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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판타지 2

7

오후의 밝은 햇살 속에서 유원지 내의 신비스러운 매력은 그림자를 감추고 있었다. 먼지는 여기저기 가득 쌓이고 페인트로 긁힌 자국으로 울퉁불퉁한 것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밤에 네온사인 아래서 화려하게 빛나는 것이 오후의 햇빛 속에서는 눈에 드러나지 않는 모습들이다.

현실과 직면했을 때에도 마법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은 혈기왕성한 젊은 사람이라든지 무척이나 청순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뿐일 것이라고 여겨진다.

미건의 조부인 팜프의 마음은 언제라도 젊었다. 그러한 조부가 미건은 무엇보다도 제일 좋았다.

지금 그녀는 유령성의 수리공사를 감독하고 있는 조부를 애정을 가득 담은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조부는 자신의 도깨비들을 소중하게 다루었다. 미건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도깨비에 부딪히지 않도록 통로 옆을 걸어갔다.

조부에게서 수리공사 문제에 대해서 들은 뒤부터 어느 새 열흘이 지나 있었다. 캐치와 마지막으로 만난 것도 l0일 전이었다. 미건은 캐치의 일은 머리 한구석에서 물리치고 눈앞의 현실, 곧 조부와 유원지의 일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었다. 이미 현실과 공상세계의 구별을 위한 뚜렷한 선을 그을 수 있는 연령인 것이다.

"할아버지!"

조부의 등 뒤에서 그녀가 말을 걸었다.

"잘 진행되고 있어요?"

손녀의 소리에 노인은 돌아보며 다정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직 멀었다, 미건."

쾅쾅 공사하는 소리가 울리는 속에서 그는 대답했다.

"생각보다는 빨리 진척되고 있단다. 이제 곧 부활제니까 구경꾼도 꽤 늘어날 거야."

그는 미건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대부분의 탈것들은 언제라도 가동될 수 있도록 준비 완료되어 있단다, 메그. 네 쪽은 어떠냐?"

조부가 밖으로 나오도록 한 뒤 미건도 대답했다. 공사하는 소리 때문에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냐뇨? 뭐가요?"

미건은 장난스레 눈을 깜박거렸다. 바깥의 뜨거운 햇빛이 눈부시게 했던 것이다. 봄의 햇살에 한여름 같은 더위가 담겨져 있었다.

"내내 어두운 얼굴이 아니냐. 벌써 일 주일 이상이나 말이다."

강렬한 햇빛에도 불구하고 마치 미건을 따뜻하게 해주기라도 하는 듯이 그는 손바닥으로 어깨를 쓰다듬었다.

"나에게는 감출 수 없어, 메그. 너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으니까."

미건은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고 어떤 표현을 해야 할까 주의 깊게 고심했다.

"아무 것도 감춘 것은 없어요, 팜프."

미건은 어깨를 움찔한 뒤 젯트코스타를 수선하는 작업대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말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중요한 문제는 아니에요. 그뿐이에요. 젯트코스타가 고쳐질 때까지 어느 정도나 걸릴까요?"

"네가 낙담하고 있는 일인데. 중대한 문제가 아니란 말은"

노인은 미건이 얼렁뚱땅 넘기는 것에 속지 않았다.

"나에게는 충분히 크나큰 일이란다. 그렇지 않으면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 되었으니까 나에게 일부러 상담할 필요가 없다는 게냐?"

미건은 사죄하는 듯한 눈빛을 조부에게 보냈다.

"그런 게 아니에요, 팜프. 언제라도 상담할 거예요."

"좋아."

노인은 짤막하게 말했다.

"들어주지."

"약간 잘못을 저질렀을 뿐그것뿐이에요."

미건은 머리를 흔들며 수리하는 걸 보는 척하면서 작업원 옆으로 가려 했다. 하지만 조부가 그녀의 움직임을 만류했다.

"미건!"

노인은 양손을 그녀의 어깨에 얹고 물끄러미 눈을 엿보았다. 같은 높이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직선적으로 묻는다만, 너 그를 사랑하지?"

"아니에요."

미건은 재빨리 부정했다.

노인은 한쪽 눈을 치켜 올렸다.

"나는 아직 누구의 이름도 말하지 않았다만."

미건은 입을 꼭 다물었다. 조부의 책략에 감쪽같이 걸려들어 버린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미건은 한층 주의깊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어요."

"그러면 왜 그런 낙담한 표정으로 있는 거냐?"

"팜프!"

미건은 그에게서 멀어지려 했지만, 다시 조부의 커다란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너는 나에게 언제나 정직하게 대답했었지, 메그. 처음에는 싫어했을 때라도 말이야."

미건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부가 이렇게 나올 때는 아무리 피하려 해도, 애매모호한 말로 속이려 해도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알았어요. 그래요, 그를 사랑해요. 하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너처럼 시원시원한 아가씨에게서 나온 대답치고는 아직 애매하구나."

노인은 부드럽게 추궁했다.

미건은 어깨를 움찔했다.

"사랑하고 있다고 하는 게 어째서 문제가 안 되는지 설명해 보거라."

그는 덧붙였다.

"아무튼 상대방이 사랑해 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걸요."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누가 말했지?"

조부는 상당히 화가 난 듯했다. 덕분에 미건의 가슴의 아픔은 어느 정도 가셔지는 듯했다.

"팜프."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미건은 말했다.

"팜프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 준다고 해서 다른 누구라도 다 그러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거예요."

"어떤 근거가 있어서 사랑받고 있지 않다는 따위의 생각에 빠져든 거냐? 네가 직접 물어보았니?"

"설마!"

미건은 놀라서 무심코 웃음이 터져 나와 버릴 듯했다.

"왜 물어보지 않았니? 그쪽이 훨씬 더 간단한 방법이 아니겠냐?"

미건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알아주지 않는 것일까.

"데이비드 캐처튼은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에요. 진심으로 사랑을 하지 않는 거예요. 게다가 나 같은 여자를 사랑할 리가 없어요."

미건은 양손을 들어 올려 자신은 분수를 알고 있다는 것을 역설했다.

"그는 파리에 간 적도 있대요. 그리고 지금은 뉴욕에서 살고 있구요. 제시카라는 이름의 누나도 있어요."

"그에 관해서 상당히 잘 알고 있는 것 아니냐?"

조부의 말에 미건은 성급하게 대꾸했다.

"나는 여행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어요."

그녀는 괴로움에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여름 내내 수백만 명, 말 그대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보지만, 모두 여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리는 사람들뿐이에요. 어디서 온 누구인지도 몰라요. 내가 정말로 알고 있는 것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뿐이에요. 게다가 이 바닷가에서 제일 멀리 갔다고 하면, 기껏해야 찰스톤이 고작인걸요."

노인은 미건의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근본적인 이유는 내가 널 내 옆에서 떠나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이제껏 아직은 그 때가 아니라고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단다."

"틀렸어요, 팜프. 그런 의미로 말한 건 결코 아니었어요."

미건은 조부에게 안겨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의미로 말한 건 아니에요. 팜프를 제일 좋아해요. 이곳도 역시 좋아해요. 나는 아무 것도 변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뭔가가 변한다는 건 정말 싫은 일이에요."

노인은 웃으며 미건의 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희미한 향수 냄새가 퍼져서 노인에게 미건은 이미 어린아이가 아닌 성인이 된 여자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 손녀는 이제 여인이 된 것이다.

"너 정도의 나이에서는 싫은 일 같은 게 아직도 있을 리가 없어. 너도 조금쯤은 세상을 보고 싶어할 터이고, 나도 또한 네가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어 줄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았단다. 아아, 그렇지만"

조부는 미건의 반박을 앞질러 말했다.

"너를 떠나게 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제멋대로 해온 탓이야."

"팜프에게서 그런 처사 같은 것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어요."

미건은 그에게서 몸을 빼냈다.

"조금 전에 말한 것은 단지, 단지 캐치와 나에게는 공통된 점이 거의 없다는 뜻이었어요. 사물을 보는 견해가 서로 완전히 달라요. 나는 도저히 캐치를 이해할 수 없어요."

"문제없어. 너라면 뭐든지 가능할 거야."

미건의 표정을 보고서 노인은 하는 수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알았다. 잠시 그대로 두고 보마. 너도 고집쟁이니까."

"완고한 거예요."

미건은 고쳐 말하고 겨우 웃는 얼굴을 되찾았다.

"그 편이 더 듣기 좋아요."

"요는 심술쟁이란 얘기로군."

노인은 쌀쌀맞게 말했지만.

미건을 바라보는 눈은 웃고 있었다.

"대낮부터 이런 유원지 같은 곳을 어슬렁거리지 말고 아틀리에로 다시 돌아간다면 어떻겠냐?"

"마침 작품구상이 벽에 부딪쳐 버리고 말았어요."

그녀는 자백하면서 머리를 떠나지 않는 저 미완성 작품의 흉상을 생각해 봤다.

"게다가 나는 유원지를 굉장히 좋아하는걸요."

미건이 조부의 손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앞으로 일 주일만 지나면 이곳도 완전히 정비되어서 깨끗하게 될 거다."

노인은 만족스럽게 주의를 돌아보았다.

"운이 좋으면 손님이 많아서 그 일만 달러도 곧 갚을 수 있을 테지."

"빨리 돈을 갚을 수 있도록 은행도 단골 고객에게 이곳을 선전해 줄 테고 말이에요."

나무를 치는 망치 소리를 들으면서, 두 사람은 젯트코스타 옆으로 가까이 갔다.

"아니야, 돈을 빌려 준 것은 은행이 아니란다. 그것은"

노인은 불시에 말을 끊어 버리고 헛기침을 하며 얼버무리듯 몸을 구부려 구두 끈을 다시 묶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은행에서 빌렸던 게 아니었나요?"

미건은 허둥대는 조부의 새하얀 머리를 쏘아보았다.

"도대체 어디에서 빌린 거예요?"

노인이 우물우물 중얼거린 대답은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 돈을 갖고 있는 친구는 없으시잖아요."

미건은 쓴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어디서"

미건의 미소가 사라졌다.

"설마, 설마, 그런 건"

그렇게 미심쩍은 듯하면서도 미건은 그것이 정말인 것을 알았다.

"설마, 캐치에게서 빌린 것은 아니겠죠?"

"미건, 너한테는 알리지 않을 셈이었다만."

노인의 눈에 곤란해 하는 표정이 떠오르고 목소리도 한층 약해졌다.

"캐치도 너한테는 말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지만."

""

미건은 급하게 추궁했다.

"어째서 그런 일을 하셨어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야, 메그."

노인은 손을 뻗어 항상 미건을 달래줄 때마다 했던 것처럼 그녀의 손을 가볍게 탁탁 두들겼다.

"그가 이곳에 왔을 때 수리공사라든가 융자 이야기를 했더니, 자신이 선뜻 빌려 주겠다고 말한 거야. 나도 그렇게 히는 것이 제일 낫겠다는 생각도 했고."

그는 우물쭈물 구두 끈을 갖고 장난쳤다.

"은행은 언제나 서류니 뭐니 절차가 복잡하고 시끄럽다만, 캐치는 거의 무이자로도 괜찮다고 했고, 너도 그쪽이"

노인의 목소리는 점점 가늘어지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서류는 확실하게 만드셨나요?"

미건은 냉정하게 물었다.

"물론."

노인은 조금 발끈했다.

"캐치는 그런 건 괜찮다고 말했지만, 네가 그런 것에 까다롭게 구는 걸 알고 있으니까 서류는 만들었다. 확실하고 분명하게 법에 준해서 말이다."

"그런 것은 어쨌든"

미건은 낮은 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담보는 뭘로 했나요?"

"유원지로 했단다, 당연히."

"당연히."

미건의 소리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그가 무척이나 갖고 싶어 하는 거니까요?"

"걱정할 필요는 없다. 미건, 무엇이든 순조로우니까. 수리공사도 잘 진행되어 가고 있고, 예정대로 유원지는 곧 개원할 거야. 게다가"

그는 거기서 한숨을 내쉬었다.

"너에게는 절대로 알리지 않는 것으로 약속을 했다. 캐치는 비밀이라고 했는데."

"네에, 그러셨겠죠."

미건은 토해내듯이 말했다.

"그러셨겠죠."

미건은 홱 몸을 돌리더니 달려가 버렸다.

노인은 그녀의 여린 몸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고 나서 답답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녀석은 자제심을 잃었을 때에는 어처구니없을 만큼 화를 내니까. 양손을 딱 마주친 뒤 노인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제 책략은 보기좋게 성공한 거다. 이걸로 뭔가 재미있는 일이 생기겠지.

미건은 오토바이를 캐치의 집 개인도로에 넣고 엔진을 껐다. 그리고 헬멧을 벗어 홀더에 걸었다. 절대로 도망칠 수 없을 거야. 데이비드 캐처튼! 미건은 마음속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잔디를 질러가서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노크라기보다는 두들긴다는 쪽의 표현이 알맞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미건은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문을 흘겨보았다. 오토바이는 검은 포르셰 뒤에 세워 놓았다. 그가 집에 없을 리는 없는 것이다. 미건은 예의 따위는 무시한 채 손잡이를 밀어보았다. 문은 열려 있었다. 그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잠잠했다. 미건은 거실로 걸어들어가 보이지 않는 캐치를 찾았다.

정교한 금색 팔목시계가 가스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커피 테이블 위에는 니콘 카메라가 있었고, 위가 열려 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럽혀진 테니스화 한 켤레가 그늘에 반쯤 감추어져 굴러다녔다. 그 옆에는 읽다가 둔 책이 한 권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미건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런 권리도 없이 남의 집에 침입한 것이다. 하지만 꺼림칙하다는 생각과 함께 미묘한 흥미도 있었다. 재떨이에는 담배 꽁초가 한 개비 들어 있었다. 약간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미건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건 엿보거나 뒤지는 건 아니야.

단지 캐치가 없는 것을 확인해 보고 싶을 뿐이야. 그렇게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어쨌든 차는 그대로 있었고, 문에도 열쇠가 잠겨 있지 않았으니까.

싱크대에는 컵이 한 개, 가스레인지에는 차가운 커피가 반쯤 든 포트가 놓여 있었다. 조리대에는 뭔가를 떨어뜨려 더럽혀진 채였다. 그녀는 무심코 행주를 집으려고 하다가 꾹 참았다. 그 때 창밖에서 붕 하는 기계의 낮은 소리가 들려왔다. 창 쪽으로 다가가서 내다보니 거기에 캐치가 서 있었다. 그는 잔디 남쪽에서부터 동력식 잔디 깎는 기계를 누르면서 이쪽저쪽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상반신은 벗은 채로 바지가 허리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움직일 때마다 흘러내리는 땀으로 볕에 탄 피부는 짙은 밀봉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팔과 등의 튼튼한 근육이 불끈불끈 솟아오르면서 움직이는 모양을 미건은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미건은 휙 주방을 뛰어나가 잔디밭을 가로질렀다.

그 허둥지둥하는 움직임과 홍조띤 얼굴이 캐치의 눈에 띄었다. 붉은색 셔츠와 흰색 바지를 입은 미건은 그를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태양의 눈부신 빛에 눈을 좁히면서 캐치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미건이 눈앞에까지 다가오자 그는 제초작업을 멈췄다.

"! 메그."

목소리는 담백했지만, 눈은 그렇지 못했다.

"당신이란 사람은 상당히 뻔뻔스럽군요, 캐처튼."

미건은 날카롭게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설마 노인네의 신뢰를 이용하리라고는 미처 생각도 못했어요."

캐치는 의아스러운 듯이 한쪽 눈을 올리고 기계에 기대어 섰다.

"다시 한 번 말해 주지 않겠소?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이오."

"당신이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일을 이것저것 간섭하지 않고서는 옷 견디는 타입이죠? 유원지에서 얼굴을 내미는 것 정도로는 부족해서 자그나마 돈을 투자하고 싶다는 관대한 청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거겠죠."

"아아, 그 일."

캐치는 긴장이 풀린 듯 등을 쭉 폈다.

"당신은 아무래도 내게서 돈을 빌린다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기리라 생각했소. 역시 그랬던 모양이로군."

"제가 그런 것을 용납할 리가 없잖아요."

미건은 날카롭게 반박했다.

"역시"

캐치는 다시 기계에 기대어 섰지만 그 동작에는 태평스러워 보이는 기색이 엿보이지 않았다.

"내가 본 바에 의하면 당신은 지나치게 옹고집이오. 그건 팜프를 위하는 올바른 길이 아니오. 물론 나를 위해서도 아닐 테고."

미건은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평상시와 다름없이 유지하려 했다.

"나에게는 유원지와 직접적으로 그것에 관한 모든 사항에 커다란 권리가 있어요."

"그래? 그렇다면 수리 비용이, 그것도 저금리로 조달할 수 있었던 것을 기뻐하지 않으면 안 되지."

캐치의 어조는 냉정하고 극히 사무적이었다.

"어째서죠?"

미건은 힐문했다.

"어째서 우리에게 돈을 빌려 주었죠?"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킨 뒤, 캐치는 입을 열었다.

"특별히 이유를 가르쳐 줘야 할 의무는 없소."

"그러면 내가 말해 줄까요?"

미건은 반박했다. 목소리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당신은 쭉 기회를 엿보다가 드디어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린 거겠죠. 그것이 바로 당신이 속해 있는 세계 사람들의 수법일 테구요. 갖고 싶은 것을 어떻게든 손에 넣기 위해서는 주위 사람들에 관해서는 조금치도 생각지 않아요."

"아무래도 머리가 좀 혼란스러운 모양이군."

캐치의 눈은 어둡게 흐려져서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목소리도 역시 감정을 밖으로 나타내지 않았다.

"마치 내가 뭔가를 해서는 안 될 일이라도 저지른 듯하군."

"돈을 빌려 주셨지요?"

미건은 다시 말했다.

"유원지를 담보로 해서요."

"그것이 문제라면, 할아버지께 직접 말하시지."

캐치는 그녀가 쓸데없는 얘기라도 하듯 몸을 구부려서 코드에 손을 뻗쳐 콘센트를 꼽고서 제초기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무슨 권리가 있어서 우리 할아버지를 이용한 거예요? 팜프는 누구라도 신뢰하는 성품이에요."

캐치는 다시 소리를 내서 코드를 뺐다.

"유감스러운 얘기지만 당신은 그 피를 이어받지 않은 모양이군."

"무슨 근거가 있어서 당신을 신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를 신뢰할 수 없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던 모양이군."

캐치는 뭔가를 깊게 생각하는 듯 눈을 좁혔다.

"당신이 까닭없이 싫어하는 사람은 나뿐이요, 그렇지 않다면 남성 전체에 대한 무슨 혐오증이오?"

미건은 이런 질문에 일부러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당신은 유원지가 갖고 싶은 거예요."

"그래, 처음부터 분명히 말해 두었을 텐데."

캐치가 기계를 난폭하게 옆으로 밀었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장해물도 없게 되었다.

"지금도 유원지는 반드시 내 소유로 할 셈이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비윤리적인 짓을 하지는 않아. 그리고 나는 아직 당신도 손에 넣을 생각이오."

미건은 뒷걸음질 쳤지만 캐치 쪽이 더 민첩했다. 그의 손가락은 미건의 두 팔을 꽉 붙잡았다.

"요전날 밤, 당신을 그대로 돌려보낸 것이 큰 실수였던 거겠지."

"당신은 나를 갖고 싶어 하지는 않았어요. 그런 건 순 거짓말이에요."

"당신을 갖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미건은 다시 한 번 재빨리 피하려고 했지만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 말 그대로요. 나는 당신을 갖고 싶어 하지 않아."

캐치가 미건을 끌어당겨 거칠게 입술을 빼앗았다. 미건은 놀란 나머지 현기증을 일으켰다.

"지금도 당신 따위는 갖고 싶지도 않소."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캐치의 입술이 다시 덮쳐왔다. 이렇게 거칠은 그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요 며칠 동안도 당신이 조금도 보고 싶지 않았어."

캐치는 미건을 바닥에 쓰러뜨렸다.

"싫어요."

미건은 이제 겁에 질려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만둬요."

하지만 캐치의 입술이 강인하게 침묵시켰다. 그의 키스는 이전처럼 초조하게 하거나 거만감을 느끼게 하는 듯한 것은 조금도 없었다. 벌거벗은 욕망이 솔직한 반응을 미건에게서 끌어내려고 했다. 그는 갖고 싶은 것은 반드시 손에 넣는 그런 남자였다. 미건을 난폭하게 끌어안고 키스를 빼앗은 정도로는 마음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입술은 미건의 입술을 떠나 목을 지나치자, 미건의 숨이 꽉 막히고 전신이 확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숨은 헐떡이고 신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점차로 미건은 공포는 물론이고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캐치는 얼굴을 들었다. 따뜻한 그리고 거친 숨결이 미건의 얼굴에 닿았다. 그녀는 살며시 눈을 떴다. 그 눈동자에는 정열과 욕망이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미건은 말없이 떨었다. 만약 뭔가를 말할 수 있다면 사랑한다고 캐치에게 고백했을 것이다. 이미 수치도 없었다. 격하게 솟아오르는 욕망과 아픔만큼 강렬한 사랑만이 있을 뿐.

"빌어먹을!"

캐치는 옆으로 굴러가 하늘을 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워 있었다. 서로 어디에도 닿지 않은 채로.

"이럴 셈이 아니었었소. 이런 식으로 당신과"

미건은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몸 안의 피가 파도치고 있었다.

"캐치!"

겨우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녀는 일어나려고 했다. 캐치는 미건의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천천히 위로 올라가 그녀의 얼굴에 멈추었다. 그것을 의식하고 미건은 얼굴을 붉혔다. 그에게 손을 대보고 싶었지만 무서워서 할 수 없었다.

잠시 동안 둘은 서로를 응시한 채로 묵묵히 있었다.

"어딘가 상처는?"

미건은 머리를 흔들었다. 몸은 아직도 그를 원해 뜨겁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럼 돌아가 줘."

캐치는 일어나 미건을 힐끗 보았다.

"먼저 실례하지."

그는 등을 돌리고 미건을 놓아 둔 채 사라졌다.

주방문이 콰당 닫히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8

관광객이나 피서객이 쇄도하는 이 주일간을 보내기란 지금의 미건의 상황으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매년 부활제가 되면, 그들은 줄을 이어 이곳을 찾아왔다. 그것이 한여름의 소란스러움이 시작된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들은 모래밭에서 피부를 태우고 갈색 피부를 선물로, 아직 봄이 남아 있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이곳에 즐거움을 만끽하러 오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얀 모래밭과 부드럽게 밀려와 사라지는 파도가 있는 바다보다 더 나은 것이 또 있을까? 나선형의 미끄럼틀, 시끄러운 게임 센터, 혼잡한 유원지. 그들은 그런 곳에 오락을 즐기러 찾아오는 것이다.

미건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들이 밀려들어 오는 것을 번거롭게 느꼈다. 시즌이 끝난 휴양지의 남겨진 듯한 한적함이 사뭇 그리웠다. 혼자가 되어 조각을 제작하면서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고 싶었다. 참된 안식을 얻기 위해서는 조각에 몰두하는 수밖에 별다른 해결책이 없다고 생각했다. 조부에게 자신의 기분을 사실대로 털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마음이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미건에 관해서 잘 알고 있는 조부는 혼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일부러 아무 것도 물어오지는 않았다.

미건은 유원지에서 몇 시간이나 기계적으로 수동적인 일을 하면서 지냈다. 보는 얼굴들마다 모두 모르는 사람들뿐이었다. 그것이 싫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쪽에서는 이렇게 당황해서 허둥지둥 일을 하고 있는데 즐겁게 놀고 있는 그들이 원망스럽게 생각되었다.

저녁에는 아틀리에에서 다소 위안을 찾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고 아틀리에의 전구가 불타는 듯이 뜨거워지면 비로소 시간이 지난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조각에 바치는 미건의 정력은 아직껏 한계점이 없었다. 그녀는 불안정한 감정을 억누르면서 창조 작업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어느 날 오후 유원지의 어린이 용 탈것들 앞에서 미건은 표를 팔고 있었다. 그녀는 지나치게 원기왕성한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을 귀찮게 굴지 못하도록 지켜보는 데 전력을 다했다. 소방차나 레이스카, 경찰차나 구급차에 아이들이 탈 때마다 미건은 레버를 눌러 '우우 삐삐' 소리가 나는 차바퀴를 움직이게 했다. 아이들은 흰 이를 드러낸 채 진지하게 핸들을 쥐고 있었다.

소방차에 올라탄 아장아장 걷는 사내아이는 기쁜 나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네 시간 가깝게 단순노동에 매달려 있었지만, 미건은 자신도 모르게 밝게 웃고 말았다.

"죄송합니다만"

그 소리에 미건은 뒤돌아보았다. 절묘한 색의 금발을 뒤로 묶은 고상한 인상의 여자가 서 있었다.

"당신이 미건이로군요? 미스 미건 미러"

", 저에게 뭔가"

"나는 제시카 딜레이니라고 합니다."

곧 미건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캐치의 누님이시로군요."

", 그래요."

제시카는 미소를 지었다.

"잘 알아보는군요. 동생과 좀 닮기는 닮았지만, 함께 나란히 있지 않으면 누나라고 알아보는 사람은 드물어요."

조각으로 단련된 미건의 예리한 시선은 얼굴의 윤곽 아래에 감추어져 있는 골격이 닮은 것을 보고 알아차렸다. 제시카의 눈은 캐치가 말한 대로 청색이고 눈썹은 캐치보다는 가늘었다. 하지만 속눈썹과 날카로운 듯한 눈은 그와 꼭 같았다.

"만나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미건은 뭔가 할 말은 없는지 찾았다.

"캐치를 방문하러 오신 건가요?"

제시카는 유원지 같은 곳에 자주 오는 부류의 여성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컨트리 클럽이라든가 극장 쪽이 훨씬 어울릴 것이라 생각되었다.

"이삼 일 예정으로요."

제시카는 옆에서 '삐삐' 울리면서 돌아가는 어린이 용 미니 어치 카(모형 자동차) 쪽으로 손짓했다.

"남편과 아이도 함께예요. 여긴 로브, 남편이에요."

장신이고 직모의 흑발을 가진 남자였다. 매력적으로 각이 진 얼굴의 남자에게 미건은 웃어 보였다.

"그리고 딸 에린과 로라."

제시카는 한 대의 비행기에 함께 타고 있는 캬라멜 색 머리카락의 두 아이에게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네 살과 여섯 살 정도나 되었을까.

"어머나, 귀여워라."

"착한 아이들이에요."

제시카는 허물없는 어조로 말했다.

"내가 여기서 당신을 찾고 있으리라는 걸 캐치는 모르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에 관해서 무척 상세하게 이야기해 주었으니까."

"그도 여기에 와 있어요?"

무심코 인파에 눈길을 주면서 미건은 물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할 셈이었지만 그다지 자연스러웠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안 왔어요. 뭔가 일이 있다면서."

그 때 타이머가 울려 시간을 알렸다.

"잠깐만 실례할게요."

미건은 작게 말했다.

알맞게 방해가 되어 준 것을 고맙게 생각하면서 아이들이 타고 내리는 것을 감독했다. 짧은 순간에나마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있었다. 마지막 손님은 캐치의 조카 둘이었다. 언니인 에린이 삼촌과 같은 빛깔의 눈으로 미건에게 웃어 보였다.

"나 운전했어요."

에린은 만족스러운 듯 말하고 동생을 옆눈으로 보았다.

"로라는 타고 있기만 했어."

"틀려."

로라는 두 개 있는 핸들 중 한 개를 꼭 붙잡았다.

"우리 집 대대로의 전통이에요."

미건의 뒤에서 제시카가 말했다.

"고집스러운 거요."

미건이 에린과 로라를 내려주고 다음 손님을 태운 뒤 조종실로 되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말했다.

"당신도 이미 알아차렸으리라 생각되지만."

미건은 제시카를 보며 웃었다.

"네에, 한두 번은요."

불이 켜지고 미건의 등 뒤에서 미니 어치 카들이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바쁘시군요."

제시카는 빙글빙글 돌고 있는 장난감 차들을 언뜻 쳐다보았다.

미건은 작게 어깨를 움츠리고 제시카의 시선을 쫓았다.

"모두 벨트를 했는지 소란부리는 아이가 없는지를 확인하는 정도니까요."

"우리 집의 작은 천사들은 하나가 끝나면 벌써 다음으로 쫓아가 버려요."

제시카는 말을 끊었다.

"나중에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미건은 미간을 찌푸렸다.

"네에, 아마도한 시간 정도 지나면 한가하리라고 생각해요."

"그것 참 잘 됐군요."

제시카의 미소는 그녀의 동생처럼 매력적이었다.

"만약 지장이 없으면 당신의 아틀리에에 가보고 싶은데요. 한 시간 반 정도 지나면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틀리에 말인가요?"

"네에, 그래요!"

제시카는 미건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구체적인 장소는 캐치에게 들었어요."

타이머가 또 울리고 미건은 일을 생각했다.

왜 제시카는 일부러 아틀리에에서 만나고 싶다고 한 것일까?

 

이마에 주름을 잡고 미건은 침실의 거울에 비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제시카의 고상하고 부드러운 아름다움을 칭찬하는 남자가 굴곡이 깊고 음영이 짙은 얼굴에 과연 이끌릴 수 있을까? 상관없다고 말하듯이 미건은 어깨를 움츠리고, 브러시를 집어 천천히 머리를 빗었다. 그는 이곳에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한순간의 오락을 찾고 있는 거야.

"너란 사람은."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을 향해 조용하게 말했다.

"정말로 바보야."

거울에 비친 비난의 얼굴을 보는 것이 싫어서 미건은 눈을 감았다. 네가 똑똑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머릿속에서는 용서없이 말이 이어졌다. 그가 왜 나를 갖고 싶어 하는지 아무래도 좋은 거야. 어쨌든 그는 너를 원하니까. 게다가 너도 바라도 있잖아. 그가 아직 너를 갖고 싶어 해 주기를.

미건은 머리를 흔들고 머리카락을 빗질하던 동작을 그만두었다. 적당히 해. 이것저것 머릿속을 괴롭히는 것은 그만 생각하자. 제시카 딜레이니가 벌써 올 시간이었다.

왜일까? 미건은 빗질하던 브러시를 놓고 거울을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 왜 일부러 여기까지 오는 걸까? 도대체 무슨 할 이야기가 있는 걸까? 미건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캐치와는 벌써 이 주일 동안이나 만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급히 그의 누나가 나를 만나러 오겠다는 걸까? 차고로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미건의 생각을 저지시켰다.

창으로 내다보니 캐치의 포르셰에서 제시카가 내리는 참이었다.

미건이 주방문의 돌계단으로 나가자, 제시카는 천천히 정원을 돌아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미건은 자신이 촌뜨기처럼 생각되어서 거북살스러웠다. 그녀는 약간 주저한 뒤 그쪽으로 다가갔다.

"참으로 멋있는 곳이로군요."

제시카의 웃는 모습이 캐치와 너무나도 닮아서 미건은 가슴이 아팠다.

"우리 집 양진달래도 댁의 것과 같으면 좋을 텐데."

"팜프할아버지가 정성을 다해서 가꾸시는 거예요."

"아아!"

그녀의 푸른 빛 눈은 따뜻했다.

"할아버지가 훌륭한 분이라는 것도 이미 여러 가지로 얘기를 들었어요. 꼭 만나뵙고 싶어요."

"할아버지는 아직 유원지에 계세요."

거북스런 생각도 점점 엷어져 갔다. 캐처튼 가의 사람들에게선 확실히 이상한 매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커피라도 어때요? 홍차 쪽이 좋을까요?"

"나중에 부탁드릴게요. 우선 아틀리에에 데려가 주실 수 있으세요?"

"한 가지 물어도 괜찮을까요, 미세스 딜레이니?"

"제시카예요."

제시카는 명랑하게 말참견을 한 뒤 천천히 뒷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제시카!"

미건은 고쳐서 불렀다.

"어째서 내가 아틀리에를 갖고 있는 건 알고 계시는 거죠? 차고 위에 있는 것도?"

"아아, 캐치한테서 들었어요."

제시카는 솔직하게 말했다.

"동생은 자기에 관한 사소한 일까지도 나에게 말해 주거든요."

그녀는 문 옆에 서서 미건이 문 여는 것을 기다렸다.

"당신의 작품을 보고 싶어요. 나는 취미로 유화를 그리거든요."

"당신이?"

겨우 제시카가 이렇게 흥미를 갖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미술 동료로서의 친근감 때문이었던 것이다.

"아직은 상당히 미숙하지만 그냥 덮어놓고 좋아하는 거예요. 언제나 속을 태우게 하는 원인이 되긴 하지만요."

다시 캐처튼 일족의 미소가 제시카의 얼굴에 떠올랐다. 미건은 스스로도 자제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어색한 손놀림으로 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유감이지만 그림은 한 적이 없어요."

재빨리 말했다.

말하는 것으로 불안을 덮어 감추려고 하는 것을 스스로도 지나칠 만큼 잘 알고 있었다.

"생각처럼 진행되지는 않는 것 같아서"

아를리에로 들어가면서 미건은 계속해서 말했다.

"생각한 만큼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지독히도 머리를 괴롭혀서요. 여름에는 에어브러시(사진 수정)도 해요. 그렇지만"

제시카는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동생이 그랬던 것처럼 방 안을 서성거리며 돌아보았다. 정중히 예의바르게 침묵을 지키며 열심히 이쪽에서 한 작품에 손가락을 대보고, 저쪽에서 또 하나 들어 올려 보았다. 그녀가 한 번 작은 상아 유니콘을 잠시 동안 물끄러미 들여다보았을 때는 미건은 초조해서 마음을 졸였다.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왜 이런 일을 하는 걸까? 햇살이 마루에 반점 모양을 만들었다. 석양빛 속에서 작은 먼지가 춤추고 있었다. 뒤늦게나마 미건은 캐치의 흉상을 생각해 냈다. 한풀 꺾인 햇살이 그 위에 떨어져 대강의 형만이 조각되어져 있는 얼굴을 돋보이게 했다. 아직 면은 거칠고 완성하려면 시간을 더 요했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캐치였다. 바보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미건은 흉상 앞에 서서 제시카의 눈으로부터 감추려고 했다.

"캐치가 말한 대로군요."

제시카는 중얼거렸다.

그녀는 아직도 유니콘을 갖고 손가락 끝으로 탐스러운 듯이 어루만지고 있었다.

"언제든지 그 아이의 사고는 옳아요. 평소에는 그것 때문에 울컥 하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틀려요."

그 모습은 놀라울 만큼 캐치와 꼭 같았다. 제시카가 중얼거리는 말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하면서도 미건의 손가락 끝은 크로키(스케치)를 하고 싶어 움찔대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말이에요?"

"당신의 재능이요."

"네에?"

미건은 눈을 크게 뜨고 반문했다.

"당신의 작품이 훌륭하다는 걸 캐치에게서 들었어요."

제시카는 유니콘을 섭섭한 듯이 응시하고 나서 아래에 내려놓았다.

"그 아이가 보낸 두 점을 봤을 때도 인정했지만, 그건 당신 재능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거였군요."

제시카는 끌을 한 개 손에 들고 작품을 보면서 멍청히 그것으로 손바닥을 두들겼다.

"이건 굉장하군요."

"캐치는 내게서 사가지고 간 조각을 당신에게 보낸 건가요?"

"그래요, 이 주일쯤 전에. 나는 그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제시카는 꽈당 소리를 내 끌을 내려놓고 거의 만들어진 석회석 습작 앞으로 가 섰다. 그것은 바다에서 나오는 여자상으로, 캐치의 흉상을 시작하기 전에 조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그대로 놓아두고 캐치의 조각을 시작했었다.

"훌륭하군요!"

제시카는 감동한 나머지 소리를 질렀다.

"유니콘과 이것은 반드시 갖고 싶어요. 캐치가 보내온 두 점의 반응도 상당히 좋았어요."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시카가 말하는 것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우리 집 손님이에요, 뉴욕에서 경영하고 있는 화랑의 손님"

제시카는 넘칠 듯한 미소를 보였다.

"동생이 내가 화랑을 경영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아니요,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미건은 대답했다.

"캐치가 말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자세히 말하는 쪽이 좋을 듯하군요."

"부디 그렇게 해주세요."

미건은 제시카가 자기 옆의 작은 의자에 앉는 것을 기다렸다.

"이 주일쯤 전에 캐치가 당신의 작품을 두 점 보내왔어요."

제시카는 시원시원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싶다고 했어요. 나는 유화를 약간 하는 정도이지만, 미술 작품을 보는 눈은 누구보다도 확실하거든요."

제시카는 자신있게 말했다.

"화가가 되는 것은 무리라고 깨달은 뒤부터 작품 다루는 법을 쭉 배웠어요. 그리고 맨하탄에 화랑을 차린 거구요. <제시카의 가게>라고 하는데 벌써 육 년이 넘었어요. 고객도 꽤 수준이 높구요."

그녀는 빙긋 웃었다.

"그러니까 여기저기 어슬렁대며 돌아다니는 동생이 당신의 작품을 보고 내게 보낸 것은 당연한 행동일 거예요. 동생의 감식안은 전문가가 무색할 정도이지만, 그 아이는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 좋아하거든요."

별 도리가 없다는 듯 제시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해는 중앙 아프리카에 병원을 개업하겠다고 말을 꺼내 반대를 받았지만, 결국 세우고 말았어요. 그 아이는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반드시 해내는 타입이에요."

"병원!"

엉뚱한 이야기 전개에 미건은 뛰어오를 만큼 놀랐다.

"그래요, 아이들을 위한 병원. 그 아이는 어린아이들에게 약하거든요."

제시카는 놀리는 듯한 어투로 말했지만, 동생에의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베트남 난민의 고아들을 위해서도 깜짝 놀랄 만한 일을 몇 가지인가 했어요.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의 뉴사우스웨일스에는 저 아이가 만든 멋있는 공원이 있어요."

미건은 할 말도 없었다. 제시카가 말하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데이비드 캐처튼인 걸까? 이것이 그 슈퍼마켓에서 뻔뻔스럽게 추근거린 남자와 같은 사람이란 말인가?

조부를 속이려고 하고 있다고 캐치를 힐책했을 때를 미건은 괴로운 마음으로 생각했다. 쭉 캐치를 부와 혜택받은 용모로 급성장한 기회주의자라고 미건은 자신에게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쾌락만을 쫓아다니는 무책임하고 의지할 수 없는 남자라고도.

"몰랐어요."

미건은 중얼거렸다.

"그런 줄은 전혀 몰랐어요."

"그랬을 거예요. 캐치는 대개는 눈에 드러내지 않도록 처리하니까."

제시카는 말했다.

"그런 일을 할 때는 절대 공표하려 하지 않아요. 그 아이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실행력과 굉장한 자신감의 소유자이지만 무척이나 온후한 면도 있어요."

제시카의 시선은 미건의 어깨너머를 보고 있었다.

"나보다도 당신이 그 아이를 더 잘 알고 있는 듯하지만."

순간, 미건은 멍한 얼굴로 제시카를 응시했다. 그리고 머리를 돌리자 캐치의 흉상이 눈에 들어왔다. 이야기를 듣는 중에 흉상을 감추는 것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렸던 것이다. 천천히 미건은 다시 머리를 돌리고 냉정하게 되려고 노력했다.

"설마, 그에 관해서는 거의 몰라요. 매력적인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충동적으로 작품을 만든 것일 뿐."

제시카의 눈에는 알겠어요, 라는 듯한 빛이 머무르고 있었다.

"동생은 정말 매력적인 남자예요."

미건은 당황해서 눈을 내리깔았다.

"미안해요."

곧 제시카는 말했다.

"참견하고 말았군요. 나의 나쁜 습관이에요. 캐치의 이야기는 그만두고 당신의 개인전에 관한 것을 의논합시다."

미건은 또다시 눈을 들었다.

"저의 뭐라구요?"

"당신의 개인전."

제시카는 다시 한 번 말하고 곧이어 새로운 화제로 이야기를 옮겼다.

"개인전을 열 수 있을 만한 작품이 준비되는 것은 언제쯤이면 되겠어요? 여기에도 상당히 많이 있고, 마을 화랑에도 몇 점인가 놓여 있다고 캐치가 그러더군요. 지금부터 일하면 가을에는 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부탁이에요, 제시카. 당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미건의 목소리는 흥분해서 더 높아졌다.

제시카는 손을 뻗어 미건의 양손을 쥐었다. 그리고 놀랄 만큼 강하게 붙잡았다.

"미건, 당신은 훌륭한 재능이 있어요. 이제는 서서히 그것을 사람들 앞에 내보여야만 할 때예요."

제시카는 일어서면서 미건도 일어나도록 재촉했다.

"그런데 커피를 주실 수 있겠어요? 이 일에 관해서 천천히 이야기해 봅시다."

 

한 시간 뒤 미건은 주방에 혼자 앉아 있었다. 어둠이 밀려들어 왔지만 전기 스위치를 넣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테이블에는 컵이 두 개 있었다. 미건의 컵에는 완전히 식은 커피가 반쯤 남아 있고, 제시카의 컵은 텅 비어 앙금이 조금 남아 있었다. 미건은 이 한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순서대로 생각해 보려고 했다.

맨하탄의 제시카의 화랑에서 개인전을 갖다니. 게다가 뉴욕에서도 개인전이라니, 내 작품을.

현실이 아니야. 미건은 혼란스럽게 생각했다. 한낱 꿈에 지나지 않아. 그리고 맞은편에 있는 빈 컵을 내려다 보았다. 주위에는 아직 희미하게 제시카의 고상한 향기가 떠돌고 있었다.

꿈결인 채로 미건은 두 개의 컵을 싱크대로 갖고 가서 기계적으로 씻기 시작했다. 제시카는 과연 어떤 식으로 말을 끌어간 것일까? 이상했다. 개인전을 승낙하기 전에 일정이나 그밖의 소소한 것들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캐처튼 가의 인간에게 노우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미건은 한숨을 내쉬고 젖은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캐치에게 전화하지 않으면그 생각은 곧 그녀를 겁쟁이로 만들어 버렸다.

주의깊게 미건은 컵을 바구니 위에 얹어 놓았다. 캐치에게 인사말을 하지 않으면가슴이 두근거렸지만 미건은 아무렇지 않음을 가장해서 바지의 허리 주위에 젖은 손을 문질렀다. 그런 뒤 가스 레인지 옆의 전화로 향했다.

"미건, 그건 간단한 일이 아니야."

미건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입술을 깨물었다. 기침도 해봤다.

"인사말만 하면 되는 거야. 인사만. 그럼 일 분도 걸리지 않을 거야."

미건은 수화기에 손을 뻗었지만, 그 손을 다시 끌어당겨 버렸다. 머리와 심장이 경쟁하듯 두근두근거렸다.

드디어 수화기를 쥐었다. 전화번호는 알고 있었다. 이 주일 동안 몇 번이나 돌리려고 한 번호인 것이다. 미건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최초의 숫자를 돌렸다. 5분 정도로 끝날 것이다. 그리고 그 뒤는 다분히 두 번 다시 그에게 연락을 할 구실은 없어지고 말 것임에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의 싸움의 응어리가 사라지면 좋을 텐데. 더 냉정하게, 예의바른 사이가 된다면 마음이 좀 편할 텐데. 미건은 마지막 숫자를 다 돌리고 전화가 연결되기를 기다렸다. 송신기의 탈칵 하는 소리, 그리고 벨 소리.

네 번 울렸다. 그것은 영원히 울리기라도 할 것만 같은 긴 네 번이었다. 그리고 저음의 캐치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캐치?"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가는 소리가 나왔다. 미건은 눈을 감았다.

"메그?"

"그래요, "

미건은 목소리를 짜냈다.

"방해되는 때 전화를 한 건 아니었으면 좋겠군요."

이 무슨 진부한 대사인가. 미건은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괜찮아?"

"예에, 물론이에요."

말하려고 생각해 둔 간단하고 아무 것도 아닌 말이 입 밖으로는 잘 나오지 않았다.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캐치, 당신의 누나가 와서"

"알고 있소. 조금 전에 돌아왔더군."

그의 목소리는 약간 초조하게 들려왔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라도?"

"아니에요, 아무 것도 아니에요."

어째서 안정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걸까. 미건은 손쉽게 이야기를 끝낼 방법을 생각했다.

"지금 혼자요?"

", "

"십 분이면 그쪽으로 갈 거요."

"안 돼요."

미건은 다급하게 손을 머리에 댔다.

"안 돼요. 부탁이"

"l0분이오."

캐치는 그렇게 되풀이 말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9

미건은 멍청히 뚜소리가 나는 수화기를 응시했다. 단 두세 마디로 어째서 이런 결과가 되어 버린 걸까. 캐치에게 와 달라고 하고 싶은 마음은 결코 없었다. 두번 다시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미건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미건은 살짝 수화기를 되돌렸다. 정말은 그를 만나고 싶은 것이다. 미건은 인정했다. 계속해서 그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만나는 것이 두려웠을 뿐이다. 미건은 의미도 없이 주방을 돌아보았다. 이제 완전히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테이블도 의자도 까맣게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어두운 주방을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미건은 스위치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방 안에 환한 빛이 넘쳤다. 미건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꽤 안정이 된 듯했다. 그래, 커피를 끓이자. 뭔가 손을 움직이는 것이 필요했다. 맛있는 커피를 끓이자.

미건은 퍼콜레이터에 커피를 넣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신경은 변함없이 흥분된 채였다. 잠시 동안 다시 한 번 냉정해지면 좋을 텐데. 캐치가 오면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확실하게 말해 두자. 그리고그런 뒤 헤어지는 거다.

전화가 울렸다. 미건은 깜짝 놀라서 갖고 있던 컵을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했다. 그녀는 자신을 타이르면서 컵을 놓고 수화가를 들었다.

"여어, 미건?"

조부의 밝은 소리가 울려왔다.

"팜프아직 유원지에 계세요?"

도대체 몇 시인가? 갑자기 의문이 생겨 미건은 황급히 손목시계를 보았다.

"그래서 전화하는 거다. 죠지가 와서 함께 마을로 저녁 식사하러 갈 거다. 네가 걱정할까 봐서 말이다."

"괜찮아요."

머릿속에 뭉쳐져 있던 긴장이 풀려 미건은 빙그레 웃었다.

"당연히 또 낚시 이야기로 꽃을 피우실 테죠?"

"녀석의 낚시 이야기는 은거생활로 들어간 뒤부터 점점 화려해지 니까."

조부는 중얼중얼 말했다.

"어떠냐, 너도 나오지 않겠냐? 맛있는 걸 사줄 테니."

"두 분 다 자기 자랑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해서죠?"

조부의 쿡쿡 웃는 소리에 미건도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하지만 오늘은 사양할래요. 고맙긴 하지만 저는 냉장고에 남아 있는 걸로 스파게티라도 만들어 먹을래요."

"그러면 디저트를 사가마."

이것은 옛날부터의 습관이었다. 미건이 철이 들고 나서부터 조부는 쭉 미건과 따로 식사를 했을 때는 뭐든지 선물을 사가지고 들어왔던 것이다.

"뭐가 좋지?"

"레인보우 샤베트."

미건은 즉시 대답했다.

"그럼 즐겁게 지내세요."

"그렇게 하지. 미건, 늦게까지 열심히 일하지 말아라."

수화기를 놓으면서 미건은 이제 곧 캐치가 올 거라는 것을 왜 조부에게 말하지 않은 것인지 자문했다. 왜 제시카의 일이나, 그녀가 제안한 저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말하지 않았던 것일까? 캐치와 이야기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미건은 자신에게 말했다. 확실하게 이야기가 될 때까지 그가 정말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런저런 것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확인하기까지.

캐치를 기다리는 동안 미건은 안달복달했다. 바보스러운 생각이야. 도대체 어째서 내가 뉴욕 같은 데서

헤드라이트의 강렬한 빛이 주방 창을 비추었다. 미건은 퍼뜩 생각하는 것을 중단했다. 침착하지 않으면. 그녀는 일부러 찬장을 닫으러 갔다가 문으로 갔다.

손잡이에 손을 댔을 때 캐치가 돌계단을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은 침묵한 채로 스크린 도어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응시했다. 가로등 주위에서 모기가 날개를 퍼득거리는 소리가 미건의 귀에 들려왔다.

드디어 캐치는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조용히 닫고 나서 그는 미건의 볼에 손을 뻗었다. 그는 양손으로 미건의 볼을 누르고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상당히 동요하고 있는 듯하군."

미건은 입술을 적셨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리고 그의 손이 닿지 않을 때까지 뒷걸음질 쳤다. 그는 미건의 눈을 응시한 채 서서히 손을 내렸다.

"일부러 와 줘서 고마워요"

"그만둬, 미건."

캐치의 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그녀는 당황해서 캐치를 바라보았다. 그는 약간 화가 난 듯했다.

"나한테서 뒷걸음질 치는 것은 그만둬. 사과하는 것도."

미건은 무심코 양손을 흔들었다.

"커피를 끓이려던 참이에요. 곧 할 수 있어요."

컵과 커피를 꺼내려는 미건의 팔을 캐치는 붙잡았다.

"커피를 마시러 온 게 아니야."

그의 손은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와 미건의 허리를 눌렀다. 캐치의 고동이 손가락으로 전해져 왔다.

"캐치, 부탁이에요. 제발 성가신 일은 하지 말아요."

캐치의 시선에 뭔가 불타는 것이 있었다. 이윽고 그것은 사라지고 미건의 손은 자유롭게 되었다.

"미안, 이 이 주일 동안은 당신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를 내내 생각했었소."

미건의 볼에 피가 확 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움찔하지 않았다.

캐치는 양손을 포켓에 넣었다.

"미건, 화해하고 싶소."

캐치의 상냥함에 당황하면서도 미건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커피포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를 용서해 주지 않는 거요?"

뒤돌아본 미건의 눈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아니에요그러니까, 그 물론"

"물론 용서할 수 없다는 거요?"

캐치의 눈이 희미하게 웃었다. 입가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미소. 미건은 힘이 빠져가는 것을 느꼈다.

"물론 용서해요."

고쳐 말하고 이번에야말로 커피를 끓이려고 그에게 등을 돌렸다.

"잊읍시다."

어깨에 그의 손이 닿자 미건은 펄쩍 뛰었다.

"잊자고?"

캐치는 미건을 자신 쪽으로 돌려세웠다. 그의 눈에는 이미 미소의 빛은 사라져 있었다.

"내가 닿는 것을 당신이 싫어한다고는 생각지 않소. 게다가 나를 두려워하고 있는 듯이 생각되지도 않고."

미건은 어떻게 해서든지 안정을 찾으려고 했다.

"당신이 두려운 게 아니에요, 캐치."

미건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단지 당신과 있으면 혼란해져요, 언제나."

캐치는 생각에 잠긴 듯 눈썹을 모았다.

"당신을 혼란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어. 미안해, 미건."

"괜찮아요."

캐치의 성의를 느끼고 미건은 빙그레 웃었다.

"알고 있어요."

캐치는 미건을 당겨 안았다.

"그러면 화해의 키스는 어때?"

미건이 저항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캐치의 입술이 겹쳐져 있었다. 부드럽고 상냥한 키스. 미건의 가슴은 두근거리고 격하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캐치는 깊은 키스로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양손은 가볍게 미건의 어깨 위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미건은 이성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기려고 했다. 하지만 캐치는 그 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캐치는 미건에게서 멀어져 그녀의 무거운 눈꺼풀이 떨리면서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런 다음 말없이 창가로 걸어갔다.

미건은 열심히 두 사람 사이의 친밀함을 되돌리려고 했다.

"누님의 일로 할 말이 있어요."

슈슈 하며 끓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 퍼콜레이터에 손을 대면서 말했다.

"그렇다고나 할까, 정확하게는 제시카가 집에 오기 전의 것에 관해서요."

캐치는 머리를 숙여 미건이 컵에 커피를 붓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냉장고에 가까이 가 밀크를 꺼냈다.

"넣을까?"

미건의 옆에 서서 한쪽 컵에 밀크를 넣고 그녀가 끄덕이는 것을 보고 또 한쪽 컵에도 넣었다.

"어째서 내 작품을 누님께 보냈다고 말해 주지 않았어요?"

"제시카의 의견을 들을 때까지 기다리는 쪽이 좋으리라 생각했었지."

캐치는 미건의 옆에 앉아 양손으로 컵을 감싸 쥐고 흔들었다.

"누나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게다가 내 눈보다는 그녀의 눈 쪽이 정확하다고 생각했지. 개인전을 연다고? 당신 전화를 받기 조금 전에 누나에게서 들었소."

미건은 앉은 채로 머뭇머뭇 커피를 응시했다. 이윽고 캐치를 똑바로 보았다.

"제시카는 사람을 다루는 것이 무척이나 능숙해요. 난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사이에 승낙해 버렸어요."

"좋아."

캐치는 짧게 말하고 커피를 마셨다.

"당신에게 감사하고 싶어요."

미건은 목소리에 힘을 넣었다.

"무엇이든 미리 준비해 주어서."

"나는 아무 것도 한 게 없소."

캐치는 대답했다.

"누나는 일도 개인적인 것도 결단은 자신이 내리는 사람이니까. 나는 그녀에게 조각을 보내 의견을 구했을 뿐이오."

"그러니까 그 인사를 하고 싶어요. 당신은 내가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 하지 않았던 일을 해주었어요."

캐치는 어깨를 움츠렸다.

"알았어, 당신이 감사하고 싶다면."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요."

미건은 말했다.

"게다가 조금은 두려워요. 내 작품이 세상 사람들 눈에 드러난다는 것을 생각하면 두려워서 견디기 힘들어요."

미건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난 뒤 본심을 고백했다.

"전부 끝나고 비평가에게 철저하게 당한다면, 당신을 저주할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지금 이 감사의 기분을 받아 주세요."

캐치가 미건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끌어 안겨진다. 미건의 가슴은 고동쳤다. 하지만 그는 살짝 손등으로 미건의 볼을 어루만졌을 뿐이었다.

"대성공을 거두면 다시 한 번 내게 감사해 줘."

캐치는 미건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은 세계가 확실하고 선명하게 비쳤다. 미건은 캐치가 없으면 세계가 얼마나 둔하고 단조로운지 알지 못했었다.

"와 줘서 정말로 기뻐요."

미건은 속삭이고 더 참을 수 없어서 캐치의 팔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잠시 지나 캐치는 양손을 그녀의 허리에 가볍게 대었다.

"전에 여러 가지 불평을 해서 미안융자 건 말이오, 진심으로 생각한 건 아니오. 내가 화를 터뜨리면, 내 자신도 손댈 수 없을 만큼 바보가 되어 버리니까."

"이번엔 당신이 후회할 순서?"

미건은 웃었다.

"그래."

미건은 양손을 캐치의 허리에 두른 채 빙긋 웃었다. 캐치는 살짝 키스하고 멀어졌다. 미건은 마지못해 하면서 그가 자신의 팔에서 멀어지는 것을 허락했다. 캐치는 말없이 미건을 내려다 보았다.

"왜 그래요?"

미건은 쑥스럽게 웃었다.

"당신의 얼굴을 내 기억 속에 새겨 두고 싶어. 뭐가 먹고 싶지?"

미건은 머리를 흔들었다. 왜 그는 이렇게도 멋있는 걸까.

"아직이에요. 남은 걸로 스파게티라도 만들어 볼까 생각하던 참이에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군. 피자는 어때?"

"굉장히 좋아해요. 당신은 괜찮아요?"

"제시카와 로브는 아이들을 데리고 골프 연습장에 갔소. 내가 없다고 쓸쓸해 하는 사람은 없어."

캐치는 미건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지."

그의 눈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미건의 가슴은 다시 두근두근 높게 울렸다.

"어머, 잠깐만요."

캐치의 손에 한 손을 잡힌 채 미건은 말했다. 그녀는 스크린 도어 옆의 메시지 판에 메모를 남겼다.

"캐치와 외출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10

차는 해안 도로를 지나갔기 때문에 관광객이나 해수욕객으로 혼잡한 차들에 섞여 느릿느릿 가게 되었다. 카 라디오가 커다란 볼륨으로 울렸고, 창은 다들 내려져 있었다. 여기저기서 웃는 소리와 음악이 넘쳐흘렀다. 멀리에서 관람차의 라이트가 빨강과 파랑으로 반짝였다. 호텔 풀에는 여러 가지 색의 비치 타월이 난간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발코니에는 호텔 손님들이 걸터앉아서 천천히 지나가는 차의 행렬이나 오고가는 사람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왼편으로는 빌딩 틈새로 언뜻언뜻 바다가 엿보였다.

피자와 캔티 와인으로 만족스럽게 배를 채워 졸린 미건은 부드러운 가죽 시트에 깊이 몸을 묻었다.

"이번 주말이 지나면 이곳도 조용해질 거예요. 메모리얼 데이까지요."

"영지를 침범 당했다는 기분은 들지 않소?"

캐치는 멈추어 있는 차의 흐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물었다.

"사람으로 인해 혼잡스러운 것을 좋아해요."

곧 미건은 대답했다.

"하지만 모래밭이 정적으로 빠져드는 겨울도 좋아해요. 환락가 같은 것에 마음이 끌리는 것도 겨울 동안의 인적 없는 그 정적을 알 수 있어서 그러는 것일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 당신만의 시간이겠지. 조각에 몰두할 수 있는"

캐치는 힐끗 미건을 보았다.

미건은 어깨를 움츠렸다. 캐치의 진지한 눈빛에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여름에도 조금은 하고 있어요. 틈을 봐서 제시카와 개인전 계획을 짰을 때에는 시간을 완전히 잊고 있었어요."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미건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것을 준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만두거나 하지는 않겠지!"

", 하지만"

캐치의 날카로운 눈빛에 미건은 변명하려고 준비한 말을 삼켜 버렸다.

"할 수 있어요. 그만두거나 하지는 않아요."

그녀는 딱 잘라 분명하게 말했다.

"지금은 뭘 만들고 있지?"

"지금은, 글쎄"

창밖으로 눈길을 피하면서 미건은 다 만들어진 캐치의 흉상을 떠올렸다.

"자그마한"

어깨를 움츠리며 카 라디오의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목조를 하고 있어요."

"무슨?"

입 속에서 우물우물 중얼거리는 미건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캐치는 빙그레 웃었다.

"해적이에요."

가로등 빛이 그의 얼굴을 지나가 빛과 그림자의 음영을 들었을 때 미건은 제목을 결정했다.

"해적의 흉상이에요."

미건은 급히 눈을 좁혀 자신의 얼굴을 쳐다본 것을 알아채고 그는 한쪽 눈을 올렸다.

"보고 싶군."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요."

당황한 나머지 변명하듯 말했다.

"점토 원형이 겨우 만들어졌을 정도예요. 하지만 개인전에 다른 작품들을 모아들인다면 굳이 연기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메그, 이것저것 걱정하는 것은 그만두고 단지 기뻐한다면 어떨까?"

미건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며 캐치를 보았다.

"기뻐해요?"

"개인전을 말이오."

캐치는 미건의 머리카락을 흐트러 놓았다.

"아아, 그래요."

미건은 열심히 생각을 정리해 바꿔 보려고 했다.

"그렇게 하겠어요개인전이 끝나면요."

두 사람은 빙그레 웃었다.

"그 때 당신은 뉴욕에 있을 건가요?"

차의 흐름이 완만해지자 캐치는 기어를 삼단에 넣었다.

"그럴 셈이오."

"괜찮으면, 꼭 전시회장에 나왔으면 싶어요."

캐치는 머리를 흔들며 소리내어 웃었다. 미건은 그를 상관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가능한 한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와 주었으면 해요."

"정말 없으면 안 되는 중요한 것은 당신의 조각 작품들뿐이야."

캐치는 그렇게 말했지만 눈은 아직 이상하게 웃고 있었다.

"내가 오프닝 날 저녁에 나타나서 당신을 발견한 것은 나라고 자랑하고 싶어 하는 녀석으로 보이나?"

"두 사람 다 후회할 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미건은 중얼거렸지만 캐치는 아직도 웃고 있었다.

"당신은 자신이 실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은 없나 보군요?"

미건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당신이 자신에 성공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믿을 수 없을 뿐인 거지."

캐치는 그녀의 말을 바꿔 대꾸했다.

미건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그렇군요. 어느 쪽도 바른 말이에요."

그녀는 잠시 뒤 그렇게 말했다.

차가 다시 멈추는 것을 기다려 미건은 캐치의 어깨를 살며시 만졌다.

"캐치!"

"?"

"왜 중앙아프리카에 병원을 세웠어요?"

캐치는 미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미간에 작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병원이 필요했기 때문이오."

그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그것뿐?"

캐치가 이 질문을 피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건은 귀찮게 다시 물었다.

"당신은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고 제시카가 말하던데"

"우연히 충분한 액수의 돈이 나에게 있었던 거야."

캐치는 시끄럽다는 듯이 어깨를 움직여 미건을 가로막았다.

"나는 그 돈으로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뿐이오."

미건의 표정을 보고서 캐치는 머리를 흔들었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아. 그뿐이야. 제발 나를 위대하다든가 훌륭하다든가라고는 생각지 말아 줘."

미건은 다시 편안하게 의자에 기대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캐치의 귀에 걸린 곱슬머리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런 건 꿈에도 생각 안해 봤어요."

선의를 가진 사랑이라기보다는 이상한 사람이다는 쪽이 좋아. 미건은 생각했다. 이 작은 비밀을 안 것으로 그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간단해졌는지.

"당신을 슈퍼마켓에서 만났을 때 느낀 대로, 아니꼬운 남자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그쪽이 훨씬 간단해요."

"이제야 겨우 안 모양이군. 슈퍼마켓에서의 당신은 지독히 무뚝뚝했었지!"

"무뚝뚝할 만했었죠."

미건은 그 때가 그리운 듯이 말했다.

그것은 언제쯤의 일이었던 것일까. 캐치가 슬며시 미소 짓는 것이 보였다. 무심코 그녀도 그를 따라 웃었다.

"그래요. 당신은 정말로 느낌이 나빴어요."

차가 옆길로 빠졌다. 미건은 질문하듯이 캐치를 돌아보았다.

"조금만 걷지."

캐치는 능숙하게 주차장의 빈 곳에 포르셰를 집어넣었다.

"그럴 마음이 생기면 선물을 사주지."

그는 벌써 차에서 내려 지금이라도 뛰어갈 듯한 태세를 갖췄다.

"어머, 약속은 굉장히 좋아해요."

미건은 기쁜 듯 소리를 지르고 캐치의 옆으로 나갔다.

"마음이 생기면이라고 했어."

"그 부분은 들리지 않았어요."

캐치의 손에 손가락을 끼면서 미건은 말했다.

"글쎄굉장히 비싼 것이 좋겠어요."

"어떤 것이 좋지?"

두 사람은 주차하고 있는 차를 피하면서 신호를 무시하고 도로를 가로질렀다.

"기대해요."

해안선에 이어진 블럭을 깐 보도는 혼잡했다. 사람과 라이트, 그리고 소음으로 넘쳐흘렀다. 해풍이 날라오는 파도 향내와 수많은 포장마차에서 흘러나오는 고기를 굽는 향기로 냄새가 경쟁하듯이 길가에 넘쳐흘렀다. 캐치는 작은 가게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게임 센터로 미건을 끌고 갔다.

"선물해 주겠다고 허풍을 떨고 아무 것도 주지 않았잖아요."

캐치가 지폐 몇 장을 동전으로 바꾸는 것을 보고 미건은 싫증난 표정을 지었다.

"아직 빠르잖아, 이것 봐."

캐치는 미건에게도 동전을 몇 개 쥐어 주었다.

"자아, 시험 삼아 인베이더로부터 은하계를 지켜줘 봐."

미건은 미소를 만들어 보이며 한 대를 선택해 슬롯머신(자동판매기)에 동전을 두 개 넣었다.

"내가 먼저 할게요."

스타트 버튼을 누르고 레버를 쥐자 순서 빠르게 적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눈썹을 끌어 모으고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주선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였다. 적을 해치울 때마다 커다란 소리와 색이 화면에서 작열했다.

캐치는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재미있는 듯이 미건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복잡하고 정교한 화면을 보기보다는 그 쪽을 보는 편이 훨씬 재미있었다.

미건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우주선을 움직여 레이저 광선이 습격해 오면 눈을 좁혔다. 간신히 공격을 피했을 때에는 저절로 휴우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동안 내내 얼굴은 냉정하고 진지한 눈빛이었다. 이윽고 공격해 오는 맹공격을 피하면서 과감하게 싸우던 미건의 우주선은 마침내 파괴되어 버렸다.

"흐음!"

캐치는 신음소리를 내며 미건의 점수에 힐끗 눈길을 주었다. 미건은 바지허리에 손을 댔다.

"꽤 잘하는군."

"당신도 잘해 봐요."

미건은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지구의 최후의 보루이니까."

쿡쿡 웃으면서 캐치는 미건을 밀어내고 레버를 쥐었다.

캐치가 미건과 같은 순서로 조금 더 솜씨 좋게 인베이더들을 해치우는 걸 보자 그녀는 그의 솜씨를 인정했다. 그는 어떻게 되든지 간에 승부를 좋아하는 거야. 계속해서 세기를 격추시키려고 해서 아슬아슬하게 레이저로 쏘아 버리는 것을 보고 미건은 생각했다. 점수는 점점 올라가서 미건은 더 자세히 보려고 조금 가까이 갔다.

미건의 팔이 캐치의 팔에 가볍게 닿았을 때 순간 그의 손 움직임에 극히 희미한 흔들림이 생긴 것을 미건은 알아챌 수 있었다. 흐음, 재미있군. 장난을 해보고 싶다는 충동을 누를 수 없어 잠자코 그녀는 몸을 좀 더 가까이 가져가 보았다. 다시 그의 타이밍이 약간 벗어났다. 이번에는 살짝 입술을 그의 어깨에 대고 빙긋 웃으며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화면을 보지 않이도 폭발음으로 캐치의 배가 예기치 않은 죽음을 당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캐치도 화면이 아니라 미건을 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 번뜩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겨우 억누르고 있는 뜨거운 정열의 단편이었다. 갑자기 캐치의 손이 레버를 놓고 미건의 머리카락에 뻗어왔다.

"교활해."

캐치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일순, 미건은 비디오 게임의 소리도 주위에서 들끓는 인파도 잊었다. 그의 흐릿해진 회색 눈동자 속에 빨려 들어가 현기증이 날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교활하다니?"

미건은 되물었다. 입술이 가볍게 열린 채였다.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어요."

미건의 머리카락을 누르는 손에 힘이 더해졌다. 그녀는 놀람과 동시에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당신이 꾀를 부렸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당신이 내게 끼치는 위력을 자각했다면 지금부터는 좀 신중해져야겠군."

캐치는 조용히 말했다.

"캐치."

미건은 그의 입가를 응시했다.

"이 이상 신중해지고 싶지 않아요."

천천히 캐치의 손은 머리에서 얼굴로 미끄러져 갔다. 그리고 볼을 어루만진 뒤 밑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더욱 신중해져야 할 이유가 생겼어."

그렇게 말한 뒤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나가지. 다른 놀이를 찾아서."

그는 미건의 팔을 쥐고 다른 게임 파트로 찾아갔다.

미건은 캐치에게 깊이 빠져 있었다. 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두 사람은 차례로 여러 가지 게임에 동전을 넣고 솜씨를 경쟁했다. 컴퓨터를 상대로, 그리고 서로를 상대로. 캐치와 있으면 어린 시절 축제의 밤에 느낀 것과 같은 활기찬 안락감이 느껴졌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유원지에서 젯트코스타를 타는 것과 같았다. 차츰차츰 다가오는 커브, 산을 오르는 것과 내려가는 것, 언제 시작되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감각. 그리고 미건은 무엇보다도 이 젯트코스타의 바람을 자르는 듯한 드릴이 좋았다.

미건은 양손을 허리에 대고 캐치가 스키볼로 착실하게 쿠폰을 따가는 것을 뒤에서 지켜보았다. 그는 볼을 교묘하게 중앙 구멍에 넣어 벌써 깊게 늘어선 숫자에 점수를 더했다.

"당신은 실패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군요."

미건은 웃으면서 물었다.

캐치는 다음 볼을 굴려 다시 40점을 벌었다.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할 뿐이야. 마지막 두 개를 굴려보지 않겠어?"

"괜찮아요."

미건은 셔츠의 있지도 않은 실밥을 털어내는 시늉을 했다.

"당신이 모처럼 솜씨를 자랑하며 기뻐하는데난 사양하죠."

캐치는 웃으면서 마지막 두 볼로 90점을 벌어 길게 이어진 쿠폰을 받았다.

"이 정도로는 당신의 선물이 될 만큼의 경품도 나오지 않겠군."

"이걸로?"

미건은 쿠폰을 체념한 듯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당신은 선물을 사주겠다고 말했어요."

"그랬었지."

캐치는 싱글벙글하며 쿠폰을 둘둘 말았다.

"확실히는 아니었지만."

미건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는 경품을 진열한 카운터의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24매 있습니다만, 거기 여섯 가지로 사용할 수 있는 접는 나이프를 받을 수 있을까요?"

"이건 누구 건데요?"

선반에 눈길을 준 채로 미건은 물었다.

"나는 이 작은 실크 장미가 좋아요."

카운터의 유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작은 코사지를 가리켰다.

"우리 집에는 필요한 나이프 종류는 전부 갖추어져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장난기 가득하게 웃었다.

"알았어."

캐치는 카운터 여점원에게 끄덕여 보여 쿠폰을 네 장 남기고 나머지를 넘겼다.

"이것만 남았는데. "

재빨리 선반을 돌아보고 그는 손가락질했다.

"그것을."

여점원이 내린 작은 조개껍질 세공을 미건은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오리와 펭귄의 혼혈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 할 셈이에요?"

"당신에게 주는 거야."

캐치는 쿠폰의 나머지를 건네주면서 말했다.

"나는 무척이나 선심이 좋아."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올려고 해요."

미건은 중얼거리며 캐치가 셔츠 칼라에 장미를 꽂아 주는 동안 그것을 손바닥 안에 놓고 살펴보았다.

"그런데 도대체 이게 뭐예요?"

"물오리요."

다시 미건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캐치는 게임 센터를 나왔다.

"당신의 태도에는 놀라겠어, 당신은 예술가로서 이것의 미적 가치를 인정해 주리라고 생각하는데."

"흐음."

미건은 다시 한 번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그것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것에 상당히 애교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겠어요."

그녀는 까치발을 해 캐치의 볼에 키스했다.

"벌어들인 걸 전부 나를 위해 써 주어서 기뻐요."

캐치는 빙그레 웃으며 미건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위에서 아래로 쓰다듬었다.

"답례 인사로 받을 수 있는 것은 뺨의 키스 정도일까?"

"이건 조개껍질 펭귄의 인사예요."

"물오리요."

"뭐라도 좋아요."

웃으면서 미건은 한쪽 손을 캐치의 허리에 돌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보도를 가로질러 모래밭으로 이어지는 경사를 내려갔다.

달은 가늘고 하얀 선밖에 없었다. 하지만 별들은 밝게 빛나며 수면에 모습을 비추었다. 모래밭에 밀려왔다가 사라지는 파도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여기저기 연인들이 팔을 끼고 조용히 이야기를 하거나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침묵한 채로 걷거나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파도치는 틈이나 모래밭을 회중전등으로 비추며 보물찾기를 했다.

미건은 몸을 구부려 구두를 벗어던지고 바지 끝을 접어 올렸다. 캐치는 그녀를 따라 슬랙스 끝을 접었다. 차가운 물에 정강이까지 적시면서 두 사람은 북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윽고 보도에서 흘러오던 웃음소리와 음악이 아쉽게도 멀어져 갔다.

"당신의 누님은 정말로 예쁜 사람이더군요."

드디어 미건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말했던 대로예요."

"제시카는 언제나 변함없이 예쁘지."

캐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조금 고집스러운 데가 있긴 하지만, 언제나 아름다워."

"당신의 두 조카도 유원지에서 만났어요."

미건은 고개를 쳐들었다. 바닷바람이 머리를 흐트려 놓았다.

"얼굴에 온통 초콜릿을 묻힌 채였어요."

"언제나 그래."

캐치는 웃으며 미건의 팔을 살짝 어루만졌다. 미건은 피부 아래에서 피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에 외출하기 전에는 밖에서 지렁이를 봤어. 내일은 낚시질에 데려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됐어."

"당신은 아이들을 좋아하는군요."

캐치는 머리를 숙여 미건을 내려다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바다를 보고 있었다.

"아아, 아이들이란 언제나 무슨 일을 저지를지 예상도 할 수 없지?"

"매년 여름에는 유원지에 오는 수많은 아이들을 보지만, 지금도 놀라는 일들이 자주 있어요."

"당신의 양친이 돌아가신 것은 언제요?"

미건의 눈에 순간적으로 놀라는 빛이 떠오른 것을 캐치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모래밭 쪽으로 눈을 돌렸다.

"다섯 살 때예요."

"그다지 기억은 없겠군."

"예에, 희미하게밖에는그림자처럼물론 팜프는 사진을 갖고 있지만 사진을 볼 때마다 양친이 너무 젊은 것에 놀라 버려요."

"당신에게는 괴로운 경험이었겠군."

캐치는 중얼거렸다.

"양친이 없이 자라다니"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상냥했기 때문에 미건은 그를 돌아보았다. 모래밭에서 상당히 멀리 와버렸기 때문에 빛은 별에서 나오는 것밖에 없었다. 미건을 응시하는 캐치는 그녀의 눈동자가 별을 담은 채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래요. 하지만 팜프가 있었으니까. 팜프는 부모 이상의 것을 해주었어요."

선 채로 밀려오는 파도에 발을 적셨다. 바닷물이 피부에 닿아 거품이 생겼다.

"팜프가 분홍색 가디건 드레스에 다리미질을 하려고 악전고투하던 때의 모습이 아직도 인상에 남아 있어요. 내가 여덟 살인지 아홉 살 때라고 생각하지만."

머리를 흔들고 웃으면서 미건은 바닷물을 차올렸다.

"지금도 눈에 보일 듯해요."

캐치는 미건의 허리에 양손을 두르고 끌어안았다.

"알 만해."

"팜프는 주름이나 장식들과 격투를 했어요. 그리고는 혼자서 중얼중얼 욕설을 퍼붓는 거예요. 내가 바로 옆에 있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구요. 그런 팜프가 좋아요."

미건은 작게 덧붙였다.

"그런 팜프를 사랑해요."

캐치는 미건의 머리 끝에 살짝 입술을 댔다.

"당신은 드레스 같은 건 아무래도 괜찮다고 말했을 테지."

미건은 놀라서 캐치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알고 있어요?"

"당신 일이니까 아는 거요."

천천히 캐치는 손가락 끝으로 미건의 얼굴의 윤곽을 더듬었다.

미건은 눈썹을 모아 캐치의 어깨너머를 보았다.

"나는 그렇게도 단순한가요?"

"아니야."

손가락 끝을 미건이 턱에 댄 채로 캐치는 그녀의 얼굴이 자기 쪽을 향하도록 했다.

"내가 그만큼 당신을 연구했기 때문이오."

미건은 자신의 피가 격하게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

캐치는 머리를 흔들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오늘 밤은 무슨 일이든지 간에 물어서는 안 돼. 아직 대답은 준비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알았어요."

미건은 착하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까치발을 해 캐치의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조용하면서도 탐색하는 듯한 키스였다. 미건은 그의 상냥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동안 캐치는 미건을 마치 보물을 찾은 것처럼 소중하게 취급했다.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미건이 무너져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가볍게 지탱하고 있을 뿐이었다.

미건은 캐치의 등에 댄 양손을 점점 올려 강한 예술가의 손가락을 그의 머리카락으로 미끄러뜨려 넣었다. 그리고 그의 관자놀이를 쓰다듬었다. 그곳이 긴장하는 것을 느끼고 미건은 그에게 입술을 댄 채 달래듯이 속삭였다.

그가 저항하는 것과 미건의 피부에 닿은 손이 힘을 더하는 것이 동시에 느껴졌다.

조용히 정열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캐치의 승낙을 완전히 얻지 않은 채 그에게서도 정열을 끌어내고 있는 것을 미건은 알았다. 그녀는 자신의 힘에 스스로 놀랄 정도였다. 캐치는 미건을 눌러 멈추게 하고 격정을 풀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내부에서는 폭력에 가까운 욕망이 잠재해 있는 것을 미건은 알아차렀다. 그래서 그것에만 매달렸다. 전에 캐치에게 자제력을 잃어 버렸던 것처럼, 지금은 그의 자제심을 자신이 끌어내고 싶었다. 자신이 어쩌지 못할 만큼 그를 원하듯이 그도 자아를 잊을 만큼 자신을 원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캐치의 자제심이 무너져 가는 것을 미건은 느꼈다.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이 더해져 꼭 끌어안겨졌기 때문에 두 개의 그림자는 한 개가 되었다.

캐치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감싸 안아 주도권을 찾으려는 듯이 그녀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바야흐로 불꽃이 눈부시게 타올라갔다. 미건의 몸 안에 정열이 끓어 일어나고 혈관 속을 뛰어 빠져 나갔다. 그녀는 캐치의 아랫입술을 이로 살짝 깨물었다. 희미한 신음소리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갑자기 캐치는 미건을 떼어 놓았다.

"메그."

미건은 침묵한 채로 기다렸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머리를 젖힌 채 얼굴을 캐치의 눈앞에 드러내 놓고, 머리카락은 바닷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미건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을 느꼈다. 캐치의 눈은 거의 검은 빛에 가까워졌고, 미건의 얼굴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숨결이 그녀의 입술에 따뜻하게 깃털처럼 닿는 것이 느껴졌다.

"메그."

다시 한 번, 캐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천천히 양손을 어깨에 올렸다.

"이제 돌아가야지."

미건은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담하게 그에게 입술을 가까이 대었다.

"그것이 당신이 바라는 건가요?"

미건은 중얼거렸다.

"정말로 나에게서 멀어지고 싶어요?"

캐치의 손가락이 경련하듯 미건의 팔에 파고들어 그녀를 떼어 놓았다.

"당신은 알고 있겠군."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도대체 무엇을 하려 하는 거지? 나를 미치게 할 셈인가?"

"아마도"

미건의 몸 안은 아직 욕망이 숨쉬고 있었다. 그것은 캐치를 응시하는 눈 속에도 숨겨져 있었다.

"분명히, 그래요."

캐치는 힘주어 굳게 미건을 껴안았다. 그의 심장이 고동치는 것이 미건의 가슴에 전해졌다. 그의 자제심은 한계의 끝에서 균형을 잡고 있음에 지나지 않아. 미건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곧 그 때가 올 거야."

조용히 캐치는 말했다.

"반드시 그 때가 올 거야, 반드시. 이 다음, 이 다음이야. 메그, 잊지 말아."

캐치의 눈을 응시하는 그녀의 체내에는 이상한 힘이 넘쳐흘렀다.

"그건 경고인가요?"

"그렇소."

캐치는 주저하지 않고 즉각 말했다.

"말한 대로!"

 

11

캐치의 흉상을 완성하는 데에 예정보다 이틀이 더 걸렸다. 완성했을 때 미건은 개인적인 감정을 개의치 않고 객관적으로 판단을 내리려고 했다.

목조로 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돌보다는 약간 온화함이 느껴졌다. 입술을 굳게 다물은 조각상을 미건은 작품의 결점을 찾아보았다. 자만이 아니라 이것은 그녀의 작품들 중에서 걸작품 안에 들어갈 만했다. 어쩌면 최고 걸작일지도 모를 일이다.

핸섬하고 힘이 강한, 사람의 마음을 끌지 않을 수 없는 얼굴이다. 눈과 입술 근처에 유머가 나타나 있는 것 같았다. 조각의 입술에 미건은 손가락 끝을 대어보았다. 믿기지 않을 만큼 풍부한 감정을 띠고 있는 입술은 캐치의 냄새와 피부 감촉을 생각나게 했다. 재미있어 할 때, 화를 낼 때, 자극을 받았을 때, 이 입이 어떻게 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그의 눈이 어떻게 되는지도.

미건은 조각의 눈에 물끄러미 빠져들었다. 이 눈이 어떻게 보이는지, 회색 눈동자가 변화하고, 어떠한 표정을 비추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기뻐할 때는 밝게, 화를 낼 때에는 흐린 듯한 색이 되고 정열이 솟아오르면 어두운 색이 되는 것을.

나는 내 얼굴과 같은 정도로 그의 얼굴에 대해서 알고 만들어 내고 있다. 하지만그의 마음은 알 수 없다. 그의 마음은 아직도 알지 못하는 타인과 같다. 한숨을 내쉬고 미건은 작업대에 양손을 짚고 턱을 괴었다.

그는 아직도 내가 그를 아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는 걸까? 미건은 생각했다. 흩어진 머리카락에 살며시 손을 대보았다. 제시카라면 그를 알 거다. 분명 어느 누구보다도 더 상세히.

만약 용기를 내서 그에게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한다면 상황은 어떻게 변할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겠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 테다. 단지 그에게 고백할 뿐이다. 그렇게 해도 안 되는 일일까? 사랑은 가슴속에만 간직해 두기에는 너무나도 중요하고 너무나 훌륭한 것이다. 하지만 거절당한다면미건의 뇌리에 슬픈 빛을 담은 캐치의 시선이 떠올랐다.

"견딜 수 없어!"

미건은 중얼거리며 이마를 캐치의 나무 이마에 눌렀다. 그 때 노크하는 소리가 미건의 갈등을 깨뜨려 버렸다. 그녀는 재빨리 얼굴을 매만지고 의자에 앉은 채로 문을 돌아보았다.

"들어오세요."

조부가 들어왔다. 더부룩한 백발 위에 달랑 낚시 모자를 쓰고 있었다.

"저녁식사로 싱싱한 생선은 어떠냐?"

싱글벙글하는 할아버지의 얼굴은 오늘 아침부터의 원정이 성공으로 끝났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미건은 끄덕였다.

"한두 입 정도라면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노인의 눈이 반짝 빛나면서 볼에 핏기가 오르는 것을 미건은 빙긋 웃으며 주시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어린시절 자주 그렇게 했던 것과 같이 조부의 목에 매달렸다.

"사랑하고 있어요, 팜프!"

"그래, 그래."

조부는 상냥하게 미건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반은 놀라고 반은 기쁜 듯했다.

"나도 사랑하고 있다, 미건. 송어를 갖고 돌아오는 날을 더 늘려야겠구나."

미건은 조부의 따뜻한 어깨에서 얼굴을 들고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걸 기뻐하는 게 아니에요."

노인은 진지한 얼굴이 되어 미건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래그렇겠지."

크고 뼈가 튀어나온 손으로 손녀딸의 볼을 어루만졌다.

"네 덕택에 나는 오랜 세월이 즐거운 추억뿐이란다. 미건, 네가 뉴욕으로 떠나 버리면 몹시 쓸쓸해질 거다."

"팜프."

미건은 다시 한 번 조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꽉 껴안았다.

"겨우 한 달이나 두 달뿐이에요. 그리고는 곧 돌아올 거예요."

주위에 벚꽃나무 향내가 풍겼다. 조부가 주머니에서 파이프를 꺼낸 것이다.

"함께 와 주실 거죠? 시즌도 끝날 즈음이고."

"메그."

두서없는 말이 시작되려고 하는 것을 막듯이, 노인은 미건의 얼굴을 들어 올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도록 했다.

"이것은 너의 시작이야. 제한을 더 하는 것은 그만두거라."

미건은 머리를 흔들고 안정되지 않은 채로 걷기 시작했다.

"그런 게 아니에요."

"더욱 자신에게 자신감을 가져보렴. 나는 이 세상에서 중요한 인간이라고 말이다. 너에게는 훌륭한 재능이 있으니까."

조부는 방 안의 작품을 돌아보고 캐치의 흉상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너에게는 스타트의 테이프를 자를 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어. 하려고 한다면 온힘을 다해 매달려 주었으면 싶다."

"마치 내가 이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말투로군요."

미건은 뒤돌아보고 조부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차렸다. 그녀는 양손을 꽉 쥐었다.

"지금 막 완성한 참이었어요."

입술을 적시며 태연한 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꽤 잘 만들어졌죠? 어떻게 생각하세요?"

", 무척 좋구나."

노인은 미건에게 눈길을 돌렸다.

"앉거라, 미건. 말해 둘 일이 있단다."

조부의 목소리가 진지한 것에 미건은 몹시 긴장했다. 그녀는 말한 대로 그의 바로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노인은 미건이 앉기를 기다린 뒤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만, 너에게 사물은 변하는 법이라고 말했을 게다."

조부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너는 철이 들고 나서부더 쭉 나와 단둘뿐이었다. 우리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에게 의지해 왔다. 유원지 덕택으로 어떻게든 생활을 유지해 올 수 있었고 일하는 보람을 얻어왔다."

팜프의 목소리가 온화해졌다.

"너를 데려온 지 벌써 l8년이 된다만, 그 동안 나는 단 일 초라도 너를 짐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네 덕택으로 나는 노망들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다. 네가 성장하는 것을 쭉 지켜보면서 언제나 흐뭇했었지. 이제는 슬슬 다음 전기를 맞아야 할 시기라고 여겨지는구나."

목이 타는 듯해서 미건은 침을 삼켰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시려는 거예요? 통 모르겠어요."

"너도 슬슬 세상에 나가야 할 때라는 거다, 미건. 내게서 떠날 때가 온 거야."

노인은 셔츠 주머니에 손을 넣어 신중하게 접은 종이를 꺼냈다. 그것을 펼쳐서 미건에게 건네주었다.

미건은 약간 주저한 뒤 조부의 눈을 응시한 채로 받아들었다. 첫눈에 보아서는 그것이 뭔지 알 수 없었다. 미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 한 글자를 조심스럽게 읽어 내려갔다.

"그래요!"

냉정한 눈빛으로 차분하게 말했다.

"결국엔 캐치에게 팔았군요."

"네가 입회하고 그 서류에 내가 서명한다면 그렇게 되는 거지."

미건의 눈에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이 떠오른 것을 노인은 보았다.

"미건, 내가 말하는 것을 좀 들어보렴. 이건 충분히 생각한 끝에 결정한 일이야."

그는 미건의 손에서 서류를 받아, 테이블에 놓고 그녀의 양손을 쥐었다.

"유원지를 팔라고 찾아온 것은 캐치가 처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모두 내가 생각한 조건과 맞지 않았어. 하지만 이번에는 딱 들어맞는 거야."

"어떤 조건인가요?"

미건은 눈에 눈물이 넘쳐흐를 것 같은 것을 느끼면서 물었다.

"적절한 상대야, 메그. 그리고 적절한 시기이고."

미건이 탄식하는 것을 보는 것이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운 노인은 그녀의 양손을 어루만지며 위로해 주었다.

"요전에 수리 공사가 필요하게 되었을 때 팔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전부터 팔 생각은 있었단다. 누군가 젊은 사람이 계승해 주었으면 했고, 그러면 나는 온종일 낚시를 할 수 있지 않겠니. 지금은 그것이 소원이다, 메그. 한 척의 배와 한 벌의 낚싯대가 있으면 돼. 그리고 뒤를 이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바로 캐치란다."

조부는 말을 끊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찾아 내밀었다. 미건의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서.

"이전에 나는 그를 신뢰한다고 말했었지. 지금도 그것엔 변함이 없단다. 나는 유원지 경영을 캐치에게 맡기고 싶다. 이것으로 이제 두통거리도 사라지고, 다른 의욕이 생길 게다. 게다가 너도 말이다."

미건의 볼에서 눈물을 닦아 주면서 그는 계속했다.

"너도 활력소가 되어 줄 그 무언가가 필요해. 언제까지나 장부 맞추기나 종업원의 급료 지불에 대해 걱정만 하고 있어서는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을 게다."

"그야 팜프가 팔기를 희망하고 있다면"

미건은 말을 꺼냈지만, 노인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아니야, 네가 찬성해 주지 않으면 팔지 않아. 마지막 칸이 공백 그대로 있는 것은 그 때문이란다."

조부는 진지하고 안정된 시선으로 미건을 응시했다.

"네가 찬성해 주지 않으면 사인은 안할 거다, 미건. 나에게도 너한테도 가장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바에야 나도 반대란다."

미건은 일어섰다. 조부는 손녀딸의 손을 놓고 그녀가 창가로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미건은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뉴욕에서 개인전을 여는 것을 승낙했지만, 지금까지와의 생활에서 커다란 비약이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간은 유원지였다. 하지만 예술가로서의 경력을 쌓아가기 위해서는 죠이랜드 경영에 자신이 언제까지나 매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원지는 마음을 편히 할 수 있는 원천이었다. 미건의 책임이고 제2의 집이었다. 그것은 조부가 그녀의 아버지이고 어머니가 되어 주었던 것과도 같은 안락감이었다. 요전에 유원지 때문에 돈이 필요하다고 말할 때 조부의 얼굴에 피로한 표정이 떠오른 것을 미건은 생각해 내었다. 여름이 올 때마다 긴 시간을 빼앗기고 끝없는 요구사항이 이어졌다.

조부에게는 평생을 자기 마음대로 보내야 할 권리가 있다. 미건은 생각했다. 심로나 책임에서 벗어나 지낼 권리가 있는 것이다. 낚시를 즐기거나 늦게까지 한껏 자고 양진달래 주위를 산책하며 지낼 권리가, 어린 시절과의 최후의 끈이 끊기는 것이 싫다고 해서 조부를 곤란하게 할 권리가 내게 있는 걸까? 조부가 말하는 대로 새로운 변화의 시기가 와 있는 것이다.

미건은 천천히 펜을 찾아냈다. 그런 뒤 조부 앞으로 가 그것을 내밀었다.

"사인하고 송어와 함께 샴페인으로 축하해요."

노인은 펜을 쥐었다. 하지만 눈은 미건의 얼굴에 둔 채였다.

"정말로 괜찮은 거니, 미건?"

미건은 끄덕였다. 자기 자신을 위해 좋은지 어떤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조부를 위해서 좋을 것만은 확실했다.

"좋아요."

활짝 웃으며 조부가 알았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서류에 몸을 굽히는 것을 쳐다보았다.

그는 사인을 마치고 미건에게 펜을 내밀었다. 그녀는 손이 떨리는 것을 꾹 눌러 참으면서 증인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확실하고 읽기 쉬운 글자로 썼다.

"캐치에게 전화하는 쪽이 좋을 것 같구나."

조부는 무거은 짐에서 벗어난 듯 한숨을 내쉬고 생각에 잠기면서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서류를 갖고 가는 편이 좋을까?"

"제가 갖고 가겠어요."

미건은 주의 깊게 서류를 접었다.

"이야기도 하고 싶고."

"그것 잘 됐구나. 픽업트럭으로 가라. 비가 내릴 것 같으니까."

문으로 가는 미건에게 조부는 말을 걸었다.

 

캐치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는 미건의 마음은 안정되어 있었다. 서류를 바지의 뒷주머니에 소중하게 넣어 두었다. 검은 포르셰 뒤에 트럭을 세우고 그녀는 차에서 내렸다.

공기는 침침하고 무겁게 떠 있고 안개비의 가느다란 선이 빛났다. 머리 위의 주름은 검은 색으로 부풀어 올라 있었다. 미건은 현관으로 걸어가 며칠 전과 같이 노크를 했다. 역시 대답은 없었다. 현관 앞의 돌계단을 내려와 그녀는 집 뒤로 돌아가 보았다.

뒤 정원에도 캐치는 보이지 않았다. 들려오는 소리는 높은 생울타리에 막혀 분명치 않게 되어 있었다. 모래밭으로 내려가는 경사면 가까이에 캐치가 심은 버드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작고 어린 나무였다.

그 주위의 땅은 파냈다가 덮은 직후라서 아직 거뭇거뭇했다. 부드러운 어린 잎을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에 미건은 그쪽으로 걸어갔다. 키는 아직 미건에게도 미치지 않지만 곧 그 훌륭해질 나무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여름에는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어 쉬게 해주겠지.

마음이 가자는 대로 미건은 더 밑으로 내려가 모래밭 쪽으로 갔다. 뜻밖에도 그곳에 캐치가 있었다. 양손을 주머니에 찌른 채 기세 좋게 밀려오는 파도를 보고 있었다. 미건의 기척을 느낀 건지 그는 돌아보았다.

"마침 당신을 생각하고 있었지."

캐치는 조용하게 그러나 무게 있게 말했다.

"소원이 통한 건가?"

미건은 서류를 꺼내서 캐치에게 내밀었다.

"당신 거예요. 이제 당신 소원대로 된 거예요."

그녀는 냉정한 어투로 말했다.

캐치는 서류에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그 눈에 감정이 흔들리는 것을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할 이야기가 있소, 메그. 안으로 들어가지."

"싫어요."

미건은 뒷걸음질 쳤다.

"이야기 따위는 이 이상 필요 없잖아요."

"당신은 그럴지도 모르지만, 내 쪽에는 많이 있어. 어떻게 해서든지 듣게 할 거야."

캐치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섞여 있었다. 미건은 냉정함이 곧 돌풍에 날려가 버릴 것만 같은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당신 이야기 따위는 듣고 싶지도 않아요, 캐치. 이건 팜프가 희망한 거예요."

미건이 캐치의 손 안에 서류를 밀어넣었을 때 번개가 하늘을 뚫듯이 거세게 지나갔다.

"받아요, 그렇게도 갖고 싶어 했으니까."

"기다려 줘, 미건."

발꿈치를 돌리는 그녀의 팔을 캐치가 붙잡았다. 그의 말은 거의 천둥치는 소리가 지워져 버릴 정도였다.

"싫어요!"

미건은 소리치며 팔을 비틀어 빼냈다.

"손을 붙잡는 짓 따위는 삼가해 줘요. 갖고 싶은 것이 손에 들어왔잖아요. 이미 나 같은 건 필요도 없겠죠."

캐치는 욕설을 토해내며 서류를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미건이 세 발자국도 걷기 전에 다시 붙잡아 휙 자기 쪽으로 돌려세웠다.

"당신은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니잖아."

"사람을 함부로 바보니 뭐니 말하지 말아요."

미건은 몸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당신과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돼.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여러 가지 있소. 중요한 일들이오."

순식간에 폭풍이 미건의 얼굴로 불어닥쳐 왔다.

"싫다고 말한 게 들리지 않아요?"

격하게 치는 파도와 강해져 가는 바람에 지지 않으려고 미건은 큰소리로 화를 냈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이야기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의 이야기 같은 것 듣고 싶지도 않다구요. 그런 건 내게는 아무래도 좋아요."

비가 쏟아져 내렸다. 순식간에 두 사람은 흠뻑 젖어 버렸다.

"굉장한 비로군."

미건처럼 점차 분노를 터뜨리기 시작한 캐치도 역시 큰소리를 질렀다.

"이걸로 당신도 이야기를 듣게 되겠지. , 안으로 들어가지."

캐치는 미건을 끌고 모래밭을 돌아갔다. 하지만 그녀는 난폭하게 몸을 비틀며 겨우 그에게서 빠져 나왔다. 두 사람의 몸에 폭포수 같은 비가 마구 쏟아져 내렸다.

"싫어요!"

미건은 소리쳤다.

"안에 들어갈 마음 같은 것 추호도 없으니까."

"아니야, 그렇게 해!"

"어쩔 셈이에요?"

미건은 물었다.

"머리카락을 붙잡고라도 끌어갈 셈이에요?"

"그것 참 좋은 방법이로군."

캐치는 다시 미건의 손을 붙잡았지만 그녀는 살짝 피했다.

"좋아, 이제 충분해."

일순간의 동작으로 그는 미건을 끌어안았다.

"내려놔요!"

미건은 분노로 가득차 자아를 잃고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발로 차댔다. 하지만 캐치는 무시하고 꼭 끌어안고 여유 있게 경사를 올라갔다. 주위에는 천둥과 번개가 격렬하게 다투고 있었다.

"당신 같은 사람은 꼴 보기도 싫어요!"

시원스럽게 잔디를 가로질러가는 캐치에게 미건은 분노의 소리를 질렀다.

"좋아, 지금까지는 아직 서두에 지나지 않아."

캐치는 허리를 눌러 문을 열고 주방을 지나 거실로 들어갔다. 뒤에는 물방울이 한 줄기의 흐름이 되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캐치는 미건을 소파에 던졌다.

"얌전히 앉아 있는 거야."

미건이 아직 숨도 돌리기 전에 캐치는 명령했다.

"잠깐 동안 어른스럽게 앉아 있어."

그리고 그는 난로 앞으로 가 긴 성냥을 사용해 불을 붙였다. 잘 마른 나무는 곧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미건은 호흡을 정리하면서 일어서자, 문으로 날 듯이 뛰어들었다. 하지만 손잡이에 손이 닿기도 전에 캐치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미건의 어깨를 붙잡고 그녀의 등을 문에 밀어붙였다.

"메그,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나는 이미 한계에 와 있어. 이 이상 나를 자극하지 말아 줘."

"당신 따위는 무섭지 않아요."

미건은 초조하게 물이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흔들어 대었다.

"당신을 두렵게 할 생각은 없소. 당신과 뚜렷한 주제가 설정된 이야기를 하고 싶소. 그런데 당신은 늘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귀를 빌려 주려고 하지 않는 게 아니오."

미건은 새롭게 끓어오르는 분노로 눈을 크게 떴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그런 말을 할 권리는 당신에게 없으니까."

"아니, 있소."

캐치는 능숙하게 미건의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뻗어 트럭 열쇠를 빼내었다.

"이건, 맡아 두지."

"걸어서라도 돌아갈 수 있어요."

열쇠를 자기 주머니에 넣어 버리는 캐치에게 미건은 대꾸했다.

"이 빗속을?"

갑자기 몸이 떨려 미건은 양손을 앞으로 하고 몸을 끌어안았다.

"열쇠를 그만 돌려줘요."

하지만 캐치는 대꾸도 하지 않고 미건을 불 앞으로 끌어갔다.

"떨고 있잖아. 젖은 옷을 벗어야만 해."

"벗지 않아요. 당신 집에서 내가 옷을 벗으리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미친 거예요."

"그럼 멋대로 해!"

캐치는 자신의 흠뻑 젖은 티셔츠를 벗고 화가 나는 만큼 힘껏 옆으로 내동댕이쳤다.

"당신같이 완고하고 융통성 없는 고집스러운 여자는 아직껏 본 적이 없소."

"고마워요!"

미건은 재채기가 나올 것 같은 것을 꾹 참았다.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게 전부인가요?"

"틀렸소."

캐치는 다시 불 옆으로 갔다.

"아직, 아직이오. 이제부터니까. 앉으시오."

"그러면 먼저 나부터 말하겠어요."

피부에 오한이 달렸지만 미건은 떨지 않으려고 애썼다.

"당신에 관한 나의 여러 가지 추측은 많이 틀렸어요. 당신은 내가 생각한 게으름뱅이도, 불성실한 사람도 아니고, 영화를 추구하는 사람도 아니에요. 게다가 내게는 상당히 정직하게 여러 가지를 이야기해 주었죠."

미건은 눈에서 비와 눈물이 섞인 것을 닦아냈다.

"당신은 나에게 처음부터 유원지를 사들일 셈이라고 말했었죠. 그것은 좋은 방법이었다고 생각해요. 그 때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전부 내 탓이에요. 당신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틈을 보인 내가 어리석었어요."

미건은 침을 삼켰다. 미건은 최소한 마지막으로 남은 자존심만은 버리고 싶지 않겠다.

"사실 당신 같은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어요. 자아, 이제 당신은 소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어요. 이걸로 마지막이로군요."

"나는 아직 내가 원하는 것 전부를 손에 넣은 건 아니오."

캐치는 미건의 옆으로 걸어가서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묶었다.

"겨우 일부밖에 손에 넣지 못했소, 메그."

미건은 그를 응시했다. 말싸움에는 이미 지쳐 있었다.

"어째서 나를 놓아 주지 않나요?"

"당신을 놓아 줘? 당신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소. 아픈 마음을 안고 세 시까지 이 모래밭을 어슬렁거린 것이 몇 번인지 당신은 알고 있소? 당신을 내 가슴에 안을 때마다 얼마나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는지 알고나 있소?"

미건의 머리카락에 댄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며 그녀를 힘껏 끌어당겼다.

전신이 욱신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미건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자신은 두려워서 들을 수가 없었다. 생각하는 것까지 두려웠다.

순간 캐치는 욕설을 내뱉으며 다시 미건을 끌어안았다. 흠뻑 젖은 얇은 의복을 통해서 그의 손이 느껴졌다. 캐치는 미건의 입술을 빼앗으며 손으로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마루 위로 넘어뜨려졌을 때도 미건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몸에 닿을 때마다 젖어서 언 피부에 불이 붙었다.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와 비가 창에 떨어지는 소리만이 두 사람의 호흡에 섞여 들려왔다. 난로에서 장작이 타타탁 움직였다.

캐치의 키스는 길고 깊었다.

"미안하오. 나는 이야기할 셈이었는데. 당신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많이 있소. 하지만 지금은 당신이 필요하오. 이 기분을 내내 나는 감춰 두었던 거요."

필요하다. 미건의 의식은 이 한 마디에만 집중되었다. 필요하다고 하는 것과 갖고 싶다는 것은 전혀 다르다. 필요하다는 것은 더 인격적인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라고는 말할 수 없더라도미건은 그 말을 머릿속에 새겼다.

"괜찮아요."

미건은 일어나려고 했지만, 캐치 쪽의 동작이 더 빨랐다.

"캐치"

"부탁이오, 메그. 내가 하는 말을 들어줘."

캐치의 얼굴을 찬찬히 쳐다본 미건은 여느 때의 그와는 다른 진지한 시선과 입을 발견했다.

"알았어요."

미건은 조금 전보다는 더 안정되어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말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겠어요."

"처음으로 당신을 보았을 때, 그 순간부터 나는 당신이 갖고 싶었소. 그것은 당신도 잘 알 거요."

캐치의 소리는 낮았지만 평소의 냉정함은 없었다. 가슴속에는 뭔가 불타오르는 것이 있었다.

"처음에 데이트하던 밤, 나는 당신의 용모에 끌린 것만큼 당신 자신에게도 흥미를 느꼈소. 당신을 내 것으로 하는 것은 간단하다고 나는 생각했소보통 흔히 있을 수 있는 불장난 정도로."

"알고 있어요."

미건은 조용히 말했다.

미건은 진실을 알게 된다 해도 상처받지 않으려고 냉정함을 가장했다.

"아냐."

캐치는 미건의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당신은 몰라. 곧 생각만큼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지. 당신과 이곳에서 식사했을 때, 그리고 당신이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을 때"

캐치는 말을 끊고 미건의 볼에서 젖은 머리카락을 살짝 눌러 주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소. 어째서인지는 내 자신도 좀체로 알 수 없었지. 당신이 갖고 싶다지금까지 만난 어떤 여자보다도 지금까지 꿈꾸어 온 어떤 여자보다도 당신이 갖고 싶었소. 그런데 당신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거요."

"캐치"

정신을 가다듬으며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지 어떨지 불안해하면서 미건은 머리를 흔들었다.

"들어줘."

미건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이 다시 감기는 것을 보고 나서야 캐치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에게서 멀어져 가려고 생각했소, 메그. 지금까지 일어난 일은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내게 다짐하면서 말이오. 그런데 당신이 분노로 떨며 잔디밭을 뛰어내려온 거요. 당신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에 나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거지. 당신을 보았을 뿐인데도 마치 숨이 멎어 버릴 것만 같았소."

숨을 죽이고 가만히 누워 있는 미건의 손을 캐치는 들어 올려 입술에 대었다. 그 동작에 미건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그만둬요. 제발 부탁이에요."

그녀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캐치는 오랫동안 미건의 눈을 물끄러미 엿보듯 응시했지만, 이윽고 그녀의 손을 놓아 주었다.

"당신을 진정으로 갖고 싶었소."

그 소리는 그의 눈동자 이상으로 미건의 마음에 전해져 왔다.

"당신이 필요했소. 그러니까 더욱더 화가 난 거요."

캐치가 미건의 이마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당신을 상처 입힐 마음은 없소, 메그. 떨게 할 마음도 없소."

미건은 조용한 캐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난로의 활활 타오르는 빛이 그의 양팔과 등에서 넘실넘실 춤추고 있었다.

"설마, 두 번 다시 헤어지고 싶지 않을 만큼 깊게 당신에게 빨려 들어가 버리리라고는 생각도 안해 봤소."

캐치는 계속했다.

"하지만 당신은 내 꿈속에도 나올 정도가 되어 버린 거요. 어디에도 당신의 환상에서 도망칠 곳이 없었소. 요전날 밤 당신을 보낸 뒤, 그제서야 내게는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 그리고 도망칠 마음 같은 건 털끝만큼도 없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거요. 나는 이제 도망치지 않소. 결코"

캐치는 머리를 구부려 다시 한 번 미건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에게 줄 것이 있소. 하지만 우선 알아주었으면 싶은 게 있소. 어젯밤 할아버지가 오시기 전까지는 나는 유원지를 사들이는 것은 포기하려고 결정했었지. 그런 것으로 그분과의 사이를 해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팜프는 팔고 싶다고 말했소. 그가 제일 좋다고 생각한 일이오. 당신을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하지만 만약 당신이 한사코 싫다고 한다면 이런 서류는 찢어 버리겠소."

"안 돼요."

미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제일 좋은 거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어요. 단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뿐이에요.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이해를 하려 해도 싫은 기분이 드는걸요."

무심코 마음속을 다 털어놓은 덕택에 두려움도 고통도 그녀의 마음에서 달아난 것 같았다.

"부탁이에요. 내게 사과하지 말아요. 나쁜 것은 내 쪽이에요. 이런 식으로 쫓아와서 화가 난 소리를 내고. 유원지를 팔 모든 권리는 팜프에게 있고, 또 당신은 구입할 일체의 권리가 있으니까."

미건은 이 정도로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배신당한 것만 같은 기분이에요. 단지 죠이랜드가 남의 것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바보스런 짓을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요."

미건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집에 돌아가겠어요, 팜프가 걱정하실 테니까."

"안 돼, 아직은."

캐치는 상반신을 일으켜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 사이에 미건은 일어나 젖어서 흐트러진 머리를 뒤로 쓸어 올렸다.

캐치가 내놓은 것은 작은 상자였다. 조금 망설인 뒤 캐치는 미건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선물과 캐치의 긴장에 당혹해 하면서 미건은 그 상자를 열었다. 순간 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흐린 듯한 짙은 에메랄드였다. 사각 커트로 심플하지만 세련된 아름다움이 있었다. 눈이 아찔해지는 듯한 감각으로 미건은 그것을 응시했다. 그런 뒤 캐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말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캐치."

다시 한 번 미건은 머리를 흔들었다.

"모르겠어요아무래도 받을 수 없어요."

"노우라고는 하지 말아 줘, 메그."

캐치는 미건의 양손을 감싸안았다.

"거절당한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

말 소리는 적었지만 미건은 그 소리의 긴장을 느끼고 당혹스러웠다. 어떤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자 미건의 마음에 한 줄기 빛이 비쳐들었다.

안정하는 거야. 그녀는 캐치의 눈을 물끄러미 다시 응시했다.

"당신이 말하려고 하는 것이 뭔지 모르겠어요."

미건의 손을 쥔 캐치의 손가락에 힘이 더해졌다.

"결혼해 줘. 사랑하고 있소."

미건의 전신으로 전율이 달렸다. 농담임에 틀림없다. 곧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의 눈에 농담 같은 빛은 조금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진지하고 말은 간결했다. 언제나 자연스럽게 나오는 재치넘치는 문구나, 차례차례로 이어지던 말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미건은 떨면서 상자를 꼭 쥐고 일어섰다. 잘 생각해 보지 않고서는 현재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결혼! 설마, 캐치가 인생을 함께 나누어 갖자고 말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와 일생을 보낸다. 도대체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젯트코스타에 탄 것 같은 생활. 미건의 볼은 미소 지었다. 맹스피드로 숨도 쉬지 않고 뛰어넘은 젯트코스타처럼 의외의 굴곡과 드릴에 가득찬 생활, 그리고 또한 평온한 때도 있겠지. 다음 굴곡과 선회를 보다 흥미진진한 것으로 만들 만한 은밀하고 귀중한 한 때가.

그럴 마음만 있다면 훨씬 간단하고 세련된 프로포즈를 할 수 있는 사람인데. 캐치의 프로포즈는 간단하지만 성실함이 느껴졌다. 아마도 그는 나와 같을 만큼 섬세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도 참! 미건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데이비드 캐처튼이 섬세하다고 생각하다니. 게다가 아직미건은 그의 눈에 떠오른 표정을 생각했다.

사랑하고 있다. 매일 매일 조부로부터 듣는 말이었지만 캐치의 이 한 마디 말이 미건의 인생을 순간적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미건은 뒤돌아보았다. 그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그의 옆에 앉았다. 그녀의 눈도 캐치처럼 진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미건은 상자를 내밀었다. 캐치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떠오른 것을 보고 당황해서 말했다.

"왼쪽 손에 끼워 주세요."

그 순간 미건은 캐치에게 격렬하게 끌어 안겨져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아아, 메그."

캐치는 미건의 이름을 중얼거리면서 그녀의 얼굴에 키스의 비를 퍼부었다.

"거절당하는가 하고 한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어떻게 내가 그럴 수 있겠어요?"

미건은 그의 목에 양손을 두르고 여기저기 키스하는 그를 붙잡으려 했다.

"사랑해요, 캐치."

입술을 댄 채로 말했다.

"당신이 떠나려고 할 때는 살고 싶지 않았을 정도로."

"이제 결코 떠나지 않아."

"뉴올리언즈에 가는 거야. 곧장 허니문으로. 그건 돌아와서 개인전 준비를 하면 되고, 봄이 되면 파리에 가지."

캐치는 머리를 쳐들고 미건을 내려다보았다.

"당신과 둘이서 파리에서 사랑할 것을 쭉 생각해 왔소. 아침에, 아직 햇살이 부드러울 때 침대 안에서의 당신 얼굴이 보고 싶어."

미건은 캐치의 볼에 살짝 손을 댔다.

"멋져요!"

그녀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곧 결혼해서 당신과 함께 지내고 싶어요."

캐치는 옆에 떨어져 있던 상자를 집어 올렸다. 그는 반지를 꺼내 미건의 손가락에 끼웠다. 그리고 손과 손을 마주잡고 그는 미건을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두 사람을 맺어 주는 거야, 메그."

캐치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도망칠 수 없을 거야."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예요."

미건은 얼굴을 들어 그의 키스에 응했다.

 

에필로그

미건은 안절부절 손가락에 낀 에메랄드를 비틀며 제시카가 따라준 샴페인에 목을 축이려고 했다. 웃음이 얼굴에서 떠날 줄을 모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 미건은 생각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리라고는 미처 생각도 못했었다. 도대체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맨하탄의 화랑에 서서 남 못지않은 예술가라면미건은 중병에 걸린 시늉을 하고서라도 다른 방으로 도망쳐 버리고 싶었다.

"여기 있었던 거냐, 메그?"

팜프는 갖고 있는 것 중에서 제일 좋은 검은 양복을 입고서 마치 다른 사람인 듯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는 미건 옆으로 다가왔다.

"이것 하나 어떠냐? 상당히 맛이 있구나."

그는 카나페를 한 개 내밀었다.

"괜찮아요."

위 주위의 긴장을 느끼며 미건은 머리를 흔들었다.

"고마워요, 팜프. 일부러 와 주어서 정말로 기뻐요."

"손녀딸에게 중대한 밤을 내가 소홀히 하리라고 생각하는 거냐?"

노인은 카나페를 볼이 미어지게 입에 넣고 빙그레 웃었다.

"이 성황은 어떠냐?"

"마치 속고 있는 것 같아요."

미건은 중얼거리며 케이프를 늘어뜨린 남자가 그녀의 대리석상을 보고 뒤를 지나가는 것을 과감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네가 이렇게 훌륭하게 보인 것은 처음이다."

노인은 미건의 드레스 소매를 붙잡았다.

"결혼식 때와는 다르다만."

"그 때의 떨림은 이런 것과는 틀렸어요."

미건은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렸지만 모르는 얼굴들뿐이었다.

"캐치는 어디 있어요?"

"아까 봤을 때는 구석에서 굉장한 하이칼라들에게 둘러싸여 있더라만. 그러고 보니까 제시카가 너를 찾았었다."

"그래요?"

미건은 맥 빠진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곳을 움직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 안 돼요."

"메그, 네가 이렇게 마음 약한 것을 본 것은 처음이로구나."

미건은 항의의 말을 했지만, 조부는 사라져 버렸다. 마음 약하다니. 미건은 마음속에서 되풀이했다. 등을 빳빳이 세우고 가슴을 편 뒤 미건은 샴페인을 마셨다. 좋아, 언제까지나 구석에서 한낱 벽의 꽃으로만 남아 있을 수는 없으니까. 비록 비난을 당할지라도 정면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돼. 마음을 단단히 굳히고 미건은 천천히 음식을 늘어놓은 테이블을 향했다.

"당신이 이 조각을 만드신 거죠?"

돌아보니 검은 실크에 다이아몬드를 장식한 드레스 차림의 인상적인 노부인이 서 있었다.

"그렇습니다만"

미건은 약간 턱을 들어올렸다.

"접니다."

"그래요?"

노부인은 힐끗 미건을 쳐다보았다.

"모래성과 소녀의 습작이 팔렸다는 종이가 붙어 있지 않았더군요."

"네에, 그것은 남편 것이기 때문에."

결혼해서 이 개월이 지난 지금도 남편이라고 말할 때마다 미건은 볼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캐치, 나의 남편. 미건은 주위를 홱 돌아보고 그의 모습을 발견했다.

"유감이로군요."

검은 옷의 노부인이 아깝다는 듯이 말했다.

", 죄송합니다. 뭐라고 말씀하셨죠?"

"유감이라고 말씀드렸어요. 그것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당신이"

미건은 놀라서 노부인을 응시했다.

"저것을 갖고 싶다고?"

"<여인들>을 샀어요."

미건이 멍청히 서 있는 것을 보고 노부인은 계속했다.

"걸작이에요. 하지만, 모래성을 또 한 점 제작해 주시도록 부탁드리고 싶은데, 제시카를 통해서 또 연락드리도록 하죠."

", 물론이에요."

제작 의뢰? 노부인의 손을 기계적으로 쥐면서 미건은 지친 듯이 미소 지었다.

"고맙습니다."

사라져 가는 노부인에게 미건은 그렇게 말했다.

"밀리암 테일러 마커스야."

귓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당한방심할 수 없는 인물이야."

미건은 반쯤 그를 향해 서서 캐치의 팔을 붙잡았다.

"캐치, 저 사람, 저 사람은"

"밀리암 테일러 마커스."

캐치는 되풀이해서 말하고 깜짝 놀라는 미건의 입에 살짝 키스했다.

"듣고 있었어. 나도 미술계에 공헌해 주었다는 찬사를 받은 직후야."

샴페인 글라스의 테두리는 미건의 글라스에 쨍그랑 부딪혔다.

"축하합니다, 부인."

"내 작품이 마음에 들었을까요?"

미건은 물었다.

"당신도 그렇게 필사적으로 수축되어 있지만 않는다면 대성공을 거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내 뒤를 따라와 봐."

캐치는 미건의 손을 쥐었다.

"그리고 당신의 작품 아래 '팔렸음'이라는 푸른 종이가 어느 정도 붙어 있는지를 보라구."

"팔렸어요?"

푸른 종이를 보면서 미건은 의아스러운 듯 크게 소리 내 웃었다.

"정말로 팔렸어요?"

"제시카가 기를 쓰고 접대하고 있어. 그녀가 당신에게서 사들인 저 아라바스터는 살 사람이 셋, 그것도 당신이 그녀에게 지불하게 한 두 배로 말이야. 슬슬 당신이 미술 평론가들에게 가지 않는다면 제시카는 아마 발광해 버릴 거야."

"믿을 수가 없어요!"

"믿는 거야."

캐치는 미건의 손을 쥐어 입술에 갖다 대었다.

"당신이 몹시 자랑스러워, 메그."

눈물이 솟아나와 지금 곧이라도 흘러넘쳐 버릴 것만 같았다.

"잠시 동안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제발!"

캐치는 말없이 사람들을 헤치고 빈 방으로 그녀를 대려가 문을 닫았다.

"바보 같아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자 미건은 곧 말했다.

"나란 사람은 정말 바보예요. 꿈에 본 것이 무엇이든지 현실이 되어 간다는 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뒷방에서 울고 있다니. 실패하는 쪽이 좀 더 진지하게 반응할 수 있었을 것 같군요."

"미건, 사랑해."

캐치는 상냥하게 웃으면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직 믿을 수 없어요."

미건은 떨리는 소리로 말렸다.

"개인전이 열린 것 때문이 아니라무엇이든지. 손가락에 낀 당신의 반지를 볼 때마다 언젠가는 눈이 떠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래도 믿을 수 없어"

캐치의 입술이 미건의 입을 막았다. 눈물 섞인 낮은 숨과 함께 미건은 그에게 녹아 들어가고 있었다. 결혼해서 이만큼 시간이 지나고 친밀한 밤이 계속되었어도 지금도 캐치는 키스만으로 그녀를 황홀하게 할 수가 있었다. 피가 끓어오름에 따라 눈물은 사라져 갔다. 미건은 캐치를 끌어당겨 얼굴로 머리카락으로 점차 손을 미끄러뜨렸다.

"모두 현실이야."

입술을 겹친 채 캐치는 말했다.

"믿어."

그는 얼굴을 기울여 더욱 깊이 그녀를 탐했다.

"매일 밤 내 팔 안에서 잠들고 매일 아침 그곳에서 눈을 뜨는 것도 현실의 일이야."

천천히 미건을 떼어 놓고 캐치는 눈물에 젖은 양볼에 차례로 키스했다. 이윽고 미건은 떨리는 속눈썹을 들었다. 캐치는 빙그레 웃었다.

"오늘 밤 나는 뉴욕의 예술계에 빛나기 시작한 신성과 사랑할 거야. 그리고 내일 아침 조간 비평으로 아직 별이 높이 떠 있으면 다시 한 번 사랑하는 거야."

"언제쯤이면 살짝 빠져 나갈 수 있을까요?"

캐치는 웃으며 미건을 끌어당겨 상냥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렇게 유혹하지 말아 줘. 오늘 밤 회장이 닫힐 때까지 두 사람 다 남아 있지 않으면, 제시카에게 지독하게 꾸지람을 들을 테니까. , 화장을 고치고 잠시 동안 기분 좋게 칭찬을 받아 주면 돼. 정신 건강에 무척 좋아."

"캐치."

문을 열려고 하는 캐치를 미건은 멈추게 했다.

"오늘 밤 발표할 수 없었던 작품이 한 점 있어요."

"그래?"

캐치는 흥미로운 듯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 그래요"

미건의 볼에 희미하게 붉은 색이 피어올랐다.

", 이렇게 잘 진행되어 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떻든 비판 정도는 참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이 작품만은 열성이 부족하다든가 미숙하다든가 말해지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캐치는 당황한 듯한 얼굴로 양손을 주머니에 찔렀다.

"내가 본 적이 있는 작품이야?"

"아니요."

미건은 머리를 흔들며 이마에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결혼 기념으로 당신에게 선물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로 너무나 급했기 때문에그런 데다가"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우리들의 약혼 기간이라야 겨우 삼 일간이었는걸요."

"당신이 라스베이거스에 들르는 것을 찬성해 주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어쨌든 개인전 준비 때문에 당신에게 도저히 틈을 낼 수가 없었어요."

미건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지금 당신에게 보이고 싶어요. 오늘 밤에, 내가 예술가 기분으로 있는 지금"

"여기에 있어?"

미건은 빙그르르 몸을 돌려 선반 위로 손을 뻗쳤다. 거기에는 주의 깊게 천으로 싸여진 흉상이 있었다. 말없이 그것을 캐치에게 건네주었다.

캐치는 천을 쥐고 자신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미건은 나무에 약간만 광을 내서 모델이 발하는 완전하게는 세련되지 않은 자아를 표현하려 하고 있었다. 여성의 감성을 느끼기 이전에 예술가의 감성으로 느낀 캐치의 불손함, 자신감, 그리고 온화함이 확실하게 표현되어져 있었다.

캐치는 잠시 동안 아무 말없이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미건은 위 주위가 또다시 긴장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윽고 캐치는 얼굴을 들었다. 진지한 시선은 어둡게 흐려져 있었다.

"메그!"

"이 작품은 전시하고 싶지 않아요."

당황해서 미건은 말했다.

"내게는 지나치게 개인적인 작품이니까."

캐치의 손에서 흉상을 받아들어 광대뼈를 엄지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점토로 원형을 만드는 동안 부셔 버리려고 생각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어요."

쓴웃음을 지으며 미건은 그 흉상을 작은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이것을 볼 때마다 당신을 생각해 버리는 것은 당신이 나의 예술 의욕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단 한 가지 이유라고 자신에게 말하곤 했었어요."

미건은 눈을 들어 그도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아틀리에에 앉아서 당신을 사랑한 거예요. 양손으로 당신의 얼굴을 만들면서"

한 발 앞으로 나와 미건은 양손을 들어 캐치의 얼굴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 때는 지금 이상으로 당신을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어요."

"메그."

캐치는 미건의 양손을 쥐고 각각의 손바닥에 입술을 댔다.

"나는 이미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어."

"나를 사랑해 주는 것만으로도 족해요."

"언제나, 언제든지."

"그건 충분히 긴 시간이겠죠?"

미건은 한숨을 내쉬고 캐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것을 알면 어떻게든지 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평론가들의 혹독한 비평이라도."

캐치는 미건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문을 열었다.

"샴페인을 마시러 가지. 오늘 밤은 축배에 어울리는 밤이니까."

그들은 날개라도 단 듯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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