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1. 누명
김강남은 사무실에서 살해된 것이 분명했다. 소파와 사무실 바닥에 흥건히 고여 있는 피가 그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바깥에서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들려왔으므로 고영무는 머리를 들었다. 창가로 다가간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리를 차량들이 질주하고 있을 뿐 사무실 입구에 멈춘 차량은 보이지 않는다. 창에서 몸을 돌린 고영무는 김강남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보았다. 김강남에게 다가간 그는 관자놀이에 손바닥을 대어 보았다. 그의 몸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맥박도 뛰지 않았다. 시체의 가슴에서 흘러내린 피가 옷 위에서 덩어리져서 굳어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칼로 가슴을 찌른 모양이었으나 얼굴은 고통보다도 놀라움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머리를 든 고영무는 문 쪽으로 서둘러 다가가 안에서 고리를 잠갔다. 문 앞에 선 그는 잠시 김강남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뛰었고 머리에서는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윽고 고영무는 몸을 떼어 책상으로 다가갔다. 전화기를 잡고는 선 채로 다이얼을 눌렀다. 신호가 가더니 곧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교환입니다."
"경찰국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세요."
그는 힐끗 김강남을 바라보았다.
"285-1212번입니다."
전화가 끊기자 고영무는 결심한 듯 다시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눌렀다. 신호가 가는 동안 몸을 돌리고 있었으나 김강남의 크게 뜨인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에 신경 쓰였다. 수화기를 든 채로 고영무는 김강남에게 다가가 손바닥으로 그의 두 눈을 쓸어내렸다. 선뜻한 느낌이 왔으나 눈은 감겨졌다. 신호음이 그쳤다.
"여보세요?"
응답 소리가 귀에 들리자 그의 가슴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김영지의 목소리였다.
"여긴 고영무입니다."
그의 귀에 자신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는 것이 들렸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웬일이세요?"
그녀의 한국말은 익숙했지만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저, 아버님 계십니까? 말씀드릴 일이 있는데요."
도로에서 차량의 경적 소리가 들릴 때마다 가슴이 섬뜩해지고 시선이 자꾸만 문 쪽으로 갔다.
"아버진 지금 공장에 계시는데, 중요한 일이면 오시라고 할까요?"
"네, 그런데 ‥‥‥‥"
고영무는 손바닥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초조해지고 있었는데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순서가 생각나지 않는다.
"다름 아니라, 김영지씨‥‥‥‥"
그는 마음을 다져 먹었다. 어차피 그녀도 알게 될 일이었다.
"오빠가 사무실에 있습니다."
"어머나, 오빠가요? 거기 있어요?"
그녀가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한숨 돌렸다는 말투였다. 그녀의 밝은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으므로 고영무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 사무실로 냐와 보니까, 오빠가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
그는 침을 끌어모아 삼켰다.
"오빠는 죽었습니다. 살해당했어요. 어느 놈들이 오빠를 사무실로 끌고 와 살해하고 도망친 겁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오빠가, 뭐라구요?"
토막토막 끊어지는 듯한 말투로 그녀가 물었다.
"여보세요, 고영무씨."
"오빠가 살해당했단 말입니다, 여기 우리 사무실에서."
"오빠‥‥‥"
"오빠는 지금 사무실에 있습니다. 내가 자는 사이에 누군가가 죽여놓고 간 겁니다."
말하는 사이에 고영무의 머리에 사건의 윤곽이 확실하게 잡혀져 갔다. 밀리카의 일당들이다. 그들은 약속한 돈도 주지 않았을 뿐더러 자신을 김강남의 살해범으로 누명을 씌우려는 것이다. 그것만큼 안전한 방법이 없다. 경찰에 잡혀 들어가도 밀리카의 일당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없으려니와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여보세요, 고영무씨, 정말이에요? 오빠가, 사무실에서‥‥‥‥"
이제 김영지는 소리를 지르고 있다.
"김영지씨, 놈들이 나한테 누명을 씌우려는 것입니다. 마약 조직들이 말입니다."
그러는 고영무의 가슴이 다시 내려앉았다. 놈들은 지금 형체도 없는 것이다. 그녀는 영문도 모를 뿐더러 믿어 주지도 않을 것이다. 갑자기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세게 두들기자 문고리가 철컥거리면서 쇳소리를 내었다.
"누구요?"
수화기를 든 채로 그가 밖을 향해 소리쳐 물었다.
"경찰이오, 문 열어요!"
문을 두드리면서 사내가 소리쳤다.
"신고를 받고 왔으니까 빨리 문 열어요!"
들고 있던 수화기를 내린 고영무는 우두커니 문 쪽을 바라보았다. 문을 열자 세 명의 경찰관이 쏟아지듯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들은 금방 피비린내를 맡았고 소파에 앉아 있는 김강남을 보았다.
"당신을 체포합니다."
사복을 입은 사내가 대뜸 말하며 고영무의 팔을 잡았다.
"1급 살인죄요."
"잠깐만, 나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숙소에서 나와 보니까‥‥‥‥"
"그것은 경찰서에 가서 진술하도록."
정복을 입은 경찰관 한 명이 시체를 들여다보고 딘타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한국 대사관에 연락할 시간을 주시오. 난 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경찰서에 가서 하시오. 당신은 살해 현장에서 체포된 살인범이야. 잔소리 마시오."
형사는 주머니에서 수갑을 꺼내더니 익숙한 솜씨로 고영무의 팔에 수갑을 채웠다. 고영무는 그에게 어깨를 떼밀려 사무실의 구석 자리에 가서 섰다.
"같은 코리안끼리 죽이고 죽었군."
형사가 혼잣말처럼 말하면서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경찰 한 명은 이제 시체의 옷을 뒤져 보는 중이었고 다른 한 명은 책상의 서랍들을 열어젖히고 있다.
"신고도 빨랐지만 우리도 제때에 도착한 것 같군. 조금만 늦었어도 도망쳤을 테니까."
형사가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신고를 누가 했단 말입니까?"
"왜? 그건 알아서 뭘 해? 다 끝난 일인데."
"후안, 이것 보시오."
경찰 한 명이 커다랗게 소리치며 손을 들어 보였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서류 봉투가 들려져 있다.
"돈이야, 천만 페소도 넘겠어."
"여기도 있는데."
김강남의 몸을 뒤지던 경찰이 피에 젖은 봉투를 꺼내면서 말했다.
"이놈도 꽤 많군. 5, 6백만 페소는 돼."
"무슨 돈이야?"
형사가 고영무를 돌아보며 물었다.
"죽은 사람하고 돈 문제로 싸웠나?"
"내가 죽인 것이 아니오. 나는‥‥‥"
"조사해 보면 알겠지."
경찰들은 돈을 찾아내자 재미를 붙인 모양이었다. 외국인의 지사 사무실이고 명백한 살인 혐의자를 현장에서 체포한 것이다. 증거물을 찾는다는 명분도 있고 더욱이 사무실에는 한 사람뿐이어서 증인으로 나설 사람도 없다.
"숙소도 조사해."
형사가 말하자 사무실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난 경찰들은 숙소로 몰려 들어갔다.
"난 어떻게 됩니까?"
고영무가 시체를 내려다보고 선 형사에게 물었다.
"난 죽이지 않았어요. 놈들이 나를 궁지에 빠뜨린 겁니다. 놈들이 죽였어요."
형사가 머리를 돌렸다. 백인이었는데 검은 머리에 백발이 반쯤 섞여 있는 중년의 사내였다. 흰 피부에 갈색의 버짐이 군데군데 났고 갈색의 눈동자는 늘어진 눈시울에 가려져 있었다. 아랫배가 튀어나온 땅딸막한 체구에 배꼽 근처에 꽂아놓은 권총 손잡이가 보였다.
"놈들이 누구야?"
턱을 들어 보이며 그가 물었다.
"놈들이 누구냐니깐?"
고영무는 머리를 떨구었다. 밀리카를 말하면 마약도 말해야 한다. 그리고 맥밀란은 지금 LA로 향하는 비행기에 앉아 있을 것이다.
"넌 방법이 없어. 저 남자를 죽였다는 사람이 나선다면 모를까."
사무실을 둘러보며 형사가 말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두 개의 봉투가 보였으므로 고영무는 머리를 들었다.
"저 돈을 드리지요. 죄 없는 나를 풀어 주시면, 돈은 또 있습니다."
머리를 돌린 형사가 찬찬히 고영무를 바라보았다. 늘어진 눈시울 안의 눈동자가 차갑게 보였다.
"이제 실토하는군. 하지만 저 돈은 이미 우리한테 압수되었어, 그리고 네가 가지고 있는 나머지 돈도 모두 내놓게 될 거야."
고영무가 그의 시선을 받으며 몸을 숙였다. 이윽고 그는 기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사는 팔짱을 끼고는 사무실 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숙소 쪽에서는 무엇인가 내던지는 소리도 들려왔다. 고영무는 반걸음쯤 형사 쪽으로 다가섰다. 형사가 이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것 같았다. 그가 팔짱을 마악 풀려는 순간 고영무의 발끝이 날아 형사의 턱을 아래에서부터 올려 찍었다. 덜컥 소리와 함께 형사의 몸이 부웅 뜨는 것 같더니 소파의 손잡이에 머리를 부딪히면서 나가떨어졌다. 한걸음에 그에게 다가간 고영무는 호주머니를 뒤져 수갑의 열쇠를 찾아내었다. 열쇠를 수갑의 구멍에 끼웠으나 철컥거리기만 하고 얼른 풀리지 않았다. 조급해진 고영무는 형사의 배에 꽃혀 있는 권총을 잡아 빼었다. 한 손에 권총을 쥔 채로 열쇠를 꽃아 비틀면서 고영무는 숙소의 문 쪽으로 다가갔다. 안에서 저희들끼리 이야기를 하면서 경찰들은 한가하게 수색을 계속하고 있었다. 철컥 소리와 함께 수갑이 플렸다. 두 손이 자유로워진 고영무는 한쪽 팔에 매달려 있는 수갑에 다시 열쇠를 끼웠다. 숙소에는 여권과 미화가 든 가방이 있었다. 놈들은 이미 찾아내었을 것이다. 나머지 수갑을 풀어서 내려놓은 고영무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시장에서 중절모자와 판초를 사서 몸에 걸친 고영무는 시장 변두리의 과일 행상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오후 세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주위에는 인디오 행상들과 메스티조들이 몰려 앉아 소란스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양털을 짜서 만든 판초는 무거웠으나 이것저것을 호주머니에도 넣고 허리에도 차고 있었으므로 가릴 수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우기가 시작되어서 시장바닥은 오전에 내린 비로 진창을 이루고 있었다. 인디오 한 명이 다가오더니 그에게 인디오 말로 무엇인가를 물었다. 고영무가 웃으면서 머리를 젓자 그는 다시 이야기를 한다. 얼굴에 굵은 주름살이 팬 사내였다. 누렇게 변색된 이가 입을 벌릴 때마다 악취를 풍겼다. 고영무가 다시 머리를 저으며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켜 보였다. 한동안 고영무를 바라보던 인디오는 몸을 돌리더니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고영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디오와 동양인은 얼굴형은 비슷하였지만 그들의 피부는 거칠고 햇볕에 그을려서 검었다. 말을 건 인디오가 이상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시장의 안쪽으로 들어간 그는 노천 음식점 옆에 세워진 공중전화 박스로 다가갔다. 쓰레기가 쌓인 공중전화 박스 안에는 오물 냄새가 풍겨왔다. 동전을 꺼내든 고영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방에서 올라온 인디오들과 메스티조, 물라토 등으로 뒤범벅이 된 시장은 소란스러웠고 모두들 빠짐없이 모자와 판초를 걸치고 있었다. 동전을 넣자 쓰레기에 뒤덮여 있던 전화기는 신기하게도 작동이 되었다. 다이얼을 누른 고영무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바닥을 노려보았다.
"여보세요, 한국 대사관입니다."
남자가 영어로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한국말의 억양이 드러난 말투였다.
"여보세요, 한국분이십니까?"
고영무가 한국어로 묻자 그쪽이 금방 한국어로 바꾼다.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누구십니까?"
"저는 고영무라고 합니다. 대사님이나 책임 있는 분하고 통화를 하고 싶은데요."
"고영무씨라구요?"
사내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대사님을 찾으십니까?"
"제가 지금 누명을 쓰고 있어요. 살인사건인데요."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사내가 당황한 듯 서둘렀다.
"책임자를 바꿔 드리겠습니다."
고영무는 수화기를 쥔 채 시장을 둘러보았다. 한두 방울씩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박 마른 닭 한 마리가 머리를 축 늘어뜨린 채 시장바닥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주인이 놓친 모양으로 다리에 매단 끈이 진창바닥에 끌려다니고 있었다.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새로운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울려 나왔다.
"여보세요."
"네, 저는 고영무라고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고영무씨.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가 대뜸 묻는 것이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내에 있어요."
"시내 어딥니까? 우리가 모시러 갈 테니까, 거기 그냥 계세요."
"난 살인자가 아닙니다. 누명을 썼습니다, 마약 조직한테서."
"고영무씨, 그것은 여기 와서 자세히 말씀하세요. 우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정 말입니까?"
후두둑 거리며 빗발이 전화박스의 유리를 때렀다.
"그렇게 피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고영무씨. 지금 시국이 어떤 때라고, 더구나 경찰관 세 명을."
"그들은 무조건 나를 살인범으로 체포하려고 했어요. 숙소에서 자고 일어나 사무실로 나오니까 김강남씨가 사무실 소파에 죽어 있었습니다. 놈들이 내가 자는 사이에 그를 끌고 들어와 죽이고 간 겁니다."
신호음이 들렸으므로 고영무는 동전을 주입구에 집어넣었다.
"그들이 도대체 누굽니까?"
"밀리카라고 제 회사의 여직원과 그 일당들입니다. 카를로스와 관계가 있습니다. 김강남씨가 그들의 현장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맥밀란의 얼굴이 머리를 스쳤으나 고영무는 내쳐 말했다.
"마약조직들이 저를 협박해서 마약을 실었는데, 그것을 김강남씨가.."
"이것 보세요, 고영무씨.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사내가 다시 다그치듯 물었다.
"대사관에 와서 이야기를 해요. 지금 이곳 경찰은 당신을 찾으려고 비상이 걸렸어요. 계엄군도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잡히면 현장에서 총살이라는 걸 모르시오?"
"내가 왜? 왜 총살입니까?"
"살인 혐의에다가 체포 현장에서 도주했지 않습니까? 대사관으로 와요. 우리와 함께 경찰에 갑시다. 우리가 최선을 다할 테니까. 경찰을 친 것이 좋지 않았어요. 사태가 심각합니다."
고영무는 숨을 힘껏 들이마신 다음에 길게 내뿜었다. 낮게 깔려 있던 시장의 비린내와 쓰레기 냄새들이 폐 안으로 가득 들어왔다가 떨어졌다.
"난 감옥에 갈 수 없습니다. 죽을 수도 없어요. 난 날 이렇게 만든 놈들을 내 손으로 잡아내겠습니다."
"이것 봐요, 고영무씨."
"난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럼."
고영무는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전화박스를 빠져나왔다. 빗방울이 세차게 뿌려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비를 피하려는 듯 철벅거리며 진창을 뛰어다닌다. 모자의 챙을 잡아당겨 깊숙이 눌러쓴 고영무는 판초의 자락을 안에서 휘어잡고는 시장을 벗어 나왔다. 곧 통금이 될 것이다. 오늘 밤부터 잘 곳이 걱정이었다.
방으로 들어선 김영지는 한 발짝씩 걸음을 옮겨 호세 김에게로 다가갔다. 방에는 불을 켜지 않았으므로 공장의 정문에서 흘러들어온 희미한 불빛이 어렴풋이 방안의 윤곽을 비추고 있을 뿐이다. 호세 김은 소파의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는데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아버지."
두려운 듯 멀찌감치 멈춰선 김영지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아저씨들이 나와 보시라‥‥‥"
호세 김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후에 김강남의 시체를 인수할 아버지는 눈물 한 방울 홀리지 않았다. 어머니와 김영지는 울면서 넋을 잃었으나 그는 바쁘게 뒷처리를 했다 보고타의 교민들이 모두 한 번씩 얼굴을 내미느라 집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을 맞아 인사를 받던 호세 김은 밤이 되자 응접실로 들어가 버렸던 것이다.
"아버지, 이제 나와 보셔야죠."
김영지가 까칠해진 볼을 손바닥으로 쓸면서 다시 말했다.
"아저씨들이 걱정하세요."
어머니는 안방에 자리를 펴고 누워 있었다. 진정제를 맞고는 잠이 든 것이다. 호세 김에게 다시 한 걸음 다가선 김영지는 저도 모르게 흘러내린 눈물을 손바닥으로 훔쳤다.
"아버지, 제발‥‥‥‥"
"아버지,"
"그놈을 내 손으로 잡아 죽일 것이다."
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나왔으나 김영지는 똑똑히 알아들었다.
"그놈은 지금 보고타에 있을 거다. 도망치지는 못해."
"내가 이 원수를 갚지 못하면 내가 차라리 죽겠다."
고영무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으므로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고영무는 암거래에서 남은 이익금을 차지하려고 오빠를 죽인 것이다. 경찰은 고영무가 피에 묻은 돈 봉투를 가지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오빠를 죽이고 돈 봉투를 빼앗은 것이다. 경찰 셋을 때려누이고 돈과 여권과 옷가지들을 챙겨서 도주한 고영무는 지금 전국에 수배되어 있었다. 호세 김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섰다. 그가 밝은 곳으로 나서기를 꺼려하는 것 같았으므로 김영지는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대사관에 전화한 것을 보면 그놈은 아직 갈 곳이 없어. 그리고 이쪽 사정을 알아본 거야."
혼잣소리처럼 그가 말했다.
"내가 내 아들의 원한을 풀어 줘야지."
그의 말소리가 떨려 나왔다.
눈물을 닦으며 김영지가 응접실을 나오자 고상춘씨가 다가왔다. 그는 호세 김의 친구로 구둣가게를 하는 사람이다.
"아버지는 나오시지 않겠다니?"
"네, 조금 후에 ‥‥‥‥"
"가만, 내가 들어가 볼거나?"
그가 목을 뽑아 응접실 쪽을 바라보았다.
"아저씨, 조금 후에 나오실 거예요. 조금만 더‥‥‥‥"
"그래?"
고상출은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저었다.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다니, 더구나 만리타국에서 동포를 말이야."
"때려죽일 놈."
김영지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네 아버지의 심정을 내가 다 안다. 아니, 우리 교민 모두가 다 알 것이다."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부스럭거리면서 루이스가 돌아누웠다. 아직 잠이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천막 위로 후드득거리며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근처에 변소가 있는 모양이어서 오물의 지린내가 바람이 불 때마다 풍겨오고 있었다.
"헤이, 자나?"
이쪽으로 돌아누우면서 루이스가 소근거려 물었다. 천막 안에는 십여 명의 남녀가 자고 있었는데 깊은 밤이어서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영무가 조금 머리를 들자 루이스가 손을 내밀었다.
"담배 한 개만 주게."
벌써 몇 개비째인지도 모른다. 고영무가 담배를 건네주자 그는 조심스럽 게 라이터를 켜고는 불을 붙였다. 곧 담배 냄새가 났다
"난 내일 칼리로 내려가겠어. 그곳에 내 친구가 있거든. 그는 대단한 부자야."
그가 소리 죽여 말했다.
"자가용도 있는 놈이라구. 그곳 경찰들도 알아주는 놈이야."
고영무는 판초 속으로 무릎을 오므려 넣었다. 천막으로 지붕만 가렸을 뿐이지 부랑자들의 합숙소에는 이불도 주지 않는다. 20인용 텐트만 수십 개 세워 놓고는 취사는 제각기 해 먹는 모양이었다.
"이봐, 자네도 갈 데 없으면 나하고 같이 가지 "
루이스가 반쯤 피운 담배를 손끝으로 끄고는 나머지를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는 자신이 에콰도르 사람이라고만 했을 뿐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고영무가 자신이 중국 사람이라고만 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얼굴의 생김새를 보면 말디오와 백인의 혼혈인 메스티조 같았는데 체격이 켰다. 얼굴은 씻지 않아 땟국이 흘렀으나 나이는 삼십 대 후반쯤이 될 것이다. 시장 근처에서 고영무는 땅에 떨어진 과일을 줍는 그를 보았다. 남루한 판초를 걸친데다가 모자의 윗부분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에게 다가간 고명무는 돈도 없고 잘 곳도 없는 처지를 이야기했다. 자신은 중국인과 인디오의 혼혈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의 위아래를 훑어보던 그가 선심을 쓰듯이 데리고 온 곳이 이곳이다. 그는 천막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어두운 위쪽을 바라보았다. 천막촌의 한복판에 세운 기둥 위에 전등이 한 개 달려 있을 뿐 천막 안에는 전등이 붙어 있지도 않다. 천막이 임산부의 배처럼 커다랗게 부풀려서 처져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빗물이 고여 있기 때문이다.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그의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저도 모르게 긴 숨을 내쉰 고영무는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리에 슬한 얼굴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김강남의 눈을 부릅뜬 얼굴, 밀리카의 얼굴, 그리고 호세 김과 김영지의 얼굴도 보였다.
몇 시간을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한 시간? 아니면 5분? 고영무는 판초 속을 벌레 같은 것이 스멀거리는 느낌에 몸을 굳히며 잠에서 깨었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지는 않았다. 벌레는 슬그머니 기어서 허리에 찬 전대에 도착했다. 전대의 매듭이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가늘게 눈을 뜬 고영무는 그것이 루이스의 손이라는 것을 알았다. 전대에는 2천만 페소 가까운 현지 화폐와 5천 달러 정도의 돈이 들어 있었다. 미화로 환샨하면 만 달러 정도로 엄청난 금액이다. 김강남한테서 받은 돈과 경찰이 김강남의 주머니에서 꺼낸 돈까지 모두 가지고 나왔던 것이다. 전대의 매듭은 단단히 매어져 있었으므로 루이스는 힘이 드는 모양이었다. 그의 호흡이 가빠지고 있었다. 천막 안의 사람들은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코 고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잠꼬대를 하는 소리도 들렸다. 반듯이 누워 있던 고영무는 반대편에 놓인 손에 힘을 주었다. 곁눈으로 보자 루이스는 상체를 반쯤 들고는 일어나 앉아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고영무는 손가락을 칼날처럼 폈다. 그의 머리가 자신의 아랫배 바로 옆쪽에 떠 있었다. 순간 고영무의 손이 그의 목울대를 향하여 뻗어 올라갔다. 손끝이 깊숙이 그의 목에 박힌 것을 알 수 있었다.
"커억 ."
코를 골다가 숨이 막힌 것 같은 소리가 한번 들리면서 루이스의 상체가 고영무의 몸 위로 떨어졌다. 상체를 든 고영무는 두 손으로 루이스의 머리를 쥐었다. 한 손으로 턱을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 머리 윗부분을 누르면서 와락 한쪽으로 비틀자 '뚜둑' 하면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루이스의 머리에서 손을 풀면서 고영무는 천막 안의 동정에 주의를 집중했다. 코 고는 소리와 잠꼬대는 여전했다. 누군가가 이를 갈고 있었다. 슬그머니 자리에 몸을 누인 고영무는 호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시계를 꺼내어 보았다. 야광침이 새벽 세 시 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일을 위해서 충분히 자두어야 할 것이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다시 후드득거리며 났고 천막의 문이 펄럭거렸다. 옆자리의 루이스는 이제 내일 칼리로 가서 친구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군대 시절에 배운 기술이었고 나중에는 가르치기도 했지만 살인은 처음이다. 하긴 이미 살인자로 수배되어 있기도 했으므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고영무는 고르게 숨을 쉬면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몸의 반사작용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루이스에게 신경이 쓰이지 않았으므로 고영무는 곧 잠이 들었다.
"신용만씨는 어디 나갔어요?"
방에서 나온 홍성희가 물었다. 머리를 든 최대광은 침을 삼켰다. 그녀는 최대광의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셔츠의 자락이 아래쪽을 덮기는 했지만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벅지가 보였다. 도무지 팬티를 입은 것 같지도 않다.
"비디오 빌리러 갔어요?"
얼마동안 있을지는 몰라도 생활필수품을 사놓자는 신용만의 말대로 TV와 비디오, 주방용품 등은 사놓았으므로 홍성희는 하루에 10개 정도의 비디오 영화를 보고 있었다. 오늘은 그녀를 데려온 지 닷새째 되는 날이다. 유장수가 이쪽저쪽에 손을 쓴 모양으로 홍성희가 납치당했다는 신문 기사나 방송은 없었다. 냉장고를 열어젖힌 홍성희가 콜라를 꺼내 들고는 최대광의 앞자리에 앉았다. 다리 한쪽을 들어 무릎 위에 올려놓았으므로 그녀의 한쪽 다리가 환하게 드러났다. 그녀의 시선이 최대광으로부터 떨어지지를 않는다.
"아저씨, 날 언제 보내려구 해요?"
한 모금 콜라를 마신 그녀가 물었다.
"내 동생하고 바꿀 테니까, 곧 보낼 거야."
시선을 돌린 최대광이 보다 만 잡지를 펼쳐 들었다.
"잠 실컷 자구, 비디오도 실컷 보았는데, 며칠 더 있었으면 좋겠어. 아저씨들은 어떻게 하시려고 그래요? 동생 찾으면. 참, 나하고 바꾸고 나서 그 사람들이 또 누구를 잡아가면 어쩌죠?"
최대광이 머리를 들었다.
"그럼 다 쥑일거야. 다 쥑이고 나도 죽을 거다."
최대광의 기세가 사나웠으므로 이제는 홍성희가 시선을 돌렸다.
"아저씨들은 너무 순진해."
중얼거리듯 그녀가 말했다
"언젠가는 아저씨들이 당해요. 지금은 안 그럴 것 같지만."
"들어가서 비디오나 봐."
"다 왔어요. 신용만씨는 이미 본 것을 세 개나 가져왔어요. 바보 같애."
입맛을 다신 최대광이 다시 잡지를 펼쳤으나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다. 아까부터 아랫배가 뜨거워지고 있었으나 이를 악물고 참고 있는 참이다. 놈들에게 잡혀 있을 금옥이를 생각하면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그때에는 누구처럼 연장을 돌멩이로 까부숴야 할 것이다.
"아저씨, 그 사람 돈 많아요. 그때 10억을 가져오라고 했어도 가져왔을 거예요. 시간만 있다면 50억쯤이라도."
잡지를 접은 최대광은 명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콘도에서 그녀를 납치해 올 때부터 소풍 가는 아이처럼 들뜬 것 같이 보이던 홍성희였다. 도무지 무서움을 타지 않는 맹랑한 여자라고 생각하다가도 그날 아파트로 쳐들어갔을 때를 생각하면 머리가 갸웃해졌다. 그때는 학질 걸린 여자처럼 온몸을 떨어대었던 것이다. 어쨌건 그녀가 고분고분하다 못해 어떤 때는 누구 편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이쪽 생각을 해줄 때면 신용만조차도 멍할 때가 많았다.
"아저씨, 애인 있어요?"
최대광이 머리를 들자 그를 향해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입맛을 다시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있어, 둘이나."
"어머나."
홍성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둘요?"
"그래."
"여자친구 아녜요? 애인이 아니라."
"그거나 저거나, 어쨌든."
최대광의 머리에 양미숙과 장혜란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지워졌다. 양미숙을 만나지 않은 지 열흘이 넘었다. 이쪽의 연락처를 모르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알고 있었다면 찾아왔을지도 몰랐다.
"결혼할 사이인 친구가 있어요, 둘 중에서?"
두 무릎을 오므리고는 두 팔로 감싸 안았으므로 홍성희의 하체는 둥근 엉덩이 부분만 드러났다. 홍성희가 재촉하듯 그를 바라보았다.
"결혼은 젠장, 모두 서방들이 있는 년들인데."
입을 벌린 홍성희가 턱을 들었다.
"남편들이 있어요?"
"그래."
"그게 애인이란 말에요?"
"그런 거지 뭐, 돈 받고 하는 일인데."
"한번 자는 데 백만 원이야. 어떤 때는 2백을 받을 때도 있어. 돈 없으면 나하고 만날 생각 못 하지."
머리를 쳐들고는 힐끗 홍성희의 얼굴을 들여다본 최대광이 잡지를 펼쳐 들었다. 그러다가 거꾸로 펴든 것을 깨닫고는 고쳐 쥐었다.
"그런데 이 망할 자식은 왜 이렇게 꾸물대는지 모르겠구만."
혼잣소리로 중얼거린 최대광은 책장을 넘겼다. 홍성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신용만이란 사람이야. 그러면 너희 사장이 알 거다."
무선전화기를 쥔 신용만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파트 안에 있는 놀이터였다. 아직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으므로 어린아이 두 명이 앉아 모래 장난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수화기를 든다.
"여보세요."
신용만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봐, 당신 사장을 바꾸란 말이야. 유장수씨 없어?"
"너 신용만이지? 나 장규식이다. 내 이름 들어보았겠지?"
"어어, 장규식씨. 그러고 보니 당신이 유장수 똘마니였지?"
"너, 이 자식."
이를 갈아붙이는지 뿌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괜히 이빨 버릴 것 없다. 유장수가 없다면 니가 전해, 내 말을."
신용만이 던지듯이 말했다.
"너 이 새끼, 신용만, 내가 널 잡으면‥‥‥‥"
장규식이 아우성을 쳤으므로 신용만은 전화기의 스위치를 껐다. 놀이터의 아이들은 이제 시소에 올라가 있었다. 신용만이 아이들을 시소에 태우고 한참 동안 놀고 나서 다시 전화기를 꺼내었을 때는 30분이 지난 후였다. 다이얼을 늘러 신호가 가자 금방 장규식이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너, 장규식, 한 번만 더 욕을 했다가는 전화를 안 할 테니까, 네가 책임져야 돼 알았어?"
장규식은 대답이 없다.
"알았어? 몰랐어? 이 새끼야!"
"알았다."
신용만은 피우던 담배를 구둣발로 비벼 껐다.
"우리가 잡고 있는 홍성희와 최금옥이를 교환하자. 너희들도 그걸 바라고 있었겠지. 안 그래?"
"좋아, 어디서 말이냐? 언제?"
"내일 다시 연락을 할 테니까, 지금 네가 전화 받는 곳에 금옥이를 데려다 놔. 이쪽도 홍성희를 준비시켜 놓을 테니까."
신용만은 전화기를 껐다. 놀이터의 의자에 앉아 아파트를 올려다보는 신용만에게 아이들이 다가왔다. 다섯 살도 채 안 되는 아이들이었는데 다시 시소를 태워 달라는 얼굴이었다. 머리를 끄덕인 신용만은 아이들을 시소에 앉혔다.
"부회장님 계셔?"
오탁근 부장의 얼굴은 나무판자처럼 보였다. 그의 옆에 선 이태규 과장의 얼굴은 아예 시멘트를 발라 굳혀 놓은 것 같았다. 이자영은 자리에서 일어셨다.
"네, 기다리고 계세요,"
노크를 한 그녀가 부회장실의 문을 열자 그들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부회장 박주경은 그들이 들어서자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잠자코 앞쪽의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요."
"네."
오탁근이 앉자 이태규도 조심스럽게 그의 옆에 앉는다.
"어떻게 된 일이오?"
이맛살을 찌푸린 박주경이 대뜸 물었다.
"외무부에서 나를 오라고 하는데, 보고타 지사의 고영무란 사원이 살인을 했다고 하면서 말이오."
그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렸다.
"저도 조금 전에 대사관에 연락을 해서 알았습니다."
오탁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 뭐라고 합니까?"
박주경이 다그치듯 물었다. 아침부터 외무부에서 차관이 직접 전화를 해와서 신경이 곤두서 있는 판이다. 일성그룹의 40년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고영무가 현지 교민을 살해했다고 합니다."
"그건 알고 있어요. 차관의 이야기로는 금전 관계로 그랬다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랬냐는 거요."
"고영무가 창고에 있는 재고제품을 암시장에 내다 판 것 같습니다."
박주경이 입을 벌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죽은 남자는 재고품을 판 사람인 모양인데 이익 배분을 가지고 싸우다가 칼로 찌를 모양입니다."
문이 열리더니 이자영이 찻잔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박주경이 눈을 치켜뜨고 문 쪽을 바라보다가 입맛을 다시더니 시선을 돌렸다. 오탁근이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의 땀을 훔쳤다. 힐끗 이태규를 바라보았으나 머리를 숙인 이태규는 거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더구나 고영무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는데 경찰들이 집안을 수색하는 것을 틈타 경찰 세 명을 때려 중상을 입히고 도주했다고 합니다."
"허어, 참."
기가 막히다는 듯이 박주경이 입을 벌리고 헛웃음을 지었다.
"경찰관 세 명을 때려누였단 말이오?"
"네, 더구나 경찰이 가지고 있던 권총까지 빼앗아 달아났다고 합니다. 경찰과 군대에는 이제 그를 발견하면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들었습니다."
"야단났군."
박주경이 머리를 들어 마악 몸을 돌리는 이자영을 바라보았다.
"이자영씨, 실장과 전자의 김사장을 오시라고 해. 해외 업무부장도."
"네, 알겠습니다."
이자영이 문을 닫고 나가자 박주경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회장님, 고영무가 대사관에 전화를 했다고 하는군요. 자기는 살인하지 않았다면서 전화를 끊었답니다. 자수하라고 해도 듣지 않았답니다."
오탁근이 말을 이었으나 박주경은 듣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김사장은 알고 있어요? 이 일을 말입니다."
문득 박주경이 물었으므로 이태규까지 머리를 들었다.
"네, 조금 전에 보고를 했습니다."
"뭐라고 하십디까?"
박주경이 묻자 오탁근은 시선을 내렸다.
"말씀이 있었을 것 아니오?"
"네, 저쪽 대사관과 이곳 외무부에 손을 써서 사건이 보도되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이 계셨습니다만."
"‥‥‥‥"
"회사의 명예에 관계되는 일이니만치 노출되면 안 된다고."
"그건 그렇지,"
박주경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 암거래 했다는 사실을 저쪽 정부에서도 알고 있겠지요?"
박주경이 묻자 오탁근이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건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경찰이 암거래 사실을 적발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그걸 다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창고에 재고는 얼마나 남아 있지요?"
"바로 이틀 전에 TV 재고 5백 대를 처분해서 돈이 이쪽으로 송금되어왔습니다. 그래서 계산상으로는 약 70만 달러 정도‥‥‥‥"
"살인하기 이틀 전에 돈을 보내왔단 말이오? 얼마나?"
"10만 달러가 조금 넘습니다."
"10만 달러가 넘었단 말이지요?"
혼잣소리처럼 박주경이 중얼거렸다. 한동안 방안에는 침묵이 흘렀는데 그 침묵을 오탁근이 깨었다.
"부회장님, 아무래도 보고타에 누가 들어가서 회사나 창고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박주경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이태규를 바라보았다.
"그렇지요.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이 사실이 절대로 외부에 누설되지 않도록 해요. 김사장님 말대로 회사의 명예에 관계된 일이니까."
오탁근과 이태규가 머리를 숙였다.
방안은 섹스가 끝난 후의 후덥지근하고 비릿한 열기에 싸여 있었다. 에어컨 바람이 피부를 스치고 있었지만 열기를 식혀주기보다는 땀에 밴 피부가 끈적이는 것을 확인시켜 줄 뿐이었다. 이자영은 손바닥으로 박주경의 가슴을 살그머니 쓸었다. 두 팔을 머리맡에 괴고 누운 박주경은 천장을 바라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신경 쓰지 마세요. 섹스하면서도 그 일 생각하고 계신 것 같아."
이자영이 그의 가슴에 입술을 대면서 말했다.
"사원만 3만 명이에요. 어떻게 하나하나 신경을 써요?"
박주경이 머리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영이 너, 내일 아침에 신문사에다 연락을 해라. 3대 일간지만 하도록 해. 고영무 사건을 그대로 이야기해 주도록 해."
이자영이 그의 가슴에서 머리를 떼었다. 화장을 지운 밝은 얼굴로 한동안 박주경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우리 회사 이야기를 해요?"
"그래."
긴 속눈썹을 깜박이며 바라보는 이자영이 귀여운지 박주경의 손이 뻗어 나와 그녀의 깊은 곳을 건드렸다. 그러나 이자영은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몸을 내맡기고 있다. 전자의 사장과 그룹의 간부들이 모두 모인 오후의 회의에서 박주경은 결론을 내렸다. 고영무 사건은 사내는 물론 모든 언론기관의 보도까지 막기로 하였던 것이다. 아직 언론기관들은 고영무 사건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아는 낌새라도 보이면 적극적인 로비를 해서 막아야 한다.
"무슨 말씀인지 저는‥‥‥‥"
이자영이 머리를 누이며 이맛살을 찌푸리자 박주경이 웃었다.
"보고타에서 고영무가 한 일을 그대로 이야기하란 말이다. 일성전자의 고영무, 암거래 중 이득금 문제로 교포를 살해,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나 경찰 세 명을 때려 중상을 입히고는 권총과 돈을 가지고 도주, 콜롬비아에서는 그를 발견하면 사살하라는 명령이 떨어짐 아마 그 정도면 특종감일 거다."
"왜요?"
"바보 같으니, 영리한 줄 알았는데,"
"아아!"
이자영이 활짝 웃으면서 박주경의 가슴에 얼굴을 대었다.
"알았어요."
"알았으면 신중하게 잘해."
"그건 염려 마세요."
박주경의 몸 위로 올라온 이자영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몸이 뜨거워져 있는 것을 알았으므로 이자영은 다시 웃었다.
아메리카 여행사는 보고타의 힐튼 호텔에 사무실이 있었다. 이자영은 서울의 아메리카 여행사에 근무하는 선배의 도움을 받아 사흘 전 고영무 사건이 보도된 보고타의 신문을 팩시밀리로 전송을 받았다. 그것으로 임무는 99퍼센트 끝난 셈이었다. 이제는 이것을 스크랩해서 주석을 달아 각 신문사에 보내면 되는 것이다. 아침에 시작한 일이 점심때가 되자 모두 끝이 났다. 일부 신문사는 일성그룹의 체면을 생각하고 비서실에 전화를 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말리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다. 비서실에서도 모르는 걸 내면 그것도 특종이다. 신문사는 경쟁심리 때문에 보도하게끔 되어 있다고 박주경이 설명해 주었던 것이다. 신문사의 기자들에게 자신은 보고타에서 마악 도착한 사람이라면서 사건을 설명해 준 이자영은 집으로 돌아왔다. 신문사 네 곳을 거쳤으므로 오후 다섯 시가 되어 있었다.
"아니, 지금 퇴근한 거냐?"
어머니가 현관을 들어서는 그녀를 보고는 놀라 물었다.
"응, 오늘은 외근을 했거든."
가방을 소파 위에 던진 이자영은 냉장고를 열고 주스병을 꺼내어 컵에 따랐다.
"바빴어, 특명을 받았거든."
"특명? 부회장한테서 말이냐?"
"응."
이자영은 어머니를 마주 보고 앉았다.
"무슨 일인데?"
"엄마, 내가 언젠가 이야기한 적이 있지? 내 입사 동기 중에서 고영무라고 콜롬비아로 발령받았다는 사람."
"그래, 들은 것 같다. 근래서?"
"그 자식이 보고타서 살인강도 짓을 했어. 암거래에다가, 더구나 잡으려고 온 경찰까지 때려누이고는 권총을 빼앗아서 도망쳤다는 거야."
"어머나, 세상에."
이자영은 손에 들고 있던 주스를 두어 모금 삼키고는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회사가 발칵 뒤집혔어. 어제는 아침부터 대책 회의가 열렀고."
"저런, 그래서?"
어머니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호기심을 나타냈으므로 이자영은 자신도 모르게 흥이 났다.
"그 일 때문에 네가 특명을 받은 거냐?"
"응."
"무슨 일인데?"
"조금 복잡한 일이야."
어머니에게 신문사에 들러서 기사를 제공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자신과 박주경 둘이서 진행하는 것이다.
"어쨌든 조만간에 일성그룹에 지진이 일어날 거야. 고영무 사건으로 자리를 내놓을 사람이 꽤 많을걸?"
"도대체 살인강도라니, 왜?"
어머니는 그쪽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건 내일 신문 보면 돼. 교민과 싸우다 그랬으니까. 내가 그 남자 잘 알아. 그럴 만한 남자야."
이맛살을 찌푸린 어머니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말하면 못쓴다. 그럴 만한 남자라니? 사람이 어디 처음부터 그렇게 타고난 사람이 있니? 어쩌다 보니까‥‥‥‥"
"엄마는 모르는 소리 하고 있어. 그 남자는 문제 사원으로 보고타로 추방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어. 다 끝난 마당에 이런 말 하기도 뭣하지만, 직장이나 사회생활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야."
"안됐다."
"엄마는 괜히."
"그 남자도 그렇지만 그 남자 부모 말이다. 이 일을 알고 있니?"
"내일이면 알게 될 거야."
"가슴이 터지겠구나."
"가슴 터질 사람이 많아, 내일."
전자의 김학래 사장과 이태규 과장은 사표를 내야 할 것이다. 오탁근 부장은 박주경의 신임을 받고 있었으므로 시말서나 감봉 등으로 수습이 된다. 김학래 사장은 창업 공신이었고 박채룡 회장의 오른팔이다. 그가 자신의 딸을 박인경 사장과 맺어지게 한다면 박주경에게는 커다란 위협이었다. 고영무 사건은 박주경에게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좋은 기회를 준 것이다. 큰일을 마무리했다는 흥분이 여전히 가시지 않았으므로 이자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생각 같아서는 친구들과 술이나 마시면서 이 일을 떠들어대고 싶었으나 아직은 이르다. 가벼운 걸음으로 화장실로 들어가는 이자영의 뒷모습을 어머니는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저는 영무하고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친했는데 보고타로 발령 나서 떠난 줄은 몰랐어요."
김만영이 주스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저도 집이 이 근처로 이사를 왔거든요. 저 아래쪽에 국제 아파트로요. 그래서 영무도 만날 겸해서 올라왔는데"
"어쩌나, 나중에 걔한테서 전화가 오면 알려줄게. 친구가 다녀갔다고."
어머니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놈은 무심한 놈이라 전화도 자주 안 해. 이제까지 전화를 세 번밖에 안 했어, 두 달이 되어 가는데."
김만영이 넓은 얼굴을 펴며 웃었다.
"학교 다닐 때도 그랬습니다. 어머니가 이해하셔야죠."
고진호씨는 친구를 만나러 밖에 나갔고 집안에는 어머니와 일하는 아줌마 둘이서만 있었다. 오후 여섯 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그래, 그쪽은 결혼은 했어?"
어머니가 묻자 김만영은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
"저는 아직 생각 없습니다. 및 년 더 있다가 할 작정입니다."
"저런, 부모님이 걱정하시겠어."
"아니, 저희 부모님은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원체 속을 썩여 드려서요. 마누라 될 사람 고생시킬까 봐서 결혼시키기 겁난다고도 하시더군요."
어머니가 얼굴을 피며 웃었다.
"친구들이라 비슷해. 나도 그런 생각을 했어. 그런데 직장은 어디에 다니고?"
어머니는 고영무의 친구라고 찾아온 김만영에게 호감을 느끼는 눈치였다. 본래 사람을 좋아하는 김영순 여사이기도 하다.
"저는 개인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조그만 공장을 가지고 있어요."
"어이구, 훌륭하네. 무슨 공장인데?"
"자동차 부속을 만듭니다 조그만 해요. 그런데 어머니, 영무 친구들은 찾아오지 않았어요? 제가 처음입니까?"
김만영이 묻자 어머니가 머리를 끄덕였다.
"학교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직장에 다니면서 친구들하고는 멀어진 것 같아. 친구가 찾아온 것은 자네가 처음이야."
"아아, 네."
"서로 바빠서 그렇겠지. 이젠 사회인이니까. 그렇지?"
"그럼요."
"공장을 하고 있다니, 대단해. 조금 있다가 저녁 먹고 가."
"아닙니다, 어머님, "
김만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공장에 가봐야 합니다. 오늘은 지나다가 인사차 들른 것이어서요."
"어이구, 고마워라. 다음에 올 때는 빈손으로 와도 돼."
"네, 어머님, "
현관문을 열고 나가던 김만영이 몸을 돌렀다.
"어머님, 혹시 영무가 요즘 만나는 친구들은 모르시겠죠? 하나는 체격이 큰데, 최대광이라고. 그놈 주소를 제가 몰라서요."
"글쎄,"
한동안 김만영을 바라보던 어머니가 머리를 저었다.
"바깥 이야기를 하지 않는 애여서‥‥‥ 나중에 전화 오면 내가 물어볼게,"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김만영은 머리를 숙여 보이고는 문을 열었다. 문고리를 잠그고 난 김영숙 여사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집안을 둘러보았다. 김만영이 가져온 과일 바구니가 신발장 옆에 놓여 있었다.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친구들이라 그런지 모두 체격들이 좋아요, 아드님같이, 그렇죠?"
아줌마가 소리치듯 말했다.
"그래"
건성으로 대답한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가 경대 위에 놓인 전화번호 기록장을 펼쳤다. 방안에 놓인 전화기를 든 그녀는 또박또박 다이얼을 눌렀다.
"여보세요."
신호가 떨어지자 곧 금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영무 에민데."
"네? 누구시라구요?"
저쪽이 놀란 듯 목소리가 커졌다.
"영무 에미야, 고영무."
"아아, 네, 어, 어머님."
"내가 전화해서 놀란 모양이구먼, "
"아닙니다, 어머님."
"영무가 전화번호를 가르쳐 줬어, 급한 일 있으면 전화하라고."
"네, 어머님."
"거기 최 뭐라고 하더라, 그래, 최대광이라는 사람이 있어?"
"네? 네, 있습니다."
"그 사람을 누가 찾았어. 김만영이라고 영무 친구 된다는 사람인데, 내 생각은 아닌 것 같아. 내가 영무 친구는 다 알거든 그놈들은 내가 무서워서 절대로 집에 찾아오는 법이 없어."
"아아, 네,"
"그런데 그 사람이 최대광이를 물어보았어. 그래서 나는 모른다고 했는데."
"네, 어머님, 잘하셨습니다."
"자네들 거기 몇 명이나 있어?"
"둘, 아니 셋입니다."
"자네들 학생운동 하는 거야? 지금도?"
"아, 아닙니다, 어머님."
"난 빨갱이는 싫어. 영무가 친구 좋아해서 별놈들을 다 데려고 다녔지만 빨갱이는 절대 반대야."
"저희들도 절대 아닙니다, 어머님."
"그럼, 무슨 죄지었어? 영무는 다른 사람한테 알리지만 말라고 해서 말이야."
"죄 없습니다, 어머님."
"됐어. 그럼, 가스 조심하고."
"네, 어머님."
김영순 여사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놈들이 형님 집으로 찾아갔다."
신용만이 방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우리를 찾고 있어. 어떻게 형님 집을 알게 되었을까?"
그는 자리에 앉지 않고 방안을 서성거렸다.
"누가 그래?"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던 최대광이 눈을 껌벅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금방 어머님한테서 전화가 왔어."
"어머님은 모른다고 하셨다는 거야. 네 이름을 물어 봤다는구만, 아느냐고. 그놈들이 틀림없어."
최대광이 힘들게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는 신용만을 바라보았다.
"야, 집 옮기자, 다른 데로."
서성거리던 신용만이 걸음을 멈추었다.
"집을 옮겨?"
"그래, 여기 있다가는 형님 가족들한테도 놈들이 해코지를 할 테니까."
"설마?"
"설마라니, 난 그 꼴 못 본다. 더구나 형님도 한국에 없는데 무슨 일이 있으면."
"옮겨, 오늘 당장."
"야, 내일이면 인질 맞바꾸게 돼. 그때 홀가분하게 옮기는 게 낫지 않아? 아직까지는 문제가 없어. 오늘 하루만 참자."
최대광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제는 그가 방안을 오락가락했다. 신용만은 그와 부딪치지 않으려고 벽에 붙어 섰다.
"오늘 하루면 돼. 저 여자를 데리고 어딜 나간단 말이야? 갈 데도 없잖아? 호델에 들어갈래?"
그러면 홍성희의 얼굴이 대번에 알려질 판이므로 그것은 잡히러 들어가는 것과 같다.
"내일 금옥이를 찾으면 집으로 돌려보내고 우리도 여길 나가는 거야. 우리 둘이면 어디라도 상관없어. 안 그래?"
최대광이 갑자기 주먹으로 벽을 쳤다. 쿵 소리와 함께 유리창이 울렀다.
"에이그, 젠장, 이놈들을 모조리 쥑여 버리고 말아야지."
눈을 부릅뜬 최대광이 웅얼거리고 있는데 방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에요?"
홍성희가 눈을 깜박이며 그들을 둘러보았다.
"둘이 싸워요?"
"아니, 아무것도 아냐."
신용만이 머리를 저었다.
"댁은 방에 가서 비디오나 봐."
"벽이 무너지는 줄 알았단 말예요."
그들에게 눈을 흘긴 홍성희가 몸을 돌렸다.
"배를 타자. 배를 타고 곧장 LA로 가자."
신용만이 팔짱을 끼고 서서 최대광을 바라보았다.
"내가 알아보았어. 홍콩에서 비행기를 타려고 했더니 우리 여권에 출국 도장이 찍혀 있지 않으면 못 탄다는 거야. 여기서 LA로 가는 배를 타는 것이 제일 안전해."
"화물선에 타는 거야, 먹을 것 가지고. 돈도 LA에 가면 달러로 바꿀 수 있어."
최대광이 힐끗 그를 보더니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가기 전에 어머니를 만나야겠어."
벽을 바라보며 최대광이 말했다.
"언제 다시 만날지도 모른단 말이다. 인사는 드리고 떠나야겠어."
"금옥이 데리고 시골 내려갔다 올란다."
"그래? 개선장군 같은 기분이 들 것 같으냐?"
벽에 등을 기댄 신용만이 입술 끝으로 웃었다.
"고향 산소에 가서 조상들께 성묘라도 해야지, 간 김에. 안 그래?"
최대광이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활자 좋은 소리 하고 있어, 멍청한 자식이."
벽에서 등을 댄 신용만이 거칠게 문을 열고 방을 나갔다. 응접실에서는 홍성희가 두 다리를 길게 펴고 앉아 잡지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작전회의 다 끝났어요?"
잡지를 던져 놓은 홍성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최대광씨, 화났어요?"
신용만은 소파의 구석으로 다가가 앉아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홍성희가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내일 교환하기로 했지요?"
그녀가 다시 물었으므로 신용만은 머리를 끄덕였다.
"어디서요?"
"그건 내일 알려줄 거야."
"나한테 말해 주는 건 상관없잖아요? 누구한테 말할 것도 아닌데."
"아직 정하지 않았어."
"그냥 바꾸고 헤어져요?"
방문이 열리더니 최대광이 나왔다. 이맛살이 찌푸려져 있고 입술이 뒤틀려 있는 것이 심사가 편치 않은 표정이다. 최대광이 소파에 앉자 소파의 스프링이 부러질 듯 출렁거렸다.
"그 사람들이 내버려 둘 것 같아요? 날 찾고 나면 말예요."
홍성희가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어찌겠다는 거이? 돌아가고 싶지 않단 말이야?"
신용만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까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잘 따라 주어서 고마운데, 우리 일에 상관하지 말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당신들 일이라구요? 이건 내 일도 돼요."
눈썹을 치켜올린 그녀가 말했다.
"내가 괜히 당신들에게 협조한 줄 알아요? 나도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예요."
"무슨 생각인데?"
"그 사람과 떨어지고 싶어요."
신용만이 최대광을 바라보았다. 입술을 뒤들 모습 그대로 최대광은 홍성희를 바라보았다.
"당신들은 그 사람을 너무 몰라요. 결코 잊지도 않고, 놓아주지도 않을 사람이에요. 그 사람한테 잡히면 죽기 전에는 풀려날 수 없어요."
홍성희의 말소리가 떨려 나왔다. 붉게 상기된 얼굴이 화장기가 없어서 금방 딴 복숭아 같아 보인다고 최대광은 생각했다.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들하고 내가 같은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유장수는 머리를 들었다. 술기운이 얼굴에 번져 눈자위와 콧등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가차 없이 없애버려 애만 찾고 나면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죽여 버려라. 내가 책임진다."
"염려 마십시오, 사장님."
장규식이 머리를 숙였다.
"애들도 모두 준비시켜 놓았습니다. 이번에는 틀림없습니다."
"대여섯 명 가지고는 안돼. 지난번에 네 말대로 난다 긴다 하는 놈들이 어떻게 되었지? 모두 기는 놈들뿐이었다."
유장수는 소리 나게 빈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여섯 놈이 두 놈한테 당해서 모두 입원을 하다니, 기가 막혀서."
턱을 들고 천장을 향해 입을 벌리며 유장수가 웃는 시늉을 했다. 그들은 지금도 병원에 누워 있는 것이다.
"사장님, 이번에는 다릅니다. 두고 보십시오. 제가 틀림없이... "
"놈들이고 뭐라고 하는 놈하고는 관계가 없지?"
유장수가 말을 바꿨다.
"없습니다. 집안까지 들어가 보았고, 그놈은 외국에 파견 나가 있어요."
"어쨌든 지금도 수색하고 있습니다. 내일 놈들이 나타나기는 하겠지만 말입니다."
손수건을 꺼낸 장규식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유장수는 잔에 술을 채우고는 다시 한 모금에 털어 넣었다. 청산 나이트클럽의 밀실이어서 밖에서 연주하는 음악 소리가 미미하게 들려오고 있다. 홍성희가 납치된 지 엿새째 되는 날이었다. TV 방송국과 프로덕션 측에는 홍성희가 미국에 있는 친척이 상을 당해서 열흘 예정으로 떠났다고 말해 주었으니 별 탈은 없을 것이다. 장규식이 조심스럽게 그의 빈 잔에 술을 채우고 있었다.
"그년이 영리한 년이야."
혼잣소리처럼 유장수가 말했으므로 장규식이 머리를 들었다.
"납치될 때 제 동료들에게 집안일로 나가는 것이라고 했단 말이다. 그 경황없는 때에도 제 앞가림하는 것을 봐라."
유장수가 입술 끝을 비틀면서 웃었다.
"담이 큰 년이지."
"그년은 기회만 있으면 도망칠 년이다. 내가 병들어 누우면 약사발을 내던지고 집을 나갈 년이야."
장규식은 머리를 숙인 채로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그는 유장수가 흥성희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있었다. 십 년 가깝게 심복 노룻을 하면서 그의 여자 문제 뒤치다꺼리는 모두 그의 몫이었다. 유장수의 말마따나 홍성희는 그럴 만한 여자였다. 장규식의 눈으로 본다면 몇 번 쓰고 버
릴 여자였으나 유장수는 그녀에게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변덕이 많고 간사한 성격에 죽이 맞았는지, 아니면 그것 궁합이 맞았는지도 모른다.
"저는 내일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장규식이 말하자 유장수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내일이지, 내일이야."
2. 도피
덜컹거리고 산길을 내려가던 버스가 갑자기 멈추었으므로 고영무는 앞쪽 의자에 얼굴을 부딪치며 잠이 깨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인디오가 목을 뽑아 앞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그도 그를 따라 시선을 주었다. 무장한 사내 두 명이 버스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한 명은 카키색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맨발에 샌들을 신고 머리에는 밝은 중절모를 썼다. 다른 한 명은 맨머리에 일반복 차림이었다. 둘은 모두 미제 M-16 자동소총으로 버스를 겨누고 있었다. 버스 안에 탄 사람들은 모두 잠자코 앉아 있었다. 좌석이 가득찼고 통로에도 서너 사람이 앉아 있지만 입을 여는 사람은 없다. 누가 들고 왔는지 닭이 날개를 치며 꾹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내 한 명이 앞쪽에 난 문을 열고 들어섰다. 운전사에게 빠른 스페인어로 무어라고 묻고 있었는데 고영무로서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사내가 머리를 돌려 승객들을 바라보았다. 일반복 차림의 사내였다. 마른 얼굴에 광대뼈가 두드러졌으나 눈이 유난히 켰다. 정하게 들린 시선이 버스 안을 한 바퀴 휘둘러보는 것이 마치 시체의 눈 같았다.
고영무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침 여덟 시에 보고타를 출발하였으니 다섯 시간은 달려온 셈이다. 국도로 달리는 버스는 길도 험했지만 속력도 시속 50킬로미터가 고작이었다. 메데인에 도착하려면 앞으로 서너 시간은 더 가야 할 것 같았다. 닭이 다시 꾹꾹거렸고 통로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수선스럽게 일어셨다. 사내가 통로를 따라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는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살펴보다가 신분증을 조사하기도 했다. 고영무는 버스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짙은 삼림에 싸인 길 한복판에 버스가 세워져 있었고 버스의 앞을 가로막고 선 사내는 이쪽저쪽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정부군은 아니다. 이제까지 정부군의 초소를 두 개 지나쳤지만 그들은 제법 단정한 군복을 입었고 인디오들만 가득 찬 버스는 그냥 통과시켜 주었었다. 사내가 다가와 고영무의 앞에 섰다. 옆에 앉아 있은 인디오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가 고영무를 향해 스페인어로 무언가를 물었다.
"난 스페인어를 몰라."
그가 영어로 말하자 사내가 당황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며 무어라고 다시 이야기를 한다. 고영무는 판초 밑에서 움켜쥐고 있던 여권을 꺼내어 그의 손에 올려놓았다. 정부군이라면 중국인 행세를 했을 것이다. 여권을 받은 사내가 종이를 넘겨보더니 고영무의 얼굴을 힐끗거렸다. 버스 안에 있는 승객들이 모두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앞쪽 자리에 앉아 있던 사내들은 아예 일어서서 이쪽을 바라보았다. 사내가 여권을 접었다. 그리고는 바지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사내는 둘째손가락을 안쪽으로 구부리면서 고영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밖으로 나오라는 뜻이다. 버스 안은 갑자기 고요해졌다. 고영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사내는 팔을 뻗어 그의 판초 자락을 움켜쥐었다.
"왜 그래? 이유를 말해 주어야 할 것 아니야?"
고영무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묻자 그가 한 손으로 움켜쥔 M-16의 총구를 고영무의 배에 대었다. 인디오들이 저회들끼리 수군거리고 있었다. 고영무가 앞장을 서고 사내는 총구로 그의 등을 밀면서 버스를 내렸다. 그들이 내리자마자 버스는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면서 산길을 달려 나갔다.
"이봐요, 왜 그러는 거요?"
산속에는 사내 두 명과 고영무만이 남아 있었다. 사복이 총 끝으로 고영무의 판초를 걷어 올렸다. 그가 배에 찬 두툼한 전대가 드러났다. 군복이 소리 내어 웃었다. 사복이 손을 뻗어 전대의 단추 하나를 풀고는 한 뭉치의 돈을 끄집어내자 군복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사복은 다시 정신없이 고영무의 전대를 뒤지기 시작했다. 다시 한 뭉치의 달러가 나오자 사복이 머리를 들고는 군복을 향해 말했다 한두 방울씩 비가 뿌려지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흥분으로 생기가 도는 듯했다. 그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았는지 머리를 끄덕였다. 군복을 입은 사내가 총구로 고영무의 등을 밀었다 민 쪽은 길가의 숲이 우거진 곳이다. 군복을 입은 사내가 두어 걸음 앞장서서 숲으로 들어갔다. 인적도 없는 곳이었고 차량도 보이지가 않는다. 고영무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면서 숲속으로 두어 발짝 들어섰다. 무릎 위까지 덮이는 잡풀들이어서 누우면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앞장선 군복이 멈춰 섰으므로 고영무는 그에게로 바짝 다가갔다. 아직까지도 등에는 총구가 닿아 있었다. 군복이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가 M-16의 총신을 바로잡는 것이 보였다. 그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서자 그와는 두 걸음쯤의 간격이 되었다. 군복의 총구가 이쪽으로 돌려지는 순간 껑충 뛰며 달려든 고영무의 발끝이 군복의 턱을 찍었다. 그가 번적 턱을 치켜들면서 넘어졌다. 몸을 비튼 고영무는 사복의 사내를 향해서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판초 속에서 움켜쥐고 있었던 권총이 요란한 총성을 내었다. 사복의 사내는 멍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머리를 숙이고는 가슴에 뚫린 상처를 보았다. 그리고는 잡풀 속에 무릎을 꿇더니 엎어졌다. 고영무가 머리를 돌리자 턱을 차인 군복이 땅에 누워 머리를 흔드는 것이 보였다. 다가간 고영무는 그의 이마를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사내가 입을 쩍 벌렸으나 다음 순간 다시 요란한 총성이 산속에 울려 퍼졌다. 그들의 주머니에 들어간 여권과 돈뭉치를 찾은 고영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원지대여서 기후는 서늘했으나 빗방울이 잦아지고 있었다. 곧 밤이 될 것이다. 고영무는 도로를 따라 터벅거리며 걸었다.
"이 길은 라파엘의 부대를 이탈한 도망병들이나 산적들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오. 그놈들한테 걸렀는데도 살아남은 것이 다행입니다."
산길을 달려 내려가면서 마르틴이 말했다.
"오늘은 늦었으니 저희 성당에서 묵고 떠나는 게 나을 것 같소,"
그의 승용차는 독일제 구형 폴크스바겐이었는데 산길의 요철에 튀어 오르면서 요란하게 덜컹거리고 있었다. 기계의 부속과 이음새가 모조리 어긋나며 진동을 하는 것이다. 마르틴은 이 근처 조그만 성당의 신부라고 했다. 검정색 신부복을 입은 그는 사십 대 후반의 사내였는데 산길을 혼자 내려가고 있던 고영무를 만난 것이다.
"한국인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오, 중국 사람과 일본 사람을 만나 본 적은 있소만. 보고타에 한국인들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소."
마르틴이 손마디가 굵은 손으로 핸들을 꺾으면서 말했다.
"세례는 받았소?"
"아닙니다, 아직."
그냥 물어본 모양으로 마르틴은 머리를 끄덕였다. 빗방울이 제법 세차게 뿌려지고 있었으나 와이퍼는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지지 않는다. 주변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마르틴이 덕으로 앞을 가리켰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저쪽 산모퉁이만 돌면 산타밀라 마을이요."
"보고타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습니까?"
"글쎄, 대강 3백 킬로 정도 될까?"
"메데인은 가깝습니까?"
"메데인에 아는 사람이 있소?"
"아니, 큰 도시여서요. 거기 가면 카르타헤나로 가는 고속버스를 탈 수 있겠지요?"
마르틴이 힐끗 고영무를 바라보았다.
"카르타헤나라, 거기에서 무엇을 할 작정이냐고 물어도 되겠소?"
"LA에 가야 합니다. 배를 타려구요."
마르틴은 잠자코 앞을 바라보며 운전에 열중한 것처럼 보였다. 이제 주위는 완전히 어두워져서 마르틴은 헤드라이트를 켰다. 앞으로 뻗어나간 불빛 속에 빗발이 보였다. 덜컹거리고 금방 부서질 듯 요란하게 삐걱거리기는 했으나 폴크스바겐은 끈질긴 엔진 소리를 내며 빗길을 달려 나갔다. 그의 말대로 모퉁이를 들자 아래쪽에 반짝이는 불빛이 보였다. 산타밀라 마을이었다. 천천히 산길을 내려가던 차는 이윽고 검은 건물 앞에서 멈추었다. 자동차의 불빛에 비친 성당은 마치 누가 사용하다 버린 창고같이 보였다. 그 창고의 문이 열리더니 안쪽의 불빛이 흘러 비추었는데 흰색의 상의를 걸친 인디오가 나왔다. 그는 손에 든 커다란 우산을 펼치고는 이쪽으로 다가왔다.
"자, 나갑시다. 이게 우리 집이오."
마르틴이 문을 열고 나가면서 말했다.
오랜만에 먹는 것 같은 성찬이었다. 사무실을 뛰쳐나온 지 오늘 밤으로 나흘째가 되었는데 고영무는 4년쯤 지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식탁 위에는 닭고기와 함께 감자를 찐 요리, 그리고 밀리카가 만들어 주었던 산초코와 비슷한 요리도 있었다.
"많이 들어요. 이곳은 주님의 축복으로 음식 걱정은 없습니다."
허겁지겁 음식을 삼키는 고영무를 바라보며 마르틴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불안해할 것도 없습니다. 천천히 먹어요."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고영무는 순식간에 앞에 놓인 접시들을 비웠다. 나흘 동안 시장에서 산 묵은 빵이나 과일로 끼니를 때웠었다. 음식점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하인인 인디오가 쟁반에 과일을 담아 들고 왔다. 배부르게 먹은 고영무가 마르틴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니, 천만에. 나도 기뻐요, 당신을 만나게 되어서."
마르틴이 손끝으로 오렌지를 벗기며 그를 바라보았다.
"품 안에 달려온 자식을 결코 내쫓지는 않으십니다, 주님은."
"며칠 쉬었다가 가도 됩니다."
"저에게는 급한 일이 있어서요."
인디오 청년이 다가와 식탁 위의 그릇을 치우기 시작했다.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서 자랐습니다. 그동안 보고타에서는 여덟 번이나 정권이 바뀌었지요. 하지만 산타밀라는 변한 것이 없어요."
마르틴이 회색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고영무를 바라보았다.
"카르타헤나로 해서 LA로 간다고 했는데 누구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밀항하려는 것 아닙니까?"
그가 가볍게 묻자 고영무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한국인 미스터 고라고만 하였을 뿐으로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나 보고타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자신의 사진이 커다랗게 실려 있었으므로 마르틴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미스터 고, 당신은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지요? 한국으로?"
마르틴이 다시 물었다.
"아닙니다, 마르틴. 난 나를 배신하고 이용한 놈들을 찾기까지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고영무가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나는 누명을 뒤집어썼지요. 꼼짝 못 하게 되었습니다. 놈들도 그렇게 생각했겠지요. 아마 내가 이렇게 한 걸음씩 다가간다는 것을 알면 놀랄 겁니다."
"나는 놈들을 잡아낼 작정입니다. 지구 끝에 있더라도 찾아갑니다, 걸어서라도."
"그 사람을 당신이 죽이지 않았습니까?"
오렌지를 입에 넣으며 마르틴이 잔잔한 목소리로 물었다.
"죽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죽인 놈들을 잡아서 누명을 벗을 겁니다."
마르틴은 신문을 본 것이다. 그는 자신을 차에 태웠을 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르틴이 머리를 끄덕였다
"당신이 오후에 만났던 두 사내, 이온과 후지트는 이곳 산타밀라의 주민이오, 미스터 고."
".,. "
"내가 총소리를 듣고 가보았을 때는 두 사람은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고영무는 포도 알맹이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씹었다. 그는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웠고 고영무도 새삼스럽게 부담을 느끼지는 않았다.
"두 놈은 이 마을의 골칫덩어리였지요. 한 가지 다행이라면 이 마을에서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길에서나 다른 마을에서 강도질을 하는 것이었어요."
"살인도 했겠지요."
마르틴이 머리를 끄덕였다.
"당신같이 연고가 없는 사람이라면 죽이는 게 더 쉽지요."
"시체는 풀숲에 놓고 왔습니다만‥‥‥‥"
"내가 표시를 해두었소. 내일 아침에 가족들에게 이야기해 줘야지. 이온은 애가 둘이 있어요."
머리를 돌린 고영무가 포도의 씨를 손바닥에 뱉어내었다.
"미스터 고, 카르타헤나보다도 산타마르타가 더 가깝소, 밀항하기에는. 그리고 그곳에는 내가 아는 사람도 있고 말이오. 그 사람한테 40만 페소만 주면 밀항선을 태워 줄 겁니다."
고영무가 그를 바라보며 옷었다.
"신부님 같지가 않으시군요.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던 고영무의 시선이 벽에 걸린 성모 마리아상에서 멈추었다. 마리아상 밑에는 깨끗이 닦인 제기들이 놓여 있었다.
"우리의 선조들은 황금을 찾으려는 개척자들과 함께 이 나라에 왔어요. 나는 그 후손입니다. 어떤 때는 십자가를 들고 개척에 앞장을 셨지요."
"얼마를 드리면 됩니까?"
"산타마르타까지 내가 모셔다드리지요, 배도 태워 드리겠어요. 오백 페소를 주시오."
"저녁값으로는 좀 비쌉니다."
"앞으로의 매일 저녁을 생각해 보시오."
"흥정을 잘하십니다."
"인디오의 에메랄드를 유리구슬과 바꾼 실력이오."
마침내 고영무는 머리를 돌렸다. 인디오 청년이 쟁반에 커피를 받쳐 들고 나타났다. 진한 커피 냄새가 코를 찔렀고 저절로 침이 삼켜졌다. 식당은 응접실 겸용으로 쓰이는 모양이었는데 벽과 마루의 나무판자는 너무 밝아서 발을 구르면 무너질 것 같았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알전구가 스무 평이 넘어 보이는 방안을 비추고 있었다.
"신부님을 믿을 수가 있을까요?"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신 고영무가 물었다 진한 커피가 혀에 닿자 입안이 구수해졌다.
"당신은 이미 나를 믿고 있어요. 그리고 다른 방법도 없고."
마르틴이 부드럽게 말하며 웃었다.
"나는 그 돈으로 성당을 새로 신축할 작정이오. 마리아님을 깨끗하고 웅장한 성당에 모실 거요."
성호를 그으며 마르틴이 말했다.
"아버지, 내일 아침에 출발하셔도 되지 않아요? 이렇게 비가 내리는데."
눈살을 찌푸린 김영지가 호세 김을 바라보았다. 사무실의 유리창에 빗방울이 후두두 부딪히고는 이내 물줄기가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비온다고 비행기가 안 뜨더냐? 일 년에 여섯 달씩 비가 오는 나라인데. 쓸데없는 소리 말아."
호세 김이 가방의 지퍼를 잠그면서 말했다. 사무실 벽에 걸린 시계가 오전 열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네 어머니한테는 카르타헤나로 부속 가지러 간다고 말해 놓았으니까 엄마 걱정시키면 안 된다. 알겠니?"
"알고 있어요, 아버지."
호세 김이 우두커니 서 있는 김영지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영지야."
"그놈은 비행기를 타지 못하니까 분명 카르타헤나로 갔을 것이다. 그놈이 얼마 전에 물건도 그쪽으로 실었겠다, 나가려고 할 곳은 그곳밖에 없어."
"그곳에서는 밀항선이 많이 뜬다고 들었다. 민 선장도 있어. 걱정하지 말아라."
"아버지, 그 사람 찾으면 경찰에 넘기세요. 아버지가 직접 나서지 마시구요."
호세 김이 턱을 들고는 입을 벌리면서 웃는 시늉을 했다.
"그러지. 그야 당연한 일 아니냐?"
"혼자 나서지 마시구요."
"왜? 내가 그놈을 못 당할까 봐서?"
"권총까지 가지고 있잖아요."
"흥."
호세 김은 제법 묵직한 가방을 어깨에 메었다. 엿새 동안 교민들 십여 명과 함께 보고타 시내를 이 잡듯이 뒤져 왔던 아버지였다. 박물관에서 고영무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고 테켄다마 호텔에서 여자와 함께 숙박하고 있다는 정보도 들어왔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달려 나갔는데 조금도 지친 것 같지가 않았다.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서 아들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던 어머니는 누운 채 아직도 입을 열지 않는다. 그리고 아버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예민해져 갔다. 아버지는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던 아버지는 고영무가 보고타를 떠났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항구에 가서 밀항선을 탄다. 그렇게 생각하자 만류할 사이도 없이 짐을 꾸리고 떠나는 것이다.
호세 김이 다가와 김영지의 앞에 셨다. 그녀는 그동안 아버지의 얼굴이 핼쑥하게 야위게 된 것을 보았다. 텁석부리 수염은 윤기를 잃어 처져있었고 광대뼈가 두드러져 보였다. 다만 눈만이 붉게 충혈되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오빠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내놓은 자식이라고 했으면서도 마음속에는 끈질기고 뜨거운 부정이 숨겨져 있던 것이 지금 드러나고 있다. 그는 겉으로라도 매정했던 자신의 행동을 자책하고 죽은 아들의 원한만이라도 풀어 줄 작정으로 미친 듯이 고영무를 찾는 것이다.
"영지야."
호세 김이 한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난 네 오빠를 생각하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그놈을 무시하고 내던져 놓았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어."
"아버지, 그게 아녜요."
"그래도 그놈은 내 희망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말이다. 내 대를 이을 아들이었는데 ‥‥‥‥"
"오빠도 알고 있었을 거예요, 아버지."
"지금 네 오빠가 살해당했는데 내가 전처럼 내던져 놓을 수는 없다. 네 오빠의 영혼이 무어라고 하겠냐?"
"아버지, 알아요. 그러나 제발‥‥‥‥"
마침내 김영지는 아버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었다.
"이제 우리에게는 아버지밖에 없어요. 제발 조심하셔야 돼요, 아버지."
"오냐, 걱정하지 말아라."
핏발선 눈에 가득 눈물을 담은 호세 김이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쓸었다.
"아니, 당신 왜 그래요?"
방에서 나오던 김영순 여사가 눈을 치켜뜨고 다가왔다. 고진호씨의 얼굴이 하얗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보, 당신 어디 아파요?"
그녀가 다가가 이마에 손을 대려 하자 고진흐씨는 머리를 돌렸다. 그는 들고 있던 신문을 천천히 접더니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무슨 일이 있어요?"
이제는 김영순 여사의 얼굴이 독을 먹인 것처럼 굳어졌다. 이제까지 30년 가깝게 살아오면서 그의 이런 표정은 처음 보는 것이다.
"당신 놀라면 안 돼."
김여사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고진호씨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 말을 믿어야 돼. 알았어?"
그의 목소리는 날카로웠으나 예전 같은 힘이 들어 있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김여사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고진흐씨는 한 손을 탁자 위의 신문 위에 놓고는 상체를 비스듬히 숙였다.
"나는 믿을 수가 없어, 도저히."
"여보‥‥‥‥"
입만 달짝이며 그녀가 불렀다. 탁자 위에 놓인 신문에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실려 있다는 것은 김여사도 알았다. 고진호씨가 짚고 있지 않더라도 그것을 펼쳐 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놀라지 말어, 별일은 아니니까."
"별일이 아니겠지요. 어서 말해 봐요."
이제는 얼굴이 달아오르고 호흡이 가빠진 김여사가 대답했다.
"영무가 외국에서 행방을 감추었어."
뚫어질 듯 김여사를 쏘아보며 고진호씨가 말을 이었다.
"살인을 했다는군. 내 아들은 돈 때문에 그럴 놈이 아닌데,"
김여사의 얼굴이 하얗게 되었으므로 고진호씨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혀를 찼다.
"영무는 몸을 피했다고 하는군. 경찰관을 때리고 말이야. 나는 내 아들이 죄가 없으니까 몸을 피했다고 믿어,"
"그놈은 보통 놈이 아니야. 두고 봐, 애비 앞에 떳떳하게 나타날 거야. 아버지, 저는 죄가 없어서 모든 것이 해명되었습니다 하고."
김여사는 고진호씨의 손바닥 밑에 놓인 신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당신은 걱정말고 기다려, 내 말을 믿고. 알겠지?"
"그 신문 좀 봅시다."
너무도 태연한 말소리가 김여사의 입에서 홀러나왔으므로 고진호씨가 입을 벌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신문 좀 줘봐요."
"신문이란 게 특종을 찾다 보니까 다소 과장이 있는 법이라‥‥‥‥"
김여사는 고진호씨의 손 밑에서 신문을 떼내었다. 그녀가 신문을 읽는 동안 고진호씨는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숨을 쉬는 것 같지도 않았으나 가끔씩 입술 끝이 조그맣게 경련을 일으키듯 떨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어서 일하는 아줌마도 오지 않았다. 집안에는 한동안 억눌린 듯한 정적이 감돌았다.
"하아‥‥‥‥"
이윽고 길게 숨을 내쉰 김여사가 신문을 내려놓았다. 신문이 그녀의 무릎에 걸리더니 바닥에 떨어졌다.
"영무는 아니야. 나는 내 아들을 믿어."
돌처럼 앉아 있던 고진호씨가 입술만을 움직여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깨를 늘어뜨린 김여사가 입을 벌렸다.
"아이고, 내 아들, "
한숨처럼 말을 뱉은 김여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는 눈물이 쏟아지듯 흘러내렸다.
"내 아들이 살인을 하다니, 아이고‥‥‥‥"
그녀의 말소리는 가냘펐으므로 앞에 앉은 고진호씨도 겨우 들었다.
"아이고, 내 아들이 이렇게‥‥‥ 이걸 어쩌나‥‥‥ 외국에서 도망치다니‥‥‥ 사람을‥‥‥ 아이고‥‥‥‥"
그녀는 와락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어허, 내 아들은 아니라니까!"
고진호씨는 턱을 들며 소리치듯 말했으나 말소리에는 기운이 떨어져 있었다. 김여사가 소파에 몸을 엎드려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고진호씨는 머리를 들었다. 전화벨 소리는 좀처럼 그치지를 않는다. 고진호씨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거기 고진호씨 댁 맞지요?"
튀는 듯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그렇습니다만."
"아아, 여기는 국제신문 김기잡니다. 잠깐 전화로라도 인터뷰를 하고 싶은데요. 실례지만 고영무씨하고‥‥‥‥"
고진호씨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제 김영순 여사는 몸부림을 치면서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딴 도리는 없다. 자식이 사람을 죽인 것이다. 그리고 돈을 강탈해 달아난 것이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고 죄를 지은 부끄러움으로 소리를 지를 수도 없다. 오직 끝없는 자책과 자탄이 울음을 만드는 것이다.
신문을 내려놓은 최대광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얇은 입술은 꾹 다물려 있고 부리부리한 두 눈은 치켜뜨고 있었다.
"과연 우리 형님이다. 일을 하려면 이렇게 화끈하게 해야 돼."
"이런 망할 자식이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거야, 뭐야?"
신용만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임마, 지금 목숨을 걸고 피해 다니고 있는데, 더구나 외국에서, 뭣이 어쩌구 어째? 화끈해?"
"이 자식이 왜 이래?"
최대광이 그를 쏘아보았다.
"나는 콜롬비아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금옥이 찾으면 곧장 들어가서 형님을 찾을 거다."
이제는 신용만이 잠자코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형님을 구해내는거여. 너는 가기 싫으면 관둬."
신용만의 얼굴이 다시 달아오르는데 방문이 열리더니 홍성희가 나왔다.
"무슨 일이에요, 아침부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본 그들은 똑같이 머리를 돌렸다. 소매 없는 셔츠에 짧은 반바지 차림이었는데 바지는 말이 바지였지 팬티나 다름없이 짧았다.
"오늘 식사 당번은 누구죠? 신용만씨에요?"
"아니, 나여 ."
최대광이 머리를 들었다. 홍성희는 손님이었으므로 식사 준비는 둘이서 번갈아 하는 것이다.
한번은 홍성희가 저녁 준비를 하겠다고 나서서 맡겨 보았더니 저녁상 차리는 데에만 두 시간 반이 걸렸을 뿐만 아니라 온 집안을 고추 태우는 냄새와 고기 굽는 냄새로 진동하게 만들었고 막상 차려놓은 식탁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밥도 모자랐으므로 다시 해야 했던 것이다. 홍성희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스스로도 식사 준비를 하겠다고 하지 않았다.
"어머나, 집안이 깨끗해졌네."
응접실을 둘러보던 홍성희가 눈을 크게 했다.
"어젯밤에 청소했어요? 저쪽에 놓였던 박스들은 버렸어요?"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들떠 있는 그녀의 장단을 맞출 기분이 아니었다. 아침 신문을 먼저 보는 것은 언제나 먼저 일어나는 신용만이다. 그는 고영무의 기사를 읽고는 큰소리도 지르지 않았다. 자고 있던 최대광을 깨워 놓고는 신문을 눈앞에 들이밀었을 뿐이다. 그들이 의지하던 고영무는 그들보다 더한 역경에 빠져 있는 것이다. 신문이 이 정도로 대서특필할 정도의 사건이면 현지에서도 대단한 사건이었음에 틀림없었다.
"신용만씨, 어제 녹음했던 것 다시 틀어봐요. 고칠 것이 있어요."
홍성희가 두 다리를 쭈욱 뻗으며 말했다. 발가락 끝이 최대광의 복사뼈에 닿았다. 최대광이 자리를 옮겨 앉는 시늉을 하면서 다리를 떼었다. 신용만이 탁자 밑에 두었던 녹음기를 올려놓았다. 그가 스위치를 누르자 홍성희의 가냘픈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저는, 저는‥‥‥ 유장수씨한테서 아파트와 승용차를 받았어요. 아파트는 제 이름으로 전세 계약이 되어 있지만 등기는 유장수씨 이름으로 되어 있어요, 흑흑."
녹음기에서 홍성희는 울었으나 그들을 돌아보며 그녀는 싱긋 옷었다. 하얀 덧니가 드러나는 웃음이었다. 녹음기의 홍성희가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제발, 저만 손대지 않으신다면 무슨 말이든지 할게요, 제발. 저는 유장수씨와 함께 살아요. 일주일에 나흘은 저희 아파트에서 묵고 가세요. 그이는 저를 아껴 주세요. 저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주세요. 제발, 저를 건드리시지만 마세요. 그이가 다 해주실 테니까요, 네? 저는, 잘,
아아, 말할 게요. 그이와 함께 마약을 먹은 적이 있어요. 세 번쯤, 아니 다섯 번쯤. 유장수씨 친구인 강사장이 가져오셨어요. 홍콩에서 가져오셨다고 했어요."
홍성희는 스위치를 눌렀다. 최대광과 신용만의 시선을 받으면서 그녀는 익숙한 솜씨로 몇 구절을 지웠다. 그리고는 헛기침을 하고는 스위치를 눌렀다.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애처로운 모습으로 변했다. 이맛살이 찌푸려졌고 눈썹은 아래로 처져있어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녀가 울먹이며 말했다.
"제발 제 몸에 손대지만 마세요. 말할게요. 그이와 함께 마약을 먹은 적이 있어요, 열 번쯤. 네, 집에 있어요. 그이의 친구인 강사장이 홍콩에서 가져와요, 봉투로 몇 개씩. 그걸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겠어요."
홍성희가 스위치를 누르고는 머리를 들었다. 어느덧 두 눈이 반짝이며 눈이 반달처럼 기울어져 있었다.
"됐어요. 이 정도면 실감이 나죠?"
신용만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으나 최대광은 입맛을 다셨다.
"아아, 배고파. 이것 봐요, 주방장. 뭐 해요?"
홍성희의 발가락이 다시 최대광의 종아리를 건드렸다. 이맛살을 찌푸린 최대광이 일어서자 홍성희가 신용만을 바라보았다.
"저 아저씨, 오늘 왜 그래요? 어머나, 아저씨도 얼굴이 그러네. 기분이 안 좋아요? 안 좋은 일 있어요?"
"알 것 없어."
신용만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신문을 접었다. 무의식중에 신문은 여러 겹으로 접혀졌고 나중에는 노트만 하게 되었다.
"어쨌든 고마워, 홍성희씨."
신문을 응접실 저쪽으로 집어 던지며 신용만이 말했다.
"홍성희씨가 이렇게 도와줄 줄은 몰랐어."
"오늘 인질 바꾸면 이 집을 떠날 참이죠?"
주방에 서 있는 최대광을 힐끗거리면서 그녀가 물었다.
"어디로 가세요?"
"그건 말해 줄 수 없어."
"당신, 대광이 좋아하지?"
홍성희가 머리를 끄덕였다.
"잊어, 내일이면 잊게 될 테지만 "
그녀의 시선이 다시 최대광 쪽으로 갔다.
복도를 걸어오면서 이자영은 신문을 펼쳐 들고 있거나 손에 말아 쥔다. 회사의 직원들을 다섯 명이나 보았다. 모두들 고영무 사건으로 흥분해 있는 분위기였다. 회사는 대외적으로 신용에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또각거리며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앞에 서 있던 남자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신입사원을 어떻게 그런 곳에 보냈지. 에이, 미꾸라지 한 마리가 방죽 물 다 흙탕으로 만든다더니."
그러자 옆에 선 사내가 맞장구를 쳤다.
"암거래에다 살인이 뭐야, 살인이, 더구나 경찰을 때리고 도주하다니. 회사의 체면은 둘째치고 나라 체면이 말이 아니야."
엘리베이터가 열렸으므로 사내들의 뒤를 따라 이자영도 들어섰다. 그들은 전자의 직원 같았으나 이자영은 모르는 얼굴이다. 나이로 보면 대리급으로 보였다.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돼. 난 아침에 회사에 오면서 배지를 떼고 싶었어."
엘리베이터 안에는 서너 사람이 타고 있었으나 그들은 개의하지 않았다. 듣고 있던 사람들 중에 동조하는 듯 머리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다. 이자영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비서실로 들어섰다. 먼저 출근한 직원들 서너 명이 책상 위에 펼쳐진 신문 주위에 모여 있었다.
"이자영씨, 신문 보았어?"
김형규가 다가와 물었다.
"야단났어, 회사에 비상이 걸리겠어. 엊그제 회의에서 극비에 부치기로 했는데."
그의 입에서 창자가 씩는 냄새가 났다.
"큰일났네요."
이자영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분위기가 좋지 않겠어요."
그러자 이자영의 책상 위에 놓인 칠 전화기에 빨간색 불이 비쳤다.
"이크, 부회장 호출이군."
이자영의 전화를 바라본 김형규가 어깨를 치켜올렸다.
"커피 타임이에요. 출근하시자마자 드시잖아요?"
이자영이 일어나 커피잔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커피와 설탕을 타 넣자 바라보고 싫던 김형규가 말했다.
"부회장 분위기 좀 봐줘."
"알았어요."
커피잔을 들고 부회장실로 들어서자 박주경이 머리를 들었다.
"신문 잘 보았어."
"네, 부회장님."
"아침부터 집으로 전화가 오고 야단이었어."
그는 커피잔을 들고 맛있다는 듯이 한 모금을 삼켰다
"아침에 그룹 사장단 회의를 소집하도록 해. 이건 회장님의 지시야."
이자영이 몸을 굳혔다.
"회장님도 참석하십니까?"
"아니, 아니야. 회장님의 지시였지만 내가 주관하는 거야."
"잘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방을 나가려던 이자영이 몸을 돌렸다.
"참고가 될런지 모르겠습니다만, 문제가 된 고영무에 대해서 전자의 과장, 부장, 사장의 파견 요원에 대한 인사 관계 서류를 보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박주경이 한동안 이자영을 바라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전자의 비서실에 연락을 하면 바로 보실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씌어 있지?"
박주경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고영무는 보고타 지사에 적격이라고 적혀 있었숩니다. 사장께서는 회사의 이름을 선전하기 위해서라도 한 사람을 남기는 것이 낫다고 하였습니다."
"언제 보았지?"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전자의 비서실에 들어가 들쳐 보았습니다."
박주경이 빙그레 웃었다. 이제 전자의 김학래 사장은 옷을 벗어야 할 것이다. 고영무가 사건을 일으킨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변명할 길이 없다. 박주경이 머리를 끄덕이자 이자영은 몸을 돌렸다. 비서실로 들어서자 그녀와 엇갈려서 비서실장인 박성호가 부회장실로 다가가고 있었다.
"어때?"
김형규가 다가왔다.
"오전에 그룹 사장단 회의가 있어요. 회장님 지시니까 과장님이 서둘러 주세요."
"무엇이?"
김형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부회장님 컨디션이 말이 아니에요. 저도 몸이 떨려서 혼났어요."
김형규가 허둥지둥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이자영은 몸을 돌렸다.
녹음기의 스위치를 끈 유장수는 장규식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입술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내, 이놈의 새끼들을 그냥!"
눈을 치켜뜬 유장수가 갑자기 녹음기를 집어 들더니 벽을 향해 내던졌다. 녹음기가 산산조각이 났다.
"좋다, 테이프를 방송국이나 신문사에다 보낸다구? 보내라고 해. 상관없어,"
유장수가 악을 쓰듯 말했다.
"이쪽에서 입막음을 하면 돼. 미리 손을 쓰잔 말이다. 네 방송국에 일간지 다섯 개면 된다."
"우선 놈들을 잡아."
일간지만 해도 열 개가 넘는 데다가 제법 알려진 주간지 둥을 합하면 스무 개가 넘는다. 그러고 보면 잡지사도 있다. 방송국도 기독교, 불교, 또는 정당의 방송도 있는 것이다. 장규식은 이를 악물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놈들이 홍성희에게서 그런 자백을 받아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신용만 그놈의 말대로 그 테이프를 방송국이나 신문사에 보내어 발표가 된다면 홍성희는 말할 것도 없고 유장수도 끝장이 난다. 마약 사용과 소지 혐의로 몇 년 동안 형을 살아야 할 것이다. 유장수는 강일준과 함께 마약을 수입 판매하는 데 재미를 붙이고 있는 중이다. 한번 들여오면 열 배 이상의 이윤이 남는 장사인 것이다. 그것이 이번 일로 단숨에 무너질 수가 있었다.
"알았어? 놈들을 잡으란 말이다. 여러 말 할 것 없다. 가서 끌고 와. 내 손으로 포를 떠서 죽이겠다."
"사장님."
"야, 이 자식아, 어서 잡아 오라는데두?"
유장수가 눈을 흡 뜨며 다시 무엇인가를 집어던지려는 듯 탁자 위를 두리번거렸다. 극도로 흥분된 모습이었고 장규식도 이제까지 이런 모습의 유장수를 본 적이 없었다.
"사장님, 고정하십시오. 우선 아가씨를 모셔 오고 나서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장규식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갑자기 유장수가 입을 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런 바보 같은 놈."
"놈들은 그 테이프를 가지고 두고두고 나를 애 먹일 거야. 아예 지금 터뜨리는 것이 낫단 말이야!"
아직 그의 성질은 가라앉지 않았다.
"사장님,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놈들과 테이프를 모조리 찾겠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사장님."
더 이상 말꼬리를 잡히지 않으려는 듯 장규식이 서둘러 일어섰다.
"아니, 이 자식이 어떻게 된거야?"
몇 번째인지도 모르게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최대광이 투덜대었다
"여섯 시에 연락해 준다는 놈이 십 분이 넘었는데도 소식이 없어."
"여섯 시에서 일곱 시 사이라고 했어요. 대광씨는 즘 진득하게 앉아서 기다릴 수 없어요?"
홍성희가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자꾸만 앉았다 섰다 하니까 내가 불안해지잖아요?"
입맛을 다신 최대광이 소파에 앉았다 집안은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고 냉장고나 TV 등은 아직 새것이므로 그대로 집안에 남겨 두었다. 오늘 저녁에 금옥이를 돌려받는 대로 이 집을 나가게 된다. 신용만은 시내에 나가 있었는데 유장수와의 협상 때문이었다. 그의 연락이 오면 최대광이 홍성희를 데리고 가서 최금옥과 바뀌오는 것이다.
"대광씨 동생, 이뻐요?"
홍성희의 말에 최대광이 머리를 들었다. 금옥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동그란 얼굴에 눈은 조그맣지만 언제나 반짝인다. 콧날은 홍성희처럼 우뚝 솟지도 날카롭지도 않다. 그렇지만 고향의 동산처럼 부드럽게 솟아 있었고 입술은 약간 두꺼운 편이다. 금옥이는 집안의 일꾼이었다. 학교를 마치면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와 함께 언제나 밭일을 했다. 어쩌다 건들거리며 고향마을로 내려가면 제일 먼저 뛰어나오는 것이 금옥이였다.
"이뻐."
최대광이 머리를 끄덕였다.
"나보다 이뻐요?"
다시 최대광이 머리를 끄덕이자 홍성희가 환하게 웃었다.
"대광씨, 나, 가지고 싶지 않아요?"
최대광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녀의 귓불이 조금 붉어진 것 같았다.
"오늘 헤어지면 우린 만나기 힘들어요. 알고 계시죠?"
"나, 대광씨 좋아해요."
"내 뭣이?"
"대광씨의 힘, 성격, 그런 것,"
"날 가져요."
최대광은 머리를 저었다.
"싫어."
"왜요?"
홍성희는 조금도 부끄러운 것 같지가 않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글쎄, 나도 모르겠어."
최대광은 침을 끌어모아 삼켰다.
"그냥 아끼고 싶고, 그래."
"바보같이, 이제 날 가까이서 볼 수도 없을 텐데."
"글쎄 말이야."
홍성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원피스 차림이었는데 앞쪽에 단추가 달린 스타일이다. 그녀는 최대광을 바라보면서 원피스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나갔다. 이내 그녀의 브래지어가 드러났고 아랫배가 보였다. 원피스 속에 속치마를 걸치지 않은 것이다. 홍성희는 옷을 벗어 소파 위에 걸쳐 놓았다.
"스릴이 있지 않아요? 그 사람이 알면 우리 둘 모두를 죽일 거예요."
브래지어의 고리를 풀자 그녀의 봉곳한 유방이 드러났다. 젖꼭지 부분은 검붉은색을 띠고 있었는데 연필 끝에 달린 고무 같았다.
"그때처럼 날 거칠게 다뤄 주세요."
팬티를 끌어 내리면서 그녀가 달아오른 얼굴로 최대광을 바라보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최대광은 벌떡 일어섰다. 셔츠를 벗고 바지를 끌어 내리자 금방 팬티 차림이 되었다. 갑자기 홍성희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의 팬티를 끌어 내린 그녀가 입술로 그의 아랫부분을 애무했다. 참을 수 없어진 최대광은 그녀를 번쩍 안아서 소파 위에 누였다. 그가 다가오자 홍성희는 다리를 벌렸다. 뜨거운 살끼리 부딪혔고 홍성희는 입술을 깨물며 신음소리를 꾹 눌러 참았다. 온몸에 희열이 전류처럼 짜릿하게 통했으므로 그녀는 굳어진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래쪽의 고통이 차츰 뻐근한 충만감과 기쁨으로 바뀌고 있었다. 자신을 휘감은 그의 굵은 두 팔과 거친 동작의 강도가 세어질수록 기쁨은 커져 갔다 최대광은 거칠게 숨을 쉬면서 그녀의 몸을 굴렀다. 그의 힘센 몸에 번쩍 들렀다가 체위를 바꿀 때마다 이제 홍성희는 까무러칠 듯한 비명을 질러대었다. 그녀는 자신이 괴물에게 강간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괴물은 엄청난 힘으로 자신의 몸을 부숴대고 있었다. 홍성희는 두 팔로 괴물의 목을 있는 힘을 다하여 껴안고는 모든 생각을 잊었다.
"이 빌어먹을 자식, 전화통에 붙어 앉아 있으라 했잖아? 왜 전화를 이제 받는 거야?"
수화기를 들자마자 신용만은 욕부터 했다.
"야, 홍성희 데리고 한강 고수부지로 나와. 천호대교 옆의 고수부지야. 그곳에 가면 흰색 소나타가 있어 그 차에 장규식이가 타고 있을 거다, 금옥이하고 둘이서. 거기서 금옥이를 태우고 곧장 올림픽 대로를 타고 와."
쏘아대듯이 말하던 신용만이 잠시 숨을 멈췄다.
"그래서?"
한 손으로 팬티를 꿰어 입으면서 최대광이 물었다. 소파 위에는 알몸의 홍성희가 누워 움직이지 않는다.
"거기서 곧장 만남의 광장으로 와. 경부고속도로에 있는 거 말야. 열 시까지야."
"알았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최대광이 홍성희를 바라보았다.
"끝났어요?"
눈을 감은 채 홍성희가 물었다.
"응, 어서 옷 입어. 지금 가야 돼."
홍성희가 눈을 떴다.
"어디로?"
"한강 고수부지."
"나, 옷 좀 입혀 줘요."
그녀의 팬티를 찾아 입히고 브래지어와 원피스를 입히는 동안 흥성희는 연체동물 마냥 흐느적거렸다. 최대광은 응접실 구석에 놓인 커다란 가방을 집어 들고는 집안을 둘러보았다. 이제는 이 집과도 작별인 것이다. 본래가 집도 절도 없어서 동가숙 서가식으로 떠돌던 몸이었으나 이 집은 제일 정이 들었다. 하루종일 나가지도 않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날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최대광은 가방을 둘러메고는 소파에 앉아 있는 홍성희의 허리를 번쩍 안아 들었다.
"자, 가자."
금옥이가 오빠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그런 고생을 시키는 자신이 부끄러웠었다. 최대광은 아파트의 문을 잠그고는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들의 자가용인 중고차가 벽 쪽에 세워져 있었다. 홍성희를 옆자리에 태우고 벨트를 매어 주면서 최대광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어?"
"괜찮아요."
최대광은 시동을 걸고는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이제, 어디로 가실 거예요?"
올림픽 대로가 좌측에 보이고 있었다. 강가를 비추는 등불들을 바라보고 있던 홍성희가 머리를 돌리고 물었다.
"형님을 만나러 갈 거야."
앞쪽을 바라본 채 최대광이 대답했다.
"형님이 우리와 똑같이 쫓기고 있어. 가서 도와야 돼."
"이렇게 쫓겨 다니면서 살 작정이에요?"
"이젠 그렇지 않을 거야, 앞으로는."
"왜요?"
"한국을 떠날 테니까."
"이제 해결사 노릇도, 강도짓도, 돈 받고 여자 누르는 짓도 그만둘 거야. 떳떳하게 살 거야."
"어떻게요?"
"나도 몰라."
"형님하고 상의해 봐야지."
"친형님이에요?"
"아니, 그냥 형님 삼았어, 나하고 용만이하고."
"주먹이 세지. 나하고 용만이가 한방에 넘어갔지. 대단해, 아는 것도 많고."
"대광씨보다 커요?"
최대광이 힐끗 홍성희를 바라보았다.
"응, 커."
"몸무게는 얼마나 나가는데?"
"글쎄, 한 2백 킬로."
최대광은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속력을 내었다. 입을 벌린 채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홍성희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대광씨, 나 좋아요?"
"좋았어, 아니, 좋아."
"너처럼 예쁜 여자는 이 세상에 없어, "
"목욕하고 싶어요, 뜨거운 물로."
홍성희는 의자에 머리를 기대었다.
밤 아흡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으므로 고수부지에는 수십 대의 차량이 세워져 있었다. 흰색 차는 얼핏 보아서 세 대였는데 모두 불을 끄고는 강쪽을 향해 머리를 향하고 있다. 주차장의 입구에서 최대광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젊은이들이 군데군데 서너 명씩 모여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이쪽은 헤드라이트를 켜고 있었으므로 상대편이 보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어떤 차예요?"
홍성희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녀도 이제는 긴장한 듯 목소리가 메말라 있다.
"흰색 차야, 소나타."
"없는데, 아직 오지 않았나 봐요."
그 순간 뒤쪽에서 환한 불빛이 비쳐 왔으므로 최대광은 백미러를 올려다보았다. 차체는 흰색인데 불빛에 눈이 부셔서 안에 탄 사람들은 보이지가 않는다.
"이런 젠장할."
놈들은 어딘가 숨어 있다가 뒤쪽에서 나타난 것이다. 최대광은 가속기를 밟아 차를 주차장 안으로 들이밀었다. 뒤쪽의 차가 바짝 뒤를 따랐다. 주차장 복판에 차를 세운 최대광은 후진기어를 넣었다. 뒤쪽에서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최대광의 차는 후진을 하면서 뒤쪽 차를 스치고는 비스듬히 옆쪽으로 돌았다. 이제 뒤쪽 차와 대각선으로 마주 보는 위치가 되었다. 흰색 승용차에서 사내 한 명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이쪽의 불빛이 사내의 정면을 비추고 있었으므로 얼굴이 보였다.
"장규식씨에요, 총지배인."
홍성희가 그를 보고 말했다.
"대광씨, 나한테 연락하려면 675-4577로 해주세요. 이모 집이에요."
힐끗 그녀를 바라본 최대광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상한 느낌은 없다.
"전화 꼭 해줘요, 기다릴 테니까."
그녀의 말소리가 숨 가쁘게 들려왔다. 잠시 이쪽을 바라보던 장규식이 승용차의 다른 쪽 문을 열었다. 최대광은 금옥이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자 갑자기 목이 메었다. 진 바지에 흰색의 점퍼 차림이었다. 차에서 내린 그녀의 팔을 쥔 장규식이 다시 이쪽을 바라보았다.
"자, 내려."
차의 문을 열면서 최대광이 말했다. 홍성희가 잠자코 반대쪽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여어 최대광이, 오랜만이구나."
장규식이 소리치듯 말했다.
"오빠!"
최금옥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어어, 금옥아, 괜찮다. 인자 집에 간다."
배에 힘을 준 최대광이 턱을 들었다. 최금옥의 괄을 핀 장규식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오빠! 오빠!"
장규식의 팔에서 벗어나려고 최금옥이 발버둥을 치고 있다. 홍성희의 팔을 쥔 최대광이 장규식에게 다가갔다.
"꼭 전화해 줘요."
입술만을 달짝여 홍성희가 말했다. 그들은 양쪽 차의 불빛을 온몸에 받으며 마주 섰다.
"오빠."
최금옥의 얼굴이 눈물에 젖어 있는 것이 보였다.
"자, 그분을 이리 보내라, 나도‥‥‥
그러자 홍성희가 매섭게 최대광의 팔을 뿌리쳤으므로 방심하고 있던 최대광은 그녀를 놓쳤다. 힐끗 최대광의 얼굴을 쏘아본 홍성희가 턱을 들고 장규식에게로 다가갔다.
"오빠."
장규식도 팔을 놓은 모양이었다. 최금옥이 달려와 최대광의 허리를 부둥켜안았다
"너, 어서 차에 들어가."
그녀의 어깨를 잡은 최대광이 말했다. 최금옥이 몸을 빼어 뒤쪽의 차로 달려갔다.
"최대광이, 넌 제 명에 못 살 거야. 그런 잔재주 부린다고 오래 살지 못해"
장규식이 그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이제 홍성희는 그의 옆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너 그러다간 내 손에 죽는다."
"지금 죽여 버려요."
홍성희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배인님, 지금 죽여요, 당장."
"아가씨는 차에 들어가 계시지요."
눈을 깜박이며 최대광을 바라보던 홍성희가 몸을 돌렸다.
"너, 그 테이프 모두 내놔라, 내일까지 시간을 줄 테니까. 내가 책임지고 수습을 하겠다. 테이프만 내놓으면 없는 일로 해주마."
장규식이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일 벌이지 말란 말이다, 넌 길이 없어. 솔직히 테이프 뿌려도 우리가 손을 쓰면 그만이야."
"말 다했수? 그럼 난 가우."
"야, 최대광이!"
몸을 돌리려는 최대광을 장규식이 소리쳐 불렀다.
"년 방법이 없어, 잘 생각해. 내 말 새겨듣고. 내일이다. 알았어?"
최대광은 몸을 돌렸다. 백미러를 바라보았으나 따라오는 차는 없는 것 같았다. 최대광은 가속기를 밟아 차에 속력을 내었다. 차는 이제 고속도로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최금옥이 겨우 정신을 가다듬은 모양이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더니 그를 바라보았다.
"오빠, 잘못한 일 있어?"
이제까지 한 번도 부모의 속을 썩여 본 일이 없는 최금옥이다. 그녀는 부모가 바라는 대로 착하고 얌전한 색시가 되어 있었다.
"잘못한 일 없어."
퉁명스런 최대광의 말에 최금옥이 머리를 돌렸다. 분명히 최대광이 저지른 일로 자신이 일주일 동안이나 붙잡혀서 고생했는데도 원망 한 마디 없다.
"너, 거시기 ‥‥‥‥"
힐끗 그녀를 바라본 최대광이 침을 삼켰다. 최금옥이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 일 없지? 그러니까‥‥‥‥"
"응,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만 했지, 아무 일 없어."
최대광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버지하고 어머니가 찾아다니셨을 텐데, 오빠, 어떻게 해?"
"내가 연락했어, 네가 서울 친구하고 여행 갔다고."
"믿어?"
"내가 세 번이나 전화했다."
"오빠, 정말 잘못한 것 없지?"
최대광이 머리를 끄덕였다.
"잘못한 것이 없으니까 네가 풀려난 것 아녀?"
"그 여자는 많이 본 여잔데, 오빠‥‥‥
"그런 것 알 필요 없어."
최대광이 눈을 부릅떴으므로 그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금옥아, 난 널 집 앞에다만 내려주고 다시 올라올 거여. 그러니까 니가 잘 알아서 해라."
최대광이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어머니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겠어, 당분간은. 내가 씨름단에서 제명된 것 알지?"
최금옥이 머리를 끄덕였다.
"난 외국에 나갈 거다. 가서 성공해서 올 테니까, 네가 부모님 잘 모셔."
"오빠."
"돈 벌겠어. 이 몸뚱이 가지고 무엇을 못허겄냐? 성공해서 돌아올 테니께."
최대광이 한 손을 주머니에 넣더니 봉투 하나를 꺼내어 최금옥에게 넘겨주었다.
"통장 두 개하고 도장이 들었다. 비밀번호도 써놓았어. 6천만 원이니까 네가 알아서 살림에 보태 써."
"오빠."
그녀가 통장과 최대광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쁜 돈 아녀. 하지만 너 혼자만 알고 있어. 부모님한테도 말하지 말고."
"아버지 농협 빚 갚아 드리고 경운기 한 대 사드려, 지붕 고칠 것 없이 벽돌집으로 다시 짓든지."
"오빠."
만남의 광장이 눈앞에 다가왔으므로 최대광은 우측으로 핸들을 꺾어 갓길로 들어선다. 밤이 깊었으므로 차량의 통행은 많지 않았다. 광장 안으로 들어서서 서행하는 그의 차 앞으로 주차시킨 차량 사이에서 사내 한 명이 불쑥 튀어나왔다. 신용만이었다.
3. 살인자와 성자
식당차에 들어선 그들은 창가의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열차는 밀림을 빠져나와 이제는 평원 위를 달려가고 있었다.
"산타마르타에는 오후 네 시에 도착한다니까 다섯 시간 남았군."
시계를 들여다본 마르틴이 말했다.
"산타마르타는 통금이 없으니까 시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지요. 무역항이라 정부 측에서도 어쩔 수가 없지."
고영무는 목이 답답했으므로 칼라의 단추를 하나 풀었다. 그것을 본 마르틴이 빙긋 웃었다.
"며칠 입고 지내다 보면 익숙해질 거요. 난 이 옷이 제일 편합니다."
그들은 모두 검정색의 신부복 차림이었다. 마르틴의 신부복을 고영무가 입었으므로 신장이 큰 고영무에게는 소매가 조금 짧았다. 종업원이 다가오자 마르틴이 주문을 했다.
"난 작년 초에 산타마르타에 갔었지요. 그곳에는 밀항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요. 소문으로는 돈만 받고 도망치는 밀항 대리인도 있고 어떤 놈은 밀항자들을 배에 태우고 바다로 나가서 던져 버리고 온다고도 합디다."
"산체스는 성실한 사람이오. 독실한 신자이기도 하지. 염려할 것 없어요."
고영무는 식당차 안을 둘러보았다. 아직 이른 점심시간이어서 반대편 창가에 모녀로 보이는 두 백인 여자가 앉아 있을 뿐이다. 마르틴의 신부복을 입고 그와 함께 행동하고 있었으므로 기차 정류장에서도 검문을 받지 않았다. 경찰들은 그에게 모자의 차양에 손을 대고 경의를 표시했다.
"고, LA에 가면 그들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마르틴이 물었으므로 고영무는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찾아야지요."
"그 여자도 LA에 갔을까요?"
"아마 그럴 겁니다."
밀리카가 집에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전화를 받은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여행을 떠났다고 말해 주었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 여자 외에도 찾을 사람이 있습니다."
"아아, 그 CIA 요원이라는 남자?"
마르틴이 아는 체를 했다. 그에게 사건의 전말을 설명해주었으므로 그도 대강 윤곽은 안다. 고영무는 맥밀란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는 CIA 요원이 아니다. 밀리카와 같은 조직원으로 안류에서 자신을 속이고 이용했던 것이다. 페드로가 숙소를 감시하고 있다고 그에게 말해 준 것이 결국은 그의 피살로 연결되었다.
"고, 찾으면 어쩔 작정이오?"
자기 앞에 있는 스테이크를 썰면서 마르틴이 물었다.
"돈을 받아야지요. 놈들은 내가 체포당해서 처형당할 줄 알고 약속한 돈을 모두 은행에서 지급정지를 시켰을 겁니다. 한쪽은 아예 주지도 않았고."
"얼마나 되는데?"
"모두 3백만 달러. 하지만 나는 그들을 만나면 마약 대금의 반은 가져올 거요."
마르틴이 눈을 껌뻑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반이라니, 엄청난 돈일 텐데."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은 보상이지요. 반도 내가 양보한 겁니다."
고영무는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었다. 고기는 설익게 구워졌으므로 입안에서 질겅거리기만 했다. 부모님은 이 일을 알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드러누워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 이상일 수도 있다. 고영무는 머리를 들고 마르틴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제 정상적인 직장인이나 사회인이 되기는 틀렸습니다. 내가 이곳 황금의 땅에 발을 딛기 전부터 그렇게 결정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분명히 알게 되었어요, 내 앞길에 대해서."
마르틴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계속하라는 듯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난 적응력이 강합니다. 그리고 결코 좌절해 본 적이 없지요. 우리 아버지는 나를 믿어 주었습니다."
고영무는 힘을 주어 어금니를 물었다.
"그래요, 이렇게 된 이상 난 이제부터 돈과 힘을 가질 겁니다. 정상적인 직장인이 못 되는 대신 다른 방향에서, 다른 것으로."
"도망치지 않아요. 나는 부딪치고 이겨 나갈 겁니다. 그러면 결국 내가 찾는 것이 나오겠지요."
"무얼 찾소?"
고영무가 히죽 웃었다 머리를 돌린 그는 창밖으로 스쳐 지나는 평원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머리를 돌려 마르틴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그러시더군요. 무엇이건 닥쳐온다고,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든 자신의 것으로 하면 결국은 찾는 것이 나온다고. 지금도 나는 찾으러 가는 겁니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믿음을 배신하지는 않을 겁니다."
"사람을 죽이지는 마시오."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만 살인을 하지요."
"정의를 지키시오, 미스터 고."
"정의가 있다면 지키겠습니다."
마르틴이 그의 머리에 성호를 그었다.
민기철씨가 소리치듯 말했다.
"호세, 이곳은 뻔해. 밀항 중개를 하는 놈이 넷 있는데 그놈들한테 연락을 해놓았으니 고가 놈이 온다면 틀림없이 잡히게 되어 있어."
"그 네 명 외에는 없나?"
호세 김이 배의 난간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어선이어서 이곳저곳에 생선 머리와 꼬리가 흩어져 있었고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갈매기 떼들이 사람을 겁내지도 않고 갑판 위에 내려앉아 생선 조각을 쪼았다. 그물을 치우던 민기철이 머리를 들고 다시 소리쳤다.
"아따, 다른 놈은 없어. 두어 놈 있었는데 벌써 총 맞고 죽었어. 그 네 놈이 세관하고 거래를 하는 놈들이란 말이야."
카르타헤나에서 어선 두 척을 가지고 어업을 하고 있는 민기철과는 같은 배를 타고 이민 온 사이였다. 친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였으므로 그가 미리 손을 써둔 것이다. 어구를 정돈한 민기철이 손을 닦으며 다가왔다.
"카르타헤나는 걱정하지 마, 내가 밀항 중개인 놈들한테 그놈 사진도 보내주었으니까. 알려주면 50만 페소를 준다고 했네."
"잘했어. 백만 페소라도 줄 테니까."
그들은 흔들거리는 배에서 선창가로 나왔다. 민기철은 오십 대 중반인데도 벌써 허리가 조금 휘었다. 중노동을 하기 때문이다.
"영지가 회사에 남아 있겠구만."
선창가를 걸으며 민기철이 그에게 물었다. 그의 말소리는 언제나 켰는데 배에서 소리 지르다 생긴 버릇이다.
"자네 너무 상심하지 말게, 남은 가족을 생각해야지 자네마저 흔들리면 영지나 집사람은 어떻 게 해?"
"어쨌거나 놈을 잡아야 돼. 그래야 강남이의 혼이 갈 곳으로 간단 말이야."
호세 김의 자르는 듯한 말에 민기철은 입맛을 다셨다.
"자네 얼굴이 많이 안 됐어. 그래서 그러는 거야."
"그런데 밀항자는 여기에서도 많이 떠나지만 요즘은 산타마르타 쪽으로도 몰려. 교통이 편리해서 그러나 봐."
"산타마르타?"
호세 김이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쪽에도 중개인이 두 놈 있다고 들었어. 이쪽 중개인한테서 말이야."
밀항 중개인들은 세관이나 해안경비대와 결탁하지 않으면 영업을 할 수가 없다. 밀항자들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밀항 중개업은 큰 이권이 걸린 사업이었다. 전직 세관 간부 출신의 어떤 중개인은 화물선을 소유하고 있어서 중개비에다 운임까지 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호세 김이 걸음을 멈추었으므로 민기철도 따라 셨다.
"산타마르타의 중개인들한테는 연락해 놓았나?"
"아니, 아직. 내가 내일쯤 전화도‥‥‥
민기철이 머리를 젓자 호세 김은 입맛을 다셨다.
"내가 지금 산타마르타로 가겠어. 자네가 미리 그들에게 연락을 해주게, 내가 간다고. 내가 놈의 사진하고 인상착의를 설명해주어야 할 테니까."
"이봐, 지금 여섯 시야. 저녁이나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일 끝나고 먹지."
"산타마르타까지는 세 시간이 걸려."
호세 김이 서두르듯 걸음을 떼었다.
"가야 돼. 어긋나면 안 돼."
"내 차를 줄 테니까 운전하고 갈 수 있겠어? 그러면 조금 빠르기는 할 텐데."
"그래 주겠어? 고맙네."
한 명은 육중한 체구에 검은 구레나룻이 험상궂은 남자였고 다른 하나는 흰 머리에 어깨와 허리가 굽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피부가 검게 그을어 원주민인 인디오같이 보였다. 그들은 바쁜 걸음으로 선창가를 빠져나갔다. 하늘은 흐렸고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밀리카는 한동안 탁자 위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방에서 나오던 사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
맥밀란이었다. 그는 말쑥한 쟃빛 양복에 화려한 무늬의 넥타이를 매고 있어서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미스터 고가 도망쳤다고 해요. 경찰들을 때리고 도망쳐서 아직 잡히지 앉았다는데요."
"흥, 그놈이 제법인데."
앞쪽 자리에 앉으면서 그가 말했다.
"경찰하고 계엄군이 그놈을 찾으려고 야단이 났겠군."
"꺼림칙해요, 어쩐지."
"이봐, 여긴 미국이야, LA라고. 쓸데없는 생각 말고 쉬기나 해."
"매린, 오빠한데 이야기해 줘요. 미스터 고가 잡히지 앉았다고."
매린이라고 불린 맥밀란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알았어, 이야기는 하지. 오빠가 중대한 일이라고 말하겠군."
자리에서 일어선 매린이 밀리카를 내려다보았다.
"저녁에 컨테이너가 내려질 거야. 세관 검사를 오늘 중으로 마쳐야 되니까 난 늦을지도 몰라."
"알았어요."
"쓸데없는 생각 말고 푹 쉬어."
매린이 다가와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밀리카가 두 팔을 들어 목을 껴안자 그가 웃었다.
"이봐, 늦어. 페르난도하고 다섯 시에 만나기로 했어."
"일 끝나면 우리 여행이나 가요."
그녀의 앞쪽 양탄자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은 매린이 머리를 끄덕인다. 목을 껴안은 밀리카의 팔이 풀리자 매린이 무릎을 펴고 일어선다.
"그놈은 경찰 아니면 군대, 또는 우리 조직의 손에 죽게 되어 있어. 놈을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가 넥타이를 바로 매며 말했다.
"놈은 동족을 살해했단 말이야. 아마 동족들한테서도 배척당하고 있을걸."
"차라리 죽이는 것이 나았어요, 숙소에서."
"안 돼, 서로 죽고 죽이는 모양으로 만들려고도 해봤는데 어색했어."
"만일 그가 경찰에 잡혀가서 우리 일을 자백했으면 어쩔 셈이었죠? 그땐 배가 이곳에 도착하지도 않았을 때인데."
매린이 그녀를 바라보고 싱긋 웃었다.
"우리가 그토록 허술할 것 같았어? 놈은 살인범에다가 암거래 현장 체포범이야. 더구나 돈이 2천만 페소 정도나 있었고. 놈은 경찰에서 바로 계엄군으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어. 돈은 경찰들이 나누어 갗고, 아마 그 녀석은 그날 저녁쯤 총살당했을걸. 경찰들이 발을 구르고 있을 거야."
밀리카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연민이나 동정 따위의 아무런 감정이 없다 목적을 위해서 쓰고 버리는 기계의 부속 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그는 낙오된 회사원으로서 보고타로 밀려났고 기회를 기다리던 그들의 계획에 예상대로 끌려 들어왔던 것이다.
"매린, 오빠한테 휴가 가겠다고 꼭 이야기하세요, 네?"
눈을 반짝이면서 밀리카가 다시 말했다.
"그래, 페르난도도 우리한테 상을 준다고 했으니까, 허니문을 다녀오겠다고 해야겠어."
그가 방을 나가자 밀리카는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주택가였으므로 거리에는 대여섯 대의 차량이 세워져 있을 뿐 조용했고 누군가가 자전거를 타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건너편 저택의 낮은 판자 울타리 너머에서 주인 여자가 빨래를 널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곧 매린의 모습이 보였다 문을 나온 그가 집 앞에 세워둔 하늘색의 폰티악으로 다가가더니 몸을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밀리카가 창가에서 손을 흔들자 그가 활짝 웃으면서 손을 들었다. 그의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창가에 서 있던 밀리카는 몸을 돌려 소파로 다가갔다. 이 집은 페르난도가 그녀와 매린을 위하여 얻어 준 집이었다. 매린은 미국 국적을 가진 페르난도의 부하로 LA에서 대학을 졸업한 사내였다. 머리가 좋고 치밀해서 이번의 계획도 그가 세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밀리카는 가죽 소파에 깊숙이 등을 묻었다. 보고타의 집과 비교하면 모든 것이 고급품이다. 그리고 평화롭고 아늑했다. 집안을 둘러보던 그녀는 식탁을 새것으로 갈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석 달 후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 가구는 모두 갖추어 놓을 생각이었다.
페르난도는 삼십 대 중반의 사내로 신장은 1미터 70 정도였으나 어깨에서부터 엉덩이까지의 상체가 드럼통처럼 둥글고 켰다. 검은 머리에 눈동자도 검었고 코밑에 기른 곁은 콧수염은 윤기가 흘렀다. 콧날도 반듯했고 콧수염 밑의 얼은 입술은 언제나 굳게 닫혀 있었다. 뒷짐을 지고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그의 주위에는 서너 명의 사내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매린이 다가가자 페르난도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매린, 크링거한레서 연락이 왔는데 열흘 후에 만나자고 한다."
"이번에는 좀 길군요. 이쪽 물량이 많아서 그런 모양입니다."
매린의 말에 페르난도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다가와 매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크링거가 닥치는 대로 돈을 끌어모으는 모양이야. 이 소문이 앨버트 쪽으로 나가면 위험한데."
앨버트는 미국 대통령 직속의 마약 단속부 산하에 있는 LA 지국장이다.
"앞으로 열흘이 문제다, 매린."
페르난도가 매린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11월 초였으나 바닷바람이 차갑게 그들의 피부를 스쳤고 옷자락을 펄럭이게 했다.
"오늘 밤 세관을 빠져나오는 것은 됐어. 한국산 TV라 신경도 쓰지 않아. 에메랄드에 매달려 있어, 그놈들은."
어차피 에메랄드도 오늘 밤 같이 세관을 빠져나올 것이다. 콜롬비아에서 도착한 화물에 세관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당연했다. 페르난도는 스톤웰의 이름으로 한꺼번에 TV가 들어 있는 두 개의 컨테이너와 세 개의 가구 컨테이너, 세 개의 수직 모피 컨테이너, 그리고 한 개의 에메랄드와 세공품 컨테이너를 들여왔다. 모두 아홉 개의 컨테이너였다. 스들웰은 세관원에게 모두 백만 달러가량의 뇌물을 뿌렸는데, 에메랄드와 세공품을 잘 봐달라는 인사로 준 것이다. 세관원들은 지금 에메랄드 컨테이너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형식적으로 검사를 하고는 통관시켜 줄 것이다. 나머지 컨테이너를 조사할 시간은 없다.
"컨테이너 여덟 개는 배에서 내리면 바로 트럭에 실리게 되어 있다. 에메랄드 컨테이너만 빼고."
페르난도의 콧수염 사이에서 흰 이가 드러났다. 에메랄드는 불량품이 대부분이어서 모두 합해서 10만 달러어치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TV 박스 안에는 5억 달러가 넘는 물량의 마약이 들어 있는 것이다.
"매린, 네가 박스 뜯는 것을 감시해 주어야겠어. 물량도 확인해 보고 말이야."
"물론입니다, 페르난도. 어제도 머스키의 창고에 다녀왔습니다. 철저히 체크 하겠습니다."
페르난도가 그의 어깨에 두른 손에 힘을 주었다.
"카를로스가 기다리고 계시다. 그도 너의 치밀한 계획을 칭찬하셨어."
"영광입니다, 페르난도."
이런 상황에 밀리카와의 휴가 이야기를 꺼낸다면 그야말로 십 년 공부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꼴이 된다. 그들은 바다를 바라보고 셨다. 눈 아래에는 수십 척의 화물선이 떠 있었는데, 그 배들 가운데 그들의 물품을 실은 아드리아호도 끼어 있을 것이었다. 부두에는 스들웰과 십여 명의 부하들이 물품을 인수하려고 나가 있고 TV 박스가 옮겨질 머스키의 창고에도 이미 십여 명의 부하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번에 페르난도가 이끌고 온 부하들은 카를로스의 정예 용병들이다. 카를로스는 자금 압박으로 세력이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그는 이번 작전으로 기세를 만회하려고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페르난도, 아까 밀리카가 보고타에 전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페르난도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나?"
그의 말소리는 낮았으나 쪽똑히 들렸다.
"그 한국인 말입니다. 미스터 고라는 그 친구가 도망쳤다는군요."
힐끗 페르난도의 얼굴을 바라본 매린이 시선을 돌렸다.
"나도 들었다."
머리를 든 매린이 그를 바라보았다.
"난 며칠 전에 들었어. 아직도 잡히지 앉았다더군."
"두더지처럼 어디에 숨어 있든가 아니면 강도를 만나서 시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놈은 이제 경찰이나 어떤 곳에도 가지 못해. 가슴속에 원한을 묻고 죽는 길밖에 없어."
바깥바람이 불어와 그들의 옷자락을 날렸다.
"이곳은 여행하는 신부들이 묵는 곳이오. 그러니 안심해도 좋아."
마르틴이 신부복을 벗으며 말했다.
"당신은 신부복이 썩 어울려. 이런 말 들으면 기분 나쁩니까?"
"아닙니다, 별로."
단추를 풀면서 고영무가 웃었다.
"군복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활동하기가 군복보다 조금 불편하지만."
"군인이 옷을 입으면 군복이고 신부가 옷을 입으면 신부복이지. 당신은 지금 군인 같은 마음이 되어 있는 것 같소."
고영무는 잠자코 방안을 둘러보았다. 침대는 딱딱한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을 뿐 거울도 서랍도 없는 방이었다. 한쪽 구석에 조그만 테이블과 의자 세 개가 놓여 있는 것이 전부였다. 성당 안쪽에 세워진 목조건물이었다. 일자형으로 길게 지어진 건물이어서 이런 방이 열 개도 넘는 듯했다. 들고 온 가방을 奎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마르틴이 고영무를 돌아보았다.
"이곳은 잠만 재워 주는 곳이라 식사는 각자 알아서 해야 돼요. 내가 나가서 먹을 것을 사 오겠소. 그리고 나간 길에 산체스를 만나고 올 테니까 방에 있어요."
"저, 신부님."
고영무가 부르자 문고리를 잡은 마르틴이 머리를 돌렸다.
"나가신 길에 서울로 전화를 해주시겠습니까? 저희 아버지는 영어를 하십니다. 그저 제가 잘 있다고만‥‥‥‥"
마르틴이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신부님,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좋소, 해드리지. 전할 말은 그것뿐이오?"
"그것뿐입니다."
고영무는 서둘러 전화번호를 적어 마르틴에게 건네주었다.
"다른 할 말은 없소?"
쪽지를 받으면서 마르틴이 다시 물었다.
"없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그런 일을 하지 앉았다고 믿고 계실 겁니다. 변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마르틴이 방을 나갔다.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던 고영무는 딱딱한 침대에 걸터앉았다. 온몸이 나른해져 왔다. 하루종일 긴장해 있었기 때문이다. 보고타에서 이제 콜롬비아의 북쪽 끝인 산타마르타까지는 왔다. 그러나 앞으로도 갈 길과 해야 할 일이 첩첩이 놓여 있는 것이다.
마르틴은 성당을 나와 돌로 다듬어진 보도를 걸어 내려왔다. 저녁 때가 되어서인지 사람들이 바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차량의 왕래가 빈번한 사거리에서 잠판 멈춰선 마르틴은 거리 모퉁이에 있는 공중 전화박스를 보았다. 주머니의 동전을 확인하면서 그는 전화박스로 다가갔다. 전화박스에 들어가서 마르틴은 쪽지를 펴들고 수화기를 들었다. 동전을 집어넣고 다이얼을 누르자 한참 만에 신호가 갔다. 이윽고 신호가 떨어졌다.
"여보세요."
남자의 목소리였는데 한국말이다. 마르틴은 수화기를 움켜쥐었다.
"여보세요, 고진호씨 계십니까?"
이쪽이 영어를 쓰자 그쪽은 놀란 듯 잠시 대답이 없다.
"접니다."
이윽고 대답이 왔다. 전화를 받았던 사내였다.
"난 콜롬비아의 마르틴이란 신부입니다. 산타밀라의 교회에 있습니다."
"아아, 예."
마르틴은 그의 목소리가 허공에 떠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놀란 것 같기도 했고 불안한 것처럼 들렸다.
"고영무씨의 부탁을 받고 전화를 합니다. 그는 잘 있다고만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까? 고맙습니다, 신부님."
그의 말소리가 또렷해졌다.
"아드님한테 전할 말씀 있습니까?"
그러자 다시 저쪽에서는 한동안 대답이 없다.
"여긴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주시오."
그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는 내 아들을 믿는다고 말해 주시오."
마르틴은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아드님도 그런 말을 하더군요. 아버지가 자기를 믿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알고 계실 거라고도 하더군요."
"나도 당신 아들이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마침내 마르틴은 시키지도 않은 말을 입 밖에 내었다.
"그는 마약 조직에 이용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뒤집어썼다고 해요."
내친 김이었으나 말하는 순간에는 세례를 줄 때의 기분 같은 것이 그의 가슴에 번져 나갔다.
"그는 지금 자신을 모함에 빠뜨린 사람들을 찾으러 미국으로 간답니다"
"용서하지 말라고 전해 주시오."
마르틴은 그 말은 전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용서하면 안 된다고 하시오."
그의 말소리는 단호했고 이제는 생기에 차 있었다.
"영무한테서 전화가 왔어."
방으로 들어선 고진호씨가 소리치듯 말하자 김영순 여사가 번쩍 눈을 뜬다. 몸을 반바퀴 굴려 한쪽 팔굽으로 방바닥을 짚고 일어나려던 그녀는 어지러운지 다시 누웠다.
"언제요?"
쉰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금방, 내가 직접 통화를 했어."
고진호씨는 아내 옆에 앉았다.
"신부님도 옆에 있더군. 내가 신부님하고도 이야기를 했어."
김영순 여사가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신부님이 그러는데 영무는 죄가 없다는 거야. 모함을 당했대. 그것을 해명하려고 미국으로 떠난다는구만."
"미국으로?"
"그래, 나쁜 놈들이 영무를 이용했어. 영무가 호락호락 잡힐 놈이 아니지."
어머니는 고영무가 아직도 범법자라는 것을 상기했다. 그러나 자식은 살아 있는 것이다.
"몸은 건강합디까? 왜, 나 좀 바꿔주지 않고. 지금도 도망 다니겠지요?"
쉬엄쉬엄 말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고진호씨가 머리를 끄덕였다.
"영무가 당신 걱정을 하더구만. 그저 몸이나 건강하라고, 꼭 건강하라고 말이야. 곧 어머니 뵈러 온다고 했어."
"당신이 제일 걱정이 된다는구만. 허, 그놈이 이젠 좀 여유가 있는 모양이야. 에미 생각을 다 하고."
"그러니 어서 일어나 기운을 차려. 이제 곧 영무의 누명도 풀릴 것이고, 그놈도 돌아올 텐데."
"신부님이 그럽디까?"
"그래, 산타마리아라든가 산타밀라라든가 하는 그 교회의 신부님이라는데 영무가 죄가 없다는 것을 말해 주었어. 신부님의 말씀이야. 하느님의 말씀하고 똑같은 거야. 법관이 말하는 것보다 더 든든하구만."
"어서 기운을 차려."
고진호씨는 생기가 지나쳐 수선스럽기까지 했다.
"영무가 살아 있긴 살아 있는 모양이군요."
지친 듯 눈을 감으며 김영순 여사가 말했다.
"하지만 영무하고 전화했다는 것은 당신이 지어낸 말이지요."
"아니, 이 사람이."
"영무 그놈이 그런 말할 놈이 아니에요. 내가 제일 걱정이 된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 말이에요. 제 할 말만 뚝뚝 던지는 놈인데."
"당신이 내 생각 하고 하시는 말씀이지."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고."
"아이구, 이놈아, 살아라, 살아다오."
한꺼번에 숨을 뱉아내면서 어머니가 천장을 바라보았다.
"제발 살기만 하거라. 어디에 있든 간에 살아만 있어 다오."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사건이 신문에 보도되고 나서부터 꼼짝하지 않고 자리에만 누워 있었다 하루종일 방에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는 것이었다. 고진호씨가 꾸짖듯이 말하면 겨우 음식을 먹는 시늉을 하다가 수저를 내려놓곤 했다. 고진호씨는 이제 아들보다 아내가 더 걱정되었다.
실내복 차림의 유장수가 피로한 듯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있었다. 넓은 응접실에는 침묵이 흘렀다. 한동안 탁자 위를 내려다보고 있던 장규식이 머리를 들었다.
"아파트는 비어 있더군요. 세간살이는 모두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놈들이 살았던 흔적이 있었습니다."
"멍청한 놈들, 진작 가정부를 목표로 삼을 것이지."
유장수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돌렸다.
"저희들은 그들이 다른 아파트를 가지고 있는지를 전혀‥‥‥‥"
"너희들은 언제나 한발씩 늦어. 이틀만 먼저 알았어도 이런 일이 일... 이번에는 놓치지 말아."
머리를 든 유장수가 다짐하듯 말했다.
"로비에 세 놈이 있었어. 아니 그보다 많을지도 몰라. 얼핏 눈에 띈 게 세 놈이었으니까."
신용만이 커튼을 들치고 밖을 내려다보았다.
"빌어먹을, 유장수를 아예 죽여 버리든지 해야지."
"거, 시끄러워 그만 씨부렁거리란 말이다."
침대에 팔베개를 하고 누운 최대광이 버럭 소리쳤다.
"열 놈이 있으면 뭐하고 스무 놈 있으면 어때? 입 닥치고 잠이나 자."
"지금이 몇 신데 잔단 말이야?"
창가에서 몸을 뗀 신용만이 힐끗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저녁 일곱 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형님만 그런 일이 없었다면 진작 배를 탔을 텐데."
침대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으면서 신용만이 말했다. 고영무의 행방은 알 수가 없었다. 엊그제 일간지에는 그가 산속으로 도망쳐 들어갔다는 기사가 났을 뿐이었다.
"망할 자식, 그런 일이 있으니깐 못 간다는 거야? 의리 없는 놈 같으니라구."
옆으로 돌아누우면서 최대광이 말했다.
"이런 때일수록 가서 도와줘야 하는 거란 말이다, 더러운 놈아."
벌써 이 일로 몇 번을 다투었는지 모른다. 앞으로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유장수의 부하들을 달고 다녀야 할지 알 수가 없었으므로 신용만도 불쑥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밀항하는 것도 문제지만 콜롬비아에 가서도 막막한 것이다. 한 달 가깝게 걸리는 뱃길이다. 그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도 없다.
"에이, 답답혀."
침대에서 벌떡 상체를 세운 최대광이 신용만을 바라보았다.
"저놈들이 연제 또 우리 식구를 데리고 갈지도 모른단 말이다. 다음번에는 우리 어머니나 아버지를 데리고 갈지도 몰라. 그러면서 테이프하고 바꾸자고 할 거란 말이다."
"야야, 대한민국이 그렇게 무법천지는 아니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아. 그때는 테이프가 모두 신문사나 방송국에 보내졌을 테니까. 내가 확실하게 말해 주었어."
최대광이 우두커니 신용만을 바라보았다.
"넌 가족도 없어?"
그의 갑작스런 물음에 신용만이 입술을 한쪽으로 비틀었다.
"이 자식이 난데없이 무슨."
"넌 부모도 형제도 없느냔 말이다."
"내가 부모 형제 있으면 왜? 네 식구 대신 그놈들에게 잡히라고?"
"넌 부모 없는 호로자식이냐? 말 좀 해봐 임마."
갑자기 신용만의 발길이 옆쪽으로 휘익 날아들어 최대광의 옆구리를 쳤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최대광이 허리를 비틀며 침대 위를 굴더니 반대쪽으로 굴러떨어졌다.
"이 새끼가 쳤어!"
금방 얼굴이 검게 달아오른 최대광이 한 손으로 침대를 번쩍 들어서 뒤집어 놓았다. 침대가 뒤집히면서 탁자를 깔아 부수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그래 이 자식아, 나는 호로자식이다."
한쪽으로 비켜 싫던 신용만이 정충 뛰어올라 그의 턱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 머리를 틀어 그의 발길을 피한 최대광이 손을 휘둘러 그의 다리를 쳤으나 빗나갔고,그 순간 신용만의 주먹이 그의 배를 연타로 두들겼다.
"이놈의 자식."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문 최대광이 두 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죽여 버릴테여."
"그래 이 새끼야, 잘됐다. 같이 죽자. 난 부모도 형제도 없는 호로자식이니까 서러워할 사람도 없다."
다시 신용만이 온몸을 던지듯이 뛰어들었다. 그의 주먹이 최대광의 가슴을 연달아 치고 무릎이 접어지면서 옆구리를 박았다. 그러다가 그의 허리춤이 최대광의 손에 잡혔고 어느 사이에 뒤집혀서 신용만이 침대에 부딪히며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신용만이 통기듯이 몸을 세웠다.
"이 새끼! 아직 멀었어!"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문 신용만이 뛰듯이 다가왔다.
"됐다, 이 새끼야. 휴전이다."
와락 뛰쳐 드는 그의 주먹을 피하면서 최대광이 소리쳤다.
"그만해, 이 새끼야! 휴전이라니깐."
어깨를 잡힌 신용만이 온몸을 비틀면서 빠져나오려고 하다가 이윽고 사지를 늘어뜨렸다.
"난.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어. 친척이 몇 명 있지만 연락을 끊고 살아왔으니까 네 말대로 호로자식인지도 몰라."
성한 침대의 귀퉁이에 걸터앉은 신용만이 무릎 위에 두 팔굽을 짚고 바닥을 바라보았다.
"난 호텔에 근무했던 것도 아니야.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동사무소에 근무했어. 밤에는 야간대학에 다녔다. 영문과를 졸업했지."
최대광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난 잠잘 방하고 세 끼 먹을 수만 있으면 만족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것이 꿈이었지. 대통령이 되고 장군이 되겠다느니 의사, 검사가 되겠다느니 하는 생각은 못 했어. 아니 안 했어 나는 먹고 잘 수만 있으면 되었어."
신용만이 허리를 펴고는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가 주머니를 더듬거리는 것을 본 최대광이 라이터를 던져 주었다. 바깥에서 차량의 엔진 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그것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4년을 동사무소 서기로 근무했다. 구청장 표창도 받았지. 일과 끝나면 운동하고, 공부하고. 그렇지, 운동은 내 취미였지 기죽지 않으려면 주먹이 있어야 했으니까. 15년 되었지, 운동한 지는."
담배 연기를 내뿜은 신용만이 머리를 돌려 최대광을 바라보았다.
"난 동사무소에 배당된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은행에서 찾아내고는 동사무소를 그만두었지."
신용만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5백만 원쯤 되었는데, 전날부터 불우이웃이라는 사람들이 동사무소에 찾아와서 기다리고 있었어. 늙은 할머니 또는 찌든 아줌마들 난 그 돈을 가지고 튀었어."
"워 돈 들 데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직장생활이 특별히 싫어서도 아니고. 돈을 찾으니까 이 돈을 내가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그래서 가졌어. 그렇게 해서 동사무소 생활을 그만뒀고 이렇게 빚쟁이 신세가 됐지."
"야 임마, 하필이면."
"시끄러, 이 자식아. 잠자코 들어."
입을 열었던 최대광이 입맛을 다시면서 다시 벽에 둥을 기대었다.
"그러고 나니까 눈이 확 뜨이더구만. 돈 벌 데도 많고, 쓸데도 많더라구 "
"쌍놈의 새끼, 나한테는 호텔 직원이었다구 했지? 뭐? 미국에서 몇년 있다가 오면 지배인이 되었을 것이라구?"
"내가 그랬나?"
"호텔에 들어온 여자가 어쩌구 어째? 소리가 나서 방에 들어갔더니 후장을 파고 있었다구?"
"너한테는 그런 사연이 인상적일 것 같아서. 너 같은 돌대가리가 기억하고 있는 걸 보니까 내 추측이 맞았군."
"빌어먹을 놈."
최대광이 손바닥으로 옆구리를 문지르며 침대 위로 두 다리를 주욱 벌렸다.
"아무리 그렇다고 불우이웃 성금을 들고 뛰어? 하고 많은 돈 중에서?"
"흥, 내가 불우이웃이다, 이 자식아. 동정받기 싫어서 들고 튀긴 했지만."
"그건 들치기지, 이 자식아."
"동사무소에서는 내 퇴직금이네. 적금 같은 것으로 해결했어. 아마 몇십만 원 남았을 거야. 언젠가는 그 돈을 받으러 가야 돼."
"이자까지 쳐서 받아라."
"난 돈을 벌 거다, 엄청나게 벌 거야. 유장수를 봐라. 그런 놈이 새끼들 데리고 떵떵거리고 사는 걸 보란 말이다. 그리고 어린 년도 들어 앉혀 놓고."
"네놈이 하고 싶은 모양이구만."
신용만이 머리를 들고 최대광을 향해 웃었다.
"우리 부모는 내가 열 살 때 자살했어, 내 동생도 함께 죽었다. 나는 위장이 좋았던 모양이야. 나만 살았어."
"이제 너는 알았으니까 호로자식이라고 해도 된다. 모르고 하는 그 소리는 정말 듣기 싫더라. 소름이 끼쳐."
"야, 임마, 거기 라이터 좀 이리 줘."
담배를 입에 문 최대광이 라이터를 가리켰다.
"뭘 먹었는데? 쥐약 먹었냐?"
불을 붙여 문 최대광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 수면제."
"그렇지, 수면제가 깨끗하지."
최대광이 머리를 끄덕였다.
"내가 어릴 때 쥐약 먹고 죽은 사람을 보았는데 못 보겠더라. 아주 꿈자리가 사나웠어."
"느그 부모는 배운 사람이었던 모양이야. 점잖게 수면제를 잡수시고. 그 수면제를 먹으면 꿈도 안 꾼다던데, 참말이냐?"
최대광을 바라보고 있던 신용만이 머리를 돌리며 피식 웃었다. 그들은 한동안 딴 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지 앉았다.
방안은 거친 숨소리와 신음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유장수의 온몸은 땀으로 덮여 있어서 살이 부딪칠 때마다 철썩거리는 소리가 났다.
"살살 해줘요."
이맛살을 찌푸린 홍성희가 숨 가쁜 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유장수가 그런 말을 들을수록 기세를 부리며 거칠게 나오는 것을 안다. 그의 얼굴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가슴 위로 떨어져 내렸다.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은 홍성희가 머리를 좌우로 저었다.
"여보, 나, 되려고 해요."
그녀의 입에서 길고 억눌린 듯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유장수가 뜨거운 것을 분출시키는 것이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그의 목을 끌어안은 홍성희가 온몸을 굳히며 폭발하는 듯한 비명 소리를 내었다. 유장수의 온몸이 늘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봐, 오랜만에 하니까 기분이 다르구만 그래. 색다른 맛이 나."
천장을 바라보고 누운 유장수가 문득 입을 열었다. 아직도 그의 숨소리는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숨소리뿐만이 아니다. 그의 섹스도 작년과 다르다 그는 언제나 상대를 만족시켜 준다고 믿지만 그것은 모르는 말씀이다. 이쪽에서 그의 상태를 보고는 소리와 몸짓으로 절정을 맞춰 줄 뿐이다. 작년과 비교해서 홍성희는 절정의 시간을 많이 단축시켜 놓고 있었다.
"넌 나하고 궁합이 맞아, 그것만 알아둬라."
홍성희의 어깨를 안으면서 유장수가 말했다.
"다른 놈은 널 이렇게 못해."
"아이, 또 그 소리."
홍성희가 몸을 틀어 두 다리로 그의 하반신을 감았다.
"꼭 길들인 강아지한테 말하는 것 같아서 기분 나빠요."
"흥."
유장수가 입술 끝으로 웃었다.
"그것 괜찮은 표현이군."
"소름이 끼쳐요. 지난 일주일을 생각하면. 당신 원망도 많이 했어요."
"혹시나 그놈들이 저를 해치지나 않을까 잠도 자지 못했어요."
"그럴 순 없었지. 우리가 그년을 잡고 있었는데."
유장수의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가 머리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네가 그 이야기를 털어놓는 바람에 내 입장이 난처해졌어. 왜 강일준이 이름까지 끄집어낸 거냐?"
"죽일 것 같았어요. 정말 무서웠어요."
커다랗게 눈을 치켜뜬 홍성희가 상체를 반쯤 세우고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 큰놈은 마치 미친놈 같았어요. 말하지 않으면 날 강간하고 죽이겠다고 하는데 어떡해요? 그놈한테 강간당하느니 털어놓는 게 나았어요."
"그리고 그 신 뭐라고 하는 놈은 대충 윤곽을 아는 것 같던데요 뭐. 다그치는데 어떡해요?"
"할 수 없는 일이지. 어차피 놈들은 오늘 밤 끝나게 되어 있으니까."
입맛을 다신 유장수가 손을 철어 그녀의 젖가슴을 쓸었다. 그에게 바짝 몸을 붙인 홍성희가 늘어진 그의 남성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제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속초에서는 그게 뭐예요? 내가 그놈들에게 끌려가면서 당신을 얼마나 원망한 줄 알아요?"
"오늘 밤은 그렇게 안 될 거다. 열 명이 내려가 있는 데다가 강사장이 칼잡이 다섯 명을 내려보냈으니까."
"아예 호텔을 봉쇄하고 일을 벌일 거다. 잘 안 되면 죽이라고 했어."
"그놈들이 테이프를 터뜨리면 어떻게 하죠?"
홍성희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물었다. 그의 남성은 어느덧 단단해져 있었다.
"테이프 있을 만한 데를 알아봤어. 그리고 터뜨려도 상관없어. 우리가 손을 쓰면 돼. 조금 귀찮기는 하겠지만 놈들을 살려 두고 골치를 썩이는 것보다는 낫다."
"내가 위로 올라가요?"
그의 남성을 건드리면서 홍성희가 묻자 유장수가 머리를 끄덕였다.
"빨리 해줘요. 난 기운이 없으니까, 오래하면 안 돼요."
그러나 이번은 꽤 오래 갈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쪽이 절정을 맛볼 수도 있을 것이다. 홍성희는 그의 몸 위로 몸을 올렸다.
로비에 모여선 사내들을 둘러보던 장규식의 시선이 한 사내에게 멈추었다. 검은 얼굴에 콧수염을 기르고 있어서 동남아계처럼 보이는 사내였다. 키는 1미터 70이 조금 넘게 보였으나 양복의 어깨에서 팔로 흐르는 선이 둥글게 보일 정도로 부풀어 있었다.
"이형, 4층의 손님들을 모두 다른 충으로 옮길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30분이면 끝난다고 하니까."
장규식의 말에 그는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밤 열한 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투숙객으로 보이는 사내가 여자의 부축을 받으며 그들의 옆을 지났다. 술에 엉망으로 취해 있어서 제대로 걸음을 걷지도 못한다.
"오늘 밤 절대로 놈들을 놓치면 안 된다. 다시 말하지만 어떻게 하더라도 놈들을 잡아서 끌고 나가야 돼. 알아들었어?"
억눌린 듯한 목소리였으나 주변에 둘러선 사내들이 알아들은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이형, 부탁합시다."
콧수염을 기른 이한기에게 말하고 난 장규식이 몸을 돌렸다. 사내들이 제각기 흩어지고 이한기의 주위에는 여섯 명의 사내들이 남았다. 그들이 방을 습격할 결사대인 셈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한기는 장규식의 부하도 유장수의 부하도 아니다. 그는 이번 일에 신경을 곤두세운 강일준 사장의 부하였다. 이한기가 팔짱을 끼고는 둘러선 여섯 명의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세 명은 자신이 데려온 부하였고 나머지 셋은 장규식의 부하였다
"나 참, 두 놈 가지고. 이건 전쟁을 하는 것 같구만."
그러자 세 명의 부하는 싱글거리며 웃었는데 장규식의 부하들은 반응이 없다. 그들은 이한기가 이쪽을 무시한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이한기는 온갖 싸움을 다 해본 사내였고 그만큼 감각도 빠르다. 금방 정색을 하더니 사내들에게 한 걸음 다가가 섰다.
"방이 좁으니까 일단은 나하고 이쪽 형씨들이 먼저 들어가기로 하지. 그러면 우리는 넷이로군. 내가 덩치 큰 놈을 맡을 테니까 형씨들은 다른 놈을 맡고."
그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희들은 문밖에 서 있다가 우리가 일이 생기면 한 명씩 뛰어들어 와. 내가 말할 때까지 칼은 던지지 말아라."
장규식의 부하들은 만족한 듯 머리를 끄덕였고 그의 부하들도 보스의 명령 인지라 잠자코 있다.
"앰블런스는 도착했나?"
"예, 호텔 옆 골목에 있습니다."
이한기가 묻자 누군가가 대답했다.
그들이 곱게 잡혀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앰블런스에 싣고 가는 것이 어울릴 것이었다. 시계를 들여다보던 이한기가 이맛살을 찌푸리고 로비를 둘러보았다. 프런트 담당 계원 옆에 서 있던 장규식과 그의 부하들이 보였다. 아직 손님들의 이동이 덜 끝난 모양이었다. 이한기는 팔짱을 풀고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렀다. 오른쪽 손에 두툼한 나이프의 손잡이가 잡혔다. 칼을 쓰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도무지 이름도 없는 조무래기 두 놈을 처치한다고 이런 소동을 부리는 유장수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의 부하들 여섯 명 이놈들을 기습했다가 도리어 모조리 머리가 깨지고 코가 달아나는 중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유장수도 이제 한물간 모양이었다. 장규식이 긴장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경쟁도 없이 한국에서 태평성대를 누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쪽은 다르다. 홍콩이나 태국 또는 말레이시아의 조직들을 누르고, 또는 해적들과도 싸우면서 마약 사업을 해왔다. 이한기는 장규식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보스는 5인 위원회의 위원인 유장수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스는 이번 일을 계기로 유장수의 능력을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러나 프런트에 서 있던 장규식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이형, 4층은 모두 비었소. 이제 시작합시다."
머리를 끄덕인 이한기가 몸을 돌렸다.
"이형, 나는 4층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겠소."
장규식의 말을 등뒤로 들으며 이한기는 엘리베이터로 다가갔다. 멈추어 있던 엘리베이터가 곧 열렸다.
"빌어먹을, 점점 비윗장이 틀어지는구만,"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이한기가 어금니를 문 채 이를 갈듯 말했다
"조무래기 두 놈 잡는데 이런 소동이라니 이건 솔직히 우리 얼굴에 똥칠하는 거야."
여섯 명의 사내들은 모두 입을 열지 앉았다. 그러나 이한기는 장규식의 부하들이 눈썹을 곤두세우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악에 받쳐 분발할 것이다.
"이번에 놓치면 아예 발을 씻자구, 모두 말이야."
엘리베이터 안은 살기가 압축되어 가는 듯 긴장감이 감돌았다. 곧 4층의 불이 켜지고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그들은 눈 앞에 펼쳐진 텅 빈 복도로 쏟아져 나왔다. 복도의 끝 쪽에는 비상구가 있었고 그쪽에는 장규식의 부하들이 지켜 서 있을 것이다. 4층의 투숙객들은 이미 다른 층으로 옮겼으므로 다른 것에 신경쓸 일도 없다. 그들은 말없이 408호실 앞으로 다가갔다. 작전은 짜놓았으므로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408호실 앞에 다가서자 이한기는 힐끗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세 명의 사내들이 문 옆쪽으로 비켜났고 나머지 세 명은 그의 등 뒤쪽으로 다가섰다. 머리를 끄덕인 이한기는 문에서 한 걸음 물러졌다. 재빨리 눈치를 챈 부하들이 제각기 허리를 숙이거나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사내 한 명은 이미 20센티쯤 되어 보이는 회칼을 빼어 들고 있었다. 장규식의 부하였는데 얼굴이 사생결단을 할 작정인지 하얗게 굳어 있었다. 이한기는 한 발을 높게 올리고는 문고리를 향해 힘껏 내질렀다. 우지끈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마르틴은 밤 아흡 시가 되어서야 방으로 들어섰다.
"고, 일들은 모두 잘 되었어요. 산체스도 만나보았고."
그는 들고 온 종이봉투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봉투 위로 삐어나온 한 덩어리가 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신부님."
고영무는 봉투 안에 든 방과 통조림들을 탁자 위로 꺼내놓았다. 둘이서 사흘간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분량이었다.
"복도에서 성당의 주임신부를 만났는데 나보고 내일 미사를 집전해달라는 거야. 그래서 사업관계로 안 된다고 했어."
마르틴이 주머니에서도 통조림 깡통을 꺼내어 놓았다.
"나한xp 이런 큰 사업이 또 있겠소? 산타빌라의 성당을 증축하는 사업 말이오. 주임신부가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돌아서 가더군."
그는 유쾌한 듯 보였다.
"고, 당신 아버지께 전화도 했소."
돌아서서 윗도리를 벗으며 마르틴이 말했다.
"당신의 말을 그대로 전했어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본 채 고영무는 움직임을 멈켰다.
"아버지도 당신을 믿는다고 합디다. 집안은 걱정하지 말라고도 했어요."
고영무는 빈 봉투를 접어 한쪽에 놓았다. 다시 힐끗 마르틴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더 이상 아무 말이 없다. 소매를 걷어붙이면서 탁자로 다가오더니 합과 깡통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산체스는 30만 페소로 깎아 줍디다. 다른 사람한테는 40만 페소를 받는다고 하더군 내 부탁이니까 특별히 할인해 준다는 거야."
마르틴이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 나더러 밀항자를 모집해 달라고 하지 않겠소? 1인당 5만 페소씩 수수료를 주겠다는 거야."
"배는 사흘 후에 출항할 거요. 산체스의 배인데 낡았지만 쓸만해요 아마 미국까지 백 번도 더 다녀왔을 테니까."
"아버지가 다른 이야기는 안 했습니까?"
"안 했소."
마르틴이 머리를 저었다.
"난 당신이 전하라는 말만 전했고 그쪽도 그 말만 합디다."
"그 깡통을 이리 주시오. 저녁 준비는 내가 할 테니까 당신은 저쪽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요."
마르틴이 식탁을 치우면서 말했으므로 고영무는 침대로 돌아와 끝 쪽에 걸터앉았다. 이제 사흘 후면 콜롬비아를 떠나게 된다. 그러나 아무런 감회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곳이나 저곳이나 장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직은 그를 반길 나라가 아무 곳도 없는 것이다.
4. 불타는 원한
"미카엘한테서 연락은 받았소. 미카엘하고는 옛날에 같은 배를 탔었지. 지금도 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말이오."
산체스가 주름살투성이의 얼굴에 더욱 깊은 주름을 만들며 웃었다.
"그래, 무슨 일입니까, 내가 도와 드릴 일이라는 게?"
"밀항자를 찾고 있어요, 한국인인데, "
호세 김은 호주머니에서 고영무의 사진을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 사람이오. 카르타헤나의 모든 대리인한테는 이야기가 되었는데 이곳 산타마르타는 아직 연락이 안 되어서요."
산체스는 사진을 들고 한동안 들여다보았다.
"일주일 전에 살인을 한 놈이오. 보고타의 신문에는 크게 났었는데."
"그래, 그렇군. 나도 읽었소. 같은 한국인을 살해하고 도주했다고 기억이 나는데."
머리를 끄덕이며 산체스가 말했다.
"돈도 꽤 많이 가지고 달아난 모양이던데요."
"놈을 잡아 주면 놈이 가지고 있는 돈은 모두 드리겠소. 그리고 따로 백만 페소를 드리지요."
입을 벌린 산체스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햇볕에 탄 검은 피부에 모가 난 얼굴이었다. 갈색의 눈동자가 호세 김을 향하고 있었으나 조금씩 좌우로 흔들리고 있다.
"큰돈이군. 그놈은 경찰에서도 찾고 있을 것인데, 그렇지 않소?"
"그래요, 계엄군도 놈을 찾습니다."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사내 두 명이 시끄럽게 지껄이며 들어섰다.
"너희들 나가, 나가 있어."
산체스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그들이 멍한 얼굴을 하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경찰에 알리지 말고 당신한테 넘겨 달라는 이야기로군. 그렇지요?"
틱을 내밀며 산체스가 물었다.
"그렇소. 그저 몸만 넘겨주면 됩니다."
"왜 그런지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소?"
"놈은 내 아들을 죽였소."
"아아, 그 한국인이 당신의 아들이군."
산체스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이며 허리를 폈다.
"이제 이해가 가는구만."
"도와주시겠소?"
"물론이오. 도와드리고 말고. 당연히 복수를 해야 하는 거요."
"이제까지 그놈이 오지는 않았었지요?"
"물론."
"난 볼리바르 호텔에 묵고 있어요. 카르타헤나는 친구한테 맡기고 당분간 이곳에 머물 작정이니까 그곳으로 연락을 해주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호세 김이 산체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산체스씨, 돈 걱정은 마시오. 놈만 잡으면 얼마든지 드리리다."
산체스의 사무실을 나온 호세 김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밤 열 시 십 분이 되어 있었다. 보고타와는 달리 이쪽의 항구 도시들은 통금이 없다. 그쪽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였고 이쪽은 상업적으로 중요한 지역인 것이다. 산타마르타의 시장은 라파엘 정권 때 임명된 사람이다. 그는 지금의 카스틸로 정권이 무너지고 마약왕 카를로스가 집권하더라도 계속 시장으로 있을 것이다. 보고타를 장악한 사람에게 복종하면 되는 것이니만치 이쪽이 신경 쓸 일도 또 그쪽에서 걱정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가게의 불빛과 현란하게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거리는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호세 김은 차를 달려 호텔로 들어섰다. 산타마르타에서 밀항업을 하는 두 명의 사내들을 모두 만난 것이다. 어깨가 늘어질 듯 피로하였으나 아직도 정신은 밝았다. 호세 김은 방에 들어서자 윗도리를 벗어 던지고는 쓰러지듯 소파에 앉았다. 탁자 위에 전화기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으므로 몸을 누이고는 전화기를 끌어당겼다. 하루 동안에 콜롬비아 전국을 일주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이 얼을 누르고 신호가 가자 곧 저쪽에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김영지의 목소리였다.
"나다, 애비다."
"아아, 아버지."
그녀의 목소리는 한숨을 토해내는 것 같고 놀란 것 같기도 했다.
"지금 어디 계세요?"
"산타마르타야, 지금 볼리바르 호텔에 있다."
"카르타헤나에 전화했었어요, 민 아저씨한테. 거기 가신 줄은 알았어요."
"여긴 밤에도 음식점이나 카페가 문을 여는구나. 통금이 없어서 말이다."
"‥‥‥‥"
"애비 걱정은 말아라, 곧 돌아갈 테니까."
"언제요?"
"곧 간다."
"아버지."
김영지는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 호세 김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제가 오빠 대신으로 더 일할게요. 이젠 엔진도 배울게요."
"아버지, 돌아오세요."
"곧 간다."
호세 김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잠시 턱을 번쩍 치켜들고 천장을 노려보고 있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엇인가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식욕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점심부터 아무것도 먹지 앉았다. 일을 하려면 배를 든든하게 해놓아야 할 것이다.
호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 하나를 꺼낸 마르틴은 그것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산체스, 여기 40만 페소가 있어. 어제 자네는 30만으로 해준다고 했지만, 난 40만을 받아왔네."
봉투를 내려다본 산체스가 주름진 얼굴을 활짝 펴면서 싱글벙글 웃었다.
"신부님은 사업가가 안 되신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돈을 모으실 수 없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어서 거기에서 10만 페소를 떼어 나에게 주게."
웃음 띤 얼굴로 산체스는 봉투 속의 돈을 세어서 마르틴 앞으로 밀어놓았다.
"신부님은 할인 비용만큼 돈을 버셨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그렇게 어중간한 입장이면 안 됩니다."
마르틴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저한테는 더 깎고, 저쪽에다가는 더 올려야지요. 더구나 신부님은 저를 마음대로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좋은 조건에서 겨우 10만을 챙기시다니요."
"그건 자네 같은 사기꾼이 하는 짓이고."
"저는 일주일에 한 번씩 꼭 고해성사를 합니다."
"자넨 일주일간의 죄만으로도 지옥에 갈 거야. 고해하고 바로 죽는다면 모르지만."
"그땐 부하들을 시켜서 고해받을 신부를 끌고 올 테니까요. 그런데 이번에 갈 사람은 데리고 오시지 않았습니까?"
"응, 상관있나? 모레 배를 탈 때 나오면 되겠지."
머리를 끄덕인 산체스가 봉투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여권은 가지고 있겠지요? 미국에 도착하면 돈이 좀 필요할 겁니다. 2천 달러 정도만 있으면 아예 이민국이 발행한 증서를 살 수가 있는데요."
"여권은 있어, 돈도 있고. 그런데 한국 여권이라 이민국 증서가 될까?"
"한국인입니까?"
산체스가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한국인이야. 그런데 그것이 자네한테 무슨 상관이야? 머릿수만 많으면 되는 거지, "
"그렇지요."
탁자 위에 놓인 담배를 집어 들고 입에 물었다가 산체스는 도로 내려놓았다.
"배는 모레 몇 시에 출항인가?"
"네? 배는 모레 밤 열한 시에 출항합니다. 그러니까 열 시까지는 부두에 나와야 됩니다. 모이는 곳은 제3 부두의 야적장인데 그곳에서 모터보트를 타고 근해에 떠 있는 화물선으로 가는 겁니다."
"열 시까지 제3 부두의 야적장이라고 했나?"
"네, 거기에 저희 안내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인적 사항을 적어야겠군요."
자리에서 일어난 산체스가 종이와 펜을 들고 돌아왔다.
"이름이 뭡니까, 신부님?"
"마르틴이야."
산체스가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마르틴이 그를 향해 웃었다.
"세관의 입국심사도 아닌데 이름이 무슨 필요가 있나? 그 사람을 마르틴이라고 부르게."
"한국 사람은 맞지요?"
"그렇다네. 그러면 되겠지?"
"한국 사람 마르틴이라‥‥‥‥"
산체스는 종이에 무엇인가를 적더니 마르틴에게 넘겨주었다.
"그것을 안내원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그것이 여권이자 여기의 지불 영수증이니까요. 그런데 ‥‥‥‥"
산체스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 한국인을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내 신도야."
"아아, 그렇습니까?"
"산체스, 아까 미국에 도착해서 시민권 만들어 줄 사람을 안다고 했지? 그 사람을 소개시켜 주게."
산체스가 머리를 끄덕이더니 종이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 건네주었다.
"이 놈한데 연락하면 될 겁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돈이 꽤 들 텐데요."
"그거야 자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쪽지를 호주머니에 집어넣은 마르틴이 상체를 기울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산체스, 내가 자네의 고해를 받아주겠네. 지금 조금 시간이 있으니까 여기서 해도 돼."
산체스가 머리를 저었다.
"아닙니다, 신부님.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이틀 전에 고해를 했습니다. 아직 ‥‥‥‥"
"이틀간의 죄도 상당할 텐데."
마르틴이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자 산체스가 따라 일어서며 마주 웃었다.
"다음에 하겠습니다, 신부님. 며칠 더 있다가 말입니다."
사업관계로 미사 집전을 하지 못하겠다던 마르틴 신부가 미사를 마치고 돌아왔다. 얼굴에 싱싱한 생기가 넘쳐흐르는 듯했다.
"고, 난 당신을 위해 기도를 하지 못했소.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당신의 이름을 성모 앞에서 부를 수는 없었소."
신부복을 벗으면서 마르틴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당신은 죄인이오. 그러나 당신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는 가끔 착각을 한다니까."
고영무가 탁자 위의 두 손을 깍지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역경에 처해 있는데도 당신처럼 초연한 젊은이는 처음 보았어. 불평도 원망도 하지 않고 또 실의도 좌절도 없어. 나는 당신이 맹렬한 복수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야. 그저 당연히 처리해야 할 일처럼 그들을 찾아 나서고 있어."
옷을 갈아입은 마르틴이 그를 마주 보고 앉았다.
"450년 전에 황금의 땅에 첫발을 디딘 우리 가톨릭 신부들이 아마 당신 같은 천성을 지녔을 거요. 그때의 신부는 군인보다 더 용맹했고 더 용기가 있어야 했지. 나는 계율과 법의 기준으로 당신을 측량하지 않은 거요."
"고맙습니다, 신부님."
"물론 조금은 선입견이 있지. 당신의 돈으로 산타밀라에 성당이 증축된다는 것 말이오. 그것까지는 주님이 이해하실 거요."
머리를 끄덕인 고영무가 한쪽에 치워 둔 혁대형 전대를 가져다가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여기 1천 6백만 페소가 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지금 돈을 드리지요."
턱을 내민 자세로 전대를 바라보던 마르틴이 시선을 들었다.
"고, 약속은 5백만 페소였는데."
"이 중에는 죽은 김강남의 돈도 있습니다. 나는 그가 돈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몰랐습니다. 놈들이 그의 몸속에 그 돈을 넣어 두어서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어요. 이 돈을 신부님께 드리게 되어서 기쁩니다."
"성당을 세우실 때 김강남의 이름을 기록해 주십시오. 그의 영혼이 기뻐할 겁니다."
"그러지요."
마르틴이 두 손을 벌리고는 전대를 끌어당기다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미국에 가면 시민권을 받는 데 돈이 든다고 하던데. 내가 산체스한테서 받았던 주소와 이름 있지 않소? 그 사람한테‥‥‥‥"
"그 정도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만나면 받을 돈도 있고."
"LA에는 친구도 있으니까요."
혼잣말처럼 마르틴이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이윽고 그는 전대를 끌어당겨 주머니 안에 든 돈을 꺼내더니 장사꾼이 물품대를 받은 것처럼 엄숙한 얼굴로 돈을 세기 시작했다. 고영무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다가가 방문을 바라보며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모레 밤이면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은 없다.
앨버트 존슨은 사십 대 후반의 머리가 벗겨지고 배가 나온 사나이였다. 배가 나온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이 다리가 상체에 비해서 가늘게 보였는데 팔이 긴 편인 그는 더욱 그랬다. 창가에 서 있던 그가 몸을 돌려 이쪽으로 다가오자 지미 굴드는 저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지미, 그 염병할 놈의 새끼가 시카고로 떠난 이유는 뭐냐? 네 알량한 생각을 말해 봐라. 이번만은 들어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앨버트는 얼굴을 펴고 활짝 웃었다.
"미친개처럼 캘리포니아를 쏘다니다가 이젠 시카고로 떠났단 말이야. 그곳은 그놈에게 기반이 없는 지역이야."
"시카고 지부의 파킨슨이 놈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호텔에서 쉬고 있다는데요. 사람을 만나지도 않습니다."
앨버트가 머리를 끄덕였다. 늘어진 볼의 살이 출렁거리며 흔들렸는데 콧날만 뺀다면 늙은 불독의 얼굴이다.
"너한테서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어, 지미. 네 대가리는 전화통과 똑같으니까. 하는 말을 그대로 전하고 듣게만 해주지."
"보스, 당신 대가리는 구형 전화기요, 전할 말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미간을 좁히며 앨버트가 그를 노려보았다. 잿빛 눈이 먼 곳을 보듯이 가느스름해졌다. 그가 턱을 들었다.
"지미, 시카고 지부에 연락해서 그놈의 방에 도청 장치를 해놓으라고 해"
"알았습니다, 보스."
"크링거가 할 일 없이 시카고에 머무를 놈이 아니야. 지금 시중에는 마약이 달려서 마약값이 두 배로 뛰었어. 그런 때 시카고로 떠나다니, 그 지겨운 동네로."
지미가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그와 7, 8년 같이 생활하다 보니 그는 자신의 두 번째 아내보다도 더 앨버트 존슨을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당황해하고 화가 나 있는 것이다. 크링거가 갑자기 시카고로 떠난 것은 복싱 상대방이 경기 도중에 링을 떠나 락카룸으로 간 것과 마찬가지였다. 화가 난다. 그리고 크링거도 이상한 놈이지만 링에 혼자 남게 된 자신의 꼴도 우스꽝스럽고 허전한 것이다. 언제 또 발작을 일으킬지 알 수 없었으므로 지미는 슬그머니 엉덩이를 들었다.
"지미, 그 콜롬비아에서 들어온 배, 이름이 뭐였지?"
지미가 그를 바라보았다.
"이오니아 호라고 했지요, 아마."
"이상한 것 없었나?"
"별것 없었습니다. 불량품 에메랄드를 잔뜩 들여왔는데 아마 곱 장사는 하겠지요."
"보스, 마약이 귀해지고 크링거가 시카고로 간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우리의 단속이 심해져서 마약이 귀해졌고, 그리고 크링거는 다른 볼일로‥‥‥‥"
그러자 앨버트가 빙그레 웃었으므로 지미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제 곧 걸쭉한 욕설이 튀어나올 것이다. 앨버트는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어도 그것이 마약으로 보이는 사람이다. 그의 앞에서 커피에 백설탕을 넣을 때는 조심해야 했는데 잘못하면 그를 흥분시킬 수가 있었다.
"지미, 크링거가 이 기회를 놓칠 놈이 아니야."
의외로 앨버트가 차분하게 말했다.
"이런 때 마약을 들여오면 전보다 곱 장사가 된다. 원가의 20배를 받는다구."
지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작년에 크링거를 추적하였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사건이 흐지부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앨버트는 워싱턴으로부터 문책을 받았던 것이다. 크링거 킬패트릭은 골수 공화당원일 뿐만 아니라 LA와 캘리포니아에 건설회사와 철강회사를 가지고 있는 유력한 실업가였다. 그에게는 전과기록도 없다. 그러나 3년 전부터 앨버트는 크링거의 축재 과정에 마약이 개입되었다는 심증을 굳히고 있었다. 그의 철강회사에 근무하는 수백 명의 외국인들 중 밀입국자가 많다는 것도 의심쩍었다. 그러나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다. 이번에도 실수를 한다면
틀림없이 옷을 벗게 되든지 아니면 알래스카로 쫓겨나게 될 것이다.
"요좀 콜롬비아의 카를로스가 자금이 달린다는 CIA의 정보가 있어. 놈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는 거야. 밀가루 부대처럼 마약을 창고에 쌓아 놓고 있는 놈이다. 지미, 너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
선 채로 지미는 입맛을 다셨다.
"이곳으로 실어 오지 않겠느냔 말이다."
"보스, 콜롬비아에서 오는 밀항자를 철저히 단속하고 있습니다. 연안 경비정을 지난달부터 두 대나 늘렸지 않습니까?"
밀입국자들이 가져오는 마약도 상당량이 될 것이다. 이쪽에서는 카르타헤나나 산타마르타에 있는 밀입국 대행자들에 대해서도 파악은 해두고 있다. 그러나 그쪽 정부와 결탁한 놈들이어서 그쪽에서는 손을 쓸 도리가 없는 것이다. 지미가 슬그머니 몸을 돌려ᅟᅡᆻ는데 이제 앨버트는 더 이상 그를 부르지 않았다.
"페르난도, 물량은 틀림없습니다."
페르난도에게 다가간 매린이 말했다.
"모두 다섯 개의 가방에 나누어 담았습니다."
아래쪽 창고를 내려다보던 페르난도가 머리를 끄덕였다.
"카를로스한테서 연락이 왔어, 매린. 그쪽은 급한 모양이다."
그와 나란히 서서 매린이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은 비행기의 격납고처럼 보이는 거대한 창고였다. 그들이 서 있는 2층의 사무실 입구에서 내려다보면 창고의 내부가 편히 보였다. 나무상자나 종이박스, 또는 커다란 기계들이 종류별로 차곡차곡 쌓여 있없는데 사방은 진회색의 시멘트벽이다. 창고 한쪽에서 노란 헬멧을 쓴 열 명 남짓한 인부들이 나무 박스를 정리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짐차가 박스를 싣고 비틀거리면서 달려가고 있다.
"난 크링거를 만나고 나면 곧장 콜롬비아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페르난도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이달 말에 지불해야 할 돈이 많아. 무기도 받아야 하고."
"페르난도, 돈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번에 돈을 받으면 말입니다."
담배에 불을 붙인 페르난도가 힐끗 매린을 바라보았다
"5억 달러는 큰돈이지. 하지만 나라를 상대로 하는 게임이야. 군대와 부패한 관리들에게 쏟아붓고 나면 그 돈도 금방 없어진다."
페르난도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오늘 낮에 앨버트의 부하들이 세관을 한바탕 흩고 갔어. 놈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증거다."
"별일은 없었습니다. 이오니아 호에 실었던 물품들의 내역을 확인하고 갔습니다만 다른 선박들의 물품 내역도 모두 체크했다는군요. 형식적인 조사지요."
그리고 이미 물품들은 세관을 빠져나와 있는 것이다. 마약은 모두 TV 박스에서 거두어 다섯 개의 가방에 담겨져 있었고 TV는 스들웰이 본래 계약한 대로 중고품 시장으로 실려 나갔다. 이제는 창고 깊숙한 곳에 숨겨진 다섯 트렁크만 지키면 된다. 페르난도는 신중한 성격이었다 매린의 장담을 듣고는 얼굴 표정이 굳어졌다.
"일이 끝날 때까지 방심을 하지 마라, 매린. 마지막 순간에 잘못되는 경우도 있다."
"알겠습니다, 페르난도."
"카를로스는 너에게 기대를 걸고 있어."
"너는 나에게도 특별한 사내다."
"페르난도, 일을 마치면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페르난도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밀리카가 어제 전화했었다."
"일이 끝나면 휴가를 갖게 해달라고 하더구나. 스페인에 가고 싶다고 했어."
"우리 집안에 한 명이면 돼, 그리고 나는 내가 한사람 몫은 더 한다고 믿으니까."
"페르난도, 저는‥‥‥‥"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야. 네가 날 따라간다면 그 애도 널 따를 것이야. 몸 바쳐서 이번 과업을 성공시켰어. 밀리카는 제 몫을 충분히 해내었다. 넌 밀리카와 남아서 스페인으로 가든지 프랑스로 가든지 해라. 포상으로 휴가를 주는 거다."
"페르난도."
페르난도는 담배를 버리고는 시멘트 계단 위에 떨어진 중초를 구둣발로 비벼 됐다.
"끝없이 계속되는 전쟁이야. 마약이 있는 한 전쟁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몸을 돌린 페르난도는 뒤쪽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멍한 얼굴로 서 있던 매린이 뒤를 따랐다. 넓은 사무실에는 컴퓨터가 가동되고 있었다. 여남은 명의 직원들이 입출고를 체크하느라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머스키 자재 수입 창고의 사무실인 것이다. 앞장서 가던 페르난도가 걸음을 멈추었다.
"매린, 크링거는 닷새 후에 이곳에 오기로 했다. 우리에게 앞으로 닷새가 중요해."
"알고 있습니다, 페르난도."
"앨버트는 시카고에 가 있는 크링거를 의심쩍게 생각하는 모양이야. 감시가 붙어 있다고 한다."
페르난도가 낮은 소리로 말하며 입술 끝을 비틀어 웃었다.
"그쪽은 그쪽이다. 이쪽 감시를 철저히 해라."
"알았습니다, 페르난도."
페르난도는 안쪽에 나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선다. 사무실에 서 있는 매린에게 사내 한 명이 다가왔다.
"매린, 뉴스 들었어?"
매린이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데?"
"어젯밤에 콜롬비아에서 온 밀항선 한 척이 근해에서 나포되었다는 거야, 연안 경비대에게."
"20여 명이 체포되었다는군."
"신부님은 나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집에 계시지요."
고영무의 말에 마르틴이 머리를 저었다.
"야적장까지만 같이 가겠소. 돈 받은 값을 해야지. 그렇지 않소?"
"제가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건 알아요. 하지만 산체스에게 할 말도 있고."
부득부득 고집을 피고 있는 마르틴을 바라보던 고영무가 마침내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들은 울통불퉁한 돌이 깔려 있는 인도를 나란히 걸었다. 하늘은 흐려 있었으나 빗방울은 떨어지지 않았다. 고영무는 지금도 신부복 차림이었다. 옷도 없었지만 며칠 동안 입고 지내다 보니 익숙해진 것이다. 그리고 옷자락이 코트처럼 길었으므로 허리춤과 가습 안에 물건을 집어넣기가 편리했다.
"고, LA에 가면 그 옷은 벗어야 할 거요. 여기서야 사람들에게 익숙한 복장이지만 그쪽에서는 이상하게 볼걸?"
마르틴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럴 작정입니다. 하지만 버리지는 않겠습니다. 소포로 보내 드리지요."
"바쁠 텐데 그럴 필요는 없소."
선창으로 향하는 길은 사람들의 왕래가 드물었다. 그들의 구두가 돌바닥에 부딪혀 발자국 소리가 크게 울렸다.
"인생은 묘한 것이오. 누구는 사람은 태어날 매부터 정해진 길을 걷는다고 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멈춰서서 뒤돌아보았을 때 할 수 있는 말이지. 아아, 이것이 나에게 정해진 길이었구나 하고."
앞을 바라보고 걸으며 마르틴이 말했다.
"사람이 살아갈 때는 수없이 변하는 거요. 살아남기 위해서 수없이 변신하지."
"물론 모든 것이 주님의 뜻이오."
"당신은 앞으로 수많은 죄를 지을 거요."
"이봐요, 이게 무슨 일이오?"
마르틴이 사내들을 데리고 다가왔다.
"신부님은 가만히 계시는 게 이로워요."
호세 김의 말에 마르틴이 악을 쓰듯 말했다.
"당신은 누구야? 산체스! 산체스는 어디 있어?"
사내 두 명이 마르틴의 양쪽 팔을 움켜쥐었다.
"놓아라! 이놈들아!"
마르틴이 몸부림을 치자 세 명이서 신부를 끌고 뒤쪽으로 물러났다.
"고, 이것 봐요! 이것 놓아라, 이놈들아!"
이윽고 마르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호세 김, 난 당신 아들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며 고영무가 한걸음 그에게 다가갔다.
"마약 조직이 나를 궁지에 빠뜨린 겁니다. 김강남씨는 마약 조직에 끌려가서 살해당했어요."
"엉뚱한 이야기로 속이지 마, 고영무."
호세 김이 손에 든 권총으로 고영무를 겨누었다.
"그렇다면 왜 경찰을 치고 도망갔어?"
"계획적으로 치밀하게 짜놓았기 때문에 해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난 정말 죽이지 않았어요, 호세 김."
"속지 않는다, 나는 이 비겁한 놈!"
호세 김이 고영무의 가습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사내들은 잠자코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세 김, 기회를 주시오. 나는 나를 모함한 놈들을 찾으려고 지금 미국으로 갑니다. 내가 꼭 해명하겠습니다."
순간 고영무는 허리를 비틀면서 한쪽 발로 호세 김의 손을 차올렸다. 그의 손에 든 권총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놈!"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진 호세 김이 두 팔을 벌리고는 고영무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호세 김, 미안합니다."
자신의 말소리가 바람에 흩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팔굽으로 호세 김의 한쪽 팔을 쳐올린 고영무가 선뜻 몸을 비끼고는 그의 목덜미를 수도로 내려쳤다. 호세 김이 휘청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자 주변에 둘러있던 사내들이 몰려들었다. 사내 한 명이 한팔을 가로로 휘익 저었는데 허리를 누여 피하고 보니까 그의 손에 쥔 긴 칼날이 보였다. 그 사이에 고영무의 어깨에 둔한 통증이 왔다. 사내 한 명이 쇠 몽둥이로 그의 어깨를 내려친 것이다. 다시 칼날이 곧장 앞으로 쪽 들어왔다. 한걸음 뒤로 물러선 고영무의 발뒤꿈치가 돌덩이에 걸렸다. 뒤쪽은 검은 바다였다. 옆쪽에서 발길이 날아왔다. 고영무는 그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한팔로 사내의 종아리를 걷어 올렸다.
"아, 아, 아‥‥‥‥"
한쪽 발끝으로 겨우 중심을 잡고 한동안 멈춰 있는 것 같던 사내가 아래쪽으로 사라졌다.
"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가 났다. 아래쪽은 바다가 아니었다. 모난 바위로 쌓아 놓은 방파제인 것이다. 칼을 쥔 사내와 쇠몽둥이를 든 사내가 그의 앞쪽에 있었으나 선뜻 달려들지를 않는다. 같이 죽기로 마음먹으면 부딪혀 오겠지만 이쪽에서 어디 한 곳이라도 잡는다면 같이 떨어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고영무는 무릎을 펴면서 껑충 뛰어올랐다. 쇠몽둥이를 든 사내가 사정없 이 몽둥이를 내려쳤으나 고영무는 그의 팔을 쳐서 빗나가게 하고는 다른 주먹으로 사내의 양미간을 쳤다. 사내가 엉덩이를 땅바닥에 찧고 주저앉더니 곧 뒤로 넘어졌다. 그 순간 칼을 든 사내가 휘두른 칼이 고영무 가슴 부근의 옷자락을 길게 끄어 놓았다. 허리를 틀었던 고영무의 발길이 사내의 사타구니를 올려 차자 긴 숨을 몽땅 토해내면서 사내가 허리를 숙였다. 사내는 두 손으로 사타구니를 움켜쥐고는 두 다리를 펴면서 허리를 숙였다. 한 걸음 다가간 고영무는 주먹을 휘둘러 그의 관자놀이를 쳤다.
"타앙!"
갑자기 총소리가 울렸고, 순간 고영무의 머리 옆부분이 불로 지진 듯한 느낌이 왔다. 머리를 한 손으로 누르면서 고영무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눈을 부릅뜬다.
"타앙!"
다시 총소리가 울리고 돌덩이가 튀는 소리가 났다. 엎드려 있던 고영무는 몸을 굴렸다. 대여섯 번 구르는 사이에 다시 총소리가 울렸고 몸이 제방 끝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이봐! 멈추지 못해?"
악을 쓰는 듯한 소리가 먼 쪽에서 들려왔다. 바람이 바다 쪽에서 불고 있었으므로 말소리가 뒤쪽으로 흘렀다.
"멈춰!"
사내들을 뿌리쳤는지 마르틴이 달려왔다. 피가 흘러내려 눈을 가렸으므로 가늘게 뜬 눈으로 고영무가 머리를 들었다. 앞을 가로막고 선 호세 김의 검은 몸이 보였다. 권총이 그의 가슴을 향해 겨누고 있다. 일어서면 서로 얼굴이 마주 닿을 거리였다. 그를 내려다보던 호세 김이 말했다.
"죽어라."
"이봐! 안돼!"
마르틴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영무는 발을 뻗어 호세 김의 종아리를 걷어 올렸다.
"타앙!"
총소리가 다시 요란하게 울렸다. 검푸른 바다를 향하여 총을 쓴 호세 김의 상체가 이미 공중에 떠 있는 두 다리와 함께 아래쪽 바위 위로 떨어져 내렸다.
산체스는 제2 야적장에 있었다.
사내 한 명을 앞세우고 고영무와 마르틴이 나타나자 그는 입을 딱 벌리고 다가오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산체스."
마르틴이 한 걸음 앞서 나가 그의 앞에 멈춰 섰다.
"넌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네놈의 손이 닿는 물건, 사람, 모든 것에. 네놈이 아끼고 생각하는 모든 대상에도 저주가 내린다. 두고 봐라. 너는 죽기도 전에 네 몸에서 시체 냄새가 나고 구더기가 기어 나올 것이다."
"신부님!"
"네놈 때문에 사람 두 명이 죽었다. 두 명은 지금 일어나지도 못해 이놈, 나를 배신하다니."
주변에는 서른 남짓한 남녀가 모여 서 있었다. 제2 야적장에 컨테이너가 쌓여 있었는데 칸델라 등불을 켜놓았으므로 주변이 제법 보였다.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바라본 채 숨을 죽였다. 칸델라 불에 비친 고영무의 모습은 머리 옆쪽의 귀 위에서 흘러내린 피가 온 얼굴에 범벅이 되어 있었으므로 얼핏 지옥에서 뛰쳐나온 악마처럼 보였다. 가슴이 찢어져 너펄거리는 신부복 차림이어서 더욱 기괴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토록 무서운 말을 뱉는 신부도 처음이었다.
"산체스, 너는 이제 성당에 올 수가 없다. 네 집에 있는 십자가도 모두 떼어라. 네 고해를 받을 신부도 없다. 난 산타마르타로 옮겨서 네놈이 주님을 괴롭히는 것을 막을 것이다."
"신부님."
머릿속이 텅 빈 듯한 표정으로 산체스가 휘청거리며 다가왔다.
"실은, 그 사람이 갑자기 ‥‥‥"
고영무가 한걸음 나서서 그의 앞에 셨다.
"배는 제대로 떠날 수 있소?"
"아아."
산체스가 정신이 돌아온 듯 힐끗 마르틴을 바라보더니 틱으로 방아를 찧듯이 끄덕였다.
"떠납니다, 떠나구 말구요, 떠납니다."
"그럼, 갑시다."
"아아, 예."
"산체스."
마르틴이 소리쳐 부르자 몸을 돌리려던 산체스가 갑자기 뻣뻣하게 굳어졌다.
"신부님, 저는 떠나겠습니다."
마르틴을 가로막은 고영무가 말했다.
"저만 막지 않으면 괜찮습니다. 떠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마악 입을 열었던 마르틴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고영무가 산체스를 바라보았다.
"떠납시다. 그리고 조금만 이상하게 보이면 당신은 죽습니다."
슬쩍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자 산체스가 손가락이 총구인 양 몸을 비켰다. 산체스가 주춤거리며 앞장을 서자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고영무와 마르틴을 힐끗거렸는데 갑자기 사내 한 명이 대열에서 빠져나와 마르틴의 신부복 자락을 잡더니 입술을 대었다. 마르틴이 그의 머리에 성호를 긋자 이제는 서너 사람이 서둘러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이제는 앞서가던 사람들이 몸을 돌려 몰려왔다. 마르틴이 턱을 들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낭랑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축복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무릎을 꿇고 앉은 사람들을 바라보던 고영무는 몸을 돌렸다. 앞에 쌓여 있는 컨테이너가 그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기도를 마치자 사람들은 마르틴의 성호를 받으며 제방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신부님, 그럼 안녕히‥‥‥‥"
고영무가 머리를 숙여 보이자 마르틴이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내린 고영무는 몸을 돌렸다. 마르틴이 그에게 성호를 그어주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최대광이 문을 열자 홍성희가 그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정색을 한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방으로 들어선다. 문을 닫고 돌아선 최대광의 앞에 선 홍성희의 얼굴은 이제 활짝 웃는 얼굴이다. 홍성희가 그의 목을 안고 매달렸다.
"나, 빨리 왔지요?"
"어, 이봐, 이것 놔."
"싫어."
그녀는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았다.
"어흠."
방안에서 들리는 헛기침 소리에 홍성희가 기절할 것같이 놀라 최대광에게서 몸을 떼었다 방 안 구석에 신용만이 서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도 민망한 듯 몸을 돌렸다.
"미안합니다. 이거 제가 불청객인 줄은 압니다만, 염치를 무릅쓰고..."
신용만이 말하자 그녀는 슬쩍 최대광을 흘겨보았다.
"그리고 지난번에 저희들을 도와주신 것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괜찮아요."
그녀가 냉랭한 얼굴로 침대 옆쪽의 의자에 앉았다.
"그때 전화해 주시지 않았으면 아마 저희들 둘은 이 세상에서 없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신용만이 인사를 차리면서 힐끗 최대광을 바라보았다.
"고마웠어. 우리 생명의 은인이여."
최대광이 말했다. 그녀의 전화를 받고는 곧장 비상구로 달려가 지키고 있던 두 놈을 때려누이고 도망쳤던 것이다.
서울에 올라와 수소문을 해보자 강일준의 심복인 이한기까지 광주로 내려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장수와 강일준은 이쪽을 죽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홍성희가 앞자리에 앉은 그들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그날 밤 녹아 떨어진 유장수를 침대에 누여 놓고는 휴대폰을 들고 화장실로 갔던 것이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오그라든다.
"그 사람, 이젠 테이프를 두려워하지 않아요. 요즘은 두 분 찾으면 바로 어떻게 하라고 해요."
어떻게 하라는 것은 곧 죽이라는 말인 줄을 그들은 알아들었다.
"그런데 웬일이세요?"
그녀가 물었다. 고맙다는 인사는 지난번에 전화를 할 때에도 들었다. 그들이, 특히 신용만이 인사나 차리려고 올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최대광의 전화를 받고 부리나케 달려왔는데 신용만과 함께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조금 전의 일이 머리에 떠오르자 홍성희는 한쪽 손바닥을 볼에 대었다.
"뭘 좀 여쭤 볼 말씀이."
신용만이 입을 열었다.
"뭔데요?"
"저, 지금도 유사장이 마약 거래를 합니까? 그것을 좀 알았으면 좋겠는데요."
그녀를 바라보던 신용만이 최대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놈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하니까 우리도 그놈들 약점을 잡아야겠어. 우리만 당하고 도망 다닐 수는 없단 말이야."
최대광이 그녀에게로 상체를 숙였다.
"죽기 아니면 살기여. 즈그덜이 우리를 죽이려는디 당하기만 할 수 있어?"
잠자코 최대광의 얼굴을 바라보던 홍성희가 입을 열었다.
"외국 나가신다면서요."
"그건 보류됐어, 형님이 행불이다."
"아, 어디 있는지나 알면 떠나지, 여기에 무슨 미련이 있다고."
최대광의 말에 신용만이 퍼뜩 눈을 들어 홍성희를 바라보았다.
"그저 거래는 하는 모양인데 저는 잘 몰라요. 지난번 그 테이프 일이 있었던 후로 유사장 입장이 난처해진 것 같았어요, 강사장한테요."
홍성희가 말했다. 머리를 끄덕인 신용만이 물었다.
"동신산업의 강일준 사장 말입니까?"
"그래요, 그 사람이 공급하고 유사장은 판매를 맡는 모양인데 자세한 것은‥‥‥‥"
"어디서 거래를 하는지 아십니까?"
"그것도 잘‥‥‥ 아무튼 요즘은 제 앞에서 이야기를 잘 안 해요."
감금당한 상태에서 고문을 당했다손 치더라도 마약 이야기를 털어놓은 홍성희에 대해서 좋게 생각할 리가 없다. 만일 다른 사람 같았으면 생매장이라도 당했을 일이다. 홍성희가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다닌다는 것은 그만큼 유장수가 아끼고 있다는 말도 되었다.
"어쨌든 고맙습니다. 저는 인사도 했으니까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신용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즘 어디서 살아요?"
최대광의 팔을 베고 누운 홍성희가 물었다. 침대 위에 누운 두 사람은 모두가 알몸이었고 침대의 흰 시트는 구겨져서 베개와 함께 바닥에 떨어져 있다.
"그건 알아서 뭐하려구?"
"걱정이 되니까 그렇지."
"걱정할 것 없어. 유장수만 죽이면 끝나니까,"
홍성희가 머리를 들고는 최대광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죽여요? 정말 죽일 셈이에요?"
"내가 죽지 않으려면 죽여야지. 우리도 도망치는 것에 지쳤어."
용만이가 그러는데 너도 조심하래 유장수가 널 미행시킬지도 모른다구,"
"흥, 미행이 영화같이 되는 줄 알아요? 난 택시 타고 왔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홍성희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최대광의 배를 쓸었다.
"소가죽 같애"
"이봐, 유장수가 네 아파트에 언제 오는 거야?"
"매일."
"요즘은 매일 못살게 굴어."
"애들은 몇 명이나 데리고 있어?"
"대여섯 명, 아니 그보다 많을지도 몰라요. 집에는 들어오지 않으니까 난 잘 몰라."
손가락으로 그의 아랫부분을 건드리던 그녀가 몸을 바짝 붙여왔다.
"아파트로 오면 위험해요. 유사장이 전처럼 당하지는 않을 거예요."
"강사장은 자주 만나나?"
"아니, 밖에서 만나는 모양이에요. 그 사람하고 자주 만나기는 하는데, 집에는 한 번밖에 안 왔어."
홍성희는 그의 남성이 성을 낸 것을 보더니 눈가가 빨갛게 되었다.
"내가 올라가요?"
그러면서 이미 그녀의 미끈한 몸이 통나무배를 타듯 기어 올라왔다.
"그만."
최대광은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고는 가볍게 들어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떡 치는 것은 나중에."
이맛살을 찡그린 홍성희가 발을 들어 그의 아랫배를 찼다. 최대광의 아랫배가 출렁거렸으나 그는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장수가 누구하고 어디서 만나는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연락해 줘, 휴대폰으로."
"싫어, 무서워."
"전처럼 변소에서 문 닫고 하면 모르잖아?"
"그게 어디 쉽나? 일하다 말고 휴대폰 가지고 변소 가는 것이?"
최대광이 입술을 부풀리며 웃었다.
"누가 일하다 말고 가래? 끝나고 해도 돼."
"죽이고 나면 뭘 할 작정이죠?"
홍성희가 정색을 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널 데리고 살아야지."
그녀의 젖가슴을 손바닥으로 감싸 쥐어 보면서 최대광이 말했다. 그의 커다란 손가락에 감싸인 젖가슴은 보이지 않았다.
"돈은 어떻게 벌구?"
"돈이야 먹고 살 만큼만 있으면 되지."
"난 그렇게는 못 살아."
홍성희가 머리를 저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유사장하고 이렇게 사는 것이 나아."
그녀의 젖가슴에서 손을 팬 최대광이 히죽 웃었다.
"그럼 유장수 돈도 뺏어야겠구만."
"‥‥‥‥"
"널 데리고 살려면 말이야."
"내가 그렇게 좋아요?"
그의 가슴 위에 엎드리면서 홍성희가 물었다. 그녀의 말랑말랑한 젖가슴이 스펀지처럼 밀착해 왔다. 최대광은 그녀의 허리를 안아 몸 위에 올려놓았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리면서 홍성희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15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유장수는 복도로 나왔다. 자주색 양탄자가 깔려 있는 복도에는 아무 인기척도 없었다. 그는 복도를 걸어 1515호실의 문을 열었다. 보통 객실의 세 개를 합친 것 같은 대형 객실이었다. 창가 의자에 앉아 있던 강일준이 머리를 들었다.
"유사장, 당국의 단속이 심해져서 일해 먹기 힘이 들어요. 이번에 물건 풀어 놓고 나서는 당분간 쉬어야 할 것 같은데."
유장수는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나도 이번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부터 안정이 안 됩니다. 이번 일만 끝내고 손을 털어야겠어요. 괜히 잔재미 보다가 신세만 망칠 것 같단 말이오."
"그건 유사장이 단속을 잘 하셨어야지, 여자한테 그런 이야기가 들어가게 하면 어떻게 합니까?"
강일준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를 쏘아보았다. 그는 작년에 환갑을 지냈으니 유장수보다는 다섯 살 손위였다. 그러나 흰 머리칼 한 올 없는 머리와 붉은 혈색이 도는 둥근 얼굴은 아직도 왕성한 정력을 느끼게 했다.
"그 일 때문에 신세 조질 뻔한 것은 유사장뿐만이 아니란 말입니다. 시장도 좁겠다, 단속도 심해져서 어려운 판에 집안에서 문제가 터지다니."
강일준의 말에 이번에는 유장수가 턱을 들었다.
"강사장, 어쨌든 이번 일을 끝으로 우리 손을 텁시다. 그러고 나면 강사장과 내가 이런 일로 신경 쓸 일도 없지"
"내가 이제까지 닦아 놓은 기반이 잘못되면 하루아침에 무너지겠어. 잘된 일이지 뭐요."
강일준은 마약 사업에 손댄 지 십 년 남짓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업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태국이나 홍콩의 중간 상인한데서 서너 봉지씩을 사다가 국내에 풀어 놓는 뜨내기장사였다. 그러다가 작년부터 유장수를 만나 장사의 규모가 부쩍 늘어난 것이다. 그것은 유장수의 조직을 활용해서 판매망을 넓혔기 때문이었다. 강일준은 유장수의 말이 자신을 비꼬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이번에 얼마나 들여왔습니까?"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면서 유장수가 말머리를 돌렸다.
"4킬로그램이오."
강일준이 가라앉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20억이군. 내가 모레까지 준비해 드리겠소."
"난 아까 말했다시피 물건 넘기고 나면 외국에나 나가서 쉴랍니다."
유장수가 냉랭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여 주었다.
"유사장, 그놈들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까?"
강일준이 묻자 유장수가 입맛을 다셨다.
"아직, 하지만 곧 잡을 거요."
"나도 그놈들이 마음에 걸려서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아요. 그놈들이 정리 안 되면 유사장이나 내가 아무리 손을 턴다고 해도 헛일이오."
"압니다."
"그 홍성희씨, 이런 말 드리기가 뭣하지만 입이 가벼워서‥‥‥‥"
강일준이 다시 홍성희 쪽으로 화살을 돌렸다.
"물론 유사장이 단단히 교육을 시키셨겠지만, 이 일은 유사장 혼자만의 일이 아니지 않소?"
"그건 염려하지 마시오, 강사장."
유장수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꼈다.
"이제 내일모레 일만 끝나면 우리가 만날 일도 드물어지겠는데, 언제 일 떠나서 한잔합시다."
"그럴까요?"
강일준이 입을 벌리고 웃었는데 어린아이 같은 천진한 표정이었다.
"언젠가 다시 만날 기회가 오겠지요."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유장수가 머리를 돌렸다.
"강일준이한테 20억을 주기로 했다. 놈이 4킬로 가져왔는데 그것만 뿌리고 손을 털겠다고 하더군."
안쪽에 앉은 장규식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그놈이 손을 턴다고 했는데 거짓말이야. 그놈은 나하고는 달라. 그 장사 못하면 마약 못 맞은 쪽정이 꼴이 될 거다. 그놈은 마약이 아니라 마약 장사에 중독이 걸린 놈이야."
"저 혼자 똘마니들을 만나게 내버려 두시지요. 우리 조직을 건드리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장규식의 말에 유장수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놈이 날더러 단속을 잘하라고 하더구만, 여자 단속을."
"놈은 나를 믿고 있지 않아."
"사장님, 저도 놈을 믿지 않습니다."
"놈이 그만두겠다는 말이 믿기지가 않더란 말이다."
". .."
"그놈한테 내 조직은 그야말로 침이 넘어가는 판매망이지. 안 그러냐?"
"그렇습니다, 사장님. 사장님,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놈이 우리 조직을 감히 넘보다니요?"
장규식이 덕을 들고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똘마니들 몇 명 거느리고 있다고 30년 가깝게 기반을 굳혀 온 우리 조직을‥‥‥‥"
"그렇지만 약점이 있지, 우리들도. 너하고 나, 둘 중 하나만 없어져도 세력이 반쯤 줄어들 거다. 최대광이 같은 놈 백 명을 거느리고 있어도 머리가 없으면 동네 깡패가 되어 버린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최대광의 이름을 꺼낸 유장수가 어금니를 물었다.
"그놈을 토막을 내어야 내가 잠을 제대로 자겠는데."
"곧 잡을 겁니다, 사장님."
유장수가 눈을 치켜떴으므로 장규식은 시선을 내렸다.
"먼저 잡을 놈이 있다."
혼잣소리처럼 말하는 유장수의 말에 장규식이 퍼뜩 머리를 들었다.
"마약을 받고 나서 강일준을 없애 버려. 우리가 먼저 선수를 치는 거야."
"놈은 앞으로 우리한테는 귀찮은 존재가 돼. 미리 잘라 버려야 한다."
"죽입니까?"
눈을 깜박이며 장규식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폐인을 만들든지,"
"이한기도 같이 처치해야겠습니다."
"너와 나의 관계와 같으니까."
유장수가 손바닥으로 턱의 면도 자국을 쓸었다.
"흥."
갑자기 그가 얼굴에 웃음을 띠우고는 장규식을 돌아보았다.
"놈도 보통내기가 아니야. 나이도 환갑이 지나서 뱃속에 구렁이가 들어 있는 놈이지."
"아마 그놈도 이한기를 불러 나하고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한기가 보통 놈이 아니야."
"사장님, 애들을 모으겠습니다."
"내가 그놈을 몇 번 보았지만 그놈은 주인을 배신할 놈이다. 언젠가는 강일준의 자리에 오른다고 믿고 있을 거야."
"너하고는 다른 놈이야."
유장수는 창밖으로 머리를 돌렸다.
차는 강남대로를 달려가고 있었다. 인도를 걷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두꺼워져 있었다.
"저희들은 영무 친구가 됩니다. 부모님께 안부 인사 좀 여쭈려고 왔는데요."
문밖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인사만 드리고 갈랍니다."
아줌마가 몸을 돌려 고진호씨를 바라보았다.
"큰도련님의 친구분들이라는데요. 인사드리러 왔다구요."
소파에 앉아 있던 고진호씨가 머리를 끄덕였다.
"들어오라고 해."
아줌마가 문의 자물쇠를 풀었다. 집안으로 들어선 사내들은 고영무 또래의 나이였는데 모두 다섯 명이나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고진호씨가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래, 자네들이 영무 친구인가? 어서 오게."
사내들 중 한 명은 아직 현관 근처에 서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주방 쪽에 있다. 고진호씨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들을 둘러보았다. 이쪽으로 사내 한 명이 다가오고 있을 뿐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이었다.
"에그머니."
그릇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아줌마가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었다.
사내 한 명이 붙어 서 있다.
"이게 무슨 짓들이야!"
집안이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로 고진호씨가 소리쳤다.
"너희들은 누구야?"
"영감, 잠자코 있지 않으면 다쳐. 찍소리 말어."
다가선 사내가 말했다. 사내들이 방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본 고진호씨의 눈썹이 곤두섰다.
안방에는 김영순 여사가 누워 있었다. 이제 막 하루에 한 그릇쯤의 죽을 먹고 기력을 찾아가는 참이다. 그것은 고진호씨의 끈질긴 설득 탓도 있었지만 고영무가 전화를 해 온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네 이놈들, 어디를 들어가려고 하느냐!"
사내를 밀치며 안방 쪽으로 다가가려던 고진호씨가 갑자기 허리를 숙이더니 응접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사내가 그의 옆을 지나는 고진호씨의 아랫배를 주먹으로 친 것이다. 입을 쩍 벌린 그가 이제 온몸을 둥그렇게 움츠리면서 응접실 바닥에 쓰러졌다. 주방 쪽에서 아줌마의 흐느껴 우는 소리가 갑자기 멈추었다. 사내들이 입을 틀어막은 모양이었다. 안방으로 들어간 사내 두 명은 마악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김영순 여사를 보았다. 한눈에도 병색이 완연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바깥의 소동을 들었는지 둥그렇게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웬 놈들이냐!"
그녀가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도둑이야! 도둑이야!"
머리맡에 놓인 약그릇을 집어던지면서 그녀가 악을 썼다.
"묶어! 입을 막어!"
당황한 사내들이 달려들어 이불자락으로 김영순 여사의 얼굴을 덮어씌웠다. 가죽점퍼 차림의 사내 한 명이 이불을 둘러씌운 그녀의 머리를 깔고 앉았다. 그녀가 발버둥을 치고 있었으나 이제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야, 테이프하고 끈 내놔."
가죽점퍼가 서 있는 사내에게 손을 내밀었다.
"할망구가 제일 귀찮아."
발버둥을 치던 그녀의 발놀림이 차츰 둔해지고 있었다. 동료에게서 끈과 테이프를 받아 쥔 사내가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들었다. 그녀는 반듯이 누워 있었다. 다른 사내는 그녀가 다시 소리칠 것에 대비해서 허리를 반쯤 숙이고 있다. 이불을 젖힌 가죽점퍼는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문 김영순 여사의 얼굴을 보았다. 얼굴색이 하얗게 되어 있었는데 숨을 쉬는 것 같지가 않다. 서 있던 동료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죽었다."
눈살을 찌푸린 그가 짧게 말했다.
"젠장, 심장마비야."
가죽점퍼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베개를 반듯하게 놓고 이불을 펴서 몸 위에 덮었다. 무릎을 펴고 일어서던 가죽점퍼는 손바닥으로 그녀의 눈을 쓸어내렸다.
"재수없군,"
어깨를 치켜올리면서 가죽점퍼는 자기 동료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이제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서랍이란 서랍은 모두 열어서 방바닥에 쏟아 놓았다.
"영감, 묻는 말에 고분고분 대답하란 말이야. 나이 먹었다고 봐주지 않을 테니까 알아들었어?"
앞에 앉은 사내가 눈을 부릅떴다.
"쓸데없는 소리나 고함을 질렀다가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목을 틀어 놓을 거요."
사내들이 온 집안을 헤매며 난장판을 만들고 있었다. 책꽃이에 있는 책들도 모두 쏟아 놓고 그가 모아 놓은 꽃병들도 주둥이가 큰 것이면 뒤집어서 던져 놓는다. 고진호씨는 배의 통증으로 상체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손은 뒷결박이 되었고 다리도 묶였으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영감, 최대광이라는 놈 알지? 당신의 대림동 아파트에 숨겨 준 놈 말이야. 그놈이 테이프 맡겨 놓았지?"
고진호씨가 눈썹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여윈 얼굴이었으나 사내는 그의 시선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네 이놈, 나를 죽여라."
어금니 사이에서 그의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말 못 한다. 그러니까 죽여라."
"허어, 이 영감이."
사내는 삼십 대 초반으로 머리가 조금 빗겨진 데다가 눈이 가늘었다. 딱 벌어진 어깨를 한번 흔들고 난 그가 대뜸 주먹을 휘둘러 고진호씨의 관자놀이를 쳤다. 고진호씨가 소파 위로 쓰러졌다.
"얼마나 오래 견디는가 보자."
고진호씨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자 머리를 건들거리던 그가 얼굴을 바로 세우는가 했더니 사내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죽여라, 이놈아."
한숨을 토하듯 그가 다시 말했다. 사내가 다시 그의 배를 쳤다.
"그래, 죽여 주마."
"이놈, 나는 다 아는데 말을 안 한다. 내 입에서 말이 나오게 해보아라."
사내는 이제 눈을 치켜뜨고 이성을 잃었다. 고진호씨의 온몸을 닥치는 대로 두들기던 그는 숨을 헐떡이며 쓰러져 있는 고진호씨를 내려다보았다.
"이 지독한 영감."
집안을 온통 뒤져 놓은 사내들이 어느덧 그의 주위에 몰려 있었다. 안간힘을 쓰듯 고진호씨가 머리를 들었다. 온 얼굴이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놈아, 나는 아는데 말 못 해. 그러니까‥‥‥‥"
그는 머리를 응접실 바닥에 떨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