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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3-12

53. 제 발등 찍기

날마다 매서워지는 북풍 속에서 겨울이 깊어가며 세상은 얼어붙고 있었다. 그런데 겨울 추위보다 더 혹독하게 세상을 얼어붙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총칼을 앞세워 피 냄새 풍기고 있는 계엄령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한겨울 추위에 몸이 얼고, 계엄령에 마음이 얼고 있었다. 대통령이 술자리에서 총 맞아 죽고. 장장 9일장의 국장을 치루고. 이미 범인이 잡힌 상태이니 계엄령은 해제되어야 했다. 그러나 계엄령은 해제될 줄을 모르고 서울 심장부는 장갑차와 무장 군인들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대통령을 죽인 범인 여덟 명이 기소되었다. 그리고 국민이 직접 뽑은 것은 아니지만. 체육관에서나마 새 대통령을 선출했으면 계엄령은 마땅히 해제되어야 했다. 그런데도 계엄령은 해제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누가 나서서 계엄령을 해제하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즉각 난동자로 체포되고. ‘난동자=용공=빨갱이로 몰릴 수 있는 살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군인들이 아무리 총칼 들고 삼엄하게 진을 치고 있다고 해도 세상은 잠잠하지가 않았다. 이상야릇한 가지가지 소문들이 북풍보다 빠르게 퍼져나가면서 세상은 자꾸 뒤숭숭하고 불안스러워지고 있었다. 그 소문들은 분명 계엄령에 위배되는 것인데도 사람의 힘으로 바람을 잡을 수 없듯이 군인들의 총칼도 날로 심해지고 있는 소문을 잡지 못했다.

박 통을 미국이 죽였다며?”

그렇다더라니까 글쎄.”

그럼 김재규가 미국하고 내통했다는 거야?”

그야 말하면 잔소리지.”

어찌 그럴 수가 있나. 심복 중에 심복이라는 사람이.”

그러니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잖아.”

근데 왜 미국은 남의 나라 대통령을 즈네들 맘대로 죽여?”

그걸 몰라? 미국 말 안 듣고 박 통이 꼭 원자폭탄 만들려고 해서 그랬다는 거.”

웃기는 새끼들이네. 즈네들은 수 만개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가 한 개 가지려는 걸 왜 못 갖게 해.”

그걸 몰라? 천 년 만 년 즈네들 손아귀에 꽉 틀어쥐고 있으려는 속셈.”

근데. 왜 정말 즈네들이 우리 대통령을 죽이고 그래? 독재해서 우리가 싫어하는 것하고. 미국이 죽이는 것하고는 완전히 다른 문제잖아.”

이런 말 못 들었어? 미국 CIA에서는 각국 지도자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데. 집무실 도청은 말할 것도 없고. 똥까지 수집해서 분석한대잖아. 똥을 분석하면 기질이며 성격까지 다 나온대니까. 그런데 똥을 분석한 결과 우리 박 통이 제일 독종이었다는 거야. 그 독종이 독기를 발휘해 끝끝내 원자폭탄을 만들 테니까 미리 손을 쓴 거지.”

그게 정말일까? 그럼 박 통은 그런 눈치를 전혀 못 챘을까?”

근데 김재규 그건 뭐야?

박 통 죽이고 지가 대통령 될 생각이었나?”

이런 소문 있잖아. 미국에서는 박 통이 죽으면 사람들이 광화문으로 쏟아져 나와 만만세를 부르며 환호할 줄 알았다는 거야. 그런데 어떻게 됐어? 단 한 사람도 만세 부른 사람은 없고. 온 나라가 쫙 얼어붙어 버렸잖아. 그 뜻밖의 사태에 미국이 그만 당황했다는 거야. . . 이게 아니로구나 하고 김재규를 모른척해 버렸다는 거지. 그러니까 김재규는 그만 얼떨떨해져 있다가 쇠고랑을 차고 말았다는 거야.”

하 그것 참. 말은 그럴듯한데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고 말야.”

그나저나 이 판이 이거 어떻게 돼가는 거야? 계속 군인들이 설쳐대고 있으니.”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별들의 전쟁인 거야. 진작 다 소문났잖아.”

그럼 또 군바리들이 잡는다고?”

그럼 어쩌겠어. 총 든 게 그쪽인데.”

그렇지 뭐. 새로 들어앉은 대통령이 허수아비라는 건 어린애들도 다 아는 거니까.”

이거 참 나라꼴이 뭐가 될려고 이러지? 그리 되면 박 통 죽으나마나 아냐?”

누가 아니래. 박 통이 기를 써서 GNP 1천불 만들어 놓고 갔는데. 잘못하다간 그거 곤두박질치게 된다구.”

그런 소리 말어. GNP를 박정희 혼자서 다 올린 것처럼. 정치가 산으로 기어 올라가거나. 바다로 빠져 들어가거나 간에 국민들은 그저 잘살아보려고 죽자 사자 일하고 있으니까. 언제라고 개판 정치 덕에 GNP 올랐나. 제길.”

계엄령은 유언비어 유포자들을 엄단한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었지만 그런 소문들은 말이 보태지고 부풀려지며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신문들이 죽은 시대를 대신하는 소문의 시대였다. 그런 소문들과 뒤엉키는 또 다른 소문은 그날 밤 대통령 옆에 앉았던 여자가 대학생이니 미스코리아 출신이니 하는 우김질이 이어지는가 하면. 그 방에서 노래를 부른 여가수를 놓고 여러 이름들이 떠돌아다니며 세상 떠난 대통령의 체면을 구기고 있었다.

양용석은 그런 소문들을 귓등으로 들으며 다른 일에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는 건축회사 사장실에 버티고 앉아 있었지만 회사 일에서 관심이 떠난 지 벌써 한 달이 넘어있었다. 회사 일은 전부 전무한테 떠맡겨놓고 건성으로 결재를 하며 신경은 온통 군부의 움직임에 집중되어 있었다.

어머나! 이를 어째. 나라 망했네.”

박 대통령이 시해되었다는 텔레비전 보도를 보는 순간 한정임이 소파에 주저앉으며 터뜨린 말이었다.

! ! 이게 무슨 소리야.”

양용석은 이 말밖에 못하면서. ‘나라 망했다는 아내의 말과 똑같은 마음이었다. 슬픈 조곡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되풀이되고 있는 보도를 들으며 한정임은 울었다. 양용석은 무언가 복잡하게 뒤엉킨 마음으로 담배만 피웠다. 양용석은 사무실에서도 하루 종일 뒤숭숭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보내다가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사업상 술 마실 선약이 있었지만 서로 다음으로 미루었다.

어차피 떠난 사람은 떠난 사람이고. 이젠 세상이 바뀌었어요.”

식탁에 앉은 한정임이 말했다. 그녀의 기색에서는 아침에 울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

양용석은 아내를 멀뚱하게 쳐다보았다.

최혜경. 그것 이젠 팔다리 다 잘렸어요.”

한정임이 싸늘하고 매섭게 말했다. 그 눈초리며 얼굴에서도 섬뜩한 냉기가 뻗치고 있었다.

글쎄....... 그럴까? 도로 그 사람들이 잡을 텐데.”

자신이 하루 종일 생각해 온 문제라서 양용석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좋아요. 공화당에서 잡겠지요. 그치만 최혜경네는 끝장났어요. 그 남편이 다른 사람들한테 억시게 미움 산 것 당신도 잘 알잖아요. 그 사람은 각하 없으면 시체에요.”

한정임은 정신 차리라는 듯 남편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당신 말도 일리는 있는데. 그래도 속단할 수는 없어. 그 사람도 만만하지는 않으니까.”

물론 그렇겠지요. 돈까지 많이 몰아잡고 있으니까 권력 안 잃을려고 온갖 짓 다하며 발버둥을 치겠지요. 그치만 이젠 한풀 꺾인 건 틀림없어요.”

그야 그렇지.”

. 천 년 만 년 갈 줄 알았겠지만 이렇게 당하는 수가 있다구요. 아유 그 배신자. 속이 다 시원해.”

한정임은 끝말을 이빨로 와드득 물어뜯듯이 하며 입을 앙다물었다.

그래. 당신 심정 알아. 그렇지만 다 잊어버려. 세상인심이라는 게 그런 건데 뭐.”

어머. 당신 맘 좋은 척하며 그런 물러터진 소리 하지 말아요. 남자 매력 빵점이니까. 난 이번에 최혜경이가 쫄딱 망하기를 바래요. 그렇게 돼야만 내가 복수를 할 수 있으니까.”

한정임은 싸늘한 냉기를 내뿜으며 파르르 기를 세웠다.

여보. 복수는 무슨.......”

여보. 당신은 배알도 없고 감정도 없어요! 내가 쇠고랑 차고. 감옥살이한 것 다 잊어버리셨어요? 그러고도 내 남편이에요? 난 끝끝내 복수하고 말거에요. !”

한정임은 그때의 감정이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은 기세로 바락바락 소리치며 떨었다.

알았어. 알았어.”

양용석은 건너편에 앉은 아내의 어깨를 두들기는 손짓을 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때 당한 일을 잊지 못하는 아내가 딱하기도 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 발표가 있었다. 그 발표를 보면 그날 밤 박 대통령은 죽지 않을 수 없도록 이중의 살해 계획망 속에 포위되어 있었다. 대통령이 가장 믿었던 조직의 장과 그의 부하들에게 에워싸여 대통령이 죽어갔다는 사실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또한 온갖 소문들이 퍼지는 의혹의 주머니가 되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 한정임이 남편에게 불쑥 물었다.

당신. 수사 발표하던 그 사람 알아요?”

알지.”

아니. 그냥 아는 게 아니라 말이 통하게 친하냐구요.”

아니. 그런 사이는 아닌데.”

양용석은 이상한 낌새를 느끼며 아내를 주시했다.

아유. 어쩌면 좋아. 그 사람이 실세라는데.”

한정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실세? 그게 무슨 소리야?”

양용석은 이 말을 하면서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스치는 것을 느꼈다. 상황 파악을 하는데 자신이 아내보다 한발 늦었다는 것과. 장성들의 움직임이 심상찮다는 그저 스쳐들은 소문이었다.

척 들으면 모르겠어요? 당신 요새 뭘 생각하고 살아요?”

한정임은 마땅찮게 눈을 흘기며 짜증을 부렸다.

나도 장성들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소식 정도는 듣고 있는데. 그런 것에 너무 신경 쓸 거 없어. 몇몇이 무슨 욕심이 있어도 자기들 뜻대로 될 세상이 아니니까.”

그런 속 편한 소리 말아요. 총 들고 밀어대는데 안 될 게 뭐 있어요. 박 대통령은 뭐 한강 건너올 때부터 대통령이었어요?”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넘겨짚고 이래. 당신이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미안하지만 5.16때하고 지금 하고는 상황이 전혀 달라. 5.16은 장면정권이 워낙 무능해서 민심을 다 잃어버렸으니까 성공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유신으로 군부독재에 쓴 물이 나 있던 상황에서 박 통이 떠난 거야. 학생들이고 야당이고 일반 국민들이고 이제 민주주의 할 기회가 왔다고 잔뜩 벼르고 있는데 또 군인들이 나서? 그건 어림없는 일이야. 절대 먹히지 않아.”

양용석은 자신 있게 말하며 고개까지 내저었다.

예에. 나도 그런 생각쯤 안 하는 게 아니에요. 그렇지만 세상사란 엉뚱한 일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돼요. 더구나 지금은 말할 수 없는 혼란기니까 그런 일이 더 잘 벌어질 수도 있잖아요. 군인들이 모든 걸 장악한 계엄 상태에서 그들이 정권을 잡고 나설 수도 있다구요. 우리가 그런 경우에 신경 써서 손해날 건 없잖아요. 이익이면 이익이었지. 안 그래요?”

그야 손해날 건 없지.”

그러니까 당신은 그 사람들 움직임을 눈치 빠르게 살피고. 특히 그 사람하고 직코스로 줄이 닿는 선을 찾아내라구요. 이번 기회가 우리한테 절호의 찬스가 될 수도 있다구요.”

글쎄. 그거 너무 오버쎈스 아닐까?”

당신은 참 이상해요. 신중한 건 좋지만. 왜 그렇게 군인다운 박력이 없어요. 안 되면 그만이고. 되면 땡잡는 거다 생각하고 일단 시작해 봐야 되잖아요. 미리부터 안 될 거다 하고 손 놓고 있다가 덜컥 정권을 잡아버리면 그때 가서 얼마나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되겠어요. 안 그래요?”

글쎄. 그건 그런데. 당신은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 특별한 소린 아니에요. 그 사람이 젊은 장군들 중에서 박 통한테 제일 신임을 받았던 사람이고. 지금 이 판을 틀어쥐고 있는 실력자라는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만일을 생각해서 우리가 먼저 뛰자는 거지요. . 그 사람이 안 되더라도 앞으로 군 요직에서 계속 힘을 쓸 텐데. 그런 사람과 선이 이어지면 나쁠 것 하나도 없잖아요.”

그야 그렇지. 군부대 공사만 따내도 땅 짚고 헤엄치기지.”

그러니까 당신은 내일부터 그 일에 최선을 다하세요. 나는 나대로 부인 쪽을 알아볼 테니까요.”

양용석은 다음날부터 그 일에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그쪽으로 접근해 가는 것은 그다지 쉽지가 않았다. 계엄 상황의 핵심세력답게 차단막이 겹겹이었다. 그런데 새 대통령이 선출되고 나서 양용석은 바짝 긴장하게 되었다. ‘별들의 전쟁이라는 소문과 함께 군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될 거라는 말이 솔솔 퍼지고 있었다. 아내의 예감이 맞아들어 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양용석은 그동안 현직에 있는 동창 몇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쪽 이야기만 조금 비치면 당황하며 전화를 끊으려고 들었다. 그들은 계급이 더 높으면서도 잔뜩 몸을 사리고 있었다. 역시 군대는 직책 우선이었다. 아내도 생각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는지 자꾸 짜증을 냈다. 자신의 예감이 맞아들어 가고 있는 것 같으니까 아내는 얼마나 몸이 달 것인가. 남편 출세도 시키고. 최혜경에게 복수도 하고. 아내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 하고 있었다. 아내는 남편이 건설회사 사장인 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회사가 벌지 않아도 돈은 많으니 아내가 원하는 것은 권력이었다. 자신도 그저 그런 건설회사 사장보다는 국회의원쯤이 한결 좋을 것 같았다. 건설회사를 인수하기 전에 야당 쪽에 접촉을 안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쪽에서는 턱없이 많은 기부금을 요구했다. 그렇다고 국회의원자리가 확정되는 것도 아니었다. 선거를 하게 되면 또 돈을 쏟아 부어야 했다. 그런다고 당선을 장담할 수도 없었다. 떨어지고 나면 막대한 돈만 날리고 빈손을 털게 될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도박이었다.

양용석은 맛도 없는 담배를 뻐끔거리며 벌써 몇 번째 시계를 보았다. 그때 문을 두들기는 손기척이 울렸다.

예에ㅡ.”

양용석은 목소리를 길게 끌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사장님. 다녀왔습니다.”

아 고 상무. 어찌됐어요?”

양용석은 상대방이 소파에 앉기도 전에 물었다. 고 상무란 지난날의 고 중령이었다.

. 약간의 성과는 있었습니다.”

고 상무는 두 손을 앞으로 모아잡고 허리를 굽혔다.

약간의 성과?”

양용석은 눈을 치뜨며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 그쪽의 핵심참모하고 며칠 있다가 만나기로 했습니다.”

며칠 있다가?”

. 요새는 모종의 중대한 일이 있어서 전혀 시간을 낼 수 없는 모양입니다.”

그저 막연하게 며칠이면 그게 언제지? 모종의 중대한 일이란 또 뭐고?”

양용석은 얼굴을 찌푸리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죄송합니다. 전혀 눈치를 챌 수가 없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원래 군대일이란 그런 것 아닙니까. 더구나 요새는 비상 상황이니까요. 다른 기관에서도 잔뜩 긴장하고 눈치만 살피고 있지 아는 게 없습니다. 우리가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핵심참모라면 대령쯤 되나?”

. 그렇습니다. 대령입니다.”

그럼 고 중령하고 같은 또래 아닌가.”

양용석의 입에서는 불현듯 고 중령이라는 말이 나갔다.

. 그러니까 만나기만 하면 얘기가 잘 통할 겁니다.”

한 가지 명심할 게 있어. 이렇게 암암리에 움직이고 있는 것이 우리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야. 수없이 많이 뛰고 있는데. 이건 또 하나의 전쟁이야. 이 일만 잘 해내면 내가 크게 봐줄 테니까 정신 똑똑히 차리라구.”

양용석은 앉음새를 가다듬으며 고 상무를 응시했다.

. 명심하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 상무는 군대식으로 고개를 꺾었다.

이틀이 지나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군인들의 총격전 끝에 계엄사령관이 밤사이에 연행된 것이다. 그 사태는 가뜩이나 불안하고 뒤숭숭한 세상을 여지없이 뒤흔들어놓았다. 신문이나 텔레비전보다 더 빠르게 또 온갖 소문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군부대들이 서울을 포위하듯이 둘러쌌다고 하는가 하면. 총격전으로 군인들 수십 명이 죽었다고 했고. 유탄으로 민간인들도 여럿 죽었다는 등. 흉흉한 소문들이 차가운 겨울바람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놀란 것은 민가가 밀집된 서울 시내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계엄사령관이 대통령 시해사건에 관련되었다는 것만도 아니었다. 엄연히 계엄사령부의 하급기관에 불과한 기관에서 총을 쏘아대며 계엄사령관을 잡아갔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 있었다.

봐요. 봐요. 내 말이 어때요. 내 말이 틀림없잖아요. 그 사람이 실세라니까요. 이번 사건은 그 사람이 별들의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했다는 걸 보여주는 거라구요. 그렇지요?”

한정임은 텔레비전 보도를 보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숨 가쁘게 말했다.

그래. 그런 모양이네....... 그리 도니 모양이야. ‘별들의 전쟁’.......”

양용석은 힘없이 중얼거리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머리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했다.

고 상무가 말한 모종의 중대한 일이란 바로 저것이었을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 친구는 그것밖에 안 되는 계급으로 최강자가 되었는데. 나는 뭐지? 내가 예편을 당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어찌 되어 있을까? 최소한 이런 꼴은 아니지 않겠어? 아니지. 계급이 높으면서도 지금 다른 친구들이 하는 것처럼 기죽어 눈치보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건 차라리 더 못할 일 아닌가? 어쩌면 지금이 더 나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 사람이 대통령.......? 글쎄. 글쎄. 그게 말이 되나? 영 안 어울리는데. 너무나 안 어울려. 야당이나 대학생들이 가만히 있을까? 계엄.......? 아무리 계엄이라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그리고 또 미국이 있잖아? 미국은 어떻게 나올래나?’

여보.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어요? 무슨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한정임은 남편의 팔을 질벅거렸다.

? . 아니야. 이거 판이 어찌 돼가는 건지 한치 앞도 안 보여.”

양용석은 혀를 차며 담배를 빼들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에요? 당신은 이럴 때 보면 참 답답하고 소심해요. 판이야 환하게 드러났는데 뭐가 한치 앞도 안 보여요. 대통령은 어차피 허수아빈 거야 세상이 다 아는 일이었고. 그 다음 실권자가 계엄사령관이 아니었냐구요. 근데. 그 사람이 당해버렸어요. 그럼 그 실권이 누구한테 가겠어요. 구구법보다 더 쉬운 걸 놓고 뭘 어렵게 생각하고 그래요. 증말 답답해 못살겠네.”

한정임은 왈칵 짜증을 부렸다.

이거 봐. 그리 잘난 척 좀 하지 마. 그까짓 걸 몰라서가 아니라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 말이야. 세상이란 혼자 밥상 차려먹는 게 아니라구.”

. 또 야당이고 학생들 얘기 꺼낼라고 하는 거지요? 그렇지만 당신 이거 하나만 생각하면 돼요. 당신. ‘별들의 전쟁이란 소문 들으면서 계엄사령관이 잡혀갈 줄 알았어요. 몰랐어요?”

양용석은 아내를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몰랐지요? 나도 몰랐어요. 우리만 모른 게 아니라 이 세상사람 전부가 몰랐어요. 안 것은 그 사람 편뿐이었어요. 근데 그 사람들은 그런 엄청난 일을 해치웠어요. 그 일은 계엄사령관 한 사람이 잡혀가는 것으로 끝난 게 아니에요. 세상을 향해서 누구든지 까불면 가차 없이 해치우겠다는 시범을 보인 거라구요. 그리고 서울 동서남북에 부대들이 여차하면 밀고 들어오려고 진을 치고 있다는데 여당이나 학생들이 무슨 수로 일어난다는 거예요? 간단하게 한 가지만 생각해요. 당신이 만약 그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물렁물렁하게 하겠어요. 짱짱하게 독하게 하겠어요? 그 사람 군인이고. 한번 뽑은 칼이에요. 이런 상황에서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내가 그 사람이다 하고 생각하라구요. 괜히 복잡하게 생각했다간 죽도 밥도 안 돼요. 알았어요?”

이거야 원....... 당신이 군인이었으면 크게 출세했을 거야.”

양용석은 장식장으로 가서 양주병을 꺼냈다. 그는. 당신이 그렇게 단순하게 나대다가 최혜경한테 당한 것 아냐. 하는 말이 곧 밀려나오는 걸 참으며 자리를 뜬 것이다. 그건 아내의 상처를 너무 심하게 찌르는 것이었고. 오늘의 재산은 아내가 최혜경을 끼고 이룬 것이니 오히려 역공을 당할 위험이 더 컸다.

당신 말이 일리가 있기도 해. 하여튼 어떻게 잘 좀 돼야 할 텐데.......”

양용석은 술잔 하나를 아내에게 내밀며 소파에 앉았다.

우리 정신 차려야 해요. 모두 약아빠진 세상에서 이번에 판 뒤집어진 것보고 서로 빨리 줄 대려고 눈들이 시뻘게져 날뛸 거라구요. 그쪽에서도 정치하려면 결국 이것이 있어야 돼요. 이것 힘 당할 게 없으니까 아까워 말고 써야 해요. 이거야 원하는 자리 잡고 또 모으면 되니까.”

한정임은 손가락 두개로 동그라미를 그려보였다.

어쨌거나 당신 배짱 한번 대단해. 처남 찜쪄먹는다니까.”

양용석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사랑스럽다는 듯 아내를 쳐다보았다.

아유. 오빠 얘긴 꺼내지도 말아요. 군인도 아니고 정치가도 아니고. 그따위로 정치하려면 뭐 하려고 해요? 오빤 배짱이 있는 게 아니라 바보 같은 통고집뿐이라구요. 차라리 정치가라면 남재구씨가 훨씬 윗질이지. 오빠가 통고집 부려서 된 게 뭐가 있어요? 그 많은 재산 거의 다 까먹고 촌구석에서 초라하고 한심하게 됐지.”

꼭 그렇게 말할 건 없지. 우리나라 여야 국회의원들이 거의 다 썩었으니까 그 속에서 오빠가 어쩔 수 없이 파묻힌 거지. 모두가 오빠만큼씩만 양심이 있고 청렴했어 봐. 이 나라는 달라졌지. 오빠를 그리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어. 그런 분은 필요 해.”

옛 상관에 대한 의리한번 잘 지키네요. 오빨 좋게 말하니까 기분 나쁠 건 없는데. 하여튼 오빠는 세상사는 데 서툴고 답답해요.”

근데 남재구씨는 어찌 될라나? 혹시 모르니까 그냥 지나가는 셈치고 그 사람 한번 만나볼까?”

아니. 그럴 것 없어요. 공화당 국회의원들이 한물간 것처럼 그 사람도 이젠 쉰밥이에요. 자기 살 구멍 찾느라고 정신이 없을 텐데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잘못하다간 괜히 우리 속만 내보이고 손해만 보게 되는 건데.”

그도 그렇군. 이거 참. 세상 어지러워서.......”

어지러워할 것 없어요.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이런 혼란기일수록 크게 잡을 수 있어요. 저쪽에서도 이것 많고 믿을 수 있는 사람 찾을 건 뻔하니까. 우리야 이것 많겠다. 군 출신 족보 확실하겠다. 선만 닿았다 하면 우리만큼 유리한 사람들도 없어요. 당신도 각오 새롭게 하고 나서요.”

한정임은 남편 앞으로 술잔을 내밀었다. 양용석은 아내의 술잔에 자신의 술잔을 부딪쳤다. 배가 불룩한 두 개의 양주잔은 잘그랑 경쾌한 소리로 울렸다.

이튿날 한정임은 동창회 미스 최와 약속한 장소로 나갔다. 마음이 바쁘다 보니 젊은 사람과 의 약속인데도 시간이 10분이나 일렀다. 한정임은 초조감을 덜려고 먼저 커피를 시켰다. 커피를 마시면서 또 생각을 짜내 봐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건 철저하게 비밀을 지키면서 일을 해나가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계급에 따라 알고지낸 군인의 아내들은 많았다. 그러나 그들을 다 경계의 대상으로 삼고 보니 고립상태가 되어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을 접촉해 보면 연줄 연줄로 얻어 들을 소리들은 있겠지만 결정적인 도움을 얻기는 어려웠다. 괜히 그들에게 속내를 눈치 채게 해서 경쟁자만 늘릴 위험이 더 컸다. 쥐도 새도 모르게 직 코스로 가야했다. 최혜경을 구워삶았던 것처럼. 과정이 좀 어렵더라도 그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어머. 선배님 먼저 와 계셨군요.”

. 미스 최 어서 앉어. 어떻게 됐어?”

한정임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해 놓고는 후회했다. 너무 속을 드러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근데. 어쩌죠. 선배님

미스 최라는 여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

한정임은 틀렸구나하는 낙담과는 달리 웃음을 지었다.

그게 있잖아요. 아무리 뒤져봐도 연락처가 없어요. 그게 동창회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다는 증거예요. 왜 그런 동문들 많잖아요. 졸업하면 동창회는 돌아보지도 않는 사람들 말예요. 제가 딴 동문들한테 좀 알아볼까요? 선배님 같은 장군 사모님들께.”

아니야. 그럴 건 없어. 뭐 별로 중요한 일 아니니까.”

한정임은 여유 있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아무 도움도 못 돼서.”

죄송하긴. 도와 준거나 똑같지. 이거 맛있는 것 사먹고. 이건 미스 최하고 나하고만 아는 일인 것 알지?”

. 알고 있어요.”

한정임은 혼자 걸으며 이 상사를 만나 볼까말까 저울질하고 있었다. 어쩌면 효과가 있을 것도 같고. 어쩌면 헛수고만 할 것 같기도 하고. 종잡기가 어려웠다. 자신이 이 상사와 친분을 두텁게 쌓았듯 다른 여자들도 남편을 모시는 장교들보다는 하사관들과 더 가깝게 지내는 걸 생각하면 효과가 있을 수 있었다. 장교에 비해 하사관들은 다루기 만만하고. 이것저것 궂은 일 시키기에 부담이 없었다. 그러나 이 상사가 제대한 지 오래된 것을 생각하면 얻는 것 없이 괜히 헛김만 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 상사가 재향군인회 일에 열성이면서 발이 넓은 것이 마음 한 쪽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는 입이 무겁고 일 처리하는 것이 능란했다. 그 많은 부동산 건수들을 엎어 치고 뒤집어 치면서 한 번도 말썽이 나거나 실수한 적이 없었다.

그래. 밑져봐야 본전이다!’

한정임은 택시를 타고 다시 강남으로 달렸다. 강남 영동은 그동안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빈 땅들이 절반 가까이나 남아 있었다. 한 정임은 그 빈 땅들을 볼 때마다 옛 추억이 새로워졌다. 자신에게 흡족할 만큼의 부를 가져다 준 그 땅. 제아무리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있다 해도 거기에는 당할 도리가 없었다. 이익이 엄청나게 남는 장사를 흔히 열 배장사라고 하지만 땅은 스무 배. 서른 배도 우습고. 정보만 확실하게 잘 빼면 100배 장사는 예사였다. 평당 1천원에 산 땅이 개발 계획이 발표되고 1년이 지나지 않아 10만원이 되기는 쉬우니 돈을 갈퀴로 긁어모은다는 말도 시장스러울 지경이었다. 솔직히 말해 오늘날 누리고 있는 치부는 최혜경이 아니었으면 어려운 일이었다. 어찌 보면 최혜경의 입장은 오빠가 판단한 것이 옳을지도 몰랐다. . 오늘의 치부를 생각하면 보석 사건으로 당한 고생은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런데 최혜경은 어찌 그리도 돈 욕심도. 보석욕심도 끝없이 많았을까. 글쎄. 최혜경만 그런가....... 한정임은 스스로 멋쩍어져 씩 웃었다. 택시에서 내린 한정임은 고개를 젖히고 15층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개천에서 용 났지.’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사모님. 이게 어쩐 일이십니까.”

한정임이 들어서자 꽃무늬 요란하게 붙은 커다란 책상에 버티고 앉았던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그간에 잘 있었어요?”

한정임은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를 받았다.

아이고 사모님. 어서 앉으십시오. 너무 오랜만입니다. 어찌 이리 직접 납시셨습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호출을 하시지요. 이거 원 황송해서. 참 장군님께서는 안녕하십니까?”

그 남자는 수선스럽다 싶게 말을 쏟아내며 굽실거렸다.

이 사장은 재미 좋아요?”

한정임이 이 상사이 사장으로 우대해 부르며 소파에 앉았다.

예에. 재미야 뭐 늘 그렇지요. 저 같은 놈이 이렇게 떡 벌어지게 사는 거야 다 사모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 때문이지요. . 그럼요. . 다 사모님 덕이죠. 헌데. 무슨 급한 일 있으십니까?”

머리를 군대식으로 짧게 깎은 이 사장은 연신 손을 맞비비며 눈치 빠르게 물었다.

저어....... 여기......”

한정임은 여기서 할 이야기가 아니라는 듯 문 쪽을 눈짓했다. 칸막이 뒤쪽은 빌딩의 관리사무실이었다.

예에. 나가시지요. 조용한 다방이 있습니다.”

이 사장이 벌떡 일어나며 옷걸이의 오버를 내렸다.

“....... 그러니까 그쪽에 직 코스로 통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으면 해요. 빠르고 조용하게.”

한정임은 아주 낮은 소리로 침착하게 말했다.

. 말씀 알겠습니다만. 제가 옷 벗은 지 오래돼서 당장 떠오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허지만 재향군인회 쪽에서 더듬으면 금방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하사관들이야 상하좌우로 금방금방 맥이 통하니까요. 2~3일내로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이 사장 역시 낮은 소리로 그러나 자신감을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절대 극비예요.”

. 사모님. 어디 한두 번 해본 일입니까. 역시 사모님께서 판단 빠르시고. 잘하시는 것 같은데요.”

이 사장이 은밀하게 웃었다.

그래요? 빨리 좀 잘 해요. 내가 서운찮게 답례할 테니까.”

한정임이 눈으로 웃음을 받으며 일어났다.

아이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이런 기회에 은혜 갚아야지요.”

사흘이 지나 한정임은 이 사장의 전화를 받고 약속장소로 나갔다.

인사 받으시지요. 저하고 친한 강 상사입니다.”

이 사장이 한 남자를 한정임에게 소개했다.

강 상사라고 합니다. 그저 조용조용 해야 될 일이니까 이름은 묻어두도록 하겠습니다.”

그 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한 말이었다.

한정임은 고개를 까딱하며 찬 느낌의 웃음을 살짝 지었다. 그녀는 그 남자를 훑으며 제법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람 후배 중에 그분을 오래 모셨고. 신임이 아주 두터워 비서처럼 지내는 김 중사가 있다고 합니다.”

이 사장이 설명했다.

현역인가요?”

아닙니다. 작년에 제대했는데. 지금도 그 댁에 무상으로 드나들 정돕니다.‘

강 상사라는 사람이 대답했다.

왜 제대를 했지요? 그런 그늘이면 특과 중에 특괄 텐데.”

한정임은 예리한 점검에 나서고 있었다.

. 잘 아시다시피 그늘이 아무리 좋아도 중사 수입으로는 커나는 자식들 가르치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대해서 친구가 하는 사업체의 상무로 들어갔습니다.”

상무? 무슨 사업첸데요?”

. 군납 하청업인데. 그 일을 바로 그 분이 뒤봐주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그분이 상무 만들어준 셈이지요. 그래서 지금도 받들어 모시는 거구요.”

“.......”

입을 꼭 다문 한정임은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한동안 그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럼. 그 사람 언제나 만날 수 있지요?”

이윽고 한정임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 오늘은 어렵겠고. 원하시면 내일은 만나실 수 있습니다.”

좋아요. 내일 만났으면 좋겠어요.”

. 그렇게 하시지요. 그런데 저어....... 그쪽에서 꺼릴 수 있으니까 이 사장은 이 선에서 빠지고. 연락은 제가 직접 드리는 것이 어떨지......”

그야 당연하지요. 단계마다 꼬리는 빨리 잘라야 해요.”

한정임은 마치 여두목처럼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수십 번 말했지만. 자네 일 빈틈없이 잘해야 해. 내 위신이 걸린 문제니까.”

이 사장이 자기 임무를 마치는 마지막 당부처럼 강 상사에게 말했다.

걱정 말어. 자네 덕 봐가며 사는 처지에.”

강 상사가 커피 잔을 들며 말했다. 한정임은 다음날 강 상사와 함께 김 중사라는 사람을 만났다.

자네에 대해선 다 말씀 드렸어. 성심껏 잘 도와드리도록 해. 다 서로를 위해 좋은 일이니까.”

한정임에게 소개가 끝나자 강 상사는 김 중사에게 이렇게 당부하고 곧 자리를 떴다. 이틀 뒤에 한정임은 김 중사를 다시 만났다.

여기에 내 명함을 넣었어요. 거기에 사모님의 싸인만 받아오면 돼요.”

한정임은 핸드백에서 사각봉투 크기의 얇게 포장한 것을 꺼내며 말했다.

.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김 중사는 포장된 것을 받으며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었다.

안주머니에 잘 넣고. 곧바로 전해야 돼요. 조금이라도 가지고 다니면 절대 안 돼요.”

한정임은 김 중사를 응시하며 못을 박았다.

그럼요. 지금 바로 갈 겁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만나요.”

. 알겠습니다.”

한정임은 김 중사를 먼저 택시 태워 보냈다. 사라지는 택시를 보며 그녀는 가슴이 뚫리는 것 같은 긴 숨을 내쉬었다. 이튿날 한정임은 가슴을 두근거리며 약속장소로 나갔다. 약속시간 5분전인데 김 중사는 나와 있지 않았다. 커피를 먼저 시켜 마시는데 1. 1분이 초조했다. 약속시간이 지나가고 있는데도 김 중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1. 1분이 조바심이 일었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1. 1초가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마침내 30분이 지났다.

혹시 이놈이!’

온갖 생각을 다하던 한정임은 돌로 머리를 치는 것 같은 생각에 부딪혔다. 그녀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현기증으로 머리를 감쌌다. 심한 어지러움 속에서 수백 개의 돈다발들이 저 먼 허공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54. 업어치기

아버지 이 불안한 시기에 왜 외국엔 나가시려고 합니까? 내일모레면 신년이기도 한데요.”

박준서는 왜 아버지가 부른 것인지 탐지하려고 숟가락을 놓으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

박부길 사장은 반주 잔을 기울이다 말고 아들을 빤히 쳐다보다가는.

몰라서 묻는 게냐. 알면서도 확인을 하자는 게냐?”

불퉁스럽게 내질렀다.

. 전혀 모르는 건 아니고 무슨 느낌이 있긴 한데. 그것이 또 이건지 저건지 모호해서 잘 짚을 수가 없어서 여쭤보는 겁니다.”

. 그 말 한번 우물쭈물 어물어물 구렁이 담 넘어가듯 잘 굴리는구나. 즈이놈들 책임 안 지려고 그저 변명하고 발뺌하는 데만 이골 난 회사 간부 놈들처럼. 첫마디 하는 걸 보니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면서.”

박부길 사장은 성질을 부리듯 반주 잔을 왈칵 뒤집었다.

아버지도 차암......”

박준서는 계면쩍게 웃으며 코밑을 훔쳤다. 아버지의 지적을 받고 보니 자신이 꺼낸 첫마디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그래도 정치 물을 먹었다는 놈이 그리 둔해서 되겠냐? 애비가 멍청하게 있어도 네놈이 나서서 외국 좀 다녀오십시오. 해야 할 판에.”

박부길은 기관총의 연속사격처럼 빠르게 혀를 차댔다.

“......?”

박준서는 그저 모호하게 웃기만 했다. 더욱 감 잡기가 어려워진 것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계엄 상태는 계속되고. 세상은 더욱 어수선하고 불안스러워지는 이런 상황에서는 외국에 출장을 갔더라도 급히 돌아와야 옳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오히려 반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 세상 보는 게 아직도 어려. 너 똑똑히 들어라. 난세에는 무조건 몸을 피하는 게 최상의 보신책이다. 이걸 머리에 꼭 박아둬라.”

박부길은 술을 따르라고 아들 앞으로 술잔을 불쑥 내밀었다.

예에......”

박준서는 몸을 일으켜 술을 따르면서 그 말뜻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난세에 몸을 피하는 건 좋지만. 난세에 회사는 신년을 맞는 것이고. 계엄 상태에서 또 정치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또 신년 됐다하면 정치인 떨거지들이 세배합네 하고 어중이떠중이 몰려들겠지? 그것들을 싹 피해야 해. 특히 이번 신년에 어물어물 얼띠게 굴며 그 작자들하고 술잔 나누고 앉았다가는 날벼락 맞기 딱 좋다. 너를 포함해서 지금 정치인이란 물건들은 앞발 뒷발 다 묶여 꼼짝달싹 못하고 있지 않느냔 말야. 그것들은 돈은 궁해지고 날로 죽을 맛이겠지. 그자들이 노리고 있는 게 바로 신년인데. 신년에 떡값 뿌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돈을 많이 뿌릴수록 저쪽에 용코로 찍힌다 그 말이야. 정치인들을 제일 싫어하는 게 저쪽인 것쯤은 너도 알고 있지? 특히 야당 것들한테 돈 건너갔다 하면 그건 초상집 되는 거야. 인제 감이 좀 잡히냐?”

아버지.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는 계엄 풀리고 나면 입장이 곤란해지잖아요.”

. 약게 놀았다고 인심 잃고 미운 털 박힌다 그거냐?”

.”

하아. 이런 쑥맥 봤나. 정치인들이 제일 잘 쓰는 두 가지 말이 뭔지 너 알지? 자기들 입장 다급해지면 말 못하는 국민멋대로 팔아먹고. 즈네들 의리 없고 비겁하게 굴어 지탄 받으면 정치는 현실이다하고 뻔뻔스럽게 변명해 버리잖냐. 정치만 현실인 줄 아냐. 사업은 더욱 더 현실이다. 판이 달라지면 제때제때 그 판에 맞춰나가고. 다음에 문제가 생기면 그때 가서 그때는 어쩔 수 없지 않았느냐. 내 본심이 아니었으니 이해하고 앞으로 더 잘하자하면서 듬뿍 집어주는데 어떤 놈이 감정을 사? 너 알지? 현찰 박치기! 돈 힘 앞에서는 그 어떤 놈이던 봄눈 녹듯 녹아버리게 마련이야. 이건 만고의 진리니까 절대로 잊지 말어. 그리고 너 지금 꿈꾸고 있는 모양인데. 정신 똑바로 차리고 현실을 봐! 이 계엄 사태가 앞으로 어떻게 요술을 부릴지 아무도 모른다 그 말이야. 너 이점 우습게 알았다간 큰코다쳐.”

박부길 사장은 손가락으로 아들을 찌르듯 손짓했다.

아버지. 바로 며칠 전에 계엄사령관이 군은 정치에 불간여하겠다고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이런. 이런. 철딱서니 없는 것! 너 정말 그 말을 믿고 계엄이 곧 해제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거냐?”

박부길이 노기 띤 얼굴로 아들을 쏘아보았다.

그건....... 그래도....... 국민 앞에 하는 약속인데요.”

박준서는 아버지의 기세에 눌리며 우물쭈물했다.

너 그따위 소리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애저녁에 정치 때려치워라. 박 통은 뭐 군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겠다는 혁명공약을 국민 앞에 내걸지 않아서 18년 동안이나 해먹다가 그렇게 비명횡사했냐? 정치란 거짓말을 참말처럼 하는 것 빼놓고는 뭐가 있냐? 그리고. 너 지금 이 나라 정치가 누구 손에서 놀아나고. 권력이 누구 손에 틀어 잡혀 있는지 몰라서 그따위 소리하는 게냐? 그리고 권력이라는 건 뭐냐? 애비가 아들도 죽이고. 아들이 애비도 죽이는 것 아니냐? 그런데 그걸 순순히 내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하지도 말아라. 정치인들은 즈네들이 다시 권력 잡을 욕심으로 그 말을 믿고 싶고. 계엄이 빨리 해제되어 군인들의 꼴을 안 보기 바라겠지. 허나. 그건 십중팔구 잘못짚은 몽상이야. 알아들어?”

예에.......”

박준서는 대답 뒤에 따라 나오는 한숨을 애써 감추었다. 아버지가 지적하는 그 점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 불안을 정치인들은 누구나 가지고 있었다. 불안이 클수록 계엄이 빨리 해제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 예측대로 된다면 정치판은 전혀 딴판으로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사업 수완만 좋은 것이 아니라 사업가로서 세상을 읽는 촉수 또한 예리했다.

여러 말할 것 없이. 너도 그동안 겪어봐서 대충 알고 있겠지만 사업을 크게 할수록 정치와 관계를 뗄 수 없고. 승승장구 사업을 키워나가려면 변하는 정치물결에. 뒤바뀌는 정치바람에 요령껏 눈치껏 몸을 실어야 하는 게야. 그러니까 너도 생기는 것 아무것도 없이 괜히 저쪽한테 찍히고 미운 털 박히기 전에 정치인들과 싹 발 끊고 회사에 박혀 있어. 정치인들한테 감시의 눈이 따라붙고 있는 것쯤은 알고 있지?”

. 그러면....... 이런 시점에서 아버지가 외국에 나가시는 것을 저쪽에서 곱게 보겠어요?”

박준서는. 아버지가 저쪽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궁금해 이렇게 에둘러 말했다. 그건 정치적으로 자신에게도 직결되는 문제기 때문이었다.

! 그래도 그런 머리는 돌아가는구나.”

박부길은 신통하다는 듯 픽 웃고는.

그 대목은 이따가 말하려고 했다. 그보다 먼저 할 얘기가 있다.”

그는 술잔을 비우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박준서는 아버지의 잔에 술을 따랐다.

. 지금부터 하는 말 똑똑히 들어라. 난 모레아침 일찍 일본에 갔다가 열흘 후에 돌아올 작정이다. 그동안에 네가 깨끗하게 처리할 회사일이 있다. 그게 뭔고 하면. 우리 회사에 숨어 있는 불순세력들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는 일이야. 그 노조라는 것 말야. 재작년부터 살살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작년에 부쩍 심하게 나대게 됐다. 그걸 후딱후딱 뿌리 뽑으라고 엄명을 내렸는데도 그것들이 워낙 끈질기고 독해 내쫓으면 또 생겨나고. 내쫓으면 또 생겨나고 한단 말이야. 두말할 것 없이 그것들이 다 뭉쳐 노조를 하고 나서는 판에는 회사 못해 먹는다. 우리도 이젠 자회사가 많아져 한 회사에서만 노조가 결성되어 날뛰게 되면 그 바람이 다른 회사로 퍼져 사업 다 망쪼 들게 된다. 사우디 폭동 때 봤지? 자회사도 아니고 완전히 다른 남의 회사에서 터진 폭동바람이 얼마나 빠르게 다른 회사들로 퍼지대? 더구나 한 지붕 아래 회사들은 더 말할 것이 없다.”

박부길은 술로 입을 축이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도 극성맞게 데모를 해대던 대학생들이 요새는 꼼짝을 하지 않고 잠잠하지? 왜 그렇겠냐? 저희들이 원하던 대로 박 통이 없어지고 유신시대가 끝나서 그렇겠냐? 아니면. 그렇게까지 비명횡사한 박 통을 애도하느라고 그렇겠냐? 너도 알겠지만. 이것도 저것도 아니야. 걔네들은 민주정부니 뭐니 어서 세우라고 또 데모하고 나서고 싶어 죽겠는데도 총칼 꼬나든 군인들 기세가 무서워 딱 숨죽이고 엎드려 있는 거야. 지금 계엄사에서 눈 부릅뜨고 제일 노리고 있는 게 저희들인 것을 아는 게지. 계엄사에서는 사회 혼란을 일으키는 걸 제일 싫어하는데. 대학생들 다음에는 뭐겠냐? 바로 큰 회사들을 흔들어대려고 설치는 노조야. 바로 우리 같은 큰 그룹들 열댓 개만 흔들리면 사회혼란은 말할 것 없고. 나라 망하는 판이니까. 그런데. 대학생들이 그렇듯 노조 하려는 놈들은 잽싸게 그 눈치를 채고 요새는 잔뜩 움츠러들어 있단 말이야. 바로 이때가 그놈들을 공격하는 절호의 찬스야. 절호의 찬스!”

박부길은 자기 기분에 겨워 식탁을 쳤다. 박준서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그 불순세력의 뿌리를 싸그리 도려내 버리란 말이야, 조금이라도 이상한 것들은 싹 쓸어내 버려도 그것들은 계엄이 무서워 전처럼 출근투쟁이니 뭐니 까불지 못하고 꼼짝 못하게 돼 있으니까. 그리고 만약에 꺼떡대면서 덤비는 놈들이 있으면 제꺽 계엄사에 연락을 해버려. 그럼 난동자로 깨끗하게 해결돼 버리니까. 알겠냐?”

. 그런데....... 그 짧은 시일 안에 그 일을 다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요. 제가 회사 일에서 너무 오래 떠나 있어서 구체적인 현황을 거의 모르는 형편인데요.”

그야, 기획실을 통해 자회사마다 철저하게 조사를 해두라고 진작에 다 지시를 내려놨다. 네가 할 일은 회사마다 나가 현황을 직접 파악하고. 나를 대신해서 작전을 신속하고 빈틈없이 총지휘하라 그것이다. 당최 간부라는 것들을 믿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그동안 노조 하려는 것들이 깨끗하게 근절되지 않은 것은 그것들이 끈덕지기도 해서였지만. 또 하나의 원인은 회사 간부들이 야무지게 일을 처리하지 못하고. 데데하게 굴었기 때문이야. 알아듣겠어?”

박부길은 아까보다 더 세게 식탁을 내리쳤다.

!”

박준서는 자신도 모르게 힘찬 대답을 했다. ‘나를 대신해서........ 총지휘하라하는 말이 일으킨 작용이었다.

그래. 명심해라. 노조가 설쳐서는 어느 회사든지 다 망한다. 일거리 줘서 먹고 살게 해줬더니 이젠 주인행세하려고 들어? 어림없는 소리다. 회사를 만 년 튼튼하게 하려면 이번기회에 인정사정없이 잘라서 실뿌리도 남기지 말고 왕창 뽑아버려야 한다. 알겠지?”

.”

그래. 어디 이번에 네 능력 좀 보자. 내 얘기 다 끝났으니 이제 그만 가거라.”

박부길은 너무 배가 부른 듯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아까 뒤에 하시겠다고 한 말씀은....... 외국 나가시는 것에 대해서 저쪽에서.......”

박준서도 따라 일어나며 아버지를 일깨웠다.

. 그 얘기가 있었지. 너 내일 아침 830분까지 오너라. 그쪽에 출국신고를 하러 갈 거니까.”

출국신고요.......?”

박준서는 어리둥절해졌다.

시간 맞춰 오기나 해. 옷 깨끗하게 차려입고.”

. 알겠습니다.”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어서 박준서는 긴장감을 느꼈다.

그러고 참. 원 서방은 요새 어쩌고 있냐?”

박부길은 거실 소파에 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 그저 그렇습니다.”

박준서는 어물거리듯 하며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그저 그렇다니. 세 끼 밥은 먹고 있는 게야?”

박부길의 어조에서는 짜증이 묻어났다.

. 겨우겨우 살아가기는 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사회 분위기가 나빠져서.......”

. 출판이라는 것도 세상물결 타고 그러냐?”

. 세상이 잠잠하고 조용해야 책이 팔리지 이렇게 뒤숭숭하면 잘 안 팔리는 모양입니다. 사람들 마음이 들뜨고. 책보다는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더 마음을 쓴다고 합니다.”

그도 그렇겠군. 하여튼 딸자식 하나 있는 게 어째 팔자가 그 모양이 됐는지 모르겠다. 속상해서 참.”

박부길은 혀끝이 떨어져나갈 지경으로 거세게 혀를 차댔다. 박준서는 또 옹색해져서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원병균이 자신의 친구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마땅찮아할 때마다 면목 없고 죄스러웠다.

거 원 서방은 교육자 자식이라는 게 뭘 배워먹었는지 왜 그렇게 생각이 삐딱한지 모를 일이야. 경기도 출신이면 기질도 억세지 않을 텐데 알다가도 모를 일이란 말야.”

박부길은 투덜거리듯 말하고는.

됐다. 어서 가거라.”

아들을 향해 손을 저었다. 박준서는 집으로 돌아가며 아버지의 발 빠른 수완에 다시금 놀라고 있었다. 정치인들은 서로 자기네 쪽이 정권 잡을 꿈을 눌러가며 눈치 살피기에 바쁜데 아버지는 벌써 그쪽과 모종의 접촉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두 형을 제쳐놓고 굳이 자신을 데려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잡히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남들보다 먼저 나를 구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에 대비해 미리 다리를 놓아주려는 것인가.......?’

어느 쪽이 되었거나 간에 지금 상황에서 그쪽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이 상황에 휩쓸려 정치생명이 끊어질 정치인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만약 아버지의 예측대로 그쪽에서 정권을 잡게 되면 그 세력들이 득세를 할 테니까 그 수만큼 기존 정치인들은 쓰레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정치인들에게는 생사를 위협하는 무서운 시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권력이라는 건 뭐냐? 애비가 아들도 죽이고. 아들이 애비도 죽이는 것 아니냐?”

아버지가 한마디로 압축한 권력의 생리였다. 그 말을 부정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벌써 권력을 장악할 계획을 추진해 나가고 있는 것일까?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무사히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준서는 매제 원병균을 생각하며 끄응 된 숨을 내쉬었다. 그와는 이제 너무나 거리가 멀어져 있었다. 오직 매제라는 끈이 이어져 있을 뿐 생각은 타인처럼 아무런 교감이 되지 않았다. 지난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출판사를 그만두고 회사로 들어오라고 그를 설득하다가 실패한 다음부터 마음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좋아. 자본을 댄 기업주의 권한을 충분히 인정해. 또 기업주들이 바치는 노력도 다 인정해. 그렇지만 기업주들은 자기네가 투자한 자본의 몇 배의 이익을 얻어야 만족하는 거지? 백 배? 천 배? 만 배? 그게 아니잖아. 무한정. 영원히 이익을 보려고 욕심 부리고 있어. 그게 말이나 돼? 노동자들은 최저생계비도 못 되는 임금을 받으며 혹사당하고 있는데 기업주들만 무한대의 치부를 하고 있는 게 말이 되느냔 말이야. 자본주의니까 어쩔 수 없다고? 그건 자본주의가 아니야. 봉건적 착취주의지. 올바른 자본주의란 분배를 통해서 자본과 노동이 수평적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거야. 자본 없는 노동은 있을 수 없다고? 그 말 옳아. 그러나 노동 없는 자본이 있을 수 있어? 자본과 노동이란 기업이라는 기차가 달리게 하는 두 줄의 레일이야. 그 비중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기업은 결국 망해. 기업이 망하지 않게 하려면 기업인들은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분배를 해야 하고. 기업의 주인이 자기 혼자라는 생각도 뜯어 고쳐야 돼. 자기가 투자한 자본보다 수천 배. 수만 배를 빼먹고도 기업 자산은 또 수천만 배로 커졌는데 어찌 그게 다 자기 거야. 그 절반은 노동으로 그 자산을 키워 낸 노동자들의 것이지. 그 몫을 찾기 위해서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는 것은 당연한 거야. 이젠 일방적 착취의 시대는 지났어. . 노조가 존재해야만 자본과 노동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그 토대 위에서 천민자본주위가 아닌 올바른 자본주의가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거야. 빨리 의식을 고쳐.”

원병균의 생각이 이러니 말이 통하지 않기로는 타인중의 타인 이었다. 다음날 신문들의 경제인 동정란에는 박부길 사장이 모종의 새 계약을 위해 일본으로 출국한다는 토막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것이 정계. 재계를 향한 다목적용이라는 것을 박준서는 어렵지 않게 헤아리고 있었다.

너는 3일까지 집에 얼씬도 말아라. 미처 신문 못 보고 찾아오는 것들 만날 수 있으니까. 쓸모없는 것들 괜히 얼굴 맞대고 앉아 이 말. 저 말 걸쳐봤자. 전부 손해날 말 뿐일 테니까.”

박부길 사장이 일본으로 떠나며 박준서에게 일렀다. 박준서는 신년 연휴 사흘 동안 텔레비전 앞에 앉아 혼자 양주를 홀짝 거렸다. 그러나 그는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양주 맛을 즐기는 것도 아니었다. 머릿속에는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하는 생각만 가득 차 있었다.

어디 이번에 네 능력 좀 보자.”

아버지의 이 말이 채찍이 되고 있었다. 왜 그 중요한 일을 회사에 몸담고 있는 두 형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에게 맡긴 것인지 아버지의 속뜻을 명확하게 짚어내기는 어려웠다. 두 형을 욕먹지 않게 하려는 뜻일 수 있었다. 아니면. 자신이 지금 별로 하는 일이 없으니까 그랬을 수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그동안에 형들이 만족스럽게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이번은 또 한번의 중대한 고비였다. 회사를 위해서도 그 일을 잘 처리해야 했고. 자신을 위해서도 빈틈없이 끝내야 했다. 자신은 계속 정치를 한다 해도 그 뒷받침을 위해서는 튼튼한 재력이 있어야 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걱정할 게 없지만 언젠가 아버지가 떠나시게 되면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형들이 아버지처럼 뒷바라지해 줄 리 없었다. 아버지는 나날이 늙어가고. 언젠가 자회사들을 갈라 세 아들에게 물려주게 될 텐데. 그때 좋은 회사들을 차지하려면 지금부터 착실하게 능력을 인정받고 점수를 따나가야 했다. 박준서는 4일 날 출근 한 시간 전에 회사에 도착했다. 기획실에는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다. 그는 기획실장실로 가서 그 의자에 버티고 앉았다. 사흘 동안 궁리해 보았던 이런저런 방법들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그 생각들을 정리하려고 볼펜을 꺼내고 메모지를 끌어당겼다.

1. 노조 결성 A급 혐의자 : 주동자급

2. 노동 결성 B급 혐의자 : 적극 동조자급

3. 노조 결성 C급 혐의자 : 소극 동조자급 및 동조 위험자

여기까지 쓴 박준서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런데 원병균의 얼굴과 함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원병균의 모습을 지우려는 듯 담배 연기를 거칠게 내뿜었다.

병균이 넌 예나 지금이나 말은 아주 잘해. 그러나 넌 현실을 모르는 철부지야. 네가 신문사에서 글줄이나 써본 실력으로 혼자 다 아는 척 했는데. 미안하지만 그건 GNP 1만 불대 나라들 얘기지 우리나라는 이제 고작 1천 불을 넘었을 뿐이야. 그 나라들도 1천불 대에서는 우리하고 마찬가지였어. 넌 그 점을 모르고 잘난 척하고 있어. 우리도 1만 불대가 되면 분배하지 말라고 해도 분배할 거야. 기업경영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입 놀리기 쉽다고 그런 소리 함부로 떠들어 대지마. 너도 제발 출판사가 잘돼서 직원이 많이도 말고 스물만 돼봤으면 좋겠다. 그때 너는 분배 착착 잘하는지 보게. 보나마나 너도 맘 변할 게 뻔해. 출판사는 아니지만. 그렇게 맘 변한 친구들을 내가 몇 알고 있지. 사람의 마음이란 다 그런 거야. 남의 일이라고 입바른 소리 그만 하고 처자식 제대로 먹여 살릴 책임이나 어서 져. 너한테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네가 끝없이 처가 덕보고 산다는 걸 알기나 하셔? 어서 철 좀 들어라.’

아이고 의원님. 이거 어쩐 일이십니까?”

질겁을 하고 놀라는 소리에 박준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허리를 반으로 접다시피 한 기획실장이 종종걸음을 치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박준서는 아무 대꾸 없이 손목의 시계를 빠르게 훑었다. 출근시간 30분전이었다.

출근시간 20분전까지 안 나왔으면 너부터 갈아치울 참이었어.’

박준서는 이런 속마음을 담아 기획실장을 쳐다보며 내질렀다.

과음했소?”

. 아닙니다. 나오신지 오래 되셨습니까?”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잡은 기획실장은 그저 굽실거렸다.

회장님 지시 들었소? 노조 건.”

자회사 열 개가 넘으면서 박부길의 직함은 회장으로 변했다. 그런데 지금은 자회사가 스무 개가 넘었다.

. . 조사 자료 전부 갖추어놓고 대기 상태에 있습니다. 지시만 내리시면 언제든지 실행할 태세가 되어 있습니다.”

좋소. 자료 가지고 오시오.”

박준서는 책상에서 일어나 소파로 옮겨갔다. 기획실장이 허둥거리며 자료철을 챙겨가지고 박준서에게 바쳤다.

이게 언제까지 조사한 거요?”

. 작년 말까지. 정확하게 말해서 5일전까지 조사한 것입니다.”

쏘스가 어디요?”

. 현장의 공장장을 중심으로 한 그 휘하의 간부들입니다.”

그것뿐이오?”

예에?”

표 나지 않게 박아둔 다른 정보원들은 없냐 그거요.”

박준서는 자회사별로 작성된 서류를 넘기면서 물었다.

. 그런 것 아니라도 현황파악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요? 실장 자리를 걸고 자신할 수 있소?”

박준서의 눈초리가 매섭게 기획실장을 겨누었다.

예에.......?”

기획실장이 놀라며 얼굴이 딱 굳어졌다.

노조 하려는 자들이 빨갱이 식 점조직으로 움직이는 것 알아요. 몰라요? 속 편하고 손쉽게 위로 떠올라 있는 것들만 건져낸다고 그 뿌리가 뽑힐 것 같소? 속에 숨어있는 것들이 더 무서워요. YH 사건이 왜 일어난 줄 알아요? 바로 겉만 적당히 훑고 속을 완전히 파헤치지 못해서 그래요. 우린 이번에 속까지 완전히 파헤쳐 그 뿌리를 깨끗하게 뽑아버려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메모하시오.”

냉정하게 명령하는 박준서는 야전군 사령이었고. 재빨리 수첩을 펼치는 기획실장은 갈 데 없는 부관이었다.

첫째. 공장장 책임 하에 각 현장마다 노동자 세 명 이상을 내일까지 회유. 포섭하게 하시오. 조건은 1년 치 월급에 해당하는 특별 보너스와. 극비리에 다른 자회사로 이동시켜 편한 직책으로 승진이오. 둘째. 포섭된 자들을 통해 속에 숨어있는 위험분자나 동조자들을 현재 파악된 수의 두 배에서 세 배까지 확보케 하시오. 이 시한은 나흘 후까지 완료고. 다음날은 전원 해고요.”

아니. 그러면 말썽이 생기고. 생산에도 차질이 생기게 됩니다.”

기획실장이 박준서의 말을 막듯 하며 황급히 말했다.

끝까지 똑똑히 들으시오.”

박준서가 불쾌한 기색으로 내쏘며 담배를 빼들었다.

. . 죄송합니다.”

기획실장이 잽싸게 라이터를 켜댔다.

셋째. 그 파면 조치에 대비하기 위하여 각 공장장들은 다른 회사의 하청공장들을 대상으로 공원 확보를 병행토록 하시오. 월급이 적은 하청공장 공원들은 우리 같은 대기업으로 자리 옮기는 게 소원이니까 얼마든지 인원확보를 할 수 있소. 넷째. 파면자 명단을 공고할 때는 만약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르는 자들은 그 명단을 계엄사에 넘긴다는 것을 붉은 글씨로 명시하시오. 이 모들 일은 극비리에 속전속결로 처리하여 회장님께서 귀국하시기 전날까지 완료시켜야 하오. 만약에 이번에 차질을 일으키는 공장장들은 옷 벗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오. 지금부터 작전개시요. 지금 9. 11시까지 공장장 전원을 여기로 소집하고. 내가 동석할 테니 실장이 세부사항을 지시하시오.”

기획실의 전화들은 자회사의 공장장들을 향해 일시에 작동되었다. 박준서는 연달아 커피를 마시며 기획실장실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기획실장은 안절부절못하며 발끝걸음으로 드나들었고. 바로 옆에 붙은 기획실에는 직원들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공장장들은 10시 반부터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획실장 책상에 버티고 앉은 박준서를 보고는 놀라서 빈자리 찾아 앉기에 바빴다. 공장장들은 1110분전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집합을 완료했다. 허리를 곧게 펴고 똑바로 앉아 눈동자만 천천히 돌려 공장장들을 하나하나 살펴나가고 있는 박준서의 얼굴은 엄격하고 냉정하다 못해 살벌하고 독기까지 서린 것처럼 보였다. 공장장들은 그 기에 눌려 하나같이 눈을 내리깔거나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11시가 되자 박준서가 기획실장에게 눈짓했다. 기획실장이 결재 철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단호한 표정에 귀를 빳빳하게 세운 그는 아까 박준서 앞에서 굽실거리던 때와는 달리 완전히 딴사람이었다. 공장장들 앞에서 자신의 위신을 세우는 동시에 박준서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려고 작정한 듯한 느낌이었다.

지금부터 우리 그룹의 도약적 발전을 위한 신년 대 계획을 추진하는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리는 것은. 이 회의의 내용은 물론이고 그 추진 과정 전체가 절대 비밀에 붙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비밀이 지켜지지 않을 시는 여기에 있는 여러분들 전부가 연대 책임을 지고 옷을 벗을 것을 이 회의가 끝나고 서약해야 합니다.”

기획실장은 울림 좋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하고는 좌중을 휘둘러보았다.

좋아. 좋아. 아주 잘하는군. 기대 이상이야. 그래 기획실장 자리 아무나 차지하고 앉는 것 아니지.’

박준서는 더욱 위압적인 얼굴로 눈동자를 굴리며 저으기 만족하고 있었다.

우리가 앞으로 3~4일 이내에 극비리에 속전속결로 추진해야 할 대 계획은 다름이 아니라 각 공장마다 병균처럼 숨어있는 노조 설립 음모자들을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완전무결하게 색출하여 깨끗하게 일소시키는 일입니다. 이 일을 기필코 완결시켜야 하는 이유는 재론의 여지가 없이 지난번 YH 사건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YH는 소규모의 기업입니다만. 노조가 회사를 어떻게 망가뜨려버리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더없이 좋은 본보기입니다. 아무리 큰 기업이라 하더라도 노조 결성을 완전하게 봉쇄하지 못하면 결국 망하고 만다는 것을 YH 사건을 통해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주시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YH 사건을 통해서 모든 노동자들이 자기들도 노조를 결성해야 한다고 자극받고.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의 일부 몰지각한 세력들이 노동자들 편을 들고 나서며 노조 결성을 부채질해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천만다행하게도 비상계엄이 선포되어 그런 불순한 움직임들이 일단 정지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언젠가 계엄이 풀리게 되면 그 잠복했던 세력들은 더욱 거세게 들고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절호의 기회에 그 불순세력들을 단 한명도 남기지 말고 완전무결하게 제거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그 세부사항을 지시할 테니 똑똑히 듣기 바랍니다.”

기획실장은 서류를 넘기며 숨을 돌렸다.

좋아. 좋아. 아주 좋아.’

박준서는 한층 더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기획실장은 박준서가 지시한 사항들을 빈틈없이 야무지게 전달하기 시작했다. 지시사항이 한 가지씩 넘어갈수록 공장장들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 만약에 이번 작전에서 소기의 성과를 올리지 못했을 시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옷을 벗을 각오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질문들 있으면 질문하십시오.”

기획실장은 결재 철을 덮으며 공장장들을 휘둘러보았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침묵 속에 굳어진 듯 앉아 있었다. 하실 말씀 있으면 하시라며 기획실장은 박준서를 모시는 손짓을 했다. 그러나 박준서는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저으며 그만 끝내라는 손가락 짓을 했다.

그럼 이상으로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신속히 공장으로 돌아가 일을 시작하기 바랍니다.”

박준서는 날마다 기획실을 지켰다. 그는 자신이 지시한 날짜에 맞추어 침착하게 진행 상황을 점검해 나갔다. 마침내 공장마다 해고 공고가 나붙었다. 거의가 100명씩이 넘었고. 어느 공장은 200명이 넘기도 했다.

아니. 이거 왜이래. 갑자기?”

아니.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이게 말이 돼? 노조 띄울 움직임은 하지도 않았는데.”

이건 그냥 당하면 안 돼. 항의를 해야지.”

당연하지. 조용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왜 몰아내. 항의해서 철회 시켜야 해.”

왜들 그리 순진한 소리만 하고 그래? 저 빨간 글씨 안 보여? 항의하면 난동자로 몰려 계엄군한테 끌려갈 뿐이야. 계엄군한테 걸리면 국물도 없다는 것 알지?”

! 이 기회에 업어치기 하겠다 그거지? 개새끼들. 머리한번 잘 썼다.”

그럼 이걸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미리 솎아낸다면 별수 없지. 개새끼들. 요런 식으로 회사 해 처먹어 자손만대에 배꼽이 터져 싹 뒈져라.”

남자 공원들의 반응이었고.

난 아니야. 난 아니야. 난 노조 하려는 사람들 가까이 간 적도 없어.”

난 억울해. 이건 말이 안 돼. 난 노조 할 생각 꿈에도 한 일 없어.”

이 일을 어쩌면 좋아. 어쩌면 좋아. 내가 안 벌면 우리 엄마 죽어. 약값 못 대 우리 엄마 죽어.”

어떤 여공들은 발을 동동거리거나. 마구 눈물을 흘렸다.

 

 

55. 한낮의 어둠

3월의 꽃샘바람이 지나가고 4월과 더불어 화사한 봄이 꽃송이 속에서 벙글고 있었다. 3월이 오는 봄이고, 5월이 가는 봄이라면. 4월은 머무는 봄이었다. 그러나 봄은 꽃이나 나무들에게 왔을 뿐 사람들에게는 오지 않았다. 계엄은 제주도와 변두리 지방 일부에서만 해제되고 큰 도시들에서는 여전히 위세를 떨치며 사람들을 겨울에 묶어놓고 있었다. 처음보다 덜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신문들은 여기저기 먹통으로 지워진 흉한 꼴로 배달되었고. 사람들은 그런 신문보다는 기세 수그러들지 않고 계속 새로 퍼지는 소문들에 더 귀 기울이고, 친한 사람들끼리 수군거리기에 바빴다. 그러나 귓속말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되었다. 신문 검열 거부를 결의한 사람들이 전원 구속되는가 하면. 어느 신문사 기자들은 유언비어 유포죄로 쇠고랑을 차는 판이었다. 그런 사실들을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람들은 바짝 얼어붙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수직종인 신문기자들이 그렇게 당하면 보통사람들이야 오죽하랴. 하는 반사 작용이었다. 계엄사에서 굳이 그런 사건들을 보도하게 하는 것은 어쩌면 바로 그런 파급효과를 노리는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상재는 퇴근시간을 좀 앞당겨 사무실을 나섰다. 그는 몸이 피곤한 것을 느끼며 목을 두어 번 돌렸다. 일 때문에 피곤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 늘 칙칙한 구름이 끼어 걷힐 날이 없고. 생기는 일마다 기분을 상하게만 해 걸핏하면 짜증이 일고는 했다.

당신. 나한테는 괜찮은데 왜 애들한테까지 짜증내고 그래요? 당신 혼자 계엄 당한 것도 아니고. 당신 성격 버리는 거야 상관없는데 애들까지 버리게 생겼어요.

아내가 핀잔한 말이었다. 계엄이 시작되면서 표나게 책이 안 팔리게 되었고. 계엄이 오래가니 도매상에서는 죽는 소리를 하며 수금을 미루어갔고. 수금이 안 되니 제작비는 물론이고 생활비까지 쪼들리지 않을 수 없었고. 거기다가 새로 내는 책마다 검열을 받아야 하는 일까지 겹쳐 제작기간이 그쪽 멋대로 늘어졌고. 재수 없어 검열에 걸리게 되면 조판이 다 되어 교정까지 완료한 책을 낼 수가 없었고. 그리 되면 제작비 압박은 더 심해졌고. 월말이 되면 수금을 독촉해 대는 제작처들에게 시달려야 했고. 그뿐만 아니라 퇴직기자들의 모임을 위험시해 형사들이 뻔질나게 사무실에 드나들었고. 그들의 눈초리 때문에 투위의 성명서 내는 것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사무실에서조차 마음 놓고 얘기할 수가 없어 모여 앉는 것까지 피해야 할 지경이었다. 궂은일들이 그렇게 이중삼중으로 겹치니 마음은 우중충한 채 걸핏하면 짜증이 솟고는 했다. 더구나 검열이 제멋대로라서 무슨 책을 내야 좋을지 종잡을 수 없는 게 또한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 형. 이상재 씨. 어디 가시오?”

아 예 사장님. 어디 다녀오십니까?”

아이고 말 말아요. 나 지금 시청에서 오는 길인데. 신간 두 권 중에 하나가 검열에 걸렸어요.”

그것 참. 어떻게 사장님이 직접 다니십니까?”

죽지 못해 하는 짓이지요. 편집장이 다녔는데 검열을 통과시켜 볼까 하고 내가 나섰지요. 그런데 소용없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새파란 것들이 군대식으로 마구 밀어붙여 버리니 말이 안 통해요. 나 출판 25년에 이런 험한 꼴 첨 당해요. 5.16때도 이렇지는 않았어요.”

문제는 문제지요. 무슨 책인데 당하셨어요?”

이상재는 머리 희끗희끗한 민 사장을 보며 위로하듯 말했다.

검열 피해보려고 국내 작가 연애소설을 골라봤지요. 그런데 거기에 군대생활이 조금씩 섞여 있어요. 그게 신성한 군대를 모독하고 있다는 거지요. 책을 내려면 그 부분들을 싹 빼버리고 다시 가져오라는 것인데. 그런 무식이 대체 말이 됩니까? 그 부분들을 다 빼버리면 작품이 망가질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작가들은 자기네 작품에서 한 줄만 좀 고치자해도 난리가 나지 않습니까? 이것 참 이래저래 못해먹을 짓이오.”

민 사장은 상한 감정을 어떻게 다스릴 수가 없는지 대로상인데도 그 말이 거침이 없었다.

.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빵장사나 해먹는 게 제일 속 편할 것 같습니다.”

이상재는 떨떠름하게 웃으며 시계를 보았다.

그것도 못해먹어요. 온 천지가 불황에 빠져버렸으니. 우리 사무실에 좀 놀러오세요. 가까이 있으면서 가끔 회포나 풀어야지요.”

. 또 뵙겠습니다.”

이상재는 또 불길한 그 생각을 하며 광화문 지하도를 건넜다. 박정희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6개월이었다. 그런데도 계엄이 풀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에게 사형이 선고된 것은 작년 12월이었다. 그것으로 사건은 전부 마무리되었으니 마땅히 계엄은 해제되어야 했다. 더 이상 계엄이 지속되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그런데 군부는 계엄을 틀어쥐고 있었다. 그건 딴 뜻 때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신문사 쪽에서 흘러나오는 유비통신을 들어보아도 소문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뜻대로 정권이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나....... 이 불길함은 날로 커져가고 있었다. 이상재는 더 칙칙해진 마음으로 종로2가 금은방으로 들어갔다.

예에. 돌 반지요? 여기서 골라보세요. 한 돈짜리. 두 돈짜리. 이건 닷 돈짜리 팔찌구요.”

금은방 주인의 두툼하게 살찐 손은 빠르게 금반지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 것도 하나 대신 사다 주시오. 내가 직접 가는 게 예의겠지만. 괜히 내가 끼면 분위기도 안 맞을 것 같고. 마음 같아서는 이런 기회에 금돼지를 한 마리 선사하고 싶지만 이거 형편이 형편이라. 서경혜 씨가 우리 출판사 차리는 데 얼마나 고맙게 해줬소. 그리고 그 아이가 집안 우환 속에서도 무사히 태어나고. 건강하게 자라 돌을 맞았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럽고 대견한 일이오. 헌데 돈이 궁해 사람 노릇을 제대로 못하다니. 이거 참......”

한 돈짜리 금반지 살 돈을 내놓으며 원병균이 옹색스럽게 한 말이었다.

이거 두 개 따로따로 싸주세요.”

이상재는 얼굴이 일그러지며 한 돈짜리 금반지를 손가락질했다. 그런 그의 눈길은 반대쪽으로 가 있었다.

. 그러시지요.”

주인이 포장을 하는 동안 이상재의 눈길은 여전히 한곳에 머물러 있었다. 거기에는 정말 원병균이 말한 금돼지가 있었다. 한 마리만이 아니라 크기가 조금씩 다른 것들이 여러 마리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금거북들도 있었다. 금거북들은 금돼지들보다 더 종류가 많아 제일 큰 것은 어른 손바닥만 했다. 돼지는 다복. 건강의 상징이고. 거북은 무병. 장수의 상징이었다. 원병균이 유일표의 첫애에게 금돼지를 사주고 싶어 하는데. 하물며 자신의 마음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자신은 금거북 중에서도 제일 큰 것을 사주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뿐 그렇게 할 도리가 없었다. 이런 기회에 유일표에게는 정다움을. 그의 아내에게는 고마움을 맘껏 표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의 진정을 나타낼 수 없게 경제력이 빈약한 것에 처음으로 비애감을 느끼며 이상재는 금거북에서 눈길을 돌렸다.

. 포장 다 됐습니다.”

일표야. 미안하다.’

이상재는 쓴 기분으로 돈을 치렀다.

어서 와라.”

유일표가 대문을 따주며 벙글 웃었다. 그의 얼굴은 어느 때 없이 밝았다.

머리는 많이 길었네? 그냥 중노릇 하고 말 것이지.”

이상재가 유일표의 머리를 흘끗 보며 던진 말이었다.

심뽀 고약하네. 이게 많이 긴 것으로 보여? 다 늙은 나이에 꼭 제대군인 꼴이지. 너 보기 싫어서 그냥 중노릇 하려고 했는데 원효를 능가하는 고승이 하나 더 나올까 봐 관뒀다.”

유일표는 정말 제대군인 같은 짧은 머리에 두어 번 손가락빗질을 하며 웃었다.

잘했어. 괜히 고승열전 쓰기 힘드는데. 그런데....... 잔칫집 기분 나게 손님들이 많으신가 보네?”

이상재는 걸음을 떼어 놓으며 왁자한 웃음과 유쾌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는 방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 집사람 친구들하고 친정식구들.”

유일표가 대꾸하며 그 옆방으로 앞장섰다.

아이고. 대장님이 먼저 와 계셨군요.”

아이고. 이 선생. 어서 오세요.”

방으로 들어선 이상재는 가까이 있는 재건대장 이용진과 먼저 악수했다. 그리고 유일표의 형에게 인사했다.

요새 출판은 어때?”

유일민이 먼저 안부를 물었다. 그는 전보다 혈색도 좋아졌고 얼굴의 그늘도 많이 걷혀 밝아져 있었다.

오랜 경험자들의 말로 최악의 불황이라고 합니다. 형님은 좀 어떠세요?”

그래. 불경기가 닥치면 책값부터 줄인다는 말이 있지. 우리 쪽도 불황을 타긴 하지만 그래도 생필품들이라서 그런대로 견딜 만해.”

. 그것 참 다행입니다. 한 군데라도 나은 데가 있어야지요.”

. 불황은 예사불황이 아닙니다. 얼마나 불황이면 애들이 모아오는 소뼈가 절반 가까이나 줄었겠습니까. 그나저나 이 불황 끝나려면 어서 계엄이 풀려야 하는데 어쩌려고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잘못하다간 나라 내려앉게 생겼는데.”

이용진이 혀를 찼다.

나라가 망하나마나 다 엿장수 맘대로지요.”

유일표가 담뱃갑을 끌어당기며 한숨을 쉬었다.

여보. 미안하지만 상을 좀 들어주면 좋겠어요.”

유일표의 아내가 방문을 여는 뒤에서 이상재가 인사했고.

아까 부엌에 있느라고 인사 못 드렸어요. 고맙습니다.”

서경혜가 상냥하게 인사를 받았다.

. 일어나서 밥값 해.”

유일표가 이상재에게 툭 말했고.

. 이집 인심 한번 고약하네. 손님을 막 부려먹으려고 들고.”

이상재가 목청 높이며 일어났고.

아니에요. 아니에요. 한 쪽은 제가 들 거예요. 형님이 임신을 하셔서 못 들게 한 건데. 당신은 왜 그래요. 정말.”

서경혜가 당황스럽게 손을 저으며 남편에게 눈을 흘겼다.

좋은 기운 뒀다 어디다 써. 이런 때 형수님 위해야 귀염 받지.”

그래 요놈아. 계수씨 사랑은 시아주버니다. 어서 나가기나 해라.”

이상재가 유일표의 등을 밀었고. 이어지는 그들의 농담에 유일민과 이용진은 껄껄대며 웃고 있었다. 걸게 차린 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며 이상재는 어둑발이 퍼지고 있는 대문 쪽을 돌아보았다. 1주일 전에 날짜를 가르쳐 주었는데 아직까지 허진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 신경 쓰였다. 최주한은 사우디에 있으니 어쩔 수 없고. 허진은 꼭 와야 했다. 활달하면서 친구 좋아하는 성격과는 달리 자신의 불우해진 환경 때문에 친구들의 교류까지 극히 제한해 버린 유일표였다.

자아. 다 같이 둘러앉읍시다.”

상이 놓이자 손위답게 유일민이 말했다.

저어. 잔칫상을 받기 전에 해야 될 일이 있는 것 같은데요. 형수님도 함께하시는 게 좋겠고. 계수씨도 오늘의 주인공을 안고 와 보여주셔야 되지 않겠어?”

이상재는 시간을 끌 생각으로 유일민과 유일표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 그래야지요. 그래야 우리도 인사를 차린 다음 상을 받지요.”

이용진이 말을 거들었다.

맞어. 형수님은 몸 무거우신데 그만 쉬셔야 하고. 오늘은 맘놓고 자식 자랑해도 되는 날이잖아.”

유일표가 그런 생각해내서 대견하다는 듯 이상재의 등을 두들기고 밖으로 나갔다. 곧 아이를 안은 서경혜가 앞서고. 임채옥이 뒤따라 들어왔다. 금방 임신한 것을 알아볼 수 있도록 임채옥의 배는 불렀다.

현지야. 손님들께 인사드려야지. 안녕하세요. 저는 유현지입니다. 저의 돌잔치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맛있게 들어주세요. 저 예쁘지요?”

서경혜가 아이목소리로 변성해 말하며 안고 있는 아이를 인사시키는 시늉을 했다. 포동하게 살이 오른 아이는 엄마 말을 알아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배시시 웃음 지었다.

. 아주 잘생겼네. 미녀야.”

이용진이 아이를 올려다보며 덕담을 했고.

. 두 사람은 별론데 애가 아주 예쁘고 총명하게 생겼어요. 이 큰아버지가 애 좀 쓰게 생겼다. 현지 따라다니는 사내놈들 막아내려면.”

이상재의 말에 모두 와아 웃었다. 임채옥도 이상재를 쳐다보며 입을 가리고 웃었다.

얘가 이렇게 덕담을 할 줄 모른다니까. 두 분이 워낙 빼어나니까 애도 역시 아주 예쁘고 총명하게 생겼군요. 해야지.”

유일표가 이상재를 쥐어박는 시늉을 했고.

맞어요. 심히 유감스럽네요.”

서경혜의 말에 또 모두 와아 웃었다.

자아. 이제 우리 예쁜 애기한테 선물을 줘야겠지?”

이용진이 뒤에 두었던 봉투를 끌어당기고는.

이건 제가 약소하게 준비한 거구요. 이건 우리 애들이 준비한 겁니다.”

하며 포장된 반지갑 두 개를 서경혜에게 건넸다.

어머나. 어쩜 좋아. 그 학생들이 무슨 돈이 있다고. 가슴이 쓰리네요.”

서경혜가 울상을 지었다.

당연히 고마움을 표해야지요. 저희들이 입고 있는 은혜가 얼만데요. 그리고 이런 걸 해보는 게 다 산교육 아니겠습니까.”

이용진이 말했고. 유일표는 묵묵히 앉아있었다.

이건 원병균 선배께서 보내신 거구요. 이건 제가....... 금거북은 10만부짜리 베스트셀러

쏴서 두 돌 때 장만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재도 반지갑을 서경혜에게 건넸다.

어머. 출판사도 어려우신데.......”

서경혜의 얼굴이 또 곤혹스러워졌다.

자아.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기를 빌며 우리 축배를 듭시다.”

유일민이 술병을 들었다.

허진. 이 자식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또 긴급회의 타령할 건가?’

이상재는 더는 시간을 끌 명목이 없어 몸이 달고 있었다. 허진이 안 오면 유일표가 아무리 마음을 넓게 쓴다 해도 서운해 할 것 같았다. 그들은 함께 술잔을 부딪쳤다. 그리고 아이의 건강을 축복하기 위해서 그래야 하는 것처럼 모두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저어. 여기 손님 오셨는데요. 허미경 씨라구요.”

밖에서 들린 말이었다.

예에?”

벌떡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연 것은 집주인 유일표가 아니라 이상재였다.

아니. 어떻게 된 일이오?”

이상재는 밖으로 뛰쳐나가며 다급하게 말을 쏟아냈다.

너무 늦어서 죄송해요. 주소만 가지고 집을 찾느라고 두 시간 이상 헤맸어요.”

허미경이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며 말했다.

이렇게 올 작정이었으면 미리 나한테 연락을 했어야지요. 두 시간이 넘게 고생을 하다니. 이거 참.......”

이상재는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서 오시오. 미경 씨가 뜻밖에 어쩐 일이오?”

유일표가 뒤따라 나오며 허미경을 맞이했다. 그는. 미경 씨 고생한 게 아주 애가 타서 죽을 지경이로구나? 하는 말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유일표는 허미경을 모두에게 소개했다.

오빠가 나흘 전에 갑자기 미국엘 갔어요. 여기서 체결하기로 했던 공장 건설 계약을 미국에서 하기로 했다고요. 떠나면서 저한테 오늘 꼭 가라고 했는데. 그만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건 오빠가.......”

허미경은 핸드백에서 반지갑보다 훨씬 더 큰 포장갑을 꺼내 유일표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가 이리 커요?”

이상재가 뚜벅 말했다.

. 오빠가 오빠한테 너무 죄지은 게 많다고 선물을 특별히 부탁했어요. 애기가 돼지처럼 건강하고 복스럽게 자라라고 금돼지를 마련했어요.”

허미경이 말한 앞의 오빠는 허진이었고. 뒤의 오빠는 유일표였다.

그거 참 잘됐소. 허진이가 우리 현지 장학금 마련한 셈이네.”

이상재가 얼른 말을 받았고.

어머. 그렇게 과용하면 어떡해요.”

서경혜가 미안쩍은 표정을 지었다.

짜식. 죄 짓기는. 제 놈도 매인 몸인 걸 누가 몰라?”

유일표는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리며 담배를 빼 물었다.

이건 제가 조금 준비한 거구요.”

허미경이 또 하나의 반지갑을 꺼내더니.

어디. 내가 너한테 직접 끼워주고 한번 안아볼까?”

하며 일어섰다. 허미경은 아이의 가운뎃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고는 아이를 받아 안았다.

아이고. 눈이 초롱초롱한 게 아주 영리하게 생겼구나. 그래. 건강하고 예쁘게 커라. ? 깍꾹. 깍꾹!”

이상재는 아이를 어르는 허미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마음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어쩌면 빼앗겨버린 자기 아이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허미경을 유심히 쳐다보던 아이가 낯가림을 하느라고 빼액 울음을 터뜨렸다.

. 낯가림도 할 줄 알아? 그래. 그래. 엄마한테 가.”

허미경이 아이를 넘겨주고는.

어쩜 저렇게 두 분 좋은 점만 쏙 빼서 닮았는지 모르겠네요. 집안이 잘될 징조예요.”

하며 자기 자리에 가서 앉았다.

봐라. 덕담은 저렇게 하는 거야. 나이 들어가는데 어서 좀 배워라.”

이상재의 어깨를 툭 치며 유일표가 하는 말에 모두는 와아 웃었다.

어서 많이들 드세요. 그럼 현지는 이만 물러갑니다.”

서경혜는 아이를 안고 나갔다. 남자들은 술을 마시고. 여자들은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양품점은 좀 어때요? 거기도 불황타지요?”

유일표는 인사를 차리느라고 허미경에게 물었다.

. 개점휴업 상태나 마찬가지예요. 아무리 계엄으로 경기가 얼어붙었다고 하지만 좀 심한 것 같애요.”

허미경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경기가 이렇게 나빠지는 건 석유파동이나 계엄 말고 다른 이유가 또 있는 것 아닌가요? 거 사우디 쪽 벌이가 나빠졌다거나 하는 것 말입니다.”

이용진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최주한이 보내오는 편지를 보면 우리나라 회사들이 사우디만이 아니라 그 주변국들까지 진출하기 시작했으니까 지금까지 벌어들인 돈은 시작에 불과하고 앞으로 더 본격적으로 벌어들이게 될 거라고 합니다.”

이상재의 말이었다.

. 저 말이 맞습니다. 저의 선배 김기돈이라는 사람이 사우디에 몇 년 있다가 얼마 전에 돌아왔는데. 그 사람 말도 그렇더군요. 사우디를 발판삼아 우리나라 기업들이 쿠웨이트. 요르단. 시리아. 리비아 같은 나라의 대형 공사들을 따내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계엄바람이 워낙 살벌하니까 그런 소식은 다 묻혀버리고. 사람들도 별 관심을 안 쓰고 해서 잘 모르는 거지요. 그 사람 말로도 앞으로 4~5년 동안이 중동경기가 가장 좋아지는 시기가 될 거고. 그때 가면 지금 벌어들이는 돈 몇 배를 벌게 될 거라고 하더군요. 지금도 그쪽 경기 없으면 불황이 훨씬 더 심해질 겁니다.”

유일민이 말을 덧붙였다.

그러면 거기서 벌어들이는 돈은 다 어디로 가버리고 경기가 이 꼴인가요. 그래. 군바리들이 계엄으로 국민들 꼼짝 못하게 해놓고 즈네들 맘대로 다 해먹는 것 아닌가요?”

이용진의 화난 어투에서는 재건대의 어려움이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 석유파동보다 더 큰 원인이 결국 계엄입니다. 박 통이 죽어 사회가 불안하게 된데다가 계엄까지 공포분위기를 조성해대고 있으니 기업들이 몸 사리며 재투자를 안 하고. 재투자를 안 하니 수출이 줄고. 소비자는 소비자들대로 불안스러워 돈을 안 쓰고. 그러다보니 불황은 자꾸 심해지게 되는 겁니다. 나라가 정상이 되려면 어서 빨리 계엄이 풀려야 하는데. 그게 언제가 될지 참 걱정입니다.”

유일민이 혀를 차며 술잔을 들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하나도 안 빼고 계엄 피해를 보고 있지만. 그래도 가장 위험한 사람이 오빠잖아요? 요새 노조하려는 사람들도 마구 잡아들인다는데 계엄 해제될 때가지는 정말 조심하세요. 노조야 계엄 풀리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허미경이 유일표를 보고 말했다.

그래서 나도 작전상 후퇴라고 생각해서 애 보는 데만 열중하고 있소. 이러다간 보육원 하나 차리게 될지 모르겠소.”

유일표의 말에 허미경이 쿡쿡 웃었고.

그래요. 서방님이 생각보다 훨씬 더 애를 이뻐하는 것이 뜻밖이었어요.”

임채옥이 손님 대접하듯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 뭘 제 자식인데.”

유일민이 말을 받자.

형수님. 전혀 부러워하지 마세요. 형님은 보육원 세 개는 차릴 정도가 될 테니까요.”

유일표의 말에 모두 웃었다.

오늘이 좋기는 참 좋은 날입니다. 유 선생이 이렇게 농담 많이 하는 건 첨봅니다.”

이용진이 유일표에게 술잔을 건넸다. 이상재는 술잔을 기울이며 유일민과 임채옥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그들이 그지없이 행복해 보이고. 자신은 무언가 큰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다.

말은 안 하고 왜 그렇게 자꾸 술만 마시세요? 빈속일 텐데.”

허미경이 숟가락을 놓고 상에서 물러나 앉으며 이상재에게 말했다.

몰라요? 본전 뺄려구요.”

이상재의 뚱한 대꾸에 모두 웃는데. 유일표는 무슨 색다른 뜻인지 이상재의 등을 치며 유난히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아서라. 상재야. 애 그만 태워라. 맺지 못한 사랑이라 더 애달픈지 안다만. 네 말마따나 마누라를 둘 거느릴 수는 없잖냐. 이렇게 만나면서 살 수 있다는 것만도 행복 아니겠냐.’

유일표는 속으로 이런 위로를 보내고 있었다. 유일표의 집을 나섰을 때 이상재는 꽤나 취해 있었다. 이용진과 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진 이상재는 허미경을 붙들었다.

우리 어디 가서 술 한 잔 더 합시다.”

밤이 늦었어요.”

허미경이 이상재를 부축하며 고개를 저었다.

늦긴요. 통금 아직 멀었는데.”

여기서 집까진 너무 멀어요.”

좋소. 그럼 일단 광화문까지 갑시다.”

허미경이 택시를 잡았다.

이상재는 한참이 지나도 말이 없었다.

요새 새로 준비하는 책은 뭔가요?”

침묵이 어색스러워 허미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표네 형님과 형수의 사연을 알지요? 어떻게 생각해요?”

이상재가 불쑥 내놓은 말이었다.

“.......”

내 말 안 들려요?”

“.......”

내 말 안........”

. 안 들려요.”

허미경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그런 소리 듣기 싫다 그거지요? . 좋아요. 그렇지만 난 하고 싶어요. 그 두 사람은......”

여기 택시 안이라는 것 아시죠? 그런 주정할 만큼 술 취한 것도 아니구요.”

허미경은 또 이상재의 말을 잘라버렸다.

알겠소. 듣기 싫어하는 것. 그런데 왜 난 자꾸 하고 싶어지지? 그 사람들이 부러워 죽겠으니 어떡하면 좋지? 내가 바보가 아닌데....... 왜 그 문제만 생각하면 바보처럼 되지? 모르겠어.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어. 일표 그 새끼도. 주한이 그 새끼도 다 나쁜 새끼들이야. 나를 까맣게 속이다니. 정말 나쁜 새끼들이야. 그 새끼들이. 그 병신 같은 새끼들이 사랑이 뭔지를 몰라서 그런 거야. 그 새끼들이 원수야.......”

이상재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허미경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 이상재는 시청에 자리 잡은 계엄사 출판검열부의 호출을 받았다.

시청에서 오라는데요. 바로 가봐야 되겠습니다.”

이상재는 전화를 끊으며 원병균에게 말했다.

뭐가 걸린 것 아니오?‘

교정을 보고 있던 원병균이 즉각 반응했다.

. 심상치가 않습니다.”

이미 자신의 예감도 좋지가 않아 이상재는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는 번역물이고. 하나는 한인곤 씨 건데. 번역물은 이상이 없지 않겠소?”

. 저도 한인곤 씨 원고가 마음에 걸립니다.”

그러기가 쉽소. 내가 갈까요?”

아닙니다. 제가 가야지요. 당해도 한 살이라도 적은 제가 당하는 게 낫지요.”

이거 번번이 이 형이 못할 일이오.”

원병균이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군인 둘이 석상처럼 정문 양족에 서 있는 시청으로 들어가며 이상재는 또 기분이 역겹게 상했다. 박 정권 18년 동안 자꾸 커지기만 했던 군인에 대한 거부감이 이번 계엄으로 극에 달해 있었다.

저어. 물결출판사에서 왔습니다.”

이상재는 검열관 앞에 명함을 내밀었다.

순서를 기다리시오.”

중위는 얼굴만큼 딱딱한 어조로 말하며 턱짓했다. 군대의 명령에는 오로지 복종뿐이라 이상재는 돌아서서 맞은편 벽에 붙어있는 긴 나무의자로 갈 수밖에 없었다. 서너 개가 이어 붙여진 그 의자에는 다른 출판사에서 온 사람들이 네댓 앉아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관공서 분위기는 딱딱하게 마련인데 거기다가 군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으니 그 분위기는 더없이 살벌했다.

이건 이래서 걸리고. 저건 저래서 걸리고. 책 낼게 없어요.”

연애소설은 미풍양속을 해치고. 탐정소설은 사회악 조장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니 빠져나갈 구멍이 없지요. .”

이상재는 옆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듣고 있었다.

그래서 우린 아동물 쪽을 생각해 봤는데. 그것도 뜻 같지가 않아요. 갑자기 좋은 작품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동물은 삽화까지 들어가면서 호화로워야 하니까 제작비는 더 많이 먹히고. 그렇다고 낱권 판매시장이 안정되게 형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렇다니까요. 이래저래 죽을 맛이지요. 어떻게 좀 독서인구가 느는가 싶었는데 이런 벼락이 치니 원.”

우리도 죽을 지경이지만 독자들도 딱하지요. 이러기를 벌써 7개월짼데. 무슨 신나는 읽을거리가 있어야 말이지요. 서로 못할 일이지요.”

그들은 연달아 한숨을 쉬었다.

이상재는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려 검열관 앞에 불려갔다. 예상대로 검열관 책상에는 한인곤 씨의 교정본이 놓여 있었다.

당신. 무슨 의도로 이 불온한 책을 내려는 거요?”

중위가 눈을 치뜨며 대뜸 물었다. 이상재는 당신이라는 말에 기분이 획 상했다. 중위는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어렸다. 그러나 불온이라는 말이 감정을 위축시켰다.

아무런 의도도 없습니다.”

뭐라고? 이런 상황에서 군의 위신을 추락시키고. 군의 위상을 파괴하는 이따위 책을 내려고 기도하면서 의도가 없다는 게 말이 되오?”

중위가 눈을 부릅뜨며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 원고 집필기간을 돌이켜 따져보면 아시겠지만. 한인곤 씨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계엄 이전으로 이런 상황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자신이 살아온 일생을 쓰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이상재는 중위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여러 말 마시오. 지금 우리가 따지는 것은 원인이나 경과가 아니라 결과요. 결과. 그리고 이 내용은 계엄 상태가 아니라 해도 용납할 수 없도록 신성한 군을 모함하고 음해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소. 당신이나 이 자의 근본 사상이 의심스럽소.”

이상재는 근본사상이라는 말에 바짝 긴장했다. 말이 느닷없이 그쪽으로 비약할 줄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건 갑자기 목줄을 겨누는 비수였다.

그분의 경력을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그분은 예비역 육군대령이고. 다선 국회의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국익에 조금이라도 해가 된다면 그분도 그렇고. 우리 출판사도 그런 책을 낼 마음은 없습니다. 그 판단을 하기 위해서 검열을 하는 것이니까 그 조처를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재는 백기를 들기로 해버렸다. 애초에 싸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고. 퇴직기자에 근본 사상의심이 겹쳐지면 그 불똥이 엉뚱하게 튈 위험이 컸다.

그게 진심이오?”

. 그렇습니다.”

좋소. 그쪽에서 그렇게 반성적으로 태도를 취한다면 우리도 이 한인곤 씨의 경력을 최대한 우대해서 별도의 수사 같은 건 하지 않겠소. 그 대신 다음 두 가지 사항을 준수하시오. 첫째. 이 원고 일체를 당장 가져오시오. 압수하겠소. 그리고 조판 전부를 오늘 당장 해체하고. 인쇄소 사장의 확인서를 제출하시오. 둘째. 한인곤 씨가 내일 중으로 여기 출두하여 서약서를 쓰도록 조처하시오. 할 수 있소?”

. 그렇게 하겠습니다.”

됐소. 차질 없이 당장 실시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이상재는 시청 계단을 터덕터덕 걸어 내려가며 그 중위가 마치 출판 전문가처럼 조처를 취한 것에 대해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실제로 책을 읽어내는 사람들은 그전부터 그 일을 해왔던 공무원과 그 부서에서 위촉하고 있는 전문가들인 것을 출판인들은 다 알고 있었다.

한인곤 씨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육군 참모총장이 하나도 빼지 않고 전부가 일본군 출신이라고 적고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그 책은 이 땅에서 빛을 볼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몰랐다. 한인곤 씨는 출판사의 어려움을 알고 제작비는 자기가 부담할 테니 책만 만들어 달라고 했었다. 그리고 글도 속필인 문인이 무색할 정도로 빨리 써가지고 왔다. 그런 열정을 지녔던 한인곤 씨에게 어떻게 전화를 해야 할지 이상재는 난감하기만 했다. 이상재는 시청을 돌아서며 고개를 젖혀 한숨을 토해냈다. 문득 잡힌 봄 하늘은 밝고 푸르기만 한데 가슴속은 캄캄한 어둠이었다.

 

 

56. 운명적 좌절

병원으로 들어서던 강숙자는 당황하고. 난감해졌다. 안경자의 전화를 받고 달려오며 예상은 했었지만. 막상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자 당혹감이 한층 커졌다.

내 마누라 살려내!”

내 딸 살려내. 내 딸!”

열서너 명이 웅성거리는 속에서 이런 외침과 울부짖음이 울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병원이야. 이게

다 영창 보내야 해.”

원장은 어딨어. 원장 끌어내.”

이런 말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고.

이 병원 잘한다던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어.”

글쎄. 이 병원 망했네.”

이런 말도 들리고 있었다. 그전에 지니고 있던 병원다운 정숙함과 무게감은 다 깨지고 없었다. 강숙자는 사람들을 피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굳어진 얼굴로 서성거리고 있던 간호원들이 강숙자 쪽으로 모여들었다.

사모님. 오셨군요.”

빨리 올라가 보세요. 원장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알았어요. 여기 잘 지키고 있어요.”

강숙자는 냉정한 어조로 간호원들에게 이르고는 원장실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강숙자가 원장실로 들어섰을 때 안경자는 울고 있었다.

왜 우니. 맘 강하게 먹어야지.”

강숙자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어머 너 왔구나. 이걸 어떡하면 좋으니.”

안경자가 눈물을 훔치며 벌떡 일어났다.

아래 의사가 저지른 일이니까 넌 일단 안심해. 그리고 의료사고는 고의가 아니니까 빨리 해결하도록 하면 돼.”

강숙자는 침착했다.

그렇지만 원장은 나니까 책임을 피할 수가 없어. 저 사람들을 어찌해야 좋을지도 모르겠고. 며칠이고 저렇게 버티면 어찌 되겠어. 소문은 자꾸 퍼질 거고. 눈앞이 캄캄해.”

안경자는 두 손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꼈다.

이런 맹추야. 겁먹지 말고 기다려. 저 사람들을 며칠이고 저렇게 둘 참이야?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지. 그리고 소문 무서워할 게 뭐 있어. 넓고 넓은 서울에서 병원 딴 데로 옮기면 되는 거지. 너 찔찔 짜면 재수 없어 일 자꾸 꼬인다. 이 순간부터 절대 눈물 보이지 마. 또 울면 일 안 봐줄 테니까.”

강숙자의 어조는 더 강해졌다.

알았어. 알았어.”

안경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훔쳤다.

자아. 지금부터 내가 사고수습위원장이다. 넌 자리부터 내놔.”

강숙자는 이렇게 말하며 원장의 책상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 저예요. 마침 재판이 없었군요. 이건 공적인 일이니까 직장으로 전화한 것 이해 좀 하세요. 당신이 적극 나서야 할 긴급 사태가 생겼어요. 다름이 아니라 제 친구 안자경이 있잖아요. 걔 밑에 있는 의사가 소파 수술을 하다가 사고를 내어요. . 그렇게 됐어요. 그래서 지금 유가족들이 병원 현관에 몰려 야단났어요. 이 사람들부터 어떻게 해결을 했으면 좋겠는데요.”

알았어. 그 문제는 유가족들이 감정이 격해 있으니까 병원 당사자가 나서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지. 의료사고도 엄연히 살인은 살인이니까 어차피 1단계 경찰 조사는 피할 수 없어. 그러니까 빨리 경찰에 연락해서 경찰의 힘으로 유가족들을 경찰서로 옮기게 해야 돼. 그리고 유가족들하고 타협을 잘하는 게 최선책인데. 그러자면 빨리 변호사를 선임해 일을 맡겨야 해. 이 단계에서는 그 두 가지를 빨리 해결해야 되는데. 경찰문제는 그쪽에서 먼저 의료사고를 신고해. 그럼 내가 경찰서로 연락해서 협조를 구할 테니까. 그리고 변호사는 멀리 생각할 것 없이 이규백이 어떨까?”

홍석주는 사무적인 얘기를 다정한 목소리에 실어 보내고 있었다.

이규백이요?”

강숙자는 자신도 모르게 말꼬리를 치세웠다.

여보. 당신이 그 사람 마땅찮아하는 것 잘 알아. 그렇지만 이건 일이야. 궁지에 몰린 당신 친구를 구해야 하는 중대사라는 걸 잊지 말어. 객관적으로 봐서 이규백만한 변호사 찾기도 쉽지 않고. 더 중요한 문제는 변호사가 사건에 사무적으로 임하느냐. 인간적 애정을 가지고 임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져. 의사가 환자를 대하는 것도 그렇듯이. 그런 사례는 책 많이 읽은 당신이 나보다 더 잘 알잖아. 이 변호사가 안 원장을 알고 있는 처지니까 가장 좋은 적임자 아니겠어?”

. 알았어요. 그렇게 해요.”

됐어. 그럼 내가 이 선배한테 지금 바로 연락해서 이 선배가 직접 그쪽으로 가도록 할게.”

. 알겠어요.”

강숙자는 얼굴이 밝아지며 전화를 끊었다.

가자 경찰서로.”

강숙자가 벌떡 일어났다.

경찰서?”

안경자가 소스라쳤다.

아이고. 간은 콩알만해 가지고. 뒷문 있지? 가면서 얘기해.”

일은 홍석주의 계획대로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대목에서 일은 풀리지 않았다. 이규백이 애를 썼지만 유가족 측에서 전혀 타협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의사를 감옥에 보내야 한다고 완강했다.

이런 일은 다급하게 서두르면 오히려 더 꼬이고 어려워집니다. 저쪽에서 그렇게 나오는 건 감정이 격해 있어서 당연한 것입니다. 사건이 일단 경찰서로 넘어갔고. 우리 쪽에서는 응분의 보상을 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니까 유가족들이 더는 병원에 와서 항의하거나 화풀이하는 행위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 그런 행위를 하면 영업방해로 그쪽이 법에 걸린다는 사실을 경찰에서 주지시킬 테니까요. 그러니까 원장님은 정상으로 영업을 하면서 시간 여유를 가지고 대처해 나가야 합니다. 저쪽에서 뜻을 굽히지 않고 법정으로 가려고 한다면 그 사람들도 변호사를 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일하기가 한결 수월해집니다. 법적 수속을 밟는 동안 날이 자꾸 지나면서 유가족들의 감정도 차츰 가라앉게 되어 사건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게 되고. 그러는 동안에 양쪽 변호사끼리 이야기가 오가면서 일이 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안 되어 법정에 서게 된다 해도 너무 심려할 건 없습니다. 의료사고란 전혀 고의성이 없기 때문에 법정에서도 실형을 선고하기란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원장님은 인생경험을 쌓는 다 생각하고 심적 여유를 갖고 대응할 준비를 하시고. 저는 하루라도 빨리 일이 해결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규백은 정중하면서도 자상하게 설명했다.

, 여러모로 고맙습니다.”

안경자는 지치고 근심 가득한 얼굴로 겨우 한마디를 했다.

이런 고약한 일 맡겼으니까 변호사 비용을 몇 배로 받으세요.”

줄곧 안경자 옆을 지켜온 강숙자가 말했다.

. 그렇지 않아도 열 배를 받을 작정입니다.”

이규백이 웃으며 가방을 챙겼다.

우리가 처음 만나 뚝섬에 놀러갔던 게 정말 엊그제 같은데 벌써 모두 늙어가고 있어요. 세월 참 빠르고 허망해요.”

강숙자는 일부러 이 이야기를 꺼냈다.

. 그것 참 좋은 추억이었지요. 그때 먹었던 수박 맛이 가끔 생각나고는 합니다. 벌써 20년이 흘렀으니.......”

추억을 더듬는 듯한 표정이 스치며 이규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건은 결국 검찰로 넘어갔다. 이규백은 다른 사건들보다 훨씬 더 시간을 많이 바쳐 최선을 다했지만 타협을 이끌어낼 수가 없었다. 남편보다는 친정부모가 막무가내였다. 장인과 장모의 완강함 때문에 피해자의 남편은 어쩔 수 없이 따라가고 있는 인상을 감지할 수 있었다.

어쩌면 잘됐는지도 모릅니다. 법원에 가면 법적 권한이 남편한테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드러나니까요. 그러면 친정 부모들이 개입할 여지가 아주 줄어들고. 남편이 결정 내리기가 그만큼 쉬워지니까요.”

이규백이 안경자를 위로했다.

그런데....... 만약에....... 만약에 실형을 받게 되면 어쩌지요? 그 의사는 지금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안경자는 표 나게 수척해진 얼굴로 한숨을 억눌렀다.

그건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남편에게 타협할 낌새가 보이고 있고. 저쪽 변호사도 제가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홍석주 판사하고 힘을 합쳐 애쓰면 좋은 쪽으로 결말이 날 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타협액이 좀 더 커질 염려는 있습니다.”

그건 전혀 신경 쓰지 마세요. 사람의 목숨이 그리 됐는데......”

안경자는 더 말하기도 두려운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제가 최대한 노력해서 재판 날짜를 앞당기도록 하겠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이 악몽에서 벗어나야 하니까요.”

네 고맙습니다.”

안경자는 이규백을 배웅하며. 그가 예민하고 깐깐해 보이는 인상에 비해 마음이 무척 따뜻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홍석주는 아내에게 떠밀리고. 이규백의 언질로 김선오를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딴 거북한 사건도 아니고 의료사고니까 김 형이 담당한테 슬쩍 한마디만 해줘. 남편은 처가의 힘에 밀려 여기까지 왔지 타협할 의향이 농후한 모양이야. 그 안 원장. 남편하고 생이별하고 애 하나 데리고 사는 형편에 이런 힘겨운 일에 시달리고 있는 것 안됐잖아.”

홍석주는 김선오에게 술잔을 건넸다.

그거 어쩌다가 그런 사고를 냈나. 병원이 아주 잘 되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김선오는 술을 받으며 아무 표정 없이 중얼거렸다.

글쎄 병원이 너무 잘되어 나간 게 탈이었는지도 모르지. 의사 둘을 더 쓰고 있었는데 그중의 한 사람이 사고를 냈으니까.”

글쎄 말이야. 어쨌든 안 원장이 낸 사고가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야. 아니야. 이렇게 말하면 말이 안 되겠지? 그 침착한 모범생이 아예 그런 사고를 낼 리가 없으니까.”

어때. 김 형이 나설 거지?”

홍석주는 김선오의 뜨뜻미지근하고 모호한 태도가 마음에 걸려 정면으로 다짐을 놓았다. 확답을 듣지 못하고 들어갔다가는 아내에게 당할 판이었다.

알았어. 생각해 볼게.”

이런. 우리끼리 생각해보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이번에 마음 합쳐 일 산뜻하게 처리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잖아.”

우리끼리....... 김선오는 그 말을 되씹었다. 안자경의 얼굴이 떠올랐다. 대학생이면서도 하이힐을 신지 않고 넓적하게 퍼진 검정 단화를 신고 다닐 때의 모습이었다. 그 인상이 지금까지도 강하게 남아있는 것은 거기서 사랑의 감정이 싹튼 때문인지도 몰랐다. 안자경의 얼굴에 그녀의 아버지 안 원장의 얼굴이 겹쳐졌다.

알았어. 그렇게 하지.”

김선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바로 처리해야 해. 기왕 돕는 것 하루라도 빨리 일을 끝내야 하니까.”

알았어.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조건?”

. 내가 힘을 보탰다는 건 안자경 씨한테 비밀로 해줘.”

난 또 무슨 소리라고. 그야 어려울 것 없는 일이지.”

그리 쉽게 생각하지 말어. 그 비밀이 지켜지려면 홍 형 아내한테도 비밀로 해야 한다는 소리야. 두 사람이 혈육 이상으로 친하다는 것 알지?”

그 말 듣고 보니 그러네. 알겠어. 그건 나한테 맡겨. 그런 수완쯤은 부릴 수 있으니까.”

이렇게 대꾸를 하면서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 홍석주는 아리송하기만 했다. 난 척 잘하고 낯내기 좋아하는 김선오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혹시 그 일 때문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자리 옮기는 일과 안자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홍석주는 생각난 김에 그 일이 어찌 되고 있는지 물어볼까 하다가 이내 마음을 바꾸었다. 괜히 그런 이야기 꺼냈다가는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해 안자경의 일을 망칠수도 있었다. 복잡하게 얽히고 있는 정치이야기 피하고. 대학생들이 데모하기 시작한 이야기 피하고. 그러다보니 너절한 음담만 나누다가 술자리를 끝냈다. 홍석주는 집으로 돌아가며 김선오가 너무 지나치게 출세에 급급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중정으로 옮겨가려고 하는 것은 크게 잘못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중정은 이번에 조직 개편을 하면서 요직에 수사 능력이 뛰어난 검사 몇을 뽑아가려 하고 있었다. 그 후보 대여섯에 김선오가 끼어있었다. 중정은 현직 국회의원은 말할 것도 없고 판검사도 거침없이 끌어갈 수 있는 막강한 권력체였다. 그런 곳에서 권력을 휘둘러보고 싶은 것은 남자면 누구나 갖는 욕망이고. 유혹일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거기서 몇 년 머물며 공을 세우면 남들을 앞지르는 출세의 길이 열리기도 했다. 바로 국회의원으로 정치 야망을 이룰 수도 있었고. 검찰로 되돌아오더라도 발 빠른 승진이 보장되어 있었다. 그런저런 이유로 그 후보들에 대해서 숨죽이고 눈치 보아가며 많은 속삭임이 오가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법조계의 좁은 울타리 안에서 빠르게 돌고 있는 말들을 간추리면 두 가지였다. 첫째는 누구누구가 뽑혀 가느냐 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그들이 표 나지 않게 손을 쓰며 경합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김선오가 무언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것은 정치 상황이 너무 나쁘기 때문이었다. 정권이 어디로 갈 것인지 불안하기 짝이 없는데다가. 5월로 접어들면서 대학생들은 마침내 계엄 철폐를 외치며 학교를 벗어나 가두로 나서기 시작하고 있었다. 작년 10월부터 올해 4월까지 계엄은 너무 길었고. 대학생들은 지나치게 오래 참아온 것인지도 몰랐다. 대학생들이 내세우고 있는 것은 단순히 계엄 철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민주화 대행진이라는 깃발을 들고 있었다. 민주화란 이미 소문이 퍼질 대로 퍼져 기정사실처럼 되어가고 있는 군부정치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선언인 동시에 계엄을 오래 끌면서 정권을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도 모를 계엄세력의 심장을 겨누는 화살이었다. 그리고 대행진이란 모든 대학생들이 다 같이 일어나 함께 싸우겠다는 결의였다. 오래 참아온 만큼 분노는 큰 것인가. 한 대학이 데모를 일으키자 그 다음날부터 데모는 거세지면서 날이 바뀔 때마다 바람 탄 들불로 번져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지 그야말로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런 어지러운 상황에서 김선오는 계엄세력이 강화시키고 있는 중정으로 가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런 혼란스럽고 불안한 상황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 누구보다도 빠르고 예민하게 판단할 수 있는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하고 나섰을까? 그에게는 또 군부가 정권을 장악할 거라는 확신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비선(秘線) 을 통해 다시 군부정권이 설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 해도 그건.......

홍석주는 잔뜩 복잡해진 머리를 수습하지 못한 채 집에 도착했다.

어떻게 됐어요?”

강숙자는 남편이 미처 구두도 벗기 전에 물었다.

잘됐어.”

어머! 김선오가 그 일을 선선히 해주겠대요?”

강숙자는 손바닥을 치며 반색을 했다.

아니야. 김선오가 아니라 딴사람한테 부탁했어.”

왜요? 그 인간이 거절해서요?”

아니, 그 사람 요새 복잡한 사건을 맡고 있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런 부탁하기가 좀 곤란하더라고. 그래서 서로 입장 편하게 하려고 딴사람을 고른 거지.”

역시 당신은 최고예요. 자경이도 다음에 김선오가 자기 일을 도왔다는 걸 알게 되면 부담스럽고 거북해 할 수도 있어요. 아주 잘됐어요.”

잘했군. 잘했군. 자알했어어. 그러니까아 당신 남펴언이지이이.”

눈치 빠른 아내를 감쪽같이 속여 넘긴 것이 흥겨워 홍석주는 자신도 모르게 노랫가락을 뽑아 늘였다.

근데 이렇게 신나게 노래 부를 때가 아닌 것 같아요.”

강숙자가 양복을 받아 걸며 말했다.

. 또 무슨 일 있어?”

홍석주는 넥타이 풀던 손을 멈추었다.

당신은 술 마시느라고 뉴스 못 봤지요? 오늘은 대학생들 데모가 더 굉장했어요. 이러다가 4.19처럼 될지도 모르겠어요.”

“4.19처럼? 그렇게 되기만 하면 오죽이나 좋겠어.”

홍석주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대학생들 기세를 보면 대단한데. 그렇게 안 될까요?”

글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경찰하고 군대하고는 질적으로 다르니까. 4.19때도 경찰은 이겨냈지만 군인들이 밀고 들어오니까 데모를 더 못했거든. 그런데 지금은 군인들이 아예 서울을 장악하고 있으니까 더 어렵지. 어쨌든 두고 봐야 알겠지만 크게 기대할 건 없을 거야.”

그나저나 군인들은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는데 왜 이러나 몰라. 국민 세금으로 먹고 살면서 나라 지키랬지 누가 자기네들 보고 정치하랬나? 군인들 참 뻔뻔하고 양심 없어요. 전쟁도 없이 30년 가까이나 놀고먹으면서.”

. 당신 직업군인들이 들으면 제일 싫어할 소리만 골라서 하는군.”

헝석주가 양말을 벗어던지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소리 듣기 싫으면 얌전하게 나라 지키는 일이나 잘해야지요. 글쎄. 얼마 전에 읽은 건데 말예요. 아프리카 어느 부족은 여자들이 집안일은 물론이고 농사짓는 일까지 전부 다해요. 그런데 남자들은 막대기를 하나씩 들고 숲속에서 빈둥빈둥 놀아요. 그건 노는 게 아니라 다른 부족의 침략을 막아내는 일을 한다는 구실을 붙여놓고. 그런데 어이없는 건 지난 1천년 가까이나 다른 부족들이 쳐들어온 일은 한 번도 없었대요. 그 남자들의 위력 때문이 아니라 그들 가까이에는 쳐들어올만한 다른 부족들이 없는 거예요. 그게 우리나라하고는 경우가 다르지만. 편케 놀고먹는다는 대목에서 직업군인들 생각이 나더라구요.”

그래. 군부정치에 염증이 나서 직업군인들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나빠져 버린 거야. 그러니 진짜 군인들이 억울하게 생겼지. 어쨌거나 나라를 위해서도 그런 불신감이 팽배해 있는 건 큰일이야.”

우리 홍석주판사님. 술 마시고도 또 나라 걱정이시네. 어서 씻고 자요.”

강숙자는 남편의 팔을 잡아끌었다.

 

여보. 여보. 빨리 아버지 전화 받아요. 아버지.”

김선오는 아버지라는 말에 놀라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며 허둥거렸다.

여기요. 여기. 아마 그 일인 것 같아요.”

잠옷 바람인 노화자가 낮고 빠르게 말하며 김선오의 손에 송수화기를 들려주었다.

. 접니다. 장인어른. 안녕하십니까.”

김선오는 한 손으로 눈을 비비면서 장인이 앞에 있는 것처럼 꾸벅꾸벅 절을 했다.

전화가 좀 일렀는데 말이지.......”

. 아닙니다.”

그래. 빨리 서둘러 이리 좀 오게. 급히 할 얘기가 있으니까. 아침 여기서 먹고 바로 출근하도록 해.”

. 알겠습니다. 집사람하고 함께 가겠습니다.”

. 그러라고 일러뒀네.”

. 곧 가겠습니다.”

. 딸은 어지간히 끔찍하게 안다니까. 그 말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네. 김선오는 속으로 꿍얼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그 일 같지요?”

노화자가 급히 머리에 수건을 묶으며 물었다.

글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빨리 세수하고 양치해요. 나는 화장은 차에서 할 테니까요.”

그런 흐리멍텅한 소리 들을 시간 없다는 듯 노화자가 남편의 등을 밀며 일어났다. 김선오는 숨 쉴 틈 없이 화징실을 거쳐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서면서도 장인이 왜 이렇게 아침 일찍 부르는지 분명하게 짚이는 게 없었다. 아내의 기대대로 그 일 때문이라고 믿기 어려운 것은 장인 직업상 그 일에 힘을 쓰기는 저쪽과 거리가 너무나 멀었다. 장인이 알아본다고 했을 때도 그저 부모의 마음으로 신경이 쓰여 그러는 것이겠거니 해두었다.

잠이 모자라면 눈 좀 붙여요.”

자가용이 출발하자 노화자는 화장품을 꺼내며 남편에게 말했다.

요새 괜히 왜 이렇게 피곤한지 모르겠어.”

김선오는 마른 입맛을 다시며 얼굴을 훔쳤다.

괜히는요. 그 일 땜에 너무 신경 쓰니까 그렇지요. 어서 눈감아요. 의학상으로 볼 때 눈만 감고 있어도 반수면 상태가 유지된대요. 그럼 그만큼 피로 회복의 효과가 있어요.”

그래. 의사선생님 말을 들어야지.”

김선오는 몸을 편하게 부리며 눈을 감았다. 안자경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시에 떨어졌을 때 속 넓게 위로하던 모습이었다. 실망스러워하거나 무시하는 기미라고는 전혀 없이 오히려 스무 살이 안 된 최연소합격자가 법관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고 우려했던 것은 단순히 자신의 능력을 믿어준 위로였을까. 아니면 이성적 감정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일까. 의대 공부를 부담 없이 해낼 만큼 머리 명석하고. 잘 살면서도 검소하고. 공부밖에 모르며 정숙하고. 그녀는 의사로서 적격이면서도. 배우자로서도 만점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잘못으로 그녀와의 인연은 깨지고 말았다. 그녀와 박자영이 친구였으니. 내심으로 조마조마했던 것이 폭탄이 되고 만 것이다. 그건 양쪽 손에 든 사과가 아니라 시한폭탄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왜 그녀는 혼자가 되었을까.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데 왜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버린 것일까. 그건 어쩌면 그녀가 무슨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남자가 인간성이 나쁜 것은 아니었을까. 자식까지 있는데 미국에서 돌아오지 않은 인간....... 그런데 남편의 그런 배신 앞에서 그녀는 미국에 한번 가보지도 않고 마음을 정리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 이성적인 냉정이 안자경다웠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을 생각하자 김선오는 문득 그 남자와 자신이 뭐가 다른가 하는 자책감을 느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안자경이 가엾고 애처롭게 여겨졌다. 그녀에게 첫사랑이 분명한 자신에게 상처받고. 남편한테까지 버림받은 그녀는 남자 복이라고는 지지리 없는 여자였다. 그동안 그녀를 가끔 스치게 될 때면 일부러 지난 일을 다 잊은 척. 태연한 척 꾸미고는 했었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안자경에게도. 안 원장에게도 죄스러움이 씻기지 않고 남아 있었다. 자신은 자연스럽게 대하고 싶은데 그녀가 서둘러 자리를 피하고는 하는 걸 보면 그녀의 가슴에도 상처가 깊은 모양이었다.

여보. 다 왔어요. 눈도 못 붙이고 무슨 생각을 그리 해요?”

. 그저......”

김선오는 눈을 뜨며 얼버무렸다. 아내를 옆에 앉혀놓고 안자경의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한 것은 처음이었다. 아내가 알면 질색을 할 일이었다.

자아. 식사하면서 얘기하세.”

노성칠 사장이 식탁에 앉으며 말했다.

아빠. 요새도 회사 매출은 나쁘지요?”

김선오와 함께 아버지 맞은편에 앉으며 노화자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말도 마라. 세상이 다시 시끌시끌해지고 있으니 더 나빠지게 생겼다.”

노성칠이 숟가락을 들며 혀를 찼다.

불경기라고 약까지 잘 안 팔리는 건 언뜻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옷 같은 것도 아니구요.”

김선오가 장인을 위로하듯 말했다.

진작 말했잖아요. 병원에 환자가 준다구요. 옷이나 구두 같은 것만 안사는 게 아니라 아픈 것도 참고. 약국에서 적당히 싼 약 사먹고 말고 그래요.”

남편이 사정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님을 변명하듯 노화자는 재빨리 말했다.

그래 글쎄. 경제라는 것이 그렇게 묘해서 구석구석 영향이 안 미치는 데가 없다니까.”

무슨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거 큰일 아니에요?”

그래서 대통령이 2~3일 전에 부랴부랴 사우디고 쿠웨이트를 공식 방문한다고 떠나지 않았냐. 지금 믿을 수 있는 돈 줄은 중동밖에 없으니까.”

그게 무슨 효과가 있겠어요? 그 사람이 허수아비라는 건 그쪽에서도 환히 다 알고 있을 텐데요.”

글쎄 말이다. 그런 먼 얘긴 그만하고 우리 얘기나 하자. 김 서방 일인데 말야. 이 애비가 결국 급소로 직통하는 맥을 찾아냈다.”

노성칠은 자랑하듯 어깨를 펴며 딸과 사위를 바라보았다.

어머. 아빠 어떻게요?”

노화자는 입으로 가져가던 숟가락을 멈추며 소리치듯 했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으려던 김선오도 앉음새를 고쳤다.

그래. 놀랄 만하지? 제약회사 사장하고 저쪽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 같은데 말이지. 어디. 머리 좋은 너희들이 한번 맞춰봐라.”

김선오와 노화자는 서로 마주보았다.

아빠. 퀴즈 풀 시간 없어요. 마음 급한데 빨리 말씀해 보세요.”

노화자가 어리광부리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출근시간들 바쁘니까 내가 바로 말하도록 하지. 그걸 어떻게 했는고 하니 말이다. 내가 하는 일을 놓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쪽에 물건 들어가는 선이 있더란 말야. 그게 병원이긴 한데. 계급 높은 군의관들을 통하면 길이 있지 않을까 싶었지. 나하고 친분 두터운 영관급이상 군의관들은 많고. 이 세상에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으니 찾아보면 그 사람을 치료하고 해서 특히 가까운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 사람의 사단에서 병원장을 했던 군의관들 중에 말야. 그래서 통합병원부터 뒤지기 시작했지.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내 생각이 적중한 거야.”

어머나. 아빤 역시 최고예요.”

노화자는 아버지의 노고에 감사를 표해야 된다는 듯 과장일 만큼 환성을 질렀고.

아 예. 너무 애를 쓰셨군요.”

김선오는 국그릇에 코가 빠지도록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그게 말이야. 만일을 생각해서. 일이 틀림없어야 하니까 두 길을 잡았어. 그 사람하고 절친한 군의관이 나서게 했고. 또 한 길은 그 사람이 가장 믿는 참모들 중의 하나인 대령을 잡은 거야. 그 일이 최종 검토 단계만 남아 2~3일 사이에 결정이 나게 돼 있어. 그런데 그 대령이 이번일의 결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자네는 이따가 오후에 그 대령을 잠깐 만나도록 해. 그쪽에서 꺼리니까 자네 혼자만 살짝 가야 해.”

. 알겠습니다.”

김선오는 다시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럼 안심해도 되는 거죠?”

노화자가 안도한다는 어깻숨을 과장되게 내쉬며 아버지를 보고 사르르 웃었고.

그래. 이 애비가 이런 일에 언제 실수하는 것 봤냐?”

노성칠은 거드름을 피우며 느긋한 웃음을 딸에게 보냈다.

아빠. 그전에 수입하려다가 잘 안 된 약품 있잖아요. 그걸 다시 슬슬 시작하세요. 이 일이 잘되면 이젠 딴 데서 방해할 수 없잖아요.”

흐흠. 널 우리 회사 전무로 앉혀야 되겠구나. 그것도 나쁠 것 없는 생각이지.”

노성칠은 흐뭇한 웃음을 머금으며 밥숟가락을 들어올렸다.

자네. 2~3일 동안 아무도 안 만나는 게 좋을 것 같네. 괜히 술자리 잘못했다간 술 취해 말이 헛나갈 수도 있으니까. 중대한 일 앞두고는 말조심. 몸조심이 젤이야. 주변 사람들이 일부러 자네 발목을 걸려고 술을 살 수도 있으니까.”

노성칠이 집을 나서는 사위에게 엄하게 일렀다.

.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자네 그동안 마누라한테 써비스 별로 못하고 살았지? 이번에 써비스 좀 해봐. 퇴근하자마자 마누라하고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고 하면서 2~3일 보내. 마누라 하고 붙어있는 게 제일 안전하니까. 알겠어?”

.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선오는 그저 허리를 굽혔다.

정말 아버지 말씀대로 할 거예요?”

차에 앉은 노화자가 물었다.

내가 언제 장인어른 말씀 거역한 일 있나? 그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기도 하고.”

어머 좋아라. 그 일 잘 되고. 그 덕에 데이트도 즐기고. 이리 좋은 일이 어디 또 있어요.”

노화자는 소곤거리듯 말하며 김선오의 팔짱을 끼었다.

“.......”

김선오는 아내에게 운전수를 눈짓하며 슬그머니 팔을 뺐다.

김선오는. 배탈이 심하다. 어머니 병세가 안 좋다. 하는 이유를 내세워 술자리를 피하고 퇴근길에 아내의 병원으로 갔다.

그 사람 만났어요?”

노화자는 남편을 보자마자 물었다.

. 장인어른 말씀대로 했지.”

눈치가 어때요?”

일이 일인데 무슨 눈치 같은 것 보일 리가 있나? 딱딱한 군인의 태도지. 당신도 잘 알잖아. 이런 일에는 만났다는 게 중요한 거.”

그렇지요. 말보다는 행동이 중요하니까요. 가요. 어떤 근사한 호텔에 가서 오랜만에 양식 맛있게 먹고 재미나는 영화 봐요.”

그러지. 영화 본 지도 오래됐군.”

당신 따라 살다간 야만인 되기 딱 알맞아요. 문화생활이라는 걸 통 모르니.”

그런 소리 말어. 문화생활을 모르는 게 아니라 문화생활을 할 틈이 없는 거지. 이건 전적으로 국가의 책임이야.”

그들은 흥겹게 자가용을 탔다. 차들이 을지로 입구에서 막혀 움직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경찰차의 경적음이 숨 가쁘게 울리고 있었다.

무슨 사고 났나?”

노화자가 창밖을 두리번거렸다.

아마 데모 벌어진 것 같습니다.”

운전수가 대꾸했다. 한동안 있다가 신호등이 달린 네거리로 데모 진압차들이 줄지어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철망을 둘러친 차들은 열대가 넘었다.

학생들이 공부나 할 것이지 왜 데모들은 하고 이래요?”

노화자의 어조에 성깔이 돋아 있었다.

“.......”

김선오는 아내의 팔을 질벅이며 눈짓으로 운전수를 가리켰다. 노화자는 짜증나는 얼굴이면서도 더 입을 열지는 않았다. 데모 진압차들이 지나가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 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데모를 할래도 낮에 하고 말 것이지 퇴근시간까지 할 건 뭐예요. 글쎄. 하라는 공부들은 안 하고.”

오래 참았다는 듯 노화자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쏟아놓았다.

당신 참 순진하군. 그게 작전인 것 몰라? 차들이 많이 밀리니까 진압차들이 신속하게 출동하기 어려워지고. 퇴근시간이니까 데모하는 걸 시민들에게 많이 보일 수 있고. 일거양득하려고 머리 쓴 작전인 거야.”

김선오는 커다란 유리문을 밀어 아내를 먼저 들여보내는 서양식 예법을 자연스럽게 갖추며 말했다.

갈수록 태산이군요.”

노화자는 불쑥 화를 냈다.

그 얘기 이따가 해.”

김선오는 아내의 어깨를 감싸잡듯 하며 말했다.

그들은 호텔의 스카이라운지에 자리 잡았다. 창가에서는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색색의 불이 켜지기 시작하는 서울의 도심은 평온해 보였다.

뭘로 드시겠습니까?”

일류호텔답게 까만 양복에 나비넥타이를 맨 젊은이가 말쑥한 차림만큼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며 주문을 받았다.

비프스테이크 둘.”

노화자가 말했다.

고기는 어느 정도로......”

하나는 미디움.”

노화자는 김선오를 가리키고는.

하나는 웰던

하며 자기를 가리켰다.

와인을 하시겠습니까?”

레드

김선오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여보. 저것 문제 아니에요? 자꾸 심해지고 있는 모양인데.”

노화자는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꺼냈다.

너무 신경 쓰지 말어. 내 생각으로는 어차피 한번 거쳐야 될 과정이야. 그러나 학생들 뜻대로 되지 않아.”

김서노는 느리게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그럴까요?”

내 말만 믿고 신경 쓰지 말라니까. 우리가 보는 눈이 있잖아.”

. 그럼 됐어요.”

노화자는 의미 깊은 눈길로 남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이 나오고 잔에 붉은 포도주가 따라졌다.

축배!”

노화자가 잔을 들었다.

사람 참. 급하긴.”

김선오는 빙긋이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두 개의 유리잔의 울림이 해맑고 경쾌했다.

김선오는 다음날도 아내와 야외로 나가 5월의 싱그러움을 만끽하며 유쾌하게 보냈다. 그러나 사흘째 되는 날. 김선오는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두 사람이 결정되었는데 자신의 이름은 없었다. 그는 허망하고도 맥이 빠져 퇴근해서 바로 집으로 들어갔다. 장인에게 전화해 볼 마음도 없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뭐 이런 황당한 일이 다 있어요. 참 기가 막혀 못 살겠네.”

노화자는 안절부절못하며 자기 아버지에게 전화하기 바빴다.

아유. 신경질 나. 어디 계시길래 이렇게 통화가 안 돼 그래. 이 일을 알고 계시는 거야 어쩌는 거야.”

노화자는 마구 신경질을 부려댔다. 김선오는 양주를 찔끔거리며 텔레비전에 헛눈을 팔고 있었다. 그는 9시쯤에 장인의 전화를 받았다.

자네는 다 좋았는데 출신도가 안 좋아. 그게 옥에 티라면 티라구. 어쩌겠나. 다 잊어버리게.”

 

 

57. 광주를 향하여.

비상계엄이 다시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그와 함께 계엄포고 10호가 발표되었다. 그 내용은 전 현직 국가원수 비방금지. 모든 정치활동 및 시위 중지. 대학 휴교. 언론. 출판. 방송의 사전검열 등이었다. 대학생들의 데모가 뚝 그치면서 세상은 다시 살벌해졌다. 서울을 향해 군부대들이 이동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각 대학의 정문마다 장갑차를 앞세운 무장군인들이 포진했다.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교수들까지도 정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는 형편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신문들은 나흘 만에야 18일에 광주에서 벌어진 사건을 보도했다. 그것도 기자들이 자유롭게 취재해서 쓴 기사가 아니라 계엄사가 발표한 내용을 그저 옮겨 싣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이미 세간에는 계엄군인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저지른 잔인한 짓들이 소문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재건대의 야학선생인 전준일은 친구들 셋과 하숙방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방도 술집도 은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놈들이 어찌나 잔인하게 했는지 광주시내 중심가인 금남로가 온통 피바다라는 거야.”

귀가 큰 대학생이 말했다.

학생이고 시민이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죽였으니 왜 안 그렇겠어.”

눈썹 짙은 학생이 말을 받았다.

그놈들이 곤봉이나 대검으로만 사람을 치고 찌른 게 아니라 장갑차로 마구 깔아 죽였대잖아.”

전주일이 담배를 빼들며 말했다.

그것만이 아니야. 도망가는 시민한테 대검을 던져 배에 꽂히게 했다니 그게 말이나 돼.”

턱뼈가 각진 학생의 언성이 높아졌다.

내가 들은 것은 그보다 더해. 어떤 여학생이 달아나는데 뒤에서 총을 갈겨버렸다는 거야.”

눈썹 짙은 학생이 말끝에 무슨 욕인가를 중얼거리며 담배를 빨았다.

그럼 내가 들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네.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구타해 머리가 터져 피가 흐르고. 심지어 눈알이 빠져버린 데모대들을 시내로 끌고 다닌다던데.”

귀 큰 학생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것도 말이 되냐. 그게 어떻게 사람이 할 짓이냐.”

턱이 각진 학생이 분에 찬 한숨을 토해냈다.

말이 안 되는 짓들이 한둘이 아니야. 체포한 데모대의 남. 녀학생들을 팬티와 브라쟈만 남기고 발가벗기고. 그런 여학생들을 희롱해댄다니 그것들이 어디 인간이야.”

전준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도 그건 좀 낫다. 내가 들은 건 여학생들 브라쟈를 다 찢고 벗겨 버렸다고 하더라. 아무리 공수부대라고 어찌 그리 잔인하고 짐승 같은지 모르겠어.”

눈썹 짙은 학생이 고개를 내둘렀다.

아니야. 문제를 공수부대로 축소시키면 안 돼. 군인은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산다고 하잖아. 공수부대가 왜 그런 만행을 멋대로 저지르겠어? 위에서 적을 무찌르듯이 무슨 짓을 해서든 데모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 아니겠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끔찍하고 무지막지한 짓들을 즈네들 맘대로 저질러.”

귀 큰 학생이 흥분기를 드러냈다.

그 말이 맞을 거야. 아무 명령 없이 그런 짓을 할 수는 없겠지. 근데 말이야. 공수부대를 투입하기 직전에 술을 먹였다고도 하고. 환각제를 먹였다고도 하는데. 그게 사실일까?”

턱이 각진 학생이 담배를 끄며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그것만이 아니잖아. 거기 투입한 공수부대원들을 전부 경상도 출신으로 골랐다는데. 그건 또 어떻게 된 걸까?”

전준일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야 전라도 출신들은 제외시켰을 수 있는 일이지. 하여튼 의문투성이야. 그런데 문제는 말이야. 어쩔려고 그런 잔인한 짓을 마구 저질러대느냐 그거야. 군부의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눈썹 짙은 학생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도 문제지만 더 문제는 신문들이야. 신문에서 사실을 정확하게 보도해야 하는데 그 임무를 하지 않고 있으니까 소문만 자꾸 무성해지고. 뭐가 뭔지 알 수가 없게 되잖아.”

전준일이 침통하게 말했다.

신문에 기대하긴 다 틀렸어. 총 들이대고 사전검열 하는 판에 기자들이라고 별수 있겠어. 우리 대학생들이 데모 중단한 거나 마찬가지지. 우리는 서울역에 10만 명이나 모였다가도 다 흩어졌는데. 신문사들 다 모여 봤자 기자들이 몇 명이나 되겠어?”

귀 큰 학생이 한숨을 쉬었다.

그도 그래. 하여튼 군부가 이런 식으로 폭력을 휘둘러 몰아붙이면 결국에는 정권을 먹어치우게 되는 것 아닐까? 나는 그게 제일 걱정스럽고 두려워.”

눈썹 짙은 학생이 한숨을 쉬었고.

다 그렇지 뭐.”

다른 학생들도 한숨을 쉬었다.

 

신문들은 다음날부터 광주에 대한 기사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기서 일어난 일이 폭동이고. 그곳 사람들은 폭도라고 지칭하고 있었다.

이상재와 유일표는 또 한사람과 중국집 구석방에 자리 잡고 앉았다.

정 형. 이 사람은 나하고 고등학교 동창인데.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야. 그러니까 아무 걱정 말고 말해도 괜찮아. 하도 믿기 어려운 소문들이 자꾸 퍼지고 있는데 어떻게 확인할 방법이 있어야 말이지. 정 형이 신문사 안에서 파악한 대로만 말해주면 돼. 요새 신문사는 어때?”

이상재가 낮은 소리로 말하며 고량주잔을 들었다.

선배님도 대충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한마디로 살벌해요. 기관원들이 상주하는 정도가 아니라 편집국을 아예 점령해버린 상태니까 기자들끼리도 마음 놓고 무슨 얘기를 할 수가 없어요. 그저 쉬쉬해 가며 한두 마디씩 하는 정도지요. 제가 기잔지 뭔지 알 수가 없어요.”

정 기자라는 사람이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공수특전단원들이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였다는 건 사실인가?”

이상재가 술잔을 받으며 물었다.

. 사실입니다. 광주시내 대학생들은 서울의 대학생들과 발을 맞추어 14일부터 계엄 철폐와 민주화추진 데모를 벌였어요. 그런데 17일 계엄확대로 다음날 교내 출입이 차단되자 전남 대학생들이 교문 앞에서 공수부대와 충돌해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됐어요. 그래서 학생들은 데모를 시내로 확산시켰어요. 그런데 진압에 나선 공수부대가 곤봉과 대검으로 무자비하게 살상을 자행한 거지요. 그 잔인한 학살 소문이 퍼지자 다음날 시민들이 학생들에게 합세했어요. 그렇지만 다시 출동한 공수부대는 전날보다 더 가혹하게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였어요. 그 만행에 격분한 시민들은 다음날엔 더 많이 일어나게 되고. 공수부대는 위기를 느껴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게 되고. 거기에 맞서 시민들이 예비군용 총 같은 것을 탈취해 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거지요. 그러는 동안에 죽고 부상당한 시민들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데. 지금 그 수를 누가 정확하게 알겠어요. 큰일 났어요.”

정 기자는 담배연기를 한숨으로 토해냈다.

이 못된 새끼들이 군대용어로 시범쪼를 광주에서 보이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구만.”

이상재도 한숨을 쉬었다.

유일표는 고개를 숙인 채 술만 마시고 있었다.

. 그런 의도 같아요. 그렇게 시범을 보이면 전부 무서워 꼼짝을 못할 테니까요. 그리 장애물을 없애야 정권 잡기가 쉬워지잖아요.”

그런데 그런 과정은 하나도 보도를 하지 않고 무조건 폭동이고 폭도라고 몰아? 신문이고 방송이고 참.......”

비참하지요. 총구가 눈앞에 있으니......”

그런데 말야. 시체들이 큰길에 즐비하다는 소문이 사실이야?”

그런 모양이에요.”

도망가는 사람을 뒤에서 쏘았다는 소문도?”

그런 것 같아요. 남의 집에 숨은 사람까지 찾아내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고 하니까요.”

그런 죽일 놈들이 있나. 그럼 임신한 여자의 배를 찔러 죽였다는 것도?”

.”

이런 사람 미칠 일이 있나. 그게 도대체 어느 나라 군댄 거야?”

이상재는 가슴 무너지는 것 같은 한숨을 토하고는 술잔을 비웠다.

요새는 신문보다 소문이 더 정확한 세상이 됐어요. 요 며칠 동안에 내가 왜 기자가 되었나 하고 수없이 후회하고. 세상을 향해 얼굴을 들 수가 없어요.”

그래. 내가 현직에 있었더라도 별수없었겠지. 이제 와서 해직된 걸 다행으로 여기고 있으니 이것도 비겁이지. 하여튼 광주사람들 어쩌지. 외부사람들은 가보지는 못하고. 그 사람들만 고립되어 있으니.”

. 그것도 큰 문제지만 또 하나 큰 문제는 외부사람들 중에서 상당수가 군부의 의도대로 광주사람들을 폭도라고 생각하고 있는 점입니다. 그건 물론 신문이나 방송 때문이지만.”

글쎄 말이야. 이래저래 큰일이야.”

또 한숨을 쉬는 이상재 옆에서 유일표는 묵묵히 술만 마시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난 선생들 대여섯이 교무실 옆의 휴게실에 모여앉아 있었다.

이거 광주사태는 날마다 더 심해지고 있으니 예삿일이 아니네. 이거 왜 이렇지요?”

한 선생이 신문을 덮으며 다른 선생들을 둘러보았다.

그쪽 사람들이 워낙 과격해서 그렇지요 뭐. 계엄군들한테 덤비는 걸 봐요. 딴 지방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인가.”

한 선생이 대꾸했다.

그래요. 시청을 뺏고. 방송국을 불지르고. 거기다가 무기까지 탈취해 무장까지 하고 나섰으니 보통 과격한 게 아니지요.”

다른 선생이 말을 이어받았다.

시국도 뒤숭숭하고 불황으로 살기도 어려운데 그런 식으로 과격하게 폭동을 일으켜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어요. 자기들이 온 나라 정권을 잡겠다는 건지 뭔지.”

또 다른 선생이 동조하고 나섰다.

글쎄 말이지요. 이렇게 폭동을 일으키면 나라만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아니겠어요. 그리 되면 딴 지방 사람들한테 원망이나 들었지 누가 좋아하겠어요.”

처음 말을 꺼낸 선생이 말했다.

그 사람들 그동안 정치에 불만이 쌓일 대로 쌓여 있었잖아요. 자기네들을 차별하고 푸대접한다고. 그 불만을 맘껏 터뜨리며 총 쏘아대는 것 아닙니까.”

네 번째 선생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럼 정권이 그쪽으로 갈까요?”

두 번째 선생이 흥미를 드러냈다.

그거 어림없지요. 지금이 봉건시댄가요? 폭도들이 정권 잡게. 괜히 딴 지방 사람들한테 인상만 나빠지고 주저앉게 되겠지요. 계엄군들이 그걸 보고만 있겠어요? 먼 지방이니까 아직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곧 병력이 투입되면 진압 안 되고 어쩌겠어요. 한국군 막강한 거야 월남전에서 이미 유감없이 보여줬는데.”

네 번째 선생의 말에 신명이 붙었다.

선생님들. 무슨 말들을 그렇게 무책임하게 합니까.”

민경섭은 듣다못해 입을 열었다.

무책임? 그게 무슨 소리요?”

네 번째 선생의 목소리에 각이 섰다.

. 무슨 근거로 폭동이고 폭도라고 하는 겁니까?”

민경섭의 어조에도 날이 섰다.

아니. 민 선생은 이 신문도 안 보고 텔레비전도 안 보고 살아요?”

네 번째 선생이 신문을 들어 흔들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좋아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그럼. 이런 상황에서 신문이고 방송을 다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뭐라고요? 아니. 신문. 방송을 안 믿으면 뭘 믿어요? 그럼. 민 선생은 신문이고 방송이 거짓말한다 그거요?”

참 답답하군요. 지금은 비상계엄 상황이고. 포고령은 신문. 방송의 보도를 사전검열 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어요. 그럼 다 검열을 받고 나온 신문. 방송의 보도가 사실 그대로겠어요? 그건 객관적 사실의 보도가 아니라 검열하는 쪽의 일방적 입장만 나타내고 있는 겁니다. 우린 지금 눈도 귀도 입도 다 막힌 상태에서 계엄사의 일방적인 주장만 보고 듣고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민경섭은 선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사태의 진상을 물었을 때 원병균이 한 말이었다.

지금 진실은 다 가려져 있어. 계엄사에서는 이미 광주를 봉쇄했기 때문에 아무도 갈 수가 없는데. 현장에 가보지 않고는 진실을 알 수가 없어. 민간인들이 왜 총을 들었겠느냐. 그게 문제야. 그들이 든 M1이나 칼빈이란 총들은 계엄군의 M16에 비하면 장난감에 불과해. 그걸 알면서 그들이 총을 들었을 때는 그러지 않을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거야. 계엄군을 향해 총을 든 것은 죽기를 각오한 건데. 그 이유는 전혀 밝혀지지 않고 폭동으로. 폭도로 몰아가고 있어. 신문이나 방송들은 계엄사의 앵무새 노릇을 하고 있는 거지.”

원병균의 말이었다.

그 말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군요. 역시 민 선생은 사회 담당이라 우리하고는 달라요.”

첫 번째 선생이 말했고.

글쎄요. 이거 섣불리 생각할 문제는 아닌 것 같소. 상황이 너무 복잡하니까.......”

세 번째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지만 민간인들이 총을 들고 나선 건 옳지 않아요. 어쨌거나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건 그쪽 사람들이 너무 과격해서 그래요.‘

네 번째 선생이 말했다.

그때 점심시간이 끝나는 벨이 울렸다. 선생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경섭은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네 번째 선생에게 마음을 닫았다.

 

가게에서 담배를 사가지고 나오던 이용진은 그 옆에 붙은 복덕방에서 노인들 서넛이 목청 돋우어 말싸움하는 것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 신문이고 방송에서 폭도라고 했으면 폭도지 더 말해 뭘 해.”

이 말이 발길을 붙들었던 것이다.

안녕들 하세요? 무슨 얘긴데 그렇게 기운들을 쓰고 그러세요?”

이용진은 복덕방 안으로 고개를 디밀며 인사했다.

. 이 대장. 마침 잘 오셨소. 이 늙은이가 글쎄 광주사람들을 폭도라고 해대는데. 이 대장은 어찌 생각하시오?”

도수 높은 안경을 낀 노인이 응원을 청하듯 말했다.

아 이 대장. 어서 이리 와 앉으시오. 저 영감탱이가 두말할 것 없는 걸 가지고 빡빡 우기고 든다니까. 제놈 사돈네 팔촌이 광주에 사는 것도 아니고. 신문이고 방송에서 폭도다 했으면 폭돈 거지 왜 그쪽 사람들 편을 들고 나서는지 모르겠어. 이 대장은 어찌 생각하시오?”

복덕방 주인이 이용진에게 자기 옆자리를 권하며 또 응원을 청하고 있었다.

그럼 아저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이용진은 입장이 난처해서 수염 기른 또 한 노인에게 물었다.

글쎄요. 이 늙은이 말을 들으면 이 늙은이 말이 맞은 것 같고. 저 늙은이 말을 들으면 저 늙은이 말이 맞은 것 같고. 어찌 종잡기가 어렵구랴.”

수염 기른 노인이 다른 노인을 번갈아 보며 희멀건하게 웃었다.

이 사람아.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아까는 내 말이 옳은 것처럼 해놓구선.”

복덕방 주인이 소리쳤다.

어디 내가 딱 잘라서 말했나. 자네가 자꾸 신문이나 방송을 안 믿으면 뭐를 믿느냐. 신문이나 방송이 거짓말할리 있느냐. 하니까 그렇기도 하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 거지.”

수염 기른 노인이 표나게 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변명하듯 말했다.

이것 봐. 아까도 말한 거지만 말야. 자네 6.25때 그렇게 호되게 당하고도 신문이고 방송을 믿어? 그때 방송에서 뭐라고 떠들어댔어? 국군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서울을 사수할 테니 시민여러분들은 하등 동요하지 말고 생업에 충실하라고 했잖아. 그런데 알고 보니 어찌 됐어? 그 방송이 나올 때는 벌써 이승만이는 한강을 건너 대전으로 줄행랑을 치고 있었고. 한강다리는 폭파된 뒤였잖아. 그 빌어먹을 놈에 방송 때문에 피난도 못가고 얼마나 죽을 고생을 했어. 그런데도 방송을 믿어?”

안경 낀 노인이 기세등등하게 주인을 몰아붙였다.

똑같은 소리 자꾸 떠들면서 잘난 척 좀 작작해. 그때는 전시였으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고 지금은 평화시니까 다르잖아.”

주인도 지지 않고 맞대거리를 했다.

자네야말로 잘난 척하지 말고 똑똑히 알아둬. 지금이 평화시는 뭐가 평화시야. 계엄시지. 계엄시가 뭔지 몰라? 전시 다음 가는 위험시다 그런 말씀이야. 그러니까 저 위의 입맛대로 얼마든지 방송해 댈 수 있어. 안 그렇소. 이 대장?”

안경 낀 노인은 또 이용진에게 응원을 청했다.

. 두 분이 시국에 관심 쓰는 것은 좋은데요. 계엄 때는 이런 다툼하는 것도 법에 걸려요. 그거 있잖아요. 유언비어 유포라는 거. 그러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두고 보세요. 이런 말 크게 해대다가 형사가 엿들어봐요. 괜히 오라 가라 골치 아프게 된다구요. 그러니 그냥 사이좋게 장기나 두면서 시간 보내세요.”

이용진은 이렇게 얼버무리며 노인들에게 담배를 권했다.

그럼. 그렇지. 서로 우김질 해봐야 떡이 나와. 밥이 나와. 괜시리 없는 기운만 파하지. 이젠 사람 죽이고 어쩌고 하는 얘긴 당최 꺼내지를 말어. 하도 흉한 세상만 보고 살아서 이젠 지긋지긋해.”

수염 기른 노인은 손사래를 쳤다.

이용진은 재건대로 올라가며 마음이 께름칙했다. 속으로는 유일표에게 들은 말을 속 시원하게 해버리고 싶었다. ‘그건 거짓말이다. 군인들이 정권을 잡으려고 조작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이 말을 했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복실이네 좁은 자취방에 저녁상을 놓고 네 명이 둘러앉았다.

어머 얘들아. 오늘 새로 들은 소문인데 있잖니. 군인들이 글쎄 얼굴을 못 알아보게 시체들 얼굴에다 페인트를 칠해서 사람들 모르는 곳에다 파묻고 있대잖니.”

미자가 숟가락으로 콩나물국을 뜨며 말했다.

. 나도 새로 들은 건데 말야. 밤에 트럭으로 시체를 실어내 아무 표도 안 나게 파묻고 있다는 거야. 아유. 끔찍해.”

실눈의 아가씨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근데 왜 거기 사람들은 총을 들고 나서니 나서길. 되지도 않을 싸움 그렇게 해서 자꾸 죽어가면 어떡해. 용감한 건지 미련한 건지 모르겠어.”

주걱턱의 아가씨가 혀를 찼다.

그래 글쎄. 군인들한테 덤벼서 어떻게 이기겠어. 그냥 가만히 있어야지. 그 사람들이 답답해 죽겠어.”

실눈의 아가씨가 밥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소리들을 그리 속 편케 해? 군인들이 너무 무지막지하게 사람들을 죽이니까 어쩔 수 없이 총을 들었다는 소문 다 듣고도 그런 소리를 해?”

밥만 먹고 있던 복실이가 쏘아붙였다.

근데 말야. 그 말도 좀 이상하지 않니? 그동안 가만히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처음에 데모를 얌전히 했는데도 그랬을까 싶어. 그러니까 군인들이 화나고 열 받치게 데모를 심하게 한 거 아닐까?”

주걱턱 아가씨의 말이었다.

그럼 광주사람들이 잘못했다 그거야?”

복실이의 목소리가 곤두섰다.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지.”

너 그따위 소리는 아예 하지를 말어. 우리가 노조를 하려고 할 때 무슨 행동을 심하게 해서 간부고 구사대가 그렇게 인정사정없이 몰아치고. 못된 짓하고 그러던? 그리고. 경찰에서는 블랙리스트 돌려대고? 그게 아니잖아. 힘이 있는 쪽에서는 자기들한테 조금만 손해가 된다 싶으면 아예 초장부터 씨를 말리려고 들잖아. 광주에서도 마찬가지야. 아예 데모를 못하게 하려고 처음부터 무지막지하게 해댄 거야.”

복실이의 어조는 강경했다.

그렇지만 민간인들이 총을 훔쳐서 군인들한테 대들면 어떡해. 그래 가지고 어떻게 하자는 거야? 나라만 시끌시끌해지고. 불경기는 더 심해져 우리 같은 것들 살기만 더 힘들어지지.”

얘 좀 봐. 넌 사람들이 그렇게 분하고 억울하게 죽어가고 있다는 소문 다 들으면서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거냐? 애가 어찌 그리 인정머리도 없고 생각하는 게 이 모양이냐.”

복실이가 그 아가씨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넌 같은 전라도라고 그러는지 너무 그쪽편만 들어. 아무리 같은 고향이라도 너무 그러는 건 좀 곤란하잖아.”

뭐라구? 너 그거 지금 말이라고 하니? 내가 뭘 너무했어?”

복실이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왜들 이래. 이러다가 쌈 나겠다.”

미자가 끼여들었고.

그만들 해. 우리가 뭘 아는 게 있다고.”

실눈의 아가씨가 울상을 지었다.

그래.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왜 그 사람들보고 세상이 폭도라고 하겠니? 그 사람들이 잘못하는 게 있으니까 그럴 것 아니겠어? 근데 넌 무조건 그쪽 편만 들고 나서니까 내가 그런 말 안 하게 생겼어?”

주걱턱의 아가씨가 밀리지 않고 대들었다.

폭도? 그래. 그 사람들 폭도다. 그렇게 믿고 싶으면 그렇게 믿어.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는 건 자유니까.”

복실이는 웃기까지 하며 너무 쉽게 말을 끝내버렸다. 그녀는 노조 지도부에서 들은 말을 다 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춘선이는 이미 말상대가 아니었다. 춘선이가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나마 알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복실이는 춘선이를 경멸하며. 방을 딴 데로 옮기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김명숙은 박보금네 술집 특실에서 두 남자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근데 말이죠. 왜 전라도 사람들을 보고 하와이라고 하는 거죠? 서울 생활을 하면서 그 말을 수없이 들었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기분 나쁘고 속상했는데. 요새 또 전라도 것들이라는 말과 하와이라는 말이 부쩍 심해지고 있잖아요. 근데 우리 전라도사람들한테 왜 그렇게 부르느냐고 물어봐도 속 시원하게 아는 사람이 없어요.”

김명숙은 최 감독과 정 부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글쎄요. 나는 그런데 무식해요. 난 서울 출신이라서 그런지 어쩐지 경상도 전라도 해가면서 지방색 드러내고 편 가르는 것 딱 질색이고. 절대 반댑니다. 그런 잡학에는 정 부장이 전문이잖소? 어디. 나도 이 기회에 좀 알아둡시다.”

최 감독이 옆 사람에게 잔을 건네며 웃었다.

나도 그놈의 지방색은 이제 넌덜머리가 나요. 박 통이 갔으니까 그놈의 차별이 싹 없어져야 하는데. 손바닥만한 놈의 나라에서 망할 징조지요. 근데 그 하와이라는 것 말이지요. 내가 알기로는 이래요. 해방이 되고나서 남쪽의 제일 큰 정적 두 사람은 이승만과 김구였어요. 이승만은 미군정의 도움을 받으며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고 있었고. 김구는 민족을 분단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반대하며 서로 팽팽하게 맞섰어요. 그런데 김구는 미군정의 지지를 못 받는 입장이니까 그 대신 대중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전국 순회강연을 나섰어요. 김구는 가는 지방마다 환영을 받았는데 특히 전라도 지방에서는 그 환영이 아주 열렬했어요. 그게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강연은 큰 도시에서만 하게 되어 있었는데. 작은 군에서 사람들이 몰려나와 겹겹이 기찻길을 가로막는 바람에 김구는 예정에 없던 강연을 하고서야 기차가 움직일 지경이었어요. 그런 동태가 이승만에게 빠짐없이 보고된 것은 말할 것도 없지요. 그런 보고를 다 받은 이승만이 기분이 나빠져 한마디 내뱉은 것이 하와이놈들 같으니라구!였어요.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일제시대에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한다고 미국 본토에 있다가 나중에 우리 동포들이 많은 하와이로 옮겼어요. 그런데 거기에는 이미 박용만이라는 사람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우리 동포들을 모아 독립투쟁을 할 군인들을 양성하고 있었어요. 이승만은 독립군보다는 외교 능력으로 독립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하와이에 가자마자 박용만과 대립하기 시작했어요. 두 사람을 따라 동포들이 갈라지기 시작했는데. 결국에는 이승만 쪽에 몇 사람이 남지 않게 되어 이승만은 궁지에 몰리고 말았어요. 이승만은 박용만 쪽으로 쏠린 동포들에게 감정이 많았는데. 김구를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전라도사람들이 옛날 하와이의 동포들처럼 보인 겁니다. 그 다음부터 전라도사람들을 하와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정 부장이라는 사람은 입담 좋게 이야기하고는 맥주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것 참 재미있는 얘길세. 김구는 비운에 가고. 이승만이 승자가 되었으니 그 12년 동안에 전라도사람들에 대한 나쁜 인식을 전국적으로 퍼뜨리고 차별하고 할 수 있었겠군. 그거 아주 일리 있는 얘기요.”

최 감독이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 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서울에 전라도사람들이 특별히 많지 않았는데. 그보다 10년 전부터 서울 전체에 전라도사람들을 유난히 나쁘게 보는 인식이 퍼져 있었다는 것은 사회학적 연구 대상이기도 하죠. 결국 서울사람들 태반은 전라도사람들을 겪어보지도 않고 험담하고 불신했던 셈인데. 그 배경에는 그런 정치적 영향력이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가기도 하지요.”

정 부장이 오징어다리를 질겅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승만 시대에 그렇게 당하고. 박정희 시대에는 그보다 더 심하게 당하고. 박정희가 죽었는데도 지금 또 당하고 있으니 우리 전라도사람들은 분하고 억울해서 어떻게 살아요. 글쎄.”

김명숙은 술기운 번진 눈으로 하소연하듯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 그 말 듣고 보니 그렇군요. 결과적으로 보니까 이승만은 전라도에 대한 나쁜 인식을 뿌리 깊게 심었고. 뒤따라 박정희는 모든 권력기관마다 자기네 사람만 편파적으로 쓰면서 전라도 차별을 철저하게 조직화하고 구조화시켰어요. 누구나 다 아다시피 그 차별과 괄시가 얼마나 심했어요. 그건 참 잘못 된 거지요.”

최 감독이 혀를 차며 땅콩을 까서 입에 넣었다.

박정희 그 사람 대통령을 하기 전까지의 생애도 한마디로 하기 어렵고 복잡한데. 대통령을 한 동안의 공과도 한마디로 하기 어렵게 복잡해요. 그런데 잘못한 것 중에서 유신독재 다음으로 꼽혀야 하는 게 바로 그 지방색을 뿌리깊게 박은 지역 차별주의지요. 그것도 독재체재를 유지해 나가기 위한 방편으로 필연적인 산물인데. 어쨌든 그건 박 통이 크게 잘못한 거고. 나라꼴을 위해서도 하루빨리 일소시키지 않으면 안 돼요.”

정 부장이 술 마신 사람답지 않게 심각하게 말했다.

저는요. 텔레비전 드라마는 통 안 보고 살아요.‘

김명숙이 정 부장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고.

아니. 영화는 그리 좋아하면서 왜 드라마는 안 봐요? 물론 영화하고 텔레비전 드라마는 다르지만.”

최 감독이 의아해 했다.

. 감독님은 제 심정 잘 모르실 거예요. 글쎄. 양장점에 옷 맞추러 오는 돈 많은 손님들 중에 경상도말 하는 여자들이 자꾸 많아지는 것도 슬그머니 속이 꼬이고 사르르 기분이 상하고는 하는데.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 으레껏 잘살고. 점잖고. 좋은 사람들은 경상도 말을 쓰고. 식모에. 깡패에. 나쁜 사람들은 거의가 전라도말을 쓴다니까요. 텔레비전 보는 건 재미있자고 보는 건데. 화나고 분하기만 한 그따위 드라마를 뭐 하러 봐요.”

술기운 밴 김명숙의 얼굴에는 정말 분함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거 하나도 화나고 분할 것 없어요.”

정 부장이 담배연기 후우 내뿜으며 픽 웃었다.

네에?”

김명숙이 파르르 기를 세웠다.

뭐 오해하지 마세요. 나도 드라마까지 그 꼴이 되고 있는 걸 보고 우리 잡지에서 한번 다뤄볼까도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그걸 달리 보면 꼭 나쁜 것만도 아니더라구요. 왜냐하면 경상도와 전라도가 그런 식으로 차별되고 있는 건 엄연한 현실이고. 드라마까지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은 그 부당한 차별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 있으니까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30년쯤 지나서 그때 지방색이 없어졌는데. 자식들에게 30년 전에 이런 식으로 지역 차별을 했다 하고 말로 하면 누가 믿겠어요. 그럴 때 그런 드라마를 보여주면 얼마나 실감나고. 얼마나 좋은 증거물이 되겠냐 그겁니다.”

어머. 그렇기도 하네요.”

김명숙이 반색을 했고.

이런. 누가 잡지쟁이 아니랠까봐 별 희한한 소리 다하고 앉았네. 30년 후까지 그런 필름이 남아 있어야 말이지요. 당하는 사람들은 당장 죽겠는데.”

최 감독이 사과를 와삭 베물었다.

말하자면 그렇다 그거지요. 어쨌든 방송국에서까지 그런 식으로 지방색을 드러내고 있는 건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간부급에 경상도 출신들이 많아서 그런가. PD들이 저질이라서 그런가. 극작가가 얼빠진 것들이라 그런가. 하여튼 한심한 일이지요.”

정 부장이 술잔을 김명숙에게 내밀며 씁쓰름하게 웃었다.

. 정 부장 생각보다 순진하시네. . 이 얘긴 안 하려고 했는데 정 부장이 그리 말하니까 안 할 수가 없소. 어느 방송국에서 어떤 전라도출신 작가의 작품을 단막극으로 만들었어요. 그런데 방영 며칠 전에 중정에서 나서서 전라도말은 안 되니까 모두 경상도말로 바꾸라고 했어요. 그 작품 무대가 전라도라서 주인공들이 전부 전라도말을 쓰고 있었거든요. 그러니 PD 가 어떻게 됐겠어요. 부랴부랴 작가한테 전화를 걸어서 양해를 구하려고 했지요. 그런데 작가가 한마디로 거부하며. 방영을 하지 말라고 해버렸어요. 그러자 PD만이 아니라 편성국 전체가 난감해지고 말았어요. 다음 작품은 안 돼 있지. 90분짜리를 다른 것으로 바꿔칠 것도 없지. 그런데 그 극은 예정대로 방영이 됐어요. 전부 경상도 말로 바뀌어.”

아니 그게 정말이에요?”

정 부장이 벌떡 허리를 세웠고.

어머나. 어머나.......”

김명숙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게 우리 현실이오. 바로 작년에 벌어진 일인걸 뭐.”

최 감독이 술잔을 비웠다.

아이고. 이거 다 망해버린 나라네.”

정 부장이 어깨를 부리며 한숨을 토해냈다.

얘기들 재미있으세요? 겨우 빠져나오느라고 혼났네.”

술기운 불콰한 박보금이 들어서며 환하게 웃었다.

재미 하나도 없소.”

최 감독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어머. 왜요?”

우리 지금 민족과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심각한 토론을 하고 있기 때문이오. 자아. 술이나 받으시오.”

정 부장이 마치 주먹질을 하듯이 박보금 앞으로 술잔을 불쑥 내밀었다.

민족과 국가요? 아 참. 저쪽 방에서 들은 얘긴데 광주 폭도들 곧 진압될 거래요.”

. 말조심해! 폭도는 누가 폭도야. 너 경상도라서 그따위로 말하는 거야?”

박보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명숙이 빠락 소리 질렀다.

어머나.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네가 전라도였지. 미안해. 미안해. 하도 그 말을 많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나온 거야. 취소야. 취소. 정말 미안해. 우린 그냥 친구잖아. 친구.”

박보금이 김명숙을 안았다.

난 말야. 전라도 욕하는 걸 들으면 꼭 우리 부모 욕하는 것 같단 말야. 그렇잖아도 분하고 서러워 죽겠는데 너까지 그러면 어떡해. 나 요새 세상 살고 싶지가 않아. 너 알아. 내 맘?”

김명숙이 박보금을 마주 안으며 울먹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미안해. 알아. 알아. 다 알아.”

박보금이 김명숙의 등을 다독거렸고. 두 남자는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상재야. 너 신문 봤지? 내일부터 광주에 갈 수 있는 거.”

유일표는 전화로 말했다.

. 봤어.”

이상재의 목소리도 유일표만큼 침울했다.

나 내일 광주 간다.”

혼자서?”

.”

그럼 나도 함께 가자.”

너도? 출판사 안 바뻐?”

그까짓 일이 문제가 아니잖아.”

알았어. 그럼 내일 아침 첫차야.”

첫차? 기차냐?”

.”

알았어. 서울역 대합실에서 만나자.”

그래. 그럼 들어가.”

이튿날 아침 대합실에서 이상재를 만난 유일표는 깜짝 놀랐다.

아니. 선배님께서 웬일이십니까?”

가봅시다. 그건 광주만의 문제가 아니잖소.”

원병균이 유일표의 팔을 잡았다. 기차는 한강 철교를 지나고 있었다. 그들은 말없이 한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강은 영겁의 세월을 담고 긴긴 흐름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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