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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땅 2-2

5. 장례식

민기철이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왔다.

"영지야, 이젠 돌아가자."

장례식이 끝났으므로 사람들이 제각기 흩어지고 있었다. 김영지는 머리를 끄덕이며 인부들이 흙을 덮고 있는 묘지를 바라보았다. 김강남의 묘지 바로 옆에 호세 김의 무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네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민기철이 말했다. 김영지가 걸음을 옮기자 한쪽에 몰려 있던 사람들 중에서 키가 큰 사내가 다가왔다.

"김영지씨, 저는 한국 대사관에 있는 전태섭이라고 합니다."

그녀의 앞에 선 사내가 머리를 숙였다. 사십 대 초반으로 보였고 이맛살을 찌푸리고 눈을 내리깐 그의 표정은 정중했다. 그의 뒤쪽에 서 있는 두 사람의 한국인은 그의 수행원인 것 같았다.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됐습니다, 그만하면 됐어요."

민기철이 그의 앞쪽으로 한 걸음 다가선다.

"대사관에서 그만큼 했으면 됐어요. 얘는 좀 쉬어야 해요."

"고영무는 미국에서 잡힐 겁니다. 이곳에서는 사정이 여의치 못했지만 미국에 있는 저희 직원들한테 연락을 해놓았습니다."

민기철을 무시한 채 사내가 김영지를 향해 말했다.

"저희들도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럼 ‥‥‥‥"

사내가 몸을 돌리고는 일행들과 함께 잔디밭을 가로질러 갔다. 김영지는 아직도 묘지 근처에서 서성대고 있는 교민과 친지들의 시선을 받으며 민기철과 함께 차에 올랐다.

"네 어머니가 걱정이다. 너야 젊으니까 견뎌내겠지만‥‥‥‥"

차가 출발하자 민기철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도 핼쑥하게 야위어 있었다. 호세 김의 소식이 없어 궁금해하던 그는 다음날 신문을 보고는 곧장 산타마르타로 달려갔었다. 신문에는 전날 밤 선창의 하역장에서 두 명의 피살체가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리고 한 명은 한국 교민이라는 것이다. 호세 김의 시체를 확인한 민기철은 넋을 잃었다. 경찰은 두 명이 서로 싸우다가 죽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고영무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었다. 밀항조직과 연결된 그들은 사건이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교민들은 물론 대사관마저도 이제는 알게 되었다. 고영무는 이제 김강남은 물론 호세 김까지 죽였다. 호세 김은 고영무의 밀항을 막으려다 살해된 것이다. 그리고 고영무는 밀항선을 탔다. 그의 목적지는 틀림없이 미국일 것이었다.

"아저씨, 어머니를 한국으로 보내 드려야 할 것 같아요."

김영지가 민기철을 바라보았다.

"한국에? 외삼촌한테 말이냐?"

민기철이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외삼촌이 세 분 있다고 했지?"

"."

"형제간 우애는 좋고?"

"그런 편이에요."

"어머니가 그러시더냐?"

김영지는 머리를 저었다. 어머니는 지금 죽는 것이 소원이었다.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남편과 아들 옆에 묻히려고만 했다.

"면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들이 낫다던데, 오히려 이곳에 어머니 친구들이 많지 않니?"

"그건 그렇지만 이곳이 어머니에 게‥‥‥‥"

"제 생각에는 어머니가 나아지실 것 같지가 않아요."

"어머니가 어떻게든 견뎌내야 할 텐데. 내가 보아도 너무 충격이 큰 것 같다."

"나이 드셔서 견디기가 더 힘이 들지도 모르겠고."

민기철이 길게 한숨을 쉬더니 김영지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를 한국으로 보내면 그럼 너 혼자 보고타에 남을 거냐?"

김영지가 머리를 저었다.

"공장 정리하고 미국으로 가겠어요."

눈썹을 치켜뜬 민기철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국에는 왜?"

메마른 소리로 그가 물었다.

", 설마‥‥‥‥"

"보고타는 싫어요."

"여기가 바로 네가 태어난 곳이야. 네가 아기였을 때부터 친자식처럼 여겨온 교민들이 있다. 도대체 미국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김영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는 어머니하고 같이 있어야 돼, 여기건 한국이건 간에. 너 혼자 다른 곳은 못 간다."

민기철이 늘어진 어깨를 세우고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어깨에 힘을 풀었다.

"너 혼자는 어림도 없다. 영지야, 제발 고집부리지 말고."

창밖에는 빗방울이 뿌리기 시작했다. 장례식을 마칠 때까지 참고 있었던 듯 빗발은 굵고 세었다.

"그놈은 잔인무도한 살인자야. 네가 나설 일이 아니다. 마침 한국 정부에서도 그놈을 잡는 데 신경을 써주겠다고 하잖니."

"남의 일이에요. 인사차 해준 말이에요. 미국에서는 그놈이 이곳에서 저지른 죄를 추궁할 사람도 없다구요."

"네 어머니는 어떻게 하란 말이냐?"

화난 듯 소리치는 민기철에게 대뜸 김영지가 말을 받았다.

"저는요? 저는 어떡하구요?"

그녀를 바라본 민기철이 입맛을 다시면서 머리를 돌렸다. 김영지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았기 때문이다. 차에서 내린 그들은 현관으로 들어섰다.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교민들과 어머니의 친구들, 아버지와 오빠의 친구들로 집안은 흔잡했다.

"잠깐, 아가씨."

부르는 소리에 김영지가 몸을 돌렸다. 사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농부 같은 생김새의 신부였다. 검정색의 신부복은 밝았고 얼굴도 투박했다.

"고인의 따님 되시지요?"

그녀의 앞으로 다가온 신부가 물었다.

", 신부님."

"난 산타밀라의 성당 주임신부로 있는 마르틴이라고 합니다."

산타밀라는 김영지로서도 처음 듣는 도시였다.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새벽에 출발했는데 그 빌어먹을 버스가 고장이 나서 그만‥‥‥‥"

김영지가 민기철을 돌아보았다.

"신부님 식사는 하셨습니까? 안 하셨으면 저기 안으로 가시지요."

민기철이 나서자 그는 손을 저었다.

"그보다도 아가씨에게 말씀드릴 이야기가‥‥‥ 어디 조용한 곳이 없을까요?"

"그럼, 서재로 들어가시지요."

민기철이 앞장을 섰고 그의 뒤를 마르틴과 김영지가 따랐다. 서재에서 김영지와 민기철은 마르틴을 마주 보고 앉았다. 이곳은 서재라기보다도 호세 김이 장부를 정리하고 중요한 엔진 부속을 보관하는 곳이다. 책꽂이에는 책 대신 기계 부속이 놓여 있었다.

"말씀하시겠다는 것이 뭡니까?"

민기철이 궁금한 듯 상체를 숙이고 물었다. 머리를 끄덕인 마르틴이 김영지를 바라보았다.

"고영무는 당신 오빠를 죽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가씨.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믿습니다."

"잠깐만, 신부님."

이맛살을 찌푸린 민기철이 나섰다.

"그것을 신부님이 어떻게 아십니까?"

"내가 그 사람하고 같이 며칠 동안을 보냈지요. 산타마르타에도 같이 갔습니다."

"산타마르타에?"

"그렇소, 호세 김이 방파제에서 추락하는 것도 보았소."

마르틴은 수건을 꺼내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유감이오, 아가씨. 아버지는 총을 쏘셨고 고영무는 총에 맞았소. 넘어진 고영무를 쏘려다가 아버지가 방파제로 떨어지셨소."

말을 그친 마르틴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영무는 아버지를 살해할 의도가 없었소. 방어하려다가 그렇게 된 것이오."

"어쨌든 죽였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민기철이 다그치듯 물었다.

"그놈은 부자를 모두 살해한 놈이오."

"이것 보시오,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고영무는 아가씨 오빠가 마약 조직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해요. 그는 그 사람들을 찾으려고 떠났습니다."

"믿을 수가 없어요, 신부님."

"나는 내가 그의 말을 믿고 있다는 것을 알려 드리고 싶었소, 비록 당신들이 비웃더라도."

"그는 미국으로 갔지요?"

김영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신부님, 말씀해 주세요."

"그는 당신 오빠를 죽이지 않았소, 아가씨."

김영지가 잠자코 자리에서 일어셨다. 그녀가 문을 열고 나가자 방안은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당신은 나잇값도 못 하는군요."

마르틴이 덕을 들고 민기철을 바라보며 말하자 그는 잠시 눈을 깜박이며 입을 열지 않았다.

 

갈매기가 뱃전 위를 돌다가 로프 뭉치 위에 내려앉았다. 바다는 잔잔했으므로 밝은 화물선은 제법 속력을 내었다. 항해를 시작한 지 나흘째 되는 날의 아침이었다.

갑판 위에 선 고영무는 아득히 바라보이는 수평선에 시선을 주었다. 푸른 바다의 왼쪽 끝 수평선 쪽에는 한국이 있다. 오른쪽은 이제 북미대륙이다. 배는 태평양을 북진해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뒤쪽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상갑판의 계단 아래에 대여섯 명의 밀항자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오늘 밤에는 LA 근해로 접근하게 되므로 배 안의 분위기는 아침부터 들떠 있었다. 고영무의 시선을 알아챈 그들이 몸을 돌려 구명보트의 뒤쪽으로 사라졌다. 밀항자들은 고영무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모두들 그가 저질렀던 사건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리고 야적장에서 아수라 같은 모습을 보기도 했던 것이다. 고영무는 사흘 밤낮을 배 안에서 지내면서 먹고 자고, 때로는 바다 구경을 하다가 지치면 화물선의 갑판 위에서 운동을 했다.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고영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산체스는 한 번도 그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조타실이나 선장실에 틀어박혀 있는 모양이었다. 바다 위로 날치 떼들이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배와 함께 날아오르다가 이내 동쪽으로 사라져 갔다. 바다 쪽으로 시선을 주고 있는 그의 뒤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이제 몇 시간이면 미국 영해로 들어가게 됩니다."

산체스가 다가오며 말했다. 그는 고영무와 나란히 서서 배의 난간을 잡고 그를 바라보았다.

"상처는 어떻습니까?"

"괜찮소."

총알이 귀의 바로 윗부분을 스치고 지나갔으므로 5센티쯤 피부가 찢어져 있었다. 배에는 소독약밖에 없었으므로 소독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 두었다. 미국에 도착하면 치료부터 해야 할 것이다.

"신부님도 이야기를 하셨지만, 미국에 도착하시면 신분증을 만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주름진 얼굴을 더욱 찌푸리며 그가 물었다. 걱정하는 얼굴인지 경계하는 표정인지 주름에 가려서 알 수가 없다.

"내가 지난번에 전화번호를 적어 드렸지요? 그걸 가지고 있습니까?"

"가지고 있어요."

"그 사람이 만들어 줄 겁니다. 연락을 하세요, 잊지 마시고."

"산체스."

고영무가 몸을 비스듬히 돌려 난간에 허리를 기대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한테 얼마를 받고 나를 팔았소?"

"아직 돈은 받지 않았어요. 당신을 잡고 나면 백만 페소와 당신이 가지고 있는 돈을 받기로 했지요."

산체스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신부님을 속인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만, 워낙 큰돈이어서‥‥‥ "

"그리고 아들의 복수를 하겠다는 사람을 돕는 것이었소. 나중에는 신부님도 이해하시리라고 믿었소."

"배에는 보트가 두 척이 있어요. 한 척은 50인승이고 안전하지요. 15노트인데 세 시간 후에 샌디에이고 근처의 해변에 닿아요. 사람들은 기다리는 컨테이너 트럭에 타고 밀입국자 합숙소로 갑니다. 물론 돈을 내야겠지만."

"다른 한 척은 10인승인데 40노트요. 빠르지. 이놈은 LA의 산 페드로만으로 들어갑니다. 아예 놈들의 코앞으로 들어가는 거지요."

산체스가 눈꼬리를 내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입술 끝이 치켜 올라간 것을 보면 웃는 얼굴이었다.

"이건 돈 많은 손님들을 위해 준비한 특별항로지요. 놈들의 코앞이 실은 더 안전합니다. 배에서 내리면 기다리는 리무진을 타고 호텔로 직행합니다."

"호텔에서 의사를 부를 수도 있습니다, 미스터 고."

"난 컨테이너 트럭을 타고 가겠소, 산체스씨,"

고영무가 바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돈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돈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런 특별대접은 받고 싶진 않아."

"신문에는 2천만 페소를 가지고 있다던데, 미스터 고."

"난 돈이 없어."

"저쪽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니까, 미스터 고. 이민국과 마약반이 눈에 불을 켜고 있어, 내 배는 이미 추적당하고 있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면 석탄 속까지 샅샅이 조사를 할 거요."

"우리 사이니까 말해 주겠는데 샌디에이고 코스는 이미 놈들에게 알려져 있다구."

"저쪽은 미끼란 이야기야, 미스터 고. 이쪽의 7, 8명을 살리기 위한 미끼"

고영무의 시선이 그와 마주쳤다.

"얼마요?"

"백만 페소."

기다렸다는 듯이 산체스가 잇몸을 보이며 웃었다.

"3천 달러군."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산체스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3천 달러라고 말한 것은 미화로 돈을 지불하겠다는 뜻이다. 공정 환율이 달러당 350페소였으므로 백만 페소면 2,850달러가 조금 넘었고, 암시장에서 3천 달러면 130만 페소까지 받을 수가 있다.

"3천 달러만 주시면 당신은 최고급 대우를 받고 안전하게 입국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날 선장실에서 쉬게 해주시오.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소."

"물론입니다. 계산은 내 방에서 하십시다."

산체스가 그의 팔을 잡았다.

"식사도 형편 없으셨을 텐데, 맛있는 요리라도 드십시다. 술도 있으니까요."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던 매린이 얼굴을 들었다.

"밀리카, 페르난도한테서 여기 남아 있으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구."

그의 얼굴에 웃음이 번져 나갔다.

"당신 전화를 받았다고 페르난도가 말을 꺼냈을 때는 야단맞는 줄 알았어."

"오빠는 당연히 우리를 남게 해주셨을 거예요. 우리가 밀림 속이나 거리에서 총에 맞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테니까."

밀리카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이봐, 카를로스나 다른 간부들도 천막생활을 하고 있어.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돼."

"난 석 달 되었어요."

매린이 머리를 들었다.

"무슨 소리야?"

"임신했다구요."

밀리카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양쪽 볼이 조금 붉어진 것 같았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요. 그 한국인을 만난 것이 석 달 전이에요. 그렇죠? 관계를 갖게 된 것은 두 달 전이구요."

"밀리카."

매런이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난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어."

"당신의 아이예요."

"알아, 밀리카."

"난 결코‥‥‥‥"

밀리카가 말을 잇지 못하고 머리를 숙였으므로 매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당신을 사랑해, 밀리카."

그녀의 뒤에 선 매린이 몸을 숙여 그녀의 상반신을 안았다.

"그리고 당신이 얼마나 섬세하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그놈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어. 그것은 일이었으니까, 일을 마치면 잊는 거야."

밀리카의 머리에 입을 맞춘 매린이 얼굴을 숙여 그녀의 볼에 입술을 대었다.

"그래, 그 이야기를 페르난도한테도 했단 말이지?"

밀리카가 머리를 끄덕였다.

"아아, 행복하군."

그들은 앞쪽의 식탁을 바라보았다. 식탁 위에 가득 놓인 맛있는 음식과 술병은 보고타의 일류 호델 요리보다 풍성했고 먹음직스러웠다

"일이 끝나면 바로 스페인으로 가자구. 거기서 휴가를 보내는 거야."

"언제 끝나게 돼요?"

"내일 크링거가 돈을 가지고 오면 그 돈을 날라야 할 일이 남았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마약을 운반하는 것보다는 쉽지. 돈 냄새를 맡는 개를 풀어 두지는 않으니까."

"페르난도가 이번에 콜롬비아로 돌아가면 어머니를 이쪽으로 보낸다고 했어요. 어머니는 우리 결혼식에 참석하시게 돼요."

"우리와 같이 사시면 돼, 결혼하고 나서도."

밀리카가 두 팔을 올려 그의 목을 안고는 앞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들의 입술이 마주쳤고, 매린이 옆으로 몸을 트는 바람에 식탁 위에 놓인 술병이 넘어졌다.

 

지미 굴드는 버릇처럼 머리를 쓸어올리면서 서류를 내려다보던 시선을 들었다.

"이건 샌프란시스코로 석탄을 풀러 가는 배구만. 출항지는 산타마르타이고."

"한 달에 두 번씩 우리 앞바다를 지나지. 다행히 LA에 기항한 적은 한 번도 없어."

피터의 말에 지미가 어깨를 한번 치켜들며 웃었다.

"산호세호라. 이 배는 단속에 걸린 적이 한 번도 없구만 그래.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날 보자고 한 것은? 이 배가 석탄 대신 마약이라도 실었단 말인가?"

"지미, 서두르지 마."

피터 그린피트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를 흘겨보았다.

"자넨 마약 외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 자네가 입을 벌릴 때마다 앨버트의 험담이 나오지만 앨버트와 다를 것이 없어. 똑같은 놈들이야."

"피터, 입 닥치고 날 불러낸 이유를 대란 말이야, 이 산호세호에 무슨 문제가 있어?"

책상 위에 종이를 집어 던진 지미가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연안경비대의 LA지역 책임자이다. 업무적으로 자주 만나고 있었으므로 이제는 업무를 끝내고 술친구도 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LA 한국 영사관에서 연락이 왔어, 나한테."

피터가 정색을 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산호세호에 한국인 한 명이 타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거야. 놈은 콜롬비아 정부에서 살인범으로 현상수배를 받고 있는 놈인데, 교민을 죽였다는군."

"허어, 그런데 콜롬비아 정부로부터는 연락이 없고?"

"없어, 그놈들은."

"그럼 콜롬비아 경찰더러 잡으라고 해. 도대체 한국 정부 놈들, 할 일도 없구만."

"이봐, 교민을 죽였다잖아?"

"교민이래도 콜롬비아로 이민 왔을 테니까 그쪽 국민 아닌가?"

"부자간 두 명을 죽였다는 거야."

"두 명이나? 부자간을?"

"그래, 또 한 명이 있기는 있는데 콜롬비아인이야. 그놈은 세 명을 죽였어, 부자간과 콜롬비아인 한 명을."

"누가 그래?"

"LA의 한국 영사관이. 그들은 보고타의 대사관에서 연락을 받았다는군."

"그들 이야기로는 놈은 마약 관계로 인한 모함에 빠졌다고 주장한다는 거야. 자신은 죽이지 않았다면서. , 자네가 좋아하는 이야기로 연결되었지 않나?"

"그놈이 배낭 가득 마약을 짊어지고 산호세호에 타고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야. 어때? 구미가 당기지?"

"샌프란시스코의 요한슨 담당이야."

머리를 쓸어올리며 지미가 말했다.

"그리고 그쪽 해안경비대장이 누구야? 그 친구 담당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자네하고도 일이 없고,"

"지미, LA의 한국 영사관은 그쪽을 알고 있지 못해."

"알아보라고 해. 난 그런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어."

자리에서 일어선 지미는 피터에게 다가가 어깨를 쳤다.

"피터, 어때? 오늘밤에 내가 한 시간쯤 시간이 있어. 캠블네 바에서 위스키를 곱빼기로 다섯 잔씩만 마시는 게?"

"네 오줌하고 섞어서 칵테일로 해 마셔라."

부아가 난 피터가 몸을 돌렸다.

"당장 내 방에서 꺼져!"

빙긋 웃음을 띠운 지미는 서둘러서 방을 나왔다. 바닷가에 세워진 해안경비대 건물에서는 앞쪽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바람이 바다 쪽에서 불어와 그의 머리칼과 옷자락을 날렸다. 밝은 태양이 중천에 떠 있는 화창한 날씨였다.

지금은 크링거가 시카고로 달아나 버렸으므로 앨버트를 비롯하여 마약부의 부원들이 김이 빠져 있는 형편이다. 게임도 상대가 있어야 신이 나는 법이지, 벽에다 공을 두드리는 스쿼시도 혼자 치면 신이 나지 않는다. 지미는 경비대를 나와 차에 올랐다. 그렇다고 한국인 한 놈을 잡으려고 소동을 벌일 마음은 없었다. 시카고에 있는 크링거에게 촉각을 세우고 있는 것이 나을 것이다. 크링거는 희고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앨버트의 얼굴을 보고 싶구만. 놈은 지금 실망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어"

그는 손을 뻗어 탁자 위에 놓인 금제 담배 케이스를 집었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크라우스가 재빨리 라이터를 켜 그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크라우스, 준비는 되어 있겠지?"

크링거가 묻자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모두 끝났습니다. 내일 저녁에 출발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크링거의 시선이 탁자 옆쪽에 놓여 있는 전화기에 머물렀다. 자신의 방에 있는 전화기는 도청 장치가 되어 있었다. 그가 잠깐 방을 비운 사이에 앨버트의 일당이 방에 있는 세 개의 전화기에 모조리 도청 장치를 설치해 놓은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크링거가 벽에 붙은 선반으로 다가가 위스키병을 꺼내어 들었다. 이 방은 아래층에 있는 그의 방 중의 하나였다. 시카고에 거주하는 선량한 시민의 이름으로 빌린 방이어서 앨버트의 패거리들은 눈치도 채지 못했을 것이다. 크라우스는 크링거가 시카고에 도착하기 전에 찰스들 호텔의 특별실 다섯 개를 이런 방법으로 빌려 놓았다. 앨버트가 크링거의 방에 모든 첨단장비를 가져다 댄다고 해도 난데없이 다른 방에 들어가 회동을 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잔에 자주색 위스키를 따라 한 모금 마신 크링거가 머리를 끄덕였다. 머리는 완전한 백발이었는데 손질이 잘 되어 있어서 윤기가 났다. 피부는 건강한 밝은색으로 짙은 초록색 눈과 조금 큰 듯한 콧날이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눈가에 잔주름이 보였으나 아무도 그를 나이가 예순이 넘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기껏해야 사십 대 후반쯤으로 생각할 것이다.

"크라우스, 이번 건은 커. 한꺼번에 움직이면 안 돼."

낮은 목소리로 크링거가 말했다.

"저쪽이 서두르고 있지만 물량을 한꺼번에 풀지는 않겠다. 가격을 올리면서 조금씩 푼다."

그래야 올린 가격을 오랫동안 굳힐 수 있고, 중요한 것은 한꺼번에 마약을 풀어 놓으면 금방 앨버트가 역추적을 해올 것이다.

"페르난도는 일이 끝나면 곧장 돌아가겠지?"

손에 든 잔을 조금씩 흔들면서 그가 물었다.

", 인원이 많아서 그런지 배로 돌아갈 것 같습니다."

"배로?"

크링 거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한쪽으로 조금 기울였다.

"시간이 째 걸릴 텐데. 바쁘다고 하더니."

"사흘이면 도착하니까요."

"그거야 그쪽 사정이지만."

크링거가 술잔을 들어 한 모금을 삼켰다.

"놈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우리가 난처해져. 크라우스, 네가 자세히 알아봐라."

"알았습니다, 사장님."

크라우스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삼십 대 후반의 건장한 체격이었다. 크링거도 1미터 80이 넘는 신장이었지만 크라우스는 그보다도 큰 키에 금발의 단정한 용모였다. 한눈에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으나 성격이 잔혹하고 컴퓨터같이 정확한 두뇌를 가진 사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

물었다. 크링거는 크라우스가 방을 나가자 탁자 위에 잔을 내려놓고는 소파에 앉았다. 호주머니에서 손바닥보다도 작은 휴대폰을 꺼낸 그는 다이얼을 눌렀다. 휴대폰을 도청하려면 이쪽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야 한다. 그러나 그가 들고 있는 휴대폰은 번호도 없는 것이었다

 

고영무는 잠이 깨었다 침대가 기분 좋게 흔들렸고 환풍 장치가 잘되어 있는 방안에서는 밝은 정화액 냄새가 났다. 바다를 향한 둥근 유리창이 어두웠다. 벌써 밤이 된 모양이었다. 방의 바깥쪽에서 수선거리는 말소리들이 다시 들려왔다. 그는 산체스가 사용하고 있는 선장실에 누워 있었는데 복도 건너편의 조타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벽에 걸린 시계가 밤 여덟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갑자기 방문이 열리더니 산체스가 들어섰다.

"떠날 준비를 하세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는 손에 든 옷가지를 고영무에게 내밀었다.

"여기 옷을 가져왔습니다. 손님들 중에 체격이 비슷한 사람이 있어서 얻었는데, 조금 작을 겁니다."

"고맙소."

고영무는 이제까지 입고 있던 신부복을 벗었다. 앞자락이 흉하게 찟어진 신부복 차림으로 LA에 들어간다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끌 것이다. 양복은 기장이 약간 짧았으나 입을 만했다. 옷감도 좋은 것이었는데 돈 많은 밀항자 중 한 사람의 것인 모양이다.

"맞군요. 씩 잘 어울립니다."

눈을 가늘게 뜬 산체스가 그를 바라보았다.

"신부복을 입고 있었을 때는 어쩐지 꺼림칙했어요. 자꾸만 마르틴 신부가 떠오르고 해서,"

고영무는 침대 옆에 내려놓은 헝겊으로 만든 가방을 집어 들었다. 신부복을 벗자 흘가분 했지만 이제는 양복이 어색했다. 며칠간이었지만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 갑시다. 사람들이 배에 타고 있으니까."

산체스가 앞장을 서서 방을 나갔다. 산호세호는 바다 위에 정지하고 있었는데 그물에 얹혀 있던 대형 보트가 막 내려진 참이었다. 갑판 위에 밝혀진 불이 아래쪽에서 파도에 흔들리는 보트를 비추고 있었다. 제각기 가방과 보따리를 든 사내들이 경사진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간혹 여자들도 보였는데 대부분이 이십 대 초반이나 후반이다.

"저 배는 샌디에이고 방향이오. 당신은 저 배가 떠나고 나야 갑니다."

그와 함께 보트를 내려다보던 산체스가 말했다. 그들은 LA 쪽으로 들어가는 특등 보트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산체스의 말대로라면 그들은 샌디에이고 해변에서 밀입국단속반에게 잡히게 된다.

"산체스, 당신은 항상 보트를 두 척씩 준비합니까?"

고영무가 묻자 그는 머리를 저었다.

"아니, 이번만이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스피커로 배를 향해 무어라고 소리쳤다.

"내가 동포를 상습적으로 팔아먹는 놈 같소? 천만의 말씀."

산체스가 스피커를 내리면서 고영무를 향해 눈을 치켜떴다.

"만일 저 사람들이 잡힌다고 해도 그들은 수용소에 한 달쯤 있다가 본국으로 추방당하는 것이 고작이오. 산타마르타로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지."

"콜롬비아에서 밀항했던 죗값을 치르지 않겠소?"

바닷바람이 갑판 위에 서 있는 그들의 옷자락을 날렸고 아래쪽의 보트가 흔들거렸다. 산체스의 허리춤에 찼던 무전기가 울렸으므로 그는 무전기를 빼어 들었다. 한동안 말을 주고받던 그가 머리를 돌렸다.

"뭐라고 했더라? , 밀항했던 죄는 어떠냐구? 저 사람들은 세관에 사흘쯤 갇혀 있다가 집으로 돌아갈 거요. 저 사람들이 재판을 받는다면 나나 세관이 다치지. 그러니까 할 수 없는 일이지."

산체스가 소리치듯 말했다.

"한 달 동안 미국의 수용소에서 근사한 대접을 받고 미국 구경을 한 값이면 40만 페소는 적은 돈이야."

"샌디에이고에 단속반이 기다리고 있다면 다른 곳으로 돌릴 수도 있지 않소?"

고영무가 다시 묻자 산체스가 못 들은 척 아래쪽을 향해 스피커를 대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에 탄 모양이었다. 선원 두 명이 보트 위에서 로프를 풀어 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에게 스피커로 소리치던 산체스가 고영무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 이제 저쪽으로 갑시다. 당신을 포함해서 일곱 명의 귀빈을 모실 차례요."

그는 앞장서서 갑판의 앞쪽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 정도로 해두시오. 당신은 당신 걱정만 하면 되지 않소?"

선원 서너 명이 그들을 앞질러 갑판 앞쪽으로 뛰어갔다.

"나도 사정이 있어서 그리니까 더 이상 쓸데없는 질문은 마시오."

산체스가 자르듯 말했다.

10인승의 모터보트에 탄 승객은 일곱 명이었다. 선원이 두 사람 있었고 고영무를 제외한 승객들은 제각기 서너 개씩의 트렁크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배 안은 짐과 사람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보트는 우렁찬 엔진 소리를 내며 달려갔다. 파도를 거슬러 갈 때마다 물보라가 배 안까지 덮쳐 왔으나 좁은 보트 안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모두 말이 없었다. 바깥은 먹물을 칠해 놓은 것 같은 짙은 어둠에 덮여 있었다. 산호세호에서 바라보았을 때에는 별들이 보였는데 파도 속에 들어 있는 듯 이곳에서는 별도 보이지 않았다.

"당신, 한국인이오?"

문득 옆에 맞은 사내가 어깨를 맞대며 물었다. 사십 대 중반의 백인이었는데 짙은 콧수염을 기르고 있다. 배에 탈 적에 서슴없이 고영무 옆자리에 앉던 사내였다.

"그렇소, 한국인이오."

"난 한국에 한번 가본 적이 있소, 3년 전이었는데"

엔진 소리와 뱃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섞여서 들릴 뿐이었고, 그리고 가물씩 양동이로 쏟아붓는 듯한 물보라가 떨어지고 있다. 사내가 소리치듯 말했다.

"위대한 나라요, 한국은. 한국의 군대는 세계 최강이오."

고영무가 머리를 돌려 그를 보았으나 물을 뒤집어써서 번들거리는 그의 얼굴만 보일 뿐이다.

"한국군 1개 사단만 가지고 있었으면 콜롬비아를 정복했을 거요."

배가 한쪽으로 기우는 것 같더니 그 상태로 한참 동안을 달리다가 겨우 원상으로 돌아왔다. 고영무는 팔을 들어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열한 시 사십 분이었다. 두 시간이 넘게 달려온 것 같았는데 산호세호가 출발한 지 사십 분밖에 되지 않았다.

"배에서 내리면 우린 깁슨 호텔로 갑니다. 특급호텔이지. 그곳에서 브랜디를 한잔합시다."

사내의 흰 이가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그 시간에 지미 굴드는 캠블의 바에서 위스키 더블을 석 잔째 마시고 있었다. 캠블네 바의 간판은 '위대한 LA'여서 자주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위대한 LA'에서 만나자고 하면 마치 청소년 선도나 거리 정화모임에 가자는 말처럼 들리곤 했다. 그래서 단골들은 주인 이름을 따서 캠블네 가게라고 부르고 있었다.

"지미, 오늘은 혼자여서 그런지 안돼 보이는군. 동반자를 하나 소개해 줄까?"

스탠드 안에서 잔을 받으며 캠블이 물었다. 대머리와 젖가슴 부근에서부터 튀어나온 아랫배가 육중한 거인이다. 잔을 들어 올리던 지미가 동작을 멈추었다.

", 누구 있어?"

"있지"

수건 안에 든 잔을 돌리며 캠블이 머리를 끄덕였다. 언제나 찌푸린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 자네는 긴 머리를 좋아했지?"

"그랬던가?"

"어떤 미친년이 놓고 간 브래지어가 하나 있다네. 그걸 빌려줄 테니‥‥‥‥"

"저기 있어. 내가 말하고 올까?"

캠블이 턱으로 가리킨 바의 구석 자리에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긴 머리를 뒤에서 졸라매었으므로 꽁지를 자른 말꼬리의 형상이다. 동양 사내가 혼자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지미가 눈을 부릅뜨자 캠블이 입술 끝으로 웃더니 위스키를 한잔 더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저 일본 놈이 아까부터 자네를 힐끗거리고 있었단 말이야."

"일본 놈인지 중국 놈인지 어떻게 알아? 한국 놈일 수도 있고."

문득 지미는 피터가 이야기한 한국 놈이 생각났다.

지금쯤이면 그 배가 공해상에서 LA 앞을 지났을 시간이다.

"이봐, . 그 전화기 좀 이리 줘봐. 내 휴대폰을 차에 두고 나와서 그래."

술잔을 내려놓은 지미가 손을 벌렸다.

"? 불러내올 여자라도 있어?"

입술 끝을 비틀며 캠블이 전화기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지미는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눌렀다. 동양인 쪽으로 시선을 주자 아니나 다를까 그쪽이 이쪽을 보고 있었으므로 와락 얼굴을 찌푸린 그는 몸을 돌렸다.

"여보세요, 경비대입니다."

전화기에서 사내의 말소리가 들렸다.

"난 단속반의 지미 굴드인데 피터 좀 바꿔주시오."

", 지미씨, 대장은 지금 바다에 있습니다."

지미가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 무슨 일이 있소?"

다그쳐 묻자 저쪽은 잠시 망설이는 눈치였다.

"이봐요, 난 단속반의 지미란 말이오. 당신도 알고 있지 않소? 우리가 그런 것쯤은 알 수도 있지 않느냐구?"

"신고가 들어와서요."

사내가 결심한 듯 말했다.

"산호세호에서 배를 띄었답니다 샌디에이고 쪽으로 배가 떠난 모양인데, 레이더에도 잡혔어요."

수화기를 내동댕이친 지미는 캠블네 바를 뛰쳐나갔다.

 

장의사 버스 주변으로 승용차들이 여남은 대 세워져 있고 강가 쪽으로는 모닥불이 타고 있었다. 승용차 운전사 대여섯 명이 모닥불을 둘러싸고 잡담을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 너 어디 가?"

신용만이 앞장서 가는 최대광을 소리쳐 불렀으나 그는 턱을 세운 채로 내쳐 걷는다.

", 이 새끼야! 어디 가!"

그와의 거리가 10미터에서 20미터로 멀어져 갔다. 길가로 나온 신용만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발밑의 돌덩이를 집어 들었다. 힘껏 던진 돌멩이가 최대광의 몸을 스치고 앞쪽의 땅바닥에 떨어졌다. 차량들은 길가의 공터에 세워져 있었는데 길은 차 두 대가 겨우 비껴 나갈 수 있는 시멘트 다리로 뻗어 있었다 다리는 150미터쯤 되었다. 다리 건너편에서 길은 좌우로 뻗어 T자 모양이 되었는데 묘지는 다리 건너편의 작은 산 중턱에 있었다. 이제 최대광은 다리를 건너가고 있다. 산 중턱의 묘지에는 어림잡아서 백 명 가까운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한동안 최대광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신용만이 주먹을 불끈 쥐더니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금방 최대광을 따라잡고는 그의 옆에 서서 걸었다.

"이 자식아, 다 끝나고 가자니깐."

얼굴을 붉힌 신용만이 버럭 소리를 질렀으나 이제 말리지는 않는다.

"놈들이 끼어 있으면 어쩔 셈이냔 말이다."

갑자기 최대광이 손바닥을 휘둘렀으므로 신용만이 얼른 상체를 비틀었으나 손바닥은 귀를 퉁기고 지나갔다.

"이 씨발놈의 자식, 이 호로자식!"

버럭 소리를 질렀으므로 신용만은 그의 주먹보다도 뒤쪽과 앞쪽에 신경이 쓰였다. 얼른 앞뒤를 살펴보았으나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누구 때문에 어무니가 죽었는디? ? 이 호로자식아!"

눈을 부릅뜬 최대광이 노려보았으므로 신용만은 어금니를 물고는 이번에는 성큼 앞장을 섰다. 다리 위에서 치고받고 싸울 수는 없다.

"이거 어떡허면 좋딘 말이여 우리가 어덕허면 이 웬수를‥‥‥‥"

목소리가 젖은 것이 최대광이 다시 우는 모양이었다. 뒤쪽에서 구시렁거리는 최대광의 앞장을 서서 신용만은 눈을 부릅뜨고 묘지를 향해 나아갔다. 신문에 난 김영순 여사의 피살사건을 발견한 것은 최대광이었다. 그것도 하루 전의 신문을 보고 안 것이다. 신문을 받으면 31면이나 32면의 사건 기사만 주로 읽고 버리는 최대광이었다. 어제저녁 신문을 가지고 변소에 들어갔던 그가 갑자기 도살장에서 소가 죽는 것 같은 소리를 지르더니 바지를 끌면서 뛰쳐나왔다. 그가 미쳐 버린 것 같았으므로 신용만의 머리끝이 곤두설 정도였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신문의 한쪽을 짚었다. 사회면에 제법 커다랗게 보도된 사건 기사가 보였다.

"백주에 아파트에 강도가 침입, 노인 부부와 가정부를 위협하여 금품을 털고 도주함. 5명의 강도는 주인의 아들 친구로 위장하고 아파트에 들어와 금품을 털었는데 부인 김영순씨는 반항하다가 강도가 덮어씌운 이불에 의해 질식사함 주인 고진호씨는 사건에 대해서 굳게 입을 다물고 있으나 가정부의 말을 빌리면 일당들은 주인 부부에게 테이프를 내놓으라고 했다고 함."

신문을 읽고 난 신용만도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놈들은 아파트를 빌려준 고진호씨가 테이프를 보관하고 있으리라고 믿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고영무의 얼굴을 떠올린 그들은 한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이다. 다리를 건넌 그들은 길을 가로질러 묘지로 다가갔다. 묘지는 길에서 30미터쯤 올라간 낮은 동산 위에 있었다. 문상객들이 나무 그늘에 흩어져 있는 사이를 지나면서 신용만이 얼굴들을 훑어보았으나 그들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는 것 같았다. 묘지에서는 인부들이 봉분 작업을 마쳐 가고 있었다. 봉분의 앞쪽에는 친척 서너 명이 제를 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고 멀찍이 떨어진 곳에 고진호씨가 상복을 입은 젊은이의 부축을 받고 서서 봉분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한눈에 고진호씨를 알아보았다. 고영무의 눈과 입술, 그리고 풍기는 분위기가 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그의 옆에 상복을 입고 서 있는 젊은이는 고영무의 동생 고영철일 것이다. 당장에 소동을 부리며 울 것 같았던 최대광이 주춤거리며 나무등걸 옆에 셨으므로 신용만도 따라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유장수의 졸개들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두려워서라기보다 이 자리에서 만난다면 최대광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도 참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인부들이 일을 마칠 때까지는 한참이 걸렀는데 신용만은 물론 최대광도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은 11월 말의 흐린 날씨였다. 바람이 제법 세차게 불었고 강을 출고 올라온 바람은 차가웠다. 주위의 노송들에 바람을 맞아 가지를 떨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일을 마친 인부들이 연장을 챙겨서 그들에게 준비된 술과 안주 쪽으로 몰려갔다. 제단이 준비되었으므로 나이 든 친척 한 명이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고진호씨와 고영철에 게 머물렀다. 고영철이 주춤거리며 어머니의 묘 앞에 마련된 제단으로 다가왔다. 화사한 용모였고 고영무와는 대조적인 체격이다.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친척들과 문상객들이 둘러선 가운데 그는 향을 사르고 잔을 바쳤다. 그리고 절을 하고는 한동안 묘를 바라보다가 머리를 돌렸다. 아버지 쪽이었다 고진호씨가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으므로 그는 머리를 숙이고는 제단을 물러 나왔다. 최대광이 부스럭거리며 움직이자 신용만이 머리를 돌렸다. 그가 손에 쥔 것을 바라본 신용만이 눈살을 찌푸리고 머리를 들었다. 의외로 최대광의 얼굴은 담담했다.

"나는 절을 할 수 없어, 웬수를 갚을 때까지. 그래서 손가락 한 개만 잘라서 어무니 묘 앞에 안주감으로 놓고 갈라고."

중얼거리듯 말하고는 최대광이 손톱깎이에 끼워진 조그만 칼을 뽑아내었다. 사람들은 모두 묘소 주변에 몰려 서 있었으므로 아무도 그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최대광은 손바닥을 좌 펴고는 옆에 선 굵은 소나무 기둥에 도장을 찍듯이 갖다 대었다. 그리고는 새끼손가락에 칼을 갖다 대는가 했는데 끙 소리와 함께 힘을 주었다. 신용만의 눈에 그의 새끼손가락 중간 부분이 잘라져 있는 것이 보였다. 한순간 잘린 부분이 희게 보이더니 금방 시뻘건 피가 튀어나왔다. 최대광이 허리를 숙이더니 머리를 이리저리 돌렸다.

"이놈의 손가락이! , 어디 있는가 너도 좀 찾아봐라."

나무 밑을 뒤지며 최대광이 말했다.

", 그것 이리 내."

신용만이 말하자 두리번거리던 최대광이 손만 뻗어 손톱깎이를 내밀었다. 신용만은 옆쪽의 나무에 최대광이 한 것처럼 손바닥을 댔다. 칼을 새끼손가락 옆에 꽂자마자 단숨에 힘을 주어 눌렀다. 중간 부분이 끊어져 나갔는데 살이 아직 붙어 있었으므로 최대광과 같은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여그 있구만."

한숨 돌렸다는 듯이 말하며 최대광이 허리를 졌다. 그의 시선이 신용만의 손가락에 머물렀다.

"됐다, 가자. 어머니 안주로 놓고만 오자."

최대광의 말소리가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 소리에 섞여 메마르게 들렸다.

 

장규식은 차에서 내리자 온몸을 한번 부르르 떨었다. 밤의 냉기가 찼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온몸이 긴장되어 있어서 저도 모르게 몸서리가 처진 것이다. 앞쪽에 다이아나 호텔의 후문이 보였다. 후문 기둥 양쪽에 달린 둥근 전구가 주위를 제법 환하게 비추고 서너 명의 사내들이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장규식이 걸음을 옮기자 세 대의 차에서 내린 일곱 명의 사내들이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후문 근처에 서 있던 사내들이 한곳으로 뭉치고 있다

"강사장님 계시지?"

사내들을 향해 장규식이 부드럽게 물었다.

", 계십니다."

낯익은 사내 한 명 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계단으로 해서 2충으로 올라가시지요."

장규식은 그들을 지나쳐 후문 안으로 들어섰고 부하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강일준의 부하들은 그들을 제지하지 않는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비상계단이었으므로 천장에 기다란 형광등 한 개만이 매달려 있었다. 썰렁했고 시큼한 냄새마저 풍겼다. 부하 두 명이 장규식의 옆을 지나더니 성큼거리며 계단을 뛰어올랐다. 단련된 부하들이라 시키지 않았는데도 앞장을 서는 것이다. 부하 한 명이 철문을 열자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다른 한 명이 철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장규식은 부하들과 함께 철문 안으로 들어섰다. 2층은 객실이었다. 삼류 호텔이라 복도에 깔린 오래된 양탄자에서는 생선 썩는 냄새와 방향제 냄새가 섞여 풍겼다. 복도 한쪽에만 방이 대여섯 개 있었는데 끝쪽 방 앞에 서너 명의 사내들이 서 있었다. 강일준이 있는 방일 것이다.

"사장님이 여기 계신가?"

다가간 장규식이 묻자 사내 한 명이 문을 열었다. 방안에는 강일준이 혼자 앉아 있었다. 문 쪽을 향한 의자에 앉아 있던 그가 얼굴에 웃음을 띠고 일어섰다.

"이거 장지배인, 오느라고 수고하셨구만"

강일준과는 여러 차례 만난 사이였고 그가 자신에게 어중간한 반말을 쓰는 것도 익숙해져 있다.

"사장님께서 몸이 편찮으십니다. 감기가 드셨지요. 그래서 제가 왔는데 이해해 주십시오."

장규식이 정중하게 말하자 그가 손을 저었다.

"상관없어, 오늘은 물건만 바꾸면 되니까. 그렇지 않소?"

"그렇지요."

장규식이 그의 앞자리에 앉고 그를 따라 방으로 들어온 세 명의 사내가 각기 그의 좌우에 벌려 셨다. 그들은 모두 조그만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한눈에 보아도 돈이 든 가방이다

"자아, 그럼 계산을 할까?"

강일준이 웃는 얼굴로 탁자 옆에 붙은 단추를 눌렀다. 그러자 강일준의 옆쪽에 나 있는 문이 열리더니 이한기가 두 명의 사내와 함께 들어섰다. 사내 한 명이 제법 커다란 트렁크를 들고 있었다.

", 이실장, 펴놓아라."

강일준의 말에 사내는 트렁크를 들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가 고리를 풀고 지퍼를 여는 동안 방안에는 짙은 침묵이 흘렀고 지퍼가 내려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사내는 가방의 배를 가르듯이 반으로 쪼개어 놓았다 활짝 열려진 가방 안에 커다란 비닐봉지에 불룩하게 담겨진 네 뭉치의 흰색 가루가 보였다.

", 살펴보게, 장지배인"

강일준이 턱으로 가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틀림없을 것이지만 확인을 해야겠지?"

장규식의 부하 한 명이 가방을 동료에게 맡기고는 탁자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조그만 병을 꺼내었는데 끝에 뾰족한 침이 나와 있었고 병에는 흰색의 액체가 반쯤 담겨 출렁거렸다. 사내는 침으로 봉지 하나의 중간 부분을 찔렀다. 흰색의 가루가 묻어 나오자 탁자 위에 뿌리고는 병의 끝을 눌러 액체를 가루 위에 한두 방울 떨어뜨렸다. 흰색 가루는 곧 파란색으로 변했다. 그것을 바라본 강일준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 이쪽은 확실한 것 같고, 어디 그쪽을 볼까?"

장규식이 머리를 들어 부하들을 바라보자 두 명의 부하가 가방을 들고 다가왔다.

"보여 드려라."

부하들은 가방을 열더니 소음기가 끼워진 권총을 꺼내어 앞쪽을 향해 겨누었다. 마약을 조사하던 부하는 재빨리 트렁크의 뚜껑을 닫으며 양손으로 트렁크를 안고 뒤쪽으로 물러났다. 강일준의 얼굴이 하얗게 되었고 이한기가 아랫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였다. 그의 옆쪽에 섰던 두 명의 부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장규식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셨다. 그의 손에도 어느덧 권총이 들려 있었다.

"너희들, 우리를 우습게 보았어."

억양 없는 목소리로 장규식이 낮게 말했다.

"이래 봐도 밤의 세계를 30년 가깝게 겪어 온 우리야. 너희들처럼 해적질에다가 강도질 등으로 지내 온 놈들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이봐, , 장지배인."

강일준이 한 손을 저었다.

"우리가 어쨌다고, 우리를 정말‥‥‥‥"

그의 부하 한 명이 와락 몸을 틀어 이쪽으로 뛰었다가 한 걸음도 떼기 전에 몽둥이로 모랫자루를 치는 소리가 두 번 들리면서 뒤로 넘어졌다. 가슴과 머리에서 피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직 서틀러. 그리고 그런 수단으로 우리 조직을 깰 수는 없어, 강일준."

장규식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다.

"네가 이 장사를 안 한다고 했지만, 네 부하들이 우리 지방조직을 건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 이봐요, 장지배인. 그것은 우리가 당신들을 도우려고‥‥‥‥"

부하 한 명의 시체가 바로 발밑에 쓰러져 있었다. 강일준은 자제력을 잃어 가고 있는 것이다.

"네놈들이 내 돈을 확인하자마자 나를 제거하고 우리 보스를 제거하기로 한 것도 안다."

바깥에서 툭탁거리는 소리가 났다. 비명 소리와 함께 무엇이 넘어지는 소리도 났다. 가방을 들고 물러섰던 부하가 바깥에 신호를 보낸 것이다. 서로 기습을 계획하였지만 먼저 한 쪽은 이쪽이다. 바깥은 곧 조용해졌다. 이쪽은 모두 권총으로 무장한 것이다.

"우리 보스의 집 주변에 7, 8명쯤 모여 있다고 하더군. 오늘 밤 네가 행불이 되면 놈들도 없어지겠지."

"이봐요, 장지배인."

"아아, 씨발, 시끄러워 죽쳤네."

이한기가 잇사이로 말을 뱉었다. 이를 악문 그는 장규식을 노려보고 있었다.

"씨발, 뒈질려면 좀 남자답게 뒈져야지."

"잘 생각했다, 이한기"

얼굴에 웃음을 띠운 장규식이 말했다

"우리가 한발 앞서는 거다, 그리 알고."

장규식의 손에 쥔 권총에서 척 소리가 났고 강일준이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면서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졌다. 그 순간 이한기의 굵은 몸이 왈칵 뒤로 누여졌다 장규식이 쓴 총알은 이한기의 배와 턱을 스치면서 지나갔고 이한기의 부하 한 명은 가슴에 총을 맞고 벽에 부딪히며 넘어졌다. 뒤로 누여지는 순간에 이한기의 머리가 뒤쪽 유리창에 맞아 박살을 내는 것도 거의 같은 순간이었다. 장규식의 부하 한 명은 이한기가 뒤로 넘어지는 것이 장규식의 총에 맞은 것으로 착각했으므로 그 순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이한기의 등이 창틀에 걸렸다. 그를 향해 세 명의 총에서 불꽃이 튀었으나 탁자를 끼고 있었고 이한기의 몸은 뒤로 누여진 상태였다. 그의 다리가 번쩍 위로 치켜들린 순간은 세 명이 제각기 조준을 잡으려는 순간이다. 다리가 아래쪽으로 휘어지는 순간을 장규식이 잡아 방아쇠를 당겼는데 그의 눈에 이한기의 허벅지가 뒤쪽에서 뚫리는 것이 보였다. 이한기는 뒤집혀서 아래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장규식이 탁자를 뛰어넘어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정원으로 떨어진 이한기가 몸을 굴리는 것이 보였다. 옆쪽의 바위를 향해서였다. 장규식은 그를 향해 연거푸 방아쇠를 당겼다.

 

 

 

6. 밀항자

방에 들어선 이자영은 박주경 앞으로 다가갔다.

"부회장님, 부르셨어요?"

서류를 들여다보던 그가 머리를 들었다.

"거기 앉아."

턱으로 가리키는 소파에 가서 앉자 박주경이 책상에서 일어나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는 진한 붉은색 바탕에 검정무늬가 있는 넥타이를 매고 있었는데 이자영이 사준 것이다. 넥타이에서 시선을 뗀 이자영은 탁자 위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어쩐지 그가 뜸을 들이고 있다. 무엇인가 중요한 이야기를 꺼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자영씨, 난 이자영씨를 남으로 생각하지 않아. 그건 알고 있지?"

박주경이 입을 열었다. 그녀가 시선을 올리자 박주경이 얼굴을 펴며 웃어 보였다.

"어떻게 보면 우리 둘이서 일성그룹을 운영해 나간다고 볼 수도 있어."

"내가 이자영씨에게 많이 의지했고."

맞는 말이었다. 이제는 그렌드 호텔의 특실이 그들의 집처럼 여겨졌고 일주일에 적어도 사나흘은 그곳에서 보낸다. 아이 때문에 박주경은 꼭 집에 들어가지만 이자영은 그곳에서 회사로 출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자영은 이제 자신이 박주경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

고영무 사건을 계기로 일성전자의 김학래 사장은 사표를 냈다. 고영무를 일성의 얼굴로 삼으라는 그의 판단이 박재룡 회장에게도 알려졌으므로 변명할 여지도 없었던 것이다. 그 일이 아니더라도 대표자는 책임을 져야만 했다. 오탁근 부장은 박주경의 라인이므로 견책을 받는 것으로 구제되었으나 이태규 과장은 대기발령을 받은 후에 사표를 내야만 했다. 조정수 대리는 더 비참하게 되었다. 고영무의 직속상관이었으므로 해임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박주경에게는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김학래 사장과 동생인 건설의 박인경 사장의 연합이 차단된 것이 장래를 위해서 제일 값진 소득이 될 것이다.

"회장님은 지금 연세가 예순셋이야, 아직도 한창 일할 나이시지. 누구는 앞으로 20년은 끄떡없다고도 해."

박주경이 말을 이었다.

"우리 그룹을 위해서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야. 회장님이 안 계시면 나 혼자로는 도저히 감당해내지 못해."

"회장님이 내년부터는 그룹의 사장단 회의를 직접 주재하시기로 했어."

이자영이 머리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올해부터 박재룡 회장은. 사장단 회의를 박주경에게 맡겼고 특별한 경우에만 그가 직접 회의를 주관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가 다시 그룹을 통괄하겠다는 의미였고,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박주경을 믿지 못하겠다는 뜻이 된다.

"너무하세요."

이자영이 불쪽 입을 열었다.

"이제까지 잘 해오셨지 않아요? 올해의 매출액이 줄어든 것도, 이익이 줄어든 것도 아닌데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유가 뭔지 물어보셨어요?"

박주경이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그는 이자영의 반발을 기다리고 있었던 눈치였다. 이자영의 격한 말투에도 놀라지 않고 잠자코 있는 것으로도 증명이 되었다. 또한 머리를 젓는 태도에는 박재룡 회장에 대한 강한 불만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소문난 효자였고 이제까지 한 번도 아버지의 뜻을 거역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사원들은 박주경을 2세 후계자가 아니더라도 전문경영인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이해가 안 가. 내가 아직 경륜이 부족한 탓인 것 같아. 발도 넓지 못해서 정계나 관계의 인맥은 모두 회장님과 통하거든."

박주경이 박자 위에 놓인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룹의 제2 도약 정책이 마음에 걸리셨는지도 몰라."

일성그룹의 제2 도약 정책이란 박주경이 비서실에 지시하여 연초부터 기획해 온 내년부터 실행하기 위한 정책이다. 일성그룹은 내년부터 5년간 그룹을 재조정하여 고부가가치 품목인 전자와 반도체 사업을 확장하고 기업의 전문성을 높이기로 했던 것이다. 따라서 축소되는 부분이 있다. 서너 개의 사업체가 흡수 또는 통합될 것인데 박주경은 자신의 지분을 그 기회에 늘일 예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현재희 그룹 전체의 지분율이 박재룡 50, 박주경 30, 박인경 20에서 박재룡 35, 박주경 55, 박인경 10으로 재조정이 된다. 박주경은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이것은 나와 박실장 둘만이 아는 구상이었어. 회사를 위해서는 과감히 사업체 전문화가 되어야 하고 또 나는 어차피 그룹의 상속자야. 그래서 자연스럽게 생각했지."

그의 구상을 간략하게 설명한 박주경이 말했다.

"회장님의 뜻을 알 수가 없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다시 나서시려는 건지. 회장님이 나서시면 내 제2 도약 정책은 백지화될 가능성이 커."

"이자영씨, 날 도와줘야겠어,"

"어떻게요?"

눈을 깜박이며 이자영이 그를 바라보았다. 상체를 반듯하게 세우고 온몸을 긴장시키고 있다. 박주경의 꿈은 이제 자신의 꿈이고 미래인 것이다.

 

출국장 앞에서 몸을 돌리자 김영지의 눈에 민기철을 중심으로 모여있던 10여 명의 교민들의 얼굴이 보였다.

"어머니 모시고 꼭 돌아오너라 잉?" 하고 나주댁 아줌마가 소리쳤고, "이봐요! 영지 엄마! 꼭 전화해야 돼!" 하는 아좀마와, "영지야! 너 빨리 와야 돼!"하고 김영지의 친구가 소리쳤는데, 그 외의 소리들은 잘 들리지가 않았다. 갑자기 눈앞이 흐려졌으므로 김영지는 그들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어머니를 돌아보았더니 표정 없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다. 그것을 바라보던 저쪽에서 마침내 서너 명의 여자들이 울음소리를 내었고 출영객의 대부분이 여자인 그들은 한꺼번에 울음을 터뜨렸다. 민기철써가 소매로 눈을 닦는 것이 보였다. 김영지는 어머니의 팔을 끼고는 그들을 향해 다시 머리를 숙였다. 울음소리를 등 뒤로 하고 김영지는 어머니를 부축해서 세관으로 들어섰다. 이제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엄마, 외삼촌들 만나고 다시 돌아와도 돼. 그건 엄마 맘대로야."

여권 심사를 받으려고 잠깐 서 있는 사이에 김영지가 말했다.

"아버지와 오빠 묘소는 사람들이 돌봐주기로 했어, 걱정하지 말고."

"아버지와 오빠 영혼은 언제나 엄마 옆에 있을 거야, 가장 아끼는 사람을 따라다닌대, 영혼이."

스스로 생각해낸 것이었으나 김영지는 그것을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어머니의 애착이 강하다고 믿었으므로 그것은 어머니의 몫이다.

"엄마, 민씨 아저씨 좀 봐. 그 아저씨도 사고로 외아들을 잃었지만 견디어내잖아?"

민기철은 및 년 전에 자동차 사고로 아들을 잃었다. 호세 김과 어머니는 그를 위로하려고 카르타헤나에 일주일이 넘게 내려가 있었다.

"엄마가 기운 차려야지. 안 그러면 내가 어떻게 될지 알고 있어?"

이것은 위협이다. 모든 방법을 쓰고 있었으므로 어머니는 머리가 혼란스러울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힐끗 김영지를 바라보았다가 머리를 돌렸다. 비행기 시간이 남아 있었으므로 그들은 대합실의 의자에 나란히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김영지가 손을 뻗어 어머니의 손을 쥐었다. 이제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은 둘뿐이라는 외로움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혈육을 찾으러 가지만 그들은 제각기 처자식이 있다. 사람은 낳고 성장하면 또다시 분열을 일으켜 낳는다. 그 낳고 태어나는 그 두 관계가 가장 밀접한 관계인 것이다. 어머니는 이미 자신의 계열과 위쪽의 단계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자신이 낳은 자식과 일생을 같이하던 남편을 거의 동시에 잃었다. 김영지는 어머니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엄마, 기운 내, 엄마."

이제까지 참아 왔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자 그것은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다. 갑자기 어머니가 가방을 잡더니 손수건을 꺼내어 들었다. 그리고는 김영지의 얼굴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엄마."

와락 어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김영지가 소리를 내어 울었다. 어머니의 가슴은 말랐으나 따뜻했다. 그녀의 손이 자신의 등을 어루만지는 것이 느껴졌다.

"울어라, 실컷."

어머니가 속삭이듯 말했다. 요 며칠 동안에 처음 듣는 어머니의 말이었다. 어머니에게 한국에 가서 지내자고 하자 그녀는 반대하지도 그렇다고 가겠다고 말하지도 않았었다. 벙어리가 된 듯 말을 잃었던 어머니였던 것이다.

"영지야, 실컷 울어라. 나는 울 수가 없단다. 소리를 지를 수도 없어. 그러면 죽은 네 아버지나 강남이한테 죄를 짓는 것 같아서 그러니까 네가 나 대신 실컷 울거라."

어머니가 등을 손으로 토닥거리며 다시 속삭이듯 말했다.

 

깁슨 호텔은 다운타운의 12번 도로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알폰소의 말을 들으면 다섯 구역만 가면 컨벤션 센터가 나온다고 하였으나 고영무로서는 12번 도로건 2번 도로건 또는 컨벤션 센터나 링컨 센터나 의미가 별로 없었다. LA에 도착해 있는 것이 중요했고 어느 지명을 이야기해도 처음 온 곳이어서 생소했기 때문이다. 창밖의 날씨는 화창했다. 밝은 햇볕을 받아 빌딩의 유리창이 반짝였다. 커튼을 내린 고영무는 응접실로 돌아왔다. 머리에는 깨끗한 붕대가 감겨 있었는데 오늘 새벽에 호텔에 도착하고 나서 의사의 치료를 받았던 것이다. 다행히 총알은 뼈를 스치지 않았으므로 꿰매기만 하면 되었다. 늙은 의사는 전쟁터의 군의관처럼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상처를 치료해 주었는데 치료비는 현금으로 5백 달러를 가져갔다. 그러나 상처를 꿰맨 것만으로도 온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소파에 앉은 고영무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다이얼을 누르고 난 그는 수화기를 고쳐 잡고는 상체를 반듯이 세웠다. 신호가 가자 곧 저쪽에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영무가 눈을 치켜떴다.

"아니, 너 영철이 아니냐?"

"아아, !"

저쪽에서 소리치듯 말을 받았다.

"! 형 아냐?"

"그래, 나다. 네가 집에 와 있구나."

"!"

갑자기 고영철이 흐느껴 울었으므로 그는 어금니를 물었다.

"야 임마, 울지 마, 사내자식이."

고영철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섬세한 성격이었고 어렸을 때부터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수채였다. 아마 한 번도 부모의 속을 썩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난 잘 있으니까 걱정 말아. 부모님은 건강하시냐?"

고영철이 그가 말하자 전화기에서 끅끅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겨우 말했다.

",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어머니 장례를 치렀어. 살해당하셨어."

고영무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누구한테? 도대체, ?"

목 안이 메말라 왔고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아래쪽으로 한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영철아! 도대체 무슨 일이야!"

갈라진 목청으로 그가 다시 물었다.

"어떤 놈들이 테이프를 찾으러 와서는 아버지를 묶어서 고문하고 어머니한테 이불을 뒤집어씌워서‥‥‥‥"

"테이프?"

"그놈들은 최 누군가를 찾았다고 그래. ,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이제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고영철이 소리쳐 물었다.

"형이 최 뭐라는 사람을 저쪽 아파트에 살게 했다면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단 말이야."

고영무는 천천히 소파에 다시 앉았다.

"아버지는, 아버지는 괜찮으시냐?"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묻자 고영철의 거친 숨소리만 들려왔다.

"아버지는 방에 누워 계셔."

이윽고 고영철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려."

그리고는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고영무는 눈을 껌벅이며 벽 쪽에 시선을 주었다. 최대광과 신용만의 얼굴이 머리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어머니의 얼굴은 생각나지 않는다.

"여보세요, 영무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고영무는 어금니를 물었다. 눈은 찢어질 것같이 치켜뜨고 턱을 올린 모습이 되었다.

"몸은 건강하냐?"

아버지의 목소리는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영철이한데 들었구나. 그래, 돌아가셨다. 조금 아프셨는데."

"고통이 길지는 않았다. 다행이다."

"년 지금 어디에 있냐?"

"아버지 저는 지금 LA‥‥‥‥"

"됐다."

아버지가 그의 말을 잘랐다.

"난 그 신부님에게 너를 믿는다고 했다. 들었느냐?"

", 아버지."

"널 그렇게 만든 사람들을 결코 용서하지 말라고도 했다. 들었느냐?"

", 아버지."

"이곳 걱정은 말아라."

"아버지."

고영무가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최대광이나 신용만이한테서 연락이 오면 제가 LA에 있다고 전해 주십시오. 연락처는 일성그룹 LA 지사에 있는 박정환 앞으로."

"알았다."

"아버지,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으면 안 된다."

고진호씨가 자르듯 말했다.

"부모를 생각한다면 살아라."

수화기를 내려놓은 고영무는 두 팔을 무릎 위에 없고는 벽 쪽을 바라보았다. 관자놀이의 상처가 맥박과 함께 큰소리를 내면서 뛰었다. 어금니를 꽉 물고는 턱을 내밀고 눈을 한껏 치켜뜬 모습 그대로 그는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담배 한 대 태우겠소?"

담뱃갑을 내밀자 검은 피부의 사내가 담배를 한 개비 빼더니 입에 물었다. 지미는 라이터를 켜서 그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걱정할 것 없어요. 내가 손을 쓴다면 이곳에 몇 개월 더 있도록 할 수도 있으니까 잘하면 수용소 밖으로도 나을 수 있지."

사내가 연기를 내뿜다가 재채기를 했다.

"세뇨르,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사내의 검은 눈동자가 지미와 시선이 마주치자 탁자 위로 내려졌다.

"이봐요, 당신들은 미국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미국 시민이 되고 싶어서 밀항해 왔을 텐데. 나한테 본 것만 이야기해 주면 돼요. 그러면 내가 당신의 공로를 인정해 줄 테니까."

지미가 그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사내는 담배를 힘껏 빨아들이더니 아끼는 듯이 천천히 연기를 내뿜었다.

"당신은 행운아야, 마르코. 잘하면 지겨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아도 돼."

사내는 오늘 새벽에 샌디에이고 북쪽 해변에서 붙잡힌 50명에 가까운 밀항자의 하나였다. 그들은 모조리 잡혀서 LA 근교의 밀항자수용소에 갇히게 된 것이다.

"그 배가 산호세호라는 것은 알겠고. 배에 탔던 밀항자들은 모두 잡힌 거요?"

지미가 묻자 사내가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세뇨르. 한국인 한 명이 탔는데 악마 같은 놈이었지요. 그놈이 우리 배에는 타지 않았습니다."

담배를 꺼내려던 지미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럼, 그놈은 아직도 산호세호에 타고 있단 말이오?"

"모릅니다, 세뇨르."

산호세호는 샌프란시스코 근해로 다가갔다가 연안 경비정에 나포되어 지금 LA로 끌려오는 중이다. 피터에게 연락하면 바로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마약을 운반한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소? 당신 일행이나, 아니면 배의 선원들이 말이오."

사내가 머리를 저었다.

"모릅니다. 그런 것은 우리들 같은 사람에게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습니다."

밀항자들의 몸과 짐을 샅샅이 수색하였지만 마약은 찾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산호세호가 LA에 입항되면 수색은 해보아야 할 것이다.

"됐소, 마르코. 당신 이름을 적어 놓겠소. 곧 다시 올 테니까."

지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사내가 따라 일어셨다.

"세뇨르, 꼭 기억해 두십시오. 난 콜롬비아에 다시 돌아가기는 싫습니다."

"알았소."

입맛을 다신 지미는 면회실을 나왔다. 산호세호에서 빠져나온 밀항선이 검거된 것은 연안경비대의 잘난 레이더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LA 시내에서 걸려온 전화 제보를 받고 출동했던 것이다. 제보자가 신원을 밝히지 않았으므로 피터 그린피트는 슬그머니 연안경비대의 레이더로 공로를 돌리고 있었다. 마르코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 레이더건 제보건 간에 이번 배의 밀항자들은 재수가 없었다. 지미는 차에 올라 수용소를 빠져나왔다. 사무실로 들어서자 앨버트는 마악 자리에서 일어선 참이었다.

"보스, 어디 가십니까?"

지미가 묻자 앨버트가 눈을 부릅떴다.

"지미, 산호세호가 들어온다. 그 빌어먹을 놈의 배를 샅샅이 뒤져야 돼."

"그렇지요."

"넌 안 갈 거야?"

문을 열고 나가려던 앨버트가 몸을 돌렸다.

"수용소에서는 성과가 있었어?"

"없었습니다."

지미가 머리를 저었다.

"산호세호에 가시면 석탄 속에 한국 놈이 있는가 찾아보세요. 난 사무실에 일이 있습니다."

"한국 놈이라니?"

"한국 놈 하나가 산타마르타에서 탔는데 밀항자 속에는 끼어 있지 않았어요."

"물에 빠져 죽은 게로군."

앨버트는 사무실에 남아 있던 대원들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지미는 책상 위에 두 다리를 올려놓고는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다이얼을 누르자 교환이 나왔다.

"사라, 한국 영사관을 바꿔줘, 지급으로."

허리를 틀어 종이를 끌어당긴 지미는 호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들고 적을 준비를 했다.

 

다운타운의 꽃시장 입구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박정환이 다가오는 고영무를 보자 입을 쩍 벌렸다.

"야아, 이것."

그가 고영무의 손을 잡았다.

"언제 여기에 도착한 거야?"

"이틀 되었어."

그들은 사람들을 헤치고 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이것, 배를 탈 때 다친 거야. 신경 쓰지 마라."

머리에 동여맨 붕대를 만지면서 고영무가 입술 끝을 올렸다.

"넌 일 잘하고 있지?"

"나야, ."

그와 나란히 걸으면서 박정환은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꽃시장은 처음이었으나 고영무가 앞장서서 시장 구석에 놓여 있는 국화 화분 쪽으로 다가갔다. 서너 개의 플라스틱 의자가 길 쪽을 향해 놓여 있었던 것이다.

"불안해하지 마라. LA에 아는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찾아왔지만, 네가 싫다면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 테니까."

고영무의 말에 박정환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도 남자야. 친구가 곤경에 빠졌는데 도와줘야지."

"나하고 만나는 것 누가 보면 네가 힘들어져. 회사 문제도 있고."

"서울에서 최대광이나 신용만이라고, 그 둘 중의 하나가 너한테 연락을 할 거야. 그러면 네가 그들의 전화번호를 적어 놔줘. 내가 연락할 테니까."

입을 열려던 박정환이 앞을 지나가는 동양인 서너 명을 보더니 입을 닫았다. 그들은 건너편의 홀로 들어섰다.

"네 연락처는 없어?"

그가 묻자 고영무가 머리를 저었다.

"있지만 말 못 한다. 그리고 너도 모르는 것이 좋아."

"그리고 참, 어머님 얘기, 나는 나중에 들었는데, 정말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맙다."

고영무가 그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난 황금의 땅에 들어갔었지, 피를 묻히고 나왔지만 황금 줄기는 보았어. 거기서 만난 신부님한테 들었는데 옛날에 개척자들이 엘도라도에 발을 딛고 나면 꼭 무엇인가를 본다는 거다. 황금도 보고, 지옥도 보고, 또는 하다못해 자기 자신도 본다는 거야. 나는 모든 것을 보았어."

박정환이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는데"

고영무가 말을 바꾸자 박정환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말해 봐."

"20일 전에 콜롬비아의 카르타헤나를 떠난 이오니아 호가 있어. 그 배에 수취인이 LA의 스들웰로 되어 있는 컨테이너가 있을 거다. 그것을 어디로 가져갔는가 알아봐 줘. 세관의 컴퓨터에 기록되어 있을 거야."

"그거야 회사에서 컴퓨터로 연결해 보면 알 수 있지, 네가 재고품 판 것 아니야?"

"그래."

"그땐 회사가 떠들썩했다던데."

"‥‥‥"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김사장하고 이과장, 조대리가 모두 회사를 그만두었어. 널 엿 먹인 놈들이 싹쓸이 당한 거지."

"이자영이 그년은 출세했지. 이제는 회장의 수행비서가 되었다."

"혹시 수사기관에서 조사 나올지도 몰라. 조심해라. 나도 앞으로는 널 귀찮게 하지 않겠지만."

앞쪽을 바라보며 고영무가 말했다.

"아아, 씨발, 엿 먹으라고 해."

박정환이 머리를 들고 소리치자 앞을 지나던 사람들이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년 여기에서는 밀입국자일 뿐이야. 콜롬비아 경찰이 잡으러 올 수는 없어."

"앞으로 뭘 할 거야? LA에 계속 있을 거냐?"

"여기서 할 일이 있어"

"돈은 있어? 내가 조금 준비해 왔는데,"

박정환이 코트 주머니에서 봉투 한 개를 꺼내어 내밀었다.

"2천 달러야, 내 돈하고 매형 가게에서 탈탈 털어 가지고 온 거야."

고영무가 머리를 끄덕이며 봉투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며칠 후에 갚지, 이자 쳐서."

"안 줘도 좋아."

박정환이 머리를 저쪽으로 돌렸다.

"그럼 난 간다."

고영무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 박정환이 서두르듯 따라 일어섰다.

", 어디 가서 술이라도 한잔, 아니면 저녁이라도 하자."

이제 박정환은 긴장이 풀려 있었다.

"할 일이 많아"

고영무가 손을 내밀며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고맙다, 박정환."

그의 손을 잡은 박정환이 고영무를 바라보았다.

"고영무, 너 정말 그랬니?"

한동안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고영무가 머리를 젓고는 몸을 돌렸다.

 

술잔을 들어 한 모금을 삼킨 알폰소가 고영무를 바라보았다.

"나는 첫눈에 당신을 알아보았지. 그래서 배에서 당신과 말할 기회를 찾았는데 산체스가 만들어 주지를 않더구만."

그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산체스는 돈에 팔려서 당신을 그 한국인에게 넘겼지요?"

"어쨌든 대단했어요. 산체스의 부하들도 보통내기들이 아닌데 놈들을 눕히고 돌아온 당신의 모습에 모두들 숨이 막혔지요."

알폰소는 다시 한 모금 술을 삼켰다. 밖에서 돌아오던 고영무는 호텔 앞에서 그를 만났다. 알폰소도 시내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호텔 식당에서 같이 저녁을 먹고 알폰소의 초대로 그의 방에서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 당신은 LA에서 무엇을 할 작정입니까?"

빈잔에 술을 따르며 그 물었다. 얼굴이 술기운에 젖어 붉은빛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돈을 벌 거요."

탁자 위에 놓인 술잔을 들면서 고영무가 말했다.

"황금 줄기를 찾았으니까."

"그래요.?"

알폰소가 빙긋 웃었다. 무성한 콧수염 아래에 희고 가지런한 이가 드러났다.

", 당신은 내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고영무가 머리를 들었다.

"당신이 알폰소라고 했지 않아요?"

"난 군인이오."

군인이건 경찰이건 간에 밀항선을 타고 온 것을 보면 콜롬비아에서는 줄이 떨어진 사람이다. 관심이 없었으므로 고영무는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난 일 년 전만 해도 카스틸로의 참모장이었소. 준장이었지,"

알폰소의 시선이 고영무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카스틸로가 쿠데타를 일으킬 때 날 출장을 보냈어. 왜냐하면 내가 라파엘 대통령 측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베네수엘라에서 부랴부랴 돌아와 보았더니 이미 카스틸로가 정권을 쥐었더군. 라파엘 대통령은 밀림으로 숨었고, 내가 귀국했다는 정보를 듣고 카스틸로가 날 잡으려고 군대를 보냈다고 해요. 그래서 난 밀림으로 라파엘을 찾아갔습니다."

"나는 생각지도 않았던 라파엘 측의 게릴라군 사령관이 된 거묘."

고영무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그에게서 군인의 분위기가 풍긴다. 모터보트에서도 한국군 이야기를 한 것도 기억이 났다.

"그런데 LA에는 무슨 일입니까?"

고영무가 묻자 그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탁자 위의 위스키병은 비어 있었다.

"미국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으러 온 겁니다. 그 돈으로 필요한 것도 구입해야 하구요."

한 모금에 위스키를 삼킨 고영무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미국은 카스틸로 정권을 지지하고 있었다. 라파엘의 게릴라가 미국의 지원을 받는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미국 정부가 당신을 말입니까?"

"그렇소, 우리를 말이오."

알폰소가 고영무의 말을 흥내 내듯이 말했다.

"카를로스가 카스틸로나 우리 측 양쪽을 주무르고 있듯이 미국도 카스틸로와 우리를 주무르고 있지요."

"미국은 카를로스를 잡아먹고 싶겠지만 어려운 일이지. 남의 나라에 군대를 보낼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양쪽에 지원을 해주지. 어느 한 쪽에만 지원을 하면 다른 쪽은 금방 카를로스와 연합할 테니까. 그땐 미국과 카를로스를 등에 업은 세력들의 전쟁이 일어납니다."

알폰소가 머리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미국 대통령은 미군의 희생을 원치 않아요. 선거에 영향이 많으니까요."

"알폰소씨, 그런 이야기를 나에게 해주는 이유는 뭡니까?"

고영무가 소파에서 등을 떼며 물었다.

"당신은 털어놓아도 안전한 것이 첫째요. 왜냐하면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는 신분이기 때문이지. 둘째는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오, 미스터 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알폰소의 얼굴은 진중했다.

"나는 당신을 우리 일의 대리인으로 만들고 싶소. 내가 이렇게 밀항선을 타고 오갈 수는 없는 노릇이오, 미스터 고."

 

"30분 후에는 도착할 겁니다."

시계를 들여다본 매린이 말했다.

"조금 전에 크라우스의 부하한테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페르난도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창고 안에는 여남은 명의 부하들이 모여있었다. 창고 밖에도 열 명 남짓 있을 것이다. 넓은 창고는 한순간 정적에 싸였다.

"매린, 짐을 가져와."

페르난도의 말소리가 창고를 울렸다. 매린이 몸을 돌리자 서너 명의 부하들이 뒤를 따랐다. 축구장만 한 크기의 창고여서 나무상자들이 쌓여 있는 사이를 걸어 지하실로 내려가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의 아래쪽에는 기계실이라고 쓰인 간판이 보였다. 창고의 온습도를 조절하는 보일러가 작동되는 곳이다. 그들은 보일러실 안쪽에 있는 철문을 열었다.

"꺼내라."

매린이 턱으로 안쪽을 가리키자 부하들이 허리를 숙이고는 철문 안으로 들어섰다. TV 박스에서 꺼낸 마약은 모두 다섯 개의 트렁크에 담겨져서 이쪽에 보관되어 있다. 설령 마약반이 창고를 조사한다고 하더라도 보일러실의 연료탱크 옆쪽에 비밀 창고를 만들어 놓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부하 한 명이 짐차를 끌고 와 계단의 입구에 세워 놓았다. 그들은 트렁크를 끌고 계단을 올랐다. 이제 20분이면 크라우스가 도착할 것이다. 크라우스는 크링거의 오른팔로서 잘생긴 녀석인데, 그와는 지난번에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할리우드의 배우 같은 용모에 옷을 맵시 있게 입었고 몸에서는 향수 냄새가 풍겼다. 이번에는 크링거가 자기 대신 그를 보내 거래를 마칠 모양이었다. 크라우스는 휴대폰을 꺼내어 스위치를 눌렀다. 승용차는 하모사 비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여보세요."

사내의 음성이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

"난데, 20분 후에는 도착한다."

할 말만 하고는 휴대폰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거리에는 밤을 즐기려는 인파들이 도로를 메우고 있었다. 열 시 사십 분이면 그들에게는 이른 시간일 것이다. 휴대폰의 벨이 울렸으므로 그는 창에서 시선을 떼었다.

"여보세요."

"크라우스, 나다."

크링거의 목소리였다.

", 보스."

"도착했느냐?"

"아닙니다, 10분쯤 후면 도착합니다."

"일 마치면 곧장 롱비치로 내려가. 조를 보냈으니까."

크라우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보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갑자기 조를 보내시다니요?"

본래 다섯 대의 리무진에 짐을 싣고 제각기 창고를 나오면 호위 차량 한 대와 짝을 이루어서 다섯 방향으로 흩어지게 되어 있다. 만일에 대비해서 한꺼번에 물품을 옮기지 않으려는 계획이었는데 조를 보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조는 헬리콥터의 조종사인 것이다.

"계획은 그대로 진행하라. 신경 쓸 것 없다"

이번에는 크링거가 제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크라우스는 좌석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이번의 물량은 이제까지 거래해 왔던 물량의 다섯 배나 되었다. 크링거는 있는 돈을 모두 끌어모았고 뉴욕과 라스베가스의 마피아들한테서까지 돈을 빌렸던 것이다. 다섯 배쯤은 못 되더라도 그가 전보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크라우스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5분 전이었고 앞쪽에 거대한 머스키 회사의 창고가 보였다.

페르난도가 술잔을 들고 와 크라우스에게 건네주었다.

"크라우스씨, 크링거씨를 만나지 못해서 유감이라고 전해 주시오."

"그렇게 전하지요."

잔을 받은 크라우스는 잔을 든 손을 조금 올려 보였으나 입에 대지는 않는다.

"요좀은 단속이 심해서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습니다. 더구나 생산량도 줄어들고 있어서 말이오."

페르난도가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들은 창고 2층의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아래충의 창고에서는 부하들이 제각기 마약과 돈을 확인하고 있을 것이다. 크라우스는 탁자 위에 술잔을 내려놓았다.

"이곳도 마찬가지입니다, 폐르난도씨. 우리는 정량을 일정 기간의 간격을 두고 공급받고 싶었는데, 이렇게 부정기적으로 오는 데다가 한꺼번에 물량이 쏟아지면 위험합니다."

크라우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보스는 카를로스씨와의 친분을 생각해서 아무 소리 안 하셨지만 실무자인 저희들은 애로가 많습니다."

"잘 알고 있소. 크라우스씨,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지요."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매린이 들어섰다.

"페르난도, 이제 끝났습니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셨다. 아래쪽의 창고에는 20명 남짓한 사내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각기 가방들을 꾸리는 것이다. 크라우스가 가져온 가방들은 페르난도의 요구대로 지폐가 많았으므로 트렁크로 다섯 개가 넘었다. 50달러, 1백 달러, 1천 달러짜리 지폐 뭉치들이 가방에 다시 넣어졌는데 그 액수는 1억 달러가 조금 넘었다. 나머지 금액은 스위스의 비밀금고에서 카를로스한테로 지급될 것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던 페르난도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맛살을 찌푸린 그가 크라우스와 매린을 돌아보았다.

"헬리콥터 소리 아닌가?"

"그렇습니다, 페르난도. 우린 헬리콥터로 나르기로 했습니다."

"이봐요, 크라우스.그렇다면 진작 이야기를 해줬어야지. 밤에 헬리콥터가 착륙한다면 놈들의 눈에 금방 띌 것 아니오?"

크라우스가 머리를 저었다.

"저건 경찰 헬리콥터입니다. 눈에 띄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요."

매린이 눈을 치켜뜨고 그를 향해 계단을 한 걸음 내려섰고 페르난도는 잠자코 크라우스를 바라보았다. 크라우스가 빙그레 웃었다.

"우리가 필요한 때 빌리는 경찰 헬리콥터이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조종사는 내 부하니까요."

그들이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창고 문이 열리고 차량 두 대가 후진해서 들어왔다. 크라우스의 부하들이 분주히 트렁크를 차에 싣는다. 활짝 열린 창고의 뒤쪽에 헬리콥터가 내려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프로펠러의 바람이 이쪽으로 몰려와 창고 속의 종이 부스러기들을 천장으로 날렸다.

", 그럼, 페르난도씨"

손을 내밀며 크라우스가 말했다.

"무사히 귀국하시기 바랍니다."

"당신도, 크라우스씨"

크라우스가 매린을 향해 입술 끝으로 웃어 보이고는 승용차 쪽으로 다가갔다. 기다리고 있던 승용차에 오르자 맹렬한 소리를 내며 차는 달려 나갔다.

"창고 문을 닫아라."

페르난도가 바람에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리고 창고 안의 불을 꺼라"

매린은 앞쪽의 헬리콥터를 바라보았다. 경찰의 마크와 기장이 새겨진 대형 헬리콥터에 크라우스가 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문이 닫히자 헬리콥터는 기우뚱거리면서 몸을 들어 올렸다. 크라우스의 부하들이 분주히 차에 오르는 것도 보였다. 그러자 창고의 거대한 셔터가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가죽점퍼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고영무는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간이음식점이었는데 카운터에 앉아 있던 비대한 체격의 백인이 힐끗 그를 바라보고는 머리를 돌렸다. 창가의 자리에 앉자 종업원이 다가왔다.

"뭘 드릴까요?"

"치즈버거하고 콜라, 그리고 커피."

여자 종업원은 잠자코 몸을 돌렸다. 가게에는 늦은 아침이어서인지 손님이 한 사람도 없다. 고영무는 창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길 건너편에 시멘트로 지은 거대한 창고가 보였다. 건물 앞에 세워진 컨테이너 트럭들이 조그맣게 보일 정도로 큰 건물이었다. 노란 헬멧을 쓴 인부들이 분주하게 창고를 들락거리고 있었다. 옆에서 인기척이 들렸으므로 고영무는 머리를 돌렸다. 종업원이 그의 앞에 음식을 내려놓았다. 회색빛 머리칼이 어지럽게 엉겨 있는 마른 여자였다.

"저 마담, 저기가 머스키 회사의 창고인가요?"

고영무가 묻자 그녀가 머리를 들었다. 하늘색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간판에 씌어 있잖아요? 저기."

그녀가 턱으로 가리키는 글자는 이미 읽었다.

"난 읽지를 못합니다."

허리를 세운 여자가 담담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내 사촌이 저곳에서 일을 한다고 해서 찾아왔는데,"

"그래요? 당신은 중국인?"

"잘 맞히시는군요."

"중국인들이 꽤 있어요. 점심때면 여기로 몇 명 올 테니까 그들에게 물어봐요."

"고맙습니다, 마담"

"천만에요."

여자는 턱을 세우고 몸을 돌렀다. 어깨와 엉덩이의 사이즈가 비슷한 몸매였는데 걸음이 갑자기 부자연스러워졌다.

머스키의 창고에는 쉴새 없이 트럭과 컨테이너가 들락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회사 앞 정문에서 일단 멈춘 다음에 경비원의 확인을 받은 다음에 들어가고 나왔다. 가끔씩 들어서는 승용차도 마찬가지였다. 머리를 돌린 고영무는 생각난 듯이 앞에 놓인 햄버거를 집어 들었다. 가게의 문이 열리더니 장신의 백인이 들어섰다 30대 중반쯤으로 보였고 노타이셔츠에 체크무늬의 윗도리를 걸친 사내였다. 그는 가게 안쪽을 한번 휘둘러보았는데 고영무의 얼굴에 잠깐 멈줬던 시선이 곧 비껴 나갔다. 카운터 옆쪽에 앉은 그에게 여자가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남자의 주문을 적으면서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햄버거는 의외로 맛이 있었으므로 고영무는 한 개를 깨끗이 다 먹었다. 콜라잔을 들고 창고 쪽에 시선을 주고 있는데 앞쪽에 앉았던 사내가 일어서더니 이쪽으로 다가왔다.

"여기 앉아도 되겠소?"

그의 앞에 멈춰선 사내가 앞자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고영무가 가게 안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스무 평쯤 되어 보이는 가게에 손님은 그들 둘밖에 없었다. 카운터의 뚱보와 여자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는 고영무가 싫은 시늉을 하였는데도 의자를 밀고는 앞자리에 앉았다.

"이 집 햄버거는 맛이 있어요. 그래서 가끔 지나는 길에 한 번씩 들릅니다."

부스스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어올리면서 사내가 말했다. 고영무는 잠자코 콜라잔을 입에 대었다.

"당신, 머스키의 창고에 일이 있다면서요? 사촌이 있다고 그랬습니까?"

고영무가 머리를 끄덕이자 사내가 빙그레 웃었다.

"당신, 한국인 아닙니까? 이름은 미스터 고이고, 콜롬비아에서 밀항해 왔지요?"

고영무가 손에 쥐고 있던 콜라잔을 천천히 탁자 위에 내려놓자 사내가 머리를 저었다.

"난 당신을 어떻게 할 생각이 없습니다. 내 권한도 아니고 그런 일에는 취미도 없어요. 내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마약이지요."

그가 찬찬히 고영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난 지미 굴드라고 합니다. 마약부의 LA 지부 소속이오."

"당신이 마약을 가지고 있다면 체포해야지요. 그러나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더 큰 정보를 준다면 당신을 모른 척하겠습니다. 난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오."

"당신은 운이 나쁜 점도 있고 좋은 점도 있어요, 미스터 고."

지미는 다시 입술 끝을 비틀며 웃었다. 그러나 시선은 잠시도 고영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운이 나쁜 것은 당신이 밀항선을 타고 이쪽으로 온다는 정보가 해당국인 콜롬비아 정부가 아니라 당신네 대사관에서 이쪽 영사관으로 연락 온 일이지. 그래서 내가 알게 되었고. 콜롬비아 사람들은 바쁜 사람들이라‥‥‥‥"

"... "

"운이 좋은 것은 경찰이 아니라 우리에게 연락이 된 것이지.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을 만난 것이 그것이오."

고영무가 손을 뻗어 다시 콜라잔을 쥐고는 서너 모금 마셨다.

"당신이 마약과 관계가 있다고 그러던데 당신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구요. 이용당했다고 말이오."

지미가 끈질기게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별것 아닌 줄 알았어. 그런 신고는 하루에 열 번도 넘게 받으니까. 그런데 밀항자 속에 당신이 없는 것을 알고 정신이 번쩍 들었지."

"당신의 사진이나 경력, 가족관계 등 모든 것은 10일 만에 알게 되었지요. 어때요? 머리는 괜찮소?"

지미가 머리를 기울여 고영무가 눌러 쓴 야구모자 안쪽을 들여다보는 시늉을 했다.

"지미씨, 날 내버려 두시오."

고영무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당신을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곳에 와 있는가만 알려주지 않겠소? 머스키의 창고는 당신이 보고타에서 보낸 컨테이너 두 개가 보관된 곳이지. 난 혹시나 하고 찾아왔는데."

"난 컨테이너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럼 뭡니까?"

고영무가 상체를 세우자 지미가 웃으며 한 손을 들었다.

"당신이 경찰 세 명을 때려눕힌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여기는 그곳과 달라요. 사람도 다르고. 탁자 밑으로 머리를 숙여 보시오, 조금만. 그렇지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것 보이지요?"

탁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손에 쥔 권총이 이제는 보였다.

"미스터 고, 난 방어용으로 쥐고 있을 뿐이니까 이야기를 계속합시다. 우리가 서로 돕는 방법을 말이오."

웃음기가 사라친 그의 얼굴은 이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여보, 당신이 나가 봐요. 이 시간에 누구인지 모르겠어."

아내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머스키를 바라보았다.

"글쎄, 잔슨인가?"

밤 아흡 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예고도 없이 문을 두드리는 것을 보면 옆집에 사는 건설업자인 잔슨인지도 모른다. 머스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누구요?"

"마약부에서 왔습니다. 머스키씨를 만나고 싶습니다만."

머스키가 와락 이맛살을 찌푸렸다.

"앨버트가 보냈소?"

"아니, 보스는 아직 모릅니다."

"그렇다면 아직 영장도 없겠구만. 돌아가요. 내일 앨버트하고 상의해서 다시 오든지."

"이것 봐요."

밖에서 말소리가 커졌다.

"앨버트하고 당신이 얼마나 친한지 모르지만 빨리 문 열어요. 우린 영장 없이도 수색할 수가 있단 말이오."

머스키가 한동안 문을 노려보더니 이윽고 문을 열었다. 두 명의 사내가 문 앞에 서 있었다. 한 명은 백인이고 다른 한 명은 중절모를 눌러쓴 동양인이다.

"여기 신분증이 있습니다."

지미가 신분증을 내보이자 얼굴을 찌푸린 머스키가 몸을 비켰다 그들은 대리석이 깔린 로비를 지났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옆쪽의 응접실에서 머스키 부인이 나왔다. 짧은 머리에 체격이 큰 미인이었다.

"아냐, 아무것도. 창고 일이야."

머스키가 서재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그들도 뒤를 따랐다.

", 말해 봐요. 도대체 무슨 일인가를."

팔짱을 끼고 선 머스키가 턱을 들며 말했다.

"당신이 오후에 내 창고에 들어와 컨테이너를 뒤진 사람인가?"

그는 오십 대 초반으로 머리는 조금 벗겨졌지만 단단한 몸매였다. 아랫배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이봐요, 빨리 이야기를 하라니까?"

"머스키씨, 당신 창고에 콜롬비아인들이 드나들지 않았습니까?"

지미가 묻자 그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콜롬비아인? 인부로 말이오?"

지미가 머리를 돌려 고영무를 바라보았다. 문에 등을 기대고 셨던 고영무가 잠자코 있자 지미가 다시 물었다.

"당신 창고에 콜롬비아에서 도착한 컨테이너들이 있어요. 그 안에 든 물품의 주인은 콜롬비아인일 텐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겠군."

머스키가 머리를 저으며 눈가에 주름을 잡았다.

"콜롬비아인인지 자마이카인인지 나는 몰라요, 친구. 내 창고에는 세계 50여 개국에서 수입된 물품들이 가득 있으니까"

"그래, 저녁때 창고에 들어가 컨테이너를 뒤져 보니까 뭐가 좀 나옵디까?"

"당신 이름이 뭐요? 도대체 뭐가 필요해서 이러는 거야? 용돈이 필요한가?"

고영무는 팔짱을 끼고 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머스키는 점점 당당해져 가고 지미는 가끔씩 말문이 막히곤 했다. 오후에 머스키의 창고에 들어가 인부들의 비웃음을 받아가며 TV 박스를 조사한 지미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크게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래서인지 지금 머스키를 대하는 태도에는 자신감이 없는 듯했다. 고영무는 팔짱을 풀고 머스키 앞으로 다가간다.

"이봐, 머스키."

앞에 선 그가 부르자 머스키가 턱을 들며 입을 벌렸다. 그리고는 입을 닫고 그를 쏘아보았다.

"뭔가? 노랭이 친구"

순간적인 소리와 함께 머스키가 아랫배를 움켜쥐면서 무릎을 꿇었다. 고영무의 주먹이 그의 배를 친 것이다.

"이봐, 왜 이러는거야?"

당황한 지미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내 목을 뗄 셈이야?"

고영무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댄 그가 씹어뱉듯이 물었다. 그의 손을 떨군 고영무가 머스키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머스키는 이마를 서재의 바닥에 댄 채로 둥글게 몸을 웅크리고 있다. 한숨처럼 뱉어내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머스키, TV는 내가 판 거다. 내가 그 TV에 마약을 넣으라고 한 사람이야."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어 고영무가 말했다.

"지금 TV는 물론 비어 있어. 그것은 마약을 놈들이 빼갔기 때문이지. 너는 놈들을 알아, 놈들이 어디 있는지를."

허리를 숙여 그의 목덜미를 움켜쥔 고영무가 그의 상체를 세우는가 했더니 다시 주먹으로 배를 쳤다. 머스키의 얼굴이 하얗게 되더니 입에서 가냘픈 비명소리가 났다.

"이봐, ."'

"당신은 닥쳐!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다시 그의 어깨를 잡는 지미의 팔을 떨어낸 고영무가 두 손으로 머스키를 일으켰다.

"당신은 모른 척하면 돼. 이놈은 거짓말을 하고 있어."

"그래도 안 돼! 그만해!"

그러던 지미는 몸을 굳혔다. 고영무가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어 겨누었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마, 거기 꼼짝 말고 서 있어."

바닥에 주저앉은 머스키가 입을 벌리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권총을 겨누고 지미에게 다가간 고영무가 그의 가슴에서 권총을 떼 내어 주머니에 넣었다.

"저쪽 구석으로 가."

고영무가 앞쪽의 구석자리를 가리켰다.

"이봐, 자넨 체포될 거야."

"닥쳐! 어서 저쪽으로 가."

지미가 이를 악물고는 머스키의 뒤쪽에 앉았다.

"머스키, 네 마누라를 불러라."

머스키에 게 다가간 고영무가 권총을 그의 이마에 대었다.

"이봐요, ‥‥‥‥"

머스키의 이마에는 진땀이 배어 있었다. 그러자 그의 이마에 닿은 권총의 격침이 딸깍하고 뒤로 젖혀졌다.

"그럼 죽어라."

고영무가 총 끝으로 그의 이마를 조금 밀자 머스키의 입이 따악 벌어졌다.

"헬렌! 헬렌!"

머스키가 악을 쓰듯 부르자 이내 문이 열리더니 붉은 머리의 여자가 들어섰다.

"아악!"

머스키의 꿇어앉은 모습과 그의 뒤쪽에 쪼그리고 앉은 지미를 보고 어리둥절해하던 그녀는 문 옆에서 나타난 고영무를 보고 놀라서 소리쳤다.

"입 닥치고 남편 옆에 앉아!"

고영무가 권총으로 등을 밀자 그녀는 쓰러지듯 머스키 쪽으로 다가갔다.

"난 미국법을 지킬 생각이 없다, 머스키. 그러니까 쓸데없는 희망을 갖지 말아" -

고영무가 머스키를 향해 말했다

"난 그놈들만 찾으면 돼. , 어서 말해 시간이 없다."

서재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머스키가 머리를 들었다. 이제는 배의 통증도 잊은 모양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고영무를 노려보았다.

"모른다, 이놈. 차라리 날 죽여라."

"죽는다는 건 쉽지. 어렵게 죽여 주마."

고영무가 다가서자 머스키 옆에 앉아 있던 부인이 얼굴을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집에 있는 돈을 다 드리지요. 다 가져가시고 제발"

"널 가만두지 않을 테다. 두고보아라!"

갑자기 뒤쪽에 앉아 있던 지미가 소리쳤다.

"날 이렇게 속이다니. 네 마음대로 행동해서 네가 온전할 것 같으냐?"

머스키의 옆을 돌아 지미에게 다가간 고영무가 발길로 그의 아랫배를 걷어찼다. 퍽 소리가 들렸고 신음소리를 뱉으며 지미가 바닥에 모로 쓰러졌다.

"머스키, 네 목숨을 바쳐서 놈들에게 의리를 지킬 수 있는지 보자."

고영무는 소파 위에 깔아 놓은 방석을 집어 들었다.

"다리를 앞쪽으로 펴라."

머스키의 얼굴이 다시 하얗게 되었고 그 부인이 두 팔을 휘저으며 무릎걸음으로 앞쪽으로 다가오다가 고영무가 총을 겨누자 움직임을 멈췄다.

"당신, 남편 옆으로 돌아가, 어서. 난 여자라고 사정 보지는 않으니까."

"헬렌, 이쪽으로 와. 그놈은 미친놈이야."

머스키가 소리쳤다.

"두 다리를 뻗어, 머스키. 겁이 나느냐? 이 비겁한 놈!"

이를 가는 소리가 머스키의 입에서 나왔다. 그는 앉은 채 두 다리를 벌렸다.

", 뻗었다, 이놈아."

순간 방석으로 감싼 권총에서 쐑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머스키의 한쪽 다리가 벌떡 들렀다가 내려졌다.

"아악,"

부인이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비명을 지르더니 옆으로 쓰러졌다. 기절한 모양이었다.

"으윽.."

머스키가 피가 흐르는 다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무를 밑 쪽에 총알이 뚫린 자리가 동전만 하게 보였다.

"두 다리가 끝나면 두 팔, 그다음은 배와 머리다."

고영무가 성한 쪽 다리에 총을 가져다 대었다.

"네놈이 끝나면 네 마누라다, 이 자식아."

다시 쐑 하는 소리와 함께 다른 쪽 다리에 총알구멍이 났다.

"아아악!"

고통을 참지 못한 머스키가 비명을 질렀다. 부릅뜬 눈이 초점을 잃어 가고 있었다.

"페르난도가 내 TV에 마약을 넣었단 말이다. 맥밀란이라는 놈과 밀리카라는 계집이 나를 설득하고, 이용했단 말이야. 그것이 네 창고로 실려 왔어. 그런데도 몰라?"

고영무가 그를 내려다보면서 입술 끝을 올렸다.

"네 목숨과 네 마누라의 목숨을 바쳐서 비밀을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냐? 그만큼 돈을 먹었단 말이냐?"

고영무가 그를 향해 한걸음 다가왔다.

"이봐, 멈춰!"

옆으로 쓰러져 있던 지미가 소리쳤다.

"넌 또 살인을 할 거냐.?"

고영무의 권총을 감싼 방석이 그쪽을 향하더니 퍽석 하는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한 번만 더 지껄였다가는 이마에 구멍을 뚫어 주겠어. 입 닥쳐."

고영무는 두 다리를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고 있는 머스키에게로 몸을 돌렸다.

", 다음은 네놈의 팔이다, 머스키."

총구멍이 세 개나 뚫린 방석이 그의 팔로 다가왔다.

"잠깐만, 잠깐만."

얼굴이 땀투성이가 된 머스키가 소리쳤다.

"난 페르난도가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 그들은 나한테 그런 것을 알려주지는 않아. 다만 그의 부하 매린이 있는 집은 알아. 그것을 알려줄 수는 있어."

"매린?"

눈살을 찌푸리며 고영무가 물었다

"페르난도의 부하?"

"그래, 심복이야. 우리 직원이 비행기표 심부름을 하다가 알게 되었어."

"페르난도는?"

"몰라, 정말이야."

고통과 절망감으로 두 다리를 감싼 채 머스키는 온몸을 떨었다.

"마약은?"

"그것도 몰라. 누구에게 갔는지. 난 현장에 없었어. 난 장소만 빌려주는 사람일 뿐이야."

"좋다."

고영무는 총을 감싼 방석을 집어 던졌다.

"그 페르난도의 부하라는 놈의 집을 말해, 어서."

"다운타운의 7번로와 12번로가 만냐는 곳 근처야. 그곳에 엔젤 극장이 있는데 극장 옆집이라고 들었어."

머스키는 이를 악물고 머리를 숙였다

"네 마누라를 데리고 가겠다. 만일 그곳에 그들이 없다면 이 여자를 죽일 거다."

머스키가 이를 악물고 고영무를 올려다보았다.

"좋다, 집이 확인되면 바로 보내라."

힐끗 지미와 머스키 부인을 바라본 고영무가 한걸음 물러섰다.

"지미, 당신은 이곳에서 움직이지 마. 날 따라 나왔다가는 사정 보지 않겠어."

다시 한걸음 물러선 고영무는 권총을 손에 쥔 채 서재를 나왔다. 한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거리를 건너 다가오는 지미 굴드의 모습이 보였다. 깊은 밤이었으므로 속력을 내며 차량들이 질주하고 있었다. 다가온 지미가 운전석 문을 열고 들어와 앉았다.

", 당신 지독하구만."

이맛살을 찌푸린 그가 대뜸 말했다.

"그렇게 무작정 쏘아제끼는 법이 어디 있어?"

쏘아보는 그의 시선이 고영무에게서 떨어지진 않는다.

"머스키, 그놈 병신이 안 되면 다행이야."

앞쪽을 바라볼 뿐 고영무가 반응이 없자 지미가 입맛을 다셨다.

"당신 말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야. 우리가 한발 늦었지만,"

머리를 돌린 지미는 차의 시동을 걸었다. 구형 포드는 요란한 엔진소리를 내면서 차도로 나왔다.

"머스키는 오발 사고라고 하고는 병원에 입원시켰어. 가명으로 입원시켰으니까 놈들이 당분간은 찾지 못해. 마누라는 겁을 단단히 주어 놓았어. 오늘 밤 일 이야기했다가는 그쪽 놈들한테 당한다고."

지미가 차에 속력을 내면서 말했다.

"매린이라고 했던가? 우선 그놈의 소재를 확인해야겠군. 며칠만 빨랐어도 놈들을 잡을 수 있었는데, 몽땅 말이야."

"자네가 며칠만 빨리 왔어도 말이야."

지미가 힐끗 고영무를 돌아보았다.

", 이제는 앨버트에게 보고를 해야 돼. 오늘은 놈의 집만 확인하고 돌아가서 앨버트의 지시를 받아야 돼,"

고영무가 머리를 돌려 지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둘이서만 알기로 하는 조건으로 이제까지의 일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지미는 자신의 손으로 놈들을 잡겠다는 고영무의 뜻을 이해해 주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제까지는 고영무의 이야기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모든 것이 사실로 드러나자 이 엄청난 사건을 혼자 싸안기에는 너무 벅찬 모양이었다. TV 5백 대에 마약을 나누어 실었다면 굉장한 양이다. 그리고 카를로스의 심복이자 거물인 페르난도가 LA에 왔던 것이다. 그것은 큰 거래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마약은 이미 현금과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아직 꼬리가 보이는 놈이 있다. 매린이라는 놈이 마지막 희망이었다.

", 내 권총 돌려주게."

앞쪽을 바라본 채 지미가 말했다.

"자네가 나한테 연극하는지는 알았지만 솔직히 겁도 났어. 자네가 머스키를 쏘아제낄 때는 말이야. 자넨 미친놈이야."

고영무는 호주머니에 넣었던 권총을 그의 허리춤에 찔러 주었다.

"젠장, 자네, 그 구식 권총을 쓸 때는 조심하게. 스페인제 같던데 백 년은 된 것같이 보이더군. 나도 그 총구를 보니까 끔찍했어."

"지미, 당신은 이제 내가 그 교민을 죽이지 않았다는 걸 알겠소?"

갑자기 고영무가 물었으므로 지미가 이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차의 속력이 뚝 떨어졌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대답해요, 어서."

"글쎄,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차에 속력을 내면서 지미가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것은 사실인 것 같군. 자네가 교민을 죽이지는 않은 것 같아. 하지만‥‥‥‥"

고영무가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타고난 킬러야.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해칠 수 있는 사람이야."

고영무가 머리를 돌렸으므로 지미도 입을 닫았다. 차는 밤거리를 맹렬한 속력으로 달려 나갔다.

", 우리는 자네가 미국에서 떳떳하게 돌아다니게 해줄 수 있어."

요란한 마찰음을 내며 차를 우측으로 회전시키면서 그가 말했다.

"이번 일도 자네의 공로가 크단 말이야. 물론 내 공적도 대단하지만."

그의 시선이 힐끗 고영무를 스쳤다.

"앨버트도 좋아할걸세."

고영무는 대답하지 않았다.

 

 

 

7. 마약 가문

승용차는 반포대교를 건너 터미널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초겨울이어서 차 안에는 히터가 작동되고 있다. 창밖을 바라보던 유장수가 머리를 돌렸다.

"강일준이 문제가 잘 끝나서 다행이다."

옆자리에 앉은 장규식이 머리를 끄덕였다.

"뒤처리가 더 어려웠습니다."

"그래, 어쨌든 잘되었어."

그날 밤에 네 명의 사내가 죽었으니 신문에 대서특필될 사건이었다. 그러나 신문에는 한 줄도 나지 않았다. 그들의 시체는 제각기 사고사와 병사로 위장되어 매장되었는데, 강일준의 부인이 조금 소동을 부리다가 말았을 뿐 다른 사람들은 사고의 보상이라고 안겨준 목돈에 입이 벌어져 의심하기가 미안할 정도가 되었다. 경찰과 기관에게 손을 쓴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유장수는 휴대폰을 꺼내 들고는 다이얼을 눌렀다. 곧 신호가 떨어졌다.

"난 오늘 밤에 못 들어간다."

휴대폰을 든 유장수가 말했다.

"약속이 있어서 그래. 그러니까 문단속 잘하고 자거라."

"아이, ."

짜증난 듯한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울려 나왔다. 밝고 울림이 있는 홍성희의 목소리였다.

"저녁 준비 다 해놓았는데 어쩌라구."

"내일 아침에 들어가서 먹으마."

"어디 가시는데요?"

"국빈관."

"술 많이 드시지 마세요."

"알았다."

유장수는 휴대폰의 스위치를 껐다.

"사장님, 이한기는 가족이 인도네시아에 있습니다. 처와 두 자식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장규식이 입을 열었다.

"그 몸으로 인도네시아로 도망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샅샅이 뒤져. 뿌리를 남겨 두면 안 된단 말이다."

유장수가 그를 바라보았다.

"놈은 이를 갈고 있을 거다. 어쩌면 그날의 사건을 언론이나 기관에 터뜨릴 수도 있어."

"자폭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야. 놈을 잡아."

"알고 있습니다."

장규식이 머리를 숙여 보였다.

"그 두 놈하고 같이 찾고 있습니다."

"좁은 땅이야."

혼잣소리처럼 유장수가 말했다.

"더구나 그놈은 총에 맞았다니 당분간 어디에 박혀 있을 거다."

"병원을 샅샅이 뒤지고 있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유장수가 말을 바꿨다.

"대전의 오사장이 오늘 참석 못한다구?"

", 복막염 수술을 했답니다. 그래서 대리인을 보냈다는데요."

"그림 모두 다섯 명이군,"

유장수가 잠자코 앞쪽 의자를 바라보더니 머리를 들었다.

"모두에게 5백 그램씩을 나눠 줘,"

"알았습니다."

"부산이나 대구도 마찬가지야. 똑같이 나눠 줘야 돼."

"염려 마십시오. 불평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난 청산으로 갈 테니까 그쪽으로 연락해라."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지금 걸리는 것은 그놈들 둘밖에 없다. 그놈들 명이 긴 것인지 아닌지는 곧 알게 될 것이고."

유장수가 입맛을 다셨다."

"두 놈이 단독행동을 하니까 그렇습니다. 기반이 있는 조직 같으면야 2백 명이라도 단숨에 요절을 내었지요."

"그것, 지난번 아파트 사건, 괜한 여자만 죽였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사장님. 여자가 앓고 있었다더군요. 일어나서 악을 쓰길래 이불을 덮어씌웠더니 그만."

"서툰 놈들이야."

"놈들에게 아파트를 빌려줘서 숨겨 주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테이프를 맡겨 두었을 확률이 높았는데."

유장수가 머리를 돌렸으므로 장규식은 말을 멈췄다. 승용차는 강남대로로 들어서고 있었다.

 

12시가 넘어 있었다.

코트 깃을 세운 신용만이 바쁘게 이쪽으로 걸어왔다.

"유장수는 아직 떠나지 않았어. 놈의 차가 그대로 있단 말이다."

골목 안쪽의 벽에 기대 서 있던 최대광이 벽에서 몸을 떼었다.

"몇 놈이나 있어?"

"현관 근처에 네 놈 있었어. 그런데 놈들이 무슨 회의를 하는 모양이야. 지방번호판을 달고 있는 차도 몇 대 있었다."

"도적놈들, 회의는 무슨 회의, 열 놈이건 스무 놈이건 모조리 때려 죽일 테여"

최대광은 코트 자락 속에 가리고 있던 쇠몽둥이를 움켜쥐었다. 공사장의 철근 골조를 집어온 것으로 직경이 3센티쯤 되었고 길이는 1미터가 넘었다. 둘레에 울퉁불퉁한 매듭이 있었으므로 손으로 쥐기에도 좋았다. 이것으로 머리라도 맞으면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질 것이다.

", 조금, 기다려. 어차피 유장수는 돌아갈 테니까, 차 타러 나올 적에 쳐들어가는 게 낫다."

신용만이 골목 바깥을 바라보며 말했다.

"영업시간도 끝났으니까 곧 나올 거다. 어쨌든 여기서 나가자."

그들은 어두운 골목을 나와 그보다는 조금 넓은 샛길로 나섰다. 샛길 따라 50미터쯤 내려가면 오른쪽이 대형간판의 네온이 번쩍이고 있는 국빈관의 입구이다. 거기서 다시 50미터를 내려가면 테헤란로였다. 이쪽은 주택가이므로 샛길로 왕래하는 인적은 이미 끊겨 있었다. 그들은 담을 따라 천천히 아래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신용만은 앞쪽을 노려보면서 자신들의 행동이 무모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힘이 좋고 쇠몽둥이와 칼로 무장해 있다고 하더라도 저쪽은 열 명이 넘는다. 잘못하면 사람 행세도 제대로 못 한 채 죽을 수도 있었다. 뒤쪽에서 최대광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저녁 무렵에 홍성희의 전화를 받고는 저녁밥도 먹다가 말았다. 그들은 국빈관의 정문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정문은 불만 밝혀져 있을 뿐 인적이 없다. 안쪽의 좌우에 제법 널찍한 주차장이 있었고 50미터쯤 정면으로 현관문이 보였다.

"애들은 어디 있어?"

길 건너의 정문을 바라보며 최대광이 물었다.

"현관 안에 있었어."

"밖에는 한 놈도 없구만 그래."

최대광이 신용만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들어가자."

대답을 기다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최대광은 길을 가로질러 국빈관의 정문을 들어섰다. 와락 이맛살을 찌푸린 신용만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뒤를 따랐다. 정문으로부터 현관까지는 오륙십 미터가 되었는데 오른편의 주차장에 7, 8대의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맨 끝에 현관의 불빛을 받아 검은색 차체가 번쩍이는 벤츠 500이 보였다. 그들은 정문 오른편의 담장을 끼고 돌아서 안쪽으로 나아갔다. 담장 밑은 화단이었다. 커다란 바위돌을 쌓아 놓아서 바위 옆으로 바짝 붙어 걸었다. 이윽고 그들은 2미터가 넘는 담을 등지고는 화단 안에 쪼그리고 앉았다. 꽃냄새가 코를 찌르더니 이내 머리가 아팠다. 최대광이 쇠몽둥이를 휘저어 시야를 가린 꽃나무를 눕혔다.

"이상한데."

신용만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 벤츠에 운전사가 있더냐?"

"아니, 없던데."

머리를 저으며 최대광이 20미터쯤 앞쪽의 벤츠를 바라보았다.

"비어 있었어."

"씨발, 함정이다."

속삭이듯 말했으나 그의 말은 최대광에게 똑똑히 들렸다.

"대광아, 뒤쪽 담을 넘어라. 튀자,"

", 임마."

"튀자니까!"

신웅만이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엉거주춤 최대광이 따라 일어섰고 신용만은 몸을 솟구쳐 담장 위로 상반신을 세웠다. 최대광은 선 채로 앞쪽을 둘러보았다. 눈앞에는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 없다. 오른쪽의 국빈관은 2층 건물이었는데 환하게 불이 켜져 있을 뿐이다.

"대광아, 빨리!"

담장 위에 상반을 세운 신용만이 낮게 소리쳤다. 최대광은 입맛을 다시고는 몸을 돌렸다. 담장 위로 두 손을 얹고는 단숨에 뛰어오르면서 최대광은 어쩐지 등에 으스스한 한기가 스쳐 지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뛰어라!"

담장 너머는 회사 빌딩의 주차장이었다. 신용만이 주차장을 가로질러 뛰면서 그를 돌아보았다.

", 이 빌어먹을 놈아!"

최대광이 손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쥐었다.

"도대체 무슨."

"저것 봐라."

뛰면서 신용만이 소리쳤다. 뒤를 돌아본 최대광은 담장 위로 불쑥불쑥 올라오는 사내들의 상반신을 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열 명이 넘는다. 한두 명은 이미 이쪽으로 뛰어내리고 있다.

"뛰어!"

앞질러 달리면서 신용만이 소리쳤고 이제는 최대광도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신용만이 껑충 뛰어서 회사의 담장 위에 올랐다. 이제 바깥은 테헤란로이다. 속력을 내며 질주하는 차량들이 보였다.

 

"난 오늘 들어오시지 않을 줄 알았는데."

자다 일어난 홍성희가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하얀색의 잠옷 차림이었는데 얇은 옷감 사이로 그녀의 몸매가 드러나 보였다.

"왜요, 셔츠는 벗지 않으세요?"

", 나중에."

유장수는 윗도리만 벗은 차림으로 소파에 앉았다. 벽시계가 새벽 한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무슨 언짢은 일 있으세요?"

그의 앞자리에 앉으며 홍성희가 물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유장수는 이맛살을 조금 찌푸린 얼굴로 눈을 깜박이고 있다.

", 언제부터 그놈들과 내통했니?"

담배를 꺼내 물면서 유장수가 묻자 홍성희가 턱을 들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표정이었으나 선뜻 입을 열지는 않는다.

"잡혀 있을 때부터겠지? 그래서 놈들에게 그 이야기를 해줬겠군."

"아니, 무슨 말씀인지 저는‥‥‥‥"

얼굴이 하얗게 된 홍성희가 겨우 입을 열었다.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이 잠옷 자락을 움켜쥐고 있었으므로 젖가슴이 반쯤 드러났다.

"제가 내통하다니요? 도대체 누구하구요?"

유장수가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입술 끝을 비틀어 보였다.

"곱게 말하면 용서해 주마. 당장 찢어 죽이고 싶지만 기회를 한 번만 주마."

"전 정말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소파에 등을 기댄 유장수가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너 아니더라도 계집은 많아. 너보다 나은 애들이 얼마든지 있단 말이다."

"‥‥‥‥"

"넌 내일 아침에 은퇴 선언을 하게 될 거다. 아마 재미교포 실업가와 사랑의 도피를 했다고 언론에 보도될 거야."

"어떻게 할 건지 알려주마. 년 지금 밖에서 기다리는 애들에게 끌려가서 얼굴 성형수술을 받게 될 거야. 눈꺼풀을 늘이고, 코를 낮추고, 그렇지, 입술이나 볼도 고쳐야 할 거다. 다리 한쪽을 부러뜨리고는 어긋나게 붙여서 절름발이로 만들 수도 있지. 그리고는 남쪽의 뱃사람들을 상대하는 사창가로 보낼 예정이야."

홍성희가 온몸을 굳히고는 그를 바라보았는데 눈을 치켜뜬 채로 움직이지도 않는다.

"너는 죽을 때까지 내 부하들의 감시를 받게 될 거야. 아마 성병으로 몸이 문드러져 뒈지겠지."

"네 방에 TV는 한 대 놓아 주라고 하마."

홍성희의 시선이 아래쪽으로 떨어졌다. 잠옷을 움켜쥐었던 두 손을 풀었는데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내가 너를 믿고 있었는지 아느냐? 건방진 년, 아니다."

유장수는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줬다.

"어쩐지 놈들이 이쪽의 행동을 미리 알고 있는 것이 수상했지. 그래서 오늘은 일부러 국빈관 이야기를 한 거야. 난 그곳에 가지 않았어."

"그놈들을 시켜서 나를 제거해 버리면 네가 훨훨 자유롭게 될 줄 알았어?"

유장수가 그녀를 향해 얼굴을 펴고 웃었다.

", 선택해라. 털어놓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할 거냐, 아니면 지금 밖으로 나갈래?

"할게요. 시키는 대로 할게요."

입술을 달박여 홍성희가 말했다.

"무엇이든지 하겠어요."

"저는 그놈들의 협박을 받았어요. 저를 벗겨놓고 제 사진을‥‥‥ 만일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사진을 뿌리겠다고. 정말이에요, 무서웠어요. 그 말을 입 밖에라도 내면 당장에 뿌리겠다고 해서."

"놈들하고는 어떻게 연락하고 있었어?"

유장수는 아직까지도 언성 한번 높이지 않고 있었다.

"휴대폰이었어요, 최대광씨가 가지고 있는."

"지금 연락할 수 있겠지?"

유장수가 턱을 들며 물었다. 승용차는 수원시의 경계선을 넘어 곧장 달려 나갔다. 새벽이어서 신용만은 잔뜩 속력을 내고 있었다.

"하긴 놈들이 그렇게 허술할 리가 없지. 유장수가 있는데 말이야."

혼잣소리처럼 최대광이 말했다. 그는 의자의 등받이에 머리를 대고는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너는 놈들이 숨어 있는 것을 본 거야?"

신용만에게 묻자 운전에 열중한 듯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하마터면 당할 뻔했어. 그렇게 무더기로 달려드는 건 처음 보았다니까"

"그놈을 어떻게 해야 잡아서 요절을 내지?"

손을 펴 손가락을 바라보면서 최대광이 중얼거렸다. 아직도 손가락에는 붕대가 감겨져 있다 병원에서 상처를 꿰매었으나 잘린 자리가 아물려면 한 달이 넘게 걸릴 것이다. 그때 호주머니에 든 휴대폰이 삐리릭 거리며 울렸다. 신용만이 머리를 돌려 그의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휴대폰을 꺼낸 최대광이 귀에 대었다.

"여보세요?"

"저예요, 홍성희"

신용만이 차의 속력을 줄이더니 길가에 차를 세웠다.

"아아, 성희, 웬일이야?"

"궁금해서 전화했어요."

신용만이 차의 시동을 껐으므로 그녀의 목소리가 깨끗하게 들려왔다.

"젠장, 놈들이 숨어 있더라구. 기다리고 있었단 말이야."

"지금 어디이인?"

최대광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신용만이 옆구리를 찌르자 이맛살을 찌푸렸다.

"여긴 인천이야."

그리고는 신용만을 흘겨보았다.

"인천 어디?"

"길가야, 잠자러 들어가는 중이야."

"내일 만나요."

홍성희가 대뜸 말했다.

"그곳에서.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요."

"무슨 이야긴데?"

"지금은 말 못 해요. 내일 오후 다섯 시에."

그리고는 전화가 끊겼다.

"젠장, 애라도 배었다는 거야, 뭐야?"

휴대폰을 든 채 최대광이 신용만을 돌아보았다.

"야 임마, 왜 옆구리를 꾹꾹 찔러? 이제 와서 걔한테 숨길 것이 뭐가 있다구?"

신용만이 잠자코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어쨌든 내일 만나면 알겠구만, 무슨 일인지."

최대광이 의자에 몸을 누이면서 말했다.

"그놈의 자식, 명이 긴 놈이다. 오늘 밤에 골통을 부수려고 했더니,"

"나는 아무래도 이상해."

앞쪽을 바라보며 신용만이 말했다.

"예전과는 달랐어, 오늘 밤은. 아예 그물을 펴놓고 기다리는 것 같았단 말이다."

최대광이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놈의 벤츠에 운전사도 없이 놔둔 걸 보니까 가슴이 섬뜩했었어. 그래서 튄 것이야. 10초만 느렸어도 우리는 송장이 되었다."

맞는 말이었으므로 최대광은 잠자코 있었다.

"우리는 그 씨발놈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를 알 수가 없단 말이다. 그저 홍성희가 알려주는 말을 믿는 수밖에."

"그건 그렇지."

머리를 끄덕이던 최대광이 끄덕임을 멈추고 어두운 앞쪽을 바라보더니 머리를 돌렸다. 그의 이맛살이 찌푸려져 있었다.

", 너 혹시 홍성희가."

"그릴 리는 없어. 니 맘 알아. 허지만"

"허지만 뭐 임마."

"나도 잘 모르겠어."

"모르면서 주둥이 놀리지 말어, 이 자식아. 갸가 도와주지 않으면 우리는 봉사나 마찬가지여,"

신용만이 와락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빌어먹을 테이프, 차라리 금옥이를 찾고 우리가 죽었어야 하는데, 놈들한테."

"잠이 안 온다. 그런데 너는 떡칠 생각이나 하고."

최대광이 와락 신용만의 멱살을 움켜쥐었으므로 자동차가 균형을 잃고 흔들거렸다.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신용만이 길가에 차를 세운 것이다.

"이 씨발놈아, 뭐라고? 다시 말혀 봐!"

차 안이 떠나갈 듯 최대광이 소리쳤다.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되어 있었다.

"내가 떡칠 생각만 헌다고? 내가 요좀 스기나 허는 줄 알어?"'

"이것 안 놔?"

숨이 막혔으므로 신용만은 그의 팔목을 두 손으로 잡고 비틀었으나 풀어지지 않는다.

"이것 안 놓을래?"

이제는 신용만도 화가 솟구쳤다. 손을 뻗어 최대광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 머리 안 놔?"

"네가 먼저 놓아, 이 돼지 같은 놈아."

"이런 잡놈이"

둘은 한동안 서로의 멱살과 머리칼을 움켜쥔 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팔의 힘이 약해졌고 이내 손들을 떼었다.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 휘발유 통이나 젊어지고 가서 유장수하고 같이 타죽어 버릴 테여, 나는."

최대광이 씨근거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씨발, 인자 살기도 귀찮여."

"유장수가 호락호락하게 빈구석을 만들어 주지 않는단 말이야. 임 마, 그럴 기회가 있었으면 내가 나갔어."

신용만이 씹어뱉듯 말했다.

"그놈은 경호원에 첩첩이 싸여 있어."

최대광이 뚫어질 듯 눈을 흘겼다.

"그러니까 그놈의 새끼에 대한 것을 알려주는 성희가 중요하지 않느냐, 이거다. 내 말은."

"너는 내가 갸가 좋아서 만나는지 알고 있는 모양인데, 유장수하고 장규식이 죽이고 나면 손발 딱 끊을 판이여. 본래 나하고는 안 맞는 년이니까."

최대광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장규식은 알몸으로 누워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긴 머리를 볼 위로 늘어뜨린 채 모로 누워 있었으므로 여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까 어떤 얼굴이었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여자는 어깨와 허리의 선이 고왔고 엉덩이에서 종아리로 이르는 하체가 풍만하게 발달되어 있었다. 장규식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화장실로 들어섰다. 샤워기의 꼭지를 돌리자 찬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는 한동안 찬물을 뒤집어쓰면서 서 있었다. 운이 좋은 놈들이었다. 어젯밤도 간발의 차이로 놓쳐 버렸다. 운보다도 눈치가 비상한 놈들인지도 모른다. 화단에 움츠리고 앉길래 이제는 놈들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정문 앞쪽의 가정집에 숨어 있던 부하들 중에서 다섯 명을 놈들이 등지고 반은 담 너머로 보내어 퇴로를 차단하고 정문과 국빈관의 현관에서 여남은 명을 내보내어 박살을 낼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지시를 하기도 전에 놈들은 벌떡 일어나더니 담을 넘어 도망쳐 버렸다. 뒤늦게 부하들이 달려 나갔으나 놈들은 대로를 건너더니 종적을 감췄다. 장규식은 온몸을 부르르 떨고는 샤워기의 꼭지를 잠갔다. 그러나 소득이 있기는 했다. 홍성희가 놈들하고 내통하고 있다는 증거를 잡았고 자백도 받은 것이다. 수건으로 몸을 닦으면서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알몸을 바라보았다 내일모레 사십이 될 나이였으나 몸에는 군살 하나 붙어 있지 않았다. 자신이 보아도 단단한 체격이다. 배에 가로로 길게 찧어진 자국이 보였다. 몇 년 전에 영등포에서 토박이 놈들과의 싸움에서 다친 자국이다. 창자가 터져 나오려고 했으므로 두 손으로 감싼 채 몸을 오므리고는 병원에 달려가 꿰매었었다. 이제까지 수십 차례 그런 경우를 겪었고 견디어 왔다. 그리고 이제는 청산그룹의 제2인자로서 명실공히 권력과 부를 장악할 때인 것이다. 방으로 들어서자 여자는 깨어나 있었다. 침대의 시트로 하반신을 감고는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무대에서 그룹 댄스를 하는 여자 중 하나였다.

"어디 가시게요?"

여자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물었다. 아침 여덟 시였으므로 이 시간은 그녀같이 밤에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깊은 밤이다.

", 난 일이 있다. 먼저 나갈 테니까 너는 더 자."

서랍을 열고 내의를 갈아입는 장규식을 그녀가 물끄러미 바라보았 다.

"지배인님 혼자 사신다더니 정말이네,"

장규식은 옷장을 열고 양복을 꺼내어 침대 위에 걸쳐 놓았다. 여자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옷걸이에 걸린 바지를 끄집어냈다.

"빨래는 누가 해줘요?"

"세탁소. 그리고 가끔 너 같은 애들이 와서도 해주고."

"."

화장기가 없는 맨살이었으므로 그녀는 홀에서 볼 때보다 어리게 보였다

"식사도 식당에서 하세요?"

"귀찮다."

장규식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바지를 입었다.

"쓸데없는 것 신경 쓰지 마. 알겠어? 나는 너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으니까. 너도 그렇게 해,"

"전 미스 임이에요, 임미현."

장규식이 윗도리를 입고 있는데 현관의 벨이 울렸다.

"열쇠 여기 있다. 문 잠그고 나갈 때 경비실에다 맡겨 놓고 가."

탁자 위에 놓인 열쇠를 가리켜 보인 장규식이 응접실로 나왔다.

"누구요?"

"접니다."

문 쪽을 향해 소리쳐 묻자 박기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경호원이다.

"나간다."

힐끗 방 쪽을 살펴본 장규식은 응접실의 탁자 서랍에서 리볼버 권총을 꺼내어 허리춤에 끼었다. 작년에 홍콩의 무기 거래상한테서 리볼버 일곱 자루와 총알 2천 발을 사둔 것이 요즘은 요긴하게 쓰이고 있었다. 제아무리 날고 뛰는 놈이라도 총알 한 방이면 끝장이 난다. 회칼을 번뜩이며 지랄을 떨어도 멀찍이 서서 배때기에 한 방을 먹여 주면 벌떡 자빠져 버리는 것이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박기석이 허리를 기역자로 꺾었다. 장규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장을 셨다.

", 저배인님‥‥‥‥"

뒤쪽에서 박기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몸을 돌리자 박기석이 아파트의 문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문을 잠그지 않으셨습니다."

"안에 사람이 있다."

3층이었으므로 그들은 계단을 내려와 아파트의 현관으로 나왔다. 그의 대형 승용차가 아침 햇살에 반짝이며 서 있었고 운전사인 진영수가 그를 바라보고는 허리를 숙였다.

"사장님한테 간다."

차에 오른 장규식이 말하자 앞자리에 탄 박기석이 몸을 돌렸다.

"지배인님, 아침에 우석이 형님하고 진홍이 형님이 한일장으로 떠났습니다."

그들은 유장수의 직속 경호원들이었다. 본래 지방클럽의 관리를 맡고 있던 그들은 이제 유장수의 측근이 되어 있었다. 머리를 끄덕인 장규식은 창밖으로 머리를 돌렸다. 한일장은 오늘 오후에 홍성희와 최대광이 만날 여관이었다.

 

"어머니, 밖에 나갔다 올게요."

김영지가 어머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몇 시간 안 걸려. 친구 만나고 오는 거야."

어머니가 머리를 들어 김영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입을 열지는 않는다.

"다녀오너라, 걱정 말고."

신문을 보고 있던 외삼촌이 말했다.

"그럼, 친구도 만나야지. 엄마는 걱정할 것 없다. 오늘 아침은 죽을 반 그릇이나 드셨다."

주방에 있던 외숙모가 다가왔다.

"이제 며칠 더 있으면 네 어머니도 회복이 되실 거다. 원래 충격이 크면 그런 법이야."

어머니는 TV의 아침 프로에 시선을 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서울에 도착한 지 일주일이 되었다. 그동안 김영지는 큰외삼촌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두 내외만 살고 있는 터여서 여간 반기는 것이 아니었다. 졸지에 남편과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가여웠는지 그들은 어머니를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어머니는 끼니때마다 외숙모의 성화에 못 이겨 수처를 들었으므로 얼굴이 조금 나아진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좀처럼 입을 열지는 않았다. 공항에서 김영지의 등을 쓸면서 이야기를 해주고 나서 다시 입을 닫은 것이다.

"그럼 외삼촌, 외숙모, 다녀올게요."

가방을 들고 일어서자 김영지는 어머니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해진 것을 보았다.

"그래, 다녀오너라."

외삼촌이 말하자 외숙모가 김영지의 팔을 끼었다.

"엄마는 괜찮다니까. 실컷 놀다 와."

김영지가 어머니에게 머리를 끄덕여 보이자 그녀는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대문을 나온 김영지는 코트의 깃을 올렸다. 12월 초의 쌀쌀한 날씨였다. 그러나 밝은 햇볕이 비치고 있었다.

그녀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는 걸음을 떼었다. 서울은 김영지에게는 외국이나 다름없는 도시었다. 아버지를 따라 한번 와봤을 뿐이다. 한국말을 쓰는 동포들이 사는 나라이고 얼굴색이 같다. 그러나 생소한 거리를 걸어 내려가던 김영지는 차츰 배어 오는 외로움을 느꼈다. 모두들 바빠 보였고 그들의 옆을 지나는 여자가 부모의 고향을 찾아왔다는 것에 관심이 없다. 보고타에서 스쳐 지나가는 메스티조나 물라토보다도 더욱 낯설게 느껴졌다. 택시를 잡아탄 김영지가 내린 곳은 대치동의 아파트군 입구였다. 손에 든 종이쪽지를 내려다본 그녀는 이쪽저쪽을 기웃거리다가 마침내 안쪽에 자리 잡은 아파트 건물의 현관으로 들어선다.

"아가씨, 어디 가시지요?"

현관의 안쪽에 세워진 경비실에서 나이 든 경비원이 목을 내밀어 물었다.

", 615호실에 가는데요."

"그래요?"

김영지의 위아래를 훑어본 경비가 노트와 볼펜을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미안하지만 여기에다 오신 용건하고 이름을 적어 주시지요. 사고가 난 후부터 그렇게 하기로 되었습니다."

"사고가 나다니요?"

볼펜을 집어 들며 그녀가 물었다.

"어어, 이 아가씨가 모르시는 모양인가?"

경비원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신문에도 났는데 그걸 몰라요"

", , 외국에 나가 있어서‥‥‥‥"

"강도가 들어와서 그 집 마나님이 살해되었어요. 정말 그 집은 우환이 겹친 집이지 자식은 외국에서 일을 일으켰다고 하지 않나, 또 여기는 마나님이‥‥‥‥"

김영지는 볼펜을 만지작거리며 노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가씨는 그 집하고 어떤 사이신데?"

경비원이 목을 뽑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잘 아는 사이예요."

이윽고 김영지는 노트에 이름과 방문 목적을 적었다.

"그래, 고맙군. 이렇게 찾아와 주어서."

고진호씨가 표정 없는 얼굴로 김영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잘 알다시피 그 애는 행방을 알 수가 없어."

"집에 연락도 하지 않았나요?"

김영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없었어."

머리를 젓고 난 고진호씨가 시선을 돌렸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한 번도 없었어."

"콜롬비아에서 같은 회사에 근무했었다면 그 일의 내막을 잘 알겠구만."

", 잘 압니다."

김영지가 탁자 위로 시선을 내렸다.

"저도 믿기지가 않아요. 제가 출장을 다녀온 사이에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저도 회사를 그만두었어요."

"내 아들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냐."

가라앉은 목소리로 고진호씨가 말했다.

"만일 내 아들이 신문에 보도된 대로 이득금 배분 문제로 살인을 하였다면 나는 내 손으로 그놈을 잡아 경찰에 넘기겠어, 영무는 모함을 당했어."

"저는 두 사람이 금전 문제로 다투었다는 것을 알아요. 사무실의 다른 여직원한테서 들었습니다."

"다른 여직원이라니?"

"밀리카라고 현지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자가 제게 이야기해 주었어요."

"그 여자가 지금도 회사에 있나?"

김영지가 머리를 저었다.

"사건이 일어나고 그 여자도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가정부가 다가와 그들 앞에 찻잔을 내려놓고 물러 나갔다. 집안에는 한동안 정적이 감돌았단. 50평형의 아파트에 살고 있는 것은 고진호씨와 가정부 둘뿐인 것으로 고였다. 선입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두운 분위기가 집안에 깔려 있었다. 어쩌면 이쪽도 자신과 비슷한 상황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입장이어서 그런지 그는 고영무가 결백하다고 믿고 있다.

"보고타에 같이 있었다니 말인데."

고진호씨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죽었다는 그 교민은 어떤 사람인가?"

"김강남이라고 스물여덟 살 먹은 청년이었습니다."

"영무하고는 친했나?"

"고영무씨가 온 지 몇 달 안 되어서요. 하지만 김강남의 회사참고를 빌려 쓰고 있어서 자주 만나는 사이였습니다."

"둘이서 창고에 있는 제품을 암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회사에서는 상관하지 않았어요. 눈치는 쳤는지 모르지만 돈만 입금되면 그만이었습니다"

김영지를 바라보며 그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 일이 생기고 나서 김강남씨의 아버지인 호세 김이라는 교민이 고영무씨를 찾아 나섰지요. 자식의 복수를 하겠다고 했어요. 외아들이었으니까요."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산타마르타라는 항구에서 그분도 살해되었습니다."

김영지는 커피잔을 들었다.

"한국에서는 모르고 있을 거예요. 콜롬비아에서도 선착장에서 피살체가 발견되었다고만 보도되었으니까요. 그렇지만 교민들이나 그 사건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것도‥‥‥‥"

머리를 숙인 김영지가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고진호씨가 입을 열었다.

"그 사람도 영무가 해쳤다는 말인가?"

", 산타마르타는 밀항선을 탈 수 있는 곳이에요. 호세 김은 고영무씨가 밀항선을 타고 콜롬비아를 빠져나갈 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회사에 다닐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온 거예요. 저도 고영무씨를 만나서 물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혹시나 하고"

"그쪽은 아들 하나밖에 없나? 가족이 말이야,"

얼굴을 든 김영지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고진호씨와 시선이 마주쳤다.

"? , 그런 것 같았어요."

머리를 돌린 그녀의 눈에 주방에 서 있는 가정부가 보였다. 싱크대를 향해 서서는 마른 수건으로 그릇을 닦고 있었다.

'"안됐군, 그 집안도."

혼잣말처럼 고진호씨가 말했다.

"어쨌든 이렇게 찾아와 주고 그런 이야기를 해주어서 고마워. 그럼 지금은 서울에서 회사에 다니나?"

"아녜요, 회사 그만두었어요. 그냥 집에 있어요."

"허어."

고진호씨가 입맛을 다셨다.

"저 사모님께서 갑자기 그렇게 되신 줄은 조금 전에 알았습니다."

그녀의 말에 고진호씨가 입을 꾹 다물면서 머리를 저었다. 더 이상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는 뜻인 듯했다.

 

최대광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신용만을 돌아보았다.

", 다섯 시 오 분 전이다."

"잠깐만 기다려."

신용만은 참에서 몸을 떼고는 탁자 위에 놓여 있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뭐하려는 거야?"

"전화."

다이얼을 누르면서 신용만이 짧게 대답했다.

"누구한테?"

거칠게 최대광이 묻자 신호가 가는 듯 신용만이 둘째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거기 한일장이지요? 408호 좀 바꿔주세요."

최대광이 찡그린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으므로 신용만은 몸을 돌려 앉았다.

", 홍성희씨."

신용만의 얼굴이 굳어졌다.

", 신용만입니다. 그런데 급한 일이 생겨서 전화를 드렸는데,"

그는 힐끗 최대광을 바라보았다.

"지금 대광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는 중인데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위경련인 것 같은데, 심합니다. 그래서,"

얼굴을 찡그린 최대광이 머리를 돌렸다.

"그래서 오늘은 만나지 못할 것 같다고 하는데요. 내일이나 모레쯤 전화를 주시랍니다."

신용만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니, 병원은 어느 병원인지 아직 모릅니다. 가까운 병원에 가려고 해요. 여긴 인천인데, 염려 마시구요, 그럼."

전화를 끊자 최대광이 벌떡 일어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 이 씨발놈아,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겠다."

"이리 와 봐."

그의 욕설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신용만이 창가로 다가가며 말했다.

"어떻게 되나 보잔 말이다."

신용만은 커튼 사이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이쪽에서 내려다보면 건물 사이로 한일장의 입구가 환히 드러난다. 여관과 호텔이 한집 건너마다 세워져 있는 강남사거리 부근이었고 그들이 들어가 있는 곳도 여관이었다.

"홍성희를 못 믿서서 이러는 건 아니야. 유장수가 홍성희를 미행시켰을 수도 있단 말이다."

아래쪽을 내려다보면서 신용만이 말했으나 최대광은 대답하지 않았 다. 오후 다섯 시였으므로 어중간한 때였다. 낮 손님을 받을 시간은 지났고 숙박 손님에게는 이른 시간이어서 들락이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다섯 시 십 분 전에 홍성희가 들어가는 것만 보았는데 이 시간대에서 그녀가 한일장의 유일한 손님이었다. 십 분쯤 지났을 때 그들은 쪽같이 홍성희의 모습을 보았다. 검정색 모피 코트를 걸치고 곁은 선글라스를 편 그녀의 모습은 먼 곳에서 보아도 두드러졌다. 그녀는 곧은 자세로 앞쪽 주차장으로 다가가더니 흰색의 대형 승용차에 올랐다. 승용차는 불쑥 튀어 나가듯이 주차장을 빠져나가 옆쪽 길로 들어섰다.

"화가 난 모양이로군."

그녀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신용만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다시 머리를 돌려 한일장의 현관을 바라본 신용만은 숨을 들이마셨다. 건장한 사내 두 명이 나오고 있었다. 네 시부터 이곳에서 지키고 있었지만 그들이 들어가는 것은 보지 못했었다. 그러자 다시 세 명의 사내가 나왔다. 두 명의 뒤를 따라 옆쪽의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 일행이다. 그리고 똑같이 젊고 건장하다. 한눈에 보아도 주먹깨나 날리는 건달이었다. 최대광도 그것을 보고 있었다. 눈을 부릅뜬 채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는데 어금니 쪽의 근육이 딱딱해진 것이 보였다. 그들은 다시 사내 다섯 명이 한꺼번에 현관을 나서는 것을 보고는 서로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두 명이 또 나온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내들을 보기에 지쳤는지 최대광이 몸을 돌리더니 등을 벽에 대었다.

"모두 열여섯 놈이로구만."

신용만의 말소리가 방에 울렸다.

"한일장에 들어갔다가 곧장 산소로 갈 뻔했구나."

벽에 기댄 등을 아래쪽으로 미끌어 내리면서 최대광은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상반신을 일으켜 세운 이한기는 한쪽 발에 중심을 잡고 일어섰다. 붕대가 감겨 있는 다른 쪽 다리를 조심스럽게 앞으로 내밀고는 그쪽으로 중심을 이동시키자 총에 맞은 허벅지의 상처가 쑤셔 왔다. 이를 악문 이한기가 두 걸음쯤 걸었을 때 방문이 열리더니 조한철이 들어섰다. 깨끗한 용모의 사내였다.

"아니, 형님."

놀란 그가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어딜 가시려는 거요"

"됐다, 걸을 만하다."

그의 몸에 손을 대려는 조한철에게 뿌리치듯 손을 흔들어 보인 이한기가 다시 두어 걸음을 걸어 문고리를 잡았다.

"내일모레면 뛸 수 있겠어."

이한기가 머리를 돌려 조한철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런 것은 마음먹기 나름이야."

"실밥 풀려면 한 달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건 형님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오."

조한철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형님 기분은 알지만 그 몸으로 나갔다가는 끝장이오."

이한기는 방문을 열고 응접실로 나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벅지가 칼로 쑤시는 듯 아팠으나 걸음의 횟수가 많아질수록 통증이 덜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걸을 만 하구만 그래."

응접실의 소파를 돌면서 그가 말했다.

"장규식이 그놈의 총솜씨는 서툴어. 군대도 가지 않았던 모양이야. 안 그러냐?"

그러나 조한철은 그의 다리를 바라본 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놈이 총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를 향해 웃어 보인 이한기가 소파에 앉았다. 조한철은 그의 부하라기보다는 죽은 강일준의 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 년쯤 전에 조직에서 떠나 피자집을 차렸으므로 이번 사건에서 유장수의 손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유장수는 이미 마약을 넘긴 모양이었어요, 지방에 마약이 퍼져 있습니다."

조한철이 입을 열었다.

"형님, 이제 조직에 미련을 두지 말아요. 끝난 일이니까. 그리고 그 몸으로 서두르지도 말고."

"끝나기는 뭐가 끝났다는거야? 그래 내가 너처럼 피자가게나 차리고 말란 말이냐?"

정색을 한 이한기가 조한철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형님의 원수는 갚아야 하고, 받을 건 받는다. 그러고 나서 내일을 생각해 보겠어."

"그걸 막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무리라는 이야기요."

"놈들은 총을 썼어. 이제는 주먹이나 칼을 쓸 때가 아니야. 총이다. 절름발이가 총을 쏘면 안된다는 법이라도 있냐?"

"그놈들이 그렇게 빨리 손을 쓸 줄은 몰랐어. 우리는 유장수부터 처치하려고 했었다."

"형님 유장수는 조직의 원로예요. 5인 위원회의 위원입니다. 지금 말하기는 이미 늦었지만 그놈을 너무 가볍게 보았어요."

"신변경호를 여간 단단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 경호보다 더한 것 같아요. 한두 자루 총으로 될 일이 아닙니다."

"유장수가 무서워하는 놈이 있어."

이한기의 말에 조한철이 얼굴을 들었다.

"최대광이하고 신용만이라는 놈인데, 스물대여섯짜리다."

"처음 듣는 놈들인데, 누구요? 어디 있던 놈들입니까?"

"어디 있기는? 조직 생활을 했던 놈들이 아니야. 하나는 씨름했던 놈이고 다른 놈은 동사무소에 있던 놈이야."

"그놈들은 홍성희를 납치해서 유장수와 일대일로 거래를 했어. 그리고는 약점을 쥐었지. 홍성희에게 자백을 받은 테이프를 가지고 있단 말이다 유장수가 마약 거래를 한다는 내용이야."

"그놈들 둘이 말이오?"

"그래, 그래서 나도 광주로 내려가 장규식이를 도왔는데 어느 사이에 냄새를 맡고 튀었더군."

"유장수가 나보다 더 신경을 쓰고 있는 놈들이 그놈이야. 조직이 없으니까 거처도 없고, 그러니까 미칠 노릇이지,"

"홍성희를 납치하다니, 웃기는 놈들이구만. 하긴 유장수가 그녀한테 홀딱 빠져 있는가 봅니다."

이한기가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그 두 놈하고 우리 신세가 비슷하구만요, 아니, 그들이 더 났지? 우려보다?"

조한철이 입맛을 다시더니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장규식 부하들이 서울은 물론이고 지방의 우리 거래선들을 이미 모두 손안에 쥐었어요. 형님, 이쪽은 이미 기반을 잃었습니다. 현실을 잘 보셔야 합니다."

이한기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앨버트, 준비되었습니다."

지미가 허리를 숙이고 다가와 소리 죽여 말하자 앨버트는 시계를 보았다.

"좋아, 지금 여덟 시 오 분이다. 십 분에 들어간다."

"알았습니다."

무전기를 입에 대면서 지미가 옆쪽으로 사라졌다. 고영무는 머리를 들어 길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벽돌로 지은 2층 주택이었는데 아래층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 당신은 우리가 들어오라고 할 때까지 여기 있어요."

머리를 돌린 앨버트가 그를 향해 말했다.

"두 연놈이 지금 저녁을 먹고 있는 모양이야. 내일 아침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되어 있으니 들떠 있겠지."

어둠 속에서 그는 하얗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좌우간 긴 여행이 될 거야. 목적지가 조금 달라지겠지만."

시계를 내려다본 앨버트의 얼굴이 굳어졌다. 호주머니에서 무전기를 꺼낸 그가 짧게 말했다.

", 가자."

앨버트가 몸을 감춘 차의 뒤쪽에서 나서자 그의 주위에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모였고 그들은 단숨에 길을 건너뛰어서 현관으로 다가갔다. 고영무는 몸을 세우고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발길로 문을 걷어차자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문이 활짝 열렸다. 그들은 달려 들어가듯이 집안으로 사라졌다. 지미는 뒤쪽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서 문 앞과 옆쪽에는 소총을 움켜쥔 요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집안에서는 총소리도 고함이나 비명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윽고 현관의 불빛을 둥지고 요원 한 명이 나타났다. 그는 이쪽을 향해 손으로 들어오라는 시늉을 한다. 고영무는 단숨에 길을 건너뛰어서 집안으로 들어섰다. 서너 명의 요원들이 응접실을 뒤집어 놓듯이 모든 가재도구들을 꺼내고 있는 사이를 지나 고영무는 서재로 들어섰다. 요원들 사이로 이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맥밀란과 밀리카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의자 위에 앉아 있었는데 들어서는 고영무를 보더니 맥밀란이 눈을 부릅떴다. 옆에 앉은 밀리카의 입이 따악 벌어졌다.

", 이 사람들 맞습니까?"

앨버트가 머리를 돌리고 물었다. 고영무는 그들에게 다가가 섰다.

"맞습니다. 이 여자가 밀리카, 저놈은 맥밀란이었는데."

"여권에는 매린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놈은."

앨버트가 여권을 들어 보였다.

"어쨌든 맞다니까 다행이오."

"이것 봐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매린이 버럭 소리를 쳤다.

"무슨 일로 이러는 거요?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요?"

"닥쳐! 이 자식아!"

옆에 서 있던 지미가 버럭 고함을 쳤다.

"할 말 있으면 법정에 가서 해."

"우리가 무슨 죄가 있다는 거요? 우리는 선량한."

고영무가 한 걸음 다가섰다.

"맥밀란, 아니 매런, 악을 써봐도 소용이 없다. 네놈은 20년쯤 감옥에서 살아야 한다더군."

그를 내려다보던 고영무의 시선이 밀리카에게 머물렀다.

"김강남을 살해한 죗값은 콜롬비아에서 받아야겠지. 그건 너희들의 짓이야."

"난 너를 모른다, 미스터."

매린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저었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하겠어,"

"보스."

요원 한 명이 방으로 들어섰다. 그는 손에 든 가방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돈입니다. 1백 달러짜리로 30만 달러가 들어 있습니다."

"마약 판 돈이로군."

앨버트가 가방에서 매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 돈도 증거물이 된다. 매린, 자 가실까? 가서 저 돈의 출처를 말해야겠지"

"대사관에 연락을 하겠어. 저 돈은 우리의 여행경비일 뿐이야. 마약과는 상관없어."

매린이 턱을 들고 말했다.

"아마 당신들 모양이 우습게 될 거야. 두고보라구."

고영무는 팔짱을 끼고 서서 밀리카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실내복 차림이었으므로 가운이 벌어진 사이로 허벽지가 보였다. 아랫입술을 깨문 채 방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녀가 퍼뜩 머리를 들었다.

"우리는 네놈을 몰라, 미스터."

그녀의 날카로운 목청이 방안을 울리자 모두들 움직임을 멈췄다.

"도대체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거야. 우리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녀가 눈물을 흘렸으므로 지미가 고영무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조그맣게 머리를 저었다. 하나씩 둘씩 요원들이 방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난 앨버트가 매린 쪽으로 다가갔다.

", 갑시다. 우리는 정부의 영장을 가지고 있어. 당신들이 죄가 없다면 풀려나겠지."

"좋소, 갑시다. 미국에서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죄 되는지 처음 알았어."

매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콜롬비아 정부에서 날 보증할 거야. 당신들 잘못 짚었어."

그의 시선이 고영무에게 향해졌다.

"저놈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증인이라니. 어디 당신들 뜻대로 되나 봅시다."

따라 일어선 밀리카가 턱을 들고는 매린의 뒤를 따랐다.

"지미, 어떻게 된 거요?"

현관을 나서면서 고영무가 묻자 지미는 머리를 저었다.

"마약이 발견되지 않았어. 이미 처분한 모양이야."

"마약의 판매대금 아니겠소? 그 돈이."

지미는 대답하지 않고 세워 둔 차에 올랐다.

", 타지 않겠어?"

그가 창문을 열고 고영무를 바라보았다.

"아니, 난 따라가지 않겠어."

고영무가 머리를 저었다.

"내가 따라가서 할 일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아."

"증인으로 필요할 텐데."

"물론 법정에 세운다면 내가 중인이 되어 주겠어."

요원들을 태운 차량들이 그들의 곁을 스치고 지났다.

"내가 내일 당신한테 연락하겠어, 지미. 설마 나를 강제로 붙들고 있을 생각은 아니겠지?"

잠시 그를 바라보던 지미가 머리를 돌려 좌우를 둘러보았다. 요원들의 차들은 모두 떠났고 집의 현관 근처에 서 있는 두 명만이 그의 눈에 띄었다. 지미가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내일 연락을 해주게."

"걱정 말어, 지미."

"자네는 짐승 같아. 무슨 예감을 느낀 모양이군."

"내가 지금 믿을 것은 그것밖에 없어."

"하긴 놈이 콜롬비아 정부를 들먹일 때 나도 기분이 편치 않았어,"

"지미, 놈들은 마약을 운반해 왔어. 내가 당신들에게 맡긴 이상 틀림없이 증거를 찾아내야 돼."

지미는 머리를 돌리더니 차의 시동을 걸었다. 그의 차가 로터리를 돌아 지나자 고영무는 걸음을 떼었다.

 

"난 그들이 이곳에 와 있는지 모르고 있었소, 페르난도하고는 이달 말에 베네수엘라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알폰소가 손가락 끝으로 콧수염을 만졌다.

"페르난도는 이미 돈을 받은 모양이군. 그의 쫄따구가 30만 달러씩이나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오."

수염에서 손을 덴 알폰소가 물끄러미 고영무를 바라보았다.

"미스터 고, 당신이 그런 목적을 가지고 LA에 왔다는 것이 나한테는 뜻밖이오. 더구나 그들이 카를로스의 일당이라는 것을 알면서 말이오."

"난 그런 것은 상관없습니다, 알폰소."

고영무가 머리를 젓고는 술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누구의 일당이든 간에 난 그 연놈들을 잡아서 내 누명을 벗어야 합니다."

", 내가 카를로스와 거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소?"

"그래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내가 하는 일이 당신에게 좋지 않은 영향이 올 것 같아서요, 계약을 없던 일로 해도 좋습니다."

알폰소는 자신의 빈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 당신은 카를로스라는 거대한 괴물을 상대로 하고 있어요. 당신의 상대는 그 남녀가 아니오. 카스틸로 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도 그의 자금지원을 받고 있어요. 콜롬비아 전국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놈들은 그들밖에 없어요."

고영무는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알폰소하고는 그의 대리인으로 일해 주기로 계약을 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카스틸로 정권이건 라파엘 반군이건 상관할 것이 없었다. 그들이 어떤 이념으로 싸우는지 알지도 못했고 알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자신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자신을 믿는 사람이다. 믿고 일을 맡겨주겠다는 알폰스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알폰소가 카를로스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일 때문에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밀리카와 맥밀란이라고 자칭했던 매린을 마약부로 넘기고 온 고영무는 모든 것을 알폰소에게 털어놓은 것이다

"할 수 없는 일이지."

술잔에 반쯤 담긴 위스키를 커다랗게 한 모금 삼키고 난 알폰소가 더운 기운을 입 밖으로 뱉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릴수록 나는 당신에게 매력을 느끼게 되다니 이상하단 말이야."

"배신과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세상이오. 당신은 나한테 그 일을 털어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었겠지요?"

"나는 이 일을 모른 척하겠어. 그것이 우리 서로 간에 좋을 거요. 그리고 당신과 나와의 계약도 그대로야."

"알폰소, 그 여자는 페르난도의 동생입니다. 오늘 마약부로 잡혀간 여자 말이오."

알폰소가 술잔을 내려놓고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놈, 매린이라는 놈하고 같은 집에 살고 있었으니 그놈이 남편인지도 모르지요."

"야단났군."

알폰소가 엄지와 검지로 콧수염을 빠르게 쓸어내렸다.

"당장에 페르난도가 당신을 찾겠는데."

"그래서 오늘 밤에 호텔을 옮길 작정입니다. 나야 상관없지만 당신이 불편할 테니까."

"그래, 내가 조금 불편하겠군"

눈을 껌뻑이며 고영무를 바라보던 알폰소가 머리를 끄덕였다.

"일이 생각보다 빠르게 돌아가겠어. 폐르난도는 지금쯤 여동생이 잡혀간 걸 알고 있을 거요. 사람을 보내서 그들을 면회하게 한다면 당신의 존재를 알게 되겠지. 늦어도 내일이면 놈들이 이곳에 오겠는데."

"미국 재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증인이지. 당신은 콜롬비아에서 살인 혐의로 수배된 사람이야. 당신의 증언을 믿어 줄까?"

"자초지종을 설명해 준다면 이해를 할 겁니다. 그리고 페르난도의 동생이 체포되어 있으니까요. 그 여자는 나를 모른다고 했지만 난 그 여자의 은밀한 부분까지 모두 알지요."

"허허, 그럼."

알폰소를 향해 고영무가 머리를 끄덕였다.

"상상하시는 것 이상이오, 알폰소. 아마 내 증언이 그들의 거짓말을 깰 겁니다. 난 마약 수송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럴수록 위험하단 말이야."

술잔이 비었으나 알폰소는 더 이상 잔에 술을 따르지 않았다.

"어서 호텔를 떠나시오, ."

그가 턱을 들며 재촉하듯 말했다.

"그리고 이것이 콜롬비아의 내 연락처요. 이곳으로 연락하면 나하고 연결이 됩니다. 나를 찾을 때는 미구엘을 찾으시오, 돈 미구엘."

고영무는 그가 건네주는 쪽지를 받았다.

"그리고 이것."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탁자의 서랍을 열고 두툼한 서류 봉투 한 개를 꺼내어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계약금이오. 당신은 이제 내 대리인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될 거요. 바쁘게 될 겁니다."

"내 이름을 하나 지어 주시오, 알폰소. 미스터 고는 이미 너무 알려져서요,"

고영무의 말에 알폰소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지, 내가 그 생각은 못 했군."

잠시 고영무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알폰소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지, 프랑코라고 합시다. 작년에 죽은 내 부하의 이름이오, 그의 영혼이 당신을 보살펴 줄 것이오."

고영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알폰소는 그의 어깨를 한 손으로 두드렀다.

", 기운을 내요, 프랑코."

"고맙습니다, 알폰소."

봉투를 들어 보이며 고영무는 방을 나섰다.

 

페르난도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앞에 암은 알렉산더를 바라보았다.

"내일 아침에 대사관의 미카엘 참사관이 신원보증을 해주기로 했어. 보석금이 얼마 들더라도 둘을 빼내어야 돼."

알렉산더가 머리를 끄덕였다.

"염려 마십시오, 페르난도. 내일 오전에는 집으로 돌아올 수가 있습니다."

"그 한국인이 마약부에 있던가? 그놈을 보았어?"

"아니, 없었습니다, 페르난도."

페르난도가 소파에 등을 기대고는 팔짱을 끼었다. 깊은 밤이었고 산타모니카 해변 근처에 있는 그의 저택 안이었다. 드럼통 같은 몸매를 실크 가운으로 감싸고 있었으나 드러난 맨다리가 보였다. 별이 무성하게 덮인 우람한 다리였다.

"그놈, LA까지 따라오다니 지독한 놈이군. 거리에서 헤매고 있는 줄 알았더니."

"페르난도, 그놈이 모두 털어놓은 모양입니다. 마약부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알렉산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오십 대의 머리가 흰 사내였다. 얼굴은 주름살로 덮여 있었지만 눈동자는 열은 하늘색이었다. 페르난도의 고문 변호사로 일해 왔지만 지금처럼 큰일은 없다. 마약부에 잡혀 있는 매린의 전화를 받고는 가슴이 털씩 내려앉는 것 같았던 것이다. 부랴부랴 달려가 보았던 그는 마약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자 일단 마음이 놓였다. 돈이 발견된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고영무의 이야기를 들었다. 고영무라는 한국인은 보고타에서 마약이 실릴 때부터 깊게 관여된 사람이었다. 마약부가 증인으로 확보한 그가 자초지종을 증언해 나간다면 이것은 마약이 발견된 것보다도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놈은 밀항선을 타고 왔을 거야, 알렉산더"

페르난도가 문득 입을 열었다.

"놈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내는 것은 쉬워. 놈들이 보호하고 있지 않다면 말이야. 아마 공식적으로 보호하지 못할걸."

"콜롬비아하고 미국이 범인 인도 협정은 되어 있지 않지만 방법이 있지. 외무부에 압력을 넣으면 놈은 살인 혐의자이기 때문에 공식 자리에 나타나지 못해. 그러면 증언의 신뢰성도 떨어지고."

"미국이 그런 놈을 이용했다는 것은 미국 정부의 체면에도 관련되어 있어서."

알렉산더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 한국인이 마약부에 보이지 않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과정을 알고 있지만 얼굴을 내밀고 나설 수는 없겠군요."

"살인자니까, 놈은 자신에게 드리워진 그것을 떨어 버릴 수 없어."

페르난도는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벌써 새벽 두 시로군, 알렉산더."

알렉산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페르난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동생은 내일 오전 중에 나옵니다."

"그 애는 지금 임신 중이야. 매린하고 곧 결혼하기로 되어 있어. 보고타에서 어머니도 곧 올라오실 것이고. LA에서 멋진 결혼식을 올려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

그를 올려다보면서 페르난도가 나직하게 말했다. 알렉산더가 응접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페르난도는 수화기를 들고는 다이얼을 눌렀다.

"피에르, 나다."

그의 말투가 싹 바뀌었다. 뚝뚝 뜯어내는 듯한 억양이다.

"이번 밀항자 가운데서 고영무라는 한국인을 찾아라. 놈은 LA에 있어."

그는 힐끗 창밖을 바라보았다. 짙은 어둠에 싸여 있어서 푸른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찾는 즉시 잡아서 죽여라. 죽이고 나서 꼭 확인할 것. 그리고 나한테 보고해라."

페르난도는 머리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이다, 피에르,"

 

 

 

8. 잠복

"아저씨, 여기 309호 열쇠 있어요."

아파트 경비실로 다가간 임미현이 열쇠를 건네주자 경비원이 머리를 들었다.

", 엊그제 그 아가씨구만."

"아저씬 기억력도 좋으셔."

그를 향해 한눈을 감아 보인 임미현은 가벼운 걸음으로 현관을 나섰다. 쌀쌀한 날씨였으나 햇빛이 밝은 늦은 아침이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주부들이 겨우 숨을 돌리는 시간이다. 아파트 앞마당은 한산했다. 슈퍼마켓의 배달원이 자전거에 가득 배달품을 싣고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났다.

"아가씨, 잠깐만요."

부르는 소리에 임미현이 몸을 돌렸다. 정장 차림에 이목구비가 번듯한 사내가 뒤쪽에서 바쁘게 다가왔다.

"아가씨가 금방 장규식 지배인님 집에서 나오신 거지요"

그녀 앞에 선 사내가 물었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을 보니 뛰어온 모양이었다.

"지배인님께서 집에 가서 열쇠를 가져오라고 하셔서요. 전화를 받지 않으신다고 저를 보내셨습니다."

"전화요? 난 전화벨 소리 못 들었는데,"

임미현이 머리를 비틀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전화기를 잘못 내려놓은 모양이지요? 어쨌든 가십시다."

"어디로요?"

오히려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임미현이 묻자 사내가 얼굴을 들더니 밝게 웃었다. 바보 같기도 하고 어린아이 같기도 한 웃는 모습이다.

"저기 전화박스에 가셔서 지배인님한테 전화를 하시면 됩니다. 지금 청산에 계시니까."

전화박스는 아파트 안쪽의 슈퍼마켓 옆에 세워져 있었다. 임미현은 앞서가는 사내를 따라 전화박스로 다가갔다.

"내가 전화를 걸고 바꿔 드릴게요."

사내가 박스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동전을 넣고 다이얼을 누르는 사내의 뒤에 서서 임미현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는 하품을 했다.

"여보세요, 나 석동수인데, 지배인님을 바꿔줘요."

사내가 전화기에 대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 지배인님, 저 석동수입니다. 지금 아파트 앞에 와 있는데요, 아가씨가 밖으로 나왔지 뭡니까? 열쇠는 경비실에 맡기구요, 제가 경비실에 가서 열쇠를 달랠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사내가 임미현을 돌아보았다.

"바꿔달라시는데요."

임미현이 끄덕이며 수화기를 건네받자 몸을 틀어 전화박스 밖으로 나가려던 사내가 박스의 문을 닫고는 돌아섰다. 다시 얼굴에 천진한 웃음을 띠우고 있었는데 한 손에는 조그만 약병을 쳐들고 있다. 수화기를 귀에 댄 채 임미현이 눈을 치켜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것, 염산이야. 소리를 지르거나 조금이라도 지랄을 하면 얼굴에 확 부어 버릴 거야."

그의 말소리는 사근사근했고 얼굴의 웃음기도 그대로였다. 사내는 염산 병을 조금 기울여 전화기의 철판 위에 한두 방울을 떨어뜨렸다. 임미현의 눈앞에 지글거리며 녹아내리는 철판이 보였다.

", 시키는 대로 해. 나하고 같이 경비실에 가서 지배인 집에다 놓고 온 것이 있다고 말해, 그래서 열쇠를 찾아 가지고 같이 올라가잔 말이다."

철판은 아직도 녹아내리고 있었으므로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났다.

"네년한테 손해 볼 일이 없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놓아 주마. 그렇지 않으면 네년 얼굴이 흉악하게 될 거야. 사람들이 널 보면 모두 몸서리를 치고 도망치게 될 거다."

사내가 병을 기울여 한 방울을 그녀의 가방 위로 떨어뜨렸다.

"아앗!"

수화기를 떨어뜨린 임미현이 짧게 소리쳤다. 가방에 구멍이 들렸고 안쪽으로 계속 타들어 갔다.

", 조금이라도 다른 눈치를 보였다가는 네 얼굴에 확 뿌려 버리고 튈 거야."

그녀의 팔을 낀 사내는 박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 웃어라, 이년아."

그녀를 향해 웃으면서 사내가 말했다.

"병째로 쏟아 버리면 네 눈은 타버려. 눈알에 구멍이 들려 버린단 말이다. 쓰레기 같은 얼굴이 되지. 이 쌍년, 안 웃을 거야?"

끼고 있는 왼쪽 팔을 통해서 그녀가 온몸을 떨고 있는 것이 사내에게 느껴졌다.

"웃겠어요, 웃을게요."

그녀가 아래턱에 힘을 주며 입을 벌렸다. 두어 번 이가 마주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더 크게 입을 벌리자 이제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아저씨, 열쇠 주세요."

경비실 앞에 선 그녀가 경비원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놓고 온 것이 있어요."

그녀의 옆에 선 사내가 따라 웃었으므로 경비원도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 헛걸음을 했군 그래?"

경비원이 열쇠를 건네주며 그들에게 웃어 보였다.

"제발 살려주세요. 제 얼굴만은 건드리지 말아요, ?"

엘리베이터 안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으므로 임미현이 울상을 짓고 말했다.

"그래, 말을 잘 들었으니까. 하지만 두고 봐야지 끝까지 잘 듣는가."

"잘 들을게요, 잘 들어요."

"나갈 때도 웃어야 돼."

", 염려 마세요."

그들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는 309호실 앞으로 다가갔다.

"열어."

사내가 말하자 임미현은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넣어 돌렸다. 찰칵이는 소리가 들리면서 윗 자물쇠가 풀리더니 이내 아래쪽 자물쇠도 열렸다. 사내가 손잡이를 잡고 비틀면서 안쪽으로 밀자 철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됐어, 가자."

문을 잡아당겨 놓은 사내가 다시 임미현의 팔을 끼었다. 아주머니 한 명이 그들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노인 두 명이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아저씨, 열쇠 여기 있어요."

임미현이 다시 웃으며 말했고 경비원이 그들을 향해 웃었다.

"빨리 나왔군 그래."

 

장규식이 유장수의 아파트 앞에서 차를 내리자 현관을 나와 이쪽으로 다가오는 홍성희의 모습이 보였다. 흰색의 털코트로 몸을 감싼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화사했다.

"외출하십니까?"

한쪽으로 비껴선 장규식이 머리를 숙였고 그의 뒤쪽에 서 있던 박기석과 진영수는 일제히 허리를 취었다

"방송국에서 오라고 해서요."

그를 향해 홍성희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지만 오후 세 시까지는 돌아올 거예요."

그녀의 뒤쪽으로 두 명의 부하를 거느린 안진홍이 다가왔다. 그는 장규식을 향해 머리를 숙여 보였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장규식이 머리를 숙이는 사이에 짙은 향수 냄새를 풍기면서 홍성희가 그의 앞을 지났다. 그녀의 뒤를 안진흥과 부하들이 따르고 있다. 장규식이 아파트로 들어서자 신문을 읽고 있던 유장수가 머리를 들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머리를 숙이는 장규식을 향해 유장수가 웃었다.

"그 말이 실감나는구나,"

"그렇게 신경이 쓰이십니까?"

따라 웃으며 장규식이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어쨌든 오늘 오후 다섯 시에는 결론이 나겠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

입술 끝을 올리며 잠시 머리를 돌렸던 유장수가 장규식을 바라보았다.

"들어오면서 만났겠구나."

", 만났습니다. 진홍이가 따라가더군요."

"그놈을 붙여 두면 안심이 돼. 눈치 빠르고 대담한 놈이니까."

"그렇지요, 마음 놓으셔도 될 겁니다."

"그 애한데서 휴대폰을 빼앗아 두었다. 전화가 오면 곤란할 것 같아서. 아무 말도 않더구나.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였어."

머리를 끄덕여 보이면서 장규식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될 수 있는 한 홍성희의 일에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영리한 애야. 적응력도 빠르고,"

혼잣소리처럼 유장수가 말했다.

"하긴 잡초처럼 자란 인생이지. 쓰레기 속에서 헤어나와 이제는 공주가 되었으니까, 잡은 것을 잃을 수는 없겠지,"

"사장님, 이제 놈들만 잡아 없애면 다른 걱정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장규식이 자르듯 말하자 유장수는 입맛을 다시더니 머리를 돌렸다.

"사장님, 김종무를 만나 보시겠습니까? 며칠 전부터 사장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조심스럽게 장규식이 입을 열었다.

"사장님 말씀을 듣고 나서 홍콩으로 가겠다고 합니다."

"내일 만나기로 하자, 오늘은 바쁘니까."

"그럼 그렇게 전해 두겠습니다."

머리를 끄덕이며 장규식이 허리를 졌다. 김종무는 마약 운반업자로 전에는 강일준의 동업자였다. 오십 대 후반으로 유장수와 비슷한 나이였으나 외국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국내에 기반이 없었다. 더욱이 강일준이 독립해 나가서 조직력을 갖춘 뒤 유장수와 손을 잡자 아주 몰락해 버렸던 인물이다. 그러던 그가 강일준의 사건을 알고 나서는 유장수를 만나려고 안달을 하고 있었다.

"사장님, 강일준이 그렇게 되고 나니까 어중이떠중이들이 마약 사업에 손을 대려고 들썩거리는 것 같습니다. 강일준이 있을 적에는 그런 놈들이 머리를 들지를 못했는데 이제는."

"그런 이야기, 우석이한테서 들었다. 놈들이 직접 보스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면서?"

", 그것을 빨리 진정시키셔야 합니다. 우선 김종무로 수입업자를 잡으시고, 공급선을 하나로 해야‥‥‥‥"

유장수는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 전과는 달리 한국의 조직사회는 기업화가 되어 가고 있었다. 예전처럼 조직 폭력배나 폭력배의 두목으로 불리는 사람은 없었고 사람들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기업군의 사장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겉으로 생산공장이나 무역회사를 차리고서 사회에 당당히 진출해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부산에 있는 건일산업의 김건일 회장은 호텔업과 통조림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자수성가한 사업가로 알려져 있다. 예전처럼 유홍가에서 싸움은 일어나지 않는다. 지역별로 조직의 보스들에게 모두 장악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산은 김건일 회장, 대구는 박한영 사장, 이런 식이었다. 각 지역별로 분쟁이나 마찰이 있을 때에는 원로급으로 구성된 5인 위원회가 중재를 맡는다. 5인 위원회의 구성원은 지역 보스로 은퇴했거나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 전국 38개 지역 보스 중 과반수 이상의 추천을 받아서 선임이 된다. 그러나 다른 5인 위원회 성원의 만장일치 동의를 받아야 했다. 5인 위원회의 임기는 종신이었고 결원이 생길 때만 보충을 하므로 근래 3년 동안은 위원 선출도 없는 상황이었다.

"조심해야 돼. 마약은 아직 우리 위원들한데서도 공식화되지는 않았어. 말썽이 난다면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

유장수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정부나 사범기관들이 마약에 대해서는 융통성을 보이지 않아. 강일준의 의문사가 그럭저럭 넘어간 것도 그 때문이야."

"알고 있습니다만 이성철 위원이 그쪽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요. 어차피 마약 인구가 있는 한 마약은 들어옵니다, 사장님,"

장규식이 자리를 고쳐 않았다.

"저희들이 공급해 준 5개 지역 보스 외에도 가져갈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 위원이 지난번에 태국에 다녀온 것도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장수가 잠자코 장규식을 바라보았다. 이제까지 마약은 조직사회에서도 금기시된 거래였다. 그것은 잘 지켜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조금씩 깨어져 간다. 엄청난 이득을 안겨 주는 매력도 있지만 위원들과 조직의 규율이 해이해진 것도 있을 것이다. 유장수는 이성철이 자신과 같은 방법으로 다른 공급업자를 내세워 지역 보스에게 마약을 배분해 주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다른 위원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장규식의 얼굴을 바라보던 유장수는 조그맣게 머리를 끄덕였다.

"매사에 조심하도록. 저 애한테까지 약점이 잡힌 내 꼴이 안되도록 말이야."

그리고는 유장수가 히죽 웃었다.

 

오후 다섯 시가 조금 넘어 있었으나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이 흐려 있었다. 신용만은 손에 든 묵직한 시장바구니를 고쳐 쥐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요. 우리 큰애는 지금 감기가 걸려서 낫지가 않아요."

사십 대의 여인이 맞장구를 쳤다.

"요즘 감기는 잘 낫지 않는다던데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들은 아파트의 현관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저는 이제까지 감기 걸려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어머나, 세상에"

여인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떠 보였다. 경비원이 머리를 들고는 여인에게 아는 체를 했다. 그의 시선이 신용만에게 멈췄다가 다시 여인에게로 가더니 이내 보고 있던 책으로 옮겨졌다.

"여름에 일광욕을 많이 하면 감기 안 걸린다는 말은 거짓말이에요."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여인이 말했다.

"을 여름에 그 애는 매일 일광욕을 해서 새까맣게 태우더니만."

삼층의 불이 켜지고 엘리베이터가 멈추었으므로 신용만이 짐을 내려놓고 여인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럼 다음에 또."

"아이구, 고마웠어요."

신용만은 서두르듯 309호실 앞으로 다가갔다. 복도에는 왕래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있다고 해도 대수로울 것은 없다. 장규식 똘마니들이 수시로 드나들었을 것이었으므로 이상하게 보지도 않을 것이다. 306호실 앞에서 멈춘 신용만은 주머니에서 열쇠 뭉치를 꺼내어 들었다. 안에서 사슬만 채우지 않았으면 5분이면 열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쯤 장규식은 국제호텔의 어딘가에서 다리를 떨고 있을 것이므로 이 집은 빈집이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위쪽의 자물쇠가 풀렸다. 머리를 끄덕인 신용만은 아래쪽 자물쇠에 열쇠를 꽃았다. 세 번째 열쇠를 꽃아 비틀자 다시 철컥이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린 것이다. 시간은 재어 보지 않았지만 350초쯤 걸린 것 같았다. 문의 손잡이를 잡은 신용만은 좌우를 돌아보았다. 텅 빈 통로에는 인적이 없다.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텅 빈 집안에서는 환기가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인지 비린내가 났다. 비 오기 전에 나는 것 같은 억눌린 공기 같았다. 그는 신발을 신은 채로 응접실로 다가가 소파에 앉았다. 아파트는 40평쯤 되어 보였는데 제법 잘 꾸며져 있었다. 선반에는 수십 가지 종류의 고급 위스키가 꽂혀 있었고 구석에 놓인 TV는 최신형 35인치짜리였다. 응접실을 둘러보고 있던 신용만의 시선이 안방 쪽에 머물렀다. 문이 조금 열려 있었던 것이다. 이맛살을 찌푸린 그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에 안방 문이 활짝 열렸으므로 저도 모르게 신용만은 온몸을 굳혔다. 이렇게 놀라 본 일도 처음이었다. 입을 딱 벌리고 주먹을 쥔 신용만의 눈에 한 사내가 보였다. 그는 얼굴에 웃음을 띠우고 있었는데 그의 손에는 검정색의 묵직한 권총이 들려 있었다.

"움직이지 말아, 이 자식아. 입도 벌리지 말고.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넌 송장이 될 테니까."

사내가 소근거리며 말했는데 고함을 치는 것보다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사내의 뒤쪽으로 콧수염이 난 건장한 사내 한 명이 또 나타났다. 그는 한 손에 굵은 지팡이를 짚고는 절름거리면서 신용만의 앞으로 다가왔다.

"넌 누구냐?"

지팡이 끝으로 신용만의 얼굴을 가리키며 물었는데 지팡이의 끝엔 날카로운 쇠못이 박혀 있었고 거리는 5센티도 안 되게 가깝다. 그가 지팡이를 뻗으면 양미간이 들릴 참이었다.

"난 신용만이다, 이 새끼들아."

생각도 빠르고 판단도 빠른 신용만이다. 그는 깨끗하게 미련을 버렸다. 장규식의 졸개들이 집안에서 권총까지 갖추고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생각 밖이었다. 기어코 함정에 빠진 것이다.

"신용만? , 이 새끼 좀 보게?"

절름발이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위아래를 훑자 신용만은 선 채로 턱을 올렸다. 두 손의 처리가 조금 어색했으므로 그는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었다.

"신용만이라‥‥‥‥"

절름발이가 다시 중얼거리듯 말했고 범상한 사내는 여전히 권총으로 신용만의 머리를 겨누고 있다. 절름발이가 지팡이를 내리면서 물었다.

", 뭐하려고 이곳에 왔어"

입을 열려던 신용만의 시선이 발에 머물렀다가 올라갔다. 그는 신발을 신고 있었다.

"당신들은 누구야?"

이제는 신용만이 다그치듯 물었다.

"난 장규식이 죽이러 왔어. 그런데 당신들은?"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최대광은 아파트를 올려다보고는 수화기를 들었다. 다이얼을 누르자 곧 신호가 떨어졌다.

", 진성 아파트 관리실입니다."

무뚝뚝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나는 아파트 주민인데요, 신고할 것이 있어요."

최대광도 뚝뚝하게 말했다.

"15동 오른쪽 벽에 말이오, 누가 지금 선전물을 붙이고 있어요. 그거 못 붙이게 해야 하는 것 아니오?"

"알았습니다."

사내가 전화를 내려놓았다. 전화박스에서 나온 최대광은 성큼거리며 아파트의 입구로 다가갔다. 현관 10미터쯤 앞으로 다가갔을 때 경비원이 현관을 뛰쳐나왔다. 그가 엉덩이를 흔들며 아파트의 오른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면서 최대광은 아파트 안으로 들어섰다. 너는 네가 알아서 재주껏 들어오라고 했던 신용만에게 보여주고 싶은 장면이었다.

 

장규식은 휴대폰의 스위치를 끄고는 몸을 돌렸다.

"돌아간다. , 2층에 올라가서 애들 내려오라고 해."

사내 한 명 이 재빠르게 몸을 놀려 2층의 비상계단을 올라갔다. 호텔의 로비를 걸어 현관 쪽으로 다가서는 사이에 이쪽저쪽에 박혀 있던 부하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모두들 입을 열지 않았으므로 여남은 명의 사내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호텔을 나서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끗거렸다. 밖은 이미 짙은 어둠이 내려 있었다. 최대광은 일곱 시가 넘었는데도 연락조차 없었던 것이다. 장규식은 몸을 돌려 호텔의 2층을 바라보았다. 오후 네 시에 홍성희의 전화를 받은 최대광은 다섯 시 정각에 국제호텔의 210호실에서 만나자고 했던 것이다. 이제는 위경련도 나았다면서도 껄껄대고 웃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놈은 이쪽의 계획을 눈치채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승용차가 앞에 와서 멈추었으므로 장규식은 차에 올랐다. 앞자리에 박기석이 들어왔다. 차 안에는 한동안 무거운 정적이 깔렸다. 이윽고 호텔의 현관을 나오는 홍성희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뒤로 안진흥과 두 명의 부하가 거머리처럼 따랐다.

"이리 모시고 와라."

장규식이 낮게 말하자 박기석이 서둘러 문을 열고 나갔다. 그가 홍성희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이쪽으로 다가와 옆자리에 오르자 차는 호텔 앞을 떠났다. 한동안 차 안에서 들리는 것은 희미한 엔진 소리와 옆을 스치는 다른 차량의 소음밖에 없었다.

"놈들은 눈치를 채었습니다."

장규식이 입을 열었다. 낮은 목소리였으나 차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똑히 들렸다. 힐끗 장규식을 바라본 홍성희가 다시 머리를 돌리더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보통내기들이 아니지요. 한 놈은 비상하게 머리를 쓰고 다른 한 놈은 힘이 있어요. 손발이 맞는 놈들입니다."

장규식이 억양 없는 목소리로 발을 이었다.

"사장님은 아마 아가씨를 안 보실 겁니다. 오늘 놈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아가씨는 어떻게 되실지 알고 계시지요?"

홍성희가 그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아랫입술을 잔뜩 깨물고 있었다. 그러나 얼른 입을 열지는 않는다. 스쳐 지나는 차량의 불빛에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이다가 어두워지곤 했다.

"나로서도 도리가 없습니다. 아니, 그보다도 내 생각인데."

고개를 숙인 장규식이 그녀에게로 얼굴을 가깝게 대었다.

"아가씨는 협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놈들에게 협조한 것입니다. 사장님의 구속에서 해방되고 싶었겠지요."

"... "

"그런 여자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때는 사장님이 섭섭하지 않게 해서 보내주셨는데 이번 경우는 특별하군요."

이를 악문 홍성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놈들이 죽어야 아가씨가 삽니다. 나는 오늘 일도 아가씨가 놈들에게 어떤 정보를 주었다고 생각해요. 사장님 생각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 둘 중 하나를 잡아요. 살 거요? 아니면 죽을랍니까?"

"어떻게 하란 말예요? 나는 속인 것이 없는데. 믿지 않겠지만 어제와 오늘 그 사람들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했어요."

홍성희가 목이 메인 듯 침을 삼켰다.

"그렇다면 그놈들을 다시 불러요. 여기 전화기가 있으니까."

장규식이 휴대폰을 꺼내어 그녀의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전화하기 전에 한마디만 물읍시다."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며 그가 물었다.

"그놈, 최대광이하고 좋아하는 사이 아닙니까? 아니, 지금은 아니라고 치고, 좋아하는 사이였지요?"

창밖으로 시선을 준 홍성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장님이 안 계시니까 물어보는 소리요. 사장님은 아시면서도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걸 알면 나에게 도움이 돼요. 물론 아가씨한테도 말이오."

"아녜요, 그건 말두 안 돼요."

머리를 돌려 장규식을 바라본 그녀가 대답했다.

"내가 그런 놈하고‥‥‥ 정말 말두 안 되는 소리예요. 반발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사장님한테. 그렇지만‥‥‥‥"

"사장님을 없애면, 예를 들어 죽여 버리면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생각 안 해봤습니까?"

눈을 치켜뜬 홍성희가 입을 열었으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장규식이 머리를 끄덕이며 눈으론 휴대폰을 가리켰다.

"전화를 해요, 그놈한테. 왜 안 나왔느냐고 물어요, 어서."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든 홍성희는 다이얼을 눌렀다. 다이얼을 누르는 소리가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의 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응접실의 불을 켤 수가 없었으므로 그들은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신용만은 주방 쪽의 구역을 맡았는데 장규식이 들어오고 나면 퇴로를 차단하는 역할이다. 총을 가진 이한기와 조한철이 문과 정면의 위치에 있기로 하고 최대광은 벽 쪽에 붙어 있게 되었다. 그런데 벽에 붙은 선반에는 위스키가 수십 병 진열되어 있는 것이다. 최대광은 이미 술병을 손에 쥐고 있었다. 술병을 기울여 서너 모금을 마시고 난 최대광이 그것을 조한철에게 넘겨주었다.

"어이, 자네도 한잔하지"

조한철의 시선이 술병에서 최대광의 얼굴로 옮겨졌다. 손을 내밀어 술병을 받지 않는다.

"아따 씨발, 안 받을 거여? 말어, 그럼."

최대광은 다시 술병을 기울여 몇 모금을 더 마셨다.

"거기 몇 살이야?"

조한철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두워서 얼굴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인다. 소파의 앞자리에 앉아 권총을 손질하고 있던 이한기가 얼굴을 들었고 주방 근처에 서 있던 신용만도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 나이 알어서 뭐하려고? 알고 싶다면 말해주지. 서른다섯이야, 내가."

조한철은 얼굴을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 나이가 몇인지 모르지만 나하고 말 트든지, 아니면 입 다물고 있든지 둘 중의 하나로 해"

이한기가 다시 총을 닦으면서 웃었다

"그만해 둬, 최대광씨."

"댁은 나이도 지긋하고 물정을 아는 사람 같아서 하는 소린데, 댁의 동행이 아까부터 내 신경을 건드리고 있단 말이야."

위스키 한 병을 반 시간도 되지 않아서 거의 다 마셔 버렸으므로 최대광은 얼굴이 후끈거렸다.

"? 그래? 뭐가 신경을 건드렸어?"

이한기가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비실비실 웃는 것도 지집애 같아서 보기가 언짧고, 총이나 만지작거리는 것도 싫단 말이야, 비겁하게."

신용만이 다가와 최대광의 어깨를 쳤다.

"이 자식아, 시비는 나중에 가려. 언제 장규식이가 돌아올지 모르는 판인데."

"시비는 무슨 시비, 젠장."

최대광이 선반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시비도 붙을 만해야 붙지."

"이봐, 최대광이 말조심해"

조한철이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으나 신용만이 듣기에는 천성으로 타고났는지 부드럽게 들렸다. 신용만이 어깨를 누르고 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최대광은 입을 열지 않았다. 한동안 응접실 안에 침묵이 흘렀고 신용만이 발소리를 죽이며 다시 주방 쪽으로 다가갔다.

"최대광씨는 한철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구만"

이한기가 소리 죽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철이는 보기와는 달리 독한 놈이라네. 저놈 별명이 거머리야. , 있지 않은가? 토막을 내어도 떨어지지 않고 달라붙어서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

"나는 별명이 고릴라여. 어렸을 때 별명은 찌럭소였고. 고릴라한테 거머리 붙는 것 못 봤고, 소한테 붙는 것도 못 봤어."

조한철은 잠자코 있었으나 이한기가 하얗게 이를 드러내며 웃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네 사람은 온몸을 굳혔다. 그중에서 제일 놀란 사람은 최대광이다. 가슴 호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이 울렸으므로 심장을 벨소리로 두드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니기미."

최대광이 투덜거리며 머리를 신용만 쪽으로 돌렸다.

", 이거 어떻게 하지?"

"어디 전화야?"

신용만이 대답하기도 전에 이한기가 다급히 물었다.

"그년일 거야, 홍성희, 그년 외에는 없어."

최대광이 대답하자 신용만이 다가왔다.

"받아, 휴대폰이니까. 우리 위치는 추적할 수 없을 거다."

"그래, 받아 봐. 쓸데없는 이야기는 말고."

이한기도 거들었다.

최대광은 휴대폰을 켰다.

"여보시오."

자신의 말소리가 집안을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대광씨, 저예요."

홍성희의 말소리는 응접실에 있는 사람들의 귀에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오늘 어떻게 된 거예요? 왜 나오지 않았지요?"

그녀가 다그치듯 물었다.

"무슨 일이 또 있어요?"

"너한테 싫증이 나서 그래. 그래서 안 나간 거야."

최대광의 어깨를 누르고 있던 신용만의 한 손이 가볍게 그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쳤다. 잠시 저쪽에서 말이 그쳤다. 이한기와 조한철이 온몸을 굳히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래요? 그래서 안 나왔어요?"

이윽고 홍성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용만은 그녀의 목소리가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건성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럼 나는 어떻게 되라구"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고 최대광이 휴대폰을 고쳐 쥐었다.

"어떻게 되기는 젠장, 니가 언제 나보고 살았냐? 나 같은 놈하고 천년만년 살려고 했단 말이여?"

그의 어깨에 놓여 있던 신용만의 손이 꼼지락거렸으나 제지하지는 않았다. 다시 홍성희의 말이 끊겼으므로 최대광이 잠시 숨을 돌리는 듯 휴대폰을 귀에서 떼었는데 갑자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대광이, 나 장규식이다."

엉겁결에 최대광이 턱을 번적 치켜들면서 어깨를 세웠고 나머지 세 사람의 몸도 굳어졌다.

"너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이 여자가 너하고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아. 그래서 이 여자를 몰아붙여서 너희 두 놈을 잡아내려고 했는데."

최대광이 기분이 이상한 듯 집안을 둘러보았다. 전화기에서 장규식의 말소리가 다시 울려나왔다.

"네놈들이 눈치를 챈 모양이야. 아니면 이 여자가 너희들에게 그것도 말해 주었는지도 모르고."

"지랄하고 자빠겼네, 개새끼가."

최대광이 통기듯이 말했다.

"야 이 씨발놈아,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 우리가 어디 있는가 알아맞혀 보거라."

신용만이 힘을 주어 최대광의 어깨를 눌렸다.

"너는 조만간에 내 손에 죽어, 이 새끼야."

어깨를 흔들어 신용만의 팔을 떨구어내면서 최대광이 씨근거렸다. 전화기에서 장규식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최대광이, 이 여자하고는 이제 이별이다. 기회를 줄 테니까 할 말 있으면 해라."

신용만이 어깨를 흔들고 있었으므로 최대광은 이를 악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는 모양이군. 실컷 이용해 먹고서. 그럼 끊는다."

전화가 끊겼으나 응접실 안의 네 사람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놈이 함정을 파고 있어."

어둠 속에서 이한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보기에는 최대광씨를 자극하려고 하는 것 같구만."

그러자 앞쪽의 조한철이 가벼운 웃음소리를 내었다.

"뻔한 수작에 넘어가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요?"

목소리는 사근사근했고 그것이 최대광의 온몸에 전류가 흐르도록 만들었다.

"이런, 뭐가 어찌구 어째 이 자식아?"

억누른다고 하였으나 최대광의 외침이 응접실을 울렸다. 신용만이 그의 목덜미를 잡아당겼으나 잔뜩 목을 앞쪽으로 뽑고 있어서 심술이 난 황소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저것 보세요, 형님."

조한철이 소곤거리며 웃자 이한기가 혀를 찼다.

"그만들 해둬, 제발."

한동안 응접실에는 씨근거리는 숨소리만 들렸다. 열두 시가 훨씬 지난 시간이어서 클럽의 주위는 한산했고 주차장에 대여섯 대의 차량이 세워져 있을 뿐이다. 승용차는 클럽 앞에서 멈추자 기다리고 있던 이동혁이 다가왔다. 그는 청산 클럽의 업무부장으로 실질적인 책임자였다.

"이제 오십니까, 지배인님."

넓은 어깨를 흔들며 다가온 이동혁이 차에서 내리는 장규식을 향해 허리를 꺾었다.

", 바빠서 곧장 들어가 봐야겠는데,"

장규식이 뒤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의 승용차를 따라온 두 대의 차량에서 사내들이 내리고 있었다. 뒤차에서 내린 안진흥이 팔을 휘저으며 걸어와 그의 옆에 셨다.

"걔를 데리고 나와라."

장규식이 이동혁에게 턱을 들며 말했다. 잠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이동혁이 한 걸음 다가셨다.

"지배인님, 미스 임은 오늘 가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몸이 아프다고 전화가 왔다는데요. 내일 나오겠다고 했답니다"

"다른 애 데리고 와."

"알겠습니다."

이동혁이 몸을 돌렸다. 싸늘한 바람이 휘몰려 오더니 코트 자락이 흔들렸다.

"지배인님, 그럼 저는 애들 데리고 사장님 댁으로 가겠습니다."

안진홍이 말하자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에 내가 일찍 갈 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몸을 돌린 안진홍이 부하들과 함께 차에 오르더니 차를 후진시키고는 어두운 거리 속으로 사라졌다. 장규식은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라이터를 켜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머리를 들자 늘씬한 여자와 함께 이동혁이 클럽의 현관을 나오는 것이 보였다. 승용차는 8차선 도로를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긴 머리의 아가씨는 그룹 댄싱을 하는지 솔로를 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으나 낮은 익었다. 그녀는 반대편의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으나 긴장한 듯 온몸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나 곧 긴장이 풀리고 온몸이 부드러워질 것이다. 장규식은 그러한 변화를 즐기는 버릇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힘에 대한 스스로의 확인도 되었다. 그의 앞에 선 여자는 굳어져 있어야 정상이다. 언젠가는 노래 부르는 여자가 그에게 대뜸 안겨 왔다가 얻어맞고는 길거리로 쫓겨난 적도 있었다.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으므로 앞자리에 앉은 박기석이 몸을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장규식은 앞좌석 등받이에 찔러 넣었던 휴대폰을 꺼내어 들었다.

"여보세요."

", 나야."

유장수의 목소리였다.

", 사장님."

그와 헤어진 지 아직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 장규식은 이맛살을 찌푸리고 전화기를 고쳐 쥐었다.

"진홍이는 보냈나?"

"네 사장님, 클럽에서 애들 싣고 조금 전에 출발했습니다."

"그래? 알았다."

전화가 끊겼다. 입맛을 마신 장규식은 휴대폰의 스위치를 껐다. 유장수의 아파트 근처에는 지금도 전우석이 인솔하는 열 명이 넘는 부하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이 미덥지 않은 모양이었다. 같은 충에 마침 전세로 내놓은 곳이 있었으므로 아파트 한 채를 전세로 얻어 그곳에 부하들을 머물게 하고 있는 것이다.

"년 뭐하고 있어?"

장규식이 불쑥 묻자 여자가 놀란 듯 머리를 이쪽으로 돌렸다. 이십 대 초반의 둥근 얼굴이었다. 당황한 모양으로 눈썹이 여러 차례 깜박였다.

", 이번에 윤 언니 밑으로‥‥‥‥"

장규식이 머리를 끄덕였다. 술 시중을 드는 아가씨인 모양이었다. 무대 위에서 설치는 여자보다 하룻밤 품고 자기에는 이런 애들이 나을 것이다. 밝은 피부와 곧게 뻗은 그녀의 다리를 바라보던 장규식은 머리를 돌렸다. 이동혁은 여자 보는 눈이 있는 놈이었다. 차가 아파트의 앞에 멈췄을 때는 한 시 반이 되어 있었다. 박기석이 문을 열고 내리더니 경비실로 들어갔다. 열쇠를 찾는 모양이었다. 여자가 주춤거리며 장규식의 뒤를 따랐다. 경비실 안에 서 있던 경비원이 머리를 숙였다. 그의 시선이 여자의 얼굴을 힐끗 스치고 지났다. 엘리베이터는 1층에 멈춰 서 있었으므로 그들은 안으로 들어가 문을 연 채로 서 있었다. 그러자 승용차를 주차장에 주차시켜 놓은 진영수가 헐떡거리면서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장규식은 입맛을 다시면서 턱을 들었다. 한 달 전만 해도 부하들을 데리고 아파트로 들어가지는 않았었다. 방은 세 개나 있으니 부하들을 다섯 명은 재울 수가 있지만 불편한 것이다. 그들 앞에서 여자를 끼고 노닥거리는 것을 보인다는 것은 체면에 관계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체면 때문에 목숨을 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대광이나 신용만이는 아예 위아래가 없는 놈으로 사생결단을 하려고 들 것이고 총에 맞고 도망친 이한기도 아직 찾지 못한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박기석이 앞장을 서서 309호실로 다가가더니 열쇠를 꽂았다. 옆쪽에 서 있는 여자에게서 옅은 화장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어젯밤의 임미현하고는 다른 냄새였다. 여자마다 약간씩 다른 냄새를 풍기는 것이다.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 너덧 명이었으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문에서 철커덕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신용만은 주방의 벽에 몸을 바짝 붙였다. 놈들이 들어서자마자 퇴로를 차단해야 하는 것이다. 문이 열리고 수선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현관에 불이 켜졌다. 그 불빛 하나만으로도 특 터진 응접실까지 비출 수 있다. 신용만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희들은 면저 자겠습니다."

사내 한 명이 말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철커덕거리며 안에서 문을 잠그고 있다. 신용만은 코로 길게 숨을 내리 쉬었다. 발자국 소리가 이쪽으로 가까워지고 있다. 신용만은 어깨를 한번 부풀리면서 주방의 벽을 돌아 뛰쳐나갔다. 바로 1미터쯤 앞에 다가오는 사내가 있었다. 그 사내가 그의 모습을 확인하기도 전에 신용만의 주먹이 양미간을 찍었고 입을 쩍 벌린 채 사내는 마룻바닥에 뒷머리를 부딪치며 넘어졌다. 그와 동시의 일이었는데 최대광에게 허리춤과 목덜미를 잡힌 사내 한 명이 벽으로 날아가 부딪히며 나가떨어졌다. 숨을 돌린 신용만이 머리를 들어 응접실 쪽을 바라보았다. 어깨를 움켜쥔 장규식이 찬장에 몸을 기대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앞쪽에는 권총을 겨눈 조한철의 모습이 보였다. 이한기는 안방의 문기둥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두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는 눈을 껌벅이며 그들을 둘러보고 있는 중이다. 그의 시선이 응접실의 한복판에 서 있는 여자에게 머물렀다. 그 순간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너 이년!"

짧고 날카로운 소리가 이한기의 입에서 떨어졌다.

"입 벌리면 너도 죽는다."

여자는 온몸을 굳힌 채 잠자코 서 있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소리 지를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신용만의 몸은 그들 모두가 볼 수 있었으므로 그가 행동하는 것과 맞추어서 손을 쓰기로 했던 것이고 걸린 시간은 5초도 되지 않았다.

"저년을 묶어."

이한기가 지팡이로 여자를 가리키자 조한철이 여자에게 다가갔다. 팔을 잡아끌자 휘청거리면서 안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신용만은 마루 위에 누운 사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양미간이 뻘겋게 부어올랐으나 죽지는 않을 것이다. 최대광이 장규식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너 이 새끼, 오늘이 니 제삿날이여. 아까 전화할 때는 미처 몰랐을 것이다."

그는 장규식의 멱살을 움켜쥐고는 허리를 틀면서 응접실 안쪽으로 내동댕이쳤다. 총에 맞은 어깨를 움켜쥐고 있던 참이라 균형이나 중심을 잡을 리가 없다. 소파와 탁자 사이로 던져진 장규식의 몸뚱이가 탁자를 부수었다. 쓰러진 채 이를 악문 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지기미."

신음 소리가 양에 안 차는 모양인지 최대광이 두 팔을 벌리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아예 모가지를 뚝 분질러 주께."

"잠깐만 최형."

이한기가 절름거리며 한걸음 다가왔다.

"죽이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이한기는 지팡이의 끝으로 장규식의 상처 난 어깨를 밀었다. 이를 악문 장규식이 다리에 힘을 주면서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탁자에 부딪혔는지 입술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그래, 죽이고 싶으면 죽여라."

낮고 억누른 목소리였으나 매듭이 분명했다. 그는 턱을 번쩍 치켜들고 자신을 둘러싼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네놈들도 오래 살지 못할 테니까."

그가 다시 말하자 최대광이 주먹을 들어 절구로 떡을 찧듯이 그의 머리 위를 내려쳤다. 장규식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잠깐 동안 뇌가 진동을 한 때문이다.

"난 너에게 돈을 받을 것이 있지, 장규식이. 그리고 이분들도 너에게 목숨값을 받아야 하고."

이한기가 그를 바라보고 앉아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다음날은 아침부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파트의 주변은 이미 신발이 젖을 만큼 눈이 쌓여 있어서 아이들이 만들어 놓은 눈사람이 군데군데 보였다. 커튼을 내리고 소파로 돌아온 신용만은 시계를 보았다. 아침 일곱 시 반이었다

"난 우선 병원부터 들러야 하겠구만."

장규식이 혼잣말처럼 말했으나 아무도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어깨에 잔뜩 붕대를 감은 뒤에 코트를 걸치고 있었으므로 겉으로는 표시가 나지 않았다. 입술의 상처는 깨끗이 닦아 놓았고 머리칼도 단정히 빗어 넘겼다.

"사흘이야, 장규식. 명심하라구."

이한기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현관의 벨이 울렸다.

"나가 봐."

이한기의 말에 장규식이 몸을 일으켰다. 몸을 움직이자 상처가 울리는지 장규식은 얼굴을 찡그렸다.

"어머니세요?"

현관으로 다가간 그가 소리쳐 묻자 바깥에서 여자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나다."

장규식의 뒤에 바짝 붙어 셨던 조한철이 그를 젖히고는 문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더니 문을 열었다. 예순이 넘어 보이는 여인이 얼굴에 웃음을 띠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시선이 조한철에게 머무르더니 장규식에게 옮겨졌다.

"아침 식전부터 어미를 오라고 하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

응접실로 들어서던 그녀는 소파에서 엉거주춤 일어서는 이한기와 신용만을 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어제 여기서들 잔 모양이지? 에이그 사내들끼리 궁상맞기도 하지."

그러자 건넌방에서 어젯밤에 장규식이 데리고 왔던 아가씨가 나왔므로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어머니 잠깐 여기 좀 앉으세요."

장규식이 앞자리를 가리키며 소파에 앉았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문을 잠근 신용만이 소파의 한쪽 자리에 앉았고 어머니의 옆에는 이한기가 않았다. 그의 옆에는 조한철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러자 안방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최대광이 셔츠의 단추를 풀어 놓은 차림으로 나왔으므로 어머니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의 뒤를 따라 박기석과 진영수가 나왔는데 박기석은 양미간에 퍼렇게 멍이 들었고 진영수는 다리를 절고 있다.

"어머니, 저 좀 보세요."

입을 벌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어머니를 향해 장규식이 말했다.

"제 말씀 잘 들으셔야 돼요. 중요한 일이니까요."

최대광이 쿵쿵 마루를 울리며 냉장고로 다가갔고 박기석과 진영수는 마룻바닥에 앉는다. 그들이 제각기 이쪽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그녀를 더욱 의아하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이맛살을 찌푸린 어머니가 장규식을 바라보았다. 주위에 앉고 선 사내들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있다. 그리고 인사도 하지 않는 것이다.

"어머니, 저는 어머니가 도와주시지 않으면 죽어요."

장규식이 입을 열었다.

"저는 지금 밖에 나가서 일을 봐야 돼요. 그래서 어머니를 오시라고 한 거예요."

"도대체 무슨 일이냐?"

어머니가 마음을 다져 먹은 듯이 얼굴을 들고 물었다. 그러나 시선은 주변에 있는 신용만과 이한기, 조한철을 향해 어지럽게 움직였다. 백발이 반쯤 섞인 머리에 얼굴은 주름살이 깊었으나 배대가 굵어 보였는데 장규식이 어머니의 체격을 닮은 모양이었다.

"어머니, 어머니는 아무 말씀 마시고 집에만 계세요. 나가시지 말구요."

장규식이 손바닥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니깐?"

어머니의 목소리가 커졌다.

"무슨 일인지 이야기를 해라, 어서."

"어머니, 저는 이 사람들한테 잡혀 있어요. 이 사람들은 저를 죽이려고 온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어머니의 시선이 신용만과 이한기 등을 차례로 흩었고 바닥에 앉아 이쪽에 등을 돌리고 있는 박기석과 진영수에게 머물렀다. 아가씨는 창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신 최대광이 중중거리며 다가왔다.

"아예 단숨에 쥑일려고 했었어, 아줌마 당신 아들은 아주 나쁜 놈이오. 자기 말로는 어쩔 수 없었다고 했지만 사람을 여렷 쥑인 놈이란 말이오."

그는 장규식의 뒤쪽에 서더니 그가 덮고 있던 코트 자락을 와락 벗겼다. 피투성이가 된 어깨가 드러나자 그녀는 눈썹을 치켜뜨면서 입을 벌렸다.

"아줌마 아들이 이곳에서 죽는 꼴 보지 않으려면 아줌마가 대신 이곳에 남아 있어야겠어."

"어머니, 사흘간만 있어 주세요, 이 사람들하고. 제가 사흘 후에는 모시러 돌아오겠습니다."

장규식이 상체를 숙이며 말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탁자 위에 떨어졌다.

"집에 남아 있을 사람은 이 사람들 둘입니다, 어머니."

그는 머리를 들어 옆에 앉은 이한기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들하고 사흘만 같이 지내 주세요. 사흘이면 모든 일이 끝나요, 어머니."

"내가 인질이란 말이냐?"

장규식을 바라보며 어머니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댁의 아들이 생각해낸 일이여. 우리를 원망할 것 없어요, 아줌마. 우리는 아줌마 생각도 허질 못혔으니까."

최대광의 말소리가 응접실을 울렸다.

 

"나는 마음에 안 들어, 느그들이."

최대광이 불쑥 입을 열었다.

"잔머리 굴리는 것이 마음에 안 든단 말이다. 그놈을 집 밖으로 내보낸 것은 잘못한 거다."

입맛을 다신 신용만이 다시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는 남부순환도로를 기어가듯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제 눈발은 조금 가늘어졌으나 날씨가 추운 탓인지 내린 눈이 녹지 않고 쌓이고 있었다.

"이한기는 돈을 받을 욕심만 있는 게 아니야, 내 생각은."

신용만이 입을 열었다.

"강일준이가 죽어서 조직이 산산조각으로 깨어졌단 말이다."

"당연하지, 마약쟁이는 깨져야 돼."

최대광의 말에 신용만이 머리를 저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유장수는 강일준을 죽이고 마약을 통째로 먹었더구만. 더러운 놈이야. 강일준이보다도 더 더러운 놈이다"

"모두 똑같아 임마, 강일준이나 유장수, 장규식이, 이한기, 그놈들. 제 에미를 인질로 내놓는 장규식이 같은 놈은 사람도 아니다."

최대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제가 살려고 제 에미를 불러와? 천하에 호로자식 같으니,"

"호로자식이야."

신용만이 머리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무서운 놈이지. 안 그러냐?"

이맛살을 찌푸린 최대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이 미끄러운 눈길을 헤치고 아파트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때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차에서 내리자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음만 먹었지 한번도 들어가 본 일이 없는 고영무의 아파트였다. 전에는 유장수의 부하들에게 꼬리를 잡힐까 보아서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했었다 그들 자신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지만 고영무의 가족에게 피해를 입힐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놈들은 이 아파트를 알아내었고 그런 불상사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 가자."

최대광이 양손에 든 과일과 통조림 꾸러미를 추켜들면서 앞장을 섰다. 이젠 장규식의 부하들이 본다고 해도 걸릴 것이 없었다. 신용만도 통조림 박스를 들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아버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최대광이 다시 머리를 숙였다. 그들은 응접실에 앉아 있었는데 신용만과 최대광이 서로 번갈아서 더듬거리면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난 참이다. 머리를 숙인 최대광은 큰 몸이 부끄러운 듯 잔뜩 움츠리고 앉아 있었다.

"모든 일은 형님이 저희들을 숨겨 주신 것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저희들은 죽으라고 하신다면 죽겠습니다."

신용만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하자 고진호씨가 머리를 들었다.

"그래, 잘 왔어, 잘 왔다. 이제 내막을 알게 되니까 개운하구나."

가정부가 다가와 커피잔을 내려다보고는 주방으로 돌아갔다. 세 사람 모두 커피잔에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영무한테서도 전화가 왔었다. 너희들이 오면 연락처를 가르쳐 주라고 했었어. 언젠가 너희들이 올 줄은 알았다."

그들이 머리를 들고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럼 형님이, 형님이 어디 계시는지 알고 계십니까?"

최대광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래, LA에 있어. 내가 전화번호를 적어 놓았다."

고진호씨가 몸을 일으키더니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주방에서 딸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잠시 후에 고진호씨가 안방에서 나왔다. 그는 손에 쥔 종이쪽지를 그들 앞에 내려놓았다.

"이제 형님이 계신 곳을 알았으니 저희들이 LA로 가겠습니다."

신용만이 쪽지를 집어 들며 말했다.

"아버님, 저희들이 목숨을 걸고‥‥‥‥"

"그런 이야기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고진호씨가 신용만의 말을 잘랐다. 그는 두 팔을 의자의 팔걸이에 얼고는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내 자식이 아니야. 그래서 하는 말이야."

"목숨은 귀중한 것이다. 너희들 목숨처럼 다른 사람들의 목숨도 아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버님."

최대광이 선뜻 목을 \숙였으므로 고진호씨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무어라고 입을 열려던 신용만이 머리를 숙였다.

 

 

 

9. 여인과 연인

"그놈은 어렸을 때부터 제 어머니의 속을 무척 썩였지, 끊임없이 말썽을 피운 놈이야, 어머니의 눈으로 보면."

고진호씨가 눈을 깜박이며 건너편 벽을 바라보았다. 그저 흰 벽지만 발라져 있는 벽이었으나 무엇인가 붙어 있는 것을 보는 시선이었다.

"싸움질에, 학교 빼먹기, 연락도 없는 외박, 등록금을 써버리는가 하면 운동권 친구를 집으로 데려와 숨겨 주기도 하고. 그놈 어머니는 자식놈 때문에 오래 못 살 것 같다고 했어."

고진호씨는 탁자 위에 놓인 커피잔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결국은 그렇게 되었군. 난데없는 놈들이 나타나서 무슨 테이프를 내놓으라고 하더니."

김영지가 사과 깎던 손을 멈추고 머리를 들었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영무 친구하고 관계가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영문도 모르는 일이야."

"정말 너무해요."

이맛살을 찌푸린 김영지가 머리를 저었다.

"그 친구분들 말이에요. 그 사람들 때문에 이쪽은 영문도 모르고."

"하는 수 없지, 다 끝난 일이야."

고진호씨는 머리를 돌렸다.

사과 껍질을 치운 김영지는 그릇을 그의 앞에다 내려놓았다.

"사과 드세요."

"그래, 고맙군."

고진호씨가 사과 조각을 집어 들었다. 오늘은 일요일이어서 가정부가 쉬는 날이다. 자주 찾아오는 김영지에게 고진호씨는 차츰 말수를 늘려가고 있었다. 지난번에는 고영무와 가까운 사이였느냐고 넌지시 물어보기까지 했었고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난 그놈에게 두 가지만 가르쳤어. 첫째로 신의를 배신하지 말라는 것하고, 둘째는 배신한 놈은 용서하지 말라는 거야.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그 두 가지가 꼭 조화롭게 맞물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놈은 그것을 지킬 놈이야."

고진호씨가 다시 물끄러미 벽을 바라보았다.

"그놈이 돈 때문에 교민을 살해했다는 것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지. 나중에는 제 입으로도 그러지 않았다고 하더군. 모함을 당했다는 거야. 무슨 말인지는 몰랐지만 나는 그 말을 믿어."

"그놈은 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도 자포자기하지 않았어. 자네가 이런 말 들으면 웃겠지만 난 그때 자식 가르친 보람을 느꼈지."

고진호씨가 흰 얼굴을 펴면서 소리 없이 웃었다. 지난번에는 고영무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고 했던 고진호씨였다. 김영지는 잠자코 앞에 놓인 커피잔을 내려다보았다. 어머니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르고 었었다. 어머니는 식사도 하고 TV도 보았으나 여전히 입을 열지 않는다. 의사의 이야기로는 병은 아니라고 했다. 실의에 빠진 상태라는 것이다. 그는 여러 가지 정신 치료법을 알려주었는데 김영지는 그것이 어머니를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삶의 의욕을 상실한 어머니는 차츰 기력을 잃고 죽어갈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거의 비슷한 상처를 입고 있는 아버지가 있다. 그도 짧은 기간 동안에 두 번의 충격을 받은 것이다. 김영지는 어금니를 물고는 머리를 들었다.

"다행이에요, 걱정하셨는데 전화라도 했다니까요. 그래도 미국은 콜롬비아보다 안전하거든요."

고진호씨가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김영지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어머, 벌써 세시네. 집에 가봐야겠어요. 어머니가 걱정이 되어서요."

". , 어머니가 편찮으시다면서."

", 나아지실 거예요."

자리에서 일어선 김영지가 그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그럼 다음에 또 올게요."

"고마워, 유영미씨."

아파트를 나온 김영지는 택시 정류장에 멈춰 있는 택시에 올랐다.

"월곡동으로 가주세요."

택시가 움직이자 영지는 핸드백을 열고 종이쪽지를 꺼내어 펼쳤다. 쪽지에는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혀져 있었다.

 

"난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지 뭐유? 요즘은 소리만 크게 나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니까."

아줌마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저었다. 오십 대 중반의 나이였으나 풍진 세상을 겪은 자취가 온몸에서 풍겨 나왔다. 주름진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는데, 집 근처의 다방에 나오는데도 그렇게 화장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고진호씨의 집에서 만났을 때는 이렇게 화장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손을 펴더니 커피잔을 쥐었다. 매듭이 튀어나온 넓은 손이었다.

"에이그, 그 집에 3년이 넘게 있었는데 큰 자식이 속 썩이는 바람에 한시도 바람 잘 날 없더니만."

아줌마가 김영지를 힐끗거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김영지가 집 근처로 찾아온 것에 대해서 궁금증으로 몸이 달아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웬일이우? 아가씨가 날 찾아온 것이?"

커피잔을 내려놓은 아줌마가 마침내 얼굴을 내어밀며 물었다.

"그 사람이 미국에 있다는 건 알아요."

김영지가 머리를 들었다.

"난 도저히 이 말씀을 아버님한테 드릴 수가 없었어요."

"무슨 말인데?

아줌마가 탁자 위로 몸을 바짝 붙였다.

"아줌마, 이것은 아줌마와 나만 알고 있어야 돼요. 내 장래가 걸린 문제니까요."

이맛살을 찌푸린 김영지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럼, 내가 누구 말할 사람이라도 있나? 하루종일 있어도 선생님하고는 세 마디밖에 안 해. 식사하세요 두 번 하고, 안녕히 계세요 한 번."

", 그 사람, 고영무씨한테 제가 받을 것이 있어요."

"어머나."

입을 곽 벌린 아줌마가 허리를 젖혔다가 다시 이쪽으로 숙였다.

"그러면 그렇지."

그녀가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 말하지만 색시 같은 미인이, 본인도 없는 집으로, 더군다나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인데 말이야, 자주 찾아오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어."

"그래, 받을 돈은 많수? 그런데 받을 수나 있을까? 사람 죽이고 도망 다니는 사람한테?"

"돈은 아니에요. 그리고 어디에 있는지 알기만 하면 돼요, 아줌마."

아줌마가 눈을 깜박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가씨는 경찰이우?"

깜박임을 멈춘 그녀가 물었다.

"아니에요."

"허긴 경찰이래도 상관이야 없지. 내가 죄지은 게 아니니까."

"아줌마, 여기."

핸드백을 연 김영지가 만 원권 뭉치 하나를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가진 돈 전부예요. 50만 원인데, 받아 주세요."

아줌마가 탁자 위의 돈뭉치를 바라보며 입을 열지 않는다.

"미국에서 전화가 왔다고 하시더군요, 아까 아버지께서. 아마 고영무씨의 연락처를 알고 계실 거예요. 아줌마가 그 주소와 연락처를 저한테 알려주시기만 하면 돼요."

"그땐 제가 다시 50만 원 드릴게요."

"아줌마, 죄짓는 것 아니에요. 좋은 일 하시는 거예요."

아줌마가 머리를 들었다. 한동안 눈을 깜박이며 김영지를 바라보던 그녀는 넓은 손가락을 펴더니 돈뭉치를 끌어쥐었다.

"염려 말어. 내가 알아볼게."

 

홍성희가 방으로 들어서자 침대에 누워 있던 유장수가 눈을 떴다. 오후 세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유장수는 하루종일 집안을 오락가락하더니 이제는 방에 들어가 누워 있는 것이다.

"점심 안 드실래요?"

조심스럽게 다가간 그녀는 침대의 끝 쪽에 엉덩이를 걸쳤다. 유장수는 천장을 바라본 채 대답하지 않는다. 이틀 전에 허탕을 치고 돌아온 후로 유장수는 그녀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묻는 말에도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다.

", 방송국에 연락을 해야 하는데, 오늘부터 녹화가 있거든요."

침대 깃을 손끝으로 비틀면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연락도 안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요."

"연락 안 해도 돼. 넌 며칠간 쉰다고 했으니까."

유장수가 입술을 달짝여 낮게 말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다 영화사하고 CF도 모두 연락해 놓았어, 네가 아파서 쉰다고."

홍성희는 가슴속에서 무엇인가가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고 이내 숨이 막혔다. 입을 벌리고 있었으나 호흡하기가 어려웠으므로 턱을 들었다. 유장수가 머리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게 부족한 것이 뭐였지?"

그는 두 팔을 머릿밑에 괴었다.

"넌 쓰레기 같은 년이었어. 네가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도 삼류 클럽에서 발이 부르트도록 춤을 추다가 이놈 저놈에게 몸을 팔았을 게다. 청산 클럽만 하더라도 너보다도 나은 애들이 열 명도 넘어."

홍성희가 온몸을 굳힌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숨을 쉬는 것 같지도 않다.

"TV, 영화 또는 연극에까지 너는 네 재능을 보일 수가 있었지. 재능을 보일 기회도 없이 사라지는 사람도 많아. 하지만 넌 처음부터 내가 만들어낸 배우다. 내가 밀지 않았더라면 네가 설령 방송국에 등록을 했다손 치더라도 넌 지금도 단역 신세야."

"넌 내가 만들어낸 여지야. 내가 없으면 너도 없어져 너는 그것을 잊었어."

"잊지 않았어요, 절대로."

홍성희가 그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제발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네가 해달라는 것은 다 해주었는데·.

"용서해 주세요, 여보."

"네가 커가는 것을 보는 것이 낙이었단 말이다"

아랫입술을 깨문 홍성희가 머리를 숙였다. 이제는 최대광을 생각하면 부글거리는 배신감이 끓어오른다. 그는 어떻게든 국제호텔에 나왔어야만 했다.

"앞으로는 시키시는 대로 하겠어요. 무슨 일이건 할게요."

자신도 모르게 말끝에 울음이 섞여 나왔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쩔 수 없었어요. 그들의 협박을 견뎌낼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전 결코 당신을 배신하지는 않았어요."

유장수가 그녀를 바꿔보았다.

"한일장 여관은 두 번 간 것이 아니더구나. 여러 차례 갔던 모양이야. 종업원들이 말해 주었다."

".. "

"이제 모든 것을 알게 되어서 시원하다. 할 수 없지,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홍성희가 머리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유장수가 천천히 입을 벌리며 웃었다.

"너는 내가 얼마나 너를 아끼고 있는지 모른다, 이놈아."

"여보."

홍성희가 얼굴을 그의 무릎 위로 떨어뜨렸다.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울지 말아라."

유장수의 손이 자신의 어깨를 어루만지는 것이 느껴지자 그녀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며칠간은 잠을 제대로 자지도 못했고 식욕이 달아나 버려서 먹을 수도 없었다.

"이놈아, 그런 무식한 놈하고 어울리다니. 그건 나를 모욕하는 것이었어."

"그만, 이제, 그만요."

그의 몸 위로 상체를 끌어올린 홍성희가 머리를 저었다.

"이젠 당신만을 바라보고 살게요. 다른 욕심은 부리지 않을게요. 한눈도 팔지 않겠어요. 이대로 사는 것도 행복해요. 저는 그걸 이제야 느꼈어요."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다. 그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홍성희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유장수의 두 손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올렸다. 방안에는 야릇한 침묵 속에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홍성희는 그의 배 위로 올라앉아서는 치마를 끌어 내렸다. 분홍색 팬티가 드러났고 미끈한 두 다리가 싱싱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한 손을 벌려 그의 실내복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의 남성도 이미 발기해 있었으므로 홍성희는 부드럽게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저에게도 당신밖에 없어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녀가 말했다. 그에게서 입술을 뗀 홍성희는 서둘러 팬티를 끌어 내렸다. 유장수가 누운 채로 팔을 벌려 보이자 얼굴이 달아오른 홍성희는 서둘러 그의 몸 위로 올라왔다. 자리를 잡고 그의 남성을 밀어 넣자 그녀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두 팔로 침대를 짚은 그녀는 거친 숨소리를 내며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응접실 건넌방에는 유장수의 심복인 전우석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홍성희는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커다랗게 신음 소리를 뽑아내었다. 유장수의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쥔 그의 움직임도 거칠어졌다. 이윽고 홍성희는 터져 나갈 것 같은 신음 소리를 내면서 유장수의 몸 위로 엎드렸다. 유장수가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쥔 채로 온몸을 굳히고 있었다.

"아아, 행복해요."

허덕이며 홍성희가 뜨거운 숨결을 유장수의 귓속으로 뱉었다. 유장수의 손길이 그녀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부드럽게 쓸었다

"그래, 나도 행복하다."

"당신을 사랑해요."

유장수가 그녀의 머리칼을 움켜쥐고는 얼굴을 끌어당겼다. 벨 소리가 울린 것 같았는데 다시 조용해졌으므로 유장수의 품에 안긴 홍성희는 다시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잠시 후에 노크 소리가 들렸으므로 홍성희는 다시 눈을 떴다.

"누구냐?"

유장수가 짜증 난 듯 물으며 홍성희의 어깨를 안았던 팔을 풀었다.

"사장님, 접니다."

전우석의 목소리였다. 입맛을 다신 유장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고치고는 방을 나갔다. 홍성희는 문이 닫히자 이불로 몸을 감았다. 온몸이 나른했고 감기가 걸린 것처럼 열기에 싸여 있었는데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몸을 굴려 옆으로 누으면서 그녀는 두 다리를 힘껏 뻗었다. 쾌락의 찌꺼기로 남아 있던 감각이 입에서 조그만 탄성으로 떨어져 나왔다. 방문이 열리면서 유장수가 들어왔다. 이맛살이 찌푸려져 있었다.

"성희, 방송국에서 너 찾는다고 야단이라는구나. 집으로도 찾아올 모양인데."

유장수가 입맛을 다셨다.

"아프다고 했으니까 요양하러 내려간 것처럼 도고온천에 내려가 있거라. 나도 내일쯤 내려갈 테니까."

"그래요, 갈게요."

홍성희가 이불을 제치며 벌떡 일어섰다.

"온천에 가본 지도 오래되었어요."

 

"보고타에서 해치워야 했어, 매린."

페르난도의 말에 식탁에 둘러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하던 말을 멈추었다. 매린은 웃는 얼굴로 마악 포크에 끼운 스테이크를 입으로 가져가던 참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이 지워졌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페르난도. 만일 그놈을 해치웠다면.."

"어쨌든 지금보다는 나아졌을 거다. 너하고 이렇게 식사를 하려고 우리가 얼마나 진땀을 흘린 줄 알기나 해? 네 뒤를 마약부의 미행반이 따르고 있단 말이다."

페르난도의 검은 눈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으므로 매린은 시선을 내렀다. 사람들은 잡담을 멈추고 식사를 하는 시늉을 하였으나 페르난도의 기척에 신경을 썼다.

"페르난도, 경찰이 그놈을 잡지 못한 것은 우리 탓이 아니에요."

밀리카가 입을 열었으므로 식탁에 앉아 있던 7, 8명의 사내들이 그녀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그놈을 죽였으면 그가 실었던 물품에 의혹이 집중되었겠지요. 우리는 계획대로 했어요."

"밀리카, 시끄럽다."

이맛살을 찌푸린 페르난도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어린아이 같은 소리 말아라, 계획이 좋았건 나빴건 결과가 말해 주는 거다. 그리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경찰을 더 보내든지 했어야 했다. 어쨌든 그놈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마약부를 찾아간 지경이 되었어 . 계획이 허술했던 거다."

페르난도가 수건을 접시 위로 던졌다.

"매린, 넌 오늘부터 집에만 붙어 있어야 할 거다."

예상하고 있었는지 매린과 밀리카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롱비치 근처에 있는 조그만 레스토랑 안이었는데 바닷가에 위치해 있어서 파도 소리가 방안까지 들려왔다.

"크라우스한테서도 연락이 왔어. 그쪽도 바짝 긴장하고 있는 모양이야."

페르난도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놈은 아마 앨버트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사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깁슨 호텔을 오늘 새벽에 빠져나갔더군요. 약삭빠른 놈입니다."

"알폰소가 깁슨 호텔에 있었습니다."

반대쪽에 앉아 있던 대머리의 사내가 뒤를 따라 말했다.

"알폰소가?"

담배를 째어 물던 페르난도가 움직임을 멈추고 사내를 바라보았다.

", 산호세호를 타고 온 모양입니다."

페르난도가 머리를 끄덕였다.

"거지처럼 돈을 얻으러 왔겠군. 미국놈한테 말이야."

"페르난도. 언제 출발하십니까?"

매린이 물었으므로 페르난도가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얇은 입술 끝이 꾹 다물려 있다가 조금씩 위로 말려 올라가고 있다. 사내들이 말을 멈추고 페르난도를 바라보았다.

"매린, 그건 말할 수 없어."

이제 흰 이를 드러내며 그가 말했다.

"난 너를 사랑하지만 그건 말할 수 없다. 이해해라."

"페르난도."

밀리카가 건너편에서 그를 불렀으나 페르난도는 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매린, 두 달 후에 너희들의 결혼식을 성대하게 올릴 거다. 그때까지 너희들의 의혹이 벗겨져야 해. 그래야 내가 참석할 수가 있어. 어머니도 그렇고."

페르난도는 머리를 돌려 주위의 사내들을 돌아보았다.

"네 동료들도 말이다."

페르난도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밤 열 시가 넘었군. , 우리는 이만 떠나 볼까?"

그는 매린에게로 다시 머리를 돌렸다.

"너희들은 조금 나중에 나오거라. 그리고 무슨 일이 있으면 알렉산더가 도와줄 테니까 염려하지는 말고."

페르난도는 자리에서 일어셨다. 사내들이 서둘러 따라 일어섰고 매린도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식탁을 내려다본 채 밀리카는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밀리카, 일어나."

매린이 다가와 말했으나 그녀는 머리도 들지 않는다. 페르난도와 부하들은 이미 방을 나가고 있다.

"밀리카, 제발."

"싫어요, 날 내버려 둬요, 제발."

밀리카가 짜증스럽게 말했을 때 문 앞에 나간 줄 알았던 페르난도의 모습이 보였다.

"매린, 밀리카, 내가 한마디 안 해줄 수가 없구나."

그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으므로 밀리카도 몸을 굳혔다.

"너희들은 내 혈육이야. 그럴수록 나는 너희들에게 엄격해야만 한다. 그래야 규율이 서는 거야."

그의 말투는 딱딱하게 들렸다.

"알렉산더에게 말해 놓았다. 너희들은 곧 스페인 여행을 하게 될 거다. 난 이번에 귀국하면 어머니께 밀리카가 임신했다는 걸 알려 드리겠다. 기뻐하실 거다. 결혼식에서 어머니가 춤을 추시는 것을 보게 될 거야."

말을 마친 페르난도가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아랫입술을 깨문 밀리카가 방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어깨 위로 매린의 손이 가만히 얹혀졌다.

 

담장은 2미터도 안 되었으므로 두 손을 짚고 단숨에 뛰어오른 고영무는 담장 위에 몸을 누인, 채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담장 안쪽은 정원이었다. 30미터쯤 안으로 2층의 저택이 보였다. 집안의 불은 모두 꺼져 있었으나 응접실로 보이는 저택의 중간 부분에 불이 밝혀져 있었다. 잠시 주위를 살펴본 고영무는 아래쪽으로 뛰어내렸다. 잔디밭이어서 소리도 나지 않는다. 허리를 숙인 그는 성큼성큼 뛰어서 저택의 벽에 몸을 붙였다. 응접실은 이제 3미터쯤 옆쪽에 있다. 커다란 유리문 두 개를 여닫게 된, 정원으로 향한 응접실의 문은 굳게 닫혀졌고 안쪽에 쳐진 흰색 커튼 때문에 내부는 보이지 않는다. 고영무는 몸을 돌려 저택의 벽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갔다. 곧 직사각형의 기다란 유리창이 나왔으나 그것은 그냥 지나쳤다. 몸을 들여 밀기에는 너무 좁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저택의 옆쪽으로 나왔는데 안으로 들어갈 창문은 5미터쯤 되는 높은 담이 세워져 있었다. 담을 넘으면 바로 해럴드 연구소의 마당이다. 고영무는 뒷문의 손잡이를 돌려 보았다. 안에서 잠겨져서 움직이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본 그는 호주머니에서 조그만 칼을 꺼내어 펼쳤다. 그리고는 유리창이 끼워진 나무판자를 쪼아내기 시작했다. 유리는 삼각형의 기다란 받침대에 의해 세워져 있었다. 못질을 하였으나 받침대를 솎아내면 유리는 빠지게 된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눈에 들어갔으므로 소매로 눈을 닦은 그는 잠시 허리를 세웠다. 받침대는 반쯤 깎여 있었다.

 

밀리카의 온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매린이 부딪쳐 올 때마다 철벅이며 물이 뒤기는 소리가 났다. 응접실의 양탄자는 침대보다는 쿠션이 적었으나 그들의 몸놀림을 더욱 쉽게 해주었다. 밀리카가 절정에 오른 듯 그의 목을 감은 손에 힘을 주었다. 숨이 끊어질 듯한 호통 소리와 함께 비명 같은 탄성이 방안을 울렸다. 이윽고 매린이 거칠게 하반신을 움직이자 밀리카는 온몸을 둥글게 하여 매린을 안았다. 매린은 길게 신음소리를 내면서 그녀의 몸 위에서 힘을 빼었다.

"매린, 좋았어요."

허덕이며 밀리카가 말했다. 그녀의 한 손이 그의 허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아아, 그대로 있어요, 움직이지 말고."

그녀의 호흡에는 아직도 양철을 끓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밀리카는 그의 하반신을 감았던 두 다리를 힘없이 떨어뜨렸다.

"매린, 그대로 있어요, 조금만."

"그래, 알았어."

양탄자에 얼굴을 박고 있는지 매린이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만들 일어나지."

위쪽에서 울려 나온 소리에 매린이 번쩍 머리를 들었고 밀리카는 두 무릎을 세웠다. 그러나 아직 몸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천천히 움직여, 이 권총을 보면서 말이다."

그들은 이제 그 목소리의 임자를 알았다. 고영무였다.

"매린, 상체를 세워라. 밀리카, 너는 그대로 누워 있어. 부끄러워할 것 없다. 나도 네 위에서 그 짓을 했으니까."

퍽석! 하는 소리와 함께 밀리카의 머리맡에 세워졌던 샴폐인 병이 박살이 났다. 술이 튀어서 그들의 얼굴을 적셨으나 그들은 잠시 몸을 굳히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시키는 대로 해. 두 번 말하지 않고 다음에는 죽여버리겠다."

고영무의 목소리는 낮고 느렸다.

", 몸을 떼었으면 천천히 몸을 돌려 앉아서 말이다. 그리고 나를 보고 앉아. 밀리카, 너도 일어나서 그놈 옆에 앉아."

응접실에는 탁자 위에 놓인 스탠드의 불빛이 비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불빛만으로도 두 남녀의 나신을 보여주는 데는 충분했다. 고영무는 소파의 보조 의자를 발로 밀어서 그들을 향해 놓고는 그 위에 앉았다

", 난 너희들의 섹스에는 관심이 없다. 다소 지루했을 뿐이지. 나는 내가 받아 갈 것이 있어서 왔을 뿐이야."

소음기를 낀 권총을 똑바로 겨눈 채 고영무가 천천히 말했다.

"너희 두 연놈이 나한테 약속한 돈, 모두 3백만 달러인데, 은행에 입금시켰다가 모두 취소시키고 찾아갔더구만. 이제는 그 돈을 내라는 것이 아니다. 마약 판 돈의 반을 가져가야겠어."

매린이 눈을 부릅뜨고 고영무를 올려다보았고 밀리카는 머리를 돌렸다.

"둘째, 내가 살인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에 대한 너희들의 보증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희들이 자백해야겠지."

고영무는 그들의 알몸을 차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가 금방 밀어져 갔다.

", 우선 돈부터 시작하자. 돈을 내라. 마약은 이미 팔렸을 테니까."

권총의 총구로 두 사람의 이마를 하나씩 겨누어 보면서 고영무가 말을 이었다.

"내 돈이 어디 있느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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