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정이식
“할머니...”
베개를 품에 안은 은진이가 들어옵니다.
침대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던 할머니가 은진이를 반깁니다.
“어서 온, 우리 은진이 또 동생하고 다투었구나.”
입을 삐죽이며 은진이는 할머니의 침대에 벌렁 누웠습니다.
“엄마도 아빠도 다 미워. 은영이만 좋아하구.”
“에그, 우리 은진이는 언제 철이 들꼬?”
할머니는 일어나 앉으며 엎딘 은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후드득.”
저녁 무렵부터 내리던 눈이 쌓인
뒤뜰 대추나무가 가지의 무게를 못 이겨 허리를 휘는 신음을 간간히 내지릅니다.
“부엉.”
멀리서 솔부엉이 우는 소리도 들려옵니다.
“할머니. 옛날이야기 해줘요.”
돌아누우며 할머니의 무릎을 벤 은진이의 눈가에 반짝,
아름다움 보석처럼 영근 눈물이 맺혀 있습니다.
“우리 은진이 할머니 이야기 들으러 올 줄 알았지. 오늘은 할머니가 우리 은진이만 할때 이야기를 해줄까요?”
“할머니도 어린 시절이 있었어요?”
“그럼, 아니면 할머니는 뭐 하늘에서 뚝딱 떨어진 줄 알았나요? 할머니도 엄마 아빠가 다 계셨지요. 지금은 안 계시지만. 할머니는 또 막내 이어서 오빠 언니는 있어도 은진이처럼 동생은 없었어요. 그래서 동생 있는 우리 은진이가 세상에서 제일 부럽답니다.”
“진짜요? 할머니, 고맙습니다.”
“은진이는 참 착하지, 칭찬을 들으면 고마워할 줄도 알고.”
“할머니 어서 이야기해줘요.”
칭얼대며 할머니의 허리를 껴안는 은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할머니는 마음속에 고인 간직한 소중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의 보따리를 끌렀습니다.
하얀 눈들이 할머니의 이야기를 같이 들으려 몰래몰래 창틀에 내려앉고 있는 깊은 밤에요.
그날은 새벽부터 바람이 문풍지를 쥐어짜며 매섭게 몰아쳤어요.
오빠는 추운 날이고 또 방학이지만 당번이라 학교에 가야 한다며 두꺼운 옷을 껴입고 있었지요.
“오빠야, 월남방망이 먹어봤어?”
문풍지를 밀어내며 들어온 바람이,
심지를 잔뜩 돋은 호롱불 위로 검은 끄름을 밀어내고 있던 새벽이었답니다.
탱탱한 불빛을 창호지로 쏘아붙이며 돌아서는 첫 버스를 타려고 집을 나서려 문고리를 잡던 오빠는 월남방망이 소리에 난데없다는 듯 돌아섰어요.
"월남 방망이? 음, 덕이는 못 먹어보았지?"
학교에 들어가기 직전이었으니 아마도 내가 우리 은진이 나이쯤 되었을 겁니다.
4학년이었던 오빠는 십 리도 더 되는 먼 거리의 읍내 학교를 다녔어요.
그때에 막대기에 둥그런 알사탕을 매달은 월남방망이라 부르는 사탕이 유행하였어요,
월남 전쟁에서 월맹군이 사용하던 막대수류탄을 본 따서 만든 사탕이지요,
이름이 묘하여 어린이들에겐 폭발적인 인기가 있었어요.
사탕 한 개 사먹을 형편이 못되는 가난도 문제이지만. 몇 집 안 되는 산촌 마을엔 가게도 없어서 이미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월남방망이를 말만 들었지 우린 구경도 할 수 없었어요.
읍내엔 가게도 많아서 어쩌면 오빠가 한 개 사줄지도 모른다는 쓸데없는 내 욕심이 오빠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이랍니다.
“좋았어. 기다려봐 덕이야, 오빠를 믿어.”
오빠는 생각 끝에 주먹을 불끈 쥐며 내게 싱긋 웃어 보이곤 학교로 떠났어요.
그때부터 홍당무처럼 붉어오는 내 가슴과는 달리, 흐리기만 하던 하늘은 자꾸 아래로 내려왔어요.
오후 들며 좁쌀 보다 작은 싸락눈이 바람을 타고 춤을 추며 산이고 들이고 마구 쏟아져 내려 왔어요.
“드르릉, 드르릉.”
눈바람을 못이긴 문풍지가 매섭게 울어댈 쯤에는 싸리울을 넘어온 많은 눈들이 장독인지 눈인지 분간을 모를 만큼 켜켜이 쌓여 갔어요.
바람은 또 왜 그리 차가운지 살이 떨어지도록 시려서 바깥을 나가볼 엄두를 어머니도 나도 못 내고 있었지요.
문창살에 빗대어 걸쳐놓은 손바닥만 한 작은 유리로만 읍내에서 돌아올 오빠를 기다렸답니다.
"섭이가 차를 안탔네, 이 추운 날씨에."
바퀴에 체인을 감고
산돼지처럼 으르렁대며 도착한 마지막 버스를 보며 어머니의 걱정은 깊어만 갔어요.
몸을 움츠린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 하얀 눈발 속으로 모두 사라지도록 오빠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랍니다.
"엄마, 눈이 왜 자꾸 내리지?"
월남 방망이에의 욕심에만 눈이 어둡던 나는 어머니의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지요.
그저, 댓돌위에도 장독대에도 넙죽하게 쌓여가는 눈들이 신기하게만 보였을 뿐이랍니다.
"하나님은 헐벗은 나무들이 추울까봐 하얀 솜이불을 내려주고 계신거야."
어머니는 나무 한그루 풀 한 포기에도 생생한 숨결을 불어넣을 줄 아는 시인이셨답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참다운 사람으로 사시길 희망하는 어머니의 그런 참을성에도 한계가 있었어요.
더 이상 오빠를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했어요.
사기등잔에 불을 밝히고 사그라지는 화톳불을 뒤적일 때만 해도 막차가 오기전이라 어머니는 담담하게 앉아 있었지요.
처마 끝에 걸린 무청과 엊그제 장날 사다 걸어놓은 양미리 고기두름을 구별치 못할 만큼 깔린 어둠이 사방에 널려가자 어머니는 나를 불러 일으켰어요.
"덕이야, 옷 두둑이 입고 엄마 따라가자, 아무래도 네 오빠가 야싯골 할미 바위에 엎쳐 있을 것 같구나."
읍내로 빨리 가려면 대낮에도 여우가 나온다는 야싯골을 지나야 하는데 그 초입엔 커다란 바위가 있고 사람들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라며 할미바위라 불렀어요.
할미바위는 작은 산처럼 커서 그 위에서면 멀리 있는 읍내가 훤히 한 손안에 들어왔지요.
겨울이면 읍내 쪽에서 들어오는 찬바람을 막아주는 상당한 이로움을 주는 그런 좋은 바위였어요.
어머니는 눈바람을 맞으며 읍내에서 돌아오던 오빠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그 바위 어디에선가 웅크리고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셨던 것이지요.
우리 집은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어머니는 이웃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였어요.
그래서 어른이지만 혼자서 눈 내리는 밤길을 가려니 조금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지금이야 나이가 많이 들어서 산길은커녕 들길조차도 걷기 버겁지만 그때의 나는 어려도 늘 산을 타며 놀아서 아무리 먼 길이라도 겁을 내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이런 나를 누구보다 더 잘 아셨던 것이랍니다.
하얀 눈빛이 산길을 밝혀주어서 어렵지 않게 할미바위에 올 수 있었지만, 바위산을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무섭게 들려와 너무 무서워 나는 어머니 옷자락을 꼬옥, 붙들며 떨어지지 않으려 애를 썼어요.
이런 나에게 신경을 쓰며 바위틈새를 훑으며 돌아가던 어머니가 커다란 고목나무아래에서 우뚝 멈추어 서며 귀를 모았어요.
"엄마. 엄마."
눈 위를 스쳐가는 오빠의 작은 신음소리를 붙잡은 어머니는 둥치 뒤에서 쪼그린 채 유령처럼 눈을 덮어쓰고 있는 오빠를 드디어 찾아내었어요.
들판의 눈바람을 몽땅 뒤집어쓰며 달려오던 오빠는 할미바위에 이르자 힘이 다 빠졌나봐요.
집이 눈에 보이지만 가지 못하고 고목의 벌어진 틈새에 몸을 의지하며 쓰러져 버린 것이랍니다.
희미하나마 정신을 놓지 않으려 엄마를 부르며 마지막 용기를 모으던 오빠는 덥석 끌어안는 엄마를 보며 스르르, 고개를 떨어뜨렸어요.
얼음보다 더 차가운 오빠를 들쳐 업은 어머니는 발목을 완전히 덮는 눈길을 마다 않고 빠르게 달려갔어요.
오빠의 도시락 가방만 날름 옆구리에 낀 내가 미처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어머니는 날렵했어요.
"엄마가 눈 오기 전에 버스 타라고 안 하던? 엄마가 준 차비는 어쩌고 걸어 온 거야."
아랫목에 오빠를 눕히고 온몸을 마른 수건으로 비벼대는 어머니의 두 볼엔 뜨거운 눈물이 샘물처럼 솟고 있었어요.
그렇게 한참을 비벼대자 어머니의 정성이 하늘을 울렸는지 오빠의 언 몸에 발그레한 빛이 돋아나기 시작하였어요.
그때에야 감았던 눈을 뜨며 오빠는 어머니와 나를 알아보았지요.
“엄마!”
“그래, 그래, 우리 아들 섭이야, 넌 이제 살았어. 걱정마라 어미가 있고 또 네 동생 덕이도 여기 있어.”
그런데 오빠는 볼이 꽉 얼어서 엄마 말도 잘하지 못하면서도억지로 머리를 들고 무언가를 자꾸 찾았어요.
“이거 찾는 거니?”
어머니는 오빠의 생각을 미리 읽고 있었어요.
어머니는 움켜쥐고 있던 도시락을 내게서 앗아서 오빠에게 내 밀었지요.
도시락을 보자 오빠의 굳었던 얼굴이 펴지며 와중에도 웃음이 흘러 나왔어요.
채 오므려지지 않는 손으로 도시락을 끌러서 나를 바라보며 오빠는 “짠.” 하고 손을 치켜들었어요.
아! 살아오며 그날처럼 감동을 먹은 적이 내게 어디 있었을까요?
오빠의 손에는 월남방망이가 들려 있었답니다.
나무젓가락처럼 긴 작대기 끝에 아가 주먹만 한 붉은 사탕이 달린. 오빠가 아침에 약속하였던 그 월남방망이가 말이에요.
동상에 걸릴지도 모르는 오빠의 차가운 손은 아랑곳없이, 이 철모르는 소녀는 그저 달콤한 사탕에의 유혹에만 빠져서 얼마나 기쁘고 또 세상 모두를 얻은 것처럼 마음이 들떠 버렸는지요.
오빠의 도시락 통에서 나온 월남방망이를 보면서 치솟는 울음을 감당 못하고 무릎사이에 얼굴을 묻고 어깨가 흔들리도록 깊이 울고 계시던 어머니를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어요.
어디 그 잘못만 있을까요?
동생인 내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버스비로 월남방망이를 사고, 눈보라가 치는 그 먼 길을 오빠가 걸어왔다는 사실도 나는 알지 못하였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세월이 훨씬 지나서, 이 세상에 오빠가 계시지 않을 때에야 자신의 목숨과 바꾸어도 좋을 만큼 동생을 사랑한 오빠의 마음을 제대로 읽게 되었으니, 내가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후회처럼 자꾸 밀려온답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오빠나 형 치고 자신의 동생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이 어디에 있을까요?
가끔씩 오빠와 다투기도 하고 그래서 오빠를 미워도 했지만, 가족은 언제나 영원한 것이어서 밀물에 밀려드는 바닷물처럼 나이든 지금에도 아름다운 감동으로 다가오곤 한답니다.
은진이는 어느새 꿈나라에 가 있습니다.
할머니의 무릎위에서 새근거리며 머언 꿈속의 동화나라를 찾아 떠나갔습니다.
이제는 동생과 다시는 다투지 않으리란 약속을 하면서요.
“후드득.”
할머니의 이야기를 같이 들으려
창틈에 몰려있던 눈들이 그제야 하나둘 떨어져 내립니다.
조용한 창가에 어른거리는 나무가 할머니처럼 모두 하얀 머리를 하고 있습니다.
순결하고 고귀한 그리고 아름다운 하얀 머리를.
이렇게 겨울밤은 깊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