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팔트 위에 피는 꽃
정이식
가물거리는 아지랑이가 시커먼 아스팔트 위에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학교 앞 네거리는 오늘도 많은 차량이 꽁무니를 물며 달리고 있습니다. 수업이 끝났는지 한 무리의 아이들이 왁자하니 떠들며 교문을 나와 파란불이 켜진 네거리를 향해 달려갑니다.
"할머니 이거 얼마에요?"
연녹색 잎이 부드러운 가로수 나무 그늘의 할머니처럼, 다래는 아이들을 따라가지 않고 아스팔트 위에 쪼그려 앉으며 자두의 값을 물었습니다. 언제나 값만 묻고 사지 않는 다래의 가난한 호주머니를 할머니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행여나 오늘도 그냥 갈까 미리 걱정을 하며 잘 익은 자두 한 개를 다래의 손에 먼저 쥐여줍니다.
"다래야, 이것 그냥 먹으렴. 너무 익어서 놓아두면 내일은 못 팔기 때문에 널 주는 거야. 걱정 말고 받아라. 응?"
값을 치르지 않고는 함부로 받을 수 없다며 한사코 그냥 가던 다래였습니다.
"할머니 고맙습니다."
할머니의 걱정은 괜한 기우가 되었습니다. 어쩐 일인지 다래는 겸연쩍어하면서도 활짝 웃으며 긴 머리가 땅에 철렁이도록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러며 받은 자두를 손에 쥔 채 보석을 바라보듯 황홀한 표정을 짓더니 일어서서 미끄러지듯 네거리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다리를 심히 저는 제 할머니 손을 잡고 입학식 날 교문을 들어서든 다래의 첫 모습을 떠올리는, 할머니의 얼굴에도 모처럼 평화로운 웃음이 피었습니다. 하늘엔 둥실둥실 흰 구름이 떠 있어서, 가파른 달동네 언덕길을 올라가며 쌕쌕거리는 다래의 머리 위를 그림자를 드리우며 따라가고 있습니다. 빨간 양철 지붕 너머로 다래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할머니의 눈길도 다래를 좇아갔습니다.
저녁이 지나며 어둠이 몰려와서 못다 판 자두를 싸서 할머니가 떠나자, 멀리서 망을 보던 검은 구름이 삽시간에 네거리 하늘 위를 차지하였습니다. 하얀 가로등 불빛에 붙으려 미끈거리며 달라붙던 물방울들이 밤이 깊어가자 비로 변신하였습니다. 신문 배달 소년이 네거리에 나타날 즈음엔 비의 양은 제법 많아져서 하수구 주위로는 발이 잠길 듯 많은 물이 넘쳐났습니다.
"아직 반도 못 돌렸는데 큰일이야. 이러다 학교 지각하겠어."
신호등에 파란불이 오자 네거리를 건너는 신문 소년의 자전거 뒷바퀴로 희뿌연 빗방울들은 튀어 오르며 아침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빨갛고 파란 우산을 든, 햇병아리처럼 신선하고 귀여운 아이들이 네거리로 몰려들 때에도 비는 여전하여서 그칠 줄 몰랐습니다.
"자. 어린이 여러분 어서 건너세요. 파란불입니다."
엄마들의 손에 들린 노란 깃발의 표식에 따라 우산을 치켜든 아이들이 네거리를 건너왔습니다. 고사리손의 마지막 1학년이 건너오고 엄마들은 모두 돌아들 가는데도 다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파란불이 들어오고 또 빨간불이 들어오고 몇 번의 신호가 한참이나 뒤바뀐 뒤, 멀리 언덕을 넘어서는 다래가 아주 작은 점으로 나타났습니다. 비옷을 대신한 하얀 비닐포대를 고깔로 만들어 머리에 쓰고 종종걸음으로 골목을 내려오고 있습니다. 네거리를 건너온 다래는 할머니가 앉았던 자리에 서서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졸졸 빗물이 흘러 들어가는 시커먼 아스팔트 금이 간 사이에 민들레 새싹이 앙증맞게 떡잎 두 장을 쏘옥 내밀고 있습니다. 다래는 나뭇가지에 비닐포대를 걸어두며 민들레 새싹에 말을 걸었습니다.
"민들레야. 할머니가 매우 아프셔서 병간호하느라 늦었어. 이 포대는 할머니 것이거든? 우리 할머니 몸 다 나으시면 돈 벌러 가실 때 써야 해. 잊어버리면 안 되니 꼭 지켜줘. 알았지?"
깨어진 벽돌을 주워 민들레 새싹으로 내려가던 물길을 막아놓고 손바닥을 우산처럼 머리 위에 드리우며 다래는 교문을 향해 마구 달려갔습니다.
다음날은 아이들이 학교에 오지 않는 일요일입니다. 비는 그쳤지만, 네거리는 쓸쓸하기 그지없습니다. 건너는 사람도 드물고 아이들은 영 없건만, 할머니는 아랑곳 않고 아침부터 네거리 한쪽 편에 자두가 담긴 광주리를 들고 와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돗자리 위의 바구니에 담은 자두는 빗물이 채 마르지 않아, 빛깔도 싱싱하니 참 좋습니다. 구름을 비껴 내린 익은 봄볕만 할머니의 성큼 난 흰머리를 매만지며 친구하고 있습니다.
“아이들도 나오지 않는 휴일인데 좀 쉬시지 않고 또 전을 벌렸네요?”
한낮이 되어 따가운 볕을 피해 가로등 그림자를 따라 자리를 옮긴 할머니에게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시내에서 돌아오는 두 명의 엄마입니다.
“새댁 같은 손님 때문에 내가 자리를 지키는 것이라오. 어젠 또 비가 와서 공도 쳤고, 골라 봐요 다 싱싱하니깐.”
"이것. 얼마에요?"
젊은 엄마 한 분이 굵직한 자두 하나를 집어 들었습니다.
"응, 그거, 한 바구니에 5,000원은 받아야 하는데 마수니깐 4,000원만 줘요."
할머니 얼굴에 모처럼 환한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자두를 바구니 채로 들어 비닐봉지에 옮겨 담았습니다.
"에이, 할머니, 비싸다. 조금만 깎아줘요. 3,000원 합시다."
"색시야 안 돼. 이 늙은이 이것 하나 팔아 얼마 남는다고."
자두가 담긴 봉지를 앞에 놓고 젊은 엄마는 계속 흥정을 했습니다.
"할머니, 그럼 이렇게 해요. 서로 반반씩 손해 봅시다. 할머니 500원 나 500원 됐지요?"
"하하하. 물건값은 서로 당기고 밀어야 맛이 나지. 좋아요. 좋아."
5,000원짜리를 3,500원에 팔면서도 할머니는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옷을 잘 차려입은 젊은 엄마도 기분이 좋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잔돈을 받아 지갑에 넣었습니다.
"에이, 현이 엄마 너무했다. 그깟 500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데 왜 깎아?”
네거리를 건너며 나이가 든 엄마가 할머니 들을세라 작은 소리로 말을 합니다.
"뭘 모르시네요? 저 할머니 아들이 대학교수라요. 대학교수."
"응? 아들이 교순데 왜 종일 저런대서 쪼그려 앉아 장사하지?"
"시골서 땅 팔고 집 팔아 박사 만들고 교수 만들어주었더니. 뭐, 미국 가서 산다나? 명절 되어도 코빼기도 안 보인 다네요." "
"그래도 그렇지. 자신의 어머니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모셔가든지 하지 원."
"할머니는 사람이 그리운 겁니다.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과 이렇게 흥정을 하고 그러며 사람 사는 즐거움을 만끽하며 사는 거예요."
"에그, 그것 보면 없다 해도 자식 애 안 썩히는 우리가 더 낫다. 그렇지?"
두 엄마의 머리 위로 어디서 날아왔는지 노랑나비 한 마리가 나풀대며 따라갑니다.
"다래가 요즘은 왜 안 보이는 거야?"
변함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에게 자두를 팔고 있는 할머니는 며칠째 보이지 않는 다래를 걱정하며 먼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 벌써 5일이나 되었네. 다래네 집에 무슨 일이 있나 봐."
빨간 양철지붕 너머로 눈길을 보내는 할머니의 눈가로 촉촉한 이슬이 맺히고 있습니다.
"우리 교수님도 다래만 할 땐, 못살아서 시장바닥에 내버린 과일을 내가 주워 먹였지. 어릴 때 못 먹어서 입이 다 돌아가던 우리 교수님이었잖아. 다래를 보면 자꾸 우리 교수님 어렸을 때 생각이 나네. 다래야, 어디 있니? 자두 좋아하는 너 주려고 이렇게 많이 모아두었는데."
노란 자두를 매만지며 할머니는 혼잣소리로 다래를 찾고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아이들의 소리만 우렁차게 대신 답을 합니다.
"앗! 다래다. 분명 다래야. 얘. 다래야."
달동네 가파른 언덕길에 눈길을 두고 있던 할머니가 기쁨에 겨운 비명을 내쳤습니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선 머슴애처럼 터덜거리며 내려오던 다래는 저를 부르는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할머니.”
다래는 힘차게 달려왔습니다.
"안녕하셨어요? 할머니."
다래는 언제나처럼 할머니 앞에 쪼그려 앉으며 생글거리며 웃었습니다.
"다래야. 왜 학교는 안 나왔어? 그간 무슨 일이 있었니? 이거 너 주려고 할머니가 모아둔 거란다."
전보다 더 야위어 보이는 다래의 얼굴을 보며 할머니는 깊은숨을 몰아쉬었습니다. 다래는 물끄러미 바구니에 담긴 자두를 바라보다 몇 개를 잡아들었습니다. 물렁거리지만 알싸한 자두의 향은 그대로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처럼 고마워하지 않고 자두를 다시 바구니에 담아 할머니에게 주었습니다. 군침을 삼키면서도 할머니가 주는 자두를 먹지 않고 집으로 가져가던 다래를 기억하는 할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다래야. 자두는 많으니깐 돈 걱정하지 말고 어서 먹어라. 집에 갈 때 가져갈 것 할머니가 따로 챙겨 줄게."
"자두, 이제는 필요 없어요."
힘없이 자두를 내려놓은 다래는 일어섰습니다.
"우리 할머니가요……."
다래는 머리를 숙이고 발끝을 비비적대며 울먹였습니다.
“할머니가 왜? 다래야. 할머니한테 무슨 일이 생겼니?”
따라 일어선 할머니는 가늘게 떠는 다래의 어깨를 감싸 안았습니다.
“자두를 좋아하시는 할머니는요, 할머니는 저기, 하늘나라로…….”
다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돌아서서 손으로 눈을 가리며 훌쩍였습니다.
“뿌웅.”
멀리 강가를 돌아가는 기차의 기적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천사가 다녀가는, 말 없는 짧은 시간이 지난 뒤에 할머니는 조용히 다래를 불렀습니다.
"다래야."
돌아서서 걸음을 옮기던 다래가 멈추어 섰습니다. 그리곤 고개를 돌렸습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커다란 눈물방울이 다래의 눈언저리에 그렁그렁 맺혔습니다.
"다래야. 내가 대신 네 할머니가 되어 줄게. 이리 오련?"
할머니의 목소리에도 울음이 섞여 있습니다.
"할머니."
다래는 울먹이며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그래. 다래야.”
“할머니.”
다래는 두 팔을 벌리고 있는 할머니 품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갈라진 아스팔트 사이로 돋아나 노란 꽃을 피운 민들레 한 송이가 배시시 웃음을 짓고 있는, 유월은 아스팔트 위에서 아름답게 영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