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호반의 연정(At daggers drawn) 1

호반의 연정(At daggers drawn)

Margaret Mayo

 

윈더미어 호수 지방의 어느 외과 간호사로 간 테리. 의사 브레이든과의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려는 찰나에 느닷없이 옛 남자친구 마이클이 눈앞에 나타난다.

 

1

! 하는 소리에 테리는 깜짝 놀라며, 간신히 인도 쪽으로 차를 갖다 붙였다. 속으로 욕을 주절거리면서 그녀는 차에서 내려 펑크난 바퀴를 살펴보았다. 하필 오늘 같은 날에, 그것도 이런 곳에서 펑크가 나다니!

도로는 회색 리본처럼 길게 앞으로 뻗어 있었다. 그녀가 누군가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순간에 그 도로 위에는 사람이란 그림자도 하나 안 보였다. 높은 언덕이 길 양쪽으로 이어져 있고, 멀리 호수의 수면이 햇빛에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다. 그렇지만 주말을 즐기는 그 수많은 인간들은 다 어디로 가버리고, 이곳 호수가 있는 마을에는 단 한 사람도 얼씬거리질 않는단 말인가?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연장통에서 스패너를 꺼내들었다. 이 연장은 오빠가 지난번 생일 선물로 사준 것이다. 그때는 별로 달갑지 않게 받은 것이었으나, 지금 생각하니 역시 리차드의 사려 깊음에 테리는 감탄했다. 또한 간단한 자동차 정비 방법을 가르쳐 준 것에 대해서도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무릎을 꿇은 자세로 단단하게 죄어진 너트에 매달려서 씨름을 하고 있을 때, 뒤에서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도와 드릴까요?"

테리는 깜짝 놀라서,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키가 껑충하니 큰 사내가 허리춤에 손을 걸친 자세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하얀 셔츠는 팽팽하게 부풀어 있어서, 그의 탄력있는 가슴을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짙은 갈색 목 위로는 햇볕에 바랜 듯한 갈색 머리카락이 드리워져 있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그의 길고 곧은 콧마루 위에 검은색 안경이 걸쳐져 있어 그의 눈동자를 볼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의 입술은 두툼하고 육감적이며, 의미있는 미소를 짓고 있다.

테리는 자수정 눈빛을 반짝이며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은빛 금발 머리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

"이제까진 이런 일이 없었어요. 저 너트가 꼼짝도 안하는군요."

"자동차 바퀴를 갈아끼우기에는 당신은 너무 연약해요.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다 했소?"

그의 목소리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울려 나오는 것처럼 매우 부드럽고 깊은 것이었다.

테리는 양손을 허리에 얹고 턱을 높이 쳐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기를 무시한 듯한 태도에 화가 난 듯이 쏘아붙였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무기력한 여자가 아니에요. 그리고 필요로 할 때마다 남자친구가 항상 옆에 있어 주는 것도 아니니까, 나 스스로 할 수밖에 없잖겠어요?"

"내가 마침 때맞춰 이곳을 지나던 길이어서 다행이오."

그녀의 항의하는 태도에 조금도 싫은 내색이 없이 그는 껄껄 웃었다.

그녀는 그의 눈에서 선글라스를 벗겨내고 표정을 보고 싶었다.

"저 너트나 좀 풀어 주시겠어요? 댁을 귀찮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리고 나도 충분히 할 수가 있지만, 오늘은 새 직장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라서 늦으면 굉장히 곤란하거든요. 펑크 때문에 첫인상을 구길 것 같아서 그래요."

테리는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빠르게 지껄이고 있다고 느꼈지만, 그러나 이 사내는 어딘지 모르게 흔한 여느 사내들과는 다른 묘한 기분으로 자신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검은 안경 뒤에서, 자기를 남김없이 발가벗기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당신 말을 믿지 않을 남자는 한 사람도 없을 거요. 특히 그 예쁜 얼굴에 시커먼 기름까지 묻어 있는 걸 보면 어떻게 안 믿을 수 있겠소?"

"어머, 그래요? 그러면 화장을 다시 해야겠군요. 더 늦어지게 생겼네"

그녀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 아름다운 자줏빛 눈동자로 한번만 바라보면 모든 것이 용서되고 말 거요. 걱정할 거 없소."

그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너트를 풀어내면서 말했다.

"이 직장을 못 잡으면 고민이에요."

"누구도 당신을 고민에 빠뜨릴 만한 강심장을 갖고 있진 않을 거요."

그는 바퀴를 빼내어 일어섰다. 그의 미소는 따뜻하고 진실해 보인다.

"정말 그러면 다행이겠어요. 이제부터는 제가 할 수 있어요. 고마와요."

"안 돼요. 차바퀴를 가는 일은 숙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테리는 턱을 쳐들고 그를 노려보았다.

"왜 여자는 그런 일을 하면 안 되나요? 남자들이 그런 식으로만 여자를 길들이니까 우리 여자들은 갈수록 점점 더 나약해진단 말예요. 차라리 걸어가는 편이 낫겠어요."

이런 스타일의 남자라면 딱 질색이다.

"당신도 소위 여성해방운동에 동조하는 여자요?"

그는 마치 그녀의 표정을 느긋하게 즐기듯이 바라보며, 손으로 재빨리 스페어 타이어를 갈아끼웠다.

"생각하기 나름이죠, ."

테리는 그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의 손은 멋있고, 손톱은 짧고 깨끗하다.

"나는 아직도 남자가 나를 위해서 문을 열어 주고 코트를 받아 주길 바래요. 그리고 아름다운 옷과 값비싼 향수를 사랑하죠. 하지만 상황에 따라선 언제라도 바지차림에 스웨터를 걸치고 일터로 뛰어나갈 거예요."

그는 뒤를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희고 고른 치아가 얼핏 보인다.

"당신은 아주 적극적인 여성이군. 좋았어."

테리는 처음 만난 이 사내에게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여전히 선글라스 뒤의 그의 눈을 보고 싶었다. 그의 눈을 보지 않고서는 마치 그림자와 얘기하고 있는 듯한 꺼림칙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전 말예요, 여자가 남자의 직업을 갖는 것도 반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여자라고 해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남자만 쳐다보고 있는 여자들을 보면 정말 한심하게 느껴지거든요."

바퀴를 고정시킨 후 그가 일어났다. 기골이 장대한 그의 뒷모습에 테리는 다시 한번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아부래도 그의 강렬한 남성적 매력을 무시할 수가 없다.

"아무리 아름다와도 무기력한 여자라면 매력이 없지요. 보다 지적이고, 남자를 대신할 수도 있고, 남자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여자를 나는 좋아해요. 게다가 미인이라면 더욱 금상첨화겠지."

, 그의 눈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테리는 생각했다. 그는 지금 나와 말장난을 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그의 말 속에 다른 어떤 의미를 감추고 있는 건가? 그는 지금 바로 앞에 서 있다. 그의 얼굴에서 풍기는 고급 화장품 냄새가 신경을 자극한다.

"아직 미혼이란 말씀예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한 적은 없었소."

그는 자신의 시계를 힐끗 보고 나서 말했다.

"나도 늦었군. 빠른 시간 내로 펑크 난 타이어를 손보도록 하시오."

헤어진다는 생각을 하니까 괜히 숨쉬기가 거북해지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 사람처럼 적극적이고 독단적인 남자를 아직까지 만나본 적이 없다. 테리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마와요, 도와 주셔서. 성함이?"

그는 웃었다.

"나는 키엘이라고 하오. 당신은?"

"테리."

그녀는 그의 손을 통해서 전해 오는 짜릿한 감정을 억누르며 그의 검은 랜즈를 바라보았다.

"댁이 그냥 지나쳤으면 나는 아직도 저 바퀴와 씨름을 하고 있을 거예요. 나 때문에 너무 오래 지체하신 건 아닌지?"

그는 손을 놓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을 알게 된 것으로 이미 보상을 받은 셈이오, 테리. 아마 우린 또 만나게 될 거요. 나는 어지간히 싸돌아다니는 편이니까."

"나도 그러길 바래요, 키엘."

그것은 진심이었다.

"이젠 서둘러야겠어요. 다시 한번 감사해요, 키엘 씨."

그녀는 운전석으로 올라가서 시동을 걸었다. 차를 출발시킨 그녀는 백미러를 통해서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테리는 이때까지 그처럼 강렬한 매력을 발산하는 남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결혼할 마음까지 가졌던 그레그까지도 이처럼 첫눈에 반하게 만들지는 못했었다. 어떻게 처음 만난 남자에게 이렇게 매료될 수가 있을까? 생각할수록 자신이 바보스럽고 속없는 여자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어차피 그와는 다시 만날 가능성이 있을 것 같지 않아서 그에 대한 일체의 생각을 마음속에서 지워 버리기로 했다. 그 대신 이제 곧 병원에 도착하면 어떻게 첫인상을 좋게 보여서 호감을 얻을 수 있을까에 대해서만 생각을 모으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취직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었다. 그래서 닥터 브레이든이 면접도 하지 않고 일자리를 제공하겠다고 했을 때, 테리는 하늘을 오를 것 같은 기분이었다.

리차드는 물론 자신이 다른 곳으로 나가서 살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오빠로서 동생에게 베푸는 친절일 뿐이지 어느 신혼부부가 자기들 두 사람 외에 딴사람과 함께 살기를 원할까?

그래서 테리는 이 호수지역의 병원에서 간호사를 구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얼른 지원서를 냈던 것이다. 어쩌면 지난 2년 동안 겪어온 그 지독한 소음공해와 대기오염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축복의 기회라고 생각되기도 했던 것이다.

차가 윈더미어 호수 근처에 이르자, 주변의 아름다운 절경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화산작용으로 곱사등처럼 벗겨진 산들이, 숲으로 까맣게 우거진 작은 산들에 둘러싸인 채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고, 계곡은 호수까지 이어적 내려오고 있다.

호수 위에는 나비의 날개처럼 눈부신 돛을 단 요트들이 유유히 떠다니고 있다. 테리는 잠시 머무르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그녀로서는 처음 보는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다음에 더 좋은 기회가 있을 거라고 자신을 위로하며 계속 차를 몰았다.

몇 번이나 차를 세워 가며 길을 물은 끝에 그녀는 마침내 창고를 개조한 듯한 건물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겉으로 보기엔 건강진료소처럼 다소 초라해 보이는 건물이나, 현관 문에는 닥터 K.J. 브레이든이라는 이름과 닥터 B. 알렌이라는 이름의 청동 문패가 붙어 있다.

닥터 브레이든이라는 사람이 자신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겠다고 서신을 준 의사로서 알렌이라는 의사보다는 선배가 되는 모양이었다. 전화상의 그의 목소리는 매우 친절했다. 아마 이 호수지방에서 수년 동안 환자들을 보살펴 온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신사일 거라고 그녀는 상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닥터 알렌은 베리라는 이름의 남자로 최근에 의사 자격을 취득한 오빠의 친구다. 바로 그가, 테리의 오빠인 리차드에게 이 일자리에 대한 얘기를 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일자리를 지원하면서 베리의 이름을 팔지는 않았다. 자존심 때문이었다.

문은 쉽게 열렸다. 베리가 놀란 표정으로 다가왔다. 테리는 실로 오랜만에 그를 만난 셈이다. 그러니까 그가 의과대학에 진학한 이후부터 거의 만나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식을 아주 끊은 적은 없었다. 하다못해 크리스마스 카드라도 빠뜨리지 않고 보내왔다.

"나는 좀 더 빨리 올 줄 알았는데"

그는 그녀를 살짝 껴안으며 말했다. 그의 갈색 머리는 여전히 흐트러져 있고, 팔과 다리는 변함없이 길어 보인다. 그도 이젠 서른이 가까운 나이가 됐을 거라고, 그녀는 짐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소년 같은 웃음과 태도를 잃지 않고 있다.

"펑크가 났었어요."

그녀가 재빨리 변명을 했다.

"닥터 브레이든이 기다렸나요?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는데"

"안심해!"

그는 한 팔로 그녀를 안으면서 즐거운 듯이 바라보았다.

"외출중이니까. 테리가 오면 환영해 주라고 하더군."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군요. 그리고 의사가 된 걸 축하해요. 기어코 해냈군요."

베리는 원래 믿음직한 느낌을 주는 남자는 아니었다. 항상 웃고 농담하고 심각한 구석이라곤 한 군데도 없었으므로, 그가 무언가를 이루어낸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처럼 보였었다.

"테리가 믿고 성원해 준 덕택이지."

그는 싱긋 웃으며 그녀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올 생각을 했지? 나도 지원서류를 보곤 깜짝 놀랐어."

"베리 씨가 리차드 오빠한테 말하지 않았던가요? 구태여 이유를 말하라면, 평화와 고요를 찾아 런던을 떠나 이곳으로 왔다고 말할 수 있겠죠."

그녀는 그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갔다. 그곳은 놀랄 만큼 밝고 쾌적했으며 열대어가 담긴 어항이 한쪽 구석에 놓여 있었다.

"여기가 내 진료실이고, 이쪽은 나의 에동업자가 사용하고 있지."

그런데 두 개의 진료실은 겉으로 보기에도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베리의 방은 작고 초라하지만 그의 동업자 방은 널찍하고 으리으리하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죠?"

베리에게 물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원래 이곳은 한 사람의 의사만 있어야 할 곳이거든. 그래서 나는 그냥 아무 방이나 있는 것을 사용하다 보니까"

"그렇다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닥터 브레이든에게 환자가 많아서 베리 씨를 이곳으로 불렀다면 왜 적절한 시설을 제공하지 않는 거죠?"

"이제 내 진가를 보여 줄 때가 오겠지.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됐으니까."

그는 씁쓸하게 말했다.

테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속으로는 몹시 못마땅했다.

"그리고 여기가 테리의 사무실이야."

그는 '간호사'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문을 열어 보였다.

예상 외로 내부가 잘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안심이 되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좋은 것 같아요. 닥터 브레이든은 어떤 사람이죠?"

그는 얼굴을 찌푸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지."

"당신은 싫어하구요?"

그녀는 그의 말투에서 알력의 기미를 재빠르게 눈치채고 다시 물었다.

그는 얼른 머리를 저었다.

"그는 괜찮은 사람이야. 테리도 좋아하게 될 거야."

물론 자신도 그러길 원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전에 여기에 와서 사람을 만나보지도 않고 취업을 결정해 버린 것에 대해서 잘한 일인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그러나 이곳까지 와본 지금 그다지 후회할 것도 없었다. 도시에서 그다지 멀리 떠나온 편도 아니고 윈더미어 호수의 주변 경치는 상상 외로 좋았으니까.

그러나 닥터 브레이든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베리가 의심을 더해 주었다. 그의 편지는 상냥하고 예의발랐으나 그의 사람 됨됨이는 모르고 있다.

그러나 그런 불안감을 한편으로 밀쳐 두기로 마음먹었다.

"제가 거처할 곳을 보여 주세요. 브레이든 씨는 나만 좋다면 아파트를 사용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베리는 갑자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는 지금 내가 사용중이야, 테리. 딴 곳으로 옮기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직 적당한 곳을 못 찾았어."

"그러면 나는 어떡하죠?"

그녀는 실망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테리는"

그의 말은 때마침 문 밖에서 들려온 차 소리에 중단되었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놀랍게도 테리의 자동차 바퀴를 갈아끼워 준 그 키 크고 멋진 사내였다.

"밖에서 차를 보고 알았지. 당신이 테레사 데닝일 줄이야!"

그는 실내로 들어오면서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제야 테리는 그의 두 눈동자가 차가운 회색빛을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눈은 상대방의 아무리 작은 움직임도 놓치지 않을 만큼 날카롭고 냉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에 대한 호감으로 빛나고 있다.

그녀는 밝게 미소를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를 다시 만나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바로 닥터 브레이든이란 말인가? 그녀의 미소는 곧 지워져 버렸다.

"닥터 브레이든?"

"정식으로 자기 소개를 합시다. 나는 키엘 제롬 브레이든 의사요."

그녀는 가볍게 머리를 숙이며 그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면서도 강렬한 그의 개성이 다시 한번 그녀에게 와닿는다.

"테레사 데닝이에요. 잘 부탁합니다."

"이곳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부디 오래 이곳에 머물러 주시길, 편지에는 이곳으로 아주 옮겨오고 싶다고 했는데, 정말이오?"

그는 테리의 아래위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다. 왜 이렇게 예쁘장한 아가씨가 이런 시골구석에 파묻혀 살려고 할까 하는 얼굴이다.

"정말이에요."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그의 참모습을 본 그녀로서는 더욱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굳어졌다. 그는 무어라고 확실하게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 느껴진다. 따뜻한 인정과 강렬한 개성, 그리고 강한 남성미로 그녀를 첫눈에 사로잡고 있다. 테리는 그의 환자 중에서도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그와 사랑에 빠져 있을까 상상해 보았다.

"옮겨와야 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소?"

그는 아주 부드럽고 상냥하게 묻고 있지만, 그 표정 뒤엔 그녀에 대한 모든 걸 알고 싶어하는 강한 호기심이 숨어 있는 것 같다.

테리는 가볍게 넘어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냥 개인적인 이유예요."

그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남자 일로 이곳까지 피신온 건 아니겠지? 애인이 이곳까지 뒤쫓아와서 귀찮게 구는 사태는 없기를 바래요."

그는 어느 새 목소리까지 냉정하게 변해 있었다.

"그건 아녜요!"

테리는 그에게 구태여 자신의 파혼에 대해서까지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레그에 관한 한, 그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리고 자신으로서는 도무지 흥미가 없었지만, 자신을 그토록이나 집요하게 쫓아다녔던 마이클 웨스트에 대해서도 그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물론 그들이 런던을 떠나야 했던 이유들 중에서 조그마한 부분을 차지할 수야 있겠지만, 결코 전부는 아니다.

닥터 브레이든은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베리 쪽으로 돌아보았다.

"베리는 내 보조의사요. 그래, 베리가 당신을 잘 접대해 줬소?"

보조의사라구! 그의 말에 테리는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두 사람의 나이차는 적어도 6, 7년은 되는데도 지금 두 사람은 전혀 나이 차이가 없어 보인다.

"베리 씨와는 수년간 서로 친분이 있는 사이예요. 그래서 이곳이 마치 우리 집처럼 느껴져요."

테리가 별 생각없이 한 이 말에 닥터 브레이든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다.

"지원할 때 왜 진작 그 말을 안했소?"

그의 회색 눈동자가 얼음처럼 싸늘해지고, 벨벳처럼 부드럽던 그의 말소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테리는 당황했다.

"그의 힘을 빌어서 취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 다 나에게 그 사실을 감추고 있었군!"

그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소리쳤다. 베리는 테리에게 계면쩍은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우물쭈물하고만 있다.

"브레이든 박사님, 그건 오해예요. 베리 씨는 제가 여기를 지원한 사실도 모르고 있었어요. 나는 그가 박사님께 말씀드린 줄 알았어요, 박사님이 저를 채용하기로 결정한 다음에 말예요. 그런데 그렇게 화를 내시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는데 말예요."

그는 머리를 저었다.

"내가 그 말을 믿으리라고 생각하오? 여자에 관한 한 나는 베리의 말을 손톱만큼도 믿지 않소. 이건 뻔한 일이란 말이오."

테리는 그가 완전히 달라진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넘치던 매력은 다 어디로 가고, 그의 얼굴에는 분노와 경멸만이 가득차 있다. 도대체 그가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베리는 왜 그렇게 한마디도 대꾸를 못하는지. 자신을 변호해 주기는커녕 어정쩡한 표정으로 쥐구멍을 찾고 있는 모습이니, 뭔가 잘못된 것임이 분명했다.

"내가 끝까지 모를 줄 알았소? 도대체 데닝 양은 내가 바보인 줄 알았소?"

테리는 머리를 흔들었다.

"물론 아니예요. 하지만 정말 베리 씨는 내가 이 일에 지원한 줄을 모르고 있었어요. 그가 내 오빠에게 얘기는 했지만, 지원할 줄은 그도 몰랐다구요. 이건 사실이에요."

그는 콧방귀를 뀌었다.

"베리는 내가 잘 알고 있소. 그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겠지. 간호사로 온 아가씨는 자기 품안에 안길 것이고, 그 다음엔 침대로 데려갈 거요. 그가 아파트를 빨리 비우지 않는 이유를 알 만해!"

그의 차가운 눈길이 그녀의 감발 머리에서 희고 깨끗한 샌들까지 남김없이 훑고 내려갔다. 다시 한번 그녀는 발가벗겨지는 기분이었다.

"내 생각엔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소, 데닝 양. 채용은 취소하겠소."

그녀는 턱을 쳐들었다.

"그건 부당해요! 베리와 나는 단순한 친구일 따름이에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란 말예요!"

"그걸 어떻게 믿소?"

"베리!"

그녀는 그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제발, 말 좀 해주세요.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지만 말고. 박사님이 오해를 하고 있다고 말예요."

"테리의 말은 사실이오."

베리가 마지못해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별로 신빙성이 없어 보였다. 테리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베리는 혼자서도 말할 줄 알아요, 데닝 양."

브레이든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

"베리가 당신의 도움 없이는 말을 못할 지경이라면, 더 이상 얘기할 것도 없지. 베리는 가책을 느끼고 있는 거요. 그러니 당장 나가시오!"

테리는 그가 이성을 잃은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는 왜 그렇게 베리를 불신하고 있는 건가? 문득 테리는 베리의 주벽으로 인한 조그만한 사건 하나를 기억해냈다. 자신이 16번째 생일을 맞던 해였다.

그는 테리에게 이제는 매우 아름답고 성숙한 여인이 되었다면서, 이젠 더 이상 리차드의 어린 여동생이라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니 그와 함께 성인다운 쾌락을 즐겨 보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그녀는 너무나 놀랍고 불쾌하여 그에게 마구 비난을 퍼부었다. 다음에 만났을 때 그는 테리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 사건은 그 이후로 뇌리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오늘 베리가 자기를 잠깐 포옹했을 때까지도 자신이 그 사건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자그만치 7년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어때? 내 말이 과히 틀리지 않았을 걸?"

브레이든이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유감이지만 틀렸어요!"

그녀는 펄쩍 뛰면서 항의했다.

"그리고 박사님은 내게 단 한번의 기회도 주지 않고 해고할 권리가 없어요. 나는 이곳이 조용해서 마음에 들고, 또 내가 맡은 일을 잘 해낼 수 있단 말예요."

그는 냉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코레스 박사는 당신을 좋게 얘기했지만 나는 바보가 아니오. 베리와 당신이 짜고 나를 멋지게 속여넘기려 했지만, 그렇게는 안 될 거요."

"키엘, 제발 그쯤 해둬요!"

베리가 마침내 못 참겠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테리의 말은 정말이오. 우린 최근 몇 년 간 서로 만난 일도 없어요. 그리고 키엘, 지금 이 병원에선 그녀의 도움을 필요로 하잖소? 최소한 몇 주간의 기회라도 주는 게 어떨까요?"

"그 몇 주는 너에게 필요한 것이겠지?"

키엘은 그를 노려보며 빈정거렸다.

베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키엘이 꼭 그렇게 생각한다면 하는 수 없지, . 나는 다만 테리의 사정이 딱해서 한 소리예요. 키엘, 지금 테리 양을 해고하면 그녀는 또 실업자가 될 겁니다."

"여기까지 네 뒤를 쫓아올 때는 그 정도의 각오는 했을 테지. 하지만 네 말대로 나는 그녀가 필요하기도 해. 데닝 양, 당분간은 머물러도 좋소. 내가 다른 간호사를 구할 때까지 말이오."

그는 강바닥의 조약돌처럼 차갑게 반짝이는 회색 눈을 그녀에게 돌리며 말했다.

테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무어라고 한마디 더 했다가는 그의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어떻게 하든지간에 자기와 베리 사이가 깨끗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는 것과 그래서 그가 자신을 더 오래 머물게 할 생각이 들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의 좋았던 첫인상은 이제 깨끗이 사라져 버리고, 그는 이제 자기를 잠시 이용하려는 한낱 이기주의자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그게 진정한 키엘 브레이든의 모습이라고 테리는 단정했다.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고마와요, 박사님. 매우 관대하시군요'라고 말할 수도 없다. 결코 그는 호의를 베푼 것이 아니다. 베리와의 관계만 깨끗이 밝혀지면, 그날로 이곳을 박차고 나가 버릴 생각이다. 그러면 그와도 영원한 작별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일은 역시 일이다. 일단 간호사로 일을 시작하게 되면 좀처럼 그 자리에서 빠져나가기가 어려운 법이다. 간호사는 헌신을 요하는 직업이니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베리는 닥터 브레이든에게 바람둥이로 아예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래서 브레이든은, 테리도 그의 많은 여자 중 하나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라는 걸 깨우쳐 주어야만 한다.

그녀는 베리가 거들고 나선 것을 속으로 기뻐했다. 그렇게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그가 닥터 브레이든을 몹시 두려워하는 줄로만 알았다.

"이제 나는 베리가 왜 아파트를 옮기지 않고 질질 시간을 끌고 있는지 알았어. 그리고 데닝 양, 당신과 베리 사이에 아무 관계도 없다는 당신 말이 진실이라면 이제부터가 큰일이로군. 왜냐하민 아파트를 그와 함께 공동으로 사용해야 할 테니까 말이오."

그는 입가에 냉소를 띠우고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테리는 싫은 표정을 지어 보임으로써 그를 즐겁게 만들어 주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아파트에 침실이 둘 있다면 상관없어요. 남자랑 같이 한집에서 지내는 데는 익숙해져 있으니까요."

그는 얼굴이 시뻘개지며 눈살을 찌푸렸다.

"데닝 양, "

그녀는 그의 말을 댕강 자르며 계속 말했다.

"저의 오빠랑 말예요. 그리고 베리 씨는 저에게 오빠나 다름없는 분이에요."

그의 불을 삼킨 듯한 표정을 보고 테리는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그의 그 같은 과잉반응은 실로 웃기는 일이었다. 때마침 전화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키엘이 낚아채듯 수화기를 들더니, 신중한 태도로 상대방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베리에게 말했다.

"랭턴 씨의 부인이 쓰러졌다는군. 네가 빨리 가봐."

베리는 무어라고 항의를 하려다가 맥없이 주저앉으며 테리의 얼굴을 보고는 풀썩 웃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왕진가방을 챙겨서 나가 버리고 말았다.

"당신은 나와 베리 씨를 잘못 알고 있어요."

단둘이 남게 되자 그녀는 다시 그에게 설명하고 싶었다.

"그래요?"

"그렇고말고요. 당신은 독선이 지나쳐요. 나이에 비해서 말이에요."

그녀의 말투는 다분히 공격적이고 단호한 것이었다. 실내의 분위기가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그러자 그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으면서 이빨 사이로 뱉어내듯 말했다.

"나도 당신의 말을 믿을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소. 그렇다면 나는 기쁘게 사과할 거요."

"그럼, 왜 믿지 못하죠?"

그녀가 재빨리 그의 말을 받았다.

"그건 진실이에요. 베리는 내가 여기에 지원한 사실조차도 몰랐어요."

그의 손아귀는 억셌다. 그녀는 손을 빼려고 애를 썼으나 통증만 돌아왔다.

테리는 지금 그를 매우 가까운 곳에서 느끼고 있다. 그의 야성적인 남성미와 관능적인 힘이 자신을 말없이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다.

"화났어요, 테레사?"

강철처럼 차갑고 날카롭던 그의 눈이 부드럽게 풀려 있다.

"당신의 옛 남자친구에 관해서 듣고 싶지 않소? 당신은 이제까지 그를 독차지하고 있었다고 믿고 있소? 베리는 한 여자로는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녀석이오. 그는 여자란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하다고 믿고 있는 축이지."

그는 자수정 같은 그녀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나와 베리는"

"알아요. 순수한 친구 사이란 말이지. 그런 유치한 말은 치워요, 테레사. 나는 믿지 않아. 베리에 관한 한 내가 당신보다 더 잘 알고 있소."

"어떻게 그런 말을? 그와는 거의 같이 자라다시피 했어요. 한때는 우리 집을 거의 매일 들락거렸어요. 나는 그의 성장과정을 봐왔단 말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아름다운 숙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가 눈치챈 것만큼은 당신도 모르고 있다는 말이오."

그는 그녀의 손목을 놓아 주고, 대신에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받쳐들었다.

"특히 이런 아름다운 입술을 가진"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테리는 피할 수가 없었다. 그가 키스를 해왔을 때, 그녀는 자신이 환희의 연못 속으로 풍덩 빠져드는 듯이 나른했다. 이전의 그 누구로부터의 키스도 이만큼 짜릿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문득,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어느 새 두 손을 그녀의 등 뒤로 돌려, 그녀를 자기의 앞가슴에다 힘껏 밀착시키고 있었다. 테리는 지금 저항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먹으로 때리든 따귀를 치든 어떻게라도 그의 팔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그에게 완전히 항복해 버린 것처럼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다. 반격은 고사하고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두 팔로 그의 목을 감고, 키스에 열렬히 화답하고 있었다. 자신을 이곳에서 쫓아 버리려고 했던 적에게 왜 이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 순간은 불과 몇 초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그녀에게는 몇 년이나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팔을 풀고,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왜 그러셨죠?"

테리는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온 듯 낯을 붉히며 그에게 물었다. 그의 키스에 반응을 보인 자신이 못마땅하게 여겨지는 표정이다. 도대체 나는 왜 그랬을까? 그는 회색빛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냉소적인 웃음을 지었다.

"나는 나의 친애하는 동생이 불러들인 새가 어떤 종류인가를 스스로 확인해 보고 싶었소. 그리고 당신은 나에게 충분히 대답을 해준 것 같군."

 

2

"동생이라구요?"

테리는 놀란 얼굴로 키엘을 바라보았다.

"베리 알렌이 어떻게 당신의 동생이 될 수 있죠?"

"정확하게 말하면 나의 의붓동생인 셈이지."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남자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이제 그의 이러한 태도변화가 다만 무례하고 독선적인 자신의 성격을 감추기 위한 가면이라는 것을 테리는 알게 되었다.

"몰랐어요. 베리는 한번도 당신에 관한 얘기를 한 적이 없었거든요."

그녀는 베리의 어머니가 사망하고 그의 아버지가 재혼을 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베리는 집을 나와서 살면서, 자신의 가족에 대한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린 서로 사랑을 나눌 만한 처지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나는 건달을 상대할 시간은 없었으니까."

"베리는 건달이 아니예요!"

그녀는 단언하듯 말했다.

"건달이라면 어떻게 이곳에서 일하고 있겠어요?"

"그건 어머니와 의붓 아버지의 부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거요. 두 분은 그렇게 함으로써 베리가 마음을 잡을 거라고 생각하신 거지."

정말 베리가 그렇게 형편없는 건달이란 말인가? 그녀는 다시 옛날을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기억에는, 베리는 오빠인 리차드와 함께 어울려 다니던 생각밖에는 특별히 이렇다 할 나쁜 점은 없었다.

그는 대학을 진학한 뒤에도 해마다 두세 번씩은 그녀의 집으로 놀러와서 리차드와 함께 어울리곤 했다. 그들의 화제란 으레 여자 얘기가 아니면 파티 얘기, 팝송 따위에 관한 게 대부분이었다. 키엘이 말하는 대로 그렇게 나쁜 청년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키엘은 베리에게 무슨 악감을 품고 있는 모양이다.

"그가 건달이라면 어떻게 의사가 될 수 있었죠?"

그녀는 항의하듯 키엘에게 따지고 들었다.

키엘은 조롱하듯 콧방귀를 뀌었다.

"녀석은 마지막 시험에서 두 번이나 실패하고, 세 번째에 가까스로 턱걸이를 했지. 책과 씨름하기보다는 여자들과 노닥거리기를 더 좋아했으니까. 만약 나와 전혀 관계없는 남이었다면, 그런 녀석은 내 병원 안에 들여놓지도 않았을 거요."

"어쨌든 내가 여기에 오게 된 것은 그와는 아무 관계없는 일이에요."

키엘은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베리와 한 아파트를 쓰겠다고 말했을 때, 나는 더욱 확신하게 되었소. 당신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환영했지."

그는 비꼬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테리는 속이 끓어올랐다. 정말 메스꺼운 사내야! 이런 인간에게 키스를 허락하다니.

"그는 오빠의 가장 친한 친구예요. 그리고 나는 지금 당장 갈 곳이 없구요!"

"그러시겠지. 어쨌든 베리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두고 보면 알 수 있겠지."

"그래요, 그러니까 이제 그 아파트나 좀 보여 주시면 고맙겠군요. 너무 피곤해서 좀 쉬어야겠어요."

"나에게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말씀?"

"그래요!"

"내가 당신의 기대에 못 미쳤나 보군."

"생각보담 너무 젊은 것 같군요."

"그게 모두요?"

"그리고 의사로서는 좀 불친절하고 지나치게 성급한 것 같구요."

그녀는 거리낄 게 없다는 듯이 말해 버렸다.

"지금은 환자를 상대하고 있는 게 아니잖소?"

"다행이군요. 그게 박사님의 본래 성품이 아니라니 기뻐요."

"베리는 이따금 나의 성미를 뒤틀어 놓지."

"내가 베리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생각해 볼 여지도 없이 나를 베리와 똑같이 취급하시는 거예요?"

"그럴 생각은 없소."

그의 눈빛이 약간 부드러워졌다. 그가 한걸음 가까이 다가오자 그에게서 깨끗하고 신선한 향기가 풍겨왔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잡아끄는 강렬한 매력을 느꼈다. 그녀는 그가 다시 그 강한 두 팔로 자신을 껴안고, 그의 차가운 입술로 힘껏 키스해 주기를 바랐다.

"당신의 짐을 날라 드리지."

그가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테리는 실망감을 감추고 말했다.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어디로 가면 되는지 알려만 주세요."

"남자의 호의를 무시하는 건 예의가 아니오, 테레사."

"미안해요. 하지만 나는 언제나 내 일은 내가 해요."

"예쁜 만큼 고집도 세군. 당신과 여러 해 동안이나 사귈 수 있었던 베리 녀석이 부럽구먼."

그는 문을 열고 테리의 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그의 뒤를 따라가며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그가 자꾸 좋아진다.

아파트는 병원건물 맞은편에 있었다. 내부시설은 허술했지만 비교적 지낼 만한 곳이다. 거실이 한 개, 주방, 조그마한 침실이 두 개, 욕실이 하나 있다.

키엘은 그 중 한 침실로 그녀의 짐을 옮겼다. 그의 눈초리가 그녀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테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와 베리와의 관계가 깨끗하다는 사실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밝혀지겠지.

짐을 다 옮기고 나서 그는 말했다.

"오늘은 쉬도록 하시오. 출근은 8시 반이오."

그가 가버리자 아파트는 텅 빈 것만 같았다. 마음도 동시에 텅 비어 버린 느낌이다.

그녀는 맨 먼저 리차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가 펑크난 일과 키엘과의 만남, 그리고 그가 품고 있는 자신과 베리와의 관계에 대한 의심으로 이곳에서도 오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배가 고파 빵을 구웠다. 그리고 빵에다 치즈를 발라서 커피와 함께 먹기 시작했다. 아파트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바깥 경치는 정말 아름다왔다. 윈더미어 호수와 함께 마을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이쪽에서부터 펼쳐져 나간 풍성한 푸른 목장의 초지가 반짝이는 강을 끼고 폭포까지 이어져 가다가 갑자기 하늘로 비상해 버린 것 같다. 테리는 피로감도 잊고, 탐험을 나서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재빨리 샤워를 마치고 가방 속에서 진 바지를 꺼내 입었다. 이제까지 한 번도 호수를 본 적이 없었으므로 이번 기회에 꼭 가보고 싶었다.

큰길을 따라서 걷다가 계곡으로 향하는 사잇길로 접어들었다. 그 오솔길을 따라가니 강이 나타났다. 호수로 이어지는 작은 강이었다.

그녀는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서 푸른 하늘을 쳐다보았다. 햇볕이 피부를 간질이고, 종달새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은구슬을 굴리는 듯한 소리로 울어댄다. 바람이 불어와서 풀잎이 스치는 소리가 솨아 하고 들려온다. 물소리와 벌레소리도 함께 어우러지고 있다.

생각은 다시 키엘에게로 돌아갔다. 자동차 바퀴를 갈아 끼워 줄 때만 해도 그는 신사였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매력있는 여성으로 흥미 있게 여기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기분이 엉망이다. 그가 키스를 했지만, 그것은 자신을 시험해 보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의 키스를 쉽사리 지워 버리기가 힘들었다. 그의 키스는 이제까지 그 어떤 남자도, 그레그까지도 붙이지 못했던 불꽃을 마음속에다 밝혀 놓았다.

테리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자기의 입술을 더듬으며 그의 키스를 되새기고 있다. 눈을 감으면 그의 격렬했던 입술과 북소리처럼 둥둥 울리던 가슴의 고동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가 내게 그럴 권리는 없었어. 그런데도 그가 그렇게 해주는 것이 왜 그렇게 기쁘게 느껴졌던 걸까.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서 아파트로 돌아왔다. 아파트 내부는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고요했다. 런던에서와는 달리 여기는 자동차 소음도,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새소리와 양의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 등이 멀리서 이따금씩 들려올 뿐이다. 테리는 베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베리가 돌아왔을 때, 그는 무척 피로한 모습이었다. 테리는 준비해 둔 뜨거운 커피를 따라 주었다. 그는 천천히 커피를 들이키면서 대뜸 물었다.

"키엘이 얼마나 오래 있었지?"

"금방 갔어요. 2, 3분 정도?"

그 정도면 키스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지! 베리는 의혹의 눈초리를 그녀에게 던졌다.

"그는 당신이 의붓동생이라고 말해 주더군요. 나는 전혀 몰랐어요."

그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우린 서로 미워하는 사이지. 둘 다 의사가 되려고 했던 게 잘못이야."

"부모님의 뜻이라면서요?"

"그렇지만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도무지 키엘의 비위를 맞출 수가 없었어. 정말 지겨워!"

"환자들은 어때요?"

"그들도 나를 별로 신용하지 않아. 그저 키엘이 제일인 줄로만 알지. 나는 신출내기라는 거야."

"세월이 좀 흘러가면 달라질 거예요."

테리는 미소를 지었다.

"키엘도 처음에는 그랬을 테니까. 그가 펑크난 내 자동차의 바퀴를 갈아 줄 때만 해도 나는 그가 의사인 줄 전혀 몰랐어요."

"그래서 두 사람이 알게 됐군. 그래, 그를 어떻게 생각해?"

테리는 얼굴을 찡그렸다.

"정말 어려운 사람이에요. 그렇게 변덕이 심한 사람은 처음 봤어요. 그래서 아직도 결혼을 못하고 있는 모양이죠?"

"아가씨들이야 많았었지. 하지만 그는 항상 일이 우선이야. 그래서 다들 떠나 버렸어. 그가 왜 일반 진료의사로 남아 있는지 알 수가 없어. 그는 영양학에 대해서는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지. 오로지 거기에만 매달려 있어."

베리의 말에 테리는 오히려 키엘에 대한 호감이 깊어졌다. 그렇다면 키엘은 정상을 향해서 끝없이 전진하는 사나이가 아닌가? 오로지 의사라는 직업에만 평생을 바칠 그런 남자는 아닌 것 같다.

"당신은 어때요? 그런 야망을 가지고 있나요?"

그는 싱긋 웃었다.

"인생을 즐겁게 살아야지. 하지만 이 시골구석에선 틀렸어. 어머니가 고집하셨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키엘과 함께 있는 거야. 어머니는 내 생활방식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키엘이 말한 게 사실이군요?"

그녀는 놀란 척하며 소리쳤다.

"그가 뭐랬는데?"

"당신은 여자라면 이골이 났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시험엘 두 번씩이나 실패했지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놀랐어요. 부끄럽지도 않아요, 베리! 내가 한 축하의 말은 취소하겠어요."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서 나를 앞으로 달리 보겠다는 거야?"

그는 얼굴을 바싹 가까이 갖다 댔다.

테리는 큰소리로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도 당신은 내게 오빠나 다름없어요. 달라질 건 없어요."

그러나 그녀를 보는 그의 눈빛은 오빠라기보다는 오히려 남성의 그것이었다. 테리는 그의 시선이 거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여기서 한 7km 정도만 가면 말이야, 스테이크를 기막히게 만들어 주는 곳이 있어. 거기나 갈까?"

테리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베리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그 나이의 건장한 남자라면 다 그러니까, 딱히 문제될 건 하나도 없다.

테리는 연한 초록색 치마와 재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실크 스카프로 머리를 단정하게 감쌌다. 오늘 저녁을 충분히 즐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오늘 낮시간은 완전히 잡친 셈이다. 일자리는 기분 나쁜 쪽으로 결정되었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게 되었다. 도대체 오늘 저녁을 즐기지 말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레스토랑은 호숫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수면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건너편의 산과 나무들이 수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고, 빨간 돛을 단 요트가 매우 우아한 모습으로 그 위를 소리없이 지나가고 있다.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조용하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테리는 모든 시간이 정지해 버리고, 인생은 자신의 존재를 무시한 채 그 곁으로 흘러가는 듯한 착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호수는 시간감각과 함께 일상의 모든 압박감까지도 앗아가 버린다. 언제나 바쁘고 시끄러운 일상에서 벗어나, 이처럼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으로 나온다는 것은 분명 신선한 충격임에 틀림없다.

"무슨 생각?"

베리가 그녀의 상념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냥 이곳이 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곧 지루해질걸. 더군다나 겨울이 돼보라구!"

그는 지겹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때는 완전히 별천지가 되겠군요. 이 언덕들은 모두 눈으로 뒤덮이고, 호수는 얼어붙어 마치 작은 스위스 같겠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탄성에 가까왔다.

"온통 무덤처럼 삭막해지지."

베리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게다가 길은 눈으로 막히고, 며칠씩이나 갇혀서 꼼짝도 할 수 없게 되면 그때는 정말 못 참을걸."

"환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면 골치 아프겠군요. 더군다나 야간에 말예요."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던 베리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저길 좀 봐, 누가 들어오고 있는지!"

테리는 그가 가리키는 쪽을 돌아다보고는 숨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키엘이 갈색 줄무늬 셔츠에 깨끗한 베이지 색 양복으로 갈아입은 모습으로 레스토랑을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전보다 더 키가 커보였고, 실내에서 가장 눈에 확 띄는 모습이다.

그는 알고 있었다는 듯이 똑바로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 그의 거침없이 당당한 걸음걸이는 맹수의 그것을 연상시켜서, 그녀는 자신이 마치 그의 먹이나 된 듯한 착각에 몸을 떨었다.

테리는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만들면서 그를 맞았다. 그의 싸늘한 회색 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순간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을 멸시하는 듯한 그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기대로 몸을 떨고 있는 자기 자신을 저주했다.

"여기에 있을 줄 알았지. 베리는 항상 여자 친구만 오면 이곳으로 데려오니까."

그는 유쾌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를 뒤쫓아온 이유가 뭐요?"

베리의 말투는 자못 신경질적이다.

"가정부가 좀 아파. 그래서 이곳에서 식사를 하려고 왔지. 내가 함께 끼는 게 싫어?"

"싫지 않구요!"

베리는 기어코 성질을 터뜨렸다.

"오랜 만에 테리를 만나서 우리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단 말예요!"

"염려 마, 밤은 기니까. 나도 저녁 내내 따라다닐 생각은 없어."

테리는 마음이 불안했다. 그의 옆에 앉아서 식사를 즐길 수는 결코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이제까지 자신이 만난 남자 중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남자며, 좋든 싫든간에 끌려갈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키엘은 두 사람의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웨이터를 불러서 자신이 먹을 음식을 주문했다.

그래서 거북한 분위기에서 식사가 진행되었다. 키엘은 거의 일방적으로 베리에게 여러 가지 사례에 대한 얘기를 계속했다. 테리는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혼자만 소외된 기분으로 불안하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커피를 마시고 나자 키엘은 일어섰다.

"미안, 가정부 때문에 본의 아니게 방해한 것 같군."

그는 테리를 한참 말없이 바라보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 정도로 끝내 줘서 고맙군. 그는 일을 해야 할 테니까. 항상 일이 최우선이지."

베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우리가 여기 있는 줄 알고 찾아왔을까요? 아니면 우연일까요?"

"절대로 우연은 아냐. 우리들 저녁을 망쳐 버리려는 수작이지."

"어쨌든 가버렸으니 됐잖아요?"

테리는 별 생각없이 자신의 손을 베리의 손등에다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녀가 손을 거두어들이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베리는 재빨리 그녀의 손에다 키스를 한 것이다.

"리차드에게 이 일자리에 관한 얘기를 했던 걸 나는 후회하고 있어. 테리를 실망시켜서 미안해."

"당신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그가 그렇게 나올 줄 누가 알았겠어요. 하지만 나는 그가 나를 믿어 주기를 바래요. 거짓말쟁이로 보이기는 싫거든요."

"이 좋은 경치를 깨뜨려서 미안해."

어느 새 키엘이 그들 뒤에 되돌아와 있었다.

"그렇지만 베리, 로라 멍크가 너를 애타게 찾고 있어. 그녀의 어머니가 다시 천식으로 발작을 일으키고 있다는군."

"형이 가면 되잖아요! 테리를 혼자 내버려 둘 수도 없어요!"

베리가 대들듯이 그에게 말했다.

키엘의 눈빛이 날카로와졌다.

"테리가 오니까 이제 로라에겐 흥미가 없어졌다는 거야? 정말 바람처럼 옮겨다니는군."

"정말 말 다했어요?"

베리는 용수철처럼 튀기듯이 일어나며 금방이라도 키엘을 때려눕힐 듯한 자세를 취했다.

"베리가 가보는 게 좋겠어요."

테리가 걱정스러운 투로 말렸다.

키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테리는 내가 보살필 테니까. 내가 함께 있어 주면 걱정할 게 없지."

"그렇기야 하겠지. 그렇지만 불쾌할 거예요. 도대체 테리를 괴롭히는 이유가 뭐예요?"

"내가?"

그의 회색 눈이 싸늘한 냉기를 품어냈다.

"어서 네 짝이나 찾아가, 베리! 싫든 좋든 말이야."

마지못해서 베리는 테리에게 말했다.

"아파트에서 기다려, 테리.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까."

"테리 걱정은 조금도 말고 천천히 다녀오라구."

키엘이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일자리가 기대에 어긋나는 바람에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내가 오늘 저녁엔 좀 즐겁게 해주려고 했단 말예요."

"알았어, 내가 너 대신 최선을 다해 보지."

베리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뭐라고 한마디 더 하려다 말고 뒤돌아서 레스토랑을 나가 버렸다.

키엘은 의자를 당겨 앉고는 커피를 따르기 시작했다. 테리는 테이블 밑으로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베리가 가버려서 안 됐군. 직업상 어쩔 수 없지 뭐."

그는 대수롭잖은 듯이 테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대신 가줄 수도 있었잖아요?"

테리는 약간 역겨운 생각이 들어서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릴까 생각했다. 키엘은 은근히 즐거워하고 있는 눈치다. 테리가 생각하기에도, 그는 베리를 쫓아 버리기 위해 안간힘을 쓴 게 틀림없다.

"베리는 기꺼이 그곳므로 간 거요. 당신은 그애와의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주 엉성한 연기를 하고 있소."

"연기가 아니에요!"

그녀는 고개를 쳐들고 그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의 눈은 테이블보 아래에 있는 자신의 무릎 위에 머물고 있었다. 순간 테리는 아찔한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그와의 사이에 이런 유감스러운 감정이 깔려 있다는 것에 대해서 더없이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보다 깊고 따뜻한 감정을 그와 나누고 싶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한 그런 희망은 성취될 기회가 없다.

"베리에게 너무 심하신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키엘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애는 좀 혹독하게 다루어야 돼요. 테리는 그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어요. 그의 좋은 면만 알고 있을 뿐이지."

"그에게 나쁜 면이 따로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게 뭐가 그리 나쁜가요? 다른 남자들도 다 그래요. 당신은 자신을 독신주의자라고 주장하실 작정이세요? 오로지 일을 위해서만 살고, 일생을 몽땅 일에다 바칠 거라구요?"

그는 비꼬는 듯한 웃음을 띠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그런 말 한 적이 없는데? 나는 여자친구가 필요하오. 하지만 때와 장소가 있는 법이지. 베리는 그것을 못 가려요."

테리는 커피를 마저 마시고 나서 의자를 뒤로 빼며 말했다.

"아파트로 돌아가서 쉬고 싶어요. 괜찮으시다면 말이에요."

"괜찮지 않지."

키엘이 재빨리 말했다.

"간신히 베리를 쫓아내고, 이제 겨우 당신과 단둘이 되었는데"

그녀의 두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그처럼 빛나는 자줏빛 눈을 키엘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무엇 때문에? 베리와의 관계를 아무리 설명해도 당신은 믿지 않으면서 그 얘길 또 하자는 거예요?"

그는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조금 전에도 당신은 그와 함께 손을 맞잡고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앉아 있었잖소? 그것도 순수한 우정에서 우러나온 거요?"

"그래요!"

대답을 해놓고도 그녀는 자신의 볼이 붉어짐을 느꼈다.

"우리는 친구일 뿐예요."

"베리는 여자와 순수한 우정만을 나눌 수 있는 위인이 아니야."

테리도 이제 그 말을 차츰 믿게 되었다. 그러나 키엘에게 사실을 인정하기는 싫었다.

"그렇지 않아요! 저는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앉아서 당신의 그 빈정거리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요. 저를 태워 주시기 싫으시면 택시를 부르겠어요. 안녕, 브레이든 박사님."

그녀는 자신의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키엘의 커피 잔이 그녀의 가방 줄에 걸려 쓰러지면서 뜨거운 커피가 그의 셔츠 앞자락에 쏟아지고 말았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뛰어 일어났다.

", 맙소사!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정말 아녜요. 제가 닦아 드릴게요."

그녀는 허겁지겁 손수건으로 그의 셔츠에 묻은 커피를 찍어냈다.

"어쩔 수 없이 가야겠군. 먼저 내 집에 들러서 옷을 좀 갈아입고 가도록 합시다. 이 상태로 당신 아파트까지 가기는 싫으니까."

테리는 가슴이 뛰었다. 이 성가시게 매력적인 남자로부터 빨리 도망치고 싶은데, 이제 어쩔 수 없이 그의 집까지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게끔 되었다. 으스름길을 달리면서 두 사람은 서로 말이 없었다. 아주 옅은 향기가 키엘의 얼굴에서 풍기고 있으나, 진한 커피 냄새로 곧 지워져 버렸다. 그녀는 자신의 부주의를 다시 한번 속으로 나무랐다.

초승달이 건너편 언덕 위에 걸려 있었다. 별빛이 차츰차츰 또렷해지고 있다. 테리는 그 고요한 평화가 엄숙하게 느껴졌다. 키엘만 아니라면 이곳에 내려서 밤과 낮이 교차하는 그 짧은 순간을 마음껏 즐기고 싶었다.

그들은 고요한 호숫가를 달리고 있었다. 나뭇잎을 흔들고 지나가는 미풍이 잔잔한 호수의 수면을 곱게 주름잡고 있다. 테리는 차를 세워서 잠시만이라도 그곳에서 머물고 싶었지만 키엘에게 감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차츰 더 어두워짐에 따라, 하늘에는 더 많은 별들이 나타났다. 그 별들은 검은 빌로드 같은 수면 위에다 은색의 기다란 그림자를 수없이 긋기 시작했다.

키엘의 차는 헤드라이트를 레이저 광선처럼 비추며 좁은 언덕길을 올라갔다. 그 언덕의 맨 꼭대기 부분에 그의 집이 멋있게 자리 잡고 있었다. 따뜻한 정감이 느껴지는 노란 불빛이 아래층 창문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대문 앞에서 차를 세운 키엘은 내려서더니 기다란 상체를 폈다. 테리도 뒤따라 내려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낮이라면 주변의 경관이 수려할 텐데 밤이라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게 유감이다.

부엉이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 동그마니 앉아서 밤하늘을 배경으로 검은 실루엣을 던지고 있고, 어디선가 쏙독새 우는 소리도 들려온다. 멀리 아래로 바라보이는 불빛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별처럼 생각되었다. 그녀는 어쩐지 슬픈 생각이 엄습해오는 것 같았다.

키엘이 현관에서 부르고 있었다.

"아름다운 곳이에요."

그녀는 감탄하며 말했다.

"당신은 이곳을 무척 사랑하고 있겠군요."

"만족하고 있지."

그는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홀 안에는 번쩍이는 나무 조각과 중국 도자기로 장식되어 있었다. 벽은 아주 연한 초록색의 비단으로 발랐고,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천장 가운데에서 반짝이고 있으며, 아름다운 여러 가지 식물들이 화분마다 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키엘은 테리를 놀랄 만큼 작고 아늑한 방으로 밀어 넣었다.

방 한쪽에 가죽의자와 함께 책상이 놓여 있고, 또 하나의 안락의자와 매우 아름다와 보이는 골동품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요. 얼른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올 테니까. 음료수를 마시려면 마시고."

키엘은 그녀를 방에 남겨 두고 나갔다.

나지막한 테이블 위에 크리스탈 술병이 술잔 하나와 함께 놓여 있었다. 테리는 그 술잔이 키엘의 것이란 생각에 뜨거운 침을 삼키며 거기에다 위스키를 따랐다. 그리고는 용암처럼 뜨거운 액체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목구멍 안으로 흘려 넣었다.

10분도 못되어 키엘은 방으로 돌아왔다. 섬세한 캐주얼 셔츠에다 연한 회색 바지로 산뜻하게 갈아입은 모습이다. 물에 젖은 그의 갈색 머리는 더욱 진한 황갈색을 띠고 있고 그를 더욱 활기찬 남자로 보이게 한다. 그는 진열장에서 다른 잔 하나를 꺼내어 위스키를 따른 다음 그녀가 앉아 있는 안락의자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잔을 들어 그녀에게 목례를 한 다음 말없이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입가에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윽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테리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멋진 집을 가지고 계시군요."

그녀는 침묵을 깨뜨리려는 생각에서 먼저 말을 꺼냈다.

"부모님도 여기서 함께 사시나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엄마 치마폭에 감겨서 살기엔 내가 너무 늙었잖소. 2년 전에 이 집을 사서 아예 칩거하기로 했지. 초대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이 집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나는 아주 영광으로 생각해야겠군요."

"어쩔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이제까지 몇 명이나 되는 여자를 초대했었나요?"

테리는 자신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의 대답은 그녀를 놀라게 만들었다.

"단 한 명도 없었소. 나는 내 사생활을 대단히 중요시하니까. 여기엔 나와 가정부밖에는 아무도 들어온 일이 없소."

"그녀는 지금 어디 있죠?"

"자러 갔겠지. 우린 서로 혼자나 다름없소."

테리는 순간적으로 소름이 오싹 끼쳤다. 이 넓은 집에 그와 단둘이 있는 거와 다름없다니.

"겁을 먹고 있군. 내가 덤비기라도 할 것 같소? 나는 무슨 일이든 남에게 강요하지는 않아요."

그 말은 일단 그녀를 안심시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이라도 그가 키스를 요구해 온다면 자기로서는 그것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다는 건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거절은커녕 더 적극적으로 매달릴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매력에 점점 깊이 빠져드는 자신이 무척 바보스럽게 느껴지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보다 지금 자신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베리와의 관계에 대해서 그가 품고 있는 의심을 어떻게 풀어 주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3

"그런데, 당신의 그 펑크난 타이어는 고쳤소?"

키엘이 화제를 슬쩍 딴 곳으로 돌렸다. 그녀가 말없이 고개를 저어 보이자 그는 계속했다.

"빨리 고쳐 두는 게 좋을 거요. 이곳 호수지역은 스페어가 없이 돌아다니기는 좀 곤란하니까. 이 집을 한번 둘러보겠소?"

그의 제안에 테리는 속으로 놀라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서 별다른 의도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이 집 어딘가에 그 가정부라는 여인이 있을 테니까 말이다.

"좋아요. 하지만 낮시간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정말 멋있을 것 같은데요?"

그는 테리의 말에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그녀를 안내했다. 서재는 잘 정돈되어 있으며, 응접실은 고상하고 우아하다. 그리고 식당과 휴게실과 온실까지 있다. 한 방에는 그랜드 피아노만 한 대 놓여 있는데, 고가 피아노를 연주하는지는 테리로서도 알 수가 없었다. 주방은 온통 전자제품으로 들어차 있다.

가정부가 잠자고 있는 위층까지 구경시켜 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그가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발을 옮기자, 그녀는 주저했다. 그러나 곧 그를 믿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뒤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못 믿을 것은 그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위층은 화랑과 침실, 그리고 개인용 욕실 등으로 되어 있었다.

"이 방이 바네스 부인의 침실이고, 이쪽이 나의 침실이오."

키엘이 침실의 내부를 보여 주지 않아서, 그녀는 오히려 묘한 실망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개인의 침실은 바로 그 사람의 성격을 반영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침실도 그의 수술실이나 진료실과 마찬가지로 깨끗하고 아담할 거라고 상상됐다.

아래층으로 되돌아오자 그는 그녀의 위스키 잔을 다시 채워 주었다.

"그래, 이 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오?"

"이렇게 멋있는 집은 처음 봤어요. 일반 외과의사 수입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집인 것 같군요?"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영양학에 관한 책을 몇 권 썼지요. 그리고 라디오에 출연도 하고 세미나 등에도 가끔 나가요. 돈이 좀 생기는 일들이지."

"그런데 왜 이곳에서 계속 일반진료를 하고 있죠?"

"이곳에서 환자들과 매일 접촉하노라면 많은 것을 배우게 되오. , 앉아요. 나는 친구가 필요한 사람이니까."

테리는 가슴이 몹시 설레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 이상 머무른다는 것은 별로 현명한 일이 아니리라.

"이젠 가봐야겠어요."

그녀는 베리가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겠소?"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도 모르겠어요."

테리는 그가 자신의 마음을 눈치라도 챌까 봐 걱정되었다.

"그러면 내가 가르쳐 주겠소."

그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내게 매력을 느끼고 있소. 그렇지만 내가 당신의 채용을 거절했기 때문에, 나를 미워하려고 애쓰고 있는 거요."

그는 정확하게 테리의 심중을 짚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정직하게 말해서, 당신은 매우 매력적인 여성이오. 그 런데 베리 같은 녀석과 함께 어울려서 자신을 싸구려 여자처럼 평가절하시키고 있단 말이오."

"그런 여자들처럼 처신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녀는 마치 따귀라도 올려붙일 것처럼 발끈했다. 그의 키스에 응해 줬던 건 정말 큰 실수였어. 그래서 나쁜 인상을 주었던 게 틀림없어.

"나는 베리가 당신처럼 무례한 말을 마구 내뱉는 것을 아직 본 적이 없어요. 당신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에요."

"당신을 이곳에 머물도록 하는 일은 커다란 비극을 초래하는 결과가 될 것 같군."

"그건 왜죠?"

"이곳 평화로운 호반의 마을을 온통 난잡한 여자사냥 장소로 더럽힐 것만 같거든.

"그런 야비한 말을! 정말 몰상식하군요. 당신과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의사가 될 수 있었죠? 그런 마음으로 어떻게 사람을 보살펴요? 당신이 결혼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알 만하군요. 어떤 여자라도 당신의 그 야비한 성품을 견뎌내지 못할 테니까요."

"계속해요. 재미있는 지적인데 그래."

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괜히 위선 떨지 말아요. 베리가 당신을 증오할 만도 해요. 이제 아파트로 돌아가도 되겠어요?"

"좋아요, 준비하도록 하지. 당신 성깔도 보통은 아니군. 베리가 당신을 어떻게 다루는지 모르겠군. 이제 생각하니 베리가 당신을 여기로 끌어들인 게 아니라, 당신이 베리를 꾀어서 이곳으로 끌어들이도록 만든 것 같애."

그의 말이 끝났을 때 테리는 분노로 치를 떨었다.

"당신 마음대로 생각해요! 내가 보기엔 당신은 아무래도 불치의 정신병 환자 같으니까! 내가 만약 베리라면, 당신과 단 1분도 같이 일하지 않을 거예요."

그는 그녀가 분개하는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이 싱글벙글 웃고 있다.

"베리야 방법이 없지. 아무데서도 환영해 주지는 않을 테니까. 그애는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거든."

"당신은 형이 돼가지고 그를 잘 인도할 생각은 않고, 왜 오히려 훼방이나 놓고 있죠?"

키엘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잘 몰라. 그저 베리의 좋은 점만 보고 있지. 하기야 그게 당신의 매력이긴 하지만 말이오. 하지만 당신도 나만큼만 베리를 알고 나면, 내 고민을 이해하게 될 거요."

"베리에 관해 더 이상 토론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야무지게 말을 끊었다.

"그리고 당신의 편견을 왜 내게 자꾸 주입시키려고 하죠? 나는 나대로의 주관이 있어요. 내게는 베리가 아주 매력적이고 친절하게만 생각돼요."

그녀는 속으로 그녀 자신이 약간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7년 전에 있었던 자그마한 사건까지 그에게 말할 필요는 없잖겠는가?

"답답하군. 당신은 매우 비논리적인 여자요!"

그는 화를 내며 뒤돌아섰다.

"정말 눈에 무엇이 덮어쓰여도 단단히 쓰인 모양이군. 하지만 오래잖아 그 녀석의 실체를 알게 될 거요."

분위기가 긴장으로 팽팽해지며, 그의 차가운 시선이 그녀를 금세라도 얼어붙게 할 것만 같다.

테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신의 목적이 어떻게 해서든 베리를 깎아내리는 거라면 나는 더 이상 여기에 앉아 있을 이유가 없어요."

그녀는 문 쪽으로 걸어가서 턱을 높이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가겠어요."

"텅 빈 아파트로? 베리는 앞으로 몇 시간 이내에는 돌아오지 않아요. 로라가 보내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서둘 필요는 없소."

"그럼 여기서 계속 당신의 그 독선적인 얘기를 듣고 있으란 말예요? 천만에요, 이젠 흥미없어요."

만약 키엘과의 감정이 서로 호의적이라면, 언제까지라도 이곳에서 떠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 집은 그만큼 멋진 곳이다. 특히 화사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테리에게는 이 집의 모든 것들이 마음에 들었다.

"베리 얘기는 더 이상 하지 않겠소. 아무래도 당신 마음속에서 그의 존재를 지워 버리기는 어려운 모양이니까."

키엘이 예상 외로 한풀 꺾여서 체념조로 나왔다.

"그렇지 않아요, 그는 나에게 친구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니까. 왜 내 말를 못 믿는 거죠?"

"두 사람이 서로 쳐다보는 눈빛이 친구의 그것은 아니었소. 그건 연인들의 눈빛이었어."

그는 천천히 다가와서는 그녀의 등을 돌려 다시 의자로 데려왔다.

그의 손길은 가벼워서 닿지도 않은 것처럼 느껴졌으나, 빨갛게 단 쇳덩이처럼 그녀의 가슴속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의 어디에서 이런 불가항력적인 매력이 뿜어나오는지 자신으로서는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마지못해서 의자에 다시 앉은 테리는 조금 전에 마시다가 둔 위스키 잔을 다시 집어들었다. 키엘은 레코더에 테이프를 끼워 넣었다. 조용한 음악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테리는 등받이에다 몸을 완전히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감미로운 선율이 이제까지의 긴장된 감정을 부드럽게 순화시키며, 그녀는 방안에 닥터 브레이든과 함께 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릴 지경이 되었다.

"테리, 당신의 얘기를 좀 해봐요. 나는 당신이 내 의붓동생의 친구라는 사실 외에는 아는 것이 없소."

키엘이 그녀의 얼굴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요, 내 오빠 리차드가 베리의 친구라고 말했었죠? 그 외에는 가족이 아무도 없어요."

"여동생도?"

"없어요, 아무도. 그러니 얘기할 것도 없어요."

"부모님은 2년 전 스페인에서 비행기 사고로 돌아가셨지."

"그건 어떻게 알았죠?"

테리는 의아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 정도는 나의 의무니까. 닥터 코레스가 말해 주더군. 그는 당신이 이곳으로 옮겨올 수밖에 없는 심정을 이해하고 있었소."

"그러니까 내 뒷조사를 했단 말이군요. 왜 직접 물어보지 않고 그런 비열한 방법을 써야 했나요?"

"나도 내 이익을 보호해야 하니까."

", 그리고 또 뭘 알아봤죠?"

그는 그녀를 관찰하는 눈으로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당신의 남자친구에 관해서 물어보았지.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그런 문제에 시끄럽게 말려들기가 싫거든. 그런데 그는 아무것도 모르더군. 당신은 꽤나 비밀을 철저히 지켰던 모양이지?"

멸시에 찬 눈으로 테리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과 더 이상 말할 가치가 없군요. 제발 나를 아파트로 데려다 줘요. 당신과는 1분도 더 있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정말 역겨운 사내다!

닥터 코레스가 자신의 파혼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다. 한때나마 자신의 약혼자였던 그레그를 만났던 것은 부모님이 사망한 직후 마음이 매우 불안정했던 시기였다. 다행히 그 약혼은 두 사람의 합의하에, 서로 큰 상처없이 무효로 돌릴 수가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 일은 이제 별다른 느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후로부터는 이렇다 할 남자친구가 없었다. 귀찮은 존재에 불과한 마이클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그는 바로 이웃에 사는 친구로서 학교도 같이 다니고, 함께 자랐다. 그것이 그에게는 일종의 우선권이나 되는 것처럼 자신에게 사랑을 선언하게 만든 것 같았다. 그러나 그에게서도, 베리와 마찬가지로 조금의 연정도 느낄 수가 없었다.

차는 어둠을 뚫고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가로막고 있다. 마침내 어둠 속에서 아파트가 헤드라이트 불빛에 드러났을 때, 그녀는 오한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아파트는 낯설고 적의에 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베리가 올 때까지는 들어가기가 어렵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한번 몸을 떨었다.

놀랍게도 키엘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더니 아파트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불을 켰다. 설사 이 건물이 그의 소유라 하더라도 그가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별로 유쾌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젠 됐어요."

그에게 돌아가라는 뜻으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내가 상당히 역겨운 모양이군."

그는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때 전화 벨이 울렸다.

"내 전화가 아닐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수화기를 들었다.

베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와 있었군. 키엘이 저녁을 잡쳐 놨겠지? 나는 두어 시간 더 걸릴 것 같아. 그러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구."

그러고는 한참 있다가 그는 다시 말했다.

"괜찮아?"

"물론이에요, 너무 피곤해서 머리가 베개에 닿기도 전에 잠들어 버릴 거예요. 그럼 내일 아침에 봐요."

키엘이 다가오면서 비난조로 말했다. 그의 입이 냉소하고 있었다.

"아직 올 수가 없다는 거겠지? 그럴 줄 알았어."

"그걸 알면서도 왜 베리를 보냈죠?"

그녀는 증오심을 드러내면서 따지고 들었다.

"몰라서 묻소? 그 녀석의 진면목을 당신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지. 이제 당신이 그의 유일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겠소?"

"나는 그의 여자가 아니예요!"

"그만의 여자가 아니겠지."

테리는 깊숙이 숨을 들이키며 자줏빛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당신을 증오해요!"

키엘이 허연 이를 드러내고 허허 웃었다. 그는 두 손을 테리의 양 어깨 위에 올려놓으면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겁고 격렬한 관능의 에너지가 또다시 자신을 완전히 사로잡는 것처럼 느꼈다.

"당신을 생각해서 그러는 거요, 테레사. 당신을 구하고 싶어서."

그는 갑자기 테리를 꽉 껴안더니 격렬하게 키스하기 시작했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는 마치 굶주린 맹수처럼 그녀의 입술을 공격했으며, 그녀로서는 그의 정열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처음엔 반항을 했지만, 곧 뒤이어 몰려온 자신의 정염에 굴복해서 오히려 열렬하게 그의 입술에 매달렸다. 그는 그녀의 가장 고통스러운 욕망을 채워 줄 수 있는 남자였다.

그러나 키엘의 목적은 단지 나에게 베리와는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데 있어. 그의 키스는 그가 원해서가 아니야. 그는 나를 경멸하고 있으며, 이것은 그의 시험에 불과해. 그러므로 나는 저항하고, 싸워야 하며, 자기 방어를 위한 최소한의 저항이라도 해야만 한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테리의 마음은 이 모든 것들을 포기했다. 그녀는 무조건 그가 더 힘차게 키스해 주기만을 원 했다.

지금은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게 되리라는 것까지도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졌다. 어떻게 이런 감정으로 그와 함께 얼굴을 마주하고 일할 수가 있겠는가. 그와의 사랑은 오늘밤 이것으로 끝나도 좋다고 생각됐다.

마침내 그가 놓아 주었을 때, 테리는 마치 영원한 시간 속에서 풀려난 것 같았다. 자신의 전생애를 그의 품안에서 탕진해 버린 느낌이다. 저항할 생각은 꿈에도 갖지 않았다니. 그를 만난 게 언제였던가? 바로 오늘이다. 자신으로서는 이런 모든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다.

기진한 상태에서 그녀는 의자로 가서 무너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눈에서 엷은 미소가 어리는 것을 보았다.

"베리는 소중한 것을 놓치고 있군. 로라 따위는 당신과 비할 바가 못돼. 그에게 당신의 일생을 던진다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말해 주고 싶군."

"당신에게 키스를 허락한 게 바보 같은 짓이죠!"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자신이 그 키스를 즐기는 것을 눈치채인 건 더욱 멍청이 같은 짓이었다고 생각됐다.

"참 즐거운 경험이었소. 그 결과 나는 당신이 베리에게만 충실한 여자는 아니란 걸 알게 되었소. 따라서 당신을 되돌려 보내는 건 재고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소."

테리는 그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나는 자신을 남자에게 팔아넘길 생각은 없어요. 내가 당신에게 보인 반응은 본의 아닌 것이었어요. 그리고 이건 정말 역겨운 일이지만, 당신이 정말 매력적인 남자라는 사실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그리고 나와 관계해서 말썽나는 법은 없어요."

그는 능글맞게 말했다.

"당신에게는 아가씨들이 자발적으로 안겨 온다는 뜻인가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

"그래서 그 여자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모조리 받아들였겠죠?"

그는 그녀의 비꼬는 말투에 더욱 뻔뻔스런 표정을 지었다.

"굴러 들어오는 복을 왜 발로 차겠소?"

"과연 그렇군요!"

그녀는 경멸의 웃음을 보이며 뒤로 돌아섰다.

"이젠 잠이나 자야겠어요. 베리를 기다릴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그런데 당신은 키스를 해오는 남자에겐 모두 그렇게 적극성을 보이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그는 점점 더 짓궂고 능청스러워지고 있다.

"당신의 키스는 나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리고 난 난생 처음으로 경멸하는 남자에게 키스를 한 셈이에요."

"그건 충격적인 말이군, 데닝 양. 좋은 꿈꾸시고, 내일 아침에는 늦지 않도록."

그는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기더니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혼자 남게 되자 테리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정신없이 보낸 저녁이었다. 몹시 피곤한데도 불구하고 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녀는 키엘에게 한 키스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했다. 한때 약혼자였던 그레그에게도 그토록 열렬한 키스를 한 기억은 없었다.

자리에 누워서도 좀체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암흑과 적막에에워싸여서 정신이 갈수록 더 명료해지는 것이다. 베리라도 빨리 돌아오기를 바랐다. 키엘의 그림자가 끈질기게 쫓아다녔다.

한 시간 이상을 침대에서 뒤채고 있는데 간담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주는 전화 벨 소리가 들려왔다. 베리인가? 혹시나 더 오래 걸리겠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베리예요?"

그녀는 대뜸 전화기에다 대고 소리를 쳤다.

"실망시켜서 미안하오. 하지만 최소한 내가 알고 싶은 건 대답해 준 셈이군."

솜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키엘이 속삭였다. 그녀의 가슴을 마구 뛰게 만드는 목소리다.

"키엘! 무슨 일이죠?"

"당신에게 아무 일도 없나 하고. 그리고 친애하는 내 동생이 돌아와서 당신을 잘 돌봐 주고 있는지 알고 싶었소."

"이젠 알았으니 끊어요. 나는 괜찮아요."

"괜찮은 것 같지 않은데? 상당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 같군. 내가 가서 친구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소."

친구해 준다고! 농담을 하고 있는 거야? 그거야말로 자신이 가장 원치 않는 일이다.

"아니, 아니예요. 그럴 거 없어요. 나는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아요."

그녀는 다급하게 말했다.

"나는 단지 당신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요. 그렇게 사양할 건 없소."

"내가 지금 잠자리에 있다는 걸 잘 알잖아요?"

"하지만 잠을 못 이루고 있잖소?"

"두려움 때문이 아니에요. 다만 너무 조용해서아직 익숙치 못해서 그래요."

"호수지역은 항상 그렇지. 이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곳이지. 그렇지만 당신은 잠을 좀 자야 해. 그러지 않으면 내일 근무에 지장이 있을 거요."

결국 그가 걱정하는 것은 내일의 근무다.

"걱정 말아요, 당신한테 피해를 끼치지는 않을 테니까."

그녀는 내뱉듯이 말했다.

"좋아요, 그럼 가서 자도록"

"전화해 줘서 고마와요."

그녀는 별로 달갑지 않다는 듯한 목소리로 인사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는 내가 잠을 못 이루고 있다는 것을 훤히 알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감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음이 분명해.

어차피 베리가 돌아오기 전에 잠들 수 없다는 건 이제 확실해졌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뜨거운 우유 한 잔이면 마음이 좀 가라앉을지도 모르지.

거실에 앉아 우유를 홀짝거리며 다시 키엘을 생각했다. 우유를 다 마셨을 무렵에 바깥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곧 열쇠를 돌리는 소리가 났다. 이젠 정말 베리가 돌아온 모양이라고 테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어처구니없게도 키엘이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휘둥그래졌다.

"왜 또 오셨죠?"

그녀는 자신이 입고 있는 무릎 위까지 온통 드러나 있는 잠옷을 의식하며 말했다.

"베리에게 아무리 전화를 해도 통화가 되지 않았소. 로라를 데리고 나간 게 분명해. 언제 돌아올지는 아무도 몰라. 그래서 걱정이 돼서 다시 온 거요."

"그럴 필요는 없었어요!"

그녀는 화를 벌컥 내며 말했다. 자신에게 걱정이 되는 건 다름 아닌 바로 키엘이다.

", 안심해요."

그는 그녀를 달래듯이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은 가서 자요. 나는 여기 앉아서 베리가 올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그러면 안심이 되겠지?"

그를 문 밖에다 두고 잠을 잔다구? 정말 농담을 하고 있나?

"아주 고맙지만, 쓸데없는 일이에요!"

그녀는 잘라 말했다.

"낯선 곳에 처음 갔을 때는 온통 뒤숭숭해서 잠이 잘 오지 않는 법이지. 나도 그런 경험이 많아요. 하지만 당신은 이제 좀 자야 해."

"당신이 여기에 앉아 있는 한 나는 한잠도 잘 수가 없어요. 당신은 지금 착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돌아가 줘요."

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당신은 내가 무슨 치한처럼 굴 줄로 생각하는 거요? 나를 좀 더 알게 되면 절대로 그런 놈은 아니란 걸 깨닫게 될 거요. 당신의 침실엔 절대로 들어가지 않을 테니 안심하시오."

테리는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이란 사람은 절대로 자기 고집을 꺾지 않는다는 건 이미 경험했어요. 그렇다면 방법이 없겠죠."

반라에 가까운 그녀의 몸에 그의 찬탄의 눈길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몸속에 숨어 있는 악마가 그의 눈속을 들여다보라고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그랬다가는 그의 눈속으로 빨려들고 말 거다. 그녀는 그의 눈을 피했다.

"안녕, 닥터 드레이든. 그럼 잘 좀 지켜 줘요. 이런 친절 고마와요."

그는 잠시 동안 아무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면서, 그 말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인지를 헤아리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한손으로 그녀의 턱을 받쳐올리면서 말했다.

"천만에, 내가 좋아서 하는 짓이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베리가 들어섰다.

"도대체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요? 당장 테리에게서 손을 떼요!"

그는 시뻘겋게 흥분하며 소리를 질렀다. 테리는 마치 부끄러운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키엘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 정도로 테리를 생각한다면 좀 더 빨리 돌아왔어야지. 테리가 무서워하길래 내가 잠깐 말벗이 돼준 거야."

", 그 속을 내가 모를 줄 알고? 내가 마침 때맞춰 돌아왔군!"

그는 험상궂게 인상을 쓰며 말했다.

"베리는 오해하고 있어요!"

두 사람의 다투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서 테리가 끼어들었다.

"키엘은 줄곧 여기에 있지 않았어요. 내가 혼자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고 있는 것을 알고 방금 전에 온 거예요."

"그래, 그런 모습으로 그를 불렀단 말이야?"

그는 반라의 모습인 그녀를 노려보며 폭발 직전의 권투선수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테리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예요, 나는 그인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그가 와줘서 기뻤어요."

그런데 왜 이 말을 했을까? 왜 키엘이 자신에게 말벗이 되어 준 것을 기쁘다고 말했을까?

"만약 테리에게 손을 댔다면"

베리가 눈을 날카롭게 번득이며 키엘을 노려보았다.

"아니예요!"

그녀가 재빨리 그의 말을 잘랐다.

"더 이상 당신들이 다투는 꼴은 못 보겠어요. 난 자러 가야겠어요."

그녀는 침실로 들어가서 문을 닫고는 밖에서 다투는 두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참을 더 싸우던 두 사람은 마침내 끝이 난 모양이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키엘은 떠나갔다. 베리가 만나러 들어올 줄 알았으나, 놀랍게도 그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침내 온 집안에 바다속같이 고요한 적막이 찾아왔다.

 

4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 테리는 심한 두통을 느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악몽처럼 떠올랐다. 창문을 활짝 열고 멀리 산을 바라보았다. 맑게 갠 푸른 하늘 아래 희뿌연 안개를 허리에 두른 높은 산들이 시원하게 솟아 있다.

어디선가 양의 울음소리가 바람결에 처량하게 들려온다. 산모퉁이를 돌아 기차가 시골 철길을 따라 달려오고 있다. 햇살이 차츰 강렬해지며, 구름은 점점 높이 치솟아 올라간다. 산비탈에 심어 놓은 곡식들과 근처 나무들의 잎새들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얼마나 멋있는 전원풍경인가! 다소 두통이 사라지는 것 같다. 여기서 오랫동안 머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키엘이 다른 간호사를 구하면 집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내가 돌아가면 리차드가 뭐라고 할까? 리차드와 라첼의 신혼생활을 번거롭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나만을 위한 보금자리를 스스로 찾아내고 싶다. 하지만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거다.

지금 리차드가 살고 있는 집은 부모님이 남겨 놓고 가신 유일한 유산이다. 리차드와 라첼이 결혼함에 따라 테리는 그 집을 오빠에게 양보했다. 대신 리차드는 집값의 반에 해당하는 현금을 은행에서 융자받아 테리에게 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제까지 행복하게 자라왔던 정든 집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이 기회에 런던을 떠나 영국에 대해 더 많은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자신을 위로했다.

이 호수지역은 이상하게 마음을 끌었다. 키엘이 자신의 기대를 무산시키지만 않았다면, 이곳에서 되도록이면 오래 머무르고 싶다.

테리는 창가에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베리는 아직 일어날 기미가 없다. 몇 개의 차 봉지와 비스켓 몇 개가 아침식사로 찾아낼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산책을 나가서, 멋진 풍경을 즐기면서 뭔가 좀 마실 걸 찾아보기로 작정했다. 호수의 정경은 실로 아름답기 짝이 없다. 하지만 지금 보고 있는 건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언젠가는 윈더미어 호수 전체를 보게 되겠지. 현재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 자질구레한 일상사에서 벗어나, 광활한 수면 위에서 마음껏 나래를 펴보고 싶다.

부모가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이후로, 테리는 정신적으로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다. 매우 단란한 가정생활을 영위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부모님을 한꺼번에 여의게 되자 그것이 곧 세상의 종말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생활도 차츰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고, 그레그와의 작은 불상사만 빼고 나면 그런대로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어느덧 그녀는 자그마한 호숫가로 나와 있었다. 윈더미어에 비해서는 아주 작은 호수지만, 수면은 맑고 조용하다.

호숫가에서 명상에 잠겨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도로를 따라 지금 자기가 서 있는 쪽으로 날렵하게 생긴 흰색 승용차가 바람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그 자동차는 바로 앞까지 곧장 오더니 멈추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내린 사람을 놀랍게도 키엘이었다.

그는 그녀를 향해 언덕을 천천히 올라오고 있다.

"일찍 일어나셨군. 웬일이신가? 동생놈이 당신을 침대에서 차내기라도 했단 말이오?"

그 한마디에 테리는 아침부터 기분이 싹 잡치는 것 같았다. 이치는 어떻게 된 인간이길래 말을 해도 꼭 이렇게 한담?

"난 아직 베리의 얼굴도 못 봤어요! 어젯밤 그 법석 이후론 말예요."

그는 의심스런 눈길을 그녀의 얼굴에다 던졌다.

"그건 믿기 어려운 말인데베리 같은 녀석이 한 아파트 내에서 여자와 잠자면서 손도 대지 않았다구?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그러면 어떻게 믿고 싶은 거예요?"

그녀는 야멸차게 반문했다.

"병원엔 항상 이렇게 일찍 나오나요? 아니면 환자가 있나요?"

그는 씁쓰레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둘 다 아니오. 나도 당신처럼 잠을 설쳐서 일찍 나온 거요."

테리는 호수의 수면 위로 눈길을 던졌다. 한 남성을 느끼게 한다. 자신을 걷잡을 수 없이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그의 관능적인 매력에 다시 한번 몸을 떨면서 테리는 한 발짝 물러섰다.

"나를 좀 가만히 내버려 둘 순 없나요?"

"정말 아름다운 아침이군!"

그는 들은 체도 않고 유쾌하게 말했다.

"나는 저 아래쪽에다 보트를 매놓고 왔지. 그냥 노를 젓는 배 말이오. 행락객들이 몰려와서 호수를 온통 침범하기 전에 일찌감치 호수 한가운데로 나가봅시다. 원한다면 말이오, 테레사."

결심을 하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건 거절할 수 없는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테리는 진을 입고 굽 낮은 슬리퍼를 신고 오길 잘했다고 기뻐했다.

그를 마주보며 자리를 잡고 앉자 그는 천천히, 그리고 힘차게 노를 저어 호수 가운데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모터보트라면 아마 이 천국처럼 조용한 분위기를 엉망으로 망가뜨려 놓았을 거다. 이른 아침의 호수가 이렇게도 기분 좋은 것이라니. 이 추억을 언제까지나 간직해 둬야지.

어느 사이에 키엘에 대한 분노는 눈처럼 녹아 버렸다. 그녀는 그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태어나셨나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버밍엄에서 태어났소. 옥스퍼드에 들어갈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지. 수련의 시절에는 일요일을 대부분 켄들에서 보냈소. 그때 나는 이 호수에 반해서 나중에 자격을 취득한 후에는 이곳에 눌러살기로 마음을 굳히고 말았지."

"조금도 나무라고 싶진 않군요. 이곳은 천국이에요, 꿈같은 곳이에요."

"그렇소, 나도 당신처럼 집과 사무실, 그리고 공장, 상점 따위가 꽉 들어찬 도시에서 살았었지. 그리고는 이곳, 천지가 확 트인 고장으로 옮겨왔지. 사방이 16만 정보도 넘는다는 걸 알고 있소? 이곳은 세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오. 다른 많은 곳을 다녀봤지만 이곳에 견줄 만한 곳은 아무 데도 없었소. 나는 여기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테리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키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렇게 감정이 부드러운 사람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왜 그렇게 인간미가 없어 보였을까?

그가 그녀의 생각을 눈치 챘는지 웃음을 지었다.

"워즈워스나 콜리지 같은 시인들도 아마 나와 같은 기분을 느꼈을 거요. 눈에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확 잡아서 도망칠 래야 도망칠 수가 없게 돼버렸지. 아마 나는 죽을 때까지도 이곳을 못 떠날 거요."

"멋있군요!"

테리는 공감했다.

"여긴 처음 왔지만요, 언젠가는 또 찾아올 거예요. 나는 그걸 확신하고 있어요."

"언제라도 환영하겠소. 나를 찾아 주신다면 말이오."

그의 인사치레 말에 테리는 오히려 아릿한 슬픔을 느꼈다. 나는 저이에게 있어저 아무런 의미도 되지 않는 것이야. 그가 방금 그 사실을 확인시켜 준 셈이다. 어쩐지 우울한 기분이 되어 차가운 호수에다 손가락을 담갔다. 푸른 하늘이 거기에도 있었다.

보트가 잔잔한 수면 위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키엘이 그녀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요, 내 곁에 앉아요."

그는 속삭이고 있었다.

테리는 마치 그에게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이 멋있는 순간을 단 몇 분만이라도 그와 함께 보내고 싶은 욕망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앉은 자리에서 가까스로 일어나서 위태위태하게 그를 향해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녀가 보트 한쪽에다 발을 내딛자, 갑자기 보트가 흔들리면서 몸의 균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키엘이 팔을 뻗어서 그녀를 부축하려 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그녀는 비명소리와 함께 허공을 잡으며 텀벙 물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호숫물은 얼음처럼 차가왔다. 테리는 수영이 서툴러서 공포에 질려 있었다. 자꾸자꾸 아래로만 내려가는 것 같아서 정신없이 위로 솟구쳐 올랐다. 간신히 눈을 뜨려고 애쓰고 있을 때, 키엘의 억센 팔이 그녀를 번쩍 들어서 보트 위로 끌어올렸다. 그는 배를 잡고 웃어댔다.

테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어떻게 웃음이 나와요!"

그녀는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털어내면서 소리 질렀다.

"나를 골리려고 그랬군요. 아이, 얼어 죽겠네!"

"얼굴이 볼 만하군! 카메라를 가지고 왔어야 하는 건데, 하하그렇게 멋지게 놀라는 얼굴을 본 적이 없어. 이렇게 아침이면 물에 종종 뛰어드는 버릇이 있소?"

"하마터면 물에 빠져죽을 뻔했어요!"

그녀는 사납게 소리쳤다.

그는 계속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렇게 죽도록 내버려 두지야 않지. 어쨌든 빨리 차로 돌아가는 게 좋겠군."

뭍에 닿아 보트에서 내린 테리는 한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키엘은 자신의 옷으로 그녀를 둘둘 말아서 차의 뒷좌석에다 구겨 넣었다. 결국 그녀도 큰소리로 웃고 말았다. 왜냐하면, 웃지 않으면 울어야 할 판이었기 때문이다.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도 키엘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가볍게 안고서 아파트 계단을 올라갔다.

테리는 온몸이 추위로 덜덜 떨리고 축축이 젖어 있는 상태에서도 키엘의 품안에 있다는 사실에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키엘의 관능적인 매력은 혈관에다 불을 붙이고, 숨을 가쁘게 만들었다. 이런 상태에서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실로 미친 짓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됐다.

그들이 들어서자, 베리의 얼굴 표정이 뒤틀릴 대로 뒤틀려졌다. 그러나 키엘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쳐서 테리의 방문을 발로 차서 열었다. 그는 다시 한번 크게 웃고 나서 그녀를 침대 위에다 눕혀 주었다.

"머리카락 한올 다치지 않고 제자리에 갖다 놨다구, 하하하"

테리는 방 밖에서 두 사내가 서로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젖은 옷을 벗어 버리고, 타월로 온몸을 감은 뒤 욕실로 갔다. 그리고는 뜨거운 물을 틀어 놓고 온몸을 녹이기 시작했다.

몸에는 아직도 키엘의 체온이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을 말끔히 지워 버리기는 불가능하리라는 생각이 얼핏 뇌리를 스쳤다.

샤워를 끝내고 깨끗하게 옷을 갈아입은 뒤 거실로 나왔을 때 키엘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베리가 찻잔을 그녀 앞 탁자 위에다 탕 놓으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이었어?"

가느다란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가며 테리는 그를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었어요. 나도 일부러 물에 빠지고 싶었겠어요?"

"그러니까 애시당초 키엘과 함께 그곳엘 간 게 잘못이란 말야!"

그녀는 그의 이런 태도가 성가시게 생각되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산책을 하고 싶었어요. 키엘이 뒤따라올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어요?"

베리가 찌푸린 얼굴을 펴며 한숨을 지었다.

"나는 테리가 그와 함께 있었다는 게 기분 나쁘단 말야."

"그이는 친절하고 상냥했어요. 그런데 왜 당신이 기분 나빠하는 거죠? 베리가 나의 뭐라도 되나요?"

"이 일자리에 대해서 리차드에게 얘기한 게 잘못이었어. 너를 곤경에 빠뜨린 결과가 됐어."

"그런 말 말아요. 나는 이곳에 온 걸 후회하지 않아요. 언제고 다시 오고 싶을 곳이에요."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베리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젯밤 말예요, 로라를 데리고 외출한 게 사실이에요? 그녀의 엄마를 치료한 다음에 말예요."

그는 죄책감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테리가 잠이 들어서 일찍 들어갈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었지."

"그건 좋지 않은 행동이에요."

테리는 날카롭게 반박했다.

"더군다나 그녀의 어머니가 편찮으신 때에 말예요. 그리고 내 기분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겠죠?"

베리는 마치 못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앞으론 안 그럴게."

그의 어린애 같은 태도에 테리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키엘은 이미 병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아주 활발하고 능란한 솜씨로 그녀를 지도하고 충고했다. 환자가 밀려오자, 그는 그녀에게 모든 걸 맡기고 자신의 업무에 들어갔다.

그래서 아침나절이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테리는 일이 생각보다 많고 바쁘게 돌아가는 데 대해서 속으로 놀랐다. 이윽고 키엘과 베리가 순회진료를 나가 버리고, 혼자 남게 되자 그녀는 수많은 기록을 정리하고 사무실을 정돈했다.

오후에는 환자들의 붕대를 갈아 주고, 여러 종류의 테스트와 전화접수 등으로 더욱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이 일자리가 한 사람이 해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자신은 간호사인 동시에 접수원이고, 또 동시에 사환 겸 비서기도 했다.

마침내 퇴근해서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베리에게 투덜거렸다.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됐어요. 샤워하고 잠자는 것밖에는 아무 생각도 없어요."

"지금 이 시간에?"

그는 웃었다.

"너무 피곤한 하루를 보냈어요. 이젠 한계에 왔나 봐요."

"아무리 피곤해도 저녁은 먹어야지. , 나갔다가 금방 오자구."

그들은 식사시간을 오래 끌지 않았다. 베리는 그녀가 일찌감치 잘 수 있도록 식사가 끝나자 즉시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런데 키엘의 차가 병원 앞에 서 있었다. 더욱 놀랍게도, 그들이 아파트로 돌아와 보니 키엘이 기다리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왕진을 가야겠는데, 테리가 같이 좀 가줘야겠어요."

그녀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베리가 먼저 따지고 들었다.

"왜요? 전에는 간호사를 데리고 왕진 간 일이 없었잖아요? 그리고 테리는 지금 몹시 피곤해요. 어제는 긴 여행을 했고, 오늘 하루도 무척 바빴었죠. 이젠 잠을 자야 해요."

그러나 테리는 갑자기 생기를 되찾은 듯 명랑한 얼굴로 말했다.

"난 괜찮아요, 즉시 준비하겠어요."

"좋았어!"

키엘은 베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는 테리와 함께 밖으로 나가며 베리에게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소리쳤다.

"기다리지 마. 테리는 내가 잘 보살필 테니까."

"그러시겠지!"

베리가 적의를 감추지 않고 으르렁거렸다. 테리는 그가 단지 자기의 건강을 걱정해서 그러는 게 아님을 알 수가 있었다. 그는 키엘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친구로서 테리를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에겐 로라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한 생각은 테리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녀는 차에 오르자 키엘에게 말을 걸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니, 방금 앉아 있던 참이오. 무척 피곤할 텐데 나가자고 해서 미안해요. 오늘은 정말 잘해 주었어."

그가 칭찬을 다 하다니.

"그냥 할 일을 한걸요."

그녀는 겸손하게 말했다.

"그런데 보통 간호사를 대동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에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당신이 그애와 함께 드라이브를 나간 줄 알았소. 나 때문에 스케줄이 깨진 거요?"

표정이 굳어지며 그녀를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자줏빛 눈동자가 불꽃을 일으키는 것처럼 반짝인다.

"잠을 잘 생각이었어요, 혼자서!"

그녀는 끝말을 힘주어서 말했다.

"베리와의 관계를 염려해서 나를 이렇게 불러냈다면, 공연히 쓸데없는 짓이에요."

"어차피 될 대로 된다는 뜻이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칼처럼 번득였다.

"백 번 얘기해도 마찬가지라는 뜻이에요. 베리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뜻으로는."

"내가 차츰 당신을 믿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테리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기쁘군요,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말예요."

"베리도 기뻐하겠지? 의도한 대로 돼가니까?"

"기막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요, 이젠."

"그렇다면 그애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거요?"

"그래요!"

그녀는 마치 그렇게 믿고 싶다는 마음으로 힘있게 대답했다. 베리의 태도가 확연하게 달라진 것을 그녀는 눈치채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그렇지가 않아. 당신은 그애를 다른 각도에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는 내가 당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기미만 보면 참지를 못하고 있어."

"그건 친구니까 걱정해 주는 마음에서일 거예요."

키엘은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단 한번도, 베리가 여자와 정신적으로 친구가 된 것을 본 적이 없어."

테리는 머리를 뒤로 제치며 지루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 하는 게 어때요?"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어도 그를 의식에서 잠시도 떼어 놓을 수 없었다. 그의 작은 몸짓에 이르기까지 놓치지 않고 그를 느끼고 있다. 그것은 그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줄곧 그러했으며, 어떤 경우에도 달라질 수가 없는 절대적인 감정이었다.

그녀는 차창 밖의 풍경에 신경을 돌리려고 마음먹었다. 그들은 길 양쪽에 돌담을 친 좁고 꼬불꼬불한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차는 졸고 있는 듯한 조그마한 집들을 지나서 다리를 건넌 다음, 다시 푸른 들판으로 들어섰다. 길을 따라서 데이지 꽃과 동자꽃 등 각종 들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어서 나비들의 천국을 이루고 있다.

키엘은 길의 구석구석까지 훤히 알고 있는 것처럼 빠르고 능숙하게 차를 몰아 달리고 있다. 테리의 눈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능란한 손과 앞으로 길게 뻗은 두 다리, 그리고 허벅지 쪽으로 눈길을 주고 있었다.

들판을 다 지나온 차는 다시 양쪽으로 수많은 언덕들을 지나며 언덕배기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차는 어느 농장 앞에서 정지했다. 키엘의 뒤를 따라 농장 안으로 들어갔다. 농장 안에 있는 어느 중년의 농부와 키엘은 정답게 인사를 건넸다. 그 농부는 개한테 물린 다리를 키엘에게 보여 주며 뭐라고 설명을 했다.

키엘이 환자를 대하는 태도는 너무나 부드럽고 친절하여 딴사람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가 왜 그렇게 환자들에게 인기가 있는지 이젠 알 만했다.

농부의 아내는 차를 끓여 내왔고, 그들은 치료가 끝난 뒤에도 무려 반 시간 이상이나 이런저런 세상사에 대해서 유쾌하게 얘기를 나누었다.

집에 돌아올 무렵에는 어둠이 내려서 주위가 칠흑 같았다. 테리는 눈을 감고 머리를 의자 뒤로 기댔다. 키엘의 옆에서 이상하게도 마음의 평안을 느끼고 있었다.

"일어나요, 다 왔어!"

그녀는 깜짝 놀라서 눈을 떴다. 그러고 보니 자기도 모르는 새 키엘의 어깨 위에다 머리를 기대고 한숨 잤던 모앙이다. 어둠이 자신의 부끄러운 얼굴을 가려 주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됐다.

"미안해요, 무례하게 잠이 들었군요."

그녀는 얼른 머리를 들며 사과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얼마나 그런 상태로 더 있었으면 하고 바랐는지 모른다.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상당히 피곤했던 모양이니까. 당신의 자칭 호위병이 기다리고 있군."

그는 아파트 계단 아래 서 있는 베리를 가리키며 그녀에게 말했다. 테리는 무거운 몸을 억지로 움직여서 차에서 내려왔다.

"안녕, 키엘."

그녀는 졸린 목소리를 그에게 인사하고는 아파트 계단을 휘청거리며 올라갔다.

"뭘 하느라고 이렇게나 오래 걸렸지?"

아파트 문을 닫자마자 베리가 그녀에게 힐난조로 물었다.

그녀는 무거운 눈을 들고 그를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키엘을 도왔죠. 베리, 불필요하게 신경을 곤두세우지 말아요. 나는 무척 피곤해요, 빨리 자야겠어요."

"차도 한 잔 안할 거야?"

그녀는 고개를 흔들고는 자기 침실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그리고 자리에 드러눕자마자 곧장 깊은 잠에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테리는 완전히 기력을 회복한 상태로 일어났다. 그녀는 어젯밤, 키엘과 한결 가까와진 듯한 생각에 기분이 매우 좋았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니 몸이 날 듯이 가벼웠다. 베리가 일어나는 기척을 들으며 토스트와 계란 프라이를 만들었다.

"내가 먼저 일어나서 만들려고 했는데"

그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두 팔을 위로 번쩍 쳐들며 미소를 지었다.

"어젯밤엔 통나무처럼 잤어요.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팔팔해요. 정말 이곳에서 일하는 게 즐거워요.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서운해요."

"솔직히 말해봐, 테리. 일이 즐거운 거야, 아니면 키엘 때문이야?"

베리가 정색을 하며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죠?"

"그에게 흠뻑 빠져 있는 것처럼 보여서 하는 말이야. 별로 현명하지 못한 짓이야. 상처를 입게 될지도 몰라."

테리는 그만 웃고 말았다.

"당신들 두 사람은 똑같군요. 서로 상대방을 조심하라고 다투어 나에게 경고를 하고 있으니, 얼마나 웃기는 얘기예요?"

"그렇지만 나는 키엘과는 입장이 다르잖아? 테리에 대한 책임이 있단 말이야!"

"키엘은 나에게 관심이 없어요. 나도 그와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구요."

그리고 베리와는 더더욱 그럴 생각이 없다.

"곧 여기를 떠나야 할 거예요. 틀림없어요."

"그렇게 생각한다니 마음이 놓이는군. 하지만 조심해. 키엘은 매우 끈질기고 위험한 사람이니까. 나는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자가 테리의 마음을 갉아먹는 걸 원치 않아."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줘서 고마와요."

그러나 베리 자신의 사고방식에 따라 자기를 보지 않기를 그녀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리차드도 내가 테리를 잘 돌봐 줄 거라고 기대하고 있을 거야. 그런데 테리가 상처받아서 집으로 돌아간다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그건 기우예요. 그리고 만약 내가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생긴다면 그때는 아무도 어쩔 수가 없을 거예요."

그녀는 그가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깨달을 수 있도록 또렷한 어조로 말해 주었다.

키엘과 하루종일 일을 하면서, 그녀는 그가 자신에게 끼친 감정의 영향이 생각보다 훨씬 더 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은 그의 눈짓 하나, 손짓 하나에도 그 의미를 파악하고, 그에 따라서 손발처럼 움직였다. 그 또한 자신을 지시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로보트가 아니라, 한 사람의 완전한 파트너로 생각하고 일을 맡겼다. 일이 재미있어서 정신없이 모두 하다 보니까, 주말이 되어서는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말았다.

"흡사 물에 젖은 솜 같군."

베리가 딱하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가자구. 아무리 키엘이라도 테리를 이렇게 혹사할 권리는 없어."

"괜찮아요. 나는 일을 즐기고 있으니까."

그녀는 그의 말에 반박했다. 그렇기는 해도 한 사람이 해내기에는 너무 지나친 양의 일이었다. 의사가 나간 뒤에도 산더미같이 많은 서류가 기다리고 있었고, 전화는 그치지 않고 울어댔다.

베리가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산기슭에 있는 고풍스런 레스토랑이었다. 아늑한 방안엔 벨벳으로 씌운 소파가 놓여 있고, 나오는 음식들은 모두 훌륭했다. 테리는 배가 터질 지경이 될 때까지 허겁지겁 먹어댔다.

"여기 가까운 지점에 작은 호수가 하나 있어. 사람도 별로 없고 아주 조용한 곳이야. 거기로 산책이나 갈까?"

식사가 끝나자 베리가 은근한 말투로 그녀에게 제안했다.

"그래요, 이렇게 배가 불러서는 어차피 잠들긴 틀렸어요."

그들은 호수가 가까운 숲속에다 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숲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울창하게 뻗은 나무들이 푸른 잎을 머리에 이고 바람에 일렁이고 있다. 베리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키엘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감정의 소용돌이 같은 걸 베리에게서는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호수의 수면을 향해 그들은 조약돌을 던졌다. 동그란 무늬가 소리없이 퍼져나가는 것을 두 사람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숲에서 새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다.

베리가 그녀의 눈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간절한 애모의 정이 담겨 있었다.

"넌 정말 아름다와, 테리. 알고 있어? 아주 멋진 아가씨."

테리는 문득 16살 나던 해에 그가 자기에게 했던 말을 생각해내고는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가 또다시 그런 말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랐다.

"요 며칠간 난 고민을 많이 했어. 테리는 나를 어떻게 생각해?"

"베리, 제발 그만 해요."

그녀는 재빨리 그의 말을 막았다.

"그런 투의 말은 하지 말아요. 난 이제까지 베리를 오빠로만 생각해 왔어요. 그 이상은 아니예요."

"테리"

"물론 나는 당신을 좋아해요. 하지만 그런 의미로는 아니예요."

베리는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쓸쓸한 표정으로 수면만 바라보고 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감정이 감돌아 모처럼의 즐거운 산책을 우울하게 만들어 놓았다.

"돌아가지."

그가 갑자기 말했다. 그리고는 주저 없이 돌아서서 왔던 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테리는 기분이 착잡했다. 지금까지는 그의 마음을 알면서도 억지로 모른 체해 왔지만, 이제 그가 고백에 가까운 말을 한 이상 그와 함께 한 아파트를 사용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아파트로 돌아오자 베리는 위스키를 벌컥벅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그가 순식간에 반 병을 비워 버리는 것을 보자, 테리는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그를 내버려 둔 채 침실로 갈 수는 없다. 베리는 아까 일로 몹시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그녀는 자신도 위스키를 한 잔 마시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래서 자신의 잔에다 위스키를 반쯤 따르고, 그 위에다 물을 부어서 희석한 다음 천천히 조금씩 마셨다.

"당신은 이제 더 이상 마시면 안 돼요."

그가 다시 잔을 채우는 것을 보고 그녀가 주의를 주었다.

"마시지 않고서는 잠을 잘 수 없을 거야!"

베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뱉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일어나며 그는 소리쳤다.

"미치겠군!"

그러더니 그는 와락 테리를 껴안았다. 그녀가 제지할 겨를도 없이 그의 격렬한 키스가 얼굴에 퍼부어졌다.

테리는 반항했다. 베리의 이런 구석을 제일 싫어했었다. 하지만 그는 팔에 힘을 주면서 뜨거운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테리, 너를 원해! 나를 거부하지 말아줘, 테리."

그는 열에 들뜬 소리를 해댔다.

그녀는 구역질을 느꼈다. 죽을 힘을 다해서 몸부림을 쳤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의 손이 아무 데고 마구 파고들어 왔다. 그녀는 모욕을 느꼈다.

"이것 놔요!"

마침내 그의 허벅지가 자신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어 오자 테리는 소리를 질렀다.

"놔줘요! 당신이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요?"

"키엘만이 유일한 남자는 아니야. 왜 그만 항상 행운을 독차지하지? 넌 내 거야, 테리. 그의 것이 될 수 없어."

그는 반항하는 그녀를 자기 방으로 끌고 들어가서 침대 위에다 쓰러뜨리고는 그 위에 몸을 실었다.

그의 탐욕스런 손이 그녀의 옷을 찢었다. 테리는 있는 힘을 다해서 그를 할퀴고 차고 물어뜯었지만, 그의 무지막지한 완력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위스키가 그를 미친 개로 만들어 놓았다. 무서웠다. 테리는 절망적인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가 더 이상 어떻게 하기 전에 그로부터 빠져나가야 한다!

 

5

비명을 질러봐야 아무도 달려올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반항은 오히려 더 그를 완강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그의 이성에다 호소해 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리."

그녀는 애원했다. 목소리가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다.

"내일 아침이면 당신은 스스로를 증오하게 될 거예요. 제발 그만 두세요. 왜 우리 사이의 모든 것을 파괴하려고 해요?"

그녀는 반항을 멈추었다. 그러자 그도 이제까지의 그 미친 듯한 행동을 중지하고,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싫다는 거야? 같이 즐기자구, 아무도 방해할 사람 없어."

"당신의 키스를 원치 않아요. 내 몸에 손대는 것조차도 싫어요."

"왜지? 넌 키엘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았어. 그가 너를 그렇게나 심하게 대했는데도 말이야. 그는 자기가 원하는 여자는 누구라도 가질 수 있어, 테리."

"당신도 그래요. 나를 강제로 이렇게 할 필요는 없어요. 제발, 베리, 우리의 우정을 망치지 마세요."

"망쳐?"

그가 코웃음을 쳤다.

"아름다운 여자와 사랑을 나누는 일이 무엇을 망칠 수 있겠어? 여자란 워낙 그런 거지. 자 테리, 키스해. 내가 멋진 것을 가르쳐 줄게."

"싫어요, 베리. 싫어!"

그녀는 그의 탐욕스러운 입술을 피해서 마구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는 두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꽉 잡고는 그녀의 입술에다 강제적으로 키스를 했다. 그녀는 다시 구역질을 느꼈다. 그의 입술을 콱 물자 그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뒤로 제쳤다.

"아니, 이게"

그가 말하려는 순간, 테리는 기적적으로 자유의 몸이 된 자신을 발견했다. 키엘이 베리의 뒷덜미를 잡고 문 밖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곧이어 키엘의 주먹이 베리의 턱을 내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방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베리는 길게 바닥에 뻗어 있었다.

"맙소사! 어떻게 한 거예요?"

"맞을 짓을 했으니까. 당신도 그를 부추긴 책임이 있어!"

키엘은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하얗게 굳어 있었다.

"그러고도 친구라구? 오빠와 다름없다구?"

테리는 기가 질려서 말이 제대로 안 나왔다.

"강제였어요! 위스키가 그를 미치게 만든 거예요!"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어. 그야말로 파티를 열고 있는 것 같았어."

그는 빈 위스키 병과 잔들을 보고 있었다.

"또 시작한 줄은 모르고 있었어. 당신이 마시자고 했소?"

"무슨 뜻이죠?"

그녀는 그와 술병을 번갈아보면서 의아해했다. 키엘의 존재는 실내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것처럼 강력하고 위압적이어서 그녀는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에게는 알콜이 심각한 문제가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단 말이오?"

그의 차가운 회색 눈빛이 잠시도 그녀를 떠나지 않고 쏘아보고 있다.

"그에게는 금주령이 내려져 있어. 한 모금이라도 마시면 미쳐 버리니까."

키엘의 말에 테리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럼 베리가 알콜중독자란 말이에요?"

"다름없지. 모르고 있었소? 맙소사! 깜깜절벽이로군. 그렇다면 당신은 그에 관해서 백지나 다름없어요."

"몰랐어요, 그런 줄은 정말 몰랐어요."

그녀는 정신없이 머리를 내저었다.

"순진하기도 하군. 이제 알았으면 빨리 보따리를 싸요. 이곳에선 잠시도 더 있을 수가 없어."

"그럼 어디로 가요?"

"내 집으로 가는 거요."

"네에?"

그것은 프라이팬에서 나와 불 속으로 뛰어드는 거나 다를 바가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럼, 달리 어디 갈 데가 있단 말이오? 염려 말고 따라와요."

테리는 몽유병 환자처럼 넋을 잃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미친 여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머리는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얼굴 화장은 지워져서 루즈가 곳곳에 묻어 있는 데다 드레스는 가슴 부분부터 찢겨져 있다.

그녀는 옷을 모조리 벗어서 팽개치고 샤워를 하고 싶었지만, 키엘을 기다리게 하는 게 두려웠다. 방 밖의 거실은 불길한 침묵이 짓누르고 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옷가지들을 가방 속에다 쑤셔 넣었다.

그녀가 가방을 들고 거실로 나오자, 두 사내는 서로 맹수처럼 노려보고 서 있었다. 베리의 턱에서는 피가 나고 있고, 또 그녀가 할퀸 그의 뺨에는 기다란 손톱자국이 나 있다. 그야말로 꼴불견이다. 그는 무거운 눈을 치뜨고 선 자세로 흔들흔들하고 있었다. 테리는 그를 이런 상태로 두고 싶지 않았으나, 이젠 그가 너무 무서웠다. 그녀는 살아난 기분으로 키엘을 따라 아파트를 나왔다.

차 속에서도 두 사람은 줄곧 말이 없었다. 테리는 이러한 침묵에 이젠 익숙해 있었다. 더군다나 오늘밤에는 도무지 말하고 싶지가 않다. 베리의 키스를 생각하면 지금도 몸이 오싹하고, 목구멍에서 구역질이 올라왔다.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다.

키엘의 집에 당도하자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키가 작고 여윈 중년의 여자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테리를 맞이했다.

", 바네스 부인, 데닝 양이 기거할 방을 하나 마련해 주시겠습니까?"

그녀가 사라지자 그는 테리에게 말했다.

", 뜨거운 걸 좀 마시고 싶지 않소? 아니면 독한 걸 드릴까?"

그녀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위스키는 이젠 죽을 때까지 안 마시겠어요. 정말 끔찍해요!"

키엘은 전의 그 작은 방으로 데려갔다.

"그런 일은 사전에 미리 정해져 있었소. 당신은 너무나 매력적이거든."

"그가 그렇게 짐승처럼 행동할 줄은 정말 몰랐어요!"

그녀는 격렬한 어조로 말했다.

"앉아요, 코코아를 타가지고 올 테니까. 그걸 마시면 좀 진정될 거요."

그녀는 결코 진정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베리의 손이 스쳐간 곳마다 마치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곧 키엘이 돌아왔다.

"바네스 부인이 곧 마실 걸 준비해 올 거요."

그는 그녀의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눈길로 테리를 바라보았다.

"내가 참 귀찮은 존재죠?"

그녀의 커다란 자줏빛 눈이 걱정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머리를 저었다.

"그렇다면 이곳으로 데려오지도 않았을 거요. 호텔로 보냈겠지."

그래도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에 오래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 거죠? 당신이 얼마나 사생활을 소중히 여기는 줄 알고 있어요."

그는 눈빛을 부드럽게 하며 손을 잡았다. 테리는 세차게 손을 뿌리쳤다.

"헤이, 난 베리가 아냐."

그가 부드럽게 소리쳤다

"참을 수 없어요!"

그녀는 고통스럽게 말했다.

"아무도 내 몸에 손대게 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지금 더러워진 것 같애요. 씻고 싶어요."

그는 갑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처럼 말했다.

"그걸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망할 자식! 한 방 더 먹여 주는 건데. 바네스 부인이 마실 걸 가져오면 곧 목욕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겠소."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그녀는 이런 환대에 익숙하지 않아 어색하게 말했다.

"무슨 소리! 바네스 부인에 대해서는 신경쓸 거 없소. 그녀는 매일 할 일이 너무 없다고 투덜대는 정도니까."

바로 그때, 그 부인이 컵과 비스켓이 담긴 쟁반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데닝 양이 지금이라도 주무실 수 있도록 준비해 뒀어요."

"그런데 먼저 목욕을 하고 싶답니다. 준비해 주시겠소? 테리는 부인을 너무 귀찮게 하지 않나 걱정이랍니다."

키엘이 미소 띤 얼굴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천만에요. 오히려 즐거워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테리를 다시 호기심있게 바라보았다.

"이 집엔 손님이 너무 귀하거든요."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서둘러 나갔다.

컵을 양손으로 감싸쥐고, 뜨거운 초콜릿 코코아를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따뜻한 기운이 혼란한 감정을 부드럽게 가라앉혀 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키엘이 연민의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눈치 챘다

그가 더 이상 추근거리지 않는 게 속으로 고마왔다. 어떤 남자도 자신에게 손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베리가 자신에게 그런 행동을 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오랜 신뢰가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두번 다시 그를 보고 싶지가 않다. 그리고 리차드에게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오빠의 가장 친한 친구가 여동생인 자기에게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테리는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괴었다.

키엘이 그녀를 위로했다.

"곧 잊혀질 거요, 다른 나쁜 일들처럼."

"너무 무섭고 창피해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좀처럼 울지 않는 편이었다. 기억으로는 부모님이 사망했을 때 이후 처음 흘리는 눈물이다. 부모를 여읜 후, 그녀는 강해져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온몸의 힘이 다 빠져 버린 느낌이다.

키엘은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그의 마음은 그녀를 끌어안고 다독거려 주고 싶지만, 꾹 눌러 참고서 그녀가 스스로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좀 마셔요, 이제. 역시 내 실수였어. 우린 지난주 내내 너무 바빴었지. 그리고 당신은 놀랄 만큼 잘해냈어. 베리만 아니었다면 나는 당신을 계속 붙잡아 둘 생각을 했을 거요. 하지만 나는 그를 쫓아 버릴 수가 없어. 부모님을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는 않거든."

그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서 소리를 질렀다.

"테리, 만약 그 녀석이 또다시 당신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댄다면, 녀석을 죽여 버리겠어!"

그의 악의에 찬 말에 테리는 깜짝 놀라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에게 그렇게도 불친절하게 대하고 런던으로 쫓아 버리려고 했던 그가 도대체 왜 이렇게 나를 두둔하는 걸까? 혹시 정신이 어떻게 돼버린 게 아닐까?

그녀가 컵을 다 비우자, 키엘은 그녀를 데리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테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아픈 데가 없는 것 같았다. 베리의 행동이 남긴 상처는 오랜 시간이 지나야만 치유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목욕중에도 몇 번이나 잠이 들었다가는 깨곤 했다. 걱정이 된 가정부가 마침내 욕실 문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브레이든 박사님이 걱정하세요."

그녀는 웃는 얼굴로 타월을 들고 대기했다.

테리는 타월로 몸을 감았다.

"고마와요, 바네스 부인. 이제 괜찮아요."

그래도 가정부는 머뭇거리며 가지 않았다.

"아가씨를 혼자 남겨 두고 싶지 않아요. 브레이든 박사님은 아가씨가 잠자리에 드는 것을 확인하라고 하셨어요."

테리는 그의 호의가 고맙게 느껴졌다. 바네스 부인이 건네준 잠옷을 걸치면서 키엘을 생각했다.

침대 시트 사이로 기어 들어가자, 바네스 부인은 마치 그녀의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다독거려 주었다. 그것은 묘하게 테리의 마음을 위안해 주었고, 그래서 다시 어린애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좀처럼 잠은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베리의 미친 듯한 얼굴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육체만을 원했었다. 테리는 식은땀을 흘렸다.

마침내 잠깐 잠이 들었을 때에는, 얼굴도 없는 수많은 사내들이 자기를 향해 덤벼들었다. 테리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트가 온통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다시 옷을 갈아입었다. 겨우 6시다. 창가로 가서 바깥 풍경을 보았다. 저번엔 밤이라서 못 보았던 풍경이, 지금 눈 아래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멀리 조그마한 호수가 거울처럼 반짝이고 있다. 그 연못이 일전에 자기가 빠졌던 그 호수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때 키엘의 품에 안겨서 느꼈던 그 기분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자기는 지금 그의 집에서 마음의 안식을 얻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 테리는 창가에 선 채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바네스 부인일 거라고 짐작했다.

"들어오세요."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키엘이었다. 그도 방금 샤워를 했는지 산뜻한 느낌을 주었다. 베이지 색 셔츠를 안에 받쳐입고, 갈색 실내복을 입은 그의 모습은 말쑥해 보였다. 그는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녕? 왜 그렇게 일찍 일어났지?"

"꿈자리가 나빠서요."

테리는 그의 친절에 고마움을 느꼈고, 또 그가 와준 것이 기뻐서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격이 심했던 모양이군. 당신을 그 아파트에서 베리와 함께 묵게 한 건 내 불찰이오."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당신의 잘못은 아니예요. 내가 베리를 잘못 알았던 거죠. 베리가 그럴 줄은 정말 몰랐어요."

"아니오, 어제까지만 해도 당신과 베리가 연인 사이인 줄로만 알았소. 정말 어제 내가 갔던 게 다행이었어."

"그런데 어떻게 왔었죠?"

"병실에 기구를 몇 개 가지러 갔다가 그 소동을 듣게 됐지."

그는 테리가 서 있는 창가로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서 풍기는 사향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그녀는 불현듯 그의 넓고 단단한 가슴에 안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의 품이라면 안심해도 좋을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있어서 결코 두렵지 않은 단 한 사람의 남자다.

그는 여자 쪽에서 원하지 않는 한 절대로 키스를 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제 테리는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그가 왜 그토록 의붓동생인 베리를 경멸하고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베리의 그런 단점은 리차드도 잘 모르고 있었던 면이었다.

그는 어쩌면 술을 통해 키엘에 대한 자신의 열등감을 해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상당히 성공한 의붓형에 비해서, 베리 그 자신은 어느 모로 보아도 열등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는 고통이었으리라.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재혼한 게 못마땅했을 것이다. 키엘에 대한 열등감은 바로 그 아버지가 그에게 선사한 것이니까. 그가 키엘에 대해서 악감을 품고 있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당신이 아무래도 그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오늘은 더브코티지에나 다녀올까 하는데 어떻겠소?"

그의 눈길은 너무 부드럽고 목소리도 은근하다.

"병원은 어떡하구요?"

"토요일은 대개 바쁘지 않아요. 베리 혼자서도 해낼 수 있을 거야. 밀린 사무는 휴식시간에 처리하면 되겠지 뭐."

테리는 표정이 밝아졌다.

"물론 처리할 수 있어요, 일이 좀 많긴 하지만요. 전 좋아요."

"그럼 아침식사가 끝나면 곧 출발합시다. 그런데 기분이 괜찮겠소?"

"괜찮아요."

그녀는 그의 걱정이 고맙게 느껴졌다.

"바네스 부인이 요리를 하는 동안 정원이나 산책하지."

정원은 주변의 경관과 잘 조화되고 있다. 관목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고, 장미 덩굴이 울타리를 따라 우거져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다. 정원을 따라 한 바퀴 빙 돌면서 바라보는 바깥 경치도 수려한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곳이에요."

가장 경관이 좋은 지점에다 만들어 놓은 벤치 위에 앉으면서 그녀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키엘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겨울엔 꽤나 삭막하지. 눈이 많이 오면 난 아파트에서 지내요. 대부분의 길이 막혀 버리거든. 그런데 하필이면 그런 때가 제일 바쁘단 말야."

하지만 나는 그때에는 이곳에 없겠지. 그 생각은 그녀를 서글프게 만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곳을 떠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베리와 함께 일한다는 것은 이젠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그녀의 생각을 눈치라도 챘는지 키엘이 물었다.

"베리에게 끌린 것도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이곳까지 왔지? 이런 시골까지 말이오."

"런던에서의 생활을 좀 바꿔보고 싶었어요. 어쨌든 집에서는 나와야 했거든요. 오빠가 결혼을 했기 때문에 함께 생활하기가 불편했어요. 그래서 그 집에 대한 내 권리 절반을 오빠에게 넘겨 드렸죠. 이제 돌아가면 나는 따로 아파트를 구해야 해요."

"하지만 거처를 구할 때까지는 오빠와 함께 지낼 수 있겠지? 나는 테리가 집 없는 천사일 줄은 몰랐어."

테리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만약에 그가 알았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있을까? 마찬가지겠지. 그는 아직도 나를 이곳에서 떠나보내려는 생각을 바꾸지 않고 있잖아.

"물론 길거리로 내쫓지야 않겠죠."

"오빠에게 다시 돌아간다고는 연락을 했소?"

"아뇨."

그는 그녀를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지? 내가 마음을 바꾸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그의 말소리에는 갑자기 의심이 잔뜩 배어 있다.

"전혀."

테리는 재빨리 대답했다.

"나는 단지 오빠가 하루라도 덜 걱정했으면 싶었어요. 오빠는 지금 축복받은 신혼생활을 즐기고 있는 중이거든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는 오빠가 죽 나를 돌봐 주었죠. 이제는 내가 제 발로 설 수 있어야만 해요."

"오빠는 당신이 베리와 한 아파트를 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소?"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입술을 꼭 깨문 그녀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베리가 어제처럼 그렇게 돌변할 줄은 몰랐어요. 갑자기 괴물로 변했거든요."

키엘의 얼굴이 분노로 어두워졌다.

"그 녀석은 내게도 항상 그런 식으로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지. 우리 두 사람이 친해지는 것을 싫어한 거요. 말하자면 질투를 느낀 거지."

"설마?"

테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질투를 느낄 이유가 없잖아요?"

그녀는 그의 말이 의미하는 미묘한 숨은 뜻을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모호하게 자신의 감정을 감춰 놓고 있었다.

"베리는 어느 여자와도 오래 관계를 유지하지 못해요. 곧 싫증을 내고 말지. 그래서 이제 새로운 여자로 당신을 선택한 거요. 어제의 그 행위가 그것을 설명해 주는 거지."

"이젠 알았어요."

베리는 키엘과 함께 일하는 한 결코 자신의 열등의식을 지울 수가 없을 것이다. 테리는 그것을 확신할 수가 있었다. 그러한 단순한 사실을 그들의 부모는 왜 모르고 있는지 그것이 이상스럽다. 두 사람을 같이 일하게 함으로써 사태를 더 악화시키고 있는 게 아닌가. 베리는 키엘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는 훈련을 익혀야 할 것이다.

"이제 베리에 관한 얘기는 그만 합시다."

키엘은 쾌활한 표정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그 녀석 때문에 우리들의 유쾌한 하루를 망치고 싶진 않으니까. 가서 아침식사나 합시다."

아침 식탁을 본 테리는 깜짝 놀라서 눈이 둥그래졌다. 이제까지 자신의 아침식사라고 해봐야 토스트 몇 쪽이 전부였는데, 이건 완전히 진수성찬이 아닌가. 오트밀, 토스트, , , 집에서 만든 빵 등 없는 것이 없다.

테리는 그 모든 것을 조금씩 다 먹었다. 그러나 키엘의 식사량을 따를 수는 없었다. 그는 당나귀 같은 왕성한 식욕을 보여 주었다.

식사가 끝나자 두 사람은 출발했다. 그렇게 먼 길은 아니었다. 테리는 도중에도 이것처것 구경하기에 바빴다.

그라스미어는 여러 가지 토산품과 선물 상점이 줄지어 있는 자그마한 마을이었다. 예술가들의 화랑과 전시장이 마을 중심부에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곳에서 오래 머뭇거리지는 않았다. 교회의 정원에 있다는 워즈워스의 무덤에조차 들르지 않은 채 곧바로 더브코티지로 향했다. 이곳은 그 시인과 여동생, 그리고 만년에는 그의 아내와 함께 살았다는 곳이다. 별장은 지붕에다 회색 타일를 입힌 조그마한 흰색 건물이었다.

건물 안에는 생전의 워즈워스가 사용했던 모든 유물을 고스란히 보존해 놓고 있었다. 테리는 그들의 생활상을 눈앞에서 보듯 그대로 상상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가까이 있는 창고는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있었는데, 그의 작품 원고와 모든 저서, 그리고 사물(私物)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런 모든 것들을 매우 흥미 깊게 관찰하곤 했다.

"그래, 어떻소?"

밝은 햇빛 아래로 나오자 키엘이 그녀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당신이 보여 주는 건 모두 내게는 새로운 거예요."

"이제 랑데일 산정 쪽으로나 올라가 볼까? 그곳도 놓치기는 아가운 코스요."

"좋아요!"

그녀는 기뻐서 그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그의 결정은 무조건 그녀를 기쁘게 했다.

"왼쪽에 보이는 것이 로크리그 언덕이오. 오르기가 쉽지. 내려다보이는 호수가 아주 절경이야. 올라갈 수 있겠소?"

테리는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등산 차림이 아닌데요?"

그건 참으로 유감이었다. 왜냐하면 진심으로 키엘과 함께 그곳을 오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조그마한 연못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즐기는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오. 가히 천국이지."

그 연못은 산 속에 있는 아주 조그만 것이었다. 스케이트 타기를 좋아하는 테리는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이런 멋진 자연 속에서 더군다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하루종일 얼음 위를 미끄러지더라도 지루할 것 같지가 않다.

얼마 후 두 사람은 랑데일 산정으로 올라가는 기슭에 당도했다. 그들 앞으로 봉우리가 높게 솟아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봉우리는 아름답고 험준했다. 험한 암벽에는 등반가들이 점점이 매달려서 기어오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기슭에서 약 3km쯤 올라간 계곡에 자리잡은 호텔에서 그들은 점심식사를 했다. 그리고는 계곡 위로 폭포를 구경하러 가기로 했다. 호텔에서 20분 정도 걸어 들어가야만 했는데, 산길이 꽤나 가파르고 험준했다.

폭포의 높이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그러나 암벽을 뚫고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는 보는 이의 가슴까지도 써늘하게 만들었다. 폭포는 하얀 물방울을 튀기며 바위 위로, 웅덩이 위로 줄기차게 떨어진다. 그녀는 이 아름다운 경관에 가슴이 벅차서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이곳에 데리고 와줘서 정말 기뻐요. 난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그녀의 좋아하는 모습을 그는 매우 기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당신이 좋아할 줄 알았소. 당신과 나는 서로 취향이 비슷한 것 같군. 하지만 이곳엔 이보다 더 아름다운 폭포가 많다는 걸 알아야 해."

그의 말은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고, 아울러 그에 대해 좀 색다른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호텔로 돌아온 그들을 다시 차를 몰아 라이노즈 고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키엘이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

"17세기엔 이 지역이 밀수꾼들로 득실거리고 있었소. 그들은 해안으로부터 이 고개를 넘어 밀주를 운반해 와서, 랑데일 부근의 농가 지하실에 저장해 두곤 했다더군."

"나는 밀수꾼이란 말만 들으면 콘월 지방을 연상하게 돼요."

"밀수는 어디서나 성행했으니까."

그가 설명을 계속했다.

"그런데 그 운반 통로가 차단되자, 아예 이곳 지역에서 위스키를 주조하기 시작했소. 그래서 랜티 슬리 같은 사람은 유명한 위스키 제조자로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지."

갑자기 테리는 몸이 의자 등받이로 기대어지는 것을 느꼈다. 가파른 길을 올라가게 되면서 자꾸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뿐만 아니라 너무 좁아서 동시에 두 대의 차가 지나갈 수도 없었다. 테리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키엘의 얼굴을 보니 빙그레 웃고 있다.

"재미있소?"

"재미라구요!"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간이 콩알만해졌어요. 이런 지독한 길은 처음이에요."

"호수지방은 원래 이렇게 아기자기하다오."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이따금 차는 아래로 곤두박질을 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좌석에 매달리다시피하여, 행여나 벼랑 아래로 떨어질까 봐 발발 떨었다. 도중에 여러 번이나 차를 정지시키고 앞에서 내려오는 다른 차를 먼저 통과시켜야만 했다.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길은 더 아찔하게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아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영국에서 제일 험한 길일 거요. 옛날 로마 인들에 의해서 닦여진 길이지. 저쪽으로 돌아가면 아직도 옛 성채가 남아 있는데, 잠깐 들렀다가 갈까?"

테리는 고개만 끄덕였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한번도 이처럼 머리칼이 일어설 정도로 아찔한 산길을 달려본 적이 없었다. 이런 벼랑길을 어떻게 자동차가 지나갈 수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만에 하나라도 브레이크가 고장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하니 비명을 지를 수조차도 없었다.

"여기서 사고가 많이 일어나지 않나요?"

그녀는 작은 소리로 키엘에게 물어보았다.

"별로 일어나지 않아요. 어쩌다가 서로 길을 양보하지 않으려고 다투다가 차가 많이 밀려서 소동이 일어날 때가 있긴 하지만. 누구나 이곳 호수지역에 오면, 이 라이노즈 고개를 넘는 일에 도전하기를 좋아하지."

성채에 도착했을 때는 오랜 긴장이 풀린 탓인지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을 정도였다. 테리는 다리가 휘청거려서 키엘의 팔에 매달리지 않으면 설 수조차 없었다.

"돌아갈 때는 그 길로 가지 않아도 돼죠?"

"당신 맘대로지. 그런데 웬일이오? 그렇게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으니, 하지만 진짜 스릴은 밤에 그 길을 오르내려 봐야 느낄 수 있지."

그는 껄껄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천만에요, 사양하겠어요."

그녀는 감히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두 사람은 화강암으로 된 성벽을 따라 걸었다. 성 안에서 곡창과 본영이 자리 잡고 있었던 터를 살펴보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성채는 암반 위에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고, 그 아래에 목욕탕과 연병장이 있다. 성채에서 내려다보이는 연병장은 절벽 바로 아래에 맞닿았다. 암벽에서 떨어져 내린 바위들이 연병장 여기저기에 흩어져서 다소 황량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잠시 후 그들은 성채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즐거웠소?"

키엘이 에스크데일에 차를 세우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이 처음 말한 대로 너무 멋있었어요. 하지만 서둘러서 다시 도전하고 싶지는 않아요. 너무 혼이 나서."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길을 우회해서 돌아가려면 엄청나게 먼 길이 될 텐데"

"괜찮아요."

그녀가 재빨리 대답했다. 아무리 먼 길이라도 마음 편하게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래티를 탈 시간이 됐군. 당신도 좋아할 거요."

그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래티가 뭐죠?"

"미니 열차의 이름이지. 옛날 빅토리아 광업회사에서, 에스크테일의 광석을 래빈스글라스에 실어 나르기 위해 부설한 철도지. 그런데 l915년에 관광용으로 개조하여 여행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소."

두 사람은 요금을 지불하고 미니 열차에 올랐다. 열차의 내부는 번쩍번쩍 빛이 나게 닦아서 깨끗하고 아담하게 꾸며져 있었다.

"연중무휴로 운행되고 있지."

키엘이 테리에게 설명해 주었다.

"여행객들의 즐거움이 될 뿐만 아니라, 이 에스크데일 계곡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대화 통로 구실도 하고 있다는군."

이것은 테리가 미처 생각 못했던 즐거움이었다. 그들은 수많은 숲속의 공터를 지나고 암벽을 따라 달리며, 아래쪽의 회색 별장들을 건너뛰었다. 미니 열차의 좁은 좌석에서 키엘의 옆에 바싹 붙어앉아 대자연의 공간을 달리고 있는 테리의 마음은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황홀했다.

이 순간이 영원히 끝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기에게 그렇게 거칠고 냉혹하게 대하던 키엘과 지금 이런 꿈 같은 여행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다.

두 사람은 자그마한 농가에서 차를 마시며 쉬었다.

테리는 이제 베리로부터 받은 충격에서 차츰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베리의 얼굴만 떠오르면 역겨운 생각이 치솟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생각을 거리낌 없이 말하고 큰소리로 기쁨을 표현할 때쯤 되자, 비로소 키엘은 그녀의 손을 잡고 농가를 나왔다.

"정말 오랜만에 일을 잊고, 하루종일을 즐겁게 지냈군."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후회하는 건 아니겠죠?"

테리는 눈을 곱게 흘기며 그를 바라보았다.

"전혀"

그는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래, 기분이 좀 어때요? 꽤 행복해 보이기는 하는데, 이젠 견딜 만하오?"

테리는 약간 부끄러운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부드럽게 그녀를 끌어당겼다.

"다행이군. 베리에게서 받은 충격이 오래 가지 않길 바라겠어."

그의 부드러운 위로는 테리의 괴로움을 한결 가볍게 해주었다. 그는 테리의 마음속에 있는 고통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새로운 이미지를 채워 넣었다. 그것은 그녀가 이제까지 누구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신비하고 아름다운 느낌이었다.

그가 테리를 안고 있는 양팔에 힘을 주어 자신의 가슴에다 지그시 누르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등을 안았다. 그리고는 웃음 띤 얼굴을 쳐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키엘은 그녀의 이마에다 가볍게 키스하고 잠시 동안 그녀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갑자기 격렬하게 그녀의 입술에다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녀의 흥분도 고조되었다.

그러나 그가 머리를 들자 테리는 안타까왔다. 그가 계속해서 키스를 해주었으면. 그의 키스는 그냥 자기의 마음을 떠보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는 진심으로 나에게 키스하고 싶어서 하고 있는 거야.

"때와 장소가 마땅치 않군."

키엘이 조용히 속삭였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가 않거든."

또 다른 미니 열차가 돌아오고 있었다. 승객들이 우루루 쏟아져 나와서 찻집으로 들어오며 두 사람에게 미소를 던졌다.

테리는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 얼른 열차 위로 올라갔다. 바깥의 경치까지 온통 장미빛으로 활활 타오르는 것 같다.

내려오는 길에 그들은 작은 호숫가에서 차를 멈추었다. 어스름이 내리는 호수의 수면을 붉게 물들이면서 떨어져 내리는 낙조를 두 사람은 함께 지켜보았다. 그것은 실로 장관이었으며, 더군다나 키엘과 함께라는 사실이 그녀를 더할나위없이 기쁘게 했다.

키엘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너무나 멋있는 오늘 하루에 대해서 당신께 감사드려요."

그녀는 진심을 담아 그에게 말했다.

"오히려 내가 즐거웠어."

그가 미소를 지었다.

"얼른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바네스 부인이 뭘 맛있게 만들어 놨는지 봅시다. 배가 몹시 고픈걸."

그들이 식탁에 앉자마자 키엘을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고 가정부가 말했다. 전화를 받고 온 그의 얼굴은 화가 나 있었다.

"미안하오. 그렇지만 오늘 하루종일 방해받지 않았으니 그나마 고맙게 생각해야지."

그가 외출하자 테리는 혼자 남아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곧 잠자리에 들었다. 정말 길고도 즐거운 하루였다. 때로는 머리카락이 곤두서기도 했지만, 그 어떤 추억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날이었다.

잠자리에서 테리는 키엘이 돌아오는 인기척을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깨어 있으려고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눈이 사정없이 감겨왔다. 다음날 아침 태양이 그녀의 얼굴에다 부드럽게 입맞출 때까지 정신없이 잠을 잤다. 테리는 눈을 뜨자 크게 기지개를 켜며 하늘을 향해 미소를 던졌다.

"안녕, 나의 해님?"

그녀는 매우 기분이 좋았다. 인생이 온통 장미빛으로 비쳤다.

그녀는 창가로 걸어가서, 멀리 반짝이는 호수와 언덕의 그림자들을 내려다보았다. 그것들은 오늘 아침에는 한 점의 얼룩도 없이 맑고 깨끗하게 드러나 보였다. 산에는 평소에 보이던 안개자락도 하나 없었다.

제비 한 마리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고, 잔디밭 위에는 참새들이 종종걸음으로 노닐고 있다. 커다란 검정 말이 가까운 전나무에 고삐를 매인 채, 뒷다리로 허공을 차면서 곡예를 벌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테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샤워를 마친 후 가벼운 옷차림으로 아래층에 내려왔다. 식당엔 아무도 없었다.

바네스 부인이 곧 따라나왔다.

"안녕하세요, 데닝 양? 박사님은 호출을 받고 나가셨어요. 아가씨께 오늘 하루는 실컷 게으름을 피워도 좋다고 전하라더군요."

"언제 돌아오신댔어요?"

바네스 부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알 수 없죠, . 저녁 무렵엔 오시겠죠. 데닝 양이 계시니 좀 더 일찍 오실지도 모르죠."

테리는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나타내진 않았지만 진심으로 그가 일찍 돌아오기를 바랐다. 대충 아침식사를 마치고, 따뜻한 햇빛이 비치고 있는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주위엔 산들이 둘러싸여 있고, 거대한 암석이 수천 년을 내려오는 동안 온갖 풍우로 갈라지고 부서져서 도처에 흩어져 있다. 계곡에서 떨어져 내리는 시냇물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인다. 그 골짜기를 따라 올라간 관목의 숲은 싱싱한 생명의 그늘을 계곡에다 짙게 드리우고 있다.

그 아래쪽 기슭엔 초목과 히스, 그리고 이끼류 등이 햇빛 아래 드러나 보였다. 암벽이 하늘로 치솟아 장관을 이루고 있는 그 아래엔 작은 농가 한 채가 외롭게 웅크리고 있다.

먼 곳에서 개가 짖었다. 그리고 굴뚝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갑자기 자동차의 엔진 소리가 그 모든 소리들을 지워 버리며 그녀의 귓전을 때렸다. 키엘이 돌아온 걸까?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키엘의 흰 차가 아니었다. 바로 자신의 빨간 미니카였다. 그러나 아직도 그 차에 탄 사람이 키엘일 확률은 있다. 그 내 차를 몰고 왔을지도 모르니까.

그녀는 만면에 함박웃음을 띠고, 잔디밭을 가로질러 차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 웃음은, 차에서 내린 베리를 발견한 순간 깨끗이 지워지고 말았다. 생전 처음으로 베리를 만난 것이 조금도 달갑지 않게 여겨졌다.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