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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여자

향기로운 여자

Jacqueline Baird

 

1

사프론은 노천카페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맞은편의 나이 지긋한 숙녀에게 미소 지었다.

"계산을 하면서 주인에게 택시를 불러 달라고 했어. 7시까지 배로 돌아가야 하는데, 벌써 630분이네."

"수선 떨지 말고 남은 포도주나 다 마셔"

"당신의 바람이 저에겐 곧 명령이죠" 그녀는 빈정댔다. "그게 벌써 세 잔째라는 걸 명심하세요. 나중에 관절염이 도져도 절 탓하면 안 돼요"

샤프론은 넓은 입가에 쓴 미소를 지으며 스파클링 와인(거품이 이는 포도주)을 홀짝거렸다. 하지만 로도스섬의 고풍스런 카페에서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어 하는 안나의 심정은 이해가 간다. 안나가 몇 시간 동안 헤맨 끝에 찾아낸 카페니까!

"이곳은 왜 그렇게 중요한 거죠?" 사프론은 특별히 대답을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이미 여러 차례 던진 질문을 또 했다. 안나가 이 카페를 찾는 이유에 대해 입을 꼭 다물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프론은 불평하지 않았다.

사프론은 런던의 한 에이전시에 소속된 미용 및 방향 마사지사로, 고객의 저택이나 홍보차 시내 병원으로 출장 치료를 다녔다. 한 달 전 그녀는 안나 스태어티스의 의사로부터 치료 의뢰를 받았다. 안나는 낙상하여 어깨뼈를 심하게 다쳤을 뿐 아니라 무릎 관절염이 도져 활동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0일 후 사프론은 안나의 전속 마사지사로 6개월 간 일하기로 계약을 맺었고, 지난주엔 <팔라스 코린티안>호를 타고 그리스 섬 유람을 시작했다. 이보다 더 완벽한 인생이 있을까. 사프론은 만족스럽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포도주잔을 기울였다.

오늘은 로도스섬에서 십자군의 거리와 세인트 존 십자군의 숙박지를 둘러보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작은 카페를 찾아냈을 때, 안나의 기쁨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곳에서 내 아들을 임신했어"

"?" 사프론은 고개를 번쩍 들며 포도주를 꿀꺽 삼켰다. 웃음이 터져 나와 하마터면 포도주가 목에 걸릴 뻔했다. "농담하시는군요. 이 노천카페에서 말예요?"

그녀의 반짝이는 초록색 눈이 몽롱한 푸른 눈과 마주쳤다.

"사실이야. 난 예전에 무용수로 유람선에서 일했어. 내 시대에 잘 자란 영국 아가씨에겐 대담한 짓이었지. 배는 정기적으로 로도스를 오고 갔고, 난 핸섬한 그리스인 니코스 스태어티스를 만나 사랑에 빠졌어. 그리고 이 카페 윗방에서 내 아들 알렉산드로스를 임신했어. 이번 주로 꼭 40년 전에"

사프론은 믿어야 될지 어떨지 갈피를 못 잡으며 안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60대 중반으로, 느슨한 시뇽(뒷머리에 땋아 붙인 쪽) 스타일로 가다듬은 하얗게 센 금발 머리칼이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의 섬세한 윤곽을 돋보이게 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추억을 상기하는 슬픈 듯한 미소가 아련하게 맴돌았다.

"그래서 다시 이곳을 찾았군요. 정말 낭만적이에요"

사프론은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심 의아스러웠다. 안나의 개인 마사지사로 고용된 지 일주일도 채 안 되었을 때, 이 늙은 숙녀는 자신의 조속한 회복에는 유람 여행이 필요하다고 담당 의사를 설득했다. 안나의 연약해 보이지만,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었다.

"낭만적이라! 나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어" 안나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실수였어, 그것도 엄청난 실수"

호기심을 느낀 사프론은 뒷말을 재촉했다. "실수....?"

"다음에 내 인생 역정을 말해 줄게. 난 누군가에게 말할 필요를 느껴. 그리고 우리가 서로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난 누구보다도 당신이 더 가깝게 느껴져. 그건 나처럼 당신도 인생 대부분을 홀로 외롭게 살아왔기 때문일 거야"

"하지만 당신에겐 아들이 있잖아요" 안나는 항상 그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야박할 정도로 무시했다. 사프론의 기억에 의하면, 그는 전화도 거의 걸지 않았다.

"그렇지"

그들이 가까운 모자 사이가 아니란 것은 분명하다.

이기적인 남자의 전형이야. 사프론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택시가 도착하자, 그녀는 이야기를 다음으로 미뤄야겠다고 생각했다.

안나는 잔을 쭉 들이켠 후 명랑한 분위기로 바꾸며 미소 지었다. "오늘 이곳을 다시 보니, 몇몇 유령이 되살아났어. 하지만 우린 전진하는 편이 좋겠지, ?"

"그럼요" 사프론이 동의하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미소와 함께 덧붙였다. "당신의 카페를 찾아서 기뻐요. 당신은 훨씬 만족스럽게 보여요"

"만족! 그래, 내가 정말 그렇다는 걸 알아주는군. 고마워, 사피"

사프론은 어깨에 가방을 걸쳐 멘 후 안나의 연약한 팔꿈치를 부축하며 일으켰다. 웬 여자가 건물 꼭대기 층에서 계속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의식했다. 사프론이 안나를 차에 타도록 부축할 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지옥으로 꺼져!" 동시에 그녀의 가방이 뒤로 당겨지며 단단한 손가락이 그녀의 맨살을 붙잡았다.

사프론은 안나에게서 손을 떼며 소리쳤다. "도둑이야!"

수년 동안 고아원에서 보내며 자신을 스스로 돌본데다 방아술까지 배운 사프론은 자신을 잡은 손이 느슨해진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공격자의 목을 찌르는 동시에 무릎을 올려 남자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그리고 몸을 돌린 후 안나를 자동차 뒷좌석에 앉히려 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안나. 내가 전부 처리했어요"

사프론은 그녀를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안나는 이 불유쾌한 사건에 충격을 받기는커녕, 미소를 짓더니 그다음엔 낄낄거리고 나중엔 웃음보까지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이건 전혀 웃을 만한 상황이 아니에요. 우린 강도를 당할 뻔했다구요"

", 사피. 내가 당신의 능력에 대해 일말의 의혹이 있었다 해도, 지금은 완전히 없어졌을 거야! 내 평생 이렇게 재미있는 일은 처음이야"

사프론은 자신이 얼마나 근사해 보이는지 짐작도 못했다. 그녀의 사랑스런 얼굴 주변엔 붉은 머리칼이 구불거리며 늘어졌고, 167센티미터에 이르는 몸매에는 딱 맞는 흰 반바지와 청색의 끈 없는 상의를 걸치고 있었다. 불길이 이글거리는 초록 눈의 그녀는 발키리(북구 신화에 나오는 오딘 신의 시녀) 그 자체였다.

"뭐가 그렇게 우습죠?" 그녀가 다그쳤다. 그런 다음 자신이 해치운 남자를 흘끗 쳐다보았다. "이 남자는 우릴 공격하려 했단 말이에요" 그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신음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허리를 숙이고 매우 은밀한 부위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카페 주인을 포함해 사람들이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중 누군가가 말했다. "경찰에 연락할까요?"

경찰.... 사프론은 망설였다. 곧 유람선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경찰 때문에 배를 놓칠 수도 있다. 그녀는 안나를 쳐다보았다. 안나는 너무 웃은 나머지 눈가에 맺힌 눈물을 한 손으로 닦으며 다른 손을 공중에 흔들었다.

"경찰은 됐어"

"그렇다면 택시를 타고 떠나도록 해요" 사프론은 갑자기 군중들의 시선을 따갑게 의식했다. 그녀는 관심의 대상이 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방을 다시 한번 어깨에 단단히 둘러메고, 자신을 공격한 남자를 돌아보았다. 이제 그는 좀 전까지 그녀가 앉아 있던 의자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검은 머리칼이 넓은 이마로 흘러 내려왔고, 선명한 눈썹은 반짝이는 검은 두 눈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큼직하고도 약간 매부리코, 각진 턱, 단정하지만 고통으로 뒤틀린 큰 입술. 그녀는 그의 넓은 어깨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고급 옷감 사이로 검은 털이 살짝 엿보였고, 짧은 반바지는 역시 검은 털로 뒤덮인 가무잡잡한 근육질의 긴 다리를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그는 위험스러울 정도로 터프해 보였다. 갑자기 사프론의 두 다리에서 힘이 쫙 빠졌다. 자기가 어떻게 이런 남자를 물리쳤는지 의아스럽기까지 했다. 좀전에 그의 얼굴만 보았더라면, 그런 시도는 하지도 못했을 거야.

이상도 하지! 그의 얼굴은 어딘지 낯익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사프론은 마음에 걸리는 생각을 떨쳐 버리며 재빨리 말했다. "가요, 안나. 이런 사람 때문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 없어요. 경찰이 충분히 처리하겠죠"

그녀는 안나의 팔꿈치에 한 손을 대고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는 한시라도 이곳을 빨리 떠나고 싶었다.

금방이라도 문제를 일으킬 것 같은 이 남자 주변에 있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아냐, 아냐, 사피. 당신은 이해를 못 해" 안나가 여전히 낄낄거리며 말했다. "저 애는 내 아들 알렉산드로스, 즉 알렉스야"

"? 당신의 아들!" 그녀의 초록색 눈이 놀라 동그래졌다. "믿을 수 없어요, 그럴 리가..."

"하지만 사실인걸" 안나가 마침내 웃음을 진정시키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고마워요, 어머니. 내 불행을 그렇게 유쾌하게 받아들이시다니, 기쁘기 그지없군요" 깊고 음량이 풍부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사프론은 한 대 얻어맞은 심정이었다. 그러다 진짜 얻어맞은 사람은 바로 이 남자라는 생각이 떠오르자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그녀에게 맞다니! 지금이 웃기에는 적당한 때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기어이 웃음보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당신도 마찬가지요.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깊은 목소리가 거칠게 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이라면, 난 웃을 수 없을 거요. 이곳에서 경찰을 불러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요. 부당하게 공격한 당신에 대해서 말이오"

"맙소사, 알렉스. 그만하거라! 넌 꼭 잘난 체하는 바보처럼 말하는구나" 그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그리고 사프론의 팔을 쓰다듬으며 덧붙였다. "난 당신 행동이 옳았다고 생각해. , 택시를 타고 떠나지, 유람선을 놓치면 안 되니까 말야"

하지만 그들의 탈출은 결코 쉽지 않았다. 좀전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알렉스는 재빨리 의자에서 일어나 자신의 어머니와 사프론을 택시 뒷좌석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억지로 끼어 탄 그가 택시 기사에게 그리스어로 방향을 지시하자, 차가 출발했다.

", 어머니. 이젠 이 빨간 머리의 악마와 함께...."

그는 그들 사이에 낀 사프론에게 험악한 시선을 던진 다음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리스 섬 유람 여행을 하면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말해보시죠"

"휴가를 보냈다" 안나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사피는 새로운 내 말동무야. 그리고 미리 말해 두겠는데, 담당 의사인 젠킨스 씨도 허락했어"

사프론은 검은 눈동자가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음을 느꼈다. 그녀는 계속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감췄다. 스릴 넘쳤던 30분이 지난 다음에야, 자신이 한 짓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고용주의 아들을 구타하다니, 공든 탑이 무너지는군. 그녀는 시무룩하게 생각했다. 모든 생활비까지 포함된 이번 계약으로 자신의 미용 클리닉을 개업할 수 있을 정도로 저축이 확 늘어나리라 생각했는데, 이제 그 꿈이 바로 코앞에서 산산조각 났다. 택시 뒷좌석 사이에 끼여 앉아 있던 사프론은 활활 타오르는 분노로 온몸이 삽시간에 재가 될 것 같았다.

갑자기 알렉스가 안나에게 그리스어를 총알처럼 퍼부어댔다. 그는 자신의 말을 강조하는 것처럼 팔을 뻗어 어머니의 어깨를 만졌다. 그의 팔이 그녀의 목 뒤를 스치자, 사프론은 목의 솜털이 빳빳하게 일어설 듯한 충격으로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그의 강렬한 남성다움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는 그 사실이 유감스러웠다.

전에도 그와 같은 타입을 만난 적이 있다. 거칠고 무자비한 남자. 심지어 그의 어머니마저 가까운 모자간이 아니며, 자신은 외롭다는 말을 했지 않은가. 사프론과 자신의 어머니를 원치 않는 짐짝처럼 택시 안으로 밀어 넣었던 그의 독재적인 태도를 떠올리면 안나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오만한 돼지 같으니!"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 말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분노로 반짝이는 검은 두 눈동자가 그녀의 상기된 얼굴에 고정되었다.

"이 여자야, 내일도 살아 있고 싶다면, 입 다물고 있는 편이 좋을 거요. 당신 행동은 이미 정도를 지나쳤소. 어머니를 납치한데다 날 공격하고... 한 마디만 더하면, 땅에 발을 딛기 전에 그리스 감옥으로 보내질 줄..."

"그만하면 충분하다, 알렉스" 안나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택시는 논쟁하는 장소가 아냐. 그리고 우린 이미 도착했다"

알렉스는 잠자코 차에서 내려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그는 어머니를 위해 자동차 문을 열어 주었다. 사프론은 항구로 빠져나가 유람선을 바라본 후 택시 지붕 너머로 두 사람을 신중하게 지켜보았다. 알렉스는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이더니 안나의 머리 위에 가볍게 키스를 한 다음, 택시 기사에게 돈을 지불했다. 그리고 안나의 팔을 잡고 유람선 승선 계단으로 이끌었다.

사프론은 망설였다. 그녀가 오해한 모양이다. 알렉스는 그의 어머니를 내팽개친 게 아닌지도 모른다. 카페에서의 장면이 떠올랐다. 오랫동안 아들을 만나지 못한 어머니답지 않게, 안나는 그가 갑자기 나타났는데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그 장면을 굉장히 웃음거리로 여겼다. 이상해. 굉장히 이상해...

사프론의 입술 사이에서 한숨이 빠져나왔다. 무슨 상관이람? 곧 일자리를 잃게 될 건 불을 보듯 뻔한데.

유람 여행이라도 끝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알렉스 스태어티스의 얼굴에 떠오른 잔인한 표정으로 보아 그녀는 로도스에서 다음 비행기로 영국으로 보내질 가능성도 충분하다.

하지만 아까 실수를 한 사람은 사프론, 자신이니....

일단 배에 오르자 그녀는 모자 단둘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하고, 혼자 여행 중이던 친절한 미국 신사와 이야기를 했다. 그 신사는 일전에 들렀던 로도스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서정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잠시 후 사프론은 천천히 선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실내의 긴장된 분위기가 즉시 느껴졌다. 안나는 사랑스런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깍지 낀 손을 무릎에 얹어 놓은 채 팔걸이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에 반해 알렉스는 우리에 갇힌 호랑이처럼 선실 안을 서성거렸다.

"서두르지 말아요, 알겠소. 미스 마틴?" 그의 성난 두 눈동자가 그녀에게 와서 박혔다. 그녀는 그의 분노 앞에 몸을 떨었다.

"서둘러야 될 일이나 있나요, " 그녀가 즉각 말을 받았다. "우린 앞으로 3일 동안 유람선에 있게 될 텐데요"

"당신은 아냐" 그의 말에 사프론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해고로군! 하지만 그의 뒷말에 그녀는 다시 놀랐다. "당신의 짐을 싸서 가능한 한 빨리 떠날 준비를 하시오. 준비가 될 때까지, 난 선장에게 출발을 지연시키겠소. 하지만 서둘러요, 출발 시간이 지연되는 일분일초가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이니까"

"?" 사프론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이 유람선을 떠나다니. 하지만 어디로? "어디로 가는데요?" 그녀가 소리쳤다.

"내 요트로. 그리고 난 질문에 대답할 시간이 없소. 어머니가 당신과의 6개월 계약을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시더군. 당신이 매우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오."

그의 시선이 그녀의 붉은 머리칼을 지나, 짧은 웃옷 밑에서 당당하게 솟은 가슴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리고 가는 허리, 날씬한 히프와 긴 다리를 훑어분 다음 다시 그녀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표정에는 어머니가 고집을 부리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똑똑하게 적혀 있었다. 그는 단 두 걸음 만에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주먹을 꼭 쥐었다. 그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본능적으로 그를 밀어내고 싶은 충동이 솟아올랐다. 그녀는 등을 쭉 펴고 얼굴을 붉히지 않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 남자는 불가해한 방법으로 그녀를 협박한다. 성적인 위협, 하지만 그 외엔 또 뭔가가 있다. 깊고 어두운 무엇인가가.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험악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자비한 생김새를 찬찬히 보면 볼수록 어디서인지 모르지만 분명히 그를 본 적이 있다는 확신이 커져 갔다. 갑자기 그가 그녀의 혼란스런 마음을 꿰뚫는 말을 던졌다.

"전에도 당신 같은 부류를 만난 적이 있소. 도대체 어떤 가치가 있다는 건지 모르겠군" 그는 냉소적으로 말을 이었다. "완전히 돈 낭비지"

그 말에 사프론은 분개했다. 그녀는 그 비열한 남자의 따귀를 치려고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가 그녀의 손을 공중에서 잡으며 계속 모욕을 가했다.

"하지만 내 정당한 판단과는 달리. 우리 어머니의 안정을 위해 당신이 머무르는 데 동의했소"

사프론은 그의 강한 손가락에서 자신의 손으로 강한 전류가 관통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우린 거래를 한 거요, 사프론. 그걸 명심해요" 그가 그녀의 손을 놓아 주며 내뱉었다.

그녀는 비틀거렸다. 문으로 향하던 그가 그녀의 곁을 지나며 중얼거렸다.

"좀 전에 있었던 일을 내가 잊으리라 생각지 마. 난 당신에게 그 값을 톡톡히 치르게 할 거요. 이 초록 눈의 마녀" 그는 문을 꽝 닫고 나가 버렸다.

분노와 공포가 그녀의 눈에 어렸다. 저 오만한 악마! 어쩌면 사람을 이렇게 취급할 수가!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때 안나의 눈과 마주쳤다. 나이 지긋한 숙녀의 눈에는 애원의 빛이 선명했다.

"아들에 대해선 내가 사과할게. 그는 거만하게 굴지만, 날 진정으로 걱정해서 그런 거야. 나와 함께 있어 줄 거지? 난 당신이 필요해"

"그게 좋은 생각인지 어떤지 모르겠어요"

사프론이 건조하게 말했다. "당신 아들과 나는 잘 지내지 못할 게 분명해요. 특히 내가 그를 반병신으로 만들 뻔한 지금에는" 그녀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 쩔쩔매던 꼴이라니!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닌걸. 그 애는 당신을 그렇게 잡지 말아야 했어, 사피. 하지만 요트는 크니까 알렉스와는 그다지 마주치지 않을 거야. 그 애는 항상 여자나 친척을 동반하거든" 안나가 얼굴을 찌푸리며 비밀스럽게 덧붙였다. "그래서 난 관광 유람선을 타고 여행하고 싶었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편이 훨씬 재미있거든"

"하지만 주치의가 스트레스를 피하라고 했잖아요. 아무래도 아드님에게 사실대로 말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당신은 낙상을 했고 충격을 받기 했지만, 곧 괜찮아질 거예요."

안나는 아들이 알면 화를 낼 거라며 자신의 사고에 대해선 입도 떼지 말라고 의사와 사프론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하지만 사프론은 그녀의 아들에겐 화를 낼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런던에 내버려 두고 자신은 그리스에 기반을 두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는 주제에 웬 화?

"아드님이 당신과 함께 있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내 존재는 필요 없어질 거예요"

"내가 알렉스에게 말할 수 없다는 걸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애는 나 혼자 살기엔 너무 늙었다며 런던 집을 포기하고 친척들과 함께 살라고 고집을 피울 거야.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제발 계속 머물러 있겠다고 말해 줘..."

사프론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불쌍한 숙녀의 아들이 아무리 싫다 해도, 자신의 책임을 내버릴 순 없다. 하지만 < 이 불쌍한 숙녀>도 보통이 아니야. 사프론은 미소 지었다. 심지어는 전지전능한 알렉스 스태어티스마저도 고개를 숙이고 사프론이 머무르도록 허락하다니. 안나, 그녀는 연약하고 섬세한 늙은 숙녀인 척하지만 사나운 새임에 분명하다.

", 알겠어요" 그녀는 대답한 다음 옷장으로 다가갔다. "난 어서 짐이나 싸는 편이 좋겠군요"

사프론은 끊임없이 침대에서 뒤척거리다 얇은 새틴 이불을 허리까지 내렸다. 하지만 더위 때문에 잠들지 못한 건 아니다. 요트의 냉방 시설은 완벽했다. , 한밤중에 에게해를 향해하는 증거로 낮게 울려 퍼지는 엔진 소리 때문도 아니다. 그녀의 불면은 오로지 알렉스 스태어티스 때문이다.

그는 그녀와 안나를 유람선에서 데리고 나와 택시를 타고 대기시켜 놓은 헬리콥터로 안내했다. 그날 저녁 10시경 헬리콥터는 그리스 본섬에 정박해 있던 호화 요트 선창에 있는 착륙대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리고 놀랄 시간도 없이 예의 바른 승무원이 나타나 사프론을 맨 위층에 있는 선실로 안내했다. 그 선실이라니! 마호가니 벽으로 된 선실 한가운데 큰 원형 침대가 놓여 있고, 놋쇠와 마호가니로 치장된 욕실과 화장실은 광채가 날 정도로 번들거렸다. 안나의 방은 더 호화스러웠고, 개인 거실까지 달려 있었다.

사프론은 짐을 풀며 안나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했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그녀는 신통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사프론이 부드럽게 머리를 빗겨 줄 때에야 안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알렉스는 내가 무책임하게 마음대로 여행을 했다고 생각해" 그녀는 거의 자신에게 말하듯 부드럽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변명을 담은 푸른 눈동자로 거울에 비친 사프론을 응시했다. "하지만 당신은 이해하지?"

그녀는 거울 속의 안나에게 미소를 지으며 고백했다. "전부는 아니지만"

"그렇겠지. 이건 과거를 재현하고 싶어 한 나이 든 여자의 환상이니까. <팔라스 코린티안>은 내가 일하던 배였어. 그리고 나도 나중에 알았지만 그 배의 주인은 내 남편 니코스였고..."

"그러니까, 그 유람선이 당신 소유였단 말인가요?"

사프론은 놀랐다. 그녀는 왜 안나가 특히 그 배를 예약하라고 고집을 피웠는지 지금에야 알았다.

"그건 아냐. 알렉스는 자기 사업체를 소유하고 있고, 수년 전에 그 유람선을 다른 회사에 팔았어. 그는 감상에 빠질 시간이 없거든. 그 때문에 내가 뭘 원하는지 그에게 말할 수 없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만의 즐거운 휴가를 가져서 기뻐, 사피. 오늘 로도스섬과 그 카페를 본 걸로 충분해. 그리고 감상적인 늙은 바보를 위해 준 당신에게 정말 감사해"

본능적으로 사프론은 빗을 내려놓고 안나를 가볍게 안았다. "난 당신을 늙은 바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주 멋지다고 여기는걸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어깨를 마사지해 드릴까요?"

"아니, 됐어. 난 바로 잠이 들 정도로 피곤하거든"

안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사프론의 뺨을 매만졌다. "날 참아 주다니,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 더 이상 원하는 게 없을 정도야"

지난 몇 주 동안 안나에 대한 사프론의 마음은 깊어 갔다. 오만한 아들과 달리 안나에게는 진심으로 베풀고 싶었다.

"부탁이니, 알렉스에게는 내가 마시지 뿐 아니라 화장까지 받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숨겨 줘. 난 머리를 빗을 수 없을 정도로 팔을 못 올린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 그 애는 눈치가 빠르고, 내가 관절염 외에도 아픈 데가 있다는 걸 알면 무척 걱정할 거야"

사프론은 지구가 자신을 위해 회전한다고 생각하는 그 비열한 돼지가 과연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걱정을 할지 의아스러웠다. 하지만 그 남자를 싫어한다는 내색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단지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사프론은 호화스런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며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고 자신을 납득시켰다. 그들은 여전히 유람을 하고 있다. 단 개인 요트로. 그런데 왜 이상한 육감에 시달리는 거지? 이건 정말 말도 안 된다. 여전히 일자리는 건재하고, 1, 2주일 후면 런던 중심가에 있는 안나의 편안한 저택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 후엔 알렉스 스태어티스를 볼 기회도 없으리라. 그녀는 단지 그가 뭘 하든 입만 꾹 다물고 있으면 된다. 그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안나를 위해 고용되었으니까...

그녀는 눈을 감고 다시 잠이 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저녁 시가 후 안나와 함께 선실로 돌아올 때, 문에서 배웅하던 알렉스의 영상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넓은 이마 뒤로 우아하게 넘긴 검은 머리칼, 39세의 나이에 걸맞지 않게 반짝이던 눈, 그리고 섹시한 입술이 자신의 옆을 지나는 그녀에게 냉소적으로 야유했다. "당신이 지금은 떠날 수 있지만, 난 당신에게 갚을 빚이 있다는 걸 잊지 않고 있소" 그건 그녀에 대한 위협이었다.

그녀의 눈이 번쩍 뜨였다. <당신이 지금은 떠날 수 있소> 그는 그렇게 말했다. 머릿속 한편에서 뭔가가 스물거렸다. 그를 만난 적이 있었던가? 아니, 그건 불가능하다. 뭔가 착각을 일으킨 거야. 분명히 안나의 집에서 그의 사진을 보았을 거야. 그래, 그거야. 당연해.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사프론은 밤새도록 키가 크고 검은 남자가 등장하는 뒤숭숭한 꿈에 시달렸다.

그녀는 노크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커피를 가져왔습니다, 마담" 문밖에서 승무원이 말했다.

"들어와요" 그녀는 침대에 일어나 앉으며 눈을 깜박였다. 안나는 일어났을까? 순간 눈앞에 나타난 남자를 보고 그녀의 눈은 공포로 휘둥그레졌다. 분노로 숨이 막혔다. "당신..."

짧은 하얀 가운을 걸친 알렉스였다. 허리끈이 느슨하게 조여진 가운 사이로 검은 털이 난 가슴과 남자다운 다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가 커피잔과 주전자가 놓인 쟁반을 들고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잘 잤소, 사프론?"

"... 당장 나가요" 그녀가 소리쳤다. 그는 틀에 박힌 미남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여자도 저항할 수 없는 남성적인 매력을 풍겼다. 오늘 아침, 거뭇하게 돋은 수염 때문인지 알렉스는 무모하고 날렵한 해적처럼 보였다.

"그게 당신 커피까지 가지고 온 고용주를 환영하는 태도요?"

"당신은 내 고용주가 아니에요" 그녀가 반박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자신의 의무를 상기시켰다. "하지만 당신이 내 선실에서 나가 주신다면, 난 옷을 입고 안나를 보러 갈 거예요"

잠이 확 달아났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럽게 보이는지 알지 못했다. 어깨 주변에서 넘실거리는 붉은 색이 섞인 금발이, 얇은 끈으로 연결된 면 잠옷 밑에서 풍만하게 부풀어 오른 가슴까지 내려왔다.

"당신은 아침형이 아니군... 가엾어라, 아주 신경질적으로 보이는데..."

감히 그녀를 희롱하다니? 사프론은 화가 난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그의 시선이 자신의 몸매에 고정되었음을 알고 경악하며, 새틴 이불을 턱까지 잡아 올렸다. 그때 알렉스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빨리 나가요" 그녀가 소리쳤다. 분노가 솟구쳤다.

"그렇게 충격받은 척하지 말지.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자라면, 수많은 남자가 침실을 거쳐 갔을 텐데"

그녀의 침실에는 어떤 남자도 발가락 하나 들여놓은 적이 없다. 그리고 이렇게 힘이 넘치는 오만한 남자를 첫 남자로 맞이할 생각도 없다.

"나가요" 그녀가 한 손으로 문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우쭐거리지 말아요" 알렉스가 냉소적으로 말꼬리를 질질 끌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상기된 얼굴과 헝클어진 머리칼을 모욕적으로 훑어보았다. "당신이 어머니를 뵙기 전에 할 말이 있었을 뿐이니까. 내가 왜 아침 7시에 당신을 깨웠다고 생각하오?" 그가 조롱하듯 말했다.

사프론의 온몸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알렉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자부심이 대단히 강하군, 사프론"

지금 이 남자는 재미로 그녀를 놀리고 있다. 하지만 그와 잘 지내자고 결심했던 사프론은 그의 말을 무시했다. 그녀는 그가 침대 옆 테이블에 내려놓은 쟁반 쪽으로 몸을 돌린 후 커피를 따랐다. 그리고 프림을 넣은 다음 다시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말해봐요, 왜 이름이 사프론이지? 사프론은 향신료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는데, 당신이 향긋한가 보군?" 그가 검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녀의 짙은 속눈썹 아래로 그를 흘끗 본 다음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그의 빈정거림을 무시한 채 짧게 대답했다. "사프론은 짙은 노란색과 오렌지색 염료를 뽑아내는 식물이에요. 내가 갓 태어났을 때, 우리 부모님이 생강 같은 내 머리칼을 보고 그렇게 이름 지었어요."

큰 손이 뻗쳐오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알렉스는 그 머리칼을 손가락에 감았다. 그의 손가락 관절이 그녀의 가슴을 스쳤다.

"당신 머리칼은 생강 빛이 아니오, 금빛, 붉은색, 생생한 불꽃의 색깔들의 집합체지"

짧은 접촉에도 그녀의 가슴은 단단해졌다. 본능적인 부끄러움으로 그녀의 뺨이 붉게 상기되었다. 알렉스가 자신의 반응을 알아차렸으리란 생각을 하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제만 해도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최고로 발휘하는 유능하고 성숙한 프로 직업인이었다. 그런데 지난 열두 시간 동안 그녀의 인생은 이 궤변적인 남자와 그의 제트족다운 생활방식에 뒤흔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뺐다. 그러자 그의 손가락에 감긴 그녀의 머리칼이 스르르 풀렸다. 그녀는 알렉스의 무자비한 얼굴에서 독재적인 표정을 보게 될까 봐 재빨리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하지만 더 좋지 않은 장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검게 탄 다리가 하얀 가운과 강렬한 대조를 이루는, 그이 벌어진 가운으로 쏠렸다. 순간 에로틱한 영상이 떠올랐다. 맨몸과 다를 바 없는 그들의 육체 사이엔 오직 얇은 이불 한 장이 놓여 있을 뿐이고.... 갈색으로 탄 그의 육체가 그녀에게 접근하면서.... 정열로 녹아든 그의 깊은 갈색 눈엔....

"커피 맛이 좋소?"

자신의 불안정한 상상에 스스로 충격을 받은 사프론은 그의 다리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붉게 물든 얼굴을 감추며 중얼거렸다. "" 그리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알렉스 스태어티스에 대한 그녀의 반응은 갈수록 터무니없어지고 있다. 이게 대체 웬일이람? 자제력만큼은 자신이 있었는데. 하지만 이 남자와는 온 힘을 기울여 싸워야 할 것 같은 무시무시한 예감이 들었다.

"선실은 마음에 드오?" 그가 물었다.

그는 이곳이 호화의 극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그녀를 자극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미끼에 넘어가지 않으리라.

"뭘 원하세요, 스태어티스 씨?" 그녀가 목소리를 깔며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에 비해 내가 원하는 건 많지 않소, 미스 마틴"

그의 장난기가 싹 사라졌다. "내 어머니는 부유하오. 난 필요하지도 않은 유람선 여행을 하도록 누가 누구를 부추겼는지 모르겠소"

"내가 그런 건..."

"당신이 진실을 말하겠지. 어머니는 얼마든지 교활해질 수 있으니까"

안나가 교활하다니! 사실, 사프론도 그의 말에 약간은 수긍이 가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이 남자와 비교하면 안나는 티없이 순진하고 맑은 사람이다. 알렉스의 말이 계속되자, 사프론의 분노가 점점 커져 갔다.

"어머니의 주치의에게 확인해 보니, 선상 여행을 추천했다고 하더군. 어머니는 당신을 좋아할 뿐 아니라 당신이 매우 유능하다고 나에게 말했소. 그리고 나는 내 돈의 가치에 대해선..." 그의 입술이 팽팽해졌다.

"당신의 능력 이상으로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건 당신이 어디에서 그런 재주를 배웠는지, 그리고 왜 배울 필요가 있었는지 하는 점이오. 그래서 경고하건대, 만일 내 어머니를 상심시키거나 또는 그녀의 물불을 못 가리는 계획에 얽혀들었다면 빨리 포기하는 게 좋을 거요, 알겠소?" 그가 일어섰다. "당신이 커피를 즐겁게 마시도록 자리를 비켜 주지. , 이 배에 온 걸 환영하오."

사프론은 이런 모욕을 받은 건 난생처음이었다. 이 나쁜 놈! 물불을 못 가리는 계획이 어쩐다구? 그녀가 마치 사기꾼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다니. 붉은 머리칼과 어울리는 특유의 성질이 폭발했다. 그녀는 반쯤 마시다 만 커피잔을 그에게 던졌다. 컵이 그의 가슴에 부딪히면서 온몸에 커피가 튀었다.

"아니, 당신이..." 강한 두 손이 그녀의 팔을 잡고 그녀를 침대에서 끌어 내렸다. 그녀는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하지만 그녀가 미처 빠져나올 틈도 없이 알렉스의 입술이 그녀를 급습하여 온몸에서 공기를 빨아들이는 듯한 난폭한 키스를 했다. 그녀는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쳤지만 점점 그 키스에 빠져들었다....

 

2

사프론의 등이 침대에 닿았다. 그리고 그의 거대한 몸무게가 그녀 위로 덮쳐 왔다. 그녀는 무릎을 들어 치려고 했지만, 알렉스는 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할 남자가 아니었다. 그의 다리가 그녀의 다리를 단단히 눌렀다. 이번에 그녀는 그의 얼굴을 노렸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양손을 잡고 머리 위에 고정시켰다.

"이 빌어먹을 말괄량이 같으니" 그가 욕을 했다. "어제는 당신에겐 행운이었소. 당신은 20년 만에 처음으로 내 방어막을 뚫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마지막인 줄 알아. 지금은 누군가가 당신에게 교훈을 가르칠 때고, 내가 바로 그 남자요" 어두워진 그의 갈색 눈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대하자 사프론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누가 그래요?" 그녀의 마지막 말은 그의 입술에 가로막혀 다시 삼켜졌다. 갑자기 그녀는 자신의 다리에 맞닿은 그의 맨살을 의식했다. 그녀의 짧은 잠옷은 허리 근처까지 말려 올라갔고, 그의 가운 역시 앞이 벌어졌다... 그의 남성다운 가슴에 눌린 그녀의 가슴은 면 잠옷 밑에서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사프론의 혐오감과 달리 예상치 못했던 열기가 온몸을 감쌌다. 심장은 가속이 붙은 로켓처럼 두근거렸다. 필사적으로 저항했던 키스는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달콤한 유혹으로 변했다. 그녀는 자신의 피부에 와 닿는 그의 강인하고 남자다운 육체를 민감하게 느꼈다. 그의 무거운 팔다리가 그녀를 끊임없이 자극하며 움직였다.

그래, 어제 이 남자가 내 걷어차기에 다치지 않은 게 분명하군. 그녀는 두서없이 생각했다. 마침 알렉스의 입술이 떨어지자, 그녀는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그녀의 상기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그녀에게서 몸을 떼어 내며 일어났다.

그녀가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그런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 어쨌든 그는 험악한 시선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몸을 가려, 이 여자야. 난 그런 것에 쉽게 걸려들지 않아" 그는 시트로 그녀를 덮어 주었다.

걸려들어? 그 말이 무슨 뜻일까?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순간 신경질적인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나체나 다름없다. 넓은 어깨에 헐렁하게 걸쳐진 그의 가운은 멋진 육체와 흥분된 남성을 전혀 가려 주지 못했다. 좀 전에 그녀가 한 환상은 충족되었다. 그의 남성다운 아름다움에 매료된 그녀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기억해, 당신은 경고를 받았다는 걸" 알렉스가 무의식적으로 가운을 고쳐 입으며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당신은 전적으로 우리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고용되었다는 사실도 일깨워 주지"그는 방을 가로질러 문을 꽝 닫고 나가 버렸다.

사프론은 폭탄을 맞은 것처럼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었다. 그녀의 이성은 이런 가벼운 공격에도 넋나갈 정도로 무방비했다. 그녀의 몸은 여전히 익숙지 않은 열기로 화끈거렸고, 이유도 없이 발가락 끝이 저릿저릿하게 아팠다. 그리고 주변에 떠도는 알렉스의 희미한 냄새가 그녀를 유혹했다.

믿을 수 없어. 아니, 불가능해. 그녀는 자신에게 말했다. 그녀는 그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순간 그를 격렬하게 원했다. 다른 남자에겐 손가락에만 겨우 키스하도록 허용했던 그녀가!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반응을 정당화했다. 이건 모두 상상이야. 현실에서 정말 이렇게 반응할 리가 없다. 그녀는 스물다섯 살이고, 자신이 성적 욕구가 강한 사람이 아니란 정도는 잘 알고 있다. 10대 시절에 경험한 두 번의 불유쾌한 사건으로 남성에 대한 흥미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열 살 때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고아가 된 사프론은 고아원에 들어갔다. 그곳은 꽤 좋은 곳이었고, 직원들도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부모를 잃었다는 상실감을 채울 수는 없었다. 열세 살이 되어 점점 성숙하기 시작하자, 나이 많은 소년 중 한 명이 억지로 그녀를 땅에 눕히고 그녀의 가슴을 매만졌다. 하지만 그녀의 친구 이브가 그를 막아 주었다.

사프론은 한숨을 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물 고인 두 눈에 과거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사프론보다 두 살 더 많았던 이브는 고아워에서 가장 친했던 친구였다. 고아원을 떠난 후에도 이브는 때때로 사프론을 찾아왔다. 이브의 죽음은 사프론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그녀는 아직 그 충격의 여파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녀는 눈가에 어린 눈물을 닦아 내고 욕실로 향했다.

기억은 그들이 속한 과거에 남겨 두는 것이 최선이다. 그녀는 잠옷을 벗고 샤워를 했다. 고개를 뒤로 젖히며 온몸으로 세차게 쏟아지는 상쾌한 물방울에 자신을 내맡겼다.

요트가 항구에 닿자마자 영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현명하다. 안나가 보고 싶겠지만, 안나는 사프론의 후임자를 찾는 데 별문제를 겪지 않으리라. 계속 이곳에 있으면 알렉스 스태어티스와 문제가 생길 게 뻔하다. 그는 강력하고 위험한 남자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뭔가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일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그녀는 톰과 베라와 나눠 쓰던 아파트를 포기했다. 그들은 결혼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그녀가 나가겠다고 하자 꽤 좋아했다. 그들이 자신만의 공간을 갖길 원하는 건 당연하다. 그녀는 살 집을 구할 때까지 호텔이나 여인숙에 거주할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러면 사업 자금으로 모아 둔 돈을 꽤 많이 써버리겠지. 그 점이 유감스러웠다.

순간 이브가 그녀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가 떠올랐다.

넌 모든 것을 가졌어, 사프론. 용모, 성격, 그리고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전문 능력. 패배자로 태어난 나와는 달라. 나에게 약속해 줘, 사프론. 형편없는 건달에게 네 자신을 맡기지 않겠다고 말야. 네 꿈을 이뤄. 네 스스로 사장이 되어 자신의 사업을 하는 거야. 날 위해서도 그렇게 해줘. 넌 그걸 이룰 거야.

그녀는 어깨를 당당하게 폈다. 사랑스런 초록 눈동자에는 결연한 의지가 감돌았다. 그녀는 물을 잠근 후 큰 수건을 날씬한 몸에 두르고 욕실에서 나왔다. 스태어티스 씨가 그녀의 일을 포기하도록 가만 놔두지 않을 테다. 그녀를 고용한 사람은 안나였다. 안나는 그 계약에 만족해하고, 런던으로 돌아가면 그 남자를 만나지 않을 수 있다. 다음 몇 달 동안 받을 그녀의 봉급이면 꿈을 이루기에 충분하다.

10분 후 청색 반바지와 흰 티셔츠를 입은 사프론이 안나의 방문을 열었다.

", 일어나셨군요!" 사프론이 침대에 앉아 있는 고용주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안나 옆에 있는 쟁반을 발견했다. "그리고 커피도 드셨네요" 그녀는 다정하게 잔소리를 했다. 안나는 커피를 멀리하는 편이 좋은데.

"그래, 다인도 나와 같은 서비스를 받았을 것 같은데. 알렉스가 이걸 가져왔더라구"

순간 사프론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안나는 자신처럼 짐승에게 공격을 당하지 않았겠지! 그녀는 부산스럽게 오일이 들어 있는 상자와 다른 필수품을 준비하며 물었다. "아침 식사를 가져다드릴까요. 아니면 샤워를 한 후에 마사지를 받으시겠어요?"

"마사지. 하지만 서둘러. 알렉스가 930분에 갑판에서 아침 식사를 함께 하자고 했거든. 그 말에 난 감히 반박도 못 했어. 나 때문에 그 애의 소중한 시간을 3일이나 낭비했다는 거야"

"낭비!" 사프론의 성질이 다시 치솟았다. "그건 그의 잘못이잖아요? 우린 <팔라스 코린티안>에 있을 수도 있었어요. 이건 그의 생각이었잖아요" 그녀는 팔을 흔들며 호화스런 선실을 가리켰다.

"그래, 하지만 전적으론 아냐. 스케줄을 변경한 사람은 나거든"

사프론이 몸을 돌려 안나를 바라보았다.

"6월이면 우린 항상 일주일 정도 유람을 했어. 하지만 이번에 알렉스는 오스트레일리아에 가서 도라올 날짜도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난 나 혼자... 아니, 당신과 함께 여행을 하고 싶다고 결정한 거야. 그 불쌍한 아이는 내 행방도 모른 채 지난주 런던에 도착해서 3일 동안이나 우리 뒤를 추적했어. 일도 못 하고 말야. 평상시처럼 난 알렉스와 친척들과 함께 이 요트를 탔어야 했어."

"만일 그렇다 해도, 왜 우리가 옮겨야 했죠? 차라리 항구에서 다른 손님들을 기다렸더라면, 당신 아들도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요."

"그건 내 잘못이야. 내가 곧장 항해를 하자고 고집을 피웠거든. 왜냐하면 항구에서 며칠 지내다가, 혹시라도 당신이 마음을 바꿔 영국으로 돌아가 버릴까 봐 두려웠거든. 난 내 아들이 골치 썩을 걸 뻔히 알지만, 그래도 당신을 놓치고 싶지 않았어. 요트에서라면 당신은 떠날 수 없을 테니까. 또 알렉스에게는 당신의 친구가 되어 달라고 말해 놨어."

"당신은 대단한 책략가예요." 사프론이 붉은 머리칼을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래, 하지만 당신은 내 비밀을 속속들이 알잖아. 당신만큼 내 머리를 잘 다듬고 화장을 잘 시켜 줄 사람은 없을 거야. 평상시의 나보다도 훨씬 나을 정도라니까." 안나가 무뚝뚝하게 사실을 인정했다.

한 시간 후 안나의 머리 손질을 마친 사프론은 그녀를 따라 갑판 승강구 계단을 통해 특등실로 들어갔다. 큰 유리문 너머 갑판에서 알렉스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 밤 그들이 도착했을 땐 어두운 밤이었지만 사프론은 호화로운 선실, 우아한 라운지, 멋진 식당을 보고 감탄했다. 하지만 갑판은 또 달랐다. 흰 차일 밑에 청색과 초록색으로 날염된 세 개의 푹신푹신한 긴 소파와 팔걸이의자 한 쌍, 낮은 식탁 한 개가 쾌적하게 배치되었다. 그리고 작은 테이블이 여기저기 놓여진 포도나무 화분들 옆에 적절하게 놓여 있었다. 그 너머로 활짝 트인 갑판에는 둥근 수영장이 있었다. 꼭 그들이 수영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풀 주변에는 수많은 일광욕 의자와 파라솔이 꽂힌 테이블이 몇 개 있었다.

이 반만큼 난 살아도! 사프론은 경탄했다. 안나도 부유하지만, 알렉스 스태어티스는 엄청난 부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악한 말벗에게 자신의 어머니가 납치되지 않을까 하는 그의 걱정도 과장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를 의심할 권리는 없어. 그는 그녀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사프론은 자신을 자제하며 팔걸이의자에 앉았다. 반대편 소파에 우아하게 앉아 있는 알렉스를 의식적으로 피했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아침 식사는 아주 맛있었다. 전날 밤 그녀를 선실까지 안내했던 그 승무원이 여러 종류의 시리얼, 크루아상, , 곁들여 먹는 과자와 커피, 홍차, 그리고 다양한 과일 주스를 큰 테이블에 차려 주었다.

평범한 대화가 이어졌다. 사프론도 때때로 말장단을 맞췄지만 주로 모자가 이야기를 하도록 하고, 자신은 주변 환경에 감탄하며 만족해했다. 6월 초 뜨거운 아침 햇살이 푸른 바다 위에서 빛났고, 그 가운데를 요트가 하얀 물살을 일으키며 유유히 항해했다. 파라다이스가 따로 없군. 사프론은 따끈따끈한 크루아상에 두껍게 꿀을 바르며 경탄했다.

"당신은 찬성이요, 사프론?"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다른 두 사람이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거 알아차렸지만,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에게 다시 말해 줘라, 알렉스" 안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몇 시간 내로 미코노스섬에 도착할 거요. 어머니는 그 섬을 다시 보고 싶긴 하지만, 상륙할 기분은 아니라는군" 그가 잠시 망설였다. 사프론은 눈을 치켜뜨고 그를 의아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어머닌 나보고 당신과 함께 있으라고 제안하셨소" 그의 감각적인 입이 조롱하듯 비틀렸다. 사프론은 그의 이중적인 말뜻에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는 천천히 말을 덧붙였다. "몇 시간 동안만"

그의 나른한 미소, 단단한 육체가 그녀에게 이상한 영향을 끼쳤다. 그녀가 싫다는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목이 졸아들었다. 그녀는 힘들게 침을 꿀꺽 삼켰다.

"물론 사프론은 그렇게 할 거야" 안나가 그녀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미코노스는 놓쳐선 안 될 곳이거든"

"글쎄요" 사프론은 중얼거렸다. 직관적으로 알렉스와 단둘이 있는 건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라니까" 안나가 고집을 부렸다.

사프론은 알렉스를 건너다보았다. 그의 두 눈에 번뜩이는 건 즐거움이 분명하다. 그녀가 거절할 걸 알면서도 감히 그녀에게... " 좋아요, 멋질 것 같군요" 그녀는 자신의 승낙에 알렉스의 검은 눈동자가 냉소적으로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좋아, 잘됐소. 숙녀님들,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알렉스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어머니에게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1라운드는 어머니가 이겼어요."

그의 엄격한 얼굴에 나이를 초월하는 미소가 떠올랐다. 잠시 사프론은 그의 말을 의아해했지만, 무자비한 가면 뒤에 숨은 모습을 보는 순간 숨을 헉 들이마셨다. 그의 모습은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가 그녀를 흘끗 보는 순간 그 미소는 사라지고 대신 육식 동물과도 같은 약탈자의 눈빛이 번뜩였다.

"당신에게 미코노스섬을 안내할 시간을 기대하겠소. 난 그곳에 대한 당신의 반응을 보고 싶소"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그녀의 등골을 쓸고 지나갔다. 공포! 아니야, 나들이에 대한 단순한 기대감이야. 사프론은 자신에게 강경하게 말했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냐! 그녀는 알렉스에 대한 자신의 이해할 수 없는 격렬한 관심에 다시 화가 났다.

"즐거우리라고 확신해요" 그녀는 냉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곧 고개를 바다 쪽으로 돌렸다. 그녀의 눈에는 반바지와 셔츠만 걸친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그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숨쉬기가 왠지 힘들었다.

사프론은 안나와 나란히 요트 난간에 기대 섰다. 그들은 선원들이 상륙 계단을 내리는 걸 지켜보았다. 몇 분 후면 알렉스와 그녀가 저 계단을 통해 상륙할 것이다. 미코노스섬은 아침 내내 안나에게 들은 그대로였다.

요트가 미코노스 항구에 정박했다. 섬 전경은 볼 만했다. 하얗게 빛나는 집들 사이에 점점이 박혀 있는 푸른 돔 지붕의 작은 교회, 지평선을 따라 줄지어 있는 풍차의 인상적인 광경 등...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움에 매료된 사프론은 다시 한번 안나에게 함께 가자고 졸랐다.

"요트에서 내려갈 때 내가 당신을 도울게요, 안나. 당신은 괜찮을 거예요. 내가 약속해요. 상륙하지 않으면, 굉장히 후회하게 될 걸요"

"난 여기에서도 보고 싶은 걸 전부 볼 수 있어. 그리고 난 이곳에 수도 없이 많이 와보았단 말야."

"정 싫다면..."

"물론이야. 난 신경 쓰지 마"

사프론이 대답을 하기 전에 알렉스가 다가왔다. 그를 흘끗 바라보자 가슴이 뛰었다. 그는 청색 반바지에 청색과 흰색이 섞인 흰 셔츠로 갈아입고 있었다. 기가 막힐 정도로 매력적이다.

"준비됐소, 사프론?" 그가 다정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옷 속에 수영복은 입었겠지?" 그는 검정 눈을 반짝이며 다그쳤다.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고, 또 그걸 즐겼다.

"" 그녀가 비치백을 어깨에 걸치며 냉담하게 말했다. 그녀가 그에 앞서 계단을 내려가려 하자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말렸다.

"이럴 때는 신사가 우선이오. 그래야 당신이 바다로 떨어지는 걸 방지할 수 있으니까" 그는 그녀의 손을 계속 잡은 채 계단을 내려갔다.

작은 보트는 곧 육지에 닿았고 렌트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몇 분 후에 그들은 마을을 빠져나가 교외로 향했다.

"마을을 구경할 줄 알았는데요" 사프론이 다그쳤다.

알렉스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해 발끈 화가 치솟은 것이다.

"나중에 갈 거요. 우선 섬을 드라이브하면서 수여하기에 적당한 장소로 갑시다. 이곳엔 멋진 해변들이 꽤 많거든. 당신만 좋다면, 누드 전용 해변으로 갈 수도 있소" 그가 그녀를 곁눈질했다.

"어림도 없어요" 그녀가 재빨리 말을 받았다.

"? 오늘 아침에도 아무 일 없었잖소"

오늘 아침에 거의 나체와 다를 바 없던 알렉스가 자신의 방에서 서 있던 광경을 떠올리자,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알렉스는 불편해하는 그녀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당신이 이겼소. 수영복을 입는 해변으로 가도록 하지"

사프론은 그 외출을 즐겼다. 알렉스는 의외로 상냥한 말벗이 되어 주었고, 사프론의 적개심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인적이 드문 해변가의 작은 카페에서 밥이 곁들여진 신선한 생선과 야채로 점심 식사를 했다. 그리고 포도주를 마신 후 해변으로 향했다.

정오의 태양이 더욱 강렬해지자 알렉스는 잠시 쉬자고 제안했다. 그는 들고 온 가방에서 타월을 꺼내 황금빛 모래 위에 펼쳤다. 사프론도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자신의 타월을 조심스럽게 깔았다.

"분위기를 깨는군" 그는 중얼거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그리고 곧 상상의 여지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수영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녀 앞에 섰다.

사프론은 철저하게 남성다운 몸매에서 눈을 돌렸다. 그는 거의 마흔 살이 되었을 텐데, 탄력이 넘쳐흐르는 매력적인 몸매를 과시했다. 그야말로 절정기의 남성이다. 그녀는 그와 함께 있는 것이 과연 올바른 판단인지 의아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바다까지 경주합시다" 알렉스가 도전했다.

"당신이 먼저 가세요. 내가 따라잡을게요" 그녀는 비정상적으로 떨리는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은빛 모래와 맞닿는 터키석의 바다로 뛰어갔다. 그의 뒷모습도 매력적이었다. 넓고 가무잡잡한 등이 날씬한 히프와 길고 남성다운 다리로 연결되었다.

하느님 맙소사!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녀는 수영복 위에 걸치고 있던 청스커트와 짧은 반소매 셔츠를 서둘러 벗어던졌다.

그녀는 회의에 찬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이번 여행을 위해 마련한 수영복으로, 끈 없이 가슴에 걸치는 하이레그의 초록색 원피스 디자인이다. 문득 이 수영복이 얼마나 도발적인지 의식되었다. 왜 미처 몰랐지? 그녀는 조용히 신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바다로 뛰어 들어갔다. 멀리 알렉스의 머리가 파도 사이로 가볍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놀라운 수영 실력이다. 다른 모든 것도 완벽하게 해내는 남자겠지.

사프론은 굳이 그를 따라잡으려 하지 않았다. 수영은 할 수 있지만 상어처럼 능숙하진 않았기 때문에, 달아오르는 육체에 닿는 경쾌한 파도의 흐름만 즐겼다. 때때로 그녀는 수영하는 알렉스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그는 경탄스러울 정도로 가뿐하게 수영하고 있다. 이건 알렉스에게 무시당했기 때문이 아냐. 한숨이 터져 나왔다. 자신에게 단호히 말하고 바다에서 나왔다.

그녀는 타월 위에 누워 태양 빛에 몸을 말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정신없었던 지난 이틀, 점심 식사와 포도주, 따뜻한 태양이 그녀를 잠으로 유혹했다.

"사프론!"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알렉스는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축축한 그의 가슴에서 물방울이 반짝이며 떨어졌다. 그는 그녀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직사광선을 받으며 잠드는 게 얼마나 바보짓인지 모르는군?"

그가 손가락 하나로 수영복 위로 드러난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 곡선을 쓸었다.

"살결이 너무 희고 부드러워. 당신은 화상을 입을 거요" 그가 허스키하게 말했다.

"알렉스" 그녀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손길에 그녀의 맥박이 빨라졌다. 그는 탄력 있는 수영복을 가볍게 들어 아래로 약간 밀어 내렸다. 그의 손가락이 한쪽 가슴으로 접근하자 그녀는 몸을 떨었다. 그의 손을 멈추도록 해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그녀는 육감적으로 반짝이는 그의 눈과 허스키한 목소리에 완전히 매료당하고 말았다.

"실크처럼 부드럽고 관능적이야, 완벽해"

그에게선 태양, 바다, 하늘, 그리고 남성다운 체취가 풍겨 왔다. 그가 움직였다. 곧 그의 하체가 그녀의 다리를 눌렀다. 그는 그녀의 날씬한 다리를 꼼짝 못 하게 만들고 검은 머리로 태양을 가리며 얼굴을 기울였다.

"사프론..." 그가 거칠게 말했다. "당신은 날 미치게 만들어" 그러자 그녀의 내부에선 광기와도 같은 무언가가 생명을 얻어 솟구쳤다.

그녀는 달아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대신 그의 키스를 준비하는 것처럼 혀로 바짝 마른 입술을 축였다. 맞닿은 그의 입술의 뜨거운 감촉이 그녀를 헐떡이게 만들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애무하며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열었다. 그녀에겐 어떤 남자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던 반응이 일어났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몸을 떨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위협적으로 보였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파리해진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이번엔 어머니가 정도를 지나쳤어!" 그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몇 살이오, 사프론? 열아홉, 스무 살?"

그가 그녀의 수영복을 다시 끌어 올려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 자신의 타월 위에 누웠다. 그는 한쪽 팔꿈치를 괴고 그녀를 혐오스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난 미친 게 틀림없어" 그가 중얼거렸다.

마침내 사프론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첨은 고맙지만, 난 스물다섯 살이에요" 왜 그가 자기 어머니에 대해 말한 걸까?

"그 점은 다행이군. 난 어린 소녀를 유혹하진 않소"

"당신은 날 유혹하지 않았어요" 사프론은 알렉스의 가슴을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요. 이만하면 일광욕은 충분해요"

강한 손이 일어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기다려요, 사프론. 어제 우리가 시작을 잘못했다는 건 알고 있소. 하지만 그게 전적으로 내 잘못만은 아니라는 걸 당신도 인정해야 하오. 우린 둘 다 성인이니, 이것에 대해 도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겠지?"

사프론은 고개를 돌려 알렉스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깊은 갈색 눈에는 아직도 정열의 여운이 감돌았다. "이성적으로?" 그녀가 반문했다.

"그래. 난 당신을 원하오, 최근의 어떤 여자보다도"

그가 자신의 몸을 유감스럽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쫓던 사프론은 곧 고개를 돌렸다. 이 남자에겐 수치심이 눈곱만큼도 없어. 그녀는 분개했다. 그는 흥분되어 있었다. "한 여자가 이렇게 쉽게 날 달아오르게 만든 건 오랜만이오. 우리는 숨은 가능성들을 탐색할 수 있소. 난 당신이 날 원한다는 걸 알아. 내가 만질 때마다 당신은 몸을 떨고 있잖소. 당신 생각은 어떻소?"

그의 실제적인 사고방식이 사프론을 화나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알렉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일광욕을 즐기는 포식한 상어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먹이는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수건을 낚아채 그의 몸 위에 털었다. 그의 몸 위로 모래가 펄펄 날렸다.

"어림없어요, 이 나쁜 놈!" 그녀는 소리친 후 옷가지를 들고 질풍처럼 달렸다.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쟁쟁하게 들렸다.

5분 후 그녀는 완전히 옷을 입고 돌아왔다. 무슨 짓을 하기만 해봐라, 가만두지 말아야지. 그녀는 맹세했다.

"내가 부적절한 단어를 사용한 것 같소" 알렉스는 반바지를 입고 넓은 어깨에 셔츠를 걸치면서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관심 없어요, 스태어티스 씨" 사프론은 냉담하게 말했다. "이젠 출발할 수 있겠죠? 난 미코노스 마을을 보고 싶어요. 그것 때문에 상륙했으니까요. 당신의 너저분한 제의 때문이 아니라"

<숙녀는 심하게 반항해야 하는 법이다> 당신은 나만큼이나 섹스를 원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군" 그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녀가 그 손을 뿌리치려 하자, 알렉스가 건조하게 말했다. "어린애처럼 굴지 말아요" 그들은 나란히 차로 돌아갔다.

사프론은 그에게 다시는 말을 걸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 결심대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돌처럼 침묵을 지켰다.

마을에 도착하자 알렉스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리며 조용히 말했다. "알겠소, 내가 사과하지. 휴전, 평화, 우정..."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약속하겠소, 더 이상 놀리지 않기로"

그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루에 두 번씩이나 그의 품에서 녹아나다니, 얼마나 바보 같은가. 그에겐 단지 재미에 불과했는데. 그녀도 손을 내밀며 그에게 동의했다. 자신은 절대로 실망한 게 아니라고 그녀는 확신했다. 알렉스가 그녀 같은 여자를 심각하게 원할 리 없다. 그의 어머니도 그에겐 별만큼이나 많은 여자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조용한 마을로 들어서자 알렉스는 우호적으로 행동했다. 좁은 골목길, 심지어 알렉스마저 그 존재 이유를 모르는 풍차를 보며 즐거워하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마침내 태양이 서서히 지기 시작하자, 그들은 리틀 베니스로 갔다.

그곳의 건물들은 모두 바다를 향해 있고 꼭대기마다 멋진 발코니가 달려 있었다. 그들은 알렉스가 섬에서 최고라고 주장하는 술집으로 들어갔다. 정면으로 석양이 보였고,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들은 창가의 좁은 2인용 테이블에 앉았다. 사프론에게 이렇게 낭만적인 경험은 난생처음이었다.

"뭘 마시고 싶소, 사프론?" 알렉스가 조용하게 물었다. 위대한 알렉스 스태어티스마저 이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나 보다.

"아무거나... 당신이 고르세요. 이곳은 정말 완벽해요" 그녀는 그의 손을 가볍게 매만졌다. "이곳에 데려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렇다니, 나 역시 기쁘오" 알렉스가 미소를 되돌렸다. 그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부드럽고 따뜻하게 반짝이자 그녀는 전기에 감전당한 것 같았다.

웨이터가 알렉스에게는 위스티와 소다를, 사프론에겐 우산으로 장식된 붉은 칵테일을 가져다주었다.

"건배" 그녀는 알렉스와 건배를 하고 한 모금 들이켰다. "아무거나라고 말했을 땐, 이렇게 대단한 걸 마시게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그들은 함께 웃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발코니 너머로 관심을 쏟았다. 타오르는 듯한 선홍색으로 변한 태양이 지평선으로 천천히 지고 있었다.

음악이 바뀌었다. 사프론은 즉시 그 곡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오페라를 좋아했다. "지금 이 곡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로시니의 서곡이에요"

"로시니의 서곡을 좋아한다구?"

", 굉장히 좋아해요" 그녀는 조사하는 듯한 그의 시선에 약간 불편해졌다. "수집도 꽤 했어요."

"그래, 알 만하오. 당신은 낭만주의자이고, 로시니의 음악처럼, 때론 성난 파도처럼 정열적인 사람이야. 당신의 고양이 같은 눈동자와 붉은 머리칼에 정열적인 본성이 드러나 있소"

사프론은 자신의 성격에 대한 그의 평가에 반박하려 했지만, 로시니의 음악에 대한 알렉스의 말은 사실이었다. 로시니에 대한 그녀의 애호 속에 충동적인 정열의 본성이 감춰져 있다고?

"그 서막이 당신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게 아니길 바라오"

그녀는 알렉스를 회의적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눈이 그녀를 잡고 놔주지 않았다. 이 우주에 오직 단 두 사람만 존재하고, 그들 사이에선 뭔가 불가항력적인 것이 흐르는 것 같았다.

"내 말에 동의하는군" 알렉스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는 음악에 대해서만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억지로 시선을 돌려 칵테일을 들이켰다.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두려웠다. 알렉스와 함께 하루를 보내며 나눈 키스, 강렬한 시선, 그녀의 음악 취향에 대한 관측... 이 남자는 그녀가 여성이란 사실을 절실하게 자각하도록 만들었다.

사프론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정박된 스태어티스의 요트, <라이언 로어> 호가 석양에 온통 물들어 있었다. 태양은 바다를 온통 핏빛으로 물들이는 장엄한 광경을 연출하며 지평선 아래로 떨어졌다.

"당신은 베로나의 야외 오페라를 관람해야 해. 그건 정말 놓칠 수 없지"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덮었다. "나에게 당신과 동행할 것을 허락해 주겠소, 사프론?"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매력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승낙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오페라 관람 이상을 요구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녀는 손을 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젠 떠날 시간이에요. 안나가 날 필요로 할 거예요"

"그녀만 당신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오" 알렉스가 상쾌한 저녁 공기 속으로 그녀를 이끌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바닷가에 멈춰 서서 그녀의 허리를 살짝 잡았다.

사프론은 긴장했다. 왜 그의 말이 위협처럼 들리는지 의아스러웠다. 그의 모습과 손길은 그녀에게 기쁨을 약속해 주고, 비밀스럽게 원하게 만드는데...

"재미있군. 서곡을 좋아하는 여자라..." 그가 허리를 굽혀 그녀의 머리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당신은 이 키스도 매우 천천히 접수하겠군" 그의 검은 눈동자는 그녀를 희롱하듯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사프론도 미소 지었다. 긴장이 풀렸다. "맙소사, 그건 끔찍한 말장난이에요, 알렉스!"

"하지만 먹혀들었잖소, 당신이 웃었으니까" 그들은 손을 잡고 요트로 돌아갔다.

 

3

다시 안나와 자리를 함께 하게 되자 사프론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프론은 오후의 긴장과 알렉스의 성적인 매력을 마음 한 구석으로 몰아내고, 별이 총총 빛나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요트 후미 갑판에서 그들 모자와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사프론은 포도주를 홀짝이며 짙은 속눈썹 너머로 알렉스를 훔쳐보았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대화에 몰두해있었다. 그녀는 자신과 관계없이 대화가 흘러가는 편이 그를 살펴볼 수 있어서 훨씬 더 좋았다. 그는 미남은 아니었다. 각이 진 그의 얼굴에는 무자비한 오만불손함이 엿보였다. 그런데도 그는 그녀를 무작정 매혹시켰다.

왜일까? 알렉스 스태어티스처럼 강인하고 매력적인 남자와 사랑을 나눈다면 기분이 어떨까? 궁금해하는 것은 왜일까? 그리고 왜 그가 낯이 익을까? 그녀는 수백 번도 더 넘게 생각해보았다. 그는 그녀의 생활 범위 밖에 있는 사람이다! 크림색 바지와 청색 폴로 셔츠 맨발에 편안한 청색 신발을 신은 그는 자제된 힘을 발산했다. 그가 추진력이 강한 사업가라는 내기를 걸 수도 있다. 그런데 그는 무슨 사업을 할까?

"실례하지만, 일이 있어서요" 갑자기 들려온 알렉스의 목소리에 사프론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시 그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놀란 얼굴에 와닿았다.

"어머니가 너무 늦게 계시지 않도록 해요. 알겠소, 사프론? 내일 손님들이 도착할 거요"

"!" 안나가 야멸차게 코웃음을 쳤다. "넌 착한 아내를 갖고 나에게 손자들을 안겨 주었어야지, 그런 바보들 대신 말야"

"내가 정작 그러면 어머니는 놀라실걸요" 그는 안나에게 대답하면서도 사프론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오, 사프론? 내가 좋은 남편감으로 보이나?" 그가 조롱하듯 물었다.

"모르겠군요. 난 당신을 잘 모르니까" 그녀는 냉정하게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때 안나의 얼굴에서 아주 이상한 표정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난 우선 당신을 확신시켜야겠군" 알렉스가 중얼거린 다음 안나의 이마에 키스를 던졌다. 그리고 말을 덧붙였다. "훌륭하게 처신하겠다고 약속하셨으니, 그걸 지키세요"

"무슨 말이죠?" 알렉스가 떠나자 사프론이 안나에게 물었다. "당신은 항상 훌륭하게 처신하시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당신은 아직 손님들을 못 봐서 그래" 안나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사프론은 더 이상 설명을 듣지 못했다.

다음날 오후 7시경 사프론은 안나의 말뜻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요트는 아침 일찍 아테네 중심가에서 약 30분 거리에 있는 활기찬 항구에 입항했다. 아침 식사 이후 알렉스는 내내 보이지 않았다. 아침 식탁을 떠나며 알렉스는 평소처럼 어머니에게 키스를 한 다음 놀랍게도 사프론의 부드러운 입술에 짧은 키스를 던졌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연극이 시작된 이후 당신이 최고요"

얼굴이 붉어진 사프론은 고양이처럼 미소 짓는 안나를 쳐다보았다. "저게 무슨 말이죠?" 그녀는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잊어버려, 사프론. 알렉스는 그 자신이 법이잖아"

그 말을 잊긴 쉽지 않았다. 그때 세 대의 검은 리무진이 항구로 미끄러져 들어오더니, 보이지 않던 알렉스가 손님들과 함께 차에서 나왔다.

"나를 좀 부축해 줘, 사피. , 영접을 해볼까"

안나가 승선 계단을 올라오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그다지 내키지 않나 보죠?" 사프론이 안나의 팔을 잡고 갑판 선미 쪽으로 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래" 안나는 속삭인 다음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자들에게 사교적인 미소를 던졌다. 그리스 여자들이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안나와 같은 나이 또래의 한 숙녀는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캐서린, 다시 보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몰라" 양쪽 볼에 키스를 한 다음 안나는 젊은 숙녀에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마리아, 정말 멋지구나. 알렉스, 이 친구분은 누구시니?" 안나는 나이 지긋한 남자와 함께 서 있는 아들에게 물었다.

"실비아를 소개시켜 드리죠. 지난 3년 동안 우리 헬스와 레저 지점망의 유능한 지배인으로 일해 왔습니다."

사프론은 놀라 현기증이 일었다. 알렉스가 헬스클럽 지점망을 소유했구나. 그래서? 그녀와는 전혀 관계없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뭔가 생각날 듯 말 듯했다. 기억을 해낼 수만 있어도... 그러나 그녀는 한바탕 소개에 휩쓸려 들어가면서 기회를 놓쳤다.

실비아는 초대객 중 유일하게 영국 여자로 30대가량 되었다. 검은 머리칼, 검은 눈동자, 완벽한 용모의 소유자로 카사노바도 홀릴 듯한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사프론이 안나의 말벗이라는 사실을 알자 경멸적인 시선으로 대했다. 캐서린과 그녀의 딸 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나이 지긋한 스피로스는 캐서린의 남편인 듯했다.

사프론은 친척들에게 둘러싸여 침묵만 지키고 있는 안나에게 걱정스런 시선을 던졌다. 안나 옆으로 가서 물었다. "괜찮으세요?"

알렉스가 어머니를 대신해 대답했다. "물론 괜찮고 말고, 어머니는 가족과 함께 있잖소" 하지만 사프론은 확신할 수 없었다.

방금 전에 사프론은 안나에게 방향 오일 마사지를 끝내고, 승무원이 가져다준 영국 차를 마셨다.

"우리 친척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안나는 냉소적으로 물었다. 이런 모습을 보긴 처음이다. "솔직하게 대답해 봐, 난 상관하지 않으니까"

"글세.... 난 그분들을 잘 모르잖아요. 첫인상으로 보았을 땐..." 사프론은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했다. "그들은 전형적인 그리스인 같아요"

다행히 안나가 밝은 웃음을 터뜨렸다. "정확해, 사피. 가끔 나 자신도 내 아들에게 영국 핏줄이 섞였다는 사실을 잊을 정도야. 그애는 그리스 식구들을 더 많이 닮았어. 그는 매년 친척들과 모여 휴가를 즐기자고 고집을 피워. 그게 나에게는 얼마나 비참한 일인 줄도 모르고 말야"

"왜요? 그들과 무슨 문제라도?"

안나는 찻잔을 작은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드라마틱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런 다음 진지한 푸른 눈동자로 사프론을 쳐다보았다.

"로도스섬 카페에서 언젠가 내 인생 역적에 대해 말해 주겠다고 했지? 지금이 바로 그때야"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 사프론은 안나의 목소리에 담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하지만 안나는 아무 말도 못 들은 것처럼 말을 계속 이었다.

"난 해야 해, 모든 그리스 비극들이 이야기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내 남편은 명예를 존중하는 남자였기 때문에 내가 임신하자 나와 결혼했어. 하지만 난 그를 사랑했고 행복했지. 그의 형은 캐서린과 결혼해 뉴욕에서 살고 있었는데, 난 캐서린을 보는 내 남편의 시선을 보고 그들이 친구 이상임을 알았어. 그들을 환영하는 파티에서 캐서린은 나에게 꽤 솔직하게 털어놓더군. 그는 항상 그녀를 사랑했지만, 당시 그의 형이 더 부자였기 때문에 형과 결혼했다고 말야. 하지만 손가락 하나로도 내 남편을 언제든 잡을 수 있다고 했어"

"맙소사! 심하군요"

"최악이지!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어. 난 남편에게 사실을 추궁했지. 그는 형보다 먼저 그녀를 알았다고 인정하더군. 하지만 이미 오래전에 끝난 일이라고 맹세했고, 난 그를 믿으려고 노력했어. 그의 형과 가족들은 휴가가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갔고... 알렉스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 다음 6년 동안 우린 전과 다름없이 지냈지. 하지만 난 내가 남편에게 있어서 최선의 선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아 버렸는걸" 안나는 반짝이는 푸른 눈으로 사프론의 충격받은 얼굴을 응시했다.

"그는 분명히 당신을 사랑했을 거예요" 사프론이 입을 열었지만 무시당했다.

"알렉스가 열여덟 살 때, 딸을 임신한 캐서린이 남편과 함께 돌아왔어. 우린 영국에서도 함께 휴가를 보냈지. 몇 주일 후 그녀의 남편이 죽고, 그녀는 비탄에 잠긴 과부가 된 거야. 그리고 그리스 전통에 따라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지. 몇 달 동안 그녀와 함께 지낸 후 난 남편에게 최후 통첩을 했어. 난 런던에서 지낼 테니, 캐서린과 그녀의 딸을 내보내든지 아니면 나와의 이혼을 선택하라고 말야. 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거든. 내가 두 달 동안 런던에서 지내고 있을 때, 그가 히스로 공항에서 전화를 해왔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거야. 하지만 그야말로 그리스 비극답게, 그는 공항에서 나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죽었어."

"하느님 맙소사!" 사프론이 소리쳤다.

"내가 어쩌겠어? 도저히 내 아들에게, 그의 아버지가 나와 이혼하고 캐서린과 결혼하려 했다는 걸 말할 수 없었어. 난 그 애가 아버지에게 실망하게 되길 원치 않았거든. 당연히 내 아들은 내가 왜 그리스 친척들을 좋아하지 않는지 이해를 못하고, 그건 우리 사이에 큰 벽을 만들었어. 우습게도 캐서린은 내 남편의 장례식 후 아테네에 아파트를 마련했지. 그리고 난 런던에서 지냈지만, 알렉스는 그리스에 기반을 두기로 결정했어.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업을 시작했거든. 5년 전 캐서린이 재혼한 다음부터 알렉스와 나와의 관계도 이전보다 훨씬 호전되었지. 난 매년 세렌디피도스 섬에 있는 저택을 방문해. 사실상 그건 내 섬이야. 내 남편이 나에게 그 부동산을 남겼거든. 하지만 이제 당신은 내가 왜 이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지 이해하겠어?"

사프론은 이렇게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듣기는 처음이었다. 낭만적인 안나에게 그런 스트레스가 있었다니... "하지만 왜 아들에게 말하지 않았죠? 그러면 훨씬 나을 텐데..."

"아니, 내가 그애를 사랑하는 이상으로 그는 훨씬 그리스인다워. 가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지. 난 이미 그 애에 대한 기대를 버렸기 때문에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

만일 그 남자가 그렇게 무감각하도록 냉정하지만 않았던들, 수년 전에 어머니의 감정을 알아차렸을 거야. 사프론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난 그에게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니야, 소용없어. 당신이 이렇게 흥분할 줄 알았다면, 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거야" 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밤, 날 가능한 한 아름답게 치장해 줘. 아홉 시에 식당에서 정찬을 먹게 될 거야"

그리고 옷장으로 향했다. ", 사피, 최선을 다해. 난 캐서린보다 훨씬 낫기를 바래"

사프론이 안나가 바라는 대로 최선을 다해 치장해 준 덕분에 안나는 매우 아름답게 보였다. 그녀의 긴 머리칼은 우아한 시뇽 스타일로 정리되었고, 목과 귀에는 다이아몬드가 번쩍거렸다. 그리고 중국산 청색 실크로 만든 고전적인 드레스는 안나의 날씬한 모습을 강조했다. 그녀는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숙녀처럼 보였다.

사프론은 런던의 한 중고품 매매 상점에서 구입한 한 벌밖에 없는 정장 드레스를 입었다. 상체와 옷단에 검정 수가 놓여진 단순한 검정 드레스로, 랄프 로렌의 작품이었다. 그녀의 날씬한 몸매에 딱 맞고 스커트에 긴 절개선이 들어가 있으며, 목선이 대각선으로 비스듬하게 처리되었기 때문에 한쪽 어깨와 팔이 그대로 드러났다. 얼굴 주변에 몇 가닥만 남기고 긴 붉은 머리를 높이 올려 고정시킨 덕분에 목선이 더욱 강조되었다. 화장을 많이 해본 적이 없는 그녀였지만, 오늘 밤만은 정성껏 화장을 했다.

사프론은 안나의 팔꿈치를 단단히 부축하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고의로 늦게! 안나는 친척들과 함께 식사 전에 술을 마시며 대화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알렉스는 캐서린과 실비아, 처음 보는 두 명의 남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이 들어가자, 그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드디어 나와 주셔서 정말 기쁘군요, 어머니. 슬슬 걱정하기 시작했거든요"

그의 검은 눈동자가 사프론을 보고 번쩍 빛을 냈다. 그는 그녀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훑어보더니 슬쩍 미소를 지었다. 사프론은 그가 고의로 그런 행동을 한다는 걸 알고 얼굴을 붉히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근사해, 꽤 시간이 들었겠군" 그가 여유 있게 말을 끌었다. "당신뿐만 아니라 어머니까지 돌봐 드려야 했으니 아주 힘들었을 거요, 마틴 양"

"그렇지 않아요, 스태어티스 씨" 그녀가 반박했다. 지난 이틀 동안 친한 척하더니, 지금은 성으로 불러 내 입장을 상기시키는군. 사프론은 아니꼽게 생각했다. 나쁜 자식! 하지만 어떻게 자기의 어머니를 저렇게 냉소적으로 대하는 거지? 그녀는 분개한 채로 알렉스로부터 새로 도착한 두 남자를 소개받았다. 좀 전에 헬리콥터 소리를 듣긴 했지만, 별 생각를 못 했다.

제임스는 알렉스의 개인 보좌관으로, 20대 후반의 키가 큰 금발의 영국인이었다. 회계사라는 다른 남자는 안드레스라는 그리스인이었다. 아홉 시에 식사가 시작되자 사프론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그녀는 뒤로 물러나서 무시당하겠지. 하지만 예상대로 되지 않았다.

그들은 큰 둥근 식탁에 앉았다. 알렉스는 물론 상석에 앉았고, 그 오른쪽에는 어머니를, 그리고 왼쪽엔 실비아를 앉혔다. 안나 옆에는 안드레스와 캐서린, 그리고 남편이 앉았고, 실비아 옆으로는 마리아와 제임스, 마지막으로 사프론이 앉았다.

"남자 한 명이 부족하군" 캐서린의 남편 스피노스가 싱글거렸다.

"멋진 남자 한 명이 다른 열두 명보다 훨씬 가치가 있죠" 실비아가 교태스런 시선으로 알렉스를 보며, 그의 팔에 빨갛게 매니큐어 칠 한 손을 얹었다.

사프론은 그녀 앞에 펼쳐지는 장면에 경멸적인 미소를 지었다. 지금에야 왜 그가 그녀를 성으로 불렀는지 이해가 되었다. 여자 친구가 도착한 지금은 사프론이 그를 방해하길 원치 않았던 것이다.

흰 정장을 멋지게 입은 알렉스는 자신의 팔 위에 놓인 손을 다독거리며, "그 말을 칭찬으로 알아듣겠소, 실비아, 달링" 하고 말했다. 그의 어두운 눈동자가 사프론의 조소 어린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그 깊은 곳에서 묘한 빛이 일렁거렸다. 하지만 그의 사촌 마리아가 속사포처럼 그리스어를 쏟아 내며 분위기를 깼다.

사프론은 그 대화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물론 그리스어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녀는 속이 불편해 손가락으로 드레스 끝단을 만지작거렸다. 빨리 식사가 끝나기만 바랐다. 그녀는 상류사회에 대해서도 별 흥미가 없었을 뿐 아니라 평소와 달리 잘 재단된 흰 재킷을 걸친 알렉스가 큰 위협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순간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며 뭔가 대답을 기다리는 걸 발견하자, 그녀는 깜짝 놀랐다.

안나가 침묵을 깼다. "마리아는 지금 당신이 사용하는 선실을 매년 사용했는데, 올해는 그렇지 못하게 되어 속상해하고 있어"

"굳이 설명할 필요 없어요, 어머니. 이 문제는 이미 결정되었어요" 알렉스가 짧게 대답하자, 사프론은 그녀 자신과 어머니에 대한 그의 오만한 처사에 다시 화가 치밀었다. 그가 자신의 사촌으로부터 그녀를 방어해 주었다는 사실은 완전히 무시한 채.

다행히 승무원이 첫 코스를 가져오자 잡담이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마음 편한 식사가 아니었다. 제임스는 드러내 놓고 사프론에게 관심을 표시했다. 그리고 그녀가 런던에 산다는 것과 시간이 있을 때마다 런던의 화랑을 구경하길 좋아한다는 걸 알아냈다. 그들은 국립 박물관에 대해 활기차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알렉스가 끼어들었다.

"제임스?" 알렉스가 의심스럽다는 듯 사프론을 노려보더니 옆자리의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네는 이곳에 우리 어머니의 말벗을 유혹하러 온 게 아니라 일하러 온 거야. 그 점을 명심하게"

침묵! 마리아가 낄낄거리며 좌중의 긴장을 깼다. 사프론은 얼굴이 뜨거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놀란 시선으로 고용주를 보던 제임스가 진짜 영국 신사답게 대답했다. "사프론이나 다른 여자들에 대한 내 관심이야 항상 공명정대하죠" 그리고 유감스러운 듯 말을 덧붙였다. "위험 수위에 오른 성적 절정감 때문에 건강이 걱정되시는 분들은 나처럼 살면 됩니다" 폭소가 터지며 다시 분위기가 풀어지자, 사프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악은 지나갔다고 믿으면서,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첫 코스로 나온 파테(고기나 간을 짓이겨 한 요리)는 맛있었다. 다음에 나온 소스가 첨가된 바닷가재 요리도 완벽했다. 하지만 식사중에 사프론은 절대로 알렉스를 보지 않았지만, 그의 깊은 목소리와 웃음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녀는 자신에 대한 그의 특별한 관심에 화가 났다. 덕분에 이런 진수성찬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다니!

"그렇지 않소, 사프론?" 알렉스의 특색 있는 어조가 사프론의 생각을 방해했다.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불러 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하나? 그녀는 속이 틀렸다. 그녀는 또 사람들이 일제히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래요, 사프론. 말 좀 해봐요" 실비아가 다그쳤다.

"알렉스에게 누가 그런 짓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하지만 사프론을 보는 실비아의 눈매가 사나웠다.

"정말 알렉스를 도둑이라고 실수했단 말이오?" 스피노스의 질문에 사프론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눈치챘다.

그녀는 천천히 포크를 내려놓고 알렉스를 건너다보았다. 그녀는 그의 갈색 눈 깊은 곳에서 장난기가 번뜩이는 것을 보고, 화가 치솟았다.

"그걸 실수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고 봐요" 그녀는 냉소적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사실이에요. 난 그의 목을 치는 동시에 무릎으로 그의 사타구니를 올려 찼어요" 그녀가 재치 있게 말하며, 실비아를 의미심장하게 보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의 여자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예요. 그가 어떤 영구적인 손상을 입었는지는 심히 의심스럽지만요"

스피노스가 폭소를 터뜨리며 팽팽한 분위기를 깼다.

"맙소사! 내가 그걸 보았어야 했는데, 위대한 알렉산드로스가 여자의 일격에 무릎을 꿇다니"

다른 사람들도 모두 한마디씩 던지자 사프론은 조용히 대화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제임스는 다른 생각이 있는 듯 보였다. 그녀는 알렉스의 말 때문에 제임스가 자신을 무시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가 용감하게 그녀를 대화에 끼워 주자, 사프론은 부끄러워졌다. 그녀는 알렉스가 매처럼 자신을 노려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후에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실 때 사프론은 안나 곁에 있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캐서린이 추억을 늘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사프론은 캐서린의 행동이 고의적이란 사실을 확신했다.

"알렉스가 가문의 유일한 남자라는 게 이상해질 때가 있어. 안나, 당신도 우리 남편들이 얼마나 형제애가 대단했는지 기억나지? 그리고 내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죽은 지 벌써 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니! 젊은 나이였기 때문에 더 슬펐어. 하지만 우린 이곳에 있으니, 한 가족으로 말야"

악독한 여자 같으니! 사프론은 걱정스런 시선으로 안나를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안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속은 편치 않으리라.

사프론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례합니다, 여러분. 긴 하루였어요" 그녀는 안나에게 다가갔다. "갈까요, 안나?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어깨도 마사지 받아야지요"

"?" 놀랐던 안나가 재빨리 말을 알아들었다. "그래, 그래야지"

사프론은 안나를 부축해 일으켰다.

"어깨?" 알렉스가 사프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무릎만 치료하는 줄 알았는데"

사프론은 혀를 깨물고 싶었다. 좀더 신중하게 생각했더라면,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텐데. .... 그게 그러니까.."

안나가 구조에 나섰다.

"대단한 건 아냐, 알렉스. 단순히 어깨가 결리는 것 뿐이야. 그리고 사프론의 손은 정말 약손이거든. 난 그녀의 재주에 감탄했단다. 네가 양해해 주리라 믿는다. 난 너무 피곤하거든"

"선실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어머니"

사프론은 모자를 따라 안나의 선실로 갔다. 그녀는 방문 앞에서 그들이 대화하는 동안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죠, 어머니?" 알렉스가 안나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재빨리 물었다. "어머니가 비밀스럽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내가 어머니를 사랑하고, 진정으로 염려하고 있다는 걸 아셔야 해요"

사프론은 어머니를 보는 다정한 알렉스의 시선에 충격을 받았다. 안나는 사고를 당했다고 그에게 말해야 한다. 이렇게 애정 깊은 알렉스라면 분명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의 다음 말은 환상을 깼다.

"우리 가족은 일 년에 잘 해봐야 두세 번밖에 보지 못하잖아요"

"알아, 하지만 너도 알잖니. 내가 좋아하는 곳은 런던이야, 다른 곳은 싫어" 안나가 손으로 그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잘자거라, 얘야" 그녀는 중얼거린 다음 선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프론도 따라 들어가려다 크로 강한 손에 의해 제지를 당했다.

"잠깐만, 사프론?"

"원하는 게 뭐죠?"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려 노력했다.

"당신, 사프론" 그가 허스키한 음성으로 중얼거리자, 그녀의 몸 깊은 곳에서 의지에 반하는 감정이 치솟았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내려오는 그의 얼굴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키스 대신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 "하지만 난 기다릴 수 있소...." 그의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뺨을 간질였다. "당신과 어머니가 무슨 계획을 꾸몄는지 정확하게 알아낼 때까지..."

그녀는 피부에 와닿는 그의 숨결에 진저리를 쳤다. 전에도 욕망을 느낀 적은 있지만 지금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알렉스는 전혀 진지하지 않다. 어제 그만큼 당하고도 다시 그의 장난에 놀아나다니. 그녀는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비켜 주세요, 안나가 절 필요로 해요" 그녀는 문고리를 잡고 열려고 했다.

"나도 그렇소! 나도 당신이 필요해!" 알렉스가 허스키하게 속삭이며 그녀의 귓볼을 깨물자, 온몸이 떨렸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사프론은 손을 뒤로 뺐다.

"실비아나 유혹하세요" 그녀는 이를 갈며 소리쳤다. 또다시 바보가 될 수는 없다. "그녀라면 환영할 거예요. 당신 두 사람은 똑같은 사람들이니까"

"그렇겠지!"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홍조 띤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당신과 제임스가 동류라는 착각은 하지 마. 난 절대로 허락 못 해"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만한 남자 같으니. 그녀는 분개해하며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말싸움할 때가 아니다. 가능한 한 열을 덜 받고 이번 휴가를 보내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돈이 필요하고, 알렉스와의 거리만 지킨다면 뜻을 이룰 수 있다. 그녀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안나의 선실로 들어갔다.

안나는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사프론이 들어가자 걱정스럽게 얼굴을 찌푸리며 쳐다보았다. "알렉스가 내 사고에 대해 의심하는 것 같아?"

"아뇨, 하지만 그는 당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오랫동안 어머니를 방치한 주제에. 그녀는 속으로 덧붙였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며칠은 사프론에게 천국과 지옥이었다. 요트는 푸른 바닷물결을 헤치며 유유히 항해했고, 초여름의 열기를 머금은 태양과 대기는 완벽했다. 그들은 키트노스, 세리포스, 시프노스, 키몰로스와 파로스 등 사이클라데스 군도를 유람했다.

사프론은 최선을 다해 알렉스를 피해 다녔고, 마침 안나도 침실에서 아침 식사를 하겠다고 했다. 사프론은 연약한 피부를 핑계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이른 아침에 혼자 수영을 즐겼다. 하지만 3일째 되는 날 아침, 검은 수영복을 걸친 알렉스가 돌연 수영장에 나타났다.

사프론이 수영장에서 숨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그는 완벽한 다이빙으로 물속으로 뛰어들더니, 사프론이 서 있던 수영장 옆의 수면 아래로 불쑥 튀어나왔다. 그의 강렬한 시선에 그녀는 몸을 떨었다. 그는 손으로 그녀의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난 당신을 어디선가 보았어. 분명히 우린 전에 만난 적이 있어"

"그런 낡은 수작으로"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처음 그를 보았을 때부터 자신이 했던 생각을 그가 집어내자 깜짝 놀랐다.

"우린 전생에 인연이 있었나 보지" 그가 중얼거리며 그녀의 머리와 목덜미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리고 욕망의 끈은 지리지"

"제발..." 그는 그녀의 허리를 애무한 후 수영복 안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만졌다. "그만 하세요!" 그녀가 숨을 몰아쉬었다. "당신 어머니가 곧 나타나실 거예요"

"그래서?" 그가 조롱했다. "나는 성인 남자요. 그리고 어머니는 자신의 계획이 착착 들어맞는 걸 보며 좋아하실걸"

"계획?" 사프론은 말문이 막혔다.

"그렇게 걱정하지 말아요. 지금은 때가 아니오" 승무원이 커피잔과 주전자가 담긴 쟁반을 들고 지나갔다.

"방해꾼이 너무 많군. 하지만 난 당신을 갖게 될 거요. 사프론. 그러니 날 피하는 건 포기해, 알았소?"

사프론은 방문을 잠근 다음 욕실로 걸어갔다. 그리고 옷을 벗어 던졌다. 그녀는 샤워를 하며 알렉스 스태어티스를 저주했다. 내일 아침이면 요트가 피레우스 항구에 입항한다. 이젠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없다.

그날 아침에 알렉스가 수영장에 나타난 다음부터 그녀의 인생은 지옥이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그녀에게 손을 댔다.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는 건 예사고 뺨에 키스도 했다. 그리고 둘만 있을 때면 몸 어디든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는 그를 막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매혹시키고 유혹하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였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눈치챘다. 오늘 아침 일찍 실비아는 수영장에 나타나 자신의 생각을 똑똑히 밝혔다.

"사프론, 알렉스에게 자신을 던져 봐야 아무것도 얻지 못할걸요. 그는 다른 남자들처럼 눈앞에 차려진 밥상을 거절하지는 않죠. 하지만 착각하지 말아요. 그는 항상 나에게로 돌아오니까"

사프론은 그녀의 말에 너무 화가 나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을 쫓아 다니는 사람은 바로 알렉스다. 사프론은 아무 말 없이 수영장에서 나와 버렸다.

하지만 오늘밤! 그녀는 저녁 식사를 떠올리며 신음했다. 식탁에서 안나는 사프론 옆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사프론에게 영구적으로 일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사프론은 그녀에게 완곡하게 거절했다. "올해 연말쯤 내 가게를 열 생각이에요, 안나. 그건 항상 내 꿈이었어요. 하지만 당신을 첫 번째 고객으로 삼겠다고 약속드릴게요"

"하지만 내 어깨는 어쩌고? 난 매일 당신이 필요해"

안나는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몇 주 내로 어깨는 정상으로 돌아올 거예요"

"하지만 난 당신이 해주는 게 마음에 드는데..."

"곧 날 필요로 하지 않게 될 거예요." 사프론은 자신의 목소리가 커졌다는 걸 미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곧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다. 그녀의 초록색 눈이 악마처럼 사악한 알렉스의 갈색 눈과 마주쳤다.

"당신이 필요해, 사프론. 어머닌 그렇지 않을지 몰라도, 난 그렇다는 걸 알잖소" 그가 즉시 조롱했다.

그의 말에 침묵이 감돌았다. 사프론은 일곱 쌍의 눈동자가 일제히 자신의 홍조띤 얼굴에 집중되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웃어넘기려 했지만 바짝 마른 입술이 따라 주질 않았다. "그래요, 그렇게 말하실 만해요" 그녀는 안나가 자신을 용서하길 바라며 덧붙였다. "나에게 당신 어머니를 떠맡기면, 당신은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을 테니까요"

그의 짙은 눈썹이 치켜 올라가고 입술은 팽팽해졌다.

격한 분노로 그의 눈동자가 검게 변해 갔다. 그는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순간 실비아가 분위기를 살렸다.

"당신은 그걸 모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 없어요. 사프론. 우리 모두 알렉스의 말뜻을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가 어머니를 극진히 모신다는 건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고요. 또 당신과 안나는 서로 잘 지냈잖아요"

다시 평범한 대화가 시작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식사 내내 사프론은 알렉스의 분노가 무서워 감히 얼굴도 들지 못했다.

그녀는 샤워를 마치고 두터운 수건으로 몸을 감았다. 그리고 욕실에서 나오다가 우뚝 멈춰 섰다. 그녀는 방문을 바라보았다. 손잡이가 돌아가면서 시끄럽게 찰카닥거렸다.

"이 문 열어, 사프론. 난 당신과 대화하고 싶소" 알렉스의 목소리였다.

어림없지.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그녀는 문을 잠그고 열쇠를 내버렸다. 보조열쇠를 가져와 봐야 소용없을걸. 제게 이런 선견지명을 주신 하느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는 알몸으로 침대에 누웠다. 만족스런 미소가 얼굴 가득히 퍼졌다.

다음날 이른 아침, 사프론은 안나에게 가려고 복도로 나갔다.

투명한 네글리제를 걸친 실비아가 건너편 방문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그녀는 한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속삭였다. " , 알렉스는 잘 필요가 있어요. 거의 새벽녘에야 잠들었거든요" 실비아의 입술에 미소가 퍼졌다. 그녀는 꼭 카나리아를 잡아먹은 고양이 같았다. "내 말을 이해하죠, 사프론? 하지만 그의 어머니가 함께 계시니, 비밀을 지켜 주세요..."

 

4

너무도 놀란 사프론은 잠시 눈을 감고 가슴에 퍼져나가는 아픔을 견뎌 냈다. 이건 식전 배고픔에 불과하다고 애써 변명했지만 그건 거짓이었다. 질투의 쓴맛을 보긴 난생처음이었다.

얼이 빠진 그녀는 안나의 선실로 걸어 들어갔다. 바보처럼 눈 먼 자신이 놀라웠다. 실비아와 알렉스를 질투하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알렉스는 단지 자신을 희롱하는 것뿐이고, 그의 관심이 진실된 것이 아니라고 수없이 다짐하지 않았던가. 때문에 알렉스와의 말다툼을 즐기면서도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었다. 하지만 그의 방을 나서는 실비아를 보니 가슴에 응어리가 맺힐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래,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선 은밀한 바람이 숨겨져 있었다. 알렉스가 그녀에게 친절을 베푼 미코노스섬 이후.

"빨리 왔네, 안 그래도 다른 사람들과 합류하기 전에 단둘이서만 얘기를 하고 싶었어"

사프론은 침대에 앉아 있는 안나를 바라보았다. 안나 곁에는 커피잔과 주전자가 놓인 쟁반이 있었다.

", 이리 와서 앉아, 커피 좀 마셔" 사프론은 로봇처럼 그 말에 따랐다. "어제 저녁 일 때문이야, 사프론. 지난 몇 주 동안 내가 당신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아. 사실 우리 모자 관계는 아주 좋아. 하지만 난 사고로 기분이 침체되어 있었던 거야. 알렉스가 오스트레일리아에 있었기 때문에 난 자기 연민에 빠졌어"

"나에게 오해를 불러일으켰다구요?"

"그래, 알렉스는 매달 런던에 있는 집을 방문해. 그리고 매일 나에게 전화로 문안 인사를 하는걸. 게다가 가을엔 세렌디피도스 섬에서 함께 휴가를 보내고, 그애는 정말 효자야. 한번도 날 내팽개치거나 한 적이 없어"

"알아요, 안나. 어젯밤 내가 한 말은 날 방어하기 위해서였어요. 당신 아들은 날 놀리길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 당신이 이해해 주니 정말 기뻐. 왜냐하면 알렉스는 거친 외면 뒤에 굉장히 부드러운 마음씨를 지녔거든. 그리고 난 당신이 그애를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줬으면 했어. 특히 그애가 당신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지금은"

날 좋아해?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는 치마만 둘렀다하면 다 좋아하는걸. 사프론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할 말이 또 있어. 가을엔 나와 함께 세렌디피도스섬에 가지 않겠어? 그곳은 정말 아름다워. 어제저녁에 당신은 계약을 영구적으로 맺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1, 2주일 정도 연장할 수 있잖아?"

사프론은 고개를 숙였다. 몇 주 동안 알렉스의 주변에서 그녀가 평정을 유지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가 곁에 오기만 해도 그녀의 몸은 제멋대로 반응하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이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

안나는 사프론의 망설임을 눈치챘는지 덧붙여 말했다. "좋아,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생각을 해봐. 태양과 바다, 영국의 가을보단 훨씬 좋을 거야"

"좋아요, 안나. 당신 말에 따를게요" 오늘 아침에 받은 충격이 알렉스에 대한 끌림을 차단시켰다. 그리고 안나와 영국에서 여름을 보내는 동안 그 남자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사라질 거야. 그녀는 이성적으로 자신에게 말했다.

갑판에 차려진 아침 식사는 평상시처럼 부산스러웠다. 정오경에 제임스와 안드레아스는 서둘러 작별 인사를 하고 아테네로 떠났다. 알렉스는 사프론에게 안나를 모시고 헬리콥터로 공항에 갈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공항에 개인 전용기를 준비시켜 놓았다고 했다. 그는 나머지 사람들과 아테네로 갈 예정이었다. 그의 본부는 그곳에 있고, 이젠 일을 해야 할 때니까.

승무원이 짐을 싣는 동안 검은 대형 곤충처럼 보이는 헬리콥터의 프로펠러가 회전하며 이미 이륙할 준비를 갖췄다.

"어머니, 항상 보고 싶을 겁니다. 즐거운 비행을 하세요, 곧 연락드릴게요"

사프론은 알렉스의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나의 좌석 옆에 서 있던 그가 고개를 숙여 어머니의 뺨에 키스를 했다. 그는 고개를 든 다음 사프론을 주시했다. 그녀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남 몇 주 동안 보았던 캐주얼한 차림의 남자 대신 어두운 색조의 정장을 입은 사업가가 서 있었다. 그의 넓은 어깨를 넉넉하게 감싼 재킷, 우아한 바지, 검게 탄 피부와 대조를 이루는 흰 실크 셔츠, 그리고 보수적인 줄무늬 넥타이. 한 손엔 검은 가죽 서류 가방까지 든 모습은 영락없이 재벌 사업가였다. 그녀의 몸이 충격으로 떨려 왔다.

"이제 가봐요" 알렉스가 말꼬리를 끌었다. 하지만 그의 다음 말은 전혀 그녀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번개를 맞은 것 같았다.

그녀는 그를 본 적이 있다! 7년 전에.... 넋이 나간 그녀는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서둘러 안나를 헬리콥터 안으로 밀어넣었다. 헬리콥터에 오르는 자신을 지켜보는 알렉스의 찌푸린 얼굴이나 강렬한 시선도 느끼지 못했다. 가능한 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녀는 안나와의 대화를 방해하는 헬리콥터의 소음이 고맙게 느껴졌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7년 전 전문 대학을 졸업한 후, 그녀의 첫직장인 호화 헬스클럽에 첫 출근한 날이 곧 마지막 날이었다. 접수실에서 서 있던 남자는, "이제 가봐요"라고 말했다. 그때 그녀가 느꼈던 분노와 수치심, 청색 정장을 입은 키가 크고 가무잡잡한 남자는 한 손에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한마디 말도 못 하고 그곳을 뛰쳐나가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냉소적인 쓴 미소가 그녀의 부드러운 입가에 맴돌았다. 알렉스 스태어티스가 바로 그 남자였다.

사프론은 부드러운 안나의 손길에 공항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마치 꿈결처럼 안나를 부축해 헬리콥터에서 내려오게 하고, 조종사를 따라 개인 전용기로 갔다. 여전히 멍한 상태에서 그녀는 안나 옆에 앉았고, 비행기가 이륙할 때까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비행 중 내내 안나는 잠들었다. 밤늦게 런던에 있는 안나의 집에 도착해 하얀 레이스가 달린 4기둥 침대에 누웠을 때에야 사프론은 마음이 아파 왔다.

개인 요트, 전용 비행기, 멋진 저택, 귀중한 골동품, 개인 소유의 섬! 그녀는 분노로 이를 갈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환경에서 살게 된 그녀를 행운아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사프론은 이 돈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안다. 하지만 몇 가지 질문을 던진 바에 의하면 안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저녁 식사 후 사프론은 알렉스의 사업에 대한 얘기를 화제로 삼았다. 그러다 마침내 하루 종일 가슴에 맺혔던 질문을 던졌다.

"그가 런던에 헬스클럽을 가지고 있다면서요? 윔블던에 있다던가"

"어딘가에 있다고 들은 것도 같은데, 잘 모르겠어. 사피. 알렉스가 가업인 선박업을 물려받았을 때는 사정이 좋지 않았어. 그애는 노예처럼 일해서 이윤을 창출하고, 수년 동안 사업을 확장시켰지. 난 그 애를 도와줄 수 없었어. 사업에 대해선 일자무식이거든. 하지만 알렉스는 이제 업계에서 꽤 유명해. 신문 가십난에 그애의 수많은 연애 사건이 보도되기도 하고 말야. 정말 끔찍한 일이야"

사프론은 침대에 앉아 손에 얼굴을 묻었다. 하나밖에 없는 친구 이브의 비참한 죽음이 떠올랐다. 이브를 그렇게 죽게 만든 건 알렉스 스태어티스와 그와 같은 남자들이다. 그녀는 누나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옷을 벗었다. 그리고 샤워를 한 다음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유 없는 무덤은 없다고 했지? 그녀는 통렬하게 생각했다. 알렉스는 확실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조금 전에 안나는 가을 여행에 대해 언급하면서, 몇 년 전 알렉스가 세렌디피도스에 있는 별장을 완전히 부숴 버리고 새 저택을 지었다고 말했다... 더럽게 벌어들인 돈으로. 그에 대한 미움과 증오가 그녀의 마음에서 휘몰아쳤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지만 헛수고였다. 대신 그녀는 다시 열여덟 살 당시로 돌아갔다.

사프론은 다시 한번 금장 손목시계를 쳐다봤다. 830분 그리고 코벤트 가든에 있는 작은 맥주 집의 출입구를 다시 응시했다. 이브에게 30분 지각은 예삿일이다. 그녀는 5분만 더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이브와 자신이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는 건 슬프지만 사실이다. 항상 그랬어. 그녀는 슬프게 생각했다. 오래전 고아원에서 나간 이브는 이스트엔드에서 다른 여자와 아파트를 나눠 쓰고 있다. 그에 비해 사프론은 고아원을 떠난 지금 YWCA에서 지내고 있다.

지난 6월 사프론은 전문 대학에서 메이크업과 마사지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리고 지난 2개월 동안 헬스클럽과 미용실 등에 일자리를 알아보았지만 운이 따르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님이 비극적으로 돌아가셨을 때, 집을 판 돈으로 부채와 이런저런 비용을 충당하니 사프론에겐 얼마 남지 않았다. 열여덟 살 생일 때 그녀는 약 2천 파운드와 어머니의 금장 시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일자리를 구하는 동안 그녀의 밑천은 금방 바닥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녀의 유일한 사교 생활은 한 달에 한 번 이브와 만나는 것뿐이었다.

"사프론, 늦어서 미안해. 하지만 주차 장소를 찾을 수 없었어"

사프론은 고개를 들며 미소를 지었다. 키가 크고 멋진 금방인 이브는 오늘 밤 더욱 행복하고 빛나 보였다.

"그래서 닉은 별수없이 주차 금지 장소에 차을 세웠지 뭐니. ! 닉은 새로운 내 남자 친구야. 그는 정말 마음이 넓단다. 그리고 부자야. 이 명함을 주고 싶어서 너에게 전화했어. 윔블던에 있는 호화 헬스클럽, 스튜디오 96의 주소야. 닉이 그곳의 공동소유자란다. 내일 11시에 찾아가서 닉의 이름을 대면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거야" 이브는 손키스를 보내며 인사했다. "안녕!" 그리고 떠나 버렸다.

정말 그렇게만 되었어도. 사프론은 침대에서 뒤척이며 생각했다. 당시 너무나 순진했던 그녀에겐 그 명함이 신의 선물처럼 보였다.

그다음 날 사프론은 지배인이었던 엄격해 보이는 여자와 면접을 했다. 그녀가 닉의 이름을 대자마자, 곧 다음날 12시부터 일을 시작하라고 했다. 사프론은 전혀 불안을 느끼지 못했다. 그 헬스 클럽은 번화가에 있었고, 체육관과 온천, 사우나, 여러 개의 개인 마사지실에 이르기까지 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다. 그 여지배인은 고객에게 성적 행위를 제공하는 게 발각되면 당장 해고당한다고 경고까지 했다. 귀족에서 국회의원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지도층이 단지 긴장을 풀고 쉬려고 애용하는 클럽이라는 것이다. 그 이상은 없다!

그다음 날 여지배인은 사프론의 첫 고객이 1215분에 전신 마사지를 받으fj 온다고 알렸다. 사프론은 작은 사물함에 겉옷과 개인 사물을 보관한 다음, 40대 중반의 비대한 신사를 첫 고객으로 모셨다.

약간 신경질적으로 된 그녀는 그 신사에게 겉옷을 벗고 타월을 두르라고 알려 줬다. 그녀가 필요한 오일을 가지러 간 동안 그는 침대에 엎드려 있었고, 그녀는 학교에서 배운 그대로 마사지를 시작했다. 제대로 된 마사지 살롱에서 남자 고객을 마사지할 때는 팔, 어깨, 그리고 무릎 이하의 다리만 하게 되어 있다. 그 이외의 부분은 남자 마사지사들이 하는 것이 보통이다.

15분 후 그 남자는 몸을 돌리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서둘러, 아가씨. 내가 긴장을 풀길 원하는 부위는 등이 아니라는 걸 잘 알잖아"

그는 완전히 공포에 질린 사프론의 손을 붙잡고 자신의 비밀스런 부위로 이끌었다. 그녀는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오일이 담긴 접시로 그를 내려쳤다.

그는 분노의 고함을 내질렀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내가 등이나 밀자고 그렇게 많은 돈을 냈는 줄 알아?"

사프론은 그에게 가운을 내던지고 사물함에서 코트와 백을 집어 들고 당장 출입구로 향했다.

"무슨 일이야...?" 그 여지배인이 데스크에서 소리쳤다. 그 옆에는 키가 크고 검은 정장을 입은 사업가가 한 손에 서류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어딜 가려는 거야, 아가씨? 당신에겐 손님이 있잖아"

"난 이곳이 최상류급인 줄 알았어" 가운만 걸친 그 살찐 남자가 사프론의 뒤를 따라나왔다. "분명히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했다구" 그는 고함을 질러 댔다. 사프론은 공포와 혐오로 기가 막혀 그의 얼굴을 멀거니 보기만 했다. 그때 그 키 큰 사업가가 몸을 돌렸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봤다. 알렉스 스태어티스였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손님"

"당신이 주인이야? 좋아, 난 내가 지불한 돈에 대한 전문적인 서비스를 받길 기대했어. 기술도 없고 피도 안 마른 아마추어가 아니란 말야"

"뭐라고요....!" 사프론이 불 같은 성질을 폭발시키며 소리쳤다. "이 살찐 뚱보야, 당신은 망신거리에다..."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키 큰 이방인이 그녀의 팔을 잡고 문 쪽으로 쫓았기 때문이다.

"이제 가 봐요"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잠시 그녀의 초록 눈동자가 그의 깊은 검은 눈과 부딪쳤고, 곧 그녀는 몸을 돌려 뛰어나갔다.

3일 후 이브가 YWCA에 나타나 일자리에 대해 물었다. 사프론은 그곳이 실은 고급 마사지실을 가장한 매음굴이었다고 설명했다. 법망이 허술한 틈을 타고 노다지를 파내는 금광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맺었다.

사프론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주먹을 쥐고 솟구치는 분노를 참았다. 그날로 일이 끝났다면 알렉스 스태어티스를 잊을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알렉스가 자신에게 키스하고 만지도록 허락한 생각을 하자 소름이 끼쳤다. 그 야비한 클럽의 동업자인 알렉스 스태어티스에게는 한 생명을 파멸로 이끈 책임이 있다.

그녀는 키 크고 웃음 많고 친구에게 헌신적이었던 10대 시절의 이브를 기억했다. 그다음 해 사프론은 작은 미용 클리닉에서 일자리를 구했고, 이브는 남자 친구인 닉과의 관계가 깊어졌기 때문에 거의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사프론은 스코틀랜드에 있는 온천에 일자리를 구해 런던을 떠났다. 그들은 계속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사프론의 마지막 편지는 수취인 주소 불명으로 되돌아왔다.

사프론은 3년 동안 스코틀랜드에서 일하다가 런던으로 돌아온 후 미용 에이전시에 소속되어 일했다. 그녀는 다른 두 사람과 아파트를 공동으로 사용하며 여가 시간에는 자신의 기술을 갈고 닦았다. 병원에서 자원봉사 일을 하면서 클리닉 메이크업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선천적인 반점이나 피부암 등으로 생긴 결점을 화장으로 커버하는 일을 좋아했다.

10개월쯤 후 어느 날 경찰이 찾아와 이브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 줬다. 이브는 사프론에게 편지 한 통을 남겼고, 경찰은 사프론의 소득세를 추적해 주소를 알아 낸 것이다. 이브가 닉의 손에 이끌려 사프론이 뛰쳐나왔던 마사지 클럽에서 일하면서 남자 손님들의 전신 마사지요구를 충족시켜 줘야만 했다는 내용이 편지에 적혀 있었다... 이브는 그 일을 싫어했기 때문에, 하루를 견디기 위해 술을 마시고 마약을 탐닉하게 되었다. 닉마저 그녀를 차버렸고, 그녀는 살아갈 희망이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프론에게 간곡한 충고의 말을 남겼다.

넌 모든 것을 가졌어, 사프론. 용모, 성격, 그리고 혼자 살아가 수 있는 전문 능력. 패배자로 태어난 나와는 달라. 나에게 약속해 줘, 사프론. 형편없는 건달에게 네 자신을 맡기지 않겠다고 말야. 네 꿈을 이뤄. 네 스스로 사장이 되어 자신의 사업을 하는 거야. 날 위해서도 그렇게 해줘. 넌 그걸 이룰 거야.

사프론은 망연자실해졌다. 다음날 그녀는 심리에 참가했고, 장례식을 준비했다. 그녀는 장례식의 유일한 하객이었다.

그녀는 소리내어 신음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집에 살면서 음식을 먹고, 클럽을 소유했던 사악한 악마의 돈을 받다니... 지금 그녀는 뭘 하는 거지? 안나를 탓할 수는 없었다. 이건 그녀와는 아무 상관도 없음을 사프론은 확신했다. 하지만 그녀는 살아 있는 동안 알렉스 스태어티스에겐 눈길도 주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그녀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몇 시간 후, 사프론은 안나의 마사지를 끝내고 떠나겠다는 운을 떼었다. "내 계약이 6개월이란 것을 알라요, 안나. 그리고 이제 겨우 한 달이 조금 넘었다는 것도 알지만,...."

"무슨 일이지, 사피? 마음에 걸리는 게 있군. 어제 요트를 떠났을 때부터 내내 입을 다물었잖아. 내가 너무 당신을 귀찮게 해서 그래?"

사프론은 배반감을 느꼈다. 이 여자에게 그녀의 아들은 쓰레기 중에 쓰레기이며, 그를 다시 본다는 생각조차 참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어떨까?

"당신 봉급을 올려 줄게"

"아니에요, 지금도 사실 많아요. 이건 단지 내가... , 아무것도 아니에요! 안나, 내가 말한 걸 잊어버리세요"

그녀는 안나에게 상처를 입힐 수가 없었다. 차라리 알렉스에 대한 증오를 감추고 꾹 참을 것이다.

하지만 유일한 문젯거리가 이렇게 빨리 신경을 건드릴 줄이야! 안나는 자신의 방에서 쉬고, 사프론은 다용도실에서 빨래를 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마침 챔버 부인이 쇼핑을 나갔기 때문에 사프론은 재빨리 손을 닦고 부엌으로 달려가 전화를 받았다.

"스태어티스 부인 댁입니다" 그녀가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사프론, 당신이 전화를 받길 바랐소" 수화기를 통해 들려온 목소리는 의심할 여지 없이 알렉스였다. "내가 보고 싶었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수화기를 탁 끊는 것이지만 그녀는 자제하며 냉정하게 대답했다.

"당신 어머니는 지금 낮잠 중이세요, 스태어티스 씨. 나중에 다시 거시는 편이 좋겠군요"

"난 어머니가 아니고 당신에게 날 보고 싶었느냐고 물었소" 알렉스는 장난스럽게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왜 그렇게 냉정하지, 스위트? 내가 당신과 함께 있지 않아서 샐쭉한 거요?"

"아니에요. 오히려 멀리 떨어져 있어서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하는 줄 몰라요! 안녕" 그리고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녀의 손은 분노로 바들바들 떨렸다. 저 남자의 자만심은 상상을 초월한다. 쓰디쓴 증오가 솟구쳤다. 그가 한 짓에 대해 복수할 방법만 있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텐데.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그녀는 전화를 받을까 말까 고민했지만, 받지 않으면 안나가 잠에서 깰 것이다.

"?" 그녀가 말을 끌었다.

"어느 누구도 내 전화를 마음대로 끊을 수 없어, 알겠소, 사프론?" 아까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는 사라지고 그는 다시 엄격한 목소리의 독재자로 되돌아왔다.

"스태어티스 씨, 당신 어머니는 주무시고 계신다고 말했잖아요. 난 당신과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아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요. 이제 똑똑히 알았나요?" 그녀는 얼음장 같은 어조로 말을 끌었다.

"무슨 일이 있었군. 당신 목소리가 달라졌어"

그녀는 달라졌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그의 전문적인 유혹과 매력에 대책없이 항복하는 순진한 바보가 아니다.

"사프론! 아직 거기 있소?"

", 주인님"

"그만 빈정거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봐요. 어머니가 사기를 쳤다는 걸 알았소? 그런 거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어머니에게 남길 말이 없다면 난 그만 가봐야겠어요" 사프론이 발견한 유일한 사기꾼은 알렉스 스태어티스였다.

"좋아, 알겠소. 내가 곧 연락하리다"

그거야 내 힘으로 어쩔 수 없지. 그녀는 우울하게 생각하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사프론은 저택의 뒤에 있는 정원에서 햇빛을 즐겼다. 안나는 금요일 오후 브리지 게임에 갔으니 몇 시간 동안은 자유다. 도대체 누가 외국에서 휴가를 보내려는 거야? 영국의 6월 하순이 이렇게 근사한데 말야. 날씨는 훈훈하고 해도 늦게 진다.

안나로부터 알아낸 바에 의하면 알렉스는 앞으로 얼마 동안은 전혀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런던에 오면 자신의 아파트에서 지낸다고 하니, 지난 2주 동안 그녀는 그를 다시 본다는 공포감에서 해방되었다. 그는 매일 전화를 했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자리를 피했다.

안나의 건강과 어깨는 점점 좋아졌다. 사실 사프론은 자신이 공돈을 받는 것 같았지만, 안나는 그녀가 떠나겠다는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게다가 사프론은 거주 할 곳도 없고, 생활비를 낭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프론은 안나가 생각보다 훨씬 생기발랄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랐다. 그들은 함께 미술 전람회, 극장, 야외 오페라를 구경하러 다녔다. 안나는 문화 애호가였다. 어제 저녁, 안나의 우아한 저택 거실에서 열린 시낭송에서 <전도유망한> 시인이 <젓가락>에 대한 상징주의 시를 낭송하는 것을 듣고, 사프론은 웃음을 금치 못했다.

그 기억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영락없는 왕자를 기다리고 있는 잠자는 공주야"

사프론은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알렉스 스태어티스가 옆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런데 왕자 대신 두꺼비가 나타났군요" 그녀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되받아쳤다. 그녀의 눈에선 증오가 타올랐다.

알렉스는 한쪽 눈썹을 들어올리며 그녀의 냉소적인 말투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만사 제치고 당신과 어머니를 보러 온 나에게 더 열광적인 환영을 하리라 기대했는데"

"그러실 필요는 전혀 없었어요. 당신 어머니와 나는 둘만으로도 얼마든지 잘 지내고 있으니까요" 그녀는 정장을 입고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음속에 있는 약간의 망설임이 사라졌다. 분명히 그 남자가 맞다.

"당신은 그랬음이 분명해, 사프론" 그는 재킷을 벗어 바닥에 깔면서 동의했다. 그리고 한 손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한 후 와이셔츠 단추를 풀며 그녀에게 눈웃음을 쳤다. "하지만 내가 어머니의 즐거움을 망쳤다는 거요? 어머니가 당신에게 전화를 바꿔 주지도 않기에. 의무감이 강한 아들인 안 그녀의 게임에 참가하기로 결정했지"

그래서 그의 전화를 피하기가 그렇게 쉬웠구나. "당신 어머니와 나는 당신 없이도 즐겁게 보낼 수 있어요" 만일 그가 머무른다면, 난 떠날 거야!

그는 그녀의 의자 옆 푸른 잔디에 누우며 두 손을 고개 뒤로 깍지꼈다.

"내가 기대했던 환영과는 거리가 멀군!" 그가 조롱했다. "이곳은 날 보고 싶었다는 말을 할 장소가 아닌가 보지?"

"당신을 보고 싶어 해요!" 그녀가 펄쩍 뛰었다. "머리에 쥐가 났나 보죠" 이 남자는 미친 게 틀림없어.

"내 사랑하는 어머니가 아직 자신의 게임을 공개하지 않은 것 같군" 그는 눈을 감았다. 숱 많은 검은 눈썹이 가무잡잡한 살결에 내려앉았다. 한 순간 그는 무방비하고 연약해 보였다.

"무슨 게임 말이죠?" 그녀가 차갑게 되물었다.

"나의 귀여운 사프론, 당신은 매년 우리 어머니가 <말벗>이란 명목으로 나에게 줄줄이 선보인 소위<좋은 아내>감 중 한명이오. 날 결혼시키려고 말이오" 그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올려다봤다. "당신은 콧대를 세워도 좋을 거요. 당신이 그 중 최고였거든. 난 대부분 그들을 본 척도 하지 않았소"

사프론은 그의 눈을 후벼파고 싶은 충동과 싸웠다. 이 오만한 자식! 그는 한쪽 팔꿈치로 고개를 괴고 옆으로 누웠다. 그녀는 그를 증오하면서도 그의 악마 같은 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 위에 이브의 관이 겹쳐졌다. 그녀는 그 영상을 지우며 눈을 깜박였다.

"내 사랑하는 어머니는 마키아벨리 따위는 울게 만들 정도요. 당신도 그 점을 이젠 알았겠지, 사프론?"

그는 회의적인 시선을 던지며 가볍게 말했다. 사프론은 알렉스의 말에 말려 들어갔다. "하지만 이번에 어머닌 한 술 더 뜨셨소. 난 어제 아테네에서 당신에 대한 보고서를 받았지. 어머니의 계획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눈에 빤하더군" 그가 거의 흥에 겨우 말했다.

사프론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항변의 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사프론의 직업을 단순히 자신의 흥미를 자극하기 위한 책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게다가 그녀의 뒷조사까지 하다니, 이 오만한 자식 같으니...

"어머니는 작년에 세마디 이상은 할 줄도 모르는 그리스 선생을 고용했고, 그 전해에는 소장하는 책을 정리하겠다며 사서를 고용했지"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당신은 어머니의 최근의 아내 후보감이오. 그리고 내가 결혼할 사람 같았으면, 벌써 당신에게 넘어가 청혼을 했을 거요" 그는 비아냥거렸다.

사프론은 고개를 돌려 정원을 주시했다. 자신이 알렉스의 매력, 키스, 애무에 거의 항복할 뻔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느님 맙소사! 그의 정체를 끝까지 기억해 내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생각을 하니 속이 뒤집혔다. 그녀는 고통스런 숨을 들이마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알렉스의 나른한 몸에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당신 혼자 실컷 즐기세요, 스태어티스씨. 난 당신이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남자라 할지라도 당신과 결혼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요" 그녀는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실례하겠어요"

알렉스가 날쌔게 몸을 일으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내게 손대지 말아요!"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그는 분노로 코를 벌름거렸다. "내 접촉을 그렇게 싫어하는줄 몰랐는데"

"지금은 그래요"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살폈다. "당신은 어딘가 달라졌소"

그래, 이 오만방자한 악마야. 난 당신이 어떻게 돈을 버는지 이젠 알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차가운 초록색 눈이 그 말을 대신했다. "안나에게 방금 당신이 해준 말을 확인해서, 그게 사실이라면 난 떠나겠어요. 당신 같은 인간에게 즐거움을 제공하고 싶진 않으니까요"

"나 같은 인간?" 그는 강철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지금 당신이 날 모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지?"

"사실 그랬으니까요" 그녀는 기둥서방보다도 못한 이 남자와 말싸움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길을 비켜요, 난 갈 거예요" 알렉스는 저택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었다.

"싫소, 당신은 갈 수 없어. 난 어머니를 동요시키지 않을 거요. 그녀는 당신을 좋아해. 그리고 당신은 6개월 계약을 체결했으니, 그걸 완수해야만 하오. 아니면 고소를 해서 당신이 가진 일 페니마저 빼앗을 거야"

사프론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불길이 이글거리는 초록빛 눈동자가 무자비한 알렉스의 시선과 격돌했다. 그녀는 그가 말한 대로 실행에 옮기리란 점을 확신했다.

"그래요, 당신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아요" 그녀는 자신의 경멸을 숨기지 않으며 말을 받아쳤다.

"당신은 날 실망시켰소. 사프론. 남자에게 도전해서 관심을 얻는 방법은 책에서나 나오는 구닥다리요. 난 당신이 어머니의 계획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믿을 뻔했소, 하지만 당신은 그 이상인 것 같군" 그는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그녀는 주먹을 쥐었지만 덤비지는 않았다. 그가 강렬히 내려다보자 그녀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게 당신의 게임 방식이라면, 그에 따라야지."

"난 게임을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요, 특히 당신과는요"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난 생각이 있소, 사프론. 당신은 날 유혹했잖소. 이대로 가면 난 완전히 폭발하게 될 거야"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 사프론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그의 정열적인 거친 입술에 충격을 받은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의 손은 그녀의 엉덩이를 잡아당겨 자신의 단단한 몸에 밀착시켰다. 그의 재빠른 급습에 얼이 빠진 그녀는 그의 다급한 열정에 반응할 뻔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뜨거운 열기를 마음껏 방출했다.

그가 "난 당신을 원해"하고 말했다. 순간 그녀는 얼어붙었다. 얼마나 많은 여자들에게 똑같은 말을 했을까?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그의 능수능란한 말솜씨에 넘어갔을까? 이브는 남자 친구 닉에게 말려들어 결국 마사지실에서 일하게 되지 않았는가. 그가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에 대한 역겨움이 그녀의 피를 차갑게 식혀 줬다.

그녀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알렉스는 고개를 들었다. 충족되지 못한 욕망으로 어두워진 그의 눈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살폈다. 그는 깊이 호흡을 한 다음 그녀를 밀어냈다. 그리고 거의 벗다시피 한 그녀의 몸매를 훑어본 다음 자신의 정장을 내려다봤다.

"당신이 옳소. 난 이러기엔 너무 옷을 많이 입었어. 게다가 누군가의 방해를 받겠지. 내가 당신과 처음 사랑을 나눌 땐, 방해받을 위험이 없길 바라오" 그가 몸을 돌리며 말을 덧붙였다. "나중에 봅시다" , 말에 사프론은 이성을 완전히 잃었다.

"당신을 아예 보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그의 등에다 대고 새된 소리를 질렀다. 그는 그녀의 말에 전혀 화가 나지 않은 듯 유쾌하게 손을 흔들었다.

 

5

사프론은 꼿꼿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시선을 정원으로 돌리며 그의 부와 사회적인 지위를 생각했다. 그런 다음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등에 비수를 꽂을 수만 있다면...

아냐, 그는 감옥살이를 할 가치도 없다. 하지만 뜨거운 태양도 얼음처럼 차가운 피를 데워 주지 못하자, 사프론은 맹세했다. 알렉스 스태어티스의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반드시 그렇게 하리라. 저 알렉스란 남자는 돈 때문에 법망을 피해 여자를 착취했다.

사프론의 눈은 이글거렸고 양 손은 불끈 주먹을 쥐었다. 그녀는 평생을 바치더라도 알렉스에게 이브의 복수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생각보다 더 빨리 복수할 방법을 찾아냈다...

"당신에게 사과해야겠소, 사프론" 알렉스의 검은 눈동자가 테이블 위에 놓인 촛불에 반사되어 금빛으로 빛났다. 알렉스의 고집으로 그들은 아담한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중이었다.

오후에 알렉스가 저택에서 기다리는 동안 사프론은 안나를 파디에서 차로 모시고 왔다. 사프론은 모자만 남겨 두고 재치 있게 방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게 실수였다! 한 시간 후 거실로 돌아가 보니. 알렉스는 사프론에게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고 몰아세웠다. 사프론은 그의 초대에 거절하며 진땀을 뺐지만, 안나는 전혀 도와주지 않았다. 그녀는 안나의 음모에 대한 알렉스의 말이 옳다는 확신을 얻었다.

"사과... 당신이?"

"놀랐겠지, 하지만 오늘 저녁 난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눴소. 사고를 당했다고 말씀하시더군. 처음부터 그 사실을 나에게 비밀로 다하니 말도 안 되는 일이오. 나는 어머니와 같이 살 생각이 없소. 그건 너무 제한적인 삶이 될 테니까. 난 어머니에게 그 점을 확실하게 했고, 어머니는 나를 옭아매려는 계획과 당신은 아무 관계도 없다고 하셨소"

짐짓 겸손한 척하다니. 있지도 않은 혐의를 밝혀 내줘서 감사해리라. 생각했나? 그녀는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오늘 저녁 그는 검정색 정장과 흰 실크 셔츠, 그리고 나비넥타이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는 옷을 우아하게 소화해 내는 남자였고, 그녀는 저 훌륭한 겉옷 밑에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도 창피하게 만들 수 있는 육체가 숨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 몇 주 전 그녀는 그런 남성미에 눈이 멀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녀의 마음은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럼, 이제 그 상처를 딛고 다시 시작하면 어떻겠소? 그리고..." 그가 테이블 위에 놓인 그녀의 손을 감쌌다. "우리 사이에 있는 화학 작용이랄지, 뭔가를 한층 발전시켜 논리적인 결과를 얻어 내면 어떨까?"

"글쎄요?" 그녀가 중얼거리는 순간 터무니없는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그녀는 천천히 그의 손을 맞잡으며 허스키하게 덧붙였다. "좋아요"

그의 눈에서 승리의 빛이 번뜩였다. "좋소. 디저트는 건너뛰고 내 아파트로 갑시다" 알렉스는 쉰 목소리로 말한 다음 서둘러 그녀를 일으켰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레스토랑을 나와 자신의 재규어로 이끌었다.

사프론은 그의 오만하고 고압적인 행동에 성질이 끓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알렉스는 화살처럼 빠르게 차를 운전했다. 그는 워낙 참을성이 없는데다 욕망 때문인지 손까지 떨었다. 그녀는 그런 그를 냉소적으로 관찰했다. 이 남자에 대한 증오를 자제하려 이를 갈며, 사프론은 그의 넓은 어깨에 고개를 기대었다. 그리고 손을 그의 단단한 허벅지에 가볍게 얹어 놓았다.

알렉스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차를 주차시킨 후 서둘러 그녀를 엘리베이터에 태웠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천천히 닫히자마자 그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혐오감을 참으려 했다. 그를 밀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그의 손이 그녀의 전신을 애무하며 유혹하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행히 엘리베이터가 멈춰서고 문이 열렸다. "알렉스" 그녀가 그의 가슴을 밀며 부드럽게 말했다. "도착했어요"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가 신음하며, 정열로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넓은 복도에는 문이 하나밖에 없었다. 알렉스가 열쇠로 문을 열고 안으로 밀었다. 그다음, 그녀의 작은 등에 손을 대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사프론은 흥미를 가지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상과는 달리 가정적인 분위기였다. 그의 친척과 친구들의 사진이 거장의 명화와 함께 걸려 있었다. 큰 벽난로 위에는 모네의 작품으로 보이는 그림이 있었고, 편안해 보이는 의자와 소파들이 벽난로를 마주 보며 일렬로 배치되어 있었다. 열린 커튼 너머로 런던의 전체 야경이 보였다.

"당신이 이곳에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소, 사프론"

알렉스의 깊은 목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방해했다. 그녀는 다시 그의 팔 안에 갇혔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원하는지 모를 거요. 로도스에서 당신이 날 때렸을 때부터 난 당신을 내 침대에 눕히고 싶었어"

그의 입술이 그녀의 두 눈, , 코 끝 등 온 얼굴에 키스를 했다. 사프론은 그의 다정한 시선에 충격을 받았다.

"난 당신에게 보복하기 위해서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켰지" 그의 입술이 그녀의 부드러운 목의 곡선으로 내려가자 그녀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피하려 했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가슴이 정신없이 뛰며 머리가 몽롱해졌다.

"나에게 보복을 해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보복을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알렉스이다. 그 점을 명심해!

"나도 알아. 바보 같은 남자의 자존심이지, 하지만 미코노스섬 이후,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당신을 갖고 싶었소. 심지어 당신이 어머니의 음모에 가담했다 해도 상관없었어. 오늘 밤 그 드레스를 다시 입은 당신을 보니 기억이 새롭군" 그녀는 하나밖에 없는 랄프 로렌의 정장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라이언 로어>호에서 당신이 식당으로 들어오는 그 순간 난 넋이 나갔소. 당신은 너무 아름다웠지만, 손님들 때문에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의 실력은 뛰어나다. 정말 훌륭해! 사프론은 인정했다. 그가 다정하게 내뱉는 감각적인 말과 애무는 거의 온몸을 녹였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연습을 거쳤을까. 그녀는 우울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많은 손님들도 알렉스가 실비아를 침실로 끌어들이는 데 아무 장애도 되지 못했잖아. 그녀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려 했지만, 그가 놓아 주지 않았다.

"난 참으려 했지만, 당신을 보지 못한 지난 2주는 지옥이었어. 난 당신의 붉은 머리칼과 불타는 두 눈을 그리워했소. 난 시도 때도 없이 당신 생각만 했고, 오늘 아침엔 뭔가 조치를 내려야 한다고 결심했지"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을 간질이며 드레스 지퍼를 더듬었다. 그녀는 마지막 한 방울의 자제심까지 짜내어 그를 강하게 밀었다.

"기다려요, 알렉스" 그녀는 고의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목소리가 떨렸다. "당신은 이 화학 작용에서 논리적인 결론을 도출하자고 말했어요. 하지만 결혼은 인륜지대사예요. 정말 결혼할 준비가 된 거예요? 당신은 오랜 시간 동안 독신으로 지냈잖아요"

"결혼? 아니, 누가 결혼에 대해 말했지?" 그는 깜짝 놀란 듯 그녀에게서 물러나 뒷걸음질까지 쳤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충격과 공포를 발견하는 순간 그녀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내가 착각했다면, 죄송해요"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일생일대 최고의 연기였다. "하지만 그건 날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걸요."

알렉스는 위험스레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생각이야말로 당신의 착각이란 걸 5분 내로 증명해 보이지" 그는 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에서 목을 거쳐 가슴까지 쓸어내렸다. 그녀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그의 냉정한 손길에도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의 검은 눈에는 만족감이 깃들였다. "2분이면 충분하군" 그는 조롱조로 말했다.

"이 자만심 덩어리!" 그녀는 욕을 한 후 유유히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알렉스가 재빨리 움직여 그녀의 손을 낚아챈 다음 자신에게로 돌려세웠다. "아무도 나에게 등을 돌리지 않아"

"가겠어요."

차가워진 그의 검은 눈이 그녀의 달아오른 얼굴을 살폈다. "왜 부인하지? 당신은 날 원해. 수줍은 척하는 건 아니겠지?" 그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마사지란 꽤 사적인 직업이잖소. 수많은 남자들이 당신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꼈을 텐데, 사프론. 그리고 그 이상을 요구했겠지. 당신은 그들의 바람을 들어주기 전에도 항상 결혼을 요구했소? 그렇지 않았을 텐데..."

그는 검은 눈썹을 회의적으로 들어올렸다.

"순진한 척하며 날 바보로 만들지 마, 이 게임을 모르는 당신 또래의 여자는 없소. 그러니, 크게 한몫 잡으려고 욕심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아니면 내가 이 게임이 전혀 가치가 없다고 결정 내려 버릴 테니까"

그 순간 그에 대한 사프론의 경멸은 극에 달했다. 그녀는 자신의 경력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이런 비도덕적이고 탐욕스런 인간은 전혀 필요 없다. 그녀는 그에게 잡힌 손을 풀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당신은 자신의 매력에 대해 과대망상에 빠졌군요, 스태어티스 씨" 그녀가 톡 쏘았다. 그는 그녀가 익은 자두처럼 자신의 품안에 떨어지리라 생각했다. 그래, 그도 정신을 차릴 때가 되었어. "가게 해줘요"

"손도 보지 못하게 하면서, 날 결혼으로 밀어 넣을 순 없을걸. 난 진가를 확인하기 전엔 절대로 사지 않소"

"알 만하군요" 그녀는 혐오스럽다는 듯 쏘아붙였다.

"왜 그렇게 화를 내지?"

그는 그녀의 몸을 훑어보았다. 특히 가슴과 다리 사이를. 그녀는 그의 강렬한 시선에 움츠러들지 않으려 했다. 그의 시선이 다시 그녀의 상기된 얼굴로 돌아왔다. 그는 증오로 반짝이는 그녀의 초록색 눈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긴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당신은 변했어. 요트에서 당신은 내 관심에 당황해하고 부끄러워했지만, 항상 반응을 보였어, 하지만 지금은..."

"지금 우리는 단둘만 있고, 당신은 훨씬 더 위험하죠..." 사프론이 그의 말을 잘랐다. 만일 그녀가 복수할 계획을 밀고 나가려면 좀더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녀가 얼마나 그를 경멸하는지 한순간이라도 알렉스가 눈치채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싸우는 상대가 나인 거요, 아니면 자기 자신인 거요?"

"양쪽 모두겠죠" 그녀가 가볍게 대답했다. "당신은 속도가 빨라요, ...알렉스" 그녀는 그의 이름을 거의 더듬을 뻔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그녀의 말더듬을 여자다운 감정으로 오해했다.

"사프론, 이 귀염둥이. 난 당신을 절대로 상처입히지 않을 거요. 물론 나 역시 상처받지도 않지. 난 단지 당신과 사랑을 나누고 싶을 뿐이오" 그는 승리감에 찬 신음을 터뜨리며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덮으며 온몸을 녹여 버렸다.

그녀의 모든 본능은 굶주린 그의 입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충고했다. 하지만 더 가깝게 밀착된 그의 단단한 몸에서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 다정하게 소파에 눕힌 다음, 자신의 체중을 실어 왔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그를 떼민 다음 소리를 지르며 아파트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과 싸웠다.

안 돼. 그의 키스와 애무를 참아내야 해. 그가 그녀를 절망스러울 정도로 원하게 만든 다음 다시 결혼을 요구할 것이다. 그녀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그는 절대로 패배를 받아들이는 남자가 아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반지를 얻어내면, 그에게 모든 사실을 밝히고 최대한 돈을 긁어내야지. 그 돈은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자선 기관과 고아들을 위해 쓰여질 것이다.

"사프론, 무슨 생각을 하지?" 그녀는 눈을 떴다. 알렉스가 도전적인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실력이 예전 같지 않은가 보군" 그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킬킬거렸다.

사프론은 한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의 자신감은 대단해서 모든 여자가 자신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고 믿을 정도였다. 그녀는 가는 팔로 그의 목을 감고, 그의 입술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당신은 내가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깜짝 놀라게 했어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뒷덜미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지만 내심 이 악마를 목 졸라 죽이고 싶었다.

그녀는 그를 참아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생각보다 훨씬 영리하니, 그녀는 반응을 보여야 한다. 그녀는 입술을 그의 입술에 대고 살짝 핥았다. 그의 온몸에 경련이 일었다. 그녀의 탁월한 연기는 효과를 충분히 발휘했다. 이제 알렉스가 그녀의 입술을 덮친 것이다.

느린 키스가 순식간에 열기를 내뿜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몸을 애무했다.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 그녀는 그의 손길이 불러일으킨 믿을 수 없는 기쁨의 물결에 더 이상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로 드레스의 윗부분을 잡아당겨 그녀의 부풀어 오르고 단단해진 가슴을 드러냈다.

"알렉스, 안 돼요" 그녀는 그를 제지시켜야 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전에는 이렇게 친밀하게 그녀를 애무한 남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녀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 기쁨 속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를 어루만지며 천천히 히프를 들어 올렸다. 그의 검은 눈은 승리감과 정열로 불타올랐다. "당신이 허락해 준다면, 내가 될 수 있다는 걸 당신에게 보여 주지" 그는 그녀의 놀란 눈을 들여다보며 오만하게 말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순식간에 자신의 바지를 벗어 던진 후 그녀의 드레스를 단 한 번의 동작으로 벗겨 냈다.

반사적으로 그녀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렸다. 어떻게 이렇게 빠를 수 있지? 그녀는 일어나 앉으려 했지만 알렉스가 그녀보다 빨랐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양옆으로 내렸다. 그리고 단단한 몸으로 그녀를 눌렀다.

"아름다워,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워" 알렉스가 그녀의 가슴을 내려다보며 허스키하게 말했다.

"그만" 그녀가 거칠게 말했다. 이건 너무 지나치다.

"아니, 난 당신을 보고 싶소" 그가 말했다. 그의 뜨거운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과 반짝이는 초록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가 약간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자신의 몸에 닿는 그의 흥분된 남성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들의 육체를 내려다보고 숨을 헐떡거렸다. 그리고 다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턱은 단단히 긴장되었다. 그녀는 몸을 떨었다. 그녀의 몸 전체가 붉게 상기되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부드럽고 크림같이 흰 가슴을 덮었다. "아주 부드러워, 아주 완벽해" 그가 가슴의 붉은 봉오리를 손바닥으로 간질여 단단히 솟아오르게 만들었다. "당신은 너무 아름다워. 당신 피부는 태양을 머금은 목련 같소"

사프론은 가슴에서 온몸으로 불꽃이 일어났다. 그의 장난스런 애무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뒤로 휘었다. 그는 몸을 앞으로 내리는 동시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들어 올렸다. 그녀의 머리칼은 구불거리며 등에서 넘실거렸다.

하느님! 그녀는 신음하며 본능적으로 자신의 가슴을 그에게 더 밀착시켰다. 그녀의 입술이 부드럽게 벌어졌다. 그녀는 도망가야만 했다. 그를 중단시켜야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이 그녀의 척추를 따라 내려왔고,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와 귓볼을 애무했다.

"당신과 나에겐 결혼이나 영원한 사랑 간은 로맨틱한 거짓말의 낡은 굴레가 필요 없소. 지금 당신 몸은 날 필요로 해" 그가 뒤로 물러섰다. "당신 가슴을 봐요" 그녀가 시선을 내리깔자 그가 말을 이었다. "나처럼 부풀어 오르고 갈망에 차 있잖소" 그는 그녀를 다시 품에 안았다. "여기? 아니면 침실로 갈가?" 그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난 상관없소. 하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군" 그의 몸이 다시 그녀의 몸을 자극했다.

그는 상관없다고! 그가 그렇게 말했다. 경악한 사프론은 이성을 되찾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를 증오하면서도 마치 섹스에 굶주린 바보처럼 반응하다니!

그녀는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너무 경악한 나머지 그에 대한 경멸감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무방비 상태였던 그는 몸의 균형을 잃고 마루로 떨어졌다.

다른 때 같았으면 사프론은 그의 놀란 얼굴에 즐거워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를 다시 입었다. 그리고 쏘아붙였다. "당신은 상관없겠지만, 난 그렇지 않아요, 스태어티스 씨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내가 당신과 한 침대에 드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녀는 그의 몸을 혐오스런 시선으로 바라본 다음, 현관문으로 내달렸다.

"아니, 대체...? 기다려, 사프론!"

그녀가 기다릴 줄 알았다면, 그는 정말 미친 게 틀림없어. 사프론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갑자기 뒷덜미가 잡히며 돌려세워졌다. 분노한 알렉스는 그녀를 소파로 끌고 가 앉혔다.

"날 거칠게 다루지 말아요" 그녀는 초록 눈에 분노를 담고 소리쳤다.

"거칠게 다뤄? 난 당신을 죽일 수도 있소, 이 말괄량이! 대체 무슨 작정을 했지? 알렉스가 그녀의 상기된 얼굴을 응시하며 거칠게 다그쳤다.

".... " 그녀는 그에게 진실을 털어놓을 뻔했다. 그를 얼마나 증오하는지....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입을 꼭 다물었다. 알렉스는 영리하다. 그에게 지금 말하면, 그녀는 일자리뿐 아니라 복수도 단념해야 한다. 그녀는 가능한 한 빨리 머리를 굴렸다. "난 처음이에요...." 그녀는 새침해 보이길 바라며 눈을 내리깔았다. "난 아직 처녀란 말예요"

"당신이 뭐?"

"들었잖아요" 그녀가 여전히 눈을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그가 자신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것을 느꼈다.

"믿을 수 없어. 당신은 스물다섯 살이오.... 어떻게 당신 같은 미녀가 지금까지 경험이 없을 수가 있지?"

그의 목소리에는 의심이 꽉 차 있었다.

"난 지금도 경험하지 않았잖아요" 그녀가 말을 되받아쳤다. 하지만 곧 자신의 성급한 반응에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없어?" 알렉스가 즉시 눈을 가늘게 뜨고 부드럽게 그녀를 쳐다봤다.

"없어요" 그녀는 그를 주시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은 무조건 항복한 거요?" 알렉스의 입술이 냉소적으로 비틀렸다. "증명을 해봐, 사프론. 나는 어린 소년이 아니라 서른아홉 살이오. 그리고 도저히 당신의 순결을 믿을 수 없소. 아무리 당신이 소리 높여 주장을 하더라도 말야"

"그건 당신 문제예요, 내 문제가 아니라구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나가 날 필요로 할 거예요. 난 가야 해요"

"내 필요는 어쩌고?" 그의 검은 눈이 장난기로 번뜩였다. "우린 이곳에 단둘만 있소. 시작한 걸 끝내면 어떨까?"

"어림없어요" 그녀는 그의 느슨해진 옷차림을 훑어봤다. 그리고 한순간이나마 솔깃한 자신을 경멸했다.

", 방법은 하나 있지" 알렉스가 바지와 셔츠를 다시 걸치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재킷을 한쪽 어깨에 늘어뜨리며 덧붙였다. "당신의 방법, 결혼 말이오. 하지만 난 그런 바보는 아냐"

"하지만 내 유일한 조건이에요" 그녀가 반박했다.

"보석, 모피, 코트, 그리스 별장. 난 매우 관대한 연인이 될 거요, 사프론. 그 점을 생각해봐요. 재고할 수 있도록 24시간을 주겠소"

사프론은 자신의 계획대로 그를 사로잡았다는 사실에 기쁨 대신 공포를 느꼈다. "당신은 사랑을 믿지 않지만" 그녀가 그에게 상기시켰다. "난 믿어요"

5분 후, 그들은 알렉스의 우아한 차를 타고 런던 시내를 달렸다. 그녀는 알렉스 스태어티스 같은 남자에게 복수하려 했던 건 무서운 실수였다고 확신했다.

"안나, 내가 하는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사프론이 말했다. 그녀의 고용주는 침대에 얼굴을 대고 누워있었기 때문에 우울한 얼굴을 볼 필요가 없다. 알렉스와의 식사 소동 후, 그녀는 몇 시간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알렉스가 했던 모든 말을 되씹었다. 그리고 안나가 항상 그의 신붓감을 선보였다는 말을 기억해 냈다.

"그래, 뭔데?" 안나는 나른하게 물었다.

"어제 당신 아드님 말에 의하면, 당신에겐 한 가지 버릇이 있다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당신은 매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말벗을 바꿨다고 하더군요. 그를 결혼시키기 위해서요"

안나가 낄낄거렸다. "한두 번뿐이었는걸, . 그랬다고 누가 날 비난하겠어? 죽기 전에 얼마나 손자들을 안아 보고 싶어 하는진 오직 신만이 아실 거야. 그리고 난 더 이상 젊어질 수 없어. 그건 알렉스도 마찬가지야. 그애는 과거의 하루살이 데이트를 빨리 집어치워야 해. 내가 누누이 말한 것처럼 말야"

"그럼, 알렉스 말이 맞군요. 그래서 날 고용했군요"

실망감이 가슴을 찔렀다. 그녀는 안나를 친구로 생각했었다.

"아냐" 안나가 몸을 돌렸다. "당신은 아냐, 사피. 난 당신을 속일 수 없었어. 난 당신이 필요해. 젠킨스 의사 선생도 당신에게 말했잖아" 안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사프론의 눈을 피했다. "난 여전히 당신이 필요해. 그리고 알렉스가 뭔가 다른 말을 하거든, 그를 무시해 버려"

"그는 무시하기엔 너무 대단한 존재인걸요" 그녀는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기대에 부푼 안나를 무시하고 재빨리 이불을 펄럭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모두 끝났어요. 난 손을 씻고 올 테니, 당신은 물을 좀 드세요. 방향 오일은 약간 두통을 유발시키거든요"

그녀는 재빨리 오일 병을 가방 속에 정리한 후 안나의 욕실로 들어갔다. 세면대에서 그녀는 비누로 손을 깨끗하게 닦기 시작했다.

사프론은 한 번도 자신을 앙심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알렉스가 마사지 클럽의 공동 소유주이고, 이브의 비극적인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부터 복수심이 암처럼 그녀의 마음을 좀먹었다.

세면대의 물을 버리며 그녀는 한숨을 내뱉었다. 이론상 복수는 별건 아니었지만, 실제로는 결코 쉽지 않았다. 사프론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알렉스가 자신에게 욕망을 품고 있고, 자신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욕망을 이용해 상처를 주기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안나에게 그가 어떻게 가문의 재산을 불려 왔는지 설명함으로써 그에게 상처입힐 수도 있다. 하지만 안나를 끌어들이는 건 공평하지 않아 보였다. 그렇다면 그를 결혼으로 몰아넣은 다음 첫날밤에 걷어차는 원래의 계획만이 남게 된다. 그의 자존심은 굉장한 타격을 받겠지, 물론 그의 호주머니도...

그녀는 세면기 위에 달린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요부인가? 짙은 속눈썹에 감싸인 차가운 초록 눈이 자신을 빤히 보고 있었다.

순간 지난 밤 알렉스가 그녀의 가슴을 애무하던 영상이 생생하게 떠오르자, 공포의 전율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그리고 그를 유혹해 결혼하게 만든다는 계획이 얼마나 무모한지 깨달았다. 허무맹랑해! 알렉스가 어떤 방법으로 돈을 벌고 있든, 그는 부유한 사업가로 존경받고 있다. 궤변적이고, 강인하고, 경험 많은 연인인 알렉스는 원하는 모든 여자를 가질 수 있고, 그도 그 점을 알고 있다....

사프론은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그를 결혼까지 몰아넣고 재산을 긁어낸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지? 그녀가 요부처럼 행동한다는 건 맨몸으로 달까지 날아가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하다. 오히려 상처받는 사람은 그녀 자신이 될 것이다. 친구의 죽음에 대한 뼈에 사무치는 분노와 알렉스의 정체를 안 순간의 충격으로 그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했다. 지금이라도 이성을 되찾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 순간 그녀는 짙은 비애감을 느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기도했다. 미안해, 이브. 이 세상에 정의가 진실로 존재한다면, 알렉스는 죗값을 받게 될 거야. 하지만 나는 그럴 사람이 못 돼.

갑자기 그녀는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몇 주 만에 처음으로 평상시의 가벼운 마음과 낙천성이 되돌아온 것을 느끼고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성숙한 여자이고, 전문 직업인이다. 그러니 안나와의 계약을 완수할 것이다. , 그녀의 아들을 병원균처럼 피할 것이다. 그러면 연말에는 작은 미용 클리닉의 당당한 소유주로 꿈을 실현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몸을 돌려 욕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사프론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청바지와 청색 스웨터를 입은 알렉스가 침실 문에 기대 서 있었던 것이다.

안나가 눈물 젖은 눈으로 사프론을 바라보았다. "난 믿을 수 없어, 사프론"

알렉스가 여기서 무슨 짓을 했지? 대체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한 거지? "흥분하지 마세요, 안나" 그녀는 안나에게 다가가 여린 어깨를 안았다. 그리고 알렉스를 험악한 시선으로 노려봤다.

"난 흥분한 게 아냐. 사피. 이건 기쁨의 눈물이야. 난 정말 기뻐. 당신과 알렉스가 결혼한다니..."

"결혼" 사프론의 팔이 안나에게서 떨어졌다. 그녀는 약간 몸을 돌려 방을 가로지르는 알렉스를 지켜보았다.

"그와" 그녀는 중얼거렸다. 놀라움으로 그녀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사프론, 난 당신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본 결과 당신이 옳았다는 걸 알았소" 그의 팔이 그녀에게 둘러졌고, 입술이 그녀에게 내려왔다.

자승자박이야! 즉시 그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지만, 그녀는 더 이상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 깊고 긴 키스를 했기 때문에....

 

6

경악, 망연자실, 충격, 어떤 말로도 사프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알렉스의 얼굴을 응시하며 장난기를 찾았다.

"좀 더 만족해하는 게 어울릴 거요" 그가 어두운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당신은 나에게 정사를 제의하면서, 24시간을 줬어요" 그녀가 분노하며 씩씩거렸다.

"하지만 난 마음을 바꿨소. 어머니가 보고 계시니, 행복한 척해요"

"당신이 날 놀라게 했잖아요" 그녀는 가볍게 말했지만 그의 느닷없는 청혼에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겨우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자, 안나가 껴안았다.

"너희 둘 때문에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사피.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빨리 알렉스와 함께 반지를 고르러 가렴" 그녀가 사프론의 볼에 키스를 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말을 덧붙였다. "! 결혼 준비를 할 시간이 3일밖에 없다니, 빨리 서둘러야겠어"

사프론은 여전히 멍한 채 알렉스를 따라 방을 나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웃고만 싶었다. 복수를 포기하고 이 남자를 세균처럼 피하겠다고 막 결심을 한순간에 죽어도 결혼하지 않겠다던 알렉스가 청혼을 하다니.

10분 후 그들은 그의 차를 런던 시내의 보석상으로 향했다. 안나의 마지막 말이 사형선고처럼 사프론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왜죠?" 그녀가 차 안의 긴장을 깨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는 절대로 결혼할 생각은 없었소" 그는 화난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내 경험으로 보면, 소위 양가집 여자들이 남자를 보는 시선은 단 한 가지요. 평생 놀고 먹을 수 있는 티켓, 더 부유해질 수 있는 방법. 난 그런 여자들에게는 약간의 존경을 품고 있소. 최소한 그들은 자신의 가격을 알고 있거든"

"물론 당신이야. 그런 문제에 대해선 전문가겠죠" 사프론이 초록 눈에 혐오와 경멸을 담아 짧게 반박했다.

알렉스가 그녀의 홍조 띤 얼굴을 흘끗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미움에 찬 반응에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난 평생 여자를 사본 경험이 없소.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녀의 성질은 거의 끓어오르기 일보 직전이었다. 물론 그는 여자를 돈으로 사지 않았다. 대신 여자들에게 그를 위해 돈을 벌도록 시켰지. 사프론은 다시 복수 할 결의를 다졌다...

"하지만 내가 결혼에 대해서 마음을 바꾼 이유는 간단하오. 당신 이전에 난 한 여자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 경험이 없었소. 하지만 어제저녁 난 밤을 꼴딱 새웠단 말이오. 냉수욕도 소용이 없더군. 이런 상황은 끝내야만 하오" 그가 시선을 도로로 돌렸다. "당신은 결혼을 요구했으니, 그걸 주는 수밖에"

"단지 그것 때문이라면, 베개를 새로 사는 편이 훨씬 간단하고 싸게 들 텐데요" 그녀는 알렉스의 입술이 비틀리는 것을 보았다.

"아주 현실적이군, 사프론. 하지만 난 재미도 고려하거든"

"하지만 당신은 나와 결혼 할 수 없어요..." 그녀는 반대했다. 그녀는 더 이상 냉정을 지킬 수 없었다.

"난 할 수 있고, 그렇게 할 거요" 그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사프론의 손을 잡아 자신의 단단한 넓적다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다른 보상도 있지. 우선 어머니는 나에게 더 이상 여자들을 선보이지 않겠지. 그리고 난 마흔 살이 다 되었으니, 후계자를 생각해야 할 때요. 내 뒤를 이어나갈 아들" 그가 단호하게 선언한 다음 냉소적으로 덧붙였다. "당신이 날 걷어찬 다음 수줍어하는 척했던 날부터 마음속으로 원해 왔던 것보다 내가 훨씬 더 당신을 비싸게 쳐줬다는 걸 인정해야 할 거요"

"하지만 난 단순히 당신의 정욕을 만족시키고 후계자를 낳기 위해 결혼하고 싶진 않아요" 그녀는 차갑게 말했지만, 마음은 말과 달랐다... 알렉스의 오만방자한 선언은 복수에 대한 그녀의 결의를 다져 놓았다. 그들이 만난 첫날부터 마치 그녀가 그를 쫓아다니기라도 했다는 식으로 말하다니. 그녀는 그를 한 대 치고 싶은 충동에 주먹이 떨렸다.

"내가 영원한 사랑을 선언하는 편이 좋겠소?" 그가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글세..." 알렉스 같은 남자가 사랑에 빠진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왜 그 생각에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걸까?

"너무 늦었소, 이제 당신은 뒤로 물러설 수 없소. 난 오늘 아침에 특별 허가를 제출했거든"

"하지만 생이이랄지 그밖의 것들은 내가 써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내가 당신의 뒷조사를 했다는 걸 기억해요"

사프론은 그 점을 잊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복수를 향한 그녀의 소망에 불을 질렀다.

"차에서 내려요. 나머지 길은 걸어갑시다." 그는 해이튼 가든에 차를 주차시킨 후 그녀의 등을 떼밀어 다이아몬드 상점으로 들어갔다.

"데스몬드는 내 동업자이자 친구요. 그는 다이아몬드와 보기 드문 보석들을 취급할 뿐 아니라, 잘 알려진 러시아 디자이너의 특별 보석 콜렉션을 소장하고 있소. 당신의 마음에 들 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눈앞에 펼쳐진 세련된 환경을 무시하려 노력했다. 그녀는 알렉스와 나란히 호화스런 라운지에 놓인 편안한 의자에 앉았다. 그들 앞의 낮은 테이블에는 사프론이 평생 처음 보는 값비싼 반지들이 놓여졌다. 반대편 의자에는 50대의 데스몬드가 앉았다.

"알렉스가 결혼하리라곤 생각 못 했지만, 사프론, 당신을 만나 보니 그가 마음을 바꾼 이유를 알겠습니다."

그녀가 대답하기 전에 알렉스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내 여자야, 데스몬드. 그러니 아첨은 그만두고 반지나 보여 주게나"

<내 여자> 사프론은 그의 어조에서 소유욕을 느꼈다. 그녀는 눈을 들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 사이에 불꽃 튀는 긴장감으로 데스몬드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프론은 알렉스의 불타는 강렬한 시선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소유욕과 무자비함이 담긴 그의 시선에 충격을 받은 그녀의 입술이 약간 벌어졌다.

세상에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완전히 정신이 나갔군. 그녀는 반지를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알렉스 스태어티스의 천 마일 반경에도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복수 계획은 변변찮았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알렉스의 시선에서 봤고, 그의 손길에서 느꼈다. 그는 그녀를 완전하게 소유할 것이다. 그녀를 먹어 치우고, 쓰레기처럼 그녀를 뱉어낼 것이다,

"이게 마음에 드오?"

그녀는 알렉스의 손안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언제 내 손이 그에게 잡혔지? 에메랄드가 촘촘히 박힌 백금 줄 2개가 꼬여 들면서 그 중앙에 값비싼 블루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였다. 유난히 눈길을 끌고, 한 재산이 될 만한 반지였다.

"아름다워요, 하지만 좀 더 작은 걸로..."

잠시 그녀는 이 남자로부터 마지막 일 페니까지 긁어내겠다는 생각을 잊어버렸다. 알렉스가 그녀의 손을 꽉 쥐자 사프론은 숨을 헐떡거렸다.

"이걸로 하겠소" 그는 자신의 입술로 그녀를 덮쳤다. 그녀는 벗어나려 했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가 이로 그녀의 아랫입술을 물자 그녀는 입술을 열며 그의 침입을 허락했다. 그녀는 그를 증오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키스가 길어질수록 그녀의 저항은 허물어졌다. 마침내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초록 눈은 몽롱해졌고 입술은 부드럽게 부풀어 올랐다. "짧지만 달콤한 약혼을 위해서요, 내 귀염둥이" 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사프론은 웃으며 동의하는 자신을 깨달았다. 그녀는 어디론가 도망가서 혼란스런 감정을 정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나중에 사프론은 왜 일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방관했는지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 하지만 다음 이틀 동안 그녀는 멍한 상태로 결혼을 중지할 것을 결심했다가도 알렉스에게 오만한 말을 들으면 결혼을 강행해 이 비열한 남자에게 교훈을 안겨 주리라 결심했다...

극심한 혼란에 빠진 사프론과 달리 안나는 갑자기 눈부시도록 능률적인 여자로 돌변했다. 그 늙은 여인은 사프론에게 쇼핑을 가자고 설쳐대더니 결국 두려워하던 대로 웨딩드레스를 사주었다. 상의는 몸매를 그대로 살려 주면서 어깨 부분이 봉긋하게 부풀어 올랐고, 나긋나긋하게 주름이 잡힌 스커트가 발목까지 내려오는 1920년대 스타일의 웨딩드레스였다. 안나는 여름 결혼에는 가장 완벽한 드레스라고 주장했고, 사프론은 그 말에 따랐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철저한 위선자가 된 기분이었다.

3일 후 간단한 시청 결혼식에서 알렉스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고관의 주례를 들었다. 알렉스의 "그렇게 하겠습니다"하는 간결한 대답이 들려오자 사프론은 도망가고 싶어졌다.

도를 지나쳤어. 그녀는 싫다는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망설임을 느낀 알렉스가 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은 불타는 그의 시선에 놀라 동그래졌다. 금방이라도 훨훨 타오를 것 같은 시선에는 간청과 위협이 동시에 담겨있었다. 얼마나 강인한가, 그리고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 남자인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순간 지난 몇 주 동안의 증오가 녹아내렸다. 마치 마음의 창문이 활짝 열리는 것처럼 돌연 그렇게 두려워하고 부인했던 사실이 튀어나와 그녀를 강타했다.

그녀는 알렉스를 사랑한다. 그가 한 짓을 증오하면서도 그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사프론" 그는 최면술을 거는 것처럼 불타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떨리는 그녀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알렉스는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에 단순한 금반지를 끼웠다.

"이제 당신은 내 것이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소유하는 낙인을 찍는 것 같은 강렬한 키스를 했다.

결혼 피로연은 런던 최고 호텔의 연회장에서 개최되었다. 그들이 들어가자 카메라가 번쩍거렸다. 3일 전 <타임>지에 소개된 그들의 결혼은 세계 언론인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억만장자인 알렉스 스태어티스가 무명의 여자와 결혼을 한다. 알렉스는 그녀에겐 말도 하지 않고 신문에 결혼을 발표했다.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어 런던 시내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연회장에선 대화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호화스럽기 그지없는 식당에서 식사가 제공되었다. 신랑 들러리인 데스몬드가 재치 있는 축하 인사를 했고, 알렉스는 멋지게 받아넘겼다.

그런 후 사프론은 안나와 캐서린에게 축하를 받았다. 마리아가 축하의 말을 중얼거리고 있을 때, 사프론은 안나와 캐서린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요트에서 안나에게 들은 얘기와는 딴판이지 않은가.

"왜 얼굴을 찌푸리지, 달링? 피곤하오?" 알렉스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뇨, 아니에요. 난 괜찮아요"

"저런, 난 당신을 침대로 데리고 가고 싶은데"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진주빛이 도는 회색 정장을 입은 그는 넋이 나갈 정도로 매력적이다. 그의 검은 눈에는 웃음기와 정체 모를 무엇인가가 반짝거렸다.

사프론은 남편의 팔에 안겨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알렉스는 실비아와의 대화에 푹 빠졌다. 다른 여자들은 미움이 담긴 시선으로 사프론을 보다가도, 알렉스에게는 자신들의 여성다운 매력을 흩뿌리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사프론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는 악몽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 이브의 죽음에 대한 그녀의 분노, 알렉스에 대한 본능적인 끌림, 그리고 그이 정체에 대한 발견이 그녀를 지옥으로 몰아넣었다.

지난 몇 주일 동안 자신이 무엇과 싸워 왔는지를 인식하는 순간 그녀의 입가에는 슬픈 미소가 번져나갔다.

그녀는 알렉스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협박이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원했기 때문에 결혼 서약을 했다. 증오와 사랑은 종이 한 장 차이라지만, 사프론은 첫 육체적 경험에서 두 가지를 완전히 뭉뚱그렸기 때문에 이런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그녀는 사랑하지만 증오해야만 하는 남자와 결혼했다. 그녀는 다시 근사하게 차려입은 하객들을 바라보았다. 신부 측 손님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과거 몇 년 동안 함께 살아왔던 탐과 베리에게 연락을 하려 했지만, 그들은 휴가를 떠나 버렸다.

이브가 얼마나 좋아했을까. 최고의 호텔, 상류층 인사들, 보잘것없는 사프론 마틴이 <올해의 결혼> 주인공이 되다니. 그녀는 자신만의 생각에 푹 빠져 버렸다.

그녀는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다가올 첫날밤에 대한 기대와 흥분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여전히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는 그의 팔이 이상하게 편안했다. 그녀는 부모님이 죽은 후 경험하지 못했던 안정감이 느껴졌다.

나중에 그녀는 노란색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대답하게 검정 캐미솔이 옷깃 속으로 살짝 드러나 보였고, 검정색 하이힐과 검정색 백으로 색을 통일했다. 사프론은 알렉스와 함께 파리로 떠났다.

쌀과 색종이 세례 속을 통과해 그녀는 재규어에 올라탔다. 옆에 탄 알렉스가 검은 머리칼에서 쌀 한 줌을 털어냈다.

"3세계 아이들을 먹여도 될 정도야"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정말 제3세계에 대해 걱정이나 하는지 의심스럽군요" 사프론이 무의식중에 되받아쳤다.

알렉스가 차를 출발시켰다. "당신은 나를 잘 모르는군. 그렇지. 사프론?"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는 그를 주시했다. 잠시 그의 갈색 눈동자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상처받기 쉬운 연약함일까? 그녀의 가슴은 영문도 모르게 마구 뛰었지만, 그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 그녀는 그를 너무나도 잘 안다. 그게 바로 문제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달링. 오래지 않아 나에게 익숙해지면, 내가 생각과는 다른 사람이란 걸 알게 될 거요. 더 이상 지연 전술은 없소. 이제 당신은 완전한 나의 것이 될 거요" 남성다운 소유욕이 가득 담긴 알렉스의 시선에 사프론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복수 계획을 밀고 나가게 된 또 다른 사건을 우울하게 회상했다. 그가 그녀에게 약혼반지를 준 날, 그들은 그의 아파트에서 자축 식사를 했다. 그리고 알렉스는 고의적으로 그녀를 유혹했다. 그 생각만 해도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뛸 정도였다. 그녀는 자제심을 쥐어짜 알렉스를 제지시켰고, 결국 화각 난 알렉스가 소리 질렀다.

"젠장, 우린 약혼했소. 난 당신에게 그걸 증명하는 의무적인 돌을 사줬잖소. 난 충분히 기다렸고, 지금 당신을 원한단 말야, 제기랄!"

약혼반지에 대한 그의 냉소적인 말은 그녀를 화나게 만들었고, 얼마나 많은 불쌍한 여자들이 그의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타락해 갔는지를 상기시켰다. 그녀는 다시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그날 밤 그는 잔뜩 화가 나서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그녀는 그다음부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쩌다 잠이 들어도 벌거벗은 알렉스가 이브와 얽혀 있는 꿈에 시달렸다.

전용기가 이륙하자 사프론은 고개를 약간 돌렸다. 알렉스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와이셔츠 첫 단추를 풀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나른한 시선을 던졌다.

"의식은 끝났소. 이젠 최고의 시간만 남았지." 그의 깊고 섹시한 미소가 그녀에게 경고 신호를 보냈다. 그는 옆으로 밀착해 오며 재킷을 벗었다. "비행 중 전초전을 벌여 볼까, 스태어티스 부인?"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빛이 그의 무자비한 얼굴과 숱 많은 검은 머리를 강조했다. 그는 인상적인 힘과 권위의 소유자였고, 눈길이 쏠릴 정도로 절정기의 남성이었다. 그는 제안하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사프론은 그의 익살에 웃음 짓는 수밖에 없었다.

"좋소?" 그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 선을 그리며 재촉했다. 그는 다른 손을 그녀의 어깨에 얹어 놓았다.

"마음이 끌리오, 부인?" 그가 장난스럽게 다시 다그쳤다.

그녀는.... 사프론은 그의 품 안에 안기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부인>, 그의 말에 그녀는 눈을 떴다. 사랑하지만 존경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한 상황에서 그들 사이에 무슨 희망이 있을까?

"그렇게 굳어진 얼굴을 할 필요는 없소, 달링" 알렉스가 말했다. 그의 눈에선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저 농담이니까"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에서 떨어져 V자로 파진 옷깃 속으로 들어갔다. "비행은 한 시간도 되지 않고, 처음으로 당신과 침대에 들면 일주일 동안은 나오지 않고 싶소. 가능한 한 오랫동안!" 그는 그녀의 입술에 대고 중얼거렸다. "이런 맹렬한 육체적인 요구는 쉽게 충족되지 않을 거요" 그는 그녀에 대한 자신의 욕망이 유감스럽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사프론은 그의 느낌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목덜미에 닿은 그의 손가락, 그녀의 입술에 닿은 그의 입술. 그는 그녀를 원했다.

"잠시 쉬어야 할 것 같아요" 그녀가 중얼거리자, 알렉스가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해요. 나중에 당신이 피곤하면 안 되니까" 그는 허스키하게 말했다.

그녀는 눈을 찔끔 감았다. 미코노스에서 알렉스가 로시니에 대한 그녀의 취향에서 성적인 본능을 처음으로 지적했을 때부터 그를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자각되었다. 그녀는 약혼반지를 받은 다음에도 그를 거부함으로써 자신이 판 굴에 빠졌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는 육체적인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결혼까지 강행하진 않았을 것이다.

과거를 뒤돌아보면,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순진한 바보였는지 새삼 알 수 있었다. 요트에서 그녀를 농락하고 유혹하는 알렉스에게 푹 빠져 버렸다. 그리고 세련된 실비아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최초로 그 감정은 허물어졌고, 알렉스의 정체를 알아차린 순간 완전히 산산조각났다.

커져 가던 사랑은 삽시간에 증오로 변했고, 그녀의 불 같은 성질은 복수라는 어리석은 계획에 불을 질렀다. <말이 씨가 된다>고 누가 말했던가? 정말 그렇다! 하지만 지금 뭘 해야 하지? 무의식적으로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웬 한숨이지?"

사프론은 눈을 뜨고 자신을 자세히 바라보는 알렉스를 발견했다. 그녀는 잠시 그를 주시했다. 그의 비상한 관심에 홍조가 일었다. "..."

마침 멋진 금발의 스튜어디스가 나타나 사프론을 구해 주었다.

"축하드립니다, 스태어티스 씨. 이날을 절대로 못 볼 줄 알았어요"

알렉스의 관심은 금방 그 금발의 스튜어디스에게 향했다. "고맙소, 이브. 당신이 돌아온 줄은 몰랐는걸"

그의 친근한 미소와 금발 미녀의 반응을 지켜보는 사프론의 마음은 싸늘하게 식었다. 또 다른 이브. 하지만 이 여자는 생생하게 살아 있을 뿐 아니라 알렉스와도 친한 게 분명하다. 이건 사프론이 가장 두려워하던 공포를 건드렸다. 마치 모래 속에 고개를 처박은 타조처럼 모든 것을 망각한 채 이 결혼을 지속시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무엇인가가, 그리고 누군가가 친구의 죽음에 알렉스가 관여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킬 테니까. 거짓으로 평생을 살아갈 수는 없다. 그녀는 자신의 침묵을 방어하기 위해 샴페인을 홀짝거렸다.

그들이 파리의 호화스런 호텔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날은 저물었다. "당신이 이해해 주었으면 하오, 사프론. 당신을 쫓아다니느라고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3일 후에는 사무실로 돌아가야만 하오. 하지만 걱정 말아요, 나중에 그만큼 보상하리다" 방에 들어서며 알렉스가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몇 달내에 우린 지우해나 서인도해를 유람하며 긴 허니문을 갖게 될 거요. 당신이 원하는 곳은 어디든지"

바로 이곳만 아니라면 어디든 좋아. 그녀는 우울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화려한 방을 둘러보며 알렉스의 시선을 피했다. 미래에 실낱 같은 희망도 품어 볼 수 없다. 택시에서 그녀는 결혼을 지속시킬 수 있는 방법을 수십 가지도 더 떠올렸다. 알렉스에게 사실을 말하느냐, 아니면 이 심각한 거짓을 방조하느냐.

우아한 커튼이 드리워진 창가에는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 테이블 중앙에는 붉은 장미 꽃다발이 꽂혀 있고, 2인용의 반짝이는 크리스털 잔과 샴페인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저녁을 먹을 거예요?" 그녀가 소리쳤다. 그녀는 밖에 나가서 식사를 하며 시간을 지연시킬 생각이었지만 알렉스는 다른 생각을 가졌음이 분명하다.

"우리 허니문중에 어딜 간단 말이오?" 그가 허스키하게 말하며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고 목덜미를 입술로 간질였다. "우리 단둘이서만" 그의 숨결이 그녀의 피부를 자극했다.

"진부한 표현이군요" 그녀는 웃으며 그의 품 안에서 빠져나오려 노력했다. "식사를 주문하세요, 난 좀 씻어야겠어요"

그녀는 화장실이라고 생각되는 문을 향해 돌진했다. 요 근래 보기 드물게 예상이 적중했다. 그녀는 화장실 문을 잠갔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입이 바짝 말랐다. 보통 상황이라면 오늘 밤은 꿈이 실현되는 날이리라.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해 허니문 중이라면. 하지만 자신을 속일 수는 없었다. 아무 희망이 없다.

하느님, 살려 주세요! 그녀는 어렵사리 침을 삼켰다. 어쩌지! 그녀는 생각해 내야만 한다. 마음 한구석에서 복수는 잊어버리는 게 상책이라는 말이 들려왔다. 알렉스 주변에 있기만 해도 정신을 못 차리는데, 계획이 제대로 될 리가 없어. 화장실에서 그녀는 숨을 길만 찾았다. 진실을 밝히고 알렉스의 이해를 구하자. 설마 그가 죽이기야 하겠어...

그들은 전혀 식사를 들지 못했다. 사프론은 식욕이 없었기 때문에 샴페인만 들이켰고, 그녀가 보기에는 알렉스도 긴장한 것 같았다. 그들은 결혼을 자축하며 건배를 했다. 사프론은 응보의 시간을 지연시키기 위해 생각나는 대로 주섬주섬 이야기를 꺼냈다. 놀랍게도 그는 그녀가 그러도록 내버려 두었다. 마침내, 그는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커피는 생략하도록 합시다. 당신이 먼저 화장실을 사용해요"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자리에소 일으켜 큰 침실로 이끌었다.

그녀는 침실을 차지하는 거대한 침대를 보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그에게 말해... 지금 그에게 말해... 그녀의 마음이 소리를 질렀지만,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안나에게 선물 받은 하늘하늘한 희 네글리제와 그의 검은 실크 잠옷이 침대 위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 잠옷이 주는 친밀성이 사프론에게 고향에 온 듯한 느낌을 주어 공포감이 사라졌다.

"알렉스, 난 실수를 저질렀어요" 그녀가 좀 더 생각할 시간도 없이 말이 뛰어나왔다. 그녀는 어깨를 똑바로 펴며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진실이 유일한 방법이다.

"난 당신과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다시 말해봐요" 그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난 영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결혼 무효 신청을 제출하고, 모든 걸 없었던 일로 해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몸을 돌려 문으로 걸어가자, 알렉스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당신은 신경이 날카로워졌어" 그가 부드럽게 말해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품 안에서 빠져나와 뒷걸음질 쳤다.

"아니, 그렇지 않아요" 그녀가 문의 손잡이를 잡는 순간 알렉스가 그녀를 덥석 들어 올렸다.

"바보 같으니, 이건 단지 신부다운 자연스런 신경질이오,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나도 초조하다니까!"

그녀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발버둥 치며 소리쳤다. "난 신경질이 난 게 아니에요. 젠장! 날 내려놔요!"

그는 그 말에 따라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녀느 침대에 누워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엄청난 사태를 제대로 표현할 말을 찾았다.

"미안해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정말 미안해요, 알렉스, ...."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난 불법적으로 돈을 벌어들인 당신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복수하기 위해 결혼했어요. 난 당신이 내 친구 이브처럼 고통받길 원했어요. 그리고 당신에게 가능한 한 많은 돈을 긁어내고 싶었어요."

하지만 나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녀는 그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지난 몇 시간 동안 그녀가 가장 비통스러워했던 부분은 바로 알렉스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가 그녀와 결혼한 이유는 사프론의 원래 계획과 별 차이가 없다.

그녀는 침착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스튜디오 96>에 대한 걸 모두 알고 있어요"

그가 고개를 뒤로 번쩍 젖혔다. "당신이 <스튜디오 96>을 안다고?"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살폈다.

최소한 부인하진 않는군. 사프론이 생각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 난 그곳을 알아요" 그녀는 한 손으로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알렉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돌로 변한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고, 그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난 당신이 그 혐오스런 마사지 클럽의 소유주라는 사실을 안단 말예요" 그녀가 마침내 말했다.

"알겠소. 그럼, 당신이 그곳에서 일했나?" 그가 냉혹하게 으르렁거렸다.

"15분밖에 있지 않았지만, 그곳이 어떤 곳인지 정확하게 파악했어요. 그리고 당신이 나에게 나가는 문을 가리켜 줬죠. 불행하게도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이브는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어요. 난 그녀와 소식이 끊어졌고, 몇 달 전에 경찰이 찾아와 이브가 나에게 편지 한 통을 남긴 채 약물 과다복용으로 죽었다고 알려 줬어요. 그 썩어빠진 상류 헬스클럽에서 일한 게 그녀를 파멸시킨 거예요. 당신 같은 남자가 부를 벌어들이는 동안 말예요"

그녀는 수수께끼 같은 그의 얼굴을 살폈다.

"왜 그랬어요. 알렉스? 당신은 그렇게 많은 사업체를 가지고 있으면서, 왜 그렇게 야비한 마사지 클럽까지 소유한 거죠?"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도대체 말이 안 된다.

"탐욕 때문에?" 그녀가 물었지만,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고백을 하고 나니 속이 시원해졌다. 하지만 그녀가 알렉스의 곁을 지나갈 때, 그가 그녀의 팔을 잡고 돌려 세우며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목을 조였다. 그녀는 그의 눈을 보고 혈관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래, 당신이 바로 그 젊은 여자였어" 그가 말을 멈췄다. 드디어 그도 그녀를 알아본 것이다. 그는 그 영상을 지워 버리려는 것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냉혹하게 말했다.

"이제야 친구의 복수를 위해 나와 결혼했다는 걸 알려 놓고, 퇴장하겠다? 그래, 왜 마음을 바꿨지, 사프론?" 그가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다그쳤다. "나와 같이 잠을 잔다는 생각이 그렇게 소름 끼치던가?"

"... 아니에요"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의 강한 두 손이 그녀의 목을 조였다. 그의 검은 두 눈에는 사악한 빛이 번뜩였다. 그녀는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혔다.

"나의 달코만 사프론, 순진하기 이를 데 없군. 복수라면, 우리 그리스인을 따를 수 없지" 그는 거친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턱을 잡고 뒤로 젖혔다. 그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해 봐, 이 마녀. 언제 그 계획을 세웠지? 우리가 만났을 때, 아니면 그전? 그 때문에 우리 어머니를 위해 일한 건가?"

"아니에요... " 사프론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알렉스의 손이 그녀의 목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허리를 조여 안았다. 그에게 잡힌 그녀의 턱은 얼얼했고, 그의 눈에 담긴 얼음 같은 분노와 무자비함에 무서워서 저절로 눈물이 쏟아졌다.

"대답해" 그가 소리쳤다.

"난 요트를 떠날 때까지 당신을 기억하지 못했어요. 청색 비즈니스 정장... 전에 본 그런 옷과 서류 가방을 든 당신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어요. 난 당신이 누군줄 알고 증..." 그녀는 <증오했다>는 말을 하기 전에 입을 다물었다. 지금 그녀는 분노한 남자와 침실에 단 둘만 있다. 이건 그녀의 생각과는 딴판이다. 알렉스 같은 남자가 그녀를 순순히 나가게 내버려 두리라 생각하다니. 얼마나 바보 같은가. 그녀는 정신이 나갔던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처했으면서도 이 남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니!

"증오했다고? 그렇다면 내가 당신에게 그 원인을 확실히 제공해 주지" 그의 냉혹한 의도는 분명했다. 사프론은 발버둥을 쳤지만 결국 알렉스와 나란히 침대에 눕게 되었다.

 

7

"안 돼요, 알렉스. 당신은 이해를 못 해요. 난 마음을 바꿨어요. ..."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그의 입술이 덮쳐 왔다. 연인의 키스를 신랄하게 풍자한 키스. 키스가 끝날 무렵 그의 단단한 몸은 그녀를 반쯤 덮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그녀의 재킷과 스커트를 벗겨 냈다.

"이해? 난 너무 잘 이해하고 있어, 이 마녀. <난 마음을 바꿨어요>?" 그가 그녀의 말을 흉내냈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서 단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 "굳이 말하기는 싫지만, 달링. 당신에겐 선택권이 없소" 그는 냉소적으로 말하며 성냥개비를 부러뜨리듯 그렇게 간단히 그녀의 캐미솔을 찢어 버렸다. 그녀의 가슴이 환한 불빛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좋아요, 알렉스. 부탁해요, 알렉스" 그가 코웃음쳤다. "당신이 나에게 그렇게 간청하도록 만들지, 이 마녀"

하지만 그의 음성에 담긴 차가운 분노, 꽉 다문 입술, 광대뼈 위에 번진 홍조는 자신을 엄청나게 자제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었다.

그녀의 관자놀이에 오한이 났다. "안 돼, 부탁이에요" 하지만 간청이 먹혀들지 않자, 그녀는 빠져나가려 발버둥을 쳤지만 그에게 간단히 제압당했다. 그는 그녀보다 훨씬 큰데다, 분노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유감이라고?" 그가 코웃음을 쳤다. "떠나고 싶어?"

그는 침대에서 내려섰지만 여전히 한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눌러 침대에 고정시켰다. 그는 옷을 벗어 내던졌다. "내가 당신에게 <유감>이 무엇인지 보여 주겠소, 사프론" 그가 무자비하게 맹세했다. 그의 검은 두 눈은 그녀의 얼굴과 몸을 도전적으로 훑어봤다.

"심각할 리가 없죠?" 그녀가 공허하게 소리쳤다. 그가 그녀의 눈앞에 섰다. 그의 맨몸이 인공적인 불빛을 받아 금빛으로 빛났다. 공포가 그녀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흘렀다. 이 상황에서도 그는 너무도 아름다운 남자였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심각했던 적은 없었소" 그가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녀가 그를 발로 걷어찼지만, 그의 한쪽 다리가 그녀의 다리를 단단히 눌렀다. "당신은 정말 그리스인에게 복수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소? 우리는 그 부분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대가들이야. 당신은 그 점을 기억해야만 해, 사프론" 그가 그녀의 몸 위로 올라와 그녀의 양손을 잡고 베개 양쪽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그의 체중으로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그녀를 눌렀다.

그녀는 그를 떨어뜨리기 위해 다시 몸을 비트는 허튼 시도를 했다. "비켜요, 당신은 몸집 큰 짐승이야. 난 당신을 증오해!" 그녀의 조급한 성격과 공포가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말하도록 만들었다. "하느님, 당신과 당신네 그리스 전통들! 가족! 웃겨요! 심지어 당신 어머니마저 당신을 두려워하잖아요. 수년 동안 당신은 그녀가 참을 수 없는 친척들과 함께 지내게 하며 괴롭혔어요."

지금 그의 반응에 비하면 아까 화를 낸 건 약과였다.

알렉스의 두 눈은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그는 그녀가 신음을 내뱉을 정도로 양 손을 꽉 쥐었다.

"발을 잘못 디뎠어, 사프론" 그가 이를 갈며 말했다.

"그런 신랄한 비판으로 날 괴롭힐 순 없어. 난 당신을 가질 생각이고, 당신은 내가 결국은 원하는 걸 갖는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어떻게 이토록 비열한 짓을 할 수 있죠?" 그녀는 소리쳤다. 격렬한 공포가 분노로 모든 경계심이 사라졌다. "하긴 기둥서방보다 나을 것이 없는 남자에게 뭘 바라겠어요" 그녀가 덧붙이며 마지막 도전을 했다.

"날 다시 한번 더 그렇게 부르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줄 알아!" 그가 으르렁거리며 그녀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잠시 그는 분노로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의 턱이 움찔거렸다.

"진실은 아픈 법이죠" 그녀가 싸우려 노력했다.

"당신은 바보이거나 아니면 매우 용감한 여자요." 그는 덤벼들기 일보 직전인 호랑이처럼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그를 쓰디쓴 후회로 바라보았다. 알렉스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바보였다. 그녀는 미코노스에서의 그날 이후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걸 알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기엔 너무 자존심이 강했고 두려웠다.

그의 입술이 그녀를 사납게 강탈하며 야만스런 분노로 가득 찬 키스를 했다. 그녀는 고통과 모멸감으로 신음했다. 그녀의 반응을 알아차린 그는 입술로 부드럽게 그녀를 탐색하면서도 긴 손가락으로는 여전히 그녀를 꽉 잡고 있었다.

"당신은 내가 받아야 할 것을 주게 될 거야. 내 사랑스런 부인"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술은 죽음 같은 미소를 머금고 천천히 그녀의 가슴을 향해 내려갔다.

"난 아냐" 하지만 그가 그녀의 가슴에 가볍게 키스하자 그녀의 저항이 흐트러졌다.

"당신은 그렇게 될 거야.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난 당신이 주려고 하지 않는 건 받지 않을 테니까" 숨결이 가빠졌지만, 그는 무서울 정도로 침착하게 말했다. "당신은 나를 결혼으로 이끌었소. 어떤 여자도 성공하지 못한 일을 당신은 해낸 거야"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프론은 강력하고 냉소적인 사업가에 반항한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바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는 기쁨의 달콤한 물결을 느꼈고, 그 기쁨이 혈관을 통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에 저항할 수 없었다. 그의 혀가 가볍게 그녀의 가슴 끝을 애무했다. 그녀는 헐떡거렸다. 그녀의 몸이 기대에 부풀어 떨리며 그를 향해 들어 올려졌다.

"난 체벌하려는 게 아니오" 그가 실크처럼 부드럽게 말하며, 한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사프론은 몸을 뒤로 휘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어두운 눈 깊은 곳에는 조롱기가 엿보였다.

"응보를 받을 시간이야" 그가 말을 하며 입술로 한 번 더 그녀를 막았다. 잠시 그녀는 이를 꼭 다물고 저항하려 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스타킹이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지" 알렉스가 그녀의 배에 키스하며 말했다. "처녀일 리가 없지" 그가 그녀를 보며 조롱했다. "또 다른 책략이 뻔해. 의심할 것도 없이" 그는 천천히 그녀의 속옷과 스타킹을 벗겨 내며 입술로 온몸에 키스를 한 후 다시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사프론은 싸워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남은 힘이 없었다. 그녀의 혈관을 타고 뜨거운 피가 돌며 정열을 자극했다. 알렉스는 경험 많은 연인인데다, 그의 손길, 체취, 살과 살의 접촉, 그의 긴 손가락의 미묘한 터치가 그녀를 떨게 만들며 뼈까지 녹아내리게 만들었다. 그는 너무 크고, 너무 강인했다. 그의 냄새가 그녀의 후각을 가득 채웠고, 그의 손길이 그녀의 마음을 채워 폭발 직전으로 몰고 갔다.

그녀는 자신이 그의 넓은 어깨에 매달릴 때까진 그가 자신의 손을 풀어 준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사프론, 나의 향기로운 사프론" 그가 신음하며 그녀의 부풀어 오른 가슴을 만졌다. 그의 넓은 가슴이 그녀의 가슴에 맞닿았다. 그의 입술이 지속적으로 그녀에게 새로운 정열을 불러일으키며 미칠 정도로 몰아세웠다.

그의 큰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들어 올렸고, 그의 전 체중이 덮쳐 오는가 싶더니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그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고통으로 소리쳤고, 알렉스는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그의 눈을 그대로 바라봤다. 잠시 그녀는 자신의 눈에 후회가 어렸음을 감지했다. 그때 그가 이상할 정도로 부드럽고 다정하게 키스를 했다. 그녀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그래, 그래!" 그가 쉰 목소리로 부추겼다. "다시 당신을 상처입히지 않을 거요, 긴장을 풀어" 그가 그녀의 열린 입술에 대고 숨을 쉬었다. 한쪽 팔로 자신의 체중을 유지하며, 그는 다른 팔로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됐어, 내 작은 마녀. 이대로 가면 돼" 그는 그녀를 침대에 눕히며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길고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의 손톱이 그의 부드러운 등에 박혔다. 그녀의 다리는 본능적으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알렉스에게 매달려 절대로 상상해 보지 못한 감각과 느낌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절정에 올랐고, 곧 폭풍과도 같은 환희를 맛보았다.

순간 알레스도 신음을 지르며 숨을 쉬지 못하는 한편, 그 거대한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어 그녀의 몸 위로 쓰러졌다. 그의 가슴은 그녀처럼 빠르게 뛰고 있었다.

서서히 몸 안의 불길이 수그러들자, 사프론은 극심한 피로와 더불어 마음이 텅 빈 듯한 공허감으로 눈물을 흘렸다. 알렉스는 그녀에게 떨어져 나와 등을 대고 반듯하게 누웠다. 그의 강인한 가슴은 여전히 헐떡거렸다. 그의 거친 숨소리만이 침실의 정적을 깼다.

그녀는 훌쩍이며 침대에서 내려와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향했다. 그녀는 알렉스가 자신을 뒤따라와 허리에 팔을 감자 깜짝 놀랐다.

"저리 가요" 그녀는 그의 품 안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는 커다란 욕조에 물을 가득 채웠다.

"괜찮소?" 그가 그녀를 들어 올려 따뜻한 물 속으로 부드럽게 집어넣으며 물었다.

"물론이에요"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들은 마치 타인처럼 예의 바르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알렉스는 타인이다. 그녀는 새삼 슬픈 사실을 확인했다.

그녀는 눈을 감으며 뒤로 기댔다. 그녀는 너무 피곤하고 가슴이 아팠기 때문에,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알렉스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몸을 스펀지로 문지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너무 피곤해 반대할 힘도 없었다.

잠시 후 그는 그녀를 욕조에서 안아올려 큰 수건으로 물기를 말려 준 다음. 다시 침대에 데려갔다. 그녀는 봉제 인형처럼 가만히 누워 있었다. 잠시 그녀는 그의 손이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것을 느꼈지만, 상상인 것 같았다. 눈을 떠보니 그의 가무잡잡한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잠을 자요, 내일 아침에 이야기를 합시다"

눈썹이 갑자기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그녀는 잠에 빠져들었다.

사프론은 한숨을 쉬었다. 자신을 감싸안은 단단한 몸이 주는 온기에 몸을 더욱 밀착시켰다. 그녀의 귀에 들리는 규칙적인 심장 박동 소리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쾌적함과 안전함을 주었다.

그녀는 눈썹을 여러 번 깜박거리며 편안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그 순간 어젯밤의 기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다시 한번 눈을 깜박거렸다. 침실에는 아침 햇살이 가득 퍼져 들어왔고, 차 소리가 완전히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침대에 내리누르는 무거운 체중에 조심스럽게 살펴보니, 허리와 다리에 웬 남자의 다리가 걸쳐져 있다. 알렉스! 그녀는 천천히 남자의 엉덩이와 허리, 어깨를 거슬러 오르다가 결국 남편의 시선과 마주쳤다.

"잠에서 깨어났군" 그가 부드럽게 중얼거렸다. 그는 한쪽 팔꿈치로 머리를 기대고 누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왜 서두르지, 사프론? 우린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요"

"난 일어나고 싶어요"

"그래... , 나도 그래" 그가 낄낄거리며 장난을 쳤다. 그는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베개 위에 가득 헝클어 놓았다.

"몇 시죠?" 그녀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6. 시간은 많소" 알렉스의 손이 그녀의 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어젯밤 난 당신을 죽이고 싶었소" 그의 손이 잠시 그녀의 목을 조였다.

"그럴 필요 없어요. 난 떠날 거예요" 사프론은 거칠게 말을 꺼냈다. 알렉스는 너무 가깝고 너무 강인했다. 그녀는 도망가야만 한다.

마치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난 더 괜찮은 계획을 세웠지" 그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더니 장밋빛 가슴 봉오리를 만지자 유두가 바짝 긴장했다.

"안 돼" 그녀는 그의 계획과 성적인 의도, 전부를 거절했다.

"하지만 아직 내 계획을 들어보지도 않았잖소, 사프론" 그가 부드럽게 말하며 다른 쪽 가슴으로 손을 옮겼다.

"당신은 날 떠날 수 없소. 그러니 그런 생각일랑 아예 잊어버려요. 하지만 당신은 복수를 원했소. 나는 절반은 그리스인이오. 때문에 난 당신을 이해할 수 있고, 그걸 허락하겠소. 당신은 얼마든지 내 돈을 써도 좋소. 나는 이성적인 남자요. 어젯밤 약간 이성을 잃긴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소. 우리 모두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지고 결혼했소. 난 당신이 내 돈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했고, 당신은 어젯밤 그 사실을 나에게 확인시켰소"

그는 너무 차갑고 이성적으로 말한다. 알렉스의 말에 담긴 무시무시한 진실에 사프론은 오한이 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난 후계지와 함께 즐길 수 있는 당신을 가졌지. 달콤한 사프론. 언제든, 어떻게든 내가 원하는 대로!"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녀의 몸은 이미 그에게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는 만큼 자신을 이렇게 만드는 그를 증오했다. 그녀는 그의 단단한 다리가 자신을 압박하는 걸 느꼈다. 게다가 알렉스의 몸 아래에 한 팔이 끼인 상태이기 때문에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머지 한쪽 손을 주먹 쥐고, 자신의 가슴을 계속 애무하는 그를 제지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만"하지만 그는 간단히 그녀의 손을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난 언젠가 그만둘 거요" 그의 검은 눈이 냉혹하게 번들거렸다. "하지만 오늘은 분명히 아냐. 그리고 당신도 내가 그만두기를 원하지 않을 거요"

사프론은 씁쓸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악마, 그 자체였다. 그녀는 그의 주먹 안에서 손톱을 세웠다. 그에게 상처를 입히고, 자유롭게 되기 위해.

하지만 그는 한쪽 눈썹만 올리며 천천히 그녀의 팔을 머리 위에 고정시켰다. "이젠 뭘 할 거지, 사프론? " 그가 부드럽게 조롱했다.

그가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부풀어오른 가슴을 애무하자, 그녀는 몸을 떨었다. 그녀의 초록 눈은 분노와 흥분으로 번쩍거렸다. "그러지 마세요" 그녀는 그에게서 몸을 돌리려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그녀의 옆에 나른하게 누운 알렉스는 그녀의 불편함을 즐기는 게 분명했다. 냉소적인 미소, 차가운 갈색 눈이 그녀의 홍조 띤 얼굴에 고정되었다.

"내가 언제든, 어디서든이라고 말했잖소. 그건 내 선택이오" 그가 단호한 결심을 반복했다. "내 돈, 내 장난감" 그는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함정에 빠졌다. 그의 눈앞에 길게 누워있는 데다 한 손은 여전히 그의 몸 밑에, 다른 손은 머리 위에 고정되었다. 그는 몸을 움직여 그녀의 하체에 무거운 체중을 실으며, 다른 한손으로는 자유롭게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을 마음껏 애무했다. 그의 입술이 불타는 키스를 퍼부으며 그녀의 감각에 불을 질렀다. 그의 입술이 다시 가슴으로 향했다.

"제발.... , 제발!" 그녀는 안도의 절정에서 몸을 떨며 소리 질렀다.

몸서리쳐지는 떨림이 가라앉자, 사프론은 마침내 눈을 떴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혼란스러웠다.

"...?"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축축한 이마에 키스를 한 다음 남성적인 미소를 지었다. "핵심을 증명하기 위해서지, 당신은 내 거야."

모멸감으로 눈물이 북받쳤지만, 힘껏 참았다. 그녀는 그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날 경멸할 입장이 아니실 텐데요?" 그녀가 그의 흥분된 상태를 지적하며 앙갚음을 했다.

"당신을 즐겁게 하는 게 내 의도였소"

사프론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날 타락시키면서 말이군요."

"그렇게 충격받은 얼굴을 하지 말아요, 사프론. 남자가 자신의 여자를 많은 방법으로 즐겁게 해줄 능력을 확인하는 건 매우 즐거운 일이오. 그리고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타락하는 것 이상의 즐거움은 없소, 내 순진한 사프론."

그의 허스키한 놀림이 사프론의 모멸감에 기름을 부었다. 그녀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려 몸을 비틀었지만 그는 그녀를 더 빨리 잡았다.

"놀랍게도, 어제저녁 당신은 처녀였소. 그리고 난 부드럽게 대하지 못했지" 그가 인정했다. 그는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 자신에게 향하게 만들었다. "당신은 어제저녁 매우 아팠을 거요. 오늘 아침에 난 그 점을 고려했소"

알렉스가 고려를 해? 사프론은 슬프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그녀는 알렉스와 그에 대한 사랑 모두를 던져 버리고 싶었다.

", 사프론, 일어나요" 그가 부드럽게 명령했다. 그녀는 눈을 떴다. 그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그녀를 내려다봤다. "나는 차가운 샤워가 필요하오. 당신은 짐을 싸도록 해요. 몇 시간 내로 우린 떠날 거요"

"?" 그녀가 질문했다. 그의 반쯤 감은 숱 많은 속눈썹이 표정을 완벽하게 가려 주었다. 남자가 이런 속눈썹을 가지고 있다니. 이건 죄악이다.

"짐을 싸오-사프론-우린-떠날-거요" 알렉슨는 마치 아이에게나 말하듯이 각 단어를 강조해서 말했다. 그의 검은 눈엔 그녀를 놀리는 빛이 가득했다.

"왜요? 어디로 가죠?" 그녀가 질문했다. 그녀는 비극적이고 재난에 가까운 지난 24시간을 잊고 영국으로 도망갈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알렉스를 보니 희망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옷을 벗은 채로 당당하게 서서 그녀를 험악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난 당신에게 도망갈 기회를 줄 만큼 바보가 아니오, 사프론. 내가 당신에게 말했을 텐데. 당신은 돈을 위해서 날 위해 일하는 거요"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린 단신의 안전을 확신할 수 있는 세렌디피도스섬으로 갈 거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그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당신이 우리 계약을 지킨다는 걸 확신하기 위해서도. 최소한 내가 다른 결정을 내릴 때까지 말이오"

그녀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어제 그녀는 정직만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진실을 향한 그 고집이 오늘 그녀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만일 그녀가 헬스클럽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었다면, 그리고 알렉스의 추잡한 과거를 잊을 준비만 되었다면, 그들의 결혼에는 기회가 있었으리라. 하지만 지금 사프론은 그녀를 전혀 신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싫어하고, 죄수처럼 가둬 놓으려는 남편과 맞부딪쳤다. 그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장난감, 그리고 그의 후계자를 낳아주는 씨받이. 그것도 그가 싫증을 낼 때까지만...

알렉스가 그녀에게 회의에 찬 시선을 던졌다. "날 욕해도 소용없을 거요, 여보" 그리고 몸을 돌려 그는 욕실로 들어갔다.

사프론은 베개를 집어 그에게 던졌지만, 닫힌 욕실 문에 맞고 떨어졌다.

공항에서 알렉스는 그녀를 개인 전용기로 이끌었다. 그의 강한 손가락은 그녀의 팔꿈치를 꼭 잡고, 조금의 자유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지난 3시간 동안 그녀를 시야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

그녀가 좌석에 앉자 알렉스가 안전 벨트를 조여 줬다. 그가 자신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절대로 알아선 안 된다. 그녀는 그 사실을 뼈에 사무치도록 다짐했다. 그는 그야말로 이성적인 이유로 그녀와 결혼했다. 정욕과 후계자. 사랑을 전혀 믿지 않는 그에게 감정을 들킨다는 건 참을 수 없는 굴욕이다.

"편안하오?"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고개를 약간 돌렸다. 그는 무릎에 얹어 놓은 서류 가방을 막 열려던 참이었다.

", 고마워요" 그녀가 예의 바르게 말했다.

"잘됐소. 난 할 일이 있소" 그는 그녀를 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이미 잊혀지고, 그의 모든 관심은 가방에서 꺼낸 서류에 집중되어 있었다.

<장난감>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의미는 분명하다. 사프론은 씁쓸하게 생각하며 얼마나 더 이 상황을 버틸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들은 아테네에서 비행기를 내려 헬리콥터로 갈아탔다. 그리고 20분 후 세렌디피도스섬에 닿았다.

"당신의 새로운 집이오, 사프론. 어떻소?" 알렉스가 물었다. 그의 깊은 목소리는 헬리콥터의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쓰고 있던 헤드폰을 통해 멀리서 들려왔다.

그녀는 창문 아래에 펼쳐진 장관을 보았다. 크리스털처럼 깨끗한 청록색의 바다가 초승달 모양의 작은 섬 주변에 하얀 물거품을 일으켰다. 항구에는 검은 손가락처럼 보이는 나무로 만든 방파제가 있고, 몇 마리의 말, 마을이라 부르기에는 힘든 작은 구락, 해변에서 섬 중앙에 솟은 언덕으로 통하는 구불거리는 길이 보였다.

"아름다워요" 그녀는 중얼거렸다. 헬리콥터가 삼면이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이고 바다를 향해 서 있는 멋진 저택 위를 선회하자 그녀는 숨이 턱 막혔다. 가깝게 갈수록 정원과 테라스. 햇살을 반사하는 수영장은 근사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집 후원에 있는 헬리콥터 선착대에 내렸다.

"다행이군" 알렉스가 그녀의 대답에 반응했다. 그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헬리콥터에서 내리게 했다. "이곳은 매우 사적인 곳이오. 헬리콥터나 보트로 밖에는 오갈 수 없소.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내가 갖춰 놓았소. 친척들은 매년 한 달 정도 이곳에 머무르지만, 대부분 우리 단둘이서만 있게 될 거요"

"얼마 동안 머무를 건데요?" 사프론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이 섬이 도망가기에 쉽지 않다는 사실에 속이 답답해졌다.

"가능한 한 오래" 알렉스가 수수께끼처럼 중얼거린 후 그를 향해 뛰어오는 작은 여성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발을 멈추고 늙은 여성과 포옹하는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그 옆에는 늙은 노인이 사프론 쪽을 눈짓하며, 알렉스에게 그리스어로 몇 마디 던졌다. 그리고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알렉스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웃음을 터트렸다.

서로 소개시킨 후에도 가정부인 데스피나와 그녀의 남편인 게오르고스는 계속 웃으며 저택 안으로 앞서갔다.

"남자들끼리의 농담이오. 당신이 좋아할지 의문인걸" 놀랍게도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가볍게 키스했다. 그녀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 내 집 구경을 시켜주겠소"

"그리고 내 감옥이기도 하죠" 그녀가 곧 되받아쳤다.

"당신이 계속 아이처럼 군다면, 스스로 감옥 생활을 자초하게 될 거요" 그가 건조하게 말했다.

집은 근사했다. 거실과 식당, 가족실, 서재, 부엌에선 모두 정원과 바다가 한꺼번에 보였다. 길고 좁은 복도는 큰 홀과 위층 계단으로 연결되었다.

"홀은 파티를 열 때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설계되었소. 훨씬 가정적이잖소?"

"당신이 가정적인 타입이라 하기엔 힘들죠" 사프론이 금세 받아쳤다.

그가 그녀의 턱을 들어올렸다. "내가 어떤 타입이 될 수 있는지 곧 알게 될 거요. 내가 당신의 말대꾸에 합당한 벌을 내린다면 말이오. 당신은 그걸 좋아하지 않을걸"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못 박혔다. 그녀는 금방 분노에 찬 반박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갈색 눈동자 깊은 곳에서 빛이 번쩍 일며 온몸이 긴장하는 것을 느끼자, 그녀는 할 말을 꿀꺽 삼켰다.

"그러는 편이 좋아, 사프론. 당신은 금방 배우는군"

그가 그녀를 품안에 끌어당기며 말을 이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이 거래에서 기대한 것을 전부 가질 수는 없소.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문명화된 성인처럼 행동하지 못할 이유도 없지."

그의 알겠다는 미소는 그녀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안 돼" 그녀는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그의 품에서 그녀는 너무 연약했다. 무스크 향과 그의 따뜻한 체온이 그녀의 자제심을 약화시켰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의 반항적인 얼굴을 살펴다. "당신은 내 아내이고, 난 이 집의 주인이오. 당신은 내가 말하는 대로 행동해야만 해. 그리고 하인들에게 경의를 표해요. 그러면 우린 잘해나가게 될 거요, 알겠소?"

그녀의 허리를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고개를 숙여 고의적으로 그녀의 뺨을 간질였다.

"알겠소?" 그가 다시 물었다.

"알겠어요, 알았다고요" 그녀가 재빨리 대답하자, 그가 자신의 소유임을 주장하는 키스를 했다.

 

8

사프론은 차분하게 알렉스를 따라 위층 침실로 갔다. 그녀는 경탄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높은 단 위에 있는 큰 침대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흰 레이스로 된 침대보는 예술이었으며, 침대 머리에는 날개를 펄럭이는 백조가 조각되어 있었다. 마루는 핑크색으로 줄이 쳐진 흰 대리석이었다.

반쯤 열린 문으로 호화로운 화장실을 흘끗 본 사프론은 순간 숨을 들이마셨다. 침실 안에는 옷장이 없는 것으로 보아, 또 다른 문이 의상실로 통하는 것이리라. 예상대로 의상실은 두 개의 긴 소파와 크리스털과 금으로 만든 낮은 탁자, 그리고 호화스런 화장대 등 최소한의 가구로 효율성을 극대화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발코니로 통하는 큰 판유리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순간 열기가 후끈하게 밀어닥쳤다. 눈앞에 기가 막힌 장관이 펼쳐졌다.

드넓은 정원이 색채의 홍수를 이루는 테라스와 연결되었다. 그 너머로 푸른 바다에 씻겨진 은빛 모래사장이 펼쳐졌다. 왼쪽으로는 방파제와 몇 채의 집 지붕이 보였다. 오른쪽에는 끝없는 모래사장과 바다, 그리고 날카로운 검은 절벽이 보였다.

"기가 막히게 아름다워요, 그리고 너무 조용하고 평화스럽군요" 그녀는 거의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알렉스는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감고 끌어당겼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을 실크 블라우스 안에 집어넣어 그녀의 가슴을 만졌다.

그가 그녀의 긴 머리칼을 따라 목덜미와 작은 귀를 부드럽게 애무하자, 전율이 흘렀다.

"아름다워! 당신도, 나의 달콤한 사프론. 이 평화와 적막도 당신과는 비교가 되지 않소" 그가 그녀의 바지 단추를 풀고 지퍼를 내린 후 평평한 배를 어루만졌다.

"침대로 갑시다" 그가 쉰 목소리로 재촉했다. 그의 혀는 부드럽게 귀를 애무했고, 손으로는 그녀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낮잠은 어떻소, ?"

사프론은 눈을 감고 입술을 세게 깨물며 밀려드는 욕망의 파도와 싸웠다.

"당신도 원하면서, 왜 부인하지?" 알렉스가 그녀를 돌려세웠다. "그리고 나도 원하오" 그녀는 그의 절실한 욕구를 느꼈다.

그가 옳다. 그녀는 욕망과 절망이 어우러진 낮은 신음을 지르며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그의 입술을 재촉했다.

그날 오후는 그다음 날에도 계속되리라. 그리고 점점 더 저항하기 힘들게 될 테지.

사프론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바다에서 수건을 깔아 놓은 그늘진 바위 아래로 걸어갔다. 지금은 9월이지만 기온은 여전히 높고 무더웠다. 냉방 시설이 완비된 침실에 있는 편이 훨씬 현명하겠지만 더 이상 저택의 정적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비키니를 입고 오후의 햇빛 속으로 과감하게 뛰어들었다.

그녀는 수건 위로 쓰러지면서 숨을 헐떡거렸다. 수영을 너무 오래 했다. 그녀는 배를 대고 누워 팔 위에 머리를 얹은 후 작은 집 몇 채와 방파제로 연결된 황량한 모래사장을 주시했다. 수백 번이나 이곳에서 도망갈 방법에 대해 생각했지만,....

섬에 도착한 첫날, 그녀는 알렉스와 나란히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악마처럼 숙달된 손길로 끊임없이 그녀의 감각을 자극해 결국 절정의 만족감으로 흐느끼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수치스런 항복에 깊은 좌절감을 느끼며 천국과 지옥을 왕복했다.

여러 주일이 흘렀지만 빨리 오리라 생각했던 싫증은 결코 생기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면역이 되지 않았다. 대신 커다란 침실에서 매일 밤마다 알렉스에게 더욱 더 깊이 빠져들었다. 그는 그녀를 완벽한 환희의 정원으로 이끌었고, 그 굶주린 기쁨은 그녀의 본성을 부추겨 더욱 더 반응하고 원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함께 서로를 즐겁게 만드는 새롭고 놀라운 방법들을 발견해 냈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들었다.

그러면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어야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처음 몇 주 동안 알렉스는 몇 번 그녀를 아테네로 쇼핑도 데리고 가고 저녁도 먹었다. 그녀는 지금 영화배우도 부러워할 만큼 많은 옷과 휘황찬란한 약혼 반지에 어울리는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귀걸이를 가졌다. 알렉스는 돈을 물처럼 써대며 그녀에게 선물을 폭포처럼 쏟아부었다. 그리고 수많은 방법으로 그녀가 단지 돈 때문에 결혼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결혼식 날에야 그에 대한 사랑을 깨닫게 된 바보 같은 실수였다. 게다가 그와 결혼한 최악의 동기마저 밝힌 건 그 이상 멍청한 짓이었다. 지금 그에게 진실을 말할 수야 없지 않은가. 대신 그녀는 그와 끊임없이 싸웠다. 집이 외따로 있는 건 신에게 감사드릴 일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수백 킬로미터 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말다툼을 들을 수 있었으리라, 사실 데스피나는 그녀의 행동에 공공연하게 반대를 했다. 영어도 못 하면서.

좋았던 날은 단 하루뿐이야. 사프론은 중얼거렸다.

그가 아테네 구경을 시켜주던 날이다.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 디오니수스 고대 극장의 유적에 그녀는 경탄했다. 칠흑처럼 어두운 밤에 그들은 아크로폴리스 위에 있는 야외극장에 앉아, 리처드 버튼과도 같은 명배우에 의해 녹음된 이 도시의 역사를 들었다.

하지만 지난 몇 주 동안 그들은 더욱 더 멀어졌다. 사프론은 벌써 6주 동안이나 섬에서 나가지 못했다. 한편 알렉스는 이곳에 있는 시간이 더욱 짧아졌다. 매일 아침 8시면 그는 헬리콥터를 타고 아테네의 본사로 출근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늦게 퇴근했다. 지난 주말에는 아예 돌아오지도 않았다. 데스피나에게 짧은 메모만 남겼을 뿐. 그리고 어제저녁에 돌아와서도 사프론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사프론은 전에도 혼자였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최소한 일과 직장에 야심이 있었다. 지금에야 그녀는 진정한 고독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데스피나와 게오르고스가 영어만 조금 할 줄 알았더라도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 그녀는 매일 방파제를 지치도록 걸어다녔다. 남자들만 우글거리는 술집과 몇 채 되지도 않는 집이 사회생활에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리가 없다. 미소와 관대한 그리스식 환영이 전부였을 뿐이다. 사프론은 얼마나 더 이런 고독감을 견뎌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어제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 집에 돌아온 알레그가 짧게 말했다. "오늘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소. 금요일에 백모와 마리아와 함께 오신다고 하더군. 데스피나에게 준비시켜요, 알겠소?"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사프론은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어떻게요?" 그녀가 조롱하듯 코웃음 쳤다.

"몸짓으로요?" 아무 설명도 없이 11시에 들어온 주제에 오자마자 명령을 내리다니... 그는 시건방진 돼지야.

"비꼬는 건 그만둬, 사프론. 난 그럴 기분이 아니오. 얼마나 힘들게 보냈는 줄 알아?"

그녀는 3일 동안 그를 보지 못했다. 그의 검게 탄 얼굴이 희끄무레해져 무자비한 표정을 훨씬 강조했다. 한편으론 피곤해 보이기도 했다. "저녁은 드셨어요? 내가 먹을 걸 만들어 드릴게요"

"난 배가 고픈 게 아니고, 피곤하오"

"그렇다면, 침대로 가세요"

희미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번졌다. "그건 초대요?"

그가 조롱했다. "이런, 점점 대담해지는군"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정열적인 키스를 했다.

"안 돼 안돼요. 이게 아냐" 그녀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앉아요. 난 술을 좀 마셔야겠소" 알렉스가 긴 벽면을 따라 술병이 놓여진 곳으로 걸어가 크리스털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주시했다.

"당신도 한 잔 들겠소?"

사프론은 다시 소파에 주저앉았다. ", 브랜디를 약간"

알렉스가 그녀에게 잔을 건넸다. 잠깐 스친 그의 손가락이 말할 수 없는 친밀감을 주었다. 알렉스는 그녀 옆에 앉아 다리를 길게 뻗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나에게 필요한 건 바로 이거였어. 그리고 지금 우린 대화할 필요도 있지" 그가 고개를 약간 돌려 사프론의 섬세한 옆얼굴을 살폈다.

"뭐에 대해서요?" 그녀가 비통한 시선을 던지며 질문했다. "결혼식날 우린 할 말을 다했잖아요"

"우리에 대한 게 아냐. 그건 중요하지 않소" 그가 나른하게, 거의 건방지게 반박했다. "주말에 대해서요. 난 우리 어머니나 큰어머니, 또는 다른 손님들이 어떤 식으로든 놀라게 되길 원치 않소" 그는 손을 소파 뒤로 돌려 사프론의 머리칼을 잡고 고개를 돌렸다. "사프론, 내 귀염둥이, 내가 기대... 아니 명령하건대, 불 같은 성질 좀 죽이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입조심을 하도록 하시오."

그의 손이 그녀의 목에 닿자 척추에 전율이 흘렀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몸을 굳혔다. " 내 성격에는 전혀 하자가 없어요" 그녀가 화를 냈다.

그가 웃으며 그녀의 손에서 잔을 빼앗은 후 그녀를 품에 안았다. "뭐든지 간에. 난 어떤 성격이든 충분히 처리할 수 있지"

그가 그녀에게 키스하며 감각을 자극했다. 그녀가 그의 요구에 따르자, 곧 그녀를 데리고 침대로 갔다.

사프론은 수건 위에서 몸을 뒤척여 등을 대고 누웠다. 그 생각만 해도 피가 뜨거워졌다. 어제저녁 알렉스는 그녀와 느리고 부드러운 사랑을 나눴다. 너무 달콤한 사랑에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반으로 나눠진 한 몸처럼 서로의 품에서 잠들었고, 오늘 아침 알렉스는 아테네로의 출근을 930분까지 지연시킨 후 침대에서 그녀와 함께 아침을 먹었다.

사프론은 그 남자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동안 쭉 생각해 왔던 악한과 오늘 아침의 알렉스는 너무나 다르다. 그는 완벽한 수수께끼였다. 그에 대한 성적인 갈망에서 절대로 자유로워질 수 없으리란 불안한 예감이 커져만 갔다.

헬리콥터 소리가 적막을 깨자 그녀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시계를 손목에 찼다. 이제 겨우 4시인데! 그녀는 헬리콥터가 후원에 착륙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알렉스가 왜 이렇게 빨리 온 걸까? 무슨 꿍꿍이지?

그녀는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첫 번째 테라스로 통하는 길고 긴 계단을 올라갔다.

정원에서 알렉스와 마주쳤다. "당신과 함께 수영을 하려던 참이었소. 아테네의 더위는 참기 힘들거든"

그는 검은 수영복을 입고 수건을 한쪽 어깨에 가볍게 걸치고 있었다. 그의 단단한 육체는 햇빛을 받아 금색으로 반짝였고 눈은 검은 선글라스 뒤에 감춰져 있었다.

"난 수영을 다 했어요." 그녀는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기에 더욱 긴장했다.

"그럼, 내가 유혹하지, ?" 그는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난 약간의 휴식이 필요하오. 그리고 당신과 함께라면 완벽하지"

잠시 후 사프론은 설명할 수는 없지만 훨씬 가벼운 기분으로 다시 한번 해변으로 향했다.

그들은 깨끗한 푸른 물 속에서 수영하고 물장난을 쳤다. 그리고 평소와는 달리 우스꽝스런 말끝잇기 게임을 하면서 웃고 즐긴 덕에 숨이 찰 정도였다.

테라스에서 저녁을 먹었다. 관목과 나무들 사이로 집과 정원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사프론은 한숨을 쉬며 커피를 마셨다.

"왜 한숨을 쉬지, 사프론?" 알렉스가 부드럽게 물었다.

"이 배경이 정말 완벽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 집, 불빛, 기후.... 하지만"

"하지만 같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이거요?"

그가 분노를 담은 눈으로 그녀의 뼛속까지 살피듯 거칠게 다그쳤다.

"아니에요, 내가 하려던 말은 일이 그립다는 거예요. 그게 전부예요" 그녀는 즐거운 하루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눈에 보이게 긴장을 풀었다. 돌연 그의 눈이 악마처럼 반짝였다.

"그거야 문제없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내 아내에게 일을 시킨다는 건 있을 수 없소" 그는 그녀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며 덧붙였다. "하지만 당신은 언제든 나를 마사지할 수 있소"

"화장을 시켜 드리는 편이 낫겠군요" 그녀가 놀렸다.

"어림없지!" 그가 경악해하며 소리쳤다.

"요즘 남자들은 피부에 수분 공급을 해줘야 해요. 구식 콜론은 남자의 피부를 건조하게 한단 말예요. 그건 전혀 좋지 않아요"

"넌 서재에나 가보렴. 알렉스. 우리 여자들끼리만 파티를 할 거란다" 안나가 알렉스에게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사프론은 알렉스가 기묘한 표정을 짓더니 경계심이 담긴 시선을 자신에게 던지는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마지못해 서재로 건너갔다. 그의 어머니와 큰어머니, 사촌이 점심을 먹으러 왔고, 커피까지 다 마시자 사프론이 오늘 저녁 파티를 위해 그들 세 명 모두에게 화장을 시켜 주기로 결정했다.

안나는 선언했다. "아무리 집안에 메이크업 전문가가 있어도, 솜씨를 발휘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지?" 사프론은 동의의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사프론은 안나의 침실에 화장 도구를 주의 깊게 늘어놓으며, 전에 들었던 이야기와는 영 들어맞지 않는 상황에 혼란을 느꼈다. 안나와 캐서린, 두 늙은 숙녀는 오늘 나란히 도착해서 함께 웃고 농담을 즐기며 휴가를 즐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지난 몇 달 동안 그녀의 인생에서 말이 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만일 그녀가 안나 스태어티스를 위해 계약했던 5월로, 오직 자신만을 걱정하고 자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도 없던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뭘까? 일만 하면서 홀로 묵묵히 살아가는 것? 알렉스의 손길이나 따뜻함도 느끼지 못한 채...? 사프론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괜찮아, 사피?"

사프론은 고개를 문으로 돌렸다. 안나만이 그녀를 사피라고 부른다 ",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안나에게 자신의 진짜 결혼 생활을 보여 줄 순 없었다. 그녀는 얼굴에 미소를 짓고 질문했다. "좋아요, 첫 타자는 누구죠?"

다음 시간 내내 사프론은 솜씨를 발휘해 마리아와 캐서린에 이어 마지막엔 안나에게 화장을 시켰다. 여자들의 수다는 그치지 않았다. ,. 화장품, 남자들...

"기억나, 안나? 우리 모두 런던에 있었을 때 말야. 그때 당신과 니코스는 알렉스의 대학 생활을 위해 살집을 구하러 다녔잖아. 그동안 난 런던에 살고 있었던 남동생을 만나 점심을 먹었지. 그리고 나중에 다시 당신들과 합류했잖아. 기억나지? 우린 모두 함께 트라팔가 광장을 돌아다녔어.

"약간" 안나가 대답했다.

"그래, 내 남편은 굉장히 구식이었어" 캐서린은 사프론에게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알렉스만큼이나 말야. 내가 남동생이 헬스클럽 <스튜디오96>의 공동 경영자가 되었다고 남편에게 말했더니, 그가 화를 내면서 그곳은 매음굴과 마찬가지라고 하는 거야. 우린 말다툼을 했고, 난 그를 쫓아 트라팔가광장 주변을 한 바퀴 돌았어. 결국은 애가 그를 분수대에 밀어 넣었지."

"그래, 이제 생각나" 안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당신은 막 소리를 질렀지, <그곳에 가보지도 않았다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거예요?>라고"

"맞아" 캐서린이 킥킥거렸다. "그는 나에게 상류층 사이에선 소문이 쫘악 퍼졌다고 말해 줬어. 그리고 몇 주 후 내 불쌍한 남편은 죽었지"

"사피, 그건 내 눈이야." 사프론이 마스카라로 안나의 눈을 찌를 뻔하자, 안나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 , 미안해요" 사프론은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품위 있는 숙녀들이 그렇게 질 낮은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하다니. "하지만 당신은 놀라지 않았어요?" 그녀는 캐서린에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놀랐지. 하지만 난 그걸 믿지 않았어."

"..." 사프론은 그 감탄사밖엔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캐서린이 사프론의 얼굴 표정을 보고 심각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걸 알면, 알렉스는 날 죽일 거야. 하지만 모든 집안엔 꼭 검은 양이 한 마리씩 있게 마련이고, 우리 집에선 불행하게도 내 남동생 아키스가 그랬어. 그는 순풍에 돛을 단 듯이 잘 나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구제불능인 범법자였어. 그가 7년 전에 죽었을 때, 알렉스는 런던으로 가서 그의 시체를 그리스로 돌려보낸 후 사업체를 정리했어. 난 그걸 왜 정리하는지 궁금해했어. 헬스클럽의 손익 계산서에 의하면 이윤이 많이 남던 사업체였거든. 나중에야 알렉스는 그곳이 사실은 법에 저촉되는 고급 마사지 클럽이라고 고백하더군"

"그건 알렉스의 것이 아니었군요" 사프론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모든 적대감이 놀람과 경탄 속에 가라앉았다.

"물론, 아니지!" 캐서린이 소리쳤다. "그는 내 동생 아키스의 지분을 동업자였던.... 내 기억에 의하면 이탈리아 남자였어. 그에게 팔아넘기느라 그곳에 30분간 방문했을 뿐인걸. 그리고 스태어티스의 이름과 알렉스의 티끌 하나 없는 평판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깨끗이 정리했지. 좋은 명성을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니까 말야"

"사촌 알렉스가 마사지 클럽을 소유해?" 마리아가 뒤집어졌다. "상상도 안 돼! 내가 열여덟 살 때, 한 달간 친구들과 함께 파리에서 지내는 것도 반대한 알렉스가!"

사프론은 웃으려고 노력하며 딱딱하게 굳은 손으로 안나의 화장을 끝냈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재빨리 도구를 치운 후, 양해를 구하고 자신의 침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침대에 화장품 상자를 내려놓은 뒤 마치 자동인형처럼 웃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그녀는 따뜻한 물살에 얼굴을 들어 올리며 그 물이 마음까지 깨끗이 씻어 주길 바랐다.

어쩌면 그토록 멍청할 수 있었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 같은 부자가 그런 음란한 마사지 클럽의 공동소유자가 될 리가 없지 않은가.

"하느님, 내가 무슨 짓을 했지?" 그녀가 소리쳤다.

샤워실의 유리문이 드르륵 열리며 옷을 벗은 알렉스가 들어왔다.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데?" 그가 질문하며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내가 추측해 볼까? 그들의 눈썹을 전부 밀어 버린 모양이군?" 그가 장난스럽게 눈썹을 들어 보였다. "아니면, 바라던 대로 그들의 입술을 꿰매 버렸나?" 그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재촉했다.

사프론은 그의 핸섬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순간 자신이 남편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육체적인 면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친밀했다. 하지만 그녀는 정신적인 면으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의견과 편견에만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가 세상에 내세우고 있는 오만하고 남성적인 가면 뒤에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는 훨씬 감성적인 영혼의 소유자임이 틀림없다.

그녀의 시선이 그의 넓은 어깨, 체모로 덮인 가슴, 날렵한 허리, 긴 다리를 사랑스럽게 훑어보았다. 샤워물이 그의 가무잡잡한 육체 위에 연인의 애무처럼 흘러내렸다. 그녀는 한 손을 들어 그의 단단한 입술선을 만진 다음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는 그녀의 남편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바보였는지 참을 수 없었다.

"사프론" 알렉스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그녀의 손길에 흥분했으면서도, "왜 그러지?" 하고 물었다.

"당신은 <스튜디오96>의 소유주가 아니에요. 내가 그곳에서 당신을 본 날이 그곳에 왔던 처음이자 마지막 날이었어요, 그렇죠?"

알렉스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며 표정이 순간 사라졌다. "그래서?"

"왜 나에게 그게 당신의 것이라고 믿게 했죠? 왜요? 왜 나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나요?"

"왜 내가 그래야 하지? 그래 보았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데"

"하지만 그랬어야 했어요, 그걸 모르겠어요?" 사프론은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내가 알기만 했어도, 난 절대로 복수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이브 때문에 당신을 비난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우리의 결혼은 잘 되어갔을 테고요" 어떻게 그가 이해를 못할 수 있지?

"지금도 잘 되어가고 있잖소, 사프론" 그가 부드럽게 말하며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녀의 가슴을 자신의 젖은 몸에 밀착시켰다. "이 이상 더 좋을 수 없을 정도지"

그가 그녀의 입술에 대고 중얼거렸다.

"기다려요, 알렉스" 사프론이 잠시 후 중얼거렸다.

"난 설명하고 싶어요" 알렉스가 그렇게 비열한 짓을 했다고 생각할 만큼 자신이 바보였음을 고백하는 건 그녀에겐 긴급한 일이었다. 해야만 한다면, 무릎을 꿇고 그의 용서를 구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그녀를 품에서 떼어놓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살펴보았다. 홍조가 인 얼굴, 간청이 담긴 초록 눈동자, 부풀어 오른 가슴과 날씬한 허리, 정말 육감적인 모습이었다.

"설명할 필요 없소, 사프론" 알렉스가 쉰 목소리로 선언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의 말에 놀라 말을 끌었다. "캐서린이 나에게 남동생에 대해 말했어요. 가문의 검은 양이었다고요. 만일 단지..."

"<만일 단지>. 사프론, 우리가 그렇게 진부한 영어 표현을 꼭 써야만 하는 거요?"

그는 경멸적인 코웃음을 치며 샤워실에서 나갔다. 그리고 그녀에게 수건을 던진 후 우울한 표정으로 또 다른 수건을 자신의 허리에 감았다.

"대화를 원한다고? 좋소, 그럼 대화를 합시다. 몸을 말려요. 또 내가 당신에게 손을 대면, 대화가 불가능할 테니까" 그는 몸을 돌려 욕실에서 나가 버렸다.

사프론은 마른 수건으로 몸을 가린 후 그를 쫓아갔다.

그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붉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갔다. 알렉스를 이렇게 내려다보니 좀 이상했지만, 묘한 자신감이 일었다. "왜 결혼식 날, 내 비난을 부인하지 않았죠? 당신은 모든 걸 알고 있었잖아요."

"왜냐하면 난 그게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난 내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소. 다른 사람의 잘못된 의견 따위는 아무 관심도 없소"

"하지만 우린 결혼했어요"

"그래, 하지만 결혼 증명서가 나에게 캐서린 백모의 이름을 더럽힐 자격을 준 건 아냐"

사프론은 이렇게 초라하게 느껴진 것은 평생 처음이었다. 그녀가 이브를 빙자해 그를 비난하는 동안, 그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침묵을 지켰다. 일단 알렉스를 처음 만난 후 겪어야 했던 죄책감과 혼란스런 감정이 정리되자, 그녀는 이 남자의 단단하고 세련된 표면 밑을 보았다. 어떻게 이토록 눈이 멀 수가 있지? 알렉스는 진정한 남자였다. 가족, 특히 여성 식구를 보호하려는 투철한 책임감을 가진 남자.

그녀는 그의 무릎 사이로 다가가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 그녀는 그의 머리를 뒤로 젖히고 고개를 숙여 처음으로 자진해서 키스를 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 전부와 영혼을 바쳤다. 그녀가 고개를 들 즈음 알렉스는 그녀의 몸을 단단히 안고 있었다.

"이건 뭐지?" 그가 놀라움이 담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불평하는 건 아니오" 그가 사프론은 안은 상태에서 침대에 벌렁 누웠다.

"난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바보예요" 사프론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의 다리가 그의 강인한 다리 사이에 끼었다. 그녀는 그의 넓은 가슴 위에 길게 누웠다.

"그리고 당신은 남성 우월주의자인데다 너무 고결해요" 그녀가 그의 가슴을 가볍게 물며 장난을 쳤다.

"고결이라?" 알렉스가 즐겁다는 듯 반복했다. "악당, 기둥서방에서 엄청나게 발전했군. 내가 고귀하게 살게 되다니"

그는 단숨에 몸을 움직여, 사프론의 몸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가는 팔로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녀의 가슴은 사랑과 웃음으로 가득 찼다. 기쁨으로 머리가 가벼워졌다. 동안 이브에 대한 배신감과 죄책감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내 남편은 이브의 죽음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 그녀는 자유였다, 자유...

입술이 맞닿을 정도로 그를 끌어당긴 후 그녀가 속삭였다. "그리고 난 당신과 함께 살 거예요. 나의 고귀한 알렉스, 내 사랑"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것처럼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다음 그의 입술이 그녀를 덮쳤다. 그녀는 그의 정열을 열렬히 환영하며 그에게 힘껏 매달렸다. 그리고 더 강력하게 그를 요구했다.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그녀의 몸은 이미 뜨거워졌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커다란 양손이 그녀의 허리를 들어 올려 자신에게 밀착시키자, 그녀의 몸을 활짝 열며 힘껏 매달렸다. 정열의 파도가 물밀듯 몰려들어 왔고, 잠시 후 그녀의 영혼 깊이 해방감이 찾아들었다.

알렉스가 돌연 소리를 지르며 그의 생명을 그녀 안에 쏟아부었다. 잠시 동안 그는 그녀의 허리를 꼭 잡고 부드러운 키스를 퍼부었다.

그런 다음 그가 몸을 일으켰다. "난 그렇게 고귀한 남자가 아니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프론이 그를 보며 웃었다. "난 그 점이 좋아요. 난 항상 당신이 좋았어요" 그녀는 자유롭고 행복하게 고백했다.

그들의 시선이 마주쳤고, 알렉스가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나의 향기로운 사프론" 그가 사랑스러운 듯 말했다. "살아 있는 한 절대로 당신을 충분히 가질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 정도요. 하지만 지금은 아름답게 화장한 세 명의 여자들이 다른 손님들과 함께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소. 열두 명의 친구와 사업 상대들을 태운 요트가 방금 도착했거든"

"열두 명이 더?" 사프론이 놀라서 되물었다.

"걱정 말아요, 사프론. 데스피나가 다 알아서 할 거요"

그녀는 약간 화가 솟았다. 알렉스는 그녀에겐 큰 파티 준비를 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고, 그 점이 가슴 아팠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장난감으로 보는 걸까? 이런 시간을 함께 보낸 후에도?

", 함께 샤워를 합시다" 그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이번엔 몸만 씻는 거요. 알았지?"

30분 후 사프론은 알렉스의 팔짱을 끼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는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흰 정장 재킷을 입은 알렉스도 멋질 뿐 아니라. 그녀 자신도 그에 어울리게 멋져 보였다. 그녀는 몇 가닥 잔머리만 남겨 놓고 머리를 위로 빗어 올렸고, 어깨끈 없는 크림빛 실크 드레스는 그녀의 매끄러운 살결과 멋진 다리를 강조했다. 그녀의 얇은 목에는 아름다운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건 겨우 5분 전에 알렉스로부터 받은 선물이었다.

사프론은 그 자신이 여주인이면서도 이번이 최고의 파티였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16명은 우아한 식탁에 앉아 정식을 즐겼다. 음식은 훌륭했고, 대화는 재기로 번뜩였다. 알렉스는 테이블의 상단에, 사프론은 그 반대 끝에 앉았다. 하지만 오늘 밤처럼 그가 가깝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시선이 마주칠 때면, 그들은 비밀스런 미소를 공유했다. 그는 단지 시선 한 번으로도 그녀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식후 커피가 테라스에서 접대되자, 분위기는 훨씬 자유로워졌다. 부드러운 음악에 맞춰 몇몇 사람들은 춤도 췄지만, 대부분 편안히 앉아서 친구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스 파티답게 술은 대화만큼이나 자유롭게 제공되었다.

사프론은 현란한 불빛에서 물러나 난간에 기대서서 웃고 있는 손님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제임스가 다가왔다.

"축하합니다, 사프론. 당신의 결혼과 첫 환영 파티의 성공에 대해서요. 당신은 아주 자연스러웠어요"

"환영 파티?" 그녀가 질문했다. "저녁 파티가 아니었던가요?"

"아닙니다, 사프론. 우리 대부분은 요트에서 지내지만, 몇몇은 이곳에서 이틀 동안 보내게 될 겁니다. 알렉스가 말하지 않던가요?"

"... . 물론이에요" 하지만 그는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제임스에게 둘러대며 수치스러움을 감췄다. 하지만 그의 눈에서 번뜩인 건 동정의 빛인가?

"걱정 마세요. 난 아름다운 숙녀에게 잘 속는 남자거든요.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전화만 하세요."

"그럴 리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제의는 고마워요."

"제임스, 마리아가 마실 것을 찾던데, 도와주겠나?"

알렉스가 사프론과 제임스의 대화를 방해했다. "괜찮소, 사프론?" 그가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물었다.

그녀는 화난 시선을 그에게 쏘았다. ", 물론이죠, 왜요? 내가 당신 친구들을 이틀 동안이나 접대할 수 있을지 걱정되시나 보죠? 내가 당신을 창피하게 만들까봐 염려되세요?" 그녀가 쏘아붙였다.

알렉스는 작은 목소리로 욕을 중얼거리더니, 다른 사람들이 모두 보고 있는 앞에서 그녀의 입술에 바짝 얼굴을 갖다 대며 말했다. "이 바보 같은 여자야, 당신에겐 이성이란 게 없군. 그리고 당신의 피곤에 대한 나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어. 하지만 당신은 너무 사랑스럽소"

그들의 숨결이 서로 엉키며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 위에서 움직였다. 사프론은 주변에서 야유를 던지는 소리와 웃음소리를 들었지만, 이렇게 그의 품에 안겨 있으니 모든 분노와 의심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전혀 수치스럽지도, 창피하지도 않았다. 단지 자신의 심장에 더 가깝게 그녀를 끌어안는 이 남자에 대한 사랑만을 느꼈다.

 

9

이틀 후, 안나와 사프론은 정원에 서서 손님을 가득 실은 요트가 아테네로 떠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의심할 것 없이 최고의 대접이었어,. 사피" 안나가 만족스럽게 말했다. "너에겐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넌 정말 최고의 며느리에, 알렉스의 완벽한 부인이야. 그가 널 사랑하는 건 모든 사람이 다 알아"

"그건 알렉스의 잘못이에요" 사프론이 한쪽 눈썹을 들어 보이며 안나에게 말했다. "그는 내가 제임스와 대화하는 걸 보고,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결정한 거예요"

안나가 웃었다. "그래, 선의의 질투는 내 오만한 아들이 그만큼 빠졌다는 명백한 증거지. 일주일 내내 그 애는 너에게서 떨어지지 않더군"

비밀스런 미소가 사프론의 입술에 번졌다. 그리고 밤이면 우린 완전한 몸이 되지. 그녀는 꿈을 꾸듯 생각했다. 그녀의 결혼은 그야말로 성공적으로 잘 진행되었고, 그녀는 천천히 행복감을 체험하기 시작했다.

인생은 새로운 국면에 도달했다. 안나는 더할 나위 없는 친구였다. 그리고 훌륭한 지주였다. 때문에 10월과 11월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알렉스가 그녀를 죄수처럼 이 섬에 붙잡아 놓을 의도가 없다는 발견도 그에 대한 존경심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시어머니가 도착한 첫째 주, 사프론은 깜짝 놀랐다.

어느 날 아침 안나가, ", 아테네로 가자꾸나"하고 말했기 때문이다.

사프론이 교통편이 없다고 하자, 안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사프론이 남자들만의 술집이라고 생각해서 감히 들어갈 생각도 못 했던 곳이 바로 보트 선착장이었다. 언제든 가서 주인에게 말만 하면, 그의 아들이 보트로 본섬까지 데려다 주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요?" 사프론이 침대로 걸어가 뒤로 돌면서 날씬한 히프를 과장되게 흔들었다. "당신 어머니는 이게 마음에 든 데요."

그녀는 안나와 아테네에서 쇼핑을 했다. 내일이면 영국으로 떠날 안나가 겨울옷을 쇼핑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며 부추긴 덕분에 사프론은 남편의 신용카드를 마구 남발했다.

저녁 식사 후, 침실에서 그녀는 알렉스만을 위한 패션쇼를 벌였다. 상쾌하게 샤워를 마친 그는 침대에 몸을 쭉 펴고 누워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때요?" 그녀는 히프 주변을 가볍게 손으로 쓰다듬으며 몸에 딱 달라붙는 청색 점퍼수트를 과시했다. 어두워진 알렉스의 시선이 나른하게 그녀의 몸을 훑었다. 그는 잠시 열어 놓은 지퍼 사이로 슬쩍 엿보이는 가슴 골짜기에 시선을 멈췄다. 그녀는 그를 유혹하길 좋아했다.

"그래, 내 섹시한 부인"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두 가지 질문이 있소. 나보고 스키장에 데려가 달라는 거요? 그리고 그런 옷을 입어 본 경험이 없어서인데, 화장실에선 어떻게 하지?"

"알렉스, 어쩜 그렇게 무미건조할 수가!" 그녀가 신음했다. "당신을 유혹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나에게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어요!"

"당신의 환상을 깨뜨리긴 싫지만, 사프론, 대부분의 남자들은 벗기는 데 시간이 많이 드는 전투복 같은 두꺼운 옷이 아니라 보일락 말락 한 실크와 레이스 속옷을 입은 여자에게 유혹당하고 싶어 하오."

"시간이 많이 드는지, 한번 시험해 볼까요?" 그녀가 쉰 소리로 중얼거리며 앞지퍼를 열었다.

"오늘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나에게 암시하는 교활한 방법이오?" 알렉스가 그녀에게 냉소적으로 말했다. "이럴 필요는 전혀 없소. 전에도 말했듯이, 100번 환생을 해도 될 만큼 돈이 많소. 그러니 돈을 쓸 때마다 나에게 섹스로 보답하지 않아도 괜찮소"

사프론은 몸짓을 멈췄다. 마치 명치에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녀의 초록빛 눈동자가 알렉스와 마주쳤다. 그의 얼굴은 냉정한 모멸감으로 가득 찼다. 정말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그녀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한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마음속에선 작은 악마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의 말이 맞잖아? 오늘 밤 그를 유혹하려 했던 건 네가 쓴 돈 때문이잖아? 아냐! 그녀는 부인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녀는 모든 것을 다 버쳐 알렉스를 사랑했다.

그녀는 뒷걸음질 쳤다. 그녀는 지난 몇 주 동안 그들이 사랑을 나눴다고 생각했지만, 알렉스는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걸 아직도 섹스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가볍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듣고도 계속 유혹할 만한 배짱은 없었다. "당신은 청색을 좋아하지 않는군요, 꼭 기억해 두겠어요" 그녀는 중얼거리며 지퍼를 다시 목까지 올린 후 몸을 돌리며 덧붙였다. "나머지 것들은 다음에 보여 드릴게요. 샤워를 좀 해야겠어요" 그녀는 화장실로 도망쳤다.

2시간 후 그녀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알렉스가 비열한 악당이 아니라는 행복감에 도취된 나머지, 앞뒤 가리지 않고 사랑을 고백했다. 그리고 그도 자신과 같은 식으로 느끼는 줄 알았다. 하지만 오늘 밤 그의 말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던 그녀의 행복감에서 바람을 뺐다.

다음 날 아침에 안나는 알렉스와 아테네로 떠났고, 사프론은 다시 홀로 집에 남게 되었다. 몇 시간 후 알렉스가 전화를 걸어 오늘 밤 집에 못 들어온다고 했을 땐 더욱 고독해졌다.

그녀는 남편이 필요로 할 때까지 천국과도 같은 이 섬에서 대기하는 유한부인으로서밖에 살 수 없는 걸까? 자신의 미용 살롱을 갖겠다는 꿈은 그저 꿈으로만 끝내 버리고? 그녀는 해변을 따라 걸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여름날은 이미 가버리고, 차가운 겨울바람이 바다에서 불어왔다. 크리스마스가 멀지 않았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왜 섬에 머물러야 하지? 알렉스는 아테네까지 출퇴근한다. 그렇다면 왜 그녀라고 못 하는 거지? 그녀도 살롱을 개업하거나, 혹은 시내 병원에서 일할 수도 있다. 정말 찾으려고만 들면, 길은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그녀는 빨리 알렉스와 상의하고 싶은 마음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가방을 꾸린 후 전화를 걸어 보트를 예약했다. 알렉스를 깜짝 놀라게 해줘야지. 아테네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 저녁을 마련해 놓는 거야. 알렉스가 동의하리라고 생각하는군... 항상 그가 널 사랑한다고 생각해... 현실의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젠 상관없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이 맺은 계약의 일부분을 이행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임신 진단 시약을 사야 할 필요가 생겼다. 하지만 그녀는 어머니인 동시에 사업가도 될 수 있다.!

사프론은 유리와 철강으로 된 알렉스의 본사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장 사장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꼭대기 층에서 도착하자 안내데스크로 다가갔다. 알렉스를 따라 이곳에 몇 번 왔기 때문에 비서가 그녀를 기억했다.

"스태어티스 부인, 정말 놀랐어요. 사장님께선 지금 이곳에 계시지 않는데요"

"상관없어요. 난 그의 아파트 보조 열쇠를 받고 싶어서 왔어요. 그가 이곳에 맡겨 놓았다는 걸 알거든요"

비서는 책상을 열고 열쇠를 꺼내 건넸다. "당신은 그의 부인이니까, 괜찮을 테죠"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때, 사무실 안쪽 문이 열리며 제임스가 걸어나왔다. 그는 멈춰 서서 사프론을 바라보았다. 그가 서둘러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기까지 약간 머뭇거렸다는 건 오직 그녀의 상상일까?

"사프론, 당신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하지만 어쩐 일이죠? 알렉스가 당신을 기다린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요"

"아니에요, 난 그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어요."

", 하지만 그는 지금 이곳에 없습니다."

"괜찮아요. 그는 오늘 늦게까지 일한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연락이 닿거든, 내가 그의 아파트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 주실래요?"

"아파트! 그게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해요?" 제임스가 이상하게도 그녀의 웃는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며 물었다. "차라리 나와 함께 이른 저녁을 먹고, 헬리콥터를 타고 집에 돌아가면 어떨까요? 알렉스는 아주 늦을 겁니다."

"아니에요, 제임스. 당신의 제안은 정말 고맙지만, 난 알렉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요."

"하지만 내가 그와 연락이 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모임이거든요" 제임스가 이상하게 서둘러 대답했다. 왜 그의 눈동자에 동정심이 엿보이는 거지? 설마, 그렇진 않겠지.

"제임스, 걱정하지 마세요" 그녀가 아주 밝게 대답했다. "난 한두 시간 정도 상점들을 둘러볼게요. 괜찮을 거예요"

"여기, 내 명함이 있습니다. 만일 필요하거든.... " 그는 평소의 태도답지 않게 말을 흐렸다. "만일 마음이 바뀌거든, 집으로 전화를 주십시오"

"알겠어요" 그녀는 명함을 받아들었다. 왜 제임스가 이렇게 걱정하는 걸까? 그리고 알렉스의 개인 보좌관이면서 그렇게 중요하다는 회의에 왜 함께 참석하지 않았을까?

아파트는 작았지만, 부엌과 거실, 목욕탕, 발코니, 침실을 갖추고 있었다. 사프론은 알렉스를 따라 이곳에 와본 적이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아테네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대 유적을 가졌지만 또한 손꼽히는 오염 도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교통량은 끔찍하고, 24시간 내내 공기 중에는 일산화탄소 냄새가 가득 배어 있다. 어느 누구도 이곳에서 영원히 살고 싶어하진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의 계획에만 흥분되어 그 점을 잊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자신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바닥에 쇼핑백을 내려놓은 다음 커피를 끓여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하게 소파에 앉았다. 순간 열쇠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활짝 미소를 지으며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알렉스가 돌아왔다. 얼마 늦지도 않았네. 하지만 문이 열리자 그녀의 미소는 사라지고 대신 충격으로 눈이 동그래졌다. 실비아가 마치 자신의 집인 양 당당하게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머, 손님이 계셨네. 이곳엔 웬일이죠? "실비아는 사프론 앞에 놓인 탁자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편안하게 물었다.

"내가 당신에게 같은 질문을 하고 싶군요" 사프론이 되받아쳤다. 그녀는 결혼식 이후 이 여자를 보지 못했고, 싧비아와 알렉스의 관계에 대해선 고의적으로 생각을 피해 왔다. 그건 모두 지난 과거라 믿으면서. 하지만 그건 현실을 도피하려는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실비아가 이곳에 있다. 열쇠까지 갖고... 아마 알렉스에게 뭔가를 갖다 주러 온 걸 거야. 그래, 분명히 그럴 거야.

"난 이곳에 살아요."

"당신 말을 못 믿겠어요."

실비아의 눈이 악의적으로 반짝거렸다. "날 따라오세요, 당신만 상관없다면요" 그녀는 침실로 향했다.

사프론은 떨리는 발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실비아가 옷장을 열자, 그 안에 걸린 여성복들이 보였다. 옷장 문이 완전히 열리자, 안쪽엔 남성복, 신발, 셔츠 등이 정리되어 있었다! 사프론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렉스의 것이다!

"당신은 바보예요, 사프론. 정말 알렉스가 한 여자에게 만족할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단지 어머니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당신과 결혼한 거예요. 내가 지난번에 요트에서 경고했었죠. 당신은 그 말을 들었어야 했어요"

"... 그래요, 그 말을 들었어야 했어" 사프론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몸을 돌려 거실로 돌아갔다. 그녀는 바닥에 내려놓은 쇼핑백을 바라보았다. 약국 이름이 적힌 봉지를 보는 순간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임신했다 해도, 지금은 밝힐 때가 아니다.

그녀는 꾸러미와 재킷을 챙겨 차가운 밤거리로 걸어 나왔다. 잠시 후 그녀의 뒤에서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뒤돌아보자, 큰 트럭이 그녀의 코앞에 아슬아슬하게 멈춰 서 있었다. 하마터면 깔려 죽을 뻔했다.

그녀는 보도로 뛰어올라 주변을 살폈다.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얼마만큼 걸었는지 알 수 없었다. 검은 구름이 어둑하게 끼면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스커트와 블라우스가 금방 비에 젖었다. 그녀는 손을 재킷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순간 제임스가 줬던 명함이 손에 닿았다. 지금에야 도와주겠다던 제임스의 제의, 그의 눈에 스치던 동정심이 이해되었다. 알렉스의 개인 보좌관인 제임스는 실비아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녀는 죽고 싶을 정도로 수치스럽고 모멸감을 느꼈다.

어머니가 골라 준 보잘것없은 아내는 쓸쓸한 섬에 처박혀 있으면서도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순진한 바보였단 말인가. 그녀는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아냐.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맹세했다. 그녀는 어깨를 바로 펴고, 손에 든 명함을 내려다보았다. 제임스라면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사프론!" 제임스가 대문에 선 여자를 보며 소리쳤다. "들어와요. 푹 젖었군요. 무슨 일이에요?"

사프론은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입술이 떨렸고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노력을 포기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임스. 첫 비행기로 영국으로 돌아갈 비행기표만 있으면 돼요. 그것 때문에 이곳에 왔어요. 도와주실 수 있죠?"

그녀는 그의 옆을 지나 안락한 거실의 의자에 주저앉았다.

제임스는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브랜디를 가져다주고 그녀가 다 마시자, 목욕 가운까지 빌려주며 목욕탕에 데려다줬다. 그리고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고 말했다. 사프론은 그의 태도가 고마웠다. 자신의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단 한 가지, 영국으로 돌아갈 생각에만 마음을 집중시켰다. 따뜻한 샤워를 하며, 그녀는 수없이 되뇌었다. "비행기, 호텔, " 그녀는 평생 혼자 살아왔다. 이브만 빼고! 눈물이 다시 솟구쳤지만 이를 악물고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어떤 남자에게도 마음을 주지 말고 꿈을 쫓으라던 이브의 마지막 메시지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사프론은 자신의 꿈에서 이탈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미코노스섬에서 그녀는 알렉스와 사랑에 빠져 버렸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자신의 어머니와 공모하여 그를 결혼으로 몰아넣으려는 탐욕스런 여자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그 생각을 밀고 나갔다. 왜냐하면 그에게 이로웠기 때문에. 그는 그녀의 육체 이외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단 한 가지, 그는 뭔가 다른 감정이 있는 척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그녀는 스스로를 바보로 만들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고, 알렉스가 헬스클럽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시실을 알자, 순진하게도 그가 자신을 사랑하리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알렉스를 사랑하므로. 얼마나 장밋빛 같은 인생관인가...

지난 몇 달은 잊어야 하는 악몽이다. 그녀의 마음속에선 알렉스와의 관계가 실패로 끝나리란 걸 알고 있었다. 이브 문제를 제외하고도, 그녀는 알렉스의 세련된 상류 세계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절대로 이대로 무너지지 않을 거야. 그녀는 가슴 아픔을 무시하며 스스로에게 단호히 말했다.

그녀는 샤워실에서 걸어 나왔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감싼 후 다른 수건으로는 살갗이 발갛게 일어날 정도로 물기를 닦아 냈다. 그런 다음 제임스가 준 검정색 가운을 입었다. 검정색! 딱 어울려! 그녀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실패한 사랑! 실패한 결혼! 그리고 어리석은 꿈의 종말!

이런 생각을 그만하자. 그녀는 자신에게 충고한 후 거울을 바라보며 헤어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렸다. 순간 초인종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잘못 들은 걸 거야.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한 후 기계적으로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일부러 피했다. 보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감정을 닫아 버린 채 머리를 말리는 일에만 골몰했다.

마침내 머리가 다 마르자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늘 저녁의 비극적인 사건이 그대로 반영되었으리라 확신했지만, 거울 속에는 언제나 봐왔던 생강처럼 붉은 머리의 고독한 여자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누군가가 분명히 그녀의 변화를 알아차리리라 확신했다. 생명력을 갖고 빛나던 초록빛 눈동자는 우중충했다. 두 눈뿐 아니라 사프론의 내면에 서도 빛은 사라졌다.

그녀는 가운의 허리끈을 조인 후 긴 소매를 반으로 접었다. 그리고 맨발로 조용히 화장실을 나서서 복도를 걸어갔다. 그녀는 거실 문을 밀었다. 제임스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이다.

제임스는 팔걸이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들어서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의 파란색 눈에는 그녀가 이해하지 못한 거부의 빛이 담겨져 있었다.

천천히 그녀는 벽난로 반대편에 있는 긴 소파로 눈을 돌렸다. 알렉스! 알렉스가 이곳에 있다. 조각처럼 굳은 그의 얼굴에선 눈만 반짝거렸고, 꼭 다문 입술에선 분노가 엿보였다. 잠시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사프론은 그의 이 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의 험악한 시선이 그녀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훑었다. 방금 감아 헝클어진 머리, 남자 가운 앞섶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가슴, 조여진 허리와 맨발, 그는 다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측정할 수 없는 분노로 반짝이는 그의 눈이 다른 때 같으면 그녀를 공포로 밀어넣었을 텐데, 지금은 아니었다. 오늘 그녀의 심장은 죽었다. 그녀의 감정은 북극의 만년설에 얼어 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천천히 알렉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큰 손이 주먹져 있었다. 사프론은 멍하니 하얗게 변한 그의 손가락 관절을 지켜보았다. 그는 살의가 담긴 시선으로 제임스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새로운 사업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이 없다고 했군, 제임스. 넌 내 아내를 가지고 놀았어"

"가지고 놀다뇨? 아닙니다. 사프론은 제 도움을 바라며 왔습니다. 그것뿐입니다"

"자네가 그녀에게 어떤 종류의 도움을 줬는지 충분히 알 수 있지. 저 여잔 자네 가운 외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어" 알렉스가 손으로 사프론을 가리킨 후 다시 제임스를 보았다. "일어나, 이 나쁜 놈. 널 가만두지 않겠다." 그는 분개한 사자처럼 으르렁거렸다.

사프론이 소리를 질렀다. "안 돼! 안 돼요, 당신의 착각이에요" 하지만 알렉스의 표정에 떠오른 살의에 충격을 받았다.

알렉스는 제임스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는 주먹으로 제임스의 얼굴을 강타해 다시 그를 의자에 쓰러뜨렸다.

"그만해요! 그만!" 사프론이 방을 가로질러 가, 다시 주먹질을 하려고 올린 알렉스의 손을 잡았다.

"당신 아내 말을 들으십시오" 제임스는 코에서 코피가 줄줄 나는데도 영국인다운 자제심을 발휘해 말했다.

"한 대라면 받아 주겠습니다. 이 상황은 충분히 오해를 살 만하니까요. 하지만 그 이상은 참을 수 없습니다" 그는 냉담하게 말했다.

"제발, 알렉스" 사프론이 그의 팔에 매달려 사정했다. "제임스를 그냥 놔둬요" 하지만 알렉스는 파리를 쫓아내듯 그녀를 떨궈 고, 그녀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순간 아픔과 충격이 느껴졌다.

알렉스는 쓰러진 그녀를 분개한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그녀의 가운 앞자락이 벌어져 긴 다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이 창녀 같으니, 널 죽일 거야" 그가 으르렁거렸다.

잠시 그녀는 숨도 쉬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위협적이었고, 그의 검은 눈에는 야만스럽고 원시적인 잔인함이 번뜩였다.

그는 오랫동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가면을 쓴 것처럼 그의 표정이 바뀌었다. 검은 눈동자는 무표정해졌고, 그의 격심한 내적인 고통을 반영하듯 볼의 근육만이 실룩거렸다.

그는 짧게 덧붙였다. "하지만 당신에겐 그럴 가치도 없어" 그는 제임스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네는 내일 책상을 정리하게. 다시는 자네를 보고 싶지 않아" 그다음 사프론에게 다가와 그녀를 일으키며 소리쳤다. "가서 옷을 입어. 우린 떠날 거야"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의 곁을 지나 화장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축축한 옷을 다시 입었다. 그녀가 고개를 꼿꼿이 들고 다시 거실로 돌아와 말을 하려고 입을 연 순간, 알렉스가 그녀를 팔 안에 들어 올리고 아파트를 나갔다.

"날 내려놔요!"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주먹진 손으로 그의 넓은 등을 때렸지만, 단단한 강철 벽에 다 대고 아우성치는 듯했다.

"입 닥쳐, 입 닥치란 말야" 알렉스가 그녀를 자동차 앞좌석에 내려놓고 문을 닫으며 으르렁거렸다. 그녀는 다시 도망가려 했지만 그가 더 빨랐다. 눈 깜짝할 새에 그는 운전석에 앉아 총알처럼 차를 운전했다.

그녀는 안전벨트를 조이며 차갑고 분개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어떻게 감히 그녀와 제임스를 의심할 수가...? 기만적이고 타락한 악마 같으니!

"썩어빠진 네안데르탈인" 그녀가 소리내어 말했다. 순간 차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그녀는 좌석에서 튕겨져 나가 유리창에 머리를 박을 뻔했다.

알렉스의 단단한 손이 그녀의 턱을 잡고 자신에게 들어올렸다. "나에게 다시 욕하지 마. 더 이상 참아주지 않겠어" 그는 으르렁거리며 그녀의 얼굴을 홱 떨쳐버렸다.

"대단하시군요" 그녀가 반격에 나섰다. "제임스와 나와 만남은 완전히 깨끗해요" 실비아와 그의 관계 같진 않아. 왜 제임스를 찾아갔는지에 대한 이유가 다시 떠오르자 분노가 솟구쳤다. 말도 안 돼!

"깨끗해?" 그가 불신이 깔린 목소리로 코웃음을 쳤다. "남자의 가운만 입고 있었는데도? 당신은 나를 바보로 만들려고 하나?"

그녀는 반격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도 하기 전에 알렉스가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는 그녀에게 분노가 담긴 키스를 하는 동시에 손으로 그녀의 턱을 부서져라 잡고 있었다.

처음으로 그녀는 그에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축축한 블라우스 사이로 기어들어가 가슴을 움켜쥐었는데도 이젠 공포와 혐오감밖엔 느끼지 못했다. 결국 그녀의 무반응을 알아챈 그가 그녀에게서 몸을 떼었다. 그녀는 숨을 헐떡거리며 좌석에 몸을 웅크렸다.

"제임스에게 넘어갔군.... 하지만 오래 가진 않아. 난 당신을 흥분시키는 방법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운전대를 잡고 차를 출발시켰다.

사프론은 그의 증오스런 얼굴에 대고 자신의 상처와 분노를 마음껏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대신 그녀는 눈을 감고 그를 시야에서, 그리고 마음에서 밀어냈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고, 상관도 없었다.

결혼은 끝났다. 그에겐 실비아가 있으니, 차라리 그들 모두에게 잘된 셈이다.

 

10

10분 후 사프론은 알렉스가 직접 조종대를 맡은 헬리콥터에 올라탔다. 억수처럼 쏟아지는 빗물이 강화 유리 창문을 때렸고, 세차게 불어닥친 바람으로 헬리콥터의 동체가 흔들렸다.

"비행을 하기에는 비가 너무 많이 오지 않나요?" 그녀는 옷깃을 여미며 질문했다.

"만일 간다면, 우린 함께 가는 거요. 오직 죽음만이 우릴 갈라놓을 거요. 당신은 그 점을 잊은 것 같지만 말야" 알렉스가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사프론은 분개한 시선을 던지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마음껏 두 얼굴의 가면 놀이를 하라지. 그녀는 생각했다. 실비아를 정부로 두고 있는 주제에 말도 안 되는 꼬투리를 잡아 경멸하고 비난하다니!

그녀는 제임스에게 동정을 느꼈다. 그녀 때문에 일자리를 잃는다는 건 너무 심하다. 세렌디피도스섬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짐을 싼 후 제임스의 무죄를 입증하는 편지를 남기고 떠나야겠다.

다시 한번 저택의 현관에 들어섰을 때, 사프론은 뼈까지 시려 오는 추위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덜덜 떨었다.

"맙소사, 이 여자야! 폐렴에 걸리고 싶소?" 알렉스가 소리를 지른 후 다시 그녀를 안아 들고 위층 침실의 목욕탕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는 서둘러 그녀의 옷을 벗긴 후 뜨거운 샤워기 밑에 밀어 넣었다. "혼자 하겠소, 아니면 내가 도와줄까?"

그녀는 고개를 뒤로 돌리며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어림도 없어요" 그녀는 얼음장같이 반박하려 했지만, 이가 덜덜 떨리는 바람에 원하던 효과가 나지 않았다.

알렉스는 그녀가 덜덜 떠는 모습을 화가 나서 바라보다가, 결국 몸을 돌리고 문이 부서져라 닫으며 목욕탕을 나갔다.

다음날, 사프론은 헬리콥터가 출발하는 소리에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다른 날 아침처럼 알렉스의 온기를 찾아 옆자리로 손을 뻗다가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젠 끝났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아 옆자리의 베개를 바라보았다. 주름 하나 없이 평평했다.

감사하게 생각해야 해. 그녀는 자신에게 말했다. 최소한 알렉스는 어젯밤 동침하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샤워가 끝난 후 하루 동안의 사건으로 너무 피곤한 나머지 침대에 몸을 구부린 채 잠들었다.

그녀는 하품 반 한숨 반을 내뱉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하늘은 여전히 회색빛으로 꾸물거렸다. 그녀의 기분을 반영하듯. 그녀는 정원을 바라보았다. 태풍의 여파가 역력했다. 잔디 위에는 부러진 나뭇가지와 11월에도 지지 않았던 꽃들이 흩어져 있었다. 나처럼 산산조각이 났군. 그녀는 슬프게 생각했다.

그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춥고 어두웠지만 잔잔했다. 그녀는 오늘 떠날 생각이다. 이곳에 더 이상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알렉스는 그녀를 절대로 사랑하지 않는다. 그녀가 제임스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분명히 화를 내긴 했다. 하지만 질투심 때문이 아니라 단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사프론은 몸을 돌려 의상실로 갔다. 그녀는 알렉스가 사준 옷은 옆으로 밀어 놓고, 오직 자신의 옷만을 가방에 싸기 시작했다. 싸늘한 공허감이 몰려들었다. 그녀는 유령처럼 청바지와 울 셔츠를 입은 후 가방을 들고 나와 전화기를 들었다.

그녀는 공항에 전화를 걸었고, 오후에 런던으로 떠나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그녀는 손목 시계를 바라보았다. 930분이니, 시간은 충분하다.

데스피나는 그녀가 가방을 들고 내려오자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당신 가요?" 그녀는 영어로 더듬더듬 물었다.

사프론은 눈을 피하며 그저 웃어 보인 채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 창문 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속이 요란하게 울렁거렸다. 뭔가를 먹어 둬야 해. 마지막으로 식사를 한 게 언제더라. 어제 아침이었다.

그녀는 식탁 위에 놓인 빵 한 덩어리를 먹을 만큼 잘랐다. 그리고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한 채 꼭꼭 씹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두 눈은 멍했다.

5분 후 그녀는 소지품을 들고 집을 나와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주점은 텅 비고 주인만이 지키고 있었다. 사프론은 조용히 본섬까지 태워다 달라고 했다. 그는 그녀에게 의아한 시선을 던진 후 아들에게 보트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녀는 "고마워요" 하고 말한 후 플라스틱 테이블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가방을 양쪽에 내려놓은 후 지갑을 점검했다. 여권과 돈은 가지고 있다. 조금만 있으면, 이젠 모든 것이 다 끝난다.

주점 문이 열렸다. 보트가 준비된 모양이다. 그녀는 열린 문으로 시선을 던지며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알렉스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의 검은 시선이 그녀의 굳은 모습을 본 후 양옆에 놓인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어디로 갈 거지?" 그가 엄하게 물었다.

"헬리콥터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그녀는 그의 단단한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무시무시해 보였다. 면도도 하지 않고, 두 눈은 퀭하니 들어갔으며, 입가에는 주름이 잡혀 있다. 몇 주 동안 잠을 자지 못한 남자의 모습이다.

알렉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요트로 왔소"

"요트?" 그녀가 혼란한 상태에서 말을 따라 했다. 알렉스를 다시 볼 계획은 없었는데.

그는 양손을 낡은 청바지 주머니에 넣고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사프론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격렬하게 뛰었다. "난 곧 떠날 거예요" 그녀가 재빨리 말했다.

"그래, 알겠소" 알렉스가 허리를 굽히더니 그녀의 가방을 들었다. "내가 도와주지" 그는 그녀가 반대하기도 전에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녀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갔다. "안돼, 기다려요. 내가 할 수 있어요" 그녀는 방파제 옆에 정박한 요트를 보는 순간 말소리가 흐려졌다. 알렉스는 <라이언 로어>호로 승선하는 계단에 서 있었다.

그는 몸을 돌렸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

"배에 타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안고 올라가지"

그녀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녀는 자신에게 말했다. 하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때도 알렉스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주변에서 기다리고 있는 남자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요트 출항을 도우려고 방파제에서 기다리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녀는 한 번도 방파제 쪽은 보지 않았다. 바보 같으니라구! 긴장된 침묵이 오랫동안 흘렀다. 방파제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만이 들려왔다. 모든 사람들이 다음에 일어날 일을 흥미진진하게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사프론..." 알렉스의 목소리가 채찍질처럼 터져 나왔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본섬에서 내릴 거예요" 그녀는 자존심을 지키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그녀의 팔꿈치를 잡고 서둘러 배에 태웠다. 그는 갑판에 도착하자 그녀를 흘끗 본 다음 손을 떼었다.

"아래로 내려가요. 선원들이 많이 없는데다 또 다른 태풍이 불어오고 있기 때문에, 내가 도와야 하오"

그녀는 뻣뻣한 발걸음으로 선실로 내려갔다. 푹신푹신한 소파에 무너지듯 주저앉은 다음 방어적으로 가슴에 팔짱을 꼈다.

둔탁한 엔진 소리가 들려온 다음 배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조금만 있으면, 영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순간 뒤통수의 머리털이 움찔 일어났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알렉스가 문을 막고 서 있었다. 그의 존재가 거실 전체를 꽉 채우는 듯했다.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을 읽을 순 없었지만, 무자비한 얼굴에서 엿보이는 악의와 강철 같은 의지는 이 남자가 어느 누구에게도, 더더군다나 자기 아내에게 협박당하는 데 익숙하지 못하다는 걸 암시하고 있었다.

사프론은 신경질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언제 도착하죠?" 그녀는 이 침묵을 깰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우린 이미 거래했어" 얼음장처럼 차갑고 음산한 목소리로 알렉스가 말을 이었다. "우린 거래를 했어. 당신의 육체와 아이에 대해서 내가 돈을 지불하기로 말야. 아무것도 바뀐 것은 없소. , 당신이 거래 조건을 이행할 때까지 요트에서 지낸다는 것만 제외하곤"

"믿을 수 없어!"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믿어. 당신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소"

"어젯밤 일이 있은 다음에도 내가 정말 당신과 함께 지내리라 생각했단 말예요?" 그는 자신의 힘과 돈을 휘둘러 그녀에게 아테네에 둔 정부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할 생각이다. 그는 미쳤다!

"내가 때려눕힌 게 당신의 연인이라는 점을 고맙게 생각해야 할 거요. 난 평생 여자에게 손을 대본 적이 없지만, 어제저녁엔 그럴 뻔했소" 그는 냉소적으로 웃었다. "난 내 자신을 비난했소. 평상시에는 신중하게 계약을 맺거든. 우리 거래에서 난 성실성에 대한 약정을 빼놓았지만, 당신은 이제 절대로 그럴 기회를 잡지 못할 거요"

사프론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마음속에서 그의 배신에 대한 분노와 고통이 쌓이고 맺혀 숨도 쉴 수 없었다.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 오만한 자식!

갑자기 그녀의 성질이 폭발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그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그의 턱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그가 그녀의 허리와 주먹을 동시에 잡으며 자신에게 단단히 밀착시켰다. "이 작은 망나니" 그가 이를 갈며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보여 주지"

하지만 사프론은 그의 말이나 행동에 상관하지 않았다. "성실성을 잊은 사람은 당신이야!" 그녀가 소리 질렀다. "날 웃음거리로 만들지 말아요! 난 다 알고 있어! 당신들 두 사람에 대해 알고 있단 말야. 이 성실한 척하는 돼지! 제임스는 절대로 내 연인이 아냐. 절대로. 난 당신의 정부가 아파트에 있는 걸 발견한 다음에 도움을 청하러 그에게 갔단 말야"

그녀는 갑자기 자유롭게 되었다. 그녀가 비틀거리자 그가 어깨를 잡아 주었다. 그리고 홍조인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어제저녁에 당신이 내 아파트에 왔다고? ?" 그가 다그쳤다.

"실비아를 발견하러 간 건 아니었죠" 그녀가 짧게 받아쳤다.

"당신은 날 찾으러 왔었어" 그의 눈에서 강렬한 빛이 번뜩였다. "그리고 실비아를 발견한 거야" 그가 양손을 그녀의 여린 어깨 위에 얹었다. "당신은 질투를 했군. 질투를 한 나머지 화가 나서 빗속을 뛰쳐나갔고, 제임스를 찾아간 거야" 그가 의기양양하게 추론해 냈다. "내 말이 맞지?"

"셜록 홈즈가 따로 없군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서요? 더 이상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상관없다구?" 그가 부드럽게 물었다. "나에겐 그렇지 않아. 우린 대화를 해야 해"

"우린 아무것도 할 이야기가 없어요, 이젠 끝났어요"

그녀는 몸을 돌렸지만, 그 순간 요트가 크게 요동을 치는 바람에 그의 몸 쪽으로 쏠렸다. 그는 몸을 긴장시키고 둘의 균형을 잡았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를 품에 안고 자신의 선실 쪽으로 향했다.

"날 내려놔요" 그녀가 명령했다. 하지만 그녀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지난 몇 시간 동안 단단히 얼어 있었던 그녀의 감각이 녹기 시작하며 전기 같은 충격이 일어났다. 가깝게 있는 그의 얼굴, 그의 미묘한 체취, 그의 심장 박동 소리는 너무나도 친밀했다. 그녀는 이 남자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가 일으킨 상처가 칼날처럼 그녀의 가슴을 후벼팠다.

알렉스는 그녀를 안은 채로 자신의 선실 문을 연 다음 꽝 닫았다. "제발 날 가게 해줘요" 그녀가 간청했다. 더 이상은 아픔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감정은 산산조각났으며 자존심은 누더기가 되었다.

"절대로 안 돼, 사프론" 알렉스가 중얼거리며, 그녀를 바닥에 세웠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를 단단히 안고 있었다.

그녀는 덫에 갇혀 발버둥을 쳤다. 그는 한 손을 그녀의 등에 돌려 머리칼을 움켜쥔 다음 고개를 젖혀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섹스는 아무런 해결이 되지 못해요" 그녀는 빛을 더해 가는 그의 갈색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몸이 두 쪽이 나는 한이 있어도 그의 남성적인 매력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래, 하지만 사랑은 가능하지!"

"당신이 사랑에 대해서 뭘 알죠? 당신은 식사를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여자를 가졌어요. 정부, 아내. 심지어 당신 어머니까지도 화를 낼 정도라고요!" 사프론은 호전성을 드러내며 그에게 덤벼들었다. 그가 감히 사랑에 대해 언급하다니! 그는 그 말의 의미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의 재산과 외모, 그의 자신감과 힘으로 항상 여자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그를 따르게 만들었다. 그는 사랑이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개념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한순간이나마 그를 바꿔 놓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바보였다.

"난 당신을 사랑해. 당신이 날 믿으리라 기대는 하지 않지만 말야"

사프론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제대로 들은 건가? 그녀는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를 덮은 긴 눈썹마저도 그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연약함을 완전히 숨겨 주진 못했다.

"내가 당신을 험하게 대한 건 알고 있소. 하지만 나 자신을 변호하도록 해줘" 그는 재빨리 오만함을 회복하고 말을 이었다. "당신은 내 아내요. 그러니 그럴 의무가 있소"

사프론은 그 말에 호기심과 실낱 같은 희망을 느끼고 말했다. "그럼, 말해 봐요"

"먼저 앉아도 될까?" 그가 물었다.

그녀가 허락하자, 그는 그녀를 침대로 데리고 간 다음 나란히 앉았다.

"내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 당신은 나를 공격하는 동시에 매료시켰어. 하지만 난 사랑을 하기엔 내가 너무 늙었다고 생각했고, 사랑을 믿지도 않았지. 내가 당신에게 느끼는 감정은 그저 강렬한 화학 반응이고 섹스에 불과하다고 스스로에게 말했소. 그리고 당신을 내침대로 끌어들이기로 결심했지"

"나도 기억해요" 사프론은 요트에 오른 첫날 아침 알레그의 반나체 차림을 떠올리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알렉스가 약간 고개를 돌리며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당신은 날 굉장히 매료시켰기 때문에, 난 당신이 어머니의 계획의 일부라 해도 상관하지 않았소. 난 당신이 내 품에 떨어지는 건 단지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당신은 내가 틀렸다는 걸 증명했소"

첫날부터 그녀가 그를 얼마나 갈망했는지, 그가 안다면, 그녀는 눈을 내리깔며 무릎에 놓인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당신에게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겠죠, 의심할 것도 없이" 그녀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제기랄, 날 봐, 사프론!" 강력한 명령에 놀란 그녀가 번쩍 눈을 들었다. 그는 그녀의 양손을 잡았다. "그만 빈정거리고, 나에게 기회를 줘. 우리에게 기회를 달란 말야"

<우리> 그의 목소리는 진지했고, 벨벳처럼 부드러웠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를 믿고 싶었다!

"당신은 내가 가질 수 없었던 첫 여자였소. 그래, 그건 분명 첫 경험이었어. 난 부유한 남자고, 여자들은 돈 때문에 내 앞에 무릎을 꿇지. 난 당신도 그러리라고 생각했었소"

"당신은 내가 그들과 똑같다고 믿었어요" 사프론은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다신 거래는 그 이상이에요"

알렉스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엄지손가락으로 손바닥을 쓸었다. 달콤한 기쁨의 고통이 그녀에게 전달되었다. "내가 한 말은 진심이 아니었소"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당신이 날 그렇게 몰아친 거요, 사프론. 당신이 런던으로 떠났을 때, 난 상관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했소. 하지만 그다음 날 당장 당신에게 전화를 했지. 난 당신이 보고 싶었소. 하지만 여전히 섹스 이상의 것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거요. 당신을 쫓아 런던까지 가서 저녁 식사를 미끼로 내 아파트까지 데려갔을 때도 말이오. 그날 밤 당신이 결혼을 요구했을 때, 난 정말 걱정하기 시작했소"

"당신이 걱정을?} 사프론은 이 시건방진 알렉스를 괴롭힐 뭔가가 있다곤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래, 나도 한 사람의 인간이잖소" 그가 허스키하게 말하며,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에 키스했다.

"안 돼요. 당신은 말을 해야 해요, 진실을" 사프론은 그들이 마음을 툭 털어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결혼이 또 다른 기회를 갖기 위해선, 모든 비밀을 털어놓아야 한다.

"그래" 그가 우울하게 미소 지었다. "진실. 난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소. 그리고 결혼은 좋은 생각이라고 스스로 확신했지, 좋은 거래라고. 난 거의 마흔 살에 가까웠고, 후계자를 생각해야 했소. 그리고 어머니도 행복하게 해줄 뿐 아니라 당신을 내 침대로 끌어들일 수 있지. 난 그 이상을 인정하길 거부했소. 그다음 날 청혼할 때조차 난 스스로를 기만했던 거요"

사프론은 그런 기만에 대해선 잘 알았다. 그녀 역시 똑같은 병에 걸려, 스스로 바보 같은 복수 계획을 세웠지 않은가? "알렉스"

"내가 끝까지 말하게 해줘, 사프론. 내가 정신이 있을 때 말야. 난 어제저녁 내내 이 말을 준비했으니, 꼭 해야겠어"

이런 알렉스는 처음 봤다. 그녀의 강인한 남편이 이렇게 신경질적으로 애를 태우다니! "계속하세요" 그녀가 부드럽게 재촉했다.

"결혼식 날, 난 당신은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면서 의기양양했지. 오만하게도 난 사랑에 빠졌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내가 원하던 여자와 원하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던 나 자신을 축하했소. 하지만 당신이 결혼한 진짜 이유를 털어놓자 내 빗나간 욕망에 불이 붙어 버렸소"

그녀는 그의 어두운 얼굴에서 후회를 발견했다. 어떻게 그렇게도 심하게 서로를 비난할 수 있었지? "난 당신에게 기둥서방보다 더 악질이라고 했어요" 그녀는 후회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때 난 당신을 죽일 뻔했어" 알렉스의 눈이 당시의 분노로 번쩍거렸다. "내가 마침내 사랑을 인정하기 시작한 여자가 날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고 나니, 난 쉽게 그 사실을 반박할 수 없었소. 사랑은 한 사람을 연약하게 만들 수도 있더군. 하지만 난 당신이 가도록 내버려 둘 순 없었소. 그러기엔 당신을 너무나도 원했거든. 그래서 거래를 제안한 거야"

"제안? 차라리 명령이었어요" 사프론은 손을 들어 그의 단단한 볼을 만지며 그의 말을 정정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다시 말했다. 그녀도 용기를 내어 고백할 기회를 잡아야 하리라.

"난 복수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리고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결혼 첫날밤 진실을 고백했어요. 난 잘못된 이유로 결혼 생활을 해나갈 수 없었던 거예요. 난 남몰래, 이브를 파멸시킨 클럽을 소유했던 당신을 용서하고, 복수를 꿈꿨던 나를 당신이 용서한 후 다시 시작하기를 바랐던 거예요"

"그때 당신이 날 사랑했다고?" 알렉스가 놀라서 물었다. "날 그렇게 나쁘게 생각했으면서도, 용서할 생각이었소?" 그가 거친 목소리로 말하며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았다. "당신은 날 정열과 사랑으로 흔들어 놓았소, 사프론. 첫날밤 난 분노에 가득 차서 당신에게 앙갚음을 했소. 당신을 상처입히고, 당신의 사랑을 무너뜨린 거요. 내가 정말 잘못했소"

"그렇지 않아요" 사프론이 자유롭게 고백했다. "당신은 날 상처입히지 않았어요. 그건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경험이었어요, 난 그걸 즐겼어요"

"그건 나도 역시 마찬가지였소" 알렉스가 유감스럽게 말했다. "난 당신을 너무 많이 즐겼소. 당신 같은 여자는 처음이었고, 만나게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소. 내 품안에서, 우리 침대에서, 당신은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정열적으로 반응했소. 당신은 내 모든 자제심을 잃게 만들었고, 난 그 사실이 싫었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사프론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모르겠소? 세렌디피도스섬에서 우리가 나눈 사랑은 너무 근사했기 때문에, 난 우리의 거래가 완벽하고 사랑 고백 이상이라고 결론내렸소. 당신은 내 어머니의 좋은 친구였고, 난 당신의 처음이자 유일한 연인이었지. 또 당신이 날 버리고 떠날 방법도 없었소. 하지만 어제저녁, 제임스의 아파트에서 당신을 발견하고 내 오만함은 산산조각이 났소. 내 아내가 반쯤 벗은 채로 다른 남자의 목욕탕에서 나오는 걸 발견하다니"

그는 그 영상을 지우려는 것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사프론이 재빨리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알렉스. 난 당신이 오기 30분 전에 도착했고, 눈물과 비 때문에 온몸이 젖어있었어요. 난 제임스에게 빨리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하지만 그는 나에게 일단 젖은 옷을 벗은 다음에 이야기를 하자고 했어요. 그다음은 당신이 아는 바예요"

"그래! 난 흥분해서 그를 때렸지. 하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나고 자존심이 뭉개졌는데도 불구하고, 난 한 번도 당신을 떠나보낼 생각은 하지 않았소. 난 그가 당신의 연인이었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아"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검은 눈이 활활 타올랐다. 그는 재빨리 말을 번복했다. "아니, 상관은 있어. 하지만 나는 당신 없인 살 수 없어. 당신을 다시 내 품에 안지 못하고, 부드러운 당신 속으로 날 파묻지 못하고는... 내자아, 자존심. 당신은 얼마든지 짓밟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난 당신을 떠나보낼 수 없어. 난 당신을 사랑해"

사프론은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그의 사랑을 오랫동안 원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믿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런 정도는 감히 꿈도 꾸지 않았다. 강인하고 오만한 남편이 그녀의 발 밑에 자신의 심장을 내놓다니. 그녀는 그에게 몸을 기울였다. "나도..." 하지만 그녀는 말을 멈췄다. 전날 밤 사건이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알렉스는 그녀의 망설임을 눈치채고, 그녀를 힘차게 끌어안았다. "날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돼, 지금은. 난 당신의 사랑을 얻어 낼 기회를 원할 뿐이오" 그의 검은 눈이 그녀의 회의에 찬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난 결국은 해낼 거요. 난 의지가 강하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거든. 평생이 걸린다 해도 해낼 거요." 그는 한 손을 그녀의 셔츠 속으로 집어넣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어떻게 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런 기회를 얻어낼 수 있지?"

"어제 난 당신을 놀라게 해주려고 아테네에 갔었어요. 다시 직장에 나가겠다는 말을 하려고요" 사프론은 자신의 등을 애무하는 그의 손길에 무너지고 않고 말문을 텄다. "겨울에 섬은 너무 적막하고 난 고독했기 때문에, 아주 좋은 생각 같았어요. 아파트에 도착해서 실비아를 발견할 때까진"

그의 사랑 고백도 이런 명백한 사실 앞에선 빛을 잃는군. 사프론은 슬프게 깨달았다. 실비아는 그의 정부다. 그녀는 똑똑히 그 사실을 그의 요트에서 확인했지만, 어제저녁까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무릎에서 내려오려 시도했지만, 알렉스의 힘에 밀려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웠다. 알렉스는 하체로 그녀를 단단히 누르며 몸을 숙인 후 양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잡았다.

"그건 부인할 수 없어요, 알렉스. 난 옷장에 당신과 그녀의 옷들이 나란히 걸려 있는 것을 보았어요"

"사프론, 달링. 당신 질투심은 반갑지만, 난 절대로 실비아와 사랑을 나누지 않았다고 맹세하겠소. 사실 당신을 본 순간부터 다른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소. 내 옷 몇 벌이 옷장 안에 있었을지 몰라도, 난 절대로 그곳에서 실비아나 다른 여자와 함께 지내지 않았소. 실비아가 호텔 생활에 진저리가 났다고 했기 때문에 내 아파트를 쓰라고 제의한 거요. 그리고 내 잘못이라면 그녀에게 그리스에 머무르면서 헬스 클럽 체인 매매를 감독하게 한 것뿐이오. 하여튼 난 호텔로 옮겼소. 이 부분에 대해선 당신도 책임이 있소. 난 헬스클럽을 팔아치우고 속이 다 후련했소. 아마 당신은 상상도 못할 거요. 마사지 살롱과 관련이 있는 건 이제 지긋지긋했거든" 그가 낄낄거렸다. "내 개인 마사지사는 계속 두고 싶지만 말야"

사프론은 그의 말에 놀랐지만, 아직 실비아를 쉽게 떨쳐 버릴 순 없었다.

그녀의 눈에서 여전히 의심의 빛을 발견한 알렉스는 입술로 그녀의 이마와 코, 그리고 입술을 가볍게 애무했다. "생각해봐요, 사프론. 캐서린 백모가 모든 사실을 밝힌 다음 우린 한 번도 떨어져서 밤을 지새지 않았잖소"

그의 말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녀는 확신 할 수 없었다.

"실비아는 잊어버려. 난 당신을 사랑하고, 지금 당장 절망적으로 당신을 원하고 있소"

사프론은 부드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긴박한 열정이 몸으로 전달되어왔다. "하지만 요트로 항해를 할 때, 난 실비아가 당신 방에서 나오는 걸 보았어요"

그녀가 숨도 안 쉬고 맺힌 사연을 털어냈다.

알렉스가 몸을 뒤로 뺐다.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소"

"나에게 거짓말하지 말아요, 알렉스. 어느 날 아침 난 당신 방에서 나오던 실비아를 보았단 말예요"

"사프론, 맹세하겠는데 한 번도 실비아와는 동침해 본 적이 없소. 게다가 항해 내내 난 당신을 침대로 끌어들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어떻게 또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 수 있었겠소?"

그건 사실이다. 사프론도 인정했다.

"왜 그 빌어먹을 여자가 내 방문에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당신에게 한 말은 꾸밈없는 사실이오" 그가 우울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다음 주면 실비아는 날 떠나 다른 사람 밑에서 일하게 될 거요. 하지만 그 전에 먼저 그녀에게 사실을 추궁해야겠군 " 그는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 침대에 누웠다. "어떻게 당신에게 확신시켜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반드시 하고 말 거요" 그는 그다운 오만한 태도로 자신했다.

사프론은 너무 피곤해서 일어설 수도 없었다. 알렉스가 그녀를 베개에 제대로 눕혀 줬다. 그녀는 자신에게 접근해 오는 그의 어깨와 반짝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한 손으로 그의 가슴을 저지했다. 그녀는 더 이상 섹스로 확신을 얻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중요한 일이다.

"사프론?" 그가 의아하게 질문했다.

그녀는 그의 단호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를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무자비하고 냉정한 사람인지 떠올랐다. 제임스를 때려눕힌 게 그 증거였다.

"당신 어머니는 가족 여행에도 당신이 여자 한 두명을 꼭 동반한다고 말했어요. 때문에 감히 당신 아버지가 캐서린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었던 거예요"

그녀는 말을 멈췄다. 그 말을 할 생각이 아니었기 때문에 안나에 대한 죄책감이 솟아올랐다. 그녀는 잠시 숨을 멈추고 알렉스가 불처럼 화를 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대신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호탕하게 웃어댔다.

"맙소사, 충분히 짐작이 가는군. 우리 어머니 때문에 미치겠군" 그는 그녀를 자신의 몸 위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그의 뜨겁고 단단한 몸 위에 반듯하게 누워, "미치겠다뇨?" 하고 되물었다.

"사프론, 나의 순진한 사프론" 그가 놀려대며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당신은 아직도 우리 어머니가 드라마의 여왕이란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거요?"

"드라마의 여왕?" 그녀가 중얼거렸다. 알렉스의 놀림과 그가 불러일으킨 욕망으로 머리가 멍해졌다.

"우리 어머닌 정말 못 말리는 분이오" 알렉스가 말을 이었다. "아버질 만났을 당시 어머닌 무용수였지만, 그녀의 야심은 배우가 되는 것이었소. 우리 아버진 어머니가 딛는 땅조차 숭배하는 분이었기 때문에 관대한 마음으로 그녀를 런던에 보내 오페라나 연극이나 예술 활동을 즐기시도록 한 거요. 당신은 우리 아버지와 캐서린 백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게 분명하군. 하지만 전혀 사실무근이오. 큰아버지를 만나기 전, 캐서린은 우리 아버지와 단 두 번 데이트를 했을 뿐이오. 하지만 어머닌 사실을 과장하길 좋아하시거든. 그녀 스스로도 못 말린다니까. 오래전에 내가 중지시켜야만 했지만 나도 아버지처럼 어머니에게 약한 경향이 있거든. 난 열여덟 살 때 가문을 책임지고, 어머니, 캐서린 백모와 마리아, 세 명의 여자를 돌봐야 했소. 정말 보통 일이 아니더군. 차라리 다국적 기업을 경영하는 편이 훨씬 수월하지"

사프론은 그의 말을 믿었다. 세렌디피도스 섬에서 안나와 캐서린이 다정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 그녀 자신도 의아해하지 않았던가?

"어머니가 하는 말은 절반도 믿을 게 못 되오 하지만 난 어머닐 사랑하고 있소" 그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난 당신을 사랑해, 사프론, 내 말을 믿어줘"

그녀는 믿었다... 이건 성격이야, 하고 그녀는 파악했다. 때문에 알렉스는 실비아에게 아파트를 빌려준 것이다. 그는 평생 여자들을 잘 보살펴 왔고, 그날 요트에서 사프론은 실비아가 그의 선실에서 나오는 것까진 보지 못했다. 단지 그의 선실 문고리에 손을 대고 있던 실비아만 보아쓸 뿐이지. 결론은 내려졌다. 그녀는 함박 미소를 지었다.

"난 당신을 믿어요, 알렉스.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그녀는 사랑을 가득 담은 눈으로 그의 가무잡잡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내일, 그녀는 테스트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가장 위대한 사랑의 선물을 주게 될 수도 있으리라. 아기.....

그들은 재빨리 옷을 벗어 던진 후 서로의 몸을 애무했다. "제발, 알렉스" 그녀가 간청했다. "지금요"

알렉스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애정과 정열을 담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난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거요. 이 세상에서, 그리고 내세에서까지" 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