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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쓰기 이야기

받아쓰기 이야기

오수경

 

“9, 슴바기.”

햇살초등학교 한 교실에서 컬컬한 목소리가 울려 나왔습니다.

이 소리는 1학년 3반 담임인 안청수 선생님이 받아쓰기 문제를 내는 소리랍니다.

예민한 귀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 소리 뒤에 콩콩, 하는 소리도 같이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새 학기부터 매주 목요일 아침마다 들리는 그 소리는 창가의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의연이의 작은 심장이 뛰는 소리입니다.

의연이는 연필을 쥔 손에 힘을 주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천정을 쳐다보았습니다.

`으로 써야 할지 으로 써야 할지 망설여졌습니다.

한참 만에 의연이는 9번 답안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쓴바.”

다음. 마지막 10번 문제다. 궁궐로 데려갔습니다.”

의연이는 허둥지둥 9번 답안의 마지막 글자를 썼습니다.

.”

그런데, 10번 문제가 뭐였는지 까마득히 잊어버렸답니다. 의연이는 짝꿍인 다희를 쳐다보았습니다. 다희는 얌체같이 두 손으로 공책을 가렸습니다.

짝이랑 공책 바꿔라.”

선생님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희가 의연이의 공책을 홱 빼앗아갔습니다.

, 내 공책 왜 가져가는데?”

선생님이 바꾸라고 했잖아?”

의연이는 다희의 밉살스런 말투 때문에 약이 올랐습니다.

이 뚱뚱보야

결국 다희는 무서운 도깨비로 변했고 둘의 싸움은 안청수 선생님의 호통소리로 끝이 났습니다.

김의연, 강다희너희 둘은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운동장 청소야.”

다희가 앞서서 통통통 걸어갔습니다.

의연이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툴툴툴 걸었습니다. 주머니에서 삶은 밤이 만져졌습니다.

아침에 어머니가 넣어준 밤입니다. 의연이는 다희에게 밤을 주고 사과할까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텅 빈 운동장에는 쓰레기들이 여기저기 뒹굴었습니다.

스탠드 구석마다 쫀드기 봉지, 아폴로 껍질, 짱구 과자 봉지, 그리고 누군가 버린 우유도 있었습니다.

다희는 번쩍번쩍 빛나는 깜장 에나멜 구두로 우윳곽을 꽉 밟았습니다.

우유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습니다.

예끼, 요 녀석들무슨 짓이냐?”

낯선 할아버지가 의연이와 다희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낡은 외투에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다희는 무서워서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답니다.

학교 뒷산으로 아이들을 잡아간다는 거지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그때 의연이가 찌그러진 우윳곽을 집어들며 말했습니다.

이 우유 저희가 버린 거 아닙니다.”

뭐야? 그럼, 그냥 두지 밟기는 왜 밟아?”

다희는 할아버지 앞에 당당하게 나서는 의연이의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평소에 의연이가 약해 보여서 무시하고 있었거든요.

의연이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자세히 봤습니다.

눈동자는 유난히 빛이 나고 하얀 속눈썹은 낙타처럼 길어서 슬퍼 보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정말 배가 고픈 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의연이는 밤을 꺼내 할아버지에게 내밀었습니다.

할아버지, 이거 잡수세요.”

의연이가 내미는 밤톨을 받으며 할아버지는 껄껄 웃기 시작했습니다.

넌 내가 무섭지 않니?”

무섭지 않아요.”

의연이는 받아쓰기 빼고는 무서울 게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가방에서 색색의 고무 찰흙이 들어 있는 통을 꺼냈습니다.

연두색 흙을 고르더니 금세 애벌레 한 마리를 만들어냈습니다.

요 녀석이 자라면 나비가 되지.”

애벌레는 당연히 나비가 되죠.”

의연이가 아는 척했습니다.

아냐.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지.”

할아버지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습니다. 의연이와 다희는 침을 꼴깍 삼켰습니다.

요 녀석이 날개를 달려면 햇빛을 먹고, 먹고, 또 먹어야 해. 나비가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다희가 조바심이 생겨 할아버지에게 한 걸음 다가갔습니다.

애벌레가 나뭇잎을 먹지, 어떻게 햇빛을 먹어요?”

그럼, 나무는 나뭇잎을 무엇으로 만들겠니?”

할아버지와 다희의 이야기를 듣던 의연이가 얼른 대답했습니다.

, , 그리고 햇빛이요.”

바로 그거야. 애벌레들이 먹는 나뭇잎이 바로 햇빛이고, 그 햇빛이 나비의 날개를 돋아나게 하는 거란다.”

할아버지는 입술을 떨더니, 밤 한 톨을 꺼내 딱 갈라 먹었습니다.

나무들은 신기한 열매를 많이 만들지. 나무도 한 가지씩 소원을 가지고 열매를 맺는 거란다. 그중에는 밥 잘 먹게 하는 열매, 머리를 좋아지게 하는 열매, …….”

받아쓰기를 잘하게 하는 열매는 없어요?”

의연이는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눈을 번쩍이며 말했습니다.

있지. 그런 나무도 있어.”

그리고 할아버지는 그냥 가려는 듯 돌아섰습니다.

의연이는 재빨리 할아버지의 등에 대고 말했습니다.

우리 선생님은 맨날 싸움을 사움이라고 읽어주거든요. 불러주는 대로 받아썼다간 다 틀려요.”

할아버지는 천천히 얼굴을 돌렸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입가의 주름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잘 듣거라.”

할아버지는 의연이와 다희의 얼굴을 서로 마주보게 하더니 속삭이기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 목소리는 작았는데도 가슴을 울리면서 크게 들려왔습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학교 뒷산에 사는 나무 이야기였습니다.

그 나무는, 보기에는 삐죽삐죽한 바늘 같은데 만지면 납작하게 되는 잎을 가졌고, 초록 잎 사이로 빨간 열매가 열리는 나무라고 했습니다.

여자나무 한 그루랑 남자나무 한 그루가 사이좋게 서 있지.”

할아버지는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그 열매를 먹으면 글자를 한 번만 보면 다 알게 돼.

선생님이 잘못 읽어줘도 받아쓰기를 하기만 하면 100점이지.”

할아버지는 허리를 굽혀 의연이의 동그란 이마에 쭈글쭈글한 이마를 갖다댔습니다.

다희는 할아버지가 자기한테도 이마를 댈까봐 한 걸음 뒤로 물러섰습니다.

할아버지는 다희의 손을 잡아주고는 돌아섰습니다.

의연이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등 굽은 낙타가 사막을 걸어가는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그때부터 의연이는 수업 마치기만을 기다렸답니다.

드디어 4교시를 마치는 종소리가 울렸습니다. 다희가 가방을 메다 말고 의연이에게 속삭였습니다.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정말 받아쓰기 100점 받을까?”

의연이가 시큰둥하게 대답했습니다.

넌 그런 열매 안 먹어도 100점이잖아?”

의연아, 나도 같이 가고 싶어, 같이 가자, ?”

의연이는 다희가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자 마음이 변했습니다.

아무래도 혼자보다는 둘이 가는 게 나을 것 같았습니다.

좋아. 대신 내 뒤를 잘 따라와야 해.”

알았어.”

의연이와 다희는 바람처럼 쌩쌩 달려 학교 뒷산으로 갔습니다.

의연아, 뱀 나오면 어쩌지?”

우리 작대기 하나씩 들고 가자. 뱀이 나오면 이걸로 누르면 돼.”

정말?”

뱀은 이빨로 무니까 머리를 꽉 눌러서 요렇게 빙빙 돌리다가 던지면 죽는대. 우리 사촌 형아가 그랬어.”

의연이는 힘이 세어 보이는 번개 모양의 작대기를 찾았습니다.

다희에게는 하얗고 반듯한 작대기를 찾아주었습니다.

의연이와 다희는 마음이 든든해졌습니다. 의연이는 풀숲을 막대기로 툭툭 치며 걸어갔습니다.

뱀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어디선가 토끼나 다람쥐, 어쩌면 곰이 나와서 넙죽 인사할 것만 같았습니다.

즐거운 상상을 하며 걸어가다 보니 조금씩 나무들이 울창해지고, 길은 갈수록 좁아졌습니다.

나뭇가지들이 공중에서 서로 엉켜 있어 마치 숲 속의 터널 같았습니다.

의연이가 작대기로 잔가지들을 쳐내며 들어갔습니다.

다희는 의연이의 뒤를 바짝 따라갔습니다. 터널이 점점 조여드는 것 같았습니다.

발에 돌멩이가 밟혔지만 땅에 이끼들이 있어서 물렁물렁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때 다희가 비명을 질렀습니다.

커다란 갈색 사마귀 한 마리가 세모난 머리를 빙글빙글 돌리며 발 밑에서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의연이는 작대기로 사마귀가 서 있는 땅을 탁 쳤습니다.

사마귀는 낫처럼 생긴 앞발을 높이 쳐들었습니다.

금방이라도 의연이한테 달려들 태세였습니다. 의연이는 작대기를 사마귀 앞에 가만히 들이댔습니다.

사마귀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앞발로 작대기를 감았습니다.

의연이는 작대기 살살 들어서 사마귀를 뒤로 날려버렸습니다.

의연이와 다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숲 속의 터널이 끝나자 확 트인 자리가 나타났습니다.

키가 큰 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말한 여자나무와 남자나무 같았습니다.

삼각 털모자를 쓰고 있는 듯한 두 나무 앞에는 팻말이 있었습니다.

소원을 세 번 말한 다음 열매를 먹으시오. 씨는 먹지 마시오독 있음.”

팻말에는 서툴고 비뚤비뚤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나무 껍질은 붉었고 잎은 짙푸른 색이었습니다.

바늘같이 뾰족한 잎을 손으로 만지자 갑자기 물컹하며 납작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빨강 열매의 꼭지에는 검은 씨앗이 드러나 보였습니다.

의연이는 콧노래를 부르며 열매를 땄습니다.

의연이가 열매를 가득 모았을 때 다희의 손에도 열매가 한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넌 받아쓰기 잘 하니까 많이 먹을 필요가 없잖아.”

의연이의 말에 다희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틀릴 때도 있어.”

그래도 90, 아니면 80점 받잖아?”

한 개 틀리면 엄마한테 손바닥 맞아. 두 개 틀리면 쫓겨나기도 하는 걸.”

?”

우리 엄마는 무조건 100점 받아야 한대. 1학년이 글자 모르면 바보래.”

좋아. 그럼 같이 먹자. 하나, , 셋 하면 먹는 거야.”

잠깐 소원을 세 번 말해야지.”

의연이와 다희는 서로 마주보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받아쓰기 100점 받게 해주세요. 받아쓰기 100점 받게 해주세요. 받아쓰기 100점 받게 해주세요.”

둘이는 까르르 웃으며 나무 열매를 한 개씩 입안에 넣었습니다.

나무 열매는 마냥 달콤했습니다.

의연이는 조금씩 아껴가며 먹었습니다.

다희는 열매를 입 속에 모두 털어 넣었습니다.

한 번 보면 글자가 다 생각난다고 했지?

집에 가서 책도 읽고 틀렸던 받아쓰기 문제도 다시 봐야지.’ 의연이는 그 생각만 했습니다.

열매를 먹으면서도, 산길을 내려오면서도.

다음 주 목요일, 받아쓰기 시간이 되었습니다.

안청수 선생님이 컬컬한 목소리로 마지막 문제를 불렀습니다.

“10 사움을 말리느라고.”

아무리 귀가 예민한 사람도 이제는 콩콩 뛰는 의연이의 심장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야무지게 시험을 치는 다희도 공책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의연이는 받아쓰기 공책에 자신 있게 썼습니다.

“10. 싸움을 말리느라고.”

마지막 문제를 다 쓴 의연이는 기분 좋게 창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거지 할아버지가 운동장 한쪽 구석에서 우윳곽을 줍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