로 달리는 고속도로에 접어든 차의 진동에 몸을 맡기면서, 떨떠름한 시선을 그녀에게 던졌다. 그의 검은 눈은 그녀의 얼굴에서부터 조금 전에 막 갈아입은 청록색 실크 드레스로 옮겨갔다.
부드러운 옷감이 몸에 찰싹 감기어 늘씬한 육체의 곡선이 또렷이 드러나 보인다. 몽실한 가슴의 융기, 가는 허리, 아담한 히프라인, 드레스 자락 밑으로 내리뻗은 매끈한 견양말을 신은 다리로 숀의 시선이 옮겨감에 따라 미란다는 얼굴이 붉어졌다.
훑어내리는 듯한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해 그녀는 눈을 돌려 히스로로 가는 도로 연변의 전원풍경을 차창으로 내다보았다. 두 사람 모두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침묵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적어도 미란다에게만은 편안하지가 않았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두 사람뿐이라는 것을 의식하면서 터질 듯한 불안이 그녀의 가슴을 억눌린다. 기내에 들어가 1등석에 자리를 잡고 나서 숀은 미란다에게 잡지를 건네주었다.
그때 그의 손이 슬쩍 가슴을 스쳤다. 미란다는 벌에게라도 쏘인 듯이 움찔 몸이 굳어짐을 느꼈다. 가슴이 무섭게 뛰었다. 숀이 관찰하듯 그녀를 살폈으나 다행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행기가 이륙한 후 미란다는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떨쳐 보려고 다시 데클란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것이 가장 무난한 화제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데클란에 대해서는 호감도 느꼈고, 그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숀 자신에 대한 실마리가 잡힐지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던 것이다.
그녀로서는 어떠한 실마리라도 필요했다. 포도주 잔이 나오고 다음엔 오르되브르와 해산물 샐러드가 나오는 긴 시간 동안 데클란 얘기가 계속되었다.
"그는 올해 학위를 받게 되나요?"
미란다는 커피를 다시 따르려고 허리를 구부린 스튜어디스에게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이제 괜찮아요."
스튜어디스는 교태 어린 미소를 보내면서 숀의 컵에 커피를 따랐다. 그의 관심을 끌려는 그녀의 노력을 눈치 챘는지 숀이 되받아 미소 지었다. 미란다는 입술을 꼭 다물고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음식 위로 시선을 떨구었다. 아무것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시간을 보내고 어색한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를 풀기 위해 그것에라도 관심을 가진 척 해야 했다.
"응, 데클란은 학위를 받을 거야"
스튜어디스가 가버린 후 숀이 대답했다.
"공부벌레는 아니지만 머리는 좋고 또 올 1년 동안 열심히 파고 있었어. 지난해는 꽤 놀았지만 저도 3년간 대학을 다니고도 학위를 못 받아서야 꼴이 말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당신은 어려서부터 그를 키워야 할 책임을 지고 있었으니 고생이 많았겠네요."
잠시 뜸을 들인 후에 미란다가 말했다.
"내 동생이니까..."
숀은 간단히 대답했다.
"나 말고는 돌 봐 줄 사람이 없거든"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었어요?"
짐짓 동정을 표하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랬었지."
짜증스러운 그의 목소리에 미란다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때 기내의 조명이 어두워지며 영화상영이 시작되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미란다는 등을 구부리고 희미한 불빛 속에 시계를 바라보았다. 새벽 2시인지 아니면 다른 시각의 1O분인지는 분명치 않았으나 다시 숀의 주의를 끌게 될까 두려워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2주일 동안을 지내기로 되어 있는 별장은 얽혀 있는 나뭇가지의 그늘에 가리워져 도로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나무에는 끝이 뾰족한 노란 꽃이 피어 있었고, 갸름한 꽃잎은 노란 거미의 다리를 연상하게 했다. 그것들을 보며 그녀는 몸을 떨었고 숀은 그러한 그녀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왜 그래?"
"저 기분 나쁜 꽃은 뭐죠?"
운전수가 그들의 짐을 별장으로 나르는 동안 숀에게 물었다.
"마녀개암나무야"
놀리는 듯한 눈으로 나직이 말했다.
"마술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
"원시종교의 주술 따윈 믿지 않아요."
그런 식으로 그녀를 보는 것이 싫어서 그녀는 암팡지게 되받았다. 별장 주위가 푸른 바다와 모래사장밖에 없는 한적한 곳임을 알자, 그녀는 더욱 신경이 곤두섰다. 이런 곳에서 그와 단둘이 있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범 우리 안에서 잠이 깬 토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이상 속이 뒤집힐 소리를 듣기 전에 그녀는 혼자 앞서서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창에는 셔터가 내려져 있었고, 푸른 그늘이 꽉 차 있는 방은 그녀의 꿈 같은 비현실감을 한층 짙게 해주었다. 미란다가 방들을 돌아보고 있는 동안 밖에서는 숀이 운전수에게 돈을 치르는 소리와 이어서 차가 사라져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일은 현지의 렌트카 회사에서 차 1대를 보내 주게 되어있다. 미란다가 창 위의 셔터를 열자 강렬한 햇살이 내리비쳤고 그제사 왜 창이 닫혀 있었는지 겨우 알 수 있었다. 방안이 밝아지자 레몬 빛 벽의 넓은 거실에 놓여 있는 모든 것이 깨끗하게 보였다.
집 주인이 이웃에 사는 부인에게 일주일에 3번씩 청소를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숀이 방으로 들어오는 발소리를 듣고 미란다는 바싹 긴장했다. 드디어 두 사람만이 있게 되었구나. 하지만 숀에게 그런 동요를 눈치 채이고 싶지는 않다. 미란다는 몸을 휙 돌려서 도전하는 듯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숀은 입가에 빈정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짐을 풀고 나서 샤워를 할까 해요."
그녀는 말했다. 숀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재미있어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미란다는 숀이 얼마나 냉혹한 마음으로 결혼했는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기의 연약한 마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런 상황으로 몰려 든 것이다.
숀의 검은 눈의 광채가 그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결혼한 것이 후회되었다. 소동이 벌어지더라도 결혼을 취소해야 했는데... 언쟁을 피하고 싶은 심정이 결국 자기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는 결과가 돼버린 것이다.
"샤워보다 헤엄치러 가는 게 좋지 않을까?"
냉랭한 어조로 그가 권했다.
"잔디밭 저쪽에 풀장이 있어."
"지금은 싫어요."
대답하며 그녀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쪽 침실을 써도 되겠죠? 바다 경치가 정말 좋군요."
그는 온화하게 웃었다.
"어느 방을 사용하든 우리 맘대로야. 하긴 바다 경치를 즐길 시간이나 있을는지..."
미란다는 목덜미에서 머리카락이 빳빳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방을 같이 쓸 마음은 없어요."
"그래?"
중얼거리면서 숀은 회색 상의를 벗어서 의자 위로 던졌다.
"정말이에요."
미란다는 그가 넥타이를 풀어서 역시 의자 위로 던지는 것을 불안스럽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법적으로는 부부가 되었지만 당신과 함께 잘 수는 없다고 어저께 분명히 말했잖아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요."
침착하고 확고한 어조로 말하고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숀은 어느새 셔츠의 단추를 끄르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더 벗으려는가. 미란다는 조바심이 났다.
"내 자존심에도 한계가 있어."
숀은 퉁명스레 대꾸했다.
"허니문인데도 떨어져 잔다는 걸 가정부가 눈치 챌 거라는 생각을 못하나? 그 뒷소문이 이 집을 빌려준 내 친구 귀에 들어가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아? 그리고 그 녀석이 그 흥미로운 뉴스를 혼자 간직할 것 같아?"
"그건..."
미란다는 중얼거리며 급히 그에게서 눈을 떼었으나 이미 늦었다. 드러난 넓은 어깨, 곱슬곱슬한 털이 덮인 햇볕에 그을린 가슴팍이 눈앞에 확대되었다. 보지 않았어야 했을 걸 하고 자책하면서도 그녀는 본능적인 욕망으로 몸이 달아올랐다.
절대로 마음을 놓아서는 안 돼. 그녀의 상반된 감정을 그가 눈치라도 챈다면, 사정없이 그 감정을 이용하고 말 사람이다.
"어젯밤엔 내 옆에서 자지 않았어?"
숀이 말했다.
"별로 불편해 하는 것 같지 않던데..."
"그것과는 달라요."
그녀가 야멸차게 내뱉었다.
"그땐 옆에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나를 아주 위험인물로 만들고 있군."
숀의 검은 눈동자가 묘한 빛으로 번득였다.
"지금 내가 칭찬을 받고 있는 건지 멸시당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할 것 같아? 우격다짐으로 당신을 소유할 것 같아? 그렇게 하려면 당장에라도 할 수 있지."
그녀에게로 그가 다가왔다. 그녀의 가슴에서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격분과 긴장이 뒤섞인 눈으로 그를 쏘아보면서 그녀는 뒷걸음질 쳤다.
"장난으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녀가 말하려 하자 그의 눈이 싸늘해졌다.
"아냐 미란다. 농담하고 있는 게 아니야. 여긴 우리 둘 뿐이야. 내가 그럴 마음만 있다면 방을 같이 쓰든 따로 쓰든 별 차이가 없는 거야. 침대조차 필요없어. 지금 이 자리에서 마루 위에 눕혀 놓는다면 당신이 어쩔 수 있을 것 같아? 대들어 보았자 무기라도 갖고 있지 않는 한 나를 막을 수는 없어... 혹시 주머니에 총이라도 숨기고 있는 건 아니야?"
미란다는 그의 넌지시 던지는 위협이 현실로 옮겨질까 두려운 나머지 입을 다문 채 숨을 죽일 뿐이었다.
확실히 숀이 말하는 대로다. 그가 덮치려고만 든다면 그를 막는 길은 그를 죽이는 수밖에 없다. 힘으로 그를 당할 수는 없으며 싸워서 그를 물리칠 수도 없다.
"증오해요!"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 그의 검은 눈에 이상한 빛이 어리는 것을 보고 그녀는 숨이 넘어가도록 깜짝 놀랐다.
"그 증오라는 것이 지금 시작된 건 아니잖아"
그가 의미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 마음이 변했는지 밝히기를 거절했을 때부터 나는 그 상황을 감수하고 있어. 지금은 남에게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게 하고 싶지 않아. 같은 방을 써주어야겠어. 트윈베드가 있는 방이 있으니까 그거면 괜찮겠지? 마음 놓고 자. 마다하는 여자를 안을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한밤중에 싸울 걱정은 안해도 돼"
미란다는 입술을 깨물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이 약속을 지키리라는 걸 어떻게 믿어요?"
숀의 안색이 변하면서 눈동자에는 위협의 빛이 서렸다.
"당신에게 선택권이 있는 게 아니야"
그는 자르듯이 내뱉었다.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은 그녀로서도 뼈저리게 알고 있다. 이젠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어제 아침이라면 그래도 기회가 있었다. 완강히 결혼식을 거절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결혼식을 올림으로써 자기 자신의 탈출구를 스스로 막아버린 것이다. 자기의 의사로 그를 일생의 반려자로서 선택한 줄 알았는데 모든 것은 사전에 계획되어 있었던 게 아닌가. 그녀는 영악한 두 사람에게 조종되어 각본대로 교묘히 결혼으로 이끌려진 것이다. 그것은 물론 표면상의 결혼에 불과하지만,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다는 데는 마찬가지의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미란다는 숀을 뒤에 두고 방을 나와 바다에 면한 전망 좋은 침실로 들어가 자물쇠를 눌렀다. 바다를 바라볼 마음의 여유조차 생기지 않았다. 우울한 기분으로 여행 가방에 든 것을 붙박이장에다 집어넣었다. 가방 속을 모두 비운 후 그녀는 옷을 벗고 침실과 이어져 있는 유리문의 샤워실로 들어갔다.
눈을 감고 더운 물줄기를 맞고 있노라니 조금씩 분노가 가라앉았다. 튀겨오는 따뜻한 물줄기가 등으로부터 가슴으로 흐르면서 긴 여행의 피로와 땀을 씻어내려 주었다. 냉철하게 생각을 해보려고 해도 아직은 상황이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금 악몽을 꾸고 있으며 그러다가 깨어날 것만 같았다. 머리가 혼란했다. 숀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그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사랑이라고 생각 것은 단지 환상에 불과했던 걸까?
숀은 미란다와 알기 이전부터 퍼디 밑에서 몇 년간 일해 왔었다. 아빠가 그를 자주 칭찬하는 소리를 듣고 그가 유능한 인물일 거라는 인상을 갖고 있었다. 한편 미란다는 아빠의 회사를 잇는다는 것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과학에 대해서는 정통하지 못했고 전자공학과는 더욱 인연이 멀었다. 그래서 일상적인 회사 일 따위엔 특별한 관심이 없었다. 미술학교로 진학한 것은 미술을 잘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 말고는 그다지 흥미를 끄는 과목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특별히 우수한 성적도 아니었으므로 졸업 후 미술로 성공해 보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사람은 미술이든 다른 무엇이든 야망과 목적의식을 갖고 밀고 나가야 하는 것인데도. 숀은 그녀를 만나기 오래 전부터 이런 모든 것을 구비하고 있었다.
퍼디는 숀에게서 성공에 대한 불타는 야심을 발견했으며, 그래서 그가 숀에 대해 자주 칭찬하는 말을 듣고 미란다는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미란다는 사회에 나가 성공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때로는 어려서부터 너무나 행복하게만 자라온 탓이라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욕심나는 것을 가지려고 남과 다툴 필요는 없었다. 언제나 아빠가 접시에 고이 담아 내주었으니까. 하지만 사실 숀을 만나기까지 그에 대해서 약간의 질투를 느껴 본 적은 있었다. 아빠가 숀을 너무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었다.
미란다는 젖은 머리를 두 손으로 쓸어 올리고 한숨을 쉬면서 샤워 밑에서 나왔다. 타월 천으로 된 매트 위에 서서 몸을 잘 닦은 후 짧은 가운을 걸쳤다. 아빠와 숀은 미란다가 그를 만나기 전부터 결혼을 계획하고 있었을까?
그 생각을 하니 등골이 오싹하는 전율을 느꼈다. 옷을 골라 입기 위해 그녀는 맨발로 침실로 돌아왔다. 밖은 햇살이 누그러져 있었다. 가능한 한 그녀는 냉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떨떠름한 분위기 속에서 숀과 대처해 나가려면 냉정해야 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감정을 억제하여 그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행동으로 나오게 해서는 안된다고 다짐했다.
미란다는 목둘레가 깊이 팬 소매 없는 셔츠와 연푸른색 반바지를 입었다. 얼마 후 슬리퍼를 발에 걸치고 문을 열고 나갔더니 주방 쪽에서 숀의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미란다는 이를 악물었다. 어쩌면 저렇게도 태평스럽고 기분이 좋을 수 있을까? 그녀는 주방 입구에서 발을 멈췄다.
"침실이 비었어요. 짐을 푸시려면 지금 푸시죠."
숀은 레몬수가 든 잔을 손에 들고 얼음을 섞어 휘젓고 있었다.
"내 짐은 풀지 않았어?"
서운한 듯이 그가 물었다. 그녀는 흰 이를 드러내며 웃는 시늉을 했다.
"아뇨.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당신의 시중을 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휴가를 즐기기 위해서란 말예요. 나는 혼자서 즐기고 싶으니 각자 좋을 대로 하기로 해요."
그는 빈정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미란다.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 작정이라면 대성공을 거둔 셈이야. 2주일간이나 여기서 지내야 하니까 얘기할 시간은 충분히 있어. 런던으로 돌아가기까지 당신의 행동 이면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찾아내고야 말 테야. 일찌감치 실토하는 게 속편할 텐데..."
"정원을 산책하겠어요."
미란다는 숀의 위협을 무시해 버리고 조용히 말했다.
"미란다. 농담이 아니야!"
걸어가는 미란다의 뒷모습에다 대고 강한 어조로 내뱉었으나 그녀는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가 노기 띤 어조로 나오는 것에 그녀는 오히려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나는 숀에게서 감당 못할 만큼 큰 상처를 받고 있다. 설혹 일시적으로 짜증을 유발했다 해도, 오히려 약간의 보복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별장은 해안을 향해 완만한 경사에 세워져 있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모래밭에 흰 파도가 밀려와서는 철썩 소리를 내며 밀려나가고 있다. 인적 없는 바닷가에는 갈매기와 바닷새들만이 날아다니고 있다. 미란다는 별장 정원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며 파도 소리와 물새 우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잘 손질된 잔디밭 주변에는 키 작은 관목들이 줄지어 서 있고, 그 밑으로 꽃밭이 펼쳐져 있다. 갖가지 봄꽃들이 피어 있으나 모두가 미란다에게는 낯선 꽃들이었다.
튤립의 초록빛 새싹은 흰빛과 분홍빛 줄무늬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목련의 윤기 흐르는 타원형 잎의 그늘에도 꽃망울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2, 3주만 지나면 희고 붉은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겠지.
미란다는 양쪽에 부겐빌리아 꽃이 피어 있는 오솔길을 빠져나와 해변으로 나갔다. 갈매기가 놀라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날아올랐다. 날아가는 갈매기를 눈가에 손을 얹고 바라보니 새들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크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5
사나이는 죽어 있는 것 같았다.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엎드린 자세로 물 위에 떠 있었다. 미란다는 크게 숨을 몰아쉬고 사나이의 몸에 손을 댔다. 두려움으로 목덜미의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허리를 잡고 힘껏 물에서 끌어올렸다. 아주 무거웠으나 마침 파도가 밀려와서 그 힘을 빌어 겨우 모래사장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바닷물에 젖어서 색깔이 짙어진 금발머리가 마치 해초처럼 보였다. 기를 쓰고 사나이의 몸을 바로 젖혀놓은 다음, 미란다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물에 퉁퉁 불었을 줄로 생각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눈두덩에는 상처가 나 있었다.
갑자기 미란다는 사나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왠지는 모르지만 살아 있는 것같이 여겨졌다. 그녀는 다시 한번 사나이를 엎드려 놓고 인공호흡을 시작했다. 등 위에 올라앉아 견갑골 밑 부분을 규칙적으로 눌렀다 풀었다 했다.
처음에는 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더니만 이윽고 희미하게 꾸르륵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더 힘을 주어 누르기를 계속했더니 마침내 쿨럭이며 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는 몸을 떨면서 계속 물을 토해 냈다.
사나이는 벌렁 누워 큰대자로 팔을 벌린 채 근육을 꿈틀거리면서 괴로운 숨을 내몰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으니 미란다는 저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같은 나이 또래의 젊은이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던 것이다.
엄청난 충격에 미란다는 자신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없이 울었다. 꿈지럭거리는 기척에 미란다가 얼굴을 들었더니 사나이가 옆으로 몸을 돌리고 머리를 들고 있었다. 바닷물이 뚝뚝 떨어지고 햇볕에 그을린 몸에 물방울이 반짝였다. 미란다는 떨리는 손으로 젖은 눈을 비비며 어린 소녀처럼 훌쩍 거렸다.
"저... 고맙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젖은 눈썹 사이로 맑고 푸른 눈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호흡은 약간 가라앉았으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기분이 좀 어떠세요?"
"엉망이죠."
사나이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미란다는 바다 쪽으로 눈을 돌렸다. 보트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이 해안으로 흘러온 걸까. 정원에서 모래사장을 내려다보았을 때 그곳에는 물새의 세모꼴 발자국만 있었을 뿐 사람의 자취는 없었다.
"어떻게 이리로 오신 거죠? 요트, 아니면 보트로?"
"윈드서핑으로 저쪽 해변을 떠나 저 섬을 돌았어요. 생각보다 멀리 나왔던 모양인데 그걸 알았을 때는 암초에 걸리고 말았어요. 지금은 형체도 안 보이지만 해면 바로 밑에 암초가 있었어요. 그걸 안 것은 서핑보드가 바위에 부딪쳤을 때였죠. 공중으로 튕져져 버렸고... 헤엄을 쳐서 해변까지 오는 수밖에 없었던 거죠."
미란다는 일어나서 멀리 섬쪽을 내다보았다. 분명히 빨간 돛 같은 물체가 파도 사이에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거리는 꽤 멀었다. 헤엄쳐 왔다면 지쳐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당신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사나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모래 위에 일어나 앉았다.
"내 이름은 마티 녹스입니다."
"미란다 보스턴이라고 해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결혼 전의 성을 댔다는 것을 알았지만 정정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신혼여행중이라는 것을 생각해내고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느닷없이 마티가 껄껄 웃었다.
"어쩌면 이렇게..."
미란다는 영문을 몰라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좀 더 가까이 그의 옆으로 다가앉았다.
"왜 그러죠?"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 사세요, 미란다?"
"저 위에 와 있어요."
머리로 별장을 가리켰다.
"이 섬에 사시나요?"
"나도 휴가 중이랍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가 있었지요. 정부의 사업계획에 관계하고 있는 기술잡니다. 그곳에 간 지 2년이나 되어서 장기 휴가를 얻었지요."
그는 말을 중단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기분이 영 좋지 않군요, 젠장"
중얼거리면서 머리를 떨구자 젖은 금발이 앞이마에 흘러내렸다.
"별장으로 가세요. 의사를 불러 드릴게요."
미란다는 일어섰다.
"저를 붙드세요, 자"
마티는 그녀를 잡고야 겨우 두 다리로 일어섰다. 미란다는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늘씬한 몸매인데 근육질이어서 꽤 무거웠다.
"자, 천천히 걸으세요."
떨리는 마티의 몸이 그대로 미란다에게 전해져 왔다. 마티는 미소를 담은 푸른 눈을 미란다에게로 돌렸다.
"당신을 보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해야겠어요. 당신이 와 주지 않았더라면 난 벌써 죽은 몸일 테니까 말입니다."
"섬뜩한 소리 말아요."
한발 더 내디뎠을 때 마티의 몸이 크게 기우뚱거렸다.
"괜찮아요?"
미란다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묻자 마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덕을 올라 정원으로 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마티는 숨을 헐떡이며 목련나무 밑에서 걸음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대면서 고개를 숙였다.
미란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살폈다. 호흡이 가라앉자 마티는 얼굴을 들고 그녀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합니다."
"별말씀을요. 숨이 차서 그러는 게 당연하죠."
그는 두 팔을 그녀에게 감고 키를 낮춰 입술에 가벼이 키스했다.
"사랑스런 분이군요."
이렇게 속삭이고 나서 이내 어색한 표정으로 변했다.
"이런 것은 두번 다시 못할지도 몰라요."
두 사람이 집을 향해 걷기 시작하였을 때 숀이 베란다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하얀 난간에 기대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미란다는 떨어진 곳에서도 그가 싸늘한 표정 밑에 분노를 감추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검은 눈을 번쩍거렸고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신혼여행에 낯선 남자가 끼어들어온 걸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마티도 숀의 모습을 보고는 의아스러운 얼굴을 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죠?"
"제 남편이에요."
하는 수없이 미란다가 사실을 말했다. 마티의 얼굴에 놀람과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것은 미란다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확인할 겨를도 없이 그 표정은 사라져 버렸다.
"키스 장면을 안 보았다면 좋겠는데... 무슨 일인가 할 테죠. 질투심이 많은 분입니까?"
미란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려운 질문이었으므로 대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숀이 어떤 형의 사람인지, 미란다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을 안다면 이렇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지...
숀은 두 사람 쪽으로 휭하니 와서 베란다의 층계 앞에 가로막듯이 섰다. 미란다는 자기에게 쏠린 숀의 날카로운 시선이나 험악한 표정을 마티에게 눈치 채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부인이 목숨을 구해주셨습니다."
바닷물을 들이켰던 탓인지 마티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숀에게 미소를 지었지만, 그의 굳은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미란다가 서둘러 설명을 덧붙였다.
"녹스 씨는 윈드서핑을 하다가 암초에 부딪쳤대요. 잘못하면 익사할 뻔했어요. 물가에 떠 있는 걸 내가 보았기에 망정이지."
"해변에 헤엄쳐 닿기 전에 아마 의식을 잃었던가 봐요."
이번에는 마티가 그 뒤를 이어 말했다.
"의식을 되찾았을 전 부인께서 인공호흡을 해주고 계셨습니다. 훌륭한 부인입니다."
숀은 미간을 약간 찌푸렸을 뿐이었다.
"마실 걸 드는 게 좋겠군."
숀의 시선이 마티로부터 미란다에게로 옮겨갔다.
"두 사람 다."
무뚝뚝하게 말을 던졌다. 마티는 당혹한 표정으로 미란다를 바라보았으나 그녀는 아무 표정도 드러내지 않고 얼굴을 돌렸다. 숀의 매몰찬 태도에 미란다도 당혹했던 것이다. 숀은 앞서서 층계를 올라갔다. 마티는 발밑의 마루가 젖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몸이 젖어서..."
"타월을 가져올게요."
미란다는 총총걸음으로 욕실을 향해 달려갔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마티는 숀의 낯빛을 살피면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곳에 온 지 일주일째 됩니다. 여기서 일주일을 더 보내고 영국으로 돌아가 남은 휴가를 그쪽에서 지낼 작정입니다. 식구들도 만나고 싶고..."
미란다가 수건을 갖고 나타나자 마티는 안도하는 눈치였다.
"부인께서 구해 주지 않았더라면 식구들과도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뻔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미란다에게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 같으면 남은 일주일을 그런 위험한 스포츠로 보내지는 않겠소."
숀은 여전히 쌀쌀맞았다. 숀과 시선이 마주쳤지만 미란다는 그의 마음속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무엇을 마시겠소?"
그가 말했다. 미란다로부터 수건을 받아쥐면서 마티가 말했다.
"위스키 진저를 주신다면 고맙겠어요, 보스턴 씨"
숀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마티는 부지런히 몸을 닦느라고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숀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으면서 미란다의 얼굴은 새빨갛게 되었다. 그는 검은 눈을 번득이며 이름을 정정하지도 않고 말없이 미란다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티가 발을 닦고 나자 미란다는 타월감으로 된 숀의 가운을 건네주었다.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겨우 되살아난 기분입니다."
마티는 가운을 껴입고 허리끈을 매고서 숀이 권하는 대로 등의자에 가 앉았다. 몸의 무게 때문에 의자가 삐걱거렸다.
"여러 가지로 폐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보스턴 씨"
마티는 술잔을 받아들고 두 손으로 감쌌다. 생사를 헤맨 탓인지 갈색 피부는 혈색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금발 머리는 다 말라서 밝은 광채를 되찾고 있었다. 2O대의 스포츠맨 타이프의 준수한 청년이었다. 숀은 미란다에게도 브랜디가 든 잔을 건네주었다. 그의 차가운 손가락이 손에 와 닿았을 때 미란다는 급히 손을 뺐다. 마티는 흥미로운 눈길로 실내를 둘러보았다.
"훌륭한 집이군요. 빌린 거겠죠? 함께 지낼 상대가 있으면 집을 빌리는 편이 훨씬 즐겁겠어요. 마음 내키는 대로 지낼 수 있으니까요. 나 같은 독신에겐 호텔 쪽이 좋습니다. 사람과 알게 될 기회가 생기거든요. 휴일의 로맨스가 생길 가능성도 있고요."
그는 미란다를 보며 싱긋 웃었고, 그녀도 미소로 답했다.
"당신은 휴일의 로맨스를 찾아 휴가를 즐기시오?"
숀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마티는 숀의 차가운 시선에 약간 움찔하면서 술잔에 입을 댔다. 미란다가 비난 어린 시선을 숀에게 던졌다.
마티 역시 방금 숀이 한 말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마티는 위스키를 쭉 비우고 나서 잔을 탁자 위에 놓았다.
"목숨을 구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일어났다.
"호텔로 돌아가야 하겠는데 전화를 좀 쓸 수 있을까요? 차를 보내 달라고 해야겠어요."
"그러시죠."
숀이 대답했다. 미란다도 브랜디 잔을 비우고 나서 마티가 사용한 타월을 집어 들고는 주방으로 가서 세탁통에 넣었다. 그리고는 옷을 갈아입으려고 침실로 들어갔다. 미란다의 옷도 젖었고 모래가 묻어 있었다.
그녀는 문을 잠그고 다시 한번 샤워를 하기 위해 옷을 벗었다. 살갗에 모래가 묻어 까칠까칠했다. 샤워를 한 후 몸을 닦고 산뜻한 옷을 입었다. 엷은 분홍색 면바지에 흰 줄무늬가 든 소매 없는 하늘빛 셔츠였다. 머리에 빗질을 하고 엷은 루즈를 바르고 나서 거실로 돌아왔다.
마티와 숀은 정중한 어조로 사우디아라비아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얼음 조각을 넣은 위스키 잔을 들고 있었다. 숀은 잔을 흔들면서 마티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거기선 술이 금지돼 있어요. 저는 원래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어서 별로 곤란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파티에서나 가정에 초대받았을 때에나 어울려 한두 잔 하는 정도였지 혼자선 마시지 않거든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술 때문에 곤란 받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보다 내가 견딜 수 없었던 건 더위와 파리였어요. 그러나 차츰 적응이 되더군요. 돈 버는 게 첫째 목적이니까!"
미란다가 다가오자 마티는 하던 말을 끊고 미소를 던졌다.
"시원하고 산뜻해 보이는군요."
그의 눈은 분홍빛 바지와 셔츠를 더듬었으며, 숀도 그것을 보고 있음을 깨닫고는 미란다 는 얼굴을 붉혔다.
"고마와요. 샤워를 하고 왔지요. 호텔에선 차를 내주었나요?"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을 겁니다."
마티는 끄덕이고서 위스키를 마셨다.
"부인에게는 큰 빚을 졌습니다. 일간 식사에 초대해도 좋겠습니까?"
급히 숀에게로 눈을 돌렸다.
"물론 두 분이 함께"
숀은 미란다가 대답하기 전에 엄숙한 얼굴로 대답했다.
"며칠 더 지나고 나서요. 오늘 막 도착한 길이라서 아직 정돈이 안됐습니다. 뒷날에 초대를 받겠습니다."
미란다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해가 기울어지자 하늘은 짙은 황갈색으로 물들어 갔다. 곧 밤이 된다. 숀과 함께 밤을 지낼 일을 생각하니 갑자기 불안해졌다. 세 사람 모두 묵묵히 있는데 엔진 소리가 들렸고 마티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호텔에서 보낸 차일 테죠."
마티는 잔을 놓고 미란다에게 손을 내밀었다.
"부인에게는 뭐라고 감사의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별말씀을"
미란다는 얼굴을 붉히면서 말을 더듬었다.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그렇게 했을 거예요."
"하지만 내 목숨을 구해 준 것은 다름 아닌 부인이었습니다. 내게 있어 부인은 특별한 사람입니다."
마티는 미란다의 손을 잡고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그 손등에 입술을 갖다 댔다. 미란다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숀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해 손을 빼냈다. 숀은 불쾌하게 생각할 것이다. 미란다의 옆에서 꼼짝도 않고 서 있었으나 그 기분 나쁜 침묵이 분노를 말해 주고 있었다.
미란다를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소유를 분명히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퍼디의 회사를 손에 넣기 위해 이처럼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권력에 대한 그의 욕구에는 일단 손에 들어 온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마음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에도 숀은 다른 남자들이 미란다에게 접근하려 하면 화를 냈었다.
그들은 서먹서먹한 기분으로 문 쪽을 향했다. 마티는 곁눈으로 미란다와 숀의 눈치를 살피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현관에서 발을 멈추고 그는 숀과 악수를 했다.
"당신에게도 감사드리는 걸 잊었습니다. 환대해 주셔서 고마왔습니다. 보스턴 씨"
차가운 표정에 의례적인 목소리였다. 숀이 그에게 적의를 품고 있듯이 마티도 숀에게 호감을 갖지는 못하고 있었다.
"천만에요."
숀도 탐탁지 않은 어조로 대답했다. 마티는 호텔의 이름이 찍혀 있는 자동차 쪽으로 걸어갔다. 차 옆에 가서 다시 한번 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일간 또 뵙겠습니다."
그 말은 미란다에게 하는 것이었으며 마티의 시선은 그녀에게만 쏠리고 있었다. 미란다도 손을 흔들어 차가 방향을 틀어 개암나무 가지를 스치면서 사라져가는 것을 전송했다. 차가 사라진 후 미란다는 숀을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불안하여 견딜 수 없었으나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
라고 생각하면서 미란다는 푸른 눈에 도전적인 빛을 띠었다.
"대단히 냉담한 태도를 취하는군요. 마티는 엄청난 일을 당했기 때문에 쇼크를 받은 사람이잖아요?"
거실로 들어서면서 그녀는 숀을 나무랐다. 숀의 입술이 위로 뒤틀리면서 조소의 미소를 지었다.
"은인인 용감한 부인에게 마음이 끌리는 여유는 있더군!"
미란다는 얼굴이 붉어지려는 것을 억제하느라고 안간힘을 썼다.
"실없는 소리 말아요! 마티는 나에게 감사한 것뿐이에요."
"당신들은 30분쯤 전에 처음으로 만난 것 아냐? 그런데 그자는 당신에게 키스를 하고 돌아갈 때에도 손에 입을 맞추었어. 익사할 뻔했던 사람이 할 수 있는 태도일까? 놀랍도록 빠른 발전이야 몸이 정상상태였더라면 무슨 짓을 했을지 생각만 해도 오싹해져"
순간 미란다는 눈을 내리깔았다.
"난 그가 밝고 쾌활한 청년이라고 생각했는데 당신은 난봉꾼 취급하는군요."
숀은 미란다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았다. 미란다도 턱을 내밀고 그의 시선을 되쏘아보았다.
"당신은 그에게 결혼 전의 성을 일러주지 않았어?"
"놀라서 정신이 헷갈리는 통에 잊어버렸던 거예요."
"이제부터는 내 아내라는 걸 잊어버리지 마. 듣고 있는 거야?"
숀이 미란다의 몸을 세게 흔들었다. 그녀는 그 손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렸으나 몸만 뒤틀릴 뿐이었다.
"얼떨결에 말을 잘못한 걸 가지고 그렇게 소란을 떨 건 없잖아요?"
"프로이트가 말하는 본심이 드러난 실언이라는 건가?"
숀은 내뱉듯이 말했다.
"매력적인 사나이를 만나서 남의 아내라는 것도 편리하게 잊었다 그 말이지. 내 아내인 걸 잊어버리고 싶겠지만 그렇게는 안될 걸"
숀의 노기등등한 서슬에 미란다는 겁났다. 날카로운 눈초리가 미란다를 꿰뚫고 있어서 그녀의 얼굴은 골격이 드러날 정도로 경직되었다. 숀이 화내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섬에 도착하자마자 마티 녹스가 끼어들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는 없겠지만 이토록 격분해 있을 줄은 몰랐다.
"이 손 치우세요."
미란다의 두려움은 점차 분노로 변해 갔다. 그런데 하고 싶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숀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막아 버렸다. 숨도 쉴 수 없었다. 숀은 그녀의 몸을 두 팔로 감고 난폭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키스를 퍼부어댔다.
미란다는 그런 키스가 싫었다. 온몸으로 저항하자 숀은 잠시 입술을 떼었고, 그 틈에 미란다는 크게 숨을 쉬었으나, 다시 그의 입술이 다른 방식으로 다가왔다. 부드럽게 덮어 누르면서 뜨거운 욕정을 불러일으켰다.
눈을 감고 미란다는 본능을 좇아 점점 숀의 키스에 응하기 시작했다. 숀의 손이 셔츠 밑으로 미끄러져들어와 배를 스쳤다. 그리고는 조금씩 위로 더듬어 올라와 가슴에 와 닿았다. 뜨거운 피가 무서운 속도로 미란다의 몸 속을 마구 치달았다.
미란다는 황홀한 기분에 취해 모든 것을 잊어 갔고, 저도 모르게 격렬한 욕구로 등이 휘었다. 웬일인지 숀이 미란다의 입술에 처음 키스했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첫 데이트를 하던 밤이었다. 차 안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면서 미란다는 숀의 입술 움직임을 보며 저 남성적인 입술의 키스를 받았으면... 하는 상상으로 가슴이 벅찼었다. 숀의 말이 중단되었을 때도 미란다의 눈은 그의 입술에 빨려들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미소 지었을 때 미란다는 깜짝 놀라 얼굴을 붉혔었다. 이윽고 숀이 상체를 그녀에게로 기울여 왔고 미란다도 그의 가슴에 몸을 맡기었다. 가슴은 뛰고 몸이 떨렸다.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지고 미란다는 눈을 감았다. 마음에 그리고 있었던 격렬한 키스는 아니었다. 소중한 것을 아끼는 듯한 부드러운 키스였다.
미란다는 이제까지 감정을 폭발시키는 그런 격정적인 키스를 한 적이 없었음을 생각하고 숀의 팔 속에서 몸을 빳빳이 하고 있었다. 숀은 연기를 하고 있는 걸까? 이렇게 해서 나를 복종시킬 작정인가? 미란다는 숀을 떼밀어 버렸다. 겨우 그의 손이 풀렸을 때 반동으로 그녀는 그만 나자빠질 뻔했다.
"나쁜 사람!"
미란다는 얼굴을 붉히고 소리쳤다.
"내게 손대지 말아요, 그러지 않으면 지금 당장 영국으로 돌아가 버리겠어요."
숀의 입술 언저리가 씰룩씰룩 움직였다. 그의 얼굴은 미란다 이상으로 상기되었다. 광대뼈 부분은 아주 빨개져 있었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숨결이 거칠었다.
"당신도 원하고 있잖아?"
숀은 흥분된 소리로 말했다. 미란다의 귀에는 쿵쿵거리는 고동 소리가 울렸다. 그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그토록 고동이 격렬해진 것은 욕정 때문만이 아니었다. 평정을 잃은 그의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화풀이로 시작한 키스였는지는 몰라도 그는 점점 본심에서 미란다의 육체를 갈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천만에요."
미란다는 톡 쏘아붙였다. 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이성을 잃고 있다면 그대로 내버려두자. 미란다는 이제까지 숀으로부터 강렬한 요구를 받아 본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이성을 잃지 않았으며 정열에 휘말리는 일 따위는 없었다.
지금까지는 불꽃이 타오르지 않도록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숀의 변화에 미란다는 당혹함을 느꼈다. 그녀가 저항하는 바람에 숀은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감정에 불이 붙은 걸까?
아니면 다른 남자가-예절바른 멋진 청년이-나타남으로써 질투에 불타 소유욕이 강해진 걸까? 어쨌든 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으므로 그의 마음 속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미란다. 착각하고 있는 건 내가 아니야"
숀이 히죽 웃었다.
"자신이 무얼 바라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건 바로 당신이야"
"적어도 이런 거짓 결혼 따위는 다라고 있지 않았어요!"
미란다는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숀은 그녀의 어깨를 힘주어 잡고는 다시 자기를 보도록 돌려세웠다.
"진정한 결혼으로 만들 수 있어."
희롱하는 듯한 말투에 미란다는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라도 당신이 좋을 때에"
"다시 한번 날 자유의 몸으로 해주겠어요?"
숀의 몸이 굳어지는 것이 미란다의 눈에 비쳤다.
"일주일 전에는..."
숀이 말하려 했으나 미란다는 그 말을 가로막았다.
"일주일 전에는 눈이 제대로 뜨이지 않았던 거예요."
"누가 눈을 뜨게 해주었지?"
숀이 따져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어? 왜 내가 비난받아야 하는지 설명해 주었으면 좋겠어. 우리는 결혼 전에 반년 동안이나 교제를 했었잖아? 당신도 나만큼이나 이 결혼을 원하고 있는 줄 알았어."
"그랬어요. 하지만 이유가 달랐어요."
숀은 물끄러미 미란다를 쳐다보았다. 검은 눈이 열심히 무언가를 살펴 내려고 했다.
"그 이유가 뭐였어?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란 말인가?"
"당신이 나와 결혼하려는 건 회사의 실권을 잡기 위한 야망 때문이었죠?"
미란다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제 와서 부정하지 않아도 돼요, 결혼식 날 내가 물었을 때에도 당신은 부정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거짓말할 필요는 없어요."
"그날은 당신의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어.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고, 왜 그런 착란상태에 빠졌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어."
숀은 짜증나는 듯이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회사 때문에 결혼한다는 걸 인정했다고? 무슨 근거를 갖고 말하고 있는 거야? 그런 말한 기억이 없어."
미란다는 괴로운 듯이 웃어 보였다.
"이젠 괜찮아요. 내게 청혼하기 전에 아빠와 당신과 사이에 얘기가 돼 있었다는 건 알고 있어요."
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알고 있다니? 아버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던가?"
미란다는 씁쓸하게 웃었다.
"누구에게서 들었는지는 상관없잖아요? 여러 모로 보아 당신은 그 사실을 인정한 거예요.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리석지는 않아요. 한 번은 속았지만 두번 다시 속지 않아요!"
미란다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주방에 어떤 식품이 있는지 보고 오겠어요."
한 마디를 던지고 그녀는 나가 버렸다. 숀은 우뚝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6
별장 관리인은 생선, 냉동식품, 통조림 등 많은 식료품을 이미 준비해 놓고 있었다. 냉장고 맨 밑단에는 샐러드 용 야채가 마련되어 있었고, 윗단에는 조리를 다 해놓은 게가 들어 있었다. 미란다는 샐러드를 만들어 놓고 숀을 불렀다. 숀은 게를 보더니 찜찜한 얼굴로 말했다.
"싱싱한지 모르겠어. 게 종류는 잘못 먹으면 위험해"
"오늘 아침 막 잡은 거라고 관리인 아주머니가 쪽지에 적어 놓고 갔어요."
"그렇다면 모험하는 셈 치고 먹어 볼까?"
숀은 천천히 테이블 쪽으로 향하면서 창 너머로 어두워져 가는 정원을 내다보았다. 정원 저쪽으로 펼쳐져 있는 바다에는 파도 한 점 일지 않고, 거울 같은 수면에 달빛이 은색으로 비치고 있었다. 미란다는 먼저 샐러드를 식탁으로 나른 다음, 게를 집으러 와서 어깨 너머로 숀에게 말했다.
"와인 병을 따주지 않겠어요?"
"병따개는?"
"그쪽 서랍을 열어 보세요. 주방 기구는 모두 거기에다 넣어 둔 모양이에요."
숀은 병따개를 꺼내 미란다가 냉장고의 아래칸에서 꺼내 놓은 와인 병을 땄다. 미란다가 자리에 앉자 숀은 몸을 앞으로 내밀면서 익숙한 솜씨로 그녀의 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미란다는 두 개의 접시에 샐러드를 갈라서 담아 놓았다.
"뭔지 알 수 없는 야채도 들어 있어요. 이 노란 건 처음 보는 건데, 파스닙 비슷하기도 하고..."
숀이 껄껄 웃었다.
"중요한 건 이름이 아니라 맛이야"
두 사람은 노란 야채를 입에 넣었다. 씹고 있으니 달착지근해지는 게 감자와 비슷하다고 미란다는 생각했다.
"끓였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어쨌거나 당신은 새로운 야채 하나를 안 거예요."
"그런 셈이군."
숀은 시덥잖게 대답했다. 미란다는 숀의 어투에 별로 개의치 않고 식사에만 모든 신경을 쏟았다. 포도주의 취기가 돌자 점점 눈두덩이 무거워졌다. 숀이 따라 준 커피를 마실 즈음에는 하품까지 나왔다.
"먼저 자리에 드는 게 어떻겠어? 뒷설거지는 내가 해 놓을 테니까"
숀이 말했다. 미란다는 그의 말이 놀라왔지만 그러나 기꺼이 그 제의를 따르기로 했다. 같은 침실을 쓸 바에는 그가 오기 전에 침대에 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커피를 마시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숀의 싸늘한 시선을 의식하고는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그럼 난..."
그리고는 더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만족스러워 보이는 그의 얼굴 앞에서 자신의 냉정함을 잃기 전에 빨리 나가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미란다는 종종걸음으로 주방을 빠져나왔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침실로 돌아와 미란다는 서둘러 옷을 벗고 트윈베드의 한쪽으로 들어가 스탠드의 불을 껐다. 숀은 일찍 잘 생각이 없는지 좀체로 들어오는 기척이 없었다. 그가 오기까지는 신경이 쓰여 잠들지 못할 줄로 알았지만 그의 발소리가 들릴 즈음에 미란다는 서서히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도 미란다는 혼자 누워 있었다. 옆 침대의 시트는 구겨진 채 걷어져 있었고 베개는 움푹 들어가 있어 어젯밤 숀이 자고 간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미란다는 귀를 기울여 보았다.
숀이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지나 않을까. 물소리가 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타월로 된 가운을 찾아서 욕실로 달려갔다. 시원한 물줄기가 그녀를 상쾌하게 해주었다. 가운을 걸쳐 입고 젖은 머리를 뒤로 쓰다듬어 내리면서 침실로 돌아왔지만 숀의 모습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옷을 갈아입으려고 문을 잠그려는 순간 불쑥 문이 열리면서 숀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 일어났구만?"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미란다에게 커피잔을 내밀었다. 흰색 트레이닝 복에 운동화를 신었고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조깅했어요?"
미란다는 그가 달리기를 하거나 혹은 체육관에 다니면서 평소 건강에 유의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더운 섬에까지 와서 조깅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해변가를 달리고 왔지."
전신으로 휘감겨오는 듯한 숀의 시선을 의식하고 미란다는 짧은 가운 밑에 아무 것도 입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몸을 돌리고 커피잔을 입술에 댔다.
"넘쳐흐르는 에너지를 발산해 내야 하니까"
암시가 섞인 빈정거림을 못 들은 체하며 미란다는 말했다.
"옷을 입으려던 참이었어요."
숀은 자기 침대에 가 앉았다. 미란다는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관객은 필요 없어요."
"식기 전에 커피 들어요."
숀은 도무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신에게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지금 얘기하는 편이 좋겠어."
"뭔데요?"
가운 자락을 잡아당겨 무릎이 나오지 않도록 신경을 쓰면서 할 수 없이 미란다도 침대에 앉았다.
"낮에 해변에서 한가하게 지냈으면 하는데, 어때? 둘 다 긴장을 풀어야겠어."
"그거 괜찮겠는데요?"
그녀는 남은 커피를 마저 마셨다.
"아침은 드셨어요?"
"아냐, 커피만 마셨을 뿐이야. 하지만 이젠 배가 고파지는군."
"그럼 옷을 갈아입고 나서 식사준비를 하겠어요."
미란다는 잔을 놓았다. 숀이 일어나서 트레이닝 복 상의를 벗었다. 반사적으로 미란다는 몸을 움츠리게 되었다.
"샤워를 하고 오겠어."
숀은 비웃는 듯한 눈초리로 미란다를 보면서 욕실로 걸어갔다. 태양에 그을린 근육질의 어깨가 출렁거렸고 갈색의 건장한 육체는 미란다의 눈을 놓아주지 않았다. 유리문이 닫히자 미란다는 옷장에서 비키니와 큰 정방형 꽃무늬가 있는 얇은 천을 끄집어냈다.
가운을 벗고 비키니를 입은 다음 그 천을 몸에 감고 아침식사를 준비하려고 방을 나왔다. 10분쯤 지났을까, 숀도 주방으로 나왔다. 검은 수영 팬티를 입고서 타월로 된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머리는 젖어 있었고 수염은 갓 면도한 듯이 보였다. 미란다는 식탁 중앙에 과일이 든 접시를 놓고 빵 저장고에 들어 있던 빵을 꺼내서 얇게 썰었다. 커피가 든 포트에서 김이 솟아나고 있었다. 숀은 빵을 집어 들고 마말레이드를 바르기 시작했다.
맞은편에 앉은 미란다는 잔에 커피를 따랐다. 이것이 내가 그리던 신혼여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미란다에게 떠올랐다.
숀과 단둘이서 햇빛 내리쬐는 조용한 곳에서 오붓하게 앉아 식사를 하거나, 오손도손 이야기꽃을 피우거나, 또는 느긋이 일광욕을 하거나 수영을 하면서 그렇게 아기자기한 시간을 지낸다는 것, 바로 지금 어떻게 보면 그 꿈이 실현된 것인지도 모른다. 한데 실제는 그렇지 않은 걸.
"왜 한숨을 쉬는 거야?"
숀이 의중을 살피려는 듯이 쳐다보았다. 미란다는 잔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제가 그랬나요? 몰랐었는데..."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닌데?"
숀이 퉁명스레 말했다.
"왜 제대로 말해 주지 않을까? 내가 독심술이라도 익히고 있어야 하는 거야?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그럴 수 없는 편이 좋을 거예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가쁘게 몰아쉬는 숀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무슨 뜻이지?"
"자신이 생각해 보세요."
미란다는 숀의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그 표정은 알 수 있었다. 숀의 험악한 얼굴이 마음에 또렷이 찍혀져 있는걸, 그와 한방에 있다고 생각하니 살갗이 따가와졌다.
"수수께끼 같은 소리는 집어치워"
숀은 그녀 쪽으로 몸을 내밀며 대들듯 말했다.
"내가 알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뭐냔 말야?"
그녀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남자야?"
미란다는 저절로 웃음이 터졌다. 숀의 일로 머리를 썩이고 있는 터에 다른 남자에 대해 오해를 받고 있다니 얼마나 아이러니컬한가. 물론 이러쿵저러쿵 숀에게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미란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해준 남성은 숀 말고는 없었다는 걸 가르쳐 줄 필요가 있을까. 그녀가 열정적으로 그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숀이 알아서는 안된다. 그걸 안다면 그는 그것을 역이용할 게 분명하니까.
"뭐가 우스워?"
가시 돋친 어조로 숀이 물었다. 그 날카로운 눈은 미란다의 머리를 분석해 뇌의 작용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했다. 숀이 아무리 미란다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싶어해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다행스러웠다.
"누구야?"
숀은 닦아세울 듯한 기세로 말했다.
"누구라니, 뭐가요?"
어이없는 표정으로 미란다가 되물었다.
"순진한 체하지 말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게 아냐! 하룻밤 사이에 마음이 변하다니 누군가 그 마음을 훔친 자가 있을 게 뻔해"
"당신이 답답한 점은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거예요."
미란다는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 일어섰다.
"오늘 아침은 식욕이 안 나서 해변으로 과일을 가지고 가겠어요. 일광욕을 하면서라면 맛있게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얘기의 핵심으로 다가서기만 하면 언제나 딴전을 피우니 도무지 불쾌하기 짝이 없어."
숀은 미란다의 걸어나가는 뒷모습을 흘겨보았다. 해안으로 뻗은 언덕을 내려가면서 숀이 느닷없이 물었다.
"그날 밤 클레어 홈의 아파트에는 얼마나 있었지?"
미란다는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몰라서 잠시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글쎄요, 잘은 모르겠지만... 왜죠?"
"곧바로 그 여자 집으로 간 거야? 아니면 어디를 들러서..."
묻는 뜻을 알게 된 미란다는 다시 웃음이 나오려 했으나 숀의 강한 어투에 기가 눌리어 그저 어깨만 으쓱했다.
"뭘 말하고 싶은 거죠?"
"당신은 내가 뭘 말하고 싶은지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아"
미란다는 얼굴을 돌려서 그에게 미소를 던졌다.
"고맙군요, 칭찬해 주셔서"
그것이 숀의 분노의 불꽃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내뱉듯이 말했다.
"그 여자의 아파트에 가기 전에 어디엔가 들렀지? 누구를 만나러 간 거야?" 곁
눈으로 숀을 훔쳐보았더니 튀어나온 턱과 뼈가 앙상한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숀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의 대답을 얻어내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문득 그가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황급히 눈을 돌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약해져서는 안된다. 숀이 이처럼 진지하게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은 그를 알고 지낸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모처럼 얻어진 것을 잃는 실수를 범하지는 말자. 반년 동안 교제하면서 숀이 진정으로 이쪽을 생각하고 있다고 느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눈이 돌아갈 정도로 바빠서 겨우 짬을 내어 데이트 시간을 마련한다는 식이었다. 미란다가 그 동안 몰래 관찰한 바에 의하면 한참 데이트를 하고 있는 중에도 딴 데 신경을 쓰고 있던 일이 몇 번인가 있었다.
식사 중에 유난히 침묵을 지키고 있어서 미란다가 말을 던지면 숀은 그녀와 함께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는 표정으로 깜짝 놀라 얼굴을 들기도 했다. 그러던 그의 마음이 지금 곧바로 미란다에게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라면 숀도 건성의 키스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는 키스를 할 수 있으리라. 미란다는 청혼을 받기 이전까지는 숀에게 버림받는 것이나 아닐까, 또는 데이트를 안해 주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도 했었다. 그의 마음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었고 거절당하면 어쩌나 싶어서 그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되도록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었다.
그러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 여성의 입장은 약해지게 마련이다. 먼저 행동을 하는 쪽이 주도권을 잡는 것으로 생각하는 게 현대적일지도 모르지만 딱하게도 세상 남성의 태반은 현대적인 사고를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쫓기는 쪽이 아니라 쫓는 쪽에-사냥감보다는 사냥꾼 쪽에-서고 싶어 하는 것이다.
미란다도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숀의 마음을 확실히 알게 되기까지 감정의 표출을 되도록 삼가고 있었던 것이다. 청혼이라는 것 자체도 그다지 로맨틱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날 숀은 함부르크로 출발하게 되어 있어, 그 전에 잠깐 두 사람은 함께 점심을 나누었다. 미란다는 나흘 동안이나 그를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쓸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출발시간이 되자 숀은 작별의 키스를 하고 대기해 놓은 차에 막 타려는 찰나에 미란다에게 말했다.
"미란다. 나와 결혼해 주지 않겠소? 나 없는 동안에 깊이 생각해 봐요."
숀은 미란다가 대답할 틈도 없이 차에 올라타고는 그대로 달려가 버리고 말았다. 미란다는 차 뒤를 쫓아가면서 "물론이죠! 기꺼이 받아들이겠어요."하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기쁨이 넘쳐 가슴이 터질 듯했다. 몇 시간이나 좋아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차츰 시간이 지나자 한 가닥의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숀은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 사랑하지 않는다면 청혼 따윈 할 리가 없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면서도 미란다는 좀 더 분위기 있는 청혼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길바닥에서 다음 데이트 약속이라도 하듯 가벼운 기분으로 묻고 휙 가버리다니... 그로부터 나흘 동안 미란다의 마음은 기쁨과 불안 사이를 방황하고 있었다. 그러나 출장에서 돌아온 숀의 웃는 얼굴이 그녀의 불안을 깨끗이 씻어 주었다.
"마음을 정했어? 나와 결혼해 줄 거야?"
미란다는 그의 팔에 뛰어들면서 작은 소리로 "네" 하고 속삭였다. 하지만 불안이나 의문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다. 진실을 알지도 못한 채 그와 키스를 할 때면 파도가 밀려왔다간 쓸려가듯이 미란다의 마음에 아쉬움이 맴도는 것이었다.
어제 숀은 홧김에 미란다의 입술을 빼앗았다. 그러한 억지 키스는 싫었지만 적어도 그의 숨김없는 진실이 나타나 있었다. 숀은 처음으로 미란다를 갖고 싶다는 욕구에 사로 잡혀 키스를 한 것이다.
분명히 이제까지의 키스와는 달랐다. 미란다에게도 그 정도의 분별력은 있었다. 두 사람은 활짝 피어나 있는 부겐빌리아 꽃 사이를 지나서 흰 모래사장으로 나갔다. 물가엔 다리가 빨간 물새 몇 마리가 머리를 숙이고 수면을 쪼면서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놀라서는 후드득 날아올랐다. 미란다는 타월을 펼치기에 알맞은 장소를 찾으면서 백사장을 걸어갔다.
햇살은 그다지 강렬하지 않았고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이 기온을 알맞게 유지해 주고 있었다. 겨우 파도가 미치지 않는 적당한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미란다는 그곳에 타월을 깔고, 그 위에 앉아 선크림을 온몸에 발랐다. 숀도 그 옆에 와 몸을 뉘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가만히 드러누워 있는 것이 어떻게 보면 잠든 것같이 보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안경 속으로 미란다를 관찰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햇볕이 선글라스에 반사되어 미란다로서는 이런저런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선글라스 밑으로 그의 얼굴이 입을 가볍게 벌린 채 조용히 쉬고 있었으며, 구리빛 몸통은 햇빛에 빛나고 있었다. 잠시 동안 미란다는 현실과 꿈 사이를 넘나들고 있었다. 잠이 깰 때마다 갈매기 소리나 파도 소리, 그리고 별장 정원의 나무들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한가로운 소리가 마음을 한껏 편안하게 해주었다.
한낮이 가까와지자 미란다는 바구니에 담아 온 과일을 먹고 탄산수를 마셨다. 숀도 일어나 앉아 그녀가 내미는 것들을 받아서 입에 넣었다. 늘씬한 그의 몸에 되도록 눈을 돌리지 않으려 애썼으나 숀이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이 자신도 모르게 의식되면서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사슬에 묶인 맹수가 도망치려고 사납게 날뛰듯, 육체의 욕구는 이성의 억제를 감당 못하도록 죄어오는 것이었다. 집요한 이 욕구를 떨쳐 버리기 위해 미란다는 수영을 하기로 작정했다.
숀이 보고 있는 앞에서 검은 머리를 뒤로 묶고, 뜨거운 모래 위로 달려나갔다. 뒤에서 그가 따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란다가 얕은 곳을 지나 헤엄쳐 나아가자 숀도 바로 뒤에서 긴 팔로 규칙적으로 파도를 가르면서 쫓아오고 있었다.
작렬하는 태양을 받아 푸른 수면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미란다는 해안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물에 몸을 띄운 채 녹색으로 둘러싸인 하얀 별장을 바라보았다.
"돌아갈 때는 내기를 해볼까?"
숀이 파도 사이로 물개처럼 얼굴을 내밀고 도전해 왔다. 미란다는 소리 내어 깔깔 웃고는 물속으로 들어가 해안을 향해 힘차게 헤엄쳐갔다. 얕은 곳까지 와서 미란다는 숀에게 따라잡혔다. 그녀의 발이 바다 밑 모래에 닿을 즈음에는 숀은 승리에 만족하는 얼굴로 다리를 크게 벌리고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은 무엇이든 이겨야만 성이 차는군요."
미란다는 냉랭하게 말하였다.
"누구나 그런 거 아냐?"
"모두 그렇게 승부욕이 강한 건 아녜요."
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것이 날 싫어하는 이유 중의 하나인가?"
대답도 않고 미란다는 얕은 곳으로 걸어 나왔다. 숀은 그녀의 팔을 낚아채어 돌려세우려 했다. 그 바람에 미란다는 발이 감기어 휘청거리면서 그의 팔 안으로 넘어졌다. 젖은 두 몸이 부딪쳤다.
엉겁결에 미란다는 숀의 어깨를 잡았다. 그와 동시에 숀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눌렀다. 미란다는 손발에 힘을 줄 수가 없어 잠시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해 그가 하는 대로 내맡겨져 있을 도리밖에 없었다.
그러나 불현듯 거절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욕구에 휘말려 버려서는 안 돼. 그것은 싸우기도 전에 이미 승부를 포기해 버리는 셈이야. 미란다가 몸을 비틀면서 숀의 어깨를 힘껏 밀어낼수록 그도 더욱 힘을 주어 키스는 난폭하게 변해 갔다.
입술을 억지로 벌리게 하자 미란다의 분노는 더욱 거세어졌다.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탕탕 치고 발로 정강이를 차며 몸부림 쳤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도 허사였다. 용케 숀의 팔을 벗어났다고 생각한 다음 순간 그녀는 지탱할 곳을 잃어 숀의 발 밑에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미란다는 급히 일어나려고 했으나 재빨리 숀이 달려들어 그녀의 몸을 덮쳐 왔다.
양쪽 어깨가 모래에 박히고 풀어진 머리가 해초처럼 물 속에 나부꼈다. 미란다는 눈을 크게 뜨고 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숀의 숨소리는 거칠었고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눈은 심상치 않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갑자기 예기치 않은 두려움이 그녀를 엄습했다. 이제까지 그런 그의 얼굴을 본 일은 없었지만 여자의 직감으로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맥이 빠져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숀은 난폭하게 키스를 퍼부어 댔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미란다는 눈치 챘다. 미란다는 연약한 힘으로 꿈틀거리면서 젖은 그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있는 힘을 다해 저항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도 없었다. 숀은 두 무릎으로 미란다를 내리누르고 그녀의 몸을 손으로 더듬었다.
반쯤 물에 잠겨 있었으므로 미란다는 그의 입술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끝내 귀에 물이 들어왔다. 그러나 숀은 아랑곳없이 미란다의 등으로 손을 돌려 비키니의 뒷단추를 끌렀다. 작은 천 조각이 파도에 밀려 떠가는 것이 미란다의 시선에 스쳐 지나갔다.
미란다는 자신이 비명을 질렀는지 어떠했는지 분명치 않았지만 공포의 외침이 목에서 튀어나오는 순간 입은 키스로 콱 막히고 말았다. 숀은 드러난 그녀의 젖가슴을 어루만지며 무릎으로 미란다의 다리를 벌리려고 했다.
미란다는 있는 힘을 다해 숀의 등에 손톱을 박고 내리긁었다. 움찔 놀란 숀이 머리를 들고 아픈 소리를 내며 옆으로 털썩 떨어져 눕는 순간 미란다는 겨우 도망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미란다는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마구 흐느껴 울며 뛰어갔다. 뒤따라오는 숀의 발소리에 쫓겨 두려움은 극도에 이르렀다. 정신없이 달렸다.
그러나 목련나무 밑에 이르러 결국 따라잡혀 숀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몸부림치는 미란다에게 숀은 얼굴을 들이대며 속삭였다.
"미안해"
숀도 헐떡이는 목소리였다. 그의 달아오른 볼이 미란다의 젖은 머리를 스쳤다. 미란다는 숀의 목소리에서 달라진 어조를 느끼고 저항하기를 그쳤다. 다리에 힘이 쑥 빠졌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어. 잘못했어. 미안해"
나직이 그는 말했다. 그녀는 엉엉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미란다?"
그는 속삭이며 떨고 있는 미란다의 몸을 꼭 안았다. 너무나도 충격이 커서 미란다는 발을 딛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이는 딱딱 마주쳤고, 얼굴은 핏기가 가셔 핼쓱했다. 갑자기 숀은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는 별장으로 향했다.
곧장 침실로 들어가서 침대에 누이고는 새털 이불로 감싸주었다. 그리고는 옆에 꿇어앉아 이불 밑으로 손을 넣어 미란다의 팔과 어깨를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미란다는 숀의 얼굴을 보는 것이 두려워 눈을 감고 있었다.
차츰 떨리는 것도 가라앉고 손발에는 온기가 되돌아왔다. 숀은 미란다를 침대에 남겨 두고 방을 나갔다. 미란다는 머리가 띵하여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몇 분 후 커피잔을 손에 들고 숀이 돌아왔다. 미란다의 상체를 일으켜 세워 어깨를 안고는 입에 잔을 갖다 댔다. 한 모금 입에 흘려 넣고 미란다는 얼굴을 찡그렸다.
"뭐예요?"
"브랜디야. 마셔 둬. 커피에 조금 따라 넣었을 뿐이야"
미란다는 눈을 감고 한 모금 더 마셨다. 숀의 시선을 느끼며 가늘게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숀도 혈색이 좋지 않았으며 눈은 엄숙한 빛마저 띠고 있었다. 그가 잔을 치우고 있는 동안 미란다는 새털 이불을 두르고 앉아 그의 움직임을 보고 있었다. 미란다에게 등을 돌린 채로 숀이 입을 열었다.
"이런 짓은 하지 않겠다고 내 자신에게 맹세해 두었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사과한들 아무 소용도 없게 됐지만 아까 일은 참으로 미안하게 생각해. 변명의 여지가 없어. 하지만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을 테니까 두려워할 건 없어. 나를 화나게 해 자제심을 잃게 하는 일 따위를 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잠깐만요."
노기를 띠며 미란다가 말을 막았다.
"처음에는 변명할 여지도 없다고 해놓고서는... 뒤에 한 말은 또 뭐예요? 내 탓이라는 거예요?"
"아냐, 물론 그렇지 않아. 다만 당신이..."
"내가 부탁했다고라도 할 참인가요?"
앙칼진 미란다의 항변에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렇게 앞질러서 마음대로 해석하진 말아 줘, 미란다. 그런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잖아? 왜 내가 자제심을 잃었는지를 설명하려는 거야. 결혼식 날 아침부터 내 마음에 무겁게 맺히는 게 있었어. 왜 우리 사이가 갑자기 서먹서먹하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고, 당신이라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어. 화가 나고 욕구불만이 쌓여..."
"어머?"
미란다는 가차 없이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욕구불만이었다 그 말씀이죠? 내가 신부로서의 의무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 앙갚음을 하려 했다는 말이죠?"
숀의 볼에 핏기가 돌고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
"내 말을 모조리 왜곡만 하는군. 내 말은 그런 게 아니야. 너무나도 마음에 맺힌 응어리가 컸기 때문에 갑자기 정신이 나가 버린 거야"
숀은 등을 보이며 긴 다리를 내딛어 창가로 걸어갔다. 밖에서 빛이 새어들고 있어서 숀의 뒷모습이 검은 실루엣이 되었다. 숀은 정원을 내다보면서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나도 인간이야"
"그럼 난 뭐죠?"
미란다는 냉랭하게 되받아 쏘았다.
"내가 어떻게 생각한다고 여기세요? 야만적인 행동을 당하고서 기뻐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그렇다면 생각을 바꾸시죠. 참을 수 없이 싫었으니까"
숀은 숨을 세게 몰아쉬었으나 미란다의 말에 대꾸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도리어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짜증스러웠다. 하지만 결국 얘기를 한다고 해서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다른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니 언제나 쳇바퀴 도는 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데. 숀은 미란다가 결혼식 전날 집을 뛰쳐나간 동기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미란다는 그녀가 찾고 있는 게 사랑의 확증이라는 것-물론 숀이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면야 문제될 것도 없는 일이지만-을 입밖에 낼 수가 없는 것이다. 바닷가에서도 미란다는 숀의 애무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런 식으로 그녀를 꺾으려고 한 것이 싫었던 거다. 생활신조 면에서도 용서할 수 없었다. 숀이야 신조 같은 걸 내세울 그런 위인은 아니었고, 그의 머리에는 미란다를 정복할 생각뿐인 것이다. 달래도 보고 을러도 보고 갖은 방법을 다 시도해 보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먹혀들지 않았으므로 남성 전용의 수단인 "힘의 방법"을 취한 것이다.
만일 숀이 다른 방법을 사용했더라면 아무리 미란다가 경계하고 있었다 해도 쉽게 목적을 이루었을지 모른다. 미란다는 숀의 애무에는 약했다. 그가 가까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피가 끓고 몸이 떨렸다. 그의 손에 몸에 닿기라도 하면 머리가 휑해지고 생각이 정지해 버렸다. 신조고 뭐고 일시에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숀이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것이 미란다에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이기만 하면 곧 열릴 성채의 문을, 숀은 힘으로 공략하려고 하고 있었다. 물론 미란다에게는 그것까지 가르쳐 줄 마음이 없었으므로 숀에게는 승산이 없었다.
그에 대한 그녀의 분노는 컸다. 충격의 여운은 아직도 그녀의 전신을 감돌고 있었다. 그가 본심에서 덮쳐 온다면 이를 막을 방도는 없을 것이다. 가령 그러한 형태로 숀이 의도한 바를 이룬다고 해도 뒤에는 응어리가 남을 것이며, 두 사람에게는 파멸적인 결과만 남을 뿐이다.
미란다가 숀에게 모든 것을 바칠 때 그것은 패자로서의 굴욕감이 아니라 사랑의 확증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숀이 갑자기 돌아섰다.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어 보았자 아무 소용도 없어. 2주일 동안을 여기에서 지낼 텐데 이런 싸움을 계속하다가는 허니문이 엉망이 되고 말아. 미란다. 지금까지 일은 모두 물엔 흘려보내고 새로 시작해 보지 않겠어?"
미란다는 다가오는 숀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두번 다시 그런 짓을 안할 거죠?"
"약속하지."
기대감 어린 눈초리와 상냥한 그의 미소를 미란다는 싸늘한 눈으로 되받았다. 이제야 자신이 저지른 실수의 대가가 얼마나 컸었는지 깨달은 모양이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다시는 완력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하고 지내노라면 언젠가는 미란다가 바라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될지도 모른다. 미란다는 한 줄기 희망의 빛에 매달렸다. 과거는 어떠했던 간에 지금 숀의 마음은 미란다에게로 향하고 있다. 그가 관심을 가져 주기만 한다면 희망은 있다. 참고 기다려 보기로 하자. 숀은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
"좋아요, 약속했어요."
미란다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굳었던 그의 입술이 풀리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 두 사람은 즐겁게 지냈다. 오전 중에는 매일 해변으로 나가서 헤엄을 치거나 일광욕을 하고, 낮이 되면 간단한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후에는 숀이 빌어온 차로 섬 안을 드라이브했다. 저녁에는 나가서 식사를 했다. 차로 조금만 가면 짭짤한 해물 전문 레스토랑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매일 저녁 음식을 바꿔가면서 식사를 했다. 별장까지 돌아오는 밤길 드라이브도 꽤나 운치가 있었다.
미란다는 숀의 옆에서 시트에 기대어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이나, 달빛 어린 바다를 바라보면서 낭만적인 분위기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어느 날 아침 미란다는 늦잠을 자고 있었다. 숀이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잠이 덜 깬 눈을 가까스로 뜨니 바로 코앞에 햇볕에 그을린 그의 얼굴이 바싹 다가와 있었다.
"일어나요, 잠자는 미인"
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면서 사이드 테이블에 커피 잔을 놓았다.
"잠자는 미인? 어울리는 이름이군요."
미란다는 기분이 좋아져서 미소 지었다.
"우리에게는 적당하지 않은 것 같기는 하지만"
숀은 크게 웃었고, 미란다는 씁쓸한 눈으로 그런 그를 보면서 손을 내밀어 잔을 들었다. 커피 냄새가 구수했다. 갑자기 숀이 웃음을 뚝 그치고는 굳은 표정으로 미란다를 쳐다보았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야?"
미란다는 잔 너머로 그를 보면서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어느 날엔가 당신의 공주님이 나타날 거 아녜요?"
숀은 미란다의 흐트러진 머리를 뒤로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 수수께끼 같은 소리는 듣기에 좋지 않아. 좀 더 솔직한 여자인 줄로 알았었는데 내가 잘못 알았던 건가?"
"그래요, 그 점도 잘못 알고 있어요."
"그밖에 어떤 점에서 내가 잘못했지?"
뒤이어 그가 물었다.
"당신은 언제나 나에게 질문을 퍼부어 대면서 내가 묻는 질문에는 대답해 주지 않잖아요?"
미란다는 교묘히 얼버무렸다. 그는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았다. 이미 그는 수영 팬티를 입고 있었으며, 일어난 지 여러 시간 되는 것 같았다. 간밤에는 꽤 늦게 돌아왔었으므로 미란다는 그가 깨워 줄 때까지 푹 잠을 잤다.
피곤을 모르는 숀의 체력에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언제나 아침 일에 일어나고 저녁에는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항상 바쁘게 일에 매달리는 습관이 몸에 밴 모양이었다.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은 좀처럼 마음을 풀 시간이 없어 때로는 그러한 시간이 주어져도 몸을 푹 쉬게 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좋아, 무엇이든지 물어 보시지."
도전하는 투로 숀이 말했다. 근육질인 몸은 여유 있게 대처하고 있는 듯이 보여도 꽉 다물어진 입 모양이 그렇게 여유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미란다는 알았다.
"나와의 결혼은 아빠가 먼저 꺼낸 말이죠?"
미란다는 싸늘하게 질문을 던지고 숀의 반응을 살폈다. 숀은 잠시 밑을 내려다보며 대답할 말을 찾고 있었다. 미란다는 그가 사실을 말해 줄 것인가, 아니면 적당히 얼버무릴 건가를 알아내려는 듯 그를 주시했다. 그는 얼굴을 들었다.
"응"
감정이 없는 소리로 대답했다.
"아버님은 내가 아직 당신과 만나기도 전에 넌지시 그런 뜻을 비치셨어. 이쪽은 별로 내키지도 않았는데, 아버님이 매우 적극적이어서 나는 당신이 별로 내놓을 만한 인물이 못돼서 상대자가 없는 줄로만 알고 있었지. 회사를 물려줄 아들이 없는데 외동딸의 용모가 신통치 않다면 아버지로서 걱정하는 건 당연하니까. 난 조금도 마음이 내키질 않았었고 오히려 귀찮기까지 했어. 그래서 당신 얘기를 꺼낼 때마다 애써 화제를 돌리려고만 했었지."
미란다는 괴로운 생각으로 숨을 들이켰다. 아빠는 왜 그런 짓을 하셨을까. 화가 치밀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숀은 험악해진 미란다의 표정을 보고 당황한 기색이 되었다.
"하지만 그건 다 당신과 만나기 전의 얘기야"
그제서야 미란다는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마음에도 없었는데 처음 만난 날 용케도 다음 데이트를 신청했군요?"
"만난 뒤였으니까"
만나기 전과 후의 차이를 깨닫지 못 한다면 바보가 아니겠느냐는 투였다.
"만일 내가 내놓을 만한 얼굴이 못되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게 아녜요?"
숀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자세를 고치고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데이트를 신청한 건 당신을 좀 더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어. 아버님이 권했기 때문이 아니야. 마음에 없었다면 여러 번 데이트를 청할 까닭이 없지 않겠어?"
미란다는 푸른 눈동자에 미심쩍은 빛을 띠면서 비웃는 듯 미소를 던졌다.
"그래?"
숀은 잘라 말하면서 벌떡 일어났다.
"난 당신에게 굳이 사실을 털어놓지 않아도 되는 거야. 당신은 아버님의 의도만을 문제삼고 있지, 내가 아버님의 의사와는 아무 관계없이 당신과 교제해 온 것은 인정하려 들지 않고 있어. 당신과 데이트한 것은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아버님이 시켜서 그런 게 아니라고. 나는 아버님에게 실력을 인정받고 있어. 좋아하지도 않는 아가씨와 사귀면서 그의 환심을 사지 않아도 된단 말이야"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잖아요?"
미란다는 잔을 놓고 두 다리를 침대 밖으로 내려놓았다. 분홍빛 잠옷이 펄럭이며 무릎을 덮었다.
"나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면 회사에서의 발언권이 커지거든요. 게다가 아빠가 은퇴하는 날에는..."
"아버님은 은퇴 따위는 하지 않아"
숀은 퉁명스레 내뱉었다.
"혹사의 실권을 남에게 넘기거나 하지는 않으셔. 아버님의 성격은 당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잖아?"
숀은 화난 걸음으로 성큼 문 쪽으로 걸어갔다. 숀은 문의 손잡이를 잡고 어깨 너머로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아무리 얘기해도 쓸데없는 것 같군. 나에 대해 당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그토록 설명해도 당신에게는 들을 귀가 없으니까, 어느 한 부분만을 보고 나를 감정도 없는 모진 사람으로 단정해 버리고 있어."
갑자기 그는 말을 끊더니 얼굴을 붉히면서 소리쳤다.
"분노를 느껴! 그런 눈으로 나를 보았다면 왜 내 청혼에 응했느냐 말야? 나를 정말 사랑했다면 출세하기 위해 여자를 이용하는 짓 따위는 내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을 것쯤은 알고 있었을 게 아냐? 그 따위 비열한 수단을 쓸 필요도 없고, 또 만일 그랬다면 나는 자신을 경멸했을 거야"
격렬한 그의 어투에 눌리어 미란다는 침대 끝에 앉은 채 묵묵히 숀을 바라보기만 했다.
"수영하고 오겠어."
숀이 그렇게 말했을 때도 미란다는 아무 대답도 못했다. 쾅 하고 문 닫히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결혼 전의 여러 달 동안 그의 사랑에 대한 확증을 느끼지 못했었던 일이 마음에 걸리지만 않았던들, 미란다는 숀이 하는 말을 그대로 믿었을지도 모른다.
데이트할 때 그는 언제나 무언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미란다에 대한 사랑이 결여되어 있었거나, 아니면 그녀에게 온 신경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든가 그 어느 쪽이다.
서로의 사이가 점점 가까와져 가는 동안에도 어딘지 모르게 타성에 이끌려 행동하고 있는 듯이 여겨졌던 것이다. 첫 번째 키스, 회수를 거듭하는 데이트, 주위 사람들로부터 연인 사이라는 인정을 받게 되고, 이윽고는 정식 결혼. 그 때의 일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숀의 행동 하나하나에 뜻이 있는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미리 미란다와의 결혼이 정해져 있고 그에 따른 필요한 절차를 밟아 온 느낌이었다. 숀은 아빠가 원했기 때문에 결혼을 결심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나로 하여금 그렇게 믿도록 하기 위한 위선에 불과한 게 아닐까.
미란다는 크게 한숨을 쉬면서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몸을 닦아낸 다음 침실로 돌아가 산뜻한 노랑색 비키니를 입고 그 위에 얇은 비치 가운을 걸쳤다. 배가 고팠으므로 미란다는 해변으로 가기 전에 주방으로 가서 정원을 내다보며 크루아상을 먹었다.
그 동안 관리인이 두 번 와서 식료품을 보충해 주었고 방을 청소해 주었다. 관리인은 자녀를 가진 몸집이 큰 부인이다. 이곳에 일하러 올 때에도 몇 명의 아이들이 따라오곤 했었다. 미란다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그녀는 그 고장의 부동산 회사와 계약을 맺고 별장 관리로 생계를 꾸려 가고 있으며, 현재 여섯 채의 관리를 맡고 있다고 했다.
그녀가 현지의 상점에서 구입해 오는 식료품에는 수수료가 포함돼 있는 모양인데 미란다 자신이 사러 다녀야 할 것을 생각하면 다소 비싸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란다는 황홀한 기분으로 바다를 내다보았다. 은빛의 모래톱이 펼쳐져 있고 파도 사이로 숀의 머리가 간간이 보였다.
사실, 숀과 언짢은 신경전을 벌이거나 티격태격 다투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정도를 넘어서 다가왔을 경우에는 밀어제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으면서 육체적으로 맺어져 진짜 부부가 된다면 미란다는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게 될 거다.
하지만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눈이 마주쳐 그가 미소를 던질 때면 아직 희망이 있다는 가느다란 기대를 가져 보게 된다. 처음에는 형식적인 부부일지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숀이 애정을 쏟을지도 모른다는 은밀한 기대를 갖고 결혼했던 것이다.
희망의 불꽃을 완전히 꺼버릴 수는 없다. 미란다는 또 한숨을 내쉬면서 일어나 식탁 위를 치우고 접시를 싱크대로 날랐다. 식기를 다 씻고 나서 해안으로 나가려는데 현관에서 벨이 울렸다.
깜짝 놀라 미란다는 작은 앞치마를 벗어 놓고 현관으로 나갔다. 문을 열었으나 밖에 서 있는 남자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멍청히 바라보고 있는데 사나이는 팔에 끼고 온 큰 꽃다발을 내밀었다.
순간 숀이 꽃집에 부탁해 보내온 것이구나 생각해서 가슴이 벅차올랐지만, 곧 눈앞의 남성이 그전에 해변에서 구해 준 마티인 것을 깨달았다. 마티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벌써 저를 잊으셨군요. 섭섭합니다."
미란다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지 않아요. 다 기억하고 있어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내기란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닌 걸요."
마티도 덩달아 웃었다.
"고마움의 표시로 이걸 갖고 왔습니다."
미란다는 꽃다발을 받아들고 한동안 바라보았다.
"고마와요. 아름다운 꽃이군요?"
"목숨을 구해 주었는데 꽃 정도로는 부족하죠. 무언가 더 해드리고 싶은데..."
"빨리 꽃병에 꽂아야겠죠?"
꽃을 들고 들어가는 미란다의 뒤를 따라 마티도 주방으로 들어왔다. 미란다가 셀로판 포장을 풀고 꽃을 꺼내어 찬장 선반에서 찾아낸 2개의 꽃병에 나눠 꽂고 있는 동안, 마티는 그녀를 바라보며 얘기를 계속했다.
"이거 빌려주신 옷입니다."
그는 깔끔하게 포장한 꾸러미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참으로 고마왔습니다. 진작 돌려 드려야 했었는데 호텔의 세탁소에서 오늘에야 가져왔어요. 이 섬에는 모든 게 아주 느릿느릿해요. 호텔의 종업원들도 하루 종일 깨어 있는지 졸고 있는지 분간 못할 얼굴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무엇이든 부탁하려면 여간 힘드는 게 아닙니다."
미란다는 꽃줄기를 자르면서 어깨 너머로 마티를 보고 웃었다.
"서핑보드는 찾으셨나요?"
"아뇨, 그건 내 것이 아니고 호텔의 스포츠클럽의 것이니까 숙박비에 얹어서 청구하겠지요."
"안됐군요. 호텔비가 꽤 비싸지겠네요."
"그 대신 당신과 알게 되었잖아요?"
미란다는 방긋 웃었다.
"아름답죠?"
그녀는 조금 뒤로 물러나서 꽃병의 꽃을 바라보았다.
"참 예쁜 꽃이네요. 고마와요."
"천만에요."
미란다가 거실로 꽃병을 들고 가는 것을 보고 마티도 뒤따라 와서 가장 적당한 각도에서 꽃을 감상했다. 문득 마티는 정색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깥분은 외출하셨나요? 아니면 아직 자리에? 내가 온 것을 언짢아하지 않으면 좋겠는데..."
분명히 숀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언짢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란다는 그런 내색을 보이지도 않고 밝게 웃었다.
"바다에서 수영하고 있어요."
그녀는 마티의 경직된 몸에서 긴장이 풀리며 눈에는 안도의 빛이 감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못 뵈어서 유감스럽다는 말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마티는 솔직히 말했다.
"그분은 저를 별로 좋게 여기시는 것 같지 않았으니까. 그렇지요?"
마티의 눈은 비키니의 선이 뚜렷이 드러나 보이는 비치가운 위를 더듬고 있었다.
"당신과 같이 아름다운 부인을 두고 있으니 그러지 않을 수도 없겠지만..."
그의 칭찬에 흐뭇해하며 미란다는 주방으로 돌아왔다.
"커피라도 한 잔, 어떠세요?"
"그런 말은 듣지 못할 줄 알았는데요."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말했다.
"새것으로 끓이겠어요. 먼저 것은 내가 거의 마셔 버렸고, 그러지 않아도 다 식었으니까"
미란다는 스푼으로 커피를 덜었다. 마티는 건들건들 주방 안을 걸으면서 창 밖을 내다보았다.
"남편께서는 수영을 잘하시네요. 스포츠맨 타입이군요. 여기에서도 팔의 근육이 보일 정도인데요. 저런 양반을 적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군요."
미란다는 선반에서 잔 둘을 꺼내며 힐끗 마티를 쳐다보았다. 마티 역시 건강하고 균형 잡힌 몸매였다. 볕에 그을린 호리호리한 몸에 조끼와 짧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마티에게는 숀에게서 느낄 수 있는 그런 강렬한 성적 매력이 없었다.
마음놓고 얘기를 나눌 좋은 친구라는 느낌이었다. 또 자유를 좋아하는 떠돌이 같은 느낌도 주는데, 미란다는 그가 외국에 가서 산다는 말을 듣고는 납득이 갔다. 그는 한곳에 진득하게 뿌리 내리고 살거나 살고 있는 고장에 애착을 느끼거나 할 형은 못되었다.
"가족들은 영국에 있나요?"
미란다의 묻는 말에 마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내주에 만나러 갈 예정입니다. 하지만 함께 있는 건 2, 3일이면 족하죠. 집에 돌아가면 옛 친구들을 만나거나 스코틀랜드 쪽으로 나가서 낚시를 하는 일이 더 많죠."
"스포츠를 좋아하시기 때문인가요?"
커피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였다. 미란다가 커피 쪽을 돌아보고 있는데 마티가 등 뒤로 다가오는 기척이 났다.
"나는 언제나 적극적으로 행동하기를 좋아하죠."
마티는 갑자기 손을 내밀어 미란다의 비치가운을 잡아당겼다.
"아주 섹시하군요. 더구나 비키니를 입고 있으니까"
미란다는 차갑게 그를 쏘아보았다.
"장난치지 마세요, 마티. 난 남편이 있는 몸이란 걸 잊지 마세요."
마티는 씁쓸히 입을 씰룩였다.
"유감이군요."
장난기 섞인 그의 표정에 미란다는 웃음이 나왔다.
"칭찬해 주셔서 고맙긴 하지만..."
"나 같은 건 끌리지 않는다 그 말이죠?"
마티는 슬픈 듯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나 그 표정에는 밝은 유머가 있었다. 미란다가 대답도 하기 전에 두 사람의 귀에 발소리가 들렸으며 마티는 허리에 충격이라도 받은 듯이 흠칫 미란다에게서 떨어졌다.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았을 땐 이미 그의 얼굴에선 웃음이 가셔 있었다. 숀 역시 웃지 않았다. 턱을 뻣뻣이 굳히고 미란다를 노려보았다.
"어때?"
거친 소리로 물어 왔다.
"이 사람에게 대답해 주지 그래. 당신 마음에 끌리는지 어떤지를?"
7
미란다는 태연히 커피 포트의 스위치를 껐다.
"마침 잘 오셨어요. 커피가 다 끓었어요."
숀에게서 등을 돌리며 잔을 하나 더 가지러 갔다.
"그저 해본 농담이었습니다."
마티는 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기라도 할 듯한 멋쩍은 표정이었다.
"우습지도 않은 농담이군."
불쾌한 낯빛으로 숀이 대답했다. 미란다는 얼굴은 웃는 낯으로 바뀌었다.
"남편은 원래 말하는 품이 거칠어요. 마음 쓰지 마세요."
그녀는 커피포트를 들어올렸다 .
"크림과 설탕을 치시겠어요, 마티?"
마티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닙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11시에 약속이 있어서요. 커피는 다음에 다시 대접받기로 하겠습니다."
숀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쫓기기라도 하듯 문으로 향했다.
"옷을 빌려주신 것과 목숨을 구해 주신 데 대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는 미란다에게 우물우물 말했다.
"그럼 이만 가겠습니다."
숀은 불청객에게 빨리 나가 달라는 듯 문을 열어 놓은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마티가 밖으로 나서자마자 숀은 탕 하고 문을 닫아 버렸다. 미란다는 잔에 커피를 따랐다. 마시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비위가 뒤틀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행동을 하고 있었다. 마티를 내보내고 난 숀은 주방으로 돌아와서 험한 얼굴로 입구에 기대어 섰다.
"언제부터 그자가 여기에 와 있었나?"
미란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한 10분쯤 됐을 거예요."
숀은 비치가운에 비쳐 보이는 비키니와 몸의 곡선을 차가운 눈으로 뜯어보면서 미란다의 전신을 훑었다. 미란다는 역정이 났다. 어쩜 그런 눈으로 본담. 무슨 꼬투리를 잡을 심산인가?
"10분이면 충분했겠군."
숀의 말에 미란다는 되받아 쏘아붙였다.
"뭐가요?"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
이번에는 숀이 소름끼치는 웃음을 던지며 비꼬는 투로 되물었다.
"뭐라고요? 설명이 필요없다구요? 날 힐책할 생각이라면 구체적으로 말해 줘요."
미란다는 얼굴을 붉히고 이를 악물었다. 그것을 보고 숀은 다시 굳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그를 침대로 유인했다는 건 아니고..."
"그만 해둬요!"
미란다는 참을 수 없어 소리쳤다. 그래도 숀은 말을 그치려 하지 않았다.
"그자가 당신에게 지분거리기 위해 온 건 분명하잖아? 목숨을 구해 준 날부터 당신에게 마음이 있었던 거야. 다시 나타나리라고 예상했었지."
"마티는 그때 빌어 간 옷을 돌려주려고 왔을 뿐이에요. 말끔히 세탁을 해 갖고 왔어요. 당신과 달라서 그는 예의가 바르단 말이에요."
"허어, 하지만 난 남의 부인에게 지분거리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아"
"자기 아내에게도 그러질 못하면서"
미란다는 그만 무의식중에 입을 잘못 놀리고 말았다. 아뿔싸 하면서, 숀이 눈썹을 곤두세우며 굳게 다물었던 입을 천천히 떼는 것을 숨을 죽이며 바라보았다.
"그래... 그랬었구나"
숀의 눈에는 심상치 않은 빛이 어른거렸다.
"왜 진작 말해 주지 않았지?"
그가 다가오는 걸 보면서 미란다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녀는 다급히 손을 내밀어 그를 떠밀려고 했다. 숀은 히죽히죽 웃으면서 그 손을 잡아 휙 끌어당겼다. 미란다도 질 수 없다는 듯이 두 다리에 힘을 꽉 주고 머리를 도리질하며 저항하였다. 숀은 한 발 더 내밀고 미란다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만둬요."
숨 넘어가는 소리로 미란다는 소리쳤다. 이렇게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여느 때와는 다른 숀의 태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의 이글거리는 눈의 광채에 압도당하면서 미란다의 심장은 격렬하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약속했잖아요. 잊었어요?"
미란다는 사력을 다해 애원했으나 숀은 아랑곳없이 그녀의 볼에 가볍게 손을 대더니 달아오른 살결을 쓰다듬었다.
"당신은 항상 마음이 변하니까"
숀의 손끝이 내려와 미란다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두 사람의 몸이 닿을 듯이 접근하여 그의 체온이 미란다의 몸으로 전해져 왔다.
"처음에는 내가 당신을 요구하는 것이 싫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는 그렇게 해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터뜨리니, 그래서 여자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모양이야"
그의 손끝이 목으로 더듬어 내려왔을 때 미란다는 마치 차가운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듯한 섬찟함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난...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어요."
미란다는 당황해 어쩔 줄을 모르며 떠듬떠듬 변명하였다. 숀은 조소하는 듯한 미소를 띠며 미란다를 응시하더니 "그래?"하며 입술로 그녀의 볼을 쓰다듬으며 가슴팍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반사적으로 미란다는 그의 목에 두 손을 감았다.
"안 돼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미란다의 입술은 그의 키스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싫어?"
숀은 웃으면서 되물었다. 키스는 더욱 격렬해지고 허리에 두른 그리 팔에 힘이 더해 갔다. 미란다는 그만 감각이 마비되어 숀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숀이 얼굴을 들고 그녀를 내려다보았을 때 미란다는 그의 등을 두 손으로 더듬으면서 자기 의사와는 관계없이 움직이는 육체를 감추려는 듯 상기된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고 있었다.
숀의 몸에서 바닷물의 짠내가 풍겼다. 미란다는 그의 탄력있는 살갗에 입술을 비벼댔다. 숀은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발하고는, 한 손으로 미란다의 머리를 어루만지고 또 한 손으로는 그녀의 육체를 더듬으면서 손바닥으로 그 형태와 윤곽을 감상하는 듯했다.
비키니의 브래지어가 벗겨지고 숀의 손이 양쪽 젖가슴을 감싸 쥐었을 때 미란다는 말할 수 없는 쾌감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얼굴을 들고 그의 입술을 요구하였다. 이젠 밀고 당기거나 체면을 내세우거나 할 여유가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 살을 맞대고 입술을 포개었다. 미란다의 포동포동한 젖가슴이 숀의 건장한 가슴에 눌리고 허벅지가 서로 스치었다. 미란다의 손은 숀의 등을 천천히 오르내렸고 비키니의 팬티 후크가 벗겨졌을 때에도 그녀는 조금도 저항하지 않았다.
알몸 위에 비치 가운만을 걸친 모습으로 정신없이 입술을 요구하며 그의 검은 머리에 손가락을 깊숙이 들이밀고 그의 머리를 세게 끌어 당겼다. 숀은 입술을 맞춘 채 그녀의 몸을 안아올려 천천히 걷기 시작하였다.
흥건한 도취감 속에서 미란다는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면서 공중에 붕 뜨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이제부터 일어나게 될 일을 냉정히 예측하고 판단할 만한 사고력을 잃고 말았다.
"안 돼, 그를 막아야 해"
하는 이성의 제지를 미란다는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너무나 오랫동안 그 소리에 맹종했었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지금의 미란다에게는 몸도 마음도 숀에게 바치고 싶다는 기분이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겨졌다. 만일 여기에서 중단된다면 욕구불만으로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숀은 미란다를 안은 채 침실로 들어갔다.
그녀를 마루 위에 내려 세우고는, 고개를 들어 오랜 키스에서 겨우 입술을 떼었다. 미란다는 도취감이 사라질까 두려워 눈을 감은 채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러자 숀은 두 손을 미란다의 양쪽 가슴에 대고 그 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고 키스하기 시작했다.
그의 따스한 혀끝이 풍만한 가슴 위를 애태우듯 더듬었다. 그의 입술은 다시 아래로 훑어내려가 배꼽 부근에서 곡선을 그리며 긴장한 복부에 계속 키스를 퍼부었다. 두 사람이 이 같은 사랑을 나누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이제까지의 숀은 너무도 신중하여, 흥분이 고조되어 자제심을 잃게 되기 전에 몸을 떼곤 했다. 미란다는 숀이 감정도 없는 차가운 인간이 아닌가 의심한 적도 있었다. 한데 그 의심은 지금 말끔히 가시었다.
미란다는 무아경에서 그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숀의 검은 머리가 미란다의 땀이 밴 몸에 달라붙었다. 이윽고 숀은 휘청이며 허리를 폈다. 얼굴은 상기되어 있고 호흡은 거칠었다. 굳어 있는 표정에는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위험스런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숀은 말없이 미란다를 침대 위로 밀었다. 흐느적거리는 그녀의 몸은 이미 모든 근육이 빠져나가 버린 듯 시키는 대로 침대 위를 뒹굴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의 몸은 침대 위에서 하나가 되었다. 숀의 육중한 몸무게에 미란다는 내리 눌리어 숨이 막혔다. 크게 뜬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나른한 열정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무거워요..."
미란다가 속삭였다. 숀은 상체를 약간 들고는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미안, 미안. 서둘다 보니 그만... 하지만 그것도 다 당신 때문이야, 너무 날 기다리게 했으니까..."
미란다의 가슴 사이에 입술을 대고 괴로운 듯이 속삭였다.
"지금 당신을 가져야겠어, 미란다. 이제 게임은 그만둬"
그는 젖꼭지를 가볍게 물었다.
"이곳에 와서는 내내 괴로움에 시달렸어. 매일 밤 당신에게 손도 대지 못하고 같은 방에서 자는 것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일인지 알아? 밤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고 아침 일찍 침대를 뛰쳐나간 것은 무슨 이유인지 알아?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벌써 첫날밤에 이렇게 되었을 거야"
미란다는 얼굴을 찌푸리고 듣고 있었다. 지금 숀이 얼마나 그녀를 갈망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허용한 다음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미란다로서도 그에게 사랑받고 싶은 심정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그러나 간단하게 숀에게 승리를 안겨 주고 나면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제각기 따로 놀게 되지나 않을까. 일단 남편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고 나면 나에 대한 관심이 엷어지지나 않을까? 질질 끌려서 여기까지 온 것이 잘못이었다.
제 자신의 욕구에 휘말리지 말아야 했다. 어떻게 하면 무사히 이 방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미란다는 열심히 생각에 골몰하면서 한 손을 숀의 헝클어진 머릿속에 밀어넣고 그의 머리를 가볍게 들어올렸다.
"숀..."
"쉿"
숀은 마지못해 얼굴을 들었다.
"미란다. 이야기는 이제 그만. 그만하면 충분히 나를 애태워 놓았을 텐데?"
"한 가지만 물어 볼게요."
숀은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다시 뜨고는 싸늘한 시선으로 미란다를 내려다보았다.
"질문 따윈 그만 해, 지금까지 당신은 너무 많은 질문을 했어. 그리고 단 한 번도 내 대답에 만족한 일이 없고!"
"결혼을 신청한 것은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나요?"
미란다는 숀이 다시 애무의 손을 움직이기 전에 지그시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숀은 움찔하여 얼굴을 떼더니 얼굴이 일그러지며 눈에는 분노의 빛마저 어른거렸다.
"여자들은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거지?"
숀은 미란다에게서 몸을 떼어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았다. 등허리의 근육이 뻣뻣해졌다.
"나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 거야? 거짓말이라도 하란 말인가? 당신의 그 로맨틱한 철부지 마음을 만족시킬 달콤한 얘기라도 속삭여 주길 바라는 건가? 그렇게 해야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척척 맞아떨어지게 되는 건가? 나는 지금 이 시각까지 당신이 나를 원하고 있는지 어떤지조차 종잡지 못하고 있어. 미란다. 하지만 이제야 알겠어. 당신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5분 이내에 당신도 알게 해주겠어. 아직도 모른다면 말이야..."
숀의 목소리가 아주 허스키하게 변했고, 미란다는 등골이 싸늘해졌다. 그것을 본 숀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간단한 거야, 알겠지? 나는 당신을 요구하고 당신은 나를 요구하고 있어.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은 부부야. 서로의 기분을 만족시켜 주어서 안될 건 없잖아?"
미란다는 목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억지로 되받아 미소 지었다.
"숀, 당신이 말하는 것은 육체의 문제예요. 가령 상대가 꼭 내가 아니라도 좋다는 뜻이 된단 말이에요. 당신을 끌어들일 매력만 있다면 .말이에요. 틀림없이 당신은 그 여성을 점령한 후엔 그 이름조차 잊어버리고 말 거예요."
숀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을 막았다.
"왜 억측으로 말하는 거야? 당신은 다른 여자가 아냐. 내 아내지. 이제부터 둘이서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 나가는 거야. 시작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숀이 미란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미란다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한 손으로 그의 몸을 밀어 막았다.
"또 하나, 가정하여 질문하겠어요. 숀, 만약 사내가 당신이 아니라 마티 녹스라 해도 내가 똑같은 기쁨을 얻을 수 있을까요?"
숀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게 본심인가?"
"문제를 착각하지 마세요. 만일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 어떤 지가 문제되지 않고, 섹스가 단순히 육체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에 불과하다면, 내가 마티가 아닌 당신을 선택할 이유가 없을 게 아녜요?"
숀은 턱을 뻣뻣이 하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생각하기엔 좀 늦은 것 같군. 우리는 정식 부부인 거야. 그 자가 좋아졌다 해도 이젠 어쩔 수 없게 됐어."
"결혼이란 결정적인 것은 아니에요."
아무래도 숀에게 걸었던 기대는 어긋나는 것 같았다. 그는 전혀 이해하려 들지 않았고, 필경 그의 사랑은 서서히 식게 될 것이다.
"이 결혼은 결정적인 것이야. 미란다. 적당한 말로 당신을 속이기는 쉬워.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근본적인 부분에 관해 정직해지지 않는다면 이제부터의 결혼 생활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야. 나는 로맨틱한 사람은 아니야. 모든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사랑하고 있다."란 어떤 상태인지 난 아직 잘 몰라. 이제까지는 너무 일에 몰두해서 여자에게 열중할 시간 따위는 없었어. 섹스-그건 이해해. 그건 우리가 다 느끼는 생리적 갈망이야. 애정, 그것도 이해해. 나는 당신을 몹시 좋아하고 있어. 당신은 몇 번이나 나를 당혹하게 하였지만 당신에 대한 생각은 변함이 없어. 함께 있으면 즐겁고 옆에 있어 주지 않으면 쓸쓸해. 당신은 지금까지 만났던 그 어떤 여자보다도 소중한 존재야. 이러한 것을 통틀어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의미론을 갖고 논쟁하고 있는 것밖에 안 돼"
미란다는 씁쓸하게 웃었다.
"아니에요, 숀... 우리의 말은 서로 빗나가고 있어요. 다이아나의 말이 맞았어..."
"다이아나? 다이아나가 누구지?"
미란다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흘린 것을 깨닫고 난처한 듯이 눈을 돌렸다.
"아뇨, 아무 것도 아녜요."
"그 다이아나가 우리 일에 참견했다면 그냥 들어넘길 순 없어."
숀은 그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다이아나란 한 사람밖에 없어. 당신은 몇이나 알고 있지? 역시 당신이 말하는 다이아나도 내가 알고 있는 아버님 비서겠지 ?"
미란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네"
이제 와서 숀에게 감출 더 이상의 이유도 없었다.
"그 여자의 말이 무엇이 맞다는 거야?"
숀의 추궁을 받고 미란다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 여자의 말이... 당신이 나와 결혼한 것은..."
"아버님 회사의 실권을 손에 넣기 위해서란 말이지?"
미란다가 맡을 주춤하니까 숀이 뒤를 받아서 말했다.
"그랬었군! 이상한 생각의 출처는 바로 그거였구나. 미스 코볼드에게 신혼여행을 엉망으로 만들어 준 감사의 인사를 해야겠군. 그밖엔 또 뭐라고 했지?"
"직접 나에게 말한 건 아니에요.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엿들어 버린 거예요."
미란다는 낯을 붉히며 이런 대화를 하는 자신을 처량하게 느꼈다. 다른 여인이 숀과 아빠에 대해 야비한 말을 늘어놓으며 고소해하던 일은 생각만 해도 역겨웠다.
"다이아나가 나의 사사로운 일을 남에게 얘기했다 그 말이지? 이게 무슨 꼴이람. 소문이 온 회사 안에 확 퍼졌을 게 아냐?"
숀의 얼굴이 검붉게 달아오르고 입은 꾹 다물고 있었다.
"상대는 그 여자의 사촌이었어요. 다이아나도 딴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사촌? 영업부에 있는 놈?"
"당신이 나보다 더 잘 아는군요. 나는 그가 어디에서 일하는지 알지도 못했었는데"
숀은 짜증스러운 몸짓으로 손을 머리에 얹어 검은 머리를 빗어넘겼다.
"언제 일이야?"
"파티 날이었어요."
"우리의 결혼식 전날 밤? 그랬었구나. 그래 당신은 그 말을 그대로 믿어 버렸군? 그래서 당신은 집을 뛰쳐나가 결혼을 중지시키려 했던 거고"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숀은 침대에서 내려와 부산스레 옷을 입기 시작했다. 미란다는 시트를 끌어당겨 드러난 몸을 가렸다.
짧은 바지와 곤색 티셔츠를 입고 나서 숀은 침대 옆으로 돌아왔다. 두 손을 허리에 대고 을러대는 듯한 모습으로 미란다를 내려다보았다.
"자, 당신이 엿들은 이야기를 죄다 들려 줘. 나에 대한 중상모략을 정확히 알아야겠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열에 들뜬 듯이 미란다를 갈망하던 사나이가 졸지에 엄격한 비지니스맨으로 탈바꿈하여, 내키지 않는 증인에게 설명을 강요했다.
"난, 다이아나를 좋아하지 않아요."
미란다는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증오할 정도예요. 하지만 그 여자가 한 말이 사실과 일치해 가는 거예요. 전부터 어쩌면... 하고 생각하고는 있었죠. 그러나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게 된 것은 그 여자의 말을 엿들은 다음부터였어요. 다이아나는 내가 듣고 있는 줄도 몰랐을 테고 들으라고 하는 심사도 아니었을 거예요. 다이아나와 그 사촌의 은밀한 이야기였으니까요."
"아버님의 귀에는 들어가 있겠지. 다이아나는 그의 비서니까. 게다가 사촌 이외의 사람에게 지껄이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도 없잖아?"
"아뇨. 그렇게 생각되진 않아요. 사촌은 특별한 것 갈았어요."
미란다는 흘끔 숀을 쳐다보고 말을 계속하였다.
"다이아나는 아빠와 결혼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거예요. 알고 있었어요?"
숀은 침착한 태도를 흩트리지 않았다.
"그것도 그때 들은 거야?"
"네, 분명하게요."
미란다는 무언가 생각하고 경멸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여자가 사내아이를 낳으면 당신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고도 말했어요."
"대단한 여자군."
"정통으로 맞힌 거죠?"
미란다가 해롱거리자 숀은 정색을 하고 노려보았다.
"즐거워하고 있는 것 같군."
"다이아나의 생각대로 일이 진척된다면 매우 역설적인 게 되겠지요. 당신이 애써 손에 넣은 회사도 언젠가는 다이아나의 아들 손으로 넘어가게 되어 버릴 테니. 하긴 그 여자에게 그렇게 대단한 생각이 전부터 있었다고 느껴지진 않지만, 일에만 몰두하는 당신을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것인지도 모르잖아요?"
"나를 추켜주고 있는 거야?"
숀은 비아냥거리는 투로 되받았다.
"그렇게 생각돼요?"
그녀의 눈썹이 곤두섰다. 그러한 그녀를 숀은 멀거니 바라봤다.
"미란다. 당신에겐 참으로 놀랐어. 요 며칠 사이에 당신은 약혼중에도 볼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성격을 보여 주었거든. 때로는 전갈과 같은 독기 어린 말도 내뱉고"
숀은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돌아서서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은 미란다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결혼의 동기에 대한 질문을 받고 정직하게 대답했어. 이번에는 당신이 왜 내 청혼에 응하였는지 말해 줄 차례가 아닐까?"
뜻밖의 이야기 전개에 미란다는 당황하였다. 숨을 죽이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무어라고 대답해야 좋을까 생각을 더듬었다. 본심만은 가르쳐 줄 수 없었다. 달리 둘러댈 말을 찾았다.
"나로서도 왜 그랬는지 이상해요."
숀은 미란다를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것이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의 전부인가?"
"지금으로서는요."
미란다는 가볍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드라이브하러 나갈 텐데 같이 가겠어? 아니면 바다에 나가 수영하겠어?"
"함께 가겠어요. 곧 채비를 할게요."
숀이 나간 다음 미란다는 그대로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표정은 어두웠다. 당연히 알고 있었을 텐데... 숀은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았다. 지금 그가 분명하게 그것을 인정한 것이다.
이제까지 아무도 사랑한 일이 없었다는 것이 다소의 위안은 되었지만 그리 큰 위로는 되지 못했다. 미란다는 울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마음을 약하게 먹어서는 안된다고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미란다는 억지로 침대에서 내려와 서둘러 옷을 입었다. 이 섬에 오고부터의 나날은 과거를 질질 끌고다니는 것처럼 여겨졌다. 일생 중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되어야 할 터인데, 한데 이상한 것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나니까 맺혀 있던 것들이 일시에 달아나 버렸는지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돌변하였다.
그들을 태운 차는 구불구불한 길을 달려갔다. 길이 울퉁불퉁하여 몸이 몹시 흔들렸다. 미란다는 몸이 흔들릴 때마다 킬킬 웃었다. 그러다가 미란다의 몸이 크게 튀어올라 밖으로 내던져질 뻔한 것을 보자 숀도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을 일이 아니에요. 속력을 좀 늦추세요."
"마치 도깨비 상자의 용수철 달린 광대 같군."
"이 차에는 스프링이 없는 모양이군요."
"그것도 그렇고 휘발유도 얼마 없어. 어떻게든 해안까지는 가야 할 텐데... 그렇지 않으면 한참 걸어야 하니까"
미란다는 숀을 노려보았다.
"다른 남자가 그런 말을 했다면 의심받기 꼭 알맞겠네요."
숀이 우스운 듯이 입을 실룩였다.
"난 그런 낡아빠진 수법은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어."
"여자들이 몰려오니까 그럴 필요가 없었겠지요."
미란다는 처음에는 농담조로 말했지만 문득 숀이 이제까지 몇 명의 여자와 사귀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과거 이야기를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었다. 숀이 얼마간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사생활에는 별로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어. 여자 친구 정도는 있었지. 하지만 그들 중 그 누구에게 열중할 만한 여유가 없었어."
"일 말고는 열중해 본 것이 없어요?"
미란다는 양미간을 좁혔다. 이제까지의 인생 중에서 일이 그 전부였을까? 딴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단 말인가.
"데클란을 보살펴야 했고 저축한 돈도 없었거든. 양친이 남겨 준 돈이란 보잘것없는 것이었어. 어떻게든 출세하지 않으면 안 되었어."
숀은 입을 다물었다가 잠시 뒤에 다시 계속하였다.
"그런 성격으로 태어났는지도 몰라. 왜 이렇게 되었는지 나 자신으로서도 잘 모르겠어. 인간이란 자기 자신의 일을 그렇게 잘 이해하고 있는 것도 아닌 모양이야. 심리학자더러 분석해 달라면, 장남이라는 자각과 데클란을 돌봐야 하는 책임감 때문에 억척스레 바둥거려 왔다고 말하겠지. 아니면 유전적인 것일지도 모르지. 아무튼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어. 내가 어떠한 인간이며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지를 생각해 봤자 본질적인 부분이 변할 것 같지도 않았고..."
"당신으로서는 변치 않을지 모르겠지만 당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주위 사람들에게는 달리 보이게 될지도 모르죠."
숀은 재빨리 미란다를 훔쳐보았다.
"당신에게 있어서란 말인가?"
"그럴지도 모르죠."
미란다는 말꼬리를 흐렸다. 숀은 당혹스런 얼굴을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미란다는 선이 굵은 그의 옆모습을 관찰하였다. 숀은 감정이 무디어 남에게 애정을 주거나 받는 일에 익숙지 못한 것이 아닐까. 부모의 죽음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미란다는 한숨을 쉬었다. 필경 그의 말대로 원인을 알았다 해도 대단한 차이는 없을지도 모른다. 숀은 거의 감정에 흐르는 일이 없었다. 단 소유욕에 관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마티의 일로 그것을 분명히 알았다. 질투심이 강한지도 모른다. 자기의 것은 꼭 자기 수중에 넣어 두어야 한다고 작정해 놓고 있는 것 같다.
그에게는 보다 따뜻한 정이 결핍돼 있었다. 그러한 점이 이제부터 개선되어 나갈 수 있을까-그것이 미란다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내가 그의 손에 사로잡힌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애정의 대상으로서 나에게 다가설 날이 올 것인가...
주유소까지 왔다. 탱크에 휘발유를 가득 채워넣고, 둘은 번잡한 부두 근처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으로 가서 점심을 들었다. 빨강과 노랑의 줄무늬가 진 블라인드의 그늘 아래 한가로이 해산물을 맛보았다.
섬에 와서 가장 즐겁게 지낸 하루였다. 저녁때 해가 떨어질 녘에 두 사람은 귀로에 올랐다. 저녁 해와 상쾌한 바닷바람이 미란다의 눈꺼풀을 자꾸 감기게 했다. 미란다는 숀의 어깨에 머리를 얹고 잠들었다. 차가 현관 앞에 멈추었을 때에야 겨우 눈을 떴다.
두 사람의 화해 분위기가 계속된 것은 거실에 발을 들여놓을 때까지였다. 숀은 테이블 가까이에 와서 갑자기 발길을 멈추고 꽃병에 꽂혀 있는 꽃을 들여다보았다.
"이 꽃은 어디서 났어? 정원에 피어 있었나?"
"아뇨, 마티가 가져다 준 거예요."
미란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그는 돌아서서 미란다를 응시하였다. 그의 눈에는 찌를 듯한 노여움이 번득였다.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미란다는 그의 마음속을 알고도 남을 것 같았다
8
두 사람을 태운 비행기는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히스로 공항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미란다는 창밖으로 휘날리는 눈발을 믿기지 않는 느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기내 방송으로 기후가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런던이라 할지라도 4월 중순에 눈보라를 만나게 되리라고는 예상조차 못했었다. 히스로 공항에 내린 다음에도 도로에 제설차가 나와 있을 정도여서 두 사람이 탄 차는 속력을 낼 수가 없었다.
서행운전을 하느라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운전사들이 숀의 차가 끼어들자 여기저기서 경쟁하듯 클랙숀을 울렸다. 미란다는 얇은 코트에 몸을 감고 덜덜 떨고 있었다. 차창의 와이퍼가 전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앞 유리에 눈이 붙어 버려 숀은 얼굴을 창에 바싹 대고 전방을 살피면서 차를 몰았다.
그들의 새 집은 아직 다 짓지 못했다. 당초 예정은 결혼식 때까지는 완공하기로 돼 있었지만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4월말까지 완성하지 못하면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업자에게 통고해 놓고 있었다.
숀의 맨션은 매도해 버렸으므로 그때까지 두 사람은 퍼디 보스턴의 집에서 지내기로 되어 있었다. 새 집은 퍼디가 딸에게 준 결혼선물이었다. 하기야 법률적으로는 부부의 공유재산으로 되어 있었지만. 정지신호로 차를 멈췄을 때 숀은 조수석으로 얼굴을 돌렸다.
"여기서부터는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 춥지 않아?"
"이가 딱딱 부딪쳐요."
숀은 미란다의 손을 잡아 부드럽게 마사지를 하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파래졌던 그녀의 피부는 제 혈색을 되찾았다. 그 동안 신호가 황색으로 바뀌었다.
"자, 신호가 바뀌었어요."
하고 미란다가 말하는 바람에 숀은 그녀의 손을 놓고 운전에 주의를 기울였다. 온통 눈에 덮인 은세계를 바라오면서 미란다의 눈은 부드러워졌다. 아빠한테 화를 낼 수는 없다. 내 일생을 임의로 정해 버린 데 대해서는 하고 싶은 말도 있지만, 그것도 나의 행복을 생각한 나머지 그렇게 하신 것이니 용서해 드려야지.
아빠는 이번에도 우리 두 사람이 공항에 도착한 다음 뭐가 제일 필요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차를 대기시켜 놓아 주셨던 것이다. 이것도 아버지의 애정의 표시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미란다의 마음은 훈훈해지는 것이었다.
퍼디는 어미새가 단 한 마리의 새끼새를 지키듯이 언제나 미란다에게 세심한 배려를 해주었다. 미란다가 10대였을 때에는 자주 아버지에게 반발한 적도 있었지만 어머니를 여읜 후부터는 아버지가 베푸는 애정의 고마움을 절실히 느꼈고, 동시에 아내를 잃은 아버지도 역시 애정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 환경 때문에 미란다는 인간의 애정이나 그 표현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미란다는 우수에 잠긴 눈으로 숀의 냉정한 옆얼굴을 보았다. 미란다가 어린 시절부터 몸에 익힌 것을 숀은 아직 모르고 있다.
그러나 감정 면에서 그의 좁은 시야를 교정해 주는 데 늦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지난 2주 동안에도 몇 번이나 그에게 어떤 변화가 온 것이 아닌가 하고 여겨질 때가 있었다.
두 사람은 한가로이 해변을 산책하거나 수영하거나 일광욕을 하기도 하고, 샐러드나 과일을 먹거나, 조용히 서로 다른 책을 읽거나, 신문에서 읽은 것이나 어린 시절의 추억담, 시사문제, 음악이나 연극에 대하여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결혼 전에는 숀이 항상 바빠서 경험하지 못했던 자유스러운 의견교환도 즐길 수 있었다. 미란다는 그를 만난 후 결혼까지 이르는 동안 숀에 대해 알아낸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번 신혼여행 동안에 알게 되었다.
깜짝 놀라거나 당혹스러운 일도 있었지만 즐겁고 기쁜 일도 많았다. 정리할 시간이 없어서 머릿속은 아직 뒤죽박죽인 채였지만 몇 주일이 지나면 자신의 남편이 된 남성이 어떤 형의 인간인지 알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숀 쪽에서도 미란다에 대하여 여러 가지 발견을 한 것이 아닐까? 말은 안했지만 비로소 알게 된 것을 마음속으로 평가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미란다는 운전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숀의 옆얼굴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은 상대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면서 부부가 된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아직 플라토닉한 것이지만 미란다는 그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2주간을 단둘이서 지낸 것이 두 사람을 굳게 결합시킨 것 같았다 앞 유리를 응시하고 있던 숀이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다.
"대단한 날씨군. 여기까지 오는 데 평소의 두 배나 시간이 걸렸어.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어놓을 수가 없어. 이런 도로상태에서는 차가 미끄러지기 십상이거든"
"서두를 필요는 언짢아요."
"춥지? 되도록 빨리 돌아가려고 하지만..."
앞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숀은 다시 정면으로 돌아앉았다. 미란다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월요일에는 둘 다 일터로 돌아가야 하잖아요. 그때가지는 날씨가 회복되기를 기도해야겠어요."
"내키지 않으면 당신은 일하지 않아도 돼. 당신 수입을 기대하지 않아도 지낼 수는 있으니까"
"일하는 건 즐거워요."
미란다는 황급히 변명했다.
"그런 뜻이 아니라, 휴가가 끝나서 아쉽다는 뜻에서 말한 거예요."
뒷부분의 말소리는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작아졌다. 그에게 그런 말을 한 게 잘했는지 어떠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숀은 눈길에서 눈을 떼지 않고 미소 지었다.
"휴가가 아니야. 실제적으로는 어쨌든 간에 엄연한 신혼여행이었단 말이야"
이야기가 아슬아슬한 곳에 와 있었다. 미란다는 불안을 느끼고 시계를 보았다.
"집에 도착할 즈음엔 아빠도 돌아오실 거예요. 여섯 시쯤 될까요?"
"글쎄"
숀도 미란다가 짐짓 화제를 바꾼 것에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하늘이 짙은 잿빛으로 물들고 주위에는 밤의 장막이 서서히 드리워져 가고 있었다. 숀은 헤드라이트를 켰다. 빛을 받아 눈발이 춤추면서 노면으로 떨어져 가는 것이 보였다.
눈에 익은 표지가 보이자 둘이서만 보냈던 지난 2주간이 멀리 사라지는 듯하여 허전함을 느꼈다. 이제 곧 식구들의 마중을 받게 될 것이고, 계속하여 일상적인 생활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게 될 것이다.
숀은 다시 일에 몰두하게 될 것이다. 미란다의 시선이 깍지 낀 손에 머물렀다. 왼손에 반지 두 개가 빛을 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과 같은 네모진 사파이어 반지와 묵직하게 느껴지는 결혼반지였다. 이제부터 신혼생활이 탈없이 이루어져 나갈지 불안하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집 정원 문을 들어서자 숀은 어깨의 힘을 빼고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었다. 어둠 속에 창문의 불빛이 새어나와 눈이 쌓인 정원을 환히 비치고 있었다.
차가 서기가 무섭게 현관문이 열리고 두툼한 갈색 스웨터를 입은 퍼디 보스턴이 나타났다. 그는 눈빛에 반사된 은발을 번쩍이며 걸어 나왔다.
"무사히 돌아왔구나. 날씨 때문에 오느라 힘들었지?"
그의 품으로 달려온 딸을 꼭 껴안았다.
"자, 안으로 들어가자. 햇볕에 많이 탔구나. 날씨가 좋았던 모양이지. 여긴 봄이라고 할 수 없는 날씨였어. 아주 추웠단다."
퍼디 보스턴은 현관의 불빛 아래에서 미란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흡족한 듯 미소 지었다.
"허니문을 즐겁게 보낸 모양이로구나"
"아주 좋은 날씨였어요. 그렇게 덥지도 않고 해서 곱게 탄 거세요."
라고 말하면서 짐을 나르는 숀을 도우러 총총 걸어오는 가정부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녀왔어요, 해먼드 부인"
숀은 두 개의 여행 가방을 집안으로 들여다가 탕 하고 놓았다.
"뭐가 이렇게 들었는지. 저 사람은 상점이라도 차릴 양으로 선물을 사들인 것 같습니다."
퍼디 보스턴은 껄껄 웃으면서 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거렸다.
"두 사람 다 무사히 다녀와서 기쁘다. 네가 없어 아주 쓸쓸했어. 그랬지, 해먼드 부인?"
가정부는 날라 온 여행 가방을 내려놓고 웃는 얼굴로 끄덕였다.
"미란다 아가씨가 없으니까 집안이 텅 빈 것 같고 무덤 속 같지 뭐예요. 손님도 없었구요."
그리고는 퍼디에게 물었다.
"마실 걸 가져올까요?"
"지금 마실 테냐? 아니면 먼저 옷부터 갈아입지. 식사는 집에서 할까 한다. 이런 날씨에 다시 나가기도 번거로울 테니까"
숀이 문을 닫고 있는 동안 미란다는 코트를 벗어서 해먼드 부인에게 건네주었다.
숀이 돌아서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다시 나가는 건 질색이에요. 악몽이라도 꾸는 듯한 기분으로 겨우 도착했는걸요. 눈보라가 더 세차게 치는데요. 독한 위스키라도 몇 잔 마시고 싶은데, 그전에 우선 옷부터 갈아입게 해주십시오."
해먼드 부인은 숀의 코트를 받으며 의미 있는 웃음을 보냈다.
"침실은 따뜻이 불을 지펴 두었어요. 사장님 방과 복도를 사이에 두고 있는 맞은편 넓은 방을 치워놓았어요."
미소 지은 얼굴을 그대로 미란다에게 돌리며 또 말했다.
"아가씨의... 아니지, 힌튼 부인의 짐도 모두 그 곳에 옮겨 놓았어요. 힌튼 부인이라고 부르기에 빨리 익숙해져야겠는데요."
"그럼, 당연하지요."
미란다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엔 아랑곳하지 않고 숀이 대답하였다. 미란다는 짐을 부부침실로 날랐다는 걸 알고는 난감해졌다. 방금 그 순간까지도 숀과의 방에 대한 약속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서 층계를 오르며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침실을 따로 쓸 적당한 구실은 없을까? 방에 들어서면서 더블베드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숀이 우뚝 멈춰 섰다. 미란다는 자신의 옆얼굴에 그의 시선이 닿는 것을 의식하고는 얼굴을 붉혔다.
"이거 문젠데"
숀이 희롱하는 투로 말했다.
"미란다. 어떡할래?"
"지금은 옷만 갈아입을 뿐이니까..."
하고 미란다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좋아, 그 냉정함을 잃지 않도록. 하지만 나를 소홀히 생각지는 말아 줘. 한 침대에서 자지 않을 방도가 없을까 생각하고 있는 거지? 나더러 안락의자에서 자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생각을 고쳐야 할 걸... 오늘처럼 추운 날에는 따스한 침대 속에서 자고 싶으니까"
숀은 잠시 말을 끊고는 농담 비슷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특히 여자와 함께라면!"
"난 싫어요!"
"알았어. 당신에게 맡기겠어."
숀은 셔츠를 휙 벗어던졌다. 볕에 탄 어깨와 팔의 근육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미란다는 갈아입을 옷을 갖고 욕실로 들어갔다. 세면대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니 눈동자가 생기 있게 빛나고 두 볼은 상기되어 있었다.
"자 어떻게 한다지?"
미란다는 거울 속의 얼굴에게 물었으나 대답은 없었다. 전염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꾸며 볼까? 모두 다 잠든 뒤에 아래층으로 내려가 안락의자에서라도 잘까? 시답잖은 생각만 떠오를 뿐 어느 하나 현실성이라곤 없었다. 만일 딴 방에서 자기라도 한다면 대번에 해먼드 부인이 알고 말 것이다.
가정부는 사소한 것이라도 간과하지 않는 예리한 눈과 탐정 같은 두뇌를 갖고 있음을 미란다는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다. 만일 해먼드 부인이 사람의 마음을 읽어 내거나 벽을 꿰뚫어 사물을 본다고 해도 미란다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미란다가 아무리 몰래 일을 진행하고 있어도 해먼드 부인은 언제나 미란다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간파해 내곤 했었다. 한 집안에서 너무 가까이 지낸다는 것도 문제인 것이다. 누가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두가 서로 알고 있었다.
비밀 따위는 간직할 수가 없으며, 프라이버시는 아예 없었던 것이다. 미란다가 욕실에서 나와 보니 숀은 가슴에 착 달라붙는 검은 스웨터에 골이 진 연회색 코르덴 바지를 입고 있었다. 면도를 했고, 검은 머리도 단정히 빗겨져 있었다. 빈정대는 얼굴로 미란다를 보았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미란다는 못 들은 척하면서 문 가로 걸어갔다.
"마시러 내려갈 준비가 됐어요?"
"5분 전에 다 됐지."
숀도 미란다의 뒤를 따라 나왔다.
"욕실에서 뭐 하고 있었어? 그 스웨터라도 짜고 있었나?"
숀의 시선이 엷은 분홍색 캐시미어 스웨터와 느슨하게 짠 털바지를 훑어 내렸다.
"아주 귀엽군."
"고맙군요."
칭찬해 주는 것은 기뻤지만 숀의 눈빛에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 집에 돌아와서 숀은 갑자기 장난기 어린 심정으로 변한 것같이 여겨졌다. 미란다는 오늘 밤 상당히 시달림을 받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숀이 그녀를 놓아 줄 것 같지 않았다. 그는 덫에 걸린 쥐를 지분거리고 있는 고양이같이 심술궂은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층계를 내려가면서 미란다는 몰래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곧 7시 반. 몇 시간 안으로 도망갈 방법을 찾지 않으면...
미란다가 응접실 문에 손을 대려 하는데 숀이 다가와서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는 문을 열고 미란다를 껴안았다. 퍼디가 두 사람의 기척을 듣고 돌아섰을 즈음에야 미란다는 미소를 머금을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이제야 내려왔구나. 아예 안 내려오는 줄 알았지."
퍼디가 놀리듯이 웃었다.
"난로 가까이들 오너라. 몸이 찰 거야. 너희들에게 마실 것을 가져오게 할께. 난 다이아나와 먼저 마셨어. 숀, 자넨 위스키로 하겠나?"
"예, 그걸 마시고 깊었던 참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난롯가의 안락의자에 깊숙이 앉아 그들에게 미소짓고 있는 다이아나를 보자 숀의 눈빛이 날카로와졌다.
"여어, 다이아나, 잘 있었어요?"
"네"
다이아나는 늘씬한 몸을 의자에 앉은 채 쭉 펴면서 대답했다.
"두 분은 어떠셨어요? 신혼여행은 즐거웠어요?"
다이아나는 웃음을 띠고 있기는 했지만 그 뒤에 비웃는 빛이 어른거리고 있음을 미란다는 놓치지 않았다. 퍼디 보스턴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숀의 싸늘한 옆얼굴을 흘끗 본 미란다는 숀도 그것을 감지했다는 것을 알았다.
"지겨워질 틈도 없었지요."
숀은 밝은 목소리로 말하며 미란다의 손을 잡고 입술을 댔다.
"얼마나 깨가 쏟아졌으면!"
다이아나는 또 과장하여 웃었다.
"숀, 당신은 역시 결혼을 잘했어요. 크림을 핥고 있는 고양이 같은 얼굴을 하고 계시는 걸 보면"
미란다와 숀은 꼭 붙어서 소파에 앉았다. 숀은 팔로 가볍게 미란다의 어깨를 안고 있었다. 퍼디는 숀에게 위스키를 가져다주면서 딸의 손에는 달콤한 세리 주를 건네주었다. 난로의 불빛으로 황갈색 액체가 붉게 물들어 보였다. 퍼디는 난로를 사이에 두고 다이아나의 반대쪽에 앉아서 잔을 치켜들었다.
"건배는 너무 형식적일까? 길이 두 사람이 행복하길 비네"
다이아나도 잔을 쳐들고 건배하는 시늉을 했다. 미란다는 그 건성으로 웃는 낯을 언짢은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왜 아빠는 오늘 저녁 하필이면 다이아나를 불렀을까. 신혼 여행에서 돌아온 날 저녁은 셋이서 지내고 싶었는데... 혹시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서인가.
다리를 꼬고 소파에 기대 있는 다이아나를 새삼 돌아보았을 때 미란다의 등골에 싸늘한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다. 오늘 밤 다이아나가 이 자리에 있다는 건 불길한 징조가 아닐까? 다이아나는 아주 마음 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다른 여자가 입었더라면 별로 돋보이지도 않을 성싶은 검은 드레스를 섬찟할 정도로 섹시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울 저지의 검은 드레스는 몸에 찰싹 붙어, 매력적인 가슴에서 히프의 곡선까지 완만한 육체의 선이 알몸처럼 매끄러웠다.
난로의 불은 활활 붉게 타오르고 있건만 미란다의 마음은 점점 싸늘해져 갔다. 만약에 아빠가 다이아나와 재혼하게 된다면 주위의 사정은 일변해 버리는 것이다. 다이아나는 미란다를 이 집에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려 들 것이다. 물론 아빠는 그런 걸 알지도 못하겠지만...
"별장은 어떻더냐?"
퍼디의 질문에 숀은 집 구조와 섬의 경치, 해산물 레스토랑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게 줄 선물 얘기는 아직 듣지 못했는데..."
얼마 후 퍼디는 딸에게 물었다. 미란다는 황급히 변명했다.
"아직 여행 가방에 넣어 둔 채로 있어요."
미란다는 마시고 난 술잔을 소파 옆에 있는 테이블에 놓았다. 퍼디는 아랫입술을 삐죽이 내밀고 뾰루퉁한 얼굴을 해 보였다.
"내일까지 기다려야 되는 거냐? 뭘 사왔는지 궁금한데?"
미란다는 웃으면서 일어났다.
"좋아요. 가서 꺼내 오겠어요 .아빠에게 그런 어린애 같은 데가 있는 줄을 딴사람은 생각도 못할 거예요."
퍼디도 일어났다.
"나도 함께 가자. 네가 짐을 푸는 동안 얘기 하고 싶으니까"
그 순간 미란다는 선물에 대한 것은 구실에 불과함을 깨달았다. 아빠는 미란다와 단둘이 뭔가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다이아나와 결혼하기로 작정했다고 말할 참인가. 외동딸을 시집보내놓고 아빠는 지금 외로운 게 틀림없다.
그는 가정의 따스함을 필요로 하고 있다. 하루 종일 꽉 짜인 일정을 모두 마치고 돌아와서는 시중들어 주는 사랑하는 여성과 합께 심신을 편히 쉬고 싶으리라. 층계를 오르면서 미란다는 불안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다이아나는 아빠가 필요로 하는 그런 여성이 아니다. 아빠에게 애정을 주기는커녕 아빠의 애정을 받아들이지도 못 할 것이다. 야심적이며 욕심이 강한 여자이지, 결코 애정 있는 여자는 아니야. 침실로 들어서자 퍼디는 입을 열었다.
"자 우리 둘뿐이다. 숀이 없으니까 진실을 말해 줄 수 있겠지? 그와는 잘 돼 가고 있는 거냐?"
농담 같은 어조였지만 눈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미란다는 그 즉석에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행복해 보이지 않아요?"
"뭔가 다른 것이 있는 것 같애"
퍼디는 딸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어두운 그늘이 보여. 결혼식 날부터 걱정하고 있었단다... 진심으로 숀과 결혼하고 싶었니? 그를 사랑하고 있니?"
미란다는 낯을 붉혔으나 얼굴을 돌리려고는 하지 않았다.
"네, 식을 올리기 직전엔 잠시 마음이 불안정했던 것뿐이에요."
퍼디는 안도의 숨을 쉬었지만 눈을 떼지는 않았다.
"그러면 아무 일도 없었단 말이지. 내가 공연한 생각을 한 거지?"
그녀는 잠시 주저하고 나서 대답했다.
"오늘은 피곤해요. 긴 여행에 시달렸으니까 기운이 없게 보였을 테지요."
여행가방을 열고 옷가지 속에 넣어 둔 꾸러미를 찾았다. 선물 가게에서 선물용으로 포장해서 받은 물건이었다. 미란다는 돌아보며 아버지 손에 두 개의 꾸러미를 건네주었다.
"마음에 드시면 좋을 텐데..."
퍼디는 싱긋 웃었다.
"너와 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한 구실이었어."
하고 꾸러미를 팔 밑에 끼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끄르기로 하지."
미란다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아빠가 다음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않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미란다도 겨우 긴장했던 마음을 풀면서 그를 따라 방을 나섰다.
어쨌든 다이아나와의 전격 결혼 발표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다이아나가 오늘 밤 초대되어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을 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두 사람이 내려올 때 현관께에서 해먼드 부인이 얼쩡거리고 있었다. 퍼디가 미소 지으면서 물어 보았다.
"무슨 일이 있나?"
해먼드 부인은 죄송스럽다는 듯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식사준비가 늦어졌어요. 전압이 세지가 않나 봐요. 오븐이 제대로 작동을 안하는 걸 보니, 그렇게 늦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하지만..."
"괜찮아요, 걱정 안해도. 바쁜 건 아니니까. 날씨가 추워서 어딘가 전원이 끊어진 모양이지."
미란다는 한 발 먼저 응접실로 돌아가 문을 열었다. 그 순간 입가의 미소가 얼어붙었다. 숀과 다이아나가 다정한 모습으로 난로 앞에 바싹 다가앉아 있는 것이었다. 다이아나는 한 손을 숀의 어깨에 얹고 있었으며 새빨간 매니큐어가 검정 스웨터 위에 선명히 돋보이고 있었다.
방안은 조용했지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미란다의 눈이 번쩍 빛났을 때 두 사람은 움찔 몸을 움직였다. 아니 움직인 것은 숀 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이아나의 팔을 뿌리치고 몸을 떼어놓았다. 다이아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금발을 뒤로 젖히며 미란다에게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선물은 찾았어?"
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미란다의 싸늘한 시선을 받았다. 누가 손가락으로 휘저었는지 숀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뺨을 보고 미란다는 망연자실했다. 루즈 자국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미란다의 루즈 빛은 아니었다.
"네"
미란다는 이 사이로 억지로 내미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숀과 다이아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둘 사이에서 오고간 이야기는 미란다에게 기분 좋은 것이 아님은 틀림없을 것이다.
어느 쪽이 먼저 행동으로 나왔을까. 숀은 다이아나의 적극적인 행위를 뿌리치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렇게 되도록 유도했을지도 모른다.
퍼디가 부산하게 들어왔다. 미란다는 소파에 앉아서 아빠가 꾸러미 푸는 것을 바라보았다. 손으로 만든 도자기 말과, 별장 부근의 거리에서 그 고장 화가가 그린 작은 수채화가 나왔다. 퍼디는 만족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숀은 자기 술잔에 위스키를 더 따라 채우고 어깨 너머로 물었다.
"미란다. 당신도 세리를 한 잔 더 하는 게 어때?"
"아뇨, 됐어요."
미란다는 평정을 가장했다. 사실 아무 것도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다이아나가 장난기로 숀에게 꼬리를 쳤을 뿐 숀이 유혹한 것도, 기뻐한 것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이 미묘한 색의 조화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군."
퍼디는 팔을 죽 뻗어 손에 든 수채화를 감상하고 있었다.
"내 취미를 잘 알고 있었구먼"
"그것을 고르는 데 몇 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숀이 미란다를 보면서 옆에 앉았다.
"고맙구나, 얘야"
퍼디는 딸에게 입을 맞췄다.
"마음에 드시니 기뻐요."
미란다는 이 세상에 고민 따위는 없다는 듯이 밝은 얼굴로 웃어 보였다. 아까 목도한 광경이 일시적인 장난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더 뜻을 지닌 것이라면 어떻게 할까...
미란다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숀이 미란다의 등에 손을 얹어 그녀의 몸을 끌어당겼다. 미란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머리에서 떨쳐 버리고 싶었다. 바로 2주일 전에 다이아나가 숀을 중상하던 소리를 이 귀로 듣지 않았던가. 혹시 다이아나가 거짓말을 했는지도 몰라. 문득 미란다의 마음에 그런 의혹이 머리를 들었다. 아무에게도...
사촌에게까지도, 숀과 친밀한 사이임을 알려서는 곤란하므로 짐짓 그를 나쁘게 말한 것은 아닐까...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어!
즉석에서 미란다는 부정하였으나 마음의 동요는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다이아나와 숀을 연결지어 생각해 본 일은 없었지만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쩌면 좋을까. 미란다의 상상력이 부산스럽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사람 눈을 속인 이 관계가 꽤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 왔었다면? 서로 결혼하여 각자의 길을 가게 될 때에는 남 모르게 주고받은 사랑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도록 하자고 사전에 약속이라도 했었다면...
미란다는 손바닥에 아픔을 느끼고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의 손톱으로 손바닥을 짓누르고 있었다. 왜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까. 숀은 야심가일지는 몰라도 다이아나와 공모하여 주위의 사람 모두를 속일 그러한 위인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다이아나와 몰래 관계를 지속하면서 한편으로는... 미란다는 그 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불쾌한 일이었다. 다이아나라면 못할 바 없겠지만 숀이 그러한 인간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나고 해먼드 부인이 미안스러워하는 웃음을 띠며 들어섰다.
"식사 준비가 되었습니다. 늦어서 죄송해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퍼디는 아직도 수채화를 손에 들고 있었다.
"좀 봐요. 힌튼 부인 이것을 내게 사다 주었어. 훌륭하지?"
"네, 참으로 좋습니다."
해먼드 부인이 맞장구치는 것을 미란다는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해먼드 부인에게 예술적 감각이란 있을 턱이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퍼디가 벽에 걸어 놓은 그림들은 청소할 때에 번거로움만 더해 주는 귀찮은 존재에 불과할 것이다.
다이아나는 난롯가에서 천천히 일어나 짐짓 멋부리며 요염한 자태를 취했다. 미란다는 숀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그는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띠고 황홀하게 다이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려움과 질투와 곤혹스러움으로 미란다는 마치 차가운 물을 정수리로부터 끼얹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 미소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
9
그 뒤의 식사란 미란다에게 있어서 안개 속의 일만 같았다. 평소에는 거의 술을 마시지 않던 미란다가 그 날 저녁은 무서운 속도로 잔을 비워 나갔다. 와인의 힘이라도 빌지 않으면 도저히 마음의 평정을 지탱할 수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숀은 그녀의 잔에 계속 와인을 따라 주면서 눈썹을 치켜 올렸다. 어떤 요리가 나오고 어떤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지 미란다는 분간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 놓인 음식은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채 밀어 놓고 있었다.
숀과 아빠의 화제는 거의가 사업에 관한 것이었다. 퍼디는 숀이 없었던 동안의 일의 진행상황을 대충 설명하고 나서 옆에 앉은 미란다에게로 눈을 돌렸다.
"미란다. 지루하여 졸립겠지? 식사하면서 일에 관한 이야기만 해서 안됐구나. 자, 이번엔 네가 사온 물건들에 대해서 말해 주지 않으련? 어떤 것들을 샀나?"
미란다는 나른한 얼굴을 들고 무언가 몇 마디 하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숀이 재빨리 감싸고 나섰다.
"이 사람은 눈에 띄는 건 모조리 사고 싶어 했어요. 탐나는 걸 모두 샀다간 비행기로도 다 날라오지도 못했을 뻔한 걸요."
미란다는 공허한 눈으로 식탁 중앙에 놓인 촛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촛불 둘레는 앵초와 제비꽃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아련한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밖에서 불어 대는 바람과 창에 부딪치는 눈발이 더욱 걸맞지 않게 느껴졌다.
계절에 대한 감각이 온통 뒤섞여 어제자지 해변에서 살갗을 볕에 태우고 있었던 일이 그저 꿈만 같이 여겨졌다. 와인을 마셔서 감각이 무디어진 탓인지 미란다는 숀과 다이아나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다지 마음이 쓰이지 않았다.
연기인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서로 대적하고 있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만일 조금 전 난로 앞에서의 두 사람을 목격하지 않았더라면 다이아나의 독설이나 숀의 냉소에 깜박 속았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서로 증오하고 있음을 고의적으로 나타내 보이려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커피를 따르면서 해먼드 부인이 밝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제 겨우 눈이 멎고 바람도 잔 모양입니다. 내일은 아마 좋은 날씨가 될 것 같아요."
숀은 창가로 걸어나가 커튼을 젖히고 휘황하게 비치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운전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다이아나는 눈썹을 떨면서 감겨 붙는 듯한 시선을 퍼디에게로 보냈다.
"이제 그만 가보아야겠어요."
"오늘 저녁은 여기서 자고 가지 그래"
퍼디가 진심에서 하는 말인 줄 알면서도 다이아나는 주저하는 체했다.
"불편을 끼칠 것 같아서..."
그러자 숀이 나섰다.
"내가 스테이션 왜곤으로 바래다 드리지요. 그 차라면 이 정도의 눈은 문제 없으니까. 커피를 마시고 나서 출발하죠."
미란다는 몸이 굳어졌다. 숀과 다이아나가 차 안에서 사랑을 주고받으며 자기를 비웃고 있을 모습이 눈에 떠올라 질투에 가슴이 저렸다.
"벌써 떠날 건 없잖아?"
퍼디는 놀란 듯이 얼굴을 찡그리고 숀을 보았다.
"그럴 필요 없어. 다이아나는 자고 가면 돼. 방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미란다가 쓰던 방에 침대를 마련토록 하지."
숀은 흐느적거리며 돌아섰다.
"다이아나를 바래다주는 데는 별로 시간이 안 걸려요. 게다가 신선한 바람도 좀 쐬고 싶고요."
"수고를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아요."
다이아나는 빠른 어조로 말하였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날 밤에 당신을 데리고 나가면 미란다에게 미안하잖아요..."
다이아나는 의견을 묻는 듯이 슬쩍 미란다 쪽으로 눈을 돌렸으나 미란다는 난롯불에서 눈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톡톡 빨간 불꽃을 튀기면서 오렌지 빛 불꽃이 흐늘거리고 있었다. 미란다는 한 지붕 밑에서 다이아나를 묵게 하는 것은 환영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숀이 그녀를 바래다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굳이 바래다주려고 하는 숀의 태도와 내키지 않아 하는 다이아나의 모습에 미란다는 당혹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본심은 대체 무엇일까. 어느 쪽으로 결정되든 이의를 제기할 마음은 없었으나 그것에 마음 쓰고 있음을 눈치 채이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저 무관심한 태도를 가장하고 있었다.
"졸리는 모양이군."
숀은 조금 앞으로 몸을 구부리고 미란다의 볼에 드리워져 있는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살며시 젖혀 올리면서 애정이 듬뿍 담긴 남편 역을 연출해 보였다. 미란다는 뿌리쳐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아빠와 다이아나의 눈이 있으므로 그렇게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위층에 올라가 침대에 드는 게 어떻겠어? 여기에 앉아 있어도 반은 꾸벅꾸벅 졸고 있으니. 나도 다이아나를 바래다주고 30분 이내에 돌아올 테니..."
"그럼, 먼저 쉬겠어요."
미란다는 노곤한 듯이 일어났다. 퍼디에게 가벼운 키스를 한 후 다이아나를 보고 마음 없는 소리로 말했다.
"안녕"
그리고는 숀에게 안기듯 하여 문께로 갔다. 숀은 문을 열고 미란다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란다는 홀로 걸어갔다. 침실로 들어가자 미란다는 문을 잠그고 옷을 벗었다. 지금은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큰 더블베드에 들어가 불을 껐다. 술기운 덕분에 그녀는 곧 잠으로 빠져들었다.
꿈도 꾸지 않고 한참을 자고 난 후 답답함을 느껴 눈을 떴다. 두통이 몹시 났으며 타는 듯 목이 말랐다. 자는 동안에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고, 눈언저리가 따가왔다. 시계를 보려고 머리를 들었을 때 머리가 빠개지는 듯 아팠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졌다.
새벽 다섯 시가 된다. 아직 새들의 지저귐도 들리지 않았다. 온 집안이 쥐 죽은 듯 고요하였다. 방안에는 물론 미란다 혼자 있었다. 미란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침대에서 내려서서 불을 켰다. 강렬한 불빛이 눈부셨다. 아스피린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미란다는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욕실로 들어가 정리함 속을 뒤졌다.
목욕용 방향제, 비누, 샴푸, 목욕용 발포제, 보디 오일 등이 놓여 있었다. 미란다는 두통을 참으면서 병이나 깡통을 하나하나 뒤져 나갔으나 아스피린은 없었다. 세면대의 거울에는 창백하고 초췌한 얼굴이 비쳤다.
숀은 다이아나를 바래다주러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까? 숀과 다이아나가 나간 후 아빠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튿날 회사에 나가시는 날은 일찌감치 자리에 들곤 하셨으니까. 그렇다면 숀이 언제 돌아오든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젠장!"
미란다는 내뱉듯 말하면서 정리함에서 돌아섰다. 진통제를 찾으러 주방으로 가기 위해 실크 가운을 걸치고 문으로 갔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미란다는 짜증스레 손잡이를 내려다보았다.
망가진 것일까? 다시 한번 잡아당기고 나서야 문득 옷을 갈아입기 전에 문을 잠그고 그 대로 두었던 생각이 났다. 숀은 어디에 있는 걸까. 침실의 문이 열리지 않았으므로 다시 나가 버린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돌아오지 않은 것일까?
미란다는 발소리를 죽이고 층계를 내려갔다.
정원에 쌓인 눈에 반사된 서광이 주방 전체를 희미하게 밝혀 주고 있었다. 진통제는 곧 찾을 수 있었다. 미란다는 두 알을 손에 들고 냉수와 함께 마시고 나서 창 밖의 나뭇가지를 내다보았다.
눈이 나뭇잎 하나 없는 앙상한 가지를 감싸고 희미한 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5분쯤 지나서 다시 현관을 지나치려 할 때 미란다는 어디에선가 나무의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귀를 기울였으나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층계를 올라가 방으로 돌아왔다. 뜨거운 코코아가 든 컵에 신경을 쓰면서 방 한가운데쯤 갔을 때 갑자기 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너무 놀라 하마터면 컵을 떨어뜨릴 뻔하였다. 떨어뜨리지는 않았지만 코코아가 손에 튀는 바람에 숨을 죽이고 뜨거움을 참아야 했다.
"정말 참!"
숀은 급히 컵을 받아 옆 테이블에 놓고 휴지로 손을 닦았다.
"거실의 의자에 기대어서 잤단 말이야"
숀은 목소리를 죽이고 말하였으나 그 음색에 담긴 음산함에 미란다는 소름이 돋았다.
"두번 다시 문을 잠그고 내쫓는 일 따윈 하지 말아 줘.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거죠?"
미란다는 턱을 내밀고 도전적인 어조로 되물었다.
"위협하고 싶겠지만 그렇게는 안될 걸요?"
숀은 뺨이 굳어지고 눈이 험악해지면서, 입술을 꽉 다물었다. 검은 스웨터에 회색 바지 차림으로 어제 저녁과 똑같은 복장이었다. 머리는 헝클어졌고 턱 주위에는 거뭇하게 수염이 자라 있었다.
그가 성큼 한 발을 내디디며 다가섰을 때 미란다는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안간힘을 쓰며 참았다. 이젠 둘만 있는 것이 아니다. 큰 소리만 쳤다 하면 금방 아빠가 달려올 것이다.
"왜 문을 잠갔어?"
"당신이 다이아나한테서 자고 올 걸로 생각했기 때문이죠."
미란다가 태연히 말해 버리자 숀은 놀라움으로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
"지금 말한 대로예요."
"알아들었어. 하지만 그게 무슨 뜻이지?"
그는 천천히 물었으나 미란다는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바보가 아니란 말예요."
숀은 말없이 그녀를 노려보더니 그녀가 침묵을 더이상 견뎌낼 수 없을 즈음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바보인 게 아니라 머리가 어떻게 되어 있는 거야. 이번엔 또 무슨 꼬투리를 잡을 작정인가? 내가 다이아나에게 추근거리기라도 했다고 할 작정인가? 그런 짓을 할 바에는 코브라에게 물리는 것이 낫겠어. 어젯밤 나는 다이아나에 대해서 아버님과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었어. 그녀의 음모나 야심을 이야기해 드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해서였지. 어떤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지 모르겠지만, 증거도 없이 날조한 누명을 뒤집어쓰는 건 이젠 딱 질색이야"
"증거가 없다고요?"
미란다는 앙칼지게 말꼬리를 잡았다.
"어젯밤 당신의 볼에 묻어 있던 루즈 자국은 누구 건가요? 내가 아빠와 같이 2층으로 올라가 있는 동안에 다이아나가 키스한 거죠? 똑똑히 이 눈으로 보았으니까 부정하려 해도 안 돼요."
숀은 씁쓸히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미란다를 바라보았다.
"대단한 관찰이군. 분명히 키스를 받았어. 하지만 그것은 다이아나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던 거야. 그녀의 계획을 내가 아버님에게 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말이야"
미란다의 머릿속에서는 의혹과 희망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일까? 숀의 표정에서는 죄의식 따위는 그림자조차 읽어 낼 수가 없었다.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미란다는 털썩 침대 위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아빠에게 다이아나 이야기를 한 거군요?"
"누군가가 말씀드리지 않으면 안될 시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여자에 대한 아버님의 생각을 분명히 알 수 없어서 처음에는 넌지시 운만 떼 보았지. 그러다가 진상을 알려드려도 아버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지는 않을 것 같길래, 당신이 엿들은 이야기 내용과 당신과 아버지가 2층에 가 있는 동안에 나와 다이아나가 나눈 이야기를 모조리 털어놓았지."
"내가 엿들었다고 다이아나에게 말했어요?"
미란다는 얼굴을 붉혔다. 몰래 엿들은 것을 다이아나에게만은 알리고 싶지 않았다. 행실이 바르지 못한 하녀처럼 열쇠구멍으로 들여다보고 엿듣기나 하는 천박한 여자로 오해받고 싶지 않았다. 숀은 안타깝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 얘기야 안했지! 얘기할 필요도 없잖아? 내가 전무이사가 되면 지금 비서를 그대로 쓸 생각이니까, 다이아나더러 다른 직장으로 옮기라고 했지."
미란다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래, 다이아나는 뭐라고 하던가요?"
숀이 엷은 웃음을 띠었다.
"뭐라고 했겠어? 자신은 퍼디 보스턴 밑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지 내 밑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 내가 한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야. 사장님께 이 이야기를 하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지. 단, 그에 앞서 우리의 결혼식 전날 밤에 다이아나가 사촌과 밀담했던 내용을 사장님께 말씀드리겠다고 덧붙여서 말이야. 그 여자, 깜짝 놀라더군. 그리고 나에게는 다이아나가 한 말을 모조리 증명할 수 있는 증인이 있으니 부정해도 소용없다고 아예 못을 박아 버렸지."
미란다는 크게 눈을 떴다.
"증인이 누구냐고 대들지 않았어요?"
숀은 조금 떨어진 곳에 앉더니 팔을 짚어 몸을 버티고는 씽긋 웃었다.
"다이아나는 멋대로 지레짐작하고 사촌 폴을 굉장히 비난해대더군. 출세에 눈이 뒤집힌 폴이 다이아나를 배신하고 나에게 정보를 팔았다고 생각한 거야. 한참 폴을 헐뜯고 나서 이번에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자기가 거짓말을 했으며, 자기가 말한 것은 모두가 사실이 아니라고 우겨대는 거야. 하지만 그 여자 자신도 납득이 가지 않을 억지 소리였어. 설득력이 없었지. 한참 동안 그 여자는 머리가 혼란한 것 같았어. 다이아나 같은 여자로서는 사람 앞에서 이성을 잃는다는 것은 굴욕적인 일인 거야. 나를 칼로 찌르기라도 할 듯한 표정이었어."
미란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이아나의 심정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당신에게 키스한 거로군요?"
"그래, 당신이 들어오기 직전에 말이야. 갑자기 그 여자의 어조가 바뀌더니 나와 둘만 거래하지 않겠느냐고 제의해 왔어. 내가 단호히 거절했더니 유혹으로 나오는 거야. 내 입술에 키스를 하려고 했는데 내가 피하는 바람에 입술이 볼을 스친 거야"
"그때,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멋대로 결론을 내린 거군? 식사 때도 곤드레가 되도록 술을 마시고"
"곤드레가 되지는 않았어요!"
"그렇게까지는 안 되었지만 2층으로 올라갈 수 있을까 하고 안절부절못했었어. 데려다 줘야 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야"
미란다는 토라져서 항의했다.
"와인 몇 잔 마신 것뿐이잖아요! 과장해서 말하지 마세요!"
"내가 문까지 데려다 주지 않았더라면 문이 어느 쪽에 붙어 있는지도 몰랐을 텐데..."
"피곤했던 거예요!"
숀이 껄껄 웃었다.
"질투를 하고 있었던 거야"
"천만에요!"
미란다는 얼굴을 붉히고 정색을 하며 부정했다.
"질투라뇨? 웃기지 마세요. 당신에게요? 당신에 대해선 털끝만치도..."
"다이아나가 쏜 화살은 제대로 과녁을 맞힌 셈이잖아? 그 여자의 키스가 노린 건 거기에도 있었어. 키스 장면을 당신에게 보여 우리들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려고 했던 거야. 여자란... 겁이 나"
숀은 몸을 옆으로 돌리고 더블 베드를 가볍게 다독거렸다.
"당신을 괴롭혔던 원인의 하나가 이거였지?"
미란다는 할 말을 잃고 고개를 떨구었다.
"당신은 사람의 마음을 읽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이것으로도 알겠지?"
"그래요."
미란다도 하는 수없이 인정하였다. 숀의 마음을 꿰뚫어보려고 해보았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었다.
"특히 당신의 억측은 너무 심해. 여자란 누구나 다 이렇게 비뚤어진 해석을 하는 거야? 난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어."
숀은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떠올렸다. 미란다는 반론하지 않았다. 숀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제 자신의 마음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아빠는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숀은 완전히 마음을 놓은 자세로 다시 침대에 다가왔다.
"또, 또, 그렇게 해서 얼버무린단 말이야! 구석으로 몰리면 언제나 화제를 돌려 도망치니까"
숀은 냉철히 관찰하고 있었다.
"아버님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놀라지는 않으셨어. 내가 다이아나를 바래다주고 돌아와서 아버님께 다 말씀드렸지. 어젯밤 아무래도 다이아나를 재워선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버님께서 그 여자의 의도에 말려들기 전에 그 이야기를 해두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 만약 다이아나의 유혹의 덫에 걸린 뒤라면 내가 충고하는 것쯤으로는 아무런 효과도 없을 것 같기에 말이지. 그 여자의 본심을 알고 난 지금에도 아버님은 다이아나에게 미련을 느끼고 계실지 몰라"
미란다가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숀은 냉엄하게 말했다.
"미란다. 현실에서 눈을 돌리면 안 돼. 아버님도 극히 평범한 남성이셔. 다이아나는 아주 섹시한 여성이고. 그런 형을 좋아하는 남성도 있거든. 아버님이 그러신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아버님이 다이아나에 대하여 두 가지 관심을 갖고 계신 것을 알았어. 아버님은 다이아나의 육체에 끌렸고 그리고 머리가 좋은 점에 감탄하고 계셨어. 그러나 한편으로는 의심하고 계시기도 했어. 아버님은 다이아나에게 청혼하지는 않으실 거야. 당신이 다이아나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숀은 미란다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거야. 당신에게는 충분히 다이아나의 음모를 저지할 힘이 있었으니까 말이야. 아버님에게는 이 세상에서 당신만큼 소중한 존재는 없어. 그런데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상대와 결혼할 까닭이 없잖아?"
"어쩐지 다이아나가 가련해지는군요."
숀이 웃었다.
"자업자득이라는 거야. 그 여자는 목적에만 눈이 어두워 상대의 성격을 파악하는 일을 소홀히 했던 거야. 아버님은 일에 대해서는 엄격하지만 반면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계셔. 그러므로 결코 가정적이라고 할 수 없는 다이아나를 받아들이지 않으실 거야. 아버님처럼 착하신 분에게는 행복하게 해드릴 수 있는 따뜻한 여성이라야 돼"
숀은 미란다의 표정을 살폈다.
"당신만 해도 아버님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까? 별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애. 그렇지 않다면 그날 밤 집을 뛰쳐나가 클레어에게로 가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거고, 아버님과 차분히 상의했을 거야. 그분만큼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 주는 분도 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회사를 여기까지 성장시켜 왔겠어?"
"어머, 당신은 사업과 감정과는 별문제라고 했잖아요? 그날 밤 나는 다이아나의 말을 듣고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어디로든 가서 혼자 생각하고 싶었던 거예요."
"당신은 생각하려고만 했지 느끼려고는 하지 않았잖아"
숀은 침대 위로 슬쩍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미란다는 황급히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래서 다이아나는 회사를 그만두나요?"
숀은 눈에 야릇한 빛을 번득이면서 끄덕였다.
"퇴직금을 상당한 액수로 요구하겠지만 아버님은 두말없이 주실 거야. 그 여잔 유능하니까 곧 다음 일자리도 얻을 수 있을 거고"
"밤새 의자에 앉아 계셨다면 피곤하겠네요?"
미란다는 빠르게 말하였다.
"좀 주무시면 어떻겠어요? 지금은 6시지만 아무도 깨우러 오지는 않을 거예요."
미란다는 일어서려다가 숀에게 손목을 잡혔다. 너무 꽉 잡혀 비명이라도 지를 정도로 손목이 아팠다.
"아무도 오지 않기를 바라는 쪽은 당신이지?"
숀은 미란다의 몸을 끌어당기고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또 문을 잠갔어?"
미란다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네, 하지만..."
"됐어."
숀은 미란다를 구겨진 시트 위에다 밀어 눕혔다.
"잠시 동안은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으니까. 지금까지 허송해 온 시간을 벌충해야겠어..."
미란다는 얼굴이 확 달아올라서 그의 두 어깨를 잡고 몸을 떼려고 하였다.
"숀, 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함께 살 수는 없어요. 아까 말하지 않았어요? 아빠에게는 아빠를 행복하게 해줄 여성이 어울린다고. 내게도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이 필요한 거예요. 아내로서 조건이 좋다든가, 회사의 사장이 될 수 있다든가 그런 이유로 결혼하는 사람 따위는 말고 말예요."
숀의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의미상의 논쟁이라고 말하지 않았어? 당신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밤새도록 사랑의 정의를 논하고 앉아 있어도 해결되지 않아. 그보다도 단 한 시간, 당신이 나를 멀리하는 것을 그만둔다면 서로가 이론이 아닌 더 근본적인 것을 논할 수가 있어."
"섹스와 사랑은 다른 거예요!"
미란다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기 시작했다.
"내가 당신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물론 그것만은 아니야. 하지만 말로 이해하려고 하느니보다 훨씬 더 간단하리라고 생각해.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어도 서로 엇갈릴 뿐이니까. 당신은 결론을 서두르는 경향이 있고, 머릿속에서 지어낸 것을 감정으로써 포착하려 들고 있어. 다이아나와 나에 관한 것만 해도 그랬잖았어? 만일 당신이 그 여자를 똑똑히 관찰했더라면 그녀가 분노에 떨고 있는 것을 간파했을 거야. 한데 그렇지 않았어! 당신은 그 여자를 요부로 단정해 놓고 나와 다이아나가 수상한 관계일 거라고 일방적으로 못을 박은 거야, 그렇게까지 잘못 짚을 수는 없는 것인데"
"하지만 이 결혼이 당신과 아빠가 꾸며 놓은 것이라는 데 대해서는 옳았잖아요?"
숀은 딱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당신과 데이트하도록 아버지의 권유를 받았던 것은 사실이야. 그리고 "미란다. 당신을 사랑해요." 하고 말한 일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고. 당신이 사랑스럽게 여겨져서 데이트 신청을 했었어. 기분이 맞아 만나는 회수가 더해 갈수록 함께 있는 것이 즐거웠고. 하지만 당신에 대한 사랑에 빠져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어. 내 마음은 그런 식으로는 작용하지 않아. 전에도 말했지만 "사랑한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의미인지 난 알 수가 없어.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당신의 눈이 아주 아름답다는 것, 당신에게는 푸른 드레스가 썩 잘 어울린다는 것, 손으로 어루만지고 싶은 부드러운 살결을 갖고 있다든가, 그 밖의 여러 가지... 걸핏하면 딴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 말고는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뿐이야"
미란다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조용히 누워 있었으나 좀 더 분명한 것을 끌어내고 싶었다.
"난 내 자신의 감정을 분석하기를 좋아하지 않아"
숀은 갑자기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실룩였다.
"당신에게 감정이 있어요?"
"무엇을 말해 주길 원해? 물론 감정이 있지. 잘못 표출되어 당신에게 사납게 굴게 될까 봐 두려울 지경이야. 익사할 뻔했던 남자를 당신이 구해 주었었지? 그 자에게 질투를 느끼고만 내 자신이 도무지 싫었지만, 그건 이성으로서도 억제할 수가 없었어. 당신이 나의 본심을 캐보려고 그자에게 마음이 있는 것처럼 해 보이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미란다는 반쯤 웃으면서 물었다.
"내가요?"
"그래, 순진한 척하지 말아. 내가 그 녀석을 시샘하도록 하려고 했잖아?"
"어이없는 소리 말아요. 마음대로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는 건 누군데"
미란다의 긴 속눈썹 속에서 짙푸른 눈동자가 번쩍거리고 있었다.
"여자에게는 야성적인 면이 있어. 그래서 호랑이처럼 죽이기를 즐기지. 그걸 교화시키기란 아주 어려워"
미란다는 발칵 화가 나서 눈을 치켜 떴다.
"말이면 다 하나요! 당신이 그렇게 교화된 분이라면 어떻게 아무 죄 없는 마티 녹스를 질투하지요? 그는 생명의 은인인 나에게 감사했을 뿐이었어요. 그런데도 사회의 적이나 되는 것처럼 취급하고는...?"
"감정으로 흘러 버렸기 때문이었지. 당신이 그렇게 해달라고 언제나 말했듯이 말이야. 한데 실제로 그렇게 되니까 이번에는 잔소리를 들어야 하나?"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감정적으로 흐를 수 있어요?"
숀의 검은 눈이 번득였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 따윈 한 번도 하지 않았어. "사랑하고 있다."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한 것뿐이야. 당신의 모습을 보았을 때나 당신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을 때에 마치 공중에 떠 있기라도 하듯 얼빠진 기분이 되지는 않았어."
미란다는 침대에 누운 채 두 손으로 숀의 어깨와 목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숀이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란다는 빙긋 웃으며 목덜미를 쓰다듬어 내렸다.
"당신을 원해"
숀은 간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갈망하고 있는지 당신은 모를 거야. 미칠 것만 같아"
"하지만 나를 사랑하고 있지는 않잖아요."
숀의 조급한 몸놀림, 폭발할 듯한 긴장감을 피부로 느끼면서 미란다는 달콤한 소리로 놀리듯 말했다.
"좋을 대로 말해"
숀은 낮게 신음하면서 동시에 미란다를 와락 끌어안고는 비단결 같은 살결을 두 손으로 쓰다듬었다.
"미란다. 이젠 "안 돼"라는 말 따위는 말아줘. 당신을 사랑하게 해줘. 이런 상태가 계속되는 것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괴로와 죽을 지경이야. 당신과 결혼한 건 당신이 나의 아내가 되어 주기를 원했기 때문이야. 죽을 때까지 매일 같이 있고 싶어. 당신을 보고 있는 게 즐거워.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황홀해져. 아무리 같이 있어도 싫증이 느껴지질 않아..."
숀은 눈을 감고 달아오른 얼굴을 미란다의 얼굴에 바싹 대고 키스를 퍼부었다. 미란다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기쁨으로 그녀의 눈은 더욱 빛나고 있었다. 거칠고 흥분된 그의 목소리는 미란다에게 그의 사랑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었으며, 숀 자신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하더라도 미란다의 사랑의 정의에 의하면 그것이야말로 "사랑" 그 자체였다.
"이런 걸 말로 나타내기란 아주 어렵지만"
숀은 격렬히 그녀를 애무하면서 속삭였다. 미란다의 맥박이 빨라졌다.
"내가 어리석어서 자신을 너무 드러낸 것 같아..."
"약한 인간이 된 기분?"
미란다는 숱이 많은 그의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다시 물었다. 필시 숀은 너무도 오랫동안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에 짓눌려 왔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거나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스스로 절실히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데클란을 부양하고 자기 주변의 상황을 극복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숀은 남성다움과 책임감을 자신에게 강요해 왔을 것이다. 나약한 구석을 보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숀에게 있어 사랑이란 세상에 대처해서 오히려 의지를 나약하게 하는 일종의 결점과 같고 그 욕구조차도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미란다는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러한 남성다움이야말로 미란다가 그의 매력으로서 느끼고 있던 부분이었음도 깨달았다. 지금까지 아빠의 보호 밑에서 자라난 탓인지 이상형의 남성상에는 아빠의 이미지가 겹쳐 져 있었던 것 같다. 숀은 이제까지 만났던 그 누구보다도 아빠를 닮았다.
미란다는 그 점에 당혹함을 느꼈으나 본능은 사고력보다 우세했다. 아빠와의 관계와는 다르게 숀과의 사이에서는 껍질을 헤치고 내면의 약한 부분-인간다움-을 쳐다보아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숀이 감추려 하고 있던 그의 약함을 미란다는 확인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미란다는 뜨거운 눈길로 숀을 바라보고는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를 향해 자신의 몸을 굽혔다.
"사랑하고 있어요."
쉰 목소리로 속삭이자 숀의 육체가 굳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숀은 그의 입술로 미란다의 입술을 덮고 그녀의 몸을 더욱 세차게 당기면서 정열적으로 끌어안았다. 몇 분 후 숀의 신음하는 듯한 목소리가 미란다의 귀에 들렸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미란다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고 기쁨의 절정에서 온몸이 떨려왔다. 드디어 그렇게도 기다렸던 사랑의 밀어를 듣고 있는 것이다! 미란다는 황홀의 극에 이르렀으나 봇물이 터진 듯한 숀의 감정의 물결에 휘말려 차분하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숀의 손이 열에 들뜬 것처럼 미란다의 몸을 다독이고 있었다.
"미란다?"
숀은 그녀가 저항하고 있는 줄로 여겼는지 다시 한번 쉰 목소리로 불안한 듯이 물었다. 미란다는 살과 살이 맞닿도록 그녀의 몸을 휘었다. 사랑을 확신한 지금 신부는 더 이상 항거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