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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3-4

15. 아부지럴 원망 말그라

대학병원에는 넓은 현관에서부터 아픈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환자들만이 아니라 그 보호자들까지 딸려 있어서 번잡은 더 심해지고 있었다. 유일표는 사람들 사이를 피해가며, 이건 동대문시장이나 고속버스터미널하고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분명 다른 것이 있었다. 동대문시장이나 고속버스터미널에는 생기 넘치는 와글거림과 왁자지껄함이 있었다. 그러나 대학병원의 대기실에는 풀죽고 근심 어린 모습 모습이 음산한 기운에 짓눌려 있었다.

웬 병자들이 이리도 많은가.......’

목발을 짚은 환자를 피해 엘리베이터를 타며 유일표는 어제 했던 생각을 또 했다. 불결한 공중변소에 들어갈 때면 반사적으로 '에이, 냄새!' 하는 것처럼 대학병원에 들어설 때마다 그 생각은 불쑥 떠오르곤 했다. 그런 다음에야, 병원이란 원래 환자들의 집합소라는 것을 무슨 어려운 문제나 되는 것처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리고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환자 같다는 착각도 바로잡게 되었다. 10층이 넘는 병원의 층층마다 입원실이 빈틈없이 차 있었고, 그 입원실마다 환자들이 가득했지만 세상에는 아픈 사람들보다 아프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유일표는 어머니의 입원실이 있는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렸다.

"나야 햇병아리라서 잘 모르는데, 과장님 말씀이 어머니 병세는 꽤 오래된 것 같다고 하던데?"

고등학교 동창인 레지던트는, 너 그걸 몰랐어? 하는 투로 말하며 쳐다보았었다. 뜻밖에 하얀 의사복을 입은 동창을 만나 열패감에 쌓여 있던 터에 그 말을 듣자 창피스러움까지 끼쳐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머리가 아프다며 '명랑'을 자주 먹었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머리 아픈 데 먹는 약인 빨간 포장의 '명랑'을 어머니가 복용한 것은 꽤나 오래된 일이었다. 어머니는 머리가 아플 때만이 아니라 가슴이 아프다면서도 그 약을 먹곤 했다. 그 약은 신통하게도 어머니를 앓아 눕지 않게 붙들었다. 그러나 이번에 알고 보니 그 약은 중독성이 강해 좋은 약 취급을 받지 못했다. 유일표는 동창을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환자를 퇴원시키기 전에 보호자가 담당과장을 만나게 되어 있으니 그를 피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너 지금 뭘 해?.

서로를 알아보고 악수를 한 다음 당연한 순서인 것처럼 동창이 이렇게 물었다. 좀 이상한 느낌이 드는 듯 동창의 눈길은 자신의 위아래를 더듬고 있었다. 하얀 가운에 '레지던트 이교섭'이라고 박음질된 글씨가 유난히 도드라지며 빛나 보이는 동창의 모습에 비해 검정 바지에 소매를 아무렇게나 걷어 올린 헌 와이셔츠 차림인 자신의 모습은 그대로 달라진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고 있었다.

", 그럭저럭 그렇지."

이렇게 얼버무리며 유일표는 그 어느 때 없이 강한 열패감을 느꼈다. 길거리나 다방 같은데서 등창들과 마주칠 때와는 그 강도가 너무나 달랐다. 그를 병원이 아니라 길에서 마주쳐 의사인 것을 알았더라면 기분이 이렇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유일표는 감정을 다스리려고 애썼다.

"그래? 거 누구지? 독립투사 아들이랬던가, 손자랬던가......? 응 그래, 허진. 그 애 일로 네가 나섰을 때 아주 쎄다고 생각했었는데. 널 보는 순갈 그때 일이 딱 떠오른다."

그런데 왜 이 꼴이 됐느냐고 묻고 있는 눈치가 역연했다.

"글쎄, 이 나라에서 사는 건 우리가 고등학교 때 100미터 달리기로 등수를 정하던 것하고는 다르지. 그땐 혼자서 잘 뛰기만 하면 되는데 말야. 하여튼 넌 잘돼서 좋다. 내가 동창 덕을 보게 생겼고."

유일표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이교섭은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유일표는 동창과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며 담당과장실로 발길을 옮겼다.

"고혈압은 완치가 어려운 신경 써야 할 병입니다. 특히 어머님의 병세는 오래된데다가 지속적으로 약을 복용해야 할 형편입니다. 평소 생활에서 과한 일을 피해야 하고, 심적 자극이 심한 일이나 사소하더라도 자꾸 속상하거나 기분 나쁜 일들을 피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신선같이 사는 게 제일인데, 이 점 유의하십시오."

동창의 덕인지 과장은 처음보다 한결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동창은 어디서 일을 하는지 보이지 않았다.

", 명심하겠습니다."

유일표는 퇴원증을 받아가지고 절을 깊이 했다.

"으쩌냐, 돈 많이 나왔지야?"

이미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해촌댁은 작은아들을 보자마자 이 말을 물었다. 해촌댁은 벌써 며칠 전부터 돈 걱정을 하며 퇴원하자고 조르듯 했던 것이다.

"아니오, 얼마 안 돼요. 그리고 성이 돈 잘 버는데 이까짓 병원비 뭐가 걱정이에요. 엄니는 큰아들 효도를 받으며 마음 턱 놓고 계세요."

유일표는 더없이 환하게 웃으며 어머니를 곧 끌어안을 것 같은 몸짓까지 했다.

"잘 벌기는 머시가 잘 벌어야. 고상고상험서 애롭게 모타나가는 돈, 이 잘난 에미가 염치도 읎이 홀라당 까묵은 것이제. 나가 통 면목이 읎고 속이 씨리고 씨리다."

목소리가 잠겨들며 해촌댁은 코밑을 훔쳤다. 병색이 깃든 주름 깊은 얼굴에 머리가 반백인 그녀는 이제 더 늙을 수 없을 정도로 노인이 되어 있었다.

"엄니, 엄니가 믿는 과장님이 뭐라고 하신지 아세요? 항시 마음 편하게 먹어야 병이 낫지 그렇지 않고 자꾸 속상하고 그러면 병이 또 도진다고 했어요. 엄니가 그리 속이 씨리고 씨리면 또 돈 들어가게 돼요. 신선처럼 살아야 된다고 했는데, 과장님이 엄니한테는 그런 말 안 해요?"

"그려, 그 실답잖은 소리 다 들었는디....... 인자 가자. 내 병이사 나가 다 안께."

해촌댁은 가느다랗게 한숨을 쉬며 보퉁이를 집어 들었다. 어머니의 끝말이 가슴을 찌르는 것을 느끼며 유일표는 어머니한테서 보퉁이를 뺏어들었다. 어머니의 병은 어머니만 아는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그 험한 세상을 살아오며 이제야 병원 신세를 졌다는 것은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동안 어머니는 무서운 정신력으로 버티어온 것이었다. 어머니의 늙고 가냘픈 모습을 보며 유일표의 가슴은 눈물로 젖어내리고 있었다.

"택시는 멀라고 탈라고 그냐? 뻐스도 황감헌디 그 아까운 돈을."

해촌댁은 작은아들의 팔을 잡아끌었다.

"엄니, 나 성한테 혼나는 것 보고 싶어 그러세요? 성이 틀림없이 택시로 모시라고 몇 번씩이나 말했어요. 돈 벌어서 뭐 하겠어요. 오늘만 택시를 타도록 하세요. 성 마음을 생각해야지요."

유일표는 화를 내는 척, 그러나 간곡하게 말했다.

"이 에미가 돈 잡아묵는 우환 단지다."

해촌댁은 고개를 떨구었다.

유일표는 택시의 창밖으로 무심하게 눈길을 보낸 채 어머니의 건강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젠 집안일도 어머니에게 무리인 것이다. 전에는 어머니의 병세를 몰라서, 어머니가 한사코 집안일을 맡고 나섰으니까 으레 그러려니 했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벌써 몇 년 전부터 그건 병을 키운 화근이었다. 어머니가 혼자 병을 견디며 집안일을 놓지 않았던 것은 여동생 선희가 형의 일을 돕게 하기 위해서였다. 선희는 형이 새로 시작한 회사에서 또 경리일을 맡고 있었다. 이제 선희를 집에 들어앉힐 수밖에 없었다. 빨리 형과 그 일을 의논하기로 마음먹었다.

"야아 야, 일표야."

택시가 돈암동쯤을 지나가는데 그때까지 눈을 감고 있던 해촌댁이 입을 열었다.

", 어디 아프세요?"

"아니, 선희 말인디, 갸럴 인자 그만 치워야 쓰덜 안컸어? 니 갸 나이 아냐?"

유일표는 그만 가슴이 뜨끔해졌다. 여동생 선희는 어느덧 스물일곱이었다. 스물일곱이면 혼기를 놓친 노처녀였다. 대학을 나왔다면 또 모를까,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경우에 스물일곱은 그 자체로서 혼인의 악조건 하나를 가진 셈이었다.

", 빨리 보내야지요."

", , 대답만 쉽게 허덜 말고 느그 성허고 항꾼에 맘묵고 나스란 말다. 둘이 허자고 나스면 친구덜이고 머시고 간에 짝 맞춰줄 남자 한나는 골라내질 것 아니여? 느그도 큰일이다만 더군다나 선희는 여자 아니여? 여자는 약혼혀도 암시랑도 안 헝께 성허고 꽉 짜서 금년에는 꼭 치우게 허란 말이여. 나가 언제 죽을란지 모른디 그것 치우는 건 눈뜨고 봐얄 것 아니겄어."

혜촌댁의 목소리에 물기가 비쳤다.

", 알았어요, 엄니."

"또 귓등으로 들어 넘기는 것 아니여? 약조혀라."

", 꼭 그리 할게요. 약속해요."

"그려, 느그가 맘 안 쓰면 누가 그 일얼 풀겄냐. 선희 그것이 암뜨고 기가 읎어서 그 흔헌 연애도 못허고. 선희 불쌍허니 생각혀라. 애비 얼굴을 지대로 알기럴 허냐, 애비 정을 받아보기럴 혔냐. 가시네로 천하게 궁글름서 고상고상험서 컸는디 지대로 갤치지도 못혔으니 나가 갸헌테 진 죄가 크다."

울먹이는 해촌댁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엄니, 맘 상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제가 꼭 약속 지키도록 할게요. 아무 걱정 말고 맘 편히 잡수세요."

유일표는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그는 문득 놀라면서 어머니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머니의 손은 그전하고는 너무 다르게 뼈마디가 드러나게 메마르고 잔주름들이 잡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의 손을 만져본 지도 얼마나 되었는지 몰랐다.

"그려, 인자 말이 나왔응께 허는 말인디, 이 에미가 느그덜 앞에 낯을 들 체면이 읎다. 느그덜 낳고 젖 뽈림서는 넘덜 안 부럽게 호강시켜 키우고 잘 갤차서 요렇타께 출세시키고, 존 배필 골라 장개 딜이고 시집 보낼라고 혔었는디. 시상이 험허게 미쳐 돌아 그 아까운 재산 다 날라가 불고, 사람할라 생이별로 잃고 요 모냥 요 꼬라지가 돼야부렀다. 느그덜이 말은 안 혀도 부모 원망이 얼매나 크겄냐."

해촌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엄니, 괜히 그런 말씀 마세요. 선희 일은 제가 꼭 해결할게요."

유일표는 자신 있게 재차 다짐했다. 그러나 속마음은 답답하기만 했다.

"작은오빠, 나 시집가는 것 겁나.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해. 그 일은 친가, 외가 팔촌까지 피해를 보게 되잖아. 시집에 피해를 입혀 미움 받고 쫓겨나봐.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고 무서워. 나도 오빠들처럼 시집 안 가고 혼자 살 거야. 난 싫으니까 시집가라고 그러지 마."

2년 전쯤에 결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 선희가 울먹이면서 한 말이었다. 그때 받은 충격은 형이 잡혀가는 일을 당하는 것만큼 컸었다. 선희의 생각은 지나치거나 엉뚱한 것이 아니었다. 선희가 굳이 입에 올리기를 피하며 '무슨 일', '그 일'이라고 한 일이 만약 생기게 된다면 선희의 시집에 피해가 안 가리란 보장이 없었다. ,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는다 해도 '간첩의 집안'이라고 해서 시집에서 눈총 받고 미움을 사거나, 남편과 틈이 생겨 가정 파탄이 일어날 위험은 얼마든지 있었다.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어서 선희가 형과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오해도 풀어주지 못하고 말았다. 형과 자신은 아버지 때문에,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아버지로 인한 연좌제 피해가 자식들한테까지 연결되는 것이 무서워 결혼을 하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형한테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형은 그동안 결혼할 만한 경제적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이기도 했다. 그리고 옛날 애인과의 관계도 이어지고 있어서 세월 가는 데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자신도 돈벌이가 시원찮은 형편에 형이 그러고 있으니까 결혼에 별 관심 없이 서른을 넘기고 말았다. 어머니는 그동안 자신에게 선희의 결혼을 서너 차례 걱정했을 뿐 정작 장남에게는 장가 들라는 말을 한 번도 꺼내지 않았었다. 하고 싶은 말 가슴에 묻어두고 형의 눈치만 보아온 어머니의 심중이 어떠했을 것인지 뒤늦게 죄스럽기 그지없었다. 고혈압이라는 몹쓸 병에 시달리면서도 '명랑'이라는 시원찮은 약으로 그 고통을 감추어온 어머니에게 세 자식은 이래저래 큰 불효를 저지른 것이었다. 유일표는 큰 짐을 진 기분으로 저녁에 바로 형과 자리를 따로 했다.

"그래, 나도 엄니 병을 알고 나서 선희가 집안일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유일민은 동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집도 보내긴 보내야 하는데......."

그는 한숨을 쉬며 소주잔을 들었다.

", 그건 성이 신경 쓰지 마. 내가 선희의 마음도 돌려놓고 마땅한 사람도 찾아볼 테니까. 성은 아무 걱정 말고 선희 결혼 비용이나 책임져."

유일표는 더욱 우울해지는 형의 기분을 돌리려고 속마음과 다르게 활기차게 말했다.

"그래 줄래? 결혼 비용이야 걱정하지 말어."

유일민의 얼굴이 약간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결혼 비용 우습게 생각하지 말어. 선희가 몇 년 동안이나 형 일 도우면서 무료봉사 했잖아. 적으면 내가 임금 착취로 고발할 거야."

"그래, 고발당하게 쥐꼬리만큼만 내놔야겠다."

유일민은 비로소 우울기가 가시게 웃으며,

"그동안 선희가 참 고생 많이 했지. 차분하고 정확한 게 경리로선 최고야. 집안 사정도 그런데 남들보다 빠지지 않게 보내야지.“

그는 장남다운 체모를 차리며 말했다.

"그렇다고 형한테 너무 부담되게 할 건 없어. 몇 개월짜리 어음쪽지 받아 돈도 잘 돌지 않는 형편에. 요새 공장 일거리는 좀 어때?"

유일표는 형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 그런대로 괜찮아. 제약회사에 있는 대학 동창이 일거리를 주기로 했으니까 그것만 해결되면 좀 더 좋아질 거야."

"제약회사에도 일거리가 있나?"

"그럼. 어린이용 감기약, 안약, 머큐롬, 소독약 같은 것들은 다 유리병에서 플라스틱으로 바뀌고 있어. 유리병보다 싸고 파손이 안 되니까 회사로서는 이중으로 이익인 거지."

"그렇겠네. 세상 참 무섭게 변해가. 그럼 유리병 납품업자들은 다 망하겠네?"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두 손 놓고 망할 리 있냐? 다 눈치 빠르게 플라스틱으로 바꾸고 들지. 일거리 하나 따내는데 어찌나 경쟁이 심한지 하늘의 별따기라는 말이 실감나."

"그럼, 먹느냐 먹히느냐가 자본주의 얼굴인걸. 근데, 그 동창이란 사람 친해? 틀림없이 해줄 사람이야?"

", 믿을 만해."

"이건 줬어?.

유일표는 엄지와 검지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아니, 동창 사이에 그런 것 거북해서 좀......."

유일민은 어색스럽게 웃으며 어물거리다가 술잔으로 입을 막았다.

"아이고 성, 그래 가지고 어떻게 사업을 해. 이거 안 줘서는 되는 게 없는 세상인 거 잘 알잖아. , 가장 확실한 빽이란 이걸 받아먹고 틀림없이 일을 해주는 사람이란 말이 있잖아. 무슨 말인고 하면, 성이 아무 제약회사나 찾아가 자재부장이고 누구고 붙들고 이걸 두둑하게 주면서 플라스틱 용기 일거리 좀 달라고 해봐 미친놈 취급이나 받지 그쪽에서 이걸 받을 것 같애? 이걸 주는 쪽에서는 일을 틀림없이 해주는 사람이어야 하고, 이걸 받는 쪽에서는 비밀을 철저하게 지킬 사람을 필요로 하는 거야. 그러니까 동창이란 빽이 아니고 서로 믿을 수 있는 통로일 뿐이고 진짜 빽은 이건 거야. 이거 줘서 손해 보는 일 없고, 이거 줘서 안 되는 일 없다는 말 있잖아, 그 사람 지금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빨리 술자리 벌려서 해치워 안 그러면 일 못 따."

유일표의 끝말은 아주 단호했다.

"허 참, 사업판에서 아주 산전수전 다 겪은 것처럼 말하는구나. 나도 지금 그걸 고민 중이다."

", 일단 사업을 시작했으면 고민 같은 것 할 것 없어. 세상살이는 전쟁이야. 전쟁터에서 총 쏠까 말까 고민해? 이 세상에서는 이 세상의 법칙을 따라야 해. 함께 썩어서 돌지 않으면 결국 굶어죽어. 그렇게 죽는 걸 세상에서는 양심이라고 알아주는 게 아니라 무능하고 병신이라고 비웃어. 그게 우리 사회야. 양심은 목사나 승려들이 지키는 것으로 충분해. 내가 재건대에서 애들만 가르치는 줄 알아? 경찰을 상대로 이것 먹이면서 애들 빼내는 일도 해. 애들이 많다 보니까 남의 물건 슬쩍하다가 잡혀 들어가는 애들도 더러 있거든. 그때 이걸 안 쓰면 절대 안 풀어줘. 우리한테 매달 상납 받아먹어 친한 사이인데도 맨입으로는 어림없어. 그게 이것이 발휘하는 힘이야. 자본주의는 인간을 더럽고 치사하게 만들었고, 인간은 돈의 노예가 됐어."

"그래, 네 말이 다 맞다. 나도 결심하고 시작한 거니까 최선을 다해야지. 돈을 많이 벌면 그게 우리를 보호할 수도 있으니까."

유일민은 입을 꾹 다물며 흐리게 웃었다.

"전망은 보여?"

", 플라스틱 수요가 날로 늘어나고, 경제가 자꾸 좋아지고 있으니까. 4~5개월짜리 어음을 깡 해서 쓰지 않게 된 것만도 그만큼 돈을 번 것 아니냐."

"됐어. 힘내. 나도 제약회사 쪽으로 알아볼 테니까."

유일표는 기분 좋게 술잔을 꺾었다.

"무리하지 말어. 네 일도 바쁜데."

"아니, 괜찮아. 우리가 가진 재산이라는 게 좋은 학교 나왔다는 것밖에 더 있어? 학연, 지연, 혈연으로 이 사회가 망해가고 있다고 야단들인데, 그런 게 잘 통하는 게 그나마 우리한테는 큰 다행이지. 어차피 학벌은 써먹지 못하게 됐으니까 괜찮은 자리에 있는 동창들이나 잘 활용해야지. 안 그래?"

"그래. 널 만나면 그래도 속이 좀 풀린다."

유일민은 정답게 웃으며 동생에게 술잔을 건넸다. 유일표는 끝내 형의 결혼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떼지 못했다. 그 말을 꺼내면 해결되는 것 없이 괜히 형을 괴롭히게 될 것만 같았다. 아버지 때문이든, 첫사랑 때문이든, 그 둘 다가 합해진 것이든 형에게 맡겨둘 수밖에 없었다. 형은 생각 깊은 사람이었고,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두루 생각하지 않을 리 없었다.

형은 그렇고, 넌 어떻게 할 거야?’

유일표는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괜히 웃음이 픽 나오며 막연할 뿐이었다. 여지껏 마음에 끌리는 여자가 눈에 들어온 일이 없는 게 이상했다. 그것도 어쩌면 아버지 때문인지도 몰랐다. 형이 끌려가고 잡혀갈 때만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평소에도 마음에는 늘 음산한 안개가 끼어 있었다. 그 불안을 걷어내려고,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그건 부질없는 일이었다. 무슨 병을 앓듯이 그 괴로움에 시달리다 보니 여자가 눈에 띄지 않았다. 그 사실을 처음 깨달은 것이 이상재가 허미경에 대한 감정을 처음 공개했을 때였다. 술 취한 그가 허진에게 여동생을 사귀어도 좋으냐고 물었을 때 왈칵 다가든 허미경의 모습. 그 순간 그녀가 허진의 여동생만이 아닌 여자로 보였다. 그녀의 잔잔하게 예쁜 얼굴, 다소곳한 자태, 언제나 참한 언행, 그녀는 여자로서 사랑할 만한 대상이었고, 남에게 빼앗기기 아까운 존재였다. 그러나 자신은 한발 늦어버렸고, 이상재에 비해 자신은 허미경을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없었다. 그 후로도 여자를 마음에 담을 자신감은 생기지 않았다.

"그 기집애 그거 아주 맹랑해. 남자는 멋진데 집안 사정이 무서워 싫대는 거야. 그 기집애가 그리 얌체같이 현실적일 줄은 몰랐지. 내가 일표네 아버지 얘길 했거든."

자기 동생을 소개했던 강숙자의 말이었다. 그 말이 더욱 마음을 위축시켰다. 유일표는 형이 플라스틱 관계 사업을 하기 잘했다고 거듭 생각했다. 그건 돈을 댄 옛 애인이 길을 튼 것이었다. 자기 친구네가 새로 화장품 회사를 세웠는데 각종 화장품 용기를 만드는 하청업이었다. 허진과 강숙자 쪽에서도 하청을 맡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를 비교해 본 결과 플라스틱 가공업을 택하게 되었다. 시멘트벽돌을 생산하는 것은 부지 확보에서 부터 복잡한 게 너무 많았고 일이 거친데다 관리의 어려움까지 겹쳐 있었다.

며칠이 지나 유일표는 여동생을 불러냈다.

"사무실에 안 나가니까 기분이 어떠냐? 서운해?"

"서운하긴. 엄마 건강이 더 중한데. 근데 걱정돼. 새로온 애가 잘 해얄텐데......."

유선희는 물 잔을 만지작거리며 가냘픈 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수심이 깃들어 있었다.

"선희야, 너 말이야......, 지금도 결혼문제에 대해서 생각이 변하지 않았냐?"

유일표는 말을 꺼내기 거북해 여동생을 쳐다보지 않았다.

"큰오빠한테 잠깐 얘기 들었는데......, 엄마가 그렇게 걱정하시는 줄은 몰랐어. 작은오빠도 큰오빠하고 같은 생각인 모양이지?"

유일표는 여동생의 눈길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여동생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그늘져 있었다.

"선희야, 우리 셋이 다 자식으로서 어머니한테 너무 잘못한 것 같으다. 그동안 우리가 결혼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이 가난하고 복잡하게 살아왔는데, 이제 좀 여유가 생겼으니까 자식된 도리를 해야 되지 않겠니? 선희야, 너무 겁먹고 무서워하지 말어. 아무 일도 안 일어날 수 있으니까."

"그건 요행수를 바라는 거잖아. 그러다가 무슨 일이 벌어지면 어떡할 거야."

유선희는 작은오빠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유일표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천천히 빨았다. 그가 연달아 내뿜는 담배연기가 침묵으로 바뀌고 있었다.

"선희야,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게 무서워 우리 셋이 다 결혼도 안 하고 살아간다는 건 비정상이야. 큰오빠나 나는 꼭 그 이유 때문에 지금까지 결혼을 안 한 게 아니고 앞으로 형편이 풀리는 대로 결혼을 할거지만 말야. 선희야, 그 일을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면 안 돼. 이 나라에 우리처럼 당하며 사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데, 그런 집 딸들이 다 너처럼 결혼하기를 두려워하겠니? 그런 걱정들은 하면서도 그래도 결혼해서 살아가는 거야. 그게 정상적인 거니까 너도 생각을 좀 바꿔라."

"작은오빠, 이북사람들은 자기네가 내려 보낸 사람들이 여기서 잡힌다는 걸 알고 있을까?"

이 느닷없는 말에 유일표는 여동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야......, 오래 돌아오지 않으면 잡힌 걸로 알겠지. 이쪽 신문에 나는 걸로도 알 거고."

"그럼, 그런 일이 벌어지면 이쪽 가족들이 형편없이 당한다는 것도 알겠지?"

"그렇겠지......."

"그럼 이쪽에서도 저쪽에 또 사람을 보내겠지?"

"세상에는 비밀로 하고 있지만 안 보낼 리가 없지."

"그럼 또 저쪽에서도 당하는 가족들이 있을 거야. 통일이 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잔인한 짓들을 하는지 모르겠어. 난 그런 걸 곰곰이 생각하면 이런 세상에 살고 싶지가 않아. ......, 난 말야......, 아빠가 찾아와서 내가 신고하는 꿈을 국민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수천 번도 더 됐어. 난 이쪽도 저쪽도 다 싫어."

유선희는 울고 있었다. 유일표는 여동생의 눈물을 보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선희가 그런 깊은 생각을 하며 시달려왔다는 것이 가슴 쓰라렸다. 자신이 그랬다면 선희도 똑같은 괴로움을 당했을 것이다. 아니, 여자라서 고통이 더.......

"그래, 나도 이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선희야, 우리 어머니를 생각하자. 어머니도 사시는데 우리가 그러면 되겠냐?"

유일표의 목소리는 간곡했다.

"알아, 알아. 엄니가 바라는 대로 할 거야 엄니가......."

손수건으로 눈을 가린 유선희는 울먹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유일표는 다음날부터 여동생의 짝을 찾아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자신의 친구들은 이미 결혼해 애아버지들이 되어 있었고, 주위를 둘러봐도 마땅한 사람을 고르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들한테까지 다 연락을 했다. 직장이나 주위에 쓸 만한 사람이 있으면 소개 좀 하라고.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연락 오는 데는 없었다. 그나마 재건대장 이용진이 그동안의 신세를 갚으려는 듯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가 발이 넓어 유일표는 사뭇 기대를 걸고 있었다. 이용진은 하루에 한 사람 꼴로 소개하는 열성을 보였다. 그런데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유 선생 눈이 너무 높아서 안 되겠는데요. 대학을 안 나와서 그러는 모양인데, 대학 나온 사람이 어디 그리 많나요? 허고, 대학만 나오면 뭐해요. 뻔드르르한 간판 달고 제대로 사람 노릇 못하면 파이지요. 고등학교만 나왔더라도 사람 실하고 착실하게 돈벌이할 수 있으면 최고 신랑감 아니겠어요?

이용진의 말을 듣고서야 유일표는 자신이 학벌을 따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동생은 상업학교를 나왔을 뿐인데도 신랑감은 무의식적으로 대학 졸업자를 원하고 있었다. 재건대 학생들을 상대로 평소에 하는 말과는 달리 학벌주의의 모순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며 유일표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대학 나온 사람이 어디 그리 많으냐는 이용진의 말을 실감했던 것은 군대에서였다. 훈련소에서고 기성부대에서고 대학 나온 사람은 1개 소대에 2~3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놀라움은 뜻밖에도 컸다. 그 사실을 확인하기 전까지만 해도 남자들은 거의가 대학을 나온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친구들이고 주변사람들이 다 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일으킨 착각이었다. 그런 어이없는 착각을 바로잡으며 세상의 속내를 들여다보게 된 것은 이유 없는 구타도 참아내는 연습과 함께 군대생활에서 얻은 적잖은 수확이었다. 그런데도 여동생을 위한 욕심은 그런 체험마저 다 눈 멀게 하고 있었다. 여동생에게 맞선을 보일만한 사람을 찾지 못하고 날만 흘려보내고 있던 어느 날 형네 공장에서 경리 아가씨가 찾아왔다.

"빨리 대학병원으로 오시래요. 어머니가 쓰러지셔서 위독하시대요. 사장님이 병원으로 가시며 연락하랬어요."

이쪽에 전화가 없어서 형이 먼저 병원으로 가며 사람을 보낸 거였다. 인구 폭증에 따라 서울이 비대해지면서 각종 사업체들이 늘어나 전화는 날로 귀해지고 있었다. 작은 사업체에서는 전화를 재산 1호로 칠 만큼, 비싼 값으로 뒷거래되고 있어서 재건대에서는 전화를 가질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다.

유일표는 남산자락에서부터 퇴계로까지 한달음에 뛰어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그의 마음은 택시 속에서도 '위독'하다는 말에 쫓기고 있었다. 여동생이 집안일을 도맡고 나선 다음부터 라디오나 들으며 소일하게 된 어머니의 건강은 안정되어 있었다. 병원에서 처방해 준 약도 여동생이 시간 맞춰 꼬박꼬박 챙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찌 된 일일까......, 위독하다니 무슨 일일까......,’

다급한 유일표의 마음은 택시를 밀어대고 있었다. 유일표는 혼수상태인 어머니 옆으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위독한 환자에게 더 해롭다며 인턴과 간호원이 제지했다.

"라디오를 들으며 점심을 잡수시다가 갑자기 쓰러지셨어. 라디오에서는 남북적십자회담이 중단되었다는 뉴스를 하고 있었는데......, 엄마는 깜짝 놀라며 '저게, 저게 무슨 소리냐'고 하다가 푹 쓰러지셨어."

유선희가 흐느끼면서 말했다.

"뭐라고? 회담이 중단돼?"

유일표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싸잡고 복도에 주저앉으며 어머니가 받았을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를 충분히 짐작했다.

"인자 우리가 그 험헌 꼴 더는 안 당허고 살게 될랑갑다. 하먼, 어서 그리 되아야제. 무신 철천지 웬수도 아니겄고, 갈라진 사람덜 만내게 험서 조단조단 살아야제. 따지고 보면 다 한 핏줄 아니겄어."

남북적십자회담이 서울, 평양을 오가며 열리게 되면서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뇌이고 했던 말이었다. 그 회담에서 다루고 있는 핵심문제가 남북 이산가족 재회인 것을 어머니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신문이나 라디오에서는 남북 이산가족들이 곧 만나게 되는 것처럼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유일표는 너무 기대를 하면 곤란할지도 모른다며 경계심을 가지면서도 회담이 계속됨에 따라 기대가 자꾸 커져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이산가족문제가 잘 풀리기를 간절하게 바란 나머지 형에게 그 말을 꺼냈을 정도였다.

"의사도 어찌 될지 알 수가 없단다. 오늘부터 우리 모두 여길 지키자."

유일민이 눈물 밴 눈으로 두 동생에게 말했다. 유일표는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반쯤 벌리다 말고 담뱃갑을 꺼냈다. 일그러지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어떤 분노와 울음이 섞여 있었다.

"나 빨리 가서 돈 좀 가져올 테니 기다려라."

유일민이 아랫입술을 물며 돌아섰다. 유일표는 한숨과 함께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지치고 외롭고 슬픈 형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해촌댁은 다음날도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의사는 표정 없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의사는 좀 더 심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흘째 되는 밤이었다.

"큰오빠, 작은오빠! 엄마가 깨났어! 오빠들 찾아."

유선희가 응급실에서 뛰쳐나오며 외쳤다. 복도에 있던 유일민과 유일표는 허둥지둥 응급실로 들어갔다.

"엄니, 저 일민이에요."

"엄니, 일표예요, 일표."

해촌댁의 풀린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느그......, 느그......, 아부지럴 원망 말그라......."

가느다란 소리의 말이 끝나는가 싶더니 해촌댁의 눈이 감기고 말았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유일표는 집에서 재건대를 오갔다. 여동생 때문이었다. 선희는 장례를 치르면서 서너 번씩 까무러칠 정도로 몸부림치며 못 견뎌 하더니 장례가 끝나고서도 감정 수습을 하지 못했다. 밥이나 겨우 해놓고는 넋 나간 듯 앉아 있는가 하면,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울고 또 울었다. 유일표는 이런저런 말로 위로도 하고 타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말을 할 때는 알아듣는 것 같다가도 다시금 슬픔에 빠져 목을 놓고 있고는 했다. 그런 날들이 계속되면서 선희는 표 나게 마르고 있었다.

", 재를 어떡하면 좋지? 나로선 더 무슨 방법이 없는데."

"글쎄. 저게 보통일이 아니다. 엄니한테만 의지해 온 막내라 너무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충격이 너무 큰 것도 문젠데, 병원에 데려가 봐야 되지 않을까?"

"글쎄, 그게 또 충격이 될 수도 있어. 아무래도 혼자 둬서는 안 될 것 같다. 다시 회사 일을 보게 해야 되겠어."

"지금 있는 경리는?"

", 거래처가 자꾸 늘어가니까 어차피 혼자서는 벅차. 선희가 경리 책임을 맡을 필요도 있고."

"그게 좋겠네. 그리고 선희 결혼문제는 서두르지 않는 게 어떨까?"

"그래, 차차 자연스럽게 하자."

유일민은 여동생을 회사로 이끌었다.

"집은 어떻게 하고......."

"아랫방 할머니 계시잖냐. 도둑이 들어봤자 가져갈 것도 없는 살림이고."

유선희는 그제서야 집안일을 맡게 되었을 때처럼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16. 마침내 시작된 싸움

이봐. 학생들! 꼼짝 말고 이리 와.”

길을 막 돌아서던 김선진과 송상균은 엉거주춤했다. 10여 미터 앞에 서 경찰봉을 빼든 경찰이 그들을 노려보며 손짓하고 있었다.

튀자. 장발 단속이다!”

송상균이 눈치 빠르게 외치며 획 돌아섰다. 김선진도 가방을 추스르며 재빨리 돌아섰다.

이 새끼들. 꼼짝 말어!”

한 남자가 소리치며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인상 사납고 어깨 벌어진 그 남자는 한눈에 형사였다. 그들은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그때 뒤쫓아온 경찰이 그들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이거 왜 이래요.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을.”

송상균이 몸을 내두르며 볼멘소리를 했다. 김선진은 재수 더럽다고 생각하며 경찰이 미는 데로 걸음을 떼어 놓았다.

얌마. 떠들지 말어. 죄가 있고 없고는 파출소에 가서 따져.”

형사가 송상균의 팔을 비틀며 내쏘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들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파출소 안에는 열 명 가까운 젊은이들이 잡혀와 있었다. 긴 나무의자에 앉기도 하고 풀죽어 서 있기도 한 그들의 머리는 다 귀를 덮을 정도로 길었다.

소장님. 열 명이 넘었는데 일단 처리해야죠?”

. 빨리 해야지. 파출소도 좁고. 오늘 책임량 채우려면 아직 스무 명이나 남았는데.”

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 앞으로 나서더니.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다시피 상부의 지시로 실시하고 있는 장발 단속에 걸렸으므로 지금부터 차례로 삭발을 실시한다. 차후로는 또다시 장발을 하여 미풍양속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명심하기 바란다.”

마치 연설하듯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하고는 젊은이들을 휘둘러보았다.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불만 가득 차고 반항적인 기세로 파출소장을 외면하고 있었다.

자아. 잡혀온 순서대로 한 명씩 이리 나와.”

이발기를 든 경찰이 손짓했다.

. 느네 형한테 빨리 전화 좀 해라. 느네 형 한마디면 깨끗하게 해결될 텐데.”

송상균이 김선진의 귀에 대고 다급하게 속삭였다.

미쳤나. 이런일로.”

김선진이 혀를 찼다. 형이 알면 오히려 체면 망치고 다닌다고 야단칠 것이 뻔해 그는 얼굴이 구겨졌다.

. 검사 형 둬서 좋다는 게 뭐야. 나도 이런 때 덕 좀 봐얄 것 아냐

글쎄 헛꿈 꾸지 마. 이런 일로 전화했다간 나 죽어.”

김선진은 일부러 거세게 말했다.

빌어먹을. 머리도 맘대로 못하게 다니게 억압이야. 억압이. 참 더러워서.”

송상균은 투덜거리며 담배를 꺼냈다. 머리는 다 깍는 것이 아니었다. 긴 머리를 짧게 깍지 않을 수 없도록 양쪽 귀 위. 목덜미 위에다가 이발기를 들이대 흠집을 내놓았다.

와아아. 미치고 환장하겠다!”

니기미. 이민은 괜히 가냐!”

흉한 머리 모양을 하고 파출소를 나서는 젊은이들 중에서는 이렇게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저씨들 부수입 오르겠시다.”

김선진 앞의 젊은이가 이발기를 든 경찰 옆의 의자에 털퍽 앉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경찰이 이발기를 들며 물었다.

이거 말이유. 값 나가잖수?”

그 젊은이는 의자 밑에 수북하게 쌓인 머리카락을 발로 가리켰다. 그걸 고물상에 팔면 돈이 되지 않는냐는 배짱 좋은 야유였다. 그 말투로 보아 학생 같지는 않았다.

뭐야! 너 이 새끼 이마까지 확 깍이고 싶어 그따위 소리 나불대는 거야. 지금.”

경찰이 곧 후려칠 것처럼 화를 내며 소리 질렀다.

맘대로 하쇼. 머리는 또 기니까.”

전혀 겁먹지 않고 대꾸하는 그 젊은이를 김선진은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난 절대로 머리 다시 안 깎고 그냥 이대로 다닐 거야.”

파출소를 나오며 송상균이 내뱉었다.

허 참. 그건 또 무슨 배짱이냐? 반항하겠다 그거냐?”

김선진은 송상균을 어이없이 쳐다보았다.

반항이 아니라 유신독재에 대한 저항이다. 내 뜻 알아들어?”

송상균은 김선진을 쏘아보더니 침을 내뱉었다.

. 머리 좀 깎이고 뭐가 그리 거창하냐?”

이 새끼 이거 영 맹탕이네. 대통령이면 대통령이지 명색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래도 되는 거냐? 머리를 발끝까지 기르고 다니든 빡빡 밀고 다니든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야. 근데 대통령이 그런 것까지 간섭하고 억압하고 나서? 이건 멋대로 유신헌법 만들어 독재를 하면서 생긴 횡포야. 그런데 저항 안하게 생겼어?”

너 아주 제법이다. 그럴듯한데?”

맞은편에서 오던 젊은 여자 셋이 그들의 모습을 보고 킥킥거리며 지나갔다.

웃지들 마시오. 이래도 애인 있는 몸이니까.”

송상균이 비위 좋게 한 마디 던지고는.

가자. 기분 더러운데 어디 가서 한잔하자.”

하며 건널목으로 내려섰다.

오늘 참 재수 더럽기는 더럽다. 그동안 파출소를 잘 피해 다녔는데.”

김선진이 머리를 매만지며 혀를 찼다. 9월 들어 장발 단속은 전국적으로 실시되고 있었다. 대통령의 특명이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장발을 한 연예인이나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 연예인들은 텔레비전 출연이 금지될 지경이었다. 9월 말에 머리를 깎였으니 김선진의 말마따나 그들은 그동안 파출소를 잘 피해 다닌 셈이었다.

느네 학교는 요새 분위기가 어떠냐?”

막걸리 첫 잔을 비운 송상균이 입을 열었다.

다 마찬가지지 뭐. 뒤숭숭한 게 강의도 잘 안 되고 그래.”

느네 학교에서 일어나면 넌 어떡할래?”

글쎄. 유신이란 게 말이 안 되긴 안 되는데....... 좀 더 생각해 봐야지

나도 어떡할까 생각해 왔었는데 오늘 딱 결정했다. 이건 웃기는 소리가 아니고 이 머리 이대로 나설 거야. 이 일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자유를 짓밟는 표본적인 사건이야. 앞으로 이런 식으로 모든 횡포가 자행될 거거든.”

송상균은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김선진은. 그의 말이 다소 비약하고 있는 편이 없지는 않지만 결코 잘못된 판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어찌 보면 사소하게 넘겨버릴 수 있는 그 문제에서 잘못된 정치 현실의 핵심을 꿰뚫어보는 그가 새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 그렇게 된다면 정말 문제지.”

너도 더 생각하고 말고 할 것 없어. 너 작년 조기방학 때 충장로에서 두 여대생 만난 것 기억하지? 그때 현민자가 했던 말 똑똑히 생각하라구. 1년 동안 제멋대로 하는 짓 다 봤고. 생각할 만큼 다 생각했으니까 이번에 두말 말고 과감하게 나서자.”

김선진은 천천히 술잔을 기울이며 큰 형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유신 반대 데모에 나선 것을 알면 큰 형은 어찌할 것인가......? 큰 형은 어느 편일까? 검사니까 무조건 정권 편일까? 아니면. 속마음이 따로 있을까? 큰 형은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했다. 작은 형이 자살한 다음부터 그 말이 부쩍 심해졌다.

그래 하긴 해야지.”

김선진은 송상균에게 면목없어 더는 생각해 보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이렇게 얼버무렸다. 그러나 큰형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데모는 꼭 해야 된다고 마음먹은 지 오래였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하는 헌법 아래서 종신대통령제라니. 그건 백 번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자아. 우리 화끈하게 한판 하자. 젊은 혈기 어디다 쓸거냐. 그런 의미로 건배!”

송상균이 술잔을 들었다. 김선진은 그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김선진은 무겁고 우울한 마음으로 어두운 골목길을 터덕터덕 걸었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우울함은 심해지고 있었다. 작은형이 죽은 다음부터 골목으로 접어들면 어김없이 일어나는 증상이었다. 고개 푹 숙인 작은 형이 헐어빠진 가방을 들고 골목을 걸어 나오는 것 같았고. 작은 형의 냄새가 물큰 풍겨오는가 하면. 어느 때는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리기도 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작은 형의 혼백이 저세상으로 가지 못하고 여기를 떠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언뜻 들기도 했다. 작은 형은 생각할수록 딱하고 안쓰러웠다. 실패를 거듭하다 못해 죽음을 결정하기까지 얼마나 고통스럽고 외로웠을까. 큰 형만 아니었어도 작은 형은 법대를 안 갔을지 모르고 큰 형만 아니었어도 작은 형은 죽기까지는 하지 않았을지 모를 일이었다.

병신 같은 자식. 능력에 맞게 살라니까 건방지게.”

큰 형은 작은 형이 자살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대뜸 이렇게 내쏘았다.

큰 형은 작은 형이 목숨을 끊은 것조차 건방지게받아들이고 있었다. 큰 형은 화장을 결정했고. 끝네 병원에도 화장터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작은 형은 혼자 죽어간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흔적인 것처럼 집안에 큰 우환을 남겨놓고 갔다. 어머니가 작은 형의 자살 소식을 듣고 쓰러져 거동도 못하는 반신불수가 되고 말았다. 큰 형은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서울로 모셔왔다. 그런데 큰형은 난처해 하며 어머니를 자기의 집으로 모시지 않았다. 그러나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큰 형은 당연한 것처럼 작은 누나에게 어머니 수발을 들라고 명령했다. 그 말이 명령인 것은. 유명 디자이너가 될 꿈에 미쳐 있는 작은누나는 명동의 양장점에 취직해 있었기 때문이다.

난 못해. 당연히 장남인 큰오빠가 모셔야지 내가 왜 직장을 관둬? 난 그렇게 못해.”

성질 억센 작은누나는 즉각 반발했다.

잔소리 말고 시키는 대로 해.”

난 박정희가 명령해도 그리 못해. 큰 오빤 양심 좀 있어봐. 법 잘 따지는 검사가 그렇게 불효해도 되는 거야? 나 법원에 가서 물어볼 거야.”

뭐야. 이 돼먹지 못한 기집애!”

큰 형은 여지없이 작은 누나의 뺨을 후려쳤다. 작은누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목청껏 울며 대들었다. 큰 형은 딱하게도 작은누나의 그 기세에 밀려. 어머니의 수발은 식모를 두어 하게 되었다. 그리고 큰 형은 급히 돈을 마련해 셋방살이를 면하게 했다.

김선진은 집으로 들어서 곧장 어머니 방으로 갔다.

엄니. 저 왔어요. 오늘은 좀 어떠세요? 식사는 잘 하셨어요?”

그는 어머니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그건 매일 되풀이하는 문안이었다.

. 으냐. . 괴차어다. . 니너 고부 자으혀냐?”

몰라보게 변해버린 월하댁은 한쪽으로 힘없이 처져 돌아가는 입으로 말을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혀가 잘 돌지 않아. ‘은냐 괜찮허다. 니넌 공부 잘혔냐?’ 하는 말이 거의 알아들을 수 없도록 흐르고 샜다.

. 공부 잘했어요.”

김선진은 밝게 웃으며 대꾸했다.

. . . 머리가......”

월하댁이 아들의 머리를 보고 놀랐다.

엄니. 이거 놀랄 거 없어요. 머리가 너무 길어 보기 싫으니까 단정하게 깎고 다니라고 경찰들이 밀어버린 거에요. 어때요. 멋있지요?”

김선진은 킥킥거리며 어머니의 마비된 오른쪽 팔을 붙들었다. 그는 정성스럽게 어머니의 팔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는 매일 한 시간 정도씩 어머니의 마비된 팔다리를 주물렀다. 그러면서 제발 낫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호강 한번 못해보고 그렇게 된 어머니가 생각할수록 가슴 아프고 눈물겨웠다. 그러나 서독의 큰 누나한테는 어머니의 병환을 알리지 않았다. 모르는 게 약이라며 어머니는 절대 알리지 못하게 했다. 작은 형의 자살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이규백의 막내 동생 이규동은 첫 시간부터 아예 강의실에 들어가지 않고 교정의 은행나무 아래서 데모 분위기를 타고 있었다. 오늘 데모는 어제 이미 학생회에서 예고했기 때문에 학생들 대부분은 교정에 끼리끼리 모여 앉아 토론장을 만들고 있었다. 10월을 머금은 은행나뭇잎들은 누릿누릿 변해가고 있었다. 어떤 잎들은 아직 초록색이 다 바래지 않았는데도 10월의 투명한 햇살 속에 투신하고 있었다. 이규동은 방금 떨어져 내린 은행잎을 주워들며 모여 앉은 학생들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지난 1년 동안 나라가 돼온 꼴을 좀 봐. 이건 도무지 나라라고 할 수가 없잖아? 대통령을 뽑는 데도 국회의원을 뽑는 데도 국민의 존재가 완전히 무시되고 있으니 이 나라가 도대체 어떻게 되겠어?”

더 말하면 뭘해. 대통령후보로 혼자 출마해 체육관에 대의원들 몰아넣고 체육관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것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될 가관인데 국회의원 뽑는 것을 보라구. 대통령이 73명이나 임명해 버리니 야당은 제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허수아비 꼴이고 국민의 뜻은 완전히 묵살되고 마는거지. 이런 꼴에 비하면 그래도 이승만 독재는 아주 민주주의였던 거야.”

그뿐이면 말도 안 해. 국회를 그 꼴 만들어놓고도 부족해서 국정감사를 폐지하는 법까지 만들었으니 이게 도대체 뭘 하자는 수작이야. 국정감사가 있어도 부정부패가 갈수록 심해졌는데. 그나마 국정감사 없애면 공무원들이 얼마나 맘 놓고 해먹으며 난장판을 치겠어. 도대체 나라를 이 꼴로 몰아가는 박 통 의도는 뭐야?”

그야 뻔하잖아? 만년독재를 하자면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세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 사람이 믿는 게 누구야? 군대 아니야? 그리고 국가예산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큰 게 국방예산이잖아. 막대한 예산을 국정감사 받을 필요 없이 군인들이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특혜를 베풀어주는 대신 박 통은 군부의 충성스런 지지를 손아귀에 넣는거야. 그 다음이 공무원 장악이고. 그러니 세금 내는 국민들만 불쌍한 거지 뭐야.”

그거 맞는 말인데. 그렇다면 데모를 한다고 4.19처럼 될까?”

그건 무슨 소리야? 그리 안 될 바에야 뭐 하려고 데모해? 체력단련 하자는 것도 아니고.”

아까 말 나왔잖아. 박에 비해 이승만이 더 민주주의였다고. 이승만은 경찰을 동원했지만 박은 바로 군대를 동원할 수 있어. 경찰과 군인은 질적으로 다르잖아.”

그래. 그 말도 일리가 있어. 이승만은 정치 술수에는 능할지 모르지만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작전에는 군 출신인 박을 당할 수가 없겠지. 박이 좋아하는 초전박살로 군인들을 동원하면 그건 좀 곤란해지지 않겠어?”

그럼 군인들 무서우니까 그 사람이 황천객이 될 때까지 유신임금으로 받들며 소나 개. 돼지처럼 살아가자는 거야 뭐야.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4.19가 일어날 수 있었겠어?”

맞는 말이야. 그런 것 생각해서는 아무것도 못해. 박은 이승만이 몰락해서 비참하게 되는 꼴을 보았으면서도 그보다 더한 유신독재까지 만들어냈어. 이것은 곧 정치의 퇴보만이 아니라 사회의 퇴보를 말하는 거야. 세계 여러 나라들은 날로 변화하고 발전해 가고 있는데 우리는 4.19 이후 13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오히려 퇴보한 사회에서 산다는 게 말이나 돼? 4.19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게 뭐야. 이 땅에서 그 어떠한 독재도 용납하지 말라. 독재는 싸워서 물리치지 않으면 타도되지 않는다. 독재를 타도하려면 회생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것 등등이 아니겠어? 민주주의 세상에 살기를 원하거든 피 흘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옳소! 피 흘리지 않는 혁명은 없고.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꽃이다!”

옳거니!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비겁자는 물러가라!”

학생들은 서로 구호아닌 구호들을 주고받으며 데모 분위를 조성하고 있었다.

좋아. 좋아. 빼앗긴 민주주의는 반드시 되찾아야 하는데 말이지.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박이 안 하면 안 된다는 논리가 일반 국민들 사이에 꽤나 먹혀들어 가고 있다는 게 좀 곤란한 문제 아니겠어? 4.19가 얻었던 국민적 호응과 비교해서 말야.”

그게 바로 독재자들이 써먹는 전형적인 수법이야. 팔십 넘은 나이에 이승만도 나 아니면 이 나라는 안 된다고 했거든. 그런데 그때와 지금의 상황이 다른 게 바로 경제문제야. 박 통이 경제개발을 추진했고. 그 덕에 이만큼 잘살게 됐다. 앞으로 계속 더 잘살게 되려면 박 통이 나라를 이끌어가야 한다. 아주 그럴듯한 감언이설이고. 판단력이 약하거나 가난한 일부 국민들은 속아 넘어가기 딱 좋은 괴변이야. 그러나 오늘의 경제발전을 이룩한 것은 박 통이 아니라 하루 14시간이 넘는 중노동. 그러면서도 입에 겨우 풀칠이나 하는 저임금. 건강을 해치는 형편없는 작업환경 등 온갖 악조건 속에서 피땀을 흘리며 일해 온 국민들의 노력과 힘이라는 것을 이번 데모에서 동시에 일깨워야 해. 국민 여러분이 경제 발전의 주인공이다. 국민 여러분이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다. 이 진실을 밝혀 박 정권이 유포해 온 최면에서 국민들을 깨어나게 하는 게 우리들의 또 다른 임무야. 국민들이 그 최면에서 깨어나는 건 바로 박 정권이 안주하고 있는 성벽을 무너뜨리는 거니까.”

그거 참 옳으신 말씀! . 내가 학생회에 추천할 테니까 이따가 마이크 잡고 그 발언 좀 해라.”

나도 그러고 싶은데 마이크에 약한 게 병이란 말야.”

둘러앉은 학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나저나 우리가 첫 데모인 모양인데. 딴 대학에서는 호응을 할래나? 연달아 일어나지 않으면 곤란한데.”

그야 당연히 일어나지 않겠어? 유신정권이 틀려먹은 거야 충분히 아는 거고. 학생회에서도 상호 연락하는 거야 기본일 텐데.”

그렇겠지. 학생회 간부들의 조직력이나 정치력도 만만찮으니까.”

이규동은 끊일 줄 모르고 이어지는 학생들의 대화를 들으며 큰 형을 생각하고 있었다. 큰형이 4.19에 참여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큰형이 검사이기 때문이었다. 혹시 자신의 행동이 큰 형의 입장을 거북하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떼칠 수가 없었다. 그는 지방근무 중인 큰형을 향해 물어보았다.

큰형. 나 유신 반대 데모해도 돼요?’

넌 관둬라 내 입장이 난처하잖아.’

묻지 말고 네 판단대로 해라.’

당연히 해야지. 젊은이가 정의를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냐?’

그는 큰형의 이 세 가지 대답 앞에서 다시 생각을 간추려 나갔다. 큰 형의 입장만을 생각한 것은 첫 번째였다. 세 번째 것은 그와 정반대로 당위론이었다. 그럼 남는 것은 두 번째인 자신의 판단이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10월 유신...... 종신대통령...... 경제발전...... 독재......

. . 교내에 있는 학생 여러분께 알립니다. 캠퍼스에 있는 모든 학생 여러분께 알립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우리의 모든 자유를 억압하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말살한 유신 반대 데모를 거행하고자 합니다. 학생 여러분들께서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운동장으로 집결하시어 이 성스러운 행사에 동참하여 주시기 바라니다. 학생...... ”

가자아!”

유신독재 타도하자!”

교정에 있던 학생들이 제각기 소리 지르고 팔들을 뻗쳐 올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확성기에서 계속 울려 나오는 힘찬 목소리와 함께 학생들의 움직임은 금세 교정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노란색으로 물들어가는 은행잎들에 서린 스산함으로 10월의 정취가 가득했던 교정에는 데모의 긴장만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이규동은 책가방을 옆구리에 끼며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학생들이 이루기 시작한 물결 속으로 섞여들었다.

이규동의 대학에서 데모가 일어난 바로 다음날 김선진네 대학에서도 아침부터 교정이 뒤숭숭했다. 학생들은 여기저기 모여서 어제 일어난 데모에 대해서 얘기하느라고 바빴다.

걔네들이 배짱 좋게 유신독재 타도를 외쳤다면서?”

그야 당연하지. 데모하는 마당에 타도를 외치지 개선을 바라겠냐?”

박 통 기분이 어땠을까? 왕창 독이 올랐겠지?”

그동안 자기 뜻대로 잘돼 가는 줄 알았다가 된통 뒤통수 맞은 거지.”

그나저나 우리 대학 학생회에서는 뭐 하고 있는 거야? 학생회비 깔고 앉아 술들이나 퍼 마시고 있나?”

오늘 데모한다고 지금 학생회관 쪽이 불나고 있는 것 몰라?”

병신 같은 새끼들. 기왕 하려면 선수를 쳐야지 왜 자꾸 선수를 뺏기냐 그거야. 제일 먼저 치고 나가는 기분이란 게 있잖아.”

그야 그렇지. 허지만 오늘 하는 것도 작전상 괜찮아. 대학들이 연달아 일어나서 다같이 호응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은 저쪽에 연타를 날리는 효과가 있거든.”

.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야. 권투에서 쨉을 계속 날리다가 결정적 기회가 포착되면 스트레이트 펀치를 내갈기는 것처럼. 이렇게 대학별로 하다가 때가 왔다 하면 모든 대학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밀어붙여 버려야지. 4.19 때처럼 말야.”

그거 말은 좋은데 실제로 우리 뜻대로 될까?”

그거 무슨 김 빼는 소리야?”

이승만하고 박정희는 다르다 그거지. 박의 독기는 이미 세상이 다 알잖아. 이승만처럼 쉽게 물러갈 사람이면 이승만이 당한 꼴 다 보았으면서 유신 악법을 만들었겠어? 예사 상대가 아니라구.”

이거 그렇게 말하지 말어. 이승만이 쉽게 물러가긴 뭐가 쉽게 물러가 4.19 때 얼마나 죽은 지 알어? 170명이 넘는 생사람들이 죽었어. 그러고도 안 물러갈 위인이 있어? 박도 국민 우습게 알았다간 큰코다치지 별 수 있어?”

그 말 들으니 으시시한데. 또 그렇게 죽어가게 되면 어쩌지?”

이거 미리부터 겁먹지 말어. 사람답게 살려면 독재는 타도해야 되고. 이 땅에 독재가 계속되는 건 우리의 운명이니까 또 다치고 상해도 감수해야지 어쩌겠어.”

운명? 그럴지도 모르지. 좌우간 정치하는 것들은 어떻게 된 게 탐욕을 버려라. 탐욕은 너 자신을 망치고 세상까지 망치는 가장 큰 화근이니라한 석가모니의 그 쉬운 말도 모르지? 참 답답한 인종들이야.”

이거 왜 갑자기 철학적으로 나오시나? 그 말에 대한 가장 명쾌한 답이 있지. 오스카 와일드 왈. ‘정치가라는 자들은 가장 하급 인간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끝없이 거짓말을 일삼고. 오로지 권력을 갖기 위하여 전혀 회의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어때? 썩 괜찮은 말씀이지?”

여기 정치학과 없어? 이런 말 듣고도 전과 안 하면 그건 사람도 아니다.”

순진한 소리하지 말어. 정치학과 애들은 이미 회의할 줄 모르는 자질을 갖추고 있어서 그런 말이 아예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걸 몰라?”

하하하...... 그건 너무 심했다.”

저렇게 말하는 쟤야말로 정치학과에 딱 어울리는데 상대 헛다니지 아마?”

학생들이 와아 웃음을 터뜨렸다. 김선진도 동급생들을 따라 웃으며 줄곧 큰 형을 생각하고 있었다.

선태 그놈은 인간으로서 아무 가치도 없는 놈이야. 못나게 죽긴 왜 죽어. 죽을 결심이 있으면 그 결심으로 더욱 악착스럽게 공부해서 고시를 패스해야지. 정 능력이 모자라면 딴 길로 인생을 새로 개척해야 하고. . 똑똑히 들어. 자살이란 패자들이 택하는 가장 치졸한 도피야. 작은형을 거울삼아 넌 공부만 열심히 해. 기본적으로 교재를 앞뒤로 달달 외워버리도록 열심히 하란 말야. 그런 실력으로 졸업하면 취직은 내가 책임지고 일류기업에 시켜줄 테니까. 알아 듣겠어?”

작은 형을 화장하고 나서 일을 다 마친 것을 알리려고 가자 큰 형이 한 훈계였다. 큰 형과는 나이 차이가 너무 많아 평소에도 늘 어렵기만 하고 서먹서먹했는데 그 말을 듣고부터는 더 사이가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큰 형의 속마음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 말에는 작은 형의 죽음은 조금도 슬퍼하지 않은 채 승자의 입장만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큰 형이 육법전서를 달달 외웠던 식으로 공부를 하라는 것이었지만 그럴 자신도 흥미도 없었다. 또 교재를 앞뒤로 달달 외울 정도로 공부를 하면 굳이 큰형의 검사 빽을 동원하지 않고도 일류기업에 얼마든지 취직할 수 있었다. 그 뒤로 가끔 얼굴을 대할 때마다 큰형은 공부. 공부를 강조할 뿐이었다. 나도 둘째 동생처럼 실패할까 봐 그러는 큰형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똑같은 소리를 계속 듣는 것은 지겹고 신물 났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 대신 방학 때 용돈을 따로 주며 여행이라도 한번 하라고 한다면 공부할 마음이 절로 생길 것 같기도 했다. 그런 큰 형이 공부하고는 반대인 데모를 하고 나섰다면 좋아할 리가 없을 것은 뻔했다. 그러나 큰 형의 말을 그대로 따를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지금도 데모를 앞둔 열띤 분위기를 외면하고 도서관이나 강의실로 들어가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이 잘나 보이거나 모범생으로 보여야 할 텐데 그렇지가 않았다. 그들이 이기주의자나 비겁자로 보이고. 자기만을 위해 몸을 사리는 그 꼴이 얄밉고 얌통머리 없어 한 대 쥐어지르고 싶기까지 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헷갈리는 것이 있었다.

“....... 시청 앞까지 진출했지. 그때는 벌써 여러 대학 학생들이 몰려들고 있어서 시청 앞의 넓은 광장은 발 디딜 틈이 없이 사람들로 넘치고 있었어.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독재 물러가라.’ ‘이승만 물러가라고 구호를 외쳐대는데. 그 광경은 굉장했지. 그런데 학생들이 계속 밀려드니까 시청 광장이 좁아 먼저 온 학생들은 세종로를 채우면서 점점 광화문 쪽으로 밀려가기 시작했지. 그때 이미 태평로도 데모대로 꽉 차 있었어. 광화문 쪽으로 밀려가던 데모대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종로에서 오는 데모대와 합류하게 되었지. 수가 더 많아진 그들은 그대로 광화문을 향해 갈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중앙청 앞에는 경찰들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종로에서처럼 저지선을 구축하고 있었어. 그런데도 데모대 앞에서 갑자기 경무대로 가자하는 외침이 터져 나왔고. 그 외침은 순식간에 뒤로뒤로 퍼져나가 금방 광화문 쪽 데모대의 구호로 변하고 말았어. 마음이 한 덩어리가 된 데모대가 무서운 기세로 밀어붙이기 시작하자 중앙청 앞의 경찰들은 허망하게 무너져 경무대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지. 더욱 힘을 얻은 데모대는 거침없이 중앙청을 돌아 경무대를 향해 몰려가기 시작했어. 경찰들은 중간중간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소방차로 물을 뿜어대는가 하면 최루탄을 쏘아대기도 했어. 그러나 도저히 데모대의 기세를 꺾을 수가 없었지. 바리케이트가 하나씩 다 무너지고 마침내 데모대가 경무대 앞의 바리케이트에 도착하는 순간이었어. . . . 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한 거야......”

고등학생 때 친구 서너 명과 함께 들은 큰형의 무용담이었다. 큰 형이 검사였기 때문에 그 4.19 무용담은 더욱 근사했고. 친구들은 눈부신 듯 큰 형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때 큰 형은 고등고시 공부를 하면서도 4.19 데모에 앞장선 것이 아닌가. 내가 괜히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에 너무 주눅들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독재는 똑같이 나쁜 것 아닌가. 그럼 큰 형이 했던 것처럼 나도 하는 것이 옳다. 더 생각하지 말자. 김선진은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고 마음을 정했다. 마음이 개운해진 그는 옆의 친구에게 담배를 얻어 불을 붙였다. 그때 언뜻 송상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파출소에서 깎인 머리 모양 그대로 지금쯤 데모를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머리를 짧게 깎은 자신을 보자 송상균은 대뜸 내뱉었었다.

이 배신자! 형님과의 약속을 어기다니. 이 유신헤어스타일을 당당하게 지켜야지.”

학생회의 확성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17. 삶의 굽이굽이

일반 교실의 절반만한 크기의 사무실에는 담배연기가 가득 차 안개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무실을 비좁도록 채우고 있는 40여 명의 남자들은 모둠모둠 둘러서 왁자하게 떠들며 연신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바깥 날씨가 추워 창문을 꼭꼭 닫은 사무실 가운데는 연탄난로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이 많은 것에 비해 썰렁하게 추운 그곳에는 두 가지 특이함이 있었다. 일반 사무실과는 전혀 다르게 책상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접었다 폈다 하는 철 의자들만 벽에 기대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많은 남자들은 하나같이 머리가 말끔하게 손질된데다가 넥타이를 맨 신사 차림이었다.

우리 윤 사장님 이거 너무하셔. 그 화력 좋은 석유난로 좀 팍팍 돌려댈 것이지 이게 뭐야. 돈 그리 많이 벌어들이면서 왜 이리 짠돌이야 이게 누구 덕에 돈 버는 건데 우릴 이리 푸대접해서 되나?”

한 남자가 어깨를 부르르 떨며 투덜거렸다.

입 아픈 소리 작작해. 석유난로는 고사하고 연탄난로 하나 더 피우자고 한 사람을 내쫓아버린 사람이야. 지금도 설렁탕 먹는 것이 아까워 짜장면으로 점심 때우는 사람이니까 더 말할 것 없어.”

앉은 자리에 풀도 안 난다는 건 바로 우리 사장을 두고 하는 말이야. 그 돈 벌어서 다 어디에 쓰려고 그러지? 죽을 때 가져가는 것도 아닌데.”

그런 나사 풀린 소리하지 마. 우리 사장의 원대하신 꿈 못 들었어?

직접 전집 출판사를 차린다는 것 말야. 50권짜리를 찍어낼 출판사를 차릴 때까지는 택시도 안 탄다는 거잖아.”

. 출판사가 먹는 이익까지 깡그리 챙기시겠다는 욕심이신데. 그게 뜻대로 될까? 말이 좋아 50권짜리지 그 자본이 어마어마할 텐데.”

안 될 것도 없지. 우리 사장이 얼마나 무서운 독종이라고. 중령으로 예편당한 빈털터리로 이런 회사를 일으킨 사람이야. 그 사람이 돈을 얼마나 꿍쳐놓았는지 아는 사람 누구 있어?”

하긴 그래. 그 꿍꿍이속을 누가 알겠어. 좌우간 우린 언제나 이런 회사를 가져보나? 이렇게만 돼도 한 평생 니나노판으로 배 두들기며 살 수 있는데.”

괜히 헛꿈 꾸지 말어. 우리 같은 종자들은 다 틀렸으니까. 기분 잡쳤다고 한잔 술타령. 일 좀 풀려 기분 난다고 그림공부(화투놀이). 그 버릇 싹 도려내 청계천에 처박지 않고선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니까.”

이거 김새게 사장 말투 그대로네. 말이야 공자님 말씀인데. 그런 걸 딱 끊고 세상을 무슨 재미로 사나. 아이고 이놈에 세상살이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 옆에 둘러선 대여섯 사람은 다른 이야깃거리로 열을 올리고 있었다.

우리 일이야 세상이 잠잠하면서 편안하고 물가도 출렁거리지 말고 착 가라앉아 있어야 하는데 요새 세상이 왜 이리 난리판굿이야? 이거 미치고 환장하겠다니까.”

글쎄 말이야. 작년 10월부터 데모가 시작되었으니까 벌써 넉 달째 아니야? 대학생들 조기방학 하고 해가 바뀌면 좀 나아질 줄 알았더니 점점 더 심해지고 있잖아. 장준하 같은 점잖은 양반이 개헌하자고 서명운동 나서서 불을 붙일 건 뭐야? 우리 같은 하바리 인생들 코피 터지는 줄 모르고.”

점잖기로 치자면 이희승 선생이 더하지. 그 영감님은 왜 또 서명운동을 지지하고 나서시나. 자기가 세상 시끄럽게 해대면 우리가 파는 자기 국어사전 안 팔리는 것 모르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어디 그 양반들 잘못인가? 잘못이야 다 박 통이 저지르는 거지. 그런 점잖은 양반들까지 나서면 박 통은 일을 순리로 풀어 나가야 할 텐데 오히려 긴급조치만 펑펑 쏴대고 있잖아. 그놈의 유신이 사람 잡어.”

오늘 아침 이 신문을 좀 봐. 개헌에 앞장선 사람들을 구속하기 시작했어. 이렇게 우격다짐으로 나오는 게 바로 군대식인데. 이건 불에 휘발유 끼얹는 거지 뭐야? 어쨌거나 우린 박 통 덕에 전업해야 될지도 모르게 생겼어.”

여러부운. 좀 조용히 하시고 빨리 자리 정돈해 주세요. 사장님 나오십니다.”

그때 앞쪽 문을 열고 나타난 아가씨가 카랑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양쪽 벽에 기대놓은 철 의자를 제각기 하나씩 집어다가 펴느라고 와짝 더 소란을 피웠다. 그리고 그들은 대충 줄을 맞춰 앉았다. 촘촘히 붙어 앉은 그들은 조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입들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앞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나타났다. 손에 큰 봉투를 들고 있는 그 남자도 매끈한 신사복 차림이었다.

. ...... 어제도 여러분이 카드 뽑아온 실적은 형편없었습니다. 계속 이렇게 실적이 나쁜 것은 회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유감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연말연시가 끼었고. 유신 반대다 뭐다 해서 세상이 시끌시끌하니까 우리 사업이 방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여러분들은 가일층 마음적으로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하는데. 형편이 안 좋으니까 하고 기분적으로 풀어져 있어서 실적이 안 오른다 그겁니다. 우리 외판사업은 첫째도 정신무장. 둘째도 정신무장. 셋째도 정신무장입니다. 정신일도 하사불성.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안 될 일이 없습니다. 내가 너한테 이 책을 먹이지 않고는 안 물러나겠다 하고 마음적으로 철통같이 무장을 했는데 안 먹히는 경우는 없습니다. 한 번으로 안 되면 공손하게 인사를 하며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하고 물러나서 두 번. 그래도 안 되면 세 번. 이렇게 공략해 대면 제아무리 책값 아까워하는 인간도 다섯 번 이전에 다 정복할 수 있어요. 이건 내가 개발한 것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알아요. 여러분들은 그런 정신무장이 마음적으로 안 되어 있다 그겁니다. . ...... 이런 때일수록 각오를 가일층 단단히 하기를 촉구하면서. 여러분의 판촉을 돕기 위하야 이번에 새로 나온 신상품 하나를 소개합니다. 그게 뭐냐! 24권짜리 세계명작 동화전집! 이것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사장은 큰 봉투에서 꺼낸 천연색 선전지를 쫙 펼치며 더욱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사장의 책 내용 설명에 따라 외판원들의 눈빛도 달라지고 있었다. 새로운 상품에 대한 관심과 기대뿐만이 아니라 사장의 말은 바로 판촉 요령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대학을 왜 우골탑이라고 합니까? 무식한 농사꾼들이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소까지 팔아 자식들을 대학에 보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부모들의 교육열은 그렇게 열광적이고 지독합니다. 농사꾼들만이 아니라 서울사람들이 더 심한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유치원생이나 국민학생을 둔 젊은 아주머니들. 그 사람들이 공격 목표입니다. 그 사람들이 서울에 얼마나 많습니까? 어머니들은 자식을 위하는 일이라면. 특히 공부를 위해서는 피라도 뽑아 책을 사주게 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애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이니까 애들이 있는 집집마다 꽂지 못한다면 그건 말이 안 됩니다. 이 상품으로도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와 인연적으로 안 맞는 거니까 각오해야 합니다. 자아 여러분. 오늘도 돌격하는 마음적 각오로 다같이 힘차게 나갑시다!”

사장을 따라 외판원들은 다같이 팔을 뻗쳐 올리며 나갑시다!’를 복창했다. 사장이 나간 다음 외판원들은 그 뒤를 따라 차례로 사무실로 들어 갔다. 사무실에서는 아가씨가 새 전집의 선전지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사무실을 나가는 다른 문 옆에는 전신이 비치는 커다란 거울이 붙어 있었다. 선전지를 든 외판원들은 그 거울 앞에 똑바로 서서 머리 모양이며 옷매무시를 바로잡고는 했다. 그런 그들의 얼굴은 사장이 거듭거듭 강조한 마음적 각오를 단단히 하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굳어져 있는가 하면 근심기와 함께 심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선전지를 맨 끝에 받은 사람. 그는 정동진이었다. 그는 머뭇머뭇 눈치를 보다가 아가씨에게 다가섰다.

저어....... 미쓰최. 나 가불 좀 안될까? 집에 급한 일이 생겼는데......”

마르고 지친 얼굴에 피어난 비굴한 웃음과 함께 정동진의 목소리는 힘없이 떨리고 있었다. 남재구와 고급 술집에 마주앉았을 때의 기름진 모습은 흔적도 없었다.

또 가불요? 실적도 없으면서 자꾸 그러면 어떻게요. 난 모르겠으니까 사장님한테 직접 말하세요.”

사원 아가씨가 얼굴을 찌푸리며 싸늘하게 내쏘았다.

알아. 알아. 나 급해서 그러니까 미쓰 최가 사장님한테 알려 주기만 해. 말씀은 내가 드릴 테니까.”

잔주름이 부쩍 많아진 정동진의 얼굴에 비굴한 웃음이 더 진해졌다.

참 별꼴이야. 아침부터.”

사원 아가씨는 짜증을 부리며 사장실로 갔다. 연탄난로 옆에 붙어 서서 사장실을 바라보고 있는 정동진의 눈에는 불안이 가득했다. 선전지를 돌돌 말고 있는 손놀림에서는 초조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들어오시래요

정동진은 오버를 벗으며 허둥지둥 사장실로 들어갔다. 사장실은 아주 좁았다. 책상 하나와 사무용 검정 비닐소파가 비좁게 놓였고. 한쪽 벽의 책꽂이에는 여러 가지 전집물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앉으쇼. 가불이라니 무슨 소리요?”

턱짓으로 소파를 가리키며 책상에서 일어나는 사장. 그는 10여 년 전에 거리에서 정동진을 만나 커피도 얻어먹고 전집도 팔았던 윤 중령이었다.

. 사장님. 이거 참 죄송합니다만 마누라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치료비가 급한데 어떻게 좀.......”

소파 끝에 겨우 앉은 정동진은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거 왜 이러쇼. 군 선배라 특별대우 하는 것도 한도가 있지 카드도 잘 뽑아오지 못하면서 이래서 되겠소? 지난번 가불때 벌써 한도가 넘었는데. 이게 땅 파서 하는 장사가 아니잖소.”

군 선배라는 말이 무색하게 윤 사장의 반말투는 꽤나 거칠었다.

죄송합니다. 형편이 워낙 급해서......”

정동진은 사장의 거드름 앞에 그저 머리를 조아렸다.

아니. 내가 보기엔 정 선배는 아직 형편이 덜 급하고. 배도 덜 고픈 거요. 왜냐! 육군 준장 출신이면 위아래로 아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요? 더구나 5.16 이후에는 군대가 판치는 세상이라 그 사람들 태반이 노른자위 차지하고 있잖소. 그 기막힌 기반을 언제 써 먹을거요? 그 연줄 연줄을 타고 들어가면 그보다 더 좋은 노다지가 어디 또 있소. 그것만 잘 캐먹어도 우리 회사에서 최고 실적을 올릴 수 있게 돼 있소. 아니. 이런 회사까지도 차릴 수 있어요. 날 보시오. . 나는 겨우 고졸에 간부 후보생 과정을 거친 죄로 중령에서 밀려났지만 군대 생활의 연줄을 안면적으로 인연적으로 최대한 이용해 이렇게 자수성가했다 그거요. 헌데 정 선배는 이게 뭐요. 열성적으로 일을 하지 않아 카드실적은 꼴찌를 못 면하면서 맨날 가불이라니. 벼룩도 낯짝이 있어야지.”

윤 사장은 다리를 꼬아 올리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 죄송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번 한 번만 좀.....”

거 맨날 입에 발린 소리 좀 하지 마쇼. 체면. 자존심. 위신. 그따위 게다 뭐 말라빠진 거요. 배꼽이 등에 찰싹 붙도록 굶어보쇼. 아 새끼들이 배고파 눈 하얗게 까뒤집고 쓰러지는 꼴을 당해보란 말이오. 그럼 그따위 것들 다 쓰레기통에 처박고 아무나 찾아가게 될 테니까. 아직 고생이 모자라요.”

. 사장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이번엔 형편이 너무 급하니......”

아아니. 그거. 그거 아까 배포한 새 상품 팜플랫 아니오!”

윤 사장의 얼굴이 험하게 변하며 정동진을 겨누듯 손가락질했다. 정동진은 흠칫 놀라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선전지는 자신의 두 손 안에서 돌돌 말려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닥치시오! 그게 바로 당신 맘보야. 당신은 틀려먹었어. 오늘 당장 해고야.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나가!”

눈을 부릅뜬 윤 사장은 탁자를 걷어차며 소리를 질렀다. 그는 평소에 복장 단정으로부터 시작되는 비즈니스맨 10개 수칙에 못지않게 선전지를 깨끗하게 간수하라고 강조해 오고 있었다. 고객 앞에 깨끗한 선전지를 내보여야만 상품에 대한 첫인상이 좋아지고 구매욕도 자극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정동진은 쫓기듯 사무실을 나와 싸늘하게 냉기 품은 시멘트계단을 터벅터벅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내가 어쩌다 이 꼴이 되었는가......’

절망이 아니었다. 좌절도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암담함 속을 허우적거리며 오늘에 이르렀다. 방금 당한 일도 모독감이 아니었다. 이 참혹한 심정을 무어라고 대신할 말이 없었다. 자신은 갈가리 찢기고 찢겨 이제 사람일 수가 없었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죽음에 이르는 길 같았다. 차라리 그랬으면 싶었다. 이대로 죽을 수 있다면 그게 좋을 것 같았다. 더 살고 싶지 않았고 더 살아갈 자신도 없었다. 아내마저 병 들어버렸으니 마지막 끈마저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세 자식이 앞을 막아섰다. 건물을 나선 정동진은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거리에는 매운 1월 추위에 몸을 웅크린 사람들이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정동진은 몸속에서 찬바람이 일어나는 오한을 느끼며 옷깃을 여몄다. 그건 몸이 추워서 생기는 바람이 아니라 마음이 추워서 생기는 바람이었다.

정동진은 무작정 걸음을 떼어 놓았다. 넓고 넓은 서울이 파도 거칠게 일어나는 망망한 바다 같기만 했다. 그 바다를 헤쳐 나아가려고 사람들은 저마다 배를 가지고 있었다. 능력에 따라 그 배들은 크고 작고 각양각색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돛단배는 고사하고 뗏목배조차 가지지 못한 신세였다. 허우적거리고 발버둥치다가 결국 파도에 휩쓸려 사라질 위기에 빠져 있었다. 그런 생각에 몰리자 정동진은 속떨림이 더 심해지는 것을 느꼈다. 따끈한 물이라도 한잔 마셨으면 싶었다. 그러나 서울 거리 그 어느 곳에서도 뜨거운 물 한잔을 얻어 마실 데는 없었다. 시내버스 차비 단돈 20원이 없으면 종점까지 30~40리 거리를 꼼짝없이 걸어가야 하는 것처럼. 서울은 그런 곳이었다. 아니. 사람 사는 곳이면 그 어디나 다를 것이 없었다. 수중에는 차비 정도뿐 차를 마실 여윳돈은 없었다. 그러나 가슴까지 벌떡거리는 속떨림을 다스리지 않고는 더 걸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정동진은 다방 구석자리에 주저앉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윤 사장의 말에 너무 충격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불을 하지 못한 것만이 아니라 그나마 있던 일자리마저 잃어버리게 된 때문이라 싶었다. 자신이 선전지를 그렇게 말아대고 있었던 것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일이었다. 커피를 시킨 정동진은 김이 피어오르는 물 잔을 두 손으로 받쳐 잡고 마시기 시작했다.

“......아직 형편이 덜 급하고. 배도 덜 고픈 거요.”

윤 사장의 말이 떠오르며 정동진은 울컥 눈물이 나려고 했다.

이거 보지도 않는 월부 책 때문에 사람이 미칠 일이야. 나 벌써 여섯 가지나 걸려있어. 안면 좀 있는 사람은 다 와서 괴롭히니 이거야 원.”

마침내 국회의원의 꿈을 이룬 남재구가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는 듯 이렇게 말하며 월부 카드에 이름을 썼었다.

나 월부 책 너무 많아 꽂을 데도 없어. 이거 한 질 팔면 자네가 마진을 얼마나 먹지? 그걸 내가 줄 테니까 카드 쓰는 건 관두기로 하지.”

군납업이 한창 잘될 때 뒷돈을 배부르게 챙겼던 군대 동기가 한 말이었다. 그에 비하면 남재구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남재구한테서도 마구 짓밟히는 굴욕감을 느꼈지만 그는 완전히 거지 취급을 했던 것이다. 윤 사장의 말이 아니었어도 자신은 그동안 한 번쯤 폐를 끼쳐도 괜찮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거의 다 찾아다녀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쓸모 없게 된 삶의 실패자를 대하는 데 전과 너무 달랐다. 인간관계라는 것. 우정이라는 것까지도 거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서로가 이익을 보며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 그토록 돈독했던 우정은 거래가 필요 없게 되자 일순간에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세상인심이 야박하다는 거야 상식일 수도 없는 사실이지만 친구라고 생각해 왔던 사람들의 그 야박함을 뒤늦게 겪으며 거듭 절망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지난날 한인곤이 예편 당했을 때 자신이 의도적으로 그를 외면했던 일이 아프게 떠올랐다. 그때 미안함과 괴로움이 없지 않았지만 한인곤을 계속 접촉하는 것은 여러모로 자신의 진급에 피해를 주었으면 주었지 이익이 될 리 없어서 피했던 것이다. 그때 한인곤이 느꼈을 배신감이 얼마나 컷을 것인지. 뒤늦은 죄의식이 마음을 괴롭혔다. 그때 자신이 그렇게 하지만 않았더라도 한인곤은 군납업에 자본을 대고 동업을 했을 것이다. 그랬으면 자신의 신세가 이렇게 되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 안타까운 후회 또한 자신의 이기심이 뒤늦게 고개를 든 것뿐이었다. 그때 자신은 예편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은 채 별 둘을 달기 위해서 총력을 다하고 있었다. 5.16이라는 날벼락이 칠 줄을 어찌 땅뜀이나 했던가.

정동진은 뜨거운 물을 다 마시고 한 잔을 더 시켰다. 속떨림은 약간쯤 나아지는 것 같은 기미를 보였다. 아무리 나날을 사는 것이 다급했어도 한인곤을 찾아갈 수는 없었다. 죄의식 때문만이 아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사업이 잘될 때 그를 등진 남재구와는 빈번하게 만나 힘을 빌렸으면서도 야당의원인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또 하나의 자신의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 행동이었다. 자신은 한인곤에게 거듭 잘못을 저지른 것이었고. 한인곤은 자신이 얼마나 잇속만 챙기고 살아온 인간인가를 비춰주는 거울이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세상사람은 누구나 다 그렇다......’

이렇게 변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변명이 통하려면 그나마 사업이 번창해 있어야 했다. 알량하게 사기를 당해 쪽박을 찬 신세로는 그런 변명조차 할 자격이 없었다. 정동진은 두 잔째의 뜨거운 물을 반쯤 마시고 나서 커피 잔을 끌어당겼다. 속떨림은 꽤 가라앉고 있었다. 그는 커피 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내의 병든 얼굴이 거기 어릿거리고 있었다.

여보. 나 아무렇지도 않아요. 내 병은 내가 다 아니까 어서 퇴원해요. 일이 좀 고됐을 뿐인데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요. 손님 많은 겨울 한철에 어서 많이 벌어야 애들 등록금 대지요.”

아내는 병원에서 깨나자마자 퇴원하자고 졸라댔다. 그러나 아내는 자기의 병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내는 자기가 하는 일이 너무 고달파 잠시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것으로 생각했지만 진찰 결과는 뜻밖에도 위암이었다.

수술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글쎄요 발병 원인이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지나치게 속을 썩이거나 심하게 신경 자극을 받는 일은 특히 나쁩니다. 개도 야단을 치면서 밥을 먹이면 제대로 소화를 못 시키고 먹은 걸 그대로 배설할 정도니까요.”

결국 아내의 위암은 사기를 당해 사업이 망한 것과 직결되어 있었다. 돈이 될 만한 살림살이까지 다 뺏기고 사글세 단칸방 신세가 된 뒤로 아내가 겪은 고생은 참담한 것이었다. 하루 15시간이 넘는 식당 물일을 거쳐 손수레를 밀며 시장 통의 커피며 쌍화차 행상을 해온 아내의 몸고생은 눈물겨웠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잃어버린 분함과 억울함을 견뎌내야 했던 마음고생도 컷을 것이다. 아내는 한 번도 임상천을 입에 올린 일이 없었다. 그러나 눈에는 언제나 눈물이 서려 있었고 얼굴에는 분이 차 있었다. 그리고 혼자 부엌일을 하거나 양말을 꿰매거나 할 때는 불현듯 이를 뿌드득 갈거나 가슴 무너지는 것 같은 한숨을 토하고는 했다. 아내는 풀 길 없는 원한으로 혼자 속을 태워왔던 것이다.

정동진은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나서 속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는 종이쪽지를 펴들었다. 영어 글씨. 그건 임상천의 미국 주소였다.

네놈이 이제 내 아내까지 망쳐놓았어. 네놈을....... 네놈을.......’

정동진은 어금니를 앙다물며 부르르 떨었다. 종이를 들고 있는 두 손 끝도 떨리고 있었다. 그동안 수없이 꺼내 보아 이젠 스펠링 하나하나까지도 다 외우고 있었다. 어서 빨리 돈을 모아 꼭 찾아가겠다는 생각 하나로 버티어왔었다. 그러나 그 복수의 길은 뜻대로 열리지 않았다. 외판원은 누구나 경원하는 천덕꾸러기였고 세 아이들의 학비 대기도 헉헉거리는 판에 미국행 비행기 요금은 너무 비쌌다. 미국으로 찾아가서 자신의 돈을 전부 되찾을 작정이었다. 아니 그동안 온 식구가 몸 고생 마음고생 한 것까지 다 쳐서 받아낼 작정이었다. 그리고 분이 풀릴 만큼 두들겨패 줄 작정이었다. 그러나 돈을 안 내놓으려고 하면 찔러 죽일 작정이었다. 그동안 그 꿈을 수도 없이 꾸어왔다. 이상하게도 꿈에서는 꼭 그놈이 돈을 내놓지 않았다. 그래서 그놈을 난자해 자신의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꿈을 깨고는 했다.

이놈을 꼭 찾아가야 하는데...... 아내를 이대로 죽일 수는 없는데...... 어떻게 해야 아내를 살릴 수 있을까......’

정동진은 임상천의 주소를 노려보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때 언뜻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다음 순간 그는 자신의 생각에 흠칫 놀랐다. 정동진은 깊은 숨을 쉬며 커피잔을 들었다. 커피를 천천히 마시고 있는 그의 의식 속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빠르게 교차하고 있었다.

그걸 그렇게 하면 ...... 아니야. 아니야. 그건 곤란해...... 뭐가 곤란하긴 곤란해...... 하지만 그들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럼 우리 애들은 왜...... 아내는 왜...... 병신 같은 생각 말고...... 그렇지만 그게...... 그럼 아내를 그냥 죽일 거야......’

정동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생각은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구체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한번 떠오른 그 생각은 갈수록 점점 더 강한 힘으로 의식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정동진은 유괴의 충동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임상천의 주소를 알아내려고 그의 딸을 찾아갔을 때 보았던 사내아이. 임상천과 절친한 척 꾸미려고 그 애에게 말을 걸며 물어본 나이는 여섯 살이었다. 아이는. 올해 학교에 들어간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했었다. 임상천의 딸은 나이에 비해 부자로 살고 있었다. 아파트도 평수 넓은 고급인데다가 한눈에 보기에도 가구들이 값나가는 것들이었고. 식모까지 거느린 생활이었다. 정동진은 문득 그 부유한 생활에 자신의 돈이 흘러 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사업이 잘되는 친정의 도움을 받기는 쉬운 일이었고. 그렇다면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수술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암균은 갈수록 활동이 왕성해지니까요.”

그러나...... 정동진은 생각을 바로잡으려다가 의사의 말을 퍼뜩 떠올렸다. 아내는 죽어가고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살려내야 했다. 정동진은 커피 잔을 비우며 다방에 있는 사람들을 의식했다. 자신이 너무 끔찍한 생각에 말려들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얼굴을 훔치고 머리를 흔들며 그 무서운 유혹을 떼쳐내려고 했다. 그는 돈을 구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다 생각했었지만 윤 사장에게 사정하는 것이 마지막 방법이었다. 그냥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책을 사달라는 것인데도 그렇게 싫어했던 사람들에게 한두 푼도 아닌 돈을 빌려달라고 사정한다고 빌려줄 리 만무였다. 그 유혹이 다시 그의 의식을 휘감고 들었다.

내가 왜 자꾸 이러지. 안 되겠다. 이러고 앉아 있지 말자.’

정동진은 스스로를 나무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다행히 속떨림이 가라앉은 것을 느끼며 그는 잔돈을 다 털어냈다. 햇살이 퍼지기는 했어도 밖은 여전히 추웠다. 광화문 네거리까지 나왔지만 정동진은 갈 곳이 없어 막막하기만 했다. 넓은 길이 비좁을 정도로 차들이 달리고 인도로는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만이 외톨이로 버려진 적막감과 외로움 속에서 또 이 세상이 파도 거칠게 일어나는 망망한 바다인 것을 느끼고 있었다.

무슨 수로 이 바다를 헤쳐나가나...... 새 배를 ...... 어떻게 새 배를 장만해야 ......’

이런 생각을 하며 정동진은 무작정 발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며 그는 신음했다. 쉰셋의 나이...... 잘 있던 직장에서도 밀려나게 될 나이였고 노동을 하자 해도 막노동판에서 송장 취급을 받을 나이였다. 무슨 기술을 가졌어도 쉰이 넘으면 푸대접이었다. 군납공장에서 바로 자신이 쉰 넘은 기술자들을 내보내지 않았던가.

쉰셋......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이...... 쓰레기 같은 존재...... 인간 쓰레기!’

그는 자신이 인간쓰레기임을 어느 때 없이 절실하게 느꼈다. 그 통렬함이 쓰리고 아프게 가슴을 쳤다. 그러나 사업이 그대로 지속되었더라면 쉰셋이 나이는 오히려 사장으로서 위엄과 권위가 더 생길 나이였다. 한인곤과 남재구가 국회의원으로서 그 나이가 더 잘 어울리는 것처럼. 결국 원수는 임상천이었다. 그 놈은 자신이 40대를 아낌없이 바쳐 이룩해 놓은 부를 송두리째 낚아채 자신을 인간쓰레기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그놈을....... 그의 가슴에서는 또 복수의 불길이 타올랐다. 그 불길은 이내 아까의 유혹으로 바뀌었다.

그 일이 꼭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어. 만약 실패해서 체포되는 날에는......’

정동진은 감정에 휩쓸리고 있는 자신을 막느라고 일부러 이런 생각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 곧 반발이 일어났다.

난 바보가 아니야. 군대 작전 짜듯이 하면 그까짓 건 식은죽 먹기야.’

이 생각을 하는 순간 마음에 급속도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래. 해치우자! 자신감과 함께 그쪽으로 마음이 치달아갔다. 자신도 믿을 수 없는 그 묘한 효과에 정동진은 섬뜩 놀랐다. 그 생각은 다방 구석에 혼자 쪼그리고 앉아 있어서 생긴 망상이 아니었다. 밝은 대낮에 대로를 걸으면서도 자신은 그런 무서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동진은 그토록 험하게 변한 자신을 보며 또 신음을 씹었다.

제발 어디서 아내의 수술비만 구할 수 있다면 ......’

그는 이 위기에서 스스로를 구하고 싶은 간절함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서울은 날씨만큼 차겁고 냉정할 뿐 찾아갈 데라고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 면박당하더라도 마지막으로 한인곤을 찾아가 볼까 ...... 한인곤은 남재구하고는 다른 데가 있는데 ...... 아무리 사정이 급박해도 그런 흉한 짓을 해서는 안 되는데.......’

정동진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한인곤 뿐이었다. 일단 한인곤을 생각하자 그가 꼭 도와줄 것 같은 느낌과 함께 그쪽으로 왈칵 마음이 쏠려갔다.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도록 마음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내가 왜 이 모양인가 ...... 이제 정신이 도는 것인가 ......’

정동진은 잠시 후에 그 일을 저지르기 두려워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자신이 표적으로 삼고 있는 아이가 임상천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외손자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정동진은 그 무서운 유혹에서 도망치듯 한인곤을 만나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또 마음이 변하기 전에 연락을 하려고 커피 값을 내고 남은 동전 몇 개를 소중하게 쥐었다. 그는 공중전화 앞에서 두툼한 수첩을 꺼냈다. 수첩을 넘길 때마다 앞뒤로 사람들의 주소와 전화번호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이미 쓸모가 없어진 외판원의 재산이었다. 정동진은 천천히 다이얼을 돌렸다. 그 손가락 끝이 떨리고 있었다.

의원님 지금 안 계십니다. 의사당이 개회 중입니다. 실례지만 누구신가요?”

. 친굽니다. 언제쯤 끝나십니까?”

아마 두 시간쯤 걸릴 것 같습니다.”

. 알았습니다. 다시 걸겠습니다.”

누구시라고 전할까요?”

...... 옛날 군대 동깁니다. 다시 걸도록 하겠습니다.”

정동진은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하마터면 이름을 댈 뻔했던 것이다. 이름을 남겼다가는 한인곤이 자리를 피해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간을 물어보았다. 시계를 전당포에 잡혀 먹은 지도 이미 오래 전이었다. 그는 세종로까지 걸어갈 시간은 충분하다고 계산했다. 기왕 내친걸음이니 직접 찾아가 만나기로 했다. 이런 일에 전화라는 기계는 거절하기 딱 좋은 흉물이었다. 그는 종로5가에서 급히 발길을 되돌렸다.

이거 보시오. 나 육군 준장이었소. 한인곤 의원하고 육사 동기고.”

주민등록증을 내놓았는데도 까다롭게 구는 국회 별관의 경비에게 정동진은 불쾌하게 내쏘았다.

아 예. 그러십니까.”

경비 경찰은 깜짝 놀라며 거수경례까지 올려 붙였다. 정동진의 후줄근\하고 지친 몰골은 의심을 살 만도 했다.

아니. 자네가 여기까지 어쩐 일인가? 그런데 어쩌지? 내가 점심 선약이 있어서.”

괜찮아. 괜찮아. 나도 점심 먹고 올 테니까 그 담에 만나면 돼.”

정동진은 한인곤과 악수를 하며 들뜬 듯 흥분한 듯 턱없이 큰소리로 대꾸했다. 뜻밖에도 한인곤이 반갑게 맞이해 주는 바람에 그는 고마움과 함께 힘을 얻고 있었다. 정동진은 시간 보낼 만한 데를 찾아 광화문 네거리를 건너가며 다리가 아픈 것도. 배고픈 줄도 모르고 있었다. 걱정하고 주저했던 것과는 달리 격의 없이 대해주는 한인곤의 태도가 암담하게 막혀 있던 가슴을 광화문 넓은 길처럼 틔워주고 있었다.

저러다가 궁한 소리를 하게 되면 또 다른 사람들처럼 안면 바꾸는 게 아닐까 ......’

정동진은 마음 한쪽에서 자꾸 솟아오르는 이런 생각을 한사코 억눌러댔다. 그러면서 한인곤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야기를 이렇게 엮어보고. 다시 뜯어고쳐 연습하며 저 멀리 있는 경복궁을 향해 걸었다. 어차피 한 시간 반이나 남아 있는 시간을 죽여야 했다. 그는 몇 번이고 이야기를 고쳐가며 입장료 없이 들어가는 경복궁을 두 번 돌아다. 더 걸을 기운이 없어서 학생에게 시간을 물어보았다. 너끈히 한 시간은 지난 줄 알았는데 겨우 40분 정도가 지났을 뿐이다. 미리 가서 기다리기로 하고 한인곤이 말한 다방을 찾아 나섰다.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천천히 걸으면서 남재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저 범접하기 어려운 국회의사당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 아직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벼락출세란 바로 그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세상살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놈의 5.16으로 그와 자신은 팔자가 정반대로 뒤집어지고 말았다. 생각할수록 기막히기만 한 일이었다.

정동진은 다방에 자리잡고 앉자마자 뜨거운 물 두 잔으로 배를 채웠다. 빈 재떨이를 무심코 바라보던 그는 눈이 번쩍 띄었다. 그 옆에 스푼이 꽂힌 설탕그릇이 놓여 있었다. 설탕그릇은 으레 아가씨들이 커피와 함께 가져왔다가 커피에 타기가 바쁘게 가져가는 물건이었다. 그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옆자리를 곁눈질해 보았다. 그런데 그 탁자에도 설탕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다른 자리들을 둘러보았다. 역시 탁자마다 설탕그릇이 놓여 있었다. 국회 가까운 다방이라 다르다고 생각하며 그는 신침이 지르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정동진은 아가씨들과 주위의 눈길을 살펴가며 설탕가루를 입에 털어 넣기 시작했다. 시장기 동하는 속에 설탕가루는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다 먹고 싶은 입맛을 달래며 그는 설탕가루가 절반쯤 줄어들었을 때 손길을 멈추었다.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한인곤이 자리잡고 앉으며 물었다.

나 사업 망했네.”

. 남재구한테 얼핏 들었어.”

남재구가 그런 말을 해? 뭐라고 그러던가?”

정동진은 당황스러운 빛으로 한인곤의 기색을 살폈다.

. 자세한 말은 없었고. 어떤 모임에서 만났는데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한 마디 하더군. 자네가 어떻게 지내냐고 물으니까.”

한인곤은 담배를 권했다. 정동진은 안도하며 담배를 빼들었다. 돈이 없어 담배를 끊은 지도 오래였다.

그 말하기 전에 내가 자네한테 크게 사죄할 게 있네.”

정동진은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하자고 작정한 대로 이렇게 말을 꺼냈다.

사죄?”

. 내가 자네한테 큰 죄를 졌었지. 자네 예편당하고 난 다음에 내가 고의적으로 전화를 피하고 관계를 끊었던 거 말이야. 여태껏 정식으로 사과를 못했는데. 정말 미안하고 면목 없네. 용서해 주게나.”

난 또 무슨 소리라고. 그게 죄는 무슨 죄.”

한인곤은 그냥 픽 웃고 말았다. 정동진은 당황했다. 사과를 받아들인다는 것인지. 아니면 입에 발린 소리하지 말라고 거부하는 것인지 한인곤의 반응이 모호하고 야릇했던 것이다.

여보게. 내 말이 거짓말로 들리나? 난 이제 거짓말할 기력도 없고. 남을 속여 이익 볼 일도 없네. 내 진심을 좀 알아주게.”

정동진은 울음 번지는 얼굴에 간절한 눈길로 한인곤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아 내 말 오해하지 말게. 자네 말 다 믿으니까 이제 와서 쑥스럽게 그러지 말라는 거야.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도 사람인데 그때 서운한 마음이 없었다면 그건 거짓말이지. 허나 다 지난 일이고. 남재구가 나한테 한 것에 비하면 자네가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고 말야, 나도 세상 살면서 그런 경우가 없지 않거든. 나이 쉰을 넘기고 얼마 전에 험한 꼴 당하고 나서 나도 많이 변했어. 그런 사소한 일 다 잊어버리세.”

한인곤은 사과를 받아들인다는 듯 아주 흔쾌하게 말하고는.

그런데. 땅 짚고 헤엄치기라는 그 사업이 망했다는 건 무슨 소리야? 요즘 유행하는 것처럼 딴 사업을 또 벌렸었나?”

그는 말머리를 돌렸다.

아니. 동업자 임상천한테 몽땅 사기를 당했어.”

뭐라고? 임 사장이 사기를 쳐?”

한인곤은 의자에서 등을 뗄 정도로 놀랐다. 동업자로 임상천을 소개한 사람이 바로 한인곤이었다.

. 월남 특수를 타고 우리 사업도 번창일로였지. 그런데 월남 특수가 서서히 기울자 건설업 호황을 따라 목재업을 겸하기로 했지. 그 준비로 내가 동남아 현지로 몇 달 나갔는데. 그동안에 임상천은 어음을 엄청나게 남발해 사채시장에서 돈을 바꿔가지고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렸어.”

아니. 그런 못된 인간이 있나. 자기 몫만 챙겨간 게 아니구?”

한인곤이 노기 서린 눈으로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글쎄. 작은 공장은 그만두고 내 집이라도 날아가지 않게 어음질을 했더라도 내가 이 꼴은 되지 않았을 거야. 돈이 될 만한 살림살이까지 다 뺏기고 사글세방 신세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지. 그러고 나서 굶어죽을 수 없는 일이니까 집사람은 막일로. 나는 월부 책 외판으로 나섰지. 그런 데 자네를 못 찾아왔던 건 그때 진 죄 때문이었어.”

. 이런 놈의 일이 있나.”

나는 미국으로 임상천을 찾아가려고 그의 주소를 알아냈어. 시집간 그의 큰딸은 여기 살고 있거든. 그런데 내가 주변머리가 없어서 외판 실적은 형편없지. 집사람 수입도 보잘것없어 세 아이들 학비 대기도 허덕거리는 판이니 미국 갈 돈을 모은다는 건 헛꿈이지 뭐야. 그러는 판에 집사람이 쓰러지고 말았어. 막일이 힘들어 그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위암이야. 수술비가 없어 오늘 아침에 회사에 가불을 좀 해 달랬더니 돌아온 건 해고야. 실적이 부진한 내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거지.”

어허. 이거 참......”

그런데 말야 ...... 앞이 캄캄해져 있는데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있었어. 임상천의 딸한테 대여섯 살 먹은 아들이 있어....... 걔를 유괴하자는 생각이 떠오른 거야.”

아니. 뭐라고?”

담배를 빨고 있던 한인곤이 눈을 크게 떴다.

하도 답답해서 생긴 생각인데. 한번 그 생각이 떠오르자 자꾸 그쪽으로 마음이 말려드는 거야. 아무리 다급해도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나를 막았지만 다른 무슨 수가 없잖아. 있다는 건 딱 하나. 자네를 만나보는 거였어. 참 면목 없는 일이지만 안 될 때 안 되더라도 마지막으로 찾아가 보자하고. 이렇게 온 거네.”

아랫입술을 깨무는 정동진의 눈에 물기가 번지고 있었다.

세상에 참 별 기막힌 일이 다 있군. 왕년의 육군 장성이 유괴범으로 신문에 날 뻔했어.”

한인곤은 정동진을 측은하게 바라보다가 혀를 차며 다시 담배를 권했다.

임상천의 주소는 지금 가지고 있나?”

. 여기 있어.”

정동진은 재빨리 종이쪽지를 꺼냈다.

못된 인간. 겨우 한다는 짓이 ...... ”

한인곤은 주소를 내려다보며 혀를 차더니

내가 어떻게든 해결해 볼 테니까 이건 나한테 맡겨놓고. 병원비는 내일 점심시간에 여기서 다시 만나도록 하세. 곧 오후 회의가 시작되거든, 내일 12시 반에

하며 임상천의 주소를 속주머니에 넣었다.

고맙네. 고맙네......”

한인곤의 손을 덥석 잡는 정동진의 목소리는 울컥 터지는 울음이었다.

 

임채옥은 벽시계가 830분인 것을 확인하며 다시 안방으로 들어갔다. 벌써 네댓 차례나 남편을 깨웠지만 남편은 술기운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서던 임채옥은 에그!’ 하며 코를 싸쥐었다. 역한 술 냄새가 끼쳐왔던 것이다.

여보. 여보. 벌써 8시 반이라구요 또 늦게 생겼잖아요. 빨리 일어나요.”

임채옥은 요 위에 헤풀어져 있는 남편을 세게 흔들어댔다.

! . ...... 아이구 속 쓰려. 아이구 죽겠네 ......”

그녀의 남편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무겁게 몸을 일으키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게 술을 무작정 마시지 말고 요령껏 눈치껏 마시면 되잖아요. 당신 몸이 뭐 강철인 줄 알아요? 이러다가 큰 탈 난다구요.”

아이구. 모르면 그놈의 바가지 좀 긁지 마. 술상무가 요령 피워서 상대방을 어떻게 취하게 만들어. 술상무의 가련한 임무를 알기나 해? 아이구 속이야....... ”

맨날 억지 술을 마시고 이 고생인데. 이게 사람 사는 게 아니잖아요. 이러다가 몸 상하고 탈나면 어찌 되겠어요. 그놈의 술 상무 관두세요.”

이 사람 이거 왜 이래. 어떻게 따낸 상무라고.”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드는 얼굴로 그는 아내에게 눈을 흘기며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창문을 열어제치고 거실로 나오던 임채옥은 주춤했다. 웩 웩 하는 소리가 화장실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또 토하는가 싶어 그녀는 화장실로 내달았다. 그녀의 남편은 칫솔질을 하다 말고 세면기를 붙든 채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임채옥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냥 돌아서 부엌으로 갔다. 임채옥이 사발의 국물을 입으로 불어 식히고 있는데. 넥타이를 손에 든 남편이 허둥거리며 거실로 나왔다. 그의 머리는 빗질이 되어 있지 않았고. 와이셔츠 단추들도 다 채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 국물이라도 마시고 가요. 콩나물국이 술 깨는 데 특효래요.”

아냐. 아냐. 그런 것 마시면 더 속 뒤집어져. 술 깨는 약 사먹을 거야.”

그녀의 남편은 손사래를 치며 철문을 박차고 나갔다. 임채옥은 그런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울상이 되고 있었다. 임채옥은 회사들이 사업을 하는 데 왜 그리 술을 마셔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술상무.’ 그 호칭부터가 끔찍스러웠다. 그런데 회사마다 영업을 담당하는 상무들은 술상무가 되어야 하는 모양이었다. 남자들이 얽혀 돌아가는 세상에는 어이없고 어리석은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임채옥은 두 아이에게만 밥을 먹이고 식탁에서 물러났다. 합승택시 안에서 넥타이를 매고 머리를 빗고 있을 남편을 생각하자 입맛이 하나도 없었다.

아줌마. 전화 받으세요.”

임채옥이 화장실로 들어가는데 식모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국회의원 한인곤이라고 합니다. 부친 임상천 사장의 일로 의논할 게 있으니 내일쯤 만났으면 합니다.”

무슨 일이신지 ...... 저희 아버지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임채옥은 국회의원 전화가 뜻밖이었고. 순간적으로 불길한 생각이 스쳐갔다.

전화로 말씀드리기 곤란하니까 일단 만났으면 합니다.”

예에 ...... 그렇게 하지요.”

아버지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반응에 임채옥은 바짝 몸이 달아올랐다.

그럼 내일 몇 시에 ......”

저는 오늘이라도 괜찮은 데요. 의원님 시간이 어떠신지 ......”

임채옥은 마음 급한 것을 감추지 못했다.

오늘이라 ......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선약을 좀 확인해 보겠습니다.”

임채옥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눌렀다. 타국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불안이 고무풍선으로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 여보세요. 오후 5시부터 6시까지는 시간이 있습니다.”

네에. 5시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저희 아버지가 무슨 사고를 당하신 겁니까?”

아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미국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니라. 이민 떠나기 전에 있었던 일을 상의하려는 겁니다.”

전화를 끊은 임채옥은 안도의 숨을 길게 내뿜으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임채옥은 목욕탕에서도 미장원에서도 불안감을 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어감으로 보아 좋지 않은 일이 분명했고. 국회의원이 나섰다는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녀는 시간을 끈다고 끌었지만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30분이나 일렀다. 한인곤은 임채옥에게 명함을 건넨 다음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이건 임채옥 씨의 아버지와 관계되는 일인 동시에 임채옥 씨에게도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얘긴가 하면 ...... ”

한인곤은 임상천과 정동진 사이에 얽힌 이야기를 간추려 해나갔다.

“...... 그런데 문제는 궁지에 몰리다 못한 정동진 사장이 임채옥 씨의 아들을 유괴할 생각까지 한 것입니다.”

네에?”

한인곤의 이야기를 들어가며 점점 안색이 변하고 울상이 되어가던 임채옥은 이 대목에서 소스라치며 입을 가렸다.

다행히 정 사장이 이성을 찾아 나한테 그런 심정을 고백해서 서로 흉한 일은 피하게 됐습니다만. 누가 정 사장을 그런 지경에까지 몰아넣은 겁니까?”

죄송합니다. 저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임채옥은 머리를 조아리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내가 정 사장한테 받은 주소를 가지고 미국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임채옥 씨한테 부탁하는 건. 임채옥 씨도 아버지한테 편지를 써달라는 겁니다. 정 사장은 큰돈을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 제가 당장 편지를 보내겠습니다.”

임채옥의 가슴은 벌떡벌떡 뛰고 있었다. 언젠가 집에 찾아와 아버지 주소를 알아간 사람. 그가 바로 정 사장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전화번호까지 알아내고.

잘 이해해 줘서 고맙소.”

그분이 어려우실 텐데 우선 제가 좀 돈을 드렸으면 합니다.”

임채옥은 어머니가 자신에게 주고 간 돈이 그런 돈인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18. 여자에게도 꿈이

아파트의 3층까지 한달음에 치 올라온 박보금은 숨을 헐떡거리며 양쪽 문을 살폈다. 왼쪽 304호를 확인한 그녀의 눈길이 갑자기 사나워졌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304호의 초인종을 마구 눌러댔다.

어머. 누가 이리 야단이야

하는 소리가 멀리 들리고. 이어서

누구세요?”

하는 목청 높인 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나야. 빨리 문 열어!”

박보금은 성급하게 문손잡이를 잡아 돌리며 소리쳤다.

나가 누구에요?”

잔소리 말고 빨리 열지 못해. . 내 목소리도 까쳐먹었어

박보금은 목소리만큼 거칠게 문을 걷어찼다. 유록색의 고운 색감과는 달리 둔중하게 울리는 쇳소리가 가운데 공간을 둔 철문인 것을 알리고 있었다.

어머나!”

놀라는 소리와 함께 안에서 문 따는 소리가 났다. 박보금은 문을 벌컥 열어 제쳤다.

어머. 언니......”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서는 박보금에게 밀리듯 젊은 여자는 뒷걸음질을 했다. 그 여자의 얼굴은 독이 오른 박보금의 얼굴과는 정반대로 기가 질려 있었다.

. 어니 좋아하고 자빠졌네. 의리라고는 반 푼어치도 없는 년이.”

박보금은 곧 잡아챌 것 같은 기세로 거실로 올라섰다. 발에서 벗겨진 하이힐 두 짝이 제각기 나가넘어졌다.

언니. 왜 이래요. ......”

울상이 되어 뒷걸음질치고 있는 젊은 여자는 가발공장에서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던 이양자였다. 그녀의 모습은 전혀 딴사람처럼 바뀌어 있었다. 곱상했으나 촌티가 흐르던 얼굴은 세련된 화장과 함께 미인으로 변해 있었고. 모양새라고는 없이 구지레하던 옷은 몸매를 날씬하게 드러내주는 멋진 디자인에 어울리게 호화스러운 무늬의 홈웨어로 치장되어 있었다.

이 뻔뻔스러운 년아. 몰라서 그따위 주둥이 나불거려!”

눈을 부릅뜬 박보금이 더 크게 소리치며 손을 내뻗었다. 머리채를 잡으려는 그 손을 이양자는 재빨리 피했다.

언니. 왜 이래요. 말로해요. 말로.”

하얗게 질린 이양자는 울음이 터지는 소리를 냈다.

요런 썅년 보게. 내 손을 피해!”

이 외침과 함께 박보금이 핸드백을 팽개쳤다. 그리고 이양자를 향해 내달았다. 두 팔을 뻗힌 그녀는 사나운 매였고 쫓기고 있는 이양자는 한 마리 병아리였다. 그러나 거실은 언제까지 도망가도록 넓지 못했다.

야 이년아. 어디 뒈져봐라.”

박보금은 이양자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언니. 언니. 내가 그런 게 아니야 이시하라가 ...... 이시하라가......”

이양자는 거실 바닥에 나둥그러지며 다급하게 말하고 있었다.

이 썅년이 이거 뻔뻔스럽게 주둥이 놀리는 것 봐. 이거. 니년이 꼬리 치지 않았는데 이렇게 됐어?”

박보금은 이양자의 머리채를 짤짤 흔들어대며 포악을 부렸다.

언니가 잘 알잖아. 우리가 아무리 꼬리쳐 봤자 이 사람들 맘에 안 들면 소용없는 거.”

그 위기를 벗어나려고 이양자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싸가지 없는 년이 말하는 것 좀 봐. 이년아 쪽발이들이 좋아하기만 하면 아무 놈한테나 가랭이 벌려주고 살림 차리면 장땡이다 그거야? 누가 그따위 의리 없는 짓거리 가르쳐주든? 야 이년아. 아무리 개판치고 살지만 화류계에는 화류계 의리라는 게 있어. 먹을 밥. 안 먹을 밥이 따로 있다 그거야. 이년아. 아무리 급하다고. 의리 없는 년! 의리 없는 년!”

박보금은 의리 없는 년에 맞추어 이양자의 머리를 거실 바닥에 쿵쿵 찧어댔다.

아이고. 아이고, 엄마! 왜 나보고 이래. 이시하라한테 따지지.”

이년 주둥이 놀리는 것 봐. 이거. 이년아. 그놈이 꼬시면 나한테 미리 한마디라도 했어얄 것 아냐. 이 썅년이 잘나지도 못한 쌍판때기 믿고 까불어.”

박보금은 뿌드득 이를 가는가 싶더니 빨간 매니큐어 칠한 손으로 이양자의 얼굴을 할퀴었다.

엄마아!”

이 양자가 비명을 질렀다. 그 다음 순간 그녀는 상체를 벌떡 일으키더니 박보금의 팔을 물어뜯었다.

아야야야......”

느닷없이 역습을 당한 박보금은 비명을 지르며 그때까지 머리채를 잡고 있던 한쪽 손을 풀고 말았다. 이양자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년아. 가긴 어딜 가.”

박보금은 소파를 돌아 텔레비전 쪽으로 도망가는 이양자를 뒤쫓았다. 그녀의 눈에서는 살기가 번득이고 있었다. 이양자가 도망간다고 해 보았자 별로 넓지 않은 거실 가운데 놓인 소파를 돌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이년아. 웃기지 말라니까!”

이양자가 텔레비전을 막 지나는데 박보금이 그녀의 뒷머리를 낚아챘다.

엄마아!”

이양자가 텔레비전을 받치고 있는 나지막한 장식장 위에 놓인 인형 하나를 재빨리 집어 들었다. 그리고 획 돌아서며 박보금을 후려쳤다.

아앗!”

박보금이 얼굴을 싸잡으며 비틀거렸다. 이양자는 당황해 어쩔 줄을 모르며 손에 들고 있던 인형을 떨어뜨렸다. 거실 바닥에 부딪쳐 구르는 것은 일본 목각인형이었다.

니년이 나를 쳐!”

박보금이 소파 사이에 놓인 탁자 위에서 유리 재떨이를 날쌔게 집어들고 이양자에게 덤벼들었다.

엄마!”

이양자는 질겁을 하며 몸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박보금은 유리재떨이로 이양자의 머리를 내려쳤다. 이양자는 비명을 토하며 푹 고꾸라졌다. 박보금은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이양자의 배에 올라탔다. 그리고 유리재떨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살기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언니. 언니. 잘못했어요. 동생들 때문에...... 고향에 있는 동생들 때문에 ...... 엄마 혼자서 네 동생을 ...... 마음이 급해서. 제가 잘못했어요. 살려 ...... 살려주세요.”

이양자는 울면서 두 손을 맞비비고 있었다. 이양자의 울음 범벅인 애원을 따라 높이 솟았던 유리재떨이는 힘없이 아래로 처져 내리고 있었다. 박보금은 이양자의 애원만 듣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거실 바닥에 묻어나는 것도 보고 있었다. 박보금은 아무 말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유리재떨이를 소파에 던지고 자기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이시하라. 그 치사한 쪽바리 새끼. 돈푼이나 좀 있다고 티껍게 놀고 자빠졌어. 이년아. 더럽게 번 돈으로 만든 아까운 피 더 쏟기 전에 어서 병원에나 가.”

현관으로 나가며 박보금이 던진 말이었다. 이양자는 그때까지 죽은 듯이 몸을 부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감겨 있는데 양쪽 관자놀이로는 눈물이 줄지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박보금은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깊이 빨아들인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그녀는 헛웃음을 쳤다. 여기를 찾아올 때와는 정반대로 가슴은 텅 비어 있었다. 박보금은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문득 머리가 헝클어졌을 거라는 생각이 났다. 그녀는 다시 핸드백을 열어 거울을 꺼냈다.

어머나!”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헝클어진 머리보다 먼저 눈에 띈 것은 왼쪽 눈 밑 광대뼈 부분에 잡힌 멍이었다. 아까 목각인형으로 얻어맞은 자리였다. 그녀는 담배를 던져 발로 끄고 분첩을 꺼냈다. 두 번 세 번 그 자리에 분을 덧칠했다. 그리고 머리를 대충 빗질한 다음 쫓기듯 계단을 뛰어내렸다. 이양자를 찾아온 것을 후회하며. 박보금은 택시에 눈을 감고 앉아 화류계 환갑이 스물다섯 살이라는 말을 곱씹고 있었다. 그 말은 영락없이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아니. 자신은 환갑을 넘기고도 네 살이나 더 보탰으니 이제 화류계에서는 시들대로 시들어버린 꽃이었다. 그러고 보면 3년 전 이시하라의 현지 처 노릇을 시작한 것이 오히려 신기한 일인지도 몰랐다.

너 말이야. 이시하라상 잘 모셔라. 네가 나이보다 좀 젊어 보이기는 해도 땡땄지 뭐니. 걔네들도 눈은 빠꼼인데 어쩐 일인지 몰라. 시들어가는 꽃에 벌이 앉는 법이 있으니 좀 신기하니? 내가 슬그머니 질투가 날려고 한다 얘.”

오동장 최 마담이 샐샐 웃으며 놀리듯 농담하듯 했지만 그건 질투가 생길 만도 한 일이었다. 이시하라가 아파트를 얻자고 했을 때 자신도 너무 뜻밖이었던 것이다.

하여튼 잘된 일이니까 이시하라가 원하는 대로 싸아비스 잘해서 한 밑천 톡톡히 챙기라구. 몇 년 동안만 잘 붙들고 있으면 팔자 고칠 수 있으니까. 걔네들 돈 가치가 커서 우리나라에서 맘껏 폼잡아 가며 돈을 물 쓰듯 하니까 그 돈 못 후려내는 건 쪼다라구. 걔네들이 기술 좀 있고 물건 좀 좋다고 인정사정없이 우리나라 돈 박박 긁어가나 우리가 몸뚱이 밑천삼아 걔네들 돈 요령껏 뜯어내나 서로 피장파장 아니니? 애국자 따로 없는 거다 얘

요정하나 버젓하게 차려 독립하는 게 꿈인 최 마담의 말이었다. 최 마담의 꿈은 곧 자신의 꿈이기도 했다.

김명숙이 일류 디자이너가 되고 명동에 양장점을 차리는 게 꿈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코웃음을 치고 말았었다. 혀는 짧아도 침은 길게 뱉고 싶어 하더라고 겨우 양재학원에 다니는 주제에 가당치도 않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그런데 김명숙은 양재학원을 특등으로 졸업한다고 하더니만 이내 명동의 일류 양장점에 떡 취직을 했다. 버스 차장 김명숙이 명동 일류 양장점의 디자이너로. 물론 일류 디자이너의 시다일 뿐이었지만. 그건 상상도 할 수 없이 큰 변화고 출세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럼 나는 뭐야하는 생각에 몰렸고 요정이라도 꼭 하나 차려야 한다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랬다고 자신이 김명숙 앞에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것은 돈을 많이 갖고 폼 나게 쓰는 것이었다. 김명숙이 일하는 양장점에 가서 비싼 옷을 펑펑 해 입는 것. 그것이야말로 김명숙을 기죽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꿈을 가지고 아이들 합숙소는 임시로 친구에게 맡기고 이시하라와 동거를 시작했다. 그런데 2년쯤 되어 이시하라는 배신을 해버렸다. 이시하라가 하필 자신이 데리고 있던 이양자와 눈이 맞아 자신을 속였기 때문에 배신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화류계 사랑이란 하룻밤을 자나 10년을 사나 헤어지기로 작정된 돈 사랑이고 몸 사랑이었다. . 나비가 제 맘대로 이 꽃. 저 꽃에 앉았다 날아가고 하듯 화류계 사랑도 남자들 뜻대로 마음대로였다. 그러나 남자가 떠날 때는 사나이답게 그 뒤를 넉넉하고 보기 좋게 처리하는 게 도리였다. 그게 한량의 멋이고 풍류였다. 그런데 이시하라는 이 대목에서 너무 치사하게 자신을 속였던 것이다.

현지처 노릇은 대개 전세 아파트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매달 정해진 돈을 받았다. 그렇게 살다 보면 남자가 일본을 오가며 한국에 귀한 가전 제품을 사다 주기도 했고. 더 정이 들면 보석을 선물하기도 했다. 보석의 종류에 따라서 크기에 따라서 다르긴 하지만 일단 보석 선물을 받으면 한밑천 잡은 것으로 쳤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것이 전셋돈을 물려받는 것이었다. 언제든 현지처 노릇이 끝나면 남자는 일본말로 기마이쓰느라고 아파트 전셋돈을 여자에게 넘겨주었다. 그것이 사나이다운 풍류인 셈인데 이시하라는 자신을 까맣게 속인 채 전셋돈까지 빼 가버렸다. 그런데 이양자마저 자신을 속이고 이시하라와 배를 맞춘 거였다. 그들의 동거를 알게 된 것은 열 달쯤 지난 뒤였다. 그동안 이시하라는 일본으로 가버리고. 이양자는 고향 찾아 내려간 줄 알고 있었다. 끝내 아파트를 알아내 찾아갈 때는 이양자의 낯짝을 다 망가뜨려버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양자에게 미안함이 없지 않았다. 이시하라에게 따로 감정을 풀 수는 없고. 이양자는 절반은 덤터기를 쓴 셈이었다.

, 그거 참 웃기는 물건이야.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살살 빠져나가는 게 그 물건인데. 사람들은 왜 그따위 걸 만들어내 가지고 서로 많이 가질려고 사족을 못쓰고 그러니 글쎄. 너나 나나 다 웃기는 병신들 같애.”

최 마담이 가끔 하는 푸념이었다. 박보금은 그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푹 쉬고는 핸드백에서 다시 거울을 꺼냈다. 그동안 악착같이 돈을 모았지만 마음먹은 대로 불어나질 않았다. 누구는 현지처 노릇을 해서 큼직한 다이아반지를 받았다고 하는가 하면. 또 어느 누구는 집 한 채 값의 돈을 받았다고도 했다. 그런데 자신은 하필 이시하라 같은 얌체족 쪽바리를 만나 겨우 푼돈이나 건지고 마음만 크게 상한 것이다.

박보금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또 한숨을 쉬었다. 얼굴의 멍은 아까보다 더 심해진 것 같았다, 분첩을 꺼내 몇 번이고 멍 위에 덧칠했다. 돈이란 참 더럽고 치사하고 독하고 매운 것이었다. 흔히 하는 말로 몸을 파는 게 밑천 들지 않는 장사라고 하지만 그건 해보지 않고 쉽게 떠드는. 웃기는 소리였다. 세 끼 밥 먹는 건 안 치더라도 남자들 눈 끌리게 옷 해 입어야지. 미장원 출입해야지 .화장품사야지. 그 밑천에 돈 쏟아 붓다 보면 시루에 물붓기요. 잘못하면 빚 깔고 앉기 십상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피한다고 피하지만 재수 없으면 덜컥 임신을 해서 망조 들고. 더 재수 옴 붙으면 성병에 걸려 꼴사납게 되고는 했다. 그동안 애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임신을 두 번이나 해 수술대에 누웠고. 성병이 세 번이나 걸려 의사 배를 불려주었던 것이다. 돈 없애고 고통당하고. 그건 이중으로 밑지는 장사였다. 피임약이 신통찮은 형편에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막을 수 있는 것은 콘돔밖에 없었다. 그러나 콘돔 싫어하는 작자들이 의외로 많으니 그걸 다 퇴하다가는 폐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꼴을 해가며 모은 돈이 아직 마음에 차지는 않았지만 버스 차장 할 때를 생각하면 엄청난 돈이기도 했다. 언제나 택시만 타는 것은 화류계의 폼 때문만이 아니었다. 버스 차장 시절이 지긋지긋해서 버스는 절대 타기 싫었다.

언니. 어찌 됐수? 양자 그거 박살냈수?”

박보금이 대문으로 들어서는데 수돗가에서 무엇을 빨고 있던 아가씨가 냉큼 물었다.

어머. 언니 오셨니?”

이시하란가 저시하란가 하는 놈도 만났수?”

이 방. 저 방에서 아가씨들이 다투어 나오며 물었다.

미친년들. 아주 살판들 났구나.”

박보금은 입들을 막으려고 눈을 치뜨며 사납게 내쏘았다.

어머머. 언니 얼굴이 왜 그래요?”

그때 수돗가에 있던 아가씨가 바짝 다가서며 놀라는 몸짓을 했다.

어머나. 언니. 멍이 들었잖아요?”

다른 아가씨가 마루에서 뛰어내리며 소리쳤고.

아니. 양자 그게 언니를 쳤어요?”

설마 양자가 그랬을까. 이시하라 그놈이 그랬겠지.”

아가씨들이 우르르 마당으로 내려오며 입들을 놀렸다.

시끄럿!”

박보금은 빠락 소리치고 아가씨들을 노려보면서.

느네들 내 앞에서 또 이시하라 그놈이나 양자 그년 얘기 꺼냈다가는 알아서 해. 양자 그년처럼 대가리 깨져 병원 신세 안 질려거든 느네들도 개판 치지 말구. 화류계 밥이 개밥은 아니니까.”

그녀는 싸늘하게 말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가씨들은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박보금은 곧 멍자리에 달걀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가씨들이 배치받은 요정들로 나가자 그녀는 식모를 불러들여 냉수찜질을 시켰다. 그리고 또 달걀을 갈아가며 밤늦도록 문질러댔다. 이튿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박보금은 거울을 찾아 들었다.

어머나!”

박보금은 깜짝 놀랐다. 가시리라 생각했던 멍은 밤사이에 오히려 더 심해져 있었다.

당연하지요. 멍이야 하룻밤 자고 나면 더 심해지는 법이잖아요. 어제 그리 공을 들였으니 이만한 거지요. 안 그랬어봐요. 이보다 훨씬 더 심했을 텐데요. 이 정도야 화장 짙게 하면 표 안 나겠는걸요.”

그나마 식모의 이런 말에 박보금은 위안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금 이양자를 찾아간 것이 후회스러웠다. 박보금은 점심때가 가까워 짙은 화장을 한 얼굴에 선글라스를 끼고 집을 나섰다. 기분이 칙칙한데다가 뜻 모르게 부아가 꼬약꼬약 괴어올라 집에 죽치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미도파 앞 명동 가주세요

예에. 손님 그 썬그라스가 아주 삼삼하게 자알 어울리는데요.”

택시 운전수가 차를 출발시키며 말을 걸쳤다.

이봐요. 덜떨어진 히야까시(희롱) 하지 말고 운전이나 똑바로 해요.”

박보금은 여지없이 쏘아붙였다.

거 원. 보기 싫다고 했으면 사람 잡겠수다 그려.”

운전수가 뒤를 흘끗 돌아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 운전수는 다시 택시를 몰고 있는 문태복이었다. 그는 색골 황동일에게 교육받은 대로 돈 냄새 확 풍기는 여자에게 낚시를 던져본 것인데 따귀를 맞듯 면박을 당해 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런 경우에도 황동일은 말을 풀어가는 무슨 요령이 있는 것인지 궁금하기만 했다. 자신은 황동일에 비해 색도 약했고 언변도 떨어졌다. 그래 가지고는 돈 많고 외로운 여자 낚아 꿩 먹고 알 먹고 하기는 틀린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백미러 속의 여자를 힐끔거렸다. 황동일의 말로는 큰 회사의 간부들이 외국에 오래 나가 있는 일이 잦아져 돈 두둑하면서 심심한 여자들이 날로 늘고 있다는 거였다. 그러나 그동안 몇 번 낚시를 던져보았지만 번번이 헛방이었다.

. 명숙아.”

양장점으로 들어선 박보금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천을 손질하고 있는 김명숙의 어깨를 쳤다.

어머. . 너 혼자 여름 만났니? 웬 썬그라스는. 근데. 너 꼭 그 촌스런 이름 부를래?”

김명숙은 마땅찮은 기색으로 눈을 흘겼다.

. 나 좀 봐주라. 어떻게 루비 김이라고 부르니. 아유. 징그러워

박보금은 팔과 상체를 과장되게 떨었다.

그게 안 되면 그냥 미쓰 김이라고 부르라니까.”

. 그러지 말고 나처럼 우리나라 말로 예쁜 이름을 하나 지어. 친구끼리 미쓰 김은 또 뭐니?”

피이. 혜미가 뭐 그리 예쁜 이름인 줄 아니? 박혜미보다야 박보금이가 훨씬 낫지. 박보금. 좀 좋아? 정답고.”

이 기집애. 너 지금 나한테 복수하는구나? 아유. 얄미워.”

박보금은 김명숙의 팔을 꼬집는 시늉을 했다.

. 너 그것 좀 벗어라. 실내에서 썬그라스 끼는 건 비 오는 날이나 달밤에 썬그라스 끼는 것처럼 무식한 짓이라고 하잖아. 갑갑해 죽겠다.”

남 속 모르는 소리 좀 하지 말어.”

아니 왜. 어떤 나쁜 놈한테 얻어맞았니?”

눈치 하나는 빨라가지고. 놈이 아니라 년이다.”

싸웠구나? 많이 다쳤어? 무슨 일인데 다치게 싸우니?”

김명숙은 연달아 물어댔다.

. 숨넘어가겠다. 인생 고해 살다 보면 그럴 일이 있으니까 알 것 없고. 나 기분 드러워 옷이나 한 벌 맞추려고 나왔다.”

그래. 잘 나왔다. 여자들 기분풀이에는 옷 맞추고 쇼핑하는 게 최고 아니니?”

김명숙은 반색을 해다.

. 나 지금 배고파 죽겠으니까 우리 점심부터 먹고 디자인 고르자. 나 아침 안 먹었거든.”

네에. 그러시지요 고객은 왕이신데요.”

김명숙은 서양영화에서 윗사람을 모시는 몸짓을 흉내 내며 기분 좋은 것을 감추지 않았다.

어머머. 얘가 왜 이래. 그런다고 나 두 벌은 못 맞춰.”

박보금이 쑥스러워하며 김명숙의 등을 쳤다.

네에. 옷은 철 따라 자주 하는 게 좋지 한꺼번에 두 벌씩 맞추는 건 지혜롭지 못한 거에요. 미쓰 킴. 손님 대접 잘하고 와요.”

세련되게 멋을 부린 양장점 주인이 사르르 웃으며 말을 받았다.

어머 얘. 느네 사장은 어쩌면 저렇게 말하는 것까지 쎄련되게 사람을 녹이니? 저 여잔 디자이너로 타고난 것 같은데. 너도 저렇게 될 자신 있어?”

양장점을 나온 박보금이 김명숙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저런 내숭에 너무 감탄할 것 없어. 저거야 손님 끌려면 누구나 금방 익히는 기본이니까. 문제는 디자인 솜씨가 얼마나 좋으냐가 중요하지.”

어째 말이 요상하다? 저 여자 디자인 솜씨가 별로라는 것 같기도 하고. 네 솜씨가 저 여자보다 더 낫다는 것 같기도 하고.”

. 꼭 그런 뜻은 아니고 ......”

김명숙은 피식 웃으며 얼버무리고는.

아이구. 난 언제나 독립을 하나 그래. 돈이 웬수야. 돈이.”

그녀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머리를 쥐어뜯는 시늉을 했다.

웃기는 소리 하고 앉았네. 아직 스물아홉밖에 안 먹은 게. 서른다섯까지는 얌전하게 실습하면서 채곡채곡 경험을 쌓는 게 좋아. 공부해서 남 주고. 경험 쌓아서 남 주니?”

공부해서 남 주나?’ 하는 말은 살살이라는 별명을 가진 코메디언 서영춘이 유행시켜 놓은 말이었다. 그는 큰 키에 바짝 마른 몸. 장난기 넘치는 잘생긴 얼굴이 코믹하게 어우러져 사람들은 그의 모습만 보고도 빙그레 웃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는 콧소리 섞인 특이한 목소리를 다양하게 변성시켜 가며 온몸을 던져 폭 넓은 연기를 해내 고달픈 삶에 찌들고 중노동에 지친 서민들이 잠시나마 웃음꽃을 피우게 하고는 했다. 그는 천부적이면서도 끊임없이 노력하는 일급 코메디언이고 텔레비전 시대가 열린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서민의 벗이었다.

얘 좀 봐. 밥맛없게 늙다리들이 하는 소리를 그대로 하고 앉았네. 젊은 것이 철 든 척하는 것처럼 꼴 사납고 아니꼬운 것도 없다. .”

이것아. 삐딱하게 생각하지 말구 내 말 똑똑히 들어. 있잖니. 젊은 것들이 하는 변두리 양장점에서 얼마나 쌈이 많이 나는지 아니? 기술도 시원찮고 경험도 없는 것들이 양장점부터 벌여놓고 앉아서 손님들 옷감을 다 망쳐놓는 거야. 우리 애들이 명동에 나올 돈은 없고 하니까 시장에서 감을 끊어다가 옷을 맡기는데 글쎄. 맨날 쌈질 아니니. 그거 서로 못할 일이니까 너도 맘 급하게 먹지 말라 그거라구.”

그 정도는 이 언니도 다 알고 있음네. 어쩌다가 한두 번 실수라면 모를까 연달아 남의 옷감 망쳐먹는 것들은 애저녁에 때려치워야 해. 그런 돌대가리로는 밤낮 옷감 주물러봐야 디자이너 되긴 틀린 거니까.”

김명숙은 비위가 상한다는 듯 드센 성깔을 내비쳤다.

남들보다 머리 좋다고 얘 또 잘난 척하는 것 좀 봐. 어쨌거나 돈 차분하게 모으면서 차근차근히 해. 몸으로 때우는 우리 화류계에서도 개업하려면 경험이 필요한데 양장점이야 순전히 기술로 하는 건데 경험이 좀 많이 필요하겠니?”

박보금은 차장 시절에 경리 뺨치도록 암산이 빠르던 김명숙을 생각하고 있었다.

알긋다 이것아. 화류계 생활도 사람 철 들게 만드는구나. 아유. 인생 답답해.”

그럼 너 시집가 봐. 답답한 거 확 풀릴 수도 있잖아.”

박보금이 음식점으로 앞서 들어가며 말했다.

결혼? 그거 필요한 거니?”

그럼. . 요새 유식하다는 여자들이 잘난 척하면서 내세우는 독신주의 닮은 거니?”

박보금이 마땅찮은 투로 되물었다.

메스껍게 그건 아니고. 내가 돈푼이라도 좀 있는 집으로 시집가서 양장점을 미끈하게 차린다면 모르겠는데. 그저 그렇고 그런 남자 만나 지지리 궁상으로 살면 그게 바로 흔한 말로 결혼은 지옥이지 뭐니?”

미친 지집애. 그저 양장점 타령이로구나.?”

얼씨구. 자나깨나 요정 차리구 나설 생각밖에 안 하는 건 누군데?”

박보금은 구두를 벗으며 킥킥 웃더니.

우리 둘이가 극성은 극성이다. 그치?”

모르겠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고생만 한 게 억울해서 어떻게든 한판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건데 어찌 될라는지......”

김명숙이 자리 잡고 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너 뭘 먹을래?”

. 아까 우리 사장이 하는 말 들었지? 손님 대접 잘하라는 거. 이런 땐 더 볼 것 없이 불고기 먹는 거야. 근데. 너 밥 먹으면서도 그놈의 썬그라스 끼고 있을 거야?”

그럼 어떡해.”

. 밥맛 떨어지게 하지 말구. 어디 좀 벗어봐.”

안 된다니까 그러네.”

글쎄. 안 되겠으면 다시 쓰게 할 테니까 어디 벗어봐.”

기집애. 고집통하고는 예전하고 하나도 달라진 게 없어.”

박보금이 느리게 선글라스를 벗었다.

어머 기집애. 허풍 어지간히 떠네. 그 정도는 얼핏 봐서는 표도 안 난다 얘. 난 또 눈까지 피멍이 들고 야단난 줄 알았지. 썬그라스 당장 집어 쳐.”

김명숙은 째지게 눈을 흘겨댔다.

믿어도 되니? 그래. 나도 썬그라스 끼니까 침침하고 답답한 게 영 안 좋긴 해. 근데 얘. 손님한테 불고기 척척 사주고도 장사가 되니?”

염려 놓으셔. 너 한테만 살짝 하는 얘긴데 말야. 옷값이라는 게 엄청 이익이 남는 장사야. 감값. 인건비. 임대료. 기타 운영비를 다 제해도 옷값의 절반 이상이 이익으로 남는다니까. 소문만 좀 나서 손님이 많으면 떼돈을 벌게 돼 있어. 떼돈. 우리 사장 돈 버는 걸 옆에서 보고 있으면 환장하겠다니까. 빨리 독립하고 싶어서.”

김명숙은 흥분기를 감추지 못하고는.

여보세요. 여기 불고기 빨랑 주세요.”

신경질을 부리듯 소리쳤다.

어머 얘. 그게 사실이구나. 글쎄 말이다. 술장사라는 것두 이익이 얼마나 큰지 말도 못해. 양장점 이익이 옷값 절반이라구? 그건 댈 것두 아니야. 이름난 술일수록 부르는 게 값인데 요정 주인들 돈 긁어모으는 것 보면 눈깔 나와 못살아. 내가 왜 요정 차릴려고 환장을 하는데. 떼돈 벌어 돈에 원수 갚으려면 그게 제일 빠르니까.”

박보금의 목소리도 들뜨고 있었다.

. 근데 양품점은 재고로 망하고 술집은 외상으로 망한다는 말이 있잖니? 양장점은 그런 게 없는데.”

아유. 명동 물 먹는다고 별걸 다 아네. 술집도 술집 나름이지. 술장사는 외상 안 주고는 안 되는 장사지만 말야. 망하는 건 이익 적은 싸구려 술집들이고 요정은 워낙 술값이 비싸니까 웬만큼 떼먹혀도 새발의 피야. 원가로 치면 얼마 안 되거든. 그리고 어지간한 외상은 다 받아내는 요령이 있어.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것 봤니?”

기집애 곡 요정 주인 다 된 것처럼 말하고 앉았네. 자아. 어서 먹자.”

김명숙은 젓가락을 들며 다정하게 웃고는.

그나저나 요새 경기 나빠져서 골치 아프다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요새 물가가 왜 그리 미친 것처럼 오르고 그러니? 근데 물가 땜에 느네 장사에 지장 있는 거니? 느넨 부자들만 상대하니까 상관없잖아?”

그래도 그렇지 않아. 아무리 부자들이라도 물가가 뛰고 경기가 나빠지면 자연히 몸을 사리게 되거든. 보통 사람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고. 단골들은 아니라 해도 보통 손님들을 무시하고는 장사 못해먹어. 그 사람들이 올려주는 매상도 아주 크거든.”

그래. 나부터도 맘이 달라지긴 해. 근데. 왜 갑자기 물가가 이 난리를 치는 거니? 택시요금이 배로 뛰질 않나. 비누. 설탕 같은 것까지 100원짜리가 150원 되는 판이니 못 살겠다고 시끌시끌해질 수밖에 없어.”

그놈의 석유 때문 이래잖아. 외국에서 사다 쓰는 석유 값이 치솟으니까 석유하고 연관된 물건 값들이 다 따라서 뛰는 거지. 쥐꼬리만큼 받는 월급 그놈의 석유파동 때문에 오르기는 다 틀렸다.”

김명숙은 어깨한숨을 쉬었다. 중동 여러 나라들이 뭉쳐 일으킨 석유파동은 석유가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한국에서 거센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속수무책인 정부에서는 전기료며 수도료 등 공공요금을 대폭 인상시켰고 그 뒤를 따라 모든 물가가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그 걷잡을 수 없는 물가폭등은 유신헌법 반대와 맞물려 돌아가면서 사회불안의 회오리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래 그거 큰일이다. 넌 월급을 얼마나 받는 거니?”

말도 마. 창피해서 말도 못해. 꼴 나게 기술 가르쳐줍네 하고 월급이 말도 못하게 박한 게 이 동네야.”

김명숙이 싸늘하게 잘랐다.

아이구. 저 지독뱅이. 나한테 살짝 말하는 건데 뭐가 창피해. 몇 번을 물었어도 대답을 안 하는걸 보면 난 친구로 생각 안 하는가 보지?”

그래 친구로 생각 안 한다. 어쩔래?”

어쩌긴. 나도 당장 절교지 뭐.”

둘이는 고기를 맛있게 먹으며 마주보고 웃었다.

느네 쪽도 찬바람 타지?”

김명숙이 불고기를 박보금 앞으로 밀어놓으며 물었다.

글쎄. 술집 중에서도 우린 좀 다르잖아. 일본사람들을 상대하니까 별로 달라지는 걸 모르겠어.”

그거 참 다행이다. 근데 일본 것들은 얼마나 잘 살길래 그렇게 끝도 없이 몰려드는 거니?”

그야. 세계 제일인 미국 다음 이래니까 더 말할 게 없지 뭐. 그리고 말야. 즈네 국내 여행하는 것보다 우리나라에 오는 게 돈이 더 싸게 먹힌 대잖니. 거기다가 즈네 나라보다 술값 싸지. 여자 값 싸지. 물건 값 싸지. 막 폼 잡아 가면서 신나게 놀 수 있으니까 어중이떠중이 막 몰려드는 거지 뭐야.”

그래. 어쨌거나 맘 독하게 먹고 돈 많이 모아라. 이 세상에 돈이 왕이니까 우리처럼 배운 게 없을수록 돈이 많아야 해.”

그래도 너나 나 정도면 성공한 것 아니니? 잘 먹지도 못하면서 만원버스에 매달려 고생고생하고 더럽고 치사하게 몸수색까지 당하던 그 불쌍한 기집애들 다 어찌 됐는지 몰라.”

박보금의 목소리가 슬프게 변했다.

모르겠다. 성공인지 어쩐지. 혹시 그 기집애들 중에서 양장점에 손님으로 오지 않나 하고 유심히 살펴봐도 여태껏 하나도 없어. 다 밑바닥 하바리 인생으로 살아가는 거지.”

그래. 학벌 따지고 집안 따지고 돈 따지고 해서 끼리끼리 맞춰 돌아가는 이런 야박한 세상에서 차장 출신들이 무슨 수로 팔자를 고쳐 명동 양장점 출입을 하겠니. 평생 밑바닥에서 기다가 마는 거지. 근데 얘. 우리만 이러고 앉았으니까 나복녀 생각이 간절하다. 걔는 어찌 됐는지 몰라.”

그 병신 같은 기집애. 아마 어디서 죽었을 거야.”

김명숙의 얼굴이 금세 슬프게 변하며 그 목소리가 퉁명스러워졌다.

죽어?”

박보금이 입으로 옮기던 숟가락을 멈추며 눈이 커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태까지 고향에 소식 한번 없을 수가 있니? 피 토하는 그 중병 든 몸으로 어찌 됐겠니? 천대받아 가며 병은 자꾸 심해져 결국 ......”

그래. 어쩌면 그랬을지도 몰라. 나도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지만 무서워서 말을 못 꺼냈어. 어째 몸은 약해가지고 한때를 못보고 ...... ”

어차피 잘됐는지도 몰라. 이 험한 세상 아등바등 살아봤자 그게 그 꼴일 바에는 속만 상하는 데 그 얘기 그만 하자.”

김명숙이 손가락빗질을 하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래. 산다는 건 참 더럽기도 해. 내가 서울 올 때 이런 꼴이 될 줄 어찌 알았겠어. 우리 시골집에선 지금도 내가 괜찮은 회사에 취직해서 돈 벌어 보내는 줄 알고 있으니 웃기는 일이지. 근데. 더 웃기는 건 이제 그만 시집가라고 성화를 대는 거야. 자기네 딸 진작에 걸레쪽 된 줄도 모르고.”

박보금이 허망하게 웃었다.

그런 애들이 어디 한둘이겠니. 돈에 무슨 표 나는 것 아니니까 그저 돈만 많이 벌어. 돈 힘이란 게 얼마나 요상스러운 건지 아니 너? 삼류 여인숙 집 딸은 여인숙 하는 게 흠이 되어 시집을 잘 갈 수 없는데. 일류 호텔 집 딸 앞에는 의사. 검사. 판사. 박사. 그 잘난 자 돌림 남자들이 줄줄이 줄을 서는 거야. 사람 잠 재워주는 직업으로 여인숙이나 호텔이나 뭐가 다를 게 있니? 근데. 돈 차이 땜에 여인숙은 천한 직업으로. 호텔은 고상한 직업으로 취급하는 거야. 돈 앞에서 사람들 맘이라는 게 그렇게 간사하고 더러워. 그러니까 너도 여러 말 말고 돈만 많이 벌어. 그럼 넌 공주님 되는 거니까.”

누가 아니래니. 이런 음식점도 마찬가지잖아. 이렇게 끝에 자가 붙거나 자가 붙은 큰 식당을 하면 알아주면서도 그냥 무슨 식당이라고 간판 붙이고 뒷골목에서 하면 우습게 알고 무시하잖아. 돈 많은 사람이 즈네들 그냥 돈 주는 것도 아니고 돈 적은 사람이 즈네들한테 돈 달라고 손 벌리는 것도 아닌데 말야. 사람 맘보라는 게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어.”

말도 마라. 돈 위세 무서운 거. 자유당 때부터 권력 있는 사람들만 잡고 요정해 온 정릉 원 마담이라고 있어. 그 여자가 돈을 억수로 벌었다는데. 그 소문대로 이 명동에 나타날 때는 손가락마다 보석반지에 귀걸 이. 목걸이까지. 요란 뻑적해. 그래서 양장점마다 그 여자를 모실려고 안달복달 정신들이 없어. 그 여잔 한번 나타났다 하면 두세 벌씩은 예사로 맞춰버리거든. 그 여자 뻐기는 건 눈꼴시어서 못 봐.”

어머머. 그렇게 성공한 여자도 있구나. 그 여잔 그렇게 많은 옷들을 다 뭘 하지?”

두세 번 입고 싫증나면 밑에 아가씨들한테 줘버린데. 그게 예쁜 아가씨들을 맘대로 다루는 비결이래나 뭐래나.”

그래. 그 여자 수완이 보통이 아니다. 오늘도 한 가지 배웠네.”

박보금은 손뼉을 치는 시늉을 했다.

. 넌 보석 안 좋아하니?”

보석? ?”

글쎄. 관심 없어?”

살 돈이 없어 그렇지. 여자치고 보석 안 좋아하는 여자가 어딨니? ? 느네 언니가 뭘 보내준 게 있니?”

아니야. 그냥 물어본 거야.”

김명숙은 무언가 시침을 떼며 고개를 저었다.

얘 좀 봐. 누굴 바보로 아나. 숨기지 말고 말해 봐. 나는 아직 못 사더라도 돈 좀 있는 마담 언니들 소개해 줄 수도 있잖니?”

아니. 정말 그냥 물어본 거니까 그 언니들 옷이나 맞추게 소개해 줘. 그건 나 폼 내 주는 거니까. 그만 가자.”

아유. 응큼한 기집애. 예나 지금이나 저놈의 속을 알 수가 있어야지.”

박보금이 김명숙을 따라 일어서며 잔뜩 눈을 흘겼다.

. 느네 언니한테 좀 도와달라고 해.”

박보금이 식당을 나서며 말했다.

말 마. 네가 말한 것처럼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기술이나 착실히 익히라고 훈계만 잔뜩 늘어놨더라. 자기도 몸이 안 좋다고 엄살까지 떨어대면서. 돈 앞에서는 형제간도 다 소용없어.”

김명숙은 언니한테 도움을 청했다가 퇴짜 맞은 것이 새삼스럽게 화가 나고 있었다.

 

 

19. 서로 내민 손

밝지 않은 전기스탠드 불빛 아래서 유일표는 노동법을 읽고 있었다. 보통 60촉짜리 전구를 쓰지만 그의 전기스탠드에는 30촉짜리가 끼워져 있었다. 근면과 절약을 가르치고 있는 재건대에서는 60촉짜리를 쓰는 데가 없었다.

여보세요. 유 선생님 계세요?”

빨간 볼펜으로 밑줄을 그어가며 책 읽기에 정신을 쏟고 있는 유일표는 바깥의 인기척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잔뜩 억누른 느낌의 그 목소리는 너무 낮고 가늘었다.

여보세요. 유 선생님 주무세요?”

. . 손기척과 함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예에? . 누구세요?”

유일표는 놀라 목소리가 컸다.

선생님. 저에요. 서경혜.”

서경혜...... 유일표는 순간적으로 멈칫하다가 이내 한 여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동그란 얼굴에 눈이 큰 편이고. 짙은 눈썹에 언제나 입술을 힘주어 꼭 다물고 있는 것 같은 여자.

아니. 서 선생이 어쩐 일이세요. 이 밤중에.”

유일표는 서둘러 방문을 열었다.

선생님 저 지금 쫓기고 있어요.”

작은 가방을 든 여자가 숨 가쁜 듯 말했다. 그 젊은 여자는 대학생 표가 나는 수수한 차림이었다.

쫓겨요? 깡패들인가요?”

유일표는 민첩하게 방을 나섰다.

아니. 수사기관에......”

서경혜는 목소리를 더 낮추며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통행금지 시간이 가까워 재건대 앞의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수사기관? 그게 무슨 소리죠? 아니 빨리 안으로 들어오세요.”

유일표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서경혜는 벗은 구두를 집어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유일표는. 서경혜가 유신 반대 데모 때문에 쫓기는 것이라고 직감했다. 봉사활동 클럽을 이끌고 있는 그녀는 사회의식뿐만이 아니라 정치의식도 강했던 것이다.

앉으세요. 데모 때문에 무슨 수사가 시작된 겁니까?”

유일표는 서경혜의 입장을 편하게 해주려고 먼저 그쪽으로 말을 꺼냈다.

빨리 알아차리시는군요.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관련자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기 시작했어요.”

서경혜의 입매는 여전히 야무져 보였지만 얼굴에는 불안과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드디어 칼을 빼 들었군요. 그 단체가 데모를 주도했던 모양이지요?”

유일표는 담배를 입에 물며 서경혜가 그 단체의 간부였을 거라고 짐작했다.

. 각 대학의 개별적인 데모로 생기게 되는 힘의 분산을 막고. 전국적인 조직을 짜서 힘을 강화시키고 투쟁 효과를 높이기 위해 그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동안 각 대학들이 일으킨 데모를 효과적으로 진행시켰고. 이번에 전국에 걸친 연합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기관에서 냄새를 맡고 덮치기 시작했습니다.”

서경혜는 낮은 소리로 또박또박 침착하게 말했다. 유일표는. 그녀가 재건대 아이들을 가르치는 열성도 대단하고 아이들을 이끌어가는 다부짐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침착을 잃지 않는 것에 놀라고 있었다.

그랬겠지요. 그들로선 좌시할 수 없는 위기가 닥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여기는 안전한 피신처가 못 됩니다. 드나드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경찰이나 형사들도 불쑥불쑥 나타나고요,”

. 그 생각도 안 한 게 아닙니다. 검거가 시작되고 한 1주일 정도 피신하고 보니까 더 이상 찾아갈 친척집이 없었습니다. 귀신같이 그들의 손길이 뻗쳐왔거든요. 그들에게 탐지되지 않을 곳은 친구들 집도 안 되고. 아무런 연고가 없는 타인이어야 했어요. 믿을 수 있어야 하구요. 그러나 그런 타인을 찾아내기가 어디 쉽나요. 골똘이 생각하다 보니 유 선생님이 떠올랐어요. 제가 여기 재건대에는 혼자 나왔었고. 그때의 봉사 활동 클럽에서 민청학련에 참여한 애들은 없으니까 수사기관에서는 저와 재건대와의 관계는 포착할 수 없게 돼 있어요. 선생님을 믿을 수 있구요.”

유일표는 상대방의 눈길에 문득 당황했다. 자신에게로 쏟아지고 있는 상대방의 눈빛은 너무 강렬했다. 이글거리는 느낌의 그 눈빛은 그렇지요? 믿어도 되지요?’ ‘저를 숨겨 주실 거지요?’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일표는 그 눈빛이 심장을 찌르는 그 어떤 다른 느낌 때문에 당황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꽤나 많은 여자들을 대해 왔지만 그런 눈빛을 받기는 처음 이었다.

. 잘 오셨어요. 별 걱정 마세요.”

유일표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사기관은 중정인가요?”

하며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 중정이에요.”

그렇겠지요. 그런데 지금 서 선생이 중정의 품안에. 아니. 품안은 아니겠고. 그 처마 밑에 들어와 있다는 건 아세요?”

네에?”

유일표의 갑작스러운 말에 서경혜의 눈이 커졌다.

놀랄 것 없어요. 농담이니까. 저 위쪽 큰길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중정이거든요.”

어머 그 생각은 미처 못 했어요.”

서경혜는 깜짝 놀라며 한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이런. 긴장을 풀어주려고 한 건데 그리 놀라면 됩니까. 등하불명이라고 자기들이 노리는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와 있으리라고는 그 사람들도 상상을 못해요. 오히려 여기서 하룻밤 보내기는 안성맞춤인 셈이지요. 수배자가 서울을 떠나 산간 절이나 시골로 숨는 게 가장 어리석은 짓이란 말이 있잖아요. 그런 데는 외지인이 금방 표가 나니까요.”

. 그래서 저도 서울을 떠나지 않고 있었어요.”

그런데 긴급조치 1호에 따라 검거가 시작됐다면 이게 보통일은 아닐 거요. 군대용어로 이번에 시범쪼를 보일 테니까 희생자들도 엄청나게 생길 거고. 반대 세력의 뿌리를 뽑으려고 들 테니까 앞으로의 전망도 걱정스럽소.”

말머리를 돌리는 유일표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그놈의 긴급조치 1호만 생각하면 치가 떨려요. 그건 유신독재가 얼마나 잔인하고 악독한지를 자기들 스스로가 입증하고 있어요. 이 세계 어느 나라에도 그따위 법은 없을 거에요.”

서경혜의 태도가 금세 달라졌다. 그녀는 정말 치를 떠는 것처럼 얼굴에 분노의 빛이 서리고. 야무진 입매에는 더 힘이 모아져 있었다.

그래요. 그건 무법천지의 표본이오. 그런 세상에서 살려면 사람이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건데. 앞으로 어찌될지......”

유일표는 혀를 찼다.

세상에 법원의 영장 없이 체포하고. 전시도 아닌데 비상 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에요? 이게 도대체 어느 나라에요.”

서경혜가 말하는 것은 긴급조치 1호의 5항과 6항이었다. 대통령 긴급조치 1호는 전체 7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2.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3.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4. 1. 2. 3호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방송. 보도. 출판. 기타 방법으로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5.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법원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 경우에는 15년 이하의 자격 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6.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위반한 자는 비상 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7. 이 조치는 19741817시부터 시행한다.

글쎄 말이오. 무법의 칼을 휘둘러대기 시작했으니 이게 어찌 될 것인지 ......”

그 종말이야 뻔하지요. 이승만 독재가 그 비참한 꼴을 잘 보여주고 있잖아요. 24.19가 폭발해야 되요. 그리 되면 박정희라고 별수 있겠어요.”

서경혜의 말은 거침없고 어떤 확신에 차 있었다.

글쎄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때와 사회적 상황이 같지 않은 게 문제요.”

네에? 무슨 말씀이세요?”

서 선생 못지않게 나도 제24.19를 바라는 사람인데 ...... 그때와 지금은 사회 현실이 많이 다르지 않나 싶소. 지난 4.19는 전 국민적 호응과 지지를 받았던 투쟁이었는데 오늘날에도 과연 그렇게 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게 문제요. 무슨 말인고 하면. 이승만은 정치와 경제 양면을 모두 실패해 국민들로부터 완전히 외면당했던 것에 비해 박정희는 정치를 실패로 몰고 가면서도 경제적 성공을 거둔 면이 있어요. 그게 ......”

그렇지만 독재가 이승만보다 훨씬 더 혹독하잖아요. 3선 개헌에 유신까지.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었어요.”

서경혜는 성급하게 유일표의 말을 자르고 들었다.

서 선생. 서 선생 말도 옳아요. 그러나 정치 투쟁을 하려면 사회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판단하는 이성을 잃지 말아야 해요. 정치의식과 사회의식이 강한 지식인들의 입장에서는 오늘의 현실은 틀림없이 지옥이오. 그러나 의식이 빈약한 상태에서 좀더 잘사는 것에 급급하고 있는 일반 대중들의 입장에서는 더 필요한 게 뭐겠소? 어차피 정치행위를 하지 않는 그들은 정치적 자유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고. 그저 잘살게 되기를 바라고. 오늘보다 내일이 낫기를 기대하고 있소. 그런 대중의식 속에 박정희 독재는 한 발을 깊이 박고 있소.”

그렇지만 오늘날의 경제는 박정희 혼자서 일으킨 게 아니잖아요. 그 주체는 지난 10년 동안 죽어라고 피땀 흘린 국민들이에요.”

맞소. 그건 부정할 수 없는 명확한 사실이오. 그러나 그런 인식을 하는 건 극소수 지식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또한 문제요. 참 불행하게도. 박 정권은 그동안 경제발전을 자기네 업적으로 선전하는 데 크게 성공했고. 현명하지 못한 대중들은 정치선전에 최면 되면서 대중들의 약점인 영웅주의에 빠져들어 박정희를 경제를 일으킨 영웅으로 믿고 받들게 되었소. 대중들이 그렇게 된 데는 그동안 그 영웅주의를 깨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야당. 언론. 지식인들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소, 다시 말하면 정치. 사회적 투쟁이란 폭넓은 대중들의 호응과 지지를 받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는데. 오늘의 현실에서 그게 과연 얼마나 가능할 것이냐 하는 것이오.”

그럼 어떻게 하나요? 선생님이 생각하는 방법이 뭐가 있으세요?”

서경혜의 풀죽은 기색이 유일표의 말에 동의를 표하고 있었다.

작년 말부터 대학생들 데모가 일어나자 내 나름으로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그런데 암담하기는 마찬가지면서 엉뚱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달았어요. 이승만 정권 12년은 지긋지긋하게 길었는데 박정희 정권 12년은 어떻게 하다 보니 지나갔다는 사실이었어요. 이승만 정권 때는 내가 미성년이었고 박정희 정권 때는 내가 성인으로 사회생활을 하며 살았는데도 말이오. 박 정권을 비판적으로 보는 내가 이럴 때 대중들은 어떨 것인가를 생각하니 더욱 암담해졌소.”

그럼 아무 저항도 하지 말고 당하기만 해야 하나요?”

서경혜는 어깨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수야 없지요. 그러나 제24.19를 기대하는 환상을 버리고 그 동안 최면 되어 온 대중들의 의식을 깨워나간다는 자세로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거요. 이승만 때와는 달리 군부에 또 한 발을 깊이 박고 있는 이 정권의 탄압이 보통이 아닐 테니까.”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절망스러워져요. 어쩜 좋지요?”

서경혜는 울상이 되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참 어려운 일이오. 밤이 늦었으니 그만 쉬도록 하시오. 거처는 내가 생각해 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유일표는 재건대장 이용진의 방으로 건너갔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사방을 살펴보았다. 흐린 가로등 불빛 아래 의심스러운 인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누가 찾아왔나요?”

유일표가 방으로 들어서자 장부를 정리하고 있던 이용진이 물었다.

. 작년 7월까지 1년 동안 우리 야학에서 영어를 지도해 주었던 서경혜 선생 기억하시지요? 서 선생이 피신을 왔습니다.”

피신이오?”

이용진이 놀라는 기색으로 돌아앉았다.

. 유신 반대 데모 지도부에 속했던 모양인데. 그 단체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됐다고 합니다.”

이런. 결국 시작이군요. 근데 여기서 피신이 되겠어요? 보는 눈이 한 둘이 아닌데.”

그 말 이미 했습니다. 우선 애들 눈부터 피해야 하니까 마땅한 장소를 제가 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지요. 여자 몸으로 끌려가 고초를 당하면 그거 큰일이지요. 서로 돌려가면서 하면 좋을 텐데 박 통도 무슨 욕심이 그리 많아 세상을 이리 시끌시끌하게 만드는지 원. 바다는 메워도 사람 욕심은 못 메운다는 옛말이 어찌 그리 맞는 지. 어쨌거나 박 통도 이제 좋은 시절 다 지나간 것 같소. 일단 반대가 시작됐으니 쉽게 가라앉진 않을 거고. 반대당하는 대통령 꼴이 그게 뭐요. 참 한심스러워요.”

이용진은 장부를 덮으며 쯧쯧쯧 혀를 찼다.

권력욕을 이길 수 있으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성인이지요. 권력욕이란 건 자식도 죽이고. 애비도 죽이는 거니까요.”

유일표는 문이 덜렁거리는 헌 장롱에서 베개를 꺼내 자리 잡고 누웠다.

하긴 권력을 앞에 두고 그 욕심을 이길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단 하나라도 있겠어요? 안 되는 게 없는 게 권력인데.”

이용진도 유일표 옆에 누우며 기지개를 켰다.

꼭 한 사람이 있긴 있지요.”

그래요? 그게 누구요?”

이용진이 재빨리 유일표 쪽으로 몸을 돌리며 관심을 드러냈다. 배움이 적은 그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알아 자신의 부족을 채우려고 애썼다. 그가 유일표에게 지성으로 하는 것도 야학 운영만이 아니라 그런 욕구를 창피스러움 없이 채울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인도의 간디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였던 것처럼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였는데. 간디는 인도의 독립운동을 이끌어 영국으로부터 인도를 독립시켰기 때문에 인도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간디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비폭력 저항이라는 독립 투쟁 방법을 세계 최초로 실행했기 때문입니다. 비폭력 저항이란 무기를 든 영국군을 향하여 인도의 독립대원들이 아무것도 갖지 않은 맨몸으로 덤벼 항의하고 독립을 외쳐대는 것입니다. 무장을 했지만 수가 적은 영국군은 자기네보다 수십 배가 넘는 인도사람들을 해산시키려고 공포를 쏘아대고. 그에 맞서 인도사람들은 영국군 물러가라!’를 더 크게 외쳐 대고. 그러다 안 되니까 영국군은 개머리판이나 몽둥이로 인도사람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합니다. 그때 인도 독립대원들은 맨주먹으로 맞서 싸우는 육박전을 하는 게 아닙니다. 때리는 대로 맞고 피 흘리며 쓰러집니다. 그럼 그 사람들을 끌어내고 다음 사람들이 앞으로 나섭니다. 그러는 동안 쓰러진 사람들은 여자 간호대가 치료를 합니다. 중상자들은 빼고 경상자들은 붕대를 감거나 붉은 약을 바른 몸으로 다시 줄을 서 영국군을 향해 덤벼듭니다. 부상자들이 다시 덤벼들고 또다시 덤벼들고 ...... 결국은 영국군들이 질려버리고 맙니다. 그러한 독립투쟁이 인도 곳곳에서 일어났고. 그 세계 최초의 육탄투쟁은 외국기자들에 의해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각 나라 사람들은 그 희한한 육탄투쟁에 놀라는 한편으로. 세계 여론은 비무장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해 대는 영국군을 지탄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영국은 인도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고. 인도는 우리보다 2년 뒤인 1947년에 독립을 이룩하게 되었습니다.”

하아. 총칼을 들지도 않고 독립을 하다니. 그런 묘한 방법도 있구만요.”

. 총칼을 든 우리나라하고는 다른 방법이었지요. 그런데 그 비폭력저항을 간디의 무저항주의라고 말하거나 글로 쓰는 사람들이 꽤나 많아요. 그건 아주 잘못된 겁니다. 무저항주의란 말뜻 그대로 하자면 저항을 하지 않는 주의인데. 인도 독립대원들은 자기들이 영국군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을 뿐이지 온몸을 내던져 저항했거든요. 그리고 무저항주의라는 말은 간디의 뜻과도 맞지 않는 겁니다.”

예에. 무식한 내가 생각해도 그래요. 이쪽에서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저항이란 뜻이니까 비폭력 저항이라고 해야 옳고말고요.”

이용진이 말을 받았다. 그건 단순히 맞장구를 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새로운 것을 확실하게 머리에 넣어야 할 때 그가 흔히 쓰는 복습 방법이었다.

. 그런데 간디가 두 번째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일이 생겼어요. 인도가 독립이 되었으면 당연히 간디가 인도를 다스리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간디는 권력을 잡지 않고 독립대원이었던 네루한테 수상을 맡게 하고 자기는 야인이 되었습니다. 그때 전 세계 사람들은 또 한번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간디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간디가 죽었을 때 아무 권력도 직위도 없는 야인이었는데 세계 각국의 대통령이니 수상들이 가장 많이 조문을 온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사람들은 성인이란 뜻의 인도 말을 이름 앞에 붙여 마하트마 간디라 고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하트마 간디. 마하트마 간디 ...... 참 부처님이 따로 없구만요. 알 만한 사람들이 어째서 그런 좋은 본을 못 보나 그래. 하긴 박 통이야 젊었을 때부터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들 등 뒤에서 총질해댄 인간이니까.”

이용진이 한숨을 푹 쉬었다. 유일표는 가슴이 섬뜩한 걸 느꼈다. 이용진의 부친은 만주에서 투쟁하다 숨진 독립투사였던 것이다.

그만 주무시지요. 벌써 1시가 다 됐습니다. 저는 아침에 애들이 일어나기 전에 서 선생이 여길 떠나게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어디로요? 마음에 정한 데가 있습니까?”

글쎄요 ...... 지금 생각으로는 급한 대로 저희 집으로 옮기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서로 연고가 안 닿으니까 안전하고. 낮에는 빈 집이나 마찬가지니까 서 선생이 지내기 편하고요.”

그런데 ...... 셋방 든 사람들이나 이웃사람들한테 의심 사지 않을까요? 하루 이틀 있을 것도 아닌데.”

그거야 시골서 서울로 취직하러 온 친척이라고 적당히 둘러대지요. .”

하긴 무작정 상경녀들이 수두룩한 판이니까. 우선 그리 해놓고 나도 좀 알아보도록 하겠소. 그만 잡시다.”

유일표는 4.19 그날을 생각하고 ...... 이런 상황 속에서 자신은 노동자문제만 신경 쓰고 있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고 ...... 그러다가 잠 속으로 가물가물 젖어들었다.

유일표는 새벽 5시에 재건대를 나섰다. 남산 자락에는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퍼져 있었다. 완연해진 봄기운을 따라 자주 끼는 안개는 마치 피신을 돕는 듯했다. 큰길까지 나오는 동안 서경혜는 몇 번이고 뒤를 살피고는 했다. 유일표는 곁눈질로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피신자의 신중함을 느끼는 동시에 여자의 나약함도 느끼고 있었다.

금년 졸업반이지요?”

큰길로 나서며 유일표는 불쑥 물었다. 서경혜는 멈칫 놀라더니 고개만 끄덕였다.

집에서는 뭐라고 하세요?”

어른들 하는 말 다 똑 같잖아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딴 짓 한다고 ...... 그 말은 참겠는데. 계집애가 뭐 잘났다고 나서서 까불다가 감옥살이하고 나면 시집은 어떻게 갈 거냐는 말에는 참을 수가 없어요.”

그 말씀이 맞는 것 같은데요.”

유일표는 픽 웃었다.

네에?”

농담이오. 자아 저 차 빨리 탑시다.”

그건 미아리 쪽이 아니라 금호동 ......”

서경혜는 말을 하다 말고 유일표를 뒤따라 시내버스에 올랐다. 버스의 몸체를 따라 붙인 ㄷ자형의 긴 의자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유일표는 먼저 자리 잡고 앉으며 서경혜에게 빠르게 눈짓했다. 그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눈짓 말이었다. 서너 정거장을 지나 유일표는 퇴계로 5가에서 버스를 내렸다.

아까 우리하고 버스를 탄 사람이 몇인 줄 아세요?”

버스가 떠나자 유일표가 물었다.

글쎄요 ...... 서너 사람쯤 ......”

세 사람이었는데 그 중에 둘이 남자였어요. 그런데 한 남자가 신경에 거슬렸어요. 그러나 여기서 안 내렸으니까 이젠 걱정할 거 없지요. 여기서 편한 맘으로 미아리 쪽 버스를 탑시다.”

서경혜는 그제서야 미행에 대비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눈동자만 돌려 유일표를 훔쳐보았다. 새벽 공간에 윤곽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는 그의 옆얼굴이 무척 강인해 보인다는 것을 그녀는 처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아까 말한 대로 누가 물으면 시골서 온 친척이라고 해둬요. 낮에는 혼자니까 편할 거고. 밤에는 내 여동생하고 함께 잘 수밖에 없어요. 여동생이 말이 없는 편이지만 마음은 넓어요. 서 선생보다 나이가 서너 살 많을 테니까 언니 대하듯 하며 마음 편하게 지내면 될 겁니다. 서 선생이 재건대에서 1년이나 무료봉사 했으니까 나도 그 정도는 봉사할 수 있어요. 아무 부담 느끼지 말고 편히 지내세요.”

버스에서 내려 골목을 걸어가며 유일표가 말했다.

어머 그렇게 오래 걸리면 어쩌게요.”

모를 일이오, 뿌리를 뽑으려고 할 테니까. 어쨌든 좀 오래 걸리더라도 감옥살이하는 것 보다는 낫지 않겠소?”

선생님은 농담 잘 안하시는 줄 알았는데 ...... ”

서경혜는 옆 눈길로 유일표를 보며 수줍게 웃고는.

저어 ...... 집에는 며칠에 한 번씩 오시나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1주일에 한 번 정돈데 ...... 매일 출퇴근을 할까요?”

유일표는 쿡쿡거리고 웃었다. 서경혜는 고개를 푹 수그리며 아무 대꾸가 없었다.

전혀 불편해 할 것 없어요. 저쪽 일이 있으니까 사흘에 한 번쯤 와 보도록 하겠소. 텔레비전은 없지만 매일 뉴스는 트랜지스터로 듣고. 책이나 읽으면서 시간 때우도록 해요.”

유일표는 찌그러진 판자대문 사이로 손을 넣어 문고리를 벗겼다. 그러자 문에 달린 작은 종이 땡그랑땡그랑 맑게 울렸다.

우리 집이 그야말로 무허가 판잣집이오. 이런 집이나마 장만하느라고 우리 형이 무진 애를 썼고. 이런 집이나마 없는 무주택자가 서울특별시에 50퍼센트가 넘는 형편이니 우린 부자인 셈이오. 우리한테는 이 집이 궁전이니까 서 선생도 그리 생각하고 편히 지내주시오.”

서경혜는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이며 유일표의 말을 듣고 있었다.

어머 작은오빠 ......”

종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부엌에서 나오던 유선희는 작은오빠 뒤를 따라 들어오는 여자를 보고 말을 멈추었다.

큰오빠는?”

아직 안 일어났는데 ......”

작은오빠를 쳐다보는 유선희의 눈길은 의문에 찬 말들을 담고 있었다.

일표냐? 아침부터 웬일이냐?”

잠이 덜 깬 목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동생을 쳐다보던 유일민도 얼떨떨한 얼굴이 되었다.

너 방으로 좀 들어가자.”

유일표가 여동생에게 말하며 걸음을 떼어 놓았다.

어머. 방도 안 치우고 ......”

유선희는 작은오빠를 앞서 큰오빠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유일표는 형과 여동생에게 서경혜를 소개하고 집에 오게 된 사연을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 어려운 일 하시면서 고생이 많으시군요. 보시다시피 집이 누추합니다만 안전할 수 있다면 편한 마음으로 지내도록 하십시오. 참 힘든 세상입니다.”

유일민이 집주인답게 따뜻한 어조로 손님을 맞이했다.

. 마음 편하게 먹으세요. 그래야 저도 편해지니까요.”

한 방을 써야 할 유선희도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앞으로 친척으로 지내야 하니까 말씀들 낮추십시오.”

서경혜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붙임성 좋게 말했다. 유일표는 날마다 서경혜에게 마음이 쓰였다. 꼭 여동생을 남의 집에 갖다 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선생님을 믿을 수 있구요하며 자신을 쳐다보던 그녀의 강렬한 눈길이 떠오르고는 했다. 그는 한사코 그녀에게로 쏠리는 마음에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아이들이 거둬오는 신문들을 열심히 뒤지고 뉴스시간마다 트랜지스터를 틀었다. 그러나 그 사건에 대한 보도는 전혀 접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재건대와 가까운 경찰이나 형사들에게 슬쩍 물어 볼 수도 없었다. 자칫 의심사기 쉬웠고. 중정에서 주도하고 있는 일이라면 음지에서 움직이는 그 속성상 경찰에서도 알기 어려운 일이었다. 유일표는 나흘째 되는 날 아침부터 잠시도 쉴 틈이 없이 일손을 놀렸다. 아이들이 거둬들이는 것들을 종류별로 분류하는 것은 재건대장 이용진과 그의 몫이었다.

좀 쉬엄쉬엄 해요. 몸살 나겠어요. 오늘 어디 갈 일 있나요?”

이용진이 일손을 멈추고 담배를 권하며 물었다.

. 오후에 잠깐 집에 좀 다녀오려고요. 사흘에 한 번 정도 만나기로 서 선생하고 약속했거든요.”

그거 잘 하셨군요. 더러 소식을 전해주고. 서 선생을 위로하고 힘도 주고. 겸사겸사 좋은 일이지요.”

그런데 그 사건이 어찌 돼 가는지 전혀 소식을 알 수가 없다니까요. 신문이나 방송에서 단 한마디가 없으니 ......”

좀 기다려 봐요. 여기에 알아봐 달라고 부탁해 놨으니까요.”

이용진이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그건 명동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왕초를 말하는 것이었다.

거기서 중정으로 통하는 데가 있을까요?”

유일표는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5.16 터지고 싹쓸이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당했지만 이젠 서로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됐으니까 판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도는 알아낼 수 있을 거요. 이 양반 무시해서는 안 되는 일도 적지 않으니까.”

이용진은 또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유일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이용진이 그 왕초를 받드는 의리는 눈물겨울 지경이었다. 그의 옥바라지 비용을 대느라고 미제 물건들을 취급하다가 감옥살이까지 하고 나왔는데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굶주리며 떠도는 자신에게 재건대를 마련해 주고 보살펴준 은혜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독립투사 자손인 것을 유일하게 알아준 사람이 그 왕초였다는 것에 이용진은 더욱 감읍하고 있었다. 그 왕초는 출감하여 다시 지난날의 세력을 장악했고. 이용진이 왕초와 더 깊은 사이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유일표는 2년 전 일을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이용진이 대우 좋은 회사로 자리를 옮기지 않겠느냐는 말을 꺼냈었다. 내용을 들어보니 그 왕초가 새로 생긴 어느 호텔에 카지노사업을 하게 되었는데 많이 배우고 믿을 만한 사람을 찾고 있다는 거였다. 그는 이미 큰 규모의 카바레를 경영하고. 사채시장에서 돈놀이도 하고 있어서 사업 전체를 관리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용진이 자신을 믿을 만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가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재건대와 야학을 별 탈 없이 지켰기 때문이었다. 저쪽에서 제시한 직책은 거창하게도 기획관리 상무였고 보수도 대기업 상무와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차마 주먹세계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때 이미 노동자문제에 관심을 쓰고 있기도 해서 재건대 아이들을 내세워 사양했던 것이다. 유일표는 오후 4시쯤에 일을 다 마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이거 얼마 안 되는데 서 선생 먹을 거나 좀 사다 주세요. 오래 먹을 수 있게 사탕 같은 걸로. 서 선생이 무료봉사 해준 은혜를 이런 때 조금이라도 갚아야지요.”

이용진이 누런 편지봉투를 내밀었다.

아이구 이렇게 마음을 쓰시다니...... ”

유일표는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라 반색을 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유 선생님이 선뜻 맡고 나섰는데 나는 뒤에서 이쯤은 해야지요. 감옥살이해 보니 시간은 어찌 그리 지루하고. 사탕 같은 군것질 생각은 왜 또 그리 간절한지. 서 선생은 지금 감옥살이하는 거거든요.”

봉투를 받아가지고 돌아서며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는 이용진의 말이 옳다는 것을 유일표는 뒤늦게 깨달았다. 이용진 은 재건대의 대장만이 아니라 야학의 교장 격이었다. 자신은 기껏해야 교무주임 정도일 뿐이었다. 야학에서 봉사했던 인연을 찾아왔으면 서경혜는 의당 이용진에게 도움을 청했어야 한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을 찾았고. 자신은 또 당연한 것처럼 그녀의 일을 맡고 나선 것이다. 그 일을 이용진이 어떻게 생각했을까 하는 마음이 일며 쑥스러워지고 뒷덜미가 뜨거워졌다. 유일표는 버스에서 내려 미아리시장의 식료품 도매시장을 찾아갔다. 어머니가 국밥장사를 할 때 미원이며 샘표 간장 같은 것을 사려고 자주 다닌 곳이었다. 거기에는 온갖 종류의 사탕이며 과자까지 먹을 것은 없는 게 없었다.

유일표는 그 상점으로 들어서며 혼자 픽 웃었다. 자신에게 유난히 친절했던 여 점원이 떠올라서였다. 주인 아내의 먼 친척이라는 그 처녀는 뼈대가 커서 남자 같은 체구인데다가 얼굴까지 어글어글해서 여자로서 고운 데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그 처녀는 주인이 없을 때는 물건값을 푹 깍아주는가 하면. 사탕을 한 움큼 집어 굳이 자신의 손에 쥐여주기도 했다. 그런 친절이 거북하고 난처해 결국 발길을 끊게 되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 어머니한테 들으니 어디론가 시집을 갔다고 했다. 유일표는 사탕과 과자를 이것저것 골라놓고 돈 봉투를 꺼냈다. 그는 돈을 보고 놀랐다. 그건 군것질 값으로는 너무나 많았다. 거기에는 피신이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는 이용진의 마음이 담겨 있기도 했다. 언제나처럼 유일표가 판자사이로 손을 넣어 문고리를 따자 작은 종은 딸랑딸랑 울려댔다. 그가 판자대문을 밀치며 안으로 들어서는데 서경혜가 부엌에서 달려 나왔다.

아니. 그게 뭐요?”

유일표는 서경혜를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머리를 뒤로 한 묶음으로 묶고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서경혜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셋방 할머니한테 사촌 언니 오빠들이라고 했는데 말을 그렇게 하면 어떡해요?”

서경혜는 속삭이듯 빠르게 말하며 주먹으로 허공을 치는 손짓을 했다.

. ...... 그런데 이게 뭐요?”

유일표는 갑자기 말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그 대신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다.

할머니 가게에 가셨으니까 크게 말씀해도 괜찮아요.”

서경혜는 곁눈질과 함께 곱게 눈웃음을 짓고는.

저녁밥 하는 거지요. 눈치가 빠르신 줄 알았는데.”

그녀는 어떠냐는 듯 앞치마를 쓰다듬었다.

밥을 해요?”

당연하지요. 직장에서 피곤하게 돌아온 언니한테 밥을 얻어먹어서 되겠어요? 그렇게 뻔뻔하게 굴면 쫓겨나기 딱 알맞지요. 저라도 그런 얌체는 하루도 안 붙여둬요.”

하루도? 그럼 언제부터 밥을 하기 시작했다는 거요?”

다음날 아침부터지요.”

선희가 그러라고 해요?”

아아니요. 안 된다고 야단이시길래 제가 사정사정했어요. 남들 보기도 이상하고. 저를 편케 있게 해달라고요. 그래서 아침은 함께. 저녁은 제가 하기로 했어요.”

모습만 여자답게 변한 것이 아니라 언행도 삽삽하게 달라진 서경혜를 유일표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보인 신속한 적응력도 놀라웠고 많이 배운 여자들이 흔히 드러내는 잰체함이 없이 궂은일을 차고 나선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뭘 그렇게 보세요?”

유일표의 눈길을 의식한 서경혜는 부끄러움을 타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오. 이러고 있다가 할머니한테 들키기 전에 어서 방으로 들어갑시다.”

유일표는 안방 격인 형의 방으로 앞장서 들어갔다. 그는 서경혜가 들어오기를 기다려 큰 봉지를 그녀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이게 뭐에요?”

재건대장님이 서 선생한테 보내는 선물이오. 지루하고 답답할 때 먹으라고.”

어머나. 고마우셔라. 사탕하고 과자를 이렇게나 많이!”

서경혜는 봉지 안을 들여다보며 입을 한껏 벌였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오. 그보다 백배쯤 더 살 수 있는 돈이 여기 남았어요. 비상금으로 두고 쓰시오.”

유일표는 돈 봉투를 서경혜 앞에 내놓았다.

저 비상금 많이 있어요. 떠돌 때는 돈이 힘이라면서 아빠가 많이 주셨거든요. 선생님이 가지고 쓰세요.”

그게 무슨 소리요. 대장님이 서 선생한테 주신 거고. 돈은 많이 지닐수록 좋아요. 넣어두시오.”

. 그럼 선생님이 가지고 계시다가 이것 다 떨어지면 계속 사다 주세요. 저는 나돌아 다닐 수가 없잖아요.”

서경혜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유일표는. 아까 앞치마를 입은 모습을 보는 순간 일어났던 그 야릇한 감정이 다시 스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 묘한 감정을 감추듯 과자를 집으며 불쑥 말했다.

자아. 먹읍시다. 맛있게 생겼소.”

주무시고 가실 건가요?”

서경혜도 과자를 집으며 물어다.

아니오. 나 야학선생 아니오?”

그럼 저녁은 드시고 가세요. 제가 빨리 지을게요. 언니도 오실 시간 다 됐어요. 누워서 좀 쉬세요.”

서경혜는 과자와 사탕 서너 개를 집어가지고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유일표는 서경혜의 뒷모습을 보며 담배를 빼들었다. ‘제가 빨리 지을게요.’ ‘누워서 좀 쉬세요.’ 정겨운 그 말은 흔히 부부 사이에 많이 쓰는 것이었다. 그는 그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사흘이 지나 이용진이 소식을 가지고 왔다.

수사가 거의 끝난 모양이고. 며칠 있다가 발표한다는 거요.”

. . 그럼 집에 돌아가도 되겠군요.”

아니오. 그게 아니라 체포를 일단 끝내고 본격적인 조사는 앞으로 시작한다 그거요. 중정 조사를 받으면서 실토할 것들이 많을 테니까 새로 잡혀 들어갈 사람들이 생길 것이고 앞으로는 계속 위험해요. 수사가 완전히 다 끝나고 재판이 시작될 때 까지는 조심해야 돼요.”

이용진의 말대로 나흘이 지나 수사기관에서는 민청학련 사건 수사 상황을 발표했다. 민청학련은 유신 반대 데모를 지도하는 단체가 아니라 공산주의자의 배후조정을 받아 폭력 혁명을 기도한 빨갱이집단으로 둔갑되어 있었다.

거짓말이에요.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무서워 죽겠어요.”

서경혜는 얼굴을 감싸고 소리 죽여 울며 몸을 떨었다. 유일표는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서경혜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빨갱이라는 누명은 유신독재 반대에 용감하게 나섰던 한 여대생을 순식간에 그렇게 허약하게 만들어버리는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독재정권은 자기네를 위해 공산주의를 마음대로 악용하고 있었고. 빨갱이라는 죄목은 그 누구의 심장이든 찌를 수 있는 비수로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있었다.

괜찮아요. 세상은 다 알고 있어요. 어쨌든 이 위기만 피하면 돼요.”

유일표는 서경혜를 감싸 안아주고 싶은 심정으로 말했다. 정부의 서슬에 질린 것인지. 폭풍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인지 대학생들도 데모를 일으키지 않는 침묵의 나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유일표는 사나흘 간격으로 집에 발길을 하고는 했다.

무슨 다른 소식 없나요?”

고문들 많이 당하겠지요?”

저 혼자 배신자가 됐나 봐요.”

유일표를 만날 때마다 서경혜는 우울하게 이런 말을 하며 괴로워했다. 그러는 속에서도 시간의 효험에 따라 그녀는 유일표네 가족과 한 식구처럼 친밀하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보름이 지나고. 한 달이 되었다. 이용진은 수사가 완결되었다는 소식을 유일표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 민청학련 사건 수사 전모가 발표되었다. 민청학련은 처음 그대로 빨갱이집단으로 못박인 채 비상 군법회의로 넘겨진 사람이 자그마치 253명 이었다.

며칠 더 있다가 집에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재판이 시작될 때까지 기다리자는 이용진의 말이었다.

저 집에 가기 겁나요. 요새도 형사들이 오는지 어쩐지 확실하게 좀 알아봐 주세요. 선생님이 곤란해질 수 있으니까 집으로 가지 말고 아버지 상점으로 가주세요.”

서경혜의 말이었다. 유일표는 중부시장에 있는 서경혜 아버지의 상점을 찾아갔다.

요새도 형사들이 가끔 찾아온다니까요. 서약서를 쓰면 더는 잡아넣지 않고 괜찮다는데. 그 말을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고 ...... 어쨌든 딸년을 맡아주셔서 고맙고 고맙습니다.”

서경혜 아버지는 거듭거듭 허리를 굽혔다. 유일표의 말을 듣고 난 서경혜는 말없이 밖으로 나가더니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든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니. 어쩔 셈이오?”

가서. 서약서를 쓰겠어요.”

서경혜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거 속을 수도 있소.”

그럴 것 같진 않아요. 만약 잡혀가면 대장님한테 부탁 좀 해주세요.”

아니. 서약서를 쓰는 게 진심이오? 아니면 위장이오?”

진심이에요. 그동안 곰곰이 생각해 왔었는데. 이젠 운동 같은 것 그만 두기로 했어요.”

서경혜는 유일표를 똑바로 보며 마했다.

이런. 아까운 용사 하나가 없어지다니. 왜 그리 맘이 변했소?”

몰라요. 다 선생님 때문이에요.”

서경혜는 방을 뛰쳐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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