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살아있는 이들의 만남
카스틸로는 정장 차림이었는데 원수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금붙이 장식된 견장 위에 둥근 별무리 견장이 붙어 있고 가슴에는 갖가지 훈장이 번쩍였다. 위압감이 넘치는 풍모였다. 그는 목을 조금 움직여 앞에 앉은 에르난데스와 도밍고를 바라보았다. 두 명의 대장도 호화로운 정장 차림이었는데 애를 쓴 흔적이 역력하였으나 에르난데스의 가슴에는 훈장을 떼어낸 듯 자국이 난 공간이 여러 개 보였다. 카스틸로는 금줄이 열 개쯤 처져 있는 소매를 들어 앞에 놓인 찻잔을 집었다. 영국에서 수입해 온 찻잔으로 카스틸로가 아끼는 것이다.
"이번 작전은 꼭 성공시켜야 돼,"
그의 말이 누구를 집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두 대장은 똑같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의 얼굴은 잔뜩 긴장되어 있었다.
"라파엘의 잔당들이 이번 작전으로 완전히 소탕되어야 하네. 마침 알폰소도 오르쿠에에 들어가 있다고 하니까."
"네, 각하."
"알았습니다, 각하."
전자는 도밍고이고 뒤의 대답은 에르난데스였다. 일주일에 걸쳐서 면밀한 작전 계획이 세워졌고 계획에 의해서 부대이동도 끝마쳐 놓았다. 작전 계획 수립에는 프란시스코를 포함한 세 대장 모두가 참여했으므로 이제는 연합군 사령관직을 누가 맡느냐 하는 것만 남겨놓은 것이다. 아마 대통령궁의 기자실에서는 기자들이 오늘 회견의 결과를 보기 위해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 임명되는 연합군 사령관은 명실공히 콜롬비아의 제2인자가 된다. 이제까지는 계엄군 사령관인 에르난데스가 2인자였으나 그가 신임을 잃고 있다는 소문이 심심찮게 나돌고 있었다.
"에르난데스."
카스틸로가 부르자 에르난데스는 민첩하게 상체를 굳혔다. 그는 늘어진 눈꺼풀을 최대한으로 치켜올린 채 카스틸로를 바라보았다. 다음 말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도밍고도 어깨를 치켜올린 모습으로 똑같이 카스틸로를 바라보았다. 숨을 멈춘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자네는 계엄사령관이야. 두 가지의 직책을 동시에 맡길 수는 없어. 따라서 연합군 사령관은 도밍고 대장으로 결정되었다."
카스틸로가 도밍고를 돌아보자 그는 멈춘 숨을 길게 뿜어내면서 얼굴에 감격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에르난데스는 반대로 숨을 멈춘 얼굴이 되었다. 한 명은 계엄사령관이었고 다른 한 명은 연합군 사령관이다. 얼핏 들으면 전국을 장악하는 계엄사령관의 권위가 더 강할 것 같지만 군사력의 면으로 보면 연합군 쪽이 두 배 이상 강하다. 에르난데스가 눈시울을 늘어뜨리며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각하, 현명하신 결단이십니다. 솔직히 연합군을 맡아 라파엘을 제 손으로 잡고 싶은 욕심이 있었습니다만 계엄시령부 일도 과중한 터이라."
그는 머리를 도밍고 쪽으로 돌렸다. '
"장군, 축하드립니다. 부디 라파엘을 이 기회에 뿌리뽑기를 바라겠소."
"이번에는 해외망명의 기회도 주지 않을 것이다."
카스틸로가 단호하게 말했다.
"라파엘 그놈은 다급하면 미국한테 손을 내민다. 아마 궁지에 몰리면 미국 측이 로비를 해올 것이다. 이번에는 어떤 조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두 대장은 굳어진 얼굴로 카스틸로를 바라보았다. 카스틸로가 이런 식으로 공공연하게 미국에 대한 감정을 틀어내는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도밍고 대장!"
카스틸로가 부르자 도밍고는 검고 마른 얼굴을 들었다.
"네, 각하."
"지금 즉시 연합군 사령부로 부임하도록! 작전은 내일 아침부터 개시한다."
"알겠습니다, 각하!"
도밍고는 기세가 충천해 있었다. 이제까지 카스틸로의 수족으로 지내 왔으나 연제나 에르난데스에게 선두 자리를 빼앗겨 왔다. 그것이 자신의 강직한 성격 탓이라고 주변에서는 오히려 칭송해 주는 분위기마저 있었다. 도밍고는 그것도 마땅치 않았다. 어차피 자신은 카스틸로의 수족이었고 정권이 바뀐다면 에르난데스와 같은 짐을 져야 할 신세인 것이다. 부하와 국민들의 신임을 받는 만큼 카스틸로의 눈에서 벗어난다는 것쯤은 도밍고도 알고 있었다. 도밍고와 에르난데스는 카스틸로의 집무실을 나와 기다란 복도를 걸었다. 복도 양쪽에는 정복을 입은 경비병들이 부동자세로 서 있었는데 대장 두 명이 지나가도 눈 한 번 까딱하지 않는다. 복도 끝까지 가는 데 5분 정도가 걸렸으나 두 대장은 입 한 번 열지 않았고 눈길 한 번 맞추지 않았다. 그들이 만난 것도 6개월 만이었다. 연초의 시무식 때 만나고는 처음이었다. 카스틸로는 그들의 집무실 전화를 도청하고 있었다. 따라서 만일 그들이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었다든가 친서를 교환하기라도 했다면 아마 다음날 잘하면 해임 통지서가 날아올 것이고 잘못하면 이등병으로 강등되거나 처형당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사실을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기다리고 서 있던 경비병에 의해 복도 끝의 거대한 나무 문이 열렸다. 밝은 햇살이 퍼져 있는 정원에 대장기를 단 두 대의 승용차가 정지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제각기 자신들의 승용차로 다가갔는데 서로 얼굴 한 번 돌리지 않았다.
"정면에 있는 사단은 3개 사단입니다. 예비 사단으로 제6사단이 바르비 마을 근처에 있습니다."
알폰소가 지휘봉으로 붉은 점이 처져 있는 부근을 짚었다. 상황실은 오르쿠에 시에서 10킬로쯤 후방에 있는 밀림 속의 가건물이었다. 밀림에 언제나 깔려 있는 습기와 나무가 썩어 가는 가스 냄새로 상황실 안은 후텁지근한 열기에 싸여 있었다. 라파엘은 상황판에서 얼굴을 돌려 알폰소를 바라보았다.
"프란시스코는 어디에 사령부를 두었소?"
"오리엔탈산맥의 기음입니다. 이곳입니다."
알폰소는 지휘봉으로 한 곳을 짚었다. 라파엘의 얼굴이 침울해 보였는데, 그렇다고 이번의 정부군 대공세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그는 표정의 변화가 별로 없는 사람이었고 희로애락의 감정이 잘 나타나지 않아 상황에 따라 보는 쪽이 짐작할 뿐이다. 라파엘은 알폰소 주위에 서 있는 참모들을 돌아보고는 나무 탁자 끝 쪽의 의자에 앉았다. 후줄근한 위장복 차림이었는데 모기에 쏘였는지 목의 옆쪽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그의 얼굴은 햇볕을 받지 않았으므로 희었다. 검은 테 안경을 쓰고 있어서 학자풍으로 보였는데 실제로 10여 년 전에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쳤다. 알폰소와 서너 명의 참모들은 그가 자리에 앉자 그의 주위에 둘러앉았다.
"내 생각으로는 카스틸로가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한국인 고영무를 미국 측이 보냈다고 믿기 때문인 것 같은데."
라파엘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우리로서는 우리가 고영무를 보냈다고 주장하고 싶지만 말이오."
알폰소를 비롯한 참모들이 따라 웃었다.
"각하, 고영무를 제가 미국 지역의 대리인으로 임명한 것이 동기가 되었습니다."
알폰소가 말하자 라파엘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러니까 동지들이 그에게 모였겠지. 그러다 보니 미국 측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고."
그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우린 집권 준비를 해둬야 하지 않겠소? 고영무가 보고타에 있는데 말이오."
젊은 참모 한두 명이 소리 내어 웃었고 나이 든 참모들은 입술 끝으로만 웃었다. 알폰소는 이맛살을 찌푸린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이것이 라파엘의 강점이자 약점이다. 지금 이런 분위기에서는 커다란 장점으로 전달되어 막료들의 신뢰를 더 받게 되겠지만 현실은 급박했다. 2개 군단의 3만 명에 가까운 병력이 오르쿠에 시를 중심으로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는 1만 5천의 병력을 당장에 제압할 듯 육박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프란시스코의 3군단을 상대로 해서 꼼짝하지 못하고 갇혀 있던 참이다. 알폰소는 머리를 들었다.
"각하, 이곳은 저에게 맡기시고 베네수엘라나 미국으로 몸을 피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각하만 무사하시면 나중에라도 저회들은 얼마든지 뭉칠 수가 있습니다만."
벌써 여러 번 해본 소리였다. 라파엘이 웃음기를 거두고 머리를 저었다.
"싫소, 알폰소. 병사 한 명 한 명이 모두 내 자식이오. 한 명이 남아 있더라도 같이 남아 있겠소."
아마 젊은 참모들은 눈물을 머금고 가슴이 메어 있을 것이라고 알폰소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짜증이 났다. 가슴이 메어서 개죽음을 당하느니보다 즉사하게 욕을 얻어먹더라도 살아서 집권을 해야 하는 것이다.
"각하, 각하가 잠시 피하시면 병사들도 생명을 건지게 됩니다. 저는 부대를 해산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참모들끼리 어젯밤에 결정을 본 일이다. 라파엘이 주위의 막료들을 둘러보았다. 이제 모두의 얼굴은 침울해져 있었다. 이맛살을 찌푸린 채 알폰소는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이런 때면 언제나 그는 엉뚱한 이야기로 분위기를 바꾸어 놓는다. 물론 그런 매력이 있기 때문에 월급 한번 못 받고 가족을 버린 이 사람들이 그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려고 하는 것이다. 라파엘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랐으므로 알폰소는 더욱 이마를 찌푸렸다.
"그렇지, 고영무를 지원합시다."
불쑥 라파엘이 그렇게 말하자 모두들 턱을 들었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까지 우리는 그가 우리가 보낸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방관하는 입장이었소. 이젠 우리가 그를 도울 차례요. 그렇군. 1개 중대, 아니 1개 대대 병력을 보내어 그를 돕게 합시다."
"각하,"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었으므로 이제는 나이 든 참모인 구로만이 나셨다.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각하, 여기도 병력이 모자라서 행정병이나 의무병을 초소로 보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그쪽에다 병력을‥‥‥‥ 그리고 우리는 고영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룹니다, 각하."
막료 하나가 더 나섰다.
"그는 우리와 연락 관계가 없습니다."
안경 속의 눈을 두어 번 깜박이며 라파엘이 그들을 둘러보았다. 놀란 표정 같기도 했으므로 참모들은 입을 다물었다. 라파엘이 눈물을 글썽이면 병사들은 운다. 참모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지금 가슴 아파하고 있었다.
"각하, 저회들의 지금 형편으로는‥‥‥‥"
누군가가 다시 말했을 때 알폰소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그는 참모장이다. 작전 명령은 모두 그의 결정 사항이었다.
"각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알폰소의 말에 모두들 상체를 세웠다.라파엘조차도 놀란 모양으로 다시 눈을 끔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뛰어난 생각이십니다. 어차피 이곳의 병력이 모자라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보고타를 심하게 교란시키면 시킬수록 이쪽의 공격력은 약해질 것입니다. 카스틸로가 당황해서 이쪽의 공격을 풀고 보고타의 방위로 돌릴 것이 틀림없습니다."
알폰소의 말은 점점 확신에 차 있었다.
조지 로스만은 금발이 비록 회색빛 머리칼로 변색되기 시작하는 오십 대 후반의 사내였으나 아직도 곧은 허리에 운동으로 단련된 강한 팔과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젊었을 때부터 FBI의 마약 담당 검사로 활약하다가 전직 대통령인 화이트씨에 의해 마약부장에 임명된 인물이었다. 그가 백악관의 안보 담당 보좌관실에 들어갔을 매 포크너는 막 전화를 내려놓은 참이었다.
"여어, 조지, 어서 오게. 기다리고 있었어."
자리에서 일어선 포크너가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마거릿은 어떤가?"
"다이어트를 다시 시작했어."
포크너가 피식 웃었다. 그들은 의자에 마주 보고 앉았다.
"올해 들어서 세 번째야."
로스만은 주위를 둘러보면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자넨 담배를 안 끊었군, 그렇지? 내 코는 속일 수 없어, 포크너 선생."
"과연 마약부장답게 개코로군."
할 수 없다는 듯이 포크너는 어깨를 들어 보이면서 자리에서 일어선다
"어때? 커피 한잔하기"
"한 잔 주게."
포크너는 창가에 놓인 커피포트로 다가가 커피를 따랐다.
"고영무는 보고타에 들어간 모양이더군."
커피잔을 들고 오면서 그가 말했다.
"반쯤 들어갔나?"
"아마 그쯤 돼 많이 죽었어."
커피잔을 받아 한 모금 마신 로스만이 말을 이었다.
"힐튼 호텔에서 총격전이 있었어. 군 수사관 여섯 명이 죽었네. 고영무의 부하 한 놈이 죽고. 목격자의 말을 들으면 고영무의 부하가 총을 난사했다는 거야."
"호, 놀랍군. 놈들의 신문에는 한 줄도 안 난 것 같던데."
"감춘 거지, 부끄러운 일은."
로스만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알폰소한테서 연락이 왔어. 부대원을 떼내어 보고타로 보내겠다는 거야. 고영무의 일을 돕겠다는군. 아니, 자신들이 카스틸로 제거의 주역이 되겠다는 거야. 고영무는 보조 역할을 하고."
포크너는 잠자코 그를 바라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리가 고영무하고 연결이 안 된다니까 믿지를 않아."
"바보 같은 놈, 믿을 일이 따로 있지."
포크너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로스만과 대조적인 용모였다. 작은 키에 대머리였으므로 동년배였으나 서너 살은 더 나이 들어 보였다. 그러나 몸매는 곧고 군살이 없어서 재빠른 인상을 주었는데 정치학 교수를 역임하다가 대통령의 추천으로 보좌관이 된 인물이다. 그는 라파엘의 은근한 지지자였다.
"연결시켜서 좋은 일이 없어. 그렇지만 지원을 받는 것은 나쁘지 않아."
포크너는 로스만의 앞으로 상체를 숙였다.
"그 빌어먹을 워렌 놈이 누군가에게 정보를 흘리고 있어. 어제는 민주당의 로빈스키 녀석이 콜롬비아 정국을 안정시켜야 하지 않겠느냐고 전화를 해왔단 말이야."
"그것은 곧 의회에서 문제를 삼겠다는 이야긴데, 증인으로 워렌을 부르면 그놈은 카드를 쥐게 되네."
"왜? 임기 연장을 바라고 있나?"
포크너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아나?"
"그 자리가 얼마나 매력 있는 자리인데? 임기가 6년이야. 대통령이 연임 동의를 하면 놈은 앞으로 12년을 앉아 있게 돼,"
"미국에서도 없어져야 할 놈이 있는데."
포크너가 나직하게 말하면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마 그쪽에서도 우리에게 똑같은 말을 할 거야. 쓸데없는 내정간섭으로 CIA 일을 엉망으로 만든다고."
"크링거와 손을 잡고 있어, 그놈은."
그러자 로스만이 와락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봐, 그렇게 만든 것이 누군데 그래? 자네 선임자들이야. 콜롬비아의 마약을 들여와 크링거를 통해 이라크와 이란에 뿌린 것이 누군데. 워렌 그 녀석은 중개상 역할을 했고,"
입맛을 다신 포크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로스만이 다시 말을 이었다.
"워렌은 카를로스를 남겨 두고서 그를 조종하여 마약을 정책적으로 운용하자는 주의야. 우리하고는 틀려."
"놈은 우리 일을 사사건건 방해하고 있어. 대통령이 정한 일을."
이렇게 열을 낸다고 해도 지금은 어쩔 수가 없는 형편이다. 그것을 떠올렸는지 로스만은 입을 다물고 식은 커피잔을 들었다.
"이봐, 조지. 내가 자네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포크너가 의자를 잡아당겨 다가앉았다.
"에르난데스가 지금 불안해하고 있지 않을까?"
로스만이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그놈은 항상 도밍고를 누르고 선두 자리를 차지해 왔거든. 제2인자의 자리를 말이야."
"왜? 놈하고 도밍고를 싸움시키게?"
로스만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냐?"
앞장서 길을 걷던 고영무가 스페인어로 산토스에게 물었다. 그는 이제 항상 스페인어를 썼고 신용만과 최대광에게도 그렇게 명령하였으므로 그들의 실력도 부쩍 늘어 있었다.
"묘지입니다, 보스."
"그래?"
묘지 앞을 지나던 고영무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으므로 뒤를 따르던 산토스와 앙헬이 따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시내의 지리를 익히겠다고 나와 한나절을 돌아다닌 다음 아파트로 돌아가는 길이다. 이제까지 서너 차례 이 길을 지나왔지만 담장만이 계속된 곳이어서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곳에 한국인 묘가 있는가 알아보고 와, 앙헬."
고영무의 말에 앙헬이 머리를 끄덕이며 문도 없는 담장 안으로 들어갔다. 산토스가 힐끗 고영무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늦은 오후여서 드물게 오가는 행인들의 발길이 바빠 보였다. 계엄군의 모습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것이 경계가 조금 풀린 것 같기도 했다. 오르쿠에 쪽에서 며칠 전부터 시작된 대공세에 모든 관심이 집중된 때문일 것이다. 앙헬이 판초 자락을 펄럭이며 나왔다.
"보스, 이곳에는 없습니다. 카레라 14번 도로의 끝 쪽에서 시외로 10킬로쯤 나가면 그곳에 한국인 묘소가 있답니다."
머리를 끄덕인 고영무가 몸을 돌렸다. 아파트로 돌아오자 시내에 나갔던 브루노가 돌아와 있었다.
"보스, 카스틸로는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습니다. 행사에도 참석하는 일이 드물고, 그가 즐겨 하는 행사는 대통령궁에서 요인들만 모아들고 하는 궁중 행사더군요."
그는 종이를 고영무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신문에서 베낀 것으로 대통령의 동향에 대한 것이었다. 대통령궁에서만 생활한다면 궁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고영무는 종이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칠레가 16번지에 메모리얼 빌딩이 있어, 8층 빌딩인데 1층에서 6층까지는 국제무역의 사무실이고 7, 8층은 회의실로 되어 있지."
브루노가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았고 방 안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이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실제는 그것이 대통령의 비밀 사무실이야. 6층까지는 경호실이 내외의 정보업무를 하는 곳이고, 7, 8층은 대통령의 휴게실이지."
고영무가 말을 이었다.
"대통령은 한 달에 두 번씩 그곳에 들러서 일을 하는데, 주로 저녁에 왔다가 다음 날 아침 일찍 나가기 때문에 노출되지 않았지. 8층의 침실에서 자고 가는 거야."
대원들이 슬금슬금 모여들더니 그를 에워싼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TV 스타인 세실리아양이 그때마다 들렸는데 지금은 알 수가 없어."
고영무가 주위의 사내들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이제까지 15일 동안 지리도 익혔고 경비도 조금 느슨해진 것 같다. 내일부터는 메모리얼 빌딩이 목표다."
"보스, 왜 진작 말해 주지 않았습니까?"
브루노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는 나름대로 대통령의 동향이나 궁의 위치를 조사해 오고 있었다.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짐 버클리는 궁과 정부청사 사이의 도로를 걸어서 다섯 번은 왕복했을 것이다.
"시기가 되었기 때문이야. 그렇게 알고 있으면 돼."
고영무가 자르듯 말하자 모두들 더 이상 불평하지 않았다. 시기는 지미 골드가 충고해 주었다. 도착하자마자 메모리얼 빌딩을 목표로 하는 것은 지리도 익숙지 못한데다 저쪽의 경계가 강화될 것이므로 얼마간의 시기를 두라고 말해 주었던 것이다. 메모리얼 빌딩의 정보도 지미 골드로부터 나온 것이었는데, 그것의 출처까지는 알 필요가 없었다. 고영무는 대원들이 겉으로는 투덜거렸지만 방 안의 분위기가 갑자기 팽팽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목표가 확실하게 세워지게 되면 누구나 눈빛부터 달라지는 법이다. 그것은 고진호씨가 한 말이었다. 가게에서 함 두 개를 사 봉지에 넣은 페드로는 거스름돈으로 받은 잔돈을 세면서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머릿속으로 돈 계산을 하는 듯이 길거리 쪽을 바라보면서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러다가 다시 다른 쪽을 바라보며 갸웃하고는 이내 머리를 끄덕이고 돈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는 봉투를 가슴에 안고 길을 따라 걷다가 옆쪽 골목으로 들어섰다. 저녁 무렵이어서 행인들의 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골목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바쁜 듯 어깨를 부딪쳐도 제대로 사과의 말도 던지지 않았다. 페드로는 골목을 빠져나가자마자 아래쪽 골목으로 뛰어내렸다. 이쪽은 빈민가여서 골목이 2층으로 된 곳이 많았다. 건물들이 땅을 깎아 지은 곳이 있기 때문이다. 페드로는 골목을 달려 골목 왼쪽으로 꺾어져 들어갔다. 아까부터 사내 한 명이 미행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메모리얼 빌딩 건너편의 환전소였는지, 아니면 그다음인지 분명하지는 않았다. 10분쯤 달리고 난 페드로는 숨을 헐떡이며 아파트의 윗부분이 바라보이는 거리로 들어섰다. 인디오 아이들 두 명이 웃통을 벗은 채 이쪽으로 달려왔다가 그를 지나쳐 갔다. 페드로가 막 좀은 길을 돌아 아파트 입구 쪽으로 향했을 때였다.
"선생, 잠깐만."
뒤쪽에서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린 페드로는 소스라치게 놀라 숨을 멈췄다. 아까부터 따라오던 녀석이었다. 도대체 이놈이 어떻게 여기까지 따라왔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우선 놀라웠다.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그러면서 사내는 웃으려고 입 끝을 올렸다.
"년 누구냐!"
합 봉투를 한 손으로 움켜쥔 채 오른손을 판초 속으로 조금씩 밀어 넣으면서 그가 물었다. 아직도 숨이 가쁘고 가슴이 뛰고 있었는데 이놈은 그저 조용히 입김만 뿜고 있을 뿐이다.
"난 고영무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당신 보스를 말입니다. 틀리지 않기를 바랍니다만."
"그건 무슨 소리야? 고영무가 누구지"
이미 페드로의 오른손은 판초 밑의 권총 손잡이를 단단히 쥐고 있었다. 사람들이 오가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도 목숨을 걸고 당신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선생. 난 어제도 당신을 미행했는데 이 자리에서 당신을 놓쳤어요. 그래서 오늘은 이곳에서 먼저 기다린 겁니다."
사내는 삼십 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데스티조였다. 눈이 날카롭고 입술이 얇아서 약삭빠른 인상이었으나 말투는 진실성이 있어 보였다.
"난 미국의 연락을 받고 온 겁니다, 선생,"
그가 다시 말했다.
"도대체 무슨? 나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하겠는데."
"연락을 않기로 한 것도 압니다. 하지만 목표점 부근에서 기다리면 만날지도 모른다고 해서 일주일째 기다렸습니다."
이만하면 카스틸로의 끄나풀은 아니라고 페드로는 믿었다. 그러나 아파트로 데려갈 수는 없다. 그는 이 사내를 믿은 책임을 혼자 지기로 마음먹었다.
"좋소, 당신을 믿겠소. 그런데 왜 우리 보스를 찾으려는 거요? 그리고 당신은 누구요?"
"난 마약부 소속으로 이곳의 책임자인 앙드레라고 합니다. 나는 이곳 시민입니다. 성당 앞에서 꽃가게를 하고 있지요. 그의 전갈이라고 하면 당신의 보스가 알 겁니다."
"나에게 전할 수는 없소?"
"안 됩니다."
그리고 그는 싱긋 웃었다.
"철저하시군요. 든든합니다.“
고영무는 앙드레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앙드레, 그럼 알폰소가 보고타로 3백 명을 보낸다는 말이오? 날 도우라고?"
앙드레는 주위에 둘러싸고 있는 사내들을 바라보고는 머리를 저었다.
"본래 라파엘씨의 의도는 그런 것이었습니다만 본부의 생각은 다릅니다. 이쪽은 라파엘 측에 노출시키지 않고 본래의 작전을 하고 라파엘 측이 이쪽을 지원하도록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린 그들을 만날 필요가 없겠군. 우리와 비슷한 얼굴인지 궁금했는데,"
브루노가 말했으나 아무도 웃지 않았다. 다만 앙드레가 희미하게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연락은 제가 합니다. 이쪽에서 어떤 지원이 필요한가만 말씀해 주시면 그들에게 제가 연락을 하지요."
"그건 도대체 왜 그렇소?"
짐 버클리가 물었다.
"우리의 지원부대인데 우리가 직접 지시해야지, 안 그렇소?"
"이쪽은 미국에서 오신 분들이죠. 저쪽은 콜롬비아 현지에서 활동한 사람들이고. 본부에서는 이쪽이 미국에서 왔다는 것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모두들 잠자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본부에서 다른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고영무는 그의 시선이 힐끗 자신을 스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아파트로 들어서자 자신과의 단독 면담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것을 무시하고 모든 대원을 불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원들은 만족한 모양이었으나 앙드레의 본부 소리에 조금씩 저항감을 품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은 라파엘의 추증자들이었고 현지의 동료들을 만나 함께 작전을 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고영무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소, 앙드레, 미국이 내정 간섭했다는 소리를 듣기 싫은 모양이로군. 어차피 우리는 우리만으로 계획을 세웠는데 지원이 있다면 더 말할 것도 없지, 그렇게 합시다."
고영무가 말을 맺자 앙드레가 긴장이 풀린 듯 어깨를 내렸다.
"그럼 우리의 연락 방법을 정해야 할 것 아닙니까?"
브루노가 고영무와 앙드레를 번갈아 보면서 묻자 머리를 든 앙드레가 선뜻 대답했다.
"그건 제가 정해 가지고 왔습니다."
앙드레가 돌아가고 나자 짐 버클리가 고영무에게 다가왔다. 브루노가 뒤를 따라와 그의 앞자리에 나란히 않았다. 짐이 입을 열었다.
"보스, 우리는 보스가 명령한다면 당장에 죽으러 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먼저 알아 두셔야 합니다."
"알고 있어, 짐."
고영무가 선뜻 머리를 들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짐과 브루노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난 너회들과는 달리 콜롬비아 국민이 아니지. 그것은 인정한다."
"너희들과 다른 보상이 있어, 너회들은 새로운 정권과 자유겠지만 나는 그것이 아니야. 그건 너희들도 잘 알 거야. 앙드레의 일로 이것을 분명히 하게 돼서 잘됐다. 나는 너희들을 이끌고 카스틸로를 제거한다. 그것으로 너희들과 나와의 계약은 끝나는 거야,"
브루노와 짐은 잠자코 시선을 내렸다.
"카스틸로를 제거하는 데 내가 필요할 거야, 짐. 그리고 아직까지는 내가 너희들의 보스이고."
"보스, 난 다릅니다."
브루노가 불쑥 말했으므로 짐이 그를 바라보았다. 고영무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냐"
"난 일을 마치고 나서도 보스를 따라갑니다, 만일 받아 주신다면,"
"정권이 바뀌면 너희들은 자유와 함께 큰 영예를 얻게 돼."
"내가 초등학생입니까? 내 아들도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웃습니다:"
"그럼 뭐냐?"
"성공하면 보스, 나는 보스가 나눠 주는 수당을 받고 LA에서 다시 살 겁니다."
마침내 고영무가 빙그레 웃었고 그것을 본 브루노가 따라 웃었다. 짐은 입맛을 다시면서 머리를 숙였다.
"짐, 마약부에서 원하는 대로 우선 본래의 계획대로 집행한다. 지원군은 필요할 때만 지원을 받기로 하고, 연락은 앙드레를 통하는 수밖에 없어."
"알겠습니다, 보스."
"우린 마약부와 계약을 맺은 거야, 이 시점에서 등을 돌리면 안 돼."
짐이 다시 머리를 끄덕였다. 그를 바라보던 고영무가 문득 물었다.
"짐, 너도 브루노와 함께 일 끝내고 돌아갈 작정이냐?"
짐이 머리를 들어 고영무를 바라보았다.
"저는 우선 카스틸로를 제거하는 것에만 신경을 써서 그런 생각은 아직 해보지 않았습니다. 살아 있을지도 알 수 없고."
"난 너희들을 모을 때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집에 가져다줄 생활 비를 나눠 주었다. 하지만 일이 성공했을 때의 보상은 말하지 않았지."
고영무가 그들을 둘러보았다. 아파트 안에는 네댓 명의 대원들이 있었으나 이쪽을 의식한 탓인지 응접실 쪽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최대광과 신용만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고영무가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을 말해주면 너희들이 돈 때문에 싸우러 간다는 건 시끄러운 일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기회에 분명히 말해 둘 것이 있다. 나는 28명의 대원에게 수당을 나눠 줄 것이다. 죽은 자는 그의 가족에게 준다. 이것은 본래부터의 내 생각이다."
브루노와 짐이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콜롬비아에 남아 있을 대원에게도 주겠다. 브루노, 이것을 대원들에게 알려 줘라."
브루노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대통령궁의 대연회장은 3백 평이 넘는 규모였으나 내외 귀빈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정장을 하고 부인을 동반한 장관과 장군, 학계와 종교계, 문화예술계의 유명인사들은 모두 모여들었고 해외 사절들도 빠짐없이 참석해 있었는데 오늘이 독립기념일이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샹들리에가 휘황하게 번쩍이는 연회장에는 조금 전 카스틸로의 축사가 끝나고 댄스파티가 시작되고 있었다. 연회장 안쪽에 마련된 악단에서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자 얼굴에 웃음을 띠운 카스틸로가 부인인 소피아의 손을 잡고 플로어로 나왔다. 소피아는 중년의 나이였으나 젊었을 때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있었다. 흑갈색 눈과 갸름한 얼굴, 도톰한 입술은 아직도 사내들을 매혹시킬 만했고 대통령 부인으로서의 품위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들이 플로어로 나가 왈츠를 추기 시작하자 하나씩 둘씩 장관과 장군, 외교 사절들이 부인과 함께 플로어로 나가기 시작했다. 연회장은 이제 떠들썩한 소음과 음악 소리로 가득 차 있었는데 벽 쪽에는 술과 안주가 준비된 기다란 탁자가 놓여 있어서 그쪽에도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에르난데스는 왈츠가 한 곡 끝나자 부인인 막달레나의 손을 끌고 플로어를 벗어났다 카스틸로도 소피아와 함께 옆쪽에 마련된 자리로 가고 있었으므로 에르난데스는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에르난데스, 난 이만 들어갈 테니까‥‥‥‥"
카스틸로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여기에 남아 있도록 해. 도밍고가 고생하고 있는데 기분이 흥겨워지지가 앉아."
"네, 각하."
에르딘데스가 힐끗 카스틸로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셔 있었고 이맛살을 찌푸린 채 연회장의 군중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난 들어간다."
카스틸로는 몸을 돌려 소피아와 함께 옆쪽 문으로 사라졌다. 대통령이 나가자 연회장은 더욱 활기가 차오르는 것 같았고 소란스러워졌으나 에르난데스는 벽에 붙은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도밍고는 지난 6개월 동안 정부군이 점령하지 못했던 오르쿠에를 이틀 전에 함락시켰다. 라파엘이 주력부대와 함께 뒤쪽의 밀림 속으로 후퇴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오르쿠에는 해방시킨 것이다. 밀림에 들어가면 대규모의 군사작전은 어려워진다. 잡으려는 쪽이나 물리는 쪽이나 부대를 작게 나누어 소모전을 치를 작정을 해야 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득이 있다면 이제 라파엘은 정권을 회복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는 것인데, 그것은 기반이 되는 지역과 주력을 모두 분산시켰기 때문이다. 에르난데스는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의 땀을 닦았다. 도밍고는 하루에도 여러 번씩 카스틸로와 통화를 하고 이틀에 한 번은 헬리콥터를 타고 날아와 대통령궁에서 장시간 머물다가 간다. 에르난데스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막달레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 저쪽 바에서 술 한잔할 테니까‥‥‥‥"
그가 휘적거리며 옆쪽의 군상들 사이를 헤쳐나가자 모두들 길을 비켜 주면서 그에게 목례를 보냈다. 그들을 향해 웃는 얼굴로 머리를 끄덕여 보인 에르난데스의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만일 오르쿠에에서 도밍고가 와 었었다면 이 연놈들은 그놈에게 더 깊숙이 머리를 숙일 것이다. 이제 그놈은 명실상부한 제2인자인 것이다. 바로 다가간 에르난데스는 잔에 담아 놓은 샴페인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장군, 오랜만입니다."
옆쪽에서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에르난데스는 몸을 돌렸다. 미국 대사인 맨스필드였다. 그는 둥근 얼굴에 사람 좋은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아, 맨스필드씨. 그렇군요, 오랜만에 이런 자리에서 만납니다."
다시 술잔을 집은 에르난데스가 머리를 끄덕였다.
"내가 항상 바빠서 대사들과의 모임에는 자주 못 갔습니다. 미안합니다."
"재미없는 모임이지요. 특히 대사들은 말입니다. 언제나 예의를 차리면서 본부의 명령을 받아야 움직이니까요. 화장실에 갈 때만 빼놓고 말입니다."
에르난데스가 입술을 부풀리며 웃었다.
"대사, 그럼 지금도 그렇소?"
맨스필드가 술잔을 입에 댄 채 플로어 쪽으로 얼굴을 돌리자 에르난데스는 술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미국과의 관계가 매우 좋지 않은 상태였다. 카스틸로는 미국이 자신의 정권을 전복시키려 한다고 믿고 있었다.
"곧 연락을 드리지요."
소음 속에서 그가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말하는 소리를 들으며 에르난데스는 몸을 돌렸다. 다시 한입에 샴페인을 털어 넣었으나 이미 술기운은 달아나 있었고 속만 메스꺼웠다. 오늘은 거들을 너무 단단히 채운 것 같았다. 술잔을 내려놓던 그의 시선이 두 사람 건너 옆쪽에서 안주를 입에 넣는 사내에게 멈춘다. 한국 대사인 김상호였다. 그는 작년 말에 부임해 왔으므로 아직 이곳 물정에 서투르다.
"이보시오, 김대사. 샴페인 한잔 드시겠소?"
샴페인 잔을 들며 말하자 그가 머리를 저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단정한 얼굴이었으나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녹록하지가 않다. 한국 교민들의 집을 수색하는 것에 대해서 이놈은 외무부에 강력히 항의를 해왔다. 그것도 마음에 차지 않았는지 계엄사령부까지 찾아와 한참동안이나 떠들다 간 놈이다. 전직이 국회의원이어서 그런지 노는 것이 전문 외교관하고 다르다.
"김대사, 이제 한국 교민이나 주재원에 대한 상황은 나아졌지요?"
"네, 덕분에. 고맙습니다."
그러나 얼굴은 전혀 고마운 표정이 아니다. 에르난데스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러자 문득 맨스필드가 지나치면서 한 말이 떠올랐다.
산토스에게 계단 위에서 기다리라고 이른 다음 고영무는 돌더미가 이곳저곳 쌓인 밋밋한 능선을 걸어 올라갔다. 좌우에는 오래된 석조 십자가와 제단들이 불규칙하게 세워져 있었는데 곳곳에는 파헤쳐진 흔적도 보였다. 옛 무덤이었고 앞쪽의 새로 조성된 묘지도 이장된 모양이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잘 다듬어진 흔적이 보이는 묘지가 드러나고 있었다. 검은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지나쳤다. 오른쪽 언덕 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은 이제 막 땅에 묻힌 사람을 위한 의식일 것이다. 좌우의 묘지를 살펴 가며 걷던 고영무는 이윽고 눈에 익숙한 이름들을 찾아내었다. 킴 프란시스코, 안 마리아, 최 아막리오 등의 이름은 한국의 이름을 가지고 이민 와서 살다가 하는 수 없이 이곳 이름을 붙이고 죽은 사람들이다. 주위에서 매일 마주치고 거래를 하는 사람들에게 영철, 옥순으로 발음하기 어려운 본이름으로 불리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이 이곳 이름을 붙인 가장 큰 이유의 하나인 것이다. 걸음을 늦춘 고영무는 좌측의 묘비명을 하나씩 훑어 나갔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오후 4시경이어서 한낮의 비스듬한 빛살이 묘비에 긴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능선을 넘어온 부드러운 바람에 나무 냄새 같기도 하고 야채를 절인 냄새 같기도 한 묘지 특유의 공기가 코에 스며들었다. 숱한 죽음을 보아 온 셈이었다. 일 년 동안 자신의 손에 죽어간 사람도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김강남의 피살을 신호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윽고 그는 묻힌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로운 무덤들을 찾아내었다. 그것은 좌측의 안쪽 능선 부근에 있었으므로 그쪽으로 다가갔다. 한국 이름이 적힌 묘비만 해도 5, 60개는 되어 보였는데 이민 2세대도 묻혀가고 있는 시기였다. 묘비를 훑어가던 고영무의 시선이 옮겨지다가 한순간에 멈추었다. 바로 앞쪽 3미터쯤 떨어진 묘비 옆에 김영지가 정물처럼 서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한동안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는 듯한 자세로 서 있었는데 이윽고 먼저 입을 뗀 것은 고영무였다.
"나는 김강남씨를 죽이지 않았어."
그의 목소리는 이쪽저쪽의 묘비판에 부딪친 때문인지 조금 울렸다. 그러나 김영지는 듣지 못한 듯이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물론 당신 아버님도 마찬가지야. 그럴 의도가 없었어."
고영무는 어깨를 늘어뜨리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이내 김강남과 호세 김의 묘비를 찾아내었다. 그녀의 뒤쪽에 나란히 서 있었던 것이다. 김영지를 지나 그들의 묘비 앞에 제각기 꽃을 놓고 고영무는 절을 했다. 호세 김의 묘 앞에서 절을 마친 고영무는 일어나 묘비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정으로 다듬은 자국이 생생한 대리석 묘비가 주변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으므로 그것이 고영무의 가슴을 더욱 가라앉혔다.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던 고영무가 몸을 돌리자 이미 김영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표정 없는 얼굴로 입구 쪽으로 나아갔다.
사무실 앞을 지나는데 민기철이 나왔다.
"영지야, 어딜 다녀오는 길이냐?"
그는 호세 김의 작업복을 입고 있었는데 옷이 컸으므로 소매를 두 번쯤 걷은 데다가 바지는 자신의 것을 입어서 반코트를 걸친 것 같은 모습이다.
"저기, 친구 집에요."
얼떨결에 틱과 손을 한꺼번에 들어 시내 쪽을 가리켰는데 민기철은 그것을 보더니 입맛을 다셨다.
"외삼촌한테서 전화가 왔다."
나란히 집 쪽을 향해 걸으며 민기철이 말했다.
"어머니는 별고 없으시단다. 외삼촌은 오히려 너를 걱정하시더라. 주문은 많은데 일손이 모자라서 직원을 몇 명 썼어야 됐다."
"제가 내일부터 일할게요, 아저씨."
민기철이 머리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치켜뜨고 있었다.
"그게 정말이야?"
"그럼요."
잠시 주춤거리던 민기철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잘 생각했다, 영지야. 이젠 네 생활을 찾아야지. 아버지도 기뻐하실 게다."
"네가 매일 나가는 것도 알고 있었다. 불안해서 사람을 시켜 네 뒤를 따라가 보게 했지."
"어이구. 이젠 내가 살겠구나."
민기철이 여간 기뻐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김영지의 마음도 가벼워졌다. 집 안으로 들어선 김영지는 응접실로 다가가 수화기를 들었다. 외삼촌은 그녀가 어머니와 함께 서울에서 살기를 바라고 있었다.
"여보세요."
신호가 가고 한참을 기다리자 저쪽에서 수화기를 들었다. 외삼촌의 목소리였다.
"외삼촌, 저예요. 영지예요."
"아, 영지냐? 그래, 별일 없지?"
"네, 저는 괜찮아요. 어머니는 어떠세요?"
"여전하다. 그래, 넌 언제 서울에 올 테냐?"
김영지는 숨을 들이쉬었다.
"외삼촌, 저 이제 여기 있겠어요."
"아니, 그곳에? 영지야."
외삼촌은 놀란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마 콜롬비아의 내전이 격렬해져 있다는 것은 전세계가 알고 있을 것이다.
"외삼촌, 제가 비행기표를 보내드릴 테니까 어머니를 보내 주시지 않겠어요? LA에서 갈아타시기만 하면 되는데, 누구 LA에 가시는 분한테 부탁해서."
"안 된다."
외삼촌의 말소리가 냉랭해졌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안 이상 네 어머니는 보낼 수 없다. 너도 이제 그곳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와라."
"외삼촌."
김영지는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민기철이 응접실로 들어왔다가 힐끗 그녀를 바라보더니 어깨를 굽힌 모습으로 돌아 나갔다.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에요, 외삼촌. 그리고 이곳은 제 고향이에요. 비록 아버지와 오빠를 잃었지만"
김영지는 말을 그치고 침을 삼켰다.
"네 어머니는 폐인‥‥‥ 아니다, 네 어머니까지 그렇게 만든 곳이다."
외삼촌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난 너희들을 잃기 싫어서 그런다, 영지야. 너나 네 어머니는 지금 가족이 필요해. 돌아오너라."
"저는 돌아왔어요, 외삼촌."
김영지는 응접실 안을 돌아보았다. 콜롬비아에 돌아온 지 보름이 넘었지만, 집안의 가구를 이렇게 보는 것도 처음이다. 그리고 이렇게 가슴에 와닿는 느낌도 처음이다. 20여 년 동안 낯익은 가구들이었으나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느끼게 편 동기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저는 이곳에서 가족을 잃었지만."
김영지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말을 멈춘다. 외삼촌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가 이곳에 오셔야 나아지시리라고 믿어요. 그건 확실해요, 외삼촌."
그는 김영지의 끈질긴 고집에 지쳤는지 아니면 화가 났는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외삼촌, 어머니를 낫게 해드리고 다시 한국에 갈게요."
김영지가 다시 말했다.
"이곳은 어머니나 저의 고향이에요, 외삼촌."
"네 어머니에게 물어보겠다."
마침내 그가 한숨 소리처럼 말을 멎었다.
"네 어머니가 승낙한다면 보내 주마."
말을 멈춘 어머니가 승낙과 거절을 몸짓으로 표현할 리는 없다. 오직 침묵으로 일관하는 어머니의 반응을 외삼촌이 어떻게 해석할지는 몰랐다.
"외삼촌."
김영지가 초조하게 불렀으나 외삼촌은 다음에 연락한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귀에 댄 채 박주경은 눈을 부릅떠 앞쪽을 바라보았다.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으나 상대방은 너무 당당했다. 놈의 말소리가 다시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따라서 나는 박회장이 요구 조건을 수락할 것으로 믿습니다. 요즘 신혼이라 이것저것 바쁘시겠지만 이 일이 잘못되면 회사고 쥐고 순식간에 어떻게 된다는 것쯤은 잘 아실 테니까."
"이것 보시오."
박주경이 말소리를 높였다.
"당신은 30억을 가져갔소. 그런데 또 2백억이라니. 그런 큰돈도 없으려니와 당신에게 죄를 지은 것도 없소, 나는."
박주경은 한 마디 한 마디를 자르듯이 말했다.
"난 경찰에 신고할 테니까 그 서류를 뿌리든지 신문에 내든지 당신 마음대로 해요. 난 죄가 있다면 차라리 세금을 내든가 벌을 받겠소."
"그러셔도 좋습니다, 박회장. 과연 결단력이 강하십니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내일 아침부터 나는 일간지에 5단으로 당신의 비자금에 대한 규모와 사용처를 광고로 내겠소. 물론 내 돈으로. 매일매일 낼 것이니까, 그럼."
전화가 끊기자 한동안 수화기를 쥐고 있던 박주경은 전화기를 부숴 버릴 듯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자여이 놈에게 모든 서류를 넘겼음에 틀림없었는데 과연 어디까지 깊숙하게 자료를 수집해 놓았는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자영은 그의 분신과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거의 밤마다 살을 섞었고 아버지인 박재룡 회장을 도태시키는 계획까지 잠자리에서 상의했던 사이였으니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일까지 수집해 놓았을 수도 있다. 박주경은 인터폰을 눌렸다.
"네, 회장님."
비서실의 수행비서인 이한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방으로 들어와."
우두커니 문 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시선에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이한일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책상 앞에 다가와 선다.
"부르셨습니까?"
"이자영의 소재는 아직 파악이 안 됐죠?"
"아직 안 되었습니다, 회장님. 지금 찾고는 있습니다만."
"영동 경찰서의 한반장에게 부탁해 놓았습니다. 그 사람이 사흘 안에 찾아내겠다고 장담은 했습니다만."
박주경이 입을 다물고 있자 이한일은 초조한 듯 눈을 여러 차례 깜박였다. 비공개로 수사하느니만치 인력과 자금이 더 들어가고 있었다. 경찰서의 반장과 반원들에게 두툼한 수고비가 주어졌으므로 그들이 만사 제쳐놓고 이 일에 매달려 있지만 확실한 보장은 없다. 박주경은 입맛을 다시면서 머리를 돌렸다. 그년이 30억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그런 쇼를 부리면서 그 자리를 빠져나가 이렇게 크게 놀 줄은 몰랐다. 본래가 교활한 계집이었다. 그리고 제 분수에 맞지 않은 허영으로 뭉친 꿈을 꾸는 년이었다. 그년과 결혼할 생각은 애초부터 눈곱만큼도 없었다고 자부한다.
"신문사의 광고 담당 편집자를 만나야겠어, 모든 일간지의. 그래서 우리 회사, 특히 나에 대한 폭로 광고 의뢰가 오면 싣지 못하게 해야 돼."
박주경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이한일이 눈을 둥그렇게 됐다. 그가 말을 이었다.
"어서 돈을 준비해 가지고 나가. 몇 사람이 서둘러야 돼. 이자영이 신문에 폭로기사를 실으려고 하니까 편집장들한테 광고비의 배를 주더라도 못 싣게 하란 말이야."
"알았습니다, 회장님."
그가 서둘러 방을 나가자 박주경은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놈이 일을 벌이기 전에 이쪽에서 미리 선수를 쳐야 한다. 이미 이쪽에서 어떻게 하겠다고 말을 해놓은 이상 저놈들도 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막 전화기에 손을 가져가는데 벨이 울렸다. 얼떨결에 깜짝 놀란 박주경은 놀란 것에 화가 났고 수화기를 움켜쥐자마자 버럭 소리쳤다.
"뭐야!"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쥐고 있는 전화기가 외부 전화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나, 저예요."
그쪽에서도 놀란 듯 대답해 온 것은 오경선이었다. 박주경은 기다랗게 숨을 내쉬었으나 아직 화가 풀린 것은 아니었다.
"웬일이야?"
"당신, 무슨 일 있어요?"
그가 물었는데 그쪽이 오히려 되물어 왔다.
"전화에 대고 그렇게 소리 지르는 법이 어디 있어요? 놀랐잖아요. 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전화했는데요, 당신 혹시 이자영이라고 아세요?"
박주경이 눈을 치켜뜨고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오경선이 다시 말을 이었다.
"어떤 남자가 전화를 해 왔는데 집으로 무슨 서류를 보낸대요. 당신이 지시하신 것이라면서, 이자영에 관한 서류라고 했어요. 저, 받아도 돼요?"
침을 끌어모아 삼킨 박주경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자영씨, 요좀 얼굴색이 좋지 않아.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 거야?"
조한철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바라보던 이자영이 머리를 저었다.
"아녜요, 아무것두."
"그런 것 같지가 않단 말이야. 내가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그러네."
이맛살을 찌푸린 이자영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11시 10분 전이었다. 바 안의 손님들은 10여 명이 넘었으나 모두 외국 사람들이었고 내국인은 그들밖에 없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요."
술잔을 집어 든 조한철을 향해 이자영이 말했다.
"피곤해요."
"그러지, 그럼 ,"
술에는 미련이 없다는 듯 조한철이 선선히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둘이서 양주 한 병을 나눠 마셨으니 마실 만큼은 마신 것이다. 앞장서서 클럽 안을 빠져나가던 조한철이 바 안쪽에 서 있는 바텐더의 인사를 받고는 한쪽 손을 들어 보였다. 바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던 서너 명의 외국인이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노골적인 시선이었으나 개의 머리가 흔들리는 것처럼 자연스러웠으므로 이맛살을 찌푸리던 이쪽이 오히려 무안해졌다
"오늘 안 들어가도 돼죠? 한철씨."
문으로 나온 이자영이 문득 그렇게 말하자 조한철은 퍼뜩 눈을 치켜떴다. 이제까지 그와 대여섯 번 만나 왔지만 외박한 일은 없다. 조한칠은 시원스런 성격이어서 은근히 눈치를 보이다가 이자영이 거절하면 두말하지 않고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영동에 있는 호텔의 방 안에 들어설 때까지 조한철은 및 마디밖에 입을 열지 않았고 이자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조금도 들떠 있지 않았는데, 이런 성격이 이자영의 마음에 들었다. 얼굴값을 하는 남자들은 대부분 경망스럽고 말이 많았는데 조한철은 행동이 진득한데다가 필요한 말 이외에는 하지 않는 성격이다. 그러나 그를 결혼 상대로 생각해 본 척은 없다. 박주경으로부터 채워질 수 없는 신선한 분위기를 즐겼을 뿐이다.
"몸이 끈끈해요. 샤워부터 하고 싶어요."
의자 위에 가방을 던져놓으면서 이자영이 말하자 조한칠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그가 창가 의자에 합아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 것을 보면서 이자영은 화장실로 들어간다. 화장실 안의 커다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 이자영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이제는 도망자의 신세가 된 것이다. 두 눈에 음울한 광채를 내고 입술을 꼭 다물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서 시선을 뗀 그녀는 한 가지씩 옷을 벗어 세면기 위쪽에 내려놓았다. 샤워를 끝내고 난 이자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세면기에 놓인 옷 뭉치를 안고는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아까의 그 모습 그대로 조한철이 앉아 있다가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옷가지를 의자 위에 걸쳐놓은 이자영은 알몸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조한철이 그녀의 온몸을 훑어보았다. 이자영이 그의 시선과 마주치자 입가에 웃음을 띄우면서 침대로 다가가 시트 속으로 하반신을 밀어 넣었다. 그는 이런 식의 도전에 당황하거나 주춤거릴 사람이 아니다. 이자영은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는데 그녀의 시선을 받으면서 조한철이 옷을 벗어 던졌다. 금방 그의 건강하고 미끈한 알몸이 드러났다. 이미 그의 남성이 단단하게 굳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다가와 거칠게 이불자락을 제쳤다. 그와의 입맞춤도 처음이었으므로 이자영은 눈을 감았다. 그의 입술이 자신의 눈에서 코로, 다시 입술로 내려오는 것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동안 그녀의 몸도 점점 뜨거워져 갔다. 그의 숨결이 귀를 간지럽힐 때는 참다못해 두 다리를 꼬았다. 조한철은 서두르지 않았고 이자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녀의 온몸을 확인이라도 해야겠다는 듯이 얼굴을 가져다 대었는데 이윽고 그의 입술이 아랫배를 지나자 그녀는 엉덩이를 들었다. 방 안은 뜨거운 숨결과 비릿한 땀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조한철은 그녀의 깊은 곳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고는 두 손길로 매끈한 허벅지의 안쪽을 어루만졌다. 이자영은 자신의 그곳에서 흘러내리는 액체가 밑쪽으로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눈을 했을 때 조한철은 상반신을 끌어당겨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자 이자영은 아래쪽에서 뜨거운 충격을 느꼈고 그것은 가득 찬 포만감으로 연결되었다. 감탄하듯이 그녀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허리를 번쩍 치켜들었으므로 그녀의 몸은 어깨와 두 발만이 침대를 짚은 자세가 되었고 그것이 조한철의 움직임과 맞추어 엉덩이를 들었다가 내린다. 이윽고 그녀는 두 다리를 번쩍 치켜들고는 그의 허리를 감았다. 그리고는 방 안이 터져 나갈 듯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당신은 신비로운 여자야."
가쁜 숨을 겨우 진정한 조한철이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도 방 안은 끈끈했고 장마 직전의 날씨처럼 비린내와 열기에 덮여 있었다. 알몸을 내팽개치듯 침대 위에 누운 채 이자영도 천장을 바라보았다.
"당신만큼 멋진 여자는 없었어, 내 인생에서."
그는 머리를 돌려 이자영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영씨, 당신을 사랑해."
천장을 바라보던 이자영의 입술이 꼭 다물어진 채로 부풀어 오르더니 입술 끝이 천천히 위쪽으로 치켜 올라갔다.
"알고 계시면서. 난 결혼할 남자가 있는 여자예요,"
"박주경 회장 말인가?"
그의 손이 젖꼭지를 건드리고 있었으므로 이자영은 시선을 내려 그것을 바라보았다. 의지와는 반대로 붉은 젖꼭지가 일어서는 중이다.
"동부그룹의 회장 딸과 결혼을 했더구만 그래. 나도 알아봤어."
"잘못 알아보았군요, 한철씨. 난 박주경 회장의 심복이었을 뿐이에요. 깊은 관계는 없어요."
조한철의 한 손이 그녀의 깊은 곳에 닿았다. 그의 손가락의 촉감이 이 쪽에게도 느껴졌는데 아직도 뜨거웠고 끈적거렸다. 조한철의 입김이 다시 귀에 닿았다.
"그렇다면 그랜드 호텔은 왜 자주 가서 묵고 와?"
"그 사람이 내 몸을 필요로 해서요."
"그것도 비서가 해야 할 일이야?"
"나도 필요하기도 했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 자영씨."
이자영이 손을 뻗어 그의 남성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것은 다시 단단해져 있었고 끈적거렸다.
"이제 우리의 관계는 끝났지만 당신의 그 말이 나에겐 큰 위안이 돼요, 한철씨. 고마워요."
조한철의 손놀림이 멈췄으므로 이자영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모르게 두 다리를 모으고 엉덩이를 들어 스스로 자극을 만든다.
"박주경과 만나는 동안에 내가 필요했었단 말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그와의 관계가 끝나면 이쪽도 끝나게 되는 것이었나?"
"당신은 신선한 남자였어요. 가끔 산소공급을 받는 것 같았어요. 당신을 만날 때에는."
이자영이 팔을 들어 그의 손을 자신의 손에서 떼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당신 하나만으로 난 살 수가 없는 여자이고요."
"또."
그가 재촉하듯 뒷말을 따라 물었으나 이자영은 머리를 저었다.
"난 본래 당신을 결혼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사랑의 대상으로도."
"날 잘 아는 모양이지?"
웃음 띤 목소리로 그가 묻자 이자영이 머리를 끄덕였다.
"당신 회사가 이름과 전화번호만 걸어놓은 회사라는 것도 알아요. 더 자세한 것은 알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이자영은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사랑해 줘요. 오늘 밤이 새도록."
목에 힘을 주어 버티던 조한철은 바로 얼굴 밑으로 그녀의 달아오른 두 볼과 두 눈을 보았다. 조금 벌린 입술 사이로 흰 치아가 드러났다. 이윽고 조한철은 그녀의 몸 위로 상체를 실었다. 이제까지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녀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나 지금은 미워할 수도 없었다. 이자영이 두 다리를 들어 그의 허리를 감고 있었다.
음식에 조미료를 너무 많이 넣었는지 찌개에서부터 김치에 이르기까지 단맛이 났다. 생선찌개를 몇 모금 삼키고 난 이자영은 수저를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장 안에 있는 음식점이라 장을 보러 온 아줌마들과 따라온 아이들, 주변 가게의 아줌마와 아저씨들이 손님들의 대부분이다. 그들이 내지르는 밝고 거친 소음과 밖에서 들려 오는 장사꾼들의 호객 소리가 가득 귀를 메우고 있다. 이자영은 도무지 그들과 어울리지 못할 것 같은 이질감으로 외로워졌다. 물론 그들과 어울리려고 이곳을 찾아온 것은 아니다. 집에 연락을 하였더니 형사들이 다녀간 후라 집 안이 벌컥 뒤집혀 있었다. 어머니는 다짜고짜 울음부터 터뜨렸고 아버지는 집에 계시는 것이 틀림없는 데도 말 한마디 하지 않는다. 박주경이 경찰에 신고를 하였을 것이다. 이자영은 휴지를 집어 입가를 누르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선다. 계산을 치르고 식당을 나온 그녀는 질퍽거리는 시장바닥을 사람들과 부딪치며 걸어 나왔다. 일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쓰레기에 묻혀 질퍽거리는 시장바닥과 같은 신세가 되었다. 그것의 시작이 부회장 비서로 발탁되었을 때부터인지 아니면 박주경의 유혹을 받아들여 그랜드 호텔의 열쇠를 손에 쥐었을 매부터인지는 알 수 없다. 시장을 빠져나온 이자영은 시장 입구 쪽의 과일 행상 사이에 파묻혀있는 것처럼 보이는 공중 전화박스로 들어섰다. 동전을 넣고 다이얼을 누르자 골 신호음이 끊겼다.
"여보세요."
"저, 유혜정씨 좀 부탁합니다."
"전데요."
"언니, 나야, 이자영이."
"어머나 니가 왠일이니? 나한테 전화를 다 하구?"
저쪽에서 깜짝 놀란 듯 반가워했으므로 이자영은 가늘게 숨을 내쉬 었다. 유혜정은 그녀의 대학 선배로 대한항공에 취직해 있었다.
"언니, 오랜만이야. 내가 바빠 자주 연락 못 해서 미안해."
주변에서 들리는 소음에 신경을 쓰면서 이자영이 말하자 유혜정은 짧게 웃었다.
"너, 바쁘다는 소문은 들었어. 바쁘면 좋지 월, 너 잘되면 내가 네 덕 볼지 어떻게 알아."
"언니, 지금 바빠?"
"아니, 괜찮아. 그런데 왜?"
"내가 급해서 그러는데, 미국 가는 비행기 중에서 어떤 것이 오늘 제일 빠르게 떠"
"누가 가는데?"
유혜정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셨다.
"너희 회사 높은 분이야? 회장님?"
"아니, 내가 심부름으로."
"1등석도 괜찮아?"
"응."
"목적지는 미국 어디?"
이자영은 머리를 들어 앞쪽을 바라보았다. 바로 눈앞에 디스코장 웨이터 강철수의 빨간색 딱지가 붙어 있었다.
"LA."
"잠깐 기다려."
컴퓨터의 키를 두드리는지 철컥거리는 소리가 났다.
"됐다, 우리 비행긴데 오후 5시 출발이야. 두 시간 후니까 지금 공항으로 가야 돼. 너 비자는 있지?"
"응, 그런데 언니"
이자영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다시 강철수의 이름을 들여다보았다.
"왜?"
의아한 듯 유혜정이 물었다.
"아냐, 그럼 내가 그쪽으로 갈게, 지금."
"공항으로 직접 가도 되는데 내가 네 이름을 입력시켜 놓았어. 네 코드 넘버는 Xq1572야."
"아냐, 떠나기 전에 언닐 잠깐 보려고."
"그래, 어서 와. 사무실에서 기다릴게."
30분 후에 이자영은 대한항공 본사 유혜정의 책상 옆에 그녀와 마주 앉아 있었다. 유혜정은 그녀가 반가운지 생글거리다가 이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너, 무슨 일 있어?"
"언니, 박주경이가 결혼한 것 알지?"
문득 이자영이 되묻자 유혜정이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그놈에게 실컷 이용만 당하고 내팽개쳐졌어, 언니,"
이자영이 일성그룹의 회장인 박주경과 가깝다는 소문은 이미 동창생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리고 박주경이 동부그룹의 첫째 딸인 오경선과 결혼했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을 것이었다.
"박주경이는 결혼하고 나서도 날 잡아 두려고 해, 언니. 그래서 미국으로 나가 있으려고."
"어머나, 세상에, 왜?"
오혜정이 눈을 둥그렇게 띤다.
"결혼하고 나서도 예전처럼 관계를 갖자고 협박하고 있어."
이자영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언니, 공항의 세관 컴퓨터로 연결해서 내 신원조회 좀 해줘. 그 사람이 손을 썼는지도 몰라. 악랄한 사람이야."
"응."
홱 몸을 돌려 앉은 유혜정이 이자영의 여권을 바라보며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컴퓨터의 키를 두드렸다.
"이상 없어, 자영아."
이자영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주르르 눈물을 쏟았다.
"얘, 같이 가 줄게, 공항까지."
유혜정이 의자에 걸린 핸드백을 들고 일어섰다.
"네가 떠나는 걸 봐야 내가 마음이 놓이겠다. 부모님한테는 잘 말씀드렸겠지?"
"응, 유학이나 가려고 한다고 인사드렸어,"
"가자."
이자영의 어깨를 안은 유혜정은 사무실을 나왔다.
6. 까뜨린 거리의 전투
"이봐, 에르난데스. 그렇게 노골적인 감정을 보이면 곤란하단 말이야."
카스틸로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입맛을 다셨다. 대통령궁의 카스틸로 집무실이다. 거대한 목조 책상에 앉아 앞쪽에 서 있는 에르난데스를 바라보던 카스틸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르난데스, 여기 앉아."
그는 소파의 자리를 가리켜 보이면서 앞자리에 앉았다. 에르난데스의 얼굴이 시무룩해 보였다. 그는 지금 카스틸로에게 불려와 꾸중을 듣고 있는 중이었는데, 보고타 시내에서 계엄군이 미국 대사관 소속의 차량에 총격을 가한 사건 때문이었다.
"각하, 아무리 대사관 차량이라도 정지 신호는 지켜야 합니다. 그들 이 계엄군의 명령을 무시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에르난데스가 억울한 듯 말했으므로 한동안 그를 노려보던 카스틸로의 입술 끝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에르난데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는 모양이니까 맨스필드가 항의하러 오면 유감이라고만 말해, 괜히 따지지 말고."
카스틸로가 자르듯 말했으므로 에르난데스는 머리를 숙였다. 보고 내용을 보면 미국 대사관의 차량은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계엄군의 초소에 당연히 멈춰야 함에도 경고등을 번쩍이며 그냥 통과해 버렸던 것이다.
"도밍고가 오르쿠에에 연합군 사령부를 차렸어. 축하해야 할 일이야, 내가 오르쿠에에 가 봐야겠지만 도밍고 보고 주최해서 환영 행사를 치르라고 했어."
카스틸로가 말을 받았다. 그는 뚫어질 듯한 시선으로 에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에르난데스, 도밍고 앞으로 공식 축전을 보내 주게. 그리고 자네도 참석하고 오게."
머리를 든 에르난데스는 하마터면 각하 대신 가느냐고 물으려던 입을 다물고는 침을 삼켰다. 그는 도밍고 주최로 행사를 치른다고 했다. 그리고 그에게 오르쿠에 행사에 참석하라고 한 것은 중앙에 도밍고를 앉히고 자신은 옆자리에 서서 행사를 빛내라는 뜻이었다. 에르난데스는 입술 끝을 치켜올리며 온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알겠습니다, 각하. 다녀오겠습니다."
"라파엘이 베네수엘라로 도주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있어. 국경 지역은 자네 계엄군 관할이야,"
"염려 마십시오, 각하."
"에르난데스"
"네, 각하."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카스틸로는 빙그레 웃었다. 검은 눈이 가리어졌고 흰 이가 드러났으나 따라 웃을 수는 없었다.
"불편하더라도 참아,"
"뭐가 말씀입니까? 각하."
"도밍고 말이야."
"행사에만 참석하고 연회 따위는 참가할 필요가 없네. 곧장 돌아오도록. 내가 보낸 돈 까발로니하고 같이 다녀오게."
감시역이었다.
"알겠습니다, 각하."
"맨스필드에게 심하게 굴지 말고 정중하게 대하도록 해,"
"네, 각하."
자리에서 일어선 에르난데스는 그에게 머리를 숙여 보이고는 집무실을 나왔다. 에르난데스는 카스틸로가 계엄군이 미국 대사관 차량에 총격을 가한 것을 내심 흐뭇해하고 있다고 믿었다. 물론 이쪽도 계엄군 총사령관인 자신의 분위기가 말단 초소병에게 전파되었다는 은은한 암시를 주었다. 긴 복도를 걸으면서 에르난데스는 맨스필드가 찾아오면 멱살이라도 잡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면 카스틸로는 겉으로는 발을 구르며 야단을 치겠지만 속으로는 만족해할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맨스필드는 자리에 앉자마자 눈썹을 치켜뜨고 에르난데스를 쏘아보았다. 언제나 사람 좋은 웃음을 띠우던 입술 끝은 아래쪽으로 잔뜩 처져 있었다.
"에르난데스써, 난 국무성의 정식 항의 문서를 가져왔소. 이것은 당신과 나, 그리고 카스틸로 각하만이 알고 있어야 하오."
서류 봉투를 그에게 내밀며 맨스필드가 말했으므로 에르난데스는 어깨를 한번 치켜올리면서 풀썩 웃었다.
"좋소. 그럼 당신들은 나가 있어."
에르난데스가 부관인 프랑코와 참모들에게 눈짓을 하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넓은 응접실에는 에르난데스와 맨스필드 두 사람이 마주 앉게 되었다.
"자, 읽어 보시오, 에르난데스 장군."
맨스필드가 세차게 다시 말했고 입술을 부풀린 에르딘데스는 봉투를 열었다. 서류의 첫 페이지를 읽던 에르난데스의 눈이 차츰 커지더니 이내 늘어진 눈시울이 치켜 올라갔다. 그는 침을 끌어모아 삼키고는 맨스필드를 바라보았다. 맨스필드는 묵묵히 그의 시선을 받은 채 표정에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에르난데스는 항의 서류의 앞 페이지를 바라본 채 움직이지도 입을 열지도 않았다. 이윽고 그는 서류의 앞 페이지를 떼어 맨스필드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서류에 시선을 내렸다.
"우리는 당신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 정부의 방침이오."
종이를 가슴 호주머니에 넣은 맨스필드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못합니다."
에르난데스가 즉각 말을 받았디.
"위반한 것은 당신이야."
"우리는 급한 환자를 수송하고 있었소. 대사관의 깃발이 꽂혀 있었고 경고등을 켜고 있었던 거요!"
"경고등만 켠다고, 미국 깃발만 걸었다고 무사통과란 말이야!"
에르난데스가 주먹으로 책상을 치고는 책상 옆에 놓인 벨을 눌렸다. 밖에서 소음을 들은 모양인지 문이 열리더니 프랑코와 참모들이 들어섰고 미국 대사관원들의 얼굴도 보였다.
"미국 대사님에게 가는 길을 안내해 드려라."
얼굴이 붉게 상기된 에르난데스가 고함을 쳤다.
"이런 모욕을 주다니, 에르난데스씨, 당신은 신사가 아니오!"
자리에서 일어선 맨스필드가 버럭 고함을 쳤고, 에르난데스가 따라 일어서며 그의 말을 받아 소리쳤다.
"나는 군인이지 신사가 아니야!"
"정식으로 사과하지 않으면 시끄러워질 거요, 에르난데스."
"사과 못 해."
대사관 직원들에 이끌려 맨스필드는 응접실을 나갔고 응접실에는 에르난데스와 참모들만 남게 되었다.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얼굴로 에르난데스는 자리에 서 있었다. 참모들은 제각기 서서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마 몇 분 안에 이 소식은 카스틸로에게 전해질 것이다. 에르난데스는 갈색 의자에 앉아 기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은 나이보다 5년은 더 늙어 보였고 지친 모습이었다.
"독립기념일 행사가 끝나고 차량 여섯 대가 대통령궁에서 나와 메모리얼 빌딩으로 들어갔었어."
고영무가 말했다. 그는 주위에 둘러앉은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그 차량들은 다음 날 아침 6시에 메모리얼을 출발해서 대통령궁으로 되돌아갔다. 그것이 열흘 전이야."
"그렇다면 한 달에 두 번 그 행사가 있다고 했는데, 앞으로 닷새 남은 것 아닙니까? 닷새 후에 무슨 행사가 있지?"
짐 버클리가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다시 머리를 고영무에게로 돌렸다.
"페드로, 세질리아에 대해서 조사한 것을 말해 봐라."
고영무가 페드로를 바라보았다.
페드로가 상체를 세웠디
"그 여자는 산타페 호텔 근처의 빌라에 살고 있습니다. 호화판 빌라인데 그 여자는 8층에 삽니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쪽지를 꺼내 들었다.
"가족은 가정부와 유모, 그리고 운전사가 있고 세 살 난 아들이 있습니다. 남편과는 2년 전에 이혼했는데 사진기사였던 남편은 지금 행방을 모릅니다."
모두들 잠자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빌라는 침실 여섯 개에 서재와 로비, 연회실이 있는 호화판인데 빌라 입구에 대통령궁의 경호 요원 너댓 명이 24시간 감시를 하고 있더군요."
"빌라에 들어가 보았어?"
브루노가 불쑥 묻자 페드로가 눈을 치켜떠 보였다.
"제가 어떻게, 부동산 소개소를 찾아가서 임페리얼 빌라의 안내 책자를 찾아본 것뿐입니다."
"세실리아를 감시하면 카스틸로의 움직임을 알 수 있겠군요. 아무래도 그것이 수월할 것 같습니다."
신용만의 말에 짐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세실리아가 움직이는 날이 카스틸로가 나오는 날일 테니까요."
고영무가 머리를 들었다.
"메모리얼 빌딩은 하나의 요새야. 내부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듣기로는 벽을 10인치 강철에 다시 10인치 콘크리트를 입혀 놓아서 핵폭탄에도 부서지지 않는다는 거야."
그들을 둘러보며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내부로 침투해야 하겠지만 내부에는 언제나 2백 명에서 3백 명에 가까운 인원들이 있어, 밤이나 낮이나."
"저쪽의 지원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브루노가 물었으나 고영무는 머리를 저었다.
"개죽음을 당할 뿐이야."
그는 탁자 위에 놓인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난번에 카스틸로가 메모리얼 빌딩으로 왔을 때는 이쪽 칼레 가로 해서 우회전해서 들어왔는데, 대통령궁에서 여기로 오는 길은 모두 여덟 개가 있어."
모두들 지도를 내려다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고영무는 볼펜으로 두 곳을 번갈아 짚었다.
"그렇지만 확실한 길이 있지, 딱 두 곳. 그곳은 언제나 그들이 통과하는 길이야."
"대통령궁의 앞길, 길이 1.5킬로미터의 길과 메모리얼 빌딩의 앞길, 길이 1킬로미터의 길이지. 이곳은 언제나 그가 지나가야 하는 길이야."
"보스, 그렇다면 우리 숫자‥‥‥ 아무리 저쪽 3백 명을 지원받는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짐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통금시간이면 도로에는 계엄군이 깔려 있습니다. 우리는 계엄군을 상대로 놈을 잡아야 합니다."
신용만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배후에는 대통령궁의 경비대와 메모리얼 빌딩의 경비대가 있구요. 그놈들이 치고 나오면."
브루노가 입맛을 다셨다.
"이것은 이것 때문에, 저것은 저것 때문에,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아무 일도 못 해요. 지금으로서는 이 두 길을 막고 공격하는 것이 제일 나을 것 같으니까 이것 중에서 하나를 잡읍시다."
그는 굵은 손가락을 델어 한 곳을 가리켰다.
"이곳, 메모리얼 빌딩 앞이 제일 좋습니다. 대통령궁은 경비대 병력만 2천 명이 넘어요. 이곳은 안 됩니다."
그는 지도에서 손을 떼고는 스스로도 그럴듯한지 머리를 서너 번 끄덕였다. 그러나 아무도 맞장구를 치지 않았다.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요, 브루노씨?"
뒤늦게 물어온 것은 최대광이었다. 그는 고영무나 신용만의 스페인어는 대충 알아들었으나 제멋대로 지껄이는 페드로나 짐, 브루노의 이야기는 반쯤밖에 듣지 못했다. 짜중이 났지만 꾹 참고 다시 물은 것이었다 브루노와 최대광은 투박한 성품이나 용모도 비슷했지만 특히 술 실력이 같았으므로 한 달이 넘는 아파트 생활에서 부쩍 친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차근차근 다시 설명해 주는 브루노의 말이 끝나자 최대광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얼굴은 감탄한 듯 붉은 입술을 꾹 다물고는 지도를 노려보았다.
"전적으로 찬성이오. 이곳 메모리얼 빌딩 앞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아예 박살을 냅시다."
그는 브루노가 했던 것처럼 손가락으로 그곳을 짚었다.
"시가전이 되겠군."
짐 버클리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엄청난 시가전이 되겠어."
"옆에서 치고 앞에서 막는 거야. 어려울 것 없어."
브루노가 자르듯 말하자 최대광도 머리를 끄덕였다.
"라파엘 측의 지원군을 메모리얼 빌딩 앞에 배치시키고 놈들을 막아야겠군요."
이제는 신용만이 그렇게 말하자 고영무가 머리를 들었다.
"부족하지만 하는 수 없다, 페드로."
페드로가 머리를 들었다.
"앙드레에게 연락해서 그쪽 부대를 준비시키도록 해라. 우리가 어디를 공격할 예정이라는 것은 말해 주지 말고."
"알았습니다, 보스."
"이제 결정되었다. 공격 지점은 메모리얼 빌딩 앞이야. 시간은 세실리아가 움직이는 날, 카스틸로가 자고 떠나는 새벽이다."
고영무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엊그제 꽂아둔 장미는 꽃병 바닥이 말라 있었던 탓으로 시들어 있었다. 김영지는 시든 장미를 버리고 방금 가져온 싱싱한 장미를 꽂았다. 김강남의 묘소에는 옆쪽에서 날아온 종이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었으므로 그녀는 구겨서 가방에 집어넣었다. 호세 김의 묘소 앞으로 다가온 김영지는 잔디 바닥에 앉아 묘비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점심시간 전이어서인지 묘지에는 사람들의 인적이 뜸했고, 건너편의 능선에서 두 명의 인부가 기다란 삽을 어깨에 메고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바람이 살랑이며 불어와 흙냄새와 함께 비린 듯한 공기를 폐 속으로 불어넣었다. 무의식중에 무릎 옆의 잔디를 들어 바람에 날리며 김영지는 아버지의 묘비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김영지는 온몸을 굳히고는 몸을 돌리지 않았다. 이제는 바람결에 옷 냄새와 함께 살냄새가 맡아졌다. 김영지는 옆으로 다가와 놓인 사내의 구두를 보았고 머리를 들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고영무의 얼굴을 보았다. 고영무는 잠자코 그녀 옆에 앉았다. 곁은 콧수염을 기르고 판초를 입은 차림이었으나 그의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은 그대로였다.
"난 지난번에 당신 아버지의 묘비 앞에서 약속을 했어."
묘비를 바라보며 고영무가 입을 열었다. 바람이 불어와 중절모를 벗은 그의 검은 머리칼 몇 올을 이마 위로 흐트려 놓았다.
."내가 당신을 보살피겠다고 했지. 당신을 다시 웃게 만들겠다고,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고영무가 말을 이었다.
"당신을 사랑하겠다고.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부터 당신을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김영지가 머리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묘비를 보는 시선과 똑같은 표정이다.
"설령 그런 것이 인위적으로 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나는 노력하겠어. 당신의 사랑을 갖기 위해서, 당신을 다시 예전의 활기 있는 여자로 만들기 위해서. 난 당신의 오빠를 죽이지 않았어. 그리고 아버지를 죽일 의도도 없었고, 하지만 날 용서하고 용기를 내어 날 받아들여 봐. 당신을 아프게 한 게 나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치료할 사람도 나야. 피하지 말고 나를 봐."
김영지가 다시 머리를 들어 고영무를 바라보았다. 검은 두 눈이 그의 시선과 마주치자 두어 번 깜박였다. 고영무가 한 손을 밀어 그녀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김영지의 눈썹이 조금 찌푸려졌으나 입을 열지도 몸을 틀지도 않았다.
"난 며칠 안에 어떤 일을 하게 돼. 어쩌면 죽게 될지도 몰라."
고영무가 입술 끝을 올리며 슬책 웃었다.
"죽더라도 쉽게 죽지는 앉아. 수류탄 서너 개를 가슴 위에 놓고 터뜨려서 조금 큰소리를 내고 죽을 거야."
"내가 살아온다면 날 받아들여야 돼. 당신 어머님도 내가 모실 테니까, 내가 어떻게든 낫게 해 드릴 테니까."
고영무는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한마디도 안 해주는군."
머리를 든 김영지가 고영무를 올려다보았다.
"난 알고 있었어요."
그녀의 말소리가 바람을 타고 저쪽으로 흘러갔다. 고영무가 눈을 껌벅이며 잘 들으려는 듯 허리를 조금 숙였다.
"당신이 오빠를, 그리고 아버지도."
그녀의 말소리가 낮았으므로 고영무는 아예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앞에 앉았다.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이제 김영지의 시선은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고 입술 끝이 조그맣게 떨렸다.
"그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몰라요. 당신 아버지를 만났을 때인지, 소문을 듣고 나선지, 당신을 만났을 때인지, 점점 자신이 없어졌고 이젠 알아요."
"너무 외로워요."
이제 그녀는 고영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김영지는 그 한마디의 말로 귀신을 떨치듯이 모든 원한을 고영무 앞에서 떨어준 셈이 되었다. 고영무는 불쑥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 근처에 대었다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의 손이 무엇인가를 움켜쥘 듯이 그녀의 한쪽 볼 옆에 멈춰있었다. 김영지가 얼굴을 조금 돌려 그의 손가락을 바라보자 고영무는 어금니를 물면서 손을 떼었다.
"이런, 빌어먹을."
잡아먹듯이 말을 던진 고영무가 자리에서 일어났으므로 놀란 김영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며칠을 못 참아서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이런 개 같은."
그의 억눌린 말소리가 호세 김의 묘비에 튕기고 뒤쪽의 묘비에도 튕겨 울리는 것 같았다.
"차라리 일을 끝내고 이야기를 했어야 하는데."
말을 그친 그는 몸을 돌려 김영지를 내려다보았다. 눈을 치켜뜨고 어금니를 물고 있었으므로 김영지는 침을 삼켰다. 고영무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내 생각만 하였는데, 영지, 아예 그렇게 생각하도록 해. 내가 죽으면 아예 죗값을 받은 것으로 치고, 살아오면 그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당신은 살아서 약속을 지켜야 돼요."
"이런 빌어먹을!"
고영무의 두 눈이 부릅떠졌고 악문 이가 보였다.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그는 한동안 헐떡이며 그녀와 호세 김과 김강남의 묘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가 또 당신에게 상처를 줄지도 몰라!"
고영무의 말소리는 억눌린 듯 낮게 깔려 있었다.
"살아와요, 그럼."
이제는 평온해진 얼굴로 김영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나에게 한 약속을 지켜요. 아버지 앞에서 한 약속을."
바람이 다시 스치고 지나갔고, 고영무는 판초 자락을 펄럭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의 젖가슴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인데다가 젖꼭지 또한 싱싱하게 돌출되어 있었다. 허리의 부드러운 선과 매끈한 엉덩이의 살을 바라보던 카스틸로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세실리아는 몸매도 발가락 끝까지 아름답지만 그녀의 잠자리 기교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격렬한 정사를 나누었다손 치더라도 마치고 나면 지저분한 느낌이 드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세실리아는 시작이나 끝이나 언제나 신선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기술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지간한 자기 희생이 있지 않으면 안 되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 같은 절대 권력자나 극히 일부의 남자들만이 그런 봉사를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카스틸로는 알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발끝으로 사뿐거리며 걸어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긴 머리가 반은 등 뒤로, 나머지 반은 한쪽 가슴 위로 흘러 내려와 있었다.
"8월 중순경에는 이태리에 며칠 다녀오겠어요. 그래도 괜찮죠?"
코가 막힌 듯한 목청이었으나 목소리는 맑다. 그녀의 목소리만 들어도 성욕이 동한다는 놈들도 있다고 들었다.
"이태리는 왜?"
침대에 누운 채로 그가 묻자 세실리아는 방긋 웃었다.
"영화제에 참석하러요. 그리고 쇼핑도 좀 하고. 괜찮죠?"
카스틸로는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건 사주었다. 아니, 그보다도 산더미처럼 안겨 주고는 그중에서 갖고 싶은 것을 고르게 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은 출세 가도를 달렸고 싫어하는 놈들은 관직에서 명단이 삭제되었다. 그는 사랑하고 배를 맞추는 남과 여의 입장으로만 보았을 때 내일모레가 육십인 자신과 이제 스물네 살인 세실리아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결코 사랑 같은 알량한 감정은 일어나지 않는다. 세실리아는 젊고, 억세고, 잘생긴 남자들을 수만 명이라도 고를 수 있는 조건이었고, 카스틸로 라몬은 폐경기가 10년도 더 지난 찌그러진 바가지인 소피아를 뒤에서 안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녀는 권력과 부를 찾아서 이쪽으로 온 것이었다. 그녀는 허영심이 강하고 자신의 미모를 과시하고 싶은 욕망에 차 있었는데, 그것이 카스틸로의 권력과 부에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래, 가거라."
카스틸로가 선선히 머리를 끄덕이자 그녀는 알몸으로 그의 몸 위에 비스듬히 엎드렸다.
"내가 백만 달러쯤 주마, 쇼핑하도록."
얼굴에 웃음을 띄운 세실리아는 잠자코 그의 파자마 바지를 벗겨 내렸다. 그의 연장이 쭈그러진 채 늘어져 있었으나 그녀는 소중한 듯한 눈길을 주면서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카스틸로논 천장을 바라보고 누운 채 움직이지 않았다. 방 안은 은은한 향내에 차 있었는데, 방음장치가 되어 있었으므로 들리는 것은 그녀의 거칠어진 숨소리밖에 없었다. 눈을 내려뜨자 윤기 흐르는 알몸을 꿈틀대면서 세실리아가 자신의 하반신에 매달려 있었다. 그녀의 열중한 모습을 보자 카스틸로의 온몸이 조금씩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칠레 가로 가려면 이쪽 까뜨린 12번 도로를 따라가야 하는데 검문소가 네 개나 있어서‥‥‥‥"
마리크가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하자 니콜라스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검문소가 네 개 있다는 건 지금 세 번째 이야기하고 있어, 마리크. 젠장, 어쨌든 우리는 까뜨린 12번 도로를 지나가야 돼. 마침 트럭도 있고. 하니까 곧장 달려가 버리자구."
"니콜라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이제는 마리크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부대장이었지만 할 말은 했다. 라파엘 참모들의 기질이었는데 라파엘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부하들에게 자유롭게 의견 개진을 시키고 부하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하면 서슴없이 자신의 주장을 꺾는 것이다.
"도대체 고영무도 그렇지, 작전 개시 하루 전에 알려 주는 자식이 어디 있습니까? 적어도 일주일의 여유는 줘야지."
"사정이 있었겠지."
니콜라스는 그쯤은 안중에 없는 듯했다.
"마리크, 도롯가로 2열 종대로 행진해 들어가면 어떨까? 계엄군처럼 위장하고 말이야."
마리크가 다시 혀를 찼다.
"이것 봐요, 대장. 여기서부터 까뜨린 12번 도로의 끝까지는 16킬로가 됩니다. 도로 입구에서부터 2킬로마다 검문소가 있고, 검문소 병력은 1개 소대이지만 즉각 지원 병력이 오게끔 되어 있어요. 그리고 검문소 사이에는 순찰 병력이 5분 간격으로 지나갑니다. 그것을 어떻게 다‥‥‥‥"
니콜라스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밤 11시였고 고영무가 지원을 부탁한 내일 새벽 6시 정각에 메모리얼 빌딩까지 가는 데 앞으로 일곱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조급해진 니콜라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장, 어디 갑니까?"
"잠깐 밖에, 바람 좀 쐬러."
잔소리를 할 줄 알았는데 마리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움집을 나온 니콜라스는 머리를 들어 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해발 2천 5백 미터 이상인 고원지대여서 합은 어깨가 웅크려질 정도로 추웠다. 별이 가깝게 떠 있는 듯 흔들리고 있었는데 내일은 날씨가 좋을 모양이었다. 주변에서 두런거리는 소리들이 들렸고 옆쪽의 움집에서는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이곳은 보고타에서 8킬로쯤 떨어진 고원지대에 있는 인디오 부락 안이었다. 인디오들은 외부 출입을 자주 하지 않는 데다가 니콜라스가 이끌고 온 280명의 대원들이 낮에는 꼼짝 않고 엎드려 있다가 밤에만 행동하기 때문에 이제는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보고타에서 사 온 양식을 공급해 주기 때문이기도 했다. 니콜라스는 소리 내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야 그렇게 마리크에게 했지만 자신의 방법으로 했다가는 목적지까지 가지도 못하고 대원들을 전멸시킬 것이 틀림없었다. 앞쪽에서 인기척이 들렸으므로 니콜라스는 눈을 끔벅이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밤낮으로 부락의 사방을 경계시키고는 있었다. 앞쪽에서 다가오는 사람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곧장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니, 이게 누구야? 웬일이야, 또?"
경비병과 함께 다가온 사내를 본 니콜라스가 의아한 듯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는 불안한 듯 앙드레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급히 전할 말씀이 있어서 통금을 뚫고 나왔어요. 자, 들어가십시다."
앙드레가 앞장서서 움집의 안으로 들어서자 니콜라스도 뒤를 따랐다. 안에 있던 마리크도 놀란 듯 커다란 입을 벌리고는 앙드레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지?"
앙드레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니콜라스가 다그쳐 물었다. 그는 저녁 7시에 왔다가 8시쯤 돌아갔는데, 다시 11시에 돌아온 것이다. 니콜라스는 혹시 계획이 취소되지나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앙드레는 밖이 쌀쌀한 날씨였는데도 얼굴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자전거로 10킬로 길을 달려온 것이었다.
"당신들은 까뜨린 12번 도로를 통과해야 합니다."
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으며 그가 말하자 니콜라스와 마리크가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것 때문에 이제까지 다투어 온 참이었던 것이다.
"앙드레, 글쌔 우리도 그럴 생각이오. 그런데 말씀이야."
니콜라스가 마리크를 대신해서 입을 열었다. 마리크에게는 그렇게 이야기를 했지만 이쪽은 작전에 문외한인 모양이었다.
"압니다, 니콜라스. 검문소 네 개, 5분간의 순찰 병력들."
앙드레가 자르듯 말했으므로 니콜라스는 눈을 끔뻑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내일 새벽 4시부터 6시 사이에 까뜨린 12번 도로를 통과하세요. 기억해 두세요. 새벽 4시에서 6시 사입니다."
"왜? 그때가 새벽 밤참 시간인데"
입술을 찌그러뜨리며 이제는 마리크가 묻자 앙드레가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는 검문소도 비어 있고 순찰도 돌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빈 길을 행진해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새벽 5시경이 되자 메모리얼 델명의 모든 층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이제까지는 1층과 2층에 있던 방 몇 개에만 불이 밝혀져 있던 것이 일제히 밝혀진 것이다.
"이제 카스틸로가 떠날 모양입니다."
창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페드로가 말하자 짐 버즐리가 머리를 저었다.
"아직 멀었어. 아래층에 있는 경호원들이 준비하는 거야."
방 안은 어두웠으나 대원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탄창을 철컥이며 장전하는 소리, 마룻바닥에 탄창인가 수류탄인가가 떨어졌고 누군가 그것을 가볍게 나무라는 소리가 들렸다. 두어 명이 창가로 몰려가 블라인드 사이로 메모리얼 빌딩을 건너다보았다. 길 건너편의 비스듬한 끝 쪽에 있는 메모리얼 빌딩에만 불이 환했고, 주변의 빌딩들은 아직도 새벽의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고영무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 옆에 세워 둔 M-16을 집어 들었다. 이제까지 써 왔던 우지는 근접전에서는 살상력이 대단했지만 사정거리가 짧았다. 사정거리가 길고 명중률이 높은 M-16에 철갑탄을 장탄하여 둔 것이다. 창가로 다가간 고영무는 블라인드를 젖히고 빌딩을 바라보았다. 카스틸로는 정문을 나와 이쪽으로 올 것이다. 빌딩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는 5백 미터쯤 되었는데, 까뜨린 도로의 중간 부분이다. 금 세공품을 파는 2층짜리 이 건물은 1층은 가게이고 2층이 살림집이었으나, 초저녁부터 고영무의 일당에게 점거되어 주인 식구들은 모두 2층의 한방에 감금되어 있었다. 고영무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5시 10분이었다.
"자, 나가자."
고영무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대원들은 아래충으로 몰려 내려갔다. 가게의 현관 앞에 서 있던 브루노가 2층에서 내려오는 고영무를 올려다보았다.
"보스, 니콜라스가 아직 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더 기다려 보시는 것이."
"어차피 도로는 비어 있다고 믿어야 된다. 나가자."
고영무가 닫힌 셔터를 턱으로 가리켜 보이자 그는 잠자코 돌아섰다. 철제 셔터를 바라보며 11명의 대원이 몰려 서 있었다. 모두 차림과 무장이 제각각이었다. 폐드로는 중절모에 판초를 걸쳤는데 로켓포를 어깨에 걸치고 허리춤에는 커다란 오이 같은 포탄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앙델은 어디서 구해 왔는지 군복을 입고 있었다. 상의의 가슴 주머니에는 수류탄을 쑤셔 넣어 여자의 젖가슴처럼 보였다. 머리에는 해어진 중절모를 눌러 쓰고 있었다. 산토스는 신사복 차림에 군용 벨트를 차고 있었는데, 어깨에는 배낭을 걸치고 있었다. 최대광은 판초를 벗어 던진 작업복 상의에 바지 차림이었고, 신용만은 군용 점퍼를 입고 있었다. 철제 셔터가 올라가는 소리가 새벽의 거리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사내들은 제각기 손에 쥔 총기를 움켜쥐었다. 서늘한 공기가 가게 안으로 밀려 들어왔고 앞장을 선 브루노가 거리로 뛰쳐나갔다. 고영무는 대원들의 뒤를 따라 거리로 나왔다. 거리에는 인적이 없었고 차량의 통행도 없었다. 어젯밤에 내린 비에 젖은 도로는 검게 번들거렸고 드문드문 켜져 있는 가로등의 불빛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도로는 20미터쯤 되었는데 브루노와 앙헬이 세 명의 대원을 이끌고 길을 뛰어 건넜다. 고영무는 도롯가에 주차시켜 놓은 차량의 뒤쪽으로 가서 몸을 숙이고는 땅바닥에 앉았다. 페드로가 승용차의 보딘 위에 로켓포를 걸쳐놓고 도로 쪽을 겨누었다.
"산토스, 초소를 살펴보고 와라."
고영무가 말하자 산토스가 그림자처럼 움직여 거리 위쪽으로 사라졌다. 모두들 잠깐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가게의 2층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거리의 2백 미터쯤 위쪽에는 검문소가 있고 평시에도 10여 명의 병사들이 주둔해 있었다. 짐 버클리가 다가왔다.
"앙드레 말이 맞는가 봅니다. 지금쯤 순찰이 바쁘게 돌아다닐 때인데 조용한 걸 보면 말입니다."
그들은 길가에 세워진 자동차들 뒤쪽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으므로 인도를 순찰하는 병사들에게 금방 발각될 위치였다.
"저쪽에서 미리 경계병을 띄울지도 모른다. 그걸 조심해야 돼."
고영무가 턱으로 메모리얼 빌딩을 가리켰다. 환한 불빛이 주변을 비추고 있었고 유리창에는 사람들의 검은 그림자도 보였다. 짐 버클리가 머리를 끄덕이며 빌딩을 바라보았다. 카스틸로가 눈치채고 빌딩을 나오지 않거나, 나왔다가 도로 들어간다면 거사는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니콜라스는 까뜨린 도로의 끝 쪽과 반대쪽 입구에 병력을 집결시켜 놓았으므로 빌딩 앞으로 병력을 모아 공격을 하려면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3백 명 정도의 병력으로 빌딩을 파괴하고 카스틸로를 제거할 수도 없다. 그들이 빌딩을 단단히 요새화시켜 놓았으므로 경무장한 3백 명으로는 승산이 없다. 고영무는 머리를 돌려 빌딩의 왼쪽 끝부분을 바라보았다. 빌딩에서 이쪽과 반대쪽의 까뜨린 도로를 2백 미터쯤 가면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또 한 갈래의 길이 나온다. 시내로 들어가는 길인데 그 길목에 니콜라스의 부대장인 마리크가 백 명을 데리고 잠복해 있다. 그는 빌딩에서 카스틸로가 나오자마자 대원들을 이끌고 전속력으로 달려 메모리얼 빌딩 앞의 도로를 차단해야 한다. 카스틸로가 다시 빌딩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니콜라스는 그 반대쪽이다. 그는 고영무의 오른쪽 4, 5백 미터 지점인 까뜨린 도로의 끝부분에 진을 치고 있을 것이다. 도로는 좌우로 조그만 골목길이 몇 개씩 있을 뿐 찻길은 없다. 구시가의 한복판을 잘라서 길을 만들었다가 주민들의 반발 때문에 직진 도로 한 개만 만들었으므로 1킬로가 넘는 길의 좌우에는 찻길이 없는 것이다. 오른쪽 길에서 인기척이 들렸으므로 모두들 머리를 돌렸다. 토마스였다. 그러나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로 사내 두 명이 따르고 있었다. 긴장한 대원들이 일어섰다.
"어이, 나야. 괜찮아."
토마스가 손을 저었다. 그는 뛰어왔는지 헐떡이며 고영무 옆으로 다가왔다.
"보스, 이 사람은 니콜라스의 부하인 마론입니다."
콧수염이 짙고 눈이 부리부리한 사내가 한 걸음 다가와 고영무 앞에 섰다. 그는 잠자코 서 있는 고영무를 주춤거리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딥니까?"
고영무가 묻자 그는 손가락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우린 초소에 있습니다. 초소 병력들이 모두 철수해서 비어 있습니다."
짐 버클리가 고영무를 바라보더니 시선이 마주치자 머리를 끄덕였다
"저는 니콜라스에게서 고의 지시를 받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마론이 초조한 시선으로 왼쪽의 메모리얼 빌딩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인원은 몇 명이나 됩니까?"
"20명입니다, 저까지 포함해서. 나머지는 도로의 샛길에 대여섯 명씩 배치시켰기 때문에."
"이곳에서 빠져나간 차량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 몫이오, 마론."
마론이 어둠 속에서 흰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이제 카스틸로의 시대가 오늘 새벽에 끝이 나는군요, 미스터 고,"
"이봐요, 서둘러."
옆에서 지미가 말하자 머리를 끄덕인 그가 몸을 돌렸다. 고영무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새벽 6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에르난데스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저었다.
"이봐, 각하가 나오시기 전까지 순찰 병력은 움직이지 말도록 하라고 했잖아? 월 못 알아듣는 놈이군, 네놈은."
그의 앞에 선 장군이 얼굴을 굳히며 턱을 들었다.
"각하, 저는 4시에서 6시까지라고 각하께서 말씀하셔서,"
"병신 같은 놈."
에르난데스가 늘어진 눈시울 밑의 흐련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것은 마치 먹이를 노려보는 뱀의 눈과 같았다. 그는 이제까지 자신의 정적이나 명령을 어긴 부하들을 한 번도 용서한 적이 없었다. 장군은 온몸을 굳힌 채 서 있었다.
"각하는 요즘 자신의 부하들에게까지도 약점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단 말이다. 그것이 설령 초소병이라고 할지라도. 알아들었어?"
"네, 각하."
"자신이 그들 앞으로 지나갈 때 각하께서 오늘은 딴 곳에서 주무시고 가시는구나 하고 병사들이 뒷소리를 할 것이라고 믿고 계셔. 그것을 나에게 은근히 말해 주셨단 말이야. 알겠나, 데니크"
"네, 각하."
"우리는 각하의 사생활을 보호해 드려야 할 책임도 있는 거다. 병사들의 입방아에 오르지 않도록."
"잘 알겠습니다, 각하. 그럼 궁에 도착하실 때까지 초소와 순찰은 그대로 두겠습니다."
"잘 알아듣는군, 데니크. 시내 경비는 철통과 같다. 내가 있는 한 말이야. 고작 2킬로의 도로다. 각하의 명령이니까 궁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비워 둬."
장군이 경례를 올려붙인 다음 몸을 돌려 상황실을 나갔다. 에르난데스가 프랑코를 돌아보았다.
"따라가 봐라."
머리를 끄덕인 프랑코가 방문을 열고 나갔다. 에르난데스는 책상을 돌아 자리에 앉았다. 벽에 걸린 시계는 6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르마스, 오늘은 자네 기분이 꽤 좋은 모양이로군."
그냥 지나칠 줄 알았던 카스틸로가 그의 어깨를 짚었다.
"무슨 일이 있나?"
"아닙니다, 각하. 저는 단지."
아르마스는 카스틸로의 기분이 언짢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분전환을 위해서는 무엇이건 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현관 앞에 도열해 서 있는 경비병들의 사이를 지나 차 쪽으로 다가갔다. 카스틸로의 승용차는 포드에서 특별주문한 방탄차였다. 긴 차체는 1센티 두께의 강철판으로 덮여 있어서 무게가 6톤이나 나갔고 유리창도 소총탄이 뚫지 못하는 방탄유리였다. 카스틸로를 뒷좌석에 태우고 난 아르마스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섯 대의 승용차는 출발 준비를 마치고 그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두에 설 차량은 이미 까뜨린 도로 쪽으로 머리를 향하고 있었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아르마스는 한쪽 손을 들어 보이고는 운전석 옆자리에 올랐다. 그러자 빌딩 앞쪽에 정렬해 서 있던 장교들과 병사들이 제각기 흩어지면서 빌딩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승용차가 빌딩 앞을 돌아 도로로 들어서자 아르마스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침 6시 15분이 되어 있었다.
"각하, 라파엘이 자살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아르마스가 뒤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의자에 등을 붙이고 맞아 눈을 감고 있던 카스틸로가 눈을 떤다.
"오르쿠에 근처의 밀림에서 자살을 했다는데요. 아직 확인은 안 된 소문입니다만."
라파엘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카스틸로의 충성스런 부하들은 아마 백 명도 넘는 라파엘의 시체를 찾아낼 것이다. 한때 라파엘이 서너 달 동안 종적을 감추었을 때 그런 일이 있었다 부대의 사령관과 기지의 부대장까지 포함해 네 명이나 라파엘의 시체를 가져왔던 것이다.
"제가 곧 확인을 시켜 보겠습니다, 각하."
"고맙네, 아르마스."
다시 눈을 감으며 카스틸로가 말했다.
"이건 이제 많이 써먹은 메뉴야."
힐끗 카스틸로의 얼굴을 들여다본 아르마스는 머리를 돌렸다. 그는 카스틸로의 전속 부관으로 있다가 경호실장을 맡게 되었으므로 10년 가깝게 그의 수족이 되어 왔다. 그러나 카스틸로를 대할 때는 언제나 긴장이 되었다. 그가 자신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어느 순간은 카스틸로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었다. 앞쪽에서 달리던 경비 차량이 속력을 늦추는 모양이었다. 두 번째 차량과의 거리가 부쩍 가까워졌으므로 아르마스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떤 장애물이 있을 리가 없었다. 까뜨린 도로만큼 순찰과 초소의 검문이 심한 곳이 없으므로 지금 같은 시간에는 차량의 통행도 없을 터였다. 앞차가 정지하려는 모양이었다. 뒤쪽의 경고등과 브레이크 등이 한꺼번에 들어왔고 속력을 뚝 떨어뜨리더니 멈취 선다. 이쪽 차도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세웠고 뒤쪽에서도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들렸다. 아르마스는 얼굴을 굳히며 무의식중에 길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길가에 세워 둔 차량들 뒤쪽에서 어른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는 눈을 치켜떴다. 그 순간 패액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불기둥이 곧장 앞쪽의 승용차를 향해 떨어 나갔다.
"엎드려!"
아르마스가 고함치며 뒤쪽으로 상체를 돌렸을 때는 카스틸로는 이미 의자 밑으로 몸을 누이고 있었다. 순간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폭음이 들렸고 앞쪽으로 머리를 돌린 아르마스는 불덩이가 된 승용차를 보았다.
"후진! 후진이야!"
아르마스가 고함치는 순간 운전사는 이미 맹렬히 차를 후진시켰다가 뒤차의 머리를 받고는 비스듬하게 머리를 그쪽으로 돌렸다.
"패액!"
로켓탄이 이제는 반대쪽으로 날아왔는데 뒤쪽에서 다시 요란한 폭음이 들렸다. 네 번째 차량이 폭발한 것이다. 이제는 함석지붕에 우박이 떨어지듯 유리창에 소총탄이 맞아 있었다. 도로는 폭음과 소총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각하, 반란입니다!"
아르마스가 소리치면서 허리춤에 찬 무전기를 째어 들었다.
"여기는 알파다! 까뜨린 도로상에서 반란군의 공격을 받고 있다."
도로의 양쪽에서 빗발치듯 총알이 날아왔고 운전사는 불쑥 차를 인도 쪽으로 돌진시켜서 차량 한 대를 받아 반쯤 뒤집어 놓았다. 그러자 그의 뒤쪽에 서 있던 사내 한 명이 두 팔을 올리고 차에 깔렸다. 운전사가 다시 차를 후진시키자 뒤쪽 메모리얼 빌딩으로 회전시킬 수 있는 반경이 되었다. 아르마스는 바로 뒤쪽에 타고 있던 경호원들이 차 밖으로 뛰쳐나오다가 모두 네 활개를 흔들면서 도로 위에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메모리얼로! 어서!"
고함을 치던 아르마스는 이쪽을 정면으로 겨누고 있는 사내들을 보았다. 차량들 사이에 대여섯 명이 흩어져 있고 제각기 번쩍이며 불빛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한복판에 로켓포를 어깨에 걸친 사내가 보였다.
"돌려! 어서!"
승용차는 요란한 타이어의 마찰음을 내면서 그들 앞을 회전하였는데, 순간 아르마스는 요란한 폭음을 들으면서 머리를 차의 천장에 들이받고는 입을 쩍 벌렸다. 눈앞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 수백 개의 흰 불똥이 빙글빙글 돌고 있다. 수류탄이다. 수류탄이 터진 것이다. 차는 폭발에 앞부분이 들썩였다가 내려앉으면서 엔진이 꺼져 있었다. 운전사가 머리에 피를 흘리면
서 시동을 걸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아르마스는 보이지 않는 눈을 깜박이면서 고함을 켰다.
"각하 무사합니까?"
"난 괜찮아, 아르마스."
뒤쪽에서 가라앉은 듯한 카스틸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요란한 총소리가 뒤쪽에서 났다. 메모리얼 빌딩의 앞쪽이었다. 빌딩의 현관을 나오려던 경비병들이 거리의 앞쪽 요소요소에 진을 치고 있던 사내들의 공격을 받는 것이다. 금방 1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경비병들이 빌딩 안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앞쪽에서 다시 수류탄 한 발이 터져 보닛의 뚜껑이 통겨 올라갔고 흰 수증기가 분수처럼 틀어 나왔다.
"에르난데스, 이놈."
뒷자리에서 카스틸로가 악문 이 사이로 뱉듯이 말했다.
"이놈이 결국 나를 배신하는구나."
차는 이제 고물이 되었다. 도로 한복판에서 수증기를 뿜어 올리면서 꼼짝하지 않았다. 소총탄이 10여 발 다시 날아와 차체와 유리창을 때렸다.
"저 빌어먹을 놈의 차가 수류탄을 맞고도 안은 멀쩡해!"
최대광이 버럭 소리를 질렀는데 한국말이다. 그는 수 미터쯤 앞쪽에 있는 세 번째 차량을 향해 볼링을 하듯 수류탄 한 발을 다시 굴려 넣었다. 요란한 폭음이 울리면서 차체가 들썩 들렸다가 내려앉았다. 그러나 안은 아직도 멀쩡했고 유리창도 깨어지지 않았다. 페드로가 로켓포를 겨누었다.
"그래, 페드로! 해치워라!"
고영무의 옆쪽에 엎드려 있던 짐 버콜리가 소리쳤다. 여섯 대의 차량 중 세 대는 로켓포로 박살을 내었고 두 대는 수류탄으로 차체를 깬 다음 밖으로 튀어나오는 경호원을 양쪽에서 사살했다. 살아남은 놈들은 세 번째 차량에 탄 놈들뿐이다. 카스틸로는 두 대의 방탄차로 메모리얼 빌딩팅에 왔고, 이쪽은 그가 어느 차에 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방탄차는 두 번째와 세 번째였으므로 우선 페드로가 두 번째를 부쉈고 앙헬은 세 번째를 겨눈다는 것이 비스듬한 각도여서 다섯 번째 차량의 엔진을 때렸던 것이다. 그 사이에 첫 번째 차량은 최대광과 브루노 등의 수류탄에 박살이 났고 끝 쪽 차도 마찬가지였다. 이젠 세 번째 차량만 남아 있는 것이다. 빌딩 앞쪽에서는 격렬한 총격전이 그치지 않고 있었다. 빌딩 3층과 5층에서 콩 볶는 듯한 소리가 들려 왔다. 기관포로 마리크의 대원들을 내려쏘는 것이었다. 페드로는 이제 신중하게 로켓포를 겨누었다. 양쪽의 대원들은 총격을 멈추고는 잠자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안에서 손수건을 흔듭니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이제 희끄무레하게 밝아오는 새벽의 여명으로 모두들의 눈에 그것이 보였다. 앞쪽 좌석이었는데 안에서 흰 손수건을 좌우로 내젓고 있었다. 그러자 페드로가 주춤 가늠자를 바라보던 시선을 이쪽으로 돌렸다. 고영무는 모두의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페드로, 봐!"
고영무가 낮게 소리쳤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 차량으로 옮겨졌고 페드로는 눈을 다시 가늠자에게 돌리더니 방아쇠를 당겼다.
"패액!"
귀를 긁는 듯한 발사음이 들렸고, 흰 섬광을 뒤로 뿜으면서 로켓탄이 날아가 차의 뒤창문을 들었다. 거리를 울리는 폭음과 함께 차체가 갈래갈래 찢긴 조각들을 불덩이와 함께 공중으로 뿜어 올렸다.
"철수해라! 끝이다!"
고영무가 소리쳤다. 여섯 대의 차량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성공이다. 그리고 이쪽은 한 사람의 부상자뿐이다. 거리는 이제 사물의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고영무는 뛰면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6시 5분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한 시간도 넘게 걸린 것 같았으나 기습은 10분 만에 끝난 것이다. 카스틸로는 제거된 것이다. 뛰면서 고영무는 뒤쪽을 바라보았다. 메모리얼 빌딩 앞의 총성도 뚝 그쳐 있었다. 최대광과 신용만이 제일 뒤쪽에 처져 있었는데, 최대광이 차에 깔린 대원을 들쳐 업고 뛰기 때문이었다. 신용만은 그의 옆을 따라오고 있다. 고영무는 앞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초소가 50미터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쪽에 있을 마론과 합류해서 니즐라스의 본대로 돌아갈 것이다. 라파엘은 카스틸로가 제거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장 보고타로 달려올 것이고 기다리고 있던 에르난데스의 추대에 의해 다시 정권을 쥘 것이다. 앞장서 가던 짐 버클리가 초소에 거의 접근해 있었다. 이제 거리는 윤곽이 뚜렷이 보일 정도로 밝음을 되찾았고 동쪽 하늘에는 구름에 가린 햇살의 둥그런 무리가 떠올라 있었다. 대원들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서로 발은 없었으나 시선이 마주치면 서로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헐떡이는 숨소리와 절그렁거리며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 달려가는 발자국 소리가 한동안 거리를 메웠다. 아직 뒤쪽의 메모리얼 빌딩에서 돌아오는 차량의 기척은 없었다. 오려고 해도 길을 가득 막은 차량들의 잔해에 걸려 을 수도 없을 것이다. 짐 버를리가 마악 초소의 입구로 다가갔을 때였다. 그때까지 초소에는 인적이 없었으므로 고영무는 그들이 미리 철수했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때 입구에서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복 차림의 라파엘 부대원들이었다. 그들은 일제히 이쪽을 향해 벌려 서더니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순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고영무는 입을 쩍 벌렸다가 인도 위로 몸을 굴렸다. 앞장서 뛰던 서너 명의 대원들이 총탄에 맞아 거리에 나뒹구는 것이 그의 시선에 들어왔다.
"이, 이런!"
누군가가 쥐어짜는 듯한 고함을 질렸는데 그것도 뚝 그쳤다.
"이봐, 우리야! 같은 편이라구!"
서너 발자국 앞에서 아직 사태를 알아차리지 못한 대원 한 명이 한 손을 휘저으며 고함을 질렀다가 빗발 같은 총탄을 맞고 허물어지듯이 주저앉았다. 고영무는 인도에 바짝 세워진 차체에 몸을 숨겼다.
"놈들을 보아라! 앙헬! 페드로!"
"보스! 앙헬은 죽었습니다."
앞쪽의 차량 뒤쪽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총탄이 날아와 차체에 맞아 어지럽게 튀어올랐다.
"짐! 브루노!"
"보스! 짐도 죽었습니다."
어디에선가 브루노가 깨어지는 듯한 소리로 고함을 쳤다. 이젠 이쪽에서도 초소를 향해 응사하기 시작했으므로 요란한 총성이 거리를 가득 메줬다. 고영무 뒤쪽에서 최대광이 다가왔다. 온몸을 둥그렇게 굽히면서 달려온 그는 차체의 트렁크에 몸을 부딪치며 멈췄다.
"저, 씨발놈들. 형님, 저놈들이 사람을 잘못 보고. 병신 같은."
"수류탄을 던져!"
그의 허리에 매달린 수류탄을 한 개 뽑아 들면서 고영무가 소리쳤다.
"저놈들은 배신한 것이다."
그는 팔을 휘둘러 몇 미터 안쪽 거리에 있는 막사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몸을 드는 순간 빗발 같은 총알이 날아왔으나 수류탄의 검은 덩어리가 날아가는 것이 그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그리고는 막사 옆에서 요란한 폭음을 내며 폭발하였는데 모래자루 안쪽이었다. 두어 명의 사내들이 폭발과 함께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이어서 페드로가 쏜 로켓탄이 편 줄기를 뱉으면서 막사의 창문으로 빨려 들어갔고 꾸응 하는 절제편 폭음과 함께 막사의 창문 안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최대광이 조급했는지 한 주먹에 두 개의 수류탄을 쥐고는 냅다 던졌는데, 한 개는 막사 뒤쪽에서 폭발하였고 다른 하나는 막사 앞쪽에 세워진 차량 한대를 번쩍 들어 인도 위에 올려놓았다. 저쪽의 총격이 뜸해졌다.
"브루노! 대원들을 샛길로 철수시켜라!"
고영무가 악을 쓰듯 소리쳤다.
"모두 뛰어라! 여길 떠나자!"
샛길로 가려면 오던 길로 돌아가야 했다. 대원 두어 명이 차량들 들 사이에서 얼굴을 드는 것을 본 고영무가 이를 갈았다.
"니콜라스, 이놈."
수류탄 한 발이 날아와 방금 얼굴을 든 대원들이 있는 부근에서 터졌다. 최대광이 던진 수류탄이 다시 초소 쪽에서 폭발했고, 브루노가 다리를 절름거리며 연기 사이를 빠져나왔다. 자동차의 연료 탱크가 폭발하였는지 주변은 검은 연기에 뒤덮여 있었다.
"브루노! 어서!"
"보스,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페드로밖에 없습니다."
이마에 피를 흘리며 고영무 옆으로 다가온 그는 차체에 등을 기대고 털썩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산토스는?"
고영무가 소리치듯 물었다.
"앞쪽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짐은?"
"제일 먼저 죽었습니다."
페드로가 쏘았는지 로켓탄이 막사 주변에서 폭발했고 최대광이 던진 수류탄이 연달아 터졌다.
"먼저 철수해라! 브루노."
"보스."
브루노가 악마와 같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보스가 먼저."
"빨리 꺼지지 못해!"
고영무가 악을 쓰자 브루노는 머리를 돌렸다.
페드로가 절름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형님, 이제사 형님하고 둘이 있게 되었네요, 잉?"
최대광의 헐떡이는 소리에 고영무가 힐끗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상점의 현관 틈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용만이는?"
고영무가 소리쳐 물었다.
"용만이는 어떻게 되었냐?"
"여기 있습니다, 형님."
뒤쪽에서 신용만의 목소리가 들려 왔고 그것을 목표로 하듯이 총알이 쏟아져 왔다.
"살아 있는 사람은 대답해라! 짐! 앙헬!"
그리고 잠시 기다렸으나 앞쪽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그 대신 검은 그림자 두어 개가 이쪽으로 다가오려는 듯 불타오르는 차량 뒤쪽에서 어른거렸다. 고영무는 벌떡 상반신을 세우고 그쪽을 향해 M-16을 쏘아 갈겼다. 그리고는 서너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
"도리 앙! 산토스!"
"보스."
희미한 목소리에 고영무는 눈을 치켜떴다. 매운 연기가 바람을 타고 이쪽으로 몰려왔다. 아마 10분쯤의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메모리얼 빌딩의 경비병들이 카스틸로의 사체를 수습하고는 바짝 뒤에 붙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서너 발짝 다시 앞으로 나간 고영무는 뒤집힌 차체 밑에 깔려있는 산토스를 보았다. 눈의 흰자위를 굴리며 똑바로 누운 산토스의 하반신은 차체에 깔려 보이지 않았다.
"보스."
입으로 피를 쏟으며 산토스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산토스, 내가 구해 주마."
그에게로 몸을 굽히던 고영무는 다다닥거리는 총성을 다시 들었고 온몸을 떠밀린 듯한 자세로 뒤쪽의 부서진 차체에 부딪혔다.
"형님!"
최대광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눈을 부릅뜬 고영무는 앞쪽의 산토스와 초소 쪽을 바라보려고 기를 썼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귀는 아직도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야, 용만아. 야, 이 새끼야, 빨리!"
최대광이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고 뛰어오는 발자국 소리와 다시 총소리가 들렸다.
"내가 업을게, 업혀! 빨리해! 이 씨발놈아!"
최대광이 악을 졌다.
"형님! 형님!"
신용만이 그를 흔들었다.
"난 괜찮다. 산토스"
고영무는 그렇게 말하였으나 자신의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몸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최대광의 넓은 둥이 편안했으므로 고영무는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리고는 의식을 잃었다.
7. 정략과 모략
"시 외곽을 차단해라. 시내에서 나가는 사람은 물론 들어오는 사람들도 철저히 검색하도록."
에르난데스는 지휘봉으로 앞에 늘어서 있는 장군들을 가리켰다.
"지금은 계엄하에 있는 상황이야. 각하가 유고시에는 계엄사령관인 내가 나라를 통치한다. 하지만."
말을 멈춘 에르난데스는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부릅뜬 눈으로 장군들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 가득 고인 물기가 보였고, 이내 그것은 두 줄기의 눈물이 되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각하의 뜻을 받들어 국가를 평온하게 유지시킬 작정이다. 나 정권에 대한 욕심은 없다."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커다란 응접실을 울렸다.
"이제 곧 우리 조국은 내란이 끝나게 될 것이다. 국민들에게 더 이상 고통을 분담시킬 이유도 명분도 없다."
장군들은 부동자세로 서서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모두 오십 대 중반으로 산전수전을 겪은 노장들이다. 2년 전에 카스틸로가 라파엘을 몰아내는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그가 했던 말과 비슷한 말을 에르난데스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르난데스는 그때의 카스틸로보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수도권의 경비를 담당한 제3군단의 사령관이자 계엄사령관이었지만 오르쿠에에는 제1군단과 5군단의 연합군 사령관인 도밍고가 있다. 이제 에르난데스의 강력한 정적으로 도밍고가 등장할 것이고, 전국은 카스틸로와 라파엘의 대치 상황과는 비교도 안 되는 내란에 빠져들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도밍고 장군과 프란채스코 장군을 보고타로 초치했다. 그분들과 상의해서 곧 정국을 안정시킬 작정이니까 귀관들은 부하 장병이나 가족들을 안심시키도록."
에르난데스가 말을 마치자 장군들은 긴장을 풀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들은 에르난데스의 직속 부하들이었으므로 어차피 같은 배를 탄 입장이다. 지연과 혈연으로 뭉친 사이였고, 카스틸로의 심복들이 요소요소에 있었으나 그들은 이제 기력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카스틸로는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후계자 체제를 명확하게 해두지 않았는데 권력이 계2인자에게 들어가는 것을 보아 넘기지 못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도밍고와 에르난데스를 경쟁시킨 것도 그런 맥락이었으나 잡작스런 그의 유고는 정국을 극도의 분열 상태로 끌고 가고 있었다. 장군들은 사태를 그렇게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이제 상대는 라파엘이 아니라 도밍고라고 믿었다. 장군들이 제각기 그들의 부대로 떠나자 에르난데스는 프랑코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프랑코, 도밍고는?"
"네, 각하. 작전을 중지하고 오르쿠에 시의 사령부에 머물러 있습니다."
프랑코가 기운차게 대답했다. 머리를 끄덕인 에르난데스는 그와 자신과의 관계가 옛적의 자신과 카스틸로의 관계와 거의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언짢아졌다.
"다른 건 없나?"
무뚝뚝한 말투로 그가 다시 묻자 프랑코는 어깨를 세웠다.
"제3연대는 대통령궁에서 정식으로 경비 업무에 들어갔습니다."
"메모리얼 빌딩은 15대대가 접수 완료했습니다. 그곳에 있던 정보부원과 경호실 소속 경비원 425명은 현재 억류 중입니다."
에르난데스는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카스틸로의 친위부대인 제27사단은 최정예 부대였다. 그들은 대통령궁 북쪽 12킬로 지점에 사령부를 두고 있었다. 카스틸로의 말 한마디면 에르난데스조차도 친위대의 장교 앞에 무릎을 꿇는 신세가 되어야만 하는 막강한 위력의 부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카스틸로가 로켓포에 맞아 형체를 찾아볼 수 없는 시체가 되었다. 친위사단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제야말로 사단장인 빈센토는 자신의 능력을 깨달았을 터였다. 친위사단의 전후방에 에르난데스의 두 개 사단이 옮겨와 있었으므로 움직이려야 움직일 수도 없었다. 산토 도밍고는 카스틸로의 폭사 소식을 듣자마자 부대의 운동을 중지시킨 채 세 명의 심복 부관을 보고타로 파견하여 정정을 살펴보게 했다. 친위대와 정보부원, 대통령궁 경호원의 철통 같은 경비망을 뚫고 반란군이 카스틸로의 길목을 차단하여 차량을 모조리 폭파했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이것은 에르난데스의 반란이다. 도밍고는 그렇게 믿었다. 그렇게 대담한 작전을 벌일 사람은 수도권의 병권을 쥐고 있는 에르난데스밖에 없는 것이다. 이쪽이 작전을 그쳤으므로 라파앨 측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었는데 대수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앞뒤로 에워싸여 있어서 앞으로 열흘쯤 후면 밀림과 함꼐 깡그리 불에 타 죽게 되어 있었다. 오후 6시가 되어 가고 있었으므로 도밍고는 책상에서 일어선다. 참모들과 함께 앞으로의 계획을 결정할 작정이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참모장인 쿠에바 장군이다. 도밍고와는 대조적으로 흰 피부에 근육질의 사내였다. 그는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각하, 제5군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있습니다."
순간 도밍고의 가슴이 아래쪽으로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검은 피부의 얼굴에는 표정을 보이지 않는다.
"왜? 무슨 일이 있나?"
"5군의 참모장인 아드리스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현재의 정국 상황이 극히 불투명하므로 군을 움직이거나 타군과 연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미친놈, 사령관은 나야! 제5군은 연합군의 소속이고, 나는."
버럭 소리를 치자 쿠에바는 이쪽을 멀뚱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도밍고가 억눌린 음성으로 말했다.
."버릇없는 놈. 이럴 때일수록 군이 단결해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각하, 5군 사령관이 마음을 돌린 것 같습니다."
쿠에바가 마음을 다져 먹은 듯 한 걸음 다가섰다. 그도 오십 대의 나이로 이만큼까지 올라온 사내이고 보면 세상 돌아가는 물정쯤은 훤하다. 그리고 연합군의 참모장 역할까지 맡고 있는 작전들인 것이다.
"그의 사령부에 에르난데스가 보낸 참모가 와 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눈을 부릅뜬 도밍고는 그를 바라본 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에르난데스가 선수를 친 것이다. 그놈은 언제나 약삭빠른 기지를 발휘해서 카스틸로의 신임을 독차지해 왔다.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도밍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부대장들에게 연락해서 위치를 지키도록! 그리고 참모들을 각 부대로 파견해서 에르난데스의 교란을 막아라,"
"알았습니다, 각하."
쿠에바가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오늘의 회의에서 도밍고는 에르난데스에 관한 의혹을 열거하고는 연합군을 보고타로 돌릴 작정이었다. 에르난데스에게 정권을 넘겨 주는 것은 조국을 부패와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것과 같다고 도밍고는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제거하고 당분간 정권을 장악한 다음 국민투표를 실시해서 민선 대통령을 뽑는다. 그때에는 위상도 명확히 서 있을 것이다. 라파엘은 구악이다. 그에게 정권을 넘겨줄 수는 없었다. 그와는 악운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그가 집권한다는 것은 자신의 몰락을 의미한다. 하룻동안 생각해 낸 도밍고의 결심이었다. 책상에서 다시 일어나던 도밍고는 다리에 힘이 빠져 휘청거렸다. 창
밖으로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오르쿠에 시 북쪽에 있는 제5군 사령부의 사령관실에 네 명의 사내가 모여 앉아 있었다. 물론 중앙에 앉아 있는 사내는 사무엘 프란시스코 대장이다. 그는 사십 대 후반으로 카스틸로와 동향인 남부 국경 지역 출신이었고 미국 육사를 나와 야전군 지휘관으로 잔뼈를 굳힌 인물이었다. 그의 옆에는 5군 참모장인 아드리스 중장이 앉아 있었다.
"도노반씨, 난 친미 성향이 강한 인물이라고 해서 국경 지역의 사령관으로만 10년 가깝게 돌아다녔소."
프란시스코가 앞쪽에 밝은 작업복 차림의 사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모난 얼굴에 눈매가 날캬로웠으나 목청이 굵었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난 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습니다. 당신 말을 따르게 된다는 것은 카스틸로씨가 나에 대해 잘 판단하고 있었다는 말도 되거든."
도노반이라고 불린 작업복 차림의 오십 대 사내가 빙그레 웃었다. 부드러운 은발이 이마 위에 늘어진 백인이다.
"이젠 그런 오해를 할 사람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프란시스코 대장. 이제 당신의 조국은 당신의 어깨에 얹혀졌소."
"내가 아니오, 도노반씨. 에르난데스 대장이겠지."
프란시스코가 앞쪽에 앉은 군복 차림의 장군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은가, 바텔 소장?"
"아닙니다, 각하. 저희 각하께서는 정권에 대한 욕심이 없으십니다. 각하께서는 라파엘 각하를 복권시키시겠다는 생각밖에 없으십니다."
검은 얼굴의 장군이 온몸을 굳히며 대답했다. 그는 에르난데스의 참모로 도노반과 동행해 왔다.
"내가 열쇠를 쥐고 있군, 아드리스,"
옆에 앉은 참모장을 바라보며 프란시스코가 빙긋 웃었고 아드리스가 희미하게 따라 웃었다.
"나는 오늘 저녁 도밍고 대장이 주재하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소, 도노반씨."
도노반 쪽으로 머리를 돌린 프란시스코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이미 도밍고는 이쪽의 상황을 눈치채고 있을 거요. 하지만 어떻게 할 수는 없지. 그의 부대가 화력이 대단하다고들 하지만 이곳에 와 보니 종이호랑이였어. 실전 경험이 없는 목동들이었지."
모두들 잠자코 프란시스코를 바라보았다.
"라파엘씨를 복권시킨다는 생각에 나는 찬성합니다. 나는 오르쿠에를 남쪽으로 돌아서 보고타로 진군하겠소. 물론 라파엘씨와 함께 말이오. 바텔, 에르난데스 장군에게 그렇게 전해 주게."
바델이 힐끗 도노반을 바라보았다.
"장군, 도밍고 대장의 1군을 자극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도노반이 묻자 프란시스코가 머리를 저었다.
"연합군 사령부는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난 라파엘써를 내세우고 진군해 갈 테니까. 국민들은 절대적인 환영을 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럴겝니다, 장군."
"그렇지 않은가, 바텔?"
바델이 입 안의 침을 삼켰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각하."
"그렇다면 에르난데스 대장에게 그렇게 전해 주게. 진정으로 라파엘 각하를 복권시킬 의도라면 이곳에서 라파엘 각하만 떼내어 가는 것보다 내가 각하와 함께 바람을 몰고 가는 것이 훨씬 유리할 것이라고."
"그렇게 되면 도밍고 대장도 마지못하건 어쩌건 간에 우리 측에 붙게 되네. 그를 적으로 돌리면 나와 에르난데스 대장이 연합한다손 치더라도 다시 내전이 일어나. 그에게도 여유를 주어야 해. 내 뒤를 따라 보고타로 진군해 오도록 해야 하네. 그래서 같이 라파엘 각하를 모시는 것이지."
이제 바델은 입을 확 다물고 잠자코 있었다.
"그것 좋은 생각입니다, 장군."
도노반이 머리를 끄덕였다.
"우리는 한시바삐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의도에서 라파엘씨를 모시려고 했는데, 장군께서 적극적으로 그렇게 해주신다니 오히려 그 방법이 낫겠습니다."
"그거 혹시 본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일 아닙니까? 도노반 참사관."
프란시스코가 그렇게 물었으나 도노반은 입술 끝을 올려 웃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텔은 이맛살을 찌푸린 채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불안한 표정이었다.
"도노반씨, 당신이 도와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 바텔 소장의 입장이 난처한 모양인데."
프란시스코가 앞에 암은 바델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주문받은 일 이상을 하게 되니까 바텔이 오해를 받게 되겠소."
"염려 마시오, 바델. 에르난데스 장군도 적극적으로 찬성할 겁니다."
도노반이 말하자 프란시스코도 머리를 끄덕였다.
"날 이쪽에 남겨 두어 도밍고를 견제시키는 것보다 보고타로 끌어들여 확실한 우군으로 해 두는 게 이로울 것이라고 말하게나, 바델. 도밍고는 갖은 수단을 써서 나를 끌어들이려고 할 테니까 말이야."
"잘 알았습니다, 각하."
바텔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되었어. 아드리스, 이젠 라파엘 각하를 찾아야 되네. 밀림에 전단을 뿌려 내가 직접 각하를 모시러 간다고 하게. 나 흔자서라도 가겠어,"
"알겠습니다, 각하."
도노반과 바텔은 잠자코 그들을 바라보았다.
보고타 시내의 힐튼 호텔 근처에 있는 가브리엘 정형외과 원장인 가브리엘 박사는 나이가 육십이 지났으나 언제나 출근은 두 번째로 한다. 6시 30분 병원 문이 경비에 의해 열리면 문 앞에서 기다리던 청소부인 마리아가 병원으로 들어가는 첫 출근자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6시 45분에 가브리엘 박사는 병원 앞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아침의 신선한 공기가 차 밖으로 나온 그의 코에 스며들었고, 아침 안개가 조금 끼어 있었으나 상쾌한 아침이었다. 카스틸로가 그가 예견한 대로 제 명에 살지 못하게 된 것도 좋은 아침이 된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어제 새벽의 라파엘 측 공격은 대단했었다. 병원에 마악 출근해 있던 그는 유리창이 깨질 듯 덜렁거리고 벽이 울리는 폭음을 30분 가깝게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산산이 조각난 카스틸로의 시체를 맞추느라고 지금도 국립의료원의 조르단과 그의 제자들은 진땀을 흘리고 있다. 가브리엘은 차의 열쇠를 잠그고는 두 팔을 뒤로 힘껏 젖히면서 심호흡을 했다. 제일 멋진 일은 프란시스코가 라파엘을 모시고 보고타로 진군해 온다는 뉴스였다. 그리고 에르난데스도 웬일인지 그것을 적극 환영한다는 성명을 어젯밤 특별 뉴스로 방송하고 있었다.
"가브리엘 원장이십니까?"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가브리엘은 놀라 몸을 돌렸다. 이른 아침의 빈 주차장에 사람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렇습니다만, 댁들은 누굽니까?"
그는 앞에 서 있는 두 명의 사내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한 명은 양복 차림의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였는데 어딘가 경찰 계통의 사내로 보인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보기 드문 메스티조계의 거인이다. 판초를 둘렀으나 보통 사람이 입으면 비옷처럼 보일 만큼 컸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가브리엘은 얼른 시선을 양복을 입은 사내 쪽으로 돌렀다.
"박사님, 치료해 주셔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양복을 입은 사내가 한 걸음 다가섰다.
"총상입니다. 가슴과 배에 네 발을 맞았는데 의식이 없습니다."
사내의 눈이 번들거리고 있었는데 이것은 공무로 온 것이 아니다. 가브리엘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병원으로 데려오셔야지. 그럼, 환자는 지금 어디에 있소?"
"병원으로 데려갈 입장이 안 됩니다, 박사님."
사내가 뚫어질 듯 가브리엘을 노려보았다.
"어제 카스틸로를 폭사시켰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말입니다."
가브리엘이 저도 모르게 눈을 치켜뜨면서 입을 벌렸다.
"치료 도구를 가지고 같이 가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이것 보시오, 나는‥‥‥"
그러자 뒤쪽에 서 있던 거인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판초 속에서 한 팔을 꺼내었다. 수류탄 두 개를 한주먹에 쥐고 있는 손이 보였다. 그는 잠자코 가브리엘의 양복 주머니에 수류탄 한 발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남은 한 발의 수류탄을 입으로 가져가더니 안전핀을 잡아 뜯어 넣었다.
"박사님, 의료 도구를 가지러 가십시다."
양복을 입은 사내의 말소리는 이제 부탁조가 아니었다. 그들이 시내의 빈민가에 있는 허름한 주택 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방에는 한 사람이 침대 위에 누워 있었는데, 그를 내려다본 가브리엘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 기적이었다. 상체를 가득 붕대로 감아 놓았고 지혈을 시킨답시고 약방에서 가져온 온갖 약을 처바른 모양이었다. 붕대는 온통 피에 젖어 있었는데 환자는 가늘게 숨을 쉬고 있었다.
"붕대를 떼어내시오. 어서!"
가브리엘이 소리치자 방 안에 있던 두 사내가 달려들어 붕대를 떼어내었다. 그동안에 가브리엘은 머리를 들어 방 안을 둘러보았다. 퀴퀴한 냄새에 피비린내가 섞여 있는 이곳은 걸인이나 살아가기를 포기한 마약 상습자들이 사는 곳이어서 경찰도 들어서기를 꺼리는 곳이다. 식수와 전기의 공급도 되지 않았으므로 라파엘의 게릴라들도 잠복하기에 불편해 찾지 않는다고 들었다. 방의 한쪽 구석에는 로켓포와 소총이 여러 정 세워져 있었고 구석에는 수류탄 덩어리가 오물 덩어리처럼 어지럽게 늘어져 있다. 방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끌고 온 사람과 합해 모두 네 사람이다. 누워있는 사람은 곧 시체가 될 것이므로 숫자에서 빼도 될 것이었다.
사내는 가슴에 두 발, 어깨에 한 발, 그리고 옆구리에 한 발의 총상을 입고 있었다. 가슴 상처에서는 아직도 조금씩 피가 배어 나오고 있다. 가브리엘은 한동안 입을 벌리고 사내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총을 맞고도 살아 있는 사람은 처음 보는 것이다.
"자, 거기 가방을 이리로!"
사내의 몸 위에 엎드리면서 그가 짧게 말하자 사내들이 다투듯 가방을 쥐어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선생님, 제발 살려 주십시오."
갑자기 커다란 얼굴의 사내가 그의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이대로 보스를 죽게 할 수는 없습니다. 보스는 너무 억울합니다."
가브리엘은 상처 자국을 하나하나 살펴 나갔다. 가방에서 가위와 붕대를 꺼낸 그는 소독약을 쥐었다. 사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박사님, 우리는 카스틸로를 처단했습니다. 그리고 배신당한 겁니다. 우린 동료들을 거의 다 잃었습니다. 배신자들에게 말입니다."
"거기 핀셋을 주시오."
핀셋이 주어졌고 그는 가슴 부근의 상처를 열어 보았다. 그의 가슴이 뛰었다. 두 발 모두 심장 근처에 박혀 있었고 총알의 밑바닥이 보인다. 아직 심장을 건드리고 있지 않은 것이다.
"불을! 조금 더 밝게!"
방 안이 어두웠으므로 그가 크게 소리치자 사내 하나가 촛불을 두 개 밝혀 들고 다가왔다. 모두들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배신한 것은 누굽니까?"
긴장을 풀어야 했으므로 가브리엘이 상처를 벌리면서 물었다.
"라파엘입니다. 아니, 미국인지도 모릅니다."
넓은 얼굴의 사내는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힐끗 머리를 든 가브리엘은 그의 얼굴이 낙담으로 찌그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마치 어머니를 잃어버린 아이의 얼굴이었다.
"우린 이유도 없이."
"브루노, 그만해."
날카로운 얼굴의 사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박사님 일에 방해가 돼."
브루노라고 불린 사내는 입을 닫았고 그의 뒤쪽에 서 있는 거인과 말쑥한 얼굴의 사내는 이쪽의 손길만 바라보고 있었다.
수저를 내려놓은 민기철이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1시 반 도착이니까 공항에 1시 반쯤 가서 기다리면 될 게다. 입국심사 받고 세관을 거쳐 나오려면 빨라도 30분은 걸릴 테니까."
아침 8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머리를 끄덕인 김영지는 그의 앞으로 물그릇을 내려놓았다.
"12시에 후안이 엔진 세 개를 가져온다고 했어요. 그걸 받고 돈을 줘야 돼요."
"그래? 이제야 벤츠 엔진을 끼울 수 있게 되었군,"
민기철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후안 그놈이 네가 말하면 고분고분 들어 주는 모양이야. 내 말에는 들은 척도 않는 녀석인데."
"아저씨도 참,"
"네가 일을 시작하고 나서 공장의 능률도 부쩍 올랐어, 하루에 10대에서 이제는 엔진 수리만 20대로 늘었다."
"그간 밀려 있던 일이 요즘에야 끝나서 그렇죠."
"영지야, 거기 TV 볼륨 좀 높여 봐라, 뉴스를 좀 듣자꾸나."
민기철이 그녀의 뒤쪽에 놓인 TV를 턱으로 가리켰다. 김영지가 볼륨을 높이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오늘도 라파엘 대통령의 복권에 대한 뉴스였다. 프란시스코와 함께 보고타로 진군한 라파엘은 에르난데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보복 없는 정치를 선언했다. 그것이 이틀 전이었다. 오르쿠에에 주둔해 있던 도밍고 대장도 어제 참모들과 함께 보고타로 날아와 라파엘 대통령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전국은 이제 내란이 끝난 축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아나운서는 대통령이 오늘 낮 12시를 기해 전국의 계엄령을 해제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어쨌든 대단한 사람이야, 라파엘은."
물그릇을 내려놓으면서 민기철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우린 연합군에 포위되어서 금방 잡혀 처형당할 줄 알았지, 보고타에 부대를 보내어 카스틸로를 박살낼 줄 누가 알았겠니?"
"그날 아침은 무서워서 혼났어요."
김영지의 말에 민기철이 웃었다.
"실은 나도 그랬다. 포탄이 터지는 소리가 수십 발 들리는데, 누가 아니? 잘못 날아온 포탄에 사람이 다칠지도 모른단 말이야. 옛날 한국전쟁 때에도 오폭으로 많이 죽었어."
그러다가 민기철이 말을 그치고는 TV를 바라보았다. 아나운서는 라파엘의 대 사면령을 발표하고 있었다. 카스틸로 정권하의 정치범과 수배자들에게 라파엘이 사면령을 내린다는 것이다.
"그건 말두 안 돼, 골라서 사면을 하든지 말든지 해야지."
이맛살을 찌푸린 민기철이 말했다.
"고영무 같은 놈은 라파엘 정권이 책임지고 잡아 줘야 돼. 그런 놈은 사면을 받을 수가 없어."
"그놈이 보고타에 숨어 있는 모양이다만, 내가 탄원을 해서라도 꼭 잡을 테다."
"아저씨, 이제 그만두세요."
김영지의 말에 민기철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냐? 네가 모든 걸 잊고 일에 몰두해서 내가 마음은 놓는다만, 그 일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영지야, 죄지은 놈은 죗값을 받아야 돼,"
김영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빈 그릇을 모았다.
"그런 놈은 정권이 바뀌더라도 다음 정권에 분명히 인계를 해줘야 된다."
김영지는 빈 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다가갔다. 그와 묘지에서 헤어진 지 일주일이 지났다. 살아 돌아오면 꼭 찾을 것이라고 하던 그의 목소리와 그때의 표정이 눈에 선했으나 그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민기철의 말대로 정권이 바뀌어도 물릴 입장이어서 어디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릇을 닦으면서 김영지는 가늘게 긴 숨을 내쉬었다. 외삼촌을 설득하여 오늘 1시 반 비행기로 어머니는 보고타로 돌아오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쩌면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누구요?"
뒤쪽에서 민기철이 문 쪽을 향해 묻는 소리에 김영지는 머리를 돌렸다. 민기철이 일어나 현관 쪽으로 다가갔다. 그릇을 챙겨 서랍속에 넣는데 민기철이 그녀를 불렀다.
"영지야, 시내에서 손님이 찾아왔다."
물에 젖은 손을 치마로 닦으면서 김영지는 현관으로 다가갔다. 공장의 종업원과 나란히 서 있는 사내가 눈에 띄었다. 첫눈에 스페인계 베스터조였다. 눈매가 날카로운 사내였으나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모자를 벗었다.
"김영지씨 맞습니까?"
"네, 그런데요."
민기철이 그녀의 옆에 서서 사내를 의심쩍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 잠깐 개인적으로 드릴 말씀이,"
사내가 힐끗 민기철을 바라보는 순간 김영지의 가슴이 뛰었다.
"아저씨, 저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행주치마를 벗어 현관 옆에 내려놓은 김영지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종업원이 몸을 돌려 공장으로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저는 페드로라고 합니다. 제 보스는 고영무씨라고 하는데, 알고 계십니까?"
김영지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힘들여 머리를 끄덕였다.
"저, 무슨 일이 있어요?"
"보스가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습니다. 다행히 생명은 건졌습니다만."
김영지를 탐색하듯 바라보면서 그는 손에 든 중절모를 구기적거렸다
"보스가 뵙고 싶다고 합니다, 세뇨리타. 의사도 살아난 것이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는 것을 느꼈다. 사내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지고 있었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잠깐, 옷을 갈아입구요."
"제 차가 공장의 정문 앞에 있습니다, 세뇨리타."
김영지는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왜? 무슨 일이냐?"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본 민기철이 눈을 치켜뜨고 물었다.
"좋은 일이냐?"
김영지는 고영무에게로 한 걸음 다가왔다. 이젠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어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온몸이 떨리는 것은 조금 나아졌다. 상반신을 온통 붕대로 감은 채 고영무는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방안에는 서너 사람의 사내들이 있었으나 모두들 잠자코 입을 다문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김영지는 침대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가 생각나지 않았으므로 머리를 돌려 주위에 서 있는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데려온 사내는 침대 끝에 서 있었는데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시선을 내렸고, 나머지 사내들은 아예 그녀 쪽을 쳐다보고 있지도 않다. 김영지는 어둡고 냄새나는 방 안에 앉자 한동안 우두커니 고영무를 내려다보았다. 문득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만일 죽게 된다면 죗값을 받아 죽었다고 믿으라는 말이다. 그의 가슴이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보면 살아 있었다.
"거시기."
옆쪽에서 굵은 한국어가 들렸으므로 그녀는 퍼뜩 머리를 들었다. 산타모니카에서 보았던 거인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형님은 댁이 그때 그렇게 한 것이 가슴에 맺혔던 모양이오. 내가 들었는데, 댁네 오빠를 해코지한 것이 우리 형님이 아니라고 합디다."
그의 말소리가 어두운 방 안을 울렸다. 그러자 그제야 사내들이 몸을 움직였는데, 얼굴이 넓은 메스티조는 뒤쪽의 의자로 물러가 앉았고 자신을 데려온 사내는 돌아서서 헐떡거리며 수건을 말았다.
"우리 형님은 거짓말할 사람이 아니여. 아, 죽였으면 죽였다고 말해버리지 뭐하러 숨기겠소? 어디 사람 한두 명 죽여 보았나? 형님이 깨어나면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고 말해 버리시오. 그것이 신상에 이로울 거요."
"야, 시끄러!"
옆에 서 있던 다른 한국인이 그의 말을 잘랐다.
"박사님 오실 때가 되었으니까 네가 나가 봐. 어서!"
퍼뜩 눈을 치켜들었던 거인이 잠자코 몸을 돌렸다.
"병원에는 왜?"
김영지가 말쑥한 얼굴의 사내를 바라보며 한국말로 물었다. 사내가 입술 끝으로 웃음을 띠우며 말했다.
"우린 배신을 당했습니다. 라파엘 측이 아마 우리를 찾고 있을 겁니다."
"카스틸로를 제거하고 나니까 그놈들이 공격을 해오더군요. 살아남은 사람은 우리 다섯 명뿐입니다."
"형님은 살아나실 겁니다. 이렇게 당하고 돌아가실 수는 없습니다."
김영지는 구석의 선반 위에 촛불 한 자루가 켜져 있는 어두운 방 안을 돌아보았다. 창문이 없었으므로 환기도 되지 않는다. 밖은 이미 밝은 한낮이었으나 이곳은 밤이었다. 김영지가 머리를 들었다.
"오늘 저녁에 저희 집으로 옮기세요."
사내가 눈을 깜박이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방을 치워 두겠어요. 모두 저희 집으로 옮기세요."
시계를 내려다보면서 김영지는 자리에서 일어졌다. 11시 반이었고 공항에 나가야 할 시간이다.
"괜찮겠습니까?"
조심스럽게 사내가 묻자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방이 많아요. 오빠가 쓰던 방도 비어 있구요."
문이 열리더니 밖으로 나갔던 거인이 가방을 든 사내와 함께 들어왔다. 나이 든 사내는 거침없이 고영무에게 다가왔는데 의사인 것처럼 보였다. 고영무가 눈을 떴을 때 맨 처음 시야에 들어온 것은 천장에 매달린 둥근 모양의 형광등이었다. 눈앞이 희미하게 밝아져 온다고 느끼며 그것이 형광등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형광등과 밝은 색깔의 천장 벽지 무꼭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머리를 돌려 방의 안쪽을 바라보았다. 책상이 벽에 붙어 있었고 옆쪽에는 장롱 같은 커다란 목제 가구가 놓여져 있다. 가구의 냄새에 섞여 약품 냄새가 맡아져 왔으므로 그는 시선을 내려 자신의 상반신을 바라보았다. 온통 천 붕대에 감긴 자신의 몸이 보였다. 까뜨린 12번 도로에서 온몸에 격심한 충격을 받고 쓰러지는 순간이 기억에 떠올랐다. 총성과 충격, 몸에 부딪쳤던 아스팔트의 차갑고 습기에 젖었던 촉감도 기억되었다. 아물거리며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최대광의 고함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지금 이렇게 따뜻한 방 안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으므로 그는 두 팔을 침대에 받치고는 상반신에 힘을 주어 보았다. 머리가 조금 들렸다. 그러자 옆쪽의 문이 열리더니 손에 무엇을 받쳐 든 한 여자가 들어섰다.
"어머나,"
그녀가 놀란 듯 짧게 소리쳤고 덩달아 고영무도 놀라 눈을 치켜 떴다. 그녀는 김영지였다. 그녀의 눈이 깜박이며 입이 벌어졌는데 그것은 분명히 기쁜 표정이었다.
"아직 움직이면 안 돼요. 누워요, 어서."
다가온 그녀는 한 손을 그의 이마에 대고 눌렸다. 고영무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여긴 어딥니까?"
"우리 집이에요."
"내가 왜 여기에 와 있지요?"
김영지는 들고 온 물수건을 접어 그의 이마 위에 올려놓았다.
"여기 오신 지 이틀이 되었어요. 나흘 동안 혼수상태였어요."
"가브리엘 박사님이 꼭 깨어날 것이라고 하시던데, 정말이군요. 당신은 강한 사람이래요."
"내 동료들은."
"지금 모두 우리 집에 있어요. 새벽 3시니까 잠을 자고 있어요."
"누구누구가."
"한국 사람 둘하고 브루노씨, 페드로써, 네 명이에요. 라파엘이 대통령으로 복권되었어요. 에르난데스나 다른 장군들도 모두 라파엘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김영지의 밝은 얼굴을 올려다보던 고영무는 눈을 감았다. 김영지의 목소리는 밝았고 들떠 있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살아나 주어서 기뻐요.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어서요."
"당분간은 이곳에서 쉬어요. 여긴 안전하니까. 아무도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거예요."
고영무는 눈을 떴다.
"영지씨, 그 사람들을 모두 내 방으로 불러 줘요. 지금."
눈을 깜박이며 그를 내려다본 김영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브리엘 박사한테도 연락을 해야겠어요. 무리하면 안 될 텐데."
"영지씨."
문 쪽으로 다가가던 김영지가 몸을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고영무는 그녀를 향해 웃음을 띄워 보였다.
"고맙소. 인사가 늦은 것 같아."
그를 향해 두어 번 머리를 젓고 난 김영지는 잠자코 몸을 돌렸다. 최대광을 선두로 그들이 방 안으로 들어선 것은 그녀가 나간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서였다.
"형님, 이젠 되었습니다."
최대광이 떠들씩하게 소리쳤고 신용만은 서둘러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보스, 나는 보스가 깨어날 줄 알고 있었습니다."
브루노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는데, 페드로는 어금니틀 꽉 문 채 고영무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하나씩 둘러보던 고영무가 입을 열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너희들 넷이냐?"
"보스까지 합해서 다섯입니다."
브루노가 침대 옆으로 바싹 다가왔다.
"모두 죽었습니다, 보스, 짐 버클리도, 앙헬도, 산토스도, 그리고 후안이나 다른 사람들도,"
스물여덟 명에서 다섯 명이 남은 것이다. 한동안 브루노를 바라보던 고영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론이라고 했지? 그놈, 니콜라스의 부하라는 그놈은 어떻게 되었나?"
"아직 모릅니다, 보스. 우리는 숨어만 있었습니다."
브루노가 대답했고 신용만이 말을 이었다.
"형님이 깨어나실 때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리고는 말을 멈추었는데 고영무는 다음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만일 자신이 죽는다면 그때 가서 다시 상의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고영무는 팔굽을 침대에 짚고는 머리를 들었다. 가슴 부근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왔으므로 그의 이마에는 금방 땀방울이 맺혔다. 최대광이 그의 상체를 잡았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날 일으켜라. 앉아야겠다."
최대광과 신용만의 부축을 받은 그는 침대 위에 동을 기대고 앉았다.
"앙드레를 잡아와라. 그놈이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보스, 그놈은 가게 문을 닫고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제가 어제도 찾아가 보았습니다."
페드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보스, 우선 몸이 나으실 때까지 기다리시지요. 그때 가서 놈들을 찾아내도 늦지 않습니다."
브루노의 말에 신용만이 머리를 끄덕였다.
"아무도 믿을 놈이 없습니다. 라파엘이나 알폰소도, 그리고 미국에 있는 놈들도."
그는 눈을 부릅뜨고 어금니를 물었다.
"우리는 이용만 당한 겁니다, 형님."
한국말이었으나 브루노는 이야기의 내용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보스, 만일 라파엘이나 알폰소가 우릴 배신했다면 난 그들도 살려두지 않겠습니다. 죽은 동료들 몫까지 합해서 복수를 하고야 말겠습니다."
브루노의 말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방문이 열리더니 나이 든 사내와 함께 김영지가 들어왔다.
"이런, 깨어났군. 그런데 일어나 앉아서 무얼 하는 거야"
그는 커다란 목소리로 꾸짖듯 말했다.
"당신들 지금 환자를 상대로 무슨 짓을 합니까? 어서 밖으로 나가시오."
침대가에 둘러선 사내들을 향해 가브리엘이 다시 소리쳤다.
"자, 다시 누워요. 어서. 신이 내려 준 은혜를 소중하게 지켜야 합니다."
가브리엘은 김영지와 함께 그의 몸을 침대 위로 다시 누였다.
"배은망덕한 자식 같으니. 자금지원을 해달라고 굽실거릴 때가 언제인데 지금은 전화도 안 받지."
카를로스는 허리를 들어 앞에 서 있는 문도를 쏘아보았다.
"알폰소의 집으로 전화를 해봐. 내 이름을 대고 내가 이야기할 것이 있다고 전해."
"카를로스, 알폰소는 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대통령궁에서 라파엘과 함께 있습니다."
문도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얼굴을 돌렸다.
"좋아, 그렇다면 라파엘에게 전화를 해라. 그 비서관 놈들에게 이 카를로스가 직접 라파엘을 면담해야겠다고 전해,"
"카를로스,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알폰소가 전화를 받지 않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문도가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천장에 달린 전등의 불빛이 희미해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자가 발전을 하고 있었으므로 발동기에 이상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곳은 북부 지방의 고원에 있는 카를로스의 별장이었다. 카스틸로가 길거리에서 폭사 당했다는 정보를 듣고 난 즉시 카를로스는 헬리콥터로 보고타에서 6백 킬로나 떨어진 이곳으로 날아온 것이다. 별장은 카를로스가 전국 곳곳에 가지고 있는 일곱 개 별장 중의 하나였으나 경비가 가장 완벽한 곳이다. 인근에 집단으로 거주하는 인디오들은 모두 카를로스의 명령 한 마디면 당장에 무장세력으로 변하게 편다. 충성스런 그들의 경호를 받고 있었으므로 이곳은 카를로스의 요새나 마찬가지였다.
"라파엘도 정권을 유지하려면 내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돼, 문도. 정상적인 수출이나 수입으로 국가 재정을 맞출 수 있다면 카스틸로도 나하고 손잡지는 않았을 거야."
격렬하게 화를 낼 줄 알았던 카를로스가 의외로 차분하게 말했다.
"미국의 원조도 한계가 있어. 그리고 놈들의 원조에는 언제나 조건이 따른단 말이야. 배알이 있는 놈이라면 그 짓은 못할 짓이지."
"카를로스, 카스틸로를 친 것은 미국의 지시를 받은 고영무 일당입니다. 라파엘은 미국의 힘으로 복귀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으니 미국의 영향력이 커질 겁니다."
"알고 있어, 문도."
알폰소가 전화를 받지 않는 것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저회들이 발표했던 것처럼 저희들의 특공대가 카스틸로를 처단했다면 이렇게 눈치를 볼 리가 없다.
"그런데 그놈, 고영무는 LA에서도 이곳에서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된 일이야?"
"미국 측이 숨겨 두었었지요. 자신들이 정권 전복에 관여했다는 것을 감추려고 들 테니까요."
문도가 한 걸음 다가와 그를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카를로스, 당분간 이곳을 떠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디로 말이야?"
이맛살을 찌푸린 카를로스가 물었다.
"이곳보다 안전한 곳이 있단 말이지. 1개 사단 병력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헤그리족들로 편성된 내 사병(私兵)은 끄떡없어. 무기도 콜롬비아 정규군보다 월둥하다. 난 도망칠 이유가 없다."
"카를로스, 도밍고의 1군단이 오르쿠에에서 철수해 옵니다."
"저희들의 본대로 귀환하는 거야."
"시에나 가로 가려면 이곳 마간게 부근을 통과하게 됩니다, 카를로스, 당분간은 외국으로 몸을 피하시는 것이."
문도의 얼굴을 바라보며 카를로스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LA로 떠나시면 됩니다. 이번에 거둔 마약은 제가 배에 싣고 뒤따라가겠습니다."
문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펄링거와 함께 계시면 안전합니다. 마약부 놈들이 설령 눈치를 챈다손 치더라도 함부로 달려들지는 못합니다, 카를로스."
"이쪽 상황이 안정되면 다시 돌아오시면 됩니다."
천장의 전등이 다시 희미해졌는데 금방 밝아지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박정환이 다시 묻자 이자영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도망쳐 왔어, 서울을."
"그건 말했잖아. 그러니까 왜?"
"박주경이를 피해서. 그놈이 날 잡으려고 해서."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박정환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놈의 뒤통수를 때리기는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어, 일이."
이자영은 라운지 주위를 신기한 듯한 표정으로 둘러보았다. 코리아타운 안에 있는 조그만 호델 안이다. 주변은 한국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들리는 말도 한국말이었다.
"차이나타운에서 만나자고 할 걸 그랬어. 한국말 듣기가 싫어."
"얘가 돌았군."
박정환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참으로 난데없이 이자영이 나타난 것이다. 그녀가 서너 달 전에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 별 소문이 난무하기는 했었다. 누구는 그녀가 회장한테 찍혀서 그만두었다고도 하고 또 누구는 그녀가 새로운 회장과 결혼하기 위해서 준비하려고 회사를 그만두었다고도 했다. 아무리 그들이 비밀을 지키려고 해도 3만 명이 넘는 식구를 가진 일성그룹이다. 이자영과 박주경이 그랜드 호텔을 밥먹듯이 들락이는 것을 한두 사람이 본 것이 아니었다. 비서실 직원도 보았고 바이어를 데려다주러 왔던 영업부 직원도 보았고 회장실의 운전사도 보았다. 둘만 모르고 있었지 소문이 무성해 있어서 LA에 있는 박정환까지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박주경이, 아니, 그래 회장이 널 왜 잡으려고 해?"
얼굴을 굳힌 박정환이 물었다. 이것은 북한 공작원과 접선하는 것보다 더 진땀이 났다. 그녀가 회장과 원수가 되어 버린 사이라면 이제 그녀와 만나는 것이 회장에게 보고가 될 경우 자신의 장래는 그것으로 끝이다.
"내가 그놈의 비리를 폭로한다고 했거든. 비자금 조성 문제나 날 이용해서 김학래 사장과 박인경 사장을 거세한 것을 말이야. 고영무의 사건을 가지고."
이자영이 손에 든 커피잔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장은 머리에 윤곽이 뚜렷한 얼굴형은 언제 봐도 퍼뜩이는 생기가 있었다. 그러나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지금 꼭 그녀는 예전의 그녀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그랬더니 날 잡으려고 하는 거야. 그래서 도망쳐 왔어."
"회장은 지난달에 결혼했잖아?"
박정환이 불쑥 물었다.
"너하고 결흔 약속을 했던 거야?"
"응."
시선을 든 그녀가 머리를 끄덕였다.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동작이었으므로 박정환은 가슴이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결혼 약속을 했어, 수십 번. 대권을 쥐게 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날 명예회장의 비서로 보낸 것도 그놈이었어. 난 명예회장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려 주었어.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 때문에 기분이 나쁜지, 모두를."
이자영이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난 박주경에게 복수할 거야. 그놈을 파멸시키겠어."
"야, 야, 그만둬. 그러면 내 밥줄이 끓어진다."
"고영무가 여기 있지?"
문득 그녀가 물었으므로 박정환은 눈을 치켜떴다.
"고영무는 왜?"
"글쎄, 여기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신문에도 났었고."
"납치사건? 아냐, 그건 고영무가 한 짓이 아니라구."
박정환이 머리를 저었다.
"언론이 얼토당토않은 수작을 부린 거라구. 걔는 그런 일 하지 않았어."
"어쨌든 여기에 있지?"
박정환이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행 떠났어. 그런데 네가 걔한데 무슨 볼일이 있냐?"
"일성그룹에 유감이 많을 거야, 고영무도. 그룹에서 공금횡령, 명예훼손으로 고발했거든."
"그래서?"
"어쨌든 만나고 싶어. 언제 돌아오는지 몰라?"
"그건 잘."
머리를 젓던 박정환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망쳐 왔다면 너, 돈도 없겠구나?"
"조금 있어. 하지만 아무 데라도 취직할 거야.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젠장, 날 찾아온 주제에 그래도 자존심은 세워 보겠다고."
그는 호주머니에서 수표 용지를 꺼내더니 사인을 휘갈겨 썼다.
"여기 5천 달러 있다. 내가 내일쯤 몇만 달러를 만들어 볼 테니까 돈 걱정은 말고."
"웬 돈을 이렇게,"
이자영이 눈을 끔벅이며 찻잔 옆에 놓인 수표를 바라보았다.
"난 백만장자다. 이제야 까놓고 말하는데 이까것 일성인지 이성인지 이놈의 회사를 안 다녀도 그만이야. 영무가 돌아오면 난 영무에게 이야기해서 다른 사업을 시작할 작정이야."
박정환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턱을 들었다.
"영무 그놈은 지금 콜롬비아에 있어, 지난달에 그쪽 소식을 들었는데 카스틸로 정권이 영무를 잡으려고 엄청난 현상금을 걸었다는군. 그래서 알게 된 거야. 그런데 카스틸로가 길에서 로켓포탄을 맞고 죽었단 말이야. 아직 영무 소식은 없어. 하지만 그놈은 이제 거물이야. 너나 나하고는 다른 사람이 되었어. 이 돈도 영무가 준 거야. 내 결혼 축의금으로."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물끄러미 이자영을 바라보았다.
"백만 달러를 주고 갔어, 그놈이. 살아서 돌아와야 할 텐데. 망할 자식, 떠나기 전에 그런 거금을 주고 가다니. 마음에 걸린단 말이다."
거리에는 관광객이 부쩍 늘어나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가까운 미국 쪽의 관광객이 많았는데 그들은 콜롬비아 정국이 안정되었다고 믿는 것 같았다. 내부에서 제아무리 떠들어 댄다고 해도 외국인이 보는 시각은 다른 것이다. 카스틸로는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치안이 완벽한 상태라고 장담을 하였으나 관광객들이 발길을 끊었던 것이다. 앙드레가 8번 도로의 모퉁이를 돌아 빌라의 정문으로 다가갔을 매 옆길에서 한 무리의 일본 관광객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노인 그룹이었는데 모두들 가슴에 여행사 표시가 그려진 주먹만 한 플라스틱 이름표를 붙이고 있다. 앞장선 노인은 조그만 깃발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인디오의 유적이 진열된 박물관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그들과 엇갈려 앙드례가 빌라의 정문으로 들어서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건드렸다. 젊은 일본인 한 명이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신사복 차림의 관광객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앙드레는 가슴이 아래로 뚝 떨어져 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러자 앙드레는 몸을 돌렸다. 그러나 바로 앞을 가로막고 선 거인의 가슴에 머리를 부딪칠 뻔하고는 발을 멈췄다.
"당장에 쏘아죽일 수도 있다. 네 가족이 이곳 빌라에 있을 텐데, 가족과 함께 몰살을 시킬 수도 있다."
신용만이 나직하게 말했으나 얼굴은 여전히 웃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거리에서 카스틸로를 폭살시킨 사람들이야. 네놈 목을 뚝 떼어 버리는 것은 파리 잡는 것보다 쉬워, 앙드레."
"이것 보시오. 도대체."
"닥치고 따라와. 그러면 목숨은 살아날지 모른다."
거인이 자신의 어깨를 움켜쥐었으므로 앙드레는 입을 쩍 벌렸다. 신용만이 그의 옆에 바짝 다가서서 그의 어깨를 안고 활짝 웃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으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일본 관광객들의 무리는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 노인들이라 걸음들이 더디고 앞뒤에서 부르는 소리와 웃는 소리로 떠들썩했다. 정문 옆쪽에 구형 시보레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들은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들을 태운 시보레는 자동차 공장의 정문으로 들어섰고 공장을 지나 안쪽에 있는 저택의 현관에서 멈췄다. 시내를 빠져나와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들은 모두 입을 열지 않았고 앙드레도 마찬가지였다. 현관문이 열리더니 넓은 얼굴의 사내가 나타났다. 앙드레는 그의 이름을 기억했다. 브루노였다.
"어, 왔군, 앙드레."
그가 웃는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어서 오게. 기다리고 계시네."
거인이 등을 떠밀었으므로 앙드레는 넘어질 듯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응접실을 지나 침실의 문을 연 브루노는 앙드레의 팔을 잡았다.
"반가워하실 거네, 앙드레."
"이것 봐요, 브루노, 나는."
방 안으로 들어선 앙드레는 숨을 들이마셨다. 상반신을 붕대로 감싼 고영무가·침대에 일어나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앙드레, 마룻바닥에 앉아라,"
의자가 침대 옆에 놓여 있었으나 고영무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미스터 고,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제 말씀을 들으면 이해가 가실 겁니다."
마룻바닥에 앉으며 그가 말했다.
"말해 보아라, 앙드레."
그는 마치 미라가 관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얼굴의 표정도 없고, 말을 하는데 입술이 달싹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다. 앙드레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우리를 습격한 놈이 누구냐?"
고영무가 억양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알폰소의 부하들입니다."
"개 같은 놈,"
고영무의 눈을 올려다본 앙드레는 침을 끌어모아 삼켰다.
"이놈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대광이 네가 혼을 내주어라."
뒤쪽에 서 있던 최대광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죽일까요?"
"아니, 천천히. 우선 어디 한 곳을."
군말하지 않고 돌아선 최대광은 허리를 굽혀 마룻바닥을 짚고 있는 앙드레의 한쪽 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생각난 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브루노와 시선이 마주쳤다.
"브루노, 이놈 입을."
브루노가 다가와 앙드레의 입에 수건을 틀어막았다. 머리를 끄덕인 최대광은 앙드레의 한쪽 팔을 곧게 폈다. 앙드레가 기를 쓰고 팔을 움츠리자 그는 입술 끝을 부풀리며 피식 웃었다. 앙드레의 팔이 곧게 펴졌다. 팔의 양쪽 끝을 두 손으로 움켜쥔 최대광이 두 팔에 불끈 힘을 주었다.
"따악."
두꺼운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입에 수건을 문 앙드레가 눈을 찢어질 듯 치켜뜨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수건 속에서 억눌린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앙드레의 팔이 본래 굽혀지는 곳과는 반대쪽으로 굽혀져 있었다. 뼈가 팔의 살갗을 뚫고 튀어나와 있었는데 피는 별로 흐르지 않는다.
"수건을 치워라."
고영무의 말에 브루노가 수건을 떼내었다.
"어어어어."
얼굴에 물벼락을 맞은 듯 땀을 쏟으면서 앙드레가 온몸을 떨었다. 눈의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우리를 습격하게 만든 건 누구냐?"
고영무가 다시 물었다.
"네가 말하지 않더라도 찾아낸다. 하지만 널 네 가족과 함께 몰살시켜 버린다. 아이가 있다면 아이도 죽여버릴 테다, 앙드레. 네 에미 애비도 모조리 죽인다. 자, 말해라."
"지미 골드요."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고영무의 얼굴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눈을 치켜뜬 그는 한동안 앙드레를 내려다보았다.
"지미 골드? 그러면 마론이라는 놈은 누론 니콜라스의 부하가 아닌가?"
"아닙니다."
자신의 팔을 내려다본 앙드레가 아랫입술을 세차게 깨물었으므로 피가 배어 나왔다.
"그들은 미국에서 파견된 사람들입니다. 일을 끝내고 돌아갔습니다."
"알폰소나 니콜라스는 이 일을 모른단 말인가?"
"그들은 당신들이 카스틸로의 부하들과 싸우다 당한 줄 알고 있습니다."
"지가 왜?"
"그건 모릅니다."
앙드레는 고통으로 온몸을 떨었다. 악문 이 사이로 길고 굵은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도 그날 밤에야 그들이 보고타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았소. 난 그들이 당신을 도와주러 왔는 줄 알았소. 난 억울합니다."
"넌 미국 대사관을 들락거리고 있었어. 미국에서 어떤 지시를 받았는가 말해라."
앙드레가 이를 악물고 머리를 떨구자 최대광이 한 걸음 다가와 마룻바닥을 짚고 있는 그의 다른 쪽 팔을 움켜쥐었다.
"말하겠소."
앙드레가 소리치듯 말하면서. 머리를 들었다. 눈물인지 땀인지 볼은 잔뜩 물기에 젖어 있었다.
"당신을 찾으라는 것이었소. 생사를 확인하라는. 그래서 알폰소에게도 연락을 하라는 것이오."
"알폰소에게?"
"그렇소."
"그래서?"
"그다음은 나도 모릅니다. 이것이 내가 아는 전부요."
"그렇다면 알폰소도 나를 찾고 있단 말인가?"
그의 머리 위쪽을 바라보며 고영무가 물었다. 앙드레는 다시 머리를 숙이며 긴 신음소리를 내었고 그의 뒤쪽에 둘러선 네 사내들은 말이 없었다.
"어머니, 저도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살인사건을 저질렸다고 신문에서 떠드니까 드러누우셨지요. 그런데 강도들이 몰려와서 그만."
고영무가 말하자 어머니는 잠깐 눈을 깜박이다가 다시 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는 말을 이었다.
"인연을 만들면 만들수록 고통이 많다고 누가 말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어머니를 앞으로 제 어머니처럼 모실 작정입니다. 영지씨도 제가 보살펴 주셨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아버님 묘소에 가서 약속을 드렸지요."
가슴에 통증이 왔으므로 고영무는 의자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이젠 몸을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므로 그는 시간만 나면 김영지의 어머니 방을 찾아갔다.
"그럼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방문을 열고 나온 그는 천천히 걸음을 떼어 응접실로 다가갔다. 소파에 앉아 있던 브루노가 일어섰다.
"보스, 페드로를 아침 비행기로 출발시켰습니다. 카르타혜나에 도착하면 전화 주기로 했습니다."
"미스터 최하고 신은?"
브루노가 빙긋 웃었다.
"공장 일을 거든다고 나갔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고영무는 그의 앞을 지나 침실로 다가갔다.
"어머니한테 다녀오시는 길이세요?"
한 손에 붕대 꾸러미를 든 김영지가 다가와 침실의 문을 열어 주었다.
"어머니는 나를 알아보셔. 내 말도 모두 들으시고."
김영지는 잠자코 그를 부축하여 침대 위에 누이고는 붕대를 푼 후 가져온 새 붕대로 감기 시작했다.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그렇게 서두르지 않으셔도 돼요."
붕대를 돌려 감으면서 그녀가 말했다. 그는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았다.
"답답하시더라도 밖으로 나가면 안 돼요. 집 안에서만 돌아다녀야 돼요."
김영지가 붕대의 끝을 매면서 말했다. 그녀의 머리가 바로 얼굴 밑에 있었고 머리칼에서는 꽃향기 같은 냄새가 맡아졌다. 긴 머리를 뒤로 감아올렸는데 흰 목덜미에는 보송보송한 솜털이 돋아나 있다.
"가브리엘 박사는 한 달쯤 지나면 가벼운 운동을 해도 좋다고 했어요. 그때까지는 집 안에 계셔야 돼요."
김영지가 머리를 들었으므로 그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난 출근해야 돼요."
굽혔던 상체를 펴면서 그녀가 말했다.
"아저씨한테 엔진을 가져다줘야 해요. 일이 밀려 있어요."
"아저씨는 아직도 나를 보면 편치 않으신 모양이던데."
고영무의 말에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이젠 아녜요. 많이 나아지셨어요. 아저씬 내가 좋으면 그만이라고 하셨어요."
고영무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룻바닥에 두 발을 짚고 서자 붕대를 감은 상체가 조금 조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으나 견딜 만했다. 그날 이후로 이제 한 달이 지난 것이다. 몸은 빠르게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김영지를 향해 그는 한 걸음 다가갔다.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영지는 알고 있지?"
다시 한 길음 다가선 그는 그녀의 어깨에 두 팔을 올려놓았다. 어지럽게 흔들리던 그녀의 시선이 이제는 그의 시선과 마주 닿아도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약속을 지켰는데 또 배신을 당했어."
그녀의 눈동자 속에 자신의 얼굴이 조그맣게 들어가 있는 것이 보였고, 그녀의 해맑은 얼굴이 어딘가 수심에 젖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스물여덟 명이 들어와서 다섯 명이 살아남았어, 난 미국으로 가야 돼,"
김영지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이대로 이곳에 있을 수는 없어."
"당신은 잠시도 멈추지 않는군요."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짐작하고는 있었어요. 하지만 그 몸으로는. 몸이 나을 때까지 기다려요."
"가는 동안에 나을 거야. 폐드로가 배편을 알아보려고 카르타헤나로 떠났어."
고영무는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붕대를 감은 그의 상체가 조심스러운지 그녀가 가만히 안겨 왔다. 그들은 서로 볼을 마주 댄 채 한동안 서 있었다.
"돌아올게, 영지한테. 이곳이 내 마음을 놓는 곳이야. 내 가족이고."
그녀의 귀에 대고 고영무가 말했다. 처음 껴안아 보는 김영지의 몸이었으나 조금도 낯설지 않고 포근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볼은 따스했고 보드라웠다. 알 수 없는 향기도 느껴졌다.
"당신을 사랑해요."
한숨처럼 숨을 뱉으며 김영지가 말했다.
"당신과 함R[ 있고 싶어요. 언제나, 어디서나."
"약속하지. 일을 마치면 함께 있겠다고."
"당신, 죽으면 안 돼요."
"난 안 죽어."
영지는 두 팔을 올려 그의 어깨를 안았다. 머리를 숙인 고영무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에게 얼굴을 가져다 대자 김영지는 눈을 감았다. 물기를 떤 붉은 입술이 그의 입맞춤을 기다리는 듯 조금 벌어져 있었다. 그녀의 입술은 향기로웠고 뜨거웠다. 그리고 과일맛이 났다.
지미 골드의 앞으로 다가온 검정색 벤츠가 멈춰 서더니 앞쪽 문이 열리면서 삼십 대의 사내가 내렸다. 감색 양복을 입은 건장한 체격의 사내였고, 저고리의 가슴 쪽에 가죽 권총 케이스와 손잡이가 검은색인 권총이 힐끗 보였다.
"지미 골드씨, 보스가 차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가선 사내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지미는 차창에 시커먼 선팅을 해놓아 안이 전혀 들여다보이지 않는 벤츠의 뒤쪽 문을 열었다. 안쪽에 앉아 있는 워렌의 모습이 보였다.
"지미, 당신 주변을 조사해 왔는데, 재혼한 당신의 처, 루이스 말이야. 대학 때 마약을 먹어 체포된 전과가 있더군. 두 번이나."
워렌이 얼굴에 웃음을 띠며 옆에 앉은 지미를 바라보았다.
"내 말은 약점이 없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야, 지미. 설령 대통령일지라도 캐고 보면 약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워렌씨, 그 알량한 설교는 당신들 CIA 졸개들한테나 하시고."
지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워렌은 담배를 끊은 지 얼마 되지 않는다. 길게 연기를 내뿜자 워렌은 창문을 반쯤 내렸다. 그러나 얼굴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나를 보자고 하신 이유나 들읍시다."
"지미, 이것은 내가 대통령의 허락을 받은 사항이야. 명심해서 착오가 없도록."
"그렇다면 큰일이군. 우리 보스한데도 연락이 갔겠지요?"
지미가 눈을 둥그렇게 됐다.
"나 같은 졸개한테까지 CIA 국장이 친히 지시를 하시다니, 대단한 일인 모양인데."
"이봐, 지미. 이젠 그쯤 해두지그래?"
워렌은 여전히 평온한 얼굴이었으나 앞자리에 앉아 있던 가죽 권총의 사내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지미는 허리춤에 끼어 놓았던 대형 콜트를 꺼내 들고는 사내의 머리에 가져다 대었다. 사내가 금세 온몸을 굳히면서 눈방울만 굴려 지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입이 반쯤 벌어져 있다.
"이 개자식아, 네까짓 것이 쳐다보면 어쩔 셈이냐 한 발에 대갈통을 날려 주마."
엄지손가락으로 방아줄을 젖히자 끼릭 하고 실탄이 장전되는 소리가 들렸다. 운전사가 반쯤 얼굴을 이쪽으로 돌린 채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고 워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예를 들어 내가 이곳에서 CIA 국장과 경호원, 그리고 운전사 세 명을 쏘아 죽이고 사라진다면 아마 수사는 하루도 못 가서 종결될 거요, 워렌. 왜냐하면 당신을 싫어하는 사람이 너무 많거든."
"지미, 권총을 치워."
메마른 소리로 워렌이 말했다.
"장난할 때가 아니야."
"내가 지금 장난 같소?"
권총 끝으로 사내의 머리를 밀면서 지미가 소리쳤다.
"당신을 기다리면서 나도 머리를 굴려 왔단 말이야, 내가 당신을 만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지금 나를 포함해서 넷밖에 없는 것 같단 말이야. 여기 세 명하고 나."
"지미, 권총을 치워."
워렌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보고타의 일 같은 건 잊으라구."
"잊어? 너는 십몇 년 전 내 마누라가 마약 먹은 것까지 끄집어내면서 나보고는 한 달 전 일을 잊으라구?"
지미는 총구를 돌려 워렌의 가슴에 대었다.
"스물여덟 명이 몰살을 했단 말이다, 네놈의 배신으로."
"나라를 위한 일이다, 지미. 목적은 달성했고 우리가 개입했다는 증거도 없앴어. 대통령도 찬성한 일이야."
"개 같은 놈, 너는 내 이름을 팔아서 작전을 했어. 그들은 나를 원망하고 죽었을 거란 말이다."
"지미, 죽은 자는 말을 못 해."
워렌은 손가락으로 지미의 총구를 옆으로 밀었다. 그리고는 앞자리에 앉은 경호원과 운전사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너희들은 잠시 밖에 나가 있어."
그들이 주춤대며 밖으로 나가자 워렌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지미를 바라보았다.
"지미, 그쯤이면 화가 풀렸을 테고, 이번의 지시사항을 이야기해 주지."
"지시사항이라니?"
권총을 허리춤에 끼워 넣은 지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난 앨버트와 엘리엇, 로스만의 지시만 받소. 당신 지시는 받을 수가 없어요."
"곧 지시가 내려올 거야. 그들한테서."
워렌이 입맛을 다셨다.
"카를로스가 곧 LA에 올 거야, 그를 건드리지 말아 주게,"
"크링거의 저택에 머무르게 될 거야. 그런 줄만 알고 있게."
"웃기는군. 정부에서 훈장이라도 줄 작정이요?"
"마약을 거둘 놈은 카를로스밖에 없어. 그놈이 없어지면 오히려 조절하기가 더 어려워져. 자네들도 단속하기가 더 골치 아파진단 말이야. 이제까지는 큰 배로 한 탕씩 뛰었지만 카를로스가 제거되면 조무래기들 수백 명이 수백 척으로 나뉘어 온단 말이야."
"말은 그럴듯하군."
"그리고 우리는 다른 계획이 있어. 그러니까 카를로스는 손대지 말게. 자네가 걱정이 되어서 내가 특별히 자네만 별도로 만나는 거야."
"당신이 한 수작이 마음에 걸려서였겠지."
워렌이 다시 입맛을 다셨다.
"이봐, 지미. 고영무가 보고타 어디엔가 살아 있는 것 같네."
지미가 눈을 치켜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앙드레 말인데, 그놈이 행방불명이 되었어. 내 생각엔 고영무가 살아 있어 그놈을 잡은 것 같단 말이야."
워렌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떠올랐다.
"그놈이 살아 있으면 곧 미국으로 오겠지. 그리고 자네를 찾을 거야."
"그때는 내가 도와주겠네. 어쨌거나 우리는 같은 편 아닌가."
8. 어둠 속의 비행
얼큰해진 얼굴로 유장수는 앞자리에 앉아 있는 전우석을 바라보았다.
"놈한테 원본은 보내 주었지만 복사본을 가지고 있으니까 일이 잘못되면 복사본으로 잡을 수 있어."
"그렇습니다. 원본이냐 복사본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전우석이 맞장구를 쳤다. 모처럼 기분이 좋은 유장수였으므로 전우석도 마음이 가벼웠다.
"제깐 놈이 별수 있나? 회사가 송두리째 넘어갈 판인데. 철부지 같은 녀석."
유장수가 술잔을 들며 전우석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너도 수고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봉투 한 개를 꺼내어 전우석 앞에 내려놓았다.
"이건 네 몫이다. 한몫 쥐었으니 너도 이것으로 생활기반을 잡아라."
"감사합니다, 사장님."
머리를 숙인 전우석이 봉투를 두 손으로 짚고는 가슴 속 호주머니에 넣었다.
"강판술이는 쓸 만한 놈이지만 좁은 바닥에서만 놀아서 오지랖이 좁아. 이 일이 그놈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해라."
"물론입니다, 사장님. 더구나 그놈에게도 한몫 크게 주셨지 않습니까? 제깐 놈이 안다고 해도."
전우석은 강판술과는 다르게 살아왔다. 체육대학을 나와 영어 회화도 제법 하는 그로서는 중졸에 밥 먹듯이 형무소 출입을 한 강판술과는 노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시간이 나면 골프를 치거나 볼링장에 가는데 강판술은 앉았다 하면 고스톱이다. 카바레에 가서 제법 스텝을 밟는 전우석인데 강판술은 춤도 노래도 영 젬병이었다. 전우석이 모략과 지모를 갖춘 사내라면 강판술은 두드리고 부수는 일에 전문인 사내였으니 유장수로서는 적당한 인물들을 좌우에 거느린 셈이었다.
"내가 듣기로는 장규식이 LA에서 빈둥거린다던데, 넌 그런 소문을 들은 적이 없냐?"
술잔을 내려놓은 유장수가 물었으므로 전우석이 상체를 세웠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만."
"그래? 어쨌든 놈을 잡아야 하는데. 그놈들, 최대광이 신용만이도 그렇고."
전우석은 술이 깨는 느낌이었다. 오늘은 일성그룹의 박주경으로부터 일성전자의 주식 삼십만 주를 넘겨받은 날이다. 주당 시세가 6만 원대가 넘는 주식이니만치 150억이 넘는 금액이었다. 유장수는 초저녁부터 청산 클럽의 밀실에 들어앉아 기분 좋게 술을 들이키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그가 장규식의 이야기를 꺼내자 전우석은 긴장이 되었다. 그리고 최대광과 신용만도 그렇다. 그들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유장수의 얼굴은 언제라 살기를 띠고 있었다.
"홍성희가 LA에 있다면 그놈들도 그쪽에 있는 거다. 연놈들이 모두 LA에 모여 있는 셈이 되는데, 이것들이 모여서 꿍꿍이수작을 부릴지도 모르겠단 말이다."
유장수의 얼굴은 술기운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이제까지 날 배신한 놈을 내버려 둔 적이 없다. 그리고 날 모욕한 놈도. 이성철이가 날 비웃고 있는 모양이야."
"사장님,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놈이 나한테 홍성희가 LA에 있는 걸 누가 보았다고 했는데, 그것이 날 비웃는 수작이야."
"강판술이 데려와라."
자리에서 일어선 전우석은 방을 나갔다. 플로어의 바로 밑 좌석에 앉아 솔로 춤을 추고 있는 무희에게 정신을 잃고 있는 강판술을 금방 찾아낼 수가 있었다. 강판술과 함께 밀실로 들어서자 유장수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앉아 있었다.
"사장님, 부르셨습니까?"
강판술이 두 손을 모으고 한껏 공손하게 물었다.
"거기 앉아."
턱으로 앞쪽 자리를 가리키며 그가 말하자 전우석과 강판술은 나란히 앉았다.
"판술이 네가 애들 대여섯 명을 데리고 LA에 가야겠다."
유장수가 대뜸 말하자 강판술이 머리를 들었다.
"LA에 말씀입니까?"
"그래. 홍성희란 계집이 술집을 하고 있다니까 그곳에 가서 최대광이하고 신용만이라는 어린놈들을 요절을 내고 돌아와라. 그 계집년도 마찬가지다."
"사장님, 그렇다면."
눈을 끔뻑이며 강판술이 말을 멈추자 유장수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죽여 없애라. 그 계집에게 틀림없이 그놈들이 찾아갈 거다. 그년이 혼자 LA에 갔을 리가 없다. 놈들을 요절내고 그년도 없애."
"알겠습니다, 사장님."
강판술이 머리를 끄덕였다.
"저도 그놈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보통 놈들이 아니야. 총으로라도 쏘아야 할 거다."
"예, LA에서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우석이하고 상의해서 믿을 만한 놈들을 추려 가."
"예, 사장님."
"그리고 또."
빈 술잔에 술을 따르면서 유장수가 말을 이었다.
"장규식이 LA에서 어슬링거렸다는 소문도 있어, 그놈도 찾으면 물어볼 것 없이 죽여라."
"예, 사장님."
유장수는 한 모금에 위스키를 털어 넣고는 입을 벌려 뜨거운 김을 뿜어내었다.
"이성철이 김종무라는 놈을 LA로 보냈다는군. 그런데 김종무 그놈이 마약부 직원에게 들통이 나서 쫓겨 나왔고."
"우석이 네가 가서 크링거를 만나 보아라. 우리하고는 거래도 없고 연락도 없었지만 놈은 우리를 잘 알 거다."
"네, 사장님, 알 겁니다."
"내가 이성철이 같은 조무래기하고는 차원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해라. 만나게 된다면 말이다."
"그야 물론이지요."
전우석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강형하고 상의해서 출발 준비를 하겠습니다, 사장님."
"LA에 코리아타운이 있고 한국말만 써도 된다고 하지만 외국이고 객지야. 후딱 해치우고 나을 때 조심해야 돼."
"염려 마십시오, 사장님." .
강판술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어쨌든 LA도 사람 사는 곳 아닙니까? 곧 사장님 속을 시원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유장수는 그들의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방음장치가 된 밀실이어서 술이 잔애 흐르는 소리도 들렸다.
"분위기가 좋군요. 손님들이 모일 만하겠어요."
이자영이 흘 안을 둘러보며 말하자 홍성희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요? 그런데 박정환씨하고는 친구분 되신다고 하셨지요? 박정환씨가 우리 가게 칭찬을 하셨다구요?"
"네, 코리아타운에서 제일 장사가 잘되는 곳이라고 하던데요."
그녀의 웃음에 말려 들어간 듯이 따라 웃으며 이자영이 말했다.
"그럼 이런 가게를 하시려구요?"
홍성희가 궁금한 듯 물었으므로 이자영은 머리를 저었다.
"아뇨, 저는 돈도 없고 경험도 없어서요. 그냥 구경 왔어요."
"박정환씨한테 빌리시지 그러세요? 그분 돈 많아요."
이자영이 눈을 깜박이며 홍성희를 바라보았다.
"박정환씨 잘 아세요?"
"그럼요, 제가 LA에 처음 왔을 때부터 신세를 졌는데요. 친절한 분이세요."
"제 남자친구의 선배뻘 되시는 분이에요."
박정환은 그런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취직하기에는 윗사람 모시고 눈치 봐야 할 뿐만 아니라 조건도 까다롭고 이자영 스스로도 이젠 진력이 나 있었다. 더구나 박정환이 자금을 빌려주겠다면서 한 번 돌아보라고 홍성희의 가게를 소개시켜 준 것이다.
"이 가게 차리는 데 30만 달러쯤 들었어요. 하지만 올해 안에 본전은 모두 뽑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종업원이 날라 온 커피잔을 들면서 홍성희가 말했다. 그녀는 박정환의 친구라고 해서인지 스스럼없이 대해 주고 있었다.
"어머나, 아직 1년도 안 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장사 잘 되는 것이네."
이자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홍성희가 머리를 끄덕였다.
"고급 술집이라고 소문이 나니까 돈 많은 한국 사람들이 몰려와요. 특히 한국에서 출장 나온 사람들, 여자가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와요."
"한국은 이런 곳이 한물갔다고 해요. 하지만 이곳은 달라요."
아침 10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어서 흘 안은 한산했으나 종업원들이 분주하게 점심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울도 그렇지만 여자를 확보하는 것이 제일 중요해요. 다행히 난 아르바이트로 근무하는 여자들을 많이 확보해 두었어요. 밤에만 나와서 일해 주는데 그것이 인기예요."
홍성희가 이자영을 바라보며 눈웃음을 쳤다.
"이자영씨 같은 분이 나오시면 금방 인기를 끌 걸요? 매력이 있으시니까."
이자영이 머리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그럼 나도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할까요?"
"에이, 농담인데. 박정환이한테 야단맞아요, 제가."
"뭐, 어때요? 일도 배울 겸 가끔씩 남자 구경도 하고."
"박정환씨한테 야단맞는다니까요."
이자영이 말뜻을 알아듣고는 머리를 저었다.
"박정환씨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우린 그저 친구예요. 회사 친구였지만 지금은 회사도 그만두었으니까 걸릴 것이 없어요."
"정말 일하고 싶으세요?"
홍성희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멋진 여자가 많을수록 손님을 끌게 된 것이다.
"정말이에요. 일도 배우고, 그리고 돈도 벌어야 돼요. 박정환씨한테 돈 빌려 쓸 생각은 없어요."
"그러세요. 금방 돌아가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거예요. 큰일 났네, 경쟁하는 가게가 생기면."
홍성희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얼굴에 웃음을 띠었는데 TV에서 본 것보다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서울에서 사라졌을 때는 별소문이 다 떠돌았다. 유부남과 눈이 맞아 캐나다로 갔다고도 하고 애를 낳아 일본에서 키운다고도 했다. 어쨌든 홍성희도 남다른 사정이 있어서 이곳에 왔을 것이고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이자영은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고 그런 분위기는 금방 전달이 되는 법이다. 더욱이 홍성희가 신세를 입었고 지금도 단골손님인 박정환의 친구라는 데 홍성희도 거리감을 걷어치웠다.
"나오고 싶으실 때 나오셔도 돼요. 손님이 짓궂으면 룸에서 나오시구요. 어렵게 생각하실 것 하나두 없어요. 제가 고급손님만 상대하게 해드릴게요. 점잖으신 분들로."
홍성희가 생기를 떤 말투로 말했다.
"참, 교환교수로 계시는 분이 이야기 상대로 누굴 소개시켜 달라고 했는데, 잘되었어요. 내가 연락해야지."
이자영은 소리죽여 한숨을 내쉬다가 숨을 멈추고는 참았다. 자신이 일하겠다고 말한 것에 대해서는 경솔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건 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이제까지 헛된 꿈을 꾸어 왔던 자신에 대해 자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으면 고영무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는 박정환의 말대로 거물이 되어 있었다. 그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고 현상수배를 받는 거물이 되었는데, 이제 자신에게 닥쳐온 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인생은 돌고 돌아서 다시 제자리로 간다. 문득 이자영의 머리에 그런 말이 떠올랐다.
"카를로스가 LA에 왔다."
밤늦게 들어온 페르난도가 문을 들어서며 말했다.
"그런데 그가 공공연하게 빌트모어 호텔의 식당에서 크링거와 같이 식사를 하고 나왔어."
그는 윗도리도 벗지 않고 응접실 소파에 앉았다. 술을 한잔 마셨는지 눈자위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모처럼 시내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오는 길이다.
"도망쳐 나왔겠지요. 라파엘이 복권되었으니까 배겨내기 힘들었을 거예요."
그렇게 말해 보았으나 밀리카는 자신의 말소리가 처져 있는 것을 느꼈다.
"페르난도, 이젠 우리와 카를로스는 관계가 없어요. 그 사람에게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구요."
밀리카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 위에 두 손을 올려놓았다.
"카를로스를 만날 작정이다, 밀리카."
페르난도가 머리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너에게 이 이야기를 하려고 곧장 카를로스를 찾아가지 않고 들른 게다. 난 그를 만나야 돼."
"페르난도."
초조해진 그녀가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제발, 오빠가 그러시면 나도 견뎌낼 수가 없어요."
"넌 강한 여자야. 하지만 난 다르다. 나는 살아가는 목적을 잃었다."
페르난도가 표정 없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고영무에 대한 원한을 잃었다. 그리고 카를로스에 대한 충성심도 마찬가지가 되었어. 이렇게 아무런 목적 없이 숨어 사는 것에 지쳤다, 밀리카."
"페르난도, 그렇다고 포기하면 안 돼요. 그를 만난다는 것은 자살하려는 것과 같아요."
"그의 손에 죽으러 가는 것이 나에게는 마지막 용기야. 시간이 지나면 나는 그것도 못 하게 된다. 그것이 두렵다, 밀리카."
"페르난도, 다른 것을 생각해 보세요. 증오심을 키워 보세요. 아니면 애정이라도."
페르난도가 입술 끝을 비틀면서 웃었다.
"난 실패한 사람이다. 더욱이 원수한테서 연장받은 생명으로 하루하루를 견뎌 나가고 있다. 이제야 말이지만, 그때 가르시아한테서 나는 죽었어야 했다."
"바보 같은."
밀리카가 눈을 치켜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카를로스는 충성을 바칠 만한 인물도, 대의도 없는 사람이에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오빠구요. 실패했다고 해서 다른 길을 찾을 생각도 않고 자살하려고만 하는 오빠는 비겁한 사람이에요. 충성의 가면을 쓴 비굴한 사람이란 말이에요. 혹시나 카를로스가 용서해 줄지 모른다는 비굴한 기대를 가지고 있겠지요?"
순간 페르난도가 손을 들어 밀리카의 뺨을 쳤다. 머리가 조금 돌아갔으나 그녀는 한 손을 볼에 댄 채 그를 쏘아보았다. 눈을 부릅뜬 페르난도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었었다.
"넌 나에게 배신하라고 말하고 있어. 카를로스가 절대로 나를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나를 죽이려 했던 카를로스에게 둥을 돌리고 나면 내가 무엇을 한단 말이야. 앞쪽엔 고영무밖에 없다."
"난 고영무에게 원한을 잃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와 손을 잡으세요, 페르난도."
페르난도가 눈을 치켜떴다.
"솔직하게 말해라, 밀리카. 너의 그에 대한 감정은 어떠냐?"
"그를 증오해요."
"기회가 있다면 꼭 죽이겠어요."
"기회가 올 때까지 그의 옆에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의 자식을 낳겠어요."
"오빠의 감정과는 다를 거예요. 오빠가 어떤 길을 가든 지금처럼 자살하려는 행동만 아니라면 말리지 않을게요."
"자식을 낳아서 어쩌겠다는 것이냐?"
이제는 자신의 일을 잊은 듯 페르난도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밀리카가 조그맣게 머리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페르난도. 그에게 고통을 주려면 그 자식을 어떻게 해야겠지요. 하지만 내가 남은 자식이니까 내가 받는 고통도 있을 거예요. 그것밖에 생각할 수 없었어요."
김영지는 하나씩 몸에 걸친 옷을 풀어 내리고 있었다. 원피스를 벗자 가슴을 가린 브래지어와 흰색의 팬티밖에 걸치지 않은 그녀의 몸이 전등불에 비쳐 반들거리듯 윤이 났다. 고영무는 침대에 누운 채로 꼼짝하지 않고 그녀의 몸에 시선을 주었다. 브래지어를 끄르려던 김영지가 잠깐 머리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상기된 얼굴에 눈자위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는데 검은 눈동자는 물기를 머금어 반짝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결심한 듯 브래지어를 풀어 내렸다. 그녀의 가슴이 튀어나오듯 일어섰다. 분홍빛 젖꼭지는 복숭아 색깔의 젖가슴 위에 수줍은 듯 서 있었다. 두 손으로 젖가슴을 감싸 안고 서 있던 그녀는 주춤거리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이제는 고영무가 거절하면 어쩌나 하는 초조감까지 배어 있는 몸짓이다. 그녀가 들어오자 침대가 출렁거렸고 그녀는 머리를 그의 겨드랑이 사이에 집어넣으면서 웅크리듯 누웠다. 고영무는 상반신을 들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서 있을 때는 제법 당당하던 김영지가 이제 두 눈을 감고는 비스듬한 자세로 웅크리고 있다. 그녀의 허리 곡선과 허벅지로 내려오는 긴 선을 보자 고영무는 침을 삼켰다.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팬티를 끌어 내렸다. 엉덩이에 걸쳐있던 팬티는 그녀가 허리를 비틀어 주었으므로 허벅지 아래로 끌려 내려왔고, 이제 그녀가 다리 한쪽을 들어 팬티에서 다리를 빼내었다. 고영무는 그녀의 어깨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김영지가 팔을 들어 그의 목을 안았고, 그의 얼굴은 그녀의 젖가슴에 부딪혔다. 분홍색의 젖꼭지는 탱탱하게 긴장되어 있었고 그의 혀가 닿자 굴러떨어질 듯이 흔들거렸다. 젖가슴에서 다시 위쪽으로 얼굴을 든 고영무는 그녀의 입에서 풍겨나오는 과일 냄새를 들이켰다. 그녀의 입술은 부드러웠고 달콤했다. 뜨거운 액체로 차 있어서 그의 혀를 부드럽게 녹여 주는 것 같았다. 참을 수 없어진 고영무는 그녀의 몸 위로 상반신을 올려놓았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김영지는 상체를 편안히 누이면서 두 다리를 벌렸다. 두 눈을 감은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벌린 입에서는 이미 가쁜 호흡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고영무는 자신의 남성이 뜨겁고 가득 찬 곳에 들어서는 것을 느꼈다. 김영지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고 두 팔이 어느덧 그의 목을 껴안고 있었다. 고영무는 이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두를 일도 조급할 것도 없다. 편안했고 또한 가슴이 무섭게 뛸 정도로 충만한 기운이 있었다. 김영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기분을 맛보려는 듯이 허리를 들었다가는 그가 부딪쳐 오면 탄성을 뱉으면서 몸을 떨었다. 이내 그들의 몸은 땀으로 젖었고 방 안은 더운 호흡 소리와 끈끈한 습기로 가득 찼다. 그녀의 길고 낮은 신음 소리는 잔뜩 억제되어 있었으나 참을 수 없게 되자 김영지는 한 손을 들어 베개를 끌어당겨 입에 물었다. 그녀의 치켜든 두 다리의 발가락 끝이 안쪽으로 굽혀진 채 펴지지 않았다. 이윽고 고영무의 움직임이 격렬해지자 그녀는 온몸을 내팽개친 듯 그를 따라 움직였다. 어느 사이에 베개는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졌고 이제 그녀는 그의 어깨에 입술을 대고 신음 소리를 죽였다. 이윽고 그녀의 온몸이 거세게 떨리기 시작했다. 입에서는 길고 높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고 두 팔과 다리로 그를 감은 채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해 왔다. 고영무는 뜨거운 것이 그녀에게 쏟아지는 것을 느끼면서 그녀의 입술을 빨았다.
"따라가고 싶지만 참겠어요."
침대 위에 반듯이 누운 김영지가 입술만을 움직여 말했다. 그녀는 손을 움직여 알몸을 덮을 기력도 없는 것 같아 보였다. 머리칼이 젖은 이마 위에 붙어 있었고 아직도 아랫배는 불규칙적인 호흡으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고영무는 팔을 뻗어 그녀의 이마 위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치워 올리고는 그녀의 알몸을 재 보듯이 목덜미에서 무릎 위까지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김영지가 초점을 잡으려는 듯 눈을 깜박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꼭 돌아오셔야 돼요."
고영무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그녀의 입술에서는 이제 단맛이 느껴졌다.
"이제 내가 돌아올 곳은 이곳밖에 없어. 나는 그것이 기뻐. 돌아올 곳이 있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아요."
"나도 마찬가지야. 오래 기다릴 수 없어,"
"행복해요."
고영무는 팔을 벌려 그녀를 가슴 안으로 끌어넣었다. 가슴에 두른 붕대가 땀에 젖어 너덜거리고 있었으나 상처는 이제 아물어 가고 있는 중이다. 그는 입 밖으로 똑같은 말이 끄집어져 나오는 것을 참고 있었다.
"꽤 좋은 집이군요, 크링거. 나도 이쪽 해변가에 이런 집을 하나 마련하고 싶은데."
카를로스가 밤바다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하모사 비치에 새로 구입한 크링거의 저택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진 대리석으로 지은 2층 양옥이다. 야외 풀장과 실내 풀장이 있는 데다가 침실이 11개나 되는 저택이었다.
"내가 알아보지요, 카를로스. 요즘은 부동산 가격이 내리고 있어서 매물로 나온 집들이 많을 겁니다."
크링거는 잔 두 개에 위스키를 채우고는 그에게 다가가 잔을 건네주었다. 그들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베란다에 나란히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밤바다에는 수십 척의 배가 떠있었는데 대부분이 화물선들이었다. 낮에는 떠 있는 것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으나 환하게 불을 밝힌
지금은 장관이었다.
"난 뜻밖이었소. 카스틸로가 그렇게 쉽게 무너질 줄은."
한 모금 술을 삼킨 카를로스가 바다를 내려다본 채 입을 열었다.
"까뜨린 거리에서 그를 친 것도 예상 밖이었고, 그리고 에르난데스가 그 시간에 거리를 비워 놓은 것도 말이오."
"그건 워렌도 어쩔 수 없었어요, 카를로스. 카스틸로는 운이 다했던 겁니다. 너무 욕심을 부렸지요. 그의 밑에 있는 놈들도 그렇고."
"썩었지. 지독하게 썩기는 했었소."
"난 카스틸로에게 미련이 없습니다, 카를로스. 내가 주의했던 것은 카스틸로를 제거하고 바로 화살을 당신에게 돌리는 것이었는데, 다행히 잘 해결되었소."
카를로스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고맙소, 크링거. 신세를 입었소."
"천만에요, 카를로스. 이쪽에서도 당신의 이용 가치를 찾아낸 것이지요. 내 이용 가치하고 말입니다."
"마약부의 앨버트와 지미 골드가 길길이 뛰겠군."
크링거가 친 이를 드러내며 소리 없이 웃는 것이 어둠 속에서 보였다.
"지미 골드가 실무 책임자였는데, 그를 달래려고 워렌이 직접 그를 만났다고 합니다. 권총을 뽑아 들고 난리를 치다가 결국은 승복했다는군요."
"워렌의 패거리들이 그때 고영무까지 죽여서 시체를 남겨 놓았어야 하는데."
그의 말에 크링거가 입맛을 다셨다.
"기습을 하긴 했는데, 놈들이 로켓포까지 가지고 있어서 저항이 대단했던 모양이오. 이쪽은 25명이 가서 12명이 살아 돌아왔다고 합니다. 고영무 일당의 시체 다섯 구를 찾아내었소."
카를로스는 잔에 남은 위스키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운이 좋은 놈이오. 그렇지 않소?"
크링거가 카를로스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렸다.
"나도 그놈에게 인질로 잡힌 적이 있었소, 카를로스."
카를로스가 싱긋 웃는 것이 알고 있는 눈치였으므로 크링거가 말을 이었다.
"운이 좋은 놈이라고 볼 수만은 없소이다. 놈은 산고양이처럼 독하고 재빠른 놈이오. 복수심이 강하고 치밀하기까지 한 놈이었소,"
"이제 이야기하지만 그놈은 온갖 전자 장비와 여러 명의 부하들로 둘러싸인 내 집을 단신으로 쳐들어와 밭을 만들어 버렸소."
"단신으로?"
카를로스가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당신 부하들은 여섯 명이라고도 하고 일곱 명이라고도 하던데. 나도 들었소."
"병신 같은 놈들, 혼자였소. 놈은 나까지 끌고 갔단 말입니다, 혼자."
"워렌의 말이 고영무가 총을 맞고 넘어지는 것을 부하들이 보았다던데, 콜롬비아의 시궁창 속에서 시체로 썩어 가고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그놈이 화근덩어리요, 크링거."
카를로스가 입맛을 다셨다.
"놈은 페르난도의 동생을 인질로 우리 돈을 2억 3천만 달러 강탈해 간 놈이오. 나도 그놈에게 빚이 있소이다."
"나도 1억 달러를 뜯겼습니다. 납치당하고 나서."
쓴웃음을 지으며 크링거가 말했다.
"그 와중에 크라우스 놈이 장난을 쳐서 아예 제거해 버리기까지 했소."
"그놈, 어쩐지 건방을 떨더라니."
카를로스는 일어나 베란다를 짚고 밤공기를 가득 들이마셨다.
"난 페르난도를 찾아야 합니다, 크링거."
그의 낮은 목소리에 크링거가 잘 들으려는 듯이 상체를 세웠다.
"놈은 나를 배신한데다가 내가 보낸 집행자 세 명을 몰살시켰소. 그놈을 처형하지 않으면 기율이 안 섭니다."
크링거가 머리를 끄덕였다.
"LA에 있다면 찾아내는 것은 금방이오, 카를로스. 내가 찾도록 하겠소."
오늘따라 유달리 손님이 들끓고 있었으므로 홍성희는 바빠서 비명을 지를 지경이었다. LA 한국인 실업가 그룹들의 파티가 있는 데다가 서울에서 미국 시장을 시찰 나온 사람들이 10여 명 몰려왔기 때문이다.
"얘, 너라도 좀 3호실에 들어가 보려무나, 내 대신."
1호실에 들어갔다 나온 홍성희가 카운터에 앉아 있는 이은영에게로 다가왔다.
"언니는 정말? 3호실에 아가씨가 모자란다고 해서 거기에 들어갔다가 계산하러 나왔는데."
이은영이 흰자위가 잔뜩 보이도록 그녀를 향해 눈을 흘겼다.
"저쪽 홀의 안쪽 손님들은 술이 몇 병째야?"
자욱한 담배 연기와 소음에 덮여 있는 벽 쪽을 바라보며 홍성희가 물었다.
"헤네시 XQ만 다섯 병께야, 언니. 저런 손님들만 있으면 좋겠어. 여자들도 찾지 않고."
"어머나, 정말."
서울에서 왔다는 그들은 시장에서 장사를 한다고 했는데 시장에서 부대껴서 그런지 모두 거친 인상이었다. 그러나 홍성희로서는 시장의 장사꾼인 그들이 까탈스럽고 음흉을 떠는 서울의 내노라하는 기업체 사장들인 3호실 손님보다 더 멋져 보였다. 그들이 여섯 명이서 코냑 두 병을 가지고 마시고 있는데 반하여 홀의 시장 손님들은 다섯 명이 코약보다 두 배나 비싼 혜네시 XO를 여섯 병이나 마시고 있는 것이다.
"이자영씨 연락했니?"
"응, 곧 온다고 했어."
만족한 듯 머리를 끄덕인 홍성희는 흘 안을 둘러보았다. 아가씨 십여 명을 동원하였지만 아직도 숫자를 채우려면 10여 명은 더 있어야 한다. 그녀는 몸을 돌려 까탈스러운 손님들이 모여 앉은 3호실로 다가갔다.
"장사가 잘 되는구만."
홍성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강판술이 입술을 내밀면서 풀씩 웃었다.
"저년, 꼬랑지 흔들고 다니는 걸 보니 여러 놈 요절내게 생겼어."
그는 맥주잔에 따라놓은 위스키를 커다랗게 한 모금 삼켰다.
"그런데 형님, 최대광이하고 신용만이가 안 보이는데요."
앞에 앉은 김금택이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나타나겠지. 뭘, 오늘 아니면 내일이라도."
그들은 자신들을 시장의 장사꾼이라고 소개하였는데 전우석이 서울애서 인원을 뽑을 적에 홍성희와 최대광들과는 안면이 없었던 부하들로만 추려 온 것이다. 전우석은 홍성희와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호텔에 들어앉아 있었다.
"나타날 때까지 저년한테 점수나 따도록 술이나 먹자."
강판술이 다시 한 모금 술을 삼키자 그와 동행한 네 명의 부하도 따라서 술잔을 들었다. 홍성희가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왔다.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있다.
"불편하신 건 없으세요?"
"없습니다, 사장님."
강판술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말했다.
"우리는 술이면 그만이오. 여자 투정하는 놈들은 모두 제 여편네한테 주눅이 들린 놈들이지. 안 그렇소?"
"어머나, 그럴듯한 말씀이네요."
강판술의 여편네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홍성희가 방긋 웃었다. 아마 발바닥에 시커먼 때를 묻히고 팬티를 사흘에 한 번쯤 갈아입는 여자일 것이다. 양치질도 이틀에 한 번쯤 할지도 모른다.
"술이나 한 병 더 가져다주시오."
"네, 안주는 서비스로 하나 올릴게요."
홍성희가 몸을 돌려 주방 쪽으로 다가가자 강판술이 씹어 뱉듯 말했다.
"저년을 없애기 전에 깃발을 한번 꽂아야겠다. 너희들도 마음에 있는 놈은 이야기해라. 어차피 뒈질 목숨, 그것도 죽기 전에 극락 구경 시켜 주는 것이니까."
사내들은 히죽히죽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홍성희가 다시 카운터로 다가가자 이은영이 이맛살을 찌푸려 보였다.
"언니, 이자영씨가 들어왔다가 나갔어. 언니한테 전화한다고 하면서 잠깐 둘러보다가 나갔는데, 웬일인지 모르겠어."
"들어왔다가 나가?"
홀 안이 시끄러웠으므로 그녀에게 바짝 붙어 선 홍성희가 소리치듯 말했다. 그러자 이은영의 앞에 놓인 전화기가 울렸고 수화기를 들었던 이은영이 잠깐 대답하더니 수화기를 건네주었다.
"언니, 이자영씨."
"여보세요."
홍성희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으므로 이은영이 눈을 흘겼다. 따라서 눈을 흘기고 딘 홍성희가 물었다.
"이자영씨, 무슨 일이 있어요"
"홀 안에 조직 폭력배들이 있어요. 그래서 그랬어요."
이자영의 말소리가 숨 가쁘게 들렸으므로 그녀는 수화기를 바꿔 귀에 대고 등을 돌렸다.
"누군데요? 그걸 어떻게 이자영씨가 알아요?"
"홀의 안쪽에 앉은 사람들, 남자들끼리만 앉아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중에서 체격이 크고 얼굴이 검은 사람, 가슴이 큰 사람이 내 돈 30억을 가로채 간 사람이에요. 홍성희씨도 조심하세요. 난 무서워서 도망쳐 나왔어요."
홍성희는 가만히 몸을 돌려 서울의 시장에서 왔다는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일제히 잔을 들어 올려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가슴이 드럼통 같은 사내가 유도하고 있었다.
깊은 밤이었으나 바다는 다행히 잔잔했다. 수상비행기는 바다 위를 낮게 날고 있었는데 깜박거리는 날개 끝의 불빛에 파도의 끝이 가끔씩 드러났다.
"오라지게 시끄럽구만, 이놈의 비행기는."
몇 번째인지도 모르게 최대광이 소리치듯 말했는데, 그로서는 겁이 나는 것을 애써 감추려는 허세였다. 이제 비행기 안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알게 되었다. 수상비행기는 조종사까지 포함해서 7인승이었으나 승객들의 체격이 컸으므로 다섯 명의 승객 몸무게가 여섯 사람의 몫이 넘을 것이다. 그리고 비행기는 20년이 지난 고물이어서 의자도 삐걱거렸고 진동도 대단했다. 비행기가 갑자기 고도를 뚝 떨어뜨리면 최대광은 의자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울상을 지었는데, 마주 앉은 페드로는 그것이 우스워서 참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비행기가 잠잠하게 운항하기 시작하면 최대광은 불평을 늘어놓는다. 카르타헤나에서 수상비행기를 대절한 고영무의 일행은 지금 열다섯 시간째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오는 도중에 엘살바도르의 바닷가에서 기름을 가득 넣으려고 두 시간 쉰 것까지 합하면 열일곱 시간을 비행하는 셈이다.
"이제 두 시간이면 LA 바닷가에 도착한다. 참아라."
시계를 내려다본 고영무가 말하자 최대광이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지난번에 내가 배를 타고 밀항해 올 때보다는 몇 배나 나은 편이다. 그때는 화물선에서 내려 파도를 들고 보트로 들어왔으니까."
고영무는 창밖으로 검은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해안경비대의 레이더를 피하기 위해 비행기는 파도 위 10미터를 비행하고 있었다. 비행기는 페드로가 수단을 부려 3만 달러로 흥정을 한 것이다. 고물 비행기의 조종사는 단숨에 한몫을 쥐게 되었으므로 지금도 온갖 솜씨를 부리고 있었다.
"나는 미국을 밀항해 들어갈 팔자인가 보다."
고영무가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치듯 말했다.
"모조리 없애 버려야 합니다, 보스."
브루노가 소리쳐 대답했다.
"실컷 이용해 먹고 우리를 쓰레기처럼 없애 버리려고 했던 놈들, 내버려 두지 않겠습니다."
비행기가 덜컹거리며 고도를 떨어뜨렸으므로 최대광이 다시 의자를 움켜쥐었다가 버럭 소리쳤다.
"모두 목을 분질러 버릴 테야."
그리고는 조종사 쪽을 흘겨보았는데 조종사의 목도 분질러 버리고 싶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