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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M. S. Collins

 

홀트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소리는 자동차가 내뿜는 엔진 소리와 차내의 텔레비전 소리에 섞여 사라졌다. 그는 눈부신 겨울 햇살과 지금까지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 때문에 몹씨 혼란스러웠다.

홀트는 어깨너머로 흘낏 뒤를 돌아보았다. 뒷좌석에는 작은 숙녀가 두 손을 모아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채 텔레비전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지난 며칠 동안 감정을 반영하듯 복잡해 보였다. 홀트는 다시 전방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 여행은 실패작일지도 모른다. 핸들을 잡은 그의 손이 패배감 탓인지 일순 바르르 떨렸다. 상대가 어른이든 아이이든 간에 여자로 인해 패배감을 맛본다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아무튼 여자를 다루려면 신중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지식을 쌓아야만 화를 예방할 수 있는 것이다.

홀트는 사이드 미러를 보다가 뜻밖의 광경에 기분이 맑아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작은 스포츠카가 바싹 옆에 붙어 따라오면서 자신의 차를 추월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저렇게 귀여운 차를 좋아하는 여자라면 다루기가 쉬울는지도 모르지. 홀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싱긋 웃었다. 스포츠카의 젊은 여성은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물론 노래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핸들 위에 놓여진 손가락이 일정한 리듬에 맞춰 박자를 치고 있었고 입술도 가볍게 움직이고 있었다.

여자는 꽤 참해 보였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입을 방긋거리는 모습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눈은 커다란 선글라스에 의해 가려져 있었지만 갸름한 콧대나 뺨에서 턱으로 이어지는 선을 보건대 틀림없이 아름답고 큼직한 눈을 가진 여성인 것 같았다. 머리칼은 보드라운 실크처럼 하늘거렸고 어깨 위에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홀트는 금발 머리의 여자에게는 특히 약했다.

갑자기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의 입술이 급히 오무라지더니 새침한 표정을 지으면서 시선을 핸들에 고정시켰다. 작은 스포츠카는 홀트의 차를 과감하게 앞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홀트의 얼굴에 잠시 미소가 떠올랐으나 이내 뒤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계집아이를 보는 순간 그는 다시 기분이 울적해졌다. 홀트는 두 번 다시 여자에게 신경을 쓰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면서 운전에만 온 정신을 집중시켰다.

리비 해밀턴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리듬에 맞춰 손가락으로 핸들을 두드리면서 추월 차선으로 진입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소리는 말고 경쾌하여 마치 자신의 즐거운 기분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12월의 햇살이 창문을 통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왔다. 햇살이 리듬을 맞추고 있는 리비의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리비의 마음은 행복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목을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의 감촉마저 오늘 따라 유난히 기분 좋게 느껴진다. 그녀는 아름답고 풍성한 금발을 컴퓨터 엔지니어라는 직업상의 이미지에 맞추기 위해 항상 뒤로 묶어 올려야만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자유롭게 풀어 놓아 기분이 흡족하다. 리비는 다시 노래를 부르면서 손가락으로 리듬을 맞추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커다란 밴을 운전하고 있는 남자가 미소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비는 회색 눈동자를 도로 쪽으로 돌리고 다시 스피드를 내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난 어제의 내가 아냐. 남의 시선을 의식하여 쭈뼛거릴 필요는 없어. 리비는 잠시 어제의 일을 생각하면서 침울한 기분에 잠겼다. 그러나 그러한 기분을 떨쳐 버리려는 듯 과감하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나의 날이야. 온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날이라구.

다시 오른쪽 차선으로 들어와 밴의 앞으로 나오자 백미러에 그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그는 아직도 웃고 있었다. 그가 인사 대신 가볍게 크락숀을 울렸다. 리비는 손을 흔들어 보이려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그가 스피드를 내면서 그녀의 차 뒤를 따라왔다. 27년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부모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낯선 남자를 주의해라!

남자는 넉살 좋은 표정으로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남자와 스피드 경쟁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리비는 선글라스를 이마 위에 걸치고 나서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다. 생각했던 대로 괜찮게 생긴 남자였다.

핸섬하고 그다지 기분 나쁜 인상은 아니었다. 게다가 지적으로 생긴 용모에 이마와 턱이 각져 있어 강인해 보였고 대단히 남성적인 느낌을 주었다. 웃을 때는 하얀 치아가 검게 그을은 피부와 콘트라스트를 이뤄 보기에도 듬직한 남자라는 인상을 주었다. 일리노이 주에서는 12월에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날은 거의 없다. 하지만 여긴 일리노이 주가 아니다. 리비는 새로운 집, 새로운 일자리, 새로운 생활을 찾아 지금 즐거운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생활이 나빴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팠다. 대가족의 넘치는 애정이 한 젊은 여자의 인생을 속박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결코 그 사람이 기분 좋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리비는 문득 마치 피고석에 앉은 피고라도 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게는 세상을 헤쳐 나갈만한 충분한 능력과 힘이 잠재해 있고 그럴 자신도 있어. 그런데 하나에서 열까지 부모님과 언니 오빠의 지시를 받으면서 산다는 것은 정말 견딜 수 없는 일이야. 식구들이 나에 대해 안심하게 되는 날은 교회에서 다른 남자에게 나를 떠맡겨 버리게 되는 날일 테지? 부모님은 내가 얌전한 가정 주부로 지내길 원하시지만 난 어엿한 캐리어 우먼으로 성장하고 싶어.

이제 부모님의 간섭을 받는 시절은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다. 새로운 생활을 생각하니 그녀는 다시 마음이 상쾌해졌다. 리비는 또다시 콧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리고 문득 밴을 탄 남자가 생각나서 백미러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큼직한 손으로 핸들을 꽉 쥐고 있었다. 눈동자의 색깔은 거리가 먼 탓에 확인할 수 없었지만 아마 머리칼의 색깔과 같은 검은 빛일 것이다. 조수석은 비어 있었다. 아마 혼자서 여행 중인가 보지?

리비는 뒷 차를 유심히 살폈다. 남자가 타고 있는 밴은 금방 주문한 새 차 같았다. 검은색과 흰색 선이 든 암갈색의 기분 나쁜 차체는 리비의 취향에 전혀 맞지 않는 색깔로 되어 있었다. 어떻게 저런 색깔을 좋아할 수 있을까? 그녀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남자는 아마 밴을 판매하고 있는 자동차 회사의 세일즈맨일지도 몰라. 아니면 록 가수로서 인디애나 폴리서에 있는 동료와 합류하기 위해 가는 길인지도 모르지. 전원이 암갈색 의상을 걸치고 요란한 뮤직으로 청중을 환호케 하고, 젊은 여성 팬에게 장미꽃을 던지고, 연주가 끝나면 기타를 부수면서 소란을 떠는 그런 록 그룹일 거야. 리비는 남자에 대한 나쁜 쪽으로 상상을 굴리면서 혼자 미소 지었다.

저 남자의 록 그룹은 별로 인기가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자동차 하나만큼은 고급이군. 그녀는 삐딱하게 생각하면서 뒷 차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기척이 없는 것 같았다. 뒷쪽 도어에는 스페어타이어가 아직 비닐도 벗겨지지 않은 채 매달려 있었다. 아마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특별 주문한 차임에 틀림없으리라.

리비의 상상은 여기서 끊어졌다. 밴이 어느새 리비를 젖히고 저 멀리 앞쪽을 달려가고 있었다. 리비는 멀어져 가는 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스피드 경주를 해볼까 생각했으나 그만두기로 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그 남자에 대해서는 상상하지 않기로 했다.

리비는 인디애나폴리스 북쪽 지역에 도착하여 크레디트 카드를 써 볼 생각으로 주유소를 찾았다. 아직 기름은 충분하리만큼 많이 남아 있지만 떠나올 때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유량계가 1/4로 떨어지면 잊지 말고 기름을 가득 채워줘야 길 한가운데서 연료가 떨어지는 불상사를 방지할 수 있어."

그녀는 첫날부터 아버지와의 약속을 깨고 싶지 않았다. 리비가 5년 전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아파트를 구입해서 집을 나올 때도 아버지는 똑같은 당부를 하셨다. 리비는 쓴웃음을 지었다.

두 명의 오빠와 올케, 두 명의 언니와 형부,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열 명의, 20개의 눈동자가 틈을 주지 않고 감시의 눈빛을 번뜩이던 때를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다. 진작 이렇게 독립을 해야만 했었다. 독립하겠다고 아파트를 구해 나왔었지만 그건 진실된 독립이 아니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갖가지 구실로써 식구들이 들락날락거리며 여전히 간섭했고 감시의 눈길을 더욱 심해졌었다.

데이트도 마찬가지였다. 리비의 데이트 상대가 시댁 친척이나 처가집의 친척이 아니면 언니와 오빠는 불안한 빛을 감추지 못했고, 만약 그들과 두번 이상 데이트를 하면 교회를 예약하자는 등 부산을 떨어 지레 겁을 집어 먹곤 했었다.

리비는 댄을 떠올렸다. 댄은 큰오빠 친구로서 그녀와 결혼하길 원했었다. 물론 리비도 그를 좋아하여 약혼했을 때만 해도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댄은 리비를 인형 다루듯 했고, 결혼하면 무조건 직장을 그만두고 집안에만 있어 주길 강요했다. 케리어 우먼의 꿈을 안고 있는 리비로서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리비는 자신이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떳떳하게 자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식구들 곁에 있으면 사랑이란 이름의 밧줄에 꽁꽁 묶여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유일한 자립의 길은 식구들과 멀리 떨어져 사는 길뿐이었다. 그래서 정한 것이 이번 여행이었고, 만약 플로리다로 간다면 식구들의 감시 활동도 어쩔 수 없지 중지될 것이고 TOLTOT(톨토트) 전체를 콘트롤하는 콘트롤 센터라면 시카고의 전 근무지처럼 식구들이 마음대로 들락거리지 못할 것이었다. 지난번 회사의 상사는 공교롭게도 큰오빠 친구여서 심심하면 오빠가 회사로 찾아오곤 했었다.

전방에 눈에 익은 석유 회사의 마크가 보였다. 리비는 핸들을 꺾어 주유소로 통하는 길로 진입했다.

'TOLTOT'Today's Link to Tomorrow'(오늘에서 내일로 이어지는 다리)의 머릿글자로서 플로리다 주 중앙부에 있는 미래를 테마를 한 공원이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리비의 목적지이다. 12일부터 출근을 해야 하는데 오늘이 1218일이다. 집을 구하고 정리를 하자면 최소한 2주일은 걸릴 텐데 시간이 너무나 촉박하다.

새 직장을 구했다는 소식을 들은 식구들은 대소동을 벌였었다. 특히 "그럼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집에 없을 거란 말이냐?"라는 어머니의 질문은 절규에 가까워 리비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녀도 몹시 서운했지만 단호하게 마음을 정했었다. 진정으로 캐리어 우먼을 원한다면, 진정으로 식구들로부터 독립되길 원한다면 절대로 마음이 흔들려선 안 돼!

주유소는 거대한 트럭들로 가득 차 있었다. 리비는 괴물 같은 트럭들 사이를 교묘하게 빠져나가 주유기 앞에 차를 세웠다. 두툼한 쟈켓을 입고 귀에는 방한용 귀덮개를 한 직원이 달려 나왔다.

"가득 채워 주세요." 리비는 차에서 내리면서 말했다.

"알겠습니다." 주유소 직원은 가는 한숨을 쉬면서도 디자이너 진과 고리 무늬가 든 벌크 스웨터에 감싸인 리비의 날씬한 몸매를 멀뚱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리비는 커다란 숄더백을 메고 그의 넋 나간 듯한 시선에 미소로 답한 뒤 늘씬한 다리를 재빨리 움직이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은색 꽃잎과 플라스틱 호랑가시나무가 장식된 중앙복도를 오른쪽으로 돌아가니 '여성용'이라고 씌어진 문이 보였다. 손잡이를 돌렸으나 열리지 않자 리비는 옷깃을 여미고 몸을 웅크린 채 복도를 왔다 갔다 했다. 덩치 큰 운전사 한 사람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리비를 바라보면서 좁은 복도를 비켜 '남성용'화장실로 들어갔다.

얼마 후 운전사가 화장실에서 나와 복도를 어정거리고 있는 리비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는 안으로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누가 안에 있는지 모르지만 너무 오래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여성용 화장실은 사용하지 못하도록 폐쇄해 뒀는지도 모를 일이다.

리비는 다시 한번 손잡이를 돌려 보았다. 그때 손잡이가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리비는 안에 있는 사람이 손잡이를 돌리는 것으로 판다, 부딪히지 않도록 문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나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리비는 화가 나서 거칠게 노크했다. 그러자 안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문이 잠겼어요!" 뜻밖에도 어린애 소리가 들렸다. 리비는 놀라 도어 손잡이를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그러나 끄떡도 하지 않았다.

"나가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리비는 노크를 하면서 꼬마에게 말을 걸었다.

"착한 아이지? 울지 말고 내 말을 잘 들어. 손잡이에 보턴이 보이지?" 아이는 리비의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더욱 크게 울기 시작했다. 리비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복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인기척이 없었다. 그녀는 다시 문을 두들기면서 말했다. "사람을 불러 와서 문을 열어 줄 테니까 울지 말고 기다려!" 역시 대답 대신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가엾게도 얼마나 겁을 먹었을까? 리비는 급히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카운터에 양가죽 코트를 입은 남자가 반원으로 짤려진 유리 창구 틈을 들여다보면서 안쪽의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성용 화장실에 꼬마가 갇혀 있었다. 열쇠를 갖고 계신가요?" 급한 마음에 리비는 얘기중인 남자를 밀쳐낸 다음 창구 안에 대고 소리쳤다. 밀려난 남자가 뭐라고 말을 했지만 화장실에 갇힌 꼬마 생각에 몰두한 리비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카운터 담당인 젊은 여자가 뒤에 걸린 열쇠를 벗겨 창구로 내주면서 말했다. "제가 도와 드릴까요?"

"아니에요. 저 혼자서 할 수 있어요." 리비는 열쇠 꾸러미를 받아들고 급히 복도로 달려갔다.

좀 전에 카운터에서 리비에게 밀려났던 남자가 여자 화장실 손잡이를 무리하게 돌리고 있었다. 여전히 문은 끄떡도 하지 않는 상태였다.

"열쇠를 갖고 왔어요."

남자는 리비의 손에서 거칠게 열쇠 꾸러미를 나꿔채더니 퉁명스럽게 "고맙소." 라고 대답했다. 그의 말은 감사의 말이라기보다는 비난에 가깝게 들렸다.

이 남자는 내가 고의적으로 아이를 가둔 것으로 오인하고 있는 걸까?

어찌 됐건 화장실 문은 열렸다. 놀란 여자 아이가 쏜살같이 뛰어나오더니 울음을 터뜨리며 리비에게 달려들었다. 리비도 놀라 엉겁결에 몸을 굽히고 달려오는 아이를 품에 안았다. 아이는 리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는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심하게 요동치는 아이의 맥박을 피부로 느끼면서 리비는 안타까운 마음에 아이를 꼭 껴안고 등을 쓸어 주면서 달랬다. 문득 남자의 시선을 느낀 리비가 위를 올려다보니 그 남자는 아까 고속도로에서 만났던 바로 그 남자였다.

가까이서 보니 그는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색 바랜 진에 네이비 블루 스웨터를 입었고 양가죽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키는 185센티미터 정도 될까? 마치 트럭 운전사 같은 체격으로 어깨는 넓고 허리는 좁은 전형적 역삼각형 체격이었다. 머리칼은 검은색에 가까운 갈색이었고, 다듬지 않은 긴 머리가 자연스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눈은 해가 황금빛을 발하기 직전의 새벽하늘 같은 다크 블루였다.

아까 고속도로에서 그녀에게 미소를 보냈을 때의 다정한 눈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리비의 가슴에 착 달라붙어 흐느끼고 있는 아이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 당혹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남자가 무릎을 꿇고 앉으면서 말을 걸었다. ", 착하지? 이제 그만....."

흐느끼고 있던 꼬마 남자가 말을 걸자 몸을 뒤틀면서 리비의 가슴에 더욱 찰싹 달라붙어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리비는 모피 깃이 달린 핑크빛 코트 안으로 손을 넣어 부드럽게 아이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3살쯤 되었을까? 엄마가 없는 걸까? 불쌍하기도 하지......하이웨이를 달릴 때 밴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애가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았던 걸까?

"기름을 다 넣은 것 같은데 기름 값이나 지불하고 오시오. 직원을 기다리게 하지 말고......" 남자는 리비의 품에 안긴 꼬마에게 시선을 보내면서 말했다.

낮고 그윽한 그의 음성은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무척 매력적으로 들렸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리비의 신경을 건드리는 말이다.

리비는 뭔가 대꾸해 주려고 그를 바라보았으나 우수 어린 그의 눈빛을 보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이가 자신에게 곧바로 달려가지 않고 내 품에 뛰어든 것이 마음이 들지 않아서일까?

"당신의 아이인가요?"

"그렇소." 남자가 일어서면서 대답했다.

리비는 잠시 망설였다. 물론 나하곤 관계없는 일이지만, 아이가 내 품에서 떨면서 울고 있는 걸 보면 혹시 이 애는 저 남자 딸이 아닐지도 몰라.

"정말 당신의 아이인가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저 애가 내 딸이 아닌 것처럼 보인단 말이오?" 남자가 화를 내면서 윽박질렀다.

"하지만 이 애는 당신에게 곧바로 달려가지 않았고......" 리비는 남자의 거친 태도에 잔뜩 겁을 먹은 채 말을 더듬었다. 아이를 꼭 껴안자 베이비파우더 냄새와 삼푸 냄새가 코끝에 짙게 풍겨왔다.

남자는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나는 최근에 이 아이의 양육을 맡게 되었소. 솔직히 말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소."

남자는 사적인 얘기를 하는 게 무척 마음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강제로 리비에게서 아이를 빼앗다가는 큰 소동이 벌어질 것으로 판단했는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리비는 이혼한 아내에게서 아이를 강제로 빼앗아 오는 남편이 고소당한 기사를 몇 번인가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는 탓에 아이를 순순히 내 줄 수가 없었다.

"당신의 아이라는 증거가 있나요?"

남자의 눈에 문득 노기가 번뜩였다. 그가 주먹을 불끈 쥐고 리비 쪽으로 몸을 내밀자 더욱 겁에 질린 리비가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남자도 자신의 거친 행동을 깨닫고는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운전사 한 사람이 두 사람 사이를 헤치고 남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당신은 판사가 내게 친권을 인정한 판결문을 봐야만 직성이 풀리겠군?" 남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화를 내며 거칠게 행동하지만 어딘지 연약한 면이 엿보였다. 리비는 아이를 안고 일어서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그러는 편이 좋겠군요."

"알겠소. 그럼 잠깐만 기다리시오. 갖고 오겠소. 그런데 어디에서 기다리고 있을 건지 말해 주겠소?"

내가 이 아이를 안고 도망칠까 봐 저리는 걸까? "아이를 데리고 저쪽 레스토랑에 있을 거예요. 이 아이에게는 우유를 먹이고 난 커피나 한잔 마셔야겠어요." 그녀가 약간 장난기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아이가 엄지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기 시작했다. 우유를 준다는 말에 시장기를 느낀 모양이다. 아이는 리비와 남자를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리비는 아이의 눈동자를 본 순간 지금까지의 의심이 말끔히 사라졌다. 비록 눈물에 젖어있긴 했지만 아이의 크고 아름다운 눈동자는 남자의 그것과 너무도 닮은 다크 블루였다.

"지금 날 놀리고 있는 거요?" 남자가 무서운 얼굴로 소리치자 꼬마는 놀라 리비의 목에 매달려 또 다시 울음을 떠뜨렸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면 좋을까? 이 아이는 분명 저 남자의 딸이 틀림없다. "약 올릴 생각은 없었어요. 단지 당신의 딸이 몹시 겁에 질려 있길래 기분을 풀어 주려고 그랬던 것뿐이에요. 난 애들을 다루는 데는 전문가거든요? 걱정 말고 맡겨 보세요."

남자는 리비를 잠시 바라보더니 안심한 듯 승낙했다. "지금의 상황으로 봐선 그럴 수밖에 도리가 없겠군." 대단히 떫은 말투였다.

"귀엽긴 하지만 따님을 데리고 절대 도망치지 않을 것을 맹세하겠어요." 리비는 애매모호한 미소를 띠면서 농담조로 말했다.

리비의 이런 사소한 행동이 남자에게 뜻하지 않은 반응을 일으키게 만든 모양이었다. 남자는 한밤중의 어둠처럼 짙고 푸른 눈동자를 번뜩이더니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일순 관능의 불꽃이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시선이 리비의 입 근처에 머물렀을 때 그녀는 마치 온몸이 얼어붙을 것 같은 감정을 느꼈다. 알 수 없는 뜨거운 욕망이 그녀의 내부에서 일기 시작했다.

숨 막히는 침묵이 투명한 막처럼 두 사람을 에워쌌다. 리비의 등줄기에 뜨거운 열풍이 스치는 것 같았다. 신경 세포 하나하나는 남자가 뿜어내는 성적 매력에 반응하면서 그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꼬마는 배가 고픈 듯 보채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리비는 꿈같은 침묵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재빨리 머리를 흔들었다.

"좋소. 차에 가서 친자 확인 판결 서류를 가져오겠소."

리비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 남자와 마주하고 있는 상태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꼭 보여주셔야겠어요."

"내 이름은 홀트 휘트니요." 남자는 침착을 되찾은 듯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정식 이름을 말했다.

"제 이름은 리비 해밀턴이에요." 리비도 태연을 가장하면서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악수를 하는 순간 다시 뜨거운 감정이 되살아나 후회했다. 그의 손을 통해 뜨거운 욕망의 열기가 그녀의 전신에 전달되었다. 리비는 얼른 손을 뺐다.

"내가 이 꼬마 아가씨를......그러니까 이름이 질이라고 했던가요?" 이게 내 목소리였던가? 쉰 목소리는 자신의 귀에도 들릴락 말락 했다.

"그렇소 질 휘트니요." 그의 목소리도 동요하고 있었다.

"질은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가겠어요."

"난 차에 가서 서류를 가져오겠소." 홀트는 부리나케 자리를 뜨는 리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리비는 목덜미에 와 닿는 남자의 뜨거운 시선을 의식하면서 급히 안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왜 이렇게 당황해야만 해는 걸까? 저 남자가 대체 뭐길래? 리비는 용기를 내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남자의 눈길과 또 마주치자 또 다시 당황했다. "죄송하지만....... 열쇠를 카운터에 돌려주고 점원에게 휘발유 값은 조금 있다가 지불하겠다고 전해 주시겠어요?"

"알겠소." 홀트가 한쪽 손을 약간 들어 보이면서 흔쾌히 대답했다.

리비는 상큼한 미소를 머금었다. 홀트는 리비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멍청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 여자는 정말 매력적인 여자로군! 꾸밈이 없고 친절한 아가씨! 저런 여자는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물론 지금까지 여자에 대한 욕망을 느껴 본 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녀처럼 스트레이트로 욕망을 자극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천진하기 그지없었고 눈동자는 그 어떤 마력을 지닌 듯 그를 꼼짝 못하게 했다. 그녀가 살포시 지어 보이는 미소는 그의 발목을 잡아 나꿔채는 듯했다. 키는 별로 크지 않은 것 같았다. 겨우 160센티미터 정도나 될까? 하지만 다리는 정말 늘씬했다. 수영복을 입혀 놓으면 무척 근사하겠는 걸? 홀트는 복도를 돌아가는 리비의 작은 히프에 시선을 주었다.

그는 머리를 저었다. 아마 지금 내 머리가 어떻게 된 걸 거야. 정신과 의사의 검진을 받아 봐야 하는 게 아닐까? 여자로부터 절망감을 느끼고 다시는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고 맹세했으면서 또 다시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저 여자는 귀엽고 상냥한 아가씨지만 여행 중에 만난 여자일 뿐이야. 이제 곧 헤어져야만 돼. 어서 이런 로맨틱한 감상에서 벗어나자.

얼마 후, 홀트가 레스토랑에 나타났을 때 리비는 질을 자리에 앉히고 자신도 침착을 되찾은 상태였다. 질의 핑크빛 코트를 벗기고 삐져나온 블라우스 자락을 챙겨 핑크빛 오버올사이에 집어넣어 주었다. 질은 통통한 손으로 컵을 쥔 채 밀크를 들이키고 있었다. 리비는 질에게 열심히 말을 걸고 있었지만, 질은 아직 평정을 되찾지 못했는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리비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이게 내 딸에 대한 법원의 양육권 인정 서류요." 홀트는 서류를 테이블 위에 놓고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리비는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홀트의 말투가 다시 농담조로 변해 있었다. 사실 리비는 그 서류를 확인해 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의 표정에는 아직도 우수의 그림자가 깔려 있었다.

"휘트니 씨!"

"홀트라고 불러 주겠소?"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홀트 씨!" 리비는 거부하지 않고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다음 대화에 적당한 말을 찾았다. "당신은 따님의 양육권을 법원으로부터 인정받았다고 말씀하셨죠?"

"그렇소. 바로 그저께였소. 이혼한 아내는 지금 시카고에 살고 있소." 그는 잠시 질에게 눈길을 주었다가 다시 리비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질이 당신의 품으로 가지 않고 내게 달려든 것을 책망하지 마세요. 본능적으로 애들은 여자 쪽에 보다 안도감을 느끼게 마련이니까요."

홀트는 리비의 왼쪽 손가락에 시선을 주어 반지를 찾으면서 눈썹을 조아렸다. "당신에게도 아이가 있소?"

"아뇨." 리비는 그것이 얼토당토않은 질문이라는 듯 키득키득 웃었다. "하지만 질녀가 8, 조카가 4, 무려 12명의 꼬마들과 전쟁을 치룬 경력이 있어요."

홀트도 그 말뜻을 알아듣고는 환하게 웃었다. "아가씬 대단한 대가족 틈에서 자라셨군?"

"대가족이죠. 그래서 저는 아이에 대한 경험이 풍부해요."

"이 애는 외동딸이오."

"그런 것 같아요. 얌전한 걸 보면 금방 알 수 있죠. 형제가 있다면 저 나이에 저렇게 얌전히 앉아 있지는 않으니까요."

홀트는 처음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고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리비는 비로소 그에 대해 자세한 평가를 할 수 있었다. 큼직한 손은 믿음직스러워 보였고, 얼굴 못지않게 햇빛에 그을어 있었다. 손등엔 검은 털이 덮혀 있었고, 손톱도 가지런히 손질되어 있었다.

저 남자의 손.....얼마나 힘이 좋을까.....만약.....저 손으으로.....! 내가 지금 무슨 망상을 하고 있지? 리비는 자신의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얼핏 고개를 숙였다.

"머리로는 당신의 말이 이해가 되는데." 홀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소." 그는 손가락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이를 내가 맡기로 했을 때 나도 어린애의 습성에 대해 공부를 좀 하긴 했었소."

솔직한 마음을 담은 그의 말에 리비는 모든 경계심을 지우고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앤 너무 어려서 종잡을 수가 없소." 홀트는 문득 딸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기 얘기가 나오자 질은 경계의 눈으로 홀트를 말끔히 쳐다보았다. 홀트는 조심스럽게 웃어 보이며 손가락으로 아이의 턱을 가볍게 어루만져 주었다. "하지만 난 이 아이를 무척 사랑하고 있소."

그 말에 질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홀트의 다정스런 몸짓에 리비는 왠지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리비의 가족도 애정이 풍부했다. 아버지를 이해 못하는 어린 딸의 태도가 얼마나 가슴 아플까 생각하니 홀트 휘트니가 가엾어 보였다.

"잘 알고 있어요." 리비는 약간 목 메인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홀트는 이런 리비의 태도가 몹시 이상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난 플로리다에 살고 있기 때문에 밴을 샀소. 냉장고는 물론 텔레비전도 갖춰져 있고, 좌석을 펴면 훌륭한 침대가 되는 거요. 집에서 생활하는 것처럼 느긋하게 여행을 즐길 수가 있소."

홀트가 뭔가 질문해 주길 기다리는 듯한 눈치였으나 리비는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그녀는 함께 밴을 타고 여행하자는 뜻으로 판단한 것 같았다. 그녀는 엉뚱한 말로 얼버무렸다.

"정말 쾌적하게 여행하실 수 있겠군요. 하지만, 차의 색깔이 좀....."

홀트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리비의 마음속에 길게 여운을 남기며 메아리쳤다.

"저 차의 색깔과 내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오? 난 배경을 고려해서 저 색깔로 골랐소. 사막의 석양에 물든 오렌지색 모래와 녹색의 사보텐에 잘 어울리도록 말이오. 그런데 그 비싼 문명의 이기에도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소. 우리 작은 숙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으니....." 그는 이제 기분이 어느 정도 풀려 있는 딸을 바라보면서 유쾌하게 말했다. "그건 바로 화장실이 없다는 점이오."

"혼자 화장실에 가겠다고 하던가요?"

"그렇소. 대단한 자립심이라고 생각지 않소?"

"정말 대단하군요. 저 나이에....." 리비도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도 그걸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소." 홀트는 민망할 정도로 리비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때 웨이트리스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 "난 괜찮으니까 여기 숙녀 분들께 물어 보시오."

"나도 됐어요. 어머니가 도시락을 싸 주셨으니까요." 리비는 약간 퉁명스런 듯한 어조로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 어머닌 언제나 날 과보호하고 계셨죠..... 그것보다도 이제 그만 출발하는 게 어떨까요?"

리비는 비로소 자신의 행동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처음 만난 사람과 이렇게 흉허물 없이 얘기를 주고받는다는 건 획기적인 일이다. 집안 식구들이 알면 아마 기절했을 것이다. 리비는 한 팔에 백을 걸친 다음 질을 껴안았다.

"만나게 되어 정말 즐거웠어, ."

"당신은 남쪽으로 갈 거요?"

얘기치 않은 질문에 그녀는 당황했다. 가르쳐 줘도 괜찮을까? 하긴 다시 만날 일이 없는 남자니까. 리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당신은 나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경계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테지."

그 말이 리비를 안심시켰다. 리비는 양육권 인정 서류를 코트 안쪽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있는 그의 모습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흑심을 품은 남자라면 딸을 데리고 다니지는 않을 거예요. 관찰하신 대로 난 남쪽으로 가는 길이에요. TOLTOT까지요."

"휴가요?" 홀트가 반색을 하면서 물었다.

리비는 냅킨을 들고 우유가 잔뜩 묻은 질의 입가를 닦아주면서 무심결에 대꾸했다. "아뇨. 그곳 컴퓨터 센터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그녀는 냅킨을 접어 테이블 위에 놓고 일어서면서 ", 화장실에 가려고 하는데 너도 함께 가겠니?" 라고 묻고는 홀트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홀트가 미소를 띠우며 고개를 끄덕이자 질은 컵을 테이블 위에 놓은 다음 따라 나섰다. 화장실에 다녀왔을 때 질은 리비에게 바싹 달라붙어 있는 상태였다. 리비는 홀트에게 약간 미안함을 느끼고 억지로 꼬마 아이의 손을 떼어 그에게 넘겨주었다.

", 정말 즐거웠어. 만약 언니가 있는 공원에 올 일이 있으면 꼭 찾아 주렴." 리비는 조심스럽게 웃어보였다. 그러자 헤어진다는 사실을 실감했는지 질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홀트는 말없이 아이에게 코트를 입혀 주었다. 질은 바둥대면서 코트를 입지 않으려 했고, 홀트의 팔 안에서 작을 손을 허우적대며 리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홀트는 한 손으로 아이를 부둥켜안고 한손으로는 웨이트리스가 건네주는 계산서를 받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으면서 나름대로 아이를 달래려고 애쓰고 있었다.

"당신의 휘발유 값은 내가 지불했소." 리비가 주유소 쪽으로 가려 하자 홀트가 말했다. 리비가 뭐라고 대꾸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그는 손을 저으면서 거절하지 말라는 뜻을 비쳤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알고 있소. 하지만 그 정도는 예의로 받아 주시요. 당신은 내게 구원의 천사였으니까."

"하지만 난 처음 보는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제발!" 홀트는 살려 달라는 듯한 시늉을 해보였다. "당신은 정말 내게 큰 도움이 되었소."

바둥거리는 질의 목이 그의 무릎까지 내려와 있었다. 질이 느닷없이 손을 뻗어 리비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언니에게 인사해야 돼요." 화장실 문을 열어 준 이후 질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리비는 아이의 손을 잡고 쪽 소리가 나도록 과장되게 뽀뽀를 했다. ", 너도 말을 할 줄 아는구나. 좋아, 그럼 네가 내게 휘발유를 사 준 걸로 하겠어."

밖으로 나오자 리비는 아버지에게 움켜잡히듯 안겨 있는 질에게 손을 뻗어 코트 자락을 여미어 준 다음 귀가 완전히 덮이도록 깃을 세워 주었다.

"도중에 또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겠군....." 질의 코트 지퍼를 올려 주면서 홀트가 말했다.

한순간이었으나 그의 시선이 다시 리비의 입가에 머물렀을 때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강렬한 충격이 그녀의 전신을 스치고 지나갔다. 홀트의 눈이 어느새 그녀의 가슴께에 머물고 있었다. 두터운 벌키 스웨터를 입고 있었지만 리비는 자신의 몸이 투시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고 얼굴이 붉어졌다.

"그만 보세요." 리비는 마치 모기 소리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미안!" 그것은 벨벳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홀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어깨에 와 닿았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미안! 하지만 이해해 주시오. 당신은 이제껏 내가 만난 여자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성이오."

홀트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한 탓에 리비는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 그는 리비의 반응을 보자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처음 보는 남자에게 칭찬 한마디 들었다고 해서 이렇게 맥을 못추다니. 무시해 버려야 해. 리비는 갑자기 정색을 하더니 앞서 걸었다.

밖은 대단히 추웠다. 리비는 몸을 웅크리며 바르르 떨었다. 하지만 이 떨림은 추위 때문만은 아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남자의 시선에 알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안녕, !" 리비는 자신의 차가 있는 곳으로 방향을 바꾸어 걸으면서 질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바이 바이, 리비 언니....." 질은 부츠를 신고 땅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 내 이름을 기억해 주겠니?"

그때 발진하는 밴이 요란한 소리를 냈기 때문에 리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리비, 당신은 멋진 여자! 어떻게 당신을 잊을 수가 있겠소? 리비 해밀턴! 꼭 기억하고 있겠소!" 홀트가 이쪽을 향해 소리쳤다.

그의 입가에 상큼한 미소가 번졌다. 그의 눈이 뒤를 조심하라는 지시를 보내는 것 같아 돌아보니 가솔린펌프가 바로 뒤에 있었다. 충돌을 면하게 해줘서 고맙다는 표시를 하자 그도 손을 들어 보이고는 밴을 몰아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뒤 창문을 통해 질이 이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슬퍼보이는 그녀의 눈빛이 리비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가엾은 질! 그런데 다시 이쪽을 돌아보는 질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지면서 행복에 가득 찬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몇 분 후, 하이웨이를 달리면서 리비는 질의 표정이 바뀐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좀처럼 짐작할 수 없었다. 이유가 어찌 됐든 아이가 활기를 되찾은 건 정말 다행스런 일이었다. 어린 나이의 천사 같은 질에게 슬픔이나 눈물 같은 건 어울리지 않아. 그 애의 얼굴엔 언제나 웃음이 가득 차 있어야만 해.....

리비는 무의식중에 라디오 채널을 소프트 록이 아닌 발라드가 흐르는 곳에 맞추었다. 홀트는 내가 매력적인 여자라고 했다. 그녀는 그런 칭찬 한 마디에 즐거워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15~16킬로미터 정도 달리다가 문득 리비는 선글라스를 이마 위로 치켜 올리고 생각에 잠겼다. 홀트가 결혼반지를 끼고 있었던가? 그걸 확인하지 않았군..... 어쩌면 재혼했을지도 몰라. 리비는 애써 테이블 위에 놓여졌던 그의 손을 상기했다. 반지를 본 기억은 없지만 그렇다고 끼지 않았었다는 확신도 서지 않았다.

홀트 같은 남자가 결혼하고서도 다른 여자에게 추파를 던질 리가 없어. ! 그렇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담? 두 번 다시 만날 기회가 없는 사람인데..... 아마 나보다 100킬로미터는 앞서 달리고 있겠지?

리비는 울적한 마음에 다시 라디오 채널을 소프트 록에 맞추고,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지나가는 차량 속에서 홀트가 운전하는 밴을 찾고 있었다.

 

하루 종일 차 안에 앉아 있는다는 건 대단한 노동이었다. 리비는 어깨가 뻐근한 데가 머리가 욱신거리는 등 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차는 인디애나 주의 드넓은 평원을 달리고 있었다. 지평선 끝까지 도로가 일직선으로 뻗어 있었다.

잠시 쉬면서 뜨거운 커피 한잔을 마시고 싶었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8킬로미터 전방에 휴게소가 있다는 표지판이 보였다.

휴게소를 향해 열심히 달리고 있는데, 하이웨이를 하염없이 걸어가는 두 사람이 눈에 띄었다. 키가 큰 쪽은 남자였고 그 옆의 작고 뚱뚱한 사람은 여자인 것 같았다. 리비의 차가 다가가자 여자 쪽이 뒤를 돌아다보았다. 뚱뚱해 보였던 것은 여자가 만삭에 가까운 임산부였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완전히 피로에 지친 표정이었다.

마음이 약해진 리비는 '절대로 히치하이크를 하려는 사람을 태워 줘선 안 된다'라고 신신당부하시던 아버지의 경고를 깨고 속도를 늦췄다. 이렇게 지독한 추위에 임산부가 길을 걷는다는 건 말이 안된다. 더군다나 이곳은 교통이 나쁜 곳이니까 쉽게 차를 탈 수도 없을 거야.

리리가 자신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속도를 늦추자 남자 쪽이 돌아보았다. 리비와 마주친 그의 눈은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얼굴은 몹시 험상궂었다. 아마 매정하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증오하고 있었던 것 같다. 리비는 전방에 차를 세우겠다는 신호를 보내고 길옆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차가 정지하기도 전에 뒤에서 클랙션 소리가 들려왔다. 놀랍게도 백미러에는 홀트의 밴이 비치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휴게소 커피숍 안내판을 가리키면서 계속 가라는 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리비는 마지못해 악셀을 밟았다. 홀트의 밴이 뒤에 바싹 붙어 있어 임산부 일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리비는 마음속으로 그들 부부에게 "미안합니다."라고 중얼거렸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화가 났다. 낯모르는 사람을 태워 주는 건 물론 위험하지만 홀트가 방해할 권리는 없다. 자기가 무슨 상관있다고. 따지고 보면 홀트 역시 낯선 사람 아닌가? 리비는 휴게소 앞에 차를 세우고 나서 그 문제를 따지기 위해 기세당당하게 홀트의 밴으로 다가갔지만, 오히려 그가 잔뜩 화를 내고 있었다.

"리비, 당신은 바보가 틀림없소!" 그는 손을 옆구리에 댄 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나 있소?"

"나는....."

"히치하이커를 시켜 주려 들다니! 무슨 봉변을 당하고 싶어서 낯선 사람들을 태워 주려는 거요?"

이건 완전히 적반하장 격이다. 리비는 분을 못 이겨 어쩔 줄 모르며 바르르 떨었다.

"그 부인은 임산부였어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소. 만약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범행을 꾀하기 위해 배 밑에다 베개를 넣을 수도 있지. 고속도로에서 흔히 있는 유혹 작전이오. 임산부를 태워줬다가 지갑을 털린 사건이 몇 번인가 보도되었었소. 그걸 보지 못했단 말이오?"

리비는 아무 대꾸도 못한 채 바르르 떨고 있었다. 물론 추워서 떠는 건 아니었다. 어쩐지 자신이 잘못했던 것 같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홀트에게 꾸중을 듣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홀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날이 차니까 빨리 코트를 걸치시오. 난 가서 뜨거운 커피를 주문해 놓을 테니까." 라고 말한 다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질은 리비의 손을 끌면서 말했다. "아빠가 언니를 만나게 해준다고 약속했지만 이렇게 빨리 만나게 해주실 줄은 몰랐어요!"

홀트가 질을 스툴에 앉히는 동안에도 질의 관심은 새로 사귄 언니 리비에게 쏠려 있었다. 질은 쉴 새 없이 조잘댔다. "우린 굉장히 빨리 달렸어요."

어디서 길이 어긋났는지는 모르겠으나 리비는 홀트의 밴이 100킬로미터는 앞서 달리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아무튼 홀트 일행을 다시 만나게 되어 기뻤다. "나도 널 다시 만나게 되어 무척 기뻐."

"뜨거운 커피 두 잔!" 홀트가 주문을 하면서 질을 사이에 둔 채 옆의 스툴에 앉았다. ", 너는 뭘 마시겠니?"

"난 콜라가 좋아요."

음료수가 나오자 리비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난 당신한테 꾸중을 들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멍청한 소리만 골라서 하는군. 여자들이란 하나같이 멍청이야."

"아빠, 나쁜 말을 하면 나쁜 사람이 된대요." 질의 날카로운 지적에 리비와 홀트는 동시에 아이를 쳐다보았다.

"미안하다." 아이에게 사과하는 홀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리비는 커피 잔을 들고 있는 그의 손에 반지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곧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부인은 틀림없는 임산부였어요." 리비는 소리를 죽여 그를 납득시키려 했다. "그 사람들을 버리고 왔다는 사실에 대해 난 양심의 가책을 느껴요."

홀트는 질렸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과 함께 있어요. 내가 가서 살펴보고 올테니까....."

"하지만 당신은....."

"애를 좀 봐 주겠소?"

"....." 리비는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30분이 지나도 홀트는 돌아오지 않았다. 리비는 그 두 사람이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쩌면 그들이 나쁜 짓을 꾸미고 있어 홀트가 당한 게 아닌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홀트가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서는 걸 보고 리비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혼자였다. "그 사람들 못 찾았나요?"

"찾았소. 여기서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버스 정류소까지 태워다 주고 왔소. 아기를 낳기 위해 루이빌에 있는 친정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더군. 돈이 없어 차를 얻어 탔는데, 그 운전사가 도중에서 방향이 다르다고 내팽개치고 갔다는 거요."

'그래서 당신은 버스 정류장까지 그들을 데려다 주고, 물론 버스표도 사 주셨겠죠? 그리고 틀림없이 점심 사 먹을 돈도 집어주셨을 거예요. 홀트,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 리비는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그의 친절에 진심으로 사의를 표했다. "홀트, 정말 고마워요."

"이제 그만 출발합시다." 홀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듯 질을 차에 태우고는 인사도 없이 곧장 시동을 걸었다. 질이 창문 사이로 작은 얼굴을 내밀면서 소리쳤다. "오늘밤 다시 만나요, 리비

언니!"

오늘밤이라고? 홀트의 자상한 마음에 감탄하긴 했으나 그의 무서운 얼굴을 생각하니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리비는 질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바이바이, !"

 

몇 시간 동안 리비는 제대로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 심한 교통 체증, 가로수에 달린 크리스마스 장식들, 사람들로 북적대는 상점, 손님을 끄는 호텔 광고 등등이 머리를 아프게 했기 때문이다. 끝없는 평원을 달리다가 오래간만에 보는 도시의 광경은 새로운 멋을 느끼게 했다. 몹시 피곤했다. 무리해서 켄터키 주 볼링 그린까지 운전해야 될 이유는 없었다. 그녀는 인디애나 주와 켄터키 주의 경계인 루이빌에서 쉬어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뜨거운 욕조에 들어가 피로를 풀고 옷을 갈아입은 뒤 푸짐한 저녁 식사를 하고 싶었다. 아침에 일찍 출발하면 러시아워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도로는 구불구불하여 인디애나 주 라디오 방송은 심한 전파 방해를 받아 잘 들리지 않는다. 조금 더 달리니 루이빌 방송 채널이 잡혔다. 일기 예보에는 내일 큰 눈이 내릴 것이라고 한다. 보통 큰 일이 아니다. 눈이 내리면 운전에 지장을 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무리해서라도 지금 좀 더 남쪽 지방으로 달려야겠지만, 뜨거운 목욕물과 휴식의 유혹을 이겨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전국에 체인을 둔 모텔이 다음 진입로에 있다는 표지가 보였다. 리비는 계속 남하할까 어쩔까 망설였으나 결국은 휴식의 유혹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리비는 모텔 진입로로 들어섰다.

모텔 방은 그다지 그녀의 취향에 맞지 않았으나 그래도 난방이 잘 되어 있었고 청결했다. 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고속도로의 소음과 긴장이 남아있는 듯했다. 리비는 슈트케이스와 코트를 쇼파 위에 내던지고 침대로 뛰어 들었다. "!" 하고 길게 숨을 내쉬면서 발로 부츠를 벗겨 바닥으로 내던졌다. 그녀는 "10분만 잘께."라고 스스로에게 말한 다음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1시간 후, 리비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한 덕분에 피로도 말끔히 풀렸다. 브러싱을 하면서 이렇게 안락한 모텔을 그냥 지나쳤더라면 얼마나 후회했을까 하고 생각했다. 리비는 울 슬랙스에 실크 블라우스를 입었다. 그리고 코트를 걸친 뒤 커다란 숄더 백을 메고 밖으로 나왔다. 해가 저물자 기온은 5~6도 정도 더 내려갔다. 리비는 코트 깃을 세우고 식당 쪽으로 걸어갔다.

식당 입구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가 늘어서 있었다. "혼자십니까?" 안내원이 정중하게 물었다.

리비가 그렇다고 대답하려는데 누군가가 코트 자락을 아래로 잡아당기는 바람에 밑을 내려다보았다. 맑고 파란 눈동자가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어떻게 여길 왔지! 어떻게.....여길.....?"

질은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우리도 여기서 잠잘 거예요."

"정말 그렇소." 질의 뒤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비는 화들짝 놀라 위를 올려다보았다. 홀트였다. "정말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이런 기막힌 우연이 어디 있을까요?"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홀트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웨이트리스를 향해 "3인용 테이블을 부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리브의 코트를 받아 들고 왼손으로 질을 안은 채 웨이트리스가 마련해 준 테이블로 향했다. 실내에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홀트에게서 코트를 받아 건 웨이트리스가 물었다.

"어린이용 의자 하나 갖다 주시겠소?"

"알겠습니다." 웨이트리스는 상냥하게 대답하고 나서 총총히 사라졌다.

"아빠, 나 리비 언니 옆에 앉아도 돼요?" 질이 커다란 의자에 앉아 다리를 덜렁거리며 말했다. 작은 히프만 살짝 가릴 정도의 짧은 노란 색 원피스가 무척 귀여웠다. 타이즈가 홀러 내려 있었고 작은 모자 밑으로 금발 머리가 빠져나와 있었다. 홀트는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아이의 복장을 고쳐 주느라 나름대로 고생하고 있었다. 다정해 보이는 정경에 리비는 살짝 미소 지었다. 옷매무새를 고친 후 홀트는 아이를 리비 옆에 앉혀 주었다.

", , 커피숍에서 헤어진 다음의 얘기를 들려주겠니?" 리비가 물었다.

질은 기억을 더듬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조아렸다. ".....트럭하고, 예쁜 차를 굉장히 많이 봤어요. 그리고 노장도 많이 봤어요."

"노장이 아니고 농장이야." 맞은편에 앉은 홀트가 정정해주었다. "그럼 내일은 뭐가 보고 싶지?" 그는 온화하게 웃으면서 질문했다.

"! 이만큼 큰 산을 볼 거예요!" 질은 작은 팔을 최대한 펼쳐 보였다.

"어휴, 그렇게 큰 산을 본다구?"

", 이보다 더 큰 산을 볼 거예요." 질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리비가 웃으면서 홀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부터는 질이 당신을 잘 따르겠군요?"

". 맛있는 모이를 많이 준 덕분이오." 홀트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리고 호텔도 네 개나 봤어요." 질이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자신 있게 말했다.

"네 개?" 리비는 홀트에게로 시선을 향해다. "마음에 드는 호텔이 없었던 모양이죠?"

"우리 마음에 드는 호텔이란 당신의 차가 주차해 있는 곳뿐이오. 그게 바로 질을 달랠 수 있는 맛있는 모이니까....."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 주유소를 떠날 때 잔뜩 부어 있던 질이 홀트가 뭐라고 속삭이자 갑자기 환한 표정을 짓던 일이 생각났다. 아마 리비와 헤어지기 섭섭해 하는 질에게 꼭 다시 만나게 해준다고 약속하면서 달랬던 모양이다.

"계속 내 뒤를 따라오셨나요?"

"루이빌까지. 한때 당신을 놓쳐 버려 여간 고생한 게 아니오. 강을 지난 다음, 당신의 차가 보이지 않더군. 만약 당신을 만나게 해주지 않으면 질이 날 용서하지 않을 것 같아서 필사적으로 찾아 헤맸소."

이 사람은 프로급이야. 그 많은 차들 중에서 내 차를 끈질기게 찾아내다니. 하지만 리비는 미행당했다는 사실이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다. 웨이트리스가 어린이용 의자를 갖고 오자 리비는 자신의 감정을 애써 감추며 질을 안아 의자에 앉혔다. 홀트를 다시 만나 기뻐하는 마음을 절대고 내보여서는 안 된다.

웨이트리스가 양가죽 표지의 메뉴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질의 앞에는 어린이들이 알아보기 쉽게 음식이 프린트된 테이블 매트를 놓고는 애교 있게 말했다. "편히 쉬십시오."

오늘 아침에 주유소에서 처음 만난 남자와 같은 모텔에 묵고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했다는 얘기를 들으면 식구들은 어떤 얼굴을 할까? 오빠들은 어떤 놈이냐고 닥달을 할 것이고 언니들은 벼라별 상상을 다 하겠지? 물론 엄마는 그대로 기절하실 거야.

"그러셨군요?" 리비는 메뉴판을 들여다보면서 태연함을 가장했다. "만일 저를 찾아주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셨더라면 질이 얼마나 실망했을까요?"

홀트가 불쑥 리비의 손을 잡고는 그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내 자신도 날 용서하지 못했을 거요. 질 못지않게 나도 당신을 만나고 싶었소. 우리가 그런 식으로 헤이질 수는 없었으니까....."

홀트는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지만 리비는 잠자코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외면했다. ", 배고프지 않니? , 여기 이 그림을 보고 제일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 보렴. 뭐가 제일 먹고 싶니?"

"난 이게 좋아요." 질은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아이스크림 샨데를 가리켰다.

리비는 홀트의 안색을 살피면서 말했다. "이건 디저트라는 거야. 디저트란 식사를 한 다음에 먹는 거지."

질은 맑은 눈빛으로 아빠를 올려다본 다음 다시 하나를 골랐다. "그럼 이걸 먹고 싶어요." 레몬에이드였다. 홀트가 고개를 저으면서 안 된다는 표정을 짓자 질은 뾰로통해져서 입을 쑥 내밀었다.

"난 치킨 프라이를 먹을 거야. 질은 치킨 싫어하니?"

"좋아해요. 그걸 먹고 나서 디저트를 먹어도 되나요?"

"네 아빠가 좋다고 하시면....."

질은 이상하다는 듯이 리비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리비 언니도 아빠한테 승낙을 받아야 돼요?"

홀트와 리비는 마주보면서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 앤 정말 다루기 힘든 아이야!" 홀트가 말했다.

"이 정도의 나이라면 모든 게 이상하고 의문스러워 보이죠. 세 살쯤 됐나요?"

질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아녜요, 이제 네 살이 돼요." 그녀는 재빨리 자신의 작은 손가락을 펴서 무리하게 네 개를 만들어 보였다.

"1월에 네 살이 되는 거요." 홀트가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면 당신도 이제는 대단한 역할을 떠맡아야 하겠군요?" 리비가 말했다.

"도리가 없지 않소?"

식사를 끝내고 나서 커피를 마실 즈음 식당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 둘씩 방으로 돌아가고 몇 사람 남지 않았다. 리비는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사람들처럼 질과 홀트에게서 편안한 친근감을 느꼈다.

리비는 이제 홀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나이는 34세로서 농장주였고, TOLTOT로부터 별로 멀지 않은 곳에서 오렌지 등의 과수를 재배하고 있었다.

"처음엔 가축만 길렀지만 10여 년 전 과수원 하나를 구입하여 사업을 확장했는데, 과일 수익이 좋아 점차 가축을 줄이고 과일을 심게 되었소. 지금 생각하면 가축도 좀 남겨 놓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홀트는 스푼으로 커피를 한번 휘저었다. "감귤류는 지난 3년 동안 계속 흉작이었소. 날씨도 문제지만 작년에 플로리다를 엄습한 고사병 때문이오."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어요. 뉴스 보도에 의하면 과일나무를 전부 불태워 버려야 했다면서요? 고사병이라는 것이 어떤 거죠?"

"나무에 작은 포자가 생기고 이내 나무 전체로 퍼져 나가는 병이오. 그 포자가 실질적인 피해를 주는 건 아니지만 한 1년 쯤 지나면 나무가 말라 버리게 되는 거요. 나무 한 그루를 심어 열매 맺기까지 끼우는 데는 줄잡아 5년이 넘게 걸리는데 단 1년 만에 말려 죽이다니... 난 운이 좋게 피할 수 있었지만 어떤 농장은 전 재산을 잃어버렸소." 홀트는 컵을 들고 커피를 한모금 들이켰다.

"우울한 얘기만 했군. 이제는 리비 해밀턴이 어떤 인물인지 내게 말해 주지 않겠소? 당신의 대가족에 대한 무용담도 들려주시오."

"우리 부모님은 결혼하신 지 38년이 됐어요. 5남매 중 막내인데,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시카고에 있는 컴퓨터 회사에 취직을 했었죠, 독립해 보겠다고 아파트를 구해 나왔었는데 식구들이 번갈아가며 들이닥치는 바람에 결코 쾌적한 생활은 되지 못했어요. 우리 식구는 나까지 합해서 19명이나 돼요. 문제는 식구들이 날 마치 여섯 살짜리 꼬마 대하듯 한다는 점이죠. 내가 이렇게 플로리다를 향해 가는 것도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식구들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당신은 몇 살이오?"

"스물일곱이에요."

"훨씬 어려 보이는데....."

리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바로 문제예요. 그리고 지금 내가 독립해 나오는 시기가 문제가 돼서 우리 집은 대단히 험악한 분위기에 싸여 있구요."

질이 어린이용 좌석에서 내려와 리비의 의자에 끼어들었다. 그리고는 리비의 무릎에 머리를 대더니 이내 새록새록 잠이 들었다.

"당신의 가족은요?" 그녀가 홀트에게 물었다.

"가족이라고 해봤자 전국에 흩어져 사는 사촌들을 제외하면 나 혼자뿐이오. 지금까지 늘 혼자 살아왔소. 이젠 질이 있지만..... 증조부께서 건축하셨던 집이 한 채 있는데 혼자살기엔 너무 커서 외롭소. 그 집을 방치해 둬선 안 된다고 고집하는 걸 보면 나도 어지간한 센티멘탈리스트인가 보오." 그는 멋적은 듯이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센티멘탈리스트라구요? 별로 나쁘지 않군요? 이제 질이 당신의 생활을 많이 바꿔 놓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물론 변화는 있을 거요. 사실 난 지금까지 질과 함께 살게 되는 것에 몹시 불안감을 느껴왔소."

"그렇겠죠." 리비는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이 남자는 어린이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환경에서 자라야 되는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야. 당연히 걱정도 되겠지. 하지만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니까..... 리비는 태연한 표정으로 커피를 들이켰다.

"헤어진 아내는 배우였소. 그녀는 뉴욕으로 이사하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앞으로의 환경이 질에게 적합치 않다고 내게 양육을 제의해 왔소. 시카고에 있을 때는 아내를 키워 준 유모 나나가 질을 돌봐 주었는데, 나나는 나이가 많아 아내를 따라 뉴욕으로 옮겨가 살 수가 없다고 말했던 거요. 따라서 아내는 아이를 키울 수가 없었소."

"왜 처음부터 당신이 양육을 맡지 않았나요?"

"그건...... 내가 강경하게 나갔더라면 그럴 수도 있었을 거요. 하지만 법정에서 싸우면 아이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잖소? 린다도 그걸 원치 않았소. 그래서 양보했던 거요." 홀트는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였다. "린다는 사실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소. 그녀는 자기 일이 우선이었으니까....."

이 사람은 아직도 헤어진 아내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 리비는 못마땅해 하는 자신의 감정을 억지로 감추었다. 사실 홀트만큼 강한 인상을 준 남자는 이제껏 없었다. 리비는 그에게 끌리고 있는 감정에 불안감을 느꼈다.

웨이트리스가 커피포트를 갖고 왔다. "더 드릴까요?"

"전 됐어요." 리비가 사양하지 홀트도 손을 저었다.

웨이트리스가 가고 난 뒤 식당 안을 둘러보니 자신들이 마지막 손님이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야겠어요. 운전이 이렇게 힘든 노동인 줄 오늘에야 처음 알았어요." 리비는 자신의 무릎에 잠들어 있는 질을 끌어안았다. "내일 아침에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요."

홀트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결심한 듯 그녀의 어깨에 팔을 올려놓았다. "리비, 우리 행선지가 같은 방향인데 내일부터는 함께 여행하는 것이 어떻겠소?"

리비는 숨이 막혔다. 그의 팔로부터 전해져 오는 뜨거운 열기가 목을 메이게 했다. 이 남자와 함께 있으면 가슴이 뛴다. 처음엔 이 남자의 매력에 어느 정도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지만, 육체적인 접촉에는 도저히 감정을 콘트롤할 수가 없다.

홀트는 셔츠의 첫 번째 단추를 풀면서 긴장된 분위기를 완화시키려고 가볍게 윙크했다. "당신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기로 맹세하겠소."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과 동행하게 된다면 더없는 영광으로 생각하겠소. 그리고 오늘 낮에 있었던 당신의 행동으로 봐선 내가 보호해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소."

리비는 은근히 약이 올랐다. 이 사람은 자기의 매력에 넘어갈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야. '보호해 줘야' 한다고? 나도 이 세상을 헤쳐나갈 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는 여성이야. 이 남자는 매력적인 남자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쓸 데 없는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아. 시카고에서 독립 선언을 하고 떠나온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남에게 의지할 수는 없어. 유감스럽지만 거절해야만 해.

"나를 걱정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내 스케줄은 이미 정해져 있어요. 그리고 내가 걱정했던 그 부부를 도와주신 일에 감사드려요. 이제 나 때문에 더 이상 그런 고생을 하실 필요는 없어요."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오. 내가 그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서 그랬던 건 아니오. 당신에게 그런 일을 시키고 싶지가 않아서였소."

"그건 참 유감이로군요."

"아니, 내가 말을 잘못한 것 같소."

두 사람의 말다툼에 질이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자기가 있는 장소를 확인하기 위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 , 안심하고 자렴." 리비는 아이의 불안감을 덜어주기 위해서 살포시 껴안았다. "걱정하지 말고 자는 거야." 리비는 질 덕분에 긴장된 대화가 중단된 것을 감사히 여기면서 그녀의 등을 다정스럽게 다독거려 주었다. "가서 잠재워야 되지 않겠어요?"

"그게 좋겠군."

홀트가 계산서를 집으려 하자 리비가 재빨리 나꿔챘다. "내가 계산하겠어요. 오늘 아침 휘발유 값을 대신 지불하셨잖아요?" 진심으로 더 이상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

홀트는 뭐라고 반박하려 했지만 리비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는 체념했다.

"그럼 내일 아침 식사는 내가 계산하게 해주겠소?" 그리고는 지폐 몇 장을 꺼내 웨이트리스에게 팁으로 주었다.

"그렇게 하죠." 하지만 리비는 이미 결심하고 있었다. 안내판에는 커피숍이 오전 6시에 문을 연다고 적혀 있었다. 내일 아침 홀트 일행이 깨어나기 전에 커피 한잔을 마시고 일찍 떠나 버려야만 해.

홀트는 리비의 품에 잠들어 있는 질을 넘겨받았다. 리비가 계산을 하고 있는 동안 그는 잠들어 있는 질에게 코트를 입힌 다음 부츠를 신겼다. 질이 불편했던지 다시 잠에서 깨어나 칭얼거렸다.

", 착한 아이지? 내가 도와 줄 테니까 안심하렴. 귀가 감기 들면 곤란하겠지?" 그녀는 아이를 어르면서 귀마개를 덮어 주었다.

"." 질이 잠결에 대답했다.

리비가 옷을 챙겨 주자 질은 얌전히 있었다. ", 밖은 굉장히 춥단다. 코트 단추를 잘 잠가야 따뜻하게 잠을 잘 수 있지. 너도 알고 있겠지?"

"언니가 재워 주는 거죠?" 코트 단추를 잠그고 있는 리비의 손을 잡으면서 질이 말했다. "아빠, 괜찮죠?" 질은 리비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홀트 쪽을 보면서 동의를 구했다.

"그렇게 해주겠소?" 그의 눈은 리비가 거절하지 못한다는 걸 짐작한 듯 벌써 감사의 미소를 띠고 있었다.

"물론이에요." 그녀는 할 수 없이 승낙하고 말았다.

", 그럼 갑시다." 홀트는 질을 한손으로 안고 다른 한손을 리비의 어깨에 두르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홀트의 방은 리비의 방 윗층으로 앞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방문을 열자 뜨거운 열풍이 얼굴에 몰아쳤다.

"! 히터로 장난쳤구나!"

"." 질이 눈을 뜨고 홀트의 품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리비를 향해 팔을 벌리고 응석을 부렸다. "언니, 이제 재워줘요."

홀트는 방문을 열어 둔 채 히터가 있는 곳으로 갔다. 질이 그 뒤를 따랐다.

"고온에 맞춰져 있잖아?" 홀트가 뒤돌아서서 질에게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그랬어요. 따뜻해지라고..... 내가 차 안에서 춥다고 하니까 아빠가 고온에 맞췄었잖아요?" 질은 아빠가 화내는 것이 이상한 듯 빤히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하지만 넌 글자도 모르잖니?" 홀트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글자는 몰라도 할 수 있어요. 나 파자마 갖고 올게요." 질은 달려가면서 코트를 벗어 던지고 슈트 케이스를 열어 한참 뒤지더니 순모 파자마를 꺼냈다. 그리고는 리비를 돌아보면서 애교를 떨었다. "언니, 부탁해요. 내 옷을 벗겨 줘요."

"좋아." 리비는 웃음을 머금은 채 대답했다.

홀트는 도대체 뭐가 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질의 옷을 벗겨 주면서 장난을 치고 있는 리비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이제 자야지." 홀트가 자상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직 이를 닦지 않았어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질은 네 발로 기면서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리비는 입을 딱 벌린 채 할 말을 잊고 있는 홀트를 바라보면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뭘 그렇게 놀라세요? 질은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다 컸어요."

"하지만 저 앤 아직 글을 몰라." 홀트는 아직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애들에겐 글자도 그림으로 보여요. 의미는 몰라도 나름대로 자기 판단으로 이해하고 있어요. 텔리비전의 'ON' 이란 단어는 읽지 못해도 그걸 누르면 화면이 나온다는 걸 모르는 꼬마를 본 적이 있으세요?"

"난 아동심리학자의 강습을 받고 나름대로 아이에 대해 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까 아이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군." 홀트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팔을 꼬면서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심리학자에게는 아이가 없었던 것 같애."

"세 살짜리 꼬마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곧 익숙해질 수 있을 거예요."

"네 살이오. 애가 너무 영리하다고 생각지 않소?"

"영리한 건 사실이에요."

"어느 부모나 자기 자식이 영리하길 바라겠지만 난 저 애가 너무 영리해서 걱정스럽소. 오늘 아침, 화장실에 데려다 준다니까 날 마치 다른 별에서 온 우주인처럼 대하면서 끝까지 자기 혼자 가겠다고 우기지 않겠소? 정말 할 말을 잃었소."

"그래도 용케 혼자 가게 하셨군요. 고집을 피워 끝까지 따라가셨을 줄 알았는데."

"그냥 보낼 수밖에 없었소. 아무튼 당신이 애를 다루는 기술에 그저 감탄할 뿐이오."

"어디까지나 풍부한 경험이 증명해 주는 거죠."

그때 홀트가 리비의 손을 잡아끌었다. 리비가 빠져나오려고 반항하자 더욱 세게 끌어당겼다. "리비, 당신은 왜 그렇게 조심성이 많지?" 그것은 나직하고 매혹적인 목소리였다.

리비는 숨이 막혔다.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이번 여행은 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기예요. 독립 선언이란 말이에요. 실패하지 않으려면 조심해야죠. 난 독립심이 강한 당신의 딸이 무척 마음에 들어요."

"그 아이 아버지는 어떻소?"

홀트가 좋은 대답을 기대하는 듯 애원하는 듯한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그 아버지도 마음에 들어요. 하지만 그가 조금만 더 신중하다면 더욱 마음에 들 것 같군요."

"내가 함께 여행하자고 권했을 때도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소?"

"그래요." 리비는 정직하게 말하기로 결심했다. "이런 내 행동은 누군가에게 보호 받을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조건반사예요. 내 가족은 옷 입는 것에서부터 데이트하는 데까지 하나하나 간섭하고 보호하려 들었으니까요. 난 정말 자유를 원해요."

"당신의 가족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소." 홀트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가족들을 사랑해요. 이렇게 헤어져서 정말 외롭고 쓸쓸해요. 하지만 막내동이도 이제 어엿한 성인임을 보여주고 싶어요."

"당신은 우먼 리브 투사는 아니지만 독립심 하나만은 여느 남자 못지않은 것 같군. 그렇다고 오빠들이 간섭하는 걸 나쁘게 생각해서는 안 될 거요. 예를 들어 당신이 겁 없이 히치하이크를 시켜 줬을 때 생길지도 모르는 사태를 고려한다면 오빠들의 간섭은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오."

"이제 됐어요." 질의 목소리가 긴장된 분위기를 깼다. 홀트는 리비의 강한 반박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질의 출현이 정말 다행스러웠다.

질을 눕혀 준 다음 뺨에 키스를 한 리비가 질이 완전히 잠들 때까지 옆에서 있어 주면서 아무 말이 없자 홀트는 나름대로 리비의 반박을 추측해 보았다. 아마 틀림없이 쓸 데 없는 기사도 정신은 집어치우라고 소리치겠지.

리비는 스탠드를 끄고 의자에 돌아와 앉았다. 방안에는 어스름한 불빛만히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홀트가 맞은편에 앉아 바라보고 있었다.

"리비, 당신은 정말 여성답고, 그리고 전에도 말했지만 대단히 매력적인 여성이오."

리비는 질이 깨지 않도록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난 지 12시간밖에 되지 않는데 당신은 마치 내 오빠라도 된 것처럼 간섭하고 있어요. 난 스물일곱 살이고 어엿한 직장을 가진 워킹 우먼이에요." 리비는 벌떡 일어나 그의 앞에 서더니 완강한 태도를 보였다. "호기심 때문이라면 다른 여자를 찾아보세요! 난 싫어요!"

홀트는 질을 흘낏 쳐다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지금 지나친 상상을 하고 있소."

그 말이 그녀를 자극시켰다. "뭐라고요? 웃기지 마세요. 이래봬도 남자들의 응큼한 수작을 판별해 낼만한 능력은 갖고 있다구요!"

"그만둡시다! 사이좋게 여행하자는 게 당신 눈에 응큼한 수작으로 보인단 말이오? 난 단지 혼자 여행하고 있는 한 여성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을 뿐이오. 그 여성은 대단히 친절하고 어린애를 잘 다루는 유능한 여성이오. 다루기 힘든 딸을 가진 아버지가 구원의 천사 같은 그 여자에게 함께 여행하자는 제의를 하는 것이 그렇게 나쁜 일이오?" 리비가 의심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자 홀트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친절하다는 건 사실이잖소? 내 딸을 구하려고 달려간 걸 보나 임산부를 걱정하여 위험을 무릎 쓰고 히치하이크를 시켜 주려고 한 걸 보나 그건 분명하잖소?"

"그건 예외였어요. 난 처음 보는 사람과는 결코 말을 하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은 지금 천연덕스럽게 나와 얘기를 나누고 있잖소?" 홀트가 장난기를 띈 채 지적하자 그녀는 더욱 크게 화를 내었다.

"그래서요? 그게 어쨌다는 거죠? 말해 보세요!"

사태가 험악해졌다. 리비는 마치 피고석에 앉은 피고를 닥달하는 검사처럼 홀트를 윽박지르고 있었다. 홀트는 그녀를 침대에 쓰러뜨려 더 이상 소리치지 못하도록 키스로 입을 막아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사태가 더욱 크게 악화될 것 같아 참고 있었다.

"리비, ....." 홀트는 일어서면서 적당한 말을 찾으려고 고심했지만 리비으 거부 반응은 더욱 심화되었다.

"말해 보세요, 빨리요!"

홀트는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잡은 다음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정 그렇다면 진실을 말하겠소." 홀트는 리비의 얼굴에 구멍이라도 내려는 듯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피부는 대단히 투명했다. "나 자신의 감정에 대해 말하겠소. 당신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은 맹세 같은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소."

그는 여기서 잠깐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당신은 매일 아침 거울을 보고 있으니까 당신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을 거요. 내게 당신의 모습을 그리라고 한다면 이렇게 그릴 거요. 영양처럼 우아한 몸매, 길고 화사한 손가락, 가는 허리..... 당신의 허리는 얼마나 가는지 남자로 하여금 직접 자기 손으로 재어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만들 정도요. 하지만 당신의 얼굴은 도저히 내 실력으로는 그릴 수가 없을 정도로 아름답소."

그의 손가락이 리비의 어깨에서 목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녀의 머릿속으로 파고 들더니 귀 뒤의 혈관에 이르러 격하게 뛰고 있는 맥박을 재고 있었다. 그녀의 피부는 비단결같이 매끄러웠고, 머리 뒤에 감추어진 피부는 촉촉했으며, 열대지방에 핀 화사한 꽃향기가 났다.

"당신의 머리는 여름날의 햇빛 색깔과 같소. 따스하게 빛나고 있소." 그리고 홀트는 사랑의 독백을 계속했다. "명치 끝부분에 파인 혈관이 보이고 입술은....." 홀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당신의 입술은 너무도 육감적이오. 오늘 아침, 벌키스웨터를 입고 있을 때도 당신의 가슴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날 유혹하고 있었소. 한마디로 당신은 너무나 멋지고 매력적인 여자요."

그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외면한 채 리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차 하는 순간 입술이 맞닿을 정도로 그녀를 바싹 끌어당겼다.

"당신을 지킨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건 내 진실된 기분에서 본다면 이차적인 문제요. 리비, 당신은 내게서 자신을 지켜야 될 거요.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난 당신을 안고 싶다는 생각을 품어 왔으니까....."

홀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가를 더듬으면서 그녀가 달아날 여유를 주었다. 하지만 리비는 저항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력으로는 저항할 수가 없었다. 온몸의 감각이 바싹 긴장되어 있었다. 그녀의 손은 어느새 그의 가슴팍을 더듬고 있었다.

"내 얼굴을 한 대 때려 주고 싶겠지만, 당신의 솔직한 마음은 날 원하고 있소." 홀트는 조용히 속삭이면서 그녀의 입술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그는 실눈을 뜬 채 그녀의 긴 속눈썹을 보았다. 가는 숨을 내쉬면서 리비는 홀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더욱 몸을 밀착시켜 왔다. 욕망의 열기가 뜨거운 파도처럼 홀트의 혈관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홀트는 천천히 손가락을 펴서 그녀의 등에 원을 그리다가 그녀의 몸을 힘껏 끌어당겼다. 체격이 서로 다른 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몸은 빈틈없이 착 달라붙었다. 그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리비는 자신의 이러한 행위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지만 자발적으로 가슴을 그의 가슴에 밀착시킨 다음 입술을 열고 그의 혀를 맞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머릿속은 무지갯빛으로 현란했고, 귀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홀트는 성인이 된 이래 지금껏 여성에게 이토록 직접적인 반응을 보인 적은 없었다. 질이 깨면 저 아름다운 여자가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참기가 어려웠다. 홀트의 손이 리비의 가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리비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 다음을 기다렸다. 그러나 홀트는 자아를 되찾고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그녀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속삭였다.

"미안하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내 마음을 알아주겠소, 리비?"

"아니에요, 홀트.....나는....."

그녀는 홀트의 팔에 안겨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처음으로 맛보는 욕망의 열정에 그저 충족하고픈 생각뿐이었다. 성적 충족을 갈구하는 리비는 마치 오랜 세월 사귄 연인의 품에 안긴 것처럼 편안하게 안겨 있었다.

리비는 자신의 표정을 감추기 위해 그의 가슴에 얼굴을 깊이 묻은 채 말했다.

"내 방에 가고 싶어요."

"당신의 방까지 데려다 주겠소."

"아니에요. 질이 깨면 어떻게 해요? 혼자서 갈 수 있어요. 계단만 내려가면 되니까요." 리비는 부리나케 백과 코트를 집어 들었다. 리비의 마음은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리비, 당신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정말 미안해."

"그렇지는 않아요. 난 자신이 무서워졌을 뿐이에요. 난 언제나 이렇게 화끈한 면이 있어요."

홀트는 리비의 정직함에 쓴웃음을 지었다. "재미있는 여자요, 당신은."

리비는 홀트로부터 등을 돌렸으나 다시 뒤돌아보았다. "나는 하나도 재미있지 않아요. 오히려 화가 날 뿐이에요. 잘 자요, 홀트!"

"좋소, 리비. 내일 아침 일곱 시, 아침 식사 때 만납시다." 홀트는 계단 아래까지 따라오면서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리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홀트는 계단 창문으로 몸을 쑥 내민 채 그녀가 무사히 방으로 들어가는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리비가 문을 닫기 전에 흘낏 쳐다보니 그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홀트는 방으로 돌아와 윗도리를 벗은 다음 길게 한숨을 내쉬며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양손을 머리 뒤로 두르고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머릿속은 그녀의 생각으로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오늘 아침 플로리다를 향하는 차 안에서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침대를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그녀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그는 손가락으로 눈을 비비면서 생각했다. 왜 함께 여행하자고 권했단 말인가? 더 이상 진행되면 곤란한 일에 말려들 줄을 훤히 알면서..... 더군다나 지금은 아이까지 데리고 있는데..... 질은 내 생활의 전부이다. 이제부터 내 생활도 많이 변하겠지.

홀트가 이혼한 것은 아내 린다가 나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너무 젊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에 린다는 임신했다면서 결혼을 요구했었다. 물론 그 당시에도 린다와의 결혼이 마음 내켰던 것은 아니었다. 책임감 때문에 결혼했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얼마 후 그녀의 임신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었다.

10여 년 동안의 결혼 생활 중에 린다는 늘 초조해하고 불만에 차 있었다. 정말 따분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린다도 나름대로 노력하긴 했으나 무대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홀트는 그녀에게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실제로 헤어진 지금은 그녀를 더욱 이해하고 좋아하게 되었다. 질을 낳은 건 아이가 있으면 두 사람의 사이가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으리라는 린다의 제의에 의한 것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아이를 사랑하긴 했으나 아이로 인해 사이가 가까워지지는 못했다. 결국 두 사람의 결혼은 깨어졌고 어떤 경우에든 질을 불행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는 것이 두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일단 이혼의 상처가 치유되자 독신 생활에도 익숙해지고 성인이 되어 처음 맛보는 근면하고 진지한 생활이 즐겁기까지 했다. 그동안 간단히 여자관계를 즐겨 왔지만 결혼에는 흥미가 없었다. 두 번 다시 꼭 같은 함정에 빠질 수는 없었다.

"리비는 분명 멋진 여자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여자라면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번의 만남은 흔히 있는 만남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계속해서 자기 자신에게 말했지만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채 허전하기만 했다.

린다가 뉴욕에서 출세할 꿈을 가진 덕분에 질을 데려올 수가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도 이제 가족이 생긴 것이다. 그에게는 오직 질만 있으면 여자는 필요 없다. 적어도 지금은 필요 없다. 아니.....아마 영원히 필요 없을 것이다.

 

아침에는 한두 송이 흩날리든 눈이 점심시간이 넘어서자 본격적인 눈보라로 변했다. 내쉬빌까지는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었지만 눈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아침 식사 때-차는 언제라도 곧 출발할 수 있도록 건물 뒤에 주차시켜 두었었다.-모텔 종업원이 날씨만 괜찮으면 3~4시간 정도면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눈만 오지 않았다면 벌써 도착했어야만 했다.

도로에서 눈을 떼면 위험하기 때문에 시계도 보지 않고 핸들만 꽉 쥐고 있었다. 긴장해서 어깨가 결렸고 눈도 침침해졌다. 센터라인도 눈에 덮혀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길가의 안내판을 못 보고 지나칠 가능성이 있어 리비는 온 신경을 집중시켜 센터라인과 안내판에 주의를 기울였다. 바람이 강해지자 눈은 사방으로 흩날리기 시작했고 시계가 극히 좁아져서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웠다. 리비는 핸들을 꽉 움켜잡았다. 어리석은 자존심이여! 홀트와 함께 여행했더라면 이런 곤경에 빠지진 않았을 텐데.....

홀트의 얼굴이 떠올랐다. 믿음직스러워 보이고 매력적인 남자! 그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의 크고 화려한 밴도 얼마나 멋있었던가! 그렇게 큰 밴이라면 이런 눈발쯤은 문제없을 것이다. 고집만 부리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아늑한 모텔에 머물면서 눈보라가 그칠 때를 기다리며 느긋하게 점심 식사를 하고 있을텐데. 그 생각을 하니 그녀는 갑자기 배가 고팠다.

리비는 7시가 되기 전에 모텔을 빠져나와 홀트와 마주치지 않도록 도망치듯 출발했다. 리비는 지금 진퇴양난의 곤경에 빠져 있다. 이제 곧 모텔이 보일 테지. 눈이 날려도 안내판은 보일거야. 안내판을 못 보더라도 진입로만 보인다면 그곳엔 틀림없이 모텔이나 주유소 같은 게 있을거야. 온갖 가능성들을 생각하면서 기어가고 있는데 마침 안내판 하나가 보였다.

<동쪽 27킬로미터 지점, 숙박 시설>

절망적이다. 이 사나운 눈길을 뚫고 어떻게 27킬로미터나 달린단 말인가? 해지기 전에 10킬로미터도 전진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때 리비는 간선 도로가 고속도로보다 훨씬 안전할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간선 도로라면 차량이 많지 않아 사고가 날 위험이 적을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하지만 간선 도로를 5킬로미터 정도나 달렸는데도 차는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일기불순으로 라디오도 나오지 않았다. 리비의 귀에는 자신의 숨소리와 엔진 소리만 들려올 뿐 밖은 너무도 고요했다. 마치 자신이 지구상의 마지막 인간이라도 된 것 같았다.

리비는 공포를 느꼈다. 얼마 전부터 위험한 상황에 빠져들고 있다는 짐작은 했었지만 이젠 이대로 죽을는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전신을 휩쓸었다. 죽음이 눈앞에 보였다. 동사한 내 시체를 보고 식구들은 뭐라고 할까? 대성통곡을 하면서 "그러게 내가 뭐랬니? 떠나지 말라고 했었잖니?"라고 울부짖겠지? 그래요. 엄마, 아빠.....여러분들의 말이 맞았어요. 내가 이렇게 달아나듯 모텔을 빠져 나오지 않았다면 우린 뭘하고 있을까? 아마 홀트와 난 눈이 그칠 때를 기다리며 질을 가운데 두고 유리창을 때리는 눈발을 바라보면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있겠지?

리비는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낙심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뭐든지 이 위기를 헤쳐 나갈 방법을 강구해야만 한다. 침착해야만 한다.

그러나 대자연의 폭력에는 어찌 해볼 길이 없었다. 와이퍼는 끽끽거리던 소리마저 내지 않았다. 악셀을 밟자 차가 한쪽으로 기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바퀴가 노면에 닿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그녀는 사이드 브레이크를 걸고 만약의 충돌 사태에 대비하여 비상등을 점멸시킨 다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바람 소리가 요란했다. 리비는 힘없이 자동차 전면의 글라스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혹독한 냉기가 스웨터와 슬랙스를 뚫고 들어와 살갗을 콕콕 찔렀다. 리비는 이제 필사적으로 글라스와 본네트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손가락이 얼어붙어 감각이 없었다. 아마 짤려 나가도 통증을 느끼지 못할 것 같았다. 눈을 다 털어내자 와이퍼가 다시 끽끽 소리를 내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됐다!" 리비는 환호성을 질렀다. 다시 차 안으로 들어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머리를 흔들자 하얀 눈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갑자기 원기가 솟는 것 같았다. 힘내, 리비!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뺨을 문질렀다. 시프트 레버를 다시 드라이브에 넣었을 때, 리비는 차가 전혀 움직이지 않음을 알았다. 그녀는 시프트 레버를 드라이브에서 백으로 바꿔보았다. 하지만 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악셀을 힘껏 밟아보았다. 그러자 타이어가 맹렬한 소리를 내면서 제자리에서 헛돌았다.

"어떻게 된 거야! 움직여, 제발 움직이라구!" 리비는 핸들을 쥔 채 악을 썼다. "이 멍청한 차야! 날 얼어 죽게 만들 셈이야! 빨리 움직여, 제발!" 리비는 있는 힘을 다해 다시 악셀을 밟았다.

그때 차가 갑자기 움직이더니 얼어붙은 아스팔트 노면을 미끄러져 도랑 쪽으로 굴러갔다. 요란한 충격음과 함께 리비의 머리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대로 기절하면 동사할 거란 생각에서 이를 악물었지만 의식이 불투명했다. 이젠 참을 수가 없다. 리비는 소리 내어 울었다. 얼어붙은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절망하긴 아직 이르다. 홀트 휘트니가 구해 줄지 모른다. 이 세상에서 날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다. 그는 내가 어디에 있건 찾아낼 것이다. 아니, 반드시 찾아내야만 한다.

주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대자연의 어머니가 기계 문명에 복수를 하는 걸까? 이것이 복수라면 완벽한 복수이다. 이런 공포는 태어나서 처음이다.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홀트의 구원뿐이다. 하늘이 도우신다면 규칙적으로 깜빡이고 있는 비상등이 눈발에 가리지 않을 것이다.

신이야, 제발 그녀를 찾게 도와주소서! 홀트는 북쪽으로 향하는 인터체인지를 세 개나 통과할 때까지 달리다가 다시 남쪽으로 돌아 하염없이 눈길을 달렸다. 바보 같은 여자! 멍청한 여자! 홀트는 마음속으로 수백 번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그녀가 나타나 주기만을 빌었다.

리비가 오늘 아침 몰래 떠나 버린 건 어젯밤의 내 행동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진심을 말했을 뿐인데..... 어찌됐건 그녀가 내 행동 때문에 부담스러워 일찍 떠났다면 오늘의 사태는 어디까지나 내 책임이다.

이번 눈보라는 일기 예보도 예상치 못했을 정도로 심하다. 기상대는 눈이 내릴 거라고만 예고했을 뿐 폭설과 강풍이 몰아친다고는 하지 않았었다. 한 시간 전쯤 운전하기에 위험할 정도로 기후가 돌변했을 때, 홀트는 리비가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런 날씨를 예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핸들을 꽉 쥐고 악셀을 밟으면서 홀트는 이 차를 시카고에서 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플로리다와는 달리 시카고에서 판매되는 차는 스노우타이어가 의무적으로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노우타이어와 밴의 중량 면에서는 유리하긴 하나 이런 강풍과 폭설에는 힘껏 달릴 수가 없다.

고속도로를 아래위로 다 뒤져도 리비의 차는 발견되지 않았다. 홀트는 만약을 생각하여 간선 도로로 들어섰다. 차는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이런 날씨에 운전하는 바보는 없을 테니까..... 한참을 달리자 앞에서 깜빡이는 점멸등이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가까이 달려갈수록 비상등이 단속적으로 깜빡이고 있는 것이 분명하게 보였다.

홀트는 길게 숨을 들이켰다. 그는 신중하게 브레이크를 밟은 다음 천천히 밴을 정차시켰다. 밴에서 내려 눈에 덮힌 승용차로 다가가면서 홀트는 기도했다. "신이여, 이번 한번만 더 도와 주십시오! 제발 이 차가 리비의 차이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차는 온통 눈에 덮여 있었고 문도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초인적인 힘을 다하여 문을 열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리비의 차가 분명했다.

"이 바보 같은 여자!" 홀트는 화가 나서 주먹으로 차를 내리쳤다. "이 눈 속을 걸어 나가다니! 바보 같은 여자! 멍청한 여자!"

홀트는 심호흡을 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만 한다. 그녀가 걸어갔다면 멀리는 못 갔을 것이다. 잘 하면 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그녀의 지능지수가 의심스러웠다. 간선 도로로 접어들지를 않나. 눈 속을 걸어 나가지를 않나? 홀트는 화가 나서 두 주먹으로 다시 자동자의 차체를 힘껏 내려쳤다.

"홀트.....?"

이건 분명 꿈이다. 내가 눈보라 소리를 잘못 들은 걸까?

"홀트.....?"

반대편 팬더 밑에서 눈사람 같은 것이 꿈틀거렸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뚜렷해졌다. 한쪽 손에 스노우 쟈일을 들고 서있는 리비의 모습이었다. 홀트의 모습을 알아차린 리비는 스노우 쟈일을 내던지고 그의 품안으로 뛰어 들었다.

리비의 뺨은 얼음 같았다. 홀트는 그녀를 힘껏 껴안았다.

"리비........리비!" 홀트는 두 눈을 꼭 감았다. 하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파란 눈에는 노기가 가득 차 있었다. 홀트는 말없이 리비를 데리고 밴으로 돌아갔다.

홀트는 리비를 푹신한 의자에 앉히고 코트를 벗겨 주었다. 그리고 자기도 코트를 벗고 그녀를 꼭 껴안아 자신의 체온으로 그녀의 차가운 몸을 녹여 주었다. 리비의 가녀린 육체가 추위 때문에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홀트는 뜨거운 입김으로 그녀의 눈, , , 그리고 이마를 녹여 주었다.

리비는 꿈을 꾸고 있었다. 육체의 외부는 죽음의 세계에 있는 것 같은데, 심장은 따스하고 살아 있는 것 같다. 이제 온기가 혈맥을 통해 전신으로 퍼지고 있다. 내 소원대로 홀트가 날 찾아냈고 날 껴안고 키스하고 있다. 이건 틀림없이 꿈일 거야. 리비는 눈을 뜨는 것이 두렵다. 하지만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해야만 한다.

"홀트.....?" 그의 혀가 입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을 때 리비는 용기를 내어 눈을 떴다. 꿈은 아니었다. "정말 당신이었군요? 차가 눈보라에 갇혀 버렸어요. 살려 줘서 정말 고마워요." 홀트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파란 눈동자를 다시 보자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 홀트! 이건 기적이에요!"

홀트는 한쪽 손으로 그녀를 껴안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여기 상처가 있는데?" 그는 깜짝 놀란 듯 손으로 그곳을 만지면서 말했다. "피가 나고 있군. 찢겨졌나 봐."

"차가 도랑에 미끄러질 때 머리를 찧었어요. 하지만 견딜만해요. 날 위해 이 눈 속을 달려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리비의 손을 잡은 홀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까짓걸 가지고 뭘?" 그는 손바닥을 펴서 그녀의 뺨을 문질러 주다가 ", 허리! 정말이지.....!" 하고 외마디 소리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고는 그녀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덮었다.

이 키스를 글로 표현하자면 관능적이라고 하기보다는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키스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안도감과 위로와 감사의 키스..... 리비를 안은 홀트의 팔이 유난히 강인해 보였고 어떤 곤경에서건 그녀를 지켜 주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남에게 보호 받는다는 것이 싫지 않았다.

키스가 끝났는데도 홀트는 아직 리비를 안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듯 그녀의 뺨과 입술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리비는 그의 품 안에서 살아 있다는 충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눈보라 속에서 얼어 죽을 뻔했다고 생각하니 홀트가 구원의 천사처럼 느껴졌다.

안도감과 흥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홀트의 분노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당신은 정말 바보야! 세상에 둘도 없는 멍청이야! 왜 아침에 기다리지 않고 혼자 떠나 버렸지?"

리비는 27년 동안 자신의 아버지나 오빠가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 주고는 이내 호통을 치던 일들을 상기했다. 이럴 때는 한 가지 대책밖에 없다. "내가 어리석었어요. 잘못했어요." 리비는 얌전하게 용서를 빌었다.

예상대로였다. 홀트는 더 이상 꾸중하지 않았다. "어젯밤엔 미안했소." 홀트를 다시 리비를 꼭 껴안았다. 두 사람의 귀에 들리는 것이라곤 히터 돌아가는 소리뿐이었다.

한참 후, 홀트가 팔의 힘을 느슨하게 하자 리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질은 어디에 있죠?"

홀트는 리비를 내려다보면서 웃었다. "믿건 말건 당신의 자유지만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 농가에 맡겨 뒀소."

"어디예요? 어떤 집이죠?"

"괜찮을 거요. 농가 사람들은 대개 인정이 많거든? 난 당신을 찾아나서야 했고..... 당신이 날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었으니까. 하지만 질까지 위험을 빠뜨릴 수는 없었소. 마침 뒷뜰에 어린이 자전거가 있는 농가가 보이길래 애를 좀 맡아 달라고 부탁했던 거요."

"질이 있는 곳으로 어서 가야만 해요. 잘 있는지 걱정이 돼요."

"그것도 중요하지만....." 홀트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했다. "우선 당신을 의사에게 데려가야겠소. 머리의 상처가 걱정스러우니까....."

"머리를 조금 찧은 걸 갖고 뭘 그러세요? 약간 두통이 있을 뿐이에요. 아스피린 한두 알 먹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홀트는 의심스런 눈빛으로 리비를 쳐다보았지만 별다른 반박은 하지 않았다. "당신 짐을 갖고 오겠어." 홀트는 그녀의 발밑에 떨어져 있는 코트를 집어 들었다.

"고마워요." 리비는 홀트의 손을 잡고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죽음으로부터의 구해 준 대가로는 미흡한 것 같아 다시 키스로 답례했다.

입술이 겹쳐지자 또다시 뜨거운 불꽃이 지펴졌다. 리비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른 채 본능적으로 몸을 밀착시켰다. 홀트는 그녀의 입술 감촉을 즐겼다. 리비는 적극적으로 그의 혀를 받아들였다. 그녀의 입술은 이제 온기를 되찾았다. 홀트는 거친 욕망이 자신의 내부에 일고 있음을 느꼈다.

인생의 찬가 비슷한 욕망이 전신의 감각을 일깨우자, 홀트는 거친 눈보라 속이긴 했지만 그녀를 밴의 마룻바닥에 쓰러뜨린 다음 마음껏 탐욕하고픈 충동을 느꼈다. 그는 그러한 욕망을 이기기 위해 한동안 빛나는 눈송이 같은 그녀의 머리칼에 얼굴을 파묻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때 그녀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알고 있어요? 내가 아침에 모텔을 탈출해야만 했던 이유를? 바로 이런 일에 빠질까 봐 겁이 났던 거예요."

"그랬을 테지....."

홀트가 도어를 열었을 때 커다란 눈송이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리비는 깜짝 놀랐다. 밴 안은 너무나도 따뜻했고 홀트의 품이 너무 안락하여 눈보라가 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고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비는 자신의 어리석은 고집 때문에 홀트가 무척 고생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홀트는 내가 그를 애타게 찾고 있다는 예감을 받았다고 했다. 나 역시 죽음의 위기를 맞았을 때 그가 와 줄 것이라고 믿었었다. 아마도 우리 두 사람 사이는 그 어떤 불가사의한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이런 일을 가족들이 알면 뭐라고 할까? 믿지 않겠지만 그 끈이 내 생명을 구해 준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야.

2, 3분 후 홀트가 돌아왔다. 머리와 눈썹이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는 리비의 슈트 케이스와 백, 그리고 코트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또 다시 사라졌다.

"홀트, 기다려요!" 리비는 한시라도 빨리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홀트는 그대로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한참 후, 다시 눈을 뒤집어쓴 홀트가 리비의 포터블 컴퓨터와 가족들이 미리 담아 준 프리스마스 선물이 가득한 쇼핑백을 갖고 왔다. "전부 다 옮겨 왔으면 좋겠는데, 대충 중요한 것들만 챙겨 왔소."

"차가 부서지지 않았으니 그냥 둬도 괜찮을 거예요. 이 눈보라 속에 누가 훔쳐 가겠어요?"

홀트는 운전석에 앉아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리비가 조수석에 앉자 "당신이 앉아 있는 좌석 밑에 보온병이 있을 거요. 뜨거운 커피가 들어있으니 마시도록 하라구. 차는 눈이 그치면 사람을 보내 끌고 오게 할 테니까....."라고 말했다.

"당신 것도 따라 드릴게요."

"당신이나 마시라구. 난 운전을 해야 하니까."

리비는 아무 말 없이 두 개의 컵에 커피를 따리 한 잔은 자기가 마시고 나머지 한 잔은 홀트가 원할 때마다 잔을 입에 대어 주었다. 눈보라가 사정없이 창문을 때렸지만 밴은 용감하게 돌진했다. 전면의 글라스가 수직인 리비의 차에 비해 홀트의 밴은 경사진 형이어서 눈도 쌓이지 않고 시계도 아주 넓었다. 눈은 이제 하이웨이를 완전히 잠식하고 있었다.

"부탁이 있는데....." 홀트는 리비의 가슴을 슬쩍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밴은 인터 체인지의 경사로를 조심스럽게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다음 길을 오른쪽으로 돈 다음 굽어 도는 길을 살펴봐 주겠소?"

"그러죠." 안도감이 전신에 밀려오고 있었다. 이제 악몽은 끝났다! 리비는 길을 유심히 살피다가 소리쳤다. "저기죠? 저 집인 것 같군요?"

"맞았소." 홀트도 웃으면서 소리쳤다. "이제 다 왔소!"

빅토리아 왕조 풍의 창문이 많은 집이 눈 속에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오랜 전에 지은 이층집이었다. 일층 정면과 좌우를 둘러싼 멋진 울타리, 그리고 지붕 위를 장식한 조각품이 인상적이었다. 리비의 눈에는 이 집이 바로 천국으로 보였다. 갑자기 격심한 피로가 엄습해 왔다.

눈 때문에 어디가 길인지는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 홀트는 10미터 전방의 나무 밑에다 차를 세웠다.

"리비, .....나는.....말해 둘 것이 있소."

"뭔데요?" 리비는 두통을 느끼고 있었다. 심하지는 않았지만 머리가 욱신거렸다. 홀트가 뭔가 망설이고 있는 것을 알아채기엔 너무도 피곤했다.

"이 집 사람들은 우리가 결혼한 사이로 알고 있을 거요."

"뭐라구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죠?"

홀트는 차 문을 열어 리비를 내리게 한 다음 자기도 반대편 문을 열고 내렸다. 그리고 그녀를 반대편으로 끌고 갔다. 이곳은 차체에 가려 집안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도리가 없었소. 낯선 사람에게 애를 떠맡기면서 어제 만난 여자를 찾으러 가겠다고 말할 수는 없잖소? 솔직히 말하자면 질이 엄마 아빠와 함께 플로리다로 가는 도중 눈보라를 만났다고 했기 때문에 아마 엄마가 눈 속에서 헤매고 있는 줄로 알았을 거요. 난 당신 찾기에 바빠 설명도 없이 달려 나갔으니 그 사람들이 오해를 해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소?"

"그럼 이제부터 뭐라고 할 거예요? 우린.....함께 이 집에 묵을 예정인가요?" 리비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이 이 집에서 신세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홀트는 질린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어떤 대답을 기대하는 거요? 당신이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이 눈보라 속을 다시 헤매자는 거요?"

"물론 무리인 줄은 알아요....."

홀트는 리비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머리에 하얀 눈이 쌓이고 있었다. "우리가 같은 방에서 자는 걸 상상하고 있는 거요?" 그는 양미간을 모으면서 장난스런 미소를 띠었다.

"물론 그런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돼요." 리비는 모기만한 소리로 중얼대면서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홀트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아지도 머리가 아픈가요?" 라고 상냥하게 물었다.

"조금요. 하지만 곧 낫겠죠."

홀트가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아빠, 엄마!"라는 질의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라니!"

"신경 쓸 것 없소. 내가 설명했잖소?"

홀트가 리비를 안고 차 뒤로 돌아가자 질을 안은 부인이 포치에 선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난 짐을 갖고 올 테니까 먼저 가 봐." 홀트는 반말로 말하더니, 빠른 걸음으로 차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리비는 부인에게 먼저 미소로서 인사했다. 부인은 덩치는 컸지만 무척 여성다워 보였다. 나이는 40대 전반 정도로 보였고 키가 무척 켰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남자가 말없이 홀트의 뒤를 따라갔고 그 외에 작은 꼬마 두 명이 문 앞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질이 손을 뻗었기 때문에 리비는 반사적으로 부인에게서 질을 받아 안았다. 질은 대단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리비는 문제를 가장 빨리 해결할 수 있는 쪽을 택하기로 결심했다.

"처음 뵙겠어요. 리비 해밀턴이라고 합니다. 홀트 휘트니 씨와는 절친한 친구 사이예요. 오늘 큰 폐를 끼치게 되었군요."

부인은 악수를 하면서도 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질의 어머니가 아니신가요?"

질이 묘한 표정을 짓더니 리비의 가슴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거짓말이 들통이 나서 민망스러웠던 모양이다. 질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런 엄청난 일을 계속해서 거짓말을 메꿔갈 수는 없었다.

"아니에요." 리비는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면서 대답했다. "질은 무척 귀엽고 영리한 아이예요. 저도 이다음에 이런 아이의 엄마가 되고 싶어요."

부인은 놀란 얼굴로 뭔가 말로 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친절한 미소를 머금었다. "난 딕시 카틀랜드라고 해요. , 추운데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요." 딕시는 집안으로 안내하면서 꼬마들을 소개했다. "얘들은 제 딸이랍니다. 얘가 캐리이고 이쪽이 수예요. 거실에 난로가 있으니까 이쪽으로 오세요."

부인의 뒤를 따라 들어가면서 리비는 두 여자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큰딸 캐리는 6,7세 정도로 보였고, 작은 딸 수는 질과 비슷한 나이 같았다.

거실은 현관 홀 옆에 있는 커다란 방이었고, 거울처럼 매끄럽게 손질된 오랜 된 오르간이 벽 쪽에 놓여져 있었다. 반대쪽에는 대형 텔리비전이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예쁜 사기그릇이 장식된 벽난로 옆에는 편안해 보이는 소파가 놓여져 있었다. 딕시는 빅토리아풍을 즐기는 모양이로, 가구나 집안 분위기가 모두 고전적인 빅토리아풍이었다.

"대단히 안락해 뵈는 방이로군요. 도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리비는 쿳션을 몸을 묻으면서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

"시골 인심이 다 그렇죠 뭘. 이렇게 눈보라가 치는데 당신들을..........그러니까 홀트 휘트니 씨가 당신을 찾을 수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 코트를 이리 주세요."

리비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코트를 벗어서 건네주었다. 벽난로에는 장작이 훨훨 타고 있었고, 석유램프의 불빛이 분위기를 더해 주었다. 정말 시카고의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하고 안락했다.

"정말 굉장한 경험이었어요, 차가 미끄러져 도랑에 빠져버렸는데 눈 때문에 끌어낼 수가 있어야죠." 리비는 끔찍한 기억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운이 나빴으면 생명을 잃을 뻔 하셨어요. 홀트 휘트니씨가 정말 용감했어요. , 장작불 옆으로 와서 몸을 좀 녹이세요."

"하지만 이런 행운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이런 집에 신세를 질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에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마워요." 딕시는 진심으로 흡족해하는 것 같았다.

홀트가 들어와 짐을 문 옆에 놓고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리비와 딕시도 그의 존재를 깨닫고 돌아보았다. 홀트가 들어와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리비는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리비의 옆에 앉아 난로불을 쬐며 온화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아스피린은 먹었어?"

"백 속에 들어있어요."

딕시가 큰 딸에게 물을 갖고 오라고 시키는 동안 홀트는 백을 뒤져 약을 꺼냈다. 그리고 캐리가 갖고 온 물컵을 받아 리비의 손에 쥐어 주고 약 먹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일은 학교 안 가도 돼요." 캐리가 무척 신난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그래." 수도 덩달아 좋아했다.

"바보, 넌 학교 안 다니잖니?" 캐리가 웃으면서 놀렸다.

"나도 알아. 하지만 만약에 학교에 간다면....." 수는 리비를 올려다보면서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눈 때문에 전기가 안 들어온다구. 공부할 수 없을 거예요. 그렇죠?"

"수 말이 맞아. 큰일 났네." 리비는 웃으면서 맞장구를 쳐주었다. "가만있어 봐. 램프를 켜고 공부를 하면 어떨까? 재미있을 거야."

그때 딕시가 좌중을 둘러보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 모두들 조용히 하세요. 휘트니 씨, 이쪽은 제 남편 톰이에요. 캐리하고 수는 부엌에 가서 식탁을 차리도록 해라. 엄마는 손님들을 방으로 안내해 드려야겠다. , 휘트니 씨의 짐을 함께 들어 드리도록 해요." 모두들 딕시의 명령대로 흩어졌다. 그리고는 홀트에게 "솔직히 말해 휘트니 씨, 휘트니 씨라고 부르는 게 어색해요. 이름을 불러도 될까요?" 라고 물었다.

홀트는 리비의 등에 팔을 두르고는 상냥스럽게 웃어보였다. "언제쯤 이름을 불러 주실까 하고 기다렸습니다. 홀트라고 불러 주십시오."

계단 아래에는 17살의 토미가 서 있었다. 그 애는 아버지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키가 컸다.

"얘는 토미라고 해요. 오늘 저녁에 헛간에서 자겠대요." 딕시가 토미에게 지시했다. "토미, 저녁 식사 때는 깨끗하게 씻고 와야 한다."

", 엄마."

그러고 보니 리비는 이 집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카를랜드가의 남자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집 남자들은 무척이나 온순하군!

"방이 두 개 있는데 어느 쪽이든 좋을 것을 쓰세요."

딕시가 안내해 준 침실에는 옛날 식의 덮개가 달린 네 기둥침대가 놓여져 있었다. 장미빛 덮개와 침대 커버가 잘 어울렸다. 커텐도 장미빛이었다. 작은 난로에는 석탄이 파지직 소리를 내며 타고 있었다. 정말 아늑하고 편안해 보이는 방이었다.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는 프릴이 달린 램프가 켜져 있었는데 전체적인 분위기가 여자 방 같았다.

"이 방은 리비가 쓰는 게 좋겠군요." 홀트가 리비의 슈트케이스 두 개와 백을 침대 옆에 놓으면서 말했다.

리비가 보건대 딕시는 남녀 관계에 무척 엄한 여자 같았다. 그녀가 방 배정에 특별한 신경을 쓰고 있음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다음 순간, 리비의 상상을 뒷받침하는 딕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홀트 씨는 저쪽 방을 쓰도록 하세요. , 제가 타올을 갖다 드릴 테니까 빨리 가서 쉬세요."

침실 안쪽에 방이 하나 더 있었는데 아이들 방으로 사용했는지 손잡이가 낮은 문이 있었다. 마루에는 몇 개의 작은 깔개가 놓여 있었고 반들반들하게 닦여진 떡갈나무 마루에 난로 불빛이 영롱하게 어리고 있었다.

"내가 질을 데리고 이 방을 사용할게요." 홀트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고 리비가 제안했다.

홀트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고맙다는 듯 손을 뻗어 그녀의 명치끝을 어루만졌다. "두통은 어때?"

"이젠 괜찮아요. 아스피린 효과가 대단한데요?" 리비는 그의 손길을 음미하면서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당신이 질을 돌봐야 될 의무는 하나도 없어. 정말 질을 여기서 재워도 괜찮을까?" 홀트가 미안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애 시중이라면 당신보다 내가 실력이 뛰어나다는 건 잘 알고 계시겠죠? 당신이 눈보라 속을 뚫고 날 데리러 와준 걸 생각하면 하룻밤쯤 질을 돌봐 주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나서 그녀는 홀트의 방을 흘낏 들여다보면서 농담을 했다. "당신의 방 분위기 여간 좋을 것이 아니에요. 저 방을 양보하긴 싫지만 내가 이 방을 쓰도록 하죠."

"심심하면 언제든지 놀러 와도 돼." 홀트도 키득키득 웃으면서 맞장구쳤다.

"그런 짓을 했다간 이 집 아주머니가 기절하시게요?"

홀트의 팔은 어느새 그녀를 껴안고 있었다.

"아주머니가 이런 건 어떻게 생각하실까?" 홀트의 목소리가 관능적으로 들리는가 싶었는데 이내 입술을 겹쳐왔다.

"이것, 여기 두면 됩니까?" 복도로 통하는 문에서 톰이 양손에 슈트케이스를 든 채 고개를 외면하고 서있었다.

리비는 톰이 때맞춰 잘 와 줬다고 생각했다. 이런 분위기에 그와 단둘이 있노라면 자신을 콘트롤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눈보라 속에서 홀트에게 구원 받는 때부터 리비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처음부터 끌리고 있었지만 이젠 그의 품 안기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생각되었다.

"죄송합니다." 홀트가 톰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난 괜찮소. 딕시가 욕실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서 나더러 대신 말해 주라고 하더군요. 욕실은 저쪽에 있습니다."

톰이 일러준 욕실을 방만큼이나 컸다. 문제는 질과 리비가 욕실을 사용하려면 홀트의 방을 통과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좋아, 그가 욕실에 간다고 불쑥 내 방에 들어오는 것보다는 이 편이 낫겠지. 하이웨이에서 얼어죽을 뻔한 날 구해 준 사람이니까..... 질이 톰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질은 리비와 함께 잔다는 걸 알자 기뻐하면서 침대 위를 펄쩍펄쩍 뛰었다.

"난 침대에 누으면 캐리와 수처럼 할 거예요."

"캐리와 수는 어떻게 하는데?"

"이불 속에 등불을 갖고 들어가 책을 본대요."

"안 돼." 홀트의 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질에게 말을 하면서도 눈은 리비에게 가 있었다. 톰이 들어오는 바람에 욕심을 채우지 못한 불만이 가득 차 있는 그의 표정을 보고 리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떠뜨렸다. 문득 리비는 자신이 얇은 나이트가운을 들고 있다는 걸 깨닫고 당황하면서 그것을 옷장 속에 집어넣었다.

홀트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분명하게 드려왔다. ", , 저녁 먹어야 되니까 손을 씻고 와야지?"

"네에." 질은 어른들 사이에 떠돌고 있는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 챘는지 얌전하게 대답하고 아빠를 따라 방을 나갔다.

리비는 침대에 누워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옆방에서 두 사람이 걸어 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질의 소프라노 음성에 홀트의 바리톤 음성이 조화롭게 섞여 듣기 좋았다. 그녀는 옆방이 조용해지면 욕실을 확인하고 세수할 생각을 하면서 누워 있었다.

그때 홀트가 나타났다. 그는 문설주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리비가 누워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셔츠 단추를 풀어놓아 가슴 근육이 그대로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가 자연스럽게 다리를 꼬자 작은 히프와 근육질의 긴 다리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욕실이 비었소." 홀트는 리비가 누워 있는 침대로 걸어와 미소를 띠면서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아직도 욕망이 가득 차 있었다.

"고마워요." 리비가 일어나려고 하자 그는 자신의 몸으로 가로막았다.

"날 지나가 보시지." 그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날 밀쳐내고 갈 자신이 있소?" 홀트는 한 손을 뻗어 리비의 팔에 두르고 입술을 겹칠 태세로 서서히 몸을 굽혔다.

"홀트! 그만둬요!" 리비는 손톱을 세워 할퀴겠다는 듯한 포즈를 취했다.

"오늘 밤 내 방으로 와 주겠소?"

"안 돼요!" 리비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버둥거렸다.

"얘기만 할 거야. 리비, 약속할께. 얘기만 할께."

"내가 그 말을 쉽게 믿을 것 같아요?"

"맹세하겠어!" 홀트는 리비의 입술 가까이에서 부드럽게 속삭였다. "질도 없고 그 누구도 없는 방에서 우리 단둘이 얘기를 나누는 게 어때? 멋있다고 생각지 않아?"

조용히 속삭이는 홀트의 음성은 벌거벗은 채 서로 껴안고 있는 장면을 연상케 할 정도로 육감적이었다. 리비는 불타는 감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돌렸지만 이번엔 그의 남성적인 체취가 코끝을 강하게 자극했다. 더 이상 참기가 힘들었다. 리비는 양식과 이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리비는 가만히 그의 뺨에 입술을 갖다대었다.

홀트는 리비가 힘차게 끌어당기며 내려다보았다. 숨 막힐 정도의 뜨거운 열기가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홀트는 눈을 감고 오늘 오후 그녀를 찾지 못해 미친 듯이 눈보라 속을 헤매고 다녔던 때를 생각했다. 그녀를 잃어버릴 것 같은 무서운 공포심! 혹독한 눈보라도 그녀를 찾아야 한다는 절실한 마음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순간 홀트의 뇌리에 헤어진 아내가 떠올랐다. 이어서 다시는 여자와 깊은 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맹세가 떠올랐다.

리비와도 언젠가는 헤어질 것이다. 설령 리비와 헤어진다 해도 그녀만은 영원히 내 기억 속에 잠재하고 있을 것이다. 홀트는 입술로 그녀의 부드러운 뺨을 애무했다. 홀트는 바르르 떨고 있는 리비의 입술에 닿자 욕망의 파도가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욕정을 자제하지 않으면 또 다시 좌절을 맛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 부드러운 유혹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단 말인가? 한순간의 쾌락이 평생을 옭아맨다 해도 어쩔 수 없는 말이다.

그때 꼬마의 발자국 소리가 홀트의 어려운 결심을 깨뜨렸다. 그는 여전히 양팔에 힘을 준 채 고개를 들고 신중히 귀를 기울였다.

리비는 자기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홀트의 마음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리비는 방긋 미소 지으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가 우습지?" 홀트는 불만스러운 듯이 항의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나중에 내 방에서 조용히 다시 얘기하지. 지금은 방해꾼들이 많아서....." 그는 리비를 일으켜 세웠다.

"물론 약속대로 얘기만 나누는 거죠?" 리비는 의미심장한 말투로 홀트를 약 올렸다.

"아빠, 저녁 안 먹을 거예요? 나 배고프단 말예요." 홀트가 반격을 가하려는데 질이 달려들어왔다.

", 이제 갈 거야." 홀트는 질에게 자상하게 말하고 나서 리비를 돌아보며 속삭였다. "이 집엔 감시의 눈이 많아 키스 한번 제대로 하기도 어려우니....."

리비는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 안됐군요. , 빨리 가서 손이나 씻으세요. 나도 곧 옷 갈아 입고 나갈 테니까요."

"아직 손도 안 씻었어요?" 질의 이 천진스런 한마디에 두 사람 모두 죄인마냥 얼굴을 붉혀야 했다.

저녁 식사는 대단히 먹음직스러웠다. 금방 구운 빵과 샐러드에다 큼직큼직하게 썬 감자와 양파, 그리고 당근을 넣어 만든 비프 스튜였다. 딕시가 커다란 식탁 한 가운데 앉고, 그 옆으로 홀트와 질과 캐리가 앉고, 맞은편에는 토미와 수, 그리고 리비가 자리를 잡았다.

전기가 나갔는데 이렇게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는 비결이 뭐냐고 묻는 리비에게 "다행이 가스 스토브가 있었어요. 그리고 방마다 난로가 있으므로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전기가 나가도 이 집은 쾌적한 난방을 즐길 수 있답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곧 표정이 흐려졌다. "하지만 눈이 이렇게 쌓이면 가축들이 걱정스러워요."

"플로리다에 사신다니까 이런 눈보라 걱정은 하지 않으시겠군요, 홀트 씨?" 톰이 홀트에게 물었다.

"가축은 염려 없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감귤밭이 지난 3년 동안 병충해로 시달리고 있지요."

톰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한동안 농사와 가축 얘기가 이어졌다. 리비는 맞은편에서 얘기에 열중해 있는 홀트를 바라보면서 두 사람의 얘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톰은 자신의 지식을 들려주었고, 홀트도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펼쳤다.

리비는 홀트가 여러 가지 얼굴을 갖고 있는 남자라는 걸 알았다. 그의 다양한 면모를 볼 적마다 그에 대한 흥미도 더해갔다.

그녀는 문득 딕시가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상큼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딕시는 리비를 향해 건배하자는 시늉을 했다.

캐리가 질의 어깨를 치자 질은 엉겁결에 들고 있던 우유를 쏟고는 겁에 질려 울음을 떠뜨렸다. 홀트가 컵을 잡아 테이블 위에 놓고 냅킨으로 쏟아진 우유를 훔치면서 딕시 부부에게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과하실 것 없어요. 우유는 얼마든지 있고 이런 일은 우리 집에서는 다반사로 일어난답니다. 애들이 세 명이나 되니 조용할 날이 없지요." 딕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사령관처럼 식구들에게 지시했다. 캐리, 넌 부엌에 가서 타올을 갖고오너라. 그리고 토미는 디저트를 갖고 와야지. 질은 오랜 여행으로 피곤해 있다. 빨리 푸짐하게 먹이고 나서 푹 잠을 재워야 해."

리비도 대가족의 역할 분담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재빨리 접시를 거둬 토미의 뒤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홀트는 질을 무릎에 앉히고 다정하게 얼렀다. ", , 착하지? 이제 됐어." 홀트는 남자가 여자의 눈물에 약한 것은 자연의 섭리라고 생각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눈물을 그친 질이 엄지 손가락을 빨면서 홀트를 올려다보았다. ", 나쁜 짓 했죠?"

"나쁜 짓 했다고 생각하니?"

놀랍게도 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나쁜 애니까요....."

홀트는 어떻게 대답해야 아이가 수긍할지 난감했다. 천진스런 질이 자신을 나쁜 애라고 생각할 때 어떤 식으로 생각을 바꿔 줘야 하는지에 대해 아동심리학자는 전혀 가르쳐 주지 않았었다. 그래 좋다. 언젠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넌 지금 굉장히 피곤해져 있어. 장난치려고 우유를 엎지른 건 아니잖니? 그렇지?" 그러면서 그는 사랑의 표시로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디저트 먹고 싶지 않니?"

질은 한동안 난해한 눈길로 아버지를 올려다보더니 "나 지금 졸려요." 라고 말했다.

"잠이 오니?" 물론 홀트는 아이가 정말로 자고 싶어 하는 게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질을 안고 사라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우리 질이 너무 피곤해서 그만 잠자리로 가서 자고 싶다는군요."

같은 나이인 수는 이상한 눈으로 질을 바라보더니 자기도 그만 자라고 할까 봐, "엄마, 난 피곤하지 않아요." 라면서 딕시에게 선수를 쳤다.

딕시는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넌 조금 있다가 자도 된다. 하지만 질은 여행을 했으니까 피곤할 거야. , 잘 자렴. 내일 아침에 또 보자."

"안녕히 주무세요." 질은 아빠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나서 어른들에게 인사했다.

딕시는 레몬 파이를 자르면서 리비를 향해 미소를 띠었다. "홀트 씨, 당신은 아동 심리학자의 지도를 받았다면서요?"

"딕시, 당신은 식구가 많으니까 자연적으로 아이들의 심리에 대해 잘 아시겠지만 홀트는 갑작스레 아이를 맡게 되어 불안한가 봐요." 리비는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플로리다에 도착하면 나는 저 사람들과 만날 기회는 없겠지만....."

딕시는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눈에는 리비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몇 분 후, 홀트가 돌아오자 화제는 날씨 쪽으로 바뀌었다. 식사가 끝난 다음 어른들은 커피를 들고 톰의 서재로 자리를 옮겨 포터블 라디오의 일기 예보에 귀를 기울였다. 눈보라를 뿌리던 구름이 미시시피 계곡에서 대서양 해안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한다. 간선 도로는 내일 오후 늦게 소통이 될 거라는 뉴스도 있었다.

방으로 돌아오면서 홀트가 말했다. "이곳은 내쉬빌에서 별로 멀지 않는 곳이니까 내일 업자에게 전화해서 당신의 차를 끌어다 달라고 해야겠어."

리비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도움을 받지 않겠다고 이미 말했을 텐데요?"

"허어!" 홀트가 빈정거렸다.

리비는 자신이 말을 실수했다고 생각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물론 오늘 있었던 일은 내가 잘못했어요. 하지만 그건 이제 지나간 일이에요. 앞으로는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아요."

홀트는 문을 열고 리비를 멀어 넣은 뒤 꼼짝 못하도록 막아섰다. "지나간 일이라고? 자신을 위험으로 몰아넣은 사람이 어떻게 도움이 필요 없지?" 그리고 갑자기 화제를 바꿨다.

"저런! 불이 꺼지겠는걸? 당신 방의 불도 살펴봐야겠어. 당신과 나, 둘이서만 얘기를 나누기로 약속했었지? , 앉아. 곧 돌려보내 줄 테니까."

리비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식사하고 있는 도중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와 둘이서 얘기를 나눈다는 게 지극히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램프의 불빛은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어스름한 불빛이 그를 자극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벌떡 일어나 스위치를 켰다. 하지만 정전이란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다.

"쓸 데 없는 짓은 하지 말고 여기에 와 앉으라구." 그는 난로 옆에 앉아 리비에게 다가오라고 손짓을 했다.

"질은 자고 있나요?"

"곤히 자고 있어."

"홀트, 난 피곤해요. 이제 자러 가고 싶어요." 사실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런데도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이런, 교활한 여자 같으니라구!" 홀트는 눈을 흘기면서 리비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나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분명히 얘기만 한다고 했잖아요? 자꾸만 이러시니까 나도 거짓말을 하는 거죠."

"리비, 내가 당신에게 제멋대로 군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당신도 싫지는 않으면서 왜 날 안달하게 만들지?" 홀트는 입술로 그녀의 목덜미를 뜨겁게 애무하다가 귓볼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러시니까 내가 곤란해하는 거예요."

홀트는 리비를 안은 채 의자에 앉아 그녀의 목덜미에 가볍게 키스했다.

"난 그냥 얘기만 하고 싶어, 리비. 당신에 대해 얘기해 줘. 가족들의 얘기를 들려주지 않겠어?"

리비는 침착함을 가장하기 위해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리고 벌겋게 불타고 있는 석탄을 바라보았다. "우리 가족은 애정이 풍부하고 우애가 깊어요."

"그리고 당신을 괴롭히기도 하고, 왜 그렇지?"

"식구들은 내가 스물일곱 살의 어른이란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날 아기로 취급하거든요."

홀트는 다시 손을 뻗어 리비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리비는 그에게 살짝 미소 지어 보이고는 다시 난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기 취급을 받는 건 즐거운 일이 아니에요. 오랜 세월, 난 식구들의 책임감에 둘러싸인 채 살아왔어요. 내가 용돈이 떨어지면 모두들 자기 용돈을 절약하면서 돈을 만들어 줬어요. 마치 줘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처럼....."

홀트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이 여자는 생각했던 대로 정말 멋진 여성이다. 외모만 섹시한 게 아니라 마음씨도 곱고 독립심도 강하다.

"난 그게 마음에 걸려 견딜 수가 없었어요. 가족들은 날 성인이 될 수 없는 저능아 취급을 해요. 스무 살이 돼서 아파트를 얻어 나왔죠. 식구들은 졸도할 정도로 놀랐죠. 나도 강경하게 대처했고..... 그래서 결국 내 생활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젠 온 식구들이 갖은 구실을 다 대면서 내 아파트를 출입하는 거예요. 차라리 식구들과 한 집에 사는 것만 못했어요. 결국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나이가 들자 이제 식구들은 결혼도 자기들이 주선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후보자들을 데려왔어요. 그래서 6개월 전에 큰오빠 친구와 약혼을 했어요. 멋진 사람이었어요. 3개월 계속 사귀었는데 그도 우리 식구나 별반 다를 게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파혼했죠. 그 사람의 목적은 날 보호하고 귀여워해 주는 것이었으니까요."

홀트는 휘파람을 불었다. 리비는 속박당하기 싫어한다. 그 남자는 어리석게도 그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이렇게 멋진 여자를 놓친 것이다.

"왜 그래요? 왜 휘파람을 부는 거죠?"

"아니야, 계속해 봐."

"이런 얘기 하고 싶지 않은데..... 어느 날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애기가 생기면 회사를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라구요. 난 그러구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게 아니란 생각을 했죠. 약혼자와 식구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비로소 나만의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어요. 이번의 일자리 제의를 받았을 때 난 결심했어요. 과감하게 떠나자고, 하지만 집안에선 난리가 났었죠."

"그 남자 외에 진지하게 생각한 남자는 없었나?"

"없었어요." 리비는 살포시 웃었다. "모두 식구들과 친한 사람들이라서 반발심부터 일었으니까요."

"리비, 당신이 진실로 원하는 것은 도대체 뭐지? 독립만은 아닌 것 같은데?" 홀트가 조용히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내게도 뭔가 존재 이유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요." 이해를 구하면서 리비는 까만 눈동자를 빛내며 홀트를 바라보았다.

"물론 당신은 충분히 존재 이유가 있는 여자야. 하지만 당신의 식구들은 절대 당시에게 나쁜 짓을 한 게 아니야. 친형제이기 때문에 그런 거야.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뿐이야."

"그럴 지도 모르죠. 하지만 내 기분도 생각해 줘야죠."

홀트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었다. "당신이 나이보다 어려보이기 때문에 식구들이 걱정하는 건지도 모르지." 그는 몸을 일으켜 부지깽이로 난로를 몇 번 휘저었다.

따뜻한 난로, 긴장된 하루가 지났다는 안도감, 안정된 실내분위기가 나른하고 꿈길 같은 세계로 유혹하고 있었다. 리비는 전신의 힘이 다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집에 전화 안 해도 되겠어?" 홀트가 뒤를 돌아다보면서 물었다.

"어머나! 깜빡 잊고 있었어요." 리비는 벌떡 일어났다. "일기 예보를 듣고 걱정하고 계실지도 몰라요. 지금 곧 전화해야겠어요."

"전화는 불통이야." 홀트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리비는 흥분 상태에 빠져 있다. 가족들이 귀찮다고 하면서도 지금 가족들의 걱정을 하고 있다. 한동안 떨어져 살면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리비는 다시 쿠션에 몸을 푹 파묻었다. ", 어떻게 하면 좋담!"

"당신의 오빠가 제설차를 끌고 올지도 모르지."

리비는 웃으면서 오빠와 홀트 중 누가 더 강인하지 평가해 보려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우리 오빠보다는 당신이 더 굳셀 것 같군요. 당신은 아빠이기도 해요. 아빠들은 아이에게 약하죠."

"당신은 어때? 아이들을 어떻게 생각해?" 홀트는 조심스럽게 리비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이제 아이가 딸린 홀아비를 귀찮아할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이건 결코 옳은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부터 딸과 함께 할 생활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상황이긴 하니 그녀의 의중을 알고 싶었다.

결혼이 깨어진 후 책임져야 할 인간관계는 절대적으로 피해 왔다. 그런데 겨우 이틀 전에 만난 여자와의 장래 문제를 생각하다니! 지금은 딸도 있다. 딸과의 돈독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딸에게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운명의 장난인지 모르지만 우연히 만난 여자에게 육체적 매력을 느끼고 내 마음속에 뚫린 커다란 구멍을 그녀의 사랑으로 메꾸길 원하고 있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리비를 쳐다본 홀트는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남은 심각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두 다리를 모으고 의자에 앉아 있는 리비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홀트는 애정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길고 짙은 속눈썹이 뺨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도톰한 입술은 약간 벌어져 있었다. 그리고 가는 목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곡선이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우아했다.

격한 욕망이 전신을 스쳐갔다. 그녀를 빨리 이 방에서 내보내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보장할 수가 없다. 홀트는 벌떡 일어나 몇 번 심호흡을 한 뒤에 리비를 세차게 흔들었다. "리비!" 목이 막혀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았따. "리비!"

리비가 어렴풋이 눈을 떴다. 홀트는 그녀의 의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양팔로 안았다. "당신이 너무 지쳐 있어. 내가 침대까지 데려다 주지."

리비가 희미하게 웃으면서 그의 팔에 얼굴을 묻자 홀트는 그 청순한 아름다움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는 한손으로 비단결 같은 그녀의 금발을 어루만졌다. 순간 격정이 다시 전신을 엄습했다. 홀트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기 위해 짐짓 태연한 척했다. "침대에 누워서 편안히 자야지."

리비는 내심 실망했지만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은 조금 전에 눈을 뜨고 홀트의 다정하고 감미로운 표정을 봤을 때 두 사람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자신은 자립한 여성이니까 사랑도 자유롭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홀트가 더 이상의 관계로 전진시켜도 저항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는데 마치 딸을 재우러 가는 아버지 같은 눈길에 그만 실망하고 만 것이다.

 

다음날 아침, 리비는 뺨에 뭔가가 와 닿는 감촉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녀는 몸을 비틀면서 다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두더지처럼 어딜 숨는 거야?" 허스키한 목소리가 꿈결 속에 들려왔다. "전생에 두더쥐였나?"

홀트다! 순간 리비의 잠이 싹 달아났다. 상큼한 비누 냄새와 애프터 쉐이브 로션 냄새, 그리고 민트 치약의 향긋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리비는 이불을 밀쳐내고 손가락을 입에 대면서 무서운 형상을 지어 보였다.

"! 질이 깨요!"

홀트는 이불 속에다 손을 넣어 그녀를 일으켜 앉힌 다음,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멋진 아침이야. 리비는 두 손을 뻗어 홀트의 목에다 감고 감미로운 굿모닝 키스를 음미했다. 풀 먹인 와이셔츠가 손목에 와 닿았다. 까실까실한 게 촉감이 무척 좋았다. 그녀는 한쪽 손을 홀트의 머리 밑에 넣어 부드럽게 애무했다. 머리를 감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머리칼이 아직 젖어 있었다. ".....당신 샤워하셨군요? 냄새가 무척 좋아요." 리비는 눈을 감은 채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당신도 그래. 따스하고 달콤하고 섹시한 냄새가 나는걸. , 눈을 떠보라구. 당신이 안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확인을 해야지?"

"확인할 필요 없어요. 알고 있으니까요." 리비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눈을 떴다. 홀트의 얼굴이 바로 자신의 코앞에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본 리비는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의 눈은 뜨거운 정열에 불타고 있었고, 그 눈빛은 그녀를 불태우기에 충분했다.

"홀트....." 리비는 어쩔 바를 모르면서 중얼거렸다.

"리비, 지금 이 순간, 내가 당신을 얼마나 원하는지 알아주겠지?" 홀트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당신은 정말 아름다운 여성이야. 잠자고 있는 당신의 모습은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웠어. 자연스런 핑크빛 입술! 흐트러진 금발! 마치 악마의 피가 섞인 천사의 모습 같았어."

갑자기 홀트는 리비를 무릎 위에 앉히고 그녀의 부드러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나비 날개 같은 네글리제 위에 손을 대어 따스한 가슴을 부드럽데 애무하다가 손가락으로 유두를 만지작거렸다.

"나도 당신이 탐나요." 리비는 혼미해지는 상태에서 중얼거렸다. 그의 묵직한 체중을 온몸으로 느끼며 그의 손과 입술 감촉을 맛보고 싶었다. 리비는 불덩이 같은 그의 몸을 전신으로 느끼면서 본능적으로 허리를 꿈틀거렸다.

흘트가 얼굴을 들었다. 뜨거운 불꽃이 두 개의 눈동자 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다음 순간 홀트가 벼락같이 입술을 덮쳐왔다. 리비도 홀트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열렬하게 그 키스에 응했다.

", 쉬하고 싶어!" 갑자기 귀여운 목소리가 뜨거운 분위기에 찬 물을 끼얹었다. 홀트는 너무 놀란 나머지 리비를 내밀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질이 어느새 잠에서 깨어나 침대 한 가운데 앉아 두 사람을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었다. "뭘 하고 있었어요?"

리비는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는 홀트를 생각하며 소리 죽여 웃었다. 그녀가 이불을 뒤집어쓰려고 했을 때 홀트는 한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방안을 서성이면서 리비가 아이에게 뭐라고 설명해 주길 간절히 원하는 듯한 사인을 보내왔었다. 리비는 목덜미까지 벌개진 그를 못 본 척해 버렸다.

", 뽀뽀하고 있었지." 홀트의 목소리가 이불 밖에서 들려왔다.

리비는 좀 더 재치 있는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솔직하게 설명하는 것이 가장 좋은 대답이었다.

"그런데 왜 리비 언니의 가슴을 잡고 있었어요?"

리비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고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다. 홀트는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리비는 고개를 내밀고 홀트를 빤히 쳐다보았다. 홀트는 리비를 째려보면서 두고 보자는 듯한 협박이 눈길을 보내 왔다.

"누가 언니의 가슴을?"

"아빠가 언니의 가슴을 잡고 있었잖아요?"

"그랬어? 난 모르겠는데? 아빤 그냥 굿모닝 뽀뽀를 해줬을 뿐이야. , 빨리 가서 세수해야지. 아빠도 곧 뒤따라갈게."

"." 질은 순순히 욕실로 향했다.

리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커다란 손이 갑자기 리비의 머리를 잡고 뒤로 젖힌 다음 강압적으로 입술을 겹쳐왔다. 겹쳐진 입술 틈으로 리비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잘도 날 내팽개쳤군." 홀트는 웃으면서 미간을 찡긋하더니 그렇게 말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도 당신의 얼굴을 봤더라면 틀림없이......" 그녀는 다시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의 폭소가 겨우 진정되었을 때 홀트는 고개를 들고 리비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는 두 손으로 리비의 귓볼을 만지작거리다가 머리 밑으로 손을 넣어 부드럽게 마사지해 주었다.

"당신은 지금까지 내가 알았던 여자들과는 전혀 딴판인 여성이야."

"내가요? 어떻게 다른 데요?"

홀트는 눈썹을 찡그리면서 적당한 낱말을 찾는 듯한 시늉을 했다.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전적으로 달라."

리비는 미소를 띠면서 두 손으로 홀트의 얼굴을 감쌌다. "어서 말해 봐요."

"당신이라면 나도 솔직한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말에 리비는 바싹 긴장했다. "어머, 안 돼요, 홀트! 그런 진지한 말은 하지 말아요!"

홀트는 리비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면서 말을 이었다. "어제, 당신이 없어진 걸 알았을 때....." 홀트는 그 일을 상기하는 것조차 괴롭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리비는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 쥐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그의 목에 얼굴을 묻고 생각했다. 이 사람이 어제 날 구해 주었어. 이 사람의 커다란 은혜에 난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

"또 뽀뽀하고 있어요?" 질렸다는 듯한 꼬마의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두 사람은 천천히 몸을 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대 옆에 질이 턱을 괸 채 앉아 두 사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아빠하고 리비 언니가 뽀뽀하는 게 싫으니?" 홀트가 물었다.

질은 잠시 생각하더니, "아니, 아빠가 좋다면 해도 돼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어른들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빠, 아직도 눈이 와요?"

", 조금." 대답하면서 아쉬운 듯 홀트는 리비의 몸을 약간 애무하다가 손을 뗐다.

리비가 몸이 자유로워져서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침대 가에 걸터앉은 질의 엉덩이가 손에 닿았다. ", 파자마 바지는 어떻게 했니? 감기 들겠다. 이불 속으로 들어와."

하지만 실내는 따뜻했다. 홀트가 새벽에 일어나 불을 지폈는지 벽난로는 벌겋게 타고 있었다.

"이제 곧 옷 갈아입을 텐데요 뭘?" 질이 좋아라하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오면서 변명했다.

리비는 질을 꼭 껴안으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 아빠를 이 방에서 내쫓아 주면 언니가 옷을 갈아 입혀 줄께."

장난기 어린 눈으로 동시에 홀트를 쳐다본 두 사람은 그의 표정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홀트는 새파랗게 질린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홀트?"

"아빠, 왜 그래요?"

"! 아무 것ㄷ 아니야." 그는 당황하면서 출입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아빠가 저쪽 방에 가 있을 테니까 어서 옷을 갈아입도록 해."

잠시 후, 리비는 질과 함께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리비는 데님 스커트에 빨간 블라우스, 그리고 둥근 소매의 스웨터를 입었다. 질은 빨간 블라우스와 빨간 가디건에 데님 오버올을 입었다. 슈트케이스를 다 뒤져 제일 밑바닥에 있는 걸 무리해서 꺼내 입혔다.

질은 리비를 잘 따랐다. 그런데 홀트는 왜 못마땅해 하는 걸까? 리비는 좀전의 홀트 얼굴을 상기하고는 왠지 마음이 개운치 못했다. 아빠로서 당연히 딸의 옷을 갈아 입혀 주고 사소한 시중까지 들어 주고 싶겠지. 그 역할을 내가 가로챘기 때문일까? 그는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가 이제야 겨우 딸을 찾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그 아이의 애정을 독차지해 버렸으니 기분 나쁠 수도 있을 거야.

계단 아래에서 캐리와 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 빨리 아침 먹자. 식사가 끝난 다음에 아빠가 함께 눈사람 만들고 놀아도 된다고 하셨어."

두 아이는 질의 손목을 나꿔채고 안채로 달려갔다.

리비가 부엌에 들어갔을 때 캐리는 의자에 앉은 채 질에게 냅킨을 둘러 주고 있었다. ", 이제 먹어." 캐리는 자리에 앉으면서 동생과 질에게 명령했다.

홀트는 느긋하게 뜨거운 커피를 들이키고 있었고, 딕시는 식사 준비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캐리! 천천히 먹어! 그렇게 빨리 먹으면 소화가 되지 않아..... 굿모닝, 리비?"

"굿모닝, 딕시?"

 

부엌은 따뜻했고 맛있는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카틀랜드 집안의 두 남자는 창문과 마주보는 작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가 리비기 들어오자 가볍게 목례한 뒤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미안하지만 두 분 중 한 분은 다른 사람들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 주셔야겠어요. 이 테이블은 식당에 있는 것만큼 크지는 못하니까요. 어젯밤에 식당 난로의 불을 꺼트려버렸어요."

톰이 먹저 식사를 끝내고 냅킨으로 입을 닦으면서 일어섰다. "토미, 빨리 먹어. 일하러 가야지."

"바깥일이라면 저도 돕고 싶은데요?" 홀트가 듬직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톰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고맙습니다만 둘이서 해도 충분합니다. 토미는 이런 일을 아주 잘 한답니다." 그리고는 외투를 집어 들고 토미의 등을 떠밀며 뒷문으로 나갔다.

아침 식사를 전부 마쳤을 때 부엌에는 딕시와 리비만이 남게 되었다. 딕시가 접시를 씻고 나면 리비가 그것을 헹구고 있었다.

바깥엔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어제보다는 심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신이 나서 눈 속을 뒹굴며 까르르 웃는 소리가 찬 공기를 가르고 부엌까지 들려왔다. 리비는 옅은 미소를 띠며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은 오늘 아침의 뜨거웠던 키스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홀트의 감촉과 뜨거운 애무를 생각하니 미칠 것만 같았다. 그와 맺어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육체적인 욕망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두 분께선 언제부터 알고 지내셨나요?" 딕시가 접시를 찬장에 넣고 문을 닫으면서 물었다.

리비는 딕시의 장난기 가득한 시선을 받고는 떫은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3일 전에 만났어요."

딕시는 뜻밖의 대답에 놀라 몸을 돌리다가 그만 찬장에 이마를 찧고 말았다. "아얏!"

"어머나, 딕시! 괜찮아요?" 리비는 얼른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미안해요. 놀라게 해 드릴 생각은 결코 아니었는데 ..... 어디 봐요."

"난 괜찮아요. 그런데 3일밖에 안 됐다구요? 당신들 정말 대단하군요?"

"대단하다뇨? 뭐가요?"

"홀트 씨는 당신에게 홀딱 빠져 있더라구요. 누가 봐도 알 수 있죠. 우직한 톰도 그걸 느끼고 있었을 정도니까요. 홀트 씨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더라구요."

리비는 뒤로 돌아서서 행복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홀트는 떨어져 살던 딸을 맡게 되어 무척 행복한 거예요."

"리비! 난 장님도 아니고 둔한 여자도 아니에요. 당신들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옆에 있는 나까지도 감전될 것 같아요. 하긴 어젯밤 정전 때에도 온 집안이 환했으니까..... 처음 홀트가 질을 우리 집에 맡길 때의 일이 생각 나요. 그는 당신의 소식을 몰라 반은 미쳐 있더라구요. 남자가 여자에게 빠지면 반은 미친다는 말을 들었지만, 내 눈으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리비는 반미치광이가 된 홀트의 모습이 얼른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난 당신들이 부부인 줄로만 알았어요. 질도 '우리 엄마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거든요? 어머나, 미안해요! 쓸데없는 말을 많이 했군요?"

리비는 생긋 웃어 보였다. "홀트도 당신의 말에 화내지 않을 거예요. 그는 대단히 친절하고 자상한 남자니까요." 질의 어머니는 시카고에 살고 있다고 했어요. 여배우래요. 질을 돌봐주던 할머니가 나이가 많아 더 이상 돌볼 수 없게 되자 홀트가 맡게 되었다는 거예요."

"가엾어라! 질은 아마 자기 어머니가 누가 되든 상관하지 않는 모양이로군요. 얼마나 사랑을 못 받았으면....."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홀트도 헤어진 아내에게는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어요."

"그래요? 돌보던 할머니가 없다고 해서 아이를 떠맡기는 데두요? 그건 그렇고 그들은 왜 헤어졌대요?"

"그것까지는 확실하게 모르겠어요." 왠일인지 홀트의 부인 생각을 하니 가슴이 메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를 화제로 삼고 싶지는 않았다. "저런! 창밖을 좀 보세요. 눈발이 또 거세졌어요." 리비는 애써 화제를 돌렸다.

"그렇군요! 저 애들, 얼어 죽기 전에 안으로 불러들여야겠어요. 뜨거운 코코아를 한 잔씩 먹여야겠어요." 딕시는 엄마다운 자상한 미소를 띠우면서 말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도 좋지만 엄마들은 일손만 바빠져요."

"제가 도와 드릴까요?"

딕시가 부엌을 둘러보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빵은 다 구워 놓았고..... 오늘은 멋진 요리를 만들 참이에요. 도와주시려면 애들이나 좀 상대해 주겠어요?"

"그런 일이라면 자신 있어요."

"오늘밤,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할 거예요."

크리스마스라는 말에 집 생각이 났다. 리비의 집에서는 아이들이 잠든 다음에 어른들이 트리를 장식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아침에 눈을 뜨면 마법으로 만든 것 같은 화려한 트리를 보고 환호성을 지른다. 그 아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고 각자 가정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물을 뜯어보며 환호성을 지르던 때를 생각하며 리비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적셨다.

"라디오 일기 예보를 들을 수 있을까요?" 리비가 눈물을 감추며 말했다.

"얼마든지요. 여기 갖고 와서 들어도 돼요."

"식구들이 일기 예보를 듣고 무척 걱정하고 있을 텐데 어떻게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을까요?"

"가능할 거예요. 이곳은 폭설이 내리는 계절을 대비하여 만반의 대책을 세워 두고 있어요. 엽서에 전언을 적어 빨간 끈으로 묶은 다음 우편함에 달아 놓으면 제설차나 구조대가 거둬 가서 행선지에 연락해 준답니다. 그렇게 해보세요. 아마 시카고 경찰서에 전보를 쳐서 댁으로 연락을 취하게 될 겁니다."

"지금 당장 쓰겠어요." 리비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몇 분 후, 리비가 전언을 적은 엽서와 라디오를 갖고 부엌으로 돌아오니 아이들도 마침 들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딕시가 눈에 젖은 코트를 의자등에 걸고 있는 걸 보고 리비는 수의 코트를 벗겨 옷걸이에 걸었다.

"리비 언니, 우리가 만든 눈사람 좀 봐 줘요." 질이 리비의 다리에 매달리면서 졸라댔다. "수하고 내가 검은 숯으로 눈동자를 만들어 줬어요. 굉장히 멋있어요."

"잘 만들었더구나. 언니도 창문 너머로 보고 있었어. 재미있었니?"

", 그런데 아빠는 일하러 나가 버렸어요. 난 이제부터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어요."

리비와 딕시는 소리 내어 웃었다.

"왜 웃는 거죠?" 질이 커다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물었다.

"아무 것도 아니야. 네가 뭘 했으면 좋을지 내가 생각해줄게."

"고마워요, 리비 언니. 그렇게 해줬음 좋겠어요."

"우선 일기 예보부터 들어 봐야겠다." 리비는 아이들을 둘러보면서 그렇게 말한 다음 라디오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일기 예보는 오늘밤 통과해야 할 저기압 골 전선이 계속 정체하고 있어 앞으로의 동향을 예측할 수 없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한동안 발이 묶이겠군요?" 딕시가 다정하게 말했다.

"정말 죄송해요. 이렇게 오래 폐를 끼쳐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전혀 폐가 되지 않아요." 딕시는 질의 뺨을 살짝 눌렀다. ", 넌 어떠니?"

". 조금도 폐가 되지 않아요." 질이 대답했다.

딕시와 리비는 또 다시 웃음을 떠뜨렸다.

아이들을 데리고 세 시간 동안 집안에서 놀아 주는 일은 예상외로 큰일이었다. 조카들을 데리고 한 두 시간 놀아주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우선 조카애들은 리비의 장기인 컴퓨터 게임만 시켜 주면 몇 시간이고 말썽을 피우지 않고 놀았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아직 컴퓨터 게임 같은 건 알지도 못한 뿐더러 트럼프도 할 줄 몰라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리비는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하자고 제안했으나 아이들이 진흙놀이와 그림 그리기를 하자고 졸랐다. 물감을 비롯한 그림 도구들은 잔뜩 흐트려 놓고 그림을 그리다가 캐리는 커다란 장난감 바구니를 완전히 뒤엎어 버렸고, 밑바닥에 있는 크레용을 거내 마구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사실 세 살짜리 꼬마의 그림이라는 건 삐뚤삐둘한 줄 긋기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튼 점심 식사 시간을 알리러 홀트가 들어왔을 때 리비는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홀트는 리비의 흐트러진 머리와 루즈가 벗겨진 입술, 그리고 구겨진 옷을 보고 키득키득 웃었다. 그는 마루에 잔뜩 흩어진 장난감과 크레용과 스케치북을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엄마 역할도 보통 어려운 게 아닌 게로군."

리비가 그렇다고 말하면서 문 쪽으로 다가가자 아이들의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얘들아, 잘 봐! 이제부터 아빠하고 리비 언니가 오늘 아침처럼 뽀뽀할지도 모르니까." 질의 말이었다.

"!" 홀트가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아이들은 더욱 낄낄거리며 웃었다. 홀트는 재미있어하는 애들에게 다가가서 질을 안아 올렸다. "너 이녀석, 애비 망신을 다 시키는구나. , 올라가서 손을 씻어야지?"

아이를 안고 올라가는 홀트의 모습을 보자 리비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만난 지 3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홀트는 성인 여자뿐만 아니라 3살박이 꼬마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재능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눈발이 다시 거세어졌고, 남자들은 점심을 먹은 뒤 밖으로 나갔다. 설거지를 마친 딕시가 말했다. "리비, 피곤해 보이는데 한숨 자도록 해요."

"고마워요. 아무래도 그래야겠어요. 딕시, 당신은 정말 부지런한 주부인 것 같아요. 혼자서 이렇게 큰 집안일을 다하고 애도 세 명이나 되고....."

"게다가 남편 톰도 있어요. 물론 톰은 별로 손이 가지 않지만....."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톰은 덩치 큰 애지요. 하지만 버릇을 잘 들여 놨기 때문에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한답니다."

질과 수가 밤늦게 일어나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돕게 해 달라고 부탁하자 딕시는 아주 기뻐했다. 애들을 한숨 재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 질을 캐리의 침대에서 자게 하렴."

저녁 식사를 한 뒤, 모두 트리 장식을 위해 종이를 오리고 구슬을 꿰는 등 부산을 떨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트리에 불을 켤 수는 없겠지만 다른 장식은 해 둬야겠다." 딕시가 말하자 수가 아버지의 어깨에 앉아 트리 꼭대기에 별을 달았다.

애들은 침대로 쫓아 버린 뒤 어른들만 남아 우정을 다짐하면서 건배를 들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딕시가 춤을 추자고 건의했다. 한참 춤을 추다가 톰이 눈빛을 반짝이며 아내에게 뭐라고 속삭이자 두 사람은 소리 내어 웃었다.

"홀트 씨, 우린 이제 그만 자야겠어요." 톰이 작별을 고하자 딕시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리비에게 윙크했다.

홀트는 허리를 굽히며 과장되게 인사를 한 뒤 리비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딕시는 굉장히 기분이 좋은가 봐요." 리비가 말했다.

"당신도 꽤 좋아 보이는데?" 홀트가 귓가에 대고 속삭이며 그녀의 귓볼을 깨물었다.

한줄기 짜릿한 전율이 리비의 등골을 타고 섬광처럼 지나갔다. "당신은 내가 취하길 바라고 있죠?"

"그래 줬으면 얼마나 좋을까?" 홀트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허리에 감고 있던 손을 내려 히프를 애무하다가 다시 허리에 두르고는 힘껏 끌어당겼다. 홀트는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려 자기를 바라보게 했다. 그 눈에는 뜨거운 욕망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당신도 원하고 있지?"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이에요."

리비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홀트는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그리고는 뺨과 목덜미 쪽으로 입술을 옮기면서 마구 키스를 퍼부었다. "나는 당신을 원하고 있어. 알고 있지?" 입술 가를 혀로 핥으면서 괴로운 듯 몸을 뒤척였다. "당신을 원해. 지금 당장 맺어지고 싶지만 여기서는 곤란하겠지. 우리가 언제 어디서 맺어질는지는 하느님만이 알고 계실 거야."

이틀 동안 눈보라가 계속되었다. 그동안 카틀랜드 가의 사람들은 리비 일행을 한 가족처럼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눈이 그치고 제설차가 바쁘게 움직인 덕분에 길이 뚫린 것은 크리스마스이브가 있는 그날 아침이었다. 밴에 짐을 싣고 작별 인사를 할 때, 리비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정말 고마웠어요." 리비는 모두들 껴안으면서 작별을 서운해 했다.

홀트는 질을 밴에 태우면서 ", 그리고 딕시! 약속을 어기지 마시고 6월에 플로리다에 놀러 오셔야 합니다!"라고 큰소리로 말했다.

"물론이죠! 가구 말구요!" 딕시는 울먹이는 소리로 크게 대답했다. "조심해서 가세요!"

카틀랜드 가가 보이지 않을 만큼 달리면서 홀트 옆에 타고 있는 리비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그녀의 차는 오늘 아침 내쉬빌로 운반시켰는데 크리스마스가 끝날 무렵이면 완전히 수리가 된다고 한다. 홀트의 제의로 밴을 타고 가기로 했지만, 자기 때문에 두 사람의 일정에 차질이 생기게 된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했다.

"뭘 생각하고 있지?"

홀트가 운전을 하면서 뒤돌아보았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저 딕시네 식구와 헤어지는 게 섭섭해서....."

"이제부터 바쁘게 서둘러야 될 거야." 홀트가 웃으면서 말했다.

"왜요?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요?"

". 우선 호텔 방부터 예약하고."

"호텔 방이라구요?" 리비는 숨이 콱 막혔다. 홀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러고 난 다음 쇼핑을 가야지." 홀트는 질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플로리다에서 굴뚝을 타고 내려오는 산타클로스 역할을 하려고 생각했는데 계획이 어긋났으니 내쉬발에서라도 산타클로스 역할을 해야 될 게 아냐?"

"미안해요, 홀트!" 리비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키스했다.

"어렵쇼! 차를 또 도랑에 쳐박고 싶어?" 홀트가 정색을 했다.

질은 까르르 웃으면서 재미있어 했다.

홀트는 한 손으로 리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당신을 크리스마스이브에 혼자 있게 내버려둘 사람으로 보여?"

리비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그들은 간판도 없고 별로 두드러져 보이지도 않는 호텔에 도착했다. 그러나 실내에 들어선 다음에는 이 호텔이 예사 호텔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프론트의 직원은 예약을 확인한 다음 열쇠로 문을 열어 주었고, 홀을 지나 한 계단 올라가라고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마치 이 호텔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리비가 불평을 했다.

홀트는 웃으면서 한쪽 팔을 그녀의 허리에 두른 채 넓은 계단을 올랐다. "당신을 가둬 둔 게 아니야. 외부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조치를 해둔 것뿐이지. 이곳은 얼굴이 잘 알려진 유명 인사나 스타들만 이용하는 호텔이야. 조용하고 은밀하게 지내기에는 안성맞춤이지. 그리고 우리들이 크리스마스를 즐기기에도 꼭 알맞은 장소야."

로비는 호화로웠고 품위마저 느껴졌다. 확실히 그곳은 보통의 호텔이 아니었다. 흔히 보는 라운지나 바 같은 것도 없고 레스토랑도 보이지 않았다. 크리스탈 샨데리아 불빛이 마호가니 벽과 고급 카페트를 비치고 있을 뿐이었다.

홀트는 숙박부 기장을 위해 프론트로 가면서 리비에게 말했다. "기록하고 올 동안 질을 잘 돌봐 줘. 이런 호텔이 처음이라 서먹할 테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서먹한 건 리비도 마찬가지였다. 이 이상한 호텔에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온 우리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로 올라가면서 리비가 물었다. "우리들의 짐은 어디에 있죠?"

"그런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어." 홀트가 무척 유쾌한 듯 말했다.

소리도 없이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복도로 나오면서 리비는 재차 물었다. "우리들의 짐을 갖고 와야죠."

"가만히 있으라니까. 짐은 방에서 이미 우리가 오길 기다리고 있다구." 홀트는 들고 있는 열쇠의 번호와 객실을 비교해보더니 "이 방이로군." 하면서 열쇠를 꽂았다.

"기다리고 있다뇨? 언제 우리의 짐을 방으로 옮겼죠? 짐이 날개가 있어 날아 왔나요? 우린 밴에서 내려 곧장 이곳으로 들어왔었잖아요?"

홀트는 빗발치는 리비의 질문에 전혀 대답하지 않은 채 방문을 열었다. 질이 손뼉을 치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아빠, 저것 봐요! 리비 언니, 저것 봐요!"

리비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방의 크기는 가로 세로 10미터 정도나 될 만큼 거대했고 한쪽에는 거실 스타일로 꾸며져 있으며 우아한 벽난로도 있었다. 품위 있는 무늬의 커버가 덮힌 고전풍의 소파도 비치되어 있었다. 벽난로에는 장작이 소리를 내면서 타고 있었다. 연록색의 커튼과 카펫이 조화를 이루었고, 은은한 음악이 방안 가득 흐르고 있었다. 크리스탈 샨데리아가 늘어진 아래에는 떡갈나무로 만든 다이닝 테이블이 놓여져 있었다. 그 외에는 식기 찬장, 사이드 테이블, 커피 테이블 등 일반 가정에서 늘상 보는 가구들이 고스란히 제 자리에 비치되어 있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천정까지 닿는 커다란 전나무였다. 형형색색의 램프와 구슬, 그리고 장식들이 달려 있었는데, 마치 19세기의 전통적 크리스마스를 연상케 하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홀트는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그녀와 질의 반응을 살피면서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뒤에서 리비를 껴안으며 속삭였다.

"당신의 마음에 드는 모르겠군?"

"정말 멋있어요! 이 방은 꼭 어느 부잣집 거실을 연상케 하는군요."

홀트는 그녀를 풀어 주면서 앞장섰다. ", 리비, 다른 곳도 봐야지?"

침실은 거실 양쪽에 두 개 있는데 한쪽 방에는 홀트의 말대로 짐들이 고스란히 운반되어져 있었다.

"식사는 다이닝룸에서 하면 돼. 24시간 전화만 하면 무슨 요리든 가져다주지. 이곳엔 분야별 전문 요리사들이 고용되 있거든."

"이 정도의 호텔이라면 당연히 그렇겠죠."

"내가 언제 당신을 실망시킨 적이 있었나?" 홀트가 의미심장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농담을 했다.

그때 질을 끼어들었다.

"리비 언니, 이 침대에서 나하고 같이 잘 거죠?"

리비가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데, 홀트가 대신 대답했다. "잠자는 문제는 나중에 결정하기로 하고 우선 여기저기 전화부터 하고 난 다음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가기로 하자." 그리고는 리비를 돌아보았다. "난 이 애 엄마에게 우리가 무사하다고 전화를 해야겠어. 당신도 집에 전화해야지?"

몇 분 후, 질이 거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리비 언니, 선물 사러 안 갈 거예요? 우린 준비 다 했어요!"

"곧 갈께!" 리비는 신경질적으로 백과 코트를 집어 들었다. 엄마에게 전화하고 난 다음 이렇게 기분 나빴던 적은 이제껏 한 번도 없었다.

거실에 나오니 질이 아빠 팔에 안겨 무언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백화점에 가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어요?"

"물론이지!" 홀트는 딸에게 대답하면서도 눈은 리비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안색이 좋지 않은데?"

"아무 것도 아니에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홀트가 다시 물었기 때문에 그녀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마치 가족들에게서 버림받은 듯한 느낌이에요. 집에 전화를 걸었다가 좋지 않은 소리만 잔뜩 들었어요. 당신은 어때요?"

"이 애 엄마는 오디션을 받으러 나가고 없었어. 난 자동전화 응답기하고만 통화했지." 홀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빠한테서 받을 선물, 내가 직접 골라도 돼요? 난 아기고양이가 갖고 싶은데....."

"아기 고양이라구? 넌 한 번도 애완동물을 좋아한다고 한 적이 없었잖니?"

"하지만 아빠, 한 번도 내게 물어 보지 않았었잖아요?"

결국 질은 플로리다에 돌아가면 아기 고양이를 사 주겠다는 다짐을 받아냈다. 백화점은 아직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지 못한 손님들로 가득했다. 사람들 틈을 누비며 선물을 고르고 있는데 오늘은 5시에 폐점하겠다는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아마 종업원들도 크리스마스를 지내기 위해 일찍 귀가하려는 모양이었다. 홀트가 걸음을 멈추고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제안했다.

"아직 두 시간 남았어. 지금부터 30분 동안 개별 행동을 하고 30분 후에 다시 합류하는 게 어때?" 그의 눈이 장난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좋아요. 질은 내가 데리고 다니겠어요. 어디서 다시 만날까요?"

"아니, 질은 내가 데리고 가지."

질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엿보였다. 아마 선물을 살 때 어른들이 옆에 없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무척 걱정을 하는 것 같았다.

"아니에요, 내가 데리고 다니겠어요."리비가 강하게 힘주어 말했다.

"좋아, 그럼 교대로 하자구. 어느 한 쪽이 먼저 질을 데리고 선물을 사고 나서 다시 합류하여 다른 사람이 교대하여 선물을 사는 방식이 어떨까?"

"좋아요. 그게 좋겠어요."

", 누구랑 먼저 가겠니?"

그런데 놀랍게도 질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홀트는 당황하여 아이를 안아 올렸다. "왜 그러지? 무슨 일이야?"

홀트의 품 안에서 질은 작은 어깨를 들먹거리며 흐느꼈다. 홀트는 서글퍼졌다. 아무래도 나는 좋은 아빠가 되긴 틀렸나보다. 다른 어버지들은 이럴 때 어떻게 할까?

리비도 질의 등을 다독거리며 물었다. ", 왜 그러니?"

리비와 홀트는 영문을 몰라 마주보고 있을 뿐이었다.

", , 저쪽으로 가자, 아빠가 할 얘기가 있다."

질과 함께 멀어져 가는 홀트를 바라보면서 리비는 질이 왜 울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 아이도 점심도 잘 먹었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들떠 있었다. 길 가다가 멈춰 서서 인형놀이 구경도 했고, 우리가 얘기를 하고 있으면 같이 끼어들어 대화도 나누었다. 그런데 왜 울었을까? 그래, 맞았어! 바로 그거야!

리비는 빠른 걸음으로 홀트의 뒤를 따라가 귓속말을 했다. "홀트, 질이 왜 울었는지 그 이유를 알았어요."

"뭔데?" 홀트가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리비도 뒤따라 발을 올려놓으면서 귓속말을 했다. "질은 우리가 자기를 데리고 다니는 것을 귀찮아하는 줄을 오해한 거예요."

질이 들었는지 작은 얼굴을 반대쪽으로 획 돌려 버렸다.

"우린 아직껏 한 번도 이 애를 방해꾼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하지만 질은 아직 어려요. 우리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비밀에 붙였다가 놀라게 해 주려는 걸 아직 이해하지 못한 거예요." 질이 고개를 돌려 리비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지만 리비는 못 본 척하고 말을 이었다. "선물을 비밀로 하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 게임인지 질은 아직 모르고 있는 거예요.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라구요."

예상대로 질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엄지손가락을 빨면서 말했다. ", 깜짝 놀라게 하는 게임 알고 있어요."

"정말?" 리비가 놀라는 척했다.

질은 천진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깜짝 놀래주는 게 싫을 때도 있어요."

"크리스마스 때는 깜짝 놀래 주기 게임을 하는 게 더 재미있단다. 예를 들어 아빠한테 줄 선물을 살 때는 아빠를 다른 데로 보내는 거야. 그럼 아빠는 질이 무슨 선물을 줄 건지 몰라서 궁금해 하겠지? 얼마나 재미있니?"

"그래, 맞아. 바로 그렇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 홀트가 덧붙여 설명했다.

질은 어른들의 말을 흘려들으면서 뭔가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질의 시선을 쫓아가 보니 빨간 옷을 입고 은빛 수염을 단 산타클로스가 어린이들의 선물 상담을 해주고 있었다. 부모를 따라온 어린이들이 왼쪽에 일렬로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고, 한 어린이는 산타클로스 앞에서 무언가 얘기를 하고 있었다.

"산타 할아버지와 얘기하고 싶니?" 홀트가 자상하게 말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달라고 해봐."

"산타 할아버지는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 줘요?"

"뭐든지 다는 아냐. 하지만 네가 원하는 것을 주려고 노력은 하실 거야. 저분은 대단히 친절하고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시니까."

질은 잠시 아빠를 올려다보았지만 이내 산타클로스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우리도 줄 서서 기다렸다가 산타 할아버지 만나 볼까?"

질은 아빠 품에 얼굴을 묻고 고개만 끄덕였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질의 기분을 풀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홀트는 줄을 섰다. 드디어 질의 차례가 왔다.

산타클로스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어서 오너라, 아가야."하고 인사했다. 질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도움을 청하는 눈길로 홀트를 올려다보았다.

"어른들은 여기서 얌전히 서 있어야 한단다. 산타 할아버지는 아이들만 만나고 싶어 하셔." 홀트가 상냥하게 설명했다.

리비는 질이 용기를 내어 산타클로스 앞으로 다가가는 모습을 숨죽인 채 바라보았다. 질의 얼굴은 진지했고 걸음걸이도 조심스러웠다.

"질이 무슨 선물을 원하는지 들어 보고 와." 홀트가 리비의 옆구리를 찌르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몸이 자연스럽게 기울어져 남들의 눈에는 다정한 부부처럼 보일 것이다. 리비는 말없이 그냥 서 있었다.

질은 산타클로스의 수염을 잡아당겨 자신의 얼굴 바로 앞에 오게 하고는 뭐라고 한동안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산타클로스가 리비와 홀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한동안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질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하자 질의 얼굴이 환해졌다. 산타클로스는 질을 무릎에 앉히고 캔디바를 선물로 준 다음 "메리크리스마스"라고 인사했다. 질은 고맙다고 인사를 하자마자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산타 할아버지는 정말 멋있어요. , 깜짝 놀래 주기 선물을 고르러 갈 거예요. 누가 먼저 나하고 가 주실 건가요?"

"내가 먼저 가 주지?" 홀트와 리비가 동시에 대답했다.

질은 마치 어른처럼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산타 할아버지가 두 사람 모두 그렇게 말할 거라고 했어요. 정말이군요."라고 중얼거리더니 아빠의 손을 잡아 끌었다. "하지만 난 아빠하고 먼저 갈래요."

"한 시간 후 바로 여기서 만나기로 해. 알았지?" 홀트는 질에게 끌려가면서 리비에게 소리쳤다.

 

세 사람이 선물을 한 아름씩 안고 호텔로 돌아온 것은 5시가 훨씬 넘어서였다. 리비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구두를 벗어 던지고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 이젠 한 발자국도 더 못 걷겠어."

"나도 그래요." 질도 소파에 끼어 앉으며 리비의 말을 받아 말했다.

"요런, 어른을 놀려!" 리비가 질을 간지럽히자 청아하게 웃는 질의 소프라노 웃음소리가 온 방에 메아리쳤다. 질은 버림받은 것으로 오해하고 울던 때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았다. 산타클로스의 위력은 대단했다.

홀트는 저녁 식사로 뭘 먹겠느냐고 리비에게 물은 뒤 룸서비스에 전화했다. "식사는 일곱 시에 배달해 준다고 하니 그동안 쉬도록 해. 난 질과 선물을 포장하고 있을 테니까."

"그것 좋은 생각이에요. , 30분 후에 교대해야 돼." 리비는 질에게 윙크했다.

". 언니하고도 몰래 포장해야 될 게 있으니까요. 디너에는 예쁜 옷을 입는 거죠?"

"물론이야.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리비가 말했다.

", 오늘 저녁에 예쁜 드레스 입을 거예요." 질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짐을 미리 포장하여 플로리다로 보내 버렸기 때문에 수중에 있는 칵테일 드레스는 회색이 섞인 파란색 실크 쉬퐁 드레스뿐이었다. 이 드레스는 밝은 낮에 어울리는 스타일이긴 하나

별 수 없이 입기로 했다. 리비는 길게 늘어뜨린 블론드 헤어를 열심히 브러싱하고 나뭇잎 모양의 황금색 귀걸이를 달았다.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섹시한 입술에 악마 같은 신비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화장을 체크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리비, 5분 후에 식사가 도착할 거야."

"지금 나가요." 리비는 재빨리 향수를 뿌리고 나서 문을 향했다.

조용한 음악과 은은한 촛불, 식탁 한가운데는 빨간색 카네이션이 한 송이 꽂혀 있고, 형형색색의 램프가 달린 크리스마스트리가 벽 쪽에 놓여져 있다. 그리고 마루에 주저앉아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선물을 포장하고 있는 작은 소녀, 만족스런 눈으로 맞아 주는 매력적인 남자까지..... 리비는 얼어붙은 듯이 문 앞에 서있었다. 이런 가정적인 분위기에 접할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탓에 충격이 컸다. 섹시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 있는데다가 지극히 가정적인 풍경까지 겹치니 마치 자신이 원래 질의 어머니라도 되는 양 홀트의 아내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리비는 무엇에 홀린 듯한 눈으로 그 행복한 광경을 바라보았다.

", 침대 위에 있는 선물도 갖고 오겠니?"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질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 질이 얼른 일어나 침대로 향했다.

홀트는 다크 그레이 양복에 눈부실 정도로 흰 와아셔츠를 입은 데다 빨간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는 리비에게 다가오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정말 아름다워!"

리비는 뭔가 말하려 했으나 목이 메어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홀트가 손을 잡자 말없이 얼굴만 붉혔다.

"이것 크리스마스트리 밑에 놓을까요?" 질이 선물을 갖고 와서 말했다.

", 그래 주겠니?" 리비는 간신히 대답했다.

홀트가 몸을 굽혀 향수 냄새를 맡고는 ",..... 좋은 향긴데!"라고 말하면서 끌어당겼다. "아름다워!" 리비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가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리비는 얼굴을 붉히며 그의 넥타이만 내려다보았다. 애프터쉐이브 로션 냄새가 코끝에 와 닿았다. 촉촉한 그의 손, 허스키한 목소리, 뜨거운 숨결, 그 모든 것이 전신의 감각을 자극했다.

"칭찬해 주셔서 고마워요."

리비의 말이 떨어지가 무섭게 홀트가 입술을 겹쳐 왔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해! 숨이 막힐 지경이야!"

리비는 정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의 교묘한 손놀림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리비는 입술을 열고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홀트는 질이 트리 옆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리비의 몸을 바싹 끌어당겼다. ", 리비! 당신이 탐나서 견실 수가 없어. 하루 종일 당신을 안지 못해 죽을 것만 같았어." 그는 굶주린 듯 열렬한 키스를 하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오늘 밤은 절대로 그냥 두지 않겠어!"

리비는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만지작거리면서 미소 지었다. 대답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미 리비는 자신을 억제할 만한 이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홀트는 점점 고조되는 욕망의 불길을 감당하지 못해 리비를 꼭 껴안고 전신을 애무했다. 그의 손이 어깨에서 허리로 미끄러져 내렸다. 그는 잠시 몸을 떼더니 리비를 뒤로 돌아서게 했다.

", 그랬었군! 정말 대담한 드레스야!" 어깨에서부터 히프가 시작되는 곳까지 아무 것도 없는 드레스를 보며 그가 농담했다. "이렇게 벗을 것 같으면 차라리 입지 않는 게 낫잖아? 남자들을 아주 녹여 버리겠군!"

"싫어요?" 리비가 뒤돌아서면서 말했다.

"천만의 말씀! 단 다른 남자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건 정말 싫다구."

그때 질의 목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리비 언니, 선물 갖다 놓고 왔어요."

홀트는 마지못해 질 쪽으로 걸어가면서 아쉬운 듯 리비를 돌아보았다. 리비의 드레스는 실로 뇌쇄적이었다.

홀트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면서 리비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선 이 드레스를 입지 말아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드레스는 충동 구매한 것으로서 오늘 처음 입었다.

노크 소리가 났다. 홀트가 리비를 돌아보면서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식사를 갖고 온 모양인데? 당신을 저기 소파에 가서 얌전하게 앉아 있으라구."

"홀트, 이건 드레스예요. 난 발가벗고 있는 게 아니라구요."

"하지만 벗고 있는 것보다 더 도발적인 드레스야. 잔소리말로 얌전히 가 앉아 있으라니까."

리비는 못 이기는 척 소파에 가서 우아하게 앉아 있었다. 홀트는 문 앞에서 음식을 실은 운반차를 인수 받고 나서 팁을 건네주며 말했다. "고맙소.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가서 쉬도록 해요."

식사 중에도 홀트의 시선은 리비의 드레스에 머물러 있었다. 그의 눈길이 리비에게 못 박혀 있자 질도 이상한 느낌이 드는 모양이었다.

"아빠, 왜 그래요?"

"아무 것도 아니야." 홀트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어 대화는 질을 중심으로 이어졌다. 질은 행복한 표정으로 쉴 새 없이 얘기했고, 두 사람은 아이의 말을 열심히 들어주었다.

"리비 언니가 이 책을 사 줬어요. 산타클로스에 관한 책이에요."

"그건 '센트 니콜라스 돌아오다'인데?"

"아빠는 그것도 몰라요? 이것이 산타클로스에 관한 책이에요. 아빠, 나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도 돼요."

"너무 일찍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괜찮겠지." 홀트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너무 일찍 일어났다가 선물 갖다 주러 오신 산타 할아버지와 마주치면 어떻게 하니? 산타 할아버지는 사람들과 마주치는 걸 제일 싫어하신단다." 리비가 설면을 덧붙였다.

"! 난 산타 할아버지와 오랫동안 얘기까지 했는걸! 언니도 봤잖아요?"

"그렇구나! 깜박 잊었네. 그런데 산타 할아버지와 무슨 얘기를 했니? 궁금해 죽겠구나."

질은 홀트와 리비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그 작은 입술을 오므리면서 말했다. "그건 절대 비밀이에요."

"그래? 그럼 말하지 않아도 돼. 비밀은 지켜야 하니까."

"." 질의 얼굴이 밝아졌다.

식사가 끝난 뒤 세 사람은 벽난로 앞에 모여 게임도 하고 아름다운 옛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홀트는 질을 무릎에 앉히고 리비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행복한 시간을 즐겼다. 웨이터가 갖고 온 후루츠 케이크까지 먹은 뒤 리비는 오늘 사 준 질의 드레스를 벗기고 파자마를 입혔다.

"아빠와 리비 언니도 빨리 주무세요." 질이 재촉했다.

"어른들은 애들처럼 일찍 자지 않는 법이란다." 홀트가 근엄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빠가 깨어 있으면 산타 할아버지가 들어오시지 못하는 걸?" 질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이럴 땐 어떻게 대답해야 되지?" 홀트가 웃으면서 리비를 쳐다보았다.

"져 주는 수밖에 없죠." 리비도 웃으면서 말했다.

홀트는 한숨을 내쉬면서 질을 안아올렸다. ", 그럼 모두 가서 자도록 하자."

이후 한 30분 동안 잘 준비를 하고 굿나잇 키스를 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당신을 혼자 자게 버려 두지 않을 거야." 아이를 재우면서 홀트가 뜨거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리비는 마치 온몸이 감전되는 것 같았다. 인간이 이성이란 허울을 벗는 데 어떤 이유가 필요할까? 남녀가 한 침대에 들어가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까? 일주일 정도일까? 아니면 일 년? 아니,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요는 상대방이 중요하겠지. 상대방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시간은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리비는 오늘 밤 그를 맞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리비가 쿠션에 몸을 묻고 고개를 들자 홀트가 따스하고 다정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나 마음속으로 그려오던 이상형 남자의 눈길이었다. 그는 리비의 생각을 확인하려고 했다.

"오늘 밤, 좋아?"

리비는 얼굴을 돌린 채 고개를 끄덕이면서 무릎을 모아 아기 고양이처럼 웅크렸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잘 생각했어. 이번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테니까."

홀트는 유쾌하게 웃으면서 리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녀의 몸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홀트는 비단결 같은 그녀의 살결을 애무하면서 유심히 표정을 살폈다. 그녀의 얼굴에는 평생 처음 경험하는 흥분된 순간에 대한 미묘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홀트는 다른 젊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미인에게 약했고, 그래서 린다와 결혼하게 되었었지만 언제나 정열과 사랑이 별개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에게 뜨거운 사랑을 느끼지 못했었다. 그리고 결국 이 결혼을 지속해 봤자 실망과 후회만 남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헤어졌던 것이다.

리비의 입술이 키스를 갈구하면서 살포시 열려 있었다. 홀트는 지금 이 순간부터 리비를 제외한 모든 여자에 대한 기억을 말끔히 지워 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는 리비의 소망을 들어 주기 위해 입술을 겹치면서 감미로운 향기를 음미하려는 듯 서서히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정도로 자제력이 있으리라고는 자신도 미처 상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폭발하려는 욕망을 꾹 눌러 참고 있었다.

리비는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홀트의 혀를 찾아 입술을 움직였다. 한 손을 그의 가슴에 넣고 심하게 요동치는 심장 부위를 부드럽게 애무했다. 그의 손도 리비의 가슴속으로 비집고 들어와 매끄러운 살결을 애무했다.

홀트는 빛나는 블론드 헤어를 위로 잡고 목덜미를 더듬거렸다. 홀트의 손가락은 리비의 드레스를 벗기기 위해 나름대로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이 방면에 베테랑이라고 자부하던 자신이건만 어떻게 된 건지 드레스가 벗겨지지 않았다.

"리비, 이것 어떻게 하지?"

리비가 감았던 눈을 뜨고 올려다보았다. "뭐가요?"

"드레스 말이야. 어떻게 벗겨야 하는지 모르겠어."

", 이거요?" 리비는 봉우리를 터뜨리는 장미 꽃송이처럼 활짝 웃으면서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리비, 달링, 제발 도와 줘." 홀트는 신음에 가까운 목소리로 부탁했다.

이윽고 리비의 도움으로 드레스가 벗겨지자 홀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탐스럽게 솟아오른 가슴에는 분홍빛 유두가 수줍은 빛을 띤 채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스름한 불빛을 받은 그녀의 피부는 진분홍의 장미꽃 같은 감촉을 느끼게 했다. 홀트는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리비의 무릎에 키스를 했다.

홀트는 많은 여성 편력으로 여자에 대해서는 언제나 자신만만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리비의 청순한 육체를 대하는 탓에 그 동안 여자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전혀 기억이 없었다. 그는 처음 여자를 접하는 순진한 소년처럼 조심스럽게 그녀의 몸을 탐색했다.

리비는 그의 교묘한 손놀림에 정신이 아득할 정도였다. 몸은 허공에 떠 있고 가슴은 심하게 요동쳤다. 그때 갑자기 그의 손길이 떨어져 나가더니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것 같아 그녀는 눈을 떴다.

"홀트?"

"잠깐만 기다려. 질이 깨어나서 뛰어 들어올지도 모르니까." 그는 장난스런 미소를 띠면서 문을 잠그고 있었다.

"대단히 섹시하게 웃고 있군." 홀트가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와 그녀의 뺨을 부비면서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기뻐요. 당신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 걱정했었어요."

홀트는 리비를 끌어안고 침대에 나뒹굴면서 소리 내어 웃었다.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이게 내 꿈이었어. 꼼짝 말고 이 침대 안에만 있어야 돼. 도망가면 그냥두지 않을 테니까."

"난 별로 저항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그런 터무니없는 드레스를 입어 날 당황하게 만든 죄는 어떻고?"

갑자기 장난기 어린 무드가 사라지고 관능적인 긴장감이 방안에 감돌았다. 그의 시선이 가슴에서 내려와 급격한 곡선이 교차하는 곳에 머물렀다. 분홍빛 드레스가 달린 비키니 팬티가 고운 히프에 걸쳐서 있는 모양을 보니 순간적으로 욕망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것만 같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남은 장애를 과감히 제거했다. 리비의 손이 그의 가슴께로 와 닿았다.

"이번엔 내 차례에요." 리비는 수줍음을 머금은 미소를 띄우며 그의 넥타이부터 풀기 시작했다. 와이셔츠가 벗겨지고 검은 털이 숭숭한 가슴이 드러나자 리비는 손바닥으로 그 감촉을 음미했다.

홀트가 신음 소리를 내면서 그녀의 가슴을 움켜잡았다. "리비....."

"싫으세요?" 리비는 고개를 들고 마치 악마와도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싫긴? 하지만 남자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는 없어. 내가 먼저 할게." 홀트는 그녀를 끌어당겨 약간의 거리를 두고 검은 가슴털로 그녀의 유두를 간지럽혔다. 두 사람은 동시에 환희의 비명을 질렀다.

홀트는 한동안 까칠까칠한 수염으로 그녀의 얼굴을 부비다가 점차 아래로 핥아 내려갔다. 작은 유두가 다시 입술에 와 닿았다.

", 멋져.....!" 홀트는 가슴을 애무하면서 감미로운 사랑의 밀어를 속삭였다. "부드럽고 따스하고 복숭아같이 매끄러운 살결이야." 홀트가 혀로 유두를 핥아대자 리비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홀트!" 난생 처음 경험하는 짜릿한 전율에 리비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홀트의 등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녀의 날카로운 손톱에 자극 받은 홀트의 몸이 바싹 긴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부탁이에요! 제발....."

리비의 애원 못지않게 홀트도 더 이상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는 리비의 몸 위에 자신의 육중한 몸을 싣고 본능에 몸을 맡긴 채 사랑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불꽃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리비는 남자를 접하는 것이 처음이긴 하였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두려울 게 없다고 생각했다. 리비는 행복한 마음으로 그의 사랑을 받으면서 황홀의 극치에서 오르가즘에 몸을 떨었다.

사랑을 불길은 어느 정도 진정되었지만 홀트는 여전히 리비의 전신을 어루만지며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리비가 혼자 웃고 있었다.

"왜 웃는 거지?"

"당신이 핥는 모습이 꼭 고양이 같아서요."

"요런, 악마 같으니!"

두 사람은 자지러지게 깔깔 웃으면서 침대 위를 마음껏 뒹굴었다.

"리비, 이제 우리 결혼하는 것이 어때?"

"뭐라구요?" 리비는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우리 결혼하자구."

"그것도 좋겠죠." 리비는 고개를 외면하고 벽 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리비, 이런 말이 너무 빠른 건 알고 있지만 난 육체적 관계나 즐기려고 당신을 탐했던 건 아니야.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은 내 이상에 꼭 맞는 여자라고 생각했었어. 단지 결혼에 한번 실패했기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을 뿐이야. 난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있어. 아니, 반드시 행복하게 해줄 거야. 약속할게."

그의 진지한 고백에 리비는 아연해졌다. "정말이세요?" 리비는 몸을 일으키면서 반신반의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홀트.....난 당신이 농담하고 있는 줄 알고...."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농담이라니, 천만의 말씀이야."

"하지만.....우린.....결혼할 수 없어요."

홀트는 충격을 받았지만 만난 지 며칠 되지 않는 남자와 육체적 접촉을 가진 것도 파격적인 사건이었을 리비에게 갑작스런 프로포즈는 그녀를 더욱 당황케 한 것이라 믿고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리비, 내가 여자에게 프로포즈한 것은 내 평생 처음이란 것만은 알아줘. 당신을 농락하기 위해 이러는 게 아니야. 내 진심을 알아줘."

리비는 믿어지지 않았다. "처음.....이라구요? 당신은 결혼경력이 있잖아요?"

"린다와 결혼한 것은 그녀가 임신한 걸 알았기 때무이야. 사랑했던 건 아니지만 아이에 대한 책임은 있었으니까 결혼을 해야 했어. 하지만 그건 린다가 나와 결혼하기 위한 계략이었다는 걸 결혼 후에야 알게 되었지." 홀트는 갑자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잘 알겠어요. 하지만 홀트, 우린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아요." 리비는 홀트와의 결혼에 마음이 끌리고 있는 자신을 인정하면서도 시간이 필요했다. 자유를 찾기 위해 이번 여행을 떠나왔다. 자유에 대한 욕망이 내 가슴 속에 오래 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는데, 지금 그와 맺어지면 항상 불만에 찬 생활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은 무리예요."

"지금은 안 된다고? 그럼 나중에는 된다는 뜻이겠지? 한번 꺼낸 말은 책임을 져야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리비는 도전적인 표정을 지으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당신은 정말 교활한 남자로군요.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다니. 러브 메이킹 후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도 못한 상태에서 결혼 신청을 하고 강제로 승낙을 받아내려고 하는군요. 하지만 어림도 없어요."

"더 이상 강요는 하지 않겠어. 하지만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대답해 줘. 난 변함없으니까." 홀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더 이상 언쟁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물론 내가 가볍게 말을 꺼냈다는 건 알고 있어. 그러나 내가 구혼했다는 사실을 잊어 버려서는 안 돼."

가볍게 말을 꺼냈다고? 역시 이 사람은 프로포즈한 것을 후회하고 있는 거야. 그녀는 왠지 상처를 입은 것처럼 가슴이 아려왔다.

"나 그만 자고 싶어요." 리비는 드레스를 집어 발가벗은 몸을 가리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홀트가 리비의 손목을 잡았다. "당신, 여기서 자면 안 되겠어? 나와 함께....." 그가 그런 일로 여자에게 애원한 적은 평생 처음이었다. 언제나 여자 쪽에서 그와 함께 있길 원했으니까..... 그러나 홀트의 마음은 울적했다. 그녀의 거절은 상상 이상으로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 물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매몰찬 대답을 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었다.

리비는 무표정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리비의 손을 잡고 말리는 그의 얼굴에 우수가 어려 있었다. 시트가 그의 복부만을 가려 검은 털이 뒤덮인 가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다시 그의 침대로 기어들어 손가락으로 가슴털을 감아 그의 반응을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손바닥에 와 닿던 그의 감촉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좀 더 냉정해져야 한다는 생각에 리비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만 가야겠어요."

홀트는 한숨을 내쉬면 시트를 몸에 두르고 그녀를 따라나섰다. 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홀트는 곤히 자고 있는 딸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리고 말없이 침대 속으로 기어드는 리비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잠시 휴전할까?"

"좋아요. 나도 싸움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럼 푹 자고 내일 아침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해."

"다투지 않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모르겠어. 하지만 노력해 봐야지, 굿나잇." 홀트는 그녀의 뺨에 가볍게 키스하고 나서 방문을 나섰다.

 

"홀트, 어서 일어나요!"

"으응." 홀트는 몸을 뒤척이더니 리비의 허리에 팔을 감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일어나라니까요!" 리비는 그의 팔을 뿌리치고 시트를 걷으면서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다시 팔을 두르며 졸리운 목소리로 투덜댔다.

"왜 그래? 아직 날도 안 샜는데?"

"눈을 감고 있으면서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내 배꼽시계가 일러줬어. 날이 새면 꼬르륵 소리를 내거든?" 그는 아예 리비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다시 코를 골았다.

"장난치지 말고 일어나 봐요. 당신의 배꼽시계는 아주 정확하군요. 빨리 눈을 떠 봐요. 산타클로스 게임을 해야 하니까요."

홀트가 실눈을 뜨고 그녀를 올려다보면서 웅얼거렸다. "뭘 어떻게 하자는 거야?"

"어릴 적의 생각 안 나세요? 아침에 눈을 떠 보면 어젯밤에 준비해 뒀던 케이크를 누군가가 먹은 흔적이 있고, 양말 속에는 선물이 가득 차 있던 일 말예요."

홀트는 어느새 눈을 완전히 뜨고 있었다. 그는 한쪽 팔을 머리 뒤에 두르고 누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전혀 그런 경험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 집 사람들은 요정이나 산타클로스 같은 걸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트리 밑에서 선물을 놔두고 교환했었지."

리비는 대답이 궁해 우물쭈물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청혼을 단호히 거절하긴 했어도 따뜻한 가정을 모르고 자란 그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에게는 가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질을 생각했다. 홀트는 아이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다. 어린 시절은 대단히 짧다. 질의 나이에서 조금만 더 자라면 현실적인 사고방식으로 기울어져 산타클로스니 요정이니 하는 건 우습게 생각한다. 그녀는 질에게 환상적인 어린 시절의 기억을 남겨주고 싶었다.

"당신은 어제 살아 있는 산타크로스와 질을 대면케 해주었었잖아?" 그는 당황하는 리비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면서 말을 이었다. "그래. 내가 질에게 산타클로스를 믿지 말라고 하는 건 아니야. 단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난 잘 모르겠어. 당신이 가르쳐 주겠어?"

리비의 얼굴이 다시 환해졌다. 홀트에게는 역시 내가 필요하다. 홀트의 부모도 냉정한 사람은 아니겠지만 너무 현실적이어서 이 사람에게 낭만을 심어 주지 못했을 뿐이다. 그 부족한 부분을 내가 채워 주어야 한다.

"그럼 꾸물대지 말고 빨리 시작해요." 리비는 이불을 걷으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조용히 행동해요. 벌써 6시예요. 질이 깰지 모르니까....."

"? 그 애 걱정은 하지 않아요 돼. 그 애는 잠꾸러기라서 8시 전에 일어나는 걸 못 봤으니까." 홀트는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면서 말했다. "시간은 충분해. , 다시 한번 침대에서 즐기는 게 어떨까."

리비는 못 들은 척하고 그에게 파자마를 입히기 시작했다. "나쁜 짓을 할 시간은 없어요!"

"나쁜 짓이라니? 난 그저 당신하고 잠을 조금 더 즐기려고 했던 것뿐인데. 당신은 딴 짓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

홀트의 능청스런 말에 리비는 주먹을 들고 때리려는 듯한 시늉을 했다. "정말 능청스런 사람이에요, 당신은! 빨리 바지 입지 못해요?"

30분 후,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리비는 만족스런 눈길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은은한 조명이 비치는 거실에는 화려하게 장신된 크리스마스트리가 있고, 그 앞에는 커다란 양말이 배가 불뚝한 채 걸려 있다. 또 바로 그 밑에는 호두와 땅콩이 가득 쌓여 있는데, 그 사이에 산 캔디 상자와 장난감 피리가 보기 좋게 장식되어 있다. 한쪽 옆에는 홀트가 산 귀여운 인형이 유리 상자 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고, 리비가 산 컴퓨터 게임기는 당장에라도 곧 작동될 수 있도록 셋팅된 채 질이 깨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만약 우리가 한 가족이라면 이 시간이 얼마나 행복할까? 옆에는 사랑하는 남자가 앉아 있고 건너방에는 귀여운 아이가 잠들어 있다. 이보다 소중한 시간이 또 어디 있을까? 지금은 그의 청혼이 구속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 분위기 탓일 것이다. 이제 조금 있으면 다시 따분한 현실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 그 동안만이라도 이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을 만끽해야지.....

"질이 깨기 전에 당신이 주신 선물을 열어 봐도 될까요?"

"안 돼, 기다려!"

"잠깐만 볼게요. 이제 드디어 크리스마스 날 아침이 되었잖아요?" 리비는 어제 홀트가 자신을 위해 몰래 포장해 둔 선물을 들고 와 애교를 떨면서 졸라댔다.

"교활하긴. 남자를 녹여서 뜻을 이루다니." 홀트가 마지못해 승낙의 눈길을 하자 리비는 어린 아이처럼 두 눈을 반짝이면서 포장지를 뜯기 시작했다.

"!" 리비의 두 눈이 황홀해진 채 초점을 잃었다. 벨벳상자 안에는 금으로 만든 정교한 목거리가 들어 있었다. 가운데에는 눈처럼 흰 보석이 달려 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여섯 개의 무늬마다 각기 진짜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훌륭해요! 하지만 난......"

"안 받겠다고 말을 하면 목을 비틀어 버릴 거야." 홀트의 눈에 ''라는 대답이 나올까 봐 걱정하는 빛이 역력했다.

리비는 선물을 거절당했을 때의 기분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알고 있었다. 부담스럽긴 했지만 크리스마스 선물이니까 받기로 했다. "이런 목걸이는 딸에게 선물하는 게 더 어울리겠지만, 질은 아직 어리니까 내가 그냥 받도록 하죠." 리비는 궁색한 변명을 하면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꺼냈다. "걸어 주시겠어요?"

"기꺼이!" 홀트는 리비의 목 뒤로 손을 넘겨 조심스럽게 걸어주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홀트는 그대로 양손을 목에 감은 채 키스했다. ", 당신이 내 선물을 펴 봤으니 나도 당신의 선물을 펴 볼 자격이 있겠지?"

리비는 홀트가 시간이 나면 읽고 싶다고 말했던 베스트셀러와 그의 눈빛과 꼭 닮은 색깔의 울 스웨터를 선물로 골랐다. 홀트는 예상대로 대단히 좋아했다. "책도 좋고 스웨터도 좋지만, 어젯밤에 당신이 준 선물은 더 멋있었어!" 홀트는 그녀의 귀에 대고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면서 속삭였다.

홀트의 말뜻을 이해한 리비는 얼굴을 붉혔다. "나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지금까지 받았던 선물 중에서 그것은 가장 멋있고 만족스런 선물이었어요."

홀트는 맑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리비는 그 눈빛을 감당할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렸다. 긴장된 분위기가 그의 웃음소리로 인해 깨어졌다.

"당신이 끓인 커피는 내 입맛에 꼭 맞아요." 리비는 태연함을 가장하면서 화제를 돌렸다.

"고마워." 홀트는 다시 가볍게 키스했다. "질이 깨어나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한 시간 정도 더 침대에 들어가 있는 게 어떨까?"

"난 지금 이대로가 더 좋아요. 꼬마전구가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에 멋진 선물, 그리고 고요하고 은은한 크리스마스 캐롤....."

"하긴 그렇군." 홀트는 리비를 침대로 끌어들이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도 어두운 거리에는 가로등이 켜져 있었고, 불빛 사이로 하얀 눈송이가 날리고 있었다. 홀트 역시 평화로운 방안 분위기가 만족스러웠다.

"아빠, 리비 언니가 침대에 없어요." 졸리운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당신, 뭐라구 했죠? 질이 8시 전에 깨는 걸 분 적이 없다구요?" 리비는 일어서면서 홀트를 향해 눈을 흘겼다.

", 이리 들어와. 리비 언니는 이 방에 있어. 산타 할아버지가 다녀가셨나 보다." 홀트는 두 손을 모아 비는 시늉을 하면서 근엄한 목소리로 문 쪽을 향해 말했다.

질은 엄지손가락을 빨면서 그 커다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소파로 다가왔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비집고 들어와 앉았다.

"잘 봐, 산타 할아버지가 다녀가신 것 같지?" 홀트가 질에게 물었다.

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젯밤과 오늘 아침 사이에 일어난 기적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질은 자리에서 일어나 홀린 사람마냥 화려한 프랑스 인형과 신기한 컴퓨터 게임기가 준비되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리비와 홀트는 인형과 컴퓨터 게임 중 어느 것에 먼저 손을 댈 것인지 숨을 죽인 채 지켜보고 있었다. 리비는 요즘 아이들은 인형이나 과자보다는 컴퓨터 게임을 더 좋아한다고 큰소리쳤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초조했다. 질이 곧 컴퓨터 게임기 앞에 앉아 신기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을 보고 홀트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질에게 다가가 자연스럽게 곁에 앉아 작동법을 가르쳐 주었다.

"리비, 당신도 이리 와. 당신은 컴퓨터 전문가잖아?"

리비는 소파에 앉아 만족스런 눈빛으로 컴퓨터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부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검게 탄 홀트의 얼굴과 새하얗고 작은 질의 얼굴이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실수를 했을 적마다 홀트는 소리를 질렀고 질은 까르르 웃으면서 좋아했다.

게임이 끝나자 질은 잠시 인형을 만져 보고 스타킹 속에 든 과자와 사탕을 꺼내 보기도 했지만, 다시 컴퓨터 게임기 앞에 앉아 게임에 열중했다. 질은 대단히 영리하여 한번 가르쳐 주면 잊어버리지 않았고, 나중에는 자기 혼자 해보겠다며 독립심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홀트는 혼자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질을 남겨둔 채 소파로 돌아와 뜨거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은 사랑과 만족감으로 충만되어 있었다. 리비는 그가 고마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리비도 사랑을 가득 담은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침 식사 전에 나에게 기습당하고 싶지 않다면 그만 돌아가 옷 갈아입고 오는 게 좋아."

리비의 웃음소리가 거실 안에 메아리쳤다. "식사 전에 기습하다뇨?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그런 품위 없는 말을 할 수 있으세요?"

"리비, 약 올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는 가운 밑에 솟아있는 그녀의 젖가슴을 내려다보면서 애타는 듯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알았어요. 분부대로 웃 갈아입을게요." 리비는 웃으면서 일어났다.

잠시후 리비와 홀트는 크리스마스트리 밑으로 갔다. 리비가 시카고를 출발할 때 식구들이 미리 포장해 준 선물을 펴 볼 참이었다. 질도 잠시 게임을 멈추고 트리 밑으로 와서 어젯밤 리비와 몰래 포장했던 선물을 내놓았다.

"아빠, 이것 내가 아빠한테 주는 선물이에요." 물론 리비가 골라 준 것이었지만 질은 아빠를 위해 빨간 스웨이드 조끼를 준비했다. 리비가 선물한 스웨터와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 아빤 오늘 질이 선물한 옷을 입어야겠군." 홀트가 만족스런 듯이 말했다.

"아빠, 리비 언니는 선물을 굉장히 많이 받았어요!" 질이 눈빛을 반짝이며 은색 포장지의 선물을 뜯었다.

"나는 식구들이 많아서 그래." 리비가 말했다.

상자 안에는 큰 오빠가 준 후드가 달린 회색 스웨터가 들어있었다.

"그럼 산타 할아버지가 준 게 아니에요?" 질이 물었다.

", 산타 할아버지는 어린이들에게만 선물을 주시니까."

"나도 식구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만약 리비 언니가 내..........아니에요." 질은 황급히 앙증스런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왜 그러니? 무슨 일인데?" 홀트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질은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꼬마처럼 얼굴을 붉히면서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산타할아버지가 말하지 말랬어요."

아침 식사 후, 세 사람은 내쉬빌 거리로 구경을 나갔다. 눈 덮인 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치고 있었다. 세 사람은 가까운 교회를 찾아 크리스마스 예배에 참석하여 목사의 설교와 성가대의 음악을 들으며 감동적인 한 시간을 보냈다.

돌아오는 길엔 도로에 멈춰 서서 눈사람을 만들었고, 호텔 입구에서는 장난기가 발동한 리비가 눈을 뭉쳐 홀트의 옷 속에 집어넣는 바람에 맹렬한 눈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저녁에 크리스마스 만찬을 즐긴 다음, 호텔이 소장하고 있는 풍부한 비디오 소프트 중에서 몇 편을 골라와 영화를 관람했다. 리비는 오늘 저녁 식탁에서 질이 대신 표현해 준 기도문을 가슴 속에 간직한 채 잠자리에 들었다.

"전능하신 하느님, 오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최고로 멋진 하루를 지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비는 불안한 눈빛으로 자기 차를 돌아보았다. 차는 말끔히 수리되어 밴의 뒤에 매달려 있었다.

홀트는 질을 밴의 뒷자리에 태우고 조수석 문을 연 다음 리비가 타길 기다렸다. 세찬 바람 때문에 머리가 흩날렸고 격자무늬 셔츠는 넓은 가슴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양가죽 쟈켓을 뒷좌석으로 던지면서 소리쳤다.

"안 갈 거야? 날씨가 추어진다구! 빨리 타!"

"이 차 정말 괜찮을까요? 떨어져 나가면 어떻게 하죠?" 리비는 밴에 올라타면서도 여간 걱정스럽지가 않았다. 애써 고친 차가 밴에서 떨어져 나가 길가에 나뒹굴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 홀트는 그녀를 끌어당겨 조수석에 앉힌 다음 팔을 뻗어 문을 닫았다.

리비는 못마땅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뒷좌석을 돌아보니 질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껴안은 채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홀트는 뒤로 손을 뻗어 텔레비전 스위치를 켜고 VTR에 비디오 소프트를 넣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나올 거야." 홀트가 질에게 말했다.

"리비 언니도 나와 함께 영화 봐요. 만화 영화는 재미있어요." 질이 리비 쪽을 보면서 말했다.

리비는 홀트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고 나서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고맙지만 언닌 여기서 네비게이터를 해야 돼."

"네비게이터가 뭔데요?"

"지도를 보고 어디로 가야 될지 아빠에게 방향을 가르쳐주는 일을 하는 사람을 뜻하는 거야." 홀트가 그녀 대신 설명했다.

"왜 그렇게 해야 돼요?" 다시 질이 질문했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지." 홀트가 대답했다.

"왜요?"

"집에 빨리 돌아가기 위해서야."

질이 다시 뭔가를 질문하려고 입을 열자 홀트는 "!"하고는 무서운 얼굴을 지어 보이면서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알겠어요, 아빠." 질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어른스럽게 대답한 다음 텔레비전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차는 이내 시가지를 빠져나와 전원 지대를 달렸다. 몇 킬로미터나 되는 목초지가 계속되더니, 이어 기북이 심한 구릉지대가 나타났다. 그리고 켄터키 주와 테네시 주 북부를 연결 짓는 산등성이가 보였다. 기온이 낮고 바람이 심하게 붙었지만 차창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은 따스하게 느껴졌다.

"눈이 오면 온 세계가 깨끗해 보인다구. 마음이 편안하게 행복해지지." 홀트가 한쪽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당신은 어때?"

리비도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오늘 아침의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울적해졌다. 아침에 집에 전화를 걸어 어머니에게 내쉬빌을 출발한다고 하자, 어머니는 계속해서 좋지 않은 말씀만 하셨었다. 하지만 난 이제 어린애가 아니다. 자유의 길 앞엔 행복만이 가득할 뿐이다. 리비는 홀트를 바라보며 자신 있게 말했다. "나도 행복해요."

"당신 스웨터, 잘 어울리는데? 누구한테서 받은 거지? 겉포장에 '래리로부터'라고 되어 있던데?"

"래리는 큰오빠예요. 하지만 래리는 한 번도 선물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니까, 이건 아마 올케 언니가 대신 선물한 걸 거예요."

"좋은 취향을 가지신 분 같군." 홀트는 리비를 잡고 있던 손을 놓은 다음 두 손으로 핸들을 잡았다. "오늘 아침 전화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나?"

"엄마가 날 완전히 내다버린 자식 취급을 했어요." 리비는 심통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렇게 생각지 않아.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걱정스러워서 그러시는 걸 거야. 당신의 가족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해주겠어? 먼저 래리와 올케 언니부터....."

리비는 운전대를 잡고 있는 홀트의 긴 손가락을 바라보면서 그 감촉을 상기했다. 힘세고 멋진 느낌.....! 리비는 자신의 감정이 얼굴에 드러날까 봐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다음 가족들에 대해 얘기했다.

얼마 후, 홀트는 모든 신경을 운전에 집중시켜야만 하는 어려운 길로 들어섰다. 눈 덮인 몬티글 산으로 향하는 언덕길이었는데 시카고에서 마이애미로 이어지는 도로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는 안내판이 보였다. 홀트는 노련한 운전 솜씨를 발휘하여 산길을 올라갔다.

"이제부턴 계속해서 내려가야 돼." 산길을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쪽이 훨씬 위험하다. 홀트는 신경으로 곤두세우고 있었다.

"아빠, 얼마나 더 가야 돼요?" 질이 끼어들었다.

"아직 한참 더 가야 해." 홀트가 대답했다.

"금년 안에 도착할 수 있어요?" 질이 다시 물었다. 그러자 그 바람에 리비가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하지." 홀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한 시간쯤 달리자 다시 안내판이 보였다. 좀 더 내려가면 숙박 시설과 남부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 그리고 기차도 탈 수 있는 마을이 있다고 씌어 있었다.

마을에 들어서자 리비는 질에게 들리지 않도록 홀트에게 바싹 귓속말을 했다. "점심을 저기서 먹지 않을래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

"뭐가 재미있어요?" 질이 끼어들었다.

"핫핫핫, 이 애의 귀는 천리귀인가 봐." 홀트가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무슨 얘기죠? 내게도 가르쳐 주세요." 질이 몸을 내밀고 두 사람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옛날 기차역을 개조해서 식당으로 만든 곳인데, 저곳에서 점심도 먹을 수 있고 얘기도 나눌 수 있고 기차도 탈 수 있단다."리비가 설명했다.

차는 커다란 옛 역사 앞 주차장에 멈춰 섰다.

", 추워!" 리비는 코트 깃을 모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남쪽에 오면 따뜻할 줄 알았는데, 꿈이었어요."

홀트는 걱정스런 눈길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밤 집에다 전화를 해봐야겠어. 날씨가 아무래도 이상한데?"

 

"여기서 메이콘까지는 얼마나 되나요?" 옛날에 철도 부지였던 황량한 정원을 지나면서 리비가 물었다. 홀트는 오늘 저녁 숙박지로서 죠지아 주 중부에 위치한 메이콘에 호텔을 예약했었다.

"아틀랜타로 가는 길이 순조로운면 네 시나 네 시 반 정도면 충분할 거야."

"저 기차 탈 수 있어요, 아빠?" 질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증기 기관차를 바라보았다.

기관차 뒷편의 객차에서 수십 평의 관광객들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왁작지껄 떠들어대면서 승무원을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그럼 탈 수 있고 말고. 점심 먹은 다음 우리고 한번 타보도록 하자. 그리고 이 부근엔 모형 기관차 박물관도 있대. 그러니까 그곳도 둘러봐야지?"

 

한 시간 후, 밴은 다시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고속도로는 녹색의 조지아 주 북부 산악 지대를 뱀처럼 꾸불거리며 뻗다가 보석처럼 빛나는 아틀랜타 시를 관통한 다음 고원지대를 향해 위로 연결되어 있었다. 아틀랜타 시는 거대한 빌딩으로 가득하여 남부 지방의 여왕 도시란 별명에 걸맞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여왕도 배기가스에 찌들어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교통지옥을 가까스로 빠져나오면서 홀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약한 호텔을 찾기 위해 메이콘 시내로 접어들었을 때는 이미 6시가 넘어 있었고 캄캄했다.

차가 호텔 앞에 멈춰 서자 도어맨이 달려와 문을 열어 주었고, 보이가 짐을 옮겨 주었다. 따뜻한 저녁 식사를 함께 한 후 질을 침대에 눕이자 질은 긴 여로에 지친 탓인지 곧 잠이 들었다.

"내쉬빌에서부터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온 것 같아요." 길게 하품을 하면서 리비가 말했다.

"정말 오늘 하루는 악몽이었어. 이렇게 먼 줄 알았더라면 내쉬빌에서 하룻밤 더 머무는 건데....." 홀트는 투덜거리면서 셔츠를 벗었다. 근육질의 팔, 가는 허리, 검은 털이 덮인 가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것을 본 리비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홀트가 다가와 리비의 어깨에 비스듬히 기댔다. 그의 표정이 어두워보였다.

"무슨 일이에요? 당신의 표정이 무척 심각해 보여요."

"일기 예보가 마음에 걸려 집에 전화했더니 한랭전선이 남하하고 있다는 거야. 여기서 잘 시간이 없겠어. 조금 쉬고 나서 곧 출발해야만 해."

"지금요? 홀트, 당신을 지쳐 있어요!"

하지만 홀트는 막무가내였다. 일꾼들은 모두 크리스마스 휴가를 지내러 갔는데 뉴스를 듣고 자발적으로 농장에 돌아온 사람도 있지만 일손이 태부족이어서 빨리 가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행이 홀트의 농장이 고지대에 있어서 다른 지역보다 땅이 잘 얼지는 않지만 이번에 또 피해를 입으면 막대한 손해를 보기 때문에 무리를 해서라도 어서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기온이 얼마나 내려갈지 알 수 없으니까 빨리 돌아가서 대비해야 해." 홀트는 짐을 챙기면서 리비에게 간곡히 양해를 구했다.

"그렇다면 이번엔 내가 운전하도록 허락해 줘요."

"당신은 밴을 몰아 본 적이 없잖아?"

"하지만 오빠의 트럭은 가끔 운전해 봤어요. 난 팔 힘이 세니까 밴도 충분히 운전할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은 지금 몹시 지쳐 있어요."

"당신도 요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잤잖아?"

"난 그래도 차 안에서 휴식을 취했어요. 부탁이에요."

명쾌한 승낙은 아니었지만 결국 홀트는 운전대를 그녀에게 맡기기로 했다.

홀트는 말없이 질을 안고 프론트로 나갔다. 체크아웃을 하는 동안 보이가 짐을 운반해 줬다.

질이 잠에 곯아떨어진 덕분에 홀트는 차 안에서나마 느긋하게 쉴 수가 있었다. 리비는 밴을 처음 운전하기 때문에 바싹 긴장해 있었으나 핸들과 차체의 움직임이 익숙해지자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내가 밴을 운전 못할 걸로 생각했었죠?"

"당신을 의심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홀트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어마, 그랬던가요?"

홀트는 만족스런 미소를 띠면서 뒷자석에 느긋하게 누워 잠을 청했다.

리비는 새벽 2시까지 운전했지만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사실은 홀트를 위해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뿌듯한 마음에서 힘이 솟는 것 같았다. 정말 유쾌한 느낌이었다. 홀트에겐 신세를 많이 졌다. 동사할 뻔한 날 구해 줬고, 쓸쓸한 크리스마스가 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주었다. 게다가 얼마나 멋진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게 해주었던가? 이 남자를 만남으로서 내 인생은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채워야겠어. 이젠 내가 운전하지." 홀트가 잠에서 깨어나 말을 걸었다.

그들은 주유소에 들려 기름을 넣고 따뜻한 커피로 피곤을 푼 다음 다시 밴으로 돌아왔다.

홀트는 진정으로 리비와의 만남을 신의 은총이라 생각했다. 온화하고 친절한 성격의 이 여성은 내게 부족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보태 준다. 내게는 리비가 필요하다. 그녀의 따스한 마음, 충실한 지원, 아낌없는 사랑......

 

한랭전선이 다가오자 기온이 급강하했지만 바람은 그다지 세지 않았다. 이 지방에서 빙점 이하로 내려간다면 수백만 달러 상당의 감귤밭을 가진 과수원 주인 치고 여유 있는 태도를 보일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정말 내 집에 머물지 않겠단 말이야? 방은 얼마든지 있다구." 운전을 하는 홀트의 목소리가 바깥 날씨만큼이나 냉랭하게 들렸다.

리비는 그와 눈길이 마주치지 않도록 고개를 떨군 채 얘기했다. "말씀은 고맙지만, 당신은 바쁜 사람이고 난 한시라도 빨리 살 곳을 마련해야 하니까요."

"그건 그렇지만....." 홀트는 굳이 다른 곳에 숙소를 잡겠다는 리비의 마음을 돌릴 수가 없었다.

"질이 걱정되긴 하지만....." 리비는 홀트의 예리한 시선을 받고 말끝을 흐렸다.

"베이비시터는 필요치 않아. 질을 돌봐 주는 일이라면 벌써 사람을 구해 놨으니까."

리비는 불만에 가득 찬 홀트의 말을 귓전으로 흘리면서 전원 풍경에 눈길을 돌렸다. 희미한 햇빛이 있긴 했지만 밖은 상당히 추운 것 같았다. 뉴스에 의하면 한랭전선은 플로리다를 지나간다고 한다. 곳곳에서 묘목을 손질하고 비닐을 씌우는 등 대비책에 바쁜 농부들이 보였다.

고속도로 마지막 지점을 통과했을 때 리비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드디어 이 여행도 끝이 났다. 시카고를 출발하기 전과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의 며칠 사이에 리비는 너무나도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 모텔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는 곳이므로 지내기에 쾌적할 거야." 홀트가 현관에 둥근 기둥이 있는 건물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집을 구할 동안 당신은 이곳에 머무르도록 해. TOLTOT는 이 길을 따라 1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으니까 출퇴근에도 편리할 거야."

홀트가 차에서 내려 리비의 짐을 챙겼다. 그의 표정을 굳어 있었다. 리비는 얼른 차에서 내리지 못했다. 질과의 이별은 슬픈 일이다. 좀 전에 질이 눈을 뜨고 칭얼거릴 때 집에 다왔다고 하면서 등을 다독거리자 곧 다시 잠에 빠졌었다. 그런데 차가 멈춘 것을 알았는지 질이 눈을 뜨고 리비를 쳐다보다가 뭔가 이상한 기미를 깨달은 듯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리비가 질을 얼르려고 하자 홀트가 냉정하게 거절했다. "질은 내가 돌볼 테니까 당신을 들어가서 수속이나 마치지 그래?"

홀트가 빨아들일 듯한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자 리비는 당황하며 백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수속을 마친 후 방 열쇠를 받아들고 밴 있는 곳으로 오자 질은 평정을 되찾고 홀트의 무릎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홀트는 주차장에 차가 한 대도 없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면서 걱정스런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도 처음엔 그 점을 불안하게 여겼었는데 직원 얘기가 이곳은 하룻밤 묵는 모텔이 아니라 일주일 단위로 계약하는 곳이래요. 말하자면 이곳에 묵는 손님들은 아직 퇴근을 하지 않았거나 시내에 볼일을 보고 있을 거예요." 무리하게 웃어 보이면서 말했지만 속으로는 이제 이 남자를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될 거라는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다니, 나도 어지간히 감상적인 여자로군.

"홀트, 그 동안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요." 리비는 억지로 웃음 지었다.

"고마웠다는 말은 조금도 할 필요가 없어, 적어도 우리 사이엔....." 홀트는 리비를 끌어당겨 그녀의 뺨에다 아쉬운 듯 키스했다. "안녕, 리비.....!"

그때 질이 작은 몸을 비틀면서 소리쳤다. "싫어요!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질의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난 안녕이란 말이 제일 싫어요!"

리비의 눈동자에도 눈물이 맺혔다. 가엾게도.....! 이 작은 아이는 말을 알아듣기 시작한 후부터 얼마나 많은 안녕이란 말을 들어왔던가! 엄마에게, 유모에게, 그리고 이번엔 내게서...... ", 이건 정말로 헤어지는 게 아니고 잠시 동안만 떨어져 있겠다는 인사야." 질을 달래려고 등을 어루만졌으나 아이는 심하게 몸을 비틀면서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래도 싫어요. 난 이제 리비 언니가 싫어졌어요. 그러니까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리비는 당황하면서 손을 뗐다. ", 그런 말하면 언니는 슬퍼진단다....."

"아무리 그래도 난 언니를 좋아하지 않을 거야."

질은 완강했다. 피로하여 불쾌해진 기분이 질의 마음을 더욱 상하게 한 것 같았다. 리비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홀트를 올려다보았다.

".....홀트.....질에게 상처 줄 생각은 없었어요."

홀트는 리비의 어깨를 힘차게 잡았다. "질도 잘 알고 있을 거야. 당신이 이해해야지. 리비, 부탁이니까 울지 말아요."

홀트의 얼굴에 그늘이 지는 걸 보고 리비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질을 집에 데려다가 쉬게 하세요. 난 괜찮으니까요."

"전화할게." 홀트는 짤막하게 한마디 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밴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언제 전화할 거예요? 말이 목구멍까지 기어 올라왔으나 입 밖으로 나오진 못했다.

그녀는 그로부터 3일 동안 집을 구하러 다니면서 부산을 떠는 중에도 홀트가 전화를 걸어 올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젖어 있었다.

태풍이 24시간 맹렬한 기세로 몰아치다가 물러나면서 두 명의 생명을 앗아갔고 농작물에 지대한 피해를 주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태풍이 지나간 지 이틀이 지났건만 홀트는 전화를 걸어 주지 않았다.

오늘은 섣달그믐날이다. 리비는 부동산 소개업자인 로즈 랜딩 부인과 10시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어제 두 사람은 7시간 동안 리비가 내놓은 조건에 맞는 집을 찾으러 헤맸었다. 아직 원하는 집은 찾지 못했지만 친구를 한 명 사귀었다는 생각에 헛고생은 아니었다고 자위했다.

로즈는 휴일인 데도 불구하고 오늘 적당한 집 2군데를 더 보여주겠다고 자청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마지막 손질을 하는데 노크 소리가 났다.

"나가요!" 리비는 화장대에 달린 전등을 끄고 백을 집으면서 소리쳤다.

"안녕, 리비!" 로즈가 리비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외출 준비 다 됐나요?"

", 물론이죠. 떠나기만 하면 돼요." 리비는 백 안을 확인하고 난 다음 문을 닫았다. 그때였다. 안에서 전화기의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홀트다! 열쇠가 어디 있지? 리비는 백을 뒤져 열쇠를 꺼내더니 허겁지검 문을 열었다. 전화기는 침대 옆의 스탠드에 있었다. 그녀는 전화가 끊어지기 전에 받으려고 달려가다가 침대모서리에 무릎을 찧었다.

"어멋! 여보세요?"

기다리던 섹시한 목소리가 수화기로부터 들려왔다. "외출했나 하고 생각했었지."

"5초만 늦었더라면 그럴 뻔했어요. 부동산업자와 아파트를 보러 가기로 했거든요."

"당신은 대단히 바쁜 아가씨로군?" 나직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홀트, .....전화해.....주셔서.....기뻐요." 기쁘다고? 사실은 껑충껑충 뛰면서 소리를 질러도 모자랄 정도였다. 리비는 홀트가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애교스런 미소를 띠면서 얘기했다.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니 로즈가 묘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상관이란!

"당신은 잘 지내고 계세요? 태풍 피해는 없었나요? 귤나무가 얼어 죽지는 않았나요? 질은 어때요?"

아주 자연스럽고 유쾌한 웃음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대답은 오늘 밤에 해주지. 당신과 함께 새해를 맞고 싶은데. 혹시 다른 약속이 있는 건 아니겠지?"

"약속은 없지만, 내게 신경 써 주실 시간이 있으세요?"

"무슨 소리야, 리비? 나하고 함께 있고 싶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함께 있고 싶어요."

홀트가 안도의 숨을 내쉬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멋진 저녁 식사와 더불어 댄스파티를 계획하는 컨트리클럽에서 지낼 예정이야. 정장을 하고 나와 주겠어? 여덟 시에 데리러 가겠어."

"알겠어요." 수화기를 놓은 리비는 로즈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멋적은 표정을 지었다.

"엿들으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리비, 홀트라고 부르는 것 같던데, 혹시 홀트 휘트니 씨가 아닌가요?"

"맞아요. 그 분을 아시나요?"

"알구 말구요. 여긴 별로 크지 않은 고장이고, 또 홀트와 우리 부부는 어릴 적부터 친구였답니다."

"그 사람이 뉴이어스 파티에 날 초대했어요."

"당신이 홀트를 알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어요."

"우리가 만난 것은....."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까? "얘기하지면 길어요. 나가요, 우리."

로즈는 더 이상 묻지 않았지만 눈빛을 봐선 흥미진진해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럼 한가할 때 시간을 내어 사연을 들어보기로 하죠. 홀트는 고독한 남자랍니다."

"그 사람이 고독하다구요? 하지만 난 그런 건 전혀 못 느꼈는데요?"

"강인한 남자라 내색을 하지 않아서였겠죠. 결혼 생활은 정말 흥미 없었다구요. 그는 어떤 여자든 진심으로 믿지 않아요. 이제부터 아이를 맡게 되었으니 그의 생활에 큰 활력소가 될 겁니다. 당신, 질에 대해선 알고 있나요?"

", 질하고 무척 친해요."

"혹시 당신이 오늘 초대 받은 파티가 컨트리클럽 파티 아니에요?" 로즈가 물었다.

"." 로즈는 질이 화제에 오르는 걸 애써 억제하고 있는듯했지만 리비로서는 화제가 바뀌어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혹시.....당신네 부부도 그 파티에 참석하시려던 것 아니에요?"

". 잘하면 제 남편을 소개시켜 드릴 수도 있겠군요."

"만나 뵙고 싶어요."

"꼭 소개시켜 드리겠어요. , 이제 출발할까요? 이번엔 집이 당신의 마음에 쏙 들 거라고 생각해요. TOLTOT와도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요."

하지만 그곳은 리비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 번째로 들린 집 역시 마찬가지였다. 리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로즈, 미안해요. 모처럼의 휴일에 이 고생을 시켜 드리다니. 하지만 난 결정을 못 내리겠어요."

"난 상관 말아요. 아직 이틀이 남았으니 계속 찾아보도록 하죠."

리비의 머릿속엔 방보다도 오늘 저녁이 파티가 더욱 흥밋거리였다. "로즈, 주거는 다음에 찾기로 하고 내게 어드바이스를 해주시지 않겠어요?"

"무슨 어드바이스.....?"

"오늘 저녁 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를 골라야 해요."

컨트리클럽은 한 해를 보내고 신년을 축하하기 위해 화려하게 차려입은 신사 숙녀들로 붐볐다. 상아빛의 얇고 긴 드레스는 무릎까지 슬리트가 들어 있어 날씬한 리비의 각선미를 돋보이게 했다. 리비는 이 드레스를 고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정장 차림의 홀트도 멋있고 당당해 보였다. 홀트는 어제까지 잠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바빴다고 말했다. 그런데 과연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정말 멋진 클럽이에요.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초대에 응해 줘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공주님." 매혹적인 미소를 띠며 그가 리비의 손등에 키스하자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렉스와 로즈를 찾아볼까?" 홀트는 리비의 집을 구해 주는 사람이 자기 친구라는 사실을 알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었다. "함께 앉을 자리도 찾아봐야겠는걸."

리비는 선뜻 그러자고 했지만, 내심 두 사람만이 지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로즈의 옆에는 블론드 머리의 키 큰 남자가 서있었다. 리비일행을 발견한 로즈가 환한 미소를 띠며 손을 흔들었다. 리비와 홀트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겨우 로즈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리비, 이 사람이 내 남편 렉스예요. 렉스, 이쪽이 리비 해밀턴 양이에요."

리비는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으나 렉스의 눈에는 적의가 가득했다. 리비는 저으기 당황했다. 로즈는 호의적인데 이 사람은 왜 이럴까?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하지 않겠니? 다른 사람을 만날 약속이 되어 있는 건 아니겠지?" 홀트가 함께 식사할 것을 청했다.

"아니, 약속은 없어. 오늘 오후까지만 해도 올까말까 망설이고 있었으니까."

동석한 자리에서 로즈는 홀트가 이 지방 과수협동조합의 조합장이라고 일러주었다. 화제는 과수 피해에 대한 쪽으로 홀러갔다.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몇몇 농장 주인들이 홀트에게 피해 상황을 호소하면서 어드바이스를 구했다. 렉스의 수수께끼 같은 태도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던 리비는 화장실에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렉스가 무례하게 대한 걸 제가 대신 사과 드려요. 당신이 새로운 직업에 강한 의욕을 갖고 있다고 했더니 저러는 거예요. 그이는 당신과 홀트가 만나는 걸 못마땅해 하고 있어요. 홀트의 전처는 남편보다 일이 우선이었거든요. 그래서 홀트는 무척 외로웠어요. 깊은 상처도 받았구요. 또 다시 홀트가 불행해지는 걸 원치 않기 때문에 저러는 거랍니다."

리비는 로즈의 말을 한쪽 귀로 흘려들으면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홀트는 대단히 자상하고 친절한 사람으로서 이 지방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밴드가 연주 준비를 했다. 그러자 홀트가 속삭였다.

"리비, 함께 춤추지 않겠어?" "신청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하던 중이에요."

그의 품에 안기자 그리운 애프터 쉐이브 로션의 향기가 물씬 풍겨 왔다. 문득 눈 때문에 발이 묶여 잠시 머물렀던 딕시네 집에서 춤추던 일이 생각났다.

"홀트....."

"?"

"괜찮다면 집까지 바래다주시겠어요?"

홀트의 눈에서 순간적으로 파란 불꽃이 일었다. "집까지 바래다 달라구?" 다음 순간 홀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물론이지. 데려다 줄께."

리비는 몸을 돌려 테이블로 돌아왔다. 렉스와 로즈는 춤을 추고 있는 모양이었다. 홀트는 낙심한 표정으로 말없이 뒤따라 왔다. 리비는 흰 셔츠와 진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복도에 있는 자동판매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들고 방으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새해를 축하하는 인파들이 소란을 떠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어제 저녁 파티에서의 일을 생각했다.

내가 '집에 가고 싶다'라고 했을 때 그의 눈이 순간적으로 반짝였었다. 아마 그의 집으로 가자는 줄로 알았을 것이다. 그의 집..... 리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엎질러진 물도 되담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관계로 되돌리도록 노력을 해야만 한다. 난 홀트를 사랑한다! 그의 말이 옳다! 사랑의 올가미에 묶인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야!

새벽 130. 리비는 그의 마음이 변치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차를 몰았다. 로즈에게서 얼핏 홀트의 집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그 기억을 되살리면서 부리나케 간선 도로로 접어들었다. 가까스로 그의 집 앞에 이르러 차를 세운 그녀는 '홀트 휘트니'라고 쓰인 출입문 앞으로 달려가 세차게 두들겼다. 그러면서 그의 이름을 불러댔다. 그러자 한 남자가 현관문을 박차고 달려 나왔다.

"홀트!"

"리비!" 홀트는 그녀를 들어 올려 한 바퀴 빙그르 돌면서 소리 내어 웃었다. "리비, 분명히 리비 맞지?"

"그래요. 맞아요. 리비예요!" 리비는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그의 품에 안겼다. "사랑하고 있어요, 홀트!"

"나도, 이 세상에서 최고로! 이제 우린 진짜 결혼해야만 해! 나하고 결혼해 주는 거지?"

"물론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온 거예요. , 이제 나에게 집안을 구경시켜 주시지 않겠어요?"

"일부만 보여줄 테야." 홀트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당신의 침실만을 보여주시겠단 말씀이로군요?"

"당신을 확실히 머리가 좋군." 그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면서 재촉했다. ", 들어가실까요, 여왕 폐하?" 계단을 올라 오른쪽으로 돌자 이내 아름답게 조화된 넒은 침실이 보였다. 홀트는 킹사이즈 침대에 그녀를 앉힌 다음 자기도 그 옆에 앉았다. "내쉬빌에서 처음 당신과 맺어졌을 때 나는 결혼하길 간절히 원했었어. 그리고 당신이 거절했을 땐 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어."

"나 역시 가슴이 아팠어요. 하지만 당신은 강한 사람이고, 내가 당신의 페이스에 말려들면 모처럼 찾으려던 자유가 멀리 달아나 버릴 것만 같았어요."

"달링,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구식은 아냐. 당신을 아름답고 지적인 여성이야. 그러니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사회생활을 계속 해도 돼. 당신은 린다의 경우와는 전혀 달라."

"하지만 난 야망 같은 건 갖고 있지 않아요. 단지 즐겁게 사회생활을 하고 싶을 뿐이에요."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는 거야. 여기서 TOLTOT는 가까운 거리니까.....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조건이라구요? 조건이란 뭐죠?" 조건이란 말에 리비는 가슴이 철렁했다.

홀트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비에게 윙크했다. "내게 컴퓨터를 가르쳐 줘야 해. 질이 요즘 컴퓨터에 대해 계속 질문공세를 펴는데 뭘 알아야 대답해 주지."

리비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 "질을 보고 싶어요."

"지금 곤히 잠들어 있어."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홀트는 일어서려는 리비는 다시 잡아 앉혔다.

"그래도 보고 싶어요." 리비는 막무가내로 침실을 나왔다. 몇 개의 방문을 열어 본 뒤 드디어 질의 방을 찾아냈다. 그녀는 나비 날개 같은 얇은 커튼이 드리워진 네 기둥 침대에 곤히 잠들어 있는 질에게 다가가 뺨에다 키스했다. 마치 내 집에 온 듯이 편안하고 행복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이곳이 바로 내가 머물러야 할 보금자리야.

 

다음날, 리비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눈부신 햇살이 엷은 커튼 사이로 쏟아져 들어왔다. 허리에 놓인 묵직한 팔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일어났어, 리비?" 졸리운 듯한 목소리로 홀트가 말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젖가슴을 더듬기 시작했다.

"일어나자마자 이게 무슨 짓이에요?" 리비는 눈을 흘기면서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홀트는 그녀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우리가 결혼을 하게 되면 신혼여행은 어디로 갈까? 킬라고에 별장이 있는데, 고속도로로 멋지게 드라이브할까?" 그의 파란 눈이 장난기로 반짝였다.

"절대로 안 돼요! 두 번 다시 고속도로 얘긴 꺼내지도 마세요!" 리비는 엄지손가락과 인지로 총을 만들어 그를 위협했다. "난 아무 데도 안 갈 거예요. 난 꼼짝 않고 이 집에 있을 테니까 어디 끌어내고 싶으면 끌어내 보세요."

홀트는 그녀를 끌어당겨 뜨거운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그리고 벌거벗은 그녀의 알몸을 마음껏 탐닉하기 시작했다. 두 개의 육체가 하나로 얽히어 뒹구는 바람에 침대가 몹시 출렁거렸다.

"또 뽀뽀하고 있어요?" 출입문 쪽에서 갑자기 귀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질이 잠옷을 입은 채 진지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홀트는 이불을 끌어당겨 자신들의 벌거벗은 알몸을 가리면서 몇 번인가 헛기침을 한 뒤에 설명했다.

"아빤 이제부터 리비 언니에게 굉장히 많은 뽀뽀를 해줄 참이야. 왜냐하면 리비 언니가 아빠와 결혼하여 이 집에서 함께 살겠다고 말했거든? 물론 네가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아녜요. 난 정말 좋아요." 라며 꼬마는 어깨를 으쓱했다. 싫다고 떼를 쓰지 않을까 걱정하던 리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질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지면서 침대 위로 기어 올라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질은 작은 손으로 리비의 뺨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나는 언니가 없어서 굉장히 쓸쓸했어요. 지난번에 내가 화낸 것 용서해 주시는 거죠? 그건 정말이 아니었어요."

"언니도 다 알고 있어. 언니가 네 곁을 떠난 게 잘못이었어. 그걸 깨닫고 이렇게 다시 온 거야. , 너도 나를 용서해주겠니?"

", 하지만 난 벌써 언니를 용서했어요."

홀트는 오늘만큼 딸이 귀엽게 느껴진 적은 이제껏 없었다. 그는 자신이 알몸인 것도 잊은 채 리비와 질을 한꺼번에 꼭 껴안았다. 온 세상이 지금 자신의 팔 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뿌듯했다. 그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행복이 무엇인지 직접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세 사람의 미래를 약속하듯 밝게 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