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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의 여자(The pirate's woman) 1

해적의 여자(The pirate's woman)

Madeleine Harper

 

1장 새해 전야의 마지막 고객

"행복한 새해를 보내세요! 그리고 파티에서 멋진 시간을 보내세요."

다이아나 트레몬트는 가게 현관에서 서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하얀 토끼에게 밝게 미소 지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파티에 가는 사람들이 차에 올라타자마자 다이아나는 판타지 페어의 문을 닫고 거기에 기대섰다. "문을 닫으라구!" 그녀가 소리 질렀다. "이제 손님은 한 사람도 더 받지 않겠어."

해리 밴스가 모조 장신구 카운터에서 튀어나왔다. 그는 싸구려 물건이 든 접시를 들고서 흡혈귀 송곳니를 드러내 보이면서 활짝 웃었다. 다이아나는 그 영업부장이 새해 전야에 드라큘라 백작처럼 옷을 입으면 우스꽝스러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85cm나 되는 그의 키에 맞는 옷이 가게 안에는 없었다.

"사장님, 불평하지 마시고 축하를 하셔야 합니다. 오늘밤의 임대 의상들은 할로윈 주말의 수요를 능가했어요. 우리에게는 최고의 휴일이에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너무나 피곤해서 축하를 할 수가 없어. 그러니 그만 문을 닫자구. 이제 밤이 깊었어." 그녀는 몸을 굽히고 가면을 집어들었다. "도대체 왜 이게 히비스커스 화분 뒤에 숨어 있었던 거지?"

"누가 압니까? 인조 장신구도 곳곳에 널려 있는 걸요. 고객들이 마치 소용돌이처럼 판타지 페어를 휩쓸고 갔어요."

다이아나의 영업 보조인 마인디 패터슨이 나풀나풀한 아더 왕의 왕비 복장을 하고서 가게 앞으로 잔뜩 뽐을 내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우린 판타지 페어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 모두 열심히 일했어요. 이젠 그 대가를 받아야 한다구요." 마인디는 극적인 포즈를 취해보인 다음 보석 카운터에 있는 그릇에서 초콜릿을 집어 들었다

해리가 그녀에게서 캔디 그릇을 빼앗으려 했다. "초콜릿은 더 이상 먹지 않는 게 좋겠어요."

"그건 이 옷을 입기 전의 이야기라구요." 그녀는 나풀거리는 스커트를 쓰다듬었다. "몇 파운드의 살이 더 찐다고 해도 이 의상은 문제없이 숨겨 줄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초콜릿 하나를 더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이거야말로 나에겐 가장 즐거운 보너스인 셈이에요!"

"그 말이 맞아." 다이아나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말했다. "4년 동안이나 쉴새없이 일을 해온 결과 이 가게도 그 보상을 받는 것 같아."

해리가 송곳니를 빼낸 다음 다이아나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사장님은 그렇게 해서 어떤 이익을 얻는다는 겁니까? 그렇게 열심히 번 돈을 쓸 시간도 없잖아요?"

마인디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구요. 사장님은 스스로 즐길 시간도 없으세요."

그녀는 긴 붉은 머리에서 두건을 벗긴 다음 머리를 어깨까지 길게 늘어뜨렸다.

"아니면 여러분의 반응에 보답할 시간도 없다는 뜻이겠지?" 다이아나가 말했다.

"오늘밤만 해도 그래요." 해리가 뻔뻔스런 얼굴로 말했다. "사장님은 옷조차 챙겨 입지 않았어요."

"그 옷을 챙겨 입을 생각이었어."

다이아나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상의는 면으로 된 하얀 터틀넥 스웨터에다 운동화 차림이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 머리는 단정한 포니테일 형이었고, 얼굴 주변으로 컬을 한 스타일이다. 그녀는 벽에 비스듬히 걸려 있는 거울 중 하나를 들여다보았다.

"사실 오늘 아침에도 화장을 했어. 하지만 모두 지워져 버린 것 같아."

"그랬을 거예요."

마인디가 콤팩트를 꺼내서 뺨에 두드려다. 그리고 머리를 브러시로 빗은 다음 다시 두건을 뒤집어썼다.

다이아나는 흘끗 손목시계를 보았다. "지금은 9시야. 그리고 오기로 되어 있는 사람도 없어. 게다가 우린 오늘 밤 클레오파트라에서 커트 선장까지 완벽하게 분장을 했어."

"그럼 이만 일을 끝내고 문을 닫기로 합시다."

해리는 다시 송곳니를 끼웠다. 다이아나는 밝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그의 파란 눈동자와 가면 뒤로 삐죽 나온 금발의 짧은 머리칼을 보면서 그가 정말 특별한 드라큘라를 연출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파티 시간이에요." 해리가 선언했다. "우린 기쁨의 섬으로 떠나는 거예요. 마인디, 두건은 제대로 썼겠죠?"

마인디가 머리를 흔들어 보았다. ", 각하."

"다이아나, 함께 가겠어요?"

다이아나는 그 제의에 응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 뜨겁고 질식할 것 같은 클럽에 가서 커다란 음악 소리에 시달린다는 건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픈 일이다.

"아냐. 난 빼줘."

"이번에는 절대로 안 돼요." 마인디가 비난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이번에는? 마치 내가 새해의 초대를 50번쯤 거절한 것처럼 말하는군. 내가 그렇게 늙었단 말야?"

"그렇게 늙은 건 아니에요."

"마인디, 사장님이 마지막으로 파티에 갔던 게 언제였죠?"

"할로윈 때는 가지 않았어요. 작년 새해 파티에도 안 갔어요.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어." 다이아나가 항의했다.

하지만 마인디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사교활동은 오로지 판타지 페어에 제한되어 있었다. 때로는 일주일에 6일씩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가게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런 다음 일요일에는 특별한 디자인을 스케치하면서 보냈다. 그녀의 디자인은 날이 갈수록 더욱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중이다.

그녀의 고객들은, 만약 다이아나에게 뭔가 독특한 것을 부탁하면 마음에 쏙 들게 만들어 준다는 걸 알고 있다. 자선 바자회에나 축제 때 같은 의상을 입고 나타나는 사람 때문에 얼굴을 붉혀야 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결과 그녀의 열렬한 고객들은 계속 그녀의 가게를 이용하게 되었다.

해리가 금전 등록기를 열고 내용물을 가방에 넣기 시작했다. "이걸 야간 은행에 예치해야겠어요."

"정말 천사 같은 남자라니까." 다이아나가 말했다.

그때 가게 밖의 찻길에서 타이거가 끽하고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차의 헤드라이트가 앞문을 비추었다.

", 안 돼! 또 고객이 오는 건 아닐까?"

"그런 것 같아요." 해리가 가게문 쪽으로 다가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그를 들여보내지 말아요." 마인디가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몰인정할 수 있어요?"해리가 말했다. "아마 무척 다급한가 봐요. 다이아나, 어떻게 할까요?"

"별로 남은 물건이 없는데하지만 문을 열어 줘요." 그녀가 피곤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럼 나는 기다리는 동안에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게 좋겠어요."마인디가 말했다.

"남은 옷의 절반가량은 여기 있어요. 난 로마실부터 시작하겠어요."

"당신은 고대 세계를 정돈하도록 해요. 난 순례자와 카우보이, 아메리카 원주민의 의상을 옷걸이에 걸겠어요. 다이아나, 판타지와 이미지네이션의 의상을 치워줘요. 그곳은 눈뜨고 못 볼 정도라구요."

"도움이 필요하면 우리를 불러요."마인디가 말했다.

다이아나는 발소리를 들었다. 이어서 다급하고 거친 노크소리가 들린다."늦은 주제에 꽤나 뻔뻔스럽군!" 그녀는 발끈 화를 내면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한숨을 내쉰 다음 문을 열어 주었다. 한 남자가 그녀와 현관의 불빛 사이에 서 있었다.

"아직도 문을 열고 있어서 다행이오. 아마 나에겐 행운의 밤인 것 같소."

그의 음성은 낮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다이아나의 척추를 타고 예기치 않은 떨림을 전해주는 묘한 감각 같은 게 있었다. 그가 지나치는 동안 다이아나는 숨을 들이쉰 다음 문을 꼭 잡고 있었다.

정말 믿을 수가 없다! 바로 그 남자야!

그녀는 말을 잊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드디어 그가 그녀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는 잘생긴 얼굴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숱이 많은 갈색 머리칼은 웨이브가 진 채 칼라에 닿아 있다. 눈동자는 거의 검은색에 가까우며, 장난스럽고 섹시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모든 것이너무나 흡사했다.

"무슨 일이오?" 얼굴을 찌푸리자 그의 앞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다이아나의 음성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당신은 마치잘 모르겠소."

그가 가까이 다가와서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뜨거운 시선 밑에서 다이아나의 피부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가게 문을 닫은 거요?"

"아니에요, 아직 닫지 않았어요."

다이아나는 문에 몸을 기댔다. 그녀의 마음은 거친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었다. 여태껏 그녀는 바로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 그런데 이렇게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나 때문인 모양이군요." 그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늦어서 미안해요. 아무래도 그냥 가야 할 것 같소."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녀는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심장을 제대로 조절하려고 애썼다.

"당신 시간을 많이 빼앗지는 않겠소. 약속할 수 있어요. 난 의상을 찾고 있어요. 내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군요."

그는 카키색 바지에 짙은 갈색 스포츠 셔츠, 갈색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다. 검게 그을은 그의 피부는 그가 야외활동을 즐기는 사람임을 드러내 주고 있었다. 그가 미소를 짓는 순간 그의 눈가에 작은 주름살이 잡혔다.

다이아나는 그를 응시하는 일을 이제 그만두고 싶었다. 틀림없이 이 남자는 그녀가 그토록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걸 의아해할 것이다.

"제가 도와 드리겠어요." 그녀는 간신히 그렇게 말했다.

"당신이 아니면 아무도 도울 사람이 없지 않소?" 그가 아찔하게 섹시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에겐 문제가 있어요."

그는 재킷 호주머니에서 하얀 초대장을 끄집어냈다. "나는 몇 주 동안 출장을 떠났다가 오늘밤에야 올랜도로 돌아왔소. 그런데 내 우편물에 이게 포함되어 있었어요."

다이아나는 그걸 흘끗 본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센트럴 플로리다 유나이티드 자선 바자회의 초대장이군요."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죠?"

"거기에 초대된 손님들이 대부분 의상을 우리 가게에서 준비해 갔어요."

"그럼 당신이 한 벌 더 골라 줬으면 좋겠소. 난 이사회의 멤버요. 그런데 만약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의상들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예요. 하지만 얼마든지 구경하세요. 직원을 부르겠어요."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그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당황한 그녀가 재빨리 몸을 피하는 바람에 그의 손이 그녀의 셔츠 소매를 스쳤다. "우선 내 소개를 하겠소. 난 아담 호크요. 밖에 있는 간판에서 이름을 봤어요. 아마 당신이 주인인 것 같군요, 다이아나 트레몬트."

"그래요."그녀는 그를 바라본 다음 몸을 돌렸다. 침착성을 다시 찾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왠지 우린 전에 만났던 적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군요."그가 말했다.

다이아나가 재빨리 대답했다. ", 아니에요. 그럴 리가 있나요? 우린 절대로 만난 적이 없어요."

"물론이오. 당신 말이 옳아요, 미즈 트레몬트. 우리가 만났다면 난 틀림없이 당신을 기억했을 거요. 그리고, 그리고."

한 남자가 어떻게 이런 엄청난 매력을 지닐 수 있을까? 그의 모든 것이 완벽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건 놀랄 일이 아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그는 항상 완벽한 존재로 있었으니까.

아무튼 이건 불합리한 일이다. 아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가 실제로 존재할 리가 없다.

"직원을 부르게 해주세요."

"안 돼요. 난 차라리."

"마인디!"그녀가 소리쳤다. "해리! 이봐! 난 두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구! 이리로 와서 호크씨의 의상을 골라 드려, 좀 특별한 것으로."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인디와 해리가 당신을 도와 줄 거예요. 나에겐 달리 할 일이 있거든요."간신히 그렇게 말한 다음 그녀는 황급히 도망쳐서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맨 위로 올라선 다음 발걸음을 멈췄다. 마인디와 해리가 옷을 골라 주는 소리가 들려왔다

"토가(고대 로마의 헐렁한 겉옷)는 어때요?"해리가 말했다.

"그건 침대 시트 같잖아요?" 마인디가 나섰다. "아무튼 저속한 안목 하나는 알아 줘야 한다니까! 그게 사라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이유가 있었군. 이봐요, 호크 씨, 원탁의 기사는 어때요? 당신은 랜슬롯 경과 아주 비슷하게 생겼거든요."

하지만 아담 호크는 별로 내키지 않는 것 같았다. "갑옷 입고 춤추는 건 좀 힘이 들지 않을까요?"

그러자 해리가 다른 제안을 하고 나섰다. "아직 고릴라 의상이 남아 있어요. 사실 새해 전야의 의상으로는 그렇게 인기 있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호크 씨를 직원들의 자비스런 손길에 맡겨 둔 채 다이아나는 계속 계단을 올라갔다. 그런 다음 복도를 지나서 오른 쪽으로 첫 번째 방으로 들어섰다. 머리 위의 불을 켠 다음 재빨리 사무실로 향하는 문을 닫았다.

그녀는 책상으로 사용하는 테이블에 앉아서 가운데 서랍을 열어 보았다. 그곳에는 스케치북이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깊게 들이쉰 다음 그걸 끄집어냈다. 하지만 그것을 펴보기가 두려워서 잠시 망설이고 있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그녀는 일어서서 저편으로 가서 서성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테이블 위에 있는 스케치북을 흘끗흘끗 쳐다보았다. 얼마 후에 그녀는 모든 의지력을 동원해서 간신히 테이블로 돌아가 스케치북을 펼쳤다.

순간 다이아나는 목이 막혀 왔다.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아담 호크가 자신이 스케치한 남자의 이미지와 똑같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녀가 품어 온 환상 속의 해적은 그녀가 12세 되던 해부터 줄곧 그려왔던 사람으로, 어느새 그녀 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가 판타지 페어로 들어오는 순간 그녀가 그토록 놀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잘생긴 해적에 대한 꿈을 처음 꾸기 시작했을 때 어머니는 그녀가 텔레비전을 너무 많이 본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에롤 폴린과 버트 랭커스터가 단검을 휘두르면서"그만해, 동지들!"하고 소리치는 옛날 영화에 너무나 빠져 있다고 걱정을 했었다.

"넌 거기서 벗어나야 해." 어머니는 딸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빠져나오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환상을 말로 표현하는 것만을 삼갔을 뿐이다. 그 환상은 그녀의 잠재의식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녀가 십대가 되었을 때 그녀는 항상 밤을 기다리곤 했다. 밤이 되면 침대에 누워서 잘생긴 해적 두목의 꿈을 꾸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를 납치해서 자신의 배에 태우고 5대양을 항해하고 돌아다니곤 했다. 물론 환상 속에서 말이다. 그녀는 그의 인질이었고, 그의 공주였으며, 그의 포로였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 있었다.

20대에 접어들었을 때 다이아나는 대학에서 심리학 강의를 들었다. 그래서 해적에 대한 자신의 환상이 자유와 모험, 성적인 환희를 열망하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건 지극히 건강한 것이다. 그리고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었다.

때로 그녀는 몇 달 동안이나 환상 속의 연인에 대해서 잊고 지내곤 한다 그러다가 다시 그 꿈을 꾸는 것이다. 그가 다시 나타나서 그녀를 끌어안고서 그의 배에 태운 다음 선실로 데려간다. 거기서 그는 다이아나에게 정열적인 키스를 퍼붓고 출렁이는 물결 속에서 밤새도록 그녀와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그녀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더 이상 환상 속의 해적을 무시할 수가 없다. 그녀는 책상 위의 램프를 켜고서 몇 달 전에 그려 놓은 것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정말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녀는 자신의 해적이 아담 호크라는 사실을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그건 미친 짓이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는 짙은 갈색 눈동자를 오만하게 뜨고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각이 진 편이지만, 입술은 대단히 도발적이고 감각적이다.

뭔가 이론으로 설명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여태껏 한 번도 아담 호크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스케치북에다 그의 이미지를 그대로 그려 놓은 것이다.

"좋아, 다이아나." 그녀가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 스케치를 아담 호크에게 보여 줄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내가 디자인한 의상은 그에게 보여 줄 수 있지 않을까?

다이아나는 옷장으로 다가가서 그 옷을 꺼냈다. 그건 오래된 영화에 나온 해적의 복장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 영화를 보고 마구 웃었다. 몇 년 동안 그녀는 17세기와 18세기의 이야기에 몰두해서 키드 선장이나 검은 수염, 켈리코 잭 같은 해적들에 관한 책을 열심히 읽어댔다.

그 의상을 디자인했을 때 그녀는 역사 의상에 관한 서적을 주의 깊게 읽어보곤 했다. 옷감 가게를 돌아다니다가 그녀는 아주 적합한 소재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래서 꽃무늬 수직 레이스를 단 너울너울한 옷 소매의 하얀 셔츠와 붉고 하얀 실크 장식띠, 검은 반 바지를 디자인했다. 또한 조끼에는 금실로 수를 놓고, 동으로 된 단추와 새틴 리본으로 가장자리를 장식했다. 그런 다음 그 스케치를 재단사에게 주어 옷을 짓게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한 번도 다른 장식품들과 함께 그것을 아래층에 내려다 놓지 않았다. 항상 그럴 마음은 있었지만 웬일인지 그 옷은 그녀의 사무실 옷장 속에 걸려 있었다.

마치 아담 호크가 어느 날 판타지 페어에 들어와서 해적의 복장을 요구하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다이아나는 그 복장이 그에게 완벽하게 맞을 거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결심을 했다. 그녀는 아담 호크를 위해서 그 옷을 들고 힘차게 아래층으로 내려갈 것이다. 그녀의 신경이 좀 진정된 다음에 말이다.

아래층에서 아담은 도대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두 명의 가게 직원들의 그의 의상을 두고 마치 생선 장수처럼 다투고 있었다. 가게 주인은 그가 도착한 순간 겁먹은 사슴처럼 도망쳐 버리고 나타나지 않는다.

"이건 어때요?" 마인디가 물었다. "짧은 스커트예요.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그녀는 아담이 볼 수 있도록 옷을 들어올렸다.

아담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스커트를 입는 남자가 아니오. 미안해요."

마인디는 풍만한 힙에 양손을 얹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호크 씨, 스코틀랜드 남자들은 스커트를 입을 때도 대단히 남성적이에요. 당신에게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기분 나빠하지 말아요. 그 옷은 단지 내 스타일에 맞지 않을 뿐이오. 차라리 해리가 골라 준 고릴라 의상을 입는 게 좋을 것 같소."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해리가 말했다. "여기 탈의실로 오세요. 손님에게 맞게 손을 봐드리겠어요. 이 의상은 매우 권위가 있게 보입니다. 손님이 들어가시는 순간 그곳에 모인 분들은 깜짝 놀랄 거예요."

"그런데 내가 그 옷을 입으면 그대로 타서 재가 되어 버릴 것 같군요."

"그렇지 않아요. 이 옷에는 구멍이 아주 많답니다. 머리 부분이 좀 답답할 거라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처음에 선생님의 인상을 강하게 심어 준 다음 옷을 벗어도 좋습니다."

다이아나의 음성이 계단에서 들려왔을 때 그들은 여전히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호크 씨는 고릴라보다는 해적이 되는 편이 훨씬 어울릴 것 같아요."

그녀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자 아담이 시선을 들었다. 그는 의상 같은 건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은 다이아나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빛나고, 깊은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는 빛을 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깊은 비밀을 간직한 듯한 그런 눈동자였다. 무슨 일인가가 진행되고 있다. 그건 그와 관계된 일이었다.

"이 의상이 호크 씨가 찾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녀가 그에게 다가갔다. 아담은 다시 한 번 그 여자와의 연관성 같은 걸 강하게 느꼈다.

그녀 역시 그걸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들 사이에는 둘만이 느낄 수 있는 인식과 흥분 같은 것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떻게 반응했던가? 그에게서 도망쳐 버리지 않았던가?

다이아나가 그에게 의상을 건네주었다. "해리, 이 의상과 어울릴 만한 부츠가 있는지 알아봐 줘."

"10.5인치요."아담이 여전히 다이아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그 옷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마인디가 말했다. "다이아나, 그 옷을 어디서."

"마인디, 우리 나중에 이야기해. 호크 씨, 탈의실은 저쪽이에요."

그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복도를 따라 걸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다이아나에게 가 있었다. 그는 그녀의 명성이 대단하다는 사실과, 그녀의 스타일이 대단히 훌륭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가게를 활기차게 꾸며놓은 솜씨와 그 고전적인 분위기로 미루어서 그건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된 집들이 이웃해 있는 곳에 있으면서도 그곳을 멋진 가게로 꾸며 놓았다. 넓은 샛길과 커다란 떡갈나무에는 격조 있는 분위기가 묻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올랜도의 시가지에서 불과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확실히 다이아나 트레몬트에게는 사업 수완이 있는 편이었다. 아담 역시 사업가이니까 그 점을 알아 챌 수가 있었다.

"여기 부츠가 있어요." 해리가 커튼을 열고서 구두를 밀어 넣었다. 그 바람에 아담의 상념이 깨져 버렸다.

"준비 되셨어요?"

"아직."

아담은 재빨리 옷을 벗고 그 옷을 입었다. 셔츠와 바지가 완벽하게 들어맞는 게 정말 놀라웠다. 그는 허리에 붉은 장식 띠를 두르고 조끼도 입었다. 그 옷은 그를 위해서 맞춰 놓은 것 같았다.

잠시 후에 그는 거드름을 피우는 걸음걸이로 현관 쪽으로 걸어 나왔다. "미즈 트레몬트, 당신은 천재적인 솜씨를 갖고 있어요. 이건 완벽한 의상이오."

다이아나는 아담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 사람이 거기 있었다. 그녀의 환상 속의 해적, 그리고 그녀가 수녀 동안 꿈꾸어 왔던 바로 그 남자가 거기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꿈속의 남자가 아니다. 그는 피가 흐르고 살이 있는 사람으로, 그녀가 디자인한 옷을 입고 있다.

하얀 셔츠는 그의 넓은 어깨에 아주 잘 어울렸다. 그리고 반바지 역시 그의 근육질 허벅지를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서 그를 만져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다. 사실 그녀가 꾸어 왔던 어떤 꿈도 지금처럼 생생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내 친구들이 배꼽을 잡고 웃겠어요." 그가 말했다.

"아마 친구 분들이 재미있다는 생각보다는 먼저 깊은 감명을 받게 될 거예요." 다이아나가 말했다.

"그들은 내 의상 때문에 웃지는 않을 거요. 그들이 웃는 건 이 의상이 주는 상징적인 의미 때문이오."

"상징?"

"아담 호크, 항공회사의 해적언제든 불러만 주십시오." 그가 경례를 붙이면서 말했다. "나의 경쟁자들이 질투심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여 줬어요. 그러니까 내 친구들이 날 놀려대고 싶어 할 거요."

해리가 갑자기 손바닥으로 이마를 툭 쳤다. ", 그러니까 당신이 바로 그 아담 호크로군요! 호크 항공회사 말예요. 몇 달 전에 일요신문의 재정난에서 당신에 대한 기사를 읽었어요." 해리가 다이아나와 마인디에게 몸을 돌렸다. "알아요? 이 사람이 해외 항공노선에서 가장 큰 카리브 해 노선 중 하나를 훔쳐 갔어요!"

아담이 어깨를 으쓱했다. "우린 좀 더 좋은 스케줄과 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을 뿐이오. 그리고 바로 그 일로."그가 순진한 표정이 되어서 덧붙였다. "나는 해적이라고 불리게 되었어요. 이제 그 별명이 일리가 있는 것 같죠?"

다이아나가 안도의 미소를 띠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나도 신문에서 당신 사진을 보았던 것 같아요. 바로 그거예요! 잠재의식."그녀는 마치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그건 전혀 기적이 아니었다. 그저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다. 아담 호크는 그녀의 기억 속에 잠재되어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해적에 그의 얼굴과 육체를 끌어댔던 것이다.

"뭐라구요?" 아담이 물었다.

"설명하자면 아주 길어요." 다이아나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자면 많은 질문이 따를 거예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모르지만 난 달라요 미즈 트레몬트, 난 우리가 이 대화를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녀의 대답은 정중하고도 정확했다. "당신이 그 의상을 반납하러 올 때 우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판타지 페어는 화요일부터 목요일 밤 9시까지 문을 열어요. 우린 와인을 대접하죠. 그리고 분위기는 축제와 아주 흡사해요."

"새해 이브도 축제예요." 그가 놀렸다. "지금 하는 건 어때요? 나와 함께 축제에 가지 않겠소?"

사실 그는 그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까 그의 초대는 순전히 순간적인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말해 놓고 나자 아담은 기분이 몹시 좋아졌다. 다음 순간 그는 해리가 다이아나의 등 뒤에 있는 마인디에게 윙크하는 걸 보고 자기에게 지지자가 있음을 알아챘다.

그는 정말 다이아나 트레몬트라는 여자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처음에는 오묘하고 신비에 가려 있는 듯한 느낌을 주더니, 나중에는 조용하고 책임감이 강한 여자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가 이 가게로 들어온 이후로 그녀는 아주 많은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그를 당황하게 만든 건 그녀의 마지막 변화였다. 그녀는 그가 해적 복장을 하고 있는 걸 마치 유령이라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시선으로 응시했던 것이다.

도대체 저 여자는 어떤 여자일까? 아담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걸 알아냈다고 결심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걸 손에 넣는 데 익숙한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이 복잡한 여자와 저녁을 함께 보내기를 원하고 있다.

"난 데이트 상대가 없어요. 틀림없이 당신도 거기 있는 사람들을 대부분 알고 있을 거요. 우린 아주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어요." 그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어갔다. "물론 당신이 다른 계획이 없다면 말이오."

"계획이 없고말고요." 해리가 재빨리 나섰다.

"그거 아주 멋진 생각이군요." 이번에는 마인디가 끼어들었다. "다이아나, 가요. 어서 가라구요."

"마인디, 내게 응원단 같은 건 필요 없어. 난 몹시 피곤해. 그리고 호크씨는 나를 알지도 못하는데."

"바로 그 점 때문이오. 난 당신을 알고 싶어요. 어때요, 미즈 트레몬트, 아니 다이아나?"

다이아나가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자 다시 해리가 나섰다. "그건 우리 사업을 위해서도 아주 좋은 기회가 되겠네요. 사장님이 거기 가시면 우리의 고객들을 많이 만나게 될 거예요. 그럼 그들이 사장님에게 다른 잠재고객들을 소개해 주면."

"호크 씨, 당신의 제의에 감사드려요. 하지만 나는."

"저녁시간을 함께 보낼 예정이라면 나를 아담이라고 불러 줬으면 좋겠소."

"아담."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때 그는 자기가 이기게 될 것을 알았다. 그녀의 결심이 약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옆에 두 명의 응원단까지 있기 때문에 그녀가 핑계를 댈 때마다 조목조목 반대 이유를 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사장님이 입어 볼 옷을 찾아봅시다." 해리가 제안했다.

"난 간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

"사장님은 이분을 아담이라고 부르셨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가야해요." 마인디가 명령하듯 말했다. "그런데 비치 제이슨을 위해 사장님이 디자인한 그 의상은 어때요? 아주 시기가 적합할 것 같아요. 18세기 초엽이니까 말예요."

"그 옷은 비치에게 허리선이 너무 조였어. 내게도 마찬가지일 거야."

아담이 미소 지었다. 그녀는 이제 함께 가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다.

"비치는 가봉할 때와 파티를 하는 사이에 무려 10파운드나 살이 쪘어요. 그 살이 모두 그 여자의 허리로 간 거예요."

"마인디."

", 다이아나, 도대체 왜 이래요? 그 모험 정신은 어디로 도망간 거예요?" 해리가 말했다.

"나는 사업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다져 놓은 여자라면 좀 더 대담할 거라고 생각했소."아담이 말했다.

"나는 대담한 유형이 아니에요." 다이아나가 대답했다. "나는 책임감이 강한 사업가형이에요. 그러니까 환상의 날개를 달아 준다거나아니면 모험 같은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죠

그러자 아담은 여태껏 원해 왔던 일을 하였다. 그 여자의 뺨에 부드럽게 손을 얹어 놓았던 것이다. 그것은 친근감의 표시였으며 그의 진심을 드러내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행동은 그에게 균형감을 잃게 해주었다. 그의 손길에 닿는 그녀의 피부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다음 순간 그는 자신이 다이아나와 함께 저녁시간을 보내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사실 지금 이 순간처럼 그가 단호하게 마음을 먹은 적은 없었다. 새로운 노선을 획득하게 되거나, 아니면 중요한 항공사들을 눌러 이겼을 때도 지금처럼 그렇게 비장한 마음이 되진 않았다.

"그건 사실이 아닌 것 같소." 그가 드디어 말했다. "당신은 대단히 모험을 즐기고, 낭만적이며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판타지 페어를 창조하지 못했을 거요. 아마 당신 말대로라면 이 가게 이름을 책임감 있는 의복이라든가 믿을 만한 의상이라고 붙였을 거요."

뭐라고 말을 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입술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삐죽이 올라가는 걸 그는 보았다.

", 그렇게 합시다. 우리 스스로 작은 환상을 즐기는 거요." 그이 시선이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부드러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 그곳에는 단 두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 신데렐라 아가씨, 무도회에 가기로 합시다."그가 놀려댔다.

"당신은 그 의상에 어울리는 가발을 써야 해요." 그녀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담은 해리와 마인디를 바라보았다. 그 음모자들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분쟁의 여지는 남아 있었다.

"가발은 없어요." 그가 말했다.

"그럼 당신의 뒷머리칼을 묶어도 좋을 거예요. 머리가 길어서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거예요."

"그 문제는 나중에 이야기하세요." 마인디가 그녀에게 말했다.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잖아요? 사장님을 치장해 드릴게요." 그녀가 다이아나의 팔을 잡았다. "호크 씨,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럼 그 동안."해리가 말했다. "저기 액세서리코너로 가시죠. 칼이 필요하실 테니까."

"칼도 있나요? , 여긴 장난감 가게보다도 더 구색이 다양하군요."

"그건 모두 가짜예요. 우리 가게에는 단검과 총 같은 것도 모두 갖추고 있어요."

"나는 단검으로 하고 싶소." 아담이 말했다. "그리고 내 벨트에 권총을 차는 게 좋겠소. 해적 모자도 있는지 궁금하군요."

"안 돼요." 탈의실에서 다이아나의 음성이 들려왔다. "난 아이들이 생일파티에나 쓰는 바보 같은 해적모자를 쓴 남자와는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어요. 그럼 권위가 없어져요. 머리를 땋는 게 좋아요. 내가 차에서 머리를 만져 드리겠어요."

"기대가 큽니다!"아담이 소리쳤다.

 

2장 그날 밤에 생긴 일

"이 드레스가 너무 조이는 것 같다고 말했잖아?" 다이아나가 투덜거렸다.

"그렇다면 숨을 들이쉬세요." 마인디가 나직한 어조로 명령했다. "이 옷을 디자인한 사람은 바로 사장님이라구요. 사장님이 고래뼈 코르셋을 드레스 속에 집어넣었어요. 사장님이."

"됐어, 이제 그만 해!"

다이아나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마치 트웰브 오크스에서 피크닉을 즐기기 위해 옷을 입고 있는 스칼렛 오하라가 되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인디, 내가 숨을 들이쉬고 있을 테니까 어서 단추를 잠그라구."

마인디가 고분고분 그녀의 뜻대로 하고 있는 동안 다이아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자신이 정상적으로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이아나, 아주 멋져요."

다이아나는 거울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디자인한 옷이긴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것 같아. 하의를 작약의 빨강으로 한 건 정말 완벽한 선택이었어."

"그리고 가장자리의 금박 리본도 아주 완벽해요. 처음에 사장님이 하신 스케치를 보았을 때는 여기 붉은색과 황금빛, 파랑색 비단이 드레스 상의로는 좀 지나치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하지만 정말 보기 좋아요. 사장님에게 완벽하게 어울려요. 허리가 아주 가늘어서 아무 문제가 없어요!"

"마인디." 다이아나는 드레스의 어깨를 끌어당겨서 목선을 올리려고 했다.

"그래 봤자 소용이 없어요."

"마인디 말이 옳아. 하지만 이건 너무 노출이 심해." 그녀는 어깨가 드러난 목선 주위의 레이스를 위로 끌어올렸다. "좀 나아졌지?"

마인디가 머리를 저었다. "별로 나아진 게 없어요. 하지만 걱정 말아요, 다이아나. 오늘 같은 날은 이런 스타일을 입는 게 어울려요. 더구나 이제 와서 어떻게 해볼 방법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과감하게 무시해 버리라구요. , 이제 헤어 스타일로 옮겨 갈 시간이에요. 얼굴 주변의 컬이 18세기 스타일과 아주아주 잘 어울려요. 그러니까 이건 그대로 두는 게 좋겠어요."

그녀가 다이아나의 포니테일 머리를 끌어당겼다. 다이아나가 머리를 묶은 끈을 풀어냈다.

"이건 나의 해적이 머리를 땋는 데 사용해야겠어.""나의 해적?"

"난 그 남자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성격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야. 더구나 나는 그의 옷을 디자인했어. 그러니까 당연히 나는."

"다이아나, 얼굴이 빨개지고 있는 거 알아요?"

"마인디, 이제 그만 해두고 머리 가리개를 만들어야 할 것 같아. 18세기의 숙녀들은 절대로 머리를 가리지 않고 돌아다니지 않았어. 깃털 몇 개와 얇은 천이 있으면."

"그건 준비할 수 있어요. 그런데 보석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모조 다이아몬드와 토파즈 목걸이로 하면 좋겠어."

"아주 근사할 거예요! 그리고 다이아몬드 이어링도 가져오겠어요. 판타지 페어에 있는 다이아몬드라면 뭐든 갖다 드릴게요."

몇 분 후에 다이아나는 준비를 마쳤다. 그녀는 마치 18세기의 기품 있는 숙녀처럼 차려입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바라본 다음 탈의실에서 나왔다. 그러면서도 낯선 사람과 새해 전야 파티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스케치를 해둔 바로 그 남자, 그녀가 몇 년 동안 꿈꾸어 왔던 해적의 옷차림을 한 남자.상황은 너무나 복잡하게 꼬여 가고 있었다.

그들은 마인디와 해리의 웃음과 축복을 뒤로 한 채 가게를 나왔다. 아담이 고속도로를 향해 차를 몰기 시작하자 다이아나의 마음속에는 당황함과 어색함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일은 자주 하지 않는 편이에요. 그러니까 난 한 번도."

"해적과 도망쳐 본 적이 없단 말이죠?" 아담이 웃었다.

"불과 30분 정도밖에 알지 못하는 남자와 외출한 적은 없었어요."

"난 이미 당신에게 나에 관한 보증서를 내밀었소." 아담이 대답했다. "그리고 축제에 가면 내 신분을 보장해 줄 사람들이 있을 거요. 하지만 나 역시 사교활동 중에서 이처럼 충동적인 일을 저지르는 건 드문 일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 같소. 아무튼 우리가 함께 파티에 가는 것은 자연스런 일인 것 같아요."

다이아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이 상황이 얼마나 낯선 것인지 실제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아담 호크, 내가 당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당신이 항공사를 소유했다는 사실 뿐이에요."

"그리고 당신의 해적 의상이 나에게 완벽하게 어울린다는 거요."

"그렇군요. 하지만 오늘 저녁 우리가 함께 있게 될 테니 나는 당신에 대해서 더 많은 걸 알아 둬야겠어요.""다이아나, 내 사생활은 항상 열려져 있어요. , 뭐든 물어 봐요."

"그럼당신은 항상 하늘을 날고 싶어 했나요?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나요? 그리고 당신은."

"한 번에 한 가지 질문만 하도록 해요! 그래요, 난 항상 날고 싶어 했어요. 엔진이 하나뿐인 친구의 비행기 조종석에 앉는 순간 난 유혹당하고 말았소."

"하지만 사업 비행기의 승객이 되는 것과는 다를 텐데요."

아담이 웃었다. "똑같지는 않아요. 당신이 나와 함께 비행을 해보면 내 말뜻을 알게 될 거요. 땅을 떠날 때 느끼는 자유로운 느낌, 그리고 모든 것을 털어버린 듯한 기분은 경험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어요. 물론 난 의자에만 앉아서 하늘을 날고 있는 자신이 항상 불만스러워요. 하지만 그건 나에겐 아주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져요. 하늘이야말로 내가 속해 있는 곳이오. 그래서 나는 거기서 생계를 이어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죠."

"그렇겠군요."

"짧은 거리의 통근자를 위해서 내가 예약해 둔 쌍발기 세스나를 구입했죠. 난 아주 잘 해냈어요. 그래서 비행기를 두 대 더 구입했고, 정식으로 사업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비행기를 늘렸어요. 지금은 비행기가 8대 있어요.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인 셈이오."

아담이 그녀에게 몸을 돌렸다. 다이아나는 그의 격렬한 시선에 가슴이 마구 뛰는 걸 느꼈다.

"다이아나, 한 항상 내가 원하는 걸 알아요. 그리고 항상 그것을 손에 넣죠. 그 원칙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거요."

다시 한번 다이아나는 그이 개성을 강하게 느꼈다. 그녀가 그와 함께 외출하기로 결심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에게는 거부하지 못할 힘이 있었다.

"다이아나, 당신은 어때요? 당신은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나요?"

"난 당신처럼 외길 인생을 걸어온 건 아니에요. 난 여배우로서 실패한 다음에 의상 디자인에 빠져 버렸어요."

"내 생각엔 당신은 대단한 배우가 될 수 있었을 것 같군요. 당신은 아름다운 외모와 스타일을 갖추고 있어요."

"고마워요. 기분이 좋은데요. 하지만 나에겐 가장 중요한 게 부족했어요. 재능이죠. 그래도 난 운이 좋았어요. 그 과정에 의상 다자인이 커리큘럼에 포함되어 있었거든요. 난 항상 스케치하는 걸 좋아했어요. 난 금방 그 일에 빠져들고 말았죠."

"그래서 당신은 졸업을 하게 되었고, 그 기술이 곧 당신의 일로 이어졌구요.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것 같군요."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부모님께 돈을 빌려서 첫 번째 가게를 열 수 있었죠 마치 차만큼이나 작은 가게였어요. 난 모든 의상을 만들었어요. 그런 다음에는 고객들의 요구에 맞는 의상을 만들기 시작했죠. 그 과정이 좀 힘들었어요."

"그 이야기를 해봐요."그가 계기반의 시계를 흘끗 보았다. "우린 9시부터 알게 되었지만, 서로에게 비밀이 없어요. 안 그래요, 다이아나?"그가 놀리듯 말했다.

그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이 해적이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그녀가 비밀을 가슴에 안고 있었는지 알고 있다면 저렇게 말하진 않을 거야!

"좋아요! 초창기에 내가 대단한 용기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 같군요. 난 스스로 디자인한 옷을 입고 화랑이나 레스토랑, 벼룩 시장 같은 곳을 돌아다녔어요. 한 번은 개 쇼를 하는 곳에 가서 판타지 페어 전단을 나눠 주기도 했어요. 고양이처럼 차려입고 말예요."

아담이 머리를 뒤로 젖힌 채 웃어댔다. "틀림없이 당신은 그 개들을 밀치고 나아갔겠군요."

"맞아요. 난 바보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그 모습 때문에 사람들을 끌 수가 있었죠. 그 때는 사람들이 할로윈을 위한 복장처럼 차려입고 다니던 시절이었어요. 아무튼 난 시간과 장소를 맞춘 거였어요. 그 다음엔 영화에 출연했죠."

아담이 짙은 갈색 눈썹을 움칠했다.

"아니, 내 의상이 출연했다는 거예요. 대학 친구가 낮은 제작비로 영화를 만들었어요. 나는 늪지의 늑대 인간을 위한 의상들을 만들었죠. 웃지 마세요."그녀가 경고를 보냈다.

"난 웃고 있지 않아요."

"그게 시작이었어요. 올랜도에 있는 두 개의 스튜디오와 함께 나는 더 많은 영화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의상 임대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충분히 꾸려나갈 수가 있었죠." 그녀는 오만하지 않게 들리도록 조심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마인디와 해리 외에도 세 명의 여자 재봉사와 한 명의 재단사와 계약을 하고 있어요."

"행운과 두뇌, 그리고 열심히 노력한 덕분이군요 아마 당신은 많은 걸 희생했을 거요."

"그런 것 같아요."

"사교생활 같은 것 말이오?"

"아담, 호크, 당신은 나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군요." 그녀가 비난했다. "그건 싫어요."

"당신이 그러는 건 당연해요. 왜냐하면 우리는 비슷한 점이 아주 많기 때문이오. 못 말리는 일벌레이긴 하지만 대단히 모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죠.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왜 18세기 해적과 그의 부인 같은 옷차림을 하고서 가장 무도회에 가겠어요?"

"이건 좀 미친 짓이죠.""이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더 미친 짓일 거요." 그가 말했다. "오늘 밤의 일은 모두운명인 것 같소." 아담은 그렇게 말한 다음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다이아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운명?"

"다이아나, 그건 사실이오. 난 갑자기 당신의 가게로 걸어 들어갔소. 그리고 당신은 나에게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의상을 갖고 있었어요. 그리고 내 별명에 맞는 옷을 입혀 줬죠. 그리고 당신을 기다리는 의상이 또 한 벌 있었어요. 이게 운명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소?"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어요."

"힌두교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어요.우연을 아주 멀리까지 더듬어 올라가 보면 그건 필연이다다이아나, 우리 사이의 관계 역시 피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소."

다이아나는 척추 신경을 바늘로 콕콕 찔러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아담의 말이 그처럼 심각한 영향력을 지니게 되리라곤 기대하지 않았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잘 해나가게 되는 건 운명이란 말이오." 그는 마음이 밝아져서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미리 예정된 거요. 우린 거기에 날개를 단 셈이오. 그러니까 앞으로 그 관계는 재미있게 진행될 거요."

"그러길 바래요. 사실 난 오랫동안 너무 재미없게 살아왔거든요. 마음이 날아갈 것 같아요."

그녀는 약간 경계하는 듯한 표정으로 아담을 흘끗 바라보았다. 자신의 말이 생각보다 훨씬 도발적으로 들렸을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나도 똑같은 느낌이오. 지금은 새해 전야요. 그러니 마음껏 즐겨도 좋은 시간이오. 하지만 난 아직 의상을 완전히 차려입지 않은 것 같소."

"내가 보기엔 당신은 완벽해 보여요." 정말 그랬다. 6피트가 넘는 키에 마르고 근육질의 체격, 그리고 섹시한 외모어디 한 곳 부족한 곳이 없어 보였다. "그러니까 내 말은 당신이 진짜 해적처럼 보인다는 거예요."

"다이아나, 헤어 스타일은 어때요? 당신은 내 머리칼을 묶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 그래요."

그녀는 자신의 백을 뒤져서 아담에게 머리 묶는 끈을 건네주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운전을 하면서 이걸 묶으라는 말이오?"

", 천만에요! 배에 도착하고 나서 하시면 돼요."

"당신이 내 머리칼을 손수 만져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이아나는 자기가 그렇게 하겠다고 자원했던 일을 떠올랐다. "하지만 난 머리 만지는 일에는 소질이 없어요."

"한 번 해봐요." 그가 끈을 다시 내밀었고, 다이아나는 그걸 받아들였다.

그가 운전을 하는 동안 동쪽에서 구름이 몰려들었다. 폭우가 대서양에서 내륙으로 옮겨오고 있는 중이었다. 다이아나는 그에게 약간 가까이 다가갔다.

"잘 볼 수가 없어요.""다이아나, 볼 필요는 없어요. 그저 느끼기만 해요."

그는 그녀에게 농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대담한 농담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는 손을 뻗쳐서 그의 머리칼을 만졌다. 그리고 한 손으로 그걸 쓸어내렸다. 그녀의 감촉으로 느끼기엔 올이 굵은 머리칼이었다. 윤기가 흐르고 부드러웠다. 그의 머리칼을 쓸어내리면서 그녀는 자신의 손끝에서 미세한 떨림이 번져가는 것을 의식했다. 그 떨림은 그녀의 온몸으로 번져갔다. 그녀는 그의 머리칼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무슨 일이 있어요?""아무것도 아니에요."

다이아나는 잠시 시간을 갖고서 자신이 느끼고 있는 상상을 몰아냈다. 그런 다음 다시 손을 뻗쳐서 머리칼을 움켜쥔 다음 재빨리 그걸 끈으로 묶기 시작했다.

"됐어요." 드디어 다이아가 차의 옆쪽으로 몸을 돌리면서 말했다. "이제 완벽한 해적이 됐어요." 그녀가 감탄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난 항공회사 사장들을 많이 알지는 못해요. 사실은 단 한사람도 몰라요. 하지만 그들은 머리를 아주 짧게 자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담이 미소 지었다. 어둠 속이었지만 그이 미소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난 다른 사장들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오. 사실 나는 아주 다른 종류의 사내라고 할 수 있어요. 다이아나, 우리가 서로에 대해 알게 되면 될 수록 당신은 내 말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좀 더 실감하게 될 거요."

다이아나는 차창밖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잔뜩 낀 밤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녀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무도회에 가기 위해서 정장을 한 18세기의 여성이 거기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허세를 부리는 해적의 모습 그대로인 아담이 있었다. 그의 감각적인 모습은 그녀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비싼 차를 타고 현대식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긴 하지만 그런 현실 감각은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현재는 사라지고 과거가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불분명한 상태였다. 마치 현재와 과거가 뒤섞여 버린 듯한 상태였다. 잠시 동안 다이아나는 현실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아담의 말이 다시 그녀를 현실로 끌어들였다.

"여긴 케이프 커내버럴로 가는 분기점이오. 이제 모험과 환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요."

 

아담은 18세기의 스쿠너를 그대로 모방해 좋은스완호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건 수백만 달러짜리로 팜 비치 출신의 억만장자가 보관해 왔던 것이다. 그 배의 주인은 의도만 좋다면 얼마든지 그 배를 자금 모집을 위한 자선 바자에 넘겨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중부 플로리다의 연합자선단체는 그 배 위에서 축제를 열면 정말 히트를 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풍성한 뷔페와 맛좋은 샴페인, 그리고 인기 있는 오케스트라로 그 분위기는 더욱 고급스런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폭우가 쏟아질 것처럼 위협적인 하늘과 가끔씩 몰려오는 돌풍이 그 장면에 극적인 요소를 더해 주고 있었다.

아담은 저녁 내내 다이아나와 함께 그 배 안을 돌아다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그에게서 벗어나 있었다.

그 파티에 온 손님들은 대부분 판타지 페어에서 옷을 빌려 온 사람이라고 그녀는 이야기했었다. 그는 그 말에 약간은 허풍이 섞였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녀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된 셈이다. 더구나 그녀의 가게에서 옷을 빌려 입은 고객들은 단순한 고객 이상이었다. 그들은 그녀의 친구였던 것이다.

아담 역시 그곳에 온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와 다이아나가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함께 테이블에 앉았을 때 사람들의 의미 있는 시선이 그들에게 쏟아지는 걸 그는 놓치지 않았다. 사람들의 표정이 그를 즐겁게 했다. 그리고 다이아나를 동반하고 온 자신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드디어 그가 테이블에서 일어나 그녀의 앞에 서서 머리를 숙였다. "나의 숙녀께서는 나와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기꺼이."

아담은 다이아나와 함께 춤을 추는 게 좋았다. 그녀를 품안에 안고 있는 감촉도, 그리고 그의 품안에 안겨 있는 그녀의 모습도 너무 좋았다. 그녀의 향수 냄새와 여성적인 부드러운 몸매의 곡선도 마음에 들었다. 그는 다이아나 트레몬트와 그들 앞에 펼쳐 질 저녁시간을 상상해 보고 있었다. 그때 카우보이 복장을 한 남자가 끼어 들어서 그녀와 춤을 추었다.

 

아담은 반들반들한 티크 난간에 기대서서 샴페인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아즈테 족의 군인이 나폴레옹에게 끼어든 다음 다시 슈퍼맨에게 양보하는 걸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남자들이 모두 그녀와 춤을 추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는 그들을 비난할 수가 없었다. 무도회복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모든 남성들을 숨죽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의상의 색상이 그의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그리고 파인 목선으로 드러난 그녀의 크림색 가슴은 정말 유혹적이고 도발적이었다. 그의 시선은 그녀가 빙빙 돌 때마다 그녀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제 됐어요!" 아담이 큰 소리로 외쳐댔다. 그 옆을 지나치던 커플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나의 숙녀를 요구할 시간이 되었다구요." 그가 댄스 플로어를 다가가면서 말했다.

그는 군중들 틈 속에서 다이아나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녀가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그 순간 그의 시선이 그녀의 시선을 응시했고, 그녀가 미소로써 답례해 주었다. 아담은 군중들을 헤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 사이에는 틀림없이 어떤 영감 같은 것이 교류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건 단순한 화학 작용일까? 아니면 인연? 그것도 아니면 운명?

그에게는 다이아나가 마치 로맨스로 포장한 신비의 상자처럼 여겨졌다. 그는 그 여자의 포장을 풀어헤치는 남자가 되고 싶었다.

그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의 칼이 그의 다리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정말 선장이 된 것처럼 야성적인 힘을 느끼고 있었다. 첫 번째 시도에서 그는 놓쳐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다시 그들이 돌아가고 있을 때 간신히 다이아나의 파트너 어깨를 칠 수가 있었다.

"카사노바, 이제 내 차례요." 그가 말했다.

"마이 레이디, 유감스럽게도 난 당신을 포기해야 할 것 같군요." 그 카사노바는 머리를 숙인 다음 돌고 있는 행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담이 다이아나의 손을 잡아서 가장 가까운 출구 쪽으로 데려가고 있을 때도 그녀는 여전히 낄낄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바닷가로."그가 소리쳤다. "여러 족장과 회교국 군주들이 호시탐탐 당신을 노리고 있어요. 그래서 도망치려는 거요."

"맙소사, 호크 선장, 당신은 오늘 밤 너무나 기세등등해요. 그래서 날 질리게 만들고 있다구요."

"당신을 유혹해서 붙잡아 두어야 했어요." 아담은 갑판을 따라서 걸어간 다음 트랩을 건너서 방파제 쪽으로 다가갔다.

그곳은 거친 돌풍으로부터도 보호받을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그들 뒤에서 퍼져나가고 있었다.

"여기가 더 낫군요." 아담이 팔을 내밀면서 말했다. 다이아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양팔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음악의 리듬에 맞춰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주 근사하죠? 우리 둘만의 댄스 플로어예요."

"근사하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아담, 정말 멋진 곳이에요."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고 미소 지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있었다. 그녀는 전에 자기를 괴롭히던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 것 같았다.

"우린 다시 이런 시간을 가져야 해요. 이런 의상을 입지 않고 말이오. 만약 당신의 인생에 특별한 사랑이 있어서 나에게 결투를 신청하지만 않는다면 다시 이렇게 멋진 시간을 갖기로 합시다."

"특별한 사람은 없어요." 그녀가 즉시 대답했다. "당신은 어때요? 그러니까 당신에게는 특별한 사람이."

"지금 내 품안에 있는 여자뿐이오." 아담이 대답했다. "당신을 다시 만나기를 원해요. 내일 오후 2시에 공항에서 만나면 어떻겠소? 나와 함께 하늘을 날아보지 않겠소?"

다이아나의 웃음소리가 물 위로 번져갔다. "멋진 생각이에요. 그런데 어디로 갈 건가요? 바하마 제도? 자마이카? 아니면 리우인가요? 난 항상 리우에 가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배를 타고 여행하는 건 너무 느려서."

"리우에서 저녁식사를 하는 것도 근사하겠군요 하지만 나에겐 더 좋은 생각이 있어요. 최근에 나는 로그스 케이라는 이름을 가진 바하마의 어느 곳에 취항을 시작했어요. 그곳은 파라다이스를 축소해 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곳이오. 틀림없이 당신도 그곳을 좋아 할 거요."

그녀를 더욱 가까이 끌어안고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면서, 아담은 자신이 매우 진지해져 있음을 알았다. 열대 섬에서 다이아나 트레몬트와 며칠을 보내는 건 아주 멋진 새해의 시작이 될 것이다.

다이아나는 눈을 감고 아담의 품에 몸을 기댔다. 그녀는 어느새 해적의 환상에 굴복해 버리고 있었다. 그녀와 아담은 함께 환상의 섬으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갈 것이다. 그곳에서 럼 펀치를 함께 마시며 태양을 마음껏 쏘일 것이다. 청록색 물에서 수영을 하고 뜨겁고 하얀 모래사장에 함께 누워서 사랑을 나누고.

그 꿈이 너무도 생생해서 그녀는 약간 몸을 떨면서 눈을 떴다.

"괜찮아요?" 그가 물었다.

"좋아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을 뿐이에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혹시 그가 자기의 마음을 읽고, 그녀의 환상에 대해서 알게 될까 봐 두려웠다.

"누구든 섬에 대한 상상을 하다 보면 금방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죠 누가 알아요? 언젠가는."

그들은 커다란 배 때문에 생긴 방파제의 그늘에 서 있었다. 이제 음악은 점점 커져 가고 있는 중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다시 돌아가자는 말이오? 음악이 멈췄어요. 이제 모든 사람들이 자정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거요."

떠들썩한 웃음소리와 호른의 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잡담 소리와 해피 뉴 이어라고 외쳐대는 소리가 뒤섞여서 들려왔다.

"당신은 저 의식에 참석하고 싶어요?"그가 물었다. "아니면 우리 둘만을 위해 조용한 장소를 찾아보는 게 어때요?"

다이아나의 시선이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우리만의 장소를 찾기로 해요." 그녀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담은 다이아나의 손을 잡고 방파제에서 해변으로 이어지는 자갈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들이 해변에 도착하자 바람이 거세어 졌다.

다이아나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폭풍우가 몰려오고 있어요."

바람이 격렬해지고 있었다. 바람은 아담의 느슨한 해적의 셔츠를 잡아당기고 다이아나가 입은 드레스의 넓은 소매를 펄럭이게 했다. 그녀는 그 바람이 전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게 느껴졌다.

"당신은 바람을 좋아하는군요." 그가 말했다.

"그래요."

그녀는 하늘을 배경으로 실루엣을 이루고 있는 그의 모습을 응시했다. 마음이 가볍고 들뜨기 시작했다. 그녀의 환상이 실현되고 있다. 아담은 해적의 역할만을 맡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정말 해적이었다. 그녀의 해적.

그는 다이아나에게 이 특별하고 신비로운 밤을 선사했다. 그의 모든 것이 그녀의 느낌을 아주 특별한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그 남자에게서 자기가 품어 온 환상 속의 해적과 스케치, 의상에 대해서까지 모두 털어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직 자정이 되지 않은 것 같소. 하지만 연습을 많이 하면 실전에서 완벽해질 수 있어요."

그의 시선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뒤로 약간 물러섰다. 하지만 그를 거부할 만큼 멀리 달아나진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는 격렬한 키스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런 다음 얼굴에서 목까지 더듬어 내려갔다. 그는 다이아나의 얼굴을 그와 마주보게 돌려놓은 다음 입술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샴페인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그를 받아들였을 때 그는 그녀를 거칠게 끌어안았다.

아담은 그 키스가 끝나지 않기를 원했다. 조끼의 천에 와닿은 그녀의 가슴은 아주 부드럽고 풍만했다. 그의 흥분이 고조되고 키스가 깊어짐에 따라서, 그가 입은 18세기식 바지가 점점 불편하게 조여 오기 시작했다. 아담에게는 이 순간이야말로 대단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가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녀에게서 입술을 약간 떼어냈다. 그의 음성은 쉰 것처럼 들려왔다.

"다이아나, 난 이 밤이 끝나는 걸 원치 않소 내가 원하는 건."

천둥소리가 울려대고 번개가 일기 시작했지만 아담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 소리에 다이아나는 움칠하고 말았다. 하늘이 그대로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건 다이아나와의 키스뿐이었다

그이 입술이 다시 그녀를 요구했다. 이번에는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 안쪽으로 그의 혀가 탐험을 시작했다. 다이아나의 손가락이 그의 머리칼을 훑어가지 시작했다. 두 사람의 혀가 잠시 서로 닿자 아담은 양팔로 그녀를 껴안았다. 그는 여자에게서 키스 이상을 원하고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서 원하는 건 사랑의 행위였다. 밤새도록 천천히, 정열적으로 이 여자와 더불어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예고도 없이 폭우가 격렬하게 그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레와 같은 천둥소리가 들려오면서 그들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번쩍이는 불로 비추었다.

"젠장."아담이 말했다. "우린 뛰어야 할 것 같소."

"배가 있는 곳까지 말인가요?"

"아니오, 우린 차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야 해요. 레이디 다이아나, 난 당신을 납치할 생각이오. 당신을 데리고."

그의 말은 천둥소리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다음 순간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분 후에 위협적인 돌풍이 엄청난 빗줄기를 안고 몰려왔다.

다이아나는 그들의 의상이 실크와 새틴 비단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가장 가까운 피난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곳은 해변에서 후미진 곳에 떨어져 있는 떡갈나무의 큰 가지 밑이었다. 그녀는 그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담이 그녀를 다라 달려왔다.

"나무에서 떨어져 있어야 해요. 번개가 치면."그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음성은 커다란 폭우소리 때문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바람 때문에 깃털과 얇은 천으로 만든 그녀의 머리 쓰개가 공중으로 날아가 버렸다. 다이아나는 그 쓰개를 포기했다. 대신 드레스의 가장자리를 움켜잡고 계속 달리기 시작했다. 모래가 그녀의 신발을 가득 채웠다. 비가 그녀의 드레스를 적시었고, 바람은 그녀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 놓았다.

그리고 다음에 내리친 번개는 방금 전의 것보다 훨씬 더 밝았다. 아니, 다이아나는 여태껏 그처럼 엄청난 번개를 본 적이 없었다. 다이아나는 발걸음을 멈춘 채 그 엄청난 자연의 힘을 경이로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초자연적인 하얀 빛이 그녀의 주변에 있는 세상을 기괴한 빛으로 비추고 있었다. 그 단 한 번의 빛 속에서 그녀는 아주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스완호가 미친 듯이 바다에서 움직이는 모습과 떡갈나무의 실루엣, 그리고 그녀의 해적인 아담이 바람에 저항하며 서 있는 모습을.

그리고 또 한 가지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또 한 번의 마지막 불빛에 모든 것들이 격렬한 붉은 불꽃 속으로 폭발하고 있었다. 번개가 나무에 내리쳤다. 거대한 나뭇가지가 그녀에게 덮쳐오자 그녀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양팔로 몸을 감쌌다.

 

3장 능숙한 배우처럼

"."다이아나는 머리르 쳐들면서 신음소리를 냈다. 방은 기묘한 소리를 내면서 삐걱거리고 있었고, 마치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안간힘을 썼다. 잠시 후에 그녀는 천천히 한쪽 눈을 떴다. 빙글빙글 돌던 증상은 사라졌다. 하지만 삐걱거리는 소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다이아나는 다른 한쪽 눈을 마저 뜨고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배의 선실에 있었다. 격렬한 두통이 몰려왔다. 그는 머리를 저었다. 순간 달걀 크기 정도의 혹이 생겼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무가 쓰러져서 그녀를 덮치면서 생겨난 것이었다.

정말 어리석은 짓을 하고 말았어. 다이아나는 스스로를 꾸짖었다. 그녀는 플로리다가 번개가 자주 치기로 유명한 곳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무 밑에서 피난처를 찾으려 했으니 스스로 화를 자초한 셈이다

그녀는 아담이 그녀에게 나무에서 멀어지라고 소리쳤던 걸 떠올렸다. 하지만 그녀는 바보처럼 앞을 향해 달렸다.

지금 아담은 어디 있을까? 틀림없이 그가 다이아나를 스완의 이 특별실로 데려왔을 것이다. 나무 벽으로 된 그곳에는 떡갈나무 테이블과 지도가 가득 쌓여 있는 티크 책상이 있었는데, 한결같이 고풍스런 분위기를 풍겨 주고 있다.

테이블 위에는 오일 램프까지 매달려 있으며, 고대시대를 연상케 하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아담과 함께 처음 배에 올랐을 때 그녀와 아담은 특별실을 몇 개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곳은 모두 18세기 스타일을 현대식으로 개조해 둔 곳이었다. 그런데 이 방은 대단히 고전적인 면모를 풍기고 있다.

좁은 침대 위에 있는 조악한 침구까지도 대단히 고전적이었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지금 그런 걸 감상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머리가 쑤시듯이 아파 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아찔한 현기증이 몰려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베개 위로 털썩 눕고 말았다. 마치 방 전체가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책상 위에 있는 오일 램프가 앞뒤로, 좌우로 돌면서 그녀를 극도의 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리고 배의 삐걱거리는 소리도 크게, 집요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무도회가 진행되고 있는 도중에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아마도 폭우가 여전히 기세 좋게 쏟아지고 있는 것 같다. 거친 바람이 배를 흔들리게 하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녀는 누워서 긴장을 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의 격렬한 두통의 원인 중에는 그 방이 주는 서먹서먹한 느낌도 한몫을 하고 있었다. 그 고풍스런 진품 중에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청동으로 된 해상도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건 아주 진기한 물건들이다. 몇 가지 이름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지만 확실한 이름을 기억해 낼 수는 없었다.

테이블 위에는 짙은 색의 액체가 가득 차 있는 녹색 유리병과 두 개의 백납으로 된 머그가 있었다. 저거라도 좋겠어. 럼주와 비슷하게 생겼어.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한잔의 물과 두 개의 아스피린이지만 저것도 괜찮을 것 같아.

다이아나는 단호하게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돈하려고 했다. 불행히도 그녀의 빗과 거울은 핸드백 속에 있었다. 그런데 그 핸드백을 아담의 차 속에 두고 무도회에 참석했던 것이다. 시대적 고증에 충실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그 핸드백은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제 무도회는 끝났고, 다시 그녀는 20세기로 돌아와 있다. 더구나 그녀는 20세기에 어울리게 아스피린과 헤어브러시를 원한다.

떨리는 다리를 바닥 위에 내려놓고 다이아나는 일어서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심한 두통 때문만은 아니었다. 배가 몹시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완이 정말 항해중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구." 그녀는 큰 소리로 자기 자신을 꾸짖었다.

그 배는 선창에 매우 두었다. 영원히 움직일 수 없도록. 그렇다면 지금 배가 항해하고 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하지만 축제에 참석한 사람들은 오래 전에 모두 돌아갔을 것이다.

그런데도 위에서는 소음이 들려왔다. 마치 서로에게 마구 고함을 질러대는 듯한 소리였다. 어쩌면 청소부들이 폭우 때문에 손상당한 곳을 수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담도 거기서 그들에게 배에서 내리라고 말하고, 집에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 하느님." 그녀가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제발 그가 바보 같은 짓을 하지 말게 해주세요. 의사나 앰뷸런스를 부르는 소동은 없게 해주세요."

아마 그녀는 몇 분 동안 기절해 있었던 게 틀림없다. 다이아나는 문득 생각을 멈췄다. 아니면 의식을 잃은 상태가 몇 시간, 며칠 동안 계속된 건 아니었을까? 시간이 그렇게 경과되었다면 그녀는 아직까지 배 위에 있지 않을 것이다. 집에 가 있거나 병원에 있을 것이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 18세기식 선실에는 시계 같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18세기의 옷차림을 하느라고 손목시계 같은 건 착용하지 않았다. 도대체 몇 시간이 경과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여기서 벗어나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봐야 한다. 다이아나는 다시 일어서려고 했다.

그녀가 목표물을 향해서 절반쯤 다가갔을 때 열쇠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에요?"그녀가 소리쳤다. "왜 내가 여기 갇혀 있는 거예요?" 다이아나는 갑자기 불안감을 느꼈다.

"우리는 항상 인질들을 가둬 두고 있어요." 아담이 방 안으로 들어서면서 말했다. "당신의 높은 지위 때문에 당신을 내 선실에 머물러 있도록 허용한 것뿐이오. 이곳은 선장의 선실이오."그가 특별히 선장이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나의 인질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높은 지위라니, 무슨 뜻이에요? 도대체 당신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요?" 다이아나는 놀란 표정으로 아담을 바라보았다. 왜 이 남자는 이토록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일까?

흔들리는 램프가 벽에다 야릇하게 그의 그림자를 던져 놓고 있었다. 그는 실제보다 훨씬 크게 보였다. 그리고 위협적으로 보인다.

"마이 레이디, 당신의 게임은 내게 통하지 않아요."

다이아나는 희미한 불빛 속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음성이 이상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의 외모도 좀 달라져 있었다. 다이아나는 그게 아마 자신의 극심한 두통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고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검은 바지와 부츠를 신고 있었다. 하지만 조끼는 벗은 상태였다. 그의 셔츠는 찢어지고 더렵혀져 있었다. 마치 한바탕 싸움을 한 사람 같다.

아냐, 이건 말도 안 돼! 도대체 그가 왜 싸운단 말야? 그들은 축제의 현장을 떠나서 해변을 산책했었다. 그 역시 폭우에서 부상을 당한 게 틀림없다.

다이아나가 다시 말했다. "아담,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나는 머리를 부딪쳤어요. 그래서."그녀는 이마를 문질렀다. "그래서 약간 혼란스러워요. 축제는 끝났어요?" 그가 아무 대답도 없자 그녀가 다시 물었다. "파티 말예요. 무도회."

그가 입술을 이상하게 움직이며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에게는 당분간 무도회가 끝난 게 확실한 것 같소. 그것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요. 레이디 다이아나, 필요한 게 있습니까?"

"레이디 다이아나? 글쎄요. 그건 18세기나 어울리는 용어인 같군요." 그녀가 미소를 띈 채 말했지만 그는 그녀의 미소에 응답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이 물었으니까 대답해 드리겠어요. 그래요, 아스피린을 갖다 주세요. 그걸 먹고 나면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담, 당신의 즐거운 저녁을 망쳐 버려서 미안해요."

대답 대신 그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 남자가 나에게 그토록 정열적으로 키스를 했던 남자일까?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가 이토록 냉정하고 초연하게 되어 버렸는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아담이 책상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와서 차트 하나를 집어들고 그걸 떡갈나무에 펼쳐 놓았다. 그녀는 전혀 모르는 차트였다.

"인질들은 그들의 투옥기간을 스스로 결정하지 않아요. 귀족이라도 마찬가지요."

"내가 인질이라니 도대체 무슨 뜻이에요? 아담, 별로 재미있지도 않은 농담은 그만두세요!"

그가 냉정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적의마저 담겨 있었다. "확실히 말하는데, 당신이 즐거우라고 이러는 게 아니오."

그의 음성은 대단히 거칠고 차가웠다. 다이아나는 순간 움칠하고 말았다. 도대체 아담은 왜 이렇게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걸까? 해변에서 나와 함께 있었던 그 섹시하고 멋진 남자는 어디 갔단 말인가?

"아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폭우 속에 갇혀 있었어요. 그리고 나뭇가지 같은 것이 내 머리를 내리친 것 같아요. ,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에요. 난 몹시 피곤해요. 그리고 두통 때문에 죽을 것만 같아요."

"그렇소 폭우가 문제를 야기시켰소. 하지만 당신은 여기 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여기에 머물게 될 거요.""뭐라구요?""당신은 나의 인질이오."

"아담, 제발그 우스운 소리 좀 하지 말아요. 나는."

순간 다이아나는 상황을 깨달았다.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지금 아까부터 시작된 게임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담이 그녀를 댄스 플로어에서 끌고 나와서 납치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때의 바로 그 게임이었다. 사실 그 이전에 그들이 18세기의 인물처럼 옷을 차려입고서 판타지 페어를 떠났을 때부터 일종의 게임이 진행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제 아담은 그 게임을 더욱 깊숙이 진행시키고 있다. 그는 해적이고 다이아나는 해적의 인질이었다.

"아담, 지금은 게임을 할 때가 아니에요. 제발 이러지 말아요. 난 머리를 부딪쳤기 때문에."

아담이 양손을 테이블 위에 얹어 놓고 몸을 앞으로 숙여서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영혼을 꿰뚫는 듯한 그의 시선에 그녀는 움찔하고 말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다이아나는 노기를 감추지 못한 해 소리쳤다.

그가 눈썹을 치켜떴다. 하지만 그녀의 질문을 그대로 묵살해 버리고 말았다.

"마이 레이디, 당신은 이제 훨씬 진정이 된 상태요. 정말 잘됐소. 최소한 이성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있게 됐으니까. 당신이 배에 올라와서 발로 차고 비명을 질러댔던 것에 비하면 대단한 발전이오. 우리가 당신의 목조 쾌속 범선에 올랐을 때 당신 역시 당신 배의 승무원처럼 격렬하게 저항을 했었소. 하지만 내 예상대로 내 부하들이 당신의 승무원들을 이겼소."

"배의 승무원이라니,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범선은 또 뭐예요? 난 발로 차고 소리를 지른 적이 없어요! 도대체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만약 이게 당신의 게임이라면 난 흥미가 없군요. 머리가 너무 아파요. 그리고 스완호에 올라타서 당신의 인질 역할을 하는 것도 별로 재미가 없어요."

"아가씨, 스완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요. 나의 부하들과 내가 그 배를 예전의 소유주에게서 해방시켰을 때 우리는 그 배의 이름을 블랙 호크라고 다시 지었어요.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오?"

"아담, 아주 영리하군요. 당신은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 같군요. 하지만 난 당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녀는 일어서서 걸음을 떼려고 했다. 하지만 배가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그녀는 침대로 나뒹굴고 말았다. 아담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넘어져도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 다이아나는 혼자서 일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배가 이렇게 흔들리는 걸 보니 폭우가 계속되는 모양이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이 레이디. 우린 항해중입니다. 파도가 놓아서 이러는 거예요."

"아담, 제발 이제 그만 해요. 당신이 그 다음에 뭐라고 말할지 너무나 분명히 알 수 있어요 이리와, 건방진 계집애! 그리고 여러분, 이제 그만 합시다!라고 말할 거예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그는 대단히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다이아나는 그의 시선이 열기를 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한 손을 들어올려 드레스의 윗부분을 가렸다.

다이아나는 마인디의 제의에 따라 그렇게 목선이 파인 드레스를 입고 나온 자신을 저주했다. 그렇지만 아까 아담과 함께 있을 때는 그 드레스를 입었어도 그렇게 편안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옷이 아주 매력적으로 여겨졌었다. 그런데 기분이 순식간에 변해 버렸다.

아담은 늑대와 같은 미소를 머금고 있다. "이봐요, 레이디, 당신은 건방진 계집이긴 하지만 매력적인 계집이기도 해요. 내가 첩자들에게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요."

아담은 그 역할에 완전히 빠져든 것 같았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현재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잠시 동안만이라도 그를 그 역할에서 벗어나게 할 능력이 없었다. 거기에는 유머 같은 게 없었다.

"아담, 당신은 나를 피곤하게 만들고 있어요." 그녀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게임은 그만두고 올랜도로 돌아가요."

"올랜도?"

"그래요, 아담, 올랜도로지금 당장 돌아가요!""이해할 수가 없군요. 하지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오. 우리에겐 또 다른 목적지가 있어요."

그가 배의 흔들림 때문에 약간 몸을 움직였다. 다이아나는 그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의 손은 옆구리에 있는 빛나는 칼 근처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건 판타지 페어에서 가져온 것과는 다른 물건인 것 같았다.

"당신은 곧 알게 될 거요."그가 말했다.

다이아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선실을 가로질러서 창문으로 다가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배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어둠 속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파도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조수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 배는 정말 항해중일 수도 있다.

말도 안 돼. 스완호는 영원히 부두에 정박하게 되어 있어. 그가 승무원을 고용해서 배를 대서양으로 몰고 나갈 가능성은 조금도 없어. 그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런데.

그녀는 다시 창문 밖을 흘끗 쳐다보았다. 배가 움직이고 있는 게 거의 확실한 것 같았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녀는 항해하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게 되어 있는 이 배가 움직이고 있다. 꿈을 꾸고 있는 게 틀림없어. 아니면.

"호크 씨, 누가 당신을 고용했나요? 난 그것이 알고 싶어요. 난 당신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요. 우린 단순히 데이트를 한 게 아니었어요. 누군가가 당신을 고용했어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요."

아담이 그의 책상 쪽으로 다가가서 청동으로 된 도구 하나를 집어들어서 그걸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다시 다이아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무도 날 고용하지 않았소. 난 바람처럼 자유로운 사람이오."

다이아나는 혐오스럽다는 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하지만 갑자기 흔들리는 배의 움직임으로 인해서 그녀의 제스처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이봐요, 이제 그 대사는 그만 사용해 주세요. 너무 진부해요."

아담이 그녀를 바라보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 이제 당신은 벙어리 흉내까지 내고 있군요. 당신은 말만큼이나 행동에도 재능이 있는 것 같아요." 누가 당신을 고용했는지는 몰라도 설마 당신이 비중있는 배역을 맡은 적은 없었을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매우 특별한 배우예요."

"배우?"그는 도구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그녀에게 몸을 돌렸다. 그의 표정에는 경멸과 즐거움이 뒤섞여 있었다.

"배우라고? , 그런 적은 없어요, 마이 레이디."

그가 어떤 대사를 읊조리든 그건 연기임에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연기는 배우와 같이 완벽하다 다이아나가 그에게 배우가 되려는 희망을 가졌었다고 이야기했을 때 아마 그는 웃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와 나눈 대화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과거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보여 주었다. 운명과 그들의 불가피한 만남에 대해서 낭만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것 역시 가식이었을 것이다.

아담 호크는 유능한 사기꾼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에게 빠져들고 말았다. 그녀와 나눈 키스마저도 그 해변가와 몰려오던 구름, 거친 돌풍과 함께 일종의 배경에 불과한 것이었다. 다이아나는 자신이 그 키스에 얼마나 황홀해했던가를 떠올렸다. 마치 바보가 되어 버린 것 같다. 그에게 속아 버린 그녀 자신에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그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아무래도 당신은 대사를 좀 더 열심히 연습해야 할 것 같아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의 악센트가 엉망이에요. 좀 더 영국식 악센트가 되어야 할 것 같군요."

"영국식이라!" 그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난 메인에서 태어났어요. 그러니까 식민지 악센트로 말하고 있는 것뿐이오. 그렇지만 당신은 영국에서 태어나서 자랐어요. 그런데 왜 당신은 영국의 흙을 한 번도 밟아 보지 않은 사람처럼 말하고 있는 걸요?"

그는 검은 부츠를 책상 옆에 있는 철로 된 트렁크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숙인 다음 무릎을 양팔로 감았다.

"레이디 다이아나, 사실은 당신의 악센트는 나로서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것이오."

"좋아요, 아담. 그럼 나도 당신처럼 연기를 하겠어요."

다이아나는 자신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결국 그의 방식에 따라야만 한다. 게임이 빨리 끝나면 끝날수록 그녀도 이 배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럼 내 역할에 대한 힌트를 주세요. 난 레이디 다이아나 트레몬트예요. 그리고 난 인질로 붙잡혀 있어요. 그런데 그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그건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오. 내 조건이 총족되면 당신은 석방되는 걸로 해둡시다."

다이아나는 미소 지었다. 이제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사실 그들이 하고 있는 게임은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재미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배가 흔들림에 따라 그녀의 두통은 점점 심해졌다.

그녀는 아담 호크가그게 정말 그의 이름인지도 모르긴 하지만머리가 돈 납치범이 아니라 배우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인디와 해리도 공범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오늘 저녁의 사건을 아주 교묘하게 조종했다. 아나 그들은 다이아나의 스케치를 발견한 다음이 가장극을 꾸몄을 것이다. 물론 과거와 현재의 역할을 맡아 줄 아담 호크 역시 그들이 발굴해 냈을 것이다. 다이아나는 몹시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호기심을 숨길 수 없었다.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어요. 당신 머리칼이 더 길어야 할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머리 끈은 내가 묶었어요. 기억하시죠? 당신은 내가 그걸 해줘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어요. 하지만 지금의 헤어 스타일은 다르게 보여요. 그건 가발인가요? 아니면 머리를 이어 붙였나요?"

그녀는 그에게 손을 뻗쳤다. 하지만 그의 머리가 갑자기 움직이면서 팔목을 낚아채는 순간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그녀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레이디 다이아나, 난 당신의 게임을 알지 못해요. 머리와 가발 어쩌고 하는 말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오. 아무래도 앉아 있는 편이 가장 좋을 것 같소."

잠시 동안 다이아는 두려움으로 인한 떨림이 척추를 타고 흐르는 있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 떨림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그럴 리가 없었다. 이건 게임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는 연기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연기에 반응하는 일 뿐이다. 그건 아주 간단할 것이다.

"당신의 분노와 냉정하고 차가운 표정 뒤에 숨어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어요. 사실 에롤 플린보다는 클리트 이스트우드 쪽에 더 가까운 편이죠. 하지만 그건 성공한 것 같아요."

그의 유일한 반응은 그녀를 더욱 세게 움켜쥔 것뿐이었다. 그녀의 팔목을 움켜쥔 힘은 마치 강철처럼 억세었다. 그가 그녀를 침대로 끌어당기는 순간 그녀는 그의 키가 얼마나 큰가를 깨달았다. 그녀가 침대에 눕자 그는 마치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 이 미친 대화를 하지 않겠소. 당신이 미친 여자인 척해 봤자 석방 시기만 늦춰질 뿐이오."

그녀는 다시 농담으로 그를 그 역할에서 끌어내 보려고 시도했다. "도대체 당신은 그 기술을 어디서 배운 거예요? 배우학원에 다녔나요? 당신은 정말 이 역할에 깊이 빠져든 것 같아요. 그렇죠?"

그가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더 이상 지껄이지 말아요!"

다이아나는 그에게서 몸을 빼냈다. 고용된 배우에게 위협을 당하고 있다니,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그의 셔츠가 찢어져 있는 게 보였다.

"우리 가게는 당신에게 셔츠값을 배상받아야 하겠군요. 우리는 그 옷을 결코 다른 사람에게 빌려 준 적이 없거든요. 그리고 이 핏자국은."

"당장 입을 닥치지 못하겠소?" 그가 그녀를 흔들었다. 매우 거친 손길이었다. "당신의 입은 남자를 미치게 만들기에 충분해요. 이제 내 참을성은 바닥을 향하고 있소. 그리고 난 당신을 이 침대에 묶어 둘 생각을 하고 있어요."

다이아나가 몸을 빼냈다.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남자다운 행동이 도가 지나친 것 같군요. 이건 재미있자고 하는 짓인데 더 이상 재미가 없어져 버렸어요. 내가 원하는 건아니, 강력하게 요구하겠어요. 나를 집에 데려다 주세요, 지금 당장!"

잠시 동안 그의 차가운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당신의 그 끝없는 수다 속에는 불굴의 정신 같은 게 있군요. 마음에 들었소. 당신 같은 시골 여성들은 대부분 줏대가 없는 경우가 많아요." 그가 우스꽝스럽게 머리를 약간 숙여 보이면서 뒤로 물러섰다. "당신의 희망사항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당신을 묶어 두지는 않겠소. 하지만 당신을 석방하는 문제는시간이 필요해요."

다이아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절망적인 상황이다. 그녀가 무슨 짓을 하든 이 남자는 자신이 맡은 배역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호크 씨,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난 당신과 더 이상 싸울 기력이 없어요. 난 너무나 피곤하거든요."

"호크 선장이라고 불러 줬으면 좋겠소. 그리고 당신에게 뭘 좀 갖다 주겠소. 치즈를 먹겠소? 아니면 빵? 블랙 호크호의 음식은 아주 간단하지만 풍성해요."

"싫어요. 아까 축제에서 먹었어요. 나에게 정말 필요한 건 두통을 멈추게 해줄 아스피린이에요."그녀는 욱신거리면서 쑤셔대는 머리의 혹에다 손을 댔다.

"당신은 벌써 두 번째 아스피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소. 그런데 그건 약을 말하는 거요?"

다이아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고 베개에 몸을 기댔다. ", 당신은 훌륭해요. 정말 훌륭해요." 그녀가 피곤한 어조로 말했다. "약이 맞아요. 당신은 이해력이 정말 빠른 편이군요. 나의 호의가 비웃음으로 변하고 있다는 걸 아주 빨리 이해하는 편이죠." 그의 얼굴이 검게 변해 갔다.

다이아나가 머리를 저었다. 이 게임에서조차 그는 대단히 변덕스러운 성격을 갖고 있다.

"미안해요."그녀가 사과했다. "대본을 깜빡 잊고 있었어요."

그가 테이블 위에 있는 병을 잡았다. "이건 적포도주요. 아주 훌륭한 술이자. 한 모금 마시면 머리가 맑아진다고 알려져 있소." 그가 유리잔에 그걸 조금 따라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다이아나는 거부하려고 했지만 포기하고 말았다. 그와 이런 식의 말다툼을 계속하는 것보다는 그의 제안에 따르는 편이 훨씬 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좋아요. 사실 몇 년 동안 괜찮은 적포도주를 마셔 본 적이 없거든요. 정말이에요."

그리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아주 강렬하군요. 하지만 훌륭해요."그리고 또 한 모금을 마셨다.

"두통에 도움이 되겠소? 조금 더 마셔 봐요."

그녀는 다시 술을 마셨다. "이걸 마시니까 몸이 따뜻해지는군요!"

그의 입술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 짓고 있다. "그 포도주의 맛이 좋다니 정말 기쁘군요."

다이아나는 잔을 다 비우고 잔을 그에게 주었다. "내 머리에 대단히 도움이 되었어요. 머리가 멍해지는 효과가 있군요."

"좋아요. 이제 좀 쉬도록 해요." 그가 일어섰다. "그럼 난 이만 가보겠소. 갑판으로 가서 우리의 항해를 결정해야 해요."

다이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아주 좋은 징조였다. 아마 아주 오랫동안 목적도 없이 항해가 진행되었던 것 같다. 이제 그들은 항구로 향하려는 것일 것이다. 거기에 가면 틀림없이 그녀의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농담 같은 이 일을 함께 기뻐해 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벌써 배에 올라타고 있다고 이 선실로 뛰어들 채비를 갖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호크, 그렇게 하세요. 승무원들에게 서두르라고 말해 줘요."

그녀는 낄낄 웃고 나서 손으로 입을 감쌌다. 그 적포도주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렬했다. 멍해지는 징조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그가 문을 열쇠로 잠그는 소리를 들었다. 맙소사! 정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 도대체 왜 나를 가둬 두려는 거야? 정말 뻔뻔스런 남자야!

다이아나는 문 쪽으로 걸어가서 손잡이를 돌렸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을 발로 차보았다. 하지만 현기증만 더 심해질 뿐이었다. 괜히 포도주를 마신 모양이다.

문의 손잡이를 잡고서 그녀는 몸의 균형을 잡았다. 그런 다음 천천히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다시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했다. 방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파도 때문인지, 아니면 현기증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술기운이 갑자기 올라와 온몸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온몸이 고무로 만들어진 것처럼 흐느적거리는 느낌 속에 빠져들었다.

아까보다 더 심해졌다. 현기증과 구토가 일었다. 그리고 졸음이 몰려왔다. 견딜 수 없는 졸음이 몰려 왔다.

", 안 돼!" 그녀가 소리쳤다. 갑자기 깨닫기 된 사실이 그녀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그 바보가 나에게 약을 먹였어!"

그녀의 말은 둔탁하게 흐려지고 말았다. 모든 것이 조절 능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건 너무 심한 행동이야. 집에 돌아가면 마인디와 해리에게 주의를 주어야겠어. 집에 돌아가기만 하면.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아주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다이아나가 다시 의식을 회복했을 때 그녀는 천장 쪽에서 몰려오는 흐릿한 빛에 눈을 떴다. 위쪽을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그 선실이 아치형으로 휘어 있음을 알았다. 아치형의 슬레이트에는 푸른 하늘이 그대로 드러나는 창문이 있었다.

그녀는 그 하늘에 매료된 채 좁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틀림없이 이 선실은 뱃머리 쪽에 있다. 돛대의 가장 높은 부분 밑에 있는 것이다. 그녀가 아담과 함께 파티에 도착했을 때 그 돛대를 보았었다.

아담, 도대체 그는 어디서 살고 있을까? 그리고 그는 누구인가?

마치 그녀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레이디 다이아나, 어서 일어나요." 그가 두꺼운 떡갈나무 문을 큰 소리로 두드렸다.

그건 아담의 목소리였다. 그 남자는 나를 파티에 데리고 온 매력적인 남자인가, 아니면 나를 이곳에 가두고 약을 먹인 선장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다시 다이아나의 머리가 출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스완이라는 배의 한 선실에 갇혀 있었다. 그곳은 선장의 선실이라고 했다. 하지만 파티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그런 곳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정말 바보 천치였다. 그녀는 자신을 꾸짖었다. 새해 전야에 전혀 모르는 사람과 함께 처음 가보는 곳에 오다니. 지금 난 뭔가 범죄 조직에 잡혀 있는 거야. 그래, 이곳은 범죄 조직이 틀림없어.

열쇠가 자물쇠에 덜컥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몸을 움칠하면서 눈을 감았다. 잠이 든 척해 보여서 그를 피해 보려는 얄팍한 속임수였다. 그렇게 하면 그가 가버리고, 다른 사람을 보내서 상황을 설명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행운은 따라 주지 않았다. 문이 확 열렸기 때문이다.

"배에서 내려야 할 시간이오." 그가 명령했다.

눈을 감은 채 다이아나는 아담 호크에게 간절히 소망했다. 그녀의 손을 잡고서 그건 모두 게임이었다고 말해 주기를. 하지만 그런 소망을 그가 알게 되면 아마 비웃을 것이다.

그녀는 눈을 떴다. 그는 아담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미소 짓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아 주지도 않았다. 대신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아직도 해적의 복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낮의 밝은 빛에서 바라보니까 그는 복장을 차려 입은 가짜 해적처럼 보이지 않았다. 마치 진짜 해적처럼 보였다. 그에게서 위험한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왔다. 그리고 그에게는 엄청난 권력이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머리칼이 바람에 헝클어져 있었다. 그리고 검은 수염이 그의 얼굴을 더욱 어둡게 보이게 했다.

"맙소사." 다이아나는 나직한 어조로 속삭였다. 그는 아직도 호크 선장의 역할을 하고 있는 중이다. 스페인의 바다를 무대로 활동하는 거친 해적의 모습을 그대로 재연해 내고 있었다.

", 하느님." 그녀가 부드러운 어조로 기도했다. "이 모든 악몽을 쫓아 주세요."

그녀의 애원을 무시한 채 아담은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그런 다음 거칠기 짝이 없는 행동으로 그녀를 일으켜 새웠다.

"당신을 바닷가로 데리고 가겠소."

"우리가 올랜도로 돌아왔나요? 아담, 정말 잘됐어요! 난 의사에게 가거나 치료를 받을 필요는 없어요."그녀는 머리에 난 혹을 만졌다. "이제 혹이 많이 들어갔어요. 그렇게 심하게 아프지도 않아요. 당신이 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기만 한다면아니, 그게 어렵다면 날 가게까지만이라도 데려다 주세요. 오늘이 새해 첫날이라는 걸 알아요. 하지만 난 아무래도 가게에 들려서."

다이아나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말았다. 자신이 너무 들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그녀의 팔을 거칠게 움켜잡고 있다. 그는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방식은 통하지 않고 있다. 게임이 모든 게 괜찮다고 믿도록 만들어 버린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녀 자신도 그렇게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은 모든 게 너무너무 잘못 되어가고 있는데 말이다.

"마이 레이디, 당신의 집은 여기서 아주 먼 곳에 있어요. 나는 당신을 내 집으로 데려갈 생각이오. 그곳에 가면 당신이 어떤 육체적 고통을 호소해도 모두 치료받을 수 있을 거요. 당신의 대부에게서 몸값에 대한 소식이 올 때까지 말이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녀는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는 그녀를 꽉 움켜잡았다. "나에겐 대부가 없어요."

이번에는 더욱 거칠게 잡아당겼다. 그제야 그의 손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아담, 나에게 손대지 말아요."

"미안해요, 레이디."그가 약간 멸시하듯 웃었다. "하지만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왜 내가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나요? 그런데 당신은 누구세요? 날 속이거나, 유괴하거나, 아니면 다른 행동을 해주는 대가로 돈을 받은 배우라는 말은 할 필요가 없어요."

"이건 정확히 말해서 유괴가 아니오."

"나에게 몸값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요. 난 지금 몹시 피곤해요. 그리고 한시라도 빨리 여기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는 순간 갑작스런 한기를 느꼈다. 그의 입술이 굳어져 있었고, 눈빛은 흐려져 있었다. 그리고 다이아나는 그의 뺨의 근육이 꿈틀거리고 있는 걸 보았다.

"마담, 당신에게는 가장 숙녀답지 못한 습관이 있는 것 같소. 나를 방해하는 일 말이오. 만약 당신이 계속 그렇게 행동한다면 난 이성을 잃을지도 몰라요."

순간적으로 다이아나는 이 순간을 피하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의 존재로부터 도망칠 수가 없었다. 그의 육체가 그녀 앞에 있는 공간을 모두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와 팔의 강한 근육이 그녀가 앉아 있는 좁은 침대에서 볼 때 아주 엄청나게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미안해요."

다이아나는 또 다른 술책을 쓰려고 했다. 그녀는 짜낼 수 있는 모든 위엄을 동원해서 얼굴에 흩어져 있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드레스의 주름을 손으로 쓸어냈다.

"당신은 나의 대부가 누구인지를 설명해 줘야 할 것 같군요."

"대서양 양쪽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메이의 부주지사인 윈스턴 그렌빌 경을 알고 있을 거요. 마이 레이디, 당신은 아주 순진한 척하는 연기에 능숙하군요."

"그리고 당신도 남성다운 해적의 역할을 아주 잘해내고 있어요, 호크 선장님." 다이아나는 그를 칭찬해 주었다. 그리고 순간 예전의 대담성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 남성적인 역할은 좀 위협적이었어요. 당신은 어젯밤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의 역할에도 아주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 당신의 배역에 잘 따르도록 노력해 볼 생각이에요. 그러면 그렌빌이 나의 대부이고, 당신이 나를 석방해 주기만 하면 많은 돈을 지불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두기로 해요. 그런데."

"레이디, 질문은 충분했어요. 이제 당신이 알고 싶은 건 모두 알았을 거요. 이제 우린 배에서 내려야 해요."

그가 약간 머리를 숙이면서 옆으로 물러섰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그의 그런 행동을 비웃었다.

"마이, 레이디, 먼저 가시오."

다이아나가 일어서자 현기증과 구토가 다시 몰려오기 시작했다. "어머나!" 그녀는 소리치면서 그의 팔을 붙잡았다. "도대체 그 포도주는 어떻게 된 거예요. 당신이 나에게 약을 먹인 것 같아요.""조용히 해요." 그가 거친 어조로 말했다. "이제 배를 떠나야만 하니 당신도 나와 함께 나가야 하오."

"제대로 걸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다이아나는 아직도 그의 팔을 잡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돌처럼 단단한 그의 근육을 움켜잡았다. 그가 어떤 계략을 피우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는 너무도 그럴 듯하게 보인다. 아무튼 그녀는 자제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몸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해도 그곳에서 벗어날 생각은 없었다.

이 배를 떠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곳에 그대로 있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선실은 이제 그녀에게 익숙해졌으며 안전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도대체 이 배에서 벗어나면 바깥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곳은 플로리다 해변도 아닐 것이다.

여전히 그를 꼭 붙잡은 채 다이아나는 흔들리는 걸음으로 창문 쪽으로 다가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밖의 풍경이 그녀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우린 어디에 와 있는 건가요?"

"마담, 이곳은 바하마 군도의 로그스 케이라는 곳이오."

"로그스 케이라구요? , 아담, 정말이에요? 그렇다면 이곳은 당신의 항공회사가 최근에 개발한 취항지잖아요? 당신이 운항하기를 원했던 곳 말예요. 당신이 나에게 그 이야기를 모두 해줬단 것 기억 안 나세요?""다시 그 미친 소리를 하는군."그의 대답이었다. "이곳은 나의 고향일 뿐이오. 그 이상 아무 의미도 없소."

그가 창밖으로 맑고 푸른 물을 내다보자 다이아나는 그의 시선을 쫓아갔다. 하지만 그녀가 예상했던 휴양지는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18세기의 마을이 하얀 모래사장 위에 솟아 있는 언덕 옆자락에 숨어있었다. 그건 마치 그림엽서에 나오는 것 같은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 해변에다 영화 세트를 설치한 모양이군요! 정말 재미있어요!"그녀는 감탄의 소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하게 재미있다고 표현할 정도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영화 세트가 있다면 당연히 배우와 스태프, 그리고 그녀를 현실로 돌려 놓을 다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건 자신을 아담 호크라는 이 두렵고도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어 줄 것이다.

하지만 나를 왜 바하마의 세트장까지 데리고 와야 했을까? 그리고 왜 하필이면 옛 시대의 배에 태워 왔을까? 혹시 그들이 의상에 대한 고증에서 그녀의 충고를 얻으려 했다면 납치까지 해야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다이아나는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마음이 너무나 혼란스러워서 제대로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면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리 와요, 마이 레이디, 시간이 되었어요."

다이아나는 한 발짝을 떼려고 했지만 다시 선실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아담에게는 아무 도움도 요청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도움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직도 현기증이 나요."그녀가 말했다. "머리에 난 혹과 약을 탄 와인을 마셨기 때문에 머리가 빙빙 돌고 있어요그러니까 당신에게 기대게 해준다면."

"물론이죠, 아가씨." 그는 다시 허리를 굽힌 다음 팔을 내밀었다.

 

4장 해적의 마을

다이아나는 손을 눈 위에 올린 채 아담을 따라서 갑판으로 나갔다. "!" 그녀가 소리쳤다. "태양과 숙취가 뒤섞이니까."

"뭐가 뭐하고 뒤섞였다는 거요?"

다이아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현실의 세계에서 아담은 꽤 유머가 있는 남자인 것 같다.

"알겠어요. 이제 그만 해요. 당신이 나보다 훨씬 영리하다는 걸 인정하겠어요. 물론 당신은 숙취라는 단어가 우리가 지금 묘사하려는 시기에는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사실 나는 보통 사람처럼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나도 가끔은 18세기의 단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어요. 물론 그럴 듯한 어휘가 생각나면 말예요."

그가 그녀를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아담, 제발 그러지 말아요. 당신이 계속 배의 선장인 것처럼 행동하는 게 역겨울 지경이에요. , 그러니까 어서 가자구요. 당신은 당신 집으로 가기를 원해요. 그리고 나는 마을로 가서 나를 이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구해내 줄 사람을 찾아보고 싶어요."

"마이 레이디, 당신은 나의 명령에 따라야 해요. 당신의 어휘 중에서 몇몇 단어는 나에게 큰 혼란을 주고 있소."

"아담, 우리 현실로 돌아와요. 더 이상 이 우스꽝스런 18세기식의 넌센스를 계속하고 싶지가 않아요. 도저히 그럴 기분이."

하지만 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아담은 그녀를 들어 안아서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배의 난간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당장 내려놓지 못하겠어요?" 그녀는 발길질을 하고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두드려 대면서 소리쳤다.

"당신을 내려놓으면 당신은 계속 그 혼란스런 수다를 지껄여댈 거요. 그럼 우리는 절대로 배에서 내리지 못하게 돼요. 당신 같은 여자를 다루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오."

아담은 난간에 걸쳐진 밧줄로 된 사다리를 타고서 물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작은 보트로 내려갔다. 다이아나는 드레스가 머리로 치켜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발버둥쳤다. 하지만 한 가지 기쁜 사실이 있었다. 아래에서 남자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보트로 들어서자 아담은 다이아나를 나무로 된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 옆에 앉았다.

그녀는 똑바로 앉아서 그 상황에서 최대한의 위엄을 갖추었다. "아담, 난 도저히 이걸 용납할 수가."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그가 소리 질렀다. "친구들, 드디어 해변에 왔군. 이제 바다만 바라보는 것도 진력이 났다구. 러셀, 잘 있었나?"

"잘 지냈다고 할 수 있죠. 선장님, 괜찮으시다면 난 블러드 앤드 보운즈에 가서 그로그 주를 사와야겠습니다.."

"괜찮은 생각인 것 같군, 친구."

그 두 남자는 마치 영화 시나리오에 나오는 것 같은 대사를 계속 읊어대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러셀이라는 남자 역시 배우 기질이 다분하다는 걸 알았다. 그는 아담보다 몇 살이 위인 것처럼 보였다. 거친 회색 머리칼과 멋대로 자란 콧수염, 그리고 그녀가 여태껏 본 중에서 가장 파랗고 빛나는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그와 그의 동료가 노를 당기자 그 작은 배는 물을 가로질러 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단히 정통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다이아나 자신도 그보다 더 그럴 듯한 의상은 디자인 할 수 없을 것이다.

한때는 하얀색이었음이 분명한 러셀의 바지는 가무스름하게 때가 묻어 있었는데, 약간 풍성하게 디자인한 상태로 무릎 바로 밑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벨트는 아주 넓었는데 반짝반짝 윤을 내야 하는 청동 버클이었다. 짧은 기장의 파란 재킷에는 역시 청동 단추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을 가로질러 권총을 차는 끈을 달고 있었고, 붉은 색상의 더러운 손수건과 금으로 된 고리 이어링이 의상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의상이 매우 훌륭하군요."

"내 이름은 러셀 칼렌이오, 아가씨. 그리고 내 의상에 관한 얘기라면이 여행이 끝나면 이 옷들을 불태워 버릴 거요. 아무리 많은 양잿물을 뿌리고, 비누로 빨아대도 이 옷에서 나는 냄새는 피할 수가 없어요."

"러셀, 그 비누는 자네 피부에 사용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군."아담이 농담을 던졌다. "이 사람은 파도가 높은 바다에서 최고의 병참 장교요." 그가 다이아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별로 호감이 가는 사람은 아니오. 안 그런가, 친구?"

러셀이 갈색으로 썩어간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맞아요, 선장, 멋부리는 건 선장 몫이죠."

"아주 좋아요." 다이아나는 그를 칭찬해 주었다.

그들이 해변으로 다가가는 동안 그녀는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그곳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 부둣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선술집과 가게들이 있었다.

한 남자가 해먹에서 편안하게 몸을 쉬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남자는 수레를 밀고 있으며, 몇 명의 여자들이 모닥불에다 요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먼 곳에서 개가 짖고 있었다.

카메라를 볼 순 없지만 모든 것이 아주 편안하게 느껴졌다. 카메라와 케이블, 전기장치, 전화, 요리 담당, 그리고 케스트와 스태프들이 있는 트레일러와 영화 세트에 필요한 도구가 모두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시선을 들어서 비행기를 찾기 위해 하늘을 보았다. 근처 어딘가에 임시 활주로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다이아나의 탈출구가 되어 줄 것이다.

보트가 해변에 도착하자 뱃사람들이 넓은 해변에 펄쩍 뛰어내렸다. 아담도 해변에 내려서 다이아나를 번쩍 들어 해변에다 안전하게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그녀도 저항하지 않았다. 물론 그녀 혼자서도 얼마든지 뛰어내릴 수는 있지만, 한 발짝 건너편에 자유가 기다리고 있는데 굳이 변덕스런 선장과 말다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이 모래를 가로질러서 작은 마을 쪽으로 걸어갔을 때 사람들이 몰려와서 아담 호크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 마을 사람들도 모두 18세기 의상을 갖춰 입고 있었는데 작은 부분까지 완벽하게 신경을 쓴 것이었다.

"믿을 수가 없어요." 그녀가 아담에게 중얼거렸다. "난 정말 감명을 받았어요. 한시라도 빨리 의상 디자이너와 세트 디자이너를 만나 보고 싶어요. 그들은 몇 세기 전의 마을을 아주 완벽하게 재연해 냈어요. 아주 놀라운 일이에요."

"레이디 다이아나, 이번에도 역시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그래도 당신이 처음으로 기뻐하는 걸 보니까 나 역시 기쁘군요. 하지만 오늘은 마을에 들를 시간이 없소. 나의 집은 저 위에 있어요. 맨 위에 있는 절벽이 우리의 목적지요."

다이아나는 멀리 있는 집을 바라보았다. 붉은 타일 지붕을 얹은 그 집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하얗게 반짝이고 있었다. 무거운 철로 된 그릴이 대문과 유리창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 집은 마을과는 동떨어져 있는데 집과 마을 사이에는 굽이치는 산길이 보였다. 그 집은 외딴 감옥 같았다.

", 당신은 선술집에 들르지 않을 건가요? 거긴 어때요? 블러드 앤즈 거츠라고 했던가요?"

"블러드 앤드 보운즈요. 당분간 러셀에게 그곳에 들르라고 할 거요. 하지만 틀림없이 그와 다른 친구들과 거기서 만나게 될 거요."

"틀림없이?"다이아나가 반문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는 뜻인가요?"

"지금은 안 돼요. 우리는 나의 집으로 가고 있는 거요."

그가 그녀의 팔꿈치를 거세게 움켜잡고서 그녀를 데리고 나무 계단을 올라갔다. 해변에서 시작된 그 계단은 자갈로 된 거리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이 그의 집으로 향하는 길로 들어섰을 때 다이아나가 머뭇거렸다.

"호크 선장님, 미안해요." 그녀는 빈정거리면서 그의 호칭을 사용했다. "하지만 난 더 이상 갈 수가 없어요."

그에게서 뒤로 물러서면서 그녀는 입에다 나팔을 만들고 소리를 질러댔다."이봐요, 누구 없나요? 당신들은 아주 멋진 세트를 만들어 두었군요. 하지만 난 올랜도에서 온 다이아나 트레몬트예요. 난 이 해적 마을 세트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라구요!"

사람들이 몰려 들어서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여기서 빠져나가려면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해요. 여기 이 해적선의 미치광이에게서 벗어나려면 말예요."

인상이 험악한 남자들과 억세게 생긴 여자들이 말없이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에겐 전화가 필요해요." 다이아나가 그들에게 말했다. "엑스트라 여러분 중에 나에게 도움을 주실 분은 없나요? 감독이 어디 있는지 말해 줘요. 이봐요, 난 지금 농담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드디어 누군가가 소리쳤다. "선장님, 그녀가 골칫덩어리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젠 미쳐 버린 것 같군요."

다이아나는 그곳에 모인 군중들을 향해 나아가려고 했다. 그들이야말로 그녀에겐 유일한 기회라고 할 수 있다. 틀림없이 그들 중에서 한 사람 정도는 그녀를 동정해서, 그녀를 트레일러 차량으로 데리고 가서 전화를 사용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하지만 두 걸음 정도 나아갔을 때 누군가가 무례하게 그녀를 잡아당겼다. 아담이 한쪽 팔을 그녀의 허리에 감고서 그녀를 잡아당겼다.

"더 이상 속임수를 쓰지 말아요." 그가 명령했다. "당신은 나와 함께 가야 하오."

"나에게 명령하지 말아요! 당신과 단둘이 있을 때는 당신에게 맞장구를 쳐줬지만 여기서는 안 돼요! 여기 목격자들이 있는 곳에서는 그럴 수가 없어요. 연극은 끝났어요. 당신은 호크 선장이 아니에요. 그리고 난 레이디 다이아나가 아니에요. 난 당신을 따라 가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그는 품안에서 그녀를 돌려세워서 그와 마주 보게 만들었다. 검고 차가운 눈동자로 다이아나를 내려다보면서 아담은 그녀를 거칠게 흔들어 놓았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소. 이곳은 나의 섬이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나의 사람들이오. 로그스 케이의 모든 시민들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 당신은 나의 인질이오. 그러니까 누구보다도 당신은 내 말에 복종해야 해요."

그는 그녀의 팔을 꼭 움켜쥔 다음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발꿈치로 버티고 서서 끌려가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그런 저항 역시 절망적이었다. 더 이상 버티다가는 밀가루 부대처럼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보조를 맞추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녀에겐 목소리가 있으니 계속 소리를 지를 수는 있었다.

"누구든 날 좀 도와줘요, 난 미친 사람에게 납치되어 왔어요. 주지사에게 전화를 걸어 줘요!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요!" 그녀는 계속 고함을 질러댔다. "아니, 올랜도의 판타지 페어에 전화를 거는 게 좋겠군요. 날 도와주면 반드시 그 대가를 받을 거예요. 누구에게든 내가 있는 곳을 말해요."

그녀는 뒤돌아보았다. 군중들은 여전히 거기 서서 웃으면서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마치 해적 복장을 한 미친 남자에게 거칠게 취급당하고 있는 그녀가 재미있다는 표정들이다.

군중들이 멀어지자 다이아나는 이번에는 아담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당신은 너무 심하게 굴고 있어요. 난 촬영팀들이 이 근처 어디 있다는 걸 알아요. 그들이 날 여기서 구해 줄 거예요."

그가 계속 그녀를 가파른 킬로 끌고 올라가지 그녀는 숨이 차서 저항하는 걸 포기해 버렸다.

그리고 점차 마을이 멀어져 가자 그녀는 희망조차 포기해 버렸다. 그녀는 자신있게 말했지만 로그스 케이에는 촬영팀이 없었다. 아담 호크와 그의 추종자들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

 

그들이 집 근처에 다가갔을 때 그녀는 다시 원기를 회복해서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를 마구 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가 발걸음을 빨리 하자 그녀의 기력은 눈에 띄게 약해지고 말았다.

다이아나는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서 그와 보조를 맞췄다. 그와 나란히 달리며 다이아나는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치기 시작했다. 그가 놀라서 그녀에게 몸을 돌리자 그녀는 그의 뺨을 꼬집기 시작했다.

"이 여자는 악마로군!" 그가 투덜거리면서 그녀를 떼어냈다. 하지만 그녀의 팔을 쥔 손의 힘은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당신을 묶을 생각을 하지 않다니난 정말 바보였소.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을 거요."

그에게 위협을 하긴 했지만 다이아나의 저항은 많이 줄어들었다. 열기와 거친 비탈길, 그리고 낯선 그곳의 상황이 그녀에게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현기증과 함께 구토증이 일기 시작했으므로 아담의 집에 도착했을 무렵 그녀는 차라리 다행스럽게 느낄 정도였다.

입구로 가는 길은 어둡고 서늘했다. 그곳은 밖의 강렬한 태양과는 정말 대조적이었다. 하지만 다이아나가 주변 환경을 둘러볼 여유를 갖기도 전에 아담은 그녀를 끌고 현관을 가로질러 갔다. 그런 다음 위로 향하는 넓은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을 다 올라간 그는 첫번째 방에서 멈춰 서서 발로 차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다이아나를 침대로 끌고 갔다.

", 이제 당신을 침대 기둥에 묶어 놓아도 되겠소?"

"제발 그러지 말아요."다이아나가 애원했다. "다시는 도망가지 않겠어요."

"당신이 도망을 가는 게 걱정스러워서 이러는 게 아니오."그가 그의 얼굴에 난 붉은 손톱자국을 가리켰다.

"다신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당신에게는 손도 대지 않겠어요. 하지만 당신도 나에게 손대지 말아요."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웃엇다. "마이 레이디, 내 집에서 나에게 감히 명령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소?"

"그래요."그녀는 대담하게 말했다. "난 남자에게 난폭하게 취급당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해요."

"난폭하게 취급당한다?"그는 혼자서 중얼거리더니 다이아나에게 말했다. "당신을 도와줄 여자를 이곳에 올려 보내겠소. 그 여자에게 끊임없이 수다를 떨어 봐요. 아마 그 여자도 질리고 말 거요." 그가 소리를 질렀다. "마틸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요?"

하지만 그 집은 침묵 속에 있었다.

"망할 놈의 할망구!" 그가 커다란 방의 구석에 있는 병풍을 옆으로 밀쳐놓았다. "그래도 할머니가 당신을 위해 욕실은 준비해 두었군. 그 할머니는 어딘가에 숨어서 우리를 엿보고 있을 거요. 내가 할머니를 찾아서 당신의 저녁식사를 갖고 오도록 하겠소."

다이아나는 발버둥을 쳐서 간신히 앉은 자세가 되었다. "날 여기에 혼자 놓아 두고 당신은 가버린단 말예요? 나가서 할머니를 올려 보내겠다구요? 아담 호크, 정말 고약한 사람이군요!"

아담은 높은 옷장 문을 열어서 밝은 색상의 실크 실내복을 골라낸 다음 그걸 의자 위에 던져 놓았다.

"아까 당신에게 이야기했던 것처럼 나는 내 집에선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소. 더구나 고양이 같은 손톱에다가 가장 저질스런 선원처럼 저속한 혀를 가진 포로에게 명령을 받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그는 방을 가로질러서 걸어갔다."마이 레이디, 나중에 보기로 합시다. 즐거운 목욕시간이 되기를 빌겠소." 그가 아니꼽다는 듯 비웃으면서 말했다.

다이아나는 한쪽 신발을 벗어서 거칠게 집어던졌다. 그 신발은 그가 방금 닫아 버린 문에 맞고 힘없이 방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사기꾼, 거짓말쟁이나쁜 자식!"

그녀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침대 위에 누워 버렸다. "맙소사, 난 정말 말버릇이 사나운 선원처럼 말하고 있어! 하지만 그럴 만도 하잖아? 이처럼 미친 곳에 던져지면 누구든 그렇게 될 거야."

정말 미친 곳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한 곳이다. 그 생각만 해도 머리가 핑핑 돌고 날카로운 통증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릴 정도였다. 그녀는 목의 근육을 문질렀다. 하지만 그 고통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는 아담이 마인디와 해리에 의해 고용되었다고 믿을 만한 근거도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로그스 케이에는 영화 촬영을 위해 온 사람도 아무도 없다는 것도 확실했다.

언덕을 끌려 올라오긴 했지만 그녀는 촬영을 위한 징후 같은 건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카메라를 받치는 기둥이나 필 라이트, 카메라, 케이블, 와이어 같은 것들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이 정도 세트라면 틀림없이 어느 것 하나는 눈에 띄었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유원지인지도 몰라! 갑자기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녀는 재빨리 그 생각을 밀쳐 버렸다. 유원지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주차장이나 티켓 판매소, 혹은 관광객들을 전혀 보지 못했다. 다시 머리가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곳은 무엇을 하는 곳일까?

바로 그때 문이 열리고 스카프와 숄을 두른 조그만 여인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네가 바로 그 여자로군!"그녀가 위협적으로 중얼거렸다.

다이아나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안 돼요!"그녀가 소리쳤다. 그대로 도망을 치고 싶었다. 하지만 도망칠 방법이 없었다. 그 노파가 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다이아나는 공포에 사로잡힌 채 병풍 뒤로 물러섰다. "제발나를 내버려 두세요."

"음식을 가져왔어."

"난 식사를 하고 싶지 않아요. 난 가고 싶어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여인은 그대로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마디 굵은 손이 음식접시를 꼭 움켜쥐고 있었다.

"제발, 내가 도망칠 수 있게 도와주겠어요?"

노파의 얇은 입술에서 딱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그녀는 몸을 돌리고 말았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서 문을 닫아 버렸다.

"좋아. 이제 알았어."다이아나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제 난 혼자야."

그녀는 병풍 뒤에서 나왔다. 다이아나는 그제야 그 병풍에 밝은 중국 풍경화가 그려져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방 안에 있는 것들을 감상할 여유조차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목욕만큼은 완벽하게 즐기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든 원인은 그 의상을 벗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녀는 구겨진 무도회 가운을 벗어냈다. 그녀는 과거의 여성들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들은 추수 감사절에 요리하는 칠면조처럼 그렇게 날개가 묶인 채 그들의 인생을 보냈을 것이다.

그녀는 속옷과 슈미즈를 벗어 버리고 나무 욕조 속으로 들어갔다. 물은 기분이 좋을 만큼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근육이 서서히 이완되기 시작했고, 긴장감도 사라져 갔다.

그녀는 피곤했다. 여태껏 그토록 피로해 본 적이 없었다. 몸이 더러워진 것을 느끼고 있긴 했지만 스펀지를 짜서 씻을 만한 힘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뒤로 몸을 기댄 채 팔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것이 자기 팔이라는 일체감마저도 들지 않았다. 그녀는 다이아나였다. 하지만 다이아나가 아니었다.

올랜도의 성공한 사업가인 다이아나 트레몬트가, 어떻게 그녀가 꿈꾸어 왔던 해적에게 언덕으로 끌려와서 침대에 팽개쳐진 다음 옛날 욕조에서 목욕을 하라는 명령을 받을 수가 있단 말인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야."

어쩌면 앨리스가 거울을 통과했을 때 바로 이런 기분이었는지도 몰라.

욕조 아래로 더욱 깊숙이 가라앉으니까 그녀는 물이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음을 느꼈다. 물이 그녀의 턱에 닿을 때까지 그녀는 더욱 깊숙이 몸을 가라앉혔다. 편안해지기 시작하자 긴장감도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갔다. 그녀는 눈을 감고 모든 것을 잊으려고 했다.

꿈속의 세계에 머무른 상태로 다이아나는 한동안 욕조 안에 있었다. 물이 차가워지자 그녀는 마지못해 나와서 천천히 몸을 닦고 실크 실내복을 걸쳤다.

그 의상은 매우 화려했다. 그녀의 젖은 피부에 실크의 부드러운 감촉이 감각적으로 느껴졌다. 나른해져서 사지가 그대로 늘어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천천히 방을 가로질러 창가로 다가가, 밝은 카리브 해를 내다보았다. 그곳은 일몰로 인해 화려한 금색과 연보라, 빨강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제 다이아나는 편안했다. 잠시 동안은 따뜻함과 만족감이 그녀를 감쌌지만 몹시 피로했다. 침대 쪽으로 몸을 돌리려는 순간 집 근처에 있는 무엇인가가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

희미해진 그림자 속에서 그녀는 아담을 알아보았다. 그는 마을 쪽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는 어느새 너울거리는 소매가 있는 하얀 셔츠와 꼭 조이는 검은 반바지, 그리고 반짝이는 높은 부츠로 바꿔 신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어깨를 편 채 힘을 주면서 걷고 있었다.

해질녘이긴 했지만 그의 셔츠 밑의 근육이 출렁이는 걸 볼 수 있었다. 그의 등은 넓고도 곧았다. 그의 뒷모습은 뭔가 생각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뭔가를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치가 있는 뒷모습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덮쳐오는 성적 흥분을 굳이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힘은 단단하고 강인해 보였다. 그는 댄서의 모습과 흡사했다. 그녀는 그 생각을 하면서 미소 지었다. 남성다운 선장이 그 이야기를 들으면 뭐라고 할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이아나는 항상 해적들이 그 꼭 끼는 반바지 밑에 무엇을 입고 있을까 궁금해했다. 그녀 자신이 디자이너이긴 하지만 결코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건 그녀가 결코 대답할 수 없는 의문점이었다. 그 생각만 하면 그녀는 현기증이 일기 시작했다.

그녀는 약간 흔들리는 걸음걸이로 침대로 걸어갔다. 시트는 하얗게 깨끗했고, 마치 야생화가 피어 있는 들판에 나온 것처럼 기분 좋은 향기가 풍겨 나왔다.

그녀는 침대로 올라가서 그대로 누워 버렸다. 시원한 미풍이 그녀의 몸 위로 몰려왔다. 그 바람이 또 다른 향기를 몰고 왔다. 그건 바로 바다의 냄새였다. 그녀는 생각하는 걸 멈추려고 했다. 그 격렬한 두통이 그치지 않고는 일관된 방식으로 정리한다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베개에 머리를 깊숙이 묻고서 그냥 멍한 상태로 잊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을 멈추자마자 어떤 하얀 뭉게구름처럼 떠다니더니 방을 가로질러왔다. 그녀는 그 구름들이 움직이는 모습 속에서 명확한 해답을 찾았다.

아무것도 현실처럼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건 실제로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잠이 들어 있었다. 이건 그녀의 꿈이고, 환상이다!

다이아나는 혼자서 미소 지었다. 그 순간 모든 긴장감이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올랜도의 그녀의 침실에서 잠들어 있고, 이 모든 것은 꿈속의 상황일 뿐이다. 그녀의 잠재의식은 단순하게 가능성 있는 사실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틀 이상이 지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몇 분이나 몇 초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눈을 감았다.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항공회사의 거물인 아담 호크는 환상 속의 해적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그녀를 납치해서 그의 은신처로 끌고 온 것이다. 그녀의 꿈속에서 그가 종종 그랬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번에 그 꿈은 전보다 한층 더 격렬했다. 하지만 그 이유는 그녀가 스완호를 방문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커다란 나뭇가지가 그녀를 내리칠 때 일시적인 혼수상태에 빠져서 그녀가 집에 가는 걸 잊어버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물론 집에 있다. 그것도 그녀 자신의 침대에 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해적 연인에 대한 꿈을 꾸고 있다. 전에도 수없이 많은 꿈을 꾸었던 것처럼. 다이아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에 그녀가 눈을 뜨면 그녀의 인생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로그스 케이, 호크 선장은 모두 그녀의 상상 속의 편린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해답을 알고 나면 모든 것이 간단해진다니까."그녀는 베개에다 대고 중얼거렸다. 아담이 나에게 상상 속의 여자라고 말한 적이 있었던가? "더 이상 승강이할 것 없어."그녀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저 느긋하고 편안하게 즐기는 거야. 될 대로 되라고 해."

다이아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다음 깃털 매트리스 속으로 더욱 깊게 빠져들었다. 부드러운 실내복이 그녀의 가슴과 허벅지를 애무했다. 그 감촉이 너무나 감각적이고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남자의 손처럼. 연인의 손, 아니 아담의 손처럼.

그녀는 미소 지었다. 그래, 좀 더 깊은 환상 속으로 빠져드는 거야. 현실에서 아담이 키스해 왔을 때 그녀 역시 그 키스에 탐닉했었다.

어떤 점에서는 환상 속의 아담은 매우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남자였다. 아무튼 그 남자와 다이아나 사이에는 어떤 불꽃같은 게 일었다. 그렇다면 왜 좀 더 깊이 빠져 들어서 에로티시즘에 자신을 맡기지 못하는 것일까? 그러면 그녀 자신이 환상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전의 환상 속에는 항상 뭔가 성적인 것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나면 그녀는 그것을 붙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다이아나는 아담이 자신의 은밀한 곳을 만지고 있는 상상을 하면서 뜨겁고 감각적인 파도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이제 그가 돌아오기만 한다면그녀의 침실로 들어와서 그녀와 함께 그 환상의 놀이에 동참해 준다면.

다음 순간 다이아나가 알아차린 건 그가 침대 옆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달빛이 그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그의 높은 광대뼈 위의 공간을 유난히 강조해 주고 있었다.

저건 아담이야. 다이아나는 반쯤 졸린 상태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 아담이지?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깊은 꿈속에 빠진 상태에서 그녀는 환영 속의 연인이 그녀의 침대 옆에 서 있는 걸 상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서 그의 허벅지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녀의 손길에 그가 반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근육이 본능적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는 게 당연했다. 그녀의 환상 속에서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으니까!

"마이 레이디."그가 생각에 잠긴 어조로 말했다. "난 모든 것이 잘 되었는지 보러 왔소."

", 나의 선장님, 모든 게 아주, 아주 좋아요."다이아나는 혼자서 낄낄 웃어댔다. 모든 게 환상의 방식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녀는 한쪽 팔로 몸을 기대고 일어섰다. 그녀의 가운이 벌어졌다. 비록 꿈속이었지만 그녀는 저녁의 미풍이 그녀의 가슴을 시원하게 애무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우뚝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면서 미소 지었다.

"당신 어때요, 각하?"그녀는 셰익스피어에 나오는 구절을 떠올리면서 물었다.

"아주 좋아요, 마이 레이디."

달빛 속에서 그녀는 그의 시선이 자신의 육체를 훑어보고 있음을 느꼈다. 그의 시선은 열려진 실내복 부분에 머무르더니 다시 어둠 속에 가려진 그녀의 둥그스름한 가슴에 머물렀다. 다이아나는 가운이 좀 더 벌어질 수 있도록 몸을 뒤척였다. 그녀의 시선은 달빛에 적응하려고 깜빡였다. 그의 동공이 점차 확장되더니, 이내 검어지면서 그의 눈동자가 욕망으로 철렁였다. 그걸 보는 순간 다이아나는 더욱 대담해졌다.

"호크 선장님, 당신에게 뭔가 부탁드려야겠어요."

"레이디 다이아나, 내일 하도록 해요."

"지금 당장아주 다급한 일이에요."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그를 침대 옆으로 이끌었다. 꺼려하는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그는 기꺼이 다가왔다. 다이아나는 옆에 닿은 그의 육체가 뜨거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하얀 셔츠가 달빛 속에서 기괴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검은 반바지는 그의 강한 허벅지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경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그녀의 태도에 어떤 속임수가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다이아나는 몸이 대단히 따뜻해져 옴을 느꼈다. 마치 감각의 바다 위를 떠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그의 허벅지를 쓸어내렸다. 그의 반바지 밑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근육이 그녀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섬세하고 뜨거운 기운이 그녀를 덮쳤다. 그녀는 자신이 무척 사악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느낌이 좋았다.

"선장님, 가까이 기대세요."그녀가 속삭였다.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그가 망설였다. 그의 눈동자가 경계심으로 흐려졌다. "어딘가 아픈 거요? 아니면 이것 역시 또 다른 속임수요?"

다이아나는 미소 지었다. 그녀의 미소가 그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 문은 잠겨 있어요."그가 말했다. "그리고 이 방은 아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소. 당신이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은 없소."

"정말 잘된 일이에요."

왜 그녀가 이 달콤한 꿈에서 도망을 치겠는가?

그녀는 그의 귀에다 입술을 갖다 댔다. 그의 머리칼이 그녀의 얼굴에 부드럽게 닿았다. 거기에서 비누와 바다 냄새가 묻어나왔다. "나는 알고 싶어요, 아니, 알아야겠어요. 아주 오랫동안 나를 혼란시켜 왔던 의문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어요."

"마이 레이디, 도대체 무슨 의문이오?"

"난 당신이 반바지 밑에그 밑에 무엇을 입었는지 알아야 해요." 그 말을 하면서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허벅지를 위로 훑어갔다. "아마 이건 나에게는 마지막 기회가 될 거예요."

"마이 레이디, 당신은 아직도 열이 올라서 아픈 상태요." 그가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그의 셔츠를 꼭 움켜잡았다.

그녀가 그의 반바지를 부드럽게 만지자 그가 숨을 거칠게 들이쉬었다. "나는 당신이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고 짐작해요. 하지만 내가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걸 알 수 있겠어요?"

그녀는 그가 점점 더 흥분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흥분함에 따라 그녀의 감정도 더욱 고조되어 갔다.

"레이디, 맙소사, 당신이야말로 여자 악마로군요. 난 당신을 믿지 말았어야 했소."

그의 움직임은 아주 빨랐다. 그는 재빨리 그녀의 양손을 그녀의 머리 뒤로 돌려서 고정시켰다. 그녀의 드러난 가슴이 그의 부드러운 면 셔츠에 닿았다.

"커버를 덮어요." 그가 중얼거렸다.

"당신이 내 손을 잡고 있잖아요?"

그가 즉시 그녀를 풀어 주었다. 그녀는 그의 셔츠를 꼭 움켜잡았다. "아담, 나는 커버로 몸을 덮을 생각이 추호도 없어요. 난 완전히 나체로 있고 싶어요 크고 부드러운 이 침대에서 나체로 있고 싶단 말예요. 그리고 당신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담 호크 선장의 표정은 몹시 고통스러워 보였다. 처음으로 그녀는 환상 속의 해적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음성은 아주 낮고 쉰 것처럼 들려왔다. "레이디, 당신은 자신이 인질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해요. 변절자이긴 해도 난 항상 존경받는 인물이었소. 변절자이긴 해도 난 항상 존경받는 인물이었소. 그런데 나의 보호하에 있는 여성을 다치게 할 수는 없어요. 절대로 그러진 않을 거요."

"맙소사!" 다이아나가 신음소리를 냈다. "이건 나의 환상이에요. 그런데 고작 이렇게 끝나야 한다는 건가요? 존경받는 남자라구요? 이제 그 남자는 변화해야 해요."

그녀는 그를 끌어당겼다. 그 역시 몹시 흥분해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의 심장도 그녀의 심장처럼 거칠게 뛰고 있었고, 그의 호흡은 아주 빠르고 거칠었다. 아무리 존경받는 호크 선장이라 할지라도 다이아나는 그의 반응이 그녀처럼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담, 나에게 키스해 줘요. 단 한 번만키스해줘요. 그게 뭐가 어렵단 말예요?"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잘생긴 얼굴과 검게 곱슬거리는 머리칼이 보였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입술을 치켜 올려서 감각적인 미소를 지었다.

"어려울 건 아무것도 없소."그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뜨겁게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축축하고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입술이었다. 그는 그녀의 양손을 놓고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다이아나는 자신의 육체를 그의 육체에 더욱 가까이 밀착시켰다. 그러는 동안 욕망이 흘러넘치는 걸 느꼈다. 이건 그녀의 환상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황홀한 순간을 남김없이 즐길 작정이다.

 

518세기로 떠난 시간여행?

다이아나는 입술을 벌리고 그의 키스에 응답했다. 여태껏 이렇게 실감나고 황홀했던 꿈은 없었다. 그녀는 그의 호흡이 그녀의 호흡과 뒤섞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를 완벽하게 맛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혀를 그의 입속으로 깊이 밀어 넣었다. 아담도 그녀의 입 속에 혀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다이아나의 손이 그이 셔츠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옷을 너무 많이 입었군요."그녀가 그의 입에다 대고 속삭였다. 그가 몸을 돌려 버렸다. 이제 그는 다이아나의 품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안 돼요, 아담."그녀가 소리쳤다. "나를 떠날 수 없어요."

그녀는 자신의 음성이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도저히 그를 놓아 줄 수가 없었다. 꿈을 꾸고 있는 동안 그를 잃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가 영원히 떠나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이 봐요, 아가씨. 내가 지금 당신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소? 당신이 입술로 나를 고문하고, 손으로 나를 미치게 만들고 있는데 말이오."

그리고 그가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다이아나는 그들이 판타지 페어의 복도에 서 있을 때 그의 손이 그녀의 뺨을 스치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건 현실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길은 똑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손 밑에서 그대로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담."

"말해 봐요, 마이 레이디."

그의 손끝이 그녀의 노출된 가슴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다이아나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아무 말도 나와 주지 않았다. 그녀의 꿈은 침묵 속에 진행되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가슴을 애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이아나는 그의 머리칼을 만졌다. 그녀의 손끝에서 그의 머리칼은 부드럽고 기분좋은 감촉을 주고 있었다. 그의 머리칼에서 느껴지는 감각과 그의 입술에 의한 애무 때문에 그녀는 걷잡을 수 없는 흥분 속으로 말려들고 말았다.

그녀의 혈관 속으로 흥분의 열기가 몰려와서 그녀의 심장은 거칠게 뛰었다.

그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욕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다이아나." 그가 쉰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다이아나."

꿈이 시작된 이후로 그는 한 번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의 감정은 더욱 고조되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손을 다시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부드럽게 그녀를 탐색해 갔다.

"당신은 나를 마치 꿀처럼 녹여 버렸소."

하지만 다이아나는 그와 처음으로 키스를 나눈 순간부터 자신이 벌써 녹아 버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녀는 아담에게 그대로 형태도 없이 용해되어 버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녀는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그녀는 그의 셔츠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현실 세계에서도 보았던 그의 눈가의 주름살을 보았다. 이제 그녀의 꿈속에서도 그 주름살은 존재하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옷을 입었소."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요."그녀가 속삭이면서 그의 셔츠를 잡아당겼다. 조금이라도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발버둥이었다.

아담이 그녀 대신 그 일을 해주었다. 그녀는 그가 셔츠를 찢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부츠가 바닥에 부딪치면서 내는 둔탁한 소리도 들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가 반바지의 단추를 풀려는 걸 보았다.

"아니에요."그녀가 간신히 말했다. 그녀의 음성은 욕망으로 인해 거칠게 변해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건."떨리는 손으로 그녀는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길에 그의 흥분이 점점 고조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담의 도움으로 그녀는 그의 바지를 벗겼다. 잠시 후에 그녀가 입은 옷이 몸에서 벗겨져 나가 바닥에 쌓이기 시작했다. 그녀와 그녀의 해적 연인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서로 몸이 닿은 채 그들은 서로를 애무해 주었다. 잠시 후 그건 엄청난 열정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기쁨이 너무나 격렬해서 다이아나는 그대로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 역시 열정에 휘말려 있었다.

"아담."

"다이아나."

그들이 서로를 부르는 이름은 너무나 친근하고 다정하게 여겨졌다. 그들의 육체는 서로를 뜨겁게 갈망하고 있었다.

"난 당신을 원해요. 당신을."

그의 손길이 그녀를 탐색해 가는 동안 그녀의 생각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의 손길은 마치 마술처럼 그녀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곧 그렇게 될 거요."그가 약속했다. "하지만 우선 당신을 즐겁게 할 수 있도록 해줘요. 난 당신에게 키스하고 애무하고 싶소."

그의 혀가 그녀의 상반신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의 숨결이 그녀의 피부에 뜨겁게 부딪쳐 왔다. 다이아나는 숨을 몰아쉰 채 그를 갈망하기 시작했다.

그의 애무가 깊어지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머리를 뒤로 젖힌 채 가슴 깊은 곳에서 환희의 음성을 쏟아냈다. 그는 일부러 서두르지 않고 그녀를 탐색해 갔다. 그건 고문이었다. 아주 아름다운 고문이었다.

그의 혀가 느릿느릿 그녀를 애무해 가는 동안 열정의 한숨은 점차 환희의 외침으로 변해 갔다. 그리고 잠시 후엔 애원의 속삭임으로 변해 갔다. 그는 다이아나의 욕구를 알고 있었고, 그녀를 성취에 이르게 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그의 입술과 혀는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그의 키스에서 그녀는 자신의 여성다움의 본질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를 절실하게 원하고 있었다. 여태껏 그녀는 지금 이 순간처럼 무엇인가를 절실히 원해 본 적이 없었다.

", 다이아나."그가 속삭였다. "당신은 나를 고문하고 있소."그녀의 나직한 음성은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니에요. 당신이 더 격렬한 고문을 하고 있어요."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제 우린 완벽하게 하나가 될 거요."

", 아담."

그는 그녀를 소유했다. 그녀는 기꺼이 그를 받아들였다. 그는 다이아나를 완벽함으로 채워 주었고, 환희의 깊은 경지로 이끌어 갔다.

아담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그의 짙고 강렬한 눈빛에 그대로 말려들어가고 말았다. 그에게서는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그에게 더욱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그녀의 손톱이 거의 뜨겁고 축축해진 살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그의 이름을 불러댔다.

다이아나의 세계는 아담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다. 엄청난 환희가 몰려와서 그녀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그들은 구겨진 시트 위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두 사람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다이아나는 두 사람의 황홀한 숨소리를 들으면서 조용히 누워 있었다. 꿈은 곧 끝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말할 수 없이 평화롭고 만족스러웠다. "오직 내 꿈 속에서만."그녀는 중얼거리면서 부드러운 그의 등 근육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만약 이것이 꿈이라면 난 영원히 깨어나고 싶지가 않소."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은 꿈이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그걸 알 것인가? 그는 단지 그녀의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다. 다이아나는 자신의 환상 속에서 좀 더 있고 싶었다. 좀 더 오래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아담, 밤새도록 나와 함께 있어 줘요. 내가 깨어날 때까지나와 함께 있어 줘요."

그녀 주변의 모든 것이 희미해지면서 그녀는 그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이건 그저 꿈일 뿐이야. 그저 꿈일 뿐이라구." 다이아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미친 듯이 침대에서 내려와 잠겨진 문 쪽으로 달려갔다. 창문에는 빗장이 질러져 있었다. "하지만 이게 꿈이라면 왜 나는 깨어나지 않는 거지?" 그녀는 올랜도에 있는 집에서 잠이 깰 거라고 기대했다. 잠에서 깨어날 때 그녀의 가슴속은 아담 호크 선장과의 환상여행으로 인한 만족감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눈을 뜬 곳은 당연히 그녀의 방이어야 했다. 청동 침대와 등나무 가구가 있는 그 방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로그스 케이에 있었다. 모든 것이 전날 밤의 풍경과 똑같았다. 그녀의 앞에는 작은 마을이 보였고, 아침 햇빛에 해변이 나른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블랙 호크는 청록색의 바다에 닻을 내린 채 서 있었다. 침실 구석에는 그녀가 목욕을 했던 나무 욕조가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실내복이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다. 또 침대 위에는.

", 안 돼." 그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침대 위에는 그녀의 환상 속의 해적이었던 아담 호크가 누워 있었다. 그것도 완전히 나체가 되어서. 다이아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눈을 꼭 감았다가 다시 떠보았다. 그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그의 길고 단단한 몸매가 구겨진 시트 위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었다. 그녀의 심장이 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리가 너무나 아파서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이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녀는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이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는 거야.

그녀는 경황없이 방을 가로질러서 아담에게 다가갔다. 어쩌면 그는 유령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녀의 꿈이 남긴 잔재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를 만져 보았다. 그녀의 예민해진 손가락은 진짜 인간의 살을 만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힘껏 꼬집어보았다. 그가 신음소리를 내면서 몸을 굴렸다.

갑자기 다이아나는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비명소리에 놀란 그가 재빨리 침대 밖으로 나왔다.

"맙소사, 마이 레이디, 도대체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당신 때문이에요!"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러댔다. "당신은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에요. 당신은 꿈에서만 나타나게 되어 있다구요! 어서 꺼져요!"

그녀는 그를 밀어 보았다. 하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주먹을 움켜쥔 채 그의 가슴을 미친 듯이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맙소사! 이제 그만해 둬요!"그가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고 거칠게 흔들어댔다. "당신은 미친 여자처럼 행동하고 있소."

그녀가 비명을 질러대는 걸 그치자 그가 억세게 쥐고 있던 힘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 주었다. 하지만 완전히 놓아 준 건 아니었다.

"다이아나, 이제 좀 나아졌소?" 그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난 당신을 묶어 두고 싶지는 않아요."

"안 돼요. 그건 말도 안 돼요."

그가 양손을 밑으로 내렸다.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는 동안 다이아나는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완전히 나체 상태였다. 그건 아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건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도와줘요." 그녀가 애원하듯 말했다. "도와달라구요. 난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제발 내게 진실을 말해 줘요."

그가 아래로 손을 뻗쳐서 실크 실내복을 집어 들었다. 다이아나는 옷을 받아들어 입고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몇 발짝 떼고 나자 다시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건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렇게 몽롱한 상황에서 놀랍게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아담이 바지를 입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가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다이아나는 다시 비명을 질러대고 말았다.

그 늙은 노파가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여태까지의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증거가 더욱 확실해진 셈이다.

"선장님, 도대체 어떤 여자인지 정말 모르겠어요." 그 할머니가 방 안으로 들어서면서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요. 마틸다."

"처음에 저 아가씨는 음식을 거절했어요. 그리고 이제는 온 천지가 떠나가도록 고함을 질러대고 있어요."

다이아나는 비명소리를 멈추었다. 이제 와서 비명을 질러 봤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비명을 질러댄다고 해서 아담이나 그 할머니가 떠나가는 것도 아닐 것이다.

아담이 노파에게 방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마틸다, 나도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할머니가 이 숙녀를 도울 수 있을지도 몰라요. 난 이 아가씨가 정말 미쳐 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 아가씨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잠을 잘 수 있는 약이 필요한 것 같군요."

순간 다이아나가 격렬하게 머리를 저었다. "안돼요! 이제 약이나 와인은 더 이상 마시지 않겠어요. 내 문제는 모두 약과 와인 때문에 시작되었단 말예요! 난 커피를 마시고 싶어요. 아주 많이!"

다이아나는 아담과 노파에게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테이블을 꼭 움켜잡았다. 그것이야말로 그녀의 안전판이었다.

"마틸다, 레이디 다이아나가 원하는 대로 커피를 갖다 줘요."

"선장님은 어때요? 커피를 드시겠수?"

"나는 홍차나 한 주전자 갖다 줘요.. 그리고 약간의 음식도 함께. 오늘 아침엔 몹시 시장하군요."

그가 다이아나를 의미심장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시선을 무시해 버리고는 테이블을 놓고서 근처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제는 더 이상 꿈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척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녀는 그런 척을 한 적도 없다. 아담 호크는 어쩌면 미쳐 버린 사기꾼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스스로 자신이 18세기에 살고 있다고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그동안 다이아나가 애써 밀쳐놓았던 공포심이 서서히 다시 몰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그 두려움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건 원치 않았다. 그래 봤자 다시 비명이나 지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틸다." 다이아나가 큰 소리로 노파를 불렀다. "말해 줄 수 있어요? 지금이 몇 년인지."

마틸다가 잠시 멈춰서 앙상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기 시작했다.

"난 지금이 몇 년인지 정확하게 모르겠어, 아가씨. 하지만 새해가 방금 지나갔다는 이야기는 들은 것 같아."

아담이 다이아나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마틸다는 연도에 대해서 거의 알 필요가 없는 사람이오. 마이 레이디, 하지만 내가 말해 줄 수 있어요."

"좋아요."다이아나는 겁먹은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은 17241월이오."

그 순간 다이아나는 차갑고 습한 땀 속에서 그대로 폭발해 버릴 것만 같았다. 잠시 동안 그녀는 자신이 그대로 기절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녀는 의자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양손은 긴장으로 굳어졌다. 드디어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음성은 아주 작고 희미했다.

"하지만정말로그러니까 내 말은."그녀는 문장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머릿속의 혼란과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마틸다, 할머니는 태어난 해가 언제인지 알고 있나요?"

"그럼, 알고말고."노파가 자랑스런 어조로 말했다. "1660년 런던에서 태어났어. 우리의 조지 왕이 태어난 해와 같은 해야."

방이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이아나는 마틸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 늙은 여자가 진심을 말하고 있다는 걸 다이아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노파는 너무나 순진해서 남을 속이거나 게임 같은 걸 할 수가 없었다.

다이아나는 뒤로 몸을 기대고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커피 좀 주세요."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말했다. "나에게 신문을 좀 갖다 주세요. 날짜를 봐야겠어요."

"여기는 런던이나 보스턴이 아니오."아담이 말했다. "여기엔 신문이 없어요. 하지만 우리는 음식을 제공할 수는 있소." 그는 마틸다에게 몸을 돌리고 명령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 서둘러 줘요."

그런 다음 그녀는 낮은 테이블을 가로질러 다이아나의 머리칼을 만졌다. 그녀는 뒤로 물러섰다.

"내 손이 닿는 게 그렇게 역겨워요?" 그가 거친 어조로 말했다. "어젯밤엔 당신은 그걸 매우 즐긴 것 같았소. 아니면 어젯밤도 오늘처럼 당신의 미친 위장술의 일부일 뿐이오?"

다이아나는 머리를 들어서 그를 노려보았다. 어젯밤다시 두려움을 느끼면서 그녀는 어젯밤의 일을 생각 밖으로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것은 집요하게 그녀에게 다가와 있었다.

어젯밤아담과 함께 침대에 누워 있었지. 그들이 나눈 성적인 언어와 함께 마법과도 같은 순간들을 떠올리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불꽃처럼 달아올랐다. 그들은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친근한 순간들을 함께 나누었다.

"당신은 누구세요?"그녀가 물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정말로 누구인지 묻고 있는 거예요."

"당신을 블랙 호크에 태운 이후로 내가 줄곧 말했던 것처럼 난 아담 호크 선장이오. 해적이거나, 때로는 변절자가 되기도 해요. 그건 바로."

"당신은 지금이 1724년이라고 믿고 있나요?"

"믿는다고? 이봐요, 난 마틸다처럼 문자를 모르는 하인이 아니오. 난 연도를 정확히 알고 있어요. 그리고 내가 앉혀 놓은 조지가 영국의 왕이라는 것도 알고 있소. 그리고 메인의 부주지사가 당신의 대부라는 것도 알아요. 그리고."

"당신이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이 또 있어요."다이아나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난 레이디 다이아나 트레몬트가 아니에요. 난 그냥 다이아나 트레몬트에요. 나는 왕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에요. 지난 2세기 동안에 틀림없이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아주 많았을 거예요. 아담 호크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그녀는 자신이 두서없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튼 다이아나 트레몬트라는 이름을 가진 여가가 아담 호크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를 만났어요. 그렇다면 내가 바로 그 여자예요. 하지만 내가 만난 남자는 그와는 다른 아담 호크예요. 우리가 올랜도를 떠난 뒤 폭풍우가 몰아쳤어요. 나는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어요. 그런데 시간이 뒤섞여 버린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지금 여기에 있게 되었어요."

"마이, 레이디 당신은 전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혹시 열이 있는 거요? 아니면 머리에 충격을 받아서 미친 증세가 나타난 거요?"그가 이마를 찌푸렸다.

"아니에요!" 다이아나가 소리쳤다. "난 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미친 것도 아니에요. 난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온 다이아나 트레몬트예요. 20세기에 살고 있어요. 그런데 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당신은 미친 게 틀림없군요."

"아담, 나 역시 당신처럼 이런 상황을 더 이상 믿을 수가 없어요. 시간 여행이란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나 가능한 거예요. 실제로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어요. 난 다이아나 트레몬트에요. 1994년에 살고 있어요. 그리고 나는 판타지 페어라는 가게를 갖고 있어요. UFO같은 건 믿지도 않아요. 그리고 시간 여행 같은 것도 결코 믿지 않아요. 아담, 그러니까 내게 진실을 말해 줘요." 그녀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시간 여행을 온 게 아니라면 난 어떻게 이곳에 있는 건가요?"

"마이 레이디, 당신은 블랙 호크에 올라왔어요."

", 제발 그런 말 좀 하지 말아요. 당신은 내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군요. 난 시간을 거슬러 왔단 말예요."

"그건 불가능한 일이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그게 가능하든, 가능하지 않든 난 지금 여기 있어요. 내가 이곳에 온 거라면 난 당연히 다시 돌아갈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시 시간 여행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는 거예요. 당연히 다시 돌려놓아야 해요. 그렇지 않나요? 그게 불가능하다면 난 미쳐 버리고 말 거예요.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는 미치광이가 되고 말아요."

"미치광이?"

"미쳐서 제정신이 아닌 사람 말예요. 당신도 이해 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닌가요? , 마담,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요. 난 레이디 다이아나가 아니에요. 난 미래에서 온 또 다른 다이아나예요. 나는."

그가 미소 짓는 동안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그 순간 다이아나는 예전의 아담도 똑같은 주름살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그 기억으로 인해 그녀는 더욱 심한 혼란 속에 빠져 버렸다.

"그럼 지금 당신은 유령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요? 그러니까 당신은 귀신에 지나지 않았다는 거요? 그렇지 않아요, 마이 레이디. 내가 같은 침대를 함께 사용했던 여자는 진짜 사람이었소."

"물론 나는 유령이 아니에요."그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걸 알고 다이아나는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난 진짜 사람이에요. 하지만 다른 시간에서 온 사람이에요.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난 이곳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구요. 그러니까 내가 속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알겠소!" 그가 고함을 질러대면서 주먹으로 테이블을 거칠게 내리쳤다. "몸값이 지불되기 전까지는 당신을 석방할 수가 없어요.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어요. 그건 불가능한 일이오. 난 합리적인 사람이고, 세상 이치를 많이 알고 있어요. 당신의 바보 같은 환상은 교육을 덜 받은 사람에게는 통할지 몰라도 나에게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요."

그때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마틸다에게 이런 이야기는 하지 말아요. 영혼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하면 그 할머니는 겁을 먹게 될 거요."

"할머니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단지 뭔가 조치를 취하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리고 그 일을 해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예요. 당신과 나란 말예요."

그녀는 그가 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뭔가 우습고 기묘한 일이 버려져서 그녀는 과거의 또 다른 세기로 이동해 왔다. 그래서 그녀가 알고 사랑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 있게 된 것이다.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엄청난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래서 그녀는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스스로 탐색해 볼 수조차 없었다. 단지 다시 비명을 질러대면서 그 방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도망을 칠 수도 없었다.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황이 일어날 때마다 거기에 대처하는 일뿐이었다. 기대할 것도 없었다. 다음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대비를 하거나 전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설명을 할 수도 없었다.

할머니가 쟁반 위에 신선한 과일과 빵, 차와 커피를 담은 주전자를 들고 들어왔다. 그제야 다이아나는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직접 커피를 마셨다. 뜨거운 블랙으로.

이제 그녀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아담에게 이해시켜야 했다. 그의 도움을 청해야 했다. 사실 그녀는 아담에게 완전히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아담은 그의 홍차를 따르고 빵에다 잼을 발랐다. 그 동안에도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다이아나를 바라보았다.

"레이디 다이아나, 당신은 아주 신비한 여자요. 아주 다양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요. 당신은 나와 싸우기도 하고, 나와 사랑을 나누기도 했소.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쏟아놓기도 하고."

"나를 레이디 다이아나라고 부르지 말아요."그녀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냥다이아나일 뿐이에요. 당신도 나를 그렇게 불러 주길 원해요."

"좋아요. 당신이 평범한 여자인 것 같지는 않지만 원한다면 그렇게 하겠소."

그가 활짝 웃었다 비록 엄청난 혼란 속에 빠져 있긴 했지만 다이아나는 그가 대단히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길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다이아나가 아무리 머리를 돌려도 커다란 침대는 여전히 그녀의 시야를 차단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그녀의 연인이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녀는 모든 걸 기억했다. 그리고 그의 말이 그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해 주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이 문제를 처리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녀를 인질로 붙잡아 둔 이이 해적과 어떤 관계를 이어가야만 한다.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인질로 붙잡힌 사람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드라마를 떠올리는 순간 다이아나의 마음은 미친 듯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탈출했던 방법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녀는 이 남자를 힘으로는 제압할 수 없다. 그는 다시 찢어진 셔츠를 입었지만 그의 강렬한 근육이 물결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미친 척 해보이는 방법으로도 아담 호크 선장을 감동시키진 못할 것이다. 차라리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오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것이야말로 인질들이 주로 쓰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닌가? 그에게 아첨을 하면서 모든 것이 정상인 것처럼 행동하다가 상황이 바뀔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다면."그녀는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바꿔서 물었다. "당신은 여기 바하마 제도에서 태어났어요?"

그 말에 아담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 않아요, 마이 레이디, 난 이 섬에 온 지 얼마나 안 되는 편이오. 하지만 난 이 섬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해왔소. 나의 배가 처음으로 이곳에 상륙했을 때 로그스 케이는 해적선에 있던 난폭한 선원들이 점거하고 있었소. 그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소. 우선 우리는 우리의 노획물과 상품을 여기다 갖다 둘 수가 있었소.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 불안해하는 남자들을 이주시켰소. 그들은 조지 1세의 법률과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소."

"여자들은?"

"여자들도 있었소."

아담은 망고를 한 입 베어 먹었다. 그런 다음 손등으로 입을 훔친 다음 다이아나를 응시했다.

"남자들이 선원으로 있는 몇 달 동안 그들은 여자의 필요성을 절감했소. 사실 그 문제에 있어서 당신은 어젯밤에 나를 만족시켜 주었지."

다이아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리고 오늘 아침 나는 다시 욕망을 느꼈소. 다이아나, 나를 쳐다봐요."

"싫어요."그녀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계획대로 밀고 나가서 그걸 성공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다면 어젯밤의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여자들에 대해서."

"그래요. 욕망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소." 그가 다시 과일을 베어 물었다."그들의 여자들을 이곳으로 데려오기 시작했어요. 내가 남자들과 여자들을 모두 돌보아 주었소. 그들은 안전하게 사업을 계속하고 있어요."

"그랬을 거예요."

다이아나도 아담처럼 과일을 한 조각 집어들었다. 그건 바나나였다. 그녀는 바나나의 껍질을 벗겨서 맛을 보았다. 달콤하고 맛이 있었다. 그녀가 슈퍼마켓에서 사먹었던 과일과는 다른 맛이었다.

"그런 당신은 어디서 자랐나요?"

"식민지의 땅에서."

"." 다이아나는 깜짝 놀랐다. 그건 미국을 의미했다.

"나의 부친인 사이몬 호크는 식민지의 땅에서 가장 훌륭한 조선업자 중 하나였어요. 그는 리버풀에서 할아버지에게 사업을 배웠소."

"당신의 가족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했나요?"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식민지의 땅에서 말예요."

그제야 아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자란 마을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바다에서 생계를 해결했어요. 해상 운반, 고기잡이, 그리고 조선업 등이었소. 그놈의 항해 조례가 시작되기 전에는 우리 마을은 아주 부유했었소."

"항해 조레? 그렇다면."

다이아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역사를 떠올렸다. 그녀는 영국의 항해 조례가 식민지들의 반발을 사게 한 원인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한 사실들은 알 수가 없었다.

아담이 일어서서 그녀를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왜 당신처럼 광대뼈가 나온 여성들은 남자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일에 흥미를 느끼는 거요?"

다이아나는 입을 열려다가 즉시 다물어 버렸다. 지금은 아담의 성 차별주의에 대해 항의를 할 때가 아니다. 그녀는 아담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계획을 세우기로 마음을 다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계획 제1조였다. 그런 다음 제2조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난 거의 아는 게 없어요. 하지만 대단히 호기심을 느껴요." 다이아나가 말했다.

그가 그녀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 법률은 간단하게 말하면 식민지 땅에서 나온 상품은 영국에서만 팔아야 한다는 거였소. 대륙의 다른 항구에서는 팔 수가 없다는 거요. 그리고 식민지 땅에 있는 우리들은 영국에서만 물건을 사야 했소. 그리고 관세가 얼마가 되든 왕명에 따라서 지급을 해야 했어요."

"그러니까 일종의 무역 제한이었군요? 그러니까 당신의 마을에 사는 사람이 그의그의 물건을 팔고 싶으면."

그녀는 그 마을에서 팔 수 있는 물건을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우리는 목재를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팔았어요. 그런데 그럴 수가 없게 되었소. 목재는 영국에게만 팔아야 해요. 그것도 다른 곳에서 받을 수 있는 가격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그건 아주 불공평한 일이군요."

다이아나는 영국이 자기의 식민지 친구들을 그렇게 취급했던 결과에 대해 아담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적어도 지금은 밝힐 수가 없다.

"불공평하다고? 그건 정말 악당과도 같은 짓이었소." 아담이 경멸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당신은 법망을 피하는 해적이 되었군요? 어디선가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요. 정의의 편에 서 있는 해적들의 이야기를."

그가 차갑게 그녀를 응시했다. "해적이 아니었소. 나포선을 갖고 있었소. 그건 완전히 합법적인 것이오. 하지만 나는 그게 정당한 것이라고 말하진 않겠소, 마이 레이디."

"나도 그 이야기는 알고 있어쇼."

"천만에당신은 모를 거요."

"안다고 했잖아요?"

그가 벌떡 일어서서 두 손을 허리에 대고는 멸시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마이 레이디, 그럼 어서 말해 봐요. 타국 상선 나포 면허장이 무엇이오?"

다이아나는 머리를 정리한 다음 대답을 내놓았다. 그건 사회학 교제에서 익힌 것이었다.

"고위 정부 관리의 인증이 있는 허가증 같은."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소." 그는 몹시 화가난 것 같았다.

"학교에서 배웠어요."

"당신은 여자가 아니오?"

"맞아요. 난 여자예요." 그녀가 소리쳤다. "그럼 당신은 내가 얼간이라고 생각하나요?"

"얼간이?"

"바보 천치에다 미치광이 말예요! 당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는 그런 걸 표현하는 단어도 없나요?"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한동안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러니까 타국 상선 나포 면허증이란 나포한 배를 가져도 좋다는 일종의 허락이에요. 영국의 적군으로 주로 프랑스나 스페인의 배를 말하죠. 그 배들이 가져온 상품들을 모두 몰수해서 그걸 다시 미국그러니까 식민지의 땅에다 다시 파는 거죠."

"그런데 상품이라는 게무슨 뜻이오?"

"당신이 노획 물건이라고 말하지 않았나요?"

"맞아요." 그가 웃었다. "우리의 노획물은 나포된 스페인의 갈레온 배에서 가져온 것이오. 우리가 그 배를 메인에 있는 나의 마을로 끌고 왔어요. 그 물건들이 스페인의 것이니까 우리는 세관에 신고할 필요가 없었소. 우린 아주 자유롭게 행동할 수가 있었지."

"영국인에 대한 복수로군요. 하지만 놀랄 일도 아니에요. 그건 우리의 나라에서 만들어진 방법이니까."

"우리의 나라?"

"식민지의 땅 말이에요."

"식민지의 땅에서는 부자들이나 반항적인 사람들만이 이길 기회를 가질 수가 있어요." 그의 음성은 어느새 신랄하게 변해 있었다.

"당신은 부자가 아닌가요?"

아담이 머리를 젖히고 웃음을 떠뜨렸다. "천만에요, 마이 레이디.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엄청난 보복이었군요?" 그녀도 함께 웃으면서 말하다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물었다. "정말 무슨 일이 있었군요?"

"그래요."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이건 당신도 아주 잘 아는 부분이오. 레이디 아이아나. 물론 당신은 모른다고 항의할 거요. 해상 관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소. 나의 타국 상선 나포 면허증에 서명을 했던 관리가 그 사실을 부인했어요. 그는 그 면허증이 위조된 것이고, 나와 내 부하들을 나포선의 선원이 아니라 해적이라고 선언했어요."

"그럼 당신은 교수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겠군요!"

"실제로 나는 교수대로 끌려갈 뻔했어요. 마을의 착한 사람들이 날 도망치에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렇게 되고 말았을 거요. 그래서 결국 이곳으로 오게 된 거요." 그가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다이아나는 그의 명령에 따를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어느새 아담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는 창문 옆에 서 있었다.

"당신이 여기서 볼 수 있는 게 무엇이오?"

그녀는 밖을 내다보았다. "항구그리고 당신이 나를 끌고 지나왔던 마을도 보여요." 그녀는 그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박되어 있는 배도 보여요."

"모두 내 것이오."

"그렇다면 왜 당신이 그 조그만 메인의 항구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나요? 당신은 이곳에 모든 걸 갖고 있는데."

"마이 레이디, 내 이야기를 끝내게 해줘요."

다이아나는 그의 말에 따랐다. 그건 아주 기묘한 좌절의 역사였을 것이다.

"스페인의 노획물은 압수되었소."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의 조선소도 몰수당했소. 아버지는 투옥되었어요. 나와는 달리 아버지는 탈출을 하지 못했소. 아버지가 구속되어 있는 마당에 여기 있는 게 모두 내 것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은 없나요? 국왕에게 탄원을 해볼 수도 있잖아요?"

아담이 머리를 저었다.

"그러면 어떤 고위관리가 틀림없이 당신을 도울 수 있을 거예요."

그가 다시 웃었다. 아주 차갑고 냉소적인 웃음이었다. "마이 레이디, 당신의 농담은 그리 오래 가지를 못하는군요. 당신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서 무한한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아주 잘 알고 있어요."

"뭐라구요?"

"당신의 대부."

"아담, 도대체 몇 번이나 이야기를 해야 알아듣겠어요? 나에겐 대부가 없어요."

"그럼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봐요. 당신은 어떻게 타국 상선 나포 면허장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학교 다닐 때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어요."

"난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당신이 믿든 안 믿든 그건 진실이에요.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난 그 어휘를 기억하고 있어요."

"잠꼬대 같은 소리 말아요."

"어쩌면 나의 환상 때문에 기억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당신은 다시 미친 소리를 하고 있군."

"그래요. 해적에 대한 모든 환상이 나를 18세기에 대한 모든 걸 기억하게 만들었어요." 그녀의 말은 아담에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마치 그녀 자신에게 하는 것 같았다.

"그럼 이런 사실을 기억해 봐요." 그가 명령했다. "메인의 부주지사인 윈스턴 그렌빌 경이 내 아버지를 망쳐 놓고 어머니를 집에서 끌어갔소. 그리고 나를 무법자로 만들었지. 그걸로도 부족해서 지금까지 나의 아버지를 가둬 두고 있어요. 그 윈스턴 그렌빌 경이 바로 당신의 대부요. 물론 당신은 부정하겠지만 말이오. 그는 나의 아버지를 붙잡아 두고 있소! 그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겠소?"

다이아나는 비로소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불길한 예감 같은 것이 그녀를 덮쳐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나를 붙잡아 둔 건 돈 때문이 아니군요? 당신은 나를 당신의 아버지와 교환할 생각이군요?"

아담의 검은 눈동자가 위험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아버지를 석방시킬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소."

다이아나는 자신의 몸이 싸늘해지는 걸 느꼈다. 그녀가 비틀거리자 그가 붙잡아 주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친 채 몸을 돌려서 방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그녀는 나직한 목소리로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어. 바로 그거야. 나는 사이몬 호크가 자유를 향해 떠날 수 있는 티켓인 셈이야."

 

6장 자유를 향한 갈망

"레이디, 당신의 얼굴이 아주 창백해요.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아요."아담의 표정은 걱정스럽다기보다는 화가 나 있었다.

"나에겐 맑은 공기가 필요해요. 제발." 다이아나는 밀페 공포증 같은 걸 느꼈다. "이 방에 너무 오래 있었더니 숨을 쉴 수가 없어요. 아담, 제발 나를 밖으로 내보내 줘요." 다이아나가 애원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그녀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 그는 그녀를 데리고 계단을 내려가더니 홀을 통과해서 뜰과 인접한 작은 정원으로 들어갔다. 다이아나는 열대의 꽃들 사이에 놓여 있는 대리석 벤치에 앉았다.

"이제 당신도 이해할 수 있을 거요. 교환 조건이 성사될 때까지 당신을 안전하게 데리고 있어야 하는 이유를." 아담이 말했다. "지금 몸값을 요구하는 편지가 당신의 대부에게 우송되고 있는 중이오."

다이아나는 새로운 공포를 느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모든 걸 정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섬에 인질로 잡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담 호크야말로 그녀를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만약 그가 다이아나를 자유롭게 해주기로 결심하게 되면 그는 그녀를 대부에게 넘겨 줄 것이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그 대부라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더 커져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설혹 그녀가 자유의 몸이 된다고 해도 그녀는 여전히 18세기라는 시간적 공간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혀끝으로 초조한 듯 입술을 축였다. "아담, 나에게 말해 봐요. 그 교환 시기가 얼마나 걸릴까요?"

"그건 확실히 말하기가 힘들어요."

"몇 주? 아니면 몇 달?"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요. 결국 그렌빌은 자신의 대자를 빨리 되찾고 싶어할 거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의 딸이니까."

", 윈스턴은 좋은 대부님이시군요!"

아담이 그녀의 곁에 앉아서 양쪽 다리를 쭉 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나는 이 거래가 성사되기를 더 이상 원치 않고 있소. 나는 당신을 다르게 보게 되었소. 특히 어젯밤의 일 이후로는." 그가 짙은 갈색 눈동자를 돌려서 다이아나를 응시했다. "당신과 그토록 열렬하게 사랑에 빠지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소."

"그런 게 아니라."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당신이 로그스 케이에 있는 기간을 연장시킨다면 우리 둘에게 아주 좋을 것 같소."

다이아나의 신경이 다시 곤두서기 시작했다. 아담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또 다른 세기에서 그녀에게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손길이었다.

"아담."

그는 말없이 그녀의 목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이 위험스럽게 그녀의 가슴 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그를 뿌리치려 했지만 너무 늦어 버렸다. 그녀는 벌써 그의 마술에 걸려들고 말았다. 내부에서 퍼덕이던 느낌이 어느새 뜨거운 열정과 갈망으로 터지려고 한다.

아담의 음성은 매우 유혹적이었다. "레이디?"

"이건 옳지 않아요."

"다이아나, 로그스 케이에서는 사랑을 나누는 것에 대한 규칙 같은 게 없어요. 낮에는 그 나름대로 특별한 기쁨이 있지."

아담의 손길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자 다이아나는 눈을 감았다. 어느새 그의 손은 여자의 가슴에 닿아 있었다. 그의 손길 아래서 그녀는 흥분을 이기지 못한 채 몸을 떨었다. 육체가 마치 불 위에 올라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나른한 부드러움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안 돼요!" 그녀는 갑자기 소리치면서 그에게서 물러났다.

아담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흔들렸다. 이어 그의 거친 음성이 들려왔다. "마이 레이디, 어젯밤 당신은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았소. 사실 당신이 나를 침대로 끌어들인 거요. 당신은 나로 하여금 당신이 인질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만들었소. 그 덕분에 나는 우리 사이에 사랑의 행위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말았소. 당신은 내가 모든 걸 잊어버리게 만들었소." 그의 음성은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내가 그렇게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게 정말 다행이오."

"그건 어젯밤의 일이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어젯밤에 당신은 실제의 인물이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그곳에 있긴 했지만 난 당신이 누구인지 몰랐다는 뜻이에요. 이제 당신이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나눈 사랑의 행위도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난 그걸 원치 않아요. 맙소사, 난 내 감정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요. 그렇죠?"

"솔직히 말해서 당신은 지금 미친 여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소." 그가 일어섯 벤치에서 멀어져 갔다.

"아담, 제발 이해해 주세요. 난 당신을 전혀 모르겠어요."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마이 레이디, 난 우리가 서로를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믿어요. 어젯밤 우리는 서로를 속속들이 알게 되었소."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진짜 매춘부처럼 열정적이었소. 그런 여자도 있다니 난 정말 놀라웠소. 침실 밖에서는 엄격한 숙녀였는데 침실에서는."

다이아나가 신음소리를 냈다. ", 아담, 제발난 어젯밤의 일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광대뼈가 치켜 올라간 레이디 다이아나는 결혼 첫날밤을 위해서 정조를 안전하게 간직하는 그런 여자일 거라고 생각했었소."

"레이디 다이아나는 숫처녀일지도 모르죠. 어쩌면 그녀는 정조대까지 차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나는 레이디 다이아나가 아니기 때문에."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아주 도전적인 어조로 다시 말했다. "그래요. 난 사랑에 빠진 적이 있어요. 나에겐 연인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건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에요. 그리고 당신이 상관할 문제도 아니에요."

"당신 말이 옳아요, 마이 레이디. 난 판단을 해서는 안 돼요. 더구나 이렇게 어린 아가씨를."

"어리다구요? 난 스물여섯 살이에요. 인생을 경험하기엔 충분한 나이라구요." 그녀는 좌절의 표시로 양손을 위로 들어 보였다. "도대체 내가 왜 당신에게 이런 해명을 해야 하나요?"

"스무 살하고도 여섯이란 말이오?" 그가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당신의 치아와 부드러운 피부로 미루어서 스물한 살 정도라고 생각했소."

"현대의 치과 기술과 화장품 덕분이죠." 다이아나가 중얼거렸다. "아담, 이런 일들이 모두 우리 사이에 넓은 틈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거예요. 당신은 20세기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해요. 그리고 나 역시 18세기에 대해서 더 이상 아는 건 원치 않아요. 이제 난 현실적인 상황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했어요. 아니면 내가 단지 현실로 생각하고 있는 것뿐인지도 모르죠. 아무튼 우리 사이에는 가능한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이해하시겠어요? 나는."

그가 그녀의 팔을 움켜잡고서 그녀를 홱 돌려 놓았다. "마이 레이디,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소."

태양이 마치 눈을 멀게 할 만큼 강렬하게 그녀의 얼굴에 부딪쳐 왔다. 그녀는 팔을 들어서 눈을 보호했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은 거짓이 조금도 개입되지 않았소. 그건 진실이었고, 욕망으로 가득 찬 것이었소. 우리의 사랑은 열정으로 가득 채워진 것이었소. 당신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거요."

다이아나의 눈동자가 태양에 조금 익숙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당혹감으로 여전히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래요, 당신 말이 옳아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옳지 못한 일이었어요. 난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다이아나는 다른 시대의 것이 분명한 작은 뜰을 둘러보았다.

"정말 난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녀는 같은 말을 반복한 다음 그에게 몸을 돌렸다. "당신은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난 당신의 인질이니까 당신은 나를 보호해야 해요. 나는 당신이 내 사생활을 보호해 주기를 원해요." 그녀는 그의 눈길을 피해서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내 침실은 나의 것이어야 해요. 오직 나만의 것이어야 해요. 당신과 함께 침실을 쓰지 않을 거예요."

다이아나는 그에게서 몸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마치 자신의 엄청난 힘으로 그녀와 지금의 이 상황을 좌우할 수도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려는 것 같았다.

드디어 그가 경멸하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이 레이디, 당신의 희망을 존중해 주겠소."

그가 그녀의 팔을 놓아 준 후 냉소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하지만 내 말을 명심해요. 이 집과 이 안에 있는 물건들은 모두 내 것이오." 그 사실을 인식시키려는 듯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이제 당신을 당신의 침실로 데려다 주겠소." 그가 냉정한 어조로 말하고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녀를 침실에 데려다 주었다. 다이아나가 방 안으로 들어서서 잠시 서 있는 동안 또 그 소리가 들려왔다. 열쇠로 자물쇠를 돌리는 소리였다.

격렬한 감정을 참지 못하고, 다이아나는 침대로 달려가서 쓰러지며 울음을 터뜨렸다.

 

다음날 아침, 문의 자물쇠가 열려져 있는 걸 깨닫고 다이아나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황급히 옷을 주워 입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침실 바깥 세상의 자유를 음미했다. 그녀가 홀을 따라서 서성이고 있는데 마틸다가 소리쳤다.

"레이디, 레이디! 선장께서는 아가씨가 집 근처를 어슬렁거려도 좋다는 말은 남기지 않았다구!"

"그는 나를 위해서 문을 열어 놓았어요." 다이아나가 말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집 주변을 서성이는 것뿐이에요." 그녀의 음성에는 짙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난 이 섬을 벗어날 수 없어요." 그녀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밤사이에 비행장이 세워지지 않았다면 말예요."

마틸다는 과장된 몸짓으로 팔을 들어올리더니 몸을 돌려 복도를 따라서 왔던 방향으로 다시 걸어갔다. 다이아나도 할머니가 가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실 건가요?" 다이아나가 그 말라깽이 노파를 따라잡으면서 물었다.

"그럴 생각이야."

"나도 할머니와 함께 가겠어요."

"그건 아가씨 마음대로 해. 사실 아가씨에게 신경 쓸 시간이 없어."

"그럼 내가 아침식사를 직접 만들어도 반대하지 않을 거죠?"

"아침식사 시간이 지난 지 아주 오래되었어."

"그렇다면 점심식사로 하면 돼요. 샐러드가 좋겠군요. 냉장고에 있는 야채로 만들면 근사할 거예요."

할머니의 심술궂고 완고한 성격이 다이아나를 즐겁게 만들었다. 사실 침대에 누워서 눈물이 말라 버릴 때까지 우는 일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우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차라리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 편이 그녀를 제정신으로 붙잡아 둘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선장님은 아가씨가 미친 듯이 떠들어댈 테니까 신경쓸 것 없다고 하셨어. 내가 로스트 비프를 한 조가 만들어 줄게."

"싫어요. 나는 붉은 고기를 조그만 먹어야 해요. 의사가 그렇게 명령을 내렸어요. 콜레스테롤 때문이죠."

그만 해, 다이아나. 그녀는 스스로에게 명령했다. 그래 봤자 네 이야기에 웃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다이아나는 마틸다를 따라서 좁다란 옆뜰을 통과했다. 그리고 또 다른 뜰을 지나서 커다랗고 습기 찬 주방으로 들어섰다.

마틸다는 나무로 도니 넓은 도마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커다란 물고기를 칼로 썰기 시작했다.

"무슨 요리를 하려고 해요?" 다이아나가 물었다. "생선을 토막내서 썰기로 해요. 내가 새로운 요리법을 알려 드리겠어요. 후추를 많이 넣어서 까맣게 하는 요리 말예요." 다이아나는 주방 안을 둘러보았다. "물론 후추는 있겠죠?"

마틸다의 입술이 굳어졌다. "선장께서는 아가씨가 주방에서 일을 돕는 것에 대해선 아무 말씀도 없으셨어. 여기서는 내가 요리를 해야 해. 그리고 이 생선으론 선장님의 스튜를 만들 거야."

"그렇다면 그 사람이 우두머리인가 보군요." 다이아나는 나무 그릇에서 바나나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래, 그가 우두머리야. 그런데 그는 아가씨가 나와 함께 주방에 있는 건 원치 않을 거야. 그리고 아가씨가 입고 있는 옷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걸."

"할머니가 이 옷을 찾아 주셨으니까 책임을 지세요."

다이아나는 어깨를 으쓱한 다음 바나나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판타지 페어의 가운이 전혀 입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그녀는 마틸다를 꾀어서 하녀들의 방을 뒤져 입을 만한 옷을 찾아오게 했었다.

그렇게 해서 지금 그녀는 하얀 블라우스와 느슨한 갈색 스커트를 입고 있다. 블라우스는 약간 작았고, 스커트는 너무 짧았다. 하지만 20세기의 기준으로 보면 그 옷은 그녀에게 잘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아주 편안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어디 갔어요?"

뜰에서 마지막으로 함께 있은 이후로 다이아나는 아담을 보지 못했다. 그는 다이아나와의 약속을 지켜주었다. 그래서 그녀를 혼자 있게 해주고, 마틸다와 심부름하는 어린 소녀를 보내 그녀가 필요한 시중을 들어 주게 했다.

"아마 그는 다른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을 돌봐 주고 있을 거야."

"그렇군요." 다이아나가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내가 아카디아 스타일로 생선요리를 하는 걸 원치 않는다는 거죠?"

마틸다가 사나운 표정을 지었으므로 다이아나는 주방을 나와서 천천히 뜰로 걸어갔다. 돌로 된 계단을 올라갔더니 집 뒤편 근처에 있는 발코니가 나왔다. 가파른 절벽의 맨 아래에 위치한 그 집 밑으로는 반달 모양의 하얀 모래사장이 보였고, 그 너머로 카리브 해가 햇빛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부채꼴의 야자나무들과 바나나나무가 미풍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공기 중에는 오렌지 향기가 가득했다.

다이아나는 난간으로 다가가서 몸을 똑바로 세웠다. 관광객들은, 이런 장소를 여행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돈을 지불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다이아나는, 이곳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수만 달러라도 지불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나마 오늘 아침 아담이 방문을 열어 두어서 다행이다. 만약 실내에 갇힌 상태에서 지내야 했다면 그녀는 미쳐 버렸을 것이다. 읽을 책도 없고, 글을 쓰거나 스케치를 할 종이도 없고, 유머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마틸다 이외에는 말할 상대도 없었다면 어떻게 견뎌냈을까?

전날 그녀는 아담에게 자신을 혼자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그는 그 부탁을 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 그녀가 원하는 것이었을까? 사실 그 남자는 함께 있기에는 너무 위험스런 남자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있으면 그녀는 너무나 불안해져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아무튼 그는 너무나너무나 섹시한 남자였다. 그녀는 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가 자기를 보러 와주지 않는 게 자존심이 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여태껏 다이아나는 누구에게든 의존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그에게 의지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최소한 여기 들러서 나에게 필요한 게 없는지 물어 보는 예의라도 갖춰야 하잖아?"다이아나는 큰 소리로 그렇게 말한 다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다시 혼자서 말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 그건 습관이 되고 말았다. 그건 어쩌면 그녀가 미쳐 가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다이아나는 자신이 오랫동안 앉아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나 불안하고 혼란스런 상태였다. 그리고 몹시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건 그녀 자신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모님, 마인디, 해리, 판타지 페어와 아담이 몹시 애를 태우고 있을 것이다. 물론 또 다른 아담 말이다.

다이아나는 화가 나서 다시 난간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두 개로 된 떡갈나무 문이 아담의 방으로 통하는 문이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두 개의 문 중에서 하나가 빠끔히 열러 있다. 그녀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대담학세도 다이아나는 문을 안으로 밀어 보았다. 문이 열리면서 그 곡선을 따라 불빛이 방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녀는 안을 들여다보았다. 커다란 마호가니 침대가 방을 차지한 채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침대의 덮개에는 모기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를 지나쳐서 해상 도로와 지도, 그리고 그녀가 블랙 호크에서 보았던 이상한 해상 장비들이 놓여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혹시 뭔가 알아낼 수 있는 게 있을까 해서 그녀는 몸을 굽히고 지도를 바라보았다. 혹시 그녀가 알고 있는 세상의 지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엔 휘갈겨 쓴 글씨와 숫자가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앞으로 나아갔다. 너무 빨리 가느라 아담의 침대 발치에 있는 커다란 트렁크에 붙어 있는 청동으로 된 가장자리에 심하게 부딪치고 말았다. 다이아나는 무릎을 문지르면서 높은 의자에 앉았다. 반대?낮은 책꽂이가 있는 게 보였다.

그 책꽂이에는 부드러운 가죽으로 장정된 아름다운 책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다이아나는 깜짝 놀라는 한편 강한 호기심이 느껴졌다. 그녀는 책꽂이에서 책 한 권을 꺼내 펴보았다.

거기에는 '로빈슨 크루소의 삶과 이상하고 놀라운 모험'이라고 적혀 있었다. 연도를 살펴보니 1719년으로 되어 있다.

"마이 레이디, 어느 책이 재미있어요?"

다이아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책을 떨어뜨렸다. 그는 마치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방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다이아나는 애써 침착함을 되찾으려고 했다. 그리고 다시 경계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로빈슨 크루소나도 고등학교 1학년 때에 그 책에 대한 감상문을 써낸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 책을 끝까지 읽지는 못했어요."

"감상문?"

"신경 쓸 것 없어요." 다이아나는 몸을 숙여서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당신은 이 책이 초판이라는 걸 알고 있나요?" 그녀가 그 책을 아담에게 내밀었다. "초판은 엄청난 가치가 있어요."

"마이 레이디, 당신이 왜 내 책의 금전적 가치에 대해서 그토록 관심을 쏟는지 모르겠소. 하지만 나는 그 책을 팔 생각이 추호도 없어요. 내 서재는 독서를 하는 기쁨을 주는 곳이오."

다이아나는 그 책을 받아들었다. "이 책을 빌려 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오." 그가 잠시 서서 뚫어질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그런데 왜 당신은 마치 거리의 여자 같은 옷을 입었소? 마틸다에게 당신의 옷을 빨아서 수선해 놓으라고 부탁해 뒀는데."

"그 옷은 수선을 해도 소용없게 되어 버렸어요. 그리고 이 옷은 집 주위를 배회하는 데는 아주 편리한 옷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가 다시 그녀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의 시선이 아주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의 눈동자가 그녀의 몸을 계속 훑어본 다음 그녀의 가슴 근처에서 멈춰 섰다. 다이아나는 그의 시선이 주는 열기가 자신을 덮쳐 오는 걸 느꼈다.

갑자기 신경이 예민해져서 그녀는 어깨를 앞으로 웅크리고 말았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게 실수일까?

블라우스의 얇은 천이 그녀의 가슴을 꼭 조여대고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말았다.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꽉 조여진 천 때문에 가슴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다이아나가 시선을 들어 아담의 격정적인 시선을 응시했을 때 그녀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당신에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요. 아무래도 당신은 숄을 두르는 게 좋겠소." 그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사람들에게 노출되기 전에."

"혼자 밖에 나가도 되나요?"

"물론이오. 당신의 문이 열려 있지 않았소?"

"열려 있었어요. 하지만 집을 떠나도 좋다는 뜻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당신이 원한다면 어디든 가도 좋아요. 누군가의 도움 없이 이 섬을 떠나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그리고 이 섬에서 당신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쓸데없는 기대는 하지 말아요."

다이아나는 그가 뭐라든 상관하지 않았다. 혼자서 마음대로 나돌아 다닐 수 있다는 생각만 해도 그대로 날아갈 것 같았다.

"고마워요, 아담."

"천만에, 이제 내 방을 탐색하는 게 끝났으면."

"난 당신의 방을 탐색한 게 아니었어요. 단지 호기심 때문에."

그가 테이블 쪽으로 몸을 숙였다. "지난번 당신과 이야기했을 때 당신의 시아에서 벗어나 달라는 명령을 받았소." 그가 가슴에 팔짱을 낀 채 짙은 갈색 눈썹을 치켜떴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내 침실을 샅샅이 뒤지고 있군요."

"여기가 당신의 침실이라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그녀가 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런 표시도 없는데."

아담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요, 마이 레이디, 아무런 표시도 없어요. 하지만 내 생각엔 왠지 당신이 알고 있었을 것 같군요."

"당신은 대단히 오만하군요!"

그가 다시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가 손을 뻗어서 그녀의 옆얼굴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당신이 내가 자고 있는 방에 대해서 흥미를 느끼고 있다고 생각해요."

"아니에요. 나는."

"맞아요, 다이아나."

그녀는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녀의 등이 벽에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담은 그녀를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그의 손이 닿은 피부가 욱신거렸다. 다시 그녀는 의문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왜 이 남자와 마주칠 때마다 나는 이처럼 뿌리째 흔들리는 것일까? 그건 그의 오만함 때문일까? 아니면 파렴치한 행동 때문일까?

그녀는 아담이 자신에게 가하는 그 힘이 싫었다. 그 힘은 너무나 강렬해서, 한 번 스치기만 해도 어김없이 그 위력을 발휘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밀쳐내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녀 스스로 권위를 찾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웃음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더 참을 수 없는 것은, 그의 몸이 활력으로 요동󰡒?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하얀 셔츠에 조끼를 입고, 밝은 빨강의 스카프를 목에 묶고 있었다. 그녀는 그 의상 밑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뜨겁고 단단하게 부딪쳐 오는 그의 육체가 있었다. 그 기억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내부에 떨림이 번져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떨림은 천천히, 아주 고통스럽게 번져가기 시작했다.

"이제 좀 지루해졌어요." 그녀가 고집스런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이제 읽을 책도 있으니까."

"여기 있는 책 중에서 읽을 만한 책이 있던가요? 내 인질이 학자인 줄은 미처 모르고 있었소."

다이아나가 발끈 화를 냈다. "문제는 당신이 인질을 붙잡아 두었다는 사실이에요." 그렇게 격렬한 어조로 말을 한 것은 둘 사이에 피어나는 성적인 감정을 진화하기 위한 것이다. "그건 겁쟁이들이나 하는 짓이에요!"

그의 턱이 굳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따뜻했던 그의 눈동자도 어느새 차갑게 굳어져 버렸다.

"나에게 남은 방법은 오직 그것뿐이었소. 그러니까 윈스턴 그렌빌의 대녀에게서 설교를 듣고 싶은 생각은 없소."

그제야 다이아나는 화를 좀 누그러뜨렸다."인질이든 아니든 나는 당신의 협박에 넘어가진 않을 거예요. 그리고 당신도 현명한 사람이니까 내가 하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 거예요, 호크 선장님, 내가 하는 이야기에서 뭔가를 배우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순간 다이아나는 그의 눈동자에서 경탄의 빛이 어른거리는 걸 보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표정은 다시 굳어져 버렸다.

", 마이 레이디, 나는 당신에게 이미 뭔가를 배웠소. 난 어두운 휘장 밑에서 레이디 다이아나는 무한한 정열을 가진 여자라는 사실을 이미 알아 버렸소. 하지만 낮이 되면 그녀는 또 다른 세계에서 온 영혼의 이야기를 지껄이는 미친 시골뜨기 아가씨 역할로 돌아가곤 하지."

"아담, 또 다른 세계가 아니라 또 다른 세기예요!"

다이아나는 그를 밀치고 앞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그는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 그녀의 길을 막아 버렸다.

"아담 호크, 길을 비켜 줘요! 당신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어요! 조금도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구요!"

"그렇지만 나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선 잘 알고 있어요, 마이 레이디. 모르고 있는 척하는 건 바로 당신이오!"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그가 전에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갑자기 들어올려서 그의 침대로 데려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난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당신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대답할 수 있게 해줘요, 아니, 어쩌면 당신은 이해하는 척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군요! 비켜요! 이러지 말아요! 깡패깡패 같은 인간!"

그녀는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서 그를 밀어냈다. 그리고 책을 꼭 움켜쥔 채 그의 침실에서 도망쳐 나와 복도를 따라 달려간 다음 계단을 올라와서 자기가 쓰는 침실로 돌아왔다.

방 안으로 들어온 다이아나는 문에 몸을 기댄 채 서 있었다.

"말도 안 돼!"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는 마치 고약한 해적 영화에 나오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어! 나쁜 자식!" 그녀는 숨을 몰아쉬면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더 말도 안 되는 건 내가 마치 선원처럼 험한 말을 쓰고 있다는 거야! 아무튼 여기서 빠져나가야만 해!"

 

아담이 집을 떠난 것을 확인하고서 다이아나는 마틸다를 찾아서 그녀와 조심스럽게 협상할 수 있었다. 그 여인은 더 이상 이의를 달지 않았다. 아담이 포로가 원하는 대로 해주라는 지시를 내린 것 같았다.

그 덕분에 다이아나는 화사한 색상의 숄을 두르고서 마을로 나들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쇼핑할 물건을 담을 바구니와 여러 가지 금액의 동전을 담은 손수건도 갖추었다. 그저 다른 마을 사람들처럼 시장을 보러 나선 것뿐이야. 그녀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 마을의 양식은 그녀의 생각과는 다를 것이다. 그래서 아담은 그녀를 미쳤다고 한 것이다.

아무튼 그녀의 미친 생각은고집스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로그스 케이는 그저 카리브 해에 떠있는 섬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올라간 섬이라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이곳에서 도망칠 수 있다면 그녀는 20세기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그녀의 혼란스런 의식은 무엇이든 가능할 것처럼 여겨졌다.

그녀가 마을 입구에 들어서기도 전에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멜론은 여자의 가슴처럼 달콤하지." 가게 주인이 소리쳐 불러댔다. "그리고 선장의 특별한 숙녀를 위해서는 특별한 선물이."

"우리 가게로 와요, 아가씨. 예쁜 드레스를 구경하라구요. 선장이 좋아하는 아가씨에게 아주 어울릴 거요."

"선장의 여자에겐."

"선장의 여자."

어느새 다이아나는 가게에 있는 사람들의 웃음과 야유 속에 이 가게, 저 가게로 떠밀려 다니고 있었다. 그 마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즉시 알아본 게 분명했다. 더구나 그들은 아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놀랄 일도 아니다. 마틸다그리고 다른 하인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졌을 것이다.

시대가 다르다고 해서 하인들의 속성이 변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다이아나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그들 사이를 헤쳐 갔다. 그때 키가 큰 한 여자가 군중들 틈에서 나와서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다이아나는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쉬는 소리를 들었다. 그 여자는 밝은 무늬가 있는 드레스를 입고 컬이 된 검은 머리칼이 등 뒤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적개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한 손을 스커트 자락에 넣어 뭔가를 숨긴 상태에서 계속 다이아나 앞을 서성거렸다.

다이아나는 그 여인이 자신의 적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군중들 틈에서 웅성거림 소리가 들려왔다. 다이아나는 그 여자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라 펄라, 라 펄라그개 그 여자의 이름인 모양이었다. 그 여자는 머리를 흔들어 대더니 입을 열었다. 그녀의 음성은 깊은 저음이었다.

"당신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예쁘지 않아. 그가 내 침실이 아니라 당신의 침실을 선택했다는 걸 이해할 수가 없어."

다이아나의 가슴이 쿵쿵 울리고 있었다. 그녀가 추궁하는 혐의를 부인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이미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몸을 똑바로 세웠다.

"라 펄라, 내가 당신의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했는지 모르겠군요. 아무튼 내 말을 똑똑히 들어요. 난 당신의 선장을 원치 않아요. 그러니까 당신은 그를 당신의 침실에서 소유할 수가 있어요. 그를 가죵, 그는 당신의 것이니까요!"

"거짓말쟁이!" 라 펄라가 고양이처럼 우아한 걸음걸이로 다이아나 주변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난 절대로 당신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 당신은 그 사람을 원하고 있어. 당신과 이 섬의 모든 여자들이 똑같이 그를 원해!"

그리고 아주 가벼운 몸짓으로 그 여자는 스커트 자락 속에 숨겨 두었던 손을 꺼냈다. 태양빛을 받은 칼날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다이아나의 손에서 바구니가 떨어졌다. 그녀는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하지만 군중들이 그녀를 막아섰다.

"이건 정말 끔찍한 실수란 말예요!" 다이아나가 소리쳤다. "나는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에요. 난 다른 세상에서 왔어요. 그러니까 내가 떠날 수 있도록 당신이 도와주기만 하면 당신은 그를 독차지할 수 있어요."

라 펄라가 칼을 다이아나에게 내밀었다가 다시 물러서면서 겁을 주고 있는 동안 다이아나의 숨소리는 반쯤 비명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칼을 허공 중에 마구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그 칼은 다이아나의 바로 앞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본능적으로 옆으로 물러서면서 팔을 들어 방어하는 자세를 취했다.

"좋아요, 라 펄라. 당신은 임자를 만난 거라구요. 난 가라데를 배웠어요. 거의 검은 띠를 따게 될 단계에 와 있다구요!"

사실 마지막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이아나와 마인디는 밤에도 판타지 페어를 열기로 결정한 다음 호신용으로 6주 과정의 가라데를 익혀 두었다.

"아하!"

다이아나가 소리를 질러대면서 옆으로 걸어갔다. 움직이는 목표물은 맞추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그녀는 옆으로 나아가고 있긴 했지만 마음속에서는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꿈이 악몽으로 변한 것 같다. 이제 그녀는 그 꿈속에서 영영 깨어나지 못한 채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

라 펄라는 그녀 앞에서 빙빙 돌면서 움직이고 있는 적수 때문에 갑자기 혼란스러워진 것 같았다. 상대방이 동요하는 모습을 보고 다이아나는 용기를 얻었다. 그녀는 가라데 강습받은 걸 다시 떠올리려 했다.

왜 진작 더 열심히 수업을 받지 않았을까? 그녀의 손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짧은 스커트 덕문에 다리가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적을 때려눕힐 방법이 떠올랐다!

지혈점은 바로 무릎 뒤와 조금 위에 있다. 그곳을 세게 차면 라 펄라는 그대로 쓰러지고 말 것이다. 가라데 강의를 받을 때 다이아나는 항상 자신의 힘을 모두 사용하는 걸 두려워했었다. 그래서 지금 그녀는 그 지혈점이 정확히 어디인지조차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상대방 여인이 욕을 퍼부어 대면서 다이아나처럼 몸을 낮췄다. 그 각도에서 보니까 칼날이 훨씬 더 커 보였다. 그 번쩍이는 칼날을 보는 순간 다이아나는 자기 방어에 대한 걸 모두 잊었다. 그리고 그 위기의 순간에 침착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비명을 질러댔다.

"날 좀 도와줘요! 누구 없어요? 저 여자에게서 칼을 빼앗은 다음 저 여자를 꼭 붙잡고 있어요!"

하지만 그녀를 구조하기는커녕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내기를 걸고 있었다! 이제 그녀에게는 조금의 기적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짙은 갈색 머리칼의 여인이 앞으로 다가왔다. 결국 가라데의 모범생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다리를 앞으로 내밀어서 지혈점을 맞췄다. 그 지점을 맞춘 순간 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 펄라는 당혹한 표정이 되어서 신음소리를 내면서 땅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다이아나는 앞으로 돌진해서 칼을 발로 차냈다. 그 칼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걸 보았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그 일을 자신이 해냈다고는 믿기 어려웠다.

그 칼은 공중에서 나선형으로 돌다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옆에 떨어졌다. 라 펄라는 땅바닥에 그대로 누워 버렸다. 다이아나는 날카로운 승리의 쾌감에 사로잡혀서 그 여자 위를 덮쳤다. 사실 다이아나는 한 번도 그렇게 육체적이고 원시적인 싸움을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자신의 그 원시적인 충동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다이아나는 라 펄라 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그녀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라 펄라가 욕설을 퍼부어대면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머리칼을 놓지 않았다., 군중들 속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승리의 영광의 순간으 너무나 짧았다. 거칠고 강한 팔이 다이아나의 허리를 끌어안아서 그녀를 강제로 일으켜 세웠기 때문이다.

"맙소사, 이 시골뜨기들이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그 화가 난 음성은 틀림없이 아담 호크의 음성이었다. 그는 발버둥치는 다이아나를 꼭 움켜잡은 다음 함께 온 남자에게 소리쳤다. "러셀, 저 고약한 여자를 일으켜서 데리고 가라구!"

반쯤은 제 정신이 아닌 라 펄라가 발버둥치면서 몸을 일으켰다.

"선장님." 그녀가 울면서 애원했다. "난 당신만을 생각하고 있어요. 오직 당신만을우린 서로에게 속해 있어요."

"러셀, 이 여자를 끌고 가라고 했잖아? 지금 당장!"

러셀과 다른 남자가 히스테리 상태에 빠진 라 펄라를 끌고 가자 아담이 큰 소리로 외쳤다. "레이디 다이아나는 우리의 인질이오! 이 여자가 나의 보호 하에 있는 동안 누구도 그녀에게 해를 끼치는 걸 원치 않소. 남자나 여자나 이 여자에게 손을 대는 사람이 있으면 그대로 두지 않겠소! 명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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