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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꿈 (Palace of the hawk) 1

한여름의 꿈 (Palace of the hawk)

Margaret Rom

 

1

마천루를 습격하려는 한 마리의 모기처럼 루실 램은 우뚝 솟은 대양항로의 커다란 배에 걸려 있는, 육지와 배를 연결하는 발판에 오르기 시작했다. 프로듀서가 변태성이 발동하여 선택한 듯한 다음의 촬영지인, 하느님에게서 버림받은 듯한 땅으로 불편한 여행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에 그 촬영 비용은 모두 프로듀서 담당으로 하고, 여행 방법은 자기에게 맡겨 주어야 한다고 샤니는 주장했지만, 지금 그런 것은 아무런 문제도 안 된다.

아트 캐러핸은 불평을 터뜨리면서 승낙했다. 샤니 샤론은 지금 한창 인기가 있어 틀림없이 그가 출연하는 영화의 입장권을 대매진시킬 수 있는 여배우였다. 때문에 프로듀서의 입장에서는 인기 상승 중인 젊은 스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하는 편이 현명한 일이었다.

"당신 좋을 대로 하라구."

아트는 여태까지 많은 스타들의 성공과 실패를 보아 왔기 때문에 침착한 눈으로, 뚫어지도록 샤니의 상기된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그 주장하는 바를 받아들이며 말했던 것이다.

"그것도, 당신을 리드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의 희망도 당신의 희망과 같이 중요하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고 있는 동안뿐이야."

"제가 그 사람을 잊어버리거나 할 것 같아요?"

샤니의 대답에는 경멸하는 듯한 여운이 남아 있었다.

"당신은 뭔가 하면, 그의 이름만을 쫓고 있는 거예요. 털렉 포크. 다이나믹한 남자 배우. 미녀 감상가!"

샤니는 신랄하게 아트의 말투를 흉내내었다.

루실은 핸드백을 뒤져서 필요한 서류들을 끄집어 내었다. 승선권, 패스포트, 비자, 종두 증명서, 하물 인수증!

"미스 샤론은 임항(臨港) 열차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루실은 지금까지의 습관대로 덧붙여 말했다.

"팬에게 붙잡혀 사인공세를 당하는 일이 생기기 전에 요령껏 배를 탈 수 있게 해주었으면 고맙겠습니다만."

"염려 마십시오, 미스 램."

관리는 서류를 뒤적거리면서 친절하게 말했다.

"유명인사분들에게는 익숙해 있으니까요."

루실은 자기가 한 어리석은 언행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자기의 임무에 열중하여 샤니에게서 잔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주의하는 데만 몰두하고 있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퀸 엘리자베드 2> 호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 있었던 것이다.

스츄워드가 샤니의 선실로 안내해 주었다. 루실이 오히려 당황할 정도의 정중한 태도로 조용히 방 앞까지 인도하고는 몸을 굽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입구의 문을 열었다. 루실은 가볍게 응대하며 답례를 하고 방에 발을 들여놓았다. 부드러운 융단이 금세 루실의 발을 폭신하게 감싸 주었다.

루실은 뜻밖인 방 안의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둘러보았다. 모두가 호화로운 비품뿐이었다. 아무리 염치가 없는 샤니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사치스러운 생활을 해서 프로듀서에게 과대한 비용을 부담시켜도 괜찮단 말인가?

문에는 마땅히 이 방에 어울리도록 <여왕 앤 특별실>이라고 씌어진 장식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여러 가지의 색깔로 조화시켜 황금색을 칠해 놓은 긴 의자는, 풍아한 시대의 미련을 남기고 있는 듯한 장식이 붙은 추자 목재의 가구들과 아주 효과적으로 잘 어울렸고, 거기에는 특별히 은밀한 우아미가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육중한 조각을 새긴 의자나 책상은 현대적인 단조로움 속에 18세기적인 취향을 첨가시켰고, 은제품은 유난히 소박함을 나타내어서 이 방 안의 느낌을 더욱 우아하게 했으며, 가장자리를 세공한 거울과 램프, 그리고 순수한 수정 광채를 발하는 마개 있는 식탁용으로 포도주병과 술잔이 놓인 큰 소반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듯했다. 모슬린 천으로 만든 커튼이 쳐진,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은 멋있는 바다 경치를 보여줄 것을 약속하고 있었다.

방 안 한쪽 구석에는 이층으로 통하는 나선형의 계단이 있었다. 이층은 침실로 되어 있을 거라고 루실은 생각했다. 소란스러운 배 속에 이렇게까지 고상한 옛 시대의 우아한 미의 세계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인 듯싶었다. 그런데 이 방 안의 분위기와는 전연 어울리지 않는, 교만스러운 샤니와 같은 속된 인간이 이 방을 쓴다고 생각하니 마치 이 세계를 모독하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 방이 틀림없이 미스 샤론의 방인가요?"

루실은 불안하게 물어보았다.

", 그렇습니다."

스츄워드는 확신에 차 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예약하신 것을 제가 확인했는걸요. <여왕 앤 특별실>은 미스 샤론의 예약이고, 그 곁의 <트라팔가 특별실>은 털렉 포크 씨의 예약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트 캐러핸이 도착하여 이와 같은 샤니의 무분별한 행위를 알게 된다면 큰 소동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나 루실은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그 스타가 도착할 때까지는 짐을 풀고, 산처럼 쌓여 있는 옷에 다리미질을 하여 주름을 펴놓아야만 했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루실이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다. 단념한 듯이 어깨를 움츠리며, 루실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고 샤니가 시킨 일에 착수하였다. 날마다 잔심부름을 말없이 처리해 나가는 고용인인 동시에, 자기의 사촌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싶어 하는 말괄량이 젊은 영화배우의 시중꾼에 불과하지만, 자기 나름대로 큰 보람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루실은 스스로 타일렀다.

'샤니의 그런 방자한 행동에 잔소릴 해봤자 허사지.'

루실은 드레스의 얄팍한 옷단에 휴대용의 작은 다리미를 대면서, 자기 자신을 설득하고 있었다.

'샤니의 성질은 벌써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거고, 여행에 나서면서는 어떠한 일에도 참고 견디어 내겠노라고 결심했었잖아. 그리고 실제로 그런 태도로써 이 이태 동안에 세계의 절반을 돌아다녔던 거야. 그러니 불평 따윈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한다구!'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잿빛 눈은 멍청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것은 다만 꿈에서 보았던 것뿐일까? 아니면, 실제로 로마의 '스페인 계단'을 올라가고, 그곳에서 잠들고 싶어지는 포르투갈 사람들의 마을로 들어가고, 따뜻한 자메이카의 해안에서 스킨 다이빙을 하기도 하고, 게다가 사람을 흥분시키는 아프리카에서의 사냥 등, 정말로 나 자신이 그런 체험을 해왔던 것일까.

"루실, 그건 가장 비싼 드레스인데 딴 생각을 하고 있었군. 냄새가 나지 않니!"

"비싼 드레스라구요?"

루실은 지금 자기를 책망하고 있는 상대방의 얼굴을 한순간 얼빠진 듯이 멍청하게 바라보고서 몽롱한 생각에 빠져 있던 자기 자신을 깨닫고 이윽고 눈앞의 현실을 놀란 눈으로 어설픈 몽상에서 깨어났을 때는, 볼에는 희미한 붉은 색깔마저 띠고 있었다.

"어머나 이걸 어쩌지미안해요, 샤니 언니. 깜짝 놀랐어요. 아무런 기척도 없어서"

루실은 곧 드레스를 펴보고는 억지로 쾌활하게 웃으며 보기 좋게 꾸며대었다.

"운이 좋았어요. 옷자락 안쪽을 약간 태워서 누렇게 만들었지만, 이 정도는 누가 보더라도 눈치 채지 못할 거예요."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샤니는 휙 낚아채듯이 루실의 손에서 드레스를 빼앗아 가지고 이리저리 자세히 살펴보았다. 루실은 샤니의 결정을 가만히 기다렸다. 샤니가 이 일을 앞으로 두고두고 이용하려는 눈치는 빤한 것이었다.

샤니의 태도는 위엄에 가득차 있었다. 처음에는 단지 촬영장의 카메라 앞에서 의식적으로 취하던 위엄이었는데, 요즘에 와서는 그것이 몸에 배어 없어서는 안 될 만큼 샤니한테는 인격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오직 한 사람의 구경꾼 앞에서도 그 버릇은 버릴 수 없게까지 된 것이다.

아름다운 눈은 약간 눌은 자국이 있는 드레스에 야만적인 녹색의 불꽃을 퍼부었고, 하얀 이는 신경질을 일으켜서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분홍색의 아랫입술을 깨물며 무서운 분노를 나타내었다.

불에 눌은 자국을 자세히 보려고 드레스를 들여다볼 때, 눈앞으로 흘러내려오는 호도나무를 깎아 놓은 듯한 색깔의 머리를, 값비싼 반지를 여러 개 낀 무거워 보이는 손가락이 초조한 듯이 쓸어 올렸다. 샤니가 등을 펴니 그 늘씬한 모습이 루실의 걱정스러운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졌다.

샤니는 빈정거리면서 루실이 그런 일을 속이려는 것에 화가 난 것처럼 사납게 말했다.

"너는 그래 이 옷을 입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못 입게 돼버렸다구. 망쳤어! 너의 그 성의 없는 태도 때문에 말이야!"

멜로드라마의 마지막 장면과 같이 샤니의 가슴은 커다랗게 물결치더니 방자하고 건방진 태도로 단언을 내렸다.

"옷값은 너의 급료에서 제하겠어. 일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는 걸 잊지 말도록 하기 위해서야, 알겠니?"

루실의 입술은 이 말을 듣고 일그러졌지만 그래도 가까스로 참고 미소를 띠었다. 2년 동안에 루실은 오직 한 번밖에 급료를 받은 적이 없었다. 샤니도 그런 실정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항상 사고가 연달아 발생해서 샤니가 루실의 급료에서 변상금을 삭제할 필요가 생기게 마련이었다. 이런 식으로 샤니는 생활 형편을 보고 한 달분의 급료를 지불했을 뿐, 2년 동안이나 루실을 시중꾼으로만 부려왔던 것이다.

처음에는 아무 소리도 않고 너무나 간단하게 일이 수행되어졌기에 샤니도 놀랐으나, 루실이 거역하지 않고 이 시중드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으므로 샤니의 놀라움은 이윽고 경멸로 바뀌어 버렸고, 루실의 하는 일에 대한 집착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겠다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샤니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루실의 반응을 기다렸다. 이러한 질책에도 늘 각오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만성이 되었는지, 루실은 샤니의 잔소리를 아무렇지 않은 듯이 받아들이며 오히려 온순하게 듣고 있었다.

"그럼 이 옷은 제가 가져도 좋을까요?"

샤니의 빈틈없는 눈이 만족한 듯이 빛났다. 평소와 같이 샤니는 어깨를 오므라뜨렸다. 항상 여러 사람의 눈에 많이 띄는, 자기에게는 이미 낡아빠져서 곧 버려도 될 옷임은 그녀나 루실이나 잘 알고 있는 바였다.

"좋아."

샤니는 마치 왕비나 된 것처럼 루실의 요구를 받아 주었다.

"너한테, 너의 부주의에 대한 보상을 해주어야 할 텐데, 여러 해 동안에 걸쳐 많이 입어서 싫증이 난 헌옷을 주어 왔기 때문에 그게 마치 의무 이상으로 생각되는구나. 아빠 엄마가 그렇게도 많은 비용을 들여 양육해 온 의지할 곳 없는 사촌동생인 너한테, 또 하나 가정이란 것을 마련해 줘야 했을 적에, 대체 어떤 기분이었겠는지 지금에 와보니 알 만하겠어."

그런 잔혹한 보복에는 익숙해졌지만, 루실은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섬세한 표정을 지배하는 잿빛 눈은 이윽고 선천적인 품위를 되찾아 무의식중에 의젓한 표정으로 변해졌다.

이 루실의 타고난 위엄이 여태까지 여러 번 샤니에게 심술궂은 말투를 쓰게 했다. 샤니로서는 그렇게 하는 일이, 실로 순결하고 천진난만한 루실의 시선을 받을 때 확실히 느껴지는 마음의 불안을 완화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젊은 나이의 부모님한테 갑자기 죽음이 닥쳐올 줄은 설마 생각도 못했어요."

루실은 굴욕을 꾹 참고 또렷하게 말했다.

"만약 아빠 엄마가 사전에 그것을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나의 장래를 걱정해 주셨을 거예요. 어쨌든 나는 외삼촌한테 신세를 져서 그분들께 무거운 짐을 지우고 싶지는 않았어요."

샤니는 사나운 분노를 나타내며 불쾌한 듯이 말했다.

"그러나 우리 부모님은 너에 대해서도 나와 똑같이 친자식으로 생각해 왔어. 우리 엄마나 아빠한테서 받은 은혜를 곰곰이 생각해보라구. 아빠는 단 한 사람의 누이동생인 너의 어머니를 대단히 사랑했어. 그러나 너희 아버지가 만약에 그 무모한 운전으로 그 자신이나 너의 어머니까지 죽이지 않고 끝났더라도, 우리 부모님은 너희 아버지를 처자를 친정으로 보내 버릴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셨다구. 때문에 어쨌든 너는 벌써 여러 해 동안이나 우리 아버지한테 괴로운 걱정을 끼친 것이나 다름없어. 게다가 엄마 말씀을 들으니, 너는 놀라울 만큼 네 아버지랑 꼭 닮았다더군. 이런 건 쓸데없는 말이지만."

샤니는 확실한 반응을 비춰 주고 있는 길고 둥근 모양의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심술궂게 얘기를 계속했다.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유산 가운데서 오직 그 금발의 고수머리만이 유일한 위안이겠지. 그렇다고 해도, 그 금발 머리가 우리의 돈지갑을 채워 줄 수 있었다면 상당히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겠지만!"

"언니, 나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아요."

루실은 조용히 대답했다.

"피터 외삼촌과 마리온 외숙모 덕택으로 나는 멋진 생활을 해왔어요. 물론 언니도 그렇죠. 함께 살아오던 즐거웠던 시절, 피크닉이나 휴일, 그리고 크리스마스설마 그 추억을 잊어버리고 있는 건 아니겠죠?"

샤니의 기분이 조금은 부드러워진 듯했다. 등을 약간 돌린 채 가만히 서서 목을 갸우뚱하게 기울이고 있는 모습은, 마치 어린 시절, 환한 불빛이 찬란히 빛나는 등불 밑에서 가사를 절반이나 잊어버린 성가를 부르던 어릴 때의, 그 신중성이 깊게 나날을 가득히 채우고 있던 웃음소리를 조용히 회상하고 있는 듯싶었다.

이윽고 샤니는 어깨를 움츠렸다.

"어러석은 얘기야!"

샤니는 몸을 홱 돌리면서 눈을 반짝이며 주위의 사치스런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그때에는 정말 돈이 한푼도 없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면, 너는 말하기 아주 편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모든 친구들이 외국에서 한가롭게 휴가를 즐기고 있을 적에, 우리는 다만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한 곳에서만 견뎌내야 했던 것을 절대로 잊진 않아. 게다가 식모도 없이 우리들이 손수 식사 준비까지 했던 거야! 그럼, 잊을 수는 없지. 내 인생은 연극 학교를 졸업한 후부터 겨우 시작된 거야. 행운, 그것만이 희망이었어. 맞아, 그래서 굳게 결심했어. 하루빨리 정상을 차지하자고. 어쨌든 이쯤 되었으니 이젠 안심이야."

샤니의 의욕에 불타는 녹색 눈이 반짝였다.

"정상까지는 이젠 한 단계, 털렉 포크가 함께 해준다면, 이젠 도달한 거나 마찬가지야!"

샤니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이젠 스타의 자리에 앉아 있는 거야. 너도 기뻐해 주겠지?"

자신의 위치에 만족해하는 조롱 비슷한 말투였다.

"네가 번 돈으로 스스로 자립해서 살 수 있는 기쁨을 맛보는 데 인색해진 것은 아니겠지? 그것보다도 너는 내게 어느 정도는 고맙다고 생각해야 돼. 내가 너를 쫓아 버리거나 한다면 아빠 엄마가 얼마나 괴로워하실지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너의 그 빈번한 실수도 크게 봐주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벌써 내쫓았을 거야!"

샤니는 기세당당하게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루실은 말 속에 포함되어 있는 샤니의 위협을 생각해 보았다. 그것이 머지않아 더 많은 일을 시키려는 경고라는 것을. 요즘에 와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지만, 최근 샤니의 분노하는 방법은 한결 거세어져서 위협에도 주의해야 할 경지까지 와 있었다. 루실의 존재가 샤니의 신경을 건드린다는 사실만은 확실했으나, 루실에게는 그 이유가 석연치 않았다.

루실은 항상 내성적이었으며 칭찬을 듣지 못할지라도 하는 일만은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니다. 그런 까닭이 아니라, 샤니의 증오는 보다 더 개인적인 데에 뿌리박혀 있어, 샤니의 상상을 초월한 행동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샤니의 양친이 둘 사이에 간격이 생기면 괴로워하실 거라는 것은 샤니가 한 말 그대로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양친은 샤니가 귀엽게만 자라나서 제멋대로 하는 아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루실에게 샤니의 시중드는 사람으로서 곁에 함께 있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었다. 양친은 루실의 차분하고 신중한 성격에 크게 감동했으므로, 그 성격이 조금이라도 딸의 몸에 배게 해주었으면 하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도 꾸준히 루실을 따뜻한 애정으로 감싸 주고 보호해 왔던 샤니 양친의 부탁이니 그것을 거절할 수가 없었으므로, 루실은 할수없이 그 부탁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시초부터 두 사람 사이에는 일종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샤니의 희망, 돈에 대한 탐욕, 지금은 노골적이 돼버린 증오, 그런 것들이 매일의 생활을 더욱더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결정적인 파국이 오기 전에, 루실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여행을 달성시켜야 한다는 또 하나의 이유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샤니가 어떤 모욕이나 경멸을 가하더라도 그때마다 가만히 온순하게 아무런 반항도 보이지 않고 참아야만 했다. 호기심 있는 눈으로 볼 때에는 마치 빅토리아 시대의 여종처럼 하찮게 여겨진다고 생각되더라도, 확실히 지금 그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샤니에게 구체적인 해고의 원인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자존심도 버리고 굴욕을 참아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예상한 대로 아트 캐리핸이 도착하자,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아트는 샤니가 수정 포도주병에서 따라주는 위스키를 마시고는 있었으나 반짝이는 눈은, 팔걸이 의자에 깊숙이 허리를 묻고 다리를 쭉 편 자유스러운 태도와는 아주 달랐다.

"당신은 날 괴롭히기로 작정한 모양이군, 샤니. 바다에 떠 있는 맨션을 예약할 정도의 허영은 과연 당신만이 저지를 수 있는 나쁜 장난이야. 잘했어. 당신은 멋대로 한 거야. ."

아트는 희미하게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것이 당신 나름대로의 유머란 말인가!"

"유머란 말씀 참 잘하셨군요!"

샤니가 잔이 놓인 탁자를 돌아 왔으므로 아트에게는 샤니의 붉어진 얼굴이 잘 보였다.

"저는 상당히 오랫동안 2등급의 여행만 해왔어요. 대단한 불편, 그리고 끝없이 계속되는 옹색한 여행을 꾹 참아 왔던 거예요. 당신이 예산 이내로 억제하는 것만 주장해 왔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이젠 싫어요! 저는 스타예요.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해주세요! 영화 회사 측에서 마음에 안 들면 저와의 계약을 파기해 주면 되는 거예요!"

두 사람의 눈은 거세게 충돌했다.

"서를 출연시키고 싶어 하는 영화사는 얼마든지 있어요, 아트. 어디서든지 중요한 스타를 위해서는 돈에 인색한 짓은 안해요."

샤니는 확신이 넘치는 웃음 띤 얼굴로 달려들었다.

아트는 긴 다리를 한쪽 무릎 위에 포개고 침묵한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루실은 신경을 곤두세우며 아트의 결단을 기다렸다. 지금에 와서 영화 촬영을 단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모든 준비는 진행되었고, 샤니에게 큰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여비를 쥐어짜 보았자, 벌써 그 이상의 금액이 이미 소비되어 있는 것이다.

아트가 관대한 마음으로 대응하려는 눈치를 보고, 루실은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도중에서 꼭 순항선을 타고 싶다고 할 때에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아트는 온화하게 말했다.

"몸바사에 상륙하여 카이로까지 가야 했을 때도 동료들한테는 대단한 불편을 주었지만 말이야. 당신은 수에즈 운하가 배를 통과시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자기의 고집을 굽히지 않고 그렇게 했던 거야. 처음부터 비행기로 카이로로 향했으면 몇 시간이면 도착했을 텐데 말이야."

"그래도 싸구려였죠!"

샤니는 조롱하듯이 말했다.

"그랬다면 당신은 더없이 만족하셨겠죠? 그러나 그렇겐 안 돼요. 어서 그 여행 비용을 전부 지불해 주시든가, 아니면 지금 여기서 저와 계약을 파기해 주세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샤니의 마지막 통첩에 아트는 꾹 참고 있었다. 그때, 이 침묵을 깬 것은 복도를 걸어오는 발소리였다.

발소리는 옆방 입구에서 멈췄다. 동전소리가 나고, 스츄워드에게 사례를 하는 말소리가 들리자 이어서 문이 꼭 잠기었다.

", , 저명한 나의 상대역 스타가 마침 오신 것 같군요! 어쩔래요, 아트 씨? 촬영은 중지됐다고 제가 알릴까요, 아니면 당신께서 직접 말씀해 주시겠나요?"

아트는 일어섰다. 아트의 야윈 몸에서는 패기가 사라지고 패배의 무게가 끝없이 덮어 씌워진 것 같았다.

"할 말은 아무것도 없어."

아트는 자신의 패배를 몹시 괴로운 듯이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꼭 말해야 한다면, 옛말에도 있듯이 매라는 놈은 자기를 위해서는 탐색해 낼 능력만은 꿋꿋이 갖고 있다는 것이야!"

 

2

여덟 시간이나 걸려서 겨우 샤니가 시킨 일을 전부 처리할 수 있었다.

녹초가 되어 버린 몸을 팔걸이의자에 깊이 묻었을 때에 배는 벌써 사우댐프턴에서 셰르부르를 지나 이미 뉴욕을 향해 가고 있었다.

루실은 의자 등에 머리를 얹고 눈을 감았다. 배의 고요한 한쪽 구석에서 찾아낸 작은 거실에서 겨우 혼자 있게 되어 마음이 평안했다. 고맙게도 루실은 일부러 드레스를 입고 만찬에 나갈 필요도 없기에, 평안히 쉬면서 지낼 기분이 되었다. 일등 선객들이란 장엄한 퀸즈 그릴에서의 만찬에 참석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승선 최초의 밤인데도 야회복을 입고 나가야만 했다.

"이런 곳에 있었어, 루실? 하루 종일 대체 어디 있었지?"

지긋지긋해서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루실은 무겁기만 한 눈을 떴다. 눈앞에는 아트의 커다란 웃는 얼굴이 있었다. 아트는 크지 않은 것이 없었다. 축 늘어진 보기 싫은 팔다리, 관대하고 상냥해 보이는 입, 그리고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동정심까지도.

만약에 그 동정심이 사람에 따라 차별이 있다고 해도 그가 말하는 셀룰로이드 스타들에게는 그러한 사실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루실은 아트가 마음에 들어 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아트는 그 재능을 너무 급속히 인정받았기 때문에 뜻밖의 상처를 받고 있었다. 그는 머리는 잘 쓸 줄 알지만, 그에게 붙어 있는 괴로움의 씨앗은 빈틈없는 스타들에게 어떻게 해야 자기의 약점을 숨겨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아트는 방자한 예술가들의 감독으로서는 꼭 필요한 무정한 사람이라는 외모를 보이기 전에, 몇 번이나 루실을 찾았다. 루실의 따뜻한 동정과 이해가 아트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이었다.

"일부러 날 피해 있은 건 아닌가?"

아트는 루실의 곁에 있는 의자에 앉으면서 의심스럽게 물었다.

"마치 그렇게 생각하려고 마음먹은 것 같군요!"

루실은 자신의 냉담한 말투를 무관심하다고 느끼게 하지 않도록 의자 속에서 자세를 똑바로하며 반문했다.

"당신과 만나면 언제나 기뻐요, 아트. 여행 중의 동물원에서 진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인걸요!"

아트는 재미있다는 듯이 크게 웃어대더니, 침을 뱉고 말했다.

"당신은 엉뚱한 말만 하는군! 그러나 동물원 가족 중에 염소가 발톱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어떨까? 나는 당신이 저 녹색 눈의 고양이인 샤니나, 여자들에게 무뚝뚝하다는 평판이 붙은 매의 포크에게는 반항할 기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

루실은 어깨를 움츠렸다. 결국은 잔재주만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그녀는 전혀 흥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팬들의 아첨은 피와 살이 있는 인간을 그 마음까지 스크린 속에서 춤추는 그림인형이나 꼭두각시로 만들어 치우는 자부심을 꺾을 순 없는 것이다.

아트는 루실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관찰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샤니나,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는 자들을 보고 모든 스타에 대한 그릇된 평가를 해서는 안 되지. 예를 들면, 털렉 포크 같은 사람이지."

"그는 조금 다른 남자 주인공이에요!"

루실은 갑자기 떠오른 그 화제에 당황해 하며 말했다.

"부잣집에 태어나서 카이로에서는 가장 좋은 학교를 졸업했으니까 우수한 학자나 인기 스포츠맨도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그 대신에 도박, 여자, 돈의 길을 선택했어요. 헐리우드의 가십에 오르내리는 스타 따위, 컴퓨터로도 셀 수 없을 정도의 미녀를 먹어 버리는 애스원 댐인걸요! 그와 같은 인물을 만나지 않았다고 해도, 완벽한 자부심에 주어질 오스카 영화상이라도 있다면, 그가 매년 차지할 것이라는 정도는 이해되죠!"

루실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내가 말하려는 건 위대한"

아트가 항의하려 하자, 루실은 그것을 단호하게 가로채었다.

"저는 식사하러 가겠어요. 당신은 식사를 하셨어요?"

"아니, 아직. 함께 식사를 합시다."

복도의 끝까지 와서 아트가 퀸즈 그릴 쪽으로 안내하려 하자, 루실은 이를 거절하고 반대쪽을 가리켰다.

"제 식당은 이쪽이에요. 뒤에 칵테일에 함께 참석할 수 있을까요?"

무쇠처럼 단단한 아트의 턱이 힘 있게 움직였다.

"샤니가 당신의 식사는 이등으로 예약해 놨단 말인가?"

"저한텐 그쪽이 편해요."

루실은 진지한 얼굴로 아트를 납득시키려고 했다.

"정말이에요, 아트. 식사 때문에 드레스를 갈아입긴 싫고, 이등 선객들이 훨씬 재미있어요. 이런 일로 떠들썩하게 하진 마세요."

"떠들진 않겠어."

루실이 잡힌 팔을 빼려고 하자, 아트는 그 팔에 힘을 주며 말했다.

"사무실 사람에게 조용히 얘길 해두겠어. 그러면 우리가 식사하는 동안에 당신의 짐을 일등 선실 쪽으로 옮길 절차를 밟게 해줄 테니까 말야."

그러지 말라고 부탁해도 아트는 듣지 않았다. 겉으로는 조용해도 마음은 끓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루실은 반항하지 않고 음성을 작게 해서 말했다.

"그럼, 옷을 갈아입고 오겠어요. 이런 낡아빠진 옷으로는 퀸즈 그릴에서 식사할 수가 없으니까요."

아트는 루실의 말을 받아들여 겨우 잡아 끌던 팔을 놓았다.

루실은 자기의 선실로 급히 가고, 아트는 혼자서 치프 퍼서를 찾으러 나갔다.

아트한테도 견딜 수 없어 하면서 왜 좀 더 요령있게 숨어 버리지 못했을까,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무척 화가 난 루실은 자기에게 알맞지도 않은 드레스를 골라내었다. 그것은 상아 빛깔의 시폰으로 만든 매우 얇고 매끄러운 것이었다. 샤니가 입었을 때에는 샤니의 녹색 눈과 불타는 듯한 머리를 보기 좋게 돋보이게 해주었지만, 카메오(보석 상아)같이 온화한 루실의 크림색 얼굴에는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루실은 황급히 옷을 머리 위부터 뒤집어쓰면서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거울에 비추어진 어깨의 흰 살은 진주빛을 조화시킨 것 같은 크림색으로 상아빛의 옷 색깔과 아무런 대조도 없이 서로 흡수하고 있었다.

평소부터 익숙해져서 빗을 대자 금발의 고수머리는 곧 부드럽게 빗겨져서 가느다란 목덜미에 착 붙었다. 보석은 끼지 않고 입술에 연하게 연분홍 루즈를 칠하기만 한 다음, 다른 화장은 하지 않았다.

이때 아트가 문을 노크했다.

"곧 나가요!"

루실은 옷장으로 달려가면서 그렇게 대답하고는 화사한 샌들에 발을 밀어 넣으면서 이브닝백을 낚아 쥐고 문으로 달려갔다.

아트는 얼굴을 찡그리고 눈썹을 치켜 올리며 조급해 하면서 복도를 왔다갔다하고 있었으나, 루실이 숨을 헐떡이면서 방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자, 그 표정은 금세 환하게 밝아졌다.

"잘됐어."

아트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 당신의 짐을 일등 갑판에 있는 내 방 가까운 방으로 옮겨 놓게 되었어. 그러니까 당연히 우리는 함께 식사할 수 있는 거야."

"고마워요, 아트."

루실은 아트의 단호한 얼굴을 보고, 차마 더 이상 거절할 수도 없어 깍듯이 인사를 했다.

"샤니가 반대하여 소란을 피우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항상 자기 좋을 대로만 마구 지껄여대거든. 그녀에 대해선 내게 말겨 둬."

두 사람이 퀸즈 그릴에 가보니, 샤니의 관심은 두 사람과는 다른 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샤니는 같은 테이블에 있는 남자한테 완전히 빠져들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여러 사람의 말소리가 주위에 흐르고 있었으나 그러한 시끄러운 분위기에는 습관이 되어 버려서, 두 사람은 자기들 둘만의 세계에 싸여서 서로를 탐색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흥분으로 반짝거리는 녹색 눈을 아양 떨듯이 가늘게 뜨고, 꽃잎같이 해맑은 살갗에 눈부시게 빛나는 새빨간 나비처럼 아름다운 입술을 귀엽게 뾰족히 내밀면서, 샤니는 대화를 혼자 이끌어 가고 있었다.

상대방은 검은 얼굴의 머리를 숙이고 샤니의 말을 한마디도 빼놓지 않겠다는 듯 듣고 있었다. 새까랗고 진한 속눈썹이 눈을 내리덮고 있었지만, 그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은 비밀이 감추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심심할 때 조금씩 생각해 낼 뿐이며, 항상 입술에 남은 쾌락을 생생하게 소생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는 아랍인의 갈색 피부의 의젓한 독재자다운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입은 완강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으며 콧구멍은 위로 치켜 올려져 있다. 대단히 오만스럽게 보이는 머리의 모양은 프랑스인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것 같았으며, 모친은 모로코 여왕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을 루실은 다시 생각해 냈다.

이 세련된 털렉 포크의 주위에는 여러 가지 억측과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더욱이 그의 음성에는 낮은 이야기 소리가 그대로 똑똑하게, 사막 아래로부터 별이 웃는 하늘까지 울려퍼질 듯한, 무한의 공간에 친숙해진 종족의 음색과 음조가 깃들여 있었고, 거기 대한 스스로의 자신감은 의심할 바 없이 마음에 드는 여성에 관한 지식이 풍부한 가운데서 생겨 나오는 것이라고 루실은 완전히 믿고 있었다.

"샤니는 아주 기분이 좋은 모양이군."

아트는 루실에게서 가까운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간 낭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털렉은 그 흔한 세속적인 인사에 싫은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그 자신은 여간해서 마음을 허락하지 않으니까 말이지."

두 사람은 테이블에 앉아서 화제를 털렉 포크에서부터 눈앞의 식사 얘기로 옮겼다. 루실은 안심했다.

웨이터들은 아무리 까다로운 손님이라도 식욕을 돋우어 주고야 말겠다는 듯이 요리 쟁반을 들고 테이블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녔다. 정결한 푸른 천장까지 닿을 만한 커트글라스(세공을 한 유리 그릇)의 둥근 광채를 받아 은접시에 가득히 놓인 과실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넘칠 듯한 깊은 색조의 푸른 커튼은 화려한 라운지 안에서 고급 식사를 하는 데 알맞은 분위기를 자아내 주고 있었다.

", 무얼 먹을까?"

아트는 메뉴를 루실에게 건네주고, 천천히 의자 등에 기대어 무얼 주문할까 생각 중이었다.

", 먼저 그레이프 프루즈(북아메리카 남부의 과일)를 줘요."

루실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기네스와 굴 스프가 맛있겠는데!"

"다음은 작은 오리의 오렌지 소스 무침, 그리고 살구 메리네가 어떨까?"

아트는 익숙하게 덧붙였다.

루실이 기뻐하며 찬성하였더니 아트는 그대로 주문했다. 그리고 아트는 자세를 곧게 하고 차분하게 루실을 바라보았다.

"당신이란 사람은 함께 있으면 매우 즐거운 사람이야. 알겠어? 당신은 화도 내지 않고 떠들지도 않으며, 거울도 안 보구. 샴페인을 너무 지나치게 마신 후에 한 잔의 냉수를 마시는 기분이야."

"아무것도 아닌데, 그렇게 칭찬을 해주시니 고마워요."

루실은 뜻밖의 찬사에 대해서 조심하듯 그러면서도 빈정거리듯 말했다.

"루실! 나쁘게 듣지 말아 줘. 그런 뜻이 아니란 말이야."

아트는 당황해서 변명을 했지만 곧 깨달았다.

"뭐야, 나를 놀리는 거야? 그러면 한대 때려 줄 테야!"

루실이 활짝 웃자, 아트는 테이블 위로 손을 내밀어 루실의 손을 잡아 보복이라도 하는 듯이 손에 꽉 힘을 주었다.

루실은 시침을 떼고 웃고 있다가, 샤니의 화를 내는 소리에 놀란 듯이 손을 빼었다.

"둘이서 재미를 보구 싶으면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데서 놀면 어때? 게다가 루실은, 좀 묻겠는데 여기서 뭘 하고 있지? 너는 다른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끔 되어 있을 텐데?"

루실은 심한 모욕을 당한 것 같았다. 더구나 아트가 어색해 하는 것을 보니 더욱 그랬다.

"미안해요. 아트가 방을 바꿔 줘서요"

샤니의 옆에 앉은 사내는 이 광경을 눈을 가늘게 뜨고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 사내는 언제나, 말하자면 한 순간의 일이라도 흥미 있는 것을 보면 놓치지 않으려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사과의 말은 목구멍 속에서 말라 버렸다. 루실이 사내에게 시선을 던지자, 그는 입술을 비쭉거렸다.

샤니의 성난 눈은 아트의 눈과 부딪쳐 불꽃을 튕겼다. 아트는 턱을 쭉 내밀고 이에 대항하려 했으나, 샤니는 그것을 피하며 루실에게 화살을 던졌다.

"할 일이 있으니 얼른 내 방으로 와 줘. 내일 입을 드레스는 아직 반밖에 다리미질을 안했잖아. 드레스의 주름살을 다 펴 놓아야 일을 마친 것이 되잖겠어."

너는 노예의 신분이라고 공공연히 남이 알 수 있도록 발표한 데 대한 굴욕 때문에, 가느다란 목덜미에 금발 고수머리가 축 처졌다.

털렉 포크가 눈썹을 치켜 올렸고, 말없이 침묵에 잠겨 있던 아트가 금세 분노를 폭발시킬 듯하는 것을 보고, 루실은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면서 숨을 삼켜 가며 샤니에게 차디찬 잿빛 시선을 쏟으며 말했다.

"알았어요. 그럼 아트, 실례하겠어요."

"그러나 식사를 주문해 놓았잖아."

아트가 소리를 질렀다.

"샤니, 당신은 사람을 너무 혹사시키고 있어. 정말 루실은 오늘도 열 시간이나 넘게 일을 했어!"

샤니는 차디찬 웃음을 띠고 옆 사내의 팔에 자기 팔을 걸쳤다.

"루실은 발에 사슬이 묶인 노예는 아니에요. 조건이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지 자유롭게 될 수 있으니까요!"

루실에게 도전하는 선언을 했다. 루실이 화를 벌컥 내며 권리 주장이라도 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루실은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트가 불신하는 표정을 지었다.

공포를 느낀 루실은 샤니의 이 마지막 말은 들은 체도 않고 샤니가 한 말에 따랐다.

"일이 있으면 당연히 해야죠, 아트. 미안하지만 혼자서 식사를 하세요."

루실은 더 이상 어떤 말이 나오기 전에 이브닝백을 들고 달려나갔다. 선실을 향하고는 있었으나, 마음속으로는 오히려 승리감을 내세우듯 분노에 떨고 있는 아트와 그리고 털렉 포크의 호기심에 가득찬 눈을 피했던 것이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루실은 맹렬한 기세로 일에 착수했다.

샤니가 마룻바닥에 마구 구겨 놓은 채로 내던진 옷을 한 데 뭉쳐서 고의로 만들어 놓은 주름에 다리미를 댈 준비를 했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사소한 일에 신경쓸 것은 없어.'

루실은 이를 악물고 혼자 생각했다.

'이 여행만 끝나면 내 뜻대로 된다. 이 몇 주일 동안만 대포의 포탄 세례를 받는 걸로 생각해야지.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니까!'

일을 끝내고 마무리를 짓고 있는데, 밖에서 기분이 상쾌해진 샤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열쇠가 구멍에 꽂혔다. 루실은 얼른 몸을 돌려 구석으로 갔다.

"그러나 달링!"

샤니의 음성이 확실히 들려왔다.

"당신이 내가 고용한 여자를 이용해 주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필요한 때엔 언제든지 자유롭게 부려도 돼요."

루실은 방 안으로 발을 한 발짝 들여놓은 털렉 포크의 쏘는 듯한 시선과 마주쳤다.

루실은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털렉 포크는 입구 근처에서 머뭇거리며, 방금 제공받은 물품, 하녀를 어느 정도는 곤란한 듯이 또 어느 정도는 초조한 듯이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루실은 마치 노예 시장에서 사갈 사람에게 흥정을 받는 기분이었다. 뜨거운 시선이 루실의 완벽한 몸의 곡선에 집중되었다. 몸 전체가 불타올랐다.

"그렇다면 지불 방법을 의논해야겠는데요."

왱왱 울리는 소리가 루실의 귓가를 스치는 것 같았다. 루실은 태연하게 던져진 이 비열하기 그지없는 말을 들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당신답지 못하게."

옆방에서 샤니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저 부려먹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억제할 수 없는 분노를 말로 내뱉는 것만은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으나, 격분한 눈은 커다랗게 뜨여졌다.

그러나 털렉 포크는 못 본 체 등을 펴면서 송구스러운 듯이 말했다.

"속기와 타이프라이터를 칠 줄 알면 돼."

그렇게 말하고 눈썹을 치켜 올리며 덧붙여 말했다.

"물론, 미스 램, 내 비서가 카이로에서 우리와 함께 합류하게 되는데, 그때까지만 당신이 나를 도와 주면 돼요. 이의가 있나요?"

루실은 안심하며 가슴을 쓰다듬어 내렸다. 그러한 천진난만한 점이 확실히 털렉 포크의 마음을 감동시킨 모양이었다. 자신이 그를 의심하였다는 것이 못마땅해서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털렉 포크는 솔직하게, 그러면서도 야유를 품으며 비웃는 듯이 말했다.

"그러면 기쁘게 승낙하는 걸로 받아들여도 좋겠죠, 미스 램?"

이 순간부터 루실은 털렉에 대해서 깊은 한을 품게 되었다.

그것은 그때까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누구에게보다도 더욱 흥미를 품어온 그에 대한 반동이었다.

"제가 해낼 수 있는 일이라면, 샤니만 승낙해 준다면 언제든지 기꺼이 도와 드리겠어요."

루실은 일부러 확고한 투로 말했다.

그러면서 루실이 경멸하는 듯이 입술을 일그러뜨리자, 털렉 포크는 잠시 그런 표정을 바늘로 찌를 듯이 날카로운 눈으로 흘겨보고 있었다. 그러나 루실이 당황해 하며 그 표정을 바꾸더니 털렉 포크는 그제서야 간단한 지시를 내렸다.

"됐어, 내일 아침 열 시에 내 방으로 와 줘요."

루실은 그 자리를 떴다.

한 시간 후에 아트가 루실을 만났을 때, 루실은 아직도 마음이 달아오른 채 있었다. 루실은 배의 난간에 몸을 내미는 듯이 기대서서 말할 수 없는 사연 때문에 초조함을 조용히 억눌렀다. 그녀의 마음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어두운 바다 속에 삼켜지는 것 같았다.

아트는 말없이 루실의 옆으로 가서 함께 흘러가는 바닷물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루실이 자기의 접근을 불쾌하게 느끼지 않는 눈치를 깨닫고 아트는 결심한 듯 물었다.

"왜 루실은 샤니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지?"

"할 일이 없어지면 큰일나요, 아트. 그것뿐이에요."

아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루실은 한숨을 쉬고 바닷물만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아트의 깊은 이해심이 깃든 음성이 들렸다.

"루실, 나와 결혼해 주지 않겠어?"

루실이 놀라서 무슨 말을 하려 하자, 아트는 그것을 가로막았다.

"우리가 지금까지 사랑하지 않았다는 건 잘 알고 있어. 그러나 우리는 잘 해나갈 수 있을 것 같아. 공통된 취미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해. 당신도 잘 알고 있는 바이지만, 나는 연예인끼리의 결혼은 반대야. 서로 제멋대로 행동해서 암초에 부딪히고, 외면적인 매력까지 잃어 버린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거든. 그러나 당신은 우리 생활을 잘 이해하고 있어. 그리고 들떠 있지 않고 마음씨가 곱고, 무슨 일이 생기든 침착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야. 여행 가방을 들고 살아가는 것을 그다지 고생으로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고, 떠돌이 서커스단 생활을 경험해 보지 못한 여성이 터뜨리는 불만도 없을 거야.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하든지"

여기서 말을 중단하고 아트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은 이제부터는 다음에 할 일거리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어."

"아트!"

아트의 친절한 구혼에 루실은 그밖에 할 말이 더 없었다. 여태까지 그와 같은 일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루실은 아트의 동정 어린 태도를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 친절에는 정직하게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루실은 손을 내밀어 아트의 손을 잡으면서 상냥하게 물었다.

"비밀은 지켜 주시겠어요?"

아트는 조금 어쩔 줄을 모르다가 승낙했다.

"그럼 얘기할게요."

루실은 흥분한 기분으로 말했다.

"1년 전쯤부터 어느 잡지에 기사를 쓰고 있었어요. 그게 잘 되어 갔기 때문에 더욱 큰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샤니와 함께 여행 중에 모은 자료로 한 권의 책을 쓰기 시작했어요. 흔해빠진 여행기가 아니고, 각지의 여러 가지 사람들의 생활 양식이나 습관에까지 손을 대면서 쓰고 있죠. 그래서 우선 쓰기 시작한 두세 장()을 출판사에 보내봤어요. 그랬더니 대환영으로 완성되면 꼭 출판해 준대요. 그런데 꼭 한 가지 잘 안 되는 일이 있어서"

놀란 듯한 아트에게 루실은 설명을 계속했다.

"마지막 장은 아랍인과 그들의 관습을 취재하게 되어 있어요. 이젠 아시겠지요? 어떡하든지 이집트에서 여러 가지를 조사하고 싶었었는데"

거품 이는 바닷물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루실은 아트가 흥미를 느낀 듯이 숨을 삼키는 것을 들었다. 아트는 따뜻한 말을 보내 주었으나, 그 말은 놀라움이 깃든 것이었다.

"당신 정말 대단하군! 당신에게는 무엇인가 숨기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거라고는 짐작도 못했어. 정말 축하해, 루실. 나에게 알려 줘서 고마워. 이제야 알았어."

"지금 한 얘기는 아무한테도 하지 말아 주세요, 아트."

루실은 당황하며 덧붙였다.

"시간적인 여유도 없고, 샤니에게 알려져서 경멸을 받는다면 견딜 수 없어요. 만약만일 이 책의 출판이 뜻대로 된다면, 지금 하는 일은 그만두고 저술에 전념하려고 해요. 그러나 안 된다면"

루실은 말을 더듬으면서, 반갑지 않은 결과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루실의 자유가 지금 지평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손이 닿지 않는 신기루가 되어 버린다면

"반드시 성공할 거야!"

아트는 루실을 격려했다.

"필요한 조사는 할 수 있어. 무엇보다 이제는 여행의 절반이나 와 있으니까, 당신이 이집트로 가지 못할 이유는 없거든."

 

3

털렉 포크의 방은 샤니의 방과 같게 만든 호화로운 방으로 남성적인 느낌은 들었지만 설비는 더욱 사치스러웠다. 루실은 입구 밖에 우물쭈물하고 서 있었다. 함부로 침입당하는 것을 거부하는 듯한, 다리가 긴 특별히 만든 테이블 세트가 한구석에 있고, 거기에 맞도록 팔걸이 의자가 여유있게 놓여져 있었다.

추자나무 재료와 진주로 만든 우아하게 설계된 책상은 보기에도 고급스러웠지만 기능 면으로도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루실은 팔걸이 의자 밑에 흐르는 듯이 깔려져 있는 우아한 붉은 카페트 위를 밟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루실은 기침을 크게 했다. 그러자 문이 열렸다.

그러나 이곳으로 오도록 어젯밤 루실에게 명령을 내린 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루실이 발꿈치를 돌려 다시 되돌아 나가려 할 때, 이층의 침실 쪽에서 명령하는 소리가 들렸다.

"좀 기다려요, 아가씨. 곧 내려갈 테니까!"

루실은 자기의 노트를 누가 채가기라도 하듯이 꼭 틀어쥐고 방으로 들어가 몇 가지 색실로 짜놓은 천으로 된 의자 끝에 긴장하며 앉았다. 벽에는 커다란 유화가 걸려 있었다. 해밀튼 부인의 초상일까. 루실은 의자에서 일어나서 금테가 붙어 있는 작은 패의 글씨를 읽어보며 가만히 그림 쪽으로 가까이 갔다.

"그것은 엠마의 초상이야! 당신과는 아주 대조적인 여성이지, 아가씨!"

루실은 얼른 돌아다보았다. 루실의 어깨너머로 털렉 포크가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게는 여성이란 둘밖에 없어. 여신(女神)과 구두닦기지!"

털렉 포크의 입에서 유쾌한 듯이 들려온 말에 모욕을 느끼고 루실은 얼굴이 새빨갛게 되었으며, 한편으론 추켜세우려는 털렉 포크의 수완에 걸려들지 않기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얼른 필기를 시작하지요. 준비는 다 해왔습니다."

루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말했으나, 그 음성은 명령에 복종하겠다는 듯이 들렸다.

"그렇군."

그렇게 말하고 털렉 포크는 천천히 전화 있는 데로 갔다.

"먼저 커피를 마시고 합시다."

루실은 털렉 포크가 스츄워드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동안에 가슴을 졸이면서 얼른 일을 마치고 부담스런 그의 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루실은 자기의 감정에 놀랐다. 털렉 포크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고의적인 듯한 연기(演技)에는 익숙해졌으나, 그 사람처럼 하는 일없이 인생의 위험한 다리를 건너가면서 날카로운 관찰력을 갖고 있는 이상한 사람과 만나는 일에는 안절부절할 수밖에 없었다. 연필을 깎는 체하고 루실은 내리뜬 눈꺼풀 밑으로 방 안을 왔다갔다하는 털렉 포크를 보고 있었다.

그는 말쑥한 옷을 입고 있었다. 주문해 맞춘 날씬한 바지와 몸에 꼭 맞는 셔츠는 사막의 고양이와 같이 부드럽게 육체를 감싸고 있었는데, 힘있는 어깨나 동작에 나타나는 강인한 육체를 감추어 속여낼 수는 없었다. 걸어다닌다는 것보다는 가만히 침입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은 마음을 놓거나 안정되지는 않는 날카로운 눈과 부드러운 살갗을 가진 마치 화려한 짐승 같았다.

배달해 온 커피를 컵에 따르고, 어린 사환이 처음으로 일을 배우는 것처럼 조심조심 그 잔을 털렉 포크에게 건네주었다.

털렉 포크는 떨리는 손으로 내미는 잔을 받으면서 화가 난 듯이 말했다.

"당신은 언제까지나 그렇게 부들부들 떨고만 있을 참이오? 아니, 내가 물어뜯기라도 할 것 같아서 그러는 거요?"

대답할 필요도 없어 루실은 가만히 있었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부딪쳤을 때에 온몸에 흐르던 공포감과 흥분은 스스로도 설명해 낼 수가 없었다. 부드럽게 내뱉은 저주의 말만이 눈치빠른 루실의 머릿속에 빨려들어갔다.

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루실은 털렉 포크가 화를 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털렉 포크가 차례차례 쏟아 놓는 말에 대해서 루실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나의 가장 큰 고민은 나 자신의 인기에 맞설 수 있다면, 맞서고 싶은 일이오!"

털랙 포크는 꼭 악문 이빨 사이로 내뱉듯이 말했다.

"내가 만나는 여성은 누구나 모두가 내가 세계 제일의 훌륭한 연인(戀人)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어. 당신처럼 그녀들은 야만적인 이집트인에게 몰리다가는 곧 떨어져 나가는 것을 바라고 있는 거라구!"

루실은 이 말을 완강히 부정하려고 했으나, 털렉 포크는 강압적으로 억제하며 말을 계속했다.

"만약에 이런 상태가 전혀 없어지지 않고 그때마다 거기에 응해야 한다면, 하룻밤만 가지고도 남자의 한계를 넘어설 정도야. '술집에서 기다리고 있겠어요. 식사에 데리고 가주시면 고맙겠어요'라는 종이쪽지가 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보는 일도 이젠 지긋지긋하다구. 요구하는 대로 열 명이나 스무 명의 여성과 상대하고 있으면 그때마다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고, 이윽고는 결정적으로 싫어지는 때가 다가오는 거야!"

털렉 포크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루실의 두려워하는 얼굴을 힐끗 보았다. 불타고 있는 마음에 찬물이 끼얹혀지는 것 같았다. 몸을 깊숙이 굽히더니 엄지손가락과 둘째손가락으로 루실의 턱을 잡고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잿빛 눈을 자기 쪽으로 돌리게 했다.

"놀라게 해서 안 됐어, 아가씨. 그러나 함께 일을 하자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날마다 평화롭게 지내려면 하모니가 가장 중요해. 그러나 내 앞에 나오면 신경이 곤두세워진다든가, 내가 무얼 하려 하나 하고 의심쩍게 생각하고 있다면, 하모니를 이룰 수 없지 않겠어?"

그렇게 말하더니, 털렉 포크는 몸을 일으켜서 루실에게 마음을 진정시킬 시간을 주려고 하는 듯이 편지가 쌓여 있는 책상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나 금방 또 신랄한 말을 퍼부어댔다.

"그럼, 이것으로 내가 당신에게 대해서 아무런 음모도 꾸미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얼른 일을 시작하도록 할까?"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안한 기분으로 노트와 펜을 잡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겉으로는 냉정하게 보여도 루실은 기를 쓰고 호흡을 순조롭게 가지려고 애썼다. 너무나 노골적인 선언에 그것만으로도 자신을 어지럽게 한 듯한 생각마저 들었다.

루실은 예의에 벗어난 대화에는 익숙해졌었다. 샤니의 친구들은 모두가 세상에 부대껴서 모든 평범한 일까지에도 정통해 있었다.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들은 여성해방이나 남녀평등 같은 것에 대한 가볍고 묘한 내용이 주가 되어 있었다.

털렉 포크의 말투는 우쭐해서 남을 깔보는 일이 심했다. 루실은 경멸받는 여성에 대해서 편을 들어주고 싶은 안타까운 마음이 솟아오름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서 털렉 포크의 고민이 억지로 과장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편지의 대부분은 털렉 포크를 숭배하는 여성들에게서 온 것이기에 그는 틀에 박힌 회답을 필기시키기 전에 반드시 낭송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보내는 사람의 이름을 조사하기 위해서 털렉 포크가 편지를 훑어볼 때는 루실의 볼은 붉게 익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털렉 포크의 얼굴은 냉소적이어서 그를 자기의 매력을 과대평가하는 자만심이 강한 남자라고 결정짓기 전에, 방금 이제 읽어 들려준 다정다감한 표현이 모두가 거짓이 아님을 확인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로부터 두 주일 간 루실은 두 사람의 고용주 사이에서 시키는 일에 쫓기다 보니 식사 시간조차 충분히 즐길 수가 없었다. 산더미 같은 편지를 정리하는 일이 끝나기도 전에 배가 다음 항구에 도착하여, 전보다 더 클 듯싶은 편지 뭉텅이가 도착하여 또 정리를 시작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아침마다 식사를 마치면 털렉 포크의 방에 가서 두 시간 필기를 한다. 점심 후에는 샤니의 일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샤니는 언제나 저녁때까지 루실을 붙들어 두었으므로 루실은 저녁식사하러 나갈 준비를 서둘러 해야 했다. 그리고 남은 시간은 오전 중에 필기한 편지를 타이프 치는 데 충당했다. 뉴욕, 큐라소, 살바도르, 바이하의 항구에 머물면서 18일은 지나, 배는 머지않아서 리오데자네이로에 도착하려 하는데, 루실은 식당과 자기의 선실과 샤니와 털랙 포크의 방 이외에는 하나도 보지를 못했다.

루실의 창백한 얼굴과 피로에 지쳐 버린 모습을 맨 처음에 알아차린 사람은 아트였다. 샤니가 샤워를 하며 자기의 호화로운 배 여행을 즐기는 동안, 루실은 어떻게 해야 일을 때맞춰 할 수 있을까 하고 고심하며, 샤니의 몸에 꼭 달라붙는 옷에 흠이라도 없나 열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새로운 영화 건으로 샤니와 의논하려고 의자에서 몸을 쉬고 있던 아트는, 루실이 자신을 망각한 듯이 툭툭 경련을 일으키는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대고 있는 것을 보고 갑자기 얼굴을 찡그렸다. 루실을 위해서 오래 전부터 느껴오던 분노가 이제야 터졌다.

"루실, 너무 과로했어. 그런 옷가지 따위는 집어치워 버리고 휴식을 취해요. 내가 마실 걸 갖고 올 테니까."

"좀 더 하고요."

루실은 멍청해서 대답했다.

"잠깐만 쉬겠어요, 시간이 없어서"

"푹 쉬는 거야!"

아트는 루실의 너무나도 헌신적인 태도에 어이없음을 느끼며 큰소리를 쳤다.

"부탁이야, 당신은 집에서 기르는 짐승이 아니라구. 지금은 암흑 시대가 아니야! 이 배에서 가장 천한 노동자라도 자기의 시간을 당신보다는 더 많이 갖고 있어. 샤니의 방자한 말에 복종하는 것도 이제 끝내 버려야 돼. 정말 그러다가 건강을 해쳐 버리면 손을 쓸 여유도 없어질 테니까!"

루실의 눈에는 불현듯 눈물이 글썽하였다. 그 눈물을 감출 사이도 없었다는 사실은 곧, 역시 그만큼 피로에 지쳐 버렸다는 증거였다.

"몸이 닳아빠져 뼈만 남는다고 해도 괜찮겠어요. 샤니를 화나게 하는 일만 없앨 수 있다면. 아시겠죠?"

아트의 동정이 부드러운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고 하는 듯이 루실은 고집스럽게 대답했다.

아트는 루실의 마음을 이해하고서 안쓰러워져서 태도를 누그려뜨렸다.

"알겠어? 루실! 당신이 죽을 정도로 일해 봤자 결국은 아무 보수도 못 받아. 샤니와의 관계를 끊어. 내가 당신의 여비를 담당할 테니까. 그러면 당신도 즐거운 여행을 하면서 자료 수집을 할 수 있을 거야. 당신이 미안하게 느낀다면 책에서 인세가 나올 때 그 돈으로 갚아 주면 되잖겠어?"

루실의 얼굴은 잠깐 동안 밝아지고 빛나는 듯했으나, 이윽고 천천히 머리를 가로 흔들며 똑똑히 말했다.

"아니에요, 그럴 수는 없어요, 아트 씨. 어떻게 될지 앞 일을 내다볼 수도 없는데 어떻게 당신의 제의를 받아들이겠어요. 당신의 친절에는 정말 감사해요. 그러나 당신은 너무 지나친 낙천가세요. 만약에 실패하면 돈도 못 갚게 될 테고, 양심에 걸려서 홀가분한 생활도 할 수 없게 돼버려요. 그러니까 이 여행만은 제가 벌어서 해나가겠어요."

더 이상 말해도 허사였다. 아트는 한숨을 쉬고 오히려 부탁하듯이 말했다.

"그럼, 오늘 밤엔 이만 해둡시다. 함께 바에나 가서 카지노 노름을 하고, 캬바레나 나이트클럽에 가봅시다. 영화를 보고 싶다면 영화관으로 안내할 테고."

이제 그는 단념해 버렸다.

자기 자신이 영화 기획을 하고 있는 아트가 타인이 만든 영화를 본다는 것은 완전히 자기를 희생시키는 일이 되니까, 마지막 말은 순전히 루실의 호의적인 답변을 요구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루실은 웃으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루실은 금세 기분이 즐거워진 듯이 대답했다.

"당신 하자는 대로 하겠어요. 영화만은 그만두고."

루실은 정성껏 의복을 챙겼다. 루실의 드레스는 모두가 월급 대신에 받은 것이거나, 어쩌다가 물려받아 루실의 소유물이 된 것들이었다. 루실이 잡지사에서 받은 얼마 안 되는 돈으로는 스커트를 샀고, 가끔 산보를 나간다든지 상륙할 때에 쓸 용돈밖에 안 되었다. 루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막의 하늘처럼 푸르고 소박한 드레스를 골랐다. 그것은 샤니가 감정을 충만케 하기 위해서 샀던 칼집 모양의 드레스로, 낡은 것도 아니고 그저 주름살이 져서 물려준 것이다. 고급스런 드레스는 연약한 몸에 우아하고 성숙한 기풍을 돋보이게 해주었다.

루실은 기뻐하며 거울 앞에서 몇 번이나 뱅뱅 돌아보았다. 이탈리아의 상점에서 꺼름칙한 기분으로 샀던 은으로 만든 작은 귀걸이는 드레스와 잘 어울렸다. 푸르고 하얀 벨벳 같은 귓불에 붙어서 금발 머리를 더욱 빛나게 하고, 보는 사람의 눈을 섬세한 얼굴에 끌려들게 하였다.

아트는 멋진 백색 장미의 코사쥬를 투명한 상자에 넣어 갖고 왔다.

"당신에게 주려고 만들게 했어, 공작부인."

아트는 볼을 붉히며 미소를 보이면서 루실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그 이상의 말이 필요없었다.

"어머! 아트 씨, 저에게는 너무 지나친 선물이에요."

"시기를 기다렸던 거야."

아트는 상자에서 코사쥬를 꺼내는 일을 도우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역시 당신은 폭신폭신한 쿠션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자수 같은 것이라도 놓는 편이 어울리겠어. 누더기를 걸치고, 보잘것없는 인간들을 위해 일하는 건 잘못이야."

루실은 앞으로 다가올 즐거움에 가슴 두근거리면서 코사쥬를 끼는 데 열중해 있었으므로 약간 경멸을 느끼게 하는 아트의 말을 놓쳐 버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밤에 사람들이 모인 곳을 엿보기도 했지만, 이윽고 두 사람의 산책은 배 안을 구경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배에는 희귀한 것과 알지 못했던 것들이 많았다. 루실은 즐거워서 갑판을 차례차례로 걸어 나갔다. 두 사람은 아홉 개나 되는 술집을 하나하나 엿보았다.

아트는 그 중에서 두 군데의 술집에서 겨우 한 잔씩 마실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에스컬레이터를 몇 번이나 오르내리며 네 군데의 풀장, 대도서실, 극장, 루실로서는 감히 가볼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는 여러 가지 상품을 구비해 놓고 있는 쇼핑 아케이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지노 도박장을 보았다. 거기에서는 딜러와 도박꾼들이 녹색 나사천을 편 테이블을 끼고 앉아, 딴 돈을 싹 쓸어갈 때마다 흥분의 소란이 일어났다. 아트는 융단에 발을 묻고, 이젠 이곳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한 잔, 또 두 잔, 아니야 몇 잔이라도 상관할 게 없지만, 딱딱한 갑판을 계속 걸어서 지친 다리가 보드라운 융단을 밟고 있으면 아픔이 싹 가시는 것 같단 말이야!"

아트는 루실을 술집 의자에 억지로 앉히고 눈을 번쩍거리며 말했다.

"미안해요."

루실은 말했다.

"당신의 신세를 질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저는 지금 정말 즐거워요!"

루실이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는 것은 표정이 빛나듯이 아름다워진 것으로 명백했다. 아트는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그런데 이윽고 술을 마시고 있는 동안에 루실의 활기가 갑자기 사라졌다. 흥청거리는 사람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아직 술이 남아 있는 잔을 쥔 손을 떨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아트는 걱정스럽게 물었으나 루실은 눈을 들지 않았다. 어깨를 움츠리고 아트를 안심시킬 말을 찾아내는 듯했으나, 그 말도 찾아낼 수 없었다.

루실은 감정을 표면에 나타내고 있는 자기 자신에 화가 났다. 상당히 거만스러운 얼굴이 붙어 있는 눈에 익숙한 어깨, 그리고 가까운 룰렛판에 집중되어졌던 때의 날카로운 눈매. 루실의 기쁨은 그것들을 발견한 찰나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평범한 아트 같은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으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루실은 이브가 옛날부터 사용하여 온 흔한 구실을 생각해 내었다.

"두통이 나요. 실례해야 되겠어요."

아트는 재빨리 그녀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래? 그렇다면 루실, 내가 방에까지 데려다 줄게. 그리고 사람을 시켜 약을 가져오도록 하겠어."

루실은 아트의 친절을 배신하는 듯싶었지만, 관자놀이가 경련을 일으키고 피로해서 팔다리가 천근이나 되듯 무겁게 느껴지더니 선실로 돌아오자, 이윽고 서서히 두통도 없어지고 곧 기분이 안정되었다.

아트가 가버리고 친절한 스츄워드만 남게 되자 한껏 자유로워진 느낌이었다. 그때 또 다른 사태가 일어났다. 옷을 갈아입으려고 하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샤니의 방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늦은 밤에 무슨 용무가 있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면서 샤니의 방을 향해 복도를 빨리 걸으며, 루실은 마음의 준비를 해두려고 자기가 그날 한 행동을 생각해 보았다.

샤니는 화가 난 호랑이 같은 모습으로 방 안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녹색의 눈과 정열적이고 아름다운 얼굴에는 의식적으로 그 이상의 분노를 보여주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야!"

루실이 들어서자 곧 샤니는 말을 퍼부었다.

"그 사막의 남자란 나를 마치 자기의 관심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첩년이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세 시간이나 기다렸었어!"

샤니는 어쩔 줄을 모르는 루실에게 계속 퍼부어댔다.

"나와 식사를 못하게 된 이유가 뭔지나 알고 있어?"

루실은 옆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룰렛판과 블랙 잭은 어떻게 된 거야! 왜 그가 오지 않나 하고 여러 가지로 생각했더니 그래 쥐꼬리만한 돈을 긁어모으려고 정신이 빠졌었다니!"

루실은 목구멍이 메어옴을 참고 말했다.

"언니가 불평을 하는 이유를 알겠어요. 포크 씨는 틀림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언니와 약속해 놓고서도 지키지 않다니."

"약속? 미친 소린 하지도 말어. 털렉과 나는 일일이 약속 따위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야. 배를 탔을 때부터 우리들은 언제나 항상 함께 있기로 했던 거야!"

"그렇겠죠"

루실은 뭔가 대답을 해야겠다고 느꼈다.

"믿을 수 없어!"

샤니는 경멸하듯이 입을 오므라뜨리며 말했다.

"너의 생활은 언제나 지나칠 정도로 평범하니까 털렉이나 나같이 격한 성격의 사람끼리 부딪쳐 일으키는 거친 감정 같은 건, 남의 일처럼 생각될 거야."

샤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만족한 듯이 천천히 손을 허리에 대면서, 자기의 분노를 이미 결정된 결과로 이끌어 갔다.

"나는 그와 결혼할 작정이야."

샤니는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훌륭한 상대지. 기분 나쁜 일이 있더라도 결코 싫증이 나지 않아."

샤니는 승리한 듯이 웃음소리를 크게 내며 계속했다.

"우리들은 물론 싸움도 하겠지. 그러나 잘 풀어질 거야. 물론 나에게 편리할 때에만 말이야. 매의 포크라고 불리는 그가 인정하든 안하든 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매력적인 상대와 만나게 되는 거지."

샤니는 침묵을 지키고 있는 루실에게 도전하듯이 휙 돌아서 몸을 마주세웠다.

"그는 나를 붙잡아 두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왜 나를 회피하려 하겠어?"

 

4

다음 날 아침에 루실이 눈을 떠보니 지평선 위에 리오데자네이로의 해안이 뚜렷이 떠올라 있었다.

루실은 현창(舷窓)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배는 바다와 항구에서 우뚝 솟은 녹색 산기슭에 전개되어지는 숨을 삼킬 만큼 아름다운 거리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얀 백사장이 해안선을 따라서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이어졌고, 백사장 뒤쪽에는 근대적인 아파트와 호텔과 여러 가지 공공시설이 나란히 서 있어, 희미하게 그 윤곽을 나타내고 있었다. 눈을 들어보니 슈가로프 산이 항구 입구를 지켜보듯이 솟아있고, 거리 전체를 내려다보는 한크백 산에 거대한 그리스도의 상이 두 다리를 넓게 벌리고 상냥한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루실은 언제까지나 빨려들듯이 보고 있다가 아침식사가 늦어질까 봐 숨을 죽이며 식당으로 달려 들어갔을 때에는 샤니도 아트도 자리에서 일어설 때였다.

"어디에 가 있었지?"

샤니는 초조하게 물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야 하잖겠어!"

"미안해요."

루실은 더듬거리면서 사과했다.

"이렇게 일찍 용무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할 일이 있단 말야!"

샤니는 그렇게 말하며 흘겨보더니, 희고 긴 장갑을 집어올리고 긴 스커트의 옷자락을 고쳤다. 우아한 맵씨였다.

"오늘은 아트와 둘이서 신문사 회의, 칵테일파티, 오찬회로 돌아다니는 거야. 광고 선전업자들이 한 달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지. 그런데 네가 잊어버렸다구."

"그럼, 지금부터는 오늘 내가 할 일은 없어요?"

루실은 조심스럽게 물으면서 솟아오르는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샤니는 의심스러운 눈매로 루실을 보았다. 자기도 함께 외출하지 못함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해석한 샤니는,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안 됐지만, 너는 나오지 않아도 돼. 그러니까 배에 남아서 털렉 포크한테로나 가봐. 내가 일이 있으면 말씀해 달라고 하면서 보내더라고 해."

루실은 실망했다. 일이 없으면 바다 저쪽에서 유혹하는 듯한 거리로 갈 생각에 가슴이 뿌듯했었는데.

아트가 외출에 대한 얘기를 하는 동안, 루실은 간신히 웃는 얼굴을 하며 듣고 있었다.

"어서 얼굴을 들어요, 공주. 오늘 밤 열한 시경에 그릴 룸의 술집에서 만나요. 함께 마시자구."

혼자서 아침을 마치고 나서 루실은 털렉 포크의 방으로 향했다. 그렇게까지 유명한 스타라면 이 이상 선전하기보다는 오히려 세평(世評)을 피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루실은 조용히 털렉 포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마음이 내키지 않은 채 문을 노크했다.

"들어와요!"

금방 대답이 들렸다. 털렉 포크는 이해력도 훌륭하지만 귀도 정확했다.

루실은 슬픈 기분이 들고 말았다.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갔더니 그는 입구 바로 곁에 서 있었다.

"저 샤니가"

루실은 입을 열었으나, 그 말만 하고 꿀꺽 침을 삼켰다.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도와 드리려고 왔어요."

번쩍번쩍 빛나는 눈 위에서 한쪽 눈썹이 기분 나쁜 듯이 무엇인가 묻고 싶어 하는 의문의 태도를 보였다. 루실은 볼을 붉히면서 당황해 하며 다시 말했다.

"샤니가 가서 도와 드리라고 했습니다."

털렉 포크가 틀림없이 바보로 취급하고 조롱해 오리라고 생각했다.

루실은 알고 있었다. 털렉 포크의 수수께끼 같은 매력과 침묵 속에서 루실을 위압하려는 그 자신감을 가지는 데에 혐오를 느껴서 루실은 울분하면서 입을 꼭 다물어 버렸다.

털렉 포크는 편지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앞에 있는 책상에는 아름다운 글씨를 펜으로 쓰기 시작한 편지가 놓여 있고, 갈색의 손가락은 금빛나는 펜을 움직이고 있었다. 털렉 포크는 의자의 등에 몸을 기대었다.

루실은 불쾌한 대답이 돌아오리라고 조마조마해 하며 기다렸다. 그러나 루실의 창백한 볼과 숨길 수 없는 입술의 떨림을 뚫어지게 지켜보는 동안에, 털렉 포크의 눈에서 광채는 사라졌다.

"피로한 것 같군. 아가씨, 아마 과로를 한 모양이지?"

털렉 포크의 뜻밖의 말에 루실의 신경은 긴장된 반응을 나타내어 잿빛 눈 속에서 생명의 불길이 타올랐다.

"어쩔 도리가 없군요, 선생님. 샤니도 당신도 대단한 성깔의 사람들이군요!"

놀랄 정도로 털렉 포크는 루실의 비난을 깨끗이 받아들여 긍정하더니 더욱 놀랄 만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내게도 책임이 있다면 나도 반성을 해야 하겠지. 외투를 입고 외출에 필요한 준비를 한 다음 갑판에서 만나요, 15분 후에는 거리로 데려가겠어. 다만, 동정하는 뜻에서라구."

털렉 포크의 제의를 머릿속에서는 기뻐했으나 다리가 자유롭게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선 채로 루실은 멍청해졌다.

"왜 그래? 리오의 거리에서 하루를 보내고 싶지 않나?"

털렉 포크는 이층 침실로 향하는 계단 중간에서 발을 멈추고 호통치듯이 말했다.

꽉 틀어쥔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었다. 털렉 포크는 강아지에게 뼈다귀를 던져 주듯이 루실을 유혹했다. 은혜를 베푸는 듯이 으시대는 악마!

"거리엔 가고 싶어요. 그러나 당신과 함께는 싫어요! 괜찮다면 혼자서 나가겠어요!"

그러나 이 반항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털렉 포크의 언사와 행동에 거역한 여성은 아직껏 하나도 없었다. 털렉 포크의 놀란 표정은 그러한 사실을 여실히 말해 주고 있었지만, 거기에서 신선한 맛과 흥미를 느낀 것도 명백했다. 털렉 포크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서 루실의 앞을 막아섰다.

루실은 머리를 들고 호기심으로 불타는 눈을 똑바로 볼 수밖에 없었다. 털렉 포크의 욕망을 불러일으킨 것이 무엇이든, 루실은 아무런 환각도 없이 침착하게 마주대했다. 털렉 포크에게 있어서 여성은 오로지 즐기는 상대자이며, 귀여운 친구였다. 그러나 쉴새없이 단것만 먹으면 먹기 싫어지는 법이다. 털렉 포크의 분노는 나중에는 협박으로까지 발전했다.

"당신은 고용주에게서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을 못 들었었나, 아가씨?"

털렉 포크는 엄숙하게 말했다. 루실은 털렉 포크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발밑의 융단으로 시선을 옮기고 억지로 수긍했다.

"됐어!"

털렉 포크는 만족스럽게 희미한 미소를 띠며 계속했다.

"그렇다면 내가 말한 대로 갑판으로 나오는 거야. 지금부터 15분 후에."

리오의 거리는 축제가 한창이었다. 브라질 전체가 열광적으로 들끓는 지방의 성자제(聖子祭)를 축복하고 있었다. 그것은 항구에서 거리의 중앙을 향해 가는 도중에서 우연히 보게 된 것인데, 광장의 한모퉁이에 모인 군중 앞에서 향토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루실은 자기의 기분도 잊어버리고 털렉 포크의 설명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구경꾼의 대부분이 농민복을 입고 있었다. 여성들은 옷자락 끝에 장식이 붙은 격자무늬의 평직 옷감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고, 검은 머리에는 꽃과 리본을 꽂고 있었으며, 남자들은 평상복의 바지에 흰 셔츠를 걸쳤고 목에는 색깔이 선명한 스카프로 장식하고, 눈부신 햇빛을 피하기 위해서 차양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모자에 달려 있는 끈은 턱 밑에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우리들은 한 데 꼭 붙어 있어야만 돼."

털렉 포크는 커다랗게 뜨고 있는 루실의 눈에 흘러넘치고 있는 말없는 질문에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것은 6월 달의 성자제(聖子祭)의 하나로 안토니오, 요한, 베드로, 그리고 바울을 위한 축제지. 이때가 되면 도회나 거리에서 아이들은 불꽃놀이를 하고, 어른들은 춤을 추고, 커다란 화롯불 속에서 구워낸 감자를 먹으며, 그 주위에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 거지. 이것은 '보이 분버'라고 하는 토막극으로, 옛날 인디언이 목동의 소를 빼앗아 죽이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인 거야."

군중 속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끓어오르더니, 금방 그 재미있는 놀음이 보고 싶어서 너도나도 밀려들기 시작했다.

루실의 앞에 건장한 어깨의 사나이가 나타나 눈앞을 막아 버려서 발돋움을 해도 볼 수가 없었다. 이때 갑자기 루실은 허리를 잡혀 털렉 포크의 어깨 위까지 들어올려졌다. 바다 같은 머리들보다도 높이 떠서 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환히 바라다보였다.

루실은 보기에도 어색한 모양이 되어져서 항의를 하려고 입을 벌렸으나 마침 그때 참대나무에 천을 감고 소를 만들어 올려놓는 가장행렬에 눈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 가장 인물 두 사람은 보기에 상당히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소의 뒷다리 역을 맡은 남자와 앞다리 역을 맡은 남자의 보조가 전연 맞지 않게 되어지자, 두 사람은 열심히 보조를 맞추려고 하지만 그 가장을 뒤집어쓴 속에서는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어 서로 어긋나갈 뿐이었다.

군중의 미칠 듯한 웃음소리가 루실에게도 전염이 되어왔다. 루실은 부끄러운 자신을 잊어버리고 함께 합세하여 웃고 있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광경은 루실로 하여금 폭소를 터뜨리게 하여 금방이라도 어깨에서 떨어질 듯싶었고, 루실의 허리를 붙잡은 손에서까지 벗어날 것만 같았다.

간간이 가장행렬이 지나가고, 털렉이 루실을 땅바닥에 내려놓을 때에는 너무나 웃어서 눈물이 볼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증오심도 완전히 잊어버리고 루실은 순진한 아이들처럼 그 자리에 선 채로 순수한 심중에서 나오는 웃음을 털렉과 주고받았다. 털렉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주는 것도 그대로 맡겨 버렸다.

"참으로 즐거웠던 모양이군! 나도 몇 번이나 보는 동안 저 재난이 연극으로써 몇 번이고 반복되어 왔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어."

루실의 기쁨이 어느 정도 가셔졌다.

"웬일인지 쓸쓸해요. 당신은 야유하는 버릇으로 즐거움을 감소시키고 말았어요."

웃음이 사라지고, 털렉은 루실을 그 무리에서 끌어내려고 팔을 잡더니 큰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루실은 종종걸음으로 걸어서 털렉의 빠른 걸음과 보조를 맞추었다.

그 후에 그들은 명랑한 분위기 속에서 떠들썩하는 거리의 여기저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즐거움이 그치지 않을 정도로, 그렇다고 해서 조금 아까와 같이 둘이 완전히 심중에서 녹아내릴 정도까지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서로 무장하고 있는 중립 상태로 꾸며 가고 있었다.

털렉의 탐색하는 듯한 그 시선은 루실을 괴롭게 했다. 루실은 그런 시선을 한두 번 받았으나 그런 눈을 되돌아볼 용기는 없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어느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거기는 방음이 잘되도록 융단을 깔아 놓고,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듯이 각 테이블마다 켜진 불빛이 그 자리만 은근히 비치게 만들어 세심한 배려가 보여지는 사치스러운 식당이었다. 털렉의 시선에서는 가까스로 탐색하는 듯한 표정이 조금 사라지고, 마음속에 깃든 만족감이 더욱 짙게 나타났다.

식사가 천천히 진행됨에 따라서 무엇인가가 루실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듯 했다. 그래서 루실의 조심스러운 말씨가 유혹해 내었던 털렉의 미소를 점점 개방적인 웃는 얼굴로 바꾸어 갔다. 털렉은 무엇인가를 결심했을 것이다. 루실은 불안에 떨면서 그렇게 생각했으나, 시간이 흘러가지 않고서는 그 직감이 정말 나쁜 예감이었는지 어쩐지는 알 수 없었다.

털렉은 그가 스타가 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천진난만한 출발이었다. 이윽고 얘기는 카이로에서의 아랍 영화의 인기 얘기로 바뀌어 우수에 젖은 역에서는 따라올 사람이 없는 그의 천부적 재능이, 그를 하루 아침에 스타로 만든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루실은 그다지 큰 흥미를 느끼지 않고 듣고 있었다.

"영화 배우의 성공 여부는 관객 중에서 여성이 흘리는 눈물의 양으로 결정되지."

털렉은 터무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것은 동서양 여성들의 공통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서양 영화에서는 이집트 사람이 배우가 되는 것이 상당히 유리한 점이야. 이국적인 느낌이 드니까 사람의 눈을 끌 수가 있고, 아무 역할을 해도 잘 해낼 수 있으니까 말이야. 여태까지 나는 여러 가지 역을 해내었지. 그리고 그로 인한 성공이 나의 나쁜 버릇을 더욱 키워 주었어. 트럼프 내기 같은. 그러나 아버지는 그것을 허락해 주지 않았었지. '술에, 그리고 여자한테 빠지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트럼프놀이만은 그만두어라'라고, 아버지는 말씀한 적까지 있었지. 그러나 어느 쪽도 결국엔 다 파멸인 바에야 아예 도박꾼이 되기를 원하게 되지!"

루실의 호흡은 털렉의 어조의 격해짐에 따라서 가빠졌다. 그의 이야기는 간단한 이기주의적인 남자의 농락하는 이야기만이 아니고 무엇에 연결되어지는 것을 이야기하는 듯싶어서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이제 그만하면 됐어!"

텔렉크는 비난하는 듯한 눈빛을 번쩍거렸다.

"사람의 마음을 손아귀에 넣고 흔드는 최고의 스타의 딱지를 붙이는 것도 그만하면 됐고, 달콤한 생활 얘기도 그만하면 충분히 경험을 했으니까! 아름다운 여자, 파티, 초대장, 바다를 건너도 보고, 여행을 하고는 영화를 찍기도 했지. 끝없는 회전목마일 뿐이야. 6년 동안이나 여행으로 살아왔어. 어쩌면 이루어질 듯하던 사랑도 이 방랑생활 때문에 다 무너져 버리고 말았었지. 이쯤 되면, 이제 그리운 건 오직 평화뿐이야. 일을 줄이고, 안정하고 싶어. 나한테 남몰래 따라오는 여자들을 잘 구슬러 주고, 때로는 부엌일에서 틈을 내어 나를 위한 저녁식사 준비를 하고, 내 일을 도울 수 있는 상냥하고 온순한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

텔렉은 이야기를 중단하고 잎담배에 불을 붙였다. 루실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음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루실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는지 몰라서 멍청하게 웃는 얼굴만 보였다.

텔렉은 불만스러운 얼굴을 나타냈다. 루실은 영화의 성공으로 자만심에 빠지고, 현실세계에 만족할 수 없게 돼버린 우상(偶像)들이 늘어놓는 호언장담에 대해서, 압지(押紙) 구실을 해야 할 때 흔히들 써먹는 판에 박은 문구를 찾아내려고 했으나, 잘 나와 주질 않았다.

"어때, 어느 정도는 흥미를 느꼈지?"

털렉은 수긍하기를 기대하며 말했다.

", 물론이죠."

털렉이 강철 같은 눈으로 힐끗 찌를 듯이 보자, 루실은 불안이 뒤섞여 산만해지는 느낌으로 두려워하면서 대답했다.

"흥미진진한 일생이군요. 더 계속하세요."

털렉은 루실을 지켜보고 악물고 있었던 이빨 사이로 말을 내뱉았다.

"웬일이지? 구혼을 했는데 보기 좋게 빗나가다니!"

털렉은 참을성있게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 , 아가씨, 당신은 항의하거나 새로운 고용주를 구해내지 못할 정도로 비겁하기만 한다면 언제 파면되나 하고 불안에 쫓기면서 너절한 일거리를 맡아서 해나가는 것도 좋아.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지금 말한 그런 성격을 갖춘 여성을 필요로 하고 있어. 당신은 내가 요구하는 그런 여성이야. 그러니 어떡하지? 나는 육체적인 의미의 아내를 필요로 하는 게 아니야. 내가 구하고 있는 것은 다만 나를 지켜 줄 사람, 가까워지고 싶은 여자들에게 아내의 존재를 느끼게만 해주면 되는 거야. 그러면서도 내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하는 나의 자유에 거슬리지 않고, 나의 생활을 원활하게 해줄 여자를 기대하는 거야. 물질적으로는 그 보상을 충분히 해줄 수 있으니까."

털렉은 다시 생각난 듯이 덧붙였다.

"파리에 주택이 있고, 그밖에 포르투갈에는 별장이 있으며, 런던에는 아파트도 있어. 지중해엔 한가히 떠 있는 요트도 있지. 돈과 명성은 이미 다 갖추어져 있어."

그렇게 말해가는 도중에도 루실에게는 아연실색하는 그녀의 얼굴을 살피는 털렉의 놀라울 정도로 푸른 눈은 양친의 어느 쪽에서 물려받았을까 하는 생각을 할 시간은 있었다. 틀림없이 아버지한테서 받았을 것이다, 라고 루실은 단정했다. 나비를 핀으로 찌르는 듯한 잔인성으로 루실을 꿰뚫어보는 날카로운 시선에는 대체로 지배적인 고대 고르인 같은 것이 풍기고, 어머니 쪽 종족들이 갖고 있는 갈색 눈에 부드럽게 넘치는 따뜻한 정은 없었다.

루실은 털렉이 여성이라면 누구에게나 반의식적으로 던져 오는 매력과 싸우면서, 책상 밑에 숨긴 손의 떨림과 눈썹의 움직임이며, 입이 뾰죽해질 때마다 불규칙적으로 고동치는 심장을 어떻게든지 눌러 보려고 한사코 애쓰고 있었다.

털렉은 루실의 냉담한 대답 속에 숨겨진 마음의 동요를 눈치 챈 것일까.

"당신은 빈말로라도 저를 마음에 드는 여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포크 씨. 저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여자가 아닐는지 모르겠지만, 어떻든 결국엔 당신이 도망치고 싶은 여자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시간을 허비할 뿐이죠. 샤니는 언제든지 필요한 것은 손에 넣습니다. 그것보다 샤니가 당신에게 그처럼 빠져 있는데, 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나요?"

털렉은 거무스름한 머리를 뒤로 돌렸다. 루실은 털렉이 응대해 올 것으로 알았는데, 털렉은 눈꺼풀을 내리고 침묵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루실의 말의 진실성을 인정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절망이 루실에게 힘을 주었다. 손가방을 집어 들고 식당을 뛰어나와 장식을 한 축제 수레 행렬 뒤를 몸을 서로 부딪치며 따라가고 있는 유쾌한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거리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큰 북과 탬버린의 흥청거리는 소리가 루실의 흐느낌 소리를 지워갔다. 식당에서 당황하며 달려나오는 키 큰 검은 모습을 힐끗 보자 루실은 더욱 요란해져 가는 춤 행렬의 소용돌이와 사람들의 흥분에 휩싸이며 '뱀같이 꾸불꾸불한 행렬' 속에 삼켜져 버렸다.

 

5

몇 시간 후 루실은 극도로 피로에 지쳐 절망적인 기분으로 배에 돌아왔다.

자기의 선실로 얼른 들어가 혼자서 흥분된 몸과 마음을 쉬고 싶었다. 발소리를 죽이며 복도를 지나 선실의 문에 열쇠를 꽂고 절반쯤 돌렸을 때, 어슬렁거리던 스츄워드가 갑자기 다그치듯 소리를 질렀다.

"미스 샤론이 선실에서 기다리십니다, 미스 램."

난처한 표정을 띠며 계속했다.

"당신이 돌아오시기를 줄곧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스츄워드는 부자나 유명한 사람들의 급한 성미에는 익숙해졌지만, 루실의 커다란 잿빛 눈에 서린 낙담한 표정을 보고는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에 대한 동정심이 끓어올랐던 것이다.

루실은 힘없이 한숨을 쉬었다.

"고마워요."

피로한 기색을 지으며 말했다.

"샤니에게, 당신이 전해 주더라고 말하겠어요."

샤니의 방이 가까워질수록 루실의 발걸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분노로 빨라진 음성과 그것을 달래고 있는 묵직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트가 와 있었다. 적어도 그가 그녀를 옹호해 주리라는 것만은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루실은 문을 가볍게 노크했으나, 두 사람 다 그 소리는 못 들은 것 같았다. 루실이 안으로 들어갔어도 아직 아트나 샤니는 루실이 온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샤니는 문으로 등을 향하고 똑바로 앉아, 멋을 부리듯이 갖고 있던 술잔의 얼음을 찰랑찰랑 흔들면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으로 모두가 끝장이에요. 이번만은 제발 나가 주어야겠어요!"

아트는 팔걸이의자에 몸을 묻고 평소처럼 여유만만 한 태도였다. 그러나 그 음성은 굳어 있었다.

"대체 뭣 때문이지? 그녀는 나쁜 게 없잖아, 정말 나쁘지 않지!"

아트는 손을 내밀어 샤니의 반박을 가로막았다.

"스츄워드의 말에 의하면, 루실은 털렉과 함께 거리로 나간 것 같다더군. 털렉이 유혹했겠지. 그렇지 않다면 그녀가 나갈 리 없어. 그녀가 당신의 지시에 복종해 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잖아. 잊었다면 말하지만, 뭔가 그 자의 명령에 복종하라고 그랬기 때문에 따라 나갔을 거야."

"당신이 루실에게 빠졌다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샤니는 경멸하듯 말했다.

"당신은 그 얌전한 체하는 처녀에게 야릇한 사랑을 품고 있는 거군요! 그러나 당신보다 내가 더 잘 알아요. 그 천진스러워 보이는 표정엔 당신이 아니라도 속아 넘어가죠. 저의 아버지까지 속으셨으니까요. 그 따위 얘긴 집어치우고, 내가 문제 삼는 건 털렉이에요. 나와 리오에 나가 구경하자는 것을 내가 거절하니까, 내 비서한테 손을 뻗치다니, 그럴 수가 있어요?"

"아녜요! 내 생각으로는전연 그렇지가 않은 것 같애."

루실이 외친 소리에 놀라서 두 사람의 눈이 한꺼번에 그녀에게로 향했다.

아트는 의자에서 일어나 루실의 곁으로 달려왔다.

"잠깐 기다리세요, 아트!"

샤니는 은빛 손톱으로 아트의 소매를 붙잡았다.

"감정이 이성보다 앞서기 전에 한 가지만은 명백하게 해두겠어요. 루실은 나의 고용인이에요. 내가 부리고 있는 거니까, 나는 언제든지 해고해 버릴 수 있어요. 당신이 감싸고 돈다면, 나는 곧 돌려보낼 거예요. 당신이 나의 개인적인 문제에 관여해서 내게 손해를 끼치면 당신과 영화 회사를 상대로 고소를 제기할 테예요! 알겠어요?"

샤니는 아트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위협했다.

샤니와 루실의 시선을 받아 아트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의 음성이 그 방 안의 팽창한 공기를 깨뜨렸다.

"그 전에 날 개입시켜 줄 수는 있겠지? 왜 그런 놀란 얼굴을 하는 거야? 내가 루실에게 아내가 되어 달라고 신청했다는 사실이 그렇게도 놀랄 일인가?"

털렉의 음성에 루실은 자기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놓임을 느꼈다. 가만히 이 상황을 자기에게 맡기라고나 하는 듯이 버티고 나가려는 태도를 보자, 또한 믿어질 수 없을 만큼 마음에 위안이 되는 것이었다.

샤니도 또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라렸다.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 거예요?"

샤니는 털렉의 돌연한 말에 놀라 겨우 메마른 소리를 내었다.

털렉의 대답은 직선적이었다. 털렉은 루실의 감은 눈꺼풀에 살짝 키스를 했다. 털렉의 키스는 청천벽력보다도 더 억센 충격을 주어, 루실은 전신이 마비되는 듯한 감동에 떨었다. 루실은 심장의 고동이 멈추어 버릴 듯한 털렉의 말을 숨을 죽이고 듣고 있었다.

"나는 말이야, 샤니, 당신과 아트가 나를 축복해 줄 최초의 사람들이 되리라고 말하고 싶어. 나는 이제 겨우 이상적인 여성을 찾아냈어. 지금까지 오랫동안 생각해 오던 이미지 그대로의 여성을 말이지! 정말, 이렇게 깨끗한 마음씨를 갖고 더욱이 이렇게까지 분별이 확고한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가 하고 의문을 갖기 시작했었지. 그렇게 모든 것을 구비하고 있는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그래서 샤니, 우리를 만나게 해준 당신에게 감사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당신을 항상 감사와 기쁨을 가지고 회상하게 될 거야."

루실은 괴로움에 떨고 있는 샤니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았다. 털렉은 잔혹한 성질을 갖고 있지만 상처를 줄 만큼 그렇게까지 무자비하고 냉담하게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루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샤니를 가엾게 느꼈다.

그러나 아트는 그렇지가 않았다. 안도감과 승리가 그 음성에 깃들어 있었다.

"그것 썩 잘됐군 그래. 정말 그게 사실이라면 말이야. 그런데 참 타이밍이 잘도 맞았군, 털렉. 방금 샤니가 불평하면서 루실을 해고시키려던 찰나였단 말이야."

아트는 풍자적인 말투로 이 자만심이 강한 스타를 공박했다.

"이렇게 된 이상 샤니, 당신은 루실이 돌아갈 여비를 부담하지 않아도 될 거야. 털렉은 일하고 있는 동안에 약혼자를 자기 곁에 두고 싶다고 말할 것이니까."

아트가 지금 한 말을 샤니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털렉과 이 이상 함께 영화에 출현하지 않겠다고 선언할까? 루실은 샤니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 그것이 몹시 궁금했다.

샤니의 얼굴에는 지금이라도 그렇게 할 것 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샤니는 야심이 있는 여자였다. 털렉의 상대역을 맡는 일은 그녀의 장래를 약속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샤니는 스스로 루실에게로 가까이 가더니 키스를 했다. 아트는 이때만큼 샤니의 임기응변적인 재능에 감탄한 적이 없었다.

"정말로 축하해, 루실. 이 폭군을 당신이 잘 조종해 가기를 바라겠어. 한 번쯤은 여자란 아버지에게 복종하고, 남편에게 복종하고, 아들에게 복종하도록 태어났다고까지 단언했던 사람이니까."

밤도 늦었으나 털렉은 지금부터 바에 가고 싶다고 했다. 바에서 손님들에게 샴페인을 대접했다. 마치 두 사람의 약혼 사실을 가급적으로 빠른 시간 안에 퍼뜨리기 위한 것 같았다.

루실은 분노를 느꼈지만, 이쪽저쪽에서 보내 주는 축복을 가능한 대로 정성껏 받았다. 그곳에는 외국의 젊은 사람들도 축하하려고 모여들었다. 크롬의 회전의자, 여러 가지 색깔의 비품, 그리고 근대 예술품, 전위적인 장식이 그들의 세련된 현대 감각에 대한 동경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었다.

중도에 참석한 예술가들이, 멀리서 동경하고 있던 엘리트들의 사교장에 끼어들어 서로의 교양을 알아보려는 듯이 점잖은 말들을 주고받았다. 그런 것을 부담없이 들어 흘려보내는 남자의 옆에 있으면서 루실은 자기가 너무나 무지해서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 샤니도 물정에 밝았었다. 팬들의 인사에 대해서 일일이 볼을 붉히고 눈을 반짝이면서 일부러 겸허한 태도로 응해 주었다.

그러나 아트만은 속지 않았다. 털렉이 젊은 여성과 이야기에 열중해 있는 사이에 루실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살짝 주의를 환기시켰다.

"샤니는 할 수 없이 당신들의 결혼을 인정했지만, 속지 말라구, 루실. 그녀는 내심으로는 분통이 터지고 있어! 위험해!"

루실은 안심하란 듯이 아트를 쳐다보았다.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되어 있을까. 일부러 불가능한 일을 공언한 털렉이 얼마나 밉겠느냐고 루실은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처음에 생각한 말을 얘기하려고 하는 바로 그 찰나에, 털렉이 휙 몸을 돌렸다. 그 표정에 루실은 입을 다물어 버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굴빛이 나쁘군, 루실. 밖의 시원한 공기를 마시러 나가자구."

털렉은 온화하게 말하며 아트 곁에 있고 싶어 하는 듯한 루실을 재촉하여 허리를 꼭 껴안고 어둠이 깔려 있는 갑판까지 왔다.

다이아몬드로 만든 별을 붙인 듯한 새까만 벨벳 같은 하늘, 루실의 여린 심장과 같이 불규칙적인 고동을 울리면서 끝없이 펼쳐져 가고 있는 바다를 타협하지 않고 루실에게서 분리시키는 배의 난간.

루실은 고독한 생각에 휩싸였다. 덮어씌우는 듯한 검은 그림자에서 가급적이면 몸을 멀리하여 루실은 배의 난간에 등을 대고 섰다.

털렉은 침착했다. 어둠을 뚫으면서까지 좋아하고 있는 기분이 전해 올 정도였다.

"기분을 가라앉히라구, 귀여운 루실. 이제 여기에는 애교를 팔아야 하는 관중도 없으니까!"

털렉의 속삭임에 루실은 자신이 어리석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털렉이 두 손을 벌리고 루실의 얼굴을 슬쩍 감싸고 있을 때, 그 생각은 벌써 효력을 잃고 있었다.

"왜 저를 이렇게 바보 같은 연극에 끌어넣었지요?"

루실의 얼굴은 털렉의 손 안에서 뜨거워졌다.

"어차피 당신은 샤니에게 패배했음을 알게 될 거예요. 당신이 아무리 자유롭게 되고 싶어도 결국은 그렇게 되지 않을 거예요."

털렉의 엄숙한 대답은 루실에게 충격을 주었다.

"루실, 남자에게 중대한 두 가지는 자유와 사랑이야. 대개는 한쪽을 취하면 딴 쪽을 잃게 되지. 그러나 나는 그 양쪽을 다 갖고 싶어."

"당신이 저하고 약혼을 선언했다고 해서 샤니가 당신과의 결혼을 단념할 것 같아요?"

루실은 떨면서 물어보았다.

"바로 그거야. 그러나 쉽게 얻어지지 않는 매력은 더욱 얻고 싶다는 기분을 길러 주지, 그래서 이제야 알겠어? 나로서는 온건한 옹호자로서의 당신을 놓치고 싶지가 않은 거야!"

이 말에 수치를 느낀 루실은 떨리는 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사람을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는 속임수를 쓰기 위해서 용케도 나를 덧붙여 끌어 넣으셨군요. 저는 그런 계획에 끼고 싶지 않다고 리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말씀드렸어요. 그런데도 막무가내로 당신은 멋대로 우리들이 약혼한 것처럼 떠들어댔었어요. 약혼 기간이 이렇게 짧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슬픈 일이겠지만, 당신이 이 약혼을 해소시켰다고 발표해 주셔야 해요. 당신이 얼른 그러지 않으면 지금, 여기에서"

루실은 털렉을 밀어제치려 했으나 도리어 그 가슴에 꼭 껴안기고 말았다. 루실의 볼 부분에서 털렉의 가슴이 심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감정이 격해짐에 따라서 수치심이 끓어올랐다.

"약혼한 것이 당신에게도 유리하다는 사실을 모르나?"

털렉은 루실의 귀밑에서 속삭였다.

"샤니의 방으로 들어갔을 때, 내가 소리를 치기 조금 전에 샤니가 당신을 해고하겠다고 하는 것을 들었을 텐데. 이제 나의 약혼자가 되었으니 이집트에서 호화로운 휴일을 즐길 수가 있어. 경비는 모두 내가 담당하고 말야. 그런데 이제 영국으로 돌아간댔자, 뭐가 있어? 집이 있나, 돈이 있나, 아니면 할 일거리라도 있는 건가?"

루실은 침묵을 지켰다. 이집트에는 꼭 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여행기의 마지막 장을 마무리하느냐 못하느냐가 루실의 장래를 크게 좌우하는 것이다.

"어때, 루실?"

털렉은 재촉하듯이 말했다.

"인생이란 것은 의무와 야심 사이를 얽히면서 나아가는 거야. 지금이야말로 자기의 주관을 버리고, 보잘것없는 방종자의 장난에 내기를 걸어볼 수 있지 않겠어?"

털렉의 이 이상한 말에 루실의 마음은 흔들렸다. 그 속임수로 인해 상처받을 자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비겁한 양심을 위로하는 것도 간단할 듯했다. 그러나 정직해야 한다는 신조를 가슴에 새기고 살아왔던 루실은 번민한 끝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안 됐지만"

루실은 단언했다.

"저는 속일 수 없어요. 당신의 목적을 완수하려면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 주세요."

뜻밖에 털렉은 혀를 차면서 이윽고, 노한 듯이 손에 힘을 주어 루실의 몸을 흔들었다. 몸을 조이면서 털렉은 괴로운 듯이 말했다.

"괜찮아, 나는 당신과 아트가 서로 상당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 당신에게 있어 그는 어느 만큼의 의미가 있는 거지?"

털렉은 루실에게 놀라는 동안만 잠깐 틈을 주고 다시 말을 계속했다.

"나의 요구를 당신이 거절한다면 이번 영화 촬영을 거절하고 당신의 친구를 괴롭게 할 테야! 일부러 설명할 필요조차 없겠지만 내가 그 자와 함께 일하는 게 싫다고 하면, 그 자는 자기를 고용해 줄 영화 회사를 찾아다녀야 해! 그리고 기억해 둘 것이 있는데, 우리들 배우는 사람 흉내만 내고 싶어 한다는 것이야."

털렉은 음침한 미소를 보였다.

"오늘 내가 한 일을 내일은 다른 사람 모두가 흉내 내는 거야!"

루실은 털렉이 말한 의미를 알 수 없어 무의미한 검은 그림자를 찾듯이 보면서 말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아트를 파멸시킨다는 것은 비열한 짓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있으며, 확신을 가지고 말한 것도 사실이다. 그의 분노와 루실의 부드러운 어깨를 잡고 있는 손의 힘이 그의 말의 진실성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아트는 친절하고 인품이 좋은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이 짖궂은 한 사나이의 이기주의 앞에 희생되고 있다! 루실이 신음하는 듯한 소리를 내자, 털렉은 자신의 승리를 느꼈다.

털렉이 선실까지 함께 바래다주는데 루실은 지나친 충격과 당황으로 그의 걸음걸이가 승리의 만족감에 넘쳐 있는 것까지 깨닫지는 못했다.

둘이서 바의 입구까지 왔을 때는 파티에서 빠져 나오는 최초의 사람들이 마침 바를 나오고 있었다. 열려진 문에서 어둠 속으로 흘러나온 불빛으로 취한 손님들 앞에 루실의 모습이 비춰지려는 순간, 털렉은 얼른 루실을 끌어당겨 허리에 손을 감더니, 머리를 숙이고 반항하는 루실의 입술을 억지로 자기 입술로 막았다. 폭풍에 휩싸이는 듯한 긴 키스는 깊은 바다 밑에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털렉은 갑작스럽게 끌어들인 광적인 행동에 놀라 빠져 나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치는 루실의 보드라운 육체를 정열적으로 애무하며 관객을 위한 연애 장면을 연출해 보였다. 루실의 등을 애무하는 털렉의 손가락이 익숙하게 움직여 갔다. 털렉의 목에 감긴 루실의 손가락이 발작적으로 힘을 넣자, 털렉은 목구멍 속으로 웃었다. 털렉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듯 루실의 몸을 꼭 끌어당겨 안더니 가는 허리가 부러지도록 뒤로 젖히는 것이었다.

루실은 꼼짝못하게 되어 괴로운 듯이 헐떡였지만 목마른 듯 입술로 더듬어 오는 사랑의 연기(演技)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제멋대로 팔 힘을 시험하듯 털렉은 루실이 들고 일어서는 모든 신경과 몸서리치는 모든 감각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면서 새로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루실은 마침내 자신을 잊어버리고 마치 손가락처럼 어루만지고 깃털처럼 부딪히는 털렉의 입술에 몸을 맡기고 말았다.

"나의 귀여운 어린 양! 당신을 사랑할 수 있다면, 당신에게 사랑의 참맛을 가르쳐 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털렉이 정신없이 열띤 목소리로 속삭이자, 루실은 손가락 끝까지 뜨거워졌다. 루실은 손을 뻗쳐 털렉의 야윈 볼을 어루만졌다. 털렉은 낮은 소리를 내더니, 갑자기 루실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루실은 목구멍 속에서 놀란 웃음소리를 내면서 당황하게 손을 안으로 끌어들였다.

루실의 겁먹은 행동이 독재적인 털렉을 기쁘게 했고, 더욱더 놀려주고 싶은 기분을 일으킨 듯했다.

"나를 두려워하고 있는 건가?"

털렉은 업신여기듯이 말했다.

"어떻게 하면 믿어줄 수 있지? 나는 세상에서 말하는 것같이 짐승처럼 여자를 탐하지는 않아. 정말로 마음을 허락해 줄 수 있는 친구를 찾아헤매는 쓸쓸한 인간일 뿐이야."

"당신이 쓸쓸하다구요?"

"그렇게 이상한가?"

털렉은 즉석에서 반문했다.

"모든 것은 반쪽씩이야. 또 다른 반쪽을 찾고 있어. 물건을 살 사람은 팔아 줄 사람을, 사기꾼은 속아넘어가 줄 사람을,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그 말에는 이젠 조롱하는 기색도 없이 성실하게 되어진 태도였다.

루실은 충동적으로 얼굴을 들고 동정과 이해를 담은 키스를 퍼부었다. 털렉이 충심으로 부드럽게 그 키스를 받아 주었으므로 루실은 감격하여 눈물까지 흘리고 말았다.

"부라보! 부라보! 최고의 성과다, 털렉!"

눈에 보이지 않는 관객이 열렬한 찬사의 소리를 질렀다. 루실은 뺨을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갑자기 분노가 끓어오르고, 배신당했다는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루실은 자기의 선실이 있는 쪽으로 달아났다. 그 부드러운 연극도 그에게는 하나의 노름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약혼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그 유효성을 증거로 보여주기 위하여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임을 깨닫게 되자, 루실의 상처는 더욱 깊어졌다.

선실로 달려오자, 루실은 침대에 몸을 던지고 호흡이 정상적으로 되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수치심과 굴욕의 눈물이 억제할 수 없이 솟아났다. 비참한 생각을 되풀이하는 사이에 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의 귀여운 어린 양'이라고 털렉은 속삭였다. 나의 귀여운 어린 양! 갑자기 살갗이 타도록 뜨거워졌다.

털렉은 루실을 얼마나 감정에 무르고 얼마나 쉽사리 속아 넘어가는 여자일까 하고 당연히 비웃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자, 루실은 그가 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의 연기는 훌륭했다. 손가락만으로 루실의 감정을 금세 흐트려 놓고 말았던 것이다.

루실은 낮은 소리로 신음하며 고개를 숙이고 달아오른 얼굴을 침대의 시트에 파묻었다. 어떻든간에 그 남자의 일은 잊어야 했다.

이윽고 기분이 안정되어 오자, 몸을 일으키고 하나의 결론을 얻어냈다.

"괜찮아요, 포크 씨. 저도 당신의 도박에 내기를 걸겠어요. 나를 당신의 연극에 이용해도 좋아요. 그러나 그 보답으로, 나는 당신을 이용해서 이집트까지 데려가 주도록 만들 거예요. 그 후에는 당신을 이용해서 그곳에서 지낼 수 있게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는 멋대로 지껄여대게 해놓으면 그만인걸, 이처럼 불리한 내기는 없을 거니까 말예요."

 

6

일 주일 후, 일행은 카이로로 빨리 가기 위해서 케이프타운에서 배를 내렸다. 호화로운 선실을 떠나는 것은 안타까웠으나, 아트는 한시라도 빨리 로케할 곳으로 갈 생각뿐이었고, 샤니로서도 자신의 뜻대로 배로 세계의 절반을 돌아왔고 게다가 세계 최대의 배에서 사치스런 여행을 한 후라, 여유 없는 항공로로 바뀌게 되었지만 굳이 다른 의견을 내세우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샤니는 루실을 완전히 해고하지는 않았다. 그 후로도 일 주일 동안 샤니는 변함없이 그날그날의 모든 예정을 뒤로 물리더라도 아침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할 일을 명령했다. 루실은 그 때문에 털렉을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조금도 염려하지 않았다. 루실이 일부러 털렉을 찾아서 자기 결심을 전했던 저 운명의 밤의 다음 날 아침 이래, 루실은 평소처럼 털렉의 선실로 갔으나 그로부터 필기하는 일은 주어지지 않았다.

"배에는 손님 때문에 비서도 두고 있어. 부탁하면 언제든지 와 준다구."

루실이 필기책을 들고 나타나자 털렉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우리들의 약혼을 납득한다면, 그런 일 따위는 집어치우고 우선 내 일에 전념하면 어떨까."

털렉은 대답을 바라고 있었다.

루실은 꿀꺽 침을 삼켰다.

"물론당신이 말해 준 대로 하겠습니다, 당분간은."

루실은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약간은 비웃는 듯이 숨을 죽이며 냉담하게 자기의 결심을 전해 준 셈이었다. 그러나 털렉은 그것은 자기에게 무조건 따르겠다는 표현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것도 좋을 거야!"

털렉은 멋대로 해석하고 돌아서더니, 루실이 얼굴을 내밀었을 때 그는 평상복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편지를 끄집어내어 다시 읽어보았다. 이제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도 없었다. 루실은 아직도 우물쭈물하면서 움직이지 않았으나, 털렉은 편지에 시선을 멈춘 채 루실을 끌어다가 계속하려는 눈치는 전혀 없었다.

그때부터 분노가 루실의 행동을 지배하였다. 루실은 고집을 부려, 그와 만날 수 있는 식당에는 나가지 않았다. 세계에서 제일 훌륭한 남성의 약혼자가 된 처음 일 주일 간을 루실은 거의 그와 떨어져 지냈다. 당연한 일이면서도 샤니는 재빨리 그것을 눈치 채고는 대단히 만족스럽게 거만한 대도로, 계속 차례차례로 할 일을 알려 주었다.

샤니가 루실을 꼼짝 못하게 잡아 놓으려고 한 것은 일행이 대기하고 있는 비행기를 향해 가려는 때였다.

"루실, 내가 라운지에 놓고 온 잡지를 갖다 줘, 꼭 읽어야 할 기사가 실려 있으니까."

"꼭 지금이라야 하나요?"

루실은 호소하듯이 물었다.

"벌써 상당히 멀리 왔고, 찾는 데도 무척 시간이 걸릴 거예요. 카이로에서도 그런 잡지는 살 수가 있으니 괜찮을 텐데. 그런 잡지 라면 카이로에도 있잖아요."

루실은 마음 가볍게 말했다.

샤니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당장 필요해! 비행기 속에서 읽을거리가 없으면 심심해 못 견디니까."

루실은 발밑에서부터 공항 건물까지의 콘크리트의 넓은 길에 슬쩍 시선을 던져보며 머뭇거렸다. 루실과 샤니는 행렬의 제일 뒤에 있었다. 지금부터 얼른 되돌아간다면 시간에 맞출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지요."

루실은 달려 나가면서 어깨너머로 외쳤다.

"저를 두고 가지는 말아요!"

라운지까지 왔을 때에는 숨이 차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잠깐 동안 벽에 기대어 호흡을 안정시키고 잡지를 찾기 시작했다. 다음 비행기의 승객들이, 샤니 일행이 물러난 자리 주변에 벌써 열을 지어 서 있었다. 아무한테나 묻고 사정하며 5분 동안이나 떠들썩거리면서 찾던 중에, 겨우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나이 많은 신사의 커다란 몸 밑에 깔려 있는 잡지를 발견했다.

"대단히 미안합니다. 소란을 피워서 미안합니다. , 이젠 안심했어요."

루실은 수선스럽게 인사를 했다.

뒤로 얼른 돌아서서 달리려는 찰나에 루실은 딱딱한 것에 부딪쳐 꼼짝할 수가 없었다. 두 팔꿈치를 동시에 철에 얻어맞은 듯했고, 희미한 안개 속을 뚫고 비행기의 폭음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바보 같은 짓만 하는군! 왜 이러는 거야?"

털렉은 귀찮다는 눈치를 느끼게 하듯이 루실의 몸을 거세게 흔들더니, 그 허리에 팔을 감아안고 비행기로 걸음을 재촉했다.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이끌려서 루실은 필사적으로 털렉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기다림에 지쳐 버린 스튜어디스가 두 사람을 비행기 안으로 끌어올려 주더니 좌석의 안전벨트를 확인한 다음 비행기는 떠날 신호를 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비행기는 더욱더 속력을 더해갔다.

이륙하는 순간엔 마치 무엇을 남겨 두고 온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털렉이 대단히 화를 냈기 때문에 일어난 반사적인 감정이었다. 털렉은 루실이 저지른 잘못을 엄숙히 책망하는 듯 말도 없이 앉아 있었다.

루실은 턱을 치켜들고, 하마터면 비행기에 오르지 못하고 혼자 내버려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몸이 떨렸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더라도 다음에 떠나는 비행기가 얼마든지 있었고, 혼자서라도 어떻게든 되었으리라. 루실은 내린 눈꺼풀 밑으로 슬며시 털렉을 보고 털렉의 시선과 부딪치자 당장에 질려 버리고 말았다.

"이 따위가 그렇게도 중요했었나?"

털렉은 루실이 꼭 틀어쥔 잡지를 손가락으로 튕기면서 경멸하듯이 말했다.

책망하는 듯한 시선을 피하며 루실은 설명하려 했다.

"샤니가

"앞으로는 내가 시키는 일만 하면 돼."

털렉은 얼른 루실의 말을 막았다. 루실은 무슨 말인가 하고 눈을 크게 떴다.

"배 안에서는 참고 있었지만, 이젠 참을 수 없어. 카이로에서는 내 곁에 꼭 붙어서 사랑하는 사람과 명랑한 약혼녀답게, 정말로 행복한 듯이 행동하는 게 좋아. 나에 대해서도, 내 가정에 대해서도, 카이로에서는 다 알고 있어요. 당신 혼자의 연기력으로는 해내기가 무척 어려울 테지만 그 부족한 것은 내가 얼마든지 보충해 주지."

비행기 안은 더워서 괴로울 정도였다. 털렉의 소매가 루실의 팔에 스칠 때마다 따끔따끔할 정도로 뜨거웠다.

문득 털렉의 연기력이 회상되어졌다.

"그것만은 확실할 거예요!"

그 말은 자신의 귀에도 비난하듯이 들렸다. 엄숙한 반응이 나오리라고 예상하고, 루실은 몸을 떨었다. 그러나 비난하는 대신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를 잘 모르는 듯이 얼굴을 찌푸려 보일 뿐이었다.

털렉은 어깨를 움츠리고 머리를 좌석의 등에 기대더니 집에서 못살게 들볶여서 앞으로의 운명을 생각해 보며 떨고 있는 어린 고양이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는 괴로운 듯이 축 처져 있는 루실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았다.

카이로는 고대풍의 도시이면서 놀랄 만큼 현대적이었다. 고원에 자리 잡은 호화스러운 호텔은 수상 버스가 반짝거리는 물거품의 꼬리를 끌고 가는 시내의 주요통로인 나일 강의 깊은 흐름 위에 하얀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성능이 좋은 자동차는 버스나 택시를 차례차례 뒤로 물리치고, 낮은 다리를 수없이 건너갔다. 회교 사원의 둥근 탑이나 뾰족한 건물에 섞여서, 고대 이집트의 유물인 오벨리스크 식의 건물과 격자(格子) 모양을 한 선명한 콘크리트 탑이 한결 높이 솟아 있었다.

루실의 낙심하는 표정에 털렉은 위로의 말을 던졌다.

"근대 문명이 창조한 건물을 그다지 엄격하게 평가할 수가 없어, 루실. 낡은 거리는 그대로 보전되어 있지. 실제로 사원의 수는 상당한 것이어서 한 사람의 회교도가 날마다 한 사원씩 찾아서 예배를 본다고 해도, 일 년을 걸려서도 다 돌아볼 수 없다고까지 말해질 정도야."

루실이 안심한 듯이 숨을 내쉬자, 털렉도 미소를 띠었다. 그들을 태운 택시는 번화한 중심가를 빠져 달리고 있었다. 음침한 시외의 아카시아 가로수와는 달리 아파트나 상점이나 은행이 줄지어 서 있었다.

택시는 일행이 사막 가운데서 촬영할 장소를 찾을 때까지 묵게 돼 있는 호텔로 향했다.

"피라밋도 스핑크스도 안 보이네요."

"오늘 밤 내가 데리고 가서 구경시켜 주지."

"밤에?"

루실은 지금 당장 보고 싶었다. 우물쭈물하다가 하나도 보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다시 부탁해 보았다.

"꼭 보고 싶다면 낮에라도 볼 수는 있어."

털렉은 상냥하게 말했다.

"그러나 밤의 스핑크스처럼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없을 거라구. 못 보면 후회하게 될 거야, 내 말을 믿으라고."

털렉은 그렇게 말하고 손을 내밀어 감싸듯이 루실의 무릎을 툭 쳤다.

"나는 여기에서 산 적이 있었어. 그래서 이 거리의 아름다움을 잘 알고 있지."

샤니는 털렉이 자기를 데리고 가주지 않는다고 매우 불쾌해 했다. 루실이 외출할 준비를 하는 동안 침실을 어슬렁거리더니, 자기 사촌동생이 얼굴이 붉어져서 들떠 있는 모습을 보고 약혼한 후부터 쌓였던 원한이 모두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려고 하는 것 같았다.

"어딜 가는 거지? 예배당?"

샤니는 루실의 드레스와 침대 위에 펼쳐져 있는 가벼운 털외투가 몸에 잘 어울리는 것을 살펴보고 신중하게 물었다. 샤니 자신은 황금빛 야회복을 입고 있었다. 주름을 잡아 허리의 오목한 곡선을 더욱 곱게 만들고, 매력적인 어깨를 내놓고 있었다. 세계적인 고급 호텔의 만찬회라도 그대로 입고 갈 수 있을 만한 복장이었다.

샤니의 심술궂은 질문을 받자, 루실은 근육이 떨렸다. 언제나 샤니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협박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털렉과 외식을 하게 되어 있어요."

루실은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그리고 밤에는 피라밋 구경을 시켜 준댔어요."

그렇게 말하고 나니 스스로도 얼굴이 붉어짐을 깨달았다.

샤니는 고양이처럼 살랑살랑 루실한테로 다가왔다. 루실은 뒷걸음질을 쳤다. 보기만 해도 화가 나서 캐묻고 있는 듯한 샤니의 번득거리는 시선에 루실은 몸서리가 쳐지고 공포가 전신을 엄습했다.

"너희들의 약혼에는 무슨 흉계가 있는 게 분명해. 첫째로는 너무나도 빨리 약혼이 이루어졌고, 그것은 네가 그를 못살게 졸라댄 것이 분명해!"

샤니의 악의에 가득 찬 높은 음성에 루실은 움찔했다. 하지만 루실은 다만 샤니를 겨우 쳐다보았을 뿐이다.

의혹, 치욕, 당황에 전율하는 표정이 얼굴을 스쳤다. 루실은 샤니의 비난을 부정하려고 생각했으나,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만약에 말을 찾아내었다손 쳐도, 샤니는 꼬치꼬치 따져서 조롱하고 말 것이다.

강제로라도 고백시킬 것 같은 그 순간에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위기를 모면해 주었다. 루실은 달려가 입구를 막 들어서는 털렉의 팔 속에 뛰어들었다.

루실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숙여 털렉은 그녀의 당황한 눈을 보고는 그녀가 자기 팔 속에 안심한 듯 뛰어든 이유를 짐작했다.

"준비는 됐나, 루실?"

털렉의 음성은 루실을 안고 있는 팔처럼 침착했다.

루실은 대답 대신 얼굴을 들었다. 그러자 그 눈에서는 눈물이 넘쳐흘렀다.

털렉은 재빨리 고개를 굽혀 상냥한 키스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털렉이 부드러운 입술로 눈물에 젖어 반짝이는 눈썹과 눈꺼풀을 어루만지자, 용기가 솟고 자신을 회복한 루실은 털렉의 팔 속에서 몸을 돌려 쓸쓸한 미소를 샤니에게 보였다.

"미안해요, 샤니 언니. 뭐라고 말했죠?"

루실은 단숨에 말해 버렸다.

혼자 있을 때의 루실은 오직 외로운 한 인간에 불과했지만, 털렉의 보호를 받고 있는 지금의 루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샤니는 화가 난 듯이 손을 흔들며 아무 말도 듣지 않고 방을 나가 버렸다.

샤니가 깨끗이 퇴장해 버린 것은 심문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뒤로 미룬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생각하니 루실은 몸서리가 쳐졌다.

털렉은 루실을 호위하여 호텔 계단을 내려가 대기중인 택시 쪽으로 갔다.

카이로의 밤하늘은 휘황찬란한 달빛에 불타고 있었다. 루실은 분수에 둘러싸여 달빛에 비쳐 나타난 고대 이집트의 왕인 라미씨즈 2세의 동상을 돌아다보면서 걷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잠깐 걸으면 안 될까요? 보고 싶은 게 많은데 시간이 넉넉할는지"

털렉은 지금까지 차를 타지 않고 바깥을 걸어본 적이 거의 없었지만, 루실의 열렬한 희망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좋지."

털렉이 풍부한 표정으로 어깨를 움츠리자, 운전수도 정다운 미소를 보였다.

"한 시간 뒤에 리벨레이션 골목 남쪽에 와 주게."

털렉은 운전수에게 그렇게 말했다.

루실의 간절한 뜻을 털렉이 순순히 받아 주자 털렉을 어려워하는 마음은 점점 사라지고, 천진난만한 꿈에 부풀은 소녀와 같은 기분이 되었다.

털렉은 루실이 못 보고 지나칠 것 같은 광경을 하나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강기슭에서 동물을 보살피는 소년, 다리 밑에서 쉬고 있든가 크림빛깔의 돛을 바람에 실려 파도 위를 미끄러져 가는 페락카 선박들.

오래된 거리에 와서 두 사람은 아랍인들 사이에 섞어 쿠리쿠리하고 불리우는 길거리의 마술사를 구경했다. 마술사 손끝의 재빠른 요술은 그 속임수를 간파해 내려고 눈을 부라리는 다른 구경꾼들보다도 루실을 더 끌어들였다.

어떤 곳에서는 둘이 서로 떨어져 가면서 털렉이 루실의 손을 잡기도 했는데, 수 세기는 지난 듯한 해묵은 집채 앞에서는 루실이 갑자기 털렉의 손을 꼭 잡아 끌어 세울 만큼 루실도 털렉에게 친밀감을 느꼈다. 바깥쪽 기와는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으나, 루실의 눈을 끈 것은 집채 둘레에 튼튼하게 둘러싸인 막이었다.

그곳은 부인네들이 있는 곳이다. 가정부인들은 그 막을 통해서 바깥을 볼 수는 있으나 자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참으로 고리타분하군요."

루실은 중얼거리듯이 말하더니, 목쉰 소리로 계속했다.

"얼마나 구속받아 왔을까요, 불쌍해요."

"난 그렇게 생각지 않아."

털렉이 반대의 뜻을 나타냈다.

"우리는 여성을 숭배하며, 존대해 왔어.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들이 우리에게 반감을 품었을 것이 아닌가?"

루실은 눈을 크게 뜨고, 마치 매와 같은 모습을 지었다. 뭐라고? 여성을 숭배하고 존대해 왔다고! 이 좁고 어두컴컴한 길거리에서 루실은 털렉의 속에 흐르고 있는 아랍인의 피와 자랑을 짐작했다. 털렉은 자기 어머니가 귀족의 피를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고대 이집트의 왕의 혈통과 견줄 만한 오랜 역사의 흐름을 높게 자부해 마지않는 혈통! 그 존대성에서나 강한 의지로도 털렉에게는 그 피를 인정시키지 않는 것이 없었다. 자기들이 지금 20세기라는 시대에 있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것 같다. 지금 같으면 루실을 질투의 눈으로 감시하게 하는 부인 방에 감금하고, 죄를 뉘우치게 하고, 이윽고는 충분히 반성한 루실에게 만족감을 만끽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되었다.

루실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동양의 여성이 전제적인 남성들에 의하여 감금되었던 것을 기뻐하기라도 했다고 생각하세요? 만약 그렇다면, 왜 그녀들의 대부분이 남녀평등을 부르짖고 사회생활을 향유할 권리를 주장하며, 그런 습관을 배격해 왔겠어요? 그렇지 않나요? 현대의 여성은 얼굴을 베일로 감싸는 것은 단연코 반대해요!"

루실의 이론을 뒤흔들듯이, 그때 가까이 있는 집에서 한 여성이 쑥 나왔다. 머리부터 발까지 길고 흰 천을 쓰고, 눈 위로 1인치 정도를 남기고, 얼굴의 아래 절반은 이중의 베일로 덮고 있었다.

털렉은 지나가는 처녀를 향하여 중얼대듯이 말했다.

"저런 신중한 모습이 얼마나 훌륭하오. 해방된 여자는 한 남자의 마음을 낚아챈다. 큰 까마귀를 비둘기와 바꿔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털렉이 많은 여성 팬에게서 주목받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고맙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는 주목은 유명하기 때문이지만 털렉 자신은 그것을 경멸하고 있었다. 그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은 문명이 없는 미개의 사막에 깊은 뿌리를 박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강건한 존대성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었다.

즐거움도 사라지고, 거기에는 어색한 불쾌감만이 남아 있었다. 루실은 토론 같은 것은 하지 않는 편이 좋았었다고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다.

자동차를 타고 피라밋으로 향해 갔다. 20분도 걸리지 않았지만 그 동안 두 사람 모두 한마디 말도 없었다. 털렉의 표정은 어두웠고, 루실은 신경을 곤두세우며 조금 전의 분위기를 회복하고 싶었다. 그러나 카이로의 중심 거리에서 근대적인 고가도로를 달리고 있는 사이에 털렉은 한 가지 생각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 보는 피라밋은, 루실에게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었다. 차츰 가옥들이 뜸해지고 갑자기 높은 대() 위에 우뚝 선 거대한 돌산이 나타났다. 그때부터 털렉이 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데 대해서도 루실은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어떻든간에 말은 쓸데없는 군소리임을 깨달은 때문인지도 모른다.

둘은 널따란 빈터를 걸어갔다. 피라밋 기슭을 걸으면서 루실은 몇 세기의 세월을 흘러 보낸 돌에 손을 문질러 보았다. 고대인이 높이 쌓은 무덤을 지키며 기슭에 자리잡은 수수께끼를 깃들인 스핑크스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 다음에 둘은 야외극장에나 들어가 있듯이, 색채 영롱한 서치라이트로 어둠 속에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기념비의 배경막에 반사되듯 환히 비춰진 오천년의 역사를 보았다. 자신을 잊은 듯한 루실의 마음에 희미하게 깃들어 있는 것은, 배후에서 울고 있는 귀뚜라미의 소리와 사막의 저쪽에서 짖어대는 개들의 울부짖음이었다.

불빛이 꺼지고 음악이 사라졌어도 루실은 아직도 한참 동안 망연한 채로 정신이 빠져 버린 듯했다. 고맙게도, 털렉은 루실과 택시로 돌아가는 길에서 한마디의 말도 끄집어 내지 않았다.

마음도 머리도 아직 과거의 역사에 사로잡힌 채, 순간에 소생되어진 아득히 먼 옛날에의 강렬한 매력을 떨쳐 버릴 수는 도저히 없었다. 그러나 호텔로 돌아와서 루실은 자기의 방 앞에서 털렉에게 인사말을 할 때만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구멍에 열쇠를 꽂으려는 손가락에 털렉의 손가락이 가까이 닿자 루실의 손은 열쇠를 쥔 채 떨리었다. 구부린 털렉의 볼에 루실의 볼이 닿았다.

루실은 안심했다.

"멋진 경험을 시켜주셔서 정말로 고마워요, 털렉 씨."

그렇게 말하고 루실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황홀에 묻혔다.

털렉이 약간 머리를 움직이자 입술이 루실의 입술에 닿아져서 가벼운 키스가 되었다.

모든 것이 그날 밤의 신비로운 마력 때문이었다. 루실은 침대에 들어갈 준비를 하면서 스스로 혼자말을 했다.

가슴의 고동도, 땅에 닿지 않는 듯한 느낌도, 뭔지 손끝이 떨리는 것도, 두번 다시 없는 경험을 하고 흥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치 할아버지가 어린애에게 해준 것 같은 키스 때문일 게다. 꿈에 나타난 고대 이집트 왕의 숭고한 왕자와 같은 풍격은, 루실을 사랑과 미움의 혼돈된 늪 속에서 방황케 하는 것으로써, 그것은 실존하는 생명력에 넘치는 인물이라고는 믿어지기 어려울 만큼 왕자의 풍격을 방불케 했다.

 

7

날이 갈수록 루실은 털렉이 평판과는 달리 여성을 끌어들이는 솜씨가 전문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털렉은 루실을 제쳐 놓고 오로지 샤니에게만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 속셈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본심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털렉은 처음부터 샤니의 마음을 휘어잡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 수법이 특이해서 먼저 다른 여성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듯이 보여주면서 질투를 하게 하여 나중에는 어떤 여성도 마음대로 농락해 왔듯이 그 교묘한 수단으로 식성에 맞는 여성을 향해 강력한 공격을 해가는 것이다.

허영심으로 꽉 찬 샤니마저도 털렉에게 대해서는 놀랄 만큼 민감한 존재가 되었다.

"제멋대로 하는 남자!"

루실은 자신이 마음껏 그 남자한테 이용당한 것이 분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그 수법을 다 알았기 때문에 두번 다시는 당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호텔의 풀장에서는 아무나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눈부실 듯한 파란 수영복을 입은 샤니는 일광욕을 하기 위한 의자에 몸을 눕히고 털렉에게 정열적인 시선을 쏟아 붓고 있었다.

털렉은 풀장 가장자리에 앉아서 발로 물장구를 치면서, 태양광 선을 받아 무지개 빛깔을 내며 튕겨 흩어지는 물방울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트는 풀 안에서 천천히 상쾌한 기분으로 헤엄치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지만 말고 물로 뛰어들라구, 아주 상쾌해. 그러나 혼자서야 어디 재미가 있나!"

아트는 물속을 헤엄쳐 다니면서 루실의 화사한 모습에 홀딱 반해서 바라보았다. 은빛 가까운 금발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검정색 수영복을 몸에 착 달라붙게 입고 있는 모습은, 샤니의 이국적인 모습파는 달리 훨씬 눈에 띄었다.

"뛰어 들다간 물속에 빠져 버려요!"

루실은 말하며 힐끗 털렉과 샤니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못마땅하여 화가 치밀었다. 물속에 들어가니 기분은 부드러워졌지만, 아트 쪽을 향해서 손발을 파닥거리며 헤엄쳐 나가는 동안에도 털렉의 시선이 자기를 향한 채 조금도 떨어지지 않음을 느꼈다.

루실은 얼뜨기처럼 조바심을 하는 자신이 밉살스러웠다. 위장 약혼은 샤니의 관심을 끌기 위한 수단이었지요, 하고 루실이 털렉을 나무랐을 때, 털렉은 부정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털렉이 의도하고 있는 것은 아주 가벼운 접촉에 불과했다.

자기 마음대로 사귀었다가는 발로 걷어차면서 새로운 먹이를 찾아다니는 짐승처럼 필요 이상의 깊은 교제는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의 보호자! 털렉은 그렇게 말하면서 놀려 주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루실은 몹시 기분이 상하여 상냥한 기분도 떠받들어지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다.

루실에게 가까이 헤엄쳐 온 아트는 즐거운 듯이 반색하며 맞아 주더니 표정이 아주 환해졌다. 아트로서도 샤니와 있고 싶어 하는 털렉을 어쩐지 걱정하고 있었으나, 루실만 마음에 걸려 하지 않는다면 그 이상 걱정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연출에 재능있는 제작자라면 그것이 연기라는 것쯤은 통찰할 수 있어야 했지만, 허망스런 웃음을 터뜨리면서 물속에서 함께 어울려 히히덕거리거나, 물속에 잠기는 루실의 마음에 털렉의 존재가 무거운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있는 거라고는 미처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털렉은 눈부신 태양에 눈을 가늘게 뜨면서도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햇볕이 강해서 눈썹은 한일자로 찌푸려져 있었다.

루실이 갑자기 장난기를 보였다. 물속에 모습을 감추었는가 하면, 어느 새 가느다란 그림자가 미끄러져 와서는 아트의 정갱이를 뒤에서 한 번 툭 쥐어박았다. 그러자 깜짝 놀란 아트가 버둥거리면 또 숨쉴새도 없이 바로 곁에 나타나 이번에는 손바닥으로 아트의 머리를 물속에 처박아 넣었다.

아트가 겨우 물속에 박혔다가 얼굴을 들고 일어나 반격을 가하자, 루실의 웃는 소리는 금세 비명이 되었다. 루실은 물을 발로 차 보내면서 얼른 아트에게서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나 아트가 쫓아와서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둘이 모두 물속으로 물거품을 일으키며 가라앉았다가는 서로 손발을 얽히면서 겨우 물 위로 얼굴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다시 물싸움을 하며 재미있게 웃었다. 루실의 눈은 하늘과 물의 푸르름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났으며, 금빛 머리는 즐거움에 생기발랄한 얼굴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때 햇빛을 막으며, 누군가가 그림자를 만들며 물속을 향해 찌르는 듯한 소리를 질렀다.

"아트, 당신한테 전화가 걸려왔어. 다시 걸어 달라고 했지만, 급한 일이라고 기다리고 있겠대."

"고맙네, 털렉."

아트는 히죽히죽 웃으며 대답했으나, 풀에서 나가기 전에 무서운 얼굴로 루실을 위협했다.

"물에서 나오기만 하면 혼내 주고 말 테니깐 기다리고 있어야 해, 루실!"

털렉도 물속으로 들어왔다. 아트가 풀을 나가자 갑자기 냉기가 들어서 루실도 뛰따라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털렉은 혼자 물속에 남아 있고 싶지 않은지 무척 은근하게 말을 붙이며 루실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어머나! 나에겐 지조도 없는 줄 알아요? 저것 봐요, 주위 사람들이 보고 있어요. 저 사람하고 그렇게 떠들며 재미있게 놀다가 약혼자가 나타나자 금방 사람이 달라지도록 또다시 시치미를 떼고 명랑해지다니, 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보면 어떡하느냐 말예요!"

털렉은 영화를 촬영할 때와 같은 웃는 얼굴로 하얀 이빨을 내놓고 있다가 눈으로 화를 내고 있는 루실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풀 둘레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보고 있는 것을 알고 루실은 놀랐다. 모두가 재미있다는 듯이 이쪽을 주목하고 있었다. 아마도 아트가 나가 버린 자리에 털렉이 교대하여 인계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리라.

"저는 추, 추워요."

이를 덜덜 떨고 있었지만, 물은 따스했다. 루실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털렉이 순순히 들어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면 물 위에 떠올라서 내 눈을 차근히 보라구."

털렉은 무시하는 눈초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깜짝 놀랄 거야."

그러나 루실은 그런 꼬임에는 넘어가지 않았다.

만약에 루실이 진심으로 마음을 털어놓기만 하면, 털렉이 어떤 짓을 할지 모르는 것이다.

"전 싫어요"

"해봐!"

털렉은 냉혹하게 내뱉더니 루실을 물 위로 떠올리려고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을 풀어주었다.

루실은 털렉의 손에서 살그머니 빠져 몸을 돌려 계단 쪽으로 향하였다. 손이 계단에 미쳐서 막 손톱이 계단에 닿으려고 할 때, 루실은 다시 몸을 잡혀 건장한 갈색의 가슴에 꼭 안겨졌다. 루실은 저항했다. 털렉의 자존심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둘러싼 사람들은 어찌 되나 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털렉은 이제는 물러나지 않았다.

흔들리고 있는 루실의 귀에 쿵 하는 소리가 울렸다. 털렉의 가슴에서 울려오고 있는 고동이 루실에게 들려온 것이었다. 그것을 억누르려는 듯이 호흡을 침착하게 가라앉히려 하는 것 같았으나 그 고동소리는 더욱 강하게 들려왔다. 털렉의 고동은 털렉의 힘과 그의 오만성과 반항심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히죽히죽 웃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두 사람이 서로 깊은 사랑에 빠져 있는 듯이 보여졌을 것이다.

목에 매달려 있는 루실을 내려다보고 있는 털렉의 입가에 상냥스러운 미소가 떠올라 정말로 루실 스스로가 매달려 놓아주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았다.

루실은 털렉의 속셈이 두려워서 이번만은 이 함정 속에서 어떻 게든지 빠져 나가려고 틈을 엿보고 있었다.

갑자기 긴장된 사태가 닥쳐왔다. 루실은 아직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오직 한 일 분 동안을 수면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물빛이 반짝거리고 오색찬란한 버찌 색깔의 파라솔이 구경꾼들의 얼굴에 그림자를 던졌을 때, 털렉의 검은 머리가 루실의 시야를 막아 버리고 입술이 루실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루실의 육체 속에 깃든 정열의 불길이 틀어쥔 손가락 끝에까지, 그리고 발끝까지, 또한 몸의 구석구석까지 흘러들어갔다. 루실은 정신을 차렸다. 둘은 몸을 얽혀 한 몸이 되어서 천천히 가라앉아 들어갔다. 입술은 아직도 억세게 겹쳐져 있었다.

가슴속으로는 종이 울려오고, 차례차례로 불꽃이 튕겨 올라서, 루실의 모든 감각은 단번에 눈을 뜨고 말았다. 숨이 가빠져서 겨우 물 위에 얼굴을 내어놓은 두 사람에게 기다리고 있던 열광적인 환성이 터져올랐다.

루실은 몹시 충격을 받았다. 털렉은 이제는 끌어당기지 않았다. 새빨갛게 볼이 붉어진 루실은 얼른 풀에서 나와 몸을 감추었다.

불쾌한 야만적인 휘파람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기에 루실에게는 더 없는 치욕이었다. 귀에 거슬리는 휘파람소리가 언제까지나 머리에서 떠날 줄 몰랐다. 루실은 매의 발톱에 찍히고 말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소녀가 아니고, 그저 여자, 털렉의 여자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루실이 다른 남자와 예컨대 플라토닉하게도 친해지는 것을 허락할 수 없는 낙인을 그에게 찍히고 만 것이었다.

여러 사람들과 평소에 식사 전에 술을 마시게 되어 있는 술집으로 루실은 간신히 생각을 돌려 나갔다. 털렉의 웃는 얼굴에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듯 풍겨 오는 것이 있었다. 털렉과 샤니는 이야기에 정신이 홀딱 빠졌다고 생각했는데, 루실의 모습을 본 순간 털렉은 본능적으로 루실이 나타남을 깨달은 듯이 루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루실의 심장은 드세게 뛰었다.

털렉은 루실의 동요하는 모습에 만족해 했다. 시원스럽게 뻗은 목에 크림색깔의 장식용 끈이 달린 옷을 입은 루실은 털렉의 태도를 그렇게 생각했다. 천천히 걸어 나오는 루실의 어깨로부터 다리에 이르는 아름다운 곡선은 목에 감은 검은 벨벳의 리본이 붙은 돌에 새긴 보석 조각과 같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당신 모습은 처음 보았어, 루실."

털렉은 냉엄한 태도로 루실의 손을 잡아 끌며 말했다.

루실은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다시 무서운 승부가 벌어지는 것이다.

샤니의 귀에도 당연히 그 이야기가 들리어서 샤니는 루실에게 질투의 칼끌을 향했다.

"그건 내가 좋아하던 옷이죠."

샤니는 자만스러운 태도로 말을 내뱉았다.

"너무 오래 입었기 때문에 이젠 낡아져서 버린 걸로 생각했어요! 너도 여간 아니군 그래, 루실."

샤니는 친절을 베풀듯이 계속했다.

"옷장 속에는 이젠 입지 못할 옷이 아직도 많이 있어. 내일 너에게 주지."

털렉의 눈에 동정의 빛이 빛났어도, 손가락이 부러져라 주먹을 꽉 쥐어 봐도, 루실의 분한 마음은 달랠 수가 없었다. 털렉의 손을 살짝 풀고 루실은 떨리는 목소리로 샤니에게 인사를 했다. 말해도 소용이 없다. 겸손하게 겁에 질려 상대한다 해도 샤니로부터는 곧잘 다시 복수를 받게 되는 것이 고작이다. 그것은 털렉에게는 편리한 조건이었다. 이 호된 태도에 대항해 내지 못하는 비겁한 여자를 털렉은 자기의 손아귀에 틀어쥐었다. 거기에 털렉의 연기력이 탁월한 데가 있는 것이다.

털렉은 마음속으로 걱정하는 듯이 루실에게 의자를 권하더니 웨이터를 불렀다.

"뭣을 들까, 루실? 식사에는 흰 술을 주문했는데, 그것과 함께 먹을 수 있는 걸 내게 알려 줘. 저 클레오파트라는 것이 있는데, 마크 앤소니의 기분에 맞았던 거야. 나는 그걸 꼭 당신에게 권하고 싶은데, 어때?"

루실은 스커트의 주름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면서 불쾌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샤니 쪽에 말을 건네주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 거나 다 좋아요."

루실의 잿빛 눈은 무의식적으로 평소처럼 머뭇거리면서 대답을 했다.

주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이목이 세 사람에게로 쏠리고 있었다. 야성적 매력에 넘쳐흐르고 비상한 재능도 갖고 있는 배우가 곁에 있는 또 다른 한 미녀와 비교하면 아주 희미하게 보이는 보잘것없는 아이를 어찌 미래의 신부감으로 골랐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트가 왔다. 겨우 구원받은 듯했으나, 세 사람 곁에 온 아트의 얼굴에는 불안과 불만이 똑똑히 나타나 있었다.

"내 것도 주문해 주지 않겠소, 털렉? 나는 위스키소다를 더블로!"

눈썹을 치켜 올리며 승낙하더니, 털렉은 아트에게 눈을 돌렸다.

아트는 곧 간직하고 있던 고충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영화 촬영은 중지되고 말았네! 우리가 예정했던 로케 장소는 그곳에 무슨 유행병이 발생해서 의사회에서 허가가 안 나온대. 물의 오염이 원인인 것 같다는데."

"그러나 일정한 지역에 한하겠지?"

털렉이 얼굴을 찡그렸다.

"어딘가 그곳과 비슷한 곳을 찾아서 촬영을 계속할 수는 없나?"

"할 수도 있겠지."

아트는 초조하게 머리를 긁고 있었다.

"요컨대, 모래와 공간과 그리고 그 가까이에 오아시스가 있는 경치만 있으면 돼. 그러나 숙박이 문제지. 기술반, 배우, 카메라맨의 전원을 수용할 수 있는 장소를 찾는 것이 가장 큰 두통거리야. 몇 달 전부터 예약해 놓지 않고서는 방은 구할 수가 없어. 결국은 로케 장소는 어디에서건 찾아낼 수가 있다 해도, 그 근처에 우리의 대가족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곳을 금방 찾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야."

"이게 무슨 일이에요."

샤니는 아트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정면으로 비난을 퍼부었다.

"시간과 돈의 낭비예요!"

"돈은 지불을 해."

아트는 퉁명스럽게 반박했다.

"어떻게 지불할 수 있어요?"

샤니는 악착같이 물고 늘어졌다.

"이런 인기 생활을 하는 배우는 항상 대중의 눈에 잘 보여야 해요. 영화를 잘못 만들면 체면이 어떻게 되겠어요. 쥐꼬리만한 보수로, 그로 인해 수많은 팬들의 관심을 잃는다는 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에요!"

샤니의 주장은 정당한 것이었다. 대중에게 우상의 꿈을 유지해 가지 않고서는 그들의 마음속에 관심을 갖게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샤니는 스타의 위치로 마구 치달아 올라가는 판인데도 아직은 털렉만큼 대중을 마음대로 끌 수는 없는 수준이었다. 털렉이라면 자주 영화에 나오지 않는 편이 도리어 대중들의 인기를 끌 수 있는 방법도 되겠지만, 샤니의 경우는 자주 영화에 나오지 않으면 그 존재마저 잊혀져 버릴 형편인 것이다.

아트의 절망에 가까운 소리를 차마 들을 수 없어서, 루실은 손을 내밀었다.

"낙담할 것이 아니라 무슨 방법을 찾아봐야겠어요. 방법은 꼭 있을 거예요!"

털렉이 경고하는 듯한 시선을 던지자, 루실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털렉이 그렇게 말하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루실은 눈을 감고 있었으나, 털렉이 줄곧 자기의 태도를 응시하고 있음을 루실은 느끼고 있었다.

아트가 얼굴을 들자, 털렉은 계속해서 얘기를 했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오아시스가 있어요. 거기엔 내 어머니의 옛집이 있는데, 한 소대가 머물 수도 있는 큰 집이야. 게다가 요즘엔 거의 사용하지 않아. 어머니의 거실은 얼마 안 되지만 다른 방들은 텅 비어 있지. 그리고 그곳에는 사환이나 식모들도 많이 있어서 즉시 방을 사용할 수도 있을 거야."

털렉은 숨을 한번 돌리면서 일동의 반응을 주시했다.

아트는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듯했다. 샤니도 기뻐했다. 그러나 루실의 표정은 매우 긴장되있다.

"우리가 불쑥 찾아가면 당신 어머니께서 싫어하시지 않을까?"

아트는 이 행운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로 물었다.

털렉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는 없어. 어머니의 거처는 다른 건물에서 떨어진 낡은 후궁에 있으니까. 누가 왔는지도 모를 정도야."

"잘됐군요."

샤니가 말했다.

"아주 옛날 집이로군요?"

털렉의 입술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 호라스 성터는 몇 세기 전부터 있었던 성곽으로 그것이 세워졌던 초기부터 외가집 식구들이 대대로 물려받아 살아왔었지. 아주 구조가 특이해서 우리 마음속에 품은 꿈을 더 아름답게 해줄 거야."

털렉의 시선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루실의 머리에서부터 부드러운 벨벳에 금실을 수놓은 듯한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붙어 있는 목덜미에 쏠리고 있었다.

"당신의 생각은 어때, 귀여운 어린 양? 사막으로 깊이 들어간다니, 루실 당신은 마음이 불안스럽겠지. 하여간 아직도 여성에게는 베일로 얼굴과 몸을 가리우게 하고 있는, 전근대적인 인종들이 살고 있는 곳이니까."

털렉이 조롱하는 듯이 말하자 루실과 그와의 사이는 서로 눈에 불꽃이 튕겼다. 루실은 턱을 꼿꼿이 쳐들었으나 입술은 아직도 몹시 떨리고 있었다.

"사막의 종족 속에서 사는 여성들은 구원을 받고 있을 거예요. 그녀들은 서양 문명 사회의 남성들에게서보다도 훨씬 더 사랑을 받고, 보호받고 있으니까요. 우리 여성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문명화된 야만성입니다."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서 샤니의 숨소리만이 울려오고 있었다. 아트는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루실의 어디에 그러한 날카로운 지혜가 있었던가, 하고 말쑥한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루실은 흥분하고 있었다. 꽉 틀어쥐고 있는 주먹과 거친 숨소리로 아트는 그 기미를 눈치 챘으나, 루실이 그런 말을 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루실은 가급적이면 다른 사람의 의견에 반대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털렉의 어머니 앞에서 얼굴을 맞대야 하고 거짓말을 꾸며대야 할 것을 생각하고 몸서리를 친 것이다. 이미 위장 약혼 때문에 고통을 느끼고 있었으나, 사막에 나가 충분한 자료 조사를 하기 위해서 그 허위적인 것도 감수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면, 아무런 만족감이나 승리감은 느낄 수가 없었다. 자기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부끄러워졌고, 털렉의 어머니까지 속이려는 속셈엔 적이 경멸을 느낄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은 아트 때문에 주저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털렉은 아트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그러한 것을 루실 자신이 끊어 버릴 수는 없었다.

털렉은 루실이 진퇴양난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 농담 비슷하게 말했다.

"그럼, 사막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걸로 간주해도 좋겠지? 당신이 말하는 그 문화적인 야만인인 나보다는 미개인 편이 훨씬 당신의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8

오아시스까지 가는 데는 열두 시간이나 걸렸다. 처음에는 사막으로 된 평야를 달리고 있었지만, 대지(臺地) 부근에 이르자 높은 언덕으로 되어 있었다.

길 양쪽의 모래밭에는 풍화작용으로 달걀 모양을 한 커다란 바위들이 수없이 흩어져 있었다. 그 중에는 태권도의 주먹을 맞아 쩍 갈라진 듯한 돌들도 있었다.

"낮에 뜨거운 태양열로 타버린 돌이 밤이 되면 급속히 냉각되는 이상기후로 갈라져 버리게 되지."

털렉은 루실에게 설명했다. 루실은 더위와 피로로 인하여 오는 나른한 졸음과 싸우고 있었으나, 때로는 깜빡 잠이 들어 필사적으로 눈을 뜨려고 해도 눈꺼풀은 천근이나 되는 듯 움직이질 않았다.

루실은 주위를 돌아다보며 이렇게 메말라 버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루실이 탄 차는 아트가 철도로 운송하겠다는 것을 한사코 말린 짐들을 실은 트럭의 앞에서 달리고 있었다.

아트는 경험에 입각해서 중요한 것은 반드시 자기의 가까이에 두도록 하고 있었다. 마치 군대의 행군처럼 일행은 일에 필요한 것은 모두 자기들이 운반하는 것이었다.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예요?"

샤니가 물었다. 털렉이 운전하는 차는 사치스러운 차였는데, 수백 마일을 달리니까 바깥의 불타는 듯한 더위에 냉방 장치의 효과도 점점 사라져 갔고, 문이나 창틈으로 들어오는 모래는 처치곤란이었다.

"저 앞을 지켜봐. 이제 곧 오아시스가 보일 거야."

털렉은 지평선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루실은 목을 쭉 뽑고 모래언덕에 시선을 박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노오란 모래의 바다에 커다란 녹색의 배 한 체가 둥실 떠 있는 것처럼 오아시스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그것은 상상한 것보다도 훨씬 컸다. 움푹한 땅 위에 가로놓여진 오아시스는 생기발랄한 풀빛으로 아름답게 물들인 비단처럼 몇 십 마일이나 널따랗게 쭉 펼쳐져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루실이 뱃머리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 종려나무를 넘어 아카시아와 전나무와 열매가 가득히 열린 과수나무가 모두 높은 회교 사원의 뾰족탑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왜 호라스 성이라고 해요?"

루실이 갑자기 물었다.

"무슨 의미라도 있는가요?"

루실이 고대의 일이나 진기한 것에 흥미를 갖고 있음을 털렉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털렉은 거기에 흥미와 기쁨을 느끼고, 루실의 지적 욕구를 채워 주기 위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호라스는 고대 이집트의 신이야. 회교의 의식에서는 신을 연출하는 승려는 동물의 얼굴을 나타내지. 그것은 신이 인간의 덕과 동시에 동물이나 새들이 가진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야. 전쟁의 신인 세크멘트는 사자의 강한 성질을, 아뉴비스는 쟈칼이란 개처럼 생긴 짐승의 민첩성을, 그리고 호라스는 매의 날카로운 시각을 갖고 있어."

"그러면 결국 매의 성이란 뜻인가요?"

루실은 태양도 두려워하지 않는 눈으로,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매와 같은 사람이 그밖에도 있다고 말하려는 듯이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며 더듬거렸다.

차는 대추나무 숲이나 올리브의 숲을 빠져서 겨우 낡은 건물로 통하는 돌계단에 이르렀다. 코발트색 푸른 하늘에 청동색 벽이 우뚝 솟아 햇빛에 빛나고 있었다.

루실은 본능적으로 옳지, 이것이 호라스 성이로구나, 하고 혼자 생각했다. 이 성곽 안에서 아름다운 공주는 프랑스 군대의 젊은 장교의 열렬한 구애를 받은 것이다. 그것은 행복한 결혼이었을까? 루실은 그런 생각에 잠겨갔다.

그리하여 그 결혼의 결과를 생각하자, 눈을 그 성에서 돌리면서 몸서리를 쳤다. 호라스 가문의 자손, 날카로운 눈매의 매에게서 그 무슨 자비로운 사랑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매가 날개를 쭉 펼치고 있는 모양을 따서 만든 둥근 돌문을 지나 고요에 잠든 안뜰로 들어갔다. 커다란 기둥이 나란히 서 있는 홀 안은 조용한 죽음 속에 묻혀 있었다. 안에 들어가니, 모자이크로 묘사된 그림이 생생한 데에 우선 시선이 집중되었다.

어두컴컴한 속에서 하얀 긴 옷을 걸친 사환 한 사람이 불쑥 나타났다. 갑자기 안뜰을 떠들썩하게 메꾸어 버린 사람들과 차들을 보아도 환영하거나, 신기하게 보는 눈치도 없이 남자는 무표정한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어머니께서 아직도 주무시고 계시거든. 시녀를 불러서 내가 왔다는 소식을 어머님께 알려 줘."

그 사나이는 상대가 누군지를 알아보자 히쭉 웃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털렉을 회당 안으로 맞아들였다. 금방 사환들이 줄줄이 홀에 달려들어와 주인과 그 동료들의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루실은 꽃향기가 풍겨 오는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나니, 완전히 한가로운 기분이 들었다.

아랍인의 젊은 아가씨가 정신없이 짐을 풀어 주고 있는 방으로 루실이 맨발로 들어서니, 그 아가씨는 수줍어하면서 다음 용건을 말해 주기를 기다렸다.

"그런 일은 놔두고, 이야기나 해줘요."

루실은 피로도 완전히 회복되었고, 이제는 가만히 있고 싶지가 않았다.

"이름이 뭐지요? 이 성 안에 살고 있나요, 아니면 오아시스의 어느 집에 있나요?"

"이름은 아슈라예요, (l0)이란 뜻이죠. 그것은 제가 열 번째 딸이기 때문입니다."

아가씨는 천천히 머뭇거리며 영어로 더듬더듬 이야기했다.

"언니들도 나도 성 안에 오랫동안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아빠가 외출하시고 안 계실 동안은 엄마를 만나뵈러 가지요. 엄마는 저희가 마님의 시중을 들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걸 아시면서도, 곁을 떠나 살고 있는 걸 퍽 슬퍼하고 계신답니다. 물론 아빠에게 눈치 채이지 않게 말이죠."

루실은 침대에 누워서 흥미를 느꼈다.

"왜 당신들과 아빠는 한 데 어울려 살지 않죠?"

"왜 어울려 함께 살지 않느냐구요?"

열 번째의 딸인 아슈라는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빠가 싫어요? 아니면, 아빠가 당신네들을 싫어하나요?"

루실은 다시 물었다.

"우린 아빠가 제일 좋아요!"

아가씨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다만 우리를 보시면 아빠는 자신의 불행을 회상하시기 때문이에요. 실제로 아들이 없는 아빠는 알라신의 저주를 받고 있어요!"

루실은 깜짝 놀라 일어나 앉았다.

"그러니까 운명의 버림을 받은 아빠께서 여성을 남성 이하의 인간으로 취급한 탓으로 당신 자매들은 세상을 등지고 있다는 것인가요? 그건 너무 참혹해요!"

루실은 무의식중에 털렉의 말투를 쓰고 있었다.

"남자들이란 곯려 줘야 해요!"

아슈라는 오싹 몸을 움츠렸다. 빠른 속도로 내뱉았기 때문에, 아슈라에게는 루실이 화를 내고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여자로서 치욕을 느낀 루실은 침대에서 뛰어내려 떨고 있는 아가씨한테로 달려갔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아슈라는 루실이 내민 손으로 얻어맞는 줄 알고 몸을 얼른 피했다. 루실은 놀라서 뒷걸음치고는 손을 뒤로 빼며 말했다.

"무서워 말아요. 당신에게 화를 내는 게 아니에요. 그런 남녀 차별, 편견이 통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을 뿐이에요. 나는 당신들의 친구가 되어 줄 거예요. 아슈라도 내 친구가 되어 주어요, ?"

루실은 뒤로 뺀 손을 돌려서 천천히 아슈라에게 내밀었다.

"악수해요."

"악수?"

"그래요."

루실이 크게 말하자, 머리핀이 늦추어져서 명주실 같은 머리카락이 어깨를 덮었다. 아름다운 머리가 상냥한 잿빛 눈을 더 한층 온화하게 감싸 주어 아가씨의 불안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내렸다.

"악수"

따라서 중얼거리고는 홀쭉한 갈색의 손가락을 무서워하며 내밀었다. 손을 잡자 부끄러운 듯이 싹 빼었는데, 그 순간은 이미 서로 우정을 굳게 다짐하는 웃음 띤 얼굴을 보여주었다.

"고마워요, 아슈라."

가까스로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루실은 더 여러 가지를 물어보려고 했다.

"당신들의 생활습관을 가르쳐 주세요! 여기 있는 게 행복한가요? 도회지의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아슈라는 의자에 무릎을 단정히 붙이고 앉아서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행복이란 게 대체 뭐예요?"

아슈라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밀라 마님께서는 사소한 일로는 화를 내지 않고, 먹을 음식은 가득하구, 방 안은 깨끗하구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리고 미간을 좁혔다.

"결혼하면 틀림없이 행복해지죠. 남편을 만나면 불안도 없어지겠지요."

루실은 아슈라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뭐라구요? 만난 적도 없는 사람하구 결혼을 한다는 말인가요?"

"아아뇨."

아슈라는 루실의 흥분한 태도에 놀랐다.

"결혼 전뿐만이 아니고 예식도 신랑이 없이 해치워요. 결혼의 신청이나 약속을 해도 신부와 신랑이 하는 게 아니고, 쌍방의 친구나 보증인 또는 부모가 그 일을 대행하는 거예요. 우리 아빠와 신랑의 아빠가 손을 마주잡으면 그 위에 예식용의 천이 씌워지고, 한 잔의 술이 제공되며, 쌍방의 어버이끼리 함께 그 술을 마시면 결혼이 성립됩니다."

"그런 다음에야 신랑의 얼굴을 보는가요?"

루실은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슈라는 거의 그렇다고 대답하고 조금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요."

그렇게 말하고 킥킥 웃음을 참는 소리를 내기에 루실의 호기심은 더욱 끓어올랐다.

"그럼 언제?"

그 주체성이 없는 데 대해 조마조마해져서 루실은 재촉하듯이 물었다. 루실 자신도 순종은 하게 되었으나, 그래도 이처럼 모욕적인 일은 없는 것이다.

"결혼식에는 아버지의 종족들이 반드시 하는 의식이 있어요. 결혼 전날 저녁에 딸이 언덕으로 달려올라가면 신랑이 찾아갑니다. 딸을 찾아낼 수 있으면 신랑은 그날 밤을 딸과 같이 지내고 그것으로 결혼은 뒤로 물리지 못하게 됩니다. 어떤 이유로 그러한 의식을 할 수 없더라도, 여러 사람 앞에서 결혼하면 역시 취소할 수는 없게 됩니다."

"믿을 수 없는데? 이 문명시대에 그런 야만적인 관습이 남아 있는 곳이 있다는 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요!"

루실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자기 생각을 반신반의하게 되었다. 멀리 떨어진 이 사막 땅에서는 몇 세기 전의 그러한 관습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 왕이 엎드려 머리 숙인 사람들 위를 밟고 유연하게 걸어 나갔다고 해도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모래나 돌 밑에 묻혀 있던 도시 고대의 신과 왕의 불멸의 생명과 권력을 찬양한 사원과 무덤, 문명을 거슬러 시대에 뒤떨어진 야만적인 의식을 굳게 지켜온 한 줌의 종족.

루실은 제 몸을 꼬집어 보면서 자신이 20세기라는 시대에 존재함을 확인했다.

"특별히 그런 형식적 의식에 구속될 필요는 없어요."

루실은 그저 듣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제가 털렉에게 타일러 주겠어요. 여기 있는 여성들이 아직까지도 그런 취급을 받고 있다는 걸 알면 그도 반드시 놀랄 거예요. 지금 가서 얘길 하겠어요. 그런 결혼은 곧 없어져야 하니까요!"

아슈라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사라지고 눈썹이 찌푸려지더니, 갑자기 창백해졌다. 아슈라는 이윽고 일어서서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어서 생각대로 하세요."

열성이 없는 말투에 루실은 약간 당황했다.

"당신은 속박당한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나요?"

루실은 아슈라가 노한 것 같아서 놀랐다.

"코란에는 '여자는 너의 것이다. 마음껏 짓밟아라'라는 말이 있어요. 내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무능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아요"

루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정양을 하고 계시지만 한번 찾아오시겠대. 내일 오후에 함께 차를 마실 시간을 내자고 하시더군. 사환을 보내겠다고 하셨어."

"일행이 저녁식사를 하려고 아래층의 작은 방에 모여 들었을 때, 털렉이 어머니의 말을 전했다. 샤니는 초대를 받고는 기쁜 듯 웃었다. 그러나 루실은 아까부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털렉은 호화로운 자수를 놓은 융단을 밟고 루실의 곁으로 왔다.

"어때, 호라스 성은 당신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지?"

루실은 진기한 형태의 물그릇에 마음이 쏠려 있었다. 뚜껑에는 사자의 조각이 붙어 있었다. 혀를 내밀고 있는 차가운 감촉의 몸뚱아리는 미끄러웠다. 측면에는 수소와 염소 같은 영양을 쫓고 있는 사자나 개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옆에 있는 두 기둥이 뚜껑을 받치고, 무거운 밑바닥에서는 네 사람의 죄수가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그 얼굴이 모두가 무게에 못 견디어 고통을 참는 이그러진 표정을 나타내고 있었다.

루실은 그 물그릇에 정신이 푹 빠져 버렸다. 맨 처음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었던 돌이 사람을 흥분하게 할 정도로까지 잔혹성을 보이는 석상으로 조각되어져 있는 것이다.

털렉의 음성에 루실은 제정신을 차렸다. 놀라서 얼굴을 들고, 털렉과 마주치자 서로 마음이 융합된 듯이, 털렉이 곁에 와 있음을 알고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무슨 말씀을 하셨지요?"

"아니, 별일 아니야."

털렉은 그렇게 말하고 루실의 손에서 아직 입에 대지 않은 술잔을 받아들고 가까운 테이블로 가져다 놓았다.

"식사가 준비되었으니 다음에 얘기합시다."

식사도 식당도 모두가 호화로웠다.

섬세한 레이스의 돗자리가 놓인 뒤에 차려진 긴 식탁이 잘 닦여져 반짝거리는 은빛 나이프에 반사되고, 촛불 빛을 받은 술잔과 파란 자카란다의 꽃송이를 가득히 담은 화분은 무지갯빛 광채를 뿌리며 사뭇 이국적인 붉은 자색을 자아내고 있었다.

내놓은 음식 접시에서 샤니가 무엇부터 집어야 할는지 망설이고 있었더니, 털렉이 말했다.

"달루루프가 당신 구미에 맞을 거요. 잘게 다진 고기를 포도의 잎으로 싸서 향료를 넣은 것이니까."

루실도 그것이 가장 맛있겠다고 생각했다. 밥을 넣은 작은 기름무침도 맛있었으나, 그 다음의 요리는 먹을 수가 없었다. 군소리 없이 식사를 마치면 되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마음이 내키지 않나?"

털렉이 물어보았다.

"아니면, 배가 불렀는가?"

"이젠 너무 먹었어요."

루실은 구운 비둘기를 먹지 않고 견딜 수만 있다면 어떤 구실도 사용했으리라. 보기에도 처참스럽게 죽은 작은 비둘기의 시체는 한가운데로부터 갈라져 미나리 위에 담겨져 있었다.

털렉은 히죽 웃더니, 루실을 책망하듯이 디저트로 나온 과자와 과일을 못 먹게 손을 흔들어 치워 버리라고 하였다. 밀크와 같은 모양의 도토리를 싼 터키 녹말가루에 설탕을 넣어서 엿처럼 만들어 튀긴 구비와, 루실이 가장 좋아하는 헤리샤라는 도토리, 벌꿀과 가늘게 썬 야자나무 열매로 만든 구운 빵이 있었다.

루실은 유감스럽게 그 접시를 내보냈으나 생각해 보니, 털렉이 장난삼아 그런 것 같아 보였다. 털렉은 루실이 단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루실은 그 이상 더 음식이 잇달아 들어옴을 피하듯이 주의를 아트 쪽으로 돌리었다. 아트는 보기에도 즐겁게 요리를 먹고 있었다.

"모두가 새로운 숙소에 와서 만족해하던가요, 아트?"

아트는 대답했다.

"그렇구말구. 그렇지 않으면 천벌을 받지."

그리고는 술을 쭉 들이키고 나서 빈 잔을 털렉에게 건넸다.

"자네와 자네 어머니 덕분으로 전원이 쾌적한 방을 얻을 수도 있었고, 우리의 식사 시중을 들기 위해서 온 요리사에 의하면 요리솜씨는 최고급이라고 했어."

아트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표현하고는 마지막에 나온 과일과 과자를 먹었다.

"일단 영화 촬영이 시작되면 도저히 천천히 식사를 즐길 수 있는 시간 여유는 없게 되니까."

"참으로 딱한 양반이구려, 아트. 당신은!"

샤니가 소리쳤다.

"우리가 유쾌한 마음으로 궁전 생활을 즐기는 동안에도 당신은 저 사막에서 진땀을 흘리게 된다니 불쌍해요. 우리가 등장하는 장면을 찍을 때까지 나에게나 털렉한테 이 주일 동안의 여유까지 주어 정말 고마워요."

"고작 보답한다는 게 그 말뿐이야?"

아트는 루실을 노려보며 말했다.

"털렉이 곁에 와 있어 주어서 기뻐하시는 털렉 어머니는 생각하지 않고."

털렉의 어머니라는 말을 들은 루실은 얼굴이 흐려져 버렸다.

틀림없이 누군가 그의 어머니에게 약혼 얘기를 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의 어머니와 대면한다는 것은 지극히 쑥스러운 일일 것이다.

고대 문명의 여러 가지 유물을 비치해 두고 있는 그의 서재에 안내하려는 털렉의 요청을 루실이 거절할 수는 없었다.

"특수한 솜씨로 조각한 물품들도 몇 가지 있어. 당신의 흥미를 꼭 끌 수 있을 거야."

루실의 마음에 들 것이라고 강조하며 약간 흥분한 표정으로 털렉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안 됐지만 저는 실례하겠어요."

샤니는 부끄러워하지도 머뭇거리는 기색도 없이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저는 졸려서 못 견디겠어요."

"나도 그래."

아트도 솔직하게 말했다. 너무 먹고 마셔서 졸음이 왔던 것이다.

"괜찮다면, 이젠 좀 잘 수 있게 해주는 게 어때? 신비로운 과거의 역사를 들추어 내는 얘기는 당신들 둘이서 하도록 하고."

그러나 이때에 루실의 마음을 지배한 문제는 지나간 과거사가 아니라 앞으로 닥쳐올 일들이었다.

털렉의 서재 안에는 값비싼 물품들이 얼마든지 갖춰져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충분히 루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 것이지만, 비취 같은 보석이 꽉 차 있는 상자를 보면서도, 그리고 훌륭한 동물의 조각품을 보면서도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까맣게 색이 변했으나, 은으로 만든 갈고랑이와 새하얀 석고의 결이나 구멍 같은 것 이외의 것은 금박 칠을 하여 정성껏 보관해 온 자취가 보이는 것들이었다그것들은 부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라는 느낌을 줄 뿐이었다.

털렉이 루실의 성의가 없는 태도를 묵과하지는 않을 것이다. 루실은 눈여겨보지도 않고, 무심히 숫염소가 깔끔하게 조각 돼 있는 표면을 손가락으로 만져 보았지만, 마음속으로는 털렉의 어머니에게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그 문제 때문에 괴로울 뿐이었다.

털렉이 팔을 뻗어 루실의 턱을 감쌌다. 루실은 꼼짝못하고 다만 털렉을 쳐다볼 뿐이었다.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나?"

루실은 진심을 털어놓았다.

"당신 어머니를 속일 수는 없잖겠어요? 오래지 않아서 곧 진상을 알게 되실 텐데요."

털렉의 눈빛이 불타올랐다.

"뭣을 알게 된다는 거지?"

루실은 모르는 체하는 털렉의 행동이 몹시 아니꼬워서 화가 치밀었다.

"희롱하지 말아요! 어차피 어머니에게는 우리의 약혼이 위장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마련이에요. 그걸 아신다면 반드시 상심하실 거예요. 집까지 빌려 쓰게 해주고 친절하게 대해 주셨는데, 속였다는 걸 아시게 되면 그건 정말 온당치 못해요."

털렉은 자기 책상 옆으로 걸어갔다. 서랍을 열고 무엇인가를 끄집어 내더니, 다시 루실한테로 왔다.

털렉이 루실의 손을 잡았다. 루실은 차가운 반지가 손가락을 비틀며 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 봐! 이게 정식 약혼의 표시야! 우리가 약혼했다는 사실을 엉터리 같은 일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더라도, 이 반지가 그런 생각은 잘못된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 줄 거야."

루실은 손가락에 끼워진 커다란 황색 다이아몬드를 놀라서 내려다보았다.

"안 돼요!"

루실은 사납게 저항하면서 필사적으로 반지를 빼려고 했으나 털렉에게 손을 꼭 잡혀 너무나 아파 아무 소리도 지를 수 없었다.

"그냥 놔 둬!"

털렉은 명령하듯 타일렀다. 여태까지의 익살스럽던 말씨는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우리가 약혼한 사실은 이미 어머님께 알려졌어. 내일 서로 대면하게 되는데, 그때 어머니께서 내가 선택한 신부를 정식으로 인정해 주시면 우리는 축복을 받게 되는 거야."

"당신이 날 선택했단 말이에요?"

루실은 순간적으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꼼짝못하고 있었다.

루실은 털렉의 그러한 제멋대로의 행위가 미웠다. 그렇다고는 하나, 한편으로 그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배우로서 수많은 여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임은 틀림없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사실로 볼 때, 이 사막의 땅에서는 그의 주장이 절대적일 듯싶었다.

"대단한 자만심을 가진 사람이군요!"

루실은 화를 내었다.

"나를 당신의 명령대로 움직이게 하려고 아무리 생각하셔도 그 렇게 되지는 못할 거예요! 어머니 집에서 나를 꼼짝도 못하게 해 놓고서 실제로는 샤니하고 짝이 되려는 음모를 꾸며도, 그렇게 쉽게 되진 못해요! 당신은 대체 자기 어머니를 무얼로 생각하는 거예요, 털렉? 그리고 또, 내가 나의 이름 대신에 당신의 이름을 계승하고 싶어 하는 줄 아세요?"

루실은 의젓하게 턱을 쑥 내밀고 강경한 태도로 이야기를 해나갔다.

"당신은 매사에 있어서 여성의 가치를 남성의 절반으로밖에 생각지 않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 여성의 존재는 정말 형편없이 가련하겠죠.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오히려 사나이들 중에는 이 발밑에 있는 고무판 나부랑이보다도 못한 남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이런 나쁜 여자!"

털렉은 루실에게 달려들더니 몸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루실은 무력하게 털렉의 가슴에 쓰러졌다.

"당신 같은 고집쟁이 여자는 처음이야!"

털렉은 헐떡거렸다.

"정말 한대 올려붙이려다 참는 것을 다행인 줄이나 알아."

그렇게 말하고는 루실이 몸을 피하려 하자, 그는 더욱 거세게 잡아채었다.

"나도 뜨거운 인정이 있고, 남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이야. 당신이 나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눈치는 나도 알고 있어. 그렇지만 당신의 그 돼먹지 못한 말투는 그야말로 나를 참지 못하게 만들어."

루실은 목이 막혀 말을 할 수 없었다.

털렉은 제나름대로 결정했다.

"내일 어머니에게 당신을 장래의 아내로 소개하겠어. 당신이 현명한 사람이라면 반대는 하지 않을 거야. 마음의 준비를 빈틈없이 해둬. 그리고 약혼은 결혼처럼 구속력은 없으니까, 아직 충분한 여유는 있어. 그러나 나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약혼 같은 건 하기 싫다면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얘기해 주지. 그리고 또"

털렉의 말은 부드러웠으나 위협적이었다.

"이 사막에서는 손가락으로 소리만 내어도 곧 결혼이 성립된다는 것을 명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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