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 고무신
정이식
무성한 잎을 자랑스레 여기는 굴참나무가 멀리 읍내를 바라보며 우뚝, 언덕 위에 서 있습니다.
느릿느릿 내려온 어둠에 너울거리는 나뭇잎만 유령처럼 달려서 달빛의 밝음을 피하고 있습니다.
“엄마가 왜 이리 늦지?”
송이는 그 나무에 등을 기대며 읍내에서 돌아오는 엄마를 기다렸습니다. 전에 없는 기침을 밭으며 새벽길을 떠나던 엄마의 힘없는 뒷모습이 눈에 아른거려서 집에서 마냥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송이가 엄마 마중을 나왔네. 착하기도 해라. 옳지, 저기 송이 엄마가 오는구나."
달님은 하늘위에 높이 떠서 송이의 안타까움을 달빛에 담아 힘겹게 고개를 오르는 엄마의 앞길을 밝혔습니다.
"엄마!"
송골송골 맺힌 이마의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치던 엄마는 달려오는 송이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송이야. 엄마 기다렸어? "
"엄마!"
송이는 엄마의 품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송이야, 밤길 무서운데 집에 있지 왜 왔어."
달빛은 송이의 머릿결에서 출렁이다가 미끄러지며, 구절초 하얀 꽃 가지런한 둔덕위로 또르르 굴러갔습니다.
"무섭긴? 저것 봐 엄마, 달님이 송이 지켜 주거든? 또 나무도 풀도 돌들도 달님처럼 다 송이 친구야."
어깨를 으쓱이며 허리춤에 손을 두르는 송이가 엄마에게는 대견스레 보였습니다.
달그락, 달그락, 깨금발로 앞서는 송이의 고무신 소리가 요란하게 산 메아리로 울려 퍼져 갔습니다.
“송이야, 학교 운동회 얼마 안 남았지? 그 신 신고 어떻게 달리련.”
낡고 헤어진 송이의 고무신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이 아파왔습니다.
"엄마, 송이 1등 할 자신 있어, 1등은 상으로 고무신을 준다는데? 헤헤."
걱정스러운 엄마의 마음과는 달리, 송이는 달빛 환한 산길을 콧노래를 부르며 앞서서 달려갔습니다.
달님은 호롱불 뽀얀 그을음이 달려온 송이에 의해 초가집 안방을 비치이고서야,
누런 박들이 올망졸망 모여서 두런대는 지붕을 건너 마을을 돌아갔습니다.
“누굴까? 아니, 덕이 아니야?”
골목에 엎드려 졸고 있는 붉은 감나무 잎사귀를 일깨우며, 마을 끝머리 자리한 탱자나무 가시울이 기다랗게 늘어진 덕이네 집을 지나던 달님은, 높이 쌓인 곡식가마니 밑에서 흘끔거리는 한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그림자는 송이의 학교 단짝인 덕이었습니다. 덕이는 환한 달빛이 부끄러운지 얼굴을 돌렸습니다.
그러며 벗어든 고무신을 날카로운 돌로 박박 문질렀습니다.
"멀쩡한 고무신을 왜 저럴까? 엄마 알면 혼쭐날 탠데."
걱정스런 달님의 마음과는 달리, 몰려온 검은 구름이 앞을 가려대어 달님은 더 이상 덕이를 지켜 볼 수 없었습니다. 구름이 비껴났을 때에는 달님은 산을 두개나 넘어 다른 마을에 와 있었습니다.
다음 날 밤 되어 다시 온 달님은 산기슭을 돌아가다 혼자서 달려가는 송이를 보았습니다.
바스락거리는 가랑잎 소리에도 무서워 움찔거리던 송이는, 달님이 빛을 내리자 용기가 솟아났습니다.
“달님아, 고마워, 울 엄마 약 지러 가는 길이야.”
물결처럼 출렁이며 앞길을 밝혀주는 달빛을 따라 송이는 달리고 또 달려갔습니다.
"아저씨."
한참을 달려 읍내에 이른 송이는 약국을 찾아 대문을 애타게 두드렸습니다.
하지만 잠이 푹 든 약국 아저씨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도와줘야지.”
달님은 약국의 작은 창문으로 달빛을 강하게 쏘았습니다.
"아, 눈부셔 누가 왔나?"
그제야 일어난 약국아저씨는 송이의 이야기를 듣고 엄마의 약을 지었습니다.
"송이야, 엄마는 일을 너무 많이 하셔서 아픈 게야. 이 약 드시고 며칠 푹 쉬시라 해라."
약국아저씨는 따라 나오며 돌아가는 송이의 밤길을 걱정했습니다.
"송이야. 밤이 너무 깊었네. 어린 네가 혼자 갈 수 있겠니? 아저씨가 바래다주랴?"
"아니에요. 아저씨. 제겐 친구가 참 많아요, 저기 달님도 친구거든요?"
송이는 예쁘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 하얀 들국화 잎이 밤바람에 한들거리는 돌아온 산길을 다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벗겨지는 낡은 고무신에 의해 마음만 바쁠 뿐 송이의 발길은 더디기만 했습니다.
“어떡하지?”
송이의 발에 채인 풀잎 끝에서 노란 달빛 부스러기가 산허리로 날아갔습니다.
“옳지! 좋은 생각이 났어.”
송이는 한 무더기의 칡넝쿨 앞에 멈추어 서더니 칡 줄기를 끊어 신발 밑창을 칭칭 감아 메고 다시 집으로 해 달렸습니다.
'달그락. 달그락.' 산길엔 달그락거리는 송이의 고무신 소리가 솔가지를 타고 흐르는 달빛을 따라 함께 달려갔습니다.
다음 날 아침부터 비가 내렸습니다. 며칠을 두고 내린 비가 그치고 달님이 송이의 집을 다시 찾았을 땐 해가 높다랗게 뜬 아주 환한 낮이었습니다. 그러나 송이를 보고픈 달님의 마음과는 달리 마당가 멍석위에 누운 빨간 고추만 거짓주인 행세를 하며 거드름을 피울 뿐 , 댓돌위에도 마당가에도 송이는 얼룩고무신과 함께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디 갔을까? 혹시, 엄마 병이 도져서 병원에라도 갔나?"
달님은 댓잎을 뒤 흔들고 달아나는 바람을 따라 읍내로 가려고 좁다란 골목길을 돌아 나왔습니다.
"아니, 계집애가 이게 무슨 꼴이냐?"
연붉은 달리아 꽃이 가시투성이 울타리 사이에서도 곱게 피어있는 긴 탱자나무 울을 지나던 달님의 여린 귓가에 난데없이 나타난 덕이 엄마의 성난 목소리가 휘감아 들어왔습니다.
"학교 운동회가 내일인데, 세상에 이런 거지같은 신발을, 에잇, 이런 건 버려."
달님이 놀랄 사이도 없이 덕이네 집 안방 문이 벌컥, 열리더니 고무신 한 켤레가 탱자나무 울을 넘어 씽, 하고 날아왔습니다.
"덕이야, 새신 산지 얼마나 되었니? 지난번 엄마가 보았을 때는 겉만 조금 색이 바랐는데 아무리 험하게 놀아도 그렇지, 그사이에 이렇게 떨어져? 거지도 이런 신은 안 신겠다."
화난 엄마와 그 앞에 풀 죽은 모습으로 앉아있는 덕이가 열린 문 사이로 보였습니다.
"지난번의 그 고무신일까?"
곳간 밑에 쪼그려 앉아 돌로 밀던 덕 이의 고무신을 달님은 떠올렸습니다.
"가만, 저 고무신은 낯이 매우 익네, 덕이 신은 분명 아닌데."
쑥부쟁이 꽃을 짓이기며 내려앉은 고무신은 달님의 눈에 잘 익은 누군가의 것이 틀림없으나. 밤이 아닌 낮엔 몸집뿐 아니라 기억력도 작아지는 달님은, 결국 떨어진 얼룩고무신의 처음 주인을 생각해 내지 못하고 덕이 집을 떠나와야 했습니다.
"오늘은 송이 운동회 하는 날이지? 얼른 가보자."
다음날 마을로 다시 온 달님은 문턱을 괴고 누워 밖을 바라보는 아픈 송이의 엄마를 뒤로하고 운동회가 열리고 있는 송이의 학교로 갔습니다.
“땅”
퀴퀴한 화약 냄새와 함께 달리기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가 버들잎 유유히 흐르는 냇물을 따라 멀리까지 들려왔습니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하얗고 파란 모자들이 흔드는 깃발사이로 달음질 하는 한 무리의 아이들을 달님은 보았습니다.
"아! 저기 있네, 우와, 덕이가 일등이야 일등."
아이들의 무리 속에서 송이와 덕이는 열심히 달리고 있었습니다.
"달려라 덕이야, 송이야 너도 어서 달려."
머리에 파란 띠를 두르고 달리는 송이의 귓가로 바람도 씽씽 거리며 같이 달려갔습니다.
"송이 1등, 덕이 2등."
앞서 달리던 덕 이는 뒤를 흘끔 돌아보더니 잠시 주춤거렸습니다.
그 사이 송이는 달려서 1등으로 테이프를 끊었습니다.
"덕이야 고마워."
송이는 활짝 웃으며 눈물이 나도록 덕이를 꼭, 껴안았습니다. 송이는 1등상을 받으려 시상대로 올라갔습니다.
그런 송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달님은 송이가 신은 얼룩고무신의 콧날이 오뚝 솟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송이의 신은 뒤축이 떨어져 너털거려 칡 줄로 동여매고 산길을 달리던 그 고무신이 아닌, 덕 이가 밤새 돌로 갈아 색만 억지로 바라게 만든 고무신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달님은 잊은 기억을 끄집어내며 그제야 덕이네 울 너머로 날려진 낡은 고무신의 주인공을 알아내었습니다.
“덕이는 자신의 신을 돌로 박박 문질러 엄마에게 흔 것으로 보이게 하고 송이의 낡은 고무신과 바꾸었구나. 그 신을 덕이 것으로 안 엄마는 새 신을 덕이에게 사 신긴 거야. 그리고 덕이는 부러 1등을 양보했어. 참 착한 아이들이네.”
“와 와”
달님의 감탄스러움에 답이라도 하듯 아이들이 지르는 환호 속에서 송이는 손을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노란 풍선을 들고 온 바람은 송이의 두 손에 들린 새 얼룩고무신을 탐내듯 만지작거리다가 높고 푸른 하늘위의 달님에게로 둥실 또 둥실, 떠올라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