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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2-8

44. 서로 다른 길

한사람씩 면접하기에는 면접실은 턱없이 넓었다. 보통 교실 크기만한 면접실 한가운데는 팔걸이 없는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고,그 정면에 육중한 나무 책상 세 개가 버티고 있었다. 그 구도부터가 신입사원 응시자들의 기를 꺾기에 충분한 위압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마치 범죄자 취조실 같은 그런 딱딱하게 살벌한 구도는 어느 회사나 다 마찬가지였다. 허진은 몸이 자꾸 졸아들고 숨쉬기가 힘겨운 것을 느끼며, 군대에서 대대장실에 불려갔을 때와 별 다름없는 긴장감에 떨고 있었다.

"고등학교는 일류를 다녔는데 대학은 이게...... 무슨 이유가 있소?"

마침내 서류를 뒤적이고 있던 세 사람 중에서 가운데 사람이 말을 던졌다.

", 집안이 가난해서 4년 동안 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대학을 다닐 수 없었습니다. 아르바이트 수입으로는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야 했으니까요."

허진은 자신의 성실성과 인내력 그리고 책임감을 동시에 입증할 수 있다는 순간적인 판단에 따라 이렇게 대답했다.

"호오! 그럼 4년 동안 학비를 전부 장학금으로 해결하고, 동생들을 위해 아르바이트까지 했다 그거요?"

가운데 사람은 콧등의 안경을 밀어 올리며 호감을 드러내 보였다.

", 그렇습니다."

"으음, 가난한 거야 어쩔 수 없고...... 그 의지력 한번 쓸 만하구만."

가운데 사람은 혼자 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좀 듣기 거북한 말일지 모르지만, 우리 회사에는 일류 대학 출신들이 많소. 만약 근무하게 된다면 그 사람들하고 비교가 될 거고, 어떤 면에서는 억울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소. 그런 경우가 생기면 어떡하겠소?"

그는 엷은 웃음이 스치는 얼굴로 멀리 앉은 허진을 바라보았다.

"예에...... 그런 점은 제가장학금을 보고 속칭 이류대학을 갈 때부터 저를 괴롭힌 고민이고 콤플렉스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을 실력으로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남다른 실력과 남들을 앞지르는 성실한 근무로 학벌의 열세를 만회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기 때문에 학연에 따른 어떤 불이익이 오게 된다면 그때는 참는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허진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그대로 털어놓았다.

"참는다...... 왜 참지? 항의하고 덤빌 생각은 없는가?"

가운데 사람은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말을 놓고 있었다.

", 그건 가난이 저에게 준 피치 못할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학연은 사회문제가 될 정도로 한 개인이 뛰어넘을 수 없는 벽입니다."

"흐음...... 남들을 앞지르는 성실한 근무라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근무하겠다는 것인가?"

", 제 혈육인 동생들을 돌보았던 열성으로 회사 일을 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회사의 월급이 저의 동생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혈육을 사랑하듯 회사를 사랑하면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근무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 혈육을 사랑하듯 회사를 사랑한다......"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실력에 대해서도 자신만만한 모양인데, 이번 시험에서 몇 등이나 했을 것 같은가?"

하며 빙그레 웃었다.

"확실하게는 모르겠습니다만, 틀린 것은 별로 없었지 않나 싶습니다."

"1등을 자신한다는 투로군 미안하지만 1등이 아닐세."

"네에......?"

허진은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싶었다. 스스로의 채점으로도 그랬지만 상대방의 웃음에서 1등을 자신했던 것이다.

"뭐 그리 놀랄 것 없어. 2점이면 한 문제 차이니까 1등이나 다름없지. 회사에서 중요시하는 건 1등 짜리의 이론적 실력보다는 10등 짜리의 성실과 근면이니까. 자아, 수고했으니 나가도 좋소."

가운데 앉은 사람이 담배를 빼들었다.

",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허진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는 합격의 예감을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오빠 여러 생각하지 말고 하청업체 하나 차려봐요. 남들은 줄 대느라고 야단법석인데...... 취직하는 것보다는 훨씬 빠르대요......."

허진은 복도를 걸어나오며 동생 미경의 말을 듣고 있었다. 여동생은 자기 하나 희생하고 집안을 구하면 된다는 처음의 생각을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었다.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할 때도 계속 피하던 눈치더니 졸업을 앞두게 되자 얼마 전에 굳이 찾아와 어렵게 꺼낸 말이다.

"그래, 고맙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좀 생각해 보자."

미경이에게 '고맙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꼭 고마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살이의 이런저런 경우를 당하면서 마음에 꼭 맞는 말을 하기가 쉽지 않지만, 여동생 앞에서는 정말 마땅한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여동생이 사장의 첩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 사건을 알았을 때는 여동생은 이미 임신 중이었다. 그때 낙태수술을 하라고 강압하지 못했다. 여동생은 자기 하나 희생해서 집안을 구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고, 자신은 오빠로서 그 일을 수습할 수 있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채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절망감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여동생은 제 나름의 공을 세우기도 했다. 자신이 군대에 묶여 있는 동안 집을 마련하고, 할머니를 그 힘겨운 돈벌이에서 벗어나게 하고, 두 동생을 학교에 보낸 것은 여동생 말마따나 '희생'의 덕이었다. 이 엄연한 현실 앞에서 '고맙다'는 말은 어쩌면 가장 적절하고 진실한 말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자신의 일마저 여동생의 희생을 먹이로 하며 고마워할 수는 없었다. 그 원수 같은 가난을 물리치고 돈을 빨리 벌려면 분명 취직보다는 하청업체를 차려야 했다. 여동생의 말은 백 번 옳았다. 그러나 또 한 가지 분명한사실이 있었다. 아무리 가난이 지긋지긋했지만 자신의 자존심을 그렇게 더럽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여동생에게는 아무 응답도 없이 그 회사와 맞먹을 만한 회사에 입사시험을 쳤다.

허진은 현관을 나서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여동생 미경이도 자신의 이런 선택을 훨씬 더 좋아할 것 같았다. 자기를 옹색한 입장에 처하지 않게 해준 오빠에게 감사하리라 생각하며 그는 담배연기를 후련하게 내뿜었다.

미경아, 걱정하지 마라. 시시한 월급쟁이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이 나라는 이제 발동을 걸기 시작했으니까 앞으로 사업을 일으킬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내가 가난에 원수 갚는 모습을 똑똑히 보여주마.’

이틀 뒤에 최종 합격자 발표를 했다. 허진은 자기 이름을 확인하고 돌아서며 제일 먼저 유일표를 생각했다. 12층짜리 높고 높은 건물의 일류 회사에 근무하게 된 것은 유일표의 덕이 가장 컸다. 어려운 고비마다 유일표는 친구들을 앞장서 이끌며 자신을 도와주고 용기를 북돋워주곤 했었다. 허진은 마음이 급해 전화부터 걸고 싶었지만 재건대에는 전화가 없었다. 그는 버스정류장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난 인생의 절반은 포기했어. 그렇다고 승려가 되거나 신부가 될 수도 없잖아. 내 기질에 전혀 맞지 않으니까. 난 여기가 딱 좋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

유일표가 하는 말이었다. 고등학교 때 정치가 지망생이었던 그가 넝마주이들과 함께 재건대에서 살수밖에 없는 것이 너무 기막히고 어이없었다. 아버지 때문에 시퍼렇게 젊고 능력 있는 그가 그렇게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연좌제...... 연좌제...... 이런 잔혹한 법을 시행하는 나라가 어디 또 있을까. 분단...... 분단...... 그건 무엇인가......’

유일표가 딱하면 딱할수록 허진은 그런 현실에 분노하고 괴로워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는 절망에 깊이 빠지며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 앞에서 자신은 벌레만도 못한 존재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일표야. 나 합격했다."

허진은 기어드는 소리로 겨우 말하며 눈길을 떨구었다.

"와아, 잘됐다 축하한다. 오늘 저녁에 당장 축하주 마시게 연락하자."

유일표는 허진을 얼싸안으며 외쳤다. 허진은 말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유일표의 우정이 그렇게 뜨거울수록 미안하고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사회진출이 완전히 막혀 넝마더미 속에 파묻혀 있는 유일표에게 자신의 일류회사 취직은 또 다른 상처가 될 것이 분명했다. 유일표에게 고마움을 가장 먼저 표해야 하고, 그렇게 하고 보니 그를 괴롭히는 것이 되고, 이런 미묘한 관계가 허진은 못내 옹색스러웠다. 자신을 구원해 준 넝마더미 재건대에서 자신이 빠져나가게 되자 그 빈자리를 채우듯 유일표가 들어섰다. 그러나 유일표가 언제 이곳을 벗어나게 될지 기약이 없어 허진은 더없이 우울하고 착잡했다.

"가자. 점심 먹고 식당에서 전화 빌려 쓰게."

유일표는 때가 더께 진 목장갑을 벗으며 환하게 웃었다.

"주한이도 그렇고 상재도 그렇고, 다 매인 몸들이라 오늘 당장 가능할까?"

"저희들이 아무리 바쁜 척해도 이 소식 들으면 별 수 없이 쫓아오게 돼있어. 철공소 직공 허진이 거기서 좌절하지 않고 대학을 졸업하고, 당당하게 일류회사의 직원이 됐으니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어디 있냐. 말을 하고 보니 지나온 세월이 참 꿈만 같다야."

유일표는 감회 깊은 얼굴이 되며 허진의 어깨를 지그시 잡았다. 묵직하고 우수 어린 그의 얼굴에는 사나이가 살아온 29년 세월이 담겨 있었다.

"다 너희들 덕이야. 난 뭐라고 할 말이 없어."

허진은 겨우 이렇게 말하며, 말이라는 것이 속마음을 털어놓기에 얼마나 마땅찮고, 진심을 말로 나타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또 느끼고 있었다.

"덕은 무슨. 모든 게 네가 꺾이지 않고 이겨낸 결과야. 솔직히 말해서 난 너를 지켜보면서 위태위태하고 아슬아슬하기도 했는데, 네가 그렇게 끈질기게 버텨내는 걸 보고 놀랐어. 그런 집념과 인내심이면 앞으로의 길이야. 더 볼 것 없이 탄탄대로야."

"모르겠어. 사회생활이라는 걸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겁나고 긴장되고 그래."

"그거 뭘 별거겠어? 군대생활도 다 이겨냈는데. 자아, 가자. 배고프다."

작업복을 대충 턴 유일표가 허진의 팔을 툭 치며 걸음을 옮겨놓았다. 남산의 나무들은 아무런 군더더기 없이 잎들을 다 떨군 채 추운 모습들로 오롯이 서 있었다. 허진은 무심코 그 겨울나무들을 바라보다가 남산이 몇 년 사이에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등산객이 많아진 대신 나무들은 표 나게 줄고 있었다. 그리고 전보다 더욱 많아진 자동차들은 심한 소음을 일으키며 남산 중턱을 질주해 대고 있었다.

"박정희는 틀렸어. 4년씩 두 번이나 해먹었으면 됐지. 왜 법을 맘대로 뜯어고치고 그래. 이승만하고 뭐가 달라."

"말조심해. 이승만은 부정부패로 나라 망쳤지만 박정희는 이렇게 살기 좋게 경제발전 시키고 있잖아. 막 좋아지는 판에 그 양반이 관두면 누가 맡아 할 거야.인물이 없다구, 인물이."

"자네 술잔 얻어먹었구먼. 공화당에서 하는 소리 똑같이 하는 걸 보니 괜히 박정희, 박정희 하지 말어. 어쨌거나 독재는 절대로 안 돼. 나라 망하니까."

"아니, 그럼 야당이 하면 나라가 제대로 될 것 같애?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질 말어. 야당은 틀렸어."

"이 사람 이거 순 엉터리야. 야당이 하면 안 된다니.시켜보지도 않고 자네가 어떻게 알어. 그게 말이 돼?"

"어허 이 사람들아, 이러다가 쌈 나겠어. 그만들 해, 그만."

연탄가게를 겸한 구멍가게 앞에서 네댓 명의 남자들이 서로 질세라 기를 세우고 있었다. 대통령 선거바람이 남산 아래 골목에도 어김없이 불어대고 있는 판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 말 한가락씩은 다 잘해. 이번에 누가 될 것 같애?"

허진이 팍웃으며 유일표를 쳐다보았다.

"보나마나 아니겠어. 재건대에도 벌써 밀가루고 비누고 돌았는데, 난 관심 없어."

유일표는 쓴 얼굴로 짭짭 입맛을 다셨다. 곰탕을 시켜놓고 유일표는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최주한도 이상재도 통화가 되지 않았다.

ㅎ건설회사의 관리직에 근무하는 최주한은 포항에 출장 중이었고, 신문사 기자로서 필수적으로 거쳐야 한다는 경찰서 출입을 하느라고 언제나 허덕거리는 햇병아리 기자 이상재는 당연한 것처럼 통화가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좀 곤란하겠는데. 이상재는 이따가 오후 늦게 붙들면 되지만 최주한이가 무슨 일로 갑자기 포항에 출장을 가서 말야."

유일표가 식탁에 앉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괜찮아. 차차 하지 뭐. 근데 갑자기 포항 출장은 뭐지?"

"거 걔네 회사가 포항제철 공사 크게 맡았잖아 회사가 온통 들먹들먹 하는 모양이던데."

"그건 아는데, 공대 출신도 아니면서 건설 현장에 무슨 출장을 가고 그래."

허진이 막 나온 곰탕그릇을 끌어당겼다.

"대형 공사를 하는데 어디 공대 출신들만 필요하겠냐. 돈 없이는 될 일이 아니니까 상대 출신들도 사무실에 편히 앉아서 월급 받을 수는 없겠지."

유일표는 소금으로 간을 맞춘 곰탕에다 붉은 깍두기 국물을 듬뿍듬뿍 떠 넣었다. 그러면서 그는 어금니 사이사이에서 지르르 번져나는 신침을 삼켰다.

"그야 그렇기도 하겠군. 근데, , 형 사업은 어떻게 잘돼 가?"

허진은 숟가락에 뜬 곰탕을 불어 식히다 말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까짓 게 사업은 무슨. 한심하고 비참한 짓거리지."

유일표는 코웃음을 치며 깍두기를 와삭와삭 씹어대더니,

"친구가 잘 보살펴줘서 그럭저럭 그래. 그동안 식구들이 다 먹고 살았고 무허가 판잣집이나마 장만 했으니 재벌 된 셈이지."

볼이 미어지게 밥을 떠 넣는 그의 얼굴에 자조적인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유일표의 냉소에 허진은 그만 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자신이 바란 것은 일표네 형의 '술장사''사업'으로 번창해 일표가 어서 그쪽으로라도 옮겨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재건대의 생활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남자의 평생을 걸 만한 직업이 아니었다. 더구나 자기가 끌어들인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혼자만 빠져 나간다는 것이 영 께름칙했다. 그런데 유일표는 제 형이 하는 일을 '한심하고 비참한 짓거리'로 일축해 버렸다.

"그런데 말이다...... 언제까지고 여기 있을 순 없지 않겠니?"

허진은 유일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에 언뜻 물기가 느껴졌다.

"네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다 알아. 너 말야, 나한테 미안한 생각 전혀 갖지 말어. 그리고 앞날 걱정도 하지 말고. 그동안 많이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생각했는데...... 인생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거 아니냐. 나 말야, 솔직하게 말하자면 재건대 생활이 행복하지 않아. 그렇다고 불행하지도 않아. 왜냐하면 난 여기서 대학생들과 함께 애들을 가르치면서 그런대로 삶의 의미를 찾고 있으니까. 두고 봐야겠지만, 그 의미가 사회적으로 커질 수도 있으니까 내 걱정일랑 말고 너나 잘해. 월급 많이 받으면 자주 술이나 사구."

유일표는 좌절과 체념의 상처에서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는 가슴을 감춘 채 밝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미안해. 아무 도움도 못 돼서."

허진은 고개를 떨구더니 곰탕을 마구 퍼 넣기 시작했다. 그런 허진을 바라보며 유일표는 목이 메고 있었다. 허진은 지긋지긋한 가난에 치를 떨며 어서 어른이 되어 부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털어놓다가는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창피스러워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는 마침내 그 길로 들어섰다. 경제발전의 물결을 타고 번창일로에 있는 일류 회사에 입사했으니 그의 꿈은 머지않아 이루어질 거였다. 유일표는 자신에게 드리워진 어둠이 한층 짙고 깊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서 가서 출근할 준비를 해라. 우린 주말께나 만나도록 하자."

유일표는 재건대 앞에서 허진을 보냈다.

"아이고, 하느님 고맙습니다. 그래, 우리 진이 장하고 장하다. 이젠 이 할미가 맘 놓고 눈 감게 됐구나. 고맙다, 고마워."

허진의 할머니는 손자의 손등을 쓸고 또 쓸며 울먹였다. 세월은 아이들에게 관대한 만큼 노인들에게는 잔인해 허진의 할머니 모습은 진기가 다 빠져 파삭 마른 가랑잎 같았다. 더 늙으려야 늙을 수 없도록 할머니 얼굴을 온통 뒤덮고 있는 무수한 주름살들을 보면서 허진은 가까스로 한마디를 했다.

"할머니, 오래오래 사세요......"

"그래, 이젠 여한이 없다만 네가 어서 장가들어 증손자를 안아보고 싶은 마음이 동하니 이 무슨 욕심이누."

허진의 할머니는 얼굴은 웃고 있는데 손으로는 눈물을 훔쳐내고 있었다.

"네에, 할머니......"

허진은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해야 할 효도가 월급을 타다가 편히 모시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나이 어느덧 스물아홉이나 되어 있는 것에 허진은 당황하고 있었다.

출근 첫날부터 허진은 술이 취해야 했다. 첫날은 회사 전체의 신입사원 환영회, 둘째 날은 부서 축하회, 셋째 날은 과 신고식 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게 단순히 놀고먹는 술타령이 아니라는 것을 허진은 느끼고 있었다. 술자리마다 형식과 방법은 조금씩 달라도 다같이 단합하여 열심히 일하자는 것이 강조되고 있었고, 술자리가 거듭될 때마다 서로 간의 거리감과 서먹거림이 급속도로 허물어지면서 친근감이 생기고 소속감이 강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물도 한숨도 나 홀로 씹어 삼키며......"

허진은 얼큰한 술기운에 실려 출렁거리는 기분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걷고 있었다. 군대에서 그야말로 '맨발의 청춘'인 자신의 신세를 비관하며 절절하게 부른 노래였다. 그 비감한 느낌의 유행가를 신세가 달라진 입장에서 다시 불러보니 그 맛 또한 색다른 데가 있었다. 노랫가락을 따라 비참한 감정에 자꾸 빠져들었던 전과는 반대로 차츰차츰 커가는 승리감을 맛볼 수 있었다.

"진아, 큰일났다.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

허진이 쪽대문을 들어서자마자 할머니가 성급하게 쏟아놓았다.

"......!"

허진은 순간적으로 긴장하며 놀라움보다는 '또 뭐야!' 하는 역정이 솟아오름을 느꼈다. 그동안 당해온 궂은일들이 너무 지겹고, 지칠 대로 지쳐서 이젠 그만 피하고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일어나고는 했다.

"아니, 저어......"

허진의 기색을 본 할머니는 고개를 떨구며 목소리가 처져 내렸다.

"할머니, 괜찮아요. 무슨 일인지 말씀해 보세요. 큰일 났다니...... 혹시 미경이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요?"

허진은 여동생이 항상 불안스러운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글쎄 말이다 그게 ......"

허진의 할머니는 한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뜨거운 한숨을 토하고는,

"글쎄 그 사람, 박 사장이 애를 내놓으라고 한다는구나."

그 목소리에 울음이 섞이고 있었다.

"애를요......?"

허진은 대청마루로 올라서다가 충격에 부딪쳤고,

"젖 뗐으니 이젠 호적에 올리고 데려가야 한다는구나."

허진의 할머니는 치마 끝으로 눈물을 훔쳤다. 허진은 방에 주저앉으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호적에 올려 데려간다...... 그만 첩의 관계마저 청산하겠다는 뜻이었다. 그건 시기의 빠르고 늦은 차이일 뿐 어차피 한 번은 당해야 될 일이었다. 어쩌면 빨리 당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언제 데려간데요?"

"이달 말이라고 하더라."

"미경이는 어때요?"

"글쎄 그게 큰일이다 모자의 정을 억지로 끊는 것이니 그게 말이 되니.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

"큰일일 거 없어요. 올 게 온 거지요. 제가 곧 만나볼 테니까 할머니도 맘 약한 소리 하고 그러지 마세요."

허진의 냉정한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그래...... 기구한 팔자 타고 났으니."

그녀는 손자의 서슬에 눈물을 씹으며 저런 대목은 어찌 저리 제 할아버지를 빼박았누, 생각하고 있었다.

허진은 밤새껏 잠을 설쳤다. 여동생이 박 사장의 애를 임신한 걸 알았을 때처럼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러나 그때 감정으로도 법으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처럼 이제 또 속수무책이었다. 군대라는 국가 권력 아래서 꼼짝달싹을 못했던 것처럼 거대한 회사의 금력 또한 어마어마한 권력이었다. 가난뱅이를 놓고 취사선택할 수 있는 권한은 전적으로 부자에게 있었다. 더구나, 여자가 미성년자가 아니고, 경제적 혜택을 받아버린 이상 그 관계는 법적으로도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

다음날은 유일표와 약속한 주말이었다. 허진은 하루 종일 우울한 채로 여동생에게 전화를 할까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다이얼을 돌리지 못하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야아, 축하한다, 축하해!"

"드디어 맨발의 청춘을 면했구나. 또 하나의 불사조 탄생이야. 허진 만만세다."

친구들의 넘치는 축하를 받으며 허진은 행복한 배우 노릇 하기에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재를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가 어렵사리 마음을 수습하고 기자생활을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까지 그에게 죄의식이 가시지 않고 남아 있는데 새롭게 죄가 겹치는 기분이었다.

", 오늘은 날도 날이고 하니까 왕대포 집어치우고 좀 고상하게 놀자."

최주한이 커피 잔을 들며 말했다.

", 보나스라도 탔냐? 돈만 내겠다면 방석집이라도 얼마든지 가주지."

이상재가 담배연기를 씹듯이 말했다.

"햇병아리 기자가 똥배짱만 두둑해 가지고, 요정은 아직 멀었고, 맥주홀 정도는 가야 어울리지 않겠어?"

"그것도 괜찮아. 우리도 이젠 슬슬 급을 올려야지. 소비가 미덕인 세상에서 번만큼 폼을 잡을 줄 알긴 해야지."

이상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둘이 동의하는 것으로 일단 술집 종류는 정해졌다. 허진은 축하를 받아야 할 입장이었고, 유일표는 예나 지금이나 돈 쓰는 일 앞에서는 그저 유구무언이었다.

"가자, 청계천으로!"

최주한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살기가 점점 나아진다는 분위기 속에서 변하는 것들이 많았는데, 그중의 하나가 서울 전역에 걸쳐서 번창하는 맥주홀이었다. 그런데 청계천 일대에서 성업 중인 맥주홀들은 그 규모로나 치장으로나 으뜸이었다. 그들은 청계천4가 어림에서 택시를 내렸다.

"빌어먹을, 난 저놈의 건물만 보면 기분 나쁘더라 시커먼 게. 어이 기자 양반, 저게 그 사람 거라는 소문이 파다한데, 그게 사실이야?"

유일표가 턱짓하는 쪽으로 그들의 눈길이 쏠렸다. 그쪽에는 검은 바탕에 검은 색감의 유리로 치장된 최신식 건물이 엄청난 체구를 과시하며 치솟아 있었다. 그건 청계천 명물로 등장한 삼일빌딩이었다.

"글쎄, 그런 소문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하는 속담이 꼭꼭 들어맞잖아? 나도 확인할 길이 없으니까 그 정도로 생각해 둬."

이상재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도대체 말이나 돼? 총리라는 자가 저렇게 어마어마한 삘딩을 지어대다니. 그 돈 다 어디서 났어?"

최주한의 목소리가 커졌다.

"어디 그것뿐이야? 시청 앞 무슨 삘딩은 시장 거고, 퇴계로 무슨 호텔은 공화당 누구 거라고 하잖아. 다 좋은 자리 있을 때 한탕씩 해먹고 잘린 거지. 이 정부 이거 아주 괜찮은 정부야."

이상재의 입가에 쓴웃음이 어렸다.

"빌어먹을, 이놈이고 저놈이고 해먹을 돈들이 어찌 그리 많지?"

유일표가 푹 한숨을 쉬었다.

"순진하긴, 외자도입이 30억 불이 넘는다고 했잖아. , 부동산 투기는 불붙고. 기업한테 뜯어서 부동산에 투기하면...... 일확천금! 그거 아주 기막히잖아."

이상재가 더 말하지 말라는 듯 손을 저으며 헛웃음을 쳤다.

"아 참, 느네들 이 소문 들었냐? 잘린 중정 부장 있잖아, 그 친구 집에 추석에 선물이 쏟아져 들어오는데 말야, 어떤 사람이 사과 한 궤짝을 보낸 거야. 조그만 케이크 상자나 와이셔츠 상자 안에 고액 수표가 들어 있어야 하는데, 커다랗고 엉성한 나무궤짝에서 왕겨가 흘러나오면서 사과들이 쭉 박혀 있었으니 어떻게 됐겠어. 그 부장님 화가 나서 자가용 운전수한테 외쳤어. , 너 이것 가져다 먹어. 운전수가 궤짝을 집으로 가져가서 사과만 골라내려고 궤짝을 엎었는데, 이게 뭐야! 와르르 쏟아진 건 사과가 아니라 고액권 현찰 뭉치들이었어. 사과로는 위에 한 겹만 살짝 덮었던 거야."

최주한은 말을 마치며 네온사인 휘황한 맥주홀 어귀로 들어섰다.

"그래서 그 돈은 어쨌어?"

허진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어쨌을 것 같애? 그런 돈은 깨끗하게 먹어치우지 못하면 바보 천친 거야. 어쨌든 삼선교에 있는 그 부장 나리 집을 지나가면서 한번 본 적이 있는데, 참 어마어마해. 담이 어찌나 높은지 안에 보이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데, 담의 둘레가 개인집이라고 할 수 없이 넓고, 담을 쌓은 재료가 값비싼 검은 벽돌이야. 그 담 쌓은 돈만 해도 서민주택 몇 채 값은 될 거야."

"그래, 다들 잘 먹고 잘 살라고 해라.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만세다."

유일표가 또 한숨을 쉬었다. 어디나 그렇듯 음악소리 요란한 맥주홀에는 칸막이 방들이 잇대어 있었다. 그들은 안내하는 대로 방 하나를 차지했다.

"안녕하세요, 실례합니다."

맥주보다 먼저 들이닥친 것은 여자들이었다. 무의 혼란한 긴 월남치마를 입은 아가씨들은 잽싸게 남자들 사이사이에 끼어 앉았다. 미스 서예요, 미스 조예요, 하며 아가씨들이 인사를 해나갔다.

"미스 최라고? 이거 좀 난처한데."

최주한이 갑자기 고개를 내둘렀다.

", 최 씨예요? 어머, 보기하고 다르게 순진하셔라. 이런 데서 진짜 자기 성 쓰는 애들이 어딨어요. 이리 순진하신 걸 보니까 어쩜 아다라시 총각인지도 모르겠네. 나 오늘 재수 왔따다."

최주한에게 붙어 앉은 아가씨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손뼉을 쳤다.

"그래, 너 눈 한번 밝아서 좋구나. 나 오산 쑥고개 양키부데에서 3년 동안 썩으면서도 숫총각 딱지 못 뗀 순진파거든. 오늘 밤 네가 어떻게 좀 해볼래?"

최주한이 능글맞게 감고 들었고,

"어머, 양공주 일개 사단이 있다는 그 유명한 쑥고개에서 숫총각으로 제대를 하셨다니 이 얼마나 기막힌 순진파셔. 내가 오늘 밤 특별히 공짜로 싸아비스 해드릴게."

아가씨가 최주한의 팔을 감으며 넉살좋게 반죽을 맞추고 들었다.

"술도 안 마시고 잘들 돌아간다. 자아 술부터 마시자."

마침 맥주와 안주를 내오자 이상재가 물수건을 던지며 말했다. 아가씨들이 제각기 맥주병을 들어 남자들의 잔에 솜씨 있게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느네들이 성도, 이름도, 나이도, 고향까지도 다 가짜로 대는데 딱 한 가지는 진짜가 있지. 집들이 다 시골이라는 거."

"어머나! 그 어려운 걸 어쩜 그리 콕 찍어서 알아맞히세요?"

최주한의 아가씨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고, 그들의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그래, 중단 없는 전진을 계속하는 경제발전이라는 게 순진한 시골 처녀들 다 서울로 끌어올려 신세 아주 좋게 만들고 있다 자아, 우리의 거룩하고 위대한 경제발전을 위하여!"

이상재가 쓴웃음이 물린 입술을 비틀며 잔을 들었다. 그들 넷은 잔을 부딪쳤고, 아가씨들은 재빠르게 안주를 입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중단 없는 전진'이라는 말은 대통령이 신년사를 하고 난 다음부터 슬슬 바람을 타고 있었다.

"너 포항 출장은 왜 갔었어?"

유일표가 최주한을 쳐다보았다.

", 무슨 일이 좀 생겨서."

최주한이 순간적으로 일어난 당황한 기색을 어물쩍 감추며 내렸던 술잔을 다시 들어올렸다.

", 내가 먼저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말야, 거기 공사장에 무슨 사고 났냐?"

이상재가 눈빛 날카롭게 물었다.

"아니. 현장에 가 계신 사장님께 급히 보여드려야 할 서류가 있어서."

최주한은 속내를 싹 감추고 태연하게 둘러댔다. 회사에서 함구령이 내려진 이상 아무리 친구라 해도 그가 기자니까 특급 경계 대상이었다.

"새끼, 너 참 충성이로구나? 면전에 있지도 않는 사장 놓고 최대 존대를 써대고 말야. 얌마 사람 서글프게 만들지 마라. 아무리 월급쟁이라 해도."

이상재가 술잔을 불쑥 내밀었고,

"얌마. 좀 봐주라. 말단사원이라 잔뜩 쫄아서 입에 붙은 대로 나온 건데 뭘 그리 시비냐. 이 새끼 이거 기자되더니 사람 깐죽깐죽하게 변해 간다니까."

최주한이 술잔을 받으며 눈총을 쏘았다. 친구는 팔십에도 아이들이더라고 그들의 언행도 고등학교 시절 그대로였다.

"그런데 말야. 제철공장을 세운다는 게 우리나라 형편에 무리 아닌가?"

유일표는 최주한한테서 별다른 눈치를 채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 그게 쉽지는 않은 일인데 세우기는 꼭 세워야 해. 우리가 언제까지고 옷감이나 가발 팔아먹고, 보세가공이나 해먹을 수는 없잖아. 그래가지고는 시장이 뻔하고, 제자리걸음으로 끝나고 마니까. 우리가 이 상태에서 도약적 발전을 하려면 중화학공업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하는 건 필수적이야. 그런데 중화학공업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가 바로 철강이잖아, 지금 우리나라에서 소비하는 철강의 99프로가 외국에서 수입하는 거야. 해마다 그 액수가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고, 우리가 중공업으로 전환하려고 해도 철강을 비싸게 수입해서 상품을 만들어가지고는 외국에 팔아먹을 방법이 없어. 코리아가 잘 알려지지도 않았는데 물건 값까지 비싸면 누가 사겠어. 한마디로 철강을 우리 손으로 싸게 생산해야만 수입, 수출에서 동시에 딸라를 벌어들일 수 있다 그거야. 이건 정권 차원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아주 중대한 기로에 서 있는 거니까 제철공장은 반드시 지어져야 해."

이상재는 마치 세미나의 주제 발표자처럼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시작이 반이라니까 어떻게든 완성이 되겠지. 근데 야 기자 나리, 요새 정치판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최주한은 어서 포항제철 이야기를 끝막음하려고 이상재에게 술잔을 내밀며 화제를 바꾸어버렸다. 네 사람 사이에 술잔들은 쉼 없이 돌고, 아가씨들은 안주를 열심히 야금거리고 질겅거리며 술도 제때제때 따라 잔을 채우는 두 가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 나라에 무슨 정치가 있어야 말이지. 술맛 떨어지는데 정치 얘긴 꺼내지도 말어. 자아, 우리의 슬픈 청춘을 위해서 기분 좋게 술이나 마시자."

이상재가 술잔을 들었다.

"아저씨도 기자세요? 두 분만 잠바를 입으셨는데."

유일표의 아가씨가 나직하게 물었다.

"? 술집에 있는 느네들이 남자들 직업 알아맞히는 괴수라고 하던데, 그래도 내 직업은 죽어도 못 알아맞힐걸."

유일표는 술기운 번진 얼굴로 히죽히죽 웃더니,

"난 이 사람들하고는 달리 특별한 직업이지. 재건대 넝마주이. 어때?"

하고는 아가씨를 와락 껴안더니 입을 맞추었다.

 

 

45. 이히 리베 디히

"독일제가 뭐든지 다 좋은 줄 알았더니 국산만 영 못한 것도 있더라구요."

창고의 벽에 걸린 작은 거울 속에서 김병찬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국산보다 못한 것? 글쎄에......"

아르바이트 이발사 정수남은 가위질을 하다 말고 거울 속의 얼굴과 눈길을 맞추며 고개를 갸웃했다.

"거 있잖아요, 치약이요. 치약은 아주 형편없더라구요."

", 맞아요. 거품도 나지 않고 화한 치약 냄새도 나지 않고, 뭔가 느끼한 것도 같고 시큼한 것도 같은 게 영 파이더라구요. 그레서 국산 쓰려고 집에 편지를 보냈어요. 치약 빨리 보내라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권영진이 맞장구를 치고 나섰다.

"흐흐흐흐......"

정수남은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가위질을 멈춘 채 웃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웬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해서 정수남을 쳐다보았다.

"으흐흐흐흐......"

정수남은 짚이는 것이 있어서 허리가 굽어지며 웃음이 농익고 있었다.

"아니, 왜 그러세요?"

"뭐가 잘못됐나요?"

두 사람은 더 의아스러운 얼굴로 정수남을 쳐다보다가 서로를 쳐다보다가 했다.

"아이고, 아이고, 뱃창자가 다 땡기려고 하네."

정수남은 겨우 웃음을 잡고는,

"권 씨, 빨리 가서 그 치약 가지고 와보쇼" 하며 권영진에게 일렀다.

"왜요? 그놈에 치약 같지도 않은 놈에 치약."

회사 숙소까지 가기 싫다는 듯 권영진이 불퉁스럽게 말했다.

"싫으면 어쩔 수 없지. 내가 알기로는 독일 치약은 국산이 족보도 못 내밀게 좋은데. 그게 확실히 치약이기나 한지 모르겠네."

정수남이 가위질을 하며 실실 웃었다.

"아니 그럼, 그게 치약이 아닐 수도 있다 그건가요? 생긴 모양이 국산하고 똑같은 게 틀림없이 치약이었는데."

"치약 모양하고 똑같이 튜브에 담긴 게 뭐 치약 한 가지뿐인 줄 아슈? 이것저것. 한두 가지가 아니란 말이오."

"아니, 그래요? 그럼 그게 치약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아이고, 이거 큰일 났네. 빨리 가서 가져와 봐야지."

권영진이 깜짝 놀라서 허둥지둥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아 참 베트콩에 마라리아 모기, 독사들까지 드글드글하던 정글을 생각하면 월남이 지긋지긋하지만, 미제 물건들 흔하게 쓰던 걸 생각하면 월남이 그립기도 해요. 미제 치약 끝내 주거든요."

김병찬은 입버릇처럼 또 월남 이야기를 꺼냈다.

"그거 그럴 수 있는 일이오. 그런데, 월남전은 어찌 돼가고 있소? 여기 독일 사람들은 미국을 영 안 좋게 생각하고 있는데. 프랑스 사람들도 그렇고. 미국이 결국 베트콩을 이기지 못할 거라는 게 여기 사람들 생각인데, 직접 싸워보니 베트콩들이 어때요?"

정수남은 다시 가위질을 시작하며 평소에 궁금하게 생각해 왔던 말을 꺼냈다.

"나도 여기 와서 그런 눈치를 챘는데, 거기서야 미국이 틀림없이 이긴다 생각하고 열나게 총질을 해댔지요. 왜냐면 미국은 우리의 혈맹이고, 공산당은 우리의 공적이다. 그러므로 공산당 놈들은 씨를 말려야 한다고 교육받았으니까요. 근데 미국이 베트콩들을 이기지 못할 거라는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 때도 느낀 거지만 베트콩들 지독한 것 하나는 알아줘야 해요. 전쟁터에서야 용감한 게 최고 아니겠어요? 근데 베트콩들은 그냥 용감한 게 아니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너 죽고 나 죽자하고 덤비니 세상에 그런 독종들이 어디 있겠어요. 정글은 겹겹이 끝도 없이 깊지, 마라리아 모기떼 독사 같은 것은 드글드글하지, 온갖 부비트랩(베트콩이 설치한 살상용 덫)은 정글 여기저기서 생명을 노리고 있지, 베트콩들은 산지사방에 땅굴을 파대며 치고 숨고 치고 숨고 해버리지, 미군들이 죽어라고 골탕 먹고 있는 건 사실이지요. 한국군도 고생들 많이 하고 애 많이 먹고 있고요. 그렇지만 미국이 지는 일이 생기겠어요? 미국이 얼마나 센 나란데."

김병찬은 끝말에 힘을 넣었다. 그는 파월장병에게 베푸는 우선권의 혜택을 받고 독일에 온 사람다웠다. 정부에서는 파월장병과 전투경찰 출신들에게 '파독광부 우선권'을 언제부턴가 부여하고 있었다.

"글쎄요, 두고 봅시다. 어쨌거나 남들 나라 일이니까. 우리야 6.25 때 끔찍하게 싸워 몰피 봤으니까 이젠 구경이나 하면서 잘들 싸워보라고 해요."

"아니, 그렇게 속 편한 소리 하면 안 돼요. 지금도 정글에서 우리 한국군이 피 흘리고 있다구요."

김병찬이 불쑥 언성을 높였다.

"이런, 흥분하지 마슈. 혈맹이니 공산당 타도니 하는 건 겉보기 좋게 내세운 이유고, 솔직하게 말해 우리가 파병한 목적은 당장 급하니까 돈 벌자는 것 아니었소? 우리가 이 먼 나라까지 요 잘난 광부 노릇 온 것처럼. 그러니까 한국군들 슬슬 싸우는 시늉만 해가면서 돈을 벌면 된다 그거요. 돈 많아 몸살 나는 미국 돈 눈치껏 빼먹는 게 임자지 목숨 내걸고 죽자 사자 싸울 것 없는 거 아니오? 내 말 틀렸소?"

"글쎄요......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네요. 왜 진작 그런 생각을 못했는지 모르겠군요."

김병찬이 거울 속에서 떫은 표정을 지었다.

"김 씨 그 태권도 실력은 베트콩들한테 써먹어봤어요?"

"아아니요. 베트콩들이 육박전을 붙어와야 말이지요. 파병한 다음부터 한국군에서는 더욱 열나게 태권도를 가르쳐대지만 그거 써먹기 어려워요. 베트콩들은 자기네 몸집이 작다는 걸 알아서 그런지 어쩐지 육박전으로 돌격해 오는 일이 없으니까요. 그건 만일에 대비한 예비용일 뿐이지요."

정수남은 김병찬의 태권도 실력으로 그가 파월장병이라는 것을 더욱 실감하고 있었다. 그는 오자마자 회사의 기숙사 잠자리 문제로 싸움을 벌여 태권도 2단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었다. 그 다음부터 그는 광부들 사이에서 주먹이 가장 센 사람으로 통했다.

"아이고 힘들어. 빤히 보이면서도 혼자 갔다 올래니까 머네."

권영진은 숨을 몰아쉬며 들어와서는,

"여깄어요, 이 골치 아픈 것"

하며 튜브를 정수남에게 내밀었다. 튜브를 받아든 정수남은 곧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그 웃음소리는 아까에 비할 수 없도록 걸퍽지고 요란스러웠다

"아니, 왜 그래요?"

"뭐가 잘못됐나 보지요?"

두 사람은 자기들이 무슨 실수를 한 낌새를 채고는 어색하고 민망한 얼굴로 정수남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하하하하......"

정수남은 배를 움켜잡고 허리가 굽어지며 웃음을 걷잡지 못하고 있었다.

"저게 치약이 아닌 거 아냐?"

김병찬이 권영진을 멀뚱하게 쳐다보았고,

"글쎄, 그런 것 같은데."

권영진이 뒷덜미를 문지르며 머쓱해져 있었다.

"아이고, 아이고, 나 배꼽 다 빠지겠네. 이거 원 이럴 수가 있나......"

정수남은 가까스로 웃음을 다스리고는,

"이게 뭔지 아쇼? 마요네즈요 마요네즈"

하며 또 쿡쿡거렸다.

"마요네즈요 ......?"

김병찬이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고,

"그게 치약이 아닌가 본데, 그럼 뭐지요?"

권영진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이건 샐러드 만들 때 쓰는 소스요."

"샐러드요7"

", 또 샐러드가 뭔지 모르시는구만. 샐러드란 여러 가지 야채들을 섞어 먹는 것인데, 그냥 먹으면 풋내가 나니까 이걸 쳐서 버무려 먹는 거요."

"이런 제길, 그러니까 느끼하고 시큼하고 이상했지."

", 거 독일 사람들 이상하네. 그런 걸 병에 넣어 팔아야지 왜 튜브에 넣나 그래. 튜브에 들었으니까 치약인 줄 알았지."

김병찬이 떫은 얼굴로 혀를 찼다.

"어허허, 그래도 이건 불행 중 다행이오. 목으로 넘어가도 괜찮은 거니까. 우리가 처음 왔을 때는 어떤 사람이 포마드를 치약인 줄 알고 쓰다가 입 안이 다 부르트고 야단났었어요. 허허허허 ......"

정수남의 입에서는 연신 웃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포마드요? 그럼 그것도 튜브에 들었던가 보지요?"

"글쎄, 우리가 무식한 게 아니라 독일 사람들이 문제라니까. 왜 그런 걸 다 튜브에 넣느냔 말야."

김병찬은 화까지 내고 있었다.

"맞소. 독일 사람들이 다 잘못한 거요. 허허허허...... 다 됐으니 일어나시오."

정수남은 김병찬의 목에 두른 보자기를 풀었다.

"제기럴, 알아야 면장한다는 말 괜히 나온 게 아니라니까. 독일 와서 촌놈 노릇 톡톡히 했네."

김병찬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투덜거렸다.

"그러게 말야. 이 얘기 안 꺼내고 그냥 지나갔더라면 우리나라에서 치약 부쳐오고 어쩌고 하느라고 헛돈 깨질 뻔했지 뭐야. 우리보다 발달한 나라에서는 그런 걸 다 튜브에 넣는구먼. 그게 더 편리하긴 하겠어."

권영진이 의자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어 ...... 죄송하지만 오늘이 일요일이고 하니까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될까요?"

김병찬이 정수남의 눈치를 보며 망설였다.

"부탁? 어디 말해 보슈."

정수남은 빗과 가위를 들며 별로 달갑지 않은 기색으로 말했다.

"저어 다른 게 아니라, 아무리 참고 견디려고 해도 더는 참을 수 없어서 그러는데 오늘 점심을 좀 얻어먹을 수 없을까요? 박 씨가 김치 담그는 솜씨가 기똥차다고 소문이 나 있는데, 쌀밥에 김치 한번 먹어보면 소원이 없겠어요."

", 식당 음식에 질려서 빵에 고추장을 발라 먹고 있는데, 미칠 지경이에요. 돈을 내면 기분 상하실지도 모르고 해서 저희들이 담배를 준비했어요."

권영진이 빠르게 말을 이어 붙였다.

"글쎄, 그 심정들 충분히 이해는 하겠는데, 나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니까 이따가 박 씨한테 말해 보겠소."

정수남의 말은 사실이었다. 밥은 자기가하는 거지만 김치는 박갑동이 담그는 거니까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박갑동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게 김치를 잘 담그면서도 정작 김치 담그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 일이 손이 많이 가는 탓이었다. 그러나 정수남은 두 사람이 당하고 있는 괴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식성에 맞지 않는 독일 음식을 한 달 가까이 먹고 있으니 쌀밥에 김치를 먹고 싶어 환장할 시기였다.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셋방을 얻어 나을 돈을 모으려면 앞으로 두 달 정도는 더 식당 음식을 먹어야 하는 신세였다 외환은행을 통해서 한국에 의무적으로 보내야 하는 돈 때문에 새로 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똑같은 형편이었다. 그 기한을 줄이려면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보태는 수밖에 없었다.

"자아, 다 됐소. 내가 가서 박 씨하고 의논해 볼 테니까 조금 있다가 전화 하슈."

정수남은 권영진의 목에서 풀어낸 보자기를 털었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 빵에 고추장 발라 먹는 저희들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두 사람이 허리를 굽실거렸다. 정수남이 2층 방으로 올라가니 박갑동은 식당에서 열심히 김치를 담그고 있었다.

"어이 박 씨, 그 파월장병 있잖소? 그 사람이 친구하고 둘이서 우리한테 오늘 점심을 좀 얻어먹기를 바라는데 어떡하면 좋을까? 빵에 고추장을 발라 먹고 있다고 죽는 소리를 하는데."

정수남은 박갑동 옆으로 다가서며 넌지시 말했다.

"그 친구들 한 달도 못 돼서 엄살 더럽게 떨고 앉았네. 빵에 고추장 발라 먹을 수 있으면 됐지 뭘 더 바래? 우리 땐 그런 것도 없잖았소."

박갑동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야 그런데, 이런 부탁 자주 들어오는 건 다 박 씨 책임이오."

"내 책임?"

박갑동은 그제서야 눈길을 돌렸다.

"그렇잖고. 박 씨가 김치 잘 담근다는 소문이 확 퍼져 있으니 그 김치에 쌀밥 먹고 싶어 하는 것 아니오. 어지간하면 인심 한번 씁시다. 태권도 2단짜리 옆에 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정 씨, 눈치 없이 남 청춘사업 망치려고 들지 마쇼. 내 사업 망쳐지면 정 씨 사업은 시작도 못해보고 빠이빠이니까."

박갑동은 고춧가루 듬뿍 찬"배추를 열심히 버무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니 그럼, 이 김치 또 미스 서한테 갖다 바치려고 담는 거요?"

"그럼 이것밖에 달리 꼬실 무슨 방법이 더 있소? 돈싸게 먹히고, 효과 크고, 부지런히 담가다 갖다 바치는 수밖에."

"그럼 파월장병 일은 글렀네."

정수남이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미스 서하고 같이 점심 먹기로 했으니까 점심때는 안 되고, 이따가 저녁으로 합시다."

", 그래요 그래. 차분하니 그게 더 좋겠어요."

정수남은 반색을 했다.

"자아, 이거 어떤가 맛 좀 보쇼."

박갑동이 고춧가루 범벅인 손으로 김치 한 쪽을 집어 내밀었다. 정수남은 입을 있는 대로 벌리고 김치를 받아먹었다.

", 최고. 최고! 무슨 특별한 재료를 더 썼는지 이건 훨씬 더 맛있는데?"

정수남은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김치를 맛있게 씹었다.

"그 재료를 꼭 말해야 알겠소? 사랑이지, 사랑."

"아이고 간지러 사람 미치겠네. 허허허허......"

정수남의 웃음소리에 맞추어 박갑동도 김치를 우물거리며 흐흐흐흐 웃고 있었다.

"이젠 점심까지 함께 먹기로 하고, 일이 뜻대로 잘 풀려가는 것 아니오? 그럼 빨리 나한테도 친구 하나 소개하라고 하시오. 몸 달아 죽겠는데."

정수남이 김치를 집어먹으며 정말 몸다는 기색으로 말했다.

"감은 익어야 홍시가 되고, 밥은 뜸이 들어야 먹는 것 아니오. 기다려요, 뜸이 다 들 때까지."

"? 그게 언제 다 드는 거요? 요새 소개해서 두 짝이 함께 연애하면 좀 좋아. 나 혼자 외톨이로 쓸쓸하지 않고 말이오."

"나도 그러고 싶은 맘이야 굴뚝같은데 아직도 날 완전히 안 믿고 있는 형편이니 거기다 대고 친구 소개해 달라고 할 수는 없잖소."

", 그것 참. 몇 안 되는 간호 장학생 놈들하고, 기혼자 놈들이 멀쩡한 총각들 혼사길 막고 애타게 만드네 그거. 속을 까뒤집어 보일 수도 없는 일이고, 그거 어쩌지요?"

"급하게 생각 말고 조금만 더 기다려요. 김치 받아먹기 시작하면서 표나게 맘이 움직이고 있으니까."

박갑동은 김치를 네모진 큰 유리병에 담으면서,

"기회 봐서 곧 말뚝 콱 박을 테니까, 말뚝 박고 나면 바로 소개시키도록 하겠소. 한국 여자들이야 말뚝 박고, 안 박고 차이가 천양지차니까. 안 그렇소?"

그는 뒷말을 소곤거리듯이 하고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맞어요, 맞어요. 뭐니뭐니 해도 그걸 빨리 해치우는 게 최고요."

정수남도 목소리를 낮게 맞추며 키득키득 웃었다. 박갑동은 사귀고 있는 간호원 서미향에게 혹시 기혼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그건 '간호 장학생'들이 피해를 입히고 떠나는 것처럼 광부들 중에서 기혼자들이 총각 행세를 하며 현지 결혼을 했다가 나중에 들통 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박갑동은 서른한 살이나 먹어 그런 의심을 더 샀다. 스물다섯이면 거의가 결혼을 하는 세태여서 서른하나면 애가 있어도 두셋은 있을 나이였다. 간호 장학생들 때문에 간호원들이 유학생을 불신하고 광부들에게 눈길을 돌리게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또 기혼자들 몇몇이 양심 없이 '피아노를 치고' 나서는 바람에 정작 총각 광부들이 피해를 입고 있었다.

"나 다녀오겠소. 미안해요. 혼자 밥 먹게 해서."

박갑동이 김치병을 보자기에 싸가지고 나섰다.

"그거, 내가 나서서 총각인 것을 보증서면 안 될까."

정수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아이고, 그래 가지고는 더 의심만사요. 한국에서 오는 호적등본도 안 믿는 판인데 한통속으로 돌아갈 것이 뻔한 친구 말 믿어주게 생겼어. 좌우간 조금만 더 기다려요. 잘 풀려가고 있는 참이니까."

박갑동은 신바람 나게 손을 흔들며 밖으로 나갔다. 한국에서 보내오는 호적등본이나 사망확인서 같은 것을 안 믿는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었다. 광부들의 임금은 독일 복지제도에 따라 기혼자와 총각이 달랐다. 기혼자의 경우 아내와 자식 하나가 있으면 가족수당이 붙어 한 달 임금이 600마르크인데 총각은 400마르크였다. 총각의 입장에서 보면 똑같은 일을 하고 200마르크나 차이가 난다는 것은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슬그머니 억울한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문서 위조였다. 서류상으로 장가를 가게 되고, 아이들도 낳게 되었다. 외국으로 가는 서류니까 구청 직원이나 면서기들이 뒷돈을 받아먹고 적당히 꾸며준 것이었다. 그 가짜 서류들을 탄광회사 에서는 공문서니까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찰떡같이 믿었다. 그래서 자식이 셋이라고 문서를 위조한 총각은 그렇지 않은 총각보다 월급을 두 배나 받는 일이 벌어졌다. 복지제도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아내가 죽게 되면 3천 마르크의 위로금을 주게 되어 있었다. 약삭빠른 광부들은 그 대목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서류상으로는 아내를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사망확인서도 공문서니까 아무 의심도 받지 않고 3천 마르크씩을 받아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1천여 명이 일하는 광산에서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같은 날 17명의 아내가 죽었다는 사망확인서가 접수된 것이다. 회사에서 이상하게 생각하고 조사에 나섰다. 곗날 한강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몰살한 것이라고 둘러댔다. 회사에서는 광부들을 조사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한국대사관에도 문의했다. 왜냐하면 그런 공문서는 대사관에 신고해 확인을 받아오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사관에서도 똑같은 대답이었다. 그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사관에 서류신고를 할 때마다 담당직원에게 1천 마르크에서 2천 마르크까지 뒷돈을 바치는 게 상례로 되어 있었으니 대답이 달라질 리 없었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더 조사를 진행시켜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말았다 주한 독일대사관에 의뢰하면 서류가 위조된 것은 금방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사건이 밝혀진 다음부터 독일 회사들은 한국대사관을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보내오는 모든 공문서들은 일단 한국 변호사의 검증을 거쳐 주한 독일대사관의 확인을 받도록 조처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기가 총각이라며 내미는 광부의 호적등본을 믿을 간호원이 있을 리 없었다.

버스에서 내린 박갑동은 옷매무시를 고치며 병원으로 빨리 걸었다. 서미향은 이상하게도 익은 김치보다는 풋김치를 더 좋아했다. 그래서 아침나절에 담가 바로 가져가려다 보니 좀 늦어진 기분이었다. 서미향을 알게 된 것도 어느덧 반년이 넘었는데 딱 부러지게 결혼이 결정되지 않고 있으니 여러 가지로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특히 미국으로 가볼까 했던 계획이 서미향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서 흔들리고 말았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 3교대로 자신의 병실을 맡고 있는 간호원 중에서 둘이 우리나라 간호원이었다. 그중에 오후 당번이 서미향이었다. 그리고 그 병원에는 우리나라 간호원들이 열 명이나 더 있었다. 그런데도 첫 눈에 마음이 끌린 것이 서미향이었다. 석탄운반차에 부딪쳐 다친 다리 때문에 입원해 있었던 7일 동안 서미향을 바라보는 설레임으로 지루한 것을 몰랐다. 그녀를 바라보면 두근거리는 가슴에서 새 기운이 샘솟았고, 그녀가 멀리 지나가기만 해도 시원한 바람이 솨아 불어왔고, 그녀가 주사를 놓으면 그 손길이 전신으로 퍼지면서 몸이 금세 가뿐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퇴원하기 전에 이 말을 하려고 골백번을 더 연습했다. 그러나 그 말이 어딘가 어색하고 쑥스러웠다. 그렇다고, 우리 연애합시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말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독일말로 연습을 해보았다.

이히 리베 디히.이히 리베 디히.이히 리베 디히

한국말보다는 좀 덜 어색한 것 같았지만 역시 마땅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저어 ...... 김치 좋아하세요?"

"그럼요. 한국 사람인걸요. 그치만 맛있는 김치를 먹을 수가 없네요."

"왜요?"

"병원 일에다가 아르바이트까지 하다 보니까 매냥 시간에 쫓기거든요."

퇴원을 하면서 그녀와 나눈 말이었다. 그래요? 그건 걱정 마세요. 내가 담가다 드릴 테니까요. 이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음 일요일이 될 때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남자가 칠칠맞게 김치를 담근다고 오히려 점수 깎이는 게 아닐까. 아니지, 독일 물을 먹으면서 독일 남자들이 예사로 식당 일 도와주는 것을 보고 사니까 더 점수를 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도 한국 여자는 한국 여잔데 남자답지 못하다고 무시당할 수도 있는 일이지. 아니야. 맛있는 김치를 못 먹는 형편에 김치를 맛있게 담가다 주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남자가 김치 담그는 거야 혼자 사는 몸으로 어쩔 수 없다고 이해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이런 고민을 정수남에게 의논할 수도 없었다. 혼자 생각을 거듭하다가 김치를 담가다 주기로 작정했다.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고, 마음을 표현하기에도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손해보다는 이익이 더 많을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토요일 저녁에 김치를 담가두었다가 일요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일요일에도 아르바이트를 나갈지 모르니까 그전에 만나기 위해서였다.

"어머 , 어쩐 일이세요?"

기숙사 현관으로 나온 서미향은 깜짝 놀랐다.

"맛있는 김치를 못 먹고 산다고 하셨잖아요. 남자들끼리 자취를 오래하다 보니까 김치 담그고 밥하는 건 이골이 났지요. 특히 저는 김치를 잘 담그기로 소문나서 김치 담가 팔아먹는 것으로 아르바이트를 할 정돕니다. 그러니까 먹을 만할 겁니다."

흉잡히지 않도록 미리 준비했던 말을 털어놓았다.

"어머, 고맙긴 한데, 이거 죄송해서 어찌지요?"

"아닙니다. 전혀 신경 쓰지 마세요. 내가 먹을 것 담글 때 조금 더 하는 거니까요."

"그래도 수고를 더 하신 건데요."

"아니,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아낄 것 없이 많이 드세요. 다음 일요일에 또 담가올 테니까요. 김치는 앞으로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어머, 이걸 어쩌나. 차 한 잔도 대접하지 못하고. 제가 아르바이트를 나가려던 참이라 ......"

김치 보자기를 든 서미향은 붉어진 얼굴로 못내 당황스러워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차는 담에 얼마든지 얻어먹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시작된 첫 만남은 저으기 만족스러웠다. 미리 생각한 대로 자신의 마음을 전한 것이 그랬고, 그녀가 차를 대접하지 못해 미안해 한 것은 더욱 만족을 느끼게 했다. 그 다음부터 매주 일요일이면 김치를 담가서 서미향을 찾아가는 것은 새 활력이 되었다. 그리고 일요일을 함께 보내기 위해 두 달 전부터 서미향은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 건강을 위해 일요일의 아르바이트는 안 하는 게 어떠냐는 자신의 제의를 서미향은 별다른 이의 없이 따랐다. 그때 그녀의 마음이 열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러니 결혼하자는 말은 더구나 까맣게 멀리 있었다. 그녀는 기혼자들에게 속아 결혼했다가 파경을 맞은 간호원들 때문에 계속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경계심이 풀려 믿음을 갖게 하려면 서둘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박갑동은 기숙사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숨을 한껏 들이켜며 초인종을 눌렀다. 짧게 세 번, 그것은 언제부턴가 자신이 왔다는 신호가 되어 있었다. 서미향이 나오기 전에 창문 열리는 소리들이 먼저 들렸다. 다른 한국 간호원들이 내다보려고 그러는 것을 박갑동은 알고 있었다. 그냥 광부도 아니고 일요일마다 김치를 담가 오는 광부니 간호원들의 호기심에 찬 눈길이 자신에게 쏠리고 있다는 것을 박갑동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박갑동은 그 눈길들이 거북스러운 한편으로 당당한 마음이 없지도 않았다. 그녀들 중에서 자신이 담근 김치를 맛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서 오세요."

종종걸음을 치고 나온 서미향이 반가운 웃음과 함께 미안함이 깃든 얼굴로 김치 보자기를 받아들었다. 평범하지만 참하고 복스럽게 생긴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서미향을 뒤따라 나온 여자가 인사를 했다.

"아 예...... 안녕하세요."

박갑동은 이미 낯익어 있는 이민애와 인사를 나누었다.

"제가 오늘은 커피 한잔 대접하고 싶어서 따라 나왔어요. 그동안 미향이 김치를 제가 제일 많이 뺏어먹었거든요."

"아 예에......"

박갑동은 어물거리며 서미향을 쳐다보았다. 서미향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주세요. 무거워요."

박갑동은 현관으로 들어서며 서미향이 들고 있는 김치 보자기를 잡았다.

"아니 괜찮아요."

"괜찮긴요. 2층 끝까지는 한참인데."

박갑동은 김치 보자기를 빼앗듯이 했다.

"어머, 멋지셔. 어쩜 그리 여자 위해주는 서양식 예법을 잘 익히셨어요? 미향이가 부러워 죽겠네요."

이민애가 상글거리며 반쯤은 놀리는 투로 말했다.

그래, 그런 말만 자꾸 해라 그래야 미향이 마음이 더 열리지. 더 애인으로 막 몰아붙여. 미향이가 결혼할 마음이 생기게.’

박갑동은 이렇게 속으로 반색을 하고 있었다. 자기 방으로 안내한 이민애는 곧 커피를 내왔다.

"김치 그렇게 잘 담그는 솜씨시니까 커피도 잘 끓이실 것 같은데, 커피 맛 없다고 흉보지 마세요."

이민애가 박갑동 앞으로 커피 잔을 옮겨놓으며 말했다.

", 별말씀 다 하십니다."

"근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결혼하시고도 김치를 계속 담가주실 건가요?"

커피 잔을 들며 이민애가 불쑥 물었다.

"어머, !"

서미향이 놀라며 이민애에게 눈총을 쏘았다.

"글쎄요...... 그게...... 한국이라면 곤란할지 모르지만, 여긴 독일이니까 독일식으로 집안일 돕는다고 생각하고 하면 흉 될 게 없지요. 특히 부부가 맞벌이를 하는 경우에는 김치 담그는 것보다 더한 일도 남자가 나눠서 해야지요."

"어머나, 어머나, 정말 멋지셔, 어쩜 그리 마음이 활짝 열리셨어요? 미향이 넌 좋겠다. 1등 신랑감을 얻었으니."

이민애가 말에 걸맞게 활달한 손짓을 해댔다.

", . 너 왜 이래?"

서미향이 당황하며 이민애의 팔을 꼬집었다.

그렇지, 그렇지 ! 바로 그거야. 더 몰아붙여 빨리 결혼하라고.’

박갑동은 자신을 돕고 있는 이민애에게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 괜히 내숭 떨지 말어. 속으로는 그런 남자 좋아하면서 여자치고 그렇게 속 넓고 이해심 많은 남자 싫어하는 여자는 하나도 없지만 말야."

이민애는 꼬집힌 팔을 문지르며 서미향에게 눈을 흘기고는,

"근데 있잖아요, 얘가 직접 물어보지 못해서 그러는 건데요, 틀림없이 총각은 총각이세요?"

그녀는 커피 마실 자리를 마련한 목적이 이 사실을 확인 하려는 것이라는 듯 대담하게 묻고 나왔다.

", 너 왜 그러니."

서미향이 울상을 지었고,

"글쎄, 넌 가만있어. 친구 좋다는 게 뭐야 혼자 해결 못하는 것 이런 때 거들고 도와야 되는 것 아니니?"

이민애는 또렷하게 말하며 박갑동에게 대답을 독촉하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 여러 말할 것 없이 틀림없이 총각입니다. 그동안 하도 속임수가 많아서 남자 입장에서도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속마음을 시원하게 꺼내 보일 수가 없으니 하늘에 골백번 맹세하면 뭘 하고, 날 믿어달라고 애걸복걸하면 뭘 하겠어요. 내 경우에는 이것 한 가지만 말씀드릴게요. 내가 처자식이 있는 몸이면 한국으로 가지 않고 미국으로 갈 마음을 먹을 수 있었겠어요?"

"미국이요?"

이민애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고, 서미향은 심히 놀라는 얼굴이 되었다.

", 몇 년 동안 일해서 집안 잡히도록 자식 노릇 했으니까 그만 미국으로 갈까 하는 계획을 세웠지요. 국내 물가는 치솟고, 좁은 땅에서 복작거리면서 사느니 기왕 외국으로 나온 김에 미국으로 이민 가자하는 생각이었지요. 여기서 가기는 쉽고, 아시겠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가고 있잖아요."

"그럼 지금도 이민 갈 생각이세요?"

"아아니요."

박갑동은 완강하게 고개를 내젓고는,

"일만 잘되면 그냥 독일에 살 겁니다. 미국이 독일보다 좋은 것 별로 없다니까요."

그는 힘주어 말했다.

"일이 잘된다는 건 미향이하고 일 말인가요?"

서미향이 다시 이민애의 팔을 꼬집었다.

", 바로 그거지요."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 싶어 박갑동은 더욱 힘을 넣어 대답했다.

"이것아, 이젠 됐지? 속으로 끙끙 앓기만 하면 뭘 해."

이민애가 서미향을 향해 빈 주먹질을 했고,

"기집애, 엉뚱하긴 ......"

귓불이 발갛게 물든 서미향은 박갑동을 등진 듯한 채 이민애에게 잔뜩 눈을 흘겨대고 있었다.

"이젠 커피 타임 다 끝났어요. 두 분 나가주세요, 나가주세요."

이민애가 팔을 휘저어 내쫓는 손짓을 했다.

박갑동은 버스를 타고 라인 강가로 나갔다. 강물 따라 풍광이 아름답기도 했지만 서미향이 유별나게 강변을 좋아했다. 라인 강변은 경치가 좋고 한적해 데이트 장소로는 안성맞춤이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내기인 그녀는 라인 강에서 한강을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박갑동은 이제 그만 결혼하자는 말을 참아가며 그녀를 즐겁게 하는 이야기를 골라 하다가 데이트를 끝냈다. 박갑동은 다음 일요일에도 어김없이 김치 보자기를 들고 서미향을 찾아갔다.

"저는 곧 베를린으로 떠나게 돼요."

라인 강변에 이르자 서미향이 느닷없이 한 말이었다.

"예에? 왜요?"

박갑동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베를린에 있는 선배 언니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그쪽 병원에 좋은 자리가 비었으니 오라고요. 거긴 일도 좀 편하고 보수도 더 많아요. 그리고 우리나라 간호원들도 많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많아서 지내기도 더 좋다고 해요."

"됐어요. 나도 가겠어요."

박갑동이 소리치듯 한 말이었다.

"네에?"

이번에는 서미향이 소스라쳤다.

"나도 간다구요. 미향 씨 가는 데는 이 세상 끝까지 따라가요."

박갑동의 태도는 단호했다.

"직장은 어쩌구요?"

"그까짓 것 때려치우지요."

"때려치워요?"

", 때려치우고 베를린에 가서 한식당을 내면 돼요. 우족탕 끓이는 것하고 김치 담그는 건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으니까 식당을 차리면 탄광에서 썩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벌 수 있어요. 이건 갑자기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전부터 가끔 생각해 왔던 거예요. 그런데 마침 베를린으로 간대니까 잘 됐잖아요. 베를린에 우리나라 사람들 많은 건 나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거기서 한식당 차리면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어요."

"정말 가시겠어요?"

"그렇다니까요. 미향 씨 가는 데는 이 세상 끝까지 따라간다니까요."

"그럼 좀 더 생각하고 의논하기로 해요."

서미향은 강으로 고개를 돌렸다. 석탄을 가득 실은 배가 느리게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박갑동은 '의논하자'는 말을 결혼 승낙으로 해석하며 소리 없는 만만세를 외쳐 부르고 있었다. 더구나 그동안의 성과가 좋아 서독 정부에서는 한국에 간호원 17천 명을 더 보내달라고 하고 있어서 그는 한식당이 잘되리라는 서광까지 느끼고 있었다.

 

 

46. 그 밑뿌리

신개발지구 강남은 황량하고, 한강의 겨울바람만 드세게 쉽쓸고 있었다. 개발이라고 했지만 드넓은 벌판에 가로세로 줄무의를 긋고 있는 것은 새로 뚫린 도로들이었고, 정작 도시를 이루는 건물이란 10리나 20리 간격쯤 되게 멀리멀리 서 있었다. 그사이의 야산에는 과수원이 버려져 있는가 하면, 폐농한 밭들을 따라 텅텅 빈 농가들이 기울어져가고 있었다. 도시 구실을 하려면 20년도 더 걸릴 것 같은 인상인데 널찍널찍하게 뚫린 도로들을 따라 성시를 이루고 있는 것이 셀 수 없이 많은 복덕방이었다. 그 복덕방들은 가건물을 세우고 번창하고 있었는데, 그 명칭은 펄럭이는 광목에다 먹으로 쓴 한자의 '福德房'이 아니었다. xx부동산이라고 한글을 색색의 페인트로 쓴 매끈한 간판들을 큼직큼직하게 내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부동산 사무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강북의 골목에서 복덕방을 지키던 한복 입은 영감님들이 아니라 양복을 미끈미끈하게 빼입은 중년층이었다. 그 수많은 부동산들이 온 서울을 '한탕 치기'로 들뜨게 하고 있는 부동산 투기바람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이거 2월이 코앞인데도 어찌 통 입질들이 없지? 싸모님들이 추워서 다 아랫목 차지하고 앉았나, 카바레로 빠져서 뺑뺑이를 돌고 있나."

"글쎄 말야, 연초에는 으레 주춤한다 해도 이건 좀 심한 것 아닌가? 혹시 여기서 막차 되는 건 아닐까?"

",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평당 500원도 안 되던 땅이 5만 원이 됐으니 목이 찰 만큼 찬 것 아니겠어?"

",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지독하게도 치솟았다.100배로 솟기긴 했어도 막차 될라면 아직 멀었을걸. 강북 중심지하고 대봐 여기 땅값은 거저 아냐? 좀 주춤할지는 모르지만 대형건물들 들어서고, 아파트들 들어서고, 단독주택들이 단지를 이루고 하면서 강북 땅값을 따라잡아 가며 계속 오를 거야."

"그거야 금은 썩지 않는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니까 하나마나 한 소리고. 당장 코앞이 어찌 되느냐 그거지."

"그야 물결치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지 어쩌겠어. 제기랄, 나도 고관 싸모님하고 한탕만줄이 닿아야 하는데 그게 그리 잘 안 된단 말씀이야."

"그따위 소리 작작 좀 해.그 사람들도 자기네 신분 감추느라고 두 다리, 세 다리 걸치고 있는데 그게 꿈에서라도 될 소리야? 냉수 먹고 속 차리고 복덕방 노릇 제대로 할 생각이나 해."

"하아, 정보 빼내 첫물에 산 땅을 지금까지 가지고 계신 싸모님들이 있을 텐데, 그럼 어찌 되지? 돈이 100배로 뻥튀기가되었을 테니, 한탕 잘 쳐서 평생 먹을 것 벌어버리니 세상에 이런 기막힌 장사가 어디 또 있어. 이 생각은 아무리 해도 싫증이 안 나고, 할 때마다 가슴이 떨린다니까."

"가슴이 자꾸 떨리면 심장병 걸릴 일밖에 없으니까 조심하라구 내가 부러운 건 여기 농사꾼들이야. 거 이번에 네거리에다 삘딩 올린 지 씨 있잖아, 두 번째 첩을 얻었다더군. 아주 젊은 미인이래."

", 그거 부럽네. 일자무식인 그 사람 나무도장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걸 보면 참 가관이야. 돈벼락을 맞았다는 건 바로 그런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야,"

"거 손수 농사 지으며 고생하던 장본인들이 떼 부자, 벼락부자가 돼서 여잘 몇 씩이든 데리고 첩질을 하는 건 그래도 괜찮아. 저기 저 학교 옆의 김 씨 아들놈 있잖아. 그게 글쎄 여배우 남 머시기하고 하룻밤 놀아나면서 1천만 원을 줬대잖아. 참 드럽게 웃기는 세상이라구."

"아이구, 그런 소리 다 하자면 끝도 한도 없지. 자아, 우린 우리한테 맞는 실속이나 차리게 탕수육에 빼갈 내기 장기나 한판 두자구."

"그래 그거 좋지."

그때 부동산의 유리문이 옆으로 드르륵 열렸다. 그리고 색안경 낀 두 여자가 거침없이 들어섰다.

"아 어서 오십시요, 싸모님들."

막 장기판을 펼치려던 세 남자가 동작들 민첩하게 허리를 반으로 꺾었다.

"땅 좀 쓸 만한 거 있어요?"

색안경을 벗을 생각도 하지 않고 한 여자가 시건방진 말투를 던졌다. 두 여자는 미니스커트를 뒤따라 겨울용으로 유행한 판타롱이라는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 바지는 엉덩이 부분은 착 달라붙고, 바짓가랑이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넓어질 뿐만 아니라 그 끝은 곧 땅을 휩쓸 지경으로 긴, 괴상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예에, 쓸 만한 거라면 대로변일 텐데 널찍널찍하고 반듯반듯한 게 많습죠, . 몇 평쯤으로나 보시는지, , 앉으시지요, 앉으세요."

한 남자는 여자들을 살피고 말대꾸를 하며 자리를 권하기에 바빴고, 두 남자는 유리문 밖의 자가용을 보고 서로 눈짓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 딴 큰길가는 볼 것 없고 이 영동대로변으로 한 5천 평쯤 있어요?"

두 여자가 마지못한 듯 거드름을 피우며 소파에 엉덩이를 걸쳤다.

"예에, 있구 말굽쇼. 삘딩 세우면 금값을 칠 수 있는 코나로 쪽쪽 빠진 게 있습죠. , 지금은 평당5만 원씩이지만 눈 딱 감고 반년만 묻어두면 그 따불이 됩니다요, 따불 내 말이 거짓말이면 열 손가락에 장을 지져요."

그 남자는 한 손으로는 더블을 표시하느라고 손가락 두 개를 세웠고, 다른 손으로는 열 손가락을 내보이느라고 손가락 다섯 개를 확 펴고 있었다.

"5만 원? 얼마까지 깎을 수 있죠?"

여자는 색안경을 벗는 게 아니라 더 바짝 밀어 올리면서 물었다.

", 싸모님들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여기 영동이야 서류에 잉크 묻히고 말고 할 것 없이 바로바로 넘어가면서 돈 놓고 돈 먹기니까 깎아주고 말고가 뭐 있겠습니까."

"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딨어요? 여긴 아주 배짱이시네."

여자가 옆의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곧 일어날 기세였다.

"아 예, , 맞는 말씀이십니다. 말씀 대접으로라도 저희가 나서서 깎아 올려얍지요. , 손 많이 탄 물건은 골치 아프고, 저희가 잘 통하는 여기 토백이 지주 것이 있습니다. 그건 손 안 타서 유도리(여유)가 있으니까 작은 것 한 장은 빼게 하죠. 아니, 잔금까지 보름 안에 끝내면 두 장까지 뺄 수 있어요."

다른 남자가 다급하게 나서면서 말했다.

"2천 원이란 말이죠?"

", 그렇습니다. 딴 데 다녀보셨겠지만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을 겁니다."

"네 잘 알았어요."

두 여자는 몸을 일으켰다.

"땅을 구경 안 하시겠습니까?"

"대로변 코너 땅이면 보나마나잖아요. 빈 땅 오며 가며 실컷 보고 있어요."

", 그럼 전화번호를 좀 알려주시지요."

"아니, 됐어요. 우리가 연락할 테니까 여기 명함을 주세요."

두 여자는 명함을 하나씩 받아가지고 나갔다 그들이 나가자 자가용에서 운전수가 쫓아 나와 재빠른 동작으로 뒷문을 열었다. 그리고 또 반대쪽으로 달려가 나머지 뒷문을 열었다. 두 여자는 의연하고 유유한 몸짓으로 차에 오르며 색안경을 벗었다. 복덕방 남자들은 그들의 거동을 지켜보고 있다가 자동차가 떠나자 한 사람이 불쑥 내뱉었다.

"저것들 저거 빠꼼이 아냐?"

"글쎄, 돈 냄새는 풀풀 풍기는데 그렇게 빠꼼이 냄새는 안 나잖아?"

"그렇지도 않아. 그 썬그라스 잡순 꼴들하구 말하는 뽄새가 예삿것들이 아니야."

"저게 아마 한가락 하는 치들 마누랄 거야. 누가 혹시 즈네들 얼굴 알아볼까 봐 썬그라스를 안 벗는 거지."

"옘병, 괜히 장기판만 망쳤다."

한 남자가 침을 내뱉었고,

"그러지 말어. 저러다가 물렸다 하면 월척이니까. 좌우간 권세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이 떼 돈 벌고 돌아가는 판에서 우리도 떡고물 챙기는 거니까 뭐 메스껍게 생각할 것 없다구."

다른 남자가 동료들의 등을 두들겼다.

"워커힐로 가."

운전수에게 이르는 여자는 한정임이었고, 그 옆의 상석은 최혜경이었다.

"고자가 허튼소리는 안 하는구만."

최혜경이 껌을 까서 입에 넣었다.

"그러믄요, 사모님. 다 확인해 볼 거라는 걸 아는걸요."

"그래, 그자가 특별히 양심적인 건 아니겠지. 어떤 세상이라고."

", 당연하지요. 근데 시집보내실 건가요?"

한정임은 운전수를 의식해 은어를 쓰고 있었다.

", 그 정도 신랑감이면 인연이 아닌가 싶은데."

최혜경도 땅을 팔아넘기겠다는 뜻을 이렇게 표시했다.

"네에, 제 생각도 그런 것 같군요"

한정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근데 사모님, 한 가지 걱정이 있어요. 각하께서 히피족들 테레비 출연을 금지시킨 것 있잖아요. 건전한 사회 기풍을 진작하시려는 뜻은 더 말할 것 없이 좋으신데 그 조처를 대통령 선거 끝난 다음으로 미뤘으면 좋겠어요. 지금 한 표가 새로운 형편에 테레비에 못 나오게 된 연예인들만이 아니라 일반 히피족 젊은이들까지 그 조처를 싫어하거든요."

그녀는 이야기를 완전히 딴 방향으로 바꾸었다.

"으음,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네 미니스커트 길이 재고, 장발에 가위질하고 하는 것 젊은 사람들이 질색을 하는데. 그렇잖아도 젊은 사람들이 삐딱한 판에 긁어 부스럼 낼 것 없지."

"그럼요, 젊은 사람들 표도 엄청 많잖아요. 각하께서 그런 것을 엄하게 다스리는 것은 옳지만 괜히 이 시기에 표 잃을 건 없잖을까요?"

"내가 차 장군님한테 바로 말을 하겠지만, 각하께선 왜 그러시는지 몰라. 당신 곧은 마음만 생각하셨지 그런 세세한 계산까진 안 하신다니까. , 당장 그런 조처를 취하더라도 해당 장관을 앞세우고 당신은 좀 피해서시면 욕도 안 먹고 손해도 안 보실 텐데 워낙 솔선수범으로 평생을 살아오시다 보니까 말야......"

최혜경은 껌을 짝짝거리며 과장된 한숨을 쉬었다. 워커힐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은 땅 이야기를 피해 그런 식의 이야기만 나누었다. 운전수가 자세한 내막까지 알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자아 김 상병, 점심 먹고 있어."

차가 멈추자마자 한정임은 1백 원짜리 서너 장을 내밀었다.

"예 고맙습니다. 사모님."

황송한 듯 돈을 받는 운전수는 양복차림으로 보나 포마드 반지르르한 긴 머리로 보나 군인이 아니었다. 한정임은 기성복 양복을 사 입히고, 머리를 기르게 하고 해서 군인 티를 완전히 지워 없앴다. 계급이 높으면 누구나 으레 그렇게 하듯 한정임도 남편의 비위를 살살 맞춰 운전병 하나를 빼돌려 쓰고 있었다.

"운전수한테 너무 잘해 주는 것 아닌가? 버릇없어지게."

차에서 내린 최혜경이 몇 발짝 옮겨놓으며 톡 쏘듯 말했다.

"네에, 따로 월급 주는 게 아니니까요. 돈 후하게 줘서 인심 잃거나 욕 먹는 법 없다는 말도 있고 해서요."

", 그렇기도 하네. 돈이 충신 따른다는 말도 있으니까."

최혜경은, 내 돈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뭐, 하는 생각으로 선선히 동의했다. 그리고 그 군인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한정임과 최혜경은 화장실을 거쳐서 커피숍으로 따로따로 들어갔다. 조선호텔이 그렇듯이 워커힐도 달러를 벌어들이기 위해 외국인 전용으로 지었던 것인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커피숍에는 한국인들로 넘치고 있었다. 시내에서 멀찍하게 떨어진 그곳은 상류사회의 새로운 명소로 등장해 있었다. 굽이굽이 흐르는 한강과 멀리 뻗어가는 산세가 어우러진 전망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아 사모님, 이제 오십니까."

한 남자가단단해 보이는 체구만큼 탄력 있게 일어나며 한정임을 맞았다.

", 앉읍시다."

한정임은 엄한 기색으로 자리 잡았다. 최혜경은 한발 늦게 들어와 한정임과 눈짓하며 그 남자를 등지고 앉았다.

"이 상사 잔금을 20일로 해서 평당 얼마라고 했죠?"

한정임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최혜경이 들을 수 있도록 또렷했다.

", 46천 원까지 내겠다는 겁니다."

"알아보니 그건 너무 도맷금으로 치는 거예요. 열흘로 앞당겨서 47천 원을 부르라고 하세요."

"열흘요? 액수가 큰데 너무 급하지 않나요?"

"이 상사. 왜 그리 눈치가 없어요. 빨리 발 빼고 딴 데로 뛰어야 해요."

"알겠습니다, 사모님 근데 저어, , 칠로 딱 안 떨어지면 어쩌죠?"

"어쩌면 그 친구라는 사람이 평당 1천 원씩 붙여먹으려고 그런 꿍수를 쓸 수도 있어요. 정신 바짝 차려야 해요."

한정임은 말을 이렇게 하고 있지만 그 속뜻은. 너 날 속이려고 잔머리 굴리면 알지? 하는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노리고 있었다.

"아닙니다. 사모님.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만약 그놈이 그따위 짓 하면 제 주먹이 장날 만나는 거지요. 뼈 싹 추리고 말아요."

"됐어요. 빨리 그 사람한테 연락해서 부동산하고 흥정하라고 하세요. 급하니까 시간 끌면 안 되고, 얘기가 잘 안 풀리면 그때 가서 다시 만나요. 그리고 마음 급하다고 이 상사가 직접 얼굴 내밀면 안 돼요."

", 알겠습니다. 그럼 제 것도 처분해야 되는 거죠?"

"당연하지요."

"새로 어디 좋은 데가 생겼습니까?"

"좀 기다리고, 그 일이나 빨리 끝내도록 하세요. 어서 가보세요."

그 남자는 '상사'라고 불린 것에 걸맞게 절도 있는 몸짓으로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 한정임은 그가 커피숍 밖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 최혜경 쪽의 자리로 옮겨 앉았다.

"잘했어. 그렇게 당겨보다가 물지 않으면 천 원 더 빼줘도 괜찮아. 저쪽에서 몇 십 배 더 크게 잡으면 되니까."

최혜경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싱긋 웃더니,

"저 상사는 요새 뭘 해? 사람이 제법 쓸 만해"

하며 한정임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 제대하고는 별로 하는 일 없이 재향군인회에 나가고 그럽니다."

이 상사에 대한 최혜경의 신뢰 표시는 곧 자신에 대한 신뢰인 것을 한정임은 잘 알고 있었다. 이 상사를 방패막이로 고른 것은 자신이었다. 최혜경은 신분을 철저하게 감추려고 했고, 그 대비책으로 자신은 두 겹의 망을 쳐야 했다. 첫 번째가 이 상사였고, 두 번째가 이 상사의 친구였다. 그런데 최혜경은 이 상사의 친구는 말할 것도 없고 이 상사하고도 여지껏 얼굴을 마주 대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최혜경은 세 겹의 방패막이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셈이었다. 이 상사마저도 직접 부동산들을 만나지 않으니 신분 은폐는 꽤나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번 것까지 잘되면 큼직한 삘딩이나 하나씩 올리자구. 계속 월세 받구, 땅값 올라가구, 그보다 안전하고 좋은 게 없어."

". 저기 송은강 씨 오네요."

한정임이 손을 살짝 들어올렸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먼저 와 계셨군요."

송은강이 당황한 기색으로, 그러나 더없이 공손하게 최혜경을 향해 인사했다.

"어서 와요 괜찮아요."

최혜경은 환하게 웃으면서도 거만하기 그지없이 앉으라는 턱짓을 했다. 커피를 다시 시키고 시작된 세 사람의 밀담은 깨가 쏟아지고 있었다. 최혜경과 한정임은 이틀 동안 줄다리기를 해서 강남의 땅을 처분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자가용을 강남의 동쪽으로 몰아댔다. 그쪽은 광주로 넘어가는 길이 빠끔하게 뚫려 있을뿐 사방이 황무지처럼 논밭이 질펀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들은 며칠 동안 여러 부동산들이 앞 다투어 엮어오는 땅을 계약하느라고 숨 가쁘게 돌아갔다. 며칠이 지나 서울시에서는 잠실 개발계획을 발표했다. 그들 세 여자는 워커힐 식당에서 비프스테이크를 시켜놓고 강 건너 저 멀리 펼쳐진 잠실벌을 바라보며 붉은 포도주잔을 잘그랑 맞부딪쳤다.

 

"미스 허, 사장님 성질 잘 알잖아? 다 단념하고 사장님 뜻대로 따르는 게 현명하지 않겠어?"

비서실장이 애타하는 얼굴로 사정하듯 말했다.

"실장님도 참 너무하세요. 저하고의 정을 생각해서도 그렇지, 어떻게 한 번만 뵙게 해달라는 것도 안 된다는 거예요."

이미 눈자위가 붉게 물들어 있는 허미경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울먹였다.

"미스 허, 왜 그리 답답한 소리를 해. 내가 안 된다는 게 아니잖아. 사장님이 더 만날 필요 없다고 하시는 거지. 내가 사장님 앞에서 벌레만도 못한 존재라는 건 미스 허도 잘 알잖아?"

"......"

허미경은 입을 가리며 얼굴을 떨구었다. 말이 막혔고, 울음이 복받쳐 올랐던 것이다. 이를 앙다물었지만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져 치마 위로 뚝뚝뚝 떨어져 내렸다. 시작도 짓밟음이었고 끝냄도 짓밟음이었다. 모든 걸 자기 멋대로 해버리며 마지막으로 한 번 만나달라는 것까지 내치는 그 몰인정과 모독이 너무 비참하고 서러웠다.

"미스 허, 괴롭고 고통스럽겠지만 어쩌겠어. 다 운명이거니 하고 정리하고 잊어야지."

허미경은 문득 놀라며 다시 속입술을 깨물었다. 어리석고 한심하게도, 새 여자가 생겼나요? 하는 말이 나가려 했던 것이다. 버림받은 것이 분명한데 그걸 알아서 어쩌자는 것인가. 그런 것을 물으면 물을수록 자신의 꼴은 더 초라하고 비참해질 뿐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어리석게 박 사장에게 연연하고 있었다. 그건 무슨 정이 남아서가 아니었다. 아들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박 사장을 마지막으로 한 번 만나려는 것도 어떤 다른 일 때문이 아니었다. 그만 관계를 끊어도 좋으니 아들은 뺏어가지 말고 자신이 기르게 해달라고 간청하려는 거였다.

"미스 허, 나도 중간에 끼어 이런 심부름하기 정말 괴로워."

허미경은 울음을 추스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서실장의 말을 듣고 보니 그의 곤혹스러운 입장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고, 그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미스 허, 사장님께서 말이지...... 이번에 미스 허한테 마음을 크게 쓰셨어."

허미경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게 사장님께서 주시는 건데 ......"

비서실장은 양복 속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네고는,

"얼마 전에 잠실 개발계획이 발표됐는데, 미스 허도 그 소식 알지? 우리 회사도 그 개발에 뽑혔는데, 사장님께서 그 근방 땅을 미스 허 명의로 구입하신 거야. 개발계획이 발표되자마자 투기바람이 심하게 불어 땅값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으니까 이 땅을 잠실 개발이 끝날 예정인 73년까지 두면 엄청나게 큰돈이 될 거야. 이 돈만 잘 간수해도 미스 허 평생 동안 돈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어. 사장님께서 세심하게 배려하신 거니까 받아두고 ......"

그는 봉투를 허미경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허미경은 순간적으로 반발의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모든 것을 돈의 힘으로 좌지우지해 버리는 그 봉투를 다시 확인하자 그만 반감이 곤두섰다.

"그거 그냥 가져가세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비서실장이 허리를 곧추세우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도 생각 좀 해보겠어요."

허미경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생각하긴 뭘 생각해, 사흘밖에 안 남았는데. 그간에 많이 생각했잖아."

몸이 단 비서실장은 어깨를 떨었다.

"네 저도 결론을 내려야지요. 이틀 동안 더 생각해 보겠어요."

"미스 허, 뭐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 이건 어차피 애초에 ...... 그러니까 저어 ......"

"실장님, 말 그렇게 쉽게 하지 마세요. 괜히 실장님한테도 서운해지려고 하니까요. 나도 사람이고, 내 인생은 하나밖에 없어요. 이 말 사장님한테 전해주시고, 그만 가보도록 하세요."

허미경은 먼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비서실장이 돌아가자 허미경은 창가에 붙어 서서 흐느껴 울었다. 울지 않으려는 의지의 둑은 눈물의 홍수 앞에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욕심내지 마라. 어차피 안 될 인연이었느니라. 자식 낳아 키운 이 할미가 어찌 네 속을 모르겠니. 생살을 찢기고 손발이 잘리는 아픔인 것을 허나 말이 나왔으니 보내야 한다. 애비가 제 자식을 찾겠다는데 보내야 하는 게 세상법이야."

할머니가 진작 내려놓은 결론이었다. 그건 옳은 말이었고, 거역할 수도 빠져나갈 수도 없는 유일한 길이었고, 현명한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막상 아들의 모습을 보게 되면 그런 생각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아들을 끝끝내 지키려는 욕심만 시퍼렇게 살아 올랐다. 박 사장과 평생 살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빨리 자식을 잃게 되리라고 예상해 본 적도 없었다. 불행이지만, 아들만 박 사장의 호적에 올라 자신의 손으로 성인이 될 때까지 키울 줄 알았다. 바란 것은 그뿐, 감히 박 사장의 부인 자격을, 아들의 결혼식에서 어머니 노릇 하기를 꿈꾸지 않았다. 그러나 그 움츠린 바람마저 너무나 빨리 깨지고 있었다.

오빠가 취직한 것을 알면서도 아예 만나기를 피해버렸다. 오빠도 할머니 이상의 해결책이 없을 게 뻔한데 괜히 만나서 서로의 괴로움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 오빠는 그동안 몇 차례 만나면서도 박 사장의 얘기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자신이 먼저 하청업체를 차리라고 권했지만 오빠는 일언반구 없이 취직을 하고 말았다. 그리도 꿋꿋하게 자존심을 세운 오빠가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때 만약 박 사장의 도움을 받아 하청업체를 차리고 이 일을 당하게 되었으면 어찌 되었을 것인가. 오빠의 자존심은 영원히 회복할 길이 없도록 짓밟히고 말았을 것이다. 그 끔찍스러움에 허미경은 새삼스럽게 몸을 떨었다. 허미경은 한 파수 감정의 파도가 잦아들자 건넌방으로 갔다. 아들 현서는 다리가 긴 어린이침대에 엎드려 곤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젖살, 밥살이 한꺼번에 올라 오통통하게 살이 찐 볼은 속살이 꿰비칠 것처럼 살색이 투명한 복숭앗빛이었다. 솜털 보송보송한 그 얼굴은 탐스럽고 귀엽기 한량없었다. 아이는 잠결에 상글 웃는가 하면 작고 붉은 입술을 오물오물 하며 젖 빠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허미경은 아들의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그만 흑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봇물 터지는 서러움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엄마가 없는 데서, 생판 모르는 사람들투성이 속에서 얼마나 놀라고 얼마나 무섭겠어. 낯가림이 심해 걸핏하면 우는 네가 얼마나 심하게 울겠니. 심하게 울면 야단을 맞고, 야단을 맞으면 더 심하게 울고, 그러면...... 안돼, 안돼, 안돼......’

허미경은 아들을 와락 끌어안으며 흐느꼈다. 차라리 이대로 죽고 싶다는 생각에 사무치며. 아들을 꼭꼭 끌어안다가 그녀는 문득 자신의 젖가슴이 불어 있는 것을 느꼈다. 젖을 뗐으면서도 현서가 파고 들면 물리곤 해서 젖은 샘솟기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젖을 먹여 키워서 더 이렇게 미치겠는 것인가. 허미경은 불현듯 이런 생각을 했다.

"우유는 소 새끼가 먹는 것이지 사람의 자식이 왜 그따위 걸 먹어. 사람의 자식은 당연히 엄마의 젖을 먹여야지."

박 사장이 투박하게 한 말이었다. 박 사장의 그런 말이 아니었어도 허미경은 우유를 먹일 생각이 없었다. 아이를 보는 순간 남들과 달리 헤어짐이 빨리 오리라는 예감 속에서 정을 있는 껏 쏟아 붓고 싶은 욕망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간호원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세태에 어울리지 않게 아이에게 젖꼭지를 물렸었다. 세상은 온통 분유 먹이는 유행바람에 쉽쓸려 있었다. 서양 것이면 무엇이든 최고로 치는 세태 속에 분유 먹이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젖 먹이면 몸매 다 망가지잖아요. 분유 먹이면 애들 더 튼튼해지구요."

이렇게 일거양득이니 당연히 분유를 먹여야 한다는 젊은 주부들의 반응이었다. 그런데 이런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유행에 살살 부채질을 해대고 있는 것이 분유회사들이었다. 분유회사들은 금값보다 더 비싸다는 신문광고를 뻔질나게 내면서,'아직도 모유를 먹이십니까!' 하고 자극하고 선동해댔다. 그뿐만 아니라 10년이 넘도록 '우량아선발대회'라는 것을 해서 디룩디룩 살찐 아이들의 발가벗은 모습을 신문광고로 써먹기도 했다. 그 야비한 상업주의의 유혹에 휘말려 비싼 분유를 먹이는 여자들은 자기네 신분을 과시하며 으스댔고, 아직도 젖을 빨리고 있는 여자들은 자기들의 가난을 수치스러워하고 불행해 했다. 그러나 양심적이고 실력을 갖춘 의사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유가 그냥 밥이라면 엄마의 젖은 더없이 좋은 보약입니다."

허미경은 아들 현서가 탐하기 전에 먼저 젖을 내보이곤 했다. 그러면 현서는 그 복스러운 얼굴에 꽃웃음을 벙글벙글 피우며 달려들었다. 허미경은 이틀 밤을 꼬박 앉아서 새웠다.

현서를 빼앗기지 말고 끝까지 지킬까.... 아들을 데리고 어디로 도망을 갈까...... 함께 죽어버릴까......’

수많은 생각이 물거품처럼 일어났다가 사라지고는 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것만 빼놓고 안 되는 것이 없다는 돈을 끔찍하게도 많이 가지고 있는 박 사장이 떠오르면 그런 생각들은 안개 사라지듯 자취를 감추고는 했다.

"미스 허.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어? 그만 끝내도록 하지."

다시 찾아온 비서실장이 전보다 더 곤혹스럽게 말을 꺼냈다.

"제 말 전했어요?"

허미경은 자신의 의사가 묵살된 모독감에 부딪치며 물었다. 비서실장은 눈길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래요? 잔소리 말래요?"

허미경의 목소리가 곤두섰다.

"저어 ...... 미스 허도, 한 번 정하면 그만인 사장님 성질 잘 알잖아."

"그래요? 거지 같은 계집애 그 돈이나 감지덕지하게 먹고 조용히 물러날 것이지 무슨 말이 많냐 그거지요?"

싸늘하고 독한 기운이 서린 말을 내쏘고 있는 허미경의 모습은 돌변해 있었다. 평소의 안온하고 가녀리고 참해 보이던 인상은 간 곳이 없었다.

"아니, 미스 허......"

"실장님, 똑똑히 들으세요. 처음엔 날 속여 맘대로 짓밟을 수 있었을지 몰라요. 그러나 끝날 때도 제멋대로 짓밟을 순 없어요. 나도 사람이에요. 나도 박 사장과 똑같은 사람이라구요."

"이봐, 미스 허......"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난 설득되지 않으니까요. 시작은 박 사장 멋대로 했지만 끝날 땐 그렇게 안 돼요. 끝날 땐 내 맘대로 하겠어요. 좋아요, 아이는 보내겠어요. 그 대신 위자료를 지난번 것의 배로 올리라고 가서 전하세요."

"아니, 미스 허......"

"가만히 계시라니까요. 시간 오래 끌 것 없어요. 모레까지 결정하세요. 만약 내 말 듣지 않고 박 사장이 완력으로 하려 들면 그땐 각오하세요. 난 애 데리고 자살할 거예요. 극약 다 구해왔고, 유서도 다 써왔어요."

"아니 이봐, 미스 허......"

"말씀 마시라니까요. 내 말 우습게 알다간 큰일 날 줄 아세요. 그 유서는 신문에 날 거고, 그렇게 되면 박 사장은 망해요. 이 말 괜한 공갈로 들리나요? ㄷ일보 사회부 이상재 기자가 우리 오빠하고 제일 친한 친구예요. 그 오빠한테 유서 한 통을 보낼 거거든요."

"아이고 미스 허......"

"내 말 못 믿겠으면 당장 가서 확인해 보세요. 적으세요. ㄷ일보 이상재 기자예요. 아니, 실장님 사람 이름 외우는 건 기막히시니까 그냥 됐군요. 내 얘기 다 끝났으니까 그만 돌아가세요."

"알았어, 알았어."

비서실장은 허둥지둥 일어났다.

 

 

47. 정치라는 탁류

검정색 지프가 경찰서 정문에 멎었다. 보초경찰 둘이 거수경례를 올려붙였고, 다른 경찰 하나가 재빨리 지프의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의원 각하!"

모자에 금테를 두르고 양쪽 어깨가 좁도록 무궁화 계급장을 요란하게 단 서장이 지프에서 내리는 사람을 향해 경례를 붙였다.

", 안녕하시오, 이 서장."

차에서 내린 사람은 건성으로 경례를 받는 손짓을 하고는 악수를 청했다. 그는 여전히 건재하고 있는 국회의원 최영찬이었다.

"원로에 오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그간에 무고하셨습니까?"

최영찬의 한 손을 두 손으로 받쳐 잡은 경찰서장은 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그 제복과 의자에 어울리지 않게 굽실굽실했다. 마치 그의 역할은 국회의원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려는 것 같기도 했다.

", 덕분에...... 급하니까 어서 들어갑시다."

턱끝이 치켜 올라간 최영찬의 거드름이었다.

"예에, 이쪽으로......"

경찰서장이 가재걸음을 하며 최영찬을 앞장세웠다.

"전체, 차려우왓! 의원 각하를 향하여 경롓!"

최영찬이 지프 앞으로 나서는 순간 이런 구령이 우렁차게 울렸다. 경찰서 정문에서부터 현관까지 양쪽에 두 줄씩 도열해 있던 경찰들이 일제히 경례를 붙였다. 최영찬도 거수경례로 답하며 위엄 넘치게 걷기 시작했다. 경찰서장이 최영찬과 보조를 맞추게 되자 다시 울린 구령에 따라 경례를 끝낸 경찰들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건 경찰서를 방문하는 국회의원에 대한 기본적인 예우고 영접이었다.

"에에, 지금 경찰에선 어떻게 하고 있으시오?"

최 의원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경찰서장을 비롯한 간부들을 둘러보았다.

", 백방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경상도 어조 그대로 경찰서장이 대답했다.

"백방으로 최선을 다한다......"

최 의원은 느리게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그 말 흔히들 하는 소리고, 조금 전에 시청에서도 들은 소린데, 그렇게 막연한 소리 가지고는 이번 선거에서는 큰코다칠 위험이 있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소?"

그의 각진 눈초리가 다시 좌중을 휘둘러보았다.

"아 예, 다른 때와 달리 우리 경상도 대 전라도라 카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재빨리 정답을 대는 국민학생처럼 경찰서장이 대답했다.

"바로 그거요 모든 신문들도 은근히 그런 냄새를 풍기고 있고, 세상인심도 그리 돌아가고 있듯이 이번 선거는 분명 우리 경상도와 전라도의 싸움일 수밖에 없소. 여러분은 이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유권자들에게 주지시켜야 해요. 우리끼리니까 터놓고 하는 얘긴데, 유권자 설득작전에서 그냥 막연하게 우리가 같은 경상도니까 경상도를 찍자 해서는 효과가 좋지 않아요. 특히 지식수준이 낮고 단순한 사람들일수록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이건 된장이고 간장이고 고추장이다 하는 식으로 꼭꼭 찍어서 쉽게 말해야 효과가 나요. 다시 말하면, 우리 경상도가 이렇게 잘살게 된 건 누구 덕이냐? 다 각하 덕이다. 왜냐하면 각하께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1, 2차 단행하시면서 덕을 제일 많이 입히신 데가 우리 경상도 아니냐. 부산 대구를 양대 중심으로 해서 발전시키는 것은 더 말할 것 없고, 울산을 개발했고, 마산에 수출자유지역을 만들었고,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하지 않았느냐. 다 이런 혜택으로 딴 데보다 더 잘 살게 된 것이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폐일언하고 우리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똘똘 뭉쳐 또다시 각하를 찍어 대통령으로 받들어야 한다. 만약에 우리가 힘을 합치지 않아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면 어떻게 되느냐. 지금까지 누렸던 그 모든 혜택이 다 전라도 땅으로 가버린다 여러분, 이런 사실들을 명백하게 주지시켜야 한다 그겁니다."

최 의원의 목소리는 격앙되고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저어...... 의원 각하의 말씀 지당하고 지당하십니다만, 그 말을 전라도 사람들이 들으면 우리를 공격하기 딱 좋은 말이 아닌가 합니다. 평소에도 그런 식으로 트집 잡고 시비 걸고 했으니까요. 울산, 마산을 개발하는 것은 미국과 일본으로 오가는 데 그 어느 곳보다 뱃길이 가까워 수입, 수출을 함에 있어서 그만큼 이익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런 점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간부가 어깨와 목을 움츠린 자세로 눈길을 들지 못한 채 말했다.

"어허, 저 순진한 민중의 지팡이 봤나. 지금 여기가 국민학교 사회생활 시간이 아닌데 꼭 이건 콩이야, 저건 팥이야 하고 가려가며 말을 해야 되겠소? 물론 그런 데를 먼저 개발한 건 그런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오. 허나 우린 지금 치열한 선거전에 돌입해 있소. 한 시, 한 표가 급한 판인데 우리끼리 어떤 말을 꺼내야 효과가 나겠소? 눈코 뜰 새 없는 싸움터에서 총을 쏴야 할지 수류탄을 던져야 할지 제때제때 눈치껏 판단해야 되는 것 아니겠소?"

", 의원 각하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이게 다 집안일이니까 저희들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쨌거나 김이야 상대가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경찰서장이 공손한 태도로 최 의원의 비위를 맞추고 들었다.

"글쎄요, 기분 상으로 생각하면 한주먹감도 안 된다고 무시해 버리고 싶은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게 그리 간단치 않단 말이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이번엔 그전의 윤보선하고는 달리 엄청나게 많은 몰표가 나올 지역을 딱 등에 업고 있다 그거요. 그동안 정보를 입수한 바에 의하면 저쪽 전라도 공기가 묘하다는 거요. 만에 하나라도 일이 잘못되는 날에는 우리 당은 야당이 되고,난 야당국회의원이 되는데, 그럼 여러분들 신세는 어떻게 되겠소?"

최 의원은 일부러 과장해서 말하며 간부들을 둘러보았다. 이모저모로 최 의원과 얽히고설켜 있는 그들의 얼굴에 금방 당황스러운 기색이 드러났다.

"뭐 긴말 할 것 없습니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저희들은 일치단결하여 분골쇄신할 각오가 돼 있으니 아무 걱정 마십시오."

경찰서장은 아까보다 훨씬 더 힘주어 대답했다.

", 여러분들의 철통같은 각오, 고맙소. 헌데 세상이란 묘해서 우리 경상도에도 생각 삐딱한 반골들이 뜻밖에도 많소. 그런 자들이 각하를 비난하고 공격할 것은 딱 한 가지, 3선 개헌이오. 3선 개헌으로 독재하려고 한다는 험담을 하는 자들은 눈에 띄는 대로 무슨 트집을 잡든지 즉각 즉각 적발하시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없더라고 경찰이 트집 잡고 죄 씌워 안 걸려들 놈 없으니까. 그리고 이쪽에서는 백 번 천 번 각하께서 세우신 경제 업적과 우리가 받은 혜택을 강조하시오. 반복 효과가 크니까. 현재 여기 상황은 어떻소?"

최 의원은 물잔을 들었다.

", 아직 확실하게 표가 나진 않지만 대다수 유권자들은 다시 각하를 찍을 것 같은 눈치입니다 날이 갈수록 표가 날 테니까 당선은 압도적일 것입니다."

", , 꼭 그리 돼야지요. 허나 방심은 금물이오. 나 여러 번 선거를 치러봤지만, 선거는 전쟁이오.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전쟁, 예측 불허의 전쟁이오. 한 표가 모자라 패배한다는 심정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표를 모아야 하는 게 선거전이오. 이 사실 명심들 하시고, 오늘은 이만 끝내고 앞으로 자주 만나도록 합시다."

최 의원은 손목시계를 보며 일어났다.

"어디 또 약속이 있으십니까? 식사를 대접해 올리려고 했었는데요."

경찰서장이 현관으로 따라 나가며 연신 방아깨비 절을 했다.

"내가 술 살 테니 담에 합시다. 나 지금 지구당 사무실에 들러 조직을 총가동해야 될 일이 남았소."

"언제 상경하십니까?"

"투표일까지 여기 있어야겠소.내 구에서 표가 적게 나오면 어찌 되겠소."

최 의원이 서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곳이 지하 3층인지 4층인지 알 수가 없었다. 차에서 내려 건물로 들어와 계속 계단을 걸어 내려오기만 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계단을 한 층 내려와서는 긴 복도를 걸어 다시 계단을 내려오고는 했다. 그런데 그 소름 끼치고 끔찍스러운 비명소리, 긴 복도를 걸어갈 때마다 울려오는 비명소리들 때문에 계단을 몇 번 내려왔는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 비명소리를 듣는 순간 정신을 차리려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결국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마지막 층에서는 비명이 들리지 않았다 위는 고문실들이고 여긴 지하 감방일까? 그는 또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눈앞은 캄캄한 먹통이었다. 군대생활을 오래 해서 알지만 아무리 달 없고 구름 낀 어두운 밤이라고 해도 어둠에 눈이 익으면 무언가 물체들이 어렴풋이 보이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완전한 먹통방이었다. 햇빛이 전혀 통할 수 없는 깊은 지하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여기가 어디인지 그들이 누구인지 어림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차로 떠밀려 들어가자마자 눈이 가려졌었다.

"의원님, 잠깐만 가실까요? 괜히 시끄럽게 하면 피차에 곤란하니까 점잖게 갑시다. 오래 안 걸려요."

그들은 순식간에 팔을 뒤로 꺾었고, 입을 틀어막았다. 술을 마시기도 했지만 한인곤은 세 남자의 완력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이것들이 언제까지 이렇게 혼자 내버려둘 작정이지? 겁주자는 것인가......?’

한인곤은 먹통 방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감이 커져가고 있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자신을 일깨웠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마음은 안정되지 않았다. 불안감과 공포감이 뒤죽박죽된 상태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로구나, 사람이 이렇게 흔적 없이 사라질 수도 있겠는데, 하는 생각들이 불쑥불쑥 떠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이 동행 없이 혼자서 잡혀왔다는 것이 불안감을 더 자극하고 있었다. 집 앞까지 보좌관과동행하지 않고 큰길에서 보냈던 것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이들이 노리고 있는 한 그런 빈틈은 얼마든지 포착당할 수 있다는 것을 한인곤은 뒤늦게 깨닫고 있었다. 그는 말썽이 될 만한 자신의 언행이 없었는지 되짚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딱히 마음에 걸리거나 신경 쓰이는 것은 없었다. 특히 선거철이라서 평소에 비해 더욱 신중을 기하고 조심을 해왔던 것이다.

덜컹 철문이 열림과 동시에 불이 환하게 켜졌다. 한인곤은 눈이 부셔 반사적으로 눈을 가렸다.

"아니, 의자에 편히 잘 모셨어야지 이게 뭐야. 이 짜식들 이거 혼나야겠구만. 한 의원님, 이거 죄송합니다. 의자로 편히 올라앉으시지요."

누군가에게 팔을 잡히며 한인곤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이 시어 되감길 정도로 강렬한 불빛을 느끼고 일어서며, 이거 아주 병 주고 약 주고 하는구나,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그런 어르고 뺨치는 수법은 자신도 일찍이 군대에서 더러 써먹은 것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취조실이거나 감방일 거라고 생각했던 방에는 뜻밖에도 소파까지 놓여 있었다. 한인곤은 마치 무엇에 홀린 것만 같아 사무실을 둘러보며 어리둥절했다. 그곳은 깨끗하게 꾸며진 사무실이었다. 다만 창문이 없을 뿐이었다.

"자아, 이리 편히 앉으시지요."

키가 크고 마른 남자가 소파에 앉으며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맞아! 이것도 사람을 정신없이 만드는 또 다른 수법이구나.’

한인곤은 소파에 앉으며, 자신이 어둠 속에 주저앉아 단 한치도 움직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으며 스스로의 무력하고 한심스러운 모습에 어이없어하고 있었다.

", 커피 한잔하시죠."

양복이며 넥타이며 멋부린 티가 나는 남자가 보온병을 집어 들었다. 하얀 커피 잔 두 개에 차례로 커피가 차올랐다. 한인곤은 커피가 따라지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전에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자신의 숨소리는 답답한 것 같기도 했고 거친 것 같기도 했다.

"이 마호병이 국산입니다. 일제 못지않게 이런 것도 다 만들어내고 우리도 이젠 상당하지 않습니까?"

남자가 보온병을 들어 보이며 갑작스럽게 한 말이었다.

"아 예, 그렇습니다......"

한인곤은 얼떨결에 얼버무렸다. 보온병이 말썽 많은 일제 밀수품들 중의 하나라는 것은 알고 있었어도 국산이 생산된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국산이 생산된다는 건 잘 몰랐던 모양이지요?"

그 남자는 눈을 약간 치뜨며 웃더니,

"이런 것까지 척척 만들어내는 게 다 누구 덕입니까?"

하며 커피에 설탕가루를 떠 넣었다.

"......"

한인곤은 얼핏 무슨 말인지 종잡지 못하고 상대방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한 의원님은 아무리 야당을 하신다지만 근본사상이 의심스러운 것 아닙니까?"

"예에?"

한인곤은 순간적으로 정수리를 향해 머리카락이 수백 가닥의 찬 기운으로 뻗쳐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런 곳으로부터 사상을 의심받는다는 건 그야말로 치명적이었다.

"이런 것을 거침없이 만들어내는 건 경제발전의 결과고, 경제발전을 누가 시켰는지는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것 아닌가요?"

한인곤은 그 말이 그냥 지나가는 소리가 아니라 트집을 잡기 위한 덫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그야 당연히 각하의 덕이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 남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계속 깍듯하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당연하지요. 대한민국 국민치고 그 사실을 의심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사상의 의심을 떼치려다 보니 자신의 말이 좀 과장되고 있음을 한인곤은 느꼈다.

"그런데 섭섭하게도...... 정작 한의원님만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 것 같던데요?"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한 의원님은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바랍니까, 안 바랍니까?"

"그야 당연히 바라지요."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열렬하게 뛰십니까? 그건 지금까지 한 말하고 앞뒤가 안 맞지 않습니까? 아니면, 이제 경제건설은 기반이 잡혔으니까 아무나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

한인곤은 유도심문에 완전히 걸려들었음을 느꼈다 상대방의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해야 되는데도 몸 어딘가로 기운이 빠져나가며 맥이 풀리고 있었다.

"뛰는 건 다 좋아요. 허나 자금까지 동원하려고 그렇게 열심일 건 없지 않아요? 자기 일도 아닌데."

"......"

"지역구도 그래요. 그 선거와 이 선거가 다른데 한 의원님이 그렇게 나서면 지역 유권자들의 자유로운 선택을 방해하고 한쪽으로만 강압하는 것 아닌가요? 심히 유감스럽습니다."

"야당 국회의원도 출세고 감투인 것은 분명한데, 그 자리 보존하려면 좀 융통성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요? 정치란 타협의 예술인데. 자아, 차 식는데 좀 드시지요."

그는 여전히 반듯하게 예의를 갖추며 커피 잔을 들었다 그리고 소파 옆에 놓인 작은 탁자의 서랍을 열었다.

"남재구 국장님과의 인간관계도 있고 해서 십분 고려하기로 했으니까 직접 확인이나 해두도록 하세요."

그는 서너 장의 사진을 흔들더니 한인곤의 앞으로 던졌다.

"으악!"

한인곤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젖가슴을 다 내놓거나 치마를 다 걷어 올리고 있는 여자들과 어지럽게 얼크러져 있는 건 바로 자신이었다.

 

"와아, 박치기왕 기미리다, 기미리 !"

", 저 대그빡허고 돌허고 부닥치면 돌이 깨진다드라."

"공갈 때리지 마, 좆만새끼야. 기미리 데그빡이 머 무쇠덩어리드라냐."

", 좆만 새끼? 야 이 씹새끼야, 서울 사는 우리 삼춘헌티 들은 말인디 머시가 공갈이냐?"

"머 씹새끼? 니 죽어볼래?"

"좆 까네. 한판 붙을래?"

텔레비전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아이들 중에서 둘이 멱살잡이를 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은 레슬링이 아직 시작하지 않은 텔레비전 화면보다는 당장 눈앞의 싸움 구경에 눈들을 빛냈다.

"거 앞에 아 새끼덜 얌전허니 못 있겠냐! 저 쌈 헐라는 두 놈 당장 십 리 밖으로 몰아내뿌러."

뒤에서 어느 어른이 외쳤다.

"와아, 시작이다 시작!"

아이들의 눈길이 일시에 텔레비전으로 쏠렸다. 서로 멱살을 잡고 있던 두 아이의 손도 어느새 풀려 있었다. 레슬링이 시작되자 왁자지껄하던 시끄러움은 뚝 멎었다. 읍사무소 마당의 텔레비전 앞에는 아이들이 열대여섯, 그 뒤로 어른들이 열 명 남짓 둘러서 있었다. 아이들이 말하는'기미리'는 박치기로 유명한 김일 선수였다. 외자 이름에 ''가 붙어 발음되다 보니 기미리가 되어 전국적으로 아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여러 가지 일본풍과 함께 건너온 레슬링은 텔레비전 방송과 어울리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특히 사내아이들은 레슬링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텔레비전이 아주 드문 이 남도의 끝 시골 아이들까지도 '기미리'에 사족을 못 썼다.

", , , 물어뜯는다!"

", , 반칙이다. 눈 찔렀어."

"박치기 혀, 박치기!"

아이들은 작은 입들을 오므라뜨리며 기운을 써대고, 고사리 손들을 부르쥐어 흔들며 신바람 나게 외쳐대고 있었다.

 

"강 의원은 꾸척시럽게 테레비 갖고 무신 선거운동 헐라고 그런지 몰르겄어."

"아니시, 고것을 벌로 볼 것이 아니랑게. 강 의원, 그 물건이 미련시럽게 뚱뚱혀도 시상 물결 요리조리 탐스로 출세허는 것허고, 선거 때 여시맹키로 표 긁어모트는 수완이야 귀신 아니드라고? 요분에도 고 잘난 물건이 비문이 알아서 그 비싼 테레비를 다섯 대 썩이나 내다 걸었겄어."

"글씨, 그도 그렇기넌 헌디. 근디 말이여, 요분에넌 쌈이 쌈이라서 좀 달브덜 안 혀? 저 테레비럴 각단지게 한 집에 한나썩 사다 앵기면 몰르까, 요리 귀경시켜 갖고야 누가 표 찍어줄랑가? 워야, 워야, 저 허리 뿐질러지겄다!"

", 참말로 심덜이 장사랑께로. 씨름 귀경은 저그에 비허면 맹물이랑께. ,그려. 자네 말도 옳여 집에서 고무신이고 빨래비누 받고, 장터서 막걸리 얻어묵고 험스로도 니나 나나 씰룩씰룩허는 판잉께. 그 눈치 빠삭허니 알고 강 의원이 새 방도로 테레비 사다 걸었는지도 몰르제."

"근디, 강 의원도 너무 염치 읎고 낯짝 두껍덜 안 혀? 지아무리 당이 같다고 혀도 요리 요상시럽게 쌈이 붙었는디 어찌 박을 찍어도라고 헌댜?"

"긍께로 말이시. 까마구도 지 땅 까마구드라고 말이 안 되는 짓거리고, 그간에 우리 전라도를 찬밥, 쉰밥이다 못해 똥 친 작대기로 친 것으로 보자면 더 말이 안 되는 짓거리 아니겄어?"

"그려, 그려, 자네 말이 공자님 말씸이여. 두말허면 잔소리제. 워따, 그 박치기 씨연타!"

"카아, 쩌 미국 놈 저거 정신 못 채리고 벌벌 기는 것 봐라. 언제 우리가 저리 씨언허게 미국 놈을 패불겄냐. 기미리 최고다!"

어른들은 할 말 다 해가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나는 테레비만 보면 그 이말수 생각이 난당께."

"아 참 그놈 워찌 되았당가? 여그 병원서는 못 고칠 별시런 임질이니 매독이니 소문이 시끌시끌 해쌌등마."

"어허, 자다가 봉창 뚜딜긴당가 시방? 넘덜이 많이 보면 그만치 쉬 닳아진다고 즈그덜 식구덜찌리 살짝살짝 보든 그 비싼 테레비 폴아갖고 매독 고치자고 광주로 나간 판잉께 그 자석 생각이 나고 그라제."

"거 참 요상허시. 임질이고 매독이야 걸리기도 쉽고 낫기도 쉰 병이고, 남자치고 임질 매독 한 분썩 안 걸림사 남자 자격이 없는 것인디, 이말수는 워찌 그리 야단이랴? 국산허고 월남제허고는 달브당가?"

"그려, 월남제는 국제매독이라는 것인디, 얼매나 독허든지 간에 약이란 약이 안 듣고, 글씨 물건이 시나브로 썩어들어 간디야."

"머시여? 글먼 워찌 되게?"

"연장만 그리 되는 것이 아니당마 코도 썩어 내래앉고, 눈도 썩어 봉사가 되고 그러다가 결국......"

"어허 참말로, 테레비야 라지오야 갖고 올 때는 태산을 떠오는 것맨치로 말수고 동천댁이고 기가 펄펄허등마 그 무신 귀신 붙은 일이까. 쌈은 안 허고 맨날 그 구녕만 팠을랑가?"

"아니여. 쌔빠지게 싸움서 한 서너 번 몸 풀었다는 것인디, 워떤 드런 년 구녕에 재수 읎이 퐁당 빠진 것이제."

"화아, 그년이 누군지도 몰르고 미치고 팔딱 뛸 일이시 잉. 근디 워째 월남에 있을 적에 병이 나도 나야제 집에 와분 담에 이러면 워쩐댜?"

"이 사람 무식허기는 매독은 임질하고는 달라서, 거 유식헌 말로 머시라고 혀? 병균이 몸 안에 오래 숨어 있는 것 말이여. 좌우간 그렇다치고, 병균이 늦잠 잘 것 다 자고 지 좋을 적에 부시시 일 보로 나온 것 아니드라고."

"그것 참 생각헐수록 징허고 징허시. 그리 죽어불면 전사도 아니고 보상도 못 받고, 죽도 밥도 아니시. 월남돈 묵기가 그리 쉽덜 안 혀."

"무신 돈은 머 묵기 숼코? 돈이야 쓸 때 왕 노릇 허는 것만치 벌 때야 종 노릇 허는 것 아니드라고."

"그려, 다 인명은 재쳔이시."

어른들의 세상살이 이야기는 또 체념조로 바뀌고 있었다.

"와아, 박치기 박아라!"

"기미리 최고다. 한 방 더!"

마치 파릇파릇 돋고 있는 새싹들이 풍기는 4월의 생기처럼 아이들이 신바람 나게 외쳐대고 있었다.

강기수도 당의 방침에 따라 자기 지역구에 내려와 있었다. 그가 생각해 낸 기발한 선거운동 방법 하나가 텔레비전 설치였다. 애들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시골사람들이 제일 좋아하고 부러워하는 것이 텔레비전인 것에 착안한 그는 다섯 대를 사가지고 내려왔다. 사실 텔레비전은 시골뿐만 아니라 서울사람들한테도 최고 인기품이었다. 아직 서민들은 갖기가 어려웠고,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월부로 들여놓고 매달 돈을 갚아나가느라고 애를 먹는 사람들도 숱했다. 시집가는 처녀들은 장롱 다음으로 갖추고 싶어 하는 것이 텔레비전이었다. 그러나 그 꿈을 쉽게 이루는 처녀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강 의원은 정치인답게 그 텔레비전 다섯 대를 가지고 거창한 자리를 마련했다. '군민의 정서 함양을 위한 텔레비전 전달식'이 그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선거구에서 각 동네마다 대표를 뽑아 한 500여 명쯤 모이게 했다. 텔레비전 전달은 겉치장일 뿐이었고, 그는 목청을 뽑아가며 대통령 선거운동에 열을 올렸다. 그리고 그 텔레비전을 관공서마다 설치해 군민들이 맘껏 보게 했다.

"! 누구 놀리는 것이여, 화 질르는 것이여? 저것이야 전기 들어오는 읍내서 편케 사는 사람들 더 호시 태우는 것이제 안직 전기도 안 들어오는 구석지에 사는 사람들은 보고만 죽어라 고것인감만? 니기럴, 찍어줄라다가도 카악 가래침 뱉어불겄다."

먼발치에서 이런 불평을 듣고서야 강 의원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선거구에서 아직도 전기가 안 들어가는 곳이 얼마가 되는지 파악이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에 무릎을 쳤다.

전기 가설!

그건 다음 국회의원 선거 때 내세울 공약으로 너무나 근사했다. 그런데, 강 의원은 선거 날이 하루하루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자꾸 찜찜해지고 있었다. 공화당으로 옮기고 대통령 선거가 세 번째인데 판세가 그전하고는 영 딴판이었다. 일반인들은 더 말할 것 없고 경찰이나 공무원들의 분위기마저 이상스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러다가 표가 너무 안 나와 다음 공천 날아가 버리는 것 아닌가? 강 의원은 이런 위기를 느낄 정도로 표가 한쪽으로 쏠리고 있는 것을 감지했다. 선거철의 그런 예감들은 거의 틀려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이번 선거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서 더욱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가 있었다.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더 힘내서 뛰어. 이건 각하를 위해서가 아니고 바로 나를 위해서야. 여기서 체면치레는 하게 표가 나와야지 제일 작게 나와봐. 그땐 어떻게 되겠어! 공천 날아가잖아. 내 공천 날아가면 자네들 신세는 어떻게 되지?"

강 의원은 조직원들을 닦달하고 나섰다. 그러나 한풀 꺾인 그들의 기세는 살아오를 것 같지가 않았다. 또한 그들마저도 김대중을 찍어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이거 큰일인데...... 이건 각하의 10년 정치 실패야. 잘살게 됐다고 시끄러운데 이 전라도 땅은 맹탕으로 자식들 타향살이 보내기 바쁘니 인심이 등 돌리지......’

강 의원은 몸이 달아 동네마다 지프를 몰고 다녔다.

"여러분, 이 강기수 말을 믿어요. 앞으로는 우리 호남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기로 계획이 딱 짜여져 있어요. 나를 믿고 이번에도 눈 딱 감고......"

급한 김에 강기수는 나오는 대로 외쳐대다가 그만 맥이 빠지고는 했다. 자신의 말에 아무런 자신이 없는데다가 사람들의 반응이 전에 없이 심드렁하고 뜨악했던 것이다. 그런데 선거전을 일거에 뒤집어엎는 엄청난 폭탄이 터졌다. 김대중 후보가 전주유세에서 '박 정권이 영구집권을 위한 총통제를 추진하고 있다는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지금 어느 나라에 연구 위원이 나가서 총통제를 연구 중이다'라고 폭탄선언을 하고 나섰다.

강 의원은 충격과 환희가 엇갈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믿을 수 없는 폭로가 선거에 결정타를 입힐 것 같은가 하면, 이번에만 어찌 잘해서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앞날도 마르고 닳도록 탄탄대로라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강기수는 불안 속에서 22일의 광주 유세에 사람들을 몰고 나갔다 박정희 후보는 전남 개발 공약을 집중적으로 내세웠다. 전남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호남고속도로를 비롯한 10여 가지의 도로공사를 실시하고, 35개년 계획을 추진할 2조 원 중에서 전남에 제일 많이 투입해 광주 목포에 공업단지를 건설하고 특히 광주에는 50억본()을 생산하는 대연초제조창과 대형 우유가공공장을 건설하고, 여수 순천 광양도 새 공업단지로 개발하고, 특히 여수는 제2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한다는 거였다.

"얼랴, 너무 과헌디 뒷감당 워쩔라고."

강기수는, 각하가 정치할 줄 안다 싶으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김대중 후보는 서울 유세에 돌입하면서, '10년 동안의 부정부패로 얼룩진 박 정권은 이번 기회에 반드시 갈아치워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이번에 정권교체를 이루지 못하면 '영구집권의 총통제가 실시되어 더 이상 선거가 없을 것이라는 확고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선거운동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이에 맞서 박정희 후보는, '이번이 대통령으로 출마하는 마지막 기회다. 아직 부정부패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다음 임기 중에 부정부패를 기어이 뿌리뽑고 물러가겠다'며 부산과 서울에서 연달아 총통제를 완강히 부인했다.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가 제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런데 개표 결과는 그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상한 현상을 나타냈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표가 두 후보를 따라 칼로 무 치듯이 갈라진 것이다. 그리고 잇따라 서울대생들이 부정선거 규탄데모를 일으켰다.

 

 

48. 아름다운 폭력

천두만은 가발회사에서 돈을 받아가지고 나오면서 나복남의 일로 줄곧 마음이 무거웠다. 나복남 없이 시골을 돌아다니면서도 그의 일이 마음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복남이의 장래가 걱정이기도 했지만 갈포댁이 딱해 더 그랬다. 복남이는 서너 달 전부터 시골 가는 일에 따라나서지 않았다. 갈수록 머리카락은 모아지지 않는데 괜히 아저씨한테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거였다. 복남이가 짐이 되고 있는 것처럼 느낄 정도로 머리카락이 바닥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언제부턴가 일거리의 선후가 바뀌어 머리카락 모으는 것은 뒷전이 되고 아가씨들을 서울로 끌어올리는 것에 더 마음을 쓰게 되었다. 그것도 회사에서 수고비를 다 받는 것이니 머리카락을 모으나 그 일을 하나 돈벌이는 마찬가지니까 마음 쓰지 말라고 해도 복남이는 듣지 않았다.

"쟈가 요상시럽게 변했당께라. 밤낮으로 무신 크담헌 책에다 코럴 박고 사는디, 소핵교 포도시 나온 신세에 과거급제를 허잔 것도 아닐 것이고, 고등고시를 쳐서 판검사가 되잔 것도 아닐 것이고, 저것이 무슨 꾸척시러운 일인지 몰르겄어라우. 한 푼이라도 벌어도 살기 에로운 형편에."

갈포댁의 탄식이었다. 그게 무슨 책이냐고 물어도 그냥 읽어보는 거라며 복남이는 어물거리고 말았다. 책이야 어떤 책을 읽든 해 될 것 없으니까 상관할 게 없었고, 급한 문제는 복남이의 돈벌이였다 무슨 일을 해서든 복남이가 벌어서 가장 노릇을 해야 집안이 잡힐 수 있었다. 당장은 윤자가 벌어서 살림을 꾸려간다고 하지만 그 애도 시집갈 나이가 다 차 있었다. 제가 벌어서 손수 시집갈 채비를 해야 할 처지인데 버는 쪽쪽 생활비로 없애고 말면 그보다 난감한 일이 없었다. 갈포댁의 탄식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몸을 해가지고 복남이가 돈벌이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없었다. 풀빵장사 할 밑천도 없으니 천상 어디에 취직을 해야 하는데 손이 그 모양이니 누가 취직을 시켜줄 것인가 이 세상에 사람이 밥벌이할 수 있는 일은 많고 많지만,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고 해도 한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천두만은 차창 밖을 내다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해서든 복남이의 밥벌이를 할 수 있게 해줘야 되겠는데 그 어디에도 기댈 데라고는 없었다. 자신이 가발 하청공장을 차리는 것이 두말할 것 없이 딱 좋은 일인데 아직 돈이 모자랐다. 딸하고 자신이 앞으로 2-3년은 더 기를 쓰고 모아야 어떻게 해볼 수 있는 형편이었다. 그동안 복남이가 아무 벌이도 못하게 되면 집안 꼴은 더 쪼들리고, 윤자는 시집가기 어려운 노처녀 신세가 될 것은 뻔했다.

아니, 쩌그 저 극장!’

무심코 버스 밖을 내다보고 있던 천두만은 눈이 번쩍 띄었다. 낯익은 극장과 함께 서동철 그 사람의 얼굴이 퍼뜩 떠올랐다.

옳여. 쌍짱구 그 양반을 찾아가 보먼 무신 수가 있덜 안컸어. 그 양반이 주먹 씨고 무섭기는 혀도 인정이 많앴는디, 나헌테 재까닥 극장 변소 똥 푸게 혀주고, 마누래 딜고 극장 뒷문으로 들어가 살짝 영화 보는 것도 눈감아 주고 허덜 안 혔어. 그 덕에 마누래헌테 영화 솔찬이 귀경시켜줌서 냄편 체면 섰제. 글고 가발공장으로 자리 옮길 적에는 서운해 험스로 더러 놀러오라고도 안 혔다고. 좌우간에 그 양반이 도와주자 허고 맘만 묵었다 허면 복남이 한나 어느 구석지에 박어 밥벌이허게 맨글어주는 것이야 식은죽 묵기 아니겄어. 극장표 포는 시악씨덜 말 들어보면 그 주먹이 원체로 씨고 부하들이 많애서 그 근방 워디고 안 통허는 디가 읎다든디. 아니여, 복남이가 손이 그렁께 워디 존 자리 바랠 수는 읎고, 거그 극장 청소부 자리만 얻어도 워디여. 그 손으로 청소야 안 애롭게 헐 수 있응께. 비질이야 왼손 부리면 되고, 대걸래질이야 오른손을 보태면 비질보담 숼케 되제.’

천두만은 꼬리를 잇는 생각으로 마음이 달뜨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유일표 학생이었다. 서동철이 그렇게 쉽게 자신에게 극장의 똥을 푸게 해주었던 것은 순전히 유일표 학생의 덕이었다. 이 일에도 그 학생의 힘을 빌리면 틀림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학생이 어디에 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만났을 때 곧 군대에 간다고 했었는데 그 뒤로는 만난 적이 없었다. 군대에 갔으면 소식을 전하고 살았어야 되는 건데 자신이 너무 무심하게 지내고 말았다. 서동철에게 물었으면 어디에 근무하는지 알았을 것인데. 그러나 날이 날마다 힘드는 일에 부대끼고 허덕이며 사느라고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몇 년 이 훌쩍 지나가고 말았다. 진작 제대를 했을 텐데,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 그를 앞세울 수 없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다른 날과 달리 천두만은 밤늦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서동철을 만나러 갈 일이 머리에 가득 차 있었다. 일이 잘될 것인지 어떨지...... 전처럼 정답게 대해줄 것인지 어쩔지......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 것인지...... 이런저런 생각들이 얽히는 속에서 못내 후회스러운 것이 있었다. 그동안 서동철을 한 번도 찾아보지 않았던 것이 유일표 학생에게 무심했던 것보다도 더 후회스러웠다. 머리카락을 쫓아 정신없이 시골 구석구석을 헤매 다니다보니 건듯 불어 간 바람처럼 몇 년이 흘러가고 말았다. 간에 인사 한번 없다가 불쑥 찾아가 일을 부탁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자꾸 마음이 쓰였다.

천두만은 이튿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어젯밤에 했던 걱정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일이 되든, 안 되든 생각난 김에 일단 찾아가 보기로 작정했다. 저 구름에 비 들었으랴 했는데 소나기 쏟아지더라고 뜻밖에 잘될 수도 있었고, 안 되더라도 서운할 것은 없었다. 하는 데까지는 해보아야 미련이나 후회 같은 것이 남지 않을 거였다. 천두만은 극장 가까이 이르러 망설거렸다 빈손으로 찾아가기가 마음에 걸렸다. 오랜만에 찾아가면서 인사가 아니었다. 지난날 도움을 받은 것도 그렇고, 더구나 새 일을 부탁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막상 인사치레를 하려고 생각하니 무엇을 사가야 좋을지 마땅한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수중에 돈은 많지 않고, 상대방은 언제나 양복을 매끈하게 차려 입은 멋쟁이였다. 어설픈 것 사가지고 가봤자 눈에 안 차면 괜히 돈만 버리는 거였다. 천두만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담뱃가게 간판을 보았다. 그는 거기에 마음이 끌렸다. 담배를 최고급으로 사가지고 가면 실수가 안 될 것 같았다. 담배 피우는 사람치고 최고급 담배를 싫어할 리가 없었다.

천두만은 담배가게 앞에서 또 망설였다.

두 갑은 말이 안 되고, 다섯 갑? 다섯 갑이 괜찮헐랑가? 주먹 씨고 배장 씬 사람헌테 다섯 갑이 선하품 나오게 혀불먼 으쩌제? 글먼 열 갑, 한보루로혀? 글씨...... 한보루는 나헌테 과헌디? 글먼 일곱 갑으로 혀? 일곱 갑? 일곱 갑? 워째 아구가 안 맞는디? 하 참, 요것을 워째야 좋제?’

그때 나삼득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날 밤 석탄에 파묻혔던 기억과 함께 자신에게 잘해 주었던 일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그려, 삼득이 성님 아니었음사 나가 처자석덜 딜고 오늘꺼정 살 수 읎었을 것잉께.’

그는 마음을 정했다.

"여그 청자 한 보루 줏씨요."

천두만은 담뱃가게의 작은 구멍을 들여다보며 힘차게 말했다. 청자 열 갑을 사는 건 처음이었다. 담배를 옆구리에 낀 천두만은 극장의 큰 유리문 안을 기웃기웃했다. 시간이 너무 일러 조 할인 손님도 안 들 때라 그런지 극장 문은 닫혀 있고 안에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일 바빠지기 전에 빨리 만나려고 서두른 것이 너무 서둘렀다 싶어 천두만은 담배를 빼 물었다. 큰길에서 자동차들이 빵빵거리고, 사람들이 바쁜 걸음으로 오가고 있었다. 서울의 하루가 또 시작되고 있었다. 천두만은 느리게 담배연기를 날리며 그 거리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 익은 거리가 이상하게 낯설어 보였다. 그동안에 번화해진 탓이 아니었다. 똥통 리어카를 끌고 몇 년 동안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녀서 이 근방은 너무나 환했다. 그런데도 친숙한 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고 처음 서울 거리를 대했을 때와 별로 다를 것 없이 서먹서먹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하루만 떠났다가 돌아와도 정답고 푸근했던 고향 마을의 맛이라고는 서울 어디에서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나마 헤설픈 정이라도 조금 느낄 수 있는 데가 있다면 복남이네 산동네였다. 그러나 거기도 춥고 배고팠던 기억이 너무 커 달갑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월이 자꾸 쌓이는데도 자신이 잘못 와 있는 것 같은 그 묘한 서먹거림과 낯설음은 왜 가시지 않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만 그런가. 촌에서 온 사람들은 다 그런가? 나가 빙신인가, 못나서 그런가? 맘언 두고 몸만 와서 그런가? 아매 나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여. 서울이란 디가 사람만 와글바글 많았제 원체로 서로가 정 읎이 산께 워디다가 맘얼 붙일 디가 있어야 말이제. 나가 시방 서울 한복판에 워째 이러고 섰는지 몰르겠네......’

유리문 저 안쪽에서 사람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천두만은 하릴없는 생각을 털어냈다.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여자는 그 옷 입은 것으로 보아 매표원 아가씨였다. 천두만은 반가운 마음으로 유리문을 마구 두들겼다. 그런데 가까이 온 아가씨는 아는 얼굴이 아니었다.

"표 사게요? 아직 안 팔아요."

두꺼운 유리 때문에 아가씨의 말이 먼 느낌으로 들렸다.

"쩌어 머시냐, 미쓰 정은 안직 안 나왔능게라?"

천두만은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로 물었다.

"미쓰 정 시집갔어요. 왜 그러세요?"

"시집? 은제요?"

"작년에요. 왜 그러냐구요?"

아가씨의 얼굴에 짜증이 드러났다.

"이 미쓰 정을 만내로 온 것이 아니라 부장님을 만내로 왔소. 서동철 부장님."

"부장님을요오?"

말꼬리가 치올라가며 아가씨는 빠르게 천두만의 위아래를 훑었다. 당신 같은 사람이 감히 부장님을 만나려고? 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 부장님 기시요?"

"아직 안 나오셨어요."

아가씨는 획 돌아서서 매표소로 가버렸다.

그것 참 느자구 읎이 쌀쌀맞네. 지도 성냥 곽만허니 좁아터진 방구석에 쪼글치고 앉어 표 폴아 월급 타묵는 신세면 하나또 보잘 것 읎이 가난헐 것이 뻔헌디 워찌 저리 사람을 눈 아래로 깔아보고 저려? 시상 인심 참 요상시럽당께로. 있는 사람들이 없이 사는 것들 하시허는 것이야 그렇다 치드라도, 없는 것들 할라 없는 사람을 깔아보고 무시허는 것은 고것이 무신 심뽀제? 고것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랑께로.’

천두만은 싹 심기가 상해 눈을 찡그려 붙이며 꽁초를 빡빡 빨아댔다.

"아니, 이게 누구요? 똥 푸던 천 씨 아닌가."

유리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들리는 이 말에 천두만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이고메 장 씨 아자씨, 그간에 무고허셨는게라?"

천두만은 이마가 유리창에 부딪칠 지경으로 다가서며 반색을 했다.

", 그럭저럭 살지요. 헌데 천 씨는 여기 어쩐 일이요?"

그 남자는 대걸레를 담근 물통을 바닥에 놓으며 물었다

"야아, 부장님 잠 만낼라고라."

"? 또 여기 똥 푸게?"

"아니구만이라. 그냥 인사디릴라고라."

천두만은 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다시 똥을 풀 거냐는 말에 진저리가 쳐졌던 것이다.

"다행이오. 또 똥 푸게 되면 안 돼지. 부장님 운동하시고 오실 때 얼마 안 남았으니 거기서 좀 더 기다리시우. 나한테 열쇠가 없으니 문을 딸 수가 없구랴. 난 일 좀 해야겠수."

"야아, 어여 허시게라."

천두만은 돌아서는 청소부 장 씨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청소부 반장 격인 장 씨는 살기가 고달파서 그러는지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지 그 동안에 부쩍 늙어 있었다. 그 모습이 딱하고 측은했다.

사람 사는 것이 세월 따라 한치 썩이라도 나사져야 고상험스로도 사는 맛이 나제 세월이 가는디도 맨날 그 자리에 그 타령이면 그것 참 팍팍헐 일이제. 청소부 월급 받아감서 새끼덜 뒷수발허자면 신세 필 날이 읎겄제. 나보고 또 똥 푸러 왔냐고? 에이 쯧쯧, 사람 신세가 그리 깨진 쪽박 신세가 되먼 쓰가니. 쪼깐만 기둘려봐. 하청공장만 채리는 날에는 나도 한 시상 보는 것이여. 딸이 딱허니 채럴 잡고 기술자덜 부리고, 나도 독허니 일허고, 마누래도 팔 걷어부치고 나스고 허면 금세 불길로 일어날 것이여. , 일어나고말고. 음지가 양지 되는 것이제.’

눈을 사르르 내려감은 천두만은 끝없는 황홀경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하청공장을 할 생각만 하면 언제나 고향의 여름 들판에 소나기가 지나간 다음에 서곤 했던 무지개, 그것도 쌍무지개의 그 찬란한 모양이 눈 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쌍무지개는 운수대길의 징조로 누구나 보기를 원했다.

"아니, 이거 천 씨 아니오?"

옆에서 들리는 말에 천두만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아이고메 부장님, 지가 먼첨 못 알아보고. 그간에 평안허셨능게라?"

천두만은 허둥거리며 서동철 앞에 그야말로 코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

"이게 어쩐 일이오? 날 찾아온 거요?"

서동철이 빙그레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포마드 잔뜩 바른 머리를 '올백'으로 넘겨 그의 짱구 이마는 더 튀어나와 보였다.

"아이고메 이 손이......"

천두만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고 서동철을 쳐다보고 하며 주저주저 손을 내밀었다.

"요새는 똥 푸는 일 하는 것도 아닌데 손이 뭐 어때서요."

서동철은 천두만의 손을 잡고 기운차게 흔들었다. 천두만은 험한 일로 투박해지고 거칠어진 손을 남 앞에 내놓기가 창피스러웠고, 악수라는 것을 별로 해본 일이 없어서 어색하고 쑥스러웠다.

"나한테 무슨 볼일 있소?"

서동철이 다정하게 물었다.

"야아, 쪼깐 디릴 말씸이 있어서......"

"그럼 사무실보다 다방이 낫겠지요? 사무실에는 직원들이 출근하고 어쩌고 복잡하니까. 갑시다, 다방으로."

천두만은 생각보다 훨씬 더 정답게 대해주는 서동철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극장 옆의 다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가발공장 벌이는 어때요?"

서동철이 자리 잡으며 물었다.

"야아, 덕분에 그작저작 묵고 사능마요."

천두만은 의자 끝에 겨우 엉덩이를 붙이고 대답했다.

"똥 푸는 것보다 나으면 됐소. 천 씨야 왕대포나 쐬주가 더 좋겠지만 이런 때 커피라는 것도 한잔 마셔보시오."

서동철은 커피를 시키고 나서 담배를 꺼내며,

"무슨 일이오?"

어서 할 이야기를 하라고 눈짓했다.

"쩌어 머시냐, 그간에 정신 읎이 사니라고 인사 한분 못 디리고, 하도 오랜만에 뵈로 옴스로 빈손으로 오는 것도 인사가 아니고 혀서......"

천두만은 더듬거리듯 어렵게 말하며 담배를 두 손으로 받쳐 서동철 앞에 내놓았다.

"이게 뭐요?"

서동철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담배럴......"

"이런, 천 씨가 무슨 돈이 있다고 이런 걸 사오고 그래요. 천 씨나 가져가서 피워요."

", 아니구만이라. 사람이 인사를 몰르면 사람이 아닌 법인디, 부장님헌테 덕 입은 것이 을맨디 그간에 사람 노릇 못허고...... 지 쪼깐헌 맴잉께 부장님이 맛나게 피워주시면 더 고마울 것이 읎겄구만이라."

두 손을 앞으로 모아잡은 천두만은 간절한 얼굴로 말하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거 참, 내가 덕 보인 게 뭐가 있다고.“

서동철은 담배 싼 봉지를 반 토막 내듯 하고는,

"이런, 제일 비싼 청자를 자아, 반씩 나눠 피웁시다."

하며 절반을 천두만 앞으로 밀어놓았다.

"아니구만이라, 아니구만이라 지가 그걸 피우먼 입이 놀래 경기 나는 구만이라. 지 맴잉께 지발 그냥 받아주시씨요. 부장님이 그러시면 보잘 것 읎어서 그런갑다 허고 지가 서운해지는구만이라."

천두만은 애원하듯 하며 담배를 다시 서동철 앞으로 밀어놓았다.

"허 참, 이 담배 이거 눈물 나서 어찌 피우겠소. 천 씨 돈이 어떤 돈이라고."

서동철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어디 무슨 얘긴지 들어봅시다."

하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야아, 긍께 머시냐......"

천두만은 지난밤부터 간추려왔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기와 나삼득과의 관계, 나복남을 취직시켜 줬는데 결국 손가락이 잘리고 쫓겨난 일, 나복남을 돈벌이에 데리고 다녔지만 지금은 어렵게 되었다는 것까지 빠르게 엮어나갔다.

"...... 그려서 그놈 불쌍허니 생각허셔서 부장님이 여그 극장에 청소라도 시켜주실 수 있을랑가 혀서......"

말을 마친 천두만의 이마에는 진땀이 내배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봐, 손가락이 네 개나 잘려나갔는데도 사장 놈이 나 몰라라 하고 내쫓기까지 해버렸다는 게 참말이오?"

말이 거칠어진 서동철의 눈꼬리에 성깔이 돋아 있었다.

"야아, 지가 이 두 눈으로 똑똑허니 봤응께요."

천두만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힘주어 대답했다.

"요런 지 에미 붙어묵을 씨부랄 놈이 있능가!"

상체를 벌떡 일으키는 서동철의 입에서 고향말의 욕이 터져 나왔다.

"알았으니까 내일 이때쯤 그 친구를 이리 데리고 나오시오."

"야아, 고맙구만이라, 고맙구만이라."

자리에서 일어서는 서동철을 향해 천두만은 몇 번이고 허리를 굽혔다. 이튿날 아침 서동철이 다방으로 들어서자 천두만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옆에 앉아 있던 나복남도 후딱 일어났다.

"어이, 얼렁 인사디려. 서 부장님이시어."

천두만이 다급하게 나복남에게 일렀다.

"처음 뵙겠습니다. 나복남이라고 합니다."

나복남은 오른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고개를 깊이 숙였다.

", 반갑소, 나 서동철이라고 하오."

서동철이 냉엄한 얼굴로 악수를 청했다.

"저어 ...... 제 손이 ......"

나복남이 어깨를 움츠리며 당황스러워했다.

"괜찮소. 꼭 악수하자는 게 아니라 손을 보려는 거니까. 어디 손을 내보시오."

서동철이 의자에 몸을 부렸다. 나복남은 머뭇거리며 오른손을 빼냈다. 그리고 서동철 앞으로 천천히 팔을 뻗었다.

"......"

서동철은 미동도 하지 않고 나복남의 손을 응시하고 있었다. 손가락 네 개가 한 마디씩밖에 남지 않은 손은 섬짓하게 흉했고, 성한 엄지손가락 하나가 오히려 괴이스럽게 보였다. 서동철은 계속 손에 눈길을 박은 채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내뿜었다. 그리고 불쑥 말했다.

"이런 손으로는 청소도 못 해먹어."

천두만은 그만 가승이 쿵 내려앉았다.

"자네 말이야, 사장 만나서 얼마를 달라고 할 참이었지?"

서동철이 나복남을 쳐다보며 물었다 천두만은 자신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 엄하면서도 독기가 흐르는 무서운 서동철을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몸으로 어떻게 먹고 살 수 있게...... 그러니까 구멍가게 하나 할 수 있도록......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복남은 서동철의 기세에 눌려 연달아 말을 더듬었다.

"영영 병신이 되고도 구멍가게 정도라. 순진한 거야, 배짱이 없는 거야?"

서동철은 담배연기를 확 내뿜고는,

"헌데, 사장 그 새끼는 만나주지도 않고 경찰에 연락해 버렸다 그거야?"

하며 언성이 높아졌다.

"예에......"

"좋아, 가자!"

서동철이 재떨이에 담배를 던지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 어디로, .?"

나복남이 엉거주춤 일어나며 말을 더듬었다.

"어디긴 어디야, 그 공장이지, 그런 개새끼는 박살내 버려야 되잖아."

서동철은 앞서 걸어 나가고 있었다. 다방 앞에는 택시 두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서동철이 나타나자 건장한 사내 넷이 동시에 허리를 꺾었다.

"잘 따라오라고 해."

서동철이 사내들에게 일렀다.

", 염려 마십시요."

사내들이 다시 허리를 꺾었다. 천두만과 나복남은 서동철과 함께 앞 택시에 올랐다.

"마장동 가주세요."

앞자리에 앉아 운전수에게 말하는 나복남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천두만은 뒷자리의 서동철 옆에 잔뜩 쪼그리고 앉아 비로소 서동철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어제 나복남을 데리고 오라고 할 때 청소부로 써주는 줄만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서동철은 그때 벌써 사장을 찾아갈 작정을 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들이 공장으로 들어서자 수위가 앞을 막았다.

"누구요?"

"골통 박살나기 전에 죽치고 있어. 느네 사장 나리 만나러 왔으니까."

한 사내가 수위의 목을 콱 움켜잡더니 떠다 밀었다. 수위는 켁켁거리며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쳤다. 나복남을 앞세운 그들은 공장 옆의 사무실로 거침없이 몰려갔다. 한 사내가 사무실 문을 군홧발로 여지없이 내질렀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거 뭐야? 당신들 누구야?"

한 남자가 사무실로 밀려드는 그들을 막으려고 했다.

"아가리 닥쳐, 이 개뼉다귀야! 느네 사장새끼 어딨어!"

한 사내가 그 남자의 어깻죽지를 후려치더니 떠밀어버렸다.

"아이쿠쿠쿠......"

그 남자는 신음소리와 함께 뒤로 나둥그러졌다.

"느네들 꼼짝 말고 자빠졌어. 깝죽대면 골통들 싹 빠개고 말 테니까."

다른 사내 둘이 의자를 불끈 들어 책상을 내려치며 으르렁거렸다. 그 서슬에 두 아가씨는 '어머, 어머......' 하며 곧 책상 아래로 기어들 것처럼 움츠러들었고, 다른 남자 직원 둘은 일어날 생각도 못하고 책상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왜 이리 시끄러워!"

그때 사장실이라는 팻말을 붙인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남자가 소리쳤다.

"! 사장님이시구먼. 예의바르게 먼저 걸어 나오실 것까지 뭐 있나. 당신 만나러 왔으니까 들어가시자구."

서동철이 찬바람 도는 웃음을 피우며 사장의 가슴팍을 퍽퍽 쳤다.

", ."

사장은 묘한 소리를 토하며 뒤로 밀리고 있었다.

"이 새끼야, 얌전하게 책상에 가 앉어."

서동철은 연달아 사장의 가슴팍을 퍽퍽퍽 쳐댔다.

", , ."

사장은 주먹질에 맞추어 신음을 토하며 뒷걸음질을 하다가 자기의 회전의자에 털퍽 주저 앉았다.

"너 이 새끼, 이 사람 알지?"

서동철이 한 발을 사장의 책상 위에 올리고 뒤에 서 있는 나복남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예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사장이 나복남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도 입술도 떨리고 있었다.

"이 새끼, 이 손가락들 니 놈이 잘라먹은 거지?"

서동철이 나복남의 오른손을 잡아 사장 앞에 내밀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자기가 잘못해서......"

그때 책상 위에 올라가 있던 서동철의 팔이 쭉 뻗치며 사장의 가슴팍을 내질렀다.

"어쿠!"

사장이 비명을 토하며 가슴을 싸잡았다.

"요런 싹수없는 새끼야, 사람 열 받치게 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 개소리 치면 혓바닥 확 뽑아버릴 테니까. 이 사람이 느네 집에 찾아갔을 때 만나주지도 않고 경찰에 연락했다며?"

"......"

사장은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이 새끼, 너 경찰 빽이 그렇게 든든해? 너 그렇게 경찰 좋아하면 어디 또 전화해서 경찰 불러봐."

서동철은 송수화기를 들어서 사장 코앞에다 디밀었다.

", , 아닙니다.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사장이 송수화기를 피하며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더듬거리는 말처럼 파랗게 질린 입술이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 도끼, 이 새끼한테 맥주 좀 먹여라."

서동철이 부하에게 턱짓했다.

"!"

사장실을 지키고 있던 두 사내 중에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다른 두 사내는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고, 천두만은 사장실 문 앞에 엉거주춤 서서 사장실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서동철은 느리게 걸어 소파로 가 앉더니 두 다리를 쭉 뻗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는 동안에 도끼라는 사내는 아까 서동철이 서 있던 자리로 갔다. 그 사내의 손에는 맥주병이 들려 있었다. 그는 사장의 책상 옆에 서더니 거침없이 이빨로 뚜껑을 땄다. 그리고 입에 물린 뚜껑을 사장을 향해 내뱉었다. 뚜껑은 마치 손으로 던진 것처럼 정확하게 사장의 얼굴로 날아가 부딪쳤다. 사장은 움찔했다. 그런데 그는 점점 더 심하게 떨고 있었다. 도끼는 맥주병을 기울였다. 맥주는 장부가 펼쳐져 있는 사장의 책상 위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장부를 흥건하게 적시고 책상으로 번져나가던 맥주는 아래로 흘러내렸다. 사장은 꼼짝을 못하고 와들와들 떨기만 했다. 도끼는 맥주병을 세웠다 맥주는 절반쯤 남아 있었다. 그는 한 발짝 옮기더니 맥주병을 다시 기울였다. 맥주는 사장의 정수리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얼굴이고 뒤통수고 가릴 것 없이 흘러내린 맥주는 목줄기를 타고 와이셔츠 안으로 줄줄이 스며들고 있었다. 사장은 한층 더 심하게 떨고 있었다. 도끼는 빈 맥주병을 사장의 책상 위에 쾅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그리고 두 다리를 반쯤 굽히고 두 팔을 벌리며 이상한 몸짓을 했다. 팔을 느린 동작으로 두어 번 뻗고 접고 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소리쳤다.

"이얍!"

그 순간 맥주병이 반 토막이 나며 윗부분이 사무실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 새끼야, 뭐 하고 자빠졌어. 저거 빨리 집어 올려."

도끼가 사장에게 내쏘았다.

", ."

사장이 허겁지겁 맥주병 윗부분을 집어 두 손으로 도끼 앞에 내밀었다.

"병신 같은 새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넌 그대로 얌전히 앉아 있어."

도끼가 내뱉고는 돌아섰다.

", 통뼈, 저 새끼 위로 좀 해줘라."

서동철이 담배연기를 풀풀 날리며 말했다.

"!"

다른 사내가 도끼와 자리바꿈을 했다 통뼈라는 사내의 손에는 각구목이 들려 있었다.

"이 새끼야, 똑바로 앉어."

통뼈는 갑자기 소리치며 각구목으로 사장의 책상을 내리쳤다.

", , ......"

사장은 질겁을 하며 엉덩이를 들었다가 놓았다. 맥주를 뒤집어쓴 그의 몰골은 천상 물에 빠졌다 나온 형국이었다. 통뼈는 두 다리를 약간 벌리고 서며 각구목을 자기 이마에 두어 번 댔다 떼었다 하더니 갑자기 소리쳤다.

"우얏!"

기합소리와 동시에 각구목이 절반으로 뚝 부러지며 사장의 책상 위로 떨어졌다. 사장이 화들짝 놀라며 또 엉덩이를 들었다 놓았다.

"야 이 양심에 털 난 새끼야. 넌 돈에 환장한 놈이니까 이것 가져다가 불쏘시개 해 처먹어라."

통뼈가 들고 있던 각구목을 사장의 책상에 내던지고 돌아섰다. 서동철이 느릿느릿 걸어 처음의 자리에 가 섰다.

"시원하게 맥주도 한잔하시고, 안주삼아 위로도 받으셨으니까 이젠 본 영화를 상영해 보실까? 너 오른손 책상 위로 올려."

"예에......?"

사장이 어리둥절해서 서동철을 올려다보았다.

"이 새끼 귀먹었어!"

서동철의 목소리는 칼날이었다.

", 예에, ."

사장은 오른손을 책상 위로 올려놓았다.

"넌 더도 덜도 말고 네놈이 피해 입힌 만큼만 당하면 돼. 지금부터 손가락 네 개만 자른다."

그 말과 동시에 서동철의 손에서 잭나이프가 번쩍 날을 뻗쳤다.

"아이고, 잘못했습니다.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 살려주십시요. 살려주십시요, 죽을 죄를 졌습니다. 돈은 얼마든지, 얼마든지 내놓겠습니다."

사무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사장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두 손을 싹싹 비벼대고 있었다.

"야 이 새끼야. 급하다고 좆 까는 소리 하지 마. 얼마든지라면 1억이라도 내놓겠다는 거냐?" 서동철은 사장의 무릎을 툭 차고는,

"이봐, 자네 이리 와서 자네가 바라는 걸 이 새끼한테 직접 말해."

그는 벽에 붙어서 있는 나복남에게 손짓했다.

"난 큰돈 바라지도 않아요. 내 평생 망쳤으니까 구멍가게라도 하면서 살게 해주면 돼요."

나복남이 사장을 향해서 말했다.

"들었지? 구멍가게를 차릴려면 얼마나 줘야 되겠다고 생각해?"

서동철이 사장의 무릎을 또 툭 찼다.

"예에...... 저어...... , 오십만원......"

"이 새끼야, 손가락 네 개가 겨우 오십만 원이야! 너 안 되겠다. 손가락 잘라야지."

서동철이 사장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 아닙니다 배, 백만 원 내겠습니다, 백만 원."

"됐어, 백만 원. 스텐공장들 요새 돈벌이에 한창 신나는데, 이 정도 공장이면 은행에 수백만 원씩 쌓아놓고 있겠지? 당장 내놔, 현찰로."

", , 알았습니다."

사장이 부장을 불러들였다.

"여기 오십만 원은 있으니까 자네 빨리 가서 오십만 원만 찾아와, 현찰로. 어서 가, 어서."

사장은 연신 떨면서 통장과 도장을 내밀었다.

 

 

49. 고단해라, 인생길

"아범아 보그라.

모내기 끝물에 국회의원 선거바람 타고 니가 번개 치기로 댕겨갈 적에만 해도 꽃피는 봄이었는디 발써 숨 턱턱 맥히는 삼복 더우 속에 밤이 먼 모구가 지 시상 만낸 한여름이 되얀다. 항시 공사다망헌 검사 영감님 노리(노릇) 허니라고 금쪽 겉은 몸은 성허냐 으쩌냐. 무소식이 희소식인지 암스로도 핀지가 하도 드문드문헝게 걱정시럽고 맴이 씨이고 그런다. 고 이쁘고 똑똑헌 아그덜도 별 탈 읎이 잘 크지야? 그것들이 할메 낯 안 잊어뿔랑가 몰르겄다. 그것들허고 꿈에서 놀아쌌고 그런다. 어이 아범아, 나가 생각허고 또 생각허다가 애가 보타서 이 야그를 또 허게 되얐다. 성가시다 구찮허다 생각지 말고 맘 널르게 묵고 이 에미 이약 들어줬으면 쓰겄다. 으쩔 것이냐, 미우나 고우나 성제간이고, 부모 성제간 인연이야 띨라야 띨 수가 읎이 귀허고 찔긴 것 아니드냐. 그라고 가장 읎는 집안에 장자는 그 집안 가장인 법잉께 니가 동상덜 거둬줘야제 워쩌겄냐. 그려, 그간에 아범 니가 집안 거두니라고 몸 고상 맘 고상헌 것을 생각허면 아무 심도 읎는 이 에미넌 낯을 들 면목이 읎고 입이 열이라도 말을 헐 염치가 읎는 사람이여.

근디 말이여, 공사다망허다 봉께로 혹여 청자 냄편 일 까묵은 것 아니다냐? 고 서방이 니 처분 오기만 기둘리고 있다가 요새 맘이 변해 서울로 뜰 작정을 허고 있다. 여그서 자리 한나 못 구허면 전답 쪼깨 남은 것 폴아갖고 서울로 돈벌이 가겄다는 거이다. 봉사든 귀먹쟁이든 서울만 가면 돈 잘 벌고 사는 판에 촌구석에서 맨날 밑지는 농사에 목매고 삼서 더는 빙신 팔푼이 안 되겄다는 거이다.

어이 아범아, 일이 그리 되면 큰 탈 아니겄어? 아 새끼덜 셋이나 딜꼬 험헌 서울서 쪽박차기 하로아침일 것이고, 그리 되야 아범 니헌테 손 벌리고 뎀빔서 떼쓰면 워쩔 것이냐. 고 서방을 여그다 묶어두는 것이 질로 상책일 것 겉은디, 어찌 자리 한나 터줘라, 검사 영감님 빽이면 군청이든 읍사무소든 하다못해 수리조합 같은 디라도 한자리 차고 들어가기는 식은 죽 묵기고, 손바닥 뒤집기라는디. 고 서방보담도 많이 못 배운 동상 청자 생각혀서 꼭 잠 애를 써야 되겄다.

또 듣기 싫은 소리만 담뿍 혀서 미안시럽고 볼 낯이 읎다. 아범도 아그덜도 더우 안 묵게 조심허고, 오늘은 더 허고 잡은 말 여그서 끊는다. 고향땅에서 에미가."

이규백은 어머니의 육성을 들으며 편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의 편지는 언제나 고향 말투 그대로였다. 읽기는 하지만 쓰기는 서투른 어머니의 편지는 언제나 동생들이 대필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당신의 말투를 그대로 쓰기를 원했다. 표준어 표기가 당신의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고 느끼기 때문이었다.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기 전까지는 남동생 규상이가 대필했고, 그 다음에는 막내 동생 규동이가 대필했고, 막내 동생이 금년부터 서울로 진학하자 여동생 청자가 대필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청자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대필한 거였다. 그런데 그게 단순한 대필이 아니라 어머니의 입을 빌려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규백은 그렇게 생각하는 자기 자신에게 어떤 야비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부탁이 역겨워진 나머지 자신은 여동생에게 누명을 씌우고 있는지도 몰랐다. 편지 내용 전부는 전적으로 어머니의 뜻이고 여동생은 그저 대필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여동생도 제 남편의 뜻에 동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규백은. 어머니가 그런 편지를 보내지 않을 수 없게 한 매제 고두석에게 짜증이 일어났다. 두 동생과 세 조카에게 짓눌려서 사는 맛을 잃고 있는데 시집간 여동생마저 또 그렇게 짐으로 얹히려 하고 있었다. 물론 농사가 공업화의 덫에 치여 가망 없이 되어가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농고 출신인 매제는 신분을 바꾸기에는 갖춘 것이 너무 없었다. 어머니의 편지는 어찌 보면 은근한 위협이고 협박이었다. 짧지 않은 편지의 핵심은, 어서 빨리 관공서 어디에나 취직을 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논밭 다 처분해 서울로 올라가서 더 큰 두통거리가 될 수 있다, 하는 것이었다.

이규백은 어깨 처져내리는 한숨을 토하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건 빨리 자리를 만들어 내라는 위협일 수 있었고, 사실 그대로일 수도 있었다. 나날이 시골에서 서울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판국에 매제라고 못 올 까닭이 없었다. 돈 몇 푼 가지고 서울에 올라와 어물쩍 하다가 빈털터리가 되어 손 벌리고 덤비는 날에는 이만저만 문제가 아니었다. 여동생네는 애들이 셋이니까, 그리 되면 부양가족 다섯이 더 생기는 셈이었다.

"많이 못 배운 동상 청자 생각혀서......“

이규백은 이 대목이 또 마음에 걸려 괴로운 신음을 씹었다. 태풍 난리로 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여동생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시키고는 대학 진학은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여동생은 대학 진학을 바랐지만 그런 눈치 앞에서 '여자가 고등핵교 나온 것도 과허다' 어머니는 이런 말로 단호하게 청자의 꿈을 무질러버렸다. 여동생은 더 말없이 앞에 닥친 환경에 순응했고, 어머니는 딸의 결혼을 서둘렀다. 여동생은 그게 자신이 갈 길이라는 듯 어머니가 정한 혼처에 다소곳이 시집을 갔다.

이규백은 여동생에게 안쓰러움과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다. 여동생은 어쩌면 살아남은 형제간들 중에서 태풍 난리의 가장 큰 피해자인지도 몰랐다. 여동생이 여자가 아니었더라면 대학 진학을 그리도 매정하게 잘랐을 것인가. 여동생은 여자의 숙명을 말없이 감수했고, 자신은 고등 고시를 준비하는 무능한오빠로서 어머니의 결정에 무언의 동조를 했었다. 그건 가위눌리는 짐을 하나라도 빨리 벗어버리고자 한 음험함이었다. 여동생 청자는 제 남동생 둘이 대학생이 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어떤 심정이었을까. 자기만 대학을 못 다닌 채 농사꾼의 아내로 볼품없이 된 불만과 열등감이 날로 커졌을 것이다. 그런 마음을 표하지 않았는데도 어머니가 편지를 그렇게 썼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매제도 검사 처남의 덕을 보고 싶어 했을 것이 뻔했다. 어느 집안에 돈 번 사람이 하나 생기면 사돈네 팔촌까지 덕을 보고 싶어 하듯이 검사를 바라보는 눈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규백은 담배연기를 코로 느리게 내뿜으며 신음을 잘근잘근 씹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우선, 서울로 올라오게 방치할 수는 없었다. 서울은 이미 만원을 넘어 폭발상태에 있었다. 농부는 서울 같은 도시에서는 살아갈 방법이 없는 무능력자였다. 그렇다면 결론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어디든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규백은 상체를 비틀며 된 신음을 어금니에 물었다. 무리를 감수하며 검사의 힘을 작용시키면 군 단위 행정기관 그 어딘가 말단에 자리 하나 뚫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매제가 제몫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 것인지......괜히 검사 빽 팔아가며 두고두고 사람 망신이나 시키지 않을지......이규백은 '내가 왜 검사가 됐나' 하는 생각을 또 불현듯 하고 있었다. 그 생각은 검사가 되고 난 이후 골백번도 더한 것이었다.

"검사님, 중부서 수사과장 전홥니다."

여직원이 고개만 디밀며 알렸다.

", 여보세요......"

이규백은 송수화기를 들며 낮고 묵직한 소리를 냈다. 냉정하고 엄한 기색으로 바뀐 얼굴과 함께 그 목소리에는 거만과 위엄기가 서려 있었다. 평소와 달리 공무를 수행할 때 나타나는 변화였다.

"아 예, 이규백 검사님이십니까?"

", 그렇소만......"

". 안녕하십니까. 여기 중부서 수사괍니다. 안민구가 처남 맞습니까?"

", 그런데요."

이규백은 처남의 이름을 듣는 순간 의자 등받이에 부리고 있던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 그렇군요. 안민구가 좀 곤란한 사건으로 체포돼 우리 서에 있습니다."

"무슨 사건인데요?"

이규백은, 이놈이 또 일 저질렀구나, 생각하며 담뱃갑을 끌어당겼다.

", 이거 참 곤란하게 마약 피우다가 걸려들었습니다."

"마약이요?"

", 마리화납니다. 여자 둘 남자 둘이 호텔방에서 그런 겁니다."

"이거 참 면목 없습니다. 집안에 연락하고 곧 찾아갈 테니까 그동안 잘 좀 부탁합니다."

이규백은 전화를 끊으며 쓴 입맛을 다셨다. 상급기관의 검사 체면을 완전하게 구겨버린 거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말썽꾸러기 처남이 은근히 고맙기도 했다. 그가 사고를 칠 때마다 처가 쪽 식구들에게 검사 이규백의 존재가치를 높여주기 때문이었다. 사고뭉치 안민구는 외부적으로는 자신의 체면을 깎는 귀찮은 존재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자신의 존재를 돋보이게 하는 조명등 역할을 수행하는 썩 필요한 존재이기도 했다. 이규백은 장인, 장모, 마누라의 얼굴을 차례로 떠올리다가 장모에게 전화를 하기로 했다. 세 사람 중에서 가장 몸 달아할 사람이 장모였고, 자신을 가장 하시하는 것이 장모였다. 장모의 애를 태울 필요가 있었고, 자신의 값어치가 얼마나 큰지 다시 한 번 확인시켜야 했다. 일단 장모에게 알리면 장인이나 마누라한테는 효과가 증폭되어 알려질 것이고, 그리 되면 장인이나 마누라한테는 느긋하게 자신의 존재를 과시할 수 있게 될 거였다.

"장모님, 놀라지 마시고 들으세요. 작은 처남 민구가 지금 경찰서에 잡혀 있습니다."

"아니, 왜 또? 대낮부터 술 마시고 누구하고 싸웠나 어쨌나?"

"그게 아니랴 이번엔 좀 중죄를 저질렀습니다."

"중죄? 그게 뭔가?"

전화기에서 장모의 목소리가 뜨겁게 터지고 있었다.

", 그게 좀 말씀드리기 난처해서요...... 여러 사람 체면도 있고......"

이규백은 짐짓 뜸을 들이며 말꼬리를 사렸다.

"무슨 소린가, 지금! 어서 말하게, 어서. 뉘 집 처녀라도 망쳐왔나?"

"그게 아니고, 마약을...... 마리화나라는 마약을 여자들하고 피우다가 체포됐답니다. 이거 딴 일도 아니고......"

", 마약이라고? 여보게, 그럼 어찌 되는 겐가? 회사에는 전화 드렸나?"

더욱 뜨겁고 급하게 밀려오는 목소리에서 몸이 달아오른 장모의 모습을 환히 보고 있었다.

"혹시 밖에 알려지면 장인어른 체면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장모님한테 제일 먼저 알리는 겁니다."

", 그거 잘했네. 그런 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자넨 어서 민구를 좀 만나보게나. 그 어린것이 얼마나 무섭고 겁나겠나."

애가 타는 모정은 대학 2학년을 '어린 것'이라고 하고 있었다.

", 제가 지금 곧 재판이 있어서 당장 가보기는 어렵습니다."

이규백은 미리 생각한 대로 둘러댔다.

"아이구, 그럼 어쩌나!"

장모의 목소리는 그대로 울음이었다.

"아무 걱정 마세요. 담당과장한테 잘 부탁해 놨습니다."

"아이구, 자네밖에 없네. 자네가 젤이야. 고마우이 고마워. 혹시 때리진 않겠지?"

장모의 목소리에서는 어느 때 없이 정이 뚝뚝 듣고 있었다.

"그럼요. 검사 처남한테 누가 감히 손을 댑니까. 그 점은 안심하세요."

"그렇지, 그래. 경찰은 검사님 꼬붕이니까. 그래, 우리 맏사위밖에 없다니까. 내가 연락 다 취할 테니까 자넨 재판 끝나는 대로 곧 가봐야 하네."

", 걱정 마세요."

이규백은 자신의 존재가 평소와 달리 확대되고 돋보이는 것을 느끼며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몰골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판은 있지도 않은데 장모를 더욱 애타게 해 자신의 값을 올리려고 재판이 있다고 꾸며대고 있으니. 내가 이러려고 검사가 됐나......? 처가 식구들을 상대로 고작 그런 잔머리나 굴리고 있는 자기 자신이 혐오스럽고 비감했다. 한번 빠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심해지는 그런 감정을 떼쳐내려고 이규백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책상에서 벗어나던 그는 몸을 되돌려 어머니의 편지를 집어 들었다. 아까 끊겼던 생각 하나가 다시 이어졌다. 어머니는 아들과 손자들에 대해서는 그리도 간곡하면서도 며느리에 대해서는 빈말일망정 단 한마디가 없었다. 그건 시집을 함부로 아는 며느리에 대한 어머니의 엄한 징계인 셈이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다 가난이 죕니다. 저도 이러고 살고 실지는 않은데 ...... 어쩝니까......’

이규백은 무거운 발길로 사무실을 나섰다. 그는 동생 규상이가 공대를 나온 것을 새삼스럽게 다행으로 여겼다. 동생은 공업화의 바람을 타고 주가가 치솟기 시작한 공대를 선택했었다. 법대가 아닌 것만 천만다행이라서 자신은 이의 없이 동의했을 뿐만 아니라 칭찬까지 해주었다. 그런데 막내동생 규동이도 법과를 피하듯 영문과를 택했다. 그 이유를 묻지 않고 또 흔쾌히 동의했다. 자신을 뒤따라오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동의조건은 충분했다. 자신은 처가와의 관계 말고도 법조계의 삶에 대해서도 회의가 자꾸만 늘어가고 있었다.

 

드럼통 술상이 세 개밖에 없는 작은 술집인데 그나마 술상 두 개는 비어 있었다. 옷차림이 구지레한 주모가 꾸벅꾸벅 졸면서 밤이 깊은 것을 알리고 있는데 술상 하나를 차지한 두 남자는 제멋대로 술주정을 하고 있었다.

"아휴 옘병헐, 드런 놈에 세상 확 불이나 싸질러버렸으면 좋겠어요."

"그거 조오치. 돈 있고 권력 있는 놈들끼리만 짜고 해먹으며 썩어 문드러져 돌아가는 요런 드런 놈에 세상은 확 불을 싸질러버리는 것도 구제의 한 방법이지. 이 서울이 불타는 건 로마 시가 불타는 것보다 훨씬 더 예술적일 거야 규모도 더 크고 썩기도 더 썩었으니까 말야. 우린 남산 팔각정에 떡 버티고 앉아서 불구경을 하면 네로 황제보다 더 황홀할거고 말야. 크크크크......"

"아니 선배님, 끼리끼리 다해먹는 판인데 이 새끼들이 즈이 후배들만 골라 채점 잘해 주는 것 아닌가요?"

"글쎄, 요놈에 세상이 한여름 생선 썩듯 푹푹 썩긴 했는데 말씀야, 설마 그 시험까지야 그리 됐겠어?"

"설마가 사람 잡아요!"

"아니야, 아니야. 그건 아니야 그건 내가 장담할 수 있다구."

"아이구, 사람 환장하겠네.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이걸 어쩌지."

"이봐 아우님, 대여섯 번 실패한 걸 가지고 뭘 그래. 실패는 병가상사라. 나 같은 사람도 있으니까 힘내라구."

"아니에요, 아니에요. 전 아무래도 돌대가린 것 같애요. 가망 없어요."

"거 무슨 소리야? 재수가 좀 없었을 뿐이야. 자네 머리 좋은 거야 고등고시 탁 붙은 자네 형 김선오 검사님께서 입증하잖아."

"아니오. , 고등학교 때부터 전 형보다 공부를 못했어요. 형은 언제나 1등인데 저는 기껏해야 3, 4등밖에 못했거든요."

술기운을 못 이겨 상체가 흐느적거리고 있는 김선태의 눈에 눈물이 번지는 것 같았다.

"그까짓 건 한두 문제 틀린 거로 백지 한 장의 차이야. 날 보라구, . 마흔인 나도 버티고 있는데 겨우 서른밖에 안 된 사람이 왜 그래. 여기서 포기하는 건 말야 노다지를 한 자 앞에다 두고 곡괭이를 던져버린 광부와 같다구 고등고시 합격! 그건 평생 파먹어도 되는 노다지라구. 뻔쩍뻔쩍한 황금의 광맥! 그 얼마나 황홀해. 힘내라구."

술기운에 들뜬 큰소리 때문에 후줄근한 입성이 더욱 초라해 보이는 남자가 김선태의 어깨를 힘주어 감싸 안았다.

"그게 다 그림의 떡이라구요. 이젠 더 이상 형한테 면목 없으니 때려 치워야 되겠어요."

"형이 그런 소릴 해?"

"말은 안 해도 벌써부터 그런 눈치를 보여 왔어요. 야 임마, 냉수 먹고 속 차려. 너 같은 돌대가리로는 어림도 없어 형의 눈초리에는 이런 말이 들어 있어요."

"이봐, 이봐, 그건 자네의 열등감 과잉이야. 나처럼 마누라 삯바느질 시켜 먹으면서두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데 젊은 사람이 그 무슨 못난 소리야. 형한테 돈 좀 얻어 쓰는 것 땜에 기죽지 말라구. 형수가 날마다 돈 마구 긁어 들이잖아. 산부인과들, 그거 너무 쉽게 떼돈 버는 거야 세상이 다 안다구. 연애가 성행해 처녀들이 몰려들고, 산아제한바람으로 주부들까지 줄을 서는 판이니 제일 수지 맞는 데가 산부인과인 거야 당연한 거지. 이봐, 사위 사랑 장모고, 시동생 사랑 형수라잖아. 형을 상대하지 말고 형수님한테 길을 잘 닦으라구 고시만 패스하는 날에는 그까짓 돈 딸라변 쳐서 갚아버릴 건데 뭘. 힘내, !"

"말 말아요, 그 잘난 여자, 우리 형수. 니미럴...... 관둡시다."

김선태는 술김에도 창피한 생각이 들어 날 만나주지도 않아요, 하는 말을 삼켜버렸다.

"아이구, 이제 그만들 가슈 곧 통금 돼요, 통금."

언제 깨어났는지 주모가 갑자기 소리 지르며 팔을 내저었다.

"그래, 민주 시민은 통금을 지켜 제때 귀가해야지. 여보게 선태, 그만 가자구.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는 거니까."

그 남자는 추레한 몰골에 어울리지 않게 아까부터 유식한 말들은 혼자 다 쓰며 비틀비틀 일어섰다.

"그렇지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을 믿어야 되겠지요. 아주머니, 여기 얼만가요? 드런 놈에 세상......"

김선태는 겨우겨우 몸을 가누며 바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고 있었다. 그 남자는 문 앞에 기대서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간을 묻고 있었다. 서너 번째 사람이 11시 반이라고 하며 바쁘게 걸어갔다.

"이봐, 인생이란 말야 때론 눈물이고 때론 한숨이고 때론 막막함이고...... 그러다가 바람으로 사라져가는 거야. 그 사이사이에 빛이고 영광을 끼울려고 몸부림들 치는 거지. 그래 봤자 물거품이고 티끌이기는 다 마찬가지야. 이 박만길의 말 알아듣겠어?"

김선태와 어깨동무를 하고 뒷골목을 벗어나며 그 남자는 마치 시를 읊듯 가락을 넣고 있었다.

"일만 만 자에 길할 길 자, 이름은 참 기똥찬데 말이죠......"

"왜 고시엔 16번씩이나 떨어졌냐 그거지? 가난하고 무식한 농사꾼이었던 우리 아버지의 욕심이었지."

박만길은 끄윽 트림을 하며 시내버스에 술 취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선배님, 잘 가세요. 전 건너갑니다."

"이봐 선태, 내일 꼭 도서관에 나오라구 영원한 낙방인생은 없으니까."

박만길은 휘적휘적 길을 건너가고 있는 김선태를 향해 소리쳤다.

"오빠, 왜 이러고 다녀?"

대문을 따주며 김명숙은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기집애가 왜 또 잔소리야."

"다들 자니까 조용히 들어가. 떠들어봐야 망신살만 끼니까."

김명숙은 목소리를 낮추며 앞서 걸었다. 작은오빠가 또 고시에 떨어진 것이 속상했고, 날마다 술이 취해 늦게 들어오는 것이 셋방 사는 사람들 보기에 창피스러웠다. 그만 좀 정신차리고 맘 독하게 먹으라고, 큰오빠가 이런 걸 보면 또 뭐라고 하겠느냐고 작은오빠에게 야무지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김명숙은 벽에다 얼굴을 붙이듯 하며 누워버렸다. 술 취한 사람 잘못 건드렸다가는 한밤중에 무슨 소란이 벌어질지 몰랐다. 작은오빠는 술을 마시지 않은 맨정신에도 자기의 신상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아주 싫어하며 화를 내거나 흥분해서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그럴 때면 꼭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 같고는 했다. 그러나 딱 한 사람 큰오빠 앞에서는 꼼짝달싹을 못하는 불쌍하기 그지없는 위인이었다.

"그래, 다 그게 그런 거야. 다 나그네 길이라구 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거라구. 근데 말야...... 그게 근데...... 그게 또 아니라구......"

옷을 입은 채 방바닥에 쓰러진 김선태는 신음처럼 웅얼거렸다.

작은오빠가 잠이 드는 기척을 등뒤로 느끼며 김명숙은 사무쳐오는 슬픔을 느꼈다. 자신의 신세나 작은오빠의 신세나 생각할수록 한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큰오빠가 내비치는 눈치대로 어쩌면 작은오빠는 영영 고시를 통과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나이만 자꾸 먹어가다가 결국 그 일생이 어찌 될 것인가......

"또 볼 거냐?"

작은오빠가 고시에 떨어지고 나서 만난 자리에서 큰오빠가 꺼낸 말이었다. 큰오빠의 밑도 끝도 없는 그 말과 입 언저리를 스치는 냉소는, 더 해봤자 소용없으니까 이제 그만 포기해, 하는 말을 담고 있었다. 묵묵무답인 작은오빠는 그 숨겨진 말뜻을 알아듣는 눈치였다. 큰오빠의 그런 무시에 대항하듯 작은오빠는 끝내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으로 다시 고등 고시를 보겠다는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나 그 정도면 그래도 큰오빠는 작은오빠에게 예의를 갖춘 셈이었다. 자신에게는 너무 매정하게 하며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여러 잔소리할 것 없어, 고향에 내려가서 시집이나 가!"

검사 오빠에 공순이 여동생, 이건 큰오빠만 소스라칠 일이 아니라 세상 사람이 다 놀랄만한 일이었다. 큰오빠는 그 창피하고 망신스러운 물건을 저 먼 시골 구석에다 처박아두고 싶어 했다.

"큰오빠가 도와주기 싫으면 관둬요. 난 내가 하고 싶은 공부 꼭 할 거예요. 요새 세상에 여자나 나이가 다 무슨 상관이에요."

자신은 작은오빠하고는 달리 큰오빠에게 이렇게 못을 박았다.

"시건방지게, 너 그게 말이라고 해? 광자나 너나 계집애들이 어째서 좀 여자답지 못하고 그따위로 억세고 되바라졌냐. 어디 느네들 맘대로 해봐."

큰오빠는 화를 내고 자리를 떠버렸다. 그 후로 몇 달 동안 만나지 않아 아직까지도 올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이 자취생활은 작은오빠가 큰오빠한테서 돈을 받아와 셋방을 얻어 시작되었다. 둘의 생활비는 작은오빠의 하숙비로 해결할 수 있었다. 방 하나에서 오빠와 함께 기거한다는 것이 여러 가지로 불편했다. 그러나 공원 시절의 비좁던 방에 비하면 불평을 따로 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장성한 남매가 한 방을 쓰는 것은 가난한 형편들에 흉거리가 될 수 없는 흔한 일이었다.

언니가 간호원으로 서독에 가 있는 것은 큰오빠가 검사가 된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일이었다. 큰오빠가 검사가 된다는 것은 법대에 합격하면서부터 아무도 의심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언니의 강단도 무서운 데가 있기는 했었다. 언니한테 편지를 쓰다 보니 자그마치 나흘이나 걸렸다 편지를 쓰기 시작하니 지난날을 더듬지 않을 수가 없었고, 지난 세월을 더듬다 보니 설움과 눈물이 복받쳐 올랐고, 눈물을 떨구고 훔쳐가며 지난 10년을 줄이고 줄여서 엮어도 대학노트 앞뒤로 다섯 장이었다. 서독은 역시 멀고 멀어 한 달이 넘어 걸려 언니의 답장이 왔다. 반가움이 철철 넘치는 편지에서 언니는 앞날에 마음을 쓰고 있었다. 큰오빠와 달리 무작정 시집을 가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묻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물음은 힘이 되었다. 그리고 불현듯 '나도 서독으로 가자!' 하는 생각이 굳어졌다. 그 생각은 갑자기 떠오른 것이 아니었다. 언니의 소식을 듣고 부터 전에 가졌던 생각들과 뒤섞이기 시작했었다. 그 전에 품었던 생각은 처지에 따라 조금씩 변해 미용사나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서독 간호원은 여기서보다 예닐곱 배나 더 번다고 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는 자신이 중학교밖에 나오지 못하고 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쳤으니까 간호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점이었다. 나이가 너무 많기는 했지만 못 다닐 것이 없었다. 사람대접을 받는 직업에 돈도 그렇게 많이 벌게 되는데 좀 창피스러운 것쯤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었다. 2-3년 전에 진작 집에 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언니에게 다시 편지를 썼다. 언니한테서 답장이 올 때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선배님, 선배님, 전 영영 고시가 안 될지도 모르지요?"

김선태는 마치 생시처럼 또렷하게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김명숙은 그 잠꼬대에 가슴 섬뜩해지며 한숨을 쉬었다. 고등고시는 몇십 대 일이 아니라 몇 백 대 일인지 모른다고 했다. 하늘의 별 따기가 바로 그것으로, 한 사람이 합격해서 웃으면 수백 명은 낙방해서 울 수밖에 없었다. 정말 작은오빠가 영영 합격을 못하면...... 김명숙은 그 불길한 생각에 진저리치며 잠들려고 뒤척였다. 공원 시절에는 그렇게도 쏟아지던 잠이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작은오빠, 힘내 고등학교만 나와서도 고등고시 되는 사람들도 있잖아. 난 작은오빨 꼭 믿어."

김명숙은 다음날 아침 도시락을 작은오빠 앞에 내밀며 말했다.

"모르겠다. 해보긴 또 해보는데......"

헐어빠진 가방에 도시락을 넣는 김선태의 손길이 목소리만큼 무거웠다. 며칠이 지나 김명숙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언니의 편지를 받았다.

"...... 너의 꿈은 잘 알겠다만 여기 독일에 올 생각은 안 하는 게 좋겠다. 왜 그러는고 하니 우선 돈벌이가 달라져서 그런다. 한국보다 여섯 배나 일곱 배가 더 많이 벌린다는 것은 몇 년 전 계산이고 그동안에 절반 가까이 줄었다. 여기 월급이 깎인 것이 아니고 그동안 우리나라가 경제발전 하는 것에 따라 사람들의 월급이 많아지면서 그리 되었다. 또 집값 땅값 같은 것도 다 올라 이런 식으로 몇 년 더 가다가는 독일에 와서 고생한 것이 헛고생이 되지 않을까 우리 간호원들이고 광부들이고 다 걱정이 태산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는 여기서 간호원들이 하는 일이 너무나 뼛골 빠지게 힘이 든다. 말이 났으니 솔직하게 하는 말인데, 한국의 간호원과 여기 간호원은 일의 범위나 방법이 아주 달라 한국의 간호원들이 신선놀음을 한다면 여기선 막 노동자나 머슴처럼 일을 한다. 한 마디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중풍환자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똥오줌이 묻은 더러운 옷을 갈아입히고, 목욕을 시키고 하는 건 한국에선 다 보호자들이 알아서 한다. 그러나 여기선 전부 간호원들이 해내야만 한다. 명숙아, 너에게까지 이런 고생 시키고 싶지 않다. 내가 돈을 조금씩 더 보낼 테니 학원비로 쓰고 네가 원하는 길을 택해라. 그리고 한 가지 꼭 약속해라. 여기 일이 힘들다는 건 어머니한테 절대 말하면 안 된다......"

"언니이......"

김명숙은 편지를 떨어뜨리며 눈을 훔치고 또 훔쳤다 언니의 모습과 함께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솟구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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