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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예감(Wyatt's Most Wanted Wife)

행복한 예감(Wyatt's Most Wanted Wife)

Sandra E. Steffen

 

-서장-

라자는 약간 삐딱하게 고개를 옆으로 뉘었다."상대하기 어려울 줄 알지만, 내가 늘 이렇게 수줍고 착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에요."

와이엇은 씩 웃었다. "알만하오. 나도 그랬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소.."그의 시선이 살짝 벌어진 그녀의 비옷 앞자락으로 내려갔다. 그녀의 다리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의 몸은 뜨겁고 확실하게 반응했다. 그가 힘겹게 그녀의 다리에서 얼굴로 시선을 올리자, 그녀는 다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비옷 끝자락으로 다리를 가린 다음 의미 있는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 나서 그로서는 조금도 달갑지 않은, 부드럽고 달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반칙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보안관 님. 당신은 그저 내 타입이 아닐 뿐이에요.."

 

1.

보안관 와이엇 맥컬리는 흰색 스테트슨 모자의 앞쪽 챙을 이마 아래로 깊숙이 눌러쓴 채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식당을 구석구석까지 빠르게 훑어보았다. 화요일이면 늘상 열리는 마을 대표회의가 오늘은 어쩌다 이렇게 하나의 파티가 되어 버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그는 마을 위원회의 다른 위원들과 식당 한쪽을 지키고 앉아 있다가 부녀회 회상인 이사벨 푸루잇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는 괴로운 한숨을 내쉬었다.

요 몇 달 동안 정숙한 체하는 저 노처녀는 마을에 곧 나쁜 일이 생길 거라고 말을 만들어대고 다녔다. 바로 마을 젊은이들이 이 사우스다코타의 작을 마을로 여자들이 이주해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신문에 광고를 게재한 것 때문에 말이다.

오늘 같은 날이 예외일리는 없었다. 이사벨은 결단코 무슨 바람을 일으키고야 말 것이다. 누군가가 휴회를 선언했고 어느덧 파티도 파장 분위기를 띠기 시작했다.

보통 그는 이 작은 마을의 모임을 좋아했다. 하지만 오늘밤은 혼자 잇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는 앞에 놓인 작은 탁자 밑으로 다리를 쭉 뻗고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었다. 목소리들이 높아지고 웃음소리가 이쪽저쪽에서 울려 퍼졌다. 제스퍼 계곡의 총각들은 좀 수다스럽고 또 외설적인 농담도 잘하는 편이다.

사람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이렇게 즐거워하는 것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어제부터 22년 만에 닥친 최악의 가뭄을 해갈시키는 단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루크 칼슨의 약혼은 제스퍼 총각들에게는 가뭄 해소만큼이나 기쁜 소식이었다.

와이엇은 두 가지 경사가 다 반가웠다. 다만 그로 인해 오늘밤 그는 왠지 모를 초조함에 쫓겼다.

깊고 풍부한 여자의 웃음소리에 이끌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비켜서듯 움직이는 바람에 오늘밤 초조한 마음을 불러일으킨 주인공이 그의 시야에 나타났다. 뒤엉켜 있던 머릿속이 말끔히 정리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리자 마크맨이 한 달 전 이 고장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마치 레이더의 붉은 포착점이 점멸하듯 계속 반복되어온 현상이었다.

그녀는 가벼운 걸음걸이와 따라 웃게 만드는 미소, 그리고 신체 건강한 남자라면 누구나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 볼만한 윙크 실력을 가진 여자였다. 와이엇은 이 고장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자제력이 뛰어난 남자였지만 그것도 이젠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제스퍼 계곡의 총각들이 하나같이 그녀의 애정을 갈구하는 상황에서 전혀 관심 없는 척 뒷짐만 지고 있는데 이젠 넌더리가 났다. 겸양이 능사가 아니었다. 이젠 와이엇 맥컬리가 행동을 개시 할 때였다.

그는 일어서서 식당 안을 대충 훑어보았다. 길을 막고 있는 몇몇 사람들을 지나 앞으로 나아가면서 그는 가끔씩 고개를 끄떡이며 그들과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그의 신경은 지금 만나러 가는 한 여자에게만 집중되었다.

리자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물론 자신에게 먼저 접근해 오는 여자가 훨씬 편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순 없겠지만 리자는 뒷모습마저도 트집 잡을 구석이 없었다. 이 마을에서 그녀처럼 머리 색깔이 짙은 여자는 없었다. 또한 단순한 진바지에 빨간색 웨스턴 셔츠를 입은 것만으로도 남자의 환상 속에서 금방 튀어나온 듯이 보이는 여자도 없었다.

그가 호흡 조절을 위해 조급하게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난데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오팔! 이 사람 와이엇 맥컬리 아니니?"

"왜 아니겠어, 이사벨. 그렇고말고."

무턱대고 돌진하던 와이엇은 노숙녀 분들이 갑자기 나타나 그를 잡아세우 듯 앞을 막아서자 간신히 걸음을 멈췄다.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숙녀님들?"

"어머, 정말 예의바른 청년 아니니, 오팔?"

"그렇다니까 이사벨. 몇 분전에도 우리 루에타한테 한참을 얘기했잖아."

와이엇은 슬쩍 오른쪽으로 비켜섰고, 시선은 자동적으로 사람들 틈에 섞여 있는 리자에게 꽂혔다. 그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레이더는 그의 몸 안 깊숙이에서 꾸준히 작동하고 있어, 칠흑 같은 어둠 속이라 해도 그녀를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요사이 우리 루에타와 얘기 할 기회가 있었던가? 그 앤 저기 오른쪽 탁자에 앉아 있네."

그는 오팔 그레험의 딸을 형식적으로 힐끔 쳐다보았다. 그녀는 수줍게 손을 흔들더니 금세 얼굴이 빨개졌다. 그는 최근 루에타와 얘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옛날 고등학생 때, 남자아이들은 <전혀 아닌 애>로 루에타를 뽑은 적이 있었다.

"사랑스러운 애 아닌가?"이사벨이 물었다.

루에타가 사랑스러워? <>는 올해로 서른세 살이었다. 온몸을 칭칭 휘감은 저 펑퍼짐한 옷 속에는 굴곡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였다. 와이엇은 왜 이사벨이 루에타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지만 리자의 숨넘어가는 듯한 웃음소리가 다시 그의 귀에 전해지자 더 이상 그 해답을 얻기 위해 지체하고 싶지가 않았다. 이사벨이 모욕을 당한 듯 분해하는 걸 본 체 만 체하고 그는 식당 앞쪽을 향해 나아갔다.

한 여섯 발자국을 남겨놓은 거리에서 리자는 손에 커피 캐러피(유리로 된, 커피를 내려받는 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두 발자국 거리쯤에선 그녀가 그의 할아버지 컵에 커피를 막 따라 주고는 그의 할아버지를 팔꿈치로 살짝 찌르고 있었다.

"클레터스 매컬리 씨, 한창 대는 정말 연애꾼이었겠어요."

"지금은 한창 때가 아니라고 누가 그래?"

"어머, 클레터스 씨. 지금 날 노리는 거예요?"

"난 아직 녹슬지 않았다고."

리자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 탁자에서 물러났다. 와이엇은 할아버지의 유혹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리자의 엉덩이가 그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스치는 느낌을 즐기려면 그대로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의 양손이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러자 곧바로 그녀는 휙하니 그 자리에서 돌아섰다.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있었다.

리자 마크맨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가 사우스다코타로 이주한 지는 한 달이 됐지만 와이엇 맥컬리의 갸름한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올려다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동안 그 만큼 거리를 두고 지냈던 것은 사실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는 가끔씩 자신을 쳐다보는 그의 시선을 느꼈고 또한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어떤 감정을 일으키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닳아빠진 여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바보도 아니었다.

여성들을 상대로 광고를 냈던 이 마을로 이사를 온 것은, 이곳이 그녀에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최적의 장소로 비쳤기 때문이다. 또한, 조금은 수다스럽고 약간은 인생 세파에 상처 입은 그녀를 좋아해 줄 남자, 그녀가 사랑할 남자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번쩍이는 배지와 그에 못지않은 평판을 가진 지방 보안관은 그녀가 찾는 바로 그 남자엔 해당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건 또 한 번의 최악의 선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과거 수많은 남자들을 만났었다. 하지만 늘씬한 키에 금발머리를 가진 와이엇 맥컬리만큼 그녀의 마음을 뒤흔드는 남자는 별로 없었다.

그녀의 귓가에 원색적인 경고음이 울려왔고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이상기류를 멈출 요량으로 그녀는 사람들 속으로 섞이려 했다.

"난 그저 당신 동생을 도와주려고 하는 건데, 아무래도 보통 웨이트리스 뺨 친 것 같네요, 웨이트리스는 몸매가 좌우한다는데."

만일 지금 한 말을 주워담을 수 있다면 그녀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의 몸을 쭉 훑고 내려가더니 도중에 잠시 숨겨진 부분에서 멈칫거리는 듯했다. 그녀는 깊은 곳을 급습 당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불빛이 와이엇의 하얀 카우보이모자에 반사되자, 순간 그녀는 이쯤에서 사태를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한쪽으로 물러서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척했다.

"바쁜 게 낫겠어요, 당신 동생은 적당히 하는 꼴을 못 보잖아요."

그가 앞으로 한 발자국 다가섰다. 확고하면서도 유연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의 미소도 매한가지였다. 두 가지가 다 그녀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곧 파티도 다 끝날 거요, 좀 전에 남자들 몇 명이 하는 소릴 들었는데 크레이지 호울스로 장소를 옮긴다는 거요. 우린 뒷문으로 빠져나가 피에르에 가서 저녁이나 하는 게 어떻겠소?"

"저녁요?"

그가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시선은 그의 입술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녀가 자제력을 되찾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녀의 정신이 조금씩 맑아지고 다시 결단력을 되찾았다. 그녀가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얻은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미묘한 상황에 대처하는 요령을 익혔다는 점이다. 그녀는 수년간 익힌 솜씨를 발휘해 그에게 찡긋 윙크를 해 보였다.

"고마워요, 보안관 님. 하지만 별로 좋은 생각 같지 않군요. , 멜로디와 질리안이 나한테 뭔가 할말이 있는 것 같아서, 이만 실례할게요."

미처 반박할 새도 없이 그녀는 사람들 속으로 묻혀 들어갔다. 와이엇은 입을 굳게 다물고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클레터스의 괴팍한 음성이 그의 생각을 가르고 들어 올 때까지 곁에 누가 있는지도 몰랐다.

"사람일이 어디 그렇게 맘먹은 대로 술술 된다더냐, ?"

리자의 대답이 아직도 바윗덩어리처럼 자존심을 짓누르고 있었다. 와이엇은 할아버지를 찌를 듯이 쳐다봤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클레터스는 멜빵 안쪽에 엄지손가락을 걸치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떡였다.

"네가 상처 입은 종마 같은 표정을 하고 잇는 것하고 관계가 있을 걸."

와이엇의 귀에 이사벨과 오팔의 연극적인 한숨 소리가 들렸다. 클레터스가 <이런>이라고 말해야 했을 것 같은데 대신에 <살쾡이들>이라고 말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귀를 세우고 남의 말을 엿듣는 두 숙녀들에게서 등을 돌리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래 청해 봤냐?""거절당했어요."클레터스는 멜빵을 탁 퉁기더니 고개를 끄떡였다.

"아무래도 쉽지 않겠구나. 그건 확실해."와이엇은 대구하지 않았다. 클레터스는 그를 기른 사람이었다. 그는 할아버지의 함축적인 말솜씨에 익숙했다. 더구나 할아버지의 말이 옳았다. 리자는 순순히 그를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다. 그녀가 그럴 여유를 조금도 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숟가락으로 유리잔을 두드리는 소리가 시끌벅적한 식당 안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리자와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가 서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깐 주목해 주시겠어요?"리자가 외쳤다.

적어도 스무 명은 되는 사람들이 <!>하고 주위를 조용히 시켰다. 또 다른 스무 명쯤 되는 사람은 <조용히들 해요>라고 말했다. 그 소리들로 또 다시 술렁거렸다. 와이엇은 여동생인 멜이 입술사이에 손가락 두 개를 넣어 휘파람을 한 번 휙 불고 나서야 확실히 조용해졌다.

"루크가 질리안을 오늘밤 여기서 채 내가기 전에, 물론 결혼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겠지만우리 같이 건배를 했으면 좋겠어요."

식당 안에 이 고장 총각들의 킬킬대는 웃음소리가 물결처럼 번졌다. 모두들 루크 칼슨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오늘밤 결혼 계획이나 짜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루크는 와이엇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질리안의 얼굴 표정으로 봐서 그는 확실히 행운아였다. 와이엇은 갑자기 누군가를 체포하고 싶은 욕구가 불타오르듯 일어났다. 만일 법이란 게 없었다면 그는 당장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리자가 커피 잔을 높이 쳐들고 외쳤다.

"루크와 질리안을 위해, 5년여만에 제스퍼 계속에 처음 탄생한 한 쌍을 위해 건배!"

축하의 소리가 차츰 가라앉자 질리안 다니엘스가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를 어깨 뒤로 넘기며 자신의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건배를 제한하고 싶어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 리자 마크맨을 위해서요. 따지고 보면 광고를 보고 이 고장에 오게 된 거나 실제적으로 제 짝을 찾은 일이나 다 리자의 아이디어였어요. 리자는 데이트를 청하는 사람 모두하고 체계적으로 데이트를 해왔으면서도 아직 상대를 못 만났는데, 진정한 친구답게 저와 루크의 결혼을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어요."

식당은 한바탕 웃음 바다가 되었다. 와이엇은 리자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같이 웃을 수가 없었다. 그의 심장은 웃음과는 정반대의 이유로 호흡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그녀가 자기 쪽을 쳐다보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시선이 그와 마주쳤다.

그녀는 완전히 굳어 버렸고,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녀의 반짝이는 눈빛 속에서 그의 의중이 들통났음을 알아차렸다. 와이엇의 얼굴과 가슴으로 8월의 기온과는 아무 상관없는 그녀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의 내부에서 뭔가가 정신 없이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미쳐 깨닫기도 전에 루크의 형 클래이엇이 질리안과 리자에게 뭐라고 말을 했고 그 느낌은 곧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한 손가락으로 모자를 탁 쳐 올린 다음, 클래이엇은 식당 저 안쪽까지 들리도록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 "여러분 모두 9월 첫째 주 토요일을 비워두시는 거 잊지 마십시오. 마을 대표회의 주최로 루크와 질리안을 위해 바비큐 파티를 열 예정입니다. 여러분 모두를 초대하는 거예요."

질리안의 얼굴이 환해졌다. 리자는 다시 와이엇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가 계속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으니 그건 확실했다. 그는 조금 전의 느낌이 착각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시선을 거두었다. 상처받은 자존심을 어루만지며 그는 식당 안쪽의 조용한 자리로 몸을 돌렸다.

 

"리자 , 너 괜찮니?"

리자는 멍하니 안자 수저로 시리얼 그릇을 뒤적이고 있다가 아침식탁을 마주하고 앉아 있던 질리안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안 괜찮을 일이 뭐 있겠니?" 뭔가 생각하는 듯하던 질리안은 일어나서 자신의 그릇을 싱크대로 가져갔다."잘은 모르겠지만." 질리안은 물을 잠그고는 그릇을 건조대에 엎어놓았다.

"아무래도 네가 5분 동안 세 번이나 한 숨을 내쉬게 된 일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난 한숨 안 쉬었어."

"아니, 쉬었어."

"아무렴 내가 5분 사이에 세 번이나 한숨을 쉬었을까."

"그랬다니까."

리자는 되레 선수를 칠 요량으로 웃기 시작했다.

"사실은 네 번이 맞을 걸."

고개를 내저으며 리자는 자기 그릇도 싱크대로 가져갔다. 그녀가 다시 친구에게 고개를 돌렸다. 질리안은 그들이 여름에 이사온 이후로 같이 쓰고 있는 집의 부엌 카운터에 몸을 기대고 가슴께에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리자도 익히 아는 자세였다.

질리안 다이엘스는 긴 빨강머리에 연푸른 눈동자를 가진, 아주 고지식한 성미의 친구였다. 그녀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면, 몇 년 전 질리안이 그녀에게 아이비 페닝턴과 같이 살도록 권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테고, 리자가 가출을 그만두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뭐 때문에 그러는지 말 안 할 거야?"

"네가 이렇게 집요한 거 루크도 아니?"

"걱정 마. 다 알아. 루크는 정말 굉장한 사람이야. 사랑이란 정말 굉장해. 네가 사랑을 찾아 이곳까지 이사 올 생각을 했던 것도 당연해."

"어이쿠, 네가 내 절친한 친구인 게 행운이니 알아라. 안 그랬다면 제스퍼 계곡에서 제일 괜찮은 남자를 낚아채 간 너를 어떻게 용서하겠니."

"너 내가 밉니?"

"제발, 질리안, 농담도 못하니?"

"그럼 나와 루크의 약혼이 네 그 한숨이나, 네가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말도 거의 하지 않는 행동하곤 아무 상관도 없단 말이지?"

자신의 침묵과 한숨에 대한 이유를 생각하니 리자는 화가 끓어올랐다. 와이엇 맥컬리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그의 눈빛이나 조각해놓은 듯한 얼굴 모습이 그녀의 머리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그녀가 다시 친구에게 시선을 돌리다가 그녀를 주의 깊게 살피고 있던 질리안의 눈길과 마주쳤다. 리자는 질리안의 보석 같은 미소의 결과를 수천 번도 더 경험했었다. 두 사람은 지난 수 년 동안 얼마나 많은 비밀을 나눠왔던가. 리자는 질리안에게 라면 무엇이든 얘기할 수 있었다. 만일 어젯밤 자신과 와이엇의 일을 얘기하면 질리안은 그게 무슨 일이든 간에 다 운명이라고 말할 게 뻔했다.

리자는 운명을 믿긴 하지만 거기에 확실히 응답해 본 적은 없었다. 본인의 의지가 열 배는 강했고 리자는 와이엇 맥컬리를 마음에서 몰아내기로 딱 잘라서 결정해 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제스퍼 계곡 예순두 명의 총각들 중에 데이트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직도 마흔 아홉 명이나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 중 한 사람은 흰색 카우보이 모자에 명성도 자자한 바로 그 남자로군. 와이엇 맥컬리. 그렇다 해도 아직 마흔 여덟 명이 남아 있었다.

"?"

질리안의 목소리가 그녀의 생각을 중지시켰다. 질리안은 무슨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눈치인데, 무슨 질문이었는지 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슨 얘기를 했었지?"

"정말로 루크하고 상관이 없는 거냐고."

"물론이지. 이제 일하러 가게 먼저 나가서 차에 시동 좀 걸어 줄래?"

질리안은 잠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리자가 진심을 말했다고 판단한 그녀는 겉으로 만족해하며 손을 뻗어 지갑을 챙겨들고는 종종걸음을 치며 거실로 나갔다.

기분이 조금 나아진 리자는 벽난로를 점검한 뒤 가방과 비옷을 집어 들고 친구를 따라나섰다. 그녀가 밖으로 나와 현관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저쪽에서 질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젯밤 어디다 주차를 했니?"리자는 현관 계단을 내려와 보도로 나섰다. 자신이 어젯밤 차를 세워둔 바로 그곳까지 의심 없이 걸어왔다. 하지만 그곳엔 진흙 웅덩이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언제나처럼 바로 여기에 세워뒀는데.""그런데 없잖아. 누가 훔쳐간 게 틀림없어."

리자는 주변을 왔다 갔다 했다. "아무래도 욕 좀 먹겠군.""어쩔 셈이야?" 질리안이 물었다.

구름이 하늘에 낮게 깔려 있었다."하지만 새로 시작한 옷가게가 성공하려면 난 오늘 오후에 차가 있어야 해. 피에르에 가서 새로운 가을 상품을 골라와야 하거든. 우선 걸어서라도 가게까지 가야겠다."

그녀는 휙 돌아서서 우산을 가지러 갔다.

 

"휴우아주 본격적으로 오는데."와이엇이 문 쪽을 돌아보았다. 루크 칼슨이 문을 닫고 들어와 검은색 스테트슨에서 물을 털어 내고 있었다. 루크는 오늘 칼슨 집안사람답지 않게 쾌활했다.

"어이, 와이엇, 커피 좀 더 있어?"

와이엇은 메모판에다 뭔가를 휘갈겨 쓰더니 지난밤에 그가 끊은 교통위반 딱지들을 묶음 철에 사납게 끼워 넣었다. 언제부터 그의 보안관 사무실이 이 마을의 커피숍 중 하나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친구의 우울한 분위기를 눈치 챈 루크는 벽에 붙은 의자를 덜렁 들어다가 다리 사이에 놓고 앉았다. 의자 등받이 위에 양팔을 포개 올리고 그는 특별히 누구에게 라고 할 것 없이 헤벌쭉하게 웃었다.

와이엇은 또 한 명의 칼슨 형제를 힐끗 쳐다보았다. 클래이엇은 책상 앞 의자에 돌처럼 앉아 있다가 와이엇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흔들며 지난 15분간의 침묵을 깼다.

"이틀 전에 질리안이 결혼을 수락한 다음부터 계속 저 모양이야."

"내가 뭘?"루크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높아졌다.

클래이엇은 대답한 필요도 없었다. 이거 왜 이러냐는 듯 치켜 올라간 그의 눈썹과 삐딱하게 기운 그의 머리가 모든 대답을 대신했다.

와이엇은 책상에서 일어나 캐비닛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커피를 세 잔 따랐다. 언제쯤이면 이 사무실에서 좀 조용하게 있어 볼까 싶었다. 하지만 제스퍼 계곡에 사는 한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러려면 어젯밤에 그랬어야 했다.

그는 정말로 식당의 구석에 앉아 조용히 상처 입은 자존심을 위로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보니, 그의 자리는 더 이상 조용함과는 거리가 멀어져 있었다. 자신과 같이 자란 목동들과 카우보이들이 터를 잡고 있었고 결국은 크레이지 호울스 술집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바로 지금 그의 사무실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두 남자를 보고 있노라니 오늘 아침이고 그리 운이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루크와 클래이엇 칼슨은 연년생이고, 외모고 그 진한 갈색 머리나 회색 눈동자, 불거진 광대뼈와 각이 진 턱, 게다가 햇빛에 그을은 피부까지 아주 비슷하게 닮았다. 두 사람의 크고 마른 듯한 체구 역시 같은 유전자를 타고난 덕이었지만 오늘 루크의 들떠 보이는 행동거지는 칼슨 가의 남자답다고 할 수 없었다.

10년 전, 클래이엇의 결혼식 때 와이엇은 그의 들러리를 섰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후 그의 부인이 그를 떠날 때도 그의 곁을 지켜 줬었다. 루크는 부모님의 목장을 이어받지 않고 다른 직업을 갖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걸 처음으로 와이엇에게 얘기했었다. 혈연으로 묶여진 건 루크와 클래이엇이었지만, 와이엇은 이제껏 살아오는 동안 너무 많은 것을 칼슨 가와 나누었기 때문에 그는 그 집안의 또 한 명의 아들이나 마찬가지였다.

루크는 쾌활하게 떠들었다. "그래, 뭐 새로운 소식 없어?"

사무실 바깥쪽 문이 사납게 열렸다. 와이엇과 클래이엇이 루크의 희희낙락하는 표정에 찬물을 끼얹어 줄 틈이고 없이 클레터스 맥컬리가 문을 닫고 천천히 들어왔다.

할아버지의 모자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과 바닥에 생긴 발자국들을 보며 와이엇이 말했다. "할아버지, 흠뻑 젖으셨군요. 어디서 오시는 길이세요?"

클레터스는 문 옆에 있는 못에 모자를 걸고는 습관적으로 수그러지는 어깨를 최대한으로 폈다. "어디서 오냐니? 내 나이가 일흔 아홉이라고 해서 볼일도 없는 줄 아냐?"

클래터스는 옆에 앉은 루크의 등을 탁 때렸다.

"아직 너한테 제대로 축하도 해주지 못했구나. 어젯밤에 네 장래 신부한테는 했는데. 잘됐어. 정말 잘됐어. 그런데 루크, 넌 누구한테 들러리 서달라고 할 참이냐?"

루크는 힐끔 주위 눈치를 살폈다. "글쎄 말예요. 저도 아직 모르겠어요. 형이나 와이엇 중 하나겠지요."

와이엇은 입을 쩍 벌렸다. <잘 모르겠어요>라고? 한바탕 소리를 칠까 했지만, 그것이 불쾌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가슴에다 팔짱을 낀 다음 클래이엇을 쳐다보며 말했다.

"루크는 네 동생이야."

클래이엇이 고개를 저었다. "둘도 없는 네 친구이기도 하지."

클레터스가 멜빵에 척 손을 끼우며 말했다.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군. , 그럼 루크, 공정하게 동전 던지기로 할까?"

와이엇은 루크의 들러리가 누가 되든 상관없었다. 그에겐 다른 모든 남자하고 데이트를 하겠노라고 선언한 한 여자가 왜 그와 저녁을 함께 하는 건 별로 좋은 생각 같지 않다고 하는지 그 해답을 찾아내는 일이 훨씬 중요했다.

그는 모든 여자가 자신의 발 앞에 엎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오만한 남자는 아니었다. 거절을 당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리자는 싫다고 말한 게 아니었다. 좋은 생각 같지가 않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 요 몇 년 사이에 내가 한 생각 중 최고로 괜찮은 생각 같은데.

와이엇이 생각에서 빠져나와 보니, 할아버지가 아직도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신랑 들러리가 되면, 신부의 들러리를 낚을 수 있단 말이야. 게다가 질리안은 리자 마크맨한테 들러리를 부탁했다지? 안 그러냐, 루크?"

리자? 와이엇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난 앞면!"

"난 뒤면!"클래이엇도 동시에 외쳤다.

클레터스는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동전을 공중으로 던졌다. 그는 떨어지는 동전을 잡아채서는 자신의 손등에 탁 소리나게 엎고는 살짝 포갠 손을 들어 손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 능글맞은 웃음이 번졌다.

"와이엇, 네가 마침내 질리안의 갈색머리 들러리 처녀랑 춤출 사람으로 낙찰 된 것 같은데. 게다가 너희 사내놈들이 9월 첫째 주 토요일에 연다는 바비큐 파티에서도 잠시 그녀와 단 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겠고 말이야. , 고 아인 몸매가 죽여주잖니, ?"

와이엇의 마음은 한껏 부풀었다. 결혼식장에서 리자 마크맨을 팔에 안고 음악에 맞춰 느린 춤을 추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녀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그녀에게 키스하는 것이다.

"동전을 봐야겠어요." 클래이엇이 클레터스에게 말했다.

"무슨 뜻이냐?"

"무슨 뜻이냐고요?" 클래이엇 역시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난 그냥 할아버지를 믿었을 거예요. 하지만 할아버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선 반칙도 불사하는 분이란 건 누구나 아는 일이에요. 게다가 와이엇은 할아버지 손자잖아요?"

"그럼 내가 사기꾼이란 말이냐?"

"그렇게 말하진 않았어요. 그냥 동전만 보여 주세요. 와이엇이 공정하게 이겼다면 말예요. 만일 그게 아니라면 와이엇은 리자에게 보통 때 하는 식으로 춤을 신청하면 돼는 거지요. 그녀는 누구에게나 동등한 기회를 주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잖아요."

클레터스의 턱이 일그러졌다." 그건 절대 사실이 아니다. 청하기만 하면 어느 남자하고 다 데이트하진 않아.""거절을 당한 사람이 있어요?"루크가 물었다.

"그러게, 누구예요?" 클래이엇도 외쳤다.

"와이엇이 너희들한테 얘기 안 하던?"

클래이엇과 루크는 버킹검 궁의 근위병처럼 동시에 고개를 휙 돌렸다.

"너 데이트 신청했었어?" 루크가 물었다.

"근데 리자가 거절했어?" 클래이엇이 침을 튀기며 말했다.

"그녀 말을 그대로 옮기면, 나랑 저녁식사를 하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고 했어."

"거 참 아리송한 말이군." 루크가 말했다.

"그러게."클래이엇도 동의했다. "적임자를 찾고 있는 중이라고 선언한 여자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내가 적임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나 보지."

"너랑 데이트도 안 해보고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오늘 아침 내내 궁금해하던 것도 바로 그거야."

"내가 말해 주련? 넌 그렇게 근사한 태도는 집어치우고 황소처럼 밀고 나가야 돼. 때로는 남자다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거든."

세 쌍의 시선이 클레스터에게 향해지고, 다시 그의 손등을 누르고 있는 굵은 마디의 손으로 내려갔다. 세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그러니까 보자고요."

", 그럼." 클레터스는 세 사람을 각각 똑바로 쳐다보더니 마침내 손을 떼었다.

와이엇, 클래이엇 그리고 루크 모두 클레터스의 손등에 놓인 반짝이는 동전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낮은 휘파람 소리를 내며 숨을 내쉰 건 와이엇 한 사람뿐이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야. 앞면이다. 공명정대함에 건배를!"

클레터스는 동전을 자기 호주머니에 넣는데 우레가 번쩍였다. 클레터스는 돌아서서 온갖 폼을 다 잡으며 문으로 걸어갔다.

"어르신."클래이엇이 불렀다. "너무 많이 마시지 마세요."

문간에서 클레터스가 뭐라고 중얼거렸으나 와이엇은 확실히 듣지 못했다. 허나 뭔가 열의에 차 대답하는 것이 분명했다. 할아버지가 한 발짝 문을 옆으로 비키자, 오늘 아침 이 사무실에 발을 들여놓을 사람으로는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여자가 문안으로 들어왔다.

뭔가 말을 해야 할 텐데 그 말이 머릿속에서만 뱅뱅 돌았다. 그는 리자 마크맨이 그에게로 걸어오는 모습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 좌우를 살피는 일도 없이 그녀는 곧바로 사무실을 나눠놓은 난관의 앞으로 왔다. 와이엇은 멍하니 클레터스가 문을 닫고 나갔음을 의식했다. 하지만 그는 매끌매끌한 빨간색 우비를 입고 뭔가 해독하기 어려운 표정을 한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보안관님." 리자는 턱을 건방지다싶게 쳐들고 말했다.

"내가 사람을 고소하는 걸 좋아하지 않은 게 다행이군요. 그렇지 않으면 거짓 광고를 낸 제스퍼 계곡을 상대로 고소를 해야 했을 테니까요."

와이엇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이유가 뭐요?"

"당신네 광고에 의하면, 이곳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로서 가장 큰 범죄라야 무단횡단과 가십, 그리고 보니 트럼블이 그녀의 미용실 문에 칠해 놓은 흉측한 주황색 정도라고 했죠."

"근데 그게 아니란 말이오?"

그녀는 고개를 끄떡였다."아무래도 저는 도난신고를 해야 할 것 같거든요."

"뭘 도둑맞았소?"와이엇의 목소리는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점점 무거워졌다.

리자는 물이 떨어지는 우산을 내려놓고 그의 둥그래진 눈을 쳐다보았다.

"제스퍼 계곡의 모범 시민들 중 한 분이 내 차를 훔쳐간 것 같아요."

 

2.

"당신 차를 훔쳐갔다고?"와이엇이 다시 물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와이엇, 루크, 리자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클래이엇을 쳐다보았다.

"당신한텐 이게 잘된 일인가 보죠?"리자가 물었다.

클래이엇 칼슨은 어쩔 줄 몰라했다."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난 내 딸이 차를 훔칠 정도는 아니니까 안심이 된 것뿐이에요.."

클래이엇은 색이 바랜 갈색 카우보이모자를 벗고 와이엇을 흘끔거렸다."핼리 짓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와이엇은 허리에 양손을 얹고 서서 클래이엇의 질문을 잠시 생각해 보았다. 클래이엇이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난 두 달 사이에 아빠와 같이 살게 된 아홉 살 난 핼리 칼슨은 다루기 힘든 아이였다. 그 애는 지난달 리자와 질리안의 집 현관 앞에서 음식을 훔치다가 잡힌 적이 있었다.

하지만 와이엇은 그 꼬마가 차를 훔친 범인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핼리 칼슨이 문제가 많은 아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는 시선을 리자에게 옮겼다.

"열쇠를 차에 꽂아 놨었소?"

리자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선 많이들 그렇게 하더군요. 하지만 난 가방에 열쇠를 넣어두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요."

"그럼 됐어."와이엇은 클래이엇에게 말했다."핼리가 자동차 시동을 어떻게 거는지 모른다면, 그 녀석 짓이 나이지."

모자를 다시 눌러쓰는 클래이엇은 눈에 띄게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와이엇은 자신의 둘도 없는 두 친구에게 슬며시 눈짓했다. 두 명 다 리자를 보고 다시 그를 보더니 다음엔 자기들끼리 서로 마주봤다. 칼슨네 사람들의 씩 쪼개는 듯한 웃음은 유명했다. 두 사람은 모자 가장자리를 잡아 위치를 바로잡으며 똑같이 어디 갈 데가 있다고 중얼거렸다.

리자는 고개를 저으며 눈으로 두 남자가 으스대듯 사무실을 걸어나가는 모습을 쫓았다. 그들은 그녀가 그들 말을 조금도 믿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걸까? 하긴 갈 데가 있겠지. 하지만 두 남자는 카우보이지 배우가 아니다. 와이엇에게서 나가라는 신호를 받았기 때문에 나간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왜 자신이 그런 순간에 와이엇을 올려다보려고 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 보고 나니 눈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하얀 스테트슨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검은 그늘이 섞인 금색이었다. 머리끝이 흐트러짐이 없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아니, 와이엇 맥컬리는 아마 매달 첫째 주에 이발을 하는 종류의 사람일 것이다. 갈색이 도는 금빛 눈동자도 역시 놀랍지 않았다. 오히려 그 깊은 곳에 어린 우울함에 마음이 쓰였다.

그의 피부는 다른 모든 카우보이들처럼 구릿빛이었다. 다만 외이엇은 챕스(서부 카우보이들이 입는 가죽바지)와 박차를 착용하지 않았다. 그는 지역 보안관이다. 그녀를 머뭇거리게 하는 건 유니폼인 베이지색 셔츠가 아니다. 그의 배지도 아니다.

문제는 그에 대한 평판이었다. 제스퍼 계곡의 뒷소문에 의하면, 와이엇 맥컬리는 악담을 하는 일도 없고 술도 많이 마시지 않았으며 담배를 무는 일도 없었다. 그는 평생 문제를 일으킨 적이라곤 없는 사람이었다.

리자 마크맨의 인생은 문제투성이였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 살았었는 지나 어떻게 변해왔는가 하는 것들에 부끄러워하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바나 자신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는 잘 알았다. 이 사무실 안에서는 그것을 찾아낼 수 없었다.

"당신은 실내에서 우산을 펴면 재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소?"

그녀는 자신의 우산에서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알아요. , 위험(Danger)은 나의 중간 이름인걸요."

"정말이오?"

그녀는 우산을 접었다. 주름을 적당히 펴면서 그녀는 와이엇의 눈동자에 어린 호기심을 물리칠 방법을 생각해냈다. "보안관님. 난 꼭 그 차가 필요해요. 오늘 오후에 피에르에 가서 신상품을 가져와야 하거든요. 그러니 잡담은 이만해 두죠."

그가 어깨를 움찔했지만 거의 눈에 띄지 않았고, 그의 눈동자에 어린 실망의 빛 역시 마찬가지였다. 리자는 그게 다 자신의 탓이라고 자책했다.

그러나 곧 그녀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예의바르고 정중했던 것이다. 만일 그가 그렇게 경쾌하게 한 손으로 의자를 돌려 책상 옆에 놓으며 주의를 환기시키거나 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앉으라는 듯 그녀에게 예의바르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의자를 잡아 보이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는 그의 태도를 탓할 순 없는 일이었다.

그는 제일 아래 서랍을 열고 어떤 양식지를 꺼냈다. 손에 연필을 쥐며 그가 말했다."당신 성명부터 시작합시다. 이름, , 중간 이름 순서로 얘기해 줘요."

그녀는 이름과 성은 금방 얘기했지만 중간 이름 첫 철자를 얘기하기 전에, 그의 손에 들린 연필을 보며 당황했다. 평생 연필은 만져 보지도 않았을 것 같은 손. 그의 손은 크고 단단하고 두툼했으며 손가락 끝은 무뎌 보였다. 움직일 때마다 손가락 마디 여기저기에서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당신 중간 이름 첫자가 정말 D?" 그가 물었다.

"바로 그 <데인저(Danger, 위험)>D인거요?"

"아니요, <데스티니(Destiny, 운명)>D예요, 정말이에요. 내 이름은 리자 데스티니 마크맨이에요. 우리 부모님은 내가 마음에 안 드셨나 봐요."

"언제 태어났소?"

"내 인생 시작부터 알고 싶단 말이에요?"

"당신 생년월일을 묻는 거요. 작성을 해야 하니까."

그녀는 그의 앞에 놓인 종이를 내려다보며 그가 묻는 것들을 술술 대답했다.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그녀는 양식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와이엇은 들은 대로 받아 적고 필요한 사항들을 확인해 갔다. 그는 종이에서 눈을 들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리자를 발견했다. 연필을 돌리거나 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가 말했다. "왜 부모님이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됐소?"

그녀는 약간 몸을 앞으로 내밀고 불량스럽다 싶게 고개를 젖혔다.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내가 늘 이렇게 수줍고 착하기만 했던 게 아니에요."

"알 만하오. 나도 그랬으리라 생각되지 않소."

그녀가 급히 숨을 들이켜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 보니 그녀가 놀란 표정이었다. 그가 그녀를 놀라게 했던 것이다. 그 사실에 자신이 얼마나 만족하는지 자신도 놀라웠다. 하지만 그녀의 당황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리를 꼬고 앉았다. 빨간색 비옷의 앞단이 살짝 벌어졌다. 그녀의 다리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발목은 가늘었고 장딴지는 약간 근육질이 느껴졌으며, 무릎도 폭이 좁은 편이었다. 빨간색 웨스턴 셔츠 소매 밑으로 보이는 피부는 부드럽고 연해 보이는 게 너무나 감촉이 좋을 듯 했다.

그의 몸은 확실하게 반응했다. 그가 힘겹게 그녀의 다리에서 얼굴로 시선을 돌리자, 그녀의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비옷으로 다리를 가리고 그를 향해 눈썹을 한 번 올렸다 내려 보였다. 많은 의미를 내포한 행동이었다.

"계속할까요?"

마치 방안의 온도가 10도는 높아진 것 같고 모든 피가 머리에서 빠져나가 아래쪽으로 모이는 듯한 기분임에도 불구하고, 와이엇은 리자 마크맨이 어디서 그런 기백과 지성, 그런 독립심을 얻게 되었는지 궁금해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는 일시적인 기분에 웃음을 짓기도 하고 진지하게 많은 생각을 하는 여자였다. 그녀는 건방지기도 하고 또 남의 심금을 울리는 구석도 있었다. 그리고 그녀 자신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기 자신의 감성을 자각하고 있는 여자만큼 자극적인 상대는 별로 없다.

"보안관님, 괜찮으시다면 신고서 작성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군요."

와이엇은 자기 자신 생각의 고삐를 잡아당기고 그의 배아래 쪽에 형성되는 두근두근한 기운을 무시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는 관련 질문들을 하고 양식 작성을 마쳤다. 리자가 어제 왜 자신의 저녁식사 제의를 거절했는지는 몰라도, 그녀의 눈빛으로 보다 그녀도 그와 마찬가지로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느낌에 대해 솔직해지길 바랐지만 자신을 애먹이고 있는 그녀를 비난하진 않았다. 그는 신고 접수 양식을 돌려서 그녀가 사인할 곳을 가리켰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휘갈겨 쓰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도 같이 일어섰다. "이건 파이도둑 정도가 아니라 차량 절도라는 범죄요. 장담하는데, 수사에 만전을 기해 꼭 당신 차를 찾아주도록 하겠소. 그리고내가 어젯밤 말했던 저녁식사를 다시 제안하고 싶은데?"

그는 그녀가 진심으로 놀라는 표정을 짓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곧 턱을 치켜들더니 뭔가 적당한 말을 찾는 것을 보고 그는 또다시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더니 그로선 조금도 반갑지 않은, 부드럽고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디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보안관님. 당신은 그저 내 타입이 아닐 뿐이에요."

와이엇은 자신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당신도 알겠지만 난 이미 저녁에 약속이 있어요. 벗치 버너와 오늘밤에 열리는 로데오 경기장에 가서 그가 야생마를 타는 걸 구경하기로 했어요."

 

리자는 하늘거리는 데님 점퍼의 주름을 편 다음 가게와 디스플레이 유리창을 구분 짓는 격자무늬 판에 압정을 꽂아 고정시켰다. 여름옷을 팔기엔 좀 철이 지났음을 알고 있었지만 새로운 디스플레이와 세일 가격이 제스퍼 계곡의 여자들을 가게 안으로 불러들이길 기원했다.

그녀는 차가 없는 지금 가을 신상품을 구입하러 피에르에 갈 수 있을지 불확실했지만 늘 그렇듯이 방법을 찾아내리라 자신했다.

그녀는 20여년 만에 최악의 가뭄으로 인해 주민이라곤 5백 명 정도밖에 안 남은 마을에 옷가게를 열려고 12백 킬로미터를 달려온 사람은 아마 자기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7월 중순에 큰 꿈과 거창한 계획을 품고 이곳에 도착했다. 지난달 마을 야유회 며칠 전에 실시했던 획기적인 반짝 세일을 제외하고는 장사는 그렇게 잘 되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뭄은 끝났고 이제 그런 대로 비도 그쳤다. 이건 분명히 좋은 징조였다.

맬로디 맥컬리는 지나가면서 창문을 두드리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리자는 손에 압정과 남성용 웨스턴 셔츠를 들고 있어 멜로디에겐 그냥 윙크와 미소로 대신했다. 다른 사람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몸짓이었다. 멜 맥컬리는 자신의 오빠와는 전혀 달랐다

리자는 압정 하나를 꽂다가 손가락 끝이 찔리는 바람에 와이엇에 대해 생각을 얼른 떨쳐냈다. 아픈 손가락을 입에 넣고 있는데 마침 오팔 그레험과 이사벨 플루잇이 얼굴을 돌리더니 오만하게 고개를 쳐들며 지나갔다. 리자는 그들의 적개심을 확연히 느꼈다. 그녀는 일생 동안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그들과는 별로 얘기도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녀를 싫어할 수 있단 말인가?

분명 그들도 그녀 나이 때는 그녀와 그리 다르지 않은 꿈을 가졌을 것이다. 서른이란 나이에 리자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집과 가족, 사랑할 남자를 만나는 것뿐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가게를 궤도에 올려놓는 일도 중요했다.

가게문에 달아놓은 종이 울렸다. 것 보라니까? 손님들이 벌써 오기 시작하잖아. 그녀는 돌아서기 전에 미소를 준비했다.

루에타 그레험은 우물거리며 수줍게 인사하더니 재빨리 눈동자를 굴렸다. 시계를 보며 리자는 자신의 미소의 정도를 좀 누그러뜨렸다.

"잘 왔어요, 루에타. 벌써 1130분이나 됐는지 몰랐어요. 아주 딱 맞춰 왔네요."

"미안해요. 귀찮게 할 뜻은 없었어요."

리자는 자신의 미소를 좀 더 부드럽게 하려고 무지 애를 썼다. 솔직히 그녀는 오팔 그레험의 딸처럼 소극적인 사람은 만나 본 적이 없었다.

", 가봐야겠어요."그녀는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그러지 않아도 돼요. 얼마든지 구경해요. 요즘은 장사가 별로 여서 당신이 안 오나 기다렸어요."

"그랬어요?"

리자는 고개를 끄떡였다.

"기뻐요. 여기 오는 건 제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일이에요."

루에타의 얼굴이 빨개졌다. 리자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루에타가 닷새 전부터 정각 1130분에 여기 오기 시작한 이후로, 늘어놓은 말 중 가장 그럴듯한 말이었다.

멜로디 말에 의하면, 루에타는 서른세 살이라고 했다. 보기엔 더 들어 보였지만 행동은 아이 같았다. 키는 리자보다 조금 더 커서 170센티미터인 질리안과 비슷해 보였다. 길고 헐렁한 치마와 목깃이 높은 블라우스를 입고 다녀서 확실히 말할 순 없지만 루에타는 가슴이 크고 다리가 길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더할 수 없이 심심한 사람이었지만 정말 착했다.

"찾는 걸 조금 도와줄까요?"

"어머, 아녀요."루에타가 급히 말했다. "그냥 보기만 하는 거예요."

15분쯤 지나서 리자가 남성용 진바지의 디스플레이를 마쳤을 때 루에타는 가게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옷걸이를 집으며 리자가 말했다. "하루 이틀 있으면 신상품을 들여올 거예요. 오늘 가지려 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다른 날로 미뤄야겠어요."

"그래요."루에타가 고개를 끄떡였다. "당신 차에 대한 얘길 들었어요. 정말 안됐어요. 지금 우리 엄마와 이사벨 이모가 모두들한테 <내가 뭐랫어>하면서 얘기하고 있을 거예요."

말을 잘못 꺼냈음을 알았는지 루에타의 눈이 둥그렇게 되면서 금방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미안해요.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닌데."

리자는 허리에 양손을 얹었다."내가 이미 아는 얘기라면 얼마든지 해도 돼요. 이사벨이 어제 사람들을 만나고 다닐 때 내가 바로 옆에 있었는걸요."리자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흔들었다. 그 문제의 여인과 되도록 비슷하게 보이길 바라면서. "<이 평화로운 마을에 여자들을 불러 모으는 그 광고 때문에 나쁜 일이 생길 거라고. 매춘부나 못된 짓을 한 여자들이나 불러 모으는 거지 뭐야. 내 말을 명심들 해>."

루에타는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그런 말에 기분 상하지 않았어요?"

손을 내리며 리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왜 아니겠어요."

리자는 루에타처럼 그녀의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난 그분들 말이 다 틀렸다고 생각해요. 사람은 어떻게 불리느냐에 따라 마음에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고 보거든요."루에타는 귀를 쫑긋 세워야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조그만큼 덧붙였다."도서관에 다시 가봐야겠어요."

딸랑딸랑 종소리를 남기며 루에타는 떠났지만 리자는 생각에 빠져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놀라게 했다. 언제나 그랬다.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더없이 평범한 사람이 너무도 심오한 말을 함으로써 진정한 아름다움을 내비치는 점이었다.

<어떻게 불리느냐에 따라 마음에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고 보거든요>

루에타의 말이 맞다. 이름은 그저 글자 몇 개로 이루어지지만 그 이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영향력이 있었다. 어떻게 불리느냐에 따라 사람을 만들기도 하고 치유하기도 하고 망치기도 한다. 그건 너무 중요해서 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법적으로 수정되기도 한다.

청바지와 웨스턴 셔츠가 놓인 선반을 바라보며 리자는 자신이 무례하게 당신은 내 타입이 아니라고 말을 해서 와이엇의 기분이 상하진 않았는지 걱정이 됐다. 그에게 상처를 주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단지 그녀가 염려하는 바를 그대로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불행히도 그의 행동이나 말은 언제나 그녀의 염려를 불식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녀에 대해 친구 이상의 관심이 있다고 여겨지도록 행동하거나 한 적도 없었다. 그를 볼 때마다 그녀의 피가 뜨거워지는 건 그의 탓이 아니다. 그의 저녁식사 초대 또한 법적으로 금지된 일도 아니었다. 다른 열세 명이나 되는 남자들도 똑같이 그렇게 했고 그들에게는 털을 빳빳이 세운 일도 없었다.

와이엇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확실한 남자였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그녀의 타입이 될 수 없는 이유였다. 그녀는 만일 다시 한 번 기회가 온다면, 그토록 나무랄 데 없고 친절하고 인내심 많은 남자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대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밖에서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리자는 새로 한 디스플레이를 훑어보다가 길모퉁이에 서 있는 순찰차를 발견했다. 운전대 앞에 바로 그 나무랄 데 없고, 친절하고, 인내심 많은 남자가 경적을 울리고 있었다. 그녀는 얼른 가게 밖으로 나갔다. 고개를 숙이고 열린 차창 안으로 들여다보며 그녀가 말했다. "와이엇, 뭘 하는 거예요?"

"타요."

"뭐라고요?"그녀가 물었다.

"타라구요."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그녀를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왜냐하면 지금 피에르에 볼일이 있어 가는 길인데 당신도 물건을 떼러 갈 차편이 필요하잖소."

", 알겠어요."

"피에르까지 태워 주겠소. 또 올 때도 기꺼이 모시겠소. 오늘밤까지 댈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그리고 덧붙였다. "30분 안에 피에르에 가야 하오. 보통 40분은 걸리지. 같이 가겠소?"

그는 <아님 싫소?>라고 묻진 않았지만 그렇게 물어야 마땅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씩 웃음을 쪼개고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장난치듯 경례를 부치며 예의 그 유명한 윙크를 찡긋했다.

", 알겠습니다."

 

리자는 순찰차 뒷자리에 꽉 채운 상자들을 돌아본 다음 다시 좌석에 좀 더 편안하게 몸을 맡겼다. 신상품을 구입함으로써 그녀의 은행 잔고는 거의 바닥났다. 하지만 가게 세는 이미 연말 분까지 지불한 상태였고 지출이 좀 있다 해도 손익분기점까지는 견딜 수 있었다.

그녀는 곁눈으로 와이엇이 좌석에서 자세를 고쳐 앉으며 결리는 어깨를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는 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녀는 그의 우울한 기분을 풀어 주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아무 효과도 보지 못했다. 대개 사람들은 그녀의 관능적인 웃음이나 환한 미소에 거의 반응을 보이는 편이었다. 우리 보안관님께선 맺힌 게 많은 모양이다.

그녀는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침묵을 걷어내기 위해 지평선 위에 벽처럼 보이는 회색 구름을 손으로 가리켰다.

"또 비구름이 몰려오려나 봐요."

그는 그렇다는 의미로 뭐라 소리를 내고는 또다시 침묵을 지켰다.

리자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한번 시도했다. "잘됐죠? 저 정도 구름이면 그간의 가뭄을 충분히 보상을 해 줄거에요. 이곳 카우보이들도 이번 겨울엔 배를 곯을 일은 없을 거구요. 그럼 나도 그럴 거예요."

그가 자신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다시 도로를 보고 있었고 그의 손은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그녀는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와이엇은 이를 악물고 자신의 억울한 기분을 잃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했다. 그러나 리자 때문에 그리 쉽지 않았다. 그녀는 가게 앞 모퉁이 길을 출발했던 한 시간 전부터 관능적이고 포근했으며 또 약간은 방자하기도 했다. 그의 마음은 복잡했다.

오전에 그는 순찰을 위해 일렘 가에 잇는 그녀의 집에 들러 봤다. 자갈로 된 진입로엔 나 있었을지도 모를 자동차 타이어 자국이 비 때문에 다 씻겨 나가고 없었다. 하지만 진흙에 카우보이 부츠 발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와이엇은 그 자국에 자신의 발을 대보았다. 그 자국은 그의 신발보다 약간 작았다.

그러나 그걸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리자의 이웃은 이상한 소리나 모습은 전혀 듣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도둑이 남긴 단서는 별로 없었다. 이곳 사람들은 차를 훔치거나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무슨 이유로 그녀의 차를 훔쳤을까?

그는 다시 그의 저녁 초대에 대해 그녀가 했던 간단하고 무뚝뚝한 몇 마디 말로 생각을 옮겼다. 그녀의 미소는 그의 체온을 20도는 올려놓았고 쾌활한 웃음은 그를 전혀 다른 환상 속에 빠트리곤 했다. 게다가 그녀의 몸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의 몸은 입고 있는 셔츠를 팽팽하게 채우고 있었다. 자신의 손이나 입술에 닿는 그녀의 가슴은 어떤 느낌일까를 생각하며 누워 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와이엇 맥컬리는 여자에 도통한 남자는 아니었지만 그녀가 뭐라 하든, 뭐라고 주장하든 두 사람 사이의 이끌림은 상호적인 것임이 분명했다. 그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며, 이제 그만 그녀의 눈물나는 노력에 반응해 주자고 생각했다.

대화는 해가 될 것이 없었다. 사실, 대화만이 미흡한 직관에 많은 이해를 끌어내 줄지도 모를 일이다.

고속도로에서 차를 돌리며 그가 물었다. "가게가 여태까지 별 소득이 안 생기는 데 대해 달리 생각해 둔 건 없소?"

"이곳으로 이사 온 이후 경기가 그다지 좋지 않았잖아요? 그간 가뭄 때문에 사람들 소비가 많이 위축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겨울 걱정이 앞섰을 테니까요."

와이엇은 자신이 핸들을 힘껏 쥐는지 몰랐지만, 리자는 알아챘는지 그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배드 강을 건널 때면 늘 말이 없어졌다. 그의 이번 침묵은 고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와이엇은 목장주의 아들이고 또 손자였다. 그는 비나 눈, 바닥까지 떨어진 소값 같은 요소들이 생활을 좌우하는 집안에서 성장했다. 특별한 때를 제외하면 새 신발이나 새 옷을 사 입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아직까지도 아버지가 하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 <헌 옷은 입을 수 있지만, 헌 음식은 먹을 수 없단다>

그는 강이 흘러가는 방향 저 먼 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부모님께선 저쪽 강이 굽어지는 데서 익사 하셨소."

와이엇은 입을 꼭 닫아 물었다.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얘기를 어쩌자고 꺼냈을까? 이런 얘기를 하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그는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동정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결단코 그것은 아니었다.

"어쩌다 그렇게 되셨는지 얘기해 줄 수 있겠어요?"

"봄철 장마가 막 끝난 무렵 낡은 다리를 건너다가 변을 당하셨소. 강 수위가 위험할 정도로 높아졌을 때인데 우리 어머니가 병이 나신 거요. 그래서 아버지는 어머니를 피에르에 있는 병원에 데려가는 참이셨소. 물살에 다리가 떠내려가 그분들도 같이 빠지신 거지."

와이엇이 열산 살이 되던 해였다. 그 이후, 그의 인생에 중요한 날들은 많았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처음 보안관 배지를 달던 날, 클래이엇의 들러리로 결혼식에 섰던 날 등등. 하지만 그 날만큼 생생하고 명료하게 기억되는 날은 다시없었다.

"어떤 분들이셨어요?"

"정직하고 성실한 분들이셨소. 아버지의 이름은 죠였고, 어머니는 엘리노어였소. 사람들은 그냥 앨리라고 불렀지. 이곳에 사는 다른 목장 사람들처럼 좋은 분들이었고, <없이>사는 데 익숙해 있었소. 때로는 결코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는 것 같소. 이곳 총각들이 바로 그 증거요. 우리 <없이>사는 걸 참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걸 기꺼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요. 이사벨을 제외하고."

리자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로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었지만 그는 왠지 느긋해지고 좀 너그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웃음은 깊이가 있고, 목이 쉬 듯 들리면서도 섹시했다. 이로 인해, 그는 서로 다른 의미의 <없이><참았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그녀가 눈치 챘음을 알게 되었다.

"미안해요, 와이엇. 당신 부모님 일에 대해 무례하게 굴 생각은 없었어요. 그리고 당신 말대로 이사벨은 당신네 남자들의 곤경에 대해 매우 흡족해하는 것 같더군요."

그의 몸이 뜨거워졌다. 그는 그 열기가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또한 어디로 향하고 잇는지도 알았다. 그의 몸은 계속 흥분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곳의 밤은 달이 바뀜에 따라 더 길어지고 더 쓸쓸해졌다.

한참 호황을 누렸던 30년 전에는 제스퍼 계곡의 인구가 7백 명이 넘었었다. 지난 30년 사이 미혼 여성들이 하나 둘씩 지속적으로 이 고장을 떠나면서 현재는 인구가 5백 명도 채 안 되었다. 20세에서 75세 사이의 미혼 남성이 예순두 명이었다. 리자와 질리안이 지난달 이주해 오기 전까지, 결혼 상대가 될 만한 여자는 겨우 여섯 명밖에 남아있지 않았었다.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남자들이 힘들었다는 내 말을 믿는 거요?"

그녀는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직전에 그녀의 미소를 보았다.

"그럼요, 믿어요. 난 그저 그렇게 많은 여자들이 여길 떠났다는 사실에 놀랐을 뿐이에요."

"모를까 봐 하는 소린데, 여기는 목장주의 아내가 되는 것 외에는 전망 있는 직업이 그렇게 많지 않소. 여길 떠난 여자들은 카우보이의 아내로 들어앉기는 싫었던 사람들이지."

"그 중에서 당신을 원하는 사람이 없었다니 정말 놀라워요."

리자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무심코 라도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이었다.그녀는 와이엇의 반응을 살피지 않을 수 없어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그녀를 더욱 곤경에 빠뜨렸다. 그의 눈길에 그만 사로잡혀 버리고 만 것이다. 그의 눈빛은 갈색 그늘에 덮여 열기를 발하고 있었다. 그의 입술 한쪽이 들리며 그쪽 뺨에 주름이 패였다. 아무렇게나 즐기는 여자였다면 분명 그것을 더듬어 보았을 것이다.

와이엇이 얼마나 강하게 사람 마음을 끌어당기는지, 그리고 그것이 그녀에게 어떤 기분을 선사하는 지와는 상관없이,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알고 있었다. 또한 이번에는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하면서 이 상황을 일시에 종식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녀는 아직도 적당히 둘러댈 말을 찾고 있는데 그가 말을 걸었다. "이제 내 과거를 알았으니 이번엔 당신 얘기를 해주지 않겠소?"

리자는 마음이 가벼워졌고 침착도 되찾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그녀에게 완벽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제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얘기를 스스로 떠들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척하며 그녀가 입을 떼었다."뭘 알고 싶은데요?"

 

3.

"처음부터. 어린 시절은 어디서 보냈소?"

리자는 어린 시절과 상관없는 것으로 뭐든 다른 것을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와이엇은 질문을 했고 그녀는 결국 대답을 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사우스다코타로 이주하게 된 경위와 이곳에 오기 전에는 무슨 일을 했는지, 도는 옷가게를 차리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등에 대해 질문을 해줬더라면 싶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늘 그녀가 어렸을 때 어디 살았으며, 어떻게 살았는지 하는 것들에 더 관심 있어 하는 듯했다.

깊은 한숨을 들이쉬며 그녀는 담담하게 얘기를 시작했다. "난 시카고에서 태어났어요. 하지만 이곳저곳을 수없이 옮겨 다니며 살았죠."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사를 많이 다니셨나 보군."

"혼자 다녔어요."

그를 돌아보면 분명 의문스런 시선과 마주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훔쳐보고 있지 않았다. 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난 열다섯 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집에서 도망쳐 나왔어요."

그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어떻게 도망쳤는지도 묻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이봐요, 보안관님. 내가 왜 도망 나왔는지 궁금하지도 않나요?"

그는 대답할 말을 찾느라 뜸을 들이는 듯했다. 그가 입을 열었을 때, 차는 마을 북쪽 경계선에 이른 상태였다. "당신이 충분한 이유도 없이 그랬다면 놀라겠지. 다시 돌아간 적은 있소?"

그건 이런 경우에 사람들이 흔히 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워졌고 생경하고도 심난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는 그녀를 잘 모르면서도 그녀를 믿는 눈치였다. 여자라면 이런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몇 번 돌아갔죠. 하지만 경찰의 생각이었지, 내 의지가 아니었어요. 언제나 다시 도망쳐 나왔어요."

와이엇은 시선 한켠으로 들어오는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그는 그녀가 어디서 그런 강인함과 독립심을 갖게 되었는지 궁금했었다. 그런데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배지 단 인간들을 싫어하겠군."

"왜 그런 생각을 하죠?"

"당신 말이 그럴 것 같았소."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그럼 제복 입은 사람들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오?"

"물론이에요."

"그럼 난? 내가 싫소?"

"당신은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에요."

그는 주저하듯 옅은 미소를 떠올렸다."같이 저녁도 하고 영화도 볼만큼 나무랄 데 없소?"

"그러기엔 너무 과할 정도예요."

"다시 말해 주겠소?"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나무랄 데 없다>는 말이 손톱이 칠판을 긁을 때 나는 소리처럼 귀에 거슬리는 말로 변해 버렸다. 그녀는 손으로 양볼을 감쌌다. "이런. 내가 또 말을 잘못 골랐군요. 미안해요. 마치 모욕을 주려는 것처럼 들렸을지도 모르겠군요.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당신은 정말 나무랄 데 없는그러니까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 꼭 텔레비전에 나오는 훌륭한 보안관들 같아요. 모르긴 해도 11시에는 잠자리에 들고 매주 교회에 나가는 사람일거에요. 어렸을 때는 성가대에요 있었겠죠. 이제 내 과거를 알았으니 어째서 내가 당신과는 전혀 다른 타입의 사람을 찾고 있는지 이해해야 해요."

와이엇은 그리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무슨 말을 들어도 성자처럼 굴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입을 꽉 다물고 거칠게 차를 가게 앞 주차 공간에 세웠다. 그는 기어를 잠그고 문을 내던지듯 밀어내며 차에서 내려 다시 그 문을 소리나게 닫았다.

약간 당황스러워진 그녀는 따라서 차에서 나왔다. 와이엇은 무거운 옷상자들을 들어 올리며 차 지붕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미소로 무마해 보려 했지만 그의 굳은 기분을 풀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봐요, 내가 좀 말을 거르지 않고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당신 마음을 상하게 하려고 그랬던 건 아니에요."

대답도 않고 그는 그녀가 가게 문을 열기를 기다렸다가 그대로 가게 안으로 들어가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남은 상자를 가지러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는 차의 트렁크와 뒷좌석이 빌 때까지 그렇게 두 번을 왔다 갔다 했다. 그러기까지 그는 한마디도 입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가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해봐야 했다."저기요, 보안관님."

그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 획 몸을 돌리더니 모자를 한쪽 허리춤을 걸치며 다른 한 손으로 모자의 챙을 위로 걷어 올렸다. "다시 사과할 생각이라면 그럴 필요 없소. 당신이 나를 보는 견해가 형편없는 것이 사실이니까.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난 매일 나무에 올라간 고양이나 구해 주며 사는 사람이 아니오."

"물론 그렇죠. 내 말은."

"참고삼아 말하는데, 난 몇 년 전에 소도둑 일당을 일망타진했고 웨스트 오버에서는 은행 강도를 체포하기도 했소."와이엇은 모자를 다시 눌러쓰며 겸연쩍은 얼굴을 감췄다. 열세 살 때 소에 로프 걸기로 상을 탔던 얘기도 할까 말까?

그들은 서로 노려보았다. 두 사람은 웃지도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고,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짙은 머리카락이 가는 덩굴처럼 그녀의 얼굴 주위에 흐트러져 있었다.

와이엇은 그것이 마치 긴긴 밤 사랑을 나누고 난 후의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그런 생각에 숨죽이고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몸 속에 넘실거리는 열기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따져 볼 필요도 없었다.

그녀의 얼굴 위로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는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 같았다. 만일 그들의 심장이 똑같은 세기로 맥박 치지 않았다면 그는 모자라도 씹어먹어 버렸을 것이다. 그녀는 그가 지적인 면에서만 나무할 데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육체는 훨씬 더 세속적이고 감각적이며 야성적인 그 무엇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숨소리는 그의 귀에도 거칠었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입술로 향하였으며 생각은 단 한 가지로 모아졌다.

순간 문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 때문에 그의 몸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와이엇이 시선을 돌렸다. 클레터스가 급하게 문을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녀석아, 한 시간이나 기다렸다."

"할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메틸 젠트리가 당장이라도 목을 매게 생겼다. 그 부인이 울며불며 전화를 걸어와서는 너를 자기네 동네로 불러달라고 생떼를 썼대서 내 그러마고 했다."

와이엇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그럼으로써 할아버지가 그 분이 그러는 이유를 빨리 얘기하기를 기다렸다. 메틸 젠트리는 일흔 여덟이 된 과부로 파이크 거리에 있는 집에서 60년 간 살고 있었다.

"메틸 할머니는 괜찮으세요?"

"내가 알기로는 그래."

와이엇은 무심코 리자를 보다가 그녀의 눈동자 속에 자기와 똑같은 걱정의 빛이 번져 잇는 걸 보았다.

"할아버지, 말씀하실 거예요, 안 하실 거예요?"

클레터스는 멜빵 줄을 잡고 자신의 각진 턱을 들어 올렸다."지금 한다, 한다구. 그렇게 골낼 필요 없다. 다 고놈의 빌어먹을 고양이 때문이니까. 또 나무에 올라가 내려오질 않는다지 뭐냐. 메틸은 고놈을 안전하게 내려 줄 사람은 너밖에 없다는 거야."

와이엇은 공기를 불어넣은 타이어처럼 아드레날린이 몸속으로 서서히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가릴까, 아니면 메틸 젠트리에게 그 망할 놈의 고양이일랑은 혼자서 처리하라고 말해 버릴까 망설였다.

리자를 훔쳐보니 그녀 역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치켜 올라간 그녀의 눈썹은 많은 것을 얘기하고 있었다.

이를 악문 그는 들고 있던 마지막 상자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리자와 클레터스에게 딱딱하게 고갯짓을 하고 쿵쿵거리며 걸어가 가게 문을 열고 나갔다.

"저 녀석 왜 저러는 거야?"

대답은 귀에 울리도록 쾅 닫히는 문소리가 대신했다. 와이엇을 생각해서 그녀는 클레터스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그녀가 어린 시절의 당신 손자를 겁 많은 성가대원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클레터스의 대답은 와이엇은 샤워할 때만 노래를 부르고 그것도 음정이 맞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차 트렁크를 쿵 닫고는 순찰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세상에, 그는 돌기 일보직전이었다. 만일 클레테스가 5초만 더 늦게 왔다면 그는 그대로 몸을 움직였을 것이다. 온몸을 짜릿하게 했던, 그녀 눈동자 속의 그 기대감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5초만 더 있었더라면 그녀를 잡아 가까이 끌어당겼을 것이며, 5초가 더 있었다면 그녀의 몸에 팔을 감고 그녀의 입술을 향해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그 짧디 짧은 5초만 있었다면.

중심가 남쪽으로 달리며, 와이엇은 에드네 이발소 앞에 모여 있는 동네 어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다 건성이었다. 그는 차를 왼쪽으로 꺾어 파이크 거리로 진입 한 후 메틸 젠트리의 작고 하얀 집 앞에 차를 세웠다.

가냘픈 체구에 갈색 머리카락의 부인이 현관에서 그를 맞으며 그를 뒷마당으로 안내했다. 마치 전에는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욕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그는 메틸 부인네 떡갈나무 가지 사이에 발을 끼웠다. 조그만 가지에 그의 모자가 걸리더니 땅으로 떨어졌다. 나무에 오르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는 가장 높은 가지까지 손을 뻗쳐 고양이를 붙들었다. 한 가지 방해라면 고양이의 발톱과 요란한 가르랑거림이었다. 똑같이 해주고 싶은 것을 그는 겨우 참았다.

목을 빼고 지켜보고 있던 메틸은 그가 땅에 딛자마자 그에게서 오렌지빛 물결무늬의 고양이를 받아 안았다. 그리고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고양이를 얼렀다.

그는 몸을 굽혀 모자를 줍고 메틸과 몇 마디 주고받은 다음 보안관 사무실로 차를 몰았다. <나무랄 데 없다>는 말이 고장 난 레코드판처럼 자꾸 그의 머릿속에서 반복해 들려왔다.

그는 차에서 내려 사무실로 걸어가 <나무랄 데 없는>태도로 문을 거칠게 닫으며 들어갔다. 메모들을 체크한 다음 모자를 던져 벽걸이에 걸었다.

리자는 나를 나무랄 데 없다고 생각한단 말이지? 좋아.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그녀의 자유였다. 그는 그동안 그녀에게 뭔가 인상을 심어 주려고 계속 추파를 던졌었다. 하지만 그도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느 구석엔 가는 분명 있었다.

게다가 여자라면 그녀말고도 많았다. 아니, 사실을 인정해야지. 그렇게 많은 건 아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눈썹을 조금 치켜 올리는 것만으로 그의 호흡을 가쁘게 하는 사람은 사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와이엇 맥컬리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는 남자, 그것도 예민하고 자존심이 있는 남자였다. 다시는 그 여자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거기까지가 다였다.

 

"클래이엇, 네 챕스 좀 줘." 와이엇이 말했다.

"내 뭘 달라고?" 클래이엇이 투덜거리는 투로 말했다.

와이엇은 친구를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대형 스피커를 타고 안내방송이 울려 퍼졌다. 관중들은 다른 경기장에 있는 로데오 경기를 보며 환호하고 있었다. 몇 미터 전방에는 말들이 나지막하고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냈다.

그는 둘러보던 것을 그만두고 클래이엇에게 말했다. "하이 킥커 녀석을 탈 생각이야. 그러니 네 챕스가 좀 있어야겠어."

"너 미쳤어? 나도 얼마 전에 그 녀석을 타봤어. 호스티스가 옷 벗는 것보다 더 빨리 나를 떨궈내더라니까."그가 도리질을 쳤다. "근데 언제부터 로데오 경기를 하려고 마음먹은 거야?"

와이엇의 시선이 반대편 스탠드 중간쯤에 자리를 잡고 있는 흑갈색 머리칼의 여자한테로 옮겨갔다. 그는 한 시간 전부터 야생마를 타볼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심을 굳힌 것은 리자가 벗치 버너의 입술에 키스를 해주던 2분전부터였다.

와이엇의 시선을 쫓던 클래이엇이 말했다. "여자 하나 때문에 야생마 한 번 타고 완전 바보로 낙인찍히려는 건 아니겠지?"

와이엇은 굳이 자신의 어두운 표정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는 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때론 남자다움만이 해 낼 수 있는 일이 있거든."

클래이엇 칼슨은 와이엇을 오랫동안 쳐다봤다. 와이엇은 그의 그런 눈초리를 너무 자주 받아 본 터라 별 느낌이 없었다. 그는 클래이엇이 그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게 그냥 놔두었다.

 

"이제로데오가 왜 사우스다코타에서 관중 동원 1위의 스포츠인지 알겠지?" 멜로디 맥컬리가 물었다.

리자는 완전히 압도당해 있었지만 함성과 낯선 냄새, 그리고 주위에서 벌어지는 경기는 생생하게 느껴졌다. 핫도그 굽는 냄새와 기름진 프렌치프라이 냄새가 장내에 가득 했다. 장내 방송의 소리는 지구 반대편에서도 들릴 듯 했다. 그녀는 평생 한 장소에서 그렇게 많은 카우보이모자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리자, 저기 좀 봐."

갑자기 멜이 벌떡 일어서자, 아직도 조금 어안이 벙벙한 상태에서 리자도 같이 일어섰다. 많은 모자들 중 한 카우보이의 모자만이 구별해 내기란 보통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만났던 남자들은 대개 갈색이나 검정, 또는 회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녀가 아는 한 흰색 스테트슨을 쓰는 남자는 단 한 사람이었다.

", 저건 와이엇 같은데."

"그래, 와이엇이야." 멜이 수다스럽게 말했다. "도대체 우리 오빠가 지금 저 난폭한 말에 올라타야 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글쎄, 나는."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터질 정도로 야단스럽게 울려대 리자의 말을 덮어 버렸다.

"신사 숙녀 여러분, 자리를 뜨지 마십시오. 우리의 악명 높은 제스퍼의 신사께서 하이킥커로 자신의 운을 시험하려 하고 있으니까요."

장내아나운서가 관중들에게 야생마 등위에서 자신의 체력을 시험해 보는 비전문 로데오 경기자들의 행운을 빈다고 말했을 때 와이엇은 경기장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모자가 내리쬐는 햇빛으로부터 그의 눈 주위를 가려주고 있었지만 심장은 무섭도록 뛰게 만드는 긴장과 그 끄트머리를 잡는 불안감을 진정시키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말 평범한 저녁이 아니었다. 오늘 저녁은 그의 명예가 걸린 밤이었다. 적어도 한 명의 복잡하고 고집 센 흑갈색 머리칼을 가진 여자와 관련해서는 그랬다.

귓가로 땀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이 고약한 동물을 타는 것과 관련해 배웠던 모든 지식을 상기하려 애쓰며 그는 왼손으로 고삐를 꽉 움켜쥐고 오른손은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문이 철거덕거리며 열리자, 야생마는 고꾸라지듯 뛰어나갔다. 와이엇은 가까스로 그 기세를 따라잡았다.

처음엔 아버지, 나중엔 할아버지로부터 사람을 태울 의사가 전혀 없는 말들을 길들이는 방법도 배웠다. 이곳에 사는 다른 남자들처럼 한창 시절엔 그도 로데오를 하곤 했고 언제나 매년 여름이면 크레이지 호울스에 설치되는 기계 황소를 타고 운을 시험하곤 했다. 하지만 기계 황소는 지금 그가 올라앉은, 살아 있는 야생마와는 비교가 안 되었다.

하이 킥커는 명성이 있었다. 이 말은 네 발이 다 당에서 떨어질 정도로 공중으로 높이 뛰어올랐다. 온몸을 비틀어대며 몸부림을 치고, 이를 드러내며 미친 듯이 등을 퉁겨댔다.

와이엇의 아버지는 아들이 선천적으로 말의 중심을 찾아내는 능력이 있어 말을 잘 탄다고 자랑을 늘어놓곤 했었다. 아버지는 또 한 번 자랑하게 해드리기 위해 애쓰는 와이엇의 다리 근육이 팽팽하게 조여졌다.

오른손을 그대로 들고 무릎을 구부리고 엉덩이를 안장에 붙이고 있기 위해서는 경이적인 집중력이 필요했다. 자연에서 잡혀온 말은 와이엇을 떨어뜨리기 위해 온갖 짓을 다했다. 갑자기 오른쪽으로 몸을 던지는가 하면 왼쪽으로 던지기도 하고 잇는 힘껏 등을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하며 와이엇의 뼛골을 흔들었다.

그의 머리에서 피가 터져 나오자 사람들의 함성도, 스피커를 터뜨릴 듯 왕왕거리던 아나운서의 목소리도 모두 뚝 그쳤다.

그는 리자의 키스를 상상하며 더 힘껏 고삐를 쥐었다.

안장을 올린 야생마를 탈 때는 적어도 8초 이상을 버텨야 유효했다. 그가 그보다 오래 견뎌낸 일은 열 번도 넘었다. 다리의 근육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장갑을 낀 손가락에는 쥐가 났다. 하이 킥커가 대가리를 숙이고 뒷발을 허공에 대고 발길질을 계속 해댔다. 벨이 울렸다. 말이 뒷다리로 섰고, 와이엇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그는 고삐를 놔주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가 허공에 퉁겨져 나왔을 때 그의 손은 맨손이었다. 다른 경기자들은 늘 자신이 슬로모션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고들 했다. 그러나 와이엇은 너무 빨리 땅바닥에 내팽개쳐져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어느 부분이 다쳤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부분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도.

"신사 숙녀 여러분, 와이엇 맥컬리입니다." 아나운서가 소리쳤다. "존스 지역의 보안관은 보장받은 인생을 훌훌 털어 버릴 수만 있다면 전문 로데오 선수로 나서도 손색이 없겠군요."

와이엇은 몸을 일으켜 세우면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우스 다코타에서 성장한 소년들이 다 그렇듯이 그도 전에는 남다른 배짱과 부러진 뼈들을 훈장처럼 자랑하는 안짱다리 로데오 챔피언 중 하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이젠 여한이 없었다. 그에게는 혈관을 타고 흐르는 방랑벽이 없었고, 인생 행로를 바꿔 볼 요량으로 말 잔등에 올랐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로선 훨씬 더 마음 설레는 이유가 있었다.

엉덩이를 털고 진흙 속에서 모자를 주워 올린 그는 관중들을 향해 손을 올려 보이고 나서 그 이유가 기다리고 있는 출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죽고 싶어?" 멜이 출구 한쪽에서 다가와 소리쳤다.

그는 동생에게 고개를 저었지만 그의 시선은 그 옆에 서 있는 여자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리자의 진바지는 갈색 양가죽 빛깔이었고 위에 입은 톱은 그보다 좀 더 엷은 색이었다. 그는 갈색 계열의 옷이 그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거예요?" 리자가 물었다.

그녀의 얼굴로 시선이 올라가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는 허리 부근의 통증 따위는 까맣게 잊고 말았다. 또렷한 광채를 띤 그녀의 눈을 보니 그의 가슴이 뛰었다. 모자에서 진흙을 털어 낸 그는 머리를 한쪽으로 삐뚜름하게 들었다.

"당신이 염려할 줄은 몰랐군."

그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콧방귀를 뀌었다. "난 이 세상 피조물을 다 염려해요. 아무리 어리석게 굴더라도요."

와이엇은 새롭게 다시 웃음을 지었다. "벗치 버너한테 키스하기 전에도 그에게 어리석다고 했소?"

그가 묻는 어조 속의 뭔가가 그녀의 모든 생각을 정지시켜 버렸다. 그의 눈이 사악한 빛을 띄며 그녀의 감각을 왈칵 뒤흔들어 놓았다. "어째서 내가 당신한테 키스할 거라고 생각하죠?"

그는 자기 뒤를 힐끔 쳐다보았다. 경기장이 텅 비어 잇는 것을 안 그는 출구에 기대면서 말했다. ", 모르겠소.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공정한 일일 것 같았소. 안 그렇소?"

애를 썼지만 왠지 화를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턱에 힘을 주고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난 내 입장을 명확하게 했던 것 같은데요."

", 그랬지. 당신은 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그는 펄쩍 뛰어 출구를 넘어왔다. 땅바닥에 안전하게 내려선 그는 이로 장갑을 물어 빼고 천천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말을 하든지 움직이든지 해서 와이엇이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못하게, 그의 입술이 벌어지지 않게, 그의 눈동자가 키스에 대한 기대로 꿈꾸듯 흐려지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중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멍하니 고개를 들고 머리를 약간 옆으로 기울이고 살짝 눈꺼풀을 내려뜨렸다.

그의 눈가의 작은 주름과 하루 사이에 자라난 짧고 억센 턱수염이 다 보였다. 그에게선 남자의 진흙과 말 냄새가 났고 더불어 정체를 알 수 없는, 강하게 호소하는 무언가가 또 있었다.

그녀가 눈을 감자 곧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처음엔 부드럽게 그러다가 좀 더 다급하고, 좀 더 감각적이고, 좀 더 뜨겁게 변해갔다.

그녀는 요 몇 달 사이 열 명도 넘는 남자들과 키스를 했다. 하지만 그 중 누구도 와이엇과 비교할 순 없었다. 그녀는 평판이 깔끔하기 그지없는 보안관이라면 당연히 저잔 빼는 키스만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닿은 입술에는 점잖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의 혈관 구석구석이 뜨겁게 물결쳤고 심장은 무섭게 파닥거리며, 절대 동요하지 않겠다던 맹세가 부끄럽게도 그녀의 안에 굶주림을 무자비하게 뒤흔들어 놓았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 그의 머리카락이 닿기 전자기는 자신의 손이 그의 목 뒤로 올라간 것도 깨닫지 못했다. 와이엇은 오직 그렇게 되기만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자신의 품속으로 힘껏 당겨 안았다.

그녀는 그의 거친 호흡이나 그녀의 몸에서 느끼는 그의 육체의 열정적인 반응 따윈 놀랍지 않았다. 그녀가 놀란 것은 바로 자기 자신 때문이었다.

세상에,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녀가 고개를 돌려 키스를 피했다. 그리고 그의 목에서 손을 풀었다. 그제서야 대형 스피커를 통한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다른 로데오 경기자를 응원하는 관중들의 함성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한 걸음 물러서서 힐끔 멜을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한 멜의 연기는 정말 일품이었다. 멜과는 나중에 따로 얘기를 해야겠다. 지금은 와이엇이 먼저였다.

그를 쳐다보자 그녀는 다시 갈망을 느꼈다. 로데오 경기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지만 리자는 지금 이 남자의 눈동자 외에는 그 어느 것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해선 안 될 일을 했군요, 와이엇."

"벗치 버너한테 키스할 때도 그렇게 말했소?"그는 리자가 마음의 평정을 찾았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물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키스를 벗치의 키스와 비교하는 것을 그만두게 하고 싶었다. 물론 벗치 버너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와의 키스는 몇 초도 가지 않았고, 그녀의 발끝에 이르기까지 원초적인 열망을 불어넣는 그런 키스도 아니었다.

"오늘 야생마를 탄 이유가 뭐죠?"

와이엇은 빈틈없는 리자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때문에 뒷걸음칠 그도 아니었다. 필요 이상 시간을 들여 모자를 눌러쓰면서 깊이 숨을 들이마신 다음 그가 입을 열었다.

"아직도 내가 나무랄 데 없는 사람 같소?"

놀라움으로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지금 나 때문에 그 야생마를 탔다고 말하는 거예요?""아무래도 점수를 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소. 내 마음을 알지 않소, 리자?"

그녀의 눈이 의심을 품고 가늘어졌다.

"효과는 있었던 것 같군. 아직도 내가 저녁식사를 같이 하기에 너무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오?"

그는 날카롭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를 들었고 그녀의 눈매가 누그러지는 것도 보았다. 그의 눈앞에서 그녀의 표정이 변했다.

그리고 그녀는 입을 떼었다. "와이엇, 난 아무래도."

"됐소."또다시 거절의 말이 흘러나올 기미를 보이자 그는 말을 잘랐다. "당장 대답할 필요는 없소. 충분히 시간을 두고 한번 생각해 봐요."

그녀에게 달리 대꾸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는 모자챙을 푹 잡아당기며 눈이 등잔만 해져서 서 있는 멜로디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그 자리를 떴다.

그는 왜 뒤를 돌아보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돌아봤을 때, 리자는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보았다.

그녀는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슬픈 듯 약간 머리를 옆으로 기울이며 8월 미풍에 머리칼을 맡긴 채 서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그녀가 이젠 더 이상 그를 겁많은 성가대 소년처럼 보지 않을 거라는 사실에 자신이 아끼는 말을 걸었다.

그는 다시 그녀에게 다가가 또 한 번 키스하고 싶었지만 오늘 하이 킥커가 그의 자존심을 위해 해줬던 일을 그녀가 해줄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는 마음을 다래며, 그녀가 그 뜻을 알아낸 적이 거의 없었던 미소를 그녀에게 던지며 다시 몸을 돌렸다.

클래이엇이 챕스를 어렵게 벗어내고 그는 낡은 픽업트럭 운전석에 몸을 들이밀었다. 온 근육이 쑤시기 시작하는 것이 내일이면 더 심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마음쓰지 않았다. 리자에게 받은 키스가 그의 고통에 조금 약이 되었다.

그는 입술을 핥아 남아 있는 립스틱을 맛보았다.

그래! 그래! 그 키스는 분명 가치가 있었다. 그것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는 다음에 키스할 때는 좀 더 조용하고 훨씬 더 사적인 장소에서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시간을 주겠노라 약속했다.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인내심이 있는 남자였으니까.

그는 시동을 걸고 기어를 1단에 놓았다. 황혼녘의 어스름한 하늘이 한결 더 검은 빛을 띠기 시작하자 그의 생각은 그의 목덜미에 와 닿던 그녀의 손과 입술 사이로 새 나오던 한숨, 그의 품에 녹아들던 그녀의 몸 등을 더듬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나를 기다리게 할까?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하루? 아니면 한 주?

쿵쿵거리는 맥박만이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4.

그네가 삐걱삐걱 움직이고 풀벌레들이 윙윙 노래하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자동차의 시동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리자는 한쪽 다리를 끌어올려 몸에 붙인 다음 현관에 설치한 그네를 다시 타기 시작했다. 그녀는 평야를 가로질러 불어오는 여름바람에 몸을 부비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꿈은 그렇게 비현실적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부자도, 높은 지위도, 명성도 아니었다. 오로지 집과 가족, 사랑할 남자, 그리고 일뿐이었다.

그녀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일렘 가의 이 집은 벌서 그녀 자신의 집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집은 낡았지만 아주 튼튼했다. 그리고 그림처럼 예쁘진 않지만, 페인트가 다 떨어져나가 그런 대로 세월이 역력히 배어 있는 예스런 그네는 절대 속임수가 아니었다.

그녀는 여자들만 주목하라고 하는 사우스다코타의 작은 마을에 관한 광고와 마주쳤을 때, 그녀는 자신의 바람이 현실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녀는 이름이 붙은 모든 마을에는 웨스턴 의류가게가 있는 법이라는 기사를 어디에선가 읽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조사를 시작했고 위스콘신에서 차를 몰아 제스퍼 계곡에 현장 답사차 들러 본 다음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밤 그녀의 꿈은 하늘의 별처럼 멀어서, 그녀가 사랑하고 또한 그녀를 사랑해 줄 남자를 발견한다는 것이 요란한 일처럼 느껴졌다.

남자에 관한 한 그녀는 별다른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미래의 남편이 될 사람은 잘생길 필요도, 키가 클 필요도 없었다. 억세지 않아도 되고 부자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지적인 사람이라면 좋을 것이다. 그녀를 웃게 만드는 사람이라면 더욱 행복할 테고. 게다가 와이엇 맥컬리의 반만큼이라도 키스를 잘 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녀가 너무 갑자기 그네를 세우는 바람에 그네는 삐걱하고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보안관 와이엇의 사람됨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밤 야생마를 타던 남자에 대해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리자는 장님이 아니었다. 보안관 제복을 입었을 때의 그의 모습이 어땠는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낡은 챕스와 해진 청바지를 입고 그녀 앞에 서기전까지 그녀는 그의 진면목을 몰랐던 것이다. 그 웃음, 그 모습, , 그 움직임. 여자의 마음을 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전조등 불빛을 뿌리며 트럭 한 대가 길모퉁이를 돌아오더니 그녀의 집 현관 앞에 천천히 멈췄다. 시동이 꺼지고 문이 열렸다.

잠시 후 그녀가 주위를 환기하고 고개를 들어 보니 마음에서 영 지워낼 수 없을 것 같던 바로 그 남자가 현관 계단 끄트머리에 서 있었다.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행동인 것처럼.

"생각해 봤소?"

그녀는 한참만에야 그가 자신의 저녁 초대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는 눈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다음, 발을 바닥에 짚으며 난간 너머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게 충분한 시간을 주겠노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

"그랬소."

"두 시간이 충분한 시간이에요?"

"두 시간하고도 10분이오."

"그래, 10분이 그렇게 긴 시간인가요?"

"당신도 나 같을 줄 알았소."

현관 전등 불빛이 그의 모자 위에 떨어져 그의 얼굴 윗부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녀의 눈빛을 볼 수 없었지만 강한 턱선과 턱의 움푹 들어간 부분, 그리고 부정 할 수 없이 확실하게 지은 미소는 볼 수 있었다.

리자는 모든 생각이 그대로 마비되어 버리는 것 같았다. 이런 증상이 처음은 아니었고 분명 마지막도 아닐 듯 했다. 한 달 전 그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이 남자에게는 특별한 뭔가가 느껴졌다. 그 이후로 그녀는 그를 피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매력만 더 유혹적으로 느끼게 됐을 뿐이었다.

그녀는 이 사람은 와이엇 맥컬리, 지역 보안관, 그 고장에서 가장 사랑 받는 금발의 남자등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이라고 스스로에게 애써 상기시켰다. 또한 그녀가 찾고 있는 타입의 남자가 아님을 주지시켰다. 머리는 그 말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 어쩌겠소?"

"나보고 어쩌라는 거예요?"

그는 모자를 벗소 비스듬히 고개를 젖혔다. "내게 앉으라고 청할 수 있잖겠소."

리자는 주변의 불 꺼진 집들을 둘러본 다음 손에 모자를 들고 현관 아래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좋을 대로."

와이엇은 내색 없이 계단을 올라왔지만 리자는 그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을 때 그의 호흡이 갑자기 지체되는 것을 분명히 알아챘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런 말을 탔으니 안 그러면 이상하지요."

그는 남자를 노려보는 여자처럼 눈을 흘기며 가는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 "내가 그랬잖아요."

그녀는 쿡쿡 새어나오는 웃음을 보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다리를 꼬았다. 옷이 살짝 스치는 소리가 났다. 그도 왼쪽 발을 오른쪽 무릎 위에 얹었다. 와이엇은 여자와 남자가 다르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지만 한 여자를 알고 싶다는 욕망이 이렇게 강렬하게 느껴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며, 무엇을 느끼는지 깊이깊이 더듬어 보고 싶었다.

"당신은?" 그는 얘기의 실마리를 찾으며 물었다."로데오 경기는 어땠소?"

"좋았어요."

그는 목구멍을 타고 나오는 비난조의 소리를 막을 수 없었다."좋았다고? 사우스 다코타 최고 인기 스포츠를 <좋았어요>라고? , 리자, 좀 더 열광적인 표현은 없소?"

그녀는 그를 똑바로 보며 미소 지었다. "다음엔 좀 잘 해볼게요."

그는 발을 내리고 그네를 앞뒤로 움직였다. 그녀가 방금 다음 기회를 암시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는 정확히 2시간 10분전으로 되돌아가고 싶었지만 지금으로선 그저 부담 없는 대화를 즐기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들은 가뭄, , 맑음, 흐림 등의 날씨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는 아홉 살 때 아버지랑 했던 낚시 여행과 어머니가 만들어 주던 블루베리 파이에 대해 얘기했고, 그녀는 열다섯 살 처음 질리안을 만나게 된 경위 등을 얘기했다.

"질리안이 아니었으면 지금 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어요. 질리안은 날 집으로 데려가 자기 할아버지와 이웃 사람들한테 소개시키고 나보고 같이 살자고 졸라댔어요. 아이비 페닝턴은 꼭 어미 닭처럼 나를 감싸고 돌았죠. 비록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아이비, 질리안, 코리, 그녀의 딸 엘리스는 진짜 우리 엄마 아빠보다도 더 가족 같았어요."

"당신과 질리안이 그들을 남겨두고 떠나오기가 쉽지 않았겠군."

"모든 건 변하는 법이죠. 난 변화에 늘 잘 적응해왔어요. 사실 그게 내 강점 중 하나이긴 하지만 이런 곳에 살아 본 것은 처음이에요. 위스콘신 주 메디슨도 그렇게 복잡한 대도시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이곳의 적막함은 아직도 생경하기만 해요. 제스퍼 계곡 주민들은 옛날부터 아홉시에 집 밖으로 나왔나요?"

"그게 이 마을 규칙이오."리자가 웃음을 터뜨리자, 그 소리가 그의 가슴을 저셨다. 그의 호흡은 더 깊어졌으며 목소리도 한층 잠겨들었다."그게 그렇게 좋소?"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는 듯했다. "남자들은 친절하지만 여자들은 대부분 수줍은 편이에요. 게다가 이사벨 푸루잇은 날 미워하죠.""이사벨은 모든 사람을 미워하오."

그 말은 그녀의 관심을 끌었다. "그래요?" 와이엇이 고개를 끄떡였다. "제스퍼 계곡에 사는 사람 중 그 노숙녀의 삿대질을 받지 않고 황당한 혓바닥 위에서 놀아보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요. 루크와 클래이엇은 그래서 그녀를 순악질 여사고 부르지. 아직까지도 그 할머니가 옆에서 귀를 세우고 있으면 그렇게 불러요."

"어머, 와이엇. 정말 못됐어요."

"그게 바로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요."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보았다. 와이엇은 그녀의 그 맑고 검은 눈동자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남자가 있을지 궁금했다. 그의 내부에서 여러 가지 감정이 끓어올랐다. 그는 그녀의 입술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녀의 입술은 반쯤 벌어져 있었다. 놀라움 때문인지 아니면 기대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머리 회전이 느려졌고 그의 피는 욕망으로 뜨거워졌다.

"늦었어요." 그녀가 갑자기 일어나 난간으로 걸어갔다.

와이엇이 천천히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내쫓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모자 여기 잇네요>라고 말처럼 들리는군. 날 쫓아 버리고 싶은 거요, 리자?"

그녀가 대답을 않자, 그는 계단을 하나 내려섰다. 시선의 높이가 같아졌다.

"이제 나랑 데이트하는 것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 본 거요?"

그녀는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강산이 몇 번 변한다 해도 당신이 내가 당신이 찾는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요."

"내가 찾는 여자가 어떤 여잔데?"

"그거야, 사랑스럽고 얌전하며 좋은 여자죠. 정상적인 어린 시절을 보냈소, 아버지가 감옥에 간 적도 없고 특별한 날에는 카드도 보낼 엄마가 있고, 또 버려진 창고에서 산 일도 없고 먹을 걸 훔쳐 본 일도 없는 그런 사람요." 현관 불빛이 그녀의 피부를 노랗게 물들였다. 머리칼은 검게 윤이 흐르고 그녀의 눈동자는 일렁이는 눈물 때문에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녀는 고집스럽게 턱을 쳐들었다."당신이 지금 하는 생각, 난 싫어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아오?"

"뻔하죠."

"인정해요, 리자, 당신은 날 좋아하고 있소."

그녀는 아마 수많은 남자를 떼어냈을 법한 타산적인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나무랄 데 없는 남자치고는 그렇게 싫지 않아요."

그는 또 한 계단 내려가며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당신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오. 잘 자요, 리자."

리자는 놀란 표정으로 와이엇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잘 가라는 말 비슷한 소리를 저도 모르게 웅얼거리며 장승처럼 서서 그가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시동이 걸리고 트럭의 빨간 차량 등이 긴 꼬리를 그리며 길모퉁이를 돌아갈 때까지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다. 뭔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고개를 한껏 젖혔다. 높은 나뭇가지들 사이를 빠져나가면서 바람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녀는 <당신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오>라고 말하던 와이엇의 낮게 잠긴 목소리를 생각했다.

그는 시인이 아니었지만 말재주가 있는 사람임에 분명했다. 또한 그녀를 어떻게 하면 허물어뜨릴 방법도 알았다. 하지만 그에겐 그 이상의 무엇이, 카우보이다운 멋이나 신사의 기질을 넘어선 그 무엇이 있었다.

 

"토요일 날 딱 맘에 드는 웨딩드레스를 샀으면 좋겠는데." 질리안이 목소리는 탈의실을 가리는 두꺼운 커튼에 막혀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렸다."만약 래피드 시에도 없으면 아버딘까지라도 갈 거야. 솔직히 그때라도 찾을 수 있을지 몰라."

"맘에 꼭 드는 걸 발견하게 될 거야." 리자는 문 쪽에 서서 아동용 웨스턴 셔츠를 벽에서 떼어내고 있었다.

"드레스를 고르는 건 시작일 뿐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 루크! 그의 생각대로라면 결혼식은 내일이 될 거야. 내일! 맙소사 내가 어떻게 내일까지 결혼 준비를 다 할 수 있겠니? 난 한 달 안으로도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커튼 여기저기가 질리안의 팔꿈치나 무릎을 크게 스칠 때마다 펄럭거렸다. 아동용 청바지를 떼어내며 리자는 혼자 웃었다. 질리안은 평소 신중하고 차분한 친구였다. 하지만 지금, 평소 그녀의 모습은 루크 칼슨이라는 남자로 인해 온데간데없는 듯했다.

마침내 탈의실에서 나온 질리안이 물었다. "어떠니, 리자?""솔직히 말해서 넌 요즘 뭘 입어도 빛이 났어. 남자 옷을 입어도 근사해 보일 거야."

질리안은 삼면거울에 자기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보며 말했다.

"꼭 루크처럼 얘기하네. 이 스커트 정말 이브다. 근데 언제부터 브래지어니 슬립, 팬티 같은 품목도 다루기로 한 거니?"

리자는 흘러내린 머리를 뒤로 넘기고 옷걸이를 집어 들었다. "여자고객들을 좀 끌어들이고 싶어서. 속옷은 누구나 입는 거잖아, 안 그래?"

질리안이 다시 탈의실로 들어가자 리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 질리안이 귀가했을 때 그녀는 자고 있었다. 그리고 아침에 질리안이 일어나기 전에 집을 빠져나왔다. 친구를 피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동틀 무렵 잠이 깼고 생기를 느끼며 열의를 회복한 기분이었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는데 이제 겨우 반밖에 못했다. 그녀의 원기 넘치고 활력적인 작업태도 때문에 질리안이 지난밤 로데오 경기장에서 있었던 그녀와 와이엇의 키스에 대해 물어볼 엄두를 못 내고 있는 것이라면 그녀로선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가 브래지어와 팬티들을 유리 선반 위에 정돈하는데 질리안이 커튼을 열고 원래 입었던 옷을 다시 입고 탈의실을 나왔다.

"리자." 질리안이 살랑거리며 다가왔다. "하나 물어 보고 싶은데."

리자는 머뭇머뭇 질리안의 커다란 푸른 눈동자에 어린 표정을 살렸다. "그래?"

"네 눈빛이 다시 생기를 되찾은 것 같아 정말 좋다." 리자는 안심했다. "아이비가 맨날 말하잖니, 형편이 힘들면 힘든 대로 다 굴러가는 법이라고."

질리안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정말 아이비다운 말이다. 그러고 보니 집에 가기 전에 루크네 사무실에도 들려야 하고. 아무래도 지금 나가야겠다. 저녁 때 보자. 그땐 와이엇이 로데오 경기 후에 한 키스가 너의 이 갑작스런 변화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얘기해 줄 여유가 생기겠지?"

리자가 획 돌아보았다. 질리안이 깔깔거리며 잽싸게 열려 있는 가게문 밖으로 피하면서 그녀가 던진 옷가지들을 피했다. 리자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일을 다시 시작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다. 문가에서 저벅저벅하는 발자국 소리가나서 돌아보니 와이엇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뭔가를 주워 올리고 있었다. 허리를 편 그의 손에는 자줏빛 브래지어가 달랑거리고 있었다. "문에다 상품을 걸기 시작한 거요, 리자?"

그녀는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 그녀로선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녀는 몸을 구부리는 것이 그에게는 쉽지 않은 동작이었을 텐데도 그것만으로는 손이 풀리지 않았다. 그녀는 씩씩하게 걸어가 그의 손에서 속옷을 잡아챘다.

그는 어두운 실내에 눈을 적응시키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천천히 돌아서서 리자를 꼼꼼히 훑어보았다. 그녀도 그를 쳐다보았지만 그녀의 검은머리가 눈을 가리며 어깨 너머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그녀는 긴 데님 스커트와 술과 장식 단추들로 솔기를 마무리한 소매 없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는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그 옷밑으로 느껴지는 그녀의 풍만한 곡선에 넋을 잃고 있었다.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렇게 웨스턴 복장이 잘 어울리는 여자는 어디서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그들 사이에 가로놓인 침묵을 새삼 의식한 것처럼 물었다. "뭘 살 게 있어서 들린 거예요?" 와이엇은 한 손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 쇼핑이란 해가 서쪽으로 뜰 때나 하는 걸 거요." 그녀는 하던 일을 계속 했다. "그러니 경기가 이런 것도 당연하군요. 뭘 사러 온 것이 아니라면, 뭘 도와드릴까요, 와이어?"

그는 눈을 내리깔고 일을 하고 있는 그녀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참으로 묘한 질문이었다. 그녀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을이라면 백 가지도 넘게 헤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창 밖을 흘끔 보니 사람들이 메인가를 오가고 있어 적당한 때와 장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사무적이 볼일이 있어 들린 것이기에 그는 제멋대로 드는 생각들을 짓눌렀다."드레이퍼에서 오는 길인데 당신과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았소.""내 차가 드레이퍼에 있다고요?"

"당신 차는 찾지 못했소. 하지만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소." 그는 남성용 청바지가 진열된 곳으로 다가갔다. "아주 좋군."

"정말 내가 뭔가 찾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그는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로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돌아서서 그녀의 눈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내게 필요한 게 뭔지는 확실하오."

리자는 혀로 입술을 축였지만 가슴이 천천히 그러나 나른하게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어젯밤 그가 키스하고 나서부터 그런 현상이 생기더니 그가 그녀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얘기했을 때 또 한 번 그랬다. 처음엔 말 냄새와 사람들의 환호성, 챕스를 입은 와이엇의 모습 같은 것들 때문에 그러려니 했었다. 그리고 외로움 때문일 거라고도 여겼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떤 변명거리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정신을 수습하려 노력했다."무슨 단서라도 잡은 거예요?"

그는 고개를 끄떡였다. "오늘 아침 꽤 많은 전화 제보를 받았소. 한 제보자는 드레이퍼에서 위스콘신 주 번호 판을 단 차를 봤다는 거요. 그래서 내가 직접 가서 조사를 했소. 드레이퍼는 제스퍼 계곡보다 훨씬 작은 마을이오. 만일 빨간색 차가 그곳을 지나갔다면 스미티 잡화점 앞에 앉았던 노인양반들이 못 봤을 리 없소."

"누가 봤다고 해요?" 와이엇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당신 차는 드레이퍼 근처에도 가지 않은 것 같소.""그런데 그 사람이 왜 그런 제보를 했을까요?"

"모르겠소. 연결이 좋지 않은데다 말도 웅얼거리며 변조한 듯해서 누군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소. 하지만 뭔가 친숙한 느낌이 드는 구석이 있었소."

"그럼 여기 제스퍼 계곡에 사는 누군가가 내 차를 훔쳐갔다는 거예요?"

그는 고개를 끄떡였다. "이곳 거리의 모든 차도에는 온갖 차와 트럭이 주차되어 있소. 그 중 절반은 당신 차보다 신형들이오. 게다가 그 중 또 절반 이상은 다 열쇠를 꽂아두지. 그런데 그 사람은 당신 차를 선택한 것이오."

리자는 와이엇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오늘 모자를 쓰고 있지 않았다. 모자가 없으니 그의 눈가의 잔주름과 입가에 깊게 잡힌 선도 확실히 보였다. 그녀는 어제 그가 자신은 하루종일 고양이나 구해 주러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때의 그 분개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오늘 그의 표정은 빈틈없이 긴장되어 있어 심각한 사건도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으리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누가, 왜 내 차를 가져갔는지 짚이는 데가 있어요?"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나름대로 시시한 추론을 내놓고 있소. 이사벨 푸루잇은 악마가 한 짓이라고 하고, 부머 브라운은 차 도둑 일당이 이 지역으로 원정을 온 거라고 생각하고 있소."

"하지만 당신은 어느 쪽에도 동의하지 않잖아요."

그가 정말 고개를 흔들었는지는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의 눈에 어린 확신의 빛은 돌로 새겨진 듯했다.

"그런 것보다 훨씬 단순한 사건인지도 모르겠소."

"차 도둑 일당보다 단순한 게 뭐예요?"

"여태까지 반경 90킬로미터 이내 지역에서 신고된 자동차 도난 사건은 없었소. 만일 다른 곳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십대 아이들 짓일 거라고 말할 거요. 물론 이 지역 십대 애들은 그런 짓을 전혀 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십대들 장난은 아닌 것 같소."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내 생각엔 아무래도 당신 관심을 끄는 데 정신 팔린 총각들 중 하나의 짓인 것 같소."

와이엇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그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항상 꽉 찬 듯한 느낌을 주긴 했지만 오늘은 너무 낮고 우울해서 그녀는 실제 피부로 그 울림을 느낄 수 있을 지경이었다. "제스퍼 남자들 중 하나라고요?"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떡였다. "차가 도난 된 뒤 당신 주위를 맴도는 사람이 있는 것 같소?"

"그야 당신이죠."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더니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내가 당신 차를 훔친 것 같소?"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왜 아니오?"

"당신은 낮이 밝다는 것만큼이나 확실히 정직한 사람이니까요."

이번만큼은 그녀의 말이 전혀 모욕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는 미소를 떠올렸고,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황당스럽게 뭔가 할 말을 찾았다. 문에 달린 종이 짤랑짤랑 소리를 냈다. 리자는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리다 루에타 그레험이 가게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흐릿했던 시야를 그녀에게 고정시켰다.

루에타는 몇 걸음 들어오다 말고 멈춰 섰다. 칙칙한 갈색 머리카락 뿌리까지 새빨개진 그녀가 우물쭈물하며 인사를 건넸다."미안해요. 친구가 와 잇는 줄 몰랐어요."

리자는 수줍어하는 여인에게 얼른 다가갔다. "맥컬리 보안관은 친구가 아니에요, 루에타. 볼일이 있어서 오셨어요." 와이엇도 몇 걸음 다가왔다. "맞아요, 루에타. 리자와 난 도난 된 차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어요." 루에타의 시선이 와이엇한테서 리자에게로 옮겨지더니 다시 기능만을 위주로 한 자신의 신발로 떨어졌다.

"어머, 그랬군요, 저기, 당신 차를 찾아줄 사람이 있다면, 그건 와이어뿐일 거예요. , 방금 할 일이 있는 게 생각났어요." 그녀는 황급히 가게를 빠져나갔다. 너무 서둘러서 그녀의 풀 먹인 긴치마가 펄럭거릴 정도였다.

루에타가 나가고 난 자리를 바라보며 리자가 말했다. ", 이상해요. 한 주 동안 매일 정각 11시 반이면 여기 꼭 들르는데 저렇게까지 어려워하는 건 처음 봐요."

"난 다른 경우를 본 적이 없는데."

리자는 와이엇을 흘겨보다가 다시 문에 걸린 종을 보았다."왜 그렇게 황급히 가버렸는지 알 것 같아요. 당신을 좋아하는 거예요."

"당신이 말하는 의미로는 아닐 거요." 그녀는 와이엇의 목소리에 깃든 상한 확신에 놀란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그에게 다가가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그럼 루에타가 당신한테 반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가 그렇다는 듯 한 번 고개를 끄떡였다. "루에타 그레험은 보기 딱할 정도로 수줍음을 타는 사람이지만 나한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오."

"어떻게 그렇게 자신해요?"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냐하면 남자는 여자가 자기한테 관심이 있다면 그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오." 리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요?" 와이엇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다시 한 번 침을 삼켰다.

"어떻게 아는지 물어 보지 않을 거요?" 그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섰다.

", 차라리 지옥불이 얼음으로 변했다는 말을 믿겠어요." 와이엇은 걸음을 멈췄다. 그의 얼굴 전체에 미소가 퍼져나갔다. 젠장, 그는 그녀가 턱을 도전적으로 치켜들고 고압적인 목소리로 저렇게 건방지게 말할 때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예의 치명적이다 할 만한 미소를 뿌려대며 그가 말했다. "그럼 당신은 내 머리와 잘생긴 용모에 홀딱 반하지 않았단 말이오?" 리자 외에 누구도 그렇게 기가 막히다 못해 코가 막히다는 시늉으로 기침을 멋지게 해대지는 못하리라.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고 삐딱하게 서서 턱을 불량스럽게 이죽거렸다.

"다행히도 아직 머리까지 맛이 가진 않았군요."

그는 그 자리에 움직이지 않고 얼마나 서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흥분 호르몬과 순수한 남성이 그의 내부에서 마구 솟구쳤다. 어젯밤 침대에 들고서 한참 동안 리자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새벽 2시경에 그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더 이상 <미스터 나이스 가이>가 되지 말자는 것이었다. 이제 총을 잡을 때였다. 열정과 끼를 발휘할 때였다. 와이엇 맥컬리는 법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이 여자를 자기 여자로 만들 작정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금이 간 레코드판 같은 소리는 듣기 싫소. 그래, 내가 말했던 저녁식사는 어떡할 거요?"

"뭘 어떻해요?"

"난 당신과 같이 지내고 싶소. 단 둘이서만. 남자대 여자로. 당신이 순순히 응하지 않겠다면 체포도 불사할 거요."

리자는 이런 설왕설래는 속히 끝내야 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남성적인 곡선을 그리는 그의 입술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속으로는 흙투성이의 로데오 챕스를 입고 그녀 앞에 서 있던 그의 모습을 상상해내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그녀는 그에게 <싫다>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왜 그런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봐요, 리자, 어쩔 거요?"

"난 할 수 없어요, 와이어."

"할 수 없다는 건 무슨 뜻이오?" 그를 처음 보았던 한 달 전에도 그녀의 육체는 그에게 반응했었다. 지금 그의 얼굴에 보이는 당황스런 표정은 그녀의 마음을 전혀 다르게 잡아당기는 구석이 있었다. 리자 마크맨은 비겁자가 되어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진실을 외면하는 법은 절대 없었다. 그리고 그 진실이란, 그녀가 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태도는 명확했고, 그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정진한 대답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녀 마음속에 바위처럼 자리 잡은 용기와 결단성 덕분에 그녀는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오늘 밤 당신과 식사를 할 수 없는 이유는 식당에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저녁 부업을 하는 거요?" 고개를 끄떡이며 그녀는 사정을 설명했다. "어제 당신이 돌아간 뒤 정말 많은 생각을 했어요. 또 경기가 회복하려면 거의 5년은 걸릴 거라는 기사도 봤구요. 가게가 흑자로 돌아설 때까지 아무래도 내 웨이트리스 기술을 써먹어야 할 것 같더군요." 그는 그녀로부터 좀 떨어진 곳에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알았소. 그럼 내 문제는 어떻게 할 작정이오?"

그는 황금빛이 도는 갈색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그녀는 그를 마음에서 지워 버릴 수 없을 것이 확실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런 감정들을 무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쩌면 지금이 그녀가 그런 감정들과 맞설 때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몸이 마비되는 듯한 기분을 선명하게 느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멜은 보통 7시에 가게문을 닫아요. 그때 오세요."

그는 미소 짓지 않았다. 동시에 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몸을 돌려 문으로 걸어갔다. 손잡이에 손을 얹으며 그가 어깨 너머로 돌아보았다. "7시라 했소? 그때 봅시다."

 

5

시골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이야기소리, 그릇들이 덜거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와이엇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이 마을의 유일한 식당에 모여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오늘과 같은 목요일에는 멜의 식당은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그러나 오늘밤은 테이블 열 개와 칸막이 좌석 여덟 개에 손님이 다 들어 있었다. 비록 그의 여동생의 음식솜씨가 좋긴 했지만 와이엇은 제스퍼 계곡의 총각들이 그저 멜의 고추 스테이크와 해시 브라운을 먹자고 모여든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식당은 낡고 분위기도 별로였다. 카우보이들이 모자를 벗지 않고도 얼마든지 밥을 먹을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오늘밤엔 문 양쪽에 있는 모자걸이에 빈자리가 없었다. 카우보이들이 펼쳐내는 이런 난데없는 매너시위는 식당이 갑자기 눈부시게 격조 있는 분위기를 갖추게 되어서가 결코 아니었다. 새로 온 웨이트리스 때문이었다.

"헤이, 리자! 시간 있으면 내 잔에 리필 좀 해줄래요?"닐 앤더슨이 소리쳤다.

"나도요."그의 동생 네드도 따라했다.

"난 멜의 애플파이를 한 쪽 먹고 싶어요."앤더슨 가의 막내아들도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서둘 필요는 전혀 없어요."세 남자가 한 목소리로 말했다.

클래이엇은 기도 안 찬다는 듯 웃었다. "정말 마음놓을 수 없는 녀석들이라니까."

와이엇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칼슨 형제는 둘 다 심드렁해지는 모양이었다.

루크는 고개를 저으며 맘에 안 든다는 듯 중얼거렸다. "닐이 밴조를 끝내주게 뜯고 네드와 로버트의 기타 실력도 나쁘지 않다는 건 인정해. 또 저 세 녀석이 호흡을 맞추면 가스(미국 유명 남자 컨트리 뮤직 가수)를 뺨친다는 것까지도 좋다 이거야. 하지만 녀석들이 여자를 사로잡는 첫 번째 요소를 알고 있다면, 내 기꺼이 제스퍼 계곡의 다음 목사가 되겠어."

루크 칼슨이 목사가 된 모습을 생각하니 와이엇은 폭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는 남아있는 커피를 마지막으로 후루룩 소리 내어 마시고 나서, 교회에 하는 쥐들처럼 갑자기 조용해진 동석자들을 쓱 훑어보았다. 세 사람 모두 신기한 동물 보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들 그래요?" 와이엇이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생각해 보니까 말이야." 클래이엇은 불길하리 만치 소리를 죽였다. "넌 어떻게 네가 처음부터 점찍었던 여자를 녀석들이 집적거리는데도 조금도 열이 받지 않는 표정이지?"

"그러게." 루크가 맞장구를 쳤다. "클래이엇한테 어젯밤 로데오 장에서 있었던 얘기 다 들었어. 지금쯤이면 너랑 리자가 키스한 얘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걸. 지난달에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질리안과 한 번 어떻게 해보려고 길 잃은 고양이며 개를 양손에다 끼고 동물병원으로 몰려들었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열이 받친다. 네가 나나 클래이엇보다 열 배는 인내심이 강한 놈이란 건 알아. 하지만 저 녀석들을 참아 주려면 성자가 되야 될 텐데 그럴 수 있겠어? 아무리 너라 해도 말야."

와이엇은 도움을 구하듯 할아버지를 쳐다봤지만 그의 반응은 건성으로 하는 어깨 짓뿐이었다. 클레터스로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칼슨 형제의 말을 부정할 길이 없는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리자가 7시에 오라고 했는데도 그는 530분도 안 돼서 어슬렁거리며 나타나지 않았는가.

그가 뭐라고 항변을 늘어놓기도 전에 깊고도 농염한 웃음소리가 그의 시선을 식당 저편으로 이끌었다. 다음 순간 와이엇은 하려던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리자는 낮에 보았을 때처럼 데님 치마에 소매 없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는 앞치마가 섹시한 느낌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진부한 천 조각이 그녀의 허리에 묶여 엉덩이와 풍만한 가슴을 감싼 그 모양이 그로 하여금 이전까지의 생각을 재고해 보게 만들었다.

그는 한 시간 이상이나 그녀를 쳐다보고 있으면서 그녀가 식당 이쪽저쪽으로 커피 주전자들과 쟁반의 중심을 잡으며 동동거리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렇게 다 안다는 표정으로 앉아 잇는 건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야?" 클래이엇이 불만스럽게 물었다.

와이엇은 리자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클래이엇과 루크, 클레터스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다 기대에 찬 눈빛이었다.

"?" 루크가 재촉했다.

와이엇은 손으로 턱을 매만지면서 세 면에게 돌아가며 긴 시선을 주다가 조용히 말했다. "리자는 오늘 계속된 데이트 신청을 두 번 다 물리쳤어. 난 그 이유를 알아."

세 사람 모두 테이블에 팔을 얹으며 몸을 내밀었고 귀를 기울이느라 그들의 머리는 약간 옆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클래이엇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 이유가 뭔데?"

"리자는 저 녀석들한테는 관심이 없고, 바로 나한테 있다 이거지."

"그걸 어떻게 알아?"

와이엇은 클래이엇을 향해 음흉하게 웃었다. 곧 미소는 클래이엇에게서 루크로, 이어 클레터스에게로 천천히 옮아갔다. 세 사람 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칼슨 형제가 와이엇의 등을 두드렸고 클레터스는 입이 귀까지 찢어졌다.

"카나리아를 꿀꺽 삼킨 고양이처럼 앉아 있었던 것도 당연하군." 클레터스가 루크와 클래이엇에게 말했다. ", 너희 둘, 아무래도 우리가 여길 나가야 다른 녀석들도 일어나겠다. 그래야 와이엇이 새로 온 웨이트리스를 훔쳐내지."

루크도 똑같이 웃으며 고개를 끄떡거렸다."안 그래도 일어나려고 했어요. 질리안과 데이트가 있거든요 ."

"그럼 난 제레미 에버츠 집에 가서 핼리나 찾아와야겠군. 행운을 빌어, 와이엇."

와이엇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기대감으로 충만했다. 행운? 그는 행운에 의지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본능을 믿고, 솔직함의 매력을 무기로 삼을 작정이었다.

"고마워요." 리자는 총각들 중 한 명한테서 받은 팁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좋은 밤 보네요." 그 총각이 문을 나서며 말했다.

그녀는 특유의 윙크를 보내 주고 돌아서서 시내를 돌아보았다. 앤더슨 형제가 식당 한가운데 앉아서 파이를 다 먹어가고 있었다. 부머 브라운은 따끈한 퍼지 선디(설탕, 번터, 우유, 코톨릿으로 만든 걸쭉한 캔디)를 그릇이 드러나도록 싹싹 핥아먹고 있었고, 건너편 칸막이 자리에 있는 제이슨 터커는 세상 최후의 만찬처럼 허겁지겁 음식을 입속에 퍼 넣고 있었다.

그리고 와이엇은 커피를 마시는 척하며 테이블 너머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끄떡이며 미소 지었다. 그녀는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갔지만 그가 보내온 미소에 마음 한구석은 한참동안 설렜다. 똑같은 현상이 그가 오늘 가게 들렀을 대에도 있었다.

그녀는 그 후 실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를 볼 때마다 느끼는 매혹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와이엇이 그녀에게 맞는 남자라는 확신은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말 판이하게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그 손아귀를 벗어날 요량으로 경찰의 정강이를 차며 살아온 사람이었고 와이엇은 한 번도 진정한 고난에 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안정된 집안에서 태어난 반면, 그녀는 솔직히 그 반대였다. 그의 평판은 깔끔하기 그지없는 반면, 그녀의 과거는 칙칙한 구석이 있는 수수께끼투성이였다.

제이슨이 음식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일 끝나면 나랑 드라이브할래요?"

"정말 구미가 당기네요. 하지만 당분간은 심야 드라이브를 할 시간이 거의 없을 것 같아요."

"왜요?" 앤더슨 형제 중 하나가 물었다.

그녀는 쉬지 않고 음식 먹은 접시를 쟁반 위에 올려놓았다."가게 영업상태가 좋아질 때까지는 저녁과 주말에 식당과 주점에서 일을 해야 돼요."

삼형제는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중 그녀 생각에 닐이라고 짚이는 사람이 말했다. "상황이 그렇게 안 좋아요?"

그녀는 고개를 끄떡였다. "광고가 안 돼서일 거예요."

제이슨이 목청을 돋우며 말했다. "리자, 여기 시골뜨기들은 쇼핑을 별로 하지 않는 게 문젠 거 같아요. 하지만 당신이 판매량을 정말 늘리고 싶다면 청바지 한 벌당 키스 한 번의 사은품을 내걸면 돼요."

와이엇이 천천히 일어섰다. 시선을 리자에게서 떼지 않은 채 그는 호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녀의 음색 짙은 웃음소리가 그에게 물결처럼 전해졌다. 그녀는 그 짓궂은 손님들에게 정말 멋진 생각이라며 충고 귀담아 듣겠다고 맞장구를 쳐주며 작별인사를 했다. 와이엇은 그 중 누구라도 자신이 교묘하게 식당 밖으로 쫓겨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지 궁금했다.

리자의 농염하고 푸근한 태도가 좀 경솔한 감은 있었지만 그녀는 어느 총각에게나 동등한 유머와 관심으로 대했다. 거절할 때도 상대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배려했고 응수 때마다 윙크와 웃음, 진정에서 우러난 미소를 곁들였다. 정말 놀라운 여자였다.

부엌에서 팬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자, 리자와 와이엇은 둘 다 소리나는 쪽을 돌아보다가 다시 한 번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런 방법은 효과가 없을 거요." 그가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리자는 한쪽 다리에 무게를 싣고서 손을 허리에 괴었다. 모자걸이에 남아걸이에 남아 있는 한 개의 모자를 힐끗거리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알아요, 저 사람들은 키스하는데 정말로 돈을 쓸 사람들이 아니에요. 키스는금세 잊혀지는 그저 키스일 뿐이잖아요."

"그렇지 않소."

깊고도 허스키한 와이엇의 말투가 그녀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를 깊고 우울하면서도 감각적인 무엇으로 만들어 버렸다."그런가요?"

그가 고개를 끄떡였다. "키스는 본능적이어서 잊혀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오. 적어도 당신의 경우는 그랬소."

"그랬어요?"

리자는 언제부터 자신이 이렇게 바보가 되었나 싶었다. 그녀는 몇 분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정신이 멀쩡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지금은 한꺼번에 두 가지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다 와이엇이 그녀를 바라보면서 눈으로 그녀의 입술을 햝고있는 탓이었다.

", 그렇고말고."

그의 목소리는 쉰 듯한 속삭임에 가까웠다. 그는 그녀의 뒤로 다가서서 솜씨 좋게 앞치마의 끈을 풀었다. "이제 여길 나가는 게 어떻소?"

"뒷정리하는 것을 도와 야죠."

와이엇은 부엌을 향해 돌아서서 큰 보폭을 그리며 걸어갔다. 그는 문 안쪽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소리쳤다.

"손님들 다 갔어, . 난 리자를 집까지 바래다 줄 거야. "동생의 찌를 듯한 시선을 무시하고 잽싸게 문을 닫은 그가 다시 그녀 앞으로 성큼 걸어왔다. ", 뭘 기다리고 있소?"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순순히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당신 하는 게 맘에 드네요, 맥컬리 씨."

 

두 사람은 두 시간이 넘게 드라이브를 즐기고 리자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제스퍼 계곡 주변의 간선도로는 다 섭렵할 양인 듯 샅샅이 훑으며 돌아다녔다. 곳곳에는 전설 같기만 한 이야기들과 사연이 숨어 있었다. 결코 잊지 못할 드라이브였다.

"그래, 내 집을 돌아본 소감은 어때요?"

클레터스는 항상 그 집에 가보면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와이엇은 진리에 가까운 말이라고 생각했다.

리자의 가구는 전엔 새것이었겠지만 이젠 거의 20년은 된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무척 기능적이고 편리하게 쓰이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밝은 색상의 깔개와 쿠션, 소파 연에 세워둔 빨간 술 장식이 있는 고풍스런 램프에는 주인의 기호가 잘 드러났다.

그는 카운터에 놓인 광주리에서 레몬을 꺼내 레모네이드를 만들어 내는 그녀에 대해 놀라지 않았다. 가게 운영하랴, 또 저녁에는 식당에서 서빙하느라 피곤한 하루를 보낸 그녀가 꾸벅꾸벅 졸고 서 있으려니 생각했다면 그것은 그의 착각이다.

그녀는 그를 데리고 다니며 집안을 쭉 안내했고,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의 움직임은 활기찼다. 의자마다 무슨 사연이 있었고 책장, 화초들도 다 마찬가지였다. 와이엇은 그녀가 그러한 정력을 그에게도 부어 주기를 바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그의 맥박은 빨라지고 온몸은 열기가 퍼져나갔다.

그녀는 그의 침묵을 오해한 듯했다. "걱정 말아요, 보안관님. 옛말에 <그럴듯한 말을 하기 뭐하면 그냥 입을 머물고 있는 게 낫다>란 말이 있잖아요. 나도 내 집의 진실을 잘 알아요."

와이엇은 한쪽 다리를 천천히 다른 쪽 다리 위에 포갰다. 그런 행동으로 몸속에 차오르던 욕망이 조금 누그러지는 듯 했다. "진실? 당신 집은 당신만큼이나 훌륭하오."

그녀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다래지더니, 다시 생각에 잠긴 듯 가늘어졌다.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러지 말아야 하는 걸 알면서도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꼭 내가 신병대에 있을 때 만났던 친구처럼 말하는군."

그녀의 턱이 매듭에서 풀려 나와 목덜미에 흐트러져 내린 머리카락 때문에 둥그렇게 보였다.

"당신 군대에 있었어요?"

그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숙이고 목소리도 죽였다. "당신만 비밀스런 과거가 있는 줄 아시오?"

"지금 내 얘기가 아니잖아요. 어떻게 해서 군대에 가게 됐죠?"

와이엇은 군대 얘기를 할 마음이 없었지만 제 입으로 꺼내놓고 보니 피해갈 길이 없었다. 한결같은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며 그는 얘기를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였소. 갑자기 이제 일생동안 무엇을 하며 살아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거요.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는 목장 일부를 파신다고 그러시더군. 할아버지는 연로해지셨고, 또 난 내가 목장 사람으로 살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소. 그래서 하루는 대학에 다니는 루크를 찾아갔었소. 그리고 다시 사우스 다코타로 돌아오지 않고 군대에 들어갔던 거요."

리자는 그가 많은 부분을 생략했지만 그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적당히 요점만을 얘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로선 금시초문인 얘기였다. 와이엇이 고향을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했었다. 그의 긴장된 턱선을 바라보며 그녀가 말했다."말에 들던가요?"

"군대 말이오?"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간다는 사람 있으면 발 벗고 뜯어말릴 거요. 사실 군대에서 일생일대의 황당한 일을 경험했소. 하지만 재미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 그러면서 난 성장했소. 3년을 복무하고 났을 때, 군대 밥은 충분히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소. 집으로 돌아가고 싶더군. 그래서 돌아왔고,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오."

리자는 그의 눈빛을 보면서 그가 잘한 일이라는 데에는 그의 이주까지 통틀어서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은근한 암시에 긴장했다. 순간 그가 양볼에 깊은 주금을 만들며 미소 지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애써 미소를 되돌렸다."뭐 좀 물어 봐도 돼요, 와이엇?"

"뭐든지."

"좀 전에 말했던 가장 황당했다던 일이 뭐예요?"

와이엇은 움찔했다. 그는 지난 몇 년간 그 일은 생각하지 않고 있었고 그 날에 관해 그 어느 누구에게도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리자가 그 일을 묻기에 이른 것이다. 그는 뭐라고 둘러댈까 궁리하다가 호기심 어린 그녀의 큰 갈색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며 그가 입을 열었다. "신병들이 가득한 어떤 방이 있었소. 우리는 필기시험을 보고 시력과 청력 검사를 보았소. 그리고 나서, 신발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벗으라는 명령이 떨어졌소. 그 명령이 그렇게 소름끼쳤던 것은 아니었소. 우린 명령대로 하고 줄을 섰지."

그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계속했다. "전에 신체검사를 받아 봐서 어떡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소. 하지만 우리가 돌아섰을 대 담당 검사관들이 그렇게 웃어 제끼리라고 생각도 못했지. 한 검사관이 <텍스(텍사스 사람이란 뜻으로 텍사스 인인가의 여부를 떠나 카우보이를 통칭해서 쓰는 말), 자네부터 하자고>그러는 거요. 난 좌우를 슬쩍 훔쳐보다가 그 방에서 유일하게 카우보이 부츠를 신은 내 발로 시선을 떨궜소. 나 참, 그 꼴이란."

리자는 자신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는 것을 느꼈지만 와이엇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는 자조하듯 얼굴을 찌푸리고 어깨를 으쓱하며 얘기를 끝마쳤다. "그게 다요."

그녀는 그의 표정에 깃든 어색함을 감지하고 지고지순한 보안관님께서도 난감해서 쩔쩔 매는 일을 당하기도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 상황을 유머스럽게 이끌어가고 싶었지만 발가벗은 채 카우보이 부츠 하나만을 신고 서 있었을 그의 모습을 상상하니, 그녀의 전신으로 열기가 번졌다. 분명 웃어야 할 일임에도 그녀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는 두 사람 사이의 감각적 상황을 느낀 듯이 더 한 걸음 다가섰다."내일 밤 나와 저녁식사를 하자고 하면 어쩔 거요?"

<좋아요> 그녀의 머리에 처음 뛰어 들어온 대답이었다. 바로 그 뒤에 스스로에게 했던 수백 가지의 맹세가 따라 들어왔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내가 제이슨 터커한테 다음 몇 주 동안은 바쁠 거라고 한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어요, 와이엇. 난 가게에서 개점 기념 파격 세일을 할 생각이에요. 광고전단을 만들어서 여러 곳에다 뿌려야 해요. 애들을 대상으로는 풍선을 줄 생각이고, 모든 사람들한테 쿠키와 레모네이드를 대접할 거예요. 오늘이 벌써 목요일이니까 이번 주말까지 다 준비할 수 없어요. 하지만 토요일부터 시작하면 일주인 동안 할 수 있어요. 어떻게 생각해요?"

와이엇은 그녀가 말을 풀어내는 방식을 사랑했다. 정확한 답변을 얻어낸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말은 생기 있고 자극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손을 머리 뒤로해서 귀엽게 핀을 빼내는 모습을 훨씬 더 사랑했다.

그가 그녀 가까이 다가갔다. "멋진 생각인 것 같소. 하지만 나라 위해 조금의 여가 시간은 남겨 둬야 하오."

그녀는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 그를 향해 돌아섰다. "질리안에게 결혼 준비를 돕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리고 내가 멜의 식당에서 저녁 손님들을 치라는 걸 알잖아요. 도라리도 일손이 필요하구요."

"세 가지 일을 모두 할 참이오?"

그녀는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장난스런 표정을 그에게 던졌다. "도라리와 멜은 둘 다 일손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이 지역에 여자가 심각하게 부족하다는 거 당신도 알잖아요."

와이엇은 머리를 내저었다. 물론 다 아는 일이었다. 그 자신이 신문에 광고를 내자고 결정했던 마을 대표회의의 일원이었다. 그가 아는 한, 그 광고는 성공적이었다. 리자를 제스퍼 계곡으로 불러들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는 그녀의 시간이 모두 묶여 버린다는 사실이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그녀와 눈길이 마주한 채 그는 그들 사이에 놓인 거리를 좁혀 들어간 다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가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는 듯 그녀는 급히 숨을 들이켰다. 젠장,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본능이 이끄는 대로 따랐다. 그녀의 고개와 각도를 맞추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꺼풀이 감기며 파르르 떨더니 다시 떠졌다.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그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그는 소리가 날 정도로 그녀에게 키스했다. 마치 집어삼킬 듯이.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그의 목소리가 훨씬 더 갈라져 있었다. "좋소, 리자. 다음주까지 바쁘다는 당신 사정을 받아들이겠소. 하지만 바비큐 파티가 잇다는 건 잊지 말아요. 마을 주민 전부가 초대되었으니 그 날은 가게 문을 열 이유가 없소. 거기에 나랑 같이 가는 거요."

리자는 눈을 깜빡이면서 이상하게 머리가 어찔어찔하다고 느꼈다. 와이엇은 그녀가 왜 그런지 전혀 모를 것이다. 그는 카우보이 특유의 으스대는 듯한,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현관으로 걸어갔다.

"또 봐요, 텍스." 정신을 차린 그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

그가 뒤돌아서더니 짐짓 노려보는 척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트럭에 올라타 시동을 건 다음 차를 출발시켰다.

자동차 불빛이 긴 꼬리를 남기고 모퉁이를 돌아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그녀는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켰다. 맞은편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너 웃고 있구나. 어째 좋은 징조인 것 같은데." 질리안이 리자의 가게를 들어서고 있었다. 리자는 머리를 뒤로 넘기고 친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질리안은 문을 닫을 때쯤엔 걱정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 말 취소야. 웃음이 뭐 그렇게 허전하니? 개점 행사가 영 소득이 없는 거야?"

리자는 구형 금전 등록기를 닫고 와이엇에게 쇼핑백을 건넸다. 오전 9시부터 가게 앞에는 풍선들이 흔들리고 있었고 가게 전면에 매단 현수막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가게 중앙에 있는 탁자 위 쟁반 안에는 쿠키가 가득했고 가게 뒷방의 아이스박스 안에는 레모네이드가 차게 보관되어 있었다.

질리안한테서 와이엇에게로, 다시 질리안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리자가 말했다. "어떻게 개점 가격 세일이 별 소득이 없다고 얘기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네가 벌써 새 점퍼를 샀지, 도라리는 스커트를 샀지, 멜은 샴브레이(여성복 또는 셔츠용의 엷은 직물)셔츠를 샀잖아. 루에타는 늘 오던 시간에 와서 열심히 구경했고, 남자들 몇 명이 들려줬어. 거기다, 서쪽에서 해가 떠야 쇼핑을 한다는 와이엇까지 와서 청바지 두 벌에 셔츠를 세 벌이나 사줬는걸."

"그게 다야? 또 온 사람 없었어?"

리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클레터스는 네 결혼식 때 입는다고 안에 받쳐 입는 셔츠 몇 장에 끈넥타이를 샀어. 다음에는 훨씬 운이 좋겠지, ."

와이엇은 가게 안을 돌아다니며 여성용 캐주얼 웨어나 아동용 놀이옷, 남성용 청바지와 셔츠들을 구경하는 척했다. 질리안은 리자의 기분을 풀어주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지금 그는 질리안이 리자의 위장된 명랑함과 유머에 속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종소리를 울리며 질리안이 떠나고 난 뒤 리자를 쳐다보니 속고 있는 것은 질리안만이 아니었던 것을 알았다.

그녀는 자기 상품들 중 하나를 입고 있었다. 그 옷은 군청색으로 희미하게 비치는 소재로 허리를 꼭 조여 입는 옷이었다. 치마는 그녀가 걷거나 설 때마다 그녀가 신은 검은 카우보이 부츠 발목쯤에서 찰랑거렸다.

오늘 아침, 구불구불하게 꼬인 머리에서 가뿐한 발걸음까지 그녀는 모든 것이 탄력적으로 보였다. 정오 즈음에는 머리의 웨이브는 다 풀렸고, 2시경에는 어깨가 축 늘어지기 시작했고, 3시 이후부터는 발을 질질 끌고 걸어 다녔다. 삼단 같은 그녀의 긴 머리도 실망 어린 그녀의 눈빛과 그 밑의 어두운 그늘을 숨겨주지 못했다.

"내 차는 무슨 소식 없어요?"

와이엇은 고개를 저었다. "몇 가지 단서를 추적했지만 하나같이 성과가 없었소."그는 산 물건을 옆구리에 끼고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 나갑시다. 피에르에 선술집이 있는데 고기를 갈아 만든 햄버거와 얼음 같은 맥주, 발이 절로 움직이는 흥겨운 음악이 아주 기가 막히오. 그 세 가지를 조금씩 맛보는 게 어떻겠소?"

그녀는 자신의 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재미있겠네요. 하지만 난 오늘밤 도라리네서 일해야 해요. 부머가 드디어 그녀한테 자기가 그렇게 어리지 않다고 마음을 잡았어요. 그래서 오늘 데이트한대요."

그녀의 금전등록기 양쪽을 자고 와이엇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도라리가 데이트 나갈 수 있도록 당신이 도라리 자리를 맡아야 하니 난 당신과 데이트할 수 없다는 거군."

그녀는 가슴속에서 심장이 거꾸로 서는 느낌을 주는 침통한 눈빛으로 그를 건너다봤다. 빌어먹을, 그는 계속 투정을 부릴 수 없었다.

저번부터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쁠 것이라던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 그녀 말대로 그녀는 가게에서 오랫동안 일하고, 끝나면 식당이나 길 건너에 있는 그레이지 호울스로 부지런히 달려가 또 몇 시간을 더 일했다. 그녀는 질리안이 마음에 꼭 드는 웨딩드레스를 고르는 일을 도와주었고, 이번의 이벤트도 초스피드로 차질 없이 준비했다. 그런 와중에서, 와이엇은 그녀와 한 번도 그럴듯한 데이트를 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 주는 일이 일과가 되어 버렸다.

그가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고, 그녀도 그랬다. 그들의 얼굴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고 그녀의 머릿속은 몽롱해졌다. 그간의 낙담은 달빛처럼 신비롭고 한숨처럼 후련한 그 무언가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닿자, 그녀의 목에서 신음이 새어나왔고 그도 똑같은 것으로 대답했다.

가게문이 벌컥 열리며 요란하게 벽에 부딪혔다. 그녀와 와이엇은 화들짝 놀라 떨어졌다. 한 아이가 물건들에다 화살 같은 것을 던지더니 탈의실로 쪼르르 달려 들어갔다. 리자가 와이엇을 올려다봤고, 두 사람은 똑같이 탈의실을 가린 커튼 너머를 응시했다.

그들은 얼른 탈의실 벽으로 붙어 섰다. 리자가 커튼을 양손으로 잡아 열었다. 코 주위에 주근깨가 흩어져 있는 어린 여자아기가 목을 한참 뒤로 꺾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핼리, 왜 여기에 숨어 있어?"

아이의 얼굴은 와이엇을 보자 환해지더니 이내 미소를 떠올렸다.

복숭아처럼 탐스럽고 순수하군. 아이의 팔에서 남자아이용 신발이 툭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6

"핼리, 묻고 있잖아."

"들었어요."

"그런데?"

"생각 중이에요."

와이엇은 팔짱을 끼고 피아노를 연주하듯 손가락을 가볍게 두드렸다. 다른 신발이 바닥에 턱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이어서 남자아이용 속옷까지 따라 떨어지자, 핼리의 눈망울은 커다래지고 미소도 슬슬 자취를 감추었다. 주인이 가장 아끼는 신발을 방금까지 물어뜯고 있던 강아지처럼 탈의실을 기어 나오며 아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핼리, 수영이라도 한 거냐?"

아이는 코에 주름을 잡더니 적당한 답변들 목록을 머릿속으로 훑고 있는지 이쪽에서 저쪽 발로 체중을 옮겨 실었다.

와이엇은 아이의 가냘픈 턱을 손으로 들어 올려 그와 눈을 마주보도록 했다."난 진실을 알고 싶은 거야, 꼬마 아가씨."

그는 핼리 칼슨을 늘 귀엽게 여겼다. 머리색은 제 아빠가 고 나이였을 때랑 똑같은 갈색이었다. 엄마 빅토리아 닮은 구석은 그리 많지 않았기만 예쁜 갈색 눈동자와 아름다운 피부만은 꼭 빼닮았다.

핼리는 크면 미녀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때 즈음엔 무릎의 생채기나 때묻은 옷은 졸업했을 것이다. 그리고 클래이엇은 지금 썩고 있는 골칫거리도 그때가 되면 더 많아 질 것이다. 큰 소리로 구원요청을 해대야 할 것이다. 그가 바보가 아니라면 멜에게 청혼함으로써 고민을 일시에 해결해야 할 것이다.

", 네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안됐다 싶게 가냘픈 한숨을 내쉬며 핼리가 말했다."수영했어요."

"슈가 크릭에서?"

"."

"그럼 그 옷들은 다 누구 거지?"

"제레미 에버츠요."

"녀석이 나보고 물에 빠진 생쥐 같다잖아요."

"그랬구나. 걔가 무례했구나. 그렇다고 옷을 훔칠 이유는 되지 않아. 수영 팬티 하나만 입고 맨발로 자갈길을 걸어 집으로 가게 한다는 게 말이나 되니?"

와이엇은 핼리가 갑자기 눈을 내리깔고 자기 발끝을 내려다보는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그는 불안감을 삼키며 말했다."제레미가 수영 팬티는 입고 있는 거겠지, 꼬마 아가씨?"

아이의 조가비처럼 다문 입술이 의미하는 것은 딱 한 가지였다.

세상에. 지금 동구 밖 어딘가에서 어린 소년이 홀딱 벗은 채 배회하고 있다는 것인가? 와이엇은 이마를 문질렀다. "아무래도 네 아빠를 불러야겠다."

"꼭 그래야 돼요?"

, 그래야 되고 말고, 그는 리자를 향해 소리 없이 입술로만 말했다. "애를 잘 지켜요."그리고 돌아서서 전화기를 향해 걸어갔다.

"핼리."그녀는 문제의 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쿠키랑 레모네이드 한 잔 마실래?"

아이는 레모네이드란 말에는 시큰둥해했지만 초코칩 쿠키는 두 개 집었다. 아이는 쿠키를 와작와작 씹어 먹으며 여성용 점퍼들을 구경하더니 란제리 선반 앞에서 멈춰 섰다. 아이는 검은색 팬티와 한 세트인 브래지어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쩝쩝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이가 말했다. "이렇게 예쁜 속옷 좀 입어봤으면 좋겠어요."

리자는 그 속옷들을 입어 아이가 잘 보도록 해줬다. "앞으로 몇 년간은 너한테 조금 클 것 같은데."

"알아요. 우선 내 찌찌가 커져야지요. 나도 언니처럼 커질까요?"

리자는 숨이 막히는 듯했다. 그녀는 좀처럼 놀라지 않았다. 그런데 핼리 칼슨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그 일을 해치웠다. 리자는 목소리를 고르며 말했다.

"유방이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크기는 중요한 게 아니야. 내 느낌으로는 네가 몇 사이즈의 브래지어를 하느냐와 상관없이 아주 아름다워질 것 같은데."

"정말요?"

그 순간 핼리의 모습은 꼭 멜로디를 연상시켰다. 왜 여자들은 자신의 몸매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일까? 멜은 자기 가슴이 너무 작다고 생각했고, 또 핼리는 시간이 걸리는 것을 참을 수 없어하고 있었다.

"핼리, 너도 알다시피 남자아이들한테 네 벗은 몸을 보이는 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니야. 너랑 그 애가 결혼을 한 사이라면 모르지만 말이다. 너희들 결혼한 사이니?"

핼리는 커다란 눈망울을 들어 리자를 쳐다보았다."바보같이, 절대 아니에요. 그래서 내가 물에 들어갈 때까지 돌아서 있게 했어요."

"어머, 그건 참 잘했구나." 호기심을 느낀 리자는 목소리를 낮추고 음모자처럼 속삭였다. "그럼 제레미가 물에 들어 올 땐 어떻게 했니?"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죠."

"그랬구나."

"하지만 살짝 훔쳐보았어요."

리자는 있는 힘을 다해 놀란 표정과 웃음을 감췄으나 쉽진 않았다. 핼리 칼슨은 뭔가 달랐다. 와이엇과 클레터스가 머리를 내저으며 클래이엇한테는 어린 딸을 키우는 걸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도 그럴 만했다.

"리자 언니? 내가 예쁘다면, 제레미가 왜 나를 물에 빠진 생쥐 같다고 그랬을까요?"

"글쎄, 남자아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그런 식으로 얘기한단다."

"왜요?"

리자는 지금 핼리에게 그건 평생을 두고 생각해 볼 일일 것이라고 얘기하기엔 좋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어깨를 으쓱했다.

"와이엇 아저씨도 언니한테 그렇게 말해요?"

리자의 시선이 수화기에 대고 조용히 말하고 있는 와이엇에게 자동적으로 옮겨졌다."남자들은 다 자라면 여자의 관심을 끌 만한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낸단다."

"아저씨가 언닐 좋아해요?"

핼리의 순진한 질문은 리자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잔잔하고도 아련한 울림을 만들었다. "그래, 그런 것 같아."

"언니도 좋아하구요?"

한 달 전이라면 그녀도 그 가능성을 부인했을 터였다. 일주인 전만 해도 그런 질문에 그녀는 자신 있고 낙천적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그녀는 핼리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그래, 아저씨를 많이 좋아해."

핼리는 리자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속삭였다."나도 와이엇 아저씨가 좋아요, 아저씨한테 얘기할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거 말이니?"

"아니요."

리자는 아이의 둥근 갈색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했다."네가 수영복 입지 않고 수영했던 것 말이니? 그건 아저씨도 이미 아셔."

"그건 나도 알아요, 내가 몰래 훔쳐본 거 말할 거냐구요?"

리자는 따스하게 웃으며 아직도 통화 중인 와이엇을 슬쩍 건너다보았다."비밀 지켜 줄게. ,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아이의 눈이 의심스럽게 가늘어졌다. "무슨 조건이요?"

리자는 몸을 숙여 핼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와이엇한테 네가 몰래 훔쳐봤다고 말 안 할 테니까, 넌 이제 다시는 남자아이와 발가벗고 수영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핼리는 삐뚜름하게 입술 한쪽을 치켜 올리고 그 <조건>을 심사숙고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현 상황에선 그것이 최상의 타협임을 깨달은 듯 아이는 고개를 끄떡이더니 리자의 손을 잡고 정식으로 악수를 했다. "좋아요."

와이엇은 어깨 너머로 돌아보다가 두 사람이 새로운 외교정책을 타결한 사람들처럼 악수하는 모습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핼리가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는 그 이유를 정말 알 수 없었다. 그가 아는 한, 빅토리아는 도저히 제대로 된 엄마였다고 할 수 없었다.

핼리는 아주 매력 있는 아이였다. 천성이 밝은데다 조금 깨끗이 씻었을 때면 정말 귀여웠다. 그러나 지금은 땋아 내린 머리의 모양이 비뚤어지고, 셔츠는 더러웠으며, 반바지에는 풀밭에서 묻은 얼룩이 배어 있었다.

핼리에게는 정말로 여성의 손길이 필요했다. 어쩌면 핼리는 꼭 엄마보다는 자신을 보살펴 줄 여자를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와이엇은 클래이엇이 눈을 뜨고 멜에게 기회를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여동생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클래이엇밖에 몰랐다. 그리고 핼리를 다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멜로디였다.

그가 통화한 바로는 클래이엇은 자신이 사랑스런 딸이 새 친구 제레미 에버츠와 도서관에서 노는 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좀 더 목소리를 죽이고 말했다. "아니, 다 괜찮아. 핼리는 나랑 있어. 아니야, 핼리는 괜찮아. 그런데 전화로는 좀 그래. 제레미 에버츠에게 옷을 되돌려 주는 대로 핼리를 데리고 그리 갈게.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아니야, 네가 그 아이를 찾아 나설 필요까진 없어. 개가 있겠다 싶은 곳을 내가 알아. 말했잖아. 핼리는 괜찮아. 알았어, 이따 보자."

그는 수화기를 제자리에 놓고 돌아서다가 리자와 핼리가 그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고 당황했다.

"이제 아빠한테 데려다 줘도 상관없어요."

와이엇은 핼리의 조그만 손을 꼭 쥐고 리자를 쳐다보았다. 방금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실마리를 건질까 해서였다. 그녀는 그를 마주 보며 상황을 제어하는 사람처럼 윙크를 했다. 미소 때문에 그녀의 얼굴이 밝아졌지만 눈 밑의 그늘을 숨겨 주진 못했다.

"당신은 정말 특별해. 그거 알고 있소?"그는 다시금 자신의 몸이 정열로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요, 난 정말 특별해요. , 가세요. 이런 상황에서 좋은 보안관다운 게 뭔지 보여 주라고요. , 와이엇? 핼리 좀 잘 돌봐 줘요. 그 아이는 꼭 그 나이 때의 나를 연상시키는군요."

와이엇이 당황해하는 것을 보고도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핼리가 와이엇의 손에서 자기 손을 비틀어 빼고 그녀의 품안으로 곧바로 달려들었을 때는 기절할 만큼 놀랐다.

자신의 허리를 안은 팔의 힘이 이리도 가냘픈 여자아이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힘이 셌기에, 리자는 무릎이 휘청했다. 그 포옹은 겨우 1,2초 사이의 일이었지만 그녀의 마음에 전해진 온기는 와이엇이 핼리의 손을 꼭 잡고 떠난 뒤에도 한참 동안이나 남아 있었다.

가게에 혼자 남은 리자는 평상시의 일로 돌아갔다. 그녀는 새벽 2시부터 준비한 쿠키를 포장하고 레모네이드는 쏟아 버렸다. 가게문을 닫고 그녀는 양 옆구리에 피처를 낀 채 뒷문에서부터 이어진 샛길을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의 낡은 부엌 카운터 위에서 파이가 식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곳은 깔끔하고 청결해 보였지만 멜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저녁 손님을 맞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라 리자는 멜이 잠시 자기 아파트에 갔나 생각했다. 그녀는 싱크대에 비눗물을 풀었다. 거품이 이는 것을 지켜보며 그녀는 핼리 칼슨의 뺨이 밀어붙였던 부위를 자기 손으로 매만지면서 다시 한 번 다리가 휘청하는 기분을 맛보았다.

핼리 칼슨은 놀라운 아이였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 아이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린 아이의 마음을 얻는 일이 생기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그녀의 꿈은 이미 이루어진 것인지도 몰랐다. 모든 것이 정상적인 틀 안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기를 기대했던 그녀였다. 우선 그녀의 가게가 하나의 성공작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그녀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갖고, 결국에는 아이도 낳는 것이다.

언제 한 번이라도 그녀의 인생이 정상적인 틀 안에서 움직이는 일이 있었던가?

식당 쪽에서 사람 말소리가 들려왔다. 리자는 그쪽으로 돌아서며 멜을 맞이하는 미소를 지었다. 부엌문 앞에 왔을 때까지는 그렇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들 중 어느 한 쪽도 멜의 음성이 아님을 깨달았다.

"방금 미장원에서 멜을 만났어. 그녀 말이 곧 올 테니까 우리보고 늘 앉아 잇던 자리에 가서 얘기나 하고 있으라고 그르대."

리자는 문을 열려던 손을 그대로 멈추었다. 엿듣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에 그녀는 다시 카운터로 되돌아가 듣지 않으려고 했다.

"내 동생 델마한테 뭘 한 가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어. 너도 델마 알지, 오팔?"

"그럼, 이사벨. 알고말고."

"그 애는 애버딘에 있는 보안관 사무실에서 접수원으로 일했었거든. 그래서 내가 리자 마크맨이란 이름을 컴퓨터로 조회해 봐 달라고 그랬어. 그랬더니 내가 생각한 대로지 뭐야. 그 앙큼한 매춘부 계집애한테 아주 대단한 과거가 있더라구. 그게 뭔지 알아?"

리자는 서늘하나 카운터 표면을 양손으로 집고 섰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점점 사라져갔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지만 손으로 귀를 막는 일이 그다지 쉽지 않았다.

"오팔, 와이엇 맥컬리도 그 약삭빠른 바람둥이한테 걸려들었다는 걸 곧 깨닫게 될 거야. 델마 말이 그 여자 아버지란 사람은 전과자인데,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거야. 근본은 못 속이는 법이라니까,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거야. 근본은 못 속이는 법이라니까. 부인회의 정숙한 부인들이 그 여자 가게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이는 것을 그 여자가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지만 우리의 와이엇 맥컬리가 그런 여자와 관계한다는 것은 도대체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지 뭐야.

가슴이 쥐어짜듯 저며왔다. 그녀는 두 눈을 감고 머리를 도리질해댔다. 엿들은 것을 알릴 셈이냐, 마크맨?

사실 그녀는 엿들은 거라고는 할 수 없었다. 오팔 그레험과 이사벨 푸루잇은 단단한 벽 너머로 다 들릴 정도로 <속삭이고>있지 않은가.

그녀는 이 자리를 피해야만 했다. 피처를 건조대 위에 남겨두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바깥 복도는 후끈했다. 바람이 막힌 건물이고 보니 8월말의 햇볕이 더욱 뜨겁게 달궈졌다. 그녀는 자신의 가게 안으로 부지런히 들어가서 어두컴컴한 실내에 눈이 익숙해질 때까지 그대로 문에 기대 서 있었다.

그녀는 마음을 추스려야만 했다. 오래 전부터 이미 자기의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는, 편견에 가득 찬 속물들에게 이력이 난 터였다. 하지만 이사벨과 오팔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할 것이다.

우습게도 그녀는 와이엇에 대해 점점 커 가는 감정에 사로잡혀 그녀의 가게에 일상적으로 드나드는 사람이 그녀의 친구들을 제외하고 루에타 그레험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근본은 못 속이는 법이라고? , 루에타를 보면 팥 심은 데서 콩이 나기도 하는데 뭘. 리자는 루에타가 그 엄마를 닮지 않아서 기쁘긴 했지만 오팔과 이사벨에게서 얻은 마음의 아픔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적막한 가게 안을, 자신의 노동의 열매들과 힘들여 정리해 놓은 옷가지들을 둘러보았다. 대부분이 그녀가 해놓은 그대로였다. 이제 그 이유를 안 것이다.

그녀는 큰돈을 벌 심산으로 가게를 연 것이 아니었다. 정직한 사람들에게 정직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싶었고 그러면서 정직한 수입을 내고 싶었다. 더도 덜도 말고 그저 먹고 사는 것만 해결되면 그만이었다. 그것이 왜 그렇게도 어렵단 말인가?

그녀는 문에 기댄 채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꽤 오래 그러고 앉아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하고 있었던 듯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계바늘이 거의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몇 분 안에 크레이지 호울스로 가야만 했다.

두통을 해결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힘겹게 일어나 불을 끄고 가게에서 나왔다.

 

"여기요, 리자. 우리 여기 맥주 한 잔씩 더 돌려줘요."

그녀는 남자들 손앞에 병을 내려놓으며 그들이 기대하던 윙크를 빠짐없이 해주었다. 그 중 누군가 오늘밤 그녀의 미소가 뭔가 억지스러운 데가 있다고 알아차렸을지 모르지만 아무도 아는 체하지 않았다.

"당신 아버지가 정말로 전과자였어요?"

벤 제이콥스가 한 구석에서 식당에 다 들리도록 물었다.

"그래요, , 그랬어요."

"무슨 잘못을 하셨는데요? 은행 강도?" 벤 옆에 앉은 사람이 물었다.

그녀는 쟁반을 팔 밑에 끼었다."눈치 한 번 대단하네요. 저분한테 상품 좀 드리세요."

남자들이 껄걸 웃어댔다. 비록 지나도 즐겁다는 듯 웃는 척했지만 사실 조금도 재미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전혀.

제스퍼 계곡이 얼마나 소문이 빠른지는 알만큼 아는 일이었고 가십은 더 심했다. 맥주와 프레츨을 나르며 그녀는 핼리 칼슨의 엉뚱한 장난질에 관해 얘기하는 것을 얻어 듣긴 했지만 남자들은 그녀의 과거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이 있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열다섯 살 때 집을 나온 거요?"

"실제론 그 얼마 전이었죠."

"버려진 창고 같은 데서 살았고요?"

"-."

"소녀 몸으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세상인데, 그래, 먹는 건 어떻게 해결했어요?"

", 그럭저럭."

"포주 같은 치들도 만났소?"

"한두 명요." 질문마다 대답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손님들 시중 들기도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을 즈음, 도라리가 부산스럽게 가게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녀가 가게에 발을 들여놓기 전부터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리자는 친구 얼굴을 보고 그렇게 마음이 놓이기는 처음이었다.

"리자, 길거리에 진짜로 마약중독자들이 판을 쳐요?" 칼 핸슨이 큰 소리로 물었다.

도라리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뚱뚱한 허리에 손을 얹고 삐딱하게 섰다."총각양반들께서 텔레비전을 너무 봤군. 그렇게 할 일들이 없나? 리자가 여기 남기를 원한다면 이제부터 처신들 잘하는 게 좋을 거야."

뭐라 한바탕 둘러대는 소리들이 들리더니 중얼중얼 사과를 했다. 그리고 곧 대화의 주제는 소값이나 다음 가축몰이, 해결이 안 나는 여성부족 사태 등 좀 더 일상적인 얘기들로 옮겨갔다.

도라리는 바 안을 부산하게 돌아다니며 수다를 늘어놨다. "저런, 저런, 독한 술이 그리운 얼굴이야."

리자는 크레이지 호울스 술집 주인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불매운동에 대해 알고 있었군."도라리는 거의 알아듣기 힘든 소리를 냈다." 이사벨 푸루잇 일이라면 난 5분도 더 마음 쓰지 않을 거야. , 그 여자는 나랑 아무 상관없어. 조금도 신경 안 쓰고. 하지만 자기 가게에다 한 짓은 정말 끔찍해. , 그 늙은 암탉은 누가 자기 의 뼈만 남은 엉덩이를 물어뜯는다 해도 좋은 사람을 못 알아볼 사람이야.."

리자는 실로 몇 시간 만에 처음으로 웃었다. "부머와의 데이트는 어땠어?"

도라리의 손이 머릿수건을 한 금발머리를 어색하게 만지고 뺨은 숨길 수 없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 정말 좋았지. 하지만 넌 지쳐 보여. 술이 싫으면 내가 저 중에 누구한테 부탁해서 집까지 데려다 주라고 할까?"

누군가가 도라리한테 술을 추가로 주문했다. 리자는 조용히 가게 뒤 내실로 빠져나간 다음 천천히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와이엇은 리자의 집 앞에 차를 대고 바로 시동을 껐다. 새벽 1시였다. 금방 크레이지 호울스에서 오는 길이었다. 그 전에 그는 호텔 바에서 발생한 싸움사건을 해결하러 머도에 가 있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전에는 클래이엇의 집에 들러 핼리 문제로 한 시간 정도 얘기를 나눴다.

집 전체에 불이 환하게 밝혀 있었다. 그는 그것이 좋은 징조인지 나쁜 징조인지 판단이 안 섰다. 그는 주먹을 쥐고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리자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잠금 고리를 풀어놓고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와이엇은 문을 열고 들어가서 모자를 낡은 흔들의자의 등받이에 걸고 그녀를 따라갔다. 리자는 장부와 전표, 어떤 양식지들이 널려 있는 부엌 식탁에 가 앉았다.

"내가 도로에서 추월한 사람들한테도 이보다는 따스한 대접은 받은 거 아오?" 그는 그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영수증에서 눈을 들어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으나 웃진 않았다. 그가 그녀의 눈빛이 왜 그리 차갑고 복잡한지 영문을 몰라 하고 있는데 그녀가 입을 열었다.

"들었을 텐데요."

"크레이지 호울스에서 할아버지를 뵀소."

순간적이나마 그녀의 눈빛에 고통이 흘렀다. 그녀가 눈을 깜빡거리자 그런 빛은 사라졌다. 그녀는 벌떡 일어서더니 돌아섰다. 그 바람에 그녀의 옷이 펄럭거렸다. 그녀한테서 샘솟는 듯한 에너지를 느낀 바 있었지만 오늘밤은 열 배는 더 뚜렷했다. 그녀는 냉장고로 걸어가더니 그저 맞은편 벽을 발로 차대며 속좁은 사람들에 대해 흥분에 찬 어조로 지껄여댔다.

그는 눈물로 범벅인 그녀의 눈을 마주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차였다. 만일 그녀가 술에 취해 있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화를 내는 그녀는 전혀 예상도 못했었다. 우아한 코와 거만하게 들린 턱선 등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뭔가 아릿한 느낌이 들었고 천천히 차 올라오던 어떤 자부심 같은 것이 폭발할 지경이었다.

그도 일어섰다. 리자는 방 여기저기를 차고 다니느라 그런 그를 알아채지도 못했다. 그는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청결한 비누와 샴푸 향을 느꼈다. 그녀는 맨발이었고 머리카락은 반짝반짝하기도 하고 또 축축해 보이기도 했다.

또한 그녀가 옷을 어디서 구하는지는 잘 몰랐지만 자신의 가게 물건 중 하나가 아닌가 싶었다. 발목가지 내려오는, 전체가 황혼 빛깔의 꽃무늬로 된 원피스였다. 무척 부드럽게 보이는 옷으로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목선이 깊게 패고 오직 그녀 한 사람만을 위해 만들어진 옷인 양, 풍만한 몸매의 윤관을 숨김없이 보여 주었다. 그는 부드러운 가슴의 경사와 부드러운 천을 뺀 그녀의 알몸이 환히 보이는 듯했다. 너무 아름다워 그는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몇 주 내내 나는 가게에서 일했어요. 디스플레이를 한다, 가격을 내린다, 세일을 한다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후우, 그렇게 어리석을 수가 있을까요? 이젠 생각해 볼 시간이 생겼어요. 이사벨 푸루잇이 날 몹쓸 여자라고 하는 건 정말 하나도 놀랍지 않아요. 어쨌든 속물들은 어디나 있는 것 아니겠어요? 내가 가장 괴로웠던 것은 남자들의 반응이었어요."

"남자들이 어떻게 했소?"

그녀는 멈춰 서서 그를 쳐다보았다. 순간 그는 그녀가 그에게 그만 가라고 말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집안을 빙빙 돌며 얘기했다.

"내가 제스퍼 계곡으로 이사온 후 난 열 명도 넘는 남자들과 데이트를 했어요. 모두 친절했지만 대부분이 저녁 내내 자기 얘기만 했죠. 그 중 한 명도 나에 대해 물으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오늘밤이 되기 전까진 말예요. 그런데 이젠 누구나 내 과거를 알고 싶어 하죠. <길거리의 삶은 어땠냐>고 묻더군요. 그 다음에 나온 <어떻게 먹고 살았죠?>라는 질문은 결국 <먹고살기 위해 뭘 팔았지?>하는 말이나 같았어요. 먹을 것을 훔쳤는지는 몰라도 난 내 자신을 판 적은 없어요. 단 바란 것이 있다면 누구라도 나에 대해, 내가 뭘 하는 사람이고 어떤 사람인지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이었죠. 내가 좋아하는 색깔은 뭐고 좋아하는 음식은 뭐고 좋아하는 노래는 무엇인지 하는 것들 말이에요."

"리자?" 그가 조용히 불렀다.

"하지만 그건 더러운 얘기들만큼 재미있지 않겠죠, 안 그래요? , 내가 포주들과도 만났는지 알고 싶어 하더군요. 그리고 진짜.""."

"리스."

리자는 갑자기 행동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섰다. 와이엇은 반대편 문가에 기대서 있었다. 그녀 위치에서는 그의 눈이 검고 심오하게, 입술은 꽉 다문 듯이 보였다.

"당신이 좋아하는 색깔이 뭐요?"

그녀의 시야가 눈물로 뿌옇게 흐려지고 목이 막혀왔다. 그녀는 그것이 와이엇의 모습 때문인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나지막한 어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나를 그렇게 부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는 눈길을 떼지 않은 채 몸을 바로 세웠다."이제는 그런 사람이 생겼소."

긴장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흥분도 진정되며 그녀는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곧 그녀의 마음속은 밤처럼 차분히 가라앉았다. 맥박도 정상적인 리듬으로 울리더니 뺨을 타고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초리에 마음을 빼앗기기는 너무도 간단한 일이었다. 그가 거실 쪽을 향해 고갯짓을 하며 그녀한테 오늘이 너무 피곤하고 긴 하루였을 것이라고 말하자, 그녀는 그의 충고대로 거실로 자리를 옮겨 소파 쿠션에 몸을 깊이 묻었다.

그는 그녀 옆에 바싹 다가앉았다. 하지만 몸이 닿을 정도는 아니었다. 소파 옆에 서 있는 램프의 나른한 불빛만이 유일하게 거실을 밝혀 주었다.

그는 머도의 사건을 이야기해 주고 나무숲에 숨어 있던 갓난아기처럼 발가벗은 제레미 에버츠를 어떻게 찾아냈는지 얘기했다. 그의 얘기를 듣는 중에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몸을 물결처럼 어루만졌고 그녀를 달래고 진정시키고 위로했다.

"나 맥주 좀 마셔도 되겠소, 리지?"

"그러세요."

와이엇은 소파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나 가능한 한 조용하게 부엌으로 걸어갔다. 냉장고 안을 살펴보니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과일, 야채, 우유, 주스, 먹다 남은 파스타, 반쯤 남았지만 거품기는 조금도 없는 샴페인만 있을 뿐 맥주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리자는 고개를 뒤로 젖혀 쿠션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있었다. 눈은 감겨 있고 호흡은 규칙적이었다. 그가 몸을 기대와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지쳐 떨어진 것이다.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양팔을 잡아 가만히 소파에 눕히는데도 잠이 깨지 않았다. 손등에 닿는 그녀의 가슴의 감촉이 너무도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는 움직일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었다. 그의 호르몬이 미쳐 날뛰고 그의 몸은 팽팽해지고 있었다.

간신히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둔 그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잠자는 여자에게 흑심을 품는 자신을 책망했다. 그는 그녀의 발을 들어 올려놓은 다음 소파 등에 덮여 있던 부드러운 모포를 덮어 주었다. 그녀는 잠결에 한숨을 내쉬며 그 따스함 속으로 파고들었다.

팔다리가 이상하게 아려오는 느낌을 무시한 채 그는 불을 껐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현관 등에 의지해 그는 천천히 거실에서 나가는 길을 찾았다.

 

리자는 몸을 돌리려다가 무언가 움직이지 않는 물체에 의해 제지당했다. 어디에 있는 걸까? 그녀는 약에 취한 듯한 죽음 같은 잠에서 깨어나려 기를 쓰다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누군가가 베이컨을 굽고 있었다. 질리안일 리는 없다. 그녀는 물도 못 끓이는 사람이다.

눈을 뜨니 소파 등받이가 코앞에 있었다. 그녀는 소파에서 잠이 든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는 잠든 것도, 또 잠든 지 얼마나 됐는지도 알 수 없었다. 기억나는 것이라곤 부엌을 돌아다니며 고함치며 날뛰다가 와이엇의 위로하는 듯한 리듬의 목소리에 마음을 가라앉힌 것뿐이었다.

와이엇.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흘러내린 머리를 뒤로 넘기고는 부엌으로 부지런히 걸어갔다. 와이엇이 그녀의 식탁에 앉아서 신문을 펼쳐든 채 한 쪽엔 베이컨이, 다른 쪽엔 커피 잔이 놓인 접시를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그녀가 들어선 순간 그가 고개를 들었고 조용히 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밤새도록 여기 있었어요?"

"밤에는 사무실에서 취객들을 지키며 간이침대에서 보냈소. 그 아내들이 약 한 시간 전쯤에 남편들을 집으로 데려갔고."

그녀는 고개를 끄떡인 다음 말했다. "질리안은 어디 있어요?"

"좀 전에 나갔소. 오늘 루크랑 부엌에 페인트칠을 한다는군. 그 친구는 감격스러워 어쩔 줄 오르더군."

아직도 정신이 들지 않은 리자는 지난밤 와이엇이 떠났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질리안이 어젯밤 언제 들어왔으며, 또 오늘 아침에는 언제 외출했는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잔에 커피를 따랐다."불가간 전구가 된 기분이네요. 베이컨에 곁들여 계란 좀 먹을래요?"

그는 신문을 접고 천천히 일어섰다."가야 하오. 보고서 쓸 것도 있고 지난밤에 피해를 입은 호텔 바에도 가봐야 하오."

"알았어요."

하지만 전혀 알겠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다시 그렇게 갈 것이라면 뭐 하려고 이렇게 왔단 말인가?

그녀의 속마음을 읽은 듯이 그가 말했다. "어제 난 질문을 했는데, 당신 대답을 못 들었소."

"어젯밤에 대해선 잘 기억이 나지 않거든요. 뭘 물었었죠?"

그가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교회 종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좋아하는 색깔이 뭐요?"

리자의 시야가 흐릿해지며 정신이 몽롱하고 몸은 따듯해졌다. 사실, 그녀가 등 뒤로 짚고 있는 카운터 때문에 그녀는 바닥으로 주저앉지 않고 서 있는 것이었다. "파랑요, 내가 좋아하는 색깔은 밝고 엷은 파랑 색이에요."

그녀는 왜 그것을 알고 싶어 하는지 그에게 물어 볼만큼 천연덕스럽지 못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아도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등에 팔을 감고 키스를 되돌렸다. 즐거움이 움트며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는 고개를 들고 고르지 않은 숨을 내쉬었다. 온기와 욕망을 동시에 느끼며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턱선을 쓸었다.

"머도에 가지 않아도 된다면 좋겠소. 그럼 여기서 이대로."

그의 말끝이 흐려졌지만 그녀는 그 뒷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알아요, 와이엇. 우리 다 할 일이 많은 사람들이죠. 하지만 난 어디 가지 않아요. 내일이면 또 새날이 오잖아요?"

와이엇은 그녀의 말이 암시하는 바를 음미했다. 그녀는 가게든 이 마을이든 또한 그든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말하고 있었다. 이 여자는 그가 아는 어느 누구보다도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어쨌든 그녀 말이 옳다. 내일은 또 새날이 올 것이다. 길고 기다리기 어려운 하루가 될 것이다.

 

7

"저 아가씨가 뭘 하는 거지?"

"모르겠는데. 멀어서 잘 안 보여."

"이봐, 클레터스, 꽃을 심고 있어."

와이엇은 걸음을 늦추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사무실 앞에서 멈춰 섰다. 할아버지가 우체국 앞 벤치에 앉아 그의 오랜 지기 한 명과 잡담을 한다는 것은 그다지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리자가 가게 옆에 있는 큰 통에다 꽃을 심는 광경은 어느 월요일 아침에나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었다.

메인 가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둘러서서 뭔가 귀엣말을 하고 있었다. 길 건너편에는 에드네 이발소 앞에 늘 나와 앉아 있는 노인들이 색바랜 차양 그늘 속에 앉아 있었다. 어린 남자아이 두어 명은 바트네 주유소의 석유통 옆에 서서 소다수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이 마을의 가장 나이 많은 역사 선생님 에디스 퍼거슨이 미장원 앞에서 보니 트럼블과 같이 서서 소곤대고 있었다.

"정말로 꽃을 심고 있어?" 클레터스가 물었다.

"그러게." 로이 에버츠가 우악스런 턱을 긁적이며 대답했다."8월이 다 지났는데 뭐하러 꽃을 심지? 국화를 심는 거야 괜찮겠지."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와이엇은 모자를 눌러쓰고 슬며시 웃었다. 그의 시력은 우수했다. 리자가 심고 있는 것은 국화가 아니었다.

"잠깐." 로이가 단언했다 ."저건 분홍색 페투니아 같은데. 저건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이 할 행동이 아니지 않아?"

"아니지." 클레터스가 대답했다. "그렇다고 리자가 속 좁은 수다쟁이 몇 명 손에 쫓겨날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정말 저 여자는 성깔이 있다니까."

와이엇은 그렇게 가슴 뿌듯할 수 없었다. 클레터스 말이 옳았다. 리자는 도망갈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 점을 분명히 했었다. 과거를 부인하려 하지도 않았고 그것을 창피해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말 그대로, 그리고 상징적으로도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녀의 차를 훔쳤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녀 가게에 대해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 일환으로 그녀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이 칙칙한 마을에 색깔을 수 놓고 있는 것이다.

순간 그녀가 그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고, 반 블록쯤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가 웃자, 그의 자부심 한 귀퉁이는 다시 열기로 채워졌고 맥박이 제멋대로 뛰었다. 그는 손을 들어 보이며 미소를 되돌렸다.

하지만 그가 정작 하고 싶은 일은 마을의 모든 수다쟁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길을 뛰어내려가 그녀에게 키스하는 것이었다.

와이엇은 우체국 창문에 붙어있는 여성들을 유인하는 광고를 힐끗 쳐다보았다. 물론 리자를 오게 한 공이 어느 한 사람한테 있지는 않았다. 처음 신문광고를 내자고 한 것은 마을 대표회였다. 그는 할아버지에게도 감사했고, 마을 위원회, 심지어 그의 행운의 별에게도 감사했다. 리자 마크맨 같은 여자가 제스퍼 계곡으로 들어왔으니 감사하고 기쁘기 한량없는 일이었다.

"리자가 오늘 식당에서 일하기로 되어 있어?"그는 할아버지 옆에 있던 여동생에게 물었다. 멜이 고개를 끄덕이자 와이엇은 리자가 아침에 했던 말이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산 너머 산이었다. 리자의 관심을 끌려고 다른 남자들과 경쟁할 필요가 없어지니 이젠 그녀의 다양한 일과 싸움을 해야 하다니.

그는 턱을 매만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멜만이 심지 굳은 맥컬리가 아니었고 맬만이 인내력의 한계를 느끼는 맥컬리가 아니었다. 멜한테 클래이엇 칼슨의 관심을 자기에게로 돌리게 할 기회가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와이엇은 리자가 지난 몇 주간 다른 남자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그가 매일 집까지 태워다 주는 것은 거절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사람 뒤통수를 때리며 복잡하게 노는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찍이 알았어야 했다. 사실 그녀가 불매운동을 벌이는 수다쟁이 노파들한테 혀를 메롱 내민다 해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서서히 리자가 그런 부류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사람임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유연하게 일어서더니 무릎과 손에 묻은 흙을 털어 내고는 곁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와이엇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의 몸속에서 요동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얼마나 더 그 욕망의 고문을 견딜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에게 그 유명한 윙크를 던지고 나서 그녀는 자신의 삽과 봉지들을 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도 몸을 돌려 자신의 욕망을 그나마 틀어막을 수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 하지만 그 강렬함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어떻게 리자가 그 자신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과거의 문제로 인해 스스로를 비천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가 선택한 어떤 남자한테 그녀 자신이 충분하고도 남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까지 그는 최선을 다해 인내할 작정이었다.

 

"태워다 줄까요?"

리자는 미소 지으며 자동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어디에서든 와이엇의 낮고 부드럽게 울리는 목소리를 분간해 낼 수 있었다. 그녀는 오만하게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상황에 따라 다르죠. 가는 길이 나랑 같은가요?"

"물론이오. 당신이 어딜 가든."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지만 그는 매일 밤 식당에서건 크레이지 호울스에서건 그녀가 일을 끝내고 나오자마자 나타났다. 그는 항상 특유의 점잖은 말투로 태워다 줄까를 물었고 그녀 또한 특유의 새롱거리는 듯한 질문으로 응답했다.

잠시 후 그녀는 와이엇의 픽업트럭의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흩어놓았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그녀가 낯선 풍경을 보며 물었다.

"당신을 집에 데려다 주는 중이오."

"이런 소리는 하고 싶지 않지만 요, 이 길은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니에요."

"그야 당신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니니까, 지금 우리 집으로 가는 중이오."

그녀가 뭐가 대꾸할 사이도 없이 그는 자갈이 깔린 진입로로 들어가서 차를 세웠다.

"별로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집이오."

리자는 어스름하나 불빛에 의지해 집을 훑어봤다. 경사가 급한 양철지붕과 소작한 현관을 지닌 2층짜리 판잣집은 제스퍼 계곡의 어느 주택들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와이엇이 사는 집이고 그녀는 더 구경하고 싶은 호기심을 느꼈다.

그는 뒷문으로 그녀를 인도해서 열쇠를 여는 일도 없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부엌은 60년대 분위기였는데, 아마도 계속 개량수리를 해온 것 같았다. 벽지는 수탉 그림이 있고 나달나달 해진 커튼이 걸린 채 열려 있는 큰 창에서는 평야를 타고 온 바람이 시원하게 들어왔다. 와이엇이 불을 켰고 리자는 안으로 들어가 집을 구경했다. 종이 구겨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어 돌아본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와이엇은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 있었는데, 허리에 한 손을 걸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엷은 파랑색 종이로 싼 꾸러미를 내밀고 있었다.

"그게 뭐예요?"

"선물이오."

"그건 나도 알겠어요. 근데 누구에게 줄 거지요?"

"당신."

리자는 남자가 자신에게 선물을 줬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비록 스스로를 열심히 추스르긴 했지만 지난 며칠은 그녀로선 괴로운 날들이었다. 그녀의 과거를 묻는 제스퍼 남자들의 질문에 수 없이 대답해야 했고 그들의 접근을 몇 번씩 교묘하게 받아넘겨야 했다.

하지만 와이엇은 달랐다. 그는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해 묻지 않았고 그녀가 원치 않는 유혹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 모로 보나 신사였다.

지금 그는 그녀 가게의 파격 세일 때 구입한 티셔츠에 낡은 청바지를 입고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음을 전혀 숨지기 않는 태도로 부엌에 서 있었다. 그의 눈동자엔 욕망이 어려 있었고 목소리는 더욱 낮게 깔렸다.

"당신이 이것을 어떻게 생각할지 정말 궁금하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그 꾸러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무게나 감촉으로 보아 옷 종류인 듯했다. 갑자기 남자한테서 마지막으로 선물을 받았던 때가 떠올랐다. 등이 깊게 파인 몸에 꼭 기는 빨간 드레스였다.

꾸러미를 식탁으로 가져간 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며 리본을 풀고 종이를 걷어냈다.

"맘에 드오?"

와이엇의 물음에 그녀는 시선을 들었다. 그의 얼굴을 보니 눈길을 돌릴 수 없었다.

"당신이 루크와 질리안의 약혼 축하 바비큐 파티에 이 옷을 입었으면 좋겠는데, 그래 주겠소?"

"너무 예뻐요."

몇 초 사이에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오늘 오후 피에르에 가서 쇼핑을 조금 했소. 어떤 것을 사야겠다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이 옷이 눈에 띈 거요. 당신을 생각나게 하는 옷이었소."

리자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정말 아름답고 처녀다운 옷이었다. 부드러운 니트로 된,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옅은 푸른색이었다. 긴소매에 부드럽게 주름이 잡힌 치마와 둥근 목선은 여자를 아름답고 소중하고 탐나게 보이도록 해주는 그런 옷이었다.

그가 가볍게 신발 끄는 소리를 내며 가까이 다가왔다.

"한 번의 나쁜 행실을 만회하려면 좋은 일을 열두 번 해야 한다는 말이 있소. 당신은 이사벨 푸루잇과 오팔 그레험 부인들이 당신을 이 마을에서 쫓아내지 못하도록 했소. 당신은 정말 멋진 여자요, 리자 마크맨."

리자는 잘 울지 않는 여자였다. 하지만 그의 말엔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목이 메어왔다. 와이엇은 그녀는 멋진 여자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단 하나의 선물이 그녀에게 그렇게 많은 느낌을 만들어 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의 미소에 마음이 따뜻해지고 그의 눈길에 몸이 뜨거워지며 숨이 막힐 정도로 둥둥 떠다닐 듯한 희망과 꿈이 솟아올랐다.

", 와이엇."

"이리 와서 그렇게 말해 주겠소?"

머뭇머뭇 은밀한 미소를 떠올리며 그녀는 가만가만 그에게 다가갔다. 쇼핑이란 서쪽에서 해가 떠야 할까 말까 한 일이라던 남자가 그녀를 위해 쇼핑을 했다는 사실을 정말 놀라웠다.

갓 샤워를 마친 남자에게서 나는 상쾌한 냄새와 늦여름의 바람 냄새를 맡으며 그녀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살짝 턱을 쳐들어 그의 눈을 바라봤다.

와이엇은 목에서 시작해 가슴, 그리고 그 아래까지 전신을 단단히 긴장되기 시작했다. 그는 몇 해 동안 많은 여성들과 데이트를 했었다.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눈썹 한 번 치켜뜨거나 턱 한 번 거만스레 치켜들거나 또한 순수한 말 하 마디로 그의 욕망에 불을 붙이고 그의 정열을 몰아대는 여자는 만난 적이 없었다.

그의 얼굴이 다가오자, 그녀의 시야는 흐릿해졌다. 입술이 벌어지며 그녀의 숨결은 목구멍에서 붙들리고 말았다. 그녀는 그를 향해 고개를 제치며 속삭였다. "당신의 자제력을 놓아주면 어떻게 되는 거죠?"

그가 갑자기 그녀를 너무 빠르고 세게 끌어당겨 그녀는 놀란 신음소리를 뱉어냈다. 그녀가 숨을 반쯤 들이마셨을 때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찾았고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에 감겼다. 그녀는 손으로 그의 튼튼한 등을 쓰다듬고 주무르고 탐색했다.

그의 키스는 급하고 도발적이고 감미로웠다. 그의 손은 그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녀에게 마술을 펼쳐 보였다. 그녀의 몸은 점점 자신의 몸에 밀착되게 하면서 허리에서 조금씩조금씩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리자의 머리가 뒤로 기울어지고 입술이 그의 입술 밑에서 벌어졌다. 여전히 키스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그들의 키스는 더욱 강력해졌고 그들의 호흡과 신음도 더욱 다급해졌다.

그의 손이 두 사람의 몸 사이로 파고들어 그녀의 가슴 위에 넓게 펼쳐지더니 숭배와 뜨거운 욕망이 절묘히 혼합된 움직임으로 그녀의 가슴을 애무했다. 그녀는 그의 이름을 뜨겁게 속삭였다. 그녀의 등이 휘어졌고 눈이 감겼다.

"너무나 아름다워."그가 속삭였다."너무나 완벽해."

전혀 매끄럽지 않은 그의 목소리는 결코 멈추지 않았으면 싶게 그녀의 모든 감각을 쓸며 지나갔다. 그의 손길에 용기를 얻은 리자는 그의 몸에 대고 매끄럽고 감각적으로 자신의 몸을 비볐다. 그가 그녀의 이름인 듯싶은 말을 웅얼거리더니 양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감싸쥐고 자신의 단단해진 몸 위로 당겨 안았다.

순간, 짙게 깔린 정열의 안개 저 밖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움직임을 멈췄다. 소리가 다시 들리자 그들은 눈을 떴다. 또 한 번 소리가 들리면서 와이엇은 그것이 전화벨 소리임을 알아챘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부엌을 나와 전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통화상태가 좋지는 않았지만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친숙한 느낌이었다. 그는 등을 펴고 애써 생각을 집중했다.", 제가 맥컬리 보안관입니다.."

전화가 더 심하게 지직거리자 대부분은 알아들을 수 없었고 그나마 몇 마디 알아들은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 차에 대해알아. 당신은 지금엉뚱한찾아다니고 있어바로 코앞에그런데당신은 생각도 못한 사람이."

와이엇은 상대가 누구인지 물어 보아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몇 마디라도 더 듣고 싶었다. 상대방은 슈가 크릭과 마을 서쪽에 있는 그랜지 홀에 대해 뭔가를 얘기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와이엇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돌아섰다. 그를 지켜보고 있는 리자의 눈동자는 아직도 열에 들떠 있고 입술은 그의 키스로 촉촉이 부풀어 있었다. 그에게 가능한 한 농염한 눈빛을 보내며 그녀가 말했다."타이밍이란 게 정말 중요하지요?"

그녀의 도발적인 유머에 그는 두려울 정도로 욕망을 느꼈다. 그는 그녀 앞으로 걸어갔다."나쁜 타이밍이 아니면 그렇지도 않소. 전화 건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당신 차의 행방을 알고 있었소. 그런 전화라면 나쁜 때, 좋은 때를 가릴 이유가 없지."

"어쩌면." 그녀는 저항감을 가지고 그를 쳐다봤다."딱 좋을 때 왔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녀는 홱 돌아서서 식탁으로 걸어간 다음 솜씨 있게 드레스를 개어 다시 잘 포장했다. 와이엇은 머리가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는 기분이었지만, 리자는 그런 문제가 전혀 없는 사람 같았다.

"우리가 여기 올 때 밖이 아직 밝았어요. 여기로 오는 도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봤는지 모르겠네요. 그 수다쟁이 할머니는 길을 비로 쓸다 말고 당신과 함께 있는 나를 보고는 빗자루를 떨어뜨릴 뻔했어요. 부인회는 내 과거 때문에 날 싫어하는 건데, 만일 내가 정말로 당신 집에서 밤을 보내기라도 해봐요. 그 부인들께서는 완전히 살판나는 거 아니에요?"

"젠장, 난 부인회의 수다쟁이 양반들의 생각 따윈 신경 안 쓰오."그는 본래의 목소리로 단언했다.

"난 신경 쓰여요."

"농담이겠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내가 이 고장에 뿌리를 내리기로 한 이상 난 이곳 사회를 이겨낼 방법을 찾아야만 해요. 당신과 밤을 보내는 것만큼 유혹적인 것도 없지만, 그게 제스퍼 계곡의 소위 친절하다는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은 분명 아닐 거예요."

와이엇은 손으로 머리를 빗어 넘겼다. 그의 인내심은 그에게 등을 돌렸고 그와 비례하여 그의 욕망은 천장을 치솟을 정도였다. 하지만 리자의 말이 옳다. 그녀가 이 마을 공동체에 온전한 자기 자리를 만들기 원하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더 이상의 잔인한 가십의 희생양이 되는 것은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갑자기 그는 자신이 선물한 드레스를 그녀가 저렇게 신경 써서 다시 싸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해야, 누구든 그녀가 갈아입을 옷을 가져온 것으로 경솔히 속단하지 않을 테니까.

그는 지금까지의 삶을 이 조그만 도시와 함께 했다. 결점도 많은 마을이지만 부모님이 익사하셨던 때 이곳 사람들로부터 받은 넘칠 듯한 애정은 잊을 수가 없다. 또한 그가 군대에서 제대했을 때 마을에서 준비해 준 환영파티도 마찬가지다.

리자는 와이엇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턱 근육이 움직이는 양으로 보아 물어 보지 않는 게 낫다 싶었다. 그녀는 그를 따라 그의 집을 나왔다.

그녀는 항상 그가 키 크고 덩치 큰 남자치곤 걸음이 가볍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 걸어가면서 쓰레기통 뚜껑을 차는 태도는 그런 인상과 전혀 거리가 멀었다.

그가 트럭 문을 쾅 닫고, 로케트 소리가 아닌가 싶도록 거칠게 차를 출발시키자 그녀는 더 이상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그녀가 물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그가 입을 악물더니 천천히 그녀를 돌아봤다."이 거리에 사는 말 많은 사람들을 가능한 한 많이 창가로 끌어내고 있소. 그래야 내가 당신을 정확히 밤 945분에 집에 데려다 줬다는 것을 알 거 아니오."

"세상에, 와이엇."

그의 턱선이 느슨해지며 그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떠올랐다."내가 당신을 낚아 안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길 원치 않는다면 내가 숨을 고를 때까지 그런 식으로 나를 부르지 않는 것이 좋을 거요."

그는 기어를 후진으로 바꾸고 전조등을 켜자 그녀는 쌕 웃었다. 그가 기어를 다시 1단에 놓고 그녀가 숨을 들이킬 정도로 힘 있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자, 그녀는 얼른 안전벨트를 매고 좌석을 손으로 꽉 붙들었다.

 

리자는 조그마한 뒷마당에서 마지막 빨랫감을 빨랫줄에 널고 집게로 집은 다음 뒤로 물러서서 자신의 노동의 결과를 둘러보았다. 아침 9시였지만 후덥지근한 바람이 벌써부터 한줌의 섬세한 새틴과 레이스들을 불어 흔들고 있었다.

그녀는 이틀을 계속해 일어나면서부터 콧노래를 불렀다. 어제 이 브래지어와 팬티들을 사면서 그녀 자신이 그녀한테 최대의 고객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가 꺾이지도 않았고, 그저께 밤에 와이엇이 그녀에게 선물을 준 후로 그녀에게 붙어 다니는 기대감도 내어 쫓지 못했다.

그녀는 어제 루에타가 늘 그 시간에 가게를 찾아왔을 때 그런 사실을 다 말해 버릴 뻔했다. 황홀하고 섹시한 기분에 젖어 그녀는 속옷 몇 가지를 사기로 하고 루에타에게 자신이 고른 속옷에 대한 의견을 부탁했다. 그 수줍음 많은 친구가 그렇게도 훌륭한 안목이 있다는 사실이 그녀는 놀랍고도 기뻤다.

루에타는 머릿속까지 빨개져서 말했다."나에게 당신 배짱의 십분의 일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리자는 이해한다는 듯한 몸짓을 하며 조용히 말했다. "당신 소망이 갑자기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

루에타는 바닥만 내려다보며 대답했다."너무 늦기 전에 내 마음대로 살아볼 거예요."

"절대 늦지 않았어요, 루에타."그녀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빨랫줄에 걸린 다른 옷들을 한 번 쳐다본 다음 리자는 빨래 통을 집 안으로 가져다 놓고 가게를 향해 다섯 블록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게는 공식적으로 10시가 되야 열기 때문에 그녀는 중간에 미장원에 들르자고 마음먹었다.

"안녕. 뭘 하겠어요?" 미장원의 간판으로서 최근 머리를 오렌지 빛으로 물들인 보니 트럼블이 물었다.

"지금 머리 좀 다듬을 수 있을까요?"

"그럼, 있고말고. 당신이 지금밖에 시간이 없는 거라면 말예요."

리자는 경고와 같은 보니의 눈빛을 보니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다가 그녀의 시선을 좇아가게 안쪽을 들여다보고서야 그 의미를 이해했다. 메틸 젠트리, 오팔 그레험, 이사벨 푸루잇이 밝은 핑크색 헤어드라이어 밑으로 그녀를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리자는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타이밍이 정말 끝내줬다. 그녀는 몇 주 동안 머리를 손질하고 싶었지만 오늘 아침까지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한테 드러내놓고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냥 다듬기만 해주세요."

보니는 리자의 어깨 위에 매듭을 묶고 나서 머리손질을 하기 시작했다. 친절한 중년의 미용사는 자기 남편과 래피즈 시티로 이사간 장성한 딸들의 얘기를 떠들어대며 열심히 노력해 줬지만 방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전혀 안 들리게 할 수 없었다.

"와이엇이 몇 주전에 우리 데이지를 나무에서 구해 준 얘기했던가?"메릴 젠트리가 말했다.

"아니, 못 들은 것 같은데." 오팔 그레험이 대답했다.

"정말 착한 젊은이야. 어릴 때도 우리 잡화점에 오곤 했었지. 사탕 진열대 앞에 몇 시간이나 서서 자기 손에 있는 반짝반짝한 동전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곤 했었어. 부탁합니다, 고맙습니다란 말을 빠트리는 걸 못 봤다니까."

"우리의 와이엇은 항상 예의바른 젊은이였어." 이사벨의 코막힌 목소리는 헤어드라이어의 작동음보다 훨씬 컸다.

", 그렇고말고."오팔이 맞장구를 쳤다."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잖아."

"그럼."이사벨이 재빨리 대꾸했다."근데 그 티 없는 평판이 이번에 형편없이 더렵혀졌으니 얼마나 수치스런 일이겠어."

"그러게 말야."

보니 트럼블이 드라이어의 스위치를 올렸고, 그 소리에 더 이상 그들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에 리자는 깔끔하고 보기 좋게 다듬은 머리를 하고 가게에서 나왔다. 그녀는 미장원 앞을 지나쳐 걸으면서 일부러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는 있었지만 마음속은 의구심과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목은 입밖으로 내지 못하는 항의의 말로 따끔따끔할 지경이었다. 관자놀이가 쿡쿡 쑤시고 가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불현듯 이곳으로 이사 온 것이 잘 한 결정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10시가 조금 못 되어 가게를 열고 꼭 해야 할 일이 아닌데도 선반과 옷가지를 정돈하며 오전 시간을 보냈다. 1120분쯤에야 손님이 들었다. 정각 12시가 되자 오늘은 루에타가 가게에 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팔과 이사벨이 막았을 것이 틀림없었다. 쓸쓸하고 낙담스런 마음으로 그녀는 가게 문을 잠그고 점심을 먹으려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식당 유리창을 통해 멜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마주치는 남자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녀는 한 가지 부정적인 행실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좋은 일을 열두 가지 해야 한다던 와이엇의 말을 생각했다. 와이엇 생각을 하니 그녀의 입가에 웃음이 잡히긴 했지만 무거운 기분은 풀어지지 않았다.

"헤이, 리자!" 주유소 모퉁이를 돌아가는데 질리안이 그녀를 따라잡았다."나 루크네 동물병원 오전 근무가 다 끝났어. 심부름을 몇 개 해야 하지만 10분이면 끝나는 일이야. 점심 먹을 거니?"

질리안이 걱정스럽게 쳐다보자, 그녀는 얼굴에 미소를 떠올리며 대답했다."너만 상관없다면 난 집에서 먹고 싶어."

"너 괜찮은 거지?"

", 괜찮아. 가서 볼 일 보고 와. 점심 먹으면서 얘기하자."

질리안이 머뭇거리면서 가고 나자, 리자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평생 느낀 피곤함이 한꺼번에 몰려든 기분이었다.

집에 도착한 그녀는 천천히 부엌으로 가서 아침에 놔두고 나갔던 빨래 양동이를 치우러 갔다. 그녀는 양동이를 들고 뒷문으로 나갔다. 두 걸음도 걷지 못해서 그녀는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브래지어와 팬티들이 더 이상 바람에 한들거리고 있지 않았다. 줄에는 빨래집게만이 매달려 있었고 새 속옷은 사라지고 없었다.

옆집 마당에서 한들거리고 있는 맥켄지네 빨랫감은 그대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 집 빨랫줄에 걸린 타월과 셔츠와 속옷들 사이에 빈 공간은 전혀 없었는데, 그녀의 빨랫줄은 비어 있었다.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잠시 그녀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곧 그녀의 머릿속은 명료해지고 천천히 피가 끓기 시작했다. 제스퍼 계곡에 차 도둑이 돌아다닌다. 그러더니 이젠 팬티 도둑까지 나타난 것이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차와 속옷을 훔쳐간단 말인가? 아무것도,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제스퍼 계곡으로 이사온 후 스스로를 훌륭하게 처신해왔다고 생각했다. 모든 점에서 사려 깊게 처신했다. 차가 도둑맞았을 때도 자제심을 잃지 않았다. 불매운동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았을 때도 당장 주방 밖으로 나가서 이사벨과 오팔한테 내키는 대로 해대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늘 아침 미장원에서 내놓은 모욕을 당해도 한마디 반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당할 수만 없었다.

누군지 몰라도 이번 일은 너무 지나쳤다. 그녀의 사생활을 침입하고 마당 빨랫줄에 걸려 있는 속옷을 집어가다니. 더구나 지난 일주일 동안 가게에서 내내 세일을 하던 물건이 아닌가.

제스퍼 계곡의 사람들이 그녀가 이런 처사를 감수하리라고 생각한다면, 생각을 다시 한 번 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녀는 집을 돌아서 나온 다음 다섯 블록 떨어진 보안관 사무실로 향했다.

 

8

리자는 사명을 맡은 여자처럼 씩씩거리며 거리를 걸어갔다. 마단 우체국 앞에서만 잠깐 걸음을 멈추고 여자들을 유인하는 광고를 잡아 뜯었다.

여자들이 창가로 나와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옆의 보안관 사무실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세 쌍의 눈동자가 그녀에게 향해졌지만 그녀에겐 와이엇의 시선만이 중요했다. 그녀는 사무실을 둘로 가르는 난간의문을 밀어 제치고 그의 커다란 철제 책상 앞에 가서 섰다. 그녀는 신문 광고를 흔들어대며 말했다.

"여자를 위한 광고임에는 틀림없군요. 제정신이 박힌 여자라면 아무도 제스퍼 계곡으로 이주해오지 않을 테니까요."

두 쌍의 부츠가 바닥에 부딪히는가 싶더니, 칼슨 형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와이엇은 좀 더 천천히 일어섰다. 지난 몇 주간 리자의 얼굴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감정을 목격해왔으나 지금 같은 표정은 처음이었다."리스, 뭐가 잘못됐소?"

"그래요. 잘못돼도 아주 잘못됐어요. 난 신에게 버림받은 이 마을에 살 필요도, 이런 일을 당하고 있을 이유도 없어요."

자세히 보지 않았다면 와이엇은 그녀의 턱이 떨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곧 그녀의 말 이상으로 상황이 심각하다는 의미였다. 루크와 클래이엇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다시 리자를 쳐다보더니 곧 자신들의 모자를 집어 문으로 향했다.

그녀가 떠난다는 생각이 그를 움직일 수도 없게 했으며 신중하게 어휘를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소?"

그는 그녀가 자제하려고 애쓰는 때가 어떤 때인지 알만큼 리자 마크맨이라는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지금 그녀의 어깨가 그런 노력으로 인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시도 더 서 있을 수 없다는 듯 기를 쓰며 걸음을 돌리려 했으나 그저 난간 쪽으로 돌아섰을 뿐이었다.

"당신은 나의 어떤 점이 사람들로 하여금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아요?"

와이엇은 사무실을 가로질러 가서 그녀 앞에 섰다."나한테는 맞지 않는 질문이오. 내가 아는 한 당신은 증오는커녕 싫어할 점도 없는 사람이오."

그녀는 떨리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럼 당신은 극소수 파로군요, 와이엇."

"왜 그렇게 생각하오?"

그녀는 험한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꼽아 그 이유를 생각했다. "2주전에 누군가가 내 차를 훔쳐갔죠. 지난주에는 부인회에서 내 가게에 대해 불매운동을 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10분전에는 내가 빨랫줄에 널어놓은 내 팬티와 브래지어까지 없어졌어요. 바로 이사벨 루우릿과 오팔 그레험, 메틸 젠트리 부인들께서 당신같이 명예로운 남자가 나 같은 사람 때문에 이름에 먹칠을 당하는 게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지 나에게 알려준 것과 같은 날에 말이에요. 이거 알아요, 와이엇?"

분노가 소리 없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리자에게 저렇게 상처 입은 눈빛을 짓게 만든 수다쟁이 노인네들을 체포할 수 있다면 그런 기쁨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속좁은 마음은 불법이 아니었다.

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분들 말이 맞아요. 이사벨, 오팔, 메틸 부인 말이 다 옳아요. 비열한 편견자들인지는 모르지만, 당신에 관한 한은 그분들 말이 맞아요. 여기까지 오면서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어요. 당신과 나 사이에 육체적인 것 말고 뭐가 있겠어요. 난 우리 사이를 잘 엮어나갈 자신이 전혀 없어요. 우린 정반대의 사람들이에요. 난 살기 위해 먹을 것을 훔쳤지만 당신은 생전 부도덕한 짓은."

와이엇이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떴고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다."지금 한 가지를 해볼까 하는데."

"지금요?"

그는 고개를 끄떡이며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눈을 번뜩이며 시선으로 그녀의 입술을 더듬었다.

그녀는 떨리는 한숨을 들이쉬며 조금 뒤로 물러섰다. 와이엇이 따라왔다. 그녀는 또다시 물러섰고, 그는 또 따라왔다. 계속 그렇게 해서 그녀는 난간까지 물러섰고 더 이상 갈 데가 없었다.

그녀의 맥박이 목덜미께 에서 들먹거렸고 심장 고동은 그의 마지막 한 걸음을 지켜보는 사이 불규칙적인 리듬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속삭임이라 고밖에 할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명예를 욕되게 할 거예요."

그는 웃어야 했다. 요즘 시대에 누가 <욕되게 한다>란 말을 쓰겠는가? 하지만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누르고 있어 웃을 수가 없었다.

전에도 그녀에게 정열적이고 부드럽게 키스를 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키스는 달랐다. 그녀의 입술을 덮고 있는 그의 입술은 그녀가 있는 힘껏 반응해 주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얼굴을 자신이 바라는 각도로 기울였다. 그는 다른 한 손을 그녀의 등에 감아 자신의 몸 쪽으로 세게 끌어당겨 될 수 있는 한 밀착시켰다. 그런데도 충분히 맞닿은 것 같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는 그녀의 몸 속을 지나가는 떨림과 그에 반응하는 자신의 긴장된 몸을 느꼈다. 그들의 입술은 공기를 찾아 동시에 열렸다.

헐떡이며 숨을 들이켠 그는 그녀의 뺨으로 입술을 움직여서 귀밑 섬세하게 오목이 들어간 곳에서 가만히 속삭였다."아직도 우리 사이에 육체적인 것 외엔 아무적도 없다고 생각하오, 리스?"

리자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고, 심지어 고래를 저을 수조차 없었다. 그들 사이에 있는 것은 육체적인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경이롭고 충만하고, 애닯고, 폭발적이고, 아름다웠다. 눈을 감은 그녀는 머리가 사전 속의 온갖 표현을 훑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내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와이엇은 가슴이 메어지는 느낌에 어떤 말이나 행동도 하기 힘들었다. 다른 남자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런 순간에 그는 사랑을 느꼈다.

그는 사랑에 빠졌다. 정말로 진실한 사랑에. 그는 그녀의 귀에 대고 소리치고 노래하고 속삭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만한 시기가 아니었다. 그녀가 이 <신에게 버림받은>마을에 살지 않겠다고 뜻을 비춘 상황이었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조여드는 듯했고 뭔가를 주먹으로 때려야만 할 것 같았다. 그에겐 정말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사벨, 오팔, 메틸 부인들을 리자의 이름을 더럽힌 죄로 체포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적어도 수다쟁이 노인네들의 흉한 입을 한방 먹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은 더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제스퍼 주민 중 누가 그녀의 차를 훔쳤는지, 또한 속옷을 훔칠 정도로 변태적인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내야 했다. 그런 와중에 리자에게 사랑을 고백할 방법을 찾아내고 그와 평생을 같이할 마음을 갖도록 설득해야 했다.

"당신이 잃어버린 속옷들을 좀 자세히 설명해 주겠소?"

직업의식을 되찾으려고 노력했음에도 여전히 쉰 듯한 목소리가 나왔다.

"당신도 봤던 거예요."

"아닌 것 같소. 그랬다면 좀처럼 잊어버리지 못할 텐데."

그가 그녀를 쳐다보았고 그녀도 그를 쳐다보았다. 먼저 웃은 사람은 그녀였다.

그녀는 유혹적인 걸음걸이로 그에게 다가오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내 가게에서 봤다는 거죠. 기억하죠? 당신이 클래이엇과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고 핼리는 속옷들을 둘러보고 있었어요."

"핼리?"

그들은 똑같이 입을 다물었다. 와이엇은 초조하게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핼리가 그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리자가 물었다.

와이엇은 지난달 루크가 질리안과 리자의 현관에서 먹을 것을 훔치고 있는 핼리를 잡았던 때를 떠올렸다. 그 장난꾸러기가 제레미 에버츠의 옷을 훔친 것이 겨우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또한 가게에 있었을 때도 새틴과 레이스로 된 속옷에 필요이상의 흥미를 내보였다.

그는 소리 나게 한숨을 내쉬었다."핼리를 좀 심문해 봐야겠소. 클래이엇한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함께 가요."

와이엇은 모자를 집어 들고 리자와 함께 사무실을 나왔다.

 

", 무슨 일이 생겼어요. 그렇죠? 그것도 나쁜 일이. 와이엇 아저씨와 우리 아빠 표정이 저렇잖아."

리자는 갑자기 겁을 먹은 듯이 보이는 핼리를 내려다봤다. 다만 핼리한테 그럴듯한 알리바이가 있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와이엇과 클래이엇은 대화를 끝내고 리자와 핼리가 앉아 있는 도서관 계단으로 걸어왔다.

"핼리." 클래이엇이 딸을 불렀다."와이엇 아저씨가 너한테 몇 가지 물어 보고 싶으시단다. "리자에게 비난의 시선을 돌리며 아이가 말했다. "말했어요?"

"아니, 핼리. 말하지 않았어. 난 약속을 하면 지키는 사람이야. 우리의 비밀에 대해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 앞으로도 안 할 거고. 이건 다른 얘기야. 하지만 절대 넌 체포되지 않아. 오늘 아침 누가 빨랫줄에 걸어놓은 내 옷을 가져갔어. 그래서 우린 네가 혹 근처에 있었는지 알고 싶은 거야."

"근처에 있었니, 핼리?" 와이엇이 말을 받았다.

소녀는 고개를 한 번 저었다.

"누가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걸 봤을 수도 있잖아."

"그런 걸 어떻게 봐요? 난 아침 내내 제레미네 집에 있었는데." 핼리는 기분 나쁘다는 듯이 말했다.

"제레민 에버츠가 아니라 아만다 터커네 집 앞에 내려줬었잖아." 클래이엇의 목소리는 불길할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핼리는 여자친구 아이의 이름이 나오자 입을 앙 다물었다.

"그럼 나한테 말도 않고 제레미네 집에 몰래 간 거구나? 왜 아만다랑 놀고 있지 않았어?"

아이는 갑자기 자기의 닳아빠진 신발에 지나칠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아만다는 바보 같아. 거미나 어두운 걸 무서워해. 그리고 날 미워해. 여자애들은 다 날 미워해."

클래이엇이 딸에게로 걸어가려 했지만 와이엇이 손을 뻗어 제지했다. "그럼 넌 리자 아줌마 빨랫줄에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은 거지?"

"그럼요, 근데 뭐가 없어졌는데요?"

리자는 와이엇을 쳐다봤다. 그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예쁜 브래지어와 팬티를 잊어버렸어."

핼리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입술을 <>모양으로 벌어졌다. 아이는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난 정말 가져가지 않았어. 난 안 그랬어. 십자가에 대고 맹세해요."

"널 믿어."

"정말요?"

리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클래이엇이 중얼거렸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핼리는 리자의 손에서 자기 턱을 빼내고 아빠를 쳐다봤다. "아빠도 날 믿어요?"

클래이엇은 무릎을 구부리고 아이와 키를 맞췄다. 그가 고개를 끄떡이는 순간 리자는 지금 부녀 사이의 중요한 순간을 목격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클래이엇과 핼리는 바로 떠났다.

그들이 가는 것을 지켜보며 리자가 말했다. "핼리 짓이 아니라서 다행이에요."

"당신은 정말 멋진 여자요."

와이엇의 목소리에 깊은 감정을 느낀 그녀는 그를 돌아봤다. 그녀는 비밀스런 미소를 서서히 떠올렸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과장하는 것으로 느껴졌을 테지만,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놀랍도록 달콤하게 들렸다.

그의 표정은 항상 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키스할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엔 그녀의 눈앞에서 어떤 식으로 변했다. 바로 지금이 그럴 때였다. 그녀에게서 뜨겁고 간절하고, 여성스럽고, 소중히 여겨지는 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의 모자가 만드는 그늘이 그의 눈을 검어 보이게 했지만 노골적이 욕망과 솔직한 애정의 눈빛을 퇴색시키진 못했다. 남자들은 대개 그녀에 대한 욕망을 감추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와이엇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호의와 관심을 눈빛에 무방비로 드러내놓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오직 와이엇만이 그렇게 했다.

타이어 마찰음과 함께 코너를 도는 차소리와 길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소리로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 이 고장의 가장 분주한 거리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리자는 갑자기 두 사람이 어디 다른 곳에서 둘만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와이엇이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지금 당신 생각 마음에 드오."

"내 생각이 뭔지 어떻게 알아요?"

그가 미소 짓자, 리자는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심장이 얼마나 더 오래 이런 애정에 무심한 척 버텨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또한 와이엇 맥컬리 같은 남자의 애정에 찬 요구를 그녀 자신이 얼마나 더 지탱해 낼지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약간 머리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렇게 하면 우린 다시 어려운 입장에 빠지게 돼요."

그는 모자챙을 밀어 올렸다. "그럴 수도 있소. 하지만 우리 경우엔 아니오."

그는 마을 번화가 한복판에서 몸을 숙여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 키스는 길지 않았지만 그녀로 하여금 복잡한 생각을 다 잊게 해주는 그런 키스였다. 그는 고개를 들고 씩 웃더니 다시 모자를 눌러썼다.

"일 끝나고 봅시다. 나로서는 기다리기가 쉽지 않을 것 같군 ."

그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기도 쉽지 않았다. 리자는 마음속에서 아우성치는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기가 두려웠고 그렇다고 달리 어떻게 불어야 할지도 몰랐다. 뭔지는 모르지만 그 때문에 그녀의 가슴은 한없이 부풀고 마음은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듯했다.

도서관 맨 윗계단에서의 움직임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그녀는 도서관에서 일하는 루에타에게 웃음을 지으려고 했으나 시선이 부딪친 사람은 다름 아닌 돌처럼 차가운 눈빛의 이사벨 푸루잇이었다.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이사벨은 그 작은 턱을 치켜들더니 무례하게 획 돌려 버렸다. 리자는 그런 푸대접을 감수하고 질리안이 기다리고 있을 일렘 가의 자기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의 걸음걸이가 바뀌었음을 누군가 눈치 챘을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해서 기분이 갑자기 가벼워졌는지는 아무도 알 리가 없었다.

와이엇은 그녀를 멋진 여자라고 했고 그녀는 이제 그의 말을 믿기 시작했다. ? 그녀는 사랑에 빠졌으니까.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녀의 가슴과 영혼을 채우고 있는 이런 꿈과 희망을 앗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전조등의 행령이 고속도로를 따라 건조한 평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발라드 컨트리음악이 감리롭게 흘러나왔다. 리자는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느긋하고 편안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제껏 그녀는 카우보이모자와 챕스를 착용한 남자의 모습보다 그녀의 가슴을 더 두근거리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영업 마감 시간 직전에 식당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그를 발견했을 때, 억세고 잘생긴 남자에 대해 가졌던 이전의 모든 생각이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흰 정장셔츠를 목 부근의 단추를 풀어서 입고 진회색 바지를 골반쯤에 여유 있게 걸쳐 입은 모습으로 들어왔다. 머리카락은 방금 빗질을 한 듯했고 면도한 얼굴은 매끈했다. 카우보이모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모자를 써야만 곡 남자가 남자답게 보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이제 분명해졌다.

그들은 피에르에서 늦은 저녁식사를 하고 제스퍼 계곡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첫 진짜 데이트였다. 그녀는 그가 문을 열어 주고 의자를 밀어 넣어 주고 그녀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는 등 정말 최상의 매너를 보여줬다고 생각했다. 오직 그의 눈빛만이 그의 열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그녀의 어깨 아래를 배회하고 갈망과 욕정으로 번쩍거렸다.

그녀는 자신이 점심 때 질리안에게 속옷 사건을 설명해 준 다음 어째서 옷을 갈아입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옛날 매디슨에서 샀던 옷을 입고, 새롭고도 태평스런 기분을 만끽하며 가게로 다시 돌아왔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옷을 가게에서 파는 웨스턴 복장에만 국한시키지 않을 작정이었다. 포기하지도 않을 거고 이곳을 뜰 생각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입고 싶은 대로 입을 생각이었다.

그는 그녀의 집 앞 모퉁이에 차를 세웠다. 리자는 그냥 있으면 그가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 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트럭을 돌아오는 그를 차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아찔할 정도의 기대감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차에서 내린 다음 그를 쳐다보았다.

와이엇도 리자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섰다. 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얼굴 위로 나부꼈고 치맛자락이 그녀의 무릎께에서 펄럭거렸다.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며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잡았다. 그 움직임이 그에게는 너무 나긋하고 귀여워서 가슴이 오그라들 지경이었다. 리자는 항상 성격이 불같고 호쾌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늘밤은 뭔가 달랐다. 미소가 훨씬 부드러웠고 눈이 훨씬 반짝거렸으며 한 숨은 훨씬 깊었다.

그는 그녀가 들을 수 있도록 몸을 낮추어 속삭였다. "오늘밤 제스퍼 계곡에서 자지 않고 깨어 있는 사람은 당신과 나 둘뿐인 것 같군."

그는 입술이 닿기도 전부터 키스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입술을 가져가서 그 부드러움을 탐닉했다. 그녀도 키스를 되돌렸다. 그녀의 입술은 급하고 탐색적으로 그의 입술 밑에서 움직였다. 너무도 열정적이라 그는 숨을 쉴 수도 벗었다. 그들이 숨을 쉬지 않을 수 있었다면 그 키스는 영원토록 계속되었을 것이다.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두 사람은 미소를 교환하고 똑같이 가로 저었다. 말없는 동의 하에 두 사람은 그녀의 집 현관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함께 계단을 올라갔지만 와이엇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녀는 망창문의 빗장을 한 손으로 잡은 채 그를 돌아봤다. "들어오지 않을래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그러면 자제력을 잃어버릴 것 같소. 당신의 남자라면 점잖게 굴어야 하오."

리자는 심장이 철렁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어떤 남자한테도 이런 고결한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동시에 이토록 간절하게 원하게 하는 남자도 없었다.

그가 입술을 부드럽게 쓸 듯이 키스하고는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는 그가 차에 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의 모습이 사라진 다음에도 미소를 띤 채 오랫동안 어둠 속을 지키고 서 있었다.

침대 속으로 들어가며 그녀는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이런 행복은 다른 사람들에게나 잇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와이엇을 만났고, 있는 힘껏 싸웠지만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도 똑같은 사랑에 빠졌음을 그녀는 확신했다. 어떤 남자도 여자를 웬만큼 깊이 사랑하지 않고는 여자의 안녕을 위해 자신의 욕구를 희생하지 않는 법이다.

또다시 가슴이 뿌듯해져왔다. 눈을 감으며 그녀는 그 어떤 것도 그녀의 강한 감정들을 몰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와이엇의 미소가 머릿속을 맴도는 가운데 그녀는 서서히 잠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녀는 청혼가 결혼식에 대한 꿈을 꾸었다.

 

와이엇은 클레터스가 가장 좋아하는 벤치 한 귀퉁이에다 부츠 신은 발을 걸쳤다. 클레터스는 멜빵 줄을 탁 튕겼고 클래이엇은 모자챙을 들어 올리며 그를 쳐다보았으나 두 사람 다 그의 헤벌쭉한 웃음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라 했더라도 와이엇은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기분은 그야 말고 세상을 얻은 듯한, 신나는 느낌이었다. 지난밤 거의 잠을 자지 못했는데도 피곤하지 않은 것이 놀라웠다.

새벽 2시가 좀 지나서야 잠자리에 든 그는 동틀 무렵에 잠이 깼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사랑은 위대하다고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나 그와 같은 기분이었으리라.

클레터스는 제 아빠가 주유소에서 사다 준 소다수를 소리 내며 끝까지 쪽쪽 마시는 핼리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 우리 공주님께서 오셨어?"클래이엇이 말했다.

와이엇은 핼리가 킥킥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엄마의 가출에서 받은 상처로부터 많이 회복되어가고 있는 좋은 신호로 이해했다.

오늘은 핼리에게서 보통 때의 부랑아 같은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머리도 곱게 빗고 있었고 반바지나 티셔츠에도 풀물이 들어 있지 않았다. 진정한 핼리의 모습을 보니 기뻤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음속에 자리잡은 안도감을 즐겼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가뭄도 끝났고, 루크는 신부를 찾았고, 와이엇은 리자를 찾았다.

"신사분들." 이사벨이 클레터스가 앉은 벤치 앞으로 야단스럽게 걸어왔다.

"안녕하신가, 이사벨."클레터스가 눈을 찡긋하며 인사했으나 상대는 발끈하며 무시했다. 이사벨은 다시 뭔가를 궁리해낸 눈치였다. 와이엇은 이번에 또 무슨 분란을 일으키려고 저러나 궁금해하며 벤치에서 발을 내리고 어깨를 폈다.

"오늘 부인회를 소집했어요. 그래서 만장일치로 누군가가 나서야 한다고 결정했어요. 당연히 내가 그 임무를 수행할 사람으로 뽑혔죠."

불길한 육감이 와이엇의 등줄기를 달렸다. 하지만 입을 먼저 연 사람은 클레터스였다. "때와 장소가 좋지 않군, 이사벨."

클레터스의 말투에 밴 경고는 도리어 이사벨의 화를 자극하기만 했다. 그녀는 기세등등하게 한두 걸음 다가오더니 클래이엇과 와이엇한테 돌아가며 손끝을 휘둘렀다.

"마을 공동 위원회 위원인 두 분은 우리 마을의 지도자들이에요. 우리 마을의 젊은 사람, 늙은 사람 모두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도덕적 의무감이 있는 분들이란 말이에요."

그녀는 클래이엇을 노려봤다. "부끄러운 줄 알아요. 딸아이를 야생마처럼 방치하다니, . 육아에 대한 책들을 보니 하나같이 아이들의 기강을 잡아야 한다고 분명히 써 있었어요. 핼리가 음식을 훔친 것만으로도 큰 잘못이에요. 그런데 여자 속옷이라니! , 비난을 받아 마땅한 일이야."

핼리는 스스로 항변을 하려 했지만 이사벨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언성만 높이며 계속 떠들어댈 뿐이었다.

"비난받을 일이긴 하지만 전적으로 이해는 가요. 외부영향에 민감한 아이가 그런 여자의 그 따위 물건을 훔치려고 마음먹은 것은 놀랄 일이 아니거든요."

클래이엇이 벌떡 일어섰다. 그는 험악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칼슨 가 사람들의 성질이 이사벨을 상대로 시동이 걸린 것이다.

"핼리는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를 갈려 말했다. "저는 제 딸아이의 말을 믿습니다."

이사벨은 못 들은 사람처럼 계속 말했다. "클래이튼(클래이엇의 정식 이름), 당신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에요. 말인 즉, 그 바람둥이 여자가 문제의 발단이라 이 말이에요. 핼리는 아마 어쩔 수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클래이튼, 저 아이를 기숙학교에 보내는 것을 아마 신중히 고려해 봐야 할 거예요."

와이엇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주먹을 꾹 쥐었다."그쯤 해두시죠. "그는 실제로 을러대듯 말했다."사람 욕을 하는 게 나쁘다는 가르침도 못 받으셨나요? 그리고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도 핼리를 믿습니다."

이사벨은 그의 질책에 정말로 놀란 모습이었다. 충격에서 벗어난 그녀는 작은 턱을 쑥 내밀고 말했다. "이봐요, 보안관. 요즘 정말 당신의 판단력을 신뢰하기 힘들어지고 있어요. 마크맨 같은 여자를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내년 보안관 재선이 힘들어질 걸이란 사실을 생각해 봐야 할 거예요. 아니면 다음에는 아예 뜨내기 보호자로 나설 생각인가요?"

클레터스가 의자에서 일어나 굽은 어깨에 있는 대로 힘을 주고서는 숱 많은 희 눈썹 밑으로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잘 들어, 이 말 많은 할망구야. 내 평생 당신의 오지랖을 참아 줬지만 이번엔 너무 심했어. 난 여자를 때리는 사람이 아니니 이제 와서 그러지는 않겠어. 하지만 입 닥쳐. 그렇지 않으면 내 직접 닥치게 해줄 테니."

이사벨은 멈칫멈칫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지갑을 움켜 쥔, 뼈만 앙상한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와이엇은 할아버지가 이렇게 자랑스러울 때가 없었다. 이사벨은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른 채 턱을 치켜들고 다시 야단스럽게 걸어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구두 소리가 요란했다.

핼리는 울고 있었고, 클래이엇은 머리에서 김이 날 지경이었고, 클레터스는 뜻 모를 말을 푸푸 내뱉고 있었다.

사태가 더 악화됐다고 생각하며 와이엇은 고개를 들었다. 저만치에서 리자가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9

비록 거리 때문에 리자의 표정을 명확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태도에서 모든 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도서관 앞에서 어깨와 등을 곧게 펴고 서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반듯하게 쳐들고 있었지만 분명 엄청난 노력을 들인 행동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돌아섰다.

"리자, 기다려!" 와이엇은 급히 그녀 뒤를 좇았다.

그녀는 부자연스럽게 위엄을 차리며 멈춰 섰다. 그녀가 그를 향해 시선을 들었을 때 그녀의 눈빛에 어린 수많은 경고의 빛을 보고 그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녀가 얼마나 거기에 서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들을 만큼 들었음이 분명했다.

빌어먹을. 그는 가능한 한 절제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제발 마음쓰지 말아."

그녀는 손을 들어 그가 하려는 말을 제지했다. 다시 손을 내린 후 그녀는 보도 한가운데 가만히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와이엇은 사방에서 날아와 꽂히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지만 블록이 끝나는 곳에 호들갑스럽게 모여든 흰머리 여인네들로부터 보내진 어이없는 눈초리가 가장 신경쓰엿다.

리자는 침착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입술을 굳게 다문 채였다. 허나 그녀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상처 입은 눈빛은 감춰지지 않고 있었다.

"와이엇, <바람둥이 여자>보다 더 나쁜 말도 들은 적이 있어요."

그래도 그의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서둘러 한 발을 더 내딛기도 전에 경적이 울리고, 우레 같은 차의 엔진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로이, 브레이크를 밟아! 액셀이 아니야. 브레이크!"

와이엇과 리자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니, 로이 에버츠의 구식 셰브롤레가 길 건너편의 이발소 앞, 커브길 위로 튀어 오르고 있었다. 빨갛고 하얀 줄무늬로 된 이발소 간판대 아래 앉아 있던 노인들이 허겁지겁 도망가자마자 나무 빠개지는 소리가 들렀다.

와이엇은 벽이 부서지며 유리창이 깨질 것을 예상하고 귀를 막았다.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로이가 간신히 차를 세운 것을 알고 와이엇이 리자를 돌아봤다. "이러기 싫지만 가봐야겠소. 나중에 얘기합시다, ?"

"내 걱정은 말아요, 난 괜찮아요."

그는 그 점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가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일이 그녀 곁을 떠나는 일이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거리로 달려 나가 한눈에 사태를 파악했다.

로이는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했다. 클레터스의 벤치에서 일어나는 일을 구경하는 데 열중해서 브레이크 대신 액셀을 밟은 것 같았다. 와이엇은 사태를 수습하느라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상처받은 리자의 눈빛이 자꾸 어른거렸다.

그는 필요한 내용을 기록하고 로이에게 딱지를 뗀 다음 바로 옷가게로 향했다. 주위에 부인회 부인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그들에게 또 하나의 가십거리를 제공하는 셈이 아닌가. 하지만 복수의 기쁨은 잠깐이었다.

옷가게 창문에 휴업간판이 걸려 있고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그는 아픈 육감을 드는 것이 싫었지만 그 생생한 공포심 때문에 그의 보폭은 점점 커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자신도 몰랐다. 다만 너무 늦기 전에 리자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와이엇은 보안관 순찰차를 세우고 문을 열었다. 마을의 유일한 술집 앞에 서 잇는 가로등 아래 승용차와 트럭 몇 대가 세워져 있었다. 메인가의 다른 곳은 적막했다. 제스퍼 계곡의 상가지역은 한 블록을 넘지 않았고 대개가 모래빛으로 페인트칠을 한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리자가 가게 옆에 심은 분홍색 꽃들이 칙칙하던 거리를 밝게 해주었다. 리자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녀가 두 달 전 이 마을에 이사 오면서부터, 그녀의 가벼운 걸음걸이는 그의 환상에 발동을 걸었고, 그녀의 밤색 눈동자와 웃음을 띤 눈빛은 세상에서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렇게 느낀 사람은 그 혼자였을까?

그는 자신이 왜 크레이지 호울스로 다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사방을 찾아다녔다. 리자의 가게, 식당, 일렘 가의 그녀 집. 멜에게 알아보니 리자는 하루 휴가를 신청했다고 했다. 그는 질리안, 루크, 클레터스 등 그녀의 행방을 알 만한 사람 모두에게 연락을 했다. 대답은 다들 똑같았다. 오후 4시 이후로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불길한 예감이 점점 두려울 정도의 근심으로 변해갔다. 질리안은 열심히 그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리자는 차도 없는 데다 제스퍼 계곡은 대중 교통수단이 제공되는 마을이 아니었다. 가장 가까운 공항가 역은 수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와이엇은 리자가 떠난 것이 아닐 것이라고 계속해서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본능은 그럴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자꾸 기울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나무랄 수 있겠는가?

그는 모자를 벗어 머리를 쓸어 넘긴 다음, 문가에 서 뿌연 술집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목요일 패거리들이 포커게임을 벌이고 있었다. 부머 브라운이 도라리의 환심을 사려하고 있는 모습은 요즘엔 다반사였다.

하지만 식당 안쪽에 외롭게 앉아 있는 여자를 보자, 그는 몇 시간만에 처음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리자 마크맨의 모습은 보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녀를 처음 볼 때부터 그랬다.

도라리가 그가 온 것을 알아차리고 가까이 와보라는 눈짓을 했다. 그가 부머 옆의 의자에 앉자 도라리가 차가운 맥주 한 병을 소리나게 내려놨다.

"얼마나 저러고 있었어요?"

"20, 길어야 30분쯤. 자리에 앉으면서부터 내내 저렇게 죽은 듯이 소다수만 바라보며 앉아 있었어. 상처받은 거지. 당신이 어떻게 좀 해봐야겠어."

술집 한쪽 벽을 채운 거울 속을 눈으로 쫓으며 와이엇은 얼음처럼 차가운 맥주를 쭉 들이켰다. 그는 카운터 위에 돈을 올려놓고 돌아서서 천천히 술집 안쪽을 향해 들어갔다.

<!>이란 소리가 술집 전체로 퍼졌다. 리자는 굳이 보지 않아도 와이엇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이 들고 온 병을 탁자 위에 놓고 의자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를 올려다봤다.

"정말이지 잘도 숨어 있었군."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숨어 있은 적 없어요."

와이엇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리자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는 아마 미친 사람처럼 나를 찾아다녔을 것이다. 걱정을 끼친 것이라면 미안했다. 그녀는 혼자 있고 싶어 멀리 슈가 크릭까지 걸어갔다. 생각을 해야만 했다. 말도 못하게 피곤하긴 했지만 이제 모든 것이 훨씬 명확해졌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비록 진실로 멋진 친구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평생 혼자서 세상을 헤치며 살아온 그녀였다.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그녀는 견뎌냈고 결국은 그녀를 더욱 강인하게 만들어줬다.

이사벨 푸루잇의 험담에는 마치 뺨을 얻어맞는 것 같았다. 만일 자신 외에 생각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야단법석을 떨며 그 올드 미스 할망구에게 자신의 생각을 퍼부어 줬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평판보다 더 위험에 처한 것이 있었다. 와이엇의 미래가 달린 일이기에 리자는 도저히 위험을 무릅쓸 수 없었다.

그녀는 호주머니에서 팁으로 받은 지폐 하나를 꺼냈다. 그것을 탁자 위에 잘 편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너무 오래 걸어 다녔다 놔요. 집까지 좀 데려다 주세요."

그가 탁자를 돌아오자, 그녀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는 그녀의 팔꿈치를 잡고 길을 만들며 나아갔다. 그녀는 그에게 바짝 기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를 위해서라면, 그녀는 좀 더 강해져야 했다.

와이엇은 고요하게 가라앉은 거리로 차를 몰면서 너무 급하게 커브를 돌지 않도록 주의했다. 조수석에 몸을 기대고 있는 리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창백하게 보였다.

그의 집안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질리안과 루크가 뛰어나왔다. "어머, 리자. 돌아왔구나. 너 괜찮아?"

"괜찮아. 난 언제나 회복이 빠른 사람이잖아."

하지만 보통 때의 맹렬함은 결여된 목소리였고 윙크도 표정과는 겉도는 것이었다.

질리안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루크가 와이엇이 보내는 눈짓을 읽었는지 금방 질리안의 손을 잡아 끌고서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보일 듯 말 듯하게 웃었다. "루크는 이 마을에서 가장 눈치 빠른 사람이에요. 안 그래요?"

"당신 얘기를 좀 해보겠소?"

대답을 할 것인지 의문스러워질 정도로 한참동안 그녀는 그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녀는 창턱에 놓인 화분들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난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어요."

"몇 가지라도 있을 거요. 가장 생생하게 기억나는 일이 뭐요?"

"생생하게 기억하는 일이라가만 있자. 그건 아마 첫 키스일 거예요."

와이엇이 몸을 바로 하며 핏 웃었다.

"아니면 우리 아버지가 감옥에 가던 날, 그 날을 잊을 수가 없어요. 아니면 우리 엄마 애인이 나를 때려 울린 일라던가."

와이엇은 목구멍이 죄어드는 듯했다. 그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빠르고 힘 있는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여자한테서 이토록 강렬한 눈빛을 보기는 처음이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추억할 것이 별로 없다고 말했잖아요."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웃으려 했다.

리자의 거무스레한 눈밑 그늘과 우울한 감정이 맺힌 눈빛을 보고 있자니 그는 그 옛날 그녀를 때렸던 남자와 딱 5분만 있었으면 싶었다.

"앞으로 이걸 기억해요." 그가 그녀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녀는 눈을 뜨고 있었고 그도 그랬다. 그의 시야가 약간 흐릿해지고 머릿속은 멍해졌다. 다음 순간, 서로의 심장에 끈이라도 연결된 것처럼 두 사람의 눈꺼풀이 동시에 감겼고 동시에 신음을 터트렸다.

와이엇의 팔이 그녀의 등을 감싸며 가까이 끌어당겼다. 주의해서 계속 부드러운 키스를 지속하던 그가 얼굴을 들었다. 그는 그녀의 이마를 입술로 누르며 중얼거렸다.

", 정말 감미롭군. 당신은 정말 감미롭소."

그녀는 약간 몸을 떼어 내었다. "와이엇, 할 말이 있어요."

본심이라고 할 수도 있고, 직감이라고 할 수도 있고, 공포감이라고 할 수도 있는 생생한 경고의 소리가 와이엇의 머릿속을 울렸다. 그는 어디에서 그런 갑작스러운 욕구를 느꼈는지 모르지만 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도저히 부드럽다고 할 수 없는,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는 목구멍 깊은 곳을 울리며 그에게 키스를 되돌렸다. 그는 심장이 조여드는 듯했다. 키스가 아직 충분히 깊어지지 않았는데도, 그는 그녀의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고 그녀가 몸을 빼려 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마지못해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왜 그랬어요?"

"언제부터 남자가 여자한테 키스하는 데 이유가 필요해졌소?"

리자는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상황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세를 가다듬은 다음 훨씬 차분해진 음성으로 입을 떼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게 있어요."

"그게 뭐요? 과거지가가 있었다는 거? 가출했고, 아버지는 전과자고 절박하게 살아남았다는 거? 난 신경 안 쓰오. 과거일 뿐이오. 내가 문제 삼는 것은 현재, 그리고 미래요."

그녀는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젖히고 깜깜한 창밖을 내다보았다. 생각해 보니 그녀는 이 마을뿐 아니라 어느 고장과도 유대감을 갖고 있는 곳이 없었다. 그녀의 끝은 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여기 제스퍼 계곡의 사람들은 그녀를 원하지 않았다.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그런 곳에 누가 살려고 하겠는가? 바로 그녀가 그랬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와이엇이 있으니까.

그녀가 꿈꿔오던 모든 것이 바로 그녀 뒤에 있는 것이다. 그의 품안으로 다시 걸어가서 날이 밝도록 안겨 있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와이엇 맥컬리는 그녀가 만나 본 중 최고로 존경할 만한 남자였다. 그 자신의 입으로 떠들어대지 않아서 그렇지, 제스퍼 계곡에서의 그의 뿌리는 그 성실함만큼이나 확고했다. 말투에는 늘 열의가 배어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가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얘기를 할 때는 더욱 그랬다. 그에게는 이곳이 고향이고, 잠시의 외도 후에 돌아온 곳도 이곳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어른이 된 것이다.

이사벨 푸루잇이 입방정이 심한 사람인지는 몰라도 와이엇의 평판에 관한 한은 바른 말을 했다. 그녀가 부인회의 회원들을 설득해 불매운동을 하도록 할 힘이 있는 사람이라면 와이엇이 다음 해에 존스 카운티의 보안관으로 재선되지 않으리란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리자는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행하는데 쩔쩔매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하기 어려운 옳은 일은 처음이었다.

"리자."와이엇의 목소리가 바로 몇 발자국 뒤쯤에서 들려왔다. "오늘은 참으로 길고 힘든 하루였소. 당신 분명 지쳤을 거요. 푹 자고 나면 내일은 모든 것이 좀 더 희망적으로 생각될 거요. 두고 봐요. 2주만 있으면 벌써 모두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있을 테니까."

"2주가 지나도 우리가 그들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아요."그녀는 커튼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으나 돌아서진 않았다."난 매디슨으로 돌아갈까 해요."

그래, 기어이 그 말이 나오고 말았구나.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을 한 거야. "? 언제 말이오?"

"."

그는 제대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리자가 떠나려고 하고 있다. 그것도 곧. 빌어먹을!

그는 가만히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댔다. 그녀는 잠시 그의 손에 자신을 맡기듯 싶더니 얼른 몸을 뺐다.

"부탁이니 더 이상 일을 어렵게 만들지 말아요."

그때 현관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두 사람이 채 돌아보기도 전에 벌컥 문이 열리며 클래이엇 칼슨이 걸어 들어왔다.

"와이엇, 일이 생겼어. 사방을 다 찾아다녔는데, 찾을 수가 없어.""." ".""."

"누구? 누구 말이야?"

"핼리. 내 딸이 사라졌어."

 

10

"무슨 일인지 말을 해, 클래이엇."

친구의 이런 표정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클래이엇의 눈동자는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핼리는 오늘 오후 집으로 돌아온 후 계속 울어댔어. 왜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냐, 정말로 자기를 기숙학교에 보낼 거냐 하면서 말이야. 그래서 난 널 사랑하니까 절대 아무 데도 보내지 않을 거라고 말해 줬지."

"그랬더니 뭐래?"

"별 말 안 했어. 난 그 애가 새로 태어난 고양이 새끼들을 보로 마구간에 가겠다고 해서 이젠 괜찮겠구나 싶었지. 그리고 한 30분쯤 지나서 녀석을 불렀는데 들어오질 않는 거야. 처음엔 잠이 들었나 해서 갔어. 고양이들하고 같이 웅크리고 자고 있을 줄 알고. 그런데 마구간에 없었어. 여기저기 다 찾아다녔어. 근데 없더라고. 내 딸이 아무 데도 없어."

"가출 한 거라 생각해요?"

잠시 클래이엇은 리자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것 같았다. 충격에서 빠져나온 사람처럼 주위를 돌아보더니 그가 고개를 끄떡였다.

"뭘 가지고 나갔어요? 방에서 말이에요. 갈아입을 옷이라든가, 아님 음식이던가."

와이엇은 리자가 가만가만 다가와서 달래듯이 목소리를 낮추는 걸 경황없는 클래이엇이 알아차렸을까 싶었지만 그는 알지 못한 것 같았다. 와이엇은 제스퍼 계곡 사람들이 이런 그녀의 장점을 왜 보지 못하는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핼리가 가지고 나간 것은 옷과 음료수, 크래커 봉지, 그리고 그 애가 두 살 때부터 어디든 끌고 다니던 담요뿐이었죠."

와이엇은 한 팔로 친구의 어깨를 꼭 껴안았다. "찾아낼 거야, 클래이엇. 핼리는 아주 당돌한 녀석이야. 자신을 돌볼 줄 안다고. 칼슨 핏줄 아닌가."

그래도 클래이엇의 긴장은 풀어질 줄 몰랐지만 깊이 한 숨을 들이쉬며 스스로를 가누려는 것이 확연했다."핼리를 찾아야만 해.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이미 준비되어 있어. 루크도 지금 질리안과 드라이브를 나갔지만 곧 돌아올 거야. 그 사이에 우리는 수색대를 조직하자. 크레이지 호울스에 가서 부머와 제이슨, 제드 할리를 찾아봐. 난 할아버지와 앤더슨네 형제들을 데리고 너랑 합류할게. 15분 후에." 클래이엇은 머리를 한 번 끄떡이고 문으로 향했다. 와이엇이 바로 뒤를 따랐다.

"기다려요." 와이엇의 의문을 담은 눈이 그녀를 향해 돌려졌다.

"우리가 빨리 하면 할수록 그만큼 빨리 핼리를 찾을 거예요."

"우리?" "제스퍼 계곡의 누구보다도 내가 가출에 대해선 잘 알 걸요. 하지만 내가 핼리 찾는 것을 돕고 싶다고 해서 이곳을 떠나겠다는 마음을 바꾼 것은 아니에요."

그로선 도저히 그녀의 그런 생각을 탓할 수가 없었다. 그는 모자를 눌러쓴 다음 트럭으로 걸어가 그녀가 타도록 문을 열러 주었다. 현명한 일이겠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그의 눈길을 피했다.

 

아침 7. 핼리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클래이엇의 집을 본부로 하여 마을 사람들로 구성된 수색대가 밤새도록 마을 주변을 이잡듯이 뒤졌지만 핼리를 찾을 수 없었다. 와이엇이 사무실에 나가 봐야 했지 때문에 리자는 그의 차를 얻어 타고 나가 클래이엇의 집 부엌에 모여 있는 자원봉사자들에게 여유공간을 마련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지친 몸을 창가에 기댔다."다시 태워 줘서 고마워요, 와이서."

"별말을 다 하는군." 그는 통 말이 없었다. 간밤의 수색으로 모자며 옷에 흙먼지가 묻어 있었고 수염도 자라 턱이 거뭇거뭇했다. 그녀는 어제 그의 진면목을 보았다.

제스퍼 계곡 사람들은 다 그를 존경했다. 그의 말을 귀담아 듣고 그의 지시대로 따랐다.

그녀는 간밤에 그가 몇 번씩이나 그녀를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그녀도 그에게 달려가 그를 안아주고 그의 얼굴에 미소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를 만지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방을 반도 나서 기전에 부머와 제이슨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보안관을 칭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그만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와이엇은 이곳 사람이고 그녀는 아니었다. 곧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핼리도 발견될 것이고 와이엇은 계속 존스 카운티의 보안관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어딘가에서 돈을 벌 방법을 강구하고 있을 것이다. 매디슨에서 다시 장사를 시작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코리와 앨리슨과 아이비가 있는 곳이니 완전히 외톨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고독하긴 할 것이다.

와이엇이 문을 열고 내리는 소리에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그를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고 내렸다.

그들은 그녀의 집 현관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계단 하나가 그들의 무게로 끽끽 소리를 냈다.

"떠나기 전에 고쳐놔야겠군요."

"당신은 웨이트리스 일도 잘하고 가게도 운영하고 요리도 잘하고 계단도 고칠 줄 아는군, 리자. 어디 당신이 못하는 것도 있소?"

그녀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그녀의 뺨에 그림자가 너풀거렸다.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목소리는 약간 떨렸다.

"딱 한 가지 있죠. 난 내 과거를 바꾸진 못해요."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바꿀 수 있다면 바꿀 거요?"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와이엇은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안으로는 호흡이 깊어지고 맥박이 빨라지고 있었다. 감정도 고요하지 않았다. 리자는 동화책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 바로 그런 과거가 현재의 그녀라는 한 여자. 그가 사랑하는 여자를 형성한 것이다. 와이엇 자신도 바꾸고 싶지 않았다.

욕망이 너무 강력하게 충동질하는 바람에 그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품안 에 끌어안았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할 수 없었기에 그는 살짝 몸을 숙이고 다음으로 할 있는 최선의 것을 했다. 그녀의 볼을 따라 속삭이듯 감미롭게 카스하며 그녀의 입술로 옮겨갔다. 만일 의도했던 것보다 조금만 더 오래 키스했었어도, 그는 그만 자제력을 잃었을 것이다. 그도 그저 남자일 뿐이었으니까.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는 그녀에게서 입술을 떼고 발걸음을 돌렸다.

 

와이엇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책상 위에 발을 올려놓았다. 오전 이후 무언가가 계속해서 그를 성가시게 했다. 리자를 데려다 준 다음 찬물을 뒤집어써서 머리는 어느 정도 맑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딱 고집을 수가 없었다.

그는 머리 뒤에 양손을 깍지 끼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11시가 가까워졌으나 핼리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그 아이는 사랑했던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떠났고 몸부림을 치거나 한 흔적도 없었다. 마을 절반이 수색으로 발칵 뒤집어졌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아이의 행방과 그 이유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다.

와이엇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어제 할아버지한테 들은 말 몇 마디가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쳐지나갔다.

<리자의 도난 당한 차에는 완벽하게 논리적인 해석이 있고, 속옷을 훔쳐간 사람이 변태성욕자인지는 모르는 일이야. 난 핼리가 제 발로 걸어서 돌아온다고 해도 조금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데>

와이엇은 발을 내리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할아버지가 핼리의 실종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클레터스가 가끔 포커게임에서 속임수를 쓴다는 것은 마을사람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규칙을 어기다 걸리곤 했다. 하지만 클래이엇에게 절대로 이런 고통과 걱정을 안길 리 없는 마음 좋은 양반이었다.

<리자의 차가 도난 당한 데는 완벽하게 논리적인 해석이 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있을지도 모른다>혹은 <아마 있을 것이다>가 아니라 <있다>라고 말했다.

리자의 도난 당한 차와 관련하여 걸려왔던 전화가 그의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되기 시작했다. 왠지 친근한 목소리인데 상태가 너무 안 좋아 확실히 분별할 수가 없었다.

되풀이하여 추론, 분석을 계속하던 그는 곧바로 사무실을 나가 순찰차를 탄 다음 마을 남쪽을 향해 달렸다.

와이엇은 자갈이 듬성듬성한 진입로에서 차를 갑작스럽게 세웠다. 그는 집을 향해 최단 직선 코스로 걸어갔다.

"할아버지!"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밖으로 나간 와이엇은 현관계단에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할아버지?"

자신의 발걸음이 떨려오는 것을 느끼며 그는 마구간으로 향했다. 어두운 실내에 눈이 익기까지 잠시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그는 위스콘신 주 번호판을 단 빨간색 차가 헛간 한가운데 있음을 알아봤다. 잠시 그는 그렇게 멍청히 차를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안 돼. 할아버지. 안 돼요. 어떻게 친할아버지를 체포한단 말인가?

와이엇은 할아버지가 왜 그랬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노인 양반은 아마 자신이 중죄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아마 와이엇의 사무실에서 동전을 던졌을 때와 같은 이유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와 리자를 맺어주기 위해서.

클레터스가 감옥에서 새로 사귈 친구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며 데굴데굴 구를 것이다. 그가 왜 이런 짓을 했든 간에 문제는 이런 짓을 했다는 데 있었다.

지금 와이엇이 할 수 있는 일은 리자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일이었다. 또 아는가, 이 일이 돌파구가 될지.

어쩌면 할아버지는 감옥에 가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비가 오기 전에 핼리를 찾을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리자가 이곳을 떠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 모든 것이 <어쩌면> 투성이였다.

 

11

종소리에 돌아서 보니 와이엇이 문가에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가게를 닫고 나와 같이 가주겠소?"

그녀는 그의 목소리가 짧게 자른 듯이 들리는 이유를 생각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선 뭔가 시름이 엿보였다.

"어딜 갈던데요?" 그녀는 열쇠와 핸드백을 집어 들며 물었다.

"우리 할아버지 댁이오. 당신한테 보여 줄 게 있소."

그녀는 그를 따라 그가 순찰차를 세워놓은 곳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오팔와 루에타 그레험이 미장원에서 나와 그들 쪽으로 걸어왔다.

오팔은 두툼한 두 겹의 턱을 쳐들었고 루에타는 지나가면서 커다란 가방을 가슴 안에 꼭 끌어안았다. 아무도 그녀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두 사람이 식당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리자는 친구를 잃은 듯한 깊은 슬픔을 느꼈다. 그들은 침묵 속에 클레터스의 집으로 갔다. 일단 도착하자 와이엇은 오랜 세월 비바람에 시달려온 듯 보이는 낡은 헛간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 그는 눈을 깜박거리며 초점을 맞췄다가 다시 눈을 깜빡였다. 지저분한 헛간의 한가운데로 걸어간 그는 완전히 한 바퀴 몸을 돌렸다.

"내게 보여 주고 싶다는 게 뭐예요?" 와이엇은 어깨 너머로 돌아보며 입술을 꾹 오므렸다. 리자의 질문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문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헛간은 텅 비어 있었다. 오직 본능에 의지해, 그는 커다란 문 쪽으로 걸어가 천천히 그 문을 밀어젖혀 빛이 들어오게 했다. 그는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먼지 속에 남아 있는 타이어 자국을 관찰 했다. 다시 일어난 그는 부츠 자국 위에 자신의 발을 대보았다. 리자의 집 진입로에서 발견했던 발자국과 똑같았다. 일이 어떻게 되고 있는 것인가?

"와이엇?" 그는 그녀한테로 고개를 돌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한 시간 전에 당신 차가 여기 있었소."

"내 차?"

그는 모자를 벗었다가 잠시 후 다시 썼다. "어떻게 되가는 일인지 모르겠소. 하지만 내 무슨 일이 있어도 알아내겠소. 우선 할아버지를 찾아봐야겠소."

"당신은 할아버지가 내 차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 물론 그랬다. 사실 그의 할아버지는 보통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을로 돌아오는 길은 클레터스의 집만큼이나 고요했다. 우체국 앞의 벤치가 비어 있음을 본 와이엇은 식당에 운을 걸어 보기로 했다.

그와 리자가 들어가는데 오팔과 루에타가 나오고 있었다. 루에타는 다시 가방을 가슴에다 끌어안았다. 역시 눈도 맞추려 하지 않았고 리자는 또 한 번 쓸쓸함을 느꼈다. "이해를 못하겠어요. 루에타와는 친구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매일 가게에 올 때마나 속 얘기를 하곤 했거든요."와이엇은 식당 내부를 훑어보았으나 한쪽 귀는 열어 두고 있었다. "루에타 그레험이 가게에 매일 왔었소?" 리자는 고개를 끄떡였다.

"뭘 샀소?"

"아무것도 사지 않았어요. 그냥 구경만 했어요. 사실 란제리 보는데 시간을 다 보냈어요. "리자가 말을 멈췄다. 와이엇의 시선이 바로 그녀와 마주쳤다.

"란제리?" 그들은 동시에 외쳤다.

그들은 서둘러 거리로 나왔지만 오팔과 루에타는 보이지 않았다.

"루에타를 찾아가 봐야겠소." 그들은 몇 분 뒤에 그레험 댁 현관에 도착했다.

"오팔 부인, 루에타 안에 있습니까?" 오팔이 노크 소리를 듣고 나왔다. "어머나, 그 애는 없어요. 하지만 당신을 못 만나 걸 알면 아쉬워할 거예요."

와이엇이 남자답게 코웃음을 치자 리자는 웃을 뻔했다.

"지금 어디 있습니까?"

"글세, 잡화점에 새로 산 가방을 물리려고 갔을 거예요. 왜 그런 괴상한 것을 샀는지 처음부터 이해가 안 가더라니만. 그 애하곤 영 안 어울렸거든요." 와이엇이 겨우 오팔한테서 벗어났을 때 그들은 서둘러 차로 돌아갔다.

오팔과의 거리가 충분히 확보되자 그녀가 말했다. "잡화점에선 루에타를 못 찾을 것 같아요, 와이엇. 내 느낌에 그녀는 일렘 가 203번지에 있을 거예요."

"당신 주소잖소.""그래요. , 가요."

 

와이엇은 리자의 집 앞 도로 모퉁이에 차를 세웠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주의하면서 그들은 B급 영화에 나오는 탐정들처럼 살금살금 집을 돌아갔다. 그들은 집 모퉁이 너머를 살펴보다가 루에타 그레험이 새틴과 레이스 옷조각을 빨랫줄에 집게로 집는 모습을 보며 그만 그 자리에 우뚝 서버리고 말았다.

육감적으로 루에타는 그들의 출현을 감지한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몸이 갑자기 굳어지더니 천천히 돌아섰다. 그녀의 시선이 리자와 마주쳤다.

"안녕." 리자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루에타는 마지막으로 남자 있던 속옷을 떨어뜨리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미안해요." 그녀는 울었다. "훔치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냥 빌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얼마나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느낌인지 알고 싶었어요. 난 그냥."

리자는 가만히 다가가 말했다. "그것들이 마음에 들던가요. 루에타?"

루에타는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모르게 모두 되돌려 놓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날 당신은 집에 일찍 왔고, 모든 게 엉망이 되고 말았어요. "하나하나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루에타가 얼마나 동경 어린 시선으로 속옷들을 봤던가. "날 체포할 건가요, 와이엇?“

", 이 불쌍한 것아!"

리자, 와이엇, 루에타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니 오팔 그레험이 서 있었다.

", 세상에! 점심 때 루에타가 안절부절못하는 걸 난 알았어. 내 딸을 체포할 거예요, 와이엇?" 리자는 재빨리 걸어가 빨랫줄에서 브래지어와 팬티들을 내렸다. 그녀는 큰 가방을 집으며 말했다. "루에타가 친구한테 선물 좀 받았는데 왜 와이엇이 체포를 해요?" 그녀는 브래지어와 팬티들을 그 큰 가방에 넣었다. 가방을 루에타에게 내밀어 그녀는 루에타만 들을 정도로 조그맣게 말했다.

"이 일은 그 누구한테도 한 마디도 하지 않을게요." 리자가 나직하게 말했다. "내일 가게에 들르면, 내가 당신한테 어울리는 옷을 고르는 걸 돕겠어요, 난 당신이 그 점잖고 고리타분한 블라우스 밑에 멋진 몸매를 갖고 있다는 걸 벌써 알아봤다고요."]

와이엇한테는 리자의 윙크가 놀랍지 않았지만 오팔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잠시의 충격에서 회복한 오팔은 우물거리며 말했다. "고마워요, 마크맨양."

리자는 지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발요. 제친구들은 절 리자라고 부른답니다."

"그래요, 그래요리자."

오팔은 루에타한테 팔짱을 끼고는 딸을 데리고 나가다가 말고 쭈빗거리며 돌아섰다. "리자?"그녀는 오팔 부인을 바라봤다. "?"

"당신을 다음 우리 부인회 모임에 초대하고 싶어요. 당신이 마음에 맺힌 게 많을 거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꼭 참석할 것을 고려해 보았으면 해요. 우린 정말 지역의 발전을 위해 애쓰고 있어요."

와이엇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 수다쟁이 노인네한테 키스를 해주고 싶었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리자에게 키스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오팔이 집을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둘만 남자, 와이엇이 먼저 입을 열었다."당신은 정말 멋진 여자요, 리자 마크맨.""내가요?"그는 걸음을 옮겨 그녀 바로 앞에 가서 섰다. 그는 그녀에게 떠나는 일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리자는 고집센 사람이었다. 그는 언젠가 그녀와 정면으로 충돌할 작정이었다. 그가 순순히 보내 줄 줄 안다면 그건 그녀의 착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그녀의 얼굴을 쳐든 다음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하지만 그들 옆에서 뭔가가 퉁하고 떨어지는 바람에 키스는 시작도 하지 전에 끝나고 말았다. 리자가 몸을 숙여 옆집 아이들의 공을 주워 올리자, 와이엇은 들리지 않게 욕설을 내뱉었다. 딱 한번이라도 방해받지 않고, 지켜보는 사람도 없는 곳에서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었다. 하지만빌어먹을, 옆집 가족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서 할 수는 없었다.

 

리자는 하늘 위로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피로함 때문도 아니고 걷는 것이 조심스러워서도 아니었다. 오팔이 그녀를 이 마을의 위원으로 환영해 준 것이다.

그녀를 덮치는 현기증 같은 느낌은 와이엇의 깊은 눈빛과 그 눈빛이 그녀로 인함임을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늘, 모든 것이 변했다. 떠나려던 이유도 머물러야 할 이유도. 그녀의 심장은 무섭게 뛰었다. 와이엇이 자신의 진입로 앞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끌 때까지 계속 그랬다. 그는 그녀를 차에서 내리게 한 다음 이젠 참을 만큼 참았다는 듯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에 포개졌고 그녀는 노골적인 욕망과 열정의 덩어리를 가슴으로 느꼈다. 그녀는 그의 등에 팔을 감고 남자의 늠름한 몸과 그 강인함을 감상했다.

"네 창고에서 캠핑을 하고 있는 사람을 찾았는데, 누군지 좀 봐라, 와이엇."

리자와 와이엇은 화들짝 놀라 몸을 떼고 그의 집 뒤편에 있는 낡은 창고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클레터스가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시었고, 핼리의 조그만 손이 노인의 주름진 손을 곡 움켜쥐고 있었다.

"핼리." 리자는 큰소리로 외치며 아이한테로 뛰어갔다. "너 괜찮아?"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몰골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지만 핼리는 지극히 건강해 보였다. 한쪽 무릎을 꿇어 아이와 키를 맞추며 와이엇이 말했다.

"네 아빠는 지금 네 걱정으로 거의 제정신이 아니셔. 왜 집을 나갔니?"

핼리는 눈길을 자신의 발끝으로 모으며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말했다. "몰라요. 가끔 난 바보 같아져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갑자기 헛간에서 찾아낸 차가 생각나 와이엇은 몸을 일으킨 다음 할아버지를 날카로운 눈초리로 쳐다봤다. "털어놓을 얘기 없으세요, 할아버지?"

노인은 멜빵을 탁 튕기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지없이 결백한 사람처럼.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여기에서 핼리를 찾아보자 생각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야. 그래, 기막힌 우연이지." 와이엇의 눈이 가늘어졌다. 클레터스는 윙크를 하더니 핼리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불쌍한 클래이엇 1분이라도 더 걱정하게 나둘 수 없지. 핼리를 집에 데려다줘야겠다. "리자가 와이엇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하나하나 의문이 풀리고 있네요. 또 하나하나 내 꿈도 이루어지고 있고요."

"그건 곧 이곳을 떠나겠다던 마음을 돌렸단 말이오?" 그녀가 머리를 채 끄떡이지도 못했는데, 와이엇이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 그 자리에서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를 보며 심술궂게 웃었다. "이거 알아요, 와이엇? 내 평판은 절대 백합처럼 순결하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당신 평판은 여전히 훌륭한."

갑자기 창고 안으로 엿보는 강렬한 색상이 그녀의 시선을 잡아당겼다. 저게 뭐지?

"리스, 어디 가는 거요?" 그녀는 작은 문을 걸어 들어가기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창고 안은 서늘하고 어두웠으나 창문을 통해 비춰드는 빛으로 충분히 걸음을 더듬을 수는 있었다. 날카로운 숨을 들이켜며 그녀는 빨간색 자체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녀의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돌아서지 않았다.

"아니, 이게 왜 여기 있지?"

"바로 내가 물어 보려던 말이었어요."

와이엇 맥컬리는 말을 더듬어 본 적이 없었지만, 위스콘신 번호판의 리자 차를 쳐다보고 있자니 그의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리스, 이제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소. 그러니까, 어처구니없을 줄 아오. 하지만 난 절대난 정말."

"어머, 와이엇 맥컬리, 생각했던 것과 달리 당신과 난 아주 닮은 구석이 많은 것 같군요." 그녀는 살랑살랑 그의 앞으로 걸어와 눈으로 그의 입술을 더듬었다. 실망스런 눈빛이 곧 뜨겁게 변했다. 다음 그가 안 것은 그녀가 그에게 달려들었다는 것이다. 피가 뜨거운 정상적인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였다. 그는 그녀의 몸에 팔을 감고 그녀의 키스를 받아들이고 오랫동안 억눌러온 정열을 터뜨려 다시 그녀에게 키스를 되돌리는 것이었다. 마침내 두 사람의 입술이 아쉬움에 떨며 떨어지자, 그는 결심한 듯 그녀의 손을 잡고 창고를 나와 그녀를 마주보고 섰다.

"나와 결혼해 주겠소, 리스?"

리자의 목이 메고 글썽이는 눈물로 여린 눈빛을 띠자, 와이엇의 황갈색 눈동자가 뜨겁게 빛났다. 만일 백 살까지 산다 해도 그녀는 이 순간 그의 눈빛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카우보이다운 늠름함과 남자다운 갈망을 담은 저 눈빛을.

그는 그녀가 찾고 있던 바로 그 남자였고, 절대로 찾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바로 그 남자였다. ", 와이엇. 당신을 사랑해요."

"나도 당신을 사랑하오." 와이엇의 가슴이 더욱 급박하게 뛰면서 그의 살갗까지 열기로 뜨거워졌다. 그는 어깨를 펴며 조용히 말했다. "아직 당신 대답을 기다리고 있소. 나랑 결혼해 주겠소?" 그녀는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당신과 결혼하지 않으면, 당신을 체포해야 하잖아요?"

그는 입술에 닿는 그녀 입술의 감촉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이렇게 영원히 자신은 그녀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라 될 것임을 직감하며 그는 볼 사람은 누구라도 보라는 듯 정열적으로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