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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산의 딸

핫산의 딸

Penny Jordan

 

1

"이걸 저에게 주시는 거예요? 아빠, 저를 너무 응석받이로 대하지 마세요." 다니엘은 입을 뾰족이 내밀면서, 큰 키에 아랍 옷을 걸치고 콧수염을 기른 계부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 계부는 딸의 손에서 다이아몬드의 펜던트를 받아 그녀의 가는 목에 걸어 주면서 말했다. "너와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다니엘, 그래도 내게는 네가 친딸이나 다름없지. 그래서 네 응석을 받아 주는 것이 즐겁단다. 이런 목걸이 하나 사주는 정도를, 응석을 받아 주는 거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계부는 미소 지었다. "사실은 좀 더 네게 잘 어울리는 걸 선물하고 싶었다. 네 눈동자 빛깔의 에메랄드라든지, 흰 살결을 돋보이게 해줄 페르시아만산 진주 같은걸."

다니엘은 정말 아빠에겐 못 당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웃었다. 다니엘의 친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 그리고 그녀가 엘 세 살 때 어머니는 당시 근무하고 있던 영국의 석유회사가 주최한 리셉션에서 석유왕 세이크 핫산 이븐 아하마드와 알게 되어 결혼했다.

다니엘과 계부는 곧 의기투합했다. 세이크에게는 결혼 경력이 있었으나 자식은 없었다. 어린애가 생기지 않자 아내 쪽에서 먼저 이혼을 요구한 모양이었다. 세이크가 다니엘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것도 그런 사정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런던에 거처를 정하고 석유회사를 경영해서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그 석유는, 그의 형이 통치하고 있는,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나라 카타르에서 생산되는 것이었다.

계부의 집안은 그의 재혼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으나 다니엘은 그런 느낌을 받았다. 런던의 세인트 존즈 우드에 있는 산뜻한 아파트나 다니엘이 다니던 학교 부근에 있는 도셋의 별장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집안이 세이크의 결혼을 어떻게 받아들였든 간에 그의 경영 수완을 높이 사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막대한 거래를 세이크 한 사람에게 맡길 리가 없는 것이다.

계부는 가끔 본국에서 오는 손님을 초대하긴 했으나 다니엘은 좀처럼 얼굴을 나타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첫째로 다니엘이 스위스의 신부 학교에서 돌아온 지 2년밖에 되지 않았고, 둘째는 사업 관계의 모임에 자기의 아내와 딸을 끌어들이기 싫어하는 세이크의 성격 때문이었다.

부녀간의 첫 충돌의 원인도 따지고 보면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래서 다이아몬드의 펜던트를 선물한 것도 말하자면 화평 공작의 일환이라는 것을 다니엘은 알고 있었다.

스위스의 신부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다니엘은 새로운 일을 찾으려는 의욕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계부는 이 사실을 알고 놀랐다. 그는 아버지의 체면을 손상시킬 셈이냐고 말하면서 강경하게 말렸다.

다니엘은 어머니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서양의 처녀들은 누구나 자신의 일을 갖고 싶어 한다는 것고, 결혼 전이라도 부모의 도움을 받기 싫어한다는 것을 어떻게든 계부에게 납득시키고 싶었다.

계부의 대답은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다니엘도 단념하지 않았다. 그녀가 너무나 완강하게 버티자 계부는 마지못해 다니엘이 요리 학교에 다니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그곳에서 요리법을 익혀 장차 레스토랑을 개업하고자 하는 다니엘의 참뜻을 안다면 계부는 펄펄 뛸 것이다. 다니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죽은 친아버지가 다니엘 명의로 남겨준 예금은 스물한 살이 되는 생일까지로 되어 있는 정기 예금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4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요리 학교는 3주 후에 시작되는 것이다.

요리는 스위스의 신부 학교에서는 좋아한 과목이었다. 물론 미용 강좌나 우아한 프랑스 여성을 대동하고 고급 부티크에 나가 이것저것 물건을 고른 다음 그녀의 비평을 듣는 수업도 즐거웠지만.

신부 학교를 졸업했을 때 다니엘은 신장 163센티의 자신에겐 무엇이 잘 어울리는지 아닌지를 가릴 수 있는 안목을 얻게 되었다. 어머니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학생이었던 딸이 어느 사이에 어엿한 숙녀가 된 것을 보고 여간 대견해 하지 않았다.

스위스의 신부 학교에는 세계 각국 부호의 딸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아랍의 부호를 계부로 둔 영국 처녀라는 점에서 다른 처녀들에 비해 약간 이채로왔다.

어깨에서 부드럽게 물결치는, 검은 빛이 감도는 빨간 머리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고, 불꽃처럼 불타는 듯한 초록빛 눈동자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어Te. 어머니는 늘 스코틀랜드인인 아버지에게서의 유전이라고 말해 왔었다. 계부가 에메랄드를 선물하고 싶다고 한 것도 이 초록빛 눈동자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재혼할 때까지 다니엘 모녀는 런던 북부에 있는 작은 집에서 무척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미망인으로서 얼마 안 되는 수입으로 어린 자식을 키우며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니엘이 열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석유회사의 비서로 일하기 시작했고, 여기에서 계부와 알게 되었다.

"오늘 밤 만찬회에 나가겠니?"

방에 들어온 어머니는 마흔 살을 갓 넘었으나 다니엘의 언니라고 해도 남이 곧이 들을 정도였다. 다니엘은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사치스런 드레스에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을 한 어머니의 모습에서, 양말 한 켤레 사는데도 고심하던 옛날의 어머니 모습을 상상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 시절의 일을 잊을 수가 없으며 그래서 현재의 생활 역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양친의 심정을 생각해서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론 계부가 이처럼 부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여자친구와 함께 방을 빌어 독립된 생활을 하면서 청춘을 구가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집을 나가겠다고 말하면 양친은 몹시 속상해 할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아도 계부는 동양인인 탓인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다니엘의 친구들이 누리는 자유스런 생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집으로 찾아온 남자 아이들도 계부의 못마땅해 하는 표정 앞에선 기가 죽어 돌아간 경우가 많았다. 모두가 내게 조심스럽게 구는 것은 부자인 아버지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실 형식적인 작별의 키스 말고는 의미 있는 키스를 받은 경험이 없다. 내게 매력이 없는 탓일까? 다니엘은 불안한 표정으로 벽에 걸려 있는 바로크풍의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이마에 희미하게 주름이 잡힌 모습이 비쳤다.

"어때, 오늘 밤 만찬회에는 참석할 수 있겠지? 먼데일씨 이가가 파리에서 일부러 왔단다. 필립도 꼭 너를 만나고 싶다고 하더구나." 다니엘은 얼굴을 찌푸렸다.

필립 먼데일은 계분의 사업상 친구의 아들인데, 다니엘은 지난해 파리에서 먼데일 일가와 인사를 나눌 때 그를 만난 적이 있다. 두 사람의 나이 차는 다섯 살밖에 나지 않았으나, 데이트 뒤의 작별 키스를 하는 그의 태도에서 다니엘은 상대가 남녀 관계에 있어서 자기보다 훨씬 능숙하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밤색 머리에 눈이 시원스런, 미남인 그의 시선을 받고 있노라면 가끔 가슴이 답답할 때가 있었다. 그 일을 생각하자 다소 안절부절 못했다.

다니엘도 섹스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 그 나이에 그런 것을 모른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체험한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현재까지 그녀는 자신이 자라 온 환경 탓으로 그런 경험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사실에 다니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스물한 살의 버진이라니 누가 들으면 웃을 일이다. 그녀는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언젠가 자신의 순결을 바칠 남자가 나타날 때까지는 비밀로 할 셈이었다.

", 나가겠어요." 다니엘은 그것이 어머니의 희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짙은 그린의 아이새도우를 칠하고 다니엘은 거울에서 약간 물러서서 그 효과를 확인했다. 그녀의 침실에는 18세기 프랑스의 안티크 가구가 갖추어져 있었다. 금박을 입힌 이 화사한 가구들은 다니엘이 열여덟 살이 된 생일날에 계부가 선물한 것이었다. 계부에게는 고마움을 느낄 때가 많다. 단순히 물질적인 것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어머니를 더없이 행복하게 해주어 어머니는 계부의 애정 속에서 날로 아름다워지고 있다. 그리고 다니엘도 무척 사랑해 주고 있다.

오늘 아침 선물로 받은 다이아몬드의 펜던트가 가슴에서 빛나고 있었다. 엷은 실크의 팬츠슈트의 캐미솔은 가슴의 선을 강조했다.

계부는 아내에게나 딸에게 아랍식 복장을 강요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계부가 딸이 얌전한 옷을 입기를 바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밤의 이 옷차림이 그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니엘이 우아하게 꾸며진 거실로 발을 들여놓자, 필립과 그의 아버지는 자리에서 가볍게 일어섰다. 필립은 재빨리 그녀 쪽으로 다가오더니 다니엘의 손을 잡고 갑자기 키스 공세를 퍼부었다.

"필립!" 숨이 막혀 그 이상의 말은 할 수 없었다.

먼데일 부인은, 또 한 번 키스를 하고 다니엘의 손을 놓는 아들을 대견스럽게 바라보면서 미소 지었다.

"다니엘이 부끄러워하고 있잖아." 부인은 아들을 가볍게 꾸짖듯이 말했다. "다니엘은 얌전한 처녀야. 그렇죠, 다니엘?" 다니엘이 대답할 겨를도 주지 않고 부인은 다니엘의 어머니를 향해 부러운 듯 말했다. "이렇게 훌륭한 따님을 두셔서 행복하시겠어요, 헬렌. 우리 이자벨은 다니엘보다 세 살 아래지만 벌서 속을 썩여 큰일이에요. 양가집 자녀답게 행동하라고 여러번 타일렀지만 전혀 말을 듣지 않아요. 그러면 좋은 데로 시집 못 간다고 말했더니, 시집 같은 건 가지 않겠다면서 웃잖아요. 대학에 진학해서 변호사 자격을 따가지고 자립하겠다는 거예요." 부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부인이 속으로는 자기 딸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니엘의 이런 기분을 알아챈 듯 계부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말씀하신 대로 우리 다니엘은 자랑스런 딸이에요, 마담. 내가 딸에게 바라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으니까요. 아름답고 심성도 착하고."

다니엘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런 다니엘을 보고 먼데일 부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보배 같은 따님이에요. 애지중지해야죠."

", 물론 애지중지하죠." 계부의 지나치게 진지한 태도에 다니엘은 가슴이 철렁했다. '아니에요, 아빠, 나는 평범한 처녀예요. 너무 칭찬하지 마세요.' 하고 말하려 하였으나, 먼데일 부인이 수다를 떠는 바람에 말할 기회를 놓쳤다. 그러는 사이에 대화는 보다 일상적인 화제로 옮아가 결국 다니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만찬이 끝나고 어른들이 각각 사업이나 패션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필립은 다니엘을 자기 곁으로 데리고 가 말을 꺼냈다.

"무척 오랜만이야, 셰리. 이번엔 당신 아버지가 파리에 오실 때 부탁해서 함께 오도록 해."

"앞으론 바빠서 파리에 갈 시간이 없을 것 같아요." 다니엘은 필립이 손을 애무하자 빼면서 대답했다. "곧 학교가 시작되거든요."

"학교? , 요리 학교 말이군. 요리 학교라면 파리의 전통 있는 학교에 다니는 것이 좋을 텐데. 하지만 당신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당신 아버지는 항상 당신을 곁에 두고 싶어 하시니까, 그렇지?"

"아빠는 내가 집을 떠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세요." 다니엘은 그의 말을 인정하며 말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언젠가는 새끼도 둥지를 떠난단 말이지?" 필립은 조롱하듯 웃으면서 말했다. "그때는 내게로 날아와 주었으면 좋겠어. 당신은 정말 멋있어, 다니엘. 어찌 보면 어른 같고 어떻게 보면 어린애 같은 데가 있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매력적이야. 다니엘이 좀 더 성숙해지면 틀림없이 최고의 여성이 될 거야!"

다니엘은 필립의 이런 장난기 섞인 찬탄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다니엘이 그가 플레이보이라는 사실을 농담투로 말하자 그는 놀랐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내가 플레이보이라구? 농담도! 하지만 당신에 대해선 달라, 미뇽. 만약 내가 플레이보이라면 엄격한 당신 아버지가 당신과 사귀는 것을 허락할 리 없잖아? 그리고 우리 아버지의 사업은 당신 아버지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거든. 그건 그렇고 당신이 정말 돈 환을 찾는다면, 다시 말해서 모든 여성들이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을 정도로 남자다운 남자를 찾는다면, 바로 당신 아버지 집안에 그런 사람이 있지. 조르단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어?"

다니엘이 대꾸하지 않자 필립은 놀랐다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믿을 수 없는 걸. 조르단은 당신 아버지가 좋아하는 조카란 말이야."

"이름은 들었는지 몰라요하지만 친척이 워낙 많으니까 전부 기억할 수 없어요." 다니엘은 즉흥적으로 거짓말을 했다.

조르단이라는 아빠의 조카에 대해선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 이름을 듣고 나니 왜 이렇게 몸이 떨리는 것일까? 무엇보다 이름부터 좀 이상하지 않은가? 다니엘은 마음 한구석에서 호기심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으나 필립에게는 시치미를 뗐다.

"만약 당신 아버지가 그 이름을 입 밖에 낸 적이 있다면 절대로 잊을 리가 없는데.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다니 거참 이상하군. 둘 사이는 워낙 가까워서 조르단은 조카라기보다는 자식 같은 존재거든."

다니엘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이 조르단이라는 남자가 필립의 말대로 계부와 특별히 가까운 사이라면 왜 지금까지 그의 이름은 한 번도 듣지 못했고 만나지도 못했을까? 그 까닭은 곧 알 수 있었다.

"물론 조르단도 핫산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지. 다만 결혼한 것은 기정사실이니까 심각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을 거야. 게다가 현명한 사람이니까 핫산과 같은 실력자와 불필요하게 대립하고 싶지도 않았을 테고, 특히 그의 경우 대립만 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많거든."

"얻는 것이라뇨?" 다니엘은 지금도 아빠가 친척들로부터 보다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필립은 잠시 망설였으나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핫산은 당신에게 카타르의 석유 산업을 지배하게 된 경위를 말하지 않은 모양이군."

"아버지는 여자와는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아요." 다니엘은 마지못해 상대방의 말을 시인하며 말했다.

전 같으면 그것을 여서에 대한 모멸로 단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부의 경우, 사업에 처자를 끌어들이려고 하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 노파심 때문이라는 것을 다니엘은 알게 되었다. 물론 이유야 어쨌든 결과는 마찬가지지만.

세이크 핫산은 독불장군이지만 처자에겐 항상 친절하다. 그러나 여성을 애완동물처럼 생각하는 여느 동양남성들같이 핫산도 여자는 매사를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니 다니엘은 소름이 끼쳤다. 그녀에게는 서양의 처녀들이 갖고 있는 독립심이 있다. 다만 계부를 생각해서 그것을 밖으로 나타내지 않을 뿐이었다. 자기 모녀를 이토록 아껴 주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일에 대해선 조르단도 마차가지야." 필립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 사람도 남존여비 사상의 소유자거든. 파리에서 그 사람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 사람이 여성을 낮추어 보는 데 놀랐지. 더욱 놀라운 것은 여자들이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사실이었어. 물론 권력과 재산을 갖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매력이고 그런 점에서 그 사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지. 그래도 본인은 보다 많은 권력과 재산을 바라고 있겠지만."

필립은 이렇게 말하면서 의미 있는 듯한 시선을 보냈으나, 다니엘은 조르단이라는 남자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속에서 치미는 혐오감을 떨쳐 버리려 애쓰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알아채지 못하였다.

조르단이라는 사나이는 분명히 여성을 멸시하고 있다. 쾌락의 도구로 사용하고 나서는 마치 헌신짝 버리듯 여자를 버리는 남자임에 틀림없을 거야.

"핫산의 부친은 통치자의 입장에서 어떤 자식이든 후계자로 삼을 수 있었어. 그 정도는 알고 있겠지?"

그녀는 알지 못했으나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면서 말을 재촉했다. 이야기를 중단시킨다는 것이 실례가 된다는 생각 말고도 계부의 집안에 대한 호기심을 억누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이크 벤 이븐 아하마드에겐 네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핫산을 제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은 누구든 알고 있었지. 그러니까 핫산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당연히 그가 후계자가 되었을 거야. 자식이 없으면 카타르국의 후계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세이크 벤의 말을 듣고 나머지 세 명의 아들은 좋아했겠지. 그래도 핫산이 제일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벤은 결국 카타르국의 석유 생산과 수익을 총괄하는 회사를 설립하고 핫산을 종신의 사장으로 앉혔지. 이것은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할 수 있어. 왜냐하면 핫산의 경영으로 회사의 규모는 날로 확장되고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거든. 그리고 수익은 핫산의 일족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도 돌아갔지. 당신도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핫산의 조상은 잔인성과 독립심으로 알려진 소수 부족 출신이야. 그런데 세이크 일족에게 아들들의 유학을 권한 것은 우리 선조거든. 그래서 두 집안의 교제가 시작된 거야. 아버지 말에 의하면 당신 아버지는 우리 할아버지께 입은 은혜를 현재의 거래를 통해 충분히 갚고 있다는 거야."

"하지만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죠?" 다니엘의 날카로운 질문에 필립의 얼굴은 갑자기 불만스런 표정으로 흐려졌다.

"물론 당신 아버지는 관대하지." 필립은 마지못해 인정했다. "하지만 좀 더 선심을 쓸 수도 있을 텐데. 방계 회사의 중역 자리 하나쯤 말이야. 당신 아버지 쪽에서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리 쪽에서는 대단한 것이거든."

남자는 땀 흘려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 계부의 신조였다. 그러나 다니엘은 필립에게 그런 말은 일체 하지 않았다.

여느 때의 필립은 확실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일에 대한 의욕은 전혀 갖고 있지 않다. 파리에서의 사치스런 생활을 즐기는 남성으로서 필립은 거기에 알맞은 부를 갖고 싶을 것이다. 필립이 다니엘을 매력있는 여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결혼상대로는 돈 많은 집 딸을 고를 것이다. 남편의 바람기를 모른 체 해 주는 냉정한 프랑스 여자를. 그러나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어. 스스로도 왜 이렇게 보수적인지 모를 정도거든. 결혼 상대자는, 우선 상대방을 첫째로 치고 그 밖의 일은 둘째로 치는 사람이어야 해. 다니엘은 쓸쓸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좀처럼 만나기 힘들 거야. 계부도 그처럼 엄마를 사랑하고 있지만, 엄마 이외의 일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지 않은가.

엄마는 방금 필립이 가르쳐 준 핫산의 집안의 내막을 알고 있을까? 물론 알고 있겠지. 다만 내게 말해 주지 않았을 뿐일 거야. 사실 엄마가 나를 어엿한 여성으로서 대해 주게 된 것은 내가 스위스의 신부 학교에서 돌아온 뒤부터다. 엄마는 자신은 내 나이에 미망인이 되었으면서도 나를 아직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어린애로 생각하지 않는다. 감수성이 예민하여 기숙사 학교나 스위스의 신부 학교 시절에도 친구들의 상담 상대가 되어 그들의 괴로움을 들어주기도 했다. 그래서 같은 또래의 다른 아이들에 비해 자신이 훨씬 어른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반대로 자신에겐 함정이 될 수도 있다.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녀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알고 있을지라도 감정이 개입되면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것이다. 다니엘은 어떤 일이 있어도 타협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신조를 굽히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맹세한 바 있다.

"지루해?" 필립은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다니엘은 미소를 감추었다. 아니에요, 그 반대예요. 흥미진진해요. 하지만 자신 만만한 필립이니까 내가 자기 이외의 딴 일에 마음을 쓰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겠지.

"전혀 지루하지 않아요. 계속하세요."

"지금부터가 중요한 이야기야. 핫산의 부인은 남편이 카타르의 통치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혼을 요구했지. 이슬람교도인 여성은 코란의 계율에 따라 이혼할 권리가 있거든. 물론 그런 경우는 좀처럼 드물지만 말야. 자기를 부양해 줄 유복하고 세력 있는 집안을 배경으로 갖고 있지 않는 한 이혼한 여자는 비참한 생활을 하게 마련이야. 하지만 밀리엄은 원래 핫산과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않았어. 핫산의 형님을 좋아했거든. 핫산은 코란이 인정하는데도 다른 아내를 얻지 않았어. 그는 자기가 결코 자식을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부인을 세 명이나 두고는, 싸움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도저히 사업 같은 것을 할 수 없다고 우리 아버지께 말했다는 거야. 핫산의 부친은 그에게 석유 수익에 대한 절대적 권한을 주었어. 뿐만 아니라, 유언장에는 핫산이 그 후계자를 직접 택할 수 있다고 씌어 있단 말야. 일족 중에서지. 그래서 핫산이 당신 엄마와 재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조르단을 택하게 되리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상했지. 그런데 조르단 개인을 두고 볼 때는 그는 일족 중에서 하찮은 존재에 불과해."

필립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이렇게 말했으나, 그 말투로 보아 필립과 조르단과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을 다니엘은 짐작할 수 있었다. 왜 그럴까? 이때 그녀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아빠가 우리를 카타르에 데려가지 않고, 저쪽에서 친척 한 사람 찾아오지 않는 것은 이 조르단 때문일지도 몰라.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이 남자에 대한 다니엘의 분노는 자꾸만 더해 갔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와 친척들은 사이가 좋지 않은데 그 사이를 더욱 나쁘게 만드는 조르단의 속셈은 도대체 무엇일까? 물론 외국인과 결혼하는 아랍인을 경멸하는 아랍인은 많이 있다. 하지만 필립의 이야기를 듣고 보면 조르단은 자기 숙부를 경멸할 입장이 못 되지 않는가. 적어도 일족의 논쟁으로 발전시킬 정도로는 말이다.

"물론 일족 중의 누구도 이 결혼을 좋게 보는 사람은 없었어." 필립은 말을 계속했다. "핫산은 막대한 재산과 권력을 쥐고 있고, 그 지위와 권력을 조르단이 이어 받는다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지만-다소의 반발은 있었지만-그 재산이 이 이상 외국인의 손으로 넘어가는 것을 일족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거든."

"외국인이라뇨?"

"몰랐었나?"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다니엘을 보고 필립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조르단은 혼혈이야. 사실 조르단이 집안에 받아들여지고 오늘날의 지위를 얻고 있는 것은 모두 핫산의 덕분이지. 조르단의 아버지는 핫산의 막내 동생인데, 젊었을 때 파리에서 대학을 다닐 무렵 알게 된 여자와의 사이에서 조르단을 낳았어,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하진 않았지만. 그런데 노상에서 싸움질을 하다가 그가 살해될 때까지 집안사람들은 아무도 그가 동거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었지. 핫산이 사후 처리를 하려고 파리에 갔을 때 비로소 동생이 자네트라는 여성과 동거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리고 핫산은 그 여자가 동생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지. 그래서 돈을 주고 아이를 맡겠다고 제의했대." 필립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자네트는 동의했고 조르단이 태어나자 핫산이 카타르로 데리고 왔어. 친척들은 핫산이 아이를 못 낳으니까 조르단을 양자로 삼으려 한다고 생각했고, 사실 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조르단은 핫산의 집에 살면서"

다니엘은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조르단이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했으나, 그보다도 거리를 방황해야 할 처지에 있던 아이를 길러 준 계부가 그 아이로부터 이토록 냉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친자식이나 다름없이 자기를 키워 준 계부를 조르단은 이제 와서 어떻게 괄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계부가 조르단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다니엘이 이런 의문을 느낀 걸 알아챘는지 필립은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때 계부와 먼데일씨가 일어나 필리을 불러 자기네와 함께 이야기하자고 재촉했다.

"남자들이란 어쩔 수 없군!" 먼데일 부인이 혼자 남은 다니엘을 보고 미소 지었다. "하지만, 다니엘, 우리 아이는 저 두 분보다 당신과 함께 있는 걸 좋아한답니다."

"글쎄요." 다니엘이 이렇게 대답하자 부인은 더욱 강조해서 말했다.

"정말이에요, 당신은 젊고 매력적이거든요. 필립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도 모르진 않겠죠?"

 

2

"필립은 저를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대요." 다음날 계부가 지난밤의 일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다니엘은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 인상이 나쁜 편은 아니에요. 하지만 어떤 여자든 다 어느 정도 귀엽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 아닌지 모르겠어요."

다니엘이 다소 뾰로통해진 것을 보고 계부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귀여운' 여자 이상인 너는 그의 기분을 경멸했단 말이냐?"

너무나 침착한 계부의 태도에서, 딸이 필립에게 끌리고 있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는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왜? , 그렇다. 다니엘은 미소 지었다. 아빠는 항상 나를 자기 곁에 두고 싶어 하신다. 그러니까 내가 필립에게 끌리는 것을 바라지 않을 거야.

"함께 있으면 즐겁지만, 그뿐이에요." 다니엘은 일부러 이렇게 덧붙여 말하면서 계부를 흘끗 쳐다본 다음, 요즘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문제를 이 자리에서 이야기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절대로 계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제는 딸이 무슨 일에나 스스로 판단하면서 인생을 살아갈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양친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빠도 이젠 저의 보이프렌드를 일일이 체크할 수는 없는 일 아니에요?" 다니엘은 일부러 괘사를 떨면서 말하는 자신의 기분을 계부가 알아주기를 바랐다. "이제 저도 어른이에요."

계부가 다니엘을 빤히 쳐다보았다. 불룩한 가슴과 날씬한 몸에 느낀 시선은 아버지의 그것이 아니라 한 남자의 그것이었다. 그는 딸의 빨갛게 물든 볼과 이글이글 타는 듯한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서글픈 듯 중얼거렸다.

", 하긴 그렇군." 그리고 갑자기 심각한 어조로 덧붙여 말했다. "내게는 네 행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너도 알고 있겠지, 다니엘?"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계부는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겠구나."

할 수 없이 인정은 했지만 아빠의 말에 구슬림을 당했다는 기분을 씻어 버릴 수가 없었다.

아빠는 내가 이 집에서 평생을 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해. 그날 오후 외출 준비를 하면서 다니엘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날은 스위스의 신부 학교 시절의 두 친구와 함께 쇼핑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한 친구는 모델의 견습생이고, 또 한 친구는 댄서인데 마침 웨스트엔드의 쇼우에서 일자리를 얻었다고 했다. 다니엘은 두 친구의 자유분방한 생활이 부러웠다. 물론 밤낮없이 남자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는 생활이 자신에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다니엘도 분명히 인정했지만, 남자 아이들과 사귀는 것은 그녀로서도 즐거운 일이었다. 친구로서 사귀는 것이라면 상대가 누구라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왠지 상대방이 적극적으로 열렬하게 구애를 해오면 뒷걸음질 치게 되고 혐오감을 느끼게 됨은 사실이다. 내가 불감증인 탓일까? 아니면 내가 너무 로맨틱한 탓일까.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다만 섹스에 대한 자각이 늦을 뿐이지. 다니엘은 그런 결론을 내리자 옷장에서 값비싼 드레스 대신 엷은 T셔츠와 몸에 꽉 맞는 진즈를 골랐다. 확실히 섹스를 위한 섹스를 다니엘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은 킬킬거리면서 남몰래 섹스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만 다니엘은, 직접 사랑하는 편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두 친구는 만나면 항상 즐거운 친구들이다. 모두가 꽤 유복한 가정의 딸들이지만 즐겨 중고품 시장에 가 1920년 또는 1930년대의 헌 옷가지를 뒤지고 다닌다.

약속 장소에 나타난 두 사람은 다니엘과 마찬가지로 진즈에 T셔츠라는 평범한 차림이었다. 두 친구는 현재하고 있는 일,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으로 희망에 차 있었으며, 둘이 함께 빌어 쓰고 있는 아파트에서의 자유분방한 생활에 대해서도 들려주었다. 다니엘은 부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다니엘은 부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댄서인 코린느가 다니엘에게 장래의 계획을 물었다. 그녀가 대답하자 코린느는 눈썹을 약간 치켜 올리면서 말했다.

"레스토랑을 경영한다구? 꿈이 대단하구나. 나는 네가 곧 시집이나 가 버릴 타입의 아가씨로 생각했는데, 아직 약혼도 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정말 놀랐어. 너의 집안은 좀 다르잖아." 다니엘의 의아해 하는 표정을 보고 코린느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니엘, 너의 아빠를 두고 말하는 거야. 틀림없이 신랑감 후보 몇 사람쯤 대기시켜 놓고 있겠지? 중동에선 아직도 맞선들을 많이 본다지? 특히 돈 많은 사람들은, 내 친구가 몇 달 전에 그런 남자를 만나 혼났다는 거야. 함께 쇼우를 하고 있는 아가씬데, 그 후유증 치료에 상당한 시간이 걸린 모양이야. 물론 개중에는 상당히 매력적인 남자도 있긴 하지만, 아무튼 상대방의 노리개가 될 각오 없이 그쪽 남자들을 만나는 건 어려워."

나도 알고 있지만 너무 노골적이군. 다니엘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 남자는 말이야, 바넷사에게 보석이며 드레스를 마구 사 주었대." 코린느는 다니엘의 표정에는 아랑곳없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막상 중요한 문제에 이르면-결혼말이야." 멍청하게 듣고 있는 다니엘에게 코린느는 일부러 설명까지 하면서 말했다. "그 남자는 결혼할 생각은 전혀 없다면서, 결혼은 마치 별개의 문제라는 듯한 태도를 취하더라는 거야. 얌전하고 귀여운 신부가 고국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바넷사는 펄펄 뛰면서 상대방에게 대들었다는 거야. 그런데 상대는 웃기만 하더라지 뭐니, 서로 즐겼으니까 답례는 한 셈이 아니냐면서. 이젠 끝난 일이지만."

"적어도 충분한 대가를 받았잖아." 린다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모델을 하고 있는 아가씨들 가운데도 이슬람교도인 남자에게 걸려 혼이 난 경우는 많아. 돈 많은 아랍인이 블론드의 백인 아가씨에게 사족을 못 쓰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지. 그들도 이젠 여성을 함부로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들을 얕보아선 안 되지. 그래도 여자가 요령껏 굴기만 하면 꽤 재미를 볼 수도 있지만-보석이라든가 옷이라든가 휴가라든가, 그런 거 말야."

다니엘은 가벼운 구토증을 느끼면서, 이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순결한 감정을 무엇이 상하게 했는지 곧 판별할 수 없었다-보석 때문에 거리낌 없이 몸을 판 여자 때문인지, 아니면 여자의 몸을 산 남자 때문인지. 어쨌든 남자가 나쁘다. 왜냐하면 남자는 여자를 단순히 일시적인 쾌락을 위해 이용했을 뿐, 남자와 여자 사이에 흐르고 있는 순수한 감정을 완전히 짓밟았으니까.

"그래, 바넷사도 그런 의미에선 별로 손해 본 건 없어. 바넷사의 말에 의하면 그 조르단이라는 남자는 꽤 괜찮았던 모양이야, 바넷사가 결혼할 생각까지 했을 정도니까."

조르단이라고?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다니엘은 자기도 모르게 온몸에 전율이 치닫는 것을 느꼈다. 코린느가 말하는 조르단이라는 사람과 계부의 조카가 동일 인물이라고 단정한다는 것은 성급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특이한 이름을 가진 돈 많은 아랍인이 두 사람이나 있을까?

"다니엘, 괜찮아?" 코린느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안색이 안 좋구나."

"아무렇지도 않아." 다니엘은 즉흥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백을 매면서 일어섰다. "이젠 돌아가야겠어. 저녁 식사 때까지 돌아가겠다고 부모님과 약속했거든." 이것도 거짓말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계부의 집안에 대해서 알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다니엘은 돌아오면서도 지금까지 계부의 친척들과 접촉이 없었던 일에 대해서 왜 의심을 품지 않았는지 스스로도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아마도 그녀가 학교 때문에 오랫동안 집을 떠나 살면서 자기 일에만 몰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후에 커피가 나오자 다니엘은 그 이야기를 꺼냈다. 운전과 집안일을 하면서 한 집에 살고 있는 베넷 부부가 식탁을 치우고 방으로 돌아간 뒤, 어머니가 계부에게 그가 좋아하는 짙고 단맛이 있는 커피를 따를 때 의문을 털어놓았다.

"다니엘!" 어머니가 당황하며 그 말을 일축시켰다.

"아냐, 헬렌, 묻는 것이 당연하지." 계부는 딸에게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사실 다니엘이 지금까지 한 번도 묻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니까."

"아마 제가 어려서 주위의 일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아요." 다니엘이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래서? 지금은 갑자기 어른이 됐단 말이냐?" 세이크 핫산의 눈빛이 갑자기 험악해졌다. "필립 먼데일 때문이냐?"

"그런 점도 있어요." 다니엘은 계부와 먼데일 집안과의 사업상의 관계를 생각하여, 필립의 일로 해서 계부가 이상한 지레 짐작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이번에 집에 돌아와 있으면서 우리 가족이 왜 이렇게 고립되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건 말이다." 다니엘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아하마드 집안이 우리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야. 무리도 아니지." 이의를 제기하려고 하는 딸을 말리면서 어머니는 계속 말했다. "그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게 없기 때문이야. 그래서 아빠는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 큰 희생을 감수하고 있는 거야. 다니."

어렸을 때의 애칭을 들은 다니엘은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남편 쪽을 돌아다보는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다니엘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우리 집안은 편견이 심한데다가 그것을 고치려고도 하지 않는단다." 계부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당신과의 생활을 후회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어, 헬렌." 그는 양팔로 아내와 딸을 끌어안았다. "당신 모녀가 내 곁에 있어 주어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당신은 잘 모를 거야. 마치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에 내린 은혜로운 비와 같다고나 할까."

"우리는 앞으로 더욱 행복하게 될 거야." 어머니가 생긋 웃으면서 다니엘을 쳐다보았다. "핫산 집안사람들이 화해하러 와 있거든."

"조르단도요?" 다니엘의 이에서 나온 말은 어딘지 씁쓸했다.

계부가 끌어안았던 팔을 풀면서 어머니와 은밀한 눈짓을 교환하는 것 같았다. 다니엘은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공포감을 느끼면서 온몸을 긴장시켰다.

"조르단에 대해선 뭘 알고 있니?" 계부가 부드럽게 물었다.

"아빠와 엄마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여자를 쾌락의 도구로 보고, 실컷 즐기고 나서는 헌신짝처럼 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조르단은 사막의 남자야." 계부는 그녀의 말을 구태여 부정하려고 하진 않았다. "힘과 인내심을 가지고 있지, 약간의 잔인성도. 하지만 그에게 다른 면도 있단다. 사람은 항상 독수리처럼 살수는 없거든. 백조의 부드러움이 필요할 때도 있지. 여느땐 사납던 마음이 오아시스의 정적을 갈구하면서 온화해질 때도 있단 말이다. 조르단의 그런 면은 좀처럼 밖으로 나타나진 않아. 네가 조르단에 관한 말을 누구한테 들었는지 묻진 않겠다. 짐작이 가니까 말이다. 참새가 독수리의 흉내를 내려고 한다는 것은 별로 현명한 짓이 아닌 것 같군. 참새는 자신에게 용맹스런 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새의 결점만 찾으려 들거든."

"필립은 참새가 아니에요." 다니엘은 계부의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비위에 거슬렸다.

"그럴까? 그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과 너를 정략 결혼시킬 속셈으로 접근해 왔지."

정략 결혼이라구요? 이 시대 착오적인 말을 듣고 다니엘은 충격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다니엘!" 계부가 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를 지나치게 나무랄 수도 없어. 너는 부호의 딸인데다가 미인이거든. 난봉꾼인 필립 같은 아이들에겐 재산과 미인은 다시없는 매력이야. 그의 아버지를 사업 관계로 알고 있지만, 실리적인 프랑스 사람이고 보면 그가 너와의 결혼을 생각한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잖겠니?"

"그 사람은 나를 정말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다니엘이 맥이 풀린 듯 말했다. "그런 말은 뜻밖이에요."

"하지만 너는 그를 사랑하지 않잖니? 아무 일도 없었겠지?" 계부의 날카로운 질문에 대해 어머니가 작은 소리로 무엇이라고 항의했다.

", 아무 일도 없었어요." 다니엘은 평시의 냉정을 회복하고 조소하듯이 대답하고 나서 어머니를 돌아보면서 씁쓸히 웃었다. "엄마는 정말 운이 좋군요, 두 남자의 진실한 사랑을 받았으니까요. 앞으로 제가 만나는 남자가 모두 필립이나 조르단 같은 사람이라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 줄 사람은 평생 만날 수 없을 것 같군요."

"조르단이라구? 왜 조르단이 포함되지?" 계부가 이렇게 물어 오자 다니엘은 잠시 망설였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자신도 그 사람을 사랑하고 싶었다. 나는 아직도 의외로 어린 모양이야. 아빠와 엄마가 좀 더 자기를 방임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같은 또래의 다른 처녀 아이들과 크게 다를 것 없다고는 생각되지만, 다른 점도 많다. 특히 사랑에 대한 생각이 지나치게 순수하다. 계부가 엄마를 찬미하는 것을 보아 온 탓일 게다. 이런 일은 아랍 남성으로서는 드문 일이다. 하지만 남성 전체를 두고 생각한다면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다니엘은 생각하기 시작했다.

다니엘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계부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계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 사람은 남존여비 사사의 소유자래요. 그리고 약혼자도 있다잖아요. 그런데 상대 처녀는 그가 어떤 남잔지도 모르고 수락했다나 봐요. 불쌍해요."

"너는 다른 사람의 판단으로 사람을 평가하는구나. 그 아이는 조르단을 선망하고 있는 거야. 나는 네가 좀 더 분별 있는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니엘."

"필립만이 아니에요." 아빠는 너무해, 내가 거짓을 꾸며댄 것도 아닌데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저의 친구한테 들었어요. 우연히 들었죠. 그 친구들은 내가 조르단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그가 파리에서 농락한 여자에 관한 얘기를 해준 거예요."

계부는 갑자기 경멸하는 듯한 제스처를 했다.

"창부 얘기군. 돈을 위해 몸을 파는 여자말이야."

"누구든 마찬가지 아니에요? 감정을 가진 인간임에는 다름이 없거든요. 그리고 남자가 사려고 하지 않으면 여자도 팔려고 했을 리가 없어요."

계부의 의견은 달랐다.

"남자에게는 욕구라는 게 있어. 그것을 해소할 때가 없으면 시장에서 파는 물이라도 살수밖에 없지. 물론 그 물은 자기만의 오아시스처럼 신선하고 감미로운 맛은 없지. 틀림없이 찝찔하고 맛도 없었을 거야. 그래도 물은 물이지. 남자가 극히 자연스런 욕구를 채웠다고 해서 그렇게 비난받을 것은 못 돼. 다니엘, 너는 좀 더 마음이 너그러운 줄 알았는데."

다니엘은 얼굴을 돌렸다. 갑자기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서로 감정이 통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빠와의 사이에 이렇게 거리가 있다니, 만약 내가 '그렇다면 여자의 욕구는 어떻게 하죠? 남자와 같은 방법으로 채워야 할까요?' 라고 묻는다면 아빠는 기절 초풍할 것이다. 그건 너무해요. 지나친 독선이에요. 여자라고 해서 반드시 남자가 시키는 대로만 할 수는 없어요. 여자도 감정을 갖고 있어요. 남자는 욕구를 채우는 것뿐일지 모르지만, 여자는 마음도 준단 말이에요. 그건 불공평한 일이에요. 감정대로 하자면 이렇게 반론을 펴고 싶었으나 될 수 있는 대로 이성에 입각해서 대응하기로 결심한 다니엘은 냉정한 태도로 나왔다.

"물론 한 번의 과실이라면 용서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들은 바로는 한 번만으로는 그치지 않은 모양이에요. 아까도 말했지만 부인 될 사람이 불쌍해요, 한 명이 될지 몇 명이 될진 모르지만."

"그건 다르지 않을까?" 이렇게 냉담하게 말한 계부의 눈에는 고통과 놀라움이 섞인 표정이 나타나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이 두 감정을 억제하려는 결의가 엿보였다. 다니엘은 긴장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방어하려는 고슴도치처럼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조르단은 한 사람의 아내밖에 얻을 수 없어. 필립에게서 그의 성장 과정에 관한 얘기를 들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조르단은 그의 어머니와 내가 한 약속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모양이군-그것은 조르단을 그리스도 교도로 키우기로 한 거야. 그의 어머니는 그를 낳고 며칠 후에 죽었지만 나는 약속을 지켰지. 그러니까 조르단은 카타르의 명사이긴 하지만, 그도 너와 같은 그리스도 교도란다, 다니엘."

그렇다면 더욱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에요. 다니엘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혀가 굳어 버린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엇인가가 머릿속에서 뱅뱅 돌뿐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걱정스러운 듯한 어머니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릴 때마다 다니엘은 부모님이 자신에게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너는 내 의붓딸로서 장차 큰 부호가 될 거야." 세이크 핫산은 화제를 바꾸었다. "이 문제를 지금까지 얘기 안 한 것은 화제에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야. 너도 알다시피 나는 대단한 부호야. 뿐만 아니라 우리 일족의 재산의 많은 부분을 소유하고 있고 또 관리하고 있지. 하지만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자식에게, 형으로부터 동생에게, 또는 숙부로부터 조카에게 상속되는 거란다. 여자에게는 상속권이 없지. 내가 죽으면 나 개인의 재산은 너의 어머니와 네가 나누어 갖게 되겠지만, 석유회사의 이권은 내 형님이나 아우에게 넘어갈 거야. 내게는 아들이 없으니까 말이다. 이 두 사람은 항상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기 때문에, 솔로몬의 지혜를 빌려 둘 사이를 원만히 해주고 싶은 때가 많단다. 하지만 내가 죽으면 석유회사의 이권은 이 두 형제 중 한 사람이 차지할 수밖에 없으니 이 작은 나라에는 틀림없이 내란이 일어날 거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와, 아버지를 계승한 내가 고생하면서 이루어 놓은 일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단 말이다. 그렇다면 너의 안전에 대해서도 생각해 두지 않을 수 없지. 내가 죽으면 너는 부자가 된다. 하지만 너는 온실에서 자란 아이니까 속이 검은 남자에게 걸려들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내가 제일 걱정하는 일이란다, 다니엘."

아빠는 너무 익은 과일 같은 말씀만 하시는군요. 다니엘은 약간 자포자기적인 심정이 되었다. 아빠는 나를 그처럼 아무 것도 모르는 딸로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시면 저한테 아무 것도 남겨 주시지 않는 편이 낫잖아요?" 다니엘은 미소 지으면서 논리적으로 공략했다. "오히려 그렇게 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어요. 보모의 후광은 싫거든요."

표정이 풍부한 얼굴에 진지한 빛을 띠면서 젊은이다운 말을 하는 딸의 얼굴을 보고 계부의 표정은 부드러워졌다. 너무 아름다운 것이 탈이다. 새하얀 피부에 에메랄드와 같은 초록빛 눈동자.

"다니엘, 너는 총명한 아이야.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자가 가져야 할 자세를 벌써부터 알고 있으니 너는 절대로 특권을 악용하지 않을 거야. 걱정할 것 없다. 나는 이미 회사의 이권과 네 문제, 특히 네 장래에 관한 것도 확실하게 해두었으니까."

아버지와 어머니는 의미심장한 눈짓을 교환했다. 무엇인가를 묻는 듯한 계부의 시선에 어머니가 긍정하는 눈길을 보냈다. 다니엘은 완전히 무시되었다. 그녀는 까닭 모를 공포에 사로잡히면서 온몸에 냉수를 끼얹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떤 식으로요?" 이렇게 묻는 그녀의 목소리는 간청하는 목소리에 가까웠다. 눈의 표정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목소리에 나타난 것이다.

계부는 딸의 양손을 잡고 부드러운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두려워할 것 없다. 조르단은 내 보배 같은 딸의 가치를 잘 알고 있단다. 그러니까 그는 네가 충분히 만족할 수 있게 행동할 거야. 네가 그의 아내가 되었을 때, 이것은 모두."

다니엘은 현기증을 느꼈다. '네가 그의 아내가 되었을 때' 그 나머지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조르단과 결혼하게 되는 불쌍한 아가씨가 바로 나였단 말인가. 이젠 알겠어.

"다니엘?" 어머니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다니엘은 당장 기절할 것 같은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쥐어 짜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하지만 전 조르단과 결혼하지 않겠어요. 차라리 굶어 죽겠어요." 아차, 너무 어린애 같은 소리를 했어.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 일은 자기가 결정할 자격이 없다고 아빠는 말할지도 모른다. "엄마는 내 심정을 이해하시겠죠?"

"물론이지."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면서 남편 쪽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빠는 그것이 네게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하신 거야." 딸의 팔을 살그머니 만지면서 미소 지었다. "다니, 아빠와 엄마는 지금까지 너를 애지중지하면서 키웠으니까 앞으로도 너를 지켜 주고 싶을 뿐이란다."

"어머니!" 다니엘은 무의식중에 '엄마' 라는 어린애 같은 말을 피했다. "전 언제까지고 강보에 싸여서 살수는 없어요, 그렇잖아요? 그리고 조르단이라는 사람에 관해서 들은 바로는, 내가 그 사람과 결혼한대서 안락하게 살 것 같지도 않아요."

"필립 먼데일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돼. 여기서 조르단의 과거에 대해서 말하고 싶진 않다만, 다니엘, 그는 양식이 있는 남자란다. 결혼이 중대사란 것쯤은 잘 알고 있어. 그리고 일단 결혼하면."

"그 사람이 결혼을 얼마나 중대하게 생각하든 상관없어요." 다니엘은 당장 되받아 말했다. "그 사람이 딴 남자라 해도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두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저는 중매결혼 자체가 싫단 말이에요. 어디서 어떻게 결혼 얘기가 나왔는지는 아무래도 좋아요. 물론 아빠가 진심으로 저를 생각해 주시는 것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런 결혼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쳐요. 절대로 할 수 없어요. 그건 나더러 하늘을 날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예요."

"네 기분을 알겠다." 어머니가 말했다. "여보, 이 애의 기분을 좀 이해해 주세요. 다니엘은 규중 처녀로 자랐지만, 이슬람교도의 처녀들처럼 남성 우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환경에서 자란 건 아니잖아요."

"나도 그런 일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길 바라진 않아요." 계부는 고개를 숙인 채 반항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딸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아빠도 제가 그 사람과 절대로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 주시는 거죠?"

"네 뜻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다만 나는 몹시 애석할 뿐이야. 이 결혼은 꼭 성사될 줄 알았는데. 조르단에게도 알려야겠군."

"틀림없이 딴 여자가 나설 거예요." 다니엘은 코린느가 말해 준 여자를 생각하자 꺼림칙했다.

"조르단이 너와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을 집안사람들이 알게 되면 그의 체면은 엉망이 되겠군." 계부의 표정은 침울했다. "하지만 내가 잘못 생각했어. 너를 내 친딸처럼 생각하고 깜빡 잊었던 거야. 어머니가 말한 것처럼 너는 동양 여자가 아닌데."

너무나 낙담한 계부의 표정을 보고 다니엘은 위로하기 시작했다.

"아빠가 저의 행복을 위해서 조르단과 결혼시키려 한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전, 제가 존경할 수 있고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요. 그 사람의 자식을 낳아 주기 위해서 결혼하는 건 싫어요. 그리고 결혼하기엔 아직 일러요."

계부는 한순간 딸의 날씬하고 건강한 육체를 바라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다니엘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렇겠지, 하지만 머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네가 조르단과 결혼할 의사가 없더라도 내 전권 대사로서 카타르의 친척들을 방문해 주지 않겠니? 나는 사업 관계로 곧 미국에 가야 하거든. 그러니까 요리 학교가-네가 꼭 입학해야만 하겠다는 경우의 얘기다만-시작될 때까지의 몇 주일 동안을 네가 그렇게 해준다면 더없이 기쁘겠다. 사실 나는 내게 얼마나 아리땁고 착한 딸이 있는가를 친척들에게 보이고 자랑하고 싶었는지 모른단다."

"저 혼자 카타르로 가란 말예요? 그렇게는 할 수 없어요."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지낼 수는 없다는 의미에서 다니엘은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와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닌가. 그리고 방금 결혼하지 않겠다고 한 상대도 있지 않은가!

그날 밤 다니엘이 잠잘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들어왔다. 너무나 조용히 들어와 다니엘은 처음엔 알아채지 못했다.

"다니엘!" 어머니는 침대에 걸터앉아 딸이 어깨 위에서 물결치는 머리를 빗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말을 꺼냈다. "부탁인데, 카타르에 다녀오렴. 아빠에겐 큰 의미가 있단다. 아빠가 말한 것보다 더 큰 의미가 말이다. 너는 남의 기분도 짐작할 수 있고 상상력도 풍부하니까 아빠에게 친자식이 없다는 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알겠지? 이런 지위에 있으니까 더욱 그렇다. 의붓딸이지만 자신에게도 딸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기쁜 모양이야. 그러니까 친척들에게 딸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아빠의 기분을 이해해 주렴."

"하지만 그 사람들은 아빠의 돈이 목적이지, 우리와 진정으로 얘기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잖아요?" 다니엘은 브러시를 놓고 어머니 쪽으로 돌아섰다. ", 착한 아이인 체하기 싫어요."

"아빠를 위해서도?" 어머니는 완곡하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타협이라고 말해도 될진 모르겠다만, 다니, 네가 이번 결혼을 거절해서 조르단의 체면이 깎인다고 아빠가 말했었지. 하지만 아빠 체면도 마찬가지야."

계부에 대한 동정심이 다니엘의 마음속에서 솟았다. 그녀는 시선을 방바닥에 떨어뜨렸다. 엄마가 부탁하는 취지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전, 정말이지 카타르엔 가고 싶지 않아요.

"아빠의 기분은 알아요. 하지만 엄마! 엄마는 내가 그런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실 수 있으시죠?"

"그럼. 하지만 아빠는 그렇게 하는 것이 네게 가장 좋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 그런데 네가 싫다고 하니까 비로소 생각을 고친 거란다. 아빠가 그 정도로 네 의사를 존중했으니까 이번엔 네가 아빠의 소원을 들어 드리는 게 어떻겠니?"

 

3

작은 타협을 위한 것치고는 꽤나 먼 여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니엘은 제트기의 창밖을 내다보면서 우울한 기분에 잠겼다. 이 제트기는 계부의 집안 소유인 카타르 항공 소속의 열 두 대의 제트기 중의 한 대인 특별기였다. 그리고 아빠의 명령으로 예의바른 청년이 카타르까지 동행하고 있었다.

엔진 소리가 갑자기 작아지면서 목적지에 가까워졌음을 알렸다. 다니엘은 그러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왠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비단 슈트의 스커트를 매만지는 손가락이 떨리는 것만 같다. 슈트의 빛깔은 공작색이어서 머리 빛깔을 돋보이게 했으며, 햇볕에 탄 보리 빛깔의 살결과도 잘 어울렸다. 그녀는 외국으로 바캉스를 떠나 한 번도 햇볕에 태워본 적이 없다. 그 사실을 언젠가 미용사에게 푸념했을 때, 미용사는 그렇게 델리키트한 피부를 갖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면서 절대로 햇볕에 태워 피부를 망가뜨리지 말라고 오히려 격려해 준 일도 있었다. 사실 이 정도로 피부가 탄 것도 한 해 여름 내내 선탠을 한 덕분이다. 카타르의 8월은 습도는 영국보다 덜하지만 기온이 매우 높아, 다니엘이 머물 동안 계속 더울 것이라고 계부는 말했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 이상 햇볕에 타지 않으려고 피부 보호용 크림을 잔뜩 가지고 왔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가게에서 효과가 만점이라는 신제품 선탠로션도 준비해 왔다.

계부의 친척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다니엘은 계부를 위해서는 자신이 그들의 마음에 들기를 바랐다. 다행히도 조르단은 사업 관계로 파리에 가 있다고 한다. 계부의 이러한 배려에 다니엘은 감사했다. 만나보기도 전에 예사로 결혼을 승낙하는 남자와 얼굴을 마주친다는 것은 마음이 내키지도 않거니와 무척 거북살스러운 일일 것이다.

제트기가 착륙 태세로 들어갔다. 창밖으로 푸른 하늘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니엘은 시선을 안으로 돌렸을 때 동행중인 젊은 남자가 수줍은 듯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니엘은 자기를 보고 있음을 깨달은 젊은이는 당황하면서 시선을 돌렸다. 다니엘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그는 값비싼 슈트를 입고 있었고 머리도 단정하였다. 석유회사의 직원이고 계부의 사촌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아랍 제국에서는 친족 공동 경영이 관례인 듯하다. 이 나라 사람들의 생활양식이나 관습을 좀 더 알고 올 걸, 하고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 다니엘은 후회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무례를 범하여 창피를 당하면 어쩌지? 아빠의 형수 되시는 분이 잘 보살펴 줄 것이라고는 했다, 세 딸과 몇 명의 손자를 길러낸 자메일을 다니엘도 틀림없이 좋아하게 될 것이면서.

수줍은 청년을 동행시켜 준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면서 다니엘은 트랩을 내렸다. 비행장에는 직원들이 도열해 있었고 기장이 대표로 인사를 했다.

"하늘의 여행은 즐거우셨습니까?"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금력 앞에 굽실거리는 것을 보아 왔지만, 아하마드 일족의 한 성원이 되기까지는 복종이라는 말의 참뜻을 몰랐었다. 그때, 어머니의 재혼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나도 저 일족의 어엿한 한 성원이야. 다니엘은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다니엘은 그런 생각을 하자 용기가 솟아 마중 나온 리무진 쪽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갔다. 까만 빛깔의 리무진이 작은 깃발을 나부끼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의 일족의 위세는 대단하구나 싶었다. 다니엘은 이제부터 자기가 체제하는 곳이 카타르 왕실이라는 것을 조금씩 실감하게 되면서 약간 주눅이 들었다.

궁전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는 아무도 말이 없었다. 길 양편에 늘어선 건설 중인 수많은 건물들은 다니엘을 압도했다. 건물들 저쪽에는 끝없는 사막이 펼쳐져 있고, 군데군데 종려나무가 군생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풍경이 갑자기 바뀌어 광대한 비닐하우스가 눈앞에 펼쳐졌다. 청년은 그것이 카타르의 야채 수입 양을 줄이기 위한 하나의 시도라고 하였다.

"이곳과 해안에서 착수중인 담수화 플랜트는 석유 수익을 국민에게 환원하려고 하는 세이크 핫산의 희망으로 실현된 것입니다." 다니엘을 수행하는 청년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기 특별히 밝은 인상을 주는 건물은 여자들을 위한 학교죠. 이것은 아주 대담한 시도여서 많은 반발과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이 나라의 종교계 지도자들이 인정하여 겨우 설립할 수 있었죠."

이 청년도 그런 시도를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라고 다니엘은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도 여자가 교육받는 것을 찬성하지 않죠?"

이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그의 가무잡잡한 얼굴이 붉어졌다. 검은 눈동자에는 감탄의 빛이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것을 일부러 모른 체했다. 이렇게 핸섬한 청년이 자신의 매력에 감탄하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은 결코 싫은 일이 아니었지만, 그 이상 깊이 생각하려고 하지 않았다.

"동양적 사고방식이라고는 할 수 없죠."

꽤나 단정적인 대답이라고 그녀는 생각했으나, 이 이상은 그 화제를 계속하고 싶지 않은 것 같은 상대의 표정을 읽고, 화제를 핫산 일족, 특히 지금부터 그녀가 체재하려고 하는 집 사람들에 관한 얘기로 바꾸었다.

"아하마드가가 일족의 종가이고 국수이기도 합니다." 사우드는 수줍은 듯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저는 그 분의 육촌의 아들이니까 일족 중에서는 대단한 존재가 못 됩니다. 그런데도 내가 석유회사에서 자리를 얻은 것은 순전히 핫산 세이크의 호의 덕분이죠."

"하지만 당신은 대학을 나왔잖아요?" 다니엘은 계부가 들려준 이 핸섬한 청년에 대한 얘기를 생각했다. "딴 데가 일자리가 있을 텐데요."

"있어도 바라지 않았을 겁니다. 카타르는 내 조국이고 아버지의 조국이거든요. 그리고 세이크 핫산은 저의 학비를 대주셨습니다. 그분은 나 말고도 여러 사람들의 학비를 대주고 있죠. 그러니까 자신이 배운 것은 조국을 위해 쓰는 것이 가장 떳떳한 보은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런 가식도 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그의 태도에 다니엘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유치할 정도로 티없는 순수함과 단호한 충성심, 이것이 가혹한 사막의 전사가 지니고 있는 일면이기도 한 것이다.

"세이크 핫산은 관대하고 총명한 분입니다. 우리 일족 가운데도 그분에게 감사해야 할 사람들이 많죠."

"특히 조르단은 더욱 그래야 해요." 다니엘은 그의 말에 이렇게 덧붙여 말하고 나서, 계부가 어떻게 하여 어린 조르단을 데려다 길렀을까, 하고 생각했다.

", 조르단 말씀인가요?" 사우드의 목소리가 너무나 호의적이어서 다니엘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눈에는 거의 숭배에 가까운 표정이 어려 있었다. "그 사람은 세이크 핫산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사람이죠. 그가 없으면 이 나라는 파멸할 것이라고 저의 아버지는 말씀하십니다. 친척들 간에 그는 신의 선물이라고 불릴 정도죠."

다니엘은 처음에 그것이 사생아라는 것을 돌려서 하는 말이 아닌가 생각했으나, 사우드의 경의에 찬 표정으로 보아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신의 선물이라뇨? 그게 무슨 뜻이에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자기가 결혼했을지도 모를 그 남자에 대하여 다니엘은 혐오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호기심을 느끼면서 물었다.

"민심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힘과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일족이 투쟁과 역경의 시대를 맞이하면 항상 그런 인물이 나오죠. 세이크 핫산이야말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분에게 후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형제도 자식도 많은 우리 같은 집안에서는 치열한 경쟁이 끊일 날이 없어요. 때로는 지배를 에워싼 파멸 싸움이 전쟁으로 비화되는 수도 있죠. 우리 나라는 작지만 석유 덕분에 경제적으로는 윤택합니다. 그런데도 교육 수준이 낮아 그 부를 효과 있게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죠. 장차 석유가 나지 않을 때를 생각해서 대비하려고 하는 것이 세이크 핫산의 뜻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많은 계획이 실행으로 옮겨졌고, 우수한 젊은이는 외국으로 보내서 교육을 받게 하고 있으며, 기술의 습득과 공장 설비에 많은 돈을 투자했죠. 하지만 그분이 죽고 아무도 그의 뒤를 이을 사람이 없다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반대파를 진압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고 독수리처럼 사나우며 뱀처럼 교활한 남자가 있어야 해요. 조르단이 바로 그런 남잡니다."

듣기 좋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니엘은 불쾌했다. '독수리처럼 사납다'는 것은 횡포가 심하고 공격적이라는 뜻일 게다. '뱀처럼 교활한'이라구? 다니엘은 온갖 음모를 꾀하는 마키아벨리적 인물을 상상하였다.

이슬람교도들이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는 것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그리고 아랍의 비즈니스 사회에서는 그런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것을 다니엘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랍인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결코 존경하지 않으며, 존경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친다.

"당신은 그 사람을 칭찬하는군요." 사우드는 계부가 꺼낸 예의 혼담을 알고 있을까? 조르단이 그토록 중요한 인물이라면 왕실 가운데서 순수한 아랍 처녀를 고르는 것이 당연할 텐데. 틀림없이 계부는 결혼이라는 형식을 통해 나를 유리한 위치에 놓으려 했던 거야. 다니엘은 그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 존경합니다. 하긴 조르단이 어머니 쪽의 종료를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죠. 하지만 코란은 다른 종료의 가치를 인정하고, 조르단도 코란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엄격하게 그 계율을 지키거든요."

"꽤 모범적인 사람 같군요." 다니엘은 냉담하게 말했다. 아직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조르단이라는 남자에 대한 그녀의 혐오감을 자꾸만 깊어졌다. "만날 수 없어 애석하군."

그녀는 창밖의 풍경에 정신이 팔려 있어 사우드의 놀란 듯 자기를 쳐다보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차는 높고 흰 벽을 뚫어 낸 분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눈부신 햇살이 흰 벽에 반사되어 다니엘은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었다.

눈을 떴을 때 차는 옆으로 길게 뻗은 단층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창문이 모두 닫혀 있어 마치 건물이 눈을 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입구에 있는 훌륭한 모자이크를 보고 다니엘은 환성을 올렸다.

"저는 여기서 실례하겠습니다. 운전수가 당신을 여성의 건물가지 모셔다 드릴 테니까요. 그곳에서는 세이크가 마중 나오기로 되어 있습니다."

"또 만나 뵐 기회가 있을는지요?"

이 사람이 곁에 있어 주면 마음 든든한데, 다니엘은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다. 사우드는 얼굴을 붉히면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 곤란하다는 듯 운전수 쪽을 바라보았다.

"허락해 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께 말씀드려보죠." 그는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차는 아라베스크 무늬의 장식이 있는 입구를 지나 서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안뜰로 들어갔다.

한 쪽 벽의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같다. 여기서 차를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가라는 모양인데.

다니엘은 어리둥절한 채 차에서 내리자 이번에는 다른 쪽 벽의 문이 열리고 차의 트렁크에서 짐을 운반해 갔다.

문의 안쪽으로 발을 들여놓자 자스민 향기가 그녀를 감쌌다. 시원하고 기분이 좋았다. 희밓게 들리는 것은 냉방 장치에서 나는 소리인 모양이다.

"아가씨, 이쪽으로 오세요."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검은 차림의 소녀가, 낮지만 아름다운 목소리로 다니엘을 맞았다.

다니엘에 앞서 낭하를 걸어가는 소녀의 몸이 흔들릴 때마다 발목 장식이 맑은 소리를 냈다. 낭하의 막다른 곳에 문이 있고, 그 안쪽에 네모난 작은 방이 있었다. 창문 아래 소파가 있고, 바로 위에 작은 수반이 있었다.

"아가씨, 여깁니다." 상냥하면서도 단호한 말투였다.

다니엘은 소파에 걸터앉아 하이힐의 샌들을 벗었다. 소녀가 수반의 물로 손발을 씻겨 주었다. 스타킹을 신고 오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수반의 물에서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향기가 풍겨 다니엘의 코를 간지럽게 했다.

소녀의 동작에는 어색함이 전혀 없었다. 양손은 헤너로 물들였고 항상 눈을 아래로 깔고 있었다. 손발을 다 씻고 난 뒤 방의 건너편에서 수를 놓은 부드러운 슬리퍼를 가지고 왔다. 이 소녀는 틀림없이 하녀일 게다.

"셰이하 앞에서는 이것을 신어야 합니다. 무릎을 꿇고 다가가고, 물러날 때는 뒷걸음질 쳐서 물러나는 것이 관례입니다. 하지만 아가씨의 경우는 무릎을 꿇기만 하면 됩니다. 한꺼번에 전부 익힌다는 것은 무리라고 셰이하께서 말씀하셨어요."

소녀의 영어는 완벽했다. 너무나 완벽하여 다니엘은 자신이 아랍어를 할 줄 모르는 것이 부끄러웠다. 어려서 영어를 배웠냐고 물으니 소녀는 아버지에게 배웠다면서, 덕분에 셰이하의 집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대답했다. 셰이하는 자기의 딸과 소년들에게 모두 영어를 배우기를 권한다고 했다.

"영국 학교에 들어갈 때 필요하거든요. 셰이하는 자기 집안의 여자들에게 좋은 교육을 받도록 하려고 하죠. 아랍 여성이 무지하면 남성에게 멸시 당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셰이하가 계신 곳으로 모실 테니 이쪽으로 오시죠."

지금까지 있던 방은 대기실로, 조각과 채색으로 장식된 둥근 천장이 있는 커다란 방으로 통해 있었다. 그 복잡한 아라베스크 무늬와 양식화된 조각을 보고 다니엘은 감탄했다. 그리고 저 채색! 한 방에 이렇게 다양하고 눈부신 빛깔이 모여 있는 것은 처음 보았다. 자세히 관찰해 보니 그 빛깔들은 정성껏, 그리고 미묘하게 배색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환한 블루 곁에는 엷은 보라색이, 짙은 보라색 곁에는 심홍색이, 다음에는 연보라가 채색되고 다시 선명한 블루로 되돌아오는 식이었다. 이 훌륭한 색채의 조화가, 여기저기 놓여 있는 연한 황색의 소파를 돋보이게 했다. 소파 위에는 여러 가지 빛깔의 비단 쿠션이 놓여 있었다.

방의 한쪽 끝은 약간 높게 되어 있어 그 위에 소파가 하나 놓여 있고, 배후에는 정성껏 조각한 소용돌이 무늬의 장식용 칸막이가 있어, 러시아 정교회에서 쓰는 청화벽을 연상케 했다. 물론 이것은 종교적인 것도 아니고 인물상이 그려져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빛깔의 아름다움만으로 사람의 시선을 끄는 이 칸막이에는 군데군데 보석이 박혀 있어 닫힌 쇠살문 틈으로 겨우 새어드는 햇살에 반짝였다. 다니엘이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소녀의 모습은 사라지고 방 안에는 그녀 혼자뿐이었다.

칸막이의 문이 열리는 기척이 들리자 다니엘은 조금 전에 하녀인 소녀가 한 말을 생각하고, 아름다운 타일 바닥에 놓여 있는 매트 위에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가벼운 발소리와 비단 옷 스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다니엘은 얼굴을 들지 않은 채 그대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이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쪽으로 와서 시동생 핫산이 자랑하는 딸의 얼굴을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 다오."

다니엘은 일어서서 대좌 쪽으로 조심조심 걸어갔다. 그곳에는 몸집이 작은 부인이 앉아 있었는데, 어두컴컴한 속에서 비단 카프탄의 긴 옷이 빛나고 있었다. 많은 반지와 포동포동한 목 언저리에 번쩍이는 보석의 화려함을 보고 다니엘은 숨을 죽였다.

"비 갠 뒤의 사막의 빛깔을 한 머리구만." 셰이하는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여자들에게 말했다. 다니엘은 이 몸집이 작은 부인만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부인의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다른 여자들이 있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머리 빛깔은 영국인의 변덕스런 기질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중 한 사람이 부드러운 어조로 이렇게 말했으나 다니엘은 그 뜻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잠자코 있었다.

셰이하는 미소를 지으면서 다니엘에게 대좌로 올라오라고 했다.

"영국의 남성들은 운이 좋다고나 할까." 셰이하는 불쑥 이렇게 말했다. "아랍 남성들은 명성만으로 결정되지만, 영국 남성들은 아랍 말처럼 성질이 사나운 아내를 두고 있는지 백조처럼 상냥한 부인을 두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거든. 남자들은 어떤 타입의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셰이하의 밤색 눈동자가 다니엘을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었다.

"글쎄요, 알 수 없죠. 남자들도 여자들처럼 저마다 취미가 다르니까요. 얌전한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질이 사나운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갑작스런 질문에 다니엘은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현명한 대답이군." 셰이하는 뒤에 있는 여자들에게 말했다. "핫산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어. 아름답기가 마치 연못에 핀 수련과 같고, 살결이 투명하고 섬세하여 두려울 땐 꽃잎을 오무린다고 했지. 너는 카타르에 있는 동안 우리와 함께 지내는 거야, 다니엘. 핫산에게 들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이곳에서는 여자 혼자서는 거리에 나다닐 수 없고, 아버지나 남편 아닌 다른 남성 앞에서는 베일을 벗을 수 없단다. 너는 유럽 사람이니까 아무도 너에게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만약 이 관습을 무시한다면 딸로서 네 아버지의 입장을 곤란하게 하는 결과가 될 거야. 어떻게 하겠니? 네가 결정할 문제야, 다니엘. 만약 네가 여기 있는 동안 우리의 관습을 따르겠다면 조이가 차도르를 가지고 올 것이며 이 나라의 관습에 관해서도 가르쳐 줄 거야, 양장 차림으로 있고 싶다면 그래도 무방하다만."

결정한다구, 무엇을? 다니엘은 조금 전 셰이하가 조이라고 말한 소녀의 수줍은 듯한 미소를 바라보았다. 만약 내게 양장 차림으로 있고 싶다고 말한다면 아빠의 체면도 생각하지 않는 버릇없는 처녀라고 하겠지. 하지만 아랍 여성의 복장을 하고 그들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자신의 개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거나 다름없다.

모두가 다니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계부의 호의나 애정을 생각한다면 하나밖에 없다.

"차도르를 입겠어요." 불쑥 이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 다니엘은 방금 한 말을 취소하고 싶어졌다. 전혀 낯설고 비합리적인 사회 안에 스스로 발을 들여놓음으로써 지금까지와는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것은 아빠의 일족이 아빠의 재혼에 대해서 다시는 이러쿵저러쿵 잔말이 없도록 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셰이하는 미소 지었다.

"그럼 갈아입고 오너라. 조이를 따라가면 돼. 그리고 나서 둘이 얘기하자. 핫산과는 몇 해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지. 영국에 관해서 들려 다오. 어렸을 때 가보았을 뿐이니까."

뒷걸음질 쳐서 물러난다고 했지. 다니엘은 천천히 대좌에서 물러났다. 곁에 있던 조이가 감동한 듯 미소 짓고 있었다.

알현의 방-조이가 그렇게 가르쳐 주었다-을 나와 두 사람은 낭하를 지나 다니엘이 묵게 될 방으로 돌아왔다.

끝없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가 할 정도의 나선형 계단을 다 오르자, 조이는 다니엘이 따라오기를 기다렸다가 문을 열었다.

다니엘은 호화로운 내부를 둘러보면서 황홀함과 두려움이 엇갈리는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몽유병자처럼 조이를 따라 호화로운 거실을 거쳐 침실로 들어갔다. 낮은 침대는 비단 커버가 덮인 사주식 침대였다. 그보다도 더 델리키트하고 놀라운 것은 금박까지 입혀져 있는 점이었다. 침실 곁에는 작은 화장실이 있었으며, 문이 거울로 된 모던한 옷장이 늘어서 있었다. 그 건너편은 욕실인데, 한층 낮게 되어 있는 욕조와 샤워, 그 밖의 설비가 갖추어져 있었으며, 침실의 빛깔에 맞추어 전면이 엷은 핑크빛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다.

"하녀에게 카프탄 몇 벌을 가지고 오라고 할 테니 그 중에서 고르세요."

방을 대략 안내한 뒤 조이가 다니엘에게 말했다. "내일 재봉사가 오면 무엇이든 맘에 드시는 옷을 맞추시죠."

"겨우 3주일 동안 있는데 그렇게까지 안 해도 괜찮아, 조이."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셰이하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조이의 어조는 진지했다.

"어마, 그래? 그렇다면."

그리고 반시간 동안이나 조이는 이곳의 관습과 생활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을 가르쳐 주었다.

"익히기가 무척 힘들어."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에요. 그리고 항상 곁에서 누군가가 도와 드릴 테니까요. 그럼 저녁 식사 때 또 뵙겠습니다." 조이는 이렇게 말하고 가볍게 일어섰다. "통로는 알고 계시죠?"

"그건 걱정할 것 없어." 이렇게 말하고 다니엘은 방문이 닫히는 것을 바라보았다.

왠지 외톨이가 된 느낌이 들었다. 자란 환경이나 문화가 많이 다르지만 그녀는 셰이하의 조카딸이라는 조이가 좋았다. 다정한 눈과 온화한 목소리. 셰이하의 시중을 드는 일은 대단한 영광이어서 가족들도 무척 기뻐하고 있다고 말했다. 1년의 근무를 마치고 셰이하의 마음에 들면 지참금도 많이 올려 주고 좋은 신랑감을 찾는 데 힘이 되어 준다고 한다.

다니엘은 그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조이는 그런 일에 대해 아무 반감도 품고 있지 않았으며 아버지가 딸의 상대를 선택할 권리를 갖고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조르단과의 결혼 얘기는 아직까지 한 번도 화제에 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다니엘도 침묵을 치켰다. 그 얘긴 틀림없이 공표되지 않았을 것이다.

조이가 나간 뒤 다니엘은 옷장 속을 열어 보았다. 문을 열자 보석이 박혀 있는 카프탄이 잔뜩 걸려 있었다. 빛깔도 아주 엷은 핑크에서 짙은 초록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녀는 그 중에서 한 벌 꺼내어 몸에 대어 보았다. 거울을 보니 몸집이 작은 유럽 처녀가 갑자기 매혹적인 동양 처녀로 둔갑하지 않았는가! 다니엘은 당황하여 그 옷을 원래의 자리에 걸었다.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 보니 한 소녀가 시선을 아래로 깔고 서 있었다.

"셰이하의 말씀이 계셔 아가씨의 시중을 들러 왔습니다. 차도를 가지고 왔어요. 궁중을 다니실 때는 맨살이 보이지 않도록 이 옷을 입으셔야 합니다."

다니엘은 검은 코우트처럼 생긴 차도르를 받아들고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옷을 입다니, 내겐 어울리지 않아. 그러나 다니엘은 자신이 계부의 전권 대사로 이곳에 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하느니보다 차라리 천막처럼 생긴 이 옷을 입기로 하자. 라마단(단식)이 끝났다는 것만도 다행한 일이다. 이때 정적을 깨뜨리고 근행의 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 다니엘은 깜짝 놀라 옷을 떨어뜨렸다.

소녀는 곧 바닥에 엎드려 그대로 있다가 마침내 조용히 일어나 다니엘 쪽으로 걸어왔다.

"저녁 식사 전에 목욕을 하셔야 합니다. 제가 도와 드리겠어요. 셰이하께서 손수 정원에서 기르신 장미꽃으로 만든 오일을 주셨습니다. 이건 대단한 영광이죠."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다니엘이 말했으나, 소녀는 이미 호화로운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작은 병에서 무엇인가를 따르자 물은 곧 우윳빛으로 변했다.

"혼자 할 수 있어."

그러자 소녀의 얼굴이 갑자기 흐려졌다.

"물러가라는 말씀인가요?" 그 표정이 너무나 애절하여 다니엘은 불쌍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럽의 처녀는 자기 신변의 시중을 드는 하녀에 익숙하지 않아. 이름이 뭐지?"

"자나이데예요." 소녀는 수줍은 듯 대답했다. "물러가라는 말씀을 듣게 되면 제가 실례를 해서 그런 것이라고 셰이하께서 생각하세요."

커다란 밤색 눈동자가 너무나 슬퍼 보여 다니엘은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향긋한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느긋하게 누워 있는 것은 형용할 수 없이 상쾌한 일이었다. 자나이데가 스폰지로 몸을 부드럽게 문질러 주었다. 다니엘이 목욕물에서 나와 소녀가 건네주는 타월로 몸을 감쌀 무렵에는 부끄러움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정말 희고 투명한 살결이시군요! 이렇게 아름다운 살결을 남자들이 보면 넋을 잃을 거예요. 하지만 아가씨는 좀 더 많이 잡수시고 살을 찌우셔야겠어요."

다니엘은 소녀가 어디를 보고 그런 말을 했는지를 알아채고 쓴웃음을 지었다.

"유럽에서는 남자들이 마른 여자를 좋아해."

"아가씨는 약혼하셨나요?"

주제넘은 질문을 받으면서도 다니엘은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미소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자나이데는?"

소녀는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오래 전에 육촌인 페이살과 했어요. 이곳의 관습이거든요. 저희들은 내년에 결혼해요." 이렇게 말하고 일어나서 다니엘의 말을 듣기도 전에 타월을 가볍게 받아 작은 서랍을 열었다. ", 소파에 누우세요, 아가씨."

다니엘은 곤혹감을 느끼면서도 시키는 대로 하자, 소녀는 서랍에서 꺼낸 오일을 온몸에 바른 다음 마사지를 시작했다.

"페이살과는 몇 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죠. 영국의 대학에서 공부한 뒤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서 일하고 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아주 핸섬한 청년이 되었다고 오빠가 가르쳐 주었어요." 작고 예쁜 보조개가 입가에 패었다.

다니엘은 미소로써 대꾸했다. 그렇구나, 이곳 처녀들은 참고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맞선에 대해서도 불만이 없겠군.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자기가 상대를 찾고 싶은 생각은 없어?" 다니엘은 흥미진진하기만 했다.

", 남편을 좋아하게 될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집안 망신을 시키는 결과가 되거든요." 소녀는 이렇게 말하고 방을 나갔다가 곧 돌아왔다. 비취색의 카프탄을 손에 들고 왔다.

"그건 싫어!" 다니엘은 조금 전에 그 옷을 몸에 대 보았을 때의 충격이 생각났다.

자나이데는 얼굴을 찌푸렸다.

"저 옷장 속에 있는 것 중엔 이 옷이 제일 좋은 건데요. 싫다고 하시는 건 셰이하를 모욕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아냐, 아주 멋있어. 하지만 양장이 더 편하거든. 이곳 사람들이 양장이 불편한 것처럼 난 그 옷이 불편해서 그러는 거야."

놀랍게도 자나이데는 눈동자를 빛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저도 진즈를 입어요, 아가씨. 하지만 어머니나 언니와 함께 집에 있을 때만 입지요. 어머니는 처음엔 충격을 받으셨지만, 오빠는 유럽의 처녀들은 모두 진즈를 입는다고 했어요. 양쪽 다 입을 수 있는 것이 더욱 좋잖아요?"

다니엘은 놀랐다. 아랍의 여성들은 남성에게 완전히 지배당하고 있다고 알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을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자나이데는 머리를 감겨 주고 말려 주면서 의외의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다니엘의 마음속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미지가 떠올랐다. 우수한 여자에게는 유학의 기회도 주어진다고 했다. 이슬람의 가르침을 지키고 신중히 행동하는 한, 아랍 여성은 다니엘이 생각하고 있는 이상으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유럽 사람들과는 달리 남자들과 함께 춤을 추고 자유롭게 사귈 수는 없죠. 하지만 세이크 핫산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로 많은 것을 개선해 주셨고, 앞으로도 노력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어요. 그리고 우리는 차도르를 입고 이런 생활 양식 속에서 살아가는 게 좋아요. 미지의 것에 마음이 끌린다고 하죠? 우리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들이 남자들로부터 멀리 있으니까 남자들의 마음을 끌 수 있거든요."

 

저녁 식사가 끝나자 다니엘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젠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모두가 친절히 대해 주었으나, 많은 사람의 이름을 왼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장시간의 여행과 낯선 나라에서의 긴장감으로 인한 피로 때문에 빨리 자리에 눕고 싶었다.

다니엘은 작은 컵에 진한 커피를 여러 잔 마신 모양이었다. 조이가 이런 어려운 상황을 알아채고 컵을 흔들어 더 마시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를 하라고 은밀히 가르쳐 주지 않았더라면 계속 마실 뻔했다. 식사는 맛있었으나 유럽의 음식보다 좀 기름진 것 같았다. 이젠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 방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자나이데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계단은 끝없이 계속되는 것 같았다. 이렇게 계단이 많았던가? 틀림없이 기분 탓일 게다. 다니엘은 무거운 차도르 자락을 쳐들고 힘없이 계단을 올라갔다.

벽의 불빛이 그녀를 비쳤고 열린 문틈으로 불어 드는 바람에 그림자가 흔들렸다. 하나의 그림자가 자기 앞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 가슴이 철렁하면서 멈칫했다. 그러나 그림자가 아니었다. 검은 옷을 걸친 한 남자였다. 검은 옷이라고는 하나 온몸을 감싼 다니엘의 것과는 달리 앞이 트여 햇볕에 그을은 가슴과 곱슬거리는 검은 가슴털이 보였다. 방금 샤워를 하고 나오는 길인지 아직도 젖어 있는 것 같았다. 머리도 곱슬거리는 검은 빛이어서 고대 코인에 그려진 얼굴을 연상케 했다. 얼굴은 공격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남성적이고 광대뼈가 나와 있었다. 상대는 다니엘에게 날카로운 어조로 두세 마디 말을 걸었다. 아리비아 말인가? 다니엘은 말없이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그도 고압적인 자세로 다니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순간 목 언저리에 경련 같은 것을 느꼈다. 처음에 까만빛이라고 생각했던 눈동자는 아주 짙은 회색이었다.

상대방이 다시 말을 걸었다. 아까보다 더 무뚝뚝하고 명령하는 듯한 말투였다.

"몰라요. 영어밖에 할 줄 몰라요." 상대방에게 의사 전달이 될지 자신이 없었으나 다니엘은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흰 이가 빛났고 눈 언저리에는 희미하게 주름이 잡히면서 입 언저리가 조소하듯 일그러졌다. 다니엘은 지금까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기묘한 느낌으로 몸을 긴장하면서 뒤고 물러섰다.

이때 상대방은 다니엘의 손목을 잡아 힘껏 끌어당겼다. 박하와 같은 냄새가 가볍게 풍겼다.

"나를 찾고 있었나?" 완벽한 영어였다. 그러나 부드러운 데가 전혀 없었다. 자기의 힘을 냉정하게 억누르고 있는 것 같은 말투였다.

다니엘은 잡혔던 손목을 자신도 모르게 만지면서 상대를 쳐다보았다.

"네 방을 찾고 있어요."

상대방은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여기서 말인가? 여기는 여성용의 건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텐데."

다니엘은 말의 내용보다는 그의 건방진 말투 때문에 얼굴을 붉혔다. 믿을 수 없어. 그녀는 올라온 계단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길을 잘못 들진 않았을 거예요."

상대방은 놀리는 기색도 없었다. 미소가 사라지고 오만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몇 살일까? 서른 살? 좀 더 먹었을까? 어두컴컴한 속에서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몇 살이든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이야. 다니엘은 반감을 느끼면서도 상대방의 남자다움을 느끼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엷은 옷 속에 드러나 보이는 유연하면서도 탄탄한 몸매.

"."

그의 눈은 마치 다니엘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하였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지. 아이 분해. 그녀는 상대방이 자신의 심장과 맥박의 수까지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얼굴을 돌렸다. 입술이 떨리는 것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발리 도망치고 싶다. 도망친다구? 무엇으로부터? 다니엘은 자신이 야속했다. 이제는 조이와 자나이데의 영향을 받아 낯선 남자 앞에서 그녀들처럼 행동하게 되었단 말인가? 나는 영국인이잖아? 그리고 어떤 경우에라도 자신을 굽히지 않겠다던 결심은 어찌 된 거지?

다니엘은 단호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었다.

"여성용 건물에서 벗어난 줄은 미처 몰랐어요. 길을 좀 가르쳐 주시면."

상대방이 다시 흰 이를 드러내 보여 다니엘은 몸을 긴장시켰다. 나를 비웃고 있는 모양이군. 그러나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대단한 용기가 있는 아가씨군. 백조 아가씨는 무슨 벌을 받을지도 모르고 독수리의 영역에 무단 침입을 했나?"

피로하여 머릿속이 혼란한 다니엘은 말없이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이때 그는 양팔을 그녀의 허리에 감아 힘껏 끌어당겼다. 그의 몸에 찰싹 달라붙은 다니엘은 상대방의 따뜻한 숨결을 볼에 느끼면서 숨을 헐떡였다. 상대방은 머리를 숙여 인정사정 없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것은 그녀가 지금까지 경험한 적이 없는 격렬한 키스였다. 허리에 감은 그의 양손이 더욱 죄어들었다. 상대는 엷은 옷 속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니엘은 그것을 느끼자 몸이 굳어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덕분에 다니엘은 정신을 차리고 상대방의 억센 가슴을 밀어젖혔다. 가슴털이 있는 그의 살에 손끝이 닿자 섬뜩한 느낌이 들어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그는 잔인하게 웃으면서 다니엘의 손을 자아 손바닥을 펴게 한 다음, 자기의 미끈한 살에 대고 눌렀다. 그리고 한참 동안 입술을 겹치고 있다가 갑자기 비웃듯이 말했다.

"그래영국 여자도 의외로 정조를 지키려고 하는군. 당신은 안뜰에 피어 있는 장미처럼 빨개졌잖아. 당신은 닫힌 정원이야아무것도 몰라아직 아무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어."

"그만해요!" 다니엘은 목소리를 쥐어짜내듯 간신히 말했다. "듣기 싫어요! 놓아요. 셰이하에게 이르겠어요!"

상대가 큰 소리로 웃고 있어 다니엘은 불안해졌다. 한쪽 손만 붙잡힌 채 몸만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렇게 해보시지, 아가씨." 사나이는 비웃는 듯이 말했다. "그보다도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 않나?"

상대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더욱 혼란해진 다니엘은 어두컴컴한 속에서 다만 상대를 쳐다볼 뿐이었다.

'이 남자에게 조심해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도대체 어찌된 셈이지? 처음 대하는 이 남자-더구나 오만하고 불쾌한 남자-에게 넋을 잃을 정도로 내가 바보는 아닐 텐데?

다니엘은 상대의 가무잡잡하고 윤곽이 뚜렷한 얼굴을 불안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입 언저리는 오만하게 생겼지만 턱의 선은 단정하게 생겼군. 화를 내어 턱에 힘을 주면 무섭겠으나 지금은 즐거운 듯 부드러워 보이는데.

"왜 말이 없지?"

다니엘의 손목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이 그녀의 양어깨로 돌아가더니 두꺼운 옷 속에 감추어진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다니엘은 저항하고 싶은 심정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여자를 잘 알고 있군, 나를 가지고 노는 것을 보니. 내가 싫어하는 것을 보고 좋아하겠지. 다니엘은 눈에 노여움의 불꽃을 튀기면서 온몸을 긴장시켰다. 그러나 상대는 또 소리를 죽여 웃을 뿐이었다. 이건 너무 심한데. 사나이는 한손을 다니엘의 가슴에 대었다. 그녀의 불안한 듯한 숨소리가 두 사람의 귀에 들렸다.

"당신의 심장은 마치 덫에 걸린 새의 심장처럼 두근거리고 있군." 사나이는 이렇게 말하면서 손바닥을 그녀의 가슴에 대 보았다.

다니엘은 볼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뒤로 물러섰다. 실제로 불에 데었다 하더라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양어깨를 잡히고 있는 다니엘은 그에게서 물러설 수가 없었다.

상대의 손이 겨우 그녀의 두근거리는 심장에서 떨어졌는가 했더니 이번에는 다니엘의 두건을 위로 젖혔다. 저녁 식사 전에 자나이데가 정성껏 빗어 준 머리가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 어두컴컴한 속에서 그녀의 머리는 타오르는 불꽃처럼 밝은 빛이었다. 이때 상대의 섬뜩한 낮은 목소리가 들려 그녀는 긴장했다.

"촛불 아래서 만나다니 제대로 됐군, 핫산의 따님."

다른 경우라면 우습게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 오래 된 궁전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여느때 우습게 생각했던 소설의 여주인공처럼 물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다니엘은 어스름한 속에서 상대가 비웃듯이 눈썹을 치켜 올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입 언저리는 씁쓸하게 웃고 있었으나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그의 억세게 생긴 육체를 보고 있노라니 이 세상에 두 사람만 있을 뿐 아무도 없는 것 같은, 그 자리에 영원히 서 있을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모르나?"

비웃는 듯하던 그의 태도가 갑자기 오만한 태도로 바뀌어 다니엘은 겁을 먹었다. 주위가 조용하여 마치 악의에 차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알겠어요?" 다니엘은 겁먹은 듯 말했다. ",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는데다가."

"나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당신이 내 은밀한 방에 나타났어. 무슨 급한 용건이 있어서 나를 찾으러 왔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잖아? 그것이 논리라는 거지, 그렇잖아? 핫산의 따님, 나는 당신들을 잘 알고 있지. 영국 사람들은 논리를 좋아하거든."

"그렇지 않아요." 다니엘은 발끈하면서 대답했다. "난 내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틀림없이 도중에 길을 잘못 든 거예요." 그러나 이제 와선 이미 늦었다. 계단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만 같았다. 도중에 돌아가기만 했어도 좋았을걸. "그리고 내가 당신을 찾아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 용기를 내어 이렇게 말하고 나니 가슴이 후련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일 뿐, 상대가 턱에 힘을 주는 것을 알아챘다. 화를 내고 있군. 그녀도 노여움이 치밀어 올랐다. 상대는 예의 비웃는 듯한 투로 말했다.

", 있구말구. 충분한 이유가 있지, 핫산의 따님. 나는 조르단 사우드 이븐 아하마드야."

 

4

다니엘은 입안이 바싹 말랐다. 잘못 들었을까? 그가 방금 한 말을 정리해 보려고 하였으나 머릿속이 혼란하여 가다듬기 어려웠다.

"하지만 당신은 프랑스에 있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요. ."

"프랑스에만 있고 이곳엔 오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나? 현대적 교육을 받은 여자치곤 남자를 모르는군, 핫산의 따님. 내가 그런 모욕을 받고 가만히 있을 줄 알았나? 나와의 결혼을 거절하다니."

다니엘의 손목을 잡고 있던 그의 손에 더욱 힘이 주어졌다. 아빠가 말한 대로야. 손이 마비될 정도로 힘껏 잡힌 다니엘은 두려운 나머지 오한을 느꼈다.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지. 우선 전화를 걸자. 아냐, 두 분은 사업 관계로 미국을 여행 중이지. 그렇다면 셰이하를 만나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자 다니엘은 두려움을 다소 잊었다. 그분이 틀림없이 힘이 되어 주실 거야. 아빠에게 용돈을 타 가지고 올 걸 잘못했구나. 그러나 계부는 용돈은 필요 없다고 말했었다. 사실 다니엘이 돈을 지불하려고 하면 모든 사람이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돌아올 비행기 값이라도 달라고 졸랐으나 그것도 안 된다고 말했다. 일족 전용의 비행기로 가면 된다면서. 그것은 줄을 서서 표를 사야 하는 사람들로서는 맛볼 수 없는 사치였다. 이것저것 생각하는 동안 다니엘은 현기증을 느꼈다. 눈 앞에 서 있는 사나이는 잡고 있는 손목을 계속 놓아주지 않았다.

"사과하고 싶지 않아요." 노여우이 치밀어 올라 다니엘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말해서 말했다. "사과해야 할 일은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그도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기분 나쁠 정도로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다니엘이 고집스럽게 침묵을 지키고 있자 그는 낮은 목소리로 덧붙여 말했다. "역시 핫산의 따님은 자신의 무례를 인정할 용기가 없단 말인가. 화를 내면서 남을 모욕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지만 그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하는 일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지."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결혼하려는 남자야말로 사과해야 하지 않을까요? 당신에 대해서 무척 좋지 않은 얘기를 들었거든요. 당신과 우리 아빠가 혼담을 꺼내기 전이에요. 하지만 그 얘기를 듣고."

"무슨 얘기를 들었지?" 조르단의 눈이 험악해졌다.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다가 이쪽에서 무슨 말을 하면 당장 달려들 것 같은 기세였다. "그리고 누구한테서 들었지?"

"친구한테서요." 다니엘은 상대에게 굴복 당하지 않으려는 듯 턱에 힘을 주었다. "필립 먼데일이에요. 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나는 당신의 평판만 듣는 것으로 그쳤지만, 당신의 소유물이 되었다가 버림받은 여자들이 많다던데요."

한순간 다니엘은 상대에게 얻어맞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거의 까만 빛깔에 가까운 짙은 회색의 눈동자에 무서울 정도로 격렬한 노여움이 넘쳐흘렀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당신의 모욕적인 인사는 마치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어린애의 말과 같아. 내가 이렇게 생각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거야." 조르단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싸늘하게 비웃듯이 덧붙였다. "아직 어린애군, 말하는 걸 들어보면 알 수 있어." 그가 다니엘 쪽으로 몸을 굽히자 그녀는 그의 따뜻한 숨결을 관자놀이에 느꼈다. "당신은 자신이 얼마나 경솔한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어린애야." 조르단의 눈은 겁먹은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말하자면 당신은 내것이 되는 것은 참을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군, 아가씨? 두려움과 혐오감으로 나를 피하는군. 그리고 결혼 후의 나에 대한 평판은 참으면 된다고 생각하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바보 아가씨. 머리를 좀 써보라구." 조르단은 다니엘은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한 손으로 그녀의 양손목을 잡고 또 한손으로 그녀의 턱을 올렸다. 계단의 불빛으로, 몹시 놀란 다니엘의 표정이 드러났다. "당신은 오아시스 옆에서 풀을 뜯는 새끼 사슴처럼 겁이 많아. 그 눈은 겁이 많아 다른 동물들의 먹이가 되기에 십상이겠어. 당신의 용기는 어디 갔지, 핫산의 따님? 나는 얼음처럼 찬 남자가 아냐. 당신처럼 심장도 뛰고 있어. 당신도 알겠지?"

다니엘의 손은 엷은 가운 속의 그의 따뜻한 체온을 느꼈다. 누군가 어서 와서 이 악몽과 같은 상황에서 구해 달라고 다니엘은 필사적으로 빌었다.

그녀의 그런 마음을 읽었는지 조르단은 비아냥거리면서 말했다.

"아무도 당신을 구하러 오진 않아. 여기는 내 은밀한 방이거든. 잘 생각해 봐, 핫산의 따님. 만약 내 소유물이 된다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것이지 내가 당신에게 가르친다 해도 아무도 반대할 수 없고, 또 겁 많은 처녀의 고함 소리 따윈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아."

"전 겁쟁이가 아니." 그녀가 말하려는 것을 중단시키고 그는 쉰 목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거짓말이야, 다니엘. 당신이 그렇지 않다면, 남자는 닫힌 정원처럼 남자를 모르는 소녀에게 흥미를 느낀다는 말을 듣지 않아도 알고 있었을 거야. 먼데일이 이 말을 하지 않았다니 놀랍군."

"어떻게 말하지 않았다는 걸 알죠?"

다니엘은 반항하면서, 그에게 잡힌 손으로 그의 억세고 따뜻한 가슴을 좀 더 힘껏 밀어붙일 수 있는 용기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몸부림친다 해도 그의 억센 팔은 그녀의 허리를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만약 그가 그에 대해 말했다면 말만 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지, 그리고 당신의 손이 두려움으로 이렇게 떨릴 리도 없고. 내가 이렇게 만지기만 해도 미지의 것에 대해 두려움으로 눈을 그렇게 크게 뜰 리도 없거든."

그는 다니엘의 차도르를 들추어 날렵한 손으로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면서 온몸을 긴장시켰다. 카프탄 안에는 다니엘의 탄력 있는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은 드럼처럼 두근거렸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 낯선 남자의 팔에 안기다니.

"당신은 정말 싱싱하고 순진하군!" 조르단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다니엘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항의하려고 하였으나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의 능숙한 키스에 다니엘은 지금까지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이상한 감흥이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입술이 떼어지자 다니엘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반항하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조르단은 더욱 격렬하게 입술을 밀어붙였다. 그는 조롱기 섞인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움직이지 마, 핫산의 따님. 당신이 부끄러워하는 것은 마치 아무것도 모르고 상처받기 쉬운 당신을 겁탈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 같군."

"놓으세요!"

다니엘의 숨결이 가빠지고 심장의 고동은 더욱 빨라졌다. 그러나 조르단은 그녀의 말엔 귀도 기울이지 않았고 그의 입술로 더욱 그녀를 탐했다. 그의 한 손이 가슴에 와 닿는 순간 다니엘은 깜짝 놀라면서 온몸을 긴장시켰다. 전신이 무섭게 떨렸다. 잠시 후 그녀는 자신의 몸 안에서 무엇인가가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동시에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조르단의 압도적인 힘, 남성적인 매력 앞에 그녀는 두려워 떨었다. 조르단이 몸을 떼고 다니엘은 곧바로 세웠을 때 그녀는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가 양손으로 받쳐 주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쓰러졌을 것이다.

"왜 그렇게 충격을 받는 거지?" 조르단이 다니엘의 카프탄의 깃을 아무렇게나 여며 주면서 물었다. "나의 행동 때문인가? 아니면 당신의 느낌 때문인가?"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어요." 다니엘은 일부러 허세를 부려 보았다. "혐오감말고는요."

"혐오감이라구?"

그의 기세로 보아 그녀는 그가 다시는 자기를 놓아주지 않을 것같이 생각되었으나 다행히도 상대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불빛 아래 어렴풋이 보이는 그의 눈은 조롱하는 빛을 띠고 있었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해두지. 오늘 밤은 피로해서 처녀를 교육시키고 싶은 생각이 없어. 하지만 새틴 쿠션이 있는 푹신한 침대에서 당신을 껴안고 당신의 그 고상한 체하는 태도와 프라이드의 껍질을 한 겹씩 벗기는 건 정말 재미있겠는걸. 당신이 지금까지 당신을 지킬 수 있었던 건 그 오만한 체하는 태도 덕분이겠지만, 자 이젠 당신이 어린애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시지. 그리고 내 키스가 싫지 않았다는 것도 인정하시지 그래."

"싫지 않았다구요? , 물론 싫지 않았어요." 다니엘은 허세를 부렸다. 두려움과 노여움으로 정신없이 소리쳤다. "더럽고 굴욕적이고 구역이 나서 온몸이 오싹했어요!" 이렇게 말하고 홱 돌아서서 그가 또 손을 내밀기 전에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2층까지 내려와 잠시 서서 호흡을 가다듬고 귀를 귀울였다. 그는 뒤쫓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집 안엔 정적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면서 살펴보니 길을 잘못 들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자나이데가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씨, 늦으셨군요."

걱정스런 얼굴로 말하는 자나이데에게 다니엘은 길을 잘못 들었던 경위를 설명했다.

"조르단은 프랑스에 가 있는 가 알았는데."

"세이크는 오늘 밤에 돌아왔어요." 다니엘의 상기된 얼굴을 보는 자나이데의 안색이 약간 창백해졌다. "아가씨, 잘못해서 세이크의 방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간 건 아니겠죠."

"애석하지만 사실이야." 다니엘은 쌀쌀하게 말했다.

계단에서 일어났던 일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심장의 고동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아 가슴이 들먹였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아무한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비록 상대가 마음에 드는 자나이데라 할지라도.

"세이크 조르단은 정말 핸섬하고 남자다운 분이에요. 그분 곁에서 자면 참 즐거울 거예요. 이슬람교도가 아니니까 한 사람의 부인밖에 두지 못하겠지만, 셰이하의 일족 가운데는 그분의 부인이 될 사람을 자기 집안에서 고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분은 권력과 재산을 함께 가지고 있거든요."

"오만하고 난폭한 사람이야." 다니엘은 내뱉듯이 말했다. "그 사람에 관해선 한마디도 듣고 싶지 않아."

"아가씨는 그분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자나이데는 조르단에게 완전히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뱀처럼 간교하지." 자나이데의 도움으로 카프탄을 벗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보다도 그 사람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야."

자나이데가 물려가고 방 안에 혼자 남자 다니엘은 속에서 무엇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아 침대에서 내려왔다. 몽유병자처럼 욕실로 걸어가 네글리제를 벗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매를 바라보았다. 팽팽한 가슴을 한손으로 만져 보았다. 자신의 몸의 일부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신음과도 같은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깼다. 다니엘은 네글리제를 집었다.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자신의 몸을 더 이상 바라볼 수 없었다. 조르단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와 닿았을 때의 환희가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 생각하기 싫다.

 

5

이튿날은 몹시 바빠서 다니엘은 아무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방금 구운 롤 빵에 벌꿀, 그리고 따끈한 커피로 아침 식사를 마치자, 자나이데에게 쫓기 듯하면서 계단을 뛰어내려와 넓은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에는 크고 까만 롤즈로이스가 마치 분수의 물이 수반에 떨어지는 부드러운 소리에 맞추기라도 하듯 엔진 소리를 내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운전수가 문을 열자 다니엘은 얌전하게 가 셰이하의 곁에 올라탔다.

"잘 잤어, 핫산의 따님?" 셰이하가 상냥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다니엘은 말없이 괘를 끄덕였다. 속으로는 이름을 불러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핫산의 따님'이라는 말을 들으니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고리를 물고 되살아났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비단 장사가 한 달에 한 번씩 궁전에 찾아오면 우린 새 옷감을 사지. 그날은 집안사람들이 모두 모여 떠들썩해. 모두 알현실에 모이거든. 며느리들도 가족과 함께 와서 옷감도 고르고 커피도 마시면서 하루를 보내는 게 관례지."

"즐겁겠군요." 다니엘은 실례가 되지 않도록 이렇게 중얼거렸으나 셰이하는 다니엘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셰이하는 날카로운 눈으로 다니엘의 얼굴을 살피더니 운전수에게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뒷좌석과 운전석 사이의 칸막이 유리문을 닫으라고 손짓했다.

"우리들처럼 살게 되면 여자들은 자기를 나름대로 즐거움을 찾지 않으면 안 돼요." 셰이하의 어조는 진지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소홀히 하면 안 돼, 다니엘. 며느리들은 전부 대학을 나와 영어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하지. 그래서 대가족을 꾸려 나가는 거야. 하지만 우리 종교는 남녀가 자유롭게 사귀는 일을 허용하지 않고, 우리는 그것을 지키지." 셰이하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지면서 다니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니엘에겐 견디기 힘들 것으로 생각되겠지만, 생각처럼 그렇게 힘든 건 아냐. 우리 집 양반은 핫산처럼 진보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얘기를 듣거나 영화 구경을 하는 정도는 허락하지. 그래서 우리는 국제 문제에 관해서도 상세히 알고 있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활발한 의견 교환도 하지. 그러니까 여자들뿐이라서 재미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유럽 사람들의 편견이 아닐까? 하지만 의견 교환의 목적이 단순히 남자들과 함께 있을 수 없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여자를 너무 얕잡아 본 생각 아니겠어?"

교묘한 논법이야. 다니엘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뿐만 아니라 따지고 보면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다. 그러나 다니엘이 가장 찬성할 수 없는 것은 남성들과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자유로운 선택권이 없다는 것이다.

다니엘이 그 사실을 말하자 셰이하는 고개를 저으면서 미소 지었다.

"다니엘은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그렇지 않아. 누구나 남편과 아버지와는 사귈 수 있거든."

"하지만 선택의 자유는 남자에게만 있잖아요?" 어딘지 가시 돋친 듯한 다니엘의 말에 셰이하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럼 다니엘은 남자에게-특히 남편에게-함께 있어 즐겁다는 생각을 갖게 할 힘이 없어? 진주를 지키는 조개처럼 함께 있는 귀중한 시간을 아끼게 할 수 없단 말인가? 부끄러움을 알아야 해, 다니엘! 유럽 여성들은 여성 해방 운동 덕분에 자신들에겐 남성의 마음을 끌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게 되었어. 이 나라 여성들이라면 그런 정도는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있는데 말야. 여자는 남편의 인생을 천국으로 만들 수도 있고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거든. 현명한 여성은 천국으로 만들지, 가정에 평화가 있으면 마음에도 행복이 찾아오니까. 유럽 여성들은 자신의 성을 낮게 평가하는 것 같아, 다니엘. '요람을 흔드는 손은 마침내 세계를 흔든다'고 하는 속담이 있잖아? 그 의미를 잘 생각해 봐." 셰이하는 여기까지 말하고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 "그건 그렇고카딜이 우리를 알 모하메드 거리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우리 일족이 건설 중인 건물을 볼 수 있을 거야. 저것이 새 도서관이지." 셰이하는 이렇게 말하면서 햇빛 속에 빛나고 있는 새 건물을 가리켰다. 동양적인 형태가 형용할 수 없이 매력적이었다. "그 옆에 있는 것은 외과 대학과 병원이고, 핫산은 언젠가 우리 집 양반에게 이런 말을 했지. 먼 훗날 석유가 나지 않거나 필요 없게 될 때를 대비해서 우리는 어린애들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 많은 산업과 기술이 개발되고 있지, 물론 그것들은 수도에서 몇 킬로나 떨어진 곳에 모여 있지만. 나중에 도시의 반대쪽에 있는 해안을 안내해 주겠어. 그쪽은 해수욕장과 섬이 있고, 옛날엔 진주 산업의 중심지였지."

"지금도 진주를 캐러 물 속으로 들어가나요?" 다니엘은 흥미를 느끼면서 물었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하고 있지, 대개는 유럽 사람들이지만." 이렇게 말하는 셰이하의 어조에는 어딘지 비아냥거리는 듯한 데가 있었다. "위험한 작업이라서 오래 계속되진 않을 거야. 빛깔과 모양이 완벽한 진주가 아니면 수지 맞추기도 힘들 테고."

차는 간선 고속도로를 벗어나 또 하나의 큰 길을 달리고 있었다. 중앙 분리대에는 화단이 있고 가로등에 걸려 있는 바구니에는 꽃이 만발해 있었다.

"꽃이 아름답지?" 셰이하가 말했다. "특히 이전에는 이곳이 건조한 사막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세대에게는 감흥이 새롭지. 오빠께서 한 일이야."

셰이하는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핫산의 힘을 입어 오빠는 담수화 장치의 플랜트를 건설했어. 그 물로 채소를 기를 뿐만 아니라 시가에 초목과 꽃을 심을 수 있게 되었지. 우리 아랍인에게 있어 옛날 사막이었던 자리에 나무가 자라는 광경이란 기적과 같은 것이야. 지금의 어린이들은 이런 사실을 아무런 놀라움도 없이 받아들이겠지만, 이런 일들은 얼마나 많은 진보를 가져 왔는지를 말해 주고 있어."

길 양편에는 건물의 외관이 담당한 점포들이 늘어서 있었다. 특히 보석 가게들은 훌륭했다. 그러나 롤즈로이스가 멈춘 곳은 좁은 골목의 조용하고 작은 가게 앞이었다.

일행의 경호원은 제복을 입고 무장하고 있었다. 손에 든 총을 보고 다니엘은 온몸이 오싹했다.

"나중에 후회하는 것보다는 미리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거든." 다니엘의 표정을 보고 셰이하가 일어날지 몰라. 카타르란 나라는 작기는 해도 유복한 나라지만 강력한 지도자가 없기 때문에 주위의 강국들이 쳐들어오려고 마음만 먹으면 간단하지. 하지만 오늘은 심각한 이야기는 그만두지, 비단의 빛깔이 흐려져서 고유의 아름다움을 망가뜨리면 안 되니까." 셰이하는 이렇게 말하면서 다시 미소 지었다.

경호원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니엘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일행을 맞는 사람이 여자인데 다니엘은 놀랐다. 셰이하 앞에 엎드렸다가 가볍게 일어서는 그녀의 모습에는 아첨하는 태도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여자의 얼굴을 본 순간, 다니엘은 깜짝 놀랐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완벽한 얼굴이었다.

"자라, 이 사람은 다니엘, 핫산의 딸이야." 셰이하가 두 사람을 소개했다. "다니엘, 자라는 내 사촌이야. 영국에서는 커리어 우먼이라고 하나? 그렇잖아, 자라?" 셰이하는 다니엘이 깜짝 놀라고 있는 것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자라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셰이하는 지금 당신을 조롱하고 있는 거예요. 다니엘. 내가 비단 가계를 경영하는 것을 아버지가 허락해 주신 것은 사실이죠. 물론 궁전에 있는 여자 분들에게만. 우리 가족이 이렇게 관대하고 이해심이 많다는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에요. 그렇지 않았으면 난 미쳤을 거예요." 자라의 말투가 약간 심각해졌다. "남편은 결혼한 다음 주에 죽었거든요. 그때 내 나이 열여덟 살이었죠." 담담하게 말하는 자라의 눈이 흐려졌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해 온 남편을 잃은 데다가 의지하고 살 만한 자식도 없어 생의 의욕을 잃고 있는 저에게 조르단이 이 일을 하라고 권해 주었죠. 덕분에 대하고 이해심이 많은 분이에요."

"뿐만 아니라 대단히 매력적이지." 셰이하가 의미 있는 듯 덧붙여 말하는 바람에 다니엘은 한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조르단은 짐승이에요. 알고 있을 텐데.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그 사람의 연인일까? 아니, 연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다니엘은 그런 생각을 오래 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자라가 아라비아어로 한마디 지시하자 두 소녀가 비단을 안고 나타나 나지막한 테이블 위에 펼쳤다.

"앉으세요, 다니엘." 자라가 말했다. "곧 커피를 가지고 오도록 하겠어요. 커피를 들면서 어떤 비단이 제일 좋을지 생각해 보도록 하죠."

자라와 셰이하가 무척 편안하게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다니엘은 부러웠다. 그녀는 불편해서 도저히 그렇게 않을 수 없었다. 저 사람들은 저토록 편안하고 우아해 보이는데 나는.

수줍어하는 소녀가 다니엘과 셰이하가 커피를 마시고 있는 동안에도 계속 비단을 가지고 와 테이블 위에 펼쳤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나자 자라는 비단에 관한 설명을 하면서 다니엘에게 가장 잘 어울리리라고 생각되는 몇 가지를 추천했다.

"금실로 수놓은 저 초록색과 블론드도 괜찮아요호박색도 있어요. 빛깔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물론 황색도 어울리겠어요."

결국 셰이하는 다니엘을 위해 여러 가지 빛깔의 비단을 골고루 사기로 했다. 왕실을 출입하는 재봉사에게 맡긴다고 했다.

"요즘은 파리나 뉴욕에서 옷을 사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내 생각으로는 카프탄처럼 입어서 멋있는 옷은 없는 것 같아."

"무척 엑조틱해요." 다니엘은 작은 유리구슬로 수놓은, 아름다운 터키석처럼 푸른 비단을 손으로 만지면서 맞장구쳤다. "하지만 평생 동안 진즈를 못 입는다는 것은 따분한 일일 거예요."

"이젠 향수가 신발을 사야지." 자라의 가게를 나오자 셰이하가 말했다. "신발은 궁전에서 특별히 주문하기로 하지. 하지만 향수의 블랜드는 전문가에게 맡겨야 돼. 그리고 다음 기회엔 수크(시장)에 가기로 하지. 우리 동양 사람들은 향수의 힘을 믿지, 올바르게만 사용하면 상상 이상으로 오감에 크게 작용하거든. 유럽 남성들간에 이런 속담이 있잖아? '어둠 속에서는 어떤 고양이든 모두 회색'이라는 속담 말야. 그렇잖아? 아무튼 이 나라 여성들은 향수를 뿌려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그러니까 어둠 속에서 변장을 하고 있어도 아는 사람은 알아보지. 그래서 우리는 향수를 잘 사용할 줄 아는 걸 자랑으로 알고 있어. 자기를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거든."

궁전으로 돌아오는 도중 다니엘은 차를 내려 여성만이 이용하는 안뜰에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다니엘은 자외선 방지용 크림을 듬뿍 바르고 자나이데의 동반도 거절한 채 안뜰에 발을 들여놓았다. 처음 얼마 동안 종려나무 그늘과 부겐빌레아의 향내가 코를 찌른 듯한 회랑을 걷다가, 용기를 내어 오솔길과 오솔길 사이에 있는 분수가에 걸터앉아, 수련 옆을 한가하게 헤엄치고 있는 무지갯빛 잉어를 들여다보았다. 긴장되고 위엄이 서린 집 안과는 반대로 이곳은 오아시스처럼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호화로운 꾸밈은 아니었지만 어디에나 신선한 기쁨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작은 새들이 벌레를 찾아 날고 있었다. 뒤쪽에서는 비둘기가 구구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어디선가 멀리에서 공작새 우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 소리들은 오후의 졸음을 몰고 오는 듯했다.

다니엘은 그 자리에 앉은 채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비웃는 듯한 표정의 가무잡잡한 얼굴을 떠올리고 다시 눈을 떴다. 조르단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말자고 자신에게 타이르면서 그녀는 어슬렁어슬렁 오솔길을 걷기 시작했다. 얼마쯤 걷다 보니 길이 끝났고 벽에는 나무로 된 중후한 문이 있었다. 다니엘은 옛날에 읽은 [비밀의 화원]을 생각하면서 쇠로 된 핸들을 돌렸다.

문의 안쪽에는 또 하나의 안뜰이 있는데 그 안뜰을 에워싸듯 마구간이 늘어서 있고 마구간의 낮은 문 위로 말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다니엘이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낯익은 얼굴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다니엘은 자나이데의 주의도 잊고 상대방을 향해 뛰어가서 생긋 웃었다.

"사우드!" 그는 얼굴을 약간 붉히면서 다니엘의 손을 굳게 잡았다. 눈은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어요?" 다니엘이 사우드에게 물었다. 여기에 함께 오면서 처음 만났을 뿐인데 이젠 옛친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세이크가 말을 타고 싶다고 하셔서 말에 안장을 놓도록 지시하러 왔습니다." 사우드는 안뜰에 끌려 나온 비단처럼 윤기 있는 검은 아랍 말을 가리켰다. 말은 걸으면서 약간 겁먹은 듯 귀를 쫑긋거렸다. "이 말은 왕실만을 위해 기른 종마입니다. 왕족 이외는 타지 못하도록 되어 있죠. 옛날에는 이 말을 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젊은 왕족의 용기를 시험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런 관습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이 말을 탄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되죠."

과연 두 사람의 마부가 그 말을 따르고 있었다. 그들이 고삐를 잡아당기자 말은 앞발을 차면서 소리를 질렀다.

"카타르에서의 생활은 즐겁습니까? 오늘 아침엔 옷감을 사러 셰이하와 함께 나가셨다는 말을 누이동생한테서 들었습니다."

"누이동생이라구요?"

"조이 말입니다." 사우든 이렇게 말하면서 미소 짓다가 갑자기 입술을 깨물면서 경계하듯 힐끗 뒤를 들어다보았다. "실례했습니다, 미스 다니엘. 당신은 이런 데서 저와 얘기를 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다니엘의 보드라운 입술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저는 누구보다도 당신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벨벳과 같은 어둠 속에서 당신과 함께 오아시스를 걷고 싶습니다. 초승달이 뜬 밤에 두 사람만이."

"하지만 사우드, 당신에겐 약혼자가 있잖아요?" 다니엘은 이렇게 말해 놓고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는 말을 한 것 같았다.

그가 대답할 겨를도 없이 화난 명령조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우드, 내 말은 어디 있어?" 승마복 차림에 가죽장갑을 낀 조르단이 한손의 팔뚝에 매를 한 마리 얹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다니엘은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다. 악몽처럼 그녀를 따라 다니는 그의 모습. 그녀의 얼굴에선 핏기가 가셨다. 그녀는 기가 죽어 도망치고 싶었다.

사우드는, 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받은 짓을 하다가 들킨 어린애처럼 겸연쩍어하면서 두려운 표정으로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한편 조르단은 냉담할 정도로 침착했다. 한 손으로 날뛰는 말의 고삐를 잡고 다른 손으로 받쳐들고 있던 매를 하인에게 건네주면서, 사우드와 다니엘을 차가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사우드, 나중에 네게 할 말이 있어." 조르단의 매정스런 이 한마디에 사우드의 얼굴은 새빨개졌다. 조르단은 낭패해 하는 사우드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양볼이 상기된 채 반항적인 시선으로 자기를 보고 있는 다니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가 잘못했어요. 사우드의 잘못이 아니에요." 다니엘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면서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다니엘의 날카로운 음성을 들었는지 마부들은 무슨 일이 있느냐는 듯한 얼굴로 돌아다보았다. "길을 잘못 들었을 뿐이에요. 이 분은 그 사실을 제게 가르쳐 주었을 뿐이고요."

"당신은 길을 잘못 드는 버릇이라도 있는 모양이군, 핫산의 따님." 몹시 비아냥거리는 말투였다. "당신은 마치 어미 사자가 새끼를 지키려고 하듯 사우드를 보호하려고 하는데무엇 때문에 그러지?"

다니엘은 마치 회초리로 한 대 얻어맞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첫째, 저는 약자를 괴롭히는 것이 싫어요. 그리고, 저는 사우드가 좋아요."

침묵이 전류처럼 흘렀다. 사우드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지고 밝게 빛났다. 안 되겠다. 이 사람은 내 말을 오해하고 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그러나 조르단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다니엘은 핸섬하지만 무표정한 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자기를 응시하고 있는 눈길이 불길했지만 그 이상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강한 햇살로 눈이 부신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꽉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 전용 건물로 돌아가시오, 핫산의 따님. 그리고 사우드는 약혼한 몸이라는 것을 잊지 말도록. 그리고." 조르단은 명령하는 투로 이렇게 말하더니 말에 올라타고 능숙한 솜씨로 고삐를 다루면서 다니엘 옆으로 다가와 고개를 뒤로 젖혀 자기를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덧붙여 말했다. "시험을 하려거든, 아가씨, 좀 더 연상은 아니더라도 하다 못해 좀 더 현명한 남자를 선택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조르단은 이렇게 말하더니 돌아다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다니엘의 심장은 멀어져 가는 말발굽 소리처럼 격렬하게 뛰었다.

그날 오후 늦게 다니엘이 강한 햇살을 피해서 방에 누워 있을 때, 셰이하가 사람을 시켜 새 카프탄을 맞추러 오라는 전갈을 보내 왔다. 수줍어하는 아가씨가 다니엘의 히프를 재고 있는 동안 재봉사가 셰이하에게 무슨 말인지 계속 소곤거리고 있었다.

"나오미가 다니엘은 열매를 맺기 전의 무화과나무처럼 날씬하다는 거야. 이 사람은 조이의 혼례복도 만들기로 되어 있지. 신랑 쪽에서는 신부 옷으로 심홍색의 비단에 백 한 개의 진주 단추를 단 것으로 하기로 했어. 그리고 남편 될 사람은 은으로 만든 정조대를 신부에게 선물로 주기로 했지. 혼례가 끝나면 남편만이 그것을 벗길 수 있어."

그렇다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여자는 노예로군. 심홍색의 비단 옷에 은으로 만든 정조대를 한 가엾은 여자. 그러나 왠지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은 창백한 조이의 얼굴이 아니고 다니엘 자신의 얼굴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겁먹은 얼굴로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말없이 올려다보는 있는.

"계속 서 있기만 할 건가?" 셰이하의 말에 다니엘은 정신을 차렸다. "오후에는 도시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뻗은 해안을 구경시켜 줄게. 드라이브는 기분 전환에 좋거든. 자나이데가 함께 가 줄 거야."

다니엘이 재봉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다음 서둘러 방으로 돌아왔을 때, 자나이데는 아름다운 비단 옷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놓여 있는 그 옷을 보고 다니엘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비단은 아름다웠지만 구김살이 잘 갈 것 아닌가. 드라이브를 하는데는 좀 더 간편한 옷이 좋을 텐데. 그러나 자나이데는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다. 다니엘은 일부러 자나이데가 준비해 놓은 이 옷을 무시하여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심지는 않았다. 그녀는 스커트와 블라우스를 벗고 토일렛 룸으로 달려가 새 팬티와 브래지어를 가지고 왔다.

다니엘은 목욕을 간단히 끝내려고 하였으나 자나이데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토일렛 룸에서 나온 다니엘의 주위에는 달콤한 백단 나무 향기가 감돌았다.

"목욕하고 싶지 않아, 자나이데." 소녀는 곧 울상이 되었다. 할 수 없지. 다니엘은 향긋한 목욕물 속에 몸을 담갔다.

사흘 전만 해도, 누가 깊은 대리석 욕조에 누워 부드러운 오일 마사지를 한다는 말을 들었다면 아마 큰소리로 웃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 번 맛을 들이고 보니 그 상쾌함이란 좀처럼 단념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몸을 닦고 향수를 뿌린 다음 다니엘은 작은 비단 팬티를 입고, 자나이데가 준비해 놓은 비단 옷을 입었다.

그 옷은 황금빛에 미나리아재비의 빛을 약간 띠고 있었다. 검은 빛이 감도는 빨간 머리와 초록빛 눈을 돋보이게 하는 빛깔이다. 엷은 베이지와 그린의 아이섀도우를 칠하고 루즈를 약간 바른 모습으로 거울 앞에 서 있는 것은 소녀가 아닌, 완숙한 여인의 다니엘이었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마치 딴 사람을 보듯 바라보았다. 내 입술이 이렇게 새침하게 생겼던가? 눈빛도 이렇게 신비했던가? 틀림없이 광선의 트릭일 거야.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차는 이번에는 롤즈로이스가 아니라 BMW였다. 자나이데는 말없이 조수석에 탔다. 하인이 문을 열어 주어 다니엘이 뒷좌석으로 들어가 앉자 문이 닫히고 차는 미끄러지듯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뒷좌석에 자기 혼자 앉아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안색이 나쁘군, 핫산의 따님."

"조르단! 여기서 뭘 하고 있죠?" 다니엘은 그가 넓은 어깨를 으쓱하는 것을 보았다기보다 직접 피부로 느꼈다.

"내가 이 차를 타면 안 되나? 셰이하로부터 에스코트하라는 분부를 받았어."

더 따지고 들 생각도 없었으나 왠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 사람은 카타르의 지도자의 아내가 명령한다 해도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이면 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다니엘은 알고 있었다.

"나보다도 사우드였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조르단은 비아냥거리면서 말했다. "당신은 다감한 청년에게 엉뚱한 말을 해준 모양이야, 핫산의 따님."

"우리는 그저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에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남녀 간에 아무 일도 없을 수는 없지. 그것만 보아도 당신이 세상을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이 이상의 조롱은 그만해 둬요. 다니엘은 일부러 창밖을 내다보았다. 종려나무로 둘러싸인 정원 너머로 페르시아 만이 검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해안은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았다. 다니엘은 이맛살을 찌푸리고 앞을 보았다. 이것은 해안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길 아닌가.

인터체인지에서 방향을 바꾸려는 것일까? 그러나 차는 방향을 바꾸지 않고 속력을 내어 도시의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처음에는 호화로운 별장이 산재해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으나 그것도 점점 드물어지고 사막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불안해서 조르단을 돌아다보았다. 이젠 도시에서 몇 킬로나 떨어진 곳을 달리고 있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곧 알게 돼." 조르단은 다니엘의 물음에 위압적인 한마디를 할뿐이었다.

불안이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다니엘은 고개를 돌려 멀어져 가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어디로 데리고 가는 것일까? 운전수에게 차를 세우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조수석에 앉아 있는 자나이데를 보자 다소 안심이 되었다. 틀림없이 나를 놀리고 있는 것일 거야. 일부러 겁을 주려고 하는 것일 거야. 그녀는 자기가 완전히 속았다는 걸 상대방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애썼다.

차가 계속 사막을 달리고 있는 동안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어느 쪽이 더 고집이 센지 겨루어 보자. 절대로 지지 않을 것이다. 차가 한 시간쯤 달리는 동안 인적이라곤 작은 오아시스 옆에 있는 몇 개의 천막뿐이었다. 틀림없이 차는 커다란 원을 그리면서 달리고 있을 거야. 다니엘은 광막한 사막에 압도되지 않으려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모래 언덕 너머에는 또 모래 언덕이 있는 사막에서 태양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심홍색으로 불타는 석양을 받아 사막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다니엘은 머릿속이 띵했다. 더 이상 참을 수는 없다. 그녀는 괴로운 듯 숨을 크게 쉬고 나서 떨리는 목소리로 조르단에게 말했다.

"이젠 충분히 즐겼겠죠? 조르단, 당신이 이겼어요. 알았으니까 그만 궁전으로 돌아가요. 셰이하가 기다리고 있어요."

"궁전에 가까워지고 있어, 핫산의 따님. 하지만 세이크의 궁전은 아냐." 조르단이 말도 채 끝내기 전에 지평선에 한 건물이 모습을 나타냈다. 총안이 있는 벽에는 영화에서 본 것 같은 커다란 나무 문이 여러 개 나 있었으며, 일행이 가까이 가자 문이 활짝 열리면서 차를 삼켰다. 이상하군, 왜 자나이데는 아무 말이 없지?

외벽의 안쪽은 안뜰인데 종려나무와 화단의 식물이 햇빛을 가리고 있었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두 마리의 사자상이 현관에서 궁전으로 들어가는 계단의 양쪽에 웅크리고 있었다. 차가 두 마리의 사자상 앞에서 멈추었을 때 다니엘은 문을 열려고 했다.

"내가 내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조르단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잖으면 남들이 내가 아내에게 예의를 표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테니까."

"당신 아내라구요?" 다니엘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더위와 충격이 겹쳐 그녀는 현기증을 느꼈다. 현기증이 너무 심하여 자나이데의 도움을 받으면서 차를 내릴 때는 말을 할 수조차 없었다. 석양이 주위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모자이크 무늬의 타일을 바른 현관은 시원한 분수가 있었다. 분수의 물은 금빛 줄무늬가 들어 있는 장미빛 수정으로 된 수반에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난 당신의 아내가 아니에요, 조르단." 다니엘은 더듬거리면서 간신히 말했다.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다니엘은 한기를 느꼈다. 그것은 갑자기 시원한 곳에 들어온 때문이 아니었다.

"아직은 그렇지, 핫산의 따님." 그는 냉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새벽이 되기 전에 그렇게 될걸."

 

6

여기가 어딜까? 다니엘은 멍한 머리를 베개에서 일으켰다. 어린 날을 상기시켜 주는 그리운 냄새. , 라벤더의 향기야. 그렇다면 나는 카타르의 궁전에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방안은 동양적인 은은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창문에는 주름은 잔뜩 잡은 비단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시원한 대리석 바닥에는 부드러운 페르시아직 카펫이 깔려 있었다. 덩그렇게 놓여 있는 침대는 너무나 커서, 다니엘은 자신이 마치 난쟁이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침대는 천장에서 드리운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자신이 입고 있는 복장도 달랐다. 이렇게 가벼운 비단 속옷을 입고 온 기억이 없다. 그때 다니엘의 머릿속에 어렴풋이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맞아. 그때 배후에서 짤그락 하고 문에 자물쇠를 채우는 소리가 들렸어. 그 방-감방이었나-은 원형이었고 욕실 외엔 아무 것도 딸려 있지 않았다.

울면 안 돼. 다니엘은 입술을 악물고 주먹을 힘껏 쥐었다. 조르단에겐,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와서 결혼을 강요할 권리 같은 건 없어. 셰이하에게 말해서 곧 집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해야지. 아빠는 자기 딸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조카가 이런 난폭한 짓을 했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의외로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을지도 모르지.

이런 일들을 생각하고 있던 다니엘은 거울에 비친 자나이데의 미안해 하는 표정이 눈에 들어올 때까지 문을 열고 사람이 들어온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자나이데, 어떻게 된 거야?" 다니엘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아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이곳을 빠져나가서 궁전으로 돌아가야겠어!"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무리예요. 셰이크께서 아가씨의 혼례 준비를 하라고 했어요. 준비는 이미 끝났습니다. 신부님도 와 계신걸요."

"자나이데는 모르고 있어. 나는 셰이크와 결혼하고 싶지 않아. 그 사람이 나하고 결혼하고 싶어 하는 것은 내가 자신과의 결혼을 거부한 사실에 대해 보복을 하려고 하는 거야. 어떻게 해서든 셰이하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해. 틀림없이 그분은."

자나이데가 단정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아니에요, 아가씨. 셰이하께서는 저에게 두 분은 결혼하게 되어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여기 혼례복을 가지고 왔어요. 아가씨께서 화를 내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에요. 결혼은 여자에게 단 한 번뿐인 중대사거든요. 하지만 셰이크와 결혼하시면 틀림없이 행복하실 거예요." 자나이데는 다소 장난스럽게 말했다.

다니엘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셰이하가 이 소녀에게 내가 조르단과 결혼한다고 말했다고? 다니엘은 입 언저리에 경련을 일으켰다.

"셰이크와 담판할 때까지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어." 그녀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좀 어리석긴 하지만 대단한 용기군, 아가씨." 열려 있는 문가에서 나직하고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와 할 얘기가 있으니까 자리 좀 비켜 다오, 자나이데. 그리고 혼례 준비를 하도록 해."

"무슨 얘기예요? 당신하고는 절대 결혼 안 해요." 자나이데가 방을 나가자 다니엘은 분명하게 말했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조르단?"

"그렇게 보이나?"

언제 다가왔는지 조르단은 침대 곁에 서 있었다. 엷은 베일 너머로 비단 쿠션에 기대어 단호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다니엘을 마치 음미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차, 자나이데가 비단 옷을 벗겨 주었지. 그녀는 잠옷을 입은 채였다. 부끄러운 나머지 몸을 감추려고 하다가 갑자기 오기 같은 것이 치밀어, 그의 음미하는 듯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행복하게 해줄께, 아가씨. 그러고 나면 나와 결혼하는 데도 아무 소리 안 할 테니까."

"기어이 나와 결혼을 해야만 하겠단 말인가요?" 다니엘은 냉소하듯 말했다.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이군요, 무슈. 요즘은 그런 방식으로는 통하지 않을 텐데요."

조르단은 화를 내면서 반투명의 베일을 젖히고 다니엘을 응시했다. 그 시선이 자신의 잠옷을 벗기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다니엘은 굴욕감으로 얼굴빛이 새파랗게 되어 몸을 떨었다.

"다른 남자의 자식을 낳는 것도 대수롭지 않단 말인가?"

"농담이겠죠?" 다니엘은 숨을 헐떡였다.

"아냐." 조르단은 무서운 얼굴로 대답했다. "이 나라-내 나라에서의 내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선 무슨 짓이라도 하지, 아가씨. 무슨 짓이든지 말야. , 이만하면 납득하겠나?"

"아빠는 이런 일을 절대로 용서하시지 않을 거예요!" 다니엘은 덤벼들었다. "당신이 어떻게 해서 셰이하를 당신 편으로 끌어들였는지는 모르지만 아빠가 이런 비열한 행동을 아시게 되면."

"셰이하가 나의 제의에 동의한 것은 그분도 나와 마찬가지로 나라 일을 생각하기 때문이야. 당신의 아버지-내게는 큰아버지지만." 여기까지 말한 조르단이 갑자기 다니엘 쪽으로 몸을 굽혔기 때문에 다니엘은 몸을 뒤로 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이 바라는 것을 나는 무엇이든 들어 주었거든." 조르단은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니엘이 이해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잔인한 미소를 띠었다. "큰아버지는 내 결혼 방법에 대해서는 찬성하시지 않을지 모르지만 결혼이 성사된 것을 아시게 되면 대단히 기뻐하실 거야."

"하지만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아요. 그리고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단순히 석유회사의 이권이 탐나서 그러잖아요?"

", 알고 있어." 조르단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당신은 내가 간신히 손에 넣은 것을 사우드와 같은 애송이가 빼앗아 가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으리라 생각해? 나는 그런 바보가 아냐."

"사우드라구요?" 다니엘은 겁먹은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나를 유인해서 강제로 결혼하려고 하는 것일까? 조르단은 내가 사우드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당신에겐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난 약혼한 남자의 뒤를 쫓아다니는 취미 같은 것은 없어요."

"누구든 마찬가지야." 조르단은 어깨를 으쓱했다. "다니엘, 나는 당신이 결혼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그런데 이제 와서 딴 사람이 당신과 결혼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어. 그럴 바엔 다소 그 시기가 이르더라도 내가 갖겠어."

"난 당신 같은 사람은 싫어요!" 다니엘은 그의 조롱과 강요를 이 이상 더 참을 수 없었다. "당신이 우리 아빠와 엄마의 결혼을 마지못해 인정한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석유회사를 당신 손에 넣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한 가지 더 묻고 싶은데, 이제까지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어떤 일을 처리한 적이 있어요?"

"한 번 있어." 조르단은 냉담하게 말했다. "내게는 대단히 중요한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야. 심하게 말다툼을 하게 되어 결국 그 사람을 잃었지. 어렸을 때의 내게 있어서는 아버지이기도 했고 큰아버지이기도 했고 친구이기도 했던 사람이지."

아빠를 말하고 있군.

"당신은 아빠와 엄마가 끝내 결혼을 하자 석유회사의 이권을 얻자면 그 결혼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당신의 양심을 헌신짝처럼 버린 셈이군요. 참 현명한 처사예요." 다니엘은 비웃었다.

"핫산의 따님, 당신은 아무 것도 몰라." 조르단은 갑자기 말했다. "나는 이만 실례하겠어, 나머지는 하녀가 알아서 준비해 줄 테니까. 결혼식은 한 시간 후야." 이렇게 말하고 나가려다 문에서 잠깐 발을 멈추었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이번 결혼은 법적으로도 인정받는 거야. 카타르의 계율과 그리스도의 계율, 두 가지 다 따른 거야. 무효는 있을 수 없어, 이혼도 있을 수 없고."

조르단이 방을 나간 뒤에도 다니엘의 귀에서는 조르단의 마지막 말이 떠나지 않았다.

"목욕 같은 건 하기 싫어." 향료를 뿌린 물에 목욕을 하고 결혼에 임하다니. 다니엘은 자신이 마치 제단에 올려지는 제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 어쩔 수 없는 노여움이 치밀어 올라 다니엘은 주먹을 쥐었다. 이럴 수가 없어.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결혼이 나의 운명처럼 기다리고 있다니. 하지만 현실인 것이다.

다니엘은 침대에서 일어나 마지못해 심홍색과 금색 시풍이 달린 카프탄을 입었다. 그것은 자기가 손수 입혀 주겠다는 반협박조의 조르단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가씨는 이 카프탄이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자나이데가 불만스러운 듯 물었다. "셰이하께서 몸소 디자인을 결정하신 거예요. 그리고 이 진주 단추는 선물이구요."

셰이하는 조르단과 공모하여 일부러 모른 체하고 나에게 카프탄을 맞추게 했었군. 이렇게 되고 보면 가장 비싸게 값을 매긴 경매인에게 팔려가는 노예 처녀 같잖아? 다니엘은 비탄에 잠겼다. 하지만 왜? 계부가 카타르의 석유 이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야. 조르단은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한 수단으로 나와 결혼하는 거다. 이 결혼을 끝내 저지할 수 없는 거라면 결혼 후에는 날마다 그 사람에게 악담을 해줘야지, 결혼 생활이 싫다고. 그리고 그 사람을 진정으로 미워한다고!

"그리고 이것은 정조대예요." 자나이데의 엄숙한 말에 다니엘은 정신을 차렸다. 자나이데는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가 박힌 무겁게 생긴 벨트를 조심스럽게 들고 왔다. 무슨 복잡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이 정조대는 셰이크 조르단 가문의 것입니다. 이 가문의 여성이 신부에게 채워 주는 것이 관례예요." 이렇게 말하면서 자나이데는 다니엘의 날씬한 허리에 그것을 감았다. 다니엘은 그것이 몸에 닿자 싸늘한 감촉에 몸을 떨었다. 보석이 반짝 빛나고 있었으나, 그 무지개빛 광채는 왠지 다니엘을 섬뜩하게 했다. 될 대로 되라지. 그녀는 자나이데가 준비해 두었던 민트 티를 마셨다. 한 모금 마신 순간 몸의 긴장이 풀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자나이데!" 이것이 내 목소리일까?

"뭐 시키실 일이 있으세요, 아가씨?"

"좀 전에 마신 차에 뭘 넣었지?" 온몸의 긴장이 점점 더 풀리면서 머릿속이 멍해졌다.

"별로 해는 없을 거예요. 아편을 조금 넣었을 뿐이에요. 셰이크께서 시키신 일이에요. 결혼식 전에 여자가 아편이 든 티를 마시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죠. 몸도 마음도 릴랙스해지거든요."

강제적인 결혼에 관한 일에 정신이 팔려 있던 다니엘은 자나이데가 한 마지막 말의 뜻을 퍼뜩 이해하지 못했다. 잔뜩 긴장되어 있던 몸이 본의 아니게 풀리고 머릿속도 멍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나이데가 손목과 목 언저리에 향수를 뿌리고 눈에 깊이와 광채를 주기 위해 눈가에 아이새도우를 칠하는 것을 말릴 수 없었다.

"준비가 됐습니다." 보석이 잔뜩 박힌 정조대를 손으로 만지면서 자나이데가 말했다. "이젠 주인 될 분만이 이것을 벗길 수 있어요. 순결의 표시인 카프탄의 진주 단추도요. 아가씨의 주인밖에 아무도 손을 댈 수가 없어요."

듣기 싫었다. 다니엘은 귀를 막고 싶었다. 그러나 이때 문이 열렸다. 그녀의 가슴은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자나이데가 손을 잡고 이끄는 대로 앞으로 걸어나간 다니엘은 거만한 태도로 자신을 기다리고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다니엘은 입 안이 바싹 타버리는 것 같았다.

혼례복을 입은 조르단은 너무나 당당하여 왠지 근접하기가 어려웠다. 흰 옷 차림의 하인을 거느리고 식장으로 나가는 다니엘의 떨리는 모습을 그는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식장은 바로 아래층의 한 방으로, 밤의 장막이 내린 안뜰이 내다보였다.

최초의 의식은 아라비아어로 거행되었다. 다니엘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뜻도 모르는 말을 되는대로 따라 외웠다.

10분 후 사제 앞에 섰을 때 다니엘은 애원하는 눈빛으로 조르단을 쳐다보았다. 조르단은 그녀의 팔을 아프도록 힘껏 잡았다.

"핫산의 따님, 이젠 어쩔 수 없어. 당신은 이미 이슬람교의 계율에 따라 이젠 내 아내, 내 소유물이 된 거야. 그리고 나를 노하게 하면 거기에 대한 응분의 벌을 받도록 되어 있어." 이렇게 말하는 그의 눈에서는 동정의 빛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협박조의 말이 귓전에 남아 있어 다니엘은 맹세의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의 뜻을 생각하니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질 않았다.

", 신랑은 신부에게 키스를." 늙은 사제가 성서를 덮으면서 미소 지었다. 조르단이 그녀 쪽을 돌아보면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 다니엘은 오싹하면서 전신을 긴장시켰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느끼면서 눈을 감은 채 그의 입술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입을 맞추지 않았다. 다니엘은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웬일일까? 자세히 보니 눈은 미소 짓고 있지 않았다. 먹이를 찾는 독수리의 눈처럼 싸늘하고 빈틈이 없는 눈빛이었다.

"신부가 부끄러워하고 있기에 키스하는 즐거움은 뒤로 미루겠습니다, 신부님." 조르단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모하메드가 방으로 안내할 겁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피에르 신부는 2차 대전 전부터 계속 여기에 계셨대." 둘만이 남자 조르단이 설명했다. "큰아버지는 나를 그리스도교로 키워 달라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켜 저 신부님께 세례를 받게 했지."

조르단이 조롱도 노여움도 섞지 않고 다니엘에게 담담한 어조로 말을 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집스럽게도 쌀쌀하게 말했다.

"자나이데를 불러 나와 함께 방으로 돌아가도록 해줄 수 없어요? 피로해서 자리에 눕고 싶어요."

조르단의 눈빛이 약간 흐려지는 듯했으나 그런 기미는 곧 사라졌고 완전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나도 마찬가지야. 아가씨. 하지만 굳이 자나이데와 함께 돌아갈 필요는 없어. 나의 신부가 이렇게 일찍 자리에 듣고 싶어할 줄은 몰랐는걸. 내가 좀 구식인가 봐. 내가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덕분에 기운이 나는걸."

이번에는 눈도 웃고 있었다. 다니엘은 충격을 받은 나머지 얼굴이 창백해지고 전신이 긴장되었다. 핏기를 잃은 작은 얼굴에 눈만 쾡하게 커 보였다.

", 진심이 아니겠죠? 저를 원하는 게 아니고 석유회사를."

"둘 다 손에 넣을 거야." 그는 냉담하게 말했다. 미소도 사라졌다. "당신은 내 아내야, 다니엘. 그리고 새벽엔 실감하게 될 거야."

"싫어요!" 다니엘은 목구멍에서 소리를 짜내듯 말했다. 긴장된 전신에 전율을 느끼면서 필사적으로 문 쪽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조르단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다니엘의 손목을 아프도록 힘껏 잡았다.

"이제부턴 내 아내답게 처신해야 돼." 다니엘의 귀에 대고 조르단은 내뱉듯이 말했다. "제발 철없는 어린애처럼 굴지 마. 신방이 준비되어 있으니 따라와."

다니엘이 투덜거리자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그의 손에 더욱 힘이 주어져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자리에서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는 다니엘을 가볍게 안아 올렸다.

"당신 몸매는 오아시스에서 물을 뜯는 새끼 사슴처럼 날씬하군."

조르단은 다니엘을 안은 채 방을 나와 층계를 오른 다음 화려하게 꾸민 신방으로 들어갔다. 강제적인 결혼을 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분명 다니엘은 이 방의 아름다움에 찬탄하여 마지않았을 것이다.

주름을 잔뜩 잡은 심홍색의 커튼, 멋있는 페르시아직의 카핏, 온화한 분위기가 넘쳐흘렀다. 자극적인 백단향이 다니엘을 완전히 압도했다.

그녀는 비단 쿠션이 여러 개 놓인 나지막한 소파에 내려졌다. 조르단 뒤에는 당당한 침대가 놓여 있어 그것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분별력이 상당히 좋은 아가씨군 그래." 조르단은 침대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알아챈 듯했다. "좋아, 새벽이 되기 전에 저 침대를 지금과는 다른 눈으로 보게 만들어 주겠어."

"증오의 눈으로 보겠죠." 다니엘은 분하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동정심이나 교양이 있다면 이런 일은 상상도 못 했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나? 정말 순진한 아가씨군." 조르단은 비웃었다.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않는 남자는 없을걸."

다니엘은 숨을 헐떡이면서 대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방안이 빙빙 도는 것만 같았다. 조르단이 다가왔다.

"이걸 마셔."

다니엘은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뜨거운 민트 티였다. 자나이데가 갖다준 것과 같이 아편이 들어 있을 거야.

몸도 마음도 릴랙스하게 해준다고 하던지금부터 견뎌야만 하는 일을 상상하니 온몸이 떨렸다. 다니엘은 전신에서 힘이 빠지며 의식이 점점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제발 돌려보내 달라고 울며 애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젠 그만 마음을 풀지 그래." 조르단은 다니엘의 목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지금은 두려워도 며칠만 있으면 즐거움이 될 거야. 어때, 핫산의 따님, 이젠 아까보다 편해졌지?"

"조금도 편하지 않다요!"

조르단의 웃음소리가 그녀의 심장의 두근거리는 소리를 지웠다.

"편하지 않을 리가 없어, 다니엘. 솔직하게 말해."

조르단은 다니엘을 다시 안아올리자 그 거대한 침대로 옮겨갔다. 다니엘은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은 채 전신을 긴장시켰다. 숨을 죽이고 누워 있으니 조르단이 방안의 불을 차례로 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카프탄의 첫째 번 진주 단추에 손을 댔을 때 다니엘은 조르단의 따뜻한 숨결을 볼에 느꼈다.

밤공기가 비단처럼 부드럽게 살결에 와 닿았다. 심장이 전에 없이 격렬하게 뛰었다. 다니엘은 그의 뜨거운 숨결을 볼에 느끼자 일부러 얼굴을 돌리고 입술을 꽉 다물었다.

다니엘의 격렬한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은 듯 조르단은 어둠 속에서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 눈이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 없어, 다니엘." 조르단은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황홀경에 빠진 다니엘은 본의 아니게도 그의 말에 온순히 따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의 손의 움직임에 따라 다니엘은 온몸에서 힘이 완전히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다니엘은 겁먹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면서 무언으로 애원했다. 그러나 그의 무표정했다.

", 다니엘." 조르단의 목소리에서는 이제 여느 때의 위압적인 면이 사라져 있었다. "사냥꾼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새끼 사슴처럼 당신은 청순하면서도 도발적이야." 조르단은 다니엘의 볼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 그 볼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조르단은 그것을 무표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당신은 겁먹은 어린애처럼 울고 있군. 하지만 당신은 이젠 내 정식 아내가 된 거야."

다니엘은 항의하려고 했으나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조르단의 입술이 난폭하게, 그리고 점점 부드럽게 다니엘의 꽉 다문 입술을 열게 했기 때문이다.

이런 키스는 처음이었다. 다니엘은 거의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조르단은 가볍게 떨고 있는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자신의 따뜻한 몸에 힘껏 밀착시켰다. 그리고 계속되는 그의 달콤하고 능숙한 키스에 다니엘의 양손이 어느 사이엔가 그의 어깨에 감겼다.

틀림없이 약 때문일 거야. 다니엘은 몽롱한 의식 속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이상한 기분이 되어 이 사람의 유혹에 쉽사리 넘어갈 리가 없어.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경고의 소리가 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르단의 힘은 너무나 세어 그에게서 빠져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신은 정말 아름다워, 다니엘." 조르단은 쉰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더니 아라비아어로 무슨 주문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다니엘은 격렬한 열정에 사로잡혀 완전히 혼미 속에 빠졌고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알아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한참 후 다니엘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7

날이 새었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다니엘은 커튼을 통해 비치는 따뜻한 햇살을 피부에 느끼면서 기지개를 꼈다. 왠지 몸이 나른하여 여느 때처럼 침대에서 가볍게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악몽의 단편이 되살아나자 다니엘은 눈을 감고 몸부림쳤다. 생각만 해도 몸이 굳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악몽이 아니었다.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욕실의 문을 열고 조르단이 나왔다. 탄탄한 허리에 타월을 아무렇게나 감고 있었다. 햇볕에 그을은 피부와 흰 타월이 대조적이었다. 침대로 다가와 자기를 내려다 보는 조르단에게 격한 증오심을 느끼며 진저리를 쳤다.

"야아, 내 귀여운 사람, 나는 약속을 지켰지?" 조르단은 침대의 베일을 젖히고 그녀의 가녀린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약속이라구요? 협박이었죠!" 다니엘은 발끈하면서 그의 손을 뿌리치고 쏘아붙였다. "한 가지만은 감사하겠어요. 이젠 절대로 이 결혼이 무효가 되지 않겠죠? 이것으로 당신의 섬뜩한 애무를 다시는 받지 않아도 되겠군요!"

"섬뜩하다구?" 다니엘은 너무 화가 나 있어 그의 부드러운 말 속에 포함된 경고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때 당신은 결코 섬뜩하게 느끼고 있지 않았어, 부인. 그 반대야.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낙원의 문을 열어 달라고 애원한 것은 당신 아니었나?"

"약 때문이에요." 다니엘은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난 절대로……."

"약이라구? 그건 지나친 변명인데, 핫산의 따님. 약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어. 오히려 그것은 남성적인 것인 것에 반응을 보이려고 했던, 당신의 지극히 여성적인 본능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어."

"당신이 따라 준 차에 약이 들어 있었어요. 자나이데가 넣어준 것과 같은 거예요. 그렇지 않았다면 절대로……."

"내 감미로운 키스에 당신은 반응하지 않았다는 말씀이지?" 조르단이 앞질러 말했다. "약 같은 건 쓰지 않았어, 다니엘. 쓸 필요가 없었거든. 증거라도 보여 달란 말인가?"

조르단이 허리에 감고 있던 타월을 벗는 시늉을 하자 다니엘은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전신이 굳어졌다. 결코 밖으로 내어 말하지는 않았으나 눈은 애원하듯 그를 쳐다보았다.

"아직 어린애군." 조르단은 비아냥거리듯 말하고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양손으로 그녀의 몸을 침대에 뉘어 짓눌렀다. "앞으로 당신을 훈련시킬 일을 생각하면 신이 난단 말야. 당신 속에 숨어 있는 정열의 심지에 불을 당기는 것은 간단하지. 멀지 않아 매일 밤 내 팔에 안기지 않는 것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문이 될 거야."

"당신……당신은 새디스트예요!"

이 미움과 경멸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내가 항상 당신의 협박에 못 이겨 당신의 아내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큰 오산이에요. 다니엘은 이렇게 말하려고 했으나 그만두었다. 지금 자신은 이 남자의 성안에 갇혀 포로인 것이다. 도망치려고 해봐야 아랍인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좋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양친께 전화를 할까. 통화만 되면 카타르로 달려와 주실 것이다.

"기분이 좋아졌으면 자나이데를 불러서 옷이라도 갈아입지 그래. 난 말을 타러 가겠어. 당신이 내 말을 잘 듣게 되면 언젠가 함께 데리고 가지. 오늘 아침엔 안 되겠어. 모두가 나를 한심한 신랑이라고 생각할 테니 말야. 그러니까 오늘은 당신 혼자 있어야겠어."

다니엘은 화가 나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두 볼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너무 힘껏 주먹을 쥐어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였다. 다니엘은 눈물이 앞을 가려 조르단이 방을 나가는 것도 볼 수 없었다.

그가 방을 나가자 마음이 다소 진정되었다. 내가 울고 있었다고 하녀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으면 저 사람은 속으로 좋아할 것이다. 그런 꼴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나이데가 아침 식사를 가지고 왔을 때 다니엘은 침대에 걸터앉아 매니큐어를 하고 있었다.

음식이 목으로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다니엘은 방금 구운 롤빵과 벌꿀, 과즙이 듬뿍 발라진 대추야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보기만 해도 역겨울 것 같았다.

그러나 자나이데는 수줍은 듯 말했다.

"기운을 차리셔야 해요. 아무 것도 먹지 않으면 튼튼한 사내아이를 낳을 수 없어요."

사내아이라고? 무심코 한 자나이데의 말의 뜻을 깨닫자 오장 육부가 뒤집히는 것 같아 얼굴이 창백해졌다. , 하느님, 제발 그런 일은 없게 하소서. 오한이라도 나듯 이가 딱딱 마주쳐 그녀는 서둘러 롤빵을 한 조각 입에 넣었다. 카타르를 떠나야지, 그것도 당장. 이젠 하루도 더 견딜 수 없다, 특히 이 방에서는. 이 방에는 내 헐떡이던 숨소리가 구석구석에 배어 있는 것이다.

자나이데는 목욕을 마친 다니엘을 도와 셰이하가 새로 주문하여 만든 카프탄을 입혀 주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자나이데는 통역을 통해, 조르단의 회계감사관이라는 콧수염을 기르고 키가 큰 아랍인이 성 안을 안내해 주었다.

성은 엄청나게 컸다. 세간은 있는데도 사용하지 않는 집들도 있었다. 그런 집들은 유목민을 위해 마련해 놓은 것이라고 자나이데가 설명했다. 그들은 일 년에 두 번씩 이 성 안에 있는 오아시스의 물을 가축에게 먹일 수 있도록 허락되어 있는데 그동안 여기서 머문다는 것이다.

"셰이크는 국민에게 많은 것을 해주셨어요." 자나이데는 아름다운 안뜰을 산책하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청년들은 외국의 대학에서 새로운 학문을 배우도록 했고 여성에게도 학교에 가는 것을 허락하시고 있죠."

허락하고 있다고? 다니엘의 입술이 약간 일그러졌다. 이 소녀와 나의 사고방식은 너무나 다르다. 내게는 당연한 일도, 이 소녀에게는 관대한 인물이 특별히 베풀어 준 선물인 것이다. 만약 카타르에서 탈출할 수 없게 된다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 더운 날씬데도 다니엘은 갑자기 한기를 느꼈다.

'당신은 내 소유물이야.' 간밤에 조르단이 냉담하게 내뱉던 말이 생각났다. 그 오만한 말투를 생각하자 다니엘은 다시 오장 육부가 뒤집히는 것 같았다.

자나이데가 안뜰 바닥의 모자이크 무늬를 칭찬하여 다니엘의 주의를 끌려고 했으나 그녀는 건성으로 볼 뿐이었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이곳은 새장 안이기는 매일반이다. 어떻게든 이 성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다니엘은 강한 햇살을 이마에 손바닥을 대어 가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때 성에 탑이 솟아 있는 것이 보여 그녀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것은 셰이크의 사실이에요." 다니엘의 관심을 끄는 것이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 듯 자나이데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저 탑은 셰이크의 선조께서 세웠는데, 천체를 관찰하여 예언을 하는 데 사용했다고 해요."

"올라가 볼 수 있을까?" 다니엘은 왠지 탑이 꼭 보고 싶어졌다.

"저기는 셰이크의 사실이기 때문에 그분말고는 아무도 들어갈 수가 없어요." 자나이데는 몹시 놀란 듯 당황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이제 두 분이 부부간이시니까 틀림없이 초대하실 거예요. 그분은 하루에 몇 시간씩이나 저곳에서 지내시죠."

도대체 저기서 무얼 할까? 다니엘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저 탑도 내 자유와 마찬가지로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그것도 같은 남자에 의해서. 그녀는 자신의 마음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실망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다니엘이 사막에 있는 이 성에 온 지 벌써 1주일이 되었다. 조르단은 혼례가 있던 날 밤 이후 한 번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틀째 되는 날 밤 다니엘은 커다란 침대에 혼자 누워 증오심으로 한잠도 자지 못하고 새벽을 맞았다. 결국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타나기만 하면 그 오만한 태도를 보기 좋게 경멸해 주려고 별렀는데.

그녀가 잠든 뒤 침실의 문이 열리고 아침 햇살을 등진 남자의 긴 그림자가 침대 위에까지 뻗쳤다. 그는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와 피로해 보이는 눈 언저리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사막의 한 유목민 어린애가 행방불명이 되어 조르단과 그 일행이 밤새도록 수색에 나섰다고 했다. 이튿날 아침 그 사실을 알려 준 것은 자나이데였다.

"그 아이는 운이 좋았어요. 마침 셰이크가 이곳에 계셔서 수색을 지휘한 덕분이죠. 그렇지 않으면 발견되지 않았을 거예요. 한낮의 더위도 더위지만 밤의 추위가 더 무섭거든요."

어린애가 무사히 돌아오게 되어 오아시스 옆에 있는 유목민의 캠프에서는 축하 잔치가 벌어졌다고 한다. 하인들은 무엇이든 다 알고 있군. 다니엘은 그들이 절대시하고 있는 남자에 의해 자기가 강제로 신부가 된 사실과, 자기가 그를 싫어하는데도 사정없이 짓밟혔다는 사실도 그들이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가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양친이 미국에서 이곳으로 전화를 걸어 주는 것뿐이다. 달리 연락을 취할 수가 없다. 다니엘이 곤경에 빠졌다고 하면 양친은 당장 카타르로 날아올 텐데. 이 결혼이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그녀가 이 결혼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안다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 결혼을 취소해 줄 것이다. 그러나 한편 계부도 이 결혼을 찬성하리라고 한 조르단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다만 다니엘 그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고 애쓸 뿐인 것이다.

날이 갈수록 더위는 혹심해지는 것 같다. 적동색 태양이 중천에서 이글거리고 하늘은 눈이 아플 정도로 짙푸르렀다. 가장 더운 날 오후에 자리에 누우라는 자나이데의 권고가 있었으나 다니엘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항상 무엇엔가에 쫓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고, 만나고 싶지 않은 남편의 얼굴과 언제 어디서 마주치게 될지 몰라 전전긍긍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음식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자나이데는 날로 다니엘의 체중이 줄어드는 것을 걱정스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더위가 숨통을 짓누르는 것 같은 어느 날 오후, 다니엘은 몽유병자처럼 자신도 모르게 조르단의 사실이 있는 탑으로 이어진 층계를 올라가고 있었다.

조르단은 밤을 대개 그곳에서 보낸다고 자나이데가 무슨 비밀을 가르쳐 주듯 얼굴을 붉히면서 말한 적이 있었지. 자나이데가 이런 나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하지만 난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야. 그 사람은 나와 결혼해서 나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목적을 달성했으니까 이젠 내가 필요치 않은 거야.

다니엘은 돌로 된 나선형 층계를 무턱대고 올라갔다. 두꺼운 벽에는 군데군데 가늘게 갈라진 틈이 보였다. 층계에는 강한 햇살이 비쳐들지 않아 시원했다. 자나이데의 설명에 의하면, 이 커다란 돌은 십자군 시대에 깎은 돌인데, 사라센의 개선군과 함께 각지를 돌아다닌 세련되고 학문이 높은 이슬람교도가 이 커다란 건물을 짓기 위해 사용했다고 한다.

층계가 갑자기 끝나고 그곳에는 성의 입구에 있던 것과 똑같은 나무 문이 있었다. 다니엘은 비로소 눈을 커다랗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대체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지? 대체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 층계를 오르게 했을까? 그녀는 새삼스럽게 뒤를 돌아다보았다. 처음에는 안뜰의 연못가에 앉아 잉어를 들여다보고 있었지. 그 잉어도 나처럼 자유를 빼앗기고 있다고 생각한 순간, 이 감옥의 벽 너머로 좀 더 멀리 바라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던 거야.

다니엘은 문을 열고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등뒤로 문을 살그머니 닫고 그녀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페르시아산 카핏이 깔려 있었고 벽은 공작새의 날개와 같은 빛깔이었다. 이곳에서는 부드러운 중간색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모두가 화려한 색상뿐이었다. 탑 안은 원형이고 소파가 놓여 있었으며, 총안 부분은 모피로 덮여 있었다. 망원경-이렇게 액조틱한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다니엘에게 친근감을 주는 것이었다-이 다니엘의 눈에 띄었다. 그녀는 다가가서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망원경을 만져 보았다. 시선은 멀리 지평선으로 향했다. 카타르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려 다니엘은 끊임없이 눈물을 닦아냈다. 슬픔에 못 이겨 울고 있는 이런 내 모습을 조르단은 보고 싶어 하겠지. 그녀는 주먹을 쥐고 얼굴을 들었다. 문 쪽을 바라보니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작은 침대가 눈에 띄었다. 조르단은 여기서 잠자는 것일까? 다니엘은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 다니엘은 어떤 상념을 떨쳐 버리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잊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 부끄러워하면서 뻗은 손에 와 닿던 조르단의 매끈한 피부의 감촉이 되살아났다. 다니엘은 상대방의 힘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싫어요!" 다니엘은 목구멍에서 쥐어짜듯이 목소리를 내었다. 차를 마신 때문이야. 그 사람은 부인했지만 차 속에는 분명 약이 들어 있었어.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오만한 남자에게 무조건 항복했을 리가 없어. 그렇잖아?

다니엘은 갑자기 맥이 풀리면서 가슴이 아팠다. 목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솟구쳤다. 대체 내가 어떻게 된 걸까? 왜 이렇게 비참해진 것일까? 내 확고하던 결심은, 독립심은 어디로 갔지? 다니엘은 그 작은 침대 위에 누워 곧 일어나겠다고 생각하면서 눈을 감았다.

다니엘은 꿈속에서 런던에 있었다. 양친 곁으로 돌아간 것이다. 즐거웠다. 어머니의 어깨에 손을 얹고 안도의 숨을 쉬고 나서 다니엘은 갑자기 자나이데의 이름을 불렀다.

"하녀는 주인과는 달리 독수리의 둥지에는 들어오지 않아." 냉담하고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죠, 부인? 당신이 대답하기 싫으면 내가 대신 말해 볼까?"

조르단이 바로 곁에 서 있었다. 방 안이 어두운 데도 다니엘은 상대방의 존재를 강렬하게 의식했다. 오한이 느껴졌다. 내가 왜 이런 곳에서 잠들었지?

"맘대로 하세요. 사실은……." 다니엘은 이렇게 말하면서 작은 창 너머로 반짝이는 별을 쳐다보았다. "사실은 내가 여기에 올라온 것은 자유를 얻고 싶어서예요. 당신이 지배하는 영역 밖을 내다보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조르단은 거칠게 숨을 몰아 쉬었다. 내가 좀 지나친 말을 했나? 그는 다니엘의 팔을 힘껏 잡더니 그녀의 비명에는 개의치 않고 그녀를 창가로 끌고 갔다.

", 실컷 내다보지 그래. 하지만 당신이 아무리 멀리까지 내다본다 해도 내 영역을 결코 벗어나지 못할걸." 다니엘은 그의 뜨거운 숨결을 목덜미에 느끼고 몸서리를 쳤다. 그의 잔인한 웃음소리는 밤공기보다도 차가왔다. "따라와……." 조르단은 그녀의 팔을 잡은 채 방 한구석에 세워져 있는 망원경을 가리켰다. "이 성을 건설한 여자는 건설 중에 돌에 깔렸는데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다리병신이 되었지. 그리고 나서 그 사람이 이 전망대를 만든 거야."

다니엘은 망원경 앞에 섰다. 그의 몸에 안기자 가볍게 몸이 떨렸다. 조르단은 다니엘을 포옹한 채 망원경을 보라고 했다.

"자유란 마음먹기에 달린 거야." 조르단의 입술이 다니엘의 머리에 와 닿았다. "우리 선조는 이 방에서 별을 관찰하면서 그 사실을 깨달았지. 그분은 육체적으로는 부자유스러웠지만 하늘 높이 떠 있는 별처럼 더 없는 정신적인 자유를 누렸지. 그리고 인간들은 자기감정에 빠져서 타인의 감정은 느끼지도 보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게 되었지."

"그래서 나도 그런 자기감정 도취자란 말이군요."

"그래요, 내 귀여운 사람아." 다니엘은 조롱의 빛을 띤 조르단의 눈을 보았다. "당신은 당신의 자존심에 얽매여 있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충분히 나와의 결혼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야."

확실히 조르단은 지금 그녀의 육체가 본의 아니게 반응을 보인 것을 두고 빈정거리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은 얼굴을 붉히면서 문 쪽으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어딜 가지?"

다니엘은 그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어둠 속을 응시하였으나 흰 옷을 입은 키 큰 남자의 윤곽만 보일 뿐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조르단은 재빨리 문 앞을 가로막아 섰다. 다니엘은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방으로 돌아가겠어요."

이 말은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고 요구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니엘은 자신이 방금 한 말의 뉘앙스를 깨달았다. 그는 자나이데가 골라준, 시폰이 달린 옷 속에 볼록 솟아 있는 그녀의 가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 방으로 말인가?"

그의 의미 있는 듯한 말에 다니엘의 맥박은 갑자기 빨라지고 숨이 답답하였다.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거지? 조르단은 일부러 나를 시험하고 있는 거야. 그 뿐이야. 조르단은 첫날밤에 있었던 일을 되풀이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을 거야. 닳고 닳은 사람이거든.

그날 밤 최후의 몇 분 동안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내 머릿속에서 사라졌고 나는 조르단의 애무에 완전히 몸을 맡기고 있었지. 생각만 해도 얼굴이 뜨겁다.

"나를 노리개로 생각하지 마세요, 조르단!" 다니엘은 자기 몸을 더듬던 그의 손이 생각나자 그 생각을 지우기 위해 일부러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나를 좋아하지도 않잖아요."

"글쎄……그야 피차 마찬가지야."

그의 조롱 섞인 말투에 다니엘은 속에서 무엇인가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가 갑자기 그녀 곁으로 바싹 다가왔다. 남자의 냄새와 오드콜뉴 냄새가 함께 풍겼다. 다니엘은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그러나 흰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는 그는 그녀가 왜 도망치려고 하는지를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예상했던 것처럼 조르단은 다니엘의 턱을 손으로 받쳐들었다.

"왜 그래, 마치 처녀처럼 두려워하고 있잖아. 당신은 이제 명실공히 내 아내야. 별빛 아래 사막의 모래가 끊임없이 식어가는 추운 밤에 남자가 여자의 품을 그리워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야. 다니엘, 당신은 나를 받아들일 만큼 성숙한 여인일까?" 조르단의 목소리는 약간 쉬어 있어 다니엘은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깨닫고 몸서리쳤다. 다음 순간, 왠지 전신이 마비된 것 같아 그의 얼굴이 가까워오는 데도 꼼짝할 수가 없었다.

심장은 전처럼 그렇게 심하게 뛰지는 않았다. 방안은 깜깜했다. 조르단은 여전히 그녀의 턱을 받쳐들고 있었으나 그의 태도는 야심가의 그것에서 연인의 태도로 바뀌고 있었다.

싸늘한 키스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나의 아내야." 조르단은 입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이 밤을 함께 지내는 거야. 첫날밤 맛본 즐거움을 다시 한 번 맛보고 싶지 않아? 그래서 당신은 내 사실로 찾아온 거지? 첫날밤 이후 줄곧 나를 기다렸지, 다니엘?"

아니에요, 이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조르단의 입술은 뜨거운 정열로 점점 불타올랐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그녀의 날씬한 몸을 떨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전혀 반항하지 않았다.

"조르단……." 다니엘의 애원하는 듯한 속삭임도 그의 격렬하고 뜨거운 키스에 지워졌다. 억제할 수 없는 이 충동을 이젠 약의 탓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니엘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조르단의 키스에 환희를 느끼면서 거기에 반응하려고 했다.

"다니엘, 당신이 이곳에 찾아온 건 이 때문인가?"

조르단의 싸늘한 말투에 다니엘의 뜨겁게 달아오르던 마음이 갑자기 얼어붙는 듯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조르단이 노골적으로 경멸의 눈으로 보는 것을 나무랄 수도 없다. 다니엘은 그의 팔에서 빠져나오자 뒤에서 조르단이 하는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문 쪽으로 달렸다.

층계를 빠져나오자 밤 공기가 얼음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간신히 자기 방으로 돌아왔을 때도 온몸의 떨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자나이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나이데가 기다리고 있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니엘은 안도의 숨을 내쉰 다음 옷을 벗어 던지고 욕실로 뛰어 들어가 따뜻한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비누로 전신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지? 한순간 그 사람의 품에 안긴 나는……. 비누칠하던 손을 멈추었다. 다니엘은 목욕물이 식고 있는 것도 잊고 있었다. 내가 왜 그 사람으로부터 도망쳐 왔지? 그 사람이 무서워서? 아니면 나 자신이 두려워서?

다니엘은 목욕을 마치고 몸을 닦기 시작했다. 창백한 얼굴에 눈은 더욱 커다랗게 보였다.

조르단의 품에 안겨 있던 순간 다니엘은 그에게 향했던 적대감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분명 느꼈다. 그가 자기에게 무슨 짓을 했었는지, 또 어떤 방법으로 자기를 속였는지를 자연스럽게 잊고 있었다. 다만 그가 자기의 육체에 생명을 불어넣고 마음속 깊은 곳에 자신도 모르는 감정의 분수를 솟구치게 하는 남자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다니엘은 작은 신음 소리를 내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돼. 그녀의 몸은 무언의 흐느낌으로 가늘게 떨렸다. 그의 방에 올라간 것은 먼 지평선 저쪽을 바라보려고 간 것이 아니다. 그 방의 주인을 가까이서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남자를 지금은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감정은 시시때때로 변하는 것일까? 다니엘은 자신을 비웃듯 자문했다. 오늘 밤 조르단의 태도에 그녀가 보인 반응은 상대를 미워하거나 무관심한 여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젠 정말 카타르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조르단은 내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보지 않아도 대개는 짐작할 수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니엘은 온몸이 오싹했다. 얼마나 비웃을까! 입가에 경멸의 빛을 띠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겠지, 그리고…….

다니엘은 또 다시 몸서리치면서 몸을 웅크렸다. 조르단의 얼굴을 생각하니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무튼 이 성에서 벗어나야지. 우물쭈물하고 있다간 조르단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그 앞에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굉장한 웃음거리가 될 거야. 다니엘은 그래도 그의 방에 그대로 있을 걸 하는 후회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곳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지금쯤 이 커다란 침대에 혼자 누워 괴로워하진 않을 것이다.

 

8

"아씨, 말 곁으로 너무 다가가면 안 돼요." 자나이데가 다니엘에게 타일렀다. "셰이크의 말이라서 낯선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거든요."

다니엘은 자나이데의 말을 무시하고 마구간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순종 아랍 말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였다. 몇 명의 마부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이 누군가의 감시를 받고 있음을 의식했다. 예의 회계감사관에게 부탁하여 간신히 마구간에 안내된 것이다. 그러나 조르단이 그곳에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니엘은 심장이 송곳에 찔린 듯한 아픔을 느끼고 있었다. 조르단이 어디에 있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그의 방을 찾아갔던 이튿날 아침부터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부재중임을 알고 맨 처음 생각한 것은 탈출 방법이었다. 회계감사관은 정중하지만 몹시 깐깐한 사람이어서, 다니엘이 차를 쓰고 싶다고 부탁했으나 이 핑계 저 핑계로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나를 성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는 조르단의 지시를 받은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어떻게든 수단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도 당장-그가 돌아오기 전에. 지금은 자신을 속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돌아오면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속일 수 없을 것이다.

조르단이 없는 성은 여느 때와 다르게 보였다. 다니엘은 훤칠하게 큰 그의 모습과 나직한 목소리, 그리고 비웃는 듯한 그의 미소까지도 찾고 있었다. 이런 기분은 다른 사람에게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이런 감정이 두려웠다. 조르단은 나 같은 건 사랑하고 있지도 않을 거야. 다만 권력과 재산을 손에 넣고 싶어 결혼했을 거야. 그것도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사실 결혼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이번 결혼을 그 사람이 후회하게 될 것은 시간 문제야. 자기 큰아버지의 의붓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택한 아내가 아닌가. 필립이 한 말은 정말일까? 그 사람의 발 아래 기꺼이 몸을 던진 미녀가 많다는 말은 정말일 거야.

이때 하인이 와서 회계감사관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는 잠시 자리를 떴다가 곧 다니엘에게 돌아와, 일이 생겨서 먼저 실례하겠다고 말하고 어디론지 가버렸다.

자유의 몸이 된 다니엘은 마부들이 말에게 먹이를 주는 것을 보고 있다가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말에 안장을 얹어 달라고 해줘." 그녀는 자나이데에게 말했다. "오아시스에 가보고 싶으니까."

오아시스는 성에서 몇 킬로 떨어진 곳에 있다. 자나이데는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젊은 마부에게 빠른 아라비아말로 무어라고 말했다.

마부는 곧 말 한 마리를 돌을 깐 안뜰로 끌고 나왔다. 말이 뒷발질을 하는 모습은 정말 멋있어 보였다. 다니엘이 그 말을 보고 있는 동안 젊은 마부는 그녀의 퉁명한 살결과 불타는 듯한 머리를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됐다고 이 사람에게 말해 줘." 그녀는 자나이데에게 말했다. "10분 안에 옷을 갈아입고 돌아올게."

10분도 채 못 되어 다니엘은 진즈와 소매가 긴 엷은 블라우스로 갈아입고 돌아왔다. 시내까지 가려면 얼마나 달려야 할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오아시스보다 먼 것만은 확실하다. 오아시스에서 시내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도 그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시내를 빠져나올 때 차가 동쪽으로 달렸을 거야. 그러니까 여기서는 서쪽으로 가면……. 다니엘은 열심히 생각했다. 안뜰에 돌아왔을 때 마부는 말의 고삐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씨를 모시겠습니다." 마부가 정중하게 말했으나 다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혼자 가겠어." 상대가 더 이상 말할 틈을 주지 않고 그녀는 말에 올라탔다. 조랑말에 열중했던 어린 시절 승마를 익혀 둔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말은 훌륭했지만 그녀가 탈 수 있도록 훈련되어 있지는 않았다. 바람처럼 빠른 것이 아랍 말이라는 말은 들어왔다. 과연 그렇다고 생각되었다. 말의 털은 벨벳처럼 부드러웠으며, 오아시스로 가는 데 다니엘의 지시 같은 것은 필요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래도 다니엘이 채찍을 가볍게 대자 얌전하게 말을 들었다. 그녀는 사막을 전속력으로 달리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고 천천히 몰았다. 이 말을 피로하게 하면 탈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내가 없어진 사실을 알면 그 사람은 어떤 얼굴을 할까? 다니엘은 한순간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하지만 내가 없어진 사실을 그가 알 때는 이미 나는 셰이크의 왕실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셰이하를 만나 집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말해야지. 다니엘은 말을 달리면서 또 하나의 자신이, '너는 바보야, 시간이 흐르면 그 사람이 너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잖아?' 라고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에겐 프랑스인의 피도 흐르고 있다고 하지만 결국은 동양 남자란 말야. 여자를 천시하는 관습 속에서 자란 사람이야. 이 결혼 생활을 계속한다면 결구 나는 완전히 망쳐질 뿐이다.

오아시스에는 적어도 몇 명의 유목민이 쉬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다니엘은 왠지 일말의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말이 갑자기 멈춰 섰다. 이 이상은 갈 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티었다. 다니엘은 혀를 차고 말을 달래 보았다. 그러나 말은 꼼짝하지 않고 아름답게 생긴 귀만 쫑긋거렸다.

"왜 그래?" 몇 분 동안 부드럽게 말을 달래다가 다니엘은 마침내 짜증스럽게 말했다. 네까짓 말에게 내가 질 줄 알고!

말이 간신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오아시스에서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막 길을 터덜터덜 가고 있는 그녀에게 해는 너무나 빨리 기우는 것 같았다. 멀지 않아 밤의 장막이 내리면 나는 엄청나게 넓은 이 사막에서 외돌토리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광막한 어둠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다니엘은 가슴이 답답했다. 어떻게 할까. 그녀의 이런 기분을 알아챘는지 모래를 차며 달리고 있는 말도 어딘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이윽고 어둠이 찾아와 검은 빌로드와 같은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추위를 쫓으려고 양손을 비볐다. 추위에 대비해서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시내는 멀었다 하더라도 지금쯤 어떤 마을의 불빛 정도는 보일 듯도 한데……. 그녀는 손목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벌써 4시간 이상이나 말을 달려왔던 것이다. 등과 허벅지가 아픈 것도 무리는 아니다.

모든 풍경은 어둠 속에 잠겨 버렸다. 탈출할 수 있었다는 안도감은 점점 공포감으로 바뀌어 밤의 사막의 혹독한 추위처럼 인정사정없이 다니엘을 떨게 했다. 말도 불안한 듯했다. 출발할 때의 의욕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너무 즉흥적인 계획이었음을 깨달았다. 지금 다니엘은 광막한 사막에서 자신이 어디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다. 가혹한 사막을 안이하게 본 나그네가 결국은 어떤 운명을 맞아야 했는지에 관해 언젠가 아빠가 들려 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하지만 이젠 늦었어. 다니엘은 공포와 긴장감으로 말의 고삐를 힘껏 쥐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싸늘한 바람에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동정하듯 말이 귀를 쫑긋했다. 다니엘의 눈에서는 눈물이 솟아 나왔다. 앞일도 생각하지 않고 이런 일을 저지른 나는 정말 바보야. 그 벌로 나와 말은 이 넓고 넓은, 독수리밖에 살지 않는 사막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말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다니엘은 자칫 말 등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 순간 고삐를 놓쳤다. 그녀는 고삐를 다시 잡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다니엘에게 말은 최후의 보루인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이곳에 있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사람만 있다면 조금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다니엘은 몸서리를 치면서 크게 한숨을 쉬었다.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지금의 이 비참한 처지에서 나를 구해 줄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다고 생각하다니, 나는 그 사람에게서 도망치려고 이 길을 떠나지 않았던가!

말을 귀를 세운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둘러보아도 다니엘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땅바닥에 뱀이라도 있단 말인가? 아니면 전갈이라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젠 말에서 내려 끌고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때 말이 겨우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불안하게, 그러다 점점 힘차게 걸었다. 마치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어떤 소리에 끌려 달리는 것 같았다. 다니엘은 처음 얼마 동안은 말을 자기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몰려고 하다가 마침내 단념하고 말이 가는 대로 방임하였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머리 위에는 달이 떠 있었다. 가느다란 초승달이었다. 그 달빛 아래 사막은 끝없는 바다처럼 희미하게 펼쳐져 있었다.

다니엘은 지칠 대로 지쳐 말 등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시계마저도 이미 서 있었다. 그러나 몇 시간을 헤매고 다닌 것은 틀림없다. 이때 그녀는 긴장된 마음을 풀기 위해 성 안의 일에 관해서 이것저것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없어져 모두들 뭐라고 말할까? 틀림없이 젊은 마부가 문책 당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마부는 내가 오아시스로 갔다는 대답밖에 하지 못할 것이다. 다니엘은 행방불명이 된 소년을 찾기 위해 조르단의 지휘로 수색대가 출발했던 일을 생각했다. 이미 늦었어. 이번에는 그 사람이 성에 없는걸. 회계감사관이 알렸을까? 이 사실을 알리면 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할까? 설마. 그 사람에게 그럴 필요가 있을까? 결혼은 이권 때문에 했을 뿐이야. 내가 죽어도 계부는 조르단을 책하지 않을 거야. 내가 성을 나왔을 때 그 사람은 분명 성에 있지 않았으니까.

다니엘의 마음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 사람은 수색대를 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사람답다. 뻔한 일이다. 그녀는 자신의 지나친 상상에 몸서리쳤다. 지칠 대로 지친 신경, 저려오는 육체. 말 위에서 요람처럼 흔들리면서 그녀는 비몽사몽간을 헤매고 있었다. 눈만 감으면 자신이 꿈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꿈속에서는 모든 것이 몽롱하여, 덕분에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어느 정도 덜 수 있었다.

다니엘의 눈앞에 오아시스가 나타났을 때 그녀는 두 눈을 감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말의 목에 매달려 있었다. 말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치 그녀에게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살펴보라는 듯 목을 가볍게 흔들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말은 다시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캄캄한 어둠 속, 다니엘의 잠재 의식 속에서 한 남자의 그림자가 얼마 동안이나 어른거렸는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어는 순간에는 눈을 완전히 감았는가 하면 다음 순간에는 눈을 반쯤 뜨고……. 이런 상태가 반복되는 동안 계속, '정신 차려' 하고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고삐는 모래 위에 끌리고 있었으나 기적적으로 뒤얽히지는 않았다. 다니엘은 몸을 약간 앞으로 구부리고 말의 부드러운 목덜미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이번에는 두 눈을 완전히 뜨고 오아시스를 보았다. 무슨 기척이 있는 듯했다. 아무것도 보이진 않으나 말과 자기 외에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다. 말은 놀란 듯 몸을 긴장시키고 어떤 명령을 기다리는 듯했다. 다니엘은 두려운 나머지 입 안이 바싹 말랐다. 그러나 말에서 내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알자 두려움도 가라앉았다. 성에서 가까운 오아시스에 있는 것이었다. 다니엘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등줄기를 바싹 긴장시키면서 날카로운 소리로 외쳤다.

"누구예요?"

어둠 속에서 나타난 사람은 승마복 차림에 무거워 보이는 검은 코트 자락을 싸늘한 바람결에 나부끼고 있었다. 말은 주저하지 않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사태를 알아차린 다니엘은 몸서리치면서 숨을 헐떡였다. 말이 그렇게 주저 없이 걸어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즐거운 듯 귀를 쫑긋거리고 콧소리를 내면서 자신을 쓰다듬어 주고 있는 남자에게 코를 비볐다, 마치 좋은 일을 했으니 상이라도 달라는 듯이.

"조르단, 당신은 여기에 안 계신 줄 알았는데, 웬일이세요?" 이렇게 말하고 나자 다니엘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말을 했는지를 깨달았다.

상대방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의 입술은 성난 사람처럼 꽉 다물어져 있고 싸늘한 시선은 피로와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떻게 해서 발견했느냐고 묻고 싶은 거지?" 조르단의 표정은 상대를 꾸짖듯이 싸늘했다. "당신에게는 없는 육감이 이 자라에게는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물 냄새를 맡고 여기까지 돌아온 거야. 순수한 본능이라는 거지. 이런 사막에서 그런 것이 없으면 동물은 영낙없이 죽게 돼." 그리고 냉담하게 덧붙여 말했다. "당신은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시도를 할 건가, 부인? 내가 보이지 않으면 당신은 또 도망치려고 하겠지."

"나는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에요." 다니엘은 피로한 가운데서도 대들었다. "당신은 나를 속여서 억지로 결혼을 했어요. 내가 도망친다고 해서 당신은 잔소리를 할 처지가 못 되잖아요?"

"무엇으로부터 도망친단 말이지? 그리고 어디로?" 조르단은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의 결혼으로 당신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즐거움을 맛보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

다니엘은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어둠 속에서 양볼이 화끈 달아올랐다. 조르단은 내 약점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잘 알고 있어. 그러니까, '이런 사람 나는 싫어'라고 자신에게 말하거나, 또는 이렇게 결혼하게 된 운명을 저주해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니엘은 비로소 무슨 일이나 순순히 받아들이는 아랍 여성들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매사에 미소 지으면서, '알라 신의 뜻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따라와. 그러다간 서서 잠들겠어." 조르단은 불쑥 이렇게 말하더니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또 한 손으론 말의 고삐를 잡았다.

다니엘은 수행원이 타고 있는 차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는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조르단은 그녀를 종려나무 그늘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는 그가 타고 온 말이 매어져 있었다. 그 말을 보고 그녀가 타고 온 말이 즐거운 듯 울자 조르단은 비로소 미소 지었다.

"자라는 당신과는 다르군, 친구를 만나서 즐거워하고 있잖아. 다니엘, 당신은 사막에서 구해준 나에게 아무런 감사의 말도 하지 않나?"

"길을 잃은 게 아니에요. 당신 멋대로 생각하지 마세요. 자라가 나를 오아시스로 데리고 올 줄 미리 알고 내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좋아하셨겠죠?"

"그리고 당신은?" 조르단의 얼굴은 갑자기 험악해졌다. "당신은 뒤에 남은 사람들의 심정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단 말이야? 다니엘, 자나이데는 거의 광란 상태에 빠져 있어, 그리고 말에 안장을 얹어 준 젊은 마부도. 당신은 나를 웃음거리고 만들고 좋아했겠지. 거기까진 괜찮아. 하지만 자나이데와 젊은 마부는……."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하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이 알게 되면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나예요.

"당신은 지쳐 있어."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자나이데는 착한 아이야.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당신을 벌하지 말아 달라고 내게 몇 번이나 부탁했어." 다니엘이 말대꾸를 하기 전에 그는 부드럽게 덧붙여 말했다. "그럴 필요가 없겠지, 다니엘?"

다니엘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길을 잃고 사막에서 혼자 겪은 시련만으로도 충분히 벌을 받은 셈이다. 그에 대한 사랑이 지속되는 동안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곧 성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조르단이 말했다. "오늘 밤은 이 오아시스에서 쉬어가야 해. 여기서 쉬고 나면 당신과 자라도 기운을 차릴 것이고, 하인들은 내가 당신을 벌한 줄 알 거야. 그들은, 남편은 아내의 잘못을 꼭 벌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말하자면 오늘 밤 돌아가지 않는 것은 두 가지 목적이 있기 때문이야." 다니엘이 멍청하게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비웃듯이 덧붙였다. "이런 속담을 들은 적이 있겠지, 부인? '여자와 당나귀와 호도나무는 회초리를 댈수록 좋아진다'는 속담 말야." 다니엘이 기가 죽는 것을 보고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지금까지 화가 나서 여자에게 손찌검을 한 적은 없으니까. 하긴 나를 화나게 한 여자도 없었지만.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은 남자답지 않은 일이지."

"남녀 간에는 좀 더 아픈 벌이 있단 말이군요." 다니엘은 감미롭고 짜릿한 남녀 간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 소리가 그의 신경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조르단은 그녀의 팔을 잡더니 자기 쪽으로 돌려 세웠다. 무척 화난 표정이었다.

다니엘은 또 기가 죽었다. 그러나 그도 무엇인가를 느꼈음에 틀림없다. 조르단은 그녀의 팔을 놓고 말을 매러 갔다.

한 개의 두꺼운 침낭이 종려나무 아래에 놓여 있었다. 조르단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동안 다니엘은 멍하니 침낭을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

머릿속이 혼란하여 그 말을 들을 때까지 침낭 한 개의 뜻 같은 것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이제야 다니엘은 온 신경이 두려움으로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바싹 붙어서 하룻밤을 함께 지낸다면 어떻게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있단 말인가?

"성까지 걸어갈 수는 없어요?" 다니엘은 망설이면서 물었다. "몇 킬로밖에 안 되잖아요? 그리고……." 상대방의 표정을 살피다가 그녀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저 말이에요. 목욕을 하고 싶어요……. 워낙 모래투성이인데다가 또……."

"목욕만 하고 싶은 거라면 저기 있어." 조르단은 이렇게 말하고 오아시스를 가리켰다. "두려워할 것 없어, 이곳에 나 외의 다른 사람은 없으니까."

왜 내가 두려워하는지 이 사람은 모르고 있을까? 다니엘은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이렇게 하는 것이 그의 눈에 자극적이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좋아요." 다니엘은 이렇게 대답했으나 조르단은 계속 말했다.

"뭘 두려워하고 있어? 내가 당신 몸을 슬쩍 보기만 해도 욕망에 사로잡히기라도 할 것 같아? 당신은 그 정도로 순진하진 않겠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남자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좀 더 알아야 해, 다니엘. 상대가 마음 내켜하지 않으면 남자의 욕망도 식어 버리는 거야."

다니엘은 자신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그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했다. 이 사람은 나와의 결혼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와 하룻밤을 지낸 거야. 그래서 굳이 그 일을 되풀이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거야. 그런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녀는 지금 또 한 가지를 알았다. 그의 훤칠하고 탄탄해 보이는 체격을 보기만 해도 그녀의 심장은 무섭게 뛰고 무릎이 떨리며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오아시스의 물은 매우 따뜻하지. 나도 한바탕 헤엄을 치려고 하던 참이었지만, 타월을 빌려 줄게."

헤엄을 친다고! 다니엘은 남편의 우람한 체격을 훔쳐보다가 상대도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당황하여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는 이 조용한 오아시스로 가끔 헤엄을 치러 오는 것일까?

"걱정하지 마. 내가 방해가 되는 모양이니까 따라가지 않을게. 맨살에 느끼는 비단 같은 물의 감촉은 기막힌 쾌감이지. 목욕이 끝나면 별이 빛나는 하늘 밑에서 사랑을 확인하자구. 사랑의 감정은 이 지상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것이거든."

그의 말에 다니엘은 전신을 떨었다. 그녀는 볼에 묻은 모래를 손으로 털며 오아시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당장 물에 들어가 개운하게 몸을 씻고 싶었다. 조르단은 등을 돌린 채 불을 지피느라고 바쁜 것 같았다. 옆에는 작은 삭정이가 쌓여 있었다. 조르단은 자라가 그녀를 오아시스로 데리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모아 두었을 것이다.

다니엘의 이런 생각을 알아챈 것처럼 조르단은 불쑥 말했다.

"당신을 찾으러 가기보다는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편이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했지. 다니엘, 사막은 엄청나게 넓어. 당신은 결국 지치게 되고 자라가 당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올 것이라고 믿고 싶었어." 그는 삭정이에 붙은 불을 쳐다보고 있었다. "좀 원시적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불을 보고 있으면 위로가 돼. 사막에 사는 남자도 불의 따뜻함을 그리워하긴 마찬가지야. 당신이 목욕하고 나면 자나이데가 마련해 준 것을 먹자구. 커피는 포트에 담아서 가지고 왔어. 어렸을 때 나는 이런 오아시스에서 며칠 밤을 계속 지낸 적이 있지. 여기보다 훨씬 견디기 어려운 곳에서 말야. 우리 큰아버지, 그러니까 당신의 계부가 그렇게 하도록 했어. 휴가 때마다 영국의 퍼블릭 스쿨에서 돌아와 집안사람들과 함께 사막을 헤매면서 학교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웠지. 처음 얼마 동안은 남자 아이들이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나도 그런 생활을 즐겼어. 하지만 점점 자라면서 유목민의 자유로운 생활 속에 항상 도사리고 있는 빈곤과 위험을 생생하게 알 수 있게 되었지. 그래서 큰아버지의 바램대로 나는 구민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어. 유목민 역시 석유로 부자가 된 사람들과 똑같은 카타르 국민이거든. 그들은 생존권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 사실 돈이나 지위나 재산은 그 사람들에게 있어 어떤 의미에서는 지나친 사치라고 할 수 있지."

조르단이 이렇게 많은 말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자기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 같은 것을 모르는 유목민의 생활을 부러워하고 있는 것일까?

다니엘은 그동안 자나이데를 통해 지금까지 몰랐던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르단이 카타르의 지도자가 되어 국익을 관리하지 않는다면, 사리사욕과 시기심이 뒤얽혀 나라는 사분 오열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저 사람이 나와 강제로 결혼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직 나만이 이 결혼의 중대성을 몰랐던 것뿐이었다. 이런 기분을 저 사람에게 전할 수 있다면 저 사람은 나를 자유의 몸으로 놓아줄지도 모른다, 원래는 잔인한 사람이 아닌 것 같으니까. 계부도 조르단을 책하지 않고 이번 결혼의 취소를 허락할 것이다. 내일 용기를 내어 말해 볼까? 그러나 이날 밤의 다니엘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리고 그의 우람한 육체를 괴로울 정도로 의식하고 있었다.

바보야. 다니엘은 한숨을 쉬었다. 오아시스로 가면서 두 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으나 조르단은 여전히 불을 지피기에 바빠 등을 돌린 채였다. 그녀는 옷을 벗어 모래를 턴 다음 속옷까지 벗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조르단이 말한 대로 물은 따뜻했다. 맨살을 부드럽게 애무하는 물의 감촉이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상쾌했다. 다니엘은 물속에서 반듯하게 누워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내일이면 조르단이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싫어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오늘 밤만은 얼마간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이때 다니엘은 누군가의 손이 어깨에 닿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조르단일까? 오지 않겠다고 했는데 역시 온 모양이다. 그러나 돌아다보았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가볍게 어루만지는 듯한 감촉은 계속 느껴졌다. 이번에는 그 부위가 장딴지와 허벅다리라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다니엘은 가슴이 철렁해서 비명을 질렀다. 조르단이 달려왔을 때 그녀는 몸부림치고 있었다. 어느 방향으로 헤엄쳐도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맨살에 달라붙었다.

조르단이 허우적거리는 그녀의 팔을 잡았을 때도 너무나 놀란 그녀는 얼마 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 조르단은 물 속에서 양손으로 그녀를 받쳐 주면서 말했다. 무엇인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녀는 또 비명을 질렀다.

"걱정할 것 없어, 수초야." 조르단은 이렇게 말하면서 녹색의 너풀너풀한 수초를 보여 주었다. "헤엄칠 때 이것이 몸에 걸렸을 거야."

, 분해. 소동의 원인이 기껏 수초였다니!

"미안해요." 다니엘은 그의 팔을 풀려고 하면서 쥐어 짜내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다니엘의 몸을 놓아주지 않았다. 조르단은 그녀의 몸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렇게 생각해?" 조르단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이번 결혼은 내 의사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알라 신의 뜻인지도 모르겠어. 알라 신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당신의 훌륭한 육체를 음미할 수 있도록 해주시거든. 이 세상엔 지금 달빛을 받고 있는 당신의 모습만큼 매력 있는 것은 없어, 떨고 있는 것을 보니 당신도 나를 의식으로 있군."

틀림없이 다니엘은 그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떨고 있는 것이다.

조르단의 입술이 천천히 그녀의 입술을 열었다. 시간이 정지된 것 같았다. 언제 기슭으로 돌아왔을까? 다니엘은 발바닥에 모래를 느끼면서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조르단은 다니엘을 안아 올리자 아직도 빨갛게 타고 있는 모닥불 쪽으로 걸어갔다.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조르단이 몸을 구부리면서 그녀를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다니엘은 그의 몸이 마치 조각 같다고 생각하면서 찬탄과 정열이 섞인 눈길로 바라보았다. 동양과 서양이 결부된 고대 그리이스 조각의 완벽한 인간상에 가장 가까운 인간을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넓은 어깨와 잘록한 허리, 그리고 가슴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다니엘은 그에게 매달렸다. 이에 호응하듯 조르단은 숨을 거칠게 몰아 쉬면서 그녀를 힘껏 포옹한 다음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그녀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갖다 댔다. 다니엘은 그에게서 도망쳐야 한다는 자신의 이성의 소리를 떨쳐 버리고, 기껏해야 몇 시간밖에 지속되지 않을 이 감미롭고도 조금은 씁쓸한 행복을 위해 전 생애를 걸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조르단의 키스가 그녀의 부끄러움을 쫓아 버린 듯, 다니엘도 뜨겁게 그의 키스에 응했다.

"당신에게 이렇게 격렬한 정열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조르단이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이자 이에 대꾸하려는 다니엘의 입술에 그가 손가락을 갖다 댔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말은 다시는 않겠지, 다니엘? 나를 미워한다고 말하지 마. 그렇게 말해봐야 거짓말이라는 것은 서로가 잘 알잖아. 행복하다고 솔직하게 말해 줘. 당신은 누구보다도 멋져." 조르단이 자신의 육체적인 반응만 느끼고 마음속에서 싹트는 사랑은 알지 못하는 것 같아서 다니엘은 다소 기분이 상했다. 나를 일시적인 감정에 몸을 맡기는 여자쯤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자기가 욕망에 따라 움직인다고 해서 나까지도 육체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여자로 생각하는 것일까?

다니엘은 혼란한 마음을 어떻게든 가라앉히려고 했다. 그러나 조르단은 그녀를 끌어당겨 손을 그녀의 머리카락 속에 넣고 그녀의 얼굴을 약간 뒤로 젖혔다.

"두 사람이 지금 함께 있는 이유를 오늘 밤만은 잊기로 하지. 서로에게서 발견한 달콤한 사랑만 마음속에 간직해 두는 거야."

조르단의 억센 힘 앞에서 다니엘은 가볍게 한숨을 쉰 다음 사랑의 기쁨에 온몸을 맡겼다.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9

눈을 떠 보니 다니엘은 조르단의 팔에 안겨 있었다. 그녀가 몸을 움직이자 그도 눈을 떴다. 이 사람은 틀림없이 자기에 대한 내 사랑을 알아챘을 거야.

"간밤이 우리 결혼의 진짜 첫출발이었어." 조르단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이젠 도망가지 않겠지, 나의 셰리(귀여운 사람)."

그럼요, 알고 있어요. 당신은 내 남편이고 나를 사랑하고 있는 걸요.

"일어나지. 사람들이 찾으러 오기 전에 성으로 돌아가자구. 내가 내 아내에게 어떤 벌을 줬는지 그들이 알게 되면 그들은 아마 나를 지도자로 추대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당신의 아름다움이 나를 망쳤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게 틀린 생가도 아니거든."

다니엘이 대꾸할 겨를도 없이 그는 오아시스 쪽으로 걸어갔다. 구릿빛 살결에 햇빛이 눈부셨다.

반시간쯤 있다가 돌아온 조르단은 아직도 침낭 속에 누워 있는 다니엘 곁에 웅크리고 앉았다.

"이젠 일어나. 그러고 있는 모양이 너무 자극적이야, 나를 유혹하는 것이라면 별문제지만."

조르단의 농담에 다니엘의 가슴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천천히 기어나오면서, 만약 그대로 누워 있었다면 또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를 상상하자, 간밤의 기억이 되살아나 고통과 환희가 뒤섞인 전율이 온몸을 치달았다. 그러나 조르단은 이미 등을 돌리고 모닥불을 끄기에 바빴다.

다니엘이 오아시스에서 돌아오던 중 조르단이 포트에서 커피를 따라 주어 말없이 그것을 받아 마셨다. 아침 햇살 속에서 남편과 함께 있다는 즐거움은 결혼식이후 계속된 긴장감을 풀어 주었다. 조르단에 대한 다니엘의 증오심은 간밤에 두 사람 사이에 피어올랐던 정열의 불꽃에 완전히 불타 없어진 듯했다.

성이 가까워지면서 다니엘은 이 더없는 행복감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음을 느꼈다. 성으로 돌아가면 조르단에게는 무거운 책임감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좋은 내조자가 되도록 강요받을 것이다. !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을까. 항상 오늘 아침처럼 단둘이 있을 수는 없을까.

성은 사막 위에 긴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다니엘의 마음은 참담해서 눈물이 솟아나왔다. 간밤에 오랜만에 남편의 품에 안겨 있었지만, 일단 바쁜 생활로 돌아가면 어쩌다가 생각나서 내 방에 찾아올 때만 겨우 남편을 만날 수 있겠지.

성에서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었는지 두 사람이 성 가까이에 이르자 커다란 문이 활짝 열렸다. 앞뜰에는 수행원들이 오아시스에 타고 왔던 한 대의 랜드로버가 먼지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조르단의 냉정해 보일 정도의 엄격한 표정을 보자 다니엘은 점점 실의에 빠졌다. 이제 마법의 힘은 사라졌어.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깊은 골짜기가 생긴 거야. 그녀는 자신이 괴로워하는 것을 그에게 눈치채이지 않으려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면서 말에서 내렸다.

자나이데가 달려왔고 걱정을 끼쳐 정말 미안했다.

"다니엘, 조르단과 결혼했다면서?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할 당신이 아닐 텐데. 남편이 필요했다면 나를 기다릴 수도 있었잖아?" 이때 누군가가 손을 내밀면서 귀에 익은 목소리로 말했다. 필립 먼데일이었다. 이 사람이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와 있을까?

혼란한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하는 다니엘의 입술에 필립은 자신의 입술을 힘껏 포갰다. 그의 눈이 장난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옛날 친구야. 너그럽게 봐 주게." 필립은 싸늘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조르단에게 쾌활하게 말했다. "질투하진 않겠지? 자네는 내가 없는 틈에 내 보배를 훔쳐 갔잖나!"

가벼운 농담조의 말 같았으나 사실 필립은 상당히 노여워하고 있는 듯했다. 조르단은 싸늘한 눈으로 다니엘을 꾸짖듯 쳐다보았다. , 사막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요. 필립과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다니엘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 필립이 팔을 잡고 있어 따라갈 수도 없었다.

조르단은 회계감사관에게 몇 마디 지시하고 나서 여전히 싸늘한 표정으로 필립을 돌아보았다.

"필립, 자네가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웬일이지? 자네는 분명히 사막을 싫어하는 줄 알고 있는데."

"사막? , 사막은 싫지." 필립은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자네의 아름다운 부인을 위해서라면 문제는 다르지."

다니엘은 얼굴이 빨개졌다. 마치 과거에 자기와 연인 사이였다는 말투가 아닌가! 조르단은 완전히 무표정했다.

"나는 카타르에 오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어. 캐더린이 먼저 말을 꺼냈지. 그리고 자네도 내가 온다고 해서 곤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물론 그때만 해도 자네의 결혼은 알지도 못했거든." 필립은 다니엘을 힐끗 보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갑작스레 결심한 모양이군, 내 귀여운 사람. 아니면 부모가 시켜서 했나? 하긴 당신 아빠는 남을 설득하는 데는 명수지. 조르단, 자네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야." 필립은 조르단의 불쾌해 하는 표정을 모르는 듯 말을 계속했다. "부자인데다가 아름다운 아내라……. 자네 큰아버지는 좋은 아가씨를 골라 주었네그려."

필립은 다니엘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불쌍한 다니엘!" 낮은 목소리였지만, 바로 곁에 서 있는 조르단의 귀에 틀림없이 들어갔을 것이다. "마치 시장 바닥에서 팔려 간 노예 같잖아. 마지막 만났을 때, 당신이 내게 한 제의를 내가 점잔을 빼고 거절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후회하고 있어. 우리 일가가 당신 아버지의 신세를 지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리고 좀 더 나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더라면 지금쯤 나는 당신 남편이 되었을 텐데." 다니엘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러나 그녀가 그의 말을 부정하려고 하기도 전에 필립은 화제를 자기 누이동생인 캐더린에 관한 이야기로 옮겼다. 조르단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도저히 얼굴을 들고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필립의 계산된 말을 달리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내가 먼저 유혹했다는 말을 아무리 부정해 봐야 조르단은 납득할 리 없다. 간교가 뛰어난 필립. 다니엘은 씁쓸한 기분이었다. 단순히 연인 사이였다고 말했다면 조르단은 필립의 말을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필립은 두 사람이 오아시스에서 함께 돌아온 것을 보고 무엇인가를 짐작했나 보다. 그래서 그녀가 조르단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자기의 연인이 되고 싶어 했다고 암시함으로써 조르단의 마음속에 독을 넣은 것이다. 그녀의 반응을 생각한다면 조르단은 그녀를 닥치는 대로 쾌락만을 추구하는 여자로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다.

심한 괴로움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다니엘은 조르단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다니엘이 본 것은 조르단의 팔에 안겨 있는, 흑발의 몸집이 자그마한 처녀의 모습이었다. 키스를 요구하듯 고개를 뒤로 젖히고 그의 눈을 쳐다보고 있었다.

"캐더린은 조르단에게 반해 있거든." 다니엘의 옆에서 필립이 말했다. "다니엘, 당신이 조르단과 결혼했다는 것을 우리 가족이 안다면 모두가 당신을 좋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어머니나 캐더린도 조르단과의 결혼을 무척 원했거든."

"캐더린?" 다니엘은 그 처녀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조르단의 팔에 안긴 채 공공연하게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하지만 틀림없이……당신 어머님은 캐더린이 아직 너무 어리다고 말씀하셨는걸요." 다니엘은 먼데일 부인이 자기 딸에 관해서 한 말을 분명히 기억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저런 처녀는 조르단의 아내로서는 맞지 않다. 아랍의 생활 방식에 익숙해질 수도 없지.

"다른 사람과의 결혼이라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상대가 조르단이라면 문제가 달라. 그렇잖아, 다니엘?" 다니엘은 양볼을 상기시키면서 표정을 굳혔다. 그것을 본 조르단의 얼굴이 약간 험악해졌다. 필립은 조르단에게 결혼을 신청할 테니 함께 가자는 누이동생의 부탁을 받아들여 이곳에 온 것이다. 필립은 현실주의자다. 아무런 목적 없이 그렇게 했을 리 없다. 그리고 다니엘과의 결혼을 완전히 단념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결혼보다 당장 필요한 것은 돈이다. 도박으로 짊어진 빚이 그의 생활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르단에게 일족이 정해 준 약혼자가 있다 하더라도 캐더린이라면 그의 맘을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르고, 캐더린 또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조르단의 침대에서 함께 잠을 잔다고 해서 그와 결혼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급한 생각이다. 필립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누이동생을 설득하려고 하였으나 그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 집안은 유서 깊은 집안이에요. 꼭 필요하다면 책임을 지게 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요. 남매간에 그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했다. 먼데일 부인이라 할지라도 딸의 이런 방법을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겠지만, 조르단과의 혼담을 위해서라면 눈감아 줄 것임에 틀림없다. 카타르의 엄격한 생활에 따를 수 있을까 하는 오빠의 걱정에 캐더린은 코웃음을 쳤다. 그런 곳에 살 생각은 추호도 없는 걸요. 조르단에게는 프랑스인의 피도 흐르고 있거든요. 물론 우리는 파리에 살게 될 거예요.

필립은 유혹하듯 반쯤 입을 벌리고 조르단을 올려다보고 있는 누이동생을 보다가, 다니엘의 창백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틀림없이 이 아가씨는 어리석게도 저 오만한 남편에게 완전히 빠져 있는 표정이군. 그렇다면 더욱 좋지.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방을 위해 어떤 희생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필립의 마음속엔 하나의 계획이 착착 수립돼 가고 있었다. 처음 생각했던 것 이상의 것을 기대할 수도 있겠군. 생각해 보면 학교 다닐 때부터 저 녀석은 매사에 나보다 뛰어나서 시기했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지. 저 녀석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다니엘을 빼앗으면 정말 통쾌할 것이다. 보아하니 저 녀석도 다니엘에게 빠져 있단 말야. 그녀를 빼앗기만 하면 조르단에게 설욕할 수 있고 평생을 유복하게 살 수 있으니, 말하자면 일석이조라는 거지. 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전화위복이 될지도 모르겠군.

필립은 미소 지으면서 다니엘의 오른손을 잡고 조르단과 캐더린 쪽에 보이도록 몸을 돌렸다.

"캐더린은 당신 남편을 사랑하고 있지. 실은……." 필립이 말할까말까 망설이는 것을 보고는 다니엘은 괴로움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녀의 침묵에 용기를 얻었는지 필립은 다소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실은 말이지 양친이나 난 조르단이 누이동생의 사랑을 받아들일 줄로 생각했지. 그렇지 않다면야 이곳에 오는 것을 양친께서 허락할 리도 없잖아? 지난번 조르단이 파리에 왔을 때 두 사람은 자주 만났지. 조르단이 아버지에게 누이동생과 결혼하겠다고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곳에 초대받았을 때 캐더린은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 거지."

"조르단이 당신들을 초대했어요?" 필립은 돌아다보는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은 더욱 커 보였다.

필립은 어색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조용히 대답했다.

"당신은 설마 누이동생이 초대도 받지 않고 이곳에 왔다고 생각하진 않겠지?"

캐더린은 아쉬운 듯 조르단의 몸안에서 벗어나 마치 기대고 싶다는 듯한 태도로 그의 손을 잡은 채 다니엘 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미안해요. 사실 조르단과 나는……."

캐더린은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는 듯 더듬거리면서 다니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캐더린은 저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 조르단은 그 사실을 알면서 그녀를 초대한 거야. 그러면서도 나와 결혼하다니.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사랑하지 않는지 알 수 없어. 정말 캐더린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절대로 내 감정을 눈치채게 해선 안 된다. 다니엘은 떨리는 입술에 억지로 미소를 띠면서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당신들이 와 주어서 정말 기뻐요."

이 말을 듣자 캐더린은 갑자기 깔깔대고 웃으면서 말했다.

"어머나, 조르단. 당신 부인은 융통성이나 낭만적인 면이 전혀 없군요."

"다니엘은 영국인이야, 캐더린. 당신들과는 사고방식이 달라. 하지만 당신 오빠를 만나서 기쁜 모양이군."

조르단의 시선은 필립의 팔을 잡고 있는 다니엘의 손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을 쳐들고 조르단의 도전적인 시선을 마주 쏘아보았다.

"우선 샤워를 하고 싶어요. 온몸이 모래투성이거든요. 조르단, 당신은 모르겠지만 피부가 거칠어진 것 같아요."

이 말을 듣고 다니엘은 얼굴이 붉어졌으나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캐더린처럼 세련된 아가씨와 어떻게 겨를 수 있단 말인가. 다니엘의 가슴은 가리가리 찌어지는 듯했다. 저 아가씨에게는 사랑하는 방법을 일부러 가르칠 필요도 없겠지.

"다니엘의 방을 사용하는 게 어때? 거기서 샤워를 하도록 해요."

조르단의 목소리에는 다른 사람이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다니엘의 방으로 갔다. 캐더린은 방안을 둘러보다가 사용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더블베드에 시선이 가자 일부러 동정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불쌍한 다니엘, 남편의 사랑을 받지도 못하는군요. 당신 아버지를 잘 설득했으면 필립과 결혼할 수도 있었을 텐데. 오빠는 진실로 당신을 좋아하거든요. 하지만 조르단은……." 캐더린의 시선이 다니엘의 날씬한 허리에 쏠렸다. "조르단은 여자 다루는 솜씨가 능숙해요. 촌스런 여자는 곤란하죠. 그런 사람을 사랑하다니, 겁없는 짓을 했군요. 상처받는 것이 고작일 텐데. 그렇잖아요? 그 사람한데서 나에 관한 얘기 못 들었어요? 우리의 계획에 관해서? 파리에 있을 땐 정말 다정하게 지냈죠. 우린……."

"그렇게 생각하는 여자들은 많아요." 다니엘은 어떻게든 용기를 내서 반격을 했다.

그러나 그 보복은 즉각 돌아왔고 또 가혹했다.

"그 사람의 여자가 되었던 사람이 많았단 말이군요? 하지만 난 달라요. 그 사람은 우리 집안이 전통 있는 가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결혼 이외의 것을 내게서 요구하면 어떤 모욕을 당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죠. 당신 아버지가 재산과 권력을 앞세워 그 사람을 설득하지 않았더라면 나와 결혼했을 거예요. 그래요, 난 잘 알고 있어요."

캐더린은 결혼의 목적이 재산이라고 생각하는 현실적인 아가씨였다. 그러나 조르단과 결혼하게 되면 재산과 권력, 이 두가지 기쁨을 한 손에 쥘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몇 해 동안이나 책임과 명예를 중히 여기는 조르단에게 조심조심 접근하여 그로 하여금 결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핫산이 조르단을 다니엘과 결혼시키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고 캐더린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만나 보지도 못한 얌전한 아랍의 처녀라면 그래도 참을 만하다. 조르단은 반은 프랑스인이다. 무슨 말이든 받아들이기만 하는 아내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다니엘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다니엘이 카타르에 있는 셰이크 일족을 찾아갔다는 말을 듣고 캐더린은 결심했다. 빨리 손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이미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내가 있는데 조르단은 왜 이렇게 어리석은 처녀와 결혼을 했을까? 그녀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호화로운 방 안을 둘러본 다음, 다니엘의 날씬한 허리를 비웃듯 쳐다보다가 다시 커다란 침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르단은 이 방에 오지 않는 모양이죠?" 캐더린의 단정적인 말에 다니엘은 무심코 대꾸했다.

"언제나 이 방에 있진 않아요. 내가 그의 방으로 가끔 찾아가죠."

캐더린의 푸른 눈이 노여움으로 불타올랐다.

"그래요? 그 사람과 함께 지냈단 말이군요. 하지만 그런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에요. 조르단은 누구보다도 정열적이에요. 그 사람은 마음에 꼭 드는 대상이 없을 땐 가까이 있는 아무나 갖고 말죠. 그러면서 그 다음 상대를 생각하는 거예요." 그녀는 방 한가운데 몸을 긴장시키고 우두커니 서 있는 다니엘을 경멸하듯 바라보았다. "어마, 당신도 그렇게 순진하진 않겠죠? 조르단에게는 너무나 아름답고 관능적인 여자들이 많이 따라다녔어요."

"당신도 포함해서요?" 다니엘은 이렇게 말하고 나자 곧 자신의 말을 뉘우쳤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나요? 내 경우는 약간 달라요." 캐더린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조르단은 절대로 내가 그 사람의 정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거든요. 그 사람이 나와 결혼하게 되면 프랑스에서도 명문의 집안과 친교를 맺을 수 있게 되죠. 자기 어머니가 신분이 낮은 여자였던 남자에겐 매력 있는 조건이잖아요?"

"그런데 당신은 그의 어머니의 신분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아요?" 다니엘은 그녀의 말꼬리를 잡고 반격했다.

캐더린은 다만 어깨를 으쓱할 뿐, 상대가 너무 어리다는 듯 미소 지으며. 더욱 가혹하게 나왔다.

"거기에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조르단은 나를 사랑하고 있어요, 다니엘. 이젠 알았을 텐데요. 그 사람이 나를 이곳에 초대했다는 것이 그 증거예요, 결혼 의사도 포함해서."

"그 사람은 이미 나와 결혼했어요."

"명목상으로 한 결혼이잖아요? 하지만 당신이 아들을 낳아서, 자신의 지위가 확고해지면 그 사람은 이혼할 거예요."

캐더린은 너무나도 자신 있는 듯한 말투에 다니엘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방 안이 빙글빙글 돌고 구역을 느껴 그녀는 침대에 주저앉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조르단의 아기를 배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잘못한 거야. 이 결혼이 언젠가는 단순한 정략적인 목적 이상의 결혼이 될지도 모른다고 자신에게 타일렀던 내가 어리석었던 거야. 내가 아들을 낳으면 그 사람은 나와 이혼하고 캐더린을 들여앉히겠지. 아기가 있으면 계부도 원조를 끊을 수 없을 것이다, 셰이크 핫산은 결코 손자를 버리지 않을 테니까.

"당신에게도 자존심이라도 있다면 당장 카타르를 떠나세요. 아니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나머지 쫓겨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셈인가요? 당신이 그렇게 비참할 정도로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사람은 무척 재미있어할 거예요. 당신과 결혼한 목적이 오직 하나라는 것, 사랑하는 여자는 따로 두고 당신에게는 아기를 낳게 하기 위해서만 접촉한다는 것을 알고도 그와 결혼 생활을 계속한다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어요." 캐더린은 냉소했다. "그래서 겁없는 짓을 저질렀다고 당신에게 말했잖아요, 다니엘?"

그날 하루 동안 다니엘은 조르단과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저녁 식사는 피할 길이 없었다. 캐더린이 조르단에게 치근대는 광경을 싫어도 보아야 했다.

필립은 그런 그녀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저렇게 상대방밖에 보이지 않는다면 두 사람만의 식사를 따로 차려 줄 걸 그랬지?" 그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식사가 끝나자 캐더린은 파리에서 가지고 온 테이프를 듣자고 조르단에게 말했다.

"기억 나세요? 당신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이 곡에 맞추어 춤을 추었잖아요?"

괴로운 음악 소리가 방안 가득히 울리고 필립과 다니엘은 완전히 따돌림을 당했다. 두 사람이 탑에 있는 방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해도 다니엘은 전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먼데일 남매가 찾아온 뒤로 조르단은 다니엘에게 거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도 '' 또는 '아니요'라고 대답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다니엘은 조르단이 춤을 추자고 청해도 고개를 짓고 시선을 돌렸다. 조르단은 마지못해 캐더린의 팔을 놓은 거야. 의무감 때문에 함께 춤을 추자면 그런 춤은 싫어요.

다니엘이 거절했을 때 조르단의 표정은 굳어졌다. 그러나 그때 마침 필립이 안뜰을 구경시켜 달라고 부탁해서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반시간쯤밖에 있었을까. 필립을 재촉해서 돌아왔을 때 방안은 깜깜했고 음악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필립이 불을 켜 방안이 환해졌을 때 다니엘은 고통스럽다 못해 숨이 막힐 듯하였으나 입술을 깨물면서 참았다. 거기에는 서로가 껴안고 모든 것을 잊은 채 서로의 정열을 확인하는 두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조르단은 곧 캐더린을 놓았다.

"방해가 되었나?" 필립은 다니엘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필립. 방으로 돌아올 때까지 어깨에 느껴지는 필립의 손의 감촉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방에까지 데려다 줄게.' 라고 말했을 때도 거절하지 않았다. 사실은 그럴 기력이 없었다. 필립은 문을 열고 다니엘을 끌어안으면서 입술을 맞추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 즐거움도 혐오감도. 조르단이 캐더린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받은 상처의 아픔 이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필립이 머리를 들고 무어라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 다니엘이 눈을 떴을 때, 남편의 모습이 반대 방향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기회가 좋지 않았군." 필립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 쓸 것 없어, 귀여운 사람."

 

일주일이 지났다. 다니엘은 조르단과 얼굴을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캐더린과도. 그 두 사람은 항상 함께 승마와 매사냥을 하러 다니면서 큰 소리로 웃어댔다. 다니엘의 안색은 날이 갈수록 창백해지고 여위어 자나이데를 걱정시켰다. 필립은 그런 그녀에게 은근히 접근해 왔다.

어느 날 오후 캐더린이 한사코 도시의 공기를 쐬고 싶다고 떼를 써 조르단이 그녀를 데리고 시내로 갔을 때의 일이다. 다니엘이 안뜰에서 멍청하게 허공을 쳐다보고 있을 때 갑자기 필립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니엘, 당신은 여기서 빠져나가지 않으면 안 돼. 자신을 시험하고 있나? 무엇 때문에? 당신도 이젠 캐더린과 조르단이 어떤 사인지 알 수 있겠지." 필립은 그녀의 손을 잡아 애무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저 녀석을 사랑하는 것은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당신의 자존심은 어디로 갔지? 이런 상황에서 정말 견딜 수 있겠어? 요즘의 당신은 빈 껍질 같아. 나는 이곳에 온 이후 당신의 웃음소리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 떠나려면 지금 떠나, 다니엘. 그 녀석이 당신을 완전히 망가뜨리기 전에."

"어떻게?" 다니엘은 공허한 목소리로 물었다. 필립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캐더린의 경멸에 찬 말을 지금도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내 자존심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그 사람의 아기를 낳을 때까지 여기 있어야 하나? 아기가 태어나면 아기를 빼앗고 나를 버린 다음, 다른 여자와 결혼하게 될 거야. 조르단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의 행복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빠져나가겠어요. 하지만 불가능해요."

"그것이 당신의 진심이라면 돕겠어. 랜드로버가 저기 있잖아. 당신을 궁전까지 데려다 줄 수도 있어, 그보다는 국경을 넘어 쿠웨이트로 가서 거기서 영국으로 갈 생각은 없어?"

"난 돈이 없어요. ……."

"걱정할 것 없어. 당신이 필요한 만큼은 빌려 줄 테니까. 그런데, 다니엘 난 당신만을 위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게 아냐." 필립은 다니엘의 손을 자기 입술로 가지고 갔다. "언젠가 당신의 상처가 아물면 내게도 돌아와서 나를 남편으로 섬기겠지?"

"글쎄요, 필립. 나는……."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 필립은 갑자기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문득 생각난 일인데, 우리 사이가 보통이 아닌 것처럼 조르단이 생각하게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 그렇게 되면 조르단이 당신을 쫓아와서 아기를 낳게 하기 위해 억지로 데리고 가지는 않을 테니까."

다니엘은 이미 반대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필립을 사랑한다고 말해도 그 사람은 전혀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 자존심 때문이야. 조르단에게 끌려와서 다시 지금과 같은 굴욕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 어떤 이유를 꾸며서 석유회사의 이권을 조르단에게 상속해 주도록 계부를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 사람의 소망인 것은 잘 알고 있다. 그 사람의 상속권을 빼앗고 싶지는 않다.

다니엘의 동의를 얻자 필립은 당장 출발 준비에 착수했다. 캐더린과 조르단은 다음날 아침 말을 타러 함께 나가기로 되어 있다. 다음날 저녁 식사 후에 필립은 다니엘에게 알렸다. 이때가 찬스다. 짐은 아무것도 필요 없다. 잘하면 밤까지는 쿠웨이트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는 아버지에게 여비를 보내 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구." 그는 다니엘을 위로했다. "48시간 이내에 당신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

집이라구? 다니엘은 입술을 깨물면서 얼굴을 돌렸다. 조르단을 잃은 지금, 이제 내겐 집 같은 것은 없어요. 당신은 그걸 모르세요? 그 사람이야말로 내 집이고 내 세계예요. 그런데 그 사람은 캐더린을 사랑하고 있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짙푸른 하늘에 태양이 눈부셨다. 다니엘이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 조르단과 캐더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함께 말을 타러 가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창가로 다가가서 이것이 조르단을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것을 느꼈는지 조르단도 그녀가 있는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다니엘은 한순간 계단을 뛰어 내려가 그의 가슴에 안겨 이곳에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도 조르단을 위해 이곳을 떠나야 한다.

다니엘과 필립은 조르단과 캐더린이 떠나고 반시간쯤 후에 출발했다. 다니엘은 필립의 출발 준비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무턱대고 랜드로버에 올라탔다. 성을 나올 때 필립이 그녀에게 가볍게 키스했다. 자나이데에게는 그 동안 감사하다는 쪽지를 남기고 왔으나 조르단에게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다니엘이 비행기를 무사히 타는 것을 보고 나서 모든 것은 자기가 설명하겠다고 필립이 말했다.

그런 설명은 필요 없어요. 그 사람은 자기 나름으로 결론을 내리고 내가 이곳을 떠난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할 거예요. 그리고 정말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할 거예요.

쿠웨이트로 가는 길은 카타르로 가는 길과는 방향이 달랐다.

사막을 횡단하는 것일까?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다니엘에게 필립은, '조금도 걱정할 것 없다. 이것이 바른 길이다, 어렸을 때 카타르에 와 본 적이 있으니까 사막에는 익숙하다, 몇 시간만 있으면 국경이 나온다'고 자신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너무 안이했던 것 같다. 네 시간쯤 후에 필립은 씁쓸한 표정으로 그 사실을 인정했다. 찌는 듯한 더위 때문에 다니엘은 몸에 이상을 느끼기 시작했다. 랜드로버는 튼튼하기는 했으나 쿨러도 없는데다가 하루 중 가장 더운 시간을 사막의 오지에 있었으며, 쿠웨이트의 국경은 감감하기만 했다.

"마지막 길목에서 길을 잘못 든 거야." 필립은 가솔린의 미터를 보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겠는데."

"좀 쉬었다가 갔으면 좋겠어요." 다니엘은 머릿속이 띵했다.

"이렇게 더운 데서 어떻게 쉰단 말야? 가만히 있으면 차가 녹을걸. 정말 지독한 더위군!" 필립은 아까부터 계속 푸념이었다. 자신감 과잉이에요. 잘난 체하더니 이 꼴이군요. 당신은 막상 중요한 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거든요. 그러나 필립의 푸념은 계속되었다. 더위가 어떻다, 도로 표지가 불비하다는 등……. 다니엘은 두통을 참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사막의 길은 모래 폭풍이라도 불면 곧 사라져 버린다. 사막 한 복판에서 길을 잃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필립은 응석받이처럼 계속 푸념만 하고 있는 것이다.

랜드로버가 갑자기 덜거덕거리면서 필립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펑크가 난 모양이다. 필립은 차에서 내리더니 언짢은 얼굴로 돌아왔다. 다니엘은 두 사람이 직면하고 있는 위험을 깊이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필립을 빤히 쳐다보았다.

"타이어의 교체를 돕겠어요."

이 말을 듣자 필립은 갑자기 화난 사람처럼 얼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스페어 타이어가 없어."

다니엘은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당장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윽고 그 말의 뜻을 알고 나서도 그녀는 이상하게 두렵지가 않았다. 스페어 타이어가 없으면 더 이상 갈 수 없다. 두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자신들도 알 수 없다. 몇 시간 안에 발견되지 않으면 틀림없이 죽고 말 것이다. 더구나 발견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다니엘은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필립은 여전히 푸념하면서 쿠웨이트로 가자고 한 것은 다니엘이라고 원망하기까지 했다.

필립은 겉으로만 어른일 뿐 사실은 어린애와 같았다.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전가시키려 하다니. 지금까지는 조르단이 만만한 희생물이 되었던 거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조르단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필립.

다니엘은 마치 히스테리를 일으킨 어린애를 달래는 어머니처럼, 틀림없이 누군가에게 발견될 것이라는 둥, 마음에 없는 말을 하면서 열심히 필립을 위로했다. 랜드로버 안에는 물이 있었으나 얼마되지 않는 분량이었고 차의 지붕에 내리쬐는 열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다니엘은 점점 몸의 이상을 심하게 느꼈으나 차밖에서 투덜대면서 오락가락 하는 필립에게 그런 말을 한다면 사태는 더욱 악화될 것 같아 묵묵히 있었다.

"미리 말해 두지만 이대로 죽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어." 필립은 마침내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당신은 괜찮을지 모르지만." 그는 이렇게 말하고 경멸하듯 다니엘을 쳐다보았으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르단이 없으면 당신은 어차피 죽은 거나 마찬가지 아냐? 정말 부질없는 짓을 했어. 당신 아버지가 돈만 내주었으면 우리는 즐겁게 살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다니엘, 당신을 죽게 버려두지는 않을 거야. 나로서는 지참금이 많이 붙은 당신이 유일한 희망이거든. 이곳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당신 아버지는 딸을 살려준 은인에게 감사하겠지?"

차에서 내려 걸어가는 것보다는 그대로 차 안에 남아 있는 편이 남의 눈에 잘 띌 것이라는 다니엘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녀는 할 수 없이 차에서 내려 작열하는 사막 속을 필립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10

이젠 더 이상 걸을 수 없다. 얼마나 걸었는지, 어디까지 왔는지 다니엘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고행을 치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모자를 쓰고 있지 않으니까 차에 앉아 있는 편이 현명한 일이라고 다니엘이 반대했을 때 귀를 기울이지 않던 필립이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발을 헛디뎌 모래 위에 쓰러졌다. 아무래도 발목을 삔 것 같았다. 앞에 가던 필립이 돌아서서 화난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돌아와 난폭하게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제발 처지지 말고 따라와."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사막이 끝없이 계속될 것만 같았다. 필립은 그녀와는 달리 피부도 원래 까만 편이지만 햇볕에도 익숙한 편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으며 머리도 욱신욱신했다. 물은 이미 몇 시간 전에 떨어졌다. 오아시스의 시원한 물 생각이 간절했다. 그리고 영국의 비가 그리웠다. 다니엘의 지친 눈에 필립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환각과 망상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환각 속에서 다니엘은 부드러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자신을 보았다. 조르단이 다가왔다. 그러나 그것은 조르단이 아니고 필립이었다. 성난 얼굴로 난폭하게 그녀를 잡아 흔들며 어서 일어나라고 소리쳤다.

"그럼, 그대로 누워 있어! 당신을 데리고 가지 않는 것이 현명하겠어!"

필립이 가버리고 혼자 남게 되자 다니엘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대로 누워 있으니 정말 기분이 좋았다. 머리가 욱신거리지 않고 피부가 따갑지만 않다면 언제까지고 그대로 누워 있고 싶었다.

다시 환각 속에서 다니엘은 어느 해안에 있었다.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왔다. 갑자기 바람이 모래먼지를 몰고 와 다니엘은 모래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필립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말소리가 들렸다. 그의 격앙된 목소리는 누구에겐가 항의를 하는 듯했다. 분명히 다른 목소리도 들렸다. 낮고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그 경멸하는 듯한 말투에 다니엘은 그만 가슴이 철렁했다.

"다니엘, 다니엘, 내 말이 들리나?"

그녀는 작은 신음 소리를 내면서 등을 돌렸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됐어. 내가 옮기겠어." 같은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햇볕에 무섭게 탔군. 이런 짓을 하다니, 먼데일을 죽여 버리고 싶군!"

누구에 의해 들어 올려진 다니엘은 태양열과는 전혀 다른 무엇인가 따뜻한 것을 느꼈다. 이것은 태양보다 훨씬 더 위험한 거야. 그녀는 자신의 몸을 송두리째 맡기고 싶은 충동을 본능적으로 억제하려 했다.

"걱정할 것 없어, 다니엘." 예의 낮은 목소리였다. "당신 기분은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우선 성으로 빨리 돌아가는 것이 급한 일이야." 그녀는 퉁퉁 부어올라 아픈 눈을 억지로 떠, 자기를 안아서 옮기고 있는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지난번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는 달라 보였다. 다소 여위어 옆얼굴이 더욱 오만하게 보였다. 그런데 떨고 있군.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야.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당신의 피부는 햇볕에 타서 몹시 상했어. 빨리 성으로 돌아가야 해. 도대체 어쩌자고……." 조르단은 말을 더듬었다. 말문이 막힌 모양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가 질문하고 싶어 하는 바를 짐작하고 괴로운 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일 것 같았어요. 서로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속이려고 해봐야 부질없는 짓이다. 조르단도 그녀의 기분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다니엘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젠 내 감정을 감추지 않아도 돼. 지금은 이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다. 조르단이 여기 있고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있다. 이것으로 충분한 거야. 조르단의 표정이 몹시 엄해졌다.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구? 죽음을 택하는 이게?"

"필립이 길을 알고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펑크만 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잘 되었을 거예요."

다니엘은 애써 필립을 보호했다. 그가 어떤 식으로 자기를 버리고 갔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는 나를 버려두고 갔었어. 드디어 다니엘은 사태를 파악하게 되었다.

"먼데일의 거짓말은 알아 줘야 해." 조르단은 다니엘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려고도 하지 않고 비웃듯이 말했다. "그 녀석은 당신을 버리고 간 일을 두고 또 여러 가지 핑계를 댈 거야."

"설마, 그는 나를 버리고 혼자 가려고 하진 않았을 거예요."

다니엘은 이의를 제기하려고 하다가 그의 표정을 보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눈 앞에 헬리콥터가 세워져 있었다. 요란하게 들렸던 파도 소리는 바로 이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소리였다는 것을 다니엘은 비로소 깨달았다. 조르단은 그녀를 헬리콥터 안으로 운반하여 자기 무릎 위에 뉘었다.

"필립은 어떻게 하고요?" 헬리콥터가 이륙하기 시작했다.

"그 녀석은 내 회계감사관과 함께 차를 고칠 거야. 펑크를 때우면 처음 계획대로 쿠웨이트로 가게 될 거야." 조르단의 말투는 무척 신랄했다. "당신을 위해서도 이제 다시는 그 녀석을 우리 집에 드나들지 못하게 할 거야. 불청객은 이젠 질색이야!"

헬리콥터가 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조르단과 파일럿이 나눈 짧은 대화에서 다니엘은 이 헬리콥터가 석유회사 소속이고, 두 사람이 없어진 것을 안 조르단이 곧 출동시킨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집안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르단은 다니엘을 그녀의 방이 아닌 탑에 있는 방으로 옮겼다. 걱정스런 얼굴로 따라온 자나이데에게 아랍어로 빠르게 몇 마디 이르고 나서 그대로 돌려보냈다.

"당신 피부는 햇볕에 타서 몹시 상했어. 파일럿에게 의사를 데려오라고 했어. 그 동안 자나이데가 돌봐줄 거야."

다니엘이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문 쪽으로 가던 조르단은 잠시 발을 멈추고 걱정스러운 듯 돌아다보았다.

"뭐 필요한 게 있어?"

'당신뿐'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다니엘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흘러내린 눈물이, 빨갛게 부어오른 볼을 적셨다.

"다니엘, 나는……." 조르단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 때 문이 활짝 열리면서 캐더린이 나타났다. 최신 유행 파리 패션 차림의 그녀는 엘리칸트했다.

"조르단, 필립은 어디 있어요?" 그녀는 다니엘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물었다.

"필립은 쿠웨이트로 가고 있어. 호위 두 사람을 딸려 보냈지."

캐더린은 불쾌한 표정으로 다니엘을 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조르단의 팔을 잡고 간지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달링,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어요? 불쌍한 필립. 그만 나쁘다고 할 수 없잖아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렇잖아요?"

"내가 그 녀석을 쿠웨이트로 보낸 것은 내 아내와 도망쳤기 때문이 아냐. 아내를 죽도록 사막에 버려두고 혼자 가려 했기 때문이야."

"어머나, 조르단……." 캐더린은 악의에 찬 시선을 다니엘에게 돌렸다. "당신은 사실을 확실히 파악하고 계셔요? 다니엘이 오빠와 함께 가는 것을 거부했는지도 모르잖아요? 위험은 각오했을 거예요……. 아무튼 당신은 부자고, 반대로 필립은……."

그렇지 않아요. 처음에 내가 필립을 따라가려고 했던 것은 조르단에게 자유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그뿐이에요. 그러나 다니엘은 너무나 지쳐 있었다. 피부가 따끔거리고 몸이 천근같이 무거워 잠만 자고 싶었다.

"그 얘기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지." 조르단이 캐더린에게 그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만 있고 싶다는 말이겠지. 저 사람의 캐더린에 대한 애정에는 변함이 없어.

의사가 왕진을 와 친절하게 진찰했다. 피부가 희기 때문에 햇볕에 많이 타기는 했지만 보기보단 상태가 나쁘지 않다고 했다. 차가운 로션을 얼굴과 팔에 바르자 심한 통증이 약간 가셨다. 통증을 가라앉히는 진통제가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의사는 그녀가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수면제도 놓고 갔다. 의사는 떠나기 전에 말했다.

"조르단이 기민하게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탈수 증상을 일으켜 지금쯤 죽었을 겁니다. 정말 운이 좋았어요."

다니엘은 의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처방해 준 쓴 약을 얌전하게 마셨다. 약을 마시자 곧 졸음이 쏟아져 의사가 방을 나가기도 전에 눈이 감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방안은 깜깜했다. 여기가 어디지? 내가 왜 여기에 있지? 다니엘은 한순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옆에 누군가가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필립이 아니니까 놀랄 것 없어." 작은 소리로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 "지금쯤 그는 파리로 가고 있을 거야. 당신이 내가 곁에 있는 걸 바라지 않아도 사람들에 대한 내 체면 때문에 이러지 않을 수 없어. 당신은 내 아내거든……."

"편의상의 아내겠죠!" 다니엘은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했다고는 하지만……."

"지금 그런 얘기는 하지 마. 당신이 완쾌되면 우리의 결혼과 미래에 관한 얘기를 충분히 하기로 하지."

내 곁에 있지 않아도 좋아요. 캐더린에게 가 있어도 상관없어요. 다니엘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것은 진심이 아닌 거짓말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흘 후에야 겨우 침대에서 일어나도 괜찮다는 진단이 내렸다. 햇살이 들지 않는 시간에는 안뜰까지 나가도 된다고 했다. 자나이데가 함께 따라와 주었으나 그녀가 시원한 셔베트를 가지러 간 동안 다니엘은 혼자 남아 있었다. 이때 자갈을 밝고 걸어오는 캐더린의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 다니엘은 돌아다보거나 눈을 떠 쳐다보지 않아도 누구의 발소린지 알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자나이데가 앉아 있던 옆 자리에 캐더린이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잠들지 않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캐더린이 불쑥 말을 걸었다. "언제까지 이런 연극을 계속할 거예요? 조르단이나 나는 당신이 완쾌되면 여기서 떠날 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쩌자고 계속 이렇게 남아 있는 거예요? 그 사람에게, 동정심에서라도 좋으니 제발 이혼만은 말아 달라고 애원할 작정인가요? 그 사람에게는 당신 같은 여자가 필요 없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겠어요?"

다니엘은 반격할 만한 용기가 나지 않았다. 캐더린의 말이 비수처럼 그녀의 가슴 깊이 꽂혔다. 캐더린의 말대로 이곳을 떠날 수 있을 만큼 건강이 회복되었는데도 마지막 결단을 미루고 있는 것은, 조르단에게 작별을 고하기가 두렵기 때문이었다.

"뭘 기다리고 있죠? 조르단이 나가 달라고 말할 때를 기다리는 거예요?"

스커트 자락이 바람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리더니 캐더린은 가버리고 자나이데가 돌아왔다. 그러나 캐더린의 말은 다니엘의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 밤 그녀는 새벽녘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지? 조르단의 사랑이 돌아오길? 그 사람은 내 기분을 알고 있다고 말했어. 그러니까 나를 불쌍하게 여긴단 말이지. 다니엘은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캐더린이 한 말은 사실이야. 내게는 자존심이라는 게 없어.

자나이데가 아침 식사를 가지고 왔을 때 다니엘은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오늘 이곳을 떠나자. 지난번처럼 그런 식으로 떠나지 말고, 그 사람에게 내 결심을 전한 다음 부디 행복하라고 말한 후에 떠나야지. 그렇게 하는 거야. 그녀는 자나이데에게 자기가 만나고 싶어 한다고 조르단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다니엘은 하루 종일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렸다. 그렇지만 자나이데의 안내로 안뜰에 가서 남편을 만난 것은 밤이 되어서였다. 남편은 몹시 지친 얼굴이었다. 가엾기도 하지. 하루 종일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고 쉴 틈도 없었군요. 게다가 나까지 부담이 되고 있으니…….

"당신이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자나이데에게서 들었어." 조르단이 그녀에게 다가오면서 말했다. 그녀는 연못의 가장자리에 앉으면서, 조르단이 서 있지 말고 옆에 앉기를 바랐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차라리 이 비참한 심정을 털어놓고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편이 훨씬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마음을 독하게 먹지 않으면 안 돈다. 그를 위해서 하는 일인 것이다.

"무슨 일이지?"

지금이 기회야. 다니엘은 용기를 내어 미소를 띠면서 말을 꺼냈다.

"우리 결혼에 관한 얘기예요, 조르단. 이젠 둘다 연극을 그만두기로 해요. 우린 실패했어요."

어둠 속에서도 그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턱에 힘이 주어지는 듯했다.

"나도 우리 결혼에 대해서 생각해 봤어." 그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내가 바란 것은……." 조르단은 여기서 더듬거리면서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이윽고 말을 계속했다. "그것은 아무래도 좋아. 당신이 두 사람은 부부로서 한 번도 완전히 결합되지 않았었다고 당신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다면 결혼을 취소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나도 방해하지 않을 거요, 애초부터 당신은 바라지 않았던 결혼이었으니까. 그리고 이혼을 하게 되면 먼데일 집안에서는 좋아하겠지."

다니엘은 눈물 어린 눈으로 조르단을 올려다보았다. 이 사람은 내게 거짓말을 강요하는 건가? 한 번도 완전한 결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씁쓸한 감정이 치밀어 올라 다니엘은 목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고 되풀이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어색한 목소리로,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이곳을 떠남으로써 일을 마무리 짓고 싶다고 그에게 말했다.

저녁 식사 때 그녀는 캐더린의 즐거워하는 얼굴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언짢아 보였고 무엇인가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걸까? 다니엘은 그날 밤 늦게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캐더린은 프랑스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조르단이 당신을 사랑한다고 착각하지 말아요." 캐더린은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나는 꼭 돌아올 거예요."

, 그렇겠죠. 다니엘의 심정은 참담했다. 조르단은 그녀를 생각해서 돌려보내는 거야. 우리의 이혼에 그녀가 말려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야.

다니엘은 방으로 돌아와 서둘러 옷을 벗고, 슬픈 표정으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자나이데에게 물러가도 좋다고 일렀다. 자나이데는 캐더린의 시중드는 일을 좋아할까? 다니엘은 이 아랍 소녀가 좋았다. 만나지 못하게 되면 보고 싶을 것이다. 짐은 이미 꾸려져 있었다. 자나이데가 마지못해 정리한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다니엘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결혼식이 있던 날 밤 이후로 이렇게 잠을 못 잔 밤은 없었다. 아무리 애써도 잘 수 없게 되자 그녀는 침대에서 나와 자나이데가 놓고 간 엷은 비단 가운을 걸쳤다. 탑에 있는 방에 의사가 준 수면제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면제를 먹으면 틀림없이 잠들 수 있을 것이다.

맨발에 닿는 돌계단은 차게 느껴졌다. 양말이라도 신었더라면 좋았을 걸. 하나 이미 늦었다. 문을 열었다. 달빛을 받은 엷은 핑크빛 가운을 통해 다니엘의 날씬한 몸매 뚜렷이 떠올랐다.

"조르단!"

그는 창가에 걸터앉아 있었다. 다니엘은 자신도 모르게 문을 닫고 소파를 쳐다보았다. 캐더린이 이미 이 성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의 요염한 모습이 거기에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또한 조르단도 함께 갔으리라 생각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것이 잠을 못 이룬 이유였다.

조르단이 일어섰다. 옷은 입고 있었지만 활짝 풀어헤친 옷깃 사이로 검은 가슴털이 내다보였다. 다니엘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 된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시선을 돌렸다. 조르단은 그때까지 보고 있던 책을 덮어 옆으로 치우고 방을 가로질러 왔다.

"잠이 오질 않아요." 그녀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수면제를 이 방에 두었어요." 조르단이 바로 곁에 서 있었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 오는 느낌이었다. 다니엘은 무릎에서 힘이 빠져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의자에 쓰러졌다. 그 바람에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사진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다니엘이 놀라 소리를 지르는 것과 동시에 조르단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그녀는 사진틀을 집어들었다. 달빛에 사진을 비쳐 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사진에 못박히고 말았다.

"이젠 알겠지." 조르단은 사진틀을 그녀에게 받아들고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큰아버지가 재혼했을 때 나는 카타르에 있었어. 그래서 큰아버지의 어리석은 행동을 말리려고 영국으로 갔었지. 그런데 말리기는커녕 도리어 나는 한 소녀에게 반해 버린 거야." 조르단의 입이 일그러지면서 깊은 고뇌의 흔적이 엿보였다.

"무슨 얘긴지 알 수 없군요." 다니엘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진은 제 사진이에요. 언젠가 찍은 기억이 나요. 아빠가……."

"내가 부탁해서 찍은 거야. 그때 당신은 열다섯 살, 말하자면 소녀에게 처녀로 성장하고 있는 중이었지. 아무래도 당신에게 너무 빠진 것 같아서 이래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고 자신을 타일렀지만 부질없는 짓이었어. 당신을 잊을 수가 없었어. 그리고 핫산도 굳이 나를 단념시키려고 하지 않았지."

"도대체 무슨……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조르단은 갑자기 그녀의 팔을 잡고 의자에서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다니엘, 얼마나 더 얘기해야 돼? 알고 있으면서. 나는 기다리고 있었어. 당신이 내게 익숙해질 때까지 시간을 주고 싶었어. 내게서 무엇인가를 느끼게 될 때까지 말야. 그런데 먼데일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거야. 그 녀석은 내 심중을 알아채고……."

"하지만 필립이……."

"당신은 먼데일을 사랑하고 있지? 알고 있어. 그래서 얼마나 그 녀석을 죽여 버리고 싶었는지 몰라. 질투란 정말 무섭도록 강렬한 감정이거든, 사랑처럼 말야. 당신을 위해 단념하려고도 무진 애를 썼지. 당신은 열다섯 살이고 나는 어엿한 성인이었는데 당신이 갖고 싶었어. 생각하면 좀 우스운 얘기지. 당신의 성장한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어. 어엿한 여인으로 성장한 당신을 갖고 싶었어. 핫산은 내 심정을 이해하고 격려까지 해주었지. 그분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신과 내가 맺어지는 것이 당신의 장래를 위해서나 카타르의 장래를 위해서난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리고 나는 그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어. 나는 당신을 그토록 사랑했던 거야. 결혼해서 당신을 사랑받고 사랑할 줄 아는 여자로 만들려고 생각했지. 그런데 당신이 나와 결혼할 생각이 없고, 먼데일을 좋아하고 있다는 말을 핫산에게서 들었을 때 나는 정말 죽어 버리고 싶었어. 그런데 당신이 카타르에 갔다는 말을 핫산으로부터 듣고 파리를 떠난 거야. 셰이하가 내 심정을 이해하고 도와주었지.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다니엘. 어리석게도 나는, 당신도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었지. 결국 당신에게서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빼앗는 결과가 되었지만. 하지만 지금도 당신의 선택이 옳다고 생각하진 않아."

"그래요?"

다니엘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취했다. 꿈만 같다.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니, 그것도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계속 사랑하고 있었다니. 정말 이 사람이 조르단일까? 항상 오만하고 건방지기만 하던 그는 어디 가고 지금은 이렇게 가엾을 정도로 여위어 있는 그가 있을까?

"이젠 나를 조롱하는 짓은 그만해 줘. 하긴 당신이 내게 복수하고 싶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캐더린은 필립과 당신이 왜 도망칠 계획을 꾸몄는지도 말해 주었어."

정말 머리가 좋은 남매로군. 없는 일을 있는 일처럼 꾸며서 조르단과 나로 하여금 믿게 한 그들의 거짓말 솜씨는 정말 감탄할 만해.

"캐더린은 당신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한다고 말하던데요." 다니엘은 무심코 그의 마음을 떠보았다. 지금 자신이 정말로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라고 확실한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조르단은 굳은 표정으로 몹시 경멸하는 듯한 몸짓을 했다.

"설마!" 그는 이렇게 한마디 하더니 갑자기 한 발짝 물러섰다. "한데 당신 수면제는 어디에 두었지? 한밤중에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좋지 않아, 다니엘. 이러다가 기분이 고조되어 엉뚱한 일을 저지르면 곤란하거든. 그런 짓을 한 후엔 대게 아침에 후회를 하지. 나는 늑대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성인군자도 아니거든."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 거예요?" 다니엘은 작은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물었다.

"물론 사랑하지!" 조르단은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답지 않게 고함쳤다. ", 이젠 나가 줘. 간신히 한 결심을 잊어버리고 내가 당신을 침대로 데리고 가기 전에 빨리 나가 줘!"

조르단은 다니엘에게 등을 돌렸다. 그러나 그녀는 나가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가 창가에 놓아 두 수면제를 집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상대가 몸을 긴장시키고 그녀가 나가 주기를 기다리는 심정을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다니엘!" 그것은 명령이라기보다는 신음 소리에 가까웠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마지막 경고야. 제발 나가 줘. 그러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그래도 다니엘이 움직이려고 하지 않자 조르단은 욕설을 퍼부으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정열이 폭발하는 듯한 그의 목소리는 그녀의 욕망에 불을 당겼다. "그럼 상관없단 말이지." 조르단은 이렇게 말하면서 다니엘의 몸에 팔을 감았다. "하지만 무엇 때문이지? 내게 벌을 주기 위해서, 아니면 마지막으로 달콤한 추억을 남겨 주기 위해서?"

조르단은 그녀를 안아올려 소파로 옮겨갔다.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키스해 주지 않아요?" 그녀는 일부러 어리광을 부리듯 말했다.

양볼은 빨갛게 상기되었고 긴 속눈썹 아래의 두 눈은 불타고 있었다.

"다니엘!"

그의 애원하는 듯한 쉰 목소리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다니엘은 그의 괴로움을 마치 자기 것인 양 받아들였다. 그녀는 그를 끌어안았다.

"나를 사랑해 줘요, 조르단.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나를 사랑해 줘요."

조르단의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격렬하게 덮었고, 그녀는 정열의 불꽃에 자신을 맡겼다.

잠시 후 정열의 폭풍이 가라앉자 조르단은 다니엘의 곁에 누워 조용히 말했다.

"귀여운 악마. 나를 그토록 괴롭히고 당신은 꽤나 좋아했겠지. 내 마음속을 털어놓게 하다니……."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어요." 다니엘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캐더린을 사랑하고 있는 줄 알았어요. 캐더린도 그렇게 말했어요. 언젠가 당신은 내 심정을 알고 있다고 말했었죠? 난 그 말이 나에 대한 동정에서 하는 말인 줄 알았어요."

"나는 당신이 먼데일을 사랑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에서 그런 말을 한 거야.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었거든." 조르단은 얼굴을 찌푸렸다.

"간교한 남매한테 우리가 완전히 속았군!"

"하지만 우린 서로 사랑하고 있었어요." 다니엘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그렇죠, 조르단?"

"그렇죠, 조르단이 뭐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만……그렇죠, 조르단. 헤어지기 전에 진실을 알게 돼서 정말 기뻐요. 내가 만약 수면제를 가지러 이 방에 오지 않았더라면 우린 결코 서로가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그대로 헤어졌을 거예요."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지 않았을지도 몰라. 막판에 가서 내가 과연 당신을 보낼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거든."

"아빠는 틀림없이 기뻐하실 거예요. 아빠는 필립이 당신의 과거를 과장해서 헐뜯었다고 곧이듣지 말라고 말씀하셨어요."

"글세……. 완전 거짓말이라고는 할 수 없지." 조르단은 갑자기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한 번도 다른 여자를 사랑한 적은 없어. 다만 당신 모습을 지워 보려고 애쓴 적은 있지. 하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어."

다니엘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과거는 과야. 내가 어렸을 때 이 사람은 어른이었지.

"밤새도록 얘기만 할 거예요?" 다니엘은 일부러 지겨운 듯한 말투로 물었다.

"? 달리 하고 싶은 일이라도 있어?" 조르단의 눈빛이 이상해졌고 다니엘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열에 뜬 사람처럼 쉬어 있었다. "알라 신께 감사해야겠어, 다니엘. 신은 내가 가장 받고 싶어 하는 선물을 주셨거든. 당신은 내 보배야. 평생 내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할 거야."

다니엘의 대답은 조르단의 달콤하고 격렬한 키스로 지워졌고, 그녀는 정열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