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상속녀(Fortune's Mistress)
Susan Napier
<1>
"사랑에 빠진 것 같아"
아침 신문을 읽고 있던 매기는 남편의 말을 듣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멋지군요." 그녀는 한입 가득 토스트를 베어 물고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매기는 신문에 난 구두 세일 광고를 보면서 오늘 수지 프렌티스와 만나기 전에 구두를 살 시간이 있는지 없는지 생각하는 중이다.
"매기! 내 말 듣고 있소?" 핀은 재빨리 손을 뻗어 매기가 들고 있는 신문을 낚아채더니 식당 바닥에 내팽개쳤다. "내가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고 있잖아 !"
"사랑에 빠진 것 같다고 말했죠." 매기는 핀의 풍성한 아침식사와 자신의 형편없는 접시를 번갈아보며 그의 말을 정정했다. 난 초콜릿만 봐도 10파운드는 느는데, 핀은 저렇게 많이 먹고도 멋진 몸매를 유지한단 말이야 "여하튼 같은 뜻이야" 핀은 세상 여자들이 모두 혹할 정도로 매력적인 미소를 띠며 말한다. 6피트의 큰 키에 푸른 눈, 엷은 금발과 그리스 조각처럼 잘생긴 얼굴, 피니언 콜은 자가기 원하는 어떤 여자라도 가질 수 있으리라.
"진실이야, 매기. 드디어 내가 사랑에 빠진 거라구."
"축하해요. 이번엔 누구죠? 고마워요, 샘" 매기는 떨어진 신문을 주워놓고 그녀에게 커리를 따라 주는 검고 잘생긴 집사에게 미소 지었다. "토스트 좀 더 줄래요?" "죄송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애원하는 듯한 매기의 갈색 눈을 매몰차게 외면하는 샘의 얼굴엔 미안한 기색이라곤 털끝만큼도 없어 보인다. "칼로리가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항상 두 개는 먹었잖아요!" "점심식사를 많이 드시는 날은 안 됩니다."
"내가 점심을 많이 먹을지 아닐지 어떻게 알아요?" 매기는 불만스러운 목소시로 반문했다
"왜냐하면 오늘 점심 약속을 제가 예약했기 때문이죠. 기억하시겠어요? <러시안>이라고... 거기선 크림을 뜸뿔 얹은 블리니스와 캐비아가 나오죠."
만약 매기가 얼굴을 붉힐 수 있었다면 그녀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 대신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블리니스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후식이다. "블리니스는 하나만 먹을 거예요."
"지나친 확신은 금물입니다."
"죄송하지만, 집사 나으리" 핀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제 아내와 개인적으로 시간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선생님" 매기가 킬킬거리는 동안 샘은 등을 돌려 자신의 부엌으로 들어갔다. 샘은 핀과 동갑이다. 고용인과 피고용인이라는 사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곧잘 서로에게 악의없는 말장난을 할 정도로 사이가 좋다. "매기, 좀 진진해 질 수 없어? 중요한 일이란 말이야."
"미안해요." 매기는 손을 얌전하게 무릎에 얹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신의 새로운 태양에 대해 얘기해 봐요."
"단 하나의 태양이야. 이번엔 진짜라구. 그저 열중하고 있는 정도가 아니 라 난 그녀를 사랑한단 말이야"
핀의 목소리가 몹시 심각하게 울려서 매기는 속으로 놀랐다. 그녀는 지난 5년 동안 매일 아침 식탁에 함께 앉았던 남편의 잘생긴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언제나 실제 나이보다 어려 보였던 핀이 오늘은 그녀가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을 하고 있다. 여느 때의 장난기 어린 눈동자는 온데 간 데 없고 오히려 엄숙한 느낌마저 주고 있다.
"확실해요?" 매기는 천천히 물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으로 보건대 그녀의 물음은 불필요한 것 같다. 핀의 유머 감각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그것은 재미있다기보다는 왠지 애처로은 느낌이 더 강하다. "그렇고말고, 난 그녀 없이 못살아, 매기. 그녀 없이는 살고 싶지도 않고. 그녀가 내아이의 엄마이자 나의 아내가 되길 원한단 말이야"
그렇군, 드디어 진실의 순간이 온 거야. 웃기는 일이야. 진실한 사랑에 먼저 빠지는 사람은 핀이 아니라 내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매기는 로맨티시스트이자 감정이 풍부한 낙천가였다. 반면에 핀은 경제신문의 가십란에 오르내리며 <플레이보이>라는 이미지를 굳혀 온 냉소주의자다.
"오, 핀. 너무 잘됐어요." 매기는 빵부스러기가 널려진 식탁 위로 손을 뻗어 그의 손을 툭툭 쳤다. "그런데 누구예요? 내가 아는 사람? 당신이 특별히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는 몰랐어요... 당신은 지난주에도 세 명의 여자와 번갈아 가며 점심을 먹었잖아요."
"위장이지." 핀은 이를 드러내고 히죽 웃는다. "셋 다 사업상 만난 거야." 매기는 참을성 있게 머리를 뒤로 넘기고 등을 꼿꼿이 세웠다."위장? 왜 위장 같은 걸 할 필요가 있었죠?" 그녀의 보기 좋은 눈썹이 찌푸려진다.
"핀...설마 이미 결혼한 여자는 아니겠죠? 내게 다른 사람의 아내와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진 말아요." 매기가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그게 그렇게 충격적이오? 어쨌든 나도 다른 사람의 남편이잖아, 당신의 남편"
"우리는 다르잖아요." 매기는 참을성 있게 다시 물었다.
"결혼했어요? 나도 아는 사람인가요?"
"당신이 실제로 만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핀은 커피에 설탕을 한 스푼 더 넣었다. 매기는 놀란 나머지 그의 말을 흘려들을 뻔했다. 왜냐하면 핀은 절대로 커피에 설탕을 넣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예요, 핀?"
"당신도 그녀를 좋아하게 될 거야, 매기..."
"저도 그럴 거라고 확신해요." 매기는 흔쾌히 말했지만 속으로는 의심스러웠다. 그녀는 가장 부적당한 경쟁자를 마음속에 떠올려 보기 시작했다. 그녀와 핀은 항상 서로에게 솔직했다 그들과같은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정직이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된다. 핀의 갑작스런 얼버무림은 몹시 불긴한 조짐이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그가 아무에게나 자신을 바치도 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매기는 커리를 한 모금 마시곤 이맛살을 찌푸렸다. 커피에 설탕 한 스푼만 넣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녀의 손이 천천히 설탕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자 샘의 그림자가 부엌과 식당을 연결하는 유리문에 얼금얼금 비친다. 매기는 얼른 손을 뒤로 뺐다. 샘은 철저하게 건강은 돌보는 편이다. 그는 매기를 날씬하게 유지시키는 게 자신의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아파트 안에서 샘을 속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도대체 그녀가 누구예요?’ 매기는 쓰디쓴 커피를 한모금 더 홀짝였다. 핀은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분홍빛 실크 넥타이를 조금 풀었다. 그가 방금 뭐라고 했지? 로라? 로렐? 매기의 눈이 놀라움으로 휘둥그레진다. "맙소사, 핀. 로라 하딩과 사랑에 빠진건 아니겠죠? 그녀는 40살은 넘었을 거예요!"
"로라가 아니라 로리야"
"오, 정말 안심이 되는군요." 핀이 목소리를 가다듬은 동안 그녀는 커피 한 모금을 더 마셨다.
"로리 포츤"
"로리 포츤?" 매기는 방금 마신 커피가 목에 걸려 잠시 콜록거렸다.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로리 포츤이에요?"
핀은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매기는 그의 턱이 긴장하는 것을 보았다. 아무래도 그는 모든 반대를 물리칠 각오인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로리 포츤? 그 소녀를?"
"그녀는 소녀가 아니냐, 매기. 18살이란 말이야"
매기는 의심스럽다는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정말이에요? 아직도 학교에 다니잖아요?"
핀의 가무잡잡한 얼굴이 희미한 분홍빛으로 물드는 것을 보고 매기는 또한 번 충격을 받았다. 핀이 얼굴을 붉혀? "학교를 마치는 중이야" 그가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마지막 한 학기만 남았지. 정확히 두 달 후면 18살이 돼!"
"그래도 아직 어리잖아요, 핀. 난 믿을 수가 없어... 그녀는 한 달도 안 돼서 당신을 지겹게 만들 거예요."
"아니야" 핀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의 표정은 확신과 자신감으로 차 있었다. "난 여자들을 많이 알고 있어. 하지만 매기, 여태껏 내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한 여자는 없었어...이렇게 무기력하고...강력한 느낌을. 그런 여자는 한 사람이야, 매기. 난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알았지. 그런건 나이나 경험하곤 상관없는 거야. 우리는 서로에게 속한 사람들이야, 아주 간단한 일이지."
"간단하다고요?" 매기는 정말로 그러길 빌었다. 핀을 위해서도 그녀는 만사가 그렇게 쉽게 돌아갔으면 했다. "그녀도 당신처럼 느낀다고 장담할 수 있어요?"
"물론, 장담할 수 있지."
매기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세상 모든 여자들을 다 제쳐 두고, 핀, 당신은 니콜라스 포츤의 어린 딸과 사랑에 빠졌군요."
핀은 눈썹을 찌푸린 채 항의하듯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 그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지 않다고"
"당신에 비하면 어려요." 매기가 우울하게 말했다. "그녀 아버지는 아직 모르나 보죠?" 핀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진다.
"응, 우린 아직 무척 조심스럽게 행동하거든" "얼마 동안 사귄 거예요?"
"두 달 정도"
"오, 핀" 비밀로 할 필요가 있었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왠지 그녀는 핀에게 속은 것 같아 가슴이 쓰렸다.
"당신에게 말할 수 없었어, 매기. 난...처음엔 모든 게 너무나 새로워 진짜같이 느껴지지 않았거든. 내 행운을 믿을 수가 없었어" 그가 살짝 미소 지었다. "...당신에게 먼저 말하고 나서 그녀 아버지에게 가야잖아. 그리고 로리는 우리들 관계를 모르고 있어..."
그의 말은 지금껏 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핀은 연애사건을 벌여도 자신의 규칙에 따라 엄격하게 행동했다. 매기는 사랑이 그의 신조를 무너뜨릴 거라곤 생각도 못해봤다. 바람둥이긴 해도 핀은 매우 정돈된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당신이 결혼한 줄 모른다는 말예요? 핀, 어쩌면 그럴 수가!"
"아닌, 물론 그녀도 알고 있지." 그의 푸른 눈이 모욕감으로 번득인다.
"단지 그녀가 우리의 결혼 사유를 모른다는 거야. 난 그녀에게 우리가 남남이나 진배없다고 말했어. 그랬더니 믿더군...하지만 당신의 허락 없이 자세한 얘길 할 수 없었어. 그것뿐이야" 매기는 그의 목소리에 깔린 죄책감을 감지해 내고 눈을 가늘게 떴다.
"할 수 없었던 건가요, 아니면 혹시 그녀의 사랑을 시험해 보려고 그런 거예요? 당신이 정말로 그녀를 사랑한다면, 내가 이해해 주리라는 것도 알잖아요. 아니면 혹시 그녀의 사랑을 시험해 보려고 그런 거예요?" 핀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고, 매기는 자신이 옳았다는 걸 알았다. 매기는 불현듯 로리가 가여워졌다.
핀은 어깨를 으쓱이며 조용히 말했다. "로리가 얼마나 날 믿는지 알고 싶었어. 우리가 맺어지려면 믿음이 중요하다고 생각돼서. 우리 일이 매스컴에 알려지는 그 순간부터 우린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밖에 의지할 데가 없잖아..."
"나도 있잖아요." 매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핀의 얼굴에 안도감이 퍼져 간다.
"그녀가 아직 어려서, 매기. 처음엔 좀 불안하기도 했어. 하지만 곧 그녀가 어른이라는 걸 알게 됐지. 로리는 아무도 다치는 걸 원치 않아. 하지만 나랑 결혼하길 원해. 나 같은 바람둥이에겐 과분한 여자지. 그렇다고 그녀를 놓아 줄 순 없어. 닉 포츤이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난 그녀와 결혼할 거야"
"그는 싸우기에 힘든 상대예요." 매기는 한숨을 들이쉬었다. 니콜라스 포츤은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저돌적인 침략자다. 그는 매스컴을 마치 전염병처럼 피해 다닌다. 하지만 그가 도산위기에 빠진 여러 회사들을 인수해서 뉴질랜드 경제를 활성화시키는데 일조한 덕택으로 매스컴은 그를 놓아 주지 않았다. 매기도 그가 영국인이면 한때는 권투선수였다는 것, 그리고 결혼도 했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는 약 12년 전에 뉴질랜드로 이민 와 얼마 안 되는 돈과 재능으로 증권시장에서 재빨리 부를 축적했다. 수차례 증권투자에 성공한 그는 보석 제조업과 도매업에 손을 대 문자 그대로 "포츤'이라는 대기업을 이룩해 놓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자신의 어린 딸을 위해서라면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고 했다. 로리 포츤의 사진은 거의 매스컴에 실리지 않았다. 매기조차도 그녀를 본 적이 없을 정도다. 매기는 갑자기 로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무척 궁금해졌다.
"두 달 후면 그녀는 18살이 돼" 핀이 우울하게 말했다.
"닉 포츤의 허락 없이도 우린 결혼할 수 있다구."
"아빠가 축복해 주지 않는 결혼을 로리가 좋아할까요? 두 부녀는 무척사이가 좋다고 들었는데..."
"나도 알고 있어" 순간 핀은 무척 의기소침해진다. "그녀는 상관없다고 말했어, 날 사랑한다며. 하지만 그걸로 충분할까?" 그가 고뇌에 찬 목소리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도와줘, 매기?" 그것은 부탁이라기보다는 요구에 가까웠다. 그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매기가 기꺼이 도와줄 거라고 핀은 믿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래전에 그들은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화를 해야 한다는 건 알아.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이혼한다면 문제를 더 크게 만드는 거나 같아. 젠장, 왜 하필 지금 그녀를 만나게 됐을까?"
"우린 원래 계획대로 해야 돼요."
"무효화하자고?" 핀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건 안 돼. 난 우리가..."
"핀, 로리와 같이 의논하면 어떻겠어요? 그녀의 장래이기도 하니까요. 언제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요?"
"오늘밤은 어때?"
"오늘밤에 만나기로 했어요? 그녀가 가는 곳마다 경호원이나 보호자가 따라다닐 것 같은데"
"어디를 가나 거의 따라다니지." 핀이 히죽 웃었다. 그의 눈동자가 추억으로 부드럽게 빛나는 것을 본 매기는 이상하게도 가슴이 아렸다. 핀은 그녀에게 있어 최고로 좋은 친구였다. 지난 5년 동안 그에게 수많은 여자라 있었다는 것은 매기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에는 이런 씁쓸한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오늘밤 우린 완전한 타인이 만나는 것처럼 속일 수 있지." 핀은 신이 나서 계속 말했다. "포츤은 오늘밤 사카에서 칵테일파티를 열어, 새로운 보석 판매 라인을 개척하려고. 그리고 그곳엔 로리도 올 거야"
"물론 그녀의 아버지도 오겠죠." 매기가 빈정대듯 덧붙였다.
"그래. 그를 피할 수는 없겠지. 우리가 아무리 타인인 척 해도 알아채겠지. 하지만 나를 내쫓을 수는 없을 걸" 그의 투정어린 말투에 매기는 킬킬거렸고,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닉 포츤 근처에는 가지 말아요, 핀"
"그에게 가는 게 아니라 그의 딸에게 가는 거요."
"그렇군요." 매기는 다시 킬킬거렸다. "빌어먹을. 매기, 내가 왜 열등감을 느끼는 걸까? 나도 좋은 가문에다 젊고 부잔데. 닉만큼은 아니더라도 유능하고 존경받는 사업가란 말야. 물론 건강하고"
"그리고 당신은 결혼을 했죠. 그게 약점이에요. 닉 포츤은 지극히 보수적인 사람이에요, 핀"
"그래도 금욕주의자는 아냐. 여자도 있단 말이야"
"하지만 조심스럽게 행동하잖아요.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둘 다 독신이었구요. 그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경멸해요. 도덕성보다는 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신성한 결혼의 맹세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고 파트너를 바꾸는 사람들을..."
"그는 청교도처럼 보이지는 않던데" 아무래도 핀은 마음속에 공정치 못한 생각을 품은 것 같다. "사실은 그 반대로 보이던걸. 겉모습처럼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구. 내기해도 좋아. 그는 지옥에서 온 사자야"
"원래 바람둥이가 가장 엄한 아버지가 된다잖아요." 매기가 정곡을 찔렀다. "그리고 가장 질투심 많은 남편이기도 하고"
포츤이 딸에게 하는 것만큼이나 핀도 아내를 보호하고 소유하려할 게 틀림없다고 매기는 생각했다. "핀, 닉 포츤은 아직 마흔도 채 되지 않았어요. 말하자면 한창 나이라는 거죠. 자기 나이 또래의 누구보다도 건강하고 민첩할 거예요. 게다가 그는 대단한 부와 권력을 지니고 있어요. 여차하면 주저하지 앉고 자신의 힘을 사용할 거예요."
"나도 알아" 핀이 심약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미래 당신의 장인이 될 사람인데 좋은 점을 찾아보도록 해요. 그러는 게 로리에게도 좋을 것 같네요."
핀이 이를 보이며 싱긋 웃었다. 그는 결코 오랫동안 풀이 죽어 있는 타입은 아니다. "난 그의 딸을 좋아해. 여기서부터 시작하지, 뭐. 로리 같은 딸이 있을 정모녀 하나라도 좋은 점이 있겠지."
매기는 결국 구두 세일에 가지 못했다. 그녀는 계획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빴다. 계획을 세우는 것은 매기가 잘하는 것 중의 하나다. 핀과 함께 유쾌한 기분으로 그날 저녁 나이트클럽에 들어갈 때만 해도 그녀는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묘안을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 당도한 순간부터 사진 기자들이 두 사람에게 우르르 몰려와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핀과 매기는 대중 앞에 각자 다른 파트너를 대동하고 나타나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에 두 사람이 함께 나타난 것에 기자들은 무척 관심을 나타내 보였다. 그러나 여느 때처럼 두 사람은 그들의 질문을 묵살해버렸다.
매기는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받으면서도 아주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행동했다. 그녀는 미장원에서 손본 최신 유행의 머리형에 금색과 검은 색이 늘씬한 몸에 달라붙은 짧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드레스는 아몬드 빛 눈동자와 올리브 색 피부에 무척 잘 어울렸다. 샘의 엄격한 식사량조절로 그녀의 허리는 개미허리만큼 작았고 그에 비해 가슴은 남자들의 시선을 끌만큼 풍만하고 보기 좋았다. 그리고 손에는 어김없이 장갑을 끼고 있다. 장갑은 매기의 트레이드마크였다. 대중 앞에 나올 때면 그녀는 언제나 장갑을 끼고 나온다.
포츤의 봄 컬렉션은 유리곽 안에 진열되어 있었다. 좀 진부한 진열방식이군. 매기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보석들이 훌륭하다는 것은 인정해야만 했다. 매기가 마음에 드는 보석이 없자 요리조리 눈을 돌리고 있을 때 핀이 팔꿈치로 그녀를 쿡쿡 찔렀다.
"로리가 저기 있어." 로리는 이제 막 입구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매기는 호기심이 발동해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런, 별로 예쁜 편도 아니잖아! 매기는 내심 충격을 받았다. 로리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의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파란색 드레스에 감싸인 그녀의 모습은 무척 섬세해 보이면서도 소녀 같은 매력도 함께 갖추고 있다. 핀은 풍만하고 육감적인 여자를 좋아하는데 로리는 그런 타입이 아니었다. 매기는 놀란 눈으로 남편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런 얼빠진 얼굴은 하지 말아요, 달링. 지금은 게임을 시작할 시간이에요." 그녀는 거의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그녀를 아버지에게서 어떻게 떼 놓을 수 있나 궁리하는 게 더 나을 거예요." 로리의 팔을 잡고 있는 남자는 니콜라스 포츤이었다. 그는 딸과 아주 대조족인인상을 풍겼다. 키는 거의 6피트 가량 되어 보인다. 짧게 커트한 검은 머리카락에 단단한 어깨, 세련된 차림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척 야성적인 느낌을 풍긴다.
그의 얼굴은 무척 강한 선을 그리고 있었는데, 코는 아마도 여러 번 부러진 것 같다. 그의 강인한 인상은 눈동자 때문이었다.
이지적인 녹색 눈... 아니 회색, 아니면 개암색인가? 매기는 확실하게 구분할 수 없었다. 여하튼 그런 차갑고 딱딱한 느낌을 누그러뜨려 주는 건 그의 육감적인 입술과 길고 새카만 속눈썹뿐이다.
그는 파티에 참석한 다른 어떤 남자보다도 더 격식을 갖춘 차림을 하고 있었다. 흥, 여자가 부족해서 고생하지는 안겠군! 매기는 심술궂게 생각했다. 매기는 이상스런 전율이 그녀의 등뼈를 타고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제기랄, 그는 단지 한 사람의 남자일 뿐이야. 하지만 그녀도 그가 다른 <안전한> 남자들과는 틀리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니콜라스 포츤은 자신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자수성가한 백만장자였다.
핀은 매기와 로리를 기둥 뒤에서 만나게 했다. 몇 분 동안의 탐색전을 마치고 매기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핀, 우리에게 마식 것 좀 갖다 주시겠어요?" 매기는 그에게 빈 잔을 내밀었다. 핀은 불안하다는 듯 창백한 로리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로리도 결심한 듯 단호히 아직 반 정도는 차 있는 잔을 그에게 내밀었다. "전 오렌지 주스로 줘요, 고마워요." "으...응, 좋아" 그는 마지못해 자리를 떴다. 그러나 두 여자는 그의 등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참을성 있게 쳐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로리는 조심스럽게 기둥 주위를 힐끔힐끔 훑어보았다.
"괜찮아요, 내가 선 자리에선 당신의 아버지가 보여요. 그는 지금 어떤 수다쟁이 여자를 피하려고 애쓰는 중이군요." 매기가 궁금한 듯 물었다.
"아버지가 술을 못 마시게 하는 거예요?"
"가끔 마시는 건 상관하지 않으세요." 로리가 눈에 띄게 친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매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제 입맛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한다는 건 아니에요. 저 혼자서 결정해요."
"그렇군요, 하지만 어떤 일이나 어떤 것을 결정할 때는 경험이나 지식을 토대로 하는 게 제일 올바르다잖아요. 당신은 지금껏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아왔어요. 당신의 그 호화로운 상아탑 안에서 보면 핀이 매우 매력적으로 보일 거예요. 하지만 그는 당신을 권태에서 구해 줄 환상 속의 황자님이 아니에요. 그는 무지한 어린 소녀가 아니라 그와 동등한 한사람의 성숙한 여자를 원해요."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매기는 동정심이 느껴졌다. 로리 포츤은 생긴 그대로 순진한 소녀일 뿐이다. 불쌍한 핀. ‘미안해요, 매기’ 소녀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를 아직도 원하고 있다면 정말 유감스런 일이군요. 핀은 내게 결혼해 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나도 그와 결혼할 생각이구요."
한순간 매기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창백하고 섬세한 소녀의 얼굴을 보며 매기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나와 싸울 용의가 있다는 거예요?"
소녀는 작고 뾰족한 턱을 치켜 올렸다. "난 그를 위해 그의 생각과 싸울 거예요. 핀은 내가 보호받아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거든요. 하지만 난 보호 같은 건 필요 없어요. 핀을 사랑해요. 물론 그도 날 사랑하죠. 그와 결혼한 건 당신일지 모르겠지만 그는 내 사람이에요!"
"그의 다른 여자들도 당신과 같은 생각을 해요. 당신도 아다시피. 그는 여자들이..."
"그 여자들은 아무 의무가 없어요. 나 지나간 일인걸요. 지금부터 그는 나와 함께 가정을 꾸리고, 원하는 건 모두 얻게 될 거예요." 매기는 로리의 파란 눈 속에 번득이는 결의를 보았다.
"미안해요. 나도 핀처럼 고약한 사람이에요. 난 그저 판단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돼서 당신을 좀 테스트 해본 거예요. 우리의 결혼은 한 번도 진짜였던 적이 없거든요."
소녀의 푸른 눈에 안도감이 퍼져 나갔다.
"당신과 핀의 관계가 좀 더 진전되기 전에 당신이 우리들의 결혼에 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잠시만 좀 더 들어봐요." 로리가 입을 열려는 것을 본 매기가 제지시켰다. "당신이 그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어떤 일을 미리 알고 있으면 대비하기도 좋으니까 말하는 거예요. 나도 그가 당신 사람이라는 대엔 찬성해요. 하지만 그는 아직도.." 로리는 눈을 반짝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창백한 소녀에서 사랑스런 여자로의 변신이 눈에 보일 정도다. 그녀는 여전히 귀여웠지만 지금은 소녀가 아니라 매서움을 지닌 여자로 보였다.
"좋아요. 점심이나 같이 해요. 그러고 나서 저희 변호사에게 함께 가요. 우리 결혼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오, 로리, 핀이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나게 돼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당신이 옳아요. 다른 여자들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핀은 독신남성처럼 행동한 것뿐이에요. 실제로 그런 처지였으니까. 난 그가 무척 걱정되었어요. 유부남이라는 것 때문에 채이지나 않을까..." 매기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채곤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로리는 화를 내지 않았다.
"난 그를 차지 않았어요. 믿어도 좋아요. 물론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땐 절망했었죠...몇 주 동안 그를 만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가 없더군요. 내가 정말로 그를 사랑한다고 느낀 건 그때였어요. 그 몇 주 동안 나 많은 걸 배웠어요. 그런데 그가 편지를 보내왔어요...당신이 기꺼이 이혼해 줄 것이며, 이혼이 성립될 때까지 내게 접근하지 않겠다고...그래서..." 그녀가 멋 적은 듯 손을 펼쳐보였다. "...그렇지만 아직도 의심스럽긴 해요. 아버지는 결혼의 신성함에 관해 완고한 생각을 가지고 계시거든요. 게다가 난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았고..."
"구교도 신자예요? 이혼한 신교도랑 결혼하면 무슨 문제라도 생길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 매기가 물었다. 로리를 고개를 가로저었다. "학교에서 억지로 교육을 받긴 했지만 교리엔 찬성하지 않아요. 핀을 위해서라면 파문당해도 좋다고 생각해요."
"파문?" 매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로리는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계속 말했다. "이혼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네요. 하긴 당분간은 결혼할 수도 없으니까, 뭐. 하지만 18살이 되기만 하면 아버지도 어쩔 수 없을 거예요." 로리가 짓궂게 입을 벌리고 웃었다.
"해고나 시킬 테죠, 뭐"
"아버지를 위해 일하고 있어요?" 매기는 깜짝 놀랐다.
"포츤을 위해서예요. 아직은 수습기간이구요."
"정말?" 매기는 무척 감동을 받았다.
"수습시간을 끝까지 마칠 생각이에요. 포츤에서 일할 수 없다면 다른 회사에서라도 일은 알 거예요. 보석 디자인에 관심이 많거든요. 아버지가 작업실도 마련해 주셨어요. 지금까지는 별로 값나가지 않는 보석만 다뤘지만요. 난 금은 세공이 더 좋아요. 보석은 제 일부죠." 그녀는 손가락에 낀 반지들을 매기에게 보여줬다. 매기는 솔직히 부럽기까지 했다.
"난 한 번도 내 손으로 반지를 만들어 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어떤 게 좋은지는 알고 있지. 정말 굉장한데! 만약 포츤에서 쫓겨나거든 마크햄으로 오지 않을래요. 당신 자리를 마련해 줄게요."
마크햄은 마크햄 콜이 50년 전에 창설한 일루 특수 소매점이었으나, 지금은 핀이 경영하고 있는 <콜 앤 코>를 설립하는데 주춧돌이 되었다. 핀의 할아버지이자 회사의 창설자이신 마크햄 콜은 70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회사 경영에 많은 참여를 하고 있다.
"오, 아직은 팔아도 될 만큼 좋다고 생각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에게 목걸이 하나쯤은 만들어 줄 수 있어요."
"오우, 고마워요. 난..."
"로리?"
대화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매기는 니콜라스 포츤을 지켜본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그는 기둥 옆에 서서 두 여자를 의심스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다. 제발 핀이 우리를 구하겠다는 바보 같은 충동을 느끼지 말아야 할 텐데. 매기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닉 포츤이 먼저 입을 열었다.
"로리? 마이클 스티븐슨가 널 어머니께 소개시켜 주려고 기다리고 있단다."
순간 거의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로리의 몸이 뻣뻣하게 굳더니 스티븐스 가족을 향해 아는 체를 한다. 마이클은 로리의 나이 또래로 로리에게 있어 잘생긴, 매우 적당한 상대였다.
"난...네, 알았어요...가기 전에 화장실에, 화장실에 잠시 들러야겠어요." 로리는 매기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만나서 무척 즐거웠어요. 콜부인"
그녀는 총총히 걸어갔다. 딸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니콜라스 포츤은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와는 달리 몹시 억제된 위협적인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내 딸에게서 떨어지시오, 콜부인. 그리고 당신 남편의 잘생긴 얼굴이 박살나는 걸 원치 않는다면 남편 간수 좀 잘하시오!"
<2>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마음속은 무척 혼란스러웠지만 매기는 차가운 경멸조로 말했다. 그는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잘 모르시겠다면, 콜 부인, 다시 한 번 말하겠소. 로리에게 접근하지 마시오. 그 아이는 아직 어린데다 마음도 약해요. 당신이 상대하는 닳아빠진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틀리오."
"그래도 어른이 되는 것을 막을 순 없을걸요." 매기는 거만하게 내뱉었다. "그리고 우린 아주 순수한 대화를 했을 뿐이에요. 그녀의 보석이 멋져서 칭찬한 것..."
"당신에 관한 소문을 듣자니, 콜 부인, <아주 순수한> 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던데."
그의 조소에 매기의 눈이 분노로 번득였다.
"뭐 묻은 개가 흙 묻은 개 나무란다더니, 당신 소문 역시 순수라는 말을 들먹일 처지가 아니던 데요!"
"사실이오. 하지만 당신처럼 과시하지는 않소. 적어도 사생활은 지키고 싶으니까. 그리고 딸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아버지에게 있지. 그걸 소홀히 할 생각은 없소...물론 자립심은 키워 줘야겠지만...당신은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오, 콜 부인. 로리는 사람의 겉모습에 얼마나 속기 쉬운 지를 아직 모른단 말이오."
"오, 당신은 딸에게 냉소와 불신을 가르칠 생각인가 보죠?" 매기는 자신이 엉뚱한 트집을 잡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바로 그녀 자신이 로리에게 비슷한 발언을 하지 않았던가...핀에 관해서.
"그게 아니오. 난 로리에게 인간 사회의 규율이 올바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해주고 싶은 뿐이오. 그것이 없다면 무질서와 탐욕, 방종이 인간성을 완전히 말살시킬 거요. 자제와 자긍심이야말로 사회를 조화롭게 하고 행복한 삶을 만드는 거요. 물론 당신에겐 쇠귀에 경 읽기겠지만"
니콜라스 포츤은 아직도 자신의 딸이 어리고 세상물정을 모른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그러나 매기의 생각은 달랐다. 로리는 그가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지 않았다. 겉모습은 아버지와 닮지 않았는지 몰라도 로리의 얼굴 밑에는 아버지와 똑같은 강철 같은 의지가 숨어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녀도 아버지 못지않게 원하는 것은 뭐든지 손에 넣을 것이다. 로리의 그런 점을 핀도 알고 있을까? 매기는 그러길 바랐다. 그렇지 않다면 그도 니콜라스 포츤만큼이나 충격을 받을 테니까.
"당신 딸은 이제 성인이나 다름없어요. 만약 로리가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판달을 믿지 못한다거나 아직도 사회윤리에 관한 가치관이 형성되지 못했다면, 안됐지만 당신은 아버지로서 실패한 게 아닐까요?"
"이봐요, 콜부인, 당신은 결코 윤리나 가치관에 대해 설교할 자격이 없을 텐데..."
"사람은 누구나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어요. 비록 타락한 천사라 할지라도"
매기는 그의 젠체하는 말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닉이 조롱하듯 <콜 부인>이라고 부르지 말아주었음 싶었다. 그녀의 결혼이 매우 부정하다는 의미로 들렸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까지는 매우 좋은 느낌의 호칭이었는데!
"당신이 타락했다는 것은 받아들이겠소. 하지만 천사라는 것은 왠지 의심스러운걸!" 그가 이를 갈며 말했다.
"그럴 거예요. 천사는 대단히 지루한 사람에게나 어울리니까" 매기는 흥미 없다는 듯 길게 늘여서 천천히 말했다.
"청교도에게나 어울리겠죠." 그의 검은 눈이 치켜 올라갔다. 빛을 받은 그의 눈동자에 회색과 푸른색이 번갈아 조금씩 보였다. "그러니까 내가 청교도이란 말이오? 다시 생각해 보시오. 콜 부인, 생각이 있기라도 한다면" 지금까지 가슴이 크고 육감적인 여자들은 대체로 머리가 나쁘다는 식으로 매도되어 왔었다. 그런데 니콜라스 포츤이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화가 나는 걸까?
"어쩌면 당신은 죄인과 청교도 중간쯤 되겠죠." 그녀가 달콤하게 말했다.
"위선자라고나 할까... 짧은 내 머리로는 아무리 찾아도 이 단어밖에 생각이 안 나네요."
"누가 뭐라든 간에 적어도 위선자는 아니오." 그의 눈동자가 다시 은빛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나는 지금까지 명예롭게 살아왔고 그건 내 딸도 마찬가지요. 난 다른 이들이 맹세한 서약을 존중하오. 비록 그들 자신이 지키지 않는다고 해도"
"그게 무슨 뜻이죠?" 어리석은 질문을 할 정도로 매기는 화가 나 있었다
"당신이 쫓아다닐 사람이 나라면, 내 딸을 연막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뜻이오. 나는 솔직하게 접근하는 여자를 좋아하오."
"뭐라구요?" 매기는 그의 터무니없는 짐작에 너무 놀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물론 당신 제의는 따르지 않겠지만. 그리고 가끔씩 자제하는 것도 정신 건강에 좋다잖소."
"맙소사, 상상력 한번 뛰어나군요!" 매기는 간신히 속삭였다.
"오, 이런 콜 부인이 수줍어 할 줄도 아는군? 우리가 서로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은 잘 알 텐데, 별로 탐탁하지 않은 감정이긴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왜 그렇게 부지런히 서로를 피해 왔다고 생각하오?" 매기의 긴 속눈썹이 충격으로 깜빡거렸다. 그녀가 지금껏 느껴 온 감정을 그가 알아채다니 너무 끔찍한 일이었다. 그녀가 불편한 듯 살짝 몸을 움직이자 니콜라스 포츤이 웃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야. 딱딱한 그의 얼굴 밑에 이런 표정이 숨어 있다니!
매기는 도전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녀의 그런 행동이 새틴으로 감싸인 가슴을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했고, 니콜라스 포츤은 찬탄의 눈으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그의 눈길이 매기를 더욱 분통 터지게 했다.
"그만 좀 쳐다봐요!"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그건 좀 어렵겠는데" 그러면서 그는 시선을 그녀의 화난 얼굴로 옮겼다.
"당신은 게임을 좋아하겠지만, 콜 부인. 난 아니오. 난 현실주의자요. 피가 도는 다른 남자들처럼 나도 당신에게 선정적인 환상을 품긴 하지만, 당신과는 달리 난 욕망을 자제할 줄 아는 사람이오. 새로운 연인을 찾고 있다면 다른 곳에 가서 알아보라고 말해 주고 싶군. 당신 남편은 당신의 난잡함을 괘념치 않겠지만. 사실 그도 당신과 마찬가지인 것 같더군. 하지만 난 아니오. 당신이 결혼한 몸이 아니라면 또 모르지, 당신과 즐길지 어떨지. 그러나 난 정직이나 성실의 가치를 아는 여자를 더 좋아하오. 우리 사이의 끌림은 충족되지 못할 운명이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내 딸을 그냥 내버려 두시오. 로리와 알고 지내 봤자 아무 소용없을 거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포츤 씨" 그의 비난에 몹시 화가 난 매기가 신랄한 어조로 말했다. "전 남자에게서 육체적인 끌림 이상의 것을 원해요. 당신은 명함도 못 내밀죠. 그러니 혼자서 편집광적인 환상이나 즐기도록 하세요. 당신은 핀의 절반도 못 따라가요."
그의 눈썹이 의아하다는 듯 올라갔다. "이제야 남편 생각이 난 모양이군? 당신의 그 고매한 남편이 저쪽 방에서 예쁜 여자들과 킬킬대고 있는 걸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군."
하필 오늘 같은 날 그럴 게 뭐람. 아주 오랜만에 함께 파티에 나왔는데, 오늘 하루만 좀 참아주지. 매기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자 더욱 분통이 터졌다.
니콜라스 포츤은 다소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 당신도 알고 있겠지. 그게 당신들의 <개방된> 결혼의 한 단면이니까. 당신의 곱상하게 생긴 남편이 어느 날 밤 어두운 뒷골목에서 여자의 화난 남편이나, 오빠, 아니면 남자 친구에게 봉변을 당한다고 해도 난 놀라지 않을 거요." 그는 여자의 아버지에 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까 남편을 잘 간수하라던 노골적인 말은 로리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매기를 빈정대려고 한 말에 불과했다. 안심이 된 매기는 갑자기 대담해졌다.
"우리의 결혼이 어떻든 간에 잘 되어가고 있으니 걱정마세요. 당신이 무슨 소문을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우린 행복해요!"
"정말?" 그녀를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매기는 또다시 야릇한 흥분을 느꼈다. "남편이 노상 바람을 피우는데도 행복하다고?"
"그래요. 핀과 나는,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잘 이해하고 있어요."
"그러면 당신도 당신네 둘을 이해한다는 거요?" 그가 중얼거렸다. "그럼 무엇이 당신에게 자극을 찾게끔 만드는 거지? 당신의 텅 빈 마음을 채워 줄 어떤 것? 당신이 찾는 건 사랑이오?" 매기는 그의 목소리가 약간 달라진 걸 알았다. 맙소사... 이건...동정?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매기는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그의 연민을 원하지 않았다. 그의 연민을 원하지 않았다. 그의 이런 태도에 그녀 자신이 몹시 연약하고 부드러운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엽기도 하지." 그가 다시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당신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군. 이것이 당신이 갈망하는 거요, 로맨틱한 사랑의 꿈? 이 침대에서 저 침대로 하염없이 옮겨 다니다 보면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소? 난 로리가 당신처럼 되지 않길 바라오. 그 아이는 진정한 사랑을 할 자격이 있지. 약간의 경험이 필요하다고 자신을 내둘려서야 쓰겠소?"
그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겉모양은 어떤지 몰라도 무척이나 세심하고 자상한 아버지인 것 같다. 매기의 부모님은 그녀가 5살 때 스위스에서 돌아가셨다. 하지만 그들이 살아 있을 때도 매기는 부모님의 존재를 별로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무척이나 실망시켰다. 패트릭 도노반은 자신의 오랜 동업자이자 원수인 마크햄 콜과 경쟁하기 위해 창업한 무역회사인 <도노반 앤 코>를 자신의 외아들이 경영해 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마이클 도노반은 돈을 버는 일보다 쓰는 일에 관심이더 많았다. 그의 사치스런 이탈리아 태생의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패트릭은 지금도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건강이 날로 나빠지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해가 갈수록 사업에 열을 올렸지만 사랑하는 손녀에겐 언제나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매기가 부족한 게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했지만 그녀는 항상 뭔가 부족함을 느꼈다. 가정부와 가정교사, 그리고 말동무, 그들 모두 유능하긴 했지만 어린 소녀에게 필요한 가족끼리의 따뜻한 유대감을 느끼게 해줄 순 없었다.
매기는 할아버지를 무척 사랑했다. 무뚝뚝하고 권위적이기는 했지만, 그녀는 할아버지의 사랑과 애정을 갈구했다. 하지만 그가 둔감한 걸 누구 탓으로 돌리겠는가.
지난 5년 동안 패트릭이 매기에 대해 안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니콜라스 포츤은 몇 분 만에 꿰뚫어 보았다. 갑자기 그녀는 그가 두려워졌다. 매기는 빈정거리는 게 최대의 방어라고 생각했다. "지금 저의 상냥한 심성에 호소하시는 거예요." 이번엔 그녀가 비꼬았다. 회색과 푸른색이 섞인 그의 눈동자에서 연민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을 본 매기는 마음이 놓였다.
"그런 마음이 있기라도 한 거요?" 그가 낮게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녀가 신랄하게 물었다.
"내 생각엔..." 무슨 말을 하려다 생각을 바꿨는지 그의 목소리는 깊고 거칠어진다. "당신은 닳고 닳은 여자야. 아주 교활해" 그의 목소리는 몹시 분노에 찼다. 그녀의 눈은 휘둥그레졌고 한동안 그들은 서로 쳐다만 보았다. 매기는 그의 눈동자에 어린 굶주린 듯한 남성적인 호기심을 보았다. "로리에게 접근하지 마시오, 콜 부인. 그리고 우린 더 이상 마주치지 않는 게 현명할 것 같소. 우리는 이미..."
매기는 갑자기 명치끝이 찡하니 아려 오더니 아까 먹은 샴페인 때문인지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그녀는 한 가지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불안한 느낌. 그의 눈동자가 나타내고 있는 것과 똑같은 갈증이다. 매기로서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감정이었다.
"매기? 무슨 일이야?" 적의로 털을 곤두세운 핀이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불행하게도 목소리는 그녀가 의도한 대로 매끄럽게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아주 불안정한 여자의 속삼임 같다. 니콜라스 포츤의 단호한 눈길이 핀에게로 옮겨 가기 전 아주 잠깐 만족스런 빛을 띠었다.
"부인과 잠시 ...담소를 나눴을 뿐이오."
니콜라스 포츤이 잔잔히 미소를 지었다. 당황스럽게도 매기는 몇 분 전에 자신의 몸이 그랬던 것처럼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핀이 생소한 듯 그녀의 홍조 띤 뺨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럼, 이제 다른 사람과...담소를 나누시지. 매기와 난 이제 떠나야 되겠소." 핀이 거만하게 말하고 나서 매기의 팔꿈치를 잡고 보호하듯 그에게로 잡아 당겼다
매기는 소유권은 나타내는 핀의 행동에 몹시 놀랐다. 핀이 도대체 무슨 연기를 하는 거지, 권위적인 남편?
"유감이군요." 니콜라스 포츤이 중얼거렸다. 그는 까만 레이스 장갑을 낀 매기의 자유로운 한 손을 잡고 그녀의 손가락 마디에 입을 맞추었다. "다시 만날 때 까지...매기" 그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친근하게 말했다.
"아주 오래 기다려야 할 거요." 핀이 내뱉듯 말하곤 매기를 자기 몸 쪽으로 바짝 잡아당기자 그녀의 손이 닉 포츤의 단단한 손바닥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내 아내에게서 떨어지시오, 포츤. 할 말이 있으면 내게 하시오."
닉이 위협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매우 아름다운 아내를 가졌소, 콜"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게다가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 활동적인 아내를 말이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누군가 당신 아내를 빼앗아 갈지도 모르니"
그는 비꼬듯 목례를 하고 핀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뒤로 한 채 멀어져 갔다.
"무슨 일이야?" 핀이 물었다.
"아무것도, 그저 조금 흥분한 것뿐이에요. 그게 다예요." 매기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로리와 얘길 하는데 와서 로리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거만한 돼지 같으니" 핀이 투덜거렸다. "로리에 대한 당신 생각은 어때?" 그가 매기를 돌아보더니 이맛살을 찌푸렸다. "정말로 그게 다야? 언뜻 보니 둘이 무척 가까이 서서..."
"뭐예요. 심문?" 매기가 꺼림칙한 투로 물었다. "그리고 아까 당신, 너무 대들 듯 행동했어요. 가급적이면 그와 잘 지내려고 노력해야..."
"당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맘에 안 들어. 그에게 가까이 가지 마, 매기. 그는 로리와 내가 다룰 테니까. 이건 로리와 나의 싸움이야. 당신이 깊이 개입되는 걸 원치 않아"
"핀, 당신 지금 포츤처럼 말하고 있어요." 매기가 메마른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 비슷한 점이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해봤다.
지금껏 핀의 인생에는 싸워서 얻어야 할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닉 포츤이 지금 즐기고 있는 모든 것은 싸워서 쟁취한 것이다. "질투심 많은 남편 역할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는 걸 알고 있어요? 당신이 아직도 날 소유하고 있다면, 로리와 사랑에 빠졌다는 걸 그가 어떻게 믿겠어요?" 잘 재단된 크림색 실크 수트에 감싸인 핀의 어깨가 들썩였다. "이런. 빌어먹을...하지만 매기, 그가 당신에게 접근한 건 나 때문이잖아. 그는 일말의 양심도 없이 사람을 이용한다구. 나 때문에 당신이 다치는 건 정말 싫어"
"핀?" 불유쾌한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그건 단지 연기였을 뿐이죠, 그렇죠? 내 말은 당신이 진짜로 질투를 느꼈냐 하는 거죠." 핀이 콧김을 내뿜으며 씩씩거렸다. 그러고 나서 빙긋 웃었다. "솔직히 맞아, 질투가 났어. 당신이 아니라 포츤에게. 그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그의 영향력 안에 두고 있잖아. 그런 그가 당신마저 데려갈 것 같아서"
매기는 안도감 섞인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말아요. 난 다 큰 어른이에요, 핀. 그리고 당신도 알다시피 난 세련된 남자를 좋아한다구요."
"음, 그게 바로 내가 걱정하는 점이야." 핀이 재미있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세련된 남자들은 한 번도 당신을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게 한 적이 없거든...당신이 소녀였을 때조차도. 몇 년 동안 시시한 데이트만 해서 혹시 안전에 대해 틀린 생각을 갖게 된 건 아니오, 매기? 지금 당신의 평판에 대해 심각하게 걱정해 주는 사람은 있소? 우리들의 결혼으로 인해 당신이 입은 피해를 알고나 있어? 사람들은 더 이상 당신을 순진하게 보지 않는다고, 매기. 나와 이혼한다고 해서 당신을 보호하지 않으리라는 생각하지 마. 나처럼 진실한 사람을 찾을 때까지 당신은 내 책임이니까. 그 후에 그 남자에게 보호권을 넘겨주지, 뭐"
"고마워요, 핀. 하지만 당신 혼자서 두 여자를 보호할 수 있겠어요?" 매기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우리가 결혼하기 전까지 당신은 내 인생에 없었어요. 그러니 헤어지더라도 혼자 잘할 수 있어요. 그전처럼.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럴 거예요, 당신이 두 여자를 거느리고 있다구요. 그건 로리나 나에게도 공정치 못한 일이에요. 당신에 대한 평판이 급속도로 좋아지는 한이 있더라도"
핀은 껄껄 웃었고, 그들은 화제를 바꿨다. 사실. 매기는 핀과 이혼하고 다시 독신으로 되돌아가는 게 조금 불안했다. 아무도 그들의 화려한 결혼이 우스꽝스런 광대극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선 안 외었다...그들의 두 할아버지가 남은 여생을 평화롭게 보내시려면.
다음 날, 토머스 리치는 오클랜드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세 사람과 마주 앉아 있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회사에서 잠시 빠져나온 로리는 몹시 두려운 표정으로 콜 결혼의 복잡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 동안 핀과 매기는 토머스가 내민 서류들을 침울하게 훑어보고 있었다.
"사실은 무척 단순한 겁니다." 토머스가 빈틈없는 태도로 말했다. 그는 지난 반세기 동안 자신의 직업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예의 그 딱딱한 옷을 입고 있었다.
콜 가와 마크햄 가가 서로 심하게 반목하고 있다는 걸 잘 알던 그에게 핀과 매기가 일을 의논하러 왔을 때는 무척 놀랐었다. 그는 패트릭 도노반과 마크햄 콜이 손주들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고 끈질기게 뇌물공세와 협박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털끝만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시에서 가장 권력있는 두 사람이 그의 코앞에서 책상을 쾅쾅 내리치는 것을 내심 즐겼는지도 모른다. 토머스는 오랜 관습대로 그의 아들 손자와 함께 서류를 작성했다.
"가문간의 불화와 관련된 일이군요." 로리가 말했다. "하지만 핀은 어떻게 시작된 일인지 말해 주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토머스가 말했다.
"조세핀이 관련됐다는 추측도 있긴 합니다. 패트릭 도노반의 아내지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고문에 불과합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여러 해 동안 동업자로 잘 지내 오다 패트릭과 마크햄 콜이 마침내 하루는 격렬하게 다퉜다는 겁니다. 그리곤 그때 한창 장사가 잘되고 있던 가게의 소유권 소송에서 핀의 할아버지가 이겼지요. 그는 <패트릭 마크햄>이라는 가게 이름을 <마크햄>으로 고쳤습니다. 도노반은 파산했죠. 하지만 몇 해 뒤 그도 간신히 <도노반>이라는 가게를 <마크햄> 바로 아래 동네에 세웠지요. 그때부터 해가 갈수록 경쟁이 격렬해졌습니다." 토머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서로를 속속들이 증오하고 있지요. 그런 경쟁심이 그들을 거부로 만들긴 했지만 결국 두 회사의 이익 추구를 저해하는 요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핀의 아버지가 <콜 앤 코> 사를 경영하는 동안은 마크햄도 꽤 자제하는 편이었죠. 그러다 아들이 40대 초반에 심장마비로 죽자 마크햄은 다시 경영에 참가했어요. 그때부터 그는 아무도 믿지 않았죠. 심지어 패트릭이 불법적인 사업을 한다고 떠들어 댔어요. 핀이 할아버지를 말리려다 두 사람이 크게 다투기도 했답니다. 한편 패트릭은 줄곧 혼자서 회사를 운영해 왔어요...매기의 아버지는 매기보다 사업적인 두뇌가 없었거든요." 매기는 불쾌하지 않은 체했다. "무엇보다 안 된 건 두 할아버지가 원한 게 기업 왕국이 아니라 자기 아들들이 사업을 이어받길 바랐던 거죠. 그런데 저의 할머니는 아이를 낳다 돌아가셨고 핀의 할머니도 병으로 일찍 세상을 뜨셨어요. 서로 이기겠다는 터무니없는 망상에 사로잡힌 두 분은 재혼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어요. 자식들이 더 있었더라면 그분들의 지독한 증오심도 좀 누그러졌을지도 모르는데...알다시피 저의 할아버지는 76살의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하루 종일 일하신다구요! 심각한 호흡장애가 있는데도 말예요." 매기가 한숨을 쉬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게 할아버지의 좌우명이에요...그것이 당신을 무덤으로 인도할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5년 전엔 거의 돌아가실 뻔했지요." 토머스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죽음이 거의 두 분의 목전까지 닥쳤지요. 그들의 회사도 마찬가지였고, 두 분 중 한사람이 상대방 회사를 몰래 선매 입찰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어요. 마크햄은 심장에 문제를 일으켰고, 패트릭은 산소 호흡기를 써야할 정도로 심각했죠. 단지 헛소문이었을 뿐인데. 죽음에 대한 암시때문인지 두 분은 전보다 더욱 맹렬해졌어요. 죽기 전에 상대방을 쓰러뜨리려는 것처럼 보였죠. 그들은 문자 그대로 파산 직전까지 갔어요. 아무도 그들을 멈추게 할 수 없었죠."
"우리를 제외하곤" 매기가 웃었다. " 콜과 도노반 왕국의 유일한 상속자들이 영웅처럼 나타났죠!"
"할아버지들이 그들의 방식대로 했다면 상속받을 게 아무것도 없었겠지만" 로리가 말괄량이처럼 낄낄거렸다. 그녀는 이야기의 흐름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요. 난 응석받이 꼬마였죠. 가난하게 살고 있진 않았어요. 어려서부터 상속자로서 필요한 교육을 받았거든요. 패트릭의 완고함 때문에 모든 걸 물거품으로 만들 순 없었죠."
매기는 할아버지의 개인 보좌관에게서 온 전화를 받은 후에 느낀 차가운 불안의 폭풍을 회상했다. 그는 할아버지가 계속 이런 식으로 회사를 인수할 경우 머지않아 파산할 테니 도와달라는 전화를 했었다. 사람들은 패트릭의 완고한 생각을 돌릴 사람은 그가 사랑하는 손녀딸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매기는 자신도 이제 더 이상 할아버지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감지해 내고 자신의 유일하고도 진실한 친구에게 달려갔다, 핀에게로.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마지막 학기를 마치는 중이었다. 매기가 그를 찾아 영국으로 날아왔을 때 핀도 이미 회사가 흔들리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나도 마찬가지 생각이었지." 핀이 말했다. "할아버지의 빌어먹을 자존심 때문에 회사를 망하게 내버려 둘 순 없었어. 매기와 난 너무 화가 나서 그들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을 정도였어!"
"그래서 매기에게 청혼했군요. 너무 로맨틱해요."
"그렇지 않아요. 가문간의 불화를 종식시킬 수 있는 가장 실용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매기가 말했다. "그리고 사실 핀이 청혼한 게 아니에요. 내가 했죠!"
"그녀가 내게 청혼했어." 핀이 이를 드러내며 히죽거렸다. 매기는 미국의 네바다 주로 날아가 며칠 머물렀어, 거주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러고 나서 우린 결혼했지."
"르노에서, 세계에서 가장 이혼을 많이 하는 곳에서 결혼했죠." 매기가 그때를 떠올리며 웃었다. 그땐 아주 대단한 모험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물론 우리가 돌아왔을 땐 난리가 났지...난 임신한 척했어요. 얼마 동안이라도 두 분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두 분 계신 데서 입덧 연기를 멋지게 해냈죠." 핀과 매기가 킬킬거렸다.
"그래도 워낙 두 분 다 의심이 많아 처음 1년 동안은 무척 불안했어요. 특히 내가 유산한 척했을 때 더했죠. 하지만 핀과 내가 함께 견뎌내는 모습을 보시더니 두 분다 잔소리를 그쳤어요. 핀과 내가 파리에서 만나 한눈에 서로 사랑에 빠졌다는 말을 아주 철썩 같이 믿으시더라구요."
"어릴 때부터 서로 알고 지냈다고 말했다면 별로 믿으시지 않으셨을 거예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이란 폭풍 같은 사랑뿐이지. 만약 매기와 내가 남매처럼 지냈다는 걸 아시는 날엔 또 한바탕 난리가 날 거요, 아마" 핀이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띤 채 말했다.
그들은 어렸을 때 <우연히>공원에서 만났다. 물론 각자의 유모와 함께. 운 좋게도 두 유모가 같은 공원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 후 마음씨 좋은 고용인들의 도움으로 그들은 간신히 비밀스런 우정을 키워 나갔다. 십대가 되어서도 두 사람의 우정은 지속되었지만 남자와 여자의 관계로 발전하진 못했다. 둘 다 매력적인 사람들인데도 그들은 서로에게 육체적으로 끌려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이런 연유로 핀과 매기의 계약결혼이 완벽하게 이행된 것이다.
"그런데...이혼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로리가 핵심을 찔렀다.
"그러니까...문제가 좀 있어요." 매기가 울적하게 말했다. "우린 서류상으로 결혼한 적이 없어요. 변호사 입회하에 모든 걸 구두 약속했죠. 우리가 계약을 무효화하면 마크햄과 패트릭은 우리의 결혼이 가짜였다는 걸 알게 돼요. 우리가 한 짓을 알게 되면 두 분 다 몹시 자존심이 상하실거예요. 가장 지독한 배신을 안겨 드리는 거죠. 두 분은 아직도 화해하지 않으셨어요. 지금도 만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거려요. 요즘은 덜하지만"
"그럼, 그분들이 돌아가실 때까지 힘들다는 건가요?" 로리가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사실 이렇게 결혼이 길게 지속될 줄은 몰랐어요. 그때는 두 분의 건강이 매우 위태로운 상태여서 몇 년 만 결혼 한 채로 있으면 할아버지들은 돌아가실테고, 장례식 후에 무효화시키면 된다고 생각했죠." 매기는 입을 다물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도 우습게도 그들은 아프고 나더니 더욱 건강에 주의를 하더군." 핀이 시선을 로리에게서 매기에게로 옮겼다.
"오, 내게 청혼했을 때와 똑같은 눈빛인데..." 핀의 푸른 눈동자가 춤을 추었다. "여러분 조용히, 매기가 묘안이 떠올랐대요."
"아니에요." 매기가 울적하게 말했다. "아직은 아니에요. 하지만 곧 묘안이 떠오를 거예요. 그 동안 토머스가 서류를 정리를 해줄 거예요."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소?" 핀이 일어서더니 로리 곁에 섰다. "급하게 일을 처리하고 싶진 않지만 로리를 너무 기다리게 할까 봐 그럽니다."
"글쎄요. 이혼이 금방 성립되진 않아요. 아시다시피. 그리고 이 나라에선 안 됩니다." 토머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여기선 결혼도 할 수 없습니다. 일을 빨리 처리하고 싶으시면 르노에 가셔야 합니다."
"오랜 고향이지." 매기가 웃었다. "로리도 함께 가요. 한꺼번에 해치워 버립시다. 이혼과 재혼을!"
로리의 눈동자에 잠시 불꽃이 번득이더니 금세 사라졌다. "왜 그래야 되는지 모르겠군요."
"맞아" 핀이 끼어들었다. "난 로리와 진짜 결혼하길 바라오. 들러리와 오렌지 꽃. 그녀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지. 등기소 한구석에서 그녀와 결혼하긴 싫어. 난 그녀와 결혼하는 게 무척 자랑스럽거든"
"농담이었어요." 매기가 뉘우치는 기색으로 로리에게 말했다.
"알아요." 로리가 미소 지었다. 그 후 한 시간 동안 토머스와 함께 기본적은 재산을 나눠 가지는 데 대한 의논을 했다. 매기가 아파트를 가진다는 데는 쉽게 동의를 했으나 샘 이스트의 서비스를 누가 받을 것인가 하는데서 의견충돌이 생겼다. 핀은 남자 고용인과 매기를 함께 살게 할 수 없다며 반대했고. 매기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함께 살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자 얌전히 앉아 있던 로리가 그 문제는 샘이 결정하도록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핀과 매기는 마지못해 타협안을 받아들였고, 곧 그들의 유머 감각은 다시 되돌아왔다. 토머스가 오늘은 이쯤 하자고 선언하자, 그들은 모두 홀가분한 마음으로 사무실을 나왔다.
오는 주말에 핀과 로리는 웨이크 섬에 있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각자 초대받도록 손을 썼다. 그들은 처음 만난 사람들처럼 행동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않도록 무척 조심스러워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마침내 둘이서 재미있는 주말을 보내겠지.
주말에 다른 계획이 있는 매기는 핀과 로리가 잘되길 진심으로 빌었다. 핀과 로리가 자기들 몫인 행복을 찾지 못한다면 그건 내 잘못이야. 애당초 할아버지들의 행동을 막기 위해 꾸민 이 위대한 계략은 그녀 생각이었다. 핀은 앞뒤 가리지 않고 매기에게 동조한 것뿐이다.
지금 매기에게 필요한 건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 위한 약간의 평온이었다. 핀이 웨이브에서 돌아오면, 그에게 새롭고 근사한 계획을 선물로 주고 싶었다.
< 3 >
"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군, 콜부인" 온 몸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감상하고 있던 매기는 위협하는 듯한 낮은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오, 난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충고만 받아들이죠. 포츤씨" 선글라스를 잘 썼다는 생각을 하며 매기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까지 온 걸 보니 당신은 친구가 매우 많은가 보군" 그가 비꼬듯이 말했다. "하긴 당신이 모르는 사람이 있을라구!"
"당신이 있잖아요." 그녀가 달콤하게 말했다. "당신은 마치 물에서 나온 생선처럼 이곳에 어울리지 않아요. 확실히 당신에겐 별로 재미없는 곳이겠죠?" 남편의 걱정스런 전화를 받은 매기는 전날 밤 헬리콥터로 이곳으로 날아왔다. 그런데 마치 숨어서 지켜 본 것처럼 니콜라스 포츤이 아침부터 그녀 앞에 나타났다.
"그렇소, 사실 이런 파티가 내 기호에 맞는다고 할 순 없소." 그는 절벽 위에 위치한 강낭콩 모양의 커다란 풀 주위에 널브러져 있는 반라의 사람들을 지루한 듯 훑어보았다. 바위를 타고 조그만 내려가면 깨끗하고 멋진 해변이 있는데 별장 주인은 왜 저토록 커다랗고 인공적인 풀장을 만들어 놓았을까 하고 매기는 생각했다.
"그런데 왜 오셨어요?" 핀과 로리가 멋진 주말을 보내려 하는데 왜 그 기회를 없애려 하냐구요?
"로리 혼자 오는 게 마음에 걸려서" 그의 푸른 눈이 다시 그녀의 검은 안경에 비친다.
매기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헌터 가의 사람들은 매우 존경받는 분들이에여..."
"확실히 그렇긴 하오. 나도 헌터 가와는 오랫동안 사업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손님까지 믿을 만하다고는 장담 못하지만" 거의 벗은 듯한 비키니 차림의 붉은 머리 여자가 닉의 주위를 끌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날카로운 어투가 약간 무디어진다. 손가락 부분이 없는 하얀 레이스 장갑에 얌전한 무늬 비키니와 그에 어울리는 얇은 사롱을 입은 매기는 희미한 분노를 느꼈다.
"믿으셔도 좋을 거예요." 그녀는 내뱉듯이 말했다.
풀 바에 버티고 서 있는 구릿빛 젊은 남자에게 도발적인 시선은 던지며 매기가 자신을 과시하기 시작하자, 그녀의 토라진 행동이 재미있다는 듯 닉은 붉은 머리에게서 매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전 11시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벌써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어쩌면 딸에 대한 티콜라스 포츤의 걱정이 옳았는지 모른다. 핀은 파티를 무척 좋아한다. 그러나 그건 그가 피상적인 자극을 추구해서가 아니라 쾌활하고 화려한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 물론 다른 이들은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그는 사교를 위해 항상 술잔을 들고 있지만 매기와 바텐더만이 그 속에 보드카나 진이 아닌 소다수가 들어 있다는 걸 알고 있을 뿐이다.
"질투할 필요 없소, 매기. 저 여자도 멋진 육체를 가지긴 했지만, 난 당신이 더 자극적이라 느끼니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닉의 따스하고 관능적인 목소리가 보석 전시회 때 그가 그녀의 손에 키스한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닉이 갑자기 친절하게 구는 데는 필시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매기는 핀을 찾으려고 자동적으로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핀은 눈에 띄지 않는다. 매기가 니콜라스의 조의를 딴 데로 돌리기로 한 약속을 완수하길 바라며 지금쯤 로리와 핀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던 매기는 니콜라스가 다가와 선글라스를 벗기자 뛰듯이 놀랐다. "질투하는 게 아니에요." 그녀가 당황한 듯 눈을 깜박였다. "난 수영을 하러 왔어요. 남자와 시시덕거리려고 온 게 아니에요. 그리고 편하고 좋아서 선글라스를 써요. 그러니 돌려주시겠어요?"
"사람들과 얘기할 땐 그 사람의 눈을 쳐다보는 걸 좋아하오. 특히 상대가 여자인 경우는 더욱 더 말이오." 그는 선글라스를 접어 자신의 셔츠 주머니에 접어 넣었다. 짧은 소매의 흰 셔츠 아래도 그의 두터운 팔 근육과 가늘고 검은 털이 드러나 있었다. 햇볕에 그은 얼굴과 목, 그리고 팔이 흰 셔츠와 무척 대조적으로 보인다.
"왜죠?" 매기는 그의 남성 우월적인 발언에 기분이 상했다. "눈을 보면 그 여자가 거짓말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내 생각엔 남자들이 훨씬 더 정직하지 못한...."
"누가 거짓말을 한다고 했소? 내 말 뜻은 단지 대체로 여자가 남자보다 눈으로 더 많은 걸 표현한다는 것뿐이오. 말보다 더 섬세한 어떤 것을 눈으로 보여 준다는 거요." 그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의 눈은 혀보다 더 많은 걸 내게 말해 줄 거요. 매기, 당신이 내개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무척 궁금한데?"
"그건 유명 디자이너의 선글라스라 무척 비싸요. 잃어버리거나 망가지는 걸 원치 않아요."
그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아름다운 호라키만이 내려다보이는 낮은 돌별에 기대섰다. 시원한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화창한 토요일 아침이다. 바다에는 어부와 요트맨들이 벌써 나와 있었다.
"당신도 알겠지만, 유명상표가 아니라도 품질 좋고 값싼 제품은 얼마든지 있소."
"고맙군요, 돈을 절약하고 싶으면 회계사를 찾아가겠어요. 하지만 내가 갖고 싶었던 건 지금 당신이 갖고 있는 바로 그 선글라스예요. 그래서 샀죠. 자, 그러니 이제 돌려주시겠어요?"
"넣어 놓을 데도 없잖소?" 그의 시선이 매기의 사롱 위로 미끄러져 갔다.
"그러니 내가 갖고 있도록 하겠소. 난 주머니가 있으니까 헤어질 때 돌려주리다."
"이혼할 때 재산 양도하는 소리처럼 들리는군요." 매기가 불평하듯 말했다.
"난 이혼을 좋다고 생각하진 않소. 그리고 재산 양도라는 것도 말만 다를 뿐이지 착취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뿐이라오."
" 그 말은 당신이 홀아비라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매기가 대담하게 말했다. 핀은 로리에게서 많은 얘기를 들었는데 그것은 모두가 현재 아니면 그들의 미래에 대해서였다. 로리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핀이 말하길, 로리는 자신의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소, 내 아내는 죽었소."
그의 씁쓸한 대꾸에 매기는 잠시 망설이다가 짧게 물었다.
"당신 부인...아니면 전부인?"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오, 콜부인"
"나도 그러고 싶어요, 그런데 당신이 날 내버려 두지 않잖아요." 매기의 키는 닉의 가슴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푸른빛이 도는 그의 회색 눈을 마주 보았다.
"당신은 계속 내게 질문과 모욕을 가했어요. 니콜라스" 그녀는 닉이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처럼 일부러 그의 이름을 강조해서 발음했다. "당신은 틀림없이 어머니의 눈동자를 이어받았을 거예요...왜냐하면 당신의 두 눈동자는 표정이 아주 풍부하거든요, 남자치고는 말이에요. 당신은 아내에 대한 어떤 기억도 간직하고 싶지 않은 것 같군요. 만약 부인이 살아 있다면 여전히 결혼한 채로 있었을까요?"
매기는 한순간 그가 발을 돌려 떠날 것이란 생각을 했다. 또한 그러길 바랐다. 그런데 그가 여전히 미동도 않고 있자 그녀의 눈 속에 살짝 승리의 빛이 번득였다.
"아니오. 그렇지 않았을 거요. 약물에 취해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그녀는 이미 이혼 소송을 제기한 상태였소.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지. 그리고 당신보다 더 닳고 닳은 여자였소.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다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였지. 그녀와 결혼했을 때 난 권투선수였소. 사납고 거친 난폭한 건달. 그녀는 그런 나를 마치 재주부리는 곰처럼 자신의 세련된 친구들에게 과시했지. 그들은 종종 내 시합에 와선 그들끼리 내기를 걸곤 했소. 돈, 자동차, 마약, 색스...그 당시 유행하는 새로운 것이면 뭐든지 걸었지. 델리아는 빈민굴에 흥미를 잃자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 버렸소." 매기는 몹시 충격을 받았다.
"그럼, 로리는...?" 그의 얼굴이 더욱 시니컬하게 변한다. 매기는 숨 막히는 고통을 느꼈다.
"로리는 한 번도 그녀를 보지 못했소, 델리아는 자식도 버렸거든... 로리가 태어난 지 두 달 정도 되었을 때요. 사실 그녀가 아이를 낙태시키려 했을 때 내가 그녀에게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지 않았더라면 로리는 결코 세상 빛을 보지 못했을 거요. 그래서 그녀는 내게 복수를 했소. 로리를 이혼 조건으로 내세우더군...이혼해 주면 아이를 주겠다고, 거기다 내가 가진 모든 돈을 요구했지." 닉이 위협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돈이 필요 없었소. 돈 많은 마녀였거든. 그녀는 단지 내게 고통을 주고 싶었을 뿐이오."
"유감스런 일이군요." 그것은 또 다른 <돈 많은 마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형편없이 무기력한 말이었다.
"그렇지 않소. 그 일로 인해 인간 본성에 관한 값진 교훈을 얻었소. 부와 특권에 관계된 것치고 썩지 않은 것은 없다는. 델리아가 그 모델이었지. 하지만 그녀에겐 모든 게 재미였소. 아내가 되는 것도 그녀에겐 하나의 놀이였지. 짧은 기간이었지만 엄마가 된 것도 마찬가지고. 로리가 그녀처럼 살아선 안 되도. 난 딸에게 돈으로 할 수 있는 최상의 교육을 시켰소. 하지만 로리도 나머지는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달콤한 케이크가 먹고 싶을 땐 그녀 자신이 만들어야만 하오. 다른 누군가가 대신 해주겠지 하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 말이오."
"그건 좀 가혹하지 않아요?" 그녀는 패트릭과 마크햄을 독재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남자는 그들을 그림자로 만들어 버릴 만큼 독선적인 사람이다. "마치 엄마의 죗값을 로리가 대신 치르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나를 악마로 만드는군." 그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로리는 독립적인 여자가 될 것이라 자부하오. 혼자서도 원하는 만큼의 부를 충분이 축적하리라 믿소. 그 아이는 하찮은 사기꾼들의 목표가 되지 않을 거요. 한 푼도 없는..."
"델리가의 아버지가 당신을 그런 식으로 매도했던 모양이군요?" 갑자기 닉의 턱이 당겨지는 것을 본 매기는 자신이 정곡을 찌른 것을 알았다. "그래서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고 싶어서...아버지라는 입장을 이용해 로리를 좌지우지하는군요. 당신 방식대로 로리가 살길 바란다면, 그녀는 아버지 뜻대로만 살아야겠군요."
"그런 게 아니오!" 그가 강한 악센트로 힘주어 말했다. "로리는 자신의 일에 대단히 열심이오."
"당신이 그녀에게 해줄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걸 바로 당신 사업채를 그대로 물려주는 거죠. 보석 디자이너로서 최고의 자리에 앉고자 한다면 그녀 자신의 힘으로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요? 만약 로리가 아들이었다면 문제는 달랐겠죠?" 매기의 마음속에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있던 응어리였다. 그렇다. 그녀에겐 사업적인 센스가 있었지만 패트릭은 한 번도 그녀를 <도노반 앤 코>의 경영자로 키울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할아버지 몰래 경영자로서 필요한 교육을 받았다. 물론 나중에 할아버지가 아시곤 가벼운 말다툼을 하긴 했다. 할아버지는 매기가 여자라는 이유로 사업에 얽매이는 걸 싫어했다.
"아들이었다 해도 달라질 건 없을 거요!"
"오, 그래요?" 매기가 야유했다.
"그렇소?" 그도 차갑게 야유조로 말한다.
서로 쏘아보고 있는 두 사람 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흘렀다. "그런데 왜 당신은 독립적이고 자신의 일에 열심인 딸을 자꾸 정략 결혼시키려 한다는 느낌이 들까요?"
닉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가 그런 말을 했소?"
그는 로리가 말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매기는 머리를 쳐들었다. "당신이 로리를 마이클 스티븐스에게 떠밀다시피 할 때 난 그 자리에 있었어요. 기억나시죠? 마이클의 유산이 아마 수백만 불은 호가할 거라고 믿어요."
"스티븐스 가와는 친구요, 그것뿐이오. 그리고 그때 로리는 여주인으로서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있었소. 당신은 로리를 잘 알지도 못하잖소. 콜부인. 그 애를 변호하는데 지나치게 열성적이군. 항상 그렇게 발끈하길 좋아하는 거요, 아니면 로리를 당신의 방탕한 생활에 끌어들이고 싶어서 그러는 거요?"
"오, 맙소사!" 매기는 너무 기가 막혀서 자리를 뜨고자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가 그녀의 팔뚝을 잡았다. 그의 손은 크고 두터웠으며 따뜻했다.
"도망치는 거요?" 그가 비웃었다. 매기는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데 그의 따뜻한 손의 온기가 그녀의 몸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가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 이런!
"내 몸에서 손을 때요!" 그녀가 명령하듯 말했다. 그리고 그녀 특유의 <당신이 뭐나 되는 줄 알아요?>라는 뜻의 눈길을 보냈다. 보통 남자들은 매기의 이런 시선을 받으면 주눅이 든다. 그러나 닉은 달랐다. 그가 싱긋 웃었다.
"한번 해 보시지."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명백한 도전이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 노려보았다. 매기는 그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둘 다 아는 사실이었다.
매기의 눈이 커졌다. 눈 화장을 안 한 매기의 눈은 아름다웠다. 아이처럼 검고 긴 속눈썹이 신비로운 갈색 눈동자를 더욱 신비롭게 보이게 했다. 그녀는 눈을 두 번 깜박거렸다. 작은 진주 같은 물방울이 그녀의 젖은 눈에서 굴러 떨어졌다. 닉은 그녀의 팔을 놓고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된 그녀의 그은 피부를 쳐다보았다.
"난...부인, 매기, 결코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가끔씩 내가 얼마나 힘이 센지 잊어버린다오..."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매기는 그에게서 떨어졌다. 마치 마술처럼 그녀의 눈물은 사라지고 미소가 퍼졌다. "당신의 구차한 사과를 받아들이겠어요, 포츤씨. 왜 풀에 들어가지 않으세여? 내가 보기에 당신은 열을 좀 식힐 필요가 있겠는데요!"
매기는 씩씩거리는 닉을 남겨 두고 콘크리트와 유리로 만든 하얀 집을 향해 냅다 달렸다. 대리석 바닥 위를 뛰며 신나게 커브를 돌던 매기는 서로의 눈동자만 보며 걸어오는 핀과 로리와 부딪쳤다. 매기는 팔짱을 낀 두 사람을 공포에 찬 눈으로 바라봤다.
"뭘 하고 있어요, 로리? 당신 아버지가 바로 저기 있어요." 매기가 손가락질을 했다. "몇 초 후면 이리로 올 거예요." 닉을 들쑤셔 놨으니 그도 분명 가만히 서서 당하진 않을 것이다.
"뭐가 잘못됐어? 얼굴이 사과처럼 빨간데" 마지못해 로리의 손을 놓으며 핀이 말했다.
"어떤 고약한 남자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 매기가 경멸조로 말했다.
"아빠 얘기를 하는 거예요?" 로리의 눈동자가 놀라움과 약간의 두려움으로 빛났다.
"아니에요. 물론 우린 그냥 얘기를 나눴을 뿐이야, 그게 다야." 매기가 급히 대꾸했다.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치켜 올리는 핀이 입을 열기도 전에 매기는 계속 말했다. "지난 번 우리가 얘기하는 걸 본 모양이에요."
"아빠는 의심하고 있어요, 난 알아요.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는데, 요즘은 속이지 않은 날이 없잖아요." 로리가 고통스런 표정을 지었다.
"잘 알고 있겠지만, 아빠는 처음부터 여리 올 생각이 없었어요. 이번 주말에 다른 계획이 있으셨거든요, 사업적인 미팅 간은거 말이에요. 아마도 헌터 가에 전화해서 파티에 누가 오느냐고 물어봤을 거예요, 여기 오기 전에 핀에게 경고할 시간이 없었어요."
"만일 그가 누군가를 의심한다면, 그건 바로 나예요." 매기가 위로하듯 말했다. "엘리스가 핀이 온다고 말했다면 틀림없이 나도 오리라 추측했을 거예요.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너무 걱정 말아요."
매기는 급히 핀의 등을 떠밀어 오던 길로 되돌려 보냈다. 그와 로리는 둘 다 테니스 복을 입고 있었는데, 로리의 뺨에 떠오른 홍조는 격한 테니스 시합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오, 사랑에 빠진 가엾은 젊은이들...
"가요...빨리, 핀..." 핀에게 손짓을 하고 나서 매기는 조금 큰 소리로 로리에게 스포츠 경기에 관한 얘기를 시작했다. 2초 후에 어김없이 닉이 나타나자 매기는 등줄기로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닉은 매기를 힐끗 쳐다보더니 유쾌하게 입을 열었다.
"아빠랑 같이 수영할래, 로리? 우린 둘 다 열을 좀 식힐 필요가 있는 것 같구나"
로리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띠었다. 매기가 얼른 끼어들었다.
"우린 테니스 시합을 하기로 했어요. 그렇지, 로리?"
"정말 좋은 생각이오." 닉이 예의바르게 말했다. "난 시합을 몹시 좋아한다오. 당신 남편을 찾아보는 게 어떻소. 콜부인, 넷이서 복식 시합이나 해 봅시다."
"핀은 테니스를 치지 않아..." 매기가 거칠게 입을 연 바로 그 순간 핀이 모습을 드러내며 약속시간을 정하는 걸 듣고만 있었다.
한 시간 후, 핀은 더욱 적의로 불타고 있었다. 로리가 여러 번 고의적인 실수를 범하여 나름대로 노력하긴 했지만 시합은 아주 당연한 것처럼 닉과 로리의 승리로 돌아갔다.
"맙소사, 마치 윔블던 경기를 하는 것 같더군" 핀이 딱딱거렸다. 핀과 매기는 샤워를 한 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 남자는 우릴 죽일 기세였어, 그건 테니스가 아냐, 전쟁이지! 그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우릴 이길 작정이었어." 핀이 계속 으르렁거렸다. "트럭같이 거대한 남자가 그렇게 민첩하게 움직일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사실 그는 로리가 필요 없었어, 누구의 도움 없이도 혼자 코트를 누비며 우릴 상대할 수 있었다구."
"장애물이 있어도 우릴 이겼겠죠. 난 로리가 항상 그렇게 형편없이 시합을 하는지 궁금해요." 매기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땀을 흘리는 정도가 아니라 땀으로 목욕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닉 포츤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즐기는 것 같았다. 그건 단순한 테니스 시합이 아니라 하나의 교훈 같았다. 닉 포츤이 게임을 하면 언제나 이긴다라는! 시합의 막바지에는 구경꾼들이 꽤 모여들었다. 그런데 지는 시합인데도 불구하고 매기는 여느 때와 달리 투지가 생기지 않는 자신이 무척 이상하게 느껴졌다. 젠장, 더 생각 말아야지, 단순한 시합일 뿐이었는걸.
"아마 몇 세트 더 졌더라면 그는 내게 더 친절한 눈빛을 보냈을지도 몰라" 핀은 계속 투덜거렸다. 요즘 그는 생각이 한 방행으로만 흐르는 모양이다. 매기는 가벼운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랬으면 그는 당신을 더욱 경멸했을 거예요." 그녀가 내뱉었다. "그는 이기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힘들게 이기는 것을 더 좋아해요. 인정해요, 핀. 테니스 코트에서 당신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해요. 내가 당신의 백핸드를 받쳐주지 못했다면 아마 스트레이트 세트로 졌을걸요."
"아마도 그랬겠지. 하지만 코트 밖에서 날 쉽게 요리하진 못할 걸" 핀이 호전적으로 말했다. 매기는 그녀가 핀에게 상처를 줬다는 것을 알았다. 잘생긴 외모 아래 핀은 로리에 대한 불안과 사랑의 고뇌를 숨기고 있었다. 그가 보답 받을 수 있을까? 로리는 핀이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정말로 핀을 사랑할까? 사랑에 눈이 먼 그가 진위를 가릴 수 있을까?
"물론 힘들어 하겠죠. 로리는 당신을 사랑하니까, 그레 당신의 히든카드죠. 설령 그가 처음부터 결혼을 반대한다 해도 손자들이 생기면 그도 마음이 바뀔 거예요!"
니콜라스 포츤이 할아버지가 된다는 생각은 그녀의 맥 빠진 기분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것은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다. 백발의 노신사가 무릎에 아이를 안고 어르는 모습이. 핀은 방 앞에 갈 때까지 계속 투덜거렸다.
매기는 검은 색과 흰색의 타일이 바둑돌처럼 깔려 있는 홀을 지나갔다. 원래 올 계획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늦게 도착했기 때문이지 매기는 핀의 방과 상당히 멀리 떨어진 방을 배정받았다.
점심 식탁에서 닉 포츤의 맞은편에 앉게 되자, 매기는 모든 유머 감각이 그만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테이블은 넓었고 가운데에 꽃도 놓여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닉의 사정거리 안에 있었다. 게다가 매기는 일 년 전쯤에 잠깐 데이트를 한 적이 있는 두 명의 젊은이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 앉았던 것이다.
보통 때 같으면 매기도 그들의 천진한 시시덕거림을 즐겼겠지만, 오늘은 그들의 모습이 자신을 단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라 테이블 저쪽에서 로리와 핀이 가끔씩 서로 은밀한 시선과 미소를 교환하는데 닉 포츤이 알아챌까봐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신은 여기 올 생각이 없었다는 뜻이오? 왜 마음을 바꿨소?" 사람들이 모두 식탁을 떠나 음식을 가지러 간 사이 닉이 다가왔다.
당신 때문이에요. 그녀는 그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도움을 요청하는 핀의 전화가 왔을 때 매기는 뜨거운 거품 목욕을 하고 있었다. 미친 듯한 핀의 구조 요청이 과장된 표현인 줄 매기는 알고 있었지만 그가 그녀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미 최대한으로 도와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매기는 얌전하게 눈을 내리깔면서 닉에게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했다. "왜긴요, 당신이 있으니까 왔죠. 닉, 달링" 그녀는 옆 사람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이 온다는데 어떻게 안 올 수 있어요?" 그녀의 과장된 미소와 수줍음을 불쾌하게 쳐다보는 대신 닉 포츤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아주 민첩하군. 매기, 달링" 그가 앵무새처럼 매기의 어조를 따라했다.
"오, 내 생각에 우린 지금 경쟁자인 것 같군요? 그녀의 왼쪽에 있는 바보가 농담을 했다. 마침 그들은 돼지 바비큐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얘기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매기는 민주적인 사람이야. 우리가 먹을 것도 남겨 두겠지." 이번엔 그녀의 오른쪽에 서 있는 저능아가 말했다.
"그렇게 먹다간 오천 평이 되는 것도 금방이겠는걸." 닉이 장난꾸러기처럼 말했다. 그의 시선은 매기의 접시 위에 떨어져 있었다.
매기는 포크를 놓고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녀는 가장 살찌는 음식들만 골라서 접시에 담았던 것이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음식물들을 쳐다보았다. "오, 이런. 샘이 날 죽이려 할 거야!"
"샘이 누구요?" 그녀의 목소리에 깃든 공포심에 호기심이 생긴 닉이 물었다.
"내 양심이에요." 그녀가 속삭였다. "그가 알면 앞으로 일주인은 빵하고 물만 먹고 살아야 될 거야. 하지만..." 우아하게 매기는 장갑 낀 한 손을 두근거리는 가슴에 얹었다. "...난 금방 격렬한 테니스 시합을 했어요, 그죠? 땀을 많이 흘렸으니 이 정도의 음식은 괜찮을 거야"
"아직 먹은 것도 아닌데 뭘 그래" 매기의 날씬한 허리를 짓궂게 곁눈질하며 오른쪽 저능아가 말했다
"샘이 누구요?" 닉이 다시 묻자 이번엔 왼쪽 바보가 대답했다.
"그 유명한 콜의 3인 동거에 대해 못 들어 봤소? 행운아 샘은 핀과 매기랑 함께 산다오."
"샘은 우리 집 요리사에요." 매기가 억누른 어조로 말했다.
"그것보다 더한 의미잖아요, 매기!" 왼쪽 바보의 누이동생이 말했다. 그녀는 항상 매기의 클래식한 이미지를 부러워해 왔다. 그녀가 지금 짓궂은 눈을 하고 닉에게 기대 서 있었다. "한번은 매기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샘은 그녀 결혼의 접착제라고. 그렇게 굉장한 사람이래요. 섹시한 샘, 그녀가 그렇게 부르더라구요! 당신은 무척 운이 좋아요, 매기. 두 명의 건장한 남자들을 거느리고 살다니. 어떻게 그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잘 지내는지 모르겠군요. 하긴 당신은 항상 남자들을 홀리는 데는 일가견이 있으니까요."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매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가벼운 농담조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매기가 심각하게 대답할 것이라곤 기대하지 않는다. 그것이 설령 모욕적인 언사였다 해도. 그녀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난 아주 어렸을 때부터 훈련이 되어 있었어요." 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닉에게 말했다. "5살 때부터 할아버지는 회사에서 장난감을 갖다 주셨어요. 날이 갈수록 남자 인형만 쌓여 갔죠. 왜냐하면 그 회사는 남자 인형 전문 회사였거든요. 그때부터 난 아주 자연스럽게 알았어요. 남자는 많을수록 더 재미있다는 걸요."
닉은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 알겠소. 당신 말은 장난감 인형에게서 남자를 장난감처럼 다루는 걸 배웠다는 거군?"
테이블에 모여 들었던 사람들의 호기심은 이제 사라졌다. 매기도 닉도 여전히 웃지 않고 있었다. 닉은 그녀가 웃음을 참다못해 킬킬거리기 시작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즐거운 웃음소리를 내며 드레스보다 짙은 색의 장갑 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매기의 갈색 눈동자는 닉의 말장난에 동자하는 빛으로 춤추고 있었다.
닉의 유머 감각으로 작은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매기를 향한 은밀한 승리의 미소였다. 매기는 그가 재치 있고 재미있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걸 원치 않았는데, 그런 그녀의 마음을 닉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 그가 어색해 하길 바라고 있었다. 닉은 이런 경박한 세계에 속할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가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게 아니라 이러한 세계에 속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딸을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매기에게는 지루함을 못 느끼게 해주는 존재였다.
닉은 여가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매기는 궁금했다. 결코 할아버지처럼 휴가를 갖지는 않을 것이다. 언재 여자들과 즐길까? 그의 청교도적인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여자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는 사무실에서 편리한 정사를 가지는 걸까? 아니면 사업 약속 시간에 낀 샌드위치 시간에?
매기는 자신이 아직도 그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에 얼굴을 붉혔다. 순간 그의 눈동자가 짙은 바다색으로 어두워졌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녀는 알고 싶지 않았다. 매기는 살찌는 음식이 가득 담긴 접시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닉에게서 눈을 돌렸다. 오, 안 돼. 난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 소유해 온 응석받이일지는 모르지만 바보는 아니야!
매기는 닉의 존재를 무시하리라 결심하고 식탁으로 돌아와 옆 사람들의 평범한 대화에 끼어들었다. 역시 식탁으로 돌아온 닉이 여전이 신경 쓰이게 했다. 그의 의도가 뭘까? 내게 서투른 십대 같은 어색한 느낌을 갖게 하려고? 매기는 태어나서 한 번도 서투르다거나 어색한 느낌을 가져 본적이 없었다. 그녀는 사교에 필요한 모든 매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빌어먹을, 성적인 매력 같은 건 옆에서 가르랑 거리는 금발 머리에게나 과시하라지. 그녀 같으면 먹혀들 거야. 하지만 난 아니라구. 매리는 뒤틀린 마음으로 생각했다.
점심식사 후 조용히 쉴 필요가 있다고 느낀 매기는 아직도 강렬한 햇살이 내리비치는 인적 없는 해변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실크처럼 부드럽고 따스한 모래 위에 엎드려 책을 읽었다. 수영하기엔 아직도 너무 차가운 바다였다. 풀의 수온은 수영하기에 알맞게 데워져 있었지만 매기는 발목이 묻히는 따뜻한 모래에 누워 있었다.
머리 위로 떠들고 노는 소리가 산들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하지만, 매기는 혼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좋았다. 난 숨은 게 아니야. 단지 쉽게 얻을 수 있는 작은 평화를 즐기는 것뿐이라고! 하지만 조만간 핀이 그녀를 방패막이로 필요로 할 건 불을 보듯 뻔했다. 여하튼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몹시 나른하고 평온한 기분이었다.
로리는 이제 자신에 관한 얘기를 쉽게 했다. 로리의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매기는 그녀가 좋아졌다. 로리는 호기심으로 자신의 정돈된 삶에 반항하는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무분별하게 핀의 침대에 뛰어들지도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로리가 지금처럼 깨끗한 눈으로 핀을 쳐다보지는 않을 테니까!
저녁식사 때 매기는 좌석이 재배치된 것을 보고 내심 안도감을 느꼈다. 그녀의 자리는 로리와 닉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매기 옆에 앉은 여자는 그녀의 패션쇼에 유용한 매기의 신선한 아이디어를 얻고자 벌써 여러 번이나 매기를 방문한 적이 있는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곧 패션계 동향에 대해 열띤 논쟁을 하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전시회에 관해 누군가가 매기에게 충고를 요청해 매기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걸 말해 주었다. 그러다가 문득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거의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녀를 둘러싼 일단의 숙녀들을 남겨 두고 매기는 기분 좋게 하품을 하며 침실로 향했다.
매기는 샤워를 한 후, 아름다운 푸른색 실크 잠옷을 입었다. 설마 핀과 로리가 밤중에 몰래 만나거나 하진 않겠지? 충동적으로 그녀는 실내복을 걸쳐 입고 어두운 복도로 나갔다. 핀의 방문을 노크했으나 반응이 없다. 매기는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봤다. 방은 비어 있다. 사실 그녀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침대를 쓴 흔적도 없었다. 그래도 매기는 잠시 기다려 보기로 했다.
매기는 핀을 설득해서 함께 떠날 생각이었다. 여기서 그들이 얻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닉 포츤에게 핀과 매기는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이미지만 심어줄 뿐이었다. 그녀는 닉이 선글라스를 돌려주지 않았다는 게 생각나서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그에게 달라고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녀는 닉 포츤에게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잠에서 깨나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그녀는 일어나 앉아 가벼운 목운동을 했다. 오, 핀, 어디 있는 거예요? 만약 로리의 방에 있다면 목을 비틀어 버릴 거야! 아니, 두 사람 다... 이런 위태로운 상황에서 그런 바보짓은 하지 않았겠지? 아무리 사랑에 눈이 멀었다 해도 결과를 생각지 않고 행동하지 않았을 거야.
매기는 자신의 침대로 돌아가 조금만 더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복도의 차가운 타일이 맨발에 돠닿았다. 떨면서 모퉁이를 도는 순간 그녀는 맞은편에서 오고 있던 사람과 세게 부딪쳤다. 힘찬 팔이 그녀의 팔을 파고 들었다. 그들은 잠시 균형을 잃고 흔들거렸다. 얼굴을 들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잠이 안 와서 부엌으로 뜨거운 우유 한 잔 마시러 가는 길이라고 말하지 마시오." 닉 포츤이 그녀를 놓아주며 빈정거리듯 중얼거렸다. 그는 매기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입술, 숱이 많은 흐트러진 검은 머리, 아기처럼 길고 새까만 속눈썹, 그리고 아직도 졸린 듯한 큰 눈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몰론 아니에요." 그녀가 조그맣게 소리 질렀다. 그는 아마 믿지 않을 거야,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해도. "내 방으로 돌아가는 중..."
바보같이! 매기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닉의 입술이 냉소로 일그러졌다.
"욕실에서 방으로 돌아가는 중이겠지, 물론..." 그는 각 방마다 욕실이 딸려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매기는 분노로 얼굴이 빨개졌다. 만약 닉도 그녀와 비슷한 차림을 하고 있었더라면 그녀도 비난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불행히도 그는 여전히 검은 디너 슈트를 입고 있었다. 타이도 풀어지고 셔츠의 첫 단추도 풀어져 있었지만.
"사실은 남편 침실에서 내 방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남편과 함께 있으려고 고양이처럼 몰래 다니는 거요?"
"몰래 다니지 않았어요." 놓은 천장으로 목소리가 우리자 목소리를 낮추려 노력하며 매기는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방을 따로 배정받았어요."
"당신들의 결혼은 매우 개방적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소. 그러니까,..남편과 꼬박 하룻밤을 함께 지냈다는 말이오? 당신들 두 사람에겐 무척 가혹한 날이었겠군."
닉의 눈동자가 왠지 매기를 망설이게 했다. 핀과 함께 있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알고 있을까? 그가 핀을 본 게 틀림없어...그런데 어디서?
"그래요, 난 그이 방에 있었어요." 매기는 그가 이중적인 의미를 알아채지 못하길 바라며 신중하게 말했다. 그러나 헛된 바람이었다!
"그가 방에 없었군. 매기? 그래서 지금 복도를 이렇게 뛰어다니는 거요?" 닉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가 손을 들어 매기의 턱을 살짝 어루만졌다.
매기는 그의 손을 쳐내고 싶었지만 가만히 서서 그의 손길을 참고 있었다.
"왜 핀이 그런 짓을 하게 내버려 두는 거요? 당신은 매조키스트인가? 남편이 또 다른 연애사건을 일으킬까 의심스러워 여기 온 거요? 당신이란 존재에 그가 양심의 가책이라도 받길 바라는 거요? 과연 그에게 양심이란 게 있기나 할 거 같소?"
"당신...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매기는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지는 느낌을 받으며 약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적어도 핀에 대한 닉의 생각은 매기에 대한 것보다 훨씬 훌륭했다.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자존심이 구겨져도 참는 걸 보면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걸 알 수 있소."
그의 손이 목으로 내려와 거칠게 뛰고 있는 그녀의 맥박을 찾았다. 그가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지자 매기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뭐가 잘못됐지, 매기? 내게는 말해도 되오."
잠시 동안 매기는 닉의 마술 같은 손길에 거의 넘어갈 뻔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그가 적이라는 것을 기억했다. 그녀는 움찔 뒤로 물러섰다. 그의 손가락은 떨어져 나가고 그녀는 눈을 떴다.
닉의 어두운 눈동자에 어린 갈증을 보고 그녀는 몹시 놀랐다. 매기는 그가 화가 났다는 걸 알았다. 내가 그의 부드러움에 쉽게 넘어가지 않아서 화가 난 걸까? 아니면 날 원했기 때문에 자책하는 걸까?
"잘못된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녀가 거칠게 부정했다.
닉은 넓은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순간 그의 슈트 칼라에 매달린 금발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매기는 숨을 들이쉬었다. 새벽 4시까지 이었던 곳이 바로 그 금발 머리의 침실이었어? 그런데도 내게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이거지!
매기는 오른손으로 머리카락을 집어 들고 그의 코앞에 갖다 댔다. "이건 욕실에서 주워 왔겠죠, 당신?" 그녀도 한껏 경멸조로 말했다.
"그 여자와 춤을 추었소."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녀는 몇 시간 전에 잠자리에 들었소."
"물론 마음껏 즐기고 난 뒤겠죠!" 증거를 멀리 내팽개치며 매기가 신랄하게 비꼬았다.
그녀는 얼른 그를 지나쳐 갔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다.
"마녀 같으니라고" 닉은 부드럽게, 그러나 거의 칭찬하는 어조로 말했다.
<4>
매기는 숨이 막히는 것을 느끼며 제트스키에서 내려와 부두에서 참을성 있게 차례를 기다린 젊은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이미 만에 부딪혀 오는 파도를 흠뻑 뒤집어쓰고 있었다. 매기는 해변으로 발을 한발 내디디며 일광욕 의자에 축 늘어져 있는 엘리스 헌터에게 방긋 웃어 주었다.
"당신 이웃들은 분명히 당신을 증오할 거야" 제트스키의 시끄러운 소리에 짜증이 난다는 듯한 몸짓을 해보이며 매기가 말했다. "여기 있는 것 모두, 그리고 헬리콥터도"
엘리스는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 이웃 중 어떤 사람은 우리보다 더 소음이 심한 특급 보트도 있던데 뭘"
매기는 수건을 깔아놓은 자신의 일광욕 의자를 향애 걸어갔다. 그 의자들은 엘리흐가 손님들의 편의를 위해 절별 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매기는 세련된 수영복에 잘 어울렸다. 검은색 장갑을 낀 손으로 잠수복의 지퍼를 내리려고 힘을 썼다. 헌터 가는 손님들이 입을 수 있는 크고 작은 수영복을 다양하게 갖춰 놓고 있었다. 하지만 매기가 제트스키를 타기로 마음먹고 갔을 때는 잠수복이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았는데 그게 그녀에게 너무 작았다. 입을 때도 고생했는데 지금은 더 줄어든 것 같다.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작은 신음소리를 냈다. 이로 오른손 장갑을 막 벗기 시작하는데 그녀 앞에 그림자가 하나 나타났다.
"자, 내가..."
"괜찮아요, 내가 할 수 있어요." 매기의 항의는 입에 문 장갑 때문에 웅얼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녀는 다시 한번 더 지퍼를 잡아 당겼으나 소용없었다. 그녀는 몇 분 동안 지퍼와 씨름을 했지만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상황이 점점 더 절망적으로 느껴졌을 때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고, 닉 포츤이 그녀의 손을 치웠다.
"내가 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그녀가 거칠게 말했다. 그러나 닉은 잠수복의 지퍼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당신이 할 수 있다는 건 나도 알아" 지퍼에 정신을 집중하며 그가 중얼거렸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썽이 된 지퍼를 쳐다보고 있었다. 매기는 얌전히 서서 그의 긴 속눈썹과 팔과 넓은 가슴에 난 털을 감탄하듯 바라보았다. 해별에는 잘생긴 남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닉은 그들 모두를 그림자처럼 느끼게 할 정도였다. 그의 몸은 균형 잡힌 조각품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남성적인 거친 외모에 동물적인 활력까지 흘러넘쳤다. 그는 얌전한 푸른색 수영복을 입고 있었는데, 짧은 삼각팬티 같은 수영복을 입은 어떤 남자보다도 매력적이다.
"이봐요, 귀찮게 굴지 말고..."
그의 손가락이 잠수복을 살짝 잡아 당겼다. "제발 좀 가만히 있어" 그의 가슴과 어깨 근육이 매기의 무기력한 저항을 저지시키느라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매기는 자신의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끼고, 그것은 닉 때문이 아니라 그의 모욕적인 발언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아!" 만족감 섞인 부드러운 탄성을 지르며 닉은 천천히 지퍼를 내리기 시작했다. 또 다른 곳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축축하고 단단히 죄어진 잠수복에서 해방된 기분은 말할 수 없이 상쾌했다. 매기는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었다. 닉이 잠깐 머뭇거렸다. 순간 그녀는 그와의 가까운 거리를 의식했다. 지퍼가 거의 그녀의 허리께까지 끌어 내려져 있었다. 매기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나머지는 내가 할게요."
닉은 마치 그녀의 허스키한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지퍼를 놓기 전에 잠시 작은 손잡이로 장난을 쳤다. 그가 가버릴 것이라 생각했다면 그건 매기의 오산이었다. 닉은 가만히 서서 매기가 지퍼를 끝까지 문제없이 잘 내리는지 보고 있었다. 그녀가 잠수복에서 팔을 빼내려고 고군분투하는 것을 무척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매기의 수영복은 얌전했지만 매우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착 달라붙은 잠수복에서 다리를 빼내면서 그녀는 닉의 짙은 바다빛 눈동자가 그녀의 몸을 구석구석 관찰하고 있는 것을 알고 분노로 얼굴을 붉혔다. 그는 특히 그녀의 가슴 움직임에 현혹된 것 같았다. 그녀는 몸을 숙여 비치 셔츠를 집어 들고 얼른 걸쳐 입었다. 단단해진 젖꼭지가 보이지 않게 셔츠를 매만지고 나서 뒤를 돌아보니 닉은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다. 그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그녀의 육체가 은근히 그의 눈길을 즐기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안됐군." 그가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매기는 일광욕 의자에 앉아 장갑을 끼는 데 정신을 집중시켰다.
"수영할 때고 장갑을 끼는 거요? 수영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안 되잖소?" 그녀 옆의 비어있는 의자에 앉으며 닉이 말했다.
"장갑은 내 트레이드마크예요, 난 어디서든 장갑을 끼죠." 햇빛이 눈을 찔러 매기는 모자를 눌러 썼다. 그는 아직도 선글라스를 돌려주지 않았다. 매기는 사람들이 모두 그녀의 장갑을 단순히 멋 내기 위한 것이라고 믿는 걸 무척 흐뭇하게 생각해 왔다.
"어디서든?" 그의 목소리가 재미있다는 듯한 어조를 띄고 있다. "침대에서도?"
매기는 그에게 경멸하는 눈길을 보내곤 농담조로 말했다. 아주 추운 날에는 가끔 그런다고. 그녀의 가족을 빼고는 몇 안 되는 사람만이 그녀의 왼손에 있는 커다란 흉터를 보았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모두, 물론 의사만 빼고 언제나 같은 반응을 보였다. 동정 아니면 불쾌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에게 언제쯤 상처를 보여 줄까? 그는 아마도 내 흉터가 자시 피부에 스치는 걸 좋아하지 않을 거야. 이제 그만!" 매기는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는 닉의 가슴에서 눈을 뗐다.
"숙녀는 결코 상처 없는 예쁜 손을 더럽히면 안 된다고 어머니가 당신에게 가르친 것 같군. 아마 트레이드마크라기보다는 일종의 강박관념 같구려."
상처 없는 이라고? 알지도 못하면서! 매기는 웃었다. "당신 말대로 강박관념일 수도 있어요. 하니만 이건 패션센스예요. 사실 수영복에 장갑을 끼는 건 아주 나쁜 에티켓이죠, 장갑을 낀 채 마시거나 먹는 것도 물론 불편해요. 하지만 요즘 누가 그런 걸 상관이나 한대요? 당신 같은 사람이나 하지 우리 어머니로 말할 것 같으면 인생을 철저하게 즐긴 사람이죠. 난 이해해요. 내가 다섯 살 때 어머니는 자신이 살아온 방식대로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도 마찬가지구요."
"이해한다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아무것도 없으면서?"
매기는 그게 무슨 대수냐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부모님은 대단한 여행가였어요, 사진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난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랐을 거예요. 어머니는 이탈리아 사람이었죠. 그녀는 유럽의 기후와 라이프 스타일을 좋아했어요. 아기가 있다고 해서 제트족 여행 일정을 바꿀 순 없었죠. 그래서 난 여기에 할아버지와 함께 남은 거죠."
"원망스럽지 않소?" 닉이 자신의 가슴근육을 쓰다듬으며 움직이게 하는 모습이 눈 끝으로 보였지만 그녀는 시선을 바다에 고정시켰다.
"전혀. 패디는 할아버지는 완전히 사업에만 몰두하셨지만 한 번도 날 귀찮은 짐짝처럼 취급하진 않으셨어요. 내가 필요로 할 때면 언제나 내 곁에 있었어요." 즐거운 기억으로 그녀의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 "사실 난 굉장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난 아주 거칠고 다루기 힘든 아이였죠. 유모를 항상 거의 미치게 만들었으니까요, 전에는 그랬죠..." 자신도 모르게 매기는 왼손을 문질렀다. 닉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의 호기심은 채워지지 않았다. 매기가 정신을 차리고 방금 한 자신의 행동을 그녀 특유의 가벼운 몸짓인 것처럼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패디가 방종은 엄격한 규율로 다뤄야 한다고 결정하기 전까지는요. 패디는 한번 마음먹으면 아무도 못 말려요. 처음엔 학교를 증오했어요. 내 작은 손가락으로 가정교사들을 마음대로 부려먹은 뒤라서 그랬던가 봐요. 하지만 곧 적응을 했죠. 내 또래들과 사귀는 게 즐거웠어요. 그전까지 난 하루 종일 어른들에게 둘러싸여 지냈거든요. 불쌍한 학교 선생님들은 숙녀처럼 취급하면 내가 얌전해진다는 걸 알아냈죠. 그 후론 계속 어른 취급을 하더군요.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난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며 언제나 승리감을 맛보며 살았어요. 그래도 할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더 좋아해요. 소용없는 후회나 과거를 원망하기보다는 인생을 즐기는 편이 낫죠.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가 내 머리에 끼어드는 걸 원치 않아요."
"당신 말은 그러니까, 당신 인생에는 아이를 위한 자리가 없다는 뜻이오?"
닉이 교묘한 질문을 했다.
"그런 뜻은 아니에요. 하지만 좋은 경험은 아닐 것 같군요."
닉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그게 당신이 생각하는 모성애요? 또 다른 경험이.."
"내가 만약 아이를 갖지 않는다면, 여자로서의 모든 경험을 한 게 아니라는 견지에서라면 당신 말이 맞아요." 매기가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난 결혼했다고 해서 반드시 아이를 가져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쉽게 가질 수는 없는 거잖아요. 특히..."
"특히 부모들의 결혼이 흔들리고 있을 때는?" 그녀가 머뭇거리자 닉이 그녀의 나머지 말을 추측해 냈다.
매기는 닉의 말에 항의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핀과 로리의 일만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그녀는 불만스럽게 말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도 그런 기준에 의해 아이를 낳지 않는 건 아니에요. 당신은 로리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아니오." 그는 바다를 둘러보다 로리가 탄 제트스키를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가끔은 최대의 실수가 최대의 업적이 되기도 하는 거요."
"당신은 로리를 그렇게 여기나요? 당신의 업적으로?" 매기가 호전적으로 말했다.
"맙소사, 오늘은 정말로 신경이 날카로운 모양이군" 그가 중얼거렸다. "오늘 아침 침대에서 넘어졌소? 아니면 아침을 못 먹었소? 아니, 다른 사람의 침대였던 모양이군."
매기는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목소리부터 가다듬었다. 아무래도 쇳소리가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감시 어떻게? 우린 어젯밤에..."
"당신은 어젯밤에 확실히 지금보다 두 배는 더 가냘픈 인상을 주더군, 실망한 여자는 다른 걸고 그 아픔을 달래긴 하지."
"핀에게서 돌아온 뒤 다른 사람과 잤다고 생각된다면..."
"그런 뜻이 아니오. 하지만 자신이 여전히 매력적인 여자라는 걸 확인하고 싶어 할 때도 있으니까"
"내가 어떤지는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알아요." 매기가 으르렁거렸다. "당신이나 다른 남자들이 날 매력적이라 생각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그래도 난 실망 안 해요. 그건 당신의 지나치게 선정적인 상상일 뿐이죠."
"상상이 아니오, 내가 내 침실로 가기 전에 당신 남편이 누군가와 함께 해변으로 사라지는 걸 봤단 말이오." 닉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 어젯밤 그녀가 핀과 함께 있었다는 걸 거짓말로 여기는 게 당연하지! 매기는 제트스키를 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남편을 찾아냈다. 그의 옆에 타고 있는 사람이 로리라는 사실을 알고 그녀는 깜짝 놀랐다.
"미안하오, 매기" 그녀가 충격 받은 이유를 오해한 닉은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놀랄 건 없잖소. 당신도 예상했던 일 아니오? 이번에야말로 당신들이 결혼한 이유를 말할 기회요!"
"당신이 무슨 결혼상담소 직원이라도 되나요? 결혼에 실패했으니 자격 없기는 당신도 마찬가지 아네요? 그러니 내 결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지 말아요!"
그녀는 흥분한 나머지 얼굴이 상기되었으나 닉은 여전히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난 결혼한 사람들의 파괴적인 게임을 잘 알아. 고통의 시작은 아주 단순한 거요. 순진해서 그런 거지." 매기의 신비스런 얼굴을 주시하는 그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당신에게 순진하다는 말은 좀 어울리지 않지만, 당신도 겉보기와는 달리 차가운 여자는 아니지. 부모님들이 당신을 그들의 세계 밖으로 내몬 사실에 대해 당신이 원망스럽게 생각한다는 걸 알고 있소. 당신이 남편감으로 표준 이하의 사람을 선택한 이유는 그가 당신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지. 그런데 요즘 들어 당신은 뭔가 충분하지 않다는 걸 느꼈어. 콜이 과연 당신의 빈 가슴을 채워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 거지. 그래서 다신은 초조하고 신경질적으로 변한 거라구."
돌연 침묵이 찾아들었다. 매기는 그 통찰력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이토록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남자를 어떻게 속일 수 있을까? 다행히 잘못된 결론을 내리긴 했지만. 세상에, 그는 나를 얼마나 잘 읽고 있는가!
"핀은 표준 이하의 사람이 아니에요!" 그녀는 차갑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핀도 무척 힘들게 사는 사람이에요. 핀의 할아버지는 결정을 내릴 때마다 꼭 번복을 하세요. 그러니 당신에게 없는 이점을 핀이 가졌다고 해서 그를 비난하지 말아요."
"아주 마음이 넓군" 그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닉은 매기를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고, 매기는 그의 시선이 무척 거북했다. 그래도 내색하지 않으려고 모자를 푹 눌러쓰곤 다리를 편안하게 쭉 뻗었다.
"콜과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매우 어렸었지? 그때도 지금처럼 아름아운 고집불통이었다면 양가의 반대에 부딪혔을 때 낙담하기보다는 오히려 용기를 얻었겠지..."
매기는 그가 매기의 결혼에 관한 소문을 들었다는 사실에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녀를 놀라게 한건 닉이 은연중에 그녀를 칭찬했다는 사실이다. 아름다운 고집불통이라고...그것은 <닳고 닳은>과 <제멋대로>에서 한걸음 발전한 말이다.
"그때 내가 너무 어려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는 뜻이라면 틀렸어요. 무슨 일이 생겨도 난 결코 핀과 결혼한 걸 후회하진 않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말에 정신을 지중할 수 없었다. 로리와 핀이 부두에 내려 해변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사실 때문에 닉의 얼굴이 의혹으로 굳어진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여기 계속 앉아 있으면 또다시 네 명이 어울리게 되겠지? 그런 건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그녀는 햇빛을 너무 많이 쬐었다고 중얼거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매기를 발견한 로리가 그녀를 못 가게 잡았다. 아마도 매기가 떠나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닉은 의자에 누워 매기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매기는 물이나 한 바가지 부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듯 핀을 난폭하게 밀어 버렸다.
이번 주말에 진전된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매기에게 있어선 산 너머 산이었다. 파티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닉도 돌연 태도가 바뀌어 이젠 누구보다도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매기는 닉이 왜 갑자기 변했는지 궁금했다. 정보를 얻으려고? 나와 핀에 관해서? 만일 그렇다면 헛수고 일 것이다. 왜냐하면 매기와 핀은 그들의 비밀들조차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껏 핀과 매기의 소문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매기는 닉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로리와 핀을 어느 정도 떨어져 있게 하느라 거의 녹초가 될 지경이었다. 그런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행히도 아무런 협조도 받지 못했다. 닉은 로리를 그의 눈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고, 핀은 핀대로 로리에게서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나마 그들이 서로에게 예의바르게 대하기라도 했으면 매기의 피가 바싹바싹 마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평범한 대화를 하면서도 그들은 끊임없이 서로에 대한 적의를 표출했다. 이런, 제기랄. 핀은 자신이 사태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걸 알고나 있는 걸까?
그들의 긴장을 조금이라도 해소시켜 보려고, 매기는 내키진 않았지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적당한 남자와 계속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조차 그녀의 생각과는 다른 결과를 초래했다.
"당신 지금 찰스와 뭐하는 거야?" 핀이 그녀의 귀에 대고 크게 소리 질렀다. "저 놈은 이미 당신에게 푹 빠졌다구. 아마 당신과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할 거요."
매기는 핀이 말해 주기 전 까지 같이 낄낄거리던 남자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찰스는 잘생긴 미남이긴 했지만 매우 유치했다. "핀, 그러는 당신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요?" 그녀가 화난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만간 사람들은 당신이 왜 갑자기 그렇게 호전적인지 궁금해 할 거구요. 왜 가만있지 못해요?"
핀이 짧게 웃었다. "그가 하면 나도 할 거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오, 맙소사! 마치 여덟 살짜리처럼 말하는군요. 행동도 그렇고, 당신이 지금 로리를 비참하게 만들고 있는 게 안보여요?"
매기가 정곡을 찔렀다. 핀의 잘생긴 얼굴이 로리를 돌아보며 보기 흉하게 일그러진다. 그때 갑자기 나타난 사람 때문에 매기는 숨이 목에 걸릴 정도로 깜짝 놀랐다.
"부부 싸움이오?" 코끼리 사냥총을 찬 밀렵꾼처럼 닉이 뻔뻔스럽게 물었다.
"당신의 터무니없는 관심은 다른 사람에게나 가서 발휘하시죠, 포츤씨? 매우 지겨워하는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띄던데요." 그녀가 오만하게 말했다.
"내가 당신을 괴롭혔소?" 그가 중얼거렸다. "난 당신의 감상적인 그룹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을 성가시게 하지 않는 남자는 나뿐이라고 말이오. 당신 남편이 초조해하는 것도 당연하오. 콜을 질투하게 만들려는 거요?"
그러니까 닉은 핀과 매기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그녀는 안도감이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오, 입 닥쳐요!" 매기는 닉을 피해 정자로 나갔다. 시원한 바람을 쐬고 있는데 찰스 스티븐슨이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매기는 그의 열띤 눈을 외면하며 예의바르게 물리쳤다. 사실 그녀는 찰스를 상대해 줄 기분이 아니었다. 그가 자꾸 치근덕거렸지만 매기는 바보같이 굴지 말라고 말하는 대신 그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정도로 단호하지만 정중하게 거절했다. 찰스는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남자였다. 그녀는 정말로 화가 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매기, 아무도 보는 사람 없으니까 연극할 필요 없어. 전에는 남편 눈치 안 봤잖아! 아무도 모른다구. 당신도 원하잖아. 무슨 말인지 알지?"
찰스는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을 생각인가....해가 지려면 아직도 한 시간은 족히 남았는데! 매기는 유치한 낭만적인 공상이 그의 욕정을 불러일으킨 것이라고 생각했다.
"안 돼, 찰스... 당신이 오해한 거야, 찰스!" 매기는 몸을 비틀어 뜨거운 그의 입술을 피하려고 얼굴을 돌렸다. 그녀를 안은 찰스의 폼이 아무래도 갈비뼈를 부스러뜨릴 것 같다.
"오해? 지옥에나 가라고 해!" 매기의 저항을 못 알아차릴 정도로 흥분한 그가 으르렁거렸다. "당신은 오후 내내 내게 유혹적인 미소로 힌트를 줬잖아"
"맙소사, 찰스, 그건 그냥 파티에서 으레 하는 대화였어!" 매기는 샘이 가르쳐 준 몇 가지 호신술을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그게 단순한 유희였다는 거야?" 찰스의 목소리가 욕구불만으로 굵어졌다.
"왜 나만 예외야? 다른 남자에겐 거절한 일이 없잖아!"
"그 남자들이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그녀는 신랄하게 되물었다. "어쩌면 그들의 자존심이 만들어 낸 것처럼 난잡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모두 한결같이 거짓말을 했을 리가 없어"
"왜 없어? 당신도 거짓말을 할 거잖아, 안 그래?" 매기가 씁쓸하게 말했다.
"내가 승낙하든 거절하든 간에 사람들이 날아 어디까지 갔느냐고 물으면 당신은 그냥 웃기만 할 거잖아. 그러면 당신의 그 침묵이 자연스럽게 당신을 위해 거짓말을 해주는 거지."
한순간 그녀는 찰스를 설득했다고 믿었다. 그녀가 빠져나가려고 몸을 비틀자 그가 그녀의 등을 더욱 꽉 잡아 당겼다. 그녀는 비명을 지를까 하다 곧 생각을 바꿨다. 찰스는 거의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를 폭행하는 어리석은 짓은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단지 그의 이기심을 조금 만족시키기 위해 그녀를 난폭하게 다루는 것뿐이다. 매기는 거절했다는 걸 재확인시켜주기 위해 그를 발로 찼다. 찰스는 낮은 신음소리를 내더니 그녀에게 난폭하게 키스를 해댔다.
돌연 매기는 자유스러워졌다. 찰스의 뒷덜미가 닉 포츤의 강령한 손안에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그녀가 요구했다구..." 화가 잔뜩 난 젊은 남자가 닉의 찌푸린 얼굴에 대고 투덜거렸다.
"다른 남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지." 닉이 메마른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닉의 목소리에서 찰스에 대한 연민이 들어있는 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이런 경우, 당신이 옳을지도 몰라. 그리고 아무리 늦었다 해도 신사는 언제나 거짓말을 받아들이는 법이고. 그렇지 않으면 신사는 온갖 종류의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다구. 예를 들면 싸움이라든가 불명예 같은 것 말이오."
닉이 놓아 주자 찰스는 몇 발짝 뒤로 물러나서 옷을 추스렸다. 닉의 몸짓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명백한 위협이었다.
"네 충고를 받아들이시지, 찰스. 유부녀와 있을 때는 제대로 처신하는 게 신상에 좋아. 신사는 절대로 유부녀와 키스하거나 말하지 않는다고. 게다가..."
"당신이 신사에 대해 뭘 알아요?" 찰스가 가버리자 매기가 불쾌한 듯 물었다. 차가운 회색 눈이 그녀를 보았다.
"당신이 숙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는 많을 거요. 그런데 고맙다는 인사는 안 할 거요?"
"당신 도움 없이도 충분히 그를 요리할 수 있었어요!"
"할 수 있었다구? 그렇게 보이진 않던데. 아니면 거절할 생각이 아니었나? 당신은 거칠게 다뤄지는 걸 좋아하오, 매기?"
"전혀!"
"그럼, 그냥 장난이었소?"
"그런 말을 잘도 하는군요. 당신...당신 혹시 들여다보길 좋아하는 호색한 아네요?" 매기는 그런 장면을 들킨게 몹시 창피해서 얼굴을 붉혔다. "첫째로 당신은 남의 말을 들었어요. 그리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더러운..."
"다행히도 내가 발견했지. 진정해요, 매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소."
몹시 남성 중심적인 발언이다. "당신은 폭행당한 것을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는 거예요? 오, 그래요. 내가 잠시 잊었군요. 당신은 그런 일을 무슨 경력처럼 생각하시죠, 그렇죠? 이런, 당신에게는 아무 일도 아닌 것이 내게는 무척 이나 큰 일이 되어 버렸군요."
그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소송이라도 걸겠다는 거요? 그렇다면 기쁜 마음으로 증인이 되어 드리지."
"당신이라면 그럴 테죠! 찰스를 두둔하기 위해서라도"
"그러니까 찰스가 옳다는 뜻이오?"
매기는 그에게 눈을 흘겼다. "난 그냥 가벼운 담소를 한 것뿐이에요. 그와 함께 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구요. 제기랄, 이건 파티예요. 다른 사람들도 파티에선 시시덕거리잖아요."
"당신 말대로라면" 그녀가 약하게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는 것을 보며 닉이 말했다. "당신은 앵초꽃 핀 오솔길로 데리고 간 남자에게서 자주 폭행을 당하나 보군, 콜 부인?"
"물론 아니에요. 남자들이라고 해서 모두 야만적인 원숭이는 아니니까!"
"내가 보기에 찰스는 무척 예의바른 젊은이 같던데. 나보다 훨씬 더"
매기는 눈을 깜박거렸다. 그의 눈동자가 회색에서 푸른빛으로 변한다. 그는 더 가까이 다가올 건가? 그녀는 아직도 얼얼한 입술을 핥았다.
"우리의 대화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정말 모르겠군요." 그녀는 약한 목소리로 뒤늦은 화해를 시도했다. "당신에게 그럴 뜻은 없었어요. 난 흥분한 상태였거든요. 그게 다예요. 물론 당신이 도와주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그녀는 그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매우 귀엽게 말하는군." 닉이 무감동하게 말했다. "속마음은 전혀 다르겟지만"
이 사람 왜 이래, 독심가? 매기의 미소는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가 미소에 넘어가지 않아 뾰로통해진 그녀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만해, 매기"
"뭘요?"
"날 유혹하는 것. 당신은 실수를 하고 나서도 뭔가를 배우는 법이 없나 보군"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당신 가은 위선자를 유혹한다면 내가 미친 게 틀림없어요."
"미쳤군" 그가 동의했다. "게다가 입도 걸고. 난 욕 잘하는 여자는 좋아하지 않소."
"당신은 또한 자기 의견을 가진 여자도 좋아하지 않는 것 같군요." 그녀는 닉의 강력한 남성적 매력에 압도당하는 것 같아 눈을 깜박거렸다.
"또 날 유혹하는군." 그녀의 입술이 그의 말을 부인하려고 벌어지는 것을 보며 그가 계속 말했다. "당신은 자기 자신이 상당히 도발적인 행동을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군...계속 이런 식으로 남자를 사귄다면, 언젠가 그 남자는 당신의 짧은 키스나 애무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할 거요. 그리고 그때는 당신에게서 그를 떼내 줄 사람이 주위에 없을 거요. 그러니 콜부인, 앞으로는 좀 더 조심하든지 얌전해지든지 하시오."
"나더러 수녀가 되란 말이에요?"
"당신은 소명 의식을 가진 것 같진 않군."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그 비슷한 것은 필요한 것 같소. 권태기가 당신 문제의 원인인 것 같으니까"
"확실히 요즘은 좀 지루하긴 해요. 그런데 당신은 노상 딸에게 이런 식으로 설교하나요. 그러니 무리도 아니군요. 그녀가..."
"그녀가 뭐요?"
"말을 아주 잘 듣는 딸이라구요."매기는 얼른 다른 말로 둘러댔다. "하지만 실수를 저지르게 내버려 둬야 할 때가 올 거예요. 그래야 혼자 뒷수습을 하며 성숙해질 테니까"
"그 실수가 딸아이 자신의 것일 때는 그럴 거요. 다른 사람들의 나쁜 부추김만 없다면. 그런데 당신은 로리에게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것 같구려.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면 로리의 보호자인 줄 알겠소."
닉이 날카롭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매기는 저도 모르게 여성적인 속임수를 썼다. 지난번에도 그가 꿰뚫어 봤다는 걸 잊어버린 채.
"오, 이런...알아 버렸군요. 내가 꼭 로리의 엄마처럼 군다고 생각하시겠죠, 닉" 그녀는 장갑 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녀의 이런 소녀 같은 몸짓에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나 닉은, 재미있어하거나 그녀가 이미 유부녀란 사실을 신랄하게 지적하는 대신,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로서는 알기 힘들었지만 그의 긴 침묵에 그녀의 긴장은 점점 늘어가기만 했다.
"닉" 그녀는 산만해진 생각들을 순서대로 정리하는 걸 그만두었다.
"매기?"
그녀의 이름을 마치 부드러운 벨벳처럼 부르는 닉의 목소리에 그녀는 말하려던 게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렸다.
그녀는 다시 시도했다. "닉..." 그가 알면 몹시 화를 내겠지. 그리고 상처를 받을 거야. 그러자 갑자기 그런 생각을 참을 수 없었다.
"매기" 그가 다시 불렀다. 그것은 거의 체념섞인 한숨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 매기의 맨 어깨에 와 닿은 늘어진 꽃송이를 밀쳐 냈다. 그녀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길고도 긴장된 순간이 지난 후 닉의 그림자가 그녀에게 겹쳐졌다. 그의 손가락은 꽃이 스치고 지나간 탄력 있는 피부를 살짝 만졌다. 매기는 눈을 감고 그의 손가락 관절이 피부를 문지르는 느낌을 즐겼다. 짜릿하고 따스한 감각이 그녀의 가슴속 부드러운 계곡으로 퍼져 갔다.
"매기" 그의 목소리에 일말의 저항이 느껴져 그녀는 눈을 떴다.
"너무 늦었어, 매기. 우린 너무 늦게 만났다구. 당신은 당신의 자리로 돌아가요. 나도 그러겠소..." 닉은 그녀의 도톰하고 장미 꽃잎 같은 입술을 바라보았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에게 몸을 기댔다.
그들의 입술이 닿자 어지러움이 그녀를 꿰뚫고 지나갔다. 어떤 남자도 그녀를 만지고 키스한 적이 없었다... 닉 하나뿐이었다. 그의 입술은 맛좋은 붉은 포도주처럼 그녀를 취하게 했다. 그녀는 너무 어지러워서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갑자기 키스가 멎었다. 그녀의 크고 어두워진 눈동자에 지금껏 알지 못했던 충격적인 감각이 흔들거렸다. 닉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안 되오." 자기 경멸로 등을 잔뜩 긴장시킨 그가 그녀가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했다. "이걸 작별인사로 생각하시오, 매기.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요. 난 깨진 결혼의 일부분은 되기 싫소."
"존재하지도 않는 걸 깰 순 없어요." 매기가 거칠게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소중한 일부분을 영원히 잃어버린 듯 허탈감에 빠졌다.
그의 망설임이 너무 짧았기 때문이 그녀는 알아채지 못했다. "안녕, 매기" 등을 돌려서 가려던 그가 돌연 멈췄다. 정자의 격자 무늬 사이로 그는 또 다른 커플이 킬킬거리며 가벼운 키스를 주고받는 걸 보고 있었다. 방금 닉과 매기가 나눴던 뜨거운 포옹과는 아주 다른 가벼운 것이다. 닉은 목 안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분노의 소리를 냈다. 매기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이었다.
"안 돼요, 닉..." 그녀는 얼른 닉의 팔을 잡았다. 손안에서 그의 근육이 움직인다. 그는 마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고목을 뽑아 버리듯 남자에게서 딸을 떼내려는 것 같다.
그는 매기가 잡은 팔을 흔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왜? 내가 그를 죽이면 당신에게도 좋잖소. 가련한 과부 연기도 할 수 있고!"
그의 목소리엔 냉소가 들어 있지 않았다. 단지 주먹으로 살아온 남자의 원초적이고 거친 분노만 있을 뿐이다.
"닉, 그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해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필요는 없잖아요." 그녀는 힘겹게 그의 소맷자락에 매달렸다. "그래서 얻는 게 뭐죠?"
"개인적인 만족이지. 제기랄, 죽여 버리겠어!" 그는 팔을 흔들어 그녀를 떼어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진정시키려고 그의 앞에 서서 애를 썼다.
"닉, 제발! 잠시만 진정하고 생각 좀 해봐요!" 놀랍게도 그는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는 팔을 천천히 내리더니 고개를 홱 젖혔다.
"당신은 알고 있었군." 그가 알아차렸다. "당신 남편이 나의 로리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맙소사, 당신은 알고 있었어!" 그의 목소리가 포효하듯 굵어졌다.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어. 그리고 두 사람을 도와주고 있었어, 그렇지? 그렇지 않소?"
"닉, 제발..."
"그렇지?"
"난...네, 그래요. 그렇다구요." 그가 그녀를 밀었다. 매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다.
"난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일이오." 그가 조소하듯 웃었다.
"자, 조금만 더 마음을 가라..."
"내 앞에서 비켜요, 매기. 안 그러면 던져 버릴 거요."
"좋아요." 매기는 절망감을 느꼈다. "당신이 다짜고짜 주먹을 날린다면 로리가 얼마나 놀라겠어요. 프로 권투 선수가 사람을 치는 건 불법이에요. 당신 딸에게 끔찍한 기억이 될 거구요. 그죠? 죄 없는 남자를 흠씬 두들겨 패주고 난 뒤 아버지가 체포된다면 말예요."
"죄 없는...?"
"맞아요, 죄가 없진 않죠." 매기가 그의 말을 잘랐다.
"조급하게 서둘러서 일을 처리하는 대신..."
"그건 콜 가의 전문 같은데, 그렇지 않소?" 닉이 비아냥 거렸다. 만약 눈길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핀은 죽어도 벌써 죽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핀과 로리는 더 이상 킥킥거리지 않고 나무 벤치에 나란히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다.
"닉, 당신 딸은 성숙한 여자예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같이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는 핀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어리석은 짓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당신이에요. 걱정되면 로리와 얘기를 해보세요. 하지만 먼저 로리의 말을 들어주세요. 명령부터 하지 말고"
"내 딸에 대해서 전문가가 되기라도 했소?"
"당신이 흔들리는 결혼의 전문가가 된 것과 같은 거예요. 내가 핀과 서로 좋아 지낼 때 할아버지가 억지로 떼놓으려고 하지만 않았다면 우리는 결혼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당신도 그렇게 말했잖아요. 양가의 반대에 부딪혔을 때 낙담하기보다 오히려 더 자극 받았을 거라고"
그것은 정당화시킨 거짓말이었지만 지금은 같은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매기의 말이 먹혀 들어갔다. 닉의 분노가 어느 정도 식은 것 같았다.
"모르는 척하라는 얘기요?" 그가 물었다. "뒤에 앉아서 내 딸이 자기밖에 모르는 거만한 돼지에게 상처받는 걸 그냥 지켜보라는 말이오?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신 남편에게 스릴은 다른 데 가서 찾아보라고 말하시오, 매기! 안 그러면 내가 그를 산산조각 내어 지옥 불에 던져 버릴 테니까"
그의 위협에 매기는 공포의 전율이 등뼈를 훑어 내리는 것을 느꼈다. 닉의 위협은 거의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그는 마치 자신의 분노를 폭력으로 발산시킬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오, 불쌍한 핀!
닉은 공포로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을 보고 조금은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오, 그렇게 애태우지 말아요, 매기. 지금 당장 때려눕히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가 도전해오면 나도 참진 않을 거요. 그에게 말해요, 매기. 만약 내 딸을 계속 유혹한다면 그의 인생을 서서히 파괴시킬 거라고, 아주 조금씩. 그도 자신의 삶이 무너져 내리는 걸 직접 뼈저리게 느끼게 될 거요. 그러니 깨끗이 물러나라고 하시오. 당신을 다치게 하긴 싫지만 그렇게 할 거요. 나는 한번 한다면 하는 사람이오. 아무도 날 멈추게 할 순 없소."
<5>
매기는 문가에 서서 아파트 안을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히죽 웃고 난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바닥에 너무 요란한 힐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그녀의 성역인 2층 침실로 통하는 계단을 향해 까치발로 걷기 시작했다.
"쇼핑하신 겁니까, 마담?"
쇼핑백 꾸러미를 얼른 등 뒤로 감추며 그녀는 샘에게 어설픈 미소를 띠었다.
"필요한 게 몇 가지 있어서..."
샘의 눈썹이 알겠다는 듯 올라갔다. "당신과 이멜다 마르코스에겐 그렇겠죠."
매기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난 그렇게 심하지 않아요. 적어도 쌓아 두진 않잖아"
그녀는 구두가 싫증날 때나 , 아니면 한 달에 세번 이상 신었을 때 구두를 잘 닦아 지방 구세군 사무실로 보낸다.
"구두는 멋쟁이의 기본, 당신이 한 말이죠. 마지막으로 의상실을 청소하다 세어 보니 52켤레나 있던걸요." 샘이 짐짓 점잔을 빼며 말했다.
"난 하루에 여러 번 구두를 갈아 신잖아요." 매기가 변명조로 말했다.
"어떤 때는 세 번, 네 번씩이나 갈아 신는다구. 그러니 120 켤레는 있어야 될 거야"
"맙소사, 그런데 도대체 지금 몇 켤레를 사온 겁니까?"
"한 켤레 밖에 안 샀어, 샘. 잔소리 좀 하지 말아요."
"그런데 그 가게에서는 구두를 한 짝씩 백에 넣어 주던가요?" 샘이 메마르게 말했다.
"아주 재미있군, 샘" 매기의 눈이 장난꾸러기 악동처럼 빛났다. "오늘 저녁은 칠리가 먹고 싶어요, 뜨겁고 매운. 어쩌면 친구를 좀 초대할지 모르니까 큰 냄비에다가 만들어야 될 거예요."
남미에서 샘은 칠리 요리에 관해 인생이 남을 혹독한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다. 칠리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을 할 정도다. 그는 매기의 제안에 얼굴이 약간 창백해졌지만 곧 회복되었다. "벌써 손님이 와 계세요." 그는 닫혀진 서재 문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왜 진작 얘기 안 했어요?" 매기가 작게 소리쳤다.
"샘,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것 좀 갖다 놔줘요." 그녀는 백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누구예요?"
"당신 할아버지."
매기는 얼굴을 찌푸렸다. "할아버지께서 무슨 일로 오셨을까? 점심약속은 내일인데..." 그녀는 홀을 가로질러 가다 샘의 목소리에 그만 그 자리에 섰다. "그리고 마크햄도..."
매기의 입이 벌어지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 분이 함께 오셨어요?"
"아뇨, 당신 할아버지는 30분 전에 오셨고, 마크햄은 약 10분 전에 도착하셨죠."
"그런데 두 분을 같은 방에 들여놓은 거예요?" 매기의 목소리가 공포 때문에 놓아졌다. "아마 벌써 서로를 죽였을지도 몰라."
샘이 어깨를 으쓱했다. "마크햄은 당신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도 안 하고 그냥 밀고 들어오셨어요. 그런데도 아직까지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어요."
매기는 문으로 돌진해 가서 귀를 대보았다. 불길하게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샘에게 손짓을 했고 샘은 백을 드는 중이었다.
"죄송합니다, 이걸 옮겨 놔야겠어요. 그러고 나서 가스 마스크를 가지러 가야겠어요."
"샘!" 매기가 소리쳤다. 그녀는 잠잠한 문 너머의 일을 그녀 혼자 처리하게 내버려 두고 가는 그에게 화가 났다.
"샘, 칠리에 관한 건 농담이었어."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쉰 다음 매기는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러나 채 돌리기도 전에 문이 왈칵 열리면서 마크햄 콜이 문 앞에 서 있었다. 호리호리한 몸집에 말쑥한 갈색 머리. 단정하게 콧수염을 기른 완고한 할아버지 그대로였다.
"뭐하는 게냐, 몰래 숨어서 엿듣고 있었냐, 아가? 전형적인 도노반이군."
"안녕하세요, 마크햄" 그의 모욕적인 언사가 그녀를 향한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는 매기는 의회로 부드러운 그의 뺨에 뽀뽀를 했다. "정말 놀랍군요. 오늘 당신을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녀의 할아버지가 껄껄 웃었다. "물론 몰랐을 게다. 마크햄은 언제나 놀라움으로 가득 찬 사람 아니냐. 즐거운 건 그 중에 하나도 없지만. 항상 다른 사람들의 사업에 코를 밀어 넣고 마치 시궁창 쥐 모양 코를 킁킁거리며 다른 사람들의 일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사람 아니더냐."
"난 할아버지도 보게 될 줄 몰랐어요, 패디" 매기가 조용히 다가가 아까와 똑같이 뺨에 뽀뽀했다. 패디는 기분이 언짢은 듯 손으로 뺨을 문질렀다. 작고 땅딸막한 키에 거의 대머리인 그녀의 할아버지는 거칠고 무뚝뚝한 전형적인 아일랜드 인이다. "...마실 것 좀 드릴까요?"
"난 이미 마셨다." 패디는 빈 위스키 잔을 들어 보였다. 옆 대리석 탁자에는 매기가 결혼할 무렵에 있었던 병 발작 이후 항상 사용하는 지팡이가 기대어 있다.
"자네도 항상 그러지 않았나" 마크햄이 심술궂게 말했다. "자네에게 더 이상 친구가 남아 있지 않은 것도 당연해. 몇 년 동안 그들을 울궈먹었으니까."
패트릭 도노반이 발끈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도 말게. 자네도 어떻고 마크햄, 이 늙은 친구야, 자네는 언제나 체면이라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한 잔 더 드릴까요, 패디?" 매기는 그들의 시끄러운 말다툼을 막아 보려고 얼른 끼어들었다. 마크햄에게 서둘러 한 잔 갖다 주고 패디에게도 한 잔 더 부어 주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두 남자는 서로를 죽일 듯이 쳐다보고 술을 마셨다. 괜히 긴장한 매기가 별다른 결론 없는 수다를 늘어놓아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두 사람 다 방문 이유를 말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매기가 알아채기 전까지 얼마 동안 무거운 침묵이 계속되었다.
"오, 제발!" 마침내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그 동안 이 상활을 어떻게 요리해 나갈까 궁리하느라 그녀도 위스키를 두 잔이나 마셨다.
"두 분 다 할 말도 없으시면서 왜 귀찮게 여기까지 오셨는지 모르겠군요...절 보러 오신 건 확실히 아닐 테고"
매기의 말은 마치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소리 같은 효과를 냈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의 태도를 버리고 서로 다투어 얘기하기 시작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사람이 몇몇 회사를 앞세워 <콜 앤 코> 와 <도노반>의 주식을 사들인다는 얘기였다. 아직은 얼마 안 되는 주식을 사들였지만 이런 추세로 계속 사들인다면 머잖아 상당한 양의 주식이 될 것이고, 벌써 몇 가지 소문이 증권가에 떠돈다고 했다. 마크햄과 패트릭은 서로가 서로 의 주식을 사들인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그들의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매기의 결론은 하나로 좁혀져 갔다. 그 베일에 싸인 바이어는 지난 주 매기의 가슴에 스며든 사람이었다.
니콜라스 포츤! 그 사람일 거야.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타이밍이 잘 맞아떨어져.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두 분다!" 매기는 못과 망치가 되어 다투고 있는 두 늙은이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핀과 전 두 분이 다투시는 데 넌더리가 났어요. 이런 적의가 저희 결혼에도 영향을 미쳤어요. 아주 커다란 영향이죠."
패트릭과 마크햄 둘 다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녀를 쳐다봤다.
"사실...우린 헤어질까 생각중이에요."
"헤어진다고?" 마크햄은 갑자기 흰머리가 많아진 것처럼 보였다.
패트릭은 금방이라도 발작할 듯 사색이 되었다. "내가 죽거든 해라!" 그가 포효하듯 소리쳤다. "도노반은 절대로 이혼하는 법이 없다."
"저, 패디..."
"패디라고 부르지도 마라! 난 처음부터 네가 그 두 얼굴을 가진 뱀 같은 녀석하고 결혼하는 걸 원치 않았어. 하지만 넌 결혼했고 일이 이렇게 된 거야! 난 결코 네 결혼이 깨지길 바란 적은 없지만 이건 네 일이다, 매기. 넌 이제 제 맘대로 되지 않는다고 집에 와서 울고불고 하는 어린 소녀가 아니란 말이다."
"아기라도 있었더라면 헤어지겠다는 말을 이렇게 분별없이 하지는 않을 텐데. 난 네가 그 미치광이 같은 여권주의적 발상을 하지 않길 바란다." 마크햄은 칼로 자르듯 분명하게 말했다
"매기더러 미치광이 같은 생각을 가졌다고 말할 필요는 없네, 마크햄 콜. 자네의 그 똑똑한 체하는 손자 녀석이 아이를 주지 않는 거라고..."
"내 손자는 처음부터 이 애를 임신시켰어. 기억하겠지?" 마크햄이 강한 어조로 받아쳤다. 그들은 또다시 치고 박고 싸우기 시작했다. 매기가 거의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에 샘이 극적으로 문가에 나타났다.
"오늘밤 인기가 좋으시군요, 매기. 당신을 만나러 온 손님이 있어요."
두 늙은이의 싸움이 잦아 들었다. 매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쪽으로 모셔요, 샘"
"괜찮겠어요?" 샘이 매기의 얼굴을 살폈다.
"오, 제발, 샘.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요. 교황이 온다고 해도 상관없어" 두 할아버지는 아직도 서로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부인!" 그는 아첨하듯 뒤돌아섰다. "이쪽으로 들어오시죠. 포츤씨"
마크햄과 패트릭은 주먹질을 멈추었고, 매기는 그들 사이에 낀 채 눈을 휘둥그레 뜨고 새로운 손님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거실 게임인가?" 닉 포츤이 스스럼없이 물었다.
"아뇨, 아주 오래된 겁니다. 가족 간의 불화라는 거죠." 샘이 뒤에서 중얼거렸다. 매기가 그에게 무서운 눈초리를 던졌다.
"고마워요, 샘. 당신은 가도 좋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몹시 차가웠다.
"네, 마님" 그가 그녀에게 윙크를 했다. "행운이 깃드시기를, 귀여운 마님"
니콜라스 포츤이 이 모든 광경을 목격했다는 생각에 매기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뻔하다.
"자, 자..." 패트릭이 환영한다는 듯 악수를 청했다. "닉 포츤. 자네 얘기는 많이 들었네. 핀의 친구인가? 내겐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는데, 매기..." 그는 손녀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던졌다.
"포츤 씨와는 꽤 친분이 두터운 편이에요, 패디" 그녀가 달래듯 말했다. 패트릭은 악수를 하며 닉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닉은 매기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그의 회색빛 눈동자는 읽을 수가 없다.
"마크햄 콜" 닿을락 말락 닉의 팔꿈치에 손을 댄 패트릭은 그의 라이벌에게 안내했다. 마크햄은 닉의 손을 힘차게 흔들어 댔다.
"우린 두 달 전에 프랑스 대사관에서 만났지. 기억하오? 난 우리가 서로에게 호감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지. 이번 주에 하루쯤 시간을 내어 점심이라도 함께 할까하는데..."
"안 돼요!" 그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말이 불쑥 튀어 나왔다. 세 쌍의 눈이 매기를 쳐다보았다. 두 쌍은 약간 화난 듯, 의아한 눈이었고 나머지 한 쌍은 재미있어 하는 눈이다. "제 말은 금방 만난 사람에게 곧 바로 사업 얘기를 하는 건 좀 무례하지 않나 해서..."
"괜찮소, 난 항상 본론으로 곧바로 들어가니까" 닉 포츤이 부드럽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무력감이 느껴졌다. 오, 세상에 안 돼...그는 핀의 일을 말할 작정인가 봐.
"그래도 서로에게 격식을 차릴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요." 그녀가 뻣뻣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냐, 얘야? 전에는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잖니!" 둔감한 패트릭조차 그녀가 불편해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저 아이가 어렸을 땐 격식을 차리는 걸 본 적이 없다오. 한 번은 가정교사가 매기에게 드레스를 입히려는데 매기가 그 여자의 손을 물어 버린 적도 있소. 그 여자의 손가락이 거의 떨어져 나갈 뻔했지. 대단한 말괄량이었어."
"패디!"
"그렇지만 사실인걸. 넌 그때 정말 잘 물었어. 말썽꾸러기였지." 그가 과거를 회상하며 빙그레 웃었다. 매기가 그렇게 말썽꾸러기처럼 거칠게 군 이유는 패디가 아들을 바랐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에게 남자아이 같은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서다.
"내 충고 하나 하지, 포츤. 말괄량이를 가까이하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기네." 패트릭이 껄껄 웃었다. 이것은 패디의 일급 농담이었다.
닉은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지었다. "처음엔 물어뜯고, 두 번째는 손에 잡히는 대로 내던지겠지요."
난처해진 매기는 침을 한 번 꼴깍 삼키고 나서 말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포츤씨?"
"닉이라고 부르기로 한 줄 알고 있는데"
"그래요. 닉" 그녀는 투덜거리며 <닉>이라고 발음했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분노로 번득였다.
"그것보다 더 친근하게 불렀잖소."
그녀의 분노가 터졌다. "나랑 노닥거리려고 온 거예요. 볼일이 있어서 온 거예요?"
"매우 커다란 볼일이 있지. 당신을 보는 것"
"닉!"
"설마, 둘이서 무슨 일을 저지른 건 아니겠지?"
"패디!"
"글쎄...헤어지겠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 이제 알겠구나. 자네, 남의 영역을 침범한 게지? 이놈!"
매기는 패트릭이 넘겨짚는 말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더구나 닉을 <놈>이라고 부른 것에.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그가 분노를 터뜨리길 기다렸다. 그의 눈동자는 이제 개암빛으로 변했을 거야. 그녀는 체념한 듯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눈을 뜨고 보니 닉은 전혀 분노의 기색을 띠고 있지 않았다. 매기는 안도의 한숨을 몰래 내쉬었다.
"제 명예를 의심하는 겁니까?"
"어..." 지극히 조용하게 묻는 닉의 말에 천하의 패트릭도 약간 긴장이 되는 모양이다.
"아니면 숙녀분의 명예를 비난하시는 겁니까?"
비난! 매기는, 마음속으로 낯선 단어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패디를 볼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자네 수준이지, 도노반. 친손녀를 행실 나쁜 여자로 생각하는 게!" 마크햄이 비난조로 말했다. "걱정마라, 아가. 난 도노반의 말을 한마디도 믿지 않는단다. 네 할애비도 노망만 안 들었다면 그렇게 믿을 게다."
"자네가 행실 나쁜 여자라고 말한 유일한 사람이야, 콜. 자네는 언제나 입이 걸잖아. 나는 그냥 물은 것뿐이다, 매기. 사람이 물어 봇 수도 있는 것 아니냐? 넌 요즘 들어 너무 마른 것 같단 말씀이야"
샘, 이 말 들었어요? 매기는 신경질적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신경질적이고, 신경과민이냐. 도노반의 질긴 신경을 가졌을 텐데 네가 초조해하는 게 눈에 보여" 패트릭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어쩌면 호르몬 때문인지도 모르지, 임신했냐. 매기?"
"임신?" 마크햄은 적의도 잊고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매기, 너...?"
"물론 아니에요! 아니라구요!" 그녀는 서둘러 부인했다. "다이어트 때문이에요. 신경질적인 건 커피를 맣이 마셔서 그렇다구요. 그런데 집안일을 타인 앞에서 꼭 떠벌려야겠어요?"
"닉은 타인이 아니다." 패디는 닉의 등을 탁 침으로써 의심을 깨끗하게 씻었다는 뜻을 전했다. "닉에게도 딸자식이 하나 있지. 그래서 부모 마음을 이해한다구. 매기, 이 남자와 사업할 것을 대비해 내일 밤 저녁식사를 함께하는 게 어떠냐?"
그녀만 빼고 세 사람은 일에 관해 토론하기 시작했다. 마크햄과 패트릭은 서로 닉의 주의를 끌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들은 위스키를 마시면서 화가 나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매기를 떼어 놓고 책상 주위에 둘러앉았다.
할아버지들은 닉이 그들의 주식을 사들인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거야. 그러니 적인 줄도 모르고 저렇게 정답게 얘기를 나누시지. 그녀는 그들에게 경고를 해줘야했다. 그러려면 닉이 없어야 한다. 분명히 닉은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포츤 보석에 관한 성공담으로 화제가 바뀌자 매기의 기대와는 어긋난 일이 일어났다.
"어떠냐, 매기? 몇 주 후면 네 생일인데 보석은 사주련? 그런데 언제 사면 좋을까, 닉?" 패디는 열띤 어조로 물었다. 매기는 할아버지가 돌 하나로 두 마리의 새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알았다. 매기를 달래는 것과 닉의 호의를 사는 것.
물론 마크햄도 닉에게 잘 보이려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우습군요." 매기는 할아버지들이 강하게 권하자 입을 열었다. "전 더 이상 보석이 필요 없어요. 그리고 보지도 않고 어떻게 덜렁 사요."
"다이아몬드는 다 거기서 거기야" 패티가 완고하게 말했다. "닉이 쓸모없는 걸 팔 리가 없지. 그는 신용이 무척 좋거든"
"핀이 그러던데, 넌 귀걸이는 사양하지 않는다더구나." 마크햄이 매기에게 말했다. "거기다 목걸이까지 한 쌍이면 좋겠지. 다이아몬드는 네게 어울리지 않아. 너무 차가운 느낌이거든. 루비나...에메랄드가 좋겠다."
"전 에메랄드를 좋아하지 않아요. 게다가 이건 선물이 아니에요. 계산적인 생각에 의한 거잖아요." 매기가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글쎄, 우리가 널 얼마나 생각하는지 알고 있을 게다. 매기" 그녀의 할아버지가 달래듯이 말했다.
"닉이 골라 줄 게다. 그래 주겠지, 닉?" 마크햄이 말했다. "매기가 좋아하는 걸 몇 개 골라주고 청구서는 내게 보내게"
"무슨 소리! 사야 할 사람은 바로 나야" 패디가 격렬하게 말했다.
매기가 보석을 고르면 두 분이서 반씩 지불하면 된다는 닉의 제안으로 인해 이번의 언쟁은 곧 끝났다.
"두 분의 호의는 고맙지만" 그녀는 항의했다. 그들이 서로 보석을 사주겠다는 건 사랑 때문이 아니라 경쟁심 때문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매기였다.
"산체스가 만들어 놓은 걸 보면 당신도 좋아할 거요. 그는 주로 단순한 스타일을 좋아하거든. 사실...." 닉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오늘까지 보안 요청을 해놨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선매하기 전에 보러 가는 게 좋을 거요. 그런 보석들은 주로 사적인 협상을 통해 판매되니까... 남편과 함께 오늘 나의 저녁식사 손님이 되는 게 어떻소?"
"핀은 여기 없어요." 매기가 내키지 않는 듯 말했다. "그는 웰링턴에 있어요. 내일까지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아, 그렇소?"
매기는 돌연 닉이 의심스러워졌다. 핀이 부재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다. 핀을 미행하는 가봐!
"안됐군. 몇몇 컬렉션은 선박으로 내일 다른 곳으로 옮겨질 예정인데" 그가 유감이라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됐어요. 없었던 일로 해요." 매기는 빠르지 않게 말했다.
"그렇다고 매기가 몸ㅅ 갈 이유는 없잖아. 핀이 없어도 괜찮아, 매기. 남자의 호의를 무시하면 안 된다." 그녀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다.
"당신의 손녀와 단둘이서 저녁식사를 함으로써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그의 말 속에는 패디를 부추기는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자, 자...당신은 우리 가족의 친구요. 왜 둘이서 저녁을 들면 안 된다는 거지? 저녁 식사비는 내가 부담하지. 아까 자네에게 한 내 언행을 사과한다는 뜻에서" 패디가 말했다.
마크햄이 못마땅하다는 듯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나 닉은 쉽게 그 순간을 넘겼다.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결국 이익을 보는 사람은 저니까요."
매기는 전율했다. 그녀는 닉이 다른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고 느꼈다. 그녀는 오늘 저녁 혹 다른 약속이 없나 속으로 열심히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항의애도 아랑곳없이 안돠한 세남자는 자기들끼리 일을 진행시켰다. 매기는 두 할아버지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난 뒤 닉에게 거절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당신과 함께 있는 걸 그들이 왜 반대하지 않는지 이유를 잘 알겠죠?" 할아버지들이 오늘 방문한 목적에 대해서는 다음에 얘기하자며, 매기에게 각자 따로 속삭인 뒤 집을 나서자마자 그녀는 닉에게 내뱉었다. "왜냐하면 당신을 잘 구슬려 그들 사업에 당신의 지대한 영향력을 이용하려고 그러는 거예요."
"어떤 가족? 몬테그 아니면 캐플릿?" 닉은 그녀의 작전에 말려들지 않았다. "두 분은 언제나 저렇소?"
"오늘은 그래도 좀 괜찮은 편에 속해요. 난 당신과 저녁을 같이하지 않을 거예요, 닉. 그리고 그 잘난 체 하는 표정 좀 치워요."
"겁쟁이"
그녀는 발끈했다. "당신이 뭘 노리는지 내가 모르는 줄 알아요?"
"오, 내가 뭘 노리는데?" 닉은 방 안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장식물도 집어보고 방안에 걸린 그림들도 감상하곤 했다.
매기는 그에게 한 방 먹일 작정으로 말했다. "주식을 사들이고 있죠, 그렇죠? 당신은 콜과 도노반의 주식을 사들이고 있어요. 이유가 뭐죠?"
"당신은 모르는 게 없잖소."
매기는 앞이 캄캄해졌다. 그래도 설마 했는데...
"증권가에 소문이 파다해요. 설마 끝까지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죠? 한순간이라도 당신이 그들의 회사를 파산시킬 수 있다곤 생각지 말아요..."
"어쩌면 파산시킬 생각이 아닐지도 모르잖소. 아마....적당한 시기에 주식을 몽땅 사들여 경영권을 쥘 수도 있지."
"그건 불법이에요!" 그녀가 소리쳤다.
"목격자는 한 명도 없소." 그가 비아냥거렸다. "베일에 싸인 바이어가 왜 나라고 생각하는 거요?"
"왜냐구요? 다신이 자못 고소하다는 듯 바라보잖아요. 그게 이유에요. 닉, 당신은 패트릭과 마크햄이 어떤지 보셨죠. 그들은 이제 늙으셨어요. 자신들의 회사에서 남은 여생을 마치게 해줘요. 복수하겠다는 일시적인 기분으로 그들이 이룩해 좋은 걸 파괴하지 말아요...그 회사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죄 없는 사람들이 고통 받을 거예요. 단지 당신의 자존심 때문에..."
"그건 자존심보다 더한 문제요, 매기. 당신에게 이미 경고 했잖소."
"일주일..."
"그 동안 당신 남편은 로리의 열정을 만류시킬 만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소. 내가 무슨 계획을 갖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그가 애태우려는 듯 잠시 말을 멈췄다. 그녀는 초조하지 않은 척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무심코 발을 탁탁거렸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말해 주겠소."
"말했잖아요, 가지 않겠다고"
"좋소." 매기는 그가 쉽게 승인하자 속으로 놀랐다. 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그는 넓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이 깜짝 놀라는 걸 좋아하길 바라오, 매기"
"기다려요, 닉. 기다려요!" 닉은 그녀가 쫓아오게 만들었다. 매기의 구두소리가 바닥에 울려 퍼졌고, 그녀는 문 앞에까지 와서야 그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저주나 받아요, 닉. 이건 협박이야!"
"얼마나 충격이 크시겠소."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랑 저녁 먹는 진짜 이유가 뭐예요?"
"어쩌면 한 가족과 공식적으로 친해질 수 있는 이득을 얻을지도 모르잖소."
"마치 마피아처럼 말하는군요." 그녀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분들은 가족의 명예를 생명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더군...그 명예에 먹칠을 한 사람을 그들이 어떻게 다룰지 궁금하군?"
협박하는 건가? "좋아요, 당신과 같이 저녁을 먹겠어요. 대신 약속을 꼭 지키세요."
그러자 코웃음을 쳤다. 그때 샘이 눈물을 흘리며 부엌에서 나왔다. 매기는 잠시 잘난 체하는 악마가 그녀 앞에 있다는 것도 잊었다.
"오, 샘. 미안해요. 칠리에 대해선 내 진심이 아니었어요. 어쨌든 난 외식할 예정이니까. 샘...괜찮아요?"
샘은 눈을 비비고 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정말로 나빴어요. 화내지 말아요...그럴 뜻이 아니었는데 정말 미안해요. 샘, 용서해 주는 거지?"
"물론입니다." 샘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그는 앞치마로 뺨에 흐른 눈물을 닦았다. "아직 칠리 요리를 만들지 않았어요. 대신...제가 먹을 스페인 오믈렛에 넣을 양파를 좀 썰고 있었죠."
"양파?" 매기의 눈동자가 돌연 찌를 듯이 샘을 노려보았다. "맙소사 당신, 내가 쩔쩔매면서 용서를 구하는 걸 즐기고 있었군, 그렇죠?"
"정말 볼 만했죠." 샘이 히죽거렸다. 그는 문가에 서 있는 남자를 붉게 충혈된 눈으로 바라보았다. "외출하는 겁니까? 핀에게서 전화 오면 뭐라고 말할까요?"
어디를 가더라도 핀은 전화를 걸지 않는다. 그것은 매기에게 경고하는 샘의 방법일 뿐이다. 그는 매기와 핀의 비밀을 알진 못하지만 대충은 짐작하고 있다. 핀과 매기도 이 일에 대해 샘에게 얘기를 했고, 어느 때보다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고도 말했다.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행운을 찾으러 나갔다고 말해요."
<6>
두 시간 후, 닉은 그녀를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갔다. 이탈리아식 레스토랑은 간단한 식사를 즐길 수 있는 작고 편안한 곳이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힐끔거려 매기는 전혀 편안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태껏 지금처럼 자신이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한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빌어먹을 닉 포츤...차에다 넥타이를 벗어 놓고 온 그는 식당 분위기에 완벽하게 어울린다. 이건 그의 복수야. 물론 매기는 머리를 빗고 오겠다며 잽싸게 달아나 거의 90분 동안 닉을 기다리게 했다. 그녀는 뜨거운 욕조 목욕을 하고 검정색 칵테일 드레스를 입었다. 화장을 하고, 매니큐어를 칠하고, 분홍 하이힐을 신고, 작고 검은 개미가 수놓아진 이사벨 카노바의 기다란 분홍색 실크 장갑을 꼈다. 한치의 빈틈도 없이 차려 입은 그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매기는 닉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그녀가 의기양양하게 거실로 돌아와 보니, 그는 스카치 잔을 한쪽 손에 들고 사업 얘기에 푹 빠진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기다리게 한 시간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에게 익숙한 장소로 데려가지 않고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다.
"트럭 휴게소가 아닐 걸 감사해야 될것 같군요." 그녀가 비꼬듯 말했다.
"그래야 될 거요." 그가 냉담하게 동의했다. "이곳 음식도 맛있고. 그렇게 안 보이겠지만"
그녀가 어깨를 들썩였다. "난 속물이 아니에요."
"그렇소, 속물이 아니지. 내가 먼저 건드렸기 때문에 내게 한방 먹인 거지. 그런 생각에 골몰한 나머지 어디로 데려갈 건지 물어 볼 생각도 못한 거고. 내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으려고 그렇게 근사하게 차려 입었고, 내가 열등감을 느낄 그런 우아하고 고상한 장소에서 만나길 원했겠지."
"그런 생각 안했어요." 그녀는 그의 예리한 통찰력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아니라고?"
"그래요, 난 당신과 아무 곳에도 가고 싶지 않았어요, 당신이 강요하다시피 데려왔잖아요. 샘에게 당신을 차버리라고 하지 않아 유감이군요."
"그는 당신의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을 거요."
"샘은 태권도 유단자예요."
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매기는 메뉴를 보고 있는 그의 검은 머리를 쳐다보았다. 돌연 그가 얼굴을 들었고,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닉은 자신이 그녀의 우아함과 당황했을 때 어깨를 들썩이는 모습을 좋아한다는 걸 그녀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매기에 관해 이미 많은 것을 알아냈다. 사교계의 명사라는 경박하고 불성실한 가면 아래 숨어 있는 아주 복잡한 여인... 용기 있는 마음, 부족함이 없는 삶으로 인해 약간은 고집이 세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매혹적인 미소가 그의 마음을 어지럽힌다는 것도. 갑자기 그녀가 예의 먀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닉은 몹시 놀랐다.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본 양 그녀가 웃었던 것이다.
"내가 당신을 미치게 했죠? 닉, 사실대로 말해요! 처음에 당신이 너무 차갑고 예의바르게 대해 확신하지 못했지만 난 분명 당신을 정말로 화나게 만들었어요. 그죠?"
그는 고개를 약간 끄덕임으로써 그녀의 승리를 인정했다. "난 기다리는 걸 좋아하지 않소. 기억해 두시오."
"트럭 휴게소에 가는 게 더 좋았을 것 같아요." 그녀가 명랑하게 말했다. "난 핫도그, 햄버거 등등 그런 싸구려 음식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샘은 그런 걸 만들어 주지 않아요. 그는 20미터 떨어진 사람의 입에서 나는 햄버거 냄새도 맡을 수 있을 정도예요."
"샘의...능력과 그에 대한 애정이 당신 삶에서 아주 커다른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군. 당신은 고용인과 매우...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 같아"
"자, 이제 누가 속물이죠?" 그의 질문을 모른 척하며 매기가 짓궂게 물었다.
"당신의 연인이오?"
그가 정말로 물어 볼 줄은 생각 못했다. 그녀가 아는 사람들은 대게 빙빙 돌려 얘기하는 편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당신 남편이 공공연하게 남성다움을 과시하고 다니는 거요? 집에서 거절당하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갈기고 싶은 충동이 너무 강해 그녀는 장갑 낀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닉은 몸을 앞으로 내밀고 흥미롭다는 듯 계속 말했다.
"당신 같은 여자는 침대에서 매우 기술 좋고 독창적인 사람을 필요로 할 것 같아. 겉보기처럼 샘도 괜찮은 편이오?"
"닉!" 그녀는 인접한 테이블을 휙 둘러보고 나서 거팅 숨을 쉬며 내뱉었다. "당신 정말 못 말릴 사람이군요..."
"가끔 그런 말을 듣기도 하지." 그가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얼굴이 붉어졌군. 내가 당신을 당황하게 만들었나? 이런 놀림은 아무것도 아닐 텐데"
"내 친구들은 좀 더 교묘하게 말해요. 당신의 그..."
"솔직한 발언보다?"
매기는 커다란 플라스틱 메뉴판을 펼쳐 들고 눈을 내리깔았다.
"숨는 거요, 매기?"
"배고파요, 닉" 그녀는 닉의 조롱기 섞인 어투를 흉내 냈다. 닉은 매기 콜이 까다로운 남자들을 다루는 데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런 점이 그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고, 매기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더 불러일으켰다.
"맛있는 걸 사주면 화가 풀리겠소?"
"난 좀처럼 화를 내지 않아요...적어도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어요."
그녀는 메뉴판을 탁 소리나게 접었다. "처음엔 토르텔리니를 먹고 다음엔 오소 부코를 먹겠어요." 테이블 주위를 서성대며 그들의 대화를 엿듣지 않는 척하는 젊은 웨이터에게 그녀가 말했다.
웨이터는 매기와 닉의 주문을 휘갈겨 쓴 다음 테이블 위에 있던 얼음물 주전자로 그들의 컵을 채워 주었다. 그는 한쪽 눈으로 매기를 보며 이탈리아어로 뭔가 중얼거렸다. 다행이 그것은 칭찬의 말이었고, 매기는 또한 나무랄 데 없는 이탈리아 어로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요염한 빛을 띠었다. 그의 손이 흘린 차가운 물세례를 답례로 받았다. 불쌍한 젊은이는 조그맣게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순간적인 부주의를 수습하려고 애썼다. 매기는 드레스는 세탁하면 된다는 웃음 섞인 말로 그를 겨우 진정시켰다.
"그 드레스 실크 아니오? 물 자국이 남을 것 같소?"
웨이터가 가자 닉이 말했다. 매기는 어깨를 그냥 들썩였다.
"자국이 남으면 내가 변상하겠소."
"친절하시군요, 닉. 하지만 괜찮아요."
"내가 당신을 이곳으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요."
좋아, 그가 죄책감을 느낀다면, "당신 말이 옳아요. 당신은 내게 빚졌어요."
"얼마지?"
그녀는 머릿속으로 그의 수표책을 그려 보았다.
"아주 비싸요. 하지만 현금이 아닌 다른 걸로 받겠어요."
"정말?" 그의 눈동자가 번득인다. 그녀는 얼른 그의 생각을 고쳐 주었다.
"콜과 도노반 주식으로"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영리하군"
"약속을 어길 거예요?" 그녀가 그를 노려보았다.
"그렇소."
물론 그렇겠지. "당신은 신사가 아니군요."
"이미 그렇게 결정한 걸로 아는데"
"확신하진 않았죠."
"그럼, 이제는 알겠군"
"당신은 주식을 가지고 있어요, 그렇죠?" 그녀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난 매우 광범위한 유가증권을 가지고 있소. 그런데 세부 사항은 내 투자 관리인이 처리하오."
"당신의 계획을 말해 주겠다고 했잖아요."
"그렇게 할 거요. 하지만 빈속으로는 안 되오."
"경고하는데, 닉. <노>라는 대답을 가지고 돌아가진 않을 거예요."
놀랍게도 닉은 실제로 당황했다. "매기, 나...내 생각은 적어도 우리가 서로를 먼저 알아야 되지 않나..."
"여기서 나가는 게"
"그렇게 되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될 거요." 그가 그녀에게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남의 약점을 이용하다니 정말 야비하군요!"
"완고한 거요. 단어를 제대로 선택해야지. 그리고 난 녹아웃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오."
"권투장 안에서?"
그가 잠시 동안 그녀를 쳐다본다. 마치 말장난을 계속 할까 말까 망설이는 것처럼. "아니오. 학교에서 12살이 될 때까지 난 키가 작았소. 그...범죄로 가득 찬 골목에서 자란 못된 꼬마였지. 난 어려서부터 조롱이나 무시하는 것을 때려 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배웠소. 난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지...그렇게 해서 얻은 평판을 관리하는 법도 배웠고...이름난 사람은 어디서나 그의 행동을 시험받게 되니까"
그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매기는 제대로 된 소년시절을 한 번도 보내지 못한 어린 소년을 생각하니 고통이 느껴졌다. "그래서 이름난 승리자가 되었나요? 당신은 학교 다닐 때 깡패였나요?"
그의 얼굴이 굳어진다. "난 결코 먼저 싸움을 걸진 않았소. 단지 싸움을 끝내기만 했을 뿐이오. 나보다 약한 사람과는 싸우지 않았소.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이것은 정글의 법칙이오."
"그런데 당신의 어머니는 어떻게 느꼈을까요...당신의 상처를 치료해 주면서?" 절망감과 자랑스러움을 동시에 느꼈을까....내가 지금 그에게 느끼는 것처럼?
"어머니는 그때 내 상처들의 반도 몰랐소. 내 문제 말고도 걱정할 일이 태산 같았으니까...끼니 걱정에서부터"
"아버지가 생활비를 보내 주지 않았어요?"
그는 그녀의 순진함에 미소 지었다. "임신한 여자 친구를 버리는 종류의 인간들은 연락을 하지 않는 게 보통이지."
"오..."
"어머니는 아버지가 누군지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소. 나도 묻지 않았지. 어머니가 가장 필요로 할 때 그는 어머니를 버렸소. 내 어머니는 꽤 괜찮은 여자였지. 그런데 평생을 더럽고 힘든 일로 보냈소. 딱 한 번의 실수로...그 실수의 대가를 얼마나 혹독하게 치렀는지! 어머니는 내가 16살 때 돌아가셨소. 권투로 번 돈으로 다른 사람들의 화장실이나 청소해 주는 그 더러운 일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게 되자마자"
닉은 몹시 흥분한 듯 보였고 그녀 또한 심한 충격을 받았다.
"16살 때? 어른들이 허락한 거예요?"
"나이를 속였지. 내가 누구란 것도. 돈이 될 만한 곳으로 돌아다녔소. 퀸스베리에 있는 술집에선 게임 규칙도 없이 싸웠소. 거기선 겁쟁이들만이 글러브를 끼고 싸우지."
매기의 눈동자가 사나운 폭풍우처럼 어두워졌다. "그러다 죽는 수도 있었어요!"
그는 이제껏 만났던 여자들이 그의 어둡고 거친 과거를 알았을 때 지었던 뭐가 황홀한 표정을 찾으려고 매기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폭력은 그녀들의 가슴에 뿌리깊은 흥분을 안겨 주는 것 같았다. 델리아가 그에게 끌린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번 호기심이 충족되고 나자 델리아는 그를 거절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매기의 표정에는 분노만 깃들어 있을 뿐이다.
"그럴 수도 있었지. 그런데 난 운이 좋았소. 복싱 프로코터의 눈에 띄었거든. 그는 내게 정식 훈련을 시켰소. 나의 모든 분노를 좀 더 건설적인 무언가로 바뀌게 해주었어. 또 세상에는 권투 위에도 해볼 만한 일이 얼마든지 있다고 깨우쳐 줄 만큼 그는 자비로운 사람이었소. 난 돈과 성공으로 나의 출생 때문에 거절당해 왔던 모든 것을 살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지."
"사회적 지위?" 그녀가 추측했다.
닉이 싱긋 웃었다. "권력"
"그럼 이제 당신이 원했던 것을 모두 가졌나요?"
그는 자신과 테이블을 나누어 쓰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아직..." 그들은 서로 반대편 진영에 앉아 있는 적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닉은 그녀가 결코 그에 대한 지식을 이용하지 않으리란 믿음이 있었다. 그는 적은 물론이고 친구들에게조차 오늘 그녀에게 비밀스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그녀를 믿을 수 있는 거지? 매기도 델리아와 똑같은 세계의 사람인데...그녀는 조금 다를까? 그녀를 파멸시키는 일이 왜 망설여지는 걸까?
닉은 그녀에게 어린 시절 얘기를 해보라고 했다. 거절할 줄 알았는데 매기는 두말없이 얘기를 시작한다. 그녀는 흔쾌히 할아버지가 지적한 대로 자신이 장난꾸러기였음을 인정했다. 특히 청취자의 흥미를 끈 것은 그녀 혼자서 말썽을 부렸던 일보다 <우리>라는 단어가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저질렀던 그녀의 엉뚱한 장난에 대한 얘기였다.
"우리가 누구요?" 그녀가 또다시 <우리>라는 말을 하자 닉이 물었다.
"오, 피...친구예요." 갑자기 죄지은 눈을 하고 그녀가 더듬거렸다.
"남자친구겠지, 물론"
"글쎄요, 그래요..."
"가족의 친구였소?"
그녀는 시간을 좀 벌어 보려고 냅킨으로 입술을 닦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친구는 아니었어요." 그의 눈길을 슬쩍 피하며 그녀가 애매하게 말했다.
믿을 수 없게도 닉은 <친구>라는 단어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는 매기의 발음을 듣고 사실을 알아챘다. "그럼, 적이겠군" 그가 한마디 했다. "핀? 당신과 콜은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단 말이오? 어떻게? 당신들의 할아버지가 말릴 수 없을 정도로 원수처럼 지내셨다면서?"
매기는 접시 위에 포크와 나이프를 가지런히 내려놓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할아버지는 전혀 모르셨어요."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핀과 나는... 어느 날 공원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둘 다 유모랑 같이 공원에 왔다가 유모 몰래 도망쳤죠." 그녀는 그때를 회상하며 빙그레 웃었다. "핀은 내 빵을 뺏은 뒤 날 오리 연못에 빠뜨렸어요. 나보다 더한 개구장이였죠. 그러고 나서 날 울보라고 놀렸어요. 그래서 나도 그의 무릎을 발로 차 연못에 밀어 넣었죠."
그녀의 목소리에 만족감과 미소가 섞여 있었다. 그녀는 연못에 빠진 핀의 천사 같은 얼굴이 충격적인 표정으로 변하던 것을 기억해 내고 킬킬거렸다.
"공원 관리인이 지나가다 우릴 보더니 냅다 소리를 지르더군요. 그래서 달아나 숨었죠. 그땐 서로의 이름도 알지 못했어요. 사실 알았어도 달라진 건 없었겠지만. 우린 말이 아닌 피로써 약속을 했어요. 그 후 계속 공원에서 만났어요. 아주 흥분에 찬 시간이었죠."
"얼마나 오래 계속됐지?" 그는 그녀의 얼굴에 스쳐지나가는 풍부한 표정에 매혹되었다.
"끝난 적이 없어요." 그녀가 어깨를 들썩였다. 여기까지 얘기를 했으니 끝까지 해야겠지. 닉이 핀을 바람둥이라기보다는 한 인간으로 인식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거야.
"우린 언제나 연락할 방법을 찾아내곤 했죠. 우리가 관계를 지속시키는 이상, 우린 가족이었어요...우린 둘 다 아무도 없었어요. 남자형제도 여자 형제도, 심지어 우리 나이 또래의 사촌도 없었어요. 우린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무도 몰랐소?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우린 사람들 앞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했어요. 서로에게 최고의 경멸을 던지기도 했죠...얘기하고 싶을 땐 언제나 단둘이 있을 때 했어요. 당신도 할아버지들을 봤죠? 우리도 그런 식으로 행동했어요. 만약 그들이 핀과 나 사이를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릴 갈라놓으려고 하셨을 테니까. 우리 사이가 아무리 순수했다 하더라도"
닉은 기쁨의 물결을 숨기려는 눈을 내리깔면서 포도주잔을 만지작거렸다. 지금은 핀과 결혼한 사이지만, 그들이 순수한 친구 사이였다는 사실에 그는 몹시 기뻤다.
"그렇게 오랫동안 서로 증오하며 살아온 게 이해가 안 돼요 툭 털어 버리고 용서하면 될 텐데!"
"아마 그렇겐 안 될 거 요."
"무슨 뜻이에요?" 그녀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없었던 일로 하기엔 다투는 걸 너무 즐기는 것 같더군"
"싸우는 걸 즐긴다고요?"
"그들은 이제 늙었소. 둘 다 자신들이 사랑했던 사람들을 잃은 고통도 맛보았소. 그러니 생활의 빈 공간을 무었으로 채우겠소?"
"말도 안 돼요!"
"그럴까? 두 분 다 재혼하지 않으셨소. 그들이 원하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업에 헌신하는 게 더 좋았던 거요. 사업이란 모름지기 경쟁자가 있어야 불꽃을 튀면서 발전을 하지. 매우 개인적인 불화로 시작된 싸움이 해가 갈수록 하나의 관습으로 발전한 거요. 만족스런 의식 같은 것으로...그들은 오늘밤에도 당신을 놓고 입씨름하는 게 즐거웠을 거요."
"당신은 자신이 무엇에 대해 얘기하는지 모르고 있군요." 매기는 단호하게 말하고 나서 잠시 망설였다. "그들은 아직도 핀과 내가 해외에서 만난 줄 알아요."
닉은 잠시 그녀의 어색한 표현을 곰곰이 생각했다. 하지만 왜냐고 노골적으로 묻진 않았다. "후식을 들겠소, 아니면 술 한 잔 더 마시겠소?"
"아일랜드 커피라면 마시겠어요. 내가 열두 살 때부터 패디는 <아일랜드 특별 커피>라며 아침마다 주셨어요. 그땐 내가 무척 어른스런 느낌을 받았죠. 사실 맛은 별로였지만 가족의 명예라는 견지에서 순순히 받아 마셨죠."
"아일랜드 커피로 마시지. 그리고...이젠 슬슬 오늘밤의 사업을 시작할 시간이 다가온 것 같군"
<7>
닉 포츤은 녹색 유니폼을 입은 두 명의 표정 없는 남자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비원은 무거운 강철문을 그들의 등 뒤로 조용히 닫았다. 매기는 잔뜩 긴장한 채 외부세계와 단절된 장소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둥근 천장으로 된 보석 저장실은 매우 넓고 조명도 밝다. 그런데도 은밀하고 폐쇄된 느낌이 그녀를 짓누르는 것 같다.
닉은 그녀가 몹시 난감해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비록 그 이유는 모른다 해도. "안전과 조심이 제일 중요하거든" 그는 이음새 없는 문을 가리켰다. "이 곳에도 에어컨이 있으니 질식할 염려는 없소...밤새도록 있어도 안전하오."
매기는 몸이 떨렸다. 그는 손에 든 무거운 열쇠 뭉치에서 맞는 열쇠를 고르며 수맣은 서랍이 달린 벽으로 돌아섰다. 밤새도록...도발적인 단어에 그녀의 마음이 흔들렸다. 닉 포츤과 이런 은밀한 곳에서 밤을 보낸다면 과연 어떨까? 그녀의 손가락이 분홍색 실크 핸드백을 움켜잡았다. 그만! 오늘밤 경솔한 판단으로 그만큼 바보짓을 했으면 충분해!
래스토랑에서 그가 사업을 시작할 시간이라고 말했을 때 매기는 성급한 판단으로 그가 유혹적인 발언을 했다는 듯 눈에 보일 정도로 화를 내고 있었다. 사업 이외의 다른 뜻은 없었는데도.
"보석 말이오, 매기. 난 보석에 관해 얘기했던 거요."
그녀는 곧 침착성을 되찾았다. "오, 그랬군요. 난 당신의 계획에 대해 얘기할 준비가 된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린 그 사업에 관해서도 정리할 게 있잖아요. 그렇죠, 닉?"
"당신이 생각했던 게 정말로 사업에 관한 거였소?" 그가 조롱하듯 웃었다. 그들은 둘 다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이죠." 뻔뻔스럽게도 순진한 척하며 매기는 달콤하게 말했다. "왜요? 당신은 내가 무슨 생각을 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에게서 주도권을 빼앗았다. 희미한 감탄의 빛으로 그의 눈동자가 빛났다.
"당신은 나의 연인이 되는 데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거요?"
"뭐...뭐라구요? 그녀는 희미하게 숨을 헐떡였고 혹시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아니면 잘못 해석한 게 아닌가 하며 눈을 깜박거렸다.
"당신이 그렇게 관심을 나타내 주어 난 무척 우쭐했소. 하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유부녀는 내 연인에서 제외되오. 당신은 아름다운 여인이오. 그러니 당신이 관심을 나타내면 다른 남자들은 무척 환영할 것이라 생각하오."
그는 매기를 달래듯 매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매기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화를 내야 할지 웃어버려야 할지. 그는 마치 십대 소녀에게 타이르듯 매기에게 말했다. 손해라는 것을 잘 아는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갑고 거만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분노로 이글거렸다.
그들은 잠시 포츤 공장과 소매점을 둘러보았다. 매기는 오늘같이 이상한 저녁을 보내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한편으로 몹시 싫기도 했다.
닉은 보석이 담긴 서랍을 몇 개 꺼내 저장실 한쪽 면을 차지하는 윤이 나는 벤치 위에 올려놓았다.
"어떻소?" 그가 그녀에게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제 완전히 평정을 되찾은 매기는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실크 장갑으로 감싸인 그녀의 팔꿈치가 그의 짙은 색 슈트를 스쳐지나갔다.
"오, 정말 예쁘군요!" 아름다운 보석들은 많이 보아 왔던 매기도 눈앞에 있는 보석 세공품에 넋이 빠졌다. 산체스는 보석을 날렵한 금과 은, 그리고 백금으로 장식해 놓았다. 깔끔한 선처리가 보석의 풍부한 반짝거림을 완벽하게 살려 주고 있었다.
"당신이 좋아할 거라고 말했잖소." 닉은 벤치에 붙은 직사각형 거울들 중의 하나를 매기에게로 돌렸다. "먼저 한번 해보는 게 어떻소? 이게 어떻소?"
그는 심미안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매기는 여전히 그에게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그가 고른 것과 다른 것을 지적했다. 아주 평이한 금줄에 사각으로 커트된 에레말르 목걸이를.
"그건 쇄골이 좀 덜 튀어나온 여자에게 어울려요."
"당신은 정말 최악의 세일즈맨이에요. 내가 좋아하는 걸 도와주기는커녕 훼방만 놓잖아요."
"이렇게 하다간 여기서 밤을 새겠소...아니 어쩌면 그게 당신의 의도인지도 모르지. 당신은 내가 타협해 주길 바라는 거요, 콜 부인?"
"그 농담은 별로 재미있지가 않군요, 포츤씨"
그가 입을 벌리고 히죽 웃었다. 갑자기 그녀는 으쓱대는 젊은 권투선수를 보는 것만 같았다.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이상은 그렇지."
"난 연인이 아니라 보석을 고르는 거예요. 그리고 연인을 구한다면 좀 더 탁월한 사람을 고를 거예요."
그의 눈동자가 모욕을 받아 가늘어졌다. "난 탁월하다기보다 정직한 사람이오, 어떤 경우에도"
"안됐지만 당신은 탁월하지도 않아요. 공갈, 협박, 폭력에 대한 위협은 올바른 시민이 하는 행동이 아니죠. 게다가 정직한 사람은 결코 사회적 지위를 위해 딸을 팔진 않죠."
"난 로리를 팔지 않소!" 그의 격렬한 목소리가 강철로 된 둥근 천장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당신이 신중하게 고른 푸보자들 중의 한 사람과 결혼시키려고 그녀에게 압력을 가하잖아요."
"난 그 아이에게 압력을 가한 적이 없소. 결혼을 생각하기엔 그 애가 너무 어리다는 것뿐이오. 로리가 인생의 동반자를 고를 수 있는 능력이 될ㄸㅒ까지 경험을 쌓을 필요가 있다는 거요."
"오, 당신 말은 잠자리 경험을 먼저 해도 좋아는 뜻인가요?
"아니오!" 그의 얼굴이 분노로 붉으락푸르락 했다. "난 그런 성적인 경험을 말한 게 아니오. 인생 경험이었소. 그 아이는 지금까지 매우 보호받으며 자랐거든"
"그게 누구 잘못인데요?"
"내 말은 보호를 했다는 거지 과잉보호란 뜻은 아니오." 힘들게 분노를 억누르며 그가 잇새로 내뱉었다.
"알았어요. 당신은 그녀가 17살에 머물면서 30살처럼 행동하길 바라는군요. 아주 논리적이에요, 닉. 게다가 현실적이고요. 달이라도 따달라고 울어 보지 그래요?"
통렬한 그녀의 빈정거림에 대한 반응은 아주 조용했다. 닉은 난폭하게 가슴에 팔짱을 끼는 걸로 분노를 나타냈다. "그냥 모른 척하기엔 당신의 보석들은 너무 아름다워요." 매기가 딴전을 피웠다.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한 그녀를 닉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밀폐된 공간에서 그의 시선을 받고 있자니 그녀는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이윽고 닉이 미소를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우린 위험한 장난을 즐기는 것 같군. 내가 옳았다는 걸 인정할 준비는 됐소?"
"뭐에 대해서요?"
"이건 당신에게 완벽하게 어울릴 거요." 그는 눈물 크기만 한 세 개의 루비가 박힌 매우 얇고 섬세하게 세공된 금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당신의 장점을 돋보이게 해주고 단점을 숨겨 줄 거요."
"장점? 내게는 그런 면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몰랐는데요?" 매기가 재잘거렸다. 그녀는 목덜미를 스쳐지나가는 그의 손가락을 무시하려고 애를 썼다. 그가 일부러 만지는 건 아닐까? 무슨 목적으로? 그는 그녀의 등 뒤에 딸 붙어 서 있었다. 그녀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그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넓고 단단한 어깨가 그녀를 틀처럼 감싸고 있는 게 거울 속에 비쳤다.
"끝냈소, 매기!" 그는 드디어 목걸이를 채웠다. 그러나 뒤로 물러서지 않고 그녀의 맨어깨에 커다란 그의 손을 가볍게 얹었다. 가늘고 검은 드레스 끈이 갑자기 살을 태우는 듯했다. 그가 손을 움직이면 어떻게 될까. 그가 끈을 끌어 내리면...? 거울 속에서 닉의 눈과 마주친 그녀는 눈을 깜박거렸다. 자신의 상상에 그녀는 입 안이 말랐다.
놀란 토끼눈을 한 그녀를 보고 그는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크림빛 피부 위에 걸쳐진 금목걸이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그녀의 드레스 바로 위에 걸려 있는 루비가 있는 곳까지.
"당신도 보이지?" 그가 그녀의 머리카락에 대고 중얼거렸다. "완벽해. 당신은 매우 아름다운 가슴을 지녔어. 부드럽고 풍만하며 따뜻해"
그의 손길은 노골적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가장 큰 루비가 달려 있는 곳까지 내려왔다. 매기는 숨을 멈췄다. 그 가벼운 손길이 그녀를 어지럽게 했다. 그녀는 떨리는 눈을 내리깔고 실크처럼 부드럽게 반짝이는 루비를 쓰다듬는 그의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보석 하나는 쳐다 봐 준데 대한 보답으로...세 개는 떠나기 싫어 꾸물거리는 데 대한 보답으로 주는 거요. 여성의 가슴은 매우 도발적인 신호요. 남자가 찬양할 수는 있지만...만질 수는 없는 거요. 그건 자제력에 관한 문제지."
그런데 그는 왜 자신의 말을 실천하지 않는 거지? 그는 여전히 루비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탱탱한 피부를 그의 단단한 관절로 쓰다듬었다. 그녀는 무릎이 후들거려 그에게 등을 기댔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흥분이 자신의 목과 얼굴로 번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숨이 막힌 듯 조그맣게 헐떡거렸다.
"닉..."
"내가 자제력에 대해 뭐라고 했소?"
"모르겠어요." 매기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애무로 인해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이 단단해졌다.
"이...이것과 한 짝인 귀걸이는 없어요?" 매기가 물었다.
"음, 여기 있소." 그가 귀걸이를 찾아 손을 움직일 때까지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자, 내가 해주겠소." 그녀는 그가 잘 볼 수 있도록 순순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들어 올렸다.
드디어 그는 루비 귀걸이를 그녀의 한쪽 귀에 걸었다.
"됐소."
매기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오, 그렇군요. 정말 아름다운 보석이군요." 그녀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붉게 빛나는 루비 귀걸이가 흔들리는 것을 감탄한 듯 보고 있었다.
"그럼, 선물 하나는 정해진 거요."
"두 개예요. 마크햄은 귀걸이, 패디는 목걸이"
"반지도 있소."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한 세트로 디자인된 것은 아니지만 아주 잘 어울릴 거요. 아마 당신 남편이 사주고 싶어할 거요."
그녀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 아니에요. 핀은 한 번도 내게 반지를 사준 적이 없어요. 그도 내가 끼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결혼반지조차도?"
그녀는 우물 거렸다. "오, 물론 반지를 줬어요."
그가 그녀의 왼쪽 장갑의 부드러운 곡선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당신은 반지를 끼지 않았군."
그가 예전에 보았던 초조하고 방심한 듯한 동작으로 그녀가 왼쪽 손을 문질렀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반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꼭 당신의 결혼처럼 들리는군."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얼른 반지를 찾아냈다. "어쨌든 껴 봐요. 이건 산체스의 최고의 싱글 작품이오."
반지는 매우 아름다웠다. 다이아몬드로 하트형을 만들고 그 속에 두개의 루비가 박혀 있는 고전적인 스타일이다. 매기는 몹시 탐이 났지만 고개를 저었다.
"껴보시오." 그의 손이 그녀의 장갑을 벗기려 했다.
그녀는 포기했다. 그의 눈앞에서 장갑을 벗는다는 게 돌연 유혹적인 행동처럼 느껴졌다. 장갑이 팔에 꼭 맞아 벗는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아주 오래전에 의사에게 보여준 이후로 가족 아닌 다른 사람에게 그녀의 맨살을 보여 준적도 만지게 한 적도 없었다는 걸 깨닫고 매기는 속으로 무척 놀랐다. 그녀의 피부는 매우 부드럽고 민감했다. 그녀를 쓰다듬는 그의 약간 거친 손바닥이 좀 이상하기도 하고 자극적이기도 했다.
"당신은 사랑스런 손을 가졌소. 남에게 보여주지 못해 유감이군." 그는 천천히 그녀의 창백하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반지는 자로 잰 듯 손가락에 꼭 맞는다.
"이런 반지는 당신의 손을 좀 더 섬세하고 여성스러워 보이게 하지. 왜 그런 우스꽝스런 장갑 속에 숨기고 있었소?" 그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무너진 결혼의 추한 현실로부터 당신의 마음을 보호하는 것처럼 더러운 현실로부터 손을 보호하려는 거였소?"
그가 또다시 그녀를 조롱했다. 매기는 갑자기 그의 거만한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어졌다.
그녀는 조용히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 재빨리 다른 쪽 장갑도 벗었다. 그녀의 도전적인 눈동자는 고통과 승리감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그녀의 어둡고 도전적인 눈동자를 보고도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예의바르게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망설이지도 않고 매기의 반지 낀 손을 들어 그의 육감적인 입술을 눌러 왔다. 다른 쪽 손애도 똑같이 키스하는 것을 보고 매기는 숨이 목에 걸리는 것을 느꼈다. 그의 입술은 부드럽게 그녀의 흉터를 쓰다듬고 있었다.
"놔줘요! 가겠어요."
"당신 자신을 그렇게 극적으로 보여주고 나서? 당신은 내게 어떤 행동을 기대했소? 공포에 질린 창백한 얼굴? 강한 혐오감? 내가 멍청하고 둔감한 사람이란 걸 증명하고 싶었던 거요? 당신은 그렇게 어리석소?"
네...그래요..그렇다구요! 그녀는 닉에게서 가벼운 냉소밖에 기대한 게 없었다. 그녀의 고통스런 눈빛은 이제 찌를 듯한 분노로 변해 있었다.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닉은 부드럽고 단호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려 천천히 손가락마다 키스를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왼쪽 손의 상처를 보았다. 그의 표정엔 충격도, 염려했던 동정도, 미친 듯이 위로의 말을 찾으려고 애쓰는 기색도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소?"
"불이 났었어요...약간" 그녀는 내키지 않게 말했다. "열한 살 때"
"아직도 손이 아픈 거요?"
매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약간 마비가 되긴 했어요. 하지만 다섯 손가락을 거의 완벽하게 사용해요. 신경이 조금 상했었나 봐요. 지금은 흉터가 많이 줄어든 거예요."
"성형으로?"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원래만큼 좋아졌죠."
매기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는 그의 눈이 따스한 빛을 띠었다. "장갑을 끼는 건 의학적인 필요에 의해서요, 아니면 그냥 눈에 띄는 복장으로 과시해 보려는 스타일일 뿐이오?"
"오, 물론 두말 할 것도 없이 후자죠." 자신감을 되찾자 그녀가 흔쾌히 말했다. "사람들이 한쪽 눈으로 힐끔거리며 어색한 질문을 하는 건 참을 수 없으니까요. 게다가 매우 독창적이잖아요."
"알만하군. 그런데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매기?"
"모닥불을 지펴 놓고 깡통에다 요리를 하고 있었어요. 우린 누가 책임자가 될 것인가로 다투고 있었죠. 서로 밀고 당기로 했어요." 그녀가 울적하게 어깨를 들썩였다. "...그건 내 잘못이었어요. 언제나 내 뜻이 옳다고 주장했었죠."
그녀의 친밀한 애정 표현으로 닉은 <우리> 중의 나머지 한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 그의 어깨가 긴장했다. 그는 콜을 생각하면 언제나 치솟는 분노의 불길을 억제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콜이 당신을 불 속으로 밀었소?" 그가 시납게 물었다.
"아니에요! 말했잖아요, 우린 둘다 밀고 당겼다구요. 그의 도움 없이도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증명해 볼 작정이었어요. 그런데 깡통이 넘어져 불이 났어요. 우린 물도 가진 게 없었어요. 그래서 핀이 팔로 불을 꺼야만 했어요. 그에게도 팔에 조그만 상처가 남아 있어요."
"맙소사, 손으로 불을 껐단 말이오?" 처음으로 닉의 충격을 나타냈다. 그는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고 자신의 넓은 가슴에 갖다 댔다. 그녀는 닉의 격렬하고 불규칙적인 심장고동을 느낄 수 있었다.
"난 핀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하게 했어요." 매기는 계속 핀을 감싸 주려고 노력했다. "그가 관련됐다는 걸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어요. 난 충격을 받는 상태였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순간에는 별로 고통을 느끼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둘 다 많이 다친 건 아니라고 판단한 거죠."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단 한명의 목격자가 콜이었다는 사실을 패디가 알았다면 그는 아마 미쳐 날뛰었을 거예요. 할아버지는 누가 잘못했는지, 핀이 얼마나 도와줬는지 하는 건 상관도 안 하시고 핀을 과실치사로 고소했을 거예요. 아니면 최소한 우리를 서로 다시는 만날 수 없게 했을 거예요. 내가 거의 다 낫자, 패디는 어리석은 짓을 한 대가로 내게 지옥을 맛보게 해주었어요."
"난 그를 비난하는 게 아니오!" 닉은 마치 그녀의 보호자인 것처럼 말했다."콜이 처벌을 면제받고 있는 동안 당신 혼자 곤란한 일을 겪었잖소!"
"완전히 그렇지는 않아요. 사실, 나보다 핀이 훨씬 더 오랫동안 그 일로 괴로워했다고 생각해요...남자들은 어떤 관계의 커플이든 간에 파트너에 대한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여기거든요. 핀도 단순한 여자 친구였으면 더 잘 보호해 줬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럼 그렇게 해줬어야지!"
닉이 자신이 옳다는 듯 으르렁거리는 것이 그녀에겐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는 단지 열한 살이었어요, 닉. 그리고 누구도, 가장 친한 친구조차도 그때 매기 도노반에게 핀보다 더 잘해 줄 수는 없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도 그렇겠지, 좀 의심스럽긴 하지만" 그가 메마르게 말했다. 닉의 호전적인 분위기는 매기의 미소로 인해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콜은 아직도 당신의 흉터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있소?"
"그가 양심의 가책 때문에 날아 결혼한 거냐고 묻는 거라면 프로이드 박사님, 대답은 <노>예요!"
"그럼 그는 왜 당신과 결혼한 거예요?" 그가 부드럽게 물었다.
"왜냐하면 그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 방법밖에 없었다니? 그가 당신을 침대로 끌어들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나?"
그의 통렬한 비꼼은 예상 밖의 결과를 초래했다. 매기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5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핀은 한 번도 그녀를 침대로 유인한 적이 없었다!. 그녀의 이유를 알 수 없는 웃음이 몹시 불쾌한지 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매기는 웃음을 꾹 참으며 반지를 뽑아 아쉬운 듯 있던 자리에 다시 갖다 놓았다.
"내 선물은 핀이 직접 고르게 할 생각이에요." 그녀가 서둘러 말했다. "그는 우수한 안목을 가졌거든요." 뭐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그녀는 꼼지락거리면서 장갑을 다시 꼈다. 닐처럼 날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마치 내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다른 보석들도 벗어 놓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이젠 당신 거요."
"할아버지 수표가 부도수표가 아닌지 어떻게 알고요?"
"난 그들의 돈이 얼만이지 마지막 일원 까지 알고 있소. 게다가 그들은 남자의 명예는 바로 약속을 지키는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지."
그의 발언은 마크햄과 패트릭을 제대로 표현한 말이었다. 순간 매기는 자신의 임무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뛸 듯이 놀랐다. 그녀는 툭유의 오만한 몸짓으로 텃을 치켜들었다. "그 주식으로 무얼 할 작정이세요, 닉?"
"내가 그걸로 무얼 했으면 좋겠소?"
그녀가 거칠게 그를 바라보았다. "유혹하지 말아요."
그의 눈동자가 번득였다. "어떤 정보가 당신에게 가치가 있는 거요, 매기?"
"난 이미 값을 치렀어요, 독선적인 까다로운 사람과 길고 지루한 저녁으로!"
"턱을 그렇게 치켜들지 마시오, 매기. 나같이 늙은 권투선수와 함께 링에 있는 건 괜찮지만 말이오. 안 그러면 턱이 부러지기 십상일 거요."
매기는 머리를 홱 젖혔다. "잘 처리할 수 있소이다, 늙은이"
"지금은 당신이 유혹하고 있소."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경고로 가득 차 있었다. "난 90세 이하의 다른 모든 남자들처럼 당신의 발밑에 엎드릴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는 머리가 혼란한 바보가 아니오. 난 어떤 기본적인..."
"알아요, 충분해서 넘칠 정도로 여러 번 내게 말했잖아요. 나도 당신을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 당신도 날 건드리지 말아요...친구"
"그럼 은근한 검은 눈동자와 야한 드레스, 그리고 부잣집 가련한 소녀의 연기는 어떻게 된 거요?"
"연기가 아니에요!"
다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돌연 저장실에 또다시 뜨겁고 숨막히는 공기가 흘렀다.
"아니라고?" 그가 달콤하게 말했다. "당신은 정보를 원해...하지만 그보다 나를 더 원하고 있소."
네, 그래요! 매기는 격렬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루비가 그의 손길로 인해 뜨거워진 턱에 와 부딪혔다.
"난 당신을 화나게 만들었소. 게다가 당신을 여자로 느끼게 만들기도 하지. 당신의 남편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콜은 포획자요. 그는 가질 수 있는건 뭐든지 손에 쥘 거요. 사람들이 기꺼이 그가 가지도록 내버려 두는 건 뭐든지. 하니만 내 딸은 안 되오. 난 그의 훌륭한 성품에 대한 당신의 아이 같은 믿음을 할께 할 생각은 없소. 난 손에 쥘 수 있는 모든 주식을 사들일 작정이오. 그것이 내게 지렛대 같은 역할을 해줄 거요. 그러나 주식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로리를 떠나야겠다는 확신을 심어 주지 못한다면, 그땐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를 파멸시킬 거요. 그의 평판이 다시는 회복되지 못하게 만들 자신이 있소. 그의 친할아버지까지 그를 막지 못하게 할 거요. 당신이 계속 그의 옆에 서 있을 생각이라면, 매기.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이번에야말로 불장난을 하다가 손을 델 사람은 콜뿐이오."
"당신은 내가 그를 버렸으면 좋겠죠, 그죠?" 그녀가 신랄하게 말했다. "맙소사, 결혼에 대한 당신의 청교도적 견해는 어디로 갔죠? 당신은 우리가 갈라서길..."
"난 당신이 자신이 하기로 결정한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길 바라오."
"대단히 유익한 충고에 감사드려요! 내가 핀에게 당신 말을 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이 그러길 바라오. 당신이 그를 떠나면..." 그가 어깨를 들썩였다.
"그를 쓰러뜨리는 게 훨씬 더 쉬워지지."
"핀을 떠나서 어디로 가요...당신에게? 당신은 그렇게 되면 좋겠죠, 그렇죠? 그렇게 되면 당신의 복수극이 완벽하게 되니까" 그녀의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거렸다.
부정의 뜻으로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을 때 그녀는 뺨을 한대 맞은 것 같았다. "난 남편과 그의 아내 사이에 끼어들긴 싫소."
그녀의 불신에 찬 웃음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 우리의 결혼을 깨뜨리려 하고 있잖아요."
"당신이 말한 그런 방식은 아니란 뜻이오." 그가 가까기 다가왔다. "당신이 자유롭게 되면 나도 거절하지는 않을 거란..." 그는 매기의 커다란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서투르게 인정했다. 그리고 그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루비는 그녀의 목과 가슴에서 잔잔한 빛을 발하고 있었고, 그녀의 장미 향수는 마치 안개처럼 그를 감싸고 있었다. 한 번도 녹아웃이라는 걸 몰랐던 닉 포츤이 갑자기 강펀치를 얻어맞은 듯 비틀거렸다. 그의 머리는 어질어질해졌고, 몸은 흐물흐물해져서 넘어지지 않으려면 매기를 잡아야만 했다. 그는 그녀가 기억에 남아 있을 만큼 달콤한지 알아야만 했다...
"매기..."
그녀는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그를 취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한번 맛보는 걸로는 충분하지 못했다. 그는 매기의피부에다 대고 유혹하듯 속삭였다. 그가 느끼는 흥분을 그녀도 함께 하자고 초대하듯 그는 선정적인 갈망을 늘어놓았다.
"만약 당신이 내 여자라면, 매기. 보석으로 당신을 목욕시켜 그 보석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입히지 않을 거요. 당신을 붉은 실크 시트 위에 눕히고 당신의 사랑스런 몸을 찬양할 거요. 얼마나 아름다울까...당신의 빛나는 흰 살갗과 당신의 귀에 달린 루비..." 그의 손이 그녀의 목을 감쌌다. 달랑거리는 무거운 귀걸이가 그의 손에 부딪쳐 왔다. "그리고 당신의 가슴 사이에도 놓여져 있겠지." 따스하고 거친 손바닥이 점점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리고 여기에도 보석을 달 거요... 그가 꿈꾸듯 중얼거렸다. 그의 손은 그녀의 허리까지 내려왔고, 그녀는 조그맣게 신음소리를 냈다. "오, 매기..."
닉은 그녀를 끌어나고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키스하고...키스하고...또 키스했다. 그의 입술은 몹시 급하고 격렬했다. 둥근 천장으로 된 저장실 안에서는 모든 소리가 크게 울렸다. 바스락거리는 옷 스치는 소리며 한숨소리, 그리고 두 사람의 열띤 중얼거림도. 그런데 갑자기 높은 음의 사이렌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떨어졌다.
매기는 격렬하게 떨면서 벤치에 기대섰고, 닉은 몽롱한 머리를 맑게 하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강철 문 옆에서 깜박거리고 있는 빨간 불을 쳐다보았다.
"경보장치요." 그가 허스키한 목소리고 말하고 나서 소리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드레스의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오, 맙소사, 그가 날 어떻게 생각할까? 그녀는 닉의 등이 잔뜩 긴장해 있는 것을 보고 기분이 약간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에게로 돌아선 닉은 이미 자제력을 되찾고 있었다.
"미안하오." 그는 매기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사과만큼이나 그녀를 놀라게 했다. "날 여자로 느끼게 하려고?" 매기가 질책하듯 말했다. 그의 길고 검은 속눈썹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매기는 그의 짙은 눈동자를 보는 순간 그가 왜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는지 알았다. 닉도 그녀만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닉" "그만, 매기. 일을 더 어렵게 만들지 맙시다. 내가 정신을 잃었던 거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요."
"당신은 다름 사람들에게 하는 것만큼이나 자신에게도 엄격하군요." 매기는 잃어버린 자신의 순진함을 애석해하며 슬픈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그녀의 모든 정열을 다 바쳐 사랑할 수 있는 남자를 기다려 왔다. 그러나 이 남자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뿐더러 그녀의 열정도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당신을 집까지 데려다주겠소."
"택시를 타고 가겠어요." 그녀가 망설이듯 말했다.
"바보처럼 굴지 마시오!" 마지막 서랍을 난폭하게 집어넣으며 그가 으르렁거렸다. "운전석에 앉아 있을 때는 성적 충동을 자제할 수 있소."
"안됐군요." "매기!" 날이 선 그의 목소리에 비로소 그녀는 자신이 큰소리로 중얼거렸다는 걸 알았다.
"좋아요, 좋다구요. 조용히 있겠어요.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 둬요. 이건 모두 당신의 생각이었다는 걸.
당신이 원하지만 않았어도 난 여기 오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소." 그의 간결한 수긍에 매기의 좌절감도 조금 누그러졌다.
"하나만 더 대답해 줘요?"
"뭐요?" 그가 인터폰 위에 손을 올린 채 멈춰 섰다.
"당신 정말로 붉은 실크 시트 위에서 자는 거예요?"
그의 대답은 알아들을 수 없는 투덜거림이었다. 그러나 문을 열어달라고 요구하는 그의 목덜미가 붉게 상기된 것만으로도 그녀에겐 충분했다. 닉 포츤은 그의 감각적인 환상을 사실에 근거를 두고 만든 것이다. 아마 바로 그 실크 시트 위에 누워서 창조해 냈을 게 틀림없다. 그가 그 비싼 시트를 버리려고 하지 않는 이상, 그는 매기를 잊어버리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녀도 그러길 바랬다.
<8>
"당신이 어떻다구요?" 매기는 커피 잔을 소리 나게 접시 위에 내려놓으면서 티 하나 없는 하얀 식탁보 위에 커피 얼룩이 지게 만들었다. "그녀는 임신했다고 말했어요." 얼룩을 훔치면서 샘이 도와주듯 말했다."우유 한 잔 더 드릴까요, 로리?"
소녀는 약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그녀는 소녀였지. 매기는 단호하게 생각했다. 사랑에 빠지기에 너무 어린 게 아니었어. 하지만 아직도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있는 아버지를 둔 아기에게 묶이기엔 너무 어리지!
"하지만..." 매기는 핀이 이토록 무책임하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로리도 마찬가지였지만. "로리...어떻게?"
로리의 얼굴이 핑크 빛으로 희마하게 물들었다.
"당신이 말하겠어요?" 샘이 비꼬듯이 중얼거렸다. "아니면 내가 할까요? 이런 거요, 매기.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샘, 저리가요! 우리가 당신에게 많은 양의 자유를 허락해 준다고 해서 당신이 우리의 모든 일에 끼어 들 수 있다는 아니에요! 해야 할일이 남아 있지 않나요?"
"일하고 있는 중입니다. 난 일요일 신문을 위해 일하는 스파이거든요."
"샘!"
그는 껄껄 웃으며 자리를 떴다. 신문! 만약 이 일이 새어나가면... 매기는 소름이 쫙 끼쳤다.
매기는 로리를 쳐다보았다. 아이 같던 푸른 눈이 갑자기 성숙한 여인의 눈빛을 띠고 있다.
"난 몰랐어요, 당신과 핀이...그러니까 당신을..."
로리가 초조한 미소를 띠고 매기를 도와주었다. "우리는 서로를 무척 사랑해요. 미안해요...난...우리는...그러니까, 우리가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말하긴 싫어요. 하지만 이런 위장극은 우리 두 사람에게 정말 힘든 일이에요. 그래서 뭔가 약속 같은 것으로 우리의 사랑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어요."
"아기는 가장 확실한 약속이죠." 매기가 메마른 어조로 말했다.
"오, 그건 사고였어요."
매기가 눈알을 굴렸다. "전에 어디서 많이 듣던 대사인데요?"
"진심이에요, 진짜로 사고였다고요."
로리는 정직하게 말했다. "당신도 핀이 어떤지는 알잖아요, 그는 내게 어떤 부담도 주지 않으려 했어요. 피임은 자기가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죠. 그리고 그는 언제나 조심 했어요." 로리가 유감이라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실패할 확률은 거의 없었는데도 우린...가엾은 핀,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자책을 할까!"
"그가 아직 모른다는 말이에요?"
매기의 커피는 거의 식어 있었다.
"오늘 아침에 나 혼자서 알아냈어요."
매기는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생각했다. "두 사람은 최근에 거의 함께 잠자리를 했군요."
로리는 고개를 숙여 금발머리로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네"
매기는 배신감이 느껴졌다. 그녀의 남편이 연인을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오랜 친구가...가장 가까운 친구가 그녀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씁쓸한 느낌으로 그녀는 지금껏 당연하게 여겨 왔던 핀의 충실함은 이제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직면했다. 그는 진정으로 로리에게 속한 사람이다. 이제부터 매기는 그녀 혼자서 자신의 문제에 부딪혀야만 했다. 그녀가 계속 핀과 공식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그들 셋 다에게 불공평한 일이었다. 그들 모두를 위해서 매기는 뒤로 물러서야 할 필요가 있다. 로리는 핀의 모든 관심을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이다.
"내가 고약한 부인처럼 굴었죠?"
매기는 테이블 너머로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미안해요, 너무 충격적이었거든요. 난 어른이고 당신은 아이였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 반대가 된 것 같군요."
로리가 푸른 눈을 둥그렇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당신 말은, 당신은 아직 한 번도?"
"한번도" 매기가 씁쓸하게 웃었다. "어떤 거예요?"
로리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웃음을 터트렸다. "굉장해요. 당신도 언젠가는 한 번 시도해 봐요... 핀하고는 말고"
"맹세하죠." 매기도 덩달아 웃었다. "그런데 왜 내게 먼저 말하는 거죠?"
"용기를 얻고 싶어서요." 로리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핀은 기뻐하지 않을 거예요."
그들은 둘 다 그 말이 무척 조심스러운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매기는 닉의 경고를 핀에게 말해 주었다. 그리고 핀이 무척 조심스럽게 많은 투자가들을 조사하면서 콜 주식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주식을 사들이는 방식이 무척 색달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관련이 없는 듯한 회사들이 조금씩 주식을 사들였지만 매기는 그들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닉 포츤!
불행히도 전후 사정을 모르는 패디와 마크햄의 행동이 소문을 더욱 부추겼다. 그들은 마치 두 마리의 상어처럼 등권가를 누비면서 서로의 주식을 사들이려고 애쓰고 있다. 게다가 서로에 대해 터무니없는 중상모략까지 하면서. 핀은 있는 힘을 다해 소문이 틀린 거라며 열심히 사태를 수습해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는 기뻐할 거예요." 매기가 기운차게 말했다. "처음에 그가 당신에 대해 애기를 하면서 당신이 그의 아이들의 엄마가 되길 원한다고 말했거든요."
"그랬어요?" 로리의 작은 얼굴이 기쁨으로 빛났다. 그러나 곧 사그라 들었다. "하지만 그는 좀 더 긴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그러길 바란다는 뜻으로 한 말일 거예요."
"그럼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당신은 아주 어리고, 또 일도 갖고 있고..."
"아이를 가진다고 해서 일을 포기하지는 않아요. 내가 원하던 방식으로 아이를 가전 건 아니라고 인정해요. 하지만 난 아이들을 좋아하고 언제나 여러 명을 가질 계획이었어요... 매기, 아기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화해시킬 방법이 없을 까요?"
닉이...할아버지라고! 억누를 수 없는 웃음이 그녀를 찾아들었고, 매기는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곧 두 여자는 격렬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매기는 그게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구분이 안 갔다.
"내 말은, 당신은 그런 일에 천재잖아요, 그렇죠?" 로리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아빠는 무척 엄격한 분이시니까, 아기는 아버지를 가져야 한도고 생각하실 거예요."
매기가 보석 저장실에서 만났던 남자는 전혀 엄격하지 않았다. 10일이 지났는데도 그녀는 아직도 밤에 잠을 설치고 있었다. 특히 그녀의 더블 침대를 위해 남몰래 붉은 실크 시트를 사고 난 뒤에는 더욱, 만약 그녀가 닉 포츤을 현실에서 가질 수 없다면 그녀는 꿈에서라도 그를 가질 수 있었다.
"그에게 어떻게 말할 거예요, 로리?"
"누구요? 핀... 아니면 아빠?"
"둘 다."
"모르겠어요. 그래서 당신에게 온 거예요. 적어도 핀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는지 조언해 주실 수 있잖아요."
매기는 로리가 그녀의 뜨거운 얼굴을 알아차리지 못하길 바라면서 얼른 승낙했다. 그녀는 로리에게 조언을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떻게 하면 당신의 아버지를 유혹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가 주저하지 않고 나와 사랑에 빠지게 마들 수 있을까? 핀과 로리가 함께 그에게 대항하려고 공모한 이상,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진 남자와의행복을 바랄 시회는 매우 희박하다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사실 모든 일을 제대로 정리해 좋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는데.
그들은 함께 핀이 집으로 돌아오길 기다렸다. 예상외로 핀은 조용하게 뉴스를 받아들였다. 그의 구릿빛 피부가 우윳빛처럼 창백해져서 매기는 핀을 그의 옆에 있는 가죽의자에 앉혔고, 샘은 그의 정신이 돌아오게 강력한 브랜디를 한 잔 가지고 왔다.
"기절해야 할 사람은 임심한 여자예요, 핀. 아버지가 될 사람이 아니라"
매기가 그에게 말했다.
자리에 똑바로 앉을 정도로 회복된 핀은 마치 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로리를 응시했다.
"핀?" 로리는 그를 염려하듯 말했다. 그녀의 마음이 눈동자에 나타나 있었다.
"맙소사, 로리"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눈은 로리의 편편한 배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아기? 우리의? 어떻게?"
매기는 샘이 히죽 웃으면서 입을 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그의 유머가 중요한 순간을 깨뜨리기 전에 얼른 그를 방 밖으로 쫓아냈다.
그러고 나서 돌아보니, 핀과 로리는 행복한 안개 속에 갇힌 것처럼 보였다. 시간은 많아. 매기는 속으로 생각했다. 로리는 아직 임신 3개월도 채 못 됐을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4주 정도는 시간이 남아 있다. 그 정도면 일을 수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은 이제 토머스 리치밖엔 믿을 사람이 없었다. 그는 아직도 되도록이면 짧은 시간 내에 이혼을 성사시키려고 노력중이다. 핀과 로리는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결혼할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사생아라는 건 요즘 같은 세상에 별로 불명예가 아니오." 핀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든간에 출생증명서에 내가 아버지라고 기재될 거요. 그 아이는 합법적인 나의 상속자가 될 것이오. 만약 포츤이 그의 협박을 수행한다면 우린 그게 얼마인지에 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아이에게 상속해 줄 게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테니까!"
"당신이 사랑만으로 가난하게 살아가는 게 상상되지 않는군요." 매기가 신랄하게 말했다. "당신들은 둘 다 온갖 사치를 누려 가며 살아왔어요. 도대체 어떻게 꾸려나가려고요?"
"우린 언제라도 할아버지 집에서 살 수 있소, 내가 다시 일어설 때까지." 핀이 태평스러운 말을 했다.
임신 소식이 그의 머리를 돌아버리게 한 게 틀림없다. "마크햄이 당신을 내쫓지 않으면 그렇겠죠." 매기가 말했다. "이혼한다면 곧이곧대로 받아들일지 모르죠. 하지만 또다른 임신한 신부는...그것도 당신이 아직도 나와 결혼한 상태인데? 게다가 닉이 당신을 파멸시킨다면 그는 우리들 모두를 파멸시킬 거예요. 마크햄도 포함해서. 우린 모두 살기 위해 구걸을 해야 할 판이에요. 적어도 당신은 나머지 우리들에 대해서도 걱정을 해야죠, 당신 자신에 대해서만 할 게 아니라" 그가 최근에 당한 괴로움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무척 불공평한 말이었다. 하지만 매기는 어떻게든 그의 대단한 자부심을 흔들리게 해주어야만 했다.
"나도 아빠가 아미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요. 그 이유도 알고요." 로리는 보호하듯 손을 배에 갖다 댔다. "핀과 난 우리 아이를 지킬 거예요. 그리고 일단 아기가 태어나면 아빠도 어쩔 수 없이 핀과 날 부부로 인정해 주실 거예요."
"당신이 부모하면, 로리. 당신은 이 일을 좀 다른 견해로 보겠지." 핀이 동의했다. "당신은 다른 부모들보다 아이들의 미친 짓을 참아 줄 거야."
매기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핀은 한 번도 닉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모양이다. 만약에 핀의 딸이 지금의 로리처럼 행동한다면 과연 그는 어떻게 행동할까?
이런저런 이유로 매기는 지금의 걷잡을 수 없는 사태를 막을 수 있을 만큼 제정신을 가진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결정했다. 핀과 로리는 앞으로 태어날 그들의 아기에 대한 생각으로 지내도록 내버려 두자.
매기의 첫 번째 일은 토머스 리치에게 전화를 걸어 일의 진척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의 소식은 별로 좋지 않았다.
"내가 아는 방법을 다 시도해 봤소." 그가 말했다. "당신이 아직도 무효화를 원치 않는다면 2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소."
"우리가 둘 다 원하고 있는 그런 간단한 이혼을 위해 2년을 기다려야 한다구요?"
"요즘엔 그리 간단한 이혼이란 없소, 매기. 그리고 이건 더 이상 이혼이 아니오, 결혼의 해약이지. 그래서 핀과 당신이 2년 동안 별거를 하며 떨어져 살아야 되오. 미안해요, 매기. 그 동안 나도 모두 방법을 다 동원해 봤지만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요."
"2년이라..." 매기는 작게 중얼 거렸다.
"모든 걸 저번 주에 핀에게도 말했소. 당신과 상의하지 않던가요? 그가 내게 서류를 준비해 달라고 해서 사인만 하면 되게 만들어 놨는데"
"그는 신경 쓸 데가 많거든요." 사실 그녀는 지난 몇 주 동안 거의 핀을 보지 못했다. 불쌍한 핀은 내가 패디와 마크햄의 분노를 원하지 않는 걸 알았기 때문에 이런 희생을 감수할 생각이었구나. 앞으로 2년 동안 핀과 로리는 죄의식 속에서 살아야 한다, 단지 매기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곧 아버지가 된다는 소식에 그가 졸도할 뻔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도 로리와 핀은 여전히 만족해하면서 용감하게 행동했다, 사생아에 대한 현대적인 견해까지 들먹여 가면서! 매기의 결심이 굳어졌다.
"우리가 무효화에 대한 생각을 바꾸면 어떻게 되죠?"
"하지만 핀은..."
"토머스, 당신은 내 변호사이기도 해요."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두 분으 의견이 맞지 않는다면..."
"로리가 임신을 했어요." 매기가 대담하게 말했다. 전화의 다른 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 알았소...무효화할 수 있지. 당사자들 간에 결혼의 미완료에 관해 동의가 되면 그 즉시"
매기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그게 얼마나 빠르죠?"
"두세 달 정도"
매기가 입술을 축였다. "별로 빠르진 않군요." 그때가 되면 로리는 눈에 보이게 임신한 표시가 난다. "미국에서는 좀 더 빨리 될까요?"
"그러면...하루나 이틀 정도면 해결되지."
"핀도 이 사실을 알고 있나요?"
그녀는 토머스가 전화르 ㄹ든 채 어깨를 들썩이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우린 그것에 관해선 얘기하지 않았소. 왜냐하면 순전히 시간낭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당신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자연스런 이혼이 좋다고 했잖소. 처음에 내 사무실에서 서둘러 이혼하는 걸 거부한 사람은 당신이오, 기억하겠지?"
매기는 그들의 이혼을 재혼과 거의 동시에 하자는 자신의 어리석은 제안을 기억해 내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비로소 핀에게 한 번도 진짜 선택권을 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모든 걸 자신의 방식대로 하길 원해왔다. 충실함과 사랑, 그리고 전적으로 불필요한 약간의 죄책감 때문에. 그녀가 그들의 결혼을 지퓌하게 내버려 두었던 것처럼 핀은 이번에도 그녀가 그들의 이혼을 지휘하게 내버려 둔 것이다. 처음으로 매기는 자신이 로리에게 약간의 질투를 했었다는 불쾌한 사실을 받아들였다.
매기는 죄책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빠르고 깨끗한 헤어짐을 허락하는 게 두려웠다. 왜냐하면 그 이후에 자신이 직면해야 할 허전함이 두려워서였다.
이제 매기는 그녀 자신의 행복과 인생에 대한 의미를 창조해야만 한다. 그녀는 등을 똑바로 폈다. 지금부터 시작하자.
"토머스...디즈니랜드에 가 본적 있어요?"
3일 후, 매기는 계획대로 일이 척척 진행되어 괜히 우쭐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자신과 토머스를 위해 숙박시설과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디즈니랜드를 거쳐 가는 비행기를. 그녀가 미국에 갈 때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두 장의 공술서에 사인을 받았다. 산부인과 의사와 곧 전남편이 될 사람에게서. 아직도 행복에 싸여 있는 핀은 공술서를 읽어 보지도 않고 사인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결혼해약에 관계된 산더미 같은 서류에도 사인해 주었다. 노커스는 이런 작은 속임수에도 반대를 했지만 매기는 그의 반대를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떠나기로 한 전날은 매기의 생일이었다. 옛날처럼 그녀와 핀은 마크햄과 점심을 먹고 저녁은 패디와 먹었다. 두 사람은 핀이 파산의 위험이 증가하고 있는 주식동향을 계속 모른 척한다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거라고 말했다. 언쟁이 격해지고 핀이 감정을 폭발시켜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매기가 그를 끌고 나왔다. 핀이 여전히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고 있을 때 매기는 잠시 동안 로리와 어딘가에 가 있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잠시 동안? 우린 아직 공식적으로 만나면 안 되잖아" 술 한 잔을 더 따르면서 그가 신랄하게 말했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 감기로 누워있어"
"감기? 한여름에?"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아프다는데 하는 말이 고작 그거요?"
"오, 아주 심해요? 마지막으로 봤을 때 어쩐지 얼굴이 창백하더라니"
"아주 나쁘오. 빌어먹을, 매기, 내가 있어야하는 건데. 내가 도와주어야 하는데!" 그는 한숨에 술을 탁 털어 넣었다.
"그러면 일은 더 악화되겠죠." 매기는 그녀가 그 일에 관해 뭔가를 하고 있다는데 감사해하면서 중얼거렸다.
핀이 술을 한 잔 더 따르며 그녀에게 다시 신랄한 눈초리를 던졌다.
"핀, 여기 앉아서 그렇게 술만 마시지 말고, 샘과 함께 클럽이나 뭐 다른 곳에 가는 게 어때요? 복잡한 일 따위는 잊어버리고"
"당신이 로리에게 가 있는 동안?" 핀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당신의 공주님은 하룻밤 정도 당신이 없어요 돼요, 장담하죠." 매기가 메마르게 말했닫. 이미 술을 몇 잔 마신 뒤라서 핀을 설득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매기는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침실로 올라갔다.
새벽 3시, 침대에서의 휴식은 오로지 그녀의 바람에 지나지 않았다. 매기는 경찰관에게 고소하지 말아 달라고 설득하면서 그에게 최대한 달콤하게 미소 지었다. "무척 죄송해요, 경관님. 그들은 사실 어떤 것도 파손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리고 이미 내가 주인들에게 수표를 끊어 줬어요, 게다가 아무도 다친 사람은 없잖아요. 그냥 젊은 사람들의 객기라고 생각하시고 없었던 일로 하면 안 될까요?"
"객기이긴 하오, 분명히" 백발이 히끗히끗한 경관이 말했다. 그는 넌더리가 난다는 눈빛으로 경찰서 벽에 기대서 있는, 흐트러진 모습을 한 세 명의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래요. 아까도 말했듯이, 경관님 죄송해요.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매기가 사죄하듯 말했다. 그리고 이를 갈면서 다음 말을 덧붙임으로써 피곤한 눈을 한 경관을 웃게 만들었다. "그리고 만약에 그들이 지금 죄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곧 그렇게 될 거예요."
잠시 후 각서를 쓰고 풀려난 세 사람을 매기는 그녀의 BMW로 데리고 갔다.
"미안해요, 매기"
매기는 샘의 뜰 수 있는 한쪽 눈을 바라보았다. "타요, 샘"
"고마워, 매기"핀은 비참하다는 듯 자신의 찢어진 셔츠와 쇄골이 부러져 치료하고 난 뒤 감은 하얀 붕대를 쳐다보았다.
"입 다물고 타기나 해요." 그녀는 마지막 사람을 향해 돌아섰다.
"내 차는 시내에 있소."
"그 차는 계속 그곳에 있을 거예요." 그녀는 닉 포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당신을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난 뒤에야 그 경찰관이 당신을 가게 해준 거예요."
"택시를 타겠소."
"지갑이라도 있어요?"
닉이 얼굴을 약간 찌푸렸다. "내 재킷에 있소."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주차장 말뚝에 재킷이 걸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나이트클럽에 있겠죠. 내 생각에 싸우면서 떨어뜨린 것 같군요. 타세요."
닉은 뒷좌석에 앉아 있는 두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들도 찌푸린 얼굴을 되돌려 주었다.
"정말!" 매기는 뒷문을 닫고 조수석 문을 닫았다. "타요,닉. 안 그러면 그 경찰을 데려오겠어요. 그렇게 되면 당신은 유치장에서 멋진 밤을 보내게 될 거예요."
"당신이 이럴 필요는 없잖소."
"알아요, 이건 내 마음에서 우러나온 친절이에요." 그곳에 사랑이 자리 잡고 있는 건 말할 것도 없고요! 얌전해진다는 건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그가 좋았다. 그는 오른쪽 눈 위와 입 가장자리가 찢어져 있었다. 그리고 오른 쪽 손가락은 붕대로 칭칭 감겨서 어깨에 거는 붕대에 매달려 있다. 의사는 그녀에게 진통제 한 통을 주며 세 남자 모두에게 사용하라고 일러 주었다.
"그들이 술을 조금 깰 때까지 기다려요. 왜냐하면 알코올이 부작용을 촉진시키거든요. 그리고 포츤 씨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마세요, 손가락을 붕대로 감을 때 그에게 주사를 놨거든요...양쪽 끝의 손가락 두개가 심하게 삐었어요. 아마 한 동안 고통스러울 겁니다."
맙소사, 그들은 서로를 죽일 뻔했어! 기어를 넣으면서 매기는 생각했다. 그녀는 화가 나서 클러치를 콱 밟았다. 차가 덜거덕거리자 그녀의 뒤에서 괴로운 듯한 신음소리가 들렸고. 옆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파도 싸요!" 그녀가 격분해서 소리쳤다. "도대체 당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나 알아요? 그것도 기관차 차고에서! 좀 더 사람들의 눈에 띄기 쉬운 곳을 찾지 못했어요?" 차 안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어떻게 시작된 거예요?" 침묵이 더욱 무거웠다.
"좋아요, 말하지 말아요. 알고 싶지도 않으니까"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신문에서 읽게 되겠죠. 당신들도 알겠지만, 폭력은 무지한 사람들의 도피처에요. 난 당신들 세명이 주먹을 사용하지 않고, 지성인으로서 대화로 서로의 다른 점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알코올이 사람을 상당히 단순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생각 못했군요. 몇 잔의 술이 당신들을 모두 야만인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당신들은 사람들이 날 무슨 전리품쯤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단 말이에요!"
뒷좌석에서 킥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 아니야. 우린 당신 때문에 싸운 게 아니었어, 매기. 로리 때문이었지."
물론, 로리 때문이었겠지! 누가 매기의 명예를 위해 싸우려 하겠는가? 그녀는 자신의 어리석은 추측에 당황한 나머지 몸이 뜨거워졌다.
"만약에 당신을 전리품으로 내건다면 내가 챔피언이 될 거요, 매기" 닉이 뒤로 기대면서 거칠게 말했다. "나는 전리품을 타러 온 모든 도전자들을 물리칠 거요. 당신도 그게 좋겠지, 그렇지, 허니?"
"그가 뭐라고 주절대는 거요?" 핀이 몸을 내밀며 물었다.
"주절대는 게 누군데!" 닉이 야유를 되돌렸다. "당신이 잘난 경호원이 뒤를 커버해 줄 때 떠들어댄 건 바로 당신이잖아"
"당신 말은 2대 1로 싸웠단 말이에요?" 매기가 놀라서 닉의 말을 가로막았다.
"난 단지 그들을 말리려고 한 것뿐이야" 샘이 사납게 항의했다. "난 순전히 방어만 했단 말이야. 그들은 둘 다 날쳤어!"
"당신은 핀을 대신해서 싸웠겠죠, 그를 부추겨 가면서. 비열하게 당신들 두 사람은 한 사람과 싸운 거예요." 매기는 박절하게 말했다. 거의 드라이브가 끝나갈 즈음 그녀는 무릎 위에 무거운 손이 얹혀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팔꿈치로 손을 밀어내려 했으나 닉은 단호했다. 그가 뽐내듯이 히죽 웃는 것을 보고 그녀는 포기했다. 걱정스럽게 백미러를 힐끗 쳐다보았으나 핀은 자신의 생각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지 못했다. 닉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에 따듯함을 더해 주었다.
매기는 닉을 데려다 주기 전에 두 주정뱅이를 집에 내려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핀과 샘은 홀로 들어가는 회전문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계속 돌고 있었다. 그들은 아마 내일 아침이 돼도 저러고 있으리라. 그러니 잠겨진 문을 어떻게 열 수 있겠는가!
"여기서 기다려요." 그녀는 닉에게 엄하게 말하고 나서 밖으로 나왔다.
"물론, 예쁜 자기" 그녀에게 은근한 눈빛을 던지며 닉이 똑똑히 않게 말했다.
"집" 그가 순종하듯 따라 말했다 그녀가 문을 닫으려 하자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작별 키스는?"
매기는 단호히 돌아서서 핀과 샘이 회전문을 통과할 수 있게 도와주러 갔다. 안전 자물쇠를 열고 승강기 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비틀거리며 그들의 뒤를 쫓아오는 닉을 발견했다. 그녀는 닉을 밖에 두고 다시 되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마치 길 잃은 강아지 모양 다시 그녀를 따라 왔다. 얻어맞은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 그리고 단추가 다 떨어져 억센 가슴이 들여다보이는 셔츠. 그의 검은 바지도 핀처럼 얼룩으로 더러워져 있었다.
"당신은 차 안에 있으라고 말했잖아요." 그가 이마를 찌푸렸다.
"그랬나? 언제?" 닉은 그녀의 대답에 흥미가 없는 눈을 감고 승강기의 벽에 머리를 기댔다. 매기는 버튼을 눌러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했다. 그녀는 꼴 사납고 기진맥진한 트리오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밤새도록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할 것 같다. 그래서 매기는 닉을 그의 집 문 앞에 갖다 버리기 전에 술을 조금이라도 깨게 해야 되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들이 아파트로 들어가자 핀은 신음소리를 내며 비틀비틀 그의 침실로 들어가 버리고, 한쪽 눈이 완전히 충혈된 샘은 매기에게 싱긋 웃어 보이며 커피를 끓이겠다고 했다. 그러나 부엌이 어디 있는지도 기억 못하는걸 보고 그녀는 친절하게 가서 쉬라고 말했다. 샘은 몹시 고마워하며 핀의 뒤를 따라 사라졌다.
닉은 부엌 한가운데에 흔들흔들거리면서 매기가 커리 원두를 꺼내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기운차게 분쇄기의 단추를 누르자 그의 표정이 괴로운 듯 일그러졌다.
"당신 모습 정말 지독해요." 그녀가 만족스럽게 말했다. "넘어지기 전에 앉는 게 어때요?" 그러자 그는 의자가 부서질 정도로 털썩 주저앉는다.
닉의 흐릿한 눈동자가 그녀의 모든 움직임을 따라다녔다. 잠시 후 그녀는 그의 앞에 블랙커피를 내놓았다.
"자, 마셔요." 그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그녀가 내뱉듯 말했다.
"난 커피를 마시고 싶지 않소."
매기는 화가 났다. "그럼 왜 거기 앉아서 내가 커피를 만드는 수고를 하게 내버려 둔 거죠?"
그가 황홀할 정도로 근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그의 눈동자가 생각한 만큼 흐릿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닉, 뭘 원하는 거예요? 들어오겠다고 고집부린 사람은 당신이에요, 닉?"
"내가 뭘 원하냐고?" 그는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당신은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어, 매기"
"알고 있다면 묻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의 눈동자가 열기를 띠고 있었다.
"당신"
"나?"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는 취했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다구. 그를 부추기면 안 돼. 이런 무방비 상태에 있는 그에게서 정보를 얻으려 하는 건 정말 나쁜 짓이야. 그녀의 가슴은 더욱 빠르게 고동쳤다. "날 원한다고요? 왜요?"
"왜냐하면" "왜냐하면?" 더욱 가까이 다가가서 몸을 반쯤 숙인 채 그녀가 숨을 멈췄다. 옳은 방법이든 아니든 간에 그녀는 알아야만 했다.
"왜냐하면 난..." 그의 얼굴에 놀라는 표정이 스쳐지나가며 그가 말을 멈췄다. "당신은 마녀니까, 매기 콜" 그가 계속 몽롱하게 말했다. "내 생각에 난...내가..." "당신이 뭐요?" 그의 갈팡질팡하는 말 때문에 그의 목을 조르고 싶은 정도였지만 그녀는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로 가장해 말했다. 그는 나와 사랑에 빠졌다고 말할 작정인 걸까? "내겐 말해도 돼요. 당신의 비밀을 지켜 주겠어요, 닉" "난...나...눕고 싶어..." 그는 우아하게 의자에서 바닥으로 미끌어졌다.
<9>
매기는 귀의 압력을 풀어 주려고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그녀의 옆좌석에서 조그맣게 코를 골고 있는 토머스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는 디즈니랜드의 스릴을 맘껏 맛보고 난 수 탈진한 채 로스엔젤레스에서 부터 거의11 시간 동안을 자고 있었다.
매기는 자신의 새로운 독신 상태로 인해 야기된 불안함 때문에 11시간 동안 내내 깨어 있었다. 재미없는 영화를 두 편이나 보고 맛도 없는 식사를 세 번이나 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의 마음속에 그녀만의 디즈니랜드를 가진 것 같이 느껴졌다. 기분이 좋아졌다가도 다음 순간 가라앉는 것이다.
참는 건 그녀의 미덕 중의 하나가 아니라서 매기는 핀에게 돌아가서 깜짝 놀라게 해줄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들의 결혼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격식을 갖춘 서류가 그녀의 손에 쥐어지자마자 그녀는 판사 사무실에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음에 그녀는 핀이 또 기절했다고 생각했다. 그가 말할 수 있게 되자 핀은 그녀의 따분한 농담에 화가 난다고 말했다. 토머스가 그에게 확인시켜 주었어도 그는 계속 약간의 충격과 분노가 뒤섞인 상태였다. 핀은 토머스가 적어도 자기의 의견을 물어 왔어야 했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나 매기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그의 안도의 한숨을 추측할 수 있었다. 책임감이라는 무거운 짐이 그에게서 업어졌다는 안도감도. 미칠 듯한 서글픔과 기쁨이 전화선을 타고 서로에게 전달됐다. 그것은 둘 다 어린 열정으로 밀어붙인 위대하고 영광스런 게임의, 한 시절의 종말을 의미했다. 이제는 둘 다 성숙해져야 할 시간이었다.
매기는 지금 자신이 성숙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매우 젊고 불안하다고 느꼈다. 마크햄과 패디는 분통을 터트릴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위협은 때가 늦었다. 매기가 두려워하는 사람은 닉이었다.
5일 전 그날 밤, 닉이 그녀의 부엌에서 잠들었을 때, 매기는 있는 힘을 다해 그를 거실로 데리고 갔다. 붕대를 감은 팔을 조심하면서 가죽 소파 위에 그를 내려놓았다. 소파는 길었지만 좁ㅇ서 그가 돌아누우려고 할 때 떨어지지나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녀는 쿠션으로 그를 파묻고, 신발과 양말을 벗기고 난 뒤 부드러운 담요로 푹 싸주었다.
그녀는 잠시 동안 그의 옆에 앉아서 그의 넓은 가슴이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의 단호한 얼굴의 부드러운 선을, 그가 깨어 있으면 절대로 하지 못할 그런 노골적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매기는 그의 육감적이고 부드러운 입술에 달콤하고 미련이 남은 듯한 키스를 하고 나서 마지못해 침실로 갔다.
겨우 잠이 들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또다시 잠에서 깨나야만 했다. 밖은 밝았지만 아직도 일렀다. 매기가 보통 일어나는 시간보다 무척 이른 시간이었다. 특히 어제 같은 밤을 보내고 난 뒤에는 더욱.
그녀는 커튼을 열고 있는 흐릿한 모습을 잠에 취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침대로 곧바로 쏟아지는 따스한 여름 햇살 때문에 눈썹을 찌푸렸다. 은은한 커피 내음도 그녀를 달래지 못했다.
"제발, 샘. 어제의 바보 같은 일에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껴서 그러는 거야?" 얼굴을 베개에 파묻으며 그녀가 졸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냥 용서된 걸로 생각해. 그러니 날 좀 자게 내버려 둬"
"샘? 당신을 깨우는 게 보통 그 남자요, 매기?"
매기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면서 그녀는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올렸다.
"닉! 여, 여기서 뭘 하는 거예요?
"나의 여주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떠나 버리는 건 극도로 나쁜 매너라고 생각해서요...특히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무척 친절하고 사랑스럽게 보살펴 주고 난 뒤에는 더욱. 내가 커피를 끓였소." 그는 테이블 위에 컵을 내려놓았다.
"부엌에서요? 샘은 다른 사람이 부엌을 어질러 놓는 걸 무척 싫어해요."
"샘이나 당신 남편이나 한동안은 일어나지 못할 거요. 그리고 깨어났을 때는 지독한 숙취로 고생 좀 할 거요."
"그럼 당신은요?" 그녀는 커피를 무시하고 그에게 물었다. 매기는 단지 그가 떠나 주길 바랄 뿐이었다. 닉은 어깨에 건 붕대를 풀고 너덜너덜 찢어진 셔츠도 벗고 있었다. 상반신을 벗고 있는 그의 모습은 무척 충격적이었다.
"난 그렇게 많이 마시진 않았소."
"당신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는걸요. 그리고 당신은 바닥에 곯아떨어졌어요."
"그건 술 때문이 아니라 주사약 때문이었소. 난 확실히 당신 남편이나 그의 유모만큼 취하진 않았소."
그의 경멸적인 어조가 그녀를 화나게 만들었다. "취하지 않았다면 왜 싸움에 응한 거예요? 당신은 그냥 걸어나갈 수도 있었잖아요. 만약 당신도 핀이 자신이 하는 말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걸 알았다면요. 핀은 취해 있었으니까"
"그가 책임이 없었다고는 말하지 않았소, 취해 있었다고 말했지. 그리고 나도 모욕을 참을 만큼 참다가 폭발한 거요. 하지만 난 결코 자제를 못할 정도로 미치지는 않소. 또 그렇게 할 수도 없고. 왜냐하면 내 기술로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기 때문이오. 그래서 술을 마실 때면 언제나 주량껏 마시지. 프로 권투선수가 되고 난 이후로 싸움 같은 건 하지 않았소."
"오, 당신이 그를 예외로 만들었다는 걸 앎녀 핀이 우쭐 해하겠는데요." 매기가 비아냥거렸다.
"내가 술을 마시고 있었던 건 처음부터 그가 원인이었소. 그를 때리는 게 즐거웠다는 걸 부인하진 않겠소."
"겉으로 보는 것처럼 명예를 지키키란 힘든 일이죠." 매기는 그의 붕대 감은 손을 쳐다보았다.
"난 그의 턱을 부러뜨렸소." 닉의 회상하는 듯한 미소에 잔인한 만족감이 들어 있었다.
매기는 뒤늦게 깨달은 생각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무슨 뜻이에요, 당신이 술을 마신 게 핀 때문이었다니? 내 생각에...내 말은, 다른 사람과 함께 나이트클럽에 있었던 게 아니에요?'
"데이트를 했었냐는 뜻이오?" 갑자기 그가 침대 가에 올라앉았다. 그래서 매기는 그의 따스한 구릿빛 피부를 만지지 않으려고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앉았다. 닉이 자조하듯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아니, 난 다른 여자와 함께 있지 않았소. 난 일부일처주의자요, 매기. 한 번에 한 여자만을 원해 왔지. 그리고 이번에도 내가 원하는 여자를 이미 언급한 바 있잖소. 그 당사자와 대면하게 됐을 때 내가 왜 욕구불만을 해소시킬 기회를 놓치겠소? 분명 싸움은 내가 이겼지만 그는 여전히 전세를 주도하고 있소. 그가 아직도 당신을 가지고 있으니까"
매기는 침을 꿀꺽 삼키고 욕망으로 어두워진 그의 눈을 슬쩍 피했다.
"하지만...핀은 당신이 로리 때문에 싸웠다고 말했잖아요."
"그랬지. 결국, 당신과 나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뜻 아니오? 난 로리를 위해 그를 한 대 쳤소...하지만 다른 건 모두 당신 때문이었소."
매기는 소름이 끼쳤다. "당신은 그를 죽을 수도 있었어요."
그가 다시 자조하듯 웃었다. "그렇게 되면 내 문제는 해결이 되는 건데, 그렇지 않소? 하지만 난 내 힘을 잘 알고 있소. 링을 떠나면서 다시는 주먹을 쓰지 않겠다고 맹세했지. 당신도 내가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많은 일들을 하게 만들었소. 매기..." 닉이 다치지 않은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았다.
"우린 정말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여기 있으면 안 돼요."
"당신의 침실에? 당신의 침대 위에? 이건 당신 침실이야. 그렇지, 매기? 당신과 남편은 서로 다른 방을 쓰고 다른 의상실에 다른 욕실을 사용하지. 아무런 교류도 없어. 당신들 방의 연결 문조차 잠겨 있다고"
"이 염탐꾼!" 매기가 그의 손을 뿌리치며 비난했다.
"난 당신들의 정리정돈에 무척 호기심이 생겨"
"핀과 난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해요. 침대에서 좀 내려가 주시겠어요?"
"같이 있고 싶을 땐 어떻게 하는 거요? 문 아래로 초청장이라도 밀어 넣나?"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에요. 당신은 사무실에 나가봐야 되지 않아요?"
"오늘은 일요일이오." 그가 지적했다. "당신처럼 정역적이고 민감한 여자가 이런 메마른 삶에 행복해하는 걸 믿을 수가 없군."
"나...난 잠을 깊이 자지 못해요. 그런데 핀은 코를 골거든요." 매기가 즉석에서 지어냈다.
"시트와 상관있다고 생각하지 않소...당신의 잠버릇이?"
"무슨 뜻이에요?" 매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색깔 말이오. 그게 약간...당신에겐 좀 격렬한 색깔이잖소? 다른 것들은 다 잘 어울리는데 유독 이 시트만..."
"여러 해 동안 이걸 가지고 있었는걸요." 그녀는 그의 재밌어 하는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는 한쪽 눈썹을 올린 채 색이 바래지 않은 붉은 실크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나는 무척 신사적인 사람이라 당신을 거짓말쟁이라고 부를 순 없고"
"금방 그렇게 말한 거나 진배 없잖아요! 이젠 제발 좀 나가줘요."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잠자리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만약 셔츠도 입지 않고 당신 집에서 나간다면 무슨 소문이 나돌겠소?"
"내 옷이 당신에게 맞을지 의심스럽군요." 매기는 막상 그를 쫓아낼 수 있는 기회가 오자 왠지 망설여졌다.
"그렇군" 그의 눈이 그녀의 몸을 감싼 시트 위를 배회했다.
"핀의 것은 당신에게 너무 작을 거고" 그녀가 얼른 말했다. "샘에게서 얻어와야겠군요. 아래층에서 기다리는 게 어때요?"
"어젯밤은 내 일상에서 어긋난 날이었소." 그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당신을 내 일상 밖으로 몰아낼 수 있다면 난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닉이 그녀를 끌어안고 더욱 가까이 기대왔다. 그녀는 그를 밀어 내려고 닉의 맨가슴에 손을 갖다 댔다. 그것이 실수였다. 매기는 그의 미친듯한 심장고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어두운 눈동자 속에 메아리치는 욕망의 빛을 보며 그녀는 충동적으로 손을 움직여 그의 몸을 소리 없는 신음으로 떨게 만들었다. 닉은 그녀를 베개 위에 눕히며 달콤한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격렬한 반응이 그에게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의 뜨거운 입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매기는 희미하게 신음을 울렸다.
"매기!"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핀이 충격을 받은 얼굴로 열려진 침실 문 앞에 서 있었다.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방금 전만해도 닉의 검은 머리를 애무하던 매기의 손이 미친 듯이 그를 밀어내도 닉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일어나 앉았지만 아직도 그녀를 앉은 팔을 풀지 않았다. 매기는 핀의 얼굴을 몰래 살펴보곤 카멜레온처럼 그녀의 붉은 시트 색깔 사이로 숨어 버렸으면 하고 바랐다.
"무얼 하는 것처럼 보이나?" 닉이 도전적으로 말했다.
"매기?" 핀이 닉과 매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가 그를 머물게 했어요, 핀" 그녀가 약하게 항의했다. "그가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떠나 달라고 말할 수가 없었잖아요. 내가 어떻게 했어야 했죠? 로리에게 전화를 걸어 한밤중에 그녀를 끌어내라고요?"
"아니, 물론 아니오." 핀이 더듬거렸다. 그의 얼굴은 그가 감고 있는 붕대만큼이나 창백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잘 필요까진 없었잖아?"
"그러지 않았어요!" 매기는 격렬하게 부인했다. "맙소사, 핀. 생각 좀 해봐요. 어젯밤 이후로 생각할 머리라도 남아 있으면!"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핀은 머리를 문에 기댔다. "좋아, 매기. 미안해. 하지만 내가 들어왔을 때 그는 마치..."
매기는 감시 닉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강인한 몸에서 발산되는 긴장을 느낄 수는 있었다.
"당신은 그녀를 믿는 거요?" 닉의 불쾌한 목소리로 그녀는 그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녀를 믿소." 핀도 불쾌감을 나타내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내의 침대에서 반라의 남자와 아내를 발견하고서도 완벽하게 순수하다는 그녀의 말을 믿는 거요?"
"물론. 매기는 한 번도 내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소." 핀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매기를 홱 쳐다보았고 그녀는 핀의 눈을 피했다. "전에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지." 매기는 더욱 죄책감이 들었다.
"언제나 처음은 있는 법이지." 닉이 신랄하게 말했다.
"난 매기를 알아. 그녀는 결코 잘 모르는 사람과 쾌락을 위해 잠을 자진 않소. 당신도 예외는 아니지."
"매기와 난 모르는 사이가 아니오." 문가에 선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닉이 손으로 베개에 펼쳐져 있는 그녀의 검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린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친분이 두터워. 그렇지, 허니?"
"닉..." 그녀의 항의는 사그라들었다. 닉에게 호소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핀....당신 지금 모습은 끔찍해요. 다시 침대로 돌아가는 게 어때요? 나중에 다 설명해 줄게요, 우리 둘만 있을 때"
"그녀는 당신이 없어져 주길 바라고 있소, 콜" 닉이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전히 핀을 노려보면서 닉은 시트를 신경질적으로 구기고 있는 그녀의 흉터 있는 손을 쓰다듬었다. 매기의 비밀을 감싸는 닉의 친밀한 행동에 핀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매기!"
"그는 당신을 흥분시키려는 거예요, 핀. 물론 난 그와 자지 않았어요." 그녀가 절망적으로 말했다. "나도 뭐가 위험한지 정도는 알아요, 당신은 내가 그렇게 무분별하지 않다는 걸 알잖아요! 닉은 단지 당신을 화나게 하려고 빗대어 말하는 것뿐이에요."
"하지만 그녀에게 물어 봐, 콜. 그녀가 사실 그대로의 일을 좋아하는지. 당신의 아내에게 물어 보라고,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듯이 그녀가 당신을 사랑하는지. 그렇다면 그녀가 날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해서도 물어 봐!"
"닉..." 그녀의 목소리는 고통에 찬 속삭임이었다. 그는 알고 있었어. 그는 이런 이유 때문에 내가 그를 사랑하게 만들었어. 핀과 싸울 때 이용하려고.
"법적으로 그녀는 당신 사람이지, 콜. 하지만 그뿐이오. 다른 모든 면에서 그녀는 대 사람이야!" 닉은 충격을 받아 웅얼거리는 핀을 무시했다. "그녀는 아직도 당신에게 말로써 사랑의 표현을 하겠지...그건 속이 텅 빈 습관적인 말일 뿐이오, 게다가 어린 시절의 추억 때문이기도 하고. 당신은 친구로서 매기의 필요를 만족시켜 주었소, 하지만 남자로서는 아니오. 만약 그녀가 당신을 남자로 느낀다면 그녀는 결코 내게 그런 식으로 반응하진 못하오...마치 사랑에 굶주린 여자처럼, 만져지길 갈망하는 여자처럼..."
매기는 수치심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그녀를 마치 성에 미쳐서 그에게 사랑을 구걸한 부랑아처럼 표현했다. 오, 맙소사! 내가 그렇게 눈에 보일 정도로 뻔뻔스러웠을까?
"그럼 당신이 바로 그 남자란 말이오?" 핀이 야유했다.
"적어도 당신은 아니라는 거요. 그리고 매기는 그걸 깨닫게 되는 날 당신을 떠날 거요. 내 딸도 당신이 부와 지위의 호위 없이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다는 걸 발견하게 되면..."
"당신은 로리에게 부당한 일을..."
"그건 당신의 선택이오, 콜. 당신은 로리를 가질 수 있지. 그러나 그걸 포기하면 다른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소. 당신의 친구, 화려한 생활방식, 사회적 특권..."
닉의 통렬한 조롱은 타협의 여지가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매기...내가 계속 매기를 가질 수 있소, 만약 내가 로리를 포기한다면?" 핀이 차갑게 물었다.
"그래도 당신은 그녀를 원하는 거요? 그녀가 날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도?" 닉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건 매기에겐 너무 지나친 상황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닉은 그녀의 사랑을 몹시 부주의하고 태평하게 입에 올렸다, 마치 길에서 요행수로 주운 것처럼.
"나가요, 당신들 둘 다!" 그녀가 소리 질렀다. "내 방에서 나가요! 내 인생에서 나가란 말이에요!" 그녀가 구두 한 짝을 집었다.
"매기, 진정해. 난 단지 그를..." 구두가 그의 머리에서 몇 센티 떨어진 문틀에 와 부딪히자 핀이 말을 멈췄다. 다른 한짝이 뒤따라 날아왔다. 매기는 무기가 아주 많았다.
"매기!"
"닥쳐요! 닥치라구! 입 다물란 말이야!" 연달아 날아간 세 짝의 구두가 핀을 완전히 홀로 내쫓았다.
"내 생각에 당신은 금방 선택을 한 것 같은데, 매기" 닉은 몹시 기뻐하고 있었다. 그는 전혀 두려움 없이 웃으면서, 자신감에 차서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의 자부심이 증오스러웠고, 그의 욕망이 경멸스러웠다.
"그래요, 난 당신들 둘 다 선택하지 않았어요!" 그녀가 팔로 자신을 감싸 안으며 소리쳤다.
그는 계속 다가오고 있었고 그녀는 거칠게 구두를 던졌다. 그러나 그를 막으려고 던진 구두보다 그녀의 목소리가 더 절망적이었다. "당신은 그저 재밌기만 했겠죠, 닉. 하지만 이제 파티는 끝났어요, 집에 갈 시간이라구요."
"좋은 시도였소, 매기" 그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난 당신 남편처럼 쉽게 믿는 사람이 아니오. 또 그렇게 쉽게 쫓아 버릴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러나 결국 매기는 그를 쫓아냈다. 재빨리 욕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기 때문이다.
"다시 오겠소, 매기" 그가 문을 사이에 두고 위협했다. "이것으로 끝났다고 생각지 마시오. 당신이 내개세 느끼는 감정을 증오하나 본데, 당신은 결코 빠져나갈 수 없소. 내가 당신은 놔주지 않을 테니까. 당신을 달릴 수도, 숨을 쉴 수도, 내게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는 척도 할 수 있지만 내게서 달아날 순 없소. 내 말 듣는 거요, 매기? 다시 오겠소. 당신을 얻기 위해 벽을 뚫고 나가야 하는 일이 있어도"
그러나 그녀는 달아났다....자유의 나라, 미국으로!
매기는 비행기가 착륙하려고 기울어지자 토머스를 깨웠다. 토머스는 그의 딸과 두 손자들이 마중을 나왔다. 그녀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고 샘을 찾았다. 그러나 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차 한대가 그녀에게 와 멈추었다. 매기가 놀란 가슴을 진정키시시도 전에 그녀의 짐은 그 차 트렁크에 실렸다.
"감히 어떻게? 당신은 이럴 권리가 없어요! 짐을 내려놔요!"
닉은 매기를 거의 강제로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허니, 난 지금 내가 좋아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기분이오!"
"샘이 날 데릴러 오기로 했어요. 내가 어디 있는지 궁금해 할 거예요."
"그 말은 당신이 그러고 싶을 때마다 사라지는 버릇은 없다는 뜻이오?" 그가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난...사라지지 않았어요."
"내가 관계된 일에 한해서 당신은 그랬소. 다시 오겠다고 말했잖소. 내가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한거요?"
"난..." 로리에게 들어서 그가 알고 있는 걸까? 매기는 입술을 축이고 부드럽게 말하려고 애썼다. "확신하진 않았어요...하지만 난 가야만 했거든요, 모든 걸 정리하러"
"누구랑? 늙은 로미오와?" 그가 이를 갈듯 말했다.
매기는 코머스에게 해준 작별 인사겸 감사 키스를 기억해 냈다. "그는 내 변호사예요."
그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빨란 불을 보고 거칠게 차를 세웠다. "일요일에 변호사를 데리고 간 거요? 별로 놀랍지도 않군. 당신은 사고를 일으키는데 재능이 있으니까"
"난 사고뭉치가 아니에요!"
"내겐 많은 사고를 일으키잖소. 우리가 알게 딘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당신은 내게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켰소. 내가 마치 뼈다귀를 구걸하는 개처럼 닫혀진 문 앞에서 얼굴을 들고 있는 걸 좋아하는 줄 아오?"
"다투는 게 지겨워서 욕실로 들어간 것뿐..."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니오. 난 지난 며칠간을 얘기하는 거요. 당신의 남편도 고용인도 당신이 나갔다는 말조차도 안 해줬소. 난 당신이 겁쟁이처럼 아파트 안에..."
"난 겁쟁이도 아니에요!" 그녀가 화를 냈다.
"아니라고? 그럼 왜 달아난 거요?"
"달아난 것도 아녜요, 나는 단지..."
그녀가 사실을 털어놓으려는 순간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 신호등이 파란색이었다, 아마 바뀐지 좀 되는 것 같다. 닉이 난폭하게 차를 출발시켰다.
"닉...? 닉, 아파트로 가는 길이 아니잖아요...어디로 가는 거예요? 닉, 좀 천천히 달릴 수..."
"차를 어떻게 모는지 말하지 말아, 매기. 차를 세우고 당신이 날 어떻게 몰아댔는지 정확하게 보여 줄 테니까" 매기는 그의 말이 약속인지 위협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앞뜰이 몹시 넓은 닉의 집은 높은 벽돌담 속에 숨듯이 자리 잡고 있다. 매기는 그 집이 전위적인 건축양식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벽돌과 삼나무, 잔디가 건물의 복잡한 아름다움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다.
"매기, 내려요." 그가 문을 열어 주었다. 그녀가 항의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려하자 그가 덧붙였다. "당신은 선택의 여지가 없소, 내려요."
그녀는 집의 내부를 구경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닉의 남성적인 침실이었다. 그는 즉시 다치지 않은 손으로 능숙하게 재킷과 타이를 벗기 시작했다.
"손은 좀 어때요?" 그녀가 물었다.
"살 수 있을 거요." 셔츠 단추를 풀면서 그라 거칠게 말했다.
"뭐, 뭐하는 거예요?"
"당신에게 증명하려고" 그가 남자라는 걸? 그는 이미 그렇게 했다, 그것도 여러 번이나.
"이해가 안 되는 군요...로리는?"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외출했소. 그리고 고용인들도 들어오지 않을 거요. 내 침실로 초대하지 않았거든. 이번엔 방해물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 없소. 당신도 알겠지, 만약 당신의 남편이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우린 이미 연인이 되었을 거요, 지금처럼..."
"안 돼요...닉" 그녀는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 당신의 남편 그는 아직 모르는 거야. 그는 아무것도 몰라. "우린 얘기를 해야 돼요. 당신에게 할 말이..."
그가 고개를 저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난 완벽하게 이해하오. 당신은 혼란스럽고 불안한 거요, 당신 자신이나 날 믿기가 두려운 거지. 내가 당신의 결혼에 대해 한 말을 행각사면 당신이 그렇게 달아나 버린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날 사랑하는 걸 두려워할 필요는 없소, 매기. 원칙이나 자존심보다 내겐 당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소. 난 우리가 연인이 되길 원하오. 당신이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할 때 당신의 힘이 되어 주고 싶소...당신이 나와 서약한 사이라고 느끼길 바라오. 난..." 그의 열기가 매기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의 소중한 믿음 삶에 대한 그의 규칙들을 그는 그녀를 위해 바람에 흩날려 보내고 있었다.
그는 셔츠를 벗고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사랑해, 매기. 당신과 결혼하고 싶소. 우린 서로에게 속한 사람들이오. 난 더 이상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소. 당신이 다른 남자의 아내인 것도 상관없소." 그가 신음소리를 내며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당신이 날 사랑하는 한 난 뭐든지 견딜 수 있소. 말해 봐요, 매기. 내가 틀린 게 아니라고"
"아니에요..."
그는 매기의 말을 오해했다. 그는 얼굴을 들었고, 눈동자는 괴로움으로 불타고 있었다. 닉 포츤이 두려워하고 있다.
"아뇨, 당신은 틀리지 않았어요. 사랑해요, 닉" 그가 다시 키스해 왔다.
작고 검은 가죽장갑을 낀 손으로 매기는 그의 어깨를 꼭 껴안았다. 그녀의 손길은 마치 불길에 가솔린을 부은 것 같은 효과를 냈다. 그의 몸이 격렬하게 전율하여 그녀를 더욱 강하게 끌어당겼다. 미칠 듯한 정령의 한가운데에서도 매기는 그에게 사실을 말해 줘야 한다고 느꼈다. 그의 가치관에 무척 중요한 얘기였다.
"닉...그는 내 남편이 아니에요."
"누구?" 그의 손은 그녀의 허벅지에 놓여 있었다.
"핀. 우리 더 이상 결혼한 사이가 아니에요. 토머스와 미국에 간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요. 난...백에 서류를 갖고 있어요." 닉의 입술이 그녀의 목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혼한 거요?" 그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매기는 그의 놀란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한 번도 진짜로 결혼한 적이 없었어요. 당신도 봤겠지만 핀과 나는..."
닉은 그녀가 말을 끝내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마지막 장애물까지 없어진 닉은 점점 자제력을 잃어갔다. 전희도 없었고 여자가 된다는 부푼 느낌도 없었다. 처음으로 그녀의 몸에 그가 들어왔을 때도 그녀가 예상한 고통은 없었다. 단지 그 녀의피가 환성을 지르며 솟구치는 느낌과 압도적이고 굶주린 듯한 남자의 욕망만 느낄 수 있을 뿐이다.
"미안하오." 그가 속삭였다. "내가 아프게 했소? 나 자신을 멈출 수가 없었소, 당신에게 손을 댄 순간부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가 소리쳤다.
"가지 말아요!" 그녀는 그를 힘껏 껴안았다.
"절대로 떠나지 않겠소." 그녀에게 키스하며 그가 약속했다. "내가 의도한 건 이런 게 아니었소. 부드러운 키스로 당신에게 구애하고 난 뒤 침대로 데려갈 생각이었소. 미친 사람처럼 바닥에서 당신을 갖는 대신에"
그날 그들은 하루 종일 함께 보냈다. 그들 이외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전화가 울려도 받지 않았다. 그들은 사랑을 하고 샤워하고 다시 사랑을 하고 잠을 잤다. 깨어나면 또다시 또 다른 정열의 향연을 함께 했다.
전화가 울리기 시작한 것은 거의 석양이 질 무렵이었다. 닉은 신음소리를 내며 팔을 뻗어 수화기를 잡았다. 전화벨 소리만 듣고 매기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 소리가 그들의 완벽한 하루의 종말을 가져다 줄 전조음이었는지를?
전화는 사설 탐정소에서 걸려왔다. 매기가 꿈꾸듯 그의 등을 애무하고 있는 동안, 닉 포츤은 그의 딸이 그의 연인의 전남편과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10>
매기는 그녀의 접시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베이컨 에그와 알맞게 튀겨진 포태이토였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지만 금지된 음식이기도 했다.
"이게 뭐예요?" 그녀가 두려운 듯 물었다.
"음식" 샘이 말했다. "우리가 먹는 물질이 우리를 살아있게 해주죠. 비행 이후에 아무것도 못 먹었다고 했잖아요. 벌써 36시간이 넘었어요."
매기는 다시 한 번 더 코밑에 놓인 음식을 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입을 막고 욕실로 뛰어갔다.
"지금 내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 맞아요?" 그녀가 돌아오자 샘이 조심스럽게 물으면서 커피를 내놓았다.
"아니, 난 임신하지 않았어요."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어느 누가 바람둥이 여자가 처녀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는 알지 못했어. 그런 일이 있은 후에도 그는 알지 못했어!
"그냥 물어 봤어요." 샘이 그녀의 우울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왜 그랬을까, 샘? 그들은 왜 내개 한마디 말도 없이 그렇게 사라져야 했던 거지?" 그녀가 지친 듯 물었다.
"그건 모두 로리의 생각이었어요. 당신의 친절에 보답하고 싶어서 그런 것 같아요. 우리들 모두 당신과 포츤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걸 눈치 챘거든요."
매기가 괴로운 듯 신음소리를 냈다.
"그를 사랑해요, 매기? 그도 당신을 사랑하고?"
"오, 난 모르겠어요. 모든 게 뒤죽박죽이야. 그가 날 어떻게 사랑하겠어요. 로리가 임신 중이었다는 걸 안 닉은..." 그녀는 또다시 꿈이 산산조각 나는 느낌이었다. 밤새도록 울었는 데도 아직도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 닉의 분노에 찬 얼굴을 보았다. 그는 탐정이 알아낸 일들을 그녀에게 무감동한 목소리로 말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한 가지 질문을 했다. 그녀가 <서둘러 한> 이혼이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핀이 로리와 결혼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인지.
"이것도 계획의 일부였소? 그들이 달아나는 동안 당신이 날 침대에 붙들어놓기로 했던 거요?"
"아니에요, 닉...날 믿어요, 난 그들이 그런 짓을 할 줄 몰랐어요. 그들은 정식결혼을 원했어요."
그녀의 항의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당신은 내가 사랑 때문에 무슨 일이든 당신을 용서해 줄 거라고 생각했소? 맙소사!" 그는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닉, 제발, 내 말 좀 들어 봐요."
"왜? 그들에게 시간을 더 주기 위해서?"
"하지만...뭘 어떻게 할 건데요?"
"그들을 뒤쫓아 가야지."
"어디 있는지 알아요?"
"아니, 하지만 찾아낼 거요." 닉이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그는 그녀를 원했다. 그런데 그녀를 가지고 난 지금 그의 마음은 다른 곳으로 쏠리고 있었다.
"옷 입어요." 그가 그녀에게 스커트와 재킷을 던졌다.
"닉, 제발!"
그는 헝클어진 머리를 한 알몸의 인어 같은 그녀를 완전히 무관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당신은 충분히 즐겼잖소. 이제는 끝났소."
"닉, 사랑해요." 그녀가 절망적으로 애원했다. "당신도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그의 미소를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 점에선 아마 나보다 당신이 더 정직한 것 같군. 난 어떤 거짓말이 여자를 침대에서 가장 열렬하게 만드는지 알고 있거든"
매기는 이런 식으로 그를 떠날 수는 없었다. "난 한 번도 당신처럼 사랑했던 사람은 없었어요."
"그건 칭찬이오? 자존심까지 짓밟혀 가며 당신을 즐겁게 해준 다른 바보들은 없었단 말이지?"
"다른 바보들? 다, 다른 사람들이라뇨?"
"좀 솔직해지는 게 어떻소. 매기?" 그가 경멸조로 말했다. "당신은 멋진 몸을 가졌어. 하지만 당신은 그걸 너무 탐욕스럽게 사용하더군. 게다가 처음인 것 같은 흉내도 너무 잘 냈어."
그가 그렇게 난폭하게 그녀의 순결을 취하고서도, 결국 거기에 관해서는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았다는 걸 매기가 깨닫는 동안 닉은 전화를 걸고 있었다. 매기는 몹시 고통스럽고 몹시 화가 났다.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옷을 입어요. 알몸으로 쫓겨나고 싶지 않거든"
그녀는 복종했다. 옷을 다 입고 있는 닉과 알몸인 채로는 논쟁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거의 옷을 다 입었을 때 짧은 노크소리가 났다.
닉은 그녀가 옷을 완전히 다 입었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들어오라는 말을 했다. 호리호리한 집사는 매기의 당혹스런 얼굴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부르셨습니까?"
"콜 부인인 집까지 모셔다 주게, 얀센" 그의 얼굴은 전혀 변화가 없었지만 매기는 그의 경멸을 상상할 수 있었다.
"닉, 당신이 이럴 수는 없어요." 그녀는 어떻게든 그와 얘기를 할 기회를 잡으려고 했다. "닉, 제발..."
"닉, 당신이 이럴 수는 없어요." 그녀는 어떻게든 그와 얘기를 할 기회를 잡으려고 했다. "닉, 제발..."
"왜? 당신 수고에 대한 대가를 바라는 거요?" 그가 비밀금고로 걸어가더니 거기서 뭔가를 꺼내 와 그녀에게 내밀었다. "당신의 노리개요. 실컷 즐기시지. 당신이 아주 점잖게 번 거니까"
그는 그녀를 창녀처럼 취급했다. 그녀는 그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경멸은 분노보다 강렬했다.
"백을 가져가야죠." 매기는 장갑도 잊고 있었다. 그녀는 두 남자에게 등을 돌린 채 옆에 있는 테이블에서 백을 집어 들었다. 테이블 위에는 무어인가 이것저것 많이 놓여 있었는데 그녀는 그곳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해 놓았다.
그녀는 자신의 결혼 무효 서류가 담긴 봉투를 닉에게 바로 건네 줄 수가 없었다. 지금 그의 상태로는 그는 아마 열어 보지도 않고 찢어 버릴 것이다. 그녀는 봉투를 놔두면서 닉이 나중에 호기심이 나서라도 열어 보길 빌었다. 설마 그도 오클랜드 최고의 산부인과 의사가 쓴 공술서를 거짓말이라고 하진 않겠지! 얼굴을 똑바로 들고 매기는 방을 가로질러 갔다. 그녀는 닉을 지나쳐 갈 때 잠시 멈춰 섰다.
"안녕, 닉" 매기의 조용한 태도는 그녀의 거친 항의보다 더 그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그들이 하루 종일 사랑을 나눴던 헝클어진 침대에서 고개를 홱 돌렸다.
"보석을 잊은 것 같군, 매기. 실패는 했어도 뭔가 값진 걸 가지고 나가야 하지 않겠소? 다른...경험보다도"
그의 마지막 말이 두 사람에게 다시 한 번 그들의 멋진 경험을 상기시켜 주었다. "난 아무것도 잊지 않았어요."
그녀가 흔들림 없이 말했다. "그리고 당신도 결코 잊지 않길 바라겠어요."
그녀의 말은 그가 그녀를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지금은 화가 나서 부정하고 있지만, 짧은 몃 시간 동안 그녀는 그의 사랑의 깊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오, 샘..." 그녀는 닉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난 어떻게 하냐구?" 그녀의 말은 자신의 나머지 인생을 의미했다, 닉의 존재 없이 살아야 할 앞으로의 인생을. 샘은 그녀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다.
"기다려요.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지요." 그는 지도를 한번 힐끗 보더니 말을 멈췄다. 매기는 그녀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었다.
"매기..." 샘은 그녀 옆에 무릎을 대고 앉아서 그의 넓은 어깨로 그녀의 머리를 안았다. "그들이 사랑에 빠진 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 자책하지 말아요. 만약 닉이 당신의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면, 그는 당신의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면, 그는 당신의 거짓말을 용서해 줄 거예요. 특히 로리가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보게 되면"
매기의 머리가 힘없는 항의로 들썩였다. "그는 결코 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결코! 당신이 그의 얼굴을 못 봐서 그래요! 비록 그가 아직도 날 사랑한다 해도, 그의 빌어먹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조그맣게 딸꾹질을 하며 울었다. 그러고는 벽에 붙은 전화가 울릴때 까지 계속 울었다. 그들을 둘 다 숨을 죽였따. 곧 샘이 전화를 받았다. "그 사람이에요!" 수화기를 티셔츠에 갖다 댄 채 샘이 소리쳤다.
"닉?" 그녀의 목소리는 희망으로 가늘게 떨렸다.
"오클랜드 병원 응급실" 그는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남편...당신의 전남편이 교통사고를 냈소."
"오, 맙소사! 그들은? 그들은 어때요?"
"모르겠소. 나도 금방 경찰에게서 전화를 받았소. 로리는 의식이 있다는군. 그게 그들이 말해준 것 전부요."
"그리고...핀은?"
"물어 보지 않았소." 그의 어조에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5분 안에 밖에 나와 있어요. 내가 데리러 가겠소."
샘은 매기와 함께 밑으로 내려갔다. 안개비가 내리는 보도를 둘러보면서 그는 매기가 재잘대는 것을 참을성 있게 듣고 있었다.
"그는 날 태우러 올 필요가 없어. 그냥 경찰에서 연락하도록 내버려 둘 수도 있었는데. 그는 아마 걱정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나봐. 내게 전화하느라 시간을 보낸 걸 보면. 병원으로 곧장 운전해 가면 훨씬 더 빨리 갈 수도 있을 텐데, 그는 날 데리러 오려고 길을 돌아오는 거잖아..."
비는 따뜻했지만 매기는 닉의 짙은 푸른색 재규어를 보는 순간 몸이 떨려왔다. 닉은 내리지도 않고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녀가 갑자기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서자 그가 참을성이 없이 뭐라고 투덜거렸다. 샘의 손이 그녀를 진정시켜 앞으로 밀었다.
"그녀를 잘 돌보 주시오." 샘은 손마디가 하얘진 운전수에게 말했다. "나도 곧 뒤따라가겠소. 핀의 할아버지에게 연락해서"
닉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자신이 무슨 말을 할지 믿을 수 없는 것처럼. 차가 햇빛이 비치는 거리를 달릴 즈음 매기가 입을 열었다. "그들은 어디 있었대요? 사고가 어떻게 났대요?"
괴로운 침묵이 흘렀다. 그가 그녀를 무시할 작정이라는 생각이 든 순간 닉이 거칠게 말했다. "봄베이 힐 쪽으로 내려가는 중이었소." 그곳에? 그렇다면 오클랜드로 다시 돌아오는 중이었을까? "8중 충돌이었다는군. 심하게 다친 사람을 운반하기 위해 헬리콥터를 불러야 할 정도였대."
"그...사고가 핀의 잘못이었대요?"
"그렇소, 그의 잘못이오." 닉이 이를 갈듯 말했다. "그가 로리를 데리고 가지만 않았어도 그 애는 지금 병원에 있지 않을 거요."
지금은 로리가 그 도주에 기꺼이 응했다는 말을 할 때가 아니었다. 닉이 진정하려는 듯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아니오, 사고는 그의 잘못이 아니었소. 그는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던 것뿐이었소. 어떤 저주받을 바보가 차를 너무 빨리 몰았다는군."
닉은 병원 바깥에 차를 불법으로 주차시켰다. 그가 하도 떼미는 바람에 매기는 거의 뛰다시피 해서 응급실로 들어갔다. 안내 데스크에 있는 간호사가 허둥지둥하는 그들을 경험 있는 눈으로 바라보며 닉과 매기더러 따라오라고 했다. 그녀는 매기를 핀이 있는 X 레이실로 들여보내고 나서 닉을 옆에 늘어선 문들 중의 하나로 안내했다.
X 레이 간호사와 힘없이 다투고 있는 핀을 발견한 순간 매기는 거의 주저앉을 뻔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그의 수족은 제 기능을 다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지금 머리 X 레이를 찍고 있어. 난 녹초가 됐어" 그가 기쁜 듯 매기의 손을 잡았다. 그의 셔츠 앞부분이 피로 덮여 있었다. 하지만 눈 위에 난 상처는 깊지 않았다. "로리는 어때? 아무도 몰라...아니면 내게 말을 해주지 않는 건지. 포츤도 여기 있어? 그에게 가서 물어봐, 사람들이 뭘 숨기는지. 매기, 제발, 난 알아야 돼"
"당신이 그를 진정시킬 수 있다면 좀 알아보세요." 간호사가 매기에게 조용히 말했다. "그는 꼭 미친 사람 같아요. 하지만 우린 그에게 진정제를 못 놔 줘요. 부작용 때문에"
"핀, 가서 알아볼게" 매기가 흔쾌히 말했다.
"곧바로 돌아오는 거지? 약속했어?"
"물론, 누워 있어요. 핀, 될 수 있는 한 빨리 올 테니까"
그들이 도착했을 땐 거의 비어 있던 대기실에 사람들이 차곡차곡 모여들기 시작했다. 매기는 대기실에 들어가서 닉을 기다렸다. 곧 그가 모습을 나타냈는데, 얼굴은 백지장같이 하얗고 뺨에는 눈물자국까지 있다. 그녀가 그의 얼굴을 잡고 마주보고 물었지만,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녀의 눈동자만 보고 있었다. 매기는 너무 답답해서 그를 잡고 흔들었다. 그래도 그는 그녀의 손에 힘없이 흔들리고만 있었다.
"오, 닉..." 그녀는 그를 껴안았다. 그의 팔이 옆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닉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로리가 이미 죽은 걸까? 아니면 어딘가를 절단이라도 한 걸까? "닉, 달링. 제발 내게 말 좀 해봐요. 말해 봐요...무슨 일인지."
그가 몸을 떨었다. 드디어 그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녀는 그의 거절에 대비해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그녀가 고통으로 소리를 지를 정도로 그녀의 허리를 꽉 잡았다.
"아기..."그가 목쉰 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아기를 잃었소."
"오, 닉..." 눈물이 그녀의 눈에서 마구 쏟아졌다. "닉, 정말 미안해요."
"내 손자요. 내 아기는 엄마가 될 예정이었소. 내 귀여운 아기, 로리가"
"그녀는 어때요? 닉, 로리는 어떻냐구요?" 매기는 급하게 물었다. 닉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상태였다.
"로리...로리는 수혈을 받고 있소. 피를 많이 흘렸거든. 하지만 의사 말로는 괜찮을 거라고 하더군. 그 아이는 팔이 부러졌소...방풍 유리 때문에 몇 군데가 찢어지기도 하고. 그래도 심한 건 하나도 없다는군...아기만 제외하고. 맙소사, 매기, 로리가 날 얼마나 증오할까...그녀는 날 원치 않을 거요. 그녀는 아기를 원한 거야. 그리고 콜도. 난 로리가 원하는 걸 줄 게 아무것도 없소."
닉의 손이 그녀를 껴안으면서 몸을 기대 왔다. 그는 매기의 목에 얼굴을 묻고 몸을 떨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당신은 로리에게 사랑을 주었잖아요, 그리고 당신의 용기도" 매기가 속삭였다. "그녀는 알아요, 당신이 그녀를 사랑한다는 걸. 하지만 로리가 핀을 보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거예요. 그와 함께 슬픔과 상실을 나누고 싶어 하는 것도. 왜냐하면 이건 핀의 상실도 되니까. 그들은 지금 서로가 절실하게 필요해요."
"그를 죽여 버릴 거요. 아직 죽지 않았다면, 내가 죽일 거요." 그가 거칠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힘이 없었다.
"아뇨, 당신은 그러지 않을 거예요." 매기가 자신 있게 말했다. "당신은 그들이 함께 아기의 죽음을 애도하게 해줄 거예요. 그리고 그들을 위로하겠죠. 또다시 아기가 생길 거라고"
그의 몸이 굳어졌다. 그녀는 그의 저항을 느꼈지만 가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닉이 그녀의 부드러운 어깨에서 얼굴을 들었다. 그의 얼굴은 몹시 초췌했지만 그녀에게는 그가 지금처럼 멋있어 보인적은 없었다. 강철 같은 사나이 닉 포츤은 그가 가장 약해진 순간들을 매기의 팔 안에서 보냈다.
"여전히 그의 편이오, 매기. 지금도?" 그가 씁쓸하게 말했다.
"이건 편에 관한 문제가 아니에요, 사랑이죠. 로리는 당신들 둘 다 사랑해요, 닉. 두 사람 둥에 한 사람을 선택하라고 해서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들지 말아요. 그들이 고의적으로 당신을 괴롭힌 건 아니에요."
"아니면 당신을 괴롭힌 거요?"
매기가 고개를 내저었다. "결코 그럴 가능성은 없어요. 난 핀을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그가 힘없이 물었다. "아기에 대해서 알고 있었소?"
"로리가 지난주에 얘기했어요." 그가 눈을 감았다. "닉, 그녀는 당신에게 얘기할 수가 없었을 거예요."
"아니오, 내가 말을 듣길 거부함으로써, 그녀를 여자로서 심각하게 생각하는 걸 거부함으로써. 나는 정말로 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거요, 그렇지 않소?"
"이제는 알게 될 거에요. 그녀에게 기회를 줘요, 그들 둘 다에게. 당신은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더듬었다. 닉은 처음으로 그녀를 마음껏 바라보았다. "로리가 말하길 도주는 모두 그녀가 한 일이라더군" 그가 궁금한 듯 말했다. "당신도 알고 있었소, 그녀가 내 동의서를 위조했다는 걸? 로리는 결혼이 합법적이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았다고 말하더군. 그저 그의 아내가 되고 싶었다고..."
매기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닉은 숨을 멈췄다. "맙소사, 당신은 그 일로 로리에게 감탄하고 있군" 그가 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감동받은 거지. 매기?"
매기는 그에게서 빠져나가려고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이미 활기를 되찾은 그가 놓아 주지 않는다. 닉이 즐거운 듯 말했다. "그리고 어제 당신의 섬세한 열정으로 난 당신이 불감증이 아니란 것도 알아. 그러니 친절하게 날 깨우쳐 주는 게 어떻소? 어떻게 5년 동안 순결한 신부로 남아 있었던 거요? 아니면 그 놀라운 서류에 사인한 의사도 당신이 숨겨 둔 친절한 애인들 중의 한 사람이었소?"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떻게 당신이! 나쁜 사람! 당신을 알지도 못했잖아요, 처녀가 그때...그때..."
"내가 처음 들어갔을 때?" 그는 얼굴도 붉히지 않고 말했다. "난 신이 아니오, 매기. 그저 한 사람의 남자 일뿐이오. 그리고 전에는 한 번도 처녀와 사랑을 한 적이 없었소. 내가 알 수 있었던 건 당신이 꿈꾸던 것만큼이나 달콤하고 뜨겁고 좋았다는 것뿐이었소. 내가 둔감하게도 알아차리지 못했소. 난 내 딸이 여전히 처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에 관해서 내가 얼마나 무지한지 알겠지..." 그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녀는 그가 아기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당신에게도 또다시 손자가 생길 거예요, 닉"
그의 입술에 미소가 번져 갔다. "난 내 아이가 생기길 바라고 있는데. 난 아직도 아버지가 될 나이거든, 매기"
"나도 알아요." 그녀가 이를 갈며 그에게서 또다시 빠져나가려고 몸을 움직였다. 닉이 그런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고 키스를 하려고 고개를 숙였다.
"매기?" 목쉰 소리가 그들의 몸싸움을 저지시켰다. 핀이 쓰러질 듯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콜 씨, 우리가 당신을 데려다..." 그의 뒤로 간호사가 쫓아왔다.
"매기, 로리에 대해 알알 온다고 했잖아?"
닉이 여전히 매기를 끌어안은 채 뒤로 돌아섰다. 그는 피로 범벅이 된 핀을 보고 숨을 삼켰다. 핀의 눈동자가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
"로리는 아기를 잃었소." 닉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핀은 순식간에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안 돼! 안 돼...로리! 그녀는 어디 있소?" 그가 비틀거리며 그들을 지나쳐 가려 하자 닉이 핀의 셔츠를 잡고 그를 막았다.
"우린 결혼하지 않았어." 핀이 후회로 괴로워하며 불쑥 말했다. "우리는 돌아오는 길이었소. 우린 그게 잘못된 일이라고 결정했소...돌아와서 당신과 맞설 생각이었지...당신에게 말하려고. 오, 맙소사! 절대로, 그녀가 하자는 대로 하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좀 강했어야 했는데" 그의 눈동자는 죄책감으로 고통스러워했다. 그리고 매기는 닉의 말을 두려움으로 듣고 있었다.
"그렇소, 당신은 강해질 필요가 있어. 그 아이도 그걸 필요로 할 거요. 로리는 조용한 아이지만 무척 강한 의지를 가졌지. 만약 당신이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지 않으면, 그녀는 당신을 지배하게 될 거요.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한다는 것도 깨닫지 못할 거요."
핀은 감방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박이며 닉을 쳐다보았다. 그건 정확히 찬성은 아니었다. 그러나 반대도 아니다. 그건 아버지로서 하는 충고였다. 닉은 핀의 놀란 얼굴에서 등을 돌리고 그가 로리에게 가는 것도 보려 하지 않았다.
"자, 우리가 어디까지 했더라?"
"고마워요." 매기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그건 완전히 나를 위해서 한 일이오." 닉이 히죽 웃었다. "당신의 남편이 우리 사이에 끼어드는 게 몹시 싫었거든"
"전남편"
"아, 그렇지. 당신의 잘못된 결혼, 첫 번째 결혼..."
"당신은 결코 내 말을 믿지 않았잖아요." 그의 말이 떠올린 생각을 매기는 무심코 내뱉었다. "당신이 날 사랑한다는 건 믿소."
"당신은 날 마치...창녀처럼 취급했어요." "침대에서 당신의 천부적인 재능 때문에 일어난 실수였소." 매기의 뺨이 확 달아올랐다.
"닉..." "쉬, 조용히" 그가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당신을 사랑하오, 매기. 당신은 날 고통스럽게 해. 그러니 앞으로 살아가면서 날 위로해 줘야할 거요. 그래 줄 수 있겠지?"
매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닉이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바로 그때 안내 데스크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났다.
"오, 안 돼!"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닉의 가슴에 얼굴을 감추고 마크햄과 패디가 간호사를 닥달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샘은 그들 옆에서 어쩔 줄 몰라 서성거리고 있었다.
"모른 척해요, 매기" 닉은 그녀에게 말하면서 왜 항상 중요한 순간에 방해물이 나타나는지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 맙소사, 그들이 또 싸우려고 해요." 매기가 신음소리를 냈다. "우리가 말려야 해요." "매기..."
패디와 마크햄은 이제 서로 팔꿈치를 굽혀 시합자세를 취하면서 서로 핀을 먼저 보러 가겠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다치게 할 거예요...그리고 핀과 내가 아직도 부부인 줄 알고 계시는데! 닉, 어떻게 하죠?"
"매기, 당신이 그들을 영원히 보호할 순 없소, 설사 그들이 보호받길 원한다 하더라도! 그들을 봐, 저건 그들 생활의 일부요. 내가 말했잖소, 그들은 자기들의 싸움을 즐긴다고? 말년에 남은 재미라곤 익숙하고 편안한 두 사람 간의 다툼뿐인데 그들이 왜 화해하려 하겠소? 매기, 당신은 그 동안 당신의 거짓된 결혼 게임을 하느라 너무 바빠서 규칙이 바뀐 것도 깨닫지 못했군.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건 공평무사한 중재요!"
닉이 그녀를 앞세우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두 노인네는 여전히 서로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노려보고 있었다.
"매기! 핀은 어디 있냐?" 그녀를 먼저 발견한 패디가 소리쳤다. "왜 그와 함께 있지 않는 게냐? 의사는 어디 있고?"
"의사, 지옥에나 가라고 해! 집에서 나올 때 내가 전문의를 불렀어." 마크햄이 덩달아 소리쳤다. 그의 콧수염이 걱정으로 비비 꼬여 있었다. "아, 포츤, 당신은 무슨 일인지 알겠지?"
"그렇습니다." 닉이 천천히 말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애기하기 시작했다. 그가 모르는 부분은 매기가 설명해 주었다. 패디와 마크햄은 그들 생애 처음으로 동시에 할 말을 잃은 듯했다. 그리고 그들이 여전히 침묵 속에서 과거에 매달려 있는 동안, 닉은 그들에게 미래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짧은 기간 내에 그와 매기의 결혼으로 두 회사를 합병할 예정이라는 것. 그리고 한참 후에는, 적당하고 품위 있는 약혼 이후에 핀과 로리가 결혼할 예정이라는 것을. 패디와 마크햄의 두 손자들, 즉 매기와 핀의 두 결혼이 그들의 회사를 막강한 하나의 그룹으로 만들게 될 거라는 얘기도 했다. 매기조차 해결책을 찾아내는 닉의 돌연한 능력에 감동을 받았다.
"네 말은...그러니까 유산 같은 건 결코 하지 않았단 말이지!" 마크햄이 매기를 비난하듯 소리쳤다.
"지금까지." 패디가 슬픈 어조로 말했다. "5년 동안 꼬박 증손자만 기다려왔는데 넌 결코 가질 의사가 없었구나. 원한다면 12명이라도 가질 수 있었는데도!"
"오, 패디...마크햄..." 매기는 그들의 충격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려고 뭔가 할 말을 찾았다.
"매기?" 닉이 나지막히 불렀다.
그녀는 조급하게 내밀어진 손바닥을 응시했다. "닉, 우린 할아버지들을 떠날 수 없어요."
"나도 그럴 생각은 없소. 하지만 우린 여기 어딘가에 있을 저장실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녀가 눈을 깜박이며 그들 쳐다보았다. "아니면 작은 창고나...비어 있는 원장실이든가" 그녀가 알아듣지 못하자 그가 계속 설명했다. "우리가 잠시 동안 둘만 있을 수 있는 곳" 그의 눈동자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오, 그래요." 그녀는 눈을 새치름하게 내리깔았다. 두 노인네가 핀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 나서 그녀가 닉을 올려다보자 그가 히죽 웃었다. 그는 이미 그들의 안락한 붙박이장을 발견해 놓고 있었다.
"말썽쟁이" 그녀를 꼭 껴안으면서 그가 말했다. "내가 당신과 무얼 할 생각인 것 같소?"
그들의 머리 위에 매달린 갓 없는 전구가 그녀의 눈을 부시게 했다. "사랑해줘요..그냥 날 사랑하기만 해요."
"그냥?" 그가 머리 위의 전구를 껐다. "날 멈추게 해보라구"
물론 그녀는 그의 말대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말대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