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이름엔 그림자도 없느니
송순이 진에게 지극히 형식적인 분부를 내렸다. 단둘이 정을 나누며 시조를 주고받을 땐 그냥 ‘진’이라고 부르다가 일부러 ‘명월’이라 부르는 그 목소리에서 진은 일종의 모멸감을 느꼈지만 그냥 넘어갔다. 몸을 일으켜 벽계수 앞으로 나아간 그녀는 나비가 꽃에 앉는 것보다 가벼운 몸태로 절을 하였다.
“기생 진랑…… 문안드리옵니다.”
흥, 코웃음을 치고 난 벽계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진랑은 이름이고 별호가 명월인가? 명월이라…… 거 참 아무리 기녀의 이름이지만 흔해 빠진 이름이구나. 하하핫! 아주 속된 이름이야!”
유수가 굳이 ‘명월’이라 지칭한 것을 대접이라도 할 심산인지, 아니면 ‘월명’이란 단어를 들먹여 감히 사내대장부를 놀려먹은 데 대한 분풀이인지, 벽계수는 별스레 진의 별호를 트집 잡은 거였다. 몇 사람 껄껄거리고 웃자 벽계수는 더욱 큰소리로 웃는다.
“대감!”
진이 돌연 벽계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한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한 손으로는 자리 바닥을 짚은 채 다소곳이 입을 열었다.
“대감의 별호는 왜 하필 벽계수이오니까? 지킬 수(守) 자가 들어 있어 저는 처음엔 어느 고을 수령쯤 되시는 줄 알았습니다.”
가야금의 국수 엄수 노인이 뚱떵뚱띵 가야금을 타기 시작했다. 그는 칠순이 넘은 노령이다. 새파란 계집애 황진이 감히 왕족에다 고명한 석학인 벽계수한테 버릇없이 구는 게 민망하였는지, 아니면 자기 이름에 ‘수’자가 들어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뜬금없는 이름 타령을 늘어놓는 황진.
“옛날에 매월당 김시습 선생이 대사에게 그러셨대요. 부처 앞에서 참회하고 불법을 닦겠다고 크게 맹세하면서, 속명을 버리고 법호를 따르겠노라고 했더래요.”
“얼씨구!”
손가락이 아니고 입에서 나온 엄수 노인의 추임새였다.
“대사가 손뼉 치고 웃으면서, 심하도다, 너의 미혹됨이여. 너는 아직도 이름을 좋아하는구나. 중이란 육체가 마른 나무와 같으니 목비구라 부르고 마음이 식은 재와 같으니 회두타(행각승)라 부르려무나.”
엄수 노인이 아주 조심스레 가야금 추임새를 넣었다.
“산이 높고 물이 깊은 이곳에서 이름은 있어 어디에 쓰겠느냐. 네 육체를 돌아보아라. 이름이 어디에 붙어 있느냐? 너에게 육체가 있기에 그림자도 있다지만, 이름은 본래 그림자조차 없는 것이니 장차 무엇을 버리려 한단 말이냐? 네가 정수리를 만져 머리카락이 잡히니까 빗으로 빗은 것이지, 머리카락을 깎아 버린 이상 빗은 있어 무엇에 쓰겠느냐?”
“……”
“네가 장차 이름을 버리려고 한다지만, 그 이름 옥이나 비단도, 땅이나 집도, 금이나 주옥이나 돈도 아니다. 밥이나 곡물도 아니며, 밥솥이나 가마솥이나 큰 가마나 큰솥도 아니며, 광주리도 술잔도, 곡식 담는 각종 그릇도 고기 담는 제기도 아니다. 하물며 차고 다니는 주머니나 칼이나 향낭처럼 풀어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비단 관복이나 학을 수놓은 흉배, 서대나 어과(물고기 모양을 나무에 새기거나 구리로 빚어 허리띠에 차던 관리의 신표)처럼 벗어 버릴 것도 아니다. 양쪽 끝에 원앙을 수놓은 베개나 술이 달린 비단 장막처럼 남에게 팔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때나 먼지처럼 물로 씻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생선 가시가 목에 걸렸을 때에 물까마귀 깃으로 토해내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부스럼, 마른 딱지처럼 손톱으로 떼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각무경에 나온 이야기를 네가 아는구나.”
송순이 혀를 내두르며 진의 이름 타령을 중단시키자, 벽계수가 부추겼다.
“나머지 이야기를 마저 해 보아라. 아마도 거기까지뿐일 터?”
진이 배시시 웃으며 이름 타령을 계속했다.
“그게 네 이름이기는 하다.”
벽계수가 어깨를 움찔 들썩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하지만 너의 몸에 속한 것이 아니라 남의 입에 달려 있는 것이다. 남이 부르기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되고 영광스럽게도 치욕스럽게도 되며 귀하게도 천하게도 되니, 그로 인해 기쁨과 증오의 감정이 멋대로 생겨난다. 그 때문에 유혹을 받기도, 기뻐하기도, 두려워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공포에 떨기까지 한다. 이빨과 입술은 네 몸에 붙어 있는 것이지만 씹고 뱉는 것은 남에게 달려 있는 셈이니, 네 몸에 언제쯤 네 이름이 돌아올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만! 그만 하여라.”
벽계수가 절규하였다.
“아이고, 졌다. 항복이다. 열경(김시습의 자)까지 들먹이며 이름 타령을 해대는 재색 겸비 자네에게 그 누가 대적하리. 황진이고 진랑이고 명월이고 간에, 이후론 두 번 다시 내가 네 이름을 걸고넘어지는 일은 없으리라.”
한동안 엄수 노인의 가야금 소리에 모두가 취했다. 그 잠시 후에는 모두들 넋을 잃은 채 진의 평온한 노랫소리에 귀를 팔았다.
얼음 위에 댓닢자리 보아,
임과 내가 얼어 죽을망정,
정 둔 오늘 밤 더디 새오시라 더디 새오시라
……
남산에 자리 보아 옥산을 베고 누워,
금수산 이불 안에 사향 각시 안아 뉘어,
약 든 가슴을 맞추옵사이다, 맞추옵사이다
전혀 음란하지 않게 들리는, 진의 ‘만전춘별사’가 끝나자마자 엄수 노인이 별안간 무릎을 쳤다.
“과시 불세출의 명기로세!”
그러나 진의 이름 타령에 기가 팍 질려버린 벽계수는 내내 꿀 먹은 벙어리였다.
“얘들아, 춤을 추어라!”
송순의 지시에 따라 기생들이 떼지어 춤추기 시작했다.
“사또, 나는 혼자 이 아래나 두루 구경하고 오지요.”
벽계수 자리를 뜨자 그녀도 슬며시 자취를 감췄다.
계곡 쪽이다. 잔뜩 풀죽은 사내가 아름다운 말을 타고 터벅터벅 내려가고 있다. 진은 단아한 벽계수의 뒷모습을 확인하고는 지름길로 가서 혼자 달빛을 받았다.
후루룩,
길섶에 무성한 싸리 잎을 손으로 훑으며 진은 혼잣말을 하였다.
‘대감이 내 첫 번째 남자, 그런 거요?’
송순이 첫 남자라면 벽계수는 두 번째 남자라야 앞뒤가 맞는 말이다. 그런데 진은 벽계수더러 당신이 내 첫 남자이냐고 스스로 묻고 있었다. 그녀로선 영육이 합치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스스로 극도의 희열감을 느끼지 못한 성관계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벽계수가 통과할 길목 널따란 바위에 걸터앉은 황진.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달빛 아래 무성한 그림자를 던져놓고 있었다.
씨륵 씨륵 씨르르……
풀벌레 소리가 오스스 몸을 떨게 한 바로 그때, 짤랑짤랑 은방울 소리가 들렸다. 붉은 빛깔 말과 말 위에 앉은 귀공자의 모습도 선명히 드러났다. 드디어 바로 앞을 지나는 순간, 진이 짧은 헛기침을 했다.
“밤도 깊은데 웬 여자인가?”
“웬 여자가 아니라 기생 명월입니다, 대감!”
“요괴로구나!”
매몰찬 한 마디를 내던지고서 그는 말고삐를 잡아챘다.
“이랴!”
말이 주춤거렸다. 언뜻 벽계수의 허점이 보였다. 진은 한 팔을 소나무 등걸에다 척 걸쳤다. 뱅싯 웃고는 목청을 뽑았다.
청산리 벽계수야!
말이 멈칫하였다. 청산에 흐르는 푸른 시냇물아! 하고 빗대어 불렀든 어쨌든 말의 귀엔 제 주인 이름이었다. 그래서 ‘누가 주인님을 부릅니다.’하고 일단 멈춤 자세를 하는 거였다.
“이랴아!”
벽계수는 다시 말을 몰아세웠고 진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이랴 가자!”
일도 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이랴!”
명월이 만공산 한데
쉬어 간들 어떠리.
달빛이 이리도 밝은데, 명월이 바로 여기서 그대를 기다리는데, 좀 쉬어 간들 뭐 어디 덧나겠냐? 하는 권유가였다.
과연 벽계수는 말머리를 돌려세웠다. 말도 히이잉, 찬성표를 던졌다. 그는 명월 아래서 명월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허겁지겁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이내 바위로 뛰어올라 진의 손을 덥석 잡고는 뉘우치듯 말했다.
“그대를 모르고 십 년을 사느니보다 오늘 하룻밤만큼은 그대와 있으련다.”
“내일은 어쩌시렵니까?”
진이 싸늘하게 물었다.
“일도창해하면 돌아오지 못할 테니 어찌 쉬어 가지 않겠느냐?”
벽계수, 그는 무너지고 말았다. 절대로 돌아보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그 여자 품에.
둘은 자하골 진이 집에서 같이 하룻밤을 보냈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지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하룻밤. 진 스스로는 아무런 감흥도 맛보지 못한 육체끼리의 교접이었지만, 그래서 벽계수 또한 첫 남자 축에 들진 못하는 결과를 빚었지만, 진은 송순에게나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해 벽계수를 홀렸고, 받아들였다. 따라서 벽계수는 진이 하는 말이 추상같은 명령으로 들릴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아침이 왔다.
“진랑!”
“예, 대감!”
벽계수의 눈이 간절한 소망으로 흠뻑 젖어 들었다.
“내 오늘 하룻밤만 더 너와 더불어 지내고 싶다.”
“언약은 어떡하고요?”
“언약이란 다시 할 수도 있지 않으냐? 너와 나만의 언약이니 말이다.”
“나으리완 단 하룻밤이 인연인걸요.”
“내 여생을 다할 때까지 너와 더불어 살면 아니 되겠느냐?”
“기녀란 한 지아비를 섬기지 못할 팔자이옵니다.”
“한 지아비를 섬기면 될 게 아니냐?”
“그러기가 싫어서 기생이 되었습니다.”
“허허 요것!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저는 대감의 소실로 들어앉아 층층시하에 평생을 얽매어 살고, 대감은 큰소리 탕탕 치시다가 일도창해하면 돌아오지 못할 것이 한스러워 또 어느 여자의 집에서 쉬시고…… 싫습니다.”
“아니다. 명월이 없는 곳에 내 어디서 쉬겠느냐?”
“날이 저물기 전에 올라가시지요, 나으리!”
진의 쌀쌀한 태도는 어젯밤을 같이 보낸 여자가 맞는가 싶게 낯설었다. 앞으로 열 번을 더 찍어도 다시는 넘어오지 않을 것을 알아챈 벽계수는 짐짓 한탄했다.
“내 괜히 개성에 와서 한을 남기고 가는구나. 괜히……”
벽계수와는 달리, 진은 전혀 다른 문제로 서글픔을 씹었다.
‘도대체, 내가 불감증? 아아, 그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18. 가까이 오면 그대 아니고
1550년 명종 5년 가을, 진의 나이 스물두 살.
‘단 하나 내 사랑은 누구일까?’
누굴 불같이 사랑해보고 싶은데, 그런 남자를 만난 적이 한번 없었다. 죽도록 사랑한다 말하고 싶은데, 그가 아직 나타나질 않는 거였다. 말 한마디 못 해 보고 죽어버린 총각. 너무나 큰 청산이어서 간신히 그 발치만 적셨던 서경덕 선생. 비밀스런 정을 나눴던 전임 유수 송순. 그리고 단 하룻밤 인연을 맺고 보낸 벽계수. 그 누구도 진정한 사랑의 대상은 아니었다. 몸과는 달리 사랑만은 주고 싶다고 주어지는 게 아니었다. 살기 위한 방편으로 몸을 내놓을 수는 있으나, 사랑만은 그럴 수가 없는 법. 그녀는 차츰차츰 그 이치를 터득해갔다. 영육을 동시에 불태울, 그래서 어떤 환희의 극치에서 죽어도 좋을 만큼의 찰나에 영혼을 던지는 그러한 사랑이란 과연 없는 것일까?
‘화담 선생님 지적대로, 내가 정말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어서? …… 그래서 내가 불감증이란 말인가?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신의 문제였다. 분명히 정신세계에만 한정된 것이라고 하셨다.’
명나라 사신이 자주 이 나라에 드나들었다. 그들은 자기네의 잇속으로 자진해서 오기도 했으나 때로는 이 나라 정객들이 자기네 패의 잇속을 위하여 청을 넣어 오는 경우도 많았다. 그 일행이 어느 날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길에 개성을 통과한다는데, 60여 명의 패거리라고 했다.
“오늘 저물녘엔 천수원 큰길이 구경꾼으로 인산인해를 이룰 걸세.”
사실이었다. 고려 인종 때에 이녕이라는 화가가 있었다. 그의 작품들 중에서 [천수사 남문도]는 송나라 상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인종에게 바친 그림이다. 인종이 그림을 보니 대단히 훌륭하였다. 왕은 이녕 등 여러 사람들을 불러 그림을 감상시켰는데, 이녕이 보니 자기 그림이었다. 그래서 이녕은 “전하, 이 그림은 송나라 사람의 것이 아니라 신이 그린 개성 ‘천수원도’ 이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왕은 물론 이녕의 스승 이준이까지도 이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녕은 하는 수 없이 그림 배접부분을 조금 떼어 자기가 표했던 필적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이를 본 사람들이 모두들 탄복하였다. 이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이라고 정평 나 있는 천수원은 고려조 5백 년 내내 손님을 맞아들이고 배웅하고 하는 터전이었다. 왕조는 바뀌었으나 지금도 천수원은 그 영빈송객의 구실을 하고 있으며, 때로는 공자왕손들이 미희를 거느리고 와서 풍악을 울리고 시를 노래로 풀어 즐기는 곳이기도 하였다.
정자 밑 맑은 강엔 고니가 떠있는데,
술을 들고 여기 와서 그대를 보낸다.
반나마 살아온 인생 시름에 겨워
취하도록 마셔서 인생사 잊어보리.
진 역시 천수원에 올 때마다 바로 이 시조를 노래 부르곤 했는데, 이승소가 천수원에 와서 읊은 시조다. 이승소는 성종시대의 문장가로써 학자이며 재상이었다. 그는 신숙주 강희맹 등과 힘을 모아서 [국조오례의]를 편찬한 바 있는 이름 높은 학자였다. 게다가 시조 또한 능해서 내내 후인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고 있는 거였다. 그녀는 좋은 시가를 읊으면 마치 구만리 깊숙한 영혼에서 달음박질쳐오는 열정에 사로잡히는 것 같았다.
“온다!”
천수원을 중심으로 모여 있던 남녀 군중은 외국 사신 일행이 온다는 소리에 일제히 까치발을 하면서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개성에서 하룻밤 자고 간대나 봐요.”
“신임 유수가 한 자리 베푼다던데?”
송순이 지난봄에 이조참판이 되어 한양으로 올라가고 새 유수가 발령받아 온 것이었다.
“명월이 또 한 몫 보겠네.”
“그들이 황명월일 보면 침을 질질 흘릴 거야.”
구경꾼들은 황진 바로 옆에서 황명월 이야기로 입방아를 찧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의 머리모양과 옷차림은 보통 아낙네와 다를 바 없었다. 얼굴에도 전혀 화장을 하지 않은 맨 살결 그대로였다. 송순이 개성 유수 자리를 내놓고 한양으로 올라가게 될 즈음 그녀 황진도 틀에 박힌 관기 노릇에 염증을 내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서 부득이한 상황 아니고는 일쑤 이런 차림을 해왔다. 옆에 행색이 수상한 젊은 사내가 하나, 뒤춤에 괴나리봇짐을 삐뚜름하니 매달고 서 있었다. 옷차림이 남루한 편은 아니지만 오랜 나그넷길인 모양이었다. 갓은 낡아빠진데다 발에 꿴 미투리는 닳아빠졌다. 얼굴은 햇볕에 그을고 먼지와 피로에 찌들었다. 그래도 눈은 이글이글 빛난다. 선비다운 지혜와 만만찮은 패기가 깃들어 있기도 하였다. 어쩌다 눈이 마주쳤다. 이지함! 진은 알지 못할 전율에 몸이 떨렸다.
“지함 형님……”
1545년 을사사화 당시 지함의 친구인 안명세가 사관이었다. 그는 사화의 모든 과정을 ‘춘추필법’으로 사초(史草)에 담았는데, “돌아가신 선왕(인종)이 아직 빈소에 계신 데 같은 날에 세 대신을 죽이니 어찌 불행한 일이 아닌가?”라면서 사초를 작성하였다. 윤원형 일파가 많은 선비들을 잡아다가 매질해서 옥사(獄事)를 일으켰고, 명종을 아예 젖히고 문정왕후가 직접 주살을 결정하자, 과연 누가 의기양양하였고 누가 비통해했는지를 일일이 기록하였다. 그리하여 을사사화의 뒤를 이은 1548년, 송순이 개성부 유수로 왔던 그해에 이른바 ‘안명세 필화사건’이 터졌었다.
사초는 당대에 공개하지 않는 게 절대 원칙이고 임금조차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동료 사관이었던 한지원이 지함의 죽마고우 안명세의 기록내용을 윤원형 일파에게 고자질하였고, 소윤 일당과 문정왕후는 이에 격분한 나머지 안명세를 즉각 붙들어다 중죄로 다스렸던 거였다. 명세는 강직하였다. 그는 사초의 수정을 요구한 형리들에게 끝까지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가는 형장에서도 사관의 책무에 한 줌 부끄러움 없이 당당히 소신을 밝히며 의연히 망나니의 칼을 받았다. 명세가 조복을 입은 채 수레에 실려서 형장으로 가는 걸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시장 사람들까지 모두 울었다. 한양의 당현(唐峴)에서 참수 직전에 한 친구가 처형 시각에 앞서 술을 먹였더니 명세가 ‘잘 있거라’ 하였고, 이어서 집안사람들에게는 ‘부디 자식들은 글을 가르치지 말라’ 하였다. 사실은 그런 말조차 필요 없었다. 그의 처자들이 모두 노비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청년 이지함에게 안명세의 억울한 죽음은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지함은 처형의 순간순간을 낱낱이 지켜보면서 대성통곡하고는 친구의 시신을 수습해주었다. 그리고 안명세와 친한 사람은 모조리 잡아들인다는 어명이 내려지자, 도피 아닌 도피 생활을 시작하였다. 결정적으로 벼슬길을 포기하고 은거하는 처사의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도저히 그럴 수밖에 없는 세상 형편이었다.
지함은 진이 옆으로 바짝 붙어서면서 넌지시 말을 걸었고, 진이 차분하게 대답하였다.
“화담 선생님 돌아가신 후로 처음 뵙는군요.”
“자네가 극구 기녀가 되겠노라 고집을 부렸다는 이야길 선생님한테서 들었지.”
“아이쿠 형님도, 별 쓸데없는 이야길 다 기억하시는군요. 그런데 요즘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시나 봅니다?”
“그 후 사연이 많았다네. 이렇게 본격적으로 싸돌아다니게 된 까닭 말일세.”
친구 안명세의 죽음으로 깊은 실의에 빠졌던 지함은 어느 날 장인과 처남들의 운수를 짚어봤다. 그러자 바로 친구와 엇비슷한 불길한 괘가 나왔다. 그는 큰형 지번에게 “내가 처가를 관찰했더니 길한 기운이 없습니다. 얼른 피하지 않으면 장차 나에게까지 화가 미칠 것이오.”라고 말하고선 처자를 데리고 서쪽으로 나갔었다. 그러나 부질없는 일이었다. 지함의 장인 이정랑이 역모 사건의 괴수로 몰려 모진 태형을 받다 죽는 바람에 처가는 하루아침에 역적 집안이 돼서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 처남들도 죽어나갔고, 장모와 처남댁들 그리고 처조카들도 종살이를 해야 했다. 그리고 지함 자신도 연좌법에 의해 천민 신분으로 전락한 지경이었다.
진은 가슴이 미어졌다.
“허엽 형님한테서 어렴풋이 소식 들었습니다. 할 말이 없군요.”
여자가 외간 남자 옆에 서 있는 것조차도 망측한 일인데 허물없이 말까지 걸다니,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그것뿐. 발돋움하는 진을 위하여 그는 한 발 뒤로 물러섰을 뿐이었다.
울울창창한 창검들이 숲 같이 즐비한 선발대에 뒤이어 호적대가 따랐다. 그 뒤에 말 탄 군사들의 호위를 받은 남여(藍輿) 세 채가 큼지막한 일산을 받치고서 유유자적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진은 이지함을 돌아다보며 물었다.
“세 번째 남여를 타고 계신 분, 조선 사람이죠?”
“그런가?”
마침 그때였다. 첫 남여를 탄 명나라 사신이 진이 서있는 지점을 통과하다 말고 손을 번쩍 들었다. 연연히 이어져 움직이던 행렬이 일제히 멈추었다. 사신을 호위하던 군마들은 남여 세 채를 더욱 철통같이 옹위하면서 수런거렸다. 사신 일행의 정사는 수염이 목을 가린 장한이지만 음성은 계집애처럼 가늘고 호들갑스러웠다.
“호오, 조선 송도엔 미녀가 많다 소리만 들었지 저토록 아름다운 여자를 진짜 볼 줄은 몰랐네.”
순전히 중국어라서 사람들은 알아듣지를 못하고 있었다. 셋째 번 남여가 그 옆으로 접근하면서 거기 탄 조선의 대관이 정사의 감탄사에 토를 달아주고 있었다.
“개성엔 명월이라는 아름다운 기생이 있는 줄로 아오만, 저런 미인이 또 있을 줄은 조선 사람인 저도 미처 몰랐군요.”
사신단 일행이 자리를 뜨자, 진은 이지함에게 또 말을 걸었다.
“저 조선의 대관은 누구시오니까?”
“소제학이시지.”
진은 깜짝 놀랐다.
“그럼 저분이 소양곡 선생이신가요?”
“퇴휴 선생이라고도 하지.”
“대제학 소세양 선생이시라 그 말씀?”
“저 분은 무오사화. 갑자사화 등 어려운 시기에 정계에 입문하여 그 시기를 슬기롭게 이겨낸 인물이라네. 게다가 대문장이시고.…… 중국 사신으로 자주 왕래했는데, 이번엔 아마 그쪽 사신단을 압록강까지 전송하는 길인가 보네.”
“오호, 그런가요?”
그런데 잠깐, 아주 잠깐 사이에 지함이 사라져버렸다.
‘도저히 잡히지 않는 사람……’
진은 그 황당함을 달래기 위해 또 한 수의 시조를 읊었다.
천수문 앞에 버들개지 나는데,
술 한 병 들고서 그대 오길 기다리네.
해 지는 긴긴 길목을 뚫어지게 보아도
오가는 사람 가까이 오면 그대 아니네.
고려조 유명한 가인 최사립의 노래였다. 당시 송도 유수 이예(李芮)가 취적봉 아래에다 정자를 짓고 이 최사립의 시를 현판으로 걸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19. 하늘에도 방에도 달이 떴고
사신단 일행은 먼저 남대문을 둘러보았다. 개성의 남대문 누상에 보존되어있는 종은 고려 29대 충목왕 2년 당시 연복사의 것을 새로 고쳐 만들어 옮겨다 놓은 일품이었다. 지름이 180센티미터가량에다 높이는 3미터가 넘는, 엔간히도 큰 종이다. 그들은 종을 쳐보기도 하고 그 울림에 감동하기도 하면서 반나절을 보낸 다음 부조현으로 갔다.
고려조는 물론 조선왕조에 와서도 이 나라의 문무현관은 과거제도에 의해서 발탁하였다. 고려조가 태조 이성계에 넘어가자 그도 역시 우선 널리 인재를 구하고자 과거를 보게 했다. 그러나 고려의 유민들은 한 사람도 과거에 응하지를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이 고개를 넘어 개성 땅을 등졌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이 아니다’라는 뜻의 아닐 부(不)에 조선 조(朝)의 부조현이 되었다고 한다. 세종은 재위 22년에 이곳에 와서 비를 세워주었는데, ‘고려충신부조현(高麗忠臣不朝峴)’이라는 일곱 개의 글자를 비에 새겼다.
두문동 고사도 바로 이에 연유한다. 당시 두문동에는 신규, 조의생, 임선미 등 73명의 선비가 정권에 거부하여 은거하고 있었다. 이성계는 이들을 끌어내기 위해 두문동에 불을 질렀지만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음을 맞았다. 이때 죽은 72명을 두문동 72현이라고 하며 이때부터 한곳에 오래 머무르며 문밖출입을 하지 않는 것을 ‘두문불출’이라고 한다.
그러면 두문동을 나선 단 한 사람은 누구였는가. 바로 황희 정승이었다. 고려조에 출사한 황희였지만 그의 인물됨과 겨레의 안위를 걱정한 두문동 사람들이 새로운 왕조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내보냈다고 한다. 과연 황희 정승은 두문동을 나온 덕에 성군 세종대왕을 만나 왕조의 기틀을 다지고 이후 조선을 태평성대로 이끌었다. 아무튼 부조현은 바로 이 두문동의 고사와 함께 고려 유신들의 절개를 상징하는 곳이 아닐 수 없지만, 사신들에겐 세종대왕이 세운 비라는 것 정도만 소개했다.
사신 일행은 선죽교를 마지막으로 둘러보았다. 고려 말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방석(?~1398. 태조 이성계의 8남)을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에 드러눕게 되었다. 정몽주(1337~1392)를 비롯한 고려왕조 수호 측에서는 이성계를 밀어낼 좋은 기회로 삼고자 했는데, 이방원(태종 1367~1422. 태조 이성계의 5남)이 이를 눈치채고는 정몽주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방원은 문병 온 정몽주에게 고려왕조를 저버리고 이성계를 따를 것인지의 여부를 타진하기 위해 [하여가]를 노래했고, 그에 답한 정몽주의 노래가 [단심가]로써, 이 둘은 알려진 바대로 자수 중심의 평시조이다.
이방원의 [하여가]
(초)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此亦何如 彼亦何如 차역하여 피역하여)
(중)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긔 어떠리
(성황당 뒷담이 무너진들 긔 어떠리)
(城隍堂後垣 頹圮亦何如 성황당후원 퇴비역하여)
(종)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누리리라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 아배약차위 불사역하여)
정몽주의 [단심가]
(초)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차신사료사료 일백번갱사료)
(중)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백골위진토 혼백유야무)
(종)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與之 향주일편단심 영유개리여지)
시조 [단심가]를 읊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이방원이 딸려 보낸 조영규의 철퇴를 맞고 피를 흘리며 눈을 감은 정몽주의 혈흔이 있는 곳이었지만, 조선의 역관은 그 또한 작자미상의 시 한 편만을 소개하였다.
한낮의 해처럼 밝은 고려 나라
충성에 빛나는 정몽주 선생
영원을 흐르는 선죽교 밑에 냇물은
한강으로는 흘러들지 않는구나.
신임 유수 한충식의 중국 사신 영접 잔치는 저녁에 동헌 대청에서 열게 돼 있었다. 물론 다른 기생들과 함께 진랑 황명월도 참석하라는 전갈이 왔다. 화려한 잔치의 기쁨이 넓은 동헌 뜰을 뒤흔들었다.
“오늘은 명월이 어째 이리 시무룩할꼬?”
“몸이 좀 불편하군요.”
진은 되도록이면 뒷자리로 물러앉아 구경만 했다. 글재주를 겨루는 마당이라면 사양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 자리는 순전히 중국 사신을 위로하는 연석이고, 어떤 기생이든 한 명은 뽑혀서 정사에게 수청을 들어야 할 판이었다. 일단 뽑히면 거절할 처지가 아니었고, 그러니 시무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따금씩 소양곡을 바라보았다. 덕이 있는 사람은 얼굴부터 덕스럽기 마련이고, 학예에 능한 사람은 세련된 격조가 행동에서 풍긴다. 대제학 소양곡은 그 둘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다. 60대 초반일 텐데 50대 초반 같았다. 가만히 앉아만 있는데도 좌중에 군림하고 있는 저 인물.
‘눈은 또 왜 저리 선한가.’
이따금 바라보는 눈길엔 왜 저리 알 수 없는 깊이의 정이 넘실대는가.
기생들이 대청에서 어지러이 춤추고 있을 때, 진은 살포시 자리를 떴다. 소양곡에게 다가가서 술을 한 잔 따라 올리고는 귓속말을 하는 진.
“오늘 밤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러고 제자리로 돌아와 짐짓 딴청을 부렸다. 자하골 집에서 소양곡을 맞이한 진은 마음이 한껏 들떠있었다.
“천수원 앞길에서 본 그 미인이 바로 너였구나.”
그는 도포 띠를 끄르다 말고 손가락 끝으로 진의 볼을 눌렀다.
“어른께서 제집에 안 오시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안 오다니? 너의 초대를 거절할 줄 알았던가?”
“감히 여자 입으로 오시라 청해놓았기에 발칙하다 여기신 줄 알았지요. 어르신, 저는 비록 기생일망정 남정네를 초대하는 일은 처음이어요.”
“네가 어지간히 도도하게 처신한다는 소문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허허허, 나에게만은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니 고맙구나.”
소세양 역시 담백한 성품이었다.
“개성에 와 보니 명월이 둘이로구나. 하나는 하늘에 떠 있고, 하나는 지금 이 방에 있고, 하하하핫!”
그러고 방안 여기저기를 살펴보던 그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현란한 자개장롱, 가야금, 거문고가 놓여있다거나 반달 모양의 소맷부리가 거꾸로 횃대에 매달려 있는 흔한 기방 풍경 때문은 아니었다. 병풍 그림이 남달랐다. 폭포와 그 주변 경관을 그린 10곡 연결 병풍이었다. 폭포 앞 널따란 바위에는 특이하게도 이백의 시 ‘망여산폭포’ 뒷부분이 새겨져 있는 거였다. 그림의 위편엔 마치 폭포수가 흩날리는 듯 무지개가 가로놓인 듯한 필체의 화제가 있는데, 제목이 박연이었다. 이백의 시가 중국 여산 풍경을 예찬했다면 이 시는 천마산 아래 박연폭포가 여산보다 더 절경이라고 예찬하고 있었다. 뿐이랴. 병풍에 새겨진 낙관 또한 남달랐다.
20. 그대는 유곡가인
화제의 오른편 위쪽에 새겨진 두인은 ‘명월’이었고 화제 끝에 새겨진 아호는 ‘진랑’ 이름은 ‘황진이인’이었다. 소세양, 그는 설마 하고서 자개장롱 옆의 족자에다 눈을 주었다. 그의 시선을 부여잡고, 절벽 위 난초 한 포기가 벼랑 아래로 떨어질락 말락 하고 있었다. 여리고도 굳센 자태를 한들거리고 있었다. 난초를 칠 때에 보통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치기가 예사인데, 절벽 위의 이 난초는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뻗었다. 물론 서쪽의 벼랑이 해 뜨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겠지만,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가리킬 때의 '청구'를 가리키는 것이고, '청구'는 남해 속에 있는 신선이 살고 있다는 곳이며, 동방에 있다는 땅의 이름이지만, 어쨌든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뻗은 저 난초는 여간 필력이 아니다.
뿐이랴. 유곡가인(幽谷佳人), 즉 그윽한 계곡에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뜻의 네 글자가 병풍의 화제와는 판이한 모습으로 새겨져 있는 게 아닌가. 안진경 왕희지 등의 서체를 뭉뚱그려 다시 그림에 어울리는 독특한 서체를 만들어냈다. 병풍과 족자의 글씨체는 각각 이어도 쓰고 그린 이는 분명 ‘황진이’ 한 사람이었다.
기방 쳐놓고 체경 없는 곳이 있을까마는 거울에 비쳐진 얼굴이 문제다. 흘낏 보았다간 거울에 빨려 들어가다 이마를 깨고야 말 지경으로 신비한 이목구비다.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천년 만에 한 번 태어날까 싶은 완벽한 미인이다. 그런데 기생 신분이라니, 아깝다. 가슴을 펑펑 치고 싶도록 아까운 사람이다.’
주안상이 들어왔다. 깔끔하고 조촐하였다.
“나는 술을 마실 테니 너는 저기 병풍 그림이나 노래해보렴.”
“읽으셨나요?”
“그림과 시가 자네 작품 맞는 게지? 참으로 놀랍구나. 언제 그린 건가?”
“졸작이옵니다. 저 병풍 그림은 어릴 때에 초안을 잡아놓았다가 작년 가을에야 완성한 것입니다.”
“시도 작년에 완성했느냐?”
“예, 시는 작년 봄에 문득 완성한 것이옵니다.”
“면앙이 유수로 있을 때였구나.”
“예. 그러합니다.”
“그는 시조에 달관한 사람이지. 그렇다면 저 그림에 면앙의 입김도 있었겠구나.”
“송순 선생님은 저 박연폭포가 실로 장엄하다 하시고 개성부 서편에 장엄정이라는 정자를 지으셨지요.”
“오호라, 그리되었느냐? 헌데 사연이 그뿐인가? 이백의 시를 바닥에 놓은 저기엔 무슨 이야기가 스며있는 것 같구나. 궁금하다. 들려주겠느냐?”
“이야기라면 애달픈 사랑 이야기, 뭐 그런 것일 뿐, 그다지 떠벌일만 한 게 못됩니다.”
“허허, 그런가? 그러니 더욱 궁금해지는군.”
진은 작년 봄 송순과의 일이 떠올랐다. 그 일이 꿈만 같았다. 송순을 형식상으로나마 첫 남자로 받아들였던 그 일이 아니었다. 머리채를 붓 삼아 이백의 시를 써놓고는 그게 없어질까 봐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병풍 그림에다 새겨버린 그 일도 아니었다. 그때야 비로소 완성된 ‘박연’이라는 시가 꿈만 같은 것이었다. 진은 거문고를 내려 기러기발(雁足 안족)을 매만졌다.
“저기 바위에 새겨진 글자는 박연에 가시면 직접 보실 수 있습니다. 어느 석공이 정으로 쪼아 놓았으니까요.”
“언제 한번 저곳에 데려가 주겠느냐?”
“그러지요. 하지만 저 위에 적힌 박연은 바로 여기서만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조용히 거문고를 뜯으며 그녀는 자신의 시를 노래했다.
기나긴 물줄기 하나
바위에서 뿜어져 나와
용이 치솟는가,
백 길도 넘게
물소리 우렁우렁
나는 듯 거꾸로 솟아
은하수 되려나
성난 폭포 가로누워있으니
하얀 무지개로다
양곡 소세양은 술잔을 들다 말고 멍하니 진을 보았다. 울고 싶도록 취했다. 술에 취한 게 아니라, 거문고 소리에 취한 게 아니라, 진의 화사한 손끝과 그 날렵하게 노니는 움직임과 약간 숙인 단아한 이마, 도톰한 콧날과 입매에 취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시에 취했다. 천수원 길가에서 진을 한 번 보고 개성의 미색에 놀랐고, 그 여인이 바로 황진이었음을 알아채자 두 번 놀랐고, 그림과 시에도 능통해 있다는 사실에 세 번 놀랐고, 그것들을 형언키 어려울 정도의 고운 목소리로 노래해내는 증거에 맞닥뜨리자, 기어이 그의 마음이 오늘날까지 쌓아온 수양의 성을 와그르르 무너뜨리는 소리를 냈다. 양곡은 꼼짝없이 두방망이질하는 가슴을 억누르면서 술잔만 연방 비워댔다. 볼수록 신비스럽고 슬기로운 여인이었다.
‘아깝다.’
그는 한 잔 들며 감상하고 또 한 잔 들며 감탄하다가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이 송경 맑은 영기를 네가 홈빡 타고났구나.”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진은 노래를 계속했다.
우박인가 우뢰인가
물방울 알알이 흩어져서
골짝을 채우고
구슬방아 옥을 깨면서
맑은 공중 꿰뚫는다.
길손아,
여산만 좋다고 말라
천마산이야말로 해동에 으뜸이란다.
띠당땅 덩덩 거문고 가락 또한 절묘했다.
‘선녀의 목소리다.’
양곡은 더 이상 점잖 뺄 재간이 없었다. 손을 내밀어 그녀를 불렀다.
“네가 정녕 사람이라면 이리 오너라.”
“갑니다.”
그렇게 말해놓고 진은 노래 한 가락을 더 뽑았다.
아침에 푸르던 머리칼이
저녁엔 눈처럼 희었구나.
인생이라 뜻을 얻을 때에
모름지기 즐김을 다할지니
황금색 저 술항아리
달빛 속에 내버려 두지 말라.
“허어, 고것 참, 여기 이 순간엔 또 다른 이백의 시가 어울린다는 거냐?”
양곡 소세양은 갓을 벗어 사방침 위에다 올려놓았다.
“네가 나의 늙음을 조롱하는구나.”
이리되면 남자는 더욱 초조해진다. 그렇다고 허허허, 하고 무골충 노릇을 한대서야 사내라고 할 수도 없다.
“명월아, 그 거문고 내가 한 번 뜯어보랴?”
“그러시겠어요?”
선선히 거문고를 받아 뒷전으로 밀어버리고서 소양곡이 물었다.
“내 너를 지척에다 두고 음률이라니 가당키나 한 말이냐?”
그러고 진의 손을 잡아 와락 껴안아 버렸다. 얼굴에다 얼굴을 비비며, 손으로는 그 몸을 더듬었다.
“나는 남자, 너는 여자, 어찌 학이나 봉을 시샘하며 촌각인들 유예하랴.”
오랫동안 몸에 밴 도학자의 금색주의를 헌신짝처럼 내던지는 대제학 소세양. 숨결은 속절없이 높아갔다. 거세어만 갔다. 여자와 남자는 한 쌍의 꽃사슴이 되었다. ‘정’의 물결과 ‘사랑’의 파도 속으로 열띤 부딪침을 반복하다가 이따금씩 숨 가쁜 말을 주고받았다. 조용히 깊어가는 밤. 욕망은 농익은 포도알갱이처럼 달달했다.
“어디까지 가셔야 하나요?”
“의주까진 갔다 와야 할 판이네.”
말이 끊어지면 호흡이 바람소리를 내고, 바람소리가 지나면 파도는 밀물로 와서 부서졌다. 진은 온몸 불사를 듯이 몰입하였다.
‘사랑해, 이 분이야말로 내 사랑하는 임이야.’
사랑은 이론일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이치를 모르는 바도 아닌 진은 소세양 어른을 사랑하고자 온몸 다 바쳐 노력하였다. 몸 어느 구석을 내주어야만, 어떻게 비틀어야만, 어떤 소리를 내야만 남자가 기뻐할 것인가를 체득하였었고 실습하고 있는 중이었다. 온 몸 다 바쳐 사랑하고 있노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기도 했다. 하지만 물거품이었다. 비밀한 그녀의 절규는 어느새 물거품 되어 가라앉고야 말았다. 그녀는 치솟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예사롭게 말했다.
“곧장 한양으로 돌아가시나요?”
“그럴 수야 있느냐? 내, 너에게로 돌아와서 박연도 구경해야 하지 않으냐?”
“의주까지 갔다 오시면 며칠이나 걸리시나요?”
“한 보름은 걸리지 싶다.”
‘그래. 사랑의 감정이란 시를 우려내는 거야.’
머리맡 촛불이 너울거릴 때, 진은 가만가만 시를 지었다.
달빛 어린 뜰에는 오동잎 모두 지고
서리 맞은 들국화는 시들어 가는 구나
누각은 높아서 하늘에 닿고
오가는 술잔은 취할수록 끝이 없구나
거문고 가락은 차가운 물소리에 섞이고
피리에 감겨드는 그윽한 매화 향기
내일 아침 임 보내고 나면
그리움 강물이 되어 한도 끝도 없으리.
“떠나야 하시나요?”
“떠나야 한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주고받은 말이었다.
“기어코 떠나시는군요?”
“내 다시 오겠다.”
소세양이 댓돌에 내려섰을 때, 그 대화는 또 반복되었다.
“오늘부터는 밤이 퍽 길어질 텐데 어쩌지요?”
“나도 겁이 나는구나.”
마당 가운데서 또 한 마디씩을 했다.
“오시겠지요?”
“온다.”
대문 바깥에서는 차마 서로 손을 마주 잡진 못하였으나 마주 잡은 것이나 진배없었다. 소세양. 그는 떠나갔다. 못다 한 하룻밤 정을 고스란히 남겨놓고서. 황진은 그날 이후 또 두문불출했다.
“네가 병이 단단히 났구나.”
어머니 현금은 딸이 야위어가는 모습에 전전긍긍하고, 딸은 쓸쓸히 웃으면서 북쪽 하늘을 가로지르는 기러기 떼를 바라보았다. 언약한 그 보름이 지났는데도 한 번 간 소세양 어른은 도무지 나타나지를 않는 것이었다.
어느 밤 거문고에 시름을 놓던 진은 문득 화선지를 펼치고 먹을 갈았다. 달 아래 줄지어 날아가는 기러기를 그리고서 그림이 마를 동안 시를 지었다.
내 언제 신의 없어 임을 어이 속였관대
월침삼경에 올 뜻이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하리요.
보름이면 온다던 소세양은 두 보름이 지나도 오질 않았다. 도대체 무얼 잘못 했기에 오시지 않는 걸까 하고 진은 속상했다. 그래도 온다고 믿어보자니 달빛은 밤마다 너무 차갑고 벌레소리는 너무도 청승맞았다. 그래서 한동안 밀쳐두었던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전생 기록 서사시를 쓰기 시작한 거였다.
21. 거북아, 멀리 멀리 나 좀 데려가 주렴
어느덧 임해 바닷가에 당도하였다. 지척을 분간키 어려운 밤안개가 밀려와 주위에 빽빽이 감돌고, 우리는 정자 근처에 친 천막에서 저녁 식사 후 잠을 청했다. 순정공, 그이도 언제나처럼 숨소리도 고르게 잠들었다.
‘여보시오, 내가 진정 그림이었더란 말씀이오? 가례를 올린 후로 한 번도 손을 뻗치지 않으시다니, 한 번도 품어주시지 않으시다니, 대체 누가 이 기막힌 사연을 알아주겠소? 첫날밤 댓바람부터 화가와 궁녀 이야길 하시더니, 그 후로 내내 나를 그림 취급 하시는 당신, 당신이시여……’
염치 따위는 엿 바꿔먹고 지아비를 흔들어보았다. 그러자 지아비, 소리 없이 눈꺼풀 들어 올리신다. 마음을 다져 먹은 김에, 나는 부끄러움도 삼켜버렸다.
“후손을 잇는 일이 지어미의 도리라고 배웠습니다. 부디……”
스르르 슬쩍, 눈꺼풀 내리시는, 오히려 내가 우러러야 할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옥골선풍 순정공.
‘당신이 사람이듯이 이 내 몸도 사람인 것을……. 그대와 함께 기나긴 이 밤 불태우고픈 그대의 지어미인 것을…….’
나는 마치 신선 더럽히는 악동처럼 그의 품에 파고들어 부르르 몸을 떨고, 내친김에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벼대기 시작하여서 용감하게 손을 뻗쳐 아래로, 더 아래로, 더듬어 내려가는데 그런데 아니올시다. 지그시 눈을 감으신 채, 한 손으로 이내 손을 끌어내어 거머쥐고서 한 손은 내 어깨에 걸치시는, 천하에 고상한 사람. 그이가 내 등을 토닥이면서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후손을 잇는 것보다…… 신성이 중요하오. 부인, 그대의 아름다운 몸을 고이 보존하는 일이 내게는 더 값진 일이라오.……”
‘아이고, 어이할거나. 내가 그림인 건 그만두고라도, 그대가, 그대야말로 정녕 사람이 아니구려.’
못 말릴 순정공은 또 옛날이야기를 끄집어내신다.
“문무왕 시대에 광덕과 엄장이란 승려가 살았는데, 광덕은 분황사 서쪽 마을에서 신발 만드는 일을 하면서 부인과 살았고, 엄장은 남악(南岳)에 암자를 짓고 화전을 일구고 짓고 살았다지요. 둘의 우애가 남달라 밤낮으로 약속하기를, 서방정토에 먼저 가는 쪽이 남은 쪽에게 꼭 알리자고 했답니다. 해 그림자 붉어지며 어둠이 소나무 그늘에 깔리던 어느 저녁, 엄장의 집 창밖에서 ‘나 먼저 서방으로 가네. 자네도 잘 있다가 하루빨리 나를 따라오시게.’ 하는 광덕의 소리가 나서 엄장이 문을 밀치고 나가 바라보니 눈이 부시더랍니다. 구름 위 하늘가에서 내려온 음악 소리와 빛이었지요. 이튿날 엄장이 찾아가 보니 광덕이 과연 죽어있어, 엄장은 광덕의 아내와 함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지내고 난 뒤에 부인의 의사를 물었다고 합니다. ‘남편이 죽었으니 이제 나와 함께 사는 것이 어떻겠소?’ 그런데 드디어 한집 한 방에서 엄장이 부인과 정을 통하려고 할 순간에, 부인이 ‘스님께서 서방정토를 구하는 일은 마치 물고기를 잡으려고 나무 위에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하며 딱 거절했다오. 깜짝 놀란 엄장이 괴이쩍게 여겨 ‘광덕도 이미 그러했는데 나라고 어찌 안 되겠는가?’라고 묻자, 부인이 ‘남편은 십여 년 세월을 같이 살았지만 일찍이 하룻밤도 몸을 섞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오. 그 뜻이 높은 곳에 있으면 부부로 살아도 몸을 섞지 않을 수도 있는 것 아니겠소? 그것이 영원한 사랑 아닐는지요?”
‘이럴 수, 이럴 수 없어……’
내내 뒤척이다가, 나는 나도 모르게 잠자리를 빠져나갔다. 나의 맨발은 어느덧 모래펄로 내닫고 하늘엔 달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만큼 그 빛이 흐릿하고, 빙 둘러있는 화톳불은 짙은 안개가 스며들어 촛불과도 같이 무의미하게 깜박여댔다.
‘내가 꿈을 꾸고 있나요? 도대체, 우리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났나요? 광덕이고 엄장이고 그들의 아내고 간에, 차라리 신빙성 있게, 이 수로는 옥황상제 여식이 잠시 하강하였다고, 그럭저럭 인간 세상이나 구경하러 왔다고 그렇게 토나 달아주실 일이지……. 전생이 이슬이라는 궁녀였거나 어쨌거나, 현생은 분명 수로라는 당신의 지어미, 그럴진대, 아아, 이 얼마나 쓸쓸한 인생인가요? 기막힌 이내 신세가 기막혀 참말이지 참을 수 없네요. 아버지 대권 몰이 희망 사항은 접는다 치더라도, 나는 반드시, 당신의 지어미로 의무를 다하고 알토란같은 아이도 낳고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간절한 소망이지만, 그 소망이 이루어질 수 없음에 몰려서 나는 점점 숨이 막혔다. 노인의 손에 들렸던 소의 고삐, 아니면 만파식적이 손에 있다 치고, 소리를 소리소리 지르기 시작하였다. 피리를 불기 시작하였다.
“거북아, 거북아, 멀리 멀리 나 좀 데려가다오.”
파도에 휩쓸려 잘 들리지 않으리라 싶어, 더욱 크게, 좀 더 크게 소리 질렀다. 그러며 만파식적 설화의 거북 머리모양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간절히 빌었기 때문일까? 찰방찰방…… 찰방, 찰방, 무엇이 파도를 헤치며 나오는 소리. 혹시나 거북님일까? 하는 순간에, 누군가 확 달려들었다. 억센 손아귀 억센 수염, 일찍이 못 맡아본 냄새가 훅 끼쳐와,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놀라움에 몸을 떨며, 비명을 질러보았다. 하지만 갇혀, 갇혀버렸다. 입에는 재갈이 물리고 몸에는 자루가 씌워지더니 비명조차 갇혀버렸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을 차리랬다고, 정신을 차리고 가만히 느껴보니 바닥이, 바닥이 기우뚱거리고, 삐걱삐걱 노질 소리 들렸다.
“부인, 부인, 누가 수로부인을 구할 자 없느냐? 부인~”
누군가의 아우성…… 내 지아비 순정공은 아닐 거였다. 고요히 잠든 것을 보고 나왔으니 말이다. 훗날 월성군 전설을 토대 삼은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수로가 용에게 붙들려갔다 적혀지겠지만, 순정공이 안타까이 발을 굴렀다고 기록되겠지만, 사실은 정말은 그게 아니다. 아니다. 아니고말고. 나는 지금 노 젓는 배에 실려 어디론가 납치되고 있다. 스스로 거북아, 거북아, 부르며 거북님을 호출한 거였다. 기꺼이, 거북님에게 붙들려가고 있다. 바로 이래서 용에게 붙들려갔대 놓고 거북에게 협박한다는 식의 혼선을 빚는 삼국유사 기록이 되리라.
“거북아, 제발 이리 와서 나를 데려가다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뷔구뷔 펴리라.
동짓달 기나긴 밤, 그 시간을 절반쯤 뚝 베어내서 봄바람 이불 아래 서리서리 따뜻하게 해놓았다가 어른님이 오신 날 밤에 펼쳐놓고 한층 길어진 밤을 맘껏 즐기리라……. 절묘한 시간 형상화의 시를 전생 기록 서사시 같은 자작 소설에 끼워 넣는 것을 끝으로 붓을 놓았을 때, 바람 소리인지 뭔지 대문 밖이 어수선했다.
밤에 기생 황명월을 찾는 사람이야 많았다. 귀찮을 만큼 많았다. 그러니 밖에서 누가 찾는다고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지만 물어보았다.
“누구시오?”
“글쎄 말이다. 웬 사람이 너를 찾는구나?”
어머니 현금은 손님의 정체가 다소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괴나리봇짐을 등허리에 둘러멘 젊은 나그네더라”
“누구라는 말도 없구요?”
“만나면 안다더구나.”
안내되어 들어온 사람은 바로 이지함이었다.
“들어오시어요.”
사뭇 반가웠지만 내색을 피했다. 갑자기 나타났다가 소리 없이 사라지기 일쑤인 사람. 쉽사리 정을 주었다간 마음 다치기 십상이었다.
“그때 갑자기 사라지시더니……”
“누가 나를 잡으러 오는 것 같아서 줄행랑 놓았더니라.”
“죄를 지으셨나요?”
“글쎄다. 내 죄가 무엇인지 딱히 모르지만 하여간 쫓겨 다니는 신세구나.”
진은 할 말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진이도 죄인 아닌가?”
“하긴 그러합니다. 멀쩡한 남의 목숨을 앗아버렸던 그 죄를 만분지일이나마 갚는답시고 이렇게 기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 아무리 고귀한 재예를 여럿 지녔다고는 하나, 사내들을 홀리는 그 천품은 제재를 받아야 한다. 남아란 자긍이 재산인데, 벽계수 어른도 소제학 대감도 아우 때문에 그 대장부 긍지가 짓밟혔다. 유형의 재물을 뺏는 것만이 도둑이 아닌 게다. 무형의 재물을 뺏는 도둑이 더 큰 도둑이지.”
“그런가요? 하하하…… 아이고 배꼽이야……. 그러면 형님 죄도 저처럼 요상한 죄로군요.”
그녀는 한참을 소리 내어 웃었다. 남자처럼 웃었다.
“여보게 진랑!”
덩달아 웃던 이지함이 병풍과 족자를 흘낏 보곤 부신 눈빛을 했다.
“박연을 나타낸 저 병풍과 시, 그리고 저 족자 그림에서 자네의 모든 기예를 알 수 있네. 마치 가야금 노랫가락같이 낭창한 난초꽃이 흡사 황진이구먼. 근데 유곡가인이라……, 그윽한 계곡에 아름다운 사람. 자화상 같으이. …… 하기야, 그 모든 게 다 자네 눈에 담긴 정에서 우러나는 게 아니겠나? 저 난초 잎의 교차점을 이루는 선 같이, 때로는 상어의 눈처럼 예리해지고 때로는 봉황의 눈처럼 다정해지면서 말일세.”
“소양곡 어른은 박연을 노래하라 그러시더니, 형님께선 난초의 상안 봉안에 제 성격을 그려내십니다.”
“허어, 그런가?”
그녀는 거문고 줄을 퉁기면서 시름없이 흥얼거렸다.
어저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다냐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진은 양곡 어른을 그리도 못 잊는가?”
이지함이 어림잡았다.
“그때 지어서 가락을 붙인 노래이긴 합니다만…….”
“소세양 어른은 한양 내 이웃에 사신다.”
“어머나?”
그녀의 머릿속에선 수많은 생각들이 오락가락하였다. 그중 한 생각은 ‘사랑해야 한다. 그분이 바로 내 거북님일 것이다.’였다.
“한양에 돌아가시면 자주 만나시겠네요?”
진은 바짝 다가앉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소제학 어른은 보름이면 다시 들른다더니 두 보름이 지나도 아니 오십니다.”
“너를 보러 또 오실 거다.”
“그럴까요?”
“다시 만나 뵙거든……”
“전하실 말씀이라도?”
“나보다 한 걸음 앞서신 걸 원망스러워하더라는 말을 전해주게.”
‘정말 소양곡 어른이 내 첫 남자였을까?’
억지로 갖다 붙일 게 따로 있다. 아니다. 아닌 것 같지만, 놓치고 싶지 않은 어른이기는 하였다.
“어쨌든 오랜만에 얼굴 본 이것만으로도 만족하네. 자네가 보통 아낙네가 되어 있다면 어디 꿈이라도 꿀 일이던가? 고맙네.”
술만 마시고는 한다는 소리가 이렇다.
“소녀의 위치가 지금 기생인 게 다행이라 그 말씀이신가요?”
“말이 그리되나? 허허, 미안하네.”
담백한 그의 태도에 진은 그만 서글퍼졌다.
“언제고 모실 수 있는 인연이라면 좋겠어요.”
“바람 같은 인생일세.”
“정을 주었다간 큰일 날 인생이지요?”
처음 화담골을 찾아갈 때 화담서숙이 어디쯤인가를 친절히 알려주던 이지함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어쨌든 구름 따라 바람 따라 강산을 에도시는 형님이 부럽군요.”
“지금은 아우님이 한창때이니 어림없는 일이겠지만, 이담에라도 같이 다녀보세. 바람 따라 구름 따라 가더라도 진이와 함께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네.”
“그때가 언제일까요?”
갑자기 외로움이 물밀듯 밀려와서, 진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였다. 그 눈물을 못 본채로 이지함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괴나리봇짐을 허리에 둘렀다.
“황진은 바로 개성의 정기라고 할 수 있네. 그러나 여자의 재기는 요기이기 쉬운 법. 지족선사쯤이면 몰라도 많은 도학자들이 자네 때문에 지조를 꺾겠으니 그것만이 애석하군.”
그런 말을 이지함에게서 듣다니 뜻밖이었다.
“여자에게서 요기를 빼면 뭐가 남나요? 지족선사가 그리 단단하답니까?”
눈물을 싹 감추고 깔끔하게 대꾸하긴 했지만 지족은 기생 황진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진은 입술이 저절로 깨물려졌다.
“생불이 다 된 사람 아닌가. 아무리 명월이 만공산해도 지족암의 덕은 요기로 물들이지 못할 걸 아마.”
이지함, 그는 그렇게 농담 삼아 한 마디 던지고는 홀연히 가버렸다.
22. 지족, 그대에게 도전합니다.
천마산 중턱에 아지랑이가 아른거릴 즈음, 다정하게 빛나는 햇볕 아래서 바람은 솜털처럼 부드러웠다. 논에서는 거름 냄새가 풍기고, 저 건너 화전에서는 두더지가 흙 속을 누벼댔다.
금새(金鳥)야 옥토끼(玉兎)들아 뉘가 너흴 쫓아온다고
구만리장공을 허위허위 다니느냐
이후란 천리에 한 번씩 쉬엄쉬엄 다니려마.
진이 즉흥 시조를 흥얼거리며 걷고 있을 때, 세 갈래 길 중 오른편에서 스님이 오고 있었다. 여승이었다.
“스님, 숭덕사는 어느 쪽인가요?”
여승이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하였다.
“예, 소승을 따르십시오.”
진은 호젓한 산속에서 여승을 만난 것이 더 없이 반가워 또 물었다.
“스님도 숭덕사엘 가시나요?”
“예, 숭덕사에 가십니까?”
여승이 고깔을 젖히며 돌아보는데, 진은 화들짝 놀랐다. 달달달 가슴이 떨리고 후들들 다리도 떨려왔다. 옴쭉할 수 없는 그녀의 머릿속으로 진달래꽃 무리가 들어왔다. 여리면서도 달달한 향기를 뿜으며 꽃무리는 흐트러질 듯 쓰러질 듯 빙글빙글 돌았고, 머리끄덩이를 붙잡힌 채 이리저리 패대기쳐지던 그녀 자신의 가엾은 모습이 진달래꽃 무리와 뒤범벅되고 있었다. 애타게, 화담 선생님의 혼백이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소승을 알아보셨군요?”
여승이 허리를 굽히더니 숭덕사엔 무슨 볼일이냐며 더욱 다정하게 묻자 진은 겨우 마음을 고르잡고서 침착하게 되물었다.
“언제 스님이 되셨나요?”
“그 후 뛰쳐나와서 바로 입산했답니다.”
여승은 전임 유수 송순의 애첩이던 제월이었다.
“사또께서 이조판서로 승진되어 가신 건 알고 계시나요?”
“막연히 소문은 들었답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투가 아닌가. 진은 그 초월이 부러웠다.
“저는 전혀 몰랐어요. 멀지 않은 곳에 계신데……”
“왜 멀지가 않습니까?”
“숭덕사에 계시지 않으세요?”
“거기 있습지요.”
“그럼 먼 곳이 아니지 않습니까?”
“멀지요. 속세에서 가늠하는 거리로서야 시오리쯤 되지만, 속세와 불가의 사이는 구만리랍니다. 관세음보살……”
멀다. 아니 많다. 숫자 열은 끝이 있지만 아홉은 끝이 없는 수이다. 그래서 열보다 많은 수가 아홉이다. 아홉은 가장, 맨, 제일 같은 무한량 무한대 무진장인 것들을 가리킬 때 써먹는, 수가 없는 수이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가장 높은 데는 구민이고, 땅에서 가장 높은 데는 구인이고, 땅에서 가장 깊으면 구천이고, 넓디넓은 하늘은 구만리 장천이다. 그렇다. 진은 가슴이 벅차 간신히 입을 열었다.
“많은 수도를 하셨군요?”
“잘 되지가 않습니다.”
“스님을 뵈니 저는 마치 죄인이 된 기분입니다.”
“소승은 진랑을 은인으로 알고 있는 걸요.”
“아니 왜요?”
“소승, 자만심에 빠져 있었어요. 세상 여자가 모두 나만 못하다고 여겼으니까요. 콧대 높기가 하늘에 닿아 있을 때에 불현듯 나타난 인물이 황진, 당신이었습니다. 그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었죠. 얼마나 자만심이 강했기에 단박에 미쳐버렸겠어요? 나무관세음보살……”
어느덧 여자의 속성마저도 초월해버린 사람이었다.
“불가에 귀의하고서야 저 자신의 어리석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다행히,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은 조용히 웃으시며 이 죄 많고 어리석은 중생을 구원해주셨습니다. 관세음보살……”
아르르 어디에선가 꽃향기 풍겨왔다.
“암자는 저 뒤에 있지요. 지족선사가 계신 곳입니다.”
숭덕사의 넘실한 처마 끝을 바라본 진이 뒤로 젖혔던 쓰개치마를 다시 썼다.
“저는 곧장 지족암으로 가보렵니다.”
제월 스님이 주춤 멈췄다.
“불공드리러 가는 건 아니시겠고?”
“지금은…… 주어진 운명에 최선을 다하려고요.”
“운명?”
“그분은 제가 뛰어넘어야 할 운명입니다.”
“하오면……?”
두세 번 고깔머리를 끄덕이며 제월이 엷게 웃었다.
숭덕사의 경내라 하지만 지족암은 청량봉 깊숙이 들어앉아 있었다. 앞쪽엔 사시사철 맑은 물이 이끼 낀 바위를 툭툭 치며 에워 도는 깊은 계곡이고, 뒤편은 청량봉의 준험한 봉우리를 업은 산같이 높다란 바위 밑을 우묵하게 파고들었다. 오르는 길은 가파르고 깔린 돌들도 서슬이 퍼랬다. 이따금 노루도 드나들 만큼 적막한 곳이었다. 높았다. 산봉우리가 하늘에 꽂힌듯하였다. 바람은 산허리를 감고 돌며, 안개는 구름처럼 피어 굼실거렸다. 진은 절벽을 돌면서 막 망울진 철쭉꽃 가지를 휘어잡았다.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불현듯 수로에게 바쳐졌다는 그 철쭉꽃이 떠올랐다.
암자 앞에 이르고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지족암. 현판이 붙어 있어서 지족암이 아니라 지족선사가 있는 곳이라서 지족암이라 불리는, 사실은 이름도 뭣도 없는 지족암이었다. 하기야 이름, 그게 뭐 그리 대단하던가.
진은 암자의 초라한 출입문을 향하여 다가갔다. 참싸리대로 엮어 만든 암자의 문은 닫혔는지 열렸는지 모를 정도로 비틀려 있었다.
솨솨사아……
암자 옆으로 계곡 물소리도 정겨웠다. 옥색 쓰개치마를 청솔가지에 걸어놓고는 물가로 갔다. 물은 뼈가 시리게 차가웠지만 목욕재계하는 마음으로 얼굴과 목, 손발도 깨끗이 닦았다. 하지만 산속이었다. 오소소 떨리는 몸을 다독이며 얼른 물에서 빠져나왔다. 을씨년스러웠다.
다시 암자로 가서 안을 살폈다. 순간, 흠칫하였다. 돌부처인지 사람인지 분간이 안 될 만큼 꼼짝을 않는 물체. 30년 기약으로 면벽단좌하고서 관세음보살만 연호한다는 만석이라는 중의 소문을 익히 들어왔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허깨비라고 단정 지을 뻔했다.
다시 안을 살폈다. 분명히 스님일 텐데 멋대로 자란 머리를 상투처럼 머리 꼭대기에다 올려 묶었다. 그 머리가 또 치렁치렁 어깨 밑으로 늘어져 있었다. 아마도 머리 자른 지가 석삼년은 되었을 터……. 아니 태어나서 한 번도 머리를 자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죽었나 싶었지만 죽음의 음기가 없었다. 한 줄기 밝게 쏟아지는 빛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우연일망정, 주검에 저런 밝은 빛이 쏟아질 리 없는 거였다. 빛은 덕이다. 덕 없는 곳에 빛이 있을 리 없었다. 주검은 물질인데, 물질에는 덕이 깃들일 수 없는데, 저토록 찬연한 빛이 주검에 감응할 까닭이 없다.
‘해탈의 화신이다.’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 진은 합장했다. 그리고 살짝 불렀다.
“대사님!”
눈을 크게 뜨고 귀를 기울였으나 무반응이었다. 합장한 그대로 상반신을 조금 굽히며 “대사님!”하고 좀 더 크게 불렀다. 그래도 묵묵부답. 차츰차츰 목소리를 더 높여가며 연달아 불렀다. 그래도 대답이 없었다. 이번엔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바로 옆에서 또 불렀다. 그래도 깜깜무소식.
‘무섭다.’
마음을 다잡아 먹고는 목을 길게 뽑았다. 스리슬쩍 얼굴을 들여다보니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입술은 움직이는 듯 마는 듯 움직였고, 목소리, 목소리는 그야말로 들리는 둥 마는 둥 “나무관세음보살”뿐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정화된 우주가 관세음보살의 대자대비를 중심으로 응결되어 있을 법도 하였다. 무릎에 놓인 오른손에서는 백팔염주가 살살 돌아가고 있었는데, 꼭 기계장치를 해놓은 것처럼 규칙적이고 단조로웠다. 동그란, 반들반들한 염주는 그대로 원망이며 득오이며 인생이며 우주이며 색(色)이고 공(空)이다. 별안간 화담 선생의 한 마디가 떠올랐다.
‘지함 형님은 공이고, 나는 색이렷다…… 그래, 나는 색이다.’
진의 머릿속에선 ‘포기’와 ‘진행’이란 두 갈래 길이 한참동안 교차하였다.
‘선생님, 드디어 지족선사에게 왔습니다. 그런데 과연 만날 수 있을까요? 지족이 면벽송경을 하는 겁니까? 소녀가 면벽하고 있는 겁니까? 어찌된 일인지요?…… 하지만, 가다가 중지 곧 하면 처음서부터 아니 감만 못하겠죠?’
그녀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대사님, 여기 죄 많은 중생이 왔습니다.”
옥이 구르며 내는 소리가 맑다고들 하지만 물체와 물체가 부딪쳐서 내는 소리에 불과하다. 물체의 소리가 아무리 곱기로 어찌 사람만큼 오묘한 소리를 내겠는가. 목소리,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천년의 시공을 단숨에 넘나드는 황진인 거였다.
“대사님, 미련한 중생이 부처님 빛을 따라왔습니다. 먼발치로 황금색 자비의 빛을 보고, 가까이 와서 엎디었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슬며시 요기스러워진 눈동자에 짜증 섞인 초조감이 버무려지고 있다.
“스님……, 자비로운 손길로 이 중생의 죄업을 어루만져 주소서.”
그의 가슴에다 손을 얹고 살살 쓸어보았지만 돌문을 해 달았는지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무릎 위에 얹힌 손을 흔들어댔지만, 흔들리긴 하는데 바위처럼 무거웠다. 이를 앙다물었다가 풀었다. 통통한 젖무덤으로 그의 이마를 파들파들 스쳤다. 그래도 꿈쩍을 않는 지족!
‘도전이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위대한 인간 지족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위선의 탈을 벗겨보겠다는 집념이 작용했다. 그 본성, 믿음의 정체를 알아낸다는 명분도 내세웠다.
‘그렇다면 내가 바로 관음보살이다.’
드디어 본격적인 행동으로 옮겼다. 손으로는 그의 목덜미를 살살 쓸어주면서, 귀에다는 보들보들한 소리를 불어넣었다.
“지족, 염불만 왼다고 불심이 되는 건 아니요. 눈을 똑바로 뜨시오.”
그래도 눈을 뜨지 않은 채 지족은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만 연호하고 있는 거였다. 그의 목을 팔로 가볍게 감고 그 이마에 입술을 갖다 댔다.
“눈이란 마음의 창. 똑바로 뜨고 온갖 사물을 꿰뚫어 보아야 하오. 탐스러운 욕망이라는, 바보스럽고 수치스럽다는 그런 번뇌에서 벗어나시오. 그대를 가리던 무명의 장막을 걷고 맑은 지혜를 얻기 원한다면 먼저 삼라만상 모든 색을 제대로 보시오. 똑바로 눈을 떠서 나를 보시오. 나와 더불어 빛을 구합시다.……”
아리땁고도 위엄 있게, 스스로도 착각될 천상의 목소리로 도란도란 줄기차게 속삭여댔다. 하지만 그래도 반응이 없었다. 그의 염불은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줄줄이 강 물줄기인 양 흐르고 있었다. 진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의 입술에다 자신의 입술을 포개고 특유의 몸내를 솔솔 불어넣었다. 그리고 이따금씩 볼을 그의 볼에다 살살 비볐다.
“아아, 그대의 시련은 이미 끝난 줄을 왜 모르시오? 이제 그대는 사람의 몸이로되 부처의 마음, 그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대는 이미 사바세계 속인이 아닌 것을.”
그제야 아주 미세하게 지족이 반응을 보였다. 염불 외는 목소리를 조금 높인 거였다. 한 가닥 가능성에 용기를 얻은 진은 다시 유혹을 감행했다. 그런데, 아니올시다. 지족은 지족선사가 아니었다. 쓰러뜨리면 쓰러지고 주무르면 주물리면서 전혀 반응을 하지 않는, 한낱 물체였다.
‘지독한 인간!’
못 이겨 파리 소리만큼이라도 내던 염불 소리조차 다시 가라앉았다. 기진맥진해있는 판인데 느닷없이 솔 향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여승 제월이었다. 진은 연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것 마냥 반가웠다. 그러나 제월은 진에게 눈길 한 번 주질 않는 거였다. 황초 두 개와 잘게 썬 향나무를 놓은 작은 향로를 들고서 불단엘 다가서더니 가만히 합장하였다. 촛불도 밝히고 향불도 피우더니, 그뿐이었다. 다시금 지족에게도 합장하고, 그대로 암자 밖으로 사라져 가는 제월. 뒤미처 쫓아 나온 진이 제월을 불러 세웠다.
“나, 승복 한 벌만 빌려주세요. 스님이 입으시던 것으로요. 고깔하고 염주하고, 목탁도 있어야겠네요.”
그러면서 싱겁게 웃었다. 제월의 얼굴에서도 엷은 웃음기가 감돌았다. 가까운 데서 솔새가 울며 달아나자 산 너머에선 뻐꾸기가 뻐꾹 뻑 뻐꾹, 울어댔다.
“지금 갖다 드릴까요?”
“예, 지금요.”
잠시 후, 진은 승복을 입었다. 목탁과 염주는 손에 들고 고깔은 머리에 쓰는 등 재무장을 했다. 그리고 껌껌한 암자 안으로 다시 들어섰다.
23. 진이와 지족의 망석중 놀이
“화엄경 속의 착한 벗이 너를 고쳐 주리라.”
신문왕 때 고승 경흥이 18세에 중이 되어 삼장에 통달하니 명망이 한 시대에 높았다. 문무왕이 세상 떠날 때 신문왕에게 ‘경흥법사는 국사가 될 만하니 내 명을 잊지 말라.’ 당부하였고 그래서 신문왕이 즉위하자마자 국로가 된 경흥법사. 왕이 내려준 삼랑사에 살던 그는 갑자기 병이 들어 한 달이나 앓아눕게 되었다. 그런 법사에게 하루는 여승 하나가 와서 문안하고 ‘화엄경’ 속의 착한 벗이 병을 고쳐준다면서 합장하였다.
‘스님의 지금 이 병은 근심으로 인한 것이니, 기쁘게, 아주 기쁘게 웃으면 나을 것입니다.’
그러고서 지팡이로 열한 가지 모습을 지어 저마다 각각 기기묘묘한 춤을 추게 하니, 뾰족하기도 하고 깎은 듯도 하여 그 변하는 형용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모두들 턱이 빠질 지경으로 웃었다. 물론 경흥법사의 병도 씻은 듯이 나았다.
‘그렇다, 나는 이제부터 11면 보살을 창출했다는 그 여승이다.’
진이는 합장하였다. 잠시 후, 지족을 내려다보며 한쪽 팔을 번쩍 들었다. 앞으로 내밀었다. 또 한쪽 팔을 뒤로 뻗었다. 발 한쪽도 들었다. 다른 다리의 무릎이 꺾였다. 딱, 따그락 딱딱. 목탁이 울었다. 다그르륵 염주들이 연한 소리를 냈다. 솨솨솨아 바람이 일었다. 아라리, 앞서거니 뒤서거니 몰려나온 그녀 향기가 촛불을 춤추게 했다. 승복에 고깔, 한 손엔 목탁, 한 손엔 염주를 들고, 팔을 벌리고 무릎을 꺾고,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저 단순한 육신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마음이 깃들고 정이 솟구쳤다. 삶의 율동이며 여자의 열정이며 감히 부처님과의 대결이었다. 진은 지족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돌면서 추었다. 두 바퀴 돌면서 장단을 쳤다. 이 춤에다 제목을 붙인다면? 승무. 승무가 제격일 거였다.
사전은 말하고 있다. 승무는 고려 말 이후에 발전되어온 춤이며, 장삼을 입고, 고깔을 쓰고, 부채를 들고 풍류에 맞게 추는 춤이라고.… 춤이 아주 고조되었을 때에 법고를 치는데, 파계승의 고뇌, 곧 수행의 어려움과 그것을 참아내지 못하는 고통을 법고를 두드리면서 이겨보자 하는 심정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이다.
부채 대신 염주를 들고 법고 대신 목탁을 들었지만, 그녀의 춤에다 이름을 붙이자면 승무, 그것 외는 없을 것이다. 황진이 승무의 창시자라는 일설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이다. 남자 앞에 앉을락 말락 몸을 구부린 채, 여자의 두 팔이 사해창궁을 안을 듯 둥근 원을 그렸다. 눈빛 색깔 고깔이 손짓인 양 까딱거리고, 둥그스름한 이마가 우주인 양 태양인 양 땅에 닿았다가 멀어졌다가, 참으로, 제비처럼 날렵하고 바람처럼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이윽고 여자의 이마와 콧등에 잘디잔 땀방울들이 송송 맺혔다.
“나무관세음 보살, 나무……, 나 무……”
어느덧 남자가 박자를 놓쳤고, 때마침 눈꺼풀이 움직였다. 태초부터 덮여있었다는 듯 편안히 감겨 있던 눈꺼풀은 은밀히 꼬물거렸다. 이 순간을 놓친다면 진이 황진이가 아니라 무진이라고 성을 갈아버릴 판이다.
“지족!”
진은 사뭇 위협적인 어조로 불렀다.
“그대의 가슴에는 지금 이 몸이 들어앉았소. 눈을 감아서 보지 않는다고, 그런다고 세속이 맑아지나.”
파르르 떨어대는 저 눈꺼풀 봐라. 은근슬쩍 높아지는 저 염불 소리 들어봐라. 따라서 드높아지는 별같이 동글동글한 이 목소리도 들어봐라. 진은 이마에 흐트러져 내린 지족의 머리칼을 살살 걷어 올려주었다.
“길 아닌 곳에서 길을 찾음은 어리석다. 광명 아닌 곳에서 광명을 찾음은 더욱 어리석다. 그대 만약 도를 위하여 여체를 멀리하려거든 눈앞에 있는 여체를 가까이하라. 그대 굳은 심지를 더욱 단단히 굳혀보라.”
저 마음 굽이치는가. 염불 소리가 잠깐 끊어졌다가 이어졌다. 그러나 다시금 높아지는 염불 소리.
“나무관세음 보살, 나무관세음, 나 무……”
“지족! 이 몸은 그대가 눈을 떴을 때 더욱 뚜렷하리라, 그대가 오래도록 찾던 환영이 여기 그대 눈앞에 있느니라. 눈을 떠라!”
황진은 보았다. 수로부인에게 꽃을 꺾어 바치고는 ‘소를 잃었구나.’하고 탄식하며 사라졌을 견우 노인의 그 표정이 지족의 얼굴에서 일렁임을 보았다. 한동안 춤에만 열중하였다. 진은 이제 입을 꾹 다물었다.
눈을 뜨니 무언가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흐린 불빛에 보이는 저것, 저 벽걸이는 용머리 모양의 탈. 흙바닥에 짚북데기 같은 것이 깔려있는 방안. 그런데, 또 다른 시선이 나를 보고 웃는데, 바로 내 얼굴 아닌가. 중국에서 귀화한 화가 장승요가 배꼽 밑에 점 하나 있는 궁녀를 그렸다는, 아득한 과거의 내가 나를 보고 웃는다. 용머리를 썼으니 용에게 붙들려갔다고 기록될 저 얼굴도 웃고, 납치범, 험상궂은 사내, 사내도 나를 내려다보고 웃는다. 웃고 있다. 내 화상과 용머리 탈과 사내, 아니 저 사내는? 기절했다 깨어났지만 다시 기절할 일이다.
“선사님!”
납치범은 바로, 철쭉꽃을 꺾어다 주었던 그 노인. 노인이라고만 여겼던 그가 풀어헤친 머리칼 사이로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별안간 암소 놓친 이 몸……, 그냥 견우 노인이라오.”
또다시 밀려드는 후회, 후회의 물결이다.
‘철쭉꽃, 꽃을 꺾어주시라 했던 그때부터 내 잘못이 시작된 거다. 아니다…… 철쭉꽃이 거기에 있었던 게 잘못이다. 아니, 아니다. 꽃이 내 신세와 같다고 여겼던 나의 상상력이 오두방정이었다.’
나는 애달피 소리쳤다.
“누군 줄, 누군 줄을 아시면서……, 그대 목숨 풍전등화.……”
노인이 내 손을 거머쥐더니 자기 가슴에 묻었다. 번쩍이던 눈, 그 눈에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미 삼십 년 세월을 한순간에 날린 마당이오. 그대가 꽃을 탐하지 않았던들, 나는 지금쯤……”
“아니 무슨 억지 말씀을?”
나는 손을 빼느라 안간힘을 쓰면서 짐짓 호통쳐보았다.
“아무리 내가 원했더라도 모른 척 하시지 그랬어요? 가시던 길을 그대로 가시지 그랬어요? 스스로 부르고야 만 불상사, 앙갚음하시려고요? 진정으로 그래요?……”
이윽고 그가 내 손을 스르르 풀어주는 거였다. 그리고 자기의 두껍디두꺼운 손으로 휘휘 방 안 공기를 저으며 공허한 웃음을 자아내는 거였다. 온 방 안이, 온 산이, 그의 웃음소리에 크게, 커다랗게 흔들렸다. 하나로 합칠 때에는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치며 7일 동안이나 어두웠다는, 만만파파식적 설화가 생각나는 웃음이었다.
“내 어찌 감히 부인에게 앙갚음 하리요. 이왕지사 소를 잃은 마당인데 뭐 그리 안달복달하겠소. 다만 부인이시여, 내가 저 나락으로 떨어지는 데에 일조하셨던 부인이 사무치게 궁금하였을 뿐이오.”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 몸 선사님을 몰랐는데요?”
“멀리멀리 데려가 달라고 나를 부르지 않았소?”
낯익은 한 목소리 귀에 쟁쟁, 짱알거렸다.
“거북아, 날 좀 데려가다오, 멀리멀리 데려가다오……”
나는 당신을 너무 그리워한 죄로 지금 당신을 만나지 못합니다........ 수로부인, 아니 진의 손끝은 훨훨 날아다니는 학의 고갯짓. 발끝의 움직임은 물고기의 헤엄이었다. 무어라 말할 수 없이 향기로운 체취는 바로 열반 세계의 향기로 자리매김하였다.
“눈을 떴소? 오오, 눈부신 그대 눈동자.”
어둠을 꿰뚫는 눈빛이었다. 바위도 산도, 사람의 마음도 꿰뚫을 눈빛이었다. 수로부인을 내려다보던 견우 노인의 눈빛이었다. 한순간 전생의 어느 지점에 머무르며 가슴이 무너졌지만, 진은 스스로를 몰아세웠다.
“보시오. 눈을 떠 보니 다르오? 관음보살과 내가 다르오?”
훌러덩 치마를 벗었다. 살이 비치는 속치마 바람이 됐다. 속치마가 덩실덩실 춤출 때마다 몸에 착착 감겨 돌며 펑퍼짐하고 둥글게 너울거렸다. 배꼽 밑 검은 점 하나가 보였다 말았다 일렁였다. 눈동자, 사내의 눈동자가 잉걸불인 양 타고 있었다. 허리를 척 꺾었다. 얼굴을 그의 코 밑에다 대고 알찐댔다. 몸을 핑그르르 돌리다 말고 뒷걸음쳤다. 그의 무릎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이내 발딱 일어나서 달아났다. 남자가 코를 벌름거리고 있었다. 여인의 향기를 맡는 중이었다.
“지족! 나의 물음에 대답하시오!”
지엄한 분부가 아닐 수 없었다.
“이 몸을 관세음보살로 믿어 의심치 않는가?”
지족은 마치 습관인 양 대답 대신 염불을 외웠다.
“나무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의 환영으로 착각하는 게 분명하였다. 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대의 육신을 가린 거추장스런 옷을 벗어라! 웃옷일랑 벗어라!”
말하자면 최면술이었다.
“웃옷을 하나하나 벗어라! 벗어라!”
드디어 사내의 손이 움직인다. 서서히 몸을 움직여 웃옷을 벗고 있었다.
“그 속에 걸친 사바의 넝마도 훨훨 벗으라. 훨훨 벗어던져라.”
사내는 망설이지 않았다. 조용히 굽실대면서 옷을 말짱 다 벗어버린 거였다.
‘얄궂다. 내 속에 이런 잔인한 면이 있었다니,……’
벗으란다고 훌떡 벗어버린 지족을 보며 진은 스스로를 나무랐다. 그러나 고지에 다다랐지 않은가. 멈추어선 안 된다. 배시시 웃음을 베어 물고서 야금야금 씹어야 한다.
“그대는 이제 구도 해탈이다. 어서 이 몸을 업으라. 업고, 연화대를 거닐어보자. 일어서라.”
슬며시 몸을 일으킨 벌거숭이 남자가 덜렁, 여자를 업었다.
“나를 업었으니 연꽃 향기가 코에 스며들지 않으냐?”
“나무관세음보살……”
“그대는 이제 영원히 멸하지 않는다. 이제 열반의 낙을 얻으리라. 자, 어서 걸어라. 거닐어라.”
남자가 여자를 업은 채로 거닐기 시작하였다.
“사바의 업원을 떨쳐버린 그대! 나를 사랑하는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지족의 입에서 염불 아닌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랑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앗 성공이다.’ 하고서 진이 상큼 웃었다.
그때였다. 누가 암자 안으로 들어왔다. 여승 제월. 그녀는 너무 놀라서 합장부터 하였다.
“나무관세음보살!”
진도 덩달아 염불을 외기 시작하였다.
“십년공덕 도로아미 타아불, 십년공덕 도로아미 타아불, 십년공덕……”
그다음 구절을 제월이 받아서는 바로 잡아주었다.
“나무아미타불!”
“날이 새었소?”
이번엔 지족이 제월에게 묻는 말이었다.
“밤이 아직 남았습니다, 나무아미……”
별안간 서두르는 지족. 그는 마치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면서 연신 주문을 외웠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죽도록 사랑합니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여자의 몸을 가야금 삼아 거문고 삼아,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몰이를 하다가, 때로는 순서대로의 빠르기를 이탈하거나 역행하여 중모리 휘몰이, 자진모리 휘몰이 중중모리를 반복하다가, 그러다 문득 여자의 몸속으로 깊이 쳐들어와 펄떡이는 남자. 여자는 순간순간 자지러졌다. 아뜩하다.……아뜩하다, 그러면서 여자의 정신은 이 세상을 벗어나고 있었다. 새처럼 날아다니던 구름, 구름 조각처럼 날아다니던 새, 그 새를 잡으려고 하늘로, 하늘로 올라가던 여자는 금세 떨어질세라 커다란 남자의 등을 꽉 붙들었다가…… 아, 아, 아, 실핏줄 가닥마다에 탄성을 버무리고 버무렸다.
아침 햇살이 암자 안에 쏟아져 들어왔다. 진은 몸을 일으켜 지족의 얼굴을 살폈다.
‘후회도 실망도 찾아볼 수 없는 평온한 얼굴…… 도승의 법력일까?’
그녀는 지족의 넓은 가슴을 쓸어주면서 나긋나긋하게 물었다.
“스님! 후회막급이시지요?”
“황명월아! 이제 만족스러우냐?”
화들짝 놀라 그의 가슴에서 손을 치웠다.
“어떻게 아셨나요?”
“그럼 내가 설마 그대를 관음보살로 알았겠느냐?”
파르르 가슴이 떨렸다. 마구 두방망이질했다.
“이 지족의 눈이 그토록 어두운 줄 알았는가?”
“눈을 감고 계셨지 않았나요?”
“눈을 감아야만 더 잘 보인다는 걸 모르느냐?”
“그건 화담 선생님 일화가 아닙니까? 갑자기 눈을 뜨게 되어 집을 찾을 수 없게 된 소경이 다시 눈을 감은 뒤에야 자기 집을 찾게 되었다지요? 스님도 그런 식으로 눈을 감아야만 더 잘 보실 수 있다는 말씀이에요? 소녀가 한낱 요사스런 계집이라는 사실을 눈을 감은 채로 다 알아보시고도, 도대체, 다 아시면서도 불법에서 금하는 여색을 탐하셨단 말씀이에요?”
“나는 여색을 탐한 게 아니다.”
지족은 시치미를 뚝 뗐다.
“중생의 집념을 풀어주었을 뿐이다.”
“허나, 스님께선 저를 사랑하셨지요?”
“그렇다. 사랑하였다.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지족은 소리 없이 일어나 옷을 입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한 여자를 진심으로, 지극히 사랑하였다. 내 생애에 두 번 다시는 없을 최대의 보람일 것이다. 설사 그것이 죄라고 하여 30년을 더 수도하라는 부처님의 분부를 받게 되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으리라.”
단순한 자기 합리화의 궤변이 아니었다.
“허허허, 이로써 나는 사바세계에 남길만한 미련이 없어졌으니 이제 온 마음 다하여 부처님 제자 되기에만 힘쓰게 됐다. 나무관세음보살.”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가슴 한 구석이 황량하게 비워지더니 거기에 찬바람 한 줄기가 스와스스 스쳐 갔다.
‘무서운, 너무 무서운 사내가 바로 당신이었군요.’
또 다시 바위처럼 앉아있는 지족의 뒷모습을 보며, 진은 거기에 자신의 흔적이라곤 일체 남아있지 않음을 알았다. 생식으로만 살아왔다고 들었다. 생쌀 한 움큼, 솔잎 한 줌을 씹으면 시장기를 느끼지 않는다 하였다. 그런데 그 정력과 힘은 예전에 만난 그 어떤 사내보다도 뛰어났었지 않은가. 이 남자에게서도 역시 죽고 싶을 만큼의 희열을 느끼진 못했지만 말이다.
“대사님, 부디 지도해주십시오. 저도 불문에 귀의하겠습니다.”
진이 진심으로 그리 말하자 지족은 갑자기 정중해졌다.
“이제 그만 하산하시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몇 마디 말을 더 걸었으나 지족은 꿈쩍도 아니 했다. 저벅저벅, 또다시 사유의 심연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지족. 그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구백구천구만리나 떨어진 세계에 격리된 생불 그 자체였다.
‘어제 일이 혹여 일장춘몽이었던가?’
부끄러웠다. 햇살에 부끄럽고 하늘에 부끄럽고, 산에 나무에 날짐승들에게도 부끄러웠다. 후세 사람들이 파계승 지족과 기생 황진의 이 사랑놀음을 두고 ‘망석중이 놀이’라는 이름을 붙여 놀음 한판을 벌인다고들 하지만, 연암 박지원도 [광문자전]에서 광문이라는 거지가 만석놀이를 잘했다고 피력하게 되지만, 승무 또한 개성 기생 황진이가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생기지만, 이 순간 진에겐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는 자각과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만이 밀어닥쳤을 뿐이었다. 한없는 패배감에 사로잡혀서, 그녀는 쓰개치마를 옴팍 덮어썼다.
24. 꿈길밖에 길이 없어서
왜 갑자기 거북을 떠올렸나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감은사 앞바다 거북 머리 형상의 산 때문이었던지, 혹시나 가락국의 수로왕 유전인자가 네 몸에 저장되어 있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건 노인이 거북의 분신이랄 수는 없다는 것.
“노인께서는 그럼, 나를 어찌하려고 그러시오?”
“노인, 노인, 하지 마시오. 오래전 나의 별명이 거북이인즉……”
“아니, 무어라 하시었어요? 그럼 내가 거북아, 거북아, 하고 부르는 소리에 정말로 거북이가 되어 나타나셨다는 말씀이오?”
그가 머릴 끄덕였다.
“용머리를 쓴 거북이랄까……”
하이고, 세상천지에 이런, 이런 기막힌 일이?
“그러면 각오는 미리 하셨겠지요?”
나는 짐짓 차가운 어조로 그리 말했다.
“내 낭군 순정공이 관군을 풀 것이오. 그대를 잡아 목을 베어 저잣거리에 내놓을 텐데, 그러면 어쩌시려고요?”
그가 흥, 하고 코웃음 쳤다.
“뒤에 순정공이라 기록될 것이라 순정공이지, 그게 어디 산 사람 성명이오? 오죽하면 순수할 순(純), 곧을 정(貞)을 하사하셨을까만, 그건 사후에 왕으로부터 받은 시호고입니다. 아무튼 단명할 운일망정 거룩한 그 성명 순정공이라……”
그리고 나머지는 네 마디 사설시조 종장을 보태는 거였다.
“순정공? 휘저어보았자 사방팔방 허공뿐인 그 공? 말짱 황인 그 공?”
그러곤 사설이 마냥 이어졌다.
“당사자만 모를 뿐이지, 뭔, 뭔, 공이 자기 부인을 여신으로 섬기고 있다는 해괴한 소문은 이미 온 서라벌에 다 퍼져 있소. 그뿐이겠소? 집안을 진골 왕족 품계로 올릴 야망에 들떴던 그대 부친 입장은 또 어떻겠소? 여신과 인간 사이에서는 자손이 나면 안 되는 법, 만약에, 만에 하나, 순정공이 눈 딱 감고 자손을 내게 된다면, 그건 그럼 뭔가? 반신반인인가? 아니지, 성골보다 더 높은 새로운 품계를 만들어야 할 판인감? 하여간 원래 대가 끊길 판이다가 수로를 수양딸로 삼아 외손으로나마 대를 이으려고, 언감생심 진골 품계로 진입할 꿈에 부풀었던 정 대감, 아니 그대 부친 신세는 또 어떤가 말이오. 날마다 발을 동동 굴리며 외손을 기다린다던데.”
그 화술, 정곡 팍팍 찌르는 화술에 내 몸이 부르르 떨렸다. 소문이 진실일 거라는 상상이 억만 세포 곳곳을 기웃거리며 방황하였다.
“하하하, 날이 밝으면 일전의 헌화가 말고 노래를 또 하나 가르쳐 주리라.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그대의 이름을 보더라도 그대 아비의 야망이 금방 드러나는 것이오. 대 가락국의 첫 임금 이름이 수로인즉……그러니 이 몸도 그대 아비 시늉을 내어보려 하오. 수로왕을 내기 위해 생겼다는 그 노래,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라는 구지가를 본떠서 노래를 만들어보리다. 물론 구지가에서와 마찬가지로 뛰면서 춤추는 주문도 덧붙일 것이오.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부인 앗아간 죄 그 얼마나 크랴……”
피맺힌 통탄이라는 것처럼 그가 울먹이었다.
“이보시오 수로부인, 저 초상화, 수로 화상을 보시오. 나는 어느 날 장터에 발을 들였다가 우연히 저것을 구입한 거요. 따지자면 그대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나돌았을 초상화, 미인도. 저 얼굴이 그대일 리 없는데, 신비하게도 저 화상이 지금의 그대 얼굴과 일치하는구려. 이러려고 그랬는지, 저 화상을 본 그날로부터 이미 소를 영영 잃을 징조가 보였건만, 그때는 미처 몰랐소. 나중에야 그대의 화상, 아니 수로 화상이 점점 내 눈을 흐리게 만든다는 걸 알게 되었소만. 이열치열이라……한 방법을 생각해냈소. 저것은 화상에 불과하다. 사람이 저리 아름답다니…… 그림보다 못하다면 마음을 접으리라. 실체를 보자. 그런 다짐을 했던 거요. 그리고 마침 순정공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여 온다는 소문을 듣고, 나는 기어이 그대를 두 눈으로 볼 결심을 했던 거요. 부디, 앞뒤 생각을 해 보시오. 내가 아무 까닭도 없이 그대에게 철쭉꽃을 바쳤겠소? 하물며, 천길 까마득한 벼랑을 타고 올랐겠소?”
갑자기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아아, 이 무슨 형벌이란 말인가.
“그렇게 그대는 소를 잃었다는 말씀이오?”
내 쓸쓸한 물음에는 아랑곳없이 그가 중얼거렸다.
“철쭉꽃을 바쳤던 것처럼 이제는 나를 바칠 차례요.”
그러고 황황히 등잔불을 끈 뒤에 그는 내 몸을 와락 끌어당겼다. 불면 날아갈세라 쥐면 꺼질세라 신주단지인 양 모셔지던 나의 몸이, 노인의 허울을 쓴, 30년이란 나이를 되돌려 받은 사내에게 거칠게 다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체취 코를 찌르고, 볼을 스치는 수염도 가시에 긁히는 듯 따가웠지만, 도저히 그의 품속을 헤어나고 싶지도 않고, 헤어날 길도 없었다.
‘죽도록 사랑합니다. 내 거북님을 사랑합니다. 깊숙이 받아들임이 사랑이고 행복입니다.’
그렇게 배꼽 밑에 점 하나가 도란, 도란거렸다. 지아비는 어이하여 하늘이며, 지어미는 왜 땅인가 하는 이치가 깨달음 되어 내 피부 구석구석에 번져나갔다. 온몸, 더더구나 배꼽 밑에 진짜로 있는 점을, 혹시나 진짜로 있을까 봐 두려워 더더욱 아내를 외면하던, 전설 속 궁녀와 닮았다는 이유로서, 아내를 차마 만지지도 못하던 나의 지아비 순정공이 하늘 땅 사이같이 멀어지는 순간, 순간들이었다. 처음에는 노인이었다가 거북님이었다가 어느새 장쾌한 젊은이로 변하고, 그의 악취조차 정감 어린 체취로 변하고, 그가 잠시라도 옆을 비우면 나는 미쳐서 죽을 것같이 그의 냄새를 더듬었다. 몇 날이 지났는지 알아낼 수 없는데, 나를 목욕시켜 차근차근 머리 빗겨주던 거북님이 정색하였다.
“부인, 이 몸이 부인을 모신지가 이미 일곱 날. 대나무는 산과 함께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합해서 하나가 된답니다.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치며 7일 동안이나 어둠 속에서 하나가 되는 그 일곱 날이 지난 지금, 순정공은 아직도 백성들을 모아 밤낮으로 바다를 치며 그대를 내놓으라고 성화를 부리고 있소. 그것도 기실 내가 가르쳐 준 방식이지만, 용왕이 잡아갔다 하고서 거북이더러 내놓으라니, 앞뒤 맞지 않는 주문이지만, 어쩌겠소. 내 그대를 가만히 되돌려놓을 수밖에”
비로소 현실을 짚어내고서 나는 안타까이 울부짖었다.
“거북님, 꿈을 꾼 게지요? 요 며칠, 우리 둘 다 궁녀와 화가라는 꿈을 꾼 거죠? 봉황새도 붕새도 아닌, 용궁에서 거북 타고 노닌 꿈 말이어요.”
“인생이란 어차피 한순간의 꿈. 우리는 여기서 일곱 날을 보냈지만, 저 바깥세상에서는 겨우 일박이일인 것을.”
“하오면 거북님, 이제 두 번 다시 나를 찾지 마시고, 잃었던 소나 찾으러 가시어요.”
“아니 되오. 꼭 기다리시오.”
그러고 그는 애타는 눈빛으로 말했다.
“이 몸이 보고 싶을 땐 나들이를 하시오. 연못이나 계곡 근처로 소풍을 나오시오. 그러면 내 기어이 그대를 만나리다. 사람의 본성, 어차피 축생의 그것이나 마찬가지로 발현되는 법. 이 몸은 이번처럼 거북이가 되든지 그 무엇이 되든지 간에, 그대가 부르자마자 그대를 품겠소.”
“날마다 맴도시겠다고요? 거북님, 이내 주변을 맴도시겠다는 내 거북님…… 하오나 거북님, 꿈은 어디까지나 꿈일 뿐. 그 꿈을 이어가려면 꿈속에서나 가능하와요. 부디, 꿈속의 여자를 잊어주시어요. 이제 가면 밤낮으로 관군을 풀어 이 몸은…… 거북님 당신의 접근을, 당신이 내게 옴을 막아버릴 테요.”
“30년, 30년을 바쳤는데, 무에 새삼 두려우리. 그대 마음 가는 대로 나를 처분하시오. 내 목을 쳐서 저잣거리에 매달든지, 불에 구워 먹든지, 나는 이제 여한이 없다오. 만약 이승살이가 또 남았다면, 미래의 만남이든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만나든, 언제고 그대를 행복하게 해주리라는 열망만이 내 속에 가득 찼을 뿐이오. 부인, 사랑하오. 나를 죽여 부인이 행복하겠다면 그리하시오.”
“하지만, 이제라도 소를 찾으러 떠나셔야지요.”
“찾아야지요. 허나, 지금은 그 소가 어디로 줄행랑쳤는지 감을 잡을 수 없다오.”
별안간 용머리 탈을 덮어쓰고는 그가 말했다.
“아마도 그대 가슴에 내 소가 숨은 것인지……”
‘이 가슴 갈가리 도려내는 아픔이여, 전생 인연을 만난 느낌에서 빠져나와야만 하는 아픔의 형상이여, 새로운 예감이 또 다른 구속을 가함이여……’
어쩌면 마지막인지도, 영영 이별일지도 몰라 눈앞이 캄캄한 순간. 나는 안개 자욱한 밤을 틈타 또다시 배에 실렸다. 사라졌던 그 바닷가에 당도한 나는 ‘용이 부인을 모시고 나와 도로 바쳤다’하는 삼국유사 어느 한구석의 주인공이 되는 중이었다.
“물이 얕으니 겁내지 말고 천천히 걸어가시오. 지금은 용궁에서 지상으로 나가는 길임을 잊지 마시고……”
꿈길밖에 길이 없는 우리의 신세
임 찾으니 그 임은 날 찾아 길 떠났고야.
이 후란 밤마다 어긋나는 꿈
같이 떠나 도중에서 만나를 지고
안개 속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조각배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나는 천천히 물결 헤치며 걸었다. 시치미 딱 떼어버리고서, 불현듯 납치되었다가 되돌려진 걸음걸이로. 찌그덕 짤박 찌그덕, 노질 소리도 가물가물해질 무렵, 자욱한 안개 사이로 흐린 횃불들이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부인 앗아간 죄 그 얼마나 크랴, 네가 만일 거역하고 내놓지 않는다면, 그물로 잡아 구워 먹으리.……’라는 노래를 따라 너울거리는, 가락국 생성 당시 유행했던 주술 소리, 구지가, 해가로 변해 재현되고 발현하고 물과 뭍의 경계에 나의 몸 지친 듯이 올라서고, 해가만 불러대던 백성들의 목쉰 노래가 함성으로 변하였다. 횃불들은 단번에 안개를 밀어내더니 주위를 대낮같이 밝힌 가운데, 단 일박이일 사이에 눈이 퀭해진 순정공이 줄줄이 눈물 흘리며 달려오더니, 오로지 신주단지 모시듯 나를 천막 안에 모시는 거였다.
“이 무슨 향기요? 그대 몸에서 신비한 향내가 솔솔 풍기는구려.”
나도 내 몸내를 맡아보았지만 나로선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어찌 된 걸까? 아무튼 연신 코를 벌름거리는 순정공. 희한한 발상의 결혼생활을 추구한, 도대체 제 아내를 인간으로 치지 않는, 단지 여신으로 모시는, 대단하다면 대단하달까 나약하다면 나약하달까, 거북님 추정대로 삼국유사에 사후 시호를 미리 쓸 만큼 단명할 운인 나의 지아비 순정공. 그는 내 향기에 취한 채로 위선적이고 가증스러운 질문을 시작하였다. 사람이면서 사람 축에 끼지 못할 귀신이 퍽, 퍼벅, 봉창 두드리는 소리…… 문답이 씨나락 까먹을 귀신소리.
“부인이 돌아본 용궁은 어떠하였소?”
거북님 흙투성이 오막살이가 떠올라 가만히 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냉큼 말하였다.
“기둥마다 칠보단장을 하고, 지붕은 무지개 빛깔이고, 모든 풍경이 투명하고 매끄럽고 향긋한 것이, 서라벌의 궁전은 비할 바가 아니었지요.”
“굶지는 않았소? 음식은 무엇을 먹었던고?”
불현듯 알뜰살뜰 보살펴주시던 거북님 손길이 그리웠다.
“하나같이 향기롭고 깨끗했습니다. 인간 세상의 음식하고는 아주 달랐지요. 불로 익히지 않았는데도 혀끝에 놓자마자 살살 녹더군요.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아 끊임없이 먹을 수 있었지요.”
25. 내 마음 그대가 뺏어가니
‘내 향기가 바로 수로부인의 향기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진은 ‘송도를 노래함’이라는 자작시를 혼자 읊조렸다.
옛 고려의 빛은 눈 속에 떠돌고,
옛 나라의 소리는 차디찬 종소리에 묻혔네.
남루에 올라 홀로 수심 겨워 섰노라니,
고요히 저녁연기 피어오르네, 남아있는 성터에
난데없는 목탁 소리인가 싶었더니 곧이어 낭랑한 염불 소리가 났다. 숭덕사의 여승 제월이었다. 산수화를 그리던 참인 진은 매화 문양 벼루 뚜껑에 붓을 걸치며 손님을 반겼다.
“어머나 스님! 정말 참말 반가워요~”
진은 제월의 손을 잡고 별당으로 안내하자마자 성급하게 물었다.
“스님, 지족 스님은 그 후 어찌 지내시나요?”
“여전하십니다.”
“그러세요?”
진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저도 모르게 합장하였다.
“호오, 파계 환속이라도 하신 줄 아셨어요?”
제월은 손목에 걸린 염주를 만지작거렸다. 사실 지족은 진이 떠난 그다음 날로 홀연히 자취를 감춘 거였지만, 놓친 소를 찾으러 떠난 거였지만, 바른대로 말할 수가 없다. 아니다. 파계 환속은 아니리라 믿고 싶어 그리 얼버무린 거였다.
“여자의 힘이란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를 모르고 지낼 뿐이지요.”
“그럴까요? 별로 마음에 차지 않는 말씀이시군요. 저는 여자의 힘이야말로 위대하다고 믿습니다. 이 세상 남자들이 모두 여자에게서 나왔으니까요.”
“진이 씨 그 말씀엔 꼭 남정네들 주장처럼 힘이 서렸군요.”
제월이 멋쩍게 웃었다.
“절에나 한번 올라오세요. 부처님 앞에 앉아서 묵상에 잠기노라면 스스로가 한없이 초라해짐을 알 수 있습니다.”
“스스로 초라해짐을 알기 위하여 부처님 앞에 묵상한다는 것 역시 맘 내키지 않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여자의 한계에 도전하는 식의 삶을 즐기고 있는 저로선……, 스님. 제가 자꾸 비뚤어진 말씀을 올리는군요. 송구해요.”
“별말씀을……아무튼 번뇌도 떨쳐버릴 겸 휴양도 할 겸 절에 올라오세요.”
절에 올라와서 지족이 사라진 지족암을 직접 목격하라는 뜻임을 진은 까맣게 몰랐다. 모른 채로 말했다.
“말씀은 고맙지만, 저는 가끔 제 그림 속에다 번뇌를 떨쳐버리곤 해요.”
진이 방금 그리던 산수화를 가리켰다. 금강산 구룡폭포 상상도이다.
“여자의 힘에만 한계가 있는 게 아니라, 상상만으로 그림을 그리는 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실경산수화 때문에…… 언제고 금강산엘 가고 싶습니다만, 이번 여름엔 평양엘 좀 다녀오려고요.”
“어쩌면 재주도 많습니다. 그림도 이리 잘 그리시니……”
제월은 진이 직접 그린 10곡 병풍 박연 풍경과 눈 아래 펼쳐져 있는 미완성 산수화를 번갈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뭘요, 아직 많이 미숙하죠. 겨우 제 시에다 그림을 곁들일 정도, 반대로 제 그림에다 시를 곁들일 정도예요. 그저 취미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서경의 산수를 그리시려고?”
“평양에는 이언방이라고 하는 명창이 계시다는데, 전부터 그분을 찾아뵙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겸사겸사……”
“소승이 동행해도 될까요? 그림 그리는 모습도 구경하고 싶고……”
너무 고마웠다.
“스님이 어떻게?”
“구름 따라 물결 따라가는 나그네……, 그래서 중의 행각을 행운유수에 비기지요.”
어차피 서두를 일은 아니지 않으냐고 하면서 제월이 제의했다.
“누구나 중 옷을 입으면 중의 마음이 되어요. 기생 옷을 입으면 기생 마음이 되는 것처럼 말이어요. 서경에 도착하면 다시 옷을 바꿔 입으면 되니까, 어때요? 그러실래요?”
제월은 자기의 여벌 옷과 바랑을 가지고 와서 진에게 입혔다. 드디어 행운유수라는 그 행각이 시작된 거였다.
황해도 땅 사리원 어느 지점에 이르렀다. 산모롱이 외딴집 돌담에는 담쟁이가 무성하게 기어오르고, 그 옆에는 고목이 다 된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두 여인은 사립문 앞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외기 시작했다. 진은 비록 제월의 염불은 흉내조차 못 냈지만, 이따금 ‘나무아미타불’을 욀 때면 경건하고 고요하고 신비스럽기조차 했다. 한참 후, 집안에서 한 사람 나오는데, 병색 완연한 젊은 사나이였다. 목이 가늘게 드러나고 수염이 더부룩했지만 선비는 선비였다.
“미안합니다. 내 집엔 시주할 양식이 아무것도 없어서요.……”
그러던 선비의 눈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지극히 아름다운 두 여승이 그를 매혹시킨 거였다.
“찬물이나마 한 바가지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제월이 그리 말하자, 선비의 얼굴에 왠지 모를 기쁨이 넘쳤다.
“그러죠. 저희 집 자랑이라곤 뒤울에서 나는 박우물뿐이니까요.”
그는 뒤울로 돌아가더니 찬물 한 바가지를 넘치도록 떠서 들고 왔다. 두 여인은 달갑게 받아 번갈아 가며 마셨다.
“참으로 시원한 물, 잘 마셨습니다. 심산유곡에서 나는 약수나 진배없군요.”
“부처님 자비가 햇살같이 내리시기를……, 나무관세음보살.”
사나이의 눈길에 어떤 그리움이 담뿍 실려 넘실댔다. 너무나 외로운 사람의 피맺힌 애소였다. 자꾸만 그 남자가 부르는 것만 같아서, 진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걸었다. 제월도 묵묵히 걸었다. 노송 한 그루가 외로이 서 있는 산등성이를 넘을 무렵까지도 그 얼굴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얼마쯤 더 걸었을까, 뒤에서 다급한 발짝 소리가 들렸다.
“스님! 스님!”
일고여덟쯤 된 모지랑 댕기꼬리의 어린 소년이었다. 두 여인이 똑같이 발을 멈추자, 소년은 연방 숨을 헐떡이며 와서는 뭔가를 불쑥 내밀었다. 조그마한 쪽지였다.
내 마음 그대가 뺏어가니
내 마른 몸이 홀로
담장에 기대섰어라.
무슨 뼈아픈 호소인가. 제월의 손은 깊이 합장하고, 그렁그렁해진 진의 눈망울은 멀리 감나무 옆 돌담에까지 길을 냈다. 남녀의 정이란 순간적으로 움직이는 것. 뜨거운 것이 정이라면 슬픈 것 또한 정이다. 진은 별안간 주저앉았다. 바랑을 벗어 땅에 놓고, 안을 뒤적여 필낭을 끄집어내었다. 작은 벼루를 바위 바닥에 놓고, 연적의 먹물을 몇 방울 벼루에 떨어뜨린 다음 붓끝을 앞니로 잘강잘강 씹어서 풀었다. 그리고 붓끝에 먹물을 적셨고, 종이 한쪽을 찾아내어 그 위에 역시 세 줄 시를 적었다.
나귀는 내가 무거워 헉헉
숨이 차다 하는 줄로 알았더니
한 사람 넋을 더 태워 그리도 허덕였군요.
승복을 입고 걸어가는 나그넷길이긴 하지만 귀한 여인이 길을 가려면 나귀를 타는 게 상식이어서 그리 썼다. 그리고 아이에게 쥐어 보냈다. 평양 길 오백 리를 가면서 진은 내내 그 사내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아직도 돌담에 기대 있을까? 감나무 그늘 아래 누워 있을까? 돌아가는 길에 다시 한번 찾아볼까? 아니 될까?’
두 여승은 근 보름 만에야 평양성 밖에 이르렀다. 떡갈나무에 칡덩굴이 뒤엉켜있는 숲길. 진은 제월에게 뜻있는 눈짓을 보내고는 바랑을 한 손에 든 채 숲을 헤치기 시작하였고, 숲속으로 들어가서는 몸에 걸쳤던 승복을 훌훌 벗고 기생 옷으로 갈아입었다. 잠시 후 여승과 기생 두 여자가 평양성 문 안으로 들어섰다.
“소승은 절을 찾아가 있다가 돌아가실 때에 동반하겠습니다.”
“그러세요.”
저녁 무렵, 진이 이언방의 집 일각대문 앞에 섰다. 젊은 여자가 남의 집 대문 앞에서 ‘이리 오너라!’하고 주인을 찾기는 좀 민망했다. 진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뜻 있는 미소를 흘렸다. 그리고 청아한 목소리를 녹녹하게 뽑아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 서경 하면
이언창(李彦唱)에 세월 잊으리.
나그네가 주인을 찾는데 노래로 대신했다. 노래도 다른 노래가 아니다. 그녀가 지난날 벽계수를 향하여 불렀던 즉흥시의 변용이다. ‘이언창’은 바로 이언방의 노래라는 뜻이 아닌가. 개성 명기 황명월이 일도 서경해서 이언방의 노래를 듣고 싶다는 거다. 이윽고 안에서 반응이 왔다. 키가 후리후리한, 바짝 마른 사내가 나와 대문을 따더니 바깥을 내다본다.
“누굴 찾아왔습네까?”
사내가 빤히 쏘아보며 물었다.
“여기가 이언방 선생님 댁이시죠?”
“그렇수다만……,”
“지금 계신가요?”
“어케 오셨디요?”
“개성에서 선생님을 뵈려고 찾아왔습니다.”
“아하, 형님은 지금 집에 아이 계시는데, 안됐수다레.……”
진이 공손히 절을 했다. 대문 앞에 선 채로, 정말 날아갈 듯이 절을 했다. 사내는 엉겁결에 절을 받으며 진의 돌발행동을 요모조모 뜯어보고 있었다.
“선생님, 개경 기생 황명월이 선생님의 신창(神唱)을 사사코저 오백 리 길을 물어물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사내는 흠칫하여 몸을 뒤로 빼더니 손까지 내젓는다.
“글쎄 형님은 한양엘 가시구 아이 계시다니까니? 내래 노래와는 담을 쌓은 사람이우다.”
진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선생님, 소녀 눈은 못 속이셔요. 이 세상에서 그런 맑은 목소리를 가지신 분은 이언방 어른 한 분뿐이신걸요. 아무리 형제간이라두 두 분 다 그런 목소릴 가지실 리 만무지요……. 선생님을 사모하여 먼 길 왔사오니, 부디 거둬주십시오.”
그제야 껄껄거리며 이언방이 웃었다.
“하하하! 내래 평소부터 만나구 싶었쇠다. 내래 선생이 될 수야 있갔소만, 하여간 들어오시기요.”
이언방은 서도(西道) 관기 2백 명을 모아놓고 그의 뛰어난 창법을 전수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 속에 개성 기생 진랑이 끼어들었다. 그는 제자들 앞에서 사뭇 거드름을 피웠다.
“내래 일찍이 대면하기를 원했다. 개경의 이름 높은 미희이구, 명창이구, 명기인 황명월, 황진이!”
그는 옆에 앉힌 진을 눈이 시리다는 듯 돌아보았다.
“그 명월이가 나를 찾아왔기루 이 자리에 참예시켰으니까니, 너희들은 개경의 절창을 한 번 들어 보라.”
시샘 넘실대는 눈동자 400개가 일제히 진이에게로 쏠렸다. 몸이고 얼굴이고 뚫어질 것만 같다. 턱 하니 숨이 막히고야 말지 싶은 긴장감이었다. 스승이 첫 운을 떼면 이백 명 미희들이 일제히 따라서 복창하는데, 꼭 스승 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다음에는 차례대로 한 사람씩 스승이 부른 노래를 그 창법대로 독창하는데, 열이면 열, 백이면 백이 다 똑같았다. 늙은 고수는 땀을 뻘뻘 흘리며 같은 가락을 수없이 되풀이하고, 스승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는 제자들의 창법에 귀를 기울였다. 드디어 진이 차례가 왔다.
‘황명월이 네가 아무리 잘났기로 우리만이야 하겠느냐’는 자긍심으로 똘똘 뭉친 그들이 숨을 죽였다.
“명월! 그대 차례야!”
장구채를 잡은 늙은 고수가 엉덩이를 들먹거렸다. 덩다쿵, 가락이 신호처럼 울려 퍼졌다. 그의 장구채가 번쩍 들려 공간을 끊자, 마침내 진의 입이 열렸다. 그녀의 맑은 음색은 시가 되고 가락이 되어 모여 앉은 모든 사람들의 혼을 빼기 시작하였다. 노래는 서경별곡 뒷부분으로 원음 그대로이다.
대동강 아즐가 대동강 너븐디 몰라서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배내여 아즐가 배내여 노한다 샤공아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네가시 아즐가 네가 시럼난디 몰라서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녈배에 아즐가 녈배에 연즌다 샤공아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대동강 아즐가 대동강 건너편 고즐여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배타들면 아즐가 배타들면 것고리이다 나난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대동강이 넓은 줄 몰라서 사공아 너는 배를 놓았느냐.
내 시름 큰 줄 몰라서 사공아 우리임을 태웠느냐
우리 임 배 타고 대동강 건너가면
그곳의 꽃을 꺾을 줄 몰라서 태웠느냐.
26. 달빛을 고스란히 보듬고
“으흠,”
늙은 고수는 장구채를 잡고서도 장단 치기를 잊었다. 어린 기생들은 새까만 눈동자를 자꾸만 깜박거렸고, 나이 든 기생들은 입을 딱 벌린 채 다물 줄을 몰랐다. 스승 이언방은 두 눈을 감고서 짐짓 조는 척했다. 그리고 진의 노래가 끝난 지 한참 만에야 눈을 떴다.
“내 오늘부터 남에게 가창 가르치는 거를 그만두갔수다.”
그는 골이 잔뜩 오른 표정으로 그렇게 선언하더니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너희들 모두 일어나라!”
그는 노래 제자 2백 명을 모두 일어나게 했다.
“한낱 기생의 노래가 아니디. 닦여진 재질이 아니야. 이건 입신의 경지가 아니가서? 너희들은 이 노래 선녀에게 경배를 올려라!”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명령이긴 해도 스승의 분부였다. 그네들은 넉 줄로 늘어서서는 두 손을 하나같이 이마에 마주 걸은 채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소리라곤 치마의 사각거림뿐이었다.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에미나이 하나에게……’
다시 자리에 앉은 미희들은 심사가 뒤틀려버렸다. 스승 이언방은 그런 눈치를 번연히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아니 한술 더 떴다. 그는 자신도 한 손을 방바닥에다 짚으며 소위 노래 선녀에게 경의를 표함으로써 여자들의 시샘에다 찬물을 끼얹었다. 덧붙여 감격적인 목소리로 진이에게 청을 넣기까지 하였다.
“일찍이 개성 명기 황진이 황명월의 명성은 들어 알구 있었디만, 과연 국창이우다. 내 듣기룬 님자가 아박무가 장기라는데 한 번 보구 싶쇠다.”
‘아박무? 그 춤이 서경에까지 소문나 있었다니……’
진은 뜻밖이었다.
“시서(詩書)에 능하고 사군자에 일가를 이루고, 금악(琴樂) 또한 절기(絶技)인데다, 인물은 말할 것도 없고, 춤 또한 신묘를 극한다던데, 이왕이면 내래 한 번 보구 싶쇠다.”
아박이 진이 손에 쥐어졌다. 뭇 미녀들의 손때가 묻어 윤기 자르르해진 아박이었다. 진은 부채를 펴듯이 하라락, 부채를 접듯이 하라락, 그렇게 한 번 펴보고 한 번 접어보고 한 뒤에 여러 기생들을 둘러보곤 별안간 살포시 앉아 인사를 했다. 그로써 춤의 앞치레는 끝난 셈이었다.
할랑, 슬쩍, 옷고름이 날고 몸매가 율동을 시작했다. 하라락, 다그르륵, 하라락, 다그르륵, 아박이 울었다. 진의 춤은 일정한 공식이 있는 게 아니어서 더욱 특색을 지녔다. 그렇다고 자기 멋대로는 아니었다. 타당성 있는 격식을 바탕삼고 그녀 자신의 자유분방한 멋을 가미시킨 독특한 무용법이었다. 서경 산천의 기녀들로선 듣지도 보지도 못한, 오로지 희로애락의 승화만이 물씬물씬 풍겨나는 춤. 그것이 진이의 춤이었다. 그녀만의 아박무였다.
이언방의 집 별채. 진은 여독을 풀 겸 주인과 더불어 술잔을 주고받았다.
“내래 서도에선 이언방이라고 자처하고 있었는데, 여간 부끄럽디 않구먼.”
“제가 감히 선생님을 따를 수야 있겠습니까? 선생님은 남정네시고 저는 젊은 계집이라 남 보기에 재롱이 좀 더 돋보일 뿐이어서 그런가 하옵니다.”
사실 그럴지도 몰랐다. 관서의 명창은 이언방, 한양에서는 이사종, 그리고 개성에서는 황진, 서로 독특한 창법을 가진 국창들이었다. 그러니 누가 더 윗길이고 누가 좀 아래라고 규정지으려는 것 자체가 문외한들의 잣대일는지도 몰랐다.
“개성에 한 번 오시어요. 박연폭포는 꼭 한 번 보실만합니다.”
“그 소문은 익히 들었디. 개성에 가면 우선 황진이를 찾고 그 담엔 박연폭포를 찾는 거이 천하 한량들의 한결같은 순서라구 말이야.”
“지필묵을 좀 빌려주시겠어요? 제가 지닌 것은 한정이 되어있어서 말이지요.”
진은 이언방이 내놓은 종이에 그녀의 애송시 한 편을 썼다. 전에 소세양 앞에서 노래한, 병풍에 새기기까지 한 그 노래였다.
一派長川噴壑礱 (일파장천분학롱)
龍湫百仞水潨潨 (용추백인수총총)
飛泉倒瀉疑銀漢 (비천도사의은한)
怒瀑橫垂宛白虹 (노폭횡수완백홍)
雹亂霆馳彌洞府 (박난정치미동부)
珠舂玉碎徹晴空 (주용옥쇄철청공)
遊人莫道廬山勝 (유인막도여산승)
須識天磨冠海東 (수식천마관해동)
기나긴 물줄기 하나 바위에서 뿜어져 나와
용이 치솟는가, 백 길도 넘게 물소리 우렁우렁
나는 듯 거꾸로 솟아 은하수 같고
성난 폭포 가로 누워있으니 하얀 무지개로다
우박인가 우레인가,
물방울 알알이 흩어져서 골짝을 채우고
구슬 방아 옥을 깨면서 맑은 공중 꿰뚫는다.
길손아, 여산만 좋다고 말라
천마산이야말로 해동에 으뜸이란다.
…… 일필휘지, 문자 그대로 한 번 먹을 찍어 휘갈겨 쓰는 글이지만, 시구의 심오한 뜻과 필체의 유려한 멋은 단지 가성(歌聖)이라고만 일컬어지는 이언방을 꼼짝없이 주눅 들게 하고도 남았다.
“흡사 남정네의 시로구먼.…… 헌데, 박연이 중국의 여산보다도 더 절경이라 이 말이지비? 시가 장엄하구만. 장엄해.”
글 뜻을 헤아리고 있던 이언방은 바로 눈앞에서 박연폭포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아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송순 선생은 폭포가 장엄하다고 하여 개성에 장엄정을 지었고, 이언방은 오히려 황진의 시가 장엄하다고 격찬한다. 이 시를 소세양 어른 앞에서 노래로 불렀던 그 날이 그리워, 저절로 그렁그렁해진 눈매로 진이 멋쩍게 웃었다. 날은 이미 어두워 달이 휘영청 밝았다. 갑자기 전쟁이라도 터졌는가. 웬 사내가 마치 파발마처럼 급하게 들이닥쳤다. 엎어질 듯 말에서 내린 그는 곧바로 타당 탕 대문을 두드려댔다. 주인이 나가 정중히 물었다.
“이 야밤중에 웬일이외까?”
“개성 명기 명월이 댁에 와서 묵고 있다는데 사실입네까?”
사내가 말고삐를 한 손에 잡은 채로 묻는 거였다.
“명월일 대령시키라 합데까?”
말채찍 곤두세운 채로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님자가 직접 데리구 동헌 내실로 들라는 분부시외다.”
이언방은 평안감사 이구덕의 속셈을 짐작하고는 뒷머리를 쓰윽 긁었다.
“글쎄요, 명월이 말을 들어먹을까 모르갔수다.”
“메라구요? 명월이구 반월이구 기생이 아니갔소? 기생이디요?”
“기생이디요.”
“기생이 피양감사 영을 거역한다 이 말입네까?”
특별임무를 받잡고 온 비장은 한껏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언방은 태연자약하게 대꾸하였다.
“듣기론 명월이 그런 면에 고집이 대단하답디다. 제 맘이 내키디 않으면 왕명이라두 고개를 흔들디, 고럼. 일단 한 번 고갤 흔들었다 하면 막무가내루 나가디 않는 거이 명월이 신조라구 알구 있쇠다.”
“하디만, 피양감사께서 부르시는데 안 가구 배길 에미나이가 어디 있갔소? 내래 직접 끌구 가갔쇠다.”
비장은 진이 쉬고 있는 뒤뜰채로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개성 기생 명월이, 네 듣거라!”
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 사또께서 명월이 너를 즉각 대령시키라는 분부시다. 얼릉 채비를 차려라! 알간?”
“평양 감사는 평양기생이나 부르실 일이지 나들이 온 먼 고장 기생에게 오라 가라 하시는 건 예의가 아닙지요.”
진이 방문도 열지 않은 채로 단호하게 거절하자, 평양 본토박이 비장은 눈알을 불거트리면서 노기등등하게 소리 질렀다.
“메라구? 피양감사는 피양기생이나 부르라?”
비장은 이언방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또 말채찍을 곤두세우며 분노를 터뜨렸다.
“당장 동헌에 대령하자우! 안 그럼 무사히 피양땅을 벗어나지 못하지비!”
우락부락 으름장까지 놓는 저 사내를 어찌 당해내랴.
“문이나 열라우. 도대체가 건방제서 못쓰갔구나!”
그제야 진이 발딱 일어나서 방문을 열어붙였다. 와르르 달려든 달빛을 고스란히 안고 서 있는 여인의 청초한 모습이라니! 비장은 한동안 멍하니 선 채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어허, 덩말 고운 여자우다래!”하고 무심결에 뇌까렸다. 그러나 한순간이라도 임무를 까먹을 순 없는 노릇. 그는 부랴부랴 정신을 수습했다.
“날래 가자우! 우리 사또께서 기다리시니까니!”
평안감사 이구덕은 한 여자를 두 번 부르는 일이 없는 것으로 이름 나 있었다. 술이 거나하게 오르면 일쑤 “계집이란 두 번 건드리면 정이 생기지. 정이 생기면 귀찮은 요물이 되고 말이야. 하하하하!”하면서 자기의 외도 철학을 자랑하는 이구덕에게 비장은 정말 많은 여자들을 제물로 갖다 바쳤다. 그런데 지금 달빛을 한 아름 안고 서 있는 저 기막힌 여인 황명월도 하룻밤 노리개로 바쳐야 하나. 갑자기 너무나도 아까워 비장은 배가 다 아파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
“몸단장 하구 썩 나서라마. 사또께서 너를 볼라구 기대리시는 중이니끼니.”
모질게 마음 다잡고 호통쳐보는 비장. 그러나 그의 호통은 어느새 종이호랑이의 바스락거림으로 변해있었다. 게다가 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용히 말한다.
“이왕 평양성에 들어온 기생의 몸. 그렇잖아도 사또께 문안을 올려야 마땅한 줄 압니다만…….”
이렇게 나오는 데야 또다시 무슨 호통을 더 친단 말인가.
“하지만……, 이보시오 비장 어른!”
그녀는 방에서 나와 툇마루에 섰다. 그것도 당당하게 섰다.
“오늘은 제 몸 형편이 좋지가 않군요. 난생처음 먼 길을 와서 그런지……”
창백하였다. 언뜻 달빛에 보아도 얼굴에 핏기가 가셔 있다.
“송구스럽습니다만, 사또 나리를 내일 저녁쯤에 뵈러 가면 아니 될까요?”
오히려 의논조로 나오는 개성 기생 진랑을 바라보면서 비장은 입맛이 썼다.
“그렇게 하시라우요. 비장 나으리께서 사또 어른께 잘 말씀 디려서 더두 말구 하루만 기다려 주시도록 하구레.”
이언방도 옆에서 거들었다.
“고럼 내래 사또께 말씀 잘 디릴 게니, 오늘 밤은 펜히 쉬도록 하라우!”
비장은 발길을 돌리기 전에 다시 한번 황명월을 보았다.
“사또에게 아주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앓아누웠더라구 고렇게 고해야겠쇠다.”
비장이 자기의 난처한 처지를 털어놓으며 한껏 생색내자, 이언방도 덩달아 맞장구쳤다.
“우리가 어제오늘 안 사이가 아니구, 이런 때 내 닙당두 좀 봐주셔야지 않갔소! 아하하!”
비장을 살살 달래가며 배웅하고서 이언방이 다시 진의 처소로 돌아왔다.
“내 명월이 피양 온 거에 대해서 함구했는데 어드렇게 냄새를 맡았군그래. 근데 낼은 어카갔다는 거이가?”
헛헛한 웃음을 머금고서 진이 찬찬히 말했다.
“기생이란 본시 사또의 밥입니다. 소녀가 사또의 영을 어기기라도 하면 선생님의 처지가 여간 난처해지는 게 아닐 거 같아서 그리 약조했던 거죠.”
27. 곤륜산 옥을 그 누가 다듬어서
“내일 저녁엔 사또한테 가갔다 그 말이디?”
“안 가도 되나요?”
두 예인은 잠시 하늘에 떠 있는 둥근 달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언방의 표정이 매우 착잡하였다. 결국 그도 사내임에 틀림없었다. 재능은 젖혀놓고라도 뭐라 이름 붙일 수도 없이 고혹적인 진의 매력에는 취하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방문을 활짝 열어놓아서 달빛이 통들이 쏟아지고 있는 데다, 이 세상 그 어디서도 맡아보지 못한 신비로운 향내까지 솔솔 풍기고 있는 거였다. 불현듯 그 현상을 알아차린 진이 말을 돌렸다.
“개성에는 개성난봉가가 있습니다. 평양에는 무슨 노래가 있사오니까? 잡가로 말이에요.”
“수심가, 배따라기가 있디.”
“선생님, 서로 자기 고장 노래나 한 곡씩 부릅시다. 거문고 좀 주시겠어요?”
잡가에는 거문고가 썩 어울리지는 않으나 그들은 나직나직 번갈아 가며 목청을 뽑았다. 그
러다 이언방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나한테 노랠 배우러 오는 사람은 많디. 그러나 명월은 배울 게 없쇠다. 그러니끼니 공연히 여게 머물러 있다가 사또한테 봉변당하디 말라우요. 어차피 가야 한다면, 낼 아침 일찌가니 떠나는 거이 좋디 않갔어?”
진이 거문고 줄을 퉁기당당 디당당 퉁기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사또가 꽤 풍류한이라죠?”
이언방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치한이디.”
그녀는 나직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니, 풍류의 고장 평양성 사또가 풍류를 모르는 치한이란 말씀이오니까?”
이언방도 웃었다.
“피양감사야 조정에서 임명하는 대관이 아니외까. 조정에서 피양감사를 뽑는데 먼저 그 사람의 풍류를 알아보고 뽑디야 않갔디.”
평안감사 아니라 영의정일지라도 풍류를 모르는 치한이라면 절대 사절이다. 지금껏 그런 좌석엔 어떤 구실을 대어서라도 불참해왔다.
“평양성이 좋다기에, 대동강이 놀만 한 곳이라기에, 며칠 두루 구경이나 하고 갈까 했는데 그것도 뜻대로 되지를 않는군요?”
“변장을 하구서니 나서보라마.”
“그렇게 쫓기는 마음으로 산천경개를 구경한대서야 어디 ······ 후일로 미루지요.”
온 하늘에 총총 박혔던 별들은 달이 떨어져 버리자마자 저마다 깜박깜박 신호를 보내고, 온 마을 닭들도 번갈아 가며 홰를 쳐댔다. 이언방은 대동문에까지 따라 나왔다. 좀처럼 못 만날 아름다운 사람과의 이별에, 쉽사리 발길 못 돌리는 그가 진은 몹시 안쓰러웠다.
“한 번 오세요. 제가 개성 구경 실컷 시켜 드릴께요.”
“내 한 번 꼭 가갔소.”
“들어가 보세요. 신세 많이 지고 갑니다, 선생님”
두 사람의 얼굴에 똑 같은 아쉬움이 스쳤다.
“얼른 가봐야디. 감사는 또 비장을 일찌가니 내 집으로 보낼기야.”
예인 이언방. 그의 뒷모습은 마치 수수깡에다 옷을 입힌 것 같았다.
어쨌든 그냥 그대로 평양성을 등질 황진이 아니었다. 그녀는 혼자 남의 눈을 조심하면서 대동 변을 두루 구경하였다. 산수화 몇 점도 소묘하였다. 그러고 서쪽 하늘에 저녁노을이 곱게 비낀 무렵에야 성문 밖으로 나왔다.
며칠 후, 두 여승은 평안도와 황해도의 접경을 넘고 있었다. 구름조차 쉬어간다는 영마루.
“우리 그리루 들러 갈까요?”
“어디루?”
제월은 진의 고깔을 뒤로 젖혀주며 되물었다. 진의 얼굴에서 연민의 정이 자르르 흐르고 있었다.
“돌담에 기대선 채로 망연히 보고 있던 그 선비가 자꾸만 마음에 걸리네요. 지금쯤은 병이 좀 나아졌을라나······.”
“더 나빠졌을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목마른 사람의 목을 축여준 그 인연은 전생 인연과 무관하진 않을 겁니다. 전생에 누구였을까······?”
바로 눈앞에 스치는 구름을 바라보면서 제월은 허무한 궁금증을 드러냈다. 선비의 집은 돌아가는 길에 지나게 되어 있는 곳은 아니었다.
평양으로 갈 때는 어차피 유람 삼아 가는 길이어서 길이 생긴 대로 가다 보니 만나게 된 외딴집이었다. 하지만 진은 벌떡 몸을 일으키면서 고깔을 썼다.
두 사람의 발길은 어느새 그 돌담집이 바라다보이는 산마루에 올라섰다. 지난번 쪽지를 전해주던 아이가 보였다. 목화밭 머리에다 오줌을 누고 있던 아이는 몸을 발딱 젖히면서 수줍게 웃었다.
“잘 있었니?”
아이는 아주 씩씩하게 “예!”하더니 이내 얼굴 붉히며 고개를 숙이는 거였다.
“얘, 접때 그 어른이 너희 아버지시냐?”
제월이 한쪽 어깨에서 바랑의 멜빵을 벗기다 말고 물었다.
“형님이세요.”
“그래? 그럼 너희 형님은 그동안 안녕하시니? 병은 좀 나으시고?”
“죽었어요.”
마침 머리 위로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가며 까악 울었고, 아이는 눈물을 글썽였다. 두 여인이 이구동성으로 무슨 소릴 하느냐고 물으니 아이는 다시 말했다.
“돌아가셨어요, 우리 형님.”
“정말이니?”
두 여인은 털썩 주저앉을 것 같이 비틀거렸다.
‘이토록 허무할 수가······’
진은 낯익은 돌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담쟁이 이파리마다에 서러운 망인의 모습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천천히 돌담을 돌아서, 두 여승은 사립문 앞에 섰다.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외웠다. 젊은 나이에 병들어 죽어간 한 인생의 극락왕생을 빌어주고 싶어서였다. 바로 그때,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집안에서 한 사나이가 방문을 펄쩍 열고 내다보는 거였다. 순간 두 여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백주대낮에 귀신이 보이다니!’
제월은 성깔 있게 목탁을 두드려댔다. 하지만 댓돌에 내려선 사내는 죽었다는 그 선비가 아니었다.
“이지함?”
진은 화들짝 놀라서 고깔 쓴 머리를 푹 수그렸다. 수그린 채로 염주만 내내 굴려댔다. 사나이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뚜벅뚜벅 두 여승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허, 귀한 분들을 예서 만나는군.”
맴 매앰, 별안간 매미가 울었다. 맴맴, 맴 맴 매앰······. 매미는 더더욱 시퍼런 소리로 그네들의 귓전을 때렸다.
“언제 입산을?”
사내의 물음에 진은 잠시 얼굴을 붉혔다. 변명을 안 할 수도 없다.
“일시 편법으루······, 그런데 형님께선 여길 어떻게 오셨나요?”
“내 아우 집이라네.”
“막내이신 줄 알았는데 아우가 있으셨나요?”
“거야, 자네도 내 아우뻘 아닌가? 아무튼 아는 아우 집이네.”
얄궂다, 그 선비가 바로 당신의 아우였다니······ 아는 아우이든 친척 아우이든 도무지 못 믿을 일이지만 믿을 수밖에 없다.
“아우가 이곳에서 오개년 계획으로 공부를 파고들더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랜만에 들러보니 병들어 죽었더라고. 때마침 장례 날이라 이웃집 사람들과 장사를 지내주었다는 설명이었다.
“과거 공부 그 부질없는 괴물이 또 한 사람을 잡았지.”
헛헛한 그의 웃음이 가만가만 저녁 하늘에 번져갔다. 두 여인은 다시 묵념했다.
“일전에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아우 되시는 분한테 물을 얻어 마셨지요.”
“내 아우에겐 다행이었구먼그래.”
“무슨 말씀이오니까?”
“산골 촌사람이 진랑 같은 국색을 한 번이나마 보고 죽었으니, 얼마나 행운아인가? 하하하!”
“형님두 참, 이 판에 무슨 농을······?”
“그나저나 날도 저물었는데 여기 어디서 자고 가지?”
“그래두 가봐야지요.”
그러면서도 두 여인은 얼른 발을 떼지 못했다. 산중이라 금방 어둠이 밀려들 거였다. 게다가 가까운 곳에는 인가라곤 보이질 않았다.
“그럼 나으리, 하룻밤만 재워주시겠어요?”
“나는 이제 천민이니 나으리는 빼고 계속 형이라고 불러주시게.”
진이 머리에 쓴 고깔을 손끝으로 치켰다.
“형님, 언제까지는 양반이었다가 언제부터는 천민이고······ 왔다 갔다 하는 신분 계급이 참말 우습네요,”
“하하하, 딴은 그렇군. 정말 우스운 신분제도야! 그러고 보면 날 때부터 양반 명찰을 달고 나오진 않는다는 게 증명되는 셈이네. 안 그런가?”
“형님은 날 때부터 양반 명찰 달고 나오셨잖아요?”
“그런데도 지금은 천민 신세라······ 하하하! 웃기는 세상이야.”
세 사람은 데굴데굴 구르기까지 하며 웃어댔다.
“그나저나 여승과 기생의 차이는 뭔가? 그 삼단 같은 머리가 고깔을 쓴다고 감춰지나? 왜 하필 승복을 하고?”
“스님의 길동무가 돼서 방랑 좀 하느라구요.”
“천하의 재녀 진랑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던 모양이야?”
“목하 방황 중입니다, 형님······”
어느새 마루 끝에 올라앉아서 두 여인은 다리를 쭉 뻗었다.
“지족하고의 일은 소문으로 들었네.”
“민망스럽습니다, 형님······”
“한낱 객기였겠지?”
“넘어야 할 산이라고 여겼는데, 지나놓고서야 객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원효가 삼악도를 섭렵한 연후에야 해탈했듯이, 지족도 황명월을 등에 업기, 팔에 안기를 해보고서야 그러고서야 득도를 했을 거네. 석가모니도 여자를 안 연후에야 구도의 길을 나섰던 게 아닌가. ······ 헌데 아우님! 지족을 파계시켰다고 생각하나?”
진의 얼굴에 저녁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지족 선사는 우선 막강한 사나이, 더군다나 고승이십니다.”
“옳거니, 알고 있었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이지함이 관솔불을 밝혔다. 지함은 지족이 운주사라는 곳에 가서 불탑을 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지족이 지족암에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여승 제월도 윗방으로 들어가더니 삿자리 위에 몸을 뉘고 이내 잠들어버렸다. 하르르 쏟아지는 달빛 아래서 두 사람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제가 터득한 바로, 인생이란 풍류 없인 허망하다는 겁니다. 그 풍류란 세상 물정에 구애됨이 없이 제 마음 가는 대로 충실히 따르는 것이고요.”
“심중에 가두어놓은 자네의 솔직한 언어가 바로 마음 가는 대로인가?”
“예, 서방님.”
“서방님이라?”
이지함이 짐짓 놀라거나 말거나, 진은 서슴없이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그리고 너무 담백한 얼굴로 나긋나긋 이야기를 이어갔다.
“서방님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달빛에 싸여서 마냥 안겨 있고 싶습니다.”
사내 품에 안겨 하는 이야기인데, 천박하지도 않았다.
‘당신은 역시 자기 인생에 충실한 여자야. 멋쟁이야!’
이지함은 속으로 감탄하면서 진을 꼭 안았다.
‘아아, 이 황홀한 향기······.’
은은한, 신비로운 향내가 사람을 마취시킬 것만 같이 달려들었다. 마음이 이성을 원하고 몸이 그것을 보챌 때, 아무 거리낌 없이 스스로 사나이 품에 안기면서도 담담한 심경일 수 있는 여자가 바로 진랑, 황진이었다.
곤륜산 옥을 그 누가 다듬어서
직녀의 얼레빗을 만들었던고.
그리운 견우님 떠나가신 뒤
서러워 허공중에다 내던져 버렸네.
“언제 지은 시인가?”
“글쎄요, 수로부인이었을 때 지었던 시일까?”
“하하하, 자네의 전생이 정녕 수로부인이었다, 그 말이로군?”
“수로부인 이야기를 소설로 쓰다 보니 자꾸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무튼 진의 재능은 아무도 못 말리지. 하여간, 그 시는 전에 소세양 어른 떠나신 후에 지은 게 아닐까 싶은데?”
“그랬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제 시에 등장하는 견우님은 단수의 인물이 아니지요. 저를 사모하다 죽은 총각일 수도, 서화담 선생님일 수도, 그리고 지함 형님일 수도 있지요.”
“바로 이 몸일 수도 있다? 영광이로군. 아무튼 그러고 보면 만남도 이별도 기막힌 시를 우려내는 원동력이었던 셈이군.”
“원동력이라면 차라리 정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마음 말입지요.”
그러고 진은 마치 되새김질을 하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북님, 내 거북님은 어디 계실까?
단 하나의 내 사랑, 영원한 내 짝은 도대체 어디 계시다는 말일까? 혹 지함 형님 당신이 내 거북님이실까?’
달빛이 쏟아져서 더욱 싱그러워진 산바람. 바람이 그랬다는 것처럼 진의 머리에서 고깔이 벗겨져 나갔다. 염주도 손목에서 벗겨졌다. 사랑은 길어질 수도 짧아질 수도 있다. 일시적인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어차피 한 번 왔다 가는 인생인데, 인생 자체가 순간인데, 순간을 왔다 가는 나그넷길이 인생길인데, 길면 얼마나 길고 짧으면 얼마나 짧을 것인가. 화르르 불처럼 탄다지만, 타다가 재를 남기는 사랑과 재조차 없이 완전 연소해 버리는 사랑, 그 차이일 뿐이다. 하르르, 진의 영육은 완전 연소를 지향해 불붙었다. 거기엔 망설임이나 뉘우침이 있을 수 없고, 꾸밈도 사양함도 없었다.
“서방님!”
진은 가만히 사나이를 불러놓곤 눈을 감았다. 우주의 모든 움직임이 일시에 정지해버린 마음의 못에 못다 핀 열꽃만 가라앉았다. 마치 자궁 속 양수에 몸을 맡긴 태아처럼. 이지함, 그와의 하룻밤은 승화된 열정의 극치였다. 처음이라는 어색함도, 날이 새면 그만이라는 구지레한 미련도 없었다. 그뿐일 따름이었다.
“편히 쉬어 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여승 제월은 노독이 깨끗이 풀린 싱싱한 얼굴이었다.
“먼저 떠나갑니다. 언제쯤 어디서 또 만나 뵈올지······”
다시 중으로 변장한 진이 제월을 따라 합장하고는 주인에게 공손히 절하였다.
“언제고 불쑥 불쑥 나타날 걸세. 그대가 나를 찾으면.”
진은 이지함을 한참 바라보다가 뜬금없이 중얼거렸다.
“거북님?”
28. 소슬한 달밤에
1560년 명종 15년. 진이 기녀 생활에 접어든 지도 열네 해. 여자 나이 서른둘이지만 그녀에겐 노기라는 명칭도 퇴기라는 지칭도 어울리지 않았다. 차라리 무한한 날갯짓을 하는 예인이라고 하면 어울릴 거였다. 그녀의 예술성은 더욱 높은 경지에 이르렀고 탈속의 멋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더 진한 향기를 풍겼다. 때로는 사랑의 화신이 되어 주위 이목을 꺼리지 않았으나 전혀 천하지가 않았고, 때로는 열녀처럼 도사렸지만 옹졸해 보이지도 않았다. 도대체 옷이고 얼굴이고 꾸미는 일이 없었지만 볼 때마다 보는 이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했다. 가무 음률은 본시부터 따를 사람이 없었다. 시재 또한 아무도 흉내조차 못 낼 만큼의 독보적인 경지였다. 사군자는 이미 옛날에 통달했다. 구륵법, 몰골법을 활용하여 산수화에다 적용시키는 식의 수묵화 솜씨는 또 어떤가. 순전히 묵의 짙고 옅음으로만 여러 색깔을 표현하되, 산을 그릴 때엔 신령스럽게, 물을 그릴 땐 물이 살아있게, 숲을 그릴 땐 생기 있게, 폭포나 안개, 달을 그릴 땐 그 부분에 물만 칠한 후에 형태의 바깥 부분만을 발묵법으로 처리하는 그녀의 그림 수법은 가히 전문가 수준이다. 그러나 진은 자신의 그 모든 재능을 자랑삼지 않았다. 그녀의 사유는 불(佛)의 허무사상이 지배하였다. 그랬다. 구름을 보며 인생을 읽었고,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는 세월의 흐름을 보았다.
옛 절은 쓸쓸히 어구 옆에 있고
저녁 해가 교목에 비치어 서럽구나.
연기 같은 놀은 스러지고 중의 꿈만 남았는데,
세월만 첩첩이 깨진 탑머리에 어렸다.
봉황이 어디론가 가버리니 참새만 날아들고,
두견화 핀 성터에는 소와 양이 풀을 뜯네.
송악의 번화롭던 날을 생각하니
어이해 봄이 와서도 가을 같을 줄을 알았으랴
만월대에 갔다가 지은 한시다.‘봉황이 어디론가 가버리니 참새만 날아들고’에다 많은 의미를 부여한 이 시를 시조창으로 개편하다 말고, 진은 문득 깊은 사색에 빠져들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더라. 그러면 한낱 아녀자인 나는 과연 무엇을 남기는가. 예능도 아니다, 학문도 아니다, 도(道)는 더더욱 아니다. 몇 편의 시조? 후세 사람들이 황진의 작품이라고, 여인네가 제법이라고 칭찬해줄까? 박연폭포 앞의 바위에다 머리채로 갈겨 쓴 비류직하 삼천척이란 그 필체? 유수 송순이 석공을 시켜서 음각으로 파놓았으니 그 글씨가 남아 후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옛날의 황진이 작품이라고 경탄이라도 해줄까? 개성부 서편을 장식한, 새가 날개를 펼치고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은 모습의 장엄정은 사실 송순이 황진에게 바친 선물이라며 황진이 장한 일을 했다고 칭찬이라도 해줄까? 자작시를 새긴 저 병풍? 아이도 하나 없는데 어느 누구의 후손이 보관하여 남겨줄까? 늙어지면 주름지기 마련인 얼굴, 지금이라도 자화상을 그려놓으면 그림이라도 남는가. 노래 부르는 목소리가 남는가. 춤추는 자태가 남는가. 내막으로야 진정한 사랑을 만났건 못 만났건, 사랑의 행위에서 희열을 맛보았건 맛보지 못했건, 어쨌든 관계한 남자들마다 완연히 사로잡아버렸던, 핏빛보다 진하다고 소문난 그 사랑이 남는가. 아아, 향기롭다는 몸내가 남는가. 그저 찰나에 불과한 이승살이인데, 도대체 무슨 소용 있다고 남긴단 말인가. 오호라 부질없구나, 모두가 헛것이로구나.······
봄에는 아버지를 여의고 초여름엔 어머니를 잃었다. 아버지의 죽음엔 그저 무덤덤할 수가 있었던 진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는 땅을 치며 통곡했다. 아버지 황진사야 애초 큰집 살림으로 떨어져 살았다. 그래서 가끔 본집과의 지체 시샘으로 일어나곤 했던 분란 때문에 가려던 정도 되돌아오고 하였지만, 어머닌 아니었다. 어머니 현금은 진이 늘 기대고 살던 언덕이었고 기둥이었다. 하지만 기둥이 무너졌다는 허탈감보다는 너무 불쌍한 그네의 인생 때문에 울고 또 울었다. 목이 쉬도록 울었다. 자신에게 마지막이 온 것을 느낀 어머니는 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도저히 이뤄지지 않을 소망을 털어놓았다.
“한 지아비를 만나 오순도순 살면 얼마나 좋았겠니? 잡초도 씨가 있다는데, 딸이건 아들이건 하나라도 네 새끼를 낳았더라면 내가 한이 없을 텐데······”
진은 어머니의 소망이 바로 자신의 소망임을 알고 있었다. 단순한 지아비를 말함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진실한 사랑을 만나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아보고 싶었던 그 소망이었다. 귀여운 아이 하나쯤 낳아 기르고도 싶었다.
‘하지만 이젠 그도 저도 다 틀린 노릇······’
헛헛한 웃음을 깨문 채 황진은 지필묵을 꺼내 펼쳤다. 대나무 둘이 바람에 서걱거리면서 마주 보고 서 있게 치고는 먹이 마를 동안 기다리면서 혼자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시작했다.
‘대나무의 몸은 마주 보고 있지만 바람이 불어요.’
‘이 세상 어쩔 수 없는 풍파를 이름이냐?’
‘그 바람이야 꽃바람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눈바람일 수도 있고 비바람일 수도 있겠지요. 어디 세상의 풍파뿐이겠습니까? 하지만 대나무도 있고 바람도 있는데 달이 없군요.’
진은 맑은 물을 한 대접 떠와서는 물을 입에 가득 머금어 그림 위에다 골고루 뿜어냈다. 일단 화선지에 먹혀들어 간 청죽은 물에 흠뻑 젖었는데도 전혀 번지지를 않는다. 진은 그 위에 커다란 달의 선을 그었다. 그대로 점점이 번지면서 선은 둥글게 둥그렇게 달무리처럼 번졌다.
‘그래요. 세월같이 여울지는 달무리를 그려야겠어요. 무수한 달무리를······’
처음 그린 동그라미의 바깥을 향하여 시푸른 달무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어둠을 밝히며 돌았다. 물기가 모두 마르자, 달 아래 청죽 둘이 꽃바람 같고 산들바람 같은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서 있는 모습이 선연히 드러났다. 그런데 문득 진이 실수하였다. 달 한 모서리에 진묵 묻힌 붓을 떨어뜨린 거였다. 그 옛날 장승요가 궁녀의 초상화 배꼽 밑 부분에 떨어뜨린 그것처럼 달에 흑점이 생겨버린 거였다.
‘아이고 아까워서 어쩌누······.’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흑점이 생긴 이대로도 충분히 아름답지 않은가요? 점이라기보다는 별이라고 이름 붙인다면 더더욱.’
‘별이라······ 네 배꼽 밑에 있는 점도 그러고 보니 별 모양이다. 숨겨진 별이라······ 여우별이라 한다던가? 오히려 매력 있구나.’
‘그렇죠. 흠이라는 것을 역으로 본다면 숨겨진 별이 될 수도 있지요. 너무 완벽하면 재미가 없기도 하고요.’
진은 이름도 낙관도 없는 청죽 그림을 옆으로 밀어놓고 외쳤다.
“정이다! 선생님이 그러셨어. 여자는 정으로 사는 거라고.”
진은 마당에 고랑을 만드는 처마의 낙숫물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물방울은 하나하나 떨어져 맴돌다가 깜빡깜빡 어김없이 스러지고 했다. 물 가마라고 하던가. 난데없이 왔다가 어처구니없이 스러져버리는 저 물방울들······ 우리네 인생살이의 허무와 맞먹는다고 그러던가.
불현듯 간난이의 목소리가 그녀의 사념 속으로 파고들었다. 마당 저편 사랑채 댓돌을 밟고서 소리소리 지르는 거였다.
“아씨, 아, 아 씨 이! 밖에 누가 찾아왔어요.”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도대체 누가 찾아온 것인가 싶어 내다보았다. 사나이 하나가 비에 젖은 채로 들어서면서 큰소리를 쳤다.
“날세. 내가 또 왔네.”
반갑다. 빗속을 무릅쓰고 찾아왔기에 더더욱 반갑다. 진은 신발도 신을 새 없이 마당으로 뛰어내렸다. 마당에 괸 물속에서, 하염없이 내리는 빗발 속에서, 진은 사내를 꽉 끌어안았다. 아니, 사내에게 몸을 던졌다.
“아이고, 어린애같이 왜?”
이지함은 너무 감격하여 목이 잠겼다. 진은 그를 마루 끝으로 인도하며 배시시 웃었다.
“상중인가? 누구의?”
그는 진이 소복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조심스레 물었다.
“부모님이에요.”
“양친이 같이 돌아가셨단 말인가?”
“아버지는 봄에, 어머닌 초여름에 돌아가셨지요.”
“그런가? 내 양친은 내가 소년 시절에 돌아가셨는데, 그에 비하면 나은 편이겠지만, 어쨌든 외롭게 되었네그려.”
“원래 외로움을 달고 살아온 몸인걸요. 그나저나 서방님, 올라오셔서 젖은 옷을 벗으셔야죠.”
“허허, 서방님이라······ 형님 소리가 그립군.”
방랑 생활이 일상화되어버린 지함으로선 서방님이란 호칭이 말할 수 없이 아늑했다.
“벗는 거야 쉽지만 여자만 사는 집에 갈아입을 옷이 있을라구?”
그는 갓 위의 기름종이 갓보를 벗기더니 물기를 홱홱 뿌려서는 부챗살 접듯이 착착 접었다.
“어서 벗으셔요.”
그녀는 자개 물린 화류장 앞으로 가면서 연신 벗으라고 했다.
“척척해서 갈아입긴 해야겠고, 그럼 치마라도 두르고 앉을까?”
진은 장롱 속에 개켜둔 모시옷 한 벌을 끄집어내어서는 밀었다.
“갈아입으세요, 서방님.”
“누가 입던 옷인가?”
“아무도 입어보지 않은 새 옷이랍니다.”
“그럼 누구에게 입히려고 마련해 둔 건가?”
“차암 나, 서방님, 저도 여자올시다. 입힐 낭군이야 아니 계셔도 철 따라 한 벌씩의 옷은 마련해두고 있답니다. 제 손으로 지은 옷을 누구에게고 입혀드리겠다는 희망도 없어서야 어디 서글퍼서 살겠습니까?”
“차라리 누구라는 말 대신 서방님이란 말을 끼워 넣으면 좋겠구나.”
이지함은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장롱 속에 향갑을 넣어뒀었던 것 같았다. 옷에서 향내가 그윽하게 풍겼다. 아니다. 향기 나는 여인이 섬섬옥수로 지은 옷이라 자연히 향내가 풍기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포옹했다. 여름밤이 깊어갔다. 모기장을 치고 방문을 열어놓고, 그들은 담백하게 운우지정을 나누었다.
“서방님, 이번 행선지는 어디신가요?”
“딱히 정하진 않았지만 금강산 유람이나 할까 싶네.”
“아이고 잘됐네. 금강산 구경하기가 소원이었는데······, 서방님, 저 좀 데려가 주세요. 네?”
진이 할랑할랑 부채질을 하며 응석 부렸다.
“드디어 자네도 때가 이르렀구나? 그래, 그러자꾸나. 그런데 나를 따라다니려면 꽤 고생이겠네. 나중에 호남지방에도 내려갈 예정이라서 말일세.”
“호남지방? 전라도 말이지요?
그렇다면 송순 선생님의 면앙정엘 가볼 수도 있겠군요.”
“나으리도 아니고 대감도 아니고 전임 송도 유수도 아니고 그냥 어른도 아니고 선생님이라?”
“호호호, 극비사항입니다.”
진은 문득 송순이 그리웠다. 더불어 시조를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송순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그가 그랬다. 십 년 설계를 하여 초가 한 간을 지어 반간은 청풍, 반간은 명월로 채우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어느새 그 십 년이 넘었지 않은가?
“극비사항이고 어쩌고 간에, 전라도엔 담양의 면앙정만 있는 게 아니라 소세양 어른도 지금쯤 익산에 내려가 계실 거다.”
이지함이 소세양을 들먹이자, 진은 가슴이 마구 울렁거렸다. 얼마나 그리워하던 분인가? 몇 편의 시조가 모두 그 분 덕에 태어난 것 아니던가?
“소양곡 어른이 한양에 계시는 게 아니고 호남에 계시다고요?”
“하하하, 그렇게 되었다네. 사실 올봄에 익산에서 만나 뵈었는데, 오다가다 자넬 만나면 전하라고 편지를 주시더군.”
진은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양곡 어른과 이 남자 지함이 이웃이라고 했었다.
“그분을 한양에서 뵈었었지요. 6년 전쯤.· ·····근데 그 편지는 갖고 계신가요?”
“내 그걸 전해줄까 말까 고민하다가 봇짐에다 깊숙이 넣어뒀는데, 거기 한 번 뒤져보시게.”
진이 이지함의 봇짐을 완전히 엎다시피 하자, 안에서 묵직한 것이 툭 떨어졌다.
“어머나 솥뚜껑 아닌가요?”
“허허, 솥뚜껑이지만 용도는 솥이기도 하고 갓이기도 하다네. 돌아다니자면 솥이 필요한데 솥은 너무 버겁잖은가? 그래서 솥뚜껑에 밥을 해먹는다네. 그나마도 거추장스러워서 가끔 갓 대신 쓰고 다니기도 하는데, 오늘은 자네한테 예의 차리느라고 쓰질 않고 넣어 왔다네.”
“아이참, 처음서부터 기상천외한 분이신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러다 편지 봉투 하나를 찾아내었다.
“이거 맞사오니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은 소세양의 편지 두 장을 무릎 아래에 깔고 첫 장을 가만가만 소리 내어 읊었다.
“빈 뜰에 나뭇잎 구르는 소리가 나네. 간밤에는 그게 신발 끄는 소린 줄 알고 마음이 두근거렸네. 여관 외로운 베개로 잠 못 이루는데, 쇠잔한 등불이 어둡다가 다시 밝아오네······ 남곤의 시로군요.”
“진짜는 두 번째 편지일 걸세. 한양에 계실 때 지어놓으신 거라더군.”
이지함이 대독하였다.
“문득 편지를 보내고 나니, 꿈에서도 그리던 마음 풀어지네. 외로운 구름은 고개 너머로 흘러가고, 조각달은 이 호수를 비치고 있네. 떨어진 서로의 거리 천 리도 못 되는데, 만난 지 여섯 해를 지냈네.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고, 그대 생각하다 책상머리에서 조네.”
진은 가슴이 미어졌다.
“우리 만난 지가 여섯 해나 되었다는 걸 그분도 잊지 않으셨네요.”
“답장을 써 주겠나? 혹 자네가 전라도까지 가서 직접 뵌다 하더라도, 이건 내 임무이니까 말일세.”
“소양곡 그 어른에게 질투도 나지 않으세요?”
“질투를 해야 하는가?”
지함이 껄껄 웃었다.
“당신 젊음을 과신하는군요.”
“허 참, 그리 들렸는가? 진이 일부종사하는 여인이라면 내 당연히 질투했겠지. 아무튼, 시 한 수 지어보시게.”
진은 몸을 일으켜 문갑을 열었다. 그리고 오래전에 써 놓았던 시편을 끄집어냈다.
蕭蓼月夜思何事
소슬한 달밤이면 무슨 생각 하시나요
寢宵轉轉夢似樣
뒤척뒤척 잠 못 이루는 밤이 꿈인 양 생시인 양
問君有時錄忘言
임이여 제가 드리던 말들을 적어보셨나요
此世緣分果信良
이승에서 맺은 인연 정녕 믿어도 될는지요?
悠悠憶君疑未盡
멀리 계신 임 생각 끝없이 이어지네요.
日日念我畿許量
하루하루 이내 몸을 그리워하시나요?
忙中要顧煩或喜
바쁘실 때 혹 내 생각나시면 괴로운가요? 즐거운가요?
喧喧如雀情如常
여전히 정겨울까요? 재잘재잘 참새처럼 지저귀어도
“정이 뚝뚝 흐르는 시로군. 편지 삼아 써 놓았던 건가?”
진이 허허로운 표정으로 웃었다.
“시심이 일어남은 모두 때가 있는 법. 지금 당장은 아무런 시상도 떠오르질 않아서 대신 내놓은 겁니다.”
“그러면 이 시의 상대방이 꼭 양곡 어른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렇죠. 두고두고 잊지 못할, 저의 전생 어느 한 모서리를 풍미하고 가버리신 임을 향해 쓴 넋두리일 수도 있지요. 양곡 어른이 남곤의 시를 저에게 보내신 것처럼 말입니다.”
“참 묘하군. 자네는 시 창작의 이론과 독자층의 호응 방향까지도 완전히 꿰고 있는 것 같으이. 이러니 자네를 일컬어 천년에 한 번 날까말까 한 천재라고들 하지.”
“어머나? 무슨 그런 정 떨어질 말씀을······?”
“내 일찍이 자네의 사주를 풀어보았더니 얼추 맞아떨어지더군. 이립 나이를 지나고선 끊임없이 방황한다는 운세야 앞으로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아무튼 자네는 다소곳한 여인이면서도 활달한 남정네. 이를테면 한 몸에 양성을 지닌 사람일세.”
별안간 떠오른 화담 선생님. 그의 얼굴을 애써 지우며, 진은 고집스레 말했다.
“남자 여자를 떠나서, 그저 인간일 뿐이죠. 그렇죠?”
“그렇지. 지금은 분명 인간이지.”
“지금은? 아유 서방님, 왜 이러세요? 수로부인이 인간이었듯이 저도 인간입니다.”
“그렇지. 까마득한 벼랑 위의 철쭉꽃처럼 화려하고 외로운 인간이지.”
“그 누가 저 꽃을 꺾어줄 이는 없는가?”
진은 기어이 울음을 쏟았다. 인간 황진, 그녀는 오래 억눌렸던 울음보를 단 한 번에 풀어놓듯 꺼이꺼이 울었다. 울다가 지함에게 매달렸다.
“서방님, 저도 금강산엘 따라 갈래요.”
지함이 당황하여 절절매며 침착하게 말했다.
“전라도가 아니고?”
“금강산 구경부터 하고 와서 나중에 저 혼자라도 따로 내려가겠어요.”
전라도엔 송순 선생의 면앙정도 있고 잘하면 소세양 어른도 뵐 수 있다는 거라서 지금 당장 전라도로 내려가고 싶은 그녀였다. 하지만 두고두고 벼르던 금강산 아닌가. 금강산 유람이 우선이었다.
‘목표가 정해졌어.’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이제는 그녀 마음이 사뭇 바빠졌다.
29. 그대가 한량이라 두려울 뿐
애초 한 점 구름 한 올 아지랑이도 없던 하늘이었다. 그런데 해가 한 자쯤 떠오르자 불현듯 검은 구름 하나가 일어났다. 그놈이 처음엔 까마귀 머리만큼만 해를 가리는 성싶었는데 어느새 절반을 가려버려 어두침침해졌다. 그러자 해는 한스러운 듯 근심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리다가 마침내 와르르 빛줄기를 뿜어냈다. 성질 난 폭포수처럼 하늘가로 내리쏘았다. 남자는 굵은 베옷 고의적삼에다 발감개를 하고서 짚신을 신었다. 막대 하나도 들었다. 머리에는 낡은 초립, 등에는 괴나리봇짐, 누가 봐도 남의 집 머슴차림이었다.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흰 댕기를 드려 쪽을 찌고 삼베옷을 차려 입었다. 등허리에 찬 괴나리봇짐 끝에다 미투리 세 켤레도 매달았다. 송악 산마루에는 두 사람이 섰다. 가난한 부부 같기도 하고 가난한 주인아씨와 머슴 같기도 하였다.
“아씨, 이 머슴 배나 곯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네가 길잡이 노릇이나 제대로 할는지 걱정이다.”
“아씨도 참, 이놈 눈이 아무리 멀었기로 봉래산 가는 길이야 잘못 들겠습니까?”
“봉래산? 금강산 가려면 봉래산엘 먼저 가는 게냐?”
“하하하 아씨, 지금이 봄이라면 분명히 금강산이지만 여름이니 봉래산입지요.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이고 말입지요.”
“거 먹물께나 먹었는지 꽤 유식하구나. 잔말 말고 얼른 앞장서라.”
“아씨도 참! 하인은 아씨의 뒤를 따르는 법이올시다.”
“너만 믿노라.”
태양은 폭염을 내리쏟고 길은 고르지가 않아 발길이 타박거렸지만, 그다지 급할 것도 없는 여행길이라 견딜 만하였다.
삼세의 굳은 인연 좋은 짝이니
이 중에서 생사는 두 마음만 알리로다
양주의 꽃다운 언약 내 아니 저버렸는데
도리어 그대가 두목(杜牧)처럼 한량이라 두려울 뿐.
그렇게 시를 읊으며 하루에 몇십 리를 걸었다. 때로는 부부행세로, 때로는 주종관계로 위장하고서 산천경개에 심취하고 세상인심의 후함과 인색함을 몸으로 겪었다. 거의 보름이나 되어서 철원을 거쳐 금화에 이르렀다. 그들의 행색은 누가 봐도 비렁뱅이였다. 하루 두 끼 음식도 챙겨 먹기가 쉽지 않아서, 계곡에 흐르는 물로 배를 채우기 일쑤였다. 철원을 지날 무렵에는 두 사람 다 너무도 지쳐 있었다. 날은 가물고 폭염은 대지를 불사를 듯이 내리쬐었다. 어느 산모롱이 나무 그늘 밑에서 잠시 늘어져 있었다. 피로감이 엄습하여 잠이 절로 들 찰라, 고을 현감의 사인교가 지나가고 있었다. 무슨 잔치엘 가는 길인지 다녀오는 길인지, 기생이 일고여덟이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마냥 다리를 뻗친 채로 앉아서는 그 행차를 구경만 하고 있었다. 중대한 실수였다. 도저히 무사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사인교가 바로 그들 앞에서 우뚝 멈추었다. 이내 추상 벽력이 떨어졌다.
“얘들아! 저 무례한 연놈을 당장 물고를 내렸다!”
현감의 지엄한 명령이었다. 관속들이 후다닥 몰려들더니 먼저 이지함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고는 발길질 주먹질 세례를 퍼붓는 거였다. 진 역시 머리채를 잡혀 곧추세워졌다.
“날도 더운데 귀찮게 어디로 끌고 갈 것도 없다. 당장 이 자리에서 곤장을 쳐라. 사내놈은 이십 대, 계집은 열 대다!”
이지함은 꼼짝없이 근처 참나무 둥치를 안고 결박됐다. 곧 아랫도리가 드러나고, 엉덩이에 곤장 스무 대가 고스란히 내려쳐졌다. 끽소리 없이 당했다. 진도 바로 옆의 밤나무 둥치에 결박되었다.
“계집도 볼기를 까라!”
사인교에서 내려선 현감이 큼직한 합죽선을 할랑할랑 부치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이지함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얗다. 하얗다 못해 눈이 함빡 내린 동그란 언덕이었다. 여지없이 까발려진 여자의 엉덩이를 보고 현감은 순간 어지럼증을 느꼈다. 수십 개 남녀 시선들도 모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까닭 모를 한숨들을 푹푹 내쉬었다. 이윽고 가까이 다가든 현감이 비명 비슷한 소리를 내질렀다.
“호오, 이 살결 보아라!”
너무 눈부셔서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는 성역 같은 곳이다. 그는 진을 보고 또 보고 하다가 옆에 묶인 채로 있는 이지함에게 물었다.
“네 계집이냐?”
“우리 쥔댁 아씨입니다요.”
“쥔댁 아씨? 네 주인이 어디 사는 누구냐?”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이놈이? 뉘 앞이라고 감히 어깃장을 놓아?”
‘네 성명이 김춘배라고 했지 아마? 그래봤자 올해를 못 넘기고 복상사(성교 때 여자 배 위에서 죽음)로나 세상 하직할 낯짝이구만, 까불기는 쯧쯧······ 한 치 앞도 못 보는 불쌍한 놈.’
이 고을 현감 김춘배가 성정이 잔인하고 호색한으로 알려져 있음을 이지함은 간파하였었고, 그래서 이미 그의 사주를 뽑아본 터였다. 그런데 관상을 보아하니 과연 사주와 한 치 오차도 없을 생김새 아닌가. 지함은 눈을 지그시 내려감았다가 문득 김춘배를 노려보았다.
“영감이 이 고을 현감인 줄은 알고 있습니다. 허나, 아무리 현감이라 하더라도 무고한 백성을 이토록 괴롭힐 수 있습니까? 더구나 부녀자에게 저런 봉변을 주다니! 영감은 부인도 없고 따님이나 며느리도 없으시오?”
김춘배가 대노했다.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마구 씰룩거렸다.
“이놈이 찢어진 아가리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얘들아, 이 연놈을 동헌으로 끌고 가자꾸나!”
관속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우선 포승줄을 풀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관속들의 행동이 딱 멈춰지더니 그중 하나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외쳤다.
“나으리, 큰일 났습니다.”
김춘배는 조금 움찔하였지만 태연하게 되물었다.
“이놈아, 별안간 뭐가 큰일이란 거냐?”
관속은 몸을 덜덜 떨어대고, 어디선가 매미소리가 한가롭게 들려왔다.
“나으리, 마패 같은 게······”
관속이 현감의 귀에 속살거렸다.
“같은 게?”
‘같은 게’라는 어휘에 다소 기대를 걸면서 김춘배는 자기도 모르게 수염을 덜덜 떨었다. 불콰하던 얼굴도 핏기가 싹 가셨다. 그러나 그도 한 고을의 수령이다.
“네 저 녀석의 몸을 샅샅이 뒤져 보거라. 혹시 어디서 훔친 물건이라도 지녔는지 모른다.”
우선은 마패를 확인해볼 심산이었다. 대놓고 당신이 암행어사냐고 물어볼 수 없는 마당이니 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두들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뭣들 꾸물대느냐? 냉큼 저 녀석의 몸을 뒤지지 못할까?”
이미 김빠진 호령이었지만 이방 하나가 슬그머니 이지함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조심스레 몸을 뒤졌고, 기어이 마패를 확인했다.
“마패입니다!”
“마패야?”
관속들이 뒷걸음치는데 기생들은 말에서 구르듯이 내렸다. 진은 빙그레 웃었고 이지함은 딴전을 피웠으며 현감은 입술을 씹었다. 김 현감, 있는 힘을 다 내어서 소리를 지르는데, 달달달 떨려 나온다.
“네에 이놈, 어 어디서 그 그런 물건을 훔쳤느냐? 마 마패라고 하는 것은, 사 상감께서 지 직접 내 내리시는 왕명의 징표이거늘, 네 이 흉측한 도 도둑놈이 어 어디서 그··· 그런··· 귀중한 물건을······ 훔쳤더란 말이냐?”
현감의 허리가 차차 앞으로 굽혀지다가 이윽고 땅바닥에 박치기할 지경이 되자, 그때야 이지함이 부드럽게 타일렀다.
“우선 저 여인의 몸부터 풀어주시오.”
진의 결박이 즉각 풀리고 매무새가 고쳐졌다.
“내 몸도 풀어주시고.”
이지함의 몸도 금방 풀렸다. 그가 암행어사이건 도둑이건 우선 풀어놓고 볼 일이었다. 이지함은 절뚝절뚝 현감에게 다가가서 나직나직 귓속말을 했다.
“행패가 도를 넘으신 것 같소이다.”
‘까딱하다간 어사 출도를 할 판이네?’
현감 김춘배가 땅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아서는 코뿐만 아니라 턱주가리에까지 땅에 닿게 엎드렸다. 수염이 땅을 덮었다. 그를 따르던 기생들과 관속들은 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엎드린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안절부절못하였다. 이쯤이면 봉고파직 정도가 아니라 목숨을 부지 못할 죄이다. 현감 이하 모든 관속과 기생들은 속절없이 떨어질 날벼락을 기다렸다. 한참 후, 깊이 반성한다는 뜻을 담고 현감이 입을 놀렸다.
“죽을죄를 졌습니다만, 모르고 한 일이니 부디 선처를 바랍니다.”
그러나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귀신한테 홀렸나?’
슬며시 고개를 들어본 다른 사람들도 모두 어리둥절하여 사방팔방을 두리번거렸다. 도무지 온데간데없이 암행어사와 여인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고갯마루를 넘고 있었다.
“그런 수모를 다 참아내시다니 참, 서방님은 무서운 분이세요.”
“허 참! 천민 행세나마 제대로 해내려면 할 수 없는 일이지.”
“그런데, 마패는 어떻게 된 거에요?”
“하하하, 자넨 화담 선생님이 물고기 ‘어’를 조각조각 찢어서 물에 뿌리자 그게 진짜 물고기로 보였던 일이 생각나지 않는가?”
“아니 무어라고요?”
진이 지함의 허리춤을 툭 치자, 정말 묵직한 마패 같은 것이 손에 느껴졌다.
“그렇담, 일개 현감이 암행어사의 볼기를 친 셈인데, 있을 수 있는 일인가요?”
“이 몸이 진짜 암행어사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렇잖은가? 하하하! 때때로 매 맞고 사는 민초의 고통을 체험해보는 것도 과히 나쁘지는 않으이.”
그러고서 지함이 말머리를 돌렸다.
“걷기가 좀 힘드네. 오늘은 많이 못 가겠구먼.”
“소첩도 다리가 아픕니다.”
“아니 왜? 자네는 볼기에 바람을 쐬었으니 오히려 생기가 펄펄할 것 같은데?”
“아씨한테 하는 말버릇이 몹시 무례하구나!”
“아이고 예에, 용서합시오.”
꾸꾸꾸, 꾸꾸 꾸루룩 산비둘기가 울어댔다.
30. 저 물밑이 황천이라...
그들은 문선교를 건너 장안사에서 밤을 맞이하였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는 전나무 뒤로 숨바꼭질하는 달을 보다가 노승에게 이끌려 법당에서 금강경의 설법을 들었다. 두 사람 다 화담 서경덕에게서 들은 바 있었지만 모른척하고 끝까지 경청하였다.
이튿날, 새 지저귀는 소리에 날이 밝기도 전에 잠이 깨었다. 노승이 일러주는 대로 우선 명경대부터 찾았다. 장안사에서 오리쯤 가니 강이 흐르는데, 형형색색의 기암절벽이 명경 보듯 강물에 비쳤다. 황천강이다. 부근에 염라대왕 형상을 하고 있는 염라대왕봉, 소머리 형상의 우두봉, 판관봉, 죄인봉 사자봉 등이 서있는 명경대는 마치 실재 재판정인 것처럼 위압적이었다. 발아래 천고의 비밀을 간직한 못 또한 서슬이 시퍼랬다. 여자는 앉았고 남자는 섰다.
“저기가 바로 황천담이랍니다, 아씨.”
“저 물밑이 황천이라…… 황천이 가깝기도 하다.”
“맑은 거울 저쪽의 머나먼 세상이 황천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누구나 살아생전 행적을 저 거울에 비춰서 심판을 받은 후에야 황천길로 간다나 뭐라나.”
“저기서 어른거리는 저 거대한 바위는 그럼 우리네 인생을 심판하는 거고?”
“염라대왕봉이랍니다, 아씨!”
여자가 오른팔을 올려 남자의 손을 지그시 잡았다. 두 사람 다 감회가 깊었다.
스무날도 넘게 금강산에서 놀았다. 입고 간 단벌옷은 남루하기 짝이 없어지고 지니고 갔던 미숫가루도 이제는 떨어져 버렸다. 그래도 별걱정이 없었다. 절간이 보이면 절에서 자고 바위굴 근처에서 해가 떨어지면 한 쌍의 산짐승처럼 굴속에서 밤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이 방랑이 시작된 이래 한 번도 살을 섞진 않았다. 더 이상 그럴 수 없을 만큼 서로가 담담하였다.
“그나저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네. 꼭 홍시를 닮은 저 해를 보니까.”
“그럼 꼬르륵 소리를 잠재워야지.”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계곡물을 손으로 떠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문득 저 위쪽 연주암 아래에 사람들이 보였다. 대여섯 명이나 되는 선비들이 널따란 바위 위에서 덩싱덩실 주흥에 겨워 춤을 추고 있는 중이었다. 진의 눈이 반짝였다.
“여보게, 우리가 아직 죽을 때가 안 되었네.”
“하아, 그렇습니다요. 아씨, 소인은 아씨만 믿겠습니다.”
남자는 지팡이 끝을 내밀었다. 여자는 남자가 내민 지팡이를 붙잡고 숨을 헐떡이며 올라갔다. 중턱에 남자를 놓아두고 여자 혼자서 풍류객들에게 다가갔다.
“아이고, 한창 즐기시는데 참으로 송구합니다.”
여자가 말을 건네자 그들은 모두 호기심 가득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웬 여인이신가?”
술이 거나해진 장년 하나가 여자를 요모조모 뜯어보고 나서 그리 묻는다. 여자는 시치미를 딱 떼고 말했다.
“마의태자님을 사모하던 나머지 금강산을 편력하다가 보니 노자가 떨어졌습니다. 지녔던 식량마저도 떨어져서 이틀 꼬박 굶었군요.”
“아하! 그런가?”
그들의 반응은 여자의 예상대로였다.
“그거 참 재미있는 소리군. 돌아가신 지 오백 년도 더 된 마의태자를 사모하여 이곳을 다니고 있었다 그 말씀이오?”
“예, 그러합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한테서 음식을 좀 구하자는 것인가?”
어디서 왔는가? 개성에서 왔습니다. 개성이라?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여자를 유독 자세히 뜯어보고 있던 한 사나이가 나섰다.
“자넨 혹 기녀인가?”
‘무언가 짚이는 데가 있나?’ 하면서 여자가 속으로 웃었다.
“기녀는 아니지만 지아비를 모시는 여염집 여자도 아닙니다.”
“그럼 과부로군?”
여자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마의태자는 만나봤단 말인가?”
다른 한 사나이가 묻자, 여자는 능청스레 대꾸하였다.
“만나 뵈었습니다.”
“그럼 자네의 그 맺힌 정회는 풀어주시던가?”
“서라벌에 묻고 오신 회한이 너무도 크셔서 거들떠보시지도 않더이다.”
“저 저런? 무정도 하셔라. 거 참 안됐네그려.”
진은 스스로 그들의 놀림감이 되어주고는 간절한 눈빛을 했다.
“선비님들, 또 한 번 청합니다. 우선 기갈을……”
“그저? 이런 산중에서 대가도 없이 그저 음식을 나눠달라고?”
이미 술이 거나해진 사나이의 수작이었다.
“너무 허기져서 말이 아니 나옵니다만, 소첩한테서 무엇을 원하시나요?”
“하하하!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는 건가? 나한테?”
몇 마디 하지 않고는 되질 않겠다 싶어 낭랑한 목소리로 조목조목 따졌다.
“선경에 노니시니 고절하신 선비님이신 줄 알았는데, 중생제도라는 자비심도 모르시나요? 아무튼 기갈 든 여자한테 무엇을 원하시나, 말씀이나 해봅시오.”
“아이고, 이거 봉변이군? 그렇담 이왕 당한 거 음식 값이나 쳐서 받아야겠네. 우린 중생제도의 길에서 세월 죽이는 중의 무리가 아니니깐 말일세.”
“그러니 원하시는 바를 말씀해 보십시오.”
“유녀도 아니고 낭군을 모신 몸도 아니라면서? 나도 집 떠난 지가 오래라 객고가 심하다.”
말씀해 보시라고 하니 꼭 집어 말하라는 거냐고 되묻는다.
“예, 말씀해 봅시오.”
사나이가 혓바닥으로 제 입술을 축이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 품에 안겨 입이나 한 번 맞춰 주지?”
진은 다소곳이 앉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저 아래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사내, 이지함과 눈이 마주쳤다.
“마의태자께 바치려던 단심을 이 사람한테로 돌려달란 말이지. 이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넋은 승천하고 백골은 진토가 됐을 마의태자한테야 비할 바 아니지. 아직 뜨거운 피가 흐르는 몸이거든.”
진은 차분하게 응대했다.
“소첩은 우선 기갈을 모면해야만 되겠습니다.”
“허락한다는 뜻인가?”
“굶어죽은 다음에야 정절이 무슨 필요 있겠습니까?”
“내 요청을 수락한다 그 말이렷다?”
선비들은 산이 떠나가라 하고 웃어젖혔다. 보아하니 점잖은 선비들은 아니다. 깊고 깊은 산중에서 그 무슨 짓이라도 할 사람들이다.
“그렇담 자아, 이리 올라오시게!”
진은 서슴없이 그들의 자리로 올라갔다. 깔고 앉은 널따란 바위 밑으로 계곡물이 솰솰 졸졸 끊임없이 흐르다가 간혹 누가 휘젓기라도 했다는 듯 수면을 뒤흔들어놓곤 하였다. 진은 그들이 먹다 남긴 밥이며 반찬들을 정신없이 퍼먹었다. 아침에 지은 밥인지 아직도 고슬고슬했다.
“자아, 한 잔 드시게.”
사양할 필요가 없었다. 감로주를 연거푸 석 잔을 받아 마시고 나자 비로소 허기가 가셨다.
“자아, 이제 언약을 지킬 차례인가? 그런데, 하룻밤을 자더라도 만리장성을 쌓는 법, 한 마디 통성명도 없어서야 어디 되겠나? 이 사람은 포천 사는 남생원일세.”
저 아래 소나무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는 이지함을 다시 흘끔 보고 나서, 진은 발그레해진 얼굴에 웃음기를 실었다.
“떠돌아다니는 일개 아녀자한테 무슨 변변한 이름이 있겠습니까만, 구태여 아셔야겠다면 간난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애꿎은 간난이의 이름을 팔아 좀 미안했지만 그럴싸하였다. 포천 남생원이 껄껄대고 웃었다.
“보아하니 얼굴도 더할 나위 없이 곱고 목소리 또한 청아한데, 하이고, 그 이름은 너무 흔해 빠진 것일세그려.”
‘옛날 벽계수 대감이 남의 이름을 업신여기다가 된통 당했었지요.’
웃음이 나왔지만 꿀꺽 참았다. 그리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흔해 빠진 게 여자이니 이름인들 흔해 빠지지 아니 하겠습니까?”
그러자 남생원이 그녀에게로 두 팔 활짝 벌리며 말했다.
“이름이야 아무렴 어떠냐. 자아, 이제 내 품에 안겨라.”
다른 사나이들도 왁자하니 웃으며 한 마디씩을 걸쳤다.
“아암, 증인이 여럿이다.”
“남생원은 오늘 운수대통이네! 금강산에서 아리따운 여자를 품에 안다니,”
“어서 화끈하게, 우리 모두 보는 앞에서 입을 맞추게나.”
그들은 남생원의 등짝을 번갈아 밀며 어서 여인네를 안아보라고 채근했다. 한 번 더 저 아래를 내려다보고 나서 진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여자 몸이지만 한 번 언약한 것은 반드시 지킵니다.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소청이 있습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앞섶을 여미며 조용히 말했다.
“이 깊은 산속에 어찌 여자 혼자 헤매고 있으리라 여기셨는지요?”
모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럼 동행이 있었단 말이던가?”
이내 시무룩해진 남생원의 눈이 연주담 부근을 훑을 때를 맞추어 진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저 아래 소나무 그늘을 턱으로 가리키며 삼베 치마폭을 움켜쥐었다.
31. 배꼽 밑에 별 하나
“뭐 별스런 동반자가 있는 게 아니라, 집안에서 부리던 하인 녀석 하나를 데리고 다닙니다. 장정을 이틀씩이나 쫄쫄 굶겼더니 설설 기는군요. 저 녀석에게도 요기를 좀 시켜주십시오.”
“하아, 난 또 뭐라고……. 그야 뭐 어렵겠는가? 하긴 주인아씨가 공복을 채웠으면 하인 녀석도 마땅히 배를 채워줘야지. 어서 부르시게.”
남생원이 사뭇 조바심치며 응낙하였다. 이지함이 불려 올라와 어슬렁어슬렁 그들 앞에 다가섰고, 진은 그를 짐짓 흘겨보았다.
“너는 이 어른들께 인사 여쭤라. 주인 잘못 만난 탓에 고생이 많다.”
이지함은 벌써 풍류객들 앞에 넙죽 엎드려 주절거리고 있었다.
“소인 여러 선비님들께 문안드립니다. 아씨를 모시고 댕기는 떡팔이란 놈이올시다.”
살포시 미소 지으며 진이 그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선비님들, 저 녀석의 창자도 좀 채워주십시오. 이틀씩이나 굶겼더니 이 몸보다도 더 맥을 못 추네요.”
진이 그리 말하는 걸 기다렸다는 듯이 이지함은 한층 엄살을 부렸다.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는 정말 꼼짝 못 할 만큼 탈진해있는 시늉을 했다.
“아따 그 녀석, 엔간히도 배가 고픈 모양이구나. 옛다! 이거나 우선 처먹어라.”
남생원이 누룽지만 남은 밥을 솥째 던져주었고, 지함은 그것을 받아들자마자 정신없이 입에 퍼 넣었다. 뺨이며 입 언저리며 밥알이 더덕더덕 붙었으나 아랑곳없이 배를 채워갔다.
“자아, 그럼 이제 내게 안겨라.”
남생원이 그리 수작을 걸자, 다른 선비들도 맞장구쳤다.
“언약은 언약이니까. 어디 입 한번 그럴싸하게 맞추어라.”
뺨에 묻은 밥알을 하나 떼어 입에 가져가던 이지함이 남생원과 진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모른 척하고 솥 안에 들어갈 듯이 머리를 처박았다.
“이 몸이 비록 여자일망정 제 입으로 지껄인 말을 뒤집지는 않습니다.”
‘도대체 몸이 뭔 줄 아느냐? 마음이 담기지 않은 몸은 빈껍데기일 뿐이라는 걸 모르는구나.’
그녀는 코웃음 치는 한편 다소곳한 자세를 취했다. 진의 그런 순응성이 결국 남자들을 미치게 하는 요인이었다. 과연 남생원은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안 그래도 여자를 다루는 데는 이골이 나 있는 작자였다. 그는 아무 거리낌 없이 진을 얼싸안고는 얼굴에 얼굴을 마구 비벼대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멈칫했다.
“허어이, 이 무슨 향내인가?”
그는 얼떨떨해진 채로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이봐라. 너 정말 인간이 맞는가?”
그는 새삼스레 진의 생김새를 뚫어져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새하얀 피부는 그만두고라도 긴 속눈썹 아래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눈망울. 쪽 곧은데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소담스러운 콧날. 작고 도톰하면서도 양 입 꼬리가 약간 치켜 올라간 입술, 그 안에서 언뜻언뜻 내비치는 박꽃색깔의 치아. 도대체 눈이 부셔서 똑바로 볼 수 없는 목덜미. 여신이라면 몰라도 도저히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미모가 아닌가.
그는 더럭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품에 안았던 진을 허겁지겁 밀쳐내고는 뒷걸음쳤다. 하지만 진은 좀처럼 털어지지 않는 도꼬마리처럼 다시 들러붙었다. 그의 팔을 잡고 배시시 웃었다. 사람 애간장을 다 녹이는 웃음으로 양념을 치고는, 별안간 남생원의 얼굴을 냉큼 잡아당겨서는 입술을 쪽 빨았고, 즉석에서 그 맛을 평가했다.
“시금털털하군!”
그뿐이었다. 곧바로 몸을 돌려 휑하니 그 자리를 물러났다. 거래가 끝났기 때문이었다. 안개비 서린 능선을 타면서 진이 지함에게 물었다.
“서방님 보시기엔 좀 민망하셨죠?”
묵묵부답이었다. 진은 그의 손을 다정히 잡고는 아씨로써 말했다.
“이 육신, 껍데기이다. 마음 없이 그 사람과 입을 댄 게 뭐 대수라고.”
역시 대꾸가 없기에 이번엔 그의 애첩이 되었다.
“서방님, 입은 왜 있다고 생각하셔요? 입이란 말도 해야 되지만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음식을 먹기 위해서 있는 거 아닌가요? 그 입을 잠시 음식을 비는 도구로 사용하였기로서니 뭐가 그리 잘못되었단 말인가요?”
그제야 지함의 입술이 잠깐 열렸다.
“그게 비단 입에 한해서만은 아니지 않은가?”
입뿐만 아니라 몸 또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굴려도 무방하다는 뜻이 아니냐는 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진은 자기 본연의 위치로 돌아왔다.
“전 기생 출신이어요. 잊으셨나요? 하지만 그런 거 저런 거 떠나서, 정이 문제지요. 정이 따르지 않는 만부득이한 행동이야 구태여 탓할 것이 못 되는 게 아닌가요?”
그래도 이지함으로선 도저히 용납 안 되는 진의 행동이었다. 그는 혼자서 몇 번이고 그럴 수가 있느냐고 중얼거리면서 한동안 말을 섞지 않는 거였다. 이만저만 서운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고 어느 하루, 외딴 주막에서 밤을 보내게 된 두 사람은 날이 새기를 서로 기다렸다.
“닭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파리 소리 아닌가요?”
마을에 개 한 놈 짓다가 뚝 그치더니 적막감마저 감돌았고 고요는 극에 달해서 마음이 으스스하였다.
“여기서 십리쯤 가면 총석정이라네.”
때마침 어느 처마 위에서 닭이 울었다. 바깥엔 아직도 한 밤중이었지만 그들은 무엇에 쫓기듯이 서둘렀다.
“그럼 얼른 떠나요. 동해 해돋이를 보자고요.”
날이 새려면 아직도 멀었지만 그들은 또 행장을 차려 걷기 시작했다. 금난굴을 돌아들어서 총석정에 올랐다. 창날에 불 지핀 모양으로 혜성이 꼬리를 끌고 앙상한 나뭇가지에선 밉상스레 부엉새가 울었다. 물 위엔 어느새 작은 뾰루지가 맺혔다.
“아아, 옥황상제가 사는 백옥루의 기둥인가?”
“어느 석공의 작품인가? 조화 부리는 귀신의 도끼로 다듬었는가?”
뾰루지의 붉은 기운이 차츰 풀어져 오색으로 갈라지고 물결은 멀리서 솟구치어 머리가 절로 맑아졌다. 문득 이지함이 중얼거렸다.
“우주가 개시해서 소멸할 때까지를 1원이라 한다던가. 1원은 12만 9600년이고 우주의 역사가 6회가 되면 6만 4800년이라던가. 그러니 저 해는 6만 4천 년을 둥글둥글 올라오고 내려갔겠군.”
“저 해가 오늘 아침엔 동그라미가 아니고 네모 같네요. 만 길 깊은 바닷속에서 어느 누가 해를 길어 올린 것 같아요.”
“내가 그대를 길어 올리는 것과 같이?”
이지함은 진의 허리를 끄잡아 올렸다. 그리고 그녀를 홀랑 마셔버릴 듯이 끝없는 입맞춤을 했다. 모든 불만이 일시에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화려히 떠오르는 태양 앞에서 둘은 완전한 벌거숭이로 한 몸이 되었다.
“어? 그대 배꼽 밑에 별이 떴군.”
지함이 얼른 거기에다 입을 맞추고서 하는 말이었다. 진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자신의 온몸에 환한 불이 들어왔음을 지켜보며 부끄러워했다.
“어머나, 내 몸에 불이 켜졌네요.”
화르르 달아올랐다 금방 사그라진 불이지만,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대사건이었다.
‘내 배꼽 밑의 비밀을 보신 분은 당신뿐이군요.’
‘그냥 점이 아니고 별……. 별이라구요……’
진의 온몸에선 전류가 물결처럼 출렁였다.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길 없는 쾌감이 그녀의 온몸에 불을 지폈다. 선덕여왕을 너무 사랑하여 온몸에 불이 붙었던 바로 그 지귀가 된 것 같았다. 지귀는 온몸에 불이 붙은 채로 허적허적 걸어갔었지만, 하지만 황진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로 서서히 불을 잠재우고 있었다. 불과 얼음이 공존하고 있으면서 둘이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상황을, 지함은 묵묵히 지켜보았다. 아니 입이 떨어지질 않아서 침묵할 뿐이었다. 이윽고 황진이 말했다.
“누군가 이 점을 별이라고 불러주기를 바랬어요. 그런데 바로 서방님이……”
“허허 그런가? 아무튼 매우 신기한 일이야. 배꼽 밑에 점 하나 있는 여인 이야기는 삼국유사에도 나오지만 말이지.”
“낙필 얼룩 이야기 말인가요?”
“그렇다네. 궁녀 초상화에 낙필을 했다는 그 화가가 장승요지 아마?”
하나씩 옷을 입으며 진은 이지함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서방님은 혹 저의 전생을 알아내실 수도 있는가요?”
“허어~ 나더러 천기누설을 하라고? 자네 전생은 수로부인이라고, 그 정도는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거 아닌가?”
“아이고 됐습니다요. 수로부인이면 뭘 하고 궁녀이면 뭘 하나요? 그들은 배꼽 밑에 점이 있었다지만 이 몸엔 별이 있는데요.”
두 사람은 해금강을 두루 구경하고 해안선을 따라 남하했다. 이미 완연한 동냥치 신세가 되어있었지만 오히려 그 생활이 몸에 익어 하루 굶는 것은 예사였고 이틀을 굶어도 배고프지가 않았다. 강릉 경포대에 도착하자 이틀 연이어 비바람이 심하여 발이 묶였다. 거울같이 잔잔한 물 위에 달기둥이 뻗는 것을 보려고 했지만 실패하였다. 하지만 모처럼만에 이틀 연이어 밥 한 끼 먹지 않고서도 서로의 몸을 탐닉하는 데만 열중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쯤에서 여행을 중단하라는 하늘의 계시인 것 같아요.”
“그런 모양이네. 경포대의 일출과 월주는 참 볼만 하다는데 다음으로 미루지.”
“서방님은 이제 어디로 가시나요?”
“한양엘 들를 셈이지. 마포에 토정을 하나 지어놓았거든.”
“토정이라고요?”
“토굴이란 이름이 더 어울릴까 모르겠네만…… 아무튼 거기서 당분간 좀 쉬어야겠네.”
“토정 이지함? 흙이라는 뜻이 들어가 있어서 그런지 퍽 다정한 이름입니다.”
“허허 그런가? 헌데 진이,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한양인데 곧바로 가는 건 좀 그렇다. 나도 자네와 같이 개성엘 들렀다 갈까?”
“아이고, 바람 같은 서방님께서 하실 말씀이 아니시네요. 곧장 떠나세요. 그게 좋겠어요. 저는 좀 쉬었다가 호남 구경이나 제대로 하렵니다. 어쩌면 호남에서 또 만나게 될라나……”
바다 건너 여러 산에서 작은 구름들이 앞다투어 일어나더니 뭉게뭉게 독을 품어 물고는 저 멀리서부터 끼리끼리 어울렸다. 해 아래 어딘가에서 순간순간 번쩍여대던 번개가 우르르 꽝꽝 벼락 치며 위용을 떨친다. 사방팔방을 온통 먹빛으로 뒤덮은 채 바느질 땀수만 한 틈도 하나 내지 않던 구름은, 번개가 번쩍! 지나고서야 비로소 겹겹이 주름지며 수천 꽃가지 수만 꽃잎을 이루었다. 마치 옷 가장자리에 선을 덧댄 것 같고, 꽃잎 가장자리에 무늬가 번진 것 같고, 그러면서도 엷고 짙음이 제각각이다. 천둥소리가 고막을 찢을 기세였다. 행여나 흑룡이라도 뛰쳐나올까 싶었으나, 비는 그다지 사납게 퍼붓지는 않았다.
이튿날 이지함은 또 무슨 수를 썼는지 강릉에서 역마 두 필을 빌려 그 하나에 진을 태워주고 자기도 말에 올랐다.
“아름다운 여장부, 잘 가시게.”
“너무나 멋진 서방님, 부디 몸조심 하시어요.”
진은 대관령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말을 재촉하여 십 리를 가니 해는 구름을 뚫고 나와 차츰차츰 밝아지며 고와졌다. 말 머리 위로 웬 기운이 한 길 넘도록 뻗친 게 마치 누르스름한 기름처럼 엉기었더니, 불현듯 붉은색 푸른색으로 변하면서 하늘 높이 치솟았다. 문 삼아 드나들 수도, 다리 삼아 건너다닐 수도, 말 머리에 있어서 손으로 만질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그런데 그것은 앞으로 나아갈수록 멀어져 갔다.
언제고 세월 아무리 흘러도 변함없을 모습, 무지개였다.
32. 영원한 아름다움을 찾아서
강릉 생활 여념 없던 어느 날, 나는 막분이를 불렀다.
“막분아, 진실을 말해 보거라. 시방도 너는 무돌이를 만나고 있으렷다?”
막분이 얼굴이 샛노래져서 엎드리더니 조아린 머리 앞에 상투처럼 두 손 내밀어서 손바닥 싹싹 비비는 거였다.
“아씨마님, 죽여줍시오. 그 미련한 것이 이곳까지 소녀를 따라와서, 이 근처를 기웃거리고 다니기에……아이고 마님, 그놈을 몇 번 만났사와요. 아무도 몰래……”
그다지 죄의식도 없으면서 주절주절 용서를 비는 꼴이라니!
“마님이 어찌 아시고……참으로 유구무언이옵니다.”
“유구무언이라?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아느냐?”
“예 마님, 이년, 주둥이가 있어도 지껄일 혓바닥이 없다는 뜻인 성싶어서 입을 놀려보았습니다.”
“네가 그래도 뭘 알기는 아는 모양이다만, 기가 막히는구나. 나도 이제는 더 이상 말릴 수가 없는 노릇, 가거라. 무돌이와 어디 멀리 가서 숨어 살든지 하란 말이다.”
“아니옵니다. 소녀, 마님을 평생토록 모신다고 약조하였사온데 어찌……”
“괜찮다. 네가 산전수전 다 겪었고, 웬만한 문자, 눈치로 때려잡든 어깨너머로 배운 거든 어쨌든, 대강이라도 알고 있는 모양이니 안심해도 되겠다. 막분아, 떠나거라.”
내 마음 변할지 몰라서 오늘 밤 당장 떠나라고 명하였다.
“아이고 마님, 이 미천한 것, 어찌하라고요.”
막분이 눈물 콧물 범벅된 얼굴로 군소리를 했다.
“마님 떠나 어디 가서 어떻게 살라고 그러시는 거여요?”
그러고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바람에 나는 짐짓 눈을 감은 채로 한숨처럼 말했다.
“도깨비, 내 몸에도 있더라. 이제야 알았느니라. 도깨비를 깨우는 자가 그 열쇠를 쥐는 법. 부귀영화가 무슨 소용이며, 남이 내 화상을 걸어놓고 경탄을 연발한들, 대체 그런 것들이 내게 무슨 행복을 준단 말이더냐. 자아, 급할 때 요긴하게 쓰도록 하여라. 너만이라도 맘껏 행복을 누려라.”
나는 고이 간직해왔던 패물들을 모두 보자기에 싸서 막분이에게 덥석 안겨줬다.
이승에선 더 이상 도피 못할 내 신세
영원히, 억겁 세월 틈틈이 만나고 헤어지고
또다시 그리워함을 되풀이할 내 팔자
묵묵히 선정 베풀던 그이가 까닭 모르게 시름시름 앓다가 혼자 저승 입문 해버려, 대왕께서는 그에게 순수할 순(純) 곧을 정(貞)을 써서 순정한 순정공이라 시호를 내리셨고, 그래서 훗날 일연이 삼국유사 수로부인 조를 쓸 적에 순정공이라 칭하게 되지만, 아무튼, 소 잃어 도중하차했을망정 30년 도를 닦던 거북님의 예언이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강릉 생활 일 년을 못 채우고 과부 신세 되어서 쓸쓸히 서라벌로 돌아온 뒤 어느 날부터 나도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얼굴이 마르고 광대뼈가 앙상하여 그토록 곱던 내 모습 말이 아니고 백약이 무효인 가운데 식음까지 전폐한 모습……. 사람들은 수로부인이 지아비 잃은 설움에 득병하였다고 쑤군대지만, 사실 그 이유 아니라서 더욱 더 가슴 갈가리 찢어질 것만 같은 이 몸.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 몸이 왜 이럴까? 사랑이 죄인가? 세속의 사랑일랑 애당초 시작도 않았던, 영원한 사랑을 꿈꾸다 허망하게 가신, 내 지아비에 대한 나의 배신이 원인인가? 거북님을 향한, 그 사랑이 죽을 죄여서 죄 받아 이럴까? 이대로, 바짝 마른 채 흉한 모습으로 죽어야 하는가?
하루는 어머니께서 조심조심 물으셨다.
“수로야, 말해 보거라, 무슨 고민 있느냐?”
“없어요, 어머니,”
“밤마다 이상한 잠꼬대에 시달리는 것 같더구나. 그게 무언데 그러느냐?”
“……?”
“네가 말을 못 하니 더욱 이상하구나.”
“……?”
“아마도 백의……왕…모랬지? 백의왕모가 무어냐? 어서 얘기해 보거라.”
“어머니도 참? 잠꼬대를 뭐 그리 신경 쓰세요?”
“예, 그렇지 않으니라. 너는 내게 숨기는 것이 있느니라. 왜 그걸 말 못 하느냐?”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입을 떼었다.
“지난 5월 말쯤, 뒤뜰 연못가에 갔었어요. 수양버들 가지가 축축 늘어진 연못 주변에서는 훈훈한 향기가 풍겨 왔지요. 어머니도 소문 들어 아시겠지만, 물가에만 가면 정신을 잃곤 하는 저인지라 바짝 긴장하며 가만가만 연못지기 신령님께 빌었지요. ‘이 몸을 영원히 아름답게 해주소서. 그리고 이 몸에게 그리운 임을 단 한 순간이라도 보여주사이다.’하고 말이에요.”
“아니 얘야, 영원히 아름다우려면 영원히 살아야 하질 않으냐? 게다가 그리운 임이라니, 간 사람은 간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어떻게 간 사람을 그리도 그리워한단 말이냐? 에그~ 우리 수로, 불쌍해서 어쩔거나.”
허망한 꿈으로 신열 든 딸의 모습에 어머니는 가슴을 치셨다. 순정공, 그 지아비를 못 잊는 것 같은 딸을 애달파하신 거였다. 정말로 그런 것처럼 슬픈 눈빛으로서 나는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한참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별안간에 안개 같은 서기가 내리면서 저의 온몸을 얼싸안는 거였어요.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저쪽에서 눈송이처럼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치마폭을 팔랑거리며 다가오는데, 그 여인이 와서 내 손을 잡고 다정히 웃었어요. ‘수로부인 청이라면 어렵지 않게 들어드리리다. 나는 태백산의 성전(聖殿)을 주재하는 백의왕모이외다.’ 그리고 덧붙이시길 ‘이 몸을 따라갑시다. 따라가서 열흘간만 놀다 오면 부인의 아름다움이 영원히 지녀질 것이며 꿈에 그리던 임도 뜻대로 만나질 것이외다.’……”
어머닌 화들짝 놀라 땅에 주저앉을 듯이 탄식하셨다.
“아니 얘야, 거긴 이승이 아니라 저승세계라는 말 아니더냐? 그러니 돌아가신 분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더냐?”
그러고 아니할 말씀까지 하신다.
“아이고, 기어이 네가 저승사자 부름을 받은 게야……”
사람들, 저마다 기웃기웃, 이 수로를 구경하려고 구름떼처럼 모여들고, 곱던 얼굴이 저리 되었다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 “화무십일홍이야,” 하는 문자로 깨소금 씹는 사람들, 그 사람들 헤치며 나는 마차에 오른다. 막분이가 있으면 좋으련만, 좋으련만, 하면서 단 한 명 몸종도 없이 마차에 올라 그대로 앞으로 달려, 달려간다. 남다른 꿈,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한없이 외로운 행진을 해야 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되새기며 혼자서 외로이, 그래도 이제야 살 것만 같아 날아, 날아간다. 저승인들 어떻고 이승의 끝인들 어떠랴. 어차피 영원 속의 찰나인걸. 한순간의 행복, 한 순간의 환희를 붙들기 위하여, 영원히 아름다워야지.
33. 소년을 만나다
‘종지부, 내 인생의 종지부는 어디에서 찍어야 하나?’
속절없고 부질없었다. 하지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 그것이 진의 몸에 저장된 속성이기도 했다.
저 강 한가운데 떠 있는 조그만 잣나무 배
몇 해나 이 물가에 한가로이 매였던고
뒷사람이 누가 먼저 건넜느냐 묻는다면
문무를 모두 갖추고 있는 만호후라 하리
금강산에서 돌아온 황진은 내내 두문불출, 혼자 집안에서만 맴돌았다. 만나자는 지인, 찾아드는 한량, 청하는 연석은 예전이나 다름없었지만, 진은 일체 응하지를 않았다. 사실 마음이 불편한 거였지만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를 댔다. 그래서 개성바닥에는 황진이 이제 퇴기가 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해졌다.
하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조금도 퇴색하지 않았다. 그 구성 성분이 외면에만 치우친 게 아니라 칠팔 할은 내면세계에서 우러나온 인자들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기품 있는 총명은 이제 완숙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었다. 헌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치가 떨리게 외로웠다. 가야금으로도 거문고로도 노래로도, 춤으로도 달래지지 않는 외로움이었다. 시를 지어도 그림을 그려도 수를 놓아도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공허로움.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적수였다. 진정한 사랑 하나를 만나지 못한 허전함이 외로움이란 괴물로 둔갑한 거였다.
‘이내 몸 서린 열꽃은 언제나 시들어질까?’
소리 없이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불현 듯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진은 이불을 걷고 앉았다. 화선지를 당겨놓고 먹을 갈고 붓을 다듬었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썼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 아니로다
주야로 흘러내리니 옛 물이 있을손가
인걸도 물과 같아서 가고 아니 오더라.
뚜두둑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서 글자에 번졌다. 진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흡사 신들린 사람처럼 지필묵을 챙겨서 괴나리봇짐을 만들었다. 그리고 훌쩍 개성을 벗어났다.
“구름을 벗하며 바람과 이야기하며 세월을 그려보리라.”
호남 땅을 향해서 가는 길이다. 우연히 이지함을 만날 수도 있고, 송순 선생도 소세양 어른도 뵐 수 있겠고, 그도 저도 아니면 ‘반 칸은 청풍이요 반 칸은 명월’이라던 송순 선생의 시를 상징하는 그림이라도 한 점 그리면 헛걸음은 아니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그녀의 발길을 재촉했다.
“한양을 거쳐서 갈까?”
진은 사흘 만에 무악재를 넘었고, 또 사흘을 소비하여 한양을 두루 구경하였다. 마포 어디쯤에 있다는 이지함의 토정을 찾으려는 건 아니다. 다른 한 사람,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선전관(宣傳官) 벼슬에 있다는 이사종이다. 서북에서는 이언방이 으뜸가는 명창이고 한양 이남에서는 이사종이 신창(神唱) 경지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아버지에게서도 종종 그 이름을 들어왔지만, 한 번도 만나보진 못했다. 어찌어찌 수소문하여 전동 이사종의 집을 찾았더니 제법 큰 솟을대문 집이었다. 하인이 나왔다. 하인은 진의 요모조모를 한참 뜯어본 후에야 주인이 좀 먼 곳에 가셔서 며칠 후에야 돌아온다는 대답을 했다. “개성 사는 황진이 다녀갔다고 전해주시겠어요?”라고 말하니 그는 황진에 대하여 들은 바가 있는 모양인지 혼자 감탄하고 끄덕거리는 거였다.
노들강을 건너는데 강바람이 차가웠다. 나룻배 안에서도 진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옷은 아직 상복일망정 뛰어난 용모는 얼굴에 흙칠을 하지 않은 다음에야 남의 이목을 끌지 않을 방법이 없다. 깊숙이 쓰개치마로 덮기는 했어도 그 얼굴을 완전히 가리지는 못했다.
옆에는 열 살 조금 넘었을 소년 하나와 중년 부인, 그리고 부리부리하게 생긴 사내가 앉아있었다. 소년이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어서 진은 좀 거북하였다. 마침 중년 부인이 행선지를 묻기에 전라도까지 간다 하고서 쓰개치마로 귀밑을 여몄다. 그랬더니 소년이 저도 전라도 까지 간다면서 반가워했다. 늙은 사공은 습관처럼 노를 젓고 있었으며, 중년 부인은 다시 애기는 몇이냐고 물어왔다. 아들 하나 딸 하나 있다고 무심결에 대답하고 나니 몹시 씁쓸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처녀같이 예쁘다면서 올해 몇 살이냐고 묻기에 서른둘이라고 곧이곧대로 대답하였더니 꼭 스물두 살로 보인다고, 그럼 친정 나들이를 가느냐고, 왜 아기는 안 데리고 가느냐고 연달아 물어댔다. 그래서 대답 대신 웃어주었다. 또 한숨 돌렸다가 바깥양반이 벼슬길에 계시냐고 묻기에 머릴 끄덕였더니 지체가 높으시겠다고 혼자 어림잡으며 걱정해주는 척했다.
“이런 예쁜 색시를 가지신 분은 밖에 나가두 맘을 못 놓으시겠어.”
그때 사내가 불쑥 나섰다.
“듣자니 전라도까지 가신다는데, 내가 동행이 되어주겠소.”
사내들의 그런 수작에는 이골이 나 있는 진이었다.
“난 전주까지 가는 길인데 부인은 어디까지 가시는 거요?”
“담양까지 갑니다.”
별스레 둘러댈 필요도 없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전주하고 담양하고는 한참 떨어진 곳이겠거니 싶어 안심하고 밝혔다.
“아하, 아주 멀리 가시는구먼. 그럼 전주까지라도 동행이 되겠소이다.”
진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남의 이목도 상관없이 서슴없이 말을 걸어오는 사나이가 배짱은 좋다 싶었지만 그렇다고 말을 넙죽넙죽 받아넘길 이유도 없다. 그때 소년이 눈을 반짝였다. “저도 그쪽으로 갑니다.”라며 자기도 동행하겠노라고 졸랐다. 그러자 중년 부인이 소년을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도령은 어디 사는 누구인가?”
“예. 제 고향은 장흥이고 제 이름은 임제, 자순입니다. 마포엘 갔다가 돌아가는 길이지요.”
“장흥이라면 담양보다 더 먼 곳 아닌가?”
“예. 그러니 동행하겠다는 거죠. 저어, 누님, 제가 담양까지 따라가도 될는지요?”
“누님?…… 듣기가 좀 민망하구나.”
진은 임제라는 소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매우 영특하게 생긴 얼굴이지만 방랑기가 다분해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또다시 중년 부인이 “보통 먼 길이 아닌데 동행이 두 사람이나 생겨 잘됐네요.” 하고 말참견을 했다.
삐거덕 삐걱, 노 젓는 소리가 좀 더 크게 들렸다. 배는 물이 깊은 곳으로 갈수록 아래쪽으로 흘렀다. “이 사람은 왕궁에 있소이다.”라고 사나이가 말하자, 중년 부인이 존경의 눈길로 바라보고, 소년 임제는 약간 비아냥거리는 눈길로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진은 무시했다. 존경의 눈길도, 비아냥거리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무예별감이지요. 대궐에 들어와서 장 별감을 찾으면 누구나 다 알아요.”
중년 부인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감탄했고 소년 임제는 아예 팔짱을 끼면서 딴 데를 보았다. 진은 여전히 묵살했다. 진은 사내와 소년 두 사람 중 한 사람만 동행자로 택해야 함을 느꼈다. 두 사람을 같이 동반한다면 필시 질투로 인한 모종의 사건이 벌어질 것이라는 예감이 스친 거였다. 그래서 결국 동행자로써 장 별감이라는 사내를 택하였다. 자꾸만 뒤돌아보며 소년은 자기 갈 길을 갔다.
첫날은 수원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다. 객관을 찾기 직전에 장 별감이 “우리 아무래도 내외간으로 행세하는 게 좋겠소.”라고 제의해왔고, 진은 속으로 코웃음 쳤다. 엉큼한 사내 뱃속이 훤히 들여다보였기 때문이었다.
“내 하인 행세를 하심이 더 자연스럽지 않겠어요?”
“뭐라? 나더러 하인 행세를 하라고?”
장 별감, 펄쩍 뛰며 고함질렀고, 진이 차갑게 맞받았다.
“남 보기엔 그게 어울릴 것 같습니다.”
“여보쇼! 이 몸은 대궐에서 상감마마 신변을 지키는 무예별감이란 말이오!”
“알고 있습니다.”
“알아? 알면서도 나더러 하인 행세를 하라고? 오만방자하구나!”
“오만방자하다구요?”
“그럼, 오만방자하고 무엄하지.”
‘하기야 거들먹거릴 만도 하지. 세도가의 청지기도 거만을 떠는 세상이니……’
진은 나직나직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여보쇼, 나라 상감님도 여자 앞에선 무릎을 꿇는답니다. 댁은 부인과의 잠자리에서도 무예별감이시오?”
장 별감이 척 알아듣고 항복했다.
“아이고 아씨. 대궐에서 공주마마 중전마마 모시는 것 보다두 더 깍듯이 모시겠습니다요.”
진은 든든한 하인 하나를 얻었다 싶어 내심 기뻤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마마, 무슨 조건이신지 분부만 내리소서.”
“이 몸이 자네를 쉽게 허락한다면 필시 버르장머리 없이 굴 것이 걱정되네.”
진은 아예 ‘자네’라는 말로 기선을 제압했다.
“전라도에 닿을 때까지만 하인 노릇을 충직하게 해주게나.”
“닿기 전엔 안 됩니까 아씨?”
“좋다면 하인 노릇 하시는 거고, 싫다면 가실 길이나 얼른 가시고.”
장 별감은 계산이 빨랐다. 그로선 밑져야 본전이었다.
“그럼 아씨, 언약은 해주시는 겁죠? 전라도 땅에 닿으면 소인의 청을 들어주시는 겁죠?”
“그러지.”
진은 주인아씨답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 별감은 객사에 들자마자 우선 자기 신분부터 밝혔다. 객사의 주인 아낙은 대궐에 있다는 말 한마디로 허리가 척 휘었다.
“지체 높으신 아씨마님을 모시고 원행을 하는 길일세. 남한테 소문 내지 말구 정성껏 모셔야 하네. 어디 뒤쪽에 조용한 방 없나? 나란히 붙은 방이면 좋겠는데, 내가 옆방에서 지켜야 하니까.”
그의 속셈을 간파하고서 진이 피식 웃었다. 아니나 다를까, 달빛도 사위어갈 무렵, 얼굴에 차가운 바람기가 확 끼쳐 눈을 떴다. 안에서 걸어놓은 문고리를 어떻게 벗겼는지 장 별감이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불 속에서 몸을 도사리고 있자니 그가 엉금엉금 무릎걸음 쳐오는 게 가늠되었다. 기어이 옆에까지 왔다 싶어지자, 그녀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도대체 내가 누군지나 알고 이런 수작을 하오?”
기가 조금 죽었을까? 하지만 호락호락 물러갈 어수룩한 배짱이라면 애당초 방엘 들어오지도 않았겠다.
“말씀을 아니 해주시니 어느 댁 아씨인 줄 내 어찌 알겠소만, 댁은 꽃, 나는 호랑나비, 어울려봅시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소?”
진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관솔등잔에 불을 켰다. 그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덤벼들었다.
“이러지 마시오.”
진의 목소리가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아무리 여자이지만 한번 언약한 것은 반드시 지키오. 전라도에 닿을 때까진 서로 근접 않기로 약조했으니 별감께서도 남아일언의 중함을 보여주시오.”
그러나 그는 계속 끈적이며 달라붙는 거였다.
“어차피 친해질 사이인데 지금이나 나중이나 뭐 그리 다르다고?”
“다릅지요. 여자가 족두리를 얹기 전과 후가 다르듯이, 오늘과 내일이 다르고 경기도와 전라도가 다른 게 아니오니까? 너무 조급히 굴지 마시오. 전라도까지 이 몸을 무사히 데려다주시오. 이 몸도 남의 정실은 못 되고 첩실의 신세, 열녀와 같이 수절하려는 건 아니오.”
말을 하다 보니 어느 누구의 첩실도 아닌 자신의 신세가 몹시 서글퍼졌다. 하지만 남자의 흥분을 가라앉히기로는 긴말 이상 없다. 이야기가 길면 길수록 남자의 격정은 흐지부지 가라앉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과연 멀쑥해진 장 별감이 진의 허리께를 더듬던 손을 거둬들였다. 그러다 문득 ‘이 무슨 향기?’하고 코를 쫑긋거렸다. 오나가나 몸내가 탈이었다.
‘아이코, 이 인간이 몸내를 맡았으니 만만하게 물러가기는 틀려먹었군.
34. 옥리를 부르랍신다
진은 얼른 몸을 일으켰고, 벗어놓았던 겹치마를 두르고는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나가시오! 나도 좀 다녀올 데가 있으니……”
휑하니 밖으로 나가 뒷간부터 찾았다.
수원을 벗어날 즈음, 장 별감이 발길을 멈추었다.
“고을에 가서 가마 한 채를 빌려오겠습니다. 도대체 아씨를 걸어가시게 한다는 게 도리에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남 보기에도 이상할 거고.”
구태여 마다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어디론가 바람같이 사라졌다가 정말 가마를 빌려왔다. 교군꾼 두 사람이 딸린 가마였다.
“어서 가마에 오르십시오, 아씨마님. 왜 변복을 하고 길을 떠나셨습니까? 시골길에서 상것을 만나 봉변당하면 어쩌실라굽쇼?”
능청을 부리는 한편 신바람이 나서는 교군꾼들에게 사뭇 호통을 쳐댄다.
“조심조심 모셔라! 평택까지 가신다.”
평택에 가서 다시 가마를 빌릴 계산인 모양이었다. 진은 저절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누르며 별감에게 동조하였다.
“고맙네. 이런 곳에서 장별감을 다 만나네그려. 내 사연이 있어서 시골길을 좀 한가하게 걸어보려 했는데 말이지.”
가마가 떴다. 교군꾼들은 발이 척척 맞았다. 하루 백리 길은 너끈히 가는 그들이다. 풀풀 날아가는 듯이 수원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 뒤로 장 무예별감이 충직하게 뒤따른다.
별스런 호강까지 해가며 진은 전라도 땅엘 들어섰다. 그렁저렁 보름이 걸린 셈이다. 전주에 이르자, 장 별감이 또 한 가지 제안이랍시고 끄집어낸다.
“아씨마님, 내 이곳에 볼일이 있습니다. 이틀이면 끝나는데 한 이틀 묵으시지요? 그럼 특별히 담양까지 모셔다 드릴 수 있는데요.”
“그러지. 이왕 예까지 나를 따라왔는데 중도에서 자넬 떼어버리기도 좀 뭣하고.”
장 별감의 속셈이 빤히 들여다보였다. 그는 아직 제 욕심을 채우지 못한 거였다. 진은 전주에서 이틀을 소일했다. 낮에는 남도 경개를 두루 구경하고 밤에는 너저분한 여각엘 들러 길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드디어 전주에서 떠나는 날, 장 별감은 어김없이 여각엘 들렀다.
“자아 그럼 떠나보실까요 아씨마님?”
“그래, 떠나자.”
순창이 사흘거리 앞둔 지점이라고 했다. 순창에 도달하면 거기서는 담양이 꽤나 가깝다고 한다. 전주에서 오는 동안도 인근 고을 공청에 가서 가마를 번갈아 빌려댔던 장 별감. 그는 가마 옆으로 바짝 붙어 서서 새로운 소식이라고 속삭여준다.
“며칠 전 어사 비슷한 분이 순창 쪽으로 내려갔다 하오.”
잘됐다 싶어 저도 모르게 웃음을 베어 물고서 진이 되물었다.
“그게 참말인가?”
“바깥양반이 어사라도 되는 거요? 왜 그리 좋아하시오?”
“나 참, 웃는 걸 갖고 웬 시빈가? 여하튼 정말 어사인가?”
장 별감이 잔뜩 의심하는 눈초리로 머리를 갸우뚱거리는데, 진이 바라던 바였다.
“헛말은 아닌 듯싶습니다. 요 앞 주막에서 들었는데, 며칠 전부터 이 고장으로 수상한 사람들이 줄줄이 내려갔다는군요. 아무래도 암행어사 행렬인 거 같다고 수군거리고들 있습디다.”
“그렇담 순창은 그냥 지나치면 어떨까?”
“아씨께서 암행어사하고 무슨 상관 있으시다고?”
“상관이야 없다만……”
이 자가 담양까지 따라오면 어쩌나. 이 자를 어떻게 떼어놓나 하는 생각에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그러던 차에 암행어사가 떴다는 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장 별감을 떼어놓을 좋은 기회가 되겠다 싶은 거였다.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암행어사가 뜬다는 순창으로 가자하면 아무래도 속 보일 것 같아서 반대로 말했다. 하니까 아주 자연스레 순창엘 도착하게 되었다. 진은 가마를 버리고 걸어서 가자고 했다. 그리고 꾀죄죄한 옷을 그대로 걸치고 괴나리봇짐도 허리에 두르고 밥을 빌어 끼니를 이으며 사람들의 순창군수에 대한 평판을 묻고 다녔다. 진이 의도한 대로 장 별감은 진짜 암행어사의 부인인가 싶어 머리를 갸우뚱하였지만, 그래도 계속 멀찌감치 떨어져서는 진을 보호해주었다. 과연 순창군수에 대한 군민들의 여론이 극히 나빴다. 물욕이 지나친 나머지 거머리라는 별명이 붙은 자라 했다. 도대체 옥이 비좁아져서 새로 또 크게 짓고 있는 중이라니 두말하면 잔소리다.
댁은 어디서 왔소? 한양에서 왔어요. 뭣하러 왔당가? 일가붙이를 찾아왔다가 못 만나고 노자마저 떨어져서 걸식을 하게 됐습죠. 그라믄 시방 밥값도 못낸다냐? 송구합니다. 한양 올라가면 후히 쳐서 보내드립지요. 오메? 비렁뱅이 주제에 한양 가서 부쳐 준다고라고라아? 참말로 얼굴값도 못하네요이.―
아무리 얼굴이 고와도 이럴 땐 소용없는 일이었다.
“잠일랑 딴 집에서 자소! 우리 집엔 비렁뱅일 재울 방이 없으니께.”
그러나 진이 눈 한 번을 찡긋하자, 장 별감이 잽싸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거창하게 피력하고는 아씨마님을 극진히 모시라고 으름장을 놓는 거였다. 덕분에 진은 여각 안방 아랫목을 차지하고 눕게 되었다. 안주인이 또 한 마디 한다.
“그란디, 아씨마님이 왜 그런 차림으로 비렁뱅이 행세를 한듸야?”
“글쎄요, 저도 몰라요.”
하고서 진이 웃어보였다. 늦은 아침 무렵, 진은 순창군 동헌이 내려다보이는 뒷산에 있었다. 과연 잔치가 벌어졌는지 풍악 소리가 뒷산에까지 울려왔다.
“별감께선 내려가서 잔치 구경이나 하시지요. 이 몸은 여기서 좀 쉬겠으니.”
“그러지 말고 같이 내려갑시다.”
별감은 벌써 마음이 설레는 눈치다. 하기야 순창군수에게 “이 사람은 상감마마를 모시는 장 별감이오.”라고 한 마디만 하면 융숭한 대접을 받을 것이었다.
“이 몸, 이런 꼴로 어디 저런 잔치엘 갈 수 있겠소이까? 나으리나 가셔서 노시다가 남는 떡이나 과실이 있으면 좀 가져다주세요.”
살갑게 ‘나으리’라 불러주며 등을 떠밀었다.
“그럼 예서 좀 기다리겠소?”
“다녀오세요.”
오늘 밤엔 기어이 약조를 지키라고 덤벼들겠다는 예상을 하며, 진은 별감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따각따각 이상스런 발자국 소리가 났다. 고개를 홱 돌렸다. 그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지함, 바로 그이였다. 머리엔 솥뚜껑 갓을 쓰고 발에는 나막신을 신은 것이 참 가관이었다.
“어허, 이게 누구요?”
그도 어지간히 놀랍고 반가운 모양이었다. 덥석 손을 잡고 흔들어대는 품이 마치 어린애 같았다.
“형님! 이게 어인 꼴이시오?”
“이런, 다시 형님으로 돌아왔네? 그런데 아직도 방랑을 하고 있군.”
“호호호, 그 쇠갓 좀 벗으시우. 나막신도 좀 벗으시고. 차암 나……”
“흐흐흐, 자넬 만날 줄 미리 알았더라면 쇠갓이고 나막신이고 봇짐에다 숨기고 왔을 텐데 말이지.”
그는 괴나리봇짐에서 너덜너덜한 갓을 끄잡아내고서야 솥뚜껑을 벗었다. 그리고 나막신도 벗어서 함께 봇짐에 넣고 옆구리에 찼던 미투리로 갈아 신었다.
“하이고, 이제야 사람 같으십니다 그려.”
“그래봤자 영판 거지꼴이다. 근데 진인 면앙정엘 가는 길인가 싶은데? 면앙선생은 마침 전주부윤 자리에서 물러나 댁에 계시다던데……”
“왜 물러나셨답니까?”
“득병을 핑계로 당분간 쉬겠다는 거지 뭐. 근데 진짜로 댁에 누워 계시다면 면앙정에서 뵙는 건 포기해야 할걸?”
“그럼 면앙정 구경이나 하고 그림이나 한 점 건지지요 뭘.”
진이 자신의 괴나리봇짐을 툭 쳤다.
“그렇군. 진이 못 말릴 화가인 걸 내 깜박했네. 근데, 이번에 달고 다니는 종자는 또 누구인가?”
대궐에 있는 무예별감이라네요. 무예별감을? 내려오다가 사귀었지요. 좀 전에 그 친구인가? 다 보셨구먼. 하하하, 하도 수상쩍어서 유심히 봤지.―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며 두 사람은 사뭇 흥분하였다.
“근데 자네도 걸인 복색인가? 그게 참 편하기는 하지만.”
“피장파장.”
“아하하, 우린 영락없는 걸인 부부야!”
“천생연분.”
“자아, 쌓인 회포는 나중에 풀기로 하고, 저 아래 잔칫집에나 들러볼까? 보아하니 그동안 배도 많이 주린 것 같은데?”
진은 기뻤다.
“서방님 찾아 천릿길 마다않고 왔습니다요. 왜 따르지 않겠어요?”
“허허허, 우리 진이가 거짓말이 늘었구나.”
두 사람은 언덕 비탈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밤엔 얼고 낮엔 녹이는 기후였다. 붉은 흙이 질척거리고 미끄러워서 번갈아 한 번씩 뒹굴고 나니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가 되었다.
“저 잔치에 암행어사가 뜰 모양이에요.”
“알고 있다네. 그러니 그 구경삼아 가보자는 거 아니겠나?”
“탐관오리입니까?”
“해도 너무 해먹은 노인네 같은데 말이야.”
“봉고파직 될까요?”
“늙은이 하나 봉고파직 시키는 것보다는 억울한 백성들을 구해내는 게 암행어사의 소임일 테지만…… 그것보다도,”
“그것보다도?”
“저 노인네 운세를 짚어본 바로는 오늘이 끝이 아니더란 말일세.”
“그럼 암행어사가 안 뜰지도 모른다는 말씀인가요?”
“하여튼 실험해봄세. 참 알쏭달쏭한 일이니…….”
남자는 당장 버려도 하나 아깝지 않을 지경의 낡은 갓을 삐딱하게 꺾었다. 여자도 치마 한 자락을 걷어붙이고는 다리를 절뚝거려 보였다. 그러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뒤뚱뒤뚱 동헌 담을 돌아들었다. 풍악 소리는 무르익고 사람들의 말소리도 점점 크게 들렸다. 선물들은 바리바리 대문 밖에 줄을 섰고 구경꾼들은 동헌 담을 에웠다. 저마다 동헌 앞뜰을 기웃거리느라 까치발을 했다.
“워디서 뭣 하는 거렁뱅이들이 예가 워딘 줄 알고 함부로 들어온당게로?”
나졸들이 붉은 작대기를 가위표로 들이대며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기골이 장대한 이지함은 앞으로 썩 나서며 작대기를 손으로 걷어치웠다.
“뭣 하는 거렁뱅이라니? 거렁뱅이가 뭣하는 사람인 줄 몰라서 묻는가? 배가 고파서 빌어먹으려고 들렀으니 얼른 주인한테 일르소!”
당연히 시비가 붙었다.
“어허, 이 쌍것들이, 예가 워딘 줄을 참말 모른다냐?”
나졸은 계속 눈알을 부라렸고, 이지함은 더욱 천연덕스레 굴었다.
“대관절 여기가 뉘댁이여?”
“어허, 그래도 갓을 쓴 주제가 예가 워딘 줄도 모르간디? 동헌이다 동헌. 순창군수께서 업무 보시는 동헌 대문이란 말이다. 썩 꺼지지 못한다냐?”
제 깐엔 불호령이랍시고 치는 모양이었지만 ‘못한다냐’에서 위신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러지 말게나. 빌어먹는 팔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니 말일세. 나도 한양서는 양반행세께나 하였다만 어쩌다 보니 이 신세가 됐네. 죽어서 좋은 데 가려거든 제발 배고픈 사람한테 적선 좀 하게나.”
옥신각신 시비가 길어지니 위에서 호통이 떨어졌다.
“게 뭐가 그리 소란스러우냐?”
이런저런 말이 오고 가다가 결국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거지도 배를 채워주라”는 주인 영이 떨어지게 되고, 그래서 진과 이지함은 뜰 구석에서 음식상 하나를 받을 수가 있었다. 누가 봐도 거지 부부였다.
대청에는 수십 명의 손님들이 앉아서 군수 윤경필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한창이었다. 일부러라도 기갈 든 사람처럼 먹어대던 진은 흠칫 놀랐다. 잠시 잊고 있었던 장 별감이 떡하니 대청마루에 앉아있는 거였다. 그는 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여차저차 앞뒤 상황을 결론에다 판단까지 끝냈다는 표를 냈다. 그의 눈길이 곧장 이지함에게 가서 꽂혔다는 게 그 증거였다.
‘그자가 당신 남편 암행어사요?’
‘그렇다. 이 엉큼한 놈, 오만 정 다 떨어지게 해주랴?’
진은 씽긋 웃었다. 그리고 몸을 팽그르르 돌려서는 대청을 향한 다음 치마허리를 들썩거렸다. 손을 허리춤에 넣고 속살을 북북 긁었다. 이가 물어서 견딜 수 없다는 시늉이었다.
“당신도 참! 하필이면 사또 잔칫상 앞에서 이를 잡아?”
이지함이 소리를 빽 질렀다.
“허어 저런! 저런! 버러지 같은 인생들! 얘들아, 그 연놈을 당장 끌어내라!”
대청 위에서 어떤 손님이 마루를 구르면서 호통 쳤다. 마당에선 이지함이 진을 자제시키고, 대청마루에선 장 별감이 사태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저는 불청객이올시다만 오늘 문초하기로 한 죄인들이나 끌어내시오. 사또의 평판을 구경하고 싶습니다. 아하하핫!”
“그거 참 좋겠네그려.”
장내가 왁자해졌다. 진은 어사출도의 때가 무르익어가는 것을 느꼈다. 무슨 취향들인지 모른다. 대개 지방수령들은, 특히 탐관오리들은, 자기 경삿날을 이용하여 죄인을 문초한다. 심지어는 피를 보면서 즐거워하는 못된 습벽을 갖고 있다. 죄인들이란 뭔가. 대부분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어 무리하게 재물을 빼앗는 관의 정책에 응하지 않았거나 응할 수 없는 형편인 무고한 백성들이다. 그런데 순창군수 윤경필은 어떤 죄인을 무슨 명목으로 어떻게 다뤄서 자기 권위를 내세울 것인가. 드디어 동헌 안팎이 긴장했다. 순창군수, 떡하니 가슴을 폈다. 그는 기생에게 새삼스레 술 한 잔을 달라하여 단숨에 들이켰다. 그의 등 뒤에 있던 통인들도 한 발짝씩 물러섰다. 대청 아래 대령하고 있던 집사니 형방이니 사령들도 긴장하였다. 이제 곧 떨어질 원님의 지엄한 분부를 기다리는 참이었다. 군수 입에서 첫 호령이 떨어졌다.
“옥리를 불러라!”
통인이 간드러진 목소리로 “옥리를 부르랍신다!” 하자, 형방이 “옥리를 부르랍신다!” 하고 복창했다. 바로 뜰아래 대령하고 있던 옥리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허리를 굽혔다.
35. 거북님, 나의 거북님
“옥리 대령이오.”
형방이 죄인명부를 뒤적이기 시작하였다. 원이 어떤 죄인을 부를 것인가를 몰라 일단 명단을 훑어보고 있는 중이었다. 대청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사람들은 일제히 몸을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다. 대부분 무료하거나 긴장했다는 표시이다.
“형방은 들으라!”
“예이.”
“그 명부에 기록된 수인들은 도합 몇 명인가?”
형방이 대답했다.
“모두 일백아홉 명이옵니다.”
“일백 하고도 아홉 명?”
“예이.”
“내 그런 줄은 몰랐더니 어인 수인이 그리도 많더란 말인고? 너희들이 내 이름을 팔아서 무고한 백성들을 괴롭혔던 게 아닌가? 바른대로 말하렷다!”
늙은 형방은 입을 딱 벌린 채로 커다란 교자상 앞에 좌정해있는 군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하객들도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사태 파악을 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내 그동안 심신도 편치 않고 하여 정사에 좀 등한했다. 그랬기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웬 죄인이 그토록 많이 늘었더란 말이냐?”
덜덜덜, 형방이 수염을 떨어대면서 입을 열었다.
“사또!”
“사또라고 부르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 나으리라고 해라.”
“나으리!”
“듣거라! 원래 우리 순창지방은 백성들의 성정도 어질고 민속이 순후해서 전국에서도 탈 없는 고을로 이름이 나 있는 줄을 형방 네놈도 익히 알고 있으렷다!”
“사또! 나으리!”
“듣거라! 내 이곳에 도임한지 오늘로써 3년이 됐다만 네 알기로 내가 내 비위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무고한 백성들에게 억울한 죄명을 씌운 일이 있느냐?”
“나으리, 사또!”
“대답해라! 있느냐?”
“사또, 나으리!”
“그런 일이 있느냐?”
“없는 줄로 아뢰오!”
“그런 일이 없는 줄을 너뿐만 아니라 오늘 여기 오신 모든 손님들이 다 알고 있지 않으냐?”
“그런 줄로 아뢰오.”
기어이 항복을 받아냈다. 윤경필은 확인점검까지 마치는 꼼꼼함을 보였다. 모두들 도깨비에게 홀린 표정이었다. 상반신을 흔들어대던 사람들도 몸을 멈추었다. 윤경필은 목소리를 한층 높였다.
“형방 네 듣거라! 오늘은 내 도임한 지 세 돌 되는 날이다. 내 비록 그동안 두드러진 선정은 베푼 게 없다 하더라도, 이 몸이 민원 살 짓은 극히 삼가온 줄을 안팎이 다 아는 바가 아니냐?”
고개를 빳빳이 세운 다음 가슴은 한껏 펴고서, 군수가 엄숙히 선언했다.
“오늘은 나에게 경사스러운 날. 그 일백아홉 중에는 마땅히 법의 처분을 받아야 할 무리도 섞여 있을 것이지만, 사람 쳐놓고 누가 한두 번의 잘못이 없겠느냐? 요는 그 잘못을 뉘우치고 참된 사람으로 개과천선 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한 게다. 아무리 죄인이라 하더라도 자기 죄를 후회하고 개과천선 한다면 오히려 죄를 몰랐던 사람보다도 어질고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법.”
그는 뜰 아래 웅크리고 있는 진과 이지함을 가리켰다.
“저 아래 거지 내외도 저런 고생을 겪고 나야 속이 탁 트인 너그러운 사람이 될 수 있느니. 내 저 두 사람을 보고 가상히 여긴 것은 그 독특한 배짱이다. 예가 어딘 줄 알면서도, 내가 누군 줄 알면서도, 대담하게 들어와 거리낌 없이 공복을 채우는 행동이 마음에 들었다. 저런 인물들은 비록 지금은 불우하다만 반드시 밝은 세상에서 착하게 살날이 있을 게다.”
‘얼씨구!’
거지 내외는 서로 마주 보고 눈만 껌벅거렸다.
“그러니 형방은 듣거라!
그 수인명부에 기록되어있는 죄인 중에서 살인한 자와 부녀 겁탈한 자, 존속에게 불효막급 했던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풀어주라. 지금 당장 옥문을 활짝 열어서 모조리 방면하라. 지체 말고 거행하라! 만일 내 뜻을 어기는 관속이 있어 단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그때엔 가차 없는 책임추궁을 할 것이니라. 알겠느냐?”
형방은 “곧 분부대로 시행하겠습니다.”하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대청은 물론 동헌 안팎이 우왕좌왕 술렁거렸다. 실제 암행어사가 이 자리에 있다면 그도 어안이 벙벙할 거였다. 뒤바뀌어버린 상황 아닌가. 도대체, 저 통렬한 선언은 흡사 암행어사가 나타나 내리쏟는 그런 논법 아닌가 말이다.
“이쯤에서 나가지.”
지함은 진의 소매를 잡고 쫓기듯이 대문 밖으로 물러 나왔다. 암행어사가 어딘가에 숨어있다면 너무도 어처구니없게 당한 거였다. 윤경필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암행어사가 자기를 노리고 있다는 것도 미리 알았고, 잔치마당에 뛰어든 걸인의 정체가 다른 사람 아닌 암행어사라고 판단하고 그리 역습해온 것이 분명하였다. 이 판국이라고 해서 어사 출도를 못할 것도 없을 거였다. 예정대로 출도를 해서 윤경필의 비행을 낱낱이 들춰내면 될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김샌 일이었다. 옥에 갇혔던 억울한 죄수들은 윤경필 자기 손으로 방면할 것이었고 그 구실 또한 그럴듯했으니 아무래도 행차 뒤에 나팔 부는 격이었다.
“어쩐지 저 노인의 오늘 운세에 구름 한 점 없더라니……”
“괜히 우리가 나타나서 일을 그르친 것 같아요.”
뒷동산 쪽으로 올라가면서 진이 그리 말하였다.
“장 별감이 군수에게 미리 귀띔 했는가 봅니다.”
“그 사람이 암행어사가 여기 와 있는 줄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그러던 걸요. 암행어사가 순창 쪽으로 내려간 것 같다고.”
그렇다면 역졸들이 섣부른 짓을 해서 벌써 낌새가 새 나간 것이었다. 그래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판에다가 무예별감이라는 자가 등장하여 귀띔까지를 했던 거였다. 어쨌든 장 별감과의 껄끄럽던 언약은 저절로 물거품 된 셈이었고, 그래서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 된 진이었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저희끼리 도왔을 거예요.”
때마침 동헌 쪽이 떠들썩했다. 옥문이 활짝 열려지고, 수십 명의 죄수들이 별안간 방면되어 왁자하니 기쁨의 함성을 올리고 있었다. 이지함이 쓴웃음을 지으며 진을 돌아보았다.
“이왕 그대를 만났으니 뜬구름이나 머리에 이고서 강산소요나 해볼까.”
“저도 따라나설까요?”
“내가 따라다녀야지. 자아, 담양에나 갑시다.”
“그러죠. 송순 선생님이 계시든 안 계시든, 가서 그림이나 한 점 그릴까 해요.”
“그렇지. 그대의 예술혼은 아무도 못 막지.”
그로부터 18년 세월이 흐른 1578년 어느 날, 백호 임제가 서도병마사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 묻혔다고 알려진 무덤을 찾았다. 잡아도 잡을 수 없던, 잡기엔 너무 멀리 있던, 첫사랑 그 여인 앞에서 그는 오랫동안 피리를 불었다. 그리고 술 한 잔을 따라놓고 시조 한 수를 올렸다. 바로 그 이유로써 임제는 부임도 하기 전에 파직당하였다.
다음 해인 1579년 10월, 면앙정에서는 면앙 송순이 벼슬살이 60회 되었음을 축하하는 회방연(回榜宴)이 열렸다. 임제는 이날 정철, 고경명, 기대승 등과 함께 송순을 태운 죽여를 메었다. 어느덧 죽여가 옹달샘을 돌자, 그는 가만가만 황진의 무덤에 바쳤던 시조를 읊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데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는다.
집 떠나 백리 길을 달리고서 강을 만났다. 물결마다 타는 듯이 이글대며 꽃피우는 저 강물. 갈증이 났다. 딱 한 모금만 마시면 새로운 힘이 솟을 것만 같아, 나는 나도 모르게 마차에서 내려서서 강물을 마셨다. 강물이 온 몸 실핏줄을 통통 퉁기며 재빠르게 헤엄쳐대고, 나는 승리의 깃발인양 나부낀다. 내친 김에 발도 씻고, 그리고 다시 언덕에 올라 마차를 타려다가 문득 강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누가 서 있었다. 그는 이 두메산골에서 사냥으로 살아간다는 효자 백호님이었다. 나는 산길을 따라 그의 초막집엘 들어갔고, 그는 부모 승낙을 얻어냈다. 며칠간 자기 초막에서 나를 쉬어가도록 한 것이다.
사흘째 되는 밤, 비가 몹시 내리고 있었다. 바깥에선 번개가 섬뜩섬뜩하니 하늘을 가르고 뒤미처 우르르 꽝 꽝, 우레가 이를 갈며 초막집을 뒤흔들었다. 따로 따로 자리를 깔았어도 백호님과 나의 간격은 불과 두 뼘인 비좁은 방. 파르르, 나는 그의 이불속으로 파고들며 몸을 떨었다.
“괜찮소. 부디 무서워하지 마시오.”
그가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며 나를 꼭 그러안았다.
“얼마나 기다렸던지 모르오.”
그는 나를 보듬은 채로 내 입술을 더듬더니 별안간 내 혀를 빨아들이기 시작하였는데, 너무 자연스러웠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그래왔다는 것처럼, 나도 그의 혀를 잘근잘근 깨물어 삼킬 듯 뱉을 듯하며 한참을 놀았다. 드디어 내 몸이 달아오르고, 나는 내 몸의 불을 끄기 위해서라고 자기최면을 걸며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의 손가락이 내 젖꼭지를 살살 퉁기자, 말할 수 없는 희열감이 솟아올랐다. 이럴 수가? 너무나 오랜만의 느낌이다. 까마득한 기억 저편에서 나를 부르는 나의 거북님.
‘혹 당신이 내 거북님이신가요?’
나는 혼자 가늠하였다. 입술에 입술을 포갠 채로 그가 내 옷을 한 겹씩 벗겨내고, 나도 그의 옷을 벗겼다. 그리고 우리는 알몸이 되었다. 비는 퍼붓고 천둥소리도 요란했지만 이제 무서울 것이 하나 없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애타게 찾아 헤매던 짝이 분명하였다. 그를 받아들이는 중에 저절로 우러나는 나의 교성과 그의 격한 신음이 천둥소리와 절묘하게 어울릴 때, 나는 언뜻 언뜻 깨달았다.
“거북님, 아아 거북님…….”
드디어 나는 울음을 쏟으며 내 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의 배꼽 밑에 점 하나가 꿈틀꿈틀 독립된 생명체인 양 빛나고 있었다.
내 몸에 있는 것이되 내 소유가 아닌 나의 별.
머나먼 미래를 수소문해야만 만날까 싶은 나의 거북님…….
“어차피 공든 세월 다 버린 지금에 와서 ……”
비몽사몽간에 들리는 조용조용 부드러운 자장가.
“무에 새삼 두려우리. 그대 마음 가는 대로 나를 처분하시오. 내 목을 쳐서 저잣거리에 매달든지, 불에 구워 먹든지, 나는 이제 여한이 없다오. 또다시 이승살이가 남았다면, 미래의 만남이든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든, 언제고 그대를 행복하게 해드리리라는 열망만이 내 속에 가득 찼을 뿐이오. 부인, 사랑하오. 나를 죽여 부인이 행복하겠다면 그리하시오.”
‘앗 거북님?’
오 오 오, 거북님이었다니? 거북님 젊은 모습이었다니?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잠이 깼다. 그런데 아직도 강가였다. 내친김에 발을 씻고, 다시 언덕에 올라 마차를 타려다가 문득 강 건너편을 바라보자, 한 사내가 내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백호님일까? 아니면 두고두고 그리던 거북님일까?’
입은 옷 남루하여도 슬기로운 기상이 내 눈을 사로잡는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 멀쩡하다가도 돌아버릴 일.
‘이런 것이 인생사라고 누가 그랬더라? ……아무튼 이왕 나선 길이니 떠나기는 떠나야지. 영원이란 이름에 붙일 아름다움을 위하여, 떠나자. 저승인들 어떻고 이승의 끝인들 어떠랴. 어차피 영원 속의 찰나인걸. 한순간의 행복, 한순간의 환희를 붙들기 위하여, 영원히 아름다워야지.’
단 하나 희망에 벅찬 채로 나는 마차에 올랐다. 때로는 날래게 때로는 서서히 말은 달리고 나는 또 잠이 쏟아지는데, 잠이 깊이 들어 세상모르게 될 즈음 또다시 날씨가 변덕을 부려 폭풍우 휘몰아쳤다. 다시 잠을 깨고 보니 어디가 어딘지 지척을 알 수 없었다. 더럭 무서웠지만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백의왕모께서 조화를 부리시나’ 하고 애써 웃었다.
하지만 이곳은 구석구석에 석삼년 묵은 거미줄이 치렁치렁한 마룻방. 내 몸은 형틀에 묶여있고, 형틀을 빙 둘러싸고 험상궂은 형리들이 우뚝우뚝 서 있다. 염라대왕봉, 우두봉, 판관봉, 사자봉이 환히 비치는 금강산 명경대 풍경이다. 눈길 닿는 한 가운데 높은 곳에서 참으로 위엄 당당한 판관봉이 내려다보며 호령호령하고 있다.
“천하에 요사스런 년, 당장 죄인의 목을 쳐라!”
으스스, 소름 끼치는 소리를 목덜미에 받으며, 나는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명경대, 투명한 물위에 내 몸이 시를 쓰고 있다.
죽어 잊어야 하랴
살아 그리워해야 하랴
죽어 잊기도 어렵고
살아 그리기도 어려워라
저 임아 한 말씀 해다오
사생결단하리라
돌돌돌 회오리 날갯짓으로 차라리 파랑새 된다, 천년을 하루같이 날아다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