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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2-7

39. 검은 머리카락

"비켜요, 난 독일 사람이에요!"

금발의 살찐 여자 노인은 병실이 울리도록 갑자기 소리쳤다.

"아 네, 알겠어요. 담당의사를 불러들일 테니 진정하세요. 흥분하면 병세가 나빠질 수도 있으니까요."

김광자는 주사기를 거두며 웃는 얼굴로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감정은 싸늘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한두 번 당하는 일이 아니었지만 감정도 얼굴처럼 웃음을 띨 수는 없었다. 직업의식이 육체적 고통을 이겨낼 수는 있어도 인종 차별이 주는 모독감까지 이겨내지는 못했다. 또한 그녀는 인종 차별까지 이해하며 감정이 상하지 않게 노력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저쪽에서 황인종에게 주사 맞기를 거부하는 것과 똑같이 이쪽에서도 주사 놓기를 거부해 버리는 것으로 인종 차별 문제를 그때그때 해결하면서 잊어버리곤 했다.

"수고 좀 하셔야 되겠어요. 인종주의자가 또 나타났어요."

김광자는 지체 없이 의사한테 가서 말했다. 의사에게 주사를 놓게 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해결책이면서 보복책이었다. 주사 놓기 싫어하는 백인 의사한테 주사를 맞으며 그 늙은 백인 여자가 미움을 받게 해줘야 했다. 미움이 섞인 주사가 더 아프면 아팠지 덜 아플 리 없었다.

"이거 참 미안합니다. 백인들의 우월주의는 일종의 불치의 정신병이오."

의사가 어색스럽게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괜찮아요. 그렇지 않은 독일 사람들이 훨씬 더 많으니까요."

김광자는 밝게 웃었다. 그건 인사치레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인종 차별 의식은 젊은이들보다는 노인네들이,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이 많았다.

"이 간호원한테 주사 맞기 싫으십니까? 그러시면 안 되지요. 우리 독일 정부가 이 간호원에게 주사 놓는 자격을 인정했는데요."

의사가 웃으면서 여자 노인네에게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싫어요, 난 싫어요. 검은 머리 가진 사람이 내 몸에 손대는 건 절대 싫어요."

여자 노인네는 단호한 태도를 보이며 진저리를 쳤다. 이상하게도 독일 사람들은 얼굴이 노란 것보다는 머리카락이 검은 것을 아주 싫어했다. 검은색은 죽음, 절망 불길함을 나타내고, 마귀할멈의 치장도 온통 새까맣기 때문이었다.

"그건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누구나 다 똑같은 사람이거든요. 앞으로 이 간호원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 하니까 실수한 것을 사과하세요."

"싫어요. 나 딴 병원으로 가겠어요."

김광자는 이미 돌아서서 병실을 나가고 있었다. 그런 대답을 다 예상하고 있었고, 더 이상 모독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인종 차별은 피부 색깔이나 머리 색깔의 차이로 생기는 것만이 아니었다. 밥을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김치 냄새나 마늘 냄새도, 독일 말이 서투른 것도 다 인종 차별의 원인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에서 비롯되는 차별은 그나마 괜찮았다.

"당신들도 예수를 믿을 줄 아느냐?"

교회에 나갔다가 들은 말이었고,

", 당신들도 베토벤, 모차르트를 이해할 수 있는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명곡을 감상하다가 이런 말을 들어야 했다. 독일 사람들이 한국이 어디인지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지구본을 가져다가 한국이 어디인지 짚으며, 나라치고 너무나 작은데다 그나마 또 반 토막이 난 것에 독일인 모르게 새삼스럽게 놀라고, 독일인들은 그 먼먼 나라에서 왔다는 것에 놀라고, 그 먼 동양의 작은 나라에 병원이고 간호원이 있다는 것을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런 차별과 무시를 그나마 견뎌낼 수 있는 건 병원생활은 평등했고, 능력 위주로 자격을 평가했던 것이다. 타국에서 살아가려면 몰이해한 소수의 언행은 빨리 잊어버리는 게 상수였다.

"또 기분 상하게 해서 미안해요. 아직도 히틀러주의자가 있는 판이니까 인종주의자가 있는 거야 어쩔 수가 없지요.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알 수가 없어요."

주사를 놓고 온 의사가 궁색스럽게 말했다.

"아니 괜찮아요. 한두 번 당한 일도 아닌걸요. 저런 환자가 있는 대신 선물 주고 퇴원하는 환자들이 더 많잖아요. 전 독일과 독일 사람들을 좋아해요."

김광자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진심이었다. 꽤 많은 환자들은 퇴원하면서 담당의사와 간호원들에게 선물을 마련했다. 선물은 고마워하는 마음을 담은 조촐한 것으로 커피, 초콜릿, 과자 같은 것이었고, 어떤 사람들은 예쁜 카드와 함께 30마르크나 50마르크를 봉투에 넣기도 했다. 그리고 가끔 집으로 초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독일 의사들은 집으로 초대받는 것을 마치 무슨 상이라도 받는 것처럼 기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양에서는 사람을 집으로 초대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최고의 호의의 표시이니까 초대받은 의사로서는 자기의 의술이 인정받는 보람스러운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김광자는 의사의 보조자로서 서너 번 그 기쁨을 함께 나눈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서는 꼭 기분 언짢은 일이 생겼다. 한국에도 텔레비전이 있느냐, 냉장고를 쓰느냐 한국에도 한국의 고유문자가 있다는 것이냐? 아니, 시인과 소설가가 있다고? 그들의 호의적 관심이 어느새 자존심을 긁는 모독감을 느끼게 하고는 했다. 그러나 해가 바뀔수록 한국 간호원과 광부들에 대한 호감과 신뢰는 독일 사회에 넓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건 한국 간호원들을 겪어본 환자들이나, 광부들을 부려본 탄광회사들에 의해서만이 아니었다. 신문들이 기사로 다루면서 그런 인식은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신문들은 한국의 간호원과 광부들을 취업시킨 것은 아주 성공적이라고 평가하고, 그들은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기술 습득이 빠르고, 책임감이 강하다고 쓰고 있었다. 특히, 간호원들이 노인 환자들을 상냥하고 극진하게 간호하는 것은 어른에 대한 공경심이 높은 한국적 전통이 발휘된 아름다운 인간애라고 강조하고 있었다. 노인들이 한국 간호원들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 그대로였다 한국 간호원들은 어렸을 때부터 생활을 통해서 몸에 밴 어른에 대한 공경심이 저절로 우러나와 노인들에게 예의를 잘 갖추면서 정답게 대했고, 아픈 데를 미리미리 살펴가며 알뜰하게 간호하는 것이 다른 나라 간호원들과 달랐다. 근무경력이 쌓이고 재교육을 통해 독일 간호원의 자격을 획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그 인기는 더 높아져갔다. 한국 간호원들이 환자들에게 누리는 인기는 단순히 어른에 대한 공경심 때문이 아니었다. 환자들은 주사를 가장 아프지 않게 놓는 사람들로 한국 간호원들을 좋아했다.

독일 간호원의 자격 획득과 함께 피하주사를 놓을 수 있게 되면서 한국 간호원들의 진가는 발휘되었다. 주삿바늘을 살에 무작정 찔러대는 것이 아니라 주사 놓을 부위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찰싹찰싹 치면서 바늘을 꽂는 요령, 그것은 한국 간호원들만이 지닌 독특한 기술이었다. 미리 찰싹찰싹 치는 것은 근육을 이완시키는 동시에 그 피부 감각이 바늘이 꽂히는 아픔을 반감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다. 한국 간호원들은 독일에 오기 전에 이미 그 기술을 완전히 익힌 상태였다. 간호원 경력이 많은 사람들은 더 말할 것이 없었고 간호학교만 졸업했어도 주사 놓는 솜씨들은 대단했다. 그건 한국 병원에서 주사 놓는 일은 간호원 전담처럼 되어 있기 때문에 철저하게 교육을 시킨 결과였다.

"주사를 놓는 것은 간호원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입니다. 주사를 잘 놓는다는 건 두 가지, 첫째 환자가 덜 아프게, 둘째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건 말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 요령을 빨리 터득하는 데는 연습, 연습밖에 없어요. 수천 번, 수만 번 바늘을 찌르다 보면 도를 통하게 돼요. 여러분은 한 근짜리 돼지비계가 너덜너덜해 질 때까지 바늘을 찔러대서 열 근은 없앨 각오를 해야 해요, 그래야 요령도 터득하고 자신감도 생겨요. 주사기 들고 떨려서야 주사를 제대로 놓을 수 있겠어요? 여기서 배운 것을 기초로 해서 날마다 연습해요, 연습 그러면 언젠가는 바늘이 내 손처럼 놀게 돼요."

학원에서 누누이 강조한 말이었다.

김광자는 간호학교를 나오지 못한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독일어를 하는 것보다 더 열심히 돼지비계에 주삿바늘을 찔러대는 연습에 몰두했었다. 열 근이 아니라 스무 근을 없앨 각오로. 주삿바늘이 휘어지고 부러지기를 거듭하다 보니 어느 때부턴가 손끝에 감각이 확연해지면서 '주삿바늘을 일부러 찌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던지는 것 같은 기분'이라는 말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 즈음부터는 아무리 많이 돼지비계를 찔러도 주삿바늘이 휘어지거나 부러지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자신감이 서서히 붙어갔다.

주사를 놓게 되면서 그 누구보다도 생기를 얻게 된 것이 수간호원 출신 이정옥이었다. 그녀는 귀신같이 주사를 잘 놓아 수간호원 출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했다. 주사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그녀의 솜씨에 독일의 의사와 간호원들이 다 놀랐지만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인 건 환자들이었다. 그녀에게 한 번 주사를 맞아본 환자들은 다른 사람한테는 주사를 맞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정옥의 근무시간이 아닌데도 그녀가 아니면 주사를 맞지 않겠다고 버티는 환자들이 자주 생겨나 그 진가는 자꾸 높아져갔다. 주사에 관한 한 이정옥이 특별 취급을 받게 된 것은 야간근무를 하면서 발생한 사고를 해결한 다음부터였다. 수술을 받고 장시간 링거를 맞고 있는 환자의 팔이 부어올라 환자가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혈관주사가 잘못되어 링거가 혈관 밖으로 새나오는 거였다. 살이 많이 찐 그 환자의 혈관이 잘 드러나지 않아 생긴 실수였다 독일 수간호원이 서너 번 주삿바늘을 찔렀지만 피가 주사기로 역류하지 않았다. 혈관을 빗나간 거였다. 그때마다 환자는 아프다고 소리쳐댔다. 보다 못한 이정옥이 나섰다.

"이리 줘요. 내가 할 테니까."

"안 돼요."

수간호원이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한국 간호원들이 혈관주사를 놓는 건 금지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난 한 번이면 돼요."

이정옥은 검지손가락을 똑바로 세워 보이며 또렷하게 말했다.

"안 돼요. 그걸 어떻게 믿어요."

수간호원은 더 세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저 환자 어떻게 할 거지요? 밤새도록 링거 안 맞힐 건가요? 그럼 환자가 어떻게 되지요? 규정 따지기 전에 환자를 생각하세요. 난 딱 한 번이면 돼요. 만약 내가 실수하면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겠어요. 그래도 못 믿겠어요?"

이정옥은 자신만만하게 수간호원을 응시했다. 그녀는 자신의 주사 놓는 기술만 믿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자신이 아니면 주사를 맞지 않겠다고 버티는 환자들이 많다는 사실로 수간호원을 압박하고 있었다.

"좋아요, 환자를 생각해서 딱 한 번이에요."

수간호원은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정옥은 숨을 깊이 들이켰다가 내쉬며 침착하게 환자의 팔을 잡았다. 희미한 혈관을 주시하고 왼쪽 손가락 끝으로 감지하면서 주삿바늘을 찔러 넣었다. 곧 피가 주사기로 역류했다.

"고마워요. 정말 훌륭한 솜씨예요. 이 사실을 내일 의사한테 그대로 보고하겠어요."

이정옥이 링거 처치를 끝내고 나자 수간호원이 그녀를 얼싸안았다. 이튿날 이정옥은 의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응급실에서 혈관주사를 놓아야 했다. 일종의 시험이고 사실 확인이었다. 대여섯 환자의 팔에 바늘을 찔렀는데 그야말로 백발백중이었다. 그래서 이정옥은 혈관주사를 놓을 수 있는 특별한 간호원이 되었다.

"축하해요, 축하해요."

"참 잘됐어요."

한국 간호원들은 다같이 입을 모았다.

"그러면 뭘 해. 수간호원으로 올려줘서 월급을 더 주는 것도 아니고. 그래 봐야 삼류 국가 코리안일 뿐이지."

이정옥은 그녀 특유의 입바른 소리로 얄미움을 드러냈다.

"그래도 한국사람 자존심을 세운 게 얼마예요."

"그럼요. 선배님 덕에 저희들도 덩달아 값이 올라가잖아요."

"아이고, 그 선배님 소리 참 오랜만에 듣겠네."

"죄송해요. 앞으로는 귀가 아프시도록 선배님이라고 부를게요."

이정옥의 주사 놓는 솜씨는 한국 간호원들도 모두 감탄할 정도였다. 세월을 따라 쌓아올린 관록이란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것이었다. 김광자는 이정옥의 그 능력을 진정으로 높이 여겼다. 그리고 배우려고 노력했다.

며칠이 지나 점심을 먹으려고 식당에 가기 전에 기숙사로 들어선 김광자는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간호원들이 끼리끼리 모여 수선스런 몸짓으로 숙덕거리고 있었다. 끼리끼리란 국적별로 수다를 떠는 것이었다. 제일 많이 모여 마구 담배를 피워대고 있는 것은 독일 간호원들이고, 그 옆에 서너 명이 유고 간호원이었고, 담배를 전혀 안 피우고 있는 맨 끝쪽이 한국 간호원들이었다. 늙다리처녀가 많은 독일 간호원들은 유별나게 담배를 많이 피웠다. 유고 간호원들도 더러 피웠는데 한국 간호원들은 단 한 명도 피우지 않아 그것도 이상스럽게 보였고, 흉거리가 되었다.

", , 큰일 났다, 큰일 났어."

정남희가 김광자에게 쪼르륵 달려와 수선을 피웠다.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지?"

"있는 모양이지가 아니야, . 결국 우리 병원에서도 터지고 말았어."

"뭐가?"

"그거 있잖아, 간호장학생 사건!"

정남희가 김광자의 어깨를 살짝 쳤다.

"뭐라구? 그럼 주선녀도 당했단 말이니?"

김광자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소용돌이치는 의식 속에서 지난날의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래 글쎄. 오늘 만나는 날이라 기숙사로 찾아갔더니 글쎄 닷새 전에 벌써 떠나고 없더랜다. 지금 울고불고 야단났다."

수다스럽게 말하는 정남희의 얼굴에 이상야릇한 웃음이 당겨 있었다.

"다 알게 그러면 어쩌지, 괜히 망신스럽기만 한데 ......"

김광자는 난색이 되며 중얼거렸다.

"그러니 글쎄, 이 세상 남자라는 것들 다 도둑놈이란 말이 맞다니까. 한두 놈도 아니고, 한두 푼도 아니고, 그리 도움 받은 놈들이 어쩜 그렇게 깨끗하게 배신하고 돌아설 수가 있니, 그래."

정남희는 점점 신바람이 일고 있었고,

"꿩 먹고 알 먹고 튀는 거야 원래 사내놈들 심보 아니야? 사내놈들이 그리 노는 거야 영화고 소설에서 수없이 봐왔고, 또 눈앞에서 남들 당하는 걸 봤으면 속들 차렸어야지 하긴 뭐 박사님의 사모님 되실 욕심에 눈이 어두워 나야 설마 하신 거겠지.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옛말이 꼭꼭 들어맞는 줄 모르고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여자 쪽에서도 꼭 손해만 봤나 뭐? 남자 없으면 그 깨 쏟아지는 재미 어떻게 봐아?"

이정옥은 또 입바른 소리를 참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요. 주선녀는 하늘이 무너진 건데."

김광자는 어쩔 수 없이 상을 찌푸렸다. 정남희가 그렇고, 이정옥의 반응이 그런 것처럼 여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경거리는 다른 여자의 사랑이 깨지고 망가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늘같이 믿었던 사랑의 배신 앞에서 여자의 심신은 불길 속에서 타는 나무토막과 다를 것이 없었다. 김광자는 그 쓰라리고 외로웠던 상처가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며 주선녀의 발쪽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몰라, 몰라, 난 죽을 거야. 이대로는 못살아, 난 못살아......"

울음에 섞인 이런 소리가 들려왔고,

"세상에, 그따위 인간이 어딨니 그따위 인간 말종이 박사학위를 따면 뭘 해 글쎄. 아휴, 그걸 그냥......"

한국식의 야단스러운 울음을 그치게 하려는 것인지, 불붙은 감정에 더 부채질을 하는 것인지 모를 이런 말이 뒤를 잇고 있었다. 김광자는 잠깐 멈칫했다가 방문을 안으로 밀었다. 주선녀를 위로하고 어쩌고 하기 전에 모든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는 상황을 수습해야 된다는 생각이 앞섰다.

"주선녀 씨, 참 안됐네요. 행복하길 바랐는데...... 근데 저어...... 밖에 사람들이 다 모여서 수군거리고 있어요. 한국으로 돌아갈 거 아니고 여기서 계속 일할 거잖아요. 슬프고 괴로운 처지에 괜히 망신까지 사서 할 건 없잖아요. 그만 실례하겠어요."

김광자는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그녀는 자신보다 1년 먼저 온 주선녀가 어서 냉정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사랑의 상처는 어쨌거나 스스로 핥고 어루만지며 치유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겪었던 아픔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위로하면 확실히 효과가 있겠지만 괜히 과거를 들춰내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할 수는 없었다. 다만 주선녀가 자신처럼 임신을 하지 않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임산부 마음대로 낙태수술을 할 수 있지만 독일에서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뭐랬길래 울음을 뚝 그쳤니?"

정남희가 성급하게 물었다.

"! 배고프다."

김광자는 복도를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독일과 유고의 간호원들도 그들 특유의 제스처를 쓰며 발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글쎄 그러니까 유학생들보다는 광부들이 더 낫다는 말이 왜 생겼겠어. 거 뭐라더라, 끼리끼리 격에 맞는 사람들이 어울려야 한다는 유식한 말. 높고 높은 박사님들께서 글쎄 우리 같은 고졸짜리들을 왜 좋아하겠어. 다 임시변통으로 이용해 먹고 속여먹으려고 흑심 품고 덤비는 건데 우리가 괜한 꿈 꾸다가 당하는 거지. 우리한테는 같은 고졸짜리 광부들이 딱 어울려. 그치?"

정남희는 김광자의 빠른 걸음에 발을 맞추며 입을 놀렸다. 김광자는 자신을 속이며 임신까지 시켰던 이동원의 얼굴을 지우려고 애쓰며 말대꾸할 것도 잊고 있었다. 이동원과 '간호 장학생'......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계속 거짓말을 하면서 상대방의 몸까지 빼앗는 것이었다. 인간...... 남자..... 그녀는 또 어지러운 회의에 감기고 있었다.

김광자는 며칠째 주선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보기에 딱할 정도로 허물어지고 있었다. 다시는 소리 내어 울지는 않았지만 웃음기 사라진 얼굴에는 그늘이 가득했고, 저러다가 내쫓기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병원 일도 마지못해 하고 있었다.

"주선녀 씨,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요. 나도 비슷한 과거가 있어서 하는 말인데, 인생의 목표를 새롭게 바꿔봐요. 난 그 상처에서 벗어나려고 독일에 왔고, 여기 와선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자기는 자기 자신이 구할 수밖에 없어요."

김광자가 주선녀와 단둘이 있는 시간을 만들어 한 말이었다.

"어머! 그래서 공부를 그리 열심히 하는군요. 광부고 뭐고 남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주선녀는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김광자를 절실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권하고 있잖아요. 처음엔 쉽지 않지만 애를 쓰면 돼요."

"그럼 저를 좀 도와주세요. 복수하러 갈 수도 없이 여기서 돈을 벌어야 할 형편이니까 저도 그 일을 빨리 잊고 싶어요."

"그래요. 우리 자주 얘기합시다."

김광자는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는 주선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김광자는 날마다 주선녀와 한 시간 정도씩 얘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솔직한 서로의 얘기였다. 그러나 김광자는 자신의 임신과 낙태는 철저히 감추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광자가 물었다.

"혹시 저어, 임신할 염려는 없어요?"

"네에, 미리...... 했어요."

", 잘했군요. 그럼 더 걱정 없어요."

김광자는 한국에 비해 거의 완벽한 독일의 피임 기구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임신과 낙태를 겪지 않아도 되는 주선녀의 상처가 치유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방문 앞으로 다가서던 김광자는 문틈에 꽂힌 편지를 반갑게 뽑았다. 자신에게 소식을 보내오는 유일한 사람, 남동생 선태의 편지였다. 김광자는 편지 봉투를 서둘러 뜯으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누나 참 면목 없게 됐어. 이번에 또 실패야. 이번에는 꼭 붙으려고 사력을 다했지만 또 낙동강 오리알이니 난 아무래도 재주가 모자라나 봐. 어머니, , 누나를 모두 생각해서라도 이번에는 악착같이 패스하려고 했는데...... 미칠 것만 같애. 어머니와 누나한테 죄송하고 면목 없는 것도 죽을 지경이지만 형한테 무시당하는 것은 정말 환장하겠어. 형은 더욱더 나를 사람 취급하지 않게 생겼으니 앞으로 자주 만나기는 점점 더 어렵게 될 거야. 형이 우리 형제들을 창피스럽게 생각하는 형편에 누나가 서독에 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해. 그런데 내가 보기 좋게 고시에 패스하지 못하고 타국에서 고생하는 누나 돈만 받아쓰고 있으니 이 못난 신세 그만 죽고 싶어......"

김광자는 동생의 편지를 책상에 떨어뜨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동생은 두 번째 고시 실패였다. '바보같이!', '이런 것도 몰라!' 이런 오빠의 말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건 어렸을 때부터 오빠가 동생들한테 써온 말이었다. 언제나 1등만 하는 오빠 앞에서 4-5, 6-7등 하는 동생들은 바보일 뿐이었고, 공부까지 잘하는 장남의 그런 위세를 아버지나 어머니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자신은 독일로 도망쳐 나왔지만, 동생 선태는 하필 오빠하고 같은 길을 택해 거듭 실패하고 있으니 딱하기 이를 데 없었다. 김광자는 자신도 모르게 깊고 긴 한숨을 쉬며 동생의 편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일요일을 맞아 김광자는 머리를 정성스레 빗고 옷도 새로 다려 입었다. 언제부터인가 일요일이 오면 맑고 푸르른 새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교회에서 얻게 된 빛이고 안식이었다. 그녀는 경건한 마음으로 성경을 들고 방을 나섰다.

"진정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고자 하면 예수께서 실천하신 바를 바르게 따르십시오. 예수께서 실천하시고자 하신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신 것은 처음서부터 끝까지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나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었고, 내 가족만을 위한 편협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나 아닌 남 나 아닌 수없이 많은 남들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하늘처럼 넓고 바다처럼 깊은 사랑을 일러 박애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박애의 실천을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우리에게 증거하셨습니다. 그리고, 더하여 부활하심으로써 그 박애가 영원불변한 생명임을 재차 증거 하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무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가슴, 가슴마다에서 계속 부활할 때 비로소 영원불변의 분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의 가슴, 가슴마다에 예수님께서 부활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건 바로 나 아닌 남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박애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 과업을 성실히 수행하는 그 순간 여러분은 예수님의 축복을 최고로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한 사람,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으며, 그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기심 때문에 그 가르침을 너무나 쉽게 잊어먹고, 또 잊어먹습니다. 그러고는 예수님을 향하여 나만을 위하여, 내 가족만을 위하여 복을 달라고 기도하기 일쑤입니다. 그런 기복은 한없이 그릇된 믿음이며, 예수님의 부활의 가르침을 역행하는 어리석음입니다. 날마다 여러분의 가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롭게 부활하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지니고 나날의 일을 해나가십시오. 그러면 하는 일마다 즐겁고 기쁠 것이며 그 즐거움과 기쁨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축복입니다. 전 인류가 그렇게 될 때 천국은 바로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설교를 들을 때마다 자신의 마음을 되짚게 되고, 병원 일의 고달픔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고는 했다. 김광자는 정남희의 방문에 손기척을 냈다.

", 들어와. 문 열렸어."

"아니, 누군 줄 알고 무조건 들어오래?"

김광자는 방으로 들어서며 정남희에게 눈을 흘겼다.

"그야 노크 소리 들으면 누군지 몰라? 식구가 많아도 대문 흔드는 소리 듣고 누군지 아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정남희가 옷을 갈아입으며 대꾸했다.

"오늘도 교회는 안 가?"

"미안해. 오늘은 양로원에 가기로 했어."

정남희가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하기는 평일에도 하루도 빼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일요일까지 그러는 건 너무 과한 것 아닌가? 그렇게 과로해서 몸이 어떻게 견디겠어."

"그럼 어떡해. 동생들은 줄줄이고 돈 버는 사람은 나 혼자뿐인걸."

정남희가 슬픈 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일요일 하루는 쉬어야지 몸이 쇳덩어리가 아닌데 그러다가 병나면 어쩌려고."

"괜찮아 한국에선 잘 먹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일했는데 여기선 잘 먹으니까."

"아니, 이건 무슨 약이야?"

김광자는 책상 위에 있는 약병을 집어 들었다.

", 아스피린. 몸살 기운이 좀 있는 것 같아서 두 알 먹었어."

"거 봐. 과로하니까 그렇잖아. 피로는 쉬어서 풀어야지 약을 먹으면 어떡해 아스피린을 먹는 건 임시변통이고, 이것도 이로울 것 없는 약이라고. 명색이 간호원께서 왜 그리 무식하게 구셔?"

"장래 의사선생님, 그만 좀 바가지 긁으세요. 쉬어야 될 만큼 피곤하면 쉬겠습니다요."

정남희는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나가자는 손짓을 했다.

"양로원에는 혼자 가?"

"아니, 주선녀하고."

"주선녀는 마음이 좀 정리된 것 같애?"

"모르겠어.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 속마음은 어떤지. 그 상처가 평생 잊혀지겠어? 첫사랑인데다가 뼛골 빠지게 아르바이트까지 해가며 뒷바라지해 주다가 당한 건데. 그 인간 독일 박사 돼서 돌아갔으니까 틀림없이 교수님 되셨겠지? 그 인간도 학생들에게 양심적으로 살아라, 올바르게 살아라, 하겠지? 그걸 생각하면 소름 끼치고 기막혀."

정남희는 방을 나서며 몸서리를 쳤다.

"그래, 나도 그 생각을 하면 끔찍스러워져. 어쩌자고 그렇게들 남을 속이고 사는지. 사업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이라는 것을 놓고......"

김광자는 얼결에 짙은 한숨을 쉬었다. 마음속에는 아무런 시차도 거리감도 없이 또 이동원이 가득 들어찼다. 독일로 오면서 그를 완전히 잊으려고 했다. 지저분한 쓰레기를 말끔히 쓸어내 버리듯 그와의 기억을 깨끗하게 지우려고 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그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주선녀도 두고두고 그 상처에 시달리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양로원은 다른 병원이나 꽃집 같은 데보다 더 많이 주나?"

"그럼, 일요일 근무잖아 그리고 양로원 노인들은 뒷수발을 해주긴 해도 병자들이 아니잖아. 병자들 안 보고 일요일 수당까지 받으니까 아르바이트하기로는 양로원이 최고인 셈이지."

주선녀는 기숙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정남희가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아니, 금방 나왔어요. 성경 든 광자 씨 모습이 잘 어울리네요."

주선녀가 두 사람에게 눈인사를 했다.

"일요일에는 교회 나가고, 의사선생님 될 공부하느라고 아르바이트 딱 발 끊고, 김광자가 최고 팔자지요 뭐. 너무 부러워서 배가 다 아프려고 해요."

정남희가 정말 샘나고 기분 상한다는 기색으로 말했다.

"남희 씨는 나보다 덜하네요. 난 너무 배가 아파 마구 설사가 나요."

주선녀의 대꾸에 그들은 모두 웃었다.

"근데 이게 그냥 웃을 일이 아니라구요. 광자 얘 먼저 온 사람들 제쳐놓고 독일어 제일 잘하는 것 보세요. 좋은 머리에 날마다 공부를 그리 열심히 해대니 언젠가 의사가 되는 건 틀림없다구요. 그런데 그때도 우린 간호원 신세일 테니 얼마나 비참하고 초라하겠어요. 그땐 광자하고 천 리 밖에 떨어져 살아야 해요."

정남희가 과장된 몸짓을 했다.

"난 싫어요. 써주기만 한다면 광자 씨 병원에서 간호원 노릇 하겠어요."

주선녀의 대꾸였다.

"아니, 그건 또 무슨 초 친 맛이에요?"

"광자 씨는 이해심이 많잖아요. 날 괄세하는 게 아니라 마음 편하게 해줄 테니까."

", 그건 그래요. 얘는 이상하게 철 든 소리, 유식한 소리는 혼자 다해요. , 그럼 우리 둘 다 써줄래?"

"아니, 발걸음도 못하게 굴 거야."

김광자의 대꾸에 그들의 웃음소리는 다시 조용한 병원의 구내에 명랑하게 퍼지고 있었다.

"그럼 교회에 잘 다녀오세요."

주선녀가 손을 들어 인사했고,

", 수고하세요. 너무 무리하진 말구요."

김광자도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김광자는 혼자 천천히 걸었다. 그녀는 문득 가로수의 잎들이 변색해가는 것을 느꼈다. 어느덧 또 한 해가 저물어가는 독일의 가을이 오고 있었다.

 

 

40.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어둠 속에서 어둠보다 더 짙게 드러나는 산의 자태는 육중하고도 우람했다. 낮의 산과 달리 야릇한 신비감과 두려운 위압감을 자아내고 있는 밤의 산은 무수한 별들의 조명을 받아 어떤 종교적 경건함까지 지니고 있었다. 겨울 별들에 비해 훨씬 가깝고 크게 보이는 여름 별들의 반짝거림은 어지러울 지경으로 현란했다. 자정이 넘은 산속에는 깊은 적막뿐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산의 정기에 꺾여 초저녁의 더위는 자취 없이 가시고 산골에서는 서늘한 기운이 번져나고 있었다.

무릎을 꿇은 전태일은 어둠 속의 산과 하늘을 우러르고 있었다.

주여 ! 당신을 닮은 용기를 주소서. 죽음의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신 당신의 용기를 베풀어주소서. 가난한자, 병든 자 버림받은 자들을 한없이 사랑하시고, 그 불굴의 실행으로 스스로를 버리신 주님을 감히 따르고자 하나이다. 감히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저의 마음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을 똑똑히 목도하고 있나이다. 나약한 저의 마음이, 밤과 낮이 다르게 변덕을 부리는 저의 마음이 저 돌덩어리로 뭉친 산봉우리처럼 단단하게 굳어지도록, 주여! 힘과 용기를 주소서.’

전태일은 또 어김없이 기도하고 있었다. 밤마다 기도를 할 때면 마음이 돌덩어리로 단단해지고 쇳덩이로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날이 밝아지면 그 마음은 어느새 흔들리고 허물어지고는 했다. 바위를 깨서 기도원의 터를 닦고, 괭이질과 삽질을 해대고, 면장갑이 붉게 물들도록 손을 다쳐가며 석축을 쌓아올리고, 우물을 파고하면서 산에 머물 때는 그래도 마음의 동요가 덜했다. 그러나 목재를 나르려고 리어카를 끌고 남대문시장엘 나갈 때면 마음의 파문은 아주 심해졌다.

'바보짓하지 마. 재단사 월급이면 네 식구가 고생 안 하고 살 수 있어. 눈치껏 요령껏 그냥 편히 살아. 다 그렇게 살잖아. 괜히 앞에 나서봤자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손해만 봐 뭐하려고 고생 사서 하고 그래.......'

이런 속삭임과 소곤거림이 마음을 흔들고 어지럽혔다. 시내의 휘황한 상점들, 활기가 넘치고 있는 거리들, 자기네들 일에 바빠 분주하게 오가고 있는 사람들...... 그런 것들이 유혹의 손짓을 하고 있었다. 밤의 마음과 낮의 마음이 그렇게 다른 것을 안타까워하며 전태일은 매일 밤 기도를 거르지 않았다. 그는 일꾼들 사이에서 '벙어리'로 소문나 있었다. 생각 깊은 얼굴로 다른 사람들과 거의 말을 하지 않은 채 일손만 부지런히 놀리고 있는 전태일은 벙어리나 다름이 없었다. 언제나 남들보다 일을 빨리 마치는 그는 혼자 지하실로 내려가 책을 펴들곤 했다. 그건 어느 곳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가지고 다니는 <근로기준법> 책이었다. 하루하루 지나가면서 기도원의 모습이 차츰차츰 이루어져 가듯 전태일도 자신의 마음속에 기도의 탑이 한 층, 한 층 쌓여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두달이 가고, 석달이 가고.... 그 탑은 낮에도 흔들리거나 허물어지지 않게 되었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오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전태일은 글 끝에다 '197089'이라고 적었다. 그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삼각산에서 4개월 정도 보내면서 마음을 다지고 다져 마침내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라고 분명하게 새긴 결단의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전태일은 죽음을 각오하고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인간지옥 평화시장을 향하여 산을 내려갈 채비를 했다. 모든 것을 다 버린 자신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사람답게 살기 위해 투쟁하는 길뿐인 것을 그는 응시하고 있었다.

9월 들어 평화시장에 나타난 전태일은 산에서처럼 손질 안 된 긴 더벅머리가 아니라 빡빡 깎은 모습이었다. 그 빡빡머리는 대통령의 특별 명령으로 8월부터 실시한 '장발 단속'에 걸려 깎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노동운동을 새롭게 할 결심으로 삭발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모습으로 오랜만에 나타난 그를 보고 사람들은 '저 사람 큰집 갔다 온 모양'이라고 수군거렸다. 형무소 생활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쑥덕공론이 하루빨리 취직을 해야 할 전태일에게 유리할 리 없었다. 당장 돈도 급했고, 노동운동을 제대로 하려면 평화시장 안에 근거를 잡아야 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한동안 평화시장을 떠돌던 그는 마침내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지난 1년 동안 노동운동을 선동하고 다니는 놈이라는 소문이 가라앉아 있었고, 업주가 바뀐 공장도 더러 있어서 겨우 취직이 된 거였다. 취직이 해결되자 전태일은 다시 사람들 규합에 나섰다. 그는 친구 김개남과 함께 그동안 흩어져 있었던 바보회 회원 여섯을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재단사들에게도 손을 뻗쳤다.

추석 대목이 지나 일거리가 줄어들게 되자 전태일은 여유시간을 내서 동양방송을 찾아갔다. (시민의 프로)에 나가서 봉제공장들의 실태를 알리고, 자신들의 요구를 내세우려는 것이었다. 그는 프로 담당자에게 자료를 설명하고, 공원들의 입장을 세상에 호소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담당자는 고개를 저었다. 방송을 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하니 좀 더 자세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해 다시 와보라고 했다.

"하루에 열 네다섯 시간씩 일을 한다고요?"

프로 담당자는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예 열여섯 시간일 때도 많습니다."

"이거 참...... 잠 안 오는 주사를 맞으며 일한다는 게 사실이오?"

"예에 , 며칠 전 추석 대목 때도 그랬습니다."

"이거야 원...... 천장높이가 정말1미터 50센티미터가 맞아요? 지금 내 키가 1미터 70인데."

양복을 빼입은 프로 담당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믿기지 않으시면 지금 당장 저와 함께 가보시지요. 30분이면 그런 것들을 전부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태일은 그의 팔을 곧 잡아 끌 기세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니, 아니, 내가 지금 곧 방송시간이라 시간이 없소. 다음에 다시 봅시다."

프로 담당자는 당황스럽게 팔을 내저었다. 전태일은 무거운 발길로 방송국을 나왔다. 정말 서소문의 방송국에서 청계천 6가까지는 버스를 타더라도 미처 20분이 걸리지 않았다. 더구나 택시를 타면 10분 이내에 평화시장에 도착해 그가 의문스러워하고 믿기 어려워하는 모든 것을 두 눈, 두 귀로 똑똑히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바쁘다는 핑계로 그 일을 외면했다. 전태일은 그 사람의 양복과 자신의 작업복을 비교하며 쓰게 웃었다. 신발을 벗어야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으리으리하게 꾸며진 방송국 건물도 자신들이 일하는 공장과는 너무나 하늘과 땅 차이였다. 양복쟁이들만 모여서 일하는 방송국, 그곳은 천국이었다. 천국에 사는 사람이 지옥의 형편을 알 리 없고, 지옥에 관심이 있을 리도 없었다. 전태일은 마음을 닫으며 길을 건넜다.

이 수많은 사람들은 왜 이리들 바쁜가 이들은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사람들이 이렇게 불어나고 있는 서울은 과연 사람이 살 만한 곳인가...?’

천당과 지옥이 서로 등을 맞대고 동거하는 곳, 서울은 끔찍스러운 곳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사람들에게 밀려 걷다가 전태일은 시청이 저 멀리 건너다보이는 네거리에 다다른 것을 알았다. 한 가지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여기까지 온 김에 다시 시청에 들러보자는 것이었다. 시청 사회과는 텅 비어 있었다. 막 점심시간이 시작된 참이었다. 급사 외에는 단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은 빈 책상들을 보면서 '공무원 기강'이라는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공무원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매식을 일절 금지하고 도시락을 지참하게 한다는 말이 라디오에서 쟁쟁 울려 나온 것이 언제였던가. 국민재건복 입는 것이 언제부턴지 흐지부지되어 전부 양복으로 바뀐 것처럼 공무원들도 도시락을 싸온 사람은 하나도 없고 모두 매식을 하러 나간 것이다. 공무원 월급은 일반 회사 직원들보다 훨씬 적은데 무슨 재주로 매일 점심을 사먹는다는 것인가. 전태일은 근로감독관이 업주들의 편을 드는 이유를 다시금 되새기고 있었다.

권력 있는 자들이 돈 있는 자들을 끼고 돌고, 돈 있는 자들이 권력 있는 자들을 알아서 모시면서 그렇고 그렇게 돌아가는 세상이라는 말을 생각하면서도 전태일은 복도의 나무의자에 몸을 부렸다.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다. 점심시간을 의식해서 그런지 몹시 배가 고팠다. 라면으로 아침을 때운 속은 비어버린 지가 이미 오래였다. 라면으로도 끼니를 때우지 못하고 옥상에 몰려 점심을 굶고 있는 수많은 시다들을 생각하며 전태일은 눈을 감았다.

"이건 너무 어려운 문제가 돼서 여기선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소. 미안하지만 주무부서인 노동청 본청으로 좀 가보시오."

점심을 먹고 온 담당직원은 이렇게 발뺌하기에 급급했다. 전태일은 또다시 절벽을 느꼈다. 공무원은 도대체 뭘 하는 사람들이냐고, 국민 세금으로 월급을 받아먹고 사는 것인 줄 아느냐고, 당신네들도 양심이 있는 거냐고, 당신네들이 바로 나라 망쳐먹고 있는 모리배들이라고, 퍼부어대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전태일은 분노와 증오를 눌러 다스리며 노동청으로 발길을 돌렸다. 노동청의 담당자는 출타 중이라고 했다. 전태일은 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나 30분이 넘도록 기다려도 이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전태일은 다시 오기로 하고 기운 없는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정 기자, 이 신문 좀 봐, 이거."

"아니, 이건 윤 기자가 쓴 거 아냐."

정문을 나서던 전태일은 멈칫했다. 노동청으로 들어가고 있는 네댓 명은 신문기자들이 틀림없었다.

이 사람들에게 매달려보자!’

순간적으로 전태일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안녕하세요? 기자님들이시죠? 저는 평화시장에 있는 봉제공장의 재단사 전태일이라고 합니다. 저희들 공원들의 비참한 작업환경에 대해 들어보시면 좋은 기삿거리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10분 정도만 제 얘기를 들어주시겠습니까?"

기자들 사이에 눈길이 빠르게 오가더니 그들은 금방 의견 통일을 했다. 전태일은 아주 숙달되어 있어서 짧은 시간에 효과적으로 설명을 했다.

"이건 정말 좋은 기삿거리가 될 수 있소.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소. 공원들이 1만이나 되는데 30장 정도의 앙케트로는 자료가 충분하지 못해요. 그러니까 여러 사람들의 힘을 합쳐서 더 많은 자료를 모으고, 많은 사람들의 이름으로 진정서를 작성해서 노동청에 정식으로 제출하시오. 그럼 우리도 기사화하겠소."

어느 기자가 친절하게 말해 주었다.

",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전태일은 기자들에게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우리가 잘하기만 하면 우리 평화시장 얘기가 신문에 나게 돼. 기자들이 약속했으니까 우리가 할 나름이야. 신문기자들은 속임수 쓰는 더러운 공무원들하고는 완전히 다르잖아. 우리가 자료만 구체적으로 잘 갖추면 틀림없이 신문에 내줄 거야. 우리가 본격적으로 조직을 짜서 나서야 해 이제부터 시작이야!"

친구들을 둘러보는 전태일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우리들의 이야기가 신문에 날 수 있다!’

재단사들의 눈빛이 달라지고 얼굴에도 생기가 돌았다. 그들 열두 명의 재단사들은 지난날의 바보회를 삼동친목회로 명칭을 바꾸어 재조직을 갖추었다 삼동(三棟)이란 평화시장, 동화시장, 통일상가 세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임원선출에서 그들은 전태일을 회장으로 뽑았다. 삼동친목회는 지체 없이 첫 사업을 시작했다. 노동청에 진정서를 내는 데 필요한 자료를 구체적이고 충분하게 확보하기 위한 설문지 배포였다. 설문지는 작년에 쓰다 남은 것이 잘 보관되어 있었고, 작년 같은 실패를 거듭하지 않으려고 업주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게 비밀 작전을 짰다. 업주의 친척이나 연고자가 있는 작업장은 철저하게 피했고 회원들이 각자의 친분에 따라 연줄연줄로 각 작업장의 재단사나 미싱사들을 접촉했고, 공원들에게 설문지를 전달할 때는 반드시 업주가 자리를 비운 틈을 이용하도록 했다. 그 작전은 성공해서 며칠 만에 126매의 설문지를 회수하게 되었다. 그들은 설문조사를 분석하고 통계를 내는 한편으로. 수백 개에 이르는 작업장들의 위치, 구조, 시설 등의 자료를 수집했다. 그리고 진정서에 무게를 더하기 위하여 보다 많은 노동자들의 서명을 받으려고 애쓴 결과 삼동회 회원 외에도 90여 명의 서명을 받는 데 성공했다. 삼동친목회는 마침내 1970106일 노동청장 앞으로 '평화시장 피복제품 상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나왔다, 나왔다, 기사 나왔다!"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약속장소인 국민은행 앞의 빈터로 달려오며 소리치고 있는 것은 전태일이었다.

", 태일이다. 태일이!"

"하아, 정말 신문에 났구나!"

전태일을 기다리고 있던 회원들은 그를 향해 우르르 몰려갔다.

"났어, 났어, 이거야, 이거!"

전태일은 감격에 넘쳐 가지고 있던 신문을 회원들 앞에 펼쳤다.

"와아-, 정말 났구나!"

'골방서 하루 14시간 노동'이라는 기사 제목을 확인한 그들은 환호성을 터뜨리며 서로 얼싸안았다.

107일자 <경향신문>은 평화시장 피복공장들의 실태를 사회면 톱기사로 다루고 있었다. 삼동회 회원들은 신문사로 달려가서 신문 300부를 샀다. 당장 돈이 없어서 어느 회원의 손목시계를 풀어 맡겼다. 시장으로 돌아온 그들은 모조지를 잘라 붉은 글씨로 '평화시장 기사 특보'라고 써서 어깨띠를 둘렀다. 그리고 건물마다 돌아다니며 신문을 돌리기 시작했다. 돈을 받기도 했고 어린 시다들에게는 그냥 주기도 했다. 평소에 20원씩 하는 신문을 사보는 노동자들은 별로 흔하지 않았다. 20원이면 풀빵이 스무 개였다 그런데 신문 300부는 삽시간에 다 팔리고 말았다. 공원들은 서로서로 신문들을 빠르게 돌려보았고, 작업장마다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정말 우리 얘기가 났네."

"글쎄 말야.우리 같은 쓰레기들을 인간 취급해 줄 때도 다 있네.이게 어쩐 일이야 그래."

"누가 아니래. 근데 이게 그냥 된 일이 아니래 어제 그 신문을 돌리던 사람들 있잖아. 그 사람들이 나선 거래."

"그 사람들 멋져 장하고 훌륭해. 우리도 그 사람들을 따라서 나서야 해."

노동자들은 자기네들을 사람대접해 준 신문에 감동하고 있었고, 그 일이 우연하게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며 서로서로 힘을 엮어 나아가야 된다는 자각에 이르고 있었다. 신문기사의 효과는 당일로 금방 나타났다. 각 업주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만든 평화시장주식회사에서 노동청에 진정서를 낸 대표자들을 찾아 나선 것이다. 삼동회 회원들은 그쪽의 반응을 묵살하고 저녁 늦게까지 회합을 해서 자신들이 내세울 요구조건들을 총정리 했다. 작업 시간 단축에서부터 노동조합 결성의 지원까지 15개 항을 결정해 나가면서 그들은 가슴 벅차고 눈물겨웠다. 비로소 인간답게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감정이 부풀고 마음이 달뜨고 있었다.

밝고, 통풍 잘되고, 천장 높은 작업장에서 하루에 여덟 시간쯤 일하며, 일요일마다 쉴 수 있고, 월급을 조금 더 받을 수 있는 것. 그것이 그들이 기본적으로 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음날 전태일과 다른 두 간부는 평화시장주식회사 사무실을 먼저 찾아갔다. 그건 공원으로서 최초의 일이었다. 사장과 공원의 사이란 군대의 장군과 쫄병 사이나 마찬가지라서 평소에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형편이 달라져 있었다. 신문보도로 용기를 얻은 재단사들은 기업주들의 대표기관에 찾아가서 따질 것을 따지고 나선 것이다.

"진정 내용은 잘 알겠소. 그러나......지금 실정으로 요구조건을 전부 다 들어주기는 어려우니까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우선 환풍기 설치와 조명 시설은 바꾸도록 해보겠소."

말대꾸할 필요조차 없어서 전태일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한편, 느닷없는 신문보도에 놀란 노동청에서는 더 보도되는 것을 막으려고 실태조사를 한다느니, 근로기준법 위반업체를 고발하겠다느니 하며 수선을 떨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노동청 근로감독관이 삼동회 회원들을 찾아왔다.

"여러분은 근로자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자기희생을 무릅쓰고 나선 모범 청년들이고 모범 산업 전사들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노동청에서 바라는 일을 솔선해서 했으니까 노동절에 표창을 하겠소. 모든 건 우리가 다 알아서 해결할 테니 여러분은 이제 일을 열심히 하시오."

이번 일이 처음이었다면 그 달고 고소한 근로감독관의 말에 속아 넘어 갔을 것이다. 그러나 전태일은 그가 감추고 있는 꼬리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때를 같이 해서 정보계 형사들까지 나타나서 회원들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 삼동회 회원들은 자꾸 직장에서 쫓겨나고 있었다. 대표로 진정서를 낸 것이 알려진 때문이었다. 전태일이 그 누구보다도 먼저 쫓겨난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노동청의 근로기준국장이 삼동회 회원들을 만나려고 왔다.

"너희들 깡패처럼 이게 무슨 짓이냐. 대표들이 직업이 없으면 진정 사항을 들어줄 수 없다. 모두 취직을 하라. 그러면 1주일 이내로 다 해결 해 주겠다."

'국장님'이 책임지겠다고 한 말이었다. 그들은 좀 먼 곳까지 수소문해서 모두 취직을 했다. 전태일은 다급한 김에 재단 보조로 들어갈 정도였다. 그러나 1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도 노동청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전태일은 근로 감독관을 찾아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따졌다.

"노력을 해봤지만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해. 괜히 헛고생하지 말고 적당히 편히 살어. 미련하게 생기지도 않았는데 왜 그러지?"

전태일은 근로감독관의 낯짝에 침을 뱉어버리고 싶었다. 취직을 하게 해서 날마다 일에 쫓기다 보면 노동운동 같은 것에는 신경 쓰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것, 그것이 국장의 얄팍한 술수였음을 전태일은 평화시장으로 돌아오면서 깨닫고 있었다.

"국장까지 우릴 속였어. 이젠 말로는 안 되겠으니 1020일 날 노동청 정문 앞에 가서 데모를 하도록 하자. 그날 국회의 국점감사가 실시되니까."

"데모를 해? 그래도 괜찮을까?"

어느 회원이 겁나는 기색을 드러냈다.

"글쎄 말야, 나라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데모잖아. 데모를 하면 대학생들도 그리 무지막지하게 다루는데 우리 같은 것들이야 어떻겠어?"

"그래, 우리 같은 공돌이들이야 골로 가고 말겠지 뭐."

새로 생겨나 퍼지기 시작하고 있는'공돌이'라는 말이 묘하게 분위기를 자극했다.

"맞어, 공돌이 공순이야 어디 사람이냐. 박살나서 개피 보기 딱 알맞지."

"안 그래도 찍혀 있는 판인데 본전도 못 찾고 깨지면 바보짓이잖아?"

부정적인 기운이 좌중을 휘돌고 있었다.

"다 일리가 있는 말이야. 그런데 한 가지 빼먹은 게 있어. 내년 4월이 대통령 선거잖아. 벌써부터 선거운동이 벌어지고 있는데, 선거 때만 되면 우리 같은 사람들도 '존경하는 유권자 여러분!'이 되잖아. 경찰이 아무리 기분 상해도 우릴 함부로 취급하지 못해. 우릴 박살내서 개피 보게 만들면 투표권 가진 공순이 공돌이들이 전국에 얼마야?"

전태일은 좌중을 휘둘러보았다. 그의 예리한 상황 판단은 왜 노동운동이 필연적으로 정치운동의 성격을 띠는 것인지 그 단초를 보여주고 있었다.

"맞다! 그걸 못 생각했다."

"그래, 선거 때 인심 잃으면 즈네들만 손해니까."

"맞어, 맞어. 전국적으로 따지면 우리 공순이 공돌이들 표만 가지고도 대통령 붙였다 띠었다 할 수 있겠는데?"

"글쎄, 그게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네. 이거 우리가 그냥 멍청하게 당하고 있을 일만이 아니잖아?"

"그래, 그러니까 우리부터 데모를 하고 보자구."

"맞는 말이야 우는 애 떡 하나 더 준다는 말도 있잖아 이 시기를 잘 이용해 데모를 하는 게 좋겠어."

분위기는 금세 반전되었다. 신문보도가 나온 다음부터 전태일의 말은 한층 영향력이 커졌고, 친구들은 그의 의견을 전보다 더욱 존중하게끔 되어 있었다. 며칠이 지나 노동청의 근로감독관이 또 전태일을 찾아왔다.

"나도 자네 같은 동생이 있는 입장으로 자네들 어려운 사정 충분히 이해해. 그게 여기저기 복잡하게 얽혀서 그러는 건데, 앞으론 감독권을 강력하게 발휘해서 업주들이 자네들의 요구조건을 다 들어주도록 하게 방침을 정하고 있어. 그러니까 경솔하게 데모하려고 하지 말고 며칠만 참고 기다려봐. 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데모해서 영창에 갇히는 것보다 데모 안 하고 일이 해결되는 게 더 좋은 일 아니야?"

전태일은 감독관이 데모 계획을 알고 있다는 것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자기네 주변을 형사가 맴돌고 있었고, 누군가가 예사롭게 한 말을 엿듣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 문제는 감독관에 대한 불신이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더는 속지 않습니다."

전태일의 태도는 단호했다.

"아니야, 이번에는 틀림없어. 나도 자네 같은 동생이 있다니까. 믿으라구."

"아니오, 더는 못 믿겠어요."

"이봐, 내가 또 거짓말하면 이 손가락에 장을 지져. 아니, 내 성을 갈아!"

감독관은 검지손가락을 세우더니 이내 쪽 편 손바닥으로 목을 치는 시늉을 해보였다. 전태일은 그런 감독관을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좋습니다. 이번에는 꼭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삼동회 회원들의 며칠은 불안 속에서 흘러갔다. 근로감독관이 전태일을 다시 찾아온 것은 국정감사가 끝난 바로 다음 날이었다. 그는 다짜고짜 전태일을 음식점으로 끌어갔다.

"배고픈데 점심을 먹으면서 얘기하자구. 들어보면 아주 마음에 들 거야. 이봐 아가씨, 여기 불고기 백반."

감독관은 호기를 부렸고,

"아닙니다, 그 비싼 걸."

전태일은 불안한 예감에 부딪히고 있었다.

"자아, 어서 많이 먹으라구 사람은 그저 젊어서 잘먹어야해 젊었을 때 건강이 평생 가는 거니까."

감독관은 불고기를 뒤적이면서,

"근데 그게 말씀이야, 경제발전의 선봉대로 앞장서고 있는 산업역군인 자네들의 노고는 너무나 잘 아는데 말야, 그렇다고 경제가 막 발전하기 시작한 지금 자네들의 요구대로 해버리면 발전이고 뭐고 다 망쳐져 도로아미타불이 돼버리거든. 닭이 열 마리 이상으로 불어난 다음부터 잡아먹어야지 다섯 마리도 못 돼서 잡아먹기 시작하면 결국 씨가 말라 거덜나지 않느냐 그런 말이야. 나라 전체 사정이 그러하니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야 되겠어. 그래서 내가 자네한테 조용히 하는 말인데 말야, 일 편하고 보수 많은 직장에 취직시켜 주고, 가정적인 애로사항 같은 것도 다 해결해 줄 테니까 그놈의 일에서는 이 정도로 손 떼는 게 좋지 않겠어? 바보짓 하지 말고 요령껏 눈치껏 편히 사는 게 최고라구. 자아, 어서 먹어, 어서.“

그는 과장되게 입맛을 다시며 불고기를 입으로 몰아넣었다.

"아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그렇게는 못합니다."

전태일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거 봐. 왜 그리 말귀를 못 알아들어? 좋아, 국정감사도 다 끝났으니 어디 네 맘대로 해 봐."

감독관은 화를 내며 전혀 딴사람으로 변하고 말았다. 말이 막혀버리는 그 배신에 현기증을 느끼며 전태일은 몸을 일으켰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구나. 그런 게 어찌 공무원이냐."

"그런 사기꾼새낀 죽여야 해."

"됐어, 빨리 복수전을 시작하자구!"

삼동회 회원들은 모두 격분했다. 그들은 1024일 오후 1시에 국민은행 앞에서 데모를 감행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데모 시각을 1시로 정한 것은 1시부터 2시 사이가 공원들의 점심시간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데모에서 외칠 구호도 세 가지로 정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일요일은 쉬게 하라!"

"14시간 작업에 일당 100원이 웬말이냐!"

그들은 다음날부터 은밀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데모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참가자들이 많아야 했다. 회원 한 사람이 재단사 열 명씩을 확보하고, 그 재단사들이 자기네 작업장의 공원들을 모두 데리고 데모 현장으로 나오도록 꾀했다. 업주가 눈치 채지 못하게 감쪽같이 그 일을 처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태일은 노동청 출입기자들에게 취재를 부탁하고 평화시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는 시장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평화시장 일대의 각 작업장으로 통하는 일곱 개의 골목마다 시장의 경비원들이 두 명씩 짝을 지어 버티고 있었다. 곤봉을 빼들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어느 때 없이 살벌했다. 전태일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쥐며 어금니를 물었다.

오후 1시가 가까워 전태일을 비롯한 삼동회 회원들은 국민은행 앞으로 나갔다. 그때부터 밀려나오기 시작한 노동자들은 잠깐 사이에 5000명으로 불어났다. 그러자 경비원들이 곤봉을 고쳐 잡으며 모인 사람들을 해산시키려고 들었다. 경비실에서 그들의 이름을 불러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경비실 창가에서 형사가 내려다보며 올라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그 순간 전태일도 다른 회원들도 모든 것을 깨달았다. 경비원들만이 아니라 다른 형사들도 여기저기 깔려 있다는 것을 그들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일이 틀린 것을 알고 그들은 경비실로 올라갔다.

"왜 아무것도 개선이 안 됩니까?"

"형사님, 도와준다더니 이게 뭡니까?"

그들은 격렬하게 따지고 들었다.

"이봐, 그렇잖아도 내가 회사 측보고 자네들 요구를 들어주라고 하던 참이야. 거 회사 측에서 날짜를 직접 말해 주시오."

형사가 평화시장주식회사 사람에게 말했다.

"아무 걱정 말고 117일까지만 기다려. 다 선처해 줄 테니까."

회사 사람이 곧바로 응답했다.

"그걸 어떻게 믿어요!"

전태일이 회사 사람을 응시했다.

"이봐! 말조심해! 내가 있잖아, 내가. 날 뭘로 보고 하는 소리야."

형사가 자기 가슴을 치며 외쳤다.

"아니, 예에 ...... 알겠습니다."

한 사람이 겁이 실린 눈길로 전태일을 질벅이며 굽실거렸다.

"좋습니다. 7일까지 기다리겠습니다."

형사는 근로감독관하고는 달랐다. 전태일은, 곧장 유치장으로 끌려가느니 못 믿을 약속을 또 믿어보기로 했다. 7일은 아무 변화 없이 지나갔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믿을 놈 하나도 없잖아!"

"있는 놈들은 즈네들끼리 다 한통속으로 짜고 돌아가는 거야."

"그렇다니까. 못 배우고 힘 없어서 당하는 우리 같은 것들만 병신이지."

삼동회 회원들의 격분은 뜨거웠다.

"자아, 회원 여러분! 우리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곧 거행합시다."

이 느닷없는 말에 회원들은 모두 어리둥절해서 전태일을 쳐다보았다.

"여러분, 겉만 번드르르한 채 지켜지지도 않는 그따위 허울 좋은 법은 우리 노동자들의 손으로 화형에 처해버리고, 우린 그따위 법 대신 우리 몸뚱이를 내던져 새로 싸우자 그겁니다."

"옳소, 옳소!"

"찬성이오. 그리 합시다."

그들은 다같이 뜨겁게 박수를 쳤다.

"여러분, 우리한테는 우리들 자신밖에 없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습니다. 이번만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우리 절대로 물러나지 말고 싸웁시다. 날짜는 1113일로 하고, 화형식에 쓸 휘발유통은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전태일은 회원들을 둘러보았다. 혈색이라고는 없이 깡마른 그의 얼굴은 엄숙한 것 같기도 했고 비장한 것 같기도 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1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햇빛을!"

"하루 14시간 노동이 웬말이냐!"

화형식에 이은 데모 때 외칠 구호들을 정하고 회의를 마쳤다. 자장면은 고사하고 라면 하나씩도 먹지 못한 채 밤이 깊어 있었다. 전태일은 며칠째 불기 없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방바닥에 <근로기준법>책을 놓고 두 손을 모았다. 손때가 까맣게 전 그 두꺼운 책은 해질 대로 해져 있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수 있는 길을 찾아 펼치고 펼치고 또 펼치기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했던 책. 그러나 그건 거짓치장이었고 가짜 눈속임이었다. 그것을 불태워 없애야 할 날이 하루하루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전태일은 두 손에 이마를 대고 차가운 방바닥에 엎드렸다.

"주여, 약한 저에게 용기와 확신을 주소서. 제가 저의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저의 죽음이 절대 헛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주소서.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돈 많고 권력 가진 자들이 서로 작당해서 속이고 속이고 또 속이고, 거기에 정부까지 한통속이 되어 있습니다. 그 벽은 높고 높으며 두껍고 두껍습니다. 그 벽을 어찌해야 깰 수 있겠나이까. 그 벽을 깨고 모든 사람끼리 빈부도, 강약도, 귀천도 없는 세상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이 한 몸을 육탄으로 날리는 길뿐이라고 여겨지옵니다. 이 미천한 몸 하나 육탄으로 날아가 산산이 부서져서 천대받고 억눌려 사는 모든 노동자들이 눈 똑바로 뜨고 자기들을 보게 하고자 하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다함께 뭉쳐 일어나 그 벽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인간다운 세상을 이룩해 내는 데 한톨 불씨이고자 하나이다. 이 결심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번뇌하였으나 이 길이 가장 옳은 길이라 여겨지옵니다.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은 2천 년 동안 끝없이 부활하시기 위함이었나이다. 이 나약한 자 감히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한 줌 거름이 되고자 하오니 주여, 부축하여 주소서 ......"

맞잡힌 전태일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마음 다잡기를 자꾸 방해하는 것은 어머니 생각이었다. 두 동생을 데리고 살아가야 할 홀어머니를 생각하면......기도의 탑은 그만 허물어지려고 했다. 어머니의 생활력이란 오로지 약한 몸 하나뿐이었다. 25천 원 재단사의 월급이면 어머니를 호강은 못 시켜드려도 편히 모실 수 있는 수입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그동안 노동운동에 빠져 있느라고 어머니가 돈벌이를 나서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빛까지 10만 원이 넘게 지고 있었다. 그런데다 그 일까지 저지르게 되면...... 어머니 앞에는 끝도 한도 없는 가시밭길이...... 전태일은 며칠 있다가 어머니가 겪게 될 충격을 줄이려고 마음을 썼다.

"어머니, 우리 시장 일이 아무래도 한판 크게 벌어지게 생겼어요."

"왜 또? 그 일 네가 안 하면 안 되니? 제발 서른 될 때까지만 좀 참아라. 이 에미를 생각해서라도."

"죄송해요. 어쩔 수 없게 됐으니 요번 13일 날 1시에 국민은행 앞으로 나와 보세요. 어쩌면 아들 얼굴 오랫동안 못 보게 되실지도 모르니까......"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 잡혀간단 말이냐, 안 그러면 네가......"

"아니 뭐 그런 게 아니구요, 한바탕 왕창 벌이고 나서 불리하게 되면 어디 일본 같은 데로 밀항이라도 해야 될지 모르잖아요. 만약 그리 되면 평화시장 일은 어머니가 제 대신 좀 맡아주세요."

"아이구, 그런 험한 소리 허덜 말어. 이 무식한 에미가 뭘 안다구."

13일 하늘은 우는 듯 아침부터 잿빛 구름으로 흐렸다 평화시장 일대에는 지난 1024일 데모 때보다 더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시장 경비원들은 전보다 더 불어난데다 경찰 병력까지 요소요소에 삼엄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마침내 오후 1, 종업원들을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업주들은 공장을 지키고 있었고, 경비원과 형사들은 국민은행 안으로 통하는 모든 길목을 막아 노동자들의 집결을 차단시키려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물이 어디든지 스미고 솟듯 금방 500여 명으로 물결을 이루었다. 삼동회 회원들은 형사들의 눈초리를 피해 3층 복도 구석에서 아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회원 몇 사람은 벌써 경비원들에게 끌려가 감금 상태였다.

"됐다, 내려가자!"

130분경 전태일이 옷 속에 감추었던 플래카드를 꺼내며 말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붉은 글씨로 쓴 종이 플래카드를 들고 그들은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2층 복도에서 형사 두 사람이 쫓아왔다. 몸집 건장한 형사들은 성난 짐승 같았다. 그 완력 앞에서 종이 플래카드는 곧 찢어졌고 회원 서너 명까지 심하게 구타를 당하며 끌려갔다.

"너희들 먼저 내려가 담뱃가게 옆에서 기다려. 나도 곧 갈 테니까."

회장 전태일이 엄하게 지시했다. 국민은행 앞에서는 500여 명의 남녀 노동자들이 경찰과 경비원들의 거친 몽둥이질 앞에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있었다. 전태일은 10분쯤 지나 회원들 옆에 나타났다 그는 가장 친한 친구 김개남을 끌어당겨 급히 옆골목으로 갔다.

"너 성냥 있지? 불 좀 켜봐."

전태일의 말에 김개남은 무심코 성냥을 켰다. 다음 순간 전태일이 다가서는가 싶더니 옷에 불이 확 붙었다.

"아니 , 태일아!"

김개남은 눈이 뒤집혀 소리쳤다. 순식간에 온몸이 불길에 휩싸인 전태일은 큰길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불길 속에서 전태일이 외쳐댔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향해 뛰는 불길이 외쳤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아!"

더 거세게 휘돌고 너울거리는 불길 속에서 울부짖는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전태일은 불길과 싸우며 무슨 구호를 또 외쳤다. 그러나 입에서는 말 대신 허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또 외쳤다. 역시 허연 연기만 한 줄기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는 불길과 함께 쓰러졌다.

 

 

41. 구원의 길

", 요런 무주 산골꺼정 머리크락이 동나부렀네 그랴. 워떤 놈덜이 골골이 잘도 더터묵었당께로."

천두만은 산골동네를 나서며 허탈하게 혼잣말을 뇌까리고 있었다. 마을을 둘러싼 첩첩의 산에는 색색의 단풍이 꽃의 아름다움을 비웃듯 낭자하게 물들어 있었다.

"아저씨, 저 개울가에서 좀 쉬었다 가요. 맥 빠져서 더 못 걷겠어요."

뒤따르던 미용사 아가씨가 가방을 추스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려, 물도 한모금 묵고 낯도 잠 씻고 허드라고."

천두만이 고개를 고덕이며 개울 쪽으로 발길을 잡았다. 미용사 아가씨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뭐라고 투덜거렸다 그 뒤를 군용배낭을 진 나복남이 터덕터덕 따르고 있었다.

"어야, 단풍 참 오지게 곱다."

천두만이 개울가에 털퍽 주저앉으며 주변 산들을 둘러보았다.

"아저씨는 참 속도 편하시네요. 속 타는 판에 단풍이 다 보이고요."

미용사 아가씨가 가방을 던지듯 하며 입을 삐죽거렸다.

"허허, 일이 심에 안 차는 것이야 안 차는 것이고, 단풍이 고운 것이야 고운 것이제. 이 시상 일이라는 것이 이러기도 허고 저러기도 허는디, 일이 잠 꾀인다고 그리 속낄이고 꼬트작거리면 몸만 상허는 법이여. 그럴수록 맘 푼더분허니 묵어야 써."

천두만은 담배를 꺼냈다.

"꼬트작거리는 게 뭐예요?"

미용사가 해맑게 흘러내리는 개울물에 손을 씻으며 천두만을 쳐다보았다.

"? 꼬트작이 꼬트작이제 머시여? 가만있거라......긍께 그것을 서울말로 머시라고 혀야 쓸끄나?"

천두만은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그것이 긍께로......거 머시냐......무신 속상허는 일로 맘얼 편케 묵덜 못허고 지 속얼 비비꼬고 비비틀고, 찰떡 방애 찧디끼 지 속을 지가 짓이기는 것이여 . 긍께로 지 성질에 몸꺼정 상허는 것이제."

그는 힘겹게 설명하고는 담배연기를 후우 내뿜었다. 배낭을 벗은 나복남은 저만치 떨어져 왼손 하나로 개울물을 떠서 마시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 않게 그의 얼굴은 아무 표정이 없이 굳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저씨, 그렇지만 꼬트작거리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이렇게 돼가면 저 미장원 차리는 건 틀려버린다구요. 언니들처럼 미장원을 꼭 차려야 하는데."

미용사가 말라가고 있는 풀줄기를 잡아 뜯으며 울상을 지었다.

"언니들이 날 따라나섰을 때야 호시절이었응께 그리 된 것이고, 사람 사는 시상이야 음지였다가 양지 되고, 양지였다가 음지 되고 허는 법잉께 그리 맞쳐감서 살아야 허는 것 아니라고. 요 일이 정 안 되겄다 싶으면 그때는 무신 딴 방도럴 찾어야겄제."

"아저씨, 이제 육지는 틀렸으니까 섬으로 가보는 게 어떨까요?"

미용사가 불쑥 말했다. 그녀의 눈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 글씨...요런 산골짝꺼정 더트고 지내간 판에 섬이라고 그냥 뒀겄어? 미스정이 그리 생각허면 딴사람들도 다 그리 생각허는 것잉께."

천두만이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그럼 저는 어떡해요 고생만 하고 다니면서 결국 미장원은 못 차리게 되는데요."

다시 울상이 된 미용사의 손에 구절초 몇 송이가 잡아 뜯기고 있었다.

"그 맘은 알겄는디 그리 욕심 앞세우지 말랑게 그러네. 재미가 예전만 못해서 그렇제 요새 벌이로도 월급받는 것보담은 낫덜 안 혀? 산천 귀경해 감시로 월급보담 낫게 벌면 그것이 워디냐 허고 생각혀. 그래야 맘이 편해지제. 요리 산천 귀경 골고로 허고 댕김서 돈도 버는 것은 아무나 허는 일이 아닝께로."

"아저씨야 좋은 시절에 돈 많이 벌어왔으니까 그리 느긋하게 말씀하시지만 저는 속이 타서 죽겠단 말이에요. 다 비슷비슷한 촌구석 구경하면 뭘 해요."

미용사는 화풀이를 하듯 개울물로 마구 얼굴을 씻기 시작했다. 개울물은 어찌나 맑은지 바닥의 작은 모래알까지 투명하게 들여다보였다. 긴긴 세월에 걸쳐서 물결에 씻겨온 바위들이 여러 가지 형상으로 개울물 여기저기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 바위들을 감아 도는 물줄기들은 화음 잔잔하고도 그윽한 자연 음악을 끊임없이 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넓은 암반 위를 흘러내리는 물줄기의 유연한 흐름은 하얀 천이 순한 바람결을 타고 느리게 펄럭거리는 우아함을 지니고 있었다. 아무리 흐드러진 꽃 사태라도 당할 도리가 없이 온통 단풍으로 물든 주변 산의 그 어느 나무에서 떨어진 것인지 이따금 붉은 낙엽, 노란 낙엽이 물결에 실려 어디론가 떠가고는 했다. 해맑은 물줄기 위에서 그 낙엽들은 한결 고와 보였다. 천두만은 곧 물속으로 빠질 듯한 자세로 엉덩이를 치켜들고 엎드려 오래도록 물을 마셨다.

"아이고메 션타. 산이 짚은께로 물도 요리 맑고, 맛도 달디 달시."

천두만은 긴 숨을 토해내며 소매 끝으로 입을 훔쳤다.

"아저씨는 왜 사투리를 안 고치세요? 서울서 산 게 10년도 넘었다면서."

가방을 챙겨든 미용사가 무슨 트집을 잡듯이 말했다.

"워째? 글먼 안 될 일 있당가?"

배낭끈을 어깨에 걸치던 천두만은 눈을 치떴다.

"아저씨 말 들으면 못 알아들을 말이 너무 많잖아요."

", 나는 또 무슨 소리라고. 워찌워찌 돈 잠 벌면 고향 찾어 내래갈 것인디 멀라고 존 고향 말을 고치고 말고 혀 항, 고향 찾어가야제."

천두만은 배낭을 지고 일어났다.

"아저씨는 참 이상하네요. 남들은 서울로 못 올라와서 안달인데 아저씨는 왜 진작 서울에 올라와서는 또 내려가려고 그러세요?"

"몰르는 소리 말어. 서울이 머 좋아서 올라왔가디. 죽도 사도 못해 올라온 것이제. 서울은 짠뜩 정신 읎이 북대기기만 허제 사람 살 디가 아니여. 내 전답만 있음사 고향서 이웃간에 따순 정 나눔서 푼더분허니 사는 것이 질이제. 하먼, 사람 한 시상 사는 것이 먼디. 서울은 10년 아니라 100년을 살아도 정이 안드는 디여. 서로 모지락시럽고 인정머리 읎는 것이 서울 아니드라고. 인자 야그 그만 허고 싸게싸게 걸어. 해 떨어지기 전에 잠자리 찾아들어야 헝께."

천두만은 배낭을 바짝 추키며 잰 걸음질을 하기 시작했다. 미용사도 걸음이 빨라졌고, 나복남은 멀찍하게 뒤떨어져 천두만의 앞을 피해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둑발에 산도 단풍도 묻혀갈 즈음에 그들은 국밥집에 잠자리를 정했다. 저녁을 먹고 미용사는 자리를 떴고, 천두만은 나복남을 데리고 술잔을 기울였다.

"니넌 무신 생각을 허니라고 통 그리 말이 읎냐?"

천두만은 나복남에게 잔을 건네며 오래 마음에 담아왔던 말을 꺼냈다.

"......그냥......"

나복남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어물거렸다.

"생각보담 벌이가 션찮아서 그러냐?"

천투만이 나복남의 잔에 소주를 따르며 나직하게 물었다.

"아아니요. 이만한 벌이면 많은 거지요. 힘 드는 일도 없이. 서울서 막노동한다고 이만큼 벌 수 있나요, 어디."

나복남은 고개까지 저었다.

"그려, 나가 니 손을 볼 때마동 속이 씨리고 아픈디, 니 맘이야 더 말헐 것이 읎는 일이제. 요것이 다 뒷북치는 소리다마는, 요 일이 한창 시절 좋을 적에 니럴 그놈의 공장서 못 빼낸 것이 두고두고 후회시럽다. 그때 딱 잘라 맘 못 정했든 것은 요 일은 끝이 내다보이는 한때고, 거그는 직장 아니었냔 말이여. 이리 될지 알았음사 그때 맘을 딱 정했을 것인디, 니헌테 미안시러바 똑 죽겄다."

"아니에요. 제가 아저씨한테 죄송스러워 죽겠어요. 제가 괜히 따라다니면서 아저씨 수입만 줄게 하고 있어서."

"어이, 그 무신 실답잖은 소리여. 당최 그런 소리 허덜 말어. 옛말에 말이시, 콩 한나를 열이서 갈라묵고 남치기를 둠벙에 던진께로 풍덩 소리가 나드란 말이 있네. 고것이 무신 말인지 안가? 정이라는 것은 서로가 나눌수록 커진다는 말이시. 넘덜찌리도 그러는 판인디 자네는 넘이 아니여. 자네 아부지가 나헌테 혀준 것에 비허면 암것도 아닝께. 하나또 맘 쓰덜 말어. 그라고, 사람이라는 것은 다 살게 돼야 있응께 심내고."

"......"

", 워째 답이 읎어?"

술기운에 젖은 천두만의 목소리가 쿠렁하게 컸다.

"예예......"

마지못해 나오는 나복남의 대답에는 힘이 없었다.

"나가 쪼간 더 있다가 말헐라고 혔는디 말이여. 자네가 하도 맘얼 못 잡고 있응께 미리 말얼 혀야 쓰겄구마. 자네는 앞날 걱정이 태산인 갑는디, 눈꼽 째가리만치도 앞날 걱정헐 것이 읎어 . 워째 그냐! 2~3년 더 있으면 나가 가발 하청공장을 채리게 된다 그것이여. 그리 되면 워찌 돼냐! 자네는 떡허니 취직이 되는 것이제. 이찌방(첫 번째의 일본말)으로 취직이 된단 말이여."

술기운에 실려 천두만의 목소리에는 생기가 펄펄했다.

"에에? 공장을 차려요?"

나복남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눈에는 그렇게 돈을 많이 벌었어요? 하는 말이 담겨 있었다.

"머시냐, 공장이라고 혀서 큰 것이 아니고 하청 받는 것잉께 쬐그만허니 한나 채래갖고 우리 말분이가 존 기술로 사람들 부리면 요새 벌이보담 훨썩 나슬 것잉만. 그간에 말분이허고 나가 버는 돈을 안 굶어죽게만 묵어감서 알뜰살뜰허니 모타왔응께로."

"아저씨, 그런데 이렇게 머리카락이 동나가면 가발공장이라는 것도 얼마 못 가서......"

나복남은 천두만을 의아스럽게 쳐다보았다.

"아니시. 그런 걱정 안 해도 돼야. 인조 머리카락을 쓰기 시작헌 지가 오래 되얏고, 요새 맨글어지는 가발은 태반이 인조 머리크락이여."

"인조 머리카락이요?"

", 사람 손으로 맨글어낸 가짜 머리크락 말이시.그것이 미국서 맨글어져 오는디, 여러가지 물딜이고 빠마시키고 혀서 가발을 맨글어놓으면 영축 읎이 진짜 머리크락 같단게로. 그 원료를 쓰면 된께 아무 걱정이 읎는 심이여."

"그럼 왜 진짜 머리카락을 모으지요?"

", 자네가 몰르는 것이 많구만 그려, 가짜 머리크락으로 맨든 가발이 지아무리 그럴듯허다 혀도 진짜로 맨든 것허고는 댈 것이 못 되는구만. 눈 볽은 사람덜 눈에는 금세 표가 난께. 그려서 진짜로는 아조 비싼 고급품을 맨글어내는 것이제."

", 예에......"

나복남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긍께 앞날 각다분허니 생각허지 말고 심내란 말이시. 알겄어?"

"예에."

"그려. 얼렁 잔 비우고 자드라고. 낼 또 해 뜨기 전에 나서야 헝께."

천두만은 자리에 눕기가 바쁘게 잠이 들었다. 나복남은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살그머니 밖으로 나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머릿속에는 여전히 그 생각뿐이었다.

"사람 더 모을 것 없어, 괜히 사람 많아지면 비밀 새기 쉽고 일만 복잡해져. 우리 단둘이 해치워. 손목이 잘린 게 아니니까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충분해."

뜻밖에도 쉽게 마음을 정한 양성팔이 한 말이었다. 그 준비를 위해 천상 천두만 아저씨를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벌써 서너 달 동안에 집에 내놓고 조금씩 떼어놓은 돈이 필요한 장비를 거의 구할 만큼 모아져 있었다. 자신보다 손가락이 두 개가 더 성한 양성팔은 드라이버 하나로 창문이나 도어 핸들을 따는 기술을 익히고 있었다.

"사람이란 참 묘해. 이거 하자고 드니까 날마다 기술이 느는 거야. 도어 핸들 이거 수십 번 분해하고 결합하고 하다보니까 속이 훤히 들여다보여. 스텐 강판 자른 솜씨들이니까 철창 잘라내는 것이야 식은 죽 먹기고."

양성팔이 전에 볼 수 없었던 생기를 드러내며 하는 말이었다.

",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말야 그 새끼손가락 잘라 복수하는 건 좀 곤란하지 않을까 싶어. 그렇게 해놓으면 그런 일 당하고 공장에서 쫓겨난 직공들이 한 짓이란 게 금방 표가 나잖아. 그건 우리 잡아가슈 하는 바보짓이니까 감정대로 했다간 곤란할 것 같애. 좀 더 생각해봐."

양성팔이 얼마 전에 한 말이었다. 그건 꽤나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경찰이 그동안 쫓겨난 공원들을 찾자고 들면 못 찾을 리가 없었다. 그건 자기 가슴에 총 쏘는 일이었다. 그 일은 그야말로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치워야 한다. 그럼 보상받는 셈치고 금품만 털어내? 글쎄...... 돈이고 보석이 많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으면...... 막말로 둘이 구멍가게라도 하나씩 해가며 살아갈 수 있는 돈이나마 챙기게 되면 모르지만 그렇지도 못하고 그놈이 성하게 살아가도록 내버려 둔다 ,. 그건 한낱 도둑질일 뿐이지 보복이 아니었다. 나복남은 담배를 깊이깊이 빨며 또 그 생각에 말려들고 있었다.

산간마을을 며칠 더 찾아다니며 천두만과 나복남은 배낭을 어지간히 채워가지고 서울로 돌아왔다.

"한 사흘 푹허니 쉬어라. 부지런헌 귀신은 배곯는 일 읎고, 께을른 귀신은 물밥도 못 얻어 묵는다고 혔니라. 부리런허니 싸댄께 그래도 배낭이 시나브로 차덜 안 혀?"

천두만이 가발회사에서 받은 돈을 나눠주며 웃었다.

"고마워요, 아저씨."

나복남은 멋쩍게 돈을 받으며 고개를 꾸벅했다.

"그럴 말 안 혀도 돼야."

천두만이 정겹게 웃으며 나복남의 어깨를 두들겼다.

나복남은 이튿날 아침 일찍 청계천 만물상으로 나갔다. 온갖 종류의 공구들이 있는 상점을 눈여겨 구경하는 것은 서울로 돌아오면 빼놓지 않는 일이었다. 필요한 공구들이 어느 상점에 있는지 미리 보아두고, 값도 비교해 보고 했다. 청계천 공구상들은 남대문시장이나 동대문시장보다 더 심해 같은 종류의 펜치 하나도 상점마다 값이 제멋대로였다.

"제 몸에 불을 붙여 죽다니 그게 이만저만 지독한 독종이 아니야."

", 독종 중에 독종이지. 그놈 그거 살았을 때 사장들 속깨나 썩였을 거야. 어쨌거나 봉제공장 사장들 앞으로 일해 먹기 골치 아프게 생겼어. 잘못하면 평화시장 대들보 무너질지도 몰라."

"누가 아니래나. 그 놈 본따서 공순이 공돌이들이 돈 올리라고 들썩거려대면 날 새는 거지. 내 친구 하나도 거기 사장인데 바짝 얼어 있어."

"근데 말야, 그놈 그거 정신이 좀 이상한 놈 아닐까? 당장 숨 막히는 제 일도 아니고, 봉제공장 노동자들이 사람 대접받게 하겠다고 제 몸을 불태워 죽는다는 게 그게 말짱한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겠어?"

공구들을 살피고 있던 나복남은 두 남자의 이야기에 귀가 쏠려 있있다. 평화시장 봉제공장이면 여동생과 직결되어 있었고, 누군가가 자기 몸에 불을 질러 죽었다는 것이 귀를 번쩍 띄게 했다. 자기 몸에 불을 질러 죽어? 그건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그게 글쎄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정작 정신병자라면 그런 일을 할 수도 없을 텐데 말야. 그나저나 그게 강 건너 불 구경만은 아니라는 게 골치 아파. 그 불똥이 우리한테도 튈 수 있거든."

"우리한테도? 그럼 우리 애들도 월급 올리라고 들썩거릴 수 있단 말인가?"

"당연하지. 여기서 평화시장이 10리야, 20리야? 그날로 소문 다 듣고 저희들끼리 쑥덕쑥덕 야단이던걸."

"이런 빌어먹을, 그놈 귀신이 우리 잡아먹게 생겼군. 염려 말어. 까불고 나서는 놈들이 있으면 외상없이 싹싹 잘라버려.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야 두말하면 잔소린데, 그런 일 벌어지면 그거 골치 아프지 좌우간 우리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해."

"그거 말 듣고 보니 그렇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우물물 흐리더라고."

나복남은 슬그머니 상점을 나섰다. 그 사람이 누군지 궁금증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봉제공장 노동자들이 사람 대접받게 하겠다고 사장들을 상대로 자기 몸을 불태워 죽은 사람...... !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동생은 그 일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왜 어젯밤에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여동생은 너무 늦게 돌아왔다. 그리고 말이 없는 편이었다. 더구나 열흘 가까이 시골을 돌아다니다가 돌아온 오빠에게 그런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나복남은 부리나케 양성팔을 찾아갔다.

", 언제 왔어? 촌 여자들 신식 많이 만들었어?"

또 뽑기 과자를 찍어내고 있던 양성팔이 반갑게 웃었다.

", 그건 그렇고. 혹시 평화시장의 봉제공장 직공이 자기 몸에 불 질러 죽은 사건 알아?"

나복남은 좌판 옆에 다붙어 앉으며 성급하게 물었다.

"느닷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자기 몸에 불을 질러 죽어?"

양성팔은 오히려 의문에 찬 얼굴로 눈을 껌벅거렸다.

", 이 구석에 앉아 있으니까 모르는 모양이군. 그런 일이 있었대."

나복남은 중얼거리듯 하며 담뱃갑을 꺼냈다.

"어디 자세히 좀 말해 봐. 사람이 어떻게 자기 몸에 불을 질러 죽어?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나도 자세히는 모르고, 청계천 공구상에 나갔다가 사장 둘이 하는 얘길 엿들었는데 말야, 평화시장의 어떤 직공 하나가 거기 봉제공장 노동자들이 사람대접을 받게 하겠다고 사장들을 상대로 해서 자기 몸에 불을 질러 죽었다는 거야."

"저런! 그럼 그 사람도 우리처럼 사장한테 개 취급당한 건가?"

"글쎄 그걸 모르겠어 . 하여튼 자기 몸을 불태워 죽은 것을 보면 무지하게 분하고 원통한 꼴을 당한 모양이야."

"자기 몸에 불을 지르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지? 몸에 무슨 기름을 뿌렸다는 건가?"

"그렇겠지.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켜대면 그건 뭐 외상이 없잖겠어."

", 그거야 기막히지 꼼짝없이 숨 막혀 죽을 수밖에. 근데, 그게 맨 정신으로 그럴 수 있을까? 생사람이 타죽는 건데 ...... 아유 끔찍해."

양성팔이 어깨를 떨며 진저리를 쳤다.

"나도 그래서 여기로 부랴부랴 달려온 거잖아 그 사람 그거 누군지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애."

나복남은 눈길을 떨군 채 볼이 패이도록 담배를 빨고 있었다.

"글쎄 무슨 일을 당했는지 모르지만 강단이 우리하고는 다른 것 같긴 해."

양성팔이 다 굳어진 또 뽑기 과자를 유리상자로 옮기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것 참 알 수 없는 일이야. 노동자들이 사람 대접받게 하겠다고 그렇게 죽다니......"

나복남이 생각 깊은 얼굴로 중얼거렸고,

"되게 충격 받은 모양이네. 그렇지만 그렇게 죽는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사장 놈들이야 끄떡도 하지 않을 텐데. 괜히 죽는 사람만 억울한 거지."

양성팔이 귀에 꽂아두었던 담배꽁초에다 불을 붙였다.

"그래, 이 좆같은 세상."

나복남이 가래를 돋우어 내뱉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말이 끊어졌다. 연탄불에 설탕을 볶는 단내만 그들 주위에 자욱이 퍼져 있었다.

 

나윤자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밤 11시가 다 되어 돌아왔다.

", 인자 오냐 오빠가 아까보톰 기둘리고 있다."

갈포댁이 딸을 맞으며 말했다.

"오빠가? 무슨 일 있어?"

나윤자의 지친 얼굴이 문득 긴장되었다.

"물르겄다. 말 안 헝께. 무신 일 있을라디냐. 배고픈디 얼렁 들어가자."

"너 이제 왔냐? 피곤하겠다."

그때 나복남이 방에서 나오며 눈을 부볐다. 그는 벽에 기데 졸다가 나오는 참이었다.

"오빠, 무슨 일 있어?"

나윤자는 불안한 기색으로 오빠를 쳐다보았다.

"아니야, 뭘 좀 물어볼 얘기가 있어서 . 배고픈데 어서 밥부터 먹어라. 난 그동안에 변소에 다녀오고 담배나 한 대 피우고 할 테니까."

오빠의 예사스런 반응에 안심하며 나윤자는 방으로 들어갔다.

"오빠 맘 상헐 야그는 한마디도 허지 말어야혀 잉? 포도시 맘 잡았는디."

갈포댁이 딸 앞에 밥상을 가져다 놓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별일 아닌 것 같으니까."

피곤에 찌들어 혈색 나쁜 나윤자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나복남이 담배를 끄는데 여동생이 건너왔다.

"밥을 천천히 먹지 그랬냐."

나복남이 여동생을 올려다보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 천천히 먹은 거야."

나윤자른 자리 잡고 앉으며 흐릿하게 웃음 지었다.

"그래, 내가 궁금한 건 다른 게 아니고 말야, 느네 평화시장에서 어떤 공원이 몸에 불질러 죽었다면서? 그걸 좀 자세히 알고 싶으다."

나복남의 말은 급하게 쏟아졌다.

"어머,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나윤자는 멈칫 놀랐다.

"오늘 청계천 지나다가 얼핏 듣고 놀랐는데 누구한테 물어볼 수가 있어야지,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왜 그런 거냐?"

나복남은 담배를 빼들었다. 나윤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잠깐 생각했다. 그 이야기가 오빠 기분을 상하게 할 것이 없었고, 무슨 피해가 갈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오히려 실의에 빠져 있는 오빠에게 어떤 힘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오빠를 위해 그 이야기를 자세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 사람 재단사고, 이름이 전태일이라고 해. 오빠가 믿을지 어떨지 모르겠는데 그 사람은 자기 개인의 어떤 일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수많은 우리 공원들을 위해서 분신자살을 한 거야. 공원들이 지금같이 먼지구덩이 속에서 월급은 적게 받으면서 짐승처럼 기계처럼 일하지 않고 좋은 환경에서 사람다운 대접을 받으면서 일하고 사람답게 살게 하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잘 안 되니까 마지막 방법으로 자기 몸에 불을 붙여 분신자살을 한 거야."

나복남은, 자기 몸에 불을 붙여 죽은 것을 '분신자살'이라고 부르는 것을 처음 알았다.

"자기 이익이 아니라 순전히 남들을 위해서......?"

나복남은 의아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넌 그 사람을 아니?"

불쑥 물었다.

"아니, 만난 일은 없고 가끔 말로만 들어왔어. 시다들한테 풀빵도 사주고 약도 사주고 하면서 걔네들 편을 들어주는 괴상한 재단사가 있다고. 그 사람이 바로 전태일 그 사람인 건 이번 사건으로 알게 되었어."

"괴상한 재단사?"

", 오빠도 알겠지만 어느 공장에서든 공장장 같은 사람들은 다 사장편이잖아. 우리 봉제공장도 대개 재단사들이 공장장을 겸하고 있으니까 당연히 사장들 편이거든. 그래서 재단사들은 인정사정없이 시다들을 구박하고 천대하고 그래. 그런데 그 사람은 시다들 편을 들어주니 괴상할 밖에. 그리고 더 괴상한 게 있어 누구나 다 아는 거지만 재단사는 우리 미싱사보다 월급을 배 가까이나 더 받거든. 2만 원만 받는다고 쳐도 그 돈이면 얼마든지 편케 살 수 있잖아. 그런데 아랫사람들 불쌍하게 생각해서 자기 돈 써가면서 노동운동을 하고 나섰으니 모두 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잖아."

"노동운동......?"

그것도 처음 듣는 말이라 나복남은 여동생의 말을 끊었다.

", 나도 이번 사건으로 모든 걸 알게 된 건데, 우리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사람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나라에서 법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근로조건이라는 게 있어, 하루에 일은 여덟 시간만 한다, 야근을 시키면 야근수당을 따로 지급해야 한다. 일요일과 공휴일은 쉬어야 한다, 공장 안의 작업환경은 건강을 해치게 해서는 안 된다, 하는 식으로 정해 놓은 거야. 그밖에도 노동자들을 위한 법이 많은데, 그 법들을 다 합해놓은 게 근로기준법이라는 거야. 그런데 사장들은 그 법을 하나도 안 지키잖아. 그래서 그 사람은 모든 걸 법이 정한 대로 하게 하려고 우리 노동자들이 힘을 모아 들고일어나게 하는 일을 시작했어. 그걸 노동운동이라고 해."

나복남으로서는 근로기준법이라는 것도 처음 들었다.

", 그 근로기준법이라는 것이 나라에서 정한 법인데 왜 사장 놈들은 안 지키지? 그리고, 사장 놈들은 돈에 환장한 놈들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치고, 그럼 나라에서 법을 어기는 놈들을 다 처벌해야 되잖아."

입에서 마구 욕이 튀어나을 정도로 나복남은 열이 오르고 있었다. 자기가 일해 왔던 공장도 줄곧 그 법을 어겼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탓이었다.

"오빠, 그게 문제야. 전태일 그 사람은 그것을 해결해 달라고, 감독을 똑바로 해달라고 여러 번 관청을 찾아갔었대. 그런데 글쎄 관청에서는 사장들 편을 들었다지 뭐야. 그 사람은 하다하다 안 되니까 결국 내가 죽어야 해결된다 하고 분신자살을 하게 됐다는 거야. 결국 그 사람은 나라에서 죽인 거나 마찬가지야."

나윤자의 목이 메는 것 같았다.

"그런 법을 만든 건 뭐고, 또 사장들 편을 드는 건 뭐야!"

나복남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거 있잖아, 싼값으로 수출 많이 해야 되는 거. 근로기준법대로 하면 물건 값이 비싸져 수출이 안 퇴고, 수출이 안 되면 경제발전이 안 돼 나라가 어렵고 한다는 것 말야."

"허 참, 자알들 논다 그래서 힘없고 불쌍한 노동자들 짓눌러 있는 놈들 배 터지게 만들어 주겠다 그거지? 이제 뭐가 뭔지 알 것 같다. 그래서 나도 그 꼴로 당한 거야. 근데 너도 그 사람이 분신자살하는 것 봤냐?"

"아니, 못 봤어. 그 생각만 하면 큰 죄를 진 것 같아서 얼굴을 들 수가 없어. 아까 말한 대로 그 사람이 관청을 찾아다니다가 안 되니까, 이거 좋게 말로 해서는 안 되겠다 생각하고 데모할 계획을 짠 거야. 그 계획 좋게 말로 해서는 안 되겠다 생각하고 데모할 계획을 짠 거야. 그 계획이 사장이나 공장장들 모르게 각 공장으로 퍼지기 시작했어. 근데 그 계획을 좋아한 건 시다나 미싱 보조, 재단 보조 같은 애들이었고 미싱사들은 별로 관심이 없었어 . 아니야, 좀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걔네들보다 월급을 훨씬 더 많이 받는 미싱사들은 데모에 나섰다가 떨려나는 게 무서워 모르는 척하면서 몸을 사렸어. 나도 마찬가지였어. 결국 몇 백 명이 모여 데모를 벌이게 됐는데, 사장 쪽에서만 데모 막을 사람들을 동원한 게 아니라 형사와 경찰들까지 나선 거야. 그런 형편에 데모를 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안 그 사람은 자기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이고 말았어. 불길에 휩싸인 채 데모대를 향해 뛰면서 그 사람이 부르짖은 소리가 뭔지 알아?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이 세 가지였어. 나는 그 말만 생각하면 너무 죄스러워서......"

나윤자는 목이 메어 말을 맺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게 그리 됐구나."

나복남은 한숨을 푹 쉬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근로기준법처럼 달라졌냐?"

나복남이 여동생을 쳐다보았다.

"아니.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아니, 있긴 있네. 사장들이 운영하는 시장조합 쪽에서 경비를 전보다 훨씬 심하게 돌고, 형사들도 자주 나타나고, 공장장들도 더 심하게 감시하고 그래."

"그럼 그 사람 죽음은 헛되이 되고 말았잖아."

"그건 그렇지 않아. 1만 명이 넘는 평화시장 공원들이 전과 다르게 자기들이 얼마나 사람대접을 못 받고 기계처럼 일하고 있는지 알게 됐고, 근로기준법이라는 게 있다는 것도 알게 됐어. 그리고 거의가 다 나처럼 죄진 마음을 가지고 있어. 그 사람은 죽었지만 죽은 게 아니야.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으니까."

"그래 그 사람 참 장하고 장하다. 몇 살이나 먹었냐?"

"스물둘"

"? 스물둘? 서른둘이 아니고?"

"아니야. 틀림없이 스물둘이야."

"! 스물두 살짜리가......"

나복남은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여동생이 건너가고 나복남은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스물두 살짜리가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은 낮에 자기 몸에 불을 붙여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이었다. 어떻게 그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고, 그런 행동까지 할 수 있는 것인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나이가 열 살 가까이나 더 많은 자신은 그런 생각을 해본 일도 없었고,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것도 이제 겨우 알게 되었다. 그 사람에 비하면 자신은 나이만 먹었지 무엇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헛 살아온 셈이었다. 그리고 더 믿을 수가 없는 건 어떻게 남들을 위해서 하나뿐인 자기 목숨을 버릴 수가 있는 것인지 이해할 도리가 없었다. 사람이 2만 원을 받았다면 자신의 월급보다 더 많았다. 재단사는 자신처럼 손가락이 잘릴 위험도 없었다. 그 나이, 그 월급 그 직업이면 얼마든지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무엇이 다른 것일까, 누구에게 그런 것을 배운 것일까 ...... 태어날 때부터 특별했을까......

이튿날 잠이 깨자마자 잠을 한숨도 자지 않은 것처럼 그 생각이 바로 연결되었다.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고, 오전이 다 흘러가도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일까....배운 것이 많은가.... 아니지. 스물두 살에 벌써 재단사 노릇을 했으면 아무리 짧아도 5년은 봉제공장 밥을 먹었을 것 아닌가. 그럼 아무리 많이 배웠어야 중학교밖에 더 나왔겠는가. 그렇다면 많이 배웠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스텐공장은 일하는 모든 조건이 봉제공장에 비해 나빴으면 나빴지 좋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은 막소주나 마시며 불평을 했을 뿐이지 그 사람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다른 공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어린 사람이 남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다니...... 그게 똑똑한 것인가...... 어리석은 것인가 ......이 야박하고 약아빠진 세상에서 그런 사람이 있다니...... 도저히 풀 수 없는 의문에 시달리며 나복남은 외출을 하지 않았다. 그 의문들은 새로운 생각에 부딪치게 했다. 그 사람의 행동과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보복이 비교되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죽었지만 죽은 게 아니야.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으니까."

여동생이 목이 메며 했던 말이 다시 들렸다. 여동생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하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그 사람은 확실히 죽은 것이 아니었다. 나복남은 또 밤늦도록 잠을 자지 못했다. 자신보다 나이 어린 사람이 목숨을 내던진 것과 손가락이 잘려 복수를 계획하고 있는 자신과....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여동생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 비교는 혼자 앓는 괴로움이 되고 있었다.

나복남은 다음날도 외출을 하지 않았다. 그 생각을 몰아내려고 애를 썼지만 끈끈한 고무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계획이 어딘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커져가고 있었다. 나복남은 사장집도 살피지 않고, 양성팔도 더 만나지 않고 다시 천두만 아저씨를 따라나섰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그 생각을 잊으려고 했었는데 날이 가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무슨 마술에 걸린 것처럼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전태일 그 사람은 여동생의 가슴에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도 점점 자리를 넓혀가고 있었다. 나복남은 열흘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근로기준법>이란 책부터 구해 읽어볼 작정이었다.

 

 

42. 열대에 뿌린 죄

폭염을 식히는 스콜이 거센 기세로 퍼붓고 있었다. 열대 나무들의 넓고 두꺼운 잎사귀에 부딪치는 빗방울들은 천지에 가득 차는 상쾌하고 장중한 자연교향곡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갑자기 쏟아지는 열대의 소나기인 스콜도 신비스러웠고, 세찬 빗줄기들이 이루어내는 풋풋한 자연의 조화도 월남의 신비였다. 문태복은 스콜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넓은 잎사귀들에 부딪치며 잘게 부서지는 빗방울들이 부옇게 떠돌고, 거기서 스며나오는 시원한 기운이 숙소 안의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그러나 스콜은 그의 가슴은 식혀주지 못했다.

손을 끊으려고 끊으려고 애를 썼지만 노름의 마력은 끈질기고도 독했다. 본전만 찾으면, 본전만 찾으면..... .그 미련이 헤어날 수 없는 늪이었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꼭 본전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그 유혹이 사람을 망치는 독이었다. 돈을 잃고 나서야 후회는 절실해졌고, 다시는 손을 대지 않겠다는 다짐 또한 절실했다. 그러나 월급을 받아 쥐고 보면 다시금 마음이 설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자발없이 바람 타는 마음을 다잡으려고 어금니를 앙 다물고 속 입술을 깨물어댔다. 그러나 화투짝을 착착 쳐대며 냄새를 피우기 시작하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게 되고는 했다. 그 증상은 아주 묘했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본전을 건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과 함께 전신 구석구석이 스멀스멀 하는가 하면, 머리에서 무슨 냄새가 나는 것 같으면서 정신이 아릿아릿해지고, 배고픔이나 목마름처럼 몸이 달아올라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그 증상은 베트콩들의 맹렬한 공격으로 한나절 이상 담배를 피우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것과 흡사했다. 그러나 그 증상은 그 상태로 가라앉는 것이 아니었다. 화투판이 벌어지는 것을 보면 더욱 심해져 전신이 비비꼬이고, 눈앞에 화투짝들이 쉴새없이 날아다니고, 밤새도록 돈을 따는 꿈을 꾸고, 밥맛도 싹 떨어지고, 순간순간 정신이 아뜩해지는가 하면 말까지 더듬거려지고, 짜증이 꾸역꾸역 괴어오르다 못해 아무에게나 화를 내게 되었다. 하루 종일 담배를 피우지 못해 안달이 나고 죽을 지경인데 남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할 때와 다름없는 증상이었다.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또 화투판에 끼여들고는 했다. 화투를 잡으면 꼭 거짓말처럼 그런 증상들은 말끔히 가셨다. 오랜 시간 담배를 입에 대지 못하다가 한 대를 피우고 나면 머리가 어질거리면서도 정신이 혼곤하고 아른한 속에서 마음이 착 가라앉고 기분이 가뿐해지는 것처럼.

문태복은 억세게 퍼부어대는 빗줄기를 멍하니 바라보며 어깨가 처져 내리도록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어쩌다 이 꼴이 되었는지 생각할수록 한심스러웠다. 어젯밤에 붙은 판에서는 6개월 월급을 고스란히 날리고 말았다. 자정을 넘기면서 판돈이 커지기 시작했고, 신바람 나게 패가 잘 붙어주었다. 화투판은 열기를 더해가면서 마침내 6개월 월급을 걸만큼 달떠올랐다. 이것이 마지막이다! 하고 눈을 부릅뜨고 덤볐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끗발이 안서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돈이 있어서 그 많은 액수를 건 것이 아니었다. 이자를 주기로 하고 서너 사람에게 빌렸으니 꼼짝없이 빚더미에 깔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자그마치 5부 이자였다. 엉뚱하게도 그런 돈놀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다. 문태복의 가슴에서도 스콜이 내리고 있었다 남들에게 보일 수 없는 후회의 눈물이 가슴 가득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돈을 잃고 나면 꼭 뒤 따르는 후회였다. 그때 기분으로는 앞으로는 절대로 화투를 만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도록 다시 도지는 그 이상야릇한 증상이 이제 두려웠다.

내가 왜 이러는가. 이 덥고 위험한 전쟁터에 와서 내가 왜 이 꼴을 하고 있는가, 근무기한을 연장하고서도 빈털터리로 돌아가면 말이 되는가. 정신차려라, 정신차려라, 이 멀대 쪼다 같은 새끼야 넌 이새끼야, 노름에 소질이 없어. 남들 밥만 되다가 거지꼴 되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 지금부터 마음잡아도 때는 안 늦어. 제발 정신차려.’

문태복은 자기 자신을 힐책하며 신음을 씹었다. 스콜은 차츰 약해지고 있었다.

"왜 이러고 앉았어. 스콜 첨 봐?"

황동일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문태복의 옆에 와 앉았다.

"으응...... 그저 ......"

문태복은 우물쭈물하며 담뱃값을 꺼냈다.

"아니, 왜 이렇게 맥 빠져 축 처져 있어? 안색도 안 좋고. 옳아, 또 그 놈에 그림공부 하다 털린 거지?"

다잡듯 말하는 황동일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아니 뭐 ......그게 원......"

문태복은 계면쩍은 얼굴로 쩝쩝 쓴 입맛을 다셨다.

"이거 참 예삿일이 아닐세 이번엔 또 얼마나 털렸어? 많아?"

황동일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풀죽고 근심 짙은 문태복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아니 ...... 그저 그래."

문태복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웃음을 피워냈다.

"이봐, 제발 거기서 손 떼라니까. 계속 그러다간 정말 도로아미타불로 생불알만 차고 귀국하게 된다니까. 그러는 넌 그 구멍 계속 파대면서 무슨 말이 많으냐 할지도 모르겠는데 말야 알아, 주색잡기 패가망신이라는 말 있는 거. 그치만 이 월남에서 노름하는 거하고 바람피우는 거하고는 영 달라. 여기서 바람피우는 거야 여자 값이 워낙 똥값이니까 우리나라의 반에 반값도 안 들잖아. 그치만 노름이야 그거 판돈 따라 큰돈이 왕창왕창 무너지잖아. 친구로서 아슬아슬해서 못 보겠어. 문 형, 혹시 완전히 중독된 거 아니야? 노름 중독도 마약에 중독된 것만큼이나 무섭다고 하던데. 마약 중독자는 논밭은 말할 것도 없고 솥까지 팔아먹고, 마지막에는 마누라고 딸까지 팔아먹고, 노름에 미친 사람은 하다하다 안 되니까 다시는 노름을 하지 않겠다고 도끼로 자기 손목을 잘라놓고는 얼마가 지나면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하나 남은 왼손으로 화투짝을 잡는다는 거야. 사람이 그 지경이 되면 어찌 되겠어. 제발 마음 독하게 먹고 거기서 손을 끊어."

"글쎄 말야, 나도 그러고 싶은데 참 미치겠어. 자꾸만 본전 생각은 나고......"

"본전 생각, 그게 사람 신세 조지게 하는 거라구. 그건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니까 애저녁에 싹 잊어버리고 손 깨끗이 씻어야 해. 안 그러고 본전에 미련 가지면 정말 여기 와서 한 고생 꽝 되고 말아."

"그걸 아는데 글쎄 ......"

"지금 너나 할 것 없이 다 정신 차려야 해. 미군들이 철수하네 어쩌네 이상한 소문들이 떠돌고 있잖아 방구 잦으면 똥 나오더라고 그런 소문 도는 게 심상치가 않아 그건 우리 호시절도 날 샐 때가 얼마 안 남았다는 뜻이잖아."

"글세, 그 소문이 정말일까? 물자 들어오는 걸 보면 달라지는 게 없는데."

문태복은 긴장해서 황동일을 쳐다보았다.

"이런, 대충 건성으로 보는 우리 눈으로 그걸 어떻게 알아. 미군들 물자 들어오는 항구가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어쨌거나 그런 소문이 돌고 있는 건 월남 경기가 한물가고 있다는 말하고 맞아 떨어지잖아. 그러니까 문 형도 끝물이라 생각하고 정신 바짝 차리라 그거야."

"이거 참 사람 미치고 환장하겠네."

문태복은 또 쓴 입맛을 다셔대며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어젯밤에는 얼마나 털렸는데?"

"아이구, 말 말어. 하여튼 내 옛날 오야지가 웬수야."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내가 운전 배우면서 조수로 따라다닐 때 글쎄, 우리 오야지가 화투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었거든. 그 시절에 어깨너머로 화투 배운 게 이렇게 드럽게 됐다니까."

문태복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야지 한번 드럽게 만났네. 나 같은 사람을 만났어야지."

"얼씨구. 그럼 바람피우는 것밖에 더 배웠겠어?"

"어허, 이렇게 모르는 게 많으니 원. 가운뎃다리 기운 센 거야 타고나는 거지 배워서 되는 게 아니잖아. 문 형이야 바람피우기 와따인 이 별천지에 와서도 1주일에 한 번이면 족하잖아. 나같이 멋진 친구한테 배우지도 못하고. 그러니 나 같은 오야지 만났으면 운전만 착실히 배웠을 것 아니냐 그거야."

", 그거 말 되네."

문태복이 허한 웃음을 흘리며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언제 그리 억센 비가 쏟아졌느냐 싶게 숙소 뜰에는 강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스콜은 길어야 30분 남짓이었다. 파리나 모기까지 생명 있는 동물은 모두 그늘을 찾아들지 않을 수 없게 더위가 극심해지는 우기에 스콜은 하루에 한 차례씩 꼭 내렸다. 폭염에 시달리는 목숨들을 보호해 주는 하늘의 은총처럼 . 한바탕 비에 목욕을 한 수목들의 초록색은 강렬한 햇볕 속에서 눈부시도록 싱싱하고 풍요로웠다. 흡족하게 쏟아지는 비와 넘치게 내리쬐는 햇볕, 모든 식물들은 흐드러지고 치렁치렁하게 무성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먼 산골일수록 나무들의 천국인 밀림이 겹겹이 이루어지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밥 때 다 됐어."

황동일이 일어났다.

"혼자 가. 나 밥 생각 없어."

문태복이 담배를 빼들며 고개를 저었다.

"이거 왜 이래 밥 안 먹고 어떻게 밤샘 운전을 해. 돈 털려 기분 잡치는 거하고 일하는 것하고는 별개잖아. 일할 준비 철저히 하지 않으면 엉뚱한 일 생기게 되니까 빨리 일어나."

황동일이 문태복의 팔을 잡아끌었다. 문태복은 억지로 밥을 먹으려고 했지만 반도 먹지 못했다. 큰돈을 잃은 분함이 꼬약꼬약 괴어올라 가슴이 뜨겁기도 하고 갑갑하기도 해서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자 많은 그 돈을 언제 다 같을까 하는 걱정으로 앞이 캄캄하기도 했다.

"아이구, 이 빌어먹을 것 좀 안 입을 수 없을까. 그렇잖아도 더운데 이것까지 입으니 사람이 미칠 지경이잖아."

"그러게 말야. 좀 얇기나 하면 또 몰라. 어떤 미련한 새끼가 두껍게는 만들어가지고. 이놈의 것 때문에 가슴이고 등이고 온통 땀띠투성이잖아."

저녁을 먹은 운전수들은 교대시간에 맞추어 방탄조끼를 입으며 투덜거렸다.

"거 배부른 소리들 말어. 그것 입고 완전무장까지 하고 정글에서 싸우고 있는 군인들을 생각해 봐, 단돈 40딸라에 목숨 내걸고 있는 군인들에 비하면 우리 이건 아주 신선놀음이라구."

"공자님 아들 말씀이로다. 거럼, 군소리 말고 착실히 착용해야지. 총알이 뭐 인정사정 있나."

그들은 방탄조끼에 철모를 신고 주차장으로 나갔다. 학교 운동장보다 서너 배는 넓은 터에 짐을 가득가득 실은 트럭들이 정연하게 줄 서 있었다. 그들은 헌병이 지키고 있는 무기고 앞에서 M16을 지급받아 자기네 차에 오르기 시작했다. 운전수들이 방탄조끼 입는 것보다 더 귀찮아하는 것이 총이었다. 총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일일이 지급받고 일을 끝내면서 반납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이었다.

이가 놈 그걸 팡 쏴 죽여 버렸으면 좋겠어.’

문태복은 총을 운전석 옆에 놓으며 불현듯 이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섬? 놀랐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아무도 모르게 죽일 수만 있다면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자에게 돈을 잃은 것이 어젯밤만이 아니었다. 그가 오고 대여섯 달 동안에 줄곧 잃어왔다. 초장에는 더러 따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빈손을 털어야 했다. 그자에게 돈을 잃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의 솜씨를 신기해하는 한편으로 속임수를 쓰지 않나 싶어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속임수를 잡아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또 이상한 것이 있었다. 그도 어느 때는 엄청나게 큰돈을 잃기도 했다. 그것이 그에게 돈을 잃은 사람들을 더 몸 달아 오르게 만들었다. 그의 솜씨라는 게 별거 아니고 재수만 좋으면 한 판으로 그동안 잃은 것을 복구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가슴을 설레게 했다. 어젯밤에 당한 것도 그런 마음으로 덤빈 탓이었다.

150대가 넘는 수송 트럭들이 스무 대, 서른 대씩 분리되어 여러 방향의 미군 보급창을 향해 출발하기 시작했다. 문태복은 차를 출발시키며 정신을 한곳으로 집중시키려고 했다. 다음 교대시간까지 24시간 동안의 전쟁터로 들어가는 참이었다. 월남전이란 전방도 후방도 없는 괴상망측한 전쟁이었지만 특히 수송차량들은 언제 어디서 기습을 당할지 몰라 잠시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베트콩들이 줄기차게 수송차량을 노리는 것은 두 가지 목적 때문이었다. 미군의 보급을 차단시키는 동시에 군수품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문태복은 앞차를 따라 점점 속력을 내면서 미군이 철수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철수를 한다는 것은 미군이 전쟁에서 진다는 것인데, 미국이 진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상대가 소련도 아니고 고작 월맹일 뿐인데. 베트콩이란 무기라고 해봤자 겨우 소총에 박격포뿐이었다. 철모도 없이 초록색 헝겊 모자를 썼고, 군화도 없이 맨발에 타이어를 잘라 만든 슬리퍼를 신고 싸우는 그들을 이기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거기다가 베트콩의 비행기라고는 아예 하늘을 날지 않았다. 미군의 온갖 비행기들이 활개치고 날아다니며 폭탄을 퍼부어대고, 얼마 전부터는 정글의 무성한 나무들을 순식간에 말라죽게 하는 고엽제를 뿌리고 있다는 소문인데 어째서 미군이 철수한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그 소문을 믿을 수 없는 건 군수품들이 줄어드는 기미가 없이 줄기차게 밀려들고 있었다. 그동안 몇 년에 걸쳐서 밤낮없이 실어 나른 물자들이 얼마가 될 것인지 어림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그건 상상할 수도 없는 어머어마한 양일 텐데, 그 많은 군수품을 쏟아 붓고도 전쟁을 깨끗하게 이기지 못하는 건 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끝도 한도 없이 펼쳐진 밀림 때문이라고도 했고, 베트콩들이 수많은 땅굴을 파고 신출귀몰하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어쨌거나 물자가 계속 풍성하게 들어오고 있는데 미군 철수란 괜한 뜬소문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미군들의 기세를 꺾기 위해서 베트콩 쪽에서 일삼아 퍼뜨리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만약에 미군 철수가 사실이라면 그거야말로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밑천 톡톡히 잡으려고 왔다가 돈을 벌기는커녕 노름빚을 안고 귀국했다가는 그런 망조가 없었다. 문태복은 정신이 바짝 들어 엉덩이를 들었다가놓았다 다시는 그놈의 화투짝에 손대지 말고 철군하기 전에 빛부터 꺼나가야지, 그는 마음이 다급해져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데 마음 한편에서는 억울한 생각이 다시 일며 이가 그놈을 죽이고 싶은 충동이 또 솟구쳤다.

다다다다 ......

갑자기 기관총 난사음이 앞에서 들려왔다. 아직 어두워지지도 않았는데 이상하다 생각하며 문태복은 시선을 앞쪽으로 멀리 보냈다.

다다다다......

총소리는 계속 울려대는데 앞차가 속도를 줄이는 느낌은 없었다. 그렇다고 위협사격을 가할 만한 숲이 가까운 것도 아니었다. 문태복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앞쪽 좌우를 빠르게 살폈다. 왼쪽 먼 논둑길에서 소 한 마리가 하늘을 향해 치솟기는 것처럼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다다다다......

기관총은 그 소를 향해 난사되고 있었다. 소는 몇 번을 더 들뛰더니 그 큰 몸이 땅에 내던져지듯 푹 나가 넘어졌다. 기관총 소리가 멎고, 트럭들은 거침없이 질주해 대고 있었다.

"씨팔, 월남에선 소들도 전쟁을 치른다니까."

문태복은 손등으로 턱 밑의 땀을 훔치며 내뱉었다. 농사짓는 주인 없이 혼자 어슬렁거리는 소들은 어디서나 여지없이 표적이 되었다. 이쪽의 반대편인 소의 배에 베트콩이 찰싹 달라붙어 이동하고 있다고 간주하기 때문이었다. 소를 향한 기총소사는 헬리콥터에서도 예사로 하고 있었다.

문태복은 껌을 까서 입에 넣었다. 어젯밤에 잠을 못 자 졸음이 오려고 했다. 딴 날과 다른 피곤에 시달리며 겨우겨우 일을 마친 문태복은 교대를 하자마다 침대에 쓰러졌다. 저녁밥을 먹으라고 황동일이 깨웠지만 그는 앓는 소리를 하며 손을 내저었다. 다음날 왁자지껄 밖이 소란한 바람에 문태복은 긴 잠에서 깨어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 숙소를 나선 문태복은 깜짝 놀랐다. 두 남자가 소리소리 질러대며 사무실을 항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던지고 있었다. 임시 계약직일 뿐인 운전수들에게 회사의 사무실은 언제나 범접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다른 운전수들은 멀찍이 떨어져 구경만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날뛰는 기세로 보아 누가 나서서 말리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문태복은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황동일을 찾았다. 랑한테 나갔는지 그는 보이지 않았다.

"저 사람들 왜 저래요?"

문태복은 옆에 있는 아무에게나 물었다.

"참 웃기는 사람들이오. 숙소에서 술을 퍼마시고 취해 술주정을 해대는 것도 뭐한데, 직원이 간섭한다고 멱살잡이를 하더니 직원이 피하자 저 난리까지 치는구랴. 하루살이 목숨인 주제에 술 기분 한번 기차게 뽑고 있는 거요. 내일 당할 깝세 그 배짱 한번 기똥차요."

한 사람이 비아냥거렸다.

그때 헌병 지프가 들이닥쳤다. 술 취한 눈에도 헌병들이 들이대는 총은 보이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꼼짝 못하고 붙들려갔다. 더 볼 것 없다는 듯 사무실에서는 다음날로 귀국 조처를 취했다. 두 사람은 차에 실려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이가 그놈인 것을 알고 문태복은 뒤늦게 놀랐다. 본전을 찾을 길은 영영 없어지고 만 거였다. 그런데 그들이 떠나고 나서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들은 날고 기는 노름꾼들로 한패라는 것이었다. 노름판에서 하나가 판에 끼어들면 다른 하나는 맞은편에서 구경하는 척하며 상대방들의 패를 신호로 다 알려준다고 했다. 그들은 여기서 털어먹을 만큼 다 털어먹고 일부러 사고를 저질러 빠져나간 것이라 했다. 귀국한 그들은 뒷돈을 써 다시 어느 회사의 현장으로 파고들지 모른다는 거였다. 문태복은 남모르게 가슴을 치고 또 쳤다. 그런 자들을 상대로 돈을 따겠다고 버둥거린 자신의 어리석음에 그만 죽고 싶었다.

"거 봐, 내가 뭐랬어. 문 형도 그놈들처럼 그렇게 본격적으로 나서지 않으려면 다시는 노름에 손대지 말어. 이 험한 세상 요령껏 눈치껏 살아야지 사람이 그리 순진해서야 원."

황동일이 비웃는 듯 딱해 하는 듯 끌끌끌 혀를 찼다. 문태복은 하루하루가 지겹기만 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가며 폭염 속에서 운전대를 돌려대는 것도 죽을 지경인데 또 다른 고통이 잇따르고 있었다.

"문 씨, 내 돈 빨리 갚아줘야 되겠는데. 집에서 돈이 급하다고 연락이 왔소."

"아 예, 이번 월급을 타면......"

"아니, 급하단 말 안 들려요? 월급날까지 기다릴 수 없으니까 딴사람한테 좀 빌려 봐요."

"그게 글쎄 어디 쉬워야 말이지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문태복은 그저 굽실거릴 수밖에 없었다.

"문 씨, 내 돈 언제 갚을 거요? 나 급히 쓸 데가 있는데."

", 이번 월급을 타서......"

"월급? 그거 틀림없소?"

"그럼요, 그날 바로 드릴게요."

"문 씨가 빛이 많다는 소문인데 틀림없이 내 것부터 갚을 수 있다 그거요?"

", 그러지요."

문태복은 다른 빚쟁이에게 또 시달려야 했다. 이렇게 서너 명에게 번 갈아가며 빛 독촉을 당하다 보니 그는 나날이 사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실의에 빠져 밤이면 유난히 반짝이는 남십자성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는 했다. 월급날 문태복은 꼼짝못하고 빚쟁이들에게 에워싸였다.

"이봐 문 씨, 나하고 약속했잖아."

"틀림없이 내 것부터 갚겠다고 했으니까 빨리 내놔."

"문 씨, 나한테 한 말 어찌 됐어?"

빚쟁이들은 문태복을 찢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서로 다투었다.

"왜들 이래요, 내가 당장 죽는 것도 아닌데. 나도 억울하고 분하게 사기당한 사람이니까 이러지들 말아요. 자아, 이거 다 내놓을 테니까 당신들이 알아서 갈라요."

문태복은 그들에게 월급봉투를 그대로 내줄 수밖에 없었다.

"이거 참 사람 환장하겠네. 월급봉투를 줘버렸으니 당장 담배 살 돈도 없고 어떻게 살지. 나 담배 한 대 줘."

문태복은 황동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빚쟁이들한테 가서 담배 사내라고 해야지."

황동일이 담배 한 개비를 건네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빚쟁이들한테......?"

"당연하지. 돼지도 키워서 잡아먹는다고 나한테 돈 받으려면 돌아가면서 담배를 사내라 그렇지 않으면 나 일 못한다 하고 공갈치라구. 그럼 자기들이 어쩔 거야. 그런 배짱도 없이 남의 돈 쓰고, 월급봉투 내줬어? 즈네들이 담배 사주기 싫으면 담뱃값은 돌려줄 거라구."

문태복은 담배를 빨며 황동일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황동일은 자기보다 한 수 위인 것만 같았다. 문태복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황동일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언제까지 황동일에게 담배를 얻어 피울 수 없는 일이었고, 더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며 웃음거리가 될 수는 없었다.

"뭐 길게 말할 것 없이 아까 나눠 가진 돈에서 담배 한 보루 값만 내놓으쇼. 나 담배 못 피우면 일 못하니까."

문태복은 첫 번째 빚쟁이한테 찾아가 다짜고짜 말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빚쟁이가 눈을 치떴다.

"그게 뭐 모를 소리요? 돼지도 키워서 잡아먹더라고 내가 일해서 돈 갚게 하려면 담배는 사 피울 수 있게 해달라 그거요. 정씨도 담배 피우니까 알겠지만, 담배 굶고 살 수 있소? 난 하루에 한 갑 피우니까 돈 빌려준 사람들이 한 보루 값씩만 내놓으면 다음 월급날까지 해결돼요. 그 날 달라는 거 아니니까 갚은 돈에서 까라구요."

"이거야 원, 똥싼 놈이 큰체하더라고 완전히 똥배짱일세."

그러나 빚쟁이는 담배 한 보루 값을 내놓았다 그 돈을 내보이자 다른 사람들도 마땅찮아 하면서도 돈을 내놓았다. 문태복은 그 돈을 챙겨 넣고, 세상 참 별나게 사는 방법도 다 있다. 생각하며 어이없게 웃었다 택시 한 대 장만할 꿈은 깨끗하게 날아가 버리고 거지꼴이 된 자신의 모습에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세 끼 밥은 회사에서 먹여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문태복은 운전대를 잡고 있을 때보다 될 때가 더 괴로웠다. 돈이 없으니 외출은 꿈도 꾸지 못하고 꼼짝없이 숙소에 갇혀 있어야 했다. 남들은 외출해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데 혼자 숙소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것처럼 큰 고역이 없었다. 시간은 지루하게 가지 않았고, 짜증이 날수록 더위는 더 심해졌다. 창살 없는 감옥이란 바로 그것이었다. 돈이 없으니까 쌀국수는 더 먹고 싶어지고, 여자도 더 품고 싶어졌다. 아니, 돈이 없으니까 더 그런 마음이 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1주일에 한 번씩은 몸을 풀어왔었는데 벌써 3주를 그냥 넘기고 있었다. 몸매 날씬한 꽁까이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목마름을 풀 길이 없었다. 자신은 이미 빚투성이로 알려져 있어서 그 누구에게도 돈을 빌릴 수가 없었다.

그는 더 견딜 수가 없어서 변소로 가서 수음을 했다. 돈 몇 달러가 없어서 수음을 해야 하는 자신의 꼴이 너무나 비참하고 한심스러웠다. 내가 또다시 노름을 하면 개새끼다! 내가 또다시 화투짝을 만지면 정말 개새끼다! 정말로, 정말로 개새끼다! 그는 바지를 끌어올리며 부르짖었다. 정말 다시는 노름을 하지 않을 결심이었다. 그는 고개를 젖혀 숨을 토해내다가 멈칫했다. 천장에 손바닥보다 큰 도마뱀이 달라붙어 큰 눈을 껌벅거리고 있었다. 그놈이 수음하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혀 그는 픽 웃음을 흘렸다. 도마뱀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긴 혀를 쑥 내밀었다. 순간적으로 빠져나온 두 가닥의 긴 혀는 무엇인가를 채가지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파리나 무슨 벌레를 낚아챈 것이다. 도마뱀은 파리나 모기만큼 월남에 흔했다. 험상궂고 징글맞게 생긴 것과는 달리 순하면서 아무 피해도 주지 않는 도마뱀들은 벽이고 천장이고 다니지 못하는 곳이 없었다. 펑퍼짐하고 두꺼운 몸집에 비해 턱없이 가늘고 연약해 보이는 발가락으로 천장이나 벽을 꽉 움켜쥐고 찰싹 달라붙어 있는 기술은 신기하기만 했다.

새끼, 건방지게 허가도 안 받고 남 물건 구경하고 그래.’

문태복은 도마뱀에게 눈을 흘기고 변소를 나왔다. 돈의 힘을 다시금 뼈저리게 느끼며, 앞으로 절대로 화투에 손대지 않을 것을 다시 결심했다. 다른 때와 달리 그 결심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절실함이 마음에 서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2-3일 내로 귀국할 거야."

어느 날 황동일이 불쑥 한 말이었다.

"뭐라구? 그게 무슨 소리야?"

문태복은 어리둥절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편지가 왔어 돈벌이가 아깝지만 어쩔 수 없잖아."

황동일이 시무룩하게 대꾸했다.

"어디가 편찮으신데?"

"암인지 뭔지 확실하지가 않은 모양이야. 입원하셨다니까 빨리 가보는 수밖에 없지."

"그래야겠지......"

문태복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갑자기 의지할 데가 없어지는 것 같아 그는 더 마음이 침울해지고 있었다. 자신도 황동일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순간적인 마음일 뿐이었다. 돈도 한 푼 없고, 빚쟁이들이 놓아줄 리도 없었다.

"자아, 이거 내 주소니까 문 형 주소도 적어줘. 문 형 귀국하면 만나자고."

황동일이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이틀 뒤에 황동일이 떠나자 문태복은 월남생활이 더욱 지겨워지기만 했다. 말상대가 없어지고 빚쟁이들만 대하게 되니 하루하루는 더 지루해지고, 풀 길 없는 울화만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놈들이 그런 속임수를 쓰는 한패라는 게 왜 그놈들이 내뺀 다음에 알려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밤마다 그놈들을 죽이고 돈을 되찾는 꿈을 꾸는가 하면, 어느 때는 자신이 그놈들에게 죽기도 했다. 300여 명 중에서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그놈들이 쓸어간 돈은 엄청날 거였다. 귀국해서 언제라도 그놈들을 만나면 꼭 죽이고 말겠다는 증오가 월남 하늘에서 이글거리는 백광처럼 가슴에서 뜨겁게 끓고 있었다.

황동일이 떠나고 열흘쯤 지나 문태복은 사무실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가슴이 철렁했다. 사무실의 호출을 당하면 열에 아홉은 나쁜 일 때문이라 근로자들은 누구나 겁부터 먹었다.

"문 씨, 뭐 잘못한 것 있소?"

"혹시 그 일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닌가?"

"설마, 그건 지난 지가 언젠데."

"누가 알아? 늦게라도 찍으면 찍히는 거지. 돈 받아먹고 사람 바꿔치기 하려면 무슨 짓을 못해. 뒷돈 쓰고 덤비는 놈들 쌔고 쌘 판에."

"그야 그럴 수도 있지."

운전수들은 문태복의 불안한 가슴에 부채질을 해대듯 입들을 모았다. 문태복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숙소를 나섰다. 그러나 그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마구 부풀고 있었다. 사무실로 들어선 문태복은 멈칫 놀랐다. 저쪽에서 먼저 자신을 알아보고 의자에서 일어난 여자는 랑이었다. 그 여자를 보는 순간 황동일의 얼굴이 떠오름과 동시에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느낌이 스쳤다.

"저 사람 맞아요?"

총무과장이 영어로 랑에게 물었다. 그 말을 어깨 좁고 마른 월남 남자가 랑에겐 통역했다. 그 남자는 회사의 현지 고용인이었다. 랑이 울먹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황동일이하고 친구지?"

총무과장이 화난 얼굴로 문태복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친구는 아니고 여기 와서 친하게 지낸 편이지요."

문태복은 랑이 울먹이는 것을 보고 자신의 첫 느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황동일 연락처 알아?"

"아뇨."

문태복은 고개를 저었다. 랑이 딱하기는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총무과장이 다시 영어로 몇 마디 했고, 통역은 그 말을 랑에게 해주었다. 랑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의자에 털퍽 주저앉았다.

"됐어, 돌아가."

총무과장이 문태복에게 턱짓했다.

"저어 ...... 무슨 일인가요?"

문태복은 짐작으로만 만족할 수가 없어서 몸을 사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끔 생기는 일인데, 보면 몰라? 황동일 그놈이 임신시켜 놓고 줄행랑을 친 거야. 결혼하자고 사기 친 놈이나, 그 말 믿고 임신한 여자나 다 똑같은 것들이야. 아유, 골치 아파."

총무과장이 화내는 것이 두려워 문태복은 얼른 돌아섰다.

"이 험한 세상 요령껏 눈치껏 살아야지. 사람이 그리 순진해서야 원."

문태복은 숙소로 돌아오며 황동일이 했던 이 말을 다시 듣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결혼하자고 꼬신 다음부터는 돈도 안 주고 공짜로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나저나 랑은 어떻게 할 것인가? 임신이 몇 개월인지 알고 싶었지만 총무과장의 서슬에 더 물을 수가 없었다. 얼핏 들은 바로는 3개월이 넘으면 수술도 어렵다고 했다. 문태복은 3개월이 넘지 않았기를 바라며 담배를 빼 물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그는 변소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지금 숙소로 가게 되면 심심한 입들이 이때다 하고 떠들어댈 것이 뻔했던 것이다. 연락처를 모른다고 해버린 것이 다시금 랑에게 미안했다. 문태복은 소변을 보면서 역시 황동일은 자신보다 한수 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쯤 서울에서 랑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어떤 여자를 꼬드기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햇살이 가려지는가 싶더니 이내 스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문태복은 담배를 입에 문 채 두 팔을 확 벌리고 빗줄기 속으로 나섰다. 삭일 수 없는 분함으로 가슴이 너무 뜨거웠다.

 

 

43. 10년 세월

"하룻밤 팁만 글쎄 5천 원이래잖니, 5천 원!"

"그럼 그게 한 달이면 얼마라는 거니? 오 삼에 십오면 ......"

"삼 오 십에 오, 15만 원이지 뭐야."

"15만 원! 그게 정말일까? 우리들 1년치 월급보다 더 많은데."

"글쎄, 나도 계산을 해봤는데 너무 겁나서 믿어지지가 않아."

"기집애들, 못나기는. 그게 가난뱅이 우리한테나 큰돈이지 돈 많은 쪽발이들한테는 푼돈이래잖야. 일본 돈이 우리나라 돈보다 더 가치가 있기도 하고 말야."

"세상에 ...... 그럼 1년을 열 달만 잡고 그 돈이 얼마니?"

"물어 뭐 해? 150만 원이지. 어지간한 집 한 채 값, 150만 원."

"아이구 어지러워 . 몸치장에 뭐에 50만 원을 쓴대도 100만 원이면 팔자 고칠 돈이잖아. 미장원도 차릴 수 있고 양품점도 차릴 수 있고."

"말해 뭘 해. 통닭집, 식품점, 하고 싶은 것 뭐든지 차려서 떼돈을 벌 수가 있지. , 자꾸 말만 하지 말고 빨리 마음들 정하자."

어둠 속에서 김명숙은 친구 임귀례에게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 불빛 흐린 방에서 들려오는 말에 김명숙은 현기증 일어나는 충격을 받고 있었다.

"너 미쳤니? 언니들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무슨 마음을 정해?"

"아이구, 미친 건 바로 너구나? 언니들이 그런 데로 옮기기라도 할 것 같애? 보나마나 반대하고 나설 건데."

"반대하긴. 언니들도 함께 가서 눈 딱 감고 1년만 벌면 얼마나 좋겠니. 다같이 팔자가 피는 건데."

", 또 얼띠게 말하는 것 좀 보게. 기집애야. 스물네 살까지가 땡이랬잖아. 근데 언니들은 벌써 스물다섯도 넘어 스물여섯이 됐잖아. 자격상실 벌써 늙었다 그런 말씀이야."

"어머머머, 언니들이 늙다니 언니들이 들으면 너무 서운해 하겠다.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들인데."

"서운해도 어쩔 수 없지 뭐. 여자 나이 스물다섯 넘으면 꽃띠로 안 치는 거야 세상이 정한 거니까."

"맞어, 그러니깐 우리도 정신 차려야 한다구. 퇴물 취급당할 날이 2-3년밖에 안 남았잖아. 어물어물 날만 보내지 말고 빨랑 결정해야 해."

"그래, 이러고 있어선 안돼. 그쪽으로 옮기고 싶어 하는 애들이 많대잖아. 오늘 밤에라도 언니들한테 의논해 보자."

"난 그건 반대야. 언니들이 그쪽으로 가라고 할 것 같지도 않고, 언니들이 가지 말랜다고 너희들은 갈 맘이 있는데도 안 갈거니? 그게 아니잖아. 우리 친언니들도 아니고, 같은 직장에서 일하다 보니 자취생활 좀 싸고 편하게 해보자고 언니 동생 하며 지내게 된 건데, 다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해서 하는 게 젤 좋은 거라구. 자기 인생 자기가 알아서 해야 되는 것 아니겠어?"

"하긴 그래. 서로가 다 남남이고, 자기 일은 결국 자기가 알아서 해야 되겠지 뭐. 그래서 인생은 고독한 거라고 한 것 아니겠어?"

"얼씨구, 아주 고상하게 나오네."

김명숙은 발끝걸음으로 물러서며 임귀례에게 손짓했다. 임귀례도 살금살긍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둘이는 좁고 지저분한 마당을 가로질러 언제나 반쯤 열려 있는 판자대문을 빠져 나갔다. 드나드는 여공들이 너무 많아 주인집에서는 문단속을 아예 포기해 버렸다. 그런데도 도둑 맞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도둑들도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여공들의 자취집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딜 가는 거야?"

눈이 녹아 질척거리는 골목을 걸으며 임귀례가 물었다.

"아무데나 가서 시간을 좀 보내야지. 바로 들어갈 수가 없잖아."

김명숙이 말끝에 한숨을 달았다.

"그래 괜히 엿들은 것같이 입장이 난처하지. 근데, 술집에서 나이 어린 것들을 꼬셔낸다는 게 헛소문이 아니었어, . 그것도 그렇구 어린 기집애들 말하는 것도 그렇구, 난 겁나 죽겠어."

임귀례가 어깨를 추스르며 떨었다.

"그것도 저것도 다 겁낼 것 없어. 그냥 모르는 척하고 있으면 끝날 일들이니까."

"넌 하나도 놀라지도 않고, 그건 또 무슨 소리니?"

"우선 저 호떡집으로 들어가자."

"밥상 차려왔을 텐데. 괜히 ......"

"괜찮아, 너무 돈 아까워하지 말어. 걔네들한테 의논할 시간을 좀 줘야지."

김명숙은 친구의 팔을 끌었다. 바깥 날씨가 추운 만큼 호떡집 유리창 문에는 김이 가득 서려 있었다. 여러 가지 중국 빵들이 싸고 따끈해서 겨울철 서민들의 휴식처답게 호떡집에는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그들은 호떡을 시키고 뜨거운 물부터 마셨다.

"아까 그거 무슨 소리야?"

임귀례가 김명숙을 쳐다보았다.

"으응.....저런일 넌 첨 당하는가 본데 난 몇 년 전에 당해봤거든. 내가 왜 차장했었다고 했잖아? 그때 당한 일인데......그때도 지금하고 똑같이 술집에서 우릴 꼬실려고 들었어. 나랑 친구 셋이서 소개아줌마를 만나보고, 안 좋을 것 같아서 난 친구들을 말렸어. 근데 두 친구는 편한 돈벌이를 찾아서 결국 떠났어. 차장 일은 정말 아더메치고 힘들었걸랑. 근데 말야.....폐병을 앓았던 내 고향 친구 복녀는 피를 토해 폐병쟁이인 것이 들통 나 어디론가 팔려가 버리고, 경상도가 고향이었던 보금이라는 친구는 그 뒤로 안 만나서 어찌 됐는지 몰라. 내 말은, 젊은 애들 그렇게 꼬셔내는 일이야 그전부터 있었던 일이고, 애들이 돈 편하게 벌고 싶어서 바람 잡고 나서는 것도 못 말리는 거니까 모르는 척 내버려두라는 거야."

김명숙이 마침 나온 호떡을 집어 들며 임귀례에게도 어서 먹으라고 눈짓했다.

"얘 그래도 그렇지 술집에 나가면 신세 망치는 거잖아."

임귀례가 호떡을 집으며 울상을 지었다.

"충청도 양반께서 모르시는 것이 없네. 왜 그게 무서워?"

김명숙이 손가락에 묻은 설탕물을 핥으며 피식 웃었다.

"그야 서울물 먹고 살면 누구든 다 아는 일이잖아. 처녀가 몸 버리면 평생 신세 망치는 건데, 애들이 그렇게 못하게 막아야지 어떻게 내버려둬?"

"괜히 충청도식으로 순진한 소리 하지 말어. 아까 말한 대로 내가 그 일 해봐서 아는데, 아무리 입 아프게 말해봤자 소용이 없어. 돈에 미치면 정신을 못 차리더라구."

"그래, 우리 사장 돈에 미쳐서 하는 꼴 좀 봐. 그래도 얘, 한솥밥 먹은 정이 있는데 애들을 말려야 되지 않겠니? 잘못될 것을 뻔히 알면서......"

"차암, 넌 순진한 거냐 답답한 거냐? 내 말은 그만두더라도 아까 걔네들이 하던 말 생각해 봐. 우리한테 의논할 필요도 없다고 하잖아. 그렇게 작정하고 나서는 애들한테 우리 말이 통하겠니?"

"그래, 그것도 그렇긴 하네. 근데 말야, 난 개네들한테 참 섭섭하고 서운하다. 우리 보고 늙었다느니 퇴물이라느니, 말들 하는 게 싸가지가 없어."

"글쎄, 기분 좋을 건 없지만 영 틀린 말도 아니잖니? 나이 스물 세넷이면 다 시집가고, 스물다섯이면 노처녀로 헌신짝 취급해 버리는 게 세상인심이잖아. 난 그따위 소리에 신경 안 써."

김명숙은 물컵을 들더니 후루룩거리며 마셔댔다. 그 소리에 그녀의 상한 기분이 묻어나고 있었다.

"근데 있잖니, 나라에서는 왜 그리 쪽발이들을 무작정 받아들이는 거니? 속도 없이."

"너 무슨 소리야, 지금?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돈에 환장 들렸고, 나라에서도 딸라 벌어들이느라고 정신이 하나도 없잖아. 쪽발이들이 와서 그 귀한 딸라를 푹푹 쓰고 가는데 왜 막아? 많이 올수록 대환영이지."

"아무리 딸라가 좋지만 그래도 우리 체면이란 게 있잖아. 술집에서 그 짓들 하는 그 기생관광인지 뭔지로 세상이 시끌시끌하잖아."

"참 웃기고 앉았어. 피 흘리고 죽어가면서 월남에서 딸라 벌어오는 건 괜찮고 여자들 기생관광으로 딸라 버는 건 왜 말썽이니? 알다가도 모르겠어 ."

"그야 일본 놈들이니까 그렇잖아."

"얘 웃기는 소리 하지 말어. 딸라면 다 똑같은 딸라지 왜놈 딸라, 월남 딸라 표시가 있니? 그리 자존심 상하면 나라를 뺏기지 말았어얄 것 아냐. 그러고, 월남에서 죽고 병신 되는 것에 비하면 술집에서 돈 버는 건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만 가자."

김명숙이 발딱 몸을 일으켰다.

"넌 어찌 그리 맨날 유식한 사람처럼 말을 잘하니, 사람 기죽게."

임귀례가 충청도 어조로 느릿하게 말하며 따라 일어났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미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

가로등 불빛이 침침하게 흐린 골목으로 접어들며 김명숙이 흥얼거리기 시작하자 임귀례도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맞추었다. 그들이 그렇게 스스럼없이 노래를 맞춰 부를 수 있는 건 평소에 하도 많이 부른 탓이었다. 그렇다고 늘 노래를 부르며 살 만큼 나날의 생활이 즐겁거나 신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가발공장에서도 작업능률을 올리려고 작업장마다 노래를 틀어놓고 있었다. 날마다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고 하다 보니 노래라는 노래는 모르는 게 없게 되었다.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구를 찾아 이쁜이도 금순이도 단봇짐을 싸았다네."

판자대문을 들어서고, 마당을 가로지르면서 그들의 노랫소리는 좀 더 커지고 있었다. 그 노래는'공순이 주제가'라고 해서 여공들은 누구나 다 좋아했다. 김명숙을 노래 속의 이쁜이와 금순이가 자신과 나복녀인 것만 같아 그 대목에서는 꼭 목이 메고 슬픔이 사무쳤다.

"어머, 언니들이다."

"어서 오세요. 배고프시지요?"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집에서 노래를 다 부르시구."

그들은 방에서 몰려나오며 인사치레하기에 바빴다.

저 맹랑한 것들 좀 봐. 그런 눈치를 어디 챌 수가 있어 사람이란 너무 무서워. 속이려고 들면 그 속을 전혀 알 도리가 없는 거야. 정신차려야해!’

김명숙은 이 사실을 다시 확인하며 마음의 치부책에다가 써넣었다.

"어서 드세요. 생각보다 야근이 빨리 끝나셨네요?"

한 아가씨가 밥상을 김명숙 앞에 놓으며 물었다. 유치한 색감의 꽃이 찍혀 있는 둥근 양은밥상에는 보리 섞인 밥 두 그릇, 콩나물국 두 그릇 총각김치, 두부조림 한 접시가 놓여 있었다.

"시야게할 게 그리 많지 않았어. 야근이 짧아져도 걱정이다."

숟가락을 집어 들며 김명숙은 한숨을 쉬는 기색으로 대꾸했다.

"그럼 미국에서 가발이 한물가고 있다는 게 정말인 모양이죠?"

다른 세 아가씨 중의 하나가 냉큼 물었다.

"몇 년 동안 없어서 못 팔아먹을 정도로 잘 팔아먹었으니까 한물가는 거야 당연하지 않니? 가발이 닳아지는 것도 아닌데."

김명숙의 심드렁한 대꾸였다.

"어머, 그럼 우리들은 어떡하죠?"

"어떡하긴 뭘 어떡해. 가발공장이 당장 문 닫는 것도 아니고, 지금 다른 공장들이 많이 생기고 있으니까 업종 봐가면서 슬슬 옮겨가면 되는 거지."

"그치만 기술이 달라지잖아요."

"까짓 기술이라는 게 뭐 별건가? 가발기술 익히듯 배우면 되는 거지. 공순이 기술이라는 게 다 그게 그 타령이니까 맘먹기에 달렸잖아."

김명숙은 직장 후배 넷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여섯이서 한 방을 쓰는 것은 순전히 방세 때문이었다. 그리고 고참과 신참들이 섞인 것은 공장장을 앞세운 회사의 입김 탓이었다. 같은 업종끼리 공원 빼돌리기가 심해서 신참들의 철새 버릇을 고참들 힘을 빌려 막고자 했다.

"예에, 그야 그렇지요......"

한 아가씨가 어물거렸고, 다른 세 아가씨는 힐끔힐끔 눈치를 보았다.

"느네들 야학에 다닐 맘은 전혀 없는 거니?"

김명숙은 느닷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거 배우고는 싶은데요, 매일 나가지 못하고 야근하는 날을 빼먹으면 그 담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고. 선생님들은 싫어하고......"

", 순덕아 공부하기 싫으면 좋게 공부하기 싫다고 할 것이지 선생님들 핑계는 왜 대? 야학선생님들 중에서 어느 분이 우릴 싫어하시든? 그분들이 싫어하는 건 결석한 우리가 아니라 멋대로 야근시키는 사람들이잖아. 그래, 안 그래?"

김명숙의 말꼬리가 카랑해졌다.

"예에, 그야......"

얼굴 곱상한 정순덕이 눈을 내리깔았다.

"느네들 다 똑똑히 들어. 대학생들이 돈을 받기는커녕 자기네들 돈을 써가면서 우리 같은 것들을 가르쳐주려고 애쓰시는데, 세상에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어디 있니. 우리가 무식 면해서 사람으로 대접받고 살려면 배우는 것밖에 없으니까 다들 야학에 열심히 나가라구. 야학에선 그냥 공부만 배우는 게 아니잖아. 전태일 같은 사람에 대해서도 배우고, 사람이 아는 게 얼마나 많아져, 그래, 정신들 똑바로 차려."

김명숙은 다시 네 사람을 하나하나 주시해 나갔다. 속말을 그렇게 에둘러서 하고 있는 김명숙을 바라보며 임귀례는 늘 정 깊고 튼실한 김명숙의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전태일 그 사람 그리 죽은 게 남자답고 아싸리하긴 하지만 우리한테는 손해만 입히고 있잖아요. 그 사람 죽은 후로 업주들이 우릴 부쩍 의심하고 감시하고 하는데, 참 짜증나고 귀찮아요."

다른 아가씨의 말이 퉁명스러웠다.

"양자 너, 그따위 무식한 소릴 어디서 막 지껄이고 그래? 너 말야 야학에 안 나가서 대학생선생님들 말씀 안 들으니까 그따위 무식한 소릴 마구 지껄여대는 거야. , 전태일이란 사람이 왜 하나밖에 없는 목숨에 불을 붙여 분신자살을 했는지 알어? 그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 노동자 전부를 위해서 죽은 거야. , 이 말 무슨 말인지 아니? 자기만 위하는 사람은 그렇게 죽지 못해. 여기 앉아 있는 우리들처럼 제 목숨이 아까워서. 그런데 그 사람은 이 땅의 모든 노동자들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으며 잘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뿐인 자기 목숨을 내던져 불타 죽은 거야. 주 예수가 모든 인간들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처럼. 그러니까 그 사람은 우리 노동자들의 예수라구, 노동자들의 예수!"

김명숙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언니...... , 그런 말 대학생선생님들이 했수?"

이양자가 두려움이 서린 듯한 얼굴로 더듬거리며 물었다.

"당연하지, 그 선생님들 아니면 나같이 무식한 것이 그런 기막힌 소릴 어떻게 해, 사람이 괜히 배워야 하는 줄 아니?"

"글쎄, 우리 노동자들의 예수라는 말 들으니까 가슴이 찌르르한 게 이상하네요. 왜 사장이나 공장장 같은 사람들은 그 사람을 다혈질이니 정신병자니 하고 욕하고, 그 사람 죽어서 빨갱이들이 박수치고 좋아할 거라는 이상한 말을 하고 그래요?"

정순덕이 의아스럽게 물었다.

"그야 당연하잖아. 우리가 그 사람을 따라 배우면 자기네들한테 손해니까."

김명숙은 자기보다 나이 어린 스물두 살의 전태일이라는 남자에게 또 휘감기고 있었다. 슬픔과 감동으로 가슴 떨리며. 이틀이 지나 월급을 받고, 그날 밤으로 정순덕과 이양자는 자취를 감추었다.

"아줌마, 이렇게 빈손으로 가면 어떡해요. 당장 세수를 할래도......"

정순덕이 불안한 눈길로 주위를 살피며 앉음새를 고쳤다.

"까짓것 걱정하지 말래니까 그러네. 공순이 신세로 살면서 빤스 하나, 수건 하나 반닥한 것 없을 거야 뻔할 뻔 자 아니겠어? 그까짓 넝마 다 된 것들 가져가면 뭘 해. 가져가느라고 무거워서 고생하고, 펴놓으면 구질구질해 창피만 당하지. 돈만 싹 챙겨가지고 나왔으면 됐어. 치약, 칫솔부터 외출복까지 하나도 빼지 않고 좌악 신품으루다 광나게 해줄 테니까. 알아들어?"

얼굴이 홀쭉하고 눈이 반들반들한 소개쟁이 여자는 우유를 한모금 마시고는 눈웃음을 쳤다.

"아줌마, 우리 넷이 함께 가기로 했는데 우리만 이렇게 ...... 의리 없이......"

소개쟁이의 눈치를 살피는 이양자의 조심스러운 말에는 불만이 서려 있었다.

", 의리 좋아하시네. 이게 지금 깡패질 나서는 거야? 의리 따지고 앉았게. 그게 아니면 수학여행 떠나는 거야? 넷이 함께 가기로 약속하게. 정신 똑바로 차려 이건 장난도 놀러가는 것도 아니고 직업전선에 나서는 거야. 난 무식해서 유식한 말 좋아하지 않지만, 느네들도 직업전선이란 말은 알지? 근데 왜 전선이라고 했겠어? 사람들이 돈벌이하면서 살아가는 게 전쟁터에서 싸우는 것과 같다 그런 뜻 아니겠어? 그러니까 말야, 전쟁터에서 서로 살아나려고 인정사정이 없잖아. 돈벌이도 마찬가지야. 서로 많이 벌려고 피도 눈물도 없는 거야. 공장에서 좀 당해봐서 알지? 사장들 하는 거. 근데 말야, 돈벌이라는 게 결국 뭐지? 기술껏 요령껏 남의 주머니에 있는 것 빼먹기 시합 아니겠어? 근데 있잖아, 술집에선 그게 아주 노골적이라 그거야. 돈 두둑하게 가지고 술기운에 기마이 쓰는 남자들의 돈은 그 누구나 먼저 빼먹는 게 임자야. 근데 그 기술이나 요령이 뭐냐? 첫째가 인물이고, 둘째가 애교야. 인제 무슨 말인지 알아잡수셨지? 여자라고 다 화류계로 빠질 수 있는 게 아니라구. 가난하면 인물이라도 반닥하게 생겨야 어찌 볕들 날 있지. 가난하면서 인물도 볼 게 없으면 그 인생은 영영 파이야. 남자들이 애써 돈 벌어서 괜히 비싼 술 마시는 게 아니다 그런 말씀이야."

소개쟁이 여자는 빤지르르한 인상에 어울리게 청산유수로 읇어댔다.

"아줌마, 우린 일본말을 못해요. 빠가야로 한마디밖에는."

정순덕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깐 건 하나도 걱정할 거 없어 한 이틀이면 당장 필요한 몇 마디는 배울 수 있고, 술자리에서야 말보다 더 필요한 게 애교부리는 것 아니것어? 그 다음이 노래 한가락 뽑는 거구 내가 살짝 미리 말해 주겠는데 말이지, 우리나라 남자들도 그렇지만 특히 쪽바리들은 여자가 애교 떠는 것 되게 좋아한다. 걔네들 짜다고 소문났지만 여자가 맘에 들었다 하면 돈을 막 푼다는 거야. 그 요령 잘 부려 몇 년 사이에 왕창 돈 번 여자가 바로 느네들 맡아줄 한 마담이야. 그 한 마담도 처음엔 일본말이라곤 몇 마디밖에 몰랐는데두 돈은 착착 잘 빼냈대. 그런 요령은 차차 다 알게 될 테니까 아무 걱정할 거 없어. 어서 빵들 먹어 가게."

정순덕과 이양자는 서로 불안한 눈길을 나누며 포크로 빵을 찍었다.

"저어...... 아까 말한 옷이고 뭐 그런 것들은......우린 돈이 얼마 없는데......"

정순덕이 빵을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으응, 그런 건 하나도 걱정할 거 없어. 한 마담 언니가 화장품까지 싹 알아서 구해주고, 화장하는 법까지 다 가르쳐줄 테니까. 느네들은 부지런히 벌어서 같으면 돼. , 느네들이 부럽다. 내 젊은 시절에도 이렇게 경기가 흥청망청했더라면 나도 한밑천 왕창 잡았을 텐데 빌어먹을, 아까운 세월만 다 갔어 막내동생들 같아서 내가 한마디 해두겠는데 말야. 똑똑히 기억해 두라구. 인생살이라는 건 돈 놓고 돈 먹기구, 누구든 돈 많으면 왕이구, 돈 없으면 시체야."

소개쟁이 여자는 그 생김처럼 야무지게 말하며 의자에서 발딱 일어섰다.

혼자 잘난 척 되게 하네. 이 세상에서 최고 와따가 돈이라는 걸 누가 몰라? 사람 웃기고 자빠졌네.’

정순덕이 빵집을 나서며 소리 없이 내뱉고 있었고,

잔소리 말어. 돈 좋은 거야 세 살 먹은 어린애도 다 아니까 여자 신세 멍드는 것 뻔히 알면서도 술집으로 왜 가는데.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려는 거라구.’

이양자도 이런 속말을 하고 있었다.

택시에서 내린 소개쟁이 여자가 어둠침침한 뒷골목을 더듬어 찾아간 곳은 서대문 적십자 병원 뒤쪽으로 이어진 오래된 한옥촌이었다. 그 여자가 찾아들어 간 집은 ㄷ자의 흔한 서울식 한옥이었다.

"아이구 한 마담, 마침 와 있었네."

소개쟁이 여자가 대청마루로 올라서며 반갑게 말했다.

"네에, 어서 오세요. 그렇잖아도 애들 데려다주고 아줌마 만나보려고 방금 돌아온 참이에요."

멋부린 여자가 대청으로 나서며 대꾸했다. 그런데, 불빛에 드러난 그 얼굴은 차장이었던 박보금이었다. 그녀는 그동안 성을 바꿔 '한 마담'이 되어 있었다.

"얘들아, 인사드려라 느네들이 앞으로 받들어 뫼셔야 할 한 마담이시다."

안방으로 들어서며 소개쟁이 여자가 정순덕과 이양자에게 턱짓했다. 그들은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기색으로 머뭇거렸다.

"참 뽄때 좋은 촌닭들이네. 저래 가지고 절이나 제대로 할 줄 알겠어? 내가 차차 가르쳐 줄 테니까 오늘은 그냥 눈 맞추는 것으로 됐어."

화장을 짙게 한 박보금은 그들에게 앉으라고 손짓하고는,

"그 대신 아다라시는 틀림없죠?"

하며 소개쟁이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척 보면 삼천리잖아."

"아니, 그럼 직접 확인 안 하셨어요?"

"안 하긴. 둘 다 또박또박 물어서 확답을 받았지. 의심나면 한 마담이 다시 확인해 봐."

소개쟁이 여자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받아넘기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조심조심 아가씨들을 꼬여내야 하는 처지에서 '너희들 숫처녀냐 아니냐' 따지고 들어서는 일을 성사시킬 수 없었다.

", 됐어요. 좌우간 조선 놈들이고 왜놈들이고 남자라고 생겨먹은 것들은 어찌 그리 아다라시를 좋아하는지 원. 꼴들 웃기지도 않아."

박보금이 담배를 빼들며 쓰게 웃었다.

"영계에다 아다라시 밝히는 거야 사내꼭지들이 부리는 못된 행투잖아. 그야 사내들 고질병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인데, 그치만 그 덕에 먹고 사는 사람들도 수두룩하니까 나쁠 것도 없어. 유행가 가사대로 세상은 참 요지경 속이지 뭐야."

"하긴 그렇기도 하네요. 아줌마나 나나 다 그 덕에 사는 거니까."

박보금이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근데 쪽발이 경기는 어떨 것 같애? 월남 경기는 김새기 시작한다는데."

"월남 경기 날 새고 있는 거야 뻔할 뻔 자고, 쪽발이 경기는 앞으로 점점 더 불붙을 거예요. 글쎄 일본 사업가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보고 하는 말이, '한국에는 길바닥에 돈이 굴러다닌다'고 한 대잖아요. 그만큼 일제 물건들을 팔아먹을 게 많다는 거래요. 좋아요, 왜놈들이 돈 많이 벌면 난 계속해서 걔네들 헬렐레하게 만들어 긁어낼 테니까."

"어머, 한마담은 좋겠네. 이 젊은 나이에 아가씨들을 열씩이나 거느리고 있으니 곧 떼돈 벌게 생겼잖아."

"젊긴요. 화류계 환갑 넘어 술상에서 밀려난 지가 언제라고요. 어쨌든 이 짓 해서 여섯 식구 먹여 살리고, 네 동생 학교 보내니까 난 당당해요."

"그럼요, 그렇다마다요. 헌데 요정은 언제나 채리게 되나요?"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기다려요. 다 때가 되면 이것 그대로 물려줄 테니까. 요정을 차려 돈에 원수 갚도록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은 내가 더 급해요."

박보금은 또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서울서 부산까지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바로 생겨난 말이 '1일 생활권'이었다. 고속버스 타고 부산에 가 볼일 다 보고 서울에 돌아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거였다. 기차보다 빠른 고속버스의 시대, 그건 분명 달라진 세상의 시작이고 더 잘살게 될 거라는 기대를 부풀게 했다. 그러나 그와 정반대의 반발을 촉발시키기도 했다.'호남 푸대접'이라는 말이 어느 때 없이 거세게 솟아오르고 있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동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거듭하면서 개발이 경상도 쪽으로만 치중된 것은 분명했고, 그럴 때마다'호남 푸대접'은 심심찮게 떠올라 정치권을 자극하며 그 해결을 위한 위원회 같은 것까지 만들어지곤 했었다.

"와따메. 고속도로 팽 뚫린 시상에 요놈으 뻐스는 워째 이리 들뛰고 난리판굿이다야. 처녀덜 시집도 못 가보고 방뎅이 다덜 깨지겄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며 흔들리는 버스 속에서 어떤 남자가 컬컬한 소리로 말했다.

", 그래도 설이라고 타관서 고상덜 죽사리치게 허다가 부모형제 만내보겄다고 요리 고향 찾아오는 질인디, 요 험헌 신작로 꼬라지가 머시여. , 즈그 경상도 땅은 싹 포장 혔겄제? 나가 멋도 몰르고 야물딱지게 생긴 것만 보고 박정희 럴 두 번이나 팍팍 찍어줬는디, 니미럴 인자 다시는 안 찍어줘. 고속도로 놓는 것 봉께로 그 사람 영 느자구가 읎어."

"으따, 입은 옆으로 찢어졌어도 말은 바르게 허드라고. 자네가 술 얻어 묵고 고무신 받아 챙기는 맛에 박정희 찍었제 언제라고 이뻐서 찍었남? 또 술 한 잔 걸치고, 밀가리고 비누고 받으면 더 볼 것 머시가 있겄어?"

"아따, 사람 멀로 보고 허는 소리여 시방? , 우리 전라도를 그리 홍어좆으로 아는디 속창아리도 읎어? 그려, 막걸리고 수건이고 머시든지 다 줘. 주는 것이야 다 받아묵고 찍는 것이야 안 찍어줄 것잉께."

"얼랴, 고것 참 존 방도시 잉 싹 다그리 혀불면 그간에 우리 전라도 푸대접허고 시퍼본 서운함 톡톡허니 갚는 것 아니겄어?"

"어허 귀 한분 볿아 좋네 그려. 긍께로 자네넌 내 동상이여."

"요놈이 성님얼 보고!"

두 남자는 껄껄대고 웃어댔다.

"워메, 월출산이네 !"

갑자기 터진 어떤 아가씨의 탄성이었고,

"워야 반가운거. 꿈에 보든 그대로시!"

설 쇠려고 고향을 찾아오는 다른 아가씨의 탄성이 이어졌다.

어 엄니이 ...... 어 엄니이......’

김명숙은 저 멀리 나타난 월출산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다. 월출산을 보는 순간 꼭 어머니를 대한 것처럼 반가움과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육중한 바위들로 첩첩이 봉우리를 이루 있는 신령스러운 월출산은 어머니 다음으로 꿈에 자주 나타나기도 했었다. 조금 전에 한 아가씨가 외친 것을 보면 월출산을 꿈에 본 것은 자신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김명숙은 10년 만에 마주 대하는 월출산을 경건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월출산은 10년 세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예전과 다름없이 우람한 자태 그대로 신비스러움과 아름다움을 우아하고 그윽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월출산은 바위산의 아름다움이 더없이 빼어난 산이었다. 월출산의 신비스러움과 아름다움은 두 가지 사실이 합해져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방 그 어디를 둘러보아도 산줄기라고는 없이 질펀한 들녘일 뿐인데 어찌 그렇게 거대한 바위산이 솟을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바위산이 되 무작정 커서 위압적인 것이 아니라 수많은 작은 봉우리들이 모여 산을 이루고, 그 산들은 겹겹이 큰 산을 이루어내며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하게 조화되어 있었다. 넓은 들판 가운데 솟아 더욱 우람해 보이고, 그러면서 수많은 봉우리들이 어우러져 섬세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월출산은 바위산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그 겹겹의 봉우리에 안개가 감겨 있을 때는 범접하기 어렵게 신령스럽기 그지없었고, 눈이 하얗게 내려 있으면 신선의 세상이 저기가 아닌가 싶게 신비스러움은 절정을 이루었다.

월출산을 보고 나자 버스 안은 더욱 소란해지기 시작챘다. 영암에 다 왔고, 월출산을 감돌아가면 이내 강진이었다. 김명숙은 마음이 바빠 사람들을 따라 짐을 챙기고 싶기도 했지만 촌스럽게 굴지 않으려고 꾹 참았다. 미리 챙겨야 할 만큼 짐이 많지도 않았다. 어머니와 동생들을 10년 만에 만날 생각으로 김명숙은 가슴이 울렁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겁이 나고 있었다. 함께 돌아와야 하는데 나복녀의 식구들을 어찌 대하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복녀와 함께 집을 떠날 때 품었던 꿈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꿈을 줄이고 바꾸기도 했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가발공장 여공 신세로 나이만 열 살이나 불어나 있었다. 그러나 타관생활 10년을 그낭 넘길 수는 없었다.

"워메 이년아, 니가 누구여!"

부엌에서 나오던 월하댁은 이렇게 울부짖으며 둘째딸을 왈칵 보듬었다.

"엄니이 ......엄니이......"

김명숙은 짐을 마당에 내던진 채 제 몸집보다 작은 어머니의 품으로 한사코 파고들며 느껴 울고 있었다.

"시상에나 만상에나 요새넌 꿈자리서도 잘 안 뵈등마 니가 워쩐 일이다냐. 이년아, 이 독허고 무정헌 년아. 그간에 죽지는 않고 있다고 간간이 소식이나 전했어야제 10년 세월 다 흘러가도 핀지 한 장 안 보냄시이 에미 애간장얼 그리도 태우다니, 에라이 요 못된 년아, 웬수가 따로 읎다."

월하댁은 한 손으로 딸의 등을 치고 다른 손으로 딸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눈물이 흥건하게 젖은 소리로 읊조리고 있었다.

"아니, 엄니......"

그때 키 껑충한 고등학생이 사립을 들어서다가 엉거주춤 멈춰 섰다.

"인냐 선진아, 둘째누나 왔다, 둘째누나. 니가 그리 보고 잡어허고 걱정해쌌튼 명숙이 누나가 왔어."

월하댁이 눈물을 훔치며 생기 넘치는 소리로 막내아들에게 알렸다.

"음마......!"

김명숙은 키 큰 고등학생을 올려다보며 어리둥절해졌고,

"얼랴 ......"

김선진도 파마머리의 여자를 바라보며 당황스런 기색이 드러나고 있었다.

"봐라, 10년 세월이란 것이 늙어가는 사람헌티는 벨라 표가 안 나도 커나는 사람들헌티는 요리 무서운 것이여. 한 성제간에도 그간에 한 분도 안 보고 산께 서로 얼렁 못 알아보덜 안 혀."

월하댁이 양쪽 손으로 딸과 아들의 손을 각각 잡아 끌어당겨 서로 마주잡게 했다.

"선진아. 니가 요리 커부렀을 줄 몰랐다. 참말로 몰라보겄다."

김명숙은 저절로 나오는 고향 말을 하며 청년 선진의 모습에서 문득 아버지의 느낌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누나도 너무 변해부렀구마. 꿈에서는 맨날 여학생이든디......"

김선진이 쑥스럽게 웃으며 목이 잠겼다.

"어야 선진아, 요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얼렁 달구새끼 한 마리 모가지 삐틀어라. 누나 시장허다."

어머니가 밥을 하면서 쉼 없이 엮어내는 집안 이야기를 들으며 김명숙은 한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큰오빠는 검사, 언니는 서독 간호원, 작은오빠는 고시생, 여동생 금숙이는 사범대생, 막내 동생은 고3이었다.

" ...... 언니가 서독에 안 갔드라면 큰 탈 날 뻔혔어. 다 그 덕에 묵고 살고 핵교 가고 헝께."

월하댁은 긴 한숨을 쉬었다.

"큰오빠는 으쩌고라?"

김명숙은 자신도 모르게 기를 세웠다.

"글씨 ...... 검사 월급이 원체로 작은디다가 양심 잘 지켜야 헝께 어쩔 수가 읎고, 언니도 핀지 보낼 때마동 큰오빠 심들게 허지 말라고 당부다."

"음마 요상허시. 판검사 되면 금세 그 집안이 활짝 핀다고 허든디 ......"

"피기야 무섭게 폈지야. 사람덜이 우리 집안을 얼매나 높이 보는지 아냐? 워디서 만내도 내 그림자도 못 볿는다 말이여. 그리 지체 높아졌으면 되았제 멀 더 바래겄냐."

김명숙은 뭔가 서운한 느낌이 들었지만 너무 오랜만에 상면한 어머니가 어려워 더 입을 놀리지 못했다.

"엄니 말 믿으면 안 되야. 그냥 듣기 좋게 허는 소린께. 큰 성은 우리럴 우세시럽게 생각허고 자주 볼라고도 안 혀. 작은 성이 큰 성 집에 있지도 못허고 따로 하숙허는 형편잉께."

말문이 트인 막내 동생이 다음날 어머니 없는 틈에 한 말이었다. 김명숙은 그제서야 어머니가 왜 자꾸만 한숨을 쉬었는지 깨달았다.

"아조 잘 되얐다. 요 가발공장 공순이가 찾아가면 검사님이 징허게 반가와라 헐 것잉께 서울 가듬절로 찾아가야 쓰겄다."

김명숙의 입술이 씰그러지고 있었다.

"글먼 안 돼야, 엄니 속 터진께로!"

김선진이 울상이 되어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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