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루실은 무슨 옷을 입을까 하고 생각했으나, 아직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십 분 후면 이 성의 여주인을 만나게 될 것이다. 시간이 가까워 오자 장래의 시어머니와 대면할 생각을 하니 몹시 마음이 불안했다.
자기 어머니 곁으로 돌아오자 털렉은 금방, 어린 시절부터 주위의 여러 사람에게서 귀여움과 떠받들림을 받아왔던 그 시절의 환경을 느끼게 하는 듯한 거만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었다. 루실은 이러한 털렉의 오만한 권위를 꺾어 버리고 싶었으나 어떻게 하면 좋을는지 몰라 그런 대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루실은 그것을 생각하여 여러 날 잠을 잘 이룰 수 없었다.
루실은 내키지 않는 속에서도 금박 칠을 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불안에 가득찬 얼굴을 어느 정도 밝게 보여주려고 짙은 핑크색 드레스를 입었다. 곧게 드리워졌던 금발의 고수머리는 말아서 동그랗게 틀어 올렸고, 가느다란 목은 더욱 우아하게 돋보였다. 짙은 잿빛 눈은 괴로움에 지쳐 있었으나, 더욱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초조하게 손을 맞잡아 틀어쥐어 보고, 느슨히 놓아보기도 할 때마다, 다이아몬드의 노오란 광채가 번득여 샤니를 비롯하여 약혼을 의심스러워하던 사람들에게 그것이 진짜였다는 사실을 명백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루실은 더욱 떨리기 시작했다. 루실을 데리러 온 것이다. 동요하는 마음에 대답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털렉이 방으로 들어왔다. 루실은 막대기 모양 우뚝 선 체로, 털렉이 가까이 와서 루실의 긴장된 몸을 팔에 안아도 공포심에 굳어져 그 포옹을 저항할 힘조차 없었다.
털렉은 부드럽게 루실을 안더니 입술을 대면서 기분을 풀어주려고 속삭였다. 눈에, 볼 위에, 귓불에 닿은 털렉의 입술이 마비되어 있던 루실의 감각을 점점 돋우어 일으켜 나중에는 루실 스스로 입술을 내밀어 살짝 스치듯이 키스를 했다.
"내 귀여운 어린 양!"
털렉은 은근하게 말했다.
"어머님은 연세가 많으셔. 그러나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괴물은 아니야!"
털렉은 루실의 섬세한 감정의 균형이 무너지고 곤혹한 신경을 자극시키기 전에 조용히 몸을 떼었다. 털렉의 위안으로 루실의 공포심은 깨끗이 사라지고, 완전히 믿고 의지하는 어린애처럼 털렉의 뒤를 따라서 성 안 부인 방 쪽을 향해 갔다.
루실은 평온하고 밝은 기분이었다. 불안은 사라지고 마비되어 있었던 신경은 생생하게 되살아나서, 부끄러움도 그 자리에서 느끼게 된 기쁨 속에 흘러들어가고 말았다.
두 사람이 털렉의 어머니 방에 들어갔을 때, 루실의 몸에는 아직도 달아오르던 기운이 남아 있었다. 그 방 안은 해묵은 구리로 만든 램프와 보석을 박은 천이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에서 나오는 것 같은 환상적인 방 안이었다. 풀피리와 같은 가느다란 음악소리가 흘러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더욱 충만하게 해주었다.
기품이 높은 검은 눈동자의 여인이 명주 방석을 높이 쌓아 올린 으리으리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야말로 아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셀라자드였던 것이다.
그녀의 손을 꼭 잡고 털렉은 엄숙한 태도로 소개하였다.
"어머님, 여기 있는 사람이 저의 약혼녀, 루실입니다. 저의 꽃밭에 만발한 꽃 중 가장 아름다운 꽃송이, 저의 머리 관에 붙은 가장 찬란한 보석입니다."
루실이 놀라자, 털렉은 손가락으로 꼬집고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면서 감정을 보이지 말라고 경계했다. 그러나 루실은 그와 정반대의 사실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털렉의 음성이 이처럼 상냥하게 들린 것도, 그 말 속에 그처럼 진심이 깃든 것도 처음이었다. 그리하여 무엇보다도 어머니와 아들의 사이에는 어떤 형식의 위선도 깃들 수 없을 정도의 신뢰감이 있었던 것이다.
루실은 잠시 동안 털렉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으면서 그의 어머니 얼굴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얼굴은 처음 보았을 때의 인상보다도 훨씬 나이가 들어 보였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흐뭇하게 안심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웃음으로 눈 주위와 입가에 주름살이 잡히니 상당히 나이든 여인의 얼굴이 되었다.
"행운을 받고 온 사람이군!"
음성은 감격으로 떨리었다.
"사랑과 광명의 샘이지! 내 아들은 아가씨의 마음을 자기 것으로 정한 것이니, 앞으로 결코 고독하지 않을 거야!"
루실의 눈에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뜨거운 눈물 방울이 흘러내렸다.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생각할 때, 루실은 눈물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눈물은 흘러 볼을 적셔 내리고, 치밀어 오르는 감격에 입술마저 떨고 있었다.
털렉은 안도감에서 흘러나오는 미소를 얼굴 가득히 띠며, 재빨리 손수건으로 루실의 눈물을 닦아 주면서 그 감격의 도가니 속을 간신히 모면시키고, 당황해 하는 어머니에게 안심시키는 말을 했다.
"마음이 꽃같이 아름다운 아가씨기 때문에 어머님의 찬양을 받자 감격해진 것입니다, 어머님. 울지 않고는 견디어 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감격할 때에는 항상 하는 버릇입니다. 결혼식 날에 신부를 울게 하면 어떻게 할까 하고, 그게 걱정입니다."
이윽고 눈물도 그치고 루시의 볼이 달아오르자 어머니의 표정도 금세 밝아졌다.
"나의 직감이 바로 들어맞았구나!"
어머니는 끝없이 기뻐했다.
"보물을 정성껏 지켜 하루빨리 그 명주 같은 부드러운 마음을 따뜻이 감싸 주도록 해라!"
루실은 자기가 그 뒤의 반시간을 용케도 무사히 보내었다고 몹시 대견해 했다.
그의 어머니는 결혼을 빨리하라고 몇 번 말했으나 털렉은 결혼을 급히 서두를 것은 없다고 계속 주장했다.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닌 가냘픈 노부인이 아무리 우겨도, 같은 의지로 굳게 결심한 아들은 그 의견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끝내 어머니는 조급한 마음을 참지 못해 털렉에게 방에서 나가라고 명령을 했다.
"루실에게 중대한 얘기가 있다."
털렉이 항의하려 들자 어머니는 손을 흔들어 강압적으로 제지하였다.
"남자들은 대체로 자기의 결혼을 충실하게 생각하려 들지 않는다. 그날까지 해두어야 할 일이 그렇게 많은데도 허술히 생각하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기 쉬우니까."
루실은 멋쩍어하면서도 털렉의 반항적인 표정에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성다운 일류 배우가 반항하는 아들로 탈바꿈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멋쩍게 물러가는 털렉의 입가에는 반항하는 빛이 돌았고, 방 안을 나갈 때에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를 어머니에게 퍼부었던 것이다.
털렉이 방을 나가 문을 닫으니, 셀라자드는 금방 소리 높이 웃었다. 한순간 얼떨떨해진 루실도 함께 웃고 말았다. 어처구니없다는 기분이 서로 일치되었던 것이다. 털렉의 위엄은 좌절되어 버리고 말았다. 털렉을 아직도 어린애로 보고 어루만지는 늙은 어머니의 심정을 같은 여자로서 루실은 느낄 수가 있었다.
"참으로 대단하시네요, 털렉을 꼼짝못하게 하시다니!"
루실은 흥분해 하면서 말했다. 감격의 눈물이 볼을 적셨다.
"애정이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거예요."
셀라자드는 눈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저애는 나의 명령에는 복종해요. 그것은 서로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저애는 언제나 총애를 받아왔거든."
그녀는 감개무량한 듯이 엄숙히 말했다.
"저애는 아무리 사랑해 줘도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나 봐요. 그런 것보다도 늘 관심을 그애한테 쏟고 있지요, 저애의 아버지나 나나 저애를 귀중히 생각한 나머지…"
머뭇거리면저 얘기를 그것으로 마치더니 자문자답하듯 한숨지었다.
"그럴 수가 있을까요? 아무리 사랑을 받고 귀여움을 받더라도, 자식이 어머니의 애정을 독차지하지 못한다고 해서 자기가 버려진 자식으로 생각하다니…"
셀라자드의 지그시 감은 눈에 한 줄기 눈물이 흐르자, 루실은 의자로 달려가서 무릎을 꿇고 위로했다.
"자식을 위하는 어버이의 사랑과 참된 마음처럼 귀중한 건 이 세상엔 다시 없는 것이에요. 하나로 화합될 가정의 행복이란 참으로 귀중한 것이죠. 그것을 잃어버린 자만이 거기에 있는 보호와 가장 큰 행복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심을 나타낸 표정으로 걱정하고 있는 얼굴을 눈앞에 내려다본 셀라자드의 눈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져 갔다.
가냘픈 손이 루실의 머리 위에 놓여지며 조용히 금발을 쓰다듬어 주었다.
"당신은 그 어떤 모진 어려움에도 꿋꿋하게 맞서서 살아갈 수 있는 넓은 아량을 갖고 있군요. 마치 오랜 세월, 이 마음을 아프게 해온 공포를 해소시켜 주기 위해서 신이 내게 당신을 보내준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위안을 베풀고, 아들에게 당신 같은 훌륭한 사람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루실은 일어섰다. 위로해 드리고 싶은 마음 때문에 거짓말을 한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이대로 있어서 두 사람 사이의 정을 깊게 하기보다는 얼른 그 자리를 뜨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피로하신 것 같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다시 곧 찾아뵙겠습니다. 용서해 주시겠죠?"
"오늘 밤에 와줘요!"
여태까지 독재자였던 그녀의 입에서 요청하는 말이 나왔다.
"내가 털렉을 너무 응석받이로 키워서, 저애는 제가 가는 데마다 가식적인 행동을 하게 되어 버렸지요. 저애가 있을 곳은 바로 여기라우. 이곳 사람들은 저애의 능력과 지도를 기다리고 있어요. 저애가 장가를 들게 되면 이제 그들과 나에게는 어떤 변명도 통할 수 없어요!"
그 말만 하고는 그녀는 뒤에 받친 쿠션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입가에는 희미하게 스쳐가는 미소를 남긴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조심조심 발끝으로 걸어 방을 나오려던 루실은 중얼거리듯 하는 물음에 흠칫 멈춰섰다.
"진심으로 그애를 사랑하우?"
아무 준비도 없이 루실의 입술이 반사적으로 열렸다.
"그렇습니다, 마님. 그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그날 저녁때부터 소문을 듣고 오아시스로 몰려온 사막인들의 축하무도회는 밤이 깊어가도록 끝날 줄을 몰랐다. 성 안에 틀어박혀서 바깥에서 대체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는 샤니의 신경은 끊임없이 울려오고 있는 큰 북소리와 외침소리, 뛰어 돌아다니는 발소리 같은 것들로 날카롭게 곤두서서 루실에게 화풀이를 했다.
"저 소란스런 축제는 대체 뭐지?"
샤니는 루실에게 세세하게 묻고는 불평을 털어놓았다.
"남자가 축하연을 베푸는 동안 여자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유치한 관습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외출 못하는 걸 털렉은 알지 못할 거야! 정말 밸이 꼬이는군. 이제부터 이중으로 위장하도록 강요될는지도 몰라!"
"귀찮군요."
루실은 큰 북을 불로 덥혀서 가죽을 펴고 있는 사내들을 보다 말고 눈을 돌리며 동의했다.
"이곳 사람들의 풍습을 꼭 알고 싶어요."
"대체 뭣을 축하하고 있는 거야.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것뿐이야."
"아슈라의 결혼 축하로 짐작돼요. 여기서 시중들고 있는 한 처녀애 말예요."
루실은 좀 똑똑히 보고 싶어서 문틈으로 엿보았으나 단념하고 돌아서면서 설명했다.
"아슈라는 내일 자기 아버지와 같은 종족의 남자와 결혼식을 올린대요."
그렇게 말하면서 루실은 미간을 좁혔다.
"나와 이야기했을 때에는 그렇게 결혼식이 임박하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는데."
"그래? 어째서 결혼식이 임박했는 걸 알 수 있지?"
"그들이 축하연을 베풀기 때문이지요."
루실은 계속했다.
"축하는 결혼식 전날 밤에 하게 되어 있거든요."
이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해방되는구나, 하고 생각한 샤니는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
심부름을 온 처녀애가 루실에게 곧장 다가왔다. 루실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은쟁반에서 메모를 집어 들었다.
"마님께서 결혼식용의 드레스 천을 와서 봐줬으면 좋겠다고 하셔요."
루실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샤니에게 이야기했다.
"거절하면 실례가 되겠죠?"
"거절하고 싶지는 않아."
샤니는 얼굴을 빛내었다.
"오후에도 이 방 안에 틀어박혀 있기보다는 그게 훨씬 낫지."
두 사람은 처녀를 따라서 마님의 방으로 갔다. 방 안에는 많은 옷감들이 쌓여 있었고, 곁에는 재봉사들이 천이 정해지면 즉시 일에 착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듯 가위를 들고 기다리며 서 있었다.
샤니의 눈이 반짝 빛났다. 파리나 런던 같은 일류 양장점에도 많이 드나들어 보았지만, 여기에 있는 옷감들은 보통 값으로는 도저히 엄두도 낼 수 없는 물품들뿐이었다.
샤니는 옷감만을 걸쳐 손색이 없을 정도로 옷자락에는 금실로 자수가 놓여진 푸른색의 비단천을 얼른 집어 들었다.
"무척 호화롭군요!"
샤니는 부드러운 얇은 청색 옷감을 만져 보면서 환성을 질렀다.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는 견본책을 샤니가 들여다보기 시작하자, 루실이 속삭였다.
"괜찮을까? 이 천은 상당히 비싼 것 같고 아무도 우리 마음대로 하라고는 하지 않았잖아요."
"괜찮아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테니까."
루실의 뒤에서 온화한 음성이 들렸다.
"그러나 내가 아가씨를 위해서 골라낸 옷감은 여기엔 내놓지 않았다우."
셀라자드가 손을 들고 지시하니, 시중드는 처녀가 드레스 한 벌치의 옷감을 조심스럽게 안고 나왔다.
"우리 고장의 누에에서 나온 명주실로 짠 거라우."
놀란 눈으로 보는 루실에게 그 옷감을 들어 보이면서 셀라자드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 지방에서 최고 솜씨를 가진 수예가가 자수를 놓은 것이오. 자, 어떻게 얘길할까. 어때, 맘에 드나요?"
루실은 목쉰 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그러나 그녀의 당황하는 표정에 셀라자드는 뜻밖에 빙긋 웃었다.
"잘됐군요, 맘에 꼭 든다니. 아름다운 젊은 왕녀에게 안성맞춤인 옷감을 가져오도록 지시했는데, 뜻대로 그것을 구할 수 있었어요. 어때요, 루실?"
얇은 명주 옷감은 가까이에서 잘 볼 수 있도록 루실의 팔에 걸쳐졌다.
아름다운 은실로 자수가 놓여 있었다.
두 마리의 비둘기가 사이좋게 마주보고 있고, 나뭇잎이, 초승달이, 별이 애정을 깃들여 생생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상상력이 탁월한 기술로 짜놓은 작품의 슬기로운 풍취는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잠시 동안 마음을 유쾌하게 가지며 견본 책과 씨름했다. 이리저리 변화를 주어가며 모양을 정하고 나자, 또다시 다음의 새로운 모양이 발견되어 자꾸만 생각이 달라져 가고 있었다.
샤니가 선택한 재단은 간단했다. 풍부한 색깔의 옷감에는 될 수 있는 한 심플한 디자인이 좋다. 그러나 루실이 선택한 것은 얼마든지 모양을 살려 낼 수가 있었다.
루실이 도저히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결국 셀라자드가 지혜를 빌려 주었다.
"이럴 바엔 재단사에게 디자인을 맡기면 어떨까? 가장 잘 맞는 모양을 생각해 줄 거예요. 그리고 또, 어떤 훌륭한 작품이 될는지, 기대하는 것도 즐겁거든."
루실은 망설였다. 마님은 어떠한 디자인도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고, 이 친절한 제안은 어찌보면 하나의 명령인 것 같았다. 루실은 시키는 대로 해야 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좋겠어요. 마님의 의향이 그러시다면요."
"그 편이 좋겠지."
나이 많은 독재 영주는 안도의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이젠 아가씨는 내 딸과 같으니까, 그런 존대하는 격식은 그만두고 나를 어머니라고 불러요!"
루실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마님은 진심으로 약혼을 확고히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루실은 강철 같은 거미줄에 감겨서 꼼짝할 수 없을 것이다.
갑자기 샤니가 구원을 뻗쳐 주었다.
"저도 어색하지 않게 어머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지요?"
샤니는 약간 부끄러워하면서 물었다.
"아드님과는 여태까지 친구 이상의 관계였고, 앞으로도 환경이 허락하는 한 가까워질 것이니까요."
샤니는 불쾌한 표정으로 탐색하듯이 루실을 보고는 냉정한 웃음을 띤 얼굴로 털렉이 거짓 약혼을 했다는 의혹을 깊게 하려는 듯이 못 박았다.
"우리 나라에서는 약혼했다고 해서 그게 굳은 약속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실제로 서양에서는 두 번, 세 번씩 혼약 취소도 하면서 결혼을 하는 일이 드물지 않게 되어 있으니까요."
샤니는 털렉의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 어머니가 이해해 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말이 끝났을 때, 그게 실패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님은 몸을 똑바로 일으켜 위엄을 보이면서 샤니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냈던 것이다. 샤니는 태어난 후 처음으로 몸이 굳어지는 느낌을 맛보았다.
"당신은 나의 아들이 난봉꾼이라도 된단 말인가요? 아니면 도덕이 부패한 세계에 몸을 두고 있는 동안에 그애가 자기의 입장에 대한 책임감을 잊어버렸다는 말인가요?"
섣불리 답변을 할 수도 없이 냉랭한 공기가 흘렀다.
"내 생각으론 그렇지 않아요, 샤니!"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말투엔 냉정한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명성이란 것은 근본이 없는 데서도 우연히 생겨날 수 있지만, 인간 본래의 고결성은 혈통에서 오는 거예요. 내 아들이 병든 사회에 물들어 비도덕적이라는 건 용서할 수 없어요!"
마님은 온몸에 분노를 나타내며 결연히 문 쪽으로 갔다.
난처해진 표정이 되어 마님과 그 시녀의 모습이 방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있는 샤니에게 위안의 말조차 할 여유도 없이 이때만은 루실도 은연중 샤니를 힐난했었다.
"샤니 언니는 그게 뭐예요…"
루실은 샤니의 감수성의 무딤과 현명치 못한 것을 딱한 얼굴로 책하며,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무슨 대책이 없을까?"
샤니는 자기의 우둔한 행동을 깨달으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너까지 합세해서 바보 같은 연극을 하니까 참을 수가 있어야지! 피와 땀과 섹스로써 흘러넘치는 현실적인 영화를 찍으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시대에 뒤떨어진 '사막의 노래'에 조역을 맡은 것 같은 기분이란 말야!"
샤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크게 웃었지만, 마님의 말과 태도가 여태까지 무관심한 갑옷 속에 감춰 두었던 아픈 곳을 꾹 찔렀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난 가서 쉴 테야!"
샤니는 발 뒤꿈치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내일도 털렉이나 아트가 나한테 뭔가 시켜주지 않는다면 아마 미쳐 버릴 것 같애!"
아무도 없는 방에서 루실은 천천히 걸으면서 이것저것 생각에 잠겨 가고 있었다.
사람의 그림자가 몰래 들어와서 루실의 날씬한 몸을 감싸는 것도, 고요한 방 안에 소란을 일으킨 것도 몰랐다. 미친 듯이 뛰어 돌아다니는 구두 뒷굽 소리와 라이플총을 난발하는 소리 그리고 하늘을 불태우는 모닥불을 둘러싼 토민들의 고함소리.
루실은 쿠션을 등에 대고 기대었다. 두 손을 대리석에 대자 그것이 루실의 달아오른 몸을 어느 정도 식혀 주었다. 황혼 속에서 꼼짝할 수 없게 된 루실은 마치 돌베개에 부각된 석상 같았다. 한숨을 쉬고 있는데, 남자가 발소리를 죽이고 가까이 왔다. 눈은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루실은 약간 몸을 움직였다. 숨어들어온 남자의 그림자가 루실의 그림자에 묻혔다.
"어머니하구 무슨 얘기를 했지?"
남자의 목쉰 소리가 어둠 속을 뚫고 들려왔다.
루실은 놀라서 숨을 삼키고 몸을 돌렸으나, 곧 난폭하게 붙잡혔다.
"털렉!"
말이 막혔다. 루실은 놀라서 털렉을 지켜보고 이 야만적인 행위의 이유를 그 표정 속에서 찾아내려 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싼 황혼이 그것을 방해하였다. 이윽고 루실은 참담한 기분으로 털렉의 어머니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루실 자신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으나, 그래도 책임의 한 부분을 느꼈다.
"형언할 수 없이 나빴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털렉. 충동에 못 이겨서 말해 버리고는 결국 후회하고 있는 거예요."
털렉의 손에 힘이 주어졌다.
"그럼, 말하지 않을 걸 그랬다고 생각하나?"
"그럼요?"
텔렉의 말을 진심으로 인정했다.
"자기 자신에게 심한 분노를 느끼고 있어요. 오해하게 했기 때문이에요."
털렉은 잠시 루실의 난처해하는 얼굴에 시선을 집중했으나, 그래도 꼼짝 않고 있었다. 가면 같은 표정 속에서 격분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히 느껴졌다.
루실을 붙잡고 있는 손이 견딜 수 없도록 단호했다. 루실은 곧 비명을 지르고 싶었으나 무엇인가가 그것을 억눌렀다.
털렉의 손이 늦추어졌다. 긴장도 풀리고 털렉은 루실에게서 한 발짝 물러섰다.
"미안하지만…"
털렉의 음성이 희미한 어둠 속을 파고들었다.
"이젠, 엎질러진 물이야. 당신이 나의 아내가 되겠다고 한 것을 어머니에게서 들었을 때 나는 놀랐지만, 그 이야기는 벌써 이 지방 사람들한테까지 다 퍼졌어. 밖의 소란을 당신도 들었겠지만, 결혼 축제는 벌서 절정에까지 올라가려 하고 있다구."
불꽃이 밤하늘에 터져 올랐고, 섬광이 달리자, 루실의 얼굴에는 공포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럼 이것이 우리들의 결혼 축제란 말인가요?"
루실은 목쉰 소리를 내었다. 점점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얼른 부정했다.
"이것은 아슈라의 결혼 축제가 아닌가요? 모든 준비가 되어서 그녀의 아버지가…"
털렉은 조용히 말했다.
"내일이 되면 우리는 부부로서 모든 사람 앞에 나가야 돼. 어머니와 당신 쪽 보증인 사이에 이미 식은 거행되고 있어. 그러나 관습에 따라서 당신이 참석할 필요는 없는 거야. 나는 혼자서 돌아가 친구들과 밤을 새우고, 당신은 그 동안에 내일의 준비를 하게 되어 있어."
이제야 상세히 알게 되었다. 셀라자드가 값비싼 옷감을 보여주고, 재봉사들이 법석대고 있었던 사실도 루실의 결혼 의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루실은 사건의 중대성을 새삼 느껴서 겨우 항의하는 소리로 말했다.
"잘못된 장난이었어요!"
소리가 떨렸다.
"누구나 끌려가는 당신의 매력에 내가 익숙해진 것을 책망하고 있겠죠?"
털렉은 진심으로 말하였다.
"사랑과 결혼에 대해서는 농담을 하는 게 아니야."
털렉의 음성은 엄숙해졌다.
"당신은 말하지 않았어야 옳았으리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일로 어머니의 기분을 돌이킬 수는 없어."
루실은 당황했다. 샤니의 실언을 사과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무슨 큰 이유는 되지 않았을 텐데.
불현듯 그러한 오해를 일으킨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득한 먼 과거에서 메아리쳐 오듯이 루실의 귀에 셀라자드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가씨는 진심으로 내 아들을 사랑하우?"
그러자 스스로 오해 속으로 끌어간 자신의 말이 회상되었다.
"그렇습니다. 그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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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니는 결혼이라느니, 오해라느니, 누군가 억지들 쓴다느니 하며, 이유를 알 수 없는 것들을 불평하듯 중얼대면서 루실에게 흔들려 깨워지자 기분 나빠했다.
"샤니 언니 일어나요, 좀 도와 줘요! 부탁을 하는데 어째서 눈을 뜨지 않는 거예요!"
샤니는 너무나 졸려서 좀처럼 일어나지를 못했다. 겨우 몸을 일으키더니 화를 냈다.
"대체 뭣이 어쨌단 거야!"
샤니는 눈에 눈물을 담고 입술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루실을 보더니 쏘아붙이던 말을 딱 그쳤다.
"무슨 일이 있었어, 루실? 털렉이 어떻게 했어?"
루실은 샤니를 깨우기에 지쳐 버린 듯이 침대에 훌쩍 몸을 던졌다
"아니, 그는 아무 짓도 안했지만 난 어쩜 좋을지 모르겠어요. 도와 줘요. 어쩔 수가 없게 되어가고 있어요."
루실은 눈물을 삼켰다.
"언니에게도 약간의 책임은 있어요."
샤니의 눈이 불타올랐다. 루실은 이성을 잃고 있다. 알 수 없는 일들이 몇 가지 있으나, 지금에 와서는 그 원인을 추궁 당할는지도 모른다.
샤니는 적당히 관심을 갖는 듯한 표정을 나타내면서 침대 커버를 가볍게 두드렸다.
"자, 기분 가라앉히고, 여기 와 앉아서 어서 모든 얘길 해봐."
늘 야심에 불타서 자기에게 해당되는 일 이외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샤니가 이렇게 부드러운 말을 해준 적은 한번도 없었다.
루실은 지나 버린 과거는 잊어버리고 부끄러워하면서 자신이 처한 괴로운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샤니는 루실의 음성에서 털렉의 이름이 불려질 때마다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부드러워졌고, 털렉이 한 거짓말에 대한 대목을 이야기할 때에는 마음의 상처를 느끼며, 몸을 떨면서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주의 깊게 들었다.
루실은 피로했지만 샤니에게 모든 비밀을 다 털어놓고 나니 기분이 좀 후련했다. 마음의 상처를 아파하고 낭패함을 느꼈지만 자기 자신이 깨닫지 못했었던 처지를 이야기함으로써 사실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털렉이 싫어졌군. 줄곧 괴로움에 싸여 왔었니? 그래서 아침까지는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가고 싶다는 거지?"
샤니는 얼른 타인에 관한 일처럼 천천히 말했다.
루실은 몸을 뒤로 젖혔다.
"그래요."
깊은 애정에 끌려서 머뭇거리며 말했다.
"달아나지 않는다면 어떤 변을 당할는지 알 수 없어요. 무슨 대책을 강구해야 해요. 얼른 서둘러서 해야 돼요!"
샤니는 돌아서서 승리감에 빛나는 반짝이는 눈을 감추었다. 샤니가 얼굴을 돌린 채로 헐렁한 원피스의 네글리제로 몸을 감싸기 시작했기에, 루실은 샤니가 자신의 마음을 교묘하게 감추면서 떠벌리는 속셈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러나 너 혼자서는 달아날 수가 없어. 그리고 털렉은 너처럼 마음 약한 인간을 이용하려고 한 사실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지!"
샤니는 갑자기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얼른 말을 이어서 난처한 입장을 메꾸어 갔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묻어 놓은 지뢰를 밟고 터져 나가는 꼬락서니를 지켜보는 게 어때? 교활하게 독신을 내세우는 털렉이 자기의 자유로운 처지를 지키기 위한 방패를 만들려고 꾀를 부리고 있는 거야. 그런 꾀에 넘어가서 그와 결혼한다면 함정에 빠져 버릴 수밖에! 너의 그 결심을 축하해, 루실. 나의 입장이라도 이보다 더 큰 재난은 없으리라고 생각되는걸!"
"그러나 나는 그와 결혼하고픈 생각이란 손톱만큼도 없어요!"
루실이 말했다.
"물론 있을 리가 없지."
샤니는 가죽 허리띠를 꽉 조여 매면서 루실의 의견에 찬성해 주었다.
"그러나 네가 없어진다면 어머니한테 구차한 설명을 해야 하고, 거만한 어머니를 납득시키려면 그가 곤욕을 치를 건 뻔해."
확실히 그는 그런 일이 생긴다면 명예스럽지 못하게 여길 것이라고 생각하니 루실 자신도 불쾌한 마음이 들었다.
호라스 성의 자손은 누구나 어떤 거짓도 단번에 꿰뚫어볼 수 있는 날카로운 눈을 갖고 있는 것이다. 엉망으로 부서진 늙은 어머니의 희망을 회복시켜야 할 그 아들의 처지를 상상하니 동정심이 솟았다. 아예, 늙은 그 어머니를 위해서 결혼해 버리고도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거기서 닥쳐올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견디어 낼 수 있겠느냐고 바꾸어 생각하고 있었다.
털렉의 수많은 여자와의 정사관계를 덮어 숨겨 주기 위해서 결혼해야 한다는 사실은 도저히 수긍이 가지 않았다. 설사 털렉과 열렬한 사랑에 빠져 있더라도 말이다.
루실의 생각은 그것으로 일단 중단되었다. 루실이 그 시간에 스스로 인정한 내용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천천히 두려움마저 느껴가면서 마음 깊이 파고드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신중을 다해 온 울타리 속에 감춰 두었던 애정의 파도가 넘쳐 흘러나오자 구원과 당황을 동시에 느끼게 된 루실은, 털렉을 진정 사랑해 왔던 것만은 사실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털렉의 곁을 도망쳐 가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루실이 처음 깨닫게 되는 사랑의 출발이며 종말이었다. 루실은 언제까지나 털렉을 사랑하리라. 그녀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게 된 이 순간처럼 털렉에게 사랑을 느낀 때는 없었다.
"도망치기 좋은 기회는 축하연이 한창 베풀어지고 있을 때야."
샤니는 방 안을 왔다갔다하면서 의기양양하게 방법을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차를 세워 놓은 곳까지만 간다면 가장 가까운 오아시스까진 쉽게 나올 수 있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루실은 침을 삼켰다. 루실은 운전을 할 수 있었다. 길은 달빛으로 환히 보였다. 그러나 밤의 장막이 내린 사막에는 또 다른 공포가 있다는 사실을 루실은 몰랐다.
"그럼 문제없어. 그렇다면, 빨리 행동을 취하는 게 좋아."
샤니는 문 쪽으로 갔다.
"왜 머뭇거리지?"
루실이 머뭇거리니까, 샤니는 날카롭게 질문을 던졌다.
루실은 크게 숨을 삼키며 말했다.
"아트와도 의논해야잖겠어요? 더 좋은 의견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와 함께 행동을 취해 줄지도 모른다구요. 난, 혼자서 사막 가운데로 나가는 게 어쩐지 무서워요."
샤니는 애써 평정한 마음을 가지려고 했으나, 침착해진 낮은 음성에 지루한 듯이 마룻바닥을 쿵쿵 울리는 발소리가 반대의사를 나타내고 있었다.
"안 돼, 그건 망상에 불과해. 남자들이란 모두 한통속이라 털렉에게 알리겠다고 말할 것은 뻔한 사실이야. 나라면…"
샤니는 날카로운 눈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결혼해서 증국식으로 발을 묶여야 하는 남자와 함께 사는 것보다 얼른 조용한 사막으로 도망치겠어. 그렇게 하라니까. 결혼 얘길 끄집어 낸 건 그 사람이잖아."
루실이 입을 열려고 하자 그것을 제지하며 계속했다.
"이 결혼은 그가 앞에서 제멋대로 행동하기 위한 방패막이인 거야. 일시적으로, 또 위장으로 어머니나 여러 사람 앞에서 신성한 맹세를 하고, 그 다음에는 서서히 자기 뜻대로 지배욕을 드러내는 거지. 너는 매에게 먹혀 버리는 거야, 루실. 거칠고 난폭한 매의 날개 밑에서 견디어 낼 재간이 있어?"
가냘픈 몸을 공포에 떨면서 머리를 푹 숙이고 지친 듯 서 있는 루실은 마치 매의 밥이 될 찰나에 있는 참새꼴이었다.
"그럴 거예요, 물론."
루실은 목쉰 소리로 응했다.
"그럼, 나는 가겠어요."
둘은 떠들고 있는 사람들의 눈을 용케 피하여 달빛을 받으면서, 발이 빠른 아랍 말을 몇 필이나 매어 둔 작은 마구간까지 달려왔다. 말이 끌던 마차가 아직 한두 대 남아 있었으며, 대부분의 오두막집들은 텅 비었고, 아트가 도구의 운반용으로 빌려다 놓은 승용차와 지프가 안마당에 꽉 들어차 있었다. 루실은 샤니의 독촉에 못 견뎌 운이 좋게 열쇠를 꽂은 채로 놓아 둔 지프차에 살그머니 올라탔다.
신경이 곤두섰다. 열쇠를 돌려 악셀을 밟자 엔진소리에 샤니는 손짓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빨리빨리 출발하라고 신호를 하며 재촉해댔다.
흥청거리는 축하연의 소란스러운 인파에 마지막 눈길을 던지고, 루실은 신호대로 움직였다. 그때, 루실의 눈에는 고함을 치며 팔을 흔들면서 마굿간 쪽으로 달려오는 사람의 그림자가 힐끗 비쳤으나 확인할 수는 없었다.
화살같이 곧게 뻗은 아스팔트 길을 몇 분쯤 달려가니 점점 추위를 느끼게 되었다. 도망쳐 나올 때에는, 루실은 샤니의 얇은 코트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지만 흥분해서 열이 올라 벗어 던지고는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불모지인 달 표면 같은 사막 지대에서는 태양이 지면 갑자기 기온이 내려 추위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가 덜덜 떨리고 핸들을 잡은 손가락은 꽁꽁 얼어붙어서 한 덩어리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추위를 느낀 것도 잠시뿐 서서히 공포가 밀어닥쳐 왔다. 상상도 못했던 고독에 휘말렸고, 간간이 달그림자를 향해 짖어대는 기괴한 짐승들의 소리가 들려와 더욱 공포에 싸이게 되었다. 승냥이와 하이에나 같은 맹수가 나타났다.
이런 사정은 루실도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언제 달려가는 차를 습격해 올지 그런 것까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루실은 이를 악물고 계속 달렸다. 토착민의 전도회관이든지, 흔히 들어왔던 대추 같은 열매의 저장소라도 좋았다. 빨리 은신하여 쉴 수 있는 건물을 찾을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달리기만 했다.
그러나 거기에서부터 또 한참을 달렸는데도 인가를 멀리 떠난 공포만 더욱 느끼게 될 뿐, 적막하게 검은 손가락을 뻗은 듯한 도로는 상상력이 풍부한 루실에게는 무한한 지평선으로 끌려가는 것만 같았다.
그러는 순간 갑자기 차 앞에 그림자가 꿈틀 나타나더니, 지프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 있었다. 비명을 지르고 루실은 당황해서 핸들을 꺾었다. 차바퀴가 길에서 벗어나 구렁텅이에 처박혔다. 지프는 지진을 만난 듯이 마구 흔들렸다. 루실은 죽을힘을 다해서 다시 조정을 했으나 손가락이 굳어져서 뜻대로 기어가 들어가 주지 않았다. 핸들과 브레이크는 이미 망가져 있었다.
지프가 쿵 하고 나자빠지고 루실은 머리를 창에 부딪쳤다.
바퀴가 움직이지 않았고, 보닛은 부드러운 모래 속에 박혀 들어갔다. 이제 모든 일이 끝장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루실은 초조하게 엔진을 걸어보았다. 흩날리는 모래의 뿌연 회오리 속에서 지프는 더욱 깊숙이 패여 들어갈 뿐이었다.
"어쩔 도리가 없구나."
절망감에 휩싸여 루실은 문에 매달렸다.
"이젠, 어쩌면 좋담!"
루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아득히 바라보이는 지평선 끝까지 모래언덕이 여기저기 솟아 있는 망망한 모래의 바다였다. 저 넓은 창공의 어둠 속에서 한 알의 모래보다도 변변치 못한, 어쩌다 생명을 이어나가는 보잘것없는 생물을 비춰내듯 달빛만이 처량하게 홀로 서 있는 루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실은 혀를 차면서 하늘을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자 용감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혼자서 킥킥 웃는 동안에 마음이 개운해졌다.
이윽고 한 발짝씩 앞으로 조심스럽게 내딛으며 가장 가까이 보이는 모래언덕을 향해 걸어갔다
루실은 자신이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한 듯한 발걸음으로 사막 속을 정처없이 걷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느 새 관자놀이가 쿵쿵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하며 추위도 그 외의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를 부딪쳤기 때문에 여태까지 느꼈던 공포심도, 인기척도 없는 사막을 고독도 잊어버린 채, 깊은 그림자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와도 아랑곳없이 걷기만 했다. 방향도 생각지 않고 사막에 익숙해진 사람도 위험을 느낄 만한 변화가 극심한 모래 속을 깊숙이 밟고 나아가면서 콧노래마저 흥겹게 읊조리고 있었다.
양피의 긴 외투로 몸을 감싼 아랍인의 양치기에게는 비틀거리면서 양떼 속으로 흘러들어온 루실이 마치 유령처럼 보였으리라. 양들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양치기는 뜻밖의 일에 몸을 움츠리고 있었으나, 이윽고 애처로운 방랑자로 인식하고 맹렬히 짖어대고 있는 개를 자기 발밑으로 불러들였고, 루실에게 다가와서는 손짓발짓으로 자기를 따라오라고 알려 주었다.
루실은 아픈 머리를 쉬게 할 수 있는 베개가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루실은 다행이다 싶어서 양치기를 따라 약 이삼백 야드 가량 앞에 오아시스가 희미하게 나타났다.
작은 오아시스의 둘레에는 무수한 천막이 있고, 모닥불이 따뜻 하게 둥근 빛을 던지고 있었다. 캠프의 주위에서 이 부락을 외적으로부터 수호하는 개들이 길게 울부짖자, 천막 속에서 사람들이 하나 둘 뛰어나왔다. 키 큰 사내들의 얼굴은 맹수 같은 교만에 가득차 있었다. 가냘프고 눈이 검은 여자들은 남자들 뒤에 숨어서 어떤 사람이 침입했는지 설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양치기는 루실을 앞으로 나오도록 권했으나, 루실은 덜덜 떨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루실의 모습을 알아차린 토민들은 함께 떠들어대었고, 여자들은 웃음으로 몸짓을 통해서 환영했다. 남자들까지도 표정을 부드럽게 하며 얼굴 가득 웃음을 띠어 갔다.
"좀 쉬게 해주실 수 없을까요?"
루실은 겁에 질린 채 큰 마음먹고 물었다. 자기의 음성이 멀리서 아득히 들려오는 듯싶었다.
웃음소리가 계속되는 가운데 루실의 말소리는 들었지만 누구 하나 손을 빌려 주려고 하지 않았다. 루실은 점점 화가 치밀었다.
사막 토민들의 신중하고 깊은 동정심에 대해서는 이미 듣고 있었다. 사람을 반가워하는 그들도, 루실을 종족에서 빠져 나와 자기 친지들이 데리러 와 주기를 기다리는 그들의 무슨 소유물처럼 간주하고 있었다.
이윽고 커다란 한 천막 속에서 의젓한 풍채의 사내 하나가 나타났다. 머리에 검은 터반을 감고, 등과 어깨에 금실로 호화로운 장식을 붙인 긴 소매 없는 겉옷인 다비를 입고 있었다. 그가 다가오자, 다른 자들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고 루실만이 훨훨 타오르는 모닥불에 비춰졌다.
피로에 지친 머리를 떨구고, 눈에는 실망의 눈물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발밑의 땅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때 루실은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나하구 결혼할 바엔, 차라리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사막으로 도망치는 게 나았단 말인가?"
귀에 익은 음성이었다. 루실은 고개를 들었다.
"털렉?"
루실은 거만한 태도의 사내에게 소리쳤다. 자신이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일까? 타오르는 모닥불 속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그 불빛으로 사내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그 불빛으로 털렉임을 확인한 루실은 큰소리를 지르며 털렉의 팔 안에 뛰어들었다. 처음 순간에는 루실은 숨을 삼켰으나, 이제는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이성을 잃고 맹렬한 힘으로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겨우 기분이 진정되자, 털렉은 루실을 안아 올리고 토민들의 환성을 들으면서 자기의 천막으로 향해 갔다. 루실은 안도감에 젖어들었다.
천막 속으로 들어오자 털렉은 루실을 팔에서 내려놓고 물러서서 루실의 더러워진 얼굴을 눈여겨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진주 램프의 불빛을 받고 루실은 눈을 깜박였다. 천막 속의 의외로 호화로운 장식품에 놀라 잠깐 동안은 호화롭게 겉에 덮은 천과 손으로 만든 진주의 테이블이나 모든 색채의 명주 깔개를 쌓아 겹친 의자와 루실의 얼어붙은 손을 따뜻하게 감싸 주는 양피에 눈을 빼앗겼다.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하는 표정으로 커다랗게 뜬 루실의 눈을 보더니, 털렉은 그녀의 눈 밑에 마치 검은 점처럼 보이는 그을음을 닦아 주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가는 머뭇거리며, 천천히 주먹을 틀어쥐면서 자기의 옆구리에 찔러 넣고 있었다.
"용감한 남자라도 체념하고 마는 탈주를 하면서도 그다지 고생하진 않았구먼."
털렉은 탐색하듯이 말했다.
심중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생각하면서 루실은 떨리는 숨결을 들이마시고 침착해졌다.
"설명하겠어요."
루실은 지금 다시 털렉의 팔에 몸을 안기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거센 감동이 밀려오는 것에 놀라면서 변명처럼 말했다.
"도망치지 않으면 우리들은 강제 결혼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의 어머니께서는…"
루실은 거짓말을 한 것이 오히려 후련해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제가 한 말을 어떻게 오해하시고, 제가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 한다는 인상을 어머니께 가지시게 했나요?"
루실은 털렉이 자기 이야기를 듣고 약간 당황하는 듯함을 느꼈다.
그러나 털렉의 냉엄한 대답이 그러한 심정을 노골적으로 나타내었다.
"어머니가 당신과의 결혼을 희망한다고 강조하실 때, 나는 무엇을 오해하는 것같이 생각되었어."
루실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 털렉은 냉혹하게 계속했다.
"그러나 당신은 알고 있소? 당신이 저지른 행동이 결혼을 기피하기는커녕 직선적으로 덫에 뛰어든 거라는 걸?"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요."
루실은 그렇게 중얼거렸으나 허둥대는 소리가 입술을 흘러나오는 동안에 아슈라와의 대화를 생각해 보았다. 한순간 벼락이 떨어진 듯한 충격을 받았다.
털렉이 미개인의 의식이 어떤지 대강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루실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전에도 얘길 했지만, 결혼식의 전후 단계는 신부가 없이 진행되나 오늘 밤 당신이 여기 모습을 나타낸 것은,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신이 신부로 선택되었다는 사실뿐만이 아니고, 신부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는 증거로 되어졌어! 당신은 도망쳐 나왔고 나는 당신을 찾아나왔지. 그와 동시에 몇백 명이라는 토민들이 당신을 걱정하며 사막 속을 샅샅이 찾아다녔어. 그리하여 우연히 내가 말을 바꾸려고 여기 온 직후에 당신이 비틀거리면서 나타난 거야."
"그들이 볼 때에 우린 공식적으로 결혼한 걸로 되어 있나요?"
루실은 목쉰 소리로 말했다.
루실의 슬픔은 자기 자신보다도 털렉을 위하는 생각에서였으나, 루실은 그것을 설명해 낼 수 없을 만큼 기분이 산란했다.
루실은 매한테 발을 묶였다. 앞으로 털렉은 그렇게 싫어하던 책임을 영원히 등에 지고 살아야 한다.
"무슨 방법이 있을 법한데요!"
루실은 눈을 크게 뜨고, 털렉의 굳은 바위 같은 옆얼굴을 보았다.
"법적인 구속력은 없는 거예요. 사막을 벗어나면 그런 결혼은 잊어버리게 돼요. 그렇잖아도 위장결혼인걸요. 그때의 입장에서 필요한 조건을 채우기 위한 가짜 연기, 그리고 용도가 끝나면 없어져 버릴 필름 조각같이 버리면 그만인걸요."
털렉은 턱을 쑥 내밀고 루실의 희미한 희망을 깨뜨렸다.
"어머니를 잊어버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털렉이 기세를 꺾었다.
한순간 루실은 확실히 늙은 마님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마님은 아들이 당연한 의무를 완수해 주기를 삶의 보람으로 삼고 있는 듯했지만, 조금 얘기하면 털렉이 앞으로도 계속 자유를 향락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줄 때가 꼭 올 것이다. 털렉은 어깨를 움츠렸다. 엄숙한 얼굴이 램프 등불에 비춰져서 고대 이집트 왕인 브몬즈의 동상같이 보였다.
"무슨 방책이 있어야겠어."
털렉은 평소와 같이 오만한 태도가 되었다.
"하여튼 나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 상황은 내가 상상한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문제는 해결 안 될 수가 없을 거야."
격렬한 증오심이 북받쳐 올라왔다. 무한한 자만심이 어떤 여자든지 마음대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 울고 있는 자기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머리가 빙빙 돌았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될 수 있는 대로 경멸을 깃들여 비난했다.
"당신이 상상했던 상황? 철없이 떠들썩거리는 사람들로부터 벗어난 사랑의 보금자리에서 온화롭게 당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아내를 곁에 놓고, 또 흥취 있는 일을 찾아서 훌쩍 뛰어나가겠단 말이죠?"
털렉의 눈썹이 크게 움직였다.
"나는 실컷 향락을 맛보았어. 이젠 그렇지가 않아. 앞으로 지내보면 알 거야!"
신증하고, 냉정한 때에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을 알게 되는 것이지만 그것을 입증하려면, 문제는 다르다. 털렉이 마돈나의 천연스러운 얼굴의 이면에도 야만적인 생물과 똑같은 사랑을 받고 싶다는 욕구가, 그리고 스스로도 사랑하고 싶은 욕구가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루실은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정면으로 부딪쳐 가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털렉은 자만심의 덩어리이며, 거만하고 자기 본위다. 그러나 루실의 털렉에 대한 사랑은 지금에 와서야 그 정체를 드러내고 싶어 했다. 숨기려는 의지를 루실은 모두 잃어 버리고 있었다.
가느다란 그림자를 이끌고 루실은 털렉의 곁으로 가서 밝게 빛나는 머리를 털렉의 가슴에 기대었다. 털렉은 자연스럽게 루실을 안았고, 루실이 키스를 받으려는 듯 얼굴을 들자, 털렉은 반사적으로 루실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입술은 상냥스럽게 떨렸고, 끓어오르는 열정에 꽃같이 아름답게 빛나는 얼굴은 이채롭게까지 보였다. 그러나 털렉은 그 의미를 알고 싶어 했다. 한순간 당황하기는 했으나, 금세 정열에 불타올라 의미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털렉은 목쉰 목소리로 속삭이면서 사랑을 갈구하듯 내밀어진 입술을 놓치지 않았다.
두 입술이 겹쳐졌고, 털렉이 자기에게 스스로 바쳐진 사랑에는 애착을 느끼지 않는다고 단언했던 그 말은 거짓이 되어 버렸다.
루실의 유혹은 희망했던 이상으로 부풀어 올랐다. 루실의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애무에 털렉은 몸을 떨기 시작했다. 털렉의 키스에 키스를 보내고, 털렉이 점점 자제심을 잃어감을 느껴가면서 루실은 자기를 지배하는 쾌감을 맛보았다.
털렉의 귓불을 살짝 깨물고, 털렉의 애틋한 신음소리를 들었다. 루실이 정열의 비단 채찍을 흔들자, 털렉은 금세 힘을 잃고 말았다. 루실은 넘쳐흐르는 정열로 남편을 맞는 첩과도 같은 생각으로 여러 해 동안의 압박에서 해방되어지는 기쁨에 빠져가고 있었다. 털렉은 루실을 안아 올리자, 루실을 껴안은 채로 긴 의자에 올라타고 강철 같은 몸으로 눌러 버렸다. 루실은 희열을 내뿜으며 폭신한 방석에 몸을 묻어갔다.
털렉의 손이 루실의 가슴을 헤쳐 부드럽고 볼록한 가슴을 감싸 쥐었다.
"크림같이 풍성하고… 벨벳처럼 매끄럽군."
털렉은 육중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을 사랑해, 나의 루실!"
털렉이 가슴 위에 올라 덮쳐오자, 루실은 한숨을 내뿜으며 눈을 감았다. 갑자기 온누리까지 감아 올려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나뭇잎이 뱅뱅 돌아가면서 털렉의 손도 미치지 못할, 금세 잊혀져 어디론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어둠과 공백과의 경계선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멀리에서 루실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이 들려왔으나 루실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털렉의 눈이 금발밑 상처에 머물렀을 때에 루실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털렉은 손가락으로 상처를 살짝 만졌다. 머리 상처의 크기와 깊음은 자신을 잊어버린 무모한 행위가 사실상 이 아픈 결과를 초래시켰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털렉은 천천히 이성을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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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실은 그런 일이 있은 뒤 며칠 동안은 희미한 의식 속에서 지내고 있었다. 의식이 분명해졌을 때에는 털렉이 곁에 붙어 있어서 상냥스럽게 위로하는 말을 건네주기도 하고, 쑥쑥 쑤시고 열이 오른 이마에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젖은 타올을 얹어 식혀줄 줄도 알았다.
루실이 찾으면 털렉은 언제든지 곁에 와 있었다. 그밖에도 고통스런 발작이 덮칠 때마다 빈틈없는 간호를 해주는 여자들이 있었으나, 루실에게는 털렉의 존재만이 느껴졌고, 털렉의 음성만이 루실을 평안한 잠 속으로 이끌어 줄 수 있었다.
3일 후에 루실은 완전히 의식을 되찾아 자기 주위를 돌아다보았다. 여기가 어디며, 왜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내려고 이마에 주름살을 지었다. 이 방은 희미하게 기억이 나는 듯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확실하게는 알 수 없었다.
루실은 기억이 분명히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눈을 감았다.
누군가 천막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났지만, 루실은 가만히 있었다. 담배 냄새와 어울려진 신선한 공기가 루실의 코를 스쳤다. 누가 왔는지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루실은 본능적으로 조심스레 주위를 살폈다. 웬일인지 모를 부끄러움에 싸여서, 털렉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자 얼굴이 타는 듯이 붉어졌다. 털렉의 불안스러운 표정은 루실의 얼굴빛과 지금은 커다랗게 떠져 자신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눈을 보자 어느덧 밝아졌다.
"퍽 걱정했었어, 루실.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거든. 지금 기분은 좋아?"
루실은 대답했다. 이제는 통증은 없어졌지만 감격해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털렉의 눈이 번쩍번쩍 빛났다. 마치 비밀의 세계를 자기 혼자서만 즐기려는 듯이 의미있게 웃었으므로, 루실은 영문을 몰라 의아해 했다.
"무슨 일이 생겼댔어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물어보았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이 천막에 온 것과 갑자기 당신이 나타난 것뿐이에요. 그것밖엔 그 후의 일은 전혀 기억할 수가 없어요."
털렉은 부인용 숄을 긴 의자 옆에 놓고 루실 바로 곁에 앉았다.
"그리곤 심한 충격을 받았었다는 것."
그는 루실의 말을 보충했다.
"머린 언제 부딪쳤지? 좀 생각이 나나?"
루실은 신중히 회상했다.
"지프가 모래에 처박혔을 때 부딪쳤어요. 그러나 그때는 그렇게 심하게 부딪친 줄은 몰랐어요."
루실은 이상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게 아닐 텐데."
털렉은 그의 종족인 아랍인이 즐겨 입는 품이 헐렁한 웃옷을 입고 있어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는데, 이윽고 매와 같이 날카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적어도 그 덕택으로 사막 속에서도 태연하게 있을 수 있었겠지! 양치기가 왜 양떼에게서 한눈을 파는지 알아?"
털렉은 엄숙히 물었다.
"모닥불이 꺼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언제라도 쉽게 총을 잡을 수 있도록 곁에 두고 있는 이유가 뭔지 알아?"
루실은 사막을 방황하는 자들이 만나게 되는 공포를 처음으로 깨달은 듯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털렉의 눈이 쏠리고 있는 어깨에 늘어진 명주실 같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살짝 쓸어내렸다.
"그렇다면, 제가 머리를 부딪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겠군요."
루실은 장난기 어린 소리로 말했다.
"사막의 야수에게 습격당할 공포 따윈 없었으니까요!"
털렉이 루실의 말을 인정하는 듯이 숨을 삼키자, 곧 다시 루실의 감정은 불타올랐다. 그러나 잠시 지켜보고 있는 동안에 털렉의 입가에 웃음이 퍼져갔다. 루실은 기대에 어긋남을 느꼈으나, 그 미소는 시기가 닥쳐오면 알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듯했었다.
털렉이 천막에서 나가자, 루실은 베개에 머리를 얹고 털렉이 갑자기 상냥스러워진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털렉은 루실이 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회복되기를 기다려 이틀 동안 루실과 함께 천막에 남아 있었다.
마지막 날, 루실은 토민들에게로 갔다. 토민들의 여자들과 친구가 되어 루실이 쓰고자 하는 글의 마지막 장을 탈고하는 데 필요한 자료를 수집했다. 털렉이 말안장에 죽은 짐승을 매달고 돌아올 무렵에는 루실은 이미 천막에 돌아와 있었고, 이제 자기 것이 되어진 천막 속에서 실컷 잠을 자고 있었다. 눈을 떠보니, 흥청거리는 소리가 루실을 맞이했다. 큰 북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많은 사람의 발들이 대지를 밟아 울리고 있었다.
그 소리에 끌린 루실은 축제의 소란과 광경을 보고 싶어 천막 밖으로 나갔다. 커다란 쇠막대기에 끼워져 불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고깃덩어리에서 나온 기름이 불 속으로 떨어져서는 지글지글 소리를 내었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고기와 야채의 스튜 냄비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풍겨 나오면서, 낮 동안의 사냥과 흥분한 춤으로 몹시 공복을 느끼는 사내들의 식욕을 돋우고 있었다.
루실이 지켜보고 있을 때, 시중드는 여자가 화사한 명주옷을 팔에 안고 다가왔다. 상냥하게 웃으며 루실이 안으로 들어와도 좋다고 손짓했더니, 여자는 머뭇거리며 안으로 들어와서는 긴 의자 위에 안고 온 물건을 놓고 부끄러워하며 나갔다.
루실은 호기심에 찬 눈으로 물품을 바라보았다.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모래 속에 푸른 수레 국화와 눈부신 진홍빛 양귀비꽃 무늬가 그려진 명주의 부드러운 촉각에, 루실은 몸이 오싹해질 정도였다.
루실은 그것을 펴보았다. 서양식으로 약간 풍부하게 재단된 긴 웃옷인데, 그 재단에는 어쩐지 아무리 보아도 동양적인 감각이 살아 있었다. 이것은 틀림없이 루실이 입을 수 있도록 보내온 것이었다. 루실이 겨우 그 의도를 알았을 때, 또 다른 여자들이 뜨거운 물이 든 단지와 양철통을 들고 들어왔다.
여자들은 통을 바닥에 내려놓더니 그 속에 뜨거운 물을 붓고 웃으면서 루실에게 목욕을 하도록 권했다. 루실은 기쁜 듯 여자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나서 이 성스러운 의식을 끝마칠 때까지 천막 밖에서 지키고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모든 준비가 다 끝나고 루실은 천막 속에서 털렉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초조감 때문인지 더욱더 몸이 긴장되었다.
그것은 큰 북을 퉁기는 울림소리와 유쾌하게 법석대며 춤추는 토민들의 소란 탓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실제로 털렉이 천막에 나타나자 루실은 안도감을 느꼈다. 하루 종일 털렉이 곁에 없었기에 홀로 남겨진 신부처럼 허전한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털렉의 웃는 얼굴을 보자 루실은 가슴이 뛰었다. 털렉이 팔을 벌리고 장난투로 말했다.
"누구한테서나 다 사랑받는 여자야, 당신은! 밤의 사막을 혼자 걸은 당신의 용기에 경의를 표해서, 토민들이 이번만은 터부를 깨고 당신도 축하연의 자리에 참가하라고 했어. 모두들 당신이 나오기를 고대하고 있어."
드레스의 새빨간 양귀비꽃도 이때만은 루실의 빛나는 아름다움보다는 못했다. 눈썹을 찌푸리는 모습이 어쩌면 좋을까 하고 망설이는 마음을 엿볼 수 있게 했다.
그러나 털렉은 모른 체하고 명랑하게 떠들고 있는 남자들 앞으로 루실을 데리고 나가더니, 남자들이 둥그렇게 원을 만들고 있는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땅 위에 놓인 방석에 앉았다.
마침 남자들이 식사를 시작하는 때였다.
낙타의 젖, 낙타 고기, 토스트, 마롱톤, 스튜, 그리고 밥까지 여기저기의 좌석에서 루실에게로 전달돼 왔다. 커피는 사막에서는 충심으로 환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살이 통통하게 찐 거위 모양을 한 검은 차주전자로 따른 커피가 감미로운 대추 열매와 석류 열매와 무화과를 피라밋처럼 쌓아 올린 큰 접시와 함께 루실에게로 전해졌다. 남자들은 땅에 다리를 꼬고 둥그렇게 둘러앉아 루실에게 다정한 시선을 돌리며 얘기와 소란을 피웠다.
존경하는 사람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어 대하는 것이 그들의 기본적인 관습이었다. 식사석에서는 바로 그런 자세였다.
루실은 포크보다도 손가락이 먼저 생겼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두껍게 썰어 놓은 빵과 함께 모든 사람이 손을 넣었다가는 돌리는 스튜 요리의 큰 접시가 자기 앞에 돌아오자 외면하고 보지 않으려 했다. 털렉은 말없이 도움을 바라는 루실을 못 본 체하고 가까이 있는 남자와 계속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으나, 우스꽝스러워하는 듯한 표정은 감출 수가 없었다.
루실은 용기를 내어 웃고 있는 곁의 남자를 엿보았더니, 열심히 빵을 두 조각으로 갈라서 삽처럼 모양을 만들어서 스튜 요리 그릇의 가장자리에 남은 작은 고기점들을 집고 있었다.
모두가 소리내어 웃으며 얘기를 끝내고는 루실이 난처해 하는 모습을 보고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겨우 마음을 크게 먹고 끈적끈적한 스튜 속의 고기를 건져낼 생각을 했다. 그러자 곁에 앉은 남자가 얼른 손을 내밀어 루실이 좀처럼 집어낼 수 없던 마론을 익숙한 솜씨로 집어 들었다.
루실은 놀라서 어안이 벙벙해져 있었더니 아랍인이 갈색 손가락으로 고기를 한 조각 집어 루실의 입 안에 넣어 주었다. 루실은 구역질이 나서 뱉으려 하자, 재빨리 털렉의 손가락이 루실의 손목을 잡고 표정은 온화하게 하면서도 엄숙하게 명령을 했다.
"당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거요. 아랍인은 손님에게는 가장 최고의 요리를 대접하는 습관을 갖고 있는데 음식을 입 안까지 넣어 주는 것은 가장 존경하는 사람에게만 한하는 것이지! 당신이 그것을 먹지 않으면 그를 심하게 모욕하는 것이 된다구."
루실은 말하는 대로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그것은 작은 고기 조각이었다. 루실은 싫은 눈치를 보이지 않고 씹어서 단번에 삼켜 버리고, 컵의 가장자리 너머로 털렉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미소를 보이자, 털렉은 상냥하게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 끄덕여 보였다. 그래 루실에게는 이와 같은 일은 몇 번이고 반복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생각해 내고 루실은 웃음을 지웠다. 털렉을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여자가 있다면 그것은 샤니뿐이었다. 그것을 잊어버리다니 우둔한 짓이다!
축제가 길어질수록 토민들의 눈에는 두 사람이 부부라는 인상이 점점 더 뿌리박혀 갔다.
가끔 성직자가 일어서서 알라의 이름을 부르며 두 사람이 많은 아들을 낳도록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 감정적인 털렉은 만족스러운 듯 그것을 통역해 주고 있었는데, 이윽고 루실은 신경이 피로해졌다. 창백해진 얼굴은 달빛 아래에서 초처럼 하얗게 빛나고, 눈자위는 검게 꺼져들어가 피로가 역력히 나타나 보였다.
털렉이 루실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곤 그녀를 자기 품에 끌어안고 이것으로 물러가게 해줬으면 좋겠노라고 토민들에게 말했을 때, 루실은 구원받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기운이 왕성한 토민들은 히죽히죽 웃음을 띠며 응대를 하고 기분 좋게 승낙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얼른 신부와 있고 싶어 하는 신랑의 기분을 이해했다.
서열을 중요시하는 아랍의 격언이 있다. 첫째는 단둘이, 둘째는 낙타, 셋째는 아내가 그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서열을 바꾸어도 허락받을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루실은 털렉의 팔에 안아 올려졌다. 토민들의 노래소리가 나른하게 큰 북소리와 조화되어 등 뒤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털렉에게 안겨져 가니 한 여자가 어둠 속에서 나타나 천막 입구에 망보는 사람을 세우고, 무엇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는 다시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저 여자가 뭐라고 했어요?"
천막 속에 들어가 털렉이 자기를 내려놓자, 루실은 멍청하게 물었다. 털렉이 빙그레 미소를 짓고 루실의 허리에 팔을 돌리자, 루실은 어린애처럼 몸을 기대었다.
"여자의 행복은 남편의 발밑에 있다, 라고 누군가 말했지."
털렉은 루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유머가 담긴 말투를 썼다.
루실은 얼굴을 들고 우스꽝스럽게 웃고 있는 자신을 의식했다.
"이상해요."
루실은 위험한 내기를 하고 있는 줄은 알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단념하기도 싫었다.
이대로 털렉의 팔에 안겨 있고 싶은 욕망에 불타올랐으나 이성을 되찾아 얘기라도 하는 것이 현명하리라고 생각했다.
"언제 부인방의 벽이 무너질까요?"
루실은 털렉의 단단한 가슴을 보며 말했다.
"여성들은 아직 갇혀 있는 몸이지만 지금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어요. 베일 뒤의 검은 눈동자는 아직도 소극적이지만 자유를 갈구하는 마음은 점점 더 커져가고 있을 거예요…"
털렉은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그래, 부인 방에서는 여러 가지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 확실해. 사고방식도 달라져 가고 있어. 그러나 어머니처럼 나이 많은 사람들은 그 변화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납득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구.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는 관심도 두지 않고, 현실마저 인정하려 하지 않는 거야."
루실은 황홀해져서 물었다.
"현실세계에 적응하려고 하시지 않는 어머님께 당신은 화를 내는 거예요?"
털렉이 어깨를 움츠리는 것을 눈치 채고 그의 볼이 머리에 닿아오자 루실은 몸이 오싹해졌다.
"화를 낸다는 말은 마음에 걸리는군. 단지 참을 수 없다는 것이지. 근대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문명 사회의 여러 가지 편리한 점을 맛보며 살고 있으니 말야. 그러나 나이 많은 부모님을 생각하면 편리한 자동차의 경영자가 되기보다는 낙타나 천막생활에서 이상야릇한 기쁨을 느끼는 것도 남자들에게 있을 수 있는 일이잖겠어?"
몇 세기나 뒤떨어진 그런 생활양식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마음에는 다만 새로운 생각을 갖는 것만으로도 무익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루실은 털렉의 무관심한 태도 이면에 이렇게도 깊은 타인에의 이해가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털렉을 너무나 쉽게 판단했던 자신이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매와 같은 털렉의 무관심한 갑옷 밑에는 두터운 인정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믿어지지 않는 것으로, 샤니가 들으면 경멸하고 웃을 것이라고 루실은 생각했다.
루실은 사과하고 싶은 기분으로 얼굴을 들었다. 주위는 고요해지고 두 사람은 가까이 붙어 있었다. 털렉은 루실이 토민들을 좋아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 듯 얘기를 계속하지 않았다.
털렉은 머리를 숙이고 먹이를 낚아채는 매와 같이 그 몸도 마음도 하늘까지 가로채어 올라갈 듯한 힘으로 내밀어진 루실의 입술을 덮쳤다. 루실은 스스로 입술을 맡기고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강렬한 키스에 만족하고 있었다. 새롭게 발견한 사랑의 기쁨에 젖어, 여자는 맞으면 맞을수록 응석받이가 된다고 생각하는 털렉의 일면을 루실은 잊고 있었다.
털렉의 손이 루실의 가슴을 감싸고 있을 때에, 루실은 마음속의 어디에서 발밑이 무너져 내려가는 듯한 충격을 깨달았다. 루실은 놀라서 이상스러운 느낌으로 몸을 벗어났다. 그랬더니 그전에 루실을 기대의 절정에까지 끌어 넣은 충격과 쾌감에 대한 동경심이 끓어올라 어느덧 다시 한번 불러보고픈 생각에 휘말려 몸이 떨렸다.
털렉의 야릇한 미소, 내심의 만족을 나타내고 있는 얼굴, 루실은 거기에 그가 여유만만하게 시기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인상을 가졌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것은 루실을 며칠이나 반 무의식 상태에서 괴롭힌 어설픈 꿈―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 결국에 가서는 절정에 이르기까지 불타오르면, 금세 잔혹하게 이성이 없는 어둠의 구멍 속으로 루실을 빠뜨린 그 꿈에 이어지는 것이 있는 듯싶었다.
"털렉!"
그가 가슴에 루실을 다시 안으려 하자, 루실은 그것을 거부했다.
"모르겠어요. 절반밖엔 기억이 안 나요!"
루실은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했다.
"첫날밤 우리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제가 뭘 했었죠? 함께 있어서, 당신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경멸하는 여성과 같은 일을 저질렀나요?"
두 번이나 거절당하여 털렉은 망설이는 눈치였는데, 이윽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대답했다.
"나는 당신에게 언제나 만족하고 있어. 설사, 당신이 방해만 하구 있다손 치더라도 말이야. 지금처럼 말이지. 그것보다 당신은 왜, 우리들이 사랑하고 싶어 하는 시간에 쓸데없는 토론을 전개시켜 방해하려 하지? 그게 당신을 지켜가는 방법인가? 강렬한 감정에 빠지려고 하면 당신은 말만 늘어놓고 응변을 내뱉으며 그것을 도피처로 삼는 것 같아."
루실의 볼이 붉어졌다. 털렉은 나를 다만 남자의 마음을 흥분시켜 놓고 재미있어하는 소녀라고 생각하고 비겁한 인간이라고 증오하고 있는 것일까. 루실은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털렉은 모든 아름다운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전문가였다. 그래 스스로 그의 팔에 몸을 맡기려 하지 않는 단 하나의 아름다운 여성의 마음을 꺾어 버리려는 것이다. 나는 흥미없는, 비겁한, 쓸모없는 인간임에 틀림없나 봐. 여태까지 뭐든 뜻대로 이룬 그의 인생에 하나의 실패를 주는 것이다.
털렉을 만족스럽게 했던 요란한 색깔의 야회복에 가냘프고 도전적인 몸을 감싸고 루실은 비난했다.
"비열한 태도를 태연스럽게 취할 수 있는 선천적으로 천박한 인간이라고는 생각지 말아 주세요. 나는 자신을 숙녀로 꾸미고 싶진 않지만, 자기행위에 대한 변명 정도는 허용되기를 바라는 거예요!"
루실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폭풍의 자취를 남긴 눈에는 불길이 훨훨 타오르고 있었다. 털렉의 분노와 루실의 경멸은 두 사람을 증오에 휩싸이게 했다.
루실은 강력하게 털렉에게 대항했다. 남자의 강압에 항상 눈물만 지는 약한 여자가 분노에 휩쓸려 털렉이 주먹을 틀어쥐어도, 육체적인 타격마저 줄 수 있는 무례한 말로 공격을 가해 와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당신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가 정말 육체적으로 결합했었느냐는 거라면 답변은 긍정이야!"
루실이 몸을 움츠리자, 털렉은 더욱 몰아세웠다. 마치 루실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줌으로써 자신의 분노를 진정시키고 거기에서 커다란 만족을 얻어내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 당신은 두번 다시 달아나지 않을 것 같았어. 그 일 때문에 비극이 생겨난다는 것을 난 믿을 수가 없어. 그때에 우리들은 지금처럼 부부였어. 그러니 나를 마치 악마의 화신처럼 보는 눈초리는 그만둬 줘. 그리고 현실을 똑바로 보기로 하자구!"
똑바로! 루실은 이때처럼 그가 인간을 우롱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털렉은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어 쾌감을 느끼는 따위의 말버릇으로 루실의 인생을 갈기갈기 찢어, 첩으로 만들고, 사회에 두번 다시 얼굴을 내놓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루실은 숨을 헐떡거리며 털렉을 비난했다.
"당신을 증오하고 경멸해요! 왜…"
눈물이 솟구쳤다.
"당신 나라에서도 우리나라에서도, 아무런 법적인 보증도 없는 이 결혼의 정당성을 어디서 찾으라는 거예요!"
털렉의 볼 근육이 꿈틀거렸다.
"증오와 경멸에 눈물은 없는 거야."
털렉은 조롱하며 비웃었다. 그 냉정함이 루실을 혼란케 했다.
"당신은 이미 끝난 일에 대해서 자신을 너무 나쁘게 생각하고 있어. 정직하게 보면, 어느 정도 시기가 좀 일렀다고 할 수 있을진 모르지만 할수없는 일이었잖아."
그의 그런 완고성 앞에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루실은 이제 완전히 피로에 지쳐 버려서 더 이상 싸울 기력도 없었다.
루실은 패배했다는 듯이 긴 의자에 몸을 던지고 쌓아 놓은 방석에 얼굴을 묻었다. 부드러운 방석이 루실의 흐느껴 우는 소리를 사라지게 했고, 비탄의 눈물을 삼켜 버렸다. 털렉의 말에 충격받고 모욕을 받아서, 루실은 스스로 자기의 상처를 핥아 가라앉혀야 했다. 어린 양이 매에게 달려들어서, 상처를 받고 만 것이었다.
12
두 사람은 다음 날 아침, 토민들이 사막에서 끌어내 준 지프를 타고 베다의 오아시스로 향했다. 루실이 혼자 있을 때에는 몇 년이나 걸릴 것 같던 여행도 둘이 서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나 불과 몇 시간 동안에 끝나 버렸다.
루실은 머리가 아파졌다. 몸도 마음도 거세게 흔들리도록 언쟁을 하면서 느낀 털렉에 대한 분노와 증오는 하룻밤을 울면서 새고 나니, 이제는 루실의 마음속에서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성에 도착하면 잘 해주리라고 믿어도 되겠지?"
말로 답변은 안했지만, 결국에는 울다 웃다 하는 루실의 비웃음 섞인 웃음이 털렉의 기대에 응하고 있었다. 나는 대체 어쩔 셈이었을까? 웬일인지 루실은 토민들에게 신뢰를 받은 만큼 털렉과 필연적인 관계를 느꼈다. 루실이 모르는 동안에 승낙도 없이 이루어진 결혼식 때문이 아니고 부득이한 사정이었더라도 루실도 똑같이 가책을 받아야 할 육체관계 때문이었다. 루실은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자세를 고쳐 앉았다. 털렉이 길에서 시선을 옮겨 자리가 불편하냐고 묻는 눈치임을 루실은 느꼈다.
루실은 얼굴이 빨개져서 시선을 돌렸다. 털렉의 시선은 루실의 마음속에까지 미쳐, 벌써 확실해진 루실의 기분에 털렉에 대한 반발을 느낄 수는 없었다.
지프가 성 안의 뜰로 들어갔을 때, 루실은 극도의 피로에 지쳐 있었다. 시중드는 여자들이 루실을 도와 준 알라신에게 칭송을 보내면서 여기저기서 뛰어나왔다.
루실은 고마운 아슈라의 시중을 받으며 방에 들어섰다. 목욕을 하고 나니 냉방이 잘된 어스름한 침실에서 기분 좋은 이부자리에 감싸였다. 풍설로 루실의 병에 대한 이야기는 성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충분히 주의를 해서 아내를 소중히 간병하도록 하라고 털렉이 일부러 아슈라에게 지시할 필요도 없었다.
몇 시간이 지나서 샤니가 루실의 침실로 찾아왔다. 루실이 마침 눈을 뜬 때였다. 아까는 창을 닫아 어둡게 했던 방에 지금은 황혼의 그림자가 가득히 스며들어 있었다. 루실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하자 아슈라가 램프에 불을 켜기 위해서 들어왔다. 샤니의 그림자가 벽에까지 길게 뻗쳤다. 루실은 샤니의 분노에 가득찬 얼굴을 보고 몸이 움츠러들었다.
"넌 교활한 애야!"
샤니는 다짜고짜 화를 냈다.
"네가 그이를 꼬여낸 거야!"
루실은 떨리는 입술을 필사적으로 깨물고 있었다. 충분히 잠을 자서 기분은 맑았다. 그러나 그 대신에 전보다도 더 마음이 약해져서 변명할 생각은커녕, 무슨 말을 하든지 그 상대자의 말을 그대로 인정해 버리려 했다.
연약한 마음으로 한숨을 쉬고, 루실은 샤니의 말이 옳다고 중얼거렸다.
"언니의 말대로예요."
히스테리 같은 숨을 토하며 칼날로 찌르는 듯이 샤니가 물고 늘어졌다.
루실의 핏기 잃은 얼굴에 악의에 가득찬 시선을 퍼부어댔다.
"그래, 이제 너의 본성이 하나하나 드러난 거야! 털렉을 증오하는 척하고는 증오는커녕 기회만 있으면 그에게 접근하여 관심을 끌게 해왔던 거지. 그래서 너는 비겁하다는 거야. 무슨 방법으로라도 그를 끌어당기려고 했던 거고! 그러나 이것만은 기억해 둬야 해, 무지한 것 같으니라구! 털렉과 나는 서로가 이미 잘 통하는 사이여서, 거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너보다 현명한 방법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지!"
샤니는 천한 웃음소리를 내고 악의에 가득차서 주위를 살피면서 침대에서 두세 발짝 물러났다.
"자신을 좀 똑똑하게 바라볼 줄을 알아야지! 달콤한 것, 쓴것 다 좋은, 모든 여성이 유혹하고 싶어 하는 남자를, 너는 진심으로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털렉의 세계는 행동과 모험과 흥분의 세계란 말이야. 꿈같은 건 택도 없어. 가정적이고, 여자에게 온순한 체하는 것은 그에겐 맞지 않는 거야!"
그날 밤 저녁식사 때 털렉이 취한 행동은 샤니의 말을 그대로 들어맞게 했다. 털렉은 침착하지 못했고, 남의 이야기는 마구 묵살시켜 버리고, 정성들여 만든 요리는 들여다보기만 하고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정성들여 준비한 요리를 한 가지 한 가지마다 비위에 거슬린다는 듯이 찡그리며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이윽고 심심해진 털렉은 포터블 레코드를 좋아하는 패들이 즐기는 유행 음악이 흘러나오는 시끄러운 속에서 샤니와 춤을 추겠으니 융단을 펴놓으라고 했다. 루실은 자연히 마음 내키지 않았지만 아트를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에 몰두하여 털렉의 시선이 맞대고 있는 두 사람의 머리 위에 쏠리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아트는 루실이 사막에서 경험한 사실들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듣고 싶어 해서, 루실은 아까까지는 침울했던 눈을 반짝이며, 입가에는 미소를 띠어 보이면서 사막에서의 일들을 즐겁고도 기쁜 마음으로 상세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유목민들 사이에서 여러 날 동안 지내면서 경험한 이야기를 흥미 있게 듣고 있던 중에, 아트는 조심성 있게 행동해야 할 것을 그만 잊어버리고는, 높은 음성으로 루실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야!"
아트는 새삼스럽게 경의를 나타내는 시선으로 루실을 바라보았다.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냐구! 처음 부분도 이 최후의 장에 못지않게 재미있다면야 이건 베스트셀러로 독자를 끌어들일 수 있는 책이 될 걸. 축하해요, 루실. 성공은 틀림없어!"
아트의 말은 마침 곡이 바뀌는 시간에 들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치 널리 선언이라고 하듯이 똑똑하게 조용한 방 안 가득히 울리었다.
샤니가 재빨리 얼굴을 돌렸다.
그 얼굴에는 호기심이 흘러넘치고 있었는데, 루실이 깜짝 놀라서 시선을 돌린 것은 털렉이었다. 그 표정은 자랑스럽게 말한 이야기 내용의 분위기보다도 못하게 관심조차 나타내지 않았다.
"재미있는데! 우리에게도 그 퍽 오래 전부터 간직했던 비밀 같은 걸 들려 줄 순 없나?"
털렉이 힐끗 이쪽을 보고 있기에 루실은 열이 오르는 동시에 오싹하는 냉기를 느꼈다. 설마, 보답을 받지 못한다 해도 사랑은 마음의 거울인 것이다. 루실은 뜻하지 않은 질문을 무턱대고 내놓은 털렉의 낮은 음성에서 한편으론 당황하고, 또 다른 한편으론 무서운 느낌을 맛보았다.
털렉이 질투를 하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았지만, 아트의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입 밖에 낸 이야기는 아주 짧은 것이었지만, 기왕 터뜨린 얘기라서 그 이상 비밀을 묻어둘 수는 없었다.
루실이 할 수 없이 이야기해도 좋겠다고 끄덕이자, 아트는 미안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루실은 다만 소설을 쓰고 있는 것뿐 아니고, 마지막 장이 완성되면 그것을 출판하게 계약이 돼 있어!"
이 이야기를 들은 두 사람이 놀라서 꿀먹은 벙어리가 되자, 아트는 루실의 성공을 자신의 것처럼 기뻐했다. 샤니는 확실히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털렉의 무표정한 얼굴은 돌처럼 굳어졌다.
자기만이 모든 비밀을 알고 있을 만큼 친밀하다는 자랑으로 아트는 의기양양해졌다.
"우리들은 모두가 루실이 유명해지는 것을 꺼려 왔던 사실을 알겠지. 이야기를 퍼뜨리고 싶어 하지 않았던 기분도 잘 알고 있을 거야. 사실을 얘기하자면, 처음에 그녀가 어떻게 해서든지 이집트로 가고 싶어 하길래, 이상해서 꼬치꼬치 그 이유를 캐 물었던 거야. 목적을 달성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진퇴유곡에 빠졌을 때, 나에게만 고백했던 거지. 그녀의 소설은 각 장마다 다른 인종의 습관을 취급하고 있어."
아트는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마지막 장을 쓰기 위해선 아무래도 이집트까지 왔어야 했던 것이지."
아트는 샤니가 그 연기력으로도 숨길 수 없는 패배를 맛보게 된 질투와 회한을 얼굴에 나타내었음을 알고 조롱하듯 바라보았다.
아트의 만족스러운 표정에 반발하며, 샤니는 루실에게 달려들었다.
"요컨대 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여태껏 나를 이용해 왔었단 말이지! 수개월 동안에 먹여 주고, 입혀 준 신세까지 지고, 가는 곳마다 내 비용을 쓰면서도 일을 소홀히 하고 자기 책의 자료 수집에만 열중해 왔다니! 잘두 나를 속였구나!"
샤니의 분노는 더욱더 거칠어져 갔다.
"이 여행으로 너 때문에 내가 쓴 비용은 한 푼도 남김없이 갚아야 해!"
"당신이 썼다구?" 아트는 못 참겠다는 듯이 큰소리를 질렀다.
"그 말은 취소해. 샤니! 루실은 자기 뼈를 깎을 만큼 열심히 일해 왔어! 나로서는 그녀가 당신에게서 해방되어진 아주 짧은 시간에 용케도 그만한 조사를 해왔다는 사실에 놀랄 정도야."
털렉은 차디찬 시선을 보내면서 입을 열어 참견했다.
"쓸데없는 시비를 해서 뭘 하나. 실제로 잘 생각해 본다면, 모두들 각자에게 다 죄가 있잖겠어!"
털렉의 냉기가 도는 시선에 루실의 마음은 얼어붙고 말았다. 그리고 몹시 허전했다.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도 일부러 극적인 장면에서 자신을 멀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털렉의 선언은 마치 성의없는 제삼자의 말처럼 들렸다. 루실은 털렉의 말 뒤에 숨겨진 의미를 생각하며 괴로워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털렉의 야유적인 말투에서 충격을 받았다.
"샤니!"
털렉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루실을 당신 마음대로 혹사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해야 할 거야. 루실은 당신한테 손톱만큼도 신세진 건 없어. 그러니까 나한테도 죄가 있어. 나는 나의 기분밖에 생각지 않고 약혼했어. 그녀의 의지를 꺾어가면서 강제로 약혼녀 행세를 시켰고, 즉 각적으로는 폭로되지 않는 복잡 미묘한 결혼 계획에 말려들게 하여 그녀를 부끄럽게 만들었던 거야."
털렉은 궁지에 몰려 핏기마저 잃어버린 루실의 얼굴을 똑바로 지켜보았다.
털렉에 대한 불쾌한 생각에 루실은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신한텐 미안하군. 용서해 주길 바래. 그러나 어머니를 위해서 이제 며칠 동안만 참아줄 수 없겠어? 그렇게만 하면, 이후로는 무거운 짐에서 깨끗이 해방될 거야."
"무거운 짐…?"
루실은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털렉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띠었다.
"그래."
그는 확고하게 말했다.
"어머니는 당신을 상당히 사랑하고 있어! 사랑을 받는 자에게 있어서, 마음에도 없이 그 사랑에 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은 역시 무거운 짐이 아닐까. 호응은 할 수 없더라도 가엾은 생각은 느낄 수 있을 거야."
털렉은 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원하고 축복하고자 하는 늙은 어머니의 소망을 위해서 루실이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하려는 듯이 보여졌다.
루실은 이런 괴로운 생각을 다시는 하지 않으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이 털렉이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마지막까지 묵묵히 맡은 바를 이행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 루실은 정신이 아득해져서 무의식중에 더 이상 괴로움을 받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나 털렉의 완강함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채 강경하기만 했다.
루실은 머리를 숙이고 한숨을 쉬었다. 털렉의 말대로 이틀쯤은 금방 지나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자기가 없는 사이에 대리인을 내세워 결혼시켰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최후의 축하연에 참석하는 것은 견뎌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앞으로 이틀간이야."
"그것으로 만족해요…"
털렉은 루실의 속삭이는 낮은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고마워."
털렉은 어깨를 쭉 폈다. 짐을 인계받은 것은 루실이 아니고, 마치 자기라고 말하려는 듯싶었다.
루실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털렉의 냉랭한 증오에 가득찬 말을 듣고 오싹해졌다.
"보답으로는, 당신의 역할이 도움이 되어 영광이라고 할 수 있지! 처음에 나의 계획에 협력하기를 거부했을 때에는 적당히 속였던 거야. 당신이 하찮은 여배우였다면 야심을 모르는 새에 보여주었을 텐데. 그렇다손 치더라도, 당신이 약혼을 자기 자신의 야망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이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는 이제 마음이 편해졌어. 며칠 동안이나 쓸데없는 자책감에 휘말려 왔으니까 말이야. 어머니가 점잖게 납득만 해주신다면 다른 장소에서 촬영을 계속하기로 하고 둘 다 오아시스를 떠나 각자의 길을 따로따로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해. 어머니는 설마 속였다고는 생각지 못하실 거야."
털렉의 잔혹한 계획에 루실의 마음은 몹시 상처를 받았다. 털렉에게 있어서 속이는 일은 숨을 쉬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일일는지 모르지만, 털렉이 아까 말한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공동의 죄가 있지 않을까? 루실은 자기혐오에 빠졌다. 자신을 굳게 믿고 있는 털렉의 어머니를 속이는 계획에 한몫한 자신을 생각하면, 루실은 자신이 타락하고 인간성을 상실해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실은 휙 뒤로 돌아서서 문을 향해 달렸다. 아트가 걱정하는 소리를 질러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까닭 모를 눈물이 끊임없이 넘쳐흘렀다. 루실이 방 안에 돌아와 30분도 지나지 못해서 털렉의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그녀는 결코 부인 방에서 나오는 일이 없었고 사람을 자기 방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예사였다. 그것은 그녀가 방 안에 들어섰을 때, 아슈라의 대견스러워하는 외람감으로 알 수 있었다.
"아가씨!"
셀라자드는 잰걸음으로 루실 앞으로 걸어왔다.
"참으로 훌륭해요. 너무 기뻐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그녀는 권하는 의자에 앉자 루실이 당황해 하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듯이 떠들어댔다.
"아가씨가 그렇게 열심히 이 땅의 풍습을 연구하고 있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지. 털렉은 그렇지 않아 자주 책망을 했지만. 그러나 아가씬 용감하게 행동해 주었어. 사막에서 홀로 있다는 게 무섭지 않았나? 털렉이 뒤따라올 거라고 짐작이라도 했었나? 사막의 밤이란 정말 무서운 거야! 게다가 머리의 상처는 정말 불행한 일이었어. 상처는 좀 어때! 지금도 아픈가? 상처에 대해 늦게 물어봐서 미안해요."
따뜻한 동정심에 루실의 마음은 꽃봉오리가 봄의 최초의 따뜻한 햇빛에 닿는 듯 활짝 피어났다.
"이젠 다 나았어요, 어머님."
루실은 애정이 깃든 호칭으로 불렀다.
"좀 피로하긴 합니다만, 곧 회복되겠지요."
"음…"
늙은이의 날카로운 눈은 루실의 부드럽게 웃는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애써 밝은 표정을 보이고 있었으나 눈이 부어오르고 볼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 슬픔을 안고 있음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셀라자드는 문득 말했다.
"털렉은 살롱에서 아가씨 언니와 춤을 추고 있는 모양이지?"
셀라자드는 그 이유를 묻지는 않았지만, 루실에게 무엇 때문에 혼자서 방에 남아 있느냐고 묻는 것임을 깨닫게 했다. 그와 동시에 루실은 뭔가 구실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네, 그렇습니다. 저녁식사 후에는 아트도 저와 함께 있었지만, 전 웬일인지 갑자기 피로해서요."
마음이 아파서 그 이상 속일 수가 없었다. 고개를 떨구고 루실은 어머니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에 닿았다.
"그 샤니라는 아가씨… 그 아가씨는 내 아들을 사랑하나?"
루실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얼굴은 들지 않았다.
"사랑? 글쎄, 저는 잘 몰라요. 샤니 언니는 털렉을 훌륭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루실은 침을 삼키며 말했다.
부드러운 손은 루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현명한 아가씨군. 샤니에 비하면 하늘과 땅의 차이지. 이것 봐요. 털렉도 그 가치를 통찰할 수 있는 현명한 아들이라고 생각하니 나도 기쁘군."
루실은 오싹하여 몸이 굳어졌다.
셀라자드는 날카로운 인식력을 갖추고 있었다. 속이려 해도 헛일이었다. 샤니가 털렉에게 꽤 열을 올리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로서는 바라고 싶지 않은 결혼으로까지 발전할는지도 모를 두 사람의 결속을 위해서 모든 것이 빈틈없이 계획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도 자기가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니 심장 가까이에 무서운 통증을 느꼈다. 털렉의 어머니에 대한 루실의 애정은 그녀에게서 호의를 얻고 있다는 데서 자연스럽게 싹튼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마음에 그리고 있던 상호 동등한 애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 다만 루실이라는 아들의 충실한 아내가 되어 줄 것이라는 노파의 아들을 위한 안도심에 불과했으니까!
조심성 있게 루실은 셀라자드의 손에서 벗어나서 될 수 있는 대로 평정을 유지하면서 창 앞으로 걸어갔다.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것은 털렉의 가슴에 안겨 살롱 창가를 춤추며 지나가는 샤니의 만족감에 넘치는 웃음소리였다.
갑자기 모든 것이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이 들었다. 샤니도, 어머니도, 털렉도 다 잊어버리고 루실은 집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호라스 성을 조금이라도 빨리 떠나서 여기 있는 사람들과 작별해 버리고 싶었다.
셀라자드의 음성이 들렸다. 그러기 위해서 여기를 얼른 빠져 나갈 수 있다면 어떤 요구든지 응해 줄 각오로 돌아섰다.
"모두 너희들을 축복할 수 있는 시간이 언제일까 하고 기다리는 중이야. 과연 언제라야 털렉의 신부로서 여러 사람 앞에 모습을 보일 결심이 서겠니?"
"내일이에요!"
루실은 치밀어오르는 곤혹을 애써 누르며 목쉰 소리로 말했다.
셀라자드는 역시 나이든 사람답게 준비할 것을 이것저것 생각했다. 눈에는 희열에 넘쳐흐르는 눈물이 고였다. 그것도 이기적인 만족감에서일 뿐이었다.
그녀는 기대에 가슴을 부풀리면서 만족스런 걸음으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루실은 혼자서 결심할 수 없어서 침대 앞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앞으로 이틀이면 자유로워진다. 아주 새로운 생활이 기다리는 것이다. 샤니의 지배에서 독립하고,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할 수 있는 단조롭지도 않고 활기에 넘칠 나날이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데 무엇 때문에 참담한 생각에 휘말리고 있단 말인가?
성취하려던 일이 바로 눈앞으로 다가와 있는 것이다. 이틀 후에는 매의 성과도, 잔혹한 성의 주인과도 영원히 작별하게 되는 것이다!
루실은 가까스로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여 걸음을 멈추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최종적인 확인이었다. 공식적인 축복의 의식만 끝내고 나면 출발을 늦출 수 없다는 것을 털렉 자신의 입으로 확답을 받는 일이었다. 그 이상의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루실은 방에서 뛰어나갔다. 홀에 아직도 털렉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듯 음악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털렉한테서 확실한 약속을 얻을 때까지는 잠을 자지 않을 테야!
계단까지 와서 루실은 걸음을 멈추었다. 계단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루실은 부드러운 실내화를 맨발에 걸치고 폭 넓은 대리석 계단을 사뿐히 주의깊게 밟으면서 내려갔다.
살롱이 가까워지면서 음악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웃음소리는 없었다. 사람의 음성이 들리지 않은 것이 루실의 마음을 쓸쓸하게 하였다.
루실은 입구에서 유령 같은 모습을 나타내었다. 가냘프게 야윈 쓸쓸한 듯한 모습을, 홀 중앙에서 정신없이 서로의 육체를 껴안고 있는 두 사람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루실은 자신의 존재를 상실하고 서 있었다.
루실은 놀라움에 숨을 삼켰다. 그 소리가 홀 안을 울린 듯했으나, 정신없이 엉켜 있는 두 사람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는 듯했다. 루실은 돌아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충격으로 발은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샤니의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달링, 언제라야 진실된 사랑을 보여줄 거예요? 언제까지 참고 있어야만 당신은 내 것이 되죠?"
털렉은 샤니의 턱을 약간 끌어당기더니 그 앵돌아진 입술에 살짝 키스를 했다.
"이제 조금만 참으면 돼, 샤니. 이제 이삼 일 후면…"
털렉의 넓은 어깨와 거만한 머리로 루실의 시야는 가로막혀졌다. 그러나 샤니는 털렉의 말에 완전히 용기를 얻은 게 틀림없었다. 몸을 눌러대면서 샤니는 털렉의 목에 팔을 감았다.
"우리는 지금까진 없었던 새로운 콤비가 되는 거죠!"
샤니의 감미로운 음성이 들렸다.
"우리는 세계를 정복하고, 프로듀서들은 경쟁하며 우리를 끌어당길 거예요. 출연료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될 거구요!"
털렉도 흡족해 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 소문을 퍼뜨려 왔었어."
장난처럼 말하고는 그 다음에 약간 몸을 떼며 계속했다.
"오아시스를 빠져 나가면 루실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결심이 되어 있나?"
자기의 이름을 듣고 루실 자신도 놀랐으나, 샤니도 놀라는 눈치였다.
"루실을?"
달콤했던 어조가 날카로워졌다.
"그애 멋대로 하게 놔두겠어요. 물론 꼴좋게 웃음거리가 되겠지요. 앞으론 곁에 얼씬도 못하게 할 거예요. 당신, 알고 있나요?"
샤니는 교활한 어조로 물었다.
"그 얼뜨기 애는 당신한테 홀딱 반해 있다니까요, 글쎄!"
"설마?"
그 한마디에 루실은 심장이 도려내지는 듯했다. 털렉은 아주 관심이 없다는 듯이 자기 앞에 있는 거울에 눈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배우란 말이냐? 괴로움을 당해 가면서 루실은 털렉을 경멸하려고 안간힘을 쥐어짰다.
현실 생활 중의 행동에까지 낱낱이 연구하고 촬영 중인 카메라를 앞에 놓고 있는 듯한 연기를 하고 있다. 그러한 천박한 남자와 어떻게 해서 사랑에 빠지게 되었던가? 루실은 도망치고 싶었지만 운명의 밧줄에 얽매어 있기나 하듯이 그 장소에 못박혀 선 채 철저하게 굴욕의 굴레를 쓰고 있었다.
"그래요!"
샤니는 기세당당해서 음성을 날카롭게 내며 말했다.
"그러나 당신의 기사정신이 그것을 바로 고쳐 준다면 잊어버릴 수도 있을 거예요! 당신이 사막에 있었던 사이에 당신에 대한 평가는 철저해졌어요. 그러나 그것으로써 저 온순한 여자에겐 충분한 거예요. 텅 빈 생애의 귀중한 회상으로서 자랑스럽게 가슴에 묻어 두고 있을 테니까요!"
질투심을 드러내며 던진 말 뒤에는 의혹이 숨어 있었다. 루실은 털렉이 샤니가 의혹을 품은 사막에서의 사건을 어떻게 설명할까 하고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루실은 그 사이에도 완전히 핏기가 가셔진 창백한 얼굴로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털렉의 답변은 희미하게 중얼대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루실은 그대로 입구에 유령처럼 우뚝 서 있었으나, 이윽고 털렉은 샤니를 팔 속에 깊이 끌어안고 긴 정열적인 키스를 퍼붓는 것이었다.
13
그들의 미신에 악마의 눈으로부터 지켜준다는 은빛의 초승달과 별과 기타의 상징을 디자인하여 자수를 놓은 하얀 명주 드레스를 입은 루실은 참으로 순진무구해 보였다.
아슈라는 루실의 주위를 수선스럽게 돌아다니면서 끝없는 기쁨에 젖어 털렉의 어머니가 보내준 보석이 박힌 장식관을 솜씨 좋게 머리에 씌워 놓고 몇 오라기 흘러내린 금발의 머리카락을 정성껏 장식 속에 넣고 있었다. 선물은 또 있었다. 섬세한 조각이 있는 금으로 된 폭넓은 발목걸이로 지금은 루실의 가는 발목에 채워져서 노예의 발과 같이 보였다.
"이것은 아주 대단한 가보입니다."
아슈라는 루실에게 설명했다.
"여행자들이 자주 이런 발목걸이를 탐내어 카이로의 잡화상 같은 데를 뒤져 찾아다니고 있지만, 어느 가문에서나 이러한 가보는 귀중히 보전하기 때문에 찾아낼 수 없어요."
루실은 무슨 관심 있는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아슈라의 눈은 속일 수가 없었다.
만능의 힘을 가진 사막의 매의 눈에 들어서 가장 행복한 신부가 될 사람이 조금도 행복하게 보이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하고 아슈라의 눈은 의혹과 당황을 품고 있었다.
루실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곧 털렉이 와서 자기가 신부를 맞는 데 대한 경의와 존경의 마음을 나타내려는 가족들과 더불어 모여들어 있는 토민들 앞으로 루실을 데리고 가는 것이다.
어린 양 가죽의 희고 부드러운 실내화에 발을 억지로 밀어 넣고, 아슈라가 치장해 준 모습을 보려고 거울 앞에 섰다.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팔찌, 에메랄드 귀걸이, 그리고 이마 한가운데에는 금사슬로 드리운 커다란 에메랄드가 녹색의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외면적으로는 눈부시게 빛났으나 마음속은 불타오르다 식어서 재만 남은 모닥불과 같이 생기를 잃고 있었다.
아슈라가 작고 얇은 천을 갖고 오기에 루실은 손을 흔들어 거절했다.
"베일은 쓰지 않겠어요!"
그날 처음으로 생기발랄한 눈매를 보이며, 루실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이 고장의 전통입니다! 이걸 안 쓰시면 신부로 보지 않게 됩니다."
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두 사람의 말씨름은 중단됐다. 아슈라는 도움받기를 기대하며 문으로 달려갔다.
루실은 사막의 왕자를 맞이하는 감동도 없이 털렉이 방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눈부신 하얀 셔츠와 바지에 핏빛같이 새빨간 웃옷을 어깨에서부터 걸친 털렉은 황홀하게 매력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사막의 기풍을 불어 넣었다. 걸을 때마다 웃옷 밑에서 잘 닦여진 무릎까지 오는 부츠가 빛났다.
털렉의 출현으로 오그라들어야 할 루실이 이때엔 단 한번 어깨를 약간 좁혔을 뿐이었다. 털렉은 루실의 아름다운 모습에 눈이 부신 듯했다.
그러나 이윽고 루실의 태연한 태도에 그의 눈은 험악해졌다.
아슈라는 이제야말로 불평을 터뜨릴 때라고 생각했다.
털렉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아슈라를 제지하고 털렉이 말을 하려고 입을 열려는 순간, 루실이 먼저 말을 했다.
"저는 베일을 안 쓰겠어요!"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털렉이 본 루실의 창백한 얼굴에는 결단코 물러날 수 없다는 반항적인 표정뿐이었다.
루실은 언제든지 답변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지금껏 어떤 일이든지 털렉은 루실을 복종시켰으나, 이 일에 관해서만은 여성의 남성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의 상징 따위는 몸에 걸치지 않으려는 주장을 관철할 결심을 하고 있었다.
털렉이 갑자기 웃는 얼굴을 보여서 루실은 놀랐다. 털렉이 그녀의 주장을 이해하고 심정을 참작해 주었음을 뜻했다. 털렉은 진지한 표정으로 온화하게 말했다.
"베일에 감싸여서 이 나라 여성들은 서양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중요시되며 사랑을 받게 되지. 그녀들이 자기들에게 그것이 가장 유리한 것이라 믿고 있는 습관을 고수한다고 해서 그녀들을 지나치게 경멸할 것은 못 된다구. 루실, 어떤 남자라도 하나님의 낙원에 자기를 위해서 피는 꽃이 한 그루 있다고 믿음으로써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남자가 충심으로 기쁨을 찾아내었을 때, 그 기쁨을 가득히 채워 준 자에게 충분한 보답을 해야 되지 않겠어?"
"털렉, 기쁨이란 것은 향기와 같은 거예요. 현명한 사람은 그 향기를 맡고 즐거워하겠지만, 그것을 삼켜 버리는 것은 못난 사람이나 하는 행위예요!"
루실은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며 비웃었다.
"당신은 나를 못난 녀석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털렉은 한 발짝 큰 걸음으로 내디디며, 루실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털렉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가까이 접근함으로써 그 압박감에 떨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다. 그의 자존심, 몇 세기 동안이나 숭배받고 존경받아 내려온 고대 이집트 왕의 자존심에 통렬한 채찍이 내려 찍힌 것이다
털렉이 그 정도로까지 상처받기 쉬운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떨리는 음성에는 난폭하게 날개를 푸드득거리고 있는 매의 거친 성미가 나타났다.
"적어도 당신은 못난 녀석이 실로 간단한 일에 화를 내고 있는 것을 보고 통쾌해 하고 있겠지? 당신만은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러나 어떤 여성이든 똑같군 그래. 당신도 그렇게 나를 비웃으면서 쾌락을 느끼고 있는 거지!"
루실은 뒷걸음질 쳤다.
"미안해요, 털렉. 공격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말이 앞섰을 뿐이에요."
털렉은 밀려오는 분노와 파도를 타고 난폭한 말을 터뜨렸다.
"이 세상은 못난 녀석 투성이야. 못난 녀석이 되고 싶잖으면, 일생을 혼자 살아가며 거울 같은 건 깨어 버리라고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그, 그런 게 아니고."
털렉의 일시적인 격분은 곧 식어질 것이고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는 것을 모르는 루실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는 그냥 생각지도 않고 내뱉았을 뿐이고, 입에서 나온 말도 어느 때, 어떤 일 때문에 머릿속에 그렇게 떠오른 것이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에요."
거만스럽게 머리를 쳐든 털렉의 그 날카롭고 찌를 듯한 시선을 받으며, 루실에게는 상당히 오랜 기간처럼 느껴지는 동안 그녀는 떨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작스레 털렉이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아주 영리하군."
입술이 이그러지려는 것을 억제하며 털렉은 말을 들려주었다.
"당신의 솔직한 무장 해제 방법은 보통의 지성(知性)보다도 훨씬 귀중하고 훨씬 효과적이지."
루실은 어쩔 줄 모르면서도 그의 웃는 얼굴을 응시했다. 어째서 그의 기분이 바뀌었을까, 그것도 따지고 싶지 않을 만큼 기분이 늦추어졌다. 본능적으로 루실은 한때는 위험한 상태에 있었음을 느꼈다. 그때의 공포를 되살리며, 이젠 절대로 그의 권력에 거역지 않으리라고 여겼다. 그의 놀랄 만한 섬세한 감정을 조금이라도 자극하지 않아야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팔을 폈다. 루실이 그의 팔목에 손을 놓자, 그는 조용히 말했다.
"당신 의사에 거슬린다면 베일을 안 써도 괜찮아. 그러나 얼굴을 여러 사람에게 보이려면 표정을 바꿔야 해. 동정 받는 것을 좋아할 남자는 없어. 나는 여기에서 지옥에라도 들어가는 듯한 얼굴을 한 신부를 데리고 여러 사람 앞으로 나가기는 싫기 때문이야!"
셀라자드도 시녀들도 화사한 드레스로 몸을 감싸고 안뜰이 내려다보이는 발코니 주위에 모여 있었다. 드넓은 공간을 사람들이 메꾸어 성으로 이어진 거리나 길가에는 행렬에 끼기 쉬운 장소를 찾는 사람들이 서로 밀고 당기며 붐비고 있었다.
털렉은 어머니를 향하여 놓여진 두 개의 명주 깔개가 있는 곳까지 신부를 이끌어 오더니 거기 함께 서서 무릎을 꿇고 그녀의 축복을 기다렸다.
루실은 비단 드레스를 입고 숨을 삼킬 정도로 아름다운 샤니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야유하는 듯한 웃음을 띠고 있는 모습을 똑똑히 의식하고 있었다.
예식은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셀라자드는 왕가의 새로운 식구를 맞아들임을 선언했다. 그 영주다운 위엄에는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그러나 그 강철 같은 의지마저도 신성한 자리에 나와 있으면서 기쁜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머리에 각기 올려놓은 손은 떨리고 있었으나, 그래도 영주는 있는 힘을 다해 떨리는 목소리를 억제하고 전통적인 축복의식을 깨끗이 마쳤다.
두 사람이 영주의 말을 되풀이할 때 관중은 조용해지고, 들리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기분으로 이 행사를 필름에 기록하게 한 촬영 기사와 카메라들이 돌아가는 소리뿐이었다.
일어서라고 털렉이 속삭이는 소리에 따르면서, 루실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연기하는 듯하다고 생각했다. 꿈꾸는 심정으로 루실은 털렉과 나란히 발코니의 끝까지 가서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영주가 루실의 손을 잡고 그 손을 털렉의 손에 넘겨 주자 그것을 축복하는 군중들의 환성이 끓어올랐다. 환성은 언제까지나 멈추지 않고 성이 무너지는 것같이 드높게 울려 퍼졌다.
"아주 잘 해주었어!"
털렉은 이미 오그라들대로 오그라든 심장을 더욱 숨 가쁘게 조여 대는 듯한 미소를 띠고 루실의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 루실의 눈에 샤니가 두 사람을 향해서 오는 모습이 보였다. 눈은 질투심에 불타오르고 가식적인 웃음에는 적개심이 깃들어 있었다.
샤니가 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털렉은 들끓고 있는 관중에게 영주가 마지막 손을 흔들어 준 다음, 성에까지 와준 사제(司祭)들을 위한 만찬의 준비가 된 방에 들어가야 한다고 루실에게 일러 주었다.
샤니는 그러나 두 사람에게로 오지 않았다. 두 시간 남짓하게 루실은 털렉의 옆에 서서 유명인사들 앞에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커다란 잿빛의 눈을 반짝이면서 창백한 얼굴의 가냘픈 아가씨를 제나름대로 생각하면서 관찰했다.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은 의식이 끝난 뒤 만족해하며 돌아갔다.
모든 사람들이 피라밋처럼 높이 쌓아 올려진 선물을 바라보면서 샴페인을 마시고 있는데, 그곳에 그때서야 간신히 두 사람 가까이로 올 수 있었던 샤니가 나타났다.
털렉이 은빛으로 조각된 말굴레의 훌륭한 세공을 가리키고, 루실은 수줍어하면서도 자세히 살펴보려고 부드러운 가죽을 주무르기도 하며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는 때였다.
사람들 앞에서는 연기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샤니는 알고 있을 터인데, 두 사람이 서로 사이좋게 정신없이 오손도손한 광경을 보고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듯했다.
"이젠 다 끝났어요!"
샤니는 그 태도로 보아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는 듯했다. 털렉의 팔을 잡더니 간청하는 듯이 말했다.
"소원이에요, 달링. 이젠 저를 여기에서 밖으로 데리고 나가 주세요. 이런 주제넘은 연극, 당신도 이젠 싫어졌겠죠?"
루실의 얼굴은 새빨갛게 되었다. 손님들의 호의에 찬 인사를 받고 루실은 잠시 동안 신부다운 기분에 젖어 있었다. 이 값진 단지, 명주 직물, 채색이 풍부한 깔개를 성 안의 어디에 놓으면 좋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털렉의 입장에서도 이런 때에 방해를 해서 되느냐는 듯이 샤니의 손을 뿌리치며 날카로운 눈으로 흘겨보았다. 그리고 털렉은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내일을 맞이하려면 오늘은 보내야 해. 사람들이 떠나갈 때까지 참고 기다려 줘. 사막인들도 점점 시대의 변천에 익숙해져 가지만 아직도 신랑이 두 여자를 팔에 끼고 있는 모습을 받아들이기에는 시기상조라구."
털렉의 말은 적중했다. 여기저기에서 내용을 알고 싶어 하는 시선이 집중되었고 용서할 수 없는 샤니의 무례한 태도에 놀라는 사람들이 떠들썩하는 것을 루실은 느꼈다.
이윽고 사람들의 소란을 넘어서 셀라자드의 음성이 들려왔다. 목소리의 톤을 높여 무엇인가 지시하고 있었는데, 루실에게는 그 의미를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는데 젊은 남자들이 거기에 응했다. 그들은 환성을 지르면서 앞으로 나오더니 털렉과 루실을 감싸고 힘찬 소리와 함께 원을 만들어 그들의 간격을 좁히면서 점점 좁혀 들어오는 둥그런 굴레 속에서 두 사람을 꼼짝못하게 했다.
"큰일났구나!"
털렉이 숨을 삼키면서 그렇게 재빨리 말하는 소리를 루실은 들었다. 그리고 겨우 틈을 내서 말했다.
"이렇게 되어서 미안해. 깜빡 잊었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들이 둘러쌌다고 생각하는 사이에 루실은 발목부터 들어올려져서 팔의 파도 위에 올라갔다. 그러나 루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털렉도 같은 경우를 당했다. 이제부터 어떻게 되어질는지 털렉은 환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두려워할 것은 없었다. 그래서 히죽히죽 웃었을 뿐이다. 루실이 들어 올려지고 대소란이 일어났으나 루실을 받들고 있는 손에는 절대로 부상을 입히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가 되어 있었다.
숨도 못 쉴 속도로 그들은 계단을 뛰어올라 복도로 빠지더니 처음 보는 문 앞에 멈추어 서서 루실을 팔에서 내려놓았다. 털렉은 우스꽝스러운 듯, 하지만 어쩔 방도가 없이 웃는 얼굴을 보였다. 일치단결된 젊은이들의 힘에 밀려서 털렉은 어쩔 줄 모르는 루실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루실은 다시 들어 올려졌다. 그러나 이번은 털렉의 팔에 안겨서 사치스럽게 꾸민 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푹신한 커다란 침대가 놓여져 있었다. 루실은 앞으로 일어날 사태에 놀라며 얼른 몸을 긴장시켰다. 털렉은 루실을 베개와 베개 사이에 내려놓고 히죽히죽 웃고 있는 남자들 앞으로 걸어가서 그들은 내쫓고 문을 발로 차서 닫았다.
털렉이 되돌아와 루실에게 덮치려 하자, 루실은 몸을 일으키려고 버둥거렸다. 루실은 털렉이 이런 경우를 당하게 된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하고 그 말을 찾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랑 친구들이 '신부의 처녀를 빼앗는' 의식을 위한 자존심을 확보해 주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슈라가 대강 이야기를 해주었었다.
루실은 이야기를 하는 일 자체까지도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될 정도로 이 야만적인 관습을 따른다는 것을 비웃으며 경멸했다. 그러나 루실은 지금 털렉과 단둘만이 남겨져 소원을 풀고 싶은 신랑 편이 되어 세상물정 모르는 신부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 조성한 분위기 속에 갇혀 있는 것이었다.
볼이 타는 듯이 뜨겁게 느껴졌다. 루실은 침대에서 뛰어내려 털렉에게 달려들었다.
"당신 어머니에 대한 보답은 이것으로 끝난 걸로 알아주세요, 털렉. 당신이 뭐라고 하든, 무얼 하든, 이 위장 결혼에 관해서는 이 이상 나를 끌어들일 수는 없어요!"
두툼하고 짙은 눈썹이 아래로 처졌다. 그러나 루실은 불꽃이 번득이고 그것이 그을려져 변해 가는 것을 보았다. 그 거친 성미에 불안을 느끼며 갑자기 전율을 일으켰다.
털렉이 저고리 어깨에 붙어 있는 사슬을 비틀어 떼어 놓자 그 힘에 그의 상체는 갑자기 뒤로 젖혀지고 웃옷은 엷은 색조의 융단 위에 피의 바다처럼 떨어졌다. 루실의 눈이 그것을 쫓아갔다. 긴 장갑을 던진 것과 같은, 그러나 놀랄 만한 행위에 루실은 우뚝 서 있었다. 털렉이 웃었다. 루실은 뒷걸음질 쳤다.
웃옷을 벗어 던지는 속도로 세상에 익숙해진 가면을 벗어 버린 야만인. 거만하고 독점욕이 강한 사막의 사나이 곁에서 얼른 달아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마음은 조바심쳤으나, 부드러운 의미있는 듯한 웃음에 루실은 얼어붙은 듯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매같이 재빠른 속도로 다가오더니, 털렉은 강철 같은 손으로 가냘픈 루실의 어깨를 잡아 끌어당겼다. 루실의 이마는 바로 털렉의 입술 높이에 있었다.
"무서워할 것은 없어, 나의 신부. 자, 어서 이 팔에 평안히 안겨 보면 부끄러워하는 마음도 곧 흥분으로 변할 거야. 그리고 나서 거센 정열에 몸을 내맡기고 불태워 보도록 하지."
루실의 약한 마음은 어쩔 수 없이 흔들렸다. 털렉의 팔에 조여 들어 가면서 루실은 털렉이 만족스럽게 목구멍을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얼마나 약한 존재냐! 그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쾌락을 추구하기만 하는 악마 같은 털렉에게도, 가급적으로 가까이하지 않을 결심을 무너뜨리고 싶은 감정에 휩싸이고 마는 자신에게도 혐오를 느껴 루실은 털렉의 팔을 물리치고 손이 미치지 못할 곳까지 몸을 피했다.
이마에는 작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지금 한 말은 취소하세요. 당신이 그렇게 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바보스런 연극을―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그래요― 다시 반복할 생각은 없어요!"
여태껏 끊임없이 괴로워했던 일을 말하는 것만도 마음을 갈기갈기 찢기우는 듯싶었다. 그러나 루실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시늉을 하면서 성에 미숙한 까닭에 실제로 눈물까지 흘렸던 다감한 소녀에게 털렉이 심어 놓은 인상을 씻어 버리고 싶었다.
털렉은 루실을 쫓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누르고 진실을 가장하며 말했다.
"나는 당신을 아내로 삼고 싶어, 루실. 지금 이때만은 아니야, 일평생 동안! 당신은 왜 피할 수 없는 숙명과 싸우고 있지? 당신도 우리가 얼마나 잘 해나가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을 텐데. 우리는 함께 행복을 누리게 되는 거야, 루실. 둘이 합치면 완전해져. 아마 당신은 식이 너무 간단해서 신용하기가 어려운 모양인데, 그렇다고 해서 당신은 그것을 무시하면서까지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는 없을 거야!"
멍청해져 핏기를 잃은 얼굴로 루실의 커다랗게 뜬 눈이 털렉을 지켜보았다. 털렉이 한 말은 진실이었다.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죄악에 틀림없다. 루실은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래도 아직은 샤니가 최고의 권위를 휘두르는 밑에서 짓밟히고 싶지는 않았다.
루실은 털렉의 입술에 눈을 주고 있었다. 그 입술로 얼마나 정열적으로 샤니에게 키스를 했을까. 어떤 말로써 샤니를 유혹했을 것인가. 그리고 샤니가 말한 그녀 자신의 장래의 계획을 털렉은 조용히 동의하면서 듣고 있지 않았는가. 잔인한 매가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가 있을 수 있을까? 털렉은 과거의, 또 미래에 대한 배신의 보상으로써 결혼을 신청하고 있는 것일까?
완전히 냉정을 되찾은 루실은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답변을 늘어놓았다.
"당신의 신청에 감사하다고 해야 할는지 모르지만, 털렉. 그렇겐 생각 안 돼요. 이건 나에 대한 모욕이에요! 이 세상에 남자는 당신 한 사람뿐이라고 해도 나는 당신과 결혼 안해요. 당신을 알고 있는 이상 절대로 행복할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털렉이 동요하는 빛이 보인 것도 그의 연기력이 내놓는 하나의 기교였다. 루실은 기세를 꺾지 않았다.
"방패막이로 나와 결혼하려는 것은 이제 잊어 주세요. 샤니는 독점욕이 강하죠. 그러나 그녀를 대단하게 여기는 일이 가장 현명하리라는 생각을 곧 하게 될 거예요."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찾아왔다. 루실은 내키지 않는 생각으로 마음이 들뜬 듯이 스커트의 은실을 손가락으로 매만지고 있었다. 털렉은 좀처럼 말을 꺼내지 않았다. 털렉의 눈이 자기의 얼굴에 쏠리는 것을 의식하면서 루실은 드레스의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침묵은 언제까지나 계속되어 갔다.
털렉의 음성이 정적을 깨었을 때, 고요 속에 묻혀 있는 루실은 깜짝 놀랐다. 패배는 참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처럼 털렉은 이를 갈면서 말했다.
"당신이 뭐라고 해도 내 말을 듣게 할 거야! 오아시스에서는 아내가 되기 싫어하는 여자 같은 건 아무도 돌아보지 않아. 고집쟁이라는 표적이 붙을 뿐이지!"
털렉은 이러한 말을 내뱉고는 루실에게 매달려 힘껏 입술을 눌러댔다. 무릎이 떨려 넘어질 듯해서 루실은 갑자기 털렉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털렉은 키스를 퍼부으면서 절대로 자신을 양보하려 들지 않는 여자가, 자기 지배 밑에 눌리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가 만들어 내는 모든 소리에 무한한 생명력을 주입시키려는 대작곡가와도 같이 루실을 완전히 자기의 지배하에 두려고 모든 수단을 다 써서 능란하게 그녀를 애무했다.
털렉이 미친 듯이 날뛰던 욕망을 겨우 억제했을 때, 루실은 뼛속까지 떨고 있었다. 괴롭히기 위한 키스에 루실은 절대로 응하지 않았다. 애무에는 몸을 긴장시킬 뿐이었다. 털렉이 손을 대면 금세 타오를 것 같은 속절없는 자기의 마음과 루실은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털렉은 거센 파도처럼 호통을 치면서 루실의 머리에서 핀을 뽑고, 보석을 사방에 던져 버리고, 금발을 틀어쥐었다. 그리고는 그 머리를 자기의 가슴에 댈 때까지 비틀어 굽혔다.
"지독한 고집쟁이군!"
루실이 괴로워하는 것을 조롱하면서 분한 듯이 말했다.
"육체는 미칠 지경으로 유혹에 끌려가고 있으면서도 용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같은 눈으로 나를 경멸할 수 있군!"
털렉은 갑자기 루실을 밀치고 큰 걸음으로 창가로 걸어갔다.
루실은 휘청거렸다. 주먹을 폈다 쥐었다 하면서 털렉은 감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괴로워했다.
루실은 거센 감정의 소용돌이에 지쳐, 침대까지 겨우 몸을 끌고 가더니 비단 이불 위에 몸을 던지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고통을 빠져 나온 반동으로 머리에도, 손에도, 그리고 발에도 파도쳐 오는 소리가 들렸다. 간격을 둔 저쪽에서 무섭게 억제되어진 털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든지 마음내킬 때 오아시스를 나가는 게 좋겠어. 이젠 당신을 붙들어 둘 이유는 하나도 없으니까…"
루실의 마음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간신히 생각대로 되는구나 하고 다행스럽게 여겼다.
"고마워요."
단숨에 말하고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털렉은 방을 나가려고 문 앞까지 가서 돌아다보며 말했다.
"사랑의 행위가 꼭 경멸스런 것만은 아니야. 당신은 사막에 있을 때, 우리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느냐고 물었어. 내 대답이 오해를 샀는지도 모르지. 나는 당신을 사랑해 주려고 했었지. 수치스러운 일이야. 그러나 불행히도 당신이 기절해 버렸기에…"
털렉의 태도는 또다시 표변하여 세상에 익숙해진 인간으로 돌아왔다. 자기 자신의 명령만 듣고 싶어 하는 사막의 야만인은 완전히 그림자를 감추었고, 거기에는 세상 일반적인 관습에 초조해 하면서도 아직 그 규정을 감수하려는 온건한 사내가 되었다. 듣고 싶었던 말들이 차례차례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그렇게 잔인한 덫을 꾸밀 수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럼, 당신도… 나도… 아무것도?"
말은 중단되었으나 잿빛의 눈은 확인을 구하고 있었다.
"그래, 우리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어!"
루실의 떨리는 입술과 놀라는 눈을 털렉은 태연하게 무시할 수 있는 뻔뻔스러운 방탕자였다. 루실은 천진난만하게도 한 가닥 희망을 걸고 기대에 빛나는 눈으로 털렉을 보았다.
"그러나 어째서죠?"
루실은 속삭였다.
"저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하면, 당신에겐 어떤 이익이 있죠?"
털렉은 가볍게 어깨를 움츠렸다.
"내기를 하다가 패배했을 뿐이야."
털렉은 간단히 패배를 인정했다.
"승부에서 이기는 것이 꼭 행운은 아니지. 지식, 여태까지의 내기에서 축적된 총체적인 '기술적 지식'과 상대의 힘을 계산하는 능력이 문제인 거야. 이번만은 보기좋게 상대자를 잘못 봤어. 당신이 그렇게까지 반항할 줄은 몰랐고, 내가 자신의 설득력을 지나치게 믿었던 것 같기도 해. 그런 건 상관 없어. 그러나 나의 기대는 어긋났고 당신은 나에게서 완전히 떨어졌어. 아니, 우리들의 사이를 이어 주고 있는 것은 당신의 증오뿐이었다고 느껴지지만, 이러한 나의 생각은 정확한 것일까?"
털렉의 노골적인 말투에 루실은 말이 안 나왔다.
서서히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다. 비웃음을 띠고 있는 털렉의 입술을 보니 뺨이라도 때려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 해도 그에게서 받은 고통이나 분노를 씻어 버릴 수는 없었다.
루실은 그 충동을 억누르고 분노를 짧은 말로 메꾸었다.
"아주 비열한 사람이로군요!"
털렉은 루실의 비난을 가볍게 허리 굽히며 받더니 문에 손을 뻗치면서 최후의 질문을 던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석연치 않아. 왜 내가 거절당해야 했는가, 그 이유를 듣게 해줄 수 없나? 나에게 당신은 최초의 패배를 안겨 주었어. 거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당신의 마음은 야심만으로 꽉 차 있었던 것인가? 다른 여자였다면 곧 다른 남자를 연상할 수 있겠지만, 당신만은 그렇게는 생각 안 돼."
루실은 자랑스러운 듯이 머리를 들었다.
"왜 그런 얘길 하시죠?"
털렉의 일방적인 상상에 화가 나서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짙은 눈썹이 놀란 듯 꿈틀거렸다. 이윽고 그 눈썹이 내려지더니 칼날같이 날카롭게 응답했다.
"다른 남자가 당신 마음을 끌 수 있단 말인가? 사랑이라도 하고 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어! 누구하구? 그런 녀석이 있다고는 짐작도 할 수 없는데."
"아트예요."
루실은 간신히 목쉰 소리로 말했다.
털렉은 아연실색했다. 그는 루실의 말을 간단히 믿었던 것이다. 루실은 놀랐다. 털렉은 입도 벌리지 못했다. 눈은 충격으로 붉게 충혈되고 입은 옆으로 길게 꼭 다물어 마치 조각같이 무표정하게 되어 버렸다.
14
아트는 공항까지 루실을 에스코트해서 가겠다고 주장했다.
먼저 카이로까지 가서 그전에 일행이 숙박했던 호텔에서 늦은 식사를 했다. 공항에 도착하기까지는 듣고 싶은 얘기가 산더미같이 쌓였지만 별다른 얘기는 나누지 않았다.
루실이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충격이 어떻게든 돌아갈 수 있게 도와 달라고 부탁받은 날부터 사흘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남아 있었다.
공항의 로비에 앉아서 다리를 꼬고 아트는 이마에 깊은 주름살을 짓고 구두코의 작은 닳아 버린 흠집을 지켜보고 있었다.
루실은 읽는 체하고 있던 잡지를 덮어 버리고, 아트의 팔에 손을 걸쳤다.
"저에 대해선 걱정 안하셔도 돼요, 아트. 듣고 있어요?"
루실은 아트의 시선을 받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당신도 털렉의 어머니 때문에 한패가 돼서 연극을 한 건 아니겠죠, 그렇죠? 그것을 생각해 준다면, 아트."
루실은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며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진심으로 털렉에게 끌려간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을 테죠?"
"바로 그걸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아트는 똑똑히 말했다.
"내 생각으로는 당신과 그는 아주 걸맞는 상대라고 느껴졌어. 털렉에게는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해. 오랫동안 그는 자기와는 맞지 않는 여성에게만 쫓겨 다녔었지. 그녀들은 그의 아내가 되고 싶어서 거머리같이 달라붙었어. 그때 당신을 만났던 거야."
아트는 담백한 마음으로 이야기했다.
"당신이 뭐라 해도 나는 그날 밤에 배 위에서 당신과의 약혼을 선언한 털렉이야말로 행복한 사나이였다고 지금도 믿고 있어."
"허튼소리 그만두세요!"
갑자기 숨이 막히는 듯한 생각이 나서 잠시 손가방을 들여다보면서 얘기할 힘이 솟아오르기를 기다렸다.
"약혼은 샤니에 대한 방위책이었던 것에 불과해요. 그녀에게 몹시 시달려 왔었기에 방패가 필요하다고 깨달았던 거예요. 그래서 저를 이용해서 자기의 귀중한 자유를 잃지 않으려고 생각했던 거라구요!"
아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 설명은 맞지 않아! 여성을 다루는 솜씨로는 털렉을 따를 자가 없어. 그의 능숙한 재주에 몇 번이나 탄복해 왔으니까 알고 있다구. 그러니까 아무 방책이 없었다는 말은 이해할 수 없어."
루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일어났다. 아트가 사실을 인정해 주지 않으면 루실의 출발은 지연될 것이다.
오아시스에서는 샤니와 털렉이 실제 이상의 정열을 쏟아 넘치게 한 사랑의 장면 연습을 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처럼 내키지 않는 작별 인사를 했을 뿐, 그의 눈앞에서 루실을 떠나게 한 남자에게 무슨 오해를 한 거라고 말하는 아트가 어리석게 생각되었다.
그때 루실이 탈 비행기의 출발 통지가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왔다. 구원받은 기분으로 루실은 턱을 추켜들었다. 아트가 작별의 키스를 해주었다.
"안녕, 아트."
눈물이 흘러넘쳐서 루실의 음성은 중단되었다.
"여러 가지로 우정을 베풀어 줘서 정말로 고마웠어요. 평생 잊지 않고 간직하겠어요. 런던에 돌아가면 잊지 말고 전화를 꼭 주세요, 네?"
"잊지 않겠어."
아트는 루실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굳세게 말했다.
"그리고 명심할 일은…"
아트는 심각하게 루실을 붙잡고 흔들었다.
"기분 좋은 여행을 하도록 해. 힘들게 이루어진 출발이니까, 모든 것을 즐겁게 보답하도록 해요."
"물론이에요."
루실은 생애의 한 페이지에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한 부분을 장식해 준 한 인물을 남겨 두고 어깨너머로 소리쳤다.
루실의 책상 위에 산처럼 쌓여 있는 것은 일 년 동안 일한 성과였다.
최후의 장을 지금 막 타이프라이터로 끝내 버린 것이다. 루실은 깨끗이 타이프 된 원고를 추고하면서도 예상했던 탈고의 감격은 없고, 그 대신에 흥미가 희미해져 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눈물을 뿌리면서―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아트의 생각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는 사치스럽게 해도 괜찮아."
아트가 퀸 엘리자베드의 호의 <여왕 앤>이라는 특별실을 루실을 위해 예약하려는 것을 루실이 반대했을 때, 아트는 그렇게 주장했던 것이다.
"도착했군 그래."
아트는 호텔에 돌아오자마자 루실에게 설명했다.
"여행사로부터 배가 파리에서 늦어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곧 생각해 내었어! 그렇잖아? 비행기로 급히 날아서 다음은 호화로운 배로 이삼 주일간의 여행을 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당신에게 필요한 청량제도 될 것이고, 런던에 도착하면 곧 출판사에 넘길 수 있게 최후의 장을 타이프 칠 시간도 갖게 될 수 있다구!"
그 당시에는 훌륭한 생각이라고 탄복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잊어버리기는커녕 전과 같은 환경이 괴롭기 이를 데 없는 추억을 차례차례로 회상시켜 갔다.
너무나 괴로웠기에 빠르고 무정한 비행기로 돌아오겠다고 왜 고집을 부리지 않았던가 하고 자기의 약한 마음을 후회했다.
루실은 책상에서 일어나 전망용 창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햇빛이 파도 위에서 넘실거리어 새파란 바다에 은빛 구슬의 모양을 던지고 있었다. 배 속에는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서 있는 곳에서도 물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배의 추진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루실의 공허한 무감각에 빠져 버린 육체와 루실의 마음을 뺏아간 남자와의 거리가 점점 멀어감을 슬픈 기분으로 느꼈다.
이때 무거운 발소리가 복도를 걸어서 루실의 방으로 가까이 오는 것을 듣고 흠칫했다. 문 밖에서 발소리가 멈춰졌다.
루실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으나, 그 발소리가 옆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듣고 조금은 긴장이 풀렸다.
일 주일 동안 몇 번이나 같은 일이 생겨나서, 루실은 그때마다 이번만은 문을 노크하면서 약간 악센트가 붙은 음성으로 자기 이름을 부르지나 않을까 하고 싫지 않은 기분으로 기대했다. 물론 루실은 약간 환상적으로 되어 있었다. 식사까지도 방을 나가서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루실은 다만 옆방에 있는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는, 발소리를 울려 주는 모르는 선객 대신에 그전처럼 털렉이 그 방에 있다고 생각하고 싶은 병적인 기대에 사로잡혀 있었다.
루실은 전신에 전율을 느꼈다. 이 이상 방에만 처박혀 있으면 괴로운 생각만 더해갈 것이다. 오늘 밤만은 정장을 하고 배에 승선한 이래 처음으로 식당에 나가 식사를 하리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모르는 옆방의 선객과 얼굴을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루실은 약간 정성들여 치장을 했다.
드레스는 털렉이 특히 좋아하던 것을 입었다. 아주 엷은 크림색의, 장식이 붙은, 무엇보다도 여성다운 부드러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주름잡은 스커트에 벨트가 꼭 조여져서 투명한 긴 옷소매는 손목에 와서 착 붙었다. 얼마 안 되는 보석 중에서 마음에 꼭 드는 것이 좀처럼 골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윽고 루실의 손가락은 자석에 붙어 끌려가듯이 털렉의 어머니가 보내 주었던 금으로 만들어진 발목걸이에 뻗쳤다.
루실은 그것을 팔꿈치 위에 끼었다. 투명한 천을 통해서 반짝이는 금팔찌는 안개 낀 달빛을 상상케 하여 루실의 기분을 밝게 했다.
"축복 의례식 때 몸에 간직했던 발목걸이는 너를 지켜줄 거야."
셀라자드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 시간부터 그 수호는 너의 소유가 되고 너만이, 혹은 너의 자손이나 시집갈 나이가 된 딸이 가지게 되는 거란다!"
루실이 돌아갈 것이라는 말을 듣고 조용히 허락해 주던 것을 생각하니, 루실은 아직까지도 가슴이 아팠다. 루실은 보석 상자를 보관하면서 그때 일을 회상했다.
"아니, 얘야. 작별 인사를 하려고 왔니? 털렉한테서 네가 돌아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무척 섭섭했단다. 그러나 그 뒤에 항상 자기의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일에 열중하는 요즘 젊은 여성들의 사고방식을 몰랐던 내가 옹고집쟁이였다고 생각했어. 너는 글을 쓴다지?"
마님은 보석을 가득히 붙인 손가락으로 갈아서 잘게 빤 핑크색의 아몬드를 채워 넣은 대추열매를 집어 들면서 태연하게 얘기했다.
"네…"
루실은 이처럼 순순히 들어줄 줄은 몰랐었다. 그래서 도리어 말이 막혀 버렸다. 루실은 비난받을 것이고,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는 완고한 고집에 부딪힐 것이라고 생각하고 눈물로써 호소할 것을 각오하고 그녀를 만났던 것이었다.
"영국에 도착하거든 알려 다오."
셀라자드는 장미꽃 이파리를 띄워 놓은 물이 하나 가득히 들어 있는 그릇에 손가락을 넣고 씻으면서 말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루실은 가볍게 응대를 하고 계속했다.
"그러나 떠나기 전에 사과드려야 될 것 같기에."
"그럴 필요는 없어요!"
셀라자드는 미소로 응대했다.
"털렉이 얘기해 주었단다. 이해할 수 있어."
루실은 너무나 손쉽게 허락을 받게 되자 차마 견디어 낼 수 없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그 방 안을 나오려고 했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뜻밖에 소리를 질렀다.
"몸을 지켜주는 발목걸이는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녀야 돼요. 따로 떼어 놓으면 재난이 몸에 닥쳐올지도 모르니까."
루실은 사람들로 흥청대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곧 대리석의 분수 곁에 놓인 테이블로 안내되었다.
분수는 이 방의 하이라이트였다. 돌에 반짝반짝 빛나는 물이 성같이 보였다. 낮 동안의 더위를 아래층의 커다란 방에서는 대리석 인물상의 입에서 연못에 조용히 떠 있는 수련화에 뿜어져 내리는 물로 식혀가고 있었다.
루실은 평소와 같이 밀크와 샌드위치를 방으로 갖고 오게 할 걸 그랬다고 생각하면서 과거에 묻혀 있던 마음을 연장시키듯이 메뉴를 보았다.
구미를 끌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무리 훌륭한 솜씨로 만들었다는 요리도 내키지 않는 식욕을 돋우어 주지는 못했다.
"오믈렛만 주면 돼요."
한가족끼리의 회식, 여행을 하면서 사람들과 사귀고 싶어 하는 여유를 즐기고 있는 사교적인 손님들, 테이블마다 즐거운 듯한 사람들로 만원을 이룬 속에서 루실만이 혼자 있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한 스츄워드에게 루실은 주문했다.
식사를 끝내자, 그 이상 여기에 남아 있을 필요는 없었다. 스츄워드가 여왕실에서 캬바레의 여흥이 시작된다고 가르쳐 주었다. 루실은 대답만은 했으나 혼란한 기분으로 여흥을 즐기고 싶지는 않았다. 떠들썩한 군중 속에 묻히기보다는 산책을 하려고 결심하고 책을 가지러 방으로 돌아갔다.
루실은 이제는 사람의 그림자가 거의 사라진 갑판을 한가롭게 거닐었다. 여기저기 배의 난간에 기대어 서서 은빛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허전한 사람의 그림자는 달빛 속에 길다랗게 떠올라온 살아 있는 유령과 같이 보였다. 밤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은 루실의 불만에 가득찬 마음을 그대로 들뜨게 하면서 어두운 하늘을 미끄러져 가는 달빛을 은은하게 감싸 주고 있었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생각에 들뜬 루실은 밝고 흥청거리는 소음이 들리는 방향으로 갔다. 어떤 상대자이든 혼자 있기보단 낫다고 생각한 끝에 마음 내키는 대로 무엇인가 마음을 흥겹게 해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방을 향하여 걸어갔다.
입구로 한 발짝 들어간 곳에서 루실은 멈칫했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남자들뿐이었다. 허리 굽힌 남자들의 머리 위에 담배 연기가 맴돌고 있었다.
눈은 카드를 쥔 손에 쏠린 채 한쪽 빈손으로는 와인이 담긴 잔을 잡았다. 마룻바닥에 깨끗한 융단을 깔아 놓은 방 안은 한적한 분위기 속에 고요했고, 모두가 내기를 하느라고 한창 열중하고 있었다. 서로가 상대방의 실력을 알아내려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방 안을 나오려는 바로 그때였다.
루실은 대단히 오만스럽게 쳐든 검은 머리를 보고 놀랐다. 심장이 거세게 뛰어올랐다. 당황해서 방을 뛰쳐나왔지만 몇 발짝도 채 못 가서였다. 남자는 머리를 들더니 놀라서 어리둥절한 친구들에게 급한 소리를 외치며 의자를 제치고 빠져 나왔다.
루실은 인기척이 없는 복도로 나와 자기 방을 향하여 달렸으나 그 마음에는 절망감이 무겁게 짓눌러 왔다. 검은 머리와 넓은 어깨만 보고서도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된다면 대체 이 세상에 그 어느 곳에서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희미한 어둠 속에 분명히 무엇인가 있었다. 루실은 허둥지둥했다. 한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고 생각하자 어둠 속에서 뻗쳐 온 팔 속에 안기고 말았다.
"잘 보지 않고 걸으면 다쳐요."
루실은 꿈인가 현실인가를 분간하지 못하며 주위에 시선을 돌렀으나 루실을 안고 있는 팔에는 똑똑히 기억이 되살아나며 눈은 그리움에 젖은 장난기가 떠오르고 있었다.
"털렉!"
루실은 털렉이 갑자기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두려워하는 듯이 속삭였다.
"어떻게…? 왜…? 알 수 없군요."
털렉의 여유만만한 웃음소리가 바다 위로 퍼져갔다.
"얘기하자면 길어. 복잡한 사정이 있어. 어때,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얘기하잖겠어. 당신 방으로 갈까, 아니면 내 방으로 갈까?"
"제, 제 방으로…"
털렉의 갑작스런 출현에 아직도 마음이 흔들려서 루실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당신 좋을 대로 하지."
털렉은 루실이 어쩐지 자기 방으로 들어가기를 꺼리는 것이 우스꽝스러운 듯 웃으며 승낙했다.
털렉은 루실의 방으로 함께 가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했다.
"며칠 동안이나 나는 당신을 감시하고 있었지. 몇 번이나 문을 노크하려고 했지만 당신의 일을 방해할까 봐 이 여행이 끝날 때까지는 반드시 당신도 모습을 나타내리라고 그렇게 스스로 타이르며 참아 왔었어."
방 앞에 멈춰서더니 털렉은 루실의 손을 꼭 잡았다.
"오늘 밤 밖으로 나올 기분이 되어 줘서 나는 정말 기뻐요."
루실의 마음은 소용돌이 속에 휩싸여서 숨이 막히는 듯했다.
털렉의 속마음을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털렉의 달콤한 말에 모욕을 당하는 것도 이제는 다 용납할 수 있었다. 털렉은 언제나 자기 뜻대로 행동했었다. 루실은 털렉이 여기 있게 된 경위를 설명 듣고 싶어 못 견디었으나 조급한 마음을 꾹 누르고 무엇보다도 털렉을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간 것이다.
그전에는 샤니의 초대를 받아 거기 앉았던 의자에 지금 다시 털렉이 한가롭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괴로워졌다. 마실 것을 준비하는 자기의 동작 하나하나에 털렉의 눈이 쏠려져 있음을 느끼면서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윽고 털렉은 말로는 나타내지 않았지만 루실에게도 침대 옆의 긴 의자에 앉으라는 듯이 권하고 있었다. 루실은 침착해지지 않는 기분으로 긴 의자의 끝에 앉아서 음료수를 마시며 초조한 듯이 말했다.
"어서 얘기해 주세요!"
털렉은 잔을 가까운 테이블에 놓고 재치있게 움직여 두 사람의 간격을 좁혔다. 루실은 뜻밖의 행동에 놀라며 일어섰다.
털렉은 깊숙이 쿠션에 기대며 안쪽 호주머니에서 담배 케이스를 끄집어 냈다.
"불은 있어?"
털렉이 중얼거렸다.
"급해서 라이터를 놓고 와 버린 것 같아."
루실은 얼른 테이블 라이터를 갖고 왔다.
루실이 털렉의 곁에 라이터를 놓자 털렉의 갈색 손가락이 루실의 손목을 잡았으므로, 루실은 털렉의 곁으로 바싹 끌어당겨지고 말았다.
"어때?"
털렉은 싱긋 웃으며 물었다.
루실은 털렉의 교묘한 솜씨를 당해낼 수 없어 주먹을 꼭 쥐었다. 털렉은 여태까지 몇 번이나 이러한 연기를 해왔을 것이다. 그래서 루실은 털렉이 자기의 소박성에 기쁨을 찾아내기 시작하자 반항적으로 나갔다. 털렉은 갑자기 소박한 음식에 식욕을 느낀 미식가와 같았다.
루실은 냉정하게 말했다.
"얘기를 나누자고 여기로 왔어요.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이 배에 탔는지, 아직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았잖아요."
털렉은 얼버무리려다가 주둥아리를 더럽힌 아랍의 매를 상상케 하는 웃음을 띠더니, 곧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촬영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털렉은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다시 그것을 낙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목적이야 어떻든 촬영 도중에서 촬영장을 떠난 것은 그것에 대한 이해관계가 있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렇게 중요한 시기에 당신이 빠졌다는 사실을 알면 아트는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털렉은 여유만만하게 루실을 보고 있었으나, 이윽고 루실을 깜짝 놀라게 하는 말을 했다.
"사실은 나를 초조하게 만든 건 당신이야. 아트는 내가 빠진다는 사실에 상당히 당황했어. 그는 '내 인생의 중요한 고비'라고 말했었지."
"그래요…"
루실은 이제 이만큼 높은 곳에까지 올라온 이 남자가 정복하려는 산정은 아직 얼마나 먼 곳일까 하고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한 가지 의문이 떠올라서 루실은 머리를 들었다.
"그렇다면 왜 배를 탔어요?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면, 비행기 편이 좋잖아요?"
털렉은 일어서서 루실을 곁으로 끌어당겼다. 털렉의 강하게 끌어가는 눈의 광채는 애매한 답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휴양이 필요했어."
털렉은 간단히 대답했다. 털렉이 루실의 볼을 부드럽게 손가락으로 찌르면 의문은 깨끗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이런 기회는 두번 다시 없을 거야. 그러니까 둘이서 한가롭게 배의 여행을 즐기는 게 좋지 않겠어? 아무것도 묻지를 말고 나도 아무런 대답을 않겠으니 함께 놀고 유쾌하게 지냅시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지?"
털렉이 이렇게 말하자, 루실의 잠들었던 신경을 눈을 떴다. 고동이 전신에 울려 퍼지고, 머리를 숙인 채 루실은 털렉의 유혹을 거절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털렉과 둘이 있으면서 꾹 참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밖에서 오는 영향을 피하려고 휴식하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댄스를 하거나 수영을 하거나, 함께 식사를 하면서 사이좋게 시간을 보낸다! 자기의 사랑을 털렉의 민감한 눈에 숨겨 두려면 참고 견디어야 할 고통이 올 것임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결점을 알고 난 후에도 미칠 듯하게 사랑한 남자와의 멋진 나날을 보내고 싶은 것일까?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별의 괴로움은 견디어 내기 어렵다는데, 그런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는 여성이 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숨막힐 듯한 생각으로 루실은 털렉에게 말했다.
"좋아요. 당신이 꼭 친구로서의 관계만 약속해 준다면 찬성하겠어요!"
다음 날 아침부터 그 관계는 시작되었다. 털렉은 어떻게 하든지 더 가까운 사이로 끌어들이려 하던 그전과는 태도를 달리했다. 금세 소개받은 듯한 친구같이 행동했다. 아침식사를 함께 하면서 털렉은 주의 깊게 과거에 얽힌 이야기는 피하고 일상적인 화제로 대화를 계속하면서, 빵이나 과실을 권하면서도 절대로 몸에 닿지 않았다.
털렉의 작전이 점차로 효과를 내기 시작할 때부터 루실의 긴장감도 차차 풀려갔다. 털렉이 자기 멋대로 침입해 오는 자를 모두 추방해 버리거나, 루실 자신보다도 더 아름답고 훨씬 세련된 여성들로부터 부러운 듯한 시선을 받고도 유쾌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위선에 불과할 것이다. 루실이 걱정하는 것을 입 밖에 내어 말하면 털렉은 비웃는 듯한 답변을 했다. 식당을 나와 만족한 기분으로 갑판을 산책할 때였다.
"친구들한테 가고 싶으면 저는 상관 말고 가세요."
루실은 솔직한 잿빛 눈으로 말했다.
털렉은 발을 멈추고 사랑스럽게 루실을 바라보았다. 어깨를 넓게 드러낸 핑크색의 여름 드레스를 입은 루실은 이슬 방울처럼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털렉의 시선을 받은 루실의 살갗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당신 곁에 있고 싶어."
털렉의 익숙한 곁눈질에 루실은 의심스러운 듯 눈썹을 모았으나, 그 다음부터 루실은 마음껏 즐거운 기분을 맛보았고, 말이 흘러나오는 대로 쉴 새 없이 대화에 꽃을 피웠다. 두 사람은 얘기를 하고 의견을 서로 말하면서 각자의 사고방식을 탐구해 갔다. 그 매력은 육체적인 것을 초월하고 있었다.
루실은 새삼스럽게 털렉을 존경했다.
털렉은 루실의 의견을 다만 여자의 헛소리로 처리해 버리지 않고, 자기의 생각과 맞지 않으면 그것을 지적해 주기도 하고, 의견이 합치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풍성하게 얘기를 주고받기도 했다. 하루, 또 하루가 달음질쳐 지나가고, 잠깐 동안에 일 주일이 지나갔다. 그것은 루실의 생애를 통해서 가장 멋있는 일 주일 간이었다. 깨어나서 사라져 버릴 꿈이라면 차라리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한참 동안 열심히 토론을 계속한 후에 두 사람은 한가롭게 갑판으로 나가 있었다.
털렉은 등의자에 기대어 루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당신 곁에 있으면 날마다 신선하고 즐거워져. 내가 알고 있는 대개의 여성은 언제나 추켜올려 주기를 바라지. 여성은 남성에게 그것만을 바라고 있어. 그러나 당신은 남자에게 동등하게 교제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갖고 있어. 그러면서도 시종일관 여성답고 말야."
"조심하세요!"
루실은 이제는 완전히 마음을 놓고 곁에 앉아 장난투로 말했다.
"소포클레스가 아니었던가요? '여자와 남자가 동등하게 된다면 여자는 남자를 이긴다'고 말한 것은."
털렉이 보복하려고 몸을 내미니, 루실은 웃음소리를 터뜨리며 훌쩍 몸을 피했다. 그러나 털렉 편이 훨씬 빨랐다. 루실은 손목을 잡히고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까지 접근하고 말았다. 잠시 동안은 웃는 눈과 눈을 마주치고 있었으나, 이윽고 침묵이 찾아들어 억눌렸던 감정이 거센 힘으로 가식적인 점잖은 행위를 비웃기 시작했다. 털렉이 머리를 숙이자 루실은 자연스럽게 부드러운 입술을 내밀었다. 다음에 덮씌우듯 퍼부어질 열광적인 키스를 루실은 눈으로 감고 기다렸다.
한참 열렬한 키스를 퍼부은 다음에 털렉은 루실을 떼어 놓고 냉정하게 말했다.
"이젠 가야지! 오늘 밤은 선장이 주최하는 칵테일파티에 나가게 되어 있으니까, 당신도 옷을 바꿔 입으려면 시간이 상당히 필요할 거야."
루실은 때려 눕혀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겨우 눈물을 참고 목소리를 짜내었다.
"그래요? 그러나 안 돼요. 함께 다니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털렉이 함께 가자고 일어서자, 루실은 당황하며 거절했다.
"다음에 다시 만나요."
루실은 얼마 동안은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없었다. 방 안으로 들어오자 루실은 그대로 긴 의자에 몸을 던지고 무릎을 끌어당겨 몸을 웅크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참담한 모습이었다. 왜, 어째서 나는 간신히 얻은 멋진 기회를 허사로 만드는 짓을 했을까? 털렉이 정신적인 애정을 추구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할 때, 그가 그런 말을 한 것을 기뻐했어야 할 내가 보기 좋게 맹세를 깨뜨렸던 것이다! 루실은 낮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자기가 마음만으로 사랑을 할 수는 없음을 깨달았다.
털렉과 친구로서의 관계만을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루실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털렉의 사랑이었다!
그날 밤 루실은 어딘가 새로운 위험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마 옷차림새 때문일까. 여태까지는 자기의 순진무구한 외모에 거슬리는 듯해서 싫어하던 검은 칼집 모양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지금 그 옷을 입고 있으니 용기가 생기는 듯했고, 또 어떠한 굴욕에도 당당하게 대항해 내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는 듯했다. 아무튼 털렉이 루실의 방문을 두드렸을 때에는 루실은 매우 힘을 얻고 있었다.
"아니, 방에는 안 들어가겠어."
루실이 문을 열고 털렉을 들어오라고 하니, 털렉은 깨끗이 거절했다.
"시간이 없어. 당신 준비가 끝났으면 바로 선장실로 가야겠어."
"당신 의향대로 하겠어요."
루실은 그렇게 대답하고 털렉도 자기의 냉정한 음성에 놀랐으리라고 문득 생각했다.
그러나 털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혹시 손가락이라도 닿으면 곧 불타오를 듯한 그녀의 크림색 어깨에 주의를 집중시키며 그녀가 숄을 걸치는 것을 도와 주었다. 그리고 루실을 복도를 따라 엘리베이터까지 안내했다. 우아한 복장에 고결한 태도로 그는 늘씬하게 등을 펴고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 동안에 루실은 몇 번이나 털렉에게 이대로 있고 싶으냐, 있고 싶지 않으냐고 묻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살펴보니 털렉은 요점도 없는 대화에 싫증을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상급 사관과의 대화를 오래 끌어가고 있었으나 그 밖에 대화의 상대자도 없는 불행한 상급사관이 급한 용무가 있다면서 달아나 버리자, 털렉은 만찬의 벨이 울릴 때까지 부근을 어슬렁거릴 뿐이었다.
루실은 그때에 이르러서야 얼른 깨달았다. 자기가 그에게 혹독한 수치심을 일으키게 했기 때문에 털렉은 이제부터 자기와 둘만 있게 되는 것을 꺼리고 있는 것이었다. 채찍으로 맞은 것처럼 그 생각으로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모든 것을 가슴에 묻고 루실은 천천히 말을 했다.
"저는… 저는… 이제… 식사를 같이 안하겠어요. 배가 고프지 않으니까요. 실례합니다."
루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도 없는 갑판을 달렸다. 통이 좁은 스커트 때문에 다리가 자유롭게 벌어지지 않아 다만 장식용으로 걸친, 뒤축이 가는 샌들로 종종걸음을 쳤을 뿐이다.
그러나 갈기갈기 찢긴 루실의 마음은 도망치고만 싶어서 고통도, 어둠 속을 맹목적으로 달리는 자신의 어리석음도 느끼지 못했다. 걷고 있는 선원의 등에 부딪쳐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런!"
그는 충격으로 넘어지려는 루실을 손으로 받치었다.
"다친 덴 없습니까? 미안합니다. 설마 뒤에 사람이 있다고는 생각 못했기 때문에!"
"정말 고맙소. 그녀는 제가 돌봐드리죠."
거친 숨을 헐떡거리며 털렉이 어둠 속에 당당한 모습을 나타내었다. 루실에게는 이젠 싸울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온순하게 털렉에게 몸을 맡기고 갑판으로 나왔다. 무서울 만큼 고요한 분위기였다. 루실은 멍청하게 털렉이 두 사람의 결정적 관계를 만들기에 안성맞춤인 장소를 택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털렉은 강제적으로라도 자기의 욕구를 받아들이게 할 예정인 것이다. 고통과 굴욕이 되살아나서 루실의 찢겨진 감정을 더욱 괴롭혔다.
털렉의 처음 말은 비난하듯이 들렸다.
"당신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지? 그러나 나도 처음부터 잘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정신적인 우정은 서로 사랑이란 감정이 없는 남녀 간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야. 그것이 처음부터 알고 있는 이유야."
루실은 털렉이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냉정한 말을 내뱉는 데 대해 반감을 느꼈다. 상처받은 꽃이 더욱 바람을 향해 가듯이 루실은 머리를 쳐들고 잿빛 눈으로 어둠 속에서 털렉의 눈을 찾았다. 루실은 털렉의 매와 같이 날카로운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지만, 그 무표정한 얼굴에 웬일인지 항상 품고 있던 승리의 그 빛이 사라진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루실은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다. 루실의 내키지 않는 대답에는 좌절감이 떠오르고 있었다.
"당신에게 수치심을 불러일으켰다면 사과하겠어요.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애써 감추려 했으나 감출 길이 없었어요!"
거칠게 숨을 불어넣는 소리에 루실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털렉은 바로 앞에 있었다. 석상처럼 꼼짝하지도 않았다. 우뚝 선 채 털렉은 거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뭐라고 했지?"
루실은 눌러 막아오던 감정의 둑이 무너져 내리듯이 저도 모르게 몸을 피했다.
"앞으론 절대로 괴롭히지 않겠어요."
루실은 울어 버렸다.
"배에서 내리면 앞으로 두 번 다시 뵙지 못하게 되겠지요."
루실은 절망에서 구해낸 것이 해일의 물결이었을까, 그렇게도 손쉽게 깜짝할 순간에 거센 힘으로 루실은 털렉의 팔 속에 안겨 들어가고 있었다. 루실의 괴로운 눈물은 털렉의 정열적인 사랑의 말로 말라 버리고, 해방된 맹렬한 힘으로 털렉은 사랑을 속삭이고, 신음소리를 내며 키스의 폭풍을 퍼부었다. 루실은 격렬한 기쁨의 폭풍 속을 뚫고 나와 달콤한 허탈에 빠졌다.
"사랑하는 사람!"
털렉은 루실의 핑크색 조개 같은 귀에 거칠게 입김을 불어넣으며 속삭였다.
"사랑해!"
털렉의 입술이 루실의 볼을 부드럽게 미끄러져 내리며 금빛 눈썹을 스치고 떨리는 입술을 빼앗았다. 그의 입술이 환하게 노출된 부드러운 어깨를 애무하는 동안에 루실은 정열이 깃들인 말의 생생한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 '사랑해!'
그는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그렇게 말했다.
털렉이 겨우 격렬한 충동을 억누르게 된 때에는 루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털렉은 루실을 팔에 안고 쉬게 했다. 흩어진 금발에 볼을 대고 털렉은 상냥하게 나무랐다.
"내가 그렇게 바라던 사랑을 감추고 있었다니. 영국인의 지나친 겸양을 미워할 수밖에 없군! 당신은 모르겠지만 당신의 냉정한 경멸이 나로 하여금 얼마나 지옥의 고통을 맛보게 했는지 몰라. 몇 번이나 기대했다가 절망했던지, 그리고 또한 더욱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던져 갈 뿐인데도 단념 못하고 기대를 걸었어."
털렉은 음성을 떨며 또 한번 말했다.
"다시 한번 천천히 나를 지옥에서 구원해 준 그 멋진 말을 들려줘요!"
행복한 기분에 황홀해져서 루실은 털렉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도 멍청한 그대로 루실은 물었다.
"어째서 나를 사랑할 수 있었나요? 샤니는…?"
"그것은 수단에 불과했어. 오히려 당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였어."
"사랑해요. 나의 야생매. 영원히 언제까지나 사랑할게요!"
두 사람은 키스를 주고받으며 말로 하는 맹세보다는 굳은 결합을 약속했다. 사랑과 만족감에 넘치는 키스는 정열적이라기보다도 그 밀도가 짙은 깊은 마음이 깃들어져 있었다.
입술을 살짝 붙인 채로 루실은 털렉을 꾸짖었다.
"그렇게 복잡한 절차를 택하지 않고, 왜 처음부터 사랑한다고 말해 주지 않았어요? 당신은 나를 신용하지 않았었나요?"
털렉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렇다고 해도 당신을 방패막이로 해서 샤니의 매력에서 벗어나려고 했다는 생각은 당신이 만든 것이야. 나는 다만 거기에 동의하는 체했을 뿐이지."
"제 생각이라고요?"
"그렇지."
털렉은 장난기 섞인 투로 말했다.
"나는 샤니를 이용해서 당신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려고 했던 거야. 그래서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
털렉은 고백했다.
"당신이 내가 샤니에게 키스하는 것을 보았던 날 밤, 나는 당신의 반응을 거울로 보고 있었어. 그리고 나는 대성공이라고 생각했지. 너무나 씬(scene)이 근사했다고 말야. 그 후 당신은 나와 함께 있어 주려고도 하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루실은 화를 내며 털렉을 나무랐다.
"그럼 당신은 자기 목적 때문에 샤니와 저를 번갈아 희롱했다는 말인가요?"
"루실."
털렉은 정열적으로 속삭였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질질 끌어나가고 있었을 거 아니냐구."
"악마 같애!"
루실은 털렉에게 염증을 느꼈다.
"어머니께서 그것을 아신다면 오싹하실 거예요!"
"그렇겠지, 어머님은!"
털렉은 히죽히죽 웃었다.
"현명한 늙은 수리부엉이는 정당했어. 필요한 것은 서로 따로 떨어져서 각자의 시간을 갖는 일이야. '너희는 사랑하는 사이가 되기 전에 친구 사이가 되어야 한다.'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셨어. 그때에 욱하고 어머니에게 대들었지만 어머니 말씀은 옳았지. 우리는 친구 사이야. 그렇지 않아?"
루실은 털렉의 속삭임에 황홀해졌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도 상관없어."
루실은 지나칠 정도의 행복에 젖으며 입술을 축였다.
"진심으로 당신의 아내가 되고 싶어요, 털렉. 당신을 위하여 식사를 준비하고,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당신의 실내화를 준비해 놓고…"
털렉은 루실의 열정적인 모습을 사랑스럽게 보고 있다가, 전에 루실이 여성의 해방에 열심이었던 것을 생각하고 물었다.
"그래서 그 보답으로 당신은 무엇을 바라지? 사랑받는 일인가?"
루실은 털렉에게 몸을 꼭 붙이며 말했다.
"베일 속에서 소중하게 귀여움을 받는 아내가 되고 싶어요."
루실은 만족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털렉의 지배에 희열을 느끼며 털렉의 애무에 황홀해져 가면서 루실은 은근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 루실의 손 밑에 힘차게 맥박치고 있는 생명은 루실 특유의 것이다. 불굴의 정신과 야생의 날개를 가진 사막의 매는 지금 안식의 장소를 찾아내어 깊은 만족을 맛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