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예전의 남자 친구, 돌아가신 아버지." 시드가 허둥지둥 사무실에 도착하자 루크가 말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세상에, 내가 맞은 거예요?"
"완벽하고 놀라울 정도로 당신이 맞았소, 당신은 정말 천재요." 그는 그녀를 안고 방안을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었다.
오늘 아침 라나 퀸의 대기실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조금 전까지 가만히 서 있던 그녀가 다음 순간에는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빙빙 돌리는 동안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그에게 매달렸다.
"드디어…." 그가 말했다. "뭔가 할 일이 생긴 것 같소."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생긴 것 <같은> 거예요?"
"난 자제하려고 애쓰고 있소." 그는 서류 캐비닛과 부딪칠 뻔했지만 아슬아슬하게 피해 갔다.
그녀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이 자제한다고요?"
루크도 웃으면서 천천히 그녀를 땅에 내려놓았다. "그게 바로 나요. 극도로 절제하는 사람." 하지만 그녀를 안은 팔은 풀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더 이상 웃지도 않고.
그녀의 몸은 어깨에서부터 허벅지까지 그에게 밀착되어 있었다.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그는 따뜻하고 단단했다. 그리고 좋은 향기가 났다.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녀의 얼굴은 그를 향해 올려져 있었다. 그의 입은 그녀의 입과 불과 몇 센티미터 거리에 있었다. 잠깐 심장이 멈춘 순간 시드는 그가 자신에게 입맞추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지난번처럼 그녀는 그의 입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전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의 눈에 순간적으로 떠오른 감정 변화와 어떤 깨달음은 연극이라고 볼 수 없었다. 정말 그런가? 그의 눈이 그녀의 입술로 내려갔다. 그리고 입술이 살짝 열리면서 그가 무의식적으로 혀끝으로 입술을 적셨다.
하지만 그는 무릎이 후들거리도록 강렬한 키스를 하는 대신 그녀를 놓았다. 그리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루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메인 컴퓨터로 끌어당겼다. "좀 보여 주게." 그는 실 생도에게 명령했다.
토머스가 키보드 앞에 앉아 있었고, 리오는 그의 어깨 위에서 내려보고 있었다. 그들이 양쪽으로 살짝 비켜서며 시드가 화면을 볼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나에게 화면에 집중하라는 말인가?
그녀는 아직도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루크는 나에게 키스하지 않았어. 물론, 여긴 미국 해군 기지 안에 있는 사무실이니까. 그녀는 속으로 말했다. 그는 팀의 대장이야. 미국 해군에겐 키스에 대해 어떤 특별한 규칙이 있을지도 몰라. 그는 자제하고 있다고 했잖아. 시드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군. 그가 자제할 줄 아는 사람이란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니….
토머스는 시드에게 컴퓨터로 무엇을 했는지 설명해 주었다. "우리는 피해자들과 관련된 남녀 군인 열두 명의 인사 파일을 찾아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 죽은 사람, 현역, 퇴역한 사람 모두요."
"열 두 명 모두." 리오가 끼어들었다. "1996년 똑같이 여덟 주 동안 여기 코로나도에 주둔했습니다."
여덟 주, 4년 전. 우연일 리가 없어. 시드는 화면 속의 숫자들을 보기 위해 몸을 앞으로 숙였다.
"피해 여성들에게서 직접 얻어낸 정보에 따르면 그 군인들은 기 기간 동안 각각에 대응하는 피해자와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토머스가 지적했다.
"우리는 그 여덟 주 동안 여기 있었던 사람들의 인사 기록을 모두 뽑아냈소." 루크는 말하며 커다란 못 같은 것으로 묶은 두꺼운 서류철을 건네주었다. "그 기간 동안 단 하루라도 있었던 사람은 모두 명단에 올렸소. 한 부는 마이크가 루시 맥코이에게 전해 주러 갔소. 그녀가 경찰 컴퓨터에 이 이름들을 조회해 볼 거요. 전과 기록 때문에 군대를 떠난 사람이 있는지 찾아볼 거여. 특히 성범죄를 중점적으로."
"우리는 벌써 열 명 정도 후보를 간추렸어요." 바비가 덧붙였다. "이 명단에 있는 열 명은 모두 불명예 제대를 했습니다."
"한 마디로 쫓겨났다는 얘기요." 루크가 설명했다.
시드는 할말을 잊었다. "이 많은 일을 어떻게 그렇게 빨리 처리했죠? 믿을 수가 없어요. 결국 당신들이 알아냈군요."
"당신이 알아낸 거요." 루크가 말했다. "우리는 그저 빈칸을 메웠을 뿐이오."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엄청난 명단을 내려다보았다. "이젠 뭘 해야 하죠? 이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범행 대상이 될 위험이 있어요>하고 경고해야 하나요?"
"이 명단에 오른 사람들 가운데 1퍼센트만 이 지역에 살고 있어요." 바비가 말했다.
"10억의 1퍼센트는 엄청난 숫자예요." 시드가 말했다.
"그 명단에 오른 이름이 10억까지는 안 되오." 루크가 말했다.
그녀는 명단을 넘겼다. "하지만 그렇게 느껴지는군요."
"알파 분대 대부분의 이름도 끼어 있어요." 바비가 말했다. "내 기억에 그때 알파 분대는 훈련 작전 때문에 코로나도에 왔어요. 그리고 BUD/S 교관 일을 임시로 떠맡았죠. 어떤 학급에서는 중도 탈락자 비율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어요. 모두 합쳐서 아마 세 명이 그만뒀을 겁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죠. 그들이 지옥 주간에 들어갔을 때 인력이 턱없이 모자랐어요."
"나도 기억나." 루크가 말했다. "우리들이 돌아가면서 교관들을 보조했다. 그들이 훈련 과정을 마칠 때까지 여기서 시간을 지체했어."
"알파 분대 대부분이?" 시드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이 명단에 오른 사람과 관계 있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범행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녀는 루크를 보았다. "당신 전화를…."
"벌써 다 했소." 그가 그녀의 질문을 예상하고 말했다. "모두의 아내들에게 말했소. 로니 캐터라너토만 빼고. 자동 응답기에 자세하게 메시지를 남기고 최대한 빨리 내 핸드폰으로 전화해 달라고 했소."
"럭키 대위님…." 리오가 말했다. "이 범인을 잡는 방법이 생각났어요. 시드를 미끼로 대위님 여자 친구처럼 보이게 하면…."
"어…." 루크는 말했다. "절대 안 돼."
정색을 하고 반대하는 이유가 뭐지?
"제 말씀은 그녀를 한밤중에 샌 펠립 뒷골목으로 내몰자는 게 아닙니다." 리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보다 오히려 더 안전해질 겁니다. 시드가 혼자 있을 때는 언제나 우리가 지켜볼 테니까요."
"그녀는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된 건물 3층에 살고 있어." 루크가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지켜볼 텐가? 그녀 아파트 어딘가에 숨어 있지 않으면…."
"도청기를 설치해 놓으면 되죠." 토머스가 제안했다. "감시 시스템을 장치해 놓고 거리에 밴을 세워 두는 겁니다."
"시드에게 한 분대를 투입시키는 겁니다." 리오는 이 아이디어에 열광하고 있었다.
리오는 분명 <NYPD 블루(뉴욕 경찰서를 무대로 벌이는 유명한 범죄 수사물)>를 너무 많이 봤어. 분대라니. 하느님.
"대위님은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인터뷰를 하고 어떻게든 그놈을 화나게 하는 겁니다. 범인이 절대 실일 리가 없다고 하는 건 어떨까요? 그는 분명 사람들이 자신이 실이라고 믿어 주길 바라고 있으니까요. 그놈한테 현싥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 다음에 시드와 함께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거죠. 그리고 사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안 돼. 미친 짓이야."
시드는 회의 탁자에 앉아서 아무 관심 없다는 듯한, 심지어 지루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바로 5분 전 키스할 뻔한 순간을 완전히 오해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척했다. 그가 나를 빙빙 돌렸고, 나는 그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키스하고 싶다는 듯이 나를 바라본 게 아냐. 나만 그를 그런 식으로 본 거야. 그가 웃음을 멈춘 건 어색했기 때문이겠지. 그는 여기가 일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자제한 게 아냐. 그저 관심이 없었을 뿐이야.
어떻게 그가 나에게 관심 있다고 생각했을까?
바비가 헛기침을 했다."그런 대로 잘 될 것 같은데…."
"네, 하지만 이 분 체면도 생각해야죠." 시드가 건조하게 말했다. "나하고 돌아다니면 망신스러울 거예요."
루크는 휙 돌아 그녀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읽을 수가 없었다.
"시드, 정말 이 일을 하고 싶은 거요?" 그의 목소리는 어이없다는 듯이 갈라졌다. "당신이 할 일은 조사요, 기억하오? 우리는 합의를 했소. 당신은 보호 장비가 있는 밴 안에서 기다리는 거요. 미끼로 나서는 게 아니란 말이오. 미끼라니…. 하느님, 이 어리석은 음모에서 제발 좀 구해주십시오!"
"아까는 천재라면서요?" 시드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래 당신이 대답해 보시오. 제정신을 잃은 건 당신이니까."
"아니면 맥코이 형사를 대위님 여자 친구처럼 꾸밀 수도 있을 거예요." 토머스가 말했다.
"네, 잘되겠군요." 시드가 눈알을 굴렸다. "범인은 세세한 것까지 신경 쓰고 있을 텐데 말예요. 루크가 <한 번 나나 내 여자를 건드려 보라>는 메시지를 보낸 뒤에 가장 친한 친구의 아내와 돌아다니면 범인이 눈치 채지 못할 것 같아요? 게다가 루시는 형사예요. 누구라고 알 거예요. 그런데 하물며 범인이 그걸 모르겠어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실 팀이 밖에 세워 둔 밴에서 당신 아파트 3층까지 가는 동안 일으키는 먼지가 당신에게 어떤 해를 끼치게 될지 모르겠소?" 루크는 발끈해서 물었다. "그 놈이 메리 베스 홀리스에게 한 짓을 알고 있는 거요? 정말 당해 보고 싶소? 세상에, 시드! 생각 좀 해보시오, 제발."
"그럼 함정을 당신 집에 팔 수도 있잖아요." 그녀가 반박했다. "내가 당신 집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하면 되잖아요. 그리고 당신은 집에 아주 늦게 들어오는 거예요. 내가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을 일정하게 반복적으로 정하는 거죠. 팀은 당신 뒤뜰에 숨으면 되잖아요. 아니면 지하실에 숨어도 되고요."
"아니, 그건 안 되오. 내 집에는 지하실이 없소."
그녀는 화가 치밀어 그에게 으르렁거렸다. "루크, 생각해 봐요! 실 팀이 늘 내 주변에 있어 준다면 난 범인을 잡기 위해 기꺼이 미끼가 되겠어요. 난 정말 범인을 잡고 싶어요. 단 한 가지 문제는 당신과 내가 좀 더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애인 사이처럼 쇼를 해야 한다는 것뿐이에요. 하지만, 젠장. 인류 전체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그런 불편쯤은 감수할 수 있어요. 당신은 그럴 수 없을지 몰라도 말이에요."
루크가 기가 막힌 듯 웃었다. "아주 장한 생각이군."
시드는 똑바로 서서 그를 노려보았다. 한편으로는 가가 받아들이기를, 또 한편으로는 거절하길 바랐다. 어떻게 내가 지나치게 잘난 이 남자와 애인인 척 태연하게 연극을 할 수 있겠어? 아무리 잠깐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그와 한 집에서 살 수 있단 말인가? 만일 내가 도박사라면 이틀 안에 그의 침대로 기어들어간다는 데 전 재산을 걸 텐데. 아니, 그것도 길어. 한두 시간이면 충분해. 결과를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침대로 들이고 싶어 하지 않아….
"효과가 있을 것 같아요." 바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팽팽한 적막을 깨뜨렸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마이크가 말했다. 그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꼭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루크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내뱉었다. 뭔가 야생 동물 같은 소리를 내며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는 쿵쿵거리며 방을 나갔다.
바비는 어리둥절해 있는 시드에게 미소를 지었다. "파란 불이에요." 그가 해석했다. "전진하라는 거죠. 언론계에 연락해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루크를 인터뷰할 수 있게 해주세요. 텔레비전이면 더욱 좋겠죠. 아, 그리고 이건 비밀로 합시다. 당신과 루크 사이가 진짜가 아니란 건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을 테니까."
시드는 눈을 굴렸다. "누구든지 그를 아는 사람은 나를 한 번만 보고도 뭔가 수상쩍다고 생각할 거예요."
"누구든지 그를 아는 사람은…." 바비가 말했다. "당신을 한 번만 보면 그가 결국 만날 가치가 있는 사람을 찾았다고 생각할 겁니다."
럭키는 한 번도 여자 때문에 이렇게 긴장한 적이 없었다.
그는 트럭을 캐터라너토의 집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주차했다. 베로니카의 작은 <저녁 식사 초대>가 거창한 파티로 커진 듯했다. 길에 서 있는 자동차와 트럭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바비의 트럭과 웨스의 오토바이가 보였다. 피제이 벡커의 연두색 폭스바겐과 프리스코의 지프, 루시 맥코이의 소형 자동차도 있었다.
"잠깐 들러서 베로니카에게 1주일 정도 시내에서 벗어나 있으라고 말합시다." 그는 베로니카의 집을 향해 걸어가며 시드에게 말했다. "이 파티를 최종 리허설로 이용할 수 있을 거요. 우리기 이 친구들에게 애인 사이라고 말해서 그들이 속는다면 모두 다 속을 거요."
시드가 그를 돌아보며 완벽한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정말 그들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는 조금도 애인 사이처럼 보이지 않아요."
그녀가 옳았다. 그들은 오늘 길에서 처음 만나 사람 같았다."내가 만일… 당신 어깨에 팔을 두르면 어떻겠소?"
젠장, 그는 중학생 때 댄스 파티에 초대받았을 때를 빼고는 이렇게 바보스러운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모르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우리가 진짜 사귄다면 당신이 과연 내 어깨에 말을 둘렀을까요?"
"난…." 그는 그녀를 바짝 잡아당기며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전혀 의도가 없었는데도 손이 그녀의 티셔츠 자락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손가락에 비단처럼 부드러운 맨살이 닿았다.
이런….
그는 속으로 찔끔하며 그녀가 주먹을 날리기를, 최소한 자신을 밀쳐내고 신랄하게 고역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손을 그의 반바지 뒷주머니에 살짝 집어넣었다. 그는 하늘로 날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럭키는 목을 가다듬고 말을 꺼냈다. "이래도 괜찮겠소?" 손이 맨살에 닿아 있는 건 팔을 어깨에 두르는 것보다 훨씬 친근하고 진한 느낌이었다.
시드도 헛기침을 했다. 아, 그녀도 태연하지 않은 거야.
"기분이 묘하네요." 그녀가 머리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묘하죠, 그렇지 않아요?"
"그렇소."
"당신도 나처럼 긴장돼요?"
"그렇소." 럭키는 기쁘게 인정했다.
"만일 나한테 키스해야 한다면…." 시드가 말했다. "입에는 하지 말아요, 알겠죠?"
<해야 한다면?>
"아…." 그가 말했다. "알겠소. 내 말은 좋다는 소리요. 당신이 내게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미리 알려주고, 난 그 선을 넘지 않도록…."
"아니에요!" 그녀의 목소리를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선을 긋거나 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어제 점심때 피자에 마늘을 엄청나게 넣어 먹었거든요. 아직 입에서 이탈리아 부엌 냄새가 솔솔 나요. 난… 당신이 불쾌해질까 봐 그래요."
럭키는 웃었다 정말 가당찮은 변명이었다. "스물네 시간이나 지났는데 입에서 마늘 냄새가 날 리 없잖소."
"당신이 도미니크 디럭스 마늘 피자를 못 먹어 봐서 그래요."
"이보시오, 시드." 그는 캐터라너토의 현관문 앞에서 그녀를 돌려세웠다. "괜찮소. 내가 당신에게 키스하면 안 되는 이유를 만들어 붙일 필요 없소."
"만들어 붙이는 거 아니에요." 그녀가 주장했다.
"그럼, 마늘 냄새가 나도 상관없다면 키스해도 괜찮다는 소리요?"
시드가 웃자 초저녁의 그늘이 그녀의 얼굴에서 아름답게 춤을 추었다. "우리가 이런 얘기를 하다니 너무 신기하네요."
럭키는 지금처럼 강렬하게 키스하고 싶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평생을 통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젠장. <여자 친구 게임>을 하고 있는 이상 두 사람이 키스하면 이 연극이 더 사실적으로 보일 거라고 설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친구에게는 어떻게 키스하지? 그는 낯선 사람에게 키스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달랐다. 훨씬 위험했다.
갑자기 그의 머리에 어떻게 해야 할지, 뭐라고 말해야 할지 정확히 떠올랐다.
"당신한테서 진짜 마늘 맛이 나는지 알아보고 싶소." 그가 말했다.
"아, 진짜예요."
"그럼…." 그가 그녀의 턱을 자신 쪽으로 들어 올렸다. "과학적인 실험을 위해서…?"
그녀는 웃었다. 그는 키스해도 그녀가 화를 내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재빨리 뒤로 물러설지는 몰라도 적어도 뺨을 때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몇 센티미터 거리를 좁혀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세상에…. 그날 베란다에서 키스했을 때와 똑같이 그녀는 그의 품에서 불꽃으로 변했다. 베란다에서 키스했을 때와 똑같이 그녀는 그를 두 팔로 감아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정열적으로 키스했다.
이건 전적으로 섹스를 부르짖는 키스였다. 그의 몸을 한 순간에 불지르는 키스였다. 그녀의 몸에서 옷을 벗겨내고 바로 지금 여기서, 상관의 집 마당에서 그녀를 안고 싶게 만드는 키스였다. 섹스를 안 한 지 길고 긴 49일과 번민의 열일곱 시간, 초조한 12분이 지났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키스였다. 마지막으로 섹스를 한 상대가 누구였는지 완전히 잊게 만드는 키스였다. 여자들로 가득한 그의 일생에서 그 동안 만난 여자들을 모두 지워 버리는 키스였다. 앞으로 남은 저녁 시간 내내 이 여자와 어떻게 하면 다시 키스할 수 있을까 궁리하도록 만드는 키스였다.
하지만… 하! 그는 속으로 웃었다. 자신이 아직도 그녀와 키스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이제 나는 언제든지 그녀에게 키스해도 돼!
와, 그녀는 정말 뜨겁고 달콤하고 맛있었다 그리고…. 그래, 희미하게 마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시드가 뒤로 물러났다. 그는 그녀가 숨을 쉬도록 시간을 준 뒤 진짜 마늘 냄새를 맡은 건지 확인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키스해야겠다고 주장할 작정이었다. 그녀에게 다시 키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몇천 가지 늘어놓을 만반의 준비를 하면서.
그는 뒤늦게 캐터라너토의 집 현관문에 불빛이 들어온 걸 깨달았다. 머리를 돌리자 베로니카가 웃으며 서 있었다.
"당신…." 그녀가 말했다. "당신일 줄 알았어요."
럭키는 자신들이 군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걸 알았다. 베로니카의 뒤에 피제이 벡커가 서 있었다. 미아 프랜시스코가 앞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내다보고 있었다. 프리스코는 그 뒤에서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쳐들어 보였다.
시드가 화들짝 놀라 그의 품에서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다시 품안으로 감아 안았다.
"괜찮소." 그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누군가 우리를 보게 될 거라고 짐작했으니까. 우리는 사귀는 사이요, 기억하오? 당신은 내 여자 친구란 말이오. 난 당신한테 키스해도 되는 사람이오."
"미안해요." 베로니카가 경쾌한 영국식 발음으로 끼어들었다. "프랭크가 베란다로 나갔다가 앞뜰에서 남자하고 여자가 아기를 만들고 있다고 말해서. 그래서 살펴보러 나왔는데…."
"오, 세상에…." 시드가 말했다. 그녀의 얼굴이 밝은 분홍색이 되었다.
"그 녀석하고 언젠가 임신에 관해 자세하게 얘기를 해야 할까 봐요." 그녀의 목소리가 웃음기가 넘쳤다. "<키스한다고 아기가 생기는 건 아니다>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것 같군요. 하지만 이제 겨우 네 살이니까 잘 모를 거예요."
"안으로 들어 올래?" 피제이가 소리쳤다. "아니면 우리 모두 피해 줄까? 문도 닫고, 등도 끄고, 두 사람이 하던 일을 마저 하도록?"
럭키는 웃으며 시드를 문 쪽으로 끌어당겼다.
소개가 끝나자 베로니카는 시드를 끌고 뒤 베란다로 갔다. "여기 바다 풍경을 한 번 봐요." 그녀는 마치 몇 년 동안 알고 지낸 사이처럼 친근하게 말했다. "난 그릴에 있는 닭고기를 살펴봐야겠어요."
"바비가 벌써 봤어." 네 사람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한꺼번에 들렸다.
"이 사람들은 내가 요리를 할 줄 모른다고 생각한다니까." 베로니카는 창문을 열면서 말했다. 그리고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불행히도 맞는 말이지만."
"안녕, 시드." 바비가 그릴 앞에서 차분하게 말했다.
그는 수영복만 걸치고 있었다. 근육이 반짝거리고, 기다란 머리채는 뒤에서 땋아 늘어뜨렸다. 역사 소설 표지에 등장하는 인물 같은 모습이었다. 시드가 눈길을 떼지 않고 보가 럭키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속삭였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시오. 당신은 내 애인이오, 기억나오?"
"루시 맥코이는 알죠…." 베로니카가 시드에게 말했다. "그리고 타샤 프랜시스코, 웨스 스켈리…."
"사실 우린 오늘 처음 만났어요." 웨스가 말했다. 그는 소파에 앉아 일어설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난 이 작전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금지되었으니까." 그가 베로니카에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냉소가 떠돌았다. 맥주를 너무 많이 마신 듯했다. "난 팀에 끼워 주지 않더라구. 용의자 명단에 있거든. 그렇지, 대위님?"
럭키가 쾌활하게 말했다. "왜 그래, 스켈리. 내가 직접 팀원을 고르지 못했다는 걸 잘 알면서. 스톤케이트 장군이 대신 했어."
"모두 왔네요. 미안해요, 늦어서. 갑자기 환자가 밀려든 데다가 저녁 공기가 너무 좋아서 걸어오고 싶었어요." 라나 퀸이 해변과 연결된 계단을 올라오면서 말했다.
바비는 포옹으로 그녀에게 키스했다. "위자드, 퀸은 어디 갔어? 오늘 집에 오는 줄 알았는데?"
퀸은 얼굴을 찡그렸다. "제6분대는 곁길로 샜대. 그다지 새로운 일도 아니잖아? 아마 몇 주 동안은 못 들어 올 거야. 전화해 준 것만도 감지 덕지지."
웨스가 급히 비틀거리며 일어나자 곁에 있던 작은 플라스틱 의자가 엎어졌다.
"미안해." 웨스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베로니카, 미안해. 난… 가야겠어… 깜빡해서… 미안해."
그는 집안으로 사라지다가 시드를 넘어뜨릴 뻔했다. 럭키는 바비를 쳐다보며 말없이 웨스가 운전을 해도 되는지 물었다.
바비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수영복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손을 펴 보았다. 바비의 손에는 웨스의 차 열쇠가 있었다. 바비는 손가락으로 걸어가는 시늉을 했다. 웨스는 걸어서 기지로 돌아갈 것이다.
베란다 한쪽에서 시드와 라나 퀸이 흩어진 비스킷을 치우고 있었다.
"그래, 새로운 여자 친구는 당신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알아?"
럭키가 돌아보자 피제이가 자신을 보고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말이 진담 반 농담 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여인은 아직도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뒤에서 그녀에게 달려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그가 말했다. "알아. 그런데도 좋대."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시드는 나를 좋아해. 피제이가 생각하는 식은 아니지만.
선임 참모 하버드 벡커의 아내는 멋지고 촉촉한 눈으로 시들 바라보았다. "오던른, 당신이 시드 제임슨 같은 여자와 사귈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놀라운데요? 그동안 내가 당신을 너무 과소 평가했군요. 시드는 아주 좋은 작가예요. 1년 전쯤에 신문에 1주일에 한 번 칼럼을 썼는데 난 놓치지 않고 읽었어요. 시드는 머리가 아주 좋아요. 생각도 깊고." 그녀는 럭키에게 환하게 웃어 보이고 볼에 입을 맞추었다.
럭키도 웃음으로 답해 주었다.
피제이는 만삭의 미아 쪽으로 장난스럽게 눈길을 돌렸다. 미아는 비스킷 줍는 걸 도와야 할지 고민하며 서 있었다.
럭키는 바비에게 바짝 다가갔다. "웨스가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어?"
바비는 어깨를 으쓱했다. "올해 운이 여러 모로 안 좋았어."
"괜찮겠어?"
"걷는 게 그놈한테도 좋을 거야. 그놈의 할리(고급 오토바이 상표)는 내 트럭에 싣고 가지 뭐."
"내가 도울 일은?" 럭키가 물었다.
"없어."
"있으면 말해."
"알았어."
럭키는 빗자루를 들고 옆으로 지나가는 베로니카의 팔을 잡았다. "잠깐 나 좀 봐요."
베로니카는 빗자루를 보며 망설였다. "글세…."
그는 빗자루를 빼앗아 피제이에게 던졌다. 그녀는 보란 듯이 한 손으로 받았다.
"무슨 얘기예요?" 베로니카가 활기차게 말했다.
"뉴욕으로 가 있어요." 그가 말했다.
"내일 아침 10시 비행기 어때요?" 그녀가 말했다.
그는 안도감이 온몸에 관통하는 것을 느끼며 그녀에게 입맞추었다. "고마워요."
"루시 말을 안 들을 수가 없었어요. 그 괴물은 정말 끔찍해요. 하지만 루시나 피제이는 나처럼 피신할 계획이 없는 것 같은데…."
"루시는 샌 펠립 경찰이고, 피제이는 핀콤이에요."
"둘 다 혼자서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녀는 그이 눈을 들여다보았다. 얼굴 가득 근심을 담은 채.
그는 농담처럼 말하려 애썼다. "피제이한테 피신하라고 말하면 망신만 당할 거예요. 그리고 루시는…." 그는 베란다에서 라나 퀸과 시드와 이야기하고 있는 루시를 흘끗 보았다.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경찰서에서 지내라고 설득할 생각이에요."
베로니카가 그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시드한테도 조심하라고 해요."
"아…." 럭키가 말했다. "그건 걱정 말아요. 그녀는 음… 내 집으로 들어와 살 거니까."
정말 묘한 일이었다. 이것이 강간범을 잡기 위해 고안한 <여자 친구 게임>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하지만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그 말을 입밖에 내자 너무나 현실적으로 들렸다. 한편으로는 당황스러웠고,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웠으며,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그리고 엄청난 기대감에 부풀었다.
시드가 나의 집에서 살 거여. 그녀는 오늘밤 나와 함께 집으로 갈 거야. 물론 손님방에서 잘 게 분명하지만 이제 그녀의 안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마도 오늘밤엔 조금이나마 눈을 붙일 수 있을 거야.
아니, 어쩌면 전혀 잘 수 없을지도 몰라. 그녀가 바로 옆방에서 잔다는 생각 때문에, 그 엄청난 키스에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베로니카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리고는 두 팔로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오, 루크, 정말 잘됐어요!" 그녀는 뒤로 물러나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난 당신이 평생 헤더와 또 다른 헤더 사이에서 방황할 줄 알았거든."그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모두 들어 봐, 럭키가 드디어 이름 값을 했어! 시드가 그와 함께 살 거래."
순식간에 맥주 캔이 죽 돌아갔고, 프리스코와 미아와 타샤에게는 음료수가 전달되었다. 베로니카가 건배를 제안했다. 럭키는 시드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는 먼 거리에서도 시드가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프리스코의 시선도 느껴졌다. 그의 수영 파트너이자 가장 친한 친구는 미소 짓고 있었지만 눈에는 질문이 가득했다. <와, 너무 빨리 진행된 거 아냐? 그리고 왜 미리 내게 귀띔해 주지 않았어?>
프리스코에게 내일 자세히 이야기해 줘야지. 사실대로. 하지만 지금 당장은…. 시드가 부끄러워서 죽어 버리기 전에 그녀를 구해 줘야 했다.
그는 누군가 손에 쥐어준 맥주를 내려놓고 시드를 피제이와 미아, 라나, 베로니카에게서 빼냈다. "폭탄을 떨어뜨려 놓고 그냥 가긴 싫지만…."
"두 사람 어떻게 만났어?" 바비가 물었다. 나쁜 자식. 그는 이것이 그저 연극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저 차분한 표정 뒤에서 실컷 웃고 있겠지.
"말 좀 해봐!" 피제이가 거들었다. "너무 좋은 소식이야. 조금이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여기서 못 빠져나갈 줄 알아. 두 사람 어디서 만났어? 사귄 지 얼마나 됐지?" 그녀는 럭키에게 다가가 코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그의 눈을 강하게 응시했다. "당신 정체가 뭐야? 여자한테 묶이면 인생이 끝나는 줄 아는 우리 친구 럭키는 어디 있는 거지?"
"재미있군." 럭키가 말하며 시드를 끌고 문으로 갔다.
"아, 왜 이래." 피제이가 말했다. "그녀가 어떻게 했기에 한집에서 살기로 했는지 그것만이라도 얘기해 줘. 이건, 정말 엄청난 발전이야. 성숙한 결단이라고." 그녀는 시드에게 미소 지었다. "정말 대견해요. 잘했어요! 저 사람은 강하게 밀어붙여야 해요."
"그녀에게 동거하자고 말한 건 바로 나야." 럭키는 거짓말을 했다. "나도 결국 사랑에 빠진 거야."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달리 어떻게 말하겠어?"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구누구죠?" 시드는 트럭에 타면서 물었다.
"우리가 연극하고 있다는 거 말이오? 바비와 루시 맥코이."루크가 말했다."루시한테는 말할 수밖에 없었소. 특히 그녀에겐 우리 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샅샅이 보고해야 하니까. 그녀가 전화를 해서 텔레비전 인터뷰 때문에 화를 냈소. 내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고 하더군." 그는 차를 출발 시켰다."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작전이 성공하길 바란다고 했소. 우리가 당신을 경찰보다 더 안전하게 지켜 주리라는 걸 아니까."그는 어두컴컴한 차 속에서 그녀를 흘끗 보았다."내일 프리스코에게 말할 생각이오. 미아에겐 말하지 말라고 해야겠지. 바비 말이 맞소. 적게 알수록 좋지."
시드는 그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앉아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 한 키스를, 그리고 자신이 그에게 한 키스를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면서. 하지만 파티에서 빠져 나올 때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말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도 결국 사랑에 빠진 거야>
흥, 그는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을 거야. 그는 아름답고 지적이고 특별하면서도 친한 친구들과 그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한 안전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는 루시와 베로니카와 피제이와 미아와 반쯤 사랑에 빠진 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너무 깊이 빠질 염려가 없으니까 말야. 그리고 자기 도취적이고 얼빠진 헤더 같은 여인과 의미 없는 성 관계를 맺을 수도 있으니까. 온 마음을 걸지 않고도 즐길 수 있잖아.
시드는 한순간도 루크가 자신에게 마음을 빼앗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시 맥코이나 조금 전에 만나, 엄청나게 아름다운 흑인 여성 피제이 벡커는 그렇지 않았다.
"피제이 벡커와는 얼마나 사귀었어요?"그녀가 물었다.
그는 멍하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못 들은 척 시침떼지 말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걱정 말아요.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것 같으니까. 하지만 내 눈에는 당신의 모든 행동이 훤히 보여요. 베로니카나 라나를 대할 때와 태도가 다르더군요."
그는 당황했고 조금 완강했다. "그녀와 아무 일도 없었소."
"아뇨." 그녀가 말했다.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털어놓았다. "그건 선사 시대 때 일이오. 그녀가 선임 참모하고 사귀기 훨씬 전이오."
"내가 말해 볼까요, 선사 시대 때, 당신은 정말 제정신이 아닌 듯한 행동을 했어요. 이를테면…그녀를 덮쳤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한쪽 입술을 올리며 처량한 미소를 지었다."언제나 틀리지 않는 게 지겹지도 않소?"
"언제나 맞는 건 아니에요." 그녀가 반박했다. "당신이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라 가능한 거죠. 다음에 매력적인 여자를 만났을 때는 유혹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 보는 게 어때요? 그럼 모두들 놀랄 텐데."
"그건…." 루크가 말했다. "우리가 동거하지 않게 되고, 내가 당신과 결혼하지 않게 된 후를 말하는 거요?"
그녀는 웃어야 했다. 마치 재미있다는 듯이.
"베로니카가 폭로한 것에 대해서는 내가 대신 사과하겠소." 그가 말했다. "진짜 그럴 줄 몰랐소."
시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요. 조금 무안하긴 했지만 당신 친구들이 내가 당신에게 무슨 마법이라도 건 것처럼 쳐다보잖아요."
"절대 그렇지 않았소." 루크가 말했다.
아니, 분명히 그랬어. 하지만 시드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 키스를 보고 나서." 그가 웃으며 말했다. "아마 내가 왜 당신하고 살고 싶어 하는지 알게 되었을 거요."
그 키스.
가슴 두근거리는 그 순간 시드는 루크 오던른을 두 팔로 안고 입술을 그의 입술에 잡힌 채 귀엽고 작은 해변가 집 층계 앞에 서 있었다. 그 순간 그 키스는 전혀 연기가 아니라고 그녀는 착각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입술을 점령하기 바로 전에, 그의 눈 깊숙한 곳에서 뭔가 따뜻하고 특별한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래, 인정하자. 나는 그에게 반했어.
하지만 그는 아냐. 창문을 통해서 사람들이 엿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한 행위였을 뿐이야. 그는 그들이 내다보고 있는 걸 알았어. 그래서 나에게 키스한 거야.
그들은 꽤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쪽으로 달라붙어요. 내 옆으로. 범인이 벌써 우리를 미행하기 시작했다면…." 그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시드는 그를 보았다. "달라붙으라고요?" 그녀는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려고 애썼다. 만일 내가 그의 옆에 붙어 앉으면, 그리고 그가 나의 어깨에 팔을 두르면 나는 숨쉬는 법을 잊어버리고 말 거야. 당장 그를 웃게 만들어야 해. "미안해요, 난 생전 어딘가 달라붙어 본 적이 없어요."
루크가 웃었다. "그게 바로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점이오. 시드, 당신은 언제 어디서든지 싸움 거리를 찾아내거든."
"아니에요."
그는 다시 웃으며 바로 옆을 툭툭 쳤다. "이리 와요. 그 날씬한 엉덩이를 이리로 옮겨요."
"날씬한?" 그녀는 살짝 옆으로 미끄러지면서 말했다. "미안하지만 내 엉덩이를 본 적 있어요? 내 엉덩이는 보통 사람의 두 배예요."
"뭐… 뭐요?"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허벅지가 자신의 허벅지에 달라붙게 끌어 앉히고 팔을 그녀의 어깨에 올려 놓았다."당신 엉덩이는 멋지오. 아주 고전적인 엉덩이요."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군요. 요즘 고전적이란 말은 곧 한물 갔다는 뜻이에요. 고전 콜라, 고정 여행…. 모두 구닥다리를 뜻한단 말이에요."
"아니오, 오래됐다는 뜻이 아니라 독보적이란 뜻이오." 그가 반박했다. "그건 그렇고 당신 몇 살이오?"
"운전하는 사람 옆에 이렇게 붙어 있으면 안 된다는 건 알만한 나이죠. 안전 벨트를 매야 한다는 것도 알 만한 나이고요." 그녀는 투덜거렸다. "당신보다 많아요."
"그럴 리가."
"맞아요." 빨간 불에서 차가 멈추자 그녀는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지 않길 기도했다. "당신보다 한 살 많아요."
만일 그가 나를 내려다보면 그이 입술이, 그 놀랍고 훌륭한 입술이 바로 코앞에 놓일 거야. 그의 입술이 코앞에 놓이게 되면 나는 다시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 생각도 못할 거야."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그가 내려다보자 그녀가 물었다. 특별히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입술을 말하는 데 사용하면 키스하고 싶은 유혹을 떨쳐버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 샌 펠립 해변가에 해산물 요리를 아주 잘하는 집이 있소." 그가 말했다. "이 시간에는 빈자리가 없소. 거기 가서 대합을 먹읍시다. 그리고 이후에는 술집을 전전하는 거요."
"난 술집을 전전해 본 적이 없어요." 그녀는 말했다. 순전히 대화 사이에 간격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하지만 꽤 낭만적으로 들리는데요."
"아니, 아주 우울해질 수도 있소."루크는 파란 불로 바뀌자 다시 길에 집중했다. 하느님 고맙습니다."전에 알파 분대 총각들하고 자주 술집을 전전했소. 주로 바비와 웨스와 함께. 때로 그들의 친구 퀸이 끼기도 했지만. 위자드 말이오. 그는 유부남이오. 당신도 알겠지만 라나가 그의 아내요. 우리는 그를 마땅찮게 여겼소. 우리가 술집을 전전하는 이유는 여대생들을 꼬시기 위한 거니까. 하지만 난 그나 라나를 잘 몰랐소.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닌 것 같았지."
"세상에…." 시드가 말했다. "그녀도 알아요?"
루크는 머리를 저었다. "아니. 퀸은 두 사람 사이에 합의를 했다고 말했소. 그는 그녀에게 말하지 않고, 그녀도 알려 하지 않기로 했다고. 웨스는 그에게 화를 냈소. 한 번은 그가 퀸의 코를 부러뜨리기까지 했소."
"웨스는 바비의 수영 파트너죠, 그렇죠?" 시드는 오늘밤 처음 만난 그 실에 대해 생각했다. 루크의 말을 듣고 상상한 것보다 훨씬 컸다. 그의 무언가가 낯설지 않게 느껴져서 신경에 거슬렸다. 그가 밖으로 뛰쳐나가다가 나에게 부딪쳤을 때….
"밥과 웨스는 가장 모범적인 파트너요." 루크가 말했다. 그가 식당 주차장으로 들어가려 우회전하며 브레이크를 밟자 허벅지 근육이 움찔했다. "물론 개인적으로도 훌륭하지만 한데 뭉치면 슈퍼맨 두 사람을 뭉친 것 같소. 그들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지. 서로 상대방의 앞으로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소. 정말 효율적이오."
"그럼 바비는 웨스를 아주 잘 알겠네요." 시드가 말했다.
"아마 웨스가 스스로에 대해 아는 것보다 더 잘 알 거요."
"바비는 웨스가 절대…." 그녀는 말을 끊었다. 자신의 말이 얼마나 끔찍한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가 단지 어깨가 넓고 범인과 똑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루크는 트럭을 세우고 그녀를 뒤로 약간 밀어내어 그녀의 눈을 꿰뚫을 듯이 들여다보았다. "무슨 말을 하다 만 거요?"
"묘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와 부딪쳤을 때…. 마치 전에 한 번 겪은 일처럼 느껴졌거든요."
"웨스는 범인이 아니오." 루크는 확고했다.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확신해요? 백퍼센트 확신할 수 있어요?"
"그렇소. 난 그를 알고 있소."
"뭔가 걸리는 게 있어요…." 그녀는 알아냈다. "루크, 그에게서 층계에 있던 남자와 똑같은 냄새가 났어요."
"냄새?"
"네, 퀴퀴한 담배 냄새 같은 거요. 웨스는 담배를 피우죠?"
"아니. 작년에 바비가 끊게 만들었소. 전에는 피웠지만…."
"미안해요. 그는 다시 피우고 있어요. 사람들 앞에서는 안 피울지 몰라도 분명히 담배를 피워요. 희미했지만 분명히 냄새가 났어요. 범인하고 똑같은 냄새가 났단 말이에요."
루크는 머리를 저었다. "웨스는 범인이 아니오." 그가 다시 말했다. "그럴 리가 없소. 난 받아들일 수 없소. 아니, 받아들이지 않겠소."
"당신이 틀렸다면요?" 그녀가 물었다. "나중에 범인이 울 코앞에서 활개를 치고 있었다는 걸 알면 어떻게 할 거예요?"
"난 틀리지 않았소." 루크가 강하게 말했다. "난 그를 잘 아니까. 오늘 당신 눈에 그가 나쁜 인상을 남겼을지 몰라도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오."
시드는 지금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게 현명한 선택이라는 것을 알았다.
9
"여기, 이런 건 어때요?" 루크가 문을 열어 조용하고 시원한 집안으로 들여보내자 시드가 말했다. "적의 근거지에 당신이 혼자 있는데 총격전이 시작돼요. 당신 팀은 뒤로 후퇴하고요. 당신은 숫자로서 열세고, 무기도 모자라요. 그런 상태에서 싸울 거예요, 아니면 항복할 거예요?"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자 그가 문을 잠갔다. 자물쇠의 찰칵 소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윙윙거리며 울리는 것 같았다.
그들은 여기 이렇게 서 있었다.
함께. 단둘이서. 그리고 오늘밤을 이대로 보낼 것이다.
시드의 입술은 마지막으로 그가 키스한 여운 때문에 아직도 따뜻했다. 쉐이키 스캔스라는 술집에서였다. 그는 마우스 홀이라는 술집에서도 그녀에게 키스했다. 진저스에서도, 샥스 런 그릴에서도. 그들은 줄곧 키스를 하며 샌 펠립 해변가를 휩쓸고 지나왔다.
시드는 키스를 짧게 하려고, 그의 품에서 녹아버리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매번 실패했다.
만일 그들이 진짜 동거하는 사이라면 그렇게 정열적인 키스를 수도 없이 하고 문을 잠그고 5분이 지난 뒤에도 이렇게 두 사람 모두 옷을 입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시드는 머리 속으로 그 사실을 인식하며 옷을 완전히 걸친 채 쉴새없이 군사 직전 시나리오를 늘어놓았다. 실 작전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묻는 건 금지되어 있지만 가설을 내놓는 건 괜찮았다. 그녀는 기회만 있으면 그렇게 했다.
"그 근거지 안에는 뭐가 있소?" 그가 물었다. 그는 열쇠를 현관 옆 탁자에 던지며 물었다. "구출 작전이오, 아니면 정보 수집 작전이오?"
"구출 작전이에요." 그녀는 순간적으로 결정했다. "안에는 인질이 있어요. 아이들도요."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우스꽝스럽게 지으며 에어컨을 켰다. 이제 너무 적막하고 후텁지근한 방이 에어컨 때문에 시원해질 거야. 그러면 숨막힌 느낌도 덜할 거야. 관능적인… 느낌도 덜해질 테고.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어 보지 그러오?" 그가 말했다.
"그는 부엌으로 갔고, 그녀도 따라갔다. "그저 한 번 생각해 보자는 것뿐인데요, 뭐."
"알았소." 냉장고를 연 그는 엉망으로 어지럽혀진 안을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우리가 인질로 잡힌 아이들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분명 절대 실패하지 말라는 명령도 함께 받을 거요." 그는 손을 뻗어 병을 하나 꺼냈다.. 아이스 티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한 잔 하겠소?"
시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틀에 기대섰다. "고마워요."
그는 찬장에서 커다란 잔을 두 개 꺼내 얼음을 채웠다.
"그럼…." 그녀는 적막을 깨뜨리려는 의도에서 물었다. "그런 상황에선 어떻게 하죠?"
그는 뒤로 돌아 그녀를 보았다. "실패하지 않지."
그녀는 웃음이 터졌다. "좀 더 자세히 말해 줄래요?"
"난 지금 혼자 안에 있는 거요?" 그는 잔 속의 얼음 위로 아이스 티를 따르면서 말했다. "하지만 밖에 있는 동료들과 무선으로 연결되어 있겠지. 그렇다면 나는 탐지 센서를 사용해서 적의 약점을 찾아내야 하오. 그리고 밖에 있는 팀에게 언제, 어디서 공격할지 알려줘야지. 그 뒤 나는 인질들을 찾아 보호하고, 팀이 우리를 밖으로 빼내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오." 그가 잔을 넘겨주었다. "레몬이나 설탕?"
"그냥 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고마워요."
이런, 정말 묘했다. 지금 부엌 싱크대에 몸을 기대고 서 있는 남자는 오늘 저녁 내내 그녀의 입 속을 혀로 탐사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차가운 아이스 티를 한 잔씩 들고 군사 전략을 주제로 아무렇지 않게 냉정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내가 다시 키스하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연극이 아닌 진짜로.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들은 첫 키스를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이 부엌 바로 뒤에 있는 베란다에서. 나는 완전히 낯선 타인을 상대로 잘못된 선택을 했어. 그녀와 진실한 친구가 되기 위해 시간을 두고 노력하는 대신 강력한 성적 매력을 앞세워 그녀를 갖고 놀려고 했으니. 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와 진짜 친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영영 망가뜨릴 뻔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어.
그런데 이젠 시드 쪽에서 내가 키스해 주길 바라고 있어.
"그런데…." 그녀는 침묵을 깨려고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왜 실에 들어가게 됐어요?"
루크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잔에 레몬을 집어넣고, 설탕을 조금 뿌린 뒤 개수대에서 수저를 헹구고 식기 세척기에 집어넣었다. 그는 잔을 들고 거실로 나오며 시드에게 머리로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를 따라 거실로 나가자 벽에는 액자가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지난번 왔을 때도 본 것들이었다. 루크의 어린 시절 사진. 햇빛에 탈색된 그의 머리칼은 지금보다 더 밝은 색이었다. 소년 루크가 까만 머리에 통통한 아기를 안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깡마른 금발 여인과 서 있는 사진도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분명해 보였다. 검은 머리칼과 검은 피부를 한 남자와 어린 루크가 찍은 사진도 있었다.
그는 그 남자가 들어 있는 사진들을 가리켰다. "여기…." 그가 말했다. "이 사람이 이시드로 라모스요. 이 분 때문에 실에 들어갔소."
시드는 그 사진을 좀 더 자세히 들어다보았다. 한 팔로 어린 루크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그 남자의 눈에 따뜻한 빛이 어려 있었다. 미소 짓는 소년의 얼굴에도 그에 상응하는 존경의 빛이 떠돌았다. "누구예요?" 그녀가 물었다.
"돌아가셨소." 그는 아이스 티를 한 모금 마시고 소파에 앉더니 발을 뻗어 커피 탁자에 올려놓았다.
시드는 그가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하려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지금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껄끄럽게 만드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여기 있기 때문일까?
"이시드로는 내가 열여섯 살 때 돌아가셨소." 그가 말했다. "아버지요."
그의…? 시드는 사진을 다시 한 번 보았다. 저렇게 머리칼과 피부가 검은 사람이 어떻게 루크처럼 금발을 한 아들을 얻었을까?
"친아버지는 아니오." 그가 덧붙였다. "하지만 그분은 션 오던른이 팽개쳐 버린 아버지 역할을 해주신 진짜 나의 아버지요."
시드는 소파 끝에 앉았다. "그분 때문에 실이 되었다고요?"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짧게 하길 원하오, 길게 하길 원하오?"
"길게요." 그녀는 샌들을 벗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아예 처음부터 시작해요. 모두 듣고 싶어요. 태어났을 때부터 하는 게 어때요? 당신 태어났을 때 몇 킬로그램이나 나갔죠?"
이렇게 계속 이야기하는 동안은 내가 어디에서 자야 할 지에 대한 어색한 주제를 끄집어낼 불상사는 생기지 않을 거야. 그녀는 한숨도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루크가 옆방 침대에 누워 있다는 걸 알면서 어떻게 편안히 잠들 수 있겠는가.
"4.2킬로그램. 어머니는 키가 155센티미터였소.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난 거의 어머니만한 크기로 태어났소."그는 잠깐 말을 멈추고 시선을 들어 사진을 보았다."어머니는 몸이 매우 약하셨소." 그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저 사진으로는 잘 모를 거요. 저 당시는 아버지와 너무 행복하셨으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어머니는 완전히 기운을 잃으셨소. 어머니는 내 여동생 엘렌을 위해서라도 기력을 회복하려 애쓰셨지만 처음부터 결과가 뻔한 싸움이었소. 오해 마시오."그가 덧붙였다."난 어머니를 사랑했소. 그저… 어머니는 그리 강한 분이 아니셨소. 늘 허약하셨소."
시드는 차를 홀짝이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머니에게 1966년은 악몽의 해였소." 그가 말했다. "션 오던른과 결혼하기로 한 것이나 떳떳하지 못한 아이를 낳기로 한 것을 생각하면 말이오. 어머니는 샌프란시스코에 살았지만 히피처럼 여성 해방을 부르짖거나 하지 않았소. 적어도 66년엔 말이오. 그래서 임신하자 어쩔 수없이 결혼했고, 내가 태어났소. 그리고…." 그는 고개를 살짝 돌려 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았다. "정말 다 얘기하길 바라오?"
"아주 재미있는데요." 그녀가 말했다. "어린 시절 얘기만 잘 들어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강 파악이 되거든요."
"그렇소? 그렇다면 당신은 어디서 자랐소?" 그가 물었다.
"뉴욕의 뉴 로첼에서요. 아버지는 의사고, 어머니는 간호사로 일하다가 우리 때문에 그만두셨어요. 형제는 네 명이고, 나는 막내예요. 오빠 언니들은 진짜 부자에 성공한 인생들이죠. 완벽한 배우자에 완벽한 의상, 완벽한 선탠까지. 부모님에게 제때 손자들도 안겨 주고요."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나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사람들이에요. 친척들은 내 얘기를 할 때는 뒤에서 수군대죠. 난 집집마다 하나씩 있게 마련인 말썽꾸러기예요. 부모님한테 왜 나한테 남자 이름을 붙였냐고 화낼 수도 없는 처지예요."
루크는 웃었다. 그녀는 그의 웃는 모습이 정말 좋았다. 그의 눈가에 사랑스럽게 주름이 퍼져 가는 모습이 좋았다. 그리고 그의 입은….
그녀는 그의 입을 빤히 보지 않기 위해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사실…." 그녀가 고백했다. "우리 가족은 아주 착해요. 조금 답답하긴 하지만. 모두들 나를 관대하게 봐주고 잘 이해해 줘요. 엄마는 나한테 해마다 레이스 달린 드레스를 사다 주죠. 크리스마스 때마다 어김없어요. <이런, 고마워, 엄마. 분홍색이네? 안 사 줘도 되는데. 아니, 정말 이러지마> 하지만 다음해 똑같은 일이 반복돼요." 시드는 루크를 살짝 보았다. 그는 아직도 웃고 있었다.
"이제, 당신 얘기를 마저 해요. 당신 친아버지는 멍청이였군요.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짐작이 가요. 아버지는 당신이 두 살도 되기 전에 집을 나갔죠?"
"그랬다면 차라리 좋았을 거요." 루크가 말했다. "션은 내가 여덟 살이 될 때까지 집에 있었소. 어머니의 피를 쪽쪽 빨아먹으면서. 하지만 내가 여덟 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작은할아버지한테 물려받은 재산을 가지고 티벳으로 달아났소. 어머니는 이혼 소송을 냈고, 결국 이겼소. 어머니는 샌디에이고에 집을 한 채 사고 난민 보호 시설에서 정식 직원으로 일하기 시작했소. 중앙 아메리카 사람들이 피난 오면 보호해 주는 곳이지. 거기서 이시드로를 만났소. 우리 집 차고 위에 아파트가 있었소. 집 뒤에 말이오. 거기서 여섯 남자가 잠깐 살았는데 이시드로는 그 가운데 한 사람이오. 내 기억에 난 그 사람들을 조금 무서워했소. 무슨 충격을 받은 듯 멍한 얼굴로 유령처럼 돌아다녔거든. 지금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소. 자신들은 아슬아슬하게 탈출했지만 나머지 가족들은 모두 죽었으니까. 몇 사람은 가족이 죽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소. 이시드로가 중에 가족의 얘기를 해주었소. 암시장으로 가솔린을 사러 나갔다가 집으로 와보니 마을 전체가 쑥밭이 되어 있었고, 사람들이 모두 무참히 학살되었다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그는 다행히 아내와 아이들의 시체는 찾을 수 있었다고 하더군. 다른 사람들은 시체를 확인하지 못해서 그곳을 떠나지 못했소. 언젠가는 가족이 돌아올 거라는, 아이들이 아직 살아 있을 거라는 기대를 벌릴 수 없는 거지."
그의 눈은 먼 곳을 바라보듯 초점이 흐렸다. 그가 문득 시드를 돌아보고 미소 지었다. "이시드로 얘기를 안 한 지 무척 오래되었소. 엘렌은 아버지 얘길 듣는 걸 좋아하지만 어두운 부분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소. 그분은 우리 어머니를 만나기 전에도 중앙 아메리카에 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소. 아버지는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 어머니와 결혼했소. 고국으로 송환되면 분명히 처형당했을 테니까. 어머니는 우리 둘을, 나와 이시드로를 식탁에 앉혀놓고 그와 결혼하겠다고 말했소." 루크는 기억을 떠올리고 웃었다. "그는 결사 반대였지. 어머니가 젊었을 때 억지로 결혼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오. 그는 어머니에게 또 그런 실수를 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고 말했소. 하지만 어머니는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결혼하는 것은 절대 실수가 아니라고 말했소. 어머니는 그때 이미 그를 사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오. 어머니는 그를 설득해서 결혼했고, 그는 차고 위에 있는 아파트에서 나와 우리 집으로 들어왔소." 어머니는 진짜 영리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적극적으로 행동해서 쟁취한 거야. 어머니는 일단 이시드로를 집안으로 들어오게 하면 결혼이 진짜가 되는 건 시간 문제라는 걸 알고 있었어. 그리고 모든 것이 예상대로 되었지.
그는 새삼스럽게 삶이 돌고 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스웠다. 그는 지금 어머니가 한 게임을 똑같이 하고 있었다. 럭키는 소파 끝에 최대한 떨어져 앉은 시드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겉으로는 무언가 큰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속으로는 개인적인 욕구를 숨기고 있었다.
그래, 앞으로도 계속 숨길 생각이야. 젠장, 꼭 그래야만 한다면 말야. 그는 낮이나 밤이나 시드와 함께 있어야 하는 <불편>을 기꺼이 감수할 생각이었다.
그래, 맞아. 나는 마치 어머니가 이시드로를 원한 것처럼 시드와 오랜 시간 함께 있음으로 생기는 압박이 피할 수 없는, 멈출 수 없는 성적 폭발로 연결되기를 바라고 있어. 꼭 오늘밤이 아니더라도 내일, 아니면 모래라도 시드가 나의 침실 문을 박차고 들어와 더 이상 못 참겠다고 선언하고 당장 나를 안고 싶다고 소리치길 원해.
그는 자신의 생각이 너무 어이없다는 생각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뭐가 그래 재미있어요?" 그녀가 물었다.
그는 대답할 뻔했다. 하지만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결혼한 지 딱 1년 만에 엘렌이 태어났소. 두 분의 결혼은 너무나 빨리 현실이 되어 버렸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벽 쪽으로 머리를 돌려 그의 어머니 사진을 보았다.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죠.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셨으니… 어머니가 그분을 정말 사랑하셨다면… 그분도 분명히 피할 수 없었을 거예요."
"아버지는 내게 가족 이야기를 자주 해주셨소." 럭키가 말했다. "어머니에게는 그다지 많이 하지 않으셨지만. 난 자주 물어 보며 대답해 달라고 졸랐소.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아버지의 고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끔찍한 인권 유린 상황에 대한 목격담을 들려주는 모임에 자주 갔소. 아버지가 본 것은… 시드, 아버지가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참상은…." 그는 머리를 저었다. "아버지는 내게 미국인으로서 누리고 있는 자유를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말씀하셨소. 내가 매일 자유의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시려고 집 앞에 성조기를 게양하셨소. 아버지는 마음 편히 잠자리에 들 수 있어 좋다고 하셨소.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해도 한밤중에 누군가 집안으로 들어와 우리를 침대에서 끌어내 길거리에서 머리에 총알을 박지 않을 거라면서 말이오. 그분 덕분에 대부분의 미국인이 당연하게 여기는 자유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소. 이시드로는 내게 많은 걸 가르쳐 주셨소. 하지만 자유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야말로 지금까지도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가르침이오. 아버지는 늘 두려움 속에서 사셨소. 가족이 모두 살해당했으니까…."
시드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시민권을 얻었을 때 나는 열세 살이었소." 그는 그녀의 눈을 마주보며 조금 긴장을 늦추고 말했다. "절대 잊지 못할 날이오. 아버지는 진짜 미국인이 된 걸 정말 자랑스러워하셨소. 게다가…." 그는 웃었다. "그해 11월 선거일! 아버지는 엘렌과 나를 투표소로 데리고 가서 투표하는 걸 보여 주셨소. 그리고 우리 둘에게, 그때 엘렌은 말도 잘 못했소. 절대로 투표권을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소."
"그래서 당신 양아버지 때문에 실이 되었군요."
"그냥 아버지요." 그가 부드럽게 바로잡았다. "그분에겐 양아버지 같은 느낌이 전혀 없었소. 난 아버지 가르침대로 살고 있소." 럭키는 어깨를 으쓱했다.
냉소적인 신문 기자가 과연 이시드로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녀는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면서 자신도 공감한다고 변명을 늘어놓을 거야.
"나도 미국에 문제가 많다는 건 알고 있소. 하지만 좋은 점도 많소. 난 내 조국을 믿소. 그래서 뭔가 보답을 하기 위해 해군에, 특히 실 팀에 입대한 거요. 자유의 나라이자 용감한 사람들의 조국이라는 명예를 지키는 일을 하고 싶었소. 그리고 예상보다 훨씬 오래 복무하고 있소. 그만큼 보상이 따르기 때문이오."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실망감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당신에게는 감상적으로 들리겠지."
"아…."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아니에요! 당신이 한 말 때문에 웃는 게 아니에요. 세상에, 당신 말을 듣고 무척 감동했어요. 절대로 당신을 비웃은 게 아니에요."
"감동했다고?" 럭키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 애썼다. "내 말에 감동을? 진짜요?" 그는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칭찬을 더 받고 싶어 안달하다니…. 다행히 그녀는 나의 의도를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아.
"내가 웃은 건…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한눈에 알아봤다고 생각했거든요. 난 당신이 남성 호르몬을 주체하지 못하는 타입인 줄 알았어요. 이것저것 폭파시키는 일이 무작정 좋아서 실에 들어간 부류라고 말이에요."
"아…." 럭키는 그녀가 자신의 깊은 내면을 관통해 영혼까지 들여다볼 것처럼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자 분위기를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끌어당겨 키스하는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을 분위기를 만들어야 했다. "내가 보상을 얻었다고 말했을 때 뭐하고 생각했소? 바로 이것저것 폭파시키는 즐거움이오."
시드는 웃음을 터뜨렸다. "또…." 그녀가 말했다. "여동생 엘렌 얘기 좀 해봐요. 곧 결혼하죠?"
"1주일쯤 뒤에." 그가 말했다. "달력에 표시해 두는 게 좋을 거요. 다들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고 믿고 있는데 내 여동생 결혼식에 당신이 빠지면 정말 이상하잖소."
"아, 아니에요."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죠? 진짜 나를 여동생 결혼식에 끌고 가고 싶은 건 아니겠죠?"
"당신이 참석하지 않는 이유를 둘러댈 수도 있겠지." 럭키가 말했다. "당신이 가고 싶지 않다면 말이오."
"가고 싶어요."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그 날이 당신한테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 잘 알아요.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바비가 당신이 그… 작전인지 뭔지 당신이 정말 가고 싶어 하던 작전에서도 빠졌다고 얘기해 주었거든요."
"내가 안 가면…." 그가 말했다. "누가 신부를 인도해 주겠소? 시드, 나와 함께 갑시다. 그리고 참석할 때 뭔가 정장을…."
"이런…." 그녀는 조롱기를 담은 눈으로 그를 보았다. "나는 백치가 아니에요. 내가 설마 결혼식에도 이런 옷을 입고 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청바지 깨끗이 빨아서?"
"그렇소." 그가 인정했다. "청바지 아니며 면바지. 당신은 그 두 가지밖에는 입지 않잖소?"
"이런…." 그녀가 말했다. "백치로도 모자라서 이젠 단조롭기까지 해요?"
그는 그녀의 웃음을 보고 그녀가 농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해명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만 해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 동생 얘기나 해줘요."
새벽 1시가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럭키는 피곤하지 않았다. 시드도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동생 얘기를 이어갔다. 그녀가 원한다면 밤새도록이라도 이야기 할 생각이었다.
그는 그녀가 대화 이상을 원하길 바랐다. 그는 그녀를 안고 침실로 데려가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아늑한 친밀감을 파괴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좋아해. 이젠 확실히 알 것 같아. 그는 그녀를 만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말로 그녀를 어루만지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블레이드(칼날)." 리오 로제티가 말했다. "아니면 팬더(흑표범)?"
"호크(매)는 어때?" 토머스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래, 호크도 좋아."
리오는 요즘 자신에게 붙어 다니는 별명에 불만이 많았다.
"실을 좀 더 친절하고 친근한 사람들로 인식시킬 필요가 있어. 그러니까 친절하고 친근한 별명을 생각해 봐." 마이클 리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버니(토끼)는 어때?"
리오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떠올렸다.
토머스가 끼어들었다. "좋은데."그가 말했다. "버니."
"우와." 리오가 말했다. "우와, 우와, 우와…."
"나도 좋은데." 럭키가 말했다.
그들은 사무실에서 루시가 경찰 컴퓨터에서 수집한 목록을 컴퓨터로 전송해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4년 전 특정 기간 동안 이 해군기지에서 복무한 수많은 사람 가운데 서른 명 정도가 전과 기록이 있었다. 스물세 명이 실제로 형을 살았고, 다섯 명은 아직 감옥에 있었다.
경찰 컴퓨터는 그들의 이름과 가명, 최근 주소지를 뱉어냈다. 이제 그 목록을 해군 인사 파일에서 얻은 정보와 대조해 볼 작정이었다.
"럭키." 리오가 말했다. "마음에 드는 별명이 하나 나왔어."
"벌써 있잖아." 마이크가 지적했다. "이크, 들어온다. 목록이 들어와. 내가 몇 부 뽑을게."
"럭키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행운이 찾아오는 건 아냐." 토머스가 리오에게 말했다. "전설에 따르면 여기 대위님은 불사신이야. 그래서 그런 별명이 붙었지."
"정말 불사신이야." 리오는 동의하며 럭키 쪽을 흘끔 보았다. 럭키는 마이크의 어깨너머로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었다.
목록에는 이름과 가명, 최근 주소지, 그리고 구속과 판결 결과 등 전과 기록이 올라 있었다.
"시드가 오늘 아침 대위님의 하와이 셔츠를 입고 온 것이 눈에 띄던데요." 리오가 말했다. "어젯밤 작전이… 성공했으리라 믿습니다만."
고개를 들자 토머스와 바비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마이클 리까지 화면에서 눈을 들었다. 럭키는 웃었다. "농담하는 거지? 자네들도 이게 그저 범인을 잡기 위한 술책이하는 걸 잘 알잖아. 시드가 어젯밤 우리 집에 묵었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 내 말은, 우리는 진짜 아무 사이도 아냐."
"네 셔츠를 입고 있던데." 바비가 말했다.
"그래, 어젯밤에 내가 그녀의 셔츠를 버렸거든."
그는 어젯밤 소파에서 잠들었다가 커피 향기에 잠을 깼다. 시드가 덮어 준 것이 틀림없는 담요를 박차고 부엌으로 뛰어 들어가자 그녀는 벌써 샤워를 마치고 옷을 챙겨 입은 상태였다. 그녀는 그의 셔츠를 입고 있었다. 기분이 묘하다 못해 조금 두렵기까지 했다.
오래 전에 비슷한 악몽을 꾼 적이 있었다. 잘 알지도 못하고, 특히 같이 살고 싶지도 않은 여자가 자신의 집인 양 행동하고 옷장까지 뒤지는 그런 꿈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전날 밤 아무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몽이 아니었다.
커피 향기는 훌륭했다. 자신의 셔츠를 입은 시드도 보기 좋았다. 그녀가 미소 짓자 그는 근심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대신 말할 수 없는 기대감이 무럭무럭 일어났다.
그는 그녀를 좋아했고, 그녀가 자신의 집에 있는 것도 좋았다. 그녀와 함께 아침을 맞는 느낌도 최고였다.
내가 진짜 운이 좋다면, 이름 값을 한다면 내일 아침에는 그녀와 한 침대에서 잠을 깰 거야.
마이크가 그에게 프린트한 목록 한 부를 건네주었고, 바비와 토머스, 리오에게도 한 부씩 나눠주었다.
"자, 한 번 정리해 봅시다. 대위님은 어젯밤 시드와 단둘이 있었어요.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섹시한 여자와 단둘이 있었단 말이에요. 밤새도록. 그런데 그 기막힌 기회를 이용하기는거녕 그녀의 옷을 더럽히는 데 금쪽 같은 시간을 허비했다는 겁니까?" 리오가 말했다.
"아, 여러분, 방금 스타벅스에 다녀왔어요. 커피 마실 사람?"
럭키가 리오에게 네 일이나 신경 쓰라고 말하려는 순간 시드가 종이컵을 가득 담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아, 드디어 목록이 들어왔나요?"
"기사화 시키면 안 되오." 럭키가 말했다.
그녀는 웃으며 컵 하나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특별 배달이에요. 설탕 더 가져왔어요. 힘든 밤을 보냈으니 열량 보충을 해야죠."
리오가 뭔가 알았다는 듯이 헛기침을 했다. "뭐라고요?"
시드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이상한 상상 말아요, 그런 뜻이 아니니까. 루크와 난 친구예요. 어젯밤 밤새도록 얘기했다고요. 루크는 거실 소파에서 3시 30분쯤에 잠이 들었어요. 그리고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뛰쳐나왔고, 옷을 더럽힌 건 순전히 내 잘못이에요."
리오는 럭키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보았다. "대위님이 거실 소파에서 주무셨…?"
"잠깐만요…." 토머스가 말했다. "여기 한 남자가 첫 번째 사건이 발생하기 4주 전에 켄터키 형무소에서 출옥했군요."
"그게 첫 번째 사건인지는 확실하지 않아." 럭키는 대화의 주제를 바꾸어 주어 고맙다는 눈길을 보냈다. 그는 토머스에게 의자를 바짝 끌어당기고 그의 어깨 너머로 목록을 보았다. "켄터키는 너무 멀어. 그만큼 움직이려면 강력한 동기가 있어야 해."
"네, 하지만 이것 좀 보세요. 벌써 수배중이에요." 토머스가 말했다. "댈러스 주류 판매점 강도 사건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 사건은 그가 풀려난 지 1주일 만에 발생했어요."
시드는 럭키의 어깨로 몸을 기울였다. "용의자가 주 밖으로 나갈 수 있어요? 보호 감찰관에게 보고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정면으로 그녀의 가슴과 마주쳤다.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순간적으로 머리 속이 텅 비었다. 방금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바비가 대신 대답했다. "내가 알기로는 죄수가 일찍 풀려났을 때만 보호 감찰관이 따라붙어요. 형량을 완전히 채우고 나왔다면 대부분 보호 감찰하지 않죠."
"그 남자 이름이 뭐예요?" 시드가 물었다. "목록 어디에 있죠?"
"오웬 핀." 럭키는 목록 한곳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녀는 작은 글씨를 읽기 위해 몸을 더 숙였다.
그녀는 그의 디오도란트를 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나는 향기는 자신이 뿌렸을 때와 달랐다. 섬세하고 여성스런 냄새가 났다.
젠장, 멍청이 같으니. 어젯밤 시드에게 섹스를 하지 않겠느냐고 물어 봤어야 했는데…. 입을 다물고 있는 것보다는 나았을 거야. 그녀도 나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녀도 육체적으로 가까워지길 바랐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우리는 친구야. 그녀가 그렇게 말했잖아. 친구로서 그녀는 솔직한 것을 좋아할 거야.
과연 그럴까?
"핀은 강도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어요." 시드는 말하며 허리를 폈다. "난 성범죄나 폭력 전과를 가진 사람을 찾는 줄 알았는데요."
"핀." 바비가 해군 컴퓨터 인사 파일에서 읽어 내려갔다. "오웬 프랭클린. 명예 훈장 수훈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점수는 나빴지만 미 해군 아카데미에 들어갔음. 96년 BUD/S에서 퇴출되었고, 넉 달 뒤에 절도죄로 구속되었음. 유죄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불명예 제대했음. 손버릇이 나쁜 건 분명하지만 폭력에 대한 언급은 없어요."
"이 사람은 어때요?" 토머스가 목록 한곳을 가리키자 시드는 다시 럭키 쪽으로 몸을 숙였다. "마틴 타우스. 성추행으로 네 번 기소당했지만 유죄 판결을 받은 적은 없음. 증거 불충분. 징역을 산 적은 없고, 벌금을 물거나 98년 패싸움에 끼어들어 손해를 입힌 죄로 사회 봉사 명령을 받은 적이 있음. 최근 주소지는 샌디에이고의 우체국 사서함이에요."
"이 사람들을 어떻게 찾죠?" 시드가 물었다. "목록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다 잡아들일 수는 없나요?"
그녀가 옆에 앉자 그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해야만 했다. 만일 공공 장소에 있었다면 분명 팔을 둘렸을 텐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무실 안에서 <여자 친구 게임>을 할 필요는 없었다.
"대부분 이곳에 살지 않소." 럭키가 말했다. "최근 주소지도 분명 바뀌었을 테고, 하지만 핀콤에서 모두를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할 거요."
"전부 다 찾기는 힘들 거예요." 토머스가 지적했다. "텍사스에서 수배된 오웬 핀 같은 사람을 봐요. 분명 도망다니고 있을 거예요."
"난 언제부터 미끼 노릇을 하는 거죠?" 시드가 물었다.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을 정해야 할 텐데요."
"오늘밤에 시작할 거요." 럭키가 말했다. "아침에 프리스코에게 말했소. 다음 주에 제1단계 훈련을 하는 생도들이 야간 수영을 할 거요. 난 그 훈련이 시작되는 22시에 일단 기지에서 모습을 드러낼 거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거지. 다른 교관 한 명이 내 대신 서 있을 거요. 누가 봐도 나처럼 보이도록 옷도 똑같이 입고, 마스크도 쓰고 말이오. 난 기지에서 몰래 빠져 나와 다른 팀원들과 합류할 거요. 우리 집, 아니 내 집 밖에 기술적으로 숨어 있을 거요." 그는 <우리집>이라는 말을 얼른 <내 집>으로 정정했다.
럭키가 시드와의 관계를 그저 연극일 뿐이라고 실토했을 때 앨런 프랜시스코는 무척 실망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프랜시스코는 뭔가 의논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했다.
시드를 미끼로 내거는 것이 찜찜하긴 했지만 공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일을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모든 일은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의논할 건 하나도 없었다.
"한 시간 뒤에 도청 장치를 하러 루크의 집에 갈 겁니다." 바비가 말했다.
"그럼 난 7시부터… 새벽 2, 3시까지 혼자 있는 거네요?" 그녀가 물었다.
"아니, 훈련이 시작되기 전에 함께 시간을 보낼 거요." 럭키가 말했다. "시내에서 함께 저녁을 먹을 거요. 사무실에서 18시, 그러니까 6시에 함께 나갈 거요. 저녁을 먹은 뒤에 집에 가서 22시 30분쯤 작별 키스를 하며 한껏 쇼를 하고 나서 다시 이곳으로 올 거요. 당신은 그때부터 새벽 2시까지 세 시간 반 정도 혼자 있게 되는 거요."
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 좋으면 오늘밤 안으로 핀콤에서 목록에 오른 사람들을 모두 잡아들이겠죠. 그리고 정말 운이 좋으면 그 가운데 한 명이 범인일 테고요."
럭키는 자신에게 붙은 황금빛 행운이 진짜 빛을 내주길 기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10
입에서 살살 녹는 바닷가재 요리와 한 병에 백 달러나 하는 포도주는 시드에게 완전히 돈 낭비였다.
이글거리는 일몰과 멋있는 야외 식당, 태평양의 백만 달러짜리 풍경, 게다가 눈부신 금발 미남과 함께 마주 앉아 있으니 음식 맛이나 술맛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식사하는 동안 내내 루크가 손을 잡아주길 고대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가 탁자 너머로 손을 뻗어 손가락을 엮자 그와 키스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는 식당 밖에서 웨이터에게 자동차 열쇠를 주고 나서 키스했다. 매우 느긋한 키스였다. 그는 술집에서도 자리로 안내되어 가는 동안 키스했다. 섬세하고 우아한 키스였다. 별 다섯 개짜리 고급 레스토랑에 어울리는 키스였다.
그녀는 고급 레스토랑에 맞는 복장이 아니었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지배인은 정중했고, 웨이터들도 깍듯했다. 그리고 루크는….
그는 그녀가 그들이 진짜로, 완벽하게, 진심으로, 가슴 떨리게 사랑하는 사이인 것처럼 믿게 만들었다.
"왜 이렇게 말이 없소?" 그가 그녀의 손바닥에 엄지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면서 물었다. 하늘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그들은 웨이터가 루크의 신용 카드를 가져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나지막한 목소리, 행동 하나한가 모두 완벽하게 사랑에 푹 빠진 남자였다. 그는 정말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 감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
"당신 키스요." 그녀가 말했다.
순간 그는 깜짝 놀라 엄지손가락의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그녀는 그가 진짜 놀랐다는 것을 눈을 보고 알았다. 그가 입을 열어 뭔가 말하려 했을 때 웨이터가 돌아왔다.
루크는 웃으면서 슬며시 손가락을 거두어 계산서에 서명했다. 그리고는 영수증을 주머니에 넣고 일어나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해변을 좀 거닙시다."
그들은 손을 잡고 나란히 나무 층계를 내려갔다. 층계를 다 내려오자 그는 무릎을 꿇고 그녀의 샌들을 벗겼다. 그리고 자신의 신발과 함께 들고 걸었다. 발가락 사이에 모래가 관능적으로 느껴졌다.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그리고 루크가 헛기침을 했다. "그래, 나의 키스에 대해 생각하니까 기분이 좋소, 아니면…?"
"기분 좋은 것 이상이죠." 그녀가 말했다. "난 지금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와 함께 있어요, 그리고 오늘밤이 가기 전에 그는 나한테 열 번도 더 키스할 거예요. 당신은 마치 꿈결처럼 키스해요, 알고 있어요? 몰론 알겠죠."
"당신도 아주 잘하는 편이오."
"당신한테 비하면 아마추어죠. 당신은 눈과 미소로 <지금 당신한테 키스할 거요> 하고 말하잖아요. 당신 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만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어요."
그는 당황한 웃음을 지었다. "아, 그럴 리가, 난…."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자신이 얼마나 멋있는지 알아요. 당신이 미소만 지으면 사방 3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여자들은 모두 환상 속으로 빠져들죠. 아무 곳에나 들어가 그 치아만 한 번 반짝 드러내면 여자들이 당신을 따라 나설 기회를 얻기 위해 줄을 설 거예요."
"이런, 내가 미리 알았더라면…." 그는 그녀를 보며 눈부시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하품을 했다. "하지만 나한테는 안 통해요. 어젯밤 당신 코고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난 코고는 사람이 아니오."
시드는 그저 웃기만 했다.
"안 곤다니까."
"알았어요." 그녀가 말해했다.
분명히 나를 놀리고 있군. 그는 생각했다.
"시비를 걸고 있군." 그가 말했다. "당신은 심각한 얘기하는 걸 두려워하고 있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어젯밤 우린 진짜 심각한 얘기를 했어요." 그녀가 주장했다.
"그렇소. 하지만 그건 <내> 심각한 얘기였소."
"나도 가족 얘기를 해주었잖아요." 그녀가 항변했다.
"아주 조금."
"우리 가족은 지루해요. 아무도 티벳으로 달아나거나 하지 않았거든요. 만일 누군가 티벳으로 달아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예요."
"또 시작이군." 그가 말했다. "진짜 당신이 티벳으로 갈 사람인지 아닌지 나와 말씨름하고 싶소?"
티벳? 아니. 하지만 뉴욕은? 맞아. 아니면 보스톤, 아니면 필라델피아. 그녀는 동부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녀는 그렇게 속으로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그래서 지금 이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연쇄 강간범을 잡아서 치밀하고도 감동적이면서 사실적인 글을, 역대 특별 수사대가 쓴 글 가운데 최고의 글을 쓰기 위해서. 나는 여기 이 남자와 달빛 아래서 키스하기 위해 있는 게 아냐.
마지막 황혼이 서둘러 물러가고, 하늘에 달이 은처럼 빛나고 있었다. 해변 멀리 파도타기 클럽에서 흥겨운 파티소음이 들려 왔다. 왁자한 웃음소리와 희미하게 들리는 로큰롤 소리.
루크의 얼굴은 캄캄한 어둠 속에 잠겼다. "시드, 난 당신이 좋소." 그는 그녀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과 있으면 즐겁소. 당신을 더 알고 싶소. 무엇을 원하는지, 진짜 당신은 어떤 사람인지. 50년 후에는 어디에 있을지, 또…." 그는 웃었다.
그녀는 그가 쑥스러워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루크 오던른이 쑥스러워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케빈 맨스에 대해서도 알고 싶소.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 당신과 맞닥뜨리는 남자를 모두 그와 비교하여 평가하는지…."
시드는 감짝 놀랐다. 아니, 충격 때문에 멍해졌다. 케빈 맨스? 대체…? 어둠 속에 가려진 루크의 눈을 보고 싶었다. "뭐가… 어떻게 케빈 맨스에 대해 알고 있죠?"
그는 헛기침을 했다. "그는… 음… 라나 퀸이 처음 당신을 최면에 걸었을 때 꽤 구체적으로 튀어나왔소."
"구체적…?"
"당신이 처음으로 음… 그를 만났을 때를 회상했소."
시드는 아주 상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회상했다고요? 회상했다는 게 무슨 소리예요?"
"음, 다시 한 번 살았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 같소."
"다시 한 번 살았다고요?" 그녀의 목소리는 몇 옥타브 올라갔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당신이 한편으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면서, 한 편으로는 케빈이 방에 있는 것처럼 그에게 말했소. 당신은 우리에게 어떤 아파트 파티에 갔을 때 층계에서 그와 부딪쳤다고 말했소. 그리고 그가 당신을 방으로 데려갔다고. 우리는 <오, 케빈. 네, 케빈> 부분을 그냥 지나가려고 온갖 애를 썼소. 하지만…."
시드는 또 한 번 상스러운 말을 내뱉고 모래톱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젠장, 이렇게 창피할 수가. "그 비참한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도 들었겠군요?"
"아니오. 어떻게 끝나는지는 모르오." 루크는 그녀의 옆에 앉았다. "시드, 미안하오. 당신을 당황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소. 난 그냥… 요새 그 생각이 너무 자주 떠올라서…."
그녀는 손가락 사이로 그를 훔쳐보았다. 그는 결말에 대해서는 몰라. 그렇다면 끔찍하고 완벽한 수치는 모면한 거야.
"아직도 그를 사랑하오?"
시드는 웃었다. 모래톱에 벌렁 드러누워 광활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여러 차례 웃어댔다. 웃지 않으면 울 것 같아서…. 이 남자 앞에서는 웃고 싶지 않았다.
루크도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 전염된 탓이었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는 질문인 줄은 몰랐는데…."
"아니에요." 그녀는 겨우 말할 수 있게 되자 깊은 숨을 내쉬었다. "아뇨. 난 그를 사랑하지 않아요. 사실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어요."
"당신 입으로 그렇게 말했소. 최면에 걸렸을 때."
"그때 난 열여덟 살이었어요."그녀가 말했다."그놈한테 순결을 받혔어요. 섹스와 사랑을 혼동했기 때문이죠."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이 하나둘 나타나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저 하룻밤 사랑이었군?"
시드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밤의 어둠보다 더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하룻밤 바람이었죠. 당신은 그런 거 몇 번이나 해봤어요?"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무척 많이."
"당신도 누군가의 케빈 맨스였을지 몰라요." 그녀가 말했다.
그는 잠자코 있었다.
"미안해요." 그녀가 말했다. "내가 심했어요."
"사실일지 모르오. 하지만 난 열여덟 살짜리 처녀한테는 가까이 가지 않으려 노력했소."
"아…." 시드가 말했다. "그래요, 아주 도덕관이 투철하군요."
루크는 처량하게 웃었다. "이런, 당신 참 잔인하군."
"언젠가는 당신을 단칼에 베어버릴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난 당신이 힘없이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는 게 좋거든요." 시드가 웃었다. "심각한 얘기 좋아해요? 내가 이 비참한 얘기의 결말을 들려주죠. 아마 당신은 가슴이 뜨끔할 거예요. 하지만 사람한테 옮기면 우리의 우정은 끝장이에요. 알겠죠?"
"내가 들으면 싫어할 얘기요?"
"정말 짜증나는 얘기죠." 시드는 일어나 앉아 바다 쪽을 내다보았다. "아무한테도 얘기한 적 없어요. 대학 단짝 친구한테도, 언니한테도, 엄마한테도,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어요. 하지만 당신한테는 말해 줄게요. 우린 친구니까요. 어쩌면 당신에게 교훈을 될지도 몰라요."
"자동차 사고 현장에 다가가는 느낌이군. 끔찍한 시체를 보게 될까 봐 두렵지만 뒤로 되돌아올 수 없는."
그녀는 웃었다. "그렇게 끔찍하진 않아요."
"다행이군."
"당시에는 끔찍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그녀는 무릎을 꼭 끌어안고 한숨을 쉬었다. 어디부터 시작하지…? "케빈 맨스는 미식축구 스타였어요."
"그렇소." 루크가 말했다. "그 말도 했소. 그자가 우등생이라는 말도. 아마 잘생겼겠지?"
"10점 만점으로 따지면…." 시드는 생각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12점?"
"우와!"
똑같은 잣대로 루크는 50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말해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난 그 크고 유명한 미식축구 영웅과 파티 때 층계에서 부딪혔어요."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됐소." 그가 끼어들었다. "그 부분은 알고 있소. 당신은 그자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소. 그리고 그 다음 부분이 당신이 <오, 케빈. 네, 케빈> 하기 시작한 부분이라는 것도 짐작했소."
"아, 잠깐만요, 아니에요. 당신은 자신이 무척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죠?"
루크가 나지막하게 웃었다. "미안하오. 난 그저… 멍청이가 된 기분이오.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걱정이 되어서…." 그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사실, 당신이 라나의 사무실에서 그랬을 때는 진짜 숨막힐 정도로 섹시했소. 가만히 앉아 있기가 힘들었지."
그녀는 눈을 감았다. "이런, 미안해요. 당신 기분을 나쁘게 하지 않았길 바라요."
"그렇소, 맞소. 몇 주 동안 함께 일할 여자가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건 항상 기분 나쁜 일이오."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네, 맞아요. 그게 바로 나예요. 매력덩어리. 내가 만난 지 한 시간밖에 안 된 남자랑 잔 걸 알고 나를 꼬시기로 작정했나요?"
"난 당신이 최면에 걸리기 전에 꼬셨소."
그가 맞았다. 그 일은 처음 만난 날 일어났다. 최면은 그 다음날 있었고.
"라나 퀸의 시술 이후에." 그가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팀에 합류해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소. 기억나오?"
시드는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난 일이 어떤 순서로 진행됐는지 정리해 볼 생각도 못했어요."
"이야기나 마저 하시오." 그가 말했다. "당신은 라나와 나에게 케빈이 친구를 시켜 당신을 기숙사로 데려다주게 했다고 말했소."
"그래요." 그녀가 말했다. "그는 내가 그 방에서 밤을 새우면 나에 대해 나쁜 소문이 돌 거라고 했어요, 흥!" 그녀는 쪼그리고 앉아 무릎 위에 턱을 올려놓았다. "좋아요. 다음날. 제2장이에요. 일요일이었어요. 난 날 케빈 방으로 인도한 고급 양주에 대해서 고맙다는 편지를 보내야겠다고 궁리하고 있었어요. 내 반쪽을 찾았는데 전화 번호도 전해주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아침 내내 그에게 줄 편지를 쓰느라 노심초사했죠. 몇백 번은 고쳐 썼어요. <케빈에게, 어젯밤은 정말 멋있었어…>."
그녀는 갑작스럽게 목구멍을 아프게 꽉 막은 덩어리를 꿀꺽 삼켰다. 이런 얼간이.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케빈 맨스 때문에 아직도 울고 싶어 하다니. 나쁜 놈.
그녀는 루크의 손길이 닿는 걸 느꼈다. 그의 손이 부드럽게 머리칼에서 미끄러져 내려가 가볍게 등을 어루만졌다.
"그만 하시오." 그가 조용히 말했다. "벌써 기분이 안좋소. 당신이 원한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다시는 하룻밤 바람 같은 건 피우지 않겠다고 맹세하겠소. 벌써 몇 년째 그런 일은 하지 않았지만…."
"난 미식축구 시합에 갔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 딱한 편지를 손에 들고 말예요. 관중석에 앉아서 내 남자가 완벽하게 경기를 풀어 가는 걸 지켜보았죠. 경기가 끝난 뒤, 로커 룸에 들어가려 했지만 경비한테 저지당했어요. 내가 케빈의 애인이라고 말하자 나를 비웃더군요. 난 화내지 않고 웃었어요. 앞으로 그 사람들과 친해져야 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시즌이 막 시작된 무렵이었거든요. 그 사람들이 케빈은 경기가 끝나면 늘 남쪽 출입구로 나와서 팬들과 만난다고 말해 주었어요. 만나고 싶으면 거기 가서 기다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난 기다렸어요."
"이런…." 루크가 말했다. "다음에 어떻게 될지 훤히 알겠군."
"난 남쪽 출입구에서 50여 명의 군중과 함께 한 시간 넘게 기다렸어요." 시드가 말했다.
그녀는 땅에 엎어진 맥주와 땀 냄새, 그리고 눅눅한 오후의 열기를 기억했다. 케빈을 다시 보게 된다는 생각에 뱃속을 휘젓던 긴장감과 마냥 부풀어오르던 기대감도 떠올랐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하면서 서 있었다. 웃음을 터뜨리며 두 팔을 내밀까? 아니면 어젯밤처럼 나를 부드럽게 쳐다볼까?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니면 환희에 차서 나를 안아 들고 빙글빙글 돌며 키스할까? 군중들이 자신들의 키스에 환호할 거라고 상상한 것도 기억났다. 로맨틱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행복하게 포옹하면 군중들이 으레 그러니까.
"드디어 그가 나타났어요." 그녀는 루크에게 말했다. "그리고 사인을 해주기 시작했죠.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난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어요. 그리고 그가 나를 돌아보고…." 목구멍이 다시 막혔지만 그녀는 안간힘을 써서 목소리를 냈다. "그는 나를 기억 못했어요." 그녀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내 눈을 정면으로 보았지만 어젯밤에 같이 잔 소녀라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그는 미식축구 스타다운 미소를 지으며 내 손에서 노트를 빼앗아갔어요. 그리고는 내 이름을 물은 뒤에 종이에 사인을 해서 돌려주었어요. <시드에게, 언제나 행복하세요. 케빈 맨스 드림>."
럭키는 모래톱에 앉아서 흐릿해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그 자식을 찾아내도 되겠소?" 그가 물었다. "찾아내서 죽도록 패줄까?"
시드는 떨리는 웃음을 웃었다.
그는 다시 손을 내밀고 싶었다. 그녀를 안아 가까이 끌어당기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선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정말 미안하오." 그가 말했다.
그는 저녁 식사 내내 시드를 침대로 끌어들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새벽 2시 이후. 그녀는 아마 그 시간에 가장 마음이 약해져 있을 것이다. 그는 도청기를 끄고 팀원들을 귀가시킬 생각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지켜보는 사람 없는 거실에서….
그녀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겠어. 그녀에게 매력을 느꼈고, 그녀를 원한다는 걸 말해야겠어. 그는 나란히 소파에 앉아 있을 때 조금씩 다가가 그녀를 안을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완전히 방향 감각을 상실할 때까지 키스할 생각이었다. 그녀가 두 손 들고 항복할 때까지.
하지만 안 돼. 나는 시드의 기분이나 희망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어. 나는 케빈 맨스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 그저 나의 즉각적인 만족만을 생각하고 있으니….
시드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가 한꺼번에 내뱉었다. "이제 가야겠어요. 시간 됐잖아요. 당신은 기자로 가야 하고, 난…. 난 그 악당이 잘 알아볼 수 있도록 이마에 <범행 대상>이라는 문신이라도 새겨야겠어요." 그녀는 일어나 기지개를 펴고 뒤로 돌아 럭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손을 잡자 그녀는 그를 일으켰다.
그는 그녀가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상상보다 훨씬 더 강했다. 그녀의 손을 잡자 그는 갑자기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나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한 속임수가 아닐까? 사건이 해결되고 나면 다시는 그녀를 보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시드, 내가 싫소?" 그는 단도 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녀는 뒤로 돌아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가락이 볼에 시원하게 느껴졌다.
"무슨 소리예요?" 그녀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재미있다는 듯이 올라갔다.
그는 그녀의 목소리에 따뜻함이 담겨 있다는 것을 느끼고 안도했다.
"내 말이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난 당신이 내 평생에 최고의 친구하고 생각해요."
11
시드는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다.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시계를 보니 3시 52분이었다. 대체 누가 이 시간에 전화를?
그녀는 순간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가슴이 뛰었다.
강간범은 미끼를 물지 않았다. 대신 다른 불쌍한 여인이 당한 것이다.
그녀는 옆방에서 루크가 나지막하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지만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화난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 좋은 소식이 아냐. 확실해.
루크는 새벽 2시가 넘어서 들어왔다. 평소와 달리 말이 없고 시름에 잠긴 듯했다. 그리고 아주 피곤해 보였다. 그는 재빨리 집을 한 바퀴 돌아본 뒤 문과 창문이 단단히 잠겼나 살피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쿵 닫았다.
시드도 한때 루크의 여동생이 썼으리라 짐작되는 좁은 침대로 올라가 잠을 청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막 가물가물 잠에 빠져들 때쯤 전화벨 소리가 그녀를 다시 의식 세계로 밀어냈다.
벽을 통해 루크의 방에서 무언가가 엎어진 듯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그의 방에 가봐야 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방문이 활짝 열렸다.
사각 팬티만 입은 루크가 숨을 헐떡거리며 서 있었다. 복도 불빛이 그의 등 뒤에서 비쳐 들어왔다.
"옷 입어요, 빨리. 병원에 가야겠소." 그의 목소리는 거칠었고, 얼굴은 굳어 있었다. "루시 맥코이가 당했소."
시드는 루크를 따리 병원 복도를 뛰었다.
루시 맥코이가. 하느님, 어떻게 이런 일이….
누가 루크에게 전화했는지 몰라도 자세한 것은 모르는 듯했다. 그녀는 얼마나 다친 걸까? 살이 있기는 한 걸까?
바비가 복도 끝에서 나타나자 루크는 더 빨리 움직였다.
"상태가 어때?" 그는 고함을 지르지 않고도 말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리가 되자마자 팀장에게 물었다.
바비의 얼굴은 침울했다. "살아 있고 강간을 당하지는 않았어." 그는 계속 복도를 걸어가며 말했다. "하지만 그걸로 좋은 소식은 끝이야. 병원에서 루시를 ICU(집중 치료실)에 넣었어. 심각한 머리 손상을 입었어. 의식 불명이야. 쇄골 뼈와 팔, 갈비뼈 하나가 불어져서 폐를 뚫고 들어갔어."
"지금 누가 있어?" 루크의 목소리가 강했다.
"웨스하고 미아." 바비가 보고했다. "프리스코는 서류를 처리하고 있어."
"블루한테 연락해 보았어?"
"나도 해보고 프리스코도 해봤지만 거센 잡음만 들었을 뿐이야. 지금 알파 분대는 깊숙한 곳에 있나 봐. 그들이 북반구에 있는지 남반구에 있는지조차 알아내지 못했어."
"로빈슨 제독에게 전화드려." 루크는 명령했다. 그들은 집중 치료실 입구에 도착했다. "알파 분대와 연락이 닿을 사람은 그뿐이니까."
바비가 급히 자리를 뜨자 미아 프랜시스코가 문을 열고 집중 치료실에서 나왔다.
"당신 목소리 같았어." 그녀는 루크를 안으며 말했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미아는 시드도 안았다. "의사 말이 앞으로 몇 시간이 고비래요. 오늘밤을 잘 넘기면…."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하느님 맙소사." 시드가 말했다. "그렇게 안 좋아요?" 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볼 수 있을까?" 루크가 물었다.
미아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4호실에 있어. 병원 규칙상 집중 치료실에는 가족만 들어갈 수 있어. 하지만 블루 대신 우리가 곁에 있는 걸 허락했어. 내가 베로니카와 멜로디에게 전화했어. 내일 아침 둘 다 비행기 타고 올 거야. 넬하고 베카도 한 시간 안에 도착할 거고, 피제이는 벌써 범행 현장으로 갔어."
루크는 집중 치료실 문을 활짝 열었다. 시드는 그를 따라 들어갔다.
집중 치료실에 밤은 없었다. 대낮처럼 환하게 불을 밝혀진 치료실을 의사와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루크는 4호실 밖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시드는 그의 손을 잡고 침대에 누워 있는 루시를 보았다. 너무나 작고 연약해 보였다. 그녀는 각종 장비와 모니터에 연결되어 있었다. 머리는 붕대로 칭칭 감겨 있고, 얼굴은 끔찍하게 멍든 곳을 제외하고는 창백했다. 왼쪽 눈썹 위에 흉측하게 바늘로 꿰맨 자국이 있었다. 입술은 퉁퉁 부어 올라 있고 왼쪽 눈은 시퍼렇고 누런 색이었다. 너무 부어서 뜰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웨스가 침대 옆에서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는 루크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자 위를 올려다보았다. 시드는 그를 따라 침대 발치에 섰다.
웨스의 눈도 미아처럼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도 많이 울었어. 나는 그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는데…. 세상에,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한 것 같아. 루시에게 그런 짓을 한 사람이 어떻게 침대 옆을 지키면서 울고 있을 수 있겠어? 죽는 것을 확인하려고? 저질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발상이야.
"어이, 루시." 루크는 쾌활한 목소리를 내려 애쓰며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일어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얘기해 줘."
루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심장 박동을 체크하는 모니터에서 규칙적으로 삑삑 소리만 들려 올 뿐이었다.
웨스는 죄지은 사람 같지 않았다. 눈동자가 불안한 듯 움직이거나 땀을 흘리거나 몸을 떨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루시의 손을 잡고 티 셔츠 소매로 눈물을 훔쳐냈다.
"음, 이렇게 하자." 루크가 말했다. "나중에 다시 올 테니까 그때 얘기해 줘, 알았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루크는 시드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너무 세게 잡고 있는 바람에 피가 통하지 않아서 아플 정도였다.
"그냥… 견뎌내야 해, 루시." 그가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블루가 곧 올 거야. 약속해. 그저… 포기하지만 마."
럭키는 블루와 루시 맥코이의 2층 침실에 서 있었다. 그는 비비 꼬여 박살이 난 전등과 뒤집힌 흔들의자, 스프링이 반쯤 드러난 침대 매트리스를 어두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침대 시트와 연노란색 벽지에 핏자국이 선명했다. 부서진 창문을 통해 꽃이 만발한 뒤뜰이 내려다보였다.
새벽 일출이 흐릿하게 동화 같은 빛을 정원에 뿌려 주고 있었다. 창문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아래쪽 잔디 위에서 깨진 유리 조각들이 예쁘게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시드는 문가에 말없이 서 있었다. 처음 이곳에 도착해 엄청난 유혈극이 벌어진 증거를 목격하자마자 그녀는 슬그머니 화장실로 사라졌다. 그는 그녀가 구토하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장 돌아왔다. 얼굴은 창백하고, 몸을 떨고 있었지만 나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피제이 벡커가 방으로 들어왔다. 특별 수사대에 배속된 핀콤 요원 한 사람도 피제이를 따라 들어왔다. 피제이는 얼마 전 승진해서 핀콤 내부에서 꽤 높은 자리로 올라갔다. 핀콤 요원은 그녀를 보고 조금 당황한 듯했다.
"데이브, 오던른 대위님과 시드 제임슨은 구면이죠? 대위님, 데이브 서든버그 씨는 일류 법의학자입니다." 피제이가 말했다. 어젯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추리하는 걸 듣고 싶어할 것 같아서 모셔왔어. 안타깝게도 맥코이 형사는 아직 진술을 해줄 수 없으니까.
럭키가 고개를 끄덕이자 데이브 서든버그는 목을 가다듬었다. "제 생각에 침입자는 아래층 창문을 통해 들어왔습니다." 그가 말했다. "경보 시스템 전체를 끄는 대신 우회로를 만들어 침입했습니다. 그건 다행이었죠. 시스템 불빛과 경보음 때문에 그나마 생명을 구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는 시드가 서 있는 쪽 문을 가리켰다. "그는 저 문을 통해 이 방에 들어왔고, 침대 시트에 남은 핏자국으로 보아 당시 루시는 침대에 있었습니다. 그자가 첫 번째 주먹을 날렸을 때는 잠들어 있었을 겁니다. 그때 코가 부러졌을 거고…. 그는 주먹을 사용했습니다. 다른 무기를 사용했다면 피를 훨씬 더 많이 흘렸을 겁니다. 루시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아마 침대 밑에 둔 총을 집으려 했겠죠. 하지만 그자가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루시는 그를 이 전등으로 후려쳤습니다."
그가 말하며 키 큰 할로겐 등을 가리켰다. 이젠 비비 꼬여 완전히 망가져 잔해만 남은. "간이 테스트 결과에 따르면 여기 묻는 혈흔은 루시의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때리자 범인은 완전히 제정신을 잃고 그녀를 벽에 집어던지고 사정없이 난타했습니다. 그래서 루시가 심각한 머리 부상을 입은 것 같습니다. 범인은 그녀의 목을 손으로 감쌌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손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제 생각엔 그녀가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경보 시스템을 울려서 이웃을 깨운 거죠. 침입자는 도망갔고, 경찰이 왔을 때 루시는 뒤뜰에 거의 죽은 채 누워 있었습니다."
하느님, 루시는 분명 그렇게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을 거야. 루크는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며 생각했다. 이 방에서 그자와 함께 있으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생각한 걸까? 싸울 것이냐, 항복할 것이냐. 그녀는 두 가지 선택 모두 자신의 목숨을 구하지 못할 거라고 믿은 걸까? 그래서 결국 <도망치는> 방법을 택한 걸까? 2층 창문에서 떨어지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몰라. 루시가 오늘밤을 넘기지 못하거나 만일 살아난다 하더라도 의식 불명 상태에서 영영 깨어나지 못한다면….
블루가 집에 와서 아내를 땅에 묻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피제이가 창문으로 다가와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데이브 말이 쇄골 뼈와 팔이 불어진 건 창문에서 뛰어내릴 때 생긴 부상이래." 그녀가 어둡게 말했다. "하지만 갈비뼈하고 코가 부러진 것과 목의 멍 자국, 치명적인 뇌 손상은 범인이 가한 거라고 하더군."
"우리는 그의 DNA 샘플을 충분히 채취했습니다. 다른 피해자들에게 남긴 정자와 피부 샘플과 일치하는지 알아봐야죠." 서든버그가 말했다. "벌써 샘플을 연구실로 보냈습니다."
"얼마나 걸려야…." 럭키는 가슴과 목이 콱 막혀서 목소리를 쥐어 짜내야 했다. "경찰이나 핀콤에서 루시가 작성한 목록에 오른 용의자들을 잡아들일 수 있지?"
"진행중이야. 하지만 시간이 좀 걸려." 피제이가 말하며 문으로 향했다. 그녀는 서든버그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진행 상황을 바로바로 알려주도록 할게."
"고마워." 럭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병원에서 봐." 피제이가 말했다.
럭키는 부엌에 서 있었다. 흐려진 눈으로 싱크대 너머로 창문을 내다보면서.
루시는 하룻밤을 넘기긴 했지만 깨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블루와는 아직 연락이 닿지 않았다. 로빈슨 장군의 도움도 소용없었다. 장군은 알파 분대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고, 연락을 취하기 위해 무선 통신도 사용해 보았지만 산맥과 바위가 많은 지형 때문에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장군 휘하에 있는 장교 미치 쇼가 자원해서 그들을 찾아가기로 했다. 미치 쇼는 블루를 찾아서 돌려보내고 대신 블루의 역할을 대신하는 임무를 맡았다.
일이 잘 풀리면 쇼는 험한 오지를 나흘 내에 뚫고 들어가 곧장 알파 분대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일이 가장 잘 풀린다 해도 블루를 아내 곁으로 데려오려면 최소 아흐레에서 열흘이 걸린다.
9일에서 10일.
젠장, 젠장.
그는 시드의 기척을 들었다. 하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난 가는 게 좋겠어요." 시드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당신은 혼자 있고 싶을 거예요, 그리고…."
그는 획 돌아서서 벌컥 화를 냈다. "어딜 간단 말이오? 당신 아파트로? 거기 혼자 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시오, 알아듣겠소? 가고 싶으면 나하고 같이 갑시다. 이제부터 당신은 혼자서 움직일 수 없소." 그는 자신이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는 맞서 고함치지도 두려움에 움츠러들지도 발끈하지도 획 돌아서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한 발짝 다가섰다. 그리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루크,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알죠?"
그는 목이 꽉 막혔다. 아무리 애를 써도 꿀꺽 삼킬 수가 없었다. 가슴속에 꽉 막혀 있는 이 덩어리를 어디로 밀어내야 한단 말인가?
"내가 강하게 설득해야 했는데…." 그는 속삭였다. "경찰서에서 자라고, 하지만 그녀는 망할 놈의 경보 시스템을 너무 믿었소."
시드는 안쓰러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는 내가 만지기만 해도 무너져 버릴 거야. 내가 손을 대면 여태까지 안으로만 삭이려 한 모든 것이 터져 나올 거야. 죄의식과 분노와 공포…. 댐을 터뜨리는 물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 텐데….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제 그만두시오, 미끼 노릇 말이오. 이젠 안 되오, 절대. 작전 종료요. 당신은 이제부터 나와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오. 바비한테 당신을 지켜 주라고 하겠소. 24시부터 7시까지."
그녀는 그에게 다가갔다. "루크, 말도 안 돼요. 범인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몰라요. 당신은 범인을 꼭 잡고 싶어 하잖아요."
그는 웃었다. 날카롭고 떨리는 소리였다. "너무 얌전한 표현이군."
"우리 두 사람 다 잠을 자야겠어요. 이 일은 나중에 얘기해요. 잘 생각해 보구요."
"더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소." 그가 말했다. "잘못 될 가능성이 너무 많단 말이오. 아무리 우리가 뒤뜰에 있다 해도 안으로 들어가는 데는 시간이 걸이오. 그 짧은 시간에 당신은 죽을 수도 있소. 당신을 루시보다 작소, 시드. 만일 그 놈이 그녀를 때린 것처럼 당신을 때리면…." 그는 목소리가 갈라져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난 당신이 그런 식으로 목숨을 걸게 내버려둘 수 없소. 단 1초라도 당신이 그자와 단둘이 있을 생각만 해도…."
필사적으로 참고 있던 눈물이 고이자, 그리고 아무리 애써도 그칠 수 없자 럭키는 완전히 공포에 휩싸였다. 그는 눈을 박박 문질러서 눈물을 닦아냈다. 그래도 눈물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 젠장. 그는 울고 있었다. 시드의 코앞에서 두 살짜리 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이젠 끝장이야. 이건 정말 남자답지 못한 짓이야.
하지만 그녀는 웃지 않았다. 평소에 그렇게 잘 짓던 <와. 정말 멍청하고 유치해> 하는 표정도 없었다. 대신 그녀는 그를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울어도 괜찮아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아무한테도 이르지 않을게요."
그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신이 알잖소."
그녀는 머리를 들어 그를 보며 다정하게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눈빛이 너무나 부드러웠다. "난 이미 알고 있었어요."
가슴속에 있던 덩어리가 더욱 단단해졌다. 젠장, 아플 정도였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난 죽어버리겠소." 블루를 생각하자 목이 갈라졌다. 어딘지 모르는 정글 속에서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여인이 병원에 누워 있다고, 죽어 간다고, 벌써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전해들을 그를 생각하자 가슴이 찢어졌다.
럭키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이스드로가 죽은 이후 한 번도 이렇게 울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시드에게 더욱 달라붙으며 흐느꼈다.
시드는 그를 품에서 놓지 않았다.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토닥였다.
루시가 깨어난다 해도, 내일 눈을 뜬다 해도 문자 그대로 겨우 목숨만 부지한 꼴이 될 것이다. 루시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자신이 겪은 악몽을 지워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신성한 자신의 침실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사투를 벌인 기억을, 자신을 범하고 죽이려는 남자에 혼자 대항해 싸운 공포를 없앨 수 없을 것이다. 남은 일생 동안 그녀의 눈에는 영원히 공포가 따라다닐 것이다.
그것도 그녀가 살아날 경우의 일이지. 만일 그녀가 죽으면… 블루는 어떻게 살아갈까? 심장이 갈가리 찢어졌는데 어떻게 숨을 쉴 수 있겠는가.
루시의 눈동자가 그를 유령처럼 따라다니겠지. 그는 거리의 군중 속에서 그녀의 미소를 찾을 거야. 머리로는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녀의 향기에 뒤돌아보고 애타게 그녀의 모습을 찾을 거야.
럭키는 블루가 지금 어떤 느낌일지 상상할 수 없었다. 한 번도 결혼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절대 결혼하지 말자> 럭키는 언제나 평생을 거는 약속이라는 개념과 씨름할 때 주문처럼 그 말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제 거기엔 특별한 의미가 생겼다.
그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생기는 공포를 달고 다니고 싶지 않았다. 절대 싫었다. 젠장!
하지만 럭키는 지금 블루에 대한 연민 때문에 이렇게 흐물흐물 쓰러진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바보같이 눈물을 흘리게 만든 감정 속에는 가슴을 조이고, 목구멍을 콱 막아버린 끔찍한 공포가 있었다.
단 1초라도 시드가 루시를 저 지경으로 마든 자와 함께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다. 그녀가 폭행을 당해 의식 불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무서워서 오금이 저렸다.
샌 펠립 강간범을 잡아 유죄 판결을 받아내고 나면 시드가 떠나버릴 거라고 생각해도 똑같이 두려웠다.
나는 그녀를 사랑해. 아냐! 세상에, 어디서 이런 생각이 튀어나왔을까? 감정적으로 폭발한 나머지 이상한 호르몬이 마구 샘솟고 있는 게 분명해.
럭키는 떨리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리고 시드의 품에서 빠져 나왔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 말도 안 돼. 나는 럭키 오던른이야. 사랑 같은 건 하지 않는 오던른이라고.
그는 눈을 닦고, 얼굴을 닦고, 식탁 위로 손을 뻗어 냅킨을 집어내 코를 풀었다. 그리고는 냅킨 뭉치를 저 멀리 휴지통에 정확히 골인시켰다. 그는 완전히 진이 빠진 채 싱크대에 기대섰다.
아냐.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 약간 혼란스러워졌을 뿐이야.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그녀와 거리를 두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야.
지금은 이 여자를 향한 육체적 이끌림을 실행에 옮길 때가 아냐. 강력한 섹스로 완전히 자신을 잃어버리고 나면 정신이 마비될 정도로 깊은 잠을 잘 수도 있지만 지금은 아냐.
지금은 그녀도 쉽게 나의 요구에 응할 것 같지만 그걸 이용할 수는 없어.
시드가 아무 말 없이 옆에 앉았지만 그는 감히 그녀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이런, 미안하게 됐소." 그는 눈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돌아서 무릎을 꿇고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는 손을 들어 그를 어루만졌다. 얼굴에 열기가 많았는지 그녀의 손가락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부드럽게 넘겨주었다. 그는 그때 그녀를 보았다. 피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바짝 다가들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빛이 너무나 따뜻해 보여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울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는 그녀가 더 가까이 다가온 것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더 다가온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키스를 했다.
그녀가 나에게 키스했어….
여기 나의 부엌에서.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도 볼 수 없는 이곳에서.
너무나 달콤하고 다정한 키스였다. 그녀의 입술이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무릎에서 힘이 더 빠져나갔다. 그는 자신이 이미 앉아 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녀가 다시 키스했다. 이번에는 그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에 묻은 자신의 짠 눈물을 혀끝으로 맛보며 조심스럽고도 부드럽게 키스했다.
그는 그녀의 한 숨 소리를 들으며 다시 키스했다. 이번에는 더욱 깊고 깊게. 두 사람의 혀가 천천히 만났다. 럭키는 머리 속이 텅 비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와 거리를 유지하겠다던 결심은 한순간에 창문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망할 놈의 혼란. 그는 이 혼란이 좋았다. 이 혼란을 사랑했다.
손을 내밀자 그녀는 그의 품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녀의 손가락이 머리칼과 목, 등을 스쳤다. 그녀의 몸은 나긋했고, 가슴은 너무나 부드러웠다.
전에도 그녀에게 키스했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현실적인 느낌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손에 닿을 만한 곳에 천국이 펼쳐졌다니….
그는 그녀에게 키스하고 또 키스했다. 그는 느릿느릿하고 나른하게 그녀의 부드럽고 달콤한 입술 속에서 자신을 잃어갔다. 그는 서두르지 않으려고 필사의 노력을 했다. 그녀에게 그 이상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키스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를 너무나 원하지만 앞으로 네 시간 동안은 키스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네 시간 동안 키스하는 건 그녀를 이용하는 게 아냐.
하지만 시드 쪽에서 먼저 선을 넘었다.
그녀는 그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에게 맹렬하게 키스했다. 길고, 강렬하고, 깊고, 굶주린 듯한 키스가 그를 흥분시켰다. 그는 그녀와 함께 숨막히는 정열이 소용돌이치는 공간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곳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그녀의 부드러운 눈과 따뜻한 육체만이 존재했다.
그녀는 키스를 멈추지 않은 채 그의 어깨에서 셔츠를 벗겨냈다.
그는 그녀가 입고 있는 자신의 하와이 셔츠 단추를 풀려고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실크 천 아래 느껴지는 부드러운 촉감 때문에 목표를 잊고 말았다. 손에 그녀의 가슴이 완벽하게 들어왔다. 욕망으로 딱딱해진 젖꼭지가 느껴졌다.
그녀도 그가 자신을 원하는 만큼 간절하게 그를 원했다. 그녀는 입술을 잠깐도 떼지 않았다. 그 강렬한 키스가 그의 폐에서 숨을 훔치고, 가슴속의 심장을 파닥거리게 만들었다.
그는 셔츠 단추 푸는 걸 포기하고 셔츠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벗겨냈다. 그러자 그녀는 검을 레이스로 된 브래지어를 풀어냈다. 그는 그녀의 가슴을 어루만지다가 딱딱해진 젖꼭지를 먹었다. 그는 그녀를 맛보고 나서 뒤로 물러나 감상했다. 작지만 완벽했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황홀했다. 어깨선은 너무나 부드럽고 가녀렸다. 쇄골 뼈와 목덜미는 예술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은…. 대체 왜 늘 감추고 다니려 할까?
그는 그녀를 잡아당겨 다시 키스했다. 팔에 소름끼치게 매끄러운 피부가 닿았다.
그녀가 두 사람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 그의 벨트를 건드렸다. 그녀는 어렵사리 혁대를 풀어냈고, 곧 바지 지퍼가 내려갔다.
럭키의 손가락이 그녀의 청바지 단추 위에서 춤을 추었다. 그녀는 그의 팔에서 잠깐 벗어나 샌들을 차버리고 바지를 차내렸다. 그도 바지와 신발을 벗었다.
"콘돔은 어디에 두죠?" 그녀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욕실에. 약상자 속에 있소."
그녀는 깜짝 놀라 물었다. "정말이에요? 물침대 옆 탁자 서랍에 두는 게 아니고요?"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고백하기는 싫지만 난 물침대가 없소."
"희끄무레한 전등도요?"
그는 머리를 저으며 그녀에게 천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전등도 없소. 미안하오. 살림이 너무 빈약해서."
그녀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물침대가 없어도 콘돔이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죠." 그녀는 벌거벗은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부엌 바닥에서 하는 것도 꽤 괜찮은 생각이지만 내가 욕실에 잠깐 들러서 당신 침실로 간다면 따라오겠어요?"
침실. 침실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모든 것을 너무나 현실적으로 만들었다. 럭키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시드, 당신 정말로…?"
그녀는 그에게 <무슨 말 하는 거냐?>는 눈길을 보냈다. "난 지금 여기 홀딱 벗고 서 있어요, 루크. 당신과 함께 원초적이고 비명이 나올 섹스를 할 수 있도록 욕실에서 콘돔을 가져올 궁리를 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도 잘 모르겠다면… 나도 모르겠어요."
"원초적이고 비명이 나올 섹스…." 갑자기 입안이 바짝 말랐다.
"야성적이고, 정열적이고, 정신 착란에 빠질 정도로 날카롭고, 황홀한 정도로 맛있고, 격렬하고, 두근거리고, 광적이고, 후텁지근하고, 끔찍하고, 무아지경에 빠지고, 심장이 멈추고, 뇌가 녹아버릴 정도로 원초적이고, 비명이 나오는 섹스요." 그녀는 그를 보며 아주 순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 해보겠어요?"
럭키는 말을 못하고 겨우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다리는 제대로 움직였다.
그녀는 허둥지둥 그를 침실로 밀어 보냈다. 그리고는 콘돔을 찾아와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몸을 훑어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그의 팬티에 가서 멈추었다. "계속 입고 있을 계획이에요?"
"당신을 겁주고 싶지 않았소." 그가 얌전하게 말했다.
"이리 와요."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했다.
그가 다가가자 그녀는 그에게 키스하며 함께 침대 위로 무너졌다. 몸 아래 부딪혀 오는 그녀의 비단 같은 살결과 다리의 감촉은 상상하던 느낌 그대로였다. 다른 여자들은 늘 현실이 상상보다 못했는데. 하지만 시드는 그렇지 않았다. 시드는 현실의 백 분의 일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반짝이는 그녀의 눈빛이 좋았다. 그리고 자신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 가장 즐거운 놀이인 듯 미소 짓는 모습도 좋았다.
그는 두 손으로 그녀 등의 곡선을 훑어 내렸다. 그녀는 완전히 그의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엉덩이를 어루만지면서 소리 내어 웃었다. 아무리 쓰다듬고 보듬어도 갈증이 채워지지 않았다.
그는 허벅지에 압력을 가해 그녀의 다리를 벌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키스하며 한 손으로 가슴과 배를 쓰다듬었다.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자 그녀가 신음 소리를 냈다.
"바로 지금이 당신이 팬티를 벗을 절호의 순간이에요." 그녀는 숨을 내쉬며 그의 허리 밴드를 잡아당겼다.
그는 그녀를 도와 자신의 팬티를 벗겨냈다. 순간 그녀가 찬탄을 하며 손을 내밀었다.
"당신이 쉽게 겁먹지 않을 줄 알았소." 그가 중얼거렸다.
"무서워서 온몸이 얼어붙는걸요." 그녀는 머리를 내려 그에게 키스했다.
그녀의 입술은 따뜻하고,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그는 황홀한 쾌감이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럭키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를 아래로 잡아끌었다. 그리고 그녀의 다리 사이에 걸터앉았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콘돔. 이런, 콘돔을 까먹을 뻔했군. 그는 그녀의 몸에서 내려와 콘돔을 찾아 포장지를 뜯고 재빨리 착용했다.
하지만 다시 그녀의 위로 올라갈 기회는 없었다. 시드가 그의 배 위에 걸터앉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단 한 번의 부드러운 동작으로 그를 깊숙이 받아들였다.
만약 그가 심장 마비에 걸리기 쉬운 체질이었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의 심장은 건강했다. 1분에 4백 번이나 뛰고 있지만 말이다.
야성적인. 그녀는 말했다. 정열적이고, 무아지경에 빠지는….
럭키는 자신이 언제 멈추었고, 시드가 언제 시작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완벽하게 일치하는 동작으로. 키스하고, 만지고 숨쉬고.
맛있고, 격렬하고, 두근거리는….
그는 몸을 굴러서 그녀 위로 올라갔다. 빠르고 강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아주 좋아했다. 그녀는 그를 더 깊숙이 받아들이기 위해 몸을 휘었다. 그녀의 키스는 그의 불길에 기름을 부었다.
그녀는 그에게 황홀하게 달라붙었다. 시드는 다시 한 번 자세를 바꾸어 그의 위에 걸터앉았다. 그녀의 가슴은 땀으로 번들거렸다.
"나만 좋은 거예요, 아니면 당신도 좋은 거예요?" 그녀는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나도 좋소." 그가 겨우 말했다. "놀라울 정도로…."
그녀는 이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그는 점점 절정으로 다가갔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과 목과 가슴을 어루만졌다. 그는 그녀가 절정에 다다르기 시작한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나지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목소리로.
그는 그녀를 잡아당겨 키스했다. 그 역시 절정으로 솟구쳐 올랐다. 심장이 멈추고 뇌가 녹아버리는 느낌이었다. 그건 황홀경이고 환희였다. 그건 섹스가 아니었다. 그건 사랑의 행위였다. 젠장, 나는 그녀를 사랑하니까.
12
"아무것도 변한 건 없소." 루크가 한쪽 팔꿈치로 머리를 괴고 손가락으로 시드의 배꼽 주변에 원을 그리며 말했다. 두 사람은 구깃구깃한 침대 시트 속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들은 다섯 시간 정도 수면을 취했고, 벌써 태양이 중천에 떠 있었다. 병원에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루시의 상태는 달라진 게 없었다.
"난 당신을 미끼로 쓰고 싶지 않소." 그가 말했다. "솔직히 자신이 없소, 시드."
그의 머리칼은 매력적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면도를 하지 않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수염마저도 황금빛이었다. 그녀는 그의 턱을 쓰다듬다가 조각 같은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매만졌다. "그럼 어떻게 해요?"
"헤어진 척하는 거요."
"헤어진 척?" 그녀는 자신의 목이 콱 막혔다는 것을 그가 눈치 채지 않길 바라며 물었다.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난 당신과 헤어지고 싶지 않소." 그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 안전이 먼저요."
분명히 변명일 거야. 그의 말처럼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으니까. 그와 헤어진다 해도 나는 절대 안전해지지 않을 거야.
"이봐요…." 그녀는 뒤로 물러나 시트로 몸을 감싸며 애써 밝은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우리 둘 다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예상 못했어요. 며칠 동안 정말 힘들었고, 그래서 이성을 잃은 나머지…."
루크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오? 이성을 잃어서 사랑을 나누었다고?"
시드는 억지로 그의 눈길을 정면으로 보았다. "그렇지 않나요?"
"아니오." 그가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우리가 사랑을 나누리라는 것을 예상했소. 아니, 계획까지 세웠소. 손꼽아 기다린 일이고, 원한 일이오." 그는 그녀의 입술에 강하게 키스했다. "당신을 원했소. 지금도 원하고 있소. 하지만 모든 것보다 당신 안전이 먼저요."
시드는 혼란스러웠다. "계획이라뇨…?"
"몇 주 동안 난 당신한테 몸이 달아 있었소."
"우린 만난 지 몇 주 되지 않았잖아요."
"그렇소."
시드는 눈을 보고 그의 말을 믿었다. 세상에, 진짜 그의 말을 믿었다. <몇 주 동안 난 당신한테 몸이 달아 있었소> 그녀는 몰랐다. 하지만 그가 <여자 친구 게임> 이라고 부르는 작전을 수행하면서 나에게 키스할 때는…. 그 키스들은 너무나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난 당신이 내가 귀찮게 쫓아다닐까 봐 헤어질 구실을 꾸며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인정했다. "난…."
"이것이 그저 하룻밤 불장난이라고 생각했소?" 그는 벌렁 드러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진짜 내가 당신에게 그런 짓을 할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오? 그 미식축구 선수… 이름은 말하지 않겠소. 속이 부글거리니까. 그 자식 얘기를 했는데도 말이오?"
"그게…."
그는 머리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의 눈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당신 쪽에서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니오?"
"난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는 생각도 못했어요."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러면 안 되었어요. 우리 우정에 금이 갈지도 모르니까요. 난 정말 당신이 좋아요, 루크. 내 말은… 그러니까 친구로써…."
젠장, 이렇게 바보 같은 소리를 내뱉다니. 게다가 거짓말이었다. 엄청난 부분을 삭제한 거짓말. 그래, 나는 그를 친구로서도 아주 좋아해. 하지만 그를 애인으로 사랑해.
사랑.
그… 를… 사… 랑… 해.
진짜 바보 같았다. 나는 바보야. 성 관계를 갖고 난 뒤에야 깨닫다니. 나는 바보 천치라 루크 오던른을 볼 때마다 느낀 따뜻한 감정이 우정 이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어.
나는 켄 인형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어. 하지만 루크는 플라스틱이 아니야. 그는 진짜고, 완벽해. 그저 완벽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완벽한 상대야. 갑자기 심각한 일은 하지 않는다고 한 그의 경고가 떠올랐다. 그것만 빼면 완벽 할 텐데.
"나도 당신을 좋아하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친구로서는 아니오. 훨씬 더…."
파란 눈과 금빛 머리칼, 구리빛 피부. 저 멋진 모습으로 침대에 벌거벗고 누워서 그런 듣기 좋은 말을…. 언니와 함께 <미스터리 데이트> 게임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문을 활짝 열었더니 금발에 턱시도를 걸친 완벽한 왕자님 그림이 짠 하고 나타난 기분이었다. 아니, 완벽한 헐리우드 영화 속에서 사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사사건건 부딪치던 남녀가 서로 끌어안고 키스로 결말을 내는 로맨틱 코미디 속에서.
하지만 그런 코미디는 2년 뒤에 그들이 이혼할 거라는 조그마한 징후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혼….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거지? 루크는 나에게 청혼한 적도 없는데.
시드는 헛기침을 했다. "우리가 헤어진 척해도 달라질 건 별로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우리가 찾는 범인은 헤어진 여자 친구도 범행 대상으로 삼으니까요. 기억하죠? 그 사람은 대상을 고르는 데 그다지 까다롭지 않아요. 난 안전해지지 않을 거예요."
"이 도시를 떠나면 안전해질 거요." 그가 반박했다.
그녀는 충격을 받았다. "여기를 떠나라고요?"
"그렇소." 그는 진심이었다.
"아뇨, 절대 안 돼요." 시드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침대에서 뛰쳐나왔다. "난 특별 수사대의 일원이에요. 당신과 한 팀이란 말이에요." 그녀는 벌거벗은 채 그를 노려보다가 침대에서 시트를 끌어당겨 몸에 둘렸다.
루크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 시트만 없다면 나는 금방 굴복당할 것 같은데…."
"말 돌리지 말아요. 난 안 떠날 거예요."
"시드, 그놈을 잡을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봤소, 그리고…."
"날 어린애 취급하지 말아요. 하룻밤 같이 잤다고 해서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할 권리가 생겼다고 믿는다면 그건 아주 큰 착각이에요. 내가 무슨 세 살 먹은 어린애라도 되는 줄 알아요? 루크, 이 일은 깨끗이 잊어버려요."
"알았소." 그도 신경질이 나기 시작했다. 상체를 일으키자 근육이 팽팽해졌다. "좋소, 아주 잊어버립시다. 당신도 루시처럼 병원에 실려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완전히 미쳐 버릴 것 같지만 잊어버리겠소!" 진심이었다. 그는 그녀를 목숨처럼 아꼈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자 시드는 저도 모르게 화가 급속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에게 져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 논쟁에선 반드시 이겨야 했다.
"미안해요." 그녀는 말하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여길 떠날 순 없어요. 이 사건은 내게 너무나 중요해요."
"목숨을 걸 정도로?"
그녀는 그의 머리칼과 어깨와 팔의 근육을 어루만졌다. "당신은 가치 있는 일에 목숨을 거는 것이 어떤 건지 잘 알잖아요."
"난 훈련을 받았소." 그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아니오. 당신은 기자요."
그녀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하지만 난 기자로서 중요한 글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어요. 언제나 안전한 곳에만 있었기 때문이에요. 과자 봉지 뒤에 실을 글이나 끼적거리면 안전하겠죠. 당신은 내가 평생 그렇게 살길 바라요?"
대답하기 어려웠지만 그는 머리를 저었다. "아니오."
"이번 사건은 내게 다시는 오기 힘든 기회예요." 그녀가 말했다. "내가 매우 높이 평가하는 잡지의 편집부 필자 자리가 왔다갔다한단 말이에요. 내가 정말 얻고 싶은 일자리예요. 바로 <팅크(Think)> 지예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루크가 말했다.
"주요 독자가 젊은 여성들이에요." 시드가 말했다. "왕자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아름다워지고 비쩍 말라야 한다고 말하는, 그러면서 절대로 만족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워지거나 날씬해질 수 없을 거라고 선동하는 패션 잡지와는 다른 잡지에요."
"그게 당신의 최종 목표요?" 그가 물었다. "그 잡지에 글을 쓰는 것이?"
"내 최종 목표는 소설을 쓰는 거예요. 한 2년 정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소설만 쓰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돈을 모아야 해요."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돈을 모은다면 90년이 지나도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거예요. 복권에 당첨되거나 후원자를 찾는 쪽도 생각해 봤는데 내게 그런 일이 벌어질 가망성은 40억 분의 일도 안 돼요. <팅크> 지 일은 차선책이에요." 그녀는 대화가 잠깐 곁길로 샜다는 것을 느끼고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번 사건은… 그 일은 얻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하지만 꼭 그것 때문에 여길 떠날 수 없다는 건 아니에요. 또 다른 이유는 순전히 개인적인 거예요. 루크, 난 범인 잡는 걸 도울 수 있어요. 도울 수 있단 말이에요!"
"벌써 많이 도와주었소."
"내가 떠나고 나면 당신은 다시 혼자가 돼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해요. 새로운 애인을 만든다고요? 누구하고요? 여 경찰하고? 너무 수상해 보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범인이 속아넘어갈까요?"
그녀는 자신이 이겼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다시 침대에 벌렁 누워서 눈 위에 팔을 얹고 욕을 내뱉었다.
"범인은 영리하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나한테는 접근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그는 눈에서 팔을 치우고 그녀를 보았다. "나나 당신이나 그런 가능성은 믿지 않소." 그는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겨 않았다. "혼자서는 아무 데도 가지 않겠다고 약속하시오. 팀원이 지켜볼 때만 움직이겠다고."
"약속할게요." 시드가 말했다.
"슈퍼에 가서 우유 한 병을 사도 마찬가지요. 범인을 잡을 때까지는 절대 혼자 행동하지 마시오, 알겠소? 내가 늘 당신 곁에 있을 거요. 그렇지 않을 때는 바비가 당신한테서 눈을 떼지 않을 거요."
"알았어요." 시드가 말했다. "하지만 난 당신이 내게서 눈을 떼지 않으면 좋겠어요."
"알겠소." 그는 그녀에게 강하게 키스했다. "당신은 안전할 거요. 내가 반드시 지켜주겠소." 그는 그녀의 목과 가슴, 배에 차례로 키스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온몸으로 휘몰아치는 쾌감의 소용돌이에 자신을 맡겼다. 진하고, 풍부하고, 깊은 쾌감이 그녀를 완전히 감쌌다. 그녀는 그 속에 깊숙이 잠겨들었다.
루시 맥코이의 병실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럭키는 내부에 퍼지는 희망을 감추지 않고 뛰어가 문을 밀었다. 그리고….
그는 우뚝 섰다. 뒤에 따라오던 시드는 그에게 부딪쳤다.
루시는 아직도 꼼짝 않고 침대에 누워 있었고, 호흡기에 의존해 숨을 쉬고 있었다.
하지만 방안엔 친구들이 가득했다. 여자들이 버글거렸다. 베로니카 캐터라너토는 침대 옆에 앉아 루시의 손을 쥐고 있었다. 가까이 앉은 미아 프랜시스코는 엄청나게 부른 배를 탁자 삼아 다리를 다른 의자에 위에 얹어 놓고 있었다. 카우보이의 아내 멜로디 존스는 맨발로 창틀에 앉았고, 그 옆에 카우보이 부츠를 신은 미치 쇼의 아내 베카가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떠는 모습이 정다워 보였다. 컨트리 뮤직 비디오에 단골로 등장하는 분위기였다.
멜로디가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서 와, 럭키. 방금 웨스에게 내 동생 브리트니가 우리 집에 왔다고 얘기했어. 나하고 베로니카가 병원에 온 동안 애들을 봐주기로 했거든. 브리트니를 웨스하고 맺어 주면 어떨까 물어 보던 중이야."
럭키는 그제야 웨스 스켈리도 방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웨스는 루시의 침대 옆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크래시의 아내 넬 호큰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웨스는 눈을 굴렸다. "내가 동네 북이야?" 그가 불평했다. "나 대신 바비나 괴롭히지 그래?"
"대신?" 바비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바비도 거기 있었다. 타샤의 앞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타샤는 그의 기다란 검은 머리칼을 여러 갈래로 땋는 중이었다.
왁자하게 웃음이 터졌다. 베로니카는 무언가 기대하며 루시에게 몸을 내밀었다. 웃음? 아니, 약간의 움직임. 움찔이라도 해주길 바랐다. 베로니카는 위를 올려다보고 럭키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저어 보였다. 화기 애애한 분위기 속에 숨어 있는 고통이 그녀의 꾹 다문 입가에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루시, 럭키와 시드가 왔어." 그녀는 방을 둘러보았다. "여기서 아직 시드 제임슨 못 만난 사람? 자, 주목하세요. 아마 깜짝 놀랄 거예요. 우리 루크 씨가 드디어 족쇄를 다셨어요. 시드는 루크와 동거중이에요."
서로 인사하고 축하하며 키스하고 포옹하느라 한꺼번에 터져 나온 여자들 목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그 소리에 시체도 벌떡 일어설 법했지만 루시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시드는 당황했다. 럭키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 알았다. 동거는 진짜가 아니었다. 그건 여자 친구 게임의 일부일 뿐이었다.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긴 했지만 그는 그녀에게 진짜 함께 살자고 말하지 않았다.
다른 남자들은 그런 말을 어떻게 꺼낼까? 럭키는 생각해 보았다. 청혼이 아니니까 한쪽 무릎을 꿇을 필요는 없을 거야. 그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면 될까? 저녁 요리를 하면서? 아니면 아침을 먹으며? 어쨌든 낭만적이지 못하군.
그때 피제이 벡커가 문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오던른, 마침 잘 왔어. 모두들 럭키에게 <상보>해 주었어?"
"상황 보고예요." 타샤가 시드에게 말했다. "해군은 주로 축약형을 써요. 하지만 걱정 말아요. 곧 다 알게 될 테니까."
"글세, 멜로디가 웨스를 여동생하고 맺어 주려 한다는 건 들었는데…." 럭키가 피제이에게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말하는 건 그게 아닐 것 같고."
"미치가 어젯밤에 떠났어." 미치의 아내 베카가 조용히 말했다. "로빈슨 장군님 호출을 받고 곧장. 미치가 블루를 찾아서 이리로 보낼 거야.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리겠지."
"우리는 교대로 루시 곁을 지키기로 했어요." 베로니카가 말했다. "루시가 혼자 있지 않도록 스물네 시간 내내 지키기로 했어요. 블루가 올 때까지 말예요. 계획표도 짰어요."
"의사가 루시에게 말을 걸거나 손을 잡아 주는 게 좋다고 했어. 접촉을 끊지 말라는 거야." 금발의 가냘픈 미인 크래시의 아내 넬 호큰이 덧붙였다. "우린 매일 저녁을 먹기 전에 이렇게 한자리에 모일 거야. 파티처럼 떠들썩하게 놀고 있으면 루시가 일어나서 같이 떠들고 싶어할지 모르잖아."
"지금까지는 효과가 없었어." 미아가 말했다. "하지만 인내심을 가져야 해. 의사가 말하길 경막하 부상 때문에 생긴 압력을 완화하는 수술이 잘됐대. 붓기가 눈에 띄게 빠졌다고 했어. 좋은 징조래."
놀라웠다. 럭키는 아름다운 여인들로 가득한 방안에 서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들의 아내들이었다. 그는 그녀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홀딱 반했지만 누구와도 데이트를 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다른 누구와 비교해 결점을 찾아낸 적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매끄러운 검은머리에 하트 모양의 얼굴을 한 시드가 나타났다. 그는 오늘 그녀에게 자신의 셔츠를 입게 했다. 맨 윗단추 두 개가 떨어져 나간 셔츠였다. 칼라가 활짝 열려서 목선과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쇄골 뼈가 훤히 드러나 보였다. 물론 시드를 몸매 때문에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끼는 이 여인들과 동격에 올려놓은 것은 아니다. 시드의 유머 감각과 날카로운 재치, 지성미 때문이었다. 그녀가 짓는 환한 미소와 놀라운 갈색 눈을 보면 모두가 빛을 발했다.
방 저쪽에서 멜로디 존스가 창틀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운동화 속에 발을 넣었다. "가봐야겠어. 동생이 타일러를 보느라 진이 빠졌을 거야." 그녀는 베로니카를 보았다. "베로니카는 천천히 와. 프랭크는 잘 봐줄 테니까. 아예 우리집에서 재워도 되고."
"고마워." 베로니카가 말했다.
멜로디는 베카에게 몸을 돌렸다. "태워다 줄 필요 없지? 차 가져온 것 같던데…?"
방 반대쪽에서 넬이 일어나 몸을 쭉 폈다. "나도 가야겠어. 루시, 내일 또 올게."
럭키가 문을 막으며 말했다. "잠깐만, 전부 어딜 가겠다는 거야?"
"집에." 모두 이구 동성으로 대답했다.
"안 돼." 그가 말했다. "아무도 집에 보낼 수 없어. 당신들 모두 범행 대상이 될 수 있어. 경호원 없이는 여기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어."
멜로디는 베로니카를 보았다. 베로니카는 넬과 베카를 보았다. 미아가 부드럽게 일어났다. 모두 뒤로 돌아 그녀를 보았다.
"그 말이 맞아." 미아가 말했다.
세상에, 이건 악몽이었다. 이 여인들이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다니….
멜로디는 고분고분하게 따를 기미가 없었다. "집에 혼자 있는 거 아냐. 내 여동생하고 아이들이 있잖아."
"나는 절대 경호원 같은 건 필요 없어." 피제이가 말했다.
"우리 목장은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베카가 말했다. "난 별로 걱정되지 않는데…."
항명(명령에 따르지 않고 반항하는 것). 그는 절대로 이 항명을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럭키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최고의 핀콤 요원 피제이 벡커를 포함한 모두에게 자신이 내놓은 규칙에 두말 없이 따르라고 윽박지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드가 그의 파에 손을 얹었다.
"난 걱정돼요." 시드가 여인들에게 말했다. 그리고는 너무나 조용하게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누워 있는 루시를 내려다보았다. "루시가 우리의 말을 전부 들을 수 있다면 그녀도 분명히 걱정하고 있을 거예요." 시드는 침대 위로 몸을 굽혔다. "지금 깨어나면 정말 완벽할 텐데요, 형사님." 그녀가 말했다. "형사님은 지금 깨어나서 친구들에게 우리가 찾고 있는 범인이 어떤 괴물인지 간단하게 설명해 주셔야 해요. 물론, 내가 대신 할 수도 있어요. 난 그자가 꼭 잠겨 있던 당신의 거실 창문으로 어떻게 들어갔는지 봤어요. 그 정교한 경보 장치를 간단히 꺼버렸더군요." 시드는 고개를 들어 멜로디를 정면으로 보았다. "당신 침대와 침실 벽에 튄 피를 봤어요. 당신 피였죠." 베카를 보며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난 당신이 뛰어내린 2층 창문을 봤어요. 당신은 목이 부러지는 것을 감수하고 추락했죠. 그자가 당신 목에 다시 한 번 손을 얹는 날엔 전혀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걸 알았던 거예요." 그녀는 눈에 고인 눈물 사이로 피제이를 보았다. 목소리가 잠겨서 속삭임처럼 흘러나왔다. "당신 침대 바로 밑에 두었던 총도 보았어요. 그 총이, 그리고 경찰 훈련이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거라고 생각한 거죠. 하지만 당신은 총을 사용할 기회도 잡지 못했어요."
방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시드는 모두를 둘러보았다. "아직도 걱정되지 않는다면 남편들을 생각해 봐요. 사랑하는 남자가 블루 맥코이가 같은 상황이 된다면 어떻겠어요? 그는 곧 이 끔찍한 소식을 들게 될 거예요. 루시를 영영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요."
"세상에, 이럴 수가." 베로니카가 숨을 들이쉬었다. "루시가 방금 내 손을 쥐었어요!"
13
시드는 천천히 서성거렸다. 시계를 디시 보았지만 겨우 1시 6분이었다. 조금 전에 시계를 본 뒤로 겨우 2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루크의 집은 너무나 조용했다. 그녀의 가슴에서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만 빼면.
낚시바늘에 매달린 벌레가 이런 기분이겠지. 아니면 뱀 잡는 덫에 걸린 쥐가 된 기분이든지.
물론, 루크와 바비와 토머스와 리오와 마이크는 정원에 숨어 있었다. 그들은 집을 물샐 틈 없이 감시하며 곳곳에 장치한 도청기로 도청하고 있었다.
"젠장." 그녀가 큰소리로 말했다. "마이크가 쌍방향이리면 좋겠어요. 그럼 이런 시간을 이용해 격렬한 토론을 벌일 수 있을 텐데. 싸울 것이냐, 도망갈 것이냐, 항복할 것이냐 말예요. 그리고 우리가 말하지 않은 선택권이 또 하나 있다는 걸 알았어요. 숨는 거요. 숨는 데 찬성하는 사람? 진짜 어려운 결정이란 묻는 거예요. 지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심야 토론 프로냐, 심야 음악 방송이냐 하는 거지만."
전화벨이 울렸다.
시드는 욕설을 뱉었다."알았어요."그녀는 벨이 계속 울리자 말했다. "알아요."그녀는 텔레비전을 봐서도, 음악을 들어서도 안 되었다. 말하는 것도 금지였다. 그녀가 말하면 침입자가 만들어 내는 소음을 놓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알았어요. 오던른 대위님. 얌전히 굴게요. 약속해요."
전화벨이 세 번째 울리다가 끊어졌다.
시드는 다시 적막 속에 혼자 남았다.
지난 며칠은 정신없었다. 루크는 한시도 쉬지 않고 시 외곽에서 실 대원 부인들을 위한 안전 가옥을 준비했다. 그와 피제이 벡커는 부인들이 병원에서 다른 어딘가로 이동할 때 태워다 주도록 경호팀과 운전사 팀을 조직했다. 그날 병원에서 시드가 짧은 연설을 한 이후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루크는 경찰과 핀콤을 닦달해서 루시가 전에 추려 놓은 용의자 명단에 오른 남자들을 서둘러 체포하게 했다. 지금까지 리스트에 오른 사람 가운데 여섯 명이 체포되었다. 그들은 대부분 강력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그렇지 않은 사름은 자진해서 DNA 표본을 제출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일치하는 것은 없었다.
루크는 텔레비전 기자들과 인터뷰도 했다. 눈부신 흰색 해군 제복을 입고 멋진 모습으로 범인을 화나게 할 만한-적어도 거슬리게 할 만한-말을 했다. 그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와서 한 번 잡아 봐. 나나 내 여자를 건드려 보시지>
그는 루시의 침대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고 빨리 블루를 찾길 기도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한쪽 손이 움찔한 것이 단순한 근육 경련이 아니길 기도했다. 의사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밤이면 그는 두려운 눈빛으로 시드에게 작별 키스를 하고 BUD/S 훈련을 돕는 척 집에서 나섰다. 하지만 몰래 되돌아와서 그녀를 지켰다. 연쇄 강간범에게 내놓은 미끼로 그녀가 이렇게 적막 속에 혼자 앉아 있는 동안 내내.
그는 새벽 1시 30분에서 2시 사이에 앞문으로 들어왔다. 그는 완전히 기진 맥진해서 침대에 쓰러졌다. 하지만 절대 황홀한 사랑을 놓치지 않았다.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시드는 지붕을 뚫고 나갈 정도로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곧장 스스로를 나무랐다. 샌 펠립 강간범이 나에게 전화를 걸 리가 없어. 그렇지 않은가?
그녀는 시계를 흘끔 보았다. 새벽 1시 15분이었다. 럭키겠지. 아니면 바비거나. 아니면 베로니카가 루시 소식을 전하려고 병원에서 전화했을지도 몰라.
제발, 좋은 소식이길….
벨이 다시 울리고,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시드." 낮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실례지만…." 그녀가 재빨리 말했다. "누구…."
"럭키 있어요?"
목뒤에 있던 머리칼이 쭈뼛 섰다. 하느님, 강간범이 내가 혼자 있는 걸 확인하려고 전화한 걸까?
"아뇨."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냈다. "오늘은 교습이 있어요. 누구시죠?"
"웨스예요."
팀장 웨스 스켈리. 전화 건 사람의 정체를 확인했는데도 그녀는 조금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긴장 되었다. 웨스. 잔인하게 지나를 유린하고 층계에서 나를 넘어뜨릴 뻔한 남자와 똑같은 냄새가 나는 사람. 웨스. 똑같은 머리, 똑같은 몸집, 똑같이 어조 없는 목소리.
바비는 웨스가 힘들었다고 했는데…. 정확히 얼마나? 완전히 미쳐 버릴 정도로 힘들었을까? 살인마로 둔갑할 만큼?
"혼자 있어도 되겠어요?" 웨스가 물었다. 목소리가 이상했다. 술에 취한 것 같았다.
"모르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말해 봐요."
"아니." 그가 말했다. "안전하지 못해요. 그 안전 뭐라고 하는 곳에 가서 베로니카와 멜로디와 함께 지내는 게 어때요?"
"당신은 내가 왜 거기 안 가는지 알 텐데요." 시드의 심장이 다시 뛰었다. 루크는 웨스가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루크와 웨스가 몇 년 동안 다져 온 동료 의식이 없었다. 그녀는 웨스 스켈리가 무서웠다.
철조망 문신과 상고머리. 그는 만날 때마다 어둡고 조용했다. 그리고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도 웃지 않았다.
"뭐라고요?"그가 말했다."그 범인하고 한 번 싸워 보고 싶단 얘기예요?"그는 웃었다. "럭키 오던른한테 뭔가를 기대하는 여자라면 조금 엉뚱할 거라 짐작은 했지만."
"이봐요." 그녀는 분개하며 외쳤다. "그런 말이…."
그는 갑작스럽게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욕설을 내뱉었다. 마음을 평소처럼 유지한 채 계속 그에게 말을 시켜서 자백을 받아내는 건 무리였다.
"루크, 전화 건 사람은 웨스예요." 그녀는 수화기를 벽에 걸면서 도청 장치를 향해 말했다. "당신을 찾았어요. 그리고 좀 이상한 말을 했어요."
적막뿐이었다. 집안 전체가 조용했다.
전화벨은 다시 울리지 않았다. 아무런 움직임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드는 생각했다. 만일 이것이 영화라면 카메라는 루크와 바비와 실 생도들이 완벽하게 잠복해 있는 집밖을 비출 거야. 그리고 정신을 잃은 그들의 얼굴과 몸을 묶고 있는 밧줄을 비추겠지. 그렇기 때문에 내가 도움을 요청해도 구하러 올 수 없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알려 줄 거야.
카메라는 뒤로 쑥 빠져서 웨스와 같은 짧은 머리와 널찍한 어깨를 한, 근육질 남자의 검은 형체를 비출 거야. 그는 정원을 기어서 집안으로 들어 올 거야.
나쁜 생각. 시드는 머리를 저으며 목을 가다듬었다. "음, 루크, 나 겁이 나요. 전화 좀 해주겠어요?"
여전히 적막뿐이었다.
그녀는 울리 않는 전화기를 노려보았다.
"루크, 미안해요, 하지만 나 심각해요." 시드가 말했다. "당신이 거기 있는지 알고 싶…."
그때 그녀는 들었다. 밖에서 발이 끌리는 소리를.
도망쳐!
그녀는 거실로 질주했다. 하지만 앞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안전을 위한 장치였지만 그녀는 열쇠가 없었다. 어젯밤 이 자물쇠는 안전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이젠 그렇지 않았다. 난 꼼짝없이 갇힌 거야.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요." 그녀가 말했다. 제발 나의 예감이 빗나가길, 루크가 무사하길…. "밖에서요. 제발 대답 좀 해줘요."
페인트칠로 봉쇄되어 있는 유리창은 엄청나게 두꺼워 보였다. 루시는 어떻게 침실 창문을 뚫고 떨어졌을까?
다시 뭔가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뒷문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분명 누군가 있어요."
싸우자.
그녀는 방안을 빙 돌면서 무언가를, 무언가 무기로 쓸 만한 것을 찾았다. 루크의 집에는 벽난로가 없었다. 따라서 불쏘시개 하나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신문지나 둘둘 말아서 휘두를까?
"빨리요, 루크." 그녀는 말했다. "제발…."
야구 방망이! 루크는 고등학교 때 야구를 했고, 지금도 가끔 샌 펠립 서부에 있는 야구 연습장을 찾는다고 했어.
그는 차고가 없었다. 지하실도 없었다. 그런 게 없는 사람은 야구 방망이를 어디에 둘까?
벽장.
시드는 구르다시피 벽장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미국 해군에게 지급되는 각종 오버코트가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옷들을 뒤로 젖혔다.
낚싯대, 라크로스 스틱, 다트 세트, 그리고 야구 방망이 세 개….
그 가운데 하나를 집어들었을 때 부엌문이 끼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숨어!
갑자기 숨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인 것 같았다. 그녀는 벽장 안으로 들어가서 조용히 문을 닫았다.
손바닥은 땀으로 축축하고, 입술은 바짝바짝 탔다. 심장이 너무 시끄럽게 뛰어서 다른 소리는 들리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야구 방망이를 두 손으로 그러쥐고 기도했다. 하느님, 제게 무슨 일이 생기든 상관없어요. 루크가 크게 다치지 않게만 해주세요. 목이 베어져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는 그의 시체가 뒤뜰에서 발견되는 일이 없기를….
안에 들어온 사람은 움직일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발자국 소리가 홀을 지나 침실로 갔다가 후닥닥 돌아왔다. 욕실 문이 활짝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드? 시드!"
루크였다. 루크의 목소리였다. 안도감 때문에 무릎에 힘이 빠졌다. 시드는 벽장 안에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낚싯대와 라크로스 스틱, 그리고 그 밖의 것들이 우르르 쓰러졌다.
벽장문이 활짝 열리고 루크가 보였다. 그녀는 그의 눈에 떠오른 공포를 보고 순간적으로 감동했다. 하지만 안도감이 분노로 바뀌는 순간 그건 물거품이 되었다.
"대체 무슨 짓이에요?"그녀는 방망이를 휘두르며 벽장에서 나왔다."당신 때문에 무서워 죽는 줄 알았잖아요!"
"내가?" 그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젠장, 시드. 당신은 온 데 간 데 없고 난…."
"일찍 들어온다는 전화를 해주었어야죠." 그녀는 비난하듯이 말했다.
"그렇게 일찍 온 것도 아니오." 그가 반박했다. "1시 30분이 다 되어 가는데 그게 뭐 이른 시간이오!"
그랬다. 정확히 1시 27분이었다.
"하지만…." 시드는 정신을 가다듬고 재빨리 생각했다. 내가 왜 그렇게 겁은 먹었지? 그녀는 부엌을 가리켰다. "당신, 뒷문으로 들어왔죠? 다른 때는 늘 앞문으로 왔잖아요. 자물쇠로 잠가 놓은 문 말예요, 만일 당신이 샌 펠립 강간범이었다면 난 안에 갇혔을 거예요!"
그 말에 그는 기가 죽었다. 그는 차분히 화를 가라앉혔다. 그는 문에 걸린 자물쇠를 보다가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눈에 아직도 그녀가 쥐고 있는 야구 방망이에 시선을 빼앗긴 자신이 보였다. 그는 그녀가 부들부들 떨고 있다는 것을,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젠장. 이 사람 앞에서는 울지 않을 거야.
"세상에…." 그가 말했다. "열쇠가 없소? 대체 왜 열쇠가 없는 거요?"
시드는 머리를 저었다. 모든 에너지를 동원해 울지 않는데 힘쓰느라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루크는 뒤뜰에 시체가 되어 누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 고맙습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허리띠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윙 소리를 내고 있은 핸드폰을 꺼냈다. "오던른입니다…." 그는 잠깐 상대의 얘기를 듣다가 말했다. "그래. 우리 둘 다 괜찮아. 그녀는…." 그는 그녀를 보았다.
"겁먹었어요." 시드는 말했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며 소파에 앉았다. "난 겁먹었어요. 그렇게 말해도 돼요. 인정해요."
"나라는 걸 몰랐다는군." 루크가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그리고 가상 시나리오 가운데서 <숨는> 걸 선택했어." 그는 야구 방망이를 보았다. "어느 정도의 싸움도 준비하면서."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다른 손으로 머리칼을 넘겼다. "내가 들어왔을 때 시드는 여기 없었어. 그리고…." 그는 얼어붙었다. 그의 모든 동작이 일순간에 정지했다. "안 된다고?"
시드의 맥박 수는 막 백 이하로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의 무언가가 맥박을 전보다 더 빨리 뛰게 만들었다. "뭐가 안 돼요?" 그녀가 물었다.
루크가 돌아서서 그녀를 보았다. "토마스가 당신이 전화 해 달라는 부탁을 들었다는군. 하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는군. 전화를 두 번 걸어 보고 도청기에서 전화벨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알았대. 전화기에 문제가 있소."
시드는 그를 노려보았다. "바로 몇 분 전에 전화가 왔는걸요. 웨스가 당신을 찾았어요."
"웨스가 여기로 전화를?"
"네." 시드가 말했다. "적어도 내가 전화에 뭐라고 말했는지는 들었을 것 아니에요?"
"난 그때 빙 돌아서." 그가 말했다. "집으로 오고 있었소. 기지에서 돌아오는 척하면서." 그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따라오시오. 무슨 일인지 확인할 때까지 내 곁에 붙어 있어요."
시드가 손을 잡자 그는 그녀를 소파에서 당겨 일으키며 토머스에게 말했다. "위치를 지켜. 비상 경계야. 정신 똑바로 차려." 그리고는 시드에게 말했다. "아마 아무 일도 아닐 거야."
하지만 그녀는 그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부엌 불은 아직도 켜져 있었다. 모든 것이 평소처럼 보였다. 싱크대에 설거지 거리가 좀 있고, 식탁 위에는 신문 스포츠 면이 펼쳐져 있었다.
시드가 지켜보는 가운데 루크는 수화기를 귀에 갖다댔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시드를 보았다. 그리고 핸드폰을 통해 토머스에게 다시 말했다. "전화가 끊겼어. 위치를 지켜. 지원을 요청할 테니까."
깨끗하게 잘려 나갔다.
아마 칼이겠지. 가위일지도 몰라.
럭키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이마를 주무르며 둔중한 두통을 떨쳐 버리려 애썼다.
소용없었어.
누군가 오늘밤 전화선을 자를 정도로 집에 근접한 것이다. 그놈은 자신을 노리고 있는 베테랑급 네이비 실 두 명과 젊고 영리한 실 생도 세 명을 골탕 먹였다.
그놈은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메시지를 보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들어 올 수 있다는 것을.
그놈이 여기 있었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드와 함께. 그놈은 안으로 들어와 전화선을 자른 칼로 시드의 목을 자르고 내가 뒷문으로 오기 전에 사라졌을 수도 있어.
그 생각을 하자 뱃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왔다. 특별 수사대 핀콤과 경찰관들이 집안을 이 잡듯 살피는 동안 럭키는 시드와 함께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는 보호하듯이 그녀의 어깨를 안고 있었다. 누가 보든 말든 상관없었다.
"미안하오." 그는 벌써 열네 번째 그 말을 했다. "그가 어떻게 우리 눈을 피했는지 생각하는 중이오."
"괜찮아요." 그녀가 말했다.
"아니오, 내가 안 괜찮소." 그는 머리를 저었다. "오늘밤 우리 모두 주위가 산만했소. 12시 15분쯤 바비가 라나 퀸에게 삐삐를 받았소. 긴급하다는 메시지를 보냈기 때문에 바비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소. 우리 나머지는 집을 주시하고 있었소.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소. 라나는 웨스가 술에 잔뜩 취해서 집에 찾아왔다고 했소. 하지만 웨스는 얘기 좀 하자고 해놓고 아무 말 없이 사라졌소. 웨스한테서 자동차 열쇠를 겨우 빼앗았지만 그는 걸어서 근처 술집으로 갔소. <덴들리온>이라는 곳이오. 라나는 일단 그가 술집에 발을 디디면 그곳을 싸움터로 만들어 버릴 게 뻔해서 걱정스러운 마음에 뒤쫓아갔소. 그녀는 안으로 들어갔고, 웨스도 누그러지는 듯했지만 함께 나오려 하질 않았소. 그래서 바비에게 전환한 거요." 럭키는 한숨을 쉬었다. "바비는 프리스코에게 전화를 걸었소. 하지만 프리스코도 미아와 타샤가 걱정되어 그들만 남겨둘 수 없었소. 그동안 시간이 흘렀소. 라나가 바비에게 다시 삐삐를 쳐서 덴들리온 사람들 틈에서 웨스를 놓쳤다고 말했소. 그 때는 그가 어디 있는지 확실히…."
"잠깐만요." 시드가 말했다. "라나가 웨스를 잃어버렸다고요?"
"아니, 사실은 아니오." 럭키가 말했다. "그녀는 20분 정도 웨스를 못 보았다고 했지만 남자 화장실에 있었소."
"웨스가 20분 동안 남자 화장실에 있었다고요?"
럭키가 발끈하며 말했다. "아니오." 그는 말했다. "당신이 무슨 생각하는지 알고 있소. 하지만 절대 아니오."
그녀는 그의 눈을 뚫어져라 보았다. "덴들리온은 여기서 차로 4분밖에 안 걸려요."
"웨스는 용의자가 아니오."
"미안해요, 루크. 하지만 난 아직 그 사람을 의심해요."
"라나가 오토바이 열쇠를 빼앗았소."
"머리를 쓴 거죠." 그녀가 반박했다. "알리바이를 만들려고요. 당신들의 주의가 산만한 시각에, 전화선을 잘려 나간 바로 그 시각에 자신이 화장실에 있었다고 사람들이 믿게 하려고요."
럭키는 머리를 저었다. "아니오." 그가 말했다. "시드, 웨스는 절대 아니오. 그럴 리가 없소. 날 믿어 주시오."
그녀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오늘밤 그녀는 엄청나게 겁을 먹었다. 루크는 벽장 문을 열었을 때 완전히 넋이 나간 그녀의 모습을 목격했다. 그는 더욱 그놈을 잡고 싶은 열망에 불타올랐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확신한다면… 내 용의자 명단에서 지우죠. 웨스는 아니에요."
그녀는 나를 놀리고 있는 게 아냐. 감싸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는 받아들이는 거야. 믿음으로. 내가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무언가를. 그녀는 나를 그토록 믿는 거야. 정말 좋은 느낌이었다. 정말 좋았다.
럭키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특별 수사대의 면전에서. 경찰 서장의 바로 앞에서.
"내일…." 그가 말했다. "웨스에게 말하겠소. 자진해서 DNA 표본을 제출하면 연구실로 보내서 공식으로 용의자 명단에서 지워 버릴 수 있을 거라고 말이오."
"그럴 필요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는 그녀에게 다시 키스했다. 가슴에 묵직한 무언가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애써 가볍게 말하려 했다. "숙취 때문에 머리가 아픈 웨스 스켈리를 귀찮게 할 생각을 하면 나도 즐겁지는 않소. 하지만 내일은 특별히 할 일이 없소."
"내일은." 시드가 그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당신 여동생이 결혼하는 날이에요."
14
루크 오던른은 여동생의 결혼식에서 울었다.
시드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울지 않았다면 놀랐을 것이다.
정장 군복을 입은 그의 모습은 정말 멋졌다. 아무것도 입지 않았을 때만큼이나 멋있었다.
그의 동생 엘렌 또한 그를 닮아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금발인 오빠와 달리 검은머리에 피부도 검은 편인데도. 그녀의 신랑 그레고리 프라이스는 평범했다. 머리도 듬성듬성 빠지고, 안경을 쓴 수더분한 모습이었다.
결혼식에는 신랑 신부의 친척과 친한 친구들만 모였다. 시드는 그 속에 섞여 새롭게 탄생한 부부가 댄스 플로어에서 춤추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레고리를 보자 시드는 희망이 생겼다. 그레고리처럼 평범한 사람도 엘렌과 결혼했잖아. 평범한 나라고 해서 루크와 잘되지 말란 법은 없어.
"오늘밤 당신이 얼마나 눈부시게 아름다운지 내가 얘기했소?"
시드는 깜짝 놀란 눈으로 루크를 보았다. "과장이 좀 심하지 않아요?" 그녀는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드레스는 검은색에 단순한 디자인이었다. 그래, 이 옷이 나의 체형의 결점을 감추고, 장점은 두드러지게 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단지 눈가림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그녀는 오늘 머리 손질을 시간 들여 했고, 살짝 화장까지 했다. 하지만 기껏해야 예쁘게 봐줄 정도였다. 무난하고, 편안하게. 결코 <눈부시게>라는 단어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특히 <아름답다>는 말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루크는 진짜 놀란 듯했다."당신은 내가…."그는 말을 자르고 웃었다."이런."그가 말했다."아니오. 싫소. 내가 당신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데 대해 시비 걸 생각이라면 그만두시오."그는 그녀를 잡아당겨 입을 맞추었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키스가 아니라 두 사람만을 위한 키스라서 그녀는 더욱 놀랐다. 그는 그녀의 뼈를 녹여 흐물흐물하게 만드는 그런 키스를 했다. 그녀는 어지러워서 그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밤 당신은 눈부시게 아름답소." 그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당신은 이렇게 말하면 되는 거요. <고마워요, 루크>."
"고마워요, 루크." 그녀는 겨우 말했다.
"그 말을 하기가 그렇게 힘드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는 천국처럼 푸른 눈을 가졌어. 이 남자야말로 눈부시게 아름다워. 그녀는 그의 눈에 떠오른 열기를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는 그녀를 댄스 플로어로 이끌고 음악에 맞추어 천천히 움직였다.
그는 나를 원해.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두 사람 정말 잘 어울리네요." 백발에 빼빼 마른 그레고리의 어머니가 아들과 닮은 따뜻한 웃음을 머금고 그들 곁을 지나가며 윙크를 했다. "다음엔 두 분 결혼식에서 춤추게 되겠죠, 그렇죠, 루크?"
오, 이런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시드는 애써 얼굴에 웃음기를 덧칠한 채 루크 대신 재빨리 대답했다. 그를 구해주기 위해서. 아니, 그가 허둥거리며 더듬더듬 부정하는 소리를 듣게 될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그런 예상을 하긴 너무 이른 것 같은데요, 프라이스 부인." 그녀는 부인에게 크게 말했다. "루크와 저는 사귄 지 얼마 안 되었거든요."
"글쎄요, 오늘은 내 아들이 결혼하는 날이니까 난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 생기길 바란답니다." 프라이스 부인은 감격스러운 듯이 말했다. "게다가 내 예상은 별로 틀리지 않았어요."
"그럼…." 프라이스 부인이 듣지 못할 정도로 멀어지자 시드는 루크에게 속삭였다. 이 상황을 농담으로 바꿀 생각이었다. "내가 복권에 당첨될 거라고 빌어주지. 현금 좀 만져 보게 말이에요. 내 고물 차는 완전히 손을 봐야 하거든요." 그녀가 바라던 대로 루크는 웃음을 터뜨렸다.
휴, 위기를 모면한 거야. 하느님 고맙습니다. 책임 있는 약속에 거부감을 느끼는 루크 같은 남자와 <결혼>이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큼 긴장감을 조성하는 일은 없을 거야.
시드는 그가 자신을 보며 답답한 벽을 느끼게 되길 바라지 않았다. 그가 자신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결혼식 종이 울리며 <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동화 같은 결말을 바라고 있을 거라고 추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자신이 실현 불가능한 결혼을 조금이라도 기대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결혼…. 시드와 루크가 결혼을 한다고?
말도 안 돼. 미친 짓이야. 그건….
하지만 머리 속에서 깨끗이 떨쳐버리기 힘든 생각이었다. 특히 오늘은.
오늘 오후 자동 응답기에 메시지가 하나 녹음되어 있었다. 뉴욕의 <팅크> 지에서 온 전화였다. 그녀는 몇 달 전에 여성의 안전에 대해서 쓴 기획 기사와 연쇄 강간범 추적 과정을 심도 있게 다루고 싶다는 내용의 글을 이력서와 함께 <팅크> 지에 보냈다. 그런데 그녀의 이력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이력서 더미에서 최상위로 부상한 것이다.
<팅크> 지에서는 시드가 발행인이자 편집자인 에일린 헤스와 면접을 하길 바랐다. 헤스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며칠간 피닉스에 갈 예정이었다. 시드에게는 뉴욕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보다 피닉스에서 그녀를 만나는 것이 더 편리할 수도 있었다.
시드는 뉴욕에 전화를 걸어 샌 펠립 강간범이 잡히기 전에는 캘리포니아를 떠날 수 없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일자리를 놓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서 다음 기회에 잘 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흔쾌히 기다려 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이제 다음 주라도 아니, 다음 달이라도 뉴욕으로 날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팅크> 지에서 일할 수 있었다.
나는 물론 <팅크> 지에서 일하길 원해. 정말?
루크가 목에 키스를 하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녀는 루크를 원했다. 남은 여생을 그와 함께 보내고 싶었다. 충분한 각오도 되어 있었다.
헛된 망상이야.
문제는 내가 상상력이 너무 풍부하다는 거야. 그리고 그 상상이 지나치게 생생하다는 거지.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 관계를 진짜처럼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건 그녀에게 식은 죽 먹기였다.
그가 다시 키스를 하자 시드는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그의 입술이 가볍게 와 닿았다. 순간 그녀는 자신이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 함께 있으면 속임수와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그들이 연인 사이인 것은 맞지만 그녀가 실제로 그와 동거를 시작한 건 아니었다. 그건 그냥 눈속임일 뿐이야. 그가 친구들에게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긴 했어. 하지만 나에게 직접 한 적은 한 번도 없어. 설령 나에게 사랑한다고 했다손 치더라도 그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야. 그는 로사리오(색마, 난봉꾼) 같은 사람이니까.
나는 지금 그와 함께 그의 여동생 결혼식에 와 있어. 물론 진짜 한 쌍의 연인처럼 보이지.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아. 우린 함께 일하는 친구 사이일 뿐이야. 침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친구 사이일 뿐이야.
그 이상을 기대하면 안 돼. 그건 실수야.
시드는 루크의 품에 포근히 안긴 채 자신이 이미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앞으로 다가올 고통을 꿋꿋이 견디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다리에 붙인 반창고를 떼어내는 것처럼 재빨리 해치우고 극복하는 거야. 그 편이 오래 묵히는 것보다 훨씬 덜 아플 테니까.
나는 범인을 잡고 나면 곧바로 뉴욕으로 갈 거야.
럭키와 시드가 피로연을 마치고 나올 때 전화가 왔다.
엘렌과 그레고리는 신혼 여행을 떠났고, 파티는 밤 11시가 되어서야 겨우 끝났다. 럭키의 삐삐와 핸드폰이 동시에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에 불길한 생각을 했다. 또 어떤 여인이 당한 건 아닐까. 하지만 곧 좋은 소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루시 맥코이가 의식 불명 상태에서 깨어났다든지, 드디어 블루를 찾아내 집으로 오는 중이라든지….
삐삐에 적힌 번호는 프리스코의 것이었다. 핸드폰에서 들려 온 목소리도 그였다.
"어이…." 프리스코가 말했다. "자네 거기 있었군. 좋은 소식이야. 범인을 잡았어."
럭키는 전혀 상상도 못한 얘기라 전화기를 놓칠 뻔했다. "다시 말해 봐."
"마틴 타우스야." 프리스코가 말했다. "전에 해군이었고, 1996년 봄과 여름 사이에 여기 코로나도에 입대해서 복무했어. 96년 말에 사소한 말썽이 여러 번 생겨 퇴역했어. 불명예 퇴역 당할 만큼 큰 사건은 없었지. 98년 초에 네바다에서 풍기 물란-노출-죄로 복역했어. 전에도 성추행 때문에 두 번 체포당했다는군. 하지만 두 번 다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어. 오늘 저녁에 샌 펠립 경찰이 참고인 조사명목으로 소환했는데 약 20분 전에 자백하는 장면을 비디오로 녹화했어."
시드는 근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강간범을 잡았다는군." 루크가 시드를 보며 말했다.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었다.
"범인이 확실하대요?" 그녀는 루크가 프리스코에게 묻고 싶은 질문을 했다.
"범행 당시 상황을 꽤 상세하게 묘사했어." 프리스코가 말했다. "경찰 서장은 기자 회견을 준비하고 있어. 밤 11시 뉴스에 내보내려고. 난 경찰서로 가는 중이야. 그리로 오겠어?"
"곧 갈게." 럭키가 전화를 끊었다.
시드는 웃지 않았다. 그녀는 매우 회의적이었다. "정확한 증거가 있대요? 그 남자가…."
"자백했소." 그가 말했다. "아주 자세하게."
"우리도 만나 볼 수 있을까요?" 그녀가 물었다.
"한번 가봅시다."
시드는 비디오를 정지시키고 노트북 컴퓨터로 시선을 돌렸다. 마틴 타우스라는 이름의 남자가 어떻게 루시 맥코이를 벽에 집어 던졌는지 묘사하는 소리를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희생자들의 이름을 모조리 알고 있었고, 그들이 얼마나 다쳤는지도 알았다. 범인과 동일한 키에, 몸집, 똑같은 머리 모양-상고머리-이었다.
경찰 서장의 기자 회견이 끝나고 시드와 루크는 타우스를 만나기 위해 몇 시간 동안 기다렸다. 하지만 경찰 쪽에서 취조실에는 특별 수사 팀의 핀콤 요원 세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여보내지 않았다. 경찰이 범행 현장에 남아있던 혈흔과 DNA가 일치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혈액을 채취하려 하자 타우스는 난동을 부렸다. 그는 자신의 머리칼이나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소송을 걸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경찰에선 이런 경우 보통 영장을 발부받아 범인의 집을 수색해 머리빗 같은 것에서 머리칼을 채취해 DNA 테스트에 쓴다. 하지만 타우스는 부랑자였다. 그가 사는 곳은 강가의 다리 밑이었다. 게다가 머리빗 같은 건 아예 없었다.
후앙, 서든버그, 노박이 그의 곁에서 테스트에 응해 줄 것을 설득하고 있었다. 일단 설득에 성공하면 결과가 나올 때까지 며칠이 걸린다. 하지만 테스트 결과와 마틴 타우스의 자백 비디오 테이프는 모든 의혹을 불식시키고 그의 유죄를 확실히 증명할 것이다. 그럼 재판도 없이 곧장 형이 선고될 것이다.
마틴 타우스는 오래오래 감옥에서 썩겠지.
루크는 시드의 어깨 너머로 노트북 컴퓨터 화면을 훔쳐보았다. 어젯밤 경찰서로 오기 전에 그녀는 그를 설득해 잠깐 집에 들러서 컴퓨터를 갖고 왔다. 아무런 기약 없이 무작정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사건을 다각도로 조명하는 기획 기사에서 신문에 낼 조각 기사까지 여러 가지 글을 썼다.
"홈쳐보지 말아요." 그녀는 경고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키보드를 날아다니며 <팅크> 지에 보낼 기사를 쓰고 있었다. 조각 기사는 벌써 <샌 펠립 저널>에 전자 우편으로 보냈고, 그쪽에서 전화로 그녀의 가시가 <USA 투데이> 지에 실리게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래, 당신은 믿고 있군?" 루크가 물었다. "당신은 그자가 우리가 찾던 범인이고, 이제 모두 끝났다고 믿는 거요?"
"왠지 김빠지는 결말이긴 해요." 그녀도 인정했다. "하지만 현실 세계가 영화처럼 언제나 박진감 넘치는 건 아니잖아요. 난 오히려 이런 편이 마음에 들어요."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려고요?"
그는 피곤한 듯이 취조실 탁자에 앉았다. 정말 기나긴 밤이었다. 벌써 아침 8시였지만 그들은 둘 다 결혼식에 입고 간 복장 그대로였다.
"그렇소, 난 그자를 한 번 보고 싶었소." 그가 말했다. "1분 1초라도 같은 방에서 그자를 보고 싶었소. 밖에서 버티고 서 있으면 경찰들도 결국 날 들여보낼 줄 거라고 생각했소."
"그래서요?"
"그래서 안으로 들어갔소. 그자는…." 루크는 머리를 저었다. "그자는 우리가 찾는 범인이 아닌 것 같소."
"루크, 자백했잖아요."
"자백 같은 건 나도 할 수 있소. 하지만 내가 범인은 아니잖소?"
"비디오 테이프를 보고도 그래요? 정말 소름 끼치…."
"내가 틀렸을지도 모르지." 그가 말했다. "난 그저… 뭔가 걸리는 게 있는데 그게 뭔지 콕 집어 낼 수가 없소."
"잠이 부족해서 그럴지도 몰라요."
"잠이 부족한 게 어떤 느낌인지는 나도 알고 있소. 그건 아니오. 피곤한 건 사실이지만, 뭔가 잘못된 것이 있소." 그가 말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두 가지요. 경찰 서장과 장단을 맞추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DNA 테스트 결과가 일치한다는 결론이 나올 때까지는 사건 파일에 종결 도장을 찍지 않겠다는 거요."
시드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루크를 보았다. "루크, 그럼 며칠이 더 걸릴 거예요."
그는 멋진 미소를 피곤한 듯이 지어 보였다. "당신도 며칠 동안은 내 집에 더 있어 줘야겠소. 나쁜 일이지?"
그녀는 파일을 저장하고 컴퓨터를 껐다. "사실은…." 그녀는 신중하게 어휘를 선택해서 말했다. "마틴 타우스가 어제 잡혀서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게 되었거든요. 이제 면접을 보러 피닉스로 갈 수 있어요."
그는 의자에 털썩 기대며 입을 쩍 벌렸다. "언제부터 피닉스로 가려고 했소?"
"면접을 피닉스에서 봐요." 그녀가 말했다. "직장은 뉴욕이고요, 기억하죠? <팅크> 지요. 거기 편집부 필자로 이력서를 보냈다고 말했잖아요."
"뉴욕?" 그는 욕을 했다. "시드, 그건 피닉스보다 더 최악이오. 당신은 뉴욕이란 말은 꺼내지도 않았잖소?"
"그럼 그런 직장이 어디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여기." 그가 말했다. "여기 어디일 거라고 생각했소. 아니면 샌디에이고나. 이런, 시드, 당신 정말 뉴욕에서 살고 싶소?"
"내." 그녀가 말했다. "그래요."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어디에 살든 상관없으니까. 그녀에게 선택은 단 두 가지로 갈라졌다. 루크와 함께 사는 것이 첫 번째 선택이었지만 그건 너무나 현실성이 없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루크 없이>라는 제목 아래 요약되었다. 뉴욕, 샌디에이고, 시카고. 모두 똑같은 느낌일거야. 지옥처럼 외롭겠지. 적어도 잠깐 동안은.
"우와." 루크가 말하며 눈을 비볐다. "머리가 멍하군. 난…." 그는 머리를 저었다. "생각중이오. 잘 모르겠지만 시간을 두고 생각해 봐야겠소."
시드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루크, 현실을 직시해요. 우리가 어떤 사이였는지 정확히 알고 있잖아요. 재미있고 좋았지만 심각한 건 아니었어요. 당신 입으로 말했잖아요. 심각한 일은 안 한다고."
"내가… 생각이 바뀌었다면?"
"그게 그저 당신 생각일 뿐이라면요?" 그녀는 부드럽게 반박했다. "그리고 몇 년 동안이나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기회를 포기했는데, 당신 생각이 바뀐 게 아니라는 게 밝혀지면요?"
그는 목을 가다듬었다. "난, 그게, 당신이 진짜 내 집으로 들어와 살면 좋겠소."
시드는 믿을 수가 없었다. 루크가 나와 동거하길 바란다고? 절대 심각한 일은 하지 않는다는 남자가? 아주 잠깐 동안 그녀는 그가 진짜로 자신과 함께 살길 원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곧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여자에게 차이는 입장이 되는 데 익숙하지 않을 뿐이야. 그건 경쟁심이야. 그는 현실적으로 아무리 바보 같은 생각일지라도 나를 조금만 붙잡아 둘 수 있다면, 그래서 승리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거야.
하지만 일단 나를 소유하고 나면 싫증을 낼 거야. 그럼 내가 먼저 짐 싸들고 뛰쳐나오겠지. 당장은 아니더라도 결국엔 그렇게 될 거야. 그럼 나는 코로나도에서 <루크 없이> 살게 될 거야.
"그렇게." 시드가 천천히 말했다.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는 생각을 많이 해봐야죠. 우리 둘 다요."
"나는 많이 생각해 봤소." 루크가 말했다. "나도… 완전하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하지만…."
"다시 생각해 봐요." 시드는 마음이 아팠다. 그를 거부하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지금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게 아냐. 그녀는 속으로 말했다. 진심이 아냐. "내가 피닉스에 간 사이에 잘 생각해 봐요."
"뉴욕이래." 럭키는 병원 침대 옆에 앉아서 루시 맥코이에게 말했다. "직장이 뉴욕에 있대. 시드는 지금 면접을 보고 있어. 피닉스에서. 당연히 직장을 얻겠지. 누가 그녀를 마다하겠어? 똑똑하고, 재미있고, 글도 굉장히 잘 쓰는데. 그녀는… 완벽해."
루시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의 뇌는 아직도 의식 불명 상태를 헤매고 있었다.
럭키는 그녀의 손을 들어 입을 맞추었다. "루시, 눈 떠 봐." 그가 말했다. "일어나서 충고 좀 해줘."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진짜 멍청이가 된 기분이야. 그런 고물차를 몰고 혼자 피닉스에 가게 놔둔 것도 그렇고, 그리고…." 그는 웃었다. "루시,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믿지 못할 거야. 시드에게 진짜 동거하자고 말했어. 정말 바보 같지? 그 말이 내 입에서 나왔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 내 말은… 나는 왜 일을 뜨뜻미지근하게 처리할까?" 그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난 그녀를 사랑해. 진심이야. 전에는 당신과 블루 사이를, 조와 베로니카 사이를 이해하지 못했어. 좋아 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 하지만 시드를 만나고 나자 모든 것이 달라졌어.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생겼어. 그런데 시드는 뉴욕으로 가려고 해."
"그런데 왜 결혼하자고 말하지 않았어요?"
럭키는 벌떡 일어나서 돌아보았다. 베로니카가 문가에 서 있었다.
그는 욕을 했다. "베로니카, 대령님한테 잠복하는 법에 대한 교육이라도 받은 거요? 간 떨어질 뻔했잖소."
그녀는 방안으로 들어와 침대 반대쪽에 앉아 루시의 손을 잡았다. "안녕, 루시. 나 또 왔어." 그녀는 럭키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엿들어서 미안해요. 그런데 왜 시드에게 결혼하자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베로니카가 대신 말했다. "겁이 났기 때문이겠죠."
럭키는 이를 갈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한편으로는 나를 차버릴까 봐 겁이 났고, 한편으로는 승낙할까 봐 겁이 났소."
"글세…." 베로니카는 활기찬 영국식 말투로 말했다. "당신이 뭔가 정확히 하지 않으면 시드는 뉴욕으로 가버릴 거예요."
바깥 복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병실 문이 활짝 열렸다. 젊은 간호사가 몸으로 문을 막았다. "미안합니다만 먼저 의사 선생님의…."
"공항에서 오는 도중에 의사하고는 벌써 얘기가 끝났소." 복도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완전히 사무적이었다. 느리게 끌리는 남부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 "의사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소. 당장 아내를 봐야겠소."
블루 맥코이.
럭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블루 맥코이 소령이 문자 그대로 간호사를 번쩍 들어 옆으로 밀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루시…." 그의 안중에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여인밖에 없었다.
블루는 피곤해 보였다. 몇 주 동안 면도도 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도착하기 직전에 간단한 샤워를 한 듯 머리칼이 젖어 있었다. 분명 위생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다. 루시를 내려다보는 블루의 표정은 처절했다. 얼굴에 난 멍 자국과 상처, 머리를 감고 있는 새하얀 붕대. 블루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내가 왔소, 여보." 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갈라졌다. "늦게 와서 미안하오. 하지만 이렇게 왔잖소." 루시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블루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루시, 힘내시오. 의사가 당신은 괜찮을 거라고 했소. 당신은 그저 눈만 뜨면 되는 거요."
또 묵묵부답이었다.
"힘들다는 거 알고 있소. 당신이 심한 고통을 당했다는 것도 알고. 그냥 잠든 채 다 잊어버리고 싶겠지. 하지만 내가 왔으니까 이제 당신을 도울 거요. 뭐든지 말만 하시오." 블루가 아내에게 말했다. "다 잘될 거요. 약속하겠소. 우리가 함께 있는데 안 될 일이 뭐가 있겠소." 블루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럭키는 베로니카의 손을 잡고 문으로 끌고 갔다.
캐터라너토 대령이 복도에 있었다. 베로니카는 남편을 향해 달려갔다. "조!"
조 캣은 엄청난 거구였다. 그는 아내를 단숨에 감싸안고 키스했다. 아니, 그는 그녀를 들이마셨다. 조가 베로니카에게 한 것은 키스 이상이었다. 럭키는 시선을 돌렸다. 뭔가 매우 사적인 장면을 엿보고 말았다는 느낌이 들었지 때문에.
조의 거친 속삭임이 들려 왔다. "당신은 괜찮소?"
"괜찮아요." 베로니카가 말했다.
"루시는…?"
"아직…." 그녀가 말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어요."
"의사는 뭐라고 하오?" 조가 물었다. "깨어날 가망이 있소?"
"그러길 바라야죠." 그녀가 말했다.
럭키는 바로 몇 시간 전에 의사와 병세에 대해 얘기를 했다. 그는 조 쪽으로 돌아서다 급히 얼굴을 돌렸다. 그렇게 덩치 크고, 무시무시한 조 캣이 아내에게 매달려 울고 있었다.
"다 잘될 거예요." 베로니카가 울먹이며 조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블루도 왔고, 당신도 왔으니… 모두 다 잘될 거예요. 난 알아요."
그때 럭키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는 루시와 블루가 공유한 것을 원했다. 조와 베로니카가 발견한 그 무엇을 원했다. 그리고 평생 처음으로 그는 자신도 <그것>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시드가 곁에 있다면 모든 일이 다 잘되었다.
그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시드에게 청혼할 작정이었다.
복도 끝에 있는 문이 열리더니 나머지 알파 분대원들이 들어왔다. 하버드, 카우보이, 크래쉬였다. 미치 쇼도 보였다. 럭키는 그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며 미치에게 의문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내가 이들을 찾았을 때." 그가 설명했다. "임무를 완수하고 산에서 내려오던 중이었어."
"루시는 어때?" 하버드가 물었다. "우리는 가까이 갈 수가 없어. 블루하고 조만 샤워할 시간이 있었거든."
"아직 의식 불명 상태야." 럭키가 말했다. "지금이 고비야. 앞으로 어떻게 될지 곧 알게 된다더군. 담당 의사는 블루의 목소리를 들으면 루시가 깨어날지도 모른다고 희망을 걸고 있어." 그는 약간 뒤로 물러났다. "이런, 냄새가 지독하군." 그들에게선 지저분한 개와 퀴퀴한 장작 연기에서 나는 것 같은 냄새가 났다.
퀴퀴한 연기….
럭키는 욕설을 내뱉고 핸드폰으로 시드의 번호를 눌렀다. 제발, 시드가 전화를 받기를….
신호가 한 번도 채 울리기도 전에 시드가 받았다. "여보세요?"
"퀴퀴한 담배 냄새요." 럭키가 말했다. "그게 바로 마틴 타우스에게 걸리는 부분이었소."
"미안합니다만…." 시드가 말했다. "전화하시는 분은 누구시죠? 정신 나간 친구 루크 오던른 씨는 아니겠죠? 앞 뒤 사정 다 빼먹고 다짜고짜 할 말만 하는 사람이요?"
"시드…." 그가 말했다. "미안하오, 하지만 내 말 들어보시오. 마틴 타우스는 범인이 아니오.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소. 난 그자 바로 옆에 서 있었소. 기억나오? 뭔가 찜찜했지만 조금 전까지도 정확히 뭔지 몰랐소. 당신은 층계에서 부딪친 남자에게서 웨스 스켈리 같은 냄새가 났다고 했소. 퀴퀴한 담배 냄새 말이오."
오랜 적막이 흐른 뒤에 시드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틀렸을지도 모르잖아요. 당신이 틀렸을지도 모르고요."
"그럴 수도 있지." 그가 인정했다. "하지만 아니오. 우리 둘 다 틀리지 않았소. 조심해야 하오, 시드. 당장 집으로 오시오." 그는 말을 정정했다. "아니, 병원으로 오시오. 하지만 주차장에 인적이 없으면 밖으로 나오지 마시오. 차에서 나오지 말고 계속 움직이며 내게 전화하시오. 마중 나갈 테니까 알았소? 젠장, 내가 왜 당신 혼자 피닉스에 가게 내버려두었는지 모르겠소!"
또 한 번 긴 정적이 흘렀다.
"글쎄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무척 궁금해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요, 면접은 정말 성공적이었어요."
"면접 따위는 집어치우시오." 럭키는 극도로 흥분해서 소리쳤다. "당신 때문에 미치겠소. 빨리 오시오. 멀쩡한지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것 같소. 그리고 집에서 꼼짝 말고… 결혼합시다, 젠장!" 순간 그는 하버드와 카우보이, 미치와 크래시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화선 저쪽에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이런…." 럭키가 말했다. "이런 식으로 말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카우보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하버드가 팔꿈치로 그의 가슴을 쿡 찌르자 즉시 잠잠해졌다.
럭키는 눈을 질끈 감고 뒤로 돌았다. "시드, 제발 돌아와서 얘기 좀 합시다."
"얘기요." 그녀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그녀는 헛기침을 했다. "네, 그게 좋겠군요. 당신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벌써 반쯤 왔거든요."
15
싸운다, 도망간다, 숨는다, 항복한다.
숨는 건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불가능했다. 제발 받아줘요, 제발. 시드는 핸드폰으로 루크의 번호를 누르며 속으로 기도했다.
그녀는 한 손으로는 운전대를 꼭 쥐고 다른 손으로는 전화들 들고 있었다. 옆 좌석에는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오던른입니다."
"루크, 하느님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만 누구십니까?" 루크가 크게 말했다. "잘 안 들리는군요. 잡음이 많은데요. 잠깐만요, 장소를 옮겨서…." 잠깐 정적이 흐르다가 그가 평소의 목소리로 다시 전화를 받았다. "미안합니다. 다시 시작하죠. 오던른입니다."
"루크, 시드예요. 문제가 생겼어요."
그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녀의 말을 끊고 말하기 시작했다. "와, 정말 마음이 통하는군! 마침 나도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 좋은 소식이 있소. 루시가 정신을 차렸소! 블루가 돌아온 지 한 시간만에 눈을 떴소. 루시가 블루를 쳐다보고 <까까머리가 됐어요. 머리칼을 전부 밀어 버렸어요> 하고 말했소. 그렇게 오랫동안 의식 불명 상태였던 사람이 처음 내뱉은 말이 그거란 말이오. 루시도 어쩔 수 없는 여자요. 죽다 살아났는데 머리칼이 무슨 대수요? 게다가 머리칼을 밀었다는 걸 알고 있다니, 정말 신기하지 않소? 지난 1주일 동안 일어난 일을 전부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소."
"루크…."
"그러자 블루가 <난 당신이 군인 머리를 해도 아주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소, 루시> 하고 말했소. 그때 우리 네이비 실 일곱 명이 전부 두 살 먹은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소. 그리고…."
"루크."
"미안하오 긴장이 되어 그랬소. 당신이 전화를 걸어서 지옥에나 가라고 할까 봐 겁이 났소."
시드는 그가 말을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내가 전화한 건…." 그녀는 백미러를 흘끔거리며 말했다.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에요. 내가 어디 있는지도 잘 모르는데… 누군가 미행을 하는 것 같거든요."
럭키의 심장이 멈추었다. "진짜요?" 그가 말했다. "장난 삼아 만들어 낸 가상 시나리오 아니오?"
"진짜예요. 한 25킬로미터 전부터 어떤 차가 따라오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전화기 속 시드의 목소리는 아주 작게 들렸다. "내가 속도를 줄이면 그 차도 줄여요. 내가 속도를 올리면 그 차도 내고요. 지금 생각해 보니 조금 전 주유소에서 차를 세웠을 때 저 차를 본 것 같아요."
"지금 어디 있소?" 그가 물었다.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지만 목구멍이 꽉 막혔다. 그는 남자 화장실에서 목을 빼고 소란스러운 병원 휴게실 너머로 프리스코가 돌아볼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친구에게 남자 화장실로 따라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78번 도로예요." 그녀가 말했다. "캘리포니아 주 바로 안쪽이에요. 10번 도로에서 남쪽으로 65킬로미터쯤 왔고, 8번 도로로 향하고 있어요. 지도를 보면 50킬로미터 이내에는 사람 사는 것이 없어요. 경찰에 전화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안녕하세요, 전 지금 운전하고 있는데요. 차가 한 대 따라오거든요…?> 그냥 우연일지도 몰라요, 아마…."
"절대." 럭키가 말했다. "차를 세우지 마시오. 계속 움직이시오, 시드."
프리스코가 궁금한 표정으로 남자 화장실로 들어왔다.
"대령님하고 선임 참모를 불러주고, 지도를 갖다 줘." 럭키가 말했다. "시드가 루시를 저 지경으로 만든 작자한테 미행당하고 있는 것 같아."
프리스코는 경찰 서장의 기자 회견장에 함께 있었다. 거기에서 샌 펠립 경찰과 핀콤이 강간범을 잡았다고 공식 발표했다. 하지만 프리스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지체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람을 데리러 갔다.
"시드, 당신에게 가는 길을 찾고 있소." 루크가 말했다. "계속 남쪽으로, 서쪽으로 가시오, 알겠소? 78번 도로에서 벗어나지 마시오. 알겠소?"
시드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알았어요."
"따라오는 차에 대해 말해 보시오."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차분하고 강하게 들렸다.
그녀는 백미러를 쳐다보았다. "진한 청색이에요. 흉측하게 생겼어요. 70년대 후반에 나온 크고 오래된 세단 차종인데…."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진한 색깔, 오래된 기종의 흉측한 세단. 그것은 지나가 강간당한 날 밤 집 앞에서 처음 본 자동차를 묘사할 때 그녀가 쓴 말이었다.
따라오던 차가 속력을 냈다. 차가 중앙선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추월할 건가 봐요." 시드는 크게 안도하며 루크에게 말했다.
세단은 더 속력을 내서 그녀의 옆으로 붙고 있었다.
"내 착각이었어요." 그녀는 말했다. "미안해요, 정말 바보 같지만…."
세단은 그녀와 나란히 달렸다. 그녀는 차창을 통해 운전자를 보았다. 떡 벌어진 몸집이 거대한 미식축구 선수처럼 보였다. 갈색이 도는 금발에 짧은 상고머리였다. 게다가 얼굴에 올이 나간 팬티 스타킹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차가 쌩하고 속력을 내는 바람에 전화기를 떨어뜨렸다.
"상보!" 럭키는 핸드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젠장. 그녀는 상보가 뭔지 몰라. "시드! 젠장, 무슨 일이 벌어진 거요?"
조 캣과 하버드가 남자 화장실로 들어왔다. 두 사람 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다행히 하버드가 지도를 가지고 있었다.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럭키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하버드에게 지도를 받아 펼쳤다. "지금 78번 도로에서 남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는 지도에서 도로를 찾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도대체 78번 도로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왜 95번 도로로 안 가고? 8번 도로로 가면 피닉스에 더 가까운데. 왜…?" 그는 깊이 심호흡을 했다. "좋아. 중간에서 가로채야겠습니다. 신속하게요. 제 생각이 어때요?" 그는 때가 늦지 않았기를 기도했다.
전화는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 그는 시드 자동자의 시끄러운 엔진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제발, 하느님…
조 캣은 하버드들 보았다. "우리가 타고 온 블랙 호크가 아직 옥상에 있을 거야. 연료도 충분하니까…."
하버드는 곧장 행동을 개시했다."내가 팀을 구성하지."
"얼른, 시드."럭키는 전화기에 대고 말하면서 옥상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전화를 받고 괜찮은지 말해 주시오."
차가 덜덜거리며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차는 시속 백 킬로미터로 달리는 것도 무리였고, 짧은 시간에 가속하는 것도 무리였다.
시드는 상대방 차가 앞에 나서는 것을 겨우 막았다. 하지만 차가 흔들리기 시작해서 두 손으로 운전대를 쥐어야했다. 핸드폰이 조수석 아래에서 튀어 올랐다 내려갔다 하는 것이 보였다. 기어 바로 옆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단 몇 초라도 운전대에서 손을 뗄 수만 있다면….
그녀는 손을 내밀어 전화기를 잡았다. 하지만 놓쳤다.
럭키는 블랙 호크 헬기가 동쪽으로 출발하자 재빨리 머릿수를 세었다. 조 캣, 하버드, 카우보이, 크래시, 미치, 그리고 토머스 킹과 리오 로제티, 마이크 리. 그들은 꽃다발을 들고 병원에 왔다가 하버드에게 붙들려서 옥상으로 끌려왔다. 남자 아홉 명에, 여자 하나…? 핀콤 요원인 피제이 벡커도 있었다. 그녀는 작은 비행기 타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데도 와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럭키가 쓰고 있는 헤드폰에서 피제이의 목소리가 크고 선명하게 들려 왔다. "네이비 실은 여기서 권한이 없어요." 그녀가 모두에게 말했다. "그러니 누가 물어 보면 핀콤 작전이라고 말해요. 알겠어요? 내가 책임자고 당신들은 내 부하예요. 하지만 누가 물어 볼 경우에 그렇고 실제론 당신이 책임자예요, 오던른."
럭키는 대령을 쳐다보았다. "어떤 무가가 있죠?"
"완전 무장을 요하는 작전에서 곧장 왔으니까, 작은 부대 하나쯤 무장할 정도는 될걸세."
"그놈이 시드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댔다간…." 럭키는 말을 잊지 못했다.
하지만 조 캣은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도 결국 이렇게 됐군? 그 여자를 걱정하는 걸 보니…."
"세상에 둘도 없는 여자니까요." 럭키가 인정했다.
시드는 클러치를 밟으며 차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러 애썼다.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얼마나 갈까?
온도계가 치솟고 있었다. 이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전화기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전화기를 떨어뜨린 지 10분은 족히 지났다. 루크는 제정신이 아닐 거야. 그에게 말해야 했는데. 말해야 했는데…. 하지만 무슨 말을?
사랑한다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이렇게 되길 바라지 안았다고.
그녀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전화기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전화기에 손이 닿았다. 손가락이 흙투성이 바닥 깔개에 걸쳐졌지만 아무튼 전화기를 쥐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차가 빗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운전하느라 무진 애를 썼다.
차라리 충돌해서 죽는 편이 나을 지도 몰라….
이런, 내가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거야? 그건 영원한 항복이나 다름없어. 나는 한 번도 가상 시나리오에서 <항복>이란 해결책을 좋아하지 않았어. 아마 죽겠지. 싸우다가 죽겠지. 젠장.
그녀는 전화기를 턱밑에 끼우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아직 전화가 끊어지지 않았다. 다시 전화를 걸 필요가 없었다.
"루크?"
"시드, 앨런 프랜시스코요. 럭키는 헬기를 타고 당신 쪽으로 가고 있소. 아주 빠른 속도요. 그런 속도로 가면 당신과 교신이 끊어질까 봐 전화기를 내게 맡겼소. 하지만 럭키와 나는 무선으로 연락하고 있소. 괜찮소? 아마 그 친구 반쯤 돌았을…."
시드는 심장이 내려앉았다. 루크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다니…. 하느님. 그녀는 단 한 번이라도 그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었다.
"그자가 맞아요." 그녀는 프리스코에게 말했다. "샌 펠립 강간범이에요. 나를 따라오고 있어요. 옆으로 차를 몰려고 해요. 얼굴에는 팬티 스타킹을 썼어요. 내 차를 받아버리려 하고 있어요."
"알았소." 프리스코는 차분하게 말했다. "계속 움직여요, 시드. 중앙선을 걸치고, 그자가 추월하지 못하게 해요. 잠깐만요. 럭키에게 그 말을 전해 주어야겠소."
"앨런." 그녀가 말했다. "온도계가 붉은 선으로 다가가고 있어요. 차가 과열됐어요."
차가 과열됐다. 시드의 차가 과열됐다.
"좀 더 빨리 갈 수 없어요?"럭키가 하버드에게 물었다.
"최고 속력으로 가는 거야." 선임 참모가 말했다. "거의 다 왔어."
"그 정도로는 소용없어요." 럭키는 이를 갈았다. "프리스코, 시드에게 말 좀 전해죠." 모두 듣고 있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이야기하고 싶은 단 한 사람만 못 듣고 있었다. "버티라고, 계속 움직이라고. 만일 그 자식이 차에서 내리면 있는 힘을 다해 받아버리라고 해. 하지만 차가 과열돼서 엔진이 꺼지면 차에서 나가지 말라고 해. 문을 잠그라고 해. 그 놈이 차창을 부수면, 그때는 외투 같은 걸 뒤집어써서 유리 파편에 다치지 않도록 하라고 해. 그리고…." 말해야 했다. 다른 사람이 듣고 있든 말든 상관없었다. "시드에게 내가 사랑한다고 전해 줘."
"정말 그렇게 말했어요?" 시드는 믿을 수가 없었다. "진짜 그렇게 말했단 말이죠?"
"럭키는 <시드에게 내가 사랑한다고 전해 줘>라고 했어요." 프리스코가 반복했다.
"오, 하느님." 시드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몰랐다. "그 사람, 내가 죽을 거라고 생각한 거죠, 그렇죠?"
그녀의 차 후드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올 것이 온 것이다. "라디에이터가 나가고 있어요." 그녀는 프리스코에게 말했다. "우습지 않아요? 싸워야 할지, 항복해야할지 그렇게 골머리를 앓았는데, 정작 내가 결정을 내려야할 상황이 될지 누가 알았겠어요?"
루크는 내가 항복하길 바랐어. 차에서 나가지 말고 그 괴물 같은 놈이 나를 잡으러 들어오게 하라고 했어. 하지만 일단 잡히면 나는 끝장이야.
하지만 차에서 나가면 기어를 몽둥이 삼아 휘두를 수 있을 거야. 만약 문을 열고 차에서 나가 휘두르면….
"루크에게 미안하다고 말해 줘요." 시드가 프리스코에게 말했다. "난 싸우기로 했어요."
라디에이터가 뭉게뭉게 연기를 피워 올랐다. 차 속력이 점점 느려졌다. 올 게 온 거야. 종말의 시간이.
"그리고 나도… 사랑한다고 전해 줘요."
시드는 전화를 끊었다. 뒤에 있던 차가 정면으로 들이받자 전화기가 무릎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두 손으로 운전대를 쥐고 중앙선에서 힘겹게 버텼다. 그가 옆으로 붙어서 약한 옆구리를 들이받으면 큰일이었다.
하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결과는 뻔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녀는 그만둘 수 없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그가 다시 한 번 들이받았다. 그러자 그녀의 자동차 앞 부분이 번쩍 위로 들렸다….
그때 시드는 보았다.
검은 점 하나가 순간순간 커지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제트 비행기 같았다…. 아니, 헬기였다. 그녀는 헬기가 그렇게 빨리 움직이는 것은 처음 보았다.
세단이 그녀의 차를 또 한 번 들이받았다. 이번에는 그녀의 차가 도로에서 벗어나 부드러운 흙 속에 처박혔다. 그녀는 충격에 대비해 몸을 웅크렸다. 헬기가 머리 위에 다다랐다. 마치 무서운 복수를 하려는 커다란 매처럼 굉음을 울리며 내려앉고 있었다. 헬기는 잠깐 속력을 늦추더니 몸체를 반 바퀴 획 돌렸다. 시드는 헬기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날카로운 총성이 터져 나왔고, 세단은 그녀의 코앞에서 비스듬히 멈추었다. 총알이 앞바퀴에 명중한 것이다!
공중에 둥둥 떠 있는 헬기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엄청난 무기로 무장한 남자들이 열 명쯤 줄을 타고 내려왔다.
시드는 차 유리를 통해 여태까지 자신을 공포로 몰아넣은 남자가 차에서 질질 끌려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도 몸집이 컸지만 그들이 훨씬 컸다. 그는 저항했지만 단숨에 그들에게 제압당해 도로에 납작 엎드렸다.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시드는 전화를 들었다. "프리스코에요?"
"아니오." 루크의 목소리였다. "대령님 휴대폰을 빌렸소."
고개를 들자 자신의 차를 향해 다가오는 루크가 보였다. 한 손에는 전화기를, 한 손에는 총을 들고 있었다.
시드는 전화기를 떨어뜨리고 문을 열었다. 그가 그녀를 차에서 끌어내 품에 꽉 끌어안았다.
16
"그자 이름은 오웬 핀이야." 럭키는 부엌의 전화를 통해 프리스코에게 보고했다. "사관 학교에 입교했고, BUD/S에도 들어갔지만 프로그램을 모두 통과하지 못하고 쫓겨났어. 96년 여름에. 그 자식, 보통 악질이 아냐. 지금도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오리발을 내밀고 있어."
"그래." 프리스코가 말했다. "나도 그런 치들 잘 알아. <나도 모르게 후려치다 보니 마누라가 병원에 실려갔어요. 난 아무런 잘못 없어요. 그 여편네가 맞을 짓을 했다고요> 하며 징징거리는 족속이지."
"맞아. BUD/S를 그만둔 지 넉 달 후에." 럭키가 친구에게 말했다. "절도죄로 구속되었고, 유죄 판결을 받았어. 그래서 불명예 제대를 했지. 민간인이 되어서도 강도 미수로 잡혔고, 켄터키에서 복역했어. 내 생각에 거기 몇 년 있으면서 모든 것이 BUD/S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라며 원한을 품은 것 같아. 그는 출옥하자마자 코로나도로 향했고, 도중에 텍사스에서 주류 판매점을 털었어. 다른 방법으로는 돈을 벌 수가 없었나 봐."
"정말 심리학자 말이 그도 처음엔 막연한 복수심으로 여기 왔을 거라고 하더군. 하지만 도착해서 생각이 굳어졌지. 술집 등지에서 자주 실로 오인받는 데서 힌트를 얻었을 거라고 하더군. 그 자식 감옥에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근육을 단련했나 봐. 심리학자는 핀이 처음으로 폭력을 행사한 건 <데이트 강간>이었을 거라고 하더군. 술집에서 눈이 맞아 같이 나온 여자한테 말야. 심리학자 말이 핀은 지배와 공포를 즐긴다더군. 이를테면 극도의 쾌감을 얻는 방법을 깨달은 거지. 그는 목록을 만들어 복수하고 싶은 사람들과 관련된 여인들을 공격했어. 몇 명은 96년도 상황에서 직접 기억해 냈고, 몇 명은 찾아낸 것 같아. 늘 주도 면밀하게 일정한 시각에 혼자 집에 있는 여인들만 찾아다녔어. 시드는 예외지. 하지만 원래는 시드가 피닉스 모텔에 있을 때 덮칠 작정이었다고 말했대. 그녀가 하루 일찍 캘리포니아로 출발해서 계획에 차질이 생긴 거지. 정말 위험천만했어.."
럭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만일 시드가 원래 계획대로 하루 더 애리조나에 있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하기도 끔찍했다.
"핀의 DNA 테스트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이번엔 제대로 잡은 것 같아." 럭키가 말했다. "분명히 칙칙한 담배 연기 냄새가 났거든. 아직도 마틴 타우스가 어떻게 루시를 공격하던 상황을 그렇게 자세히 묘사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 내 생각에 술집 같은 곳에서 핀을 만난 것 같아."
"시드는 뭐 하고 있어?" 프리스코가 물었다.
럭키는 웃었다. "글쓰고 있어." 그가 말했다.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방문 걸어 잠그고 쓰기 시작했지. <USA 투데이>에 보낼 글을 쓰고 있어. 전에 쓴 기사의 후편 같은 건가 봐."
"시드가… 음…." 프리스코가 가볍게 얼버무리려 노력했다. "대답은 해주었어?"
"아니." 럭키는 친구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정확히 알았다. 청혼.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바보 같고, 너무나 공개적이었던 청혼. 프리스코도 당연히 그 얘길 들었을 것이다. 미아가 옆에 서서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즉시 베로니카에게 전화를 걸어 현재 상황을 얘기해 줄 테니까. 그럼 베로니카는 피제이에게 말할 테고, 피제이는 하버드에게, 하버드는 나머지 알파 분대원들에게 쪽지를 돌릴 것이다.
럭키가 실제로 청혼을 했다는 사실을 친구들은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아니, 이건 아주 심각한 일이었다.
심각한 일.
심각한….
"잠깐만 기다려 주겠어?" 럭키는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그리고는 수화기를 식탁에 올려놓고 복도를 지나 굳게 닫혀 있는 방 문을 노크했다.
"네." 시드는 짜증난 목소리였다. 글을 쓰는 중이니까.
럭키는 문을 열고 물었다. "언제쯤 끝날 것 같소?"
"두 시간이요." 그녀가 말했다. "나가 줘요. 빨리요."
럭키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부엌으로 돌아와 전화기를 들었다. "프리스코, 좀 도와줘."
시드는 전자 우편으로 기사를 보내고 노트북 컴퓨터 전원을 껐다. 그리고 일어나 허리를 쭉 폈다. 드디어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루크는 거실에서 그녀와 얘기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인터뷰는 집어치우시오… 집에 꼼짝 말고, 나하고 결혼합시다, 젠장>
아마 진심이 아니었을 거야. 그녀는 그가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여러 가지 일로 심리가 불안정한 상태였어. 그는 나를 잃는다는 것, 누군가에게 진다는 생각이 싫었을 뿐이야. 그 청혼은 나를 곁에 붙들어 두기 위한 즉각적인 반응이었을 뿐이야.
<시드에게 내가 사랑한다고 전해 줘>
그래, 그는 나를 사랑해. 아마 나 이외에도 몇십억 명에게 똑같은 말을 했을 거야. 그녀는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 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도 그렇게 말해 줄 생각이었다.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고. 아니,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그녀는 그를 진정으로 아끼지만 그렇게 위험도가 큰 도박은 할 수 없었다. 어쨌든 이건 나의 삶이야. 슬프지만 뉴욕의 일자리를 잡을 거야.
그녀는 재빨리 떠날 생각이었다. 뉴욕에서도 최대한 빨리 그녀가 일을 시작해 주길 바랐다. 짐을 싸는 즉시 휑 날아갈 것이다. 한 번 따끔하면 끝이야. 몸에 붙였던 반창고를 떼는 것 같을 거야. 그녀는 속으로 되새겼다.
그는 아마 1주일이면 나를 잊어버릴 거야. 하지만 나는 남은 일생동안 그를 잊지 못하겠지.
그녀는 어깨를 펴고 문을 열었다.
루크는 거실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기척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그가 행사 때나 입는 정장 군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머리칼도 한 올 한 올 완전히 뒤로 빗어 넘겨져 있었다. 가슴에는 계급장뿐 아니라 훈장까지 전부 달고 있었다. 그렇게 무거운 것들을 달고도 멀쩡하게 서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어디 가요?" 그녀가 물었다.
"그건." 그가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묻고 싶은 말이오." 그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차리고 서 있었지만 잘생긴 얼굴에 웃음기 하나 없었다. 무척 심각해 보였다.
시드는 소파에 앉았다. "네." 그녀가 말했다. "뉴욕으로 가요. 컴퓨터로 답신이 왔어요. 일자리를 주겠대요. 내가 필요하대요."
"그럼 내 청혼은?" 루크가 물었다. "나도 당신이 필요하오."
그녀는 그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웃지 않았다. 농담을 하고 있다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자신이 얼마나 평소와 다른 모습인지 의식하는 기색도 없었다. "당신… 내게 진심으로 청혼한 거예요?" 그녀는 겨우 소리를 내어 말했다.
"그렇소. 유치하게 표현한 건 미안하게 됐지만…."
"루크, 결혼은 영원한 거예요. 난 결혼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해요. 이건 싫증나면 집어치우는 게임이 아니에요."
"내가 게임이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오?" 그가 반박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려서 그녀는 대답할 기회를 놓쳤다.
"제시간에 왔군. 실례하겠소." 루크가 말했다.
그가 문을 열자 토머스 킹이 서 있었다. 그 뒤로 리오 로제티와 마이클 리가 서 있었다. 그들은 루크처럼 정장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가슴엔 꽃다발을….
"아주 좋아." 루크가 말했다. "들어오게. 그리고 저 테이블에 내려놔. 잘했어."
"안녕, 시드." 토머스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뒤 베란다에서 기다려 주게…." 루크는 그들을 단숨에 부엌문으로 몰아갔다. "거기 아이스박스에 맥주와 포도주, 음료수가 있을 거야. 마음껏 들어."
시드는 루크를 쳐다보다가 꽃을 쳐다보았다. 정말 아름다웠다. 온갖 종류의 꽃들이 색깔별로 모여 있었다. 풍성한 꽃다발이 커피 탁자를 완전히 뒤덮었다. "루크, 웬 꽃이에요?"
"당신이 쓸 거요." 그가 말했다. "그리고 나도."
초인종이 다시 한 번 울렸다.
이번에는 밥 테일러와 웨스 스켈리가 들어왔다. 그들은 무거워 보이는 상자를 거실 안으로 들어 날랐다. 루크는 상자 하나를 열고 샴페인 한 병을 꺼내 상표를 읽었다. "멋지군." 그가 말했다. "고마워, 친구들."
"알코올 없는 것도 두 병들어 있어." 웨스가 말했다. "프리스코와 미아 거야. 건강 식품점에서 사왔지."
"안녕, 시드." 밥이 말했다. 그는 집 뒤뜰 쪽으로 손짓했다. "베란다?" 그가 루크에게 말했다. 루크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곧장 웨스를 끌고 사라졌다.
꽃하고 샴페인…? "루크 대체 무슨…."
루크가 말을 막았다. "당신은 오늘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소. 진심이었소?"
오, 하느님. 그녀는 현실 감각을 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난 내가 곧 죽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진심이 아닌 말을 한 거요?" 그는 물으며 그녀의 옆에 앉았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시드는 눈을 감았다. 진심이었다.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날 줄 알았다면 그 얘기를 입 밖에 꺼내지 않았을 텐데.
"날 사랑하오?" 그가 물었다.
그녀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네."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난…."
그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 한 마디면 충분하오."
시드는 그의 눈을 들어다보았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간단할 수도 있소." 그가 다시 입을 맞추려고 몸을 내밀었지만 또 한 번 초인종이 울렸다.
하버드와 피제이였다. 그리고 크래시와 넬 호큰, 카우보이와 멜로디 존스, 미치와 베카 쇼도. 그들은 모두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어디 오페라 구경이라도 가려나? 아니면….
"리무진 대령이요." 카우보이가 미소 지으며 소리쳤다. "석 대야. 주문한 대로 모두 흰색이야."
"출발 준비 완료입니다, 대위님." 하버드가 말했다. "베이거스야, 우리가 간다."
베이거스? 라스베이거스? 결혼의 도시?
시드는 일어나서 창 밖을 내다보았다. 분명히 전투 부대 하나가 타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리무진 석 대가 모퉁이에 서 있었다. 그녀의 심장이 평소보다 세 배는 빨리 뛰기 시작했다. 루크가 진심인 걸까…?
"안녕, 시드." 피제이가 그녀를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오늘 오후 괜찮겠어요?"
시드는 대답할 시간이 없었다. 피제이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부엌으로 밀려나 뒷문으로 사라졌다.
"자…." 다시 단둘이 있게 되자 루크가 말했다. "당신은 날 사랑하고 있소. 난 당신을 사랑하고, 뉴욕 일이 당신 경력에 도움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소. 하지만 당신은 여건만 허락한다면, 당신을 후원해 줄 사람만 찾으면, 2년쯤 소설만 쓰고 싶다고 했소." 그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자, 여기…."
또 초인종이 울렸다.
"잠깐만요."
이번엔 프리스코와 미아였다. 그들이 거실로 들어서자 검은 정장을 입은 나이 지긋한 남자가 커다란 서류 가방을 들고 따라 들어왔다.
"이 분은 조지 메이저스 씨야." 프리스코는 루크에게 말했다. "벤드라에서 보석상을 하시는 분이지."
루크는 그 남자와 악수를 했다. "이렇게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자, 여기에 진열해 놓으세요." 그는 탁자에 있던 꽃다발을 살짝 밀치면서 시드를 끌어당겨 소파에 앉혔다.
메이저스가 서류 가방을 열자 그 안에는 반지들이 죽 꽂혀 있었다. 다이아몬드 반지와 결혼 반지들이었다. 시드는 숨이 막혔다.
루크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와 결혼해 주시오, 시드." 그의 눈은 너무나 새파랬다. 그녀는 영영 정신을 잃을 건만 같았다.
프리스코는 헛기침을 하고 부엌문 쪽으로 움직였다. "우리는 거기로…."
"가지 마. 자네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야. 내가 자네 앞에서 무릎을 꿇지 못한다면 누구 앞에서 꿇겠어?" 그는 보석상을 가리켰다. "난 이 분도 잘 몰라. 하지만 여기 이렇게 직접 와준 건만 봐도 좋은 분이라고 생각해." 그는 시드를 돌아보았다. "결혼해 주시오." 그는 말했다. "나와 함께 살면서 글도 쓰고, 아기도 낳아 주시오. 내 삶을 채워 주시오."
시드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진심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진심이야. 이건 내가 평생 동안 바라던 일이야. 하지만 그녀는 <네>라는 짧은 한 마디도 할 수 없을 만큼 목이 막혔다.
그는 그녀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주저하고 있다고 오해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떻겠소?" 그가 말했다. "여기 시나리오가 하나 있소, 시드. 한 남자가, 일생 동안 여자에 대해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던 한 남자가 있소. 하지만 그가 당신을 만났고, 그의 세계는 완전히 뒤바뀌었소. 그는 당신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어 하고 있소. 오늘 밤 베이거스에 있는 사랑의 이글루 결혼 성당에서 말이오. 당신은 싸우겠소, 도망가겠소, 숨겠소, 아니면 항복하겠소?"
시드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웃었다. "사랑의 이글루요?"
루크는 끝까지 심각한 표정을 지으려 무진 애를 썼지만 미소가 번지고 웃음이 터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당신이 좋아할 줄 알았소. 나와 함께라면 당신 삶은 언제나 최상급일 거요."
루크와 함께라면 그녀의 삶에 웃음과 햇살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항복이에요." 그녀는 그 말을 속삭인 뒤 그에게 입맞추었다. 하지만 화들짝 놀라 몸을 뺐다. 그녀는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여가 다른 사람들은 전부… 결혼식 복장이었다! "오늘밤이요?" 그녀가 말했다. "이런, 루크, 난 웨딩 드레스도 없어요."
초인종이 울렸다.
"조 캣과 베로니카였다. 미아가 문을 열어 주었다.
"찾았어요." 베로니카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정확히 루크가 말한 거예요. 남 캘리포니아를 통틀어 가장 황홀한 웨딩 드레스예요!"
"이럴 수가!" 시드는 루크에게 속삭였다. "전부 다 생각했군요."
"맞소." 그가 말했다. "당신에게 내가 진짜 심각하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소. 내 친구들이 나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걸 보면 당신도 깨달을 거라 생각했소."
그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아주 심각한 키스였다.
"오늘밤 나와 결혼합시다." 그가 말했다.
시드는 웃었다. "사랑의 이글루에서요? 좋죠!"
그녀는 그의 눈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는 앞으로 삶이 완전히 달라지리라는 것을 알았다. 드디어 <행운>을 잡은 것이다. 그것도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