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의 오솔길(The Wilderness trail)
Kay Thorpe
1
리건 페리스는 프런트 담당의 고개가 움직였다고 느끼자 숙박부 명부에서 눈을 들었다.
"지금 들어오시는 분이 칼 제럴드 씨입니다."
프런트 담당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천천히 현관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붉고 검은 마키노 코트를 입은 건장한 남자가 로비로 들어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엄해 보이는 얼굴, 180센티는 될 듯한 키, 그 남자는 어느 모로 보나 <빅 맨>이라는 느낌으로, 약간 곱슬거리는 검은 머리가 함부로 접근하기 힘든 인상을 부드럽게 해주고 있었다. 사나이는 자기에게로 향한 시선을 의식했는지 눈썹을 치켜 올리고 날씬한 진 차림의 리건을 보았으나 곧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이 계단으로 향했으므로, 리건은 당황하여 그 뒤를 쫒았다.
"제럴드씨!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조금만 시간을 내주실 수 없겠습니까?"
잿빛 눈에 잠시 호기심어린 빛이 스쳤다.
"영국인인 듯한데? 여행치고는 너무 외진 곳까지 왔군."
"놀러 온 게 아니에요. 그리고 앞으로 더욱 벽촌으로 갈 거예요."
제럴드의 얼굴이 일그러졌으므로 리건은 입을 다물었다. 초면인 사람에게 이렇게 부탁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일을 대신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리건은 용기를 내어 계속했다.
"내일 포트 레스터로 가신다죠?"
"그렇소."
칼 제럴드는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로 리건의 말을 기다렸다.
"저, 혹시 지장이 없으시다면 저를 같이 데려가 주실 수 없겠습니까?"
도중에서 기가 꺾여 버리지 않도록 리건은 단숨에 말해 버렸다.
"비행기를 전세 내려했지만 그건 며칠이나 기다려야 하고, 버스는 주에 한 번 밖에 없다고 해서요."
칼 제럴드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어째서 포트 레스터에 갈 생각을 했지? 그곳에는 숲밖에 없어요."
"작은 마을이 있어요, 그리고 댐도. 하기야 완성을 전제로 한 얘기입니다만."
칼 제럴드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댐의 건설 현장에서 일 하고 싶다는 말은 하지 말아 줘요!"
"물론 그런 일은 하지 않습니다."
리건은 약이 오르는 것을 억눌렀다. "친척이 거기서 일하고 있어요."
"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군?"
칼의 입술이 일그러지면서 그는 고개를 저었다. "영국 여자란 대담하기도 하군, 믿을 수 없을 만큼!"
"별로 그렇지도 않아요."
리건은 즉시 응수했다. "댐은 포트 레스터에서 60킬로쯤 되는 곳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숙소는 읍내에 정할 생각이에요."
"물론 그렇게 하겠지........"
칼은 놀리듯이 말했다. "미개발된 도시에 여러 번 간 적이 있소, 미스........?"
"페리스, 리건 페리스예요. 아니오, 처음이에요. 밴쿠버에서 프린스 조지로 오는 도중에 몇몇 작은 도시를 보았어요."
"그런 도시와는 비교도 안 돼요. 댐이 완성되면 문제는 다르겠지만, 지금은 그렇소."
칼은 어깨를 추슬렀다. "처녀가 갈 곳이 못 돼. 멋진 상점이나 레스토랑도 없고, 영화관도 없어요. 아이들이라면 자연을 상대로 노는 것을 좋아할 지도 모르지만, 설마 아가씨가 그럴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저는 어린 아이가 아니에요, 제럴드씨."
리건은 높은 소리로 반문했다. "그리고, 멋진 상점 따윈 없어도 전연 지장이 없어요!"
"보아하니 그럴 것 같군."
칼은 약간 상기된 리건의 희고 작은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다가 갈색 머리로 눈길을 옮기더니 입을 비쭉거렸다. "하지만 아가씬 거친 야외 생활을 즐길 타입은 아닌 듯해."
"그래서 어떻다는 거예요?"
리건은 눈앞에 있는 사나이의 태도에 약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젠 됐어요. 실례하겠습니다!"
"이야길 원점으로 돌리는 게 좋겠군. 댐에 가고 싶은 진짜 이유는 뭔데?"
"그건 이미 말씀 드렸어요."
"단지 친척을 만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영국에서 일부러 이 먼 곳까지 찾아올 사람은 없어요. 그 남자는 아가씨의 누구지?"
"오빠예요."
리건은 입술을 깨물었다. "얘기를 하자면 길어요."
"아무래도 그 길다는 이야기를 끄집어낼 준비를 하는 게 좋겠군."
칼은 리건의 팔을 잡고 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15분만 시간을 주겠어."
칼을 빈자리를 찾아서는 코트를 의자 등받이에 걸쳤다. 값비싼 흰 스웨터 차림의 칼은 웨이터에게 주문을 받게 하고는 가죽으로 된 담배 케이스를 내밀었다. "담배는?"
리건은 고개를 저었다. "안 피워요."
칼은 담배 한 개비를 집어내더니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케이스를 닫고는 라이터로 불을 당기고, "그럼."하고 턱을 내밀며 가슴을 폈다. "시작하지."
이런 태도를 취하면 즉시 술술 지껄여 댈 줄로 착각하는 남자에게 화가 나서 리건은 어깨에 힘을 주며 눈앞의 사나이를 노려보다가, 조금도 부드러워지지 않는 잿빛눈에 기가 꺽여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3년간 오빠인 벤과는 만난 적이 없었어요. 아버지 때문에....오빠는 내가 열일곱 살 때 가출해 버렸거든요."
"아버지가 오빠를 내쫒았다는 건가?"
칼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유는 뭔데?"
리건은 푸른 눈에 불꽃을 튀기며 정색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하죠?"
칼은 어깨를 추슬렀다.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좋아요. 그럼 어떻게 오빠가 댐에서 일하고 있는 걸 알았지?"
"수소문했죠. 무척 힘들긴 했지만요."
리건의 목소리는 야무졌지만 어딘지 모르게 힘이 없었다. "아버지가 열 달 전에 돌아가셔서, 그때부터 계속 찾았거든요."
"어머니는?"
"거의 얼굴을 기억 못해요. 제가 갓난아기 일 때 돌아 가셨대요."
그런 말을 들어도 그 엄격한 표정은 조금도 부드러워지지 않았다. "계속해요."
"네, 그래서 아까 말씀드렸듯이 오빠와 다시 한번 만나고 싶었어요. 피를 나눈 사람은 오빠밖에 없으니까요. 오빤 건축 관계 일을 좋아했었지요. 집을 나갈 때 토목 공학의 학위를 갖고 있었고......그래서 사람을 사서 그 방면을 알아보도록 했어요."
"비용도 많이 들었겠군?"
테이블 위에서 움켜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리건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버진 머리가 무척 명석한 분으로, 사업도 순조로웠어요. 여행을 많이 하는 사업이었는데, 저도 자주 데려가 주셨죠. 학교를 졸업한 후론 그야말로 어디든지 갔었죠. 제네바와 런던에 집이 있었고......아버지는 제게 가업을 잇게 하실 생각이셨던 모양이에요."
"집을 나간 아들 대신으로?"
칼은 담담하게 질문을 던졌다. "네, 오빠가 가업을 이었다고 해도 성공하지는 못했을 테니까요. 오빠는 아버지의 사업을 우습게 생각했었거든요."
"하지만 아가씬 그런 일을 좋아 했나 보군."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익숙해 있었을 뿐입니다. 어쨌든 현재로는 오빠를 만나고 싶은 생각뿐이에요. 저와 네 살 차로, 재미있는 사람이었지요."
"아버지와는 달랐다는 거로군." 리건은 눈을 들었다.
"아버진 몹시 바빴어요. 늘 웃기만 해서는 타이트한 스케줄을 처리해 나갈 수가 없죠."
"그렇겠군."
칼은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더니, 깊이 한 모금 빨고는 연기를 토해냈다. "유산은?"
"뇌종양으로 돌아가셨으므로, 이전부터 판단력은 쇠퇴해 있었나 봐요. 투자 대상을 착각해서, 아버지는 전부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재산을 없앴지요."
칼 제럴드는 그 이상 리건의 아버지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오빠 뒤를 쫒아 여기에 온 이유는 알겠는데, 하지만 만나서 어쩌자는 거지?"
리건은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뜻이죠?"
"아가씨의 오빠가 옛날 그대로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정말 그럴까? 3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소. 설사 친누이 동생이라 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라."
"오빠는 결코 변하지 않았을 거예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면서 리건은 이렇게 말했으나, "...... 그렇게 지나칠 정도로는."하고 덧붙였다. "저도 3년 전과는 변했으니까요."
"나이를 먹은 만큼 지혜로와 졌다는 건가?"
칼은 고개를 저었다. "일부러 이런 먼 곳까지 찾아온 걸 알아도 오빠는 별로 감격해 하지 않을걸. 오기 전에 연락을 취해 보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지?"
"생각했죠. 하지만 그만두었습니다. 편지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게 많이 있었으니까요."
칼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다는 건가? 아가씬 참 이상한데!"
리건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일어섰다. "제럴드씨! 무슨 말을 해도 좋아요. 전 구애받지 않을 테니까요. 다른 방도를 취해 보죠. 실례 했습니다."
"앉아요, 앉아."
웃음을 띤 채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실 게 왔는데."
"혼자서 드세요!"
칼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일어나 말없이 리건을 눌러 앉혔다. 가까이서 보는 칼은 키가 무척 크고, 어깨에 놓인 손은 힘이 있었다. 그 손으로 셈을 치르고, 웨이터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자 입을 열었다. "그렇게 신경질을 부리지 말아요, 데려가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잖아. 그런 식으로 당장 화부터 내는 걸 보니 앞일이 염려되는데."
얌전히 칼의 말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으나 오빠를 만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 사나이의 협조가 필요했다. "물론 사례는 정식으로 하겠어요."
칼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필요 없어. 나는...."
"아니에요, 그럴 수는 없어요! 공짜 호의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칼은 짧아진 담배 끝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정말 고집이 센 아가씨군. 한 명쯤 탈 사람이 늘었다고 해도 별지장은 없는걸."
리건은 다시 반박했다. "저는 다만....."
"알았어요." 라며 칼은 리건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만 해. 비행기는 호수 근처에 있소. 내일 아침 여덟 시에 로비에서 만나기로 하지. 알겠소?"
"네."
좀 늦은 감도 있었지만 "감사합니다."하고 리건은 고개를 숙였다. 칼은 팔목시계를 들여다보더니 담배를 비벼 끄고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켜고는 일어섰다.
"여덟 시에 로비에서 만나요. 춥지 않게 입고 와야 해."
리건은 고압적인 칼의 태도에 화를 내면서, 사라져가는 그의 듬직한 뒷모습을 지켜보았는데, 이처럼 온몸에서 남성미를 발산하는 사람은 처음 보는 것 같아, 왠지 심상치 않은 가슴의 고동을 느끼는 것이었다. 리건은 주문해 준 틴자노에 입을 대지도 않은 채 바를 나왔다. 술 같은 것은 마시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리건의 모습을 발견한 프런트 담당이 의미 있는 시선을 보내왔으므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프런트 담당이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으므로 리건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몹시 친절한 사람으로, 포트 레스터에 가는 방법을 물어 보았을 때도 정성껏 가르쳐 주었었다.
방으로 돌아온 리건은 곧장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가장 두꺼운 스웨터와 청바지에 단화, 밴쿠버에서 망설이면서 샀던 마키노 코트가 이번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빛깔과 무늬가 칼 제럴드의 것과 같다는 것이 또 한 가지 꺼림칙했지만....
해가 저물기 시작하고, 중앙난방이 반갑게 느껴질 만큼 기온이 내려갔다. 캐나다의 봄은 밤이 되면 기온이 영하까지 내려가고, 여름에도 여름이라고 부를 만한 기간은 불과 한 달 남짓하다. 물론 브리티시 콜롬비아 주 북부의 숲속은 더욱 추울 것이다. 리건은 추위를 타는 오빠 벤이 그토록 추운 곳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염려스러웠다....
벤이 집을 나간 것은 3년 전의 더운 여름이었다. 여름 동안만 빌려 쓰던 호화로운 별장의 반짝이는 풀장, 햇볕에 타서 새까맣던 벤은 유연한 몸을 날려서 풀 속으로 뛰어들었었다.... 아버지와 오빠는 얼굴을 대할 때마다 심한 언쟁을 하곤 했다. 오빠가 나간 후로 아버지는 벤이라는 이름을 입에 담기조차 금하고, 죽을 때까지 오빠를 용서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나를 사랑했으리라..... 아버지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다면, 하는 것이 전제가 되겠지만...... 어쨌든 아버지의 일생은 온통 사업으로 메워져 있었으니까 말이다.
칼 제럴드는 아버지와 같은 종류의 인간일까? 들은 바에 의하면, 칼은 이 지방 일대에 영향력이 있는 큰 회사의 회장으로서, 포트 레스터 주변에 2천 5백 에이커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숲뿐이지만, 칼의 수력 발전 계획이 완성되면 크게 발전하여 제럴드 코퍼레이션은 막대한 이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큰 회사의 정상의 위치에 있는 사람치고는 칼 제럴드는 소위 부호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확실히 남에게 명령하는 일에는 익숙해 있는 듯했다. 아버지처럼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타입의 남자에게 머리를 숙여야만 하는 노릇에는 화가 났지만, 지금의 리건으로서는 그런 것을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앞으로 4, 5일만 호텔에 더 묵으면 가진 돈이 바닥이 날 테니까 말이다.
이튿날 아침, 리건은 일찌감치 아침 식사를 마치고 여덟 시 15분 전에 로비로 내려갔다. 그리고 칼 제럴드는 여덟 시 5분 전에 어제와 같은 복장으로 작은 가방을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 리건의 모습을 발견하고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지불을 끝내자마자 리건의 슈트케이스를 들고 걸어 나와, 현관 앞에 세워놓은 자동차의 트렁크에 짐을 던져 넣더니 운전석에 올라앉았다. 자동차는 시내를 벗어나서 프레이저 강을 건너 싱클레어 밀즈로 향했다.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는 탓인지 숲 속은 음울한 분위기였다. 안개 속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산꼭대기에는 아직도 흰 눈이 남아 있었다. "하늘을 날기엔 별로 좋은 날씨가 아니군요."
고조되어 가는 긴장감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리건은 입을 열었다.
"더 심할 때 날았던 적도 있지."
옆으로 얼굴을 돌린 칼의 눈은 히터 쪽으로 뻗어 있는 미끈한 다리에 빨려 들었다. "추운가?"
"아니오, 추울 정도는 아니에요. 하지만 밴쿠버에 비해 여긴 춥군요."
"그럼, 여긴 6월이 되어야 따뜻해지고, 11월엔 벌써 한 겨울이니까. 밴쿠버 쪽은 태평양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니 덜하지만."
"제럴드씨는 그 지방에 살고 계시나요?"
"응. 밴쿠버 섬의 빅토리아에서 40킬로 지점에 있는 케니 만에 집을 갖고 있지."
"아니, <제럴드 만>이라고 하지는 않나요?"
리건은 약간 비꼬는 듯이 말했다. "할아버지가 그 땅을 샀을 때 벌써 그런 이름이 붙어 있었지. 할아버지는 굳이 이름을 바꿀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
칼은 입을 비쭉거렸다. "아가씬 끝까지 시비조로 나오겠다는 거요?"
리건은 턱을 앞으로 내밀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당신은 언제나 남을 깔보는 듯한 말투라 그 말이야. 하기야 나는 어린아이의 빈정거림에 일일이 신경을 쓰지는 않지만 말이야."
"저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제럴드씨!"
리건은 약이 올라 반박했다. "앞으론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 주세요. 그런데, 당신은 몇 살이신가요?"
"잘난 체하는 아이를 잘 다룰 수 있을 정도로는 어른이지."
칼은 화가 나 있으면서도 호기심을 못 숨기고 말했다. "이렇게 먼 곳까지 혼자서 오다니 대단하다고 봐주었는데, 앞으로도 계속 이런 태도를 취한다면 다시 생각해야 겠군."
"무슨 뜻이죠?"하고 리건이 입을 떼려 하자, "두 번 다시 내게 그런 투로 말하지 마!"라고 칼은 고함쳤다.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어, 어제부터 몇 번이나 말해 왔으니까. 이건 단순한 협박이 아니야. 내게 대들어서 좋을 건 없어."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리건은 목구멍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당신과 같이 있는 건 사양하겠어요! 지금 당장 내려 주세요."
"이런 숲 속에서 어떻게 돌아가겠다는 거지? 걸어서 가겠다는 말인가?"
"그런 건 당신과 상관없는 일 아니에요? 어쨌든 저를 세워 주세요!"
"안 돼!"
칼은 분노를 폭발시켰다. "얌전히 앉아 있어. 차를 세우고 싶어도 뒷일을 감당 못할 거 같아서 그래!"
"당신 같은 사람은 정말 싫어요!"
"나 같은 인간이란, 예컨대 당신 아버지 말인가?"
"이런 때에 아버지를 들먹이지 마세요!"
"좋아, 애당초 당신이 내 비행기에 태워 달라고 부탁하러 왔지. 내가 그걸 거절 했었으면 좋았을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요."
칼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 여자다운 반응이군. 오빠를 만나고 싶지 않아?"
노여움이 불타올랐던 리건은 차츰 기가 꺾였다. "아니오, 무척 만나고 싶어요."
"그럼 그 사실을 잊지 마!"
잠시 침묵이 흘렀으나, 칼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박혀 있어 리건은 불쾌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난 벌써 스무 살이다. 열여섯 살의 어린아이는 아니야! 그런데도 저런 말투가 어디 있담? 거만한 짐승 같으니!
쏘아 붙이고 싶은 말은 산더미 같았으나 리건은 침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표정한 갈색의 얼굴을 보니 용기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윽고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수면은 회색으로 물결이 일고 있었다. 호숫가에 세워져 있는 세스너 기는 4인승인데, 노랗게 색칠한 기체에 검은 글자가 씌어 있었다. 타고 온 차를 운전하고 돌아갈 남자가 어디선가 나타나자, 칼은 재빨리 트렁크의 짐을 비행기의 로커로 운반했다. 리건은 지시대로 얌전히 세스너에 올라타고 안전벨트를 채웠다. 칼은 조종석에 앉더니 헬멧을 쓰려고도 하지 않고 엔진을 걸면서 계기를 체크하며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 모양을 보고 있던 리건은 ‘성공의 비결은 세심한 주의를 쏟는 일이다’라고 말하던 아버지를 생각했다.
날씨는 호수에 오기 전 보다 나빠지지는 않았으나 좋아지지도 않은 상태여서, 물 위를 세스너가 질주하기 시작하자 플로우트에 물결이 부딪치는 충격을 심하게 느껴 리건은 무의식중에 눈을 감았다. 엔진이 모두 가동되자 엄청난 소리와 함께 기체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미터 높이에서 기체는 크게 선회하더니 다시 고도를 높였다. 이제까지 하늘을 높이 나는 큰 비행기밖에 타본 적이 없는 리건은, 6백 미터 높이에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경치를 내려다보며 어린아이처럼 흥겨워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동물이나 새밖에 들어갈 수 없는 호수나 숲이나 산뿐으로, 만약 저 협곡에 잘못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몇 주가 걸려도 탈출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하자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 같아, 리건은 애써 그런 생각을 부정했다. 칼 제럴드는 이 부근의 지리에 밝은 명조종사인 듯 하니, 잘못되더라도 추락할 염려는 없을 것이다.
칼은 두 시간이나 지나도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어, 리건은 자기의 존재 따윈 잊혀진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자동차 속에서 그가 한 말, 특히 자기만이 옳다는 듯한 태도를 상기하고 리건은 또 화가 났으나, 이 사람과 얼굴을 맞대고 있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참을 수밖에 없지, 포트 레스터에 닿으면 이런 사람 따윈 잊어버리면 된다, 라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포트 레스터....고대하고 고대하던 여행의 종착지. 오빠와 둘이서 사이좋게 지낸다는 꿈이 마침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빠가 집을 나가서 어떤 경험을 하고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는 없으나, 포트 레스터에서 일자리를 얻으면 댐이 완성될 때까지 거기 있다가 둘이서 함께 영국으로 돌아가면 된다고 리건은 생각하고 있었다.
"저기 가방 속에 커피와 샌드위치가 들어 있어."
칼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한 잔 주지 않겠나?"
허리를 굽혀 포트와 플라스틱 컵을 내놓고 리건이 향기로운 커피를 부어 주자, 칼은 한쪽 손으로 조종간을 능숙하게 다루면서 컵을 받아 쥐고는 "고맙소."하고 말했다. 라이보리 빵에 닭고기와 햄이 끼여 있는 샌드위치는 무척 맛이 있었다. 하긴 아침 식사를 한 지 이미 몇 시간이나 지난 때였으니. "얼마쯤 더가야 포트 레스터에 도착하나요?"
잠시 후 리건은 물어 보았다.
"이 맞바람이 더 이상 강해지지 않으면 한 시간쯤이면 되겠지."
칼은 여전히 무표정한 채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될걸. 바람도 세어질 테고 구름도 낮아지기 시작했으니, 흔들리는 것을 각오해 두는 게 좋을 거야."
리건이 여유를 보이려고 미소를 띠자, 칼의 입이 약간 비뚤어졌다. "이런 비행기를 타는 게 이번이 처음이야?"
"네."
리건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여느때와는 느낌이 달라요."
"처음치고는 얌전하군. 최소한 당신은 불안감을 감추기 위해 실없는 말을 계속 지껄이지는 않았으니까."
리건은 비꼬는 투로 응수했다. "명조종사처럼 보이는 믿음직한 분이 곁에 계시는 걸요, 제럴드씨."
"또 시작했군."
그러나 리건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말을 잘못했나요?"
"말한 내용보다 그 말투가 좋지 않아요.... 한 마디 한 마디가 귀에 거슬려. 나는 실제로 명조종사요, 페리스양."
리건의 뺨이 발갛게 되었다.
"너무 과민하신 게 아니에요?"
"당신에 대해선 그렇지는 않아. 마치 내게 원한이라도 있는 것 같군. 나를 보고 있으면 누군가를 생각하게 되나?"
"아니오, 그런 일은 없어요."
리건은 정직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단지 내가 싫다는 건가?"
그러며 칼은 코웃음쳤다.
"무슨 바보 같은 말씀이죠? 그런 생각은 해 본적도 없어요."
리건은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은 거짓말 하는 게 서투르군. 어젯저녁에 내게 왔을 때도 얼굴 전체에 경멸감을 드러내고 있었어."
"그런 일은 없어요!"
"아니야, 그랬어.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거야."
리건은 초조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다면 왜 저를 비행기에 태워 주셨죠?"
"당신을 난도질하고 싶은 유혹을 이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 성공은 못했지만.... 현재로선."
"앞으로도 어려울 거예요, 포트 레스터에 도착하면 만날 일도 없을 테니까...... 그 마을이 당신 소유가 아니라면."
"그 마을 전체가 내 것은 아니지만 어디를 가나 내 토지지."
"얼마나 근사할까!"
"그런 말투는 집어 치워!"
칼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토록 그 사람이 미운가?"
"미워하진 않아요."
리건은 그 사람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곧 알아차렸다.
"그렇겠지, 그렇게 말하리라고 생각했어. 당신은 독립할 나이가 되었을 때 그 사람에게서 떠났어야 했어. 그랬더라면 자존심을 잃어버리지도 않았을 텐데."
"저의 자존심?"
"그렇지. 당신은 오빠와는 달리 자존심이 상실되어가는 걸 깨닫지 못했어. 그래서 그 사람과 같이 살 수가 있었던 거야. 이제 와서 오빠를 찾아내어 시계 바늘을 뒤로 돌리기엔 이미 너무 늦어 버렸어."
리건은 고개를 떨군 채 잠시 가만히 있었다. "어떻게 그런 걸 아시죠?"
"간단한 일이지. 제럴드 코퍼레이션은 큰 회사이고, 나는 그 회장이야. 즉, 당신 아버지와 비슷한 지위에 있는 셈이지. 하지만 사업에 성공했다 해서 누구나 다 냉혈 동물은 아니오."
"하지만 달걀을 깨지 않으면 오믈렛을 만들 수는 없어요."
"당신의 잘못은, 그 사람이 지배하는 대로 순종한 사실이야. 누군가가 지적해 주지 않으면 스스로는 아무것도 모를 여자 같군."
"당신은 언제나 옳다는 거군요."
분노로 목이 죄어들고 눈물마저 나올 것 같았다. "이젠 그만 해요. 조종간이나 신경 써서 잡아요."
칼은 이기죽거리며 응수했다. "나는 명 파일럿이니까 안심해도 좋아요."
"더 이상 들을 귀가 없으니 그렇게 알아주세요."
리건이 그렇게 말해서는 아니었지만, 칼은 두 번 다시 입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리건은 치부를 드러낸 것 같아 씁쓰레한 기분이 들었다. 사과할까 하고 생각했으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칼이 말한 것 하나 하나가 이치에 닿는 사실이므로 리건은 더욱 더 마음이 상했다. 칼이 말한 대로는 아니었지만, 리건은 아버지에게 지배되어 그녀의 사고나 희망, 야심까지도 아버지의 관여하에 있었다. 옷의 선택이나 거동까지도 구속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리건은 아버지에게 반항하려는 의사조차도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말다툼 한번 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물론 기쁘지는 않았지만....당연한 일이지만---특별한 슬픔에 빠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의사를 갖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수 있는 기쁨을 느낄 정도였다. 돈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제까지 호화로운 생활을 해 왔어도 조금도 행복하지는 않았으니까. 아무튼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리건의 소망은 벤을 찾아내어 다시 한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일 뿐이었다.
칼의 예측대로 구름이 차츰 낮아졌으므로 4백 50미터까지 고도를 낮추어야만 했다. 기체가 삐걱삐걱 흔들리고 기울어졌으나 유연한 갈색의 손은 단단히 조종간을 잡고 있었다. 비가 유리창을 심하게 때리고, 먼 산들은 희미하고, 눈 아래의 풍경은 회색 안개에 싸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 준엄한 옆얼굴을 훔쳐보면서 리건은, 이 사람에게는 희노애락이 없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지껄이기라도 한다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지만 그런 짓은 도저히 할 수가 없을 것 같아, 리건은 마음속으로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끄떡 없어, 비가 오는 정도로 비행기가 추락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 리건이 그런 생각을 한 순간, 엔진이 이상한 소리를 내고 프로펠러의 회전이 느려지더니 잠시 후에 멎어 버렸다. 칼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조종간과 씨름하고 있었다. 리건은 어렴풋이 비행기가 추락해 감을 느끼고 있었으나, 목이 바싹바싹 말라 들어가 소리칠 수도 없었다. 잿빛 수면이 다가왔다. 칼은 어떻게든 기체를 바로 잡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리건은 또렷이 감지했다.
2
마치 엘리베이터의 줄이 끊어져 급강하하듯이, 세스너는 무서운 충격음을 내면서 물속으로 돌진해 갔다. 다행히 동체착륙(胴體着陸)과도 같은 모양으로 착수(着手)하여 잠시 수면을 미끄러져 기슭 가까이에서 멎었다. 안전벨트를 단단히 맨 탓인지 추락 후에도 리건의 의식은 또렷했다. 옆에서 뻗어온 손이 안전벨트를 풀고, 기체에 뚫린 구멍 쪽으로 리건의 몸을 밀었다.
"어서 빠져 나가요, 폭발할 거야!"
칼의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밀려나온 후에도 영문을 몰라 꾸물거리고 있던 리건은, 칼의 절박한 음성으로 잠에서 깬 듯 비틀거리며 수심이 얕은 곳으로 걸어 나와 희미하게 눈에 비친 물가의 큰나무에 기대었다. 약간 울상이 되어 뒤돌아보니, 칼이 겨드랑이에 무엇을 끼고 기체의 구멍에서 나오는 것이 눈이 띄었다. 그때, 큰 소리와 함께 탱크가 폭발하며 칼은 물가로 내동댕이쳐졌다. 불꽃은 가까운 나무로 옮겨 붙어 삽시간에 부근의 숲을 태우기 시작했으나, 칼이 화염에 휩싸이지 않고 곧 일어났으므로 리건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세스너는 수면에 떨어졌으므로 시커멓게 피어오르던 연기도 더 확대되지 않고 가라앉았다. 플로우트가 부서진 채 나무 꼭대기에 걸려 있었다. 다행히도 떨어진 곳이 비교적 안전한 호수였다는 것과, 두 날개가 기체에서 떨어져 나가고 기체가 물위를 모우터 보우트처럼 미끄러져 기슭 가까운 얕은 곳에 닿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큰 부상을 입지 않고 살아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비가 오고 있는 데다 호수 부근은 나무도 많지 않아 옮겨 붙은 불이 크게 번질 염려는 없는 듯했다. 물에 흠씬 젖어 추운 것쯤은 목숨을 건진 데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칼이 비행기 속에서 가져온 담요를 큰 나뭇가지 위에 걸어 응급 피난처를 만들고, 두 사람은 그 안에 한 시간쯤 나란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너무나 순식간의 사건이어서 무전으로 연락을 취할 틈도 없었던 것이다. "어째서 엔진이 그렇게 갑자기 멎어 버렸나요?"
리건은 떨면서 물었다.
"연료 파이프가 막혀 버린 것 같아."
칼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것밖에 생각할 수가 없어. 하지만 산 이쪽편이라서 다행이야."
칼은 기름이 묻어 얼룩진, 창백한 리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머리가 빙빙 돌지?"
"네." 리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몸의 떨림이 멎지 않아요."
"쇼크 탓이지. 곧 괜찮아질 거야. 하지만 곧 멎어 줘야지, 멎지 않으면 곤란해요. 떨고만 있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까."
쌀쌀한 어투였지만 칼의 말이 옳았으므로 리건은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혼이 난 것은 피차일반이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어떡하면 좋죠? 여기에 가만히 있으면서 누군가의 구조를 기다려야 하나요?"
"아무도 구조하러 오지는 않을 걸, 얼마 동안은."
"그럴 리가 없어요! 제럴드씨가 포트 레스터에 도착하지 않으면....."
"확실한 날짜는 알리지 않았어. 그쪽 사람들은 며칠 안으로 내가 도착한다는 것만 알고 있어. 앞으로 3, 4일간은 수색 작업을 벌이지 않을 걸."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죠?"
리건은 울상이 되었다.
"가능한 일은 단 한 가지, 걸어서 여길 빠져 나가는 거지."
리건은 소름이 끼쳤다. "얼마나 걸어야 하나요?"
"60이나.... 70킬로쯤 될 거야. 사흘은 잡아야지."
사흘! 칼이 표정도 바꾸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으므로 리건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먹을 것도 없는데 어떻게....."
칼은 세스너 안에서 가져온 꾸러미를 풀었다. "탄총과 탄약, 담요 두 장, 나이프, 그리고 불을 피울 도구를 가져왔어. 이 정도만 있으면 어떻게 되겠지. 캠프 준비를 해둬서 다행이지. 언제 필요할지 몰라서 실어 두었었지. 좀 더 여러 가지를 넣어둘 시간이 없었던 게 유감이라면 유감이지만."
리건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니 겁이 났다. "불을 피울 도구란 뭐예요? 나무 막대기 두 개를 비비기라고 하나요?"
"이거지."
칼은 코트의 포켓에서 금으로 된 라이터를 꺼내어 손바닥에 놓고는 냉소를 머금어 보였다. "용의주도하지?"
"선견지명이 있으시군요."
리건은 퉁명스레 말했다. 칼은 갑자기 리건의 어깨를 잡았다. "좋았어. 평소의 당신으로 돌아왔군 그래. 우리는 위험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어. 생명을 더 연장하기 위해 당신을 끌고 걸어가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어. 알았나?"
엄격하고 딱딱한 칼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리건에게 노여운 감정이 살아났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손 좀 놓아요!"
회색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이제 겨우 쇼크에서 회복된 게로군? 이제부터 사이좋게 지내야 해요."
"저는 상관 말아요!"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버티어 나갈 수가 없어, 요즘 밤기운은 영하로 내려가기도 하니까 말이야. 몸을 서로 가까이 해서 체온을 유지해야지."
리건은 몸을 떨면서 눈길을 떨구었다. "정말로 살아서 여길 빠져나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되겠지. 우선 비가 그치는 대로 불을 피워 옷을 말리기로 하지."
칼은 팔목시계를 보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제길할, 망가졌어. 당신 것은 어때?"
리건은 흠집 하나 없는 자기 시계를 내려다보고 놀랐다. 세 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비행기를 탄 지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발생한 것인가! 비행기가 뜬 것이 며칠이나 전 인 듯한 기분이었다.
얼마 후에 비가 멎고 구름 사이로 따뜻한 햇살이 스며 나와 둘레가 밝고 따뜻해졌으므로 두 사람을 비를 피하던 장소에서 나와 젖지 않은 담요 위에 앉았다. 호수는 너비가 약 4백 미터, 길이는 1. 6킬로미터쯤 되어 보였으며, 기슭은 수성암으로 되어 있었다. 칼은 제방 밑에서 마른 나무를 찾아와서 불을 붙이고 그 옆에 젖은 담요를 펼쳤다.
"젖은 옷은 모두 벗는 거야. 허세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마키노 코트를 가져오기를 잘했지. 털은 별로 온기를 뺏어가지 않으니까."
"저의 오버 코트에 대해서 뭔가 꼭 한마디 하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리건은 오버 코트를 벗으면서 말했다. "어째서?"
"제가 캐나다인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나는 마키노 코트가 캐나다인의 전유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청바지는 어때?"
"약간 젖었을 뿐이에요. 당신 것은 어떠세요?"
칼의 은근한 시선을 받자, 리건은 뺨을 붉히면서 질문을 얼버무려 버렸다. 아직도 연기를 내고 있는 비행기 쪽에서 고약한 냄새가 풍겨왔으나 불을 쬐고 있으니 따뜻하고 기분이 좋았다. 칼은 혼자서 세스너의 잔해를 조사하러 가더니 겉이 꺼멓게 그슬린 물통, 남비, 낚시 바늘, 철사로 만든 한 쌍의 덫 등을 안고 돌아왔다. "살아남기 위한 일곱 가지 도구인 셈이지."
칼은 철사 덫을 쳐들어 보였다.
"남은 건 그것뿐이에요?" 리건이 조심스레 물으니,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는 모두 기름투성이 인걸."
지금 걸치고 있는 옷 이외에는 패스포트도 돈도 신분증명서도 다 잃어버리고 맨몸이 된 리건은 이젠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었으니, 결국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칼은 모닥불 속에 잔가지를 두셋 던져 넣고는, 울퉁불퉁한 바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리건의 옆에 앉았다. 서산 꼭대기 너머로 모습을 감추기 시작한 태양은 아직 호수의 잔물결 위에 희미한 빛을 던지고 있으나 부근의 제방에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 넓고 탄탄한 어깨, 칼이 바로 옆에 있음을 의식하자 리건은 믿음직스런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동시에 어쩐지 겁이 나기도 했다. 인적 없는 깊은 숲 속에 초면인 남자와 단둘이 남겨졌으니.....
"언제 출발하나요?" 무겁게 내리누르는 답답한 침묵을 견디지 못해 리건이 입을 열었다. "옷은 거의 마른 것 같아요......"
"이제 곧 밤이 될 테니,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하지."
손에 묻은 흙을 털면서 무심코 얼굴을 쳐든 칼의 눈과, 말끄러미 칼을 쳐다보던 리건의 눈이 마주쳤다. 리건의 눈빛으로 심중을 알아차린 칼은 이기죽거렸다.
"몹시 걱정스러운 모양인데, 안심해도 좋아요. 당신 같은 소녀에게는,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 달라는 것밖에는 요구하지 않을 테니까."
지금은 칼을 화나게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리건은 애써 냉정하게 말했다. "어느 쪽으로 걸어가면 되는지 아세요? 저는 전연 모르겠어요." 칼은 냉소하듯 콧방귀를 뀌었다. "저 강은 엔더 강이고, 엔더 강의 상류에 댐이 건설 되고 있어. 그러니까 강을 따라 올라가면 자연히 댐으로 나가게 되는 거지."
"댐 쪽이 가깝나요?"
"아니, 그렇지는 않아."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리건은 얼굴을 찡그렸다. "포트 레스터에 갈 생각이 아니었나요?"
칼은 아직도 빛이 약간 남아 있는 희미한 수면에 눈길을 보냈다.
"하늘을 날라는 말인가? 억지를 부리지 말아요." 칼은 짜증스러운 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봐! 지금 당신하고 그따위 시시한 언쟁을 하고 싶지는 않아. 당신은 잠자코 내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하면 되는 거야."
"미안해요, 바보 같은 소릴 해서. 하지만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굳이 억지로 알려고 할 필요는 없어. 하룻밤 푹 자고 나면 기분도 좋아질 거야."
리건은, 푹 잔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기온은 자꾸 내려가 몹시 추웠다. 캠핑이라도 와 있는 거라면 즐겁겠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는 울적해지기만 했다. 리건이 오버 코트 쪽으로 손을 뻗자, 칼이 이를 제지했다.
"추워서 못 견딜 지경이 될 때까지 참아요. 그러면 코트의 고마움을 알게 될 거야."
칼은 리건에게 주의를 주고 나서 단총에 총알을 장전했다.
"불을 약하게 해놓고 기다려, 곧 돌아올 테니까."
"저를 두고 가버리실 셈이에요?" 리건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무언가가 습격해 오면 어쩌죠?
.""불을 끄지만 않으면 괜찮아. 먹을 것이 없으면 곤란하지 않아?"
"호수의 물고기로 되잖아요."
"그래, 달리 잡을 것이 없으면 물고기로 참을 수밖에. 그러나 지금은 좀 더 스테미너에 도움이 될 것이 필요해. 아무튼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 줘요."
리건은 망연히 칼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남자, 특히 칼 제럴드 같은 미운 남자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당황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는데, 자기는 부들부들 떨면서 어쩔 줄 몰라 하고만 있으니 말이다.
해가 완전히 지기 직전에 칼이 손에 사냥한 새를 들고 돌아왔다. "불을 꺼뜨리지 말라고 했지? 이걸 어떻게 구울 생각이지?"
"그런 건 생각해 보지도 않았어요."
칼이 가버린 후로 너무나 긴장해서 신경이 곤두선 리건은 아무렇게나 한마디 불쑥 내뱉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 숲속에서 들려 오는 기묘한 소리, 무슨 소리가 날 때마다 그 소리 나는 쪽을 두려운 눈으로 살펴보며 뭔가 나타날 것 같은 초조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저는 배고프지 않아요."
"그래? 하지만 나는 몹시 고픈걸. 당신도 곧 고파질 거야. 배가 고프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먹어줘야겠어."
칼은 쌀쌀하게 내뱉었다. "응석을 부린다고 해서 여길 빠져나갈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해요!" 분노에 타는 눈으로 리건은 칼을 노려보았다. "혼자 내버려 두고 가버리는가 하면, 돌아와서는 응석을 부리지 말라며 나무라시니, 도대체 어떤 신경의 소유자이신지 모르겠군요!"
"나는 매사에 신경을 쓰고 있지." 칼은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이 말했다. "당신을 어떻게 하면 힘을 내게 하나, 하는 일에도 고심하고 있어. 하지만 일일이 당신의 시중을 들 만한 여유는 없어. 자기 일은 자기가 해결해 줘요."
"저쪽으로 가 주세요."라며 허세를 부렸으나, 칼이 포획물을 단총 옆에 놓고 가까이 오자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놓였다. 칼은 거친 손놀림으로 리건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
"참을 대로 참았지만 이젠 한계에 다다랐어! 추락은 물론 충격이었을 거야. 하지만 이젠 적당히 하라구! 자기 힘으로 헤쳐 나갈 수밖에 없으니까 용기를 내줘, 알았지?"
리건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칼의 얼굴을 혐오에 찬 눈으로 노려보았다. 얼마나 잔인한 사람인가! 용기를 내라고? 내게 용기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알았어요. 제럴드씨 말대로 하겠어요."
"좋았어."
칼은 명령조로 말했다.
"내가 소나무 가지를 꺾어 제방위에 놔 둘테니, 그걸 운반해요. 서둘러야 해. 오늘 저녁엔 달이 없을 것 같으니까."
리건은 화가 난 채 지시대로 잔가지를 운반했다. 마지막 가지를 안고 돌아오니, 칼은 잡은 새의 깃털을 뽑고 있었다. 살을 잘라 뾰족한 잔가지에 꿰어 두 갈래로 갈라진 큰 가지에 얹어 불 위에 놓으니, 고기는 지글지글 소리를 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겼다. 칼이 익숙한 솜씨로 잔가지를 돌리면서 즐겁게 고기를 굽고 있는 광경을 보며, 리건은 자기가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음을 느끼고 시무룩해졌다. 새고기는 냄새뿐만 아니라 맛도 좋았다. 숲은 조용하고, 둘레는 봉숭아 향기로 가득 찼다. 하늘에는 구른 한 점 없이 별이 아주 또렷이 빛나고 있었다. 리건은 그런 밤하늘에 정신이 팔려, 이 밤을 단둘이 지내야 한다는 사실도, 앞으로 사흘을 계속해서 걸어야 한다는 사실도 잠시 잊고 있었다. 칼이 가문비나무 가지로 새로 피운 불 곁에 잠자리를 만드는 모습을 리건은 복잡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속성 침대가 완성되고 칼이 손짓을 하는데도 그녀는 일어서려고 하지 않았다.
"완력으로 납득시켜야만 되겠나? 이미 이해는 되었으리라 생각하는데..."
리건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당신은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저는 달라요."
"남자와 같이 밤을 지낸 적이 없다는 건가?"
칼은 조롱하듯 웃었다.
"구태여 고백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어."
"어머나, 정말?"
리건은 가슴이 뜨끔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나는 무엇이든 알지. 내가 하는 말이 틀려 본 적은 없어."
"제가 제럴드씨 말을 모두 믿는다고 생각하세요?"
"그럼."
칼은 더 참을 수가 없는지 몹시 화가 난 음성이 되었다. "자, 이리로 와요."
"따로따로 자기로 해요, 담요도 두 장 있으니까."
리건은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
"아무리 불이 있더라도 밤이 깊어지면 한 장만으로는 추워. 이런 데서 자본 일이 없는 사람은 견디어 내지 못 할걸."
"문제없을 거예요. 제발 부탁이에요."
"안 돼."
칼은 단호히 말했다. "셋을 셀 동안 이리로 와요."
리건은 꾸물거리며 일어나 칼에게서 얼굴을 돌린 채 담요 위에 몸을 뉘었다.
"이쪽을 봐."
칼은 남은 담요 한 장을 덮더니, 리건의 허리에 팔을 감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귓가에 따스한 입김을 보내 왔다. "몸의 힘을 빼요.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군!"
그렇게 하고 있으니 확실히 따스하긴 했지만, 리건은 몸이 굳어진 채 도사리고 있었다. 인사를 나눈 지 하루밖에 되지 않은 남자와 여자가 이렇게 한 담요 속에 있다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리건은 아직 칼 제럴드란 남자를 전적으로 믿고 있지는 않았지만. 마침내 칼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이봐요, 나는 지쳐 있어. 게다가 내일은 하루 종일 쉬지 않고 걸어야 해. 하지만 당신이 주도권을 잡고 싶어서 밤새도록 거기서 나를 감시하고 있을 셈이라면, 지금 여기서 분명히 해 두는 게 좋겠군."
리건이 상체를 일으키는 것을 보자, 칼은 최후 통첩을 하는 것처럼 말했다. "당신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야, 알았지? 그럼 자기로 해."
리건은 분해서 칼에게 등을 돌렸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 남자에게 맞설 수는 없다는 말인가? 리건은 단검으로 가슴을 찔린 듯한 기분이었다.
3
리건은 손발이 저려 눈을 떴다. 아직도 주위는 어두컴컴했다. 잠자는 동안에 서로 몸을 움직인 듯, 따스한 입김을 이마에 느낄 정도로 칼의 얼굴이 가까이 있고, 팔은 허리 부근에 감겨 있었다. 일어나려고 하니 칼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달러스."라고 중얼거리면서 눈을 뜬 칼은, 잠시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리건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기억을 되찾은 듯, "아, 잘 잤다. 당신은 어때?"하고 물었다. 리건은 대꾸도 하지 않고 일어나 앉아 크게 기지개를 켰다. 주위에는 안개도 끼어 있었다. 차가운 공기에 저도 모르게 오들오들 떨렸다.
"날씨가 좋아질 것 같군." 칼은 리건의 등에다 대고 말했다. "곧 태양이 얼굴을 내밀 거야."
칼은 일어나서 덮고 있던 담요를 리건 쪽으로 던져 주고, 자기가 깔았던 것을 반듯하게 갰다. "불을 피우고 나서 어젯저녁에 장치해 둔 덫을 보러 갔다 올게. 뭐니 뭐니 해도 커피가 없는 게 유감이야. 뜨거운 것을 마시면 힘이 날 텐데."
"물이라면 거기 있어요.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아요?"
"하긴 그렇군."
칼은 곧 불을 피우더니 덫을 살피러 갔다. 칼만 일하게 하는 것이 미안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리건은 몸이 나른하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나 칼이 잠자코 있을 리야 없겠지만, 뭔가 지시할 때까지는 모른 체하고 있기로 리건은 마음먹었다. 칼은 한쪽 손에 토끼를 들고, 스카프에는 버섯을 듬뿍 담아가지고 돌아왔다. 두 사람은 삶은 버섯만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토끼는 나중을 위해 남겨 놓기로 했다. 차가운 호숫물로 손과 얼굴을 씻고는 버섯을 요리한 남비를 씻고 있는데, 수면에 갈색의 무엇이 꼬리를 수평으로 하여 헤엄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캐나다의 상징인 비버였다. 리건은, 비버가 기슭에 올라 근처의 덤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광경을 황홀한 듯이 보고 있었다. 비버와 같은 귀여운 동물이라면 조금도 겁나지 않았다. 활 모양으로 굽은 기슭을 따라 무성한 수풀 쪽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듯하여 가만히 그쪽을 살펴보았으나,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얼마 후 리건은 총총히 칼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칼은 담요를 작게 말아 등에 메고 단총을 손에 들더니, "준비는 됐어?"하고 간단히 물었다. 그러고는 준비가 되었든 안 되었든 상관치 않고 걷기 시작했으므로, 리건은 화를 내면서 칼의 뒤를 허둥지둥 쫒았다. 지금은 이 사람의 뒤를 말없이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칼은 반드시 나를 여기서 끌어내 줄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되지 않으면 정말 큰일나지.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산봉우리는 흰 눈으로 뒤덮여 있고, 산비탈 부근은 녹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호수가 거울 역할을 해서, 호수 면을 들여다보니 주위의 모든 경치가 한 눈에 들어왔다. 춥지만 멋진 경치여서, 여행 삼아 여기에 왔다면 얼마나 신이 날까, 하고 리건은 생각하고 있었다.
칼은 정확히 한 시간마다 휴식을 취했으나, 너무 오래 쉬면 근육을 움직이기가 힘들어진다면서 5분 이상 휴식을 허용하지 않았다. 강을 따라서 걸으면 되었으므로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으나, 길이 험해서 쉽사리 전진할 수는 없었다. 강이 굽이질 때마다 협곡이 나타나, 가까스로 하나를 건너고 나면 또 그 다음 것이 나타나곤 했다. 산길을 걷는데 익숙한 칼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리건은 묵묵히 뒤를 따랐다. 숲의 주민들이 잇달아 리건 앞에 나타났다. 갖가지 새들, 재빨리 나무를 기어오르는 붉은 다람쥐, 그리고 몸에 빡빡이 돋은 날카로운 가시 털을 떨면서 뒤뚱거리며 기어가는 호저. 호저는 사람이 다가가도 조금도 겁을 내지 않았다.
"이 부근에는 곰도 있겠지요?" 몇 번째인가의 휴식 때, 리건은 물어보았다. "잿빛의 큰 곰이라든가?"
칼은 어깨를 추슬렀다. "잿빛 곰이든 검은 곰이든, 아마 있을 거야."
"하지만 어젯밤엔 불을 끄고 잤잖아요. 곰이 습격하면 어쩔 셈이었죠?"
칼은 큰소리로 웃어댔다. "그래서, 내가 총을 갖고 불침번이라도 섰어야 했다는 건가? 농담은 말아요. 첫째, 하루 종일 걸어야 하는데 밤샘을 한다는 것은 무리지. 둘째로, 인간 쪽에서 곰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 곰이 먼저 습격해 오진 않아요."
"우리가 곰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고 어떻게 단언하죠?"
"나는 알아. 그리고, 추격을 받거나 위협을 당하지 않는 한 그쪽에서 덤벼드는 일은 없어."
칼은 생각이 난 듯 물었다.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지?"
"호수 근처에서 본 듯한 생각이 들어서요."
"바람이 불어가는 쪽에 있으면 상관없어. 이제 그런 것은 잊어요, 앞으로도 이상한 소리를 듣는 일이 자주 있을 테니까."
그런 말을 들었어도 염려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여서 리건은 걸으면서 힐끔힐끔 뒤를 살펴보았다. 칼의 말대로, 해가 점점 높아짐에 따라 따뜻해졌다. 따뜻하다 해도 밤에 비해서 그렇다는 이야기지만.... 칼이 먹다 남은 뇌조(雷鳥)구이를 가져왔기에 그것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리건은 살코기를 다 먹고 뼈까지 발라 먹었다. 손발은 마치 제 것이 아닌 듯이 느껴질 만큼 뻑뻑했고, 닳아빠진 한쪽 신의 뒤축이 닿은 발뒤꿈치에는 물집이 생겨 있었다. 다시 일어나 걷기를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앞으로 길은 더욱 험해질 거야." 칼은 일어서서 지쳐빠진 리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주의해서 걸어야 해."
리건은 큰 소리로 응수했다. "어차피 당신에겐 이런 길을 걷는 것쯤은 식은죽 먹기겠죠? 그런 분이 저의 괴로움을 어떻게 아신다는 거예요!"
"나라고 좋아서 하는 짓은 아니야." 칼은 쌀쌀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걷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이젠 지쳤어요. 좀 더 쉬게 해주실 수는 없어요?"
약한 소리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젠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조금 기운을 차리면 걷기 시작할 테니까요."
칼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리건 앞에 서더니, 경멸하듯 눈을 가늘게 뜨면서 억지로 리건을 일으켜 세웠다. "내가 하라는 대로 해요. 허튼 소리는 집어 치워! 그 정도의 상처로 죽지는 않아."
칼은 리건의 몸을 흔들었다. "다시는 내 말을 거역하지 마!"
칼에게 마구 뒤흔들려서 비틀거리던 리건의 눈에 분노의 눈물이 번졌다. "당신같은 사람, 보기도 싫어요!"
리건은 이를 갈았다. "진심으로 경멸해요!"
"마음대로 하라지, 나는 가겠어."
칼은 리건에게서 손을 떼고, 엄격한 표정을 조금도 흩트리지 않은 채 짐을 들었다.
"이 숲을 벗어나는 데 성공할 무렵엔 조금은 어른이 돼야 할 텐데."
리건은 반박하려던 말을 삼켜 버렸다. 지금 그런 짓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뿐더러, 칼의 말이 옳으니 칼을 나무랄 수도 없었다. 리건은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저벅저벅 걸어가는 칼의 뒤를 이를 악물고 쫒아갔다. 발뒤꿈치의 물집은 점점 더 아파 왔다. 손수건을 대니 조금 나아졌으나 계속 뒤쳐지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칼은 리건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절대로 물집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시늉을 했다. 설사 물집이 생긴 것을 알더라도 위로의 말 한마디 던져 주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니까. 귀를 기울이니 주위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갖가지 소리가 들려왔다. 거대한 수목들이 울창한 숲에는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정적이 느껴졌다. 리건은 발의 통증을 잊으려고 열심히 걸었으나, 해가 서편으로 기울 무렵에는 몸이 천근이나 되는 듯 무거웠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어, 해가 지고 나면 아주 추워질 듯 했다. 두 사람은 그다지 험하지 않은 협곡에서 밤을 지내기로 했다. 칼은 곧 덫을 놓으러 가서, 완전히 해가 진 뒤 낚시 바늘에 물고기 두 마리를 달고 왔다. "캄캄해지기 전에 돌아오려고 했는데..... 자, 토끼도 요리해서 두 가지를 조금씩 먹기로 하지. 그러면 내일은 나머지로 해결되겠지."
칼은 모닥불 너머로 지쳐 빠진 리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알았지?"
"네, 알았어요."
리건은 따뜻한 말 한마디 던져 주지 않는 칼을 책망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밤새도록 불을 피워 두면 안 되나요? 저도 교대로 일어나 있을 테니까요."
"그럴 필요는 없어. 아까 돌아오는 길에 동굴 비슷한 걸 발견했어. 별로 넓지는 않지만 습기는 없을 테니까 바깥보다는 낫겠지."
"곰의 잠자리인지도 몰라요."
"아가씬 곰에게 홀린 모양이군. 곰도 침대에서 자나?"
칼의 뜻밖의 농담에 긴장감이 풀려 마음이 놓였다.
"제가 방해되죠?"
예리한 나이프로 토끼의 가죽을 벗기고 있던 칼은, "당신에겐 당신 나름대로 좋은 점이 있어."라고 나이프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으나 리건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손을 멈추었다.
"다음은 뭐야? 당신을 함부로 다뤘다고 내가 사과할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칼은 얼굴을 들었다. 흔들리는 불꽃 너머로 보이는 그것은 수수께끼와도 같았다. "이래봬도 무척 마음을 쓴 다구."
"자신은 무엇이든 알고 있다고 믿으시는 군요."
"물론 다 알고 있지. 당신 아버지의 교육 방식은 잘못된 것 같군."
리건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버지 얘긴 꺼내지 말아 주세요."
"당신의 그 기분을 모르는 바도 아니야. 하지만, 이젠 그런 데서는 졸업해도 좋을 듯한데?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따위의 바보 같은 생각도 있지만, 꼭 그렇지도 않아. 위로가 될지 모르지만, 나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어. 우리는 전혀 다른 타입의 인간이었으니까."
"하지만 부친께서 돌아가신 후 가업을 상속하신지 않았나요?"
"아버지와 똑같은 일을 하고 있지는 않아. 그건 무리한 노릇이지."
"언제 돌아가셨죠?"
"2년 전에." 칼은 그 당시를 상기했는지 얼굴이 흐려졌으나, 이윽고 천천히 말을 계속했다. "당신은 오빠와의 재회에 너무 기대를 거는 것 같아."
"아마 그럴 거예요."
리건은 솔직히 시인하고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숲속에서 나타나면 깜짝 놀랄 거예요."
"그렇겠지."
칼이 퉁명스럽게 시인했다. "하지만 패스포트도 신분증명서도 다 잃어버렸으니 그냥 포트 레스터에 눌러 앉을 수도 없어. 무슨 말인지 알겠지? 밴쿠버로 돌아가서 영국 대사관에 가야 하니까."
"어쨌든 지금은 포트 레스터에 가는 일밖에는 생각할 수 없어요.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요?" 리건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직도 고된 여행이 많이 남아 있나요?"
"어떤 의미에선 그렇지. 여기서 몇 킬로 앞에 있는 협곡은 험준해서 건널 수 없으니까 내일은 산을 넘어야겠어. 바위를 타본 적이 있나?"
리건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런 짓을 할 타입이 못 돼요."
칼은 싱긋 웃었다.
"그렇겠지. 다른 스포츠는 어때?"
"테니스와 스쿼시라면..."
"꽤 템포가 빠른 게임이지. 성과는 있었나?"
"시합에 나간 적은 없으니까."
대수롭지 않은 대화가 마음을 녹여 긴장이 풀려갔다.
"당신은 어떠세요?"
칼은 어깨를 추슬렀다. "제대로 스포츠를 할 틈이 없었지."
"하지만 사냥은 갔었죠?"
"가끔."
칼은 나무라는 듯한 리건의 목소리에 놀라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군."
"아니오, 그냥..."
리건은 더듬거렸다. "먹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것은......"
"좋지 않다는 건가?"
칼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나는, 휴가를 얻으면 지금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생활을 하러 숲속으로 가지. 자연과 싸우기 위해서."
리건은 입술을 깨문 채, 칼이 물고기를 꼬챙이에 꿰어 토끼고기와 나란히 불에 굽는 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이러한 곤경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사람밖에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도대체 이 사람을 어느 정도 믿어야 할까? 언제까지 이런 상태가 계속될까?
"어디 아픈가?"
칼이 침묵을 깨뜨렸다.
"네, 약간." 리건은 허세를 부렸다. "하지만 괜찮아요."
"평소에 쓰지 않던 근육을 사용한 탓이지. 그리고 어젠 혼도 났고......하지만 정말 운이 좋았어. 다리라도 부러졌다면. 아니, 관절을 다치기라도 했다면 큰일 날 뻔했어!"
"저를 혼자 남겨 놓고 구조를 청하러 가야만 하셨겠네요?"
"부상을 입은 게 나라면 당신 혼자 갈 수 있었겠어?"
"그런 일을 할 수 없는 걸 잘 알고 계시면서....."
리건은 혼자서 숲속을 헤매는 광경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몸을 떨었다.
"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건 시인해요."
"그렇지. 하지만 어차피 우린 운명을 같이 하고 있는 셈이야."
"뭔가 미묘한 말투군요."
잿빛 눈이 번쩍이며 잠시 칼의 표정이 변했으나 곧 이전의 엄격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한쪽 다리를 끌면서 걷던데, 신은 새로 맞춘 건가?"
"네."
리건은 칼이 당황하여 화제를 바꾼 것을 알았으나 그 이유를 굳이 캐어 물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회색의 눈을 보는 것만으로 족했다.
"식사 후에 보여 줘. 사소한 일이 크게 잘못되는 수도 있으니까."
"한번 신을 벗으면 다시는 신을 수 없게 되요." 리건은 뾰로통해졌다.
"그러나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아주 못 걷게 될 지도 몰라."
리건은 단념하고 화제를 바꾸었다. "오늘은 대략 얼마나 걸었을까요?"
"15~ 16킬로쯤 되겠지. 정확히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러면 앞으로 사흘이 더 걸려야 할 것 같은데요?"
"사흘로 안 되면 나흘이 되겠지."
"그 무렵엔 수색대가 출동하지 않을까요?"
"아마 그럴 테지. 하지만 헛된 노력으로 끝날 거야. 다들 떠들어대기 시작할 무렵에 우린 유유히 샤워라도 하고 있을 걸?"
자신에 넘쳐 있는 칼은 눈부셨다. 역시 남자는 여자와는 달리 겁을 내거나 심약해지지는 않는 모양이다. 칼이 발견했다는 동굴은 빙하기 때부터 있었을 듯한 협곡의 토대암(土臺岩) 속에 있었다. 그 속에 뼈와 마른 풀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한때는 동물의 서식처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별로 최근의 일은 아닌 것 같아."라고 칼은 단언했다. "냄새가 별로 남아 있지 않으니까.... 입구가 넓어서 아주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좋은 것 같군. 입구에 불을 피우면 불을 끄고 난 후에도 따뜻하겠지. 풍향이 바뀌어 이 속이 연기로 꽉 차더라도 날 나무라지는 말아 줘."
불을 피우고 담요를 깔자 아주 쾌적한 침상이 되었다. "그럼 발을 보여 줘." 칼이 말했다. "신을 벗고..." 리건은 조심스레 신을 벗기 시작했으며, 손수건을 댄 상처에서 신이 떨어져 나가자 휴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양말에 구멍이 뚫어져 있어 아픔을 막기 위해 대어 놓았던 손수건은 발꿈치에 달라붙어 있었다. 칼은 살갗이 벗겨진 발꿈치를 보고 휙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이렇게 심한대도 왜 잠자코 있었지?"
리건은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우는 소릴 하고 싶지 않아서예요."
"내가 그렇게 말해선가?"
칼은 이렇게 반문하면서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지 않게 조심하면서 일어섰다. "곧 돌아올게."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칼은 이끼 같은 것을 한 아름 안고 돌아왔다. 그것을 뜨거운 물에 녹여 풀처럼 만들어, 발꿈치의 근처에 문질러 바르고 잎으로 단단히 싸매었다. "옛날부터 전해지는 인디언의 치료 방법이지. 이렇게 해두면 피부가 유착하여 강해진다더군. 양말을 신어 고정시켜 둬요. 약간 따가울지 모르지만 말이야."
"고마와요."
흔들리는 불꽃을 받아 붉게 물든 칼의 얼굴을 리건은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디서 이런 걸 배웠나요?"
"우연히 알게 된 것뿐이지."
칼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젠 자는 게 좋겠군."
동굴은 두 사람이 따로 떨어져 잘 정도로 넓지는 않았으나, 칼이 불을 보고 있는 틈에 리건은 한 장의 담요를 덮었다. 기어서 돌아온 칼은 그것을 보고도 아무 말도 없이 나머지 담요를 덮었다. 서로의 숨결을 느낄 만큼 가까이 있었으나, 잠이 들 때까지 서로 아무 말도 없었다.
이튿날도 무척 청명한 날씨였다. 태양이 높아짐에 따라 점점 기온이 올라갔다. 칼이 치료해 준 덕분에 발꿈치의 상처는 놀랄 만큼 나아 있었다. 두 사람은 아침 식사를 한 수 약간 휴식을 취하고는 걷기 시작했다. 길은 점점 험해지고 앞에는 숱한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점심때가 되자 두 사람은 어젯저녁에 먹다 남은 것과, 칼이 아침에 채집해 온 셀러리를 먹기로 했다. 제법 높은 곳까지 올라왔으므로 30시간쯤 전에 출발했던 호수가 보였다. 바로 눈앞에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이 신기했다.
"반드시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리건에게서 셀러리를 받아 들면서 칼은 "문제없어. 염려할 필요는 없어."하고 격려하듯 말하고 이제부터 걸어갈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두 시간쯤 후면 어제 말한 협곡에 당도한다. 거기를 넘으면 나머지는 수월할 거야."
리건은 설마 이런 방법으로 가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었다. 포트 레스터 읍내를 머리에 떠올렸다. 아무리 오빠가 있다고 해도 단벌옷에 패스포트조차 지니지 않았으니, 오래 머무를 수도 없을뿐더러 오빠에게 돈을 빌어야 한다. 어쩐지 시선이 느껴져 눈을 드니, 칼이 입가에 웃음을 띠고 리건을 보고 있었다. 칼이 언제까지나 시선을 거두려 하지 않아, 리건은 당황하여 볼을 붉혔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떤 분일까? 온갖 경험을 쌓은 좀 더 나이 많은 여자라면 이런 때에도 침착하게 처신할 수가 있겠지만, 리건으로서는 그런 태도는 취할 수가 없었다. 이전처럼 거만하게 구는 편이 차라리 마음이 편할 것 간다. 아이 취급을 당하는 동안은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이제 가야 할 시간이야." 칼이 일어섰다. "걸을 수 있겠어?"
"네."
리건은 지나친 염려는 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타이르면서 일어섰다. 한 시간쯤 걸었을 때, 갑자기 둘은 곰과 맞닥뜨렸다. 전연 예기치 않았던 일이라 칼조차 놀랐을 정도였다. 나무뿌리 근처를 파고 있던 곰은 바람이 불어오는 쪽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둘을 발견하고는, 발밑의 식량도 잊은 채 회색의 큰 머리를 두 사람 쪽으로 돌렸다. "움직이지 마!"
칼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이 정도의 거리면 괜찮으니까. 그렇잖으면 지금쯤은 이미 당했을 거야."
머리에 피가 올라 있던 리건은 그저 도망치고만 싶었다. 칼은 왜 쏘지 않을까!
그런데 칼은 총을 겨누려고도 하지 않았다. 긴장하여 손발이 뻣뻣해진 리건보다도 훨씬 침착한 듯 했다. 둘이 아무런 행동도 하려 들지 않자, 곰을 들었던 앞발을 내려놓고 네 발 자세가 되었으나 눈빛은 그대로 험악했다. 한두 번 으르렁 거렸으나 공격해올 태세는 아니어서 칼은 리건을 끌어당기며 바위 뒤로 숨었다. "멀리 돌아서 가지."
리건은 떨면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으나 아직도 곰이 바로 가까이에 있는 듯해서 겁이 났다.
"왜 쏘지 않았죠, 위협사격쯤은 할 수 있었을 텐데?"
칼은 무시하듯 웃었다. "회색의 큰 곰은 그렇게 간단히 위협에 굴하진 않아요. 그리고 이 시기는 배가 고파서 기분이 나쁠 때지. 한 방 쏘아 보라지, 순식간에 덮쳐 올걸!"
"그럼 만약 그 곰이 습격해 오면 어떻게 하실 셈이었죠?"
"거기 나무에다 당신을 밀어 올려서 전속력으로 기어 올라가기를 빌 뿐이지."
칼은 빈정거리며 말했다. "만약 탄환이 재어 있었다고 해도.... 지금은 장탄되어 있지 않지만....내가 가진 것으론 그놈을 거꾸러뜨린다는 건 불가능하지! 탄환이 백 발 있어도 안 돼."
길을 돌아서 가면서도 리건은 염려가 되어 자주 뒤를 돌아보았다. "뒤쫒아 올 지도 몰라요."
"아니, 이젠 괜찮을 거야. 우리는 바람이 불어가는 쪽에 있고, 그 놈은 지금 자기 배를 채우는 데 정신이 팔려 있어. 게다가 우리 쪽에서 접근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회색의 큰 곰도 아무리 배가 고픈들 사람은 반갑지가 않을 거야."
칼을 전적으로 믿는다면 그 말에 안심했을 테지만, 그렇지도 않은 리건으로서는 한 번 일어난 일이 두 번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 같았다. 회색의 큰 곰이 인간을 잡아먹지 않는다는 말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으며, 오로지 운이 좋았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칼은 꼬박 30분을 걸어간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귀중한 낮 시간을 많이 허비해 버렸어. 이대로라면 밤은 산 위에서 보내게 될 것 같군."
리건은 이젠 말할 기력도 없고, 곰이 나타나지만 않는다면 어디서 자도 좋다는 심정이었다. 칼은 다시 성큼성큼 걷기 시작하고, 리건은 떨면서 그 뒤를 쫒았다.
4
칼이 말하던 대로 거의 수직으로 깍아 지른 벼랑에 끼인 협곡에 당도했다.
"화산의 폭발로 단층이 생긴 셈이지. 옛날엔 강이 30킬로쯤 아래를 흘렀던 것 같아. 그것이 어떤 이유로 올라왔는지를 조사해 보면 재미있을 거야."
칼은 막힘없이 설명했다. 리건은 놀라서 칼을 바라보았다. "무척 자세하게 알고 계시는 군요."
"지질학을 약간 공부했기에." 칼은 별것이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럼 저쪽으로 가요. 수직으로 오르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저 벼랑을 오르기로 하지."
그 벼랑도 상당히 각도가 있어, 목이 아플 정도로 쳐다보지 않으면 정상이 안 보일 정도여서 리건은 눈이 어지러웠다.
"내가 먼저 올라 갈 테니,." 칼은 발 딛기에 적당한 곳을 찾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가 말하는 대로 손발을 옮겨 놓으며 따라오면 돼. 절대로 밑을 보아서는 안 돼요. 바위만을 바라보는 거지. 바위는 당신을 거부하지도, 뿌리쳐 떨어뜨리지도 않을 테니까."
칼은 리건의 용기를 북돋워 주려고 미소 지었다. "반드시 싱긋 웃으며 정상에서 이 절벽을 내려다 볼 수가 있을 거야."
리건은 다른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칼의 말대로 손발을 움직여 바위를 오르기만 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젠 뒤로 물러설 수는 없다. 바위의 경사면은 상상한 것보다 가파르고, 근육의 여기저기가 아파오고 걸음은 거북이처럼 느려, 칼은 몇 분 올라가다 멈춰서는 리건에게 지시를 했다. 절반도 오르지 않았는데 관절은 풀리고 손발은 말을 듣지 않게 되었으므로 칼의 지시에 따라 조금 쉬기로 했는데, 일단 멈춰 버리니 멀리 밑의 계곡을 내려다보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유혹에 져버리면 영락없이 낙하하고 만다. 리건은 현기증으로 손을 놓아 버릴 수는 절대로 없었고, 이대로 바위에 가만히 달라붙어 있는 것도 힘들었다. 차츰 정상이 가까워오므로 리건은 설레는 마음을 누르며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칼의 소리를 따라 왼쪽을 더듬어 발 디딜 곳을 찾았다. 칼은 리건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리건은 잠시 칼에게 안긴 채 웅크려 숨을 가다듬고 있었는데, 칼은 격려하듯 리건을 일으켜 세웠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몇 발짝만 오르면 쉴 수 있어. 착한 애니까 힘을 내야지. 여기 머물러 있을 순 없어요."
리건의 귀에는 칼의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스스로 용기를 북돋우며, 작은 돌에 걸려 비틀거리기도 하면서 조심조심 발을 움직였다. 가까스로 그곳에 다다르니, 이끼가 돋은 딱딱한 땅도 부드럽게 느껴져, 살았구나! 하는 실감이 치솟았다. 태양은 멀리 산 너머로 지고 있으며, 오렌지 빛과 붉은 빛으로 물들여진 터키 블루의 하늘은 호박 빛 광채로 둘러싸여 있다. 건너온 계곡은 온통 녹색으로 덮여 있고, 둘이 출발했던 호수는 사람의 머리만한 크기로 보인다. 그 너머엔 프린스 조지로부터의 하늘 여행에서 본 낮은 언덕이 보였다. 프린스 조지를 떠난 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사흘 전? 나흘 전? 아니, 일주일 전의 일인 듯 느껴지기도 한다.
"댐은 저쪽 방향이지." 리건은 칼이 가리키는 북쪽으로 자세를 바꾸어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경관에 눈길을 모았다. 어두운 숲 사이로, 얼마 남지 않은 태양빛을 받아 하얗게 떠오른 콘크리트 댐의 건설 현장이 보이는 듯했다. 육안으로는 보일 리가 없지만, 소란한 기계 소리에 둘러싸여 남자들이 일하고 있는 광경이 리건에게는 보이는 것 같았다. 지금 지나온 길과는 달리 소나무와 솔송나무가 우거진 이쪽 길은 완만하게 어둠 속으로 이어져 있다.
"캄캄해지기 전에 좀 더 전진해 두는 것이 좋겠어. 이 근처엔 야생 염소 같은 것밖엔 없으니까. 아무튼 별로 시간이 없어. 서두르자." 칼은 리건을 내려다보았다. "괜찮아?"
여로의 끝이 바로 눈앞에 있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면서 리건은 머리를 끄덕였다.
"포트 레스터는 어디쯤이죠?"
리건은 천천히 일어서면서 물었다. "여기서 보여요?"
칼은 고개를 저었다. "저 언덕 반대편이지. 이 길은 댐에서 언덕의 허리 정도에 있는 발전소로 이어져 있어. 댐이 완성되면 넓은 길이 일직선으로 이쪽을 향해 뻗게 돼 있어. 월에는 새로운 호수가 생길 거요, 한 달 이내로 수문이 닫히게 되어 있으니까."
리건이 무엇에 걸려 넘어질 듯하자, 칼은 리건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조금만 더..... 저 나무 있는 데까지만 가요."
"동굴이 없는 게 유감이군요."
리건은 살갗을 찌르는 듯한 차가와진 공기에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덫을 놓은 뒤 근방을 정찰하고 올 셈이지만, 오늘 저녁엔 신통한 것이 잡히지는 않을 것 같아."
"그렇다면 저녁은 먹지 않기로 하죠."
녹초가 되어 칼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리건은, 전연 식욕이 동하지 않았다. 칼은 지친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우묵한 곳을 찾아서 리건을 앉히고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둘레의 나무들은 자연의 바람막이가 되어 준다. 오늘 저녁, 그리고 덫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으면 내일도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 칼이 가버리자, 계곡에서 엄습해 오는 차가운 밤공기를 막기 위해 담요를 덮어쓴 리건은 낮에 맞닥뜨린 잿빛의 큰곰 생각을 하고는 불안해졌다. 칼은 불을 피우고 있으면 괜찮다고 했지만......- 정말 그럴까? 총성이 울리자 가슴이 철렁하여 리건은 엉겁결에 일어섰으나, 칼의 모습이 보이자 안도의 숨을 쉬었다. 칼은 새끼 노루를 번쩍 들어 보였다. "이 붉은 고기를 먹으면 새로 살아나는 듯 힘이 나겠지!"
"어마, 불쌍해라."
리건은 모닥불 곁에 던져진 새끼 노루를 보며 중얼거렸다. 뿔이 막 돋아나기 시작하고, 길다란 귀는 뭔가를 들으려 하는 듯했다. "아직 한 살도 안 된 것 같군요."
"이런 때에 감상적이 되면 못써."
칼은 엄하게 말했다. "나도 이런 짓은 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 우리는 이 고기를 먹어야만 해. 토끼보다도 큰 것을 먹어야만 한다. 그러잖으면 댐에 당도할 수가 없어."
칼의 말이 옳다 싶으면서도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아, 리건은 칼이 다리가 긴 작은 동물을 죽이는 광경을 볼 수가 없었다. 새끼 노루 고기는 쉽사리 구워지지 않았다. 견디다 못해 먹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속살은 익지 않은 상태였다. 리건은 내일 중으로 25킬로쯤 걸어서 댐에 닿기 위해서는 그만한 체력을 축적해 놓아야만 된다고 스스로 타이르면서 마음을 독하게 먹고 핏방울이 떨어지는 고기를 씹었다.
하룻밤을 더 이런 식으로 지내라면 정말 못할 일이었다. 가까이에 동굴은 없었고, 그 장소는 주위의 나무들이 산에서 불어 내려오는 바람을 막아주기 때문에 둘은 거기서 잠을 자기로 했다. 리건은 어젯밤처럼 얼른 담요 한 장을 끌어다 덮었으나, 칼은 그것을 보아도 어깨를 으쓱하며 작은 불쪽으로 방향을 바꾸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담요 한 장만으로는 추워서 도무지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사람과 같이 자는 건 싫다는 듯이 리건은 허세를 부려 보았으나 곧 추위 때문에 이가 딱딱 부딪쳤다.
"이젠 생각이 좀 달라졌나?"
칼은 등을 돌린 채 물었다.
"아뇨."
리건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이쪽에서 머리를 숙이면 되겠나?"
"안 돼요."
리건은 여전히 고집을 부렸으나, 본심은 그렇게 해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해주면 체면은 상하지 않을 테니까. 칼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여자가 <아뇨>라고 말할 땐 대개 <그래요>라는 뜻이라지? 그 정도는 알고 있어!"
어두워서 얼굴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칼이 옆에 와서 다정하게 몸에 손을 돌려 안았을 때, 리건은 진심으로 반가왔다.
"이렇게 하고 있으니 훨씬 낫지?"
귓가에서 칼이 속삭였다.
"네." 리건은 솔직히 시인했다.
잠시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산 쪽에서 짐승의 기분 나쁜 울음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코이웃(북미 서부 대초원의 이리)이야." 놀라 일어난 리건에게 칼은 "이쪽으로 오지는 않을 테니 안심해요."라고 말했다.
"어떻게 그런 걸 아시죠?"
리건은 울먹이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늑대죠?"
"괜찮아, 먹을 것은 겨울 동안에 마련했을 테니까 지금은 습격해 오지 않아."
리건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지금까지 저 소리를 듣지 못했을까요?"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겠나? 우연히 이 근처로 왔을 뿐이지."
칼은 리건을 담요 속으로 끌어넣었다. "내가 말하는 걸 믿어요. 이 근처에 있는 모든 짐승이 우리의 피를 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침이 오기 전에 항복하고 말걸."
"지금도 이미 항복한걸요. 무서워서 어쩔 수가 없어요."
"당신은 겁쟁이가 아니야." 칼은 정색하며 말했다. "절벽을 불평도 없이 오르지 않았나. 초심자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데도 말이야. 그때는 전적으로 나를 믿어 주었지.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믿어주지 않지?"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칼의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당황해 하는데, 갑자기 입술이 다가왔다. 남자의 턱은 어쩌면 이렇게도 까칠까칠할까, 손도 억세군. 리건은 희미하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잠시 후 또 코이웃의 먼 울음소리가 들리자 현실로 돌아왔다. "그만둬요!"
"왜? 저기 있는 기분 나쁜 우리 친구를 잊으려면 이렇게 해야 되는 거야."
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염려할 필요는 없어, 혼까지 빼앗지는 않을 테니."
"무슨 이유든 싫어요."
리건은 자신의 목소리가 들뜨지 않기를 빌면서 말했다. "키스는 달러스에게만 한정시키세요!"
뜻밖의 말을 듣고 칼은 한순간 숨을 삼켰으나 곧 이전의 엄한 표정으로 돌아와 리건의 눈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달라스란 이름을 알고 있지?"
"당신이 말하셨잖아요."
험악해지는 칼의 얼굴을 보고 리건은 후회하기 시작했다. "잠꼬대하시는 걸 들어 버렸어요."
리건은 어색하게 덧붙였다.
"그분....부인이세요?"
칼은 메마른 목소리로 짧게 웃었다. "같이 잔다고 생각하는 여자 이름을 잠꼬대로 불렀다고 해서 그 사람과 부부여야만 하나? 그런 걸 천진한 생각이라고 하는 거야."
칼은 리건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며 초록빛 눈을 들여다보았다. "당신은 최초의 남자와 결혼할 생각이야?"
리건은 몸을 도사렸다. "최초의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그렇게 우스운 생각이라고 어떻게 단언하시죠?"
"키스에 관해 말하는 게 아냐. 하기야 당신은 그 경험조차 별로 없는 것 같지만."
"어차피 당신은 플레이보이시겠죠!"
리건은 화가 난 나머지 무서움도 잊어버렸다. "조금 전의 키스쯤 대단치도 않아요!"
칼의 눈 속에서 위험을 예고하는 빛이 번쩍하여 리건은 심장이 멎을 듯이 긴장했다. "그렇다면 한번 더 시험해 보지."
칼은 천천히 마음 졸이게 하듯 말했다. 리건에게 저항할 틈도 주지 않고 칼은 위에서 짓누르는 듯한 자세로 리건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밀착시켰다. 언제까지나 입술이 떨어지지 않자 리건의 마음에서는 차츰 저도 모르게 저항심이 줄어들어, 칼의 목에 팔을 감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싶은 욕구마저 일어났다. 차갑고 거친 손은 달아오른 살갗의 열을 흡수하여 따뜻하며 다정해지고, 입술이 떨어졌을 때 리건은 실망하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얼마 동안 칼은 반듯이 누운 채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끝까지 거절했어야 했어."
"하지만 그럴 틈도 주시지 않았잖아요."
리건은 목 쉰 소리로 반박했다. "힘이 너무 세었다구요."
"당신은 작은 악마군. 놀랐어!"
"저를..... 나무라실 셈인가요?"
"아니, 나무라지는 않아. 오히려 나를 나무라고 싶어. 약간만 사랑의 레슨을 시켜 줘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는데, 그렇게 되다니."
"전, 그런 것 조금도.... ."
리건은 가슴이 막혀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아냐, 분명히 그랬어." 칼은 진정인 듯 또렷이 말했다. "당신은 내가 생각하던 이상의 것을 내게 기대했어. 서로가 운이 좋았다고나 할까."
"서로가요?"
"그렇지. 내가 책임을 질 거라고 생각했나?"
"남자란 누구나 맨 먼저 으레 그런 걸 생각한다고 여겼지요."
"나는 비뚤어진 모럴의 소유자지. 책임을 질 생각도 없을뿐더러, 그런 짓을 해놓고 난 몰라라 하며 당신에게서 떠날 생각도 할 수 없는 인간이야. 당신은 깨끗한 몸을 지닌 채 있는 게 좋아, 언젠가 당신에게 꼭 어울리는 사내가 나타날 때까지."
"그만 해 줘요!"
리건은 목안에서 쥐어짜는 듯한 소리를 내며, "그런 말을 들을 아무런 이유도 없어요!"하며 담요를 걷어 젖혔으나 화가 난 나머지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신과 같은 플레이보이의 눈에는 저 같은 것은 어린아이 같아서 상대가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런 심한 말은 안하셔도 되지 않아요? 당신이 그런 말을 하시는 이유를 가르쳐 드릴까요, 그건 나를 처음으로 성인 여성으로 의식했기 때문이에요!"
"그럴까?" 밤하늘을 쳐다보던 칼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그런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어."
칼이 갑자기 리건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으므로, 리건은 균형을 잃고 널따란 가슴팍에 쓰러졌다. "달아날 필요는 없어. 담요 속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얼어 죽어요."
"당신과 같이 담요를 덮기 보다는 차라기 얼어 죽는 편이 나아요."
리건은 이를 갈았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아. 결국 당신은 담요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을 거야."
칼은 단단히 리건을 붙잡았다. 억센 팔에는 노여움이 느껴졌다. "이젠 역정은 그만 내지. 당신은 어디로도 달아날 수는 없어. 아까 당신 자신이 말했듯이 나는 당신보다 훨씬 힘이 세니까 말이야."
칼의 말이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고 느낀 리건은 몸을 굳힌 채 얌전히 누웠다. 칼은 만족한 듯, 익숙한 손놀림으로 담요를 덮고 리건의 허리에 손을 돌려 끌어당겼다. 입술이 관자놀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칼이 숨을 쉴 때마다 이마의 머리칼이 흔들렸다. "어떻게 좀 편하게 해주실 수는 없어요?"
리건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잔소리는 말고 잠을 자요. 그렇잖으면 숲에서 나갈 수가 없단 말이야."
칼은 그렇게 말하더니 입을 다물어 버렸다. 리건은 나무 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와 규칙적으로 뛰는 칼의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으며 만족감에 온몸으로 퍼져 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코이웃이 몰래 접근해 와도 지금 같으면 소동을 부리지 않으리라. 이런 기분이 되기는 처음이었다.
날이 새기 전에 비가 내렸으므로, 둘은 급히 일어나 피난처를 만들었으나 비가 억수로 쏟아져 불을 피울 수는 없었다. 리건은 어떻게든 비가 멎어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목이 따갑고 눈도 아프다. 엊저녁의 사건도 잊고 칼과 몸을 붙이고 있고 싶을 정도였다.
"걸어야만 해." 날이 새기 시작하자 곧 칼은 말했다. "어차피 젖을 바에야 걸어도 마찬가지지."
칼은 엊저녁과는 딴판으로 상냥하게 리건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어쨌든 옷을 말릴 장소를 찾아야 겠군. 이대로 그냥 가다간 당신은 폐렴에 걸리겠어."
"저뿐 아니라 당신도 흠뻑 젖었군요."
리건은 추위로 턱을 떨며 말했다.
"나는 괜찮아." 칼은 덮고 있던 담요를 젖히고 빗속으로 걸어갔다. "그럼 가지."
칼이 라이터와 총 따위를 담요에 싸서 걷기 시작하자, 리건도 겁먹은 듯이 젖은 땅에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길이 험해지자 칼은 리건에게 손을 뻗쳤으나 눈은 빈틈없이 동굴을 찾고 있었다. 한 시간쯤 걸어가다가 칼은 바위 사이의 작은 틈새를 발견했다. 천장은 칼이 서서 걷기에는 낮았지만, 둘이 앉을 만한 공간은 있었다. 칼은 리건을 그 동굴에 남겨 놓고 불을 지필 잔가지를 구하러 나갔다. 억수로 퍼붓는 빗속에 그런 것이 있을까, 하고 리건은 막연히 생각했다. 칼은 어디서 발견했는지 마키노 코트 안에 잔가지를 넣고 돌아와서 곧 불을 피웠다. 근처에 떨어져 있는 젖은 잔가지를 불속에 넣으니 연기가 마구 피어올랐으나 그런 것을 불평할 처지는 아니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불을 피워 놓는 일이니까.
칼은 비바람을 막기 위해 입구에 젖은 담요를 드리웠다. 다행히 바람은 바깥쪽을 향해 불고 있어서, 동굴 안이 연기로 채워지지는 않았다. 불에 손을 쬐니 뼛속까지 차가와진 몸에 온기가 퍼져서 리건은 이젠 죽어도 좋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얼마 후 칼이 입을 열었다.
"이런 정도면 되겠지. 젖은 옷을 말리도록 하지. 그동안 남은 담요를 덮고 있으면 되니까."
리건은 천천히 오버코트를 벗어 칼에게 넘겨주었다. 빗물을 스웨터 속까지 스며들어 있고, 청바지와 신발도 흠씬 젖어 있다.
"전부야?" 칼은 이렇게 말하고는 차갑게 웃었다. "스스로 벗지 않으면 억지로 벗기는 사태가 벌어질 걸."
리건으로서는 칼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체념하고 칼의 등 뒤로 갔다. 확실히, 이 이상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지금까지 애써온 고생도 물거품이 되겠다 싶을 만큼 가슴까지 따가왔다. 칼은 등을 돌린 채 스웨터와 청바지를 받았다. "전부라고 했어!"
"속옷은 면이고 그다지 젖지 않았으므로 곧 마를 것 같은데."
리건은 입속에서 중얼거렸다.
"군소리 말고 벗어!" 칼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리건은 입술을 깨물었으나 칼이 시키는 대로 하고 담요를 단단히 몸에 감았다.
"그럼 이쪽으로 와요. 부끄러워할 건 없어. 당신이 발가벗었다는 것을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면 어때?"
리건은 담요를 단단히 몸에 감고 불 옆으로 갔으나 도저히 머리를 들 수는 없었다. "당신이 발가벗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는 걸요."
"억울해? 하지만 내겐 이전에 이런 경험이 있었어. 당신은 지금 이렇게 하여 혈액순환을 좋게 해야만 하는 거야."
칼이 갑자기 담요 위로 리건의 몸을 문지르기 시작했으므로 리건은 놀라 필사적으로 담요를 움켜쥐었다. "그만둬요! 그만두라니까!"
칼은 잠시 문지르기를 계속하다가 한번 머리를 끄덕이더니 손을 놓고 입술을 꼭 다문 채 리건을 바라보았다. "그런 점이 당신이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부분이야. 엊저녁에도 말했지?겁낼 필요는 없어."
"키스를 했다는 것 정도로 혼을 뺏지는 않는다고 말한 직후에 그렇게 하려고 했잖아요!"
"그때엔 마가 끼었을 뿐이지. 나는 두 번 다시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약속할게."
"믿어도 될까요?" 리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어째서 가만 놔두지 않으세요?"
칼은 무슨 대답을 할까 망설이는 듯하더니 목 뒤를 쓰다듬으며 입김을 토했다. "알았어. 좀 거칠게 다뤘지? 하지만 당신에게도 나쁜 데는 있었어."
"일부러 그랬던 것은 아니에요."
"그렇다고 해도, 내가 좀 더 조심을 했어야 했는데."
칼은 소리를 낮추었다. "속히 여기를 벗어나야 하겠어."
"저도 같은 심정이에요.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될 때가 언제나 오려나 하며 학수고대하고 있는 걸요!"
"유감스럽게도 그건 불가능해."
"무슨 뜻이죠?"
칼은 어깨를 으쓱했다. "댐의 건설 현장에 숙박할 수는 없고, 오빠가 직장을 버리는 일도 불가능하다면, 당신은 내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셈이야."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아냐, 그래. 뭐라고 해도 당신은 나의 세스너에 타고 있었으니까. 우선 보험 사정인을 만나 보험금 계산을 하는 데 이틀 정도 걸릴 거야. 그 일을 마치면 밴쿠버로 가서 당신 서류를 갖춰 줄 테니, 그동안에는 회사 공장장의 집에 있어요. 그의 아내가 잘 살펴 줄 거야."
"그런 수고는 해주시지 않아도 좋아요."
리건은 아직도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오빠가 잘 처리해 주리라 생각해요."
"3년이나 집을 떠나 있는 오빠가 기꺼이 당신을 봐 줄까?" 칼은 타이르듯 말했다. "기적은 기다리지 않는 게 좋아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로 당신의 신세는 지지 않겠어요."
칼의 얼굴이 다시 엄해졌다. "스스로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방법을 택해야 겠지."
이 이상 언쟁을 해도 소용없다고 생각했으므로, 리건은 입을 꼭 다물고 물끄러미 불을 바라보았다. 아아 오빠, 제발 나를 못 본체 하지 말아 줘요!
5
오후가 되자 비는 그치고, 칼이 가져온 새끼 사슴 고기로 점심을 먹기도 하는 동안에 젖은 옷은 거의 말랐다. 분쯤 걸으니 길은 평탄해지고, 걷기가 훨씬 편해졌다. 리건이 많은 동물의 발자국을 보고는 댐 개발이 이렇게 진척되었는데도 동물들이 아직도 서식하고 있음을 알고 놀라와하자, 칼이 입을 열었다. "동물이란 믿을 수 없을 만큼 끈덕지게 자기 영역을 지키는 법이지. 킬의 댐이 완성되었을 때 높은 곳에 고립해 버릴 동물들을 구하자는 운동을 일으킨 사람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야."
"큰 동물들은 어떻게 구출하나요?" 리건은 물었다. "곰을 끌고 올 수는 없을 것 아녜요?"
"장거리가 아니면 곰은 헤엄칠 수 있지. 헤엄칠 수 없을 만큼 쇠약해 있으면 진정제를 놓아 뗏목에 실어서 운반하겠지. 성장한 회색 큰곰의 체중은 3백 65킬로나 나가니까 큰 작업이긴 하겠지. 검은 곰도 결코 가볍지는 않아요."
길이 넓어지는 데서 칼은 리건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괜찮아?"
"네."
머리가 빙빙 돌고 목은 타는 것 같았으나, 여기서 멈춰 버리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리건은 거짓말을 했다. "문제없어요."
죽어도 계속 걸음을 옮길 각오였다. 그 말을 믿었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칼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떨고 있는 모양을 눈치 채이지 않으려고 리건은 좀 뒤쳐져 걸어가면서, 단지 감기 기운일 거야, 목적지에 닿으면 뜨거운 음료와 아스피린을 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견뎌내야 해, 아니, 견뎌 낼 수밖에 없잖아, 라고 열심히 스스로를 격려하고 있었다. 안개가 끼어 공기가 축축해지니 몸의 떨림은 더욱 심해졌다. 흠씬 젖은 신발 속의 발은 이미 감각이 없어졌으며,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칼이 말을 건네면 반드시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수문 가까이까지 오자 그제야 사람의 기미가 느껴져서, 둘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아래쪽에서 지프 소리도 들린다.
"이제야 왔군." 칼은 새파랗게 질려 있는 리건의 작은 얼굴을 사랑스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여기서 좀 쉬기로 하지."
"싫어요!"
리건은 온몸의 힘을 짜내듯 소리쳤다. "조금만 더 가면 되잖아요, 휴식은 댐에 도착한 후에 해요."
칼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15~16킬로나 남아 있어. 한밤중에 이런 데를 걸어갈 수는 없어."
"지금이 몇 시인들 알 게 뭐예요."
리건은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제발 부탁이에요, 칼!" 리건은 무의식중에 퍼스트 네임을 부르고 있었다. "이런 데서 쉴 수는 없어요!"
"쉬어야 해."
칼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으나 엄했다.
"이 이상 걸으면 당신의 몸은 망가져 버려. 내일 계속해야 한다구."
리건은 자제력을 잃고 소리쳤다. "나는 가겠어요. 말려도 소용없어요!"
절망이 힘을 솟구치게 했는지 리건은 칼의 만류를 뿌리치고 가파른 산길을 달려 내려갔다. 산길을 내려오니 엔진 소리가 들리면서 지프가 모퉁이를 돌아오는 것이 보였으므로, 리건은 길 한가운데로 나가 손을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기어이 기진하여 그만 길바닥에 쓰러졌다. 뒤에서 쫒아온 칼에게 안기면서, 지프의 조수석에 앉아 있는 검은 눈에 빨간 머리의 남자를 향해 "오빠지요?" 라고 묻더니, 리건은 실신하고 말았다.
눈을 부시게 하는 햇살을 느끼고 눈을 뜨니, 그곳은 작은 방이었다. 리건이 누워 있는 침대 외에 빈 침대가 둘 있을 뿐이고, 창에는 커튼이 없었으나 젖빛 유리여서 바깥은 보이지 않았다. 기계의 소음과 사람소리만 들려 올 뿐이었다. 흐릿한 리건의 머릿속에 엊저녁 일들이 되살아왔다. 지프의 뒷좌석에서 본 오빠의 얼굴은 쇼크를 받아 파랗게 질려 있어, 기억 속에 있는 얼굴과는 전연 달라 보였다. 기분을 가라앉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 했는지, 오빠는 리건이 입을 떼려고 하자 "나중에 천천히 말하기로 하자."하며 제지했다. 몇 천 킬로나 떨어진 곳에서 3년이나 만나지 않았던 여동생이 유령 같은 얼굴로 숲 속에서 나타났으니, 기절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다.
리건은 곧바로 의사에게 보내져서 정밀 검사를 받았다. 의사는 "몸이 지쳐있는 데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빗속을 걸어서 페렴기가 있어요. 하룻밤만 더 야외에서 지냈다면 아주 심하게 될 뻔 했어요." 라고 말했다. 그 후 리건은 가까이 있는 목욕탕에서 뜨거운 물로 몸을 깨끗이 씻고 병실인 이 방에 뉘어진 것이다. 오빠와 칼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방문이 열리더니 벤이 얼굴을 디밀었다. 오빠라고 해도 3년이나 만나지 않아, 리건은 수줍어하며 "안녕."하고 작은 소리로 인사했다. 벤도 리건과 마찬가지로 당황하며 "안녕."이라고 대답하고, 어색하게 호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다가왔다. 데님 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벤은 키가 크고 후리후리하여 멋이 있었다. "매크가 이젠 만나러 가도 좋다고 해서.... 어때, 기분은?"
"무척 좋아요."
엊저녁에 칼에게 했던 말과는 달리, 거짓이 아닌 진심이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푹 잠잔 게 효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리건은 크게 숨을 토했다.
"그런 모양으로 나타나서 미안해요. 사실은 다른 방법으로 오려고 했었는데."
"정말 놀랐어."
벤의 액센트는 약간이기는 하나 분명히 캐나다 풍으로 변해 있었다. 핸섬한 얼굴에 장난기 섞인 웃음이 떠올랐다. "영화가 아니니까 누구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지! 약간 쇼크 였어."
"무척 조심스런 말투군요."
리건은 헝클어진 머리를 염려하면서 얼굴을 들었다. 이렇게 꼴이 엉망인데도 동생인 나를 알아보아 주었구나 싶으니, 리건은 가슴이 메었다. "제럴드씨에게서 자세한 얘기 들었어요?"
"대충."
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잠든 후 둘이서 여러 가지 얘길 했어."
"그럼 아버지 소식도 들었겠군요?"
"응." 얼굴의 근육이 긴장했다. "전연 몰랐어. 지난 8개월 동안은 지방지밖에 보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내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았지?"
"사립탐정을 고용 했죠."
리건도 잠깐 쉬었다가 조심스레 벤의 기색을 살폈다.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서..."
"아버지 소식을 알았다면, 반드시 영국으로 돌아갔을 거야."
벤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영감에게 쫒겨났을때, 그때까지 살아왔던 세계의 일은 깡그리 잊기로 맹세했지만, 너까지도 나를 그렇게 취급한 건 나빴다고 생각해. 다만...."
벤은 안절부절 못하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나도 아버지와 같은 세계의 인간이라고 말하면 되죠."
리건은 굳게 마음먹고 자기편에서 말했다. "오빠를 나무라는 건 아니에요. 내게 오빠와 같은 용기가 없었을 뿐이었으니까."
그러고는 리건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오빠!"
벤은 그 손을 잡았다. 칼 제럴드와는 전연 다른 느낌의 손이었다. 칼은 벤 정도의 나이 때에도 지금처럼 냉정하게 자신을 가지고 사물을 처리할 수가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미안해." 벤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아직 믿어지질 않아. 이것은 꿈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있는 형편이다!"
리건은 벤의 손을 놓고 침대 가장자리 쪽을 손으로 두드렸다. "여기에 앉아 지금까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 줘요. 캐나다에 온 지는 얼마나 되죠?"
"2년인가, 비자가 떨어지자 곧 왔으니까." 벤의 얼굴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여긴 굉장한 나라다, 리건! 믿을 수 없을 만큼 넓어. 피스 리버 프로젝트라는 게 있어. 년 정도 지나면 반드시 세계 제일의 부유한 나라가 될 거야. 틀림없어!"
"무슨 선전 문구 같군요." 리건은 웃으면서 말했다. "칼도 걸핏하면 그렇게 말해요."
벤의 표정이 달라졌다. "너와 그 사람은 사흘 동안이나 숲 속을 걸어서 왔다면서? 이 부근의 지리에 밝은 사람과 동행이어서 정말 다행 이었어."
리건은 사흘 낮, 그리고 사흘 밤의 일을 머릿속에 되살리면서 일어나 앉아 침대 머리 부분에 기대었다. "그 사람은 잘 있나요?"
"물론이지. 제럴드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 이 부근의 땅의 대부분을 갖고 있으니까. 댐이 완성되면 더 어마어마한 부자가 될 거야."
"그렇겠군요. 하지만 아버지가 이 부근의 토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건 이상하군요."
"달리 더 중대한 일이 있었겠지. 나쁜 짓을 해서 돈을 벌려는....... 그 양반이 장기적인 안목 따윈 갖지 않았었다는 것은 너도 알고 있었을 게다. 일찍 죽은 것도 자업자득이지."
벤은 불쾌한 듯이 말을 뱉었다. "지금까지 몇 사람이나 파멸로 몰아넣었을까?"
"모르죠."
그런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재산 따윈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 알고 있나요? 조금 남겨 주신 돈으로 간신히 여기까지 왔어요."
"남아 있다 해도 그런 사람의 돈에는 절대 손대지 않겠어!" 벤의 어조가 강해졌다. "아무것도 원치 않아!"
아버지뿐 아니라 나에게도 그러하리라 생각하니 리건은 슬퍼졌다. 어차피 우리 둘은 다른 종류의 인간인 것이다. 도대체 왜 오빠가 마음속에 살아 있는 오빠와 같다고 생각해 왔을까? 집을 나간 행위 그 자체가 독립해서 살기 위한 첫걸음이었다고 하는데...... 하지만,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영국에 돌아가도 이젠 집도 없다. 리건은 앞길이 막막했다.
"갑자기 내가 나타나서 오빠의 입장이 난처해진 건 아니에요?" 리건은 괴로운 듯이 물었다.
"잘 되겠지." 벤은 달래듯이 말했다. "제럴드에게 맡겨 두면 문제없어."
"싫어요!"
리건은 힘차게 몸을 일으켰다. "그런 것은 절대로 싫어!"
"하지만, 달리 어떻게 하면 좋지? 나는 당분간 여길 떠날 수가 없어."
"그런 걸 부탁하는 게 아니에요. 앞으로 생활 방편이 설 때까지 약간 돈을 빌려주면 돼요, 꼭 갚을 테니까."
리건은 매달리듯 말했다.
"돈 문제가 아니야." 벤은 리건이 왜 제럴드를 싫어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돈이라면 기꺼이 빌려 주지. 그러나 캐나다에 오래 있으려면 내 돈으론 도저히 안 될 거다. 내게는 그만한 힘은 없으니까."
"오래 있으려면 이라니요?" 리건의 얼굴이 환해졌다. "나, 계속 여기 있어도 되나요?"
"물론이지. 이 나라는 정말 굉장한 나라야. 현재의 포트 레스터는 아직 너 같은 여자에겐 어울리지 않을 진 몰라도 1, 2년 후면 몰라보게 다른 도시가 될 거야. 그때까지는 해안 쪽 읍내에 있으면 된다. 제럴드씨가 적당한 일터를 찾아 줄 거야."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던가요, 아니면 오빠가 부탁했나요?"
벤은 싱긋 웃더니 소년 같은 얼굴이 되었다. "벌써 무슨 생각이 있는 듯한 눈치였어."
"나를 자기 비행기에 태워 주었으니까 책임을 느끼는 게로군요." 리건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제의를 받아들여야 하나요?"
"다른 생각을 할 필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사람이라면 믿어도 되니까."
리건은 표독해지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말했다. "내가 혼자서 포트 레스터에 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오빠?"
벤은 어깨를 움츠렸다. "글쎄, 호텔에라도 묵게 되었겠지. 하지만 내 힘으로는 비자 연장을 해줄 수는 없으니까 곧 여기서 나가야 하겠지."
"내가 친동생이라도?"
"일정한 주소가 없으면 안 돼. 나는 이 일이 끝나면 또 다른 데로 갈까 하고 생각중이다."
"어디로 가죠?"
"아직 몰라. 아마 당분간은 제럴드 코퍼레이션에서 일하게 되겠지. 수송 능력을 높이기 위해 다리를 가설한다는 계획이 있단다. 착공은 내년 봄이지만 설계는 겨울에 시작하겠다고 제럴드씨가 말하더군."
"그 사람이 권하던가요?"
"확실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말은 하더라. 왜 그런 걸 묻니?"
"그 사람은 우리가 만날 수 있도록 교량 역할을 해 주었으니까."
"너도..... 멀지 않아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있을 거야." 벤은 그렇게 말하면서 일어섰다. "이젠 작업장으로 돌아가야지. 제럴드씨는 너를 읍내로 데려가겠다고 하더라. 나는 일요일에 공장장의 초대를 받았으니, 그때 만나자."
벤은 머뭇거리다가 가볍게 리건의 뺨에 입술을 스쳤다. "큰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해. 나중에 꼭 벌충을 할게."
리건은 울적한 심정으로 벤이 방에서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오빠의 마음은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오빠는 나를 혼자 둬도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칼 제럴드의 신세를 지는 것도 싫지만, 오빠에게 버림을 받는 것은 더 괴로웠다. 리건은 칼을 생각하니 화가 나서 거칠게 침대 커버를 젖혔다. 그 사람이라면 만사에 세밀하고, 나를 편하게 해줄 것이다. 망연히 먼지 낀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도어를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보는 여자 같은 흉내는 내고 싶지 않지만 말이오."하면서 한 손에 옷과 구두를, 다른 한 손엔 쟁반을 든 나이 지긋한, 사람 좋아 보이는 의사가 나타났다. "내 잠옷은 아가씨 같은 귀여운 사람에겐 전연 어울리지 않는군!"
리건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보냈다. "이 향기로 보아 커피 같군요."
"아니면 커피 비슷한 정체불명의 음료라고나 할까."
의사는 쟁반을 나무 선반위에 놓더니, 옷과 구두를 침대 위로 던져 주었다.
"햄 에그와 카페인이지. 남자에겐 최악의 음식이지만 아가씨라면 상관없겠지. 자, 이걸 먹고 옷을 갈아입어요. 칼 제럴드씨가 기다리고 계셔."
"저를 만나기 위해선 가요, 아니면 쫒아 버리기 위해선가요?"
"둘 다겠지, 아가씬 여기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남자들 눈에 해로와."
"내 쪽에서 접근하진 않을 거예요."
"아가씨가 그렇더라도, 사내들은 다투어 접근하려고 할 걸. 어떻든 여긴 눈요기 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곳이니까."
"선생님은 그런 걸 별로 걱정하지 않는 것 같군요." 의사는 슬픈 얼굴이 되었다. "전엔 나도 이런 일이 없었지. 금년 말이면 은퇴하게 될 나이니까."
"죄송해요, 주제넘게 쓸데없는 말을 해서."
리건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침대 가에 앉아 커피가 담긴 컵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오빠를 아시나요?"
"응, 곧잘 둘이서 체스 게임을 했지. 그는 체스의 명인이야."
"오빤 어릴 적부터 체스를 잘 했죠."
리건은 머뭇거리다가 큰마음 먹고 물어 보았다. "가족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던가요?"
의사는 똑바로 리건을 바라보았다. "아니, 아무것도 듣지 못했어. 하지만 아가씨의 존재는 잊지 않은 모양이더군."
리건이 기뻐하는 표정을 짓자, 닥터 맥도날드는 쟁반 쪽을 향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가져온 것을 먹어 치우기로 하지!"
리건은 순순히 커피를 마시고 포크를 집고는 "전부는 도저히 못 먹겠어요."하고 말했다.
"그런 소리 말고 먹어요. 달리 뭔가 필요한 건 없어?"
"거울이 있으면 빌려 주세요." 리건은 힘없이 미소 지었다. "아니면 이대로라도 좋아요?"
"글쎄. 잘 모르겠으나 나는 지금 그대로 있어도 아주 멋있다고 봐. 화장하지 않은 얼굴이란 매우 신선하니까. 우선 화장은 피부에 좋지 않아."
"하지만 예의인 걸요."
의사는 도어 쪽을 향하면서 말했다. "곧 거울을 가져오도록 하지. 이젠 만날 일도 없을 테니 작별 인사를 할까. 몸조심해요, 아가씬 건강체지만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배는 고프지 않았으나, 리건은 무리를 해서라도 먹기로 했다. 커피는 카페인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엊저녁에는 금지된 일도 납득이 되었다. 청바지는 세탁해서 다리미질까지 되어 있었으나 아무래도 덜 빠진 때가 여기저기 남아있고, 오버 코트도 시내에서는 입을 수 없는 물건이 되어 있었다. 특히 구두는 바위를 탔기 때문에 앞부분이 닳아 있었고, 흠씬 물에 젖은 채 걸었기 때문에 가죽이 딱딱해져 있었다. 스웨터만이 심한 여행을 치르었는데도 무사했다.
리건은 지난 저녁처럼 뜨거운 샤워를 하고 싶었으나 허용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깨끗이 빨아놓은 내의를 입었다. 무척 기분이 좋다. 이런 사소한 일을 감사하게 생각한 적은 지금까지 없었으며, 앞으로도 별로 없을 것이다. 몸단장을 끝내니 노크 소리와 함께 칼이 나타났다. 작은 면도용 거울과 빗을 침대위에 던져 주더니 리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의사의 부탁을 받고 가져왔어. 기분은 어때?"
"마치 부랑아와 같아요."
리건은 거울을 집으려고 하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말끔히 세탁한 양복을 입고 수염도 깨끗이 깎은 칼은 말했다. "벤은 만났지? 분 후에는 헬리콥터로 출발이야."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자 칼은 차갑게 머리를 끄덕였다. "떠오르고 나면 괜찮아. 그런 결과가 될 가능성은 백만분의 일이니까. 그런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지는 않아."
"하지만..... 자동차로 가는 게 좋겠어요."
"하늘을 나는 거다." 이 한마디로 결정은 났다. "20분 후엔 로이드 가에 도착하지."
"로이드 씨라뇨?"
리건은 눈살을 찌푸렸다. "패터슨이지. 내 회사의 공장장인데, 당신은 그 집에 묵게 되어 있어."
숨을 한번 크게 내쉬고 리건은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실 거죠?"
칼은 어깨를 으쓱했다.
"약 1킬로 떨어진 산 속에 오두막집이 있으니까 거기서라도 묵지." 잿빛 눈이 빛나고 입술이 일그러졌다. "이후로 나와 같이 있고 싶지는 않겠지?"
리건은 평정을 가장하고 대답했다. "사흘이나 같이 있었으니, 이젠 충분해요. 나에 대해서는 이제 잊어 주세요."
칼은 짜증스럽게 숨을 토했다. "또 그따위 소릴 하는 거야? 당신의 오빠와 상의하여 여러 가지 일을 이미 결정했어. 오빠는 전적으로 찬성 하더군."
"나 몰래 결정하다니, 너무 심하시군요!"
"당신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벤이 결정하고, 벤은 내게 그걸 일임 했어."
"정말 간단하게 말씀하시는 군요."
"그럼. 머리를 빗지 않을 거야? 머리가 마치 새 둥지 같군."
리건은 또 어린아이 취급을 받자 이를 악물었다. "머리가 헝클어진 아이를 데려왔다고 창피 당할까 봐요? 그렇다면 이대로 두겠어요!"
칼은 리건의 말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기분이 달라지면 로라에게 헤어브러시를 빌려 달라고 하라구."
리건은 한숨을 쉬면서 거울과 빗을 집어 들었다. 거울 속에 비친 눈은 움푹 들어가고, 피부는 거칠고, 머리는 엉망이었다.
"어마, 너무 하군!" 리건은 그만 얼굴을 찌푸렸다. 칼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말했다. "최소한 아가씨는 화장으로 속이지 않아도 될 만큼 젊어요."
"같은 소릴 자꾸 들으면 화를 낼 정도로는 성인이 되었다구요." 물끄러미 거울 속을 들여다보던 리건의 마음속 깊은 데서 뭔가가 움직였다. "그런 소릴 하지 않으시면 그날 밤의 일은 잊어 드리기로 하죠."
"자신이 떠벌리지 않으면 뭐가 있으리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지."
머리를 빗던 손이 멈추었다. 칼이 자기를 어린애 취급하는 이유를 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아저씨와 소녀>와 같은 관계보다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 쪽이 사실은 좋았다.... 칼은 리건의 마키노 코트를 들었다. "그럼 가볼까. 곧 헬리콥터가 올 거야. 문제없지?"
"닥터의 허락도 받은 걸요."
리건은 세탁된 오버 코트의 따뜻한 촉감을 즐기면서 말했다. "총은 어디에 두었죠?"
"갖고 갈참이야."
바깥에 나가 보니 벌써 헬리콥터는 착륙해 있고, 프로펠러 탓으로 주위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높이가 몇 킬로나 되는 벽면에는 엘리베이터가 둘 있고,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벤도 그곳에서 움직이고 있으려니 생각하면서 눈길을 모아 보았다. 너무 멀어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리건은 파일럿인 매크와 칼 사이에 앉아 헬리콥터가 이륙하는 것을 기다렸다. 프로펠러가 엄청난 소리를 내며 돌기 시작하더니 헬리콥터는 둥실 떠올랐다. 댐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사흘 낮과 사흘 밤을 줄곧 걸어온 길이 눈 아래 보인다. 이윽고 세스너가 추락한 호수 위를 통과하고, 얼마 동안 계속해서 숲의 상공을 날아 헬리콥터는 포트 레스터 읍으로 내려갔다.
6
패터슨 일가는 포트 레스터 교외의 신흥 주택지에 살고 있었다. 키가 후리후리하게 큰 로이드 패터슨은 40대 초쯤 되어 보이고, 아내인 로라는 로이드보다 두세 살 젊은 듯하였다. 아이는 열 살과 여덟 살 되는 두 아들이 있고, 가족 같은 큰 개 두 마리도 있었다. 딱딱한 데가 없는 패터슨 가 사람들은 리건을 따뜻이 맞아 주었다.
포트 레스터는 리건이 마음에 그리고 있던 대로의 거리.... 몇 개의 점포, 주유고가 둘, 교회와 호텔이 각각 하나인....여서 리건은 로라를 따라 오빠인 벤에게서 빈 돈으로 당장 필요한 것을 사러 갔다. 비행기 사고로 잃어버린 돈을 칼이 변상하겠다고 말했으나 리건은 거절했다. 때가 되어 갚으려고 해도 칼은 받지 않을 테니, 보험 회사에서 보험금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보험 회사의 사정인이 오자, 칼은 헬리콥터로 날아가 버렸다. 리건은 같이 가고 싶은 생각에 쫒겼으나, 그런 행동은 악취미적 호기심에 불과하다, 그것은 사고였을 뿐이니까, 하고 참았다.
약속대로 벤은 일요일에 찾아왔다. 점심을 마치자, 벤과 패터슨 가에 와 있던 칼이 아이들과 함께 야구를 시작했다.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있는 칼을 보면서 로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언제 봐도 핸섬하군요. 왜 아이를 갖지 않는 것인지?"
"아직 필요 없다고 생각하시는 게 아닐까요. 저 분의 머릿속은 이 나라의 개발 문제로 꽉 차 있는 것 같아요."
리건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로라는 만족한 듯이 미소지었다. "토지가 광대한 데 비해 사람의 수가 모자라요. 그런데 아가씬 캐나다 시민권을 얻을 생각이에요?"
리건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현재로선 오빠의 거취 여하에 달렸어요. 이 나라에 살기 위해선 일정한 직업에 종사해야 하는데, 아직 일자리도 얻지 못한걸요."
"칼이 어떻게 해 줄 거예요. 그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으니까."
"그토록 대단한 힘을 갖고 계시나요?"
"그야 굉장한 힘을 갖고 있죠."
로라는 의자에 깊숙이 앉으며 자세를 고쳤다. "아버지는 적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칼은 그렇게 젊은 나이에 성공한 사람치고는 비교적 적이 없는 편이지요."
"회사 이야기를 하시는 건가요?"
"그 자신이 회사죠. 이사회의 신임도 두텁고, 32세의 젊은 나이로선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해요."
리건이 차갑게 말했다. "가문이 그러했다는 것뿐 아닐까요? 할아버지가 일대(一代)에 부를 쌓았다고 들었는데요."
"정확히는 좀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로라가 바로잡았다. "매켄지 강이 로키 산맥에서 흘러나왔을 무렵, 칼의 증조부님이 이 부근에서 금광을 발견했다는 거예요."
로라는 큰 사내아이가 공을 한 방 보기좋게 때렸으므로 환성을 올렸으나 곧 계속했다. "칼에게 능력이 없다면, 아마 제럴드 코퍼레이션은 끝장이 나겠죠."
리건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부인께서 아기를 원치 않으시나요?"하고 물었다. "부인이라고요?" 로라는 깜짝 놀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도 칼에게 자식이 없는 이유의 하나죠. 하긴 그는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으니..... ."
그 말을 듣고 리건은 안도의 숨을 쉬었으나 속마음에 목소리에 반영되지 않도록 애쓰면서, "달러스라는 분을 아세요?"하고 물었다. 왠일인지 로라의 표정이 약간 굳어지고 눈매도 날카로와졌다. "그래요. 하지만 아가씨가 어떻게 그 이름을 아시나요?"
"단지......그분이 입에 담은 적이 있어서. 부인 아니면 장래를 약속한 분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칼의 계모예요." 로라는 신중히 대답했다. "그 양반은 회사 운영은 잘 하지만 자기 일은 그렇지도 못해요. 아무튼, 빅토리아에 가면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리건은 마음의 동요를 누르기에 애를 먹었다. 그런 때에 그런 식으로 이름을 부른 사람이 계모라니........ 리건은 그 여자를 머릿속에 그려보려고 했다. 이제까지 고생이라곤 전혀 모르고 살아온 자신에 넘친 중년 여성이리라. 리건의 눈은 호수에서 불어오는 미풍에 머리칼을 날리며 즐거운 듯 야구를 하고 있는 키가 크고 몸집이 단단한 남자에게 빨려갔다. 설마 칼에게 저런 취미가 있었다니.... 하지만 왜 내가 이런 비참한 기분이 되어야만 할까? 칼은 단순히 책임을 느껴 나를 돌봐줄 뿐이니까, 일이 일단락되면 나 같은 존재는 잊고 말텐데......... 리건은, 나도 똑같은 행동을 보여 줘야겠다고 굳게 마음에 맹세했다.
댐으로 가는 마지막 열차 시각이 다가와서 리건은 칼과 함께 벤을 역까지 전송해 주게 되었다. 역에 도착하자 열차는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벤은 서둘러 맨 꽁무늬의 승강대에 뛰어오르면서 "가을에 또 만나자!"하고 소리쳤다. 리건은 좁은 플랫폼 위에서 발돋움하여 안타까이 손을 흔들고 있었으나 이윽고 기차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자동차에 돌아와서도 칼은 즉각 시동을 걸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중심가의 큰 거리는 오가는 사람도 별로 보이지 않고 조용하기만 하다. 건설 현장의 작업원이 휴일을 보내는 방법으로는 친구의 집을 방문하는 정도이고, 대부분의 사람은 돈을 매일의 생활에 그럭저럭 써버릴 수밖에 없었다.
"마음의 정리가 됐나?" 칼이 담배를 권했다. 리건은 일단 거절했다가 머뭇거리며 담배를 뽑아 라이터 쪽으로 허리를 굽혀 불을 댕기자 시트에 기대면서 천천히 연기를 토했다.
"당신에겐 관계 없는 일이 아니에요?"
칼은 어깨를 추슬렀다. "여기서의 생활은 따분해서 안절부절 못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지."
"로라는 그렇게 보이지 않던데요."
"로라는 가족이 있으니까 당신과는 다르지."
"그 정도 나이의 가정부인은 누구나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하세요?"
리건은 담배 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말했다.
"대개의 경우, 지금까지 손에 들어온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고 바꾸어 말할 수 있지."
달러스도 그럴까? 아니, 그것은 모른다. 달러스도 칼을 좋아한다면, 두 사람이 결혼이라는 형식을 취했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 법률상의 문제는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좀 더 나이가 들었더라면......" 리건은 분한 듯이 중얼거렸다. "당신의 신세 같은 것은 지지 않아도 될 텐데!"
"그렇게 말해 봐야 어쩔 수 없잖아. 젊음에는 그 나름대로 좋은 점이 많아요."
"하지만 당신과 같이 있을 때 그렇게 느껴진 적은 없어요."
"내 탓은 아니지. 당신이 옳은 말을 할 때 상대를 해주지 않은 적은 없어."
"하지만 늘 보호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잖아요."
"불만인가?"
칼은 값을 매기는 듯한 눈으로 리건을 보고 있었으나, 곧 화제를 바꾸었다. "이번 여름을 어떻게 보내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지. 우선 학교에 가도록 하지."
"일을 찾아야 해요." 리건은 즉각 대답했다. "가을까지 빈둥거리고 지낼 만큼 돈의 여유도 없고, 이 이상 오빠에게 신세질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 걸 염려할 필요는 없어."
칼의 어조는 변하지 않았으나, 엄한 투가 느껴졌다.
"빅토리아에 회사의 맨션이 있으니까 거기서 살면 돼. 반드시 빅토리아가 좋아질 거야, 옛날의 좋은 시절의 영국 분위기를 가진 도시니까."
"호의는 고맙지만 저는 이제부터 제 힘으로 해 나가겠어요."
"그럼 오전 중엔 일하고 오후엔 학교에 가면 되지. 그러는 중에 당신의 적성이 무엇인지 알게 될 거야. 아버지의 피를 이었다면, 숫자를 잘 다루지 않을까?"
놀림을 받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대로 흘려 들을 수는 없었다. "여름 동안 학교에 간다 해도, 결과는 대단치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오빠가 책임을 지고 당신을 데리러 올 때까지 심심풀이는 되겠지."
"저는 이미 스스로의 책임은 질 수 있어요."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당신은 이 나라 사정을 통 모르잖아?"
"하지만 고정된 직업을 가져 버리면, 곧 여길 떠날 수 없게 돼요."
"여길 떠나고 싶어?"
리건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끄덕였다. "아니오. 돌아갈 곳은 아무데도 없는 걸요."
"그럼 부탁이니, 사사건건 그런 투로 말하지 마. 프라이드를 갖는 것은 좋지만, 적당히 하지 않으면 못난이로 보여." 엄한 목소리였다. "아뭏든 내게 맡겨 줘."
리건이 또 반론을 하려 하자, 어깨에 손을 얹고 칼은 달래듯 계속했다. "이젠 아무 말도 하지 마. 얘긴 이것으로 끝이야. 화요일 아침, 프린스 조지행의 비행기를 수배했어. 한낮이 지나면 밴쿠버에 도착하겠지."
"또 하늘을 날아야 하나요?"
"물론이지. 기차로 가면 꼬박 이틀은 걸린 다구. 당신도 앞으로 이틀 동안이나 나와 같이 있고 싶지는 않겠지?"
리건은 본심을 가슴 속 깊이 감추고 말했다. "네, 그래요."
"가까스로 이해가 된 모양이군." 칼은 시동을 걸었다. "당신을 패터슨의 집에 내려 주고, 나는 숙소인 움막으로 돌아가야지."
문득, 칼의 팔에 안겨 자던 밤의 일, 그의 입술의 감촉이 되살아나, 리건은 함께 데려가 주었으면 하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다시 한번 키스해 주었으면..... 열 두 살의 나이 차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에게 그럴 마음만 있다면. 하지만 칼은 연상의 여자를 좋아하는 걸. 리건은 달러스 생각을 하고는 절망적으로 걸었다.
둘이 공항에 내렸을 때, 밴쿠버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따스하고 정감이 스며드는 비. 태평양은 녹색으로 보인다. 두 사람을 태운 페리는 라이온즈 게이트 브리지 밑을 지나 잉글리시 만으로 향하여, 소나무가 많은 작은 섬 사이를 전진해 갔다. 다가오는 양편의 높은 산봉우리에는 하얀 눈이 남아 있다.
"맨션으로 직행해도 되나요?" 빅토리아 항에 들어가기 전에, 리건은 말했다.
"안 될 건 없지만, 일단락될 때까진 케니의 집에 있는 것이 좋겠어." 다소 도전적인 어조로 칼은 말했다. "어차피 인사시킬 사람이 있으니까."
"계모 말씀인가요?"
리건은 그만 입을 놀려 버리고 말았다. 잿빛 눈이 번쩍했다. "그렇긴 하지만......-- 그녀는 절대로 어머니 타입은 아니지." 리건은 ‘그렇다면 어떤 분이에요?’ 하고 묻고 싶었으나, 그만두었다.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까.
"저것은 국회 의사당이야." 칼은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당당한 건물을 가리켰다. "둥근 지붕 위에 서 있는 동상은 조지 밴쿠버라고 해서, 최초로 이 섬을 발견한 대령이지. 우리의 조상은 같다고나 할까."
빅토리아가 가까워짐에 따라 리건의 기분은 울적해졌다. 케니 만의 집에 가고 싶지 않다. 달러스란 여자를 만나고 싶지 않다. 빅토리아는 꽃으로 가득 찬 도시로, 칼이 말했듯 옛날의 좋은 시절의 영국의 분위기를 담고 있었다. 둘은 항구에서 택시를 타고 칼의 집으로 향했다. 고속도로에서의 전망은 장관이어서, 언제라도 원하는 때에 차를 세워 경치를 감상할 수 있게끔 전망대도 만들어져 있었다. 두 사람을 태운 차는 스피드를 늦추지 않고 고속도로를 달려 만 쪽으로 내려갔다. 흰 벽의 멋진 집이 나타났다. 바다를 향해 펼쳐진 뜰에는 잔디가 깔려있고, 군데군데 돌이며 관목들이 있었다.
택시가 다가가 멎자 한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나와 두 사람의 짐을 날라 갔으나, 리건의 눈은 그 뒤에 나타난 여자에게 못 박혔다. 달러스는 중년의 미망인이 아니라 30세 정도의 미인이었다. 맞춤옷인 듯한 베이지색 드레스는 매우 값비싸 보여, 그때야 비로소 리건은 자신이 싸구려 진즈와 구김살투성이의 마키노 코트 차림인 것을 자각했다.
"아직 2, 3일 내에는 돌아오지 않으려니 생각했는데." 달러스는 칼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말했다. "왜 연락해 주지 않았지요?"
칼은 어깨를 움츠렸다. "아무러면 어때, 이쪽은 리건 페리스양. 시내에 거처가 확정될 때까지 우리 집에 머무르기로 했어요."
차갑고 푸른 눈이 빛나면서 리건의 온몸을 사로잡았다. 그 눈에 경멸이나 비웃음이 담겨 있는 것처럼 리건은 느꼈다. "옳아, 아가씨가 이 지독한 사자와도 같은 사람과 나흘이나 숲 속에서 지내야 했던 불운한 사람이군요!"
"사흘이에요." 말을 뱉고 나서 리건은 자기 목소리의 싸늘함에 놀랐다. "그리고 이분은 그렇게 나쁜 분이 아니에요. 갑자기 방문해서 죄송합니다, 부인. 폐가 되지 않아야 할 텐데."
이번에는 달러스가 무표정인 채 어깨를 움츠렸다. "여긴 칼의 집이지 내 집은 아니에요. 사양 말고 편하게 지내세요."
저택 안은 예상대로 멋있고 사치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마루에는 두툼한 금빛 카핏이 깔려 있고, 값비싼 가구는 품위 있게 빛나고 있었다. 넓은 거실에는 큰 유리문이 있어 그 너머로 꽃으로 가득한 테라스, 반짝이는 풀이 눈에 들어왔다.
"편지는 서재에 놓아두었어요." 칼이 가까운 테이블에 눈길을 보내는 것을 알아챈 달러스가 말했다. "우선 옷부터 갈아입죠?"
"그래요." 라고 칼은 가볍게 끄덕였다. "하지만, 곧 또 시내로 가야 해.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요."
"저녁은 어떻게 하지요?"
달러스가 물었다.
"일곱 시 반까진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지만, 만약 그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먼저 시작해요."
칼은 리건 쪽으로 몸을 돌리면서 계속했다. "잠시 쉬면 어때, 피곤할 텐데?"
이제부터 더 피곤해질 것 같았으나 리건은 순순히 "그렇게 하겠어요."라고 대답했다. 달러스는 일부러 눈썹을 치켜 올렸다. "훈련이 잘 됐군요."
칼은 틈을 주지 않고 말했다. "속아서는 안 되지, 이 아가씬 보기보다는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달러스는 그런 것은 벌써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방으로 안내하죠. 언제 누가 올지 모르니까 손님용 방이 많아요."
중간 뜰을 둘러싼 복도에 줄지어 있는 도어의 하나를 달러스가 열자, 녹색과 배색으로 조화를 이룬 넓은 방이 나타났다. 녹색과 백색의 스트라이프 커튼 너머로 바다가, 그리고 그 너머의 육지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어마, 멋져!" 리건은 자기도 모르게 환성을 질렀다. "일년 내내 이런 멋진 경치를 볼 수 있는 데서 살고 있으니, 정말 좋겠군요!"
"나는 도심지 쪽이 좋아요." 복도에 서 있던 달러스는 입을 실룩거렸다. "이 경치를 보고 그렇게 좋아하는 건 아가씨들뿐이에요."
"경치뿐만이 아니라 모든 게 근사해요. 제럴드씨가 빅토리아가 좋아질 거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이런 정도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리건은 달러스에 대한 반감도 잊고 눈을 빛냈다. "캐나다에 온 후 이렇게 따뜻한 기후는 처음이에요. 그리고 꽃들도 만발해 있고!"
"아직도 봄이라서 그래요. 한여름이 되면...."하더니 문득 생각이 미쳤다는 듯 달러스는 물었다. "얼마나 있을 건가요?"
리건은 미소 지었다. "당분간 있어야 할 것 같아요."
한순간 침묵이 흐른 후, 리건은 물었다. "말씀중에 캐나다 사투리가 없네요?"
"캐나다인이 아니기 때문이죠.... 결혼할 때까지는. 3년 전에 영국에서 이곳으로 왔어요."
3년...... 칼의 아버지가 죽기 직전이 아닌가! 리건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으나 얼굴에 나타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말했다. "영국의 어디인가요?"
"살리 주예요."
"옛날에 그곳에서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리건의 생각은 즐거웠던 그 여름날로 날아갔다. "찰톤이라 하여 레이 게이트의 바로 외곽이었어요."
달러스는 눈을 크게 떴다. "알고 있지. 언제쯤인지?"
"6년 전의 일입니다." 리건은 입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그때 어린아이였죠."
달러스는 다그치듯 물었다. "6년 전이라니? 베이레즈가 사람들이 남미로 갔을 무렵이 아니에요?"
달러스는 이마를 찌푸렸다. "그런데, 그 해에 그 집을 어느 금융 관계 인사에게 빌려 주었을 텐데."
"그 집을 빈 사람이 아버지예요." 리건은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작년에 돌아가셔서 전 혼자 남게 되었으므로 오빠를 찾아 여기 온 거죠. 오빠는 지금 포트 레스터 근처의 댐 건설 현장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렇군. 부자에서 무일푼이 돼 버린 셈이군요, 가엾게도!"
리건은 얼굴이 빨개져서 말을 되받아주고 싶었으나 그만 두었다. 어차피 여기에는 오래 있지 않을 테니, 지금은 이 여자에게 실컷 우월감을 맛보게 해주자. "하지만 어떻게 잘 될 것 같아요."
"그럼요, 아가씨라면. 칼을 이용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에요."
"그럴 마음은 없어요, 우연히 이렇게 됐을 뿐이니까요." 리건은 뾰로통해졌다. "나를 태운 채 추락했으므로 책임을 느끼고 계실 뿐인걸요."
파란 눈은 찬찬히 리건의 자태를 살펴보았다. "칼은 믿을 만한 사람이에요. 아가씬 정말 운이 좋았어. 아무리 아가씨가 어리다 해도, 다른 남자라면 숲 속에서 찬스를 살렸을 거야. 칼은 물론 당신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을 테지만."
실크 같은 금발의 여인의 말 속에 가벼운 의혹이 깃들여 있음을 감지한 리건은 의혹을 품게 그대로 둘까했으나, 정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말씀대로, 그분은 상당히 색다른 사람이에요. 그런데 자기 나이에 가까운 의붓자식을 가져 이상한 느낌이 들지는 않아요?"
"전연 그런 건 없어요, 지금은 어머니와 자식 관계가 아니니까요." 푸른 눈은 얼음처럼 되어 있었다. "그럼 샤워라도 하고 편히 쉬어요. 칼의 말대로 저녁은 일곱 시 반이니까."
도어가 닫히자 리건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달러스 제럴드와 같은 타입에게 아버지는 약했었지. 어머니도 저 사람 같았을까? 한번 아버지에게 물어 보려고 마음먹었으면서도 용기가 없어서 끝내 못했던 일을 리건은 후회했다.
변변한 짐은 없어서 정리는 곧 끝났다. 저녁 식사 때에는 무엇을 입으면 좋단 말인가? 그중 나은 것이라고는, 벤이 패터슨 가에 놀러왔을 때 입었던 그 원피스뿐이다. 도저히 달러스와 맞설 수는 없겠지만 세탁해서 다리미질을 해둔 것만도 다행이었다. 일년 전이라면 이런 때에 입을 드레스는 산처럼 쌓여 있었다고 생각하니, 리건은 슬퍼졌다. 물질에 구애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래도 여자인 탓인지 리건은 분함을 금치 못했다. 좋은 옷을 입으면 확실히 자신이 생긴다. 케니 만에서 며칠을 버티어 나가는 데는 바로 그것이 필요한데도....
7
칼은 열 시경에 돌아와서 달러스의 꾸중하는 듯한 시선에 변명하듯, "스미드슨과의 대화가 오래 걸려서......... 저녁은 먹고 왔어. ."라고 하더니, 방의 이쪽 끝과 저쪽 끝에 떨어져 앉아 있는 두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사이좋게 됐어?"
"어차피 2, 3일 밖에 같이 있지 않을 테니, 그 정도론...."
달러스가 틈을 주지 않고 말했다.
"당신도 돌아왔으니 화려하게 파티라도 열지 않겠어요? 리건도 캐나다의 사교계를 봐 두는 게 좋을 듯 하고."
"앞으로 얼마든지 기회는 있어." 칼은 거침없이 말했다. "하지만 나쁜 생각은 아닌데? 내일 당장 전화해 보지. 괜찮겠지?"
벌써 결정해 버린 듯한 칼의 태도다.
"보험금이 나왔으니 내일 아침 같이 은행에 받으러 가지. 시내로 간다면 쇼핑도 하고 싶겠지? 어디서 점심이라도 먹고 그 후에 오피스를 보여 주지."
"그리고 제가 빌기로 되어 있는 맨션을 볼 수 있죠?"
리건은 일부러 <빌다>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렇지."하고 칼은 리건의 말을 가볍게 흘려들으면서 힐끗 팔뚝 시계에 시선을 떨구었으나, 유리문 너머에서 달빛을 받아 빛나는 풀로 눈길을 옮겼다. "기분 좋은 밤이니까 자기 전에 헤엄이나 한번 칠까?"
달러스가 말없이 비난하듯 칼을 흘기는 것을 본 리건은 충동적으로 "대찬성이에요. 하지만 수영복이 없어요."하고 말해버렸다. 가벼운 농담이었는지, 칼은 당장 대답을 하지 않았다. 리건이 너무 경솔했다고 후회하고 있는데, 칼은 불쑥, "당신 정도의 사이즈에 맞는 수영복이라면 있을 거야. 방으로 보낼 테니, 나중에 풀에서 만나자."하고 말했다.
"알았어요." 이젠 뒤로 물러설 수 없게 됐다고 생각한 리건은 비웃는 듯한 달러스를 무시하고 일어서서 ‘오늘 밤은 따뜻하고 기분도 좋아 나도 헤엄치고 싶었어. 칼과는 관계없지 뭐야’ 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자기 방으로 갔다. 가정부가 수영복을 가져왔다. 그 푸른 수영복은 몸에 딱 맞아, 이 집을 방문하는 여성은 모두가 달러스처럼 글래머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리건은 마음을 놓았다.
함께 가져온 비치가운의 벨트를 맨 후, 리건은 맨발로 복도로 나갔다. 복도에서 직접 중간 뜰로 나갈 수가 있어, 거실로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간접 조명을 받아 흐릿하게 빛나고 있는 풀은 마치 손짓이라도 하는 듯했다. 거실 쪽을 보았으나 달러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칼도 아직 오지 않은 듯했다. 리건은 속으로 안심하면서 다이빙 보드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서 비치가운을 벗어 던지고는 그 위로 올라갔다. 밤공기는 피부에 차가왔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영국의 여름은 이보다도 훨씬 추우니까.....
리건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반동을 이용하여 공중으로 뛰어올라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풀을 일직선으로 헤엄치고 머리를 쳐드니, 풀 사이드에 칼이 서 있었다. "마치 인어 같군." 칼은 감탄하여 큰 소리를 질렀다. "다이빙도 멋있었어!"
"스포츠에는 자신 없다고 말했죠?"
리건은 손으로 물을 저으며 칼을 쳐다보았다. 넓고 탄탄한 가슴과 어깨, 검은 수영복에 감싸인 탄력 있는 히프, 미끈하게 뻗은 다리. 너무나 섹시해서 위가 짜릿하게 아파올 지경이었다. 리건은 그런 기분을 감추려는 듯이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헤엄치고 싶지 않은 건가요?"
"간신히 소원이 이루어진 셈이군." 칼은 흰 이를 보이며 웃었다. "설마 당신이 응할 줄은 몰랐어. 주 전에 물을 넣었으니, 사실은 밤에 수영하는 것은 2주 정도나 후에 하기로 작정했었지."
"미안해요, 진짜로 그러시는 줄 알고."
"마음에도 없는 말은 그만 둬."
칼은 물속에 뛰어들더니 잠시 후에 얼굴을 내밀었다. "우리 경주할까?"
리건은 웃었다. "차렷, 땅!"
열심히 헤엄쳐 풀의 반대편에 닿은 리건은 쇠사다리를 붙잡고 어깨로 숨을 쉬면서 말했다. "이건 무효예요. 진짜로 하신 건 아니죠?"
"시작하기 전엔 적당히 하려고 했지만, 헤엄치는 동안에 생각이 달라졌어."
칼은 리건과는 달리 조금도 헐떡이지 않았다.
"정말로 잘하는 군. 어디서 배웠지?"
"학교에서 배웠을 뿐이에요."
칼은 잠시 사다리의 난간에 기대어 잠자코 있다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난 몇개월 동안 뭘 했지, 오빠를 찾는 일 외에?"
"직업 말인가요?"
"그래. 유산만으로는 모자랐지?"
"네." 리건은 그때의 일을 생각하고는 코에 주름을 잡았다. "웨이트리스도 해봤지만, 주문받은 것을 뒤죽박죽으로 처리해서 해고되었죠."
리건은 칼로부터 눈을 돌렸다. "이제부터 직장을 부탁하려고 하면서 이런 얘길 해서는 안 되죠?"
"웨이트리스는 맞지 않아." 칼은 싱긋 웃었다.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있겠지."
"경험이 없어요."
"아버지의 친구는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나?"
"친구라고는 하나도 없었어요."
"그럼 당신의 친구는?"
리건은 말이 막혔다. "의논하기가 어려웠어요. 모든 일에 끝장이 난 것도 아니었고, 나 때문에 폐가 될 걸 생각하니 도저히 그런 말은 할 수가 없었어요."
"이해하겠어."
칼은 그렇게 말하더니 난간에서 손을 떼고, "떨고 있잖아. 이젠 나가야 하지 않을까?"하고 말하면서 풀 사이드에 올라가 리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꼭 잡아요."
바로 가까이에 사다리가 있었으나, 모처럼의 호의를 무시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되어 굳센 갈색의 손을 잡으니, 리건은 단번에 풀 사이드로 끌어올려졌다. 칼은 리건에게 비치가운을 걸쳐 주면서 싱긋 웃더니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때와 장소는 다르지만 꼭 이런 식이었어."
"무슨 얘기죠?"
"모르면 묻지 않는 게 좋아."
칼은 언젠가 비 오는 아침처럼, 뺨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당신은 돈으로 움직이는 그런 세계에서 살아온 것 치고는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았어. 자아가 강한 탓인가?"
"적어도 자신에게 정직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리건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칼, 더 이상 저를 어린아이 취급은 말아 주세요. 이젠 스무 살인걸요. 늘 어른 같은 행동은 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저도 이젠 어엿한 성인이에요."
칼은 물끄러미 리건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이윽고 손을 놓았다. 표정이 수수께끼처럼 되었다. "이젠 잠을 잘 시간이야!"
"싫어요!" 노여움에 섞여 한편으로 실망감이 번져갔다. "가고 싶으면 혼자 가세요, 나는 좀 더 여기에 있을 테니까요."
"또 억지를 부리네, 떨고 있으면서."
"물속은 따스해요."
칼은 성큼성큼 걷기 시작한 리건의 뒤를 쫒아가 붙잡고는 가볍게 안아 올려 거칠게 입술을 갖다 댔다. 그 격렬한 키스에 리건의 몸에서는 힘이 빠져 나갔다. "이걸로 만족했나?"
리건은 보란 듯이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칼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당신의 아버지는 가정교육을 잘못 시킨 것 같아. 당신은 같은 나이 또래의 남자아이와 사이좋게 지내면 되는 거야."
"그날 밤의 일을 잊었나요?"
"아니.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었어. 반성하고 있어."
칼은 등을 보이며 타월을 어깨에 걸쳤다. "뜨거운 샤워를 하고 잠을 자도록 해. 드라이어도 있을 거야."
리건은 턱을 내밀었다. "내일 이사하고 싶은 데요."
"좋아. 벌써 가구도 들여다 놓았으니까."
"그런 일은 하시지 않아도 좋은데. 직장도 스스로 찾아보겠어요."
"이제 그 이야긴 끝난 걸로 아는 데."
"그럼 다시 한번 얘기합시다." 무리해서 어른답게 처신하는 일은 집어 치우고 리건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 이상 당신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은 걸요!"
칼은 차갑게 리건을 노려보고 있었다. "침대로 데려가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거야?"
뜻밖의 말에 리건은 숨이 막혔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성인 취급을 해주실 바랄 뿐이죠."
"그런 건 알고 있어. 이 이상 뭘 알라는 거야?"
"고마운 말씀이군요."
"자, 내 말대로 방으로 돌아가요." 무서운 표정이었다. "속히! 거역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겠지."
리건은 아까 벗어던졌던 비치가운을 주워 들고 <당신의 말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니까.>라고나 하는 듯 힘차게 어깨에 걸쳤다. 침실에 붙은 욕실에서 뜨거운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린 후, 리건은 깨끗한 리닌의 시트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칼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칼은 그것을 눈치 챈 듯하지만. 그것은 소녀의 동경에 지나지 않는다고 문제도 삼지 않을 것이 뻔하다. 하지만 적어도 조금 전의 키스는 너무 격렬해서 어린아이를 상대로 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어. 칼이 결정한 일에 얼마 동안은 따라야만 하겠지만, 되도록 속히 자기 힘으로 일자리를 찾아 그의 신세를 지지 않도록 하자. 빅토리아 정도 규모의 도시에서라면 얼마든지 자립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칼 제럴드란 사람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 지금의 리건에게는 가장 절실한 소망이었다.
이튿날 아침 식탁에 앉자, 리건은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달러스가 어젯저녁의 일을 어디에서 보고 우습게 여기고 있는 듯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칼이 리건을 데리고 시내로 간다고 하자 뜻밖에 달러스는 "나도 같이 가겠어, 사고 싶은 것도 있고. 같이 점심이라도 하면 어때요?" 하고 말했다.
"좋지." 칼이 대답했다. "어젯저녁에 스미드슨과의 대화도 결말을 지었으니, 오늘은 한가해. 우선 은행에 가고, 그리고 당신들을 백화점에 데려다 주고는 오전 중에 마중 갈께. 맨션은 오후에 가도 상관없겠지?"
"저만 곧바로 맨션에 가면 안 될까요?" 리건이 중간에 끼여들었다. "쇼핑은 내일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요."
"내일은 당신이 다니게 될 전문학교의 교장을 만날 약속이 되어 있어. 규모는 작지만 우수한 학교지." 칼은 다른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준비는 되었나?" 하고 물었다.
"코트만 가져오면 나갈 수 있어요."
이 한 마디를 남겨 놓고 하룻밤을 지낸 방으로 돌아와 보니, 벌써 침대는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복도를 청소하고 있던, 꽃무늬의 작업복을 입은 중년 부인이 친숙한 듯이 무언의 미소를 리건에게 보냈다.
빅토리아로 가는 도중 리건은, 미국제 대형 고급차의 푹신한 뒷좌석에 파묻혀 눈앞의 검은 머리를 무시하듯 창밖만을 보고 있었다. 달러스만이 대조적으로 떠들고, 칼은 평소와 다름없이 무표정했다. 근대적인 건물의 은행에 당도하자 칼은 곧바로 리건을 창구로 데려갔다. 은행원은 사정을 잘 알고 있는지, 칼을 보자마자 곧 필요한 서류를 갖추어 내주었다. 시키는 대로 어음에 사인했으나 금액을 몰라 리건은 곧 입을 열었다.
"내용을 보고 싶어요, 잔금이 마이너스가 되면 곤란하니까." 은행원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리건을 보았으나, 칼이 사인했으므로 어음의 내용을 보여주었다. 그것을 보면서 리건은 입술을 깨물었다. 예상한 대로 가져왔던 액수의 배는 된다! 불평을 말하려고 하자 뒤에서 힘찬 손이 뻗어 억지로 일어서게 했다. "고마워요." 칼은 은행원에게 인사를 하고는 리건을 자동차 있는 곳까지 끌고 갔다. 달러스는 짜증스럽게 기다리고 있었다. 칼은 리건을 뒷좌석에 밀어 넣고, 달러스가 조수석에 타는 것을 확인하더니 운전석에 앉았다.
"이젠 됐어." 칼은 뒤를 돌아보았다. "할 말이 있으면 해요."
달러스 앞에서 돈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싫었으므로 리건은 입을 꼭 다물었다. "할 말은 아무것도 없어요."
"됐어." 칼은 앞을 보며 바로 앉더니 시동을 걸었다. "이젠 백화점으로 가지."
"당신도 같이 갈 셈이에요?"
달러스는 놀란 듯 칼을 쳐다보았다.
"뒤의 <자립하는 여성>에게서 눈을 뗄 수가 있어야지. 방치해 두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칼은 엄한 눈으로 백미러 속의 리건을 노려보았다. "내게서 돈 받는 게 싫으면 전액을 돌려줘도 상관없어."
"알았어요."
돈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은 알지만 어쨌든 칼에게 돈을 받는 것은 싫었으므로, 받을 이유가 없는 돈은 단 1페니라도 받지 않겠다고 리건은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갚아주겠어!
백화점의 여성복 매장은 무척 화려하여 조금 전의 일만 없었더라면 오랜만에 즐거운 하루가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유행의 코튼 원피스를 입고 화사한 샌들을 신으니, 리건은 몰라 볼이 만큼 멋있어졌고 호리호리한 몸매와 긴 다리가 특히 돋보였다. 달러스는 곧 싫증을 내며 자기가 입을 드레스를 보러 가버렸으나, 칼은 바싹 붙어 뒤따라와서는 결코 어음과 펜을 건네주지 않았다. 대충 쇼핑을 끝내니 한 재산---이라고 해도 칼의 돈이지만---을 탕진하고 있었다. 점원이 물건을 포장하고 있는 틈에 리건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돈을 돌려줘도 상관없다고 하신 말을 잊지 않았죠? 나중에 꼭 우송할 테에요!"
"협박하지 마." 칼은 주위에 신경을 쓰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 문제는 오후에 천천히 얘기하지."
출구를 향해 걸어가다가 칼의 눈길이 그린 색 여자 슈트에 가서 멎었다. 정찰을 보니 도저히 살 수 없는 물건이기에 리건은 입어보기를 꺼렸으나, 주위 사정으로 할 수 없이 입어 보게 되었다. "꼭 맞는데. 사기로 하지. 그대로 입고 있어요."
칼은 흔쾌하게 말하더니 어음에 사인했다. 이탈리안 니트의 멋진 드레스를 달러스가 입었던 것을 상기한 리건은, 이 드레스를 입고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대등하게 겨루어 볼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일격을 가할 수는 있을 듯했다. 브라운으로 통일한 칼과 같이 걷던 리건은, 진즈와 스웨터 밖에 입은 적이 없는 시골 처녀로부터 센스 넘치는 도회의 여자로 변신한 듯한 기분이었다. 먼저 산 샌들은 슈트에 꼭 어울려, 리건은 칼의 양해를 얻어 화장실로 가서 자기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보았다. 머리도 이전의 윤기를 되찾았으며, 루즈를 칠하니 안색도 좋아졌다. 그러나 녹색 눈동자의 반짝임만은 감추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이다. 칼을 만난 지 이제 겨우 일주일 정도 지났는데, 그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가슴이 꽉 차 있으니까......
화장실에서 나온 리건을 보고 칼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옷이 훨씬 좋군. 번데기가 나비가 된 것 같아. 이 정도면 벤도 첫눈에 당신을 알아보겠지."
리건도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 여기에 오빠가 없는 것이 유감이다. 오빠가 옆에 있어 준다면 이 새로운 세계에 부딪쳐 나갈 수도 있을 텐데...... 아무튼 오빠가 댐 공사를 마치고 마중을 와 줄때까지는 제 발로 굳게 서 있어야만 한다.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달러스는, 칼이 리건이 산 물건을 뒤 트렁크에 넣는 것을 보고 약간 입가에 긴장감을 띠었으나 리건의 변한 모습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두 여성과 함께 걷는 칼은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를 나누므로 셋은 번번히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찬 고기와 샐러드의 점심이 끝나고 디저트인 블루베리 파이와 아이스크림을 주문하더니,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칼이 달러스에게 변모한 리건의 인상을 물었다. "몰라 볼 정도로 좋아졌어요." 싸늘한 푸른 눈이 리건을 일별했다. "무척 참한 슈트군요.... 머리 빛깔과의 조화에 좀 무리가 있지만."
"결정한 것은 칼이에요." 리건은 새침해서 말했다. "센스를 의심하신다면 저분에게 해주세요."
칼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달러스의 말대로 대조가 약간 강한 듯해. 어차피 남자란 논리적이지 감각적은 아니니까."
"논리적이 아닐 때도 있잖아요?"
블론드의 여자는 의미 있는 듯이 말했다. 리건은 푸른 눈과 잿빛 눈 사이에서 뭔가 말로 할 수 없는 그 무엇이 교환된 느낌이 들었다. 칼의 턱의 선이 긴장된 듯했다. "오후엔 리건의 패스포트를 가지러 가는데, 같이 가겠소? 아니면 다른 예정이라도?"
"택시로 오크만에 갈 생각이에요." 달러스는 목소리를 묘하게 바꾸었다. "그곳에 팔기위해 내놓은 집이 있다는 걸 아세요?"
"아니, 몰라요." 칼이 멋쩍게 말했다.
"누가 선수를 치기 전에 우리가 차지합시다."
"집은 한 채면 충분해요." 칼은 타이르듯이 말했다. "현재의 집에 불만은 없을 텐데."
"그렇지만 케니는 너무 멀어요. 오크만이라면 참 편리하지."
"나는 지금의 집이 마음에 들어요. 그리고 당신은 자기 차를 갖고 있지 않소?"
"둔감한 사람이군." 달러스는 짜증스럽게 칼을 나무랐다. "당신도 시내에 살면 좋겠다는 뜻이에요."
둘은 잠시 리건의 존재도 잊어버린 듯이 서로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이 시내에 살고 싶다면 나는 말리지 않겠소."
높은 광대뼈 근처가 확 붉어지고, 푸른 눈이 차가와졌다.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달러스는 갑자기 음색을 바꾸어 응석을 부리듯 말했다. "칼, 괜찮죠?"
"이 이야긴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합시다."
칼은 퉁명스레 대답하더니, 입을 막듯이 리건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보았다. "택시를 불러 줘."
달러스와 헤어진 뒤의 리건은 흡사 감각이 마비되어버린 듯, 사인을 하라고 하면 사인하고 질문에는 기계적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칼과 달러스에 대한 일만이 꽉 차있었다. 달러스는 세련된 지적 여성이라는 망토를 걸치고 있으나 이따금 정체를 드러낼 때가 있다. 그녀는 너무나 칼을 사랑하기에 칼에게 상처 입히기를 즐거워하는 면이 있는 듯했고, 칼도 그것을 잘 알고 잇는 듯 했다. 그러나 저 두 사람은 왜 저런 이상한 관계를 계속하고 있을까? 의붓어머니와 자식 사이니까? 칼은 달러스가 친부와 결혼했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는 것인가? 그런데 달러스는 남편의 유산을 하나도 상속하지 않은 듯이 보인다. 아내를 자기 아들이 돌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도록 해놓고 죽어간 사나이란 대체 어떤 사람일까? 아마도 칼만이 모든 해답을 알고 있겠지. 그러나 물어본들 칼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겠지.
8
맨션은 6층의 당당한 건물로, 벽은 흰 칠이 되어 있고 널찍한 입구 현관 위에는 금빛 글자로 이름이 부조되어 있었다. 넓은 뜰에는 크로커스와 수선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칼은 여덟 동이 있는 맨션의 넷째 번 건물 제일 위층으로 리건을 안내했다. 리건의 방은 상상보다 넓고, 다목적으로 쓸 수 있는 거실, 그리고 침실, 욕실, 주방등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발코니에서는 공원을, 그리고 그 너머로는 바다와 산을 조망할 수 있었다.
"참 멋진 방이군요." 리건은,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잡지의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 칼에게로 돌아와서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비용이 많이 드는 곳엔 살 수가 없어요."
칼은 잡지에서 눈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냉장고에는 벌써 식료품이 들어 있으니 차라도 한 잔 주면 좋겠는데."
"차라니요?"
"그럼, 지금쯤 차를 마실 시간이 아니야?"
잡지에서 눈을 뗀 칼의 얼굴은 농담이라도 하려는 듯 웃음을 띠고 있었다. "홍차 마시는 습관은 당신네 나라에만 있다고 생각했어?"
"그렇지는 않아요. 로라도 매일 오후에는 홍차를 끓이더군요."
"나만은 예외라고 생각했다는 거로군. 나는 직접 차를 끓여 줄 만큼 헌신적인 인간은 아니니까."
"일부러 가르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리건은 빈정거리듯 말했다.
"이젠 좀 그만 해 둬." 칼은 짜증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고 말했다. "벤도 당신을 먹여 살리려고 돈을 쓸 거야."
"하지만 오빠가 집세를 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남자가 돈을 벌기 위해 어떤 고생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좌우간 지금은 홍차가 마시고 싶어."
일자리를 구하면 하고 싶은 말도 할 수 있게 되려니 생각하면서, 리건은 주방으로 가서 차를 끓이고 식기장 속에서 티 세트를 들어내어 쟁반에 놓고 거실로 돌아갔다.
"언제부터 일하면 되죠?"
칼은 어깨를 추스렸다. "서류가 갖추어진 후부터겠지."
"그렇다면 훨씬 후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지는 않아. 정부도 허가 없는 침입자를 증가시키고 싶진 않을 테니까."
칼은 긴장해 있는 리건의 턱밑에 손을 갖다 대면서 한숨을 쉬더니 큰 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그런 사고가 일어났으니 패스포트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은 당신 탓이 아니야."
"당신 탓도 아니예요. 그런데 자기만 나쁜 것 같은 태도를 하시는군요."
"결국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만 하니까. 내가 당신의 오빠보다 책임을 지기 쉬운 입장에 있는 거지."
이 이상 이 이야기를 되풀이해 보아도 부질없는 일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리건은 화제를 바꾸었다. "일을 시작하기까진 어떻게 하면 좋지요?"
"벌써 말했잖아.... 학교에 가는 거지."
"학교에 가는 데 서류는 필요 없어요?"
"아마도 괜찮을 거야."
칼이 마음먹어서 불가능한 일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분한 나머지 리건은 불쑥 "오크만이란 이 지방 제일의 피서지인가요?"하고 물어 보았다. "그렇게 말해도 좋을 거야." 애매하게 답하는 칼의 태도에 더욱 흥미가 끌려 리건은 계속해서 물어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달러스가 그토록 그곳에서 살고 싶어 하는 거죠?"
"그것도 하나의 이유겠지."
칼은 담배를 리건에게 권하고 자기도 모르게 한 개비 뽑아 불을 붙이더니, 소파에 기대어 힘차게 연기를 내뿜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 게 좋아요. 달러스는 자기 일쯤은 혼자서 할 수 있어."
"물론 그렇겠죠." 자신도 놀랄 만큼 싸늘한 목소리였다. "단지 그저 물어 봤을 뿐이에요. 당신네들의 일에 간섭할 생각은 전연 없어요!"
짧은 침묵이 지난 후 칼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빈정거리는 것은 싫다고 말했을 텐데."
"특히 <아이들의 빈정거림>일 테죠."
리건은 틈도 주지 않고 반문했다. "몇 번이나 말했듯이, 나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당신이 해주신 일은 정말 고맙게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깔봐도 좋다고 생각되진 않아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그랬지만, 이젠 그만해 주셨으면 합니다."
칼은 천천히 몸을 앞으로 내밀며 담배를 유리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것이 솔직한 심정이라면 그렇게 하지. 숲속을 헤매고 있을 때와 비교한다면 우리의 관계는 약간 진보한 셈이지.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귀여운 소녀를 밤새도록 안고 있으면서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는 사내는 없을 테니까. 느끼지 않는 편이 훨씬 부자유스러운 일이지."
입을 열려는 리건을 칼은 눈으로 제지했다. "그 점을 분명히 해야 돼. 당신이 내게 기대한 것은 위로와 안심.... 그런 것이었겠지. 그날 저녁 내가 자제심을 잃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었더라면, 당신은 성숙한 여자로 인정받았다고 생각하면서 좋아했을까?"
멋진 그린 슈트를 입고 몸이 굳어 있는 리건을 바라보던 잿빛 눈에 몸의 위험을 느끼게 하는 빛이 스쳤다. "건전하게 성장할 기회가 없었던 게 당신의 결점이야. 여자의 본능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어."
"달러스에게 배우면 되겠죠!"
칼의 표정은 험악해졌다. "달러스에게 배울 게 아니라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 되는데."
칼은 일어나 겉저고리를 벗고 넥타이를 풀더니, 꼼짝도 하지 않고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리건을 끌어당겨 일으켜 세우고는 침실 쪽으로 밀어붙였다.
"자, 무대는 갖추어져 있어!" 버둥거리는 리건의 팔을 단단히 움켜잡은 칼은 침실의 문을 걷어차고 리건을 떼밀더니 문을 잠그고 커튼을 닫았다.
"알았어요. 이것으로 충분해요."
어둠침침한 방안에서 칼의 표정은 분별할 수 없었으나 엄한 목소리는 전연 변하지 않았다. "충분하긴 뭐가 충분해. 이제부터 시작하는 거야. 당신은 아직도 배울 것이 너무 많아. 이제 와서 ‘잘못했습니다’로는 통하지 않아요. 어젯저녁엔 당신이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싶었어. 말없이 내버려 두었지만, 지금은 그렇게는 안 되지."
"이상하군요, 달러스 얘기를 꺼냈다고 해서 이렇게 화를 내시는 거예요?" 리건은 뒷걸음질을 치면서 물었다.
"지금, 그녀와는 관계가 없어. 숲속에서 시작한 일을 깨끗이 끝내고 당신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기로 하지."
"그만둬요, 칼." 리건은 블라우스의 리본에 닿은 칼의 손을 붙잡고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이렇게 해 주기를 원한 건 아니었어요, 제발...."
"그런 식으로 자극해 놓고 이제 와서 이런 것은 생각지 않았어요, 라고 말할 텐가?"
칼은 리건을 침대 위에 눕히더니 그 위로 올라갔다. "이렇게 하는 것이 성인 여자로서 취급하는 거다!"
입술이 입술에 포개어지고, 손이 엷은 블라우스 속으로 들어가자 단추가 떨어져 나갔다. 뜨거운 입맞춤에 불타오른 리건은 마음속으로 ‘그만두지 말아요’ 라고 외치고 있었다. 여자로서의 본능이 눈떠, 두 팔로 칼의 목을 휘감고 매달리면서 얼굴을 머리털 속에 묻고는 남자 냄새를 맡았다. 관자놀이 근처에 부드럽게 입술을 갖다 댄다....칼, 사랑하고 있어요.... 그러나 칼은 갑자기 몸을 떼었다. 리건이 불길한 느낌에 놀라 눈을 뜨니, 칼의 잿빛 눈이 번쩍 빛났다. 다음 순간 리건은 엎어 놓고 엉덩이를 찰싹 하고 한 대 때렸다. 칼은, 깜짝놀라 몸을 웅크리고 있는 리건에게 한마디 내뱉고는 방에서 나가버렸다.
칼은 옆방에서 한동안 부스럭거리더니 곧 돌아와, 꼼짝도 하지 않는 리건에게 말했다. "돌아가겠어. 오늘 일을 통해 뭔가를 배웠기를 바라겠어. 학교에는 열 한 시에 가기로 되어 있으니, 15분 전에 데리러 올께."
"데리러 오시지 않아도 돼요." 리건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말했다. "장소를 가르쳐 주면 혼자 찾아가겠어요."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칼은 불쾌한 듯이 큰 소리를 질렀다. "이젠 그만 해 둬!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어."
리건은 반쯤 몸을 일으켰다. "당신에게 감사하라는 뜻인가요?"
"그렇게 하는 편이 당신에게 이로울 거야."
"이해심이란 눈곱만큼도 없는 분이군요."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생각하라지. 여자의 몸에 호락호락 뛰어드는 짓은 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리건은 매달리듯이 말했다. "저도 나빴는지 모르지만, 당신도........"
"동감이야." 칼은 귀찮은 듯이 말을 뱉었다. "처음부터 당신에게 손을 대지 않았어야 했어. 당신이 좀 더 나이를 먹었다면 이야긴 달라졌을 테지만, 열 두 살이나 나이 차가 나니 말이야."
목이 바싹 마르고, 좀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딘가 다른 데서 다시 시작해야 될 것 같군요."
"그런 짓을 해도 소용없어. 어디에 있어도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어! 당장에 자기를 잃지 않고 즐겁게 남자와 접촉할 수 있으려면 2년은 더 필요하겠어. 당신에게 어울리는 남자를 만났을 때, 내가 한 말의 뜻을 알게 될 거야. 지금 내게 대한 심정 같은 걸 고백하지는 말아."
"알았어요. 그런 짓은 않겠어요." 리건은 쉰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더니, 도어 밖에 서 있는 건장한 남자 쪽을 향해 용기가 없어지기 전에 얼른 물어 보았다. "한 가지 물어 봐도 돼요?"
"뭔데?"
"달러스를 좋아하세요?"
칼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런 것은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야. 전화 옆의 메모지에 학교까지의 길을 적어 놓겠어. 용무가 있으면 집으로 하지 말고 회사로 전화해 줘. 이름을 대면 내 방으로 연결하도록 말해 둘 테니까."
말을 남긴 칼은 방에서 나갔다. 잠시 후, 천천히 일어난 리건은 멍하니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보고는 질겁을 했다. 칼은 자신의 대답을 태도로써 보여 주었다. 그는 달러스를 사랑하고 있다. 아마도 달러스가 이전에 아버지의 아내였다는 사실만이 장애일 것이다. 그러나 2년 동안이나 한지붕 밑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과연 모든 것을 청산하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을까?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모든 서류가 갖추어져서 적어도 내년까지는 캐나다에 있어도 좋도록 되었다. 칼로부터 개인적으로는 아무 연락도 없었으나, 경리부 차장인 모리스 벨라미를 만나러 가라는 편지가 왔으므로 리건은 약속 시간에 제럴드 코퍼레이션으로 나갔다. 층의 넓은 경리부에서는 동물의 뿔로 만든 테의 안경 뒤에서 예리한 푸른 눈을 반짝거리고 있는 금발의 중년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과 회장의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와 사장뿐입니다." 경리부 차장은 사무적인 태도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냥 비밀로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당신에게 부탁할 일은 타이프 기능이 요구되는 것입니다만,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다죠?"
차장은 입을 열려는 리건을 제지하듯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당신이 맡을 일은 회사 내부에서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은 데 어째서 외부 사람인 당신에게 시키나 하는 의혹도 생기고 갖가지 억측도 있겠지요. 처음 얼마 동안은 다소 하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리건은 당황하여 말참견을 했다. "입장이 곤란하시다면 당장이라도 다른 일을 찾아 보겠어요. 칼.... 아니, 회장님은 권유해 주셨을 뿐이니까요."
"이번 일은 특히 회장님의 명령입니다." 차장은 충고하듯 말했다. "아마도 당신이라면 잘 해낼 것이라고 생각하셨겠죠. 그런데, 회장님을 퍼스트 네임으로 부르는 일은 없도록 해주세요."
"신분이 다르다는 말씀인가요?"
억지로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자, 비슷한 웃음이 되돌아왔다. "상식을 가지신 걸로 압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떤 소문이 날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잘 알았습니다." 리건은, 이 사나이는 자기와 칼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는가 하고 의심이 갔으나 목소리를 밝게 하여 "언제부터 출근하면 되나요?"하고 물었다.
"내일 아침부터입니다, 일주일에 세 번. 그런데 오후에 프레스딜 컬리지에 강의를 받으러 가신다죠? 무엇을 전공하십니까?"
"속기 타이프와 비즈니스 일반입니다."
"곧 향상될 것 같습니까?"
리건은 너무 솔직한 질문을 받고는 답변이 막혔다. "최선을 다하겠어요." 차장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 "부친은 엘리어트 후기리스 씨라고 들었습니다만?"
"네. 아시나요?"
"직접은 아니지만 금융계에서 부친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요."
차장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입속에서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이런말을 할 생각은....."
"상관없어요." 리건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실패보다는 성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기를 바랍니다."
모리스 벨라미는 일어서서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뵙기로 합시다."
처음 한 동안은 차가운 대접도 받았으나 리건은 곧 직원 모두에게 받아들여져,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말씨도 캐나다식 발음으로 변하게 되었다. 회사 이외에 학교에도 다니기 때문에 칼의 생각으로 괴로워할 시간도 없고, 회사의 동료와 학교 친구들과 친해지니, 어떻게 하면 값싼 요리를 먹을 수 있을까 하는 일밖에 염두에 없는 청년들과 어울려 한껏 생활을 즐기게도 되었다. 남자들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도, 칼의 충고를 받아들여 무턱대고 좋아하지 않고, 같은 상대와는 두 번 다시 만나지 않도록 했다.
어느 날, 벤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벤은 칼과 돈에 관한 약속을 주고받은 듯 했으나 금액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았다. 리건은 칼에게 돈을 갚지 않았음을 상기하고, 옷값보다 약간 많은 금액을 찾아서 등기로 케니 만 주소로 부쳤다. 이튿날, 제럴드 코퍼레이션의 스탬프가 찍힌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네모진 글씨로 단지 한 줄, <아직도 모르겠어!>라고 씌어 있었다. 싸인의 맨 끝, 한 자가 종이에서 밀려날 듯 갈겨 쓴 글자는, 칼이 화가 나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리건은 당장 찢어 버릴까 생각하다가, 지난 한 달 동안의 칼과의 관련을 말해 주는 것은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그럴 수도 없어 첫 급료로 산 도제 부엉이 옆에 세워 놓았다. 무시당하는 것보다는 화를 내주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그날 밤, 리건은 같은 과의 로브 던컨이라는 남자와 데이트 약속을 했다. 자기 급료로는 도저히 거주할 수 없는 맨션에 있다는 것으로 이상한 질문을 받고 싶지 않았기에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나, 로브는 자동차로 데리러 오겠다고 완강히 주장했다. 일곱 시에 로브가 찾아왔다. 얼굴빛이 흰 조각과도 같은 용모, 갈색 눈, 밝은 금발의 로브는 회사 여직원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으나, 리건은 영화 스타 같은 로브를 보아도 곧 턱이 까칠까칠한 칼의 엄한 얼굴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어?" 로브는 화장하지 않은 리건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내가 너무 일찍 왔는가 보지?"
"아니오, 내가 꾸물거리고 있었죠."
리건은 로브를 방에 들어오게 했다. "잠깐 기다려요, 곧 준비를 하고 올 테니까."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레스토랑의 예약은 여덟 시니까. 그전에 드라이브나 하려고 생각했지."
리건은 동의했다. "멋지네요. 분만 기다려 줘요."
리건이 돌아왔을 때, 로브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껴 뒤돌아보았을 때의 표정이 어딘지 굳어 있었으나, 로브는 리건의 멋진 드레스를 보고 곧 싱긋 웃었다. 드라이브를 하고, 둘은 호화로운 레스토랑에서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로브가 묻는 대로 리건은 오빠에 대한 이야기 등을 숨김없이 했으나, 너무 집요하게 로브가 이번 직장으로 오게 된 계기를 묻기에 리건은 이마를 찌푸렸다.
"혹시 그 편지를 읽은 게 아니에요?" 리건은 의심을 억누를 수가 없어 물었다. "읽어 버렸군요!"
"어쩔 수 없었어. 창 쪽으로 가려고 움직이자 그 편지가 떨어져 내용이 보이더군. 악의는 없었어, 정말이야."
로브는 이렇게 고백하더니 잠시 후에 계속했다. "<칼>이라고 사인했던데, 회장과 그렇게 친한 사이인가?"
"이야기하자면 길어요."
리건은 로브의 눈을 보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깨닫자 큰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분명히 설명해 놓지 않으면 어떤 말을 조작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해가 없도록 말을 골라 이야기를 진행하다 보니 커피 시간까지 계속되고, 로브는 이따금 맞장구를 치는 정도로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다. "회장 같은 사람이어서 정말 운이 좋았군."
이야기를 다 듣고 나더니 로브는 말했다. "그렇잖았으면 큰일이 났을지도 모르지."
"아무렴요." 리건은 잠시 입을 다물고 로브를 바라보았다. "로브, 이것은 나와 당신만의 일로 해줘요, 절대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줘요."
"직장을 잃은 게 겁이 나나?"
"아니, 그게 아니라, 이 얘긴 비밀로 하라는 명령이에요. 칼, 아니 회장은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 하시죠. 알았어요? 오해할 사람도 있을 테니까."
"가련한 영국 처녀가 캐나다의 한창 나이의 플레이보이와 숲 속에 단둘이 남겨 졌다...... 이렇게 되면 억측은 한정 없이 나올 테지."
로브는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리건을 보고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런 얼굴을 하지 말아요, 농담일 뿐이니까."
"취미가 나쁜 농담이군요. 당신이 그 편지를 읽지만 않았어도 이런 이야기는 할 필요도 없는데."
"하지만 누가 그 맨션의 집세를 물어 주는지 이상하게 생각했을 거야. 이것으로 모든 게 분명해진 셈이군. 우리 회장님은 정말 박애심이 넘치는 사람이야!"
"집세는 오빠가 물어주고 있어요." 리건의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이젠 잊어주는 거죠? 어차피 당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니까."
"그 수수께끼 같은 문장의 뜻을 가르쳐 주지 않겠어?" 로브는 이렇게 말하고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화내지 마, 이것도 농담이야.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니까."
둘이 맨 션으로 돌아온 것은 열 시 반쯤이었다. 리건은 어떻게 하든 작별의 키스를 피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려면 차에서 뛰어내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예상대로 로브의 손이 가슴 쪽으로 뻗어왔다. 키스를 받고 싶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뿐이어서, 리건은 딱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밤은 고마워요. 참 즐거웠어요."
"왜 그래, 이젠 키스쯤 해도 좋을 나이일 텐데?"
"하고 싶을 때에만 하는 거예요." 리건은 자동차 문을 열었다. "잘 자요, 로브."
"또 만나 주겠어?"
"글쎄." 리건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기회가 있으면...."
방으로 돌아와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예의 편지였다. 리건은 천천히 편지를 손에 쥐더니 찢어서 휴지통에 던졌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으나 꺼림칙한 기분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로브는 비밀을 지켜줄까? 칼이 저런 편지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이런 결과가 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칼을 화나게 해서 그 편지를 쓰게 만든 것은, 내가 그런 식으로 돈을 보냈기 때문이다....
9
이튿날부터 어쩐지 회사 내의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호기심에 가득 찬 눈길, 소곤거리는 소리, 접근하면 갑자기 화제가 바뀌곤 하므로 리건은, ‘사실은 그게 아니에요’하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남의 이야기는 잠깐뿐이라고 하지만, 이 소문에 관한 한 칼 제럴드의 귀에 들어가면 끝장이다. 리건의 애틋한 소원도 아랑곳없이 사흘 후의 아침, 차장은 리건을 불렀다. "회장님이 부르십니다. 곧 6층으로 가세요."
리건은 몸과 마음의 균형을 잃은 채 6층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푹신푹신한 카핏 위를 걸으면서, 지금 곧 이 빌딩에서 달아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도대체 어떤 표정으로 칼을 만나면 될까? 약속을 깬 것은 내쪽인 것이다. 흡사 아버지의 오피스에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잡지에서 빠져나온 듯한 오피스에는 금발을 곱게 세트한 무표정한 채인 비서가 앉아 있었다. 비서는 얼굴도 들지 않고 얼음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곧바로 들어가세요, 페리스양."
갑자기 이 말을 듣고 리건은 놀랐으나, 조심스럽게 도어를 열고 회장실로 들어갔다. 회전의자에 앉아 다리를 포갠 채 화난 목소리로 전화 상대와 이야기를 하고 있던 칼은, 리건을 보고도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큰 책상 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리건은 그 권유를 사양하고, 선 채로 전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칼이 앉아 있는 뒤쪽의 큰 창으로는 시가지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 리건은 그 멋진 경치에 마음을 집중시키려 했다. 푸르게 빛나는 항구, 담쟁이덩굴로 감싸인 우아한 엠프레스 호텔. 바다를 향해 손을 뻗치고 있는 듯한 도시는 꽃으로 넘치고, 녹색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리건은 이 도시가 좋아지기 시작한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비록 해고당하더라도 여기를 떠나고 싶지 않다......
칼이 수화기를 놓았으므로 경치에서 회색의 눈으로 시선을 옮겼으나 마음의 동요를 감출 수는 없었다. "부르셨다죠?" 이렇게 말한 후 리건은 낮은 소리로 덧붙였다. "회장님."
칼은 엄한 목소리로 "앉으시오." 라고 한마디만 말했다.
"서 있고 싶습니다."
"앉으라고 하잖아!" 어조는 전연 변하지 않았다. "거기에 앉아!"
리건은 의자에 앉아, 심장이 점점 빨리 고동치는 것을 의식하면서 칼의 등뒤 쪽에 정신을 집중시키려 했으나 아무래도 칼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뭐라고 해도 눈앞에 있는 것은 칼, 가까이 있기만 해도 가슴이 짜릿해지는 사람이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회장과 일개 사원의 관계라고 리건은 자신을 타이르며 잠자코 있었다.
"내 눈을 봐요." 칼은 차갑게 말했다. 그러나 리건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자, 신경질을 내면서 "내 눈을 보라고 하지 않아!"하고 소리치면서 주먹으로 책상을 쳤다. 이토록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칼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리건의 긴장의 실오라기는 툭 하고 끊어졌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일부러 한 짓은 아닙니다. 폐를 끼쳤다면 사과드립니다."
칼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리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하지 않았다면 왜 이런 결과가 되었지? 오늘 아침 세 종류의 소문을 들었어. 그중 아무것도 진실에 가까운 것은 없었지만, 심한 것은 내가 회사 돈으로 애인과 딴살림을 한다고 했어."
로브다운 각색이라고 생각하면서 리건의 가슴은 쑤시는 듯했다. "그 편지를 어떤 사람이 읽어 버렸어요. 그 사람이 아마 터무니없는 얘길 조작해서 사람들에게 퍼뜨린 모양이에요. 나는 솔직히 털어놓았지만, 그를 믿은 게 잘못이었나 봅니다."
"누구야?"
"말할 수 없어요."
"말할 수 없는 거야, 아니면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거야?"
"나중이에요." 리건은 몸을 긴장시켰다. "그 편지를 방치한 것이 나빴어요. 처음 생각대로 찢어 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왜 그렇게 하지 않았지?"
회색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액자에 넣어 침대 위에 놔두려고 생각했어요. 좋은 기념물이 될 테니까요."
말이 저절로 입에서 나왔다. "지금까지와 같은 생활 태도를 계속한다면 그것이 필요하겠지. 당신은 같은 남자와는 결코 두 번은 만나지 않았어."
"자기를 잃지 않는 한도 내에서 교제하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같은 나이 또래와 즐겁게 사귀면 어떨까 하고 말했을 뿐이야!"
"앞으로도 이대로 계속해 나가겠어요, 인생에는 변화가 필요하니까요." 리건은 똑바로 칼을 바라보았다. "내 생각대로 살아가겠어요, 같은 과오를 두 번 반복하고 싶진 않으니까요."
칼은 입을 꼭 다문 채 연필로 책상 위를 리드미컬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큼직한 손에는 힘이 넘쳐 있어 이제라도 곧 연필이 부러질 것만 같았다. 저 섬세한 손 끝, 넓적한 손바닥.... 리건은 칼의 손이 가진 분위기를 깡그리 알고 있었다. 한 번 더 저 팔에 안기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치솟아 올랐으나, 리건은 그런 상념을 털어버리며 머리를 쳐들었다.
"당신은 변했어." 칼이 한마디 했다. "당신 덕분이에요." 리건은 눈길을 피하지 않은 채 말했다. "시킨 대로 하고 있을 뿐이에요. 이전의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소녀였는지 알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해야 겠죠."
"어리석은 소녀였다고는 생각지 않아."
"그럼 철부지였다고 수정해도 좋습니다."
"지난 6주간으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아직 무지한 소녀인 셈인데."
"완전히 성인이 되었다고 말하진 않았어요. 아직 배우고 있는 중이니 말입니다. 6주간쯤 더 걸릴 것 같아요."
칼은 "6주간이란 말이지." 하고 비양거리며 일어나 연필을 튀겨 날려 보내고 호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창밖으로 시선을 보냈다. "이 이상 당신을 여기에 근무시킬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겠지?"
"어째서요?"
리건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그러면 뜬소문도 사라질 테고,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당신의 애인이라고 생각진 않겠지." 칼은 고개를 저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갔을 때 당신에게서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부탁하고 싶어!"
칼은 뒤돌아 지그시 리건을 아래위로 훑어보다가 마지막으로 부드러운 꽃봉오리 같은 입술을 바라보았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두 사람이 사흘 낮과 밤을 숲속에 있으면서 내가 아무짓도 하지 않았다고는 생각지 않을 거야. 남자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지."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상관없어요."
"하지만 근무를 계속할 수는 없어."
"알았습니다." 리건은 분노로 몸을 떨면서 일어섰다. "다른 직장을 찾겠어요."
"그런 행동은 내가 허락지 않아."
리건은 잠시 후 가까스로 칼의 말뜻을 깨닫고 맥이 빠졌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아무튼 맨션으로 돌아가 있어, 저녁에 갈 테니까. 좋은 생각이 있어서 그래. 이렇게 되기 전에 손을 써두었어야 했는데." 칼의 말은 애매했다. 리건은 굳이 캐어 묻지는 않았다. "경리부 사람에게는 뭐라고 말하면 좋죠....아직 오전중인데 혼자만 돌아가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
"아무말 하지 않아도 돼, 내가 벨라미에게 말해 둘 테니까. 차를 내주도록 할께."
리건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하면 소문이 진짜였다고 생각할 거예요."
"지금은 그런 것쯤 아무래도 좋아." 칼은 팔목시계를 보았다. "5분 후에 약속이 있으니 같이 갈 수는 없지만, 다섯 시 반까지는 갈 수 있을 거야."
"긴 이야긴가요?"
칼은 애매하게 미소 지었다. "상황에 따라 어떻게 될지 몰라.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말아 줘..... 시간이 없으니까, 그럼 나중에."
곧 이 회사를 그만두고 나간다고 생각하면서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는 기분은 야릇했다. 경리부에 돌아오자 갑자기 실내가 조용해졌다. 리건이 재빨리 책상 위를 정리하고 있자, 옆자리의 수 키본즈가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이 있어?"
"그만두는 거예요." 리건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보면 알아. 하지만 왜지?"
"로브 던컨에게 물어 봐요." 리건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가 대답을 알고 있으니까.... 그 사람은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조차 몰라요." 수의 눈이 빛났다. "그럼 그 소문은 거짓말이구나? 당신과....."수는 위를 향해 얼굴을 쳐들었다. "저 위대한 보스가 설마 당신과 그런 관계라고는 믿어지지 않았어."
"고마와요, 알아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전해 줘요."
차장이 다가와서 무표정하게 "차가 대기하고 있어요. 내가 아래까지 따라갈 테니까."라고 말했다. 리건은 "숨거나 도망치지는 않아요." 하고 농담조로 말하고 웃으며 손을 들었다. "안녕, 여러분. 얌전하게 굴지 않으면 언제 윗사람에게 잘못 보여 목이 달아날지 모른답니다."
엘리베이터 속에서 차장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말은 할 필요가 없었어요. 회장의 귀에 들어가면 큰일 납니다."
"화내시지는 않을 거예요,." 리건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나는 이 회사의 사람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죄송해요, 아무에게나 시비를 걸어서."
모리스 벨라미는 미소를 머금었다. "회장과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충고를 받았을 텐데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편지를 방치해 두지 말라는 말씀은 하시지 않았어요."
엘리베이터가 일층에 닿자 리건은 손을 내밀었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 가지로 감사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즐거웠어요."
현관 앞에는 벌써 차가 대기해 있었고, 리건이 타자 차는 곧바로 맨션으로 향했다. 한낮의 맨션은 기분 나쁠 만큼 조용했다. 리건은 다섯 시 반이 기다려지기도 하고 겁이 나기도 했다. 칼에게는 뭔가 생각이 있는 듯한데, 어떤 것일까?
한 가지만은 분명한 것이, 이제는 더 이상 칼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다섯 시 반이 되어도 칼이 오는 기미는 없고, 다섯 시 45분에 전화가 걸려 왔다. 예의 비서를 통해, 좀 늦겠지만 되도록 빨리 그 곳으로 가겠다고 전해 왔다. 혼자 있으니 나쁜 일만이 머리에 떠올라 비참한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현관의 벨소리가 났다. 조심조심 도어를 여니, 거기엔 뜻밖에도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는 로브 던컨이 서 있었다. "비겁한 짓을 했군." 로브 던컨은 대뜸 싸움을 걸어왔다. "목이 잘렸어!"
"그거 안됐군요. 하지만 당신이 해고당한 건 내 탓이 아니에요."
"시침 떼지 마! 너는 오늘 아침 회장실에 불려갔고, 그 후에 나는 해고됐어. 이것이 우연의 일치라고 하겠어!"
"당신 이름 따윈 한마디도 내지 않았어요." 리건은 어디까지나 냉정히 말했다.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을 찾아내는 건 간단한 일이에요. 퍼뜨리기 전에 그런 생각도 마땅히 했어야죠."
"한 사람, 꼭 한 사람뿐이었어! 내가 말한 게......회사 전체에 퍼지게 될 줄을 어떻게 내가 상상이나 했겠어?"
"소문이란 꼬리가 달려 자꾸 번지는 거예요. 이번 일로 잘 아셨겠죠?"
오전 중 회장실에서의 일을 상기하고는 리건의 노여움은 더욱 심해졌다. "뭐라고 하든 당신은 진실을 말하지 않았어요!"
로브는 방안으로 눈길을 던졌다. "한창 나이의 여자인 달러스로부터 순진무구한 소녀로 마침내 말을 바꿔 탄 셈이군!"
"나가세요." 리건은 목쉰 소리로 속삭였다. "지금 당장 나가 줘요!"
로브는 어깨를 움츠렸다. "물론 가지, 할 말은 다 했으니까."
"너무 지껄였어."
복도에서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색의 눈은 얼음 같았다. "열을 셀 때까지 여기서 꺼져, 꺼지라니까!"
칼보다 키가 크고 가슴 두께도 반쯤밖에 안 되는 로브는 겁을 먹고 달아나듯 가버렸다. 칼은 도어를 닫고 손잡이에 손을 댄 채 가만히 있더니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저 사내는 언제 왔어?"
"5분쯤 전이에요."
리건은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눈치 채이지 않도록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설마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칼은 침울한 리건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나와 달러스의 일로 상상력을 발동시키고 있는 것은 당신 한 사람만이 아니야. 더욱 굉장한 스캔들을 바라는 자도 있을 정도지."
"이상한 상상은 하지 않아요. 한번은 오해했지만, 이젠 아무렇지 않게 생각합니다!"
"어째서 생각이 바뀌었을까?"
"당신이 무척 성실한 분이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숲 속에서 당신은 나의 약점을 이용하려 하시지 않았으니까요."
"신용해 줘서 고맙군, 약간 빗나가 있긴 하지만."
"커피라도 마시겠어요? 아까 마시려는데 그 사람이 찾아와서..."
"독한 위스키를 마시고 싶은 기분이지만, 역시 커피로 해두지. 포트째로 가져와요,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까."
어떤 이야기일까? 리건은 불안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끼며 커피를 가지러 왔다. 거실에 돌아오니, 칼은 몹시 피곤한 듯 소파에 폭 파묻혀 있었다. "겉저고리를 벗어도 좋겠지? 더워서 그래."
칼은 단숨에 커피를 마시고 나더니 이렇게 말했다. "쿨러를 강하게 틀까요?"
"아니, 피곤하니 이대로가 좋아." 칼은 일어나 겉저고리를 벗고 바지를 걷어 올리고 소파에 앉았다. 입술을 깨물고 몸이 굳어 있는 리건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당신을 해고해서 나쁘진 않았지?" 리건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으나, 이윽고 눈이 흐려지면서 시선을 떨구었다.
"또 그 이야긴가요?"
"그래, 분명히 해둬야 해."
"왜요?"
칼은, 리건에게라기보다 자신에게 짜증이 난 듯 크게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아무 말도 해줄 것 같지 않으니까 내가 분명히 해둘 수밖에 없겠군." 칼은 일어나 리건의 손에서 커피 잔을 빼앗아 테이블 위에 놓고 리건을 안아 올렸다. "이렇게 하는 게 좋겠어."
리건은 몸을 잔뜩 긴장시킨 채 칼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칼........"
"긴장하지 않아도 돼, 무서워 할 것 없어." 칼은 리건을 안은 채 지금까지 리건이 앉아 있던 의자에 앉아 자기 입술을 부드러운 그녀의 입술에 포갰다. 이렇게 다정하고 이해성 있는 칼은 처음이어서, 리건은 분명히 칼의 입맞춤에 응하기 시작했다. 지금 같으면 기다릴 수가 있다, 칼은 무책임한 생각은 하고 있지 않으니까.
"정직하게 대답해 줘서 기뻐." 칼은 그녀의 입술 앞에서 속삭였다. 큼직한 손은 리건의 가슴의 고동을 느끼고 있다. "지금의 당신은 자기 양심에 거역하지 않고 솔직하게 행동하고 있어."
"그래요?"
리건은 세이빙 로우션의 향기를 맡고 생긋 웃었다. "참 좋은 냄새가 나요!"
칼도 덩달아 웃었다. "그것은 남자가 하는 말이야!"
"하지만 당신은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향수 같은 건 뿌리지 않으니까요." 황홀한 듯이 이렇게 말한 리건이었으나, 갑자기 부끄러워져서 외면했다. 달아나려는 리건을 칼은 가로막았다. "이대로 있지. 냉정해지는 것은 나중이라도 돼. 마주보고 있는 것보다 이렇게 하고 있는 게 말하기 좋겠지?"
칼은 어떻게 이야기의 실마리를 꺼낼까 생각하다가 잘 되지 않자, "무슨 이야기인지 알고 있어?"하고 물었다. 리건은 칼의 눈길을 피하며 끄덕였다. "원하시는 대로 제가 해드리길 바라시는 거죠?"
칼은 표정을 굳혔다. "해줄 수 있겠지?"
"모르.... 모르겠어요."
"당신은 내게 사랑받고 싶어 해." 칼은 자신을 타이르듯이 말했다. "바로 아까 내가 생각했듯이."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당신은 유순해지지 않았어? 진심을 듣고 싶어."
"대답은 <노우>입니다. 분명하죠."
회색의 눈이 빛났다. "설득해도 소용없나?"
"소용없어요." 리건은 몸을 비틀어 달아나려 했으나 칼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칼, 그만 해 줘요!"
"침착해, 아무 짓도 안 해."
칼은 팔의 힘을 약간 뺐다. "<노우>라고 한 것은 현명했어. <예스>라고 했으면 엉덩이에 멍이 들도록 때려 주었을 거야!"
리건은 눈살을 찌푸리며 회색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말씀이죠? 그리고 왜......."
"당신은 나와 결혼하는 거다." 리건이 멍해 있자, 칼은 재차 확인했다. "그러니까 정신을 차려야지. 여자는 결혼식 날 밤의 일을 기억해 둬야 하니까."
리건은 칼이 진정임을 알고 기뻤으나, 싸늘한 눈을 본 순간 모든 것을 이해할 것 같았다. 칼은 달러스에 대한 사랑을 속이기 위해 내가 필요할 뿐이다. 젊은 아내는 영원한 연인의 벌충인 셈이지. 그러나 리건은 냉정히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 아무리 달러스 대신이라 해도 칼이 결혼을 신청한 것은 사실이니까, 내가 열심히 그를 사랑하면 달러스란 존재를 그의 마음에서 추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리건은 자신의 감정이 진짜 사랑인지, 망상 속에서 만들어진 그 무엇인지 아직은 자신도 잘 몰랐다.
"이봐!" 칼은 웃으면서 리건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대답해 주지 않겠어?"
"그것이 질문이었나요? 당신은 아직 물으시지 않았어요."
"당신을 다루는 법을 잊고 있었어. 무릎을 꿇고 부탁하면 되나?"
리건은 그만 웃음이 터졌다. "그런 건 당신답지 않아요."
"그럼 어떻게 하면 좋지?"
리건은 좀 전에 자기를 꿈의 세계로 인도해 준 입술, 뭣이든 꿰뚫어 보는 회색의 눈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아직 왜 저와 결혼하고 싶으신지 말하지 않으셨어요. 왜죠? 언제 그렇게 결정하셨어요?"
"오늘 아침 당신이 내 방에 들어왔을 때였어."
"네? 정말?"
"정말이지."
칼은 리건의 뺨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떨리는 입술을 어루만졌다. "내 방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미칠 것만 같았어. 당신이 들어왔을 때, 노여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오히려 당신을 껴안고 키스하고 싶을 정도였어. 그때 그런 식으로 당신을 쫒아내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지."
리건은 칼의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되진 않았으나, 칼이 교묘하게 한 가지 사실을 피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도 부족해? 키스했을 때는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았는데."
"당신이 의심할 수 없도록 하셨잖아요." 리건은 입을 비죽거렸다. "내 마음속을 꿰뚫어 보시는 걸요."
"매일 당신을 안고 잠자고, 아침에 눈을 뜨면 당신이 곁에 있다, 언제나 원할 때 당신을 껴안을 수 있는 거지, 어때?"
리건은 맥없이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기대에 부응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별로 염려할 것은 없다고 생각해. 키스도 잘하고, 당신은 감수성이 예민한 귀여운 여자야."
새빨개진 리건을 보고 칼은 소리 내어 웃었다. "<예스>라는 대답을 얻었다고 생각해도 좋을까?"
"<노우>라고 해도 그렇게 생각하시겠죠?"
"그렇지는 않아. 하지만 당신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못 견디겠어. 그렇게 쉽사리 단념할 수는 없어." 리건은 공중에 뜬 듯한 기분이 되었다. 상대방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은 것은 사랑하는 것 다음으로 멋진 일이 아닐까?
리건을 충동적으로 입술을 칼의 입술에 포갰다.
"내가 너무 어리지 않나요?" 잠시 후 리건은 칼의 어깨에 기대어 중얼거렸다. "이전에 그런 말을 하셨지요!"
"그때엔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당신은 그동안 많이 성장하여 어른이 되었지....그러니까 열 두 살의 나이 차가 있는 걸 실감할 수 없어. 오히려 더 호흡이 맞을지도 몰라."
칼은 잠시 사이를 두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언제 21세가 되지?"
"아직 아홉 달 있어야 해요."
"아, 당신은 그렇게도 젊어?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직 소녀에 지나지 않았을 텐데. 스물 한 살의 생일날에는 축하를 해야지."
그 무렵 나는 케니 만이 내려다보이는 하얀 저택에서 살고 있을까? 하지만 달러스는 어떻게 할까? 리건은 달러스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으나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랐다. 결혼한 후 칼이 다른 여자를 한 지붕 밑에 놓아둘 리가 없다. 내가 꼭 그녀를 잊게 만들어야지, 아무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 가지 이득이 있어요." 리건은 담담히 말했다. "이제 저도 좀 더 일을 계속할 수 있겠군요."
"안 돼."
칼이 엄한 소리로 말했다. "직장을 가지면 안 돼."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지요?"
"결혼 준비를 하는 거야, 결혼식은 이달 말이니까.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고 싶어?"
리건의 몸에 쾌적한 전율이 치달았다. "그런 걸 갑자기 말하시면......."
"그것은 장차의 즐거움으로 남겨 두기로 하지." 칼은 다정하게 키스하고는 일어섰다. "이제 슬슬 돌아가는 게 좋겠어."
"가지 않으면 안 되나요?" 리건은 응석을 부리듯 말했다.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그만 아침까지 눌러 있게 될 것 같아. 그렇게는 하지 않기로 마음에 맹세했어."
"나와 함께 있고 싶지 않으세요?"
"그런 말을 하지 마, 마음이 흔들리잖아. 내일 또 올께, 낮 무렵에. 짐을 꾸리고 기다리고 있어."
"무슨 말씀인지?"
"케니로 가는 거야. 당신 혼자 여기에 있게 할 수는 없잖아?"
"나를 감시하겠다는 말씀인가요?"
칼의 눈이 번쩍 빛났다. "아니야, 늘 곁에 있어주길 바라서지. 오늘처럼 이상한 녀석이 침입해 오면 곤란하니까."
리건은 줄곧 알고 싶었던 이야기를 처음으로 물어보았다. "내가 가는 것을 달러스가 싫어하지 않을까요?"
칼의 입술이 엄한 선을 그렸다. "그 여자는 그 여자 나름으로 할 일이 있어. 우리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올 무렵엔 당연히 나가게 될 거야."
리건은 칼이 자기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준 것이 기뻤다.
"칼, 이달은 2주 밖에 남지 않았어요!" 리건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그럼, 나도 알고 있어."
칼은 리건의 얼굴을 두 손에 끼고 수수께끼 같은 눈으로 가만히 쳐다보았다.
"정말 괜찮은 거지?"
"네, 좋아요."
리건은 칼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는 사랑해 주지 않겠지만 자기를 필요로 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스스로 타이르면서 작은 소리로 웃었다. "오빠가 이 소식을 들으면 놀라겠죠?"
"놀랄 건 벤만이 아니야. 온 시내가 왁자하게 떠들어대겠지. 당신을 케니로 데려가려는 것도 사실은 매스컴으로 보호해 주기 위해서지."
"당신이 유명인이란 걸 깜빡 잊었었어요."
"당신은 나의 그렇지 않은 면만을 봤으니까 그렇기도 하겠지. 오늘 아침 내 오피스로 불러 꾸짖은 건 미안해, 푸른 눈의 아가씨. 개인과 개인의 관계로 이야길 했어야 했어. 어차피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테지만."
"그럴까요?" 리건은 칼의 마음을 분명히 알고 싶었다. "깊이 생각할 시간이 있었어도 같은 행동을 취했을까요?"
"훨씬 이전부터 생각했지. 분명히 마음에 정한 것은 지난번에 왔을 땐가? 내가 당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목하고 있었던 것은 왠지 알아? 당신을 다른 청년에게 뺏기고 싶지 않아서야. 당신은 무척 다정다감한 소녀니까."
"하지만 그건 상대가 당신이기 때문이에요. 누구에게나 손가락 하나 내 몸에 대지 못하게 했는걸요." 칼은 놀라 가만히 리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당신은 내게 안겼을 때는 즐거워 보이던데...... 그런 짓을 해선 안 된다는 이유는 아무데도 없잖아. 여덟 번 데이트했으니, 몇 번 키스쯤은 하고 싶었을 거 아니야. 뭐라고 해도 맨 처음의 당신을 나는 알고 있으니까."
"그것과 이건 달라요."
"상대가 나니까 그렇다는 거야?"
칼은 리건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자 기쁜 듯이 웃었다. "다른 사내에겐 허락하지 않은 걸 내게만 허락했다니 기뻐." 리건은 마음의 설렘을 의식하여 눈을 감았다. "저를 두고 숙달되는 속도가 빠르다고 하셨죠?"
"어떤 의미에선 그렇지. 하지만 아직도 멀었어."
칼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아. 이제 이런 얘기를 잊어버리고 침대에 들어가 좋은 꿈을 꾸어요." 칼은 가벼운 키스를 하고 돌아갔다. 리건은 주의깊게 현관문을 잠그고 잠시 그대로 도어에 기대어 있었다. 여심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칼의 주위에는 많은 여인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하지만 여자의 마음 구석구석까지는 알고 있지 않다. 여기에 남아서 나를 안아주고, 나를 완전히 그의 것으로 해주길 바랐는데, 그렇게 돌아가 버리다니......
‘사랑하고 있어.’ 라는 그 한마디를 해주지 않았다고 해서 상처 입는 내가 이상한 것일까? 나는 그 한마디를 줄곧 기다리고 있었는데. 침대에 들어가서도 리건은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칼은 나를 완전히 자기 소유로 만들었을 때 확실한 자기 마음을 털어놓을 것이다. 그를 믿자. 아무튼 지금은 칼을 믿을 수밖에 없다. 리건의 마음속은 칼과 결혼해서 그의 여자가 되고 싶다는 소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10
바다도 하늘도 한껏 푸르고 맑아 케니 만에서 먼 산마루까지 또렷이 전망할 수가 없었다. 바다로 이어진 고대(高臺)에서 만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서 있는 흰 저택을 보면서, 지그시 솟구쳐 오르는 기쁨을 리건은 느끼고 있었다. 이제 곧 우리의 집이 되겠지. 뜰에 장난감을 늘어놓고 놀기에 여념이 없는 아이들......검은 머리, 회색 눈의 칼을 꼭 닮은 칼 2세. 칼은 엄하지만 좋은 아버지가 될 것이다. 거기까지 상상한 리건은 너무나도 성미가 급한 자신을 깨닫고 얼굴이 빨개졌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이런 생각을 하다니!
가정부인 마리가 활짝 웃으며 두 사람을 맞았다. 맨션을 나오기 전에 캐나다식 점심을 먹은 둘은 소화를 위해 바다에서 헤엄을 치기로 했다. 이전에 묵었던 때와 같은 침실에 안내된 리건은 노란 비키니로 갈아입고 큰 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춰 보았다. 이전에 여기 왔을 때와는 크게 차이가 나, 호리호리한 몸에서는 제법 성숙한 여성의 내음이 풍긴다. 칼이 이 사실을 알아준다면, 우리의 관계도 변할 수 있을 텐데......
칼은 허리까지 오는 흰 비치웨어에 샌들을 신은 차림으로 리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수영복 차림을 보고 별다른 말이 없었으나, 그 눈의 미묘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은 리건은 득의만면하여 생긋 웃었다. 바다는 따뜻하고 기분이 좋았다. 칼은 발이 닿지 않는 곳으로는 절대로 가서는 안 된다고 명령했다. 언제나처럼 리건이 불만을 표시하면, 손을 벌려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해안에서 멀리 떨어지면 물의 흐름이 갑자기 달라져 당신 혼자서는 돌아오지 못하게 돼. 내가 옆에 있지 않을 때엔 저 바위보다 멀리 가서는 안 돼!" 칼의 말투가 강해졌다. "알았지, 리건!"
"지금은 당신이 옆에 있잖아요."
리건은 웃으면서 물속에 잠겼다가 칼의 등뒤에서 얼굴을 내밀며 손을 흔들었다. "우리 경주해요!" 칼은 힘차게 헤엄쳐 뒤쫒아 와서는 리건의 몸을 꼭 붙잡았다. 얼굴이 굳어 있다. "농담이 아니야! 당신도 이젠 농담과 참말을 구별할 줄 알아야 돼. 나의 충고를 옳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앞으론 풀에서만 헤엄쳐야 해!"
허리에 칼의 손톱이 박혀 들어옴을 느끼면서 리건은 "미안해요."하고 순순히 사과했다. "좀 장난을 쳤을 뿐인걸요, 칼. 진짜로 말을 듣지 않으려 한 건 아니에요."
"사과할 마음이 있으면 바다에서 나와서 해줘. 알았지?"
리건은 "네."하고 대답했다. 바다에서 올라와 비치웨어를 입고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뒤에서 칼의 손이 뻗어 왔다. 한순간 리건의 몸은 긴장했으나, 귓불에 부드러운 입술이 느껴져 긴장을 풀었다. "화를 내서 미안." 칼은 귓가에서 속삭이며 리건을 단단히 껴안았다.
"아름다워, 리건. 당신은 남자의 마음을 자극하는 귀여운 마녀야! 아, 당신을 갖고 싶어!"
호흡이 흐트러지며 리건은 목쉰 소리로 속삭였다. "결혼식 후까지 기다리자고 한 건 당신 쪽이에요."
"하지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후회되기 시작하는 걸." 칼이 자기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리건의 얼굴은 밝아졌다. "고작 2주일이지 않아요, 칼. 그쯤은 기다릴 수 있겠죠?"
"당신은 기다리고 싶어?"
"네, 그래요."솔직한 심정이었다. "그게 서로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게 쉽지 않을 것 같아."
리건은 ‘칼, 사랑해요.’하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목이 잠겨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반드시 어느 날엔가 그의 팔에 안겨서 나는 그렇게 속삭이리라. 수영을 한 뒤 칼은 회색 양복으로 갈아입고 회사로 나갔다. 혼자 남은 리건은 풀 가의 긴 의자에 누워 일광욕을 하기로 했다. 저녁에 칼이 돌아오면 함께 식사를 하고 산책이나 하자. 내일은 토요일이니까 하루 종일 같이 있을 수가 있다. 서로 이야기해야 할 일들이 많다. 다음주엔 웨딩드레스를 주문해야지.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부에게 신랑이 키스할 때 비로소 열리게 될 베일...... 꿈은 아니겠지......... 그러나 리건은 어느 교회에서 식을 올리는지, 손님은 몇 명이나 초대하는지, 구체적인 일들은 하나도 몰랐다. 단지 옆에 칼이 서 있어 주기만 하면 족했다. 칼이 나를 아내로 맞은 걸 절대로 후회하지 않도록 하고, 반드시 행복하게 해 줘야지. 칼과 달러스에 관한 일은 모두가 나의 상상에 지나지 않으며, 사랑하고 있다고 말해 주지 않는다 해서 칼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도 사랑한다고 말로써 표현한 적은 없으니까.
선글라스를 쓴 달러스가 우아한 몸놀림으로 안마당에 들어왔으므로 리건은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고전적인 미인 타입인 그녀의 표정은 무척 정돈되어 있었으나, 그 내부에는 소름이 끼치도록 차가운 그 무엇이 감추어져 있다.
"방해가 되었나요?" 비단같이 매끄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크림을 잔뜩 얻어먹은 고양이 같은 얼굴인 걸?"
"그래요, 목구멍에서 골골 하고 소리도 내고 있어요."
리건은 정면으로 도전을 받아들였다. "싸움은 하고 싶지 않아요. 우린 친구가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좀 냉정히 이야기나 했으면 좋겠어요."
달러스는 침착하게 이런 말을 하는 리건을 보고 놀라 눈이 둥그레졌으나 미리 준비해 온 듯한 말을 뱉기 시작했다. "그가 아가씰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죠?"
얼굴이 굳어져 왔으나, 리건은 애써 냉정하게 대답했다. "어떻게 그런 걸 아시죠?"
"그건 말이에요, 아가씨........ 당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내가 칼 제럴드란 남자를 더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요!"
동요를 보이면 달러스가 즉각 공격해 올 것을 알았기에 리건은 침착하게 말했다. "분명히 지금은 그렇겠죠. 하지만 앞으로는 달라요. 날마다..... 밤이나 낮이나 칼과 같이 지낼 테니 말이에요."
달러스는 날카로운 소리로 웃었다. "칼은 곧 아가씨에게 싫증을 느낄 거예요. 그도 보통 남자니까..... 지금은 철부지 소녀에게 이것저것 가르쳐 주고 싶을 뿐이지. 하지만 칼은 호기심이 사라지고 나면 즉시 내게로 돌아올 거예요."
리건은 파랗게 질려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거짓말 장이!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칼이 나를 사랑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파란 눈이 조롱하는 듯한 빛을 발했다. "아가씬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로군! 년 전 나를 빅토리아로 데리고 온 것이 누구라고 생각해요? 칼은 알게 된 그 순간부터 내게 반해서 즉각 결혼신청을 해 왔어요."
"그런데 그의 아버지와 결혼했다니, 이상한 얘긴데요!" 리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달러스는 우아하게 어깨를 움츠렸다. "칼이 폴에게 나를 소개해 주었지요. 그 무렵의 폴은 젊고 원기 왕성했죠, 50이 갓 되었을까 했으니까. 만나자마자 의기투합해 버렸지 뭐예요."
달러스는 그때 일을 상기하는지 킥킥거리고 웃었다. "그는 아들에게서 나를 뺏고는 좋아하더군요. 그들은 성격이 서로 정반대여서 매사에 의견이 맞지 않아 싸움만 했어요. 마침내 칼은 결혼식 전날 이 집을 나가서 한 달 이상이나 돌아오지 않았지. 하지만 아무래도 나를 끝까지 미워할 순 없었던 모양이야."
몸의 선이 비쳐 보이는 흰 드레스에 몸을 감싸고 있는 달러스는 긴 의자에 앉아 실크 스토킹을 신은 다리를 우아하게 포갰다. "그로부터 두 달 후, 폴은 교통사고로 죽어 버렸어요."
리건은 꿀꺽 침을 삼켰다. "아버님께선, 당신에게 유산을 남기지 않으신 모양이죠? 어마, 죄송해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런 말을 해서."
"맞아요." 달러스는 담담히 계속했다. "결혼했어도 폴은 유언장을 고쳐 쓰려고는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유언대로 칼이 전 재산을 물려받은 거죠. 물론 법정에서 싸울 수도 있었지만, 그런 짓을 하면 제럴드라는 이름에 상처를 입히게 되고, 나 또한 별로 재산이 탐나지도 않았어요. 칼이 내가 필요한 만큼 쓰도록 해주는 걸요, 무척 관대하게 말이에요. 아가씨의 남편 될 사람은 참 이상한 타입입니다, 이제 아셨겠지만."
"네, 알아요." 리건은 허리를 굽혀 비치웨어를 손에 들었다. "이젠 더 이상 당신에게서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군요." 차가운 목소리가 뒤쫒아왔다. "사실인걸. 칼은 지난 2년간 나를 이 집에서 쫒아내진 않았어요. 내가 그의 곁을 떠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도 나를 놓칠 수가 없었던 거예요."
마음은 아팠지만 리건은 질세라 반격했다. "지난번 시내에서 점심 식사를 하면서 당신은 오크만의 집 얘길 하셨죠? 칼은 이 집에서 나가도 좋다는 뜻의 말을 했다고 기억하는 데요."
"그때 칼은 화를 냈을 뿐이지. 그가 자기를 짜증나게 하는 사람을 어떻게 곯려주는지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달러스는 냉소하듯 코로 웃었다. "아가씨, 좀 더 어른이 되어 눈을 크게 뜨고 봐요. 칼은 자식이 필요해서 당신과 결혼하는 거예요, 나는 아이 같은 건 갖고 싶지 않으니까."
"너무하군요."
리건은 몹시 불쾌한 듯 중얼거렸다. "믿을 수 없어요."
푸른 눈이 또 한 번 번쩍하고 빛났다. "이젠 조금 알 것 같기도 하죠? 칼에게 직접 물어보고 그의 반응을 살펴보면 더욱 좋겠지. 내 말이 사실이라면 입 오른쪽이 경련을 일으킬 테니. 자기는 아마 모르겠지만, 나는 아는걸요."
리건은 달러스에게 얕보이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달러스는 머리가 좋고, 직관력이 날카로운 여자인 것이다. 다만 그 통찰력이 작용하는 분야가 한정되어 있었지만..... 리건은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가슴을 쫙 펴며 집안으로 들어갔으나, 방문을 닫는 순간 긴장감이 풀려 침대에 쓰러져 흐느끼기 시작했다. 달러스의 말 따위를 믿을 성 싶어! 칼이 자기를 버리고 아버지와 결혼해 버린 여자를 사랑하다니, 거짓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자기가 얼마만큼 칼을 이해하고 있는지 자신이 없었다. 내가 보고 싶은 각도에서만 그를 보고 있지나 않은지? 달러스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푸른 눈과 마주칠 용기를 잃고 리건은 침대 속에서 꾸물거리고 있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 뜻밖에도 일찍 돌아온 칼이 모습을 나타냈다. "왜 그래?" 칼은 침대 옆으로 앉아서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기분이 나빠?"
"아마도 일광욕이 과했나 봐요." 리건은 잦아들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단지 그뿐이에요."
칼은 이마에 손을 대보고 천천히 뺨을 쓸었다. "가엾어라, 모처럼의 우리들의 첫 주말인데."
"아침까진 좋아지겠죠." 가슴은 찢어질 것 같았으나, 리건은 차분히 말했다.
"그럴까? 의사를 부르는 게 좋지 않을까?"
"그만두세요!" 리건은 저도 모르게 소리치면 눈을 떴으나, 놀라 눈썹을 찌푸린 칼을 보고는 소리를 낮추었다. "부탁이에요, 칼. 소란을 피우지 마세요. 오늘밤만 푹 쉬고 나면 꼭 나을 테니까요."
"알았어." 칼은 아기를 어르듯 타일렀다. "내일 아침까지 용태를 보자구. 하지만, 잠옷으로 갈아입고 자는 거야. 잠옷은 옷장에 넣어 두었어?"
칼이 옷장 쪽으로 걸어가자, 리건은 당황해 하며 말했다. "괜찮아요. 나, 병이 아니니까."
"억지로 환자로 만들려는 게 아니야." 칼은 부드럽게 말했다. "얌전히 있어야 해, 베이비."
"그런 말투는 그만둬요!"
리건은 칼의 눈매가 매서워짐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해요, 이렇게 큰소릴 지르려 하지는 않았는데...."
칼은 지그시 리건을 보고 있다가 "머리가 많이 아프면 그럴 수도 있겠지. 아스피린을 갖다줄께."하고 말하면서 엷은 네글리제를 던져 주었다. "곧 돌아올게."
컵과 약 두 알을 갖고 칼이 돌아왔을 때, 리건은 침대 속에 있었다. 마지못한 듯한 얼굴로 약을 먹는 리건을 보는 칼은, 터지려는 고함을 참는 듯했다. "이제 잠을 자요, 나중에 또 보러 올 테니까."
리건은 ‘그런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되는데.’하고 생각했으나 "알겠어요."라고 대답하고는 눈을 감았다. 칼은 잠시 침대 옆에 서서 리건을 내려다보더니 천천히 방에서 나갔다. 아스피린의 약효 때문인지 리건의 머리는 맑아지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달러스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것은 상관없다. 칼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올 때까지 그 여인을 이 집에서 나가게 하겠다고 말했고, 과거에 둘이 어떤 관계였든 간에 내 마음은 편치 않을 테니까. 칼을 믿고, 있는 그대로의 칼을 받아들이기로 하자. 설사 그의 일면밖에 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것대로 좋지 않으냐....
이튿날 아침 상쾌한 얼굴로 아래층으로 내려간 리건은, 안마당의 테이블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심술궂은 달러스의 푸른 눈이 힐끔힐끔 자기를 보고 있는 것을 느꼈으나 그것을 전연 눈치 채지 못하는 것처럼 즐겁게 행동했다. 영문을 모르는 칼은 원기를 되찾은 리건을 보고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리건은 그러한 칼의 마음 씀이 기뻤다. 입속에는 아직도 씁쓰름함이 좀 남아 있었지만........
칼과 리건은 캔벨 강을 지나 엘름 폭포가지의 해안선을 드라이브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멋진 경치를 감상하면서, 둘은 가지고 온 도시락을 펴놓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한두 번 칼은 리건의 서먹한 태도를 감지하고는 얼굴을 긴장시켰으나 굳이 그 이유를 물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리건도 마음에 걸리는 문제는 숨겼다. 명랑을 가장한다는 것은 부질없음을 알고는 있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인적 없는 마콕스 계곡가에 차를 세우고 칼의 팔에 안겼을 때, 리건은 달러스가 했던 말의 진부를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입맞춤에 응하는 리건의 태도가 어쩐지 평소와는 다름을 감지한 칼은, 얼마 후 조수석 시트에 기대어 있는 리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싫어?"
"그렇지는 않아요." 리건은 마음속의 혼란을 감당치 못하고 소리쳤다. "물론 그럴 리는 없어요!"
"할 말은 그것뿐인가?" 칼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나는 장님이 아니야. 손끝이 스치기만 했는데도 당신의 몸이 굳어졌어."
"미안해요."하고 말하면서 리건은, 칼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기 위해 그의 듬직한 가슴에 기대었다. "싫은 건 아니에요. 정말로 당신 것이 되고 싶어요. 하지만 그런 감정이 너무 강해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당신도 말했잖아요, 감정을 억누르기란 쉽지 않다고."
"그것은 내 이야기야." 칼은 리건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당신도 그럴지 모르겠군. 하지만 나는 한번 맹세한 일은 절대로 깨뜨리지 않는 인간이야. 그러니까 안심해도 좋아요."
리건은 신경질적으로 떨면서 웃었다. "하지만 제 쪽에서 약속을 깰 것만 같아요! 앞으로 2주간이나 기다려야 하다니, 견딜 수가 없을 것 같군요."
칼은 괴로운 듯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어떻게 하자는 거야? 앞으로 2주간을 당신에게 접근도 말라는 건가?"
리건은 큰소리로 부정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하고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못난 짓이 어디 있어?"
칼은 리건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리게 했다. "리건, 이젠 그만둬. 정말로 화낼 테다!"
"아파요, 칼."
"이젠 게임을 끝내는 거다!" 칼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말 좀 해 봐!"
아무 말도 할 것이 없었다. 아니, 리건으로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본심은 아니었어요. 단지 당신의 마음을 알아보고 싶어서...."
"어쩌겠다는 거지?"
회색눈이 노여움으로 위험한 빛을 발했다. "몰라요, 정말 몰라요."
리건은 회색 눈으로부터 시선을 피했다. "칼, 부탁이에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어른이 된 거지?" 칼은 거칠게 말을 던졌다. "어린애 취급을 하지 말라고 졸라대더니, 이젠 또 질이 나쁜 어른이 하는 짓을 흉내 내다니! 아직도 그러한 태도를 계속 취하겠다면 약속 따윈 잊어 주겠어. 하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당신은 기쁘지 않을 거야. 화가 잔뜩 난 채 끌어안아 봤자 즐거울 리가 있겠어!"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시동을 걸고 있는 칼에게 리건은 작은 소리로 변명했다. "나 자신도 잘 모르는 일이에요." 그러나 칼이 화가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기에 리건도 약이 올라 쏘아붙였다. "나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것, 후회하고 계시죠? 나, 영국으로 돌아가도 돼요."
칼은 돌과 같은 눈으로 리건을 노려보았다. "후회 따윈 안 해. 당신도 그렇지? 당신은 내 아내가 되는 거야. 어떻게 하든 기어코 당신을 어른으로 만들고 말 테다! 이젠 더 이상 지껄이지 말아!"
모든 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으나 리건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어린애 같은 짓은 하지 않겠다고 방금 맹세해 놓고 또 같은 짓을 해서 칼을 화나게 만들었다.... 칼과 같은 남자는,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간다. 머리는 잘 알고 있는 듯하여 그런 생활 방식에 자신을 맞추려고 하는데, 리건으로서는 뭔가 분명치 않은 부분이 남는 것이었다.
둘이 케니 만으로 돌아온 것은 벌써 해도 기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리건은 달러스와 칼을 거실에 남겨둔채 곧 옷을 갈아입으러 나갔다. 심플한 무명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입고 돌아오니, 안마당을 향해 열려 있는 유리문 앞에 칼이 서 있고 조금 떨어진 쇼파에 달러스가 앉아 있었다. 둘 다 입을 다물고 있는데, 그 사이에는 전기가 통하는 듯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어 리건은 막연한 불안에 사로잡혔다. 저녁 식사 중에도 불안감은 떠나지 않아 리건은 제대로 음식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으며, 디저트를 받아놓았을 때에는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안마당으로 나와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셋은 식후의 커피를 음미했다. 새파란 하늘이 보랏빛을 띤 남색으로 변하면서, 남서 방향에서 끝이 붉게 물든 밤의 구름이 흘러오고 있었다. 셋이 모두 말없이 자연의 파노라마를 지켜보고 있는데, 그 장소의 공기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아, 리건은 칼에게서 일찌감치 취침하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 그 긴장감에서 달아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어제는 일광욕을 너무 오래 해서 몸의 컨디션이 나빴었는데, 오늘은 또 너무 멀리 나갔던 것 같아. 기분은 어때?" 리건은 달러스에게 등을 보인 채 고개를 저었다. "좀 피곤할 뿐이에요.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내일은 늦게까지 푹 쉬어도 좋아요, 휴일이니까." 리건은 방으로 돌아와서도 잠이 오지 않아, 조금 후에 일어나 창가로 가서 파도가 은빛으로 반짝이며 빛나는 어두운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밀려오는 파도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도어를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이 켜져 있는 게 보여서." 변명처럼 말하면서 칼이 얼굴을 디밀었다. "불을 끄는 걸 잊고 잠이 들었나 싶었지. 그런 데서 뭘 하고 있지?"
"바다를 보고 있었어요. 좀 생각할 일이 있어서."
리건은 솔직하게 대답하고는 불쑥 이렇게 물었다. "칼, 결혼하면 곧 아기를 갖고 싶어요?"
지금은 이런 걸 물을 때가 아닌지 모르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그의 생각을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칼은 도어의 손잡이에 손을 갖다 댄 채 어리둥절해 있다가, 말을 고르면서 대답했다. "생각한 적은 없지만 장차는 갖고 싶군." 칼은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물었다. "당신은 원치 않아?"
리건은 힘없이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아니오."
칼은 방으로 들어와서, 맨살이 드러나 있는 리건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얹었다. "이런 모양으로 창가에 서 있으면 안 돼. 감기 들지 않겠나."
"기분이 좋은 걸요." 리건은 몸이 굳어진 채 말했다. "우리 정말 잘 해 나갈 수 있을까요?"
"염려하지 마." 칼은 낮은 소리로 분명히 말했다. "결혼하면 모든 게 잘 될 거야."
"하지만 우린 다르잖아요?"
"아니야, 인간이란 환경 여하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야."
"결혼하면 나도 어른이 될까요?"
"오래 걸리겠지만..." 칼은 허리를 굽혀 리건의 이마에 키스했다. "오늘은 화를 내서 미안해. 내가 잘못 했어."
"아니에요, 내가 잘못했어요."
"그럴지도 모르지." 입이 일그러졌다. "당신은 때를 잘못 택했을 뿐이야. 그런 감정은 폭발하기 쉬우니까. 남녀간의 일은 전연 모르는 채로 결혼하는 게 좋을 거야."
리건의 가슴은 아팠다.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사람에 따라서겠지. 하지만 결혼식까지 자제한다는 약속을 어긴다는 것은 당신에겐 좋지 않은 일이다 싶어. 나중에 돌이켜보고 즐거운 추억이 될 날이 당신에겐 필요할 테니까 말이야."
"남자는 다르다는 거예요?"
"똑같지는 않지. 결혼식이란 여자를 위해 있는 거야. 신랑은 단지 액세서리일 뿐이야. 피로연이 끝나고 손님들이 돌아간 후 비로소 남자의 시간이 찾아오지. 그리고 그때 신부는 아내가 되는 거야."
칼은 따뜻한 손으로 차갑고 작은 손을 감쌌다. "결혼식 때는 벤에게 아버지 대역을 부탁하고 싶겠지?"
"물론이죠!" 리건의 눈이 빛났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좋죠?"
"이 삼일 내로 로이드에게 연락해서 알려 줘야지."
이 소식을 듣고 오빠는 어떤 얼굴을 할까? 리건은 잘 알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 3년의 공백을 메울 노력을 해야만 한다. "오빠가 여기에 올 수 있도록 주선을 해주시면 좋겠는데..." 리건은 미소를 띠었다. "당신에겐 불가능한 일은 없겠지요?"
"모든 것에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 칼의 얼굴이 약간 그늘졌으나, 생각을 고쳐 먹은 듯 리건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대고 일어섰다. "이런 데서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돼요."
"네, 곧 침대로 들어가겠어요." 리건은 이렇게 대답하면서, 칼이 푸른 눈을 아양부리듯 빛내는 달러스에게 가버리기라도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무척 불안했다. 말을 나누지 않아도 서로 통하는 듯한 두 사람 사이로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자신이 안타깝기만 했다. 도어가 소리를 내며 닫혔을 때, 리건은 절망감으로 그 자리에 쓰러질 듯했다.
11
다음날부터 리건의 신변은 갑자기 부산해지기 시작하여 사소한 일 따윈 걱정할 틈도 없었다. 리건 페리스라는 여성이 제럴드 코퍼레이션의 회장과 결혼한다는 뉴스는 캐나다 사교계를 뒤흔들었다. 리건은 웨딩드레스를 가봉하는 동안, 그러한 흥분된 분위기를 양장정 주인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머리 장식은 드레스에 어울리는 면직물로 하고, 베일은 처녀라면 누구나가 꿈꾸는 흐르는 듯한 것으로 정했으나, 결혼식 당일의 일을 생각하니 리건은 약간 머리가 무거워졌다. 칼은 신부의 모습을 보고 아름답다는 말은 던져 주겠지만 가장 중요한 말은 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후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
공식 발표는 신문의 짧은 기사와 작은 사진뿐이었으나, 시내의 어디를 가도 <미래의 회장부인>이라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칼은 유명인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리건은 그러한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아 칼에게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영화 스타나 왕실 사람들 생각을 해 봐요. 한 걸음만 밖으로 나오면 늘 매스컴의 감시를 받지. 세상 사람들의 관심도 오래 가지는 않아. 지금까지 독신으로 지내온 사나이가 이렇게 예쁜 처녀의 하트를 명중시켰으니까 모두가 놀라 떠들어대고 있을 뿐이지. 시중의 사나이들은 모두 신문에 실린 당신의 사진을 보고 질투할 거야."
"칼, 제발 그런 비꼬는 듯한 말투는 안 하시는게 좋겠어요. 당신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지 않는 사람도 있을 줄 믿어요."
칼의 눈빛이 좀 부드러워 졌다. "고마와, 아름다운 풀빛 눈의 아가씨. 그대는 정말 관대하군!" 리건은 자신의 힘에 한계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달러스의 말대로 칼이 단지 순진무구한 처녀를 좋아하는 것이라면 언젠가는 싫증을 낼 것은 시간문제인 것이다. 리건은 벌써 그러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 듯한 불안을 느꼈다. 칼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시내로 가서 쇼핑을 하고 칼과 함께 점심을 먹은 후, 칼에게 시간이 있으면 집까지 데려다 주고 그렇지 않으면 택시로 돌아오는 날이 계속되었다. 칼은 반대했으나, 리건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면 곧 운전면허를 따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칼이 자기에게 싫증을 내고 돌아오지 않게 되면, 자신이 차를 몰고 나가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달러스는 여전히 케니 만의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었으나 쇼핑하는 데 따라 나서겠다고는 하지 않아서 리건은 마음이 놓였다. 혼수를 고르고 있을 때 뒤에서 말참견이라도 한다면 모처럼의 즐거움이 고통으로 바뀔 것이다. 특히 내의나 나이트 웨어를 살 때에 섹시한 것을 만져 보고 싶은 유혹과 싸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달러스처럼 풍만한 육체를 갖고 있지 못한 리건은, 몰래 검은 내의를 손에 들고 한숨을 쉬기도 했다.
바쁜 일주일이 지나자 벤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목요일 밤에 빅토리아로 와서 결혼식이 있는 월요일까지 머무를 모양이다. 나흘 동안에 지난 3년 간의 공백이 메워지리라고 여겨지지는 않았으나 온갖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빠를 이해하리라고 리건은 생각했다. 칼은, 결혼식 전야에는 신랑은 집을 떠나 있는다는 관습에 따라 일요일 밤은 시내의 호텔에서 지내기로 되어 있다. 토요일 밤, 칼의 친구와 친척, 지기들을 초대한 파티가 열렸다. 주역인 리건은 은빛 리본이 달린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사흘 전에 칼이 선물로 준 다이아 반지를 끼고 은팔찌를 팔에 끼었다. 물결치듯 어깨까지 닿는 길다란 머리는 윤기가 흐르고 있다. 달러스는 요염한 붉은 드레스 차림으로 나타났다. 몸에 착 달라붙는 이탈리안 커트의 짙은 곤색 양복을 입은 칼 옆에 서서 손님을 맞으면서 리건의 마음은 기쁨과 불안으로 터질 듯했다. 그녀는 기를 쓰며 웃는 얼굴을 보였으므로, 이 어울리는 부부의 사이가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손님들은 모두 입을 모아 리건을 칭찬했으나, 마음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한다고 리건은 느꼈다.
파티의 분위기가 한층 무르익었을 때 가슴이 답답하여 안마당으로 나온 리건은, 막연히 느끼던 불안이 근거없는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장미꽃 줄기가 뻗어 있는 돌기둥에 기댄 리건의 모습이 남의 눈에 띄지 않은 탓으로 남자들은 거리낌없이 털어놓고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제길할, 칼만 재미를 보다니..... 어째서 다음주 월요일 밤, 내 옆에서 잠자는 게 저 귀여운 아가씨가 아닌 거지!"
"마누라가 듣지 않도록 조심해. 우리 마누라는 내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아까부터 두 번이나 침을 놓았다구! 정말이지 여자란 악마야. 칼은 그런 천한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는 거야. 쳇, 엿먹어라지!"
두 사나이가 야비한 목소리로 지껄이고 웃는 것을 들으며 리건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칼은 다르다. 칼은 어떤 때라도 저런 천한 말은 절대로 입에 담지 않는다. 그럭저럭 손님들이 돌아갈 시각이 되자, 리건은 한시름 놓고 현관에서 작별인사를 했다. 안마당에서 천한 말을 하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배가 나오고 머리도 벗겨진 35, 6세의 남자로, 부인은 파티에 온 여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아내가 있는데 그런 말을 하다니, 하고 리건은 놀랐으나, 사실은 말뿐이지 좋은 남편일 것이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마지막 손님이 돌아가자 칼은 가볍게 리건의 어깨를 안고 로비를 걸으며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피곤하지? 별로 말이 없더군."
"손님이 그렇게도 많았는걸요." 리건은 머리를 끄덕였다. "당신은 정말 아는 사람도 많군요, 칼. 하지만 조금씩 익숙해지겠죠."
칼은 생기가 없는 리건의 얼굴을 걱정스러운 듯 내려다보았다. "아버지의 파티를 회상하나?"
리건은 힘없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아요. 아버지의 손님들과 오늘의 손님들은 전연 다른걸요."
"하지만 당신도 접대했을 테지?"
"그땐 아직 어렸으니까 도망치는 것만 생각했죠. 하지만 도망치려고 하면 아버지가 싫은 얼굴을 하시니까 책을 갖고 와서 방 한구석에서 혼자 책을 읽기로 했어요."
칼은 발을 멈추고는 리건의 허리에 팔을 감고 바짝 끌어당겼다. "외로웠겠구만."
"네, 그 무렵엔 잘 몰랐지만, 아마 그랬을 거예요. 같은 나이 또래 친구는 없었고, 늘 특등 열차로 여행했으니까 만나는 사람도 제한되어 있었고."
눈앞의 육감적인 입술을 보고 리건의 가슴은 뛰었다. 가슴 속에 품고 있던 하고 싶은 말을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으나 마음속의 강한....아니, 희미하다고 하는 것이 옳을지 모르지만--- 그 무엇이 방해를 했다. "당신을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죠, 칼."
"당신이라면 문제 없어. ."칼은 가볍게 미소지었으나 그 웃음 뒤에는 석연치 않은 그 무엇이 서려있었다. 칼은 가볍게 리건의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포개더니 곧 몸을 뗐다. "이젠 잠자리에 드는 게 좋겠군."
그날 밤은 무더운 데다 태풍으로 변할 듯한 바람이 불어, 리건은 한 시간쯤 몸을 뒤치기만 하다가 피로감을 가눌 길이 없어 일어났다. 풀에 들어가 차가운 물속을 헤엄치고 나면 상쾌해져서 잠이 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리건은 곧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비치 샌들을 신고 조용한 집안을 살금살금 걸어서 풀로 갔다. 풀가의 불은 꺼져서 깜깜했으나 밤하늘은 무척 아름다워, 달과 별들의 호위를 받으며 헤엄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었다. 리건은 소리 나지 않게 가만히 물로 들어가 물보라가 일지 않도록 하며 단숨에 세 번이나 왕복했으나 아직 물에서 나가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아, 쇠사다리를 붙잡고 발을 물에 띄워 물결에 흔들리는 발을 보면서 수련이라도 된듯한 기분이 되어 있었다. 꽃이 되어 버리면 이런 복잡한 고민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될 텐데. 다시는 인간으로 되돌아가기 싫다, 영원히....
안마당 쪽에서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친 칼이 천천히 풀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리건은 하마터면 큰 소리를 지를 뻔했으나 칼은 제법 먼 곳에 있었기에 잠시 그냥 관망하기로 했다. 손에 들고 있는 담배에서 한 줄기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칼은 피울까 말까 망설이듯 담배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포석 휘로 휙 던져버렸다. 뭔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듯 했으나 리건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칼이 집안으로 사라지자, 리건은 천천히 쇠사다리를 올라 풀에서 나왔다. 조금 전에 칼이 있던 장소 부근을 지날 때, 방금 버린 담배에서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끝은 붉게 빛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칼답지 않은 일이었다. 무슨 생각에 잠겼었을까?
칼을 위로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고 리건은 생각하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불을 끄려고 무심코 담배를 집어든 리건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필터 위에 씌어진 담배 이름....이 브랜드를 피우는 사람은 이 집에서 단 한 사람, 게다가 필터에는 붉은 입술연지가 묻어 있다.... 타는 듯한 붉은 드레스에 맞추어 달러스는 이 빛깔의 입술연지를 칠했었다.... 가슴이 죄어들고 손발이 떨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고, 리건은 시간의 흐름을 잊은 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섰다가 멍하니 방으로 향했다. 담뱃불은 벌써 꺼져 있었다. 발을 움직임에 따라 머리도 활동을 개시하여, 리건은 어쨌든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집을 나가기로 결심했다.
곧 택시를 부르고, 택시가 올 때까지 짐을 꾸려 놓자. 갈 곳이라곤 없었으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쨌든 칼에게 발견되지 않을 곳으로 가서 혼자가 되어,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들이 헛된 환상이었음을 자신에게 납득시켜야만 한다. 칼은 잠옷 바람이었으므로 달러스와 단순히 이야기만 주고받지는 않았을 게다. 둘은 틀림없이 침대 속에 있었을 것이다! 금발에 풍만한 몸매를 가진 달러스가 우아하게 칼의 등에 팔을 감고 여자의 기쁨을 한껏 아는 입술을 칼의 입술에 접근시킨다......... 칼은 지금까지 줄곧 억눌러 왔던 욕망을 폭발시켜 뜨겁게 입맞춤에 응한다...... 그 후 달러스는 담배에 불을 붙여 칼의 입에 물려주고, 칼은 아직도 정열의 불길을 끄지 못해 안타까와 하는 달러스를 남져 놓고 방을 나간다......
간신히, 철야 영업을 하는 택시 회사의 전화 번호를 찾아 내어 리건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다이얼을 돌렸다. 낮은 음성으로 주소를 알리니 교환수는 45분 이내에 도착시키겠노라고 말하고, 집 앞까지 오지 말고 하이웨이에서 기다려 달라는 부탁도 순순히 받아 주었다. 당장 필요한 물건만을 넣었기에 짐을 꾸리는 작업은 15분으로 끝나고, 반지는 곧 눈에 띄는 화장대 위에, 수영복은 의자위에 놓았다. 나머지는 칼이 적당히 처분해 주겠지. 이유는 설명할 필요도 없어 편지는 쓰지 않았다. 자기가슴에 손을 대고 생각하게끔 하는 것도 좋으리라. 여자가 달아나면 칼은 어떤 얼굴을 할까?
리건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하얀 저택을 나와서 캄캄한 길을, 하이웨이를 향해 서둘러 걸었다. 페리에 타는 것은 날이 밝은 후가 되겠지만, 내일을 휴일이어서 아침 식사시간에 나타나지 않아도 이상히 여기지 않을 테니까 낮까지는 소동은 일지 않겠지. 그동안 칼과 달러스는 단둘이서 어젯저녁의 일을 생각하면서 시시덕거리겠지!
택시는 약속 시간에 맞춰 왔고, 운전사는 말없이 짐을 트렁크속에 넣었다. 이 사람은 어두운 새벽에 도망치는 사람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보아왔을까? 나를 두고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리건은 불안해졌으나, 운전사란 자동차 운전을 하고 돈을 받기만 하면 되므로 일일이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밴쿠버의 부두에 가까운 호텔은 좋지 못한 장사를 하는 인간들이나 이용하는 듯 우중충했으나, 가진 돈이 얼마 없는 리건으로서는 숙박비가 싼 것이 다행스러웠다. 우선 직장을 얻을 때까지는 잠잘 공간만 있으면 족했다. 좋은 직장만을 원하지 않는다면 뭔가 적당한 일이 있을 것이다. 위법이라도 값싼 노동력은 환영받을 것이 틀림없다. 다만 어떻게 그런 직종을 발견하느냐가 문제였다. 그러한 세계에 발을 들여 놓으면 정부의 주목 대상이 되는 것도 각오해야 하니까.
프런트의 사나이가, 몸을 그르쳐 전락의 길을 밟으려는 여인에게 협력하려는 듯이, 곁눈질을 하면서 리건에게 말을 걸어왔다. "좋은 직장이 있는데, 원한다면 소개해 줄까요?" 어떤 종류의 일을 말하는지 리건은 알 수 없었으나 거절할 수는 없었다, 일주일쯤 호텔에 묵으면 돈은 바닥이 날 듯하다.
그대로 이틀이 지났다. 리건은 칼을 마음속에서 몰아내려 애썼으나, 잠자다 곧잘 통증을 느끼고 깨어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 아픔도 가셔질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은 없으니까.
수요일에 프런트 담당자가 전번에 말하던 직장의 고용주와 연락이 되었노라면서 가보면 어떻겠느냐고 리건에게 은근히 접근해 왔다. 약속 시간은 그날 밤이며, 장소는 차이나타운 부근이다. 리건은 겁이 나 거절할까 하고 생각했으나,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니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싫은 일이라면 그만두면 된다. 그리고 가보지 않고서는 싫은 일인지 어떤지도 알 수 없으니까.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어 리건은 스탠리 공원으로 갔다. 전망대에서 항구에 출입하는 배와 우뚝 솟은 산을 보고 있자니 케니의 집 생각이 나서 가슴이 아팠으나, 울어도 소용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호텔에 돌아오니 프런트 담당자는 아침과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져서, 겁먹은 듯한 얼굴로 리건을 보면서 열쇠를 주려고 하지 않았다. 설마하고 생각하면서 의자가 어수선하게 흐트러진 로비 쪽으로 눈을 돌려보니, 믿어지지 않는 광경, 칼이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이 눈이 비쳤다. 리건은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버렸다. 칼의 표정은 돌과 같았다. 리건은 이토록 감정을 나타내지 않은 칼을 처음 보는 듯했다. 겨우 턱의 선이 굳어져 있을 뿐이다. 수에드의 캐주얼 재킷도 언제나 한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 칼답지 않게 구겨져 있었다.
"짐은 벌써 차에 실어 두었어. 자, 가는 거야." 리건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칼에게 끌려 나왔다. 칼은 눈을 치뜨고 무서운 힘으로 리건을 호텔 앞에 세워 둔 차 속으로 밀어 넣더니 운전석에 앉아 노여움의 폭발을 참기 위해 핸들을 손가락의 관절이 하얗게 되도록 움켜잡았다. 자동차는 브로드웨이 가에서 남동쪽으로 꺾어들어 조지아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해안 도로로 들어섰다. 칼은 바다에 가까운 임시 정차장에 차를 세우고, 잠깐 동안 어떻게 말을 꺼낼까 망설이는 듯하더니 엔진을 끄고 앞을 본 채로 입을 열었다. "왜 그랬지? 처음부터 이야기 해줘. 그리고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결혼하는 게 싫다면 적어도 당신은 내게 그런 심정을 고백할 의무가 있을 거야."
"말해도 당신은 허락하지 않았을 거예요." 리건은 떨면서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 옆을 향한 칼의 얼굴을 보니, 단순히 화가 난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지난 사흘 동안 내가 어떤 심정에 빠졌었는지 아나? 당신을 죽이고 싶을 정도였어, 리건. 이 가느다란 목을 내 손으로 힘주어 이렇게!"
"가능하면 그렇게 해주길 바랐어요. 당신이 계획한 인생을 인형처럼 살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나으니까 말이에요." 목이 죄어 리건은 침을 꿀꺽 삼켰다. "우리 사이가 결코 완벽하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자진해서 그걸 받아들일 셈이었어요. 당신도 그럴 작정이셨죠?"
칼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마음이 변했나?"
"당신 탓이에요." 리건은 햇살을 받아 빛나는 바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당신이 달러스의 방에서 나오셨을 때, 나는 풀속에 있었어요. 토요일 밤, 아니 일요일 아침이었지요.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의 매력에 눈이 어두워 나 따위는 전혀 보이지도 않게 되어 버렸더군요!"
"뭐라고?" 칼은 리건의 턱밑으로 손을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 회색의 눈은 이글이글 불타고 입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해 봐!" 리건은 숨을 죽이고 눈을 떴다. "틀리다는 말씀인가요?"
"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아. 달러스는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까!" 칼은 이렇게 내뱉더니 손에 힘을 주었다. "때려서라도 이해시켜야겠군."
"칼....." 리건은 신음하면서 칼의 손을 밀어내려 했다. "부탁이에요!"
칼은 그녀의 목을 죄었던 손을 갑자기 놓고 시트에 깊숙이 몸을 파묻더니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당신 말이 맞아. 당신을 괴롭혀 봤자 아무 소용이 없어. 아마 원인을 캐자면 내게 잘못이 있을 거야."
리건은 핏기 잃은 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잘못했다면 사과하죠. 하지만......"
"잘못했다면 이라니?" 칼은 마침내 지금까지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켰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믿어 준다는 거야? 오른 손을 들고 맹세라도 할까?"
"아니에요."
리건은 뒤죽박죽이 된 머릿속을 정리하려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정말로 그 사람과 아무일도 없었다고 맹세하면 믿을께요." 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는 하지 않아. 하지만 지금은 달라."
"그럼 그 여자가 한 말은 사실이군요." 리건은 불쾌한 듯 중얼거렸다.
"달러스가 무슨 말을 했는데?" 회색 눈이 엄한 빛을 발했다. "그게 언제지?"
"맨션에서 케니에 갔던 날이에요. 당신은 회사일로 나가신 뒤 달러스가 와서,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2년 동안 당신과 사랑하는 사이라고..."
"그래서 당신은 그 말을 무조건 믿어 버렸다는 거야?"
"달리 어떻게 하라는 거죠? 그 여자는 당신에 대해 훤히 알고 있던걸요. 같이 살아 본 경험이 없으면 모를 일까지도."
"그건 옛날이야기야. 지금도 같은 지붕 밑에 살고는 있으나 방은 따로 쓰고 있고 아무 일도 없어." 칼은 준엄하게 말했다. "그녀를 같은 집에 살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랬어. 일찌감치 내보냈으면 좋았을 걸. 하지만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니 후회한들 소용없지."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누르고 있었지만 불가능했다는 뜻인가요?"
"어떤 이유 때문에 내보내지 못했어..... 그러나 당신의 생각과는 달라." 입을 열려는 리건을 제지하면서 칼은 계속했다. "잠자코 들어주지 않겠어? 당신은 듣고 싶지 않을지 모르나 나는 얘기해 두고 싶어." 칼은 옛날을 되살려 내면서 입을 삐죽거렸다. "3년도 더 전에 밴쿠버에서 달러스를 처음 만났지. 그녀는 남자와 함께 영국에서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그때 벌써 그 사내한테 싫증이 나서 새 남자를 물색중이었지. 그래서 바로 내가 그녀의 눈에 든 셈이야." 칼은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내 편에서도 아주 싫었던 건 아니야. 하지만 달러스는 어떤 목적이 있어 내게 접근해 온 것이었어."
"그 여자는 당신 쪽에서 결혼을 신청했다고 하던데요?" 진상을 알고 싶어 리건은 한마디 했다. "그런 여자에게 왜 내가 결혼을 신청해야 하나! 내가 아는 것만으로도 달리 교제하는 사내가 있었을 정도니, 모르는 곳에서는 몇십 명쯤 되었을 테지."
"아버님은 그런 걸 개의치 않으셨던가 보군요?"
"아버지는 모르셨을 뿐이지. 어차피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던 거야, 내게서 그녀를 빼앗기만 하면 족했으니까."
"자기 아들에게 질투하셨다는 건가요?"
"어떤 남자에게든 구별없이 질투하셨어. 구제 불능인 분이었지. 달러스를 내게서 빼앗았다고 좋아라 했으니. 상대가 싫증을 내는 것은 시간 문제였어. 그녀는 그런 여자니까."
칼의 목소리가 제법 부드러워졌음을 알아차린 리건은 큰마음먹고 말해 보았다. "당신과는 꽤 오래 계속하는 것 같군요."
"그것은 표면뿐이지. 그 여자는 <충실>이라는 말을 모르니까."
"하지만 언젠가는 그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하셨죠?"
"그런 일은 없어. 그것은 그쪽도 알고 싶을 거야. 그녀로서는 내가 아직 자기에게 마음이 있다는 증거를 보고 싶을 뿐이야. 귀여움을 받고 싶은 게지. 자기에게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이쪽도 한두 가지 이점은 있으니까, 난처하지만." 리건은 떨면서 물었다. "솔직히 말해 주세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죠?"
"빚을 갚아버리고 싶었어.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나를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어. 그런데 2년이 지나도 단념하지 않는 거야. 할 수 없이 이번 포트 레스터 여행에서 돌아가면 내쫒으리라고 결심했지. 그때 당신이 나타났어. 당신과 결혼하겠다고 작정한 후, 달러스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심정이 되어 쫒아내는 일마저 깡그리 잊어버린 거야."
리건은 얼굴을 찡그렸다. "모르겠군요. 확실히 당신은 내게 무척 잘해 주셨어요. 빅토리아에 데려와 주고, 직장과 살 집까지 신경을 써주셨죠. 하지만...."
"내가 갈피를 잡지 못한 거야. 당신이 말하는 것, 당신이 하는 짓 모두가 열두 살이란 나이 차를 깨닫게 해 주었으니까." 칼의 턱이 긴장되었다. "맨션에서 당신이 나를 유혹하려 했을 때의 일을 기억하나? 당신은 제가 하고 있는 짓이 뭔지도 모르는 것 같았어. 당신에게 겁을 주면 알게 되지나 않을 까하고 생각한 거지. 확실히 당신은 겁이 나서 달아나려 했어. 그때 나는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어. 그러한 나를 당신이 유혹한 거야."
"그래서 그런 식으로 나를 때렸군요. 그리고 저를 두고, 사랑을 사랑하고 있는 어리석은 계집애라는 식의 말을 하셨죠?"
"물론 당신을 위해서도 그랬지만 나를 위해서도 그랬던 거야. 서로가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안 되었던 거지. 하지만 난처하게도 나는 당신을 내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어. 그래서 그런 식으로 당신 앞에서 사라진 거야."
"그리고 6주동안 저를 자유롭게 놔두셨군요?"
"아무렴. 시간이 필요했지, 내 진심을 확인할 시간이. 게다가 당신에게도 다른 남자를 연구할 기회를 주고 싶었어. 그토록 자유롭게 교제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지만."
"단지 데이트 했을 뿐인걸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리건은 그 무렵의 일을 생각하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이제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거기 관해선 벌써 설명했잖아요?"
"음." 칼은 뚫어질 듯 리건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을 때, 당신의 맨 션에 가려던 참이었어. 보복할 셈으로 그런 짓을 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였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나보다도 더 상처를 입게 되는데, 당신 자신은 그걸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어. 그런 소문이 퍼져도 남자는 아무렇지 않지만 여자는 다르지. 그래서 당신에게 설명할 기회를 주려고 생각한 거야."
리건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당신은 달러스와 같이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지 않으셨어요."
"당신이 나에게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가 버렸지 않아."
"너무 비참하고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해서 그랬어요."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보복으로 나에게 상처를 입히려고 한 것은 좋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 말투가 격해졌다. "사흘 동안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당신을 찾아다녔어. 겨우 찾았다 싶으니, 그런 곳에 있잖나!" 칼은 냉정함을 찾으려고 앉은 자세를 고쳤다. "다시는 그런 짓은 하지 말아 줘, 리건. 그렇지 않으면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나는 몰라!"
리건은 숨을 죽였다. "저를 케니로 다시 데려갈 셈이에요?"
"뭣 때문에 당신을 끌고 왔다고 생각하나?" 칼의 입술이 비꼬듯 일그러졌다. "아, 그렇군. 당신은 분명히 설명하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었지."
"그럴 필요는 없어요. 당신을 믿어요." 리건은 솟구쳐 오르는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기를 빌었다. "제발 부탁이에요, 칼."
"괜찮아, 설명할 테니 들어 봐." 칼은 리건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했다. "분명히 그 파티 후에 나는 달러스와 같이 있었어. 하지만 그녀는 단지 내 방에 왔을 뿐이야. 예비해 둔 최후 수단을 써먹으려고 한 거지. 그러나 나는 그것을 거절했어. 그러자 그녀는 담배를 내 얼굴에 문지르려고 했어. 나는 그 담배를 빼앗고, 일요일 아침까지 짐을 꾸려 나가라고 한 거지."
"그래서 그 담배에 입술연지가 묻어 있었군요." 리건은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내가 바보였어요."
"오히려 내가 사과해야지." 칼은 그때의 일을 생각하자 얼굴이 일그러졌다. "안마당에 나간 것은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어서였지. 미래의 아내가 가까이 있는 걸 알았더라면 그런 경솔한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당신이 풀 안에 있어서 오해하고....... 그러한 결과가 빚어지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어."
"당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거예요. 사랑하는 것은 믿는다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해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조차 없군요."
"사랑이라구?" 칼은 비웃듯 코로 웃었다. "당신은 아직 사랑이란 말의 뜻조차 모르고 있어. 오해 없기를 바라는데, 당신은 내게 사랑받고 싶어 하고 있어. 아니, 정확히 말하면 품에 안아 주었으면 하고 있어. 나의 손이 살갗을 미끄러지는 감촉을 즐기고, 나의 본능을 조종하는 tm릴을 느끼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것은 처음으로 경험하는 기막힌 기분일는지 모르지만, 사랑은 아니야, 달링........ 그것은 욕망일 뿐이야."
리건은 화가 나서 칼을 노려보았다. "너무해요! 달러스와의 일을 오해한 건 나빴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내가 달아나서 프라이드가 상했다고 해서 그런 투로 말하는 건 심하지 않나요? 당신에게 있어서 나란 존재는 단순한 액세서리와 같은 것이어서, 자기 취향의 여자로 만들어 갈 재미를 지닌 바보 같은 처녀에 불과하겠지만, 그렇게 마음대로 되진 않을 거예요. 나는 어른이 되었으니까요. 나를 한갓 물건으로 밖에 보지 않는 남성과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어요, 절대로...."
칼이 팔을 뻗어왔으므로 리건은 무의식중에 "그만둬요!"하고 소리쳤으나 칼의 강한 포옹을 받자 그만 본심을 털어놓고 말았다. "칼, 좋아해요!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요,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요." 칼은 가슴이 철렁한 듯 한순간 움직임을 멈추었으나 이내 굳게 입술을 포개었다. 리건은 눈물을 흘리며 입맞춤에 응했다. 이윽고 칼은 입술을 떼더니 미소 지으며 손수건으로 다정하게 뺨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여자의 무기로군. 여기에 당해 낼 사내는 없다니까."
"칼, 이해해 줘요. 나는 내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어요. 당신을 사랑해요. 그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칼은 눈물 자국이 남은 보드라운 뺨에 손가락을 갖다 대면서 말했다. "월요일 아침에 교회에 있어주기만 하면 된다. 지금까지 내가 당신에게 품은 감정과 똑같은 감정을 당신이 갖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 하지만 이젠 생각을 달리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제부터 둘이서 배워 가기로 해."
"나도 할 수 있어요." 리건은 약간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내가 남을 깊이 사랑할 수 있다는 걸 당신은 처음부터 염두에도 두지 않았어요. 나를 작은 악마라고 하시지만, 그것도 모두가 당신 탓이에요. 당신이 바라시는 건 뭣이든 하겠으며, 무엇이라도 될 각오예요. 가능한 모든 일을 하고 싶어요. 내가 뭐라고 하든 당신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을 하고 생각하고 싶은 것만을 생각하실 테지만 말이에요. 그러나 아기가 생기면 조금은 이해해 주실까? 당신도 그때엔 아버지가 되니까요."
"리건!" 칼은 지금까지 진정한 리건을 보지 못했음을 깨닫고, 떨고 있는 입술을 어루만지며 눈을 빛내면서 외쳤다. "당신이라는 여자는, 아아, 당신이라는 여자는 정말! 리건..."
리건은 순순히 칼의 입맞춤을 받았다. 이 사람은 반드시 나의 좋은 선생이 되어 주겠지. 그러나 배우기만 해서는 안 돼. 이 거만하고 위험한 짓을 좋아하는 남성의 조종법을 내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꼭 할 수 있다. 평생이라는 긴 시간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