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복은 없다(no surrender)
Mary Ly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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훤칠한 미남이자 보스턴의 부유한 은행가인 제이컵 윈스롭 에머슨 3세는 사람들로 붐비는 알레포의 혼잡한 시장을 천천히 거닐고 있었다. 간간이 오래된 시장의 높은 천장 사이로 햇빛이 쏟아져 시장 안에 빽빽이 들어서 있는 조그만 상점들과 천막밖에 쌓여 있는 가죽 안장들과 낙타털로 만든 담요들, 그리고 양가죽 코트들이며 카펫들 위를 비추고 있다.
현재 국제통화기금의 대표단을 이끌고 있는 제이크는 자신에게 재정적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과 골치 아픈 시리아의 아랍 관료들로부터 막 도망쳐 나온 것을 자축하는 중이었다. 그가 한 가게의 입구에 서서 자개가 촘촘히 박혀 있는 휘장을 감탄하며 보고 있는데 갑자기 뭔가가 그의 등을 세차게 때렸다.
그 바람에 그의 몸이 카펫더미 위로 엎어져 버렸다.
처음에 그는 자기가 무거운 천더미 아래 깔린 줄 알았다. 얼굴을 덮고 있는 브로케이드 천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아 제이크는 자신을 누르고 있는 것을 더듬었다. 느낌이 따뜻한 것이 사람인 것 같은데... 흠, 그래, 이건 확실히 여자야!
"오, 맙소사! 정말로 미안하오..."
그러나 차갑고 딱딱 끊어지는 영국식 발음이 들려 온 순간 제이크의 몸이 굳어졌다.
"이봐요!"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면서 격렬하게 버둥댔다.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곧 내게서 손을 떼요! 이 구역질나는 악당 같으니!"
적반하장이라더니! 화가 머리끝까지 난 제이크는 가까스로 두 손을 빼내 얼굴을 덮고 있던 무거운 천더미를 옆으로 밀어냈다.
"오, 이런! 믿을 수가 없군. 또 당신이오?" 그는 신음하며 자신의 몸 위에 누워 있는 여자의 풍성한 금빛 머리카락과 붉어진 뺨, 그리고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푸른 눈을 쳐다보았다.
2주일간의 예정으로 짜여 있는 제이크의 이번 시리아 여행은 면밀하게 계획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시리아 정부의 관료들한테 시달릴 대로 시달린 상태이고, 모든 것이 그를 위해 준비돼 있을 것이라던 국제통화기금 관계자의 말도 믿을 게 못됐다.
그런데 이건 또 뭐야? 간신히 이 먼지만 풀풀 날리는 나라에 도착했는데 이 무슨 고약한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왜 나한테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나는 걸까? 어째서 내가 이 사람 미치게 만드는 영국 여자한테 한 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생명을 위협받아야 하는 거지?
게다가 오리얼 드 몽포르 박사가 육체적으로 매력적이라는 사실이 상황을 더욱 나쁘게 만들고 있다. 신만은 내 심정을 아시겠지. 지금까지 그는 키가 크고 보스 기질이 있는 여자는 아무리 멋진 모습을 하고 있어도 거들떠보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여자하고는 만난 지 5분도 안돼 키스를 하게 됐단 말인가? 머릿속이 어떻게 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들이 부딪친 매 순간마다 끝이 항상 비슷하게 된단 말인가?
제이크는 긴 한숨을 내쉬며 보통때의 맑은 정신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불행하게도 오리얼의 부드럽고 따뜻한 육체의 근처에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이 정신을 차리는 데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지금껏 살아온 35년의 세월 속에 그를 이렇게 미치게 만들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건 아마 일시적인 정신착란일 거야. 어쨌든 이 약간은 제정신이 아닌 우스꽝스럽고 신경질적인 여자 박사의 근처에 있을 때는 냉정하고 침착해질 필요가 있다.
그녀가 어떻게 의학박사의 자격을 딸 수 있었는지는 그의 관심 밖이었다. 그녀의 환자들에게 있어서 그녀는 틀림없이 죽음의 여신일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저 여자 손에 걸려들어 살아남은 환자는 없을 거야. 제이크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중얼댔다.
그녀는 팔미라에서 그를 거의 죽일 뻔했다. 다마스커스의 호텔에선 수영장에 빠져 익사할 뻔하지 않았던가? 그래, 이 여자에겐 그야말로 말썽꾸러기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만약 내가 미국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기적이 될 테지!
오리엘은 그 남자의 차고 딱딱한 회색눈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가슴이 돌처럼 가라앉았다. 시리아에 도착했던 첫날부터 이 남자는 갑자기 어디에선가... 꼭 땅에서 솟은 것처럼 불쑥불쑥 나타나곤 했던 것이다.
신만은 그녀가 그와 부딪치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아실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가는 곳엔, 그리고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는 곳엔 어김없이 나타나곤 했다. 이런 악연이 있을 수 있는 걸까?
물론 그가 악한이라는 말은 아니다. 사실 그의 숱 많은 검은 머리칼과 높은 광대뼈, 햇볕에 그은 얼굴을 보노라면 의심할 바 없이 이 끔찍한 남자가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임을 인정하게 된다.
그렇다고 내가 자기 뒤를 졸졸 따라 다니는 것처럼 의심할 필요는 없잖아? 얼마나 잘났길래 자기가 무슨 여성에게 내린 신의 선물쯤이나 되는 듯이 행동하는 거야?
오리엘은 다마스커스의 호텔로 성큼 걸어 들어오던 그의 큰 키와 오만한 표정을 본 처음 순간에 이미 그가 본능적으로 싫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저 남자가 만날 때마다 저렇게 촌뜨기처럼 행동한다고 해서 내가 놀랄 필요는 없는 셈이다.
확실히 저 남자는 제정신이 아니야. 세상에 어떤 남자가 처음 만난 지 몇 분도 안돼 모르는 여자를 안고 키스를 한단 말인가? 매번 내가 그의 품에 갇히는 것으로 끝장면이 연출되곤 했음에도 내가 자기 뒤를 따라다닌다고 몰아세우다니, 신경이 어지간히 녹슬었나 보다.
만약 그에게 제정신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렇게 서로가 부딪친 것이 그녀만의 잘못이라고 하진 못할 것이다.
글세, 어쩌면...이번만은 내 잘못인지도 모르지. 물론 그녀가 그에게 일부러 넘어진 것은 아니다. 바로 옆 가에의 높은 선반에 있은 옷감을 끌어내리려다가 생각보다 무거운 옷감 더미에 자신도 깔려 버렸던 것이다. 어쨌든 이 곤란한 상황에 처한 자신의 모습이 굉장히 당황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이 무례한 남자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 그렇지만 혓바닥이 입천장에 딱 달라붙은 듯 말을 할 수가 없으니...
오리엘이 갑자기 숨을 멈췄다. 그녀의 뺨이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를 단단히 안고 있던 그의 손이 이제 천천히 움직이면서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기 시작한 것이다.
오, 하느님! 대체 내가 이런 꼴로 이 남자 위에 누워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도 제정신이 아니야! 신경질적으로 눈썹을 깜박이면서 그녀는 온힘을 다해 재치있게 이 상황을 벗어날 말을 짜내려 했다. 햇볕에 그은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분노가 어느새 미묘하게 변해 있다.
그의 딱딱한 눈은 이제 뭔가 다른 메시지를 전하면서 그녀의 가슴을 쿵쿵 뛰게 만들었다. 온몸에 짜릿한 흥분이 퍼져 갔다. 오, 안돼! 설마 내게 다시 키스하려는 건 아니겠지?
"난...어...미안해요..." 그녀는 말을 더듬으면서 재빨리 옷감 더미 속에서 빠져나와 양탄자들을 쌓아 놓은 길 가장자리로 움직였다. "내 말은 그러니까...불행한 사고였단 말이에요." 그녀는 억지로 사과했다.
"오, 그래서?" 제이크가 냉소적인 웃음을 지으며 빈정댔다. "대체 언제쯤이면 내 뒤를 졸졸 따라 다니는 짓을 멈출 거요?"
"난 그런 적 없어요!" 오리엘은 화가 나서 버럭 소리쳤다.
"내겐 그렇게 보이던데." 그가 비꼬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시리아는 어림잡아 7만 2천 평방 킬로나 되오. 그런데 내가 가는 곳마다 당신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하는 것이 단지 우연이라는 게 말이나 되오."
오리엘의 뺨이 분노로 불타올랐다. "잘난 척 말아요!" 그녀는 목소리를 높여 경멸조로 말했다."내겐 당신이 이 세상에서 제일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에요. 아주 역겨운 남자..."
"부인, 이 옷감을 사고 싶으십니까?" 갑자기 아랍인의 목소리가 찬물을 머리 위에 쏟아 붓듯 둘 사이에 기여 들었다.
제이크가 멍한 시선으로 그 아랍인을 쳐다보았다.
"오, 맙소사." 그는 상점의 입구를 꽉 메운 채 자신들을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신음을 내뱉었다.
오리엘이 자신의 구겨진 면 스커트를 매만지는 동안 호흡을 정리한 그는 침착하게 그녀의 팔을 잡아끌고 걷기 시작했다.
"이봐요... 뭐하는 거예요?" 그녀가 숨을 헐떡였다.
"당신 손을 즉시 치우지 않으면 내가..."
"조용히 해!" 그녀의 팔을 여전히 꽉 잡은 채 제이크가 낮게 으르렁댔다. 그는 재빨리 아랍 상인에게 이 난장판에 대한 보상비로 지폐 다발을 건네준 되 그녀를 끌고 혼잡한 시장 통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맙소사, 놔요!"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이 발걸음을 따라갈 수가 없어서 그녀가 항의했다. "이렇게 미친 듯이 갈 필요는 없잖아요?"
그가 경멸조의 웃음을 터뜨렸다. "필요가 있지! 만약 언론에서 저 난장판에 끼어들어 봐. 난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마음은 추호도 없소! 당신을 당신 호텔에 데려다 놓을 때까지는 내 눈 밖을 벗어나게 할 수가 없소. 아나 그러고 나면, 그럴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나도 좀 쉴 수가 있겠지." 그의 눈에는 정말 끔찍하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다.
"그렇지만...난 호텔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의 손을 벗어나려고 애쓰면서 오리엘이 소리쳤다.
"난 아직 쇼핑을 끝내지 못했어요. 난 사야 할 것들이 아직도 많단 말이에요."
"그거 참 안됐소." 시끄럽고 번잡한 시장을 벗어나면서 빛 아래로 나왔다.
"자, 어디에 묵고 있소?"
호흡을 가다듬으며 오리엘은 그를 노려보았다. 어째서 이 남자가 내 주위를 얼쩡거리게 된 거지? 그녀는 자신이 사려고 마음먹었던 것을 아직 반도 못 샀고, 게다가 알레포는 해리어트 이모가 좋아할 만한 실크 브로케이드 산지로 유명한 곳이 아닌가?
"어디요?" 그가 다시 물었다.
"이 깡패 같은 남자...!"
"보통때 나는 아주 이성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는 걸 당신이 알아줬으면 좋겠군." 그가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2주동안, 물론 거기엔 당신이 관련돼 있어서지만 난 냉정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소!" 그는 냉소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니 이쯤에서 시간 낭비는 그만 합시다. 당신이 지금 묵고 있는 호텔 이름이 뭐요?"
"난 왜...우!"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팔을 강하게 움켜잡는 바람에 오리엘은 기겁을 했다. 세상에,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지! "오...좋아요. 당신이 꼭 알아야 하겠다면 난 람시스에 묵고 있어요. 그렇지만 난 돌아가고 싶지가..."
"오, 그래, 당신은 가야 하고말고!" 퉁명스레 말하면서 그가 지나가는 택시를 세웠다.
거칠게 그녀를 택시 안으로 집어넣은 뒤 옆자리에 앉은 제이크는 운전사에게 호텔 이름을 알려 주었다.
난 정말로 정말로 이 남자가 증오스러워! 오리엘은 바로 옆에 앉아 있는 그의 몸에서 가능한 한 떨어져 앉으며 이를 악물었다.
창밖으로는 어제 그녀가 많은 시간을 보낸 고고학 박물관의 모습이 스쳐 갔다. 청동 조각상들과 돌 등 고대의 유물들이 전시돼 있는 저 박물관의 많은 전시물들은 그녀의 아버지가 발굴해 낸 것들이었다.
지금까지 오리엘은 언젠가는 아버지를 더 잘 알게 될 날이 올 거라고 믿었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인 프랑스인이었던 에두아르 드 몽포르교수는 팔미라의 고대도시 폐허에서 고고학적 발굴을 하는 데 정신이 팔려서 자신의 딸의 존재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물론 그녀의 아버지는 오리엘의 이모인 해리어트에게 아이의 양육비를 충분히 대줬다. 그러나 그는 옥스퍼드 대학을 방문하러 올 때를 제외하곤 딸을 찾지 않아 부녀 지간의 관계라고 할 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그걸 봐도 에두아르 드 몽포르 박사가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해리어트 이모는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
"너의 아버지의 흥미를 끌려면 여자가 적어도 2천살은 먹어야 할거다. 불쌍한 앤은 한 번도 그 기회를 잡지 못했지."
그러나 매우 조용하고 부끄러움 많은 소녀였던 앤 턴벌은 그녀의 아버지인 턴벌 교수의 고고학 연구를 돕기 위해 옥스퍼드에 온 젊은 프랑스 학생을 보자마자 그만 사랑에 빠져 버렸다.
앤의 조용한 성격에서 안정을 얻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해리어트 이모의 말처럼 그 프랑스 인이 조용한 숭배와 완전한 경배의 대상이 된 것에 우쭐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된 일인지 에두아르는 거의 맹목적으로 앤과 결혼을 했고 곧 그의 새 아내에게 연락처라든가, 언제 자신에게 오라는 한마디 말도 없이 중동 지역으로 떠나가 버렸던 것이다.
"너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단다." 그녀의 이모가 말했다.
"잘생기고 매력적인 남자였지. 그러나 우리와는 다른 별에 사는 사람이었어. 명심해라. 죽는 날까지 내 동생은 너의 아버지로부터 한마디도 연락을 받은게 없었다. 앤이 아기를 갖고 싶어 한 것도 그는 몰랐을 거야."
에두아르가 옥스퍼드로 돌아왔을 때 그의 젊은 아내는 혼잡한 거리에서 유모차를 끌고가다가 술취한 자동차광에게 받혀 죽은 뒤였고, 그는 막 6개월 된 딸이 다행히도 그 사고에서 살아남아 있는 걸 알게 됐다.
다행히 죽은 아내의 언니인 해리어트가 딸을 돌봐 주기로 하자 그는 자신이 나온 대학의 이름을 따 오리엘이라고 딸의 이름을 지어 준 뒤 다시 집을 떠나 버렸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녀의 아버지는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비록 아버지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오리엘은 그렇게 저명한 아버지를 가진 게 자랑스러웠다. 그는 아주 가끔 영국을 방문하곤 했는데 딸이 자신의 학구적인 자질을 물려받은 것에 만족하곤 했다.
오리엘은 역사학을 우등으로 마쳤고 2년 후엔 박사 학위를 땄던 것이다. 딸이 지금 옥스퍼드에서 중세역사를 강의하고 있음을 그가 알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그러나 3달전 몽포르 교수는 이국 땅에서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시리아 정부가 그의 무덤을 방문할 수 있게 오리엘을 초청해 준 것은 고마웠지만 그녀는 알레포 박물관의 놋쇠로 만든 기념비에 새겨진 아버지의 이름을 보면서 그에 관해 좀 더 개인적인 기억들을 갖지 못했던 걸 아쉬워해야 했다.
"자, 이제 내려요."
제이크 에머슨의 목소리가 그녀의 생각을 깨뜨렸다. 그녀는 비로소 택시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는 걸 알았다.
"당신을 알게 돼서 기쁘다는 말을 할 수는 없소, 몽포르양. 그러나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는 건 확실하오."
문을 열고 그녀가 차에서 내리는 걸 도와주면서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다행이군요. 그 점엔 의견이 같으니!" 그의 손을 화가 나 밀치며 그녀가 쏘아붙였다."지금 내가 바라는 게 있다면 그건 다시 당신을 보게 되는 불행이 없길 기도하는 거니까요!"
"나도 마찬가지요!"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난 내일 미국으로 돌아갈 거니까 내 생각엔 우리 둘 다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소. 그러니 당신이 즐거운 여행을 하길 빌겠소." 냉소적인 몸짓으로 인사를 한 뒤 그는 돌아서서 거리를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당신 비행기가 하늘에서 추락해 버리길 빌겠어요!" 오리엘이 그의 뒷모습에다 대고 소리를 쳤다. 그녀는 화가 난 채 계단을 쿵쿵거리며 올랐다. 로비를 가로지르면서 그녀는 손을 씻고 머리를 빗은 뒤 다시 시장으로 갈 결심을 했다. 제이크 에머슨이 이래라저래라 하는 걸 들을 필요는 없어!
"아, 영국 아가씨." 호텔의 지배인이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당신에게 전해드릴 말이 있습니다. 내무장관의 전갈입니다." 그가 오리엘을 자신의 사무실로 정중하게 안내했다.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만 당신을 메리디언 호텔로 모셔다 줄 차가 준비됐습니다."
"난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오리엘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미 오전의 반이 지나가 버려 예정대로 오후에 알레포의 오래된 성을 방문하려면 빨리 쇼핑을 마쳐야 한다.
"아, 아가씨. 내무장관 할림 카두르께선 아가씨가 다마스커스로 돌아가기 위해 교통 편을 구하고 있다는 걸 아시고 오늘 그리로 돌아가는 자신의 리무진을 같이 타자는 제안을 해주셨습니다. 30분 후에 차가 도착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 호텔에서는 여행 중에 드실 점심 식사를 준비해 놓았답니다."
"오, 이런."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군. 오리엘은 호텔 지배인에게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확실히 정부의 고위 인사와 차를 함께 타는 영광을 갖게 된 그녀가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장면을 기대한 것 같았다. 사실 할림 카드로 장관의 제안은 구원이나 마찬가지다. 다마스커스까지 50km나 되는 길을 냉방도 안되고 사람들도 북새통을 이루는 그 끔찍한 버스를 타고 가느니 냉방장치가 완벽할 리무진을 타고 가는 게 훨씬 안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파리를 거쳐 영국에서 시리아까지 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녀는 옆좌석에 앉은 자기 또래의 미국인 여자를 알게 됐다. 막 프랑스 남자와 결혼했다는 메리 루는 그녀를 만나게 된 게 기쁜 모양이었다.
"말할 사람이 생겨서 너무 기뻐요. 난 아직 불어가 서툴거든요. 그래서 이번 여행이 좀 걱정됐어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오리엘에게 자신의 남편과 고고학자들이라며 나머지 일행을 소개했다.
물론 그들은 그녀의 아버지를 알고 있었고 자신들의 발굴 여행에 그녀를 초대했다. 오리엘은 기꺼이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들이 알레포에서 프랑스로 돌아간 게 바로 어제였다. 그래서 그녀는 혼자서 다마스커스로 돌아가야 하는 문제에 봉착해 있던 참이었다.
자, 이제 어찌됐던 어려운 문제가 해결된 셈이니 그녀는 그저 편안한 리무진에 등을 기대고 앉아 여행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 셈이다. 게다가 굶주리게 될 염려도 없다. 그녀는 점심이 든 커다란 광주리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짐을 챙겨서 내려오자 호텔밖에 리무진이 도착했다.
장관의 따뜻한 인사를 받으면서 호텔 대리석 바닥을 걸어가면서 오리엘은 운명이 자신 앞에 만들어 놓은 충격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할림 카두르는 땅딸막한 중년 남자로 언제나 서구식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아버지와는 오래된 친구로서 그녀가 시리아로 오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제공했다. 다만 그가 자기에게 지나칠 정도의 관심을 표시하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오리엘은 그것도 아랍인 특유의 친절일 뿐일 거라고 믿기로 했다.
어쨌든 굽 높은 신을 신고 있어도 자신보다 발 하나 길이만큼이나 작은 남자를 다루는 데는 그리 큰 문제야 없을 것이다.
"당신을 보게 돼서 참 기쁘군요, 사랑스런 오리엘." 손을 잡은 채 호텔 로비로 그녀를 안내하면서 그가 말했다. "지난 며칠간은 참 힘들었답니다. 시리아는 수력발전소 건설 문제로 국제통화기금의 도움을 원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거든요." 그가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의 사랑스런 얼굴을 다시 보게 되니까..."
그러나 오리엘은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공포에 사로잡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넓은 로비에 등을 뒤로 한 채 서 있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널찍한 남자의 모습에 고정돼 있었다. 오, 아니야! 그럴 리는 없어. 설마...?
"아...여깁니다, 에머슨 씨." 할림 카두르가 그 남자를 불렀다. "내가 당신에게 말했던 사랑스런 아가씨입니다! 보시다시피..." 그가 오리엘을 쳐다보았다. "당신처럼 아름다운 숙녀를 만나게 됐으니 이 미국 양반도 무척 기뻐할 겁니다."
오리엘은 제이크 에머슨을 응시했다. 기쁘기는커녕 그는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 같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2톤쯤 되는 물건에 머리를 맞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이다.
잠시 동안 그가 눈을 감았다. 동요하는 게 느껴진다. 천천히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마침내 그가 그녀가 서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오리엘은 충격과 혼란 속에서 다리가 굳어 버린 듯했다.
"아, 에머슨씨, 당신을 소개해..."
"소개시켜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장관님." 제이크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오리엘은 그가 주먹을 단단히 쥐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관자놀이가 거세게 뛰고 있다.
"전 이미 그러니까 어... 이 숙녀 분을 알고 있답니다." 그는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네...그래요, 우린 이미 아는 사이에요." 오리엘이 우울하게 말했다. 그녀는 예의바른 척하는 제이크의 태도에 동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할림 카두르는 자신을 사이에 두고 서로 무섭게 노려보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냉기류에 대해선 둔감한 것처럼 보였다.
"에머슨 씨와 난 이틀을 같이 지냈죠. 난 그에게 우리의 경작 문제를 해결시켜 준 알 토라의 유프라테스 댐을 보여줬답니다. 그는 자신이 본 다른 수력발전 계획에도 커다란 감명을 받았노라고 말했죠." 할림이 훨씬 키가 큰 제이크를 쳐다봤다. "에머슨씨 같은 국제적인 은행가가 그런 말을 해주니 얼마나 감사한지..." 장관은 가슴에 손을 갖다 대면서 감격했다는 듯이 자신의 감정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했다.
"그래요...어..." 제이크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과장된 천상에 어색하다는 듯 말을 더듬었다. "그런데" 그가 실크 처럼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물론 전 몽포르 양을 다시 만나게 돼서 기쁩니다."
저 끔찍한 남자의 거짓말하는 모습을 보라지. 뻔뻔스럽기도 하군! 오리엘은 그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차 주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기를 써야 했다.
"그런데 장관님, 만약 우리가 바니아에 있는 정유 시설을 돌아보려면 지금 떠나야 하지 않을까요?" 제이크가 할림의 주위를 환기시켰다. "아, 물론이죠.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 할림이 동의하면서 오리엘의 손을 부두럽게 두드렸다. "갈길이 멀지만 이렇게 멋진 동반자가 있으니 즐겁게 여행을 하도록 하죠. 좋죠?"
제임크가 멍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해가 안 가는군요. 방금 말씀하신게... 몽포르 양이 우리와 같이 간다는 뜻인가요?"
그녀가 그에게 그처럼 화가 나 있지만 않았더라도 제이크의 목소리와 그의 큰 체구에서 묻어나는 못 믿겠다는 말투에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오리엘을 호텔에 데려다 주고 느긋해 있다가 다시 하루의 나머지 시간을 그녀와 함께 동행해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그는 완전히 질렸다는 표정이다.
인과응보지 뭐야! 물론 오리엘 역시 그와 같이 다마스커스로 여행해야 한다는 사실이 내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 와서 이 끔찍한 상황이 달라질 리도 없는 일. 오리엘은 제이크에게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마 화가 나 죽고 싶겠지!
"친절하게도 카두르 장관님이 제게 다마스커스까지 태워 주겠다는 제의를 해주셨어요." 그녀는 일부러 가능한 한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려 했다.
"그리고 이렇게 중요한 분과 같이 여행을 하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다니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오리엘은 재빨리 얼굴을 그에게서 돌렸다. 분노 때문에 실룩이는 그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당신이 이 사랑스러운 숙녀와 동행하는 걸 기뻐하리라고 생각했어요." 할림 카두르가 여전히 분노로 굳어져 있는 제이크의 표정을 알아채지 못하고 말했다. "몽포르 양의 아버지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었죠." 할림이 다시 그녀의 손을 두드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무척 슬픈 일이었죠. 우리는 몽포르 양이 이 나라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음, 그러시겠죠." 제이크가 웅얼거렸다.
오리엘은 그의 깊고 냉소적인 목소리에서 묻어 나는 조롱조의 울림에 얼굴이 붉어졌다. 게다가 그가 장관의 손에 꽉 잡혀있는 자신의 손을 의미심장한 눈길로 쳐다보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 우리의 새로운 통역관이 도착한 것 같군요." 할림이 로비를 가로질러 오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세상에, 가엾게도 압둘이 지난밤에 그만 병에 걸렸다는군요. 그렇지만 그를 대신할 라일라 살리만 양도 아주 유능하죠." 할림이 오리엘의 손을 들더니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대며 사과를 했다. "전 잠깐 저들과 의논할 게 있어서. 그런 뒤 떠나기로 하죠. 괜찮겠죠?"
제이크는 장관이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좋소. 당신이 이겼소." 그가 퉁명스레 말했다. "당신이 뭘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이 어리석은 남자같으니,난 아무것도 의도하는 게 없어요!" 그녀가 항의했다. "장관이 내게 같이 가자고 제안을 해서 그 제안을 받아들였을 뿐이고 당신이 같이 간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단 말이에요. 날 믿어요. 만약 내가 그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이 계획에 끼어들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가 낮게 웃었다. "오, 그래? 당신과 할림 카두르는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비둘기 같더군."
"당신은 확실히 비틀린 마음에다 이런 사업 세계에는 필수적인 이성도 놀라우리만큼 부족한 사람이에요." 그녀가 과장된 억양으로 비꼬았다.
"대체 누구 예기를 하고 있는 거요?" 그가 자신의 짙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물었다.
오리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덥다. 오늘 아침엔 다른 손님이 부탁한 모닝콜이 잘못 울리는 바람에 새벽에 잠을 깨더니, 지금은 이 피곤한 남자와 또 말씨름을 해야 하다니!
"좋아요, 에머슨 씨. 진지하게 얘기해 봐요." 그녀가 초조해져서 말했다. "당신은 꼭 내가 의도적으로 이런 기회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내가 당신의 그 매력적인 성격 때문에 그랬단 말인가요? 그리고 둘째로 마치 내가 장관과 무슨 로맨틱한 관계를 맺고 있는 줄로 아는 모양인데 둘 다 아니라는 걸 알 만한 때가 되지 않았나요?" 그녀의 목소리가 냉소로 가득 찼다. "지금껏 증명해 온 대로 당신은 정말로 이성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사람이군요!"
"내게 강의 할 필요는 없소, 이 탐욕스런 여자 같으니."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의 말을 차갑게 흘려들었다.
"고맙군요!" 역시 빈정대는 말투로 받아넘기며 오리엘은 지금이야말로 이 거만한 남자의 잘못을 깨닫게 해줘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다음 문제는..." 오리엘은 그의 반응은 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난 이 나라에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보러 왔어요. 이 나라 정부의 공식적인 초청을 받아 온 거예요. 이런 말까지 당신에게 할 필요는 없겠지만 시리아는 여자 혼자 여행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아요. 게다가 영국의 여권이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런던에서 테러 사건이 난 이래 영국과 시리아는 외교관계가 악화되고 있어요. 이 말은 만약 이번 여행에서 뭔가가 잘못된다면 나도 매우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는 뜻이에요." 그녀는 그에게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제대로 이해가 되나요?"
"물론이요!" 그가 금속성의 목소리를 냈다.
"좋아요.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죠. 이 나라에 들어왔다가 무사히 떠나기 위해서라도 가능한 한 모든 도움을 받아야 해요. 그래서... 장관과 로맨틱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제발, 에머슨 씨, 내 말을 믿어요. 내가 그렇게 남자에 절망적인 것 같아요? 난 단지 다마스커스로 돌아가기 위해 그의 차를 얻어타기로 했을 뿐이에요. 이제 만족하시겠어요?"
여전히 그는 천둥을 칠 것 같은 표정이다.
그때 제이크의 비서인 듯한 사람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장관님께선 지금 떠날 준비가 되셨습니다." 그 젊은 남자는 마치 금방이라도 싸움을 할 것같이 서로 노려보고 있는 제이크와 금발의 여자를 불안하게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나도 준비가 됐어!" 제이크가 잘라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에머슨 씨. 장관님은 저와 정부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경호원들과 함께 첫 번째 차에 같이 타고 먼저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 차는 곧 출발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몽포르 양과 새 통역자, 장관님과 함께 그의 리무진을 타게 됐습니다. 첫차가 떠난 지 15분쯤 지난 후에 출발하시게 될 겁니다." 그 젊은 남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못마땅하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이건 꼭 말씀드려야 될 것 같군요, 에머슨씨. 경호원들이 그렇게 한차에 모두 타고 있다는 사실이 전 썩 마음 내키지가 않습니다. 게다가 두 차 간의 간격이 그렇게 멀찍이 떨어져서야..."
제이크가 어깨를 으쓱했다.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데."
"글쎄요." 그의 비서는 끈질겼다. "흘러 다니는 소문에 의하면 정부 각료들은 테러리스트들을 주의하라는 경고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이 나라의 정치 상황 같은 건 나와 상관이 없네." 제이크가 비서에게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이건 사업이야. 그리고 모든 문제는 장관에게 맡겨 놓는 게 좋아."
오리엘은 제이크의 얼음 같은 차가운 시선을 벗어나 차 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걱정할 게 뭐 있어? 아버지가 할림 카두르와 맺어 놓은 우정 덕분에 그녀는 다마스커스까지 편안하게 여행하게 된 것이다. 저 미국인 은행가만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제이컵 윈스롭 에머슨 3세, 그와 같이 가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릴 뿐이다!
-2-
오리엘은 리무진이 도로를 벗어나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하자 창밖을 응시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 산의 허리가 시리아 사막과 지중해 해안을 갈라놓고 있었다.
1시간 동안 지나쳐 온 단조롭고 나무 한 그루 없던 창밖 풍경이 변하고 있었다. 그녀는 할림 카두르가 여전히 여자에 대한 관심은 변함이 없지만 이러한 종류의 소풍에는 익숙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슬며시 웃었다. 사실 장관은 지금 그의 새 통역관에게 완전히 정신을 빼앗겨 있는 상태였다.
라일라 살리만이 아름답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자기 옆에 앉아 있는 그녀를 힐끗 옆눈으로 쳐다보면서 오리엘은 그 표현마저 적절한 선택이 아니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영화배우들도 부러워할 만한 투명한 피부에 굽슬거리는 긴 검은 머리카락, 커다란 두 눈을 긴 속눈썹이 강조하고 있다. 거기다 완벽한 코에 부드러운 붉은 입술까지 라일라는 그냥 아름다운 게 아니라 정신이 멍할 정도다. 게다가 그게 전부는 아니다. 오리엘은 마지못해 인정했다. 이 아랍 여자의 완벽한 모습을 짧은 소매의 붉은 리넨 드레스가 살려 주고 있다. 그녀의 가는 허리와 완벽한 가슴을 강조하는 옷이다. 게다가 라일라를 지켜 주는 요정은 그녀에게 아름다움뿐만이 아니라 명석한 머리까지 허락한 듯하다.
오리엘은 은근히 그녀를 질투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사실 그녀는 할림이 거의 황홀하다는 눈으로 라일라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개의치 않았다. 다만 제이크 에머슨이 새로운 통역관에게 반응하는 태도가 신경에 거슬릴 뿐이다. 그는 완전히 정신을 잃은 표정이다. 한 번도 이런 여자를 본 적이 없다는 듯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줄을 모른다.
뭐 놀랄 일도 아니지. 오리엘은 자신의 행동에 부끄럼을 느끼면서 우울하게 인정했다. 라일라가 아름다운 건 사실이잖아?
불행하게도 이 호화로운 리무진의 내부는 그녀와 라일라가 나란히 앉아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대면하게 돼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제이크와 할림이 옆에 있는 여자의 매력에 정신없이 반응하는 모습을 안 볼래야 안 볼 수가 없었다.
만약 내가 여행을 위해 짐을 꾸리면서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비참하진 않을 텐데... 오리엘은 자동적으로 자신이 입고 있는 단조로운 면 프린트 드레스가 영국의 여름 하늘 아래서도 매력적으로 보였으니 이 나라에서도 똑같은 효과를 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녀는 곧 시리아의 강렬하고 밝은 햇빛 아래에서 자신의 옷들이 단지 단조롭고 우중충해 보일 뿐임을 깨달았다.
물론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블라우스와 그것과 어울리는 모래 빛깔 바탕색에 연푸른 꽃무늬가 그려져 있는 치마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오리엘은 설령 성인을 보고 라일라의 옆에 앉도록 했어도 거절하고 싶어 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건 꼭 그러니까... 현란한 색을 자랑하고 있는 낙원의 새 옆에다 우중충한 참새를 세워다 놓은 꼴이군!
한숨을 쉬며 오리엘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난 다마스커스로 돌아가기 위해 이 차를 탓을 뿐이야. 옆에 있는 아랍 여자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것에 내가 기죽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자신을 타이르며 오리엘은 눈을 감은 채 주위에서 들려오고 있는 대화 소리며 웃음소리를 무시하려 애썼다.
제이크가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든다고 내가 신경 쓸 이유가 어딨어? 그건 그의 일이다. 저 미국인은 그야말로 혈통 좋고 국제적이며 저명한 은행가인 모양인데 그렇다고 그의 지위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건 아니다. 난 메리 루가 아냐.
2주일 전 다마스커스에 있는 호텔 로비를 성큼성큼 걸어오던 제이크를 보고 메리 루는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었다.
시리아 여행에 그렇게 긴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운 그 남자를 처음 만난 장면을 떠올리면서 오리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저 남자 환상적이지 않아?" 메리 루가 속삭이며 오리엘의 옆구리를 재빨리 찔렀다.
"누가..." 호텔 숙박부를 기록하는 데 정신이 팔려 그 미국인 여자의 말을 듣고 있지 않던 오리엘이 건성으로 물었다. 파리에서부터의 비행은 길었고, 메리 루의 연이은 수다에도 수시간 동안을 시달린 터라 그녀는 정신적으로 녹초가 된 상태였다.
"난 물론 피에르를 사랑해. 하지만 저 장신의 남자는 내 이상형이야. 넌 어때?"
자신의 옆구리를 찌르는 손길에 한숨을 내쉬며 오리엘은 펜을 내려놓고 돌아서서 메리 루가 그렇게 흥분한 사람을 돌아봤다.
"저 남자야!" 옆에 사람을 거느리고 자신들 쪽으로 오고 있는 키가 큰 남자를 가리키며 메리 루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내 방 열쇠를 부탁하오." 그가 딱딱 끊어지는 미국식 발음으로 안내원에게 요구했다.
길고 지루한 하루를 보낸 뒤라 오리엘은 그 상황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안내를 받던 중이에요." 그녀가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 당신 차례를 지켜 주셨으면 기쁘겠군요."
그러나 그 남자는 들은 척도 않고 마치 그녀가 존재한다는 것도 모른다는 듯이 다시 자신의 열쇠를 요구했다. 게다가 접수 계원에게 손가락질까지 하고 있다.
나중에 다시 그 상황을 생각해 내려 했지만 오리엘은 그 뒤에 일어난 일을 명확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단지 자신이 너무 비행기를 오래 타 지쳤었다고 추측할 뿐이었다. 거기에 그 남자의 무례한 행동이 낳은 분노가 가세돼 완전히 자제심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이봐요, 당신!" 그녀는 소리쳐 그를 부르며 돌돌 말아 들고 있던 신문으로 그의 어깨를 내리쳤다.
갑자기 호텔의 로비가 조용해졌다. 로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숨을 죽인 채 장신의 남자가 굳어진 걸 지켜보았다.
남자가 천천히 그녀의 얼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뭐라고 하셨소?" 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냉정하게 훑어보는 그의 회색 눈은 마치 차가운 화강암 조각 같았다. "지금 내게 말하는 거였소?"
"물론이죠!" 오리엘이 소리쳤다. 그녀의 분노가 자신의 흐트러진 모습에 노골적으로 경멸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그의 태도 때문에 깊어졌다.
그래, 좋아. 내가 입고 있는 회색 리넨 수트가 긴 여행 때문에 쭈굴쭈굴하다고 하자. 그리고 사실 머리며 얼굴 모양도 엉망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이렇게 무슨 더러운 물건을 보고 있는 것처럼 무례하게 구는 남자의 변명이 될 수는 없다.
"그러면 방금 말하고 싶어 한 게 뭐요?" 그가 은혜를 베풀겠다는 투로 물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당신은 결코 신사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조용한 로비에 울려 퍼졌다. 그의 턱이 굳어지는 걸 보면서 오리엘은 만족감을 느꼈다. "장님이라도 알 거예요. 난 막 접수 계원에게서 안내를 받고 있던 중이에요."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는 젊은 아랍인을 가리켰다. "난 누가 내 팔꿈치를 길 밖으로 끌어내는 걸 참을 수가 없어요!"
"이봐요, 아가씨, 난 그런 적이 없소!" 그가 화가 난 목소리로 대꾸했다.
"예의라곤 모르는 촌뜨기, 멍청이 같으니!"
"뭐라고?"
분노로 격해지는 그를 보면서 오리엘은 자신이 너무 심했나 싶었다. 주위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들인 걸 보니 내가 심하긴 심했나 보다. 어떻게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할지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오리엘의 팔을 세게 움켜잡았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알아채기도 전에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이끌려 접수대 뒤편에 있는 사무실로 끌려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가요!"
그 조그만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에게 남자가 소리를 쳐 모두 내쫓았다. 사람들이 방을 나가자 그는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았다.
2명의 적대자들은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그 남자가 먼저 한숨을 내쉬며 사무실 안을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보시오, 당신이 대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난 오늘 재무성에서 아주 힘들고 지루한 하루를 보냈소. 그러니 더 이상..."
"그래요? 그것 참 안됐군요!" 그녀는 화가 나 쏘아붙였다. "왜냐하면 나도 파리에서 이곳까지 힘들고 긴 비행을 했거든요. 그래서 나도 사람들이 다 보는 곳에서 내게 그렇게 무례하게 구는 사람을 이런 곳에서 만날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어요!"
"맹세해도 좋소. 난 쉽게 화를 터뜨리는 사람이 아니오." 그가 험악하게 말했다. "더구나 사람들이 있는 곳에선 더더욱이나."
오리엘이 날카롭게 웃었다. "당신은 날 바보 취급했어요!"
"하나 더. 난 내게 그런 식으로 건방지게 말하는 여자를 그냥 받아 주는 데 익숙지가 않소!" 그가 굳어진 입매로 덧붙였다.
"그래요?" 오리엘은 문까지의 거리를 계산해 보며 어느 순간에 이곳을 도망쳐 나갈까 기회를 엿봤다.
"물론이요!" 그가 혐오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글쎄요, 하지만 난 관심 없어요."그녀가 냉정하게 비꼬았다. "난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겠어요. 사실 그런 것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어요. 설령 당신이 미국 대통령이라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예요. 내가 짚고넘어가고 싶은 건 단 하나, 당신이 호텔의 로비에서 보여 준 그 충격적인 무례함이에요!" 오리엘이 문 쪽을 가리켰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난 지금 당신의 사과를 기다리고 있어요."
숨 막히는 한순간 오리엘은 그가 전신 발작을 일으키는 줄 알았다. 그의 길고 마른 몸이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하고 햇볕에 그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자, 진정해요...그렇게 흥분할 필요는 없잖아요." 갑자기 불안해져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그의 목구멍에서 들려오는 분노로 씩씩대는 소리와 마치 자신의 목을 조르고 싶다는 듯 세게 움켜쥐고 있는 그 남자의 두 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신에겐 내게 그렇게 무례하게 군 이유가 충분히 있을 것이라는 걸 나도 확신해요." 위협적인 태도로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재빨리 한걸음 물러나면서 그녀가 덧붙였다.
"당신은 대체 누구지? 정신병원을 탈출한 미친 여잔가?" 그녀의 어깨를 광폭하게 움켜쥔 그가 오리엘을 마치 인형처럼 흔들어 댔다.
"난...오리엘 드 몽포르 박사에요. 이 손 놔요... 이 야만인!" 어깨를 잡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얼굴을 찌푸리면서 그녀가 항의했다. "그만두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어요. 그리고...아!"
화가 난 남자가 어깨를 흔드는 통에 뒷걸음질을 치던 그녀의 발이 뭔가에 부딪혔다. 한순간 오리엘은 뒤로 넘어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그의 팔이 재빨리 자신을 붙잡아 단단한 가슴으로 끌어당기는 걸 느꼈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동안 두 사람은 놀란 얼굴로 상대방을 응시했다.
그녀는 그의 관자놀이에서 맥박이 세게 요동치고 있음을 봤다. 폭풍이 이는 듯한 그의 얼음 같은 회색 눈이 강렬한 빛을 발하며 뺨이 한층 붉어진다 싶더니 그녀의 부드럽고 가는 허리를 안고 있던 그의 팔에 힘이 가해졌다.
"안돼요!" 천천히 머리를 숙이는 그를 보며 오리엘이 가까스로 숨을 토해냈다.
분노가 가득한 잔인한 키스였다. 그녀의 입술을 짓누르는 입술은 광폭하고 무자비했다. 그녀의 감각을 유린하는 그의 키스는 마치 고문의 도구인 듯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신만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기 위해 넓은 가슴을 때리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고문하듯 내리누르던 그의 입술이 회유하듯 부드러워졌던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녀는 자신의 입술을 애무하고 있는 그의 입술에 저항할 의지를 잃고 말았다.
오리엘은 그 사실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에게 마치 자석에 이끌린 것처럼 반응하는 자신의 육체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의 넓은 가슴속에서 몸이 녹아 버리는 것 같다. 키스가 깊어지고 그의 손이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 위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짜릿한 흥분이 정맥을 타고 온몸에 퍼져 갔다. 그 다음엔...
죽음보다 더한, 짓궂은 운명의 장난이라고 밖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 그녀를 구해 줬다. 갑자기 재채기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들이 그 사무실에 단둘만 있는 게 아니란 걸 깨닫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가 재빨리 물러섬에 따라 오리엘은 그의 품에서 풀려났다. 숨을 가다듬으면서 그가 초조한 듯 검은 머리칼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머리를 쓸어 넘겼다. 멍한 눈으로 몸을 떨면서 오리엘은 천천히 제이크의 시선을 쫓았다. 그때서야 비로소 열려진 문을 통해 문가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지금도 그 장면만 생각하면 낯이 확 달아오르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진다. 그 당시엔 정말 디디고 있는 사무실 바닥이 무너져 땅 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었다. 그날 어떻게 그 방을 벗어났는지 기억할 수가 없다. 기억나는 건 접수 계원들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알 만하다는 웃음과 호텔 지배인이 방금 그녀를 공격한 남자에게 보인 아첨하는 듯한 태도, 그리고 놀라서 입을 다물 줄을 모르는 메리 루의 모습이었다. 물론 그녀의 상처에 소금을 문질러댄 메리 루의 말도 기억난다.
"와우, 정말 대단했어!" 나중에 저녁 식사를 하러 가자고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며 그 미국 여자가 놀려댔다. "그 남자가 누군지 알고 있어?"
"아니, 전혀 몰라. 사실 조금도 관심 없어!" 오리엘이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난 오늘밤 방에서 저녁을 먹을래."
호텔 로비에서 그 낯뜨거운 장면을 지켜봤던 손님들이며 호텔 직원들을 대할 생각을 하니 온몸이 떨렸다.
"이봐, 하니. 그가 바로 제이컵 윈스롭 에머슨 3세야!" 눈치 없는 메리 루가 계속 재잘댔다. "내 말은 그가 바로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남자 중의 하나란 뜻이야. 게다가 보스턴 명문가의 사람이기도 하고, 내 말뜻이 뭔지 알겠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여행 가방에서 옷들을 거칠게 꺼내면서 오리엘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난 그가 전능한 신 그 자체라고 해도 관심이 없어... 게다가 그는 무례하고 못 말리는 남성우월주의자야!"
메리 루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렇지만 내 생각엔..."
"어떻게 생각했는데?" 화가 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안절부절못하던 오리엘이 쏘아붙였다.
"글세, 두 사람은 정말... 그러니까 내 말은 그가 그처럼 멋진 남자니까 이해가 된다는..." 오리엘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메리 루는 말을 멈췄다. 분노의 신음 소리를 내는 새 친구를 보며 그 미국 여자는 전술을 바꿔 그 무시무시한 남자가 세계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남자인지를 납득시키려 했다. "네가 잘 이해하지를 못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그 남자는 단순한 부자가 아니야. 그는 정말 대단한 남자야. 그는 국제통화기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 거기다 그의 가문은 보스턴에서도 최상류 집안이고 그의 아내는 명문가 출신의..."
"그래, 난 그가 결혼한 남자라는 걸 알았어야 했어! 네 말을 듣고 나니 그 남자가 더 혐오스러워지는 걸." 오리엘이 역겹다는 듯 말했다.
"오, 아니야." 메리 루가 머리를 흔들었다."결혼하긴 했지만 그의 아내는 어... 그 남자 이름이 뭐였지? 너도 알지? 그 유명한 아르헨티나의 폴로 선수 말이야! 그의 아내는 수년 전 그 남자와 함께 달아나 버렸어." 그 남자의 이름을 생각해 내려고 애쓰면서 메리 루는 손가락을 초조하게 움직였다.
"그럴 만도 하지. 나 같았으면 단 5분도 견디지 못했을 거야!" 메리 루가 웃음을 터뜨렸다. "글세 맹세하지만, 하니! 아마 수천 명의 여자들이, 내 말은 모든 정상적인 미국 여자들의 쇼핑리스트에 그 이름이 올라 있다는 거야. 그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메이플라워호까지 가계가 올라간다고 하던걸."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경외감이 묻어났다. "내 친척이 보스턴에 살고 있어서 그에 관한 얘기를 많이 들었지."
"오, 맙소사! 누가 그런 얘기에 관심이 있대?" 오리엘은 노골적으로 경멸하며 코웃음을 쳤다. "어쨌든." 그녀의 말에 충격을 받고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메리 루에게 그녀가 말했다. "난 두 번 다시 그 남자의 끔찍한 얼굴을 대면하고 싶지 않으니 이쯤에서 그 남자 얘기는 그만해 줬으면 좋겠어." 그러나 그 말은 지켜지지가 않았다.
오리엘은 그 끔찍한 남자와의 연이은, 그리고 당황스러웠던 그후의 만남들을 회상하며 얼굴을 붉혔다.
"몽포르 양... 괜찮습니까?"
할림 카두르의 목소리가 그녀의 혼란스런 상념을 깨뜨렸다. 그제서야 오리엘은 두 남자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얼굴이 무척 상기돼 있어서..." 장관이 근심스런 시선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난 괜찮아요. 난..." 제이크 에머슨의 재미있다는 시선에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설마 내 마음을 읽고 저러는 건 아니겠지? 물론 그럴 리가 없다고 도리질을 하면서도 오리엘은 정말로 자신이 아프기나 했으면 싶었다. 정말로 거만 떠는 저 남자가 미워! 오리엘은 다시 한 번 그의 길고 우아하게 쭉 뻗은 다리를 힘껏 걷어차 버리고 싶다는 어린애 같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오, 맙소사! 저 남자의 일거일동이 어째서 내게 이렇게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거지?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녀는 늘 냉정하고 침착해서 웬만해서는 동요하지 않는 사람으로 자신을 지켜 왔었다. 그녀는 그런 자기 자신에게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불과 2주 전부턴 천박스럽고 조급하며 툭하면 폭발해 버리는 사나운 여자가 돼 가고 있었다.
오리엘은 마음속으로 이제부턴 저 밉살스런 제이크가 아무리 화를 돋워도 침착하게 대처하고 동요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때 차가 커다란 표지판 앞에서 속도를 늦췄다.
장관이 격앙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운전사와 뒷좌석에 타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칸막이 유리를 내렸다. 아랍 말로 격렬한 대화가 이어지더니 할림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 간막이 유리를 올렸다. "운전사 말로는 여기서부턴 도로가 수리 중이기 때문에 다른 길로 가야 한다는 군요." 할림이 설명했다. "물론 우리는 곧 원래 도로로 다시 진입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몽포르 양에게 여전히 열이 있어 보이니 여기서 잠깐 쉬면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게 어떨까요?"
"오, 죄송합니다만 장관님, 제가 보기엔 그럴 필요 까진 없을 것 같은데요." 오리엘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라일라가 재빨리 말했다. "창문 하나를 열어 놓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아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에머슨씨...?" 그에게 눈부신 미소를 보내며 그녀가 덧붙였다.
그렇게까지 자신의 매력을 강조할 필요는 없잖아, 아가씨? 오리엘은 철저히 자신을 무시하고 있는 그녀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속으로 중얼댔다.
그러나 그녀의 씁쓸한 생각은 할림이 이제 쉬면서 점심을 먹어야겠다고 제안함에 따라 중단됐다.
"글세, 전..." 사실 오리엘은 지금 말이라도 먹을 만큼 배가 고픈 상태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돼지 같다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조심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가 미처 다음 말을 잇기도 전에 다시 한 번 라일라가 말을 가로챘다. "그렇지만 존경하는 장관님, 이 곳의 풍경은 정말 아름다워요." 아랍 여자가 무엇이라도 녹일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확신하지만 저 영국 숙녀 분은 식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없으실 거예요. 그보다는 창밖의 경치를 더 보고 싶어 할 걸요?"
아니, 절대로 그렇지가 않아! 라일라를 쏘아보며 오리엘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게다가 자신을 향해 냉소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제이크의 얼굴을 보자 심사가 더욱 뒤틀렸다. 그는 마치 오리엘이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란 걸 알고 있다는 표정이다.
저 남자는 지금 내 불편한 심사를 재미있어 하고 있어! 그냥 배고파 죽을 지경이라고 솔직하게 털어놔 버려? 안 될 거 없지!
오리엘이 막 그렇게 말하려는 찰나 라일라가 갑자기 창밖을 가리키며 그녀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저기 저 색다른 건물은 뭐죠?" 그녀가 흥분한 듯 소리쳤다.
"오, 그래. 나도 본 적이 없는 건데. 그렇지만 내 생각엔...그렇군, 내가 보기에 저건 최근에 우리가 새로 발견한 성인 것 같소." 할림이 그들을 둘러보았다."저건 매우 오래된 십자군들의 성이오. 2년 전 까진 저기에 성이 있다는 걸 아무도 몰랐지. 물론 해안을 따라 이 산자락엔 이런 성들이 많소만." 그가 제이크에게 설명했다.
오리엘은 배고픔도 잊고 점차 가까워지는 커다란 돌 요새를 응시했다. 그것은 벼랑 위에 마치 독수리 둥지 같은 모양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는 시리아의 서부 해안을 따라 마치 띠처럼 흩어져 있는 기사들의 성을 비롯해, 십자군 전쟁 때 십자군이 건축한 성들을 보는 걸 열망해 왔었다. 물론 그녀의 아버지가 묻혀 있는 무덤을 찾아온 게 주된 이유였지만 이 나라에 오기 위해 그 까다로운 수속을 밟은 데는 무엇보다도 이 유적지를 둘러보고 싶다는 열망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지난 수년 동안 그녀는 남는 시간 틈틈이 중세 전쟁사에 관한 책을 써 왔다.
이제 그 책을 거의 마무리하면서 그녀는 책에 관심을 보이는 출판업자도 확보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녀는 책을 완성하기 전에 11세기와 12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건너온 십자군들이 사라센에 대항해 건설한 거대한 성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오, 정말로 멋진 모습이지." 할림이 성을 쳐다보며 말했다. 차는 산꼭대기를 돌고 있었다. "그러나 수년 전 까진 저기가 수많은 나무와 관목들로 뒤덮여 있어서 뭐가 감춰져 있는지 아무도 몰랐소."
"글쎄, 기사들이야 말을 타고 올라갔을 테니 그렇다 치고 다른 사람들은 저길 어떻게 올라갔을까요?" 제이크가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위치한 고대의 성을 응시하며 물었다.
막 같은 질문을 하려던 오리엘이 마지못해 동감의 시선을 던졌다.
"당신 말이 옳아요. 그건 무척 어려웠죠." 할림이 동의했다. "저 성이 발견되었을 때 성의 입구에 나 있는 협곡 때문에 아무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으니까요. 임시로 철로 만든 다리를 설치하고서야 간신히 성안에 들어갈 수가 있었답니다."
"제겐 아무 다리도 보이지 않는데요." 제이크가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할림이 벙글벙글 웃었다. "저 성은 3면이 가파른 절벽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길을 따라가면 산의 다른 쪽 면에 위치한 입구에 도달하게 되죠."
"복구가 필요하군요." 제이크가 돌로 이루어진 성벽을 응시하며 느리게 말했다."물론 아직은 형태가 잘 보존돼 있습니다만..."
할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지난 2년 동안 복구 작업이 진행돼 왔습니다. 안에다 조그만 박물관을 세우고도 했었죠. 그러나 지금은 작업이 중단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거리가 너무 멀어 관광객들이 찾기엔 힘들겠다는 결론이..."
"아, 보세요, 장관님! 저기 우리가 피크닉을 갖기에 딱 맞는 장소가 있군요!" 라일라가 갑자기 마음을 바꿨는지 소리쳤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성 아래 도로 옆으로 평평하게 닦여 있는 지점인 것 같았다. 둥근 돌들이 촘촘히 박혀 있긴 했지만 확실히 차를 주차시킬 만한 곳이었다.
할림이 재빨리 운전사에게 지시를 하자 차는 속도를 늦추며 도로를 벗어났다.
"당신이 옳았소. 피크닉을 즐기기엔 완벽한 장소인 것 같소." 문을 열고 아랍 여자가 내리는 걸 도와주면서 장관이 말했다. "우리 모두가 어..." 할림의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 "우리는 어... 숙녀분들이... 좀 기회를 가질 만한..." 그가 말을 웅얼댔다. "5분 후에 모두 여기서 만나는 게 어떨까요?" 그가 재빨리 말을 마치더니 운전사에게로 걸어갔다.
"먼저..." 차문을 열면서 제이크가 말했다. 그는 접게 돼 있는 의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버둥대고 있는 오리엘을 보면서 참을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떻게 조작하는지 모르겠어요." 당황한 그녀가 중얼거렸다.
또다시 그가 초조해하며 한숨을 내쉬며 오리엘은 어떻게든 해볼 생각으로 의자 아래 있는 손잡이를 비틀어 댔다. 그러자 갑자기 손잡이가 부러져 좌석이 움직이는 바람에 그녀의 몸이 솟구쳐 그만 제이크의 팔 안으로 고꾸라졌다.
-3-
"망할 놈의 〈몽포르 저주〉군. 다시 시작이야!" 제이크가 신음했다.
그의 팔 안으로 돌진해 버린 게 당황스럽기도 하고 멍해져서 자신을 추스르려 하며 오리엘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그의 품안을 벗어나려고 애쓰면서 그녀가 투덜댔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이크가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아직도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는 부서져 버린 좌석 손잡이를 빼앗았다. "오, 아니라고?" 그가 한쪽 눈썹을 비꼬듯 치켜세우며 중얼거렸다. "맹세하지만 투탄카멘 왕의 저주도 당신이 언제나 몰고 다니는 징크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거요, 오리엘!"
"조롱하지 말아요! 난..."
"맞아! 당신은 악마의 눈을 가졌소!" 그가 말을 이었다. "다마스커스에서 당신이 날 거의 익사할 뻔하게 만든 게 바로 그 증거지."
"그렇지 않아요!" 혐오스럽다는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며 그녀가 반발했다.
다마스커스의 호텔 수영장에서 그를 구출했을 때 그가 익사 직전의 상태가 아니란 걸 내가 어떻게 알았으랴? 누구나 그런 장면에선 자신과 같은 실수를 저질렀을 것이다. 수영장의 물 속에 얼굴을 처박고 몸만 둥둥 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면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는 게 더 이상하다.
나중에 그는 자신이 수영장의 바닥을 장식하고 있는 고전적인 문양을 한 타일을 구경하고 있었노라고 했다. 수백 년이 지난다 해도 나 같으면 그런 미친 생각을 할 수 없을 거야!
그 때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그의 무거운 몸을 끌고 수영장의 가장자리로 헤엄쳐 갔었다.
그러나 제이크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그녀의 노력에 대해 한마디의 인사도 하지 않은 채 투덜거렸다. "난 당신이 오기 전 까진 전혀 위험하지 않았소!"
그는 성난 목소리로 으르렁대며 그 굳어진 턱으로 〈자기 일이나 신경 쓰지, 아무 일이나 덤벼 대는 멍청한 여자 운운〉해대는 것이었다.
그리고 말만 그렇게 한 게 아니라 행동으로 자신이 예절과는 완전히 담쌓은 사람이란 걸 증명했다. 그는 그녀를 야만적으로 끌어당겨 품에 안더니 난폭하고 분노에 찬 키스를 퍼부었던 것이다. 그런 뒤 그녀를 물속으로 세게 밀어버리기 까지 했다.
이 남자는 그냥 무지막지스러운 게 아니야. 완전히 야만인이지! 그의 잘생긴 얼굴을 노려보며 그녀가 속으로 말했다.
"난 이미 그 수영장에서의 불행했던 사건에 대해 사과했어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내 말은 그런 실수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거예요."
제이크가 거친 웃음소리를 냈다. "실수가 한 가지만이라면 이해할 수 있겠지. 그러나 당신이 내게 입힌 그 많은 육체적 상처를 어떡할 거요? 팔미라에서 한 그 작은 실수는 어떻게 설명할 거지?"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어요. 당신이 그 기둥 옆에 서 있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투덜댔다.
그건 정말 내 잘못이 아니었어! 팔미라에 있는 고대 도시의 유적지를 방문하는 건 그녀의 여행 목적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 재수 없는 날 그녀가 한 거라곤 그 거대한 기둥들의 사진을 몇 장 찍은 정도였다.
일몰을 보며 사진을 찍은 뒤 그녀는 거의 1.6km나 되는 길이로 늘어서 있는, 9m에 이르는 기둥들의 모습이 찍힌 사진들을 상상해 봤다. 굉장한 사진이 될 거야! 그건 그녀가 돌아가기 전에 꼭 찍고 싶은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됐던가?
"나도 이런 말은 시간 낭비라는 건 알지만." 제이크가 기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가는 방향은 보고 다니니까..."
"나도 그래요, 대부분은..." 그가 냉소적인 웃음을 짓는 걸 보면서 그녀가 재빨리 말했다.
문제는 가능한 한 많은 기둥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찍으려고 뒷걸음질 치다가 그만 뒤에 있는 기둥에 세게 부딪혀 길 밖으로 튕겨져 나간 데 있었다. 그 바람에 마침 발굴하려고 파 놓은 커다란 구덩이 근처에 서 있던 사람을 쳐버렸던 것이다.
"팔미라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선 그만 말했으면 좋겠군요." 오리엘이 우울하게 말했다. "이미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그때 그녀는 정말로 미안해했다. 그녀가 그의 몸에 세게 부딪치는 바람에 그의 몸이 비틀거리며 깊은 참호 속으로 빠져 버렸던 것이다. 물론 그녀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함께 빠졌지만...
다행히 그녀는 제이크의 몸 위로 떨어져 무사했었지만 그는 그녀의 갑작스런 출현을 그리 반가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때 그가 극도로 화가 나서 보인 반응을 생각하면 지금도 뺨이 붉어진다. 분노와 저주의 말을 내뱉던 그가 갑자기 몸을 굴려 그녀를 내리누르면서 거친 키스를 퍼부어 댔던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파괴적이면서 강렬한 키스였다.
"당신이 어쨌다고?"
제이크의 조롱하는 듯한 목소리가 그녀의 생각을 어지럽혔다.
"당신은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재앙덩어리요. 그리고 지금..." 그가 부러진 좌석 손잡이를 들어올렸다.
"하하!" 오리엘이 쓰디쓴 웃음을 지으면서 가까스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차마 밖으로 삐져나온 블라우스 자락을 매만졌다. "어쨌든..."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차가 오래 돼서 이렇게 된 걸 내 탓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오리엘은 투덜거리며 변명을 했다.
"오, 글쎄 잘 모르겠군..." 리무지의 천장을 응시하면서 그가 가볍게 말했다. "당신이 가까이 있으면 나도 언제나 정신적 피로를 느끼는데 아무리 강철로 만들어진 차라 해도 당신이 안에 타고 있는데 어떻게 피곤함을 느끼지 않겠소?"
의외로 활짝 웃으며 말하는 그를 보고 오리엘도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놀라운 발전이군!" 그가 부드럽게 놀렸다. "웃는 모습이 참 아름답군.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언제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흥분해서 헛소리를 하다니 참 안된 일이요."
"잠깐만요!" 오리엘은 그가 보여준 유머 감각에 잠시 동안 흔들렸던 마음이 재빨리 사라졌다. "어떻게 내게 그런 말을..."
"오, 하느님!" 자못 믿음이 강한 신자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중얼댔다.
오리엘은 자신의 얼굴에서 불과 몇 센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그의 햇볕에 그은 얼굴을 노려봤다. 그녀도 물론 그 밉살스런 남자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 회색 눈에 드러나 있는 즐거움의 빛을 장님이 아닌 다음에야 못 알아볼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그와 논쟁할 기분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강렬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는 그의 시선이...
갑자기 생각이 정지된 듯한 느낌이다. 그녀는 그의 강렬한 눈빛 앞에서 최면에 걸린 것만 같았다. 그의 몸에서 은은하게 풍겨나는 관능적인 향수냄새와 자신을 끌어당기는 그의 팔 힘만이 의식될 뿐이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그의 팔 안에 안겨 있는 자신의 모습을 깨달은 오리엘의 뺨에 진홍빛이 물들었다.
어째서 난 매번 같은 상황에 처하는 것일까? 이번에도 팔미라에서 처럼..." 오, 안돼! 그때처럼 그가 내게 그런 식으로 키스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안돼!
"여기서 나가야겠어요!" 그의 품을 벗어나려 애쓰면서 그녀가 소리쳤다.
제이크가 가엾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서두르오?" 그가 조롱하듯 물었다. "우리가 만날 때마다 당신은 내 팔에 안기게 되곤 했는데. 자, 오늘이라고 달라진 게 뭐가 있소, 음?"
"아무것도요! 그러니까 내 말은...모든 게 다요! 날 놔줘요!" 몸을 비틀어 가까스로 차안을 벗어난 뒤 오리엘은 먼지나는 땅을 달려갔다. 그의 웃음소리가 커다랗게 귓속을 메아리쳤다. 그녀는 크고 둥근 돌 뒤로 숨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했다.
그녀의 키보다 2배는 높은 듯한 돌에 등을 기대며 오리엘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맙소사, 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거지? 그녀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요만큼 뛰어왔다고 이렇게 숨도 못 쉴 정도라면 의사한테 가봐야 하는 게 아닐까?
지금껏 그녀는 자신이 굉장히 건강하다고 믿어 왔었다. 그런데 지금의 상태로 봐선 아주 치명적인 병에 걸려 있는 것 같다. 혹시 뇌종양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시간의 존재를 잃고 이렇게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가 될 수는 없잖은가?
시리아에 도착한 이후, 그리고 제이크와 단둘이 있는 상황에선 언제나 시간이 그 움직임을 멈추는 것 같았다. 마치 시간과 공간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여겨졌었다. 그런 상황에 처할 때마다 미칠 지경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저 끔찍한 남자를 조금도 좋아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 표현은 적당하지 않다. 제이크 에머슨은 그야말로 혐오 그 자체였다.
깊게 심호흡을 하면서 오리엘은 애써 마음속에서 제이크에 관한 생각을 몰아내려 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 위에 보이는 성의 모습에 정신을 집중하려 애썼다. 그 회색 건물은 그녀가 차에서 떨어져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왠지 적의를 나타내는 듯했다.
"정말로 굉장하지 않소?"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소스라쳐 놀라며 오리엘이 돌아봤다. 제이크가 역시 돌에 등을 기댄 자세로 요새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 위에서 내려다보면 환상적일 것 같군. 물론 아직도 십자군이 어떻게..."
그 순간 갑자기 리무진이 있는 쪽에서 날카롭고 거대한 폭발음이 들리는 바람에 마주보고 있던 두 사람은 놀라서 펄쩍 뛰었다.
오리엘이 얼굴을 찌푸렸다. "꼭 차가 폭발하는 소리 같군요, 하지만..." 째지는 듯한 비명 소리에 그녀가 말을 멈췄다.
"맙소사!" 제이크가 소리쳤다. "저건 분명히 총소리야!" 순간 그가 차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른 채 오리엘도 재빨리 사라지는 그의 뒤를 쫓았다 시야를 가리고 있던 돌들이 사라진다 싶을 때 그녀는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제이크의 모습 때문에 발을 멈춰야 했다.
그는 자기 앞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심각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오리엘이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리무진 옆에서 얼굴이 공포로 하얗게 질린 채 떨고 있는 사람은 할림 카두르였다. 그가 왜 그러는지를 깨달은 오리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관 옆에 서 있는 라일라 살리만이 권총을 할림의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누르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맙소사, 라일라, 대체 무슨 일이오?" 제이크가 화가 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총으로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요?"
"움직이지 마!" 제이크가 막 앞으로 나서려 하자 라일라가 소리쳤다.
"어리석은 짓 말아요!" 그가 말했다. "대체 이 말도 안 되는 짓으로 뭘 얻겠다는 거요?"
라일라가 소름끼치는 웃음소리를 냈다. "내 친구들이 곧 이리로 올 거야. 그리고 나면 이것이 말도 안 되는 장난이 아니란 걸 알게 될 걸!"
오리엘은 자신의 무릎이 캐스터네츠처럼 부딪치고 있음을 느꼈다.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제이크의 힘센 팔만 아니라면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이렇게 서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헐떡대며 그녀가 속삭였다.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떤 걸 말이오?" 제이크가 차 옆에 세워져 있는 라이플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라이플과 불과 몇 센티 떨어진 곳에서 운전사가 수트케이스들을 차 밖으로 들어내고 있었다.
제이크와 차까지는 기껏해야 3cm정도였지만 마치 30cm는 되는 듯 여겨졌다. 그가 장관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라일라가 할림의 머리에 총구를 가까이 대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운전사와 그의 총도 생각해야 했다.
만약 상대가 라일라 혼자라면 제이크는 주저하지 않고 그녀에게 덤벼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용히 차에서 짐들을 꺼내는 운전사를 보니 이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자신의 목숨뿐 아니라 오리엘의 생명까지 위험해질게 뻔했다.
제이크가 상황을 계산하는 동안 오리엘의 공포와 혼란스러움은 분노로 바뀌었다. "제이크가 옳아." 그녀가 경고하듯 소리치는 라일라를 무시한 채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대체 그 끔찍한 총구를 할림에게 겨눠서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게 뭐예요?" 그리고 당신의 친구들이 곧 도착할 거란 말은 또 뭐죠?" 오리엘이 라일라를 어이없다는 듯이 노려보며 소리쳐 물었다. "그러니까 당신들, 설마 납치범들 같은..."
"내겐 이렇게 중요한 문제들을 당신과 왈가왈부할 시간이 없어." 라일라가 심술궂게 말했다. "돌아가서 에머슨 씨 옆에 서 있는 게 신상에 좋을걸."
오리엘은 약간만 물러섰다. "글쎄...만약 당신이 기대하는 게 갱단의 일원들이 이곳에서 합류하는 거라면, 내가 보기엔 당신도 그다지 운이 따르는 것 같지 않군요. 그들이 헬리콥터를 타고 오지 않는 한요." 산으로 둘러싸인 험난한 지형을 가리키며 그녀가 비웃었다. "라일라, 이 모든 상황이 난센스라고 한 제이크의 말이 옳아요!"
라일라가 숨 가쁘게 웃어댔다. "제이크가 그렇게 말했어요?" 그녀가 오리엘의 영국식 억양을 흉내냈다. "에머슨씨는 당신보다 더 어리석어! 미국의 개도 영광의 혁명을 위한 우리의 계획을 이해할 거야."
라일라는 점점 열을 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은 흥분이 거의 광란적인 상태에 이름에 따라 알아듣기가 힘들 정도였다.
"우리 조직원들이 도착하면 당신들같이 허약하고 흐물거리는 인간들을 알아서 처리하겠지. 그리고 할림 카두르는 베이루트로 옮겨지게 될 거야. 그러면 전 세계가 알게 되겠지. 장관이란 작자가 진짜 어떤 인간인지를... 진실된 믿음을 배반하고 사악한 제국주의자들에게 무릎을 꿇는 놈이란 걸!"
저 여자는 완전히 돌았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텅 비었어!
오리엘이 혼잣말로 중얼대는데 제이크가 뒤에서 말했다.
"당신, 베이루트라고 했소?"
"아, 물론." 라일라가 무심코 응수했다.
"알라 신이시오!" 장관이 신음했다. "내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그리고 내 아내들은?"
"베이루트라고요?" 오리엘이 놀란 눈으로 제이크를 돌아보았다. "난... 이해가 안 가요." 그녀가 말을 더듬었다. "내 말은 그러니까...여기서 국경까진 겨우 100km정도인데. 오, 맙소사! 그럴 리가 없어..." 오리엘은 다시 라일라를 향해 돌아섰다. "당신은 그를 납치하려는 거군요, 그렇죠?"
라일라가 그렇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자 오리엘은 화가 나 앞으로 나섰다.
"이럴 수는 없어...이 나쁜 여자! 그렇게 하도록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
라일라가 예의 그 심술궂고 째지는 둣한 웃음소리를 냈다. "에머슨씨, 그녀에게 분명히 말해 줘요." 그녀가 표독스럽게 말했다. "이 멍청한 영국 여자에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설명해 줘요."
제이크가 오리엘을 힐끗 쳐다보더니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라일라 말이 옳소, 오리엘." 그가 조용히 말했다. "머리를 천천히 왼쪽으로 돌려보면 당신도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거요."
그의 지시를 무시하고 오리엘이 급히 발꿈치를 돌리자 그 행동에 운전사가 놀라 즉시 옆의 라이플을 집어 그녀를 겨눴다.
만약 그녀가 그렇게 화가 나 있는 상태가 아니었더라면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정말로 그들에겐 장관을 도울 방법이 없는 것일까? 분명히 방법이 있을 텐데...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에 중단됐다.
"아!" 여전히 총구를 할림의 머리에 갖다 댄 채 라일라가 다른 쪽 손의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보다시피 내가 말했던 대로야! 내 친구들이 제 시간에 도착하고 있어."
엔진 소리가 더 커지자 제이크가 오리엘에게 속삭였다.
"이곳을 벗어나야 하오."
"뭐라고요?" 오리엘이 긴장한 그의 목소리에 어리둥절해져 물었다. "오, 맙소사!" 잠시 후 그녀는 커다란 회색 트럭이 도로에 나타나는 걸 봤다.
그때 갑자기 제이크가 그녀의 팔을 끌어 바위 뒤로 잡아당겼다.
"뭐하는 거예요?" 암석들 사이로 쫓아가느라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윽, 다쳤어요!" 큰돌에 부딪히는 바람에 그녀가 신음했다.
"우는 소리는 그만둬요!" 질주를 멈추지 않은 채 그가 무자비하게 으르렁댔다. "만약 지금 다쳐서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으면 저기 있는 놈들이 당신을 잡으러 올 때까지 기다리든지!"
"대체 어디로 가는 거예요?" 숨을 헐떡이며 그녀가 물었다. 발가락이 큰 돌에 부딪혀 얼얼했다. 눈물까지 나온다.
브이자 모양으로 붙어 있는 두 개의 큰 돌에 이르러서야 제이크가 걸음을 멈췄다. "오, 여기가 좋겠군!" 그 돌 사이의 좁은 틈으로 들어가 그녀를 끌어당기면서 제이크가 말했다. 오리엘이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 거의 1km쯤 뛴 사람처럼 숨을 헐떡이고 있는 그녀처럼 그도 가쁘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우리가 뭘 하고 있는 거죠? 분명히 할림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예요!"
제이크가 한심하다는 듯 푹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그가 조용히 물었다. "당신은 그들이 정말로 우리를 그냥 길에다 버려두고 갈 거라 믿소? 저 미친 라일라가 장관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있지만 그녀의 나머지 일당들이 오면, 내기해도 좋소. 그들은 우릴 모두 베이루트로 끌고 가려 할 거요!"
"뭐라고요?"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하느님 맙소사, 목소리를 낮춰!" 그가 쇳소리를 내며 윽박질렀다.
"그렇지만 왜?" 오리엘은 그의 말에 따라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다리가 다시 떨리기 시작한다. "이유가 뭐죠? 내 말은..."
"이유는 없소." 그가 거칠게 말했다. "베이루트에서 일어나고 있는 납치극엔 이유 따윈 없소. 그렇지만 저들을 막을 수도 없소!"
"그렇지만..."
"봐요, 당신도 현실을 직시해야 하오. 물론 내가 라일라와 협상할 수는 있겠지. 그녀와 충분히 얘기를 하다 보면 저 운전사를 설득하게 될 수도 있소. 그러나 일단 저 트럭이 도착하게 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지는 거요."
"그렇지만 이렇게 여기 가만히 서서 아무것도 안할 수는 없어요."
"오, 오리엘. 난 슈퍼맨이 아니오!" 그가 지쳤다는 듯 으르렁댔다. "나도 이렇게 우리만 도망쳐 버리고 할림을 운명의 손에 떠맡기는 게 싫소. 그러나 그는 운이 좋을 수도 있소. 당신도 알다시피 시리아는 레바논의 절반을 지배하고 있소. 그러니 그들은 장관의 몸값을 치르는데 그다지 어려움이 없을 거요. 사실 그들은 이 사건을 단순히 당황스런 외교적 사고쯤으로 간주할 수도 있소. 오히려 그 상태에서는 문제의 해결이 쉬워지지. 그렇지만 여기에 당신과 내가 개입되면 일은 굉장히 어려워지오. 잊지 말아요, 오리엘. 당신이 영국에서 본 것처럼 미국도 테러리스트에게 같은 입장을 보이고 있소. 협상도 없고 몸값을 지불하는 일도 없소. 그러니 난 할림을 구할 수도 없으면서 여기에 서서 베이루트의 캄캄한 토굴 속으로 잡혀가는 걸 기다릴 수는 없소.. 언제 풀려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으로 말이오!"
"오, 알겠어요." 그녀가 냉혹하게 비꼬았다. 그러니까 제이크 윈스롭 에머슨 3세는 자신을 지키겠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죠?"
제이크는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렇소, 스위트하트." 그가 꽉 다문 이 사이로 으르렁댔다. "만약 당신이 끝모르는 세월을 지하 토굴 속에 갇혀 있고 싶다면, 정말로 그렇게 희생양이 되는 게 소원이라면 왜 당신의 친구인 할림의 옆으로 돌아가지 않는 거요?"
오리엘은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그는 정말로 무자비한 남자다. 물론 그녀도 그들에게 납치돼 베이루트의 컴컴한 지하 토굴로 끌려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렇다고 이렇게 장관을 내팽개칠 수는 없다. 아무 승산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자신이 겁쟁이처럼 느껴졌고 비이성적인 생각인 줄은 알지만 이 모든게 자꾸 제이크 탓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자, 어떻게 하겠소?" 제이크가 결단을 촉구했다.
"오, 좋아요." 마침내 그녀도 인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난 여전히..."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고 몸부림치는 그녀의 몸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바람에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재빨리 그가 검은머리를 낮추면서 그녀의 귀에 급히 속삭였다. "맙소사, 조용히 해! 그들이 우리를 찾고 있어. 제발 소리 좀 내지 마!"
공포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동상처럼 서 있는데 그때서야 아랍어로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당신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 에머슨!" 라일라가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나 우리에겐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이 없어. 차가 없으면 당신이나 그 어리석은 영국 여자나 그리 멀리는 못 가겠지!" 그녀가 등골이 서늘할 지경으로 소름끼치게 웃어댔다.
제이크는 트럭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한 손으론 오리엘의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로는 떨고 있는 그녀의 몸을 자신의 단단한 가슴에 끌어당겨 안아 줬다.
"됐소." 마침내 그가 말했다. "내 생각엔 그들이 떠난 것 같아."
암석과 돌무더기 사이를 조심스럽게 헤쳐 나오면서 그들은 천천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장관의 검은 리무진이 아무 일없이 아직 그 곳에 남아 있었다. 오직 어수선하게 버려진 수트케이스들이 방금 일어난 납치극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멍청하기도 하지!" 오리엘이 소리쳤다. "우리에게 저들이 차를 남겨 두고 갔군요! 설령 그들이 열쇠를 가져갔다 해도 움직일 방법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그녀는 흥분해서 덧붙였다. "할림에게 도움을 주는 데 오래 걸리지도 않겠어요!"
"진짜로 믿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단 말이야." 차를 노려보면서 얼굴을 찌푸린 제이크가 천천히 말했다.
"오, 맙소사, 제이크!" 오리엘이 웃음을 터트리며 차쪽으로 걸어갔다. 급하게 그녀쪽으로 달려오는 그의 발소리도 경고의 외침도 들리지 않았다.
제이크가 그녀를 잡아 지면 위로 덮쳐누른 순간 갑자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 순간 오리엘은 생각할 수도 숨을 쉴 수도 뭔가를 느낄 수도 없었다. 그녀 주위의 모든 세계가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4-
오리엘은 어둠 속에서 따뜻하고 편안함을 느꼈다. 어떤 사람이 시끄럽게 하지만 않았다면...
"일어나, 오리엘. 즉시!" 그 목소리는 일어나라고 계속 요구했다.
그의 목소리라니?
"자, 어서! 이 아름답고 어쩔 수 없는, 정말 화나게 만드는 여자 같으니. 일어나시지!"
두꺼운 안개가 머릿속에서 걷혀지면서 그녀는 아주 느리게 자신에게 명령하고 있는 사람의 깊고 가라앉은 음색을 깨닫기 시작했다.
"꺼져 버려요." 그녀가 소리쳤다. 그러나 그 말들은 희미하고 둔탁하게 들릴 뿐이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꺼져 버려요, 이 역겨운 남자!"
그의 반응은 깊은 웃음소리뿐이었다.
어떻게 감히 그가 날 웃음거리로 생각할 수가 있지? 분노와 모욕감에 그녀는 눈을 떴다. 그러나 햇빛이 눈을 찔러서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넓은 어깨의 남자를 알아보는데 시간이 걸렸다.
"안녕...마침내 정신을 차렸군!" 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는 굿바이 쪽이 더 좋아요." 그녀가 다시 두 눈을 감으며 투덜댔다.
제이크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가 다시 눈을 감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스위트하트. 지금은 일어날 시간이오."
"제발 날 스위트하트라고 부르지 말아요." 그녀는 결국 그와 싸우는 걸 포기한 채 다시 눈을 뜨며 못마땅하다는 듯 소리쳤다.
제이크가 그녀의 머리 아래에 있는 베개를 바로 잡아 주며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좋아요, 박사님...그 사실을 기억해 두겠소."
오리엘은 명확하게 생각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깊은 마취에서 갓 깨어난 사람처럼 생각들이 단편적으로 흩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서 몇 센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그의 얼굴을 멍하니 응시했다. 물론 그녀는 그가 정말로 밉살스럽고 믿을 수 없는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래, 정말로 굉장히 감각적이고 매력적인 남자야!
"일어나 앉는 게 어떻겠소?"
"일어나...?" 굳어 버린 감각을 되찾으려 애쓰면서 그녀가 되풀이 말했다. 점차 자신이 땅 위에 누워 있는 게 느껴졌다. "알 수가 없군요, 윽!" 머리를 움직이려고 하다가 오리엘이 얼굴을 찌푸렸다.
"누워 있어요. 당신은 괜찮소. 물론 머리에 혹이 생기고 뺨과 다리에 상처가 약간 나긴 했지만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닌 것 같소." 하얀 손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닦아주면서 그가 확신하듯 말했다.
"우리가 지금 어디 있는 거죠?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히스테리를 일으킨 것 같다. 비로소 그의 눈가가 찢어지고 산뜻하던 그의 흰 셔츠가 구겨져 쭈글쭈글한 게 눈에 띄었다.
"이건...피예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셔츠에 묻은 붉은 반점을 만져 보며 그녀가 소리 질렀다.
"당신이 걱정할 일이 아니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 등도 약간 쓰라리지만 나중에 봐 달라고 하겠소. 지금은 당신이 일어나 앉아 줬으면 좋겠군. 처음엔 약간 어지러울 거요. 그러나 천천히 일어나면 되니까 무서워할 필요는 없소!"
"무서워할 생각은 없어요!" 그녀가 쏘아붙였다.
그가 건조한 웃음소리를 냈다. "좋아요, 철의 여인. 자, 해봅시다."
오리엘은 공포를 일으키진 않았다. 그러나 약간 현기증이 나고 몽롱했다. 그의 팔이 자신을 부축해 주는 게 고마웠다. 오래잖아 머릿속의 안개가 걷히기 시작해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들 위쪽에 위협하듯 솟아 있는 성곽의 모습이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자신들이 달의 표면에 와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녀가 누워 있던 곳은 온통 작은 암석들로 뒤덮여 있고 뭔가 타는 냄새가 대기를 채우고 있었다. 아주 기묘한 모양으로 꼬여진 금속 조각들이 암반 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대체 우리가 여기서 뭘하고 있었던 거죠?" 그녀가 혼란스러워 물었다.
비로소 자신이 베고 있던 더럽고 여기저기 찢겨진 베개가 한때는 흠 하나 없던 그의 테일러드수트였음을 깨달았다.
"어...정말로 고마워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놀란 듯한 그녀의 음성에 그의 입이 꿈틀댔다. "지금은 좀 어떻소?"
그가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떨리는 손으로 머리에 난 크고 아픈 혹을 조심스레 만져 보며 그녀가 말했다.
"글세, 당신 다리로 설 수가 있을까?"
"흠... 그래요.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일어서려는 그녀를 제이크가 부축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주위를 둘러보다 깜짝 놀라며 그녀가 소리쳤다. "차는...차는 어디 있어요?"
차가 있던 곳이 완전히 변해 있었다. 장관의 검은 리무진은 공기 속으로 사라진 것 같다. 차가 있던 곳엔 형체를 알 수 없는 물체가 뒹굴고 있고 매캐한 회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설마, 저게...?" 잠시 동안 눈을 감고 머리를 세게 흔들면서 그녀가 말을 더듬었다. "미친 소리로 들릴 거라는 건 알지만." 제이크를 향해 불안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한순간 난..."
"맞소."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믿든 안 믿든 저것이 장관이 탔던 리무진의 잔해요."
오리엘이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푸른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금 전만 해도 차가 서 있던 자리엔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그녀가 돌아서서 제이크의 씁쓸해 하는 얼굴을 응시했다. "난 이해가 안되는 군요." 그녀가 혼란스런 표정을 지었다. "차가 확실히 저기 서 있었던 것 같은데...내 생각엔...그래요, 난 분명히 차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리고 폭탄이 터져 버렸지!"
"폭탄?" 공포에 질려 오리엘이 그를 응시했다. 갑자기 현기증이 나고 눈앞이 흐려져 앞으로 휘청거렸다. 제이크가 재빨리 붙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왜?" 제이크가 이끄는 대로 근처의 평평한 돌 위에 앉으면서 그녀가 속삭이듯 물었다.
"내 생각엔 라일라가 남긴 작별 선물인 것 같소." 그가 차의 잔해를 응시하며 거칠게 말했다. " 그래, 그녀는 확실히 사랑스럽소." 그가 씁쓸하게 덧붙였다. "처음엔 난 너무 늦어 버린 게 아닐까 했었소. 아무렴 테러리스트들이 우리에게 도망 갈 방법을 알려 줄 리는 없을 테니까. 가까스로 제 시간에 당신을 잡을 수가 있었지. 몇 발걸음만 그 차에 더 접근했었더라면 아마 당신과 나 둘 다 끝장이 났을 거요."
"오, 맙소사! 난 막 차안으로 들어갈 참이었어요. 그렇죠?" 그녀가 숨을 헐떡였다. "당신이... 내 생명을 구해 준 거군요?"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너무 흥분할 필요는 없소."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확실히 좀 특별한 재난을 극복한 것 같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좋아진 것 같진 않으니까. 어쨌든 여기는 리츠 호텔이 아니오." 그가 온통 황무지만 펼쳐져 있는 주위의 풍경을 가리켰다. "우리가 어디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여기를 빠져나가 문명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신만이 알 거요."
오리엘이 멍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바로 다음 순간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미래라니. 그녀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거의 죽을 뻔했다는 것, 그러나 다행히 제이크의 도움으로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을 실감할 뿐이었다. 충격을 받은 그녀의 온몸이 떨려 오고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정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제이크가 재빨리 그녀의 무릎 사이로 머리를 묻게 했다. 그가 심호흡을 해보라고 명령했다. "당신은 강한 여자잖소? 그러니 내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여 주면 안되지. 게다가 내 등이 굉장히 쑤시는 게 당신이 상처를 좀 봐줬으면 싶소!"
그녀가 깊게 심호흡을 했다. "난...괜찮아요." 떨리는 몸을 자제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그녀가 중얼거렸다. "당신 등이 잘못됐나요?"
"나도 모르겠소. 그래서 당신에게 봐 달라고 한 거요." 그가 셔츠의 단추를 벗기고 어깨를 옷에서 빼내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오리엘이 떨리는 두 다리로 간신히 일어섰다. "이 돌 위에 앉는 게 좋겠군요. 그러면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보겠어요."
"어차피 이곳엔 치료 장비가 없으니 뭐 굉장한 걸 기대하진 않소." 그가 등을 그녀 쪽으로 돌린 채 돌 위에 앉으며 놀리듯 말했다. "그냥 당신이 할 수 있는 정도만 부탁하오, 음?"
그녀는 그의 한쪽 어깨에서부터 등 한복판까지 가늘게 띠모양으로 나 있는 상처 자국을 내려다봤다. 대체 내가 뭘해야 하지? 오리엘이 이 상황에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 결정을 못하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상처가 그리 심한 것 같진 않은데...
"사실대로 말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때만큼 미리 응급처치법을 배워 두지 못한 게 후회스러운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무력함이 비참할 만큼 원망스러웠다. "무슨 뜻이오?"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제이크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오, 하느님! 당신은 박사잖소, 아니오? 자, 장난은 그만하고 어서 치료를 해줘요."
오리엘이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씩씩대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당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난 의사가 아니에요."
"물론 당신은 의사야!" 그가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난폭하게 소리쳤다.
"아뇨. 아니에요. 몰론 그래요. 어떤 면에선..." 떨리는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잘못 안 것 같은데 난 의학박사가 아니라 철학박사에요!"
"뭐라고?" 멍청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던 그가 곧 잡아먹을 듯 으르렁댔다. "오, 대단하군!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던 거지. 이렇게 하느님만이 어딘지 알 만한 곳에 갇혀 누구라고? 그래, 빌어먹을 여자 소크라테스와 같이 있게 됐단 말이지!"
"아뇨, 틀렸어요. 당신이 잘못 알고 있어요." 그녀가 반발했다. "내 박사 학위는 그런 종류의 철학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그건 옥스퍼드가 내게 수여한 명예박사학위에요. 그러니까 내 학위논문인..."
"옥스퍼드든 캠브리지든 그런 것들엔 관심도 없소." 그가 계속 으르렁댔다. "내가 원하는 건, 너무 많은 걸 원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내 등이 어떻게 돼 있는지를 알고 싶다는 거요." 그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오리엘은 이를 갈면서 마음속으로 천천히 열까지 샜다.
그런다음 구릿빛으로 그은 그의 등에 난 상처를 내려다봤다. 굉장히 쓰라릴 것 같다. 그러니 내가 관대하게 이해해야지.
"여기서 여기까지 약간 상처가 났어요." 그녀가 그의 등을 가볍게 건드렸다. "이미 말했듯이 난 의사는 아니에요. 하지만 추측컨대 날아온 금속 조각에 긁힌 것 같군요. 그렇지만 상처가 깊진 않으니까 그냥 긁힌 정도예요. 그러니까 상처를 그냥 옷으로 덮어두기만 해도 자연적으로 나을 것 같아요."
"고맙군, 스위트하트. 뭐가 고마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가 셔츠를 집어 들고 씩씩거리며 일어서며 으르렁댔다.
오리엘이 사납게 그를 노려보았다. 이 남자의 목을 졸라 버렸으면 좋겠어! 그가 목숨을 살려 준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성질이 나쁘고 성을 잘 내는 남자가 으르렁대는 걸 영원히 참으려 고마워해야 한다는 걸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다.
"이봐요, 나도 당신의 등이 무척 쓰라릴 거라는 걸 알아요."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는 건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내가 의료 수업을 받지 못한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요? 물론 내 학위가 의심스럽다면..."
"내게 강의는 하지마!" 그가 이를 갈았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장 원하는 게 있다면 그건 거만하고 잘난 척하는 여자의 말을 듣지 않는 거니까."
"어쩌면 그렇게 무례할 수가!" 그녀의 뺨이 분노로 달아올랐다. "어쨌든 난 적어도 조그만 상처에 어쩔 줄 몰라 미쳐 날뛰는 우울증 환자는 아니니까." 그녀가 경멸한다는 투로 비꼬았다.
제이크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뭐라고 말했지?" 그가 난폭하게 물었다.
불안해진 오리엘이 맨 가슴으로 위협하듯 다가오는 그를 피해 뒤로 물러섰다.
"좋아요, 좋아." 그녀가 중얼거렸다.
"진심으로 그렇게 말한 건 아녜요."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있는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가 그녀를 잠시 동안 노려보더니 다시 셔츠를 입고 단추를 잠그기 시작했다. "여길 봐요."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우리 둘이 이 숲속에서 계속 다퉈 봤자 아무 소용없는 시간 낭비 일뿐이오. 그러니 우리 둘 다 진정하고 냉정해지는 게 어떻겠소?"
오리엘이 그를 반항적으로 노려봤다.
"당신도 우리에겐 협력하는 길 외엔 다른 대안이 없다는 걸 알아야 하오." 그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의 기를 꺾어 놓을 생각은 없지만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빨리 깨달을수록 대처하기에 좋을 거요. 그리고 누가 옷을 입었든, 아니면 옷을 입고 있지 않건 그건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면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오." 그가 허리띠를 풀고 바지 속으로 셔츠를 넣으면서 당황해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하는 그녀를 보고 재미있다는 듯 덧붙였다.
오리엘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면서 자신이 이처럼 지치고 피곤하다고 느낀 적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바로 머리 위에서 햇빛이 사정없이 내리쬐고 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숨을 조용히 가다듬었다. 햇빛이 바위에 반사돼 빛나고 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황야에, 더구나 저런 남자와 갇히게 된 걸까? 저 남자가 내 생명을 구해 준건 사실이지만 노골적으로 날 싫어하고 있다는 것도 확실한 사실이다. 그는 확실히 나를 성가셔 하고 있다.
제이크는 그녀의 피곤해 하고 지쳐 있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그녀가 가엾게 느껴지는 바람에 스스로 놀랐다. 최근에 그런 사건을 겪었으니 지친 것도 무리는 아니지. 어쩌면... 그래, 어쩌면 내가 이 철의 여인에게 좀 심하게 군건지도 모르지...
"내가 좀 거칠었다면 미안하오. 그렇지만 우리가 현실을 빨리 직시하면 할수록 좋을 것 같아서 그랬소." 그가 조용히 말했다.
오리엘은 피곤한 어깨를 으쓱했다. 제이크는 이 버려진 땅에 함께 갇히고 싶지 않은 최후의 남자다. 사실 사방을 둘러봐도 산밖에는 보이지 않는 이 상황이 아니라 물가만 됐어도 참을 만했을 거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게 확실한 이상 그녀와 제이크는 어쩔 수 없이 서로 협력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당신 말이 맞아요." 결국 한숨을 쉰 그녀가 말했다.
"아무것도 약속할 수는 없지만 가능한 한 침착해지려고 애쓰겠어요."
"나도 노력하겠소." 그가 놀라는 오리엘에게 순간적이긴 했지만 우호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난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었소." 그가 점점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지금 난 우리가 처한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소. 우리에겐 먹을 것도, 옷도, 지금 상황을 견뎌 낼만 한 게 아무것도 없소. 게다가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물이 없다는 거요. 그건 아주 심각한 문제요." 그가 우울하게 말하면서 한 손으로 검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인간이 생존하는 데 얼마만큼의 물을 필요로 하는지를 기억해 봤소.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는 하루에 2리터의 물이 필요하오."
"그렇게나 많이?"
"흐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게도 그렇소. 우리가 서로 싸워서 에너지를 낭비해선 안되는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거기에 있소."
오리엘은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우리가 공포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누군가가 저 도로에 나타나서 우리를 구해 주는 데 그다지 시간이 많이 걸리진 않을 테니까."
"대체 어떤 사람이 우릴 구해 주겠소."
오리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그럴 어떻게 알겠어요? 길이 있으니까 차가 지나갈 거고 그러니 난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탈 수 있을 거라는 거요." 그녀가 그를 날카롭게 쏘아봤다. "물론 당신이야 그렇게 지체 높은 사람이니까 트럭을 얻어 타거나 그 밖의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한다면 모욕을 느끼겠죠. 그렇지만 난 처음으로 나타나는 게 뭐든 올라탈 준비가 돼 있어요."
제이크가 이를 갈았다. 이 잘난 척하는 여자가 그를 벽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대체 이 여자는 우리가 처해 있는 재난 상황이 어떤 건지 짐작도 못하는 것일까?
"어떤 차라고?" 그가 경멸하듯 코웃음을 쳤다. "이 도로는 매우 좁은 비상 도로요. 글쎄 한 무리의 염소 떼라면 모를까, 엔진 달린 교통 수단이 지나갈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는군, 안 그렇소?"
마지못해 그가 옳다는 걸 인정하면서 오리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좋아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여기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요. 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예요."
제이크가 비꼬는 듯한 미소를 던졌다. "마침내 당신이 정상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아 무척 기쁘군." 상처에 소금을 문지르며 그가 말했다. "당신 말이 맞소. 여긴 지금 너무 뜨겁소. 그렇지만 이곳이 산이기 때문에 밤이면 무척 추워질 거요. 내 말은 그러니 우리에겐 피난처가 필요하다는 거지. 현재로선 저 성안으로 피할 수밖에 도리가 없을 듯하군."
그녀가 돌아서서 그들 위에 거대하게 솟아 있는 성채의 모습을 노려보았다. "당신 말은 우리가 저기까지 기어올라야 한다는 건가요?" 놀란 눈으로 그녀가 물었다. "대체 저 안엘 어떻게 들어가요?"
"기억나지 않소?" 그가 초조하게 말했다. "장관이 우리에게 저 성이 최근 복구됐다고 말했잖소. 그러니 분명히 입구가 있을 거요."
오리엘이 숨을 삼켰다. "오, 세상에..." 그녀가 신음했다. "내가 어떻게...어떻게 내가 그 불쌍한 할림을 잊을 수가 있겠어요? 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길지..." 거의 울먹이면서 그녀가 물었다. "내 확신하지만 당신이 그를 걱정할 필요는 없소." 제이크가 단호하면서 확신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그도 자신은 없었지만 오리엘에게 자기 생각을 밝힐 생각은 조금도 없다. 지금 중요한 건 이 여자의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시리아 정부는 그들의 내무장관에 걸린 몸값을 곧 지불할 거요.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중요한 사람을 잃게 될 테니까. 그러니 그들은 가능한 한 신속히 대처할 거요. 자, 그러니 긴장을 풀어요. 음?"
"당신이 정말로 그렇게 확신한다면..."
"물론, 난 정말로 확신하오." 제이크가 강하게 말했다.
"자, 이젠 우리가 처한 곤경에 정신을 집중하기로 합시다. 어떻소?"
오리엘은 여전히 장관의 안전이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제이크가 몇 가지 지시를 시작했으므로 그녀는 자신의 모든 신경을 당면한 현재에 집중시키려 애써야 했다. 그에게서 명령을 들어야 하는 건 무척 싫었지만 뭔가 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게 있는지 흩어져 찾아봐야 한다는 말은 옳은 것이었다.
그녀는 차가 세워져 있던 곳 주위를 투덜대면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갑자기 제이크가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녀는 그에게로 황급히 달려갔다.
"이게 바로 내가 기적이라 부르는 거요!" 그가 환호성을 질렀다. 그녀가 서 있는 바위 위로 기어 올라오는 그의 손에 점심을 담았던 피크닉 광주리가 들려 있었다. 밑에 굴러 떨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운으로 봐선 안이 비어 있을 게 분명해요." 그녀가 우울하게 말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광주리가 구른 흔적이 역력한데 잘 싸여진 음식들은 상한 것 같진 않았다.
"오, 이런!" 제이크가 빙그레 웃었다. "다, 또 다른 게 있는지 찾아봅시다."
쓸 만한 물건을 찾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그러나 주위를 끈질기게 탐색한 끝에 그들은 몇 가지를 더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아마 폭탄이 터졌을 때 리무진에서 튕겨져 나간 것들인 것 같았다.
"어쨌든 없는 것보다는 뭐라도 있는 게 훨씬 나으니까."
제이크가 그들이 모아 온 전리품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물론 이것들이 어디에 쓰여질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소만..." 그가 웃음을 터뜨리며 아직 한 번도 입지 않은 듯 셀로판지로 포장돼 있는 이브닝드레스 셔츠를 가리키며 웃었다.
그가 입으며 되겠군! 아주 어울리겠어. 오리엘이 심술궂게 생각했다. 그들은 찢겨지지 않은 제이크의 셔츠를 두장 더 발견했고 약간 찢어지긴 했지만 타월 지로 만든 그의 가운도 그럭저럭 입을 만해 보였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곳저곳을 샅샅이 수색했음에도 그녀의 수트케이스와 그 내용물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고작 찾아낸 게 낡은 가죽가방이었다.
"내 생각엔 이게 할림의 것일 것 같소." 제이크가 자신의 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바지를 들어 보이며 짓궂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든 당신도 옷을 갈아입을 수 있게 된 셈이오."
"생각해 주니 고맙군요!" 허리 둘레가 엄청난 그 바지를 보며 그녀가 으르렁댔다. "벨트도 없이 어떻게 그 바지를 입어요?"
"제발 우는소리는 집어 쳐요!" 제이크가 못 참겠다는 듯 말했다. 그는 지금 불타 버린 차의 잔해 속에서 발견해 낸 스패너며 렌치들을 만지고 있던 참이다.
"울만도 하잖아요?" 그녀가 쓰디쓴 표정으로 받았다.
"옷 따위는 상관없어요. 하지만 내 모든 노트며 팔미라에서 찍은 필름들은 꼭 찾아야 한단 말이에요. 내 화물 보험도 그런 걸 보상해 주진 않을 거고. 안 그래요?"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며 짧게 웃었다.
"보험이라고! 사랑스런 아가씨, 그건 지금 걱정거리도 아니오. 제발 더 이상은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그가 서둘러 그녀에게 장관의 가방을 건넸다. 그리고는 남은 물건들을 모았다. "우리 머리 위에 있는 곳에 빨리 들어가는 게 좋을 거요."
오리엘이 잠시 머뭇거리며 오래된 성채를 응시했다. 성은 이 버려진 땅에서 거의 8백년을 버텨 오고 있었다. 체념하듯 한숨을 내쉬면서 그녀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남자의 뒤를 따라 그가 가는 대로 암석 위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30분후 좁고 거친 암석 사이를 지나 가파른 산을 올라가 그들은 마침내 넓고 풀이 나 있는 분지에 도착했다. 오리엘은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더는 못 가요!" 그녀가 소리쳤다. "난 더 이상 갈 수 없어요!"
"물론 당신은 할 수 있소" 그가 다리 입구에서 그녀를 불렀다.
오리엘은 성 앞에 놓여 있는 깊은 협곡을 내려다보며 몸을 떨었다. 바닥까지 거의 30m는 돼 보인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의 암석들을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눈앞이 희미해진다. 그녀가 서 있는 곳에서 성의 입구에 걸쳐 있는 협곡 위로 바위 하나가 걸려 있는데 복구 작업 때 손을 봤는지 지금은 그 바위에 벽돌이 여러 줄 쌓여 있다. 그 위에 걸쳐 있는 좁은 철교가 성의 입구로 이어지는 유일한 통로였다.
물론 모두 다 인공적으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적의 침입에 대비해 성을 건설한 사람들은 이곳에 깊은 협곡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그녀는 자기들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아차렸다.
"여긴 살라딘의 성이에요!" 그녀가 소리쳤다. 시리아로 오기 전에 그렇게도 흥미를 갖고 조사한 성이건만... 그녀는 왜 지금에서야 그걸 깨달았는지 자신을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곳이야말로 저 위대한 아랍의 영웅 살라딘도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요새였던 것이다.
"난 살라딘이란 남자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지만." 제이크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는 확실히 성을 짓기엔 최적의 장소를 찾아낸 것 같군. 상대편은 접근하기가 아주 어려웠을 거요."
"진작 알았어야 하는 건데..." 오리엘이 자신의 멍청함이 한심해서 이를 갈았다. "이 성은 처음엔 십자군들에 의해 지어졌어요. 그런데 살라딘이 성안에 첩자들을 심어 이 성을 빼앗았죠. 살라딘은 이 성을 빼앗은 후 아무도 성을 넘보지 못하게 했어요. 왜 그런지는 당신도 짐작할 수 있겠죠?" 눈앞에 펼쳐져 있는 험준한 지형을 둘러보며 그녀가 덧붙였다.
"아, 물론 나도 이 모든 게 무척 흥미 있다고 생각하오. 그렇지만 하루종일 이곳에 서 있고 싶진 않군." 제이크가 단호하게 말하며 성의 입구로 이어지는 아슬아슬한 다리를 건너갔다.
자, 이제 내 차례야. 그녀는 다시 한 번 가파른 협곡을 내려다봤다. 그녀는 자신이 제이크가 그랬던 것처럼 저 다리를 성큼성큼 건너갈 수는 없다는 걸 알았다.
"자, 어서!" 제이크가 소리쳤다. "어물거리지 말고 빨리 이리로 와요."
"난 못해요!" 공포로 온몸을 떨며 눈을 감은 채 그녀가 울부짖었다.
"미안해요...난 도저히 못해요."
"오, 맙소사!" 그가 으르렁대며 다시 다리를 건너 그녀 옆으로 되돌아왔다.
그런 후 미처 오리엘이 그의 의도를 알아채기도 전에 그녀의 몸은 번쩍 들어 안겨진 채 다리를 건너갔다. 아래에 끔찍스런 협곡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공포에 질린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무사히 땅 위에 내려졌다는 걸 깨닫고도 그녀의 입에선 신음소리가 나왔다. 두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이 낮은 암석 위에 앉자마자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제이크가 재빨리 몸을 굽혀 그녀를 자신의 팔 안으로 끌어당겼다.
"난...미...미안해요." 오리엘이 어쩔 줄 모르며 흐느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모르겠어요."
"이제 괜찮소." 그가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 "이젠 정말 안전하오. 그러니 긴장을 풀고 마음을 가라앉혀요."
오리엘도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엔 충격이 너무 컸다. 그렇게 많이 싸우고 논쟁을 벌인 남자건만 그의 단단한 가슴에 안겨 있으려니 편안했다. 이렇게 머리를 그의 넓은 가슴에 기댄 채 그의 단단한 몸에서 발산되는 따뜻함과 안락함을 느끼고 있으려니 떨림이 가라앉는다.
"내가 꼭...바보 같군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긴장을 풀어요, 스위트하트." 그가 자신의 팔 안에 안겨 있는 그녀를 부드럽게 흔들며 말했다. "당신은 드물게 보는 강인한 여성이란 걸 아오. 나도 저 협곡을 건너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소. 그 폭발을 겪은 직후에 이런 경험을 하게 돼서 이렇게 된 거요." 그가 자신의 어깨에 금발을 묻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한 사람이 일생 동안 겪는 것보다 더한 모험이었지. 당신은 그걸 불과 몇 시간 사이에 겪어 내야 했던 거요."
오리엘이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난...정말 눈물이나 흘리는 여자는 아니에요!" 그녀가 그를 확신시키려고 강하게 말했다.
"물론 나도 아오." 눈물로 반짝이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응시하며 그가 말했다.
제이크는 그저 이 가엾은 여자의 뺨에 가벼운 입맞춤을 해줄 생각이었다. 그녀는 너무나 힘든 시간을 겪었고, 누군가 위로해 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시리아에 와서 겪었던 일이 다시 한 번 되풀이됐다. 그럴 생각이 정말 없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자제력을 잃고 만 것일까?
오리엘은 오리엘대로 정신이 멍한 상태에서 자신의 얼굴로 다가오는 그의 차갑고 단단한 입술에 저항할 의지도 기력도 내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화가 나 있었다. 마음속 어디선가에서 경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온통 뒤헝클어진 그녀의 뇌가 그 신호를 제대로 해석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입술 위를 움직이는 그의 입술이 주는 달콤한 유혹 앞에서 아무 저항도 못한 채 그녀가 신음했다. 그녀의 손이 저절로 그의 목을 감았다. 마치 온몸이 그의 품속에서 녹아 내리는 것 같아 오리엘은 그의 검은 머리칼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녀의 본능적인 반응이 제이크를 도발시켰다.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더니 그녀의 가는 허리를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그의 키스가 깊어지며 오리엘의 온몸에 불꽃이 타올랐다.
제이크의 입술이 그녀의 목을 따라 내려가 미친 듯 뛰는 맥박을 찾아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의 사파이어 같은 푸른 눈을 강력하게 응시했다.
"오리엘!"
속삭이는 듯한 그의 갈라진 목소리에 그녀의 정신이 돌아왔다. 그녀는 그의 키스가 일으킨 흥분 속에서 아직 온몸을 떨고 있었다. 자신이 그의 목에 여전히 매달려 있음을 깨달은 그녀의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난...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그녀의 뺨이 타는 것 같다. 오리엘은 재빨리 그의 목을 두르고 있던 자신의 손을 내렸다.
제이크가 헛기침을 했다. "아마 충격 때문일 거요." 그가 재빨리 말했다. "충격에다 어...정신적으로 지쳐서. 아, 물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오." 그가 단호하게 덧붙였다. "당신은 오늘 힘든 시간을 보냈으니까... 그리고 나도..." 그가 마치 대답할 말을 구하려는 듯 푸른 하늘을 응시했다. "난...어...단지 당신의 상태가 걱정이 돼서..."
오, 그래요? 오리엘은 찢겨지고 더러워진 그의 셔츠에 시선을 둔 채 속으로 반문했다. 어떻게 이 난처한 상황을 벗어나야 하지? 내가 걱정이 돼서 그랬다고? 하지만 그를 탓할 수만은 없다. 오리엘은 그의 품안에서 열정적으로 반응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이 문제로 그에게 따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 봐요." 주제를 바꾸기로 마음먹은 듯 제이크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린 둘 다 아주 힘든 하루를 보냈소. 당신만 피곤하고 지친 게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요. 그러니 이젠 둘 다 식사를 하면서 쉬는 게 좋지 않겠소?"
음식이라는 말에 그녀의 위가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심한 배고픔이 느껴졌다. "흠...그래요! 난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에요." 그녀가 동의했다. 피크닉 광주리에 들어 있을 음식 생각에 침이 고였다.
"좋소." 제이크가 재빨리 말했다. "그럼 모든 걸 성안으로 옮깁시다. 그런 다음 편안하게 식사를 하도록 하지."
그의 뒤를 따라 아치형의 성문을 따라 들어가면서 오리엘은 철로 만든 격자문 아래를 자신들이 지나간다는 사실에 매혹됐다. "서둘러요!" 걸음을 멈추고 격자문 아래서 그 모양을 올려다보고 있는 오리엘에게 그가 초조하게 말했다. 격자문은 옆의 벽에 걸려 있는 체인에 연결돼 있었다.
"알았어요! 지금 가요." 그의 뒤를 따르면서 그녀가 중얼거렸다.
문을 지나자 성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크고 넓은 중앙 광장이 나왔다. 그러나 그녀는 관목과 잡풀들이 그 돌바닥을 뚫고 자라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녀와 제이크의 모든 주의가 그들 앞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건물에 집중됐다.
"대단하군! 그렇지만 어째서 성안에 또 다른 성을 지어야 했을까?" 거대한 장방형 건물에 부속돼 있는 작은 탑을 올려다보며 제이크가 중얼댔다.
"방어를 위해서죠." 오리엘이 설명했다. "어떤 성이든 그 주요 목적은 다 방어를 위해서예요. 만약 적군이 성의 입구를 들어온다 해도 또 다른 요새에 부딪히게 되는 거죠."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단단히 방어되고 있는 성을 공격하는 건 대단히 길고 피곤한 일이었어요. 만약 성안에 먹을 것이 풍부하고 병사들도 충분하다면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냥 앉아서 상대편이 지쳐 퇴각하기만 기다리면 됐던 거예요. 물론 적군이 땅을 파 침입하려 할 수도 있었지만..."
"고맙소, 박사!" 제이크의 건조하고 거친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중단시켰다. "만약 당신만 좋다면 난 이 땡볕 속에 서서 당신의 강의를 듣는 것보다는 음식을 먹으며 쉬고 싶소."
저 냉소적인 악당 같으니! 난 정말로 저 남자를 증오해! 오리엘이 이를 갈았다.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것 같다. 대체 어쩌자고 내가 저 남자에게 좀 전과 같은 반응을 보였을까? 내가 정신이 나갔던 게 틀림없어! 이 중세의 성에 대해 너무 무지한 것 같아 설명을 해줬을 뿐인데... 어쨌든 그가 이 성안에서 중세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했는지에 대해 머지않아 내게 물어 볼 때가 오겠지. 그래, 목이 말라죽을 것 같으면 도움을 구할 것이다. 난 그저 느긋하게 기다리면 되는 거야! 성안에 사람이 살고 있을 확률이 희박한 만큼 그는 어디서 마실 물을 구해야 하는지 실마리도 못 잡을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오리엘도 자기가 어린애같이 유치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알게 뭐야! 그녀는 자신이 인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고 그녀가 보기에 제이크 윈스롭 에머슨 3세는 그가 스스로를 생각하는 정도의 반만큼도 똑똑하게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5
한 시간 후 오리엘은 자신이 제이크에게 좀 더 관대해져 있음을 깨달았다. 육체적인 안락함이 정신과정에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놀랍기만 하다. 불타오르는 뜨거운 난로가에서 음식을 배불리 먹고 났더니 기분이 확실히 좋아졌던 것이다.
"음, 이건 정말 맛있군요!" 차가운 닭고기를 한 점 입속에 넣으면서 그녀가 행복한 신음소리를 냈다. "운이 따르려니 뒷마당에서 장작더미까지 발견하고!" 그녀가 난로 속에서 기운차게 불타오르는 장작을 만족한 얼굴로 응시하며 덧붙였다.
"성을 복구하던 사람들이 두고 간 것일까요"
"내 생각엔 그런 것 같소" 제이크가 동의했다. "이 난로에다 불을 지피기엔 너무 큰 것들이 많더군. 그러나 당분간은 괜찮을 거요. 복구 때 사용하고 남은 떡갈나무 토막들이 상당히 많았으니까"
오리엘이 즙많은 토마토에 손을 가져갔다. "보온병에 커피가 남아 있나요?" 그녀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에게 물었다. "글쎄…"그가 잠시 주저했다. "우린 이제 남아 있는 음식들을 아껴야만 하오. 당신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가 오리엘의 표정을 쳐다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난 아침에 일어나 커피 한 잔을 마시지 않고는 하루를 시작할 기분이 안 나니까"
제이크는 방금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자신의 무릎을 싸안았다. 저 위험한 여자는 성에 도착한 이래 계속 힘든 시간만 갖게 했었다. 그가 제안하는 것엔 사사건건 시비였고, 성 안을 정찰해 보자는 그의 고집에 그녀는 심술궂은 태도로 맞섰다. 그런 말다툼 속에서 이 거대한 석조물의 2층에 있는 벽난로를 발견하게 됐고 불을 지피게 된 것이다.
제이크는 자신이 그녀의 손가방을 열어 수표책을 꺼내 찢었을 때 그녀가 보인 광란의 반응을 기억해 내곤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불을 피우려면 반드시 종이가 필요했고 이 빌어먹을 땅에서 빈 수표책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사실 그녀를 설득해 불을 피울 나무를 운반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그녀보다 더 무겁고 키가 컸기 때문이었다. 그는 폭력을 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만약 여자가 그 대상이 돼야 한다면 그건 바로 오리엘 드 몽포르 박사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 여자가 지금 들고 있던 닭다리를 내려놓고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가능한 한 음식과 물을 아껴야 한다는 그의 제안에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못 말리는 여자를 이성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음식을 잔뜩 멱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인가 보다. 그는 제발 광주리의 음식이 너무 일찍 바닥나지 않기를 빌 뿐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자신이 공정하지 못했다는 생각도 든다. 저 불쌍한 여자에겐 가혹한 하루였을 텐데도 그녀는 놀라울 만큼 꿋꿋했다. 게다가 지금 그녀는 차가운 돌바닥 위에 의자도 없이 앉아 있다. 그녀의 긴 금빛 머리카락은 어깨 위에 헝클어진 채 늘어져 있는 상태다. 그럼에도 오리엘은 매력적으로 보였다. 아무리 제이크가 그녀는 그야말로 말썽꾸러기 그 자체라며 스스로를 타일러도 자신의 품에 안겨 있던 오리엘의 호리호리한 몸과 가슴을 누르던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았던 걸 부인할 수가 없다. 그 부드러움, 그 따뜻함, 그리고 그녀의 가는 허리와 길고 가는 허벅지가 자신의 몸에 부딪혀 왔을 때의 그 느낌….
음식바구니를 정리하던 오리엘은 그가 갑자기 일어나 급히 방을 나가 버리는 걸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오, 하느님! 그녀는 사람이건 물건이건 뭔가를 무서워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아까 그 다리를 건너야 했을 때를 제외하곤. 그러나 아까 그가 자제심을 잃고 <우는 소리 그만하고 가서 불피울 나무를 갖고 와, 당장!> 이라고 소리쳤을 때는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없이 그의 명령대로 정신없이 달려 나갔던 것이다. 옥스퍼드에 있는 그녀의 페미니스트 친구들은 저런 남성 우월주위자의 명령에 꼼짝도 못하고 따른 그녀의 행동을 두고 웃음거리로 삼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 그와 같이 있는 건 나지 그들이 아니다. 게다가 그는 돈이 넘쳐 나는 은행가일 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매력적인 남자이기도 하다. 그녀는 성 밖에서 그가 한 열정적인 키스에 대한 제이크의 얼토당토않은 설명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충격에 빠진 여자를 달래려고 키스했다니, 추행범으로 고발감되는 것은 시간문제일걸!
허둥지둥 방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오리엘은 자신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하고 열기가 온몸의 정맥을 타고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사실 아무리 생각을 안 하려 해도 그녀는 그의 키스가 일으킨 흥분과 자신의 몸을 내리누르던 그의 단단한 몸의 감촉을 좀처럼 잊을 수가 없었다.
"그게 바로 우리가 갖고 있는 최대의 문제점이오. 그런데 해결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군" 어느새 다시 들어온 제이크가 말했다.
"뭐라고요?"
"오, 맙소사! 당신은 내가 한 말을 한마디도 듣지 않았군!" 제이크가 숱 많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요, 난 우리가 당면한 최대의 문제에 관해 말하던 중이었소. 물없이 어떻게 견뎌나가겠소? 커피가 남아 있긴 하지만 일단 그걸 다 마셔 버리고 나면 그 다음이 문제요"
잠시 그를 응시하던 오리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은 게임을 할 때가 아니다. 이 급박한 상황에선 둘 다 협력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한숨을 내쉬면서 그녀가 천천히 일어섰다. "좋아요, 이제 가서 저장소를 찾는 게 좋겠군요"
"무슨 저장소 말이오?" 제이크가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물론 그들이 물을 저장하고 있던 곳이죠" 오리엘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누가 물을 저장하고 있다는 거요?" 제이크가 초조하게 물었다.
"물론 십자군이죠. 전성기에 이 성은 적어도 병사 일 천 명과 그들의 말을 수용했어요." 허리를 구부려 음식바구니를 여미면서 그녀가 차근차근 설명했다.
"사람들이 하루에 2L의 물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 사람은 당신이잖아요? 그러니 한 번 생각해 봐요. 기사들이, 그들의 말은 차치하고라도 어떻게 여기서 살아남았겠어요?" 그녀가 슬쩍 놀리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분명히 그들은 신선한 물이 나오는 것을 찾아 충분히 저장해 놓아야만 했을 거예요, 안 그래요?"
그제서야 제이크가 숨을 들이마셨다. "물론이오!" 그가 화가 난다는 듯 손가락을 딱 퉁겼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순간 오리엘의 마음속에 그 대답이 스쳤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생각했겠어!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그와 논쟁할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게다가 그들에게 불이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이 옳았던 것이다. 아직도 바깥엔 햇빛이 비치고 있었지만 돌로 만든 두꺼운 벽으로 막혀 있는 이 방은 바깥보다 한 20도 정도 온도가 차이 났다.
"오, 이런! 당신처럼 영리하고 지적인 남작도 그런 실수를 할 때가 있다니 참 안 됐군요!" 그녀가 조롱하듯 머리를 흔들며 슬픈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가 이곳을 벗어나게 돼도 당신이 얼마나 멍청한 사람인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 나 혼자만 알고 있을 게요"
"이 작은…" 그가 재빨리 방을 가로질러와 그녀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진정해요! 난 단지 농담을 했을 뿐이에요"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내가 그걸 생각하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가 그녀의 푸른 눈을 강렬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당신과 같이 있으면 곧잘 내 냉철한 정신을 잃어버리게 되거든. 이곳은 우리 둘만 있게 됐으니 더더욱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아졌군"
오리엘은 갑자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를 올려다보면서 그녀는 처음으로 그의 회색 눈에서 강렬하게 빛나고 있는 열정과 그의 입술이 섹시함을 알아챘다. 온몸을 흘러내리는 기묘한 흥분 속에서 멍해져 있던 그녀가 자신의 팔을 움켜잡고 있는 그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걸 깨닫고서야 제정신을 차렸다.
"난… 정말 농담으로 그런 거예요" 그녀가 재빨리 변명을 했다. "그리고 난… 불 피우는 것에 대해 그렇게 성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던 거였어요. 이곳은 무척 춥고 불을 피워야 한다는 당신의 주장이 옳았으니까요" 그녀는 좀 비굴하다고 느끼긴 했지만 그렇게 덧붙였다. "아니, 당신 괜찮은 거요?" 놀랐다는 듯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켜 올랐다. "몽포르 박사님이 내게 사과를 하다니! 오, 이런 내가 보기에 당신은 어디가 아픈 게 틀림없어!"
"물을 찾을 때까지는 아파선 안되죠" 짖궂게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원래 저수지는 폐허 속에서도 잘 보존돼 있다는 걸 기억해 줬으면 좋겠군요"
"그렇지만 복구작업이 이곳에서 진행된 이상 사람들이 그곳을 발견해내지 않았을까?"
"오, 그것 참 좋은 지적이군요" 그녀가 서서히 평정을 되찾으며 말했다. 이젠 자신이 더 이상 약하고 연약한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냉정을 잃지는 않겠죠?" 그녀가 놀렸다.
"자신할 수는 없군" 1층으로 내려가는 돌계단 쪽으로 걸어가면서 그가 짓궂게 웃었다. "서둘러요. 가서 당신이 말한 저장소가 있는지 찾아봅시다"
성의 본체와 입구 사이에 있는 황폐한 안마당에 서서 제이크는 본체의 양쪽에 붙어 있는 두 개의 커다란 회색 탑을 응시했다.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크군" 그가 말했다. "이 벽돌뒤에 뭐가 있을지 궁금해지는군"
"내 생각엔 깍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을 것 같군요" 오리엘이 두 탑 중 하나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가며 말했다. "이것 좀 봐요! 여기서 보니 굉장하군요!" 그녀가 신이 나서 소리쳤다. "너무 높아 무서워서 그러는 건 아니오?" 계단을 재빨리 뛰어올라와 성벽에 서 있는 그녀에게 다가오면서 그가 물었다. "아뇨, 난 높이 따위는 무섭지 않아요" 그녀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것 참 모를 일이군. 그 다리 위에서 공포에 질렸던 사람이 난 아니니까"
그가 성 앞에 있는 협곡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조심해요!" 그녀가 애원했다. "이 돌들은 무너지기 쉽단 말이에요"
"알았소, 걱정 말아요" 그가 다른 탑으로 이어지는 성벽쪽으로 돌아서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성벽의 바닥에 네모난 큰 구멍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리엘이 그의 시선을 쫓았다. "저 구멍들은 성을 침입하려는 적들에게 끓는 기름을 쏟아 붓기 위해 만든 거예요"
얼굴을 찌푸리는 그를 보면서 그녀가 웃으며 설명했다.
"확실히 그들은 피에 굶주렸던 것 같군. 그런데 당신은 그 시대의 역사에 대해 어떻게 그리 잘 알지?" 제이크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그녀가 그에게 짓궂은 미소를 던졌다.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난 굉장히 곤란해졌을 거예요. 어쨌든 중세역사를 가르치는 선생이라면 뭔가 그 주제에 대해 아는 게 있어야 하니까"
그가 오리엘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래서 시리아에 온 거요?"
"아뇨, 전적으로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난 공식적으로 초청을 받아 이 나라에 왔어요. 그건 우리 아버지가…, 우리 아버진 유명한 고고학자였죠. 그런데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곳에 온 거예요. 그렇지만 최근에 막 중세역사에 관한 책을 써오던 걸 끝마쳤기 때문에 이 성에 묵게 된 걸 기뻐해야 할 것 같군요"
"농담하는 거요!"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난 이곳을 벗어나는 걸 잠시도 기다릴 수가 없소. 게다가…" 그가 안마당으로 이어지는 계단 쪽으로 걸어가며 덧붙였다. "중세의 십자군이니 기사들이니 사라센이니 하는 것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소. 대체 시리아에서 그들이 무엇을 한 거요?"
"음, 글쎄요…, 알다시피…" 말을 시작하다 말고 오리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 싫어요. 다시는 그 함정에 빠지지 않겠어요. 당신은 또 내가 당신을 가르치려 한다고 공격할 거예요"
그가 빙그레 웃었다. "아니, 이번엔 정말로 당신의 설명을 듣고 싶소"
"어머, 그래요? 그 말을 들으니 내 심장이 정신없이 뛰는군요!" 오리엘이 방긋이 웃으며 그의 뒤를 따라 안마당으로 나왔다. 그런 후 본체의 아치형 문을 지나 천장이 높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십자군이란 말은 원래 십자가를 의미하는 라틴 말에서 유래했어요." 그녀가 돌기둥에 새겨져 있는 커다란 십자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단어를 당시 기독교인들이었던 유럽의 기사들이 사용한 거죠. 또 사라센 인들은 이슬람교를 믿던 사람들을 말해요. 사라센들에게서 성스러운 도시 예루살렘을 되찾자는 것이 그들의 의도였어요."
"좋아요, 그럼 그건 명확해졌소.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수백 킬로미터는 떨어진 이곳에 왜 이렇게 거대한 성을 지은 거요?"
"그건 이 길고 들쑥날쑥한 해안이 유럽과 중동지역을 잇는 아주 중요한 무역의 통로였기 때문이죠." 오리엘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십자군의 지휘자들은 이 지역에 많은 병사와 무기들을 투입해 성들을 짓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기독교를 지키기 위한 성전이란 이름으로 이 지역을 빼앗고, 그 다음엔 그걸 지키려 했던 거죠"
"어쩐지 오싹해지는군!" 그가 먼지 많은 마루를 지나 어두침침한 방의 저편 구석으로 다가가며 중얼댔다. "이거야 원, 영원히 이어질 것 같군!" 커다란 방들을 차례차례 지나며 그가 덧붙였다.
마침내 그들이 돔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방에 이르자 오리엘은 그에게 이곳이 예전에 말을 머무르게 하던 곳임을 알려줬다.
"보세요. 벽을 따라 나 있는 오목한 곳이 보이죠? 저기에 나무로 만든 여물통이 놓여 있을 거예요. 그리고 여기에…" 그녀는 무거운 기둥들로 말뚝을 박았던 듯싶은 구멍들을 가리켰다. "저것들이 보이죠? 여기에 말들은 묶어뒀었고요"
"환상적이군" 제이크가 몸을 굽혀 자세히 안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그런데 나도 당신을 다그칠 생각은 없소만 …" 그가 몸을 쭉 펴고 돌아보며 덧붙였다. "우린 아직 물을 찾아내지 못했소"
"기사들은 말이 없인 움직이지 못했을 테니 아마 이 근처 어딘가에 물을 저장했던 곳이 있을 거예요"
오리엘의 목소리가 거대한 성당 크기만 한 방의 천장 높이 메아리쳤다.
제이크는 희미한 빛 속에서 주위를 둘러봤다. 도대체 이 여자가 어디로 간 거지? 조금 전에만 해도 이곳에 있었는데. 그가 막 입을 열어 그녀를 소리쳐 부르려는데 승리감으로 가득 찬 환호성이 들려왔다. 그 소리를 따라 그가 좁은 통로를 달려 내려갔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자, 이 정도면 충분하겠죠?" 오리엘은 놀란 표정을 짓는 그에게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귓가에 울리는 오리엘의 웃음소리 속에서 제이크가 놀란 눈으로 앞을 응시했다. 이건 물을 저장해 놓는 곳이라기보다는 터키탕이었던 곳인 것 같군.
벽들은 푸른 모자이크 타일로 덮여 있고 저쪽 벽에 난 구멍을 통해 풍부한 물줄기가 흘러내려 작은 수영장에 이르고 있었다. 그리고 물줄기는 거기서부터는 느리게 모자이크 벽을 따라 흘러 앞의 것보다 훨씬 큰 웅덩이로 폭포수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아름답지 않아요?" 오리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수영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는군요"
"좋소, 하지만 너무 속단하진 맙시다" 제이크가 그녀에게 경고했다. "우린 아직 이 물이 마실 수 있는 물인지 모르잖소?"
"오, 푸…. 그걸 누가 가르쳐 주겠어요?" 오리엘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난 이 물이 방금 내린 눈처럼 순수하지 못하다고 해서 목이 말라 죽어가면서도 가만히 앉아 있지는 않겠어요. 사실…" 그녀가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어쩌면 이 물은 저 산꼭대기에 쌓여 있는 눈이 녹아 만들어진 것인지도 몰라요. 눈녹은 물이 강이 돼 흘러내리는 걸 옛날 십자군 전사들이 이리로 끌어들였겠죠. 이 성에 오기 전에 물 흐르는 계곡을 건넜던 것이 기억나요?"
제이크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 말이 맞을 것이다. 어찌됐든 이 물을 마시지 않고는 길어야 하루나 이틀밖에는 살 수가 없을 테니.
"여긴 엄청나게 춥군" 이곳의 기온은 다른 방들보다 낮아서 그가 몸을 떨며 말했다. "참 길고 힘든 하루였소. 우리 둘 다 무척 피곤한 상태니 돌아가서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게 어떻겠소? 이 성의 나머지 부분을 탐험하는 건 내일로 미루고"
그들이 난로가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쯤엔 이미 바깥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런 산악지대에선 해가 얼마나 빨리 지는지 잊고 있었군요" 그녀가 아치형의 넓은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며 말했다.
"흠…,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군" 제이크가 너덜너덜해진 자신의 수트케이스 안을 조사하면서 말했다. "내 라이터에 들어 있는 가스를 아껴야겠소. 그러니 오늘밤 난로불이 꺼지면 내일까진 다시 불을 붙일 수가 없소"
"당신이 라이터를 갖고 있다니 운이 굉장히 좋군요.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한 것 같은데" 여전히 창밖을 내다보면서 그녀가 중얼거렸다. "때때로 저녁에 시거를 피우는 정도지. 그런데 내가 말하려고 하던 요점은 우리에겐 인공적으로 불을 지필 도구가 없다는 거요"
마침내 그녀가 뒤돌아서서 자신을 응시하는 걸 보며 그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우린 해가 질 때 침대에 들어 해가 뜨면 일어나야 할 것 같군. 옛날 사람들이 생활했던 방식대로 말이오. 그 외엔 방법이 없소"
"침대라뇨?" 그녀가 방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물론 이 딱딱한 돌바닥을 말하는 거요. 안됐지만…"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가능한 한 옷을 많이 껴입는 게 좋을 거요. 물론 난로에 나무를 많이 넣어 놓겠지만 새벽까진 타오르진 못할 테니까. 이곳은 새벽에 굉장히 추울 것 같군"
얼마 후 오리엘은 안절부절못하며 창가에 서 있었다. 희미하게나마 방안을 밝히고 있는 유일한 빛인 난로불에 의지해 창밖의 어둠을 흘끗 보면서 그녀는 제이크가 차가운 돌바닥 위에 최대한 두텁게 옷들을 까느라 정신없는 걸 지켜봤다.
옷을 다 깐 제이크가 그녀를 쳐다봤다. "자, 이리로 와요. 자리를 잡고 잡시다"
"자리를 잡아…" 옷더미 위에 막 누운 그의 지친 듯한 모습을 신경질적으로 응시하며 그녀가 겨우 입을 열어 더듬더듬 말했다.
제이크가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그렇게 바보같이 굴지 말아요. 난 지금 몹시 춥고 피곤하오. 그리고 제발 날 믿어요. 당신을 건드릴 생각은 꿈에도 없소! 게다가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녀가 머뭇거리며 자신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걸 보며 그가 덧붙였다. "내겐 당신이 입고 있는 그 두터운 옷들을 벗겨내고 욕망을 강요할 만한 기력이 전혀 남아 있지 않소!"
오리엘은 엉거주춤 서서 자신이 입고 있는 푸른 바지를 내려다보았다. 간신히 허리춤을 잡아매긴 했지만 발목을 덮지는 못하고 있다.
"도대체 할림이 어떻게 이런 옷을 입을 생각을 한 건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꼭 어릿광대가 된 것 같아요" 그녀가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로 신음했다.
"아니, 그렇지 않소. 사실 당신은 그런 옷을 입고 있어도 아주 매력적으로 보이오." 그는 더 이상 목소리도 높이지 못하고 지친 듯이 중얼거렸다. "자, 이젠 투덜거리는 건 그만두고 좀 쉽시다."
잠시 동안 머뭇거리다가 오리엘이 마침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역시 춥고 피곤했다. 사실 제이크가 잠자는 것말고 자신에게 무슨 딴 마음을 먹고 있으리라고 의심하는 건 어린애 같은 생각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우스꽝스럽게 옷을 둘둘 감고 있으니 영락없이 거대한 곰 인형 같지 않은가?
마침내 그녀는 마음을 굳혔다. 엉성한 매트리스 위로 몸을 굽혀 제이크의 한 옆에 누으면서 그녀는 가능한 한 그의 몸에서 떨어지려 했다. 이 매트리스는 생각보다 더 딱딱하군!
"오, 스위트하트, 제발 바보같이 굴지 말아요!" 그가 부드럽게 한숨을 내쉬더니 그녀를 자신의 품안으로 세게 끌어당겼다. "자, 잡시다" 그가 자신의 넓은 어깨에 오리엘의 머리를 기대게 하면서 말했다. "기억해요. 나같이 완고한 미국인 은행가들은 지폐뭉치나 동전에 새겨져 있는 사람들한테만 관심이 있소"
그의 단단하고 강인한 품속에서 긴장을 풀면서 오리엘이 만족스러운 한숨을 조그맣게 내쉬었다. 놀랍게도 그렇게 적대적으로 부딪혀온 남자인데도 그녀는 그의 품안에서 편안함과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오래지 않아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제이크는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머리 위에 솟아 있는 높은 천장의 어둠을 응시해야 했다. 자신의 몸을 누르고 있는 그녀의 따스하고 부드러운 몸을 무시하려고 애쓰다 보니 얕은 잠에 빠져드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오리엘이 눈을 떠보니 창문을 통해 엷은 새벽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직 어두컴컴한 실내를 둘러보며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깨닫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갑자기 온몸이 욱신거리고 자신을 딱딱한 돌바닥 위로 내리누르는 무게가 느껴졌다. 머리를 약간 들고 자신의 가슴속에 얼굴을 묻고 있는 검은 머리의 남자를 본 순간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무슨….
그녀는 얼른 자신과 돌바닥 사이에 깔린 얇은 옷조각들을 둘러보고 이어 시선을 이젠 재만 남아 있는 벽난로로 돌렸다. 그제야 모든 게 기억됐다. 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몸에서 제이크의 무거운 몸을 치우려 애썼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가 불만에 찬 신음소리를 내더니 그녀의 몸에 더 가까이 다가오며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움켜잡았던 것이다. 그러더니 뭐라고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자신의 부드럽고 풍만한 가슴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 그의 손가락이 주는 강렬한 느낌 때문에 숨을 헐떡이며 오리엘이 벗어나려 애썼다.
오, 맙소사! 지금 내가 뭘 하고 있지? 그녀가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쳐낸다면 가엾게도 그는 이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자야 할 것이다. 게다가 그는 등에 상처까지 있는 상태인데….
오리엘은 정말 피곤했고 지쳐서 움직일 기력조차 없었다. 더구나 지금 제이크는 자신을 여자로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뭐랄까, 따뜻하고 부드러운 베개쯤으로 여기고 있을게 틀림없다. 그 점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우리에겐 지금 이불이 필요해! 또다시 졸음이 오는 걸 느끼며 그녀가 변명하듯 자신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다시 깊은 잠 속으로 천천히 빠져 들어갔다.
오리엘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창을 통해 밝은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팔을 들어 손목시계를 보니 10시였다. 맙소사! 어쩌면 이처럼 딱딱한 돌바닥에서 이렇게 오래 잘 수가 있었을까? 쑤시는 몸을 쭉 펴며 그녀가 반문했다.
오리엘은 이마에 흩어져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텅 빈 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제이크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간밤에 그 남자와 같이 잠을 잤다는 증거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의 딱딱한 몸이 주던 느낌과 자신의 가슴을 움켜잡은 손을 생각하자 오리엘의 뺨이 달아올랐다. 오, 제발 정신 차려! 그녀는 자신을 거칠게 타일렀다. 아무리 남자와 자본 적이 한 번도 없기로서니 그렇게 어쩔 줄 모르다니 스스로 생각해 봐도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그녀와 제이크가 이 거대한 성에 갖히게 된 게 그녀의 잘못이 아니듯 그녀에게 풍부한 성적경험이 없다는 것도 그녀의 잘못은 아닌 것이다.
좋게 말하면 박애주의자이고 일반적으로 봤을 땐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림인 그녀의 이모 해리어트는 오리엘의 애정생활에 대해선 굉장히 억압적이었다. 언젠가 그녀의 조카딸이 문가에서 웬 사내애와 작별의 키스를 나누고 있는 걸 본 뒤 그녀는 자신의 입장을 단호히 선언했다. 그리고 오리엘은 이모를 아주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을 키워 준 이모에게 무거운 빚을 지고 사는 것 같아서 25살이나 되는 지금까지 한 가지만 빼곤 이렇다 할 연애사건하나 없이 살아오게 됐던 것이다. 물론 거기엔 그녀의 직업도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먼지 나는 도서관에서 오래된 문서들을 들여다보는 데 쓰면서 그것이 주는 보상에 만족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그녀가 더블린에서 연구조교로 온 크리스 피츠제럴드에게 그렇게 정신없이 빠져 버렸던 것도 그의 학구적인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여름에 시작됐던 그들이 사랑은 얼마 가지 못했다. 데이트라고 해봐야 옥스퍼드 주위의 목장을 끝없이 걸어 다니는 것이었지만, 한겨울을 맞으면서 끝났다. 그녀나 크리스에겐 공통의 화제가 없었으며 당시 원자물리학 연구에 파묻혀 있던 크리스에겐 공부가 더 중요하게 생각됐던 것이다.
마치 지금 제이크와 내가 처한 상황과 똑같았었지. 그녀가 우울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착 가라앉는 거지?
"아, 당신 깨어났군" 제이크가 장작을 한아름 안은 채 방으로 들어왔다.
"당신이 어디로 가버렸을까 궁금해하던 참이에요" 허리를 굽히고 벽난로 안에 나무를 쌓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그녀가 말했다.
"저장소에서 수영을 했소" 그가 쌓고 남은 장작더미를 난로 옆에다 내려놓은 뒤돌아서서 커피가 들어 있는 진공병을 집어들었다. "몸이 깨끗해지니 좋긴 한데 물이 무척 차더군!" 제이크는 머리를 돌려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 얼음물 속에서 수영을 하고 났더니 그나마 그 폭발에 날아가지 않고 남아 준 이 가운이 얼마나 고마운지…. 면도까지 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가 손을 들어 꺼칠한 자신의 턱을 문지르며 덧붙였다.
짧고 어두운 붉은 색 가운을 입고 있는 그의 모습을 응시하면서 오리엘은 갑자기 가슴이 아려옴을 느꼈다.
글쎄, 내가 왜 이럴까? 그건 아마 가운 사이로 보이는 그의 긴 다리와 검고 곱슬곱슬한 털이 제멋대로 헝클어져 있는 그의 넓은 가슴 때문일 것이다. 햇볕에 구릿빛으로 그은 그의 육체 앞에서 오리엘은 숨이 막혔다. 그가 저 가운 말고는 안에 아무 것도 입은 게 없을 거라는 사실도 그녀를 진정시키는 데 별다른 도움이 못됐다. 심장이 미친 듯 고동치는 것이 자신도 왜 이러는지 놀랄 지경이다. "아래층 방들 중 하나에서 발견했소." 그가 낡고 조그마한 소스팬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마 성을 복구하러 왔던 사람들 중의 한 명이 돌아가면서 버리고 간 것 같소. 내가 보기엔 여기 커피를 담아 끓이면 좋을 것 같기에…"
오리엘이 코를 찡그리는 모습을 보고 그가 재빨리 말했다.
"저장소로 갖고 가 깨끗이 씻어왔소"
"한잔의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팬이 어떤 상태든 상관없어요!" 그녀는 제이크의 표정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 생각엔 우린 곧 구출될 수 있을 것 같군요. 왜냐하면 커피도 없이 내일 아침을 맞을 생각을 하니 견딜 수가 없거든요"
"그건 내 생각과 일치하는군!" 그가 얼른 동감을 표시했다.
"우리가 구조되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오리엘이 불 위에 소스팬을 내려놓는 그에게 물었다. 제이크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그건 내 비서들과 장관의 경호원들이 얼마나 빨리 상황을 알아차리는가에 달려있지. 그렇지만 이곳에 그리 오래 갇혀 있지는 않을 거라는 건 확신하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왜, 다마스쿠스에서 누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거요?"
"아뇨, 난 시리아에 혼자 왔어요." 오리엘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영국에 있는 당신의 가족은 어떻소?"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하나뿐인 이모는 지금 아프리카에 계세요."
"아프리카? 이거야말로 놀랄 일이군. 대체 거기서 뭘하는 거요?"
오리엘은 잠시 대답하는 걸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아서 천천히 자기중심적이었던 그녀의 아버지와 똑같이 고집 센 해리어트 턴불 이모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다시는 당신에게 <미쳤다>고 말하지 않겠소!" 오리엘의 설명을 다 듣고 난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 말을 듣고 나니 당신이 당신의 그 괴팍한 이모를 따라잡으려면 엄청난 시간이 필요할 것같이 들리는군. 무례하게 굴 생각은 없소만 정치적 망명객들과 버림받은 아내와 아이들로 가득 찬 집에서 어떻게 견뎌낼 수가 있었소? 이건 지옥이 따로 없겠는걸!"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웃느라 그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그런 데서 어떻게 연구를 했지?"
"물론 어려웠죠!" 그녀가 방긋 웃었다. "하지만 해리어트 이모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졌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죠. 이모는 국제사면위원회를 위해 일했어요. 버림받은 아내들과 아이들을 도와주는 게 그녀의 일이었죠. 사실 그 여자들이 남편들에게서 겪은 폭력은 두 눈뜨고는 못 볼 정도로 참혹했어요" 그녀가 차분히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정말로 조용히 있고 싶어지면 대학에 있는 내 연구실로 피하면 된 걸요"
"그건 그렇고, 당신이 돌아오길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잘생긴 남자친구는 없소?" 그가 불에서 팬을 끄집어내며 가볍게 물었다.
"아뇨, 특별한 사람은 없어요" 바구니에서 꺼낸 플라스틱 컵에다 뜨거운 커피를 따르고 있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녀가 중얼거렸다.
갑자기 오리엘은 엄청나게 잘생기고 활력에 가득 차 있는 남자친구가 있어서 지금 이 순간 제이크 앞에다 의기양양하게 들이밀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지난 수개월동안 그녀가 데이트했던 상대들인 두 명의 역사학도와 한 명의 철학조교는 재미있는 사람들이긴 했지만 불행히도 여자들이 만나길 소원하는 그런 종류의 남자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당신은 어때요?" 그에게서 커피 잔을 건네받으며 그녀가 물었다. "당신이 은행가라는 것과 국제통화기금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 당신에 대해 내가 아는 전부인데" 그리고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며 메리 루가 그의 전처에 대해 말했던 걸 기억해냈다. "난, 어… 당신이 결혼했었다고 들었는데"
"그렇소. 확실히 그랬었지" 제이크가 커피 잔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엄청난 실수였었소"
"오, 미안해요. 말을 꺼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오리엘이 미안해하며 말끝을 흐렸다.
"괜찮소. 물론 그 당시엔 쓰라렸지만, 사실 엄밀히 말해 그 결혼이 파국을 맞은 건 순전히 내 잘못이었으니까"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난 그때,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소위 일에 미친 사람이었소. 그리고 우리는 둘 다 어렸었소. 바버라는 사교활동에만 관심이 있었고 아이를 가질 생각이 전혀 없었지. 그래서 그녀가 그 아르헨티나의 폴로 선수와 함께 달아났을 때…"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다시 그녀를 붙잡기 위해 많이 노력했노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
"미안해요"
"그럴 필요는 없소. 그건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고 나도 좋은 공부를 한 셈이니까. 요즘 들어선 통계수치를 따지고 기업의 재정기록을 점검하는 것 이상의 뭔가가 내 인생에도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지만, 그렇지만 지금은…" 그가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이런 생존훈련이 더욱 유용할 것 같군" 제이크가 일어나 창가로 천천히 걸어갔다. 잠시동안 그는 말없이 바깥 풍경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오리엘에게도 돌렸다. "생존훈련이라고 했던 게 전적으로 농담만은 아니오. 우리의 상황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가 않기 때문이지"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광주리에 든 음식은 이틀 이상 가지 못할 거요. 그리고 당신을 놀라게 할 생각은 없지만 장관을 납치한 자들이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웠던 게 어쩐지 마음에 자꾸 걸리는군. 어쨌든 우린 그들의 최후를 보지 못했잖소?"
6
한 시간 후 안마당에 있는 커다란 돌 위에 앉아 있던 제이크가 다시 한 번 자신의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대체 이 여자가 어딜 간 거지? 물론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갈 곳도, 볼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년 동안 힘든 일과 함께 정확하게 시간을 지키며 살아온 그로선 그냥 이렇게 하는 일 없이 쉬기만 하는 게 좀이 쑤셨다.
여자들이란 참! 모두 하나같이 다 똑같군! 다시 시계를 내려다보며 그가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가 아무리 자신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설명해 줘도 그녀는 관심 없다는 투였다. 사실 리무진이 주도로를 벗어나 이 성으로 이어지는 예비도로로 접어든 것부터가 우연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걸 이해시키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물론 그건 의도적이었소" 그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정말로 무장한 테러리스트들이 우연히 그 시간에 여기 나타났다고 믿는 거요? 그건 우연이라고 할 수가 없소. 당신이 사태를 제대로 받아들여야만 우리 둘 다에게 도움이 된단 말이오."
"오, 좋아요. 인정하죠." 오리엘이 인정했다. "그렇지만 난 여전히 왜 당신이 저 무시무시한 라일라와 한패거리인 악당들이 이리로 다시 올 거라고 믿는지 알 수가 없군요!"
물론 제이크도 그들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 그러기를 더 바랐다. 그러나 그는 라일라가 거대한 조직의 일원이고, 그들의 동료들이 라일라가 성에 버려 두고 온 남자가 부유한 미국의 은행가라는 걸 알게 되면 다시 돌아와 그를 잡고 싶어할 거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끔찍한 가능성도 오리엘의 낙관주의를 어찌할 순 없었다.
"상황이 그렇게 전개됐을 때 고민해도 돼요!" 저 사람 미치게 만드는 여자는 그의 말을 가볍게 받아넘기더니 조그만 금속 같은 걸 집어 들었다. "음식이 부족하면 내 립스틱을 먹으면 되죠. 깜박 잊고 당신한테 얘기하지 못했는데, 처음 저 리무진을 내리면서 난 내 핸드백을 갖고 왔어요. 왜 여자와 핸드백은 결코 떨어질 수가 없다고 하잖아요?"
"핸드백이라니, 지금 당신 지갑을 의미하는 거요?" 제이크는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미국과 영국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줄 아는데요. 진짜 그런지 의심스러워지는군요." 마룻바닥에서 핸드백 안에 든 것을 쏟아부으며 그녀가 화난다는 어조로 말했다.
"부엌의 싱크대를 제외하곤 다 가져온 것 같군요. 비록 이것들이 어디에 쓰여질 지 자신할 순 없지만요."
여자의 손지갑 속에 든 것들이 그 여자의 마음을 나타낸다는 말이 맞다면 오리엘은 심리학자를 찾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제이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위며 바느질도구, 안전 핀 등은 도움이 될 것도 같다. 그러나 문명세계에서나 쓸 수 있는 열쇠꾸러미며 휴대용 휴지팩, 크레디트 카드가 들이 있는 지갑들은 별로 쓸모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내 손 안에 들어 있는 게 뭔지 짐작도 못할걸요!" 그녀가 다시 큰 가죽가방에 물건들을 쓸어 담으면서 명랑하게 말했다. 그리곤 신이 나서 씻고 옷을 갈아입겠노라고 선언했다.
다시 시계를 내려다보면서 제이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여자는 정말로 모순덩어리 그 자체다. 어제 그는 그녀가 하도 귀찮게 불평을 해대서 하마터면 발작을 일으켜 그녀의 목을 누를 뻔했다. 오늘은 어제보다 상황이 더욱 나쁘게 전개되고 있는데 저 철모르는 여자는 뭐가 좋은지 아주 희희낙락이지 않은가? 그렇게 불편한 밤을 보내고 난 뒤인데도….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꼭 안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제이크는 얼굴이 상기되는 걸 느꼈다. 고맙게도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둘이 얼마나 가깝게 붙어 자고 있었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전처며, 오랫동안 사귀어온 여자친구들, 그리고 그의 부모님이 그 앞에 강제로 들이밀고 있는 차가운 마스시아웰 등 그 누구에게서도 지금 그가 오리엘에게서 느끼고 있는 것 같은 감정의 혼란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오늘 아침 마루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장관의 수트케이스에서 꺼낸 헐렁한 넝마조각들을 걸친 채 빗질도, 화장도 하지 않은 맨 얼굴의 그녀를 보면서 그는 그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아름답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느님 맙소사! 정신 차려, 에머슨! 그는 자신을 거칠게 타일렀다. 저 여자는 문제 그 자체야! 다마스쿠스의 수영장에서 거의 익사할 뻔하게 만든 건 접어두고서라도 팔미라에서 구덩이에 밀어 넣었을 때 그나마 뼈가 부러지지 않은 건 기적이었지. 기억 안 나?
그러나 그가 기억할 수 있는 건 자신의 옆으로 떨어진 그녀의 부드러운 몸이 주던 그 따스한 감촉뿐이었다. 바로 어젯밤 자기 옆에 그렇게 가까이 누워 있던 그 여인의 벨벳같이 부드럽고 달콤한 촉감….
"너무 오래 걸려서 미안해요" 오리엘이 안마당을 뛰어오며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에 제이크는 돌아보았다. "세상에!" 그는 천천히 일어서며 부르짖었다.
"그래, 어때요…" 그녀가 수줍게 웃었다. "내가 입을 만한 게 없어서…. 그렇지만 저 끔찍한 장관의 바지를 다시 입고 싶진 않았어요. 그래서 가방에서 발견한 가위로…"
그녀가 원래는 밝은 파란색의 남자바지였던, 그러나 지금은 허벅지가 드러나는 초미니 반바지가 된 바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진 않겠죠? 어때요?"
"심하냐고?" 그는 쉰 목소리를 냈다. "오, 아니오. 내가 보기엔… 좋아 보이는군"
"그래요? 그럼 됐어요"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이제 어제 우리가 둘러보지 못한 성의 나머지 부분을 탐험해 보기로 해요. 좋죠?"
"아, 물론이오…" 그는 성문 근처에 있는 옛 문지기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뒤를 천천히 뒤따르면서 중얼거렸다. 만약 우리가 빨리 구조되지 못하면 아마 난 고혈압으로 쓰러지고 말 거야. 자신의 눈앞에 드러나 있는 오리엘의 길고 늘씬한 다리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얇은 블라우스 안에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다는 건 자명했다. 블라우스는 지금 그녀의 허리에 매듭져 있다. 게다가 저 짧은 반바지라니! 잠시 동안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면서 제이크는 눈앞에 걸어가는 오리엘의 맨살이 일으킨 욕망이 온몸을 채우는 걸 참느라 안간힘을 썼다.
"이것 봐요! 이건 우리가 여기 왔을 땐 못 보던 건데…" 오리엘이 성문 입구 어디선가 소리를 쳤다.
그녀의 곁으로 달려간 제이크는 정말로 어제는 그냥 지나쳤던 문이 벽 쪽으로 있는 걸 발견했다. 분명히 새로 설치한 것 같은 그 떡갈나무로 만든 문 위에 아랍 글씨로 뭔가 쓰여진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뭐라고 씌어 있는 거지?" 그가 표지판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뮤제>라고 씌어 있군요. 프랑스 말로 박물관이란 뜻이죠" 오리엘이 설명했다.
"독립 후에도 시리아에선 프랑스어가 널리 쓰여 왔어요. 요즘도 다마스쿠스의 거리 안내판이 프랑스어와 아랍어로 적혀 있더군요. 그리고 물론… 음 미안해요"
그녀가 제이크의 표정을 보며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이런, 내가 또 할머니에게 달걀 삶는 법을 가르치려 했네요."
"다시 말하면 당신이 날 또 가르치려 했다는 뜻이겠지? 그렇소, 그 말이 맞아." 그가 심술궂게 말했다. "어쨌든 저기 표지판에 적힌 글자가 프랑스 어든 힌두스탄어든 그건 중요하지 않소. 우리가 알아야 하는 건 이 안에 무엇이 있느냐는 거니까"
그가 잠긴 문을 가리켰다. "그런데 들어갈 방법이 없군."
오리엘이 문을 노려보았다. 이거야말로 미칠 노릇이군! 이 성을 복구하던 사람들이 여기 문을 만들고 잠가 버린 건 분명히 안에 뭔가 훔쳐갈 만한 게 있다는 얘기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잠긴 문에 오리엘 몽포르 박사가 물러날 수는 없다.
"갑시다. 더 이상 여기를 어슬렁거릴 필요가 없소." 제이크가 분하다는 듯 말했다.
갑자기 그녀의 머릿속으로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움직이지 말고 있어요! 곧 돌아올게요!" 오리엘이 재빨리 뒤돌아 안마당 쪽으로 뛰어가며 소리쳤다.
그리고 그녀의 표현대로 오리엘은 정말로 금방 돌아와 손에 들고 온 가죽지갑을 눈앞에서 빙빙 돌렸다.
"핸드백을 들고 오길 정말 잘했다니까" 지갑에서 크레디트카드를 꺼내며 그녀가 숨찬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운이 따라 줘야 할 텐데…. 언젠가 도둑들과 탐정들이 이런 걸로 문을 열곤 한다는 기사를 읽었거든요. 이제 나도 할 수 있는지 시험할 때가 온 거예요. 당신은 이런 걸 해본 적이 있어요?"
"하느님 맙소사! 오… " 그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다른 건 접어두고라도 지금 당신이 하려는 짓은 전적으로 불법이오."
"오, 제발 답답하게 굴지 말아요! 지금 내가 하려는 건 우리의 목숨을 살릴 만한 게 없나 알아보려는 것뿐이에요. 당신도 저 끔찍한 라일라가 다시 이곳에 나타날 거라고 했잖아요?" 오리엘이 심술궂게 말했다.
"오, 그렇소?" 제이크가 코웃음을 쳤다.
어떻게 감히 내게 <답답하다>는 소리를 하는 거지!
"당신은 대체 저 안에 뭐가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거요? 소련제 장청? 아니면 수류탄 한 박스?"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의 문제점은요, 제이크. 이 20세기라는 시간대에 생각이 너무 고착돼 있다는 거예요." 오리엘이 문을 열려고 애쓰며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 우리를 보호할 만한 아무런 장비도 없이 이 오래된 성에 갇혀 있어요. 그러니 내 생각엔 우리가 이 성을 지은 옛날 십자군 기사들이 성을 방어하던 때처럼 생각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것 같군요."
거친 벽에 등을 기댄 채 망할 놈의 문을 열려고 안간힘을 쓰는 오리엘의 모습을 지켜보는 걸 즐기면서 그가 머리를 흔들었다.
저 여자는 정말 완전히 돌았어! 설사 문을 열고 저 안에서 녹슨 칼을 몇 자루 발견한다고 해도 대체 그것으로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마지막으로 총놀이를 한 게 언제였지? 아마 8살이나 9살 때였을 거다. 저 여자는 정말로 플라스틱 카드로 저 문을 열 수 있다고 믿는 걸까?
"됐어요!" 한동안 끙끙거리던 오리엘이 마침내 승리에 찬 환호성을 지르며 무거운 문을 밀어젖혔다. 그녀가 돌아서며 환하게 웃었다. "자, 봐요, 당신은 내가 못할 거라고 생각했죠?"
제이크의 입술이 씁쓸하게 비틀렸다. "당신같이 특별한 여자와 같이 있는데 내가 더 이상 놀랄 일이 있겠소?"
"당신은 내가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어요. 안 그래요?" 그녀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어두운 방안으로 사라졌다.
"좋아. 자, 어디에 탱크며 장총들이 있지?" 어슬렁어슬렁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가 옆에 서면서 그가 냉소적으로 물었다.
불쌍한 여자 같으니. 이건 그녀가 찾아내려 했던 게 아닐 거야. 그의 시선이 녹슨 석유통들과 삼베자루 더미에 머물렀다. 그렇지만 오리엘은 전혀 실망한 표정이 아니다. 방 저쪽 끝에 쪼그리고 앉아 잡동사니들을 뒤적거리면서 즐겁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것 봐요! 어때요!" 그녀가 최근에 만들어진 듯한 도끼를 들어 보이며 소리쳤다.
"자, 이젠 이걸로 장작을 팰 수 있어요. 그리고 이것으로도 뭘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녀가 벽 쪽에 쌓여 있는 낡은 고무 타이어더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물론 나도 그 도끼는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나머지 것들은…?" 제이크는 그녀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어서 어깨를 으쓱했다.
"오, 제발 그렇게 비관적으로만 보지 말아요.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얼마든지 있어요. 사실 우리에게 시간만 충분하다면 여기 있는 것들로 석궁을 만들 수도 있어요! 굉장하지 않아요?" 그녀는 바닥에 널려 있는 녹슨 철 조각들과 철사 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분명히 성을 복구할 때 쓰여진 걸 거예요. 그러니 우리도…" 그녀가 말을 멈추고 그에게 희망에 찬 시선을 던졌다. "당신, 목공일에 능숙해요?"
"아니, 그렇지 않소" 그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게다가 난 절대로 로빈 훗이 아니오"
오리엘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로빈 훗…. 그가 만약 실제인물이었다면 오늘날의 양궁과 같은 긴 활을 사용했을 거예요. 내가 말하고 있는 건 그게 아니라 석궁이에요. 양궁과는 다른 전쟁용 무기죠. 석궁에서는 이런 철 조각을 화살촉으로 써요" 그녀는 길이가 23cm쯤 되는 끝이 날카로운 금속제 철 다발을 집어 들며 설명했다.
"중세기엔 석궁이 아주 무서운 무기였어요. 100m까지 정확하게 도달하고 무거운 갑옷까지 관통할 정도였으니까요. 정말 치명적이었죠!" 그녀가 천연덕스러운 미소까지 지으며 덧붙였다.
"아주 흥미로운 얘기긴 하지만 그보다…" 제이크는 흥분해 있는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다.
"우리 투석기를 만들면 어떨까요? 그래요, 그게 정말 무기죠!" 그녀가 흥분하며 소리쳤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길고 무거운 나무뿐이에요. 거기다 무거운 돌을 얹어선 라이라와 그 일당들 머리 위로…"
"그만! 석궁인지 투석긴지 하는 얘긴 집어치워요. 세상에 이렇게 끔찍스런 여자는 처음 보겠군. 지금 내게 중세판 핵전쟁 계획을 설명하고 있는 거요?" 제이크는 기가 막혔다.
"사실 중요한 건 화약인데 나도 그걸 어떻게 만드는진 몰라요" 그녀가 분하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이크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 참 잘됐군!"
오리엘이 일어서서 그 전리품들을 조그만 창문 밑에 있는 책상 위로 옮겼다. "나도 당신이 날 어리석다고 생각한다는 걸 알아요" 손에 묻은 먼지와 녹가루를 털어내며 그녀가 말했다. "그렇지만 라일라와 그녀의 일당들이 우리를 납치할 생각으로 돌아온다면 우리도 우리를 방어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죠! 내가 말한 것처럼…"
그러나 제이크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책상위로 올라앉아 긴 다리를 앞으로 뒤로 흔들거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대체 이 여자는 뭐지? 진짜 금발의 여자들처럼 오리엘의 피부는 눈처럼 희다. 그가 아는 여자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마호가니 빛으로 피부를 태우는데 이 여자는 창백할 정도인 게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러나… 제이크는 그녀의 길고 푸르스름한 팔다리마저 무척 관능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러니 우린 적어도 오늘 밤에 편안히 잠들 수 있게 된 거예요"
"흠…?" 그가 멍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세상에! 내가 말한 걸 한마디도 듣고 있지 않았군요!" 그녀가 화를 냈다.
"지금 난 우리가 짚이불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던 중이었어요. 우린…"
"잠깐만…" 제이크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짚이불이라니, 세상에. 그게 무슨 뜻이지?"
"아, 물론 내 말은 나가서 우리에게 아주 우호적인 당나귀들을 찾아보자는 얘긴 아니에요" 그녀가 놀리듯 웃었다. "내 말은 그러니까 지금부터 구식이긴 하지만 짚이 든 매트리스를 만들어 보자는 뜻이에요. 음…, 정확히 말하자면 마른 풀로 이 자루를 채우자는 거죠" 그녀가 구석에 쌓인 삼베자루들을 가리켰다. "당신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더 이상 어젯밤처럼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잘 순 없어요. 지금도 온몸이 쑤신다구요!"
"이제야 무슨 소린지 알겠군. 괜찮은 생각인 것 같소."
제이크가 인정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불행히도 우리에겐 건초가 없다는 거요!"
"오, 그렇게 얘기할 줄 알았어요" 오리엘이 한심하다는 듯 핀잔을 줬다.
"당연히 그랬겠지!" 제이크가 체념했다는 표정으로 투덜댔다.
"좋소, 그래 어디서 필요한 만큼 건초를 구하면 되지?"
"성 바깥에 있는 고원의 풀들을 손으로 잘라서 뜨거운 태양 아래 말리는 거죠. 그리곤 이 푸대를 채우는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나도 그게 진짜 건초가 아니라는 건 알아요. 그렇지만 적어도 지난밤보다 편히 잘 순 있을 거예요. 오, 당신은 그렇게 생각지 않으세요?" 삼베푸대들을 응시하는 그의 얼굴에 나타난 딱딱하고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에 약간 불안감을 느끼며 그녀가 물었다.
사실 제이크는 어젯밤 그녀의 부드럽고 따뜻한 몸을 베개 삼아 잠들었던 걸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좋소" 마침내 그가 동의하며 거친 푸대들을 집어 들었다.
"당신 말이 옳은 것 같군" 그가 돌아서서 문가로 걸어갔다. "자, 갑시다. 당신은 정말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군. 가서 태양이 비치는 동안 건초를 만들어야지!"
오리엘이 그의 뒤르르 따라 방을 나가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완고해 보이는 이면에 유머 감각을 숨기고 있었다. 사실 지금 그녀는 여기 도착한 이래 처음으로 그가 완고하다는 생각을 버리려 하고 있었다.
오리엘은 키가 큰 풀 위에 누워 바로 머리 위에서 작열하듯 내리쬐는 뜨거운 햇빛에 얼굴을 맡기고 있었다. 등이 쑤시고 4개의 푸대에 풀을 꺽어 채우느라 두 손이 다 얼얼했다.
불평해선 안돼. 제이크는 나보다 2배는 더 일을 많이 했잖아! 그녀가 자신을 타일렀다. 게다가 이렇게 하자는 빌어먹을 제안을 한 게 바로 자신이니 힘들다고 불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원한 물 한잔 어떻소?"
그녀가 눈을 뜨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장신의 체구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쏟아지는 햇빛 속에 서 있는 그의 몸에서 강렬한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물 저장소에 가서 보온병에 물을 좀 담아왔소" 그가 그녀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진공보온병의 마개를 열었다.
"음식바구니를 저장소에 갖다놓는 게 좋을 것 같더군" 그가 덧붙였다. "그곳이 성에서 가장 깊고 서늘한 곳이니까 음식을 상하지 않게 보관하기에 좋을 것 같아서… 윽!" 그가 갑자기 손을 들어 눈을 문질렀다.
"무슨 일이죠? 다쳤어요?" 그녀가 깜짝 놀라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소. 뭔가가 방금 눈에 들어간 것 같아서" 눈가를 세게 문질러대며 그가 중얼댔다. 오리엘이 일어섰다. "어디, 내가 한 번 봐줄게요." 그녀가 손을 그의 어깨에 내려놓고 얼굴을 제이크의 얼굴로 가까이 가져가며 말했다.
"아니, 괜찮소" 그가 급히 말했다.
"오, 제발 바보같이 굴지 말아요. 내 생각엔 눈에 파리가 들어간 것 같으니까" 그녀가 확신한 듯 말하며 그의 중얼거림을 무시한 채 몸을 앞으로 기댔다. 그리고 그의 눈에서 조그맣고 검은 물체를 제거했다.
자신의 뺨에 와 닿은 오리엘의 차가운 손가락이 주는 감촉에 제이크가 머리를 뒤로 젖혔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땅에 앉아 있던 그의 몸이 덕분에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그가 본능적으로 재빨리 오리엘을 붙잡았다.
잠시 후 제이크는 여전히 그녀를 팔에 안은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
"오, 맙소사!"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자신의 얼굴에서 불과 몇 센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그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난 어떻게 된 일인지…" 제이크의 손이 자신의 허리를 단단히 감아오기 시작하자 온몸을 떨면서 그녀가 중얼거렸다.
"내 생각엔 음…, 파리는… 아니 그게 뭐였든 간에… 지금은 없어요." 그녀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강렬한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그의 표정에 기묘한 불안을 느끼며 말을 더듬었다.
갑자기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구름같이 풍성한 금발 속에 묻더니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그의 입술 아래서 오리엘의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제이크가 깊은 신음소리를 내며 그녀를 재빨리 아래로 눕혔다. 오리엘의 귓가에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고 정맥을 타고 뜨거워진 피가 흘러내렸다. 자신으로선 어찌해 볼 수가 없는 흥분이 온몸을 휩쓸고 있다. 그의 키스가 한층 깊어지면서 그녀가 의식할 수 있는 건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자신의 심장소리와 그에 화답하듯 쿵쿵대는 제이크의 고동소리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누르고 있는 그의 단단하고 장신인 몸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힘을 의식할 뿐이었다. 오리엘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입술을 떠나는 그의 입술에 항의하듯 부드럽게 신음했다.
제이크의 입술이 그녀의 부드러운 목으로 내려가 아치형의 목선을 애무했다. "스위트하트!"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댔다.
오리엘의 셔츠를 거칠게 여는 그의 호흡이 거칠고 불규칙했다. 자신의 맨살을 애무하는 그의 구릿빛 손가락에 온몸이 떨려왔다. "내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이건 완전히… 정말로… 미치겠군!" 그가 입술로 그녀의 부드럽고 풍만한 가슴을 관능적으로 애무하며 신음했다.
"그래, 이건 미친 짓이야…" 오리엘은 멍한 채 그가 방금 한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자신의 가슴을 차례로 애무해오자 완전히 정신을 잃고 말았다.
열병같이 자신을 휘감는 기묘한 흥분 속에서 오리엘의 손이 자신도 모르는 새에 그의 넓은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이 얇은 면 셔츠 아래로 느껴지는 그의 딱딱한 몸과 따뜻한 피부의 감촉을 즐겼다. 손이 저절로 그의 날씬한 엉덩이 쪽으로 내려갔다. 그녀의 손길에 그가 움찔했다.
제이크가 깊은 신음소리를 내더니 애무하는 손길이 한층 격렬해졌다. 그의 손과 입술이 관능적으로 그녀의 몸 위를 움직였다. 지금 그녀는 이 견딜 수 없는 긴장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제 그녀는 자기가 원했더 게 바로 이렇게 그의 밑에 누워 그의 몸이 주는 따뜻한 감촉을 느끼며 애무를 받는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갑자기 제이크가 모든 걸 허락한 그녀에게서 몸을 떼더니 숨을 헐떡이며 일어섰다. "미안하오, 오리엘" 그가 거칠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의 가슴이 심하게 움직였다. "내가 … 미쳤던 것 같소. 완전히 정신이 나갔었어!" 급히 뒤돌아서 성 쪽으로 걸어가며 그가 덧붙였다.
오리엘은 풀 위에 두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얼굴에 쏟아져 내리는 뜨거운 태양을 느끼며 그녀는 대체 자기가 뭘하려 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하려 애썼다. 대체 내가 왜 이러지? 물론 그녀는 지금껏 살아온 시간의 대부분을 오래된 대학촌에서 보냈다. 옥스퍼드엔 잘생기고 똑똑한데다 세련된 남자들이 가득했다. 게다가 그들 중의 많은 남자들은 그녀 역시 매력적이고 아름답다는 걸 찬미해 줬다.
그런데 어째서 난 그들 중의 그 누구에게도 빠지질 못했지? 제이크의 곁에만 있으면 온몸을 불로 고문하는 것같이 엄습하는 이 기묘한 흥분은 어째서 전엔 한 번도 느끼지 못했을까?
그의 검은 머리칼 속에 손을 묻고 싶다는 미칠 것 같은 갈망이며 느리지만 따뜻한 미소를 보면 마치 뼈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기분…. 이 모두가 그녀에겐 낯선 것들이었다.
오리엘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돌아누워 풀줄기 위로 게으르게 기어가고 있는 딱정벌레 한 마리를 멍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사실 그녀와 제이크 사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지금껏 그녀는 자신의 삶을 깨끗하게 구획정리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자신이 그 남자 때문에 흔들리고 혼란스러워졌음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는 시리아에 도착한 직후부터 그녀의 삶을 온통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정말 너무나 우스꽝스러워! 그녀는 자신에게 투덜댔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틀림없이…. 오, 아냐. 그럴 수는 없어! 아냐,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저 남자와 사랑에 빠지다니 그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녀는 신음하며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제이크 에머슨과 사랑에 빠지다니 이런 일이 어떻게 내게 일어났을까? 이건 정말 불공평하다. 잠시 동안 그녀의 머리는 혼란 그 자체였다. 그녀는 단지 그를 떠올리기만 해도 몸이 떨려오고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쿵쿵 뛰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이 확실한 증거를 받아들이는 걸 거부하고 있었다.
"난 믿을 수가 없어! 절대로 그렇지 않아!" 그녀가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일어섰다.
따가운 햇빛 때문에 눈을 깜박이며 오리엘이 저 멀리 솟아 있는 산봉우리를 응시했다. <심장이 뛰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격언 구절이 가슴 한가운데서 맴돌고 있다. 그녀가 자신에 대한 분노로 이를 갈았다. 물론 가슴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그러나 그녀의 뇌는 그 이유를 받아들이는 걸 완전히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와 제이크에겐 공통점이랄 게 하나도 없다. 게다가 그들 두 사람은 사소한 문제에도 의견이 일치하는 것이 거의 없었다. 물론 그가 실제로는 그렇게 역겨운 남자가 아닌 게 사실이지만…. 이 성에 도착한 이후엔 둘 다 무척 잘 지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두 사람이 깊고 계속되는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설령 그녀가 제이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 하더라도 결과는 뻔하다. 결국에 가선 자신이 정신적으로 완전히 미쳐 버릴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오리엘은 다시 풀베는 작업을 시작했다. 난생 처음 느끼는 흥분상태에서 손을 놀리며 그녀는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이 낯선 혼란 상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좋아, 진정해야 해! 공포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어!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자신을 달래며 오리엘은 미리 풀을 채워 둔 푸대들을 모았다.
언젠가 한 미국인 학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몸이 가까이 있으면 마음도 가까워지죠> 확실히 지금 그녀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도 거기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녀와 제이크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이 완전히 낯선 세계에 함께 던져졌다. 그는 아무런 할 일이 없어 지루해하던 차라 일시적인 기분에 사로잡혀 아까와 같은 열정적인 장면을 연출했을 뿐이다. 하지만…. 오리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렇지만 제이크가 내게 키스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잖아?
"모르겠어. 심각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풀이 든 푸대들을 질질 끌고 성으로 돌아가며 그녀가 볼멘 소리로 외쳤다. "오, 아니라고? 부딪힐 때마다 그의 품에 안기곤 했던 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 마음속의 목소리가 끈질기게 물었지만 오리엘은 듣기를 거부했다. 다른 건 접어두고라도 방금 그가 성 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간 게 그 역시 더 이상 깊은 관계로 발전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증거인 것이다. 이제 내가 해야 하는 건 제이크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거야.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자신에게 다짐했다. 운이 좋으면 이 완전히 일시적인 흥분쯤은 더 이상 심각한 상처를 입지 않고 제풀에 꺾이고 말 것이다.
혼자만의 생각에 너무나 열중해 있느라 오리엘은 자신이 저 무시무시한 협곡을 아무런 의식 없이 건넜다는 걸 성에 도착해서야 깨달았다. 정신이 나갔다는 증거군.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안마당으로 이어지는 아치 문 쪽으로 가는 데 뭔가 큰 소리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등을 이쪽으로 돌린 채 제이크가 위통을 벗고 바짓단을 무릎까지 말아 올린 채 그들이 박물관에서 발견했던 도끼로 나무를 쪼개고 있었다.
아치 문 아래 그늘진 곳에 꼼짝도 못하고 서서 오리엘은 그의 잘 발달한 근육이 만들어내는 유연하고 리드미컬한 움직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넓은 어깨와 물결치듯 움직이는 근육을 응시하는 그녀의 가슴이 아려왔다.
다시 한 번 저 단단한 구릿빛 품에 안기고 싶다는 열망에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순간 눈을 꼭 감고 심호흡을 하면서 오리엘은 도리질을 했다. 마음이 흔들려선 안 돼. 온몸의 힘을 다해 시선을 거둔 뒤 그녀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안마당을 지나 그의 주의를 끌지 않고 성의 본체로 들어갔다. 그 좁은 돌계단을 푸대를 끌고 올라갈 때쯤에 그녀의 모든 신경을 녹초가 돼 있었다.
넌 길을 잘못 들어섰어! 자기도 모르게 창가로 다가가 멀리 안마당에 있는 남자의 모습을 열망하듯 내려다보는 자신이 역겨워져서 그녀가 혼잣말을 했다. 정신을 차리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저장소의 얼음같이 차가운 물에 들어가 몸과 마음을 식히는 게 지금으로선 최상의 방법일 것이다.
제이크는 도끼를 든 손을 높이 들어 눈앞에 있는 나무를 내리쳤다. 친구들과 함께 여름학교에 다녔던 게 몇 년 전이었던가? 그렇지만 그곳에서 배운 기술이 아직도 써먹을 만하다는 게 증명된 셈이다. 게다가 이렇게 미칠 것 같은 상황에선 이게 제일 좋은 방법이다. 그가 다시 한 번 도끼를 치켜들어 나무를 이등분했다.
확실히 이 도끼는 신이 보낸 선물인 것 같다. 지난 24시간이 그에게 안겨 준 긴장이 사라지는 게 느껴진다. 물론 문명세계에서 수 킬로미터나 떨어진 이 황량한 성에 갇혀 있다는 건 그가 당면해 있는 문제에 비해 볼 때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쩌자고 내가 오리엘에게 이렇게 빠져버렸단 말인가? 그는 지금 저 고원에서 자기가 보인 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 설명하는 걸 포기한 상태다. 그건 그가 시리아에 온 이래 저 못 말리는 여자와 부딪칠 때마다 그가 겪었던 기묘한 흥분의 반응과 비슷했다.
바버라가 그 라틴계 운동선수와 달아난 게 벌써 7년 전 의 일이다. 이혼한 후 그는 명랑한 척하며 사랑을 나누는 데는 신중하면서 결코 상대방에게 완전히 열중하는 법은 없는 바버라와 같은 종류의 세련된 여자들과 로맨틱한 관계가 되는 걸 주의해 왔다.
물론 오리엘은 확실히 그런 종류의 여자는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머릿속에서 경고하듯 위험신호가 번뜩이고 벨이 울려대는 데도 그녀에게 끌리는 자신의 마음을 제어할 수가 없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소용없다. 물론 한 가지 설명이 가능하긴 하다. 자신이 일시적으로 정신이 나갔던 게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존경받는 은행가이자 주의깊고 신중한 남자로 남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는 시리아에 도착해서부터 이성이며 조심스러움, 신중함 따위는 완전히 잊은 사람처럼 행동해 왔던 것이다.
제이크는 다시 한 번 통나무를 두 조각냈다. 그의 입가가 당혹감과 자기혐오감으로 굳어졌다. 자신같이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경험도 풍부한 남자가 어쩌자고 그렇게 바보같이 굴었을까? 자신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멋지고 편안하며 매력적인 여자들이 수백 명은 될 텐데, 어떻게 만남자체가 불행의 시작이었던 저 못 말리는 여자에게 이렇게 얽혀들고 말았단 말인가?
걸어 다니는 사고뭉치 그 자체인 오리엘 드 몽포르는 그의 인생에 아주 위험한 폭죽을 터트린 존재다. 끊임없이 그를 가르치려 드는 못된 버릇은 접어두고라도 제이크는 그녀가 다음 순간 무슨 말을 할지 어떤 행동을 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잠시 동안 쉬던 그의 표정이 좀 누그러졌다. 그녀가 어떻게 박물관의 문을 열었던가를 회상하노라니 미소가 떠오른다. 크레디트 카드를 사용하겠다던 생각은 정말 천재적인 것이었다. 그게 없었으면 결코 이 도끼를 발견해내지 못했을 테니까. 게다가 오래된 성들과 중세의 생활방식에 관한 그녀의 지식이 없었다면 신선한 물이 흐르는 저장소를 찾아내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녀가 놀라울 만큼 실용적이라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저 푸대에 풀을 담아 매트리스 대용으로 쓰려는 거며, 자신에게 맞는 옷을 만들어내는 아이디어하며….
제이크는 그녀의 늘씬한 몸과 그 짧은 반바지 아래로 드러나던 그녀의 긴 다리를 떠올리지 않으려 기를 쓰며 잠시 눈을 감았다.
좋아, 내가 잠시 유혹에 빠졌던 건지도 모르지. 나도 붉은 피가 흐르는 남자니까…. 그 역시 평범한 인간이었을 뿐인 것이다. 그렇지만 그도 자신이 굉장히 신중하게 행동해야 함을 인정했다.
보스턴으로 돌아가면 마르시아 로웰과 결혼할 예정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는 평화롭고 조용한 비콘 언덕에 위치한 자신의 집과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무척 아름답지만 역시 조용한 마르시아에게 지금 자신이 느끼는 미칠 듯한 열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남아 있는 통나무들을 내려다보면서 제이크는 넓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 성에 단둘이만 있으면서 그녀의 존재에 이렇게 혼란을 일으키며 갈팡질팡하다니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내가 조그만 문제에 너무 과민반응을 보인 것 같군. 솔직히 저 영국 여자가 놀랄 만큼 매력적인 건 사실이니까 신중한 남자라 할지라도 영향을 안 받을 순 없다. 일단 남아 있는 통나무를 다 패고 나면 가서 차가운 얼음물에서 한바탕 수영을 해야지. 몸에 남아 있는 열기를 다 씻어 버리고 나면 몽포르의 유혹적인 매력에 완전히 무덤덤해질 수 있을 테니까….
그는 자신의 자제력을 확신했다.
7
오리엘은 비취색 반바지에서 물기를 짜냈다. 핸드백 한구석에서 여행용 비누조각을 발견할 수 있었던 건 실로 행운이었다. 옷에 묻은 먼지와 더러움을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옷을 빨고 나니 불행히도 당장 입을 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옷이야 햇볕에 널어 놓으면 금방 마를 테니 문제가 될 건 없다. 게다가 제이크는 장작 패는 일에 몰두하고 있으니 옷이 마르는 사이에 자신의 뜨거워진 몸을 식히기엔 지금이 제일 좋을 것 같다.
옷을 완전히 벗은 뒤 자신의 알몸을 내려다보며 빙긋 웃은 뒤 오리엘은 한 번 심호흡을 크게 하곤 얼음물 속으로 다이빙해 들어갔다.
와우…. 물이 정말로 온몸을 얼려 버릴 것 같다. 그러나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 보니 그럭저럭 물의 온도에 적응이 됐다. 이거야말로 진짜 수영이군! 전엔 한 번도 알몸으로 수영을 해본 적이 없는 그녀로서는 지금 자신의 뜨거운 피부에 와 닿는 차가운 물의 감촉이 주는 해방감과 느긋함에 놀라고 있었다.
배영 자세로 누워서 그녀는 머리 위로 아치형을 그리고 있는 높은 천장을 쳐다보았다. 여긴 정말 으스스하군. 천장의 조그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엷은 빛줄기만이 동굴 같은 이곳의 어둠을 그나마 쫓아내 주고 있다. 몸이 떨리면서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너무 오랫동안 물속에 있었나 보다. 그녀는 감기에 걸리기 전에 물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몸을 뒤집은 뒤 오리엘은 제이크의 새 이브닝드레스 셔츠를 놔둔 가장자리로 헤엄쳐갔다. 그녀가 자신의 옷을 허락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입은 걸 알면 그가 무척 화를 낼 거라는 생각을 안한 건 아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나마 그녀의 목에서 무릎까지 온몸을 덮어 줄 수 있는 옷은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할림의 셔츠들은 모두 너무 짧은 게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방금 한 벌밖에 없는 속옷까지 빨았기 때문에 햇볕에 옷이 마르는 걸 기다리는 동안 제이크 앞에 그런 꼴로 나설 수는 없었다.
물에서 나가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오리엘은 자신이 지금 중요한 문제에 봉착했음을 깨달았다. 물 속에 뛰어드는 건 쉬웠지만 나가는 건 어려웠다.
어쩌자고 이걸 미리 고려하지 못했을까?
그녀는 계속 어딘가 발 디딜 곳을 찾았지만 부드럽고 미끌미끌한 모자이크 타일로 이뤄진 벽 때문에 헛수고만 할뿐이었다. 마침내 그녀는 자신이 어리석었을 뿐 아니라 완전히 바보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나가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팔의 힘이 빠져나가며 물 속에서 나가는 게 더 힘들어졌다.
"보아 하니 도움이 필요한 것 같군" 차갑고 침침한 저장소의 벽면에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오리엘이 놀란 눈으로 몸을 굽혀 자신에게 팔을 뻗어 주는 제이크를 올려다보았다.
"내 손을 꽉 잡아요. 곧 거기서 꺼내 줄 테니까"
"그렇지만 그럴 수가 없어요!" 그녀는 추위에 덜덜 떨면서 울상을 지었다. "난…사실은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거든요"
"제발, 이 멍청이 같으니!" 그가 초조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좋아요…" 그녀의 이빨이 마치 캐스터네츠처럼 딱딱 소리까지 내며 부딪쳤다. "그렇지만 눈을 꼭 감고 있겠다고 약속해야 해요!"
"오, 하느님 맙소사!" 제이크가 두 손을 들었다는 듯 으르렁대며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고 얼음물에서 그녀의 몸을 끌어냈다.
"오, 긁혔어요!" 오리엘이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굽혔다. 저장소의 가장자리에 삐져나온 거친 돌에 정강이가 긁혔던 것이다. "그렇게 거칠게 잡아당길 필요는 없었잖아요?" 그녀가 불평을 했다.
"그럴 필요가 있지" 그가 퉁명스레 핀잔을 주었다. "이 저장소의 물이 아마 0도는 될 거요. 어쩌자고 이런 바보스런 짓을…"
"잔소리는 그만둬요!" 그녀가 소리쳤다.
"잔소리를 하는 게 아니오!"
"오, 네, 그러시겠죠." 그녀가 비꼬듯 말했다.
그의 턱이 차츰 굳어지며 근육이 꿈틀대는 게 보였다. 제이크는 아무 말 없이 침침한 빛 아래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난 정말로 당신 같은 남자들을 참을 수가 없어요…" 그러다가 그녀는 문득 말을 멈추었다. 갑자기 자신이 완전히 벗은 채로 서 있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어쩔 줄 몰라 비명을 지르면서 오리엘은 바닥에 놔뒀던 셔츠를 재빨리 집어 들었다. 그에게 등을 돌린 채 그녀는 자신의 흠뻑 젖은 몸을 정교한 실크 셔츠로 가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떨리는 팔을 집어넣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젖은 몸에 옷이 착 달라붙어 마음먹은 대로 되지가 않았다. 화가 나 어쩔 줄 모르는데 갑자기 묵직하고 남성적인 손이 그녀의 어깨에 놓이더니 팔을 셔츠 소매에 넣도록 도와줬다.
"내 셔츠를 훔쳐입었군." 그녀를 돌려세워 신경질적으로 떨리는 손가락을 대신해 단추를 잠가 주며 그가 낮게 으르렁댔다.
"그래요, 난 당신이 이해해 줄 거라고…" 그녀가 말을 더듬었다. 마지막 단추를 잠그고 있는 그의 손가락이 주는 감촉에 다시 몸이 떨려왔다. 모든 분노가 사라졌다. 그녀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
"됐소. 자, 이젠 당신이 지독한 감기에 걸리기 전에 이 곳을 나갑시다." 그가 거칠게 말했다. 그녀의 팔을 잡아끄는 그의 얼굴에 긴장이 흘렀다.
"내 옷들은 어떡하고요?"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그의 손길에서 벗어나려 애쓰면서 오리엘이 빨아서 한쪽에 쌓아 놓은 젖은 옷들을 가리켰다.
"나중에 찾으러 오면 되오. 지금 중요한 건 여기서 나가 따뜻하게 몸을 말릴 수 있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거요" 제이크는 무자비하게 그녀의 항의를 무시하며 그녀를 끌고 저장소를 나와 한때 십자군들이 말을 먹였던 커다란 방으로 걸어갔다.
"욱! 아야!" 거친 마루에 깔려 있던 작은 돌들을 안 밟으려 애쓰며 오리엘이 소리쳤다. "이건 당신이 받아야할 벌인데" 그녀가 날카로운 돌들이 박힌 바닥을 아무 문제없이 맨발로 앞서가는 그를 노려보며 중얼댔다. "내가 왜 … 아야!"
갑자기 그가 그녀를 자신의 팔 안으로 끌어당겼다. 오리엘은 잠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봐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그녀가 숨 가쁘게 물었다.
"백합같이 연약한 당신의 발을 보호해 주려는 거요." 그가 차가운 조롱을 담고 으르렁거렸다. "사실은 당신의 목을 분질러 버리고 싶지만 말이오." 그의 품을 벗어나려고 버둥대는 그녀를 보며 그가 매정하게 덧붙였다. "지금 당장 버둥대는 걸 그치지 않으면 다시 저 얼음물에 집어던져 버릴 거요!"
"아, 좋아요. 알았어요!" 자신이 정말로 어린애같이 굴고 있다는 걸 깨달으며 그녀가 중얼댔다. 제이크는 그냥 그녀의 발이 다치지 않게 하려고 친절을 베푼 것뿐인 것이다.
"당신 괜찮소?" 잠시 쉬며 자신의 품안에 얌전히 안겨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며 그가 물었다.
"그래요, 난 괜찮아요" 따뜻하고 넓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그녀가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눈앞이 흐려지고 몸이 가벼워졌다. 자신의 얼굴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그의 그은 뺨이 있다. 그의 넓은 이마 위로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와 있고 그의 피부에서 풍겨 나오는 남성적인 체취가 오리엘의 코를 간질였다.
그가 자신을 안고 본채로 들어가 돌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입에서 새어나온 만족의 한숨소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제이크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오, 오리엘!" 그가 부드럽게 그녀를 놀렸다. 그러고는 입가에 슬픈 미소를 떠올렸다. "대체 내가 당신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응?"
"모르겠어요" 오리엘은 웅얼거리며 그의 넓은 맨가슴에 매달렸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는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재미있어하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갑자기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그녀는 뭔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부드럽게 덧붙였다. "당신은 뭘…, 내게 뭘 원하죠?"
제이크가 마침내 그녀를 안은 채 2층의 큰 방으로 들어가면서 거친 웃음소리를 냈다.
"이거야말로 진짜 바보같은 질문이군" 그는 그녀를 벽난로 쪽으로 데려가 앉히며 말했다. "이봐요, 사랑스런 아가씨, 눈이며 귀가 완전히 멀지 않고서야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소? 내가 당신에게 뭘 원하는지쯤은 알고 있을 텐데."
"내가 어떻다고요…?" 두 발로 일어서려던 오리엘이 현기증에 비틀거렸다.
"맙소사!" 그가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실크 셔츠가 오리엘의 젖은 몸에 착 달라붙어 온몸의 곡선을 선명히 드러내 주고 있다. 그의 머릿속에서 지금 당장 이 방을 나가지 않으면 뭔가 아주 심각한 문제에 부딪치게 될 거라는 경고의 벨이 울리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제이크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일 마음이 전혀 없었다.
"제이크?" 사시나무 떨 듯 온 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난…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굉장히 … 기묘한 느낌이에요"
"당신만 그런 게 아니오!" 그가 거칠게 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그녀의 떨리는 몸을 부축하려 했다. 불행히도 팔을 잡으려던 그의 손이 오리엘의 따뜻하고 풍만한 가슴을 잡아 버렸다.
몸을 떨며 숨을 삼키는 오리엘의 목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우던 침묵을 깨뜨렸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움직일 수도, 시선을 그의 얼굴에서 뗄 수도 없었다. 그의 얼굴에 점차 팽팽한 긴장감이 돌더니 턱 근육이 격렬하게 꿈틀거리고 날카로운 회색 눈동자에 열망의 빛이 어른댔다.
오랫동안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둘 다 꼼짝도 않고 끝없이 이어지는 것 같은 시간 속에 서 있었다.
마치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직 그들 두 사람만이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건 마법에 걸려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제이크가 마치 꿈속인 양 깊은 최면에 빠진 사람같이 아주 천천히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오리엘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얇은 실크 셔츠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그의 손길에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제이크의 손길이 그녀의 맨살갗 위에 뜨거운 자국을 남기며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그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그녀의 가슴을 관능적으로 애무했다.
오리엘이 숨을 헐떡이며 온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짜릿한 기쁨에 신음소리를 냈다. 마치 바닥으로 쓰러질 것만 같아서 그녀는 제이크의 넓은 어깨에 매달렸다.
"제이크… 난…"
제이크가 재빨리 머리를 숙여왔다. 그녀의 다음 말들은 그의 강렬한 키스에 묻혀 버렸다. 제이크가 팔에 힘을 주며 그녀를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오리엘은 그의 몸이 긴장하고 있음을 날카롭게 의식했다.
"당신을 갖고 싶어서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가 천천히 머리를 들고 그녀의 사파이어같이 푸른 눈을 응시하며 신음하듯 말했다.
그 거칠면서 짙은 욕망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오리엘의 정신이 멍해졌다. 그녀는 자신이 마치 심한 열병에 걸린 것처럼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얼음 같았던 몸이 지금은 불덩어리다. 온몸을 휩쓰는 육체적 욕망에 그녀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그의 목을 감고 숱 많은 검은 머리카락 속을 헤집었다.
잠시 후 그녀는 자신이 낮에 성 밖에 풀로 안을 가득 채웠던 삼베 매트리스 위로 눕혀지는 걸 알았다. "스위트하트…?" 그가 그녀 옆에 무릎을 꿇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오리엘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긴장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지금이 그나마 내가 정신을 조금이라도 차릴 수 있는 마지막 때인 것 같소. 그러니 만약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난 … 당신과 사랑을 나누고 싶어요" 그녀가 그의 목을 두르고 있던 팔에 힘을 줘 끌어당기며 낮게 속삭였다. 오리엘의 붉은 입술이 그의 키스에 대한 열망으로 스르르 벌어졌다.
그녀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그의 단단한 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갑자기 그가 떨고 있는 그녀의 몸을 덮쳐왔다. 자신의 입술에 쏟아지는 그의 강렬하고 타는 듯한 키스에 오리엘은 반사적으로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마치 파도에 휩쓸려가는 느낌이다. 그의 입술이 그녀에게 안겨다 준 관능적 쾌락만이 그녀가 느끼는 전 세계였다. 오리엘은 자신의 몸을 내리누르고 있는 그의 단단하고 남성적인 힘에서 온몸을 흘러내리는 기묘한 흥분을 느꼈다.
그녀의 입술을 떠나 긴 목선으로 입술을 옮기면서 제이크가 낮게 신음했다. 그의 손이 모든 순간을 음미하려는 듯 아주 천천히 오리엘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하나씩 열기 시작했다. 얇은 천 조각을 벗겨 부드럽고 투명한 피부와 부풀어 오른 가슴을 드러나게 하는 그의 손가락들이 약간 떨렸다.
"오, 우리가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내가 얼마나 당신을 원했는지 아오?" 그녀를 내려다보는 제이크의 시선이 욕망을 빛났다.
그의 말에 날카로운 흥분의 파도가 일더니 그녀의 몸으로 흘러내렸다. 잡아먹을 듯 자신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 때문에 온몸이 붉어지는 느낌이다. 그를 올려다보면서 오리엘은 자신이 조금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걸 알고 놀랐다. 황홀하다는 듯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자신감을 확인시켜 줬기 때문이다. 그 타는 듯한 시선 앞에서 몸 안의 세포며 신경들이 전부 살아나는 것 같다.
잠시 후 그가 재빨리 자신의 바지를 벗어 던졌다. 그의 남성적인 몸이 다가와 그녀의 실크 셔츠를 벗기고 그녀를 푹신한 삼베 매트리스 위로 눕혔다. "당신은 정말… 놀라울 만큼 사랑스러워…" 그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제이크이 손길이 그녀의 가는 허리와 따뜻한 허벅지, 부푼 가슴들 위를 부드럽게 움직였다. 가슴을 애무하는 그의 입술에 오리엘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기쁨으로 인해 온몸이 떨려오고 고문하듯 자신의 몸을 애무하는 그의 입술과 다정한 손길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마치 훨훨 타오르고 있는 불 속에 있는 느낌이다. 점점 격렬해져가는 그의 요구에 견딜 수 없는 욕망을 느끼며 그녀가 몸을 활처럼 휘였다.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다. 머릿속에서 피가 치솟고 그를 갖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미쳐버릴 것만 같다.
거친 숨을 내쉬며 제이크가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자신의 뇌에 그녀의 부드럽고 달콤한 가슴과 허벅지를 기억해 두려는 것 같았다.
마침내 제이크가 그녀 안으로 들어왔다. 오리엘은 절정이 가져다 준 기쁨에 비명을 질렀다. 폭풍처럼 자신의 몸을 휩쓸고 지나가는 환희 속에서 마치 죽을 것만 같다. 그가 가져다 준 충족감에 몸을 맡기며 오리엘은 그의 품안에서 몸을 떨었다.
오리엘은 눈을 뜨고 아치 모양의 창을 통해 들어오는 오후의 밝은 햇빛 때문에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만족의 한숨을 내쉬며 욱신거리는 몸을 쭉 폈다. 제이크와 사랑을 나눴던 지난 몇 시간을 떠올리자 뺨이 붉어진다. 온몸이 쑤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제이크는 지칠 줄 모르고 그녀를 애무했고 오리엘 역시 그의 욕망에 미친 듯 반응했던 것이다.
그녀의 입가에 만족의 미소가 번졌다. 어쩌자고 그를 케케묵었다고 생각했을까? 그에게 그런 표현은 정말 어울리지가 않는다. 제이크는 잠이 들려는 그녀를 깨워 전엔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쾌락의 세계로 데려갔던 것이다. 오리엘은 지금 그때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흥분되고 조여드는 느낌이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에서 깊이 잠들어 있는 제이크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잘생기고 햇빛에 그은 얼굴 위로 쏟아져 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보노라니 갑자기 그에 대한 사랑으로 숨이 가빠오고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진다.
그를 깨우지 않으려 조심하며 오리엘은 부드러운 자루들 위에서 내려섰다. 재빨리 제이크의 실크셔츠를 껴입은 뒤 그녀는 저장소로 내려가 몇 분 후 과일과 샐러드, 그리고 몇 시간 전에 빨아 뒀던 옷가지들을 갖고 돌아왔다. 조용히 낡은 슈트케이스 위에 음식을 올려놓은 뒤 오리엘은 그 방의 후미진 구석에 있는 아치형의 통로가 어디로 연결되는지 알아보러 갔다.
오! 이곳에 본체의 지붕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다는 걸 처음부터 깨달았어야 하는데! 아마 그곳에선 이 성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가 있을 것이다. 옷을 말리기에도 좋을 거고.
잠시 후 그녀는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마침내 1m 정도의 벽으로 담장을 쌓은 지붕 바깥으로 나왔다.
돌로 만들어진 뜨거운 지붕 위에 옷가지들을 널다가 오리엘은 멀리서 엔진소리가 들려오는 걸 깨달았다. 탑의 끝쪽으로 가서 계곡 저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말로 트럭 한 대가 천천히 저 멀리 산길을 돌아오는 게 보였다. 눈을 비비면서 햇빛 때문에 자기가 헛것을 본 게 아닌가 했지만 분명히 트럭이었다. 불행히도 거리가 너무 멀어 그들의 주의를 끌 방법이 없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전날 하루종일 입고 있었던 자신의 젖은 셔츠를 집으러 달려갔다.
막 팔을 치켜들고 셔츠를 흔들려던 그녀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췄다.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점점 다가오고 있는 차를 자세히 쳐다봤다. 자신들이 곧 구조될 생각에 뛰어오를 것 같던 흥분이 갑자기 공포로 변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저 회색 트럭이 불과 24시간 전 라일라와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장관이 베이루트의 컴컴한 토굴로 납치될 때 쓰여졌던 트럭과 같은 것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제이크를 깨워야 해!" 오리엘은 비명을 지르며 가파른 돌계단을 뛰어내려와 이층으로 달려 들어갔다.
"으음…?" 제이크가 게으르게 눈을 뜨고 그녀에게 짧은 미소를 보내더니 다시 부드러운 매트리스에 얼굴을 묻었다.
"맙소사! 지금은 잠잘 때가 아니에요!" 그녀가 소리치며 달려가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넓은 어깨에 손을 올려 그의 몸을 흔들면서 그녀가 소리쳤다. "제발… 일어나요!"
깊은 만족의 한숨을 내쉬면서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당신은 정말로 멋진 여자야" 팔을 들어 자신의 가슴으로 그녀를 끌어당기며 제이크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기력이 남아 있는 것 같진 않지만 스위트하트, 다시 한번 시도하고 싶군. 그리고…"
"오, 맙소사"
그가 몸을 굴려 그녀를 눕힌 뒤 입을 막는 바람에 그녀는 잠시 동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가 마침내 입술을 가슴 쪽으로 미끄러뜨렸을 때에야 오리엘은 정신을 차렸다.
"안돼요, 제발 제이크…" 자신의 몸이 또다시 그에게 반응하기 시작하는 걸 느끼며 그녀가 소리쳤다. "이러자고 당신을 깨운게 아니에요" 그녀가 숨을 헐떡였다. "심각한 문제가 생겼어요!"
"흐음…?"
"빨리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해요. 오, 이런 뜻이 아니라니까요!" 불안한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가 가까스로 그의 품을 벗어났다. "악당들이 이리로 오고 있어요! 빨리 얼어나야 해요"
"누구…?"
"오, 알잖아요. 라일라와 그 테러리스트 친구들. 멀리 있긴 하지만 내가 방금 본 건 분명히 그들의 회색 트럭이었어요."
제이크가 일어나 턱을 쓸어내렸다. "비누거품으로 면도를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백만 달러를 주겠어." 그가 중얼댔다.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에요. 대체 우리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죠? 저 테러리스트들이 곧 이리로 들이닥칠 판인데 당신은…"
"자, 진정해요. 공포에 질린다고 어디로 갈 수 있는 건 아니잖소?" 제이크가 그녀를 달래며 일어섰다. "그들이 여기 오는 데 얼마나 걸릴까?"
오리엘은 잠시 동안 얼굴을 찌푸렸다.
"여기서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어림잡기가 힘들어서…. 아마 한 시간 정도 걸릴 거예요. 어쩌면 그보다 덜 걸릴지도 모르고…"
"그런데 당신은 그 트럭이라고 확신한단 말이지?" 그가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오리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불행히도 그래요."
제이크가 고개를 돌려 잠시 동안 강렬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좋소, 당신이 그렇게 확신한다면 이제 행동에 나서야 할 것 같군."
"당신의 말이 이해되는군. 여기서 내려다보니 굉장한데"
그들은 지금 본채 지붕 위에 서 있었다. 제이크는 오리엘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모았다. 산길을 따라 이리로 천천히 오고 있는 차가 보였다.
"할림을 태우고 베이루트로 끌고간 그 트럭이 맞죠?"
오리엘이 거리를 가늠하려 애쓰며 물었다.
그의 입가가 긴장으로 굳어졌다. "그래, 바로 그거요." 그가 동의했다. "당신이 처음 본 이후 시간이 흘렀으니 이제 우리에겐 45분 정도의 여유가 있을 뿐이오. 나의 본능은 빨리 이 빌어먹을 성에서 도망치라고 하고 있소. 하지만 도망쳐 숨을 데가 없으니 그리 좋은 생각이라고 할 순 없군."
오리엘은 탑의 망루 밖으로 몸을 기울여 봤다. 제이크의 말이 옳다. 성 밖에는 도로와 거친 돌들, 그리고 풀들만이 있을 뿐이다.
그녀가 돌아섰다. "난 당신이 말했던 걸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여전히 왜 저들이 이리로 오는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그녀가 혼란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자기들이 남겨 놓은 폭탄에 우리도 날아갔을 거라고 믿을 수도 있잖아요?"
"글쎄…, 내 생각엔 그들이 폭탄을 설치한 건 확실히 리무진을 폭발시키기 위해서인 것 같아. 내가 살아 있으리라 믿고 이번엔 나를 납치하려고 돌아오는 거겠지. 그만한 가치가 있을 테니까."
"세상에, 당신은 돈이 썩어날 정도로 부자인 모양이군요!" 그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그녀의 뺨이 붉어졌다.
"글쎄, 돈이 썩고 있는지도 모르겠소만 나와 내 가족이 그들의 관심을 끌 만큼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겠지." 그의 입가에 재미있는 미소가 떠올랐다.
"어쨌든 그들은 당신을 잡을 수 없어요" 그녀가 제이크를 껴안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
제이크가 그녀를 세게 껴안았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오리엘의 풍성한 금발 속에 묻으면서 입을 열었다. "걱정해 줘서 고맙소, 스위트하트. 그렇지만 지금 우리에겐 저 악당들을 물리칠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냉정히 인정해야 하오."
"오, 방법이 있어요!" 그녀가 소리쳤다. "우린 안전할 수 있어요. 그저…"
그녀의 다음 말들은 어디선가에서 갑자기 나타나 자신들의 머리 위를 날아가는 제트 전투기의 강력한 엔진 소리에 묻혀 버렸다. 제트기는 뒤에 회색 연기만 남기고 왔을 때처럼 재빨리 사라져 버렸다.
"대체…?"
또다시 2대의 전투기가 나타나 똑같은 속도로 그들의 머리 위를 낮게 날아가는 걸 보며 오리엘은 숨을 삼켰다.
"시리아 공군이야!" 제이크는 햇빛에 눈을 가늘게 뜬 채 중얼거렸다.
"우릴 찾고 있는 거예요!" 오리엘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당신과 장관은 어제 바니야에 있는 정유시설을 둘러볼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당신이 도착하지 않았으니 난리가 난 거죠, 안 그래요?"
"글쎄"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제7기병대가 우리를 위해 출동했다고 믿고 싶긴 하지만 거기에 돈을 걸진 못하겠는데."
"오, 제발… 낙관적으로 생각해요." 오리엘이 쏘아붙였다.
"미국에선 어떤지 모르겠지만 영국에선요, 만약 수상이나 상공부장관이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를 당했다면 정부가 즉각 수습에 나설 거예요."
그 말에 제이크가 코웃음을 쳤다. "당신 말은 그러니까 미국은 그런 일이 났을 때 대수롭지 않게 처리할 거란 말이오?"
"글쎄요, 알아서 하겠죠. 시리아 정부는 당신과 그들의 장관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군대와 경찰에 수색명령을 내렸을 거예요" 그녀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러니 우린 그들이 우릴 구출하러 오기 전까지 여기서 견뎌내야만 해요."
"오, 물론이오" 그가 놀리듯 중얼거렸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그러냐는 거요. 그냥 여기 망루에 몸을 기대고 앉아 시리아 군대가 몇 분 후면 나타날 테니 성에 접근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소리쳐?"
"제발…. 당신은 불과 하루 전에 내가 한 말을 다 잊어버렸나요?"
오리엘은 제이크의 체념에 분노로 몸을 떨며 소리쳤다. "당신에게 그 20세기 사고방식을 버리라고 내가 신물이 나도록 애기했잖아요. 6백 년 전 십자군이 이 성에 갇혀 잔인한 사라센 인들이 산을 기어 올라오고 있는 걸 봤을 때… 그들이 어떻게 했겠어요?" 그녀는 진정하려 애쓰며 물었다.
제이크는 어깨를 들썩이고는 이 미친 여자를 웃기려 했다. "글쎄, 내 생각엔…" 그는 잠시 망설였다. "다리를 끌어올리고 성의 격자문을 내렸겠지"
"바로 그거예요! 월반해도 되겠군요!" 그녀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가 말도 안된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려는 걸 보며 오리엘이 재빨리 말했다. "그래요. 나도 우리 힘으론 다리를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저 낡은 격자문은 내릴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어떻게 말이오?" 그의 목소리엔 짙은 회의가 깔려 있다.
"그 문은 사슬로 묶여 있어요. 그렇죠? 사슬들은 오래 돼 녹이 슬었죠. 그러니 도끼나 불탄 리무진에서 당신이 주운 쇠지레를 이용해 녹슨 사슬의 연결부분을 깨뜨리는 거예요."
제이크는 그녀의 제안에 머리를 흔들며 잠시 동안 하늘을 응시했다. "당신 손에 모든 걸 맡기겠소, 오리엘. 하지만 그렇게 어리석고 완전히 미친 생각이 제대로 실현될지는 잘 모르겠군!"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자, 시간이 많지 않소. 그러니 빨리 내려가서 정말로 녹슨 격자문을 내릴 수 있을지 알아보는 게 좋겠군."
8
오리엘은 잠시 허리를 펴고 바깥을 살핀 뒤 다시 성의 입구에 있는 망루 구멍에 기름통의 구멍을 갖다 맞췄다. 지난 반 시간 동안 그녀와 제이크는 바쁘게 손을 놀렸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성을 방어할 준비를 거의 마친 상태였다. 아직 테러리스트들이나 그들의 회색 트럭이 보이지 않는 게 좀 아쉬울 정도다.
가능한 한 침착해져야 한다는 제이크의 충고를 가슴에 새기면서 오리엘은 망루 끝으로 걸어가 밖을 살폈다. 오후의 태양이 작열하고 있어서 그녀는 이 상황에서도 우습게 피부를 보호해 줄 크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잘못 본 걸까? 그 회색 트럭이 정말 신기루였던 건 아닐까? 그녀는 저 악당들이 쳐들어오는 걸 기대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힘들여 일했는데 결과가 헛것을 본 것에 불과하다면 제이크가 얼마나 펄펄 뛸지 그를 대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도 분명히 트럭을 봤었다. 그러니….
오리엘이 돌아서서 등을 따뜻한 돌난간에 기댄 채 본체 쪽을 응시했다. 여기선 안마당 구석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지붕 위를 분주히 오가면서 불 위에 나무토막을 집어넣고 있는 제이크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박물관에서 발견한 낡은 고무 타이어들을 태우자는 제이크의 생각은 정말 기발난 것이었다. 그는 타이어를 태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고 그녀에게 말하면서도 지붕 위에 나뭇단을 쌓고 타이어에 불을 붙이는데 성공했다. 타이어가 타면서 시커먼 연기가 하늘 높이 기둥처럼 피어올랐다. 아마 수백킬로 밖에서도 그 연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또 역시 박물관에서 찾아낸 쓰다 남은 하얀 페인트를 이용하자는 제안도 했다.
그의 지시에 따라 납작한 나뭇조각을 붓 대신으로 써서 그녀는 안마당에다 SOS 글자를 크게 썼다. 성을 방어하기 위해 그녀가 제안한 생각에 냉소를 보내긴 했지만 제이크는 곧 아주 실질적인 아이디어들을 짜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성의 격자문을 낮추는 게 불가능하다고 의심하면서도 그는 격자문을 매달고 있는 사슬을 부수기 시작했다. 쇠지레를 집어던지고 도끼로 제일 약해보이는 고리를 끊어 버리려던 시도마저 포기할 때쯤 그녀는 마침내 그가 내지르는 승리의 환호성을 들었다. 동시에 무거운 문이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떨어져 성의 입구를 막아 버렸다.
"너무 흥분할 필요는 없소. 그들이 이 오래된 격자문을 뚫고 들어오는 덴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을 테니까" 그가 녹이 슬어 흔들거리는 격자문을 자세히 들여다본 뒤 그녀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다음번에 할 일을 떠올렸다. 그렇지만 박물관에 있는 기름통을 망루로 옮기자는 생각을 제이크에게 납득시키는 덴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당신, 정말로 그 구멍에다 끓는 기름을 부어 버리자는 건 아니겠지?" 그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오리엘이 기름통엔 기름이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고, 게다가 자신에겐 기름을 데울 방법이 없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녀는 단지 자신들이 아주 급박한 위험에 처할 경우 구멍으로 흘러내려가는 기름에 불을 붙여 악당들의 머리 위에서 불꽃이 타오르게 함으로써 그들을 겁먹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들은 감히 다리를 건너 성으로 들어올 생각을 못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정말로 근사하다고 믿고 있었으므로 제이크가 여전히 머리를 흔들며 미친 여자라느니, 피에 굶주렸다느니, 성을 몽땅 날려 버릴 거라는 등 혼잣말을 계속하자 슬며시 화가 났다.
그렇지만 지금 자신이 참으로 우스꽝스럽게 됐음을 알았다. 기름통에 들어 있는 소량의 석유를 보니 불을 붙여도 저절로 꺼질 판이다. 게다가….
그때 그녀는 제이크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본체의 지붕을 올려다봤다. 그가 그녀에게 오라는 신호를 했다.
"트럭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수가 없어요." 오리엘이 지붕 위로 뛰어올라가 그의 곁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본 게 신기루였던 게 아닌가 의심스러워지는군요." 그가 머리를 저었다. "아니오, 난 방금 다시 그 트럭을 봤소. 이제 20분 후면 이곳에 도착할 거요." 그가 망루 끝으로 걸어가 거리를 가늠해 보며 말했다.
"낡은 트럭이니까 산을 오르느라 엔진이 과열된 것 같더군."
"푸우… 이게 무슨 냄새죠?" 그녀가 얼굴을 찡그리며 코를 싸안았다. 고무가 타는 냄새가 역겨웠다. "자, 이제 뭘 하죠?" 그녀가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것 같아 허전해 하며 물었다.
제이크가 다시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라일라와 그 일당들이 해질 때쯤 도착할 테니 그 전에 우린 뭘 좀 먹어 두는 게 좋겠군."
음식이 먹힐 것 같진 않았지만 오리엘은 그의 제안을 따르기로 했다.
"더 먹고 싶지 않소?" 얼마 후 제이크가 물었다.
"오, 아뇨. 정말로 더 이상은 먹을 수가 없어요. 저 샐러드 때문에 내가 점점 토끼로 변하는 것 같은 기분이라니까요."
제이크가 웃음을 터뜨리며 일어나 불 속에 장작을 더 넣고 옆으로 돌아왔다.
"나도 내 말이 바보같이 들릴 거라는 건 알지만 저 테러리스트들이 우릴 납치하러 오는 거라면 빨리 좀 왔으면 좋겠어요." 오리엘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원래 기다리는 게 제일 힘든 법이오." 그가 말을 멈추고 재빨리 일어섰다. "그래, 분명히 엔진 소리를 들었어."
두 사람은 망루의 끝으로 달려갔다.
저 멀리 도로를 내려다보며 오리엘은 그의 말이 맞았다는 걸 알았다.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는 건 분명히 장관을 납치했던 그 회색 트럭이다. 자신을 끌어당겨 안는 제이크의 강한 팔 힘에 안도감을 느끼면서 오리엘은 트럭이 리무진의 잔해가 남아 있는 좁은 노변에 멈추는 걸 응시했다.
"이제 우린 뭘 해야 하죠?" 오리엘이 긴장해서 속삭였다.
제이크가 놀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목소리를 낮출 필요는 없소. 저들이 우리 목소리를 들을 만큼 가까이 있는 건 아니니까" 그가 트럭 밖으로 나오는 남자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렇지만 뭔가 해야 하잖아요?"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은 중세 전의 전문가요, 스위트하트. 옛날 십자군들처럼 우리는 바리케이드를 치고 이 안에 숨어 있소. 그러니 다음에 어떻게 할지는 전적으로 저들한테 달린 거요."
"글쎄, 라일라와 얘기를 해보는 건 어떨까요?" 오리엘이 제안했다. "나도 그녀가 나쁜 여자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게 문제요!" 그가 초조한 듯 손가락을 튕겼다. "대체 라일라는 어디 있지? 그녀는 확실히 조직의 브레인인데 저들과 같이 있지를 않잖아? 우리가 이렇게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었나?"
눈앞에 벌어진 정경을 자세히 내려다보던 오리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잠시 후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제이크에게 고개를 돌렸다.
"우린 운이 없군요. 난 그녀가 하이힐을 신고 드레스를 입은 모습으로 나타날 줄 알았어요. 하지만 내 생각엔 저기 트럭 옆에서 이쪽을 가리키며 팔을 흔들고 있는 사람이 라일라 같아요."
"당신 말이 맞아." 제이크가 우울하게 말했다.
그들이 점점 가까이 옴에 따라 그는 라일라와 그녀의 3남자동료들이 똑같이 얼룩덜룩한 야전전투복을 입고 있다는 걸 알았다. 누가 그들의 리더인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라일라가 남자들에게 성으로 들어가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꼭 전투라도 치르고 오는 것 같군요" 오리엘이 중얼거렸다.
갑자기 제이크가 그녀의 팔을 잡아 재빨리 망루의 그늘 속으로 몸을 숙이게 했다.
"저 악당들이 가까이 다가왔으니 이젠 조심해야 하오. 쓸데없는 모험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데 뭐라고 말했소?"
"글쎄 그럴 리는 없겠지만 시리아 정부가 베이루트에서 할렘을 찾고 있는 건 아닐까요? 라일라와 그 일당들이 문자 그대로 전장에서 막 돌아온 것 같잖아요?"
제이크가 어깨를 들썩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카드라서 날 납치하러 온 거라면 상황이 더 어려워질 거요. 저들이 굉장히 난폭해져 있을 테니까. 그러나 우린 불필요한 모험을 해선 안 되오, 알았소?"
"좋아요" 그녀가 침착해지려 애쓰며 말했다. "난 중세기의 전쟁에 관한 책을 써왔어요. 그 주제를 연구하는 것과 실제로 그 상황에 처한 것 사이에 굉장한 차이가 있군요."
그녀가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중세기의 전쟁에 대해서 완전히 안다고 생각했는데….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알 것 같소" 제이크가 위로하듯 말했다. "그런데 성 밖에서 들려오는 분노의 외침으로 봐서 우리가 격자문을 내린 걸 저 달콤한 라일라가 발견한 것 같군."
잠시 후 갑자기 3대의 제트기가 나타나더니 그들이 머리 위를 지나 저쪽 산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오리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열심히 팔을 흔들었다.
"너무 흥분하지 말아요" 그가 경고했다. "설사 우리를 발견한다 해도 여기엔 비행기가 착륙할 만한 곳이 없소.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전투기가 아니라 튼튼한 탱크요. 그러니 우린 싫어도 라일라를 상대해야 하오."
"라일라가 확실히 충격을 받은 것 같죠?" 오리엘이 침착하려 애쓰며 제이크에게 불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여잔 우리의 모토가 <항복은 없다>라는 걸 알아야 해요."
"오, 달링" 그가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겨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난…" 그러나 그의 나머지 말들은 다시 한 번 머리 위를 날아가는 제트기의 엔진 소리에 묻혀 버렸다.
"오, 맙소사. 저 아래 문지기네 집으로 내려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봐야겠어요." 오리엘이 비행기 소음 때문에 못 들을까 봐 그에게 소리쳤다. 본체의 가파른 계단을 뛰어 내려가 안마당을 가로지르면서 그녀는 시리아 공군에 대한 화를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녀는 제이크가 하려던 말이 자신과 사랑에 빠졌다는 말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망할 놈의 전투기가 소음을 내는 바람에 미처 그 말을 듣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와 제이크의 관계를 심각하게 고려할 때가 아니다. 오리엘은 서둘러 성문 위의 망루로 올라갔다. 돌 틈으로 바깥을 내다보던 그녀는 한순간 무서움도 잊고 눈앞의 정경을 정신없이 쳐다보았다.
3명의 무장한 남자들이 무리를 지어 좁은 철교 저편에 모여 있었다. 라일라의 위협과 큰소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처음 오리엘이 그랬던 것처럼 깊은 협곡을 가로지르기가 겁나는 모양이다.
망루 바닥에 있는 구멍에 기름통을 눕혀 놓은 곳으로 기어가면서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망설였다. 저 남자들이 다리를 건너는 걸 무서워한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누군가 한 명이 용기를 내 다리를 건너온다면 다음엔…? 제이크 말처럼 저 낡은 격자문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커다란 장방형의 구멍을 내려다보면서 그녀는 2명의 남자가 다리를 건너오는 소리를 들었다. 저들이 격자문을 밀치고 성 안으로 들어오는 건 시간문제야! 더 이상 생각할 여유가 없다. 오리엘은 석유통의 마개를 돌려 통을 기울이곤 기름을 구멍을 통해 아래로 흐르게 했다. 미리 준비해 뒀던 기름을 적신 헝겁에 그녀가 가지고 온 제이크의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헝겊이 활활 타오르는 걸 확인한 뒤 오리엘은 어두운 구멍 속으로 헝겊을 집어넣었다.
나중에 그녀는 이번에도 제이크의 말이 맞았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런 위험한 물질은 함부로 다뤄선 안 된다던 경고를 무시했던 것이다. 그녀는 기름에 불이 붙으면 그렇게까지 불꽃이 치솟을 줄 몰랐다. 예상 밖으로 불길과 뜨거운 열기가 구멍을 통해 그녀가 웅크리고 있는 곳까지 치솟았다. 불길이 치솟자 그녀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 석유통을 구멍 아래로 차 넣었다. 다음 얼마간은 모든 게 흐릿했다. 충격으로 멍한 눈으로 그녀는 2남자가 서둘러 다리를 건너더니 뒤에서 소리쳐 부르는 라일라의 소리도 무시하고 밑에 세워 둔 회색 트럭으로 달려가는 걸 지켜봤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강력한 폭발이 있었다. 마치 지구 전체가 흔들리는 것처럼 망루가 심하게 요동을 쳤다.
그 순간 오리엘은 자신이 제이크의 팔에 안겨 있음을 알았다.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괜찮은지 묻고 있었다.
"난… 괜찮아요"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무슨 일이죠?"
그의 넓은 어깨가 웃느라 들썩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 주지. 내 일생에 그렇게 우스운 장면을 본 건 오늘이 처음이오." 그가 너무 웃어대느라 흘러나온 눈물을 훔치며 회색 트럭을 가리켰다. 노면을 벗어나 급히 사라져가는 트럭 뒤로 라일라와 또 한 명의 남자가 소리치며 쫓아가고 있었다. 트럭을 세우기 위해 손을 흔들고 고함을 질러대는 것 같았지만 차에 탄 남자들에겐 트럭을 세울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다.
"저게 전부는 아니오. 이 미친 여자 같으니!" 제이크가 그녀를 망루의 끝으로 이끌면서 웃다가 목을 켁켁거렸다.
"빨리 구출되기만을 기원하는 게 좋을 거요. 당신은 저 기름통에 불을 붙여 라일라와 나쁜 놈들에게 겁을 줬을 뿐만 아니라 협곡 위의 다리마저 날려 버렸으니까!"
오리엘이 창밖을 내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 속으로 그녀가 늘 봐온 셔웰 강이 보였다. 비가 그칠 것 같지 않다. 외국 사람들은 영국인이 날씨에 강박적이라고 비난하지만 이렇게 축축하고 항상 젖어 있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을 어떻게 비난 할 수 있단 말인가? 2달 전 시리아에서 돌아온 이래 그녀는 하루인가 이틀 정도만 해가 비치는 날을 맞았고 나머지 날들은 언제나 무거운 먹장구름이 드리웠거나 지치지도 않고 쏟아지는 빗줄기에 갇혀 있어야 했다. 그러나 말거나 무슨 걱정이야? 그녀가 우울하게 자문했다. 회색 하늘은 그녀의 지루한 일상을 반영하는 듯했다. 심지어 오늘 차임에 해야 할 강의마저 지겨울 정도다. 중세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학생들만이 이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강의할 <십자군왕군과 그 융성> 이라는 내용을 들으러 올 것이다. 설사 아무도 출석하지 않는다해도 상관없다. 그녀는 자신이 강의해야 하는 내용을 완전히 잊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협곡 뒤의 철교를 날려보낸 이후 그녀의 전 인생이 급격히 내리막을 걷기 시작한 게 떠올랐다. 물론 그 당시엔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녀와 제이크는 라일라와 그녀의 동료들이 허둥지둥 도망가는 모습에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저장소의 차가운 얼음물에 잠시 몸을 담근 후 그들은 본체로 올라갔다. 둘 다 오늘 하루의 드라마틱한 사건들 때문에 지치고 피곤해져 있었다.
삼베 주머니들을 지붕으로 가져가 지금 막 저물어가는 붉은 해를 보자는 건 제이크의 생각이었다. 둘은 서로 말없이 그 순간의 평화스러움과 둘 사이에 흐르는 동지의식을 즐겼다. 밤이 가져다주는 정적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감사하며 그들은 서로 껴안은 채 깊은 잠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갑자기 섬광 같은 헬리콥터의 불빛이 나체로 잠들어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불빛에 서로 얽혀서 자고 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오리엘은 자신의 일생 중 가장 끔찍스럽고 당황스러웠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심지어 그 일이 일어난 지 2달이 지난 오늘에도 시리아 공군의 헬리콥터가 도착했던 그 순간만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2대의 헬리콥터는 머리 위를 돌아가 한 대는 성 밖 노면에 착륙했고 다른 한 대는 계속 상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이거야말로 진짜 악몽이었다. 그녀와 제이크는 너무나 지쳐 있었기 때문에 헬리콥터가 오는 소리를 그들의 머리 위를 선회할 때까지 전혀 듣지 못한 채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잠결에 눈을 뜬 오리엘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덴 시간이 꽤 걸렸다. 귀를 울리는 모터 소리와 다마스쿠스의 기지로 그들을 찾았다고 보고하는 조종사의 확성기 소리들 속에서, 거기다 자신의 벗은 몸을 따갑게 비추고 있는 탐조등 불빛까지 가세해 정신을 멍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오리엘은 제정신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아래 있는 방으로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떨리는 손으로 손에 잡히는 옷가지를 주워 입은 후 그녀는 재빨리 자신의 핸드백과 제이크의 옷을 집어 지붕으로 올라갔다. 오리엘의 손에서 바지와 셔츠를 받아드는 제이크의 얼굴에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당혹스런 표정이 어렸다. 헬리콥터에서 내려뜨린 로프를 타고 지붕으로 내려왔던 2명의 아랍 군 장교들의 얼굴에 가득하던 그 능글능글한 미소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조여든다.
제이크가 서둘러 옷을 입었고 얼마 후 그들 둘은 헬리콥터 위로 끌어 올려졌다. 일이 너무 빨리 진행된데다 헬리콥터 소리가 너무 커서 두 사람은 서로 애기를 나눌 기회를 갖지 못했다. 심지어 다마스쿠스 근처에 있는 공군기지에 도착한 이후에도 제이크가 너무나 급하게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는 통에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남자에게 잘 가라는 인사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다음 24시간 역시 그녀에겐 악몽이었다. 물론 시리아 정부 관계자들은 그녀에게 입을 옷가지와 묵을 호텔, 그리고 유럽으로 돌아갈 수 있게 1등석 비행기 표를 구해주는 등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들은 제이크에 대해선 일절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그렇게도 애원했지만 그 미국인 은행가에 대한 시리아 정부의 공식적인 답변은 침묵 그 뿐이었다. 그녀가 시리아를 떠나기 전 가까스로 알아낸 정보로는 내무장관이 살아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자기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그녀는 할림 카두르가 베이루트에서 구출됐다는 소식에 만족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부터 오늘까지 제이크 윈스롭 에머슨 3세에게선 아무런 말도, 기별도 들려오지 않았다. 무거운 한숨과 함께 오리엘은 자신의 책상가로 걸어갔다. 난 얼마나 바보였던가? 강의 자료를 챙기며 그녀가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길고 지루한 그 2달 동안 그녀의 제이크에 대한 사랑은 식기는커녕 강도가 더해갔다. 그는 오리엘의 일생 중 가장 위험하면서도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맛보게 해준 남자였다. 제이크도 자신과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 거라는 기대가 비이성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 이 어리석은 짓을 계속할 거지? 책과 노트를 챙겨 문을 나서며 그녀가 자문했다. 제이크에 대한 대책없는 갈망으로 마음을 찢기우는 대신 그녀는 자신의 두발로 서서 그나마 이곳 옥스퍼드엔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에나 감사할 일인 것이다.
어쩌자고 내가 그에게 정신을 빼앗겼을까? 난 자신을 완전히 웃음거리로 만들었던 거야!
자전거를 타고 다리를 건너갈 때도 빗줄기는 그칠 줄을 모른다. 지나던 차가 튕긴 물에 그녀의 옷이 흠뻑 젖었다. "오늘은 정말 재수가 없는 날이군!" 이러다간 강의시간에 늦을 것 같다.
오리엘은 식물원을 지나 과학관으로 올라가는 도로에서 급하게 자전거의 페달을 밟았다. 그녀의 생각이 다시 제이크에게로 옮겨졌다.
시간이 흐르고 일에 파묻히다 보면 그의 곁에 있고 싶다는 열망과 자신의 몸을 애무하던 그의 손길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잊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결과는 절망이었다. 낮엔 그렇다 하더라도 긴긴 밤들은 정말로 견디기가 힘들었다. 새벽에 간신히 잠이 들었다 일어나 보면 흘러내린 눈물로 뺨이 축축하곤 했다. 휴대용 컴퓨터를 내려 대리석 계단을 올라가면서 오리엘은 강의 이외의 다른 것들은 생각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천장이 높고 바로크풍의 장식이 돼 있는 방으로 들어가 강의대에 노트를 내려놓으면서 그녀는 학부생들이 잡담을 그치고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
재빨리 머릿수를 세어보니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15명은 온 것 같다. 대부분의 동료교수들이 그러듯 그녀도 자신의 강의가 지루해져 수강신청을 하는 학생들이 거의 없어지는 날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출석한 학생들을 보니 아직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오리엘은 가능한 한 짧게 압축시켜서 강의를 진행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심호흡을 크게 한 뒤 그녀는 경쾌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안녕, 여러분. 오늘은 고트프리 공작에 의해 세워진 예루살렘 왕국와 프랑크 족의 군대에서 시작해 살라딘이…"
다리가 얼어붙는 것 같아! 감기에 걸린 게 틀림없어! 오는 길에 그렇게 빗줄기가 쏟아졌으니 그럴 만도 하지. 15분 후 강의 노트를 넘기면서 그녀가 멍하니 생각했다.
"볼드윈 2세가 즉위하면서 예루살렘 왕국은 그 전성기를 맞았어요. 그러나…"
그때 강의실의 뒷문이 활짝 열리는 소리에 그녀는 강의를 멈췄다. 무심코 고개를 들던 오리엘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문가에 서 있던 장신의 남자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지면서 숨이 멈췄다.
9
나뭇잎처럼 떨면서 오리엘은 자신에게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넓은 어깨의 키 큰 남자를 멍청히 응시했다. 그의 단호한 발소리만이 쥐죽은 듯 조용한 방의 정적을 깨뜨렸다. 심지어 학생들조차 그녀의 얼어붙은 듯한 얼굴과 휘청거리는 몸을 보곤 그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가 자신의 옆에 와 멈춰 섰을 때야 그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어 말을 꺼내려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끽끽거리기만 할 뿐이다.
"제이크…? 여기서 뭘 하는 거예요?" 격렬하게 떨리는 다리를 지탱하기 위해 강의대를 꼭 붙잡으며 그녀가 간신히 물었다.
"바보 같은 질문이군. 물론 당신과 얘기를 하기 위해서지" 그의 깊이 있는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그럴 리가… 내 말은 그러니까…" 그녀가 쓰러지지 않으려 애쓰며 숨을 헐떡였다.
"지난 6주일 동안 난 당신을 찾기 위해 별짓을 다 했었소" 그가 거칠게 말하며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미안하오. 스위트하트. 하지만 마침내 내가 여기 왔소."
"그렇지만 난 … 이해를 못하는군요. 난… 지금 수업중이예요"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 애쓰며 그녀는 학생들이 그들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면에 굉장한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가 갑작스레 출현한 것이 일상적인 강의에 뭔가 재미있는 걸 던져 준 것이다.
"난 당신이 왜 내 편지며 전화에 일절 응답을 하지 않았는지 알아야겠소." 그가 소리쳤다.
"난 편지며 전화를 받은 기억이 없어요. 게다가 오, 제발 목소리 좀 낮춰요!" 학생들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알만하다는 미소에 얼굴이 선홍색으로 붉어지는 걸 느끼며 그녀가 급박하게 말했다.
"우린 얘기를 해야 해!"
"지금은 당신과 얘기를 할 수 없어요…. 이 강의를 끝내야 해요" 그에게서 팔을 빼내려 애쓰며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제이크가 코웃음을 쳤다. "당신의 강의엔 관심 없어!" 그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려퍼졌다.
학생들 중 한두 명에게서 얘기를 들어 보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 맙소사!" 그녀가 신음했다. "나중에 얘기할게요. 그러니 제발… 제발 나가 줘요."
잠시 동안 그녀를 강렬하게 내려다보던 제이크가 학생들 쪽으로 돌아섰다.
"여러분의 수업을 방해해서 미안하오." 그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난 여러분들이 내 사정을 알면 이해해 주리라 믿소. 지금 난 굉장히 절망적이거든." 그리고는 오리엘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를 자신의 품안으로 끌어당겼다.
"제이크!" 그녀가 숨을 멈췄다. 그러나 다음 말은 자신의 입술을 막아 버린 그의 입술 때문에 할 수가 없었다. 강철같이 조여 오는 그의 손길을 벗어나려 애쓰면서 그녀는 복종을 요구하며 타오르는 그의 키스에 온몸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점차 그의 거친 키스가 누그러지면서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그의 가슴속에서 오리엘의 심장이 다시 요동을 치고 맥박이 심하게 뛰었다. 갑작스런 욕망의 물결에 휩쓸리면서 그녀는 그의 관능적인 입술에 반응하는 자신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환호성에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제이크가 천천히 검은 머리를 들어 그녀에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보냈다. 그 큰 방에 휘파람소리와 손뼉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리엘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앞이 흐릿하고 숨쉬기가 어려웠지만 그녀는 자신의 허리를 꽉 잡고 있는 그의 손길만은 의식하고 있었다. 그가 받쳐 주지 않았다면 분명히 쓰러졌을 터였다.
"내 생각엔 우리가 빨리 결혼할수록 좋을 것 같은데, 당신은 어떻소?"
오리엘이 숨을 멈췄다. "뭐라고요…?"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방금 … 뭐라고 말했어요?"
"당신을 사랑해, 오리엘. 나와 결혼해 달라고 부탁했소." 제이크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주위의 환호성이 사라졌다. 남학생들보다 낭만적이기 마련인 여학생들은 몽포르 박사가 어떻게 대답하려는지 숨을 죽인 채 기다리고 있었다.
몽포르 박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우선 그녀는 뇌가 기능을 정지한 것 같아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육체는 제이크의 키스가 남겨 놓은 여운에 여전히 떨고 있는 참이다.
정말로 그가 내게 결혼하자고 한 걸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이건 다 끔찍한 환각일 뿐이야! 잠시 후면 깨어나게 될 환각. 깨어나고 나면….
제이크의 입술이 비틀렸다. "자, 스위트하트, 날 힘들게 하지 말아. 나와 결혼해 주겠소? 예스요, 노요?" 그가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투로 물었다.
"이건 미친 생각이에요. 난 할 수가… 내 말은 … 당신의 제안은 실현가능성이 없다는…"
"예스? 아니면 노요?" 제이크가 거칠게 요구했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강력한 힘과 그의 빛나는 눈동자가 그녀에게서 의지력을 박탈하고 있었다.
"당신이 그를 원하지 않는다면 내가 그를 가질게요!"
붉은 머리카락의 예쁜 여학생 하나가 소리쳤다. 그 소리에 다시 휘파람과 환호성이 난무했다.
오리엘의 뺨이 당혹스러움에 달아올랐다. 이 남자는 정말 어찌할 수가 없다. 대체 내가 어떻게 말해야 한단 말인가? 그녀에겐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했다.
"오리엘! 이 사람 미치게 만드는 여자 같으니!" 그가 신음하며 그녀를 거칠게 흔들어댔다. "난 대답을 듣고 싶어, 지금 당장!"
"오, 하느님! 좋아요, 하겠어요.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숨을 몰아쉬며 그녀가 대답했다. "이제 제발 나가 주겠어요?"
"오, 안돼" 제이크가 승리감으로 가득 찬 웃음을 터뜨렸다. "자, 학생들, 수고했어요. 오늘 수업은 이것으로 끝이요." 그가 학생들에게 따듯하면서도 행복해하는 미소를 보내면서 말했다.
그 미소에 한 여학생을 제외하곤 모두 환호성을 질러댔다. "만약 그녀가 마음을 바꾸면… 제 이름은 수지 해리슨이에요. 발리올에 살죠."
"그 제안 고맙군. 그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곧 찾아가지!" 제이크가 웃으면서 오리엘의 컴퓨터를 집어들고 방밖으로 그녀를 서둘러 끌어냈다.
"내 자전거는 어떡해요?" 대리석 계단을 내려와 커다란 롤스로이스에 밀려 들어 가면서 그녀가 소리쳤다. "이건 정말 말도 안돼요!"
"납치가 중범죄에 해당한다는 걸 알려 주고 싶군요!" 차가 대학을 벗어나는 걸 보며 그녀가 선언했다.
"난 저기엔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
잠시 후 리무진이 호텔 앞에 멈추자 그녀가 중얼거렸다.
"지금 뭘 하려는 거예요?" 제이크가 호텔 방문을 닫고 그녀를 세게 끌어당기자 그녀가 항의했다. 그의 어깨가 웃음으로 들썩였다. "당신의 옷을 벗기고 오늘 하루 내내 당신과 열정적이고 미친 듯한 사랑을 나눌 생각이지!" 그가 그녀의 레인코트를 벗기고 드레스 지퍼를 내리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그녀를 침대 쪽으로 이끌었다. "뭐 반대할 게 있소?" 제이크가 그녀를 팔에 안더니 거대한 더블 침대 위에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오, 아뇨. 전혀 없어요!" 오리엘이 행복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술이 주는 따뜻한 촉감이야말로 그녀가 너무나 불행했던 지난 몇 주일 동안 굶주렸단 모든 것이었다.
"달링…?" 그녀의 마지막 옷을 벗기는 그의 손길에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불렀다.
"당신은 아직 시리아를 어떻게 벗어났는지 말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지금은 안 돼. 나중에 얘기해 주지"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자신의 셔츠 단추를 끄르는 오리엘의 손길에 그의 몸이 흔들렸다., 그녀가 넓은 가슴의 곱슬거리는 검은 털을 어루만졌다.
"나중에… 아주 한참 후에…" 그가 쉰 목소리로 속삭이며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녀의 몸속 깊은 곳에 불길이 타오르며 주위의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오직 하나 실재하는 건 그의 구릿빛 육체와 관능적인 접축이 주는 황홀감, 그리고 그가 그녀의 내부에 일으킨 흥분뿐이다. 열정의 폭풍이 지나간 후 그들은 지구가 흔들리는 듯한 절정감을 맛보았다.
"좋아요. 나도 시리아 정부가 장관의 납치사건 때문에 무척 당황했다는 건 알겠어요. 미국과 국제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당신에 대해 함구한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여전히" 오리엘이 그 쪽으로 비누거품을 불어 보내면서 덧붙였다. "내게 연락하는 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는진 모르겠군요."
"강의실에서도 말했지만 난 지난 6주일 동안 당신과 연락하기 위해 별짓을 다했었소." 제이크가 뜨거운 물을 더 틀었다. "어때?"
"흐음… 좋아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난 정말로 아무런 편지며 기별을 받은 적이 없어요. 사실 당신이 다마스쿠스 근교에서 헬리콥터를 내린 이후 오늘 아침까지 난 완전한 침묵 외에는 아무 소식도 못 들었어요."
심지어 지금도 그녀는 이것이 꿈이 아니란 걸 완전히 확신하진 못하고 있었다. 여기 이렇게 그 옆에 누워 한가로이 목욕을 즐기는 게 정말 사실이란 말인가?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맹세했던 그 사람을 지금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정말 미친 듯이 사랑하고 있다니, 확실히 비논리적이야. "옥스퍼드에 얼마나 많은 턴불이 있는지 알고 있소? 굉장히 많더군. 아, 물론 그들 모두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봤으니 알 수밖에"
"오, 맙소사, 제이크" 그녀가 흐릿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난 당신을 못 찾아 거의 미칠 지경이었소. 마침내 당신 집주소를 알아내 전화를 걸었지만 당신이나 당신 이모 누구와도 통화를 할 수가 없었어. 언제나 외국인인 듯한 사람이 전화를 받았지. 그렇지만 점차 당신 이모인 해리어트가 여전히 해외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 당신에 대해선 아무도 모르더군. 단지 당신이 집에서 잠을 자지 않는다는 것 외엔 말이오. 내가 그 말에 어떤 기분이었는지 당신은 모를 거요"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노려보았다.
"난 죄가 없어요!" 그녀가 재빨리 말했다. "피신자들로 집이 붐비는 통에 집에 있을 수가 없었어요. 난 지난 6주 동안 대학에서 그야말로 금욕적인 생활을 했어요!"
"당신같이 재앙을 몰고 다니는 여자가, 게다가 대단히 지적이고 섹시하기도 한 여자가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고? 온통 대학가를 휘저어 놨을 텐데. 난 믿을 수가 없어."
"정말 난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뺨이 붉어졌다.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릴 수가 있었겠어요? 당신에게 그렇게 빠져 있었는데?"
"오, 스위트하트!" 그가 한숨을 쉬며 그녀를 세게 끌어안았다. 자신의 입술을 강렬하게 내리누르는 그의 입술에 오리엘은 우습게도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빨리 당신 곁으로 날아오고 싶었지만 시간이 필요했소. 당신이 어느 대학에 있는지 말해 줬어야 말이지"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야 당신을 찾아낼 수 있었던 거요"
"이젠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겠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침에 학생들이 입을 다물 줄 모른 걸 당신도 봤죠? 특히 그 수지 해리슨은 더 하더군요." 그녀가 씁쓸하게 덧붙였다.
"당신, 지금 질투하는군!" 그가 놀리며 웃었다.
"아니, 절대로 아니에요!"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난 단지 학교에 퍼질 소문을 걱정하는 거예요. 학장실로 불려갈 게 뻔하거든요."
"긴장할 거 없소. 다시 거기로 돌아갈 일은 없을 테니까. 당신은 그저 여권만 챙기면 되오."
"우스운 소리 말아요. 물론 난 학교로 돌아갈 거예요."
"아니"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은 나와 결혼해야 돼. 그리고 아주 긴 신혼여행을 즐긴 후 우린 로마에서 사는 거요."
그녀가 욕조에서 일어나 앉아 놀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우리가 어쩐다고요?"
"좋소, 처음부터 차근차근 얘기해야겠군." 그가 욕조에서 나와 가운을 입었다.
"날 사랑하오?"
"그래요. 당신도 알잖아요."
"당신은 나와 결혼할 거요. 그러니…"
"자, 잠깐만요!" 일어선 그녀의 몸에 그가 타월을 둘러주었다. "우리에겐 공통점이 없어요. 그러니 잘될 리가 없어요. 게다가 난 여기서 생활하고 당신은 미국에서 사업을 …"
"당신을 사랑해, 오리엘. 당신을 사랑한다는 그 사실 외엔 중요한 게 없소. 당신 없인 내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 게다가 당신은 많은 증인들 앞에서 나와 결혼한다고 맹세를 했어. 물론 난 당신이 그 약속을 지키게 할 거야."
그가 그녀의 수건 속으로 손을 미끄러뜨려 떨리는 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오, 제이크, 이건 불공정해요" 그녀가 신음했다.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제이크가 그녀를 안아 올려 침대로 데려갔다. "자, 스위트하트, 내 얘기를 먼저 들어줘. 그런 다음에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거요. 어때?"
"좋아요."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우리가 시리아에서 많은 시간을 같이 지낸 건 아니었지만 난 마치 오랫동안 당신과 살아온 듯한 느낌이었소. 처음엔 나도 우리의 삶이 너무나 달라 혼란스러웠다는 걸 인정해야겠군. 당신도 이곳 옥스퍼드에서의 학구적인 삶을 떠나지 못할 거라는 걸 깨달은 거요. 물론 당신이 미국에서 강의를 하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여러모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지 않더군." 그가 잠시 뜸을 들였다. "샴페인 한잔 어때?"
"와,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군요"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병에서 코르크 마개를 비틀어 뽑아내며 제이크는 여기까지 발전한 자신에게 축하를 보냈다. 오리엘이 보스턴을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그곳 대학의 학구적인 분위기를 좋아할 거라는 것도 확실했다. 문제는 자신의 아들이 점찍어준 마르시아 로웰과 결혼하는 대신 젊은 영국 여자와 결혼하게 됐다는 소식에 그의 어머니가 보인 신경질적인 반응이었다. 그곳에 있는 집엔 몇 년 후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때쯤엔 아내와 함께 아이들의 손을 잡고 돌아가게 될 것이다. 물론 그는 어머니를 대하는 법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새 아내는 거만한 노부인의 태도에 상처를 받을 게 뻔하다.
"그런데…" 그가 오리엘에게 잔을 건네며 말했다. "아기들을 가지는 걸 어떻게 생각하오? 난 혼자 자라서 3명이나 4명쯤이 좋을 것 같은데, 음?"
"글쎄요…, 나도 무척 외롭긴 했지만…"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둘 정도가 좋지 않을까요? 아들 딸 한 명씩…"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오, 이런, 난 참 운이 좋군! 그런데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그가 열정적인 키스를 퍼부으며 물었다.
"당신은 방금 옥스퍼드와 보스턴을 버렸어요. 이젠 로마에 대해 말할 차례 같군요."
"당신이 이해해 줬으면 하는데…. 시리아에 가기 전까지 난 내 삶에 만족하고 있었소. 하지만 사람 미치게 만드는 영국 여자를 만나면서부터 내 삶이 지루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지" 그가 방안을 왔다갔다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난 내가 은행가가 아닌 뭔가 흥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함을 깨달았소. 그래서 정부 관계자들과 접촉을 했고, 다행히 내가 부유한 은행가라는 사실이 내 앞길을 가로막지는 않더군" 그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당신 눈앞에 미래의 이탈리아 주재 미국 대사가 서 있게 된 거요."
"오, 맙소사!"
"물론 앞으로 의회의 인준을 받아야 하고 이탈리아어 수업도 열심히 해야겠지." 그녀가 입을 열려는 걸 보며 그가 재빨리 물었다. "플로렌스나 베니스를 여행하는 건 어떻소?"
오리엘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당신은 중세역사를 전공했잖소? 십자군이니 중세기의 전쟁이니 하는 책까지 썼으니 이젠 싫증이 날 만도 한데…" 그가 동의하듯 신음하는 그녀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 로렌조 데 메디치나 마키아벨리… 어…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어쨌든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겠소?"
"오, 제이크, 이탈리아 역사에 대해 굉장히 공부했군요."
"그래. 정말 엄청나게 복잡하더군. 그러니 당신은 오랫동안 바쁘게 지내게 될 거요. 자, 어떻게 생각하오?" 그가 침대로 다가오며 물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나타난 불안과 긴장의 표정을 보며 자신이 더 이상 그를 놀릴 수 없음을 알았다. "제이크, 당신을 사랑해요!" 그녀가 팔을 그의 목에 두르며 소리쳤다. "당신하고 결혼하게 돼서 정말 행복해요. 내가 정말로 이탈리아 대사의 아내역을 잘 해낼 수 있을지…"
기쁨의 탄성을 지르며 그가 오리엘의 얼굴에 열렬한 키스를 퍼부었다.
"제발, 지금은 겨우 오후 2시예요. 너무 소리가 크잖아요?"
"밖에는 비가 오고 할 일도 없으니 조용히 침대에 있는 게 좋겠군. 어때?" 그가 천천히 타월을 벗겨 그녀의 날씬한 몸을 드러냈다. 부풀어오는 크림 빛 가슴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빛났다.
"정말로 해야 할 일이 없다면…" 그녀의 몸이 기대로 떨렸다.
"없고말고!"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오리엘의 몸을 탐색하는 그의 목소리가 열정에 흔들렸다. "35살을 넘은 후론 젊은 시절의 기력이 아닌데 지금부터 아이들을 낳는 예술을 실습해 봐야 하지 않겠소?"
"좋아요!" 점점 강렬해지는 애무의 손길에 몸을 떨며 그녀가 숨을 삼켰다.
"아직 얘기하지 않은 게 있소" 그가 쉰 목소리를 냈다.
"당신이 꼭 알아둬야 하는 건데…, 우리 집안엔 쌍둥이만 있는 게 아니오. 먼 사촌 한 명은 실제로 3쌍둥이를 낳았소."
"3쌍둥이…? 오, 맙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