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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를 건드리지 말라 1

호랑이를 건드리지 말라

수 피터스

 

1

"당신은 지금 남의 땅에 들어왔소. 브로드워터 공원은 개인 땅이오."

커다란 종마를 탄 웬 남자가 앞길을 번개처럼 가로지르며 소리쳤다.

카라는 깜짝 놀라며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이봐요! 남이 가는 길에 끼어들려면 미리 손으로 신호를 해야 하잖아요? 하마터면 충동할 뻔했어요. 내가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면 말을 제때에 멈추지 못하고 보기 좋게 나가떨어졌을지도 몰라요."

카라는 화가 나서 남자에게 쏘아붙였다.

"당신이 엉뚱한 공상에 잠겨 있지만 않았다면 내가 오는 걸 보았을 거요. 게다가 젖소 떼가 풀을 뜯고 있는 곳에서 전속력으로 달리다니혹시 당신은 나뿐 아니라 젖소도 보지 못한 거 아니오?"

남자는 빈정거리듯이 물었다.

"소떼라면 보고 말고 할 필요도 없죠. 소떼가 언제나 거기 있다는 건 보지 않아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카라는 도도하게 대꾸했다.

황금빛 종마를 탄 남자를 보지 못하다니, 눈이 멀었던 모양이라고 카라는 생각했다. 햇볕에 탄 남자의 얼굴에는 무법자와도 같은 무례함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가까이 서 있는 참나무의 앙상한 나뭇가지가 남자의 황갈색 머리카락에 그림자를 드리워, 호랑이 가죽 같은 줄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그는 날카로운 황갈색 눈동자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녀가 얌전히 말을 돌려 오던 길로 되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카라는 짙은 속눈썹으로 남자를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놀랄 만큼 멋진 남자였다. 얼굴에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데가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만났을까?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아마 우연의 일치일 거야. 다른 것이야 어떻든, 저 피부 빛깔만으로도 한번 만나면 좀처럼 잊을 수 없는 얼굴인걸.

카라는 황갈색 승마용 바지에 감싸인 그의 긴 허벅지와 당당한 체격을 눈여겨 바라보았다. 바지와 같은 색깔의 스웨터와 몸에 꼭 맞는 승마용 재킷이 탄탄한 어깨와 늘씬한 허리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군살이라고는 하나도 붙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소들이 있는 건 알고 있었다고? 하지만 나는 이 공원에서 한 번도 당신을 본 적이 없는데?"

그는 자기가 매일 아침마다 브로드워터 공원에서 말을 탄다는 걸 은근히 암시했다.

카라는 까닭 없이 맥박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여전히 쌀쌀했다.

"난 항상 공원에서 말을 타요. 내가 브로드워터에 있을 때는 언제나"

그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녀를 찬찬히 뜯어보더니 무뚝뚝하게 말했다.

"지금부터는 다른 곳에서 말을 타야 할 거요. 아까도 말했듯이 여긴 개인 땅이오."

"나도 잘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오던 길로 되돌아가시오. 앞으로 다시는 함부로 이곳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이번만은 너그럽게 봐주겠소."

카라는 발칵 화가 치밀었다.

"정말 너그러우시군요. 하지만 여기서 말을 타도 된다고 허락해 준 건 바로 이 땅의 주인이에요. 그리고 난 지금 브로드워터 경을 만나러 가는 길이구요."

이 남자는 브로드워터 저택의 고용인인가 봐. 아마 새로 온 대리인이겠지. 전에 있던 대리인은 주인처럼 온화하고 친절한 분이었는데 내가 2년 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곧 퇴직할 예정이라고 했으니까, 이 거만한 남자가 그 자리를 물려받은 게 틀림없어카라는 속으로 생각했다.

2백 야드쯤 떨어진 곳에 돌로 지은 저택이 어렴풋이 보였다. 카라는 빨리 그 따뜻한 저택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점박이 암말의 옆구리를 발뒤꿈치로 가볍게 찼다. 그녀는 언제나 안장을 얹지 않고 말을 탔기 때문에, 그녀의 암말은 주인의 신호를 곧 알아차리고 고양이처럼 재빨리 앞으로 달려 나갔다.

카라가 조금만 더 생각해 보았더라면, 이 경주에서 이길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암말이 두 걸음 갈 때, 그 커다란 종마는 한 걸음만 성큼 내디디면 충분했다. 카라가 몇 야드도 채 가기 전에, 남자는 황금빛 종마를 몰아 번개처럼 그녀의 뒤를 따라잡았다.

카라는 옆길로 피하려고 말고삐를 옆으로 홱 잡아당겼다. 그러나 남자는 그녀의 작전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이윽고 두 마리의 말이 머리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더 이상 달아날 여지도 없었다. 남자가 한 손을 내밀어 암말의 고삐를 움켜쥐고 속도를 늦추었을 때도 카라에게는 그를 막을 만한 힘이 없었다.

"고삐를 놔요!"

카라는 남자에게 소리쳤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말을 달린 걸 진작부터 후회하고 있었다. 소떼 옆을 전속력으로 달린 건 실수였다. 이젠 이 낯선 남자가 뭐라고 비난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당신은 훈계를 좀 받아야겠군."

남자가 엄격하게 말했다

"그럼 날 훈계할 사람은 누구죠? 당신?"

카라는 그토록 쉽게 따라잡힌 게 분해서 발칵 화를 냈다.

"브로드워터 경을 만나면 당신이 한 짓을 낱낱이 고해바치겠어요."

"얼마든지 일러바치시지."

남자는 그녀의 말고삐를 꽉 움켜쥔 채 자갈길을 지나 저택 현관 앞으로 암말을 끌고 갔다.

카라는 재빨리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나 그녀의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남자는 그대로 순순히 보내 줄 수는 없다는 듯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이 암말을 마구간에 넣어 두게, 조셉."

그는 말굽 소리를 듣고 마구간에서 뛰어나온 한 남자에게 말고삐를 건네주었다

"안녕, 조셉?"

카라는 낯익은 말구종을 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인사를 하고는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이구, 바렐리 양. 반갑습니다. 돌아오셨다는 말을 들었습죠."

"돌아오니 좋군요."

카라는 울퉁불퉁 마디가 박인 조셉의 손을 반갑게 마주잡았다.

"우리 어젯밤에 도착했어요. 그래서 오늘 아침에야 틈을 내어 브로드워터 경에게 드릴 입장권을 가져온 거예요."

"외국에 계시는 동안 영국 신문을 보지 않으셨군요, 아가씨?"

", 못 봤어요. 우린 올해 아주 먼 곳에서 공연을 했거든요. 대개 외딴 곳만 돌아다녔어요. 그래서 영국 신문을 구할 수가 없었죠. 운이 좋으면 어쩌다 하나씩 구해 보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드물었어요. 그러니까 내가 떠난 뒤에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은 모두 아저씨한테 들을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아가씨"

"종마를 잘 닦아 주게, 조셉."

황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말구종의 얘기를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눌 틈을 주지 않고 그녀의 팔을 더욱 단단히 움켜잡았다.

카라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11월 치고는 보기 드물 정도로 따뜻한 날씨여서인지 육중한 참나무로 만들어진 현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현관에 이르러서야 그는 팔을 놓아 주며 조롱하듯 공손히 절을 하면서 카라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권했다. 카라는 그를 노려보며 낯익은 현관 홀로 들어섰다. 그의 손이 닿았던 자리가 마치 전깃줄에라도 닿았던 것처럼 따끔거렸다. 카라는 그 팔을 마구 문지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는 서재에 있겠네, 다니엘스."

트위드(올이 굵은 모직물)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홀 맞은편에서 나타났다. 이 사람도 역시 카라가 처음 보는 남자였다.

"곧 커피를 올리겠습니다. 서재엔 불을 피워 두었습니다."

다니엘스라는 남자는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카라를 힐끗 쳐다보고는 홀을 가로질러 부엌 쪽으로 사라졌다.

황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다시 그녀의 팔을 붙잡으려고 손을 뻗쳤다. 카라는 흠칫 놀라며 재빨리 몸을 움직여 그의 손길을 피했다. 황갈색 눈동자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가 몸을 피한 이유를 짐작했을까? 카라는 뺨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서재가 어디 있는지는 나도 알아요."

카라는 재빨리 맞은편 문 쪽으로 걸어가 손잡이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내가 열어 드리지."

남자가 어느 새 그녀를 앞질러 손잡이를 잡았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을 스쳤다. 카라는 바늘에라도 찔린 듯인 손을 움츠렸다. 그는 문턱에 딱 버티고 서서 카라에게 먼저 들어가라는 몸짓을 해보였다. 그가 문 앞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아 있는 틈으로는 카라가 지나가기에도 빠듯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에는 마음대로 지나가 보시지라는 도전의 뜻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카라는 망설였다. 몸이 닿지 않게 저 틈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뺨이 다시 달아오른다. 문 앞에서 비키라고 말한다면, 이 남자는 내가 자기와 몸이 닿는 걸 두려워한다고 생각할 거야카라는 마음을 굳혔다.

"그럼 실례하겠어요."

그녀는 빈정거리듯 말하곤 발걸음을 내디뎠다.

카라는 그를 홱 스쳐 지나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남아 있는 공간이 너무 좁았다. 몸을 잔뜩 움츠렸는데도 팔이 그의 소매를 스쳤다. 그의 승마용 재킷에서 고급 모직 옷감의 냄새가 풍겨 왔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그녀를 혼란시킨 것은 값비싼 로션 냄새였다. 그녀는 숨을 들이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좁은 틈을 통과했다.

"쟁반을 여기 놓고 가요, . 나머지는 우리가 할 테니까."

황갈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은쟁반을 들고 들어온 젊은 하녀에게 말했다.

"다른 시키실 일은 없습니까, 몬크리프 씨?"

"이젠 됐어요. 고맙소, ."

그는 하녀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는 험악한 검은 구름을 뚫고 비쳐드는 한 줄기 햇살처럼 신선했다. 카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녀가 당신을 몬크리프 씨라고 불렀나요?"

문이 닫히자마자 카라는 서둘러 말을 꺼냈다.

"공교롭게도 그게 내 이름이오."

"타일러 몬크리프, 그 유명한 박물학자 말인가요?"

그의 얼굴이 낯익어 보였던 것고 무리가 아니다. 또한 그 독특한 색깔의 머리카락과 눈이 그녀의 기억을 되살려내지 못한 이유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기거하는 밴 트럭에는 흑백텔레비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카라는 또 다른 사실을 깨닫고 의기양양해졌다. 타일러 몬크리프라면 브로드워터 저택의 대리인이 아니라 손님일 게 분명해. 그렇다면 나를 공원에서 쫓아낼 권리는 없어. 카라는 원래의 자신감을 되찾았다.

"커피 들어요."

"당신하고 커피나 마시러 온 게 아녜요. 난 브로드워터 경을 만나러 왔어요."

"지금 만나고 있잖소?"

"뭐라구요?"

카라는 어이없어 하는 얼굴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당신이 지금 쳐다보고 있는 내가 바로 브로드워터 경이라고 말했소. , 앉아요."

그의 시선이 갑자기 날카로와졌다.

"나는그냥 서 있겠어요."

그녀의 키는 그의 어깨에도 채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말할 때 그의 얼굴을 바라보려면 고개를 뒤로 젖혀야 했다.

"좋을 대로 하시오."

그는 가까이 있는 흔들의자를 아무렇게나 잡아당겨 그녀의 무릎 뒤쪽으로 쑥 밀어 넣었다. 그러자 무릎이 꺾이면서, 그녀는 싫든 좋든 의자에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잔에 커피를 따르고 설탕을 듬뿍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그 커피 잔을 카라에게 내밀었다.

"이걸 마셔요."

카라는 방금 그가 말한 폭탄 같은 선언을 억지로 삼키듯, 꽉 막힌 목구멍 안으로 커피를 흘려 넣었다.

"그러니까 당신이저어"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현재의 브로드워터 경은 바로 나요. 일 년쯤 전에 할아버지에게서 영지와 작위를 물려받았소."

"난 몰랐어요우린 외국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이곳 소식을 하나도 듣지 못했어요."

카라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충격을 받은 모양이로군."

카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이 좀 늦은 것 같군요."

"나는 어릴 때 이후로 할아버지를 뵌 적이 없소. 줄곧 외국에서 지냈으니까."

할아버지와는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니니 동정해 줄 필요도 없다는 말투였다.

"그럼 난 공연히 헛걸음만 한 셈이군요."

그녀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 일어설 준비를 했다.

"왜 헛걸음을 했다고 생각하오? 브로드워터 경이라는 작위는 아직 남아 있소."

"왕은 죽어도 영원하다는 건가요?"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되나? 한데, 아까 당신은 브로드워터 경에게 줄 입장권을 갖고 왔다고 말했는데?"

카라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는 늙은 브로드워터 경을 좋아했다. 마음씨 좋은 그 노인은 그들이 매년 브로드워터 공원에 캠프를 치고 겨울을 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그 답례로 카라는 노인을 공연에 즐겨 초대하곤 했다.

그녀는 젊은 브로드워터 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자비로운 구석이라곤 한 군데도 없는 얼굴이다. 그녀는 자기 속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한 남자의 시선을 견디기 힘들어 눈을 내리깔았다.

이 젊은 브로드워터 경은 도무지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개인적으로 아무리 그를 싫어한다 해도 현재 작위를 갖고 있는 사람은 그인 것이다. 그를 개막공연에 초대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지만, 서커스단이 그의 땅에 캠프를 치고 겨울을 나려면 그의 비위를 거스르면 안 된다. 그녀는 마지못해 바지 주머니에서 입장권을 꺼내 말없이 그에게 내밀었다.

"우대권?"

그는 겉봉에 쓰인 글씨를 보고 싱긋 웃었다. 카라는 이를 악물었다. 그가 봉투에서 입장권을 꺼냈다.

"미첨 브룩 서커스?"

그는 느닷없이 큰소리를 지르며 그녀의 코밑에 입장권을 들이댔다.

"어떻게 내게, 하필이면 나에게 서커스 입장권을 건네줄 수 있단 말이오? 당신이 서커스단원인 줄 알았다면, 내 집은 고사하고 내 공원에 한 발짝도 들여 놓지 못하게 했을 거요."

카라로서는 화산 꼭대기에 앉아 있다가 느닷없이 화산이 폭발해 버린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반응은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카라는 어안이 벙벙해서 한참 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서커스가 뭐 잘못된 거라도 있나요?"

카라는 그가 숨을 쉬려고 잠시 말을 멈춘 틈을 타서 말문을 열었다.

"그럼 서커스의 좋은 점을 한 가지만 말해 보시오. 나는 서커스라면 딱 질색이오. 야생동물을 더러운 쇠창살 우리에 가둬 놓고는 얼빠진 관객들을 바보 같은 짓거리로 웃길 때나 풀어 주지 않소? 이 미첨 브룩이란 자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가서 그 작자에게 말하시오"

"미첨 브룩은 서커스단장이자 제 삼촌이에요."

카라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럼 당신 삼촌한테 돌아가서 동물들을 데리고 당장 공원에서 떠나라고 전하시오. 내일 아침까지 짐 꾸릴 시간을 주겠소."

그는 우리에 갇힌 사자와 슬픈 눈을 가진 침팬지 냄새가 풍겨 오기라도 하듯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우리를 공원 밖으로 내쫓을 수는 없어요. 당신의 할아버지는 언제나 우리가 여기서 겨울을 나도록 해주셨어요."

"할아버지가 무슨 광기에 사로잡혀 그런 짓을 허락했든, 내 알바는 아니오."

"하지만 정말로 허락하셨어요. 게다가 우리는 겨울 내내 이 지역에서 공연하기로 계약을 모두 끝냈어요. 오늘이 개막 공연 날이에요."

"내 땅에서는 안 되오."

"하지만 우리는 할 거예요. 아니, 해야 돼요."

카라는 필사적으로 우겨댔다.

"표가 벌써 다 팔렸어요. 앞으로 몇 주일 뒤까지 공연계약이 꽉 차 있다구요. 그걸 모두 취소하란 말인가요?"

"이것 보시오!"

그의 말투는 대리석처럼 단단한 얼굴 윤곽만큼이나 딱딱했다.

"서커스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도도새만큼이나 융통성이 없군요. 도대체 마지막으로 서커스 공연을 본 게 언제죠?"

"벼룩이 들끓는 서커스 공연장엔 외국에 있을 때 많이 가봤소."

그는 이제 혐오감을 숨김없이 얼굴에 드러냈다.

"그럼 올바로 운영되는 서커스를 마지막으로 본 건요? 그런 서커스들은 어떤 박물학자 못지않게 동물 보호 작업을 하고 있다구요."

"서커스가 동물을 보호한다구?"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 물론이죠."

카라는 자기 직업을 변호하려고 까만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세계 최초로 사파리(수렵여행) 공원을 세워서 운영한 건 서커스단이었어요. 서커스단원들은 평생 동안 야생동물들과 함께 지내왔기 때문에 동물들을 아주 잘 알아요. 그래서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동물들을 번식시켜, 당신 같은 박물학자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자연으로 돌려보내기도 하는 거예요."

"그건 동물보호라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오. 지극히 하찮은 일이지."

"하지만 서커스단원들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지식이 없다면, 그 빙산의 일각조차도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거예요. 어떤 서커스라도 좋으니 한번 가보세요. 동물을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저희 삼촌도 마찬가지죠. 아무튼 우리 서커스단에는 야생동물은 한 마리도 없어요."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소?"

그는 계속 빈정거렸다.

"당신이 믿든 안 믿든 상관없어요. 어쨌든 그건 사실이니까요."

그녀는 미첨 브룩이 야생동물을 쓰지 않는 이유를 말하진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어떻게 목숨을 잃었는지 말해 봤자 젊은 브로드워터 경은 조금도 동정해 주지 않을 게 뻔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호랑이를 건드리면 안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고, 그 말은 서커스 계에서 웃음거리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23년 전, 아버지는 한순간의 부주의로 자신의 좌우명을 깨뜨렸고, 그 결과 비극적인 대가를 치렀다.

카라의 어머니는 카라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다. 미첨 브룩은 고아가 된 카라를 데려다 친딸처럼 키워 주었다. 그리고 그후 오늘날까지 어떤 야생동물이라도 서커스단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남자는 꼭 야생동물 같은 색깔을 갖고 있어. 황갈색 눈동자, 황갈색 머리카락, 꼭 호랑이 같애. 타일러, 타이거, 비슷하군카라는 조금 전 참나무 가지가 그의 머리카락 위에 그려냈던 호랑이 줄무늬를 다시 떠올렸다.

호랑이를 건드리면 안 된다.

왜 갑자기 이 좌우명을 깨뜨린 듯한 기분이 드는 걸까? 카라는 몸을 떨었다.

"서커스에서는 점박이 말들도 나와서 재주를 부린다더군. 그런데 공교롭게도 당신의 암말은 야생마인 순종 아팔루사 종이오."

"물론 프라이드도 재주를 부리긴 하지만, 프라이드는 길들여진 애완동물이에요. 우리 서커스단에 있는 동물은 프라이드와 테리어 종의 개 몇 마리와 팔라벨라스뿐예요."

카라는 그를 시험해 보려고 일부러 팔라벨라스란 이름을 꺼냈다. 프라이드가 아팔루사 종인 걸 알아볼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보단 덜 알려진 팔라벨라스까지는 모르겠지. 어서 순순히 모른다고 자백하시지카라는 의기양양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작은 조랑말도 기르고 있다는 말이군?"

그의 지식은 카라에 못지않았다. 분하게도 그는 함정을 쉽사리 빠져나갔다.

"우리 삼촌은 취미로 조랑말을 기르고 계세요. 모두 여덟 마리인데, 종마가 하나고 나머지는 모두 암말이에요. 새끼를 낳으면 다른 사육가에게 보내서 혈통을 개량하도록 도와주죠. 아까도 말했듯이 서커스단원들은 열렬한 동물 보호론자예요."

"하지만 서커스에 사용하고 있잖소?"

"그거야 물론 그렇죠"

"그것 봐요."

"하지만 조랑말들은 프라이드나 개들과 마찬가지로 집에서 기르는 애완동물인걸요. 그 조랑말들은 어린 새끼일 적부터 재주를 배웠어요. 그 녀석들에겐 그것이 모두 단순한 장난일 뿐예요. 우리가 공연에 내보내지 않으면, 그 녀석들은 자기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는 줄 알 거예요. 그건 친절한 것도 아니고 공정하지도 못해요."

카라는 열심히 설명했건만 브로드워터 경의 표정은 여전히 굳은 채였다. 아무리 살펴봐도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카라는 이마를 찌푸렸다. 서커스단의 겨울 살림이 위기에 처해 있다. 어떻게 해서든 젊은 브로드워터 경을 설득해야만 한다.

"제 말을 믿지 못하시겠거든 우리 서커스를 보러 오세요. 직접 보고 판단하세요."

"그럴 작정이오."

마침 그때 서재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아아, 다니엘스. 무슨 일인가?"

"수의사인 아담스가 젖소의 예방접종 문제로 경을 뵈러 왔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경께서 직접 약속하신 일입니다. 수의사에게 특별히 하실 말씀이 있다고"

", 그랬었지."

타일러 몬크리프는 난처한 듯이 소리쳤다.

"약속대로 아담스가 왔으니, 어쩔 수 없이 만나봐야겠군. 하지만 다른 약속은 모두 취소해 주게. 알겠나? 방금 긴급한 사태가 발생했네."

"제가 대신 처리할 수 있는 일입니까?"

"아니야, 수의사를 만나본 뒤에 내가 직접 처리할 작정이네. 나는 오늘 저녁 서커스를 보러 가네, 다니엘스."

"서커스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다니엘스도 서커스란 말에 대하여 주인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입을 딱 벌리고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인을 바라보았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카라는 그 얼빠진 얼굴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카라는 서둘러 서커스단으로 돌아와 공연장인 대형 천막 뒤편에 서 있는 삼촌의 밴 트럭으로 달려갔다.

"조가 아까부터 널 찾고 있어."

나이 든 여자가 대형 천막에서 나오더니 카라를 불러 세웠다. 카라는 마지못해 발을 멈추었다.

"자기와 함께 연습하지 않고 말이나 타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투덜거리던데?"

그녀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카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프라이드를 훈련시키든, 조가 무슨 상관이죠?"

"조를 만나보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게 되겠지."

그 여자는 심술궂게 말했다.

"네가 공연장에 연습하러 나타나지 않는다고 조가 펄펄 뛰며 화를 냈어."

"난 지금 바쁘니까, 당신이 가서 상대해 주지 그러세요?"

카라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나이 든 여자는 그녀의 가시 돋친 말에 움찔하더니, 몸을 홱 돌려 자기의 밴 트럭 쪽으로 달려갔다.

린다는 카라보다 아홉 살 위였다. 그런데 공중곡예를 하다가 떨어져 척추를 다치는 통에 다시는 곡예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카라가 조와 짝을 지어, 한때 자기만이 해낼 수 있었던 화려한 곡예를 하는 걸 무척 못마땅해 했다.

린다가 조를 원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제 린다는 공중곡예사도 아니고, 서커스단의 스타도 아니다. 그래서 자연히 결혼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고, 자기보다 젊은 공중곡예사인 조에게 은근히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조는 그녀를 거들떠보기는커녕 대신 카라를 막무가내로 쫓아다녔다. 하지만 카라는 조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거야 정말 뒤죽박죽이군. 게다가 이제 젊은 브로드워터 경과 말썽이 생겼으니카라는 삼촌이 기거하는 밴 트럭으로 들어갔다. 왜 사는 게 이리도 복잡하담. 조가 린다와 결혼하면 모두 다 행복할 텐데그러나 조는 결혼만이 아닌 더 큰 것을 노리고 도박을 하고 있었다.

카라는 삼촌에게 소식을 전하고, 젊은 브로드워터 경이 얼마나 지독한 사람인가를 설명했다.

"공원에서 쫓겨나면 우린 어떻게 되죠?"

"어쩔 도리 있겠니?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수밖에"

미첨 브룩은 걱정스런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은 그 사람이 공원의 주인이니까 얼마든지 우리를 쫓아낼 권리가 있는 거야. 그런데 그가 언제 여기 오기로 했지?"

"수의사가 때마침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벌써 와 있었을 거예요. 우리를 직접 쫓아내는 즐거움을 맛보려고 다른 약속을 모두 취소했어요. 지금 당장이라도 들이닥칠지 모르죠. 수의사는 젖소 예방접종 문제로 그 사람을 만나러 왔대요."

"브로드워터의 소들은 순종이야. 그러니까 그 사람도 수의사와 서둘러 이야기를 끝내지는 못할 게다."

미첨 브룩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공연 시간까지 두 시간도 채 안 남았구나.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여느 때처럼 진행해. 운이 좋으면 수의사가 브로드워터 경을 늦게까지 잡아 둘지도 몰라. 공연이 시작돼 버리면 브로드워터 경일지라도 2천명도 넘는 관객들을 혼자서 쫓아내지는 못할 거야."

"단장님, 카라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 프라이드가 있는 걸 보니 돌아오긴 한 것 같은데 아무 데도 안 보입니다. , 여기 있었군."

올리브 빛 살갗에 검은 고수머리와 우울한 검은 눈동자를 가진 젊은 남자가 노크도 없이 밴 트럭의 문을 홱 열어젖히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곡예사답게 팔과 어깨에 근육이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당신은 오늘 오후에 연습을 빼먹었어."

그는 다짜고짜 카라를 나무랐다.

"당신 혼자서 연습할 수도 있잖아요."

"나 혼자서 2인용 곡예를 연습할 수 없다는 걸 알잖아?"

"가서 조와 함께 준비운동을 하거라. 나머지는 나한테 맡기고."

미첨이 끼어들었다.

카라는 마지못해 일어났다.

"우선 난 옷을 갈아입어야 돼요. 10분 뒤에 갈게요."

다행히 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첨과 함께 공연장 쪽으로 걸어갔다.

"또 조를 화나게 했니?"

미첨의 아내인 베스가 물었다.

카라는 슬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요즘 항상 조와 부딪쳐요. 그는 만나기만 하면 자기와 결혼해 달라고 조르거든요. 물론 난 싫다고 하죠. 하지만 조는 그걸 대답으로 받아들이질 않아요. 그리고 내가 거절할 때마다 점점 더 화를 내구요."

"그런데조와 결혼하기 싫은 이유가 뭐지?"

"조가 원하는 건 내가 아니라 서커스단이니까요."

카라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조는 나와 결혼하면, 삼촌께서 은퇴했을 때 자기가 서커스단을 물려받을 거라고 생각하나 봐요."

"그이가 은퇴하려면 앞으로 몇 년은 더 있어야 돼."

베스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리고 오늘밤 너의 개막공연을 위해서 내가 새 꽃다발을 만들어 놓았단다."

"어머나, 고마워요."

카라는 셀로판지에 곱게 싼 아름다운 조화 꽃다발을 집어 들었다.

"전에 쓰던 건 완전히 망가졌어요. 지난번 공연 때 프라이드가 밟아 버렸거든요. 브로드워터 경이 제때에 도착하지 못하도록 빌어 주세요. 그래야 제가 이 꽃다발을 쓸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럼 이제 전 가봐야겠어요. 조를 또 기다리게 하면 그는 아마 발작을 일으킬 거예요."

카라는 일부러 쾌활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밴 트럭에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할 때쯤에는 다시 우울한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조와 결혼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 이유가 뭘까? 평생 동안 쓸쓸하게 지내지 않으려면 언젠가는 결혼해야 할 텐데. 그녀는 지난 2년 동안 조와 함께 일해 왔기 때문에 다른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카라보다 세 살 위였다. 그리고 누가 보기에도 잘생긴 남자였다. 게다가 건강하고 남자다운 체격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야심만만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미첨 브룩 서커스단을 손에 넣고야 말겠다는 의지 또한 대단했다.

카라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녀는 조와 결혼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서커스 계 출신과는 어떤 누구와도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서커스 계는 좁고 폐쇄적인 사회라서 외부 사람과 알게 될 기회라곤 거의 없다.

서커스단원과 결혼하게 되면 어떤 생활을 하게 될지 카라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이를 가지면 공중곡예를 단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옮겨다니는 이동주택에서 아이를 키우느라 온갖 어려움과 불편을 겪어야 한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면, 서커스단에서 아이를 낳은 어머니들이 으레 겪게 되는 고통을 맛보아야 한다.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지 못하는 서커스단에서는 아이들이 적절한 교육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면 기숙학교에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아이를 낳으면 날씬하고 부드럽던 몸매가 굵어지기 때문에 더 이상 공중곡예도 못하고, 기껏해야 서커스 공연장에서 프로그램이나 솜사탕을 팔거나 다른 잡일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카라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새 꽃다발을 내려다보았다. 종이 장미가 정원에 핀 꽃들과 다르듯이, 서커스단 생활의 현실은 공연장의 번쩍이는 장식이나 화려함과는 딴판이었다. 관중들은 서커스의 황홀한 표면만을 본다. 하지만 그 뒤에 숨겨진 현실은 끊임없는 노동과 희생의 연속이다. 더욱이 여자들은 어쩔 수 없이 더 큰 희생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카라는 입술에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타일러 몬크리프가 서커스를 어떻게 생각하든, 서커스단의 동물들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어그녀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2

곡예 할 때 입는 검은색 레오타드(곡예사나 댄서 등이 입는 소매 없고 몸에 착 붙는 원피스)는 카라의 탄력 있는 가슴과 가냘픈 허리와 늘씬한 다리를 숨김없이 드러내 주었다. 카라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를 재빨리 틀어 올리고, 머리카락이 빠져나오지 않도록 머리 그물을 씌웠다.

이런 머리 모양이 그녀의 섬세한 얼굴 윤곽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그러나 카라는 거울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고 공연장으로 달려갔다. 공연장은 저녁 공연을 연습하는 서커스단원들로 활기에 차 있었다.

"내가 줄을 다 매뒀어, 카라."

한 어릿광대가 그녀에게 외쳤다.

"고마워요, . 난 우선 조와 함께 공중그네를 연습한 다음 시간이 남으면 줄타기를 연습할 생각이에요."

카가는 공중그네와 줄타기뿐 아니라 프라이드와 작은 조랑말들에게 재주를 부리게 했고, 필요하면 춤도 추었다. 미첨 브룩 혼자서 간신히 꾸려 나가는 소규모 서커스단에서는 대부분의 단원들이 겹치기 출연을 해야 한다.

내가 조의 청혼을 받아들인다면 삼촌에겐 도와 줄 사람이 생기는 셈이야. 삼촌에겐 조가 많은 도움이 되겠지. 그리고 몇 년 후면 서커스단의 경영권을 안심하고 조에게 넘겨 주게 될 거야.

카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삼촌과 숙모에게 많은 은혜를 입고 있다. 하지만 그들을 위해서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까지 해야 되는 걸까?

"이봐요, 카라. 이제 한 시간만 지나면 공연준비를 해야 돼. 그 일이 끝나면 나머지 장비들도 준비해 둬야 하고, 바닥의 톱밥도 고르게 갈퀴질을 해야 한다구. 그러니 카라가 줄타기 연습을 끝낸 뒤 다시 줄을 고쳐 맬 시간이 없어."

어릿광대인 벤은 아내인 포피와 함께 톱밥을 흩뿌리며 열심히 어릿광대짓을 연습하고 있었다.

"난 서두르고 싶지 않아요. 여긴 숨 막힐 듯이 더운 걸요."

두꺼운 캔버스 천으로 된 대형 천막이 무척 답답하게 느껴졌다. 카라는 당장 밖으로 달려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전에는 그런 불평을 한 적이 없었는데 웬일이야? 게다가 우린 올 여름 내내 이보다 훨씬 더 더운 지방에서 공연을 했잖아. 도대체 무슨 일이지?"

조가 성급하게 물었다.

카라는 황갈색 머리카락과 황갈색 눈동자의 환상을 황급히 떨쳐 버리고 사다리를 가볍게 올라갔다. 공중그네의 준비대 위에서는 그녀의 파트너가 살피는 듯한 눈초리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라는 그 눈길을 피했다.

"어서 시작해요. 난 준비 됐어요."

카라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조는 불만스러운 듯 잠시 망설이다가는 그네를 탁 쳤다. 그네가 휙 날아갔다가 다시 다가왔다. 조는 몸을 날려 수평대를 잡았다. 카라는 정신을 집중하여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실제로 공연할 때는 음악이 있기 때문에 그 박자에 맞출 수 있지만, 연습할 때는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서 함께 큰소리로 숫자를 세야만 한다. 1초라도 어긋나면 그네를 놓쳐 추락해 버리기 때문이다.

하나, 구두 버클을 채워라. 어린 시절 즐겨 불렀던 동요가 카라의 마음속에 떠올랐다. 5살 때 처음으로 공중그네를 타면서 배운 노래였다.

하나조와 결혼하면, 삼촌이 은퇴한 뒤 둘이서 서커스단을 운영하게 될 거야.

, , 문을 닫아라노래는 여전히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조와 결혼하면, 삼촌과 숙모는 가족이 셋에서 넷으로 늘어나 틀림없이 기뻐하시겠지만, 나는 내 자유의 문을 닫아 버리게 될 거야.

", . , 뛰어!"

조가 외쳤다.

카라는 준비대에서 몸을 날렸다. 그녀의 날씬한 몸은 두 번째 그네에 매달려 그림자처럼 공기를 갈랐다.

조와 결혼하면, 나는 조의 그림자가 될 거야. 그는 라틴 족답게 아내를 동등한 배우자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남성이 우월한 건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니까. 조의 아내가 되면, 나는 자유뿐 아니라 주체성까지도 잃고 말 것이다.

카라는 그네 위로 몸을 회전시켜 발을 수평대에 걸고 거꾸로 매달렸다. 높은 곳에서 거꾸로 매달려 내려다보니, 공연장이 무척 작아 보인다. 어릿광대들은 열심히 연습을 하고 있다.

"다섯, 여섯."

조가 소리쳤다.

카라는 능숙하게 그네의 리듬을 바꾸었고, 조도 자기 그네의 속도를 조정했다.

다섯, 여섯, 막대기를 주워라

두 그네가 가운데로 모이는 순간, 조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카라는 자기 그네를 떠나 파트너의 힘과 기술에 몸을 맡겼다.

"아까는 뭘 하다가 그렇게 늦게야 돌아왔지?"

"내가 늦게 돌아온 걸 당신이 어떻게 알았죠?"

"당신이 나가는 걸 봤어. 그래서 언제 돌아오나 하고 눈이 빠지게 기다렸지. 난 항상 그래. 당신은 이제까지 한 시간 이상 프라이드를 훈련시킨 적이 한 번도 없었잖아."

"하지만 이번에는 그랬어요. 당신은 내가 어디 가서 뭘 하든 간섭할 권리가 없잖아요."

조와 결혼하면, 그는 그럴 권리를 갖게 될 뿐 아니라 당당히 권리를 행사할 것이다. 카라는 다시 답답증을 느꼈다.

"누가 당신을 그렇게 오랫동안 붙잡아 뒀지?"

"왜 꼭 누굴 만났다고 생각하죠? 승마를 즐기다가 시간 가는 걸 잊을 수도 있잖아요?"

카라는 발칵 화를 냈다.

"내 경험상 당신이 그렇게 늦게 돌아온 데는 반드시 누군가가 있을 거야."

"아아, 좋아요. 누군가가 있어요."

카라는 재빨리 천막 안을 휘둘러보았지만, 황갈색 머리카락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개막공연을 예정대로 밀어붙일 가능성은 많아진다. 수의사가 그를 오래 붙잡아 두기만 한다면 오늘 저녁은 무사히 넘어갈 것이다.

조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카라는 깜짝 놀라 현실로 돌아왔다. 손목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꽉 잡지 말아요. 팔목 부러지겠어요."

"나를 놀리면 팔목보다 더한 것도 부러뜨릴 거야."

카라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조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차가운 전율이 그녀의 전신을 꿰뚫고 지나갔다.

"날 놀리지 마.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당신은 내 거야. 알겠어? 내 거라고!"

"난 당신을 놀리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럴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 만약 그랬다간 평생 동안 후회하게 될 줄 알아!"

카라는 몸이 오싹했다. 조가 여기서 손을 놓아 버린다면 그녀는 돌멩이처럼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밑에 안전그물이 쳐 있긴 하지만, 조가 그럴 마음만 먹으면 아무에게도 눈치 채이지 않게 그녀를 안전그물 밖으로 내동댕이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속이 메스꺼워졌다.

"누구와 같이 있었지?"

조는 그녀의 손목을 더 세게 움켜잡았다.

"브로드워터 경이오."

조의 손가락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아아, 그 늙은이? 한데 그 노인이 뭣 하러 당신을 그렇게 오래 붙잡아 둔 거지?"

조는 경멸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 사람이 노인이 아닌 젊은 브로드워터 경인 걸 알면 조는 뭐라고 할까?

"연습 끝낸 뒤에 말할게요. 자아, 일곱, 여덟."

일곱, 여덟늦지 말아라. 그녀는 늦게 돌아왔고 그래서 조는 화가 났다. 그녀를 오래 붙잡아 둔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면 조는 더욱 화를 낼 것이다.

"이만하면 오늘 연습은 충분해요."

늘상 하는 곡예를 끝내고 준비대로 돌아오자 카라는 조를 기다리지도 않고 서둘러 사다리를 내려왔다.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거지?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

조는 약간 당황한 모양이다. 그녀처럼 사다리로 내려오는 대신 안전그물로 곧장 떨어져, 사다리 밑에서 그녀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카라는 그를 피해 가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조가 억센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직 연습이 덜 끝났어."

"난 줄타기를 연습하고 싶어요. 뒤로 재주넘기를 연습해 봐야 돼요."

뒤로 재주넘기는 무척 어렵고 위험한 곡예였다. 카라 같은 숙련된 곡예사도 관객 앞에서 안전하게 그 곡예를 해내려면 끊임없는 연습이 필요하다. 또한 공중에 매달린 한 가닥 줄은 그녀의 유일한 생명선이기도 하다. 조는 줄을 타진 못한다.

"내가 당신의 캐처 노릇을 하지 않겠다면 어떻게 하겠어?"

"그럼 캐처 없이 그냥 올라가겠어요."

카라는 천장에서 늘어진 밧줄을 잡으며 대꾸했다. 캐처 없이 줄을 타는 건 서커스단의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리고 조도 그것을 알고 있다. 카라가 줄을 타다가 발을 헛디뎌 떨어질 경우 조가 밑에서 그녀를 받아 주지 않는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미첨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 것인가?

"아아, 좋아.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할 수 없지."

조는 마지못해 양보했다.

카라는 원숭이처럼 재빨리 밧줄을 타고 올라갔다. 일단 줄 위에 올라서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녀는 발레리나처럼 우아하게 외줄 위에서 춤을 추며, 조가 던져 준 공으로 재주를 부렸다. 그 다음에는 줄 위에 편안히 누워 아래로 몸을 반 바퀴 회전시켰다. 이 동작을 하면 관중들은 항상 놀라움과 감탄의 탄성을 지르곤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는 세 번 연속 뒤로 재주넘기를 했다.

", 이제 장내를 치웁시다. 시간이 다 됐어요."

미첨이 여느 때처럼 휘파람을 불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장내의 모든 움직임이 그대로 멈추었다. 조는 다른 남자들과 함께 장비들을 옮겼고, 카라와 린다는 갈퀴를 들고 톱밥을 평평하게 고르기 시작했다.

"포피는 어디 있죠?"

항상 그 일을 도와주던 어릿광대의 아내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카라가 물었다.

"아까 자기네 밴 트럭 쪽으로 가는 걸 봤는데."

"이상하군요."

카라는 얼굴을 찡그렸다.

"게으름을 부리다니, 포피답지 않아요. 몸이 아픈 거 아니에요?"

"나도 몰라. 하지만 신경이 곤두서 있는 건 분명해. 오늘 오후에 두 번이나 벤에게 신경질을 부렸으니까."

"신경질도 전염되는 모양이군요."

카라는 비꼬듯이 말하고는 미첨에게 다가갔다.

"저택에서는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어."

미첨은 카라가 묻기도 전에 대답했다.

"베스가 계속 망을 보고 있으니까, 그 쪽에서 누가 오는 기미가 보이면 당장 신호를 보내 줄 게다. 어쨌든 오늘밤은 제대로 막을 올릴 것 같구나."

카라가 프라이드와 작은 조랑말들을 준비시킬 때까지도 베스에게서는 아무런 신호가 없었다. 밖에는 벌써 관객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이 들뜬 목소리로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은 빨리 천막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서 조바심치며, 축제일처럼 휘황찬란하게 밝혀진 꼬마전구들을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바라보았다.

서커스단에 전력을 공급하는 디젤 발전기 옆에서 포피가 남편인 벤에게 잔소리를 퍼붓고 있었다. 비 오는 날 진창길을 걷기가 귀찮아서 자기네 밴 트럭을 발전기 바로 옆에다 세워 놓았던 것이다. 발전기는 무척 시끄러웠지만 서커스단에는 꼭 필요한 물건이다. 그리고 그 관리책임자인 벤은 자기네 밴 트럭을 발전기 근처에 세워 두고 싶어 했다. 그리나 조그만 수고를 덜려고 포피의 끊임없는 잔소리를 감수한다는 건 어리석다고 카라는 생각했다.

"워어, 멈춰!"

카라는 원기 왕성한 조랑말들을 화려하게 꾸민 다음, 그녀가 옷을 갈아입으러 간 동안 얌전히 있도록 맛있는 음식을 조금씩 나눠 주었다.

천막 안은 관객들로 꽉 차 있었다. 카라는 프라이드를 데리고 무대 입구에 자리 잡았다. 실크 햇과 연미복 차림의 미첨이 그녀 옆을 지나쳐 공연장 안으로 들어가면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 사람이 방금 도착했다."

카라는 관중석을 힐끗 바라보았다. 너무나 걱정스러워서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이윽고 무대 중앙에서 미첨의 힘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 우리 차례야. 가자, 프라이드."

카라는 암말 위로 훌쩍 뛰어올라 무릎을 꿇은 자세로 입구 터널을 통과했다. 그 다음에는 말등 위에 가볍게 올라서서 균형을 잡았다. 조랑말들은 머리에 꽂은 화려한 깃털을 너울거리며 그녀의 양옆으로 질서정연하게 행진했다.

카라는 공연장에 들어서자마자 타일러 몬크리프를 발견했다. 그는 막 자리에 앉으려는 참이었다. 수의사가 내 기도를 들어 준 게 틀림없어. 카라는 그를 오랫동안 붙잡아 둔 수의사에게 마음속으로 감사를 보냈다.

그녀는 그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무척 애썼지만 그의 황갈색 머리카락은 자석처럼 그녀의 눈길을 끌어당겼다. 조랑말들이 많은 관객 앞에서 초등학생처럼 우쭐대며 재주를 뽐내는 동안, 카라는 당장 그만두라는 타일러의 외침소리를 기다리며 귀를 곤두세웠다. 말을 타면서도 그녀는 마음을 조리며 그가 앉아 있는 쪽을 자꾸만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말없이 앉아 열심히 공연을 지켜볼 뿐이었다.

날 바라보고 있는 거야. 카라는 그의 시선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곤충채집가의 핀에 찔린 나비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

음악이 클라이막스에 이르자, 점박이 프라이드가 멈춰 섰다. 카라는 말 위에서 몸을 활처럼 굽혔다. 그러자 링사이드에서 지켜보던 황갈색 눈동자와 눈길이 마주쳤다. 그녀는 요란한 박수갈채를 받으며, 어디 중지시킬 테면 중지시켜 보라는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그까짓 연기에 박수갈채를 보내는 게 가소롭다는 듯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카라는 화가 나서 그에게 등을 돌리고 다시 말 위에 올라섰다. 조랑말들은 한 줄로 늘어서서 그녀의 뒤를 따라 퇴장했다.

이어서 어릿광대들이 등장했다. 무대에서 벤과 미첨이 말다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첨이 큰소리로 호통을 치면 어릿광대는 훌쩍훌쩍 우는 시늉을 한다. 그러면 관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이들은 약자 편을 들어 벤을 응원한다.

어릿광대들의 순서가 끝나고 박수가 터졌다. 카라는 급히 옷을 갈아입으러 달려갔다. 이제 한 순서만 지나면 그녀와 조가 공중곡예를 할 차례다. 그녀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틀어 올린 다음 무대 입구로 달려갔다.

미첨이 그들을 소개하는 참이었다.

"카라와 조, 대담무쌍한 공중곡예사들을 소개합니다. 죽음에 도전하는 그들의 묘기를 지켜봐 주십시오."

카라는 사다리를 올라가면서도 타일러의 시선을 아프게 느낄 수 있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쇠꼬챙이처럼 등을 꿰뚫을 것만 같은 시선이었다.

내 집중력을 빼앗으려는 속셈이야. 카라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음악 소리는 사라지고, 대신 저 아래에서 던져지는 날카로운 시선만이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정신 차려, 카라. 도대체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하마터면 신호를 놓칠 뻔했잖아?"

그녀는 조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발목에 걸었던 수평대를 놓았다. 조가 그녀의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느라고, 숫자 세는 것도 잊어버린 거야?"

"박자를 놓쳤어요. 브로드워터 경이 와 있어서"

카라는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온갖 의문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타일러는 왜 프라이드와 조랑말들의 공연을 중지시키지 않았을까? 동물들이 아주 건강해 보이고 또 사람들 앞에서 재주 부리는 걸 즐거워했기 때문일까? 그래서 동물들이 서커스단에서 학대받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깨끗이 풀어 버린 탓일까? 아니면, 이왕 공연이 시작됐으니 관객들을 위해 오늘 공연만 끝까지 진행하도록 놔두고, 공연이 끝나면 당장 짐을 꾸려 떠나게 할 작정일까?

"그 노인네가 와서 어쨌다는 거야? 브로드워터 경은 전에도 우리 공연을 보러 왔었잖아. 하지만 당신이 이렇게 당황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제발 정신 좀 차려."

"미안해요."

"또 숫자를 잘못 세서 아래로 떨어진다면 훨씬 더 미안할 거야."

조는 그녀가 여느 때의 집중력을 되찾도록 하기 위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네에서 떨어지는 건 공중곡예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어쨌든 당신이 잘못 봤을 거야. 들어올 때 보니까 그 노인네는 안 보이던데? 아무튼 공연이 끝나면 당장 단장한테 가서 뭐가 잘못됐는지 알아봐야겠어. 오늘 아침 브로드워터 공원에 다녀온 뒤로 당신이 좀 이상해졌어."

음악이 절정에 이르렀다가 이윽고 멈췄다. 공중곡예가 끝났다. 카라는 아래로 내려와 관객들에게 인사를 한 다음 대기실로 달려가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관객들은 다른 출연자들의 묘기를 보며 손에 땀을 쥐기도 하고 어릿광대의 서투른 묘기에 배꼽을 쥐기도 했다.

다음은 카라의 줄타기 순서였다.

이 순서를 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타일러 앞에 혼자 나설 생각을 하니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팽팽히 매어진 줄 위에 올라서면 스포트라이트가 그녀에게 집중된다. 그러면 그 꿰뚫는 듯한 시선에서 그녀를 가려 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이제 카라가 여러분께 줄타기 묘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미첨이 그녀를 소개했다.

이젠 어쩔 도리가 없다. 카라는 용기를 내어 공연장 안으로 들어가 공손히 절을 했다.

온몸의 신경이 팽팽히 긴장되어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타일러의 시선은 두 줄기 서치라이트처럼 그녀에게 쏘아졌다. 그녀는 이제 높다란 외줄 위에서 그의 시선에 꼼짝없이 사로잡힌 셈이었다. 그 시선은 그녀에게 최면술을 걸어 자신감을 빼앗았다. 몸이 균형을 잃고 흔들렸다.

"제발, 딴 곳을 쳐다봐요."

카라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왜 그래, 카라?"

밑에 대기하고 있던 조가 불안한 듯 속삭였다.

카라는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아무 것도 아녜요."

카라는 급히 몸을 바로잡고 곡예를 시작했다. 팔다리가 납덩이처럼 뻣뻣하게 느껴졌다.

"왜 나더러 딴 곳을 쳐다보라는 거야?"

"이젠 괜찮아요. 줄을 던져 줘요."

카라는 줄넘기를 하고 공으로 재주를 부리면서도 내내 타일러의 황갈색 눈동자를 의식하고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손가락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공을 떨어뜨리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그가 시선을 돌려주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아예 나가 버리면 더욱 좋겠어미첨이 그녀의 다음 묘기를 소개하고 있었다. 카라는 절망감을 느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줄타기 곡예사인 카라가 이제 가장 어렵고 위험한 묘기인, 세 번 연속 뒤로 재주넘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카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입안과 목은 칼칼했고 손은 땀에 젖어 미끄러웠다. 그녀는 옷에다 손바닥을 문질렀다.

"몸이 좋지 않으면 당장 내려와, 카라."

밑에서 조가 속삭였다. 그녀의 손바닥에 땀이 밴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몸이 좋지 않았다면 여기 올라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제발 잔소리 좀 그만둬요."

카라는 음악에 맞추어 몸을 뒤로 굽혔다. 그리고 두 손을 뻗어 줄을 잡았다. 그 동작은 모두 무의식중에 이루어졌다. 타일러가 밑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가냘픈 몸이 갈대처럼 나긋나긋하게 휘는 걸 보고 관객들은 숨을 죽였다. 카라는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천천히 재주를 넘었다.

"한 번"

밑에서 조가 외쳤다. 카라는 다시 몸을 뒤로 굽혔다.

"두 번"

이제 한 번만 더 돌면 저 황갈색 눈동자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어. 카라는 자신을 달랬다. 그 시선이 너무나 뜨거워서 몸이 타오르는 것 같았지만, 손은 얼음처럼 차가왔다. 손바닥에 다시 땀이 배었다. 이젠 손바닥을 닦을 여유도 없었다. 세 번째로 몸을 굽혔을 때, 카라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세 번"

카라의 몸이 활처럼 휘었다. 이윽고 두 발이 공중에 떠올랐다. 카라는 줄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두 다리가 줄을 향하여 내려왔다. 왼쪽 발이 팽팽한 줄을 스치고는 아래쪽으로 떨어졌다. 오른쪽 발은 줄에 닿지도 않았다. 그녀는 아래로 곧장 떨어지고 있었다.

"아아!"

관중들은 일제히 신음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카라는 집중력을 되찾았다. 잠시나마 그녀는 타일러뿐만 아니라 조와 그밖의 모든 일을 잊고, 이제 그녀를 덮치려 하는 재난에만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공처럼 굽혀 공중에서 재주넘기를 했다. 그리고 바닥에 닿기 직전에 몸을 쭉 펴서 조 옆에 사뿐히 내려섰다.

"브라보! 브라보!"

관객들이 일제히 환성을 지르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카라는 태연히 그 자리에 서서 관객의 환호에 답례했다. 관객들은 그녀가 줄에서 떨어지는 순간,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있었다. 그러나 딱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카라는 타일러 쪽을 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스포트라이트가 그녀와 조에게 집중되어 있어서 관람석은 어두웠다. 그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사람들은 내가 마지막으로 재주를 넘을 때 실수한 척하면서 일부러 떨어진 줄 아는 모양이야. 전화위복이 된 셈이지

"거기서 떨어지고서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다니, 정말 운이 좋군."

대기실로 돌아오는 도중에 조가 말했다.

서커스단원들이 진상을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생각한 건 역시 지나친 기대였어. 카라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줄 위에서 미끄러지다니."

"당신이 쓸데없는 질문을 계속 퍼붓는다면, 난 이번에야말로 정말 어떻게 돼버릴 거예요."

카라는 화를 내며 쏘아붙였다.

"오늘 아침 브로드워터 저택에 갔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어. 난 그걸 알 권리가 있어."

"당신에겐 아무런 권리도 없어요!"

"우리가 결혼하면"

"우린 결혼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안할 거예요. 벌써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난 당신과 결혼할 작정이야, 카라."

"왜 린다와 결혼하지 않는 거죠? 린다는 당신을 좋아하는데"

"난 린다가 아니라 당신을 원해. 제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기필코 당신을 차지하고야 말겠어."

"당신이 원하는 건 내가 아니라 서커스단예요."

"당신과 결혼하면 서커스단도 자연히 내 손에 들어오게 돼."

조가 뻔뻔스럽게 말했다.

"내가 서커스단을 맡으면, 코끼리와 호랑이들을 사들여서 멋진 쇼를 공연할 생각이야."

"안 돼요! 미치 삼촌이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내가 서커스단을 맡으면, 미치는 그 문제에 이러쿵저러쿵 말할 권한이 없게 돼."

"아직 당신이 서커스단을 맡은 건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세요."

카라는 조의 뻔뻔스러운 야망이 혐오스러웠지만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와 함께 공중곡예를 해야 하는 이상, 그가 앙심을 품게 하는 건 위험해. 아까 연습할 때도 은근히 협박을 했었지. 삼촌한테 사실대로 털어놓을까? 아니, 그건 안 돼. 삼촌은 그렇지 않아도 공원에서 쫓겨날까 봐 걱정하고 있을 텐데 나까지 삼촌을 괴롭힐 수는 없어. 공연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하자. 카라는 대기실로 돌아갔다.

벤과 포피의 순서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테리어들이 재롱을 부렸다.

이제 출연자들이 모두 나가서 관객들에게 인사를 해야 할 차례다. 카라가 프라이드와 조랑말들을 데리고 입장하자 관객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일부러 관객들 틈에 섞여 있던 서커스단원이 그녀에게 꽃다발을 던져 주었다. 베스 브룩이 만들어 준 조화 꽃다발이다.

불이 켜지고 국가가 연주되자 관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타일러는 맨마지막까지 앉아 있었다. 이윽고 천막이 텅 비었다. 타일러는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카라를 오랫동안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전율이 카라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떨어졌을 때 다치지 않았니?"

미첨이 프라이드의 고삐를 잡으며 물었다.

"그런데 왜 균형을 잃었지?"

"내 잘못이었어요."

카라는 솔직히 고백했다.

"브로드워터 저택에서 온 그 남자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어요."

"가서 말들을 재워라. 난 브로드워터 경을 만나보겠다. 그 사람이 돌아간 뒤 일이 어떻게 됐는지 네게 알려 주마."

카라는 말들에게 건초와 물을 주고 잠자리를 보살펴 준 다음 그녀의 밴 트럭으로 돌아왔다. 구태여 불을 켤 필요는 없었다. 환하게 밝혀진 대형 텐트의 불빛이 밴 트럭 안까지 비쳐들었다. 그녀는 문을 조금 열어 둔 채, 꽃다발을 침대 위에 내던지고는 의자에 앉아 화장을 지우기 시작했다. 먼저 루즈를 지우고 나서 이어서 뺨을 닦아내려고 할 때,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졌다. 밴 트럭 안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카라는 돌아보지도 않고 소리쳤다.

"오늘밤은 안 돼요, ."

아직 긴장이 채 풀리지도 않았는데 쓸데없는 일로 그가 화를 낸다면 난 아마 발작을 일으키고 말 거야카라는 짜증스럽게 덧붙였다.

"오늘은 너무나 피곤해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피곤하오?"

타일러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3

카라는 깜짝 놀라 뒤를 홱 돌아보았다.

"당장 나가요!"

그녀는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이런 무례한 말투가 서커스단의 운명에 미칠 영향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가운이라도 걸치고 있었다면 좋았을걸. 그녀는 아직도 몸이 거의 다 드러난 곡예복 차림이었다. 서커스단원 앞에서라면 그런 옷차림으로도 태연할 수 있지만, 이 남자 앞에서는 발가벗은 듯한 수치심을 느꼈다.

"당장 나가요!"

그녀는 드러난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며 다시 한번 말했다.

"조를 위해서 자리를 양보해 달라는 말이오?"

그는 밴 트럭 안으로 한걸음 들어서면서 유들유들하게 말했다.

카라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죠? 당신은 내가 아니라 우리 삼촌을 만나야 하잖아요?"

"나는 아까 당신이 줄 위에서 떨어졌을 때 다치지나 않았나 걱정돼서 온 거요."

카라는 가슴이 철렁했다. 2천여명 가운데 타일러만이 진상을 알아차렸다. 그 원인이 바로 자신 때문이었다는 것도 짐작했을까? 그래, 어쩌면 그것도 알아차렸을지 모른다. 카라는 굴욕감에 얼굴을 붉혔다.

"난 떨어진 게 아니라 뛰어내린 거예요."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그러면, 뛰어내렸을 때 다치지 않았소?"

"물론 다치지 않았어요. 난 조 옆에 완벽하게 착지했어요. 당신도 보셨잖아요?"

"조는 행운아로군. 마침 그때 그 자리에 있었으니 말이오."

"조는 내가 혹시라도 떨어질 경우에 대비해서 그냥 밑에 서 있는 거예요. 그럴 위험은 항상 있으니까, 조심하는 게 상책이죠."

타일러가 밴 트럭의 문을 닫았다. 카라는 화가 나서 숨을 쌔근거렸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침대 끝에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앉으시죠."

카라가 비꼬듯이 말했다.

"고맙소."

그는 침대 위에 놓여 있는 그녀의 머리 장식과 꽃다발을 옆으로 밀어내고 편안히 걸터앉았다. 카라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좁은 밴 트럭 안에서 두 사람은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있다. 그의 긴 다리가 그녀의 다리를 스쳤다.

"종이 장미로군?"

그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꽃다발을 내려다보았다.

"꽃다발은 하루에 두 번씩 써야 하는데 생화로 만들면 금방 시들어 버려서"

"그러니까 결국 꽃다발은 자발적으로 주는 게 아니란 말이오?"

그는 불쾌한 듯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꽃다발을 던지는 것도 역시 흥행술일 뿐이오? 이 꽃들처럼 그것도 가짜라는 거요?"

그는 카라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짙은 무대화장에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카라는 손으로 두 뺨을 가렸다.

"무대화장은 원래 멀리서 보아도 강렬한 인상을 주도록 실물보다 훨씬 더 과장되고 화려하게 해야 해요."

카라는 변명하듯 말했다. 이 남자에게 굳이 변명할 필요는 없는데도 그런 말이 저절로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런 화장을 하고 있는 사람도 역시 실물보다 훨씬 과장되고 화려해야 하오?"

"화장을 지우면 나도 보통 사람들과 똑같아요."

"글쎄, 과연 그럴까?"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런지 어떤지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겠군."

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당신보다 훨씬 멋진 남자들이 그걸 알아내려고 애썼지만 실패했어요."

"조보다도 더 멋진 남자들이었소?"

그녀는 경솔하게 지껄여댄 걸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타일러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카라는 공포에 휩싸였다.

"조는 아마 도전을 받아들이는 남자가 아닌 모양이군?"

타일러는 분명 도전을 회피할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억센 손으로 카라를 움켜잡고는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거 놔요!"

그녀는 덫에 걸린 야생동물처럼 발버둥 쳤다. 타일러가 껄껄 웃었다.

"제발 놓아 주세요."

"이 서커스단에는 야생동물이 한 마리도 없다고 말한 것 같은데?"

그는 몸부림치는 카라를 내려다보며 놀리듯이 말했다.

"그래요, 아까 공연장에서 다 보셨잖아요. 우리 서커스단엔 개와 조랑말뿐이에요. 그보다 더 사나운 동물은 한 마리도 없어요."

"네 발 달린 동물로는 그렇겠지."

그는 싱긋 웃으며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카라는 그를 피하려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지만 그는 여유만만하게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이제 꼼짝없이 그의 품안에 갇혀 버렸다.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안 돼요!"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힘껏 밀었지만 그는 바위처럼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다가왔다.

카라는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면서 눈을 감았다. 그녀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저항력도 사라졌다. 그의 입술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러웠다. 짜릿한 쾌감이 그녀의 떨리는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입술 위에서 맴돌던 그의 입맞춤이 갑자기 격렬해졌다. 이제 그의 혀는 그녀의 입술을 열고 들어와 어두운 동굴 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녀의 혈관 속에서 뜨거운 불꽃이 산불처럼 맹렬한 기세로 번져갔다. 몸이 녹아드는 것만 같았다.

"카라"

그의 심장 고동소리가 북소리처럼 힘차게 울려왔다. 그의 입술은 이제 그녀의 뺨과 눈과 머리카락을 지나, 길고 가냘픈 목 언저리를 더듬고 있었다. 카라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목을 두 팔로 껴안았다.

"그 짙은 화장 밑에는 진짜 인간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 두꺼운 화장을 뚫고 들어가기는 좀 힘들겠지만, 누군가가 수고를 무릅쓰고"

"당신더러 수고를 무릅써 달라고 하진 않았어요."

카라는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매만지며 그를 쏘아보았다.

"여기서 나가요!"

"조를 위해서 자리를 비켜 달라는 말이오?"

그가 빈정거렸다.

"조는 이런 밤중에 여기 온 적이 한번도 없어요."

"그 대신 낮에는 내내 당신을 독차지할 수 있잖소."

카라는 너무나 화가 나서 그의 머리를 노리고 주먹을 휘둘렀다.

"이 살쾡이 같으니!"

그는 재빨리 몸을 피하면서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

"이거 놔요!"

그녀는 손을 빼내려고 발버둥을 쳤다.

"또다시 그런 짓을 하면, 나도 똑같이 앙갚음을 해주겠소."

그는 단호하게 말하고는 손을 놓아 주었다. 카라는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러나 그는 붙잡아 줄 생각도 하지 않고 빈정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기만 했다.

"난 당신을 아주 싫어해요."

카라는 간신히 몸을 바로잡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계속 싫어하라구. 당신을 길들이는 건 재미있는 실험이 될 것 같군."

"살쾡이를 길들이려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많아요."

"조 같은 남자들은 그 말을 경고로 받아들일지도 모르지."

"발톱에 할퀴고 싶지 않다면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내겐 그 말이 경고라기보다는 오히려 유혹처럼 들리는데?"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유혹을 받으면 나는 언제나 거기에 응하는 쪽이지, 카라."

그러고는 카라가 미처 몸을 피하기도 전에 다시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이젠 유혹을 받을 기회도 없을 거예요. 우대권은 한 번밖에 쓸 수 없으니까요."

"공연은 또 있을 거요. 오직 나만을 위한 공연 말이오."

"아무리 당신이라도 허락 없이 서커스를 보러 올 권리는 없어요."

"나는 허락을 기다리지 않소. 가고 싶으면 언제나, 어디든지 갈 거요. 특히 내 소유의 땅에서는."

서커스단은 그의 땅에 캠프를 치고 있다. 카라는 애당초 그가 서커스를 보러 온 이유를 생각해냈다.

"우리를 언제까지 여기 머물게 해주실 거죠?"

"그건 살쾡이에게 달려 있소, 카라. 나는 올 겨울 동안 살쾡이를 길들이며 보낼 작정이오. 박물학자가 서커스단을 자기 땅에 머물게 해주는 이유로 그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소?"

"날 카라라고 부르지 마세요. 그렇게 불러도 좋다고 말한 적은 없어요."

"왜 안 되지, 카라? 카라는 사랑스런 이름이오. 또 만납시다. 카라."

그 마지막 말은 약속일까, 아니면 위협일까? 카라는 문 앞으로 가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 린다였다.

카라는 천천히 문을 닫았다. 린다는 타일러가 지나가는 모습만 본 걸까? 아니면 내 밴 트럭에서 나가는 모습까지 보았을까? 만약 그걸 보았다면, 아침에 조에게 당장 고자질하겠지

카라는 급히 겉옷을 걸치고 삼촌을 찾아갔다. 타일러가 마음을 바꾸었다는 소식을 곧 그에게 알려 주어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삼촌과 숙모는 그 일을 걱정하느라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타일러가 마음을 바꾼 이유를 삼촌한테 털어놓을 수는 없다. 그 이유를 알면 삼촌은 펄펄 뛰며 화를 내실 거야. 날도 밝기 전에 서커스단은 짐을 꾸려 떠나게 될 테고, 올 겨울 계약은 모두 취소할 수밖에 없겠지. 그러면 이미 받은 입장료를 반환하느라 상상할 수도 없는 어려움을 겪게 될 거야.

카라는 삼촌의 밴 트럭 계단을 서둘러 올라갔다. 조가 와 있었다.

"내가 조에게 사정을 설명해 주었단다."

카라가 말을 하지 않고 머뭇거리자 미첨이 말했다.

"난 지금 브로드워터 경을 기다리는 중이야. 공연이 끝나면 바로 나를 만나러 올 줄 알았는데, 아직 오질 않는구나."

"제가 방금 그 사람을 만났어요."

"그 사람 지금까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지? 공연이 끝난 지가 언젠데."

조가 소리쳤다.

"아마 우리가 동물들을 모두 침대에 눕히고 잘 자라는 키스를 해주었는지 확인해 보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다녔을 거예요."

"우리더러 공원에서 나가라고 하더냐?"

삼촌이 초조한 듯이 물었다.

"아뇨, 그 사람은 마음을 바꿨어요. 여기 계속 머물러 있게 해준대요."

미첨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나 조는 노골적으로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대가로 당신은 뭘 주었지? 화장이 온통 엉망이 됐군. 어서 솔직히 말해."

카라는 당황하여 손으로 두 뺨을 가렸다. 타일러와의 키스 때문에 화장이 망가진 게 분명했다.

"내가 막 화장을 지우기 시작했을 때 그가 찾아왔어요.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미치 삼촌에게 그 소식을 알려드리려고 달려온 거예요."

"만일 그 말이 거짓이라면"

조가 위협하듯 카라에게 다가섰다.

"이제 그만 해두게, !"

미첨이 안락의자에서 일어나 조를 가로막았다.

"당장 카라에게 사과해!"

그가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사과해야 할 사람은 카라일 텐데요?"

"내 말대로 해. 그러지 않으려거든 여기서 나가."

그의 어조는 단호했다.

", 좋아요. 내가 사과하죠.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우리가 공원에서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조는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밴 트럭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카라가 침묵을 깨뜨렸다.

"고마워요, 삼촌."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가 네게 그런 식으로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겠다. 만약 조가 또다시 거칠게 굴거든 내게 알려다오. 그녀석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삼촌이 따끔하게 야단쳤으니까 이제 다시는 무례하게 굴지 않을 거예요."

밴 트럭으로 돌아오자 타일러가 남기고 간 로션 냄새가 그녀를 맞았다. 카라는 창문을 열어젖히고, 화장대 앞에 앉아 얼굴을 닦아냈다. 그녀의 얼굴에는 조의 의혹을 불러일으킨 흔적들이 생생히 남아 있었다. 그녀는 클린싱 로션과 탈지면을 옆으로 밀쳐 버리고 벌떡 일어나 세면기에 물을 받았다. 그리고는 타일러의 입술이 스쳤던 곳을 비누로 여러 번 씻어냈다. 그러나 입술의 감촉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았다. 창문을 활짝 열어 두었는데도 희미한 로션 냄새가 여전히 콧속을 간지럽혔다. 어둠 속에서 눈을 감으니 타일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몸을 뒤척였다. 그의 목소리가 자꾸만 들려온다.

'그 짙은 화장 밑에는 진짜 인간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카라는 사랑스러운 이름이오'

다음날 아침, 카라는 말들을 대충 돌보아 주고 나서 조와 함께 연습을 하러 대형 천막 쪽으로 걸어갔다. 린다가 텐트 근처에서 곤봉 돌리기를 연습하고 있었다.

"카라, 넌 밤늦게 손님들을 맞아들이는 습관이 생긴 모양이지? 그런데 그 남자는 누구야? 아차, 이런 걸 물어보면 안 되나?"

린다는 빈정거렸다.

"조는 벌써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 그런 식으로 빙빙 돌려서 말하지 않아도 돼요. 그리고 당신이 아직 알아내지 못했으면 가르쳐 드리죠. 어젯밤 그 손님은 브로드워터 경이었어요. 그리고 그분이 찾아온 이유에 대해 삼촌과 의논할 때 조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어요."

아침 연습을 끝내자마자 카라는 삼촌의 밴 트럭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어젯밤 브로드워터 경이 무엇 때문에 마음을 바꾸었는지 그 이유를 말하던?"

미첨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우리 서커스단에 야생동물이 한 마리도 없다는 걸 직접 확인했으니까요."

카라는 조심스럽게 대답하고는 삼촌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열심히 음식을 먹는 체했다.

"어제는 종일 그 사람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조바심치면서 속을 태웠지."

미첨은 슬픈 듯이 말했다.

"이젠 그도 자기 결정에 만족하고 있을 테니까, 다시 우리를 만나러 오겠지?"

그가 다시 찾아올 건 분명했다. 카라가 모르는 건 그가 언제 오는가 하는 것뿐이었다.

"전 가서 프라이드를 훈련시켜야겠어요."

타일러가 올까 봐 가슴 죄며 기다리느니 무슨 일이라도 하는 게 낫다. 카라는 일부러 공원을 벗어나 해변으로 향했다. 내가 타일러에게 몸을 바칠 각오만 되어 있다면, 그 사람은 기꺼이 우리를 이곳에 머물게 해주겠지. 그건 비열한 협박이야. 어쩌면 이렇게 도망치지 말고 그와 당당히 맞서서 내가 순순히 그의 협박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걸 보여 주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서커스단 근처에는 하루 종일 단원들이 있으니까 그 사람도 감히 날 어쩌지는 못할 텐데

해변은 쓸쓸했다.

그녀는 물가를 따라 말을 달렸다. 그의 억센 두 팔과 감미로운 입맞춤의 기억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바람이 윙윙 소리를 내며 귓전을 스치고 지나갔다. 머리카락은 검은 구름처럼 넘실거렸다.

"말을 아주 잘 타는군."

갑자기 타일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금빛 종마가 어느 새 그녀와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거예요?"

카라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난 당신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요?"

뒤를 돌아다보니, 그녀가 탄 말발굽 자국 옆에 그의 말이 남긴 말발굽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이 남자는 내가 말을 타고 떠나는 모습을 보고 일부러 해변까지 줄곧 뒤따라 온 게 틀림없어. 촬영하고 싶은 동물을 추적하듯이 몰래 뒤따라 와서 결정적인 순간에 모습을 드러낸 거야. 카라는 화가 치밀었다.

"그렇게 빨리 달리면 바람 소리밖에는 아무 것도 듣지 못할 거요."

"해변에서는 내 마음대로 얼마든지 빨리 달릴 권리가 있어요. 여기는 개인 땅이 아니니까요."

한바탕 운동을 했기 때문에 화장을 하지 않은 그녀의 두 뺨은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럼 저쪽 방파제까지 누가 빨리 달리나 내기해 보겠소?"

타일러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그녀는 그의 출발신호를 기다리지도 않고 프라이드의 옆구리를 힘껏 차면서 말등에 몸을 딱 붙였다. 프라이드는 바람처럼 달렸다. 카라의 불안도 바람에 날려 말끔히 사라졌다.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상쾌했다. 두 마리 말은 머리를 나란히 하고 젖은 모래 위를 달려갔다. 프라이드가 황금빛 종마를 이길 가망성은 전혀 없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방파제가 다가왔다. 타일러는 말의 방향을 돌리려고 고삐를 잡아당겼다. 카라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도 속력을 떨어뜨리지 않고 나무 장벽 쪽으로 곧장 돌진했다. 점박이 암말은 장애물을 훌쩍 뛰어넘어 계속 달렸다. 타일러가 방파제 너머에서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카라는 깔깔거리며 웃어젖히곤 모래 언덕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서커스단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카라는 어깨너머로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계략은 실패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타일러는 벌써 방파제를 뛰어넘어 맹렬한 기세로 그녀를 쫓아오고 있었다. 두려움과도 같은 기묘한 전율이 그녀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서커스단으로 가는 오솔길이 눈앞에 나타났다. 카라는 프라이드를 재촉했다. 그러나 타일러는 어느 새 다가와 그녀의 말고삐를 홱 나꿔챘다.

"내가 이겼어요!"

카라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당신은 나를 속였소."

"사랑과 전쟁에서는"

카라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끊었다. 도대체 왜 그런 말을 불쑥 입밖에 내어 버렸을까?

"사랑과 전쟁에서는 어떤 수단도 정당하다는 말이오?"

타일러가 대신 말을 끝맺었다.

"한데 우리 사이에 있는 건 무엇이오, 카라? 사랑이오, 아니면 전쟁이오?"

윤이 반짝반짝 나는 그의 승마용 장화가 카라의 다리를 건드렸다. 그녀는 커다란 종마와 산울타리 틈에 끼여 꼼짝할 수 없었다.

"좀 비켜 주세요. 그렇게 밀어붙이면 어떡해요."

그의 몸에 닿지 않으려면 말등 위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그녀는 한쪽 다리를 살짝 들어올렸다.

"그런 문제라면 쉽게 해결할 수 있지."

타일러가 갑자기 몸을 숙이더니, 콩깍지에서 완두콩을 빼내듯이 그녀를 말등에서 잡아떼었다. 다리가 정상적인 위치에 있었다면 두 발로 말의 배를 감싸안고 버틸 수도 있었겠지만, 다리 하나로는 그것도 불가능했다. 타일러는 그런 것까지 미리 계산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는 싱긋 웃으며 카라를 자기 안장 위로 끌어당겼다. 카라는 발을 버둥거렸다.

"내려 줘요!"

그녀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도대체 무슨 장난을 하고 있는 거예요?"

"왜 내가 장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그는 검은 머리카락 틈으로 드러난 카라의 귓불을 혀끝으로 간질였다. 카라는 펄쩍 뛰었다.

"내려 줘요!"

그녀는 타일러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자기 등 위에서 때 아닌 전투가 벌어지자 황금빛 종마는 불안한 듯이 발을 굴렀다.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 있는 건 전쟁이오?"

"맞아요, 전쟁이에요. 난 당신을 아주 싫어해요."

그녀가 큰소리로 외쳤다.

"얌전히 있지 않으면 떨어질 거요. 여기는 밑에 안전그물도 없소."

안전그물이라고? 하지만 이대로 그냥 그의 품안에 안겨 있는 것도 나에겐 줄타기만큼이나 위험해. 이 남자는 거만하고 편견이 심하고 고집 센 협박꾼이야. 정말 꼴도 보기 싫어. 게다가 위험스러울 만큼 매력적이야그녀는 몸속에서 관능의 불꽃이 타오르는 걸 느꼈다. 그러한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은 조에게서는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황홀한 쾌감이었다.

"날 놓아 줘요."

그녀는 다시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쳤다.

"그게 당신이 원하는 바라면."

타일러는 싱긋 웃으며 그녀를 놓아 주었다. 미친 듯이 발버둥치던 카라는 중심을 잃고 아래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도와 줘요!"

딱딱한 땅에 떨어지면 다칠지도 모른다. 카라는 별수없이 타일러의 허리를 껴안으며 매달렸다.

"내가 미끄러질 걸 뻔히 알면서 일부러 날 놓아 주었군요?"

"당신이 놓아 달라고 했잖소?"

"이젠 마음을 바꿨어요."

"그럴 줄 알았소."

그는 카라를 끌어올려 줄 생각도 하지 않고 한참 동안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자기 무릎 위에 올려 앉혔다.

"당신은 야비해요!"

카라는 화가 나서 쏘아붙였다. 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얌전히 앉아 있기는 했지만, 그녀의 눈은 여전히 그와 맞서 싸우고 있었다. 커다란 검은 눈동자가 분노의 불꽃으로 번쩍였다.

"당신은 너무나 사랑스럽소, 나의 카라. 이제까지 당신을 나의 카라라고 부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겠지?"

"날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난 당신의 카라가 아니에요."

내가 완전히 그의 것이 된다면 기분이 어떨까? 쓸쓸한 해변에서 잠깐 동안 안겨 있는 게 아니라, 영원히 그의 품에 안겨 있게 된다면?

"언젠가는 당신도 누군가의 여자가 될 거요."

"아녜요."

카라는 자신의 엉뚱한 공상을 무자비하게 지워 버렸다.

"나는 나 자신의 것이에요. 절대로 누군가의 것이 되지는 않을 거예요."

"자신의 운명과 싸우지 말아요, 카라."

그는 집게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카라의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의 손가락은 빨갛게 달궈진 쇠꼬챙이처럼 그녀의 살갗을 태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길 것만 같았다.

"당신은 당신 자신만의 것이기에는 너무나 사랑스럽소."

"나는 온갖 수단을 다해서 끝까지 싸울 거예요."

"노력하지 않는 자는 아무도 정복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는 법이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녀는 다음에 닥쳐올 일에 대비하여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그의 입맞춤은 놀랄 만큼 부드러웠다. 갑자기 그녀의 몸속에서는 고통처럼 격렬한 갈망이 솟아올랐다. 그녀는 그 이해할 수 없는 갈망과 맞서 싸웠다. 그의 입술과 손길이 닿을 때마다 온몸에 전류가 통하는 것 같았다. 그 격렬한 고통은 참아내기가 힘들 정도였다.

내 몸속에서 뭔가가 폭발하기 전에 빨리 이 불꽃을 꺼야 한다. 카라는 몸을 바로 세우려고 버둥거렸다.

"당신은 화장을 하지 않을 때가 더 아름답군."

그의 입술이 그녀의 뺨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면 나는 매일같이 하루종일 화장을 하고 있겠어요."

"그러면 그 두꺼운 화장 밑에 도달하려면 나는 훨씬 더 깊이 파고 들어가야겠군."

그는 여전히 입술을 떼지 않았다. 고통이 온몸으로 퍼져갔다. 그녀의 입술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당신은 공연장 안에서 뿐 아니라 밖에서도 연기를 썩 잘 하는군. 조금만 더 연습하면"

"난 그 따위 연습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특히 당신하고는."

카라는 그의 입맞춤이 남긴 감촉을 지우려고 입술을 세게 문질렀다.

"난 당신을 몹시 싫어해요."

"그 말은 아까도 했잖소?"

그가 싱긋 웃었다.

"하지만 당신이 오후 연습에 늦으면 안 되니까, 오늘은 이 정도로 해 둡시다. 쇼는 계속돼야 하잖소."

그는 두 손으로 카라의 허리를 잡아 번쩍 들어올려 암말의 등 위에 가볍게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카라가 미처 자세를 갖추기도 전에 암말의 엉덩이를 가볍게 쳤다. 프라이드는 오솔길을 따라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카라는 깜짝 놀라서 프라이드의 목을 잡고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타일러가 놀려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만나요. 나의 카라."

 

4

카라가 프라이드의 몸을 닦아 주고 있을 때 조가 다가왔다.

"오늘 아침엔 프라이드가 땀투성이로군. 공원에서 누굴 만났지?"

조는 의심스러운 듯이 날카롭게 물었다.

"오늘 아침엔 공원에 가지 않았어요. 거기서는 소떼들 때문에 마음 놓고 달릴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프라이드를 타고 해변으로 나갔어요. 일 년 중 이맘때면 해변엔 아무도 없으니까요."

그것은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타일러를 만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다 해도 그녀의 잘못은 아니었다.

"나는 카라가 뒤로 재주넘기를 연습하려고 좀 더 일찍 돌아올 줄 알았어. 어젯밤처럼 떨어지지 않으려면 더 연습해 두어야 할 필요가 있어."

"우리 직업은 항상 위험으로 가득 차 있어요."

그 위험에 타일러가 포함되리라고는 그녀로서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황갈색 머리카락의 박물학자는 그녀의 육체뿐 아니라 마음의 균형마저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를 생각하기만 해도 그녀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날 기다리면서 어슬렁거려 봤자 소용없어요. 난 이제 개들을 돌봐 줘야 하니까요."

"그럼 내일 아침에 하기로 하지."

조는 마지못해 양보했다.

"내일 아침에는 브로드워터 시내에 가야 돼요. 페피의 아이들을 그곳 학교에 전학시켜야 하거든요."

페피와 그의 아내는 영어를 거의 할 줄 몰랐기 때문에 그런 문제들은 모두 서커스단장의 조카인 카라가 맡아서 처리해 주어야 했다.

"왜 꼭 당신이 그런 일들을 해줘야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

조가 투덜거렸다.

"할 수 없잖아요? 페피의 아이들은 영어를 잘하긴 하지만 그런 일을 처리하기엔 너무 어려요."

카라는 조와 얘기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럼 내일은 브로드워터 시내에 갔다가 점심 전에 돌아와서 연습하겠어요. 오늘은 개들을 돌봐 주고 나서 바로 샤워를 할 작정이에요. 그러고 나면 오후 공연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 될 거예요. 괜찮다면 내 일을 좀 거들어 주세요."

예상했던 대로 조는 질색을 하며 자신의 밴 트럭 쪽으로 가버렸다. 카라가 일을 막 끝냈을 때 벤이 다가왔다.

"오늘 오후에 포피 대신 올가미 춤을 좀 추어 주겠어, 카라?"

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포피가 어디 아픈가요?"

"별로 좋지 않아. 배가 좀 아픈 모양인데, 좀처럼 낫질 않아서 걱정이야."

"의사에게 보여야 돼요. 어제 공연을 할 때도 얼굴이 창백해 보였어요."

"오후 공연이 끝나면 포피를 의사한테 데려갈 작정이야."

"그럼 어릿광대 놀이에서는 누가 당신의 조연 역할을 하죠?"

"포피가 나을 때까지 린다가 대신 해주기로 했어."

오후 공연이 시작됐다. 미첨이 첫 번째 순서를 소개하자 카라는 프라이드를 타고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링사이드의 자석들은 어린애들이 모두 차지하고 있었고 타일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의 긴장은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생기도 사라진 듯했다.

카라는 세 번 연속 뒤로 재주넘기를 완벽하게 해냈지만, 그걸 보아 줄 타일러가 없는 게 못내 아쉬웠다. 관객들의 열렬한 박수갈채도 그녀의 귀에는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조와 함께 하는 공중곡예도 멋지게 해냈다. 조는 썩 기분이 좋은 듯 그녀를 칭찬해 주었다.

"이제 당신의 본래 모습을 되찾았군."

"난 본모습을 잃은 적은 없어요."

그녀가 톡 쏘아붙였다. 공연이 끝날 때면 항상 느끼곤 했던 흥분과 기쁨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카라는 셀로판지에 곱게 싸인 종이 장미 꽃다발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다음날 아침 카라는 밴 트럭에서 나오자마자 주위의 모습이 어딘가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뭐가 달라졌을까? 카라는 얼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눈이 이 빠진 자국처럼 텅 비어 있는 공터에 멎었다. 어릿광대의 밴 트럭이 서 있던 곳이었다. 발전기를 실은 수레는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옆에 있어야 할 벤의 트럭은 사라지고 없었다.

"우리가 야반도주라도 한 줄 알았어?"

벤이 싱긋 웃으며 다가왔다.

"난 지금 저 끔찍한 기계를 좀 살펴보려고 오는 중이야."

"당신이 포피 때문에 떠나 버린 줄 알고 깜짝 놀랐어요."

"? 이 서커스단을 떠난다구? 그런 소리 마!"

벤이 소리쳤다.

"난 우리 밴 트럭을 저쪽 끝으로 옮겼을 뿐이야. 거기서는 발전기 소리가 안 들리니까."

"포피는 아직도 아픈가요?"

"포피는 괜찮아. 배가 아픈 이유도 알아냈어."

벤이 쾌활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아기들도 건강해."

"아기들이라뇨? 그럼 쌍둥이를 가졌나요?"

"그래."

벤은 아버지가 되는 게 무척이나 기쁜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밴 트럭을 옮긴 거야. 우리 아기들을 시끄러운 발전기 옆에다 둘 수는 없잖아?"

벤은 발전기를 가동시킨 다음 다른 단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야겠다며 가버렸다.

카라는 서둘러 아침에 해야 할 일들을 끝마치고는 페피의 세 아이들을 데리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기 싫어서 마지못해 따라왔다.

그녀는 여자 교장선생님한테 아이들을 맡기고 나오면서 말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서커스단에 돌아올 생각은 하지 마. 하기 싫다고 해서 피하기만 하면 절대로 훌륭한 곡예사가 될 수 없는 거야."

그 충고를 받을 사람은 저애들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야카라는 필요한 물건을 사러 브로드워터 쇼핑센터로 가면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올 겨울 내내 브로드워터 공원의 주인과 여기저기서 불쑥 마주칠 생각을 하면, 어디론가 달아나서 숨어 버리고 싶었다.

브로드워터에서 가장 큰 백화점의 지배인은 그녀가 들어서자 급히 다가와서 악수를 청했다.

"바렐리 양! 우리는 2주일 후에 여기서 열릴 당신의 공연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스포츠웨어 매상고가 부쩍 올라갈 게 틀림없어요."

"저도 그러기를 빌겠어요."

카라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오늘은 물건을 좀 사러 잠시 들렀어요."

카라는 귀중한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슬쩍 암시를 주었다. 조와의 약속을 지키려면 한 시간 뒤에 떠나는 버스를 타야만 한다.

"우리 자체 브랜드인 운동복 코너에 들르겠다고 약속하셨죠?"

지배인은 그녀가 초조해하는 것도 모르고 계속 말을 걸었다.

"제가 여러 가지 색깔의 운동복을 따로 준비해 놓았으니까 가서 골라 보시죠. 지금 입어보시겠습니까?"

"제 파트너와 함께 와서 고르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카라는 서둘러 작별인사를 하고 점원이 지배인에게 말을 거는 틈을 타서 재빨리 도망쳤다. 버스를 타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그녀는 혼잡한 사람들 틈을 뚫고 가까운 출구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 미안합니다!"

그녀는 가게를 나가는 데만 정신이 팔려서 가게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남자를 미처 보지 못했다. 느닷없이 문이 안쪽으로 홱 열리는 바람에 그녀는 균형을 잃고 남자 쪽으로 쓰러졌다. 남자가 팔을 내밀어 그녀를 붙잡았다. 코에 익은 로션 냄새가 풍겨 왔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지 않고도 자기를 받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이건 정말 우연의 일치로군."

타일러가 유쾌한 듯이 말했다.

"정말로 우연의 일치인가요? 아니면 또 나를 뒤따라 왔나요?"

"아마 양쪽 다일 거요."

타일러가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아니, 그런데 당신은 왜 그렇게 숨을 헐떡이고 있소?"

"난 지금 몹시 바빠요. 여기 지배인이 나를 붙잡고 이야기를 늘어놓는 바람에 물건도 사지 못하고 서둘러 돌아가는 길이에요. 버스를 타려면 시간이 빠듯해요."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이제 버스 시간이 아니라, 빨리 타일러의 품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카라는 허리를 감고 있는 타일러의 팔을 떼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강철 막대기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당황하며 주위를 힐끗 돌아보았다. 가게 입구는 몹시 혼잡했다. 이런 데서 소동을 벌일 수는 없다. 그녀는 할 수 없이 타일러에게 간청했다.

"제발 놓아 주세요. 지금 가지 않으면 버스를 놓쳐요."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거요? 오후 공연이 시작되려면 아직도 한참 남았는데."

"조가 빨리 돌아와 함께 연습하자고 했어요."

"당신은 무슨 일이든지 조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오?"

"물론 그렇진 않아요. 하지만"

거리를 바라보니 벌써 버스가 지나가고 있었다. 신호등이 푸른빛으로 바뀌면, 점심시간의 혼잡한 사람들 틈을 뚫고 길을 가로질러 버스를 타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다.

"제발 놓아 주세요. 버스를 놓치겠어요."

신호등이 푸른빛으로 바뀌었다. 버스는 네거리를 가로질렀다.

"저 자동차를 뚫고 길을 건너갈 수는 없소. 그대로 차에 치고 말거요."

타일러는 쯧쯧 혀를 차며 그녀를 더욱 세게 붙잡았다. 카라는 버스가 정류장에서 사람들을 태우고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결국 놓쳤잖아요!"

카라는 안타깝게 말하고는 타일러를 노려보았다.

"모두 당신 탓이에요. 일부러 날 붙잡고 늘어진 거죠?"

"그걸 보상하는 의미에서 내가 점심을 사겠소."

그는 카라가 거절하기를 기대하는 듯한 눈초리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다음 버스를 타려면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할 거요."

"당신하고 같이 식사를 하면 목으로 넘어가질 않을 거예요. 어쨌든 난 공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아요. 뱃속에 음식을 잔뜩 넣고 그네에 거꾸로 매달릴 수는 없으니까요."

"그도 그렇겠군."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신 커피라도"

"싫어요."

"또 전쟁이 시작됐군. 적어도 커피를 마시고 있는 동안만은 휴전하기로 합시다. 커피를 마시면서 동시에 말다툼을 할 수는 없으니까."

카라는 얼떨떨한 상태로 그에게 이끌려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타일러가 김이 오르는 뜨거운 커피를 그녀에게 내밀고 있었다.

카라는 슬픈 얼굴로 커피 잔을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왜 당신이 나한테 점심이나 하다못해 커피 한 잔이라도 사주고 싶어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당신은 서커스를 몹시 싫어하잖아요."

"당신네 서커스는 여느 서커스와는 다르니까."

"그럼 마음을 바꾸셨나요? 우리도 동물들을 공연에 내보내는데?"

"모두 집에서 기르는 애완동물들이지."

그는 그녀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그저께 당신의 밴 트럭으로 가기 전에 동물들을 조사해 봤소."

"정말 뻔뻔스럽군요. 누가 당신에게 동물들을 조사해도 좋다고 허락했죠?"

"내가 했소. 동물들을 위해서."

동물들을 위해서였다는 말에는 카라로서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 조랑말과 테리어들은 공연장에서 재롱을 부려요."

"내 빨간 사냥개도 재롱을 부리지. 또 내 황금빛 종마도 재주를 부린다고 할 수 있소."

그의 입술에 미소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모두 애완동물에게 재롱을 가르치는 법이오. 그리고 애완동물들은 어린애들처럼 자기가 배운 재주를 자랑해 보이고 싶어 하지. 하지만 야생동물들은 달라요."

"서커스단이 야생동물을 기르는 건 좋은 일이에요."

그 말에 타일러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로와졌다.

카라는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몇 년 전에 대량학살된 코끼리들을 기억하세요."

"기억하느냐고?"

그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신문마다 떠들썩하게 보도했소. 코끼리 떼가 무슨 개간을 하는 사업에 방해가 된다고 몽땅 떼죽음을 당했소. 우린 그걸 막아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우리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소."

"몽땅 죽은 건 아니에요. 서커스단 사람들이 그 대량학살을 중지시켰다면 믿으시겠어요? 그 서커스단은 그때 우연히 그 지역에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는 순회공연을 포기하고 아직 죽지 않은 동물들을 구하려고 달려갔어요."

"신문에는 그런 기사가 전혀 실리지 않았는데?"

그는 못 믿겠다는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신문에는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어요. 전 세계 신문방송이 대량학살사건을 크게 보도해야 여론이 일 테고, 그래야 아무도 더 이상 그런 짓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할 테니까요. 만약 서커스단 사람들이 코끼리를 구해낸 사실이 알려지면 신문은 거기에만 달라붙었을 테고, 대량학살사건은 자연히 뒷전에 처지고 말았을 거예요."

"코끼리는 몇 마리나 구조됐소?"

"모두 합해서 열두 마리 정도였어요. 대부분 암컷이고, 수컷은 한두 마리뿐이었죠. 몇 마리는 벌써 총에 맞은 뒤여서 치료를 받아야 했어요."

"그래서 그 코끼리들은 어떻게 됐소?"

"몇 마리는 영국 사파리 공원으로 왔고, 나머지는 유럽으로 갔어요."

"그 많은 코끼리들을 배로 수송하려면 비용이 엄청나게 들었을 텐데, 그 비용은 누가 댔소?"

"물론 서커스단 사람들이지 누구겠어요?"

타일러는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아직도 그녀의 말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정 믿지 못하겠거든 사파리 공원에 전화로 문의하면 간단히 확인할 수 있을 텐데카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커피 한 잔 더 하겠소?"

"싫어요!"

그의 눈썹이 꿈틀했다.

"또 전쟁이 시작된 거요?"

"이젠 정말로 가야 해요. 당신 덕분에 연습을 빼먹었어요. 하지만 다른 잡일까지 빼먹을 순 없어요. 어릿광대의 아내가 아파서 인원이 하나 부족하거든요."

"무슨 심각한 병이오?"

타일러는 정말로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쌍동이를 가졌대요."

카라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건 축하해야 할 일이로군."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린애를 싫어할 리가 없을 텐데?"

"난 쌍둥이를 사랑할 거예요. 하지만 끊임없이 옮겨 다니는 밴 트럭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건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여자 입장에서 보면, 전혀 즐거운 일이 못돼요. 그건 그렇고, 난 이제 가봐야겠어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벌써 줄을 섰을 거예요."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태워다 주겠소."

"고맙지만 사양하겠어요."

"난 어쨌든 집으로 돌아가야 하오. 원고를 다 써서 모레까지 프로듀서에게 넘겨 줘야 하니까."

타일러는 그녀와 함께 거리로 나왔다. 맞은편 버스 정류장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저 줄에 가서 서면, 당신은 다음 버스도 못 탈 거요."

"하지만 타야 돼요. 안 그러면 공연에도 늦어 버릴 거예요. 당신이 날 붙잡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화가 나서 그를 노려보았다.

타일러는 다짜고짜 그녀의 팔을 붙잡고 가까이에 주차해 있는 재규어 쪽으로 끌고 가서, 싫다는 그녀를 앞좌석에 밀어 넣었다.

"안전벨트를 매요. 그것도 싫다고는 말하지 말아요. 자동차 안에서 안전벨트를 매야 한다는 건 법률로 정해져 있으니까. 그래도 싫다면 내가 매줄 수밖에."

카라는 그 말에 움찔하며 순순히 안전벨트를 맸다.

타일러는 빈정거리는 눈초리로 그녀를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카라는 이를 악물었다. 숨결이 가빠졌다. 그녀는 불쑥 말했다.

", 맸어요."

그러자 타일러는 싱긋 웃으며 자기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었다. 커다란 재규어는 복잡한 시내를 빠져나오자 나는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이게 버스보다 훨씬 빨라요."

그는 핸들을 능숙하게 돌리며 말했다. 카라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직도 전쟁 중이오?"

그는 놀리듯이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난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소."

"나하고 이야기를 한다구요?"

카라는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대화보다 그녀와의 입맞춤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다.

"그렇소."

그는 그녀의 표정을 알아차리고는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팔라벨라스에 대해서요. 난 항상 팔라벨라스를 기르고 싶었소."

"그런데 왜 기르지 않으셨어요?"

"브로드워터 저택을 물려받기 전에는 안정된 집을 가진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오."

그는 카라를 힐끗 쳐다보았다.

"우리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소, 나의 카라."

"예를 들어서 어떤 것이죠?"

"예를 들면,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끊임없이 옮겨 다니며 살아왔다는 것, 이사할 때마다 애완동물을 버리고 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한번도 애완동물을 기르지 않았다는 것, 군대 막사 같은 제한된 세계를 제외하고는 바깥 세계에 친한 친구를 가져 본적이 없다는 것."

"군대도 서커스단과 똑같은 것 같군요."

"그렇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도 말했듯이 우리에겐 공통점이 많아요. 저번날 당신 삼촌의 조랑말을 보니 어린 시절의 소망이 되살아나더군. 서커스단 사람들에게만 동물보호를 맡겨 둘 수야 없잖소."

"아무도 당신을 방해할 사람은 없어요."

"그럼 당신 삼촌에게 전해 주겠소? 내가 조랑말 문제로 이야기 좀 나누고 싶어 하더라고."

카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는 카라를 곁눈질로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것 말고도 나에겐 다른 소망이 있소. 이건 어린애다운 소망이 아니라 아주 어른스런 소망이오."

나도 그래카라는 멍하니 생각했다. 타일러를 만나기 전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소망들이었다. 카라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저 멀리 공원 입구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카라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황급히 말했다.

"저기서 내려 주세요. 이제는 걸어가도 돼요."

"난 그렇게 인색하지 않소. 당신을 집까지 태워다 준다고 했으니까, 약속대로 그렇게 하겠소."

그는 줄지어 늘어선 밴 트럭을 지나 그녀의 밴 트럭 앞에다 차를 세웠다.

", 다 왔소."

"고맙다고 해야 할까요?"

대형 텐트에서 조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연습을 빼먹어서 그렇지 않아도 화가 나 있을 텐데, 타일러를 보게 되면 결코 가만있지 않을 거야. 카라는 서둘러 안전벨트를 풀고 문 손잡이를 잡았다.

"내가 열어 주겠소."

타일러가 몸을 기울여 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의 팔은 안전벨트보다 더 효과적으로 그녀를 그 자리에 묶어 놓았다. 두 사람의 얼굴은 거의 맞닿아 있었다. 타일러가 고개를 돌렸다. 카라는 괴롭게 숨을 들이쉬었다. 백미러에 조의 모습이 비쳤다. 타일러도 보았음에 틀림없다.

"당신이 나한테 고맙다고 말하지 않겠다면 내가 하겠소. 나와 함께 와주어서 고맙소."

그의 눈이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그녀가 입을 열려는 순간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고맙소, 나의 카라. 조에게 안부 전해 주시오."

놀리듯이 말하고 나서는 문을 열었다.

카라는 자동차 밖으로 뛰쳐나와 그를 홱 돌아보았다.

"당신은"

한마디 쏘아붙이려 했는데, 순간 자동차 문이 부드럽게 닫혔다.

"또 만나요."

타일러는 손을 흔들며 떠나가 버렸다.

"이제까지 브로드워터하고 함께 있었군."

조는 씨근거리며 사라져 가는 재규어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연습을 하러 나타나지 않았을 때 진작 그걸 알아차렸어야 했는데난 이미 경고했어, 카라!"

"그리고 삼촌은 당신에게 경고했어요!"

카라는 타일러 대신 조에게 분풀이를 했다.

"나한테 소리 지르지 말아요. 나도 가만히 참고 있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브로드워터 경이 날 태워다 주지 않았다면 연습은 고사하고 오후 공연에도 늦었을 거예요. 백화점 지배인이 날 붙잡고 이야기를 시키는 바람에 물건 살 시간도 없었어요."

조는 그녀의 예기치 않은 반격에 주춤했다.

"백화점과는 자세한 타협을 모두 끝낸 줄 알았는데"

"지배인은 자기가 혹시 잊어버린 게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보고 싶댔어요. 아참, 그리고 내일 당신과 함께 가서 운동복을 입어보겠다고 약속했어요."

공연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조를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카라는 조심스럽게 조의 안색을 살피면서 속으로는 타일러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럼 내일은 브로드워터에 가서 옷을 고르고 점심때까지 놀다 올까?"

조는 마음이 누그러진 듯, 공연 중에도 더 이상 타일러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공연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러나 카라는 공중곡예나 줄타기를 하면서도 아무런 스릴도 느끼지 못했다.

공연이 끝나자 그녀는 프라이드와 조랑말들에게 먹이를 주고 옷을 갈아입으러 밴 트럭으로 돌아왔다. 거울에 비친 얼굴에는 생기가 없었고 눈은 흐리멍텅했다. 그녀는 서커스단 생활과 자신의 일에 권태감을 느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 골치가 지끈지끈 아팠다.

삼촌은 카라의 눈 밑에 검은 그늘이 져 있는 걸 보고 위로하듯이 말했다.

"이제 대형 텐트를 닫고 개별공연을 시작하면 일이 좀 편해질 게다."

"이따금은 한가롭고 조용하게 보낼 적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며칠간은 이 근처가 그렇게 평화롭고 조용하지 못할 거야."

베스가 슬픈 얼굴로 말했다.

"어젯밤 마을 빈터에 박람회장이 들어섰거든."

카라는 박람회장의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를 좋아했다. 서커스단이 한 곳에서 며칠간 공연을 하면, 반드시 장꾼들이 뒤따라 와서 근처에 캠프를 치곤 했다. 결국 그들은 서로 상부상조하는 관계였다. 카라는 거의 그들 모두와 아는 사이였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 어떤 마을에서 우연히 그들과 마주치면 무척 반가와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에게는 그들이 가져올 떠들썩한 분위기가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전 조와 함께 페피의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백화점에 가서 운동복을 입어볼 작정이에요. 뭐 필요한 물건이나 시키실 일은 없으세요?"

"그럼 이 편지를 좀 부쳐 다오."

카라는 편지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아이들을 데리러 갔다. 조는 막내아이를 어깨에 올려놓고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면서 아이들과 즐겁게 장난을 쳤다. 자기가 아빠 노릇을 얼마나 잘하는지 나에게 보여 주려는 속셈이야. 카라는 속으로 입을 삐죽거렸다.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한다."

카라는 학교 교문 앞에서 아이들과 헤어졌다. 내가 외로움과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조와 결혼한다면 앞으로 몇 년 뒤에는 내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면서 이렇게 말하겠지. 카라는 씁쓸히 웃었다.

"우체국이 저기 있군. 가서 편지를 부쳐 버리지 그래."

"그게 좋겠군요."

카라는 길을 건너려고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낯익은 황갈색 머리가 우체국 창문턱 밑으로 쑥 들어가는 게 보였다. 타일러가 원고를 부치러 우체국에 온 게 틀림없어.

카라는 급히 조에게로 되돌아왔다. 조와 함께 있을 때 그녀가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바로 타일러였다. 조의 질투심을 생각하면, 두 남자가 마주쳤을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조는 아직 타일러를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저쪽에 우체통이 있군요. 이 복잡한 길을 건너갈 필요 없이 저기다 넣어야겠어요."

카라는 조의 팔을 잡고는 거의 뛰다시피 하여 우체통 쪽으로 끌고 갔다. 곁눈으로 바라보자 타일러는 우체국 앞에 서서 그들 쪽을 보고 있었다. 카라는 우체통에 편지를 밀어 넣고는 재빨리 바로 옆에 있는 가게 진열장 쪽으로 조를 돌려세웠다.

"잠깐 여기 들어가서 구경이나 해요. 베스 숙모님께 크리스마스 선물로 무얼 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카라는 유리창에 코를 바싹 대고 열심히 안을 들여다보았다. 다행히도 그 가게는 보석상이었다. 숙모님께 드릴 선물을 고른다는 핑계로는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저쪽에는 브로치들이 있을지도 몰라요."

카라는 조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들이 들여다보고 있는 진열장 뒤편에 하필이면 커다란 거울이 걸려 있어서 맞은편에 있는 우체국 앞뜰의 모습이 환히 비치고 있었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타일러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선명해서 마치 바로 옆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신호등이 바뀌어 타일러가 길을 건너오면 나를 보게 될 거야. 카라는 공포에 휩싸였다.

"우리, 가게 안으로 들어가 봐요."

카라는 조를 재촉했다.

"안에는 고를 만한 물건이 더 많을 거예요."

가게 안이 그녀의 유일한 피난처였다. 그녀는 조를 끌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조는 싫어하기는커녕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속삭였다.

"진열장 안에서 멋진 약혼반지를 봤어. 값도 그리 비싸지 않아."

카라는 슬쩍 창밖을 내다보았다. 타일러는 벌써 길을 건너고 있었는데 지금은 다른 두 남자와 함께였다. 한 사람은 카라가 브로드워터 저택에서 만났던 다니엘스였고, 또 한 사람은 모르는 남자였다. 카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그가 나를 보더라도 저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내게로 오진 않겠지. 그녀는 점원이 카운터 위에 꺼내 놓은 브로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 산호 브로치가 좋겠군요."

카라는 타일러와 두 남자가 멀리 가버릴 때까지 가게 안에서 꾸물거렸다. 조는 그동안 반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반지들은 그리 비싸지 않군."

"린다에게 하나 사다 줘요."

카라는 퉁명스럽게 말했다가 곧 후회했다.

그 때문에 운동복을 고를 때에는 조가 좋아하는 화려한 진홍빛 운동복을 순순히 받아들여, 그의 기분을 달래 주었다.

"정말 잘 고르셨습니다."

지배인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이 화려한 색깔을 입으면 반드시 사람들 눈에 확 뜨일 겁니다."

짙은 안개 속에서도 눈에 뜨일 거야. 카라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볼일이 다 끝났으니, 또 타일러와 마주치기 전에 빨리 돌아가는 게 상책이다. 카라는 조를 재촉하여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백화점이 너무 복잡해서 제대로 물건을 구경할 수도 없잖아요. 그리고 난 어제 못한 연습을 하고 싶어요."

그녀는 서커스단에 돌아오자마자 시작해서 늦게까지 지치도록 연습을 했다. 마침내 연습을 마치고 대형 천막을 나오자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귀를 때렸다.

"저 음악 소리를 들으니 박람회장은 경기가 썩 좋은 모양이군."

"저 시끄러운 소리만 없으면 살겠어요."

카라는 투덜거렸다.

"난 골치가 아파요. 아마 오늘 아침 백화점에서 사람들한테 시달려서 그런가 봐요. 가서 좀 누워 있으면 나을 거예요."

카라는 힘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행히 조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보내 주었다. 밴 트럭에 혼자 있어도 그녀가 바라는 마음의 평화는 오지 않았다. 카라는 밴 트럭 안을 오락가락하다가 복잡한 생각을 물로 씻어 버리기라도 하듯이 샤워를 했다.

타일러서커스타일러타일러. 이런 생각들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 머리 속에서 빙빙 돌았다. 그녀는 청바지와 스웨터를 입고 머리를 힘차게 빗질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남자 같으니라구. 내 밴 트럭 안에서조차 날 평화롭게 내버려 두지 않다니."

카라는 화가 나서 중얼거렸다.

"카라, 손님이 오셨다."

그녀가 절망스러워하며 브러시를 내려놓으려 할때 베스가 옆 밴 트럭에서 그녀를 불렀다. 카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벌떡 일어났다.

박람회장 사람이 인사차 들른 게 틀림없어. 카라는 두통도, 눕고 싶은 마음도 깨끗이 잊어버리고 삼촌의 밴 트럭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인사를 하다 말고 멍하니 선 채 긴 의자에 앉아 있는 타일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브로드워터 경은 팔라벨라스를 다시 한번 보러 오셨단다."

삼촌이 말했다.

"그리고 오늘 오후 공연도 보실 예정이란다."

베스 숙모가 즐거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5

"당신은 벌써 공연을 한번 보셨잖아요. 뭣 하러 또 보겠다는 거죠? 우리가 그동안 야생동물을 사들였을까 봐 그러세요?"

카라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카라!"

베스 숙모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카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타일러를 노려보았다. 그의 황갈색 눈동자는 그녀의 매끄러운 머리카락에서 손가락 끝에 이르기까지 값을 매기듯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카라의 얼굴이 붉어졌다.

"브로드워터 경은 우리와 공연계약을 맺을 작정이셔."

삼촌이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공연계약을 맺는다구요?"

카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브로드워터 저택에서는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영지에 사는 어린이들을 위해 파티를 열어 주고 있소. 그래서 당신네 공연 가운데 어린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몇 가지 골라볼 생각이오."

타일러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에게 개인적인 공연계약도 받는다고 말한 사람은 바로 카라 자신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발로 힘껏 걷어차 주고 싶었다. 그러나 설마 타일러가 서커스단의 고객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자기에게 편리할 때면 서커스단에 대한 편견을 기꺼이 옆으로 제쳐 놓는군요?"

"난 이 서커스단이 딴 서커스단과 다르다는 걸 벌써 인정한 줄로 아는데?"

"하지만 당신은 우리 공연을 이미 보셨으니까, 다시 보지 않아도 대충 기억해낼 수 있을 텐데요."

"지난번에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보았소. 그러니 이번엔 어떤 것들이 어린이들의 파티에 가장 적합한지를 염두에 두고 볼 작정이오."

그는 내 공연을 선택할 생각일까? 그런 의문이 번갯불처럼 카라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타일러의 입가에는 수수께끼 같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쥐를 갖고 노는 고양이처럼 나를 놀리고 있군. 좋아, 나도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카라는 고개를 당당히 치켜들고 말했다.

"백화점 같은 곳은 제법 공간이 있지만, 개인 집은"

그녀는 일부러 말을 맺지 않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고객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게 잘못인 줄은 카라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미첨과 베스가 깜짝 놀라서 나무라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타일러는 나를 선택할 작정일까? 아니면 거절하여 나에게 굴욕감을 주려는 걸까? 그걸 모르는 채 잠자코 그의 결정을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자 카라는 신경이 곤두섰다. 그녀에게 남겨진 유일한 방어수단은 그가 그녀를 선택하거나 거절할 기회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두는 것뿐이었다.

"개인 집에는 커다란 장비를 들여 놓을 만한 공간이 없을 거예요."

"우리 집 홀은 아주 넓소. 지금은 가운데에 간막이가 설치돼 있지만, 그걸 치우면 성대한 무도회도 열 수 있소. 여기 공연장하고 다른 점은 원형이 아니라 직사각형이라는 것과 잔디나 톱밥이 아니라 마루가 깔려 있다는 것뿐이오. 당신이 직접 저택에 와서 자세히 조사해 보는 게 어떻겠소?"

"그거 멋진 생각이군요."

카라가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미첨이 끼어들었다.

"카라는 개인적인 공연계약을 맺을 땐 언제나 그곳에 직접 가서 장소를 점검해 본답니다. 공중곡예나 줄타기를 하기에 곤란한 점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이번 경우엔 브로드워터 저택의 홀이 아니라 그 집에 사는 사람이 문제였다. 카라는 삼촌과 타일러에게 꼼짝없이 사로잡히고 말았다.

"지금은 그 일을 의논할 시간이 없어요. 난 가서 프라이드와 조랑말들을 준비시켜야 하니까요."

카라는 마지막 남은 탈출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카라와 함께 가시면 어떨까요?"

뜻하지 않게 미첨이 또다시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조랑말들을 검사할 수 있고 당신이 생각하는 품종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도 있을 텐데요?"

"설마 조랑말들을 파실 생각은 아니겠죠?"

카라는 삼촌의 말에 깜짝 놀라 발길을 멈추었다. 미첨이 조랑말들을 판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녀의 삼촌은 당황해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껄껄 웃었다.

"물론 아니지. 하지만 브로드워터 경이 조랑말 사육을 시작하기 전에 내 조랑말들을 한번 살펴보는 건 현명한 일이야. 브로드워터 경은 나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선택번식 작업을 추진할 수 있을 게다."

"양보다 질이 더 중요한 법이에요."

카라는 심술궂게 말하고는 마지못해 타일러를 조랑말에게 안내했다. 타일러는 이제 파티를 위한 공연계약과 팔라벨라스를 핑계삼아 서커스단에 멋대로 드나들겠지. 타일러는 정말로 팔라벨라스에 관심이 있는 걸까? 아니면 나에게 접근하려는 계획적인 책략일까? 그 이유가 무엇이든 이젠 그를 피할 도리가 없어. 그렇게 자주 가까이 접촉하게 된다면 난 어떻게 될까? 이렇게 나란히 걷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따끔거릴 정도인데

그녀는 고통을 떨쳐내려고 퉁명스레 말했다.

"수놈이 뒷발질을 해요."

그녀는 장난꾸러기 조랑말이 그 나쁜 버릇을 보여 주면 좋겠다고 은근히 바랐건만 분하게도 수말은 타일러를 걷어차는 대신 체신머리 없게도 암말들과 함께 쫄랑거리며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아주 순하고 잘생긴 녀석인데 그래."

그는 부드럽게 휘파람을 불며 한 손을 내밀었다. 놀랍게도 수말은 타일러에게 머리와 목을 얌전히 내밀었다. 그놈은 카라와 미첨 외에는 아무에게도 그런 친밀감을 보인 적이 없었다. 타일러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수말의 입에 대어 주었다.

"공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이면 안 돼요. 그러지 않으면 내가 주는 음식이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해요."

"이 녀석한테 뇌물을 바치고 있군."

타일러는 비웃으면서도 손을 거둬들였다.

"그건 뇌물이 아니라 착한 행동을 한 보상이에요. 저리 좀 비켜요. 이 녀석을 예쁘게 꾸며 주어야 하니까요."

그러나 장난꾸러기 수말은 타일러에게 좀 더 귀여움을 받고 싶어서 고개를 이리저리 내두르며 카라의 일을 방해했다. 그가 지켜보고 있어서 그녀는 더욱 초조해졌다.

"제발 얌전히 좀 있어?"

"내가 도와 주겠소."

타일러가 나섰다. 카라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순식간에 준비를 끝낸 여덟 마리 조랑말들은 낯선 남자 앞에서 화려한 깃털 장식을 자랑하듯 까불어댔다.

", 이젠 얌전히 있어라."

카라는 사과 여덟 조각을 나눠주면서 시계를 힐끗 들여다보았다.

"프라이드를 준비시키는 일도 내가 거들어 주겠소. 그러면 시간이 절약될 거요."

그는 카라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평생 동안 서커스단의 말들을 치장하며 살아온 사람처럼 익숙한 손길로 프라이드에게 가죽끈과 장식고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카라는 그와 함께 일하면서 야릇한 기분을 느꼈다. 이따금 두 사람의 손이 스쳤고, 그때마다 짜릿한 전율이 그녀의 몸을 흥분시켰다. 그러나 카라는 이를 악물고 일을 계속했다. 앞으로 몇 달 동안 이런 일이 반복된다 해도 내가 무사히 견뎌낼 수만 있다면어떻게든 꿋꿋이 이겨내야 돼.

암말의 준비가 끝나자 카라는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하러 밴 트럭으로 달려갔다. 그녀가 프라이드 곁으로 돌아오자마자 단원들을 불러모으는 미첨의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타일러가 프라이드 옆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가 말에 올라타는 걸 도와 주려고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카라는 못 본 척했다. 그의 몸에 닿는 게 두려웠다.

조는 타일러가 또 공연을 보러 온 걸 어떻게 생각할까?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기를 바랄 수는 없어. 이 안에서는 어떤 비밀도 오래가지 못하는걸. 타일러가 다시 공연을 보러 온 이유를 내가 직접 조에게 설명해 주는 게 낫겠어. 그러면 조가 멋대로 짐작하여 나를 몰아세우지 못할 테니까.

카라는 어깨너머로 타일러에게 말했다.

"지금 가지 않으면 링사이드 좌석에 앉지 못할 거예요."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프라이드와 함께 공연장 입구로 다가갔다.

"브로드워터는 또 뭣 하러 온 거지?"

조가 캐물었다. 그러나 카라가 이유를 설명해 주자 금세 얼굴을 펴며 무관심한 듯 말했다.

"우린 신경쓸 것 없어. 그 사람은 마술사나 어릿광대 같은 걸 골라낼 거야."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미첨이 첫 번째 순서를 소개했다. 카라는 조에게서 벗어나 빽빽이 들어찬 관객들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카라는 며칠 전날 밤에 느꼈던 흥분과 전율이 다시 돌아온 걸 알았다. 그것은 한 줄기 햇살과도 같았다. 그녀와 프라이드의 몸에 달린 반짝이 장식들이 더욱 밝고 찬란하게 빛났다. 그녀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휩싸여 프라이드의 등 위에서 예정에도 없는 뒤로 재주넘기를 해냈다. 갑자기 그녀는 자기 몸속에서 전류처럼 퍼져나가는 흥분을 느꼈다. 이제까지 그처럼 완벽한 연기를 보인 적은 없었다.

그것은 오로지 타일러가 링사이드에 앉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황갈색 머리카락은 자석처럼 그녀의 눈길을 끌어당겼다.

그는 나를 선택해 줄까?

카라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그 의문은 끝없이 그녀의 마음속을 맴돌며 사라질 줄을 몰랐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타일러가 어떤 걸 선택하든, 잠자코 그의 결정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카라는 애가 탔다.

이윽고 공연이 끝났다. 출연자들이 모두 나가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관객석으로부터 카라를 위한 꽃다발이 던져졌다. 그 순간 장미꽃 한 송이가 미첨의 발치에 날아가 떨어졌다.

꽃다발에서 한 송이가 빠져나간 모양이야. 이따가 철사를 단단히 죄어 줘야겠군. 카라는 미첨에게서 꽃다발과 장미꽃 한 송이를 받아들었다.

"이건 진짜 장미로군요."

카라는 깜짝 놀라 외쳤다. 머리가 어지러울 만큼 강한 향기가 풍겨 왔다. 카라는 멍하니 장미꽃을 내려다보았다. 봉오리가 막 벌어지기 시작한 핑크 빛 장미꽃이었다. 이건 꽃다발에서 빠져나간 게 아니야! 그리고 꽃장수가 파는 장미도 아니다. 카라는 자기도 모르게 링사이드를 바라보았다. 타일러는 무표정하게 앉아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으로는 과연 그가 장미꽃을 던진 장본인인지 아닌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다른 출연자들이 호기심에 가득 찬 시선을 그녀에게 던지고 있었다. 그러나 카라는 조의 찌푸린 얼굴에도, 삼촌의 의아해하는 얼굴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주위에 감도는 장미꽃 향기가 그녀를 포근히 감싸주었다. 벨벳처럼 부드러운 핑크 빛 꽃잎. 오뉴월의 대기처럼 따뜻한 향기. 거기에 비하면 베스 숙모가 그토록 정성들여 만들어 준 종이 장미는 역시 생명이 없는 가짜일 뿐이었다.

"당신의 숨은 숭배자는 누구지, 카라?"

"그런 일을 감쪽같이 숨기고 있다니, 다시 봐야겠는데?"

단원들의 짓궂은 놀림을 받으며 카라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쪽지도 있어?"

린다가 물었다.

"그런 건 없어요."

이 꽃이 타일러가 보낸 거라면, 그리고 여기에 쪽지가 매여져 있었다면, 아마 그것은 내 종이 장미를 조롱하는 내용이었겠지. 타일러는 이제 문어발처럼 우리 서커스단을 휘어잡았어. 이 땅의 주인일 뿐 아니라 개인적인 공연계약을 맺은 고객이고, 또 진짜든 가짜든 팔라벨라스에 관심을 보여 삼촌의 환심을 사두었으니 이젠 아주 자기 집처럼 여길 드나들겠지.

카라는 얼굴을 찡그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장미꽃을 내동댕이치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그 꽃을 준 사람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행동으로 분명히 보여 주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링사이드의 좌석은 이미 비어 있었다. 이젠 꽃을 내동댕이쳐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카라."

조가 다가오고 있었다.

"난 지금 바빠요."

그의 찌푸린 얼굴만 보아도 그가 어떤 질문을 할지 짐작할 수 있다. 카라는 프라이드를 타고 서둘러 텐트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졌다.

조는 다른 남자들과 함께 장비들을 치워야 하니까 잠시 동안은 나를 뒤쫓아오지 못할 거야. 빨리 박람회장으로 도망치면 다음 공연 시간까지 조를 피할 수 있을지도 몰라.

카라는 서둘러 프라이드와 조랑말들을 돌봐 주고는 옷을 갈아입으러 밴 트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장미꽃을 꽃다발과 함께 침대 위에 내던지고 샤워를 한 다음 바지와 검은 스웨터를 입었다. 그리고 머리를 풀어 어깨에 늘어뜨렸다. 이젠 타일러가 그 빌어먹을 파티에 나를 선택하든 말든 상관없어. 아니, 날 선택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그 사람과는 아무 관계도 맺고 싶지 않으니까.

그녀는 쓰레기통에 처넣으려고 장미꽃을 집어들었다. 장미꽃 줄기는 단단하고 촉촉했다. 방금 자른 끝부분이 그녀의 손바닥을 찔렀다. 줄기와는 달리 꽃잎은 애처로울 만큼 연약했다. 카라는 벨벳처럼 보드라운 꽃잎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장미꽃이 무슨 죄람. 죄없는 장미꽃에게 화풀이를 하는 건 옳지 못해. 빨리 꽃병에 꽂아 놓지 않으면 금방 시들어 버릴 거야.

카라는 꽃을 꽂아 둘 만한 그릇을 찾아보았지만, 양치질할 때 쓰는 플라스틱 컵 외에는 마땅한 것이 없었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받아본 생화가 타일러의 장미꽃이라니, 정말 얄궂은 일이로군. 하지만 차라리 잘됐는지도 모른다. 꽃이 내 밴 트럭에 장식되어 있는 동안은 그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을 테니까

"그럼 월레스네 밴 트럭까지 함께 가자꾸나."

베스 숙모가 밴 트럭에서 나오며 말했다.

"월레스 부인에게 들르겠다고 약속했거든. 너도 같이 가지 않겠니?"

"오늘은 안 돼요. 월레스 부인이 얼마나 수다쟁이인지 아시잖아요. 전 공연하기 전에 신선한 공기를 좀 마시고 싶어요."

"그렇다면, 타일러와 함께 가렴."

삼촌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라는 깜짝 놀라 뒤를 홱 돌아다보았다. 미첨과 타일러가 부드러운 잔디밭을 지나 다가오고 있었다. 미첨이 그녀의 말을 들어 버린 이상 이제 와서 그 말을 취소할 수는 없다. 카라가 놀라고 당황한 이유는 그뿐이 아니었다. 미첨이 브로드워터 경을 타일러라고 부른 것이 카라를 더욱 놀라게 했다.

"방금 타일러에게 말하고 있던 참이란다. 어린이들 파티에 어떤 순서를 넣을지 결정하기 전에 박람회장에서 하는 오락들을 한번 보는 게 좋을 거라고 말이야. 아이들은 마음껏 뛰어 놀기를 좋아하거든. 그러니까 그냥 앉아서 구경하는 것 말고, 코코넛 맞히기 같은 순서를 넣으면 아이들이 더 좋아할 게다."

"파티 전체를 박람회처럼 꾸며보는 것도 색다르고 재미있을 것 같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타일러?"

베스 숙모가 끼어들었다.

카라는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었다. 나만 끌어들이지 않는다면, 파티에서 뮤지컬 코미디를 하든 박람회를 하든 내가 알게 뭐야. 카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장미꽃 돌리기보다는 색다를 것 같소."

타일러는 카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장미꽃을 던진 사람이 타일러인 건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카라는 꼴도 보기 싫다는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핑크 빛 장미꽃이 도전장처럼 그들 사이에 가로놓여 있었다. 카라는 그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자기 멋대로 이곳을 드나들라지. 마음만 먹으면 하루종일 와서 살 수도 있겠지만, 그래 봤자 내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 줘야지. 그리고 박람회장엘 함께 가더라도 사람들이 많으니까 어쩌지는 못할 거야.

"박람회장에 가서 카라와 함께 오락을 보면 여러 모로 도움일 될 겁니다."

미첨은 자기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조용한 전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말했다.

"카라는 당신이 파티를 열 방에 가서 조사해 봐야 하니까, 당신이 마음먹고 있는 프로그램을 열 수 있을지 어떨지 함께 검토해 볼 수도 있을 겁니다."

"당신이 일단 결정만 내리면, 그럴 듯한 프로그램을 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예요."

카라는 딱 잘라 말했다.

타일러는 파티 프로그램에 나를 포함시킬 작정일까? 하지만 그걸 그에게 물어볼 수는 없어. 그건 내 자존심이 용납치 않아. 실컷 내 속을 태우며 즐기다가 막판에 가서야 말해 줄 테지. 그렇다면 나도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말아야 돼, 파티 준비를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니, 대화가 그 범주를 넘어서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일을 끝마쳐 버려야지.

"우선 베스 숙모님을 월레스 부인네 밴 트럭까지 바래다 드리고 박람회장에 구경가기로 해요."

그녀는 일부러 쾌활하게 말했다.

"삼촌이 말한 코코넛 맞히기도 어린이들 파티에는 괜찮아요."

"코코넛 대신 화려한 색깔의 공들을 써도 괜찮겠군. 코코넛은 어린 꼬마들이 맞히기에는 너무 작지만, 테니스 공으로 축구공 크기만 한 물건을 맞히는 건 어렵지 않을 거요."

카라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독신 남자가 아이들을 그렇게 깊이 이해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가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는 건 분명하다.

"코코넛 맞히기 같은 경쟁 종목을 프로그램에 넣으려면 모든 아이들이 다 할 수 있도록 해야 하오. 그래서 가장 나이 어린 꼬마까지도 산타클로스의 선물은 물론 푸짐한 상품을 타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야 해요. 꼬마들이 게임에 져서 실망의 눈물을 흘리는 건 보고 싶지 않소. 난 아이들이 크리스마스 파티를 마음껏 즐기도록 해줄 작정이오."

"생각이 깊으시군요."

카라는 냉랭하게 말했다.

"내가 어릴 때 파티에 간 기억이 나는군. 집으로 돌아오려 할때 내 풍선이 그만 터져 버렸소. 나는 새 풍선을 달라고 떼를 썼지만 풍선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어. 어른들은 풍선 대신 크래커를 주면서 달랬지만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풍선이 갖고 싶었어. 그래서 집에 오는 동안 내내 큰소리로 울었지."

"지독한 욕심꾸러기에 고집쟁이였던 모양이군요."

황갈색 머리카락의 꼬마가 울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자 카라의 마음속에 묘한 감정이 싹텄다. 그녀는 그 감정을 무시하려고 애쓰면서 아무 말이나 꺼냈다.

"그 뒤에는 그때의 실망을 보상해 줄 만한 파티들이 많이 있었겠죠?"

"그 특별한 파티 이후에는 별로 파티에 가본 적이 없소. 군인의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 기숙학교로 보내지니까."

"서커스단의 아이들도 그래요."

카라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타일러가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또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군, 나의 카라."

그는 옆에 있는 베스도 듣지 못할 만큼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카라는 그를 노려보았다.

타일러는 싱긋 웃고는 소리를 높여 말했다.

"어린이들 파티에 쓸 공들은"

"브로드워터 백화점에서 크고 화려한 공을 많이 봤어요."

카라는 타일러의 빈정대는 눈초리를 무시하고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린 2주일 뒤에 거기서 공연할 예정이니까, 어쩌면 할인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는 아직도 그녀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베스 숙모가 옆에 있어서 '나의 카라'라고 불러도 화를 내지 못하는 걸 비웃고 있는 거야. 카라는 그의 시선을 무시하고 말을 계속했다.

"큰 공 여섯 개에 테니스 공 한 다스면 충분할 거예요."

"풍선도 많이 필요하오. 한 애가 몇 개씩 터뜨려도 남을 만큼."

"풍선이라면 여기서도 살 수 있어요. 바람도 다 넣어줄 거예요."

"또 솜사탕 기계도 필요하오."

"그건 서커스단에 있어요."

타일러는 베스를 정중하게 부축하여 월레스네 밴 트럭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베스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카라의 손목을 붙잡고 가까이에 있는 솜사탕 판매점으로 데려갔다.

"솜사탕이나 하나 먹읍시다. 그러면 당신도 그럴 마음이 내킬지도 모르지."

"그럴 마음이라뇨?"

카라가 타일러를 쏘아보며 재빨리 물었다.

"내가 그 질문에 대답하길 원하오?"

그는 싱긋 웃었다.

"아뇨!"

카라가 황급히 외치자 그는 큰소리로 껄껄 웃어댔다.

솜사탕은 핑크 빛이었고 솜털처럼 폭신폭신하고 가벼웠다. 그는 솜사탕을 조금 떼어 그녀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의 손가락이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눌렀다.

카라는 얼굴을 붉혔다. 이 혼잡한 박람회장 한가운데서도 그의 손길이 닿으면 이렇게 가슴이 떨리고 몸이 오그라드는데 앞으로 몇 달 동안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카라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 서둘러 말했다.

"코코넛 맞히기를 보러 가요."

타일러는 그녀의 뒤에 바싹 붙어서 따라왔다. 짜릿한 아픔이 다시 그녀의 온몸에 퍼져갔다.

"코코넛을 먹어본 지도 오래 됐군. 내가 마지막으로 코코넛을 먹은 건 야자나무에 기어 올라가서 직접 따먹은 거요."

"공으로 하나 맞혀 보세요. 나무에 올라가는 것보다는 쉬울 거예요."

"당신도 던져요."

그는 네 개의 공 가운데 세 개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난 저 코코넛이 아니라 당신을 맞히고 싶어요."

그녀는 심술궂게 말하면서 공 하나를 던졌다. 그러나 겨냥은 터무니없이 빗나갔다.

"내 크리스마스 파티 땐 그보다 훨씬 더 잘해야 할 거요."

타일러가 놀려댔다. 카라는 그 말에 숨은 뜻을 당장 알아차렸다. 타일러는 내가 파티에 와주기를 바라는구나. 그건 어린 손님들을 위해서일까,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일까? 카라는 나머지 공 두 개를 던졌다. 그러나 손이 너무나 떨려서 처음보다도 훨씬 더 빗나가고 말았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코코넛을 얻어야 할 것 같군."

"그렇게 쉽지 않을걸요?"

그러나 코코넛은 정확하게 가운데를 맞고 떨어졌다.

"못 맞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점잖게 말했다.

"크리켓팀 주장이 저런 쉬운 목표물 하나 맞히지 못할 리가 있겠소?"

그는 가게 주인에게서 코코넛을 받아들고 껍질을 깨뜨렸다.

", 한 조각 먹어요. 또 싫다고는 하지 말고. 다음 공연시간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으니까."

그녀는 그가 내민 코코넛 조각을 받아들었다. 그와 말다툼을 시작해 봤자 질 게 뻔했다.

그들은 슬롯머신에서 돈을 잃었고 공굴리기에서도 별로 운이 좋지 못했다.

"목마나 타지."

타일러가 카라를 잡아끌었다.

"파티장에 회전목마를 들여 놓을 생각은 아니겠죠?"

카라가 그를 쳐다보며 항의했다.

"날씨가 계속 이렇게 따뜻하다면, 공원은 넓으니까 회전목마도 얼마든지 들여 놓을 수 있소."

타일러가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 갑시다."

"당신 혼자 가세요."

카라는 뒤로 물러섰다.

"나는 회전목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럴 리가 있나!"

타일러는 정말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공중그네를 타고, 외줄 위에서 균형을 잡고, 프라이드의 등 위에서 뒤로 재주를 넘는데 회전목마를 타면 어지럼증을 느낀단 말이오?"

타일러는 내가 프라이드의 등 위에서 뒤로 재주를 넘는 걸 봤구나. 하지만 그 이유까지는 모르겠지카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이유는 아무와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그녀만의 비밀이었다.

"프라이드는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을 때도 수평을 유지하지만, 회전목마는 빙빙 도는 데다가 아래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잖아요. 그걸 타면 속이 메스꺼워요."

"내가 당신을 꼭 잡아 주겠소."

그는 다짜고짜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회전목마 위에 번쩍 들어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함께 올라타고는 회전목마가 돌기 시작하자 그녀를 바짝 끌어안았다. 목마가 아래위로 출링거리기 시작했다. 이젠 목마가 멈출 때까지 도망칠 도리가 없다.

카라는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강바닥에 흐르는 모래 위를 걷는 건 아주 안전하게 느껴지지만, 모래가 가라앉기 시작하면 이미 때는 늦어 강둑 위로 기어오르지 못하고 모래 속에 파묻히고 만다고카라는 지금 그 모래를 밟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모래는 당장에라도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이상한 감각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숨을 쉴 수가 없다. 그녀는 몸이 아래로 한없이 끌려 내려가는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타일러가 그녀의 귀전에 속삭였다.

"나를 꽉 붙잡아요. 걱정하지 말고."

그러고는 입술로 그녀의 귓불을 더듬었다.

카라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타일러와 함께 있는 한 이 세상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다.

"이제 끝났는데, 한 번 더 타고 싶소?"

회전목마가 멈추었는데도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카라는 깜짝 놀라 타일러의 무릎 위에서 몸을 바로 세웠다. 타일러가 빙긋이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카라는 얼굴을 붉히고 눈을 감았다.

"아뇨, 이젠 그만 타겠어요."

회전목마를 타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재미있다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라는 타일러의 품에서 빠져나와 급히 내려섰다. 그러나 너무 서두른 나머지 발을 헛디며 비틀거렸다. 그가 재빨리 붙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보기 좋게 넘어졌을 것이다. 그는 그녀를 잔디밭에 안전하게 내려 주고는 쾌활하게 말했다.

"저기 회전차가 있군. 저걸 탑시다. 목마보다는 덜 흔들리니까." 카라는 다리가 후들거려 더 이상 서 있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고마운 마음으로 회전차에 올라탔다. 곧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거 아주 재미있는데."

타일러가 웃었다.

"이걸 타본 게 까마득하군."

그는 학교에서 해방된 소년처럼 즐거워했다.

회전차들은 서로 부딪치고 덜컥 멈춰서고 빙글빙글 돌았다. 카라는 타일러를 힘껏 껴안고 매달렸다.

타일러는 그녀가 더 바싹 달라붙게 하려고 일부러 어지러울 만큼 차를 빙빙 회전시키며, 회전차와는 전혀 무관한 쾌감을 즐기고 있었다.

"당신, 일부러 그랬죠?"

다시 단단한 땅 위로 돌아오자 카라는 숨을 헐떡이며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당신을 붙잡고 늘어지도록 일부러 어지럽게 했어요."

그녀는 화가 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그는 태연하게 싱긋 웃었다.

"당신도 그걸 즐겼잖소?"

그걸 부인하려고 해봤자 소용없어. 믿어 주지도 않을 테니까. 하지만 타일러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내 속마음이 그렇게 빤히 들여다보이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자 얼굴이 굳어지며 갑자기 몸이 오싹해졌다.

", 박람회를 마음껏 즐기십시오."

누군가가 쉰 목소리로 외쳤다.

그 익숙한 외침소리가 카라에게는 가차 없는 경고처럼 들렸다.

그래, 타일러에게는 이게 모두 장난일 뿐이야. 지루한 겨울을 마침 가까이에 있는 서커스단 아가씨와 덧없는 연애놀이를 즐기며 보내려는 것뿐이야. 그런데 나는? 타일러에 대한 내 감정은? 그와 만나는 걸 피할 도리는 없어, 하지만 그가 나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다면, 난 폭발물을 갖고 노는 어린애와 마찬가지다. 또한 정상적인 여자라면 누구라도 그의 육체적 매력에 대해 나와 똑같은 반응을 일으킬 거야. 타일러에 대한 내 감정은 그런 자연스러운 반응에 불과해

하지만 과연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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