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돌려주세요
조영희
후드득 후드득.
아침부터 오던 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아.
한낮인데도 온 세상이 캄캄해. 진서의 노란 비옷이 캄캄한 세상에 점처럼 박혀 있어.
할머니는 꼭 도깨비가 나올 것 같은 날씨라고 하셨지.
하지만 진서는 겁나지 않아. 옷자락을 꼭꼭 여미고 찢어진 깜장 우산을 받쳐 들었지.
진서는 도서관을 좋아해.
작은 언덕배기에 있는 도서관은 넓고 깨끗해.
그곳에 있으면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져.
진서는 도서관 입구에서 우산을 접어 흔들었어.
비를 피해 들어온 떠돌이 개도 몸을 흔들었어.
“안녕.”
어린이 자료실의 마음 좋게 생긴 선생님이 진서를 반갑게 맞아주었어.
“그 책 들어왔어요?”
도서관에서의 첫 말이 몇 달째 똑같아.
“아니, 아직.”
선생님은 웃는 얼굴이었지만, 진서는 조금도 재미있지 않았어.
“누가 빌려 갔어요? 왜 안 돌려준대요?”
또로롱 또로롱.
선생님이 자료실에 걸려온 전화를 받았어.
진서는 선생님의 책상에 매달려서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어.
보고 싶었던 책이 몇 달째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오늘은 꼭 듣고 싶었어.
하지만 통화는 생각보다 길어졌어.
진서는 슬슬 지겨워졌고 화장실도 가고 싶어졌어.
아침 똥을 거른 게 문제였나 봐.
화장실은 넓고 깨끗한 도서관에 어울리지 않게 좁고 어두웠어.
오늘은 비가 와서 더 칙칙해 보였지.
진서는 가운데 칸에 들어갔어.
그리고 힘을 끙! 주고 보니 화장지함에 화장지가 없는 거야.
주머니를 뒤져도 나오는 건 먼지뿐이었어.
휴지통도 살짝 봤지만 손이 가진 않았어.
얼굴이 빨개지고 손바닥엔 땀이 뱄어.
바스락 바스락.
그때, 바로 옆 칸에서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렸어.
사람이 있었나봐.
다행이지 뭐야.
“휴지 있어요?”
진서가 칸막이벽을 두드렸어. 비닐봉지가 부스럭하는 소리가 들렸고 곧 칸막이 밑으로 화장지 한 뭉치가 쑥 들어왔지.
“고맙습니다.”
진서는 마음이 탁 놓였어.
진서는 볼 일을 마치고, 손도 깨끗이 씻었어.
그리고 화장실을 나가려는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든 거야.
진서가 앉아 있던 칸의 옆 칸, 그러니까 가장 안쪽의 칸은 평소에 청소 도구들을 놓는 곳으로 쓰고 있었어.
이제 청소 도구들을 치우고 원래 목적으로 쓰고 있는 걸까?
진서는 그 칸의 문 앞으로 가보았지.
문이 살짝 열려 있었어.
진서가 모르는 사이에 나가 버린 걸까?
확인하기 위해서 진서는 문을 살짝 밀었어.
문은 스르르 열리다가 어느 순간에 딱 멈췄어.
안에 있던 사람이 열지 말라고 문을 밀었다면 다시 닫혔을 텐데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딱 멈췄어.
무언가 꽉 찬 느낌이었지.
진서는 문을 힘껏 밀어 보았어.
끄으윽.
냄비 바닥을 긁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어.
청소 도구가 끌리는 소리인가? 확실히 사람이 내는 소리는 아닌 것 같았어.
진서는 다시 한 번 힘을 주었어.
그러자 ‘퐁당’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어.
그곳엔 빗자루와 대걸레, 쓰레받기가 잔뜩 쌓여 있었어.
두루마리 화장지도 한 봉지 있고 말이야.
역시 청소 도구를 놓는 곳이었던 거야. 진서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변기 속을 들여다봤어.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람!
변기 속에는 진서가 애타게 찾던 바로 그 책이 떨어져 있었어.
진서는 책을 건져야겠단 생각에 변기 옆에 세워져 있던 싸리 빗자루를 집어 들었어.
흠뻑 젖었지만 잘 말리면 그럭저럭 볼 수 있지 않을까 했지.
푸르풍풍.
“앗! 차가워!”
변기 속에 빗자루를 넣는 순간, 빗자루는 사라지고 커다란 갈색 도깨비가 나타났어.
도깨비는 화장실 한 칸을 꽉 채울 정도로 컸어.
머리는 천장에 닿았고, 구부정한 자세로 팔을 앞으로 쭈욱 빼고 있었어.
유난히 빨간 얼굴, 덥수룩한 머리카락과 부리부리한 눈은 진서의 짝꿍을 쏙 빼닮았어.
진서는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었지.
“감히 날 변기 속에 넣다니.”
도깨비가 눈알을 뒤룩뒤룩 굴렸어. 아하! 조금 전의 싸리 빗자루는 이 갈색 도깨비였던 모양이야.
“이래 봬도 깔끔한 몸이시라고.”
도깨비는 몸을 부르르 떨었어.
그러는 사이, 진서도 정신을 차렸지.
몇 달 동안 돌아오지 않았던 책이 변기 속에 있어. 그것도 커다란 갈색 도깨비와 함께 말이야.
“이 책을 돌려주지 않은 게 너야?”
진서가 도깨비를 쏘아봤어. 도깨비는 흠칫했지.
자기를 보고 도망가지 않은 것만 해도 놀라운데 오히려 겁을 주고 있으니 말이야.
“응? 네가 그런 거냐고.”
진서가 한 발 앞으로 왔어.
도깨비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지.
하지만 그 좁은 화장실 안에 갈 데가 어디 있겠어.
도깨비는 몸을 뒤로 빼다가 물 내리는 손잡이를 눌러 버렸어.
콰르르르르.
변기 속의 물이 소용돌이를 쳤지.
진서는 깜짝 놀라 도깨비를 화장실 밖으로 끌어냈어.
겨우 찾아낸 책이 군데군데 찢겨 변기 속을 떠다녔어.
이제는 건져서 말린다 해도 절대 절대 읽을 수 없을 거야.
진서의 눈에 불이 일었어.
도깨비의 눈보다 부리부리해졌지.
“이제 어쩔 거야?”
“미안.”
“미안하다면 다야? 저 책을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진서의 얼굴은 퉁퉁 붓고, 도깨비는 점점 더 오그라들었어.
“어쩔 거냐고!”
점점 더 오그라들던 도깨비가 진서의 손을 잡아끌었어.
도깨비가 진서를 데리고 간 곳은 어린이 자료실이야.
“책이 이렇게 많은데, 아무 거나 읽으면 안 돼?”
“안 돼!”
진서는 도깨비의 손을 뿌리쳤어.
“골라줄까?”
도깨비가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진서는 대답하지 않았어.
“이거 어때? 한 번 읽어봐.”
도깨비는 재미있어 보이는 책을 진서의 눈앞에 대령했지.
진서는 웃음이 나는 걸 꾹 참았어.
이렇게 쉽게 용서해 주면 안 될 것 같았지.
그보다 사서 선생님한테 도깨비가 한 짓을 모두 일러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선생님의 책상이 비어 있었어.
그리고 다른 친구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어.
도깨비를 혼내는 건 진서의 몫이 된 거야.
“너 말이야.”
진서가 도깨비를 은근히 바라봤어.
“그 책 말고도 돌려주지 않은 책 있지?”
도깨비는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어.
달아나려고 했던 거야.
하지만 진서가 재빠르게 붙잡는 바람에 둘 다 넘어졌어.
포쇼쇼.
도깨비는 어느새 싸리 빗자루가 되어 있었어. 진서는 빗자루를 들고 바닥에 마구 내쳤지.
“돌아와, 돌아오란 말이야.”
몇 번을 내쳐도 싸리 빗자루는 여전히 싸리 빗자루였지.
진서는 싸리 빗자루를 들고 화장실로 달려갔어.
“변기에 넣어버릴 거야!”
푸르풍풍.
“안 돼! 하지 마!”
변기에는 빠지고 싶지 않은가봐.
“돌려주지 않은 책 있지?”
도깨비는 빨간 얼굴을 더욱 붉히며 고개를 끄덕했어.
“어디야? 앞장서.”
진서는 도깨비의 누더기 옷자락을 꼭 붙잡았어.
도깨비는 말없이 화장실을 나갔어.
그리고 넓은 홀을 지나 도서관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
밖에는 아직도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어.
진서는 가방에 꽂아 두었던 찢어진 깜장 우산을 활짝 펼치고 도깨비를 보았어.
“같이 쓸래?”
하지만 진서의 우산은 도깨비한테는 얼굴 가리개 정도밖에 안 되는 크기였어.
진서하고 도깨비는 키도 맞지 않았지.
우산을 얼굴에 대보는 도깨비를 보다가 진서는 웃음을 터뜨렸어.
눈물이 날 정도로 웃었지.
진서의 몸이 하늘로 들렸어.
그제야 진서는 깜짝 놀라 웃음을 멈췄어.
도깨비가 진서를 번쩍 들어 어깨에 올린 거였어.
그렇게 하고 우산을 쓰니 진서의 몸도 가려지고 도깨비의 얼굴도 가려졌어.
도깨비는 도서관 아래의 체육관을 지나고, 과수원도 지났어.
그리고 그 아래의 좁은 산책길로 올라갔지.
도깨비의 어깨에 올라가 있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면 안 돼.
비에 젖은 갈참나무 잎사귀들이 진서의 눈앞에 나타나면 진서는 팔을 휘저어 갈참나무 가지들을 밀어줘야 했고, 우산도 놓치면 안 되는 거였어.
도깨비는 작은 산을 넘어 진서가 처음 보는 동네로 내려갔지.
그러고도 도깨비는 한참을 굽이굽이 골목을 돌아갔어.
“이상한 데로 데려가면 혼난다.”
진서의 말에 도깨비가 씩 하고 웃었어.
도깨비가 멈춘 곳은 허름한 책방 앞이었어.
유리창엔 ‘헌 책 사고 팝니다’라고 적은 종이가 붙어 있었지.
붓글씨 같았어.
도깨비가 책방의 나무문을 열자 꿉꿉한 책 냄새가 훅 풍겨 나왔어.
진서는 우산을 접고 도깨비를 따라 들어갔어.
오래된 책들이 천장까지 쌓여 있었어.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모두 쓰러져 버릴 것 같았지.
그래서 진서는 조심조심 걸었어. 도깨비가 천장에 매달린 전구를 켰지만 그것만으론 책방 안을 환히 밝힐 수 없었어.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과 전구의 빛은 책방 구석까지 가지 못했어.
그 구석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진서는 겁나지 않았어.
“우와! 이게 모두 도서관에서 가져온 책이야?”
진서는 도서관에 있는 책보다 여기에 있는 책이 더 많을 거라고 생각했어.
“아니야!”
도깨비가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어.
“사람들이 이사 가면서 내버린 책들이 훨씬 많아. 그런데 사가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
책이 이렇게 많이 쌓인 것에 대한 그럴듯한 까닭이었어.
도깨비가 도서관에서 가져온 책을 고르는 동안, 진서는 발아래 있던 책을 한 권 집어 들었어.
첫 장을 펼치니 누군가 써놓은 굵은 글씨가 보였어.
진서가 태어나기도 전의 날짜와 함께 책을 산 사람의 이름이었지.
진서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어.
“난 낡은 책이 좋아. 도깨비는 원래 오래된 물건을 좋아해.”
도깨비가 슬며시 와서 말했어.
“이거 읽어도 돼?”
도깨비는 선뜻 대답하지 않았어.
“여기서 읽을게. 읽어도 되지?”
진서가 책을 꼭 끌어안고 말했어.
그제야 도깨비는 진서와 함께 책 더미 옆에 나란히 앉았어.
진서가 펼친 책에는 도깨비 이야기도 있었지.
도깨비 그림이 나올 때마다 책방의 도깨비가 얼굴을 붉혔어.
도깨비가 처음 출연했던 책이라나 봐.
무척 부끄러워하더라고.
그러고 보니 이곳에 있는 책의 표지에는 도깨비 그림이 유난히 많았어.
“네가 변기에 빠뜨린 책에도 도깨비가 나와?”
“응, 우리나라 도깨비는 아니지만 조금.”
도깨비의 대답에 진서가 고개를 끄덕끄덕했어.
“정말 읽고 싶었는데.”
그리고 가만히 중얼거렸지.
“그 마음 알 것 같아. 몇 번을 읽어봐도 정말 흥미진진한 이야기였어.”
도깨비의 얼굴엔 행복이 가득했어.
“몇 번을 읽어봐도?”
진서가 도깨비에게 바짝 다가왔어.
“몇 번을 읽었으면 혹시 나한테 이야기해 줄 수 있어?”
진서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어.
도깨비는 그 눈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지.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을 거야.
작은 책방에 이야기 나라가 펼쳐졌어.
“기관사 루카스 아저씨는 기쁨의 나라에 살고 있었단다. 그 나라는 아주 작은 나라였어.”
이야기 나라는 저녁이 되면 문을 닫아.
하지만 내일 아침에 다시 열리지.
진서는 이 작고도 넓은 나라의 첫 번째 손님이 되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