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우정도 정치
"이 새끼, 불어, 빨리 불어! 1천만 원 받아먹은 것 틀림없지!"
몽둥이를 든 사내가 살벌하게 외쳐댔다. 그 외침은 하얀 네 벽에 부딪쳐 야릇한 메아리로 되울림하고 있었다.
"날 죽여라 난 절대 그런 일 없으니까."
팬티바람에 등 뒤로 쇠고랑을 차고 나무의자에 앉은 남자는 낮으나 분명하게 대꾸했다. 밝은 불빛에 뒷모습만 드러나고 있는 그 남자의 몸뚱이는 사람의 몸뚱이가 아니었다. 얼마나 두들겨 맞았으면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인지, 뒷몸뚱이는 빤한 틈이라고는 없이 잉크를 칠해 놓은 것처럼 온통 검푸른 멍으로 뒤덮여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그런 몸뚱이로 말을 했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이 새끼 이거 언제까지 아가리가 살아 있을 거야. 준 사람이 줬다는데도 개소리를 쳐! 정말 뒈져봐야 알겠어!" 사내가 몽둥이를 휘둘러 그 남자의 등을 후려치더니, "처박어!" 무슨 구령을 붙이듯이 외쳤다. 그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팬티만 걸친 남자의 양쪽에 서 있던 두 사내가 자동으로 작동하는 기계처럼 재빠르게 움직여 그 남자의 머리를 욕조 안으로 꺾어 눌렀다. 작은 욕조에는 물이 찰랑찰랑 담겨 있었다. 멍투성이인 남자의 몸뚱이가 본능적인 저항의 몸짓으로 꿈틀거렸다. 그러나 건장하게 생긴 두 사내의 완력 앞에서 그 몸짓은 가냘프고 나약할 뿐이었다. 창문 없는 방에는 갑자기 밀려든 침묵이 깊어지고 있었다. 몽둥이를 든 사내는 불빛에 손목시계를 비춰보았다. 세 개의 바늘 중에서 가늘고 긴 초침이 시간을 토막토막 잘게 가르듯 돌아가고 있었다. 그 사내는 잠시 초침을 보더니 팔을 내리고 느긋한 손놀림으로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담배에 불을 붙여 태평스럽게 빨고, 연기를 내뿜었다.
머리 전부가 물 속에 잠긴 그 남자는 계속 저항의 몸짓을 해댔다. 그러나 두 사내가 양쪽 겨드랑이를 틀어 잡은데다가 머리카락을 움켜잡아 눌러대고 있어서 그 몸부림은 여전히 허약할 뿐이었다. 담배 맛에 취한 듯 눈을 가늘게 뜬 그 사내는 다시 손목시계를 불빛에 비췄다. 초침은 동그란 트랙을 한 바퀴 거의 다 돌아 아까 지났던 지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내는 팔을 내리고 또 담배를 깊이 빨아 연기를 천천히 내뿜었다. 푸른 연기가 밝은 불빛 속에 추상적인 무늬를 그리며 흩어지고, 방 안의 침묵은 한층 더 깊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방 안은 침묵하고 있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가 물에 잠긴 남자의 발버둥은 심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발버둥은 더 큰 힘에 억눌려 소리를 내지 못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발버둥을 따라 물 속에서 거품들이 보글보글 일고 있었다. 그 거품들은 아까는 일지 않았던 것이다. 거품들은 물 위로 솟는 순간순간 스러질 뿐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사내는 몽둥이를 바로잡으며 다시 손목시계를 불빛에 비췄다. 초침은 기계의 충실함을 발휘해 더 빠르지도 않고, 더 느리지도 않게 똑같은 속도로 두 바퀴째에 이르고 있었다.
"정지이이."
사내가 몽둥이로 바닥을 치며 목소리를 길게 끌었다. 두 사내가 다시 기계적인 동작으로 그 남자의 머리를 물속에서 치켜들었다. 그 순간 휘파람소리가 방 안의 침묵을 깼다. 그 남자가 막혔던 숨을 토해내는 소리가 흡사 휘파람소리였다. 그리고 그 남자는 숨을 헐떡거리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곧 숨이 넘어가는 것처럼 숨소리도 기침도 거칠고 심했고, 몸뚱이도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때, 지옥이 바로 코앞이지? 더 까불지 말고 어서 불어. 너 1천만 원 받아먹은 것 틀림없지!"
사내가 몽둥이 끝으로 그 남자의 등을 질벅거렸다.
"......."
그 남자는 숨만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이 새끼야, 빨리 대답해!"
사내가 다시 쩌렁 고함을 질렀다.
"날 죽여봐라. 절대 아니야."
그 남자는 숨을 몰아쉬며 꽉 잠긴 소리를 냈다.
"이 새끼, 믿는 데가 있다 그거야? 네놈도 끝까지 까불면 결국 죽게 돼. 불어, 빨리 불어!"
사내는 '불어, 빨리 불어'에 맞추어 그 남자의 등을 연달아 후려쳤다.
"데려와. 나한테 돈 줬다는 놈을 데려오라니까."
그 남자는 신음 섞인 소리로 숨 가쁘게 말했다.
"이 새끼, 개소리 치지 말어. 어디 누가 이기나 보자. 나한테 꺾이지 않은 놈은 하나도 없으니까. 처박어!"
그 남자의 머리는 다시 물속으로 처박혔다. 침묵의 시간은 아까보다 더 길어졌다. 초침이 세 바퀴째 돌아서야 사내는 정지 명령을 내렸다.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멍든 몸뚱이를 줄줄이 타고 내리고 그 남자의 헐떡거림과 기침은 한층 더 심하고 길었다.
"어때, 이래도 안 부시겠어? 적당히 하고 풀려나 처자식하고 편히 사는 게 현명하지 않겠어? 여기서 끝까지 버텨봤자 막장에는 천당행이야. 그땐 자살로, 양심의 가책으로 자살했다고 처리하면 그뿐이야. 세상은 그런 일 사흘이 못 가 잊어버리니까 손해 보는 건 너 혼자고, 불쌍해지는 건 네 처자식들뿐이야. 세상 그렇게 미련하게 살 것 없잖아. 자아, 간단하게 한 마디만 해. 돈 받았지? 그렇지?"
몽둥이를 든 사내는 멍투성이인 그 남자의 등을 살살 쓸며 그지없이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목이 잠겨 목소리가 쉰 듯 가늘어진 그 남자는 목소리를 보충하려는 것처럼 고개를 세게 내저었다.
"이 새끼 이거 정말 뒈지고 싶어 환장을 했나. 이 새끼가 날 뭘로 보고, 그래 좋다, 끝까지 해보자. 처박어!"
사내는 감정을 폭발시키듯 구둣발로 그 남자의 등을 걷어찼다. 그 남자의 머리는 또다시 물속에 처박혔다. 사내는 몽둥이를 내던지며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몽둥이가 시멘트바닥에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내다가 문득 침묵이 밀려들었다. 사내는 의자에 몸을 부렸다.
"이 새끼야, 그만 독 부리고 제발 좀 불어라. 승진 심사 가까워오는데."
사내는 담배를 꺼내며 중얼거렸다. 그 사내는 태평세월로 담배를 피우고 침묵의 시간은 더욱 길어지고 있었다. 그는 초침이 네 바퀴째 돌아서야 정지 명령을 내렸다. 두 사내는 그 남자의 머리를 들어올렸다. 그런데 그 남자의 반응은 아까와 전혀 달랐다. 막힌 숨이 터지는 휘파람소리도 울리지 않았고, 기침을 하지도 않았다. 그 남자의 머리와 어깨가 무겁게 처져 내렸다
"반장님, 이거 갔는데요."
한 사내가 다급하게 말했다.
"개새끼, 제놈이 무슨 통뼈야. 수갑 풀어 눕혀놔. 곧 깨어나겠지."
그 사내가 발끝으로 꽁초를 비벼 끄며 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두 사내는 그 남자의 쇠고랑을 풀고, 무슨 짐짝 끌듯 해서 그를 시멘트바닥에 눕혔다. 비로소 그 남자의 얼굴이 불빛에 드러났다. 광대뼈가 불거지고 여기저기 피멍이 잡혀 초췌한 얼굴, 그 남자는 한인곤이었다. 두 사내가 전혀 열릴 것 같지 않았던 문을 반쯤 열어놓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몽둥이를 든 사내는 뒷짐을 지고 한인곤 옆을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한동안 그의 구둣발소리만 뚜벅뚜벅 울리고 있었다.
"반장님, 이거 좀 이상한데요. 벌써 5분이 지났는데도 안 깨나고, 맥박도 시원치가 않아요."
한인곤의 손목을 잡고 한 사내가 반장을 올려다보았다.
"이 새끼, 잘난 체 독기 부리더니......, 어디 보자."
반장은 빠른 동작으로 한인곤의 눈꺼풀을 까뒤집더니,
"이거 곤란한데. 빨리 의무실에 연락해, 빨리."
다급하게 말했다.
"이게 벌써 몇 번째야. 독종 같으니라고."
한 사내가 밖으로 뛰쳐나가며 내쏘았다.
"야, 뭐하고 서 있어. 빨리 심호흡 시키고 상체 맛사지 실시해!"
반장이 남아 있는 사내에게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흰 가운에 가방을 든 의사가 나타났다. 의사는 무표정하게 한인곤의 두 눈을 까보았다. 그리고 가방에서 약병과 주사기를 꺼냈다. 주사기가 약병의 액체를 빨아 당기는 동안 세 남자는 한인곤을 둘러싸고 굳은 듯 서 있었다. 의사는 한인곤의 팔에 주사를 놓았다.
"어떻겠소?"
반장이 물었고, 젊은 의사는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만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이거 오늘로 시마이하려고(끝내려고) 했는데 잡쳤구만. 빌어먹을, 독촉은 심하고....... "
반장이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침을 뱉었다.
"반장님 솜씨에 여태까지 안 불다니, 이게 독종은 독종입니다."
한 사내가 말했고,
"이게 끝까지 버티는 걸 보니까 안 해먹긴 안 해먹은 것 아닌가요?"
다른 사내가 뚜벅 말했다.
"뭐가 어쩌고 어째!"
반장이 버럭 소리치며 그 사내를 노려보았다. 다음날 한인곤은 그들이 시키는 대로 옷을 챙겨 입었다. 옷을 한 가지씩 입으며 한인곤은 자꾸 눈물이 나려는 목메임을 느끼고 있었다. 이곳에 끌려와 옷이 벗겨진 이후로 처음 입는 옷이었다. 옷의 기능이 단순히 추위를 막는 것이 아니고, 멋을 부리기 위한 것은 더구나 아닌 것을 그는 이번에 절실하게 깨달았다. 옷으로 수치를 가리고 위신을 보호한다는 것은 옷의 기능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옷을 벗겨버리는 것, 그것은 또 하나의 잔혹한 고문이었다.
한인곤은 절룩거리며 그들을 따라갔다. 어디로 가는지 묻고 싶었지만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아 그는 입을 떼지 않았다. 이제야 검찰로 넘기는 게 아닐까 하는 짐작을 했다.
"국회의원 나으리, 잘 좀 해보셔."
반장이 어느 방으로 한인곤을 밀어 넣으며 비꼬인 어투로 말했다. 한인곤은 자신의 짐작이 빗나간 것을 느끼며 가슴이 철렁해졌다. 다른 수사팀에 넘기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왈칵 밀려들었다. 다시 수사가 시작된다면 그 끔찍한 고문들을 더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동안에도 거짓자백을 할 뻔한 아슬아슬한 고비를 몇 번씩이나 가까스로 넘겼던 것이다.
"여보게 인곤이, 어서 오게."
자신도 모르게 떨구고 있던 고개를 쳐든 한인곤은 깜짝 놀랐다. 자신에게로 다가오며 악수를 청하고 있는 건 뜻밖에도 남재구였다. 한인곤은 순간적으로 반가움과 경계심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지? 어서 이리 앉게."
남재구는 더없이 다정한 어조로 말하며 소파로 한인곤을 끌었다. 한인곤은 그가 끄는 대로 따라가며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그가 왜 갑자기 나타났는지, 여러 생각들이 엇갈리고 뒤엉키고 있었다.
"자아, 커피부터 한잔하게. 속이 풀릴 게야."
남재구는 보온병을 끌어당겨 커피를 따랐다. 한인곤은 눈을 내려뜨고 커피가 잔에 차오르는 것을 보면서 줄기차게 출세하고 있는 남재구의 재주에 다시금 놀라고 있었다.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이 수사기관의, 그것도 간부 방을 차지하고 앉아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존재로 그는 달라져 있었다. 그는 그야말로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었다. 지난날 정치를 시작하려고 하면서 그를 그렇게 찾아내려고 애썼던 것은 그의 남자다움, 굳은 심지며, 신의를 지킬 줄 아는 기질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정반대로 등을 돌리고 말았다.
"자네, 죽고 싶진 않겠지?"
남재구의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커피 잔을 들어 올리던 한인곤은 픽 웃었다. 그건 배짱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남재구의 돌연한 출현에서 '회유'의 냄새를 짙게 맡고 있는 그로서는 그 느닷없는 말이 턱없는 공갈 협박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왜 그렇게 웃나? 목숨이 죽는 것만 죽는 건가? 사업가가 사업 망하면 죽는 것이듯 정치가가 정치생명 끊어지면 그거 죽는 것 아니겠어?"
남재구는 냉소 어린 얼굴로 한인곤을 빤히 쳐다보았다.
"......!"
한인곤은 눈싸움을 벌이듯 남재구를 맞쏘아보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충격을 받아 머리가 멍했다.
"자네도 이젠 산전수전 겪을 만큼 다 겪었으니까 내 말 잘 알아듣겠지? 괜히 비웃거나 코웃음 치려고 하지 말어. 정치는 현실이라잖아? 우리의 현실은 엄청나게 변했고, 자넨 정치가로서 달라진 현실을 직시해야 하네."
한인곤은 못내 역겨웠지만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따끈한 커피의 맛이 불현듯 바깥세상에 대한 그리움을 자극했다. 하얀 벽으로 차단되고 단절된 지하 취조실에서 갖가지 고문을 당할 때마다 고통과 함께 일어나고 했던 그리움이었다. 고문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에 못지않게 바깥세상에 대한 그리움도 마음을 흔들고 약하게 했다. 어찌 보면 그리움도 또 하나의 고문이었다.
"난 순수한 우정으로 자네를 돕고 싶네. 자네도 마음을 열고 내 말을 듣도록 하게."
한인곤은 두 모금 째 커피를 넘기다가 하마터면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순수한 우정? 그거야말로 배반자가 읊조리는 신의였고, 반역자가 내세우는 충성이었다. 자신을 입신의 발판으로 삼고 말 한 마디 없이 변심해 버린 남재구는 정동진보다 훨씬 더 우정도 진실도 없는 인간이었다. 낯짝에 침을 뱉어버리고 싶다는 흔한 말이 있었다. 지금 자신의 심정이 꼭 그랬다.
"우리 앞에는 국민의 뜻에 따라 백 년 정권이 서게 되었네. 전에도 야당은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해왔는데 앞으로는 더욱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는 형편이야. 단군 이래 최초로 전국민이 잘살게 된 이 경제건설의 시대에 애국적 견지에서도 그렇고 개인적 정치인생을 위해서도 그렇고, 어떻게......, 나와 함께 발맞춰 걸어가지 않겠나?"
남재구의 판에 박은 듯한 달변에 한인곤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박정희 맹신자들'이라는 말이 있었다. 자나깨나 경제건설을 주창하고, 정치행위의 모든 갈등이나 모순도 경제건설이라는 미명으로 합리화시켜버리는 것이 '박정희교'라는 것이고, 그 논리를 무작정 추종하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 타당성을 역설해대는 자들을 맹신자라고 이름 붙였다. 그런데, 그 사회적 비아냥거림과 야유를 오히려 자랑스럽게 내세우며 출세의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숱한 게 정치판이기도 했다. 남재구도 영락없이 그런 부류들 중의 하나였다.
"자넨 이젠 자네 당에서도 버림받은 존재라는 걸 알아야 해."
그 순간 한인곤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의 매서운 눈초리가 남재구를 겨누었다.
"왜, 내 말이 안 믿어져? 국회의원 선거는 얼마 안 남았고, 자넨 뇌물수수 혐의자야. 그런데 당에서 공천을 해줄 것 같애? 그렇게 믿고 있다면 정치의 기역 니은도 모르는 순진함이지. 당은 당의 위신을 세워야 하고, 자네 선거구에서 출마하고 싶은 사람들이야 자네 말고도 수두룩하니까."
"아니,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그럼 딴사람을 벌써 공천했다는 거야?"
비로소 입을 여는 한인곤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믿어지지 않겠지? 그러나 그건 사실이야. 그게 바로 정치의 현실이라구."
"설마......, 이게 정치조작극인지 다 알고 있을 텐데......."
한인곤의 멍들고 초췌한 얼굴은 의문이 가득한 채 일그러지고 있었다.
"못 믿겠으면 알아봐."
"알아봐......?"
한인곤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하얀 네 벽이었다. 무슨 수로 여기를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참담한 절망을 느꼈다. 장군의 꿈이 깨지고 예편 당하던 때보다 더 큰 절망감이었다.
"자네한텐 딱 한 가지 길이 있어.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당선되는 거야. 그럼 재판을 받을 것 없이 바로 명예회복이 되는 거고. 정치인생도 탄탄대로를 걷게 되는 거지. 물론 선거운동도 암암리에 지원해 줄 테니까. 재판받고, 징역 살고, 정치생명 끊어지고, 그렇게 험하게 살 것 뭐 있겠나. 세상살이라는 건 다 그렇고 그런 건데. 이게 자네한테 주어진 마지막 기회야."
한인곤은 심한 혼란에 빠졌다. 저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고, 당에서는 이런 음모를 알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고. 이 막다른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물론 당장 결정할 수는 없겠지. 오늘 하루 동안 깊이 생각해 봐. 난 이번 기회에 자네한테 빚진 것을 갚고 싶어. 자네를 등지게 되었을 때 자네가 이해할 것 같지 않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는데, 내 나름으로 꽤나 괴롭기도 했고 고민도 많이 했었지. 하지만 그때의 결정을 후회해 본 적은 없었어. 미력이나마 국가발전에 최선을 다했고, 이 생활에 보람을 느끼고 있으니까. 자네도 기왕 정치를 하려면 트집 잡는 정치가 아니라 나라발전에 앞장서는 정치를 하기 바라네. 은혜를 갚을 겸 해서 돕고 싶으니 나한테도 한번 기회를 주게."
한인곤은 묵묵히 커피 잔을 비웠다. 그의 말을 수긍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말은 공박할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는 호랑이 굴이었다. 도청장치가 완벽하게 되어 있을 건물 안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용인되는 한 가지 말은 남재구 식의 말이었다.
"잘 생각해 보게. 내일 다시 올 테니까 옹졸하게 생각하지 말고 크게 생각하라구, 크게."
남재구가 껄껄껄 웃음을 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런 놈에 새끼, 당장 꺼져버려! 친구를 배신한 것도 모자라 이젠 친구를 팔아먹으려고 들어. 나쁜 새끼, 독재자의 주구 노릇이 애국이라구!’
한인곤은 목이 터지라고 외쳐댔다. 그러나 그건 가슴속에서만 들끓는 소리였다. 그 말이 밖으로 터져나가지 못하는 건 여기가 무서운 곳이라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그 외침을 가로막는 또 다른 마음이 있었다. 어서 여기를 벗어나고 싶고, 더는 고문을 견뎌내지 못할 것 같은 마음이 그 마음과 맞서고 있었다. 그 상반된 마음은 둘 다 자신의 마음이었다. 한인곤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물고 다시 취조실로 돌아왔다.
"남들은 양지 찾을 기회가 없어서 안달복달인데 괜히 굴러온 떡 차지 마셔. 정치고 인생사고 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식으로 핑퐁 치는 것 아니겠어? 어떻게 적당히 잘해 보시라구. 나도 더 머시기 하기 괴로운 몸이니까."
곤충의 촉수처럼 예민한 반응을 나타내는 반장의 말이었다. 한인곤은 반장의 지시나 명령이 없는데도 나무의자에 주저앉았다. 내일 남재구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취조가 없을 거라는 판단이 마음을 놓게 했다. 그리고 남재구를 의식하는 반장의 눈치 빠른 반응에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가 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인곤은 자신의 그 유치한 감정이 그만 창피스러워졌다. 그동안 자신은 온갖 고문을 당하며 초라해질 대로 초라해져 있었고, 남재구를 통해서 체면을 회복하고 싶은 욕구가 슬그머니 고개를 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치졸함을 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도 간사하고 허약한 것인가....... 한인곤은 스스로에게 회의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왈칵 끼쳐온 것은 혼자 남은 취조실의 적막함이었다. 자신의 현실은 바로 그 취조실이었다. 그는 저녁으로 들어온 설렁탕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숟가락을 놓았다. 다른 때처럼 억지로 다 먹으려고 했지만 남재구가 남기고 간 말은 입맛을 싹 거두어가고 말았다. 남재구의 말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는 자꾸 앞서려는 감정을 누르며 문제의 핵심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건 다름아닌 '무소속 출마' 회유였다. 그럼 왜 무소속으로 출마하라고 하는가? 그것이 얼른 해득하기 어려운 술수였다. 내가 즈네 당으로 곧장 들어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아니면, 노골적인 정치탄압을 은폐시키고 야당의 공격을 피하려고? ......어쩌면 그 두 가지가 합해진 것일 수도 있었다. 그걸 끝까지 거부해 버리면 어떻게 되지? 그야 더 말할 것 없이 남재구가 말한 대로 재판 받고, 징역 살고, 정치생명 끊어져 인간 퇴물이 되는 노정이 빤히 드러나 보였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이렇게 묻는다면 국민학생도 웃을 일이었다. 이 정권이야말로 처녀를 총각으로 바꾸는 일만 빼놓고는 못할 것이 없는 어머어마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더구나 '10월 유신'을 성공시킨 다음부터 그 기세는 더욱 등등해졌다.
그런데......, 당은 어찌된 것인가? 정말 딴사람을 공천했을까? 사람을 구해낼 생각은 하지 않고 딴사람을 공천해? 그건 배신행위였다. 설마 당이......, 남재구가 거짓말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그런 거짓말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구해낼 능력은 없고, 선거는 다가오고 하니까 당에서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리고......, 3선 개헌 때만 해도 사람 욕심에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한풀 접어 생각해주려는 구석도 없지 않았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 내걸고 그들 말마따나 '혁명'을 일으켰고, 연속적인 5개년계획으로 경제를 발전시킨데다가 벌여놓은 일들이 많기도 했고, 두 번으로 그만 물러나기는 너무 젊기도 했다. 3선 개헌을 반대하면서도, 그래 한 번 더 해먹고 깨끗하게 물러가라, 하는 마지못해 인심 쓰는 한국식 분위기도 없지 않았다. 그때 유신이라는 것을 일으키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던가.
남재구는 '백 년 정권'이라고 했다. 그건 물론 자기 좋도록 생각하는 과장이었다. 그러나 백 년이 꼭 백 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길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면 과장이 아니기도 했다. 그가 종신 대통령을 해먹는다면 앞으로 몇 년이 될까....... 10년......? 20년......? 지난 12년이 그리도 후딱 지나갔는데 또 10년 지나가기는 금방일 것이다. 20년은 너무 길고, 15년만 잡더라도......, 그때 내 나이가 몇 살인가....... 15년 후의 자신을 생각하자 한인곤은 그만 암울해졌다. 그리고 오재섭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 의원, 좀 융통성 있게 생각해 봐요. 한 의원은 그 고집만 좀 덜 부리면 참 좋은데 말이오. 현실 정치는 독립운동이 아니라니까. 마음을 조금만 바꾸면 애국도 더 크게 하고, 출세도 더 크게 하고......."
일찍이 태도를 바꾼 오재섭은 일류대학 출신의 능력을 한껏 발휘하며 그 누구보다도 넓게 두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그가 강조하는 '현실'은 역시 정치의 생명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왜 자꾸 자신을 포섭하려는 것인가......, 그 지역구에서는 자기네 사람을 당선시킬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더욱 버텨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감옥살이를 하고......, 세월이 바뀌고......, 인심이 변하고......, 당선이 안 되면 그때는 어찌 되는가....... ’
한인곤은 잠 한숨 자지 못하고 꼬박 밤을 밝혔다. 얽히고설킨 생각들은 전혀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자신이 꼼짝달싹 못하고 갇혀 있다는 사실과, 당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현실만 크게 다가왔다. 그리고 당이 딴사람을 공천했다는 그 믿을 수 없는 사실이 불안을 키우고 있었다. 만일 그렇다면 그건 용납할 수 없는 배신이었다.
"이봐, 빨리 나와 어제 그분 면회야."
한인곤은 어떻게 해서든 당의 처사를 확인해야 된다고 생각하며 느리게 일어섰다.
12. 현실을 작게 보라
청진동 밥집골목은 소문난 대로 점심때가 되자 사람들이 바글거리기 시작했다. 대개 근처의 직장인들이 몰려드는 것인데 그 틈에는 더러 불청객도 끼어 있었다. 번잡한 시간에 밥집들이 질색을 하는 거지들이었다. 밥집들이 싫어하는 만큼 빨리 쫓으려고 동전 한 닢씩을 쉽게 던져준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때가 절고 전 누더기 포대기에 아이를 업은 여자가 한 밥집 앞으로 다가갔다. 더럽고 낡은 포대기에 못지않게 여자와 아이의 몰골도 남루하고 굶주림에 찌들어 있었다. 그 여자를 피해서 네댓 명의 양복쟁이들이 밥집으로 들어갔다.
"주인아주머니, 돈 벌 생각만 하지 말고 적선부터 해야 복 받지 않겠소. 손님 드나드는 데 방해도 안 되고."
그들 중의 한 남자가 목청을 높였다.
"아이구, 어서 오세요, 기자 양반들."
듬직하게 살이 찐 주인여자가 반색을 하며 손님들을 맞이하고는
"아이구, 나 못살아. 동냥을 왔으면 동냥을 달라고 해야지 그냥 서 있으면 어떡해. 에그, 벙어리야 뭐야."
그녀는 앞치마에 달린 큰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며 문 쪽으로 내달았다.
"글쎄 벙어리는 아닐 거고, 동냥 달라는 말도 동냥하려는 건가?"
아까 그 남자가 자리를 잡으며 웃음 섞어 말했다.
"거 너무 차원 높게 나오지 말어. 신참이라 한 푼 보태달라는 말이 차마 밖으로 안 나오는 거겠지."
"아니야, 그게 아닐걸. 그 모습을 보니까 거지생활이 하루 이틀 된 것 같지가 않던데. 아마 그런 말을 할 기운도 없어서 그랬을 거야."
"됐어. 됐어. 이런 자리에서까지 직업의식 발휘하지 않아도 돼. 자아, 뭣들 먹겠어?"
"고를 것 뭐 있겠어? 죽으나 사나 우거지국밥이지."
그들은 바쁜 몸짓으로 다가선 주인여자에게 우거지국밥을 시켰다.
"근데 말야, 저 거지들 단속한다는 게 언젠데 아직까지도 저러고 다니지?"
한 남자가 먼저 나온 깍두기를 젓가락으로 집으며 말했다.
"글쎄, 엄청나게 큰 대형수용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겠어? 그리고 잘살아 보겠다고 사람들이 무작정 서울로 몰려드는 것처럼 시골 거지들도 서울로 몰려든다고 하잖아. 그걸 막을 도리가 없는 바에야 단속은 공염불이지."
"그런데, 거지들을 도심에 나돌지 못하게 단속한다는 발상 자체가 틀려먹은 거 아냐? 거지가 있는 게 엄연한 우리 현실인데 그걸 눈가림하려는 건 군대식 억지거든. 검열 받으려고 딴 부대 변소 문짝 떼다가 이쪽 내무반 문짝 땜질하는 식 말야."
"그래도 외국 사람들 왕래가 많아지는데 거지들이 드글거리는 건 좀 곤란하긴 곤란하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미국 뉴욕에도 프랑스 파리에도 거지들은 다 있어. 그걸 창피스럽게 생각해서 강압적으로 단속하는 게 괜한 열등감이고 위선이야. 그래, 백보 양보해서 외국의 투자가 필요한 나라 형편과 체면을 생각해서 그럴 수 있다고 쳐. 그렇다면 최소한의 생계대책을 세워줘얄 것 아니냔 말야. 그게 없이 단속만 해대다니, 그건 엄연한 생존권 파괴라구. 거지한테도 마땅히 보호받아야 될 생존권이 있어."
"자아, 식사 나왔습니다아."
종업원 여자가 커다란 쟁반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자아, 시장한데 밥들 먹자구. 오나가나 그놈의 잘난 기자 근성들은 못 버리구."
"누가 아니래. 지금 이 자리에서 떠들어댄 것만 그대로 정리해서 기사를 써대도 정부의 심장을 찌르는 일급 기사가 되잖겠어? 기사로는 한줄도 못 쓰면서 입으로만 떠들면 뭘 해."
"그래, 서글프기만 하지. 유신 하에서 서글픈 존재, 그대 이름은 기자이니라."
"빌어먹을, 국물 맛은 여전히 좋네. 국물 맛이 좋으니까 더 서글퍼지네."
"누가 아니래, 그게 현실이야."
밥을 먹기 시작하자 그들의 대화는 뚝 끊어졌다. 하나같이 밥먹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은 배가 고파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뇌리에는 밥 먹을 때 말을 하면 복이 달아난다는 말이 깊이 박혀 있었다. 그 말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한테 엄하게 익혀온 식사범절이었다. 그 말이 몸에 익기까지는 꾸중도 많이 듣고 군밤도 여러 번 얻어맞아야 했다. 그런데 밥상머리에서 지켜야 하는 범절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입을 짭짭거리는 소리를 내면 박복하게 산다, 입 안의 음식이 보이게 먹으면 남자는 출세를 못하고 여자는 시집살이가 고달프다, 음식을 마구 헤집거나 뒤집어대는 버릇은 평생 가난을 면치 못한다, 입에 맞는 음식만 골라 먹으면 오래 살지 못한다. 그 외에도 국을 소리나게 먹지 마라, 젓가락 끝이 밥상에 부딪쳐 소리를 내게 하지 마라 등 그 가르침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식사를 말없이 빨리 하는 것이 서양 사람들에게 흉거리가 되고 있었다. 그 내용인즉, 한국 사람들은 서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두 시간쯤 즐길 줄 아는 문화수준을 갖추지 못하고 서로 말 한마디 없이 그저 식사를 빨리 해치우기에 바쁜 야만적 생활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흉을 말로만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네 신문이나 잡지에 그런 글까지 거침없이 써대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자기네 입장과 기준으로 평가하고 비판하는 백인들의 전형적인 행태였다. 그 독선에 찬 자만과 우월감도 문제였지만, 더 문제는 그런 일방적인 언행에 대해 무슨 큰 치부라도 내보인 것처럼 창피스러워하고 자기비하를 서슴지 않는 이쪽 사람들의 열등감이었다. 배운 사람들일수록, 서양 물을 먹은 사람들일수록 그런 증세가 심한 것은 묘한 일이었다.
외국인과 상담(常談)을 벌이려면 최소한 두 끼 정도는 김치나 마늘을 먹지 마라, 외국인을 만나기 전에는 반드시 양치질을 하고, 갑자기 그것이 어려우면 껌이라도 씹는 것을 잊지 마라. 이런 말들은 외국인들의 내왕이 차츰 빈번해지면서 당연한 것처럼 사회에 퍼지고 있었다. 여기서 외국인들이란 미국을 비롯한 서양 사람들을 가리켰다. 그들이 선심이라도 쓰듯이 배정하는 보세가공품을 감지덕지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히 갖춰야 될 예의인지도 몰랐다.
"근데 말야, 아까 나오면서 얼핏 들으니까 신준호 선배가 결국 국회 행 열차를 타게 된 모양이던데?"
한 사람이 깍두기를 으석으석 씹으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뭐야? 신 부장 왜 그래 그거? 그래도 믿을 수 있는 선밴 줄 알았는데."
옆 사람이 국밥 가득 뜬 숟가락을 입에 넣으려다 말고 역정을 냈다.
"믿는 것 좋아하지 말어. 나이 들면서 다들 그렇고 그렇게 흐물흐물해지기 마련이라구. 그것도 촌구석 면장이나 군수도 아니고 한 나라의 국회의원 자린데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어딨어."
"이거 왜 이래?국회의원이라고 다 국회의원인가? 이름이 좋아 국회의원이지 그게 무슨 놈의 국회의원이야. 국민이 뽑지도 않고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회의원이."
"그래도 그거 서로 하려고 박이 터진타잖아? 비밀리에 줄을 대고 빽을 쓰고 그래서 그렇지 공개를 하면 몇 백 대 일이 될지 모른다는 소문이잖아? 역시 힘이 진리라는 말이 맞아."
"그야 권력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오만 잡동사니 떨거지들이 몰려드니까 그럴 테지. 그렇지만 신문기자들까지 그렇게 놀아나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냔 말야. 신문기자라는 존재들이 최소한 해야 될 일이 있는 거고, 특히 이런 정치상황 아래서는 더 정신차려야 되는 것 아니겠어?"
"그거야 백 번 옳은 공자님 말씀이고 교과서에 나오는 원칙론인데, 현실은 또 그게 아니니까 문제지. 원 형, 원 형하고 신 선배는 친하잖아? 신 선배는 도대체 무슨 맘을 먹고 그러는 거야? 대통령 될 야심이라도 품은 건가?"
"나도 몰라. 거기 출입하다 보니 예쁘게 보인 모양이고, 최고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보다 보니까 맘이 변한 모양이지 하도 거하게 되셨으니 나 같은 게 감히 따져 물어볼 수나 있나."
그때까지 입을 열지 않고 밥만 먹고 있던 원병균이 쓴웃음을 지으며 숟가락을 놓았다.
"정말이지 사람 속 모르겠어. 신 선배는 모범적인 기자로 평생을 신문에서 보낼 줄 알았는데 제일 먼저 변하니 말야. 에이 기분 잡치는데 우리 소주나 한잔씩 하자구."
"그래, 홧김에 닭 잡아먹는 거니까. 아주머니, 여기 쐬주 좀 빨리 주세요."
"근데 말야, 이게 개인문제가 아니라 신문사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소문이 도는데, 그게 사실일까?"
"아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래 가지고 신문 어떻게 만들어 먹을려고?"
"그게 아니고 저쪽에서 신문사들에 손을 뻗친다 그거지. 똘똘한 친구들 뽑아다가 휘하에 넣고 있으면 이래저래 이득이 한두 가지가 아닐 거 아냐?"
"허, 그 말 듣고 보니 그거 아주 그럴듯한 고단수네. 그렇게 한 가닥씩 잡고 있으면 언론정보 확보하기도 쉽고 기사 조절하기도 쉽고, 신문사 주무르기도 좋고, 양수겹장에 일거삼득 아닌가."
"어쩌면 그게 사실인지도 모르지. 이 정권에서 제일 두려워하고 골치 아파하는 게 첫째가 대학생들이고 둘째가 언론사들이니까. 어떤 친구들이 제법 짱구를 돌렸는데 그래?"
"그래, 머리 좋으신 일류대학 출신들 수두룩하니까, 유신헌법 만들어낸 머리들로 그 정도 일 꾸미는 거야 누워서 떡 먹기 아니겄어. 아니, 벌써 술 다 떨어졌어?"
"빌어먹을, 여기 술 좀 더 줘요."
"그나저나 이번에 기자들이 몇이나 그 감투를 쓰게 되는 거야?"
"그거야 누가 알겠어. 급할 것 없으니까 조금만 기다려봐. 머잖아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면 보기 싫어도 그 거한 면면들을 다 보게 될 테니까."
"어쨌거나 일이 그리 되면 신문들은 끝장나는 거야. 이게 대만의 장개석을 찜쪄먹는 독재가 된 건데, 그나마 횡포를 막아낼 수 있는 건 신문들뿐이잖아. 그런데 신문들이 기자들을 국회의원으로 보내놓고 권력과 유착을 하면 그 꼴이 뭐가 되겠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야."
"그건 바로 언론의 자살행위야. 신문사들도 그렇지만 해당 기자들도 그 엉터리 국회의원 쪽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돼. 기자가 될 때 국회의원 해먹으려고 했던 게 아니잖아."
"글쎄, 그야 다 공자님 맹자님 말씀인데, 막상 코앞에 닥친 현실이 그렇지 않으니까 문제지. 자아, 정 형한테 그 문제가 떨어졌다고 생각해봐. 무작정 거부만 할 수 있겠어? 그게 신사적 권유가 아니라 강압적 강요일 때 말이야."
"그게 바로 비겁한 자들이 쉽게 써먹는 책임전가용 상황논리야. 평양감사도 제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구. 신 선배나 누구나 다 권력욕, 출세욕이 있어서 그리 되는 거야. 4.19 때 학생 간부로 데모에 앞장섰던 친구들 중에 이 정권에 붙어서 출세하는 걸 봐. 그자들이 진정 4.19정신을 가졌다면 감히 그럴 수 있겠어? 죽은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 쳐도 부상자들은 지금까지도 병상에 누워 있다구. 그자들은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4.19데모를 했던 거야. 그리고 그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는 거고. 좀 야박한 말일지 모르지만, 신 선배도 기자직을 출세의 발판으로 삼고 있어."
"아니, 그까짓 임명직 국회의원이 무슨 권력이 있다고 출세야? 기껏해야 자가용 타고 다니면서 거수기 노릇이나 할 건데."
"이거 기자답지 않게 무슨 순진한 소리야? 금 뺏지 달았으면 다 국회의원인 거지 거기에 무슨 표시하나? 국회의원 되면 당연히 바뀌는 예우가 100가지가 넘는다는 말도 못 들었어?"
"자아, 그만들 가자구. 이러다가 시말서 쓰기 딱 좋겠어."
원병균이 쓰게 웃으며 일어섰다.
신준호의 국회 행은 기자들의 수군거림을 따라 넓은 편집국 안에 금세 퍼졌다. 기자들의 힐끔거리는 눈길은 연신 신준호의 자리로 쏠리고 있었다. 그런 거북한 분위기를 미리 피한 것인지 어쩐지 그의 자리는 오래 전부터 비어 있었다. 원병균은 빈 원고지 위에 만년필을 빼놓은 채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가슴속에서 꾸역꾸역 괴어오르는 실망감과 배신감을 어떻게 추스를 길이 없었다. 사회정의에 대해서 진실의 옹호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투철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선배를 믿어왔던 것이다. 대학생 때부터 그런 신뢰를 가지고 있었기에 언론계로 방향을 바꾸면서 그를 찾아가 의논했던 것이고, 굳이 그가 근무하는 신문사에 시험을 쳤던 것이다.
정치-사나이가 사회적 삶을 영위해 나가면서 한번쯤 꿈꿀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권력과 지배......, 그것처럼 남자의 생리에 잘 맞고 매혹적인 것도 없었다. 국민학교 때부터 반장이 되고 싶어 가슴 두근거리고, 사병으로 열병 분열을 하면서 사열대의 장군을 부러워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면 그건 남자라고 하기 곤란했다. 하물며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라면 더 말할 것이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신 선배의 정의감과 진실성은 바로 정치 욕구로 직결되는 요소일 수도 있었다. 자신이 품고 있는 정의와 진실을 실현하자면 정치라는 수단을 빌리는 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었다. 지금의 정치 상황은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정반대의 행태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는 정치를 시작하기로 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지난날의 생각이 변한 것인지, 나이 들어 속된 타락을 한 것인지, 어찌할 수 없는 타의에 굴복한 것인지, 그 연유를 확실하게 알고 싶었다. '10월 유신'이란 지금까지 있어 온 군부독재가 더욱 강화된 것이 아니었다. 그건 죽을 때까지 권좌를 보장하는 임금의 탄생이었다. 그건 정치제도 중에서 가장 추악한 봉건제도의 부활이었고, 몇 백 년의 뒷걸음질이었다.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이승만 독재를 비판하고, 소외되고 고통 받는 민중의 편에 설 것을 역설하며 후배들을 이끌었던 신 선배는 그때와 정반대의 배를 바꿔 타고 있었다.
원병균은 억지로 기사를 메우고는 퇴근시간이 지나도록 신 선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의 의자는 덩그러니 비어 있을 뿐이었다.
‘혹시 사표를 내버린 것이 아닐까?’
뒤늦게 떠오른 생각이었다. 원병균은 자기네 부장한테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부장님, 저기 신 부장님 사표 내셨습니까?"
"사표? 글쎄, 잘 모르겠는데. 내긴 내겠지만, 아직은 안 냈을 걸."
부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편집국장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가는,
"왜, 만날 일 있어?"
하며 야릇하게 웃었다.
"아니 뭐......, 뭘 좀 물어볼 말이 있어서......."
원병균은 괜히 멋쩍고 당황스러워 어물거렸다.
"거, 그 일 때문인가? 그렇다면 관두는 게 좋아, 일단 달리기 시작한 기차는 되돌아오지 않는 법이고, 충고란 그동안 있어 온 우정에 대한 배신이라고 하잖아?“
"아, 예에......."
원병균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부장을 쳐다보았다. 눈길이 마주치자 부장은 무표정하게 책상으로 눈길을 돌려버렸다.
다음날도 신준호의 의자는 비어 있었다. 원병균의 가슴은 어제보다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다고 실망감이나 배신감에 무슨 변화가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 농도나 무게는 그대로였고 온도만 열정에서 냉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점심때가 다 되어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원병균은 복도에서 신준호와 마주쳤다.
"선배님, 오늘 시간 좀 내주시지요. 꼭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치아라. 다 아는 소리 아이가."
퉁명스럽게 내쏘고 지나가는 신준호를 원병균은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퇴근 무렵에 신준호가 사표를 냈다는 이야기가 편집국에 퍼졌다. 원병균은 동료 대여섯 명과 회사를 나와 누가 말을 꺼낸 것도 아닌데 술집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술자리는 침울하게 시작되었다. 별로 말이 없이 그들은 술잔을 돌렸다. 그러다가 술기운이 돌기 시작하자 신준호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게 되었다. 취기를 따라 말들은 차츰 격해지면서 신준호의 성토장으로 바뀌고 있었다. 원병균은 그 분위기에 휩쓸리며 아까 복도에서 당한 일을 털어놓고 싶은 자극을 몇 번이나 받았다. 그러나 어금니를 물며 꾹꾹 참아냈다. 신준호의 성토감으로 더없이 좋았지만, 자신이 무참하게 당한 꼴을 모두 앞에 드러내는 것이 싫었다. 술을 2차까지 마시고 그들은 하나같이 비틀거리도록 취해 헤어졌다.
"야, 재벌 사위 원병균, 기회 포착 잘해 보라구. 장인 영감이 광고 놓고 우리 사장하고 맞장 뜨면 부장 자리 하나쯤 차지하기는 거뜬할 테니까. 재벌 사위 좋다는 게 뭐야. 장인 빽 이런 때 한번 화끈하게 써먹는 거지. 어차피 누군가 차지할 자리니까 안 그래? 흐흐흐흐......."
누군가가 택시에 합승을 하며 외쳐댔다. 원병균은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자신은 생각지도 못한 문제였고, '재벌 사위'라는 말은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었다. 그 말을 외쳐댄 게 누군지 모르지만, 그 친구는 술 취해 직장 선배를 성토하고 매도해 대면서도 의식의 한편으로는 비게 된 부장 자리를 탐내고 있었던 것이다. 원병균은 정수리가 서늘해지는 걸 느끼며 긴 숨을 토해냈다. 고개를 젖힌 채로 그는 한동안 서 있었다.
깊고 깊은 어둠 저 멀리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크고 작은 별들의 맑은 반짝거림은 수많은 생명들의 맥박이 뛰고 있는 것 같이 경이로운가 하면, 가슴 깊이 저려오는 감탄과 함께 이유 모를 허무감에 싸이게도 했다. 사춘기에 느꼈던 감정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어쩌다 밤하늘을 볼 때마다 변함없이 마음을 적시고는 했다. 번잡하기 이를 데 없는 서울에서, 그것도 매일 시간과 다투는 기자 노릇을 하며 참 오랜만에 바라보는 밤하늘이었다. 어느 때 없이 깊은 허무감 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하늘을 나는 새가 허공에 그 발자국을 새기지 못하듯이 인간사 그 무엇이 영겁 속에 남음이 있으랴."
언젠가 읽었던 불경의 말씀이었다. 불경은 역시 진리의 바다고, 석가모니는 비교할 자 없는 지고한 현자였다. 그 허무의 철학은 극점에 이른 미학이고, 이론을 제기할 수 없는 결과론이었다. 그러나 인간 군상들은 나날의 생활 속에 묻혀 현실만 크게 볼 뿐 그 허무의 가르침을 쉽게 망각해 버렸다. 그 허무의 가르침의 핵심은 현실을 작게 보고, 과욕을 줄이라는 것이었다.
신준호......, 그는 허무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현실을 크게 보고, 한껏 욕심을 키우며 타서는 안 될 잘못된 권력의 열차에 편승한 것이다. 그가 그렇게 모질게 자신을 내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도대체 사람이란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가....... 세상살이를 해갈수록 거듭되는 인간에 대한 회의와 절망을 또다시 느끼며 원병균은 고개를 떨구었다.
"아이구 정말 지겨워 죽겠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술을 마셨어요. 하루도 빤할 날이 없이 이렇게 술을 마셔대면 신문기사도 술이 취해 있을 거라구요."
박영자는 비틀거리는 남편 원병균을 붙들며 바가지를 긁어댔다.
"뭐, 신문기사도 취해? 그거 한번 명언일세. 암 이 개판 세상에서 신문기사가 술에 취하는 게 차라리 낫지. 당신, 우리 선배 신 부장 알지? 그 친구 출세했어.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뽑히셔서 오늘 사표를 냈다구. 알았어? 이 드런 놈에 세상이 자꾸 술을 마시게 한다니까."
"어머, 그래요? 오늘 들었는데, 준서 오빠도 그 국회의원이 되게 됐대요."
"아니, 뭐, 뭐라구?"
원병균은 비틀거리며 눈을 부릅떴다.
"어머, 소리 지르지 말아요. 옆집에 다 들리겠어요. 여긴 아파트라구요."
박영자는 남편의 양복을 벗기다 말고 질색을 했다.
"빌어먹을, 그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빨리 말해 봐, 빨리."
원병균은 방바닥에 주저앉으며 술기운 흥건한 눈으로 아내를 쏘아보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 술 깨서 말해요. 피곤할 텐데 어서 주무세요."
"준서 그 새끼도 미쳤나......, 이놈이고 저놈이고 왜들 이렇게 미쳐서 돌아가나 그래. 빌어먹을......."
원병균은 아내가 까는 요 위에 피그르 쓰러지며 중얼거렸다.
"참, 철없기는 나이 먹었어도 지조 하나는 여전하셔. 천상 기자가 팔자야."
박영자는 남편에게 눈을 흘기며 짜증스럽게 양말을 벗겼다. 아내가 깨워서 눈을 뜨자마자 원병균의 머릿속에는 처남 준서가 국회의원이 되게 되었다는 말이 떠올랐다. 집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아내와 무슨 얘기를 했는지 전혀 기억이 없으면서도 그 한 가지 말은 머리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말도 아내한테 들은 것인지 꿈을 꾼 것인지 어릿거리고 있었다.
"내가 많이 취했었던가 보지?"
원병균은 얼굴을 훔치며 멋쩍게 웃었다.
"인사불성으로 마시지 않으면 어디 직성이 풀리시남요? 세상 고민 혼자 다 짊어지신 거룩하고 위대한 기자님이시니까 날마다 열심히 술을 드셔얍지요."
박영자는 이불을 거친 손놀림으로 개키며 비비꼬고 있었다.
"사람 참, 너무 그렇게 놀리지 말어. 바가지도 정식으로 긁어야지."
"놀리긴요? 이 드런 놈에 세상이 자꾸 술 마시게 한다고 한 사람이 누군데요."
"허 참, 그건 사실이기도 하고......, 그런데, 준서 처남이 국회의원 되게 됐다는 건 무슨 소리야?"
원병균은 담배를 끌어당기며 정색을 했다.
"식전에 담배는 안 돼요. 빨리 씻고 나오세요. 상 차려놓을 테니까."
박영자는 재빨리 담배를 뺏으며 남편의 등을 떠밀었다. 그것으로 바가지 긁기를 모면하게 되어 원병균은 못 이기는 척 방을 나섰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새로운 불쾌감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아내가 이야기를 뒤로 돌리는 것으로 보아 처남 준서가 엉뚱한 욕심을 부린 것은 틀림없었다.
‘짜식이 무슨 놈에 욕심이 그리도 많아. 돈으로 모자라 권력까지 가져야 되겠다 그거야? 내 참 더러워서.......’
원병균은 성질이 나는 대로 낯을 거칠게 씻고 있었다. 사방으로 어지럽게 튀고 있는 물방울들은 그대로 그의 신경질이었다.
"당신, 오빠 일 그거 언제 알았어?"
식탁에 앉으며 묻는 원병균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어제 오후예요."
박영자는 남편의 기분이 상한 기미를 눈치 채며 왜 그러느냐는 투로 대꾸했다.
"당신은 진작 알고 있었던 거 아냐?"
원병균은 아내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뭐라구요? 당신 맘에 안 든다고 억지소리는 말아요. 그런 일 성사되기 전에는 철저하게 비밀 지키는 아빠 성질 몰라서 그래요?"
박영자의 말에도 성깔이 돋아 있었다.
"빌어먹을, 준서 그 자식은 사업해서 돈 많이 벌어들이면 됐지 뭐가 모자라서 그 거지같은 국회의원까지 해먹겠다고 나대고 그래. 자식이 변해도 점점 더럽게 변해가."
거친 말처럼 원병균의 얼굴도 험하게 변해 있었다.
"여보, 아무리 맘에 안 들어도 말 그렇게 막하지 마세요. 그게 오빠 뜻이 아니라 아빠 뜻이래나 봐요. 우리 집안에서 아빠 뜻 거역할 사람 아무도 없잖아요."
박영자는, 평소에는 농담 잘하고 유하지만 한번 성질이 났다 하면 무서운 남편을 얼른 피해 섰다.
"허 참, 박부길 사장님다우시군."
원병균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13. 세상살이라는 것
남산은 시내에서 바라보면 산 같지가 않았다. 시내에 높은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면서 그 높이가 자꾸 낮아져 보이는데다가 산의 모습을 부분부분 가리기가 예사였다. 그리고 산을 점점 타고 오르며 큰 건물들이 불어나 그 높이는 말할 것도 없고 크기까지 위축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위에 올라서 보면 남산은 비로소 산 같은 높이를 느끼게 했다. 서울 시내를 사방으로 발 아래 굽어보게 했고, 아무리 높은 건물도 그 시건방을 제압해 낮게 만들어버렸다. 사람들은 그 맛에 힘겨운지 모르고 남산에 오르는지도 몰랐다.
"크으, 맛 좋다. 자아, 잔 받어."
박만길은 크으 소리에 맞추어 어깨를 부르르 떨며 비닐술잔을 내밀었다. 김선태는 씹고 있던 오징어다리를 이빨로 자르고 술잔을 받았다.
"기운 내라구 인생이란 마지막 웃는 자가 승자라구. 자넨 아직도 청죽처럼 씽씽하잖아."
박만길은 술을 찰랑찰랑하게 따르며 기운찬 목소리를 냈다.
"모르겠어요. 제 나이도 벌써 서른둘인데, 다 틀린 것 같아요."
김선태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긴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아, 그런 소리 말어. 나한테 비하면 자넨 청춘이야, 청춘."
오징어를 찢어 입에 넣는 박만길의 어조에서는 더 기운이 넘쳤다. 그러나 그의 몰골은 전보다 더 추레하고 얼굴에도 늙은 그늘이 짙어져 있었다.
"차아암......, 저 한강을 건너올 땐 정말 청춘이었고 꿈도 컸었는데......."
김선태는 중얼거림 끝에 또 긴 한숨을 매달았다. 그의 눈길은 저 멀리 아득하게 흘러가고 있는 한강에 가 있었다.
"그야 어디 자네만 그런가. 나도 그랬고, 한강철교 건너온 젊은 놈들이야 다 청운의 꿈을 품었었지. 그래, 서울은 참 묘한 곳이야. 출세의 도시이기도 하고 절망의 도시이기도 해. 무작정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을 발휘하면서 책임은 지지 않는 잔인한 도시이기도 하지. 조선 500년에서 지금까지 출세해 보겠다고 서울로 밀려들었다가 꿈을 이루지 못하고 저 한강에 눈물을 떨구며 발길을 돌린 젊은이들이 그 얼마나 많겠는가. 그 눈물을 다 모아놓으면 또 하나 한강이 될지도 모르지. 오랜만에 남산에서 한강을 내려다보니 감정이 묘해지는군. 이 사람아, 제사 지내나?"
"아, 예에......."
김선태는 반쯤 남은 술을 털어 넣고 얼른 잔을 건넸다.
"사실 인생이란 게 별게 아니긴 한데 고비고비 잘 풀리지 않으면 그것 참 팍팍한 모래밭인 거라. 죽고 나면 다 헛것인데 산 목숨 하루하루는 심각하고 절실하니까 최선을 다해 노력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숱한 사람들이 인생에 대해 제 나름으로 많은 말들을 했는데 정작 정답은 없는 게 인생이거든. 사는 것, 그것에 열중할 수밖에 없어."
저 멀리 시선을 둔 박만길은 술을 찔끔거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저어......, 선배님은......, 고시를 시작한 걸 후회하지 않으세요?"
김선태는 주저하고 머뭇거리며 이 말을 꺼냈다.
"허! 자네가 결국 그걸 묻는군. 글쎄에......, 그걸 뭐라고 해야 하나. 후회 안 한다고 하면 형편없이 둔감한 놈이 될 것이고, 후회한다고 하면 내 인생이 한없이 초라하게 될 거고....... 그게 반, 반이라고 해둘까? 키엘케고르가 말했지 아마? 인생은 어차피 후회다. 결혼하라, 후회할 것이다. 결혼하지 마라, 후회할 것이다. 출세해 보라, 후회할 것이다. 출세를 외면하라, 후회할 것이다. 인생이 이런 거니까 다 자기가 마음먹기에 달린 거지. 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게 흠이었고, 공부깨나 잘한 게 두 번째 흠이었지. 이 나라 농부의 태반이 그렇듯이 우리 아버지도 힘없고 가난한 농사꾼을 가장 천한 직업으로 여기고 아들만은 출세시켜 권세를 누리기를 바라셨지. 그러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고......, 그 소원을 마누라가 이어받아서 내 꼴이 이리 됐어."
박만길은 어깨가 처져 내리게 한숨을 쉬더니 술잔을 꺾었다.
"저의 아버지하고 똑같군요."
김선태는 잘근거리고 있던 솔잎을 뱉었다.
"자아, 잔 받어. 그래도 자네 부친은 큰아들이 소원 성취한 것을 보시지 않았나."
"그건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인걸요."
"허, 그리 됐나!"
그들 사이엔 잠시 말이 끊어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팔각정 주변에는 서울을 구경하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저어기 저 바위로만 된 것이 인왕산이고, 그 오른쪽 옆으로 솟은 게 북악산이에요. 바로 그 밑에 있는 집이 대통령이 사는 청와대고, 그 앞에 큼직한 돌 건물이 중앙청이구요."
"아이고, 대통령 사는 집이 코딱지만하네 그랴."
"서울 시내가 넓은지 알았등마 여그서 봉께 손바닥만허시. 자동차들도 개미 기가는 꼴이고." "보래, 한강이 과시 강은 강인기라. 저리 너르고 큰 기 낙동강이 할배 안 허겄나."
즐거움이 담긴 이 지방, 저 지방 사투리들이 섞이고 있었다. 시골사람들이 서울사람들보다 남산에 먼저 올라간다는 말이 있듯이 남산은 역시 서울 관광 일번지임을 입증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어......, 선배님은 말입니다......, 중간에 방향을 딴 데로 바꿀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김선태는 박만길에게 술을 따르며 또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이 왜 남산에 올라가자고 하는가 했더니 이런 고약한 것만 골라서 물어 볼라고 그랬구나. 왜, 자네 딴생각하고 있어?"
"아뇨. 하도 답답해서 여쭤보는 거지요."
김선태는 오징어를 찢어 박만길에게 내밀며 면구스러운 듯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 답답하고 암담하기도 하겠지. 이 치열하고 살벌한 세상에서 자꾸 경쟁에 실패하는 사람들의 고독한 눈물을 그 누가 알겠어. 나도 답답하고 암담하고 처절했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결혼을 일찍 해서 처자식은 딸렸지, 해마다 고시를 쳤다 하면 낙동강 오리알이지, 시쳇말로 미치고 까무러치겠다는 말 그대론 거야. 다섯 번쯤 떨어지고 나서 심각하게 생각했지. 어딘가 능력이 모자라는 것이다, 괜히 과욕 부리지 말고, 헛고생하지 말자, 인생 더 망가지기 전에 내 능력에 맞게 아는 것을 풀어 먹으며 살자, 지금까지 공부한 것만 가지고도 살아갈 길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 생각을 했었지. 그런데, 아까 잠깐 말한 대로 마누라가 펄펄 뛰는 거야. 먹고 사는 건 삯바느질로 내가 해결한다. 좋은 세상 못 보시고 저세상으로 가신 아버님의 한을 풀어얄 것 아니냐, 남자가 한번 뜻을 세웠으면 기필코 이루어야지 중도 작파가 말이 되느냐. 그래서 나는 용기백배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10년이 훨씬 넘게 쓴잔을 마시게 된 거지. 그런데 이상한 건 마누라야. 어떻게 된 물건이 글쎄 조금도 지치지 않고 판검사 사모님 꿈을 꾸고 있는 거야. 그러니 상말로 빼지도 박지도 못하는 거지. 나한테서 꿈을 이루지 못하면 자식에게로 옮겨가지 않을까 무서워. 가만히 생각하면 가엾기 그지 없는데......, 그 꿈을 버리지 못하는 건......, 아마도 그 꿈을 버리면 여지껏 뼈빠지게 고생해 온 자기인생이 너무 허망해질까 봐 그러는지도 몰라. 아참, 노을이 굉장하군. 누구 인생이든 한번쯤은 저렇게 휘황찬란할 수 있어야 하는 건데......."
박만길은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온몸이 휘감기는 듯한 긴 한숨을 쉬었다. 술기운이 불콰하게 번진 그의 얼굴은 더욱 궁색하고 쓸쓸해 보였다. 눈부신 황금빛으로 불타고 있는 노을은 일렁이며 타오르는 불길의 생빛으로 현란했다. 화가가 자살 충동을 느낄 만큼 아름답고 고운 노을은 한강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김선태는 의식이 텅 비어가는 상태로 노을에 한정 없이 빨려들고 있었다.
경제발전이란 서울 시내에 중구난방으로 솟아오르는 고층건물들로 나타났고, 키높이 경쟁을 하는 것 같은 그 건물들은 '빌딩숲'이라는 외국말과 한국말을 짜맞춰 이상야릇한 새 말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 말과 똑같은 연유로 탄생한 것이 '아파트촌'이었다. 날로 급증하는 서울 인구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가 대대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 아파트 건설이었다. 그것이 서울시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부 차원의 정책적 사업임을 보여준 것이 '한강맨션아파트' 준공식에 귀하신 각하께서 직접 납신 것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한강 인도교 양쪽 강변으로는 아파트들이 정신없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그 층수도 2층, 3층이었던 기존 아파트를 비웃으며 5층으로 높아져 있었다. 거의가 단층인 주택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에게 5층 높이의 집이란 끔찍하게 높은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다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층층이 포개져 산다는 것은 영 고약스러운 일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예로부터 머리를 중시해 어른이 누운 머리맡에는 아무것도 놓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자는 아이들의 머리 위쪽으로는 부모도 걸어 다니는 것을 피했다. 옛사람들이 갓을 애지중지 신주단지 모시듯 했던 것은 갓이 귀한 물건이라서가 아니라 그것을 머리에 쓰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 머리 위에 남들이 층층이 겹겹이 올라앉아 있으니 그게 고약스럽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 께끄름하고 걸쩍지근함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 밥을 먹고, 밤이면 그 일을 하고, 소변을 보고, 대변을 보고......, 서로서로의 머리 위에다가 그런 짓들을 해가며 몇 겹으로 포개져 살아야 하는 아파트라는 구조는 아주 비인간적으로 비쳐졌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닭장집'이었다. 오로지 알을 낳아야하는 임무로 최소한의 생존을 층층의 비좁은 공간에서 유지하고 있는 양계장의 닭들에 비유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그런 거부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입식 부엌과 수세식 변소의 편리함과 깨끗함, 난방의 따스함이 단독주택은 댈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주부들을 휘어잡음으로써 그 입지는 완전히 반전되고 말았다. 아파트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아파트들은 대형 단지를 이루기 시작했고, 그 인구 밀집촌은 '아파트촌'이라는 신종 이름을 얻게 되었다.
"옘병헐, 어떤 놈들이 저런 아파트에서 사나 그래. 서민들은 골 빠지게 일해도 12평짜리에도 못 사는데 80평짜리가 뭐야, 80평짜리가. 저런데 사는 놈들은 이래저래 다 해 처먹은 도둑놈들이야. 흥, 경제발전, 새마을운동 좋아하고 자빠졌네. 권력 있고 돈 있고 빽 있는 놈들이 다 짜고 해먹는 수작질이지. 즈네 놈들이 도둑질 안 하고서야 어떻게 저런 데 살아. 저런 놈들은 다 총 쏴 죽여야 해."
아파트촌으로 들어서자 택시운전수가 갑자기 쏟아낸 말이었다. 뒷자리에 앉아 있던 강숙자는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상체를 뗐다. 그때 홍석주가 재빨리 아내의 손을 잡으며 눈짓했다.
"왜요......."
낮은 목소리였지만 강숙자가 거부의 뜻을 분명히 드러냈고, 그 대응으로 홍석주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그 기세에 눌려 강숙자는 무르춤해졌다.
"니기미, 이렇게 죽어라고 일해 봤자 말짱 헛 거야. 있는 놈들만 더 배 터지게 만들어주는 요런 드런 놈의 세상에서 경제발전 하면 뭘 해. 어떻게든 한탕 왕창 해먹는 게 장땡인데 나한테는 언제 그런 때가 올래나. 빌어먹을 놈에 세상, 팍 뒤집어져버렸으면 좋겠다."
손님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인지, 부자 아파트촌에 사는 너희들도 똑같다고 시비를 거는 것인지 아리송한 채 운전수의 거친 말은 계속되었다.
"예, 됐어요. 저 가게 앞에 세워주세요."
홍석주가 말했고, 이번에는 강숙자가 남편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더 가야 하는데 왜 여기서 내리느냐는 눈짓 말을 하고 있었다.
"빨리 내려."
운전수에게 돈을 건네며 흥석주는 낮게 말했다. 그리고 택시 문을 열었다.
"여보, 당신은 참 이상해요. 저렇게 상스럽게 구는 인간한테 따끔하게 한마디 해 주지는 못하고 왜 그리 눈치 보고 그래요? 그럴려고 판사해요?"
강숙자는 보도로 올라서며 앙탈부리듯 말했다.
"이것 봐, 저 사람이 욕해대는 80평짜리 아파트는 이 동네 말고 다른 데는 없잖아. 저런 말을 듣고 어떻게 거기까지 타고 가겠어. 저 사람 말이 틀린 것도 아닌데."
"어머, 당신은 저 인간 말이 다 옳다고 생각해요? 당신 참 문제 있어요."
강숙자가 파르르 성질을 냈다.
"당신도 눈 똑바로 뜨고 세상을 좀 넓게 봐. 저게 저 사람 혼자 생각이 아니라 세상인심이야. 저 사람 입에서 한탕이란 말이 괜히 나왔어? 부동산 투기로 한탕, 권력과 짜고 한탕, 부정부패로 세상이 자꾸 썩어가면서 그놈의 한탕이 예사가 된 결과 아니겠어? 오죽하면 한탕주의라는 말까지 생겨났겠어. 그리고 말야, 기업들도 현장 노동자들에게 임금은 적게 주고 기업주들만 살이 찌고 있어서 불만이 자꾸 커져가고 있잖아. 이미 임금 착취에 대한 항의와 공정한 분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사회문제로 나타나기 시작했어. 신문에 다 안 나서 그렇지 크고 작은 파업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거든. 저 사람 말이 다 일리 있는 거니까 함부로 들어선 안 돼. 당신도 지식인이니까 판단은 올바로 해야 되지 않겠어?"
홍석주의 말은 마치 학생을 일깨우는 것처럼 문답식이면서 차분했다.
"그 문젠 총리가 벌써 말했잖아요. 아직은 분배의 시기가 아니라 축적의 시기다, 좀 더 참고 기다려라 하고 말예요."
"글쎄, 그게 또 문제야. 먼저, 일국의 총리가 국민을 향해서 명령을 하듯이 그런 일방적인 소리를 해도 되느냐 그거야. 총리는 사단장이 아니고 국민은 병사들이 아니거든. 그리고 기다리라니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냐 하는 불만을 자극하고 있다는 점이야. 무슨 말인고 하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1, 2차를 거쳐 3차에 들어섰고, 국민의 대다수는 근근이 살아가며 지난 12년 동안을 참아왔거든. 그런데 그동안 빈부격차는 점점 심해지고, 서민들로서는 잘살 가망이 없는데 막연히 기다리라니, 그건 제삿날 잘 먹자고 석달 열흘 굶으라는 것과 뭐가 달라. 총리란 국민에게 희망과 믿음을 줘야 하는데, 장관이 해서도 안 될 소리나 하고 있으니 문제라구. 가뜩이나 정치 상황도 나쁜데 경제 상황까지 이 지경이니, 이거 위기야."
"당신 말 알겠는데, 그렇지만 아빠 앞에서는 절대 그런 식으로 말해선 안 돼요. 알지요?"
"아니, 모릅니다. 난 바보거든요."
홍석주는 강숙자의 이마에 군밤 먹이는 시늉을 했다.
"공원들은 하루 평균 12시간씩 노동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최저생활이 해결이 안 되고 있다구요. 그런데 기업주들은 날로 치부를 해가는 이런 착취 구조는 분명 부숴야 돼요. 정부는 경제발전을 위한 자본축적이라는 미명 아래 기업들을 보호해 주고, 기업들은 그 빽을 믿고 맘 놓고 인건비 착취를 자행하고 있거든요. 이건 사람이 사는 세상이 아니에요."
강숙자는 남편의 말에 이어지는 유일표의 말을 듣고 있었다. 유일표가 재건대의 일보다는 노동자들의 문제에 급속히 쏠려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신, 아빠한테 바짝 매달리세요."
강숙자는 아파트 정문으로 들어서며 남편에게 말했다.
"글쎄......."
그때 수위실에서 나온 경비원이 강숙자를 알아보고 거수경례를 했다. 그 아파트는 한눈에 다른 아파트들과는 달랐다. 아파트 둘레에 붉은 벽돌담이 쳐진 것이 그랬고, 경찰 같은 제복을 입은 경비원이 있는 것이 그랬다. 그리고 특히 다른 아파트들은 5층인데 비해 이 아파트는 남들의 욕을 얻어먹고 싶어 하는 것처럼 10층 높이로 도드라지게 솟아 있었다. 한 동뿐인 그 아파트는 외부 색깔부터가 호사스러웠다.
"글쎄라니요?"
강숙자는 아파트 현관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으며 남편을 쳐다보았다.
"어쩌면 아버님 힘으로도 어려울지 모를 일이라서......."
홍석주는 낮은 소리로 대꾸했다.
"떠도는 소문도 그렇고, 이번 일은 좀 복잡한 것 같애."
"참,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네요. 아무리 복잡해도 그렇지, 여당 국회의원이 사위 하나 서울에 붙들어두지 못한대서야 말이 돼요?"
앞서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며 강숙자의 목소리가 카랑해졌다. 이 아파트는 엘리베이터가 최초로 가설된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게 다 정치적 이유가 작용하고 있는 거니까 당신은 잠자코 있어."
"정치적 이유? 혹시......, 저 위에서 자기네 입맛대로 주무르려는 것 아니에요?"
"당신은 눈치 빠른 것 하나는 기막히다니까. 앞으로 정치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미리 친위대를 조직할 필요를 느끼는 것 같애."
"세상에! 그럼 피 볼 사람들은 뻔하잖아요. 고향 잘못 둔 게 한이에요."
"괜찮아. 너무 속단하지 마."
홍석주는 아내의 등을 다독거렸다.
"아빠, 이번 인사이동에서 홍 서방은 어떤 일이 있어도 꼭 붙들어줘야 해요. 일이 잘못되면 제가 애들 둘이나 데리고 죽을 고생하게 되니까요."
강숙자는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않기가 바쁘게 용건의 핵심을 드러냈다.
"글쎄다......, 그게 말이야......, 내가 벌써 다 알아봤는데 말이지......."
강기수는 더 뚱뚱해진 몸으로 굼뜨게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을 늘여 빼다가는,
"이번에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으다."
못을 박듯이 뒷말을 빠르고 큰소리로 해치웠다.
"아빠아, 그럼 저는 어떡해요. 지방에서 애들 데리고 생고생 못한다니까요."
강숙자는 금방 울음 섞인 소리를 냈고,
"고생 싫으면 넌 그대로 서울 살면 될 것 아니냐. 이번 형편 홍 서방이 더 잘 알 테니까 자세한 건 홍 서방한테 듣고, 더 말 말아라."
강기수는 단호한 표정으로 내질렀다.
"여보, 아버님 말씀 들어."
홍석주는 아내를 쳐다보며 분명하게 말했다. 그건 장인에게 자신의 태도를 밝히는 것이기도 했다.
"아빠, 김선오는 대학이 좀 좋다고 그대로 붙여주는 것 아니에요?"
"넌 어째 맨날 김선오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 그 녀석은 벌써 오래 전부터 눈치가 이상한 게 이번 일에도 날 찾아오지 않았고, 이규백이는 며칠 전에 찾아왔길래 이번에는 단념하라고 일렀다. 어째, 속 시원하냐?"
강기수는 딸에게 눈총을 쏘았다.
"보세요, 김선오 그건 인간이 틀려먹었다구요. 시건방지고 잘난 체하고, 출세하려고 여자한테 양다리나 걸치는 인간이니까 이젠 아빨 배신하고 있는 거라구요. 그게 딴 선을 잡았으니까 아빨 안 찾아오는 거지 이 급한 형편에 왜 안 찾아오겠어요. 아빠는 헛농사지신 거나 알고 계세요."
강숙자는 기회는 이때라는 듯 숨도 안 쉬고 한달음에 말을 해치웠다.
"못써!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강기수는 엄하게 딸을 쏘아보며 언성을 높였다.
"말이 나왔으니 드리는 말씀인데, 그 사람 본적도 옮겼습니다."
홍석주의 말이었다.
"아니, 뭐, 뭐라고?"
강기수가 소파에 부리고 있던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말을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 그게 어, 언제야?"
"예, 한 2년 된 것 같습니다."
"그럼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괜히 고자질하는 것 같아서......."
"이 사람아, 자넨 사안의 중대성도 모르나? 고자질하고 보고하고는 다르잖아."
강기수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사람 겉 보고는 모른다더니, 겉은 남자답게 생긴 놈이 속은 이규백하고는 딴판이라니까."
그는 중얼거리며 입을 앙다물었다.
한편, 김선오는 그 문제로 아내와 함께 장인을 만나고 있었다. 그의 장인 노성칠은 제약회사와 식품회사를 경영하며 많은 돈을 모은 사람이었다. 그는 '사업도 정치다'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 지론에 어울리게 그는 사업 수완이 좋아 '마당발'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는 자기가 이루지 못한 의사의 꿈을 큰딸을 통해 이루려고 국민학교 때부터 공을 들여 끝내 성공했다는 것을 큰 자랑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 만큼 의사선생님이신 큰딸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고, 그 남편 김선오에 대해서도 친자식처럼 마음을 썼다. 딸과 함께 검사 사위가 누구에게나 내세우는 자랑거리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일본사람의 제약회사에서 일하다가 공장을 물려받았고, 전쟁의 격랑을 호기로 이용해 미군부대 약품으로 큰돈을 벌었고, 그때부터 외국 약품에 눈을 돌려 남들보다 발빠르게 움직인 덕에 제약업계의 거물이 된 거였다.
"자넨 모든 게 특급인데 그거 한 가지가 고약하단 말야. 그게 옥에 티야, 옥에 티. 쯧쯧쯧쯧......."
그래서 김선오가 생각해 낸 것이 본적을 서울로 옮긴 것이었다.
"내가 연락 취해놨으니까 내일 오전 11시쯤에 너희들 둘이 집으로 찾아가."
군살 없이 몸이 단단해 보이는 노성칠이 과일을 찍어들며 말했다.
"예, 아버님."
소파 끝에 불안스럽게 앉은 김선오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화자 넌 이거 잘 넣어가지고 가서 그 부인한테 드리고."
노성칠은 소파 옆의 전화기가 놓인 탁자 서랍에서 아주 작게 포장된 물건을 꺼내 딸에게 내밀었다.
"뭐, 다른 말할 것 없이 예의 깍듯하게 갖추고, 잘 부탁드린다는 한마디만 해."
김선오와 노화자는 함께 대답했다. 그녀의 이름 화자는 일본 천황의 연호 소화와 일본을 상징하는 '和' 자를 그대로 따온 것이었다. 다음날 김선오와 노화자는 정확하게 11시에 맞추어 서빙고의 그 집 초인종을 눌렀다. 이미 '도둑촌'이라고 세간에 소문이 나 있는 그 동네의 집들은 겉모양부터 고급주택 표가 확 나는 2층 양옥들이었다.
"예,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식모를 따라 들어간 그들을 주인여자는 현관에서 맞이했다. 검정 비로드에 구슬장식이 된 화려한 홈웨어를 입은 그 여자는 한인곤의 여동생 한정임과 함께 부동산 투기를 하러 다니던 최혜경이었다. 그녀의 몸에서는 전보다 더 부티가 흘렀고, 집도 변두리 한옥에서 시네 양옥으로 옮겨 앉아 있었다.
"자아, 귀한 손님들이니까 2층으로 올라가실까?"
최혜경은 홈웨어를 잘잘 끌며 앞장섰다. 김선오는 아내를 앞세우고 걸으며 기가 질리고 있었다. 집 안이 넓기도 했지만 그 실내장식이 어찌나 호화로운지 눈을 어지럽혔다.
"자아, 조심들 하세요."
아니, 이게 뭔가! 김선오는 소스라치며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작동하기 시작한 계단은 분명 에스컬레이터였다. 김선오는 움직이는 계단에 발을 더듬거려 놓으며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노화자는 핸드백을 열었다.
"사모님, 이거 아버지가......."
"아니 뭘 이런 걸......."
"충심을 다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선오는 장인이 하라는 말에다 한마디를 더 보태며 정말 코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
"예, 남자답고 멋진 검사님이시네요."
"저희는 이제 그만......."
노화자가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세상에, 저게 무슨 짓이에요."
그 집을 나온 노화자가 말했고, 김선오는 쩝쩝 입맛만 다셨다. 얼마가 지나 법조계의 대이동이 실시되었다. 이규백도 홍석주도 각기 낯선 지방을 찾아나서야 했다.
병원은 내과와 소아과를 겸하고 있었다. 새로 지은 건물이라서 그런지 병원 안은 말끔했고, 코끝을 스치는 크레졸 냄새가 병원다운 분위기를 살리고 있었다. 환자접수구에는 서너 사람이 서 있었다. 실내를 휘둘러본 김선태는 그 사람들 뒤에 가서 섰다. 접수를 끝낸 환자들이 제약회사표시가 된 긴 나무의자에 가서 앉고는 했다. 몇 분이 지나지 않아 김선태의 차례가 왔다.
"성함하고 생년월일은요?"
네모진 조그만 창 저쪽에서 간호원이 건조하게 물었다.
"난 환자가 아니라 원장님 좀 만나려고 왔소."
김선태의 대꾸였다.
"네에......? 누구신데요?"
간호원이 금세 경계의 빛을 드러냈다.
"나 원장님 시동생 김선태란 사람이오. 급한 일이니까 빨리 가서 전해요."
"어머, 잠깐만 기다리세요."
간호원이 놀라며 몸을 발딱 일으켰다. 김선태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는 갑자기 소변이 보고 싶었지만 동양화가 하나 걸린 벽 쪽으로 다가갔다. 변소에 간 사이에 원장이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흔한 농촌 풍경을 그린 그림에 헛눈을 팔고 있는데 생각보다 빨리 등 뒤에서 말이 들려왔다.
"원장님께서 어서 들어오시랩니다."
김선태는 간호원을 따라가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몰려드는 긴장으로 가슴이 답답했고, 역정난 형이 뒷덜미를 잡아채는 것만 같았다. 간호원이 조심스럽게 손기척을 하고 원장실 문을 열었다. 김선태는 안으로 들어서며 다시 숨을 들이켰다.
"형수님, 안녕하세요. 참 오랜만입니다."
고개를 꾸벅하는 김선태의 목소리는 턱없이 컸다.
"근무 중인 병원으로 웬일이죠? 이런 건 피해야 하는 예의도 모르나요? 재판 중인 형님을 법정으로 찾아갈 수 있어요?"
노화자는 의자에 앉은 채 쌀쌀하게 말했다. 예쁜 데는 없지만 고양이상으로 영리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는 싸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그 정도는 압니다. 근데 갑자기 고향에 내려갈 일이 생겨서 그럽니다. 차비하고 용돈 좀 주시지요."
김선태는 그 기세에 밀리지 않고 형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쓴웃음이 어린 그의 얼굴에는 불량기마저 드러나 있었다.
"그런 일은 형님한테 얘기하도록 돼 있지 않아요? 오늘 오후에 형님한테 말해서 해결하도록 하세요."
노화자는 더 싸늘하게 내쏘았다.
"그러지 말고 처음이고 마지막으로 돈 좀 주는 게 좋을걸요. 예, 맘대로 하세요. 형을 부르든 경찰을 부르든. 돈을 안 내놓으면 난 여기서 한 발짝도 안 나갈 테니까요. 예, 좋아요."
김선태는 마치 깡패처럼 불량스럽게 말하며 책상 옆의 환자용 의자에 털퍽 주저앉았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하고 생각했던 대로 착착 풀려가는 자신의 연기에 만족하고 있었다.
"어머머 세상에......."
노화자는 얼굴이 딱 굳어지도록 놀라며 의자를 뒤로 밀어 물러나 앉았다. 그리고 옆의 탁자에 놓인 핸드백을 얼른 집어 들었다.
"여기 있어요. 이게 다예요."
그녀는 돈지갑에서 한 움큼의 돈을 다 털어내 놓았다.
"고맙습니다. 형수님. 시동생한테 처음 뜯기는 거니까 너무 억울해 하지 마제요."
김선태는 돈을 몰아 잡아 가지고 유유하게 원장실을 나섰다. 그는 형수에게 호되게 당할 형을 생각하며 통쾌하기 그지없었다. 그건 자신이 당해온 것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보복의 방법이었다. 김선태는 곧장 남대문시장을 거쳐 서울역으로 나갔다.
"워야, 선태 니가 워쩔 일이다냐!"
머리에 하얗게 눈을 인 월하댁이 작은아들을 얼싸안았다.
"엄니......, 엄니......, 절 받으시씨요."
김선태의 목소리가 잠겨들고 있었다.
"꾸척시럽게 큰절은 무신 큰절이여. 냅두고 그냥 앉어, 그냥."
월하댁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개를 저어댔다.
"출세 못헌 자석이라고 절 안 받으실라고 그요?"
"음마, 염병헌다. 잘못된 자석 보는 부모 맘은 더 에리고 씨린 것이여. 요런 무정헌 놈아, 이놈아."
작은아들의 등짝을 철퍽 치는 월하댁의 눈에서는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방으로 들어간 김선태는 어머니 앞에 큰절을 했다. 그의 절은 깊고 무겁고 오래 걸렸다.
"근디, 뜬금없이 워쩐 일이다냐? 무신 숭헌 변통 생긴 것이여?"
절을 받고 난 월하댁은 새삼스럽게 작은아들을 쳐다보았다.
"아니구만이라. 하도 답답허고 혀서 엄니 보고 가서 새 맘 잡을라고 왔구만이라."
"잉, 그려. 고향바람 한바탕 휘이익 쐬는 것도 좋제. 잘 왔어."
월하댁은 작은아들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니, 요것 엄니 빨간 속옷이구만이라."
김선태는 어머니 앞에 선물상자를 내밀었다.
"뿔근 속옷? 그것이야......."
월하댁은 얼른 말을 삼켰다.
"예, 금년에는 고시에 꼭 붙겄다는 표시로 미리 사왔구만이라."
취직을 해서 첫 월급으로 어머니의 빨간 내복을 사드려야 전정이 잘 풀린다고 해서 그건 유행을 이루고 있었다.
"그려, 그려. 그리 맘 강단지게 묵으면 쇠도 녹히는 법이여. 이 에미도 더 지성으로 빌 것잉께 니도 새 맘 묵고 죽기 살기로 혀. 니도 넘덜이 부러와허는 머리 지녔응께로."
월하댁은 이렇게 아들을 격려하며, 무슨 돈으로 이런 걸 사왔느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돈이 큰아들한테서 나왔을 게 뻔한데 자칫 작은아들의 마음을 다칠 수 있었던 것이다. 새싹이 파릇파릇 돋고 있는 긴 포구에는 푸른 기운이 자욱하게 서리며 봄이 오고 있었다. 강진의 꽃 동백은 어느덧 자취를 감추었고, 검은 뻘밭 가장자리를 따라 펼쳐진 마른 갈대숲 밑으로도 초록빛이 언뜻언뜻 내비치고 있었다.
김선태는 포구의 둔덕에 앉아 저 멀리 아슴한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소주잔을 비우고 있었다. 그는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덤도 없이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만나고 있었다. 아버지는 태풍에 휩쓸려 바다로 떠내려가 시신도 찾지 못했으니 그는 그렇게 성묘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아부지, 참말로 죄송시럽구만요. 지도 성님맨키로 보기 좋게 출세혀서 아부지 아들 노릇도 톡톡허니 허고, 엄니헌테 효도도 잘헐라고 혔는디 그것이 그리 뜻대로 안 되는구만이라. 아부지, 이 못난 놈을 용서혀주시씨요....... ’
김선태는 이틀밤을 자고 집을 떠났다.
"속 썩히덜 말고 잘혀라 와. 사람은 다 한때가 있는 것잉께. 이 에미말 알겄지야? 속 썩히면 몸 상헌께로 잉."
월하댁은 굳이 읍내 차부까지 따라나와 아들을 배웅하며 몇 번이고 했던 말을 또 다짐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김선진은 집주인의 말을 듣고 파출소로 달려갔다.
"김선태가 누구지?"
"저의 작은형인데요."
"가출한 지 며칠이나 됐어?"
"닷새짼데요. 왜, 무슨 일 있습니까?"
"왜 가출신고 안 했어?"
"혹시나 혹시나 하다가......."
"이 사람아, 한강에 투신자살 했어. 빨리 시립병원으로 가봐."
"......."
"자네 주민등록증 잊지 말고 가지고 가야 해."
김선진은 시립병원으로 가서 작은형을 확인했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싸늘하게 굳어진 시체는 틀림없는 작은형이었다. 김선진은 큰형에게 알리려고 돌아섰다. 그때 관리인이 고인의 소지품이라며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에서 나온 건 주민등록증과 쪽지였다. 그는 쪽지를 펼쳤다.
"선진아. 미안해, 엄니한테 효도해라."
14. 길을 바꾼 불기둥
이상재는 술이 취해 걸으며 무슨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밤 11시가 가까운 거리에는 비틀거리는 취객들이 적지 않았다. 그가 흥얼거리는 노래는 꽤나 슬픈 가락이었는데 가사는 들리지 않았다. 이상재는 어느 양품점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숨기듯 하며 가게 안을 살폈다. 쇼윈도에 진열된 물건들 사이로 한 여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상품진열대 위에 놓인 동그란 거울을 보며 머리에 빗질을 하고 있는 여자, 머리가 긴 그 여자는 허미경이었다. 그 순간 이상재의 술 취한 얼굴에는 밝은 웃음이 환하게 피어났다. 그는 몸을 움츠리며 다시 가게 안을 살폈다. 넓지 않은 가게에는 그녀 혼자뿐이었다. 손님이 들기는 늦은 시간이기도 했다. 술이 취했으면서도 이상재는 옷 모양새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아까와는 달리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걸음으로 양품점 문을 밀었다.
"어머, 이 기자님......."
'어머' 하는 말과 함께 허미경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순간적으로 드러났다가 스러지며 슬픈 그늘이 서렸다. 나이가 조금 더 들어 보일 뿐 선이 가는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희고 가녀린 채 안온해 보였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한 떨기 꽃을 연상시켰는데, 처녀 시절의 모습이 막 벙글려는 목련 송이였다면 지금의 모습은 꽃잎 다 펼친 목련이었다.
"요새 장사는 어떠세요. 많이 피곤하지요?"
이상재는 한쪽 볼을 문지르며 어물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또 술 드셨군요. 저보다 더 피곤해 보이세요."
허미경은 슬픈 웃음을 짓는 듯하며 등받이 없는 작은 의자를 내놓았다.
"또 약속 어겨서 미안해요."
이상재는 고개를 떨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허미경은 말없이 돌아서서 유리진열장 뒤로 들어갔다. 이상재는 의자에서 전해져 오는 따스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의자에 밴 허미경의 체온이었다. 월남으로 오는 편지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그 따스함. 그때 편지에는 마음의 따스함만 담겼을 뿐이었는데, 그때 목마르게 그리워했던 것은 바로 이 체온의 따스함까지 다 갖는 것이었다. 빨리 귀국해서 그것마저 가지리라 했었는데....... 이상재는 지금이라도 그 따스함을 갖고 싶은 충동에 또 사로잡히고 있었다.
"문 닫을 시간 다 됐는데요."
허미경이 얼굴만큼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 상품인지 실용품인지 구분이 안 되는 예쁜 벽시계는 11시 5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예, 문 닫읍시다."
이상재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까와는 전혀 달리 활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상재는 좁은 옆 골목에서 양철 붙인 문짝들을 거뜬거뜬하게 들고 와 쇼윈도를 가려나갔다. 그런 그의 몸놀림이며 손놀림은 그 일을 아주 많이 해본 것처럼 익숙하고 숙달되어 보였다. 허미경도 만류하거나 미안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 일을 옆에서 돕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 그들은 영락없는 부부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동안 실랑이를 한두 번 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허미경이 지고 말아 이상재는 술 취해 양품점을 찾아올 때마다 그 일을 기운차게 해내고는 했다. 양철 문짝들 중간쯤에 이상재가 쇠줄을 걸고, 그 양쪽 고리에 허미경이 자물쇠를 채우는 것으로 그 일은 끝났다. 그들은 정해진 순서처럼 가까운 다방으로 들어갔다.
"이 기자님, 어쩔려고 그러세요. 이렇게 길어지면 결국 아는 사람들 눈에 띄게 되잖아요.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게 괜한 말이겠어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난 허미경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예, 알아요. 알긴 다 아는데 내 맘을 나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이상재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괜히 말썽 나고 시끄러워지면 이 기자님 체면 다치게 되잖아요. 다시 약속하세요. 더 오시면 안 돼요."
허미경은 슬픈 그늘이 더 짙어진 얼굴로 눈길 떨군 이상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자위에 물기가 번지고 있었다.
‘그런 소리하지 마. 난 너를 사랑해. 그 영감탱이하고 사이가 끝났을 때 바로 연락했더라면 우린 결혼했을 거야. 이 멍청아, 순결이고 처녀고가 다 뭐 말라빠진 거야. 네가 날 배신한 게 아니라 강제로 당한 거잖아. 그 영감탱이가 애까지 데려가 버렸으니까 모든 문제는 깨끗이 해결된 것이었다구. 서로가 사랑하면 됐지, 내가 문제 삼지 않는데 왜 네가 문제를 만들어, 이 멍청아, 이 멍청아....... ’
이상재는 그동안 골백번 외쳐온 소리를 또 외치고 있었다. 그 속 타는 말을 밖으로 토해내지 못하는 건 자신은 이미 애까지 있는 몸이었고, 입 밖에 내보았자 한낱 부질없는 소리일 뿐이었다.
"빨리 약속하세요. 갈 시간 다 됐어요."
"그럽시다. 약속하지요."
이상재는 눈길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수없이 해온 약속이었다.
‘아니야, 난 그런 약속 지키기 싫어. 이런 식으로라도 평생을 살고 싶어. 넌 내가 이 세상에서 최초로 사랑했던 여잔데......, 네가 어디로 시집을 가면 몰라도 이렇게 혼자 살고 있으면 나도 그따위 약속 안 지켜.’
이상재는 허미경의 아리따움에 빨려들며 와락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일어나세요. 11시 반 넘었어요."
큰길로 나오자 이상재는 차도로 뛰어들다시피 하며 달리는 택시들을 향해 '마포'를 외치기 시작했다.
"위험해요. 먼저 그냥 가세요."
허미경은 이상재를 붙들 듯 말 듯하며 거리의 소란을 이기려고 목청을 높였다.
"내 걱정은 말아요. 내가 명색이 기자라니까요."
기자증이 있으니 통행금지에 안 걸린다는 이상재의 대꾸였다.
"마포, 마포! 마포 둘!"
허미경은 더 만류하지 못하고 이상재를 또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술을 마시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처럼 함께 택시 합승을 하고 집 앞까지 바래다주는 것도 저 남자의 오래된 고집이었다. 아니, 고집이라고 하면 그를 모독하는 것이었고, 그건 그의 식을 줄 모르는 사랑이었고, 눈물겨운 애정의 표현이었다. 자신도 지금까지 그의 편지를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은 추억을 간직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현실인 까닭이었다. 그에게 만날 때마다 더 찾아오지 말라고 하는 것은 겉마음일 뿐이었고 속마음은 날마다 보고 싶고, 어떤 때는 그와 어디로 영영 도망가고 싶기도 했다.
"미경 씨 빨리 타요, 빨리."
그들은 이미 두 사람이 타고 있는 택시에 올랐다. 택시 합승이란 승객 좋고 운전수 좋은 불법행위였다. 세상이란 필요한 것은 어떻게든 만들어내고 생겨난다는 말이 있듯이 택시 합승도 인구가 폭증하는 서울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제도 아닌 제도였다. 먼저 탄 두 사람은 술 냄새를 풍기며 잠들어 있었다.
"오빠는 이번에 승진했다면서요?"
이상재는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다 덮어두고 그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네......."
"진이는 잘될 겁니다. 실력, 열성, 독기 삼위일체니까요. 할머니 병환은 좀 어떠세요?"
"그저 그러세요."
"워낙 노환이라서......."
이상재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언제나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고 안타까웠다. 그러나 그녀와의 간격을 더 좁힐 수 없는 한 그건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저 그녀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어떤 때는 그 간격을 훌쩍 건너뛰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했다.
"너무 늦었어요 어서 가세요."
"예, 편히 쉬세요."
언제나처럼 서먹하게 헤어지며 이상재는 왜 아내가 둘이어서는 안 되는지 탄식했다.
"여보, 빨리 일어나요. 또 늦었어요. 아이구, 술을 마시지 말든지, 술을 마셨으면 통금이나 넘기지 말든지, 벌써 세 번째 깨우는 거예요. 아유, 지긋지긋해."
이상재의 아내는 사정없이 이불을 걷어치우며 역정을 냈다.
"아이고 알았어, 이 망할 놈에 악처야."
이상재는 잠 덜 깬 소리를 하며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깨우는 소리를 들어가며 깬 듯 만 듯 아른아른 취하는 아침 꿀잠의 맛이 요에서 등을 떼기 어렵게 끈끈했다. 더구나 허미경의 꿈을 꾸고 있었으니 그 아쉬움은 더했다. 인적이라고는 없는 어느 깊은 산골짜기 물 맑은 계곡에서 둘이는 목욕을 하고 있었다.
"또 아침 안 먹어요? 그럼 국물이라도 좀 마시고 나가요."
"됐어, 됐어. 너무 늦었어."
이상재는 허둥지둥 집을 나섰다. 꼭 늦어서만은 아니었다. 엉뚱한 꿈 때문에 아내 대하기가 민망하기도 했다.
"이 기자도 이제 슬슬 고참 냄새 풍기는 건가? 허긴 직장 밥 치고 신문사 밥이 사람 버리기 딱 좋긴 하니까."
출근이 너무 늦은 이상재가 우물쭈물 자리에 앉는데 비비꼬인 부장의 말이 그의 덜미를 잡았다.
"예, 좀 과음을 해서......."
"그런 변명으로 되나? 상습범에 합당한 벌을 받으셔야지 빨리 국장님한테 가봐. 아까부터 찾으시니까."
"걱정 마 취재 출장이니까."
옆자리의 기자가 싱긋 웃으며 속삭였다.
"응 이 기자, 빨리 지방 출장 떠날 준비해야 되겠는데. 자네, 포항종합제철 준공된 거 알지? 그걸 특집으로 꾸밀 거니까 3회 정도 연재가 되도록 심층취재를 해야 돼. 특히 박태준 사장을 중심으로 해서 말야."
언제나 그렇듯 편집국장은 신문을 부산스럽게 넘기며 군대식이나 다를 것 없이 말 빠르게 지시했다.
"포철......,박태준 사장을 중심으로......, 3회 정도요.......?"
이상재는 핵심 부분을 짚으며 떨떠름하게 되씹었다. 숙취로 몸이 찌뿌드드한 판에 그런 갑작스러운 지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지난날 성남 폭동사건을 집중취재 했다가 묵살당해 버렸던 쓰디쓴 기억이 되살아났다.
"왜? 기자 감각으로 뭔가 딱 잡히는 게 없어? 포항종합제철 준공이 갖는 국가적 의미가 뭐지? 그 준공이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더 많았는데 가능해진 이유가 뭐지? 그 일을 도맡아 이끌어온 박태준이란 인물은 누구지? 그가 구상하고 있는 철강의 자급자족 생산이란 과연 실현될 수 있나? 그때 이 나라의 산업구조와 경제실태는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 뭐 이런 것들이 머리에 잡혀야 되지 않겠어?"
편집국장은 신문 넘기는 것을 멈추고 이상재를 똑바로 주시하며 말해나갔다. 그게 취재 핵심을 짚어주는 것이라서 이상재는 바짝 긴장하며 볼펜과 수첩을 꺼냈다.
"자네 말이야, 포항종합제철 준공이 우리나라의 수공업적 산업구조를 중화학공업 구조로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럼 됐어. 그 한 가지 사실만 확실하게 염두에 두고 취재를 풀어나가 봐. 그럼 특집으로 도 무게 있고 의미 있게 될 거고. 대중들의 흥미로운 읽을거리로도 성공하게 될 거야."
"예, 알겠습니다."
이상재는 어느새 자신이 이 일에 뽑힌 것을 다행스러워하며, 사전 정보를 어떻게 확보해야 할까를 재빨리 생각하는 직업의식이 발동하고 있었다.
"오늘 오후에 출발하고, 그동안에 취재에 필요한 예비사항들은 요령껏 준비하라구."
"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응, 수고해 박태준 사장이란 사람 아주 대단하다는 소문이야. 수학적인 머리가 뛰어나고, 논리적이며, 원리원칙주의자라는 거야. 해방 전에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거든. 보통 군 출신들하고는 다르니까 알아서 접근해."
편집국장이 다시 일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상재는 자기 자리로 돌아오며 편집국장의 말을 되짚었다. 그러나 그의 말 중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원리원칙주의자'라는 것뿐이었다. 그건 최주한네 회사가 부실공사를 하다가 발각되어 폭파시키는 일을 당했기 때문에 실감나게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 여파로 최주한네 회사는 결국 망했고, 그는 서너 달 실업자 노릇을 했다. 최주한은 애꿎게도 박태준의 완벽주의의 유탄을 맞은 희생자인 셈이었다.
"그 사람이 고수하는 원리원칙이 어느 정도냐 하면 말야, 군대의 차는 사적으로 쓸 수 없다는 규칙을 지키느라고 큰딸을 잃어버린 사람이야. 무슨 말인가 하면, 전방 지휘관을 할 때 갑자기 큰딸이 아팠는데, 지휘관 찝차를 사적으로 써서는 안 된다고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어. 애는 밤새도록 앓고, 다음날에야 버스를 타고 몇십 리 밖 병원을 찾아간 거야. 그런데 급성폐렴이라서 애는 결국 죽고 말았지. 그 얘기를 듣고 우리 사장은 폭파를 막으려고 빽을 쓰고 있던 것을 포기하고 말았어. 그러니까 그 사람 앞에서는 눈가림, 속임수, 거짓말 적당적당이 절대 통하지 않는데, 그런 완벽주의를 실천하려다 보니까 직접 현장감독을 하느라고 서울의 집에 1년에 두세 번 올라오면 많이 올라오는 거라는 거야. 그러기를 벌써 4년 했고, 앞으로도 몇 년을 더 그럴지 모른대. 그런 게 다 그 사람이 가진 남다른 애국심 때문이라는데 하여튼 특이하고 대단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닌가 싶어."
최주한은 직장을 잃게 된 것에 대해 박태준을 원망하기는커녕 이렇듯 호감을 표시했었다.
"부장님, 혹시 포철 박 사장에 대해서 아는 것 좀 있으세요?"
이상재는 편집국장한테 다녀온 것을 알릴 겸해서 물었다.
"벌써 취재 시작이신가?"
부장이 손질하고 있던 기사를 치우며 씩 웃고는,
"내가 아는 건 그저 그렇고, 본격적으로 도움을 받으려면 저기 정치부장을 찾아가 봐. 권 부장이 옛날 최고회의 때부터 접촉했으니까 제일 많이 알 거야"
하며 턱짓했다.
"최고회의요?"
"국가재건최고회의 몰라? 5.16혁명 말야. 그때 박태준 씨가 박정희 의장의 비서실장이었거든."
"아 예, 알겠습니다."
이상재는 급히 돌아서며 또 한 가지 사실을 머리에 새겼다. 그런데 반사적으로 의문이 일어났다.
‘비서실장이었으면 핵심 중에 핵심이었는데 왜 그 흔한 권좌를 차지하지 않았지? 무슨 일로 밉보인 건가?’
"이 기자가 포항을 간다? 고향이 그쪽인 게 고려된 건가? 하여튼 좋아. 내가 박 사장에 대해선 좀 알긴 아는데, 지금은 바쁘고, 그거 맨입으론 안 되겠는데."
정치부장은 연신 원고지를 넘기며 장난기 서린 웃음을 피웠다.
"예 점심 사겠습니다. 불고기로."
"그거 좋지. 12시 정각!"
이상재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내달았다. 한 시간 남짓 남은 시간 동안에 출장 채비를 해가지고 와야 했다.
"며칠 걸려요?"
세면도구와 양말 같은 것들을 가방에 넣으며 그의 아내가 물었다.
"오후에 출발이니까 오늘 일하긴 틀렸고......, 내일하고......, 모레 오전까지 잡으면......, 2박 3일로 끝내야지."
"맘 놓고 술독에 빠지게 돼서 신나겠네요. 당신, 딴 짓하면 안 돼요."
그의 아내는 가방을 내밀며 뒷말의 어조가 달라졌다. 그 눈도 이상재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딴 짓?"
이상재는 그 말을 하는 순간 아내가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사람 이거 왜 이래. 나 혼자가 아니라 사진기자하고 동행인 것 몰라?
"피이, 남자들을 어떻게 믿어요. 동서지간에도 함께 바람피우는 게 남자라는데."
그의 아내는 입을 삐죽하며 눈을 흘겼다.
"허, 이 사람 못하는 소리가 없네. 징그러워지는 것 싫으니까 제발 그런 소리 말어."
이상재는 아내를 살짝 안았다 놓고는 시계를 보며 집을 나섰다. 그의 뇌리에는 허미경이 떠올랐다. 이런 기회에 허미경을 강제로 끌고 내려가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그 터무니없는 생각은 아내의 말 때문에 촉발된 것이었다.
"자네가 무슨 돈이 있어, 뻔한 월급쟁이 주제에 설렁탕에 쐬주 한잔이면 우리한텐 귀족 음식이지."
정치부장은 이상재가 사겠다는 불고기를 마다했다.
"출장비 두둑이 받았는걸요. 이런 때 목에 낀 때 좀 벗겨야죠."
"아니 그 돈 아껴서 박 사장한테 불고기 대접해."
"예? 박 사장이라니......."
"포철 간다면서? 거기 사장이 누군지 몰라?"
이상재는 놀란 눈으로 권 부장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 그 정돕니까?"
"응, 이 기자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닌데, 그 사람은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사람이야. 양심도 능력도 가치관도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해. 자아, 술부터 한잔하면서 얘기하자구."
이상재는 부장과 소주잔을 부딪치며 묘한 긴장과 흥미를 동시에 느꼈다. 기자라는 직업은 어쩔 수 없이 비판을 생리화시키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평기자도 아니고 부장에게, 그것도 사람 비판에 능한 정치부장에게 전폭적인 인정을 받고 있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촉수가 곤두서고 있었다.
"자아 자네한테 한 가지 물어볼까? 박 통(박정희 대통령의 줄임말)이 최고회의 의장으로 앉아 민정이양을 몇 번씩 반복하다가 결국 '혁명공약'을 어기고 대통령이 됐고, 또 헌법까지 날치기로 통과시켜 3선 개헌을 했을 때, 그때마다 최측근으로서 반대의사를 굽히지 않은 게 누군지 아나?"
"그 사람이 박태준이란 말입니까?"
답이 빤한 유도형 물음인데도 이상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머리가 복잡하게 몇 가지 생각이 동시에 뒤엉켰다. 그건 사안의 성격으로 보나 그 조직의 특성으로 보나 반대가 용납될 리 없는 일이었다.
"응, 그 사람은 국민과의 약속인 '혁명공약'을 어겨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고, 더구나 국가의 기본권인 헌법을 마음대로 뜯어고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대했던 거지."
"그래서 미움을 사 정치와 권력에서 멀어진 겁니까?"
"아니야, 그렇게 빨리 가지 말어. 오히려 그 반대야. 박 통이 정식으로 청와대 주인이 되자 그 측근들은 다투어 권좌를 차지하기에 정신이 없었는데, 그 사람은 미국 워싱턴 대학으로 유학 갈 준비를 하고 있었어. 하도 이상해서 내가 굳이 찾아가 물어봤지. 지금 자네가 물은 것처럼, 미운털 박혀서 바다 건너 유배 가는 거냐고, 그랬더니 말없이 웃다가 하는 말이, 자기 혼자서라도 군대로 복귀하고 싶은데 그동안 정치판에서 순수한 군인정신을 너무 더럽혔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는 거야. 그래서 생각다 못해 새 길을 찾아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는 거였어. 그때 박 통은 공천 자리 하나를 비워놓고 그에게 고향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라고 종용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3선 개헌을 반대하고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나요? 김 모는 처음에 반대의사를 드러냈다가 중정에 끌려가서 반 죽게 당하고 나서 찬성에 앞장섰다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소문인데......."
"그게 박 통의 사람을 보는 눈이지. 박태준이 끝까지 반대하며 찬성서명을 하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은 박 통의 한마디가 박태준이 어떤 사람인지 잘 말해 주고 있어. 내버려둬, 그 사람 원래 그런 사람이야, 했다는 거야. 박 통이 볼 때 박태준의 반대는 원리원칙에 입각한 순수성이랄까 진정성이 있는 반면에 김 모의 반대에는 정치적 야망이 들어 있다는 것을 간파한 거지. 하늘에 태양은 하나뿐이라는 말이 있잖아. 3선 개헌을 작심한 박 통 앞에서 그 누가 감히 불순한 반기를 들 수 있겠어."
권 부장은 이상재가 따르는 술을 잘도 받아 마시며 술술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예, 손에 쥐어준 국회의원을 마다한 박태준 씨니까 그 순수성이나 비정치성은 이해가 되는데요, 그 삶의 방식이나 태도가 별로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는 두 사람이 어떻게 조화랄까 관계가 유지되는 거지요?"
"음......, 그거 의문이 생길 만한 거로군. 그걸 한마디로 하자면 박 통이 쓸 만한 사람 하나 잘 만난 셈이지. 두 사람은 단순히 군대의 상관과 부하 관계 이전에 육사에서 스승과 제자로서의 인연부터 맺은 사이야. 우리나라의 그 특수한 사제지간의 정이라는 것 있잖아? 그걸 바탕으로 두 사람 사이는 깊어졌는데, 박 통이 그 사람을 얼마나 믿었는지 알아? 박태준을 쿠데타에 직접 가담시키지 않고 빼두었는데, 왜 그랬냐 하면, 쿠데타가 실패하는 경우 박 통 자신의 가족을 맡기기 위해서였다는 거야. 그건 박 통이 직접 한 말인데, 어찌 보면 박태준의 영광 같지만 실은 박 통의 행복인 거야.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을 갖는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야? 내가 겪어본 바로는 박태준은 그렇게 믿어도 좋은 사람이야."
"그럼 그런 믿음으로 대한중석 사장도 시키고 포철 사장도 시킨 건가요?"
"그렇지. 아주 제대로 짚는군. 그런데 그 전에 맡은 또 하나 중책이 있었어. 한일회담을 효과적으로 진척시키기 위해 대통령 밀사로 일본에 특파되어 활동한 거지. 일본에서 대학을 다녀서 스승, 선배, 동창 등 지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야. 그런데, 그때 남긴 에피소드가 또 희한한 게 있어. 일본에서는 우리 정부 쪽 인사들이 가면 으레 여자 대접을 했던 모양인데, 그 사람은 호텔 방으로 찾아든 여자를 단 한 번도 받아들이지 않은 유일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어."
"그때 아주 젊은 나이 아니었던가요?"
"그럼, 젊다 마다 서른일곱, 여덟, 그런 나이였지. 자넨 그럴 자신 있어?"
"저는 아직 그 나이가 안 됐으니 잘 모르겠구요, 부장님이 해당되는 데, 자신 있으세요?"
"하하하하......, 내가 걸려들었네. 두말하면 잔소리로 나야 대환영이었겠지. 술 다 끝났지? 이젠 밥 먹자구."
권 부장을 따라 이상재도 설렁탕에 깍두기 국물을 떠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까 말한 대한중석 얘긴데, 그 대한중석이라는 게 이승만 정권, 장면정권에서 내리 부정사건으로 정치적 말썽이 일어났잖았어? 그게 왜 그랬냐 하면 중석이 황금알 낳는 거위로 정치자금의 홈통이었던 거야. 중석이 바로 텅스텐인데, 그게 전구의 필라멘트로 쓰인다고 우린 교과서에서 배웠잖아? 근데 그게 그보다 훨씬 중요하게, 우주 로켓에서 없어서는 안 될 재료라는 거야. 그래서 미국으로 전량 수출되는 달러박스였어. 그 돈을 손쉽게 정치자금으로 이용해 먹으니 주인 없는 그 회사 꼴이 어찌 됐겠어? 층층이 해먹느라고 정신없어 회사는 썩고 썩어 만년 적자에 빠져 있었지. 박태준은 그런 회사를 맡아 1년 만에 흑자 회사로 돌려놓았어. 그 비결이 뭔지 알아? 사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채굴 현장으로 가서 1천 미터 이하의 갱 속으로 직접 들어간 거야. 전임 사장들이야 갱은 고사하고 현장에도 와보지 않았는데. 우스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어. 박태준이 포철로 옮기고 신임 사장이 현장 시찰을 나왔지. 현장소장은 박 사장 때 했던 것처럼 신임 사장을 갱으로 들어가는 승강기에 태웠지. 그랬더니 어떻게 됐겠어? 신임 사장이 노발대발, 난리가 난거야. 현장소장은 정반대의 상황 속에서 두 번 진땀을 뺀 거지. 박태준은 그런 사람이야."
"그럼 포철 준공을 기적이라고 하는 건 박태준을 모르고 하는 소리로군요?"
"그래, 그렇게 볼 수 있지. 박태준이 아니었으면 그 대역사가 이룩되지 않았을 것은 틀림없어. 포철에 관한 구체적인 것은 나도 잘 모르니까 현장에 가서 취재하도록 하고,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직접 철강을 생산한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경제 형태와 산업의 길을 완전히 바꾸는 획기적 사건이야."
"부장님 말씀 듣고 나니 영 겁나는데요. 그렇게 철저하고 완벽한 사람을 대해 본 적이 없거든요."
이상재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야, 걱정할 것 없어. 사람 대하는 데 아주 부드럽고 예의바른 분이야. 그 사람을 처음 보면 세 번 놀란다는 말이 있어. 가서 잘해 봐."
권 부장도 턱밑의 땀을 훔치며 숟가락을 놓았다. 7월의 더위에 설렁탕은 땀 내기 좋은 식사였다.
"그게 뭔데요?"
"그걸 다 말해 버리면 싱거워지잖아. 이 기자가 가서 느껴봐. 그런 사람이, 열은 너무 욕심이고 다섯만 있었어도 박 통이 부정부패로 야당 공세에 몰리지 않았을 텐데. 나라꼴도 훨씬 더 나아지고 말야."
권 부장은 중얼거리듯 말하고는,
"자아, 그만 가자구"
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거 봐, 부장을 뭘로 알고 이러는 거야. 그 돈 가지고 가서 쐬주나 한잔해."
권 부장은 정색을 하고 이상재를 밀쳐내며 자기가 밥값을 치렀다. 이상재는 그런 부장을 지켜보며, 저것이 선배 노릇인 것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저희 00고속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버스는 목적지 포항까지 약 3시간30분이 소요될 예정입니다.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운행 중 안전을 위하여 한 분도 빠짐없이 안전벨트를 착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여기 식수가 준비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여행 중 혹시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저를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도 저희 00고속을 많이 애용해 주시고, 저희 00고속은 여러분의 안전하고 편리한 여행을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아무쪼록 승객 여러분들의 즐겁고 편안한 여행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상재는 눈을 차르르 내려감은 채 여차장의 안내 말을 귀담아듣고 있었다. 이따금 들을 때마다 그 안내 말은 신선하면서도 정다웠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 내용은 회사마다 비슷비슷 하게 미리 준비된 것이고, 여차장들에게 거듭 연습시킨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상투적인 냄새가 나지 않고 싫증이 나지 않는 것은 그 내용이 무척 겸손하고 친절하며, 여차장들의 목소리가 아나운서들처럼 지나치게 매끈하거나 세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또, 고속버스의 운행이 얼마 되지 않은 탓도 있을 거였다. 그전에는 기차에서 안내 말을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말은 얼마나 무뚝뚝하고도 불친절했던가. 거만하기까지 했던 철도원들의 태도는 독점사업체의 전형이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고속버스회사들이 보이는 겸손과 친절은 승객들을 흐뭇하게 해주었고, 더구나 기차보다 훨씬 빨리 달리는 시간 단축은 승객들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승객들이 당연히 고속버스로 몰리는 바야흐로 '고속도로의 시대'가 본격화하고 있었다.
"선배님, 담배 태우세요."
옆에 앉은 사진기자의 말에 이상재는 앉음새를 고치며 눈을 떴다.
"고속버스는 탈 때마다 기분이 상쾌해요. 길이 쭉쭉 뻗어나간 것도 기분 좋지만 고속버스가 정말 시속 100킬로로 달리는 건 참 근사하거든요. 첨에 100킬로로 달린다는 말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안 믿었잖아요."
사진기자가 담배연기를 날리며 정말 시속 100킬로미터의 속도감이 즐거운 듯 말했다.
"참, 포항까지 세 시간 반밖에 안 걸린다니 세상 많이 변했소. 근데, 고속버스들이 전부 외제 수입품이란 게 문제요."
"글쎄 말입니다. 값이 엄청나게 비싸다데요. 우리나라는 언제나 차를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아직 한참 기다려야 할 거요. 이제 철강이 대량으로 생산될 단계에 접어들고 있으니까."
"지금 가는 포철에서 말입니까?"
이상재는 담배를 빨며 고개를 끄덕였다.
"쇠 만드는 회사에 이렇게 특별취재를 가야 할 만큼 중요한 건가요?"
사진기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말이오......, 나도 자세하게는 따져보지 못했는데......, 대충 생각해 본 것만으로도 중요하긴 중요해요. 우리가 별 관심을 두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생활 속에서 쇠가 쓰이는 곳이나 쇠가 쓰이는 물건들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소. 우선 어느 집에나 다 있는 스텐 숟가락이나 그릇들, 텔레비전이나 냉장고, 선풍기 같은 가전제품 전부, 모든 공장에서 돌아가는 크고 작은 온갖 기계들, 큰 건물이나 아파트 같은 것들을 지을 때 뼈대가 되는 철근들, 교량이나 도로를 건설할 때 없어서는 안 되고, 벌써 몇 년 있으면 '마이카 시대'가 온다고 야단인데 자동차는 쇳덩어리와 다름없고......, 그걸 다 세자면 끝도 없는데, 지금까지 우리는 그렇게 필요한 철강을 거의 수입해서 쓰지 않았소? 그런데 우리가 직접 만들어 싼값으로 쓰면 비싼 수입품에 비해 그 차액만도 얼마나 이익이겠소. 그건 기본적인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철강 생산을 계기로 우리나라 중공업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면서 그야말로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오. 다시 말하면 값싼 노동력으로 보세가공이나 해먹던 신세에서 벗어나 값비싼 공산품을 수출하는 나라가 된다 그거요. 더 자세히는 모르겠으니까 이쯤 해둡시다."
"예에, 그 말 듣고 보니 내가 갖고 있는 카메라들도 거의가 쇳덩어리로군요. 그러고 보면 볼펜이고 만년필이고 이 라이타까지 쇠가 안 들어가는 데가 별로 없어요. 참, 오늘 무식 면하네요."
사진기자는 새삼스럽게 손에 쥔 라이터를 들여다보았다.
"전에 박태준 씨 찍어본 적 있소?"
"아아니요. 초짜 때 그런 거물 찍을 기회가 오나요. 몇 년 기고 나니 인제 겨우 얻어걸린 거지요. 선배님도 처음이죠?"
"서로 같은 형편이니까 어디 이번에 잘해 봅시다."
그들은 손을 마주잡았다.
고속버스는 안락하면서 묵직한 승차감을 주며 줄기차게 질주해 대고 있었다. 고속도로는 들판을 무지르고 야산들을 동강 내며 넓고 곧게 뻗어나가고 있었다. 왕복 4차선 도로에는 고속버스와 트럭들이 여유롭게 간격을 띄우며 거침없이 달리고 있을 뿐 몸집 작은 승용차들은 드문드문했다
"아저씨, 포철 좀 가주세요."
사진기자가 먼저 택시에 오르며 눈치껏 자기가 할 일을 찾고 있었다.
"포철예? 글하입시더."
택시운전수는 익히 잘 아는 길이라는 반응을 보이며 차를 출발시켰다.
"포철 덕에 포항이 좀 좋아졌습니까?"
이상재가 불쑥 말을 꺼냈다. 취재 시작인 셈이었다.
"쪼매 살기 좋아졌지만도 그거로 어디 배가 차겄는기요. 앞으로 쇳물이 확확 쏟아져야 돈이 굴러들 판인께네 좀 더 기다려야 되겄지요."
운전수는 지체 없이 대꾸했다.
"포항시민들은 포철 들어선 걸 좋아하나요?"
"두말하믄 잔소리지러. 우리보다 먼저 개발된 울산, 마산을 얼매나 부러바했다꼬요. 두고 보이소. 앞으로 멫 년 안 가 울산사람들이 우리를 올려다볼낀께네."
"그럼 박태준 사장도 좋아하겠군요?"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요. 다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는기라요. 그 양반 참 세상에 둘도 없이 기맥힌 분임니더. 그 양반 아니였으믄 포철 못 세웠을 끼라요. 사장이 직접 작업복 입고 멫 년이고 모래바람 뒤집어쓰면서 현장에서 묵고 자고 허는 일이 이 세상에 어데 있는교. 이 포항사람들은, 얼라들까지도 그 양반 고생한 것 다 안다 아닙니꺼. 그 양반은 인물 중에 인물이고 애국자 중에 애국자라요."
"아주 열렬한 지지자로군요."
"보소, 댁은 누군교?"
"신문기자예요."
사진기자가 대꾸했다.
"하이구야 신문기자! 어째 요상타 했드마는. 내가 말 실수 안 했는가 모리겄네. 어쨌든 잘 써주이소. 저게 저 앞에 보이는 기 포철임니더."
포철 정문에서 택시를 내린 이상재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하늘을 찌를 듯이 드높이 솟은 하나의 철탑이었다. 복잡한 시설로 얽혀 있는 그 철 구조물은 사진으로 보아온 로켓 발사대를 연상시켰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솟아 있는 그 철탑은 이 공장이 보통 공장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해 주는 듯했다.
"아저씨, 저기 저게 뭐지요?"
사진기자가 수위에게 물었다.
"저게 바로 고로지요, 고로. 저 용광로에서 쇠가 만들어지지요. 저게 돈 덩어리고 보물단지라구요. 신문사에서 오셨으면 저 위에 올라가서 구경하게 되겠지요. 저걸 만드느라고 애들 많이 먹었어요."
수위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신분증을 살피다 말고 친절하게 응답했다. 그의 어조며 얼굴에는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역연했다. 자신의 짐작이 맞는 것을 확인하며 이상재는그 거대한 철탑을 다시 바라보았다. 하늘에 솟은 용광로......, 저기서 강철이 만들어진다....... 이런 생각과 함께 처음 보았을 때의 생소함이 가시며 난생처음 제철공장에 왔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인류의 근대사는 강철과 함께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더 강철을 잘 지배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국가적 발전과 성쇠가 좌우되었다."
어느 책에선가 읽은 것이었다. 국가적 발전과 성쇠가 좌우되었다는 것은 각종 기계와 무기를 말하는 것이었다. 근대적 대량 생산을 하는 기계치고 쇠 아닌 것이 없었고, 전쟁에 동원되는 무기치고 쇠 아닌 것도 없었다. 한국은 뒤늦게나마 그런 쇠를 대량으로 만들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포항종합제철 준공을 기념하기 위해 서울 한복판인 광화문 네거리에 대형 아치를 설치할 만도 하다고 이상재는 되짚고 있었다.
"홍보실에서 나온다니까 잠깐만 기다리세요."
수위가 신분증을 내주며 말했다.
"저게 도대체 몇 미터나 될까요?"
사진기자가 담배를 빼물며 이상재를 쳐다보았다.
"예, 105미텁니다."
수위가 대뜸 대답했다.
"하, 105미터! 아저씬 그저 척척인 게 아주 전문가시네요."
사진기자가 수위를 보며 정답게 웃었다.
"웬걸요. 서당개 3년이라고 그저 들은 풍월인걸요. 전문가들이야 다 저 안에서 눈코 뜰 새 없이 일하고 있지요. 저 고로의 불은 1년 365일 꺼져서는 안 되니까요."
수위는 내친김에 한 번 더 유식을 자랑하고 싶은 듯 말했다.
"정말 서당개 3년인데요."
사진기자가 이상재에게 속삭였다.
"그러게 말이오. 회사에서 기본교육을 시키는지 어쩐지......."
이상재는 그 사실을 인상적으로 마음에 담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저 안쪽에서 검정 지프가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저기 저 찝차 나옵니다."
어서 탈 준비하라는 듯 수위가 목청을 높였다. 이상재는 지프에서 내린 사람에게 명함을 내밀며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예, 차에 타시지요. 여기서는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서 특히 외부인은 걸어 다니시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거리가 너무 멀기도 하고요."
젊은 직원은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 지프가 아스팔트길을 달리기 시작하자 이상재의 긴장된 눈길은 밖으로 쏠렸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그곳은 공장이라기보다는 넓고 넓은 벌판이었고, 아직도 건설 공사가 계속되고 있는 현장 같은 인상이었다. 아스팔트는 최소한 작업에 필요한 만큼만 깐 듯 큼직큼직한 규모의 공장 건물들 옆에는 그대로 흙이나 모래밭이 드러나 있었다. 그러니 공장이 없는 넓은 땅들은 더 말할 것 없이 버려진 황무지 같았다.
"아직 공사가 덜 끝난 겁니까?"
이상재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아닙니다. 제1고로는 완성됐고, 제4고로까지 공사가 계속 추진되고 있습니다."
"아, 예. 그래서 저 빈터들이 저렇게 많이 남아 있는 모양이군요?"
"예, 그렇습니다. 4기까지 완성되려면 앞으로 몇 년이 더 걸릴지 모릅니다."
"그럼 준공식이란 게......, 너무 빠른 것 아닙니까?"
......잘못된 것 아닙니까? 하고 나오려는 말을 얼른 바꾸었다. 이상재는 이미 취재를 시작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그건 좀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제1고로가 완성된 제1기 공사까지가 가장 중요하고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1기 공사를 완결하는 단계에서 이미 제4 고로까지 세울 수 있는 부지 공사를 완료했고, 제철에 필요한 각종 공장을 21개 완성했으며, 그에 따른 기반시설을 다 갖추었습니다. 그래서 연산 103만 톤 생산 능력의 종합제철소를 처음 계획대로 완성시킨 겁니다. 여기에 투입된 돈이 1억 7천 8백만 달러고, 그 액수는 경부고속도로 건설비 두 배에 달합니다. 그 토대 위에서 제2고로부터 제4고로까지는 세워질 테니까 제1고로 준공이 그 의미가 절대적이라는 겁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했지만 포철 건설이야말로 한반도 유사 이래 최대의 설비공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수없이 한강의 기적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 막연했던 말의 주인공이 바로 포철이 아닐까 합니다. 두고 보십시오. 오늘의 포철을 탄생시킨 박태준 사장님과 포철은 반드시 이 나라 경제건설의 주인공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이거 죄송합니다. 말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저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차차 전문가한테 자세히 들으시지요."
사진기자가 이상재의 허벅지를 질벅했다. 입을 반쯤 벌린 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전문가 노릇 다 해놓고 무슨 소리냐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상재도 동감이어서 약간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공대 출신이 아니신가요?"
이상재가 물었다.
"예, 저는 상대 출신입니다. 여기서는 기죽어야 하는 신세지요."
그는 소리 내 웃었는데, 그 웃음소리는 기죽은 기색 없이 유쾌하기만 했다.
"저어......, 죄송합니다만, 아까 하신 말은 혹시......, 교육을 통해서......."
이상재는 조심조심 말을 이었고,
"아, 예. 반반입니다. 전반의 건설 관계는 교육을 통해 습득한 거고, 후반은 저의 확신입니다."
자신에 찬 그의 응답이었다.
"예, 그리 됐으면 좋겠습니다."
수위에서부터 사원까지 어떤 자긍심에 차 있는 것을 느끼며 이상재는 이렇게 예의를 차렸다. 그런데 그 직원의 말이 괜한 큰소리거나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는 점을 그는 깨닫고 있었다.
"다 왔습니다. 내리시지요."
안내한 직원의 간략한 설명을 듣고 간부가 이상재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먼 길 오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먼저 양해를 구할 일이 있습니다. 박 사장님께서는 오늘 저녁에 외국 기술자들과 긴급회의가 있어서 벌써 나가셨습니다. 천상 내일이나 뵙게 되실 것 같은데요."
"예, 오늘은 너무 늦어서 저희도 일정을 그렇게 잡고 있었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우선 자료들을 좀 주실 수 있으신지......."
"예, 저기 준비해 왔습니다."
간부가 소파에서 일어서는데 아까 그 사원이 큰 봉투를 민첩하게 내밀었다.
"피곤하시겠지만 이걸 좀 읽어보시면 대체적인 것은 파악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사장님은 내일 최대한 빨리 뵙도록 노력하겠습니다만, 일정상 오전이 어려우면 공장 둘러보시는 것을 오전으로 돌리고자 합니다. 언제 올라가실 것인지, 괜찮으실지요?"
"예, 좋습니다. 저희는 모레 오후에 상경할 예정입니다."
"예, 그럼 시간이 촉박하지는 않겠군요. 저희 사무실 일과는 9시에 시작입니다."
"고맙습니다.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다시 지프를 타고 정문까지 나왔다.
"이 회사사람들 되게 친절하고 겸손하지 않아요? 질서가 딱 잡힌 것 같고요. 잘될 것 같고, 괜찮은데요."
그동안 말을 많이 참았다는 듯 정문을 등지며 사진기자가 말했다.
"사장이 빈틈없는 원리원칙주의자라니까 회사가 그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소. 내 느낌에도 회사가 잘될 것 같소."
이렇게 대꾸하며 이상재는, 내가 너무 한쪽으로 쏠리고 있지 않은가 생각했다.
"근데 말이죠. 아까 말한 1억 7천 얼마 딸라라는 게 우리나라 돈으로 치면 도대체 얼마죠? 계산도 안 되게 어마어마한 돈인데, 그 많은 돈 들여 공장 지어서 본전 뽑을 수 있을까요?"
"글쎄, 나도 확실히는 모르겠는데, 준공식 때 난 기사들을 보니까 우리나라의 연간 철강수입액이 8천만 딸라를 이미 넘었고 그 액수는 해마다 증가일로에 있어요. 포철에서 생산하는 것으로 그걸 충당할 수 있게 된다면 본전만 뽑는 게 아니라 국가적으로 큰 이익까지 볼 수 있을 거요. 장기적으로 볼 때 포철은 잘 세운 것 같소."
"그렇게만 된다면 좋지요. 외국 것 수입 해다 쓰면 다 남 좋은 일 시키고 마니까요. 우리가 만들어 쓰면 그만큼 이익이 남는 거잖아요. 택시 잡아야 되겠지요?"
"그럽시다."
사진기자는 저녁밥에 곁들인 소주 한 병으로는 아쉬운 기색이었지만 이상재는 아까 받은 큰 봉투를 들어보였다. 그는 사진기자의 코고는 소리를 배경음악으로 들으며 12시가 넘도록 봉투에 든 인쇄물들을 다 읽었다. 그리고 사장과 인터뷰할 것들을 메모했다.
"죄송합니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미리 잡혀 있는 일정 때문에 사장님은 오후에 만나셔야 될 것 같습니다. 오전에는 공장시설을 먼저 돌아보시는 게 어떠실지요. 그러면 전체를 파악하시는 데도 도움이 되실 거구요."
어제 그 간부가 정중하게 말했다.
"예, 저도 어제 주신 자료를 다 읽어보고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상재는 선뜻 동의했다. 그건 예의를 갖추려는 것이 아니라 먼저 시설을 보고 나면 인터뷰가 더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아니, 그걸 다 읽으셨다구요? 그럼 잠이 영 모자라시겠는데요."
간부는 놀라는 기색으로 환하게 웃었다. 그 얼굴에 호감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니 뭐, 대충 읽은 겁니다."
이상재는 겸손하게 웃음 지었다. 그 간부는 직접 안내를 맡고 나섰다. 검정 지프는 크기가 엄청난 공장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보실 것이 우리 포철에서 최초로 건설된 후판공장입니다. 자료에서 보셨다시피 우리 포철은 고로를 세워 제선하고 제강하고 압연하는 전방방식이 아니라 그 반대로 압연, 제강, 제선공장을 건설해 나가는 후방방식을 택했습니다. 왜냐하면 신설회사지만 고로의 완공과 관계없이 조기에 철강제품을 생산하여 시장에 판매하기 위해섭니다. 국제 철강시장에서 반제품인 슬래브를 구입해 압연 처리를 거쳐 완제품을 만들어 내서 시장에 판매하면 막대한 건설비를 줄여나갈 수 있는 효과가 생기는 동시에 국내의 철강 부족현상을 완화시키는 이중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후판공장은 제1고로가 완공되기 꼭 1년 전부터 완제품을 생산해 낸 포철의 효자입니다. 첫 출하된 62톤의 후판은 호남정유의 오일 저장탱크 제작에 사용되었습니다."
간부는 얼굴에 홍조가 띠도록 신명나게 설명해 나갔다.
"그럼 작년 이맘때부터 이익을 냈다는 말이로군요."
"그렇습니다. 공장 건설을 하면서 돈을 벌어들인 그 특이함이 포철의 자랑이라면 자랑입니다. 자, 누구나 이 안전모를 써야 합니다."
차가 멈추기 직전에 간부는 백색 안전모를 하나씩 내밀었다. 공장 안으로 들어선 이상재는 순간적으로 압도당하고 말았다. 천장 드높은 공장, 어마어마하게 크고 구조 복잡한 기계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사각 진 쇳덩어리들, 기계들이 돌아가는 겹겹의 굉음, 그 모든 것은 난생처음 대하는 것들이었다. 그는 갑자기 자신이 조그맣게 졸아드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게 바로 반제품인 슬래브입니다. 이 쇳덩어리에 열을 가해 압연 처리를 하면서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 두께로 철판을 뽑아 완제품을 만들어냅니다."
간부가 가리킨 슬래브란 두께가 한 뼘이 훨씬 넘고 넓이가 큰 책상만한 네모진 쇳덩어리였다. 그런데 장관은 그 검은 쇳덩어리들이 고열 처리를 거쳐 시뻘건 불덩어리로 변한 다음 거대한 압연기에 눌려가며 얇으면서 길고 긴 판자처럼 변해가는 과정이었다. 시뻘건 쇳덩어리는 자동으로 작동되는 압연기에 눌려 앞뒤로 이동을 되풀이하면서 얇아지고, 그때마다 쇠를 식히기 위해 분사되는 물로 증기가 하얗게 피어오르고는 했다. 7월의 바깥 날씨도 더웠지만 공장 안의 후끈거림은 그대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고열로 달구어진 시뻘건 쇳덩어리들이 계속 열을 내뿜는데다가 쉴 새 없이 솟는 증기까지 열을 내뿜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살인적인 무더위 속에서 하얀 안전모와 황색 작업복 그리고 군화모양의 빨간 작업화를 신은 기술자들이 묵묵히 일을 하고 있었다. 이상재는 그들을 지켜보면서 가슴이 뭉클해졌고 마음이 숙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덥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너무 더우셨죠?"
공장을 나서며 간부가 물었다.
"아닙니다. 저 속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있는데요, 뭘."
사진기자가 안전모를 벗고 이마의 땀을 훔치며 씩 웃었다.
"사진은 많이 찍었습니까?"
"예, 충분히 찍었습니다. 제철공장이 이렇게 어마어마할 줄은 몰랐습니다."
사진기자는 흡족하게 웃었다.
"저분들은 하루 몇 시간씩 일합니까?"
이상재는 차에 올라 물었다.
"1일 3교대, 여덟 시간씩입니다."
"여덟 시간......, 참 너무 애들 많이 쓰고 있습니다."
이상재는, 월급은 많이 줍니까 하는 말이 나오려고 했지만 말을 바꾸었다.
"예, 저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산업전사고, 포철의 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장님께서도 저 사람들을 가장 아끼고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떻게 기술자들 중에 외국 사람은 하나도 안 보이고 전부가......."
"아 예, 참 유심히 보셨군요. 지금 포철의 모든 생산라인에는 외국 기술자들 없이 우리나라 기술자들만 일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기술자립'이라고 부르는데, 종합제철을 완공한 첫해부터 이렇게 되는 것은 후발국으로서는 세계 최초의 일일 것이고, 이것이 포철의 또 하나 자랑거리입니다. 지금 현재 포철은 세계 수준의 기술자들을 600명 확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술자립을 하기까지는 지난 68년부터 6년 세월을 바쳤고, 500만 달러를 투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장님께서는 70년에 공장을 건설하기 전에 벌써 그러니까 회사를 창립하고 부지 공사를 시작함과 동시에 기술자립을 위해 유능한 사람들을 뽑아 외국 철강회사에 기술연수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참 선견지명이 있는 일인데요."
이상재는 열심히 메모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이렇게 말하는 건 주제넘지만, 사장님께서는 탁월한 혜안과 출중한 능력을 갖추신 분이시지요. 기술 후진국일수록 기술식민지가 될 위험에서 빨리 벗어나야 된다고 늘 역설하셨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경제자립을 위해 종합제철이 꼭 필요한 형편에서 삼무(三無) 난관이 있다고 했습니다. 자본이 없고, 기술이 없고, 자원이 없는 게 그것입니다. 그 세 가지 절대요소를 모두 외국에 의존해야 되는데 관리 능력마저 외국 사람들에게 의존한다면 영원히 기술식민지 상태에 빠져 종합제철공장은 세우나마나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백 번 맞는 말씀인데, 건설자금을 아직 확보하지 못한 불안한 상태에서 기술자들 연수를 보내느라고 사장님께서 참 고생 많이 하시고 고통 많이 당하셨지요."
간부의 목소리가 떨리는 듯 변했다.
"완공과 동시에 기술자립을 이루었다면 해외연수가 절대적 효과를 냈다는 것인데, 아무런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연수만으로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예, 그게 그러니까......, 정신무장과 굳은 각오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연수를 보낼 때를 생각하면 참 눈물겹기도 한데, 사장님께서는 연수생들을 떠나보내기 전에 꼭 직접 정신교육을 시켰습니다. 우리나라 경제 사정, 산업 전반에 있어서의 철강의 중대성, 기술자립의 필요성, 철강기술인의 사회적 사명 등에 대해 교육하시면서 특히 이 이야기를 강조하셨습니다. '패전 직후 일본에서는 선진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 여러 분야에 걸쳐 미국에 기술자들을 연수를 보냈다. 그런데 미국 기술자들은 자기네 일만 할 뿐 냉담하리만큼 아무 기술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일본 연수생들은 미국 기술자들의 등 뒤에서 그저 눈치껏 그들이 일하는 것을 보고 익혔다. 그리고 그들은 저녁에 숙소에 돌아오면 기계와 기술에 대하여 보고 느낀 것을 세세하게 기록했다. 또한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공장에 출근했다. 그리고 공장과 기계들을 깨끗이 청소하고, 작업 준비까지 다 해놓았다. 미국사람들은 처음에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 연수생들은 날마다 그 일을 되풀이했다. 그러자 한 달이 못 되어 미국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친절해졌고, 기술을 가르쳐주기 시작했고, 자기들만 보던 도면을 함께 보았고, 마침내는 잊어버린 척 캐비닛을 열어놓고 식당에 가거나 퇴근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6개월이나 1년 만에 돌아온 일본 연수생들은 완전히 새로운 기술자가 되어 있었다. 여러분의 어깨에는 이 나라의 장래가 걸려 있다. 우리는 이제 그만 가난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그 지름길이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다. 무슨 수를 써서든지 신기술을 샅샅이 배워 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장님은 이렇게 말씀 하시곤 했는데, 그건 교육이라기보다는 눈물겨운 당부였고 가슴 저린 애원이었습니다. 연수생들은 그 말씀을 충실히 따랐고, 그들은 돌아와서 다른 사원들에게 새 기술을 가르치는 교육자 노릇까지 했습니다."
"예, 그랬었군요. 그들은 주로 어디로 갔었습니까?"
"일본, 미국, 그리고 독일, 호주까지, 필요한 기술이 있는 데는 어디든 다 보냈습니다. 예, 저기가 제강공장입니다. 제강공장이란 각종 원료를 배합해 고로에서 만들어진 쇳물을 이쪽으로 운반해 다시 열을 가하면서 불순물을 제거하여 양질의 강철을 만들어내는 과정입니다."
이상재는 제강공장에서 다시 압도되고 있었다. 쇳물을 담은 쇠항아리의 크기도 어마어마한데다가, 그것이 크레인에 매달려 이동하다가 불덩어리인 다른 쇠항아리와 입을 맞추듯 하며 쇳물을 쏟아내는데, 두 개의 거대한 쇠항아리가 천천히 기울어지며 시뻘건 쇳물을 쏟아내고 받는데 단 한방울도 밖으로 새거나 튕기는 것이 없었다. 그건 완벽한 시간의 일치로 이루어지는 일인데, 만약 1초라도 시차가 생기는 경우에는 쇳물이 바닥으로 쏟아질 판이었다. 그렇게 엄청나게 큰 기계들이 있다는 것도, 그런 기계들을 그렇게 정확하게 조작한다는 것도 법대 출신인 이상재로서는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팥죽 땀이 줄줄 흐르는 숨 막히는 무더위 속에서 더운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우리나라가 정말 공업국이 되었구나! 하는 실감과 함께 가슴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상재는 또 황색 작업복을 입은 기술자들을 눈여겨보며 제강공장을 나왔다.
"이제 끝으로 보실 게 저쪽에 솟은 고로입니다."
"끝으로? 다른 공장들이 아직 많은데요?"
목에 걸었던 카메라를 벗다가 사진기자가 의아해 했다.
"아 예, 그 세 공장은 핵심이고 다른 공장들은 유사한 작업을 하거나 부속시설을 한 공장이니까 안 보셔도 됩니다."
고로를 올라간다는데,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로 안내되었다.
"워낙 높으니까 안전과 편의상 엘리베이터 설치는 필수적입니다."
간부가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듯 말했다. 두 사람은 연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가 70미터 지점입니다. 내리시지요."
엘리베이터를 내려 밖으로 나서자 그대로 허공이었다. 눈 아래로 공장들이 납작했고, 포구 저쪽으로 푸르른 바다의 한 자락이 손에 잡힐 듯 했다.
"조심해서 건너십시오."
간부가 쇠판으로 얽어진 다리를 건너려고 앞장서며 말했다. 이상재는 다리가 너무 허술한 것처럼 느끼며 눈앞이 아찔해지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선배님, 아래 내려다보지 말고 걸으세요. 알고 보니 겁이 많으시군요."
이상재를 뒤따르고 있는 사진기자의 말이었다.
"이 사람아, 겁은 무슨. 당신이나 카메라 안 떨어뜨리게 조심해."
이상재는 자신의 속을 들켜버린 것이 창피해 턱없이 큰소리를 질렀다. 고로도 끔찍스럽게 큰데다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이 수많은 부속물들이 얽히고설킨 기계였다. 그리고 화끈거리는 열기와 함께 기계 작동음이 윙윙윙윙 쉴 새 없이 울리고 있었다.
"이 용광로에, 저 아래서부터 연결된 콘베어 벨트를 타고 온 철광석 코크스, 석회석이 일정한 비율로 섞여 들어가서 그 귀한 쉿물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런데 그 3대 원료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나는 건 석회석뿐입니다. 아니, 또 한 가지가 있긴 합니다. 이 용광로 안은 고열에 강한 내화벽돌로 두껍게 차단막이 형성되어 있는데, 그 내화벽돌이 국산입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이 고로가 바로 포철의 심장이고 꽃입니다."
간부가 기계 소음을 이기려고 큰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어떤 만족감과 자랑스러워하는 느낌이 가득했다.
"예, 참 대단합니다. 굉장해요. 포철의 심장이고 꽃이라는 말이 아주 멋지고 잘 어울립니다."
이상재는 거대하고 복잡한 기계를 올려다보고 고개를 끄덕거리고, 이리저리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하면서 이렇게 응답하고 있었다. 그의 큰 외침은 그대로 감탄이었다.
"자아, 끝으로 이것을 한번 보시고 내려가시지요. 이것이 화입구입니다. 이 구멍을 통해 안에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자아, 한번 보세요."
이상재는 유리로 차단된 작은 구멍에다 눈을 가까이 댔다. 저 멀리 안쪽 깊이로 붉고 노랗고 푸른 불길이 쉭쉭 소리를 내는 느낌으로 세차게 뻗치고 뒤엉키며 휘돌고 있었다. 그건 불길의 현란한 용솟음이고 화려한 춤이었다. 저 불길 속에서 쇠가 만들어진다면 저걸 창조의 불길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하며 그는 천천히 눈을 뗐다.
"예, 수고하셨습니다. 그만 내려가실까요."
간부가 앞장섰다. 불길의 잔영이 아직 남아 있어서 이상재는 다리를 건너면서 아까보다 더 굼뜨게 더듬거리며 발을 옮겨놓고 있었다. 사진기자는 그때까지 바닥에 무릎을 대고 사진기를 치올리고 있었다.
"저 화입구를 통해 고로에 불을 붙이고 20시간쯤 지난 뒤에 첫 쇳물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출선이라고 하는데, 첫 쇳물이 황금빛으로 터져 나오지 않고 검은 죽이 되어 나오거나 아예 안 나오면 그땐 종합제철 건설은 수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후발국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사장님께서는 저기에 당길 불씨도 경건하게 태양열에서 채취했고, 그 원화로 불이 당겨 고로가 가동된 이후 첫 출선이 될 때까지 우리 포철 맨들은 모두 하나같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예, 흔히 '기도하는 마음'이라는 말을 쓰는데, 저는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그때 정말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일개 직원인 제가 그랬을 때 모든 책임을 지고 계신 사장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첫 쇳물이 황금빛으로 터져 나왔을 때 모든 직원들은 만만세를 부르고......."
그 간부의 목소리는 또 떨리는 듯 잦아들더니 그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엘리베이터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상재는 그의 목이 메는 감격을 알 것 같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재의 뇌리에는 어제 자료에서 본 사진 한 장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작업복을 입은 사장과 사원들이 첫 출선을 기뻐하며 만세를 부르고 있는 장면이었다.
이상재는 공장을 나서며 고로를 돌아보았다. 거리가 가까워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야 했다. 그때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불기둥! 불길 활활 타는 고로를 품고 있는 그 드높은 철탑이 그대로 불기둥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래, 저 불기둥은 우리 산업의 길을 바꿀 것이다' 하는 생각을 했다. 그건 진정한 바람이기도 했고, 믿음이기도 했다.
"많이 더우시지요?"
간부가 차에 오르며 미안해하는 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우린 구경일 뿐인걸요."
이상재는 진심으로 응답했다.
"예, 그렇게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점심 식사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이번에는 덥지 않은 데를 좀 구경하도록 하시지요."
차가 멈춘 곳은 공장지대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어떤 단층 건물 앞이었다.
"이것이 유치원입니다."
"유치원이라니요?"
"직원 아이들을 위해 2년 전에 지은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라고 요구하지 말고 먼저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라' 하는 사장님의 경영론에 따른 것입니다. 이 둘레에 심은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도 다 사장님이 고르신 겁니다."
나무로 에워싸인 상앗빛 유치원은 마치 어떤 별장 같았다. 말끔하게 치장된 유치원 안은 고즈넉했다. 유치원이 파해 아이들이 돌아가고 없는 탓이었다.
"아, 이거 한발 늦었군요. 애들을 한 장 찍어야 하는 건데."
사진기자는 사진기를 보며 아쉬워했다.
"내일 오후에 가신다면서요. 내일 아침에 찍으시죠, 뭐."
간부의 말에 사진기자는 자기의 이마를 치며 웃었다. 장난감처럼 앙증맞은 책상과 걸상, 한의원의 약서랍처럼 짜인 작고 예쁜 사물함, 온갖 장난감들과 실내 놀이기구들, 이상재는 동화나라를 여행하는 것처럼 묘한 기분에 젖어들며 그 완벽한 시설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직원들이 자꾸 늘면서 인근 국민학교들의 학생 수용이 한계에 다다라 곧 국민학교도 세울 예정입니다."
"아니, 학교를 직접 운영한단 말입니까?"
"예, 정식 인가를 받아 직접 운영해야지요. 우리 직원들 애들 때문에 시민의 자녀들에게 피해가 가서는 안 되니까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애들이 커가는 데 따라서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세울 계획을 세워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직원의 두 자녀에 대해서는 대학까지 전액 장학금을 지급하겠다고 사장님은 이미 약속하셨습니다. 왜 하필 아이 둘인지 아시겠지요?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는 산아제한 시책에 호응하는 뜻입니다."
그 간부는 쿡쿡 웃었다.
"참으로 철저하시군요."
고개를 내두르며 이상재도 따라 웃었다.
"여기서 혹시 사진사는 안 뽑습니까?"
사진기자가 정색을 한 듯 말했고,
"유감입니다. 시기를 놓치셨어요."
간부가 응수했고, 그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차에 올랐다.
"이제 마지막으로 보실 것이 직원들 주택입니다. '회사가 성공하려면 직원들부터 잘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장님은 부지 조성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68년 9월부터 직원들 주택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포항은 여관도 변변찮은데다 주택난도 심각했습니다. 거의 다 외지에서 모여든 직원들의 장기적 숙식문제 해결은 급선무였습니다. 그러나 외자 도입이 막연한 상태에서 회사 형편은 월급을 줄 수 없을 정도로 어렵게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장님께서 나서서 20억을 신용대출 받아 주택 건설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좋은 일이 국회에서까지 말썽이 되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이유지요?"
"예 국가 기업이 공장도 짓기 전에 딴 짓을 해서 국민 세금을 낭비하고 있다는 공격이었지요. 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했던 것처럼 야당은 포철 건설도 애초에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외국 것을 수입해서 쓰면 간단할 건데 왜 실패가 뻔한 일을 시작하느냐는 것이었죠. 사장님께서 국회에 출두하는 일까지 벌어졌으니까요."
이상재는 자신도 모르게 쓴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준공식에 야당 사람들은 오지 않았느냐는 말은 묻지 않았다. 나무들이 많은 직원주택촌은 아늑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그만그만한 집들 사이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주부들이 빨래를 널거나 마당가에서 잡풀을 뽑고 있었다.
"교육시설이나 주택 보급은 우리나라 기업 중에서 최초로 시작한 것인데 이 주택은 임대를 하는 건가요?"
"아닙니다. 임대는 불안감을 조성하니까 개인 소유화하여 안정을 취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사장님 방침입니다. 그래서 최저 가격으로 분양하고, 회사 보증으로 장기 저리의 융자를 알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직원들이 자꾸 늘어나면 어떻게 하지요?"
"예, 사장님께서는 교육시설보다 주택문제를 우선시합니다. 단 한 명의 직원도 주택 불안을 겪게 해서는 안 된다는 계획이니까 계속 지어나갈 겁니다."
"계획은 더없이 좋은데 그래 가지고 회사가 운영이 될까요?"
"예, 잘될 겁니다. 사원복지 잘해서 망하는 회사는 없다는 게 사장님 신념이고, 우리 회사는 벌써 1년 경영의 흑자를 예상해 놓고 있습니다."
간부는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첫해부터요? 그게 얼맙니까?"
"그건 특급비밀입니다."
"왜 그러십니까. 분위기 화기애애한데."
"예, 실은 그런 말만 얼핏 들었지 저 같은 말단이 그 액수를 어찌 알 수가 있나요. 아마 사장님께 여쭤봐도 안 밝히실 겁니다. 그냥 기대해 보세요."
"예상이더라도 하여튼 반가운 일입니다."
"그럼 여기까지 오셨으니 사장님 숙소를 한번 보시겠습니까?"
"아니 지금 거기 계십니까?"
"아닙니다. 숙소는 언제나 개방되어 있습니다. 만약 도둑이 든다 해도 가져갈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사장의 숙소로 들어서던 이상재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짧은 인생 영원 조국에."
현관에서 바로 시작되는 좁은 거실의 정면 벽에 이런 붓글씨가 세로쓰기 두 줄로 붙어 있었다. 이상재는 그 문구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애국심이 대단하다는 정치부장의 말을 떠올리며.
"사장님께서 손수 써 붙이신 겁니다."
숙소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거실에 사무용 소파, 방에 한쪽짜리 옷장이 전부였다. 검소를 넘어 초라하게까지 보이는 그 숙소에는 박태준의 정신만이 가득 차 있었다. 이상재는 박태준이란 사람의 심층 깊이까지 다 안 것 같은 기분으로 숙소를 나왔다.
"지금까지 사장님에 대해서 줄곧 칭찬만 하셨는데, 뭐 불만이나 불평 같은 것은 없습니까?"
이상재가 차를 타며 물었다.
"글쎄요......, 그게 그러니까......, 매사에 너무 치밀하고 철저한데다가 원리원칙을 고수하시니까 사원들이 언제나 긴장해야 하고 미처 따라가지 못하고 애쓰는 그런 점이랄까."
"그것도 결국은 칭찬이네요."
이상재와 간부는 함께 웃었다.
"아닙니다. 제가 듣기로는 군대식으로 밀어붙이면서 막 쪼인트도 까고 지휘봉으로 치기도 하고 그런다던데요?"
사진기자가 불쑥 쏟아낸 말이었다.
"그런 말을 들었습니까? 그건 다 새빨간 거짓말이고 모함입니다. 사장님께서는 군대생활을 하실 때부터 제일 싫어한 게 부정부패와 구타였습니다. 포철건설에서 강한 추진력으로 일을 밀어붙인 것은 분명하고, 그런 과정에서 현장간부 세 사람 정도의 안전모를 지휘봉으로 친 일이 있습니다. 그건 전체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전략이었습니다."
정색을 한 간부의 말은 단호했다.
"근데 왜 그런 나쁜 소문이 퍼지지요? 제 생각에도 안 그럴 것 같은데."
사진기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이란 본래 그런 것 아닙니까. 그리고 사장님한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하청업자나 납품업자들은 적당적당히 하려다가 걸려 혼쭐이 나고 거래가 끊긴 사람들이 상당수 있거든요. 그 사람들이 헐뜯고 욕이나 하지 좋게 말할 리가 있겠습니까. 사장님께서는 그런 모함이나 험담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예. 그렇기도 하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원에 대한 처우가 이렇게 좋으면 포철에 취직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인사 청탁 같은 것도 많을 텐데요. 특히 국영기업체고 하니까......."
이상재는 말머리를 돌렸다.
"예, 그야 더 말할 것이 없지요. 작년에 있었던 일인데, 호랑이 눈썹도 뽑는다고 소문난 실세 중의 실세인 박 모라는 사람이 인사 청탁을 하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걸 비서한테서 받아든 사장님은 봉투도 뜯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박박 찢어 휴지통에 던져버렸습니다. 질겁을 한 비서는 그게 박 모의 편지라는 걸 다시 환기시켰습니다. 그러나 호통만 맞고 쫓겨났지요. 그 소문이 퍼진 뒤로 정치권의 인사 청탁은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습니다. 공채 때 인사 청탁이 들어오면 그 사람 이력서는 미리 빼내버리는 것은 처음부터 해온 일이고요,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사장님은 효자로 소문나신 분입니다. 언젠가 고향으로 부모님을 뵈러 가셨는데, 큰절을 올리고 나자 사장님의 아버님께서 어렵게 말씀을 꺼내셨습니다. 문중의 누군가를 포철에 좀 데려다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사장님은 아무 대꾸도 없이 마루 끝으로 돌아앉아 구두끈을 매고 대문을 나섰습니다."
입술이 겹치도록 입을 꾹 다문 이상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하고 있었고, 사진기자는 간부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자료에 보니 열연공장 건설 때 3개월이나 지연된 공기를 사장님이 직접 나서서 두 달 만에 그 공기를 만회했을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공기를 한 달이나 앞당겨 준공시켰다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요?"
"예, 많은 사람들이 그걸 묻고, 믿기 어려워하기도 합니다. 그건 한마디로 사장님의 강력한 추진력의 결과입니다. 그 추진력이란 직접 앞장서고, 직접 일하는 희생정신입니다. 그 공기 단축을 우리는 지금도 '전쟁'이라고 부르는데, 교대근무도 없이 두 달 동안이나 매일 24시간씩 일한 경우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걸 우리는 전쟁하듯 해냈습니다. 처음에 공기 지연이 시작된 것은 사장님께서 외자도입 관계로 외부 일에 골몰하시면서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사장님께서 원료수급 때문에 일본을 거쳐 호주까지 직접 가시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자리를 비우는 동안 더 심해졌습니다. 사장님은 귀국하자마자 공기 단축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직접 현장에 뛰어들었습니다. 밤낮없이 콘크리트 타설이 시작되었고, 아까 말한 간부의 안전모를 지휘봉으로 친 것도 그때 일어난 일입니다. 사장님은 한시도 현장을 떠나지 않고 직원들과 인부들을 격려했고, 길에 차를 세워놓고 지쳐 잠든 트럭 운전수들을 직접 깨우기도 했습니다. 초인이 따로 없었고, 누구나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 불가능한 일을 무사히 해냈고, 그 다음부터는 모든 공장을 지을 때 공기 단축은 있어도 공기 지연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참, 말을 듣고 보니 더 믿기가 어렵군요. 사장님은 계속 여기 계십니까?"
"예, 부득이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여기를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 계실 때는 새벽 2시에 순시 도는 것을 하루도 빼먹은 적이 없습니다. 부지 공사 때 흙먼지 뒤집어 쓴 사장님 모습을 어떤 수녀님이 보시고 '흙강아지' 같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흙강아지'가 별명이 되고 말았는데 사장님도 그 별명을 좋아하십니다."
"흙강아지......."
이상재는 그 별명을 되뇌며, 취재가 3회 연재로는 안 되겠고 5회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내리시지요. 여기서 점심 식사 하시고, 사장님도 여기서 뵙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나무숲이 짙게 푸른 속에 자리 잡은 어느 건물 앞에서 내렸다.
"아니, 이런 근사한 건물도 포철 겁니까? 이게 호텔도 아니고......."
사진기자는 어리둥절해서 멋진 건물과 간부를 번갈아 보며 두리번거렸다.
"역시 사진기자답게 한눈에 척 알아보시는군요. 이 영일대는 외국 기술자들의 숙소로 포철의 호텔인 셈입니다. 이것도 직원 주택처럼 지을 때 말썽이 많았습니다. 공장 짓기 전에 호화판 호텔이나 짓는다는 거였지요. 그러나 그건 한치 앞도 못 내다보는 단견이었지요. 무슨 말인고 하면, 종합제철을 설계하고 시공하고 건설하는 것은 모두 외국의 최고 기술자들입니다. 그런데 아까 잠깐 말한 대로 포항에는 호텔은 고사하고 그들을 재울만한 변변한 여관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호텔 시늉을 한 게 경주에 있었는데, 그들을 매일 아침저녁으로 경주까지 출퇴근을 시키자면 그 시간 낭비가 얼맙니까. 그들이 하루 이틀 머물 것도 아니고, 호텔식으로 숙소를 직접 지어라, 이것이 사장님 단안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시할 것이 있습니다. 직원들을 해외연수 보내면서 사장님이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외국 기술자들을 품안에 끼고 최고 대우를 해주면서 우리는 맨손이었겠습니까? 그게 과연 사치고 낭비였겠습니까?"
간부의 의미 깊은 눈길을 따라 이상재와 사진기자는 눈치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양식으로 점심을 먹고 나서 박태준 사장을 만난 것은 오후 2시였다.
"안녕하십니까. 박태준입니다. 오셨다는 말 듣고 빨리 시간을 내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박태준 사장은 이상재와 악수를 나누며 부드럽게 웃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ㄷ일보 이상재라고 합니다. 바쁘신데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희는 오전 중에 공장을 살펴보면서 유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상재는 자신도 모르게 깊이 고개 숙여 예의를 갖추었다. 그러면서 한순간에 세 번 놀라고 있었다. 사장이 사원들과 똑같이 안전모에 작업복 차림이었고, 뜻밖에도 키가 작았고, 그런데도 사람을 압도하는 어떤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공장을 둘러보신 소감이 어떠십니까? 질문만 받아야 하는 처지에 월권인 줄 압니다만, 이것 하나만은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칭찬받고 싶은 촌스러움을 벗지 못했거든요."
이렇게 말해 놓고 박태준 사장은 소리 내서 웃었다. 이상재와 사진기자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재는, 그가 인터뷰 분위기가 편안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을 느끼며 긴장을 늦추고 있었다.
"뭐라고 한마디로 할 수는 없습니다만, 놀랍고 감탄스럽고......, 우리나라 산업의 길을 바꿀 거라는 기대와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어제 저희들을 사무실로 안내해 준 직원이, 한강의 기적의 주인공은 바로 포철이고, 포철을 탄생시킨 사장님과 포철은 반드시 이 나라 경제건설의 주인공으로 남게 될 거라고 했는데, 그 말에 자꾸 동의하고 싶어집니다."
이상재의 응답이었고,
"하하하하......, 이거 너무 과찬입니다. 더는 질문 안할 테니 용서하십시오."
박태준 사장은 흔쾌하게 웃었다.
"저희 신문에서는 포항종합제철의 준공을 중요시해 3회 정도 연재되는 특집을 꾸밀 예정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 오기 전에, 그리고 여기 와서 포철과 사장님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취재했습니다. 바쁘실 테니까 부족한 것만 몇 가지 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재는 말을 하면서 다시 놀라고 있었다. 자세를 고치며 박태준의 본얼굴이 드러났는데, 그 얼굴은 조금 전에 친절하게 웃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웃음기 사라진 얼굴은 단호하고 강직해 보였고 어떤 강한 힘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붓으로 그려놓은 듯한 짙은 눈썹 아래 두 눈에서 광채가 뻗치고 있었다. 그 특이한 눈빛은 흡사 고로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이었다. 이상재는 아까 놀란 세 가지에 그 두 가지를 더 보탰다.
"자료를 보니까 사장님께서는 제철보국(製鐵報國)을 역설하셨는데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까?"
"예, 그건 철강 산업을 일으켜 국가발전을 도모하자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그야말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어렵고 곡절 많았던 외자도입 과정을 다 말할 수는 없고, 간단히 줄이면 포철의 건설비 중에는 한일협상의 결과인 대일 청구권자금 일부가 들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대일 청구권자금이 어떤 돈입니까. 그건 우리 선조들이 흘린 고귀한 피의 대가이고, 우리 민족 전체가 겪었던 수난과 고통의 대가입니다. 그런 소중한 돈으로 제철회사를 건설했으니 포철은 마땅히 민족과 국가에 보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포철은 영원한 민족기업이며, 그 누구도 감히 그 엄정한 역사성을 변질시키거나 훼손할 수가 없습니다. 민족기업으로서의 제철보국, 그 숭엄한 뜻을 이룩하기 위해 포철을 튼튼하게 육성시켜 나가는 것이 저와 임직원 전체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박태준 사장은 느리게 또박또박 말해 나갔는데 그 어조에는 탄력적인 힘이 넘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은 더욱 서늘하고 매서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예, 그런데, 거의 모든 시설이 일본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왜 하필 일본 것입니까?"
"예 아주 중요한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그 연유도 자세히 다 말하기는 이런 인터뷰에서 불가능하니까 간략하게 요약하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종합제철소 건설을 지난 61년에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66년이 되어서야 미국, 서독, 영국, 이탈리아 4개국으로 형성된 대한국제제철차관단인 KISA가 발족되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에 걸쳐 지루하게 사업 타당성을 검토해 오던 KISA는 69년 1월에 이르러 차관 불가의 태도를 취했습니다. 한국의 경제능력으로 돈을 갚을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습니다. 저는 미국으로 달려가 무진 애를 다 썼지만 이미 우리를 외면해 버린 미국 대표의 마음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포철은 KISA를 믿고 부지 조성은 말할 것도 없고 해외로 기술연수까지 보내고 있었습니다. 종합제철 건설의 꿈이 무너지는 그 참담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1억 불이 넘는 거액을 빌려줄 나라는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 암담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 제가 생각해 낸 것이 대일 청구권자금 전용이었습니다. 이것도 이야기가 복잡하고 길기 때문에 여기선 생략하겠습니다. 그 자금 전용을 해결해 나가면서 동시에 일본 제철회사들이 포철 건설에 참여하도록 유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고비를 거쳐 일본 회사들이 포철 건설의 주역이 된 것입니다."
"한국에 종합제철이 생기는 것은 일본 제철회사들 입장에서는 가장 가까운 시장을 잃어버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런 협조가 가능했습니까?"
"예, 정확하게 보신 겁니다. 그 일을 성사시키는 데 제 평생 잊을 수 없는 두 분이 있습니다. 일본 제일의 양명학자인 아스오카 선생과 야하타 제철소의 이나야마 사장입니다. 아스오카 선생은 일본 군국주의를 비판했던 학자로 제가 유학 시절부터 존경했던 분입니다. 정, 재계 인사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그분이 이나야마 사장을 소개해 주었고, 이나야마 사장은 다른 제철소 사장들을 설득해 주었습니다. 이나야마 사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이 과거의 불행을 딛고 일어나 경제발전의 첫 단계인 종합제철소를 건설한다면 일본은 당연히 협조를 해야 합니다. 일본의 과거 잘못으로 인해 한국민족이 겪었던 불행을 보상하기 위해서라도 포철 프로젝트가 잘 되도록 도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 두 분이 아니었으면 오늘날의 포철은 존재할 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두 분께 다시 머리 숙입니다."
박태준 사장은 마치 그 두 사람이 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행동에 이상재는 가슴이 찡 울리는 것을 느꼈다.
"예, 잘 알았습니다. 세상에서는 포철 준공을 '기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장님을 기적을 일으킨 주인공이라고 말합니다. 그 기적의 원천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저에 대한 것은 과찬입니다. 저는 별로 한 일이 없습니다. 오늘의 포철이 이룩된 것은 임직원 여러분들과 공사에 참여한 수많은 분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피땀을 흘려 쌓아올린 공입니다. 다시 말해 공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피와 땀의 결정체'입니다. 이 말은 후판공장에서 첫 생산된 두루마리 후판 몸체에 제가 쓴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포철 준공을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포철의 성공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계를 비롯해서 재계, 언론계까지 포철은 실패할 거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습니다. 그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 후발국들은 종합제철 건설에 거듭 실패하고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나라가 브라질과 터키입니다. 특히 브라질은 나라가 굉장히 크고 천연자원이 풍부한데도 실패했는데 우리나라는 별다른 자원도 없으니 더 어렵지 않으냐 하는 생각들이었습니다. 성심을 다한 사람의 힘은 하늘도 움직인다는 말을 저는 믿습니다."
이상재는 앞에 커다란 쇳덩어리가 버티고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런데 그 쇳덩어리는 견고함과 무게감과는 달리 변함없이 '저는......, 저는.......' 하는 겸손을 보이고 있었다.
"예, 유치원과 직원 주택도 돌아보았습니다. 그런 사원복지시설은 우리나라 기업들 중에서 최초의 일로 아주 바람직하고 모범적입니다. 그리고 그 종합계획도 아주 획기적입니다. 그런데 건설비가 막대하게 투자된 상황 속에서 회사경영을 정상화하는 동시에 그런 복지계획을 실현시킨다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아, 그런 것까지 다 보셨습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실현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제1기 공사 완공까지 전체적으로 공기를 한 달 단축시켜 건설비용을 절약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우리는 톤당 건설비가 287달러밖에 들지 않아 다른 나라의 절반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건설 과정에서 이미 경쟁력을 확보해 놓은 상태입니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최고 품질의 철강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 일도 틀림없이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맨주먹으로 회사를 세운 직원들이 그 일쯤 못 해내겠습니까?"
"사장님 숙소에서 '짧은 인생 영원 조국에'라는 좌우명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인생관과 애국심이 형성된 것입니까?"
"이런, 숙소까지 보셨습니까! 그게 그러니까......, 저의 유학 시절에 아까 말씀드렸던 아스오카 선생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선생은 '공적 사회적 임무를 맡은 사람은 사심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만 지식과 실천이 일치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감명 깊게 가슴에 박혔고, 해방이 되어 제 나름으로 진로를 고심하다가 나라를 위해 한평생 살기로 결심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육사 교육을 통해 애국관을 정립하다가 6.25를 당했습니다. 저는 소대장으로 동료들과 함께 최전선에 투입되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장교들이 죽어 있는데 대부분 총알을 등 뒤에 맞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적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도주하다 총들을 맞은 것입니다. 그때 깨달은 바가 컸습니다. 무슨 일이든 정면으로 맞서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을 그 후로 어긴 적이 없습니다."
"예, 긴 시간 정말 감사합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포철의 발전을 빌겠습니다."
"예, 이렇게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원로에 편히 가십시오."
박태준 사장은 시계를 보며 바삐 나갔다. 이상재는 드높은 고로를 생각하며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거인의 뒷모습이 이상하게도 외로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