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한강 2-4

20. 월남 가는 사람들

"나 월남 가기로 자원했다. 곧 떠나."

"뭐야? 너 미쳤냐?"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유일표는 놀라 소리쳤다.

"뭐 그리 놀랄 것 없어. 개죽음당하지 않게 안전한 자리로 손써 놨으니까."

이상재는 술잔을 들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 얼굴에 어떤 고민이 서려 있었다.

"병장 달고 월남엘 가다니, 너 무슨 일 있지? 사고 쳤냐?"

유일표는 술기운을 훑어내듯 얼굴을 훔치며 다잡고 들었다.

"글세, 그게 사곤지 뭔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피신삼아 도망가는 것쯤으로 알아둬....."

이상재는 우물쭈물 능치며 담배에 성냥을 그어댔다.

". 그렇게 어물쩍 넘기려고 하지 말어. 너 내 성질 잘 알지? 무슨 일인지 속 시원하게 털어놔 봐."

"새끼, 군대 밥 2년 넘게 먹고도 그놈의 끝장 보는 성질은 안 변했냐? 발설하기 난처한 문제니까 그냥 그 정도로만 알아둬."

"얌마, 그게 말이 되냐? 특과 중에 특과인 법무관실에 잘 있던 친구 놈이 갑자기 전쟁터로 도망간다는데 그 이유를 모르고 있어야 한다니. 차라리 말을 꺼내지 말았어야지, 너 같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겠어? 잔말 말고 다 털어놔. 어떤 놈 돈 먹고 수사 서류 조작하다 들통 났냐? 어떤 법무관 부인하고 내통하다 들켰냐? 그것도 아니면 허미경이한테 임신시켰냐? 아니지, 미경이한테 임신시켰으면 바로 결혼할 수 있으니까 더욱 잘된 일이네. , 뭐야 도대체?"

유일표는 이상재에게 술잔을 내밀며 윽박지르듯 했다

"짜아식, 육군 쫄짜에 어울리게 많이 하락했네."

이상재는 피식 웃으며 막걸리를 한 모금 마시고는,

"그게 말이야 알아서 별로 좋을 일이 아니야. 그냥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동안 내가 어떤 서클에 가입해 있었는데, 그게 수사 대상에 오른 거야. 너도 서클 활동 같은 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 눈치고, 느네 집안 환경을 생각해서 너한테는 굳이 가입을 권하지 않았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참 잘한 일이었어. 이 정도 알아두고, 더 알려고 하지 말어."

그의 목소리는 차츰 낮아지고 있었다.

"너 혹시 학사주점하고 연관되어 있는 일 아니야?"

유일표의 눈길이 이상재의 눈에 꽂혔다.

", 눈치 한번 귀신이네."

"귀신이 아니라 술 마실 일만 생기면 자꾸 학사주점으로 끌고 갈 때부터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그 술집 분위기도 그렇고. 근데, 그게 사상적인 서클이었냐?"

얼굴이 붉게 물든 술기와는 달리 유일표의 얼굴은 긴장되어 있었다.

"뭐 그런 셈이지 ."

유일표는 곧 입 밖으로 나가려는 말을 억누르며 이상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사회주의 사상이냐고 묻기가 끔찍하고 소름 끼쳤다.

"자아, 그 얘긴 그만 집어치우고 술이나 마시자."

이상재는 태연한 척 웃음 지으며 술잔을 들었다.

"넌 뭐냐? 핵심이냐?"

"아니, 하부 말단."

"월남으로 튄다고 괜찮을까?"

"너무 걱정하지 말어. 상부가 어떻게 되더라도 나 같은 말단이야 별 일 없지만 그래도 만전을 기하자고 하는 거니까."

"남산이냐?"

"그런 모양이야."

중앙정보부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남산'으로 불리고 있었다.

"새끼 너 아주 맹랑하구나."

유일표는 담배를 빼 물며 어처구니없어 했다.

"그래, 이제부터 이 형님을 존경해라."

이상재는 가슴을 펴 보이며 과장되게 거드름을 피웠다.

"모르겠다. 존경을 해야 할지, 야단을 쳐야 할지. 상황이 급한 것 같은 데 떠나긴 언제 떠나는 거냐?"

"며칠 안 남았어. 그만 나가자. 나 어디 갈 데가 좀 있어."

이상재는 삐딱하게 젖혀진 모자를 바로 쓰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떠나기 전에 더 만나기 어렵겠구나?"

유일표는 술집을 나서며 물었다.

"아마 그럴 거야. 1년 후에 제대하고나 만나게 되겠다."

"새끼,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 6개월 복무연장된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월남까지 가야 될 일을 저지르다니."

"신경 쓰지 말고 저쪽 버스정류장까지 좀 걷자."

이상재는 먼저 발길을 떼어놓았다. 가로등 불빛을 밟으며 사람들이 고단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신문팔이 소년들의 지치고 쉰 목소리가 밤거리에 흩어지고 있었다. 경제발전이라는 것을 실감시키려는 듯 큰 건물의 뼈대가 어렴풋한 어둠 속에 흉물스럽게 드러나 있었다. 도심에서 벌어지고 있는 큰 건물의 공사는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 서클 규모는 커?"

한동안 말없이 걷던 유일표가 입을 열었다.

"그건 나도 잘 몰라."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그러니까..... 비밀 당 조직이거든."

"뭐라구? ?"

유일표는 가슴이 섬뜩해지며 자신도 모르게 우뚝 섰다.

", 그래서 남산까지 들리겠냐? 더 크게 소리 질러라."

이상재는 씩 웃으며 유일표의 팔을 잡아끌었다.

", 그런 걸 만들어 도대체 뭘 하려고 했는데? 어디 가서 얘기 좀 하자."

"뭘 하긴. 이게 사람 사는 세상 아니잖냐? 나 지금 바쁘니까 담에 차차 얘기하자."

"뭐라구? 그럼 혀 , ....."

유일표는 당황스럽게 말을 더듬어 삼키고 있었다

"그쯤 알았으면 됐어. 우리 제대하고 보자. 건강하게 잘 있어."

이상재는 재빨리 뛰어가더니 막 출발하려는 시내버스를 올라탔다. 유일표는 멀어져가는 버스를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어지러운 의식 속에서는 전과는 전혀 다른 이상재의 모습이 크게 확대되고 있었다.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며 비밀 당을 만들다니 ....’

유일표는 그 당혹감 앞에서, 내가 친구 이상재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하는 또 다른 당혹감에 빠지고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었던 이상재는 겉모습의 이상재였고 속모습의 이상재는 따로 있었던 것이다. 유일표는 갑자기 무거워진 발길을 터벅터벅 옮기며, 비밀 당을 만든 사람들과 이상재의 행동이 용기인지 만용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미군들이 한국 사람을 린치한 신문기사를 놓고 술자리에서 미군들을 욕하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빨갱이로 무수하게 두들겨 맞고, 택시에서 한두 마디 박정희 비난을 했다가 그대로 남산으로 실려가 빨갱이 앞잡이라고 매타작을 당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는 세상이었다. 마누라와 정사를 하는 배 사이에도 중정의 촉수가 파고들어 있다고 하는 세상에서 그런 일을 도모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이상재가 대학생활을 해나가면서 중, 고등학교 동창이며 고향 친구인 장경식과 관계를 끊다시피 해버린 것도, 법대생들의 지상목표인 고등고시를 외면해 버린 것도 이제야 비로소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신의 집안 환경을 생각해서 그 서클 가입을 권하지 않았다는 이상재의 말을 곱씹으며 유일표는 화랑담배에 불을 붙였다.

만약 이상재가 그런 배려 없이 가입을 권했더라면 자신은 어찌했을 것인가.....? 유일표는 괴로운 신음을 담배연기와 함께 흘렸다. 솔직하게 말해서 자신은 그런 용기를 낼 수 없었을 것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어머니와 형의 고초와 공포, 그리고 자신이 군대생활을 하면서 벌써 여섯 번째 근무 부서를 옮겨 다니는 참담함..... 유일표는 완전히 반공주의의 포로가 되어 있는 자신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고 있었다. 그런데.....자신은 단순한 포로가 아니었다. 끊임없는 채찍질을 당하며 상처투성이가 되는 노예처럼 의식에는 날이 갈수록 상처가 늘어가고 있었다. 어떤 전쟁이든 끝나지 않는 전쟁은 없고, 전쟁 포로는 전쟁이 끝나면 자유를 찾아 자기 나라로 돌아갈 수가 있다. 그러나 자신과 같은 분단의 포로라고 할까, 이데올로기의 포로는 그런 날이 언제 올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반공주의는 세월 따라 완화되기는커녕 오히려 강화되어 가고 있으니 통일은 자꾸만 아득해지고 있다. 한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 적대하고 증오하면서 분단의 벽을 쌓아올리기만 하면 통일이라는 것은 언제나 올 것인가. 이런 식으로 앞으로 30년쯤 흘러가 버리면 어찌 될 것인가. 나이 육십이 다 될 것이니 자신의 일생이 끝나게 되는 것이다. 서로가 통일에 대한 진정하고 솔직한 노력을 하지 않는 한 분단의 세월은 30년이 아니라 50, 100년도 갈 수 있다. 수사대에 불려가고, 똑같은 내용의 심문을 당하고, 똑같은 내용의 서약서를 쓰고, 또 다른 부서로 옮겨져 잡일을 하게 될 때마다 의식의 상처는 자꾸 늘어났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상처받지 말자고 마음을 강하고 단단하게 먹으려고 했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그 일이 반복될 때마다 의식을 덮어오는 어둠은 점점 짙어져가고, 절망감도 자꾸만 깊어져갔다. 그뿐만 아니라 몸 어딘가도 허물어지거나 못 쓰게 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났다. 또한, 스스로 엄청난 죄인인 것 같은가 하면, 아무 쓸모가 없는 인간인 것도 같은 비하감이 순간순간 스치기도 했다. 그런 이상한 감정들은 의식을 혼란스럽게 하고, 내가 누구인가 하는 어지러움 속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의 구원자는 어머니와 형이었다. 어머니와 형에게 의지하며 똑바로 서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어머니와 형이 받은 상처가 얼마나 극심한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가 있었다.

"그동안 아무 말썽 없이 근무를 잘했으니 이제부턴 주말 외출 허가야 앞으로 근무 더욱 잘하도록!"

상병이 되자 수사대 중사가 외출증을 끊어주며 한 말이었다. 순간적으로 외출증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도 자신이 굴종을 잘했다는 표창장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그것을 받지 않을 자유도 없었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곧바로 반항으로 몰릴 판이었다.

"중사님, 제가 계산해 보니 제 아버지는 이제 예순다섯이 넘었습니다."

지난번으로 여섯 번째 부서를 옮기게 되었을 때 말했다.

", 그렇게 늙었으니 이젠 남파될 리 없지 않느냐 그거지? 이봐, 시건방진 생각하지 말어. 그게 바로 함정이야. 저놈들은 필요하면 예순다섯 아니라 일흔다섯 여든다섯에도 내려 보내는 놈들이야.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이걸 똑똑히 알아두라구. 느네 아버지가 직접 내려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야. 느네 아버지의 선을 이용해 엉뚱한 제3자가 너나 느네 식구들한테 접근해 올 수 있어 . 그런 일은 전에도 비일비재했으니까. 이 점 똑똑하게 기억해 두라구. 알겠나!"

중사의 이 단호한 말에 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중사의 거머리 같은 끈질김을 야속해 하거나 원망할 수도 없었다. 계속 간첩사건이 신문에 보도되고 있는 상황에서 중사 같은 사람들은 줄기차게 근무 충실을 기할 수밖에 없기도 했다. 저쪽에서 침투시키는 간첩에 맞서서 이쪽에서도 특수부대원들을 저쪽에 잠입시키고 있다는 것은 사병들도 거의 다 눈치 채고 있었다. 그건 다만 쉬쉬하는 속에서 소리 없이 전해지고 퍼지는 비밀이었다. 그 표 나지 않는 전쟁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험악한 상황 속에서 이상재는 어쩌자고 그렇게 이상스런 서클에 가입했던 것인가. 이제 월남으로 피해 간다면 무사할 수 있을까. 월남은 또 하나의 6, 25와 같은 전쟁을 벌이고 있는 곳이었다.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맞부딪치고 있는 전쟁터, 그곳이 이상재의 안전한 피신처가 될 수 있을까. 나라에서는 혈맹 관계인 미국을 도와 공산주의를 무찌른다는 명분을 내세워 파병을 했고, 졸병들 대부분은 돈을 벌어오겠다는 말을 내놓고 하며 정글 무성한 전쟁터로 가고 있었다. 월남전에 가는 것을 피하려고 일부러 손을 썼던 이상재는 군대생활 막판에 이르러 월남을 피신처로 삼고 있었다. 이제 그가 무사하게 돌아오기만 바랄 수밖에 없었다. 유일표는 부대 쪽으로 가는 버스정류장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아버지, 원 서방이 마침 월남 취재를 떠난다고 하는데 기왕이면 동행하게 출장을 한 사흘 앞당기면 어떨까요?"

박준서가 젓가락으로 불고기를 집으며 아버지와 매제가 된 원병균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아니, 자네가 월남을 가?"

박부길 사장이 반주 잔을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사위를 건너다보았다. 그 퉁명스러운 어조만큼 눈길이 곱지 않은데다 미간에 주름까지 잡혔다.

", 회사에서 이번에 취재팀을 구성했는데, 끼었습니다. 팔자에 없는 공짜 여행을 하게 된 건 좋은데, 집사람하고 동행하지 못하는 게 유감이지요."

원병균은 장인의 눈치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꾸했고, 옆에 앉은 박영자가 그의 발끝을 살짝 꼬집었다.

"에이 쯧쯧, 그 신문사 그거 순 엉터리로구만."

박부길 사장은 얼굴을 찌푸리며 술잔을 왈칵 비웠다.

"아니 장인어른, 왜 그러십니까? 그런 말씀 막 하시다가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십니다."

원병균은 여전히 능청스럽게 대응했고, 박영자는 또 남편의 발을 꼬집었다.

"자넨 박정희 대통령 각하를 싫어하고, 월남파병도 반대하는 사람이잖아. 자네 같은 기자가 월남에 백날 가면 무슨 소용 있어. 글이라고 써 봐야 보나마나 삐딱하게 써서 사람들 생각 버려놓고, 국가발전에 손해만 입히지."

박부길 사장은 사위를 백년손으로 대접하는 낌새는 털끝만치도 없이 내질렀다. 그의 가슴속에는 자신이 원했던 장군과 사돈을 맺지 못한 감정의 응어리가 아직까지도 남아 있었다. 그 장군은 이제 장관으로 앉아 있으니 그 아쉬움은 두고두고 풀리지 않았다. 딸년이 막무가내인데다가, 사업을 하는데 기자 사위 둬서 나쁠 것 없다는 아들들의 역성에 마지못해 결혼을 시키기는 했는데, 시거든 떫지나 말아야지 정부 시책이든 세상 돌아가는 일이든 사사건건 시비고 비판이었던 것이다.

"아빠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월남에 대해서 이 사람이 아무리 삐딱하게 쓰고 싶어도 쓸 수 없게 돼 있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박부길 사장은 생선회를 집다가 얼른 딸을 쳐다보았다.

"이번에 월남에 가는 건 정부하고 협조해서 가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염려하실 것 없으세요."

"협조? 그 삐딱한 신문사 사람들이 나라 말 들을 때도 있나?"

박부길 사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믄요. 신문사가 대한민국 신문사 아니고 어디 김일성네 신문삽니까. 신문사도 애국할 때는 발 벗고 애국해야지요. 장인어른, 푹 안심하시고 제 술이나 한잔 받으시지요."

원병균은 넉살좋게 받아넘기며 매화 꽃무늬 그려진 사기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그래,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신문사고 뭐고 이번 기회에 일치단결해야 돼. 이번 기회가 딸라를 벌어들일 수 있는 절호의 찬스고, 나라의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 그거야. 다 망해버린 일본이 어떻게 오늘날처럼 잘살게 됐어? 우리 6, 25동란 때 온갖 전쟁물자 팔아먹은 덕 아니냔 말야. 헌데, 일본은 이번 월남전에서도 전쟁물자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가지가지 전기제품에서부터 카메라 면도날, 라이터까지 돈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내다 팔아 딸라를 싹쓸이해 가고 있다 그거야. 우린 군대를 보내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판에 일본 놈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떼부자가 되고 있다 그런 말이야.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그러니까 우리도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벌어서 잘살 수 있는 밑천을 이번에 장만해야 되는 거야. 군대는 진작 투입됐고, 전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그럴수록 딸라는 많이 쏟아지고, 일본은 노른자위만 쏙쏙 빼먹고 있는 판에 뒷전에 앉아 월남전 놓고 왈가왈부하는 놈들은 다 베트콩 편드는 빨갱이들이야. 우린 정신 바짝 차리고 흰자위만이라도 긁어 와야 된다 그거야. 자네, 알아들어!"

말끝에다 연신 '그거야'를 붙여가며 제물에 열이 오른 박부길 사장은 방바닥을 내려쳤다.

"아 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원병균은 한입 가득 우물거리고 있던 고기를 꿀떡 삼키며 대답했다. 장인의 말은 일반적이긴 했지만 이윤 추구를 미덕으로 삼는 사업가 입장에서는 충분히 내세울 수 있는 논리고 주장으로 별로 빈틈이 없기도 했다.

"자네, 속으로 또 딴 생각하고 있는 거지?"

박부길 사장은 사위의 속을 꿰뚫듯 쏘아보았다.

", 그렇지 않습니다 외화를 벌 수 있는 기회라는 측면에서 볼 때 장인어른의 말씀은 틀림이 없습니다."

", 오랜만에 철든 소리를 하는군."

박부길 사장은 흡족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고는,

"그럼 넌 언제 떠나겠다는 거냐?"

하며 아들을 쳐다보았다.

", 모레 갔으면 합니다."

박준서가 얼른 대답했다.

"그래, 여기 일도 바빠지고 있으니까 빨리 갔다 빨리 오는 건 좋은데, 가서 일 야무지게 처리하고 와야 해. 말썽부린 놈들은 가차 없이 해고시켜 귀국시키란 말야 비실비실 굶주리던 놈들한테 수입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줬으면 열성으로 일해서 돈을 모을 생각만 해야지, 돈푼 좀 만지게 됐다고 제까짓 것들 주제에 바람피우고 술 처마셔가며 말썽을 부리다니 그게 될 법이나 한 소리야! 그게 국내라면 또 몰라. 외국에 나가서 그따위 짓 해데서 걸려들면 그게 다 회사 망신시키는 거고 나라 망신시키는 거 아니냔 말야. 가난한 것들은 다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 그런 놈들을 허술하게 다뤘다간 딴 놈들이 또 물들게 되니까 가차 없이 잘라야 해. , 빈틈없이 할 자신 있어?"

박부길 사장은 눈꼬리를 세워 아들을 노려보듯 했다.

", 걱정 마세요."

"그리고 말야, 접대비를 좀 많이 쓰더라도 수금 철저히 해라. 거기 회사보다 우리가 한발 늦어 미군과 직접 계약하지 못하고 하청 받은 것도 억울한데 수금까지 늦어지면 말이 되냐. 거래해 보니 양코들도 신사라는 건 헛말이고 아주 여간내기들이 아니야. 돈 앞에서는 흰둥이고 노란둥이고 다 똑같다는 걸 명심해야 돼. 너도 아다시피 고속도로 공사 시작으로 자금 확보를 튼튼하게 해야 하니까 이번 수금에 차질이 없어야 한다. 알겠어?"

", 잘할게요."

"잘할게요가 아니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틀림없이 받아내야 해. , 너 영어회화 공부는 날마다 하고 있는 거냐 어쩌냐?"

", 하고 있어요."

"그래, 열성으로 해서 통역 필요 없이 미국사람들하고 말이 통할 수 있도록 돼야 한다. 앞으로 사업을 크게 하자면 미국사람들 상대하는 일이 잦아질 거고, 영어 하나만 잘해도 아랫것들 기죽이고 휘어잡는 데 아주 큰 효과가 날 거니까."

박부길 사장의 얼굴은 자못 진지했다.

", 열심히 하겠어요. 근데 고속도로 공사는 꼭 지금 해야 하는 건가요?"

박준서는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 너도 야당 것들처럼 반대다 그거냐?"

박부길 사장이 대뜸 언성을 높였다.

"아니, 그게 아니구요,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일인데 그 돈으로 생산 공장부터 짓는 게 더 낫지 않나 싶어서요."

"이잉, 모르는 소리."

박부길 사장은 고개를 내두르며 혀를 차고는

"자넨 어떻게 생각해?"

그는 느닷없이 사위를 겨누었다. 박영자는 또 재빨리 남편의 발을 꼬집었다.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쪽 전문이 아니라서요."

원병균은 발끝이 전보다 훨씬 아픈 것을 느끼며 속생각을 덮었다.

"여러 잔소리들 할 것 없어. 대통령 각하가 하시는 일은 다 옳아."

박부길 사장의 턱없이 큰소리였다. 박준서와 원병균의 눈길이 순간적으로 마주쳤다. 박준서는 재빨리 눈길을 돌려 숟가락질을 했다.

이 양반이 청와대 구경 몇 번 하더니 덩치 값도 못하고 완전히 박정희 신봉자가 됐군. 돈 때문이냐, 권력 때문이냐.....’

원병균은 떫은 입맛이 도는 입에다 국을 떠 넣었다. 친구 박준서가 4,19며 통일운동에 앞장서곤 했던 학생 시절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끔 급하게 사업가로 변해가는 것이 원병균은 당황스럽고도 딱했다. 그의 변모는 마치 4,19세대의 힘없는 와해와 뜻밖의 변질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장인의 우격다짐 기질과 저돌적 사업 추진 방식이 박준서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뭐라고 할 말도 없었다.

"자아, 이거 출장 떠나는데 용돈일세."

거실 소파로 자리를 옮기고 나자 안방에서 나온 박부길이 사위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아닙니다. 회사에서 출장비 다 나옵니다."

원병균은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며 인사치레를 했고, 그 사이에 박영자는 봉투를 날름 받아 챙겼다.

"거 타국 땅에 가서 술 한잔하면서 객고 푸는 건 좋지만 여잔 조심하라고. 특히 월남 계집들은 코 내려앉는 국제 매독에 걸린 것들이 드글드글 하니까 말야."

"아이구, 사위 딸 앞에 두고 못하는 소리가 없수. 어찌 저리 부끄러운 걸 모르는지 몰라."

과일을 깎아가지고 나오던 박영자의 어머니가 질색을 했다.

"아니, 부끄럽기는. 사위도 자식인데 그게 어디 못할 훈겐가?"

박부길 사장은 큰 체구와 거칠거칠한 인상에 어울리게 태연스레 대꾸했고,

"아이고, 그런 훈계할 사람이 따로 있지 ....."

박영자의 어머니는 과일 접시를 놓고 돌아서며 남편을 향해 싸늘하게 눈을 흘겼다. 박부길 사장은 아내의 눈초리를 피해 담배를 빼들며 어흠, 흠 헛기침을 해대고 있었다. 거실의 분위기는 금방 어색해졌다. 그때 박영자가 눈치 빠르게 입을 열었다.

"아빠. 고속도로 공사를 하게 되면 돈이 많이 벌리나요?"

", 고속도로? 그게 말이다. 어떤 신문에서 말한 대로 단군 이래로 최대 최고의 토목공사가 돼놔서 공사비도 어마어마한데 ....."

딸 덕에 궁지에서 벗어나게 된 장인이 과장되게 큰소리를 내고 있는 것을 건성으로 들으며 원병균은 속으로 키들키들 웃고 있었다. 장인 박부길은 원래 그런 쑥스러운 말도 거침없이 하는 성품이었고, 기골이 장대한 만큼 정력도 좋은 것인지 여자를 가리지 않아 장모와는 사이가 거북살스러웠다. 그런 양반이 사위에게 여자 조심하라고 충고를 하다가 아내에게 면박을 당했으니 그것이야말로 장인 체면 구겨진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었다.

원병균은 언뜻 속웃음을 멈추었다. 장모의 그늘지고 수심에 찬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장모는 풍족한 경제력과는 거리가 멀게 늘 불행해 보였다. 돈이 행복의 절대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장모의 삶이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장모는 우수 깊은 얼굴에 웃음만 잃은 것이 아니라 옷치장도 전혀 하지 않았다. 마치 여자의 삶을 포기해 버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여러 말 할 것 없고, 내 딱 한 가지만 부탁하겠네. 자네, 여자의 행복이 뭔지 아나? 남편이 딴 데 한눈 팔지 않는 것이야. 알겠지? 무슨 말인지."

결혼을 결정했을 때 딸과 나란히 앉혀놓고 장모가 간곡하게 한 말이었다.

"애개개, 겨우 2만 원이야? 아유, 우리 아빠 짠 건 알아줘야 해. 그 많은 돈 다 어디다 쓰려구."

택시를 타자마자 봉투에서 돈을 꺼내본 박영자가 소리 질렀다.

"만 원보다 많네. 다 딸을 위해서야 더 많이 주면 사위 놈이 바람피울까 봐."

원병균은 쿡쿡 웃었다.

"당신 서운하지요?"

"아니,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뭘. 난 됐으니까 그 돈 당신이나 써."

"어머, 인심 쓰는 척하지 말아요. 아예 줄 생각 없었으니까요. 박봉 받아와 살기 힘들어 죽겠는데 이런 돈 아니면 언제 여윳돈이 생기겠어요."

박영자가 혀를 낼름하며 돈 봉투를 재빠르게 핸드백에 넣었다.

", 박봉 타령이 심심찮게 나오시네. 난 신문기자 박봉인 거 속인 적 없고, 인간 박자영도 좋다고 동의하고 결혼한 거니까 그런 듣기 싫은 소리는 삼가하시도록."

원병균은 농담조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에는 가시가 돋혀 있었다.

"알았어요. 바가지 긁는 것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근데, 월남에서는 오빠하고 함께 행동하게 되나요?"

박영자는 남편을 편안하게 해주려고 얼른 말을 다른 데로 돌렸다. 남편에게 돈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것은 자신의 진심이었다. 남편이 좋은 기자 노릇을 하기 바랐다. 그건 자신이 대학시절에 품었던 정의감을 실현시키는 일이기도 해서였다.

"글쎄, 처남은 그걸 원해 날짜를 앞당기는지 모르지만, 우리 취재 대상은 기업이 아니라 군인들이고 전황이니까 그러기가 어려울 걸."

원병균은 담배를 빼 물었다.

"그런데 오빠가 그걸 원하면 어쩌죠? 일을 처리하는 데 은근히 기자 힘을 이용하고 싶은 속셈이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글쎄, 나도 그런 느낌을 약간 갖기는 했는데, 뭐 그럴 것까지는 없을 걸. 그 근로자들이 워낙 잘못했으니까."

"그렇지만 막가는 사람들이라 말썽을 부릴 수도 있잖아요. 사람들이 얼마나 못됐으면 그 위험한 전쟁터에 돈 벌러 가서 바람이나 피우고 술이나 마셔 파면을 당할 정도가 됐겠어요. 오빠 혼자서 처리하기 힘들지도 몰라요."

"이런, 누가 형제애 두텁지 않다고 할까 봐 별걱정 다 하네. 당신이 몰라서 그렇지 거기 진출해 있는 기업들은 다 군 수사기관과 연결되어 있고, 보호를 받고 있어. 그리고 처남은 혼자가 아니라 현장에 회사 간부들이 많아 처남은 아버지의 특사로 가는 셈이니까 사고를 저지른 계약직 근로자들이 무슨 말썽을 부릴 도리가 없고. , 만약 좋지 않은 상황이 생겨 내가 개입해야 된다면 그땐 나도 나설 테니까 아무 걱정 마."

원병균은 다정하게 웃으며 아내의 손등을 토닥거렸다.

"참 이상한 사람들 다 있어요. 위험한 전쟁터에 돈 벌러 갔으면 돈이나 열심히 벌 것이지 딴 짓은 왜 하나 모르겠어요. 그 처자식들이 불쌍해요."

"사람이 많다 보면 별사람들이 다 있지 뭐. 그래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으니까 속상해 할 것 없어. 규율 엄한 군대에서도 말썽 부리는 사람은 있기 마련인데, 자유스러운 회사에서야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근데 그쪽 전세는 어떻게 되고 있는 거예요? 우리나라까지 참전한 지가 벌써 언젠데 아직까지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있으니."

"글쎄, 우리나라하고는 기후가 판이하게 달라 정글이 심한데다. 고정된 전선이 없는 게릴라전이라 더욱 싸우기가 어려운 모양인데, 더 자세한 것은 가봐야 알지 뭐."

"기자들은 바로 전선을 취재하나요?"

박영자가 갑자기 남편 쪽으로 몸을 돌리며 물었다. 그 얼굴이 긴장되어 있었다.

", 겁나? 그런 걱정 하지도 말어. 우리가 전선으로 가고 싶어 해도 아마 들여보내지 않을 거야. 만약 무슨 사고라도 나봐. 그 책임을 어떻게 지려고."

"그럼 취재를 간다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그야 그렇지 않지 여기서 사진보고 상상하는 것하고 오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사회의 현장을 보는 것하고는 천양지차지. 기후와 자연환경 같은 것들에서부터 민심이며 여론, 군인들의 동태 같은 것들까지 직접 살피게 되니까 느낌과 판단이 완전히 다르게 되지. 월남은 햇빛부터가 우리하고는 다른데 그 따가움을 직접 느껴보지 않고 무슨 기사가 되겠어."

"그렇지만 쓰고 싶은 대로 쓸 수 없을 것 아니겠어요."

"그렇더라도 가야지. 어차피 신문기자란 쓰고 싶은 것을 다 쓰는 건 아니니까."

"그래요, 기사 내용이 어떻게 되든 한번 갔다 오긴 갔다 와야지요."

박영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 왔습니다. 기자 양반이신 모양인데, 월남 구경 한 번은 할 만하죠, . 나도 월남 참전 용산데, 내가 보기로는 미군이 이길 가망이 없어요. 베트콩 개네들이 얼마나 독종인데. 하여튼 두고 보슈."

돈을 받으며 운전수가 갑자기 한 말이었다. 그리고 차는 부르릉 떠나고 말았다 그 느닷없는 말에 원병균과 박영자는 서로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21. 떨어진 꽃잎

골목의 한옥들 담 너머로 봄이 만발해 있었다. 나무마다 꽃이 피거나 유록색 잎들이 봄 햇살을 받아 곱고 싱그럽기 그지없었다. 김명숙은 그런 골목이 눈설어 자꾸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몇 달 만에 찾아오는 길인데다 골목도 집들도 어슷비슷해서 어릿어릿 헷갈리고 있었다.

저런 집에 사는 사람들은 무슨 근심 걱정이 있을까. 어떤 사람들이 저런 집에 사냐. 우리 사장 같은 사람일까. 저런 집 자식들은 얼마나 좋을까. 고생 모르고 원하는 대로 학교 다니고, 멋도 내고..... 참 세상은 고르지도 못해. 똑같은 사람인데 .....’

김명숙은 기와집들을 보면서 또 자신도 모르게 이런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머리를 두 갈래로 묶고 허름한 비닐 손가방을 든 그녀의 입성은 추레했다. 낡은 원피스의 무늬가 하필 꽃무늬라서 색바랜 꽃송이마다 얽힌 가난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구두 다악소, 신 다악소."

검정 누더기에 구두닦이통을 든 소년이 기운 빠진 쉰 소리를 뽑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김명숙은 집을 찾다 말고 그 소년을 쳐다보았다. 옷에 못지않게 땟국이 전 소년의 핏기 없는 얼굴에는 굶주림이 너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세상에, 재는 엄마 아빠가 다 없나.....’

김명숙은 그 소년의 모습에서 문득 막내 동생 선진이를 떠올렸다. 가슴이 찡 울리며 아이가 더 불쌍해졌다. 그녀는 자신의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자신의 구두는 약칠을 할 필요가 없는 싸구려 비닐구두였다.

경제발전이니 잘살게 되고 있느니 떠들어대는 것 다 헛소리야. 우리 사장 같은 돈 있는 사람들만 더 배불러지는 세상이지. 거 뭐라더라, 요새 유행하는 유식한 말로 부, .....’

지나쳐가는 구두닦이 소년을 바라보며 김명숙은 생각날 듯 말 듯 맴도는 말을 잡아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신경을 모을수록 그 말은 숨바꼭질하는 것처럼 자취가 감감해졌다. 그녀가 생각해 내려고 하는 말은 부익부 빈익빈이었다.

김명숙은 자신의 무식이 또 가슴 아팠다.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진다는 그런 유식한 말들을 제때제때 알아듣고 척척 쓰고 싶었다. 그래서 고등과 야학에 다니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대학생들이 가르치는 야학은 공짜였지만 공장에서는 매일같이 야근을 시키기 때문에 발길을 할 수가 없었다. 김명숙은 네댓 집을 기웃거려 나복녀와 박보금이 합숙하고 있는 집을 겨우 찾아냈다. 그 집은 다른 집들과는 달리 대문 한쪽이 반쯤 열려 있었다. 도둑이 들어봐야 가져갈 게 없다는 뜻 같기도 했다. 김명숙은 쭈뼛거리며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예닐곱 명의 아가씨들이 마루에 나앉아 있었다. 김명숙은 멈칫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잠옷 바람인데다 담배를 빨아대고 있었다.

"어머, 명숙아!"

김명숙을 먼저 알아본 것은 박보금이었다.

"이 지집애야, 얼굴 잊어먹겠다. 이게 얼마 만이냐, 그래."

박보금이 고무신을 끌며 달려 나왔다. 김명숙은 그런 박보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왜 그러고 섰어? 어서 들어가자."

반가움이 넘친 박보금이 김명숙의 손을 잡아끌었다.

"너 이게 뭐야?"

김명숙의 눈길이 박보금의 왼손으로 옮겨졌다. 그녀의 두 손가락사이에는 담배가 끼워져 있었다.

", 난 또 뭐라고. 이거 놀랄 것 없어. 한심한 술집 인생에 담배라도 안 피우면 어찌 살겠니. 다 그런 거야."

박보금은 보란 듯이 담배를 빨아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너무 변해버린 박보금의 모습에 김명숙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복녀도 그래?"

"복녀 개 여기 없어."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김명숙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니까 음..... 아니야, 나가서 얘기해. 나 금방 화장할 테니까 들어가서 조금만 기다려라."

"괜찮아, 빨리 하고 나와. 나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김명숙은 아가씨들 쪽을 눈짓하며 상을 찌푸렸다. 아가씨들은 모두 이쪽을 보며 뭐라고 수군수군하고 있었다. 김명숙은 나복녀가 여기 없다는 것에 불길한 생각이 든 데다가, 멋 부리는 술집 아가씨들 앞에 자신의 몰골을 내보이며 눈총 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럼, 잠깐만 기다려. 나 금방 하고 나올 테니까."

박보금이 돌아서자 김명숙은 대문 밖으로 나왔다.

나복녀가 왜 여기를 떠났는지 ..... 어디로 갔는지 .....’

이상하게도 불안감이 자꾸 커지고 있었다.

왜 복녀 혼자만 떠났을까?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 더 좋은 데를 찾아 갔나? 아니야, 더 좋은 데가 있으면 보금이하고 함께 갔겠지. 생김도 보금이가 더 예쁘고, 활달하기도 보금이가 더 활달한데.’

불안과 의문이 자꾸 커져 김명숙은 발끝으로 땅의 같은 자리를 쉴 새 없이 차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지? 화장이고 뭐고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지루한 감을 느끼고 있던 김명숙은 대문을 나오는 박보금을 보고 속으로 놀랐다. 박보금의 모습은 지난번보다 훨씬 더 달라져 있었다. 옷이 한결 화사했고, 화장도 너무 야해져 있었다. 한눈에 술집 아가씨라는 표가 났다. 김명숙은 그렇게 변한 박보금이 신경에 거슬리고 마땅찮았지만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건 나복녀의 일에 비해 하찮았고,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이미 술집물이 들어버린 박보금이 고칠 것 같지도 않았다. 큰길로 나와 김명숙은 박보금이 앞서는 대로 다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커피라는 쓴 물 한 잔 마시고 아까운 돈 버리느니 그 돈으로 빵을 먹는 게 훨씬 실속 있는 일이었지만 김명숙은 박보금에게 궁색스럽게 보일까 봐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글쎄 있잖아, 복녀가 글쎄 펫병쟁이였어, 글쎄."

박보금은 자리에 앉자마자 연달아 글쎄, 글쎄 해가며 놀란 기색으로 수다스럽게 말했다.

"펫병쟁이?"

김명숙은 모르는 척 꾸몄다. 그러나 속으로는 가슴이 쿵 울리며, 그게 들통 나 무슨 일이 생겼구나, 하는 생각에 휘감겼다.

"그래, 너도 그거 몰랐지? 글쎄 개가 하필 손님하고 자다가 피를 토했잖니. 그러니 어찌 됐겠어."

"손님하고 자다니? 남자하고?"

김명숙이 놀란 눈으로 박보금을 쏘아보았다.

"어머, 나 좀 봐."

박보금이 당황스럽게 손끝으로 입을 가렸다. 그때 다방 아가씨가 차를 주문받으러 왔다. 고개를 떨군 김명숙은 아랫입술을 물고 있었고, 박보금은 서둘러 커피 두 잔을 시켰다.

"명숙아, 넌 몰라서 그러는데, 술집이라는 데가 월급이 따로 없어. 손님들이 주는 팁이 수입인데, 손님들한테 제아무리 애교 떨고 알랑방구 뀌고 해서 기를 쓰고 팁을 모아봤자 그걸로 한 달 살기는 어림도 없어. 옷값들 빚진 것 갚아야지, 방세, 식대 내야지. 미장원비, 목욕 값 날마다 나가지, 화장품 사야지. 유행 지나면 또 옷 해 입어야지, 그러다 보면 어쩔 수가 없어. 아니야, 아니야 그것보다도, 더러워서 그 짓 안 하려고 했다간 맞아 죽어. 지배인은 장사 잘되게 하고 단골손님 끌려고 손님들이 눈짓만 하면 아가씨들을 붙이는 거야. 그 말을 안 들었다간 골로 가는 거야, 우린 속았어. 사기당한 거야. 복녀하고 나하고 수없이 후회했지만 여길 빠져나갈 수가 없었어. 감시가 심하고, 잡히면 죽어. 명숙아, 우릴 이해해 줘."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떨리며 잦아들던 박보금은 마침내 눈물을 떨구었다.

"울지 말아. 괜히....."

김명숙은 나복녀와 박보금이 너무 가엾고 불쌍해서 가슴 아리며,

"근데 복녀는 어찌 됐어?“

그녀는 더욱 불안해진 마음을 드러냈다.

"그거 있잖아, 그런 펫병쟁이 더 일 시킬 수 없다고 지배인이 어디로 보냈어."

"어디로?"

"그건 나도 잘 몰라 "

"뭐야? 너 그게 말이 되니? 어디로 보냈는지 알아봐얄 것 아냐."

김명숙의 얼굴이 굳어지며 다잡고 들었다.

"너 모르는 소리 말어. 그런 것 알려고 들었다간 지배인한테 맞아 죽어. 애들이 하는 말로는 여기보다 나쁜 곳으로 팔려갔을 거래."

"뭐라구? 사람을 팔아?"

"복녀가 빚진 것 있잖아. 그 돈 받고 넘긴 거지 뭐."

"세상에! 거기가 어딘데?"

"....."

", 어서 말해 봐. 거기가 어디야?"

김명숙이 다그치며 다가앉는 바람에 탁자 위의 커피 잔이며 물컵들이 흔들렸다.

", 소리 지르지 말어. 사람들이 쳐다봐. 잘은 모르는데 애들 말로는 사창굴 같은 델 거래."

"어머, 세상에 ....."

한숨을 토하는 김명숙의 어깨가 처져 내렸다. 박보금은 죄지은 것처럼 김명숙의 눈치를 살피며 커피 잔을 들었다.

"나 이 일 경찰서에 알릴 거야."

김명숙이 불현듯 말하며 입을 앙다물었다.

", 경찰?"

박보금은 코웃음을 흘리고는,

"경찰 좋아하시네. 웃기지 마, 경찰이 우리 같은 것들 사람 취급하는 줄 아니? 너 여지껏 서울살이 말짱 헛했구나? 그따위 철없는 소리나 하고 앉았게. 어디 백 번 찾아가 봐. 되는 게 뭐가 있나. 미안하지만 그것들은 다 있는 것들하고 한통속이야. 정신 차려, 이 기집애야."

그녀는 눈물을 떨굴 때와는 달리 싸늘한 냉소를 머금은 채 암팡지게 말했다. 김명숙은 따귀를 호되게 얻어맞은 기분으로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박보금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지난날 차장을 할 때도 여러 번 당해보았고, 공장으로 옮겨서도 겪는 것이지만 역시 경찰은 사장님네들 편이었다. 하도 암담하고 급한 마음에 경찰이라는 말이 불쑥 나온 것뿐이지 언제라고 그들을 믿어본 적은 없었다. 김명숙의 손등에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녀의 눈앞에는 병든 나복녀의 초췌한 모습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돈도 벌고 병도 고치겠다고 떠나더니 병은 더 도져가지고 어디로 팔려간것인지..... 도시로 뜨자고 꼬드긴 것이 그렇게 후회스럽고 죄스러울 수가 없었고, 그때 끝까지 붙들지 못한 것도 그렇게 아쉽고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울지 마. 다 팔자 사나운 게 죄지 뭐."

박보금이 목멘 소리를 하며 김명숙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떠난 지 얼마나 됐니?"

김명숙이 제 손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며 물었다.

"그게 그러니까..... 한 서너 달 돼."

김명숙은 자신이 공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나복녀를 찾아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간에 복녀가 자신에게 편지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넌 그대로 뻐스 타고 있니?"

"아니. 옮겼어, 공장으로."

"무슨 공장?"

"가발공장."

", 가발공장? 그거 외국으로 엄청 잘 팔린다며? 월급 많이 받니?"

"아니 차장이나 그게 그거야."

"그래, 여기나 저기나 사장이란 것들이 즈네들 배 채우기에 바쁘지 하바리 인생을 생각해 줄 리가 있니. 가자, 기분 잡치는데 영화나 한 편 보게."

"싫여, 너도 정신 차리고 돈 모아."

냉정하게 자르는 김명숙의 얼굴에 슬프고 쓸쓸한 기색이 엇갈리고 있었다.

 

한편, 나복녀는 청량리 사창가로 팔려갔다가 거기서도 각혈을 해 병이 드러나자 다시 팔려 동두천 기지촌으로 흘러와 있었다.

", 복녀야. 메리야, 뭐 하고 자빠졌어. 빨랑 병원에 가서 주사 맞고 오잖구. 이 미친년들아, 그렇게 샤꾸 끼워서 하라는데두 병 걸려가지고 누구 망쳐먹겠다 그거야!"

독하게 생긴 40대 여자가 고무신을 신으며 목청껏 소리치고 있었다.

"아줌마, 너무 그러지 말아요. 누군 뭐 병 걸리고 싶어서 걸린 줄 아세요? 샤꾸는 아줌마보다 우리가 더 끼우고 싶다구요. 샤꾸 안 끼우면 성병만 걸리나요? 더 재수 없으면 임신도 하지요. 주사 맞고 수술하고 해서 아픈 손해에다 치료비로 빚까지 늘어나 우린 이중삼중으로 손해만 보니까 꼭 샤꾸를 끼우려 한다구요. 근데 양코들이 그것 끼고는 안 하겠다고 빤스 줏어 입는 판엔 우리가 어쩌겠어요. 우리가 방에까지 들어온 손님 놓쳐 봐요. 아줌마가 가만히 있겠어요? 우리 잡아먹으려고 펄펄 뛸 거 아니에요? 아줌마도 양심 좀 있어보세요."

쪽마루에서 담배를 빨고 있던 아가씨가 발딱 일어나 이렇게 대거리를 하고 들었다. 허리에 한쪽 팔을 올리고 버티고 선 그 아가씨는 피부가 검은데다 얼굴 생김생김도 흑인인 혼혈아였다.

"메리 너 건방지게 어디다 대고 그따위 소리야. 너 삼춘한테 뜨거운 맛봐야 그 주둥이 얌전해지겠어?"

포주가 험한 얼굴로 표독스럽게 내쏘았다.

"네에, 죽이세요."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메리의 기는 한풀 꺾여지고 말았다. 삼촌이 그녀들을 손아귀에 넣고 감시하는 주먹패의 왕초였다. 펌프 옆에서 속옷을 빨고 있던 나복녀는 생기라고는 없는 지친 눈길로 메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메리가 그래도 그런 말이나마 하고 나설 수 있는 것은 찾는 손님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 생김 탓인지 메리를 좋아하는 것은 모두 흑인이었다. 메리도 백인보다는 흑인을 더 좋아했다. 나복녀는 그렇게 한 번이라도 기를 세워볼 수 있는 메리가 은근히 부럽기도 했다.

"복녀야, 너 빨리 일어나지 못해!"

포주가 빠락 소리 질렀다. 나복녀는 빨래를 짜며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몸에 기운도 없었고, 이제 포주 같은 것은 별로 무섭지 않았다. 아무 가망도 없는 생활 속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마음을 떠난 지 오래였다.

"언니, 가자구. 딸라 버는 기계가 두 대씩이나 고장 났으니 우리 아줌마 환장하게도 생겼잖아. 다른 다섯 대 가지고야 아줌마 직성이 풀리겠어?"

메리가 고무신을 찍찍 끌며 대문 쪽으로 나갔다.

"저년 저거 시건방지게 주둥아리 놀리는 거 보게. 알아서 해, 일 못하고 공치면 니년들 빚 늘어 니년들만 손해니까 썅년들, 평생 이 구덩이에서 썩어 죽을려면 어디 니덜 맘대로 해봐."

포주가 내뱉는 이 말에 몸서리치며 나복녀는 메리를 따라 대문을 나섰다.

"아이구, 썅년은 누군데 우리보고 썅년들이래. 우리 피 빨아 즈이 딸 년은 서울에서 대학 보내는 걸 자랑하는 저게 사람이야? 저년은 베락맞어 죽을 거고 딸년은 미군한테 강간이나 당해야 해. 틀림없이 그리 될 거야."

골목을 벗어나며 메리는 침을 내뱉었다.

"어머 얘, 누가 듣겠다."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나복녀는 속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메리는 머리카락까지 곱슬곱슬 감겨드는 것이 영락없이 흑인이면서도 한국말을 그리 야무지게 해대는 것을 들으며 나복녀는 가끔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이상스럽고 신기한 느낌이 들고는 했다. 그런데 중학교도 안 나왔다는 메리는 꼭 미국사람들처럼 혀를 부드럽게 굴리며 영어도 곧잘 했다. 사람들은 피는 못 속이는 거라고 했다. 젖이 유난히 크면서 허리가 가는 것과 함께, 그런 메리의 유일한 꿈은 어떻게 해서든 흑인 하나만 잘 물어 미국으로 가는 것이었다.

"난 고아원에서 국민학교에 다녔는데, 4학년 때 모래로 팔이고 장딴지고 피가 나도록 문질러댔어, 그래도 피부는 아이들과 같아지지 않고 검은색 그대로였어. 내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죽기보다 싫은 게 뭔지 알아? 튀기라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놀리고 하는 거야. 난 미국에 가서 감자껍질이나 벗기는 신세로 천대받아도 좋고, 버림받아도 괜찮아. 어쨌든 미국에만 가면 돼. 그럼 많은 흑인들 틈에 섞여버리니까 여기서처럼 구경거리 되는 일은 없어지거든."

언젠가 술을 마신 메리가 한 말이었다. 열일곱 살인 그녀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몰랐고, 메리라는 이름도 누가 지어준 것인지 몰랐다. 나복녀는 그때부터 그녀의 꿈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놈의 주사는 왜 이리 아픈지 몰라."

먼저 주사를 맞고 나오는 메리가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엉덩이를 문지르고 있었다. 나복녀는 스산한 웃음을 흘리며 포장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언니, 우리 어디 가서 맛있는 거 먹고 가자."

병원을 나오면서 메리가 나복녀의 팔짱을 끼었다 나복녀는, 네가 무슨 돈이 있느냐는 눈길로 메리를 쳐다보았다.

", 거 잘 웃는 로버트 하사 있잖아. 걔가 따로 팁 준 거 있거든. 이건 비밀인데, 걘 꼭 팁을 준다니까 흑인들치고 얌체가 별로 없지만 걘 특히 괜찮은 애야."

"그래? 널 좋아하니? 그랬음 좋겠는데."

표정 없이 핼쑥하던 나복녀의 얼굴이 달라졌다.

"모르겠어. 그냥 맘씨가 좋아 날 동정하는 건지 어쩐지. 사랑한다는 표시 같은 건 안 해. 하긴 걔네들도 남잔데 왜 하필 걸레 같은 양갈보 좋아하겠어. 즈이 나라에 가면 깨끗한 애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아무나 하나 물려고 하는 내가 미친년이지."

메리가 푹 한숨을 쉬었다.

"아니야, 그래도 결혼해서 떠나는 여자들이 있잖아. 넌 나이도 어리니까 얼마든지 희망이 있어."

"그렇지도 않아, 언니. 요새 웃기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알아? 글쎄 미국 이민바람이 불면서 대학생년들이 양코들한테 꼬리를 치고 나서는 판이래. 엉뚱하게 우리 경쟁자가 생겼는데, 우리 같은 것들이 어떻게 그 잘난 대학생년들한테 당하겠어? 세상 참 웃기지도 않는다구."

메리가 어처구니없어 하며 코웃음을 쳤고,

". 미국 좋아하시네."

나복녀는 불쑥 솟은 역겨운 생각에 이렇게 내뱉었다. '좋아하시네' '웃기지 마' 하는 묘한 뜻의 말은 누구의 입에나 오르내리고 있는 유행어였다.

"그렇다니까. 미국이야 하면 너나 나나 환장들이야. 거 뭐야 김신존가 뭔가 내려온 다음부터 전쟁 피해 미국으로 도망가려고 야단들이잖아. 저기 쎄븐크럽 사장도, 뉴욕양복점 사장도 이민 수속하고 있대. 다 돈 싸 짊어지고 즈네들만 살자고 내빼는 건데, 미국은 얼마나 좋겠어. 점점 더 부자가 되는데."

", 넌 모르는 게 없구나. 그래, 돈 없는 사람은 미국 이민도 못 간대더라."

나복녀는 긴 한숨을 쉬었다.

"언니, 저 시장 통에 가서 우리 순대에 족발 먹고 가자."

"돈 있을 때 아껴."

"그런다고 빚 갚아지나? 맨날 김치 깍두기만 먹으니까 속 쓰려서 못 살겠어. , 언니도 좀 잘 먹어야 해. 몸이 그리 약해가지고 어떻게 살아."

메리는 나복녀의 팔을 힘지게 끌었다. 나복녀는 가슴 뭉클해지며 메리를 따라 발길을 옮겼다.

"자아, 많이 먹어. 근데 왜 언니는 나 빼놓고 다른 언니들하고는 통 말도 안 하고 그래?"

"왜 누가 흉보던?"

"아니 흉보는 건 아니구, 혼자 떨어져 있는 언니가 힘들어 보여서 그래."

"글세, 무슨 살 재미가 있어야지. 나 이 세상 살아갈 자신이 하나도 없어."

나복녀의 얼굴에 쓸쓸한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언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나 같은 사람도 사는데. 언닌 고향에 부모 형제가 있을 거 아냐. 힘내라구, . 이거 족발 먹어봐 참 맛있네."

메리는 눈치 빠르게 말을 돌리며 족발 쪽을 나복녀의 손에 들려주었다.

"글쎄 언니, 내 말 좀 들어봐. 어떤 밤나비가 국제결혼에 꼴인해서 미국엘 갔더래. 근데 글쎄 말이 잘 안 통하고 남편이 무시하고 하는 것도 문젠데, 더 문제는 김치가 먹고 싶고 된장찌개가 먹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대. 거기다가 매일 마시는 우유가 지겹고 지긋지긋해지다가 결국에는 막 토하기 시작했대. 그래 더는 살 수가 없어서 남편한테 한국에 보내달라고 사정사정했다는 거야. 그 여자는 소원대로 한국에 돌아왔는데, 근데 웃기는 것 좀 봐. 몇 달이 지나자 그 여잔 글쎄 김치 된장찌개가 싫어지고 미국에서 신물 냈던 우유와 베이콘 같은 게 먹고 싶어 환장하기 시작했대. 호호호, 이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야 그래."

나복녀는 메리를 따라 건성으로 웃으며 집안 식구들이며 김명숙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움과 서러움이 주체할 수 없도록 사무쳤다. 이 지경이 되려고 집을 떠나온 게 아니었다. 그때 김명숙의 만류를 들었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다 소용없는 후회였다. 병은 자꾸 깊어지고 자신은 또 어디로 밀려가야 하는 것인지 ..... 헌 걸레쪽같이 되어버린 몸으로 이 어렵고 무서운 세상을 더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잠을 자다가 그냥 그대로 깨어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언니, 빨리빨리 더 먹어."

"아니야, 많이 먹었어. 너 다 먹어."

"언닌 그러니까 몸이 약하지."

나복녀는 먹성 좋은 메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서 그녀가 미국으로 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 나복녀는 소변검사를 받았다. 성병이 치료되어 그날로 영업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초저녁부터 연달아 미군 셋을 치러내야 했다. 너무 힘겨워 가슴이 답답해지며 기침이 솟고 머리가 어질거리는 현기증까지 일어났다.

"언니, 양코들이 왜 이렇게 밀려드는지 알아? 그동안 언니하고 나하고 며칠 일 못한 걸 아줌마가 본전 빼려는 것야. 글쎄, 아줌마하고 삼춘하고 짜고 양아치새끼들 풀어서 싸구려로 양코들 끌어 모아 언니하고 나한테 마구 앵기는 거라니까. 아줌만 악질 중에 상악질이야."

변소 앞에서 마주친 메리가 속삭인 말이었다. '긴 밤'까지 여섯 사람에게 시달린 나복녀는 아침에 변소에서 나오다가 기침을 하기 시작해 쪽마루를 붙들고 검붉은 피를 울컥울컥 토해냈다.

"얘가 왜 이래, 얘가! , , 병자지? 그치? 너 폐병 환자지?"

놀란 포주 여자가 소리치고 있었다. 점심나절이 다 되어서야 나복녀는 가까스로 몸을 가누고 일어났다.

"언니 어떡해. 아까 아줌마하고 삼춘이 그러는레 언니를 딴 데로 넘기겠대. 이 일을 어쩌면 좋아."

메리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말했다.

"그래, 알아. 당연한 거야."

창백하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얼굴로 나복녀는 흐릿하게 웃으며 메리의 손을 잡았다.

"언니가 왜 그런 병을....."

두 줄기 눈물이 메리의 검은 볼을 타고 내렸다. 나복녀는 오후에 깊이 감추어둔 돈을 챙겨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통 잠을 못 자요. 잠자는 약 좀 주세요."

약사는 수면제 네 알을 내밀었다.

"왔다 갔다 귀찮은데 네 개 더 주세요."

그렇게 서너 군데 약국을 돌아 나복녀는 스무 개가 넘는 수면제를 수중에 넣었다. 그날 밤 포주는 나복녀의 방에 손님을 들이지 않았다. 밤이 깊어 모두 잠자리에 들자 나복녀는 화장대 서랍 밑에 숨겨두었던 봉지를 꺼냈다. 전부터 사 모았던 수면제 스무 알이었다. 그녀는 마흔 개가 넘는 수면제를 세 차례로 나눠 다 삼켰다. 그리고 반듯하게 누웠다.

 

 

22. 군번 없는 군인

군수품을 가득 실은 일본제 8톤 트럭들은 그 위압적인 생김만큼 맹렬한 속도로 어둠 속을 달리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어두워지면서 트럭들은 먹이를 쫓아 질주하는 맹수들처럼 변했다. 그러나 트럭들이 전속력을 내는 것은 맹수들과 정반대의 입장 때문이었다. 베트꽁의 기습을 피하려는 것이니까 쫓는 것이 아니라 쫓기는 형축이었다. 문태복은 습관적으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대며 속이 꼬이고 비비틀리는 울화를 씹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의 판은 속임수가 끼여든 것이 분명했다. 그 여우 김가 놈하고 능구렁이 윤가 놈이 짜지 않고서야 막판에서 그렇게 장땡 광땡이 연달아 붙을 리 없었다. 두 놈이 노름판에 꼭 함께 끼는 것도 이상했고, 판돈 작은 판에서는 잃기도 하지만 판돈이 큰 판에서는 판판이 따는 것을 보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눈 부릅뜨고 살폈지만 무슨 꼬투리를 잡지 못했으니 판을 엎을 수도 없고, 고스란히 빈손을 털어야 했다. 문태복은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를 불끈 들었다가 놓았다. 그와 동시에 가슴에서 솟아오른 열기가 뜨거운 한숨으로 터져 나왔다. 그 피나는 돈을 날렸으니 ..... 빌머먹을, 꼼짝없이 이놈의 월남 기름밥을 1년 더 먹게 생겼으니 .....

콰광 쾅!

"어쿠, 이게 뭐야!"

문태복은 질겁을 하며 브레이크를 밟아댔다. 질주하던 차량들이 급브레이크 잡는 소리가 날카롭게 어둠 속에서 뒤엉키고 있었다.

, 콰당!

문태복은 철모의 턱끈을 조이며 옆자리에 눕혀놓았던 M16을 재빨리 집어 들었다. 베트콩들이 기습하며 쏘아대는 박격포탄이 분명한데, 그것이 앞뒤 어디서 터지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새끼들, 쥐방울만한 것들이 독종은 독종들이야. 미국을 상대로 끝도 없이 덤벼들다니, 하여튼 예삿것들이 아니야.’

문태복은 기습을 당할 때마다 하는 생각을 또 하며 차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무슨 명령이 떨어지면 행동을 취할 준비였다. 처음 몇 달 동안에는 정신없이 허둥거렸는데 1년이 넘다 보니 그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 !

"콩이다. ! 하차, 하차!"

"허리 업, 허리 업! (빨리빨리!)"

숨 가쁜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한국 헌병과 미군 헌병의 외침이 뒤섞이고 있었다.

콰당, , !

"왼쪽이다. 왼쪽! 전원 사격 개시 ! 전원 사겨억!"

다급한 사격 명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여기저기서 기관총의 연발음이 다다다다..... 콩을 볶기 시작했다. 스무 대의 트럭 앞과 뒤, 그리고 다섯 대 간격으로 사이사이에 끼어 호위하던 헌병 지프들의 반격이었다. 차에서 뛰어내린 문태복은 길바닥에 납작 엎드려 오른쪽으로 기기 시작했다. 포탄 터지는 소리가 진동하고, 기관총들과 Ml6의 칼칼한 연발음들이 어둠을 갈가리 찢어대고 있었다. 문태복은 오른쪽 길옆의 비탈로 굴러 내렸다. 갑자기 어둠이 걷혔다. 조명탄들이 그 푸르스름한 몽환적인 빛을 발산하며 새의 느린 날갯짓처럼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조명탄들은 쉴 새 없이 터지며 어둠과 싸우고 있었다. 그 밝은 불빛 아래 베트콩의 모습은 보이지 않은 채 박격포탄만 계속 날아오고 있었다.

그래, 잘들 싸워봐라 내 임무야 운전하는 거니까. 순진하게 괜히 총질하고 나섰다가 개죽음당하면 누구 손해냐. 빌어먹을, 전방도 후방도 없는 웃기는 전쟁이야, 이건.’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비탈에 엎드린 문태복은 느긋하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1년 넘긴 고참 근로자들치고 그렇게 몸을 사리지 않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신참들이나 허겁지겁 총질을 하고 나섰다. 자신도 신참 시절에는 겁에 질려 기를 쓰고 총질을 해댔었다.

"! 콩이다! 오른쪽에 콩이다!"

문태복은 갑자기 외치며 비탈을 기어올랐다. 그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때 벼들이 무성한 논에 거뭇거뭇한 것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콩이다, ! 오른쪽 오른쪽!"

문태복은 길바닥에 엎어지며 기를 쓰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요란하게 뒤엉킨 폭음과 총소리 속에서 그의 외침은 모깃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중간쯤에서 트럭에 박격포탄이 명중하며 차가 불붙기 시작했다. 조명탄들이 오히려 적에게 도움을 준 셈이었다.

"오른쪽에 콩이다! 오른쪽, 오른쪽!"

문태복은 허둥지둥 길바닥을 기어 왼쪽으로 가며 외쳐댔다. 그러나 기관총들의 속사음은 왼쪽으로만 휩쓸려 있었다. 박격포탄들은 분명 그쪽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마침내 오른쪽에서 총알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저기 오른쪽에 콩이다!"

"턴 라이트! 턴 라이트! (오른쪽으로 돌려!)"

"위생병, 위생병!"

이런 외침들이 뒤엉키는 속에서 또 하나의 트럭이 박격포탄에 박살나며 불타기 시작했다. 문태복은 이제 왼쪽 길가의 둔덕에 머리를 박고 엎드려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기관총들이 난사해 대는 총탄들은 오른쪽 논으로 소나기가 되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연달아 터지는 조명탄의 불빛 아래 드러난 무성한 벼들은 또 다른 정글이었다. 베트콩들은 그 어디에 몸을 숨겼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박격포탄은 더 터지지 않고, 이쪽에서 갈겨대는 총소리들만 조명탄 불빛 저쪽의 어둠을 물어뜯고 있었다.

"출발 준비하라! 전원 출발 준비 !"

문태복은 비틀어진 철모를 고쳐 쓰며 잽싸게 차로 올랐다. 운전대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그는 비로소 오른손에 들린 Ml6의 무게를 느꼈다. 빈자리에 총을 팽개치며 내뱉었다.

"에이 옘병, 돈 벌기 힘드네."

그들은 미군부대에 도착해서야 한국인 운전수 한 명이 죽고, 미군 헌병 하나가 다리에 총상을 입은 것을 알았다. 죽은 사람은 딸만 넷이라는 신참 이 씨였다. 문태복은, 그 사람이 너무 겁 질려 몸 사릴 줄을 모르고 총질을 하고 나선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신참 때는 최선의 공격이 최대의 방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Ml6을 연발로 긁어대게 마련이었다. 복부를 맞으면 등 뒤로 창자가 다 터져나가 버리고, 팔에 맞으면 팔이 그대로 떨어져나가 버린다는 Ml6의 위력을 믿었고, 베트콩들의 구식 소총에는 끄떡없다는 방탄조끼의 효력을 믿었다. 그러나 Ml6도 방탄조끼도 몸을 사리고 숨는 것을 당하지 못했다.

이 씨의 죽음은 합숙소 안을 침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고작 한나절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24시간 운전 근무에 시달리고, 24시간 휴식에는 잠을 자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죽는 것이 예사가 되어 있는 전쟁에 휘말리며 어느덧 죽음에 둔감해져 있기도 했다. 그들이 표하는 구체적인 애도는 월급에서 일률적으로 떼는 몇 푼씩의 조의금이었다. 회사에서는 시신이 언제 실려가는지 알려주지도 않았고 근로자들은 일에 쫓기느라고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죽은 사람의 목숨은 보험회사가 내놓는 보상액과, 회사와 동료들의 조의금을 합쳐 보통 800달러에서 1천 달러까지로 계산되었다. 그 제반 비용이 싼 맛에 미군은 모든 군수품 수송을 한국 회사에 맡기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문태복은 오전 내내 잠을 자고 점심때가 다 되어 눈을 떴다. 같은 막사 22명에서 일을 나가지 않은 절반 정도도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참이었다.

"이거 원 기분 찜찜해서 살겠나. 오후엔 술이나 퍼야지 안 되겠어."

누군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이 씨가 눈치 없이 총 들고 설쳤었나? 그리 돈을 아끼고 하더니만."

"복 없고 운수 없는 사람이지 딸년들 넷 키우려다 베트콩 밥이 됐으니."

"다 잊어버려. 인명은 재천이니까."

"좌우간 이놈의 군번 없는 군인생활 아슬아슬해서 못살겠어. 빨리 날라야지."

방탄조끼에 철모를 쓰고, 총까지 휴대하고 운전을 해야 하는 자신들을 그들은 '군번 없는 군인'이라고 불렀다.

"그래도 어디 이만한 벌이가 쉽나. 요령껏 눈치껏, 총알 피해 다니며 한밑천씩 끌어 모아서 튀는 게 장땡이지."

그들의 월급은 15만 원 정도였다. 그 액수는 서울의 운전수들보다 여섯 배 이상 많았다.

", 좋아하지 말어. 다 남 좋은 일 시키고 있는 거니까. 우린 앞으로 나서서 베트콩들 총알 앞에 가슴팍 내밀고 죽을 똥 싸고 있는데 뒤에 편안하게 앉아 배가 터지게 그 돈 다 챙기는 건 누구야? 그 뚱보 사장 나리 또 납셨다며?"

"당연히 오셨겠지. 007가방 가지고 와서 100딸라짜리로만 가득 채워가는 그 기분이 얼마나 째지겠어? 탄손누트 공항에서 비행기를 탈 때까지 양키 MP들이 경호까지 해준다니 어디 대통령이 부럽겠어?"

"괜히 맥 빠지고 김새는 소리들 작작하고 맛대가리 없는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구. 누가 말리지 않으니까 억울하면 출세하구, 배알 꼴리면 사장 되라니까."

"그래, 떠들어봐야 입만 아프지. 우린 그저 우리 몫이나 잘 챙겨야지."

한바탕 말잔치로 잠기운을 씻어낸 그들은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문 형, 안 나가? 기분도 찜찜하고 지랄 같은데 랑한테 가서 점심 먹으면서 술 한잔하는 거 어때? 문 형 쌀국수 좋아하잖아."

"랑이 싫어하지 않을까?"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황동일을 쳐다보는 문태복의 얼굴은 밝아졌다.

"싫어하기는. 랑은 나한테 꼼짝못하는 것 잘 알잖아."

얼굴 매끈하게 생긴 황동일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랑은 그와 동거하는 여자였다.

, 좋아하지 말아라 월남 여자들이 살기 급하니까 꼼짝못하는 척하는 거지, 속맘도 그런 줄 아냐. 월남 여자들 작고 가늘가늘하다고 우습게 봤다간 큰코다친다. 베트콩에 여자들이 날로 늘어가고, 남자와 똑같이 전투를 한다는 걸 들어봐.’

문태복은 구두끈을 매면서 이런 속말을 하고 있었다. 자신은 여자가 열흘에 한 번 정도밖에 필요하지 않은데, 황동일은 하루를 넘기면 견딜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외박이 금지되어 있는데도 동거하는 여자를 만들었다. 창녀촌은 성병도 위험하고 목숨도 위험할 뿐 아니라, 이틀거리로 바쳐야 하는 돈이 그게 그거라는 것이었다. 계산치고는 정확해서 문태복은 뭐라고 할 말이 없는 채 월남의 무성한 정글처럼 왕성한 황동일의 성욕이 부럽고도 신기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성욕 강한 사람은 황동일만이 아니었다. 합숙소 300여 명 중에서 열댓 명이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

문태복과 황동일은 합숙소를 벗어나자마자 월남의 명물인 시클로를 잡아탔다. 하얗게 내리꽂히는 칼날 같은 햇살을 어서 피해야 했다. 월남에서는 하얗게 타는 해가 내쏘는 햇살에 눈이 시다 못해 아렸다. 손님 둘이 탈 수 있는 자리가 앞에 있고, 뒤에서 페달을 밟아 전진시키는 삼륜자전거인 시클로는 택시에 비해 요금이 아주 싼데다가, 걷는 것보다는 몇 배나 빨라 이모저모로 좋은 교통수단이었다.

"저치들 저거 또 한탕씩 하려고 나왔군. 저것들이 은근히 부럽다니까."

황동일이 길 건너를 턱짓했다.

"글쎄 말야. 우린 영어를 씨부릴 줄 알아야 말이지."

길 건너 시장 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서너 명의 남자들은 제각기 봉지 하나씩을 껴안고 있었다. 그들은 양담배나 양주를 암거래하려고 나온 미국 회사에 근무하는 한국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런 물건들을 내다 팔아 월남 여자와의 동거비를 장만하고 있었다. 미국 회사의 근로자들은 거주가 자유로워 월남 여자들과 동거하는 일이 유독 많았다. 길이 번화해질수록 오토바이, 자전거, 시클로, 자동차, 마차까지 뒤죽박죽이 되어 오가고 있었다. 그 어수선하고 번잡한 거리에서는 전쟁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가끔 먼 메아리처럼 포성이 둔중하게 울려오는가 하면, 월남전을 상징하는 헬리콥터들이 그 어설프고 불안한 프로펠러 소리를 길게 끌며 멀리 날아가고는 했다.

"따이한 넘버원, 양키 고홈."

시클로 운전수가 돈을 받으며 불쑥 한 말이었다. 검게 그을고 깡마른 그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담겨 있었다.

"오케이, 비에트남 넘버원."

황동일이 익숙하게 대꾸하며 손을 흔들었다.

"난 저 말을 들을 때마다 속이 메스껍고 기분 나빠 미국사람들한테는 반대로 말할 거 아냐. 약아도 너무 유치하게 약아서 비위 상해."

문태복이 침을 뱉었다.

"아니 꼭 그렇지두 않아. 저건 재네들 진심일 수도 있어. 베트남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파병된 한국군의 입장을 이해해서 미군을 미워하는 것처럼 한국군을 미워하진 않는대잖아, 그러니 우리 민간인들을 나쁘게 볼 리는 없잖겠어. 베트콩들도 우리 근로자들은 해치지 말랬다는 소문이 있는데."

황동일이 쥘부채를 펼쳐 햇빛을 가리며 말했다.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만 너무 안심하지 말어. 난 이 월남사람들을 통 믿을 수가 없어. 공무원, 선생, 상인, 여학생, 창녀, 거지, 행상들 중에도 베트콩들이 섞여 있다니 말야. 저 시클로 운전수도 베트콩과 줄이 닿고 있는지도 몰라. 그 말하는 꼴이 수상해."

"이런 겁쟁이 같으니라구. 그런 걱정 말고 남십자성 별빛 아래서 청춘이나 맘껏 즐기셔. 요런 호시절 아니면 우리가 언제 또 이 요상스런 나라에서 폼 잡아 보겠어. 꽁까이들 좀 좋아. 몸집 자그마하고 가늘어서 품에 착 안기겠다. 가무잡잡한 살결 야들야들하겠다. 서양식 배워 사아비스 좋겠다. 그것 좁장해서 우리 물건하고 궁합 잘 맞겠다. 거기다가 우리 한국 남자들 시간 길게 끌어 남성 넘버원으로 대접받겠다. 이런 별천지가 또 어디 있어. 지나놓고 나서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문 형도 태국산 보약 먹고 힘 좀 내라고."

여자 얘기만 나오면 신바람 나는 황동일이 흐흐거리며 웃었다.

"황 형이나 많이 해."

문태복은 심술이 이는 것을 느끼며 내쏘았다. 떠도는 말에 의하면, 대만과 일본 남자들은 그것을 하는 시간이 5분이고. 베트남 남자들은 3분이고, 한국 남자들은 30분이라고 했다. 그래서 한국 남자들은 돈이 더 많은 일본 남자들을 제치고 월남 여자들에게 인기 1위를 차지했다는 거였다. 문태복은, 그게 다 황동일 같은 위인들이 꾸며낸 허풍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재주로 그 짓을 30분씩이나 끌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은 용을 써보았자 10분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창녀들을 상대해 보면 한국 남자들이 인기라는 것은 전혀 터무니없지도 않은 것 같았다.

"문 형, 어떡할 거야? 1년 더 연장할 작정인데."

황동일이 아오자이차림의 젊은 여자한테 야한 눈짓을 하며 말했다.

"나도 그래야 되겠어. 너무 많이 털렸으니까."

문태복은 기운 빠진 소리로 대꾸했다.

"문 형, 그 노름에서 손 떼라고. 한다하는 꾼들이 짜고 친다는 소문인데 괜히 잘못했다간 알거지 된다구. 차라리 나하고 손발 맞춰가며 꽁까이 재미를 보면 그리 큰돈 안 날리고 실속이 있잖아. 어때, 내가 랑한테 삼삼한 애 하나 소개하라고 할까?"

"아니야, 아니야. 골치 아파."

근로자들은 휴식하는 날이면 극장, 술 여자 노름 같은 것으로 시간을 때웠다. 그런데 노름은 회사에서 금하는 것과는 반대로 갈수록 판이 커져가고 있었다.

"이러다가 임신하면 어쩔 셈이야?"

골목으로 접어들며 문태복이 물었다.

"그야 내가 알게 뭐야. 즈네들 신세 안 망치려면 즈네들이 알아서 해야지."

"그렇게 속 편한 소리 하지 말어. 미국 회사에 있던 어떤 친구 하나는 임신한 것을 알고 그 여자를 차버리고 딴 여자를 얻었다가 황천객이 됐다는 소문 듣지도 못했어?"

"문 형은 참 걱정도 팔자로군 그거 어떤 새낀진 모르지만 그따위 얌체 짓 하면 죽어야 싸지. 그거 다 요령 없이 까불어서 당한 거야. 얘네들이 미군 다음으로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자기들을 무시하고, 자존심 상하게 하는 거야. 바람을 피우려면 미리 임신을 못하게 단속을 하고, 그래도 임신이 됐을 때는 수술비에다 한 달치 정도의 생활비는 주고 빠이빠이를 해야 진짜 바람둥이 아닌가? 그런 투자도 안 하면서 바람피우겠다고 까부니까 당연히 골로 가는 거지. 돈 멀마 안 들이고 청부살인을 할 수 있는 이 무법천지에서 왜 얘네들 감정 건드리고 그래? 알고 보면 얘네들 참 인정 많고 순진한 데가 있잖아. 그런 사람들을 왜 깔보고 무시해서 화나게 만들어? 그거 죽을라고 환장을 한 거지."

"아이구, 아주 도통을 했구만."

"그러니까 아무나 바람둥이 되는 줄 알아? 바람둥이 되기 전에 국제신사부터 돼야 한다구."

황동일이 키들키들 웃으며 랑의 집으로 앞서 들어갔다. 문태복은 황동일의 말이 제법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 황동일의 말처럼만 했더라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월남사람들은 한국 사람과는 전혀 다른 두 가지 면이 있었다. 여자들에게 정조관념이라는 것이 전혀 없어서 육체관계를 맺는 것도 헤어지는 것도 예사로 했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배신행위를 하면 반드시 복수를 한다고 했다. 그 남자는 이 두 가지를 한국식으로 거꾸로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랑의 집 마당가에는 언제 보아도 싱싱한 열대의 꽃들이 진한 색깔로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월남의 숲들이 끈적한 느낌이 들도록 농도 짙은 진초록색인 것처럼 꽃들도 그 색깔이 야성미를 듬뿍 담은 강렬한 원색들이었다. 그 색깔의 농도가 어찌나 강한지 아름답다 못해 야할 정도였고, 어떤 꽃들은 그 진한 색깔 속에 무당이 풍기는 그 야릇한 주술성이 어려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마당가를 따라 피어난 꽃들을 가꾼 흔적은 없었다. 강렬한 태양과 많은 비가 내리는 자연 속에서 그 꽃들은 저절로 자라나고 저절로 꽃을 피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월남의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문태복은 꽃들을 건성으로 보며 마당을 가로지르다가 한 곳에 눈길이 멈추었다. 그리고 어이없는 듯 픽 웃음을 흘렸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작은 텃밭의 고추였다. 그런데 고추들은 희한하게 달려 있었다. 한국 고추들과는 정반대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한국 고추들은 땅을 향하고 있는데 월남 고추들은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건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솟아' 있다고 해야 옳을 지경이었다. 아직 익지 않은 푸른 고추들은 그나마 괜찮은데 빨갛게 익은 고추들이 하늘을 향해 곤두선 듯하고 있는 모양은 참으로 야릇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남자의 그것을 고추에 비유한 것은 한국 고유의 것이 아니라 월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문태복은 어디서나 빨간 고추의 발딱 곤두선 모양을 볼 때마다 참 묘하게도 생겼다. 하는 생각과 함께 웃음이 나오고는 했다. 저것을 한국에 가져다 심으면 어떻게 될까? 이런 실없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그 고추는 맵기는 한데 매운맛이 한국 것에 비해 영 싱거웠다. 입에 들어가면 화끈하게 불붙듯이 맵다가는 이내 그 기운이 사라졌다. 입에서부터 맵기 시작해서 음식이 내려가는 길을 따라 목도 맵고 뱃속까지 화끈거리게 하는 한국 고추와는 딴판이었다.

문태복은 괜히 신경 쓰여 어슬렁거리며 집 가까이 갔다. 집이란 것이 이상하게 생겨서 밖에서도 안이 대충 들여다보였다. 월남의 집들은 사철 없이 더운 기후 속에서 살기 알맞도록 지붕과 벽만 있는 형태였다. 그 벽이라는 것도 벽돌이나 시멘트 같은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야자수만큼 흔한 대나무로 발을 엮어서 둘러친 것이었다. 그 발도 얼금얼금 짜서 바람이 잘 통하게 했기 때문에 그사이사이로 집 안의 동정을 얼추 살필 수 있었다.

"뭐 하고 있어. 빨리 올라오잖고."

안에서 황동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한바탕 얼크러지는 줄 알았지. 그래도 예의 차릴 줄 아네."

문태복은 대여섯 개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며 흐흐거리고 웃었다. 비가 많아서 생기는 습기를 피하고, 뱀이나 독충 같은 것들을 막기 위해서 모든 집들은 땅에서 한 길 가까이 떠올라 2층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이거 왜 이래. 나를 짐승으로 아나."

황동일이 마치 자기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편하게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담배를 빼물고 있었다. 집 안은 방들이 따로 없이 대나무 발을 둘러친 넓은 공간 그대로였다. 그 공간의 가장자리를 따라 대나무로 짠 칸막이가 엉성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 칸막이 공간이 방이었다. 그런 방에서 사랑놀이를 하며 월남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야릇한 소리들이 들려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칸막이 공간들을 제외한 가운데가 손님도 접대하고,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는 거실이었다. 이 집에도 거실의 정면 가운데에는 어김없이 불단이 차려져 있었다. 으레 그렇듯 불단은 붉은 비단으로 경건하게 장식되어 있었고, 쌀이 수북하게 담긴 하얀 사기그릇에는 길고 굵은 붉은 향이 꽂혀 있었다. 거의 모든 가정에서 불단을 차려놓고 아침저녁으로 향을 피울 정도로 월남사람들의 불심은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었다. 그 불단 아래서 한 영감이 곰방대를 빨고 있었고, 저쪽 문가에 매어진 해먹에서는 한 청년이 시에스타(낮잠)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그 영감이 빨고 있는 것은 담배가 아니라 아편이었다. 곰방대를 빠는 소리가 찌직 찍찍 괴상하게 들렸고, 그럴 때마다 곰방대통에서는 발갛게 불꽃이 일며 아편 끓는 소리가 끄륵거렸다. 아편이 타는 냄새는 담배 냄새와는 달리 향기 있는 마른풀이 타는 것처럼 구수한 듯하면서도 무슨 털이 타는 듯한 약한 노린내가 섞여 있었다. 월남 노인네의 절반은 그렇게 아편을 피우며 늙은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저 친구는 뭐 하는데 저렇게 빈둥거려?"

문태복은 담배를 빼들며 해먹 위에서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청년을 눈짓했다.

"모르겠어. 돈 주고 군대를 뺀 것인지 어쩐지. 저도 나도 서로 관심 없으니까. 애는 착해."

황동일이 푸우 소리 나게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양쪽 끝을 나무나 기둥에 잡아매 공중에 뜬 잠자리인 해먹과 시에스타는 월남사람들에게 쌀국수만큼 생활에 절대 필요한 것이었다. 점심 식사 후에 즐기는 낮잠인 시에스타는 어찌나 철저하게 지켜지는지 그 시간에는 나라 전체가 낮잠을 자는 셈이었다. 그건 무더위를 이겨내고 생활의 활력을 찾는 한 방법이었다. 그물망이나 천으로 된 해먹은 간단하면서도 편한 잠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 최고의 발명품이었다. 차곡차곡 접으면 부피가 작아 간수하기 편하고, 자야 할 때는 나무가 지천으로 많은 월남에서 양쪽의 끈을 나무에 잡아매기만 하면 좌우로 흔들거리는 잠자리가 되었다. 그래서 해먹은 게릴라전을 해야하는 베트콩들의 필수품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쌀국수는 안 주나?"

문태복은 배를 쓸면서 불평하듯 말했다.

"이런, 얻어먹는 주제에 급하기는 조금만 더 기다려. 저쪽에서 지금 랑하고 어머니가 만들고 있으니까."

황동일이 부엌 쪽을 턱짓했다.

"난 월남 떠나면 한 가지 걱정이 있어. 쌀국수 먹고 싶으면 어떡하나 하고 말야."

"그렇기도 하겠지. 여기 쌀국수 맛 하나는 기똥차니까 쌀밥 먹는 우리 입에 딱 맞잖아. 그렇지만 난 쌀국수가 아니라 여자야. 여기 여자들 자그마하고, 날씬하고, 예쁘고, 색 잘 쓰고, 남자 잘 받들고, 여자로 최고야 최고."

황동일이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아이고, 또 신바람 난다. 그렇지만 그건 황 형이 잘못 생각하는 거야. 사이공에 가면 15딸라짜리에서부터 500딸라짜리까지 온 세계 여자들이 다 있는데, 월남 여자들은 하바리 취급밖에 못 받는대잖아. 제일 고급으로 비싼 게 프랑스하고 이태리 것들이고."

"이런, 이런, 여자 맛도 모르면서 들을 소문은 다 듣고 다니네. 그건 순전히 양키새끼들이 지껄여대는 개소리야. 진짜 씹맛이 뭔지 좆도 모르는 새끼들이 즈네 기준대로 사람을 색깔로 등급을 매겨놓은 거라구. 흰둥이새끼들은 노란둥이들을 무조건 무시하고 천시하잖아. 그중에서도 특히 월남사람들을 개좆으로 취급해 버리고 말야. 흰둥이새끼들의 제일 못된 버르장머리가 색깔로 사람 차별하는 건데, 그따위 개소리 믿지 말라구. 문 형은 그 새끼들이 그러는 것에 열 받치지 않아?"

창동일의 얼굴은 점점 높아지는 목소리를 따라 벌겋게 열이 오르고 있었다.

"그야 나도 노란둥인데 기분 좋을 리 있어? 그건 흰둥이들 고질병이니까 어쩔 수 없지."

"씨팔, 그런 것 생각하면 이 전쟁에서 양키새끼들이 팍 져버려야 해. 그 좆같이 큰 코들이 아주 납작해져 버리게 말야."

"이거 꼭 빨갱이 같은 소리만 하고 앉았네 잘못하면 수사대에 신고하는 수가 있어."

"좋아, 그래, 신고해서 돈 많이 받아먹어."

그때 하얀 아오자이를 입은 랑이 쌀국수를 내왔다. 가무스름한 피부에 쌍꺼풀 진 눈우물이 깊고, 가녀릴 만큼 좁은 어깨와 가느다란 몸매에 꼭 끼는 아오자이가 아름답게 어울리는 랑은 전형적인 월남 여자였다.

"안녕하세요. , ....."

랑이 수줍어하며 더듬거렸고,

"맛있게 드세요."

황동일이 말을 이어주었다.

", 맛있게 드세요."

랑이 입을 가리며 부끄럽게 웃었다.

", 감사합니다. 맛있게 먹겠습니다."

문태복은 고개까지 꾸벅했다. 시장하던 참이라 그들은 쌀국수를 마구 먹기 시작했다. 우동처럼 국물이 넉넉한 쌀국수에는 길쭉하게 자른 파와 함께 종잇장처럼 얇게 썬 고기가 섞여 있었다. 국수발은 밀가루로 뺀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게 380가지나 된다니 믿어지지가 않아. 난 그동안 부지런히 먹는다고 먹었는데 몇 가지나 먹어봤는지 모르겠어. 근데 왜 우리나라에선 이렇게 맛있는 걸 만들어 먹을 줄 모르지?"

문태복이 국수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 뭐, 밥해 먹을 쌀도 모자라 야단인데 국수 만들어 먹을 생각을 어떻게 하겠어. 여기처럼 한 논에서 1년에 쌀이 세 번씩 나와 남아 돌아야 이런 생각을 하지."

"그렇기도 하겠네. 하여튼 쌀국수 종류 많은 걸 보면 월남사람들 아주 상당하다니까. 다시 봐야 해."

"어디 이것만이야? 미국을 상대로 끈질기게 싸우는 걸 봐 상당한 게 아니라 아주 대단해. 난 여기 오면서 전쟁이 곧 끝나버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말야."

"그래, 그 덕에 우리가 사는 거지 . 근데 결국 지긴 질 텐데, 언제까지나 버틸 수 있을까?"

"글쎄, 그걸 누가 알겠어. 지금까지 버텨온 식으로 가면 4-5년은 더 가지 않을까?"

"그리만 된다면 우리가 연장하는 데는 지장이 없겠군."

"그야 그렇지. 어쨌거나 베트콩들도 많이 죽겠지만 미군들도 좆 단단히 물린 거야. 여기 끝없는 밀림을 봐. 그 속에서 전쟁을 한다니 양키들이 미칠 일이지."

"양키들이야 즈네 좋아하는 전쟁이고 월급이나 많이들 받으니까 미칠 것 없지. 정작 미치는 건 한국군이라구. 하나밖에 없는 목숨 내걸고 싸우면서 한 달에 40딸라가 뭐야, 40딸라가. 박정희 그 사람도 정신 나갔어. 미국이 몸 달아 매달리면 버티기 작전으로 나가서 400딸라는 못 되더라도 100딸라까지는 올렸어야지. 젊은 놈들 목숨이 개 값인 줄 알어."

"그거 왜 그런지 알어? 박정희가 노름을 할줄 몰라서 그래. 문 형이 가서 노름판 버티기가 뭔지 좀 가르쳐주라구."

황동일이 아주 심각한 표정을 꾸며내며 말했다.

"어쨌거나 군인들이 목숨 내걸고 죽어라고 벌어봐야 우리가 버는 것에 비하면 말짱 헛거지. 근데, 우리가 벌어들인 돈으로 고속도로 놓는다는 건 사실일까?"

"그거 사실 아니겠어? 여기 나와 있는 회사들이 벌어들이는 돈에다가, 그 회사 근로자들이 매달 보내는 기본급, 그리고 그 많은 군인들이 의무적으로 보내는 월급까지 다 합해 놓으면 그 딸라 어마어마하잖아. 마음만 먹으면 고속도로 충분히 놓겠지."

"아이고 모르겠다 쌀국수 맛이 왔따다."

문태복은 국물까지 다 마시고 입을 훔치며 물러나 앉았다. 랑이 상을 내가는데 여자 노인이 아무 소리 없이 손짓으로만 남자 노인과 해먹의 청년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이르고 있었다. 해먹에서 자던 청년은 언제 일어났는지 게으른 하품을 하고 있었다. 살이라고는 없이 비쩍 마른 남자 노인은 무표정하게 일어나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도 슬슬 자리를 비워드려야 되겠지?"

문태복이 자리를 뜨려는 기색을 보였다.

"이런, 천천히 담배나 한 대 피우고 가. 소화나 돼야 무슨 짓을 하지. 황동일이 담배를 권했다.

"이거 괜히 눈치 없이 굴다가 미움 사면 안 되잖아. 근데 그 해구신이라는 거 효과는 있는 거야?"

문태복은 켄트를 뽑으며 물었다. 월남 담배는 풀 냄새가 심해 맛이 없었고, 각종 미제 담배들이 길거리에 넘쳐나고 있으니까 그걸 피울 수밖에 없었다. 미군부대를 거쳐 아무런 관세 없이 들어온 온갖 미국 물건들은 월남의 시장을 뒤덮고 있으면서 월남에 뿌려진 막대한 달러를 미국으로 되빨아들이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물개 자지? 그거 안 먹어도 난 너무 잘 서서 탈이니 알 수가 있나. 옛날부터 그게 양기에 좋다고 했으니 무슨 효과가 있긴 있겠지. 그렇지만 월남에 나도는 것 태반은 태국이나 홍콩에서 들어온 소 자지 말린 가짜라니까 조심해야 돼. 괜히 아까운 돈 없애가며 소 자지 과먹어 봐야 아무 효과 없으니까 왜, 먹어보게?"

"아니, 그냥 해본 소리야. 우리 근로자들 중에 그것 사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그거 다 미친 짓들이야. 웅담이라는 건 돼지 쓸개 말린 거고, 우황청심환이라는 것도 향내 나는 약초들을 찧어 만든 말짱 가짜라는 거야. 홍콩에서 들어오는 것들은 하나도 믿을 게 없어. 애써서 돈 벌어 그런 것들 허겁지겁 사는 놈들은 다 병신 쪼다들이야."

황동일은 자신 있게 말했다. 근로자들 숙소에는 미군 지프를 개조한 자동차를 몰고 떠돌이 약장사들이 심심찮게 나타났다. 그 한국사람들은 주로 정력제나 보약을 팔았고, 값이 비싼데도 근로자들은 아주 잘 샀다. 그들은 꼭 자기들이 먹으려고 그러는 것만이 아니었다. 고향 부모들한테서, 누구누구는 월남에서 오며 무슨 무슨 보약을 사왔다던데, 뭐 꼭 먹고 싶은 생각은 없다만..... 하는 식의 편지가 날아오는 것이 적지 않았다.

"자아, 난 그만 갈 테니까 재미 많이 봐."

문태복은 트림을 하며 일어섰다.

"문 형은 다 좋은데 색 약한 게 탈이란 말야. 이 좋은 계집들 두고 나와 함께 즐기면 좀 좋아."

"이거 이러지 마. 내가 약한 게 아니라 황 형이 비정상이라구. 날마다 서는 게 그게 어디 사람 거야? 물개 자지지."

문태복은 계단을 내려가며 웃었고,

"하하하..... 그 말 멋진데, 멋져."

황동일은 아래를 내려다보고 서서 통쾌하게 웃고 있었다. 문태복은 햇볕 속으로 나서며 눈을 가늘게 뜨고 상을 찌푸렸다. 그늘에 있을 때는 별로 더운 것을 몰랐는데 햇볕 속으로 나서자 금세 눈이 부시고 폭염이 화끈하게 느껴졌다. 닭들까지 그늘을 찾아들 수밖에 없는 기후였다. 큰길로 나선 문태복은 이마에 손차양을 하고 망연히 서 있었다. 문득 외국이라는 생각과 함께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가로수로 줄지어 선 야자수들이 외국이라는 것을 더 진하게 느끼게 했다. 가지라고는 없이 외줄기로 드높게 뻗어 올라간 야자나무들. 줄기 끝에 부챗살의 잎들을 볼품없고 허술하게 달고 있는 그 나무들은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에 소나무가 많은 것처럼 월남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월남을 대표하는 나무였다.

문태복은 저 앞에서 달려오는 군용 트럭에 눈길을 보냈다. 경적을 요란하게 울리며 달리는 트럭 앞에서 시클로며 오토바이들이 황급히 비켜 서고 있었다. 세 대의 트럭은 거침없이 문태복 앞을 지나갔다. 트럭에 탄 것은 월남 군인들이었다. 월남 군인들은 언제 보아도 기죽고 맥빠져보였다. 활달하고 떠들썩한 미군들과는 대조적이었다. 미군들이 이 땅의 주인 같고 월남군들이 오히려 외국군 같았다. 헬리콥터 편대가 저 높은 야자나무의 부챗살잎에 걸린 듯했다가 백광 눈부신 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 방향은 밀림 쪽이었다. 문태복은, 또 어디다 퍼부어대려고 가는 모양이지, 생각하며 헬리콥터에서 눈길을 돌렸다.

나도 노름에서 손을 떼긴 떼야 할 텐데 ..... 그놈의 본전 생각이 나서.....’

문태복은 무거운 마음으로 길을 건너가며 무료하게 앉아 있는 시클로 운전수에게 손을 흔들었다.

 

 

23. 세상살이 물결

싱싱한 벼들은 진초록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그 넓은 바다 위에 햇빛은 눈이 시도록 쏟아져 내리고, 바람기 없는 들녘의 고요는 적막하기까지 했다. 한낮의 후끈거리는 더위를 피했음인지 농부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푸른 고요의 바다에 곧 빠질 듯 빠질 듯 제비들이 낮고 빠르게 날고 있었다. 제비들의 그 경쾌하고 날쌘 비상에 비해 새하얀 해오라기들은 마치 날 줄 모르는 것처럼 한자리에 까딱 않고 서 있거나, 긴 다리로 느릿느릿 걸었다. 초록빛 속에서 해오라기들의 새하얀 모습은 더없이 곱고 우아했다.

언덕배기 소나무 그늘에 앉은 천두만은 담배를 피우며 아슴한 눈길로 들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려 ..... 내 논 열 마지기만 있었드라도 서울로 안 떴제. 서울살이, 그것이 워디 사람 사는 것이여. 니나 나나 목구녕에 풀칠허겄다고 서로가 물고 뜯고 생지옥이제. 지 땅 밥 안 굶을 맨치 지니고 철 따라 농사짓고 사는 것이 질인디.....’

천두만의 가슴에는 땅에 대한 그리움과 서울살이의 서러움이 함께 사무치고 있었다. 농사일도 힘겹고 고단한 것이지만 그래도 곡식이 자라고 알곡이 영그는 것들을 보는 즐거움과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농사일밖에 할 줄 모르는 몸으로 서울살이를 한다는 것은 나날이 막일을 찾아 허덕여야 하는 팍팍한 모래밭 걷기였다.

"아저씨, 이제 그만 가시지요."

"아저씬 또 고향땅 생각하세요?"

천두만과 좀 떨어져 앉은 두 아가씨가 제각기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잉 그려, 또 가야제. 지 아무리 고향땅 생각허먼 멀혀. 요런 쪽박 신세로야 꿈에서도 갈뚱말뚱허제."

천두만은 끄응 힘을 쓰며 미군 야전용 큰 배낭을 들쳐멨다.

"아저씨, 그러지 말고 고향에 한번 가시지 그래요. 우리한테 구경시켜 주실 겸."

키가 조금 큰 아가씨가 말했고,

"맞아요. 고향에 가면 우리 일도 훨씬 더 편하게 잘될 것 아니겠어요?"

다른 아가씨도 얼른 거들고 나섰다.

"와따메, 그 무신 사람 잡을 숭헌 소리여? 나가 요런 천헌 꼬라지 뵐라고 고향 떠나온 것이 아니랑께."

천두만은 펄쩍 뛰며 머리를 내둘렀다.

"어머 이게 어째서요? 아저씬 자가용 타는 부자가 돼서 고향에 갈 작정이셨어요?"

키 좀 작은 아가씨가 쥘부채를 펼치며 웃었다.

"아이고, 넘 속 몰르는 소리 말소. 자가용이야 꿈도 못 꾸는 것이고, 사람 체면은 좀 서얄 것 아니여. 요런 꼬라지로야 원....."

천두만은 밀짚모자를 고쳐 쓰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돈을 얼마쯤 벌어야 아저씨 체면이 서시는데요?"

다른 아가씨가 파라솔과 가방을 바꿔들며 물었다.

"글씨, 돈이란 그 얄랑궂고도 요상시런 물건이 하도 요술 빠술을 잘 부려 잡을라고 발광을 혀도 미꾸라지맹키로 손을 쏙쏙 빠져나가 불고, 허천나서 몸살을 댈수록 더 기운 빠지고, 세상 살맛 떨어지게 맨드는 물건인디. 나야 크게 바래지도 않고 논 열 마지기 살 수 있게만 바랬제, 논 열 마지기만 장만험사 고향에서 농사짓고 사는 것이 질인디 말여 ....."

"우리가 미장원 차리는 것처럼 그게 아저씨 꿈이로군요? 그건 얼마 안 되는 돈이니까 머잖아 그 꿈을 이룰 수 있으시겠는데요?"

쥘부채를 부치고 걸으며 아가씨가 말했다.

", 세상 몰르는 소리 허고 앉았네 그랴. 시악씨덜맹키로 혼자 몸이람사 그리 될 수도 있겄제. 근데 새끼덜 넷에다가, 여섯 입에 풀칠허기가 바쁜디 그것이야 영영 손에 잽히기 틀래분 꿈이시. 알아듣겄어?"

"그럼 아저씨는 영영 고향에 못 가시게요?"

"하먼 워쩔 것이여, 팔자가 드러운디 살아 못 가면 죽어서나 가는 것이제 머."

땡볕 속에서 천두만의 시름 깊은 한숨이 흩어졌다.

"근데, 아저씨는 이 일 하기 전에는 무슨 일 하셨어요?"

차양 큰 꽃무늬모자를 쓴 아가씨가 가방과 쥘부채를 바꿔들며 가슴 아픈 듯 혀를 찼다.

"말도 말어. 배운 것 읎고, 똑별난 기술 읎는 처지에 보나마나 아니여? 질로 천허고 험허고 드러운 일은 다 혔제. 거죽만 사람이제 사람으로 산 것이 아닝께 그냥 그리 알아둬."

천두만은 지나온 세월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큰딸보다 고작 서너 살 더 먹었을 아가씨들에게 창피스럽기도 했고, 가지가지 겪어온 일들을 다시 생각하는 것조차 지긋지긋했다. 그동안 해왔던 여러 가지 막일 중에서 그래도 괜찮았던 것이 똥 푸는 것이었다. 누구나 피하려고 하는 천한 일이라서 수입은 괜찮은 조건이었다. 그 일을 하고서야 돈을 모아 가족을 불러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유일표라는 학생을 통해서 알게 된 서동철 부장이 극장 변소를 맡겨줘 꽤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변소 뒷문으로 들어가 마누라한테 영화를 보여줄 수 있게 눈감아주고는 했던 서 부장은 더없이 고마운 사람이었다.

"달비 포씨요오, 머리크락 삽시다아. 달비 사요, 머리크락 짤라 폴아요오."

동네로 들어서며 천두만은 목청을 뽑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르는 두 아가씨는 가방을 추스르며 동네를 살피고 있었다.

"어허, 달비 포씨요오, 머리크락 잘라 폴아요오. 머리크락 짤라 돈 벌고, 신식 빠마는 공짜로 해주요오. 얼렁얼렁 나오씨요오."

천두만의 목소리는 50여 호의 동네를 향해 헌걸차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슬이 걷히기 전부터 논일을 나섰던 사람들은 낮잠이라도 한숨씩 자는 것인지 동네에 어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나무그늘에서 놀던 아이들이 호기심을 드러내며 그들 가까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이 봇씨요, 시악씨들! 그 머리채 귀밑꺼지 짤라 폴고, 공짜로 신식 빠마혀서 멋쟁이 안 될라요?"

바구니를 옆에 끼고 고샅에서 막 나오고 있는 두 아가씨에게 다가서며 천두만이 말을 걸었다.

"고것이 무신 소리다요?"

한 아가씨가 어리둥절했고,

"아이고메, 그 소문난 머리크락 장시가 우리 동네에도 왔네 그랴."

다른 아가씨가 반가운 기색으로 웃음을 머금었다.

"옳여, 옳여! 시악씨는 인물이 이쁘고 찰방지게 생긴 거맨치로 아조 똑똑허고 귀가 볿구만 잉. 그 존 소문 발써 딱 듣고 있는 것 본께로. 근데 말이여, 머리크락 장시라고 혀서 다 똑겉은 머리크락 장시가 아니란 말시. 워찌 근고 허니, 우리는 딴 머리크락 장시허고는 달브게 신식 빠마꺼정 공짜배기로 싹 혀줘서 멋쟁이럴 맨글어준당께로. 보소 시악씨, 요 인물에 하이칼라 빠마를 착 허면 얼매나 더 기맥히겄능가. 짜아, 얼렁 그 귀찮은 머리채 짤라뿔드라고."

천두만은 꼭 떠돌이 약장수처럼 말 반죽을 달게 해대면 손반닥에 침을 튕기고 나섰다. 그는 다리장수로 나선 몇 개월 동안에 입심이 늘 대로 늘어 있었다.

"고것이 참말이다요?"

얼굴 둥글넓적한 두 번째 아가씨가 눈을 빛내며 물번다.

"그럼요, 정말이구말구요. 우리가 바로 파마해 드리는 미용사라구요, 미용사."

파라솔 든 아가씨가 제때 박자를 맞추며 앞으로 나섰다.

"자아, 보세요, 이 파마 우리가 서로 해준 거예요. 어때요? 멋있죠? 당장 이렇게 해드릴까요?"

쥘부채를 든 아가씨가 자신의 파마머리를 내보이며 맞장구를 쳤다.

"음마..... 미용사....."

얼굴 둥글넓적한 아가씨는 자신과 다른 모습의 두 여자를 눈부신 듯 바라보며 중얼거렸고, 그 옆의 얼굴 갸름한 아가씨는 힐끔힐끔 곁눈질을 하고 있었다.

"어이 시악씨, 얼렁 머리채 짤라불고 신식 멋쟁이 되잔께."

천두만은 배낭을 벗으며 답치고 들었다.

"복실아, 우리 빠마허자. 돈도 벌고 공짜라고 안 혀?"

얼굴 둥글넓적한 아가씨가 친구를 향해 돌아섰다. 그런데, 그녀의 땋아내린 머리채는 허리께까지 치렁치렁했다. 그야말로 삼단 같은 그 머리채를 보며 천두만은 침을 꿀떡 삼켰다. 젊은 처녀의 머리카락인데다가 그 정도의 길이면 더 따지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최상품이었다.

"금메 ..... 미자 니 혼나면 워쩔라고 그냐. 나도 허고는 잡은디, 그려도 엄니헌테 물어봐야 혀. 아부지가 생야단 날지 몰릉께."

복실이란 아가씨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려? 글먼 나허고 시악씨덜 엄니헌테 가드라고. 요새 시상이 워떤 시상이라고 촌시럽고 우세시럽게 낭자머리 틀고, 머리채 땋아내리고 허능겨. 가드라고, 나가 나서서 다 해결볼 챔잉께."

천두만은 다시 배낭을 지며 자신 있게 나섰다. 이런 때 아가씨들만 붙들고 우물쭈물했다가는 판이 깨지기 십상이었다. 아가씨들의 어머니부터 낭자머리를 자르게 하면 그 다음부터는 줄줄이 고구마 캐기였다.

"자아, 나 말 한분 들어봇씨요. 시방 서울이고 도회지란 도회지에서는 여자들이 모다 빠마를 허는 것이 대유행이오. 아니, 멀리 볼 것이 없이 읍내만 나가도 빠마허는 멋쟁이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지 않읍디여? 빠마 안 허는 여자들은 꼬부랑 할망구들뿐이란 말이오. 요런 신식 시상에서 구식 낭자머리에, 머리채 질게 땋아내리고 댕김서 나 촌사람이오 허고 표식내고, 촌티 난다고 놀림감 되고 허는 것이 졸 것이 머시가 있소. 글고 말이오, 더 중헌 것이 있당게라. 낭자머리고 시악씨머리고 간에 그 질고 진 머리채를 감기도 심들고 빗기도 심들어 간수허기가 을매나 귀찮시럽소. 워디 그것뿐이간디? 여름에는 덥고 땀 많이 차서 땀내 시큼털털허게 나제, 겨울 삼동에는 자주 감기 에로와 이 드글드글 끓제. 요런 우환덩어리를 멀라고 달고 댕김서 고상이냐 그것이오. 속 씨언허니 싹 짤라뿌러 돈도 벌고 공짜로 빠마혀서 신식 멋쟁이가 되면 이보담 더 기맥히게 존 일이 워디가 또 있겄소. 그러고 또 기맥힌 일이 있는디, 빠마혀서 딴사람맹키로 이뻐지면 냄편들이 확 달라진다 그 말이오. 으쩌요, 나 말이 맞으요 틀리요? 자아, 딴 머리크락 장시덜허고는 달브게 우리만 공짜로 빠마를 혀주는 것잉께 아짐씨덜, 싸게싸게 나스씨요."

낭자머리를 한 서너 명의 여자 앞에서 천두만은 몇 달 동안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변설을 떠돌이 약장수 뺨치게 늘어놓았다.

"엄니, 돈도 벌고 빠마도 공짜로 허는디 을매나 존가. 나 당장 머리 짤를라네."

얼굴 둥글넓적 한 아가씨가 나섰다.

"엄니, 나도 헐라네."

얼굴 갸름한 아가씨도 제 어머니의 팔을 흔들었다.

"글씨, 저 양반 말이 다 공자님 말씸이기넌 헌디, 아부지가 머시라고 허실랑가 몰르겄다."

"아따, 머시라고 헐 것이 머 있간디라. 쌩돈 딜여서 딸네미 빠마시켜 줘야 헐 판에 요런 핑 묵고 알 묵고가 따로 읎는 판잉께 보나마나 얼씨구나 허지요."

천두만은 가슴이 뜨끔해져 이렇게 몰아붙였다. 남자들이 끼여들었다 하면 일이 비꾸러지고 탈이 생겼다. 이상하게도 남자들은 머리 자르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싫어했다.

"음마, 남정네들 맘보 몰르는 소리 마씨요. 딴 지집 멋나고 이쁜 것에는 춤() 흘림스로도 즈그 지집덜 멋낼라고 허는 것에는 질색팔색인 것이 남정네들 맘보니께로."

"그렇기야 헌디..... 근디, 돈 축내는 것도 아니고, 누가 속창아리 읎이 멋 낼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인자 좀 편허고 단출허게 살자는 것인디 남정네들이 그리 엉뚱헌 맘묵고 억지 부리는 것을 받아줘서는 안 되제."

"얼랴, 글먼 동강댁은 혼자 맘대로 머리 짤르겄다 그것이여?"

"치이, 남촌댁은 뭘 그리 겁내고 그려? 촌구석에 처백혀 사는 것도 서러운디 떡 본 짐에 지사 못 지낼 것 머 있겄어?"

"음마, 동강댁은 간도 크시."

"엄니, 엄니, 요렇게 허먼 으쩌겄소? 우리만 허지 말고 온 동네사람들이 싹 다 항꾼에 혀불면!"

얼굴 둥글넓적한 미자가 말했고,

", 그려! 그리 되면 아부지들이 더 헐 말이 읎제."

얼굴 갸름한 복실이가 깡충 뛰듯 하며 손뼉을 쳤다.

"하이고, 맞소, 맞소. 고것 참 기가 맥힌 생각이시."

천두만도 기쁨의 소리를 치며 있는껏 손바닥을 맞때렸다.

"아이고, 이년 대그빡에서는 못쓸 생각만 나온당께."

동강댁이 헛웃음을 치며 딸에게 눈을 흘겼다.

", 고것이 쌈빡헌 생각이네 그랴. 워찌, 통문을 혀볼랑가?"

남촌댁의 얼굴에 활짝 꽃이 피었다.

"얼랴, 그 꿍심 향단이년 꿍심 찜쪄묵네 그랴. 허기사 온 마실 여자들이 싹 다 머리 짤르고 나섰는디 동네 소박을 헐 것이냐, 동네 돌림을 헐 것이냐. 워디 우리도 이 판에 여자꼴 잠 되야 보드라고."

동강댁이 머릿수건을 획 벗으며 몸을 일으켰다.

"미쓰 김, 미쓰 최, 손 싸게싸게 놀려야 혀. 머리 먼첨 싹 짤라부르라 말이여. 빠마야 그 담에 허먼 된께."

마음이 들뜬 천두만은 숨 가쁜 듯한 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그는 새롭게 한 수 배운 이 방법에 감탄하고 있었다.

"아저씨, 걱정 마세요. 우리도 그 정도는 알아요."

"그럼요, 가위가 안 보이게 잘라댈 테니까 두고 보시라구요."

쉬쉬해 가며 동네 여자들은 금세 한통속이 되어 돌아갔다. 남자 없는 어느 과부 집으로 장소가 정해지자 두 미용사는 거침없이 여자들의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천두만은 그 옆에서 한 여자의 머리채를 검정 고무줄로 한 단씩 묶어 배낭에 넣기 바빴다. 그는 머리채를 챙겨 넣은 다음에는 바로바로 여자들의 손에 돈을 쥐어 주었다. 머리를 귀밑까지 쌍동 잘린 여자들은 당황스럽고 멋쩍은 기색이면서도 돈을 보고는 흡족한 웃음을 머금었다.

처녀들까지 60개가 넘는 머리채를 배낭 가득 챙겨 넣은 천두만은 더 없이 만족스럽고 배부른 기분으로 감나무 그늘에 다리를 뻗고 앉아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그의 느긋함과는 달리 두 미용사는 독한 약 냄새를 풍기며 여자들의 머리를 말아대느라고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날마동 오늘만 같음사 똥 푸는 것보담 백 배가 낫것다. 좌우간 똥 푸는 신세 면한 것만으로도 딸네미 덕 톡톡하니 본 것잉께 .....’

천두만은 혼곤한 담배 맛에 젖어들며 가발공장에 다니는 큰딸을 생각하고 있었다. 큰딸은 봉제공장 시다보다 벌이가 더 좋다는 구로동의 가발공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가발은 없어 못 팔 지경이고, 그 원료인 머리카락이 달려 야단이니 그것 모으는 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건성으로 들어 넘겼는데 하도 똥 푸는 고생보다 편하고 돈벌이도 나을 거니까 저의 사장님을 한번 만나보라고 졸라대는 바람에 그리 할 수밖에 없었다. 가발공장 사장이 뜻밖에도 환대를 한 것은 고향이 시골이기 때문이었다. 시골이 고향이라서 대접을 받은 것은 서울에 올라와서 처음이었다. 사장은, 다른 데는 갈 생각하지 말고 전라도 땅만, 그것도 도회지 피해 시골 구석구석 파고들어 가라고 했다. 도회지 여자들은 몇 년 사이에 거의가 파마머리로 변해버렸다는 거였다. 그리고 사장은 머리채 사들일 밑천까지 선뜻 내밀었다. 그건 큰딸의 월급을 담보로 한 선심이긴 했지만 목돈이라고는 없는 처지에서 그나마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채 한 단에 얼마씩 이문을 먹게 되는 그 장사는 큰딸의 말마따나 똥 푸는 것보다 편하고 돈벌이도 한결 더 나았다. 천두만은 슬슬 두 번째 일을 시작하려고 담배꽁초를 발끝으로 끄고 더딘 몸놀림으로 일어섰다.

"아이고, 싸게싸게 혀야제 워째 이리 굼벵이 걸음이댜? 요러다가 해 다 넘어가겄다."

"얼랴, 해만 넘어가? 이 많은 사람 다 지지고 볶을라면 밤을 새야 되게 안 생겼다고?"

"글먼 워쩐디야? 볶지도 못허고 요런 깡뚱헌 머리로 저녁밥 허로 갔다가는 난리판굿이 벌어질 것인디."

"금메 말이시. 기계가 모질래면 순서대로 머리럴 짤를 일이제, 가난헌 놈 한 마지기 논 낫질허디끼 숨도 안 돌리고 싹 다 짤라불어 누구 집안 쌈 시킬 심판인 것이여, 시방?"

한 입이 불평을 시작하자 그 기세는 금방 입에서 입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와따 아짐씨덜, 걱정도 팔자요. 해 넘어가기 전에 다 끝낼 것잉께 꺽정들 마씨요. 글고, 멫 사람 늦어진다고 혀도 머시가 그리 걱정이오. 머릿수건 둘러써 불면 그만이제, 머릿수건 벗어 짤른 머리 서방 코앞에 내밀음서,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헐 챔입디여?"

그 사태를 수습해야 된다고 생각한 천두만은 여자들을 향해 어기찬 소리로 내질렀다. 여자들의 입놀림이 뚝 끝나는가 싶더니 여기저기서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천두만은 그런 여자들의 반응에 만족하며 처음 만났던 두 아가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아가씨는 첫 번째로 머리를 감아올리고 파마가 되기를 기다리며 처마 밑 그늘에 앉아 있었다.

"시악씨덜 이찌방(첫 번째)으로 소원풀이 혀서 기분이 으띠여?"

천두만은 은근하게 말을 걸며 아가씨들 가까이 자리 잡고 앉았다.

"기분이 좋고 좋제라 이. 다 아자씨 덕분이구만이라."

미자가 쾌활하게 말했고, 복실이는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은 무신 덕분. 근디, 둘 다 우리 큰딸하고 나이가 같은 또랜디, 이 촌에서 멋들 하고 사는감? 젊디나젊은 나이에 깝깝허덜 안 혀?"

천두만은 더 은근하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음마, 아저씨넌 워찌 우리 맘얼 콕 찍어내신당게라? 요런 촌구석에서 맨날 농사일이나 거듬서 살잔께 깝깝허고 답답혀서 환장허겄구만요. 도회지는 날로 달로 살기 좋아진다는 소문인디 여그서넌 1년에 한 분도 영화 귀경허기가 에롭고, 지옥이 따로 있간디라."

미자가 기다렸다는 듯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려, 그럴 것이여 근디, 지옥타령만 허고 앉었으면 멀 혀. 쩌그 저 미용사덜 안 부러바?"

천두만은 목소리를 더욱 은근하게 내며 담배쌈지를 꺼냈다.

"부럽제라, 부럽고 또 부럽제라. 저 처녀들도 나이는 우리허고 같아뵈는디 ."

미자의 얼굴이 상기되고 목소리가 떨렸다. 복실이의 얼굴에도 부러워 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그럴 끼여. 저 시악씨들도 집이 촌인디 진작에 맘 달리 묵고 서울 올라가서 저리 존 기술 배운 것이여."

천두만은 익숙해진 솜씨로 투망을 던졌다.

"워메, 부러운 거. 촌에 살았어도 돈 있는 집 딸들이었는갑소 이. 저런 기술 배우자면 돈이 엄칭이 들 것인디."

미자가 한숨을 내쉬었고, 복실이 얼굴도 시무룩해졌다.

"아니여. 다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헌 집 딸이여. 근디 공장서 돈 벌어갖고 저 기술을 배운 것이제. 맘만 있음사 누구든지 그리 헐 수 있응께 부러와헐 것 읎는 일이여."

천두만은 투망을 슬슬 끌어당기고 있었다.

"옳여, 그런 수가 있구만이라. 아자씨, 우리도 그리 허게 어디 공장에 취직 좀 시켜주시씨요."

"글씨, 취직시키는 것이야 에로울 것이 읎는 일인디, 엄니 아부지가 서울 가게 헐랑가 몰르제?"

"보나마나 못 가게 헐 것인디 취직헐 디만 있음사 기엉코 갈 것잉마요. 밤중에 내빼는디 워쩔 것이요."

미자가 다부지게 말하며 복실이를 쳐다봤고, 복실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려, 그리 맘 강단지게 묵고 나서서 야물딱지게 돈 모음사 안 될 일이 읎제. 취직은 나가 가발공장에 꼭 시켜줄 것잉께 한 열흘 있다가 서울 올라오도록 혀, 근디, 똑똑하고 솜씨 있는 친구가 있으면 두엇 더 딜고 와도 좋아. 타관살이 험서 고향사람 많은 것이 더 심이 되고, 여럿이 항꾼에 살면 방세고 머시고 돈이 훨썩 덜 든께로. 서울 기차 타기 이틀 전에 우체국에 가서 이 주소로 전보를 쳐. 글먼 나가 마중을 나갈 것잉께."

천두만은 저쪽의 눈치를 살피며 주소가 적힌 쪽지를 내밀었고, 미자는 그것을 잽싸게 받아 챙겼다. 천두만은 육자배기 가락을 흥얼거리며 변소를 찾아 헛간으로 발을 옮겼다. 일이 뜻대로 잘 풀려 시원하게 뻗치는 오줌발만큼 그는 기분이 상쾌했다. 가발공장에서는 계속 일손이 달려 아가씨들을 구해들이고 있었다. 가발수출이 잘되기도 했지만 머리카락과 먼지를 뒤집어써야 하는 그 일이 싫어 딴 데로 뜨는 여공들도 많았던 것이다. 아가씨들을 구해가면 수고비를 따로 받을 수 있었다.

남편들 모르게 머리를 자른 것은 조용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네댓 집에서는 남자들의 고함소리가 터져올랐다. 그러나 그들이 천두만을 찾아와 따지고 들거나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강제로 저지른 일이 아니었고, 돈까지 받은 사실이 그들의 감정을 억제시킨 것이 분명했다. 여자들의 파마는 밤이 깊어서야 끝났다. 천두만은 과부집 마당의 평상에 누워 장을 청했다. 가발공장 사장은 역시 머리 잘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미용사들과 함께 다니게 한 것은 사장이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파마를 공짜로 해주게 되니까 혼자 다닐 때보다 머리채 구하기가 몇 배나 쉬워졌다. 그러나 실은 파마는 공짜가 아니었다. 말은 그렇게 얼렁뚱땅 해치웠지만, 사실은 일반 파마요금의 4분 의 1을 미용사들은 머리채 값에서 챙기고 있었다. 그런데 머리채 값이 얼마인지 모르는 시골사람들은 돈도 받고 파마도 공짜로 한다는 것을 그대로 믿었다. 그러나 사장은 그게 속임수나 사기가 아니라고 했다. 어차피 머리를 자른 여자들은 미장원에서 파마를 해야 하는데, 제값 다 내게 되면 머리채 값 다 없어지니까 그만큼 이익을 준 것이고, 햇병아리 미용사들은 월급보다 더 많이 벌게 되고, 머리채 모으는 사람도 벌이가 쉬워지고, 회사에서는 재료 확보 많이 하게 되고, 손해 보는 사람 하나도 없이 두루 두루 좋은 일 아니냐는 거였다. 참 신통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천두만 일행은 이튿날 점심나절에 다른 동네로 들어서 구멍가게에서 다리쉼을 했다.

"야아, 야아, 쓰팔 말이야, 나와! 다 나와! 다 죽일 거야. 월남 끌고 갈 때 언제고, 이 쓰팔놈들아아.....!"

술 취한 젊은 사람이 목발을 휘두르며 술주정을 하고 있었다.

"저 사람 월남 갔다가 저리 됐는갑제라?"

천두만이 사이다병을 들며 가게 주인에게 물었다.

"금메 말이오, 저 집은 월남 땀새 폭싹 망해분졌소."

주인 여자가 한숨을 쉬며 손을 저었다.

"으째서라? 넘덜언 다 돈 벌었다고 야단들인디."

"그 웬수놈에 돈이 본시 사람 잡는 것 아니겄소. 저 집이 아들 둘에 딸 둘인디, 금메 월남바람이 분께 저 집 영감이 돈 벌어 논 사겄다고 돈 욕심을 내서 두 아들을 다 월남으로 안 보냈겄소. 근디 금메 큰아들은 죽고, 작은아들은 저 꼬라지가 되야부렀다요. 긍께 영감이 눈 뒤집어져 날이 날마동 술 취해 지 정신 놓고 댕기다가 물에 빠져 죽어부렀단 말이오. 그리된께 인자 마누래가 정신 나가 실성을 혀부렀소. 근디다가 저 사람은 맨날 저러고 댕기니 그 집구석이 워찌 되겄소. 다 망헌 집구석이제."

"참말로 숭허요 이."

천두만은 월남 못 가게 되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고 생각하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24.정글로 간 까닭

새로 도착한 신문을 펼쳐든 이상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야말로 주먹만큼씩 한 활자로 1면을 뒤덮고 있는 기사-통일혁명당 간첩단 일망타진! 이상재는 눈을 질끈 감으며 어금니를 맞물었다. 머리가 핑 도는 현기증과 함께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가슴이 막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간첩단' 이란 세 글자가 가한 걷잡을 수 없는 충격이었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이상재는 그 엄청난 충격을 떠밀어내려고 안간힘하며 부르짖었다. 정말이지 통혁당은 간첩단이 아니었다. 자신이 간첩행위를 한 일이라곤 없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군홧발 소리와 함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상재는 신문을 덮고 일어나며 트랜지스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추어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아니 선배님, 어쩐 일이십니까? 김추자 노래에 맞춰 흥을 다 내시다니. 애인한테서 편지라도 왔습니까?"

정보수사대 박 병장이 다른 두 사람과 PX로 들어서며 스스럼없이 농담을 던졌다.

"이 세상 남자치고 김추자 싫어하면 그게 어디 남잔가. 더군다나 난 월남에 와 있는 육군 쫄따구 아닌가."

이상재는 능란한 척 말대꾸를 하며 왜 하필 저 친구가 나타났나,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하긴 그래요, 김추자가 흔들어대는 것 보고 군침 안 흘리면 그건 남자가 아니죠. 여기 와 있는 쫄따구들 소원이 뭔지 아세요? 김추자 품고 하룻밤 자보는 거래요."

박 병장이 쿡쿡 웃었고,

"역시 김추자는 와따야. 그 젖통이고 방뎅이 흔들어대는 것하고, 끝내 주는 가수야. 근데 서울에선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말이 유행이라며?"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중사가 말을 걸치고 들었다. 청자는 새로 나온 담배로 한창 인기를 끌고 있었다.

", 청자야 주머니에 있는 거지만 추자야 하늘에 있는 별이죠. 그건 그렇고....."

박 병장이 손을 맞비비며 이상재의 눈치를 살피고는,

"저어 선배님, 김 중사님하고 저기 송 병장이 이번에 귀국하거든요. 우리 파견대에서 그동안 너무 고생들 많이 했어요. 국물 없는 위험지대에서....."

하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냈다.

", 그러시군요. 저쪽으로 편히 앉으세요. 제가 힘닿는 데까지 할 테니까 우선 뭐 시원한 것 좀 드시지요. 뭘로 하시겠어요? 맥주, 콜라?"

이상재는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하며 선선하게 말했다. 전에도 그런 요청이 들어올 때면 싫은 기색 하지 않고 협조해 왔던 그로서는 오늘은 더욱 친절하게 대했다.

"쫄짜들은 다 어디 가고 왕고참이 이러세요?"

이상재가 냉장고에서 꺼내는 캔 맥주를 받으며 박 병장이 들뜬 소리로 크게 말했다. 그는 옹색한 일을 쉽게 해결 지은 기분 좋음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는데, '왕고참'이란 김신조 덕에 제대가 6개월 연장되어 버린 병장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오늘 우리 장날이잖아. 지금쯤 보급창에서 물건들 싣느라고 좆 빠지고 있을 거야."

이상재 역시 그 말투가 일류대학 법대 졸업생이란 흔적은 찾을 수 없이 천상 육군 병장이었다.

"좆 빠져서 남 주나요. 즈이도 병장 달면 다 찾아 먹을 건데."

이상재의 대학 1년 후배인 박 병장이 탁자에 캔맥주를 놓으며 말했다.

"이 병장님, 아싸리하게 도와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중사는 일본말까지 써가며 이상재에게 악수를 청했다.

"아니, 별말씀 다 하십니다. 실은 제가 도와드리는 게 아니고, 우린 어떻게 해서든 여기서 딸라를 많이 챙겨갈수록 좋은 일입니다. 여기서 딸라를 가져가는 건 월남을 손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일제 물건들만 사가지 않는다면 그건 암암리에 많이 권장할 일이거든요."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중사가 어리둥절해졌다.

"우리 선배님이 이런다니까요. 글쎄, 저보고도 물건 빼내다 암거래하는 군인들 심하게 단속하지 말고 적당히 눈감아주라는 겁니다. 사병들이 월남에 온 속셈이 돈벌이고, 어떻게 해서든 딸라를 챙겨가지고 가면 그게 다 외화 획득하는 애국이라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라구요."

박 병장이 훈수를 두고 나섰다.

"글쎄라..... 그 말도 일리가 있긴 한데 말씀이야 ....."

중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미심쩍은 눈길로 이상재에게 더 자세한 말을 요구하고 있었다.

", 뭐 어려울 것 없습니다.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정확하게 10년 전에, 1959년에 우리나라 어느 신문에 미8PX에서 빠져나온 물건들이 끊임없이 암거래되면서 우리나라 경제를 망치고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물건 값들이 딸라로 지불되기 때문에 한국의 딸라가 없어지니까요. 그 딸라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야 미국으로 가지요. 그런데 그 딸라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미국이 그 당시 우리나라에 원조한 것이 한 해 평균 3억 딸라였는데, PX물건 값으로 되빠져나간 게 2억 딸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사가 나오자 세상이 시끌시끌해졌습니다. 그러자 미8군에서 대표를 신문사에 보내 해명에 나섰습니다. 미군 PX에서는 그렇게 많은 물건을 방출한 일이 없고, 언제나 주둔군에게 필요한 양만 보급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암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는 PX물건이란 거의가 다 가짜라며 그 사람들은 가짜 샘플을 내놓았고, 그 사진까지 신문에 났습니다. 그러고 나선 그 일은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8군의 해명이 사실일까요? 대한민국에서 첫손가락 꼽히는 신문이 사실무근한 허위보도를 했을까요? 그것도 다른 나라가 아닌 미국을 상대로. 어쨌든 좋습니다. 8군의 해명을 믿어준다 하고, 그래도 PX물건이 조금씩 빠져나오고 있다는 건 그들이 시인했습니다. 그러면 담배 한 보루를 예로 듭시다. 모든 PX물건들은 관세 없이 들어옵니다. 그걸 미군이 1딸라에 샀다면 PX에서는 일단 얼마간의 이익을 챙깁니다 그리고 미군이 그 담배를 암시장에 넘길 때는 또 이익을 챙깁니다. 그럼 관세를 한 푼도 못 받은 우리나라는 이중삼중으로 손해를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PX에서 물건을 많이 풀어낼수록 미국은 자기 나라 기업들을 도와 좋고, PX에 이익이 많이 떨어져 비공식 군사비에 활용해서 좋고, 자기네 군인들 용돈 벌게 해서 좋고, 자기들이 풀어놓은 딸라 되걷어가서 좋고, 그 이익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 월남의 미군 PX에 넘쳐나는 그 많은 물건들이 꼭 미군들한테 필요한 정량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상재는 맥주로 목을 축이며 중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야 말 하나마나 아니오. 무한정 쏟아져 들어오는 거야 어린애들도 다 아는 건데."

중사는 켄트를 꺼내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이며 이상재를 맞쳐다보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담배나 라이터는 월남전의 또 하나의 상징물이었다. 켄트는 미국이 이를 갈고 있는 월맹의 대통령 호지명(호치민)이 좋아한다고 해서 유명해진 담배였고, 지포 라이터는 미군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군들까지 하나씩 가지고 있을 정도로 유행이었다.

", 그 물건들이 왜 그렇게 무한정 들어오는지 아시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미국이 어마어마하게 쏟아 부은 딸라를 미국만 되걷어가는 게 아닙니다. 다 아시다시피 이 월남 땅에서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는 건 일본, 대만, 필리핀 그리고 우리나라 아닙니까? 이중에서 제일 실속 있게 돈을 챙기는 나라가 어딥니까? 일본 아닙니까. 월남에 굴러다니는 딸라는 먼저 먹는 게 임자라고 하는데, 피를 흘리고, 죽어가고 하는 것으로 보면 우린 필리핀보다 실속 없게 손해를 보고 있는 겁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가 피 흘린 만큼 요령껏 재주껏 딸라를 챙겨가야 된다 그겁니다."

"허어, 이거 생판 딴 세상 애기네. 그런 내막도 모르고 그동안 우리 애들 단속만 해댔으니 난 결국 애국한 게 아니라..... 거 뭐라고 해? 애국 반대를....."

중사는 담배연기를 훅 내뿜으며 자기 옆의 부하를 쳐다보았다.

"저어, 반역은 아니고..... 비애국이라고 하면 되겠군요."

병장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럼 말이오 이 병장, 맥주 하나를 예로 들어 말할 것 같으면, 우리 국산맥주야 하면 월남사람들이 사족을 못 쓰고 좋아하는데, 그걸 많이 빼다 팔수록 군인 좋고, 회사 좋고, 나라 좋아진다 그런 것 아니오?"

"예에, 바로 그럽니다. 그렇게 딸라 버는 것이 군인이나 근로자들이 피 흘리고 땀 흘려가며 버는 것보다 훨씬 쉽게 버는 거지요."

"이런 빌어먹을, 난 결국 남들 못할 일만 시켜가면서 말짱 헛살았네."

혀를 차는 중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 서운해 하지 마세요. 제가 애국적 차원에서 귀국 준비 잘해 드릴 테니까요."

이상재는 담배를 입꼬리에 물며 싱긋 웃었다.

"그럼 이 병장은 이런 꿀단지 속에 들어앉아 한밑천 톡톡히 챙기고 있겠군."

중사는 몸에 밴 수사관 냄새를 풍기듯 이상재에게 눈길을 모았다.

"글쎄요, 안 믿어도 상관없습니다만, 저는 바람피우는 정도 이상의 돈은 욕심내지 않습니다. 제가 모셔야 할 분들이 많은데다가, 중사 같은 분들도 계속 생기니까요. 그리고 저의 집이 그런대로 먹고 살 만합니다."

이상재의 얼굴에 냉기가 스쳤고,

"중사님, 그건 정말 오햅니다. 제가 옆에서 쭉 봐서 아는데 우리 선배님은 이상할 정도로 그 점이 깨끗합니다."

난색이 된 박 병장은 당황스럽게 말했다.

"아니, 아니, 그냥 농담이오, 농담."

빗나간 자기 말을 지우듯 중사가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 옆에서 상체를 젖히고 앉은 병장이 중사의 뒤꼭지에다 눈을 째지게 흘겨댔다.

", 박 병장하고 의논해서 할 테니까 중사님은 푹 좀 쉬십시오."

이상재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중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 잘 좀 부탁합니다. 오늘 좋은 것 배웠소. 이 병장 같은 사람이 주월사령관을 했어야 되는데 말씀이야. 허허허 ....."

중사는 이상재의 팔을 턱없이 세게 흔들어대며 헛웃음을 쳤다.

"저하고 입대 동기 같은데요."

여태껏 말없이 앉아 있던 병장이 악수를 나누며 이상재와 눈길을 맞추었다. 그 세련된 태도에 이상재도 세련되게 응답했다.

", 고생 많이 했는데 기분 좋게 월남을 떠나야지요."

"선배님 그럼 수고하세요. 이따가 점심때 다시 올게요."

박 병장이 두 사람을 앞세워 PX를 나가자 이상재는 어깻숨을 내쉬었다. 연대 연병장에 헬리콥터가 내려앉는 폭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 요란한 진동은 함석으로 조립한 반달형 퀀셋을 잘게 흔들었다.

빌어먹을 놈의 전쟁.....’

이상재는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수없이 들어온 헬리콥터 폭음은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다. 6,25 때 밤낮으로 들었던 제트기의 폭음이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계속 끔찍스럽고 소름 끼쳤던 것처럼. 그게 정말일까? 간첩단이라니 ..... 간첩활동을 했다면 북쪽과 연결되었다는 것 아닌가. 정말 그랬을까? 아닌데 .....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내가 무슨 간첩활동을 했는가. 위의 선배들한테서도 그런 이상한 낌새는 전혀 느낄 수가 없었고, 미심쩍은 일을 시킨 적도 없었다. 그런데 왜 간첩단일까? 그런 끔찍한 명칭을 붙이려면 무슨 근거가 있어야 할 텐데..... 수사기관에서는 근거를 잡았다는 것인가? 그럼 또 어찌 된 일일까? 상부에서는..... 하부가 모르게 상부에서는 북쪽과 접촉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 그렇다면 ..... 이상재는 전신이 욱죄어오는 두려움으로 다시 신문을 펼칠 수가 없었다. 조직적인 통일운동을 꾀하고, 불평등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하여 비상으로 노출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사회의 모순을 직시하고, 행동의 좌표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 사회주의 서적들을 접하기는 했지만, 북쪽과의 연관이란 그 누구도 한마디 한 적이 없었다. 이상재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다. 중앙정보부의 발표는 사건 수사의 종결을 의미했고, 이미 신문에 보도된 사실을 냉정하게 판독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일깨웠다. 다행인지 어쩐지 사건이 일단 자신을 피해갔으니까 그저 평범한 독자처럼 표 나지 않게 신문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신문을 펼친 이상재는 구속 송치된 사람들이 자그마치 73명이나 되는 것에 놀라고 있었다. 기사를 읽어나가면서 그는 완전히 혼란에 빠지고 있었다. 상층 수뇌부 몇 사람은 간첩선을 타고 북쪽에 가서 밀봉교육을 받고, 노동당에 입당했을 뿐만 아니라 공작금을 받아가지고 내려와 간첩활동을 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상재는 심한 절망과 함께 배신감을 느꼈다. 고등고시까지 경멸하고 외면했던 자신의 순수와 열정이 여지없이 더럽혀지고 악용당한 거였다. 그런데 북쪽에 갔다 왔다는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73명 중에서 아는 사람은 단 하나, 신무영 선배였다. 신무영 선배를 생각하면 북쪽과 연결되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신 선배도 속았던 것인가? 아니면 신 선배가 우리를 속였던 것인가? 이상재는 새로운 혼란에 휘말리며 신문을 박박 찢기 시작했다.

"이 병장님, 물품 수령해 왔습니다."

군복이 땀에 젖은 사병 서너 명이 PX로 들어서며 거수경례를 붙였다.

"수고들 했어. 빨리 창고문 열어."

이상재는 무표정하게 열쇠 꾸러미를 그들에게 던졌다. 그는 이제 PX생활에도 신물이 나 있었다. 날마다 젊은 사람들이 퍽퍽 죽어가고 있는 정글이 지옥이라면 PX는 천당이었다. 그러나 팔자에 없는 장사를 하며 나날을 소모하고 있는 것에 지치고 염증이 나 있었다. 월남에서는 끗발 최고로 치는 PX에 자리잡은 것은 작은아버지의 덕이었다. 연대장이 작은아버지의 가까운 후배였다. 여기서 근무하며 유일하게 의미를 찾고 있는 것이 장교와 하사관들의 '귀국 준비'를 후하게 도와주는 것이었다. 어차피 미군이 이기게 되어 있는 이 전쟁에서 한국군이 얻을 것은 돈벌이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손이 닿는 대로 직업군인인 그들이 만족스럽게 귀국하도록 도와 주고 싶었다.

그 중사와 병장을 위해 빼내준 물건을 처분하고 돌아온 박 병장이 저녁을 먹으러 나가자고 부득부득 졸랐다. 그들이 인사치례로 저녁 값을 준 모양이었다. 이상재는 사복으로 갈아입고 박 병장이 모는 지프를 탔다. 박 병장은 사복차림일 때가 많았고, 그 속에는 언제나 권총을 차고 있었다. 차가 해변 쪽으로 달리는데 소대 병력의 보병들이 멀찌감치 행군해가고 있었다. 하얀 햇살이 이글거리는 속에서 그들이 발을 옮길 때마다 불그스름한 먼지가 군화목까지 뽀얗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상재는 언제나처럼 또 죄스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이 전쟁은 뭐냐 ..... 하는 생각이 되풀이되었다.

야자수 무성한 나트랑 해변의 긴 백사장은 평화스러웠다. 남지나해의 열풍은 검푸른 바다에 묵직한 파도를 일으키며 화사하게 흰 물꽃들을 피워내고, 백사장에는 많은 수영객들이 경쾌한 외침으로 왁자했다. 그 수영객들의 대부분은 휴양을 즐기고 있는 미군들이었다.

"어이, 저것 좀 마실까."

"아이구, 또 저겁니까?"

박 병장이 지프를 급히 세웠다. 이상재는 여자 행상에게로 다가가며 손가락 두 개를 세웠다. 여자가 순간적으로 반가운 기색을 드러내고는 잽싸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여자의 오른손은 맞물려 있는 톱니롤러의 손잡이를 돌리고, 왼손으로는 잎들을 다 벗겨버린 사탕수수대를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롤러에 밀어 넣었다. 사탕수수대가 톱니롤러 사이에서 으깨지며 아래로 진한 즙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한 자 길이의 사탕수수대 대여섯 개를 연달아 밀어 넣었다. 톱니롤러를 빠져나온 사탕수수대는 물기가 다 빠져버려 버슬버슬했다. 여자는 큰 유리컵에 얼음덩이를 두어 개 넣고 사탕수수즙을 따랐다. 사탕수수즙은 진한 우윳빛이었다. 강렬한 햇볕에 얼굴이 그을릴 대로 그을린 여자가 방싯 웃으며 이상재에게 컵을 내밀었다.

"이거 알고 보면 더럽다구요. 얘네들이 이 기구며 그릇 같은 걸 깨끗이 청소해야 말이지요."

박 병장이 여자에게 돈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투로 말했다.

"괜히 깨끗한 척하지 마. 이거야말로 전혀 가공이 되지 않은 순수한 자연식품이야. 난 이걸 한꺼번에 다섯 잔을 마셔도 배탈 난 적 없어. 월남에 왔으면 월남식대로 사는 게 좋아. 사람 몸이란 다 적응하게 돼 있으니까."

이상재는 사탕수수즙을 차게 하느라고 컵을 열심히 흔들어대다가 한 모금 마시고는,

"카아아 이 맛! 참 기가 막힌다니까. 양키들 콜라를 어찌 이 맛에 대겠어."

그는 눈을 사르르 내려감은 채 탄복을 했다.

"허 참, 맨날 마시면서 그게 그렇게도 맛있어요?"

박 병장이 컵을 입으로 가져가며 어이없어했다.

"이봐 콜라처럼 그냥 꿀꺽꿀꺽 마시지 말고 입 속에 담고 음미해 가면서 마셔야지 이 진가를 알지. 사탕수수 속살이 사근사근 씹히는 것 같으면서 이 깊고 그윽하고 아련한 단맛, 이게 얼마나 기가 막혀 이건 월남 아니면 맛볼 수 없는 가장 순수한 월남의 맛이야."

이상재는 다시 눈을 사르르 내려 감고 컵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주 시를 쓰시는군요. 저는 그저 달고 시원하다는 것밖에 모르겠어요."

"이런 멋대가리 없는 사람 같으니라구 그렇다고 내 느낌을 다 표현한 건 아니야. 말로는 더 뭐라고 할 수가 없는 거지. 어쨌거나 식수까지 공수해다 먹고, 월남사람들 음식이란 입에도 대지 않는 양키들로서는 이 기막힌 맛을 모르고 월남을 떠나는 거지."

", 여기 와서 다시금 느낀 건데 미국은 참 거대해요. 정글에다 그렇게 끝없이 포탄을 퍼부어대고, 그 많은 군수물자들로 월남을 다 덮다시피 하면서도 끄떡도 없으니 말이죠."

"끄떡할 리가 있나. 그럴수록 미국 경제는 호황을 누리는 거지 소비 촉진은 생산력 배가를 낳고, 생산력 배가는 경제신장을 추동하고, 자본주의 시장원리가 잘 맞아 돌아가고 있는데. 여기 한 잔 더."

이상재는 여자에게 컵을 건네며 검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근데 미국 정부도 점점 골치 아프게 생겼어요. 국내에서 자꾸 반전 여론이 높아가고, 젊은이들은 내놓고 병역기피 시위까지 벌이고 있으니까요."

"글쎄, 그런다고 정부가 제 할 일 못하겠어? 자기네 손해보다 이익이 더 많으면 일부의 불평불만은 묵살해 버리는 거지."

이상재는 여자에게 컵을 받아들고는,

"근데, 한 가지 의문이 있는데 말야, 북한에서도 저쪽에 참전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거 사실인가?"

그는 컵을 입에 대며 박 병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글쎄요, 그걸 전선에서 확인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결론으로는, 같은 공산권으로서 충분히 참전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건 대규모가 아니라 소규모로 베트콩의 군사훈련이나 게릴라 전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왜요?"

"왜긴. 생각해 봐, 무슨 이데오르기니 이념이니 해대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이건 남의 나라 전쟁이고, 남의 전쟁에 뛰어들어 우리 민족끼리 이 정글 속에서 서로에게 총을 쏘아 죽어간다면 그보다 어이없고 비참한 비극이 어디 또 있겠어. 그건 6, 25 때보다 더 기막힌 비극인 거야."

", 생각해 보니 그렇기도 하군요. 참 이 전쟁 복잡해요."

박 병장이 쓰게 입맛을 다셨다.

", 잘 마셨다. 난 귀국해서도 이 맛을 잊지 못할 거야."

"단것을 무척 좋아하시는 모양이죠?"

", 그렇지도 않은데 ..... 나도 잘 모르겠는데, 이 사탕수수 쥬스하고, 논이 펼쳐진 들녘을 보면 이게 월남의 특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무조건 좋아지는 거야. 나락 무성한 들녘을 봐. 드문드문 선 파초만 없다면 우리나라 농촌하고 너무나 똑같잖아. 나는 우리나라가 아닌가 하고 가끔 착각을 일으킬 때가 있어."

"저기 저건 어떠세요? 저게 제일가는 월남 특색 아니겠어요?"

박 병장이 운전대로 오르며 길 건너편을 턱짓했다. 흰 아오자이를 입은 아가씨 대여섯이 명랑한 몸짓들을 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가느다랗고 아담한 몸매가 드러날 만큼 꼭 끼는 아오자이 자락이 가볍게 살랑거리고, 원뿔형의 모자 농라 아래로 길게 드리워진 검은 머리카락도 잘게 흔들리며 반짝이고, 서너 아가씨의 농라는 끈이 목에 걸려 주인의 등에 업히듯 하고 있는데 그 자태들이 하얀 꽃에 검은 술이 달런 것처럼 곱고 아름다웠다.

", 박 형도 남자라고 제대로 찍었네."

이상재가 차에 오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월남 여자들한테 눈독 안 들이면 그건 남자도 아니죠. 선배님도 재네들 매력적인 거 잘 아시죠?"

박 병장은 시동을 걸며 무슨 맛있는 먹이라도 대하는 것처럼 군침을 삼켰다.

"알 만큼 알지. 몸매들 입체적으로 날씬하지, 서양식으로 개방적이지, 특히 크고 깊은 눈들이 매혹적이잖아. 헌데 여자들을 보면 어쩐지 가엾고 슬픈 생각이 들어 오랜 전쟁에 여자들이 너무 시달리고 고생하며 사니까."

"선배님도 참. 복잡하게 그런 생각하지 말고 기분 나는 대로 즐기세요. 우리가 즐기는 것도 불쌍한 여자들 돕는 거라구요. 우리가 언제 다시 월남에 와서 꽁까이들 또 품어보겠어요?"

박 병장이 급발진을 하며 목청 크게 말했다.

"그도 그렇지. 근데 저 아가씨들은 학생인가?"

", 그런 것 같아요. , 맘에 있으세요? 차 돌려요? 저 중에서 두셋은 당장 꼬실 수 있어요. 파란 돈이면 에브리씽 오케이니까요."

박 병장이 곧 차를 돌릴 기세로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학생을 그러면 되나. 여자는 얼마든지 많은데."

", 선배님 참 순진하셔. 재네들 전부 처녀 아닐 수도 있다구요. 열 살 넘으면 성한 게 하나도 없다는 말 못 들었어요?"

"그거 괜히 과장된 말이야. 나도 열두 살짜리 창녀를 보긴 했는데, 그건 극소수에 불과한 특별한 경우잖아. 전쟁이란 참 잔인한 거야."

", 선배님은 언제나 그렇게 반듯하셔서 좋아요. 아까 그 중사가 몇 번씩이나 선배님한테 고마워하더라구요. 미국에 대해서 새로 알게 된 것도 쾌나 충격이 큰 것 같고요."

"고맙긴 뭐. 늦게라도 알았으면 됐어."

"저기서 수영 좀 하고 가실래요?"

박 병장이 해수욕장 중간 지점에 차를 세웠다. 위장된 토치카 안에서 군인 하나가 뛰어나왔다. 한국군 일등병은 박 병장을 알아보고 경례를 붙였다.

"아니야, 나 수영에 별 취미 없어. 적당히 저녁 먹고 들어가지 뭐."

이상재는 속마음을 감추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미군들이 북적거리고 있는 해변에서 수영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미군들이 계집애들을 끼고 맘껏 마시며 노닥거리고 있는 해변을 한국군들이 지키고 있다는 것도 비위 상했다. 야자나무숲 저쪽에는 토치카가 또 하나 있었다. 야자나무 잎들은 엉성하기 이를 데 없는데도 이 해변의 큰길가 모래밭에는 야자수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서 그 잎들이 어우러져 그럴듯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4킬로미터에 이르는 백사장과 암청색의 남지나해가 묵직하게 밀어오는 파도와 하얗게 작열하며 쏟아져 내리는 햇살과 진초록 빛의 야자나무숲과, 해변의 풍광은 더없이 일품이었다.

"혹시 미군들 싫어서 그러는 것 아니세요?"

박 병장이 이상재의 마음을 짚어내려는 듯한 눈길로 물었다.

"아니야, 난 원래 수영을 좋아하지 않아. 이렇게 바다 구경만 해도 수영한 것이나 마찬가지야."

미군들은 월남사람들을 ''이라고 부르며 노골적으로 멸시하고 차별했다. 그러나 ''이라는 비칭은 월남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은 원래 미국에 사는 중국인들을 천시해 생겨난 것이었고, 그 비하의 지칭에는 아시아 황색인종 전체를 업신여기는 의미가 포괄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군들은 한국군은 연합군으로 자기네와 같다고 애써 구분하면서 월남인들만 ''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이상재는 그 얍삽한 수작이 오히려 역겹고 기분 상했다. 그건 단순히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백인들은 아시아인들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간주한다는 글을 일찍이 읽었기 때문이다. 황인종들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취급해 버리는 백인들의 그 대책 없는 오만과 우월감, 그에 대한 반감이 이상재는 월남에 와서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미군들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해서 월남사람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6, 25 때 한국 사람들을 그렇게 취급했던 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럼 식사하러 가시지요. 어디로 가시겠어요?"

"아무데로나."

박 병장이 차를 세운 곳은 뒷길에 있는 서울바 앞이었다.

"선배님 오늘 저녁에 술 한잔하시고 기분 좀 내세요. 꽁까이 품을 자본까지 두둑하니까요."

박 병장이 차에서 내리며 바지 뒷주머니를 두들겼다.

"아니야, 그냥 저녁 간단히 해. 실은 내일모레 우리 내부 검열이 있거든. 내가 지금 이러고 다녀서도 안 된다구."

이상재는 얼른 둘러댔다. 아침에 본 통혁당 사건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전혀 술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더구나 수사대에 있는 사람과 너무 가깝게 얽혀서 좋을 일이 없었다. 그리고 허미경에게 편지 쓸 일도 급했다.

"그래요? 이거 섭섭한데요. 그럼 자금은 제가 잘 보관하고 있을 테니까 며칠 있다가 한판 하지요."

"그럴 것 없이 박 형이 부담 없이 써. 그런 자금 생길 일이야 앞으로 또 얼마든지 있는데 뭘."

이상재는 친근한 척 박 병장의 어깨를 쳤다.

"참 선배님은 대단하세요. 어찌 그리 돈에 무관심할 수 있는지. 선배님을 대하면 제가 여자와 돈을 너무 밝히는 것 같아 창피하고 부끄럽고 그래요."

박 병장은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무슨 별난 인간인가. 나도 다 여자 좋아하고 돈 좋아하고 그래. 우리 국산맥주부터 한잔할까."

"예에 맥주는 역시 국산이 최고지요."

이상재는 밤늦도록 허미경에게 보낼 편지를 끝맺지 못하고 파지만 내고 있었다. 통혁당 사건이 자꾸 편지 쓰기를 방해했다. 아니, 편지 쓰기로 그 일을 잊어버리려고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상층부 몇 명이 북쪽에 가고, 노동당에 입당을 하고, 거액의 돈을 받아 가지고 내려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악명 높은 중정의 고문수사에 의한 조작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공개된 재판을 하게 되면 조작이 폭로되고 말 텐데 그럴 수가 있을까. 더구나 한두 명이 연루된 사건도 아니고 70명이 넘게 구속된 대사건을 가지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보다 더 어리석고 어리석은 일은 없었다. 그런 행위가 온몸에 휘발유 뒤집어쓰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위험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이전에 자신들이 추구했던 운동이 김일성 정권을 편드는 것이었던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남쪽 사회의 모순과 문제점을 혁신한다는 것이지 북쪽 사회체제를 도입하는 것이 아니었다. 남쪽사회에 모순과 문제점이 있다면 북쪽 사회에도 모순과 문제점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동시에 직시하고 해결해 나아가는 것이 사회혁신이며 진정한통일운동의 길이라고 인식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상층부에서는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인가? 자금이 필요해서? 그건 전혀 말이 안 된다. 돈이 없으면 운동을 중단해야지 돈 때문에 운동의 순수한 목적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그게 아니면 상층부에서는 처음부터 그런 의식과 목적을 가지고 조직원들을 속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건 악질적인 흉계고, 속은 자들의 순수만 무참하게 짓밟혔을 뿐이다. 그러나 일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73명이나 연루된 대간첩단 사건..... 그것이 불러올 사회적 파장이 문제였다. 그건 또 하나의 김신조 사건으로 사회를 뒤흔들며 반공 강화의 무기가 될 수 있었다. 통일운동을 하자는 것이었는데 오히려 분단의 벽만 더 높고 견고하게 한 셈이었다. 미국 비판=반미=용공=빨갱이가 되는 나라에서 순수하게 통일운동을 해도 반공주의자들은 빨갱이로 몰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4, 19 이후에 일어난 통일운동에 앞장선 대학생들을 무더기로 잡아들인 것이 그 좋은 예였다 그런데 북쪽에 가고, 노동당에 입당하고, 돈을 받아왔다면 그건 더 말할 것 없는 간첩이었다.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정신상태가 어이없고도 딱할 뿐이었다.

이상재는 변화 없는 또 하루를 맞이하면서 그 일을 어서 의식에서 지우자고 작정했다. 더 생각해 보았자 수만 리 타국에서 그 내막을 한 치도 알 수 없는 채 정신만 혼란해질 뿐이었다. 그러자면 허미경에게 부지런히 편지를 쓰는 길밖에 없었다. 허미경은 이 지루하고 답답한 월남의 생활을 견디게 하고 이겨내게 하는 유일한 위안이고 힘이었다. 아니, 하루의 폭염을 씻어내며 퍼붓는 월남의 소나기 스콜이었다. 허미경 없이 월남에 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고는 했다. 지글거리는 백광과 풍성하게 내리는 비의 조화 속에서 싱싱하게 자라나는 월남의 나무들처럼 허미경에 대한 자신의 사랑도 월남에 와서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사랑은 외로움을 먹고 크는 나무'라고 허미경에게 써보냈던 것도 그런 생각의 정리였다

"어이 종씨 병장 나리, 그동안 잘 있었어?"

얼굴이 새카맣게 탄 중사 하나가 정글복 차림으로 PX에 들어서며 컬컬하게 인사했다.

"아이고 이 중사님, 어서 오세요 그동안 무사하셨군요."

장부를 들여다보고 있던 이상재는 그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 중사는 서로 성이 같다고 해서 넉살좋게 '종씨, 종씨'했는데, 그래서 그를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정글을 누비는 전투소대에 있기 때문이었다. 안전지대에서 구경꾼처럼 빈둥거리고 있는 입장에서 목숨을 내걸고 있는 전투병들에게 늘 면목 없고 미안했고, 특히 처자식을 거느린 직업군인들에게는 딱한 연민이 커졌다.

", 무사하다마다 베트콩 총알이 나를 보면 질겁을 해서 피해가니까."

이 중사는 언제나처럼 배포 유하게 주먹으로 정글복의 가슴을 툭툭 쳤다.

"요샌 좀 어때요?"

이상재는 캔 맥주를 내밀며 자리를 권했다.

"이거 참 고약한데 날이 가도 기세가 꺾일 줄을 몰라. 근데 요새 이상한 게 한 가지 있어. 여자들이 부쩍 많아진 거야."

"그건 남자들의 손실이 그만큼 크다는 것 아니겠어요?"

"역시 우리 종씨 머리가 척척 도네. 아마 남녀가 반반씩은 되지 않을까 싶은데, 나 또 여자들하고 총질하는 건 여기서 생전 첨이라니까."

이 중사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그럼 전력이 많이 약화됐겠군요?"

"아니야, 아니야. 우리도 첨엔 그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니까 골 때리는 거야. 글쎄 그것들이 남자들하고 하나도 다를 게 없어. 뛰는 거고 총질이고, 거기다가 포탄 나르는 것도 다 똑같다니까. 박격포 공격이 변함없는 걸 보면 여자들도 남자하고 똑같이 포탄을 나른다는 걸 알 수 있잖아. 거 뭐, 여자들이 약하다는 말 있잖아? 그거 다 말짱 헛소리야. 좌우간 남자고 여자고 그 작은 체구들로 어찌 그리 독하게 버티는지 모르겠어."

"그럼 전쟁 쉽게 끝나지 않는 것 아닌가요?"

"아마 그럴 것 같애. 밀림은 끝도 없이 울울창창하지. 여자들까지 악착스럽게 덤비지, 땅굴은 수도 없이 파대지, 아무리 생각해도 미국 이거 단단히 좆 물린 거야. '삼국지'에 이런 말 있대며? 아무리 적장이라도 용맹스러운 장수를 죽일 때는 눈물을 흘린다고. 어쨌거나 물불 가리지 않는 베트콩들의 애국심, 그것 하나는 알아줘야 해. 정글 벙커에서도 에어컨을 틀어야 하는 미군들이 상대하기는 아주 힘든 적이야. 우리야 기한 채우고 뜨면 그만이지만 말야. 안 그래?"

"당연하지요. 우리까지 좆 물릴 것 뭐 있나요."

이상재는 일부러 중사의 말을 흉내 내며 분위기를 맞추었다. 그 상소리는 또한 숨김없는 진심이기도 했다. 중사가 어깨를 들썩이며 키들키들 웃었고, 이상재도 콕콕거리며 중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중사가 기다렸다는 듯 속주머니에서 무엇을 얼른 꺼내 이상재의 손에 쥐어 주었다.

"우리 종씨는 복 받을 게야."

돌아서는 이상재의 뒤에다 대고 중사가 좀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고, 이상재는 중사한테 받은 것을 들여다보고 걸으며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이상재가 받은 것은 레이션카드(구매카드)였다. 그건 연합군(미군과 한국군)에게는 전부 지급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멋모르는 전투병들에게는 그것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것을 상급자들이 슬쩍해서 그 수량만큼 물건을 사내 암시장에서 처분했다. 이상재는 그 불법행위를 편한 마음으로 도와주고 있었다. 한 달에 40달러를 받는 것 중에서 30달러가 의무적으로 본국 은행에 송금 조치되고 나면 어차피 나머지 돈으로 구매카드에서 허용하고 있는 물건을 다 살 수가 없었다. 일단 전쟁터에 투입된 물건이 소모 안 되는 것도 문제였다. 그리고 전투병들의 경우 전투에서 제외시켜 주는 귀국 3개월 전까지는 전투에서 살아남기 바빠 구매카드의 물건들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직업군인들이 모처럼 좀 살아보겠다고 구매카드를 모아오는 것을 까탈스럽게 할 수가 없었다. 처자식이 있는 몸으로 이 폭염의 땅에 온 것이 무엇 때문인가. 더구나 편한 보직도 아니고 정글 속에서 목숨을 걸고 있는 경우 그 처절함은 가슴 아리고 눈물 겹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상재는 장교도 아닌 직업군인들의 그 가슴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이 중사가 싱글벙글하며 떠나고 조금 있다가 선임하사가 들어서며 다급하게 말했다.

"이 병장, 빨리 테레비 촬영 준비해."

"또요? 얼마 전에 했잖아요."

이상재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방송국이 어디 한둘이야? 이거 다 애국하는 거니까 짜증내지 말어. 총 들고 배우 노릇 하는 애들에 비하면 우리 수고는 아무것도 아니잖아."

", 알았어요."

"그리고 방송국 사람들도 애쓰는 월급쟁이들이니까 푸짐하게 서비스 잘해 주라구."

", 걱정 마세요."

"그래, 이 병장만 믿어. 2대대 1중대로 빨리 출발해 거기서 촬영장을 안내할 거야. 애들은 둘만 데려가면 되겠지?"

", 그럼 됩니다."

이상재는 일등병 둘에게 각종 음료수와 먹을 것들을 챙기게 해서 대기 중인 스리쿼터를 탔다. 월남의 정글에서 용감무쌍하게 싸우는 국군 장병들의 눈부신 활약상을 찍으려고 또 어떤 방송국에서 온 것이다. 정글 전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그런 촬영이 싫어서 이상재는 계속 짜증 이 나고 있었다. 이상재는 달리는 차창 밖으로 거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하얗게 햇빛 쏟아지는 속에 시클로들이 느릿느릿 굴러가고 있었고, 쪽그늘을 만들어놓은 여자 행상 앞에서 구지레한 남자 서넛이 쪼그리고 앉아 쌀국수를 사먹고 있었고, 작은 거울을 벽에 걸어놓고 거리의 이발사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이상재는 갑자기 등을 떼며 곧추앉았다. 열 살쯤 되었을까, 바짝 마른 사내아이가 두 다리가 몽땅 잘려버린 계집애를 업고 서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이상재는 급히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 아이의 모습은 저 뒤로 멀어지고 있었고, 행인들은 그 아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가고 있었고, 내밀고 있는 아이의 손에는 불화살 같은 백광만 담기고 있었다.

"이거 스콜 쏟아질 것 같은데요."

운전병이 말했다.

"그래, 그거라도 쏟아져야지 ."

이상재는 몸을 바로잡으며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어디로 날아가는지 모를 헬리콥터 편대가 백광이 지글지글 끓고 있는 하늘 속에서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25. 고향 그리워

라인 강에 새해의 눈이 내리고 있었다. 자욱한 눈발에 강변을 따라 이어지고 있는 나지막한 산들이며, 산의 품에 안기듯 자리 잡고 있는 집들의 모습은 아슴푸레했다. 그러나 강줄기는 더 진한 물빛을 드러내며 긴 흐름을 짓고 있었다. 강과 산, 그리고 이름 모를 고성과 가지가지 예쁜 모양의 집들이 하늘 가득 흩날리는 눈발과 어우러진 풍광은 환상적으로 아름다웠다.

"세상에! 꼭 꿈속에 있는 것 같애."

두 팔을 벌리며 정남희가 감탄했다. 옆에서 걷고 있는 김광자는 정남희를 보며 그저 웃음 지었다.

"지금 서울에도 눈이 올까? 새해가 돼서 그런지 어쩐지 집 생각이 나서 못살겠다. 잘 익은 김치도 실컷 먹고 싶고. 지금 김치가 얼마나 맛있을 때야, 글쎄."

정남희는 입맛 동하게 신침 들이켜는 소리를 냈다. 정남희의 말에 김광자는 서울이 아닌 강진이 불현듯 다가드는 것을 느꼈다. 정남희는 서울 태생이었다. 김광자는 줄줄이 떠오르는 어머니와 동생들의 모습에 금방 목이 메었다.

"알겄지야? 아부지가 생전에 농사짓대끼 그렇게만 혀, ?"

어머니가 공항까지 나와서 다짐했던 말이 또 쟁쟁히 울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농사 짓듯이! 그 말은 가슴 벽에 깊게깊게 아로새겨져 있었다. 살 껍질을 도려내지 않고서는 없앨 수 없는 문신처럼.

"이젠 독일 놈하고 놀아날 참이냐!"

오빠의 외침이었다. 오빠는 끝내 반대를 꺾지 않았다. 그 불신과 모독때문에 어머니의 다짐을 가슴 벽에 더 깊이 팠던 것이다.

"집생각을 하면 뭘 해. 자꾸 눈물만 나오지."

정남희는 소리 나게 콧숨을 들이켜고는,

"독일어 교육도 며칠 안 남았는데, 정말 넌 어쩌면 그렇게 독어를 잘하니 글쎄. 꼭 대학 나온 것처럼. 넌 머리가 좋은 거니, 무슨 비결이 있는 거니?"

그녀는 가끔 해온 소리를 또 했다.

"비결은 무슨 비결, 그냥 죽어라 하고 하는 거지 뭐."

김광자는 축축한 감정을 걷어내며 대꾸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아니야, 난 머리가 나쁜가 봐. 나도 니 죽고 나 죽자 하고 앙심먹고 덤비는데도 영 잘되지를 않아. 그런 말 있지 왜. 독어는 울고 들어갔다 웃고 나오고, 영어는 웃고 들어갔다 울고 나온다고. 난 아무래도 울다가 끝날 것 같애."

정남희는 정말 울상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 우리가 영어는 중학교 때부터 배웠고, 독어는 처음 대하는 것이라서 그래. 그러고, 너하고 나하고 좀 차이가 나는 건 나는 서울에서 학원에 다녔고 넌 안 다녀서 그런 거야. 지금이 고비니까 어려워하지 말고 치를 악물어. 우리보다 1-2년씩 먼저 와서도 독일 말 잘 못하는 나이 많은 간호원들 봐. 얼마나 구박받고 궂은일만 하고 그러니. 사람끼리는 말이 통해야 하는 게 첫짼데, 우리 직업은 특히 그렇잖아. 그러니까 밤낮으로, 꿈에서도 독일말만 생각해. 백 번 외워서 머리에 안 들어갈 단어는 없으니까."

김광자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동안 겪어보니까 정남희의 머리가 과히 좋은 것 같지 않았고 독일어를 포기해 버리면 그녀가 어찌 될 것인지 무척 걱정스러웠다.

"어머, 넌 한 단어를 100번씩도 외우니?"

"그럼 어떡해 안 되면 200번도 해야지. 난 단어 외우는 것보다 발음이 제대로 안 돼서 속 썩이는데, 발음이 독일 사람들처럼 될 때까지 한 단어를 하루 종일 속으로 연습한 적도 있어. 한국에서 배운 발음은 거의가 엉터리니까."

"하루 종일? 그럼 그게 몇 번이야?"

정남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몰라, 아마 수백 번은 넘을 거야. 혀가 제대로 소리를 낼 때까지 계속하는 거니까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구."

"어머 얘, 너 보기하고는 다르게 독하구나. 나도 그러면 될까?"

정남희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안 될 게 뭐가 있어. 가난해서 타국생활 하는 것도 서러운데 말 잘 못해서 천대받아 봐. 그것처럼 서러운 게 어디 있겠어. 결심 단단히 해."

김광자는 정색을 하고 정남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알았어 . 나도 그렇게 해볼게 근데 말야, 여기서 배겨내지 못하고 돌아가는 여자들도 있다는데, 그게 말을 못 익혀서 그러는 걸까?"

"글쎄, 꼭 말 때문이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가 있을 텐데, 말이 잘 안 통해서 당하는 불편이나 고통 같은 게 하나의 이유는 될 수가 있겠지."

"그래, 그럴 거야. 정신병에 걸려 쫓겨갔다는 말을 들으면 으스스 떨려. 이것저것 얼마나 힘들었으면 정신병이 다 걸렸겠어 글쎄. 신세 좋아지려고 왔다가 신세 더 망쳤으니 그 집안이 어찌 됐겠어. 보나마나 빚지고 왔을 텐데. 나 정신 바짝 차려야지."

정남희는 어깨를 움츠리며 부르르 떨었다. 간호원들은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독일에 도착해서도 돈을 얼마나 쓰고 왔느냐고 서로서로 눈치 보아가며 묻고는 했다. 광부가 그렇듯 간호원들도 뒷돈질을 하지 않고서는 비행기를 탈 수가 없었고, 가난한 살림에 그 돈은 다 빚을 내야 했다. 김광자는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아 강기수 의원에게 더욱 감사하고 있었다. 국회의원 빽은 남녀를 서로 뒤바꾸는 것만 빼고는 못할 일이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 위력은 대단했다. 강 의원이 직접 나선 것도 아니고 비서가 몇 군데 전화를 하는 것으로 거침없이 비행기를 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돈 없고 빽 없는 놈들은 시체라는, 세상을 떠도는 말이 가슴 한쪽을 서늘하게 하기도 했다.

"괜히 그런 우울한 생각하지 말고 힘내, 며칠 안 있으면 본격적으로 일 시작하게 될 건데."

김광자는 묵직하게 늘어진 가방을 왼쪽 어깨로 바꿔 멧다. 어깨에 쌓였던 눈송이들이 떨어져 날리며 눈발에 섞였다.

"차암, 우린 언제 저런 멋진 집에서 사람답게 살아보니. 독일 사람들이 너무나 부러워."

길게 한숨을 쉬는 정남희의 눈길은 무수한 눈송이들이 어지럽도록 현란하게 춤추고 있는 저 멀리로 가 있었다.

"그래, 사람답게 산다는 게 뭔지 독일에 와서 알았어. 솔직하게 말하자면, 서너 달 동안 살아본 것만으로도 독일은 천국이라는 생각이 들어. 우리나라에 비해서."

"너도 그런 생각했니? 틀림없이 천국이지. 세상에, 공부시켜 주면서 돈까지 주는 나라가 어딨니? 우리나라 같았어 봐. 꿈도 못 꿀 일이지. 얘기가 나온 김에 나 창피스러운 얘기 하나 할까?"

정남희가 김광자를 쳐다보며 쑥스럽게 웃었고, 김광자는 무슨 얘기냐고 눈으로 묻고 있었다.

"흉보지 말어?"

"흉은, 우리 사이에."

"글쎄 있잖아, 첫 달 공부를 끝내고 생각지도 못한 월급을 받고 얼마나 놀라고 좋았는지 몰라. 너무 좋아서 잠이 안 오는 거야. 그래서 한국 돈으로 얼마나 되는지 계산을 해봤지. 근데 글쎄 통닭 600마리 값이더라니까, 600마리. 그러니까 말야, 이 삼은 육, 하루에 통닭 스무 마리 값을 쳐준 거라구 그 계산을 하고 나니까 얼마나 통닭이 먹고 싶던지. 그래서 다음날부터 여기저기 통닭을 찾아 나섰지. 근데 독일엔 한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그런 통닭이 없는 거야, 글쎄. 난 서울에 있을 때 그렇게 통닭이 먹고 싶었거든. 그래서 그 돈을 몽땅 집으로 보내면서 온 식구가 배가 터지도록 통닭을 사먹으라고 편지를 썼어. 내 몫까지 다 말야."

목소리가 잠겨 든 정남희는 손등으로 두 눈을 번갈아가며 훔쳤다.

"그랬었구나. 참 잘했다. 나도 서울에서 통닭이 먹고 싶었지만 결국 못 먹었어."

김광자는 정남희의 팔을 꼭 잡았다. 자신은 통닭 대신 쌀 몇 가마가 되는지를 계산했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독일어 학원만 다니면서 돈까지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공부가 끝나고 병원에 돌아오면 환자복 세탁이나 청소 같은 허드렛일을 꼬박꼬박 했다. 그 노동의 대가로 병원 측에서는 월급을 지급하는 것이고, 독일어 교육은 하루빨리 실용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들로서는 그 정도의 일을 하고 월급을 받는다는 것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열네댓 살의 계집애가 식모살이를 하면 겨우 입이나 얻어먹고, 성인이 식모살이를 해도 월급이 쥐꼬리만한 한국 현실에 그녀들은 너무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 통닭 먹어본 사람들보다 못 먹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거야. 세상엔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으니까. 근데 얘기 나온 김에 창피스런 얘기 하나 더 해도 될까?"

김광자는 정남희에게 다정한 웃음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말야, 독일에 와서 신기한 게 한둘이 아니지만, 제일 놀라고 신기했던 게 뜨거운 물, 찬물이 조정하는 대로 섞여 나오는 샤워였어. 그 샤워를 아침저녁으로 틀어놓고 맘껏 몸을 씻는 게 꼭 꿈만 같애. 우리가 어디 자주 목욕을 하고 살았니?"

"그래, 나도 샤워기가 신기했는데, 더 신기했던 건 빵 굽는 토스터였어."

"맞아, 맞아. 빵이 다 구워져 자동으로 톡 솟아오르는 것이라니! 그러고 보면 냉장고, 세탁기, 그릇 씻는 기계, 신기하고 부러운 게 너무 많지 뭐. 독일 사람들에 비해 우리나라 사람들 사는 건 사람 사는 게 아니야. 독일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잘 살지?"

"그러게 '라인 강의 기적'을 이룩했다고 하잖아."

"그래. 근데 그 '라인 강의 기적'이라는 게 무슨 뜻이지? 그 말을 귀 아프게 들으면서 독일에 왔는데 한강보다 좁고 별것 아닌 저 라인 강이 무슨 기적을 일으켰다는 것인지 난 그 뜻을 모르겠어. 석탄이나 짐 실은 배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뿐인데 말야. 우리나라에서 막 써먹는 '한강의 기적'도 그 말에서 따온 거라며?"

정남희는 의문 담긴 눈길로 김광자를 쳐다보았다. 스카프에 싸인 그녀의 볼이 추위에 발갛게 얼어 있었다.

", 그건 라인 강이 독일을 상징할 만큼 길고 큰 강이니까 그냥 '독일의 기적'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멋지고 근사하게 표현하느라고 그렇게 말한 거지 뭐. 그게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2차 대전에서 패한 독일이 잿더미 위에서 다시 오늘날처럼 잘살게 경제부흥을 일으킨 건 기적이라는 뜻인데, 그건 바로 독일인들이 일으킨 기적이라는 말 아니겠어."

"그래 글쎄, '독일인의 기적'이라고 쉽게 말하면 될 것이지 괜히 빙빙 돌려서 말하니까 나 같이 무식한 것들은 어리뻥뻥하고 헷갈리고 그러잖아. 근데, 독일처럼 우리나라에서도 '한강의 기적'이 일어날까?"

"글쎄 ..... 누구나 잘살아 보려고 애들을 쓰고 있고 ..... 우리 같은 여자들도 이렇게 외국에 나와 돈을 벌어 보내고 하는데 ..... 잘살게 돼야 할 텐데 어찌 될지 알 수가 있겠니."

"우리 잘 살긴 틀린 것 같애. 동백림 간첩단 사건으로 서독 몰래 사람들 마구 잡아가 서독하고 우리나라하고 사이가 나빠졌다면서? 광부고 간호원이고 더 못 오게 될지 모른다고 언니들이 걱정하고 있잖아. 서독이 우릴 도와주고 있는데 왜 서독 비위를 건드리고 그러는 거니?"

"글쎄,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난 어떤 광부가 했다는 말을 들으면 잠이 안 와."

"잠이? , 무슨 말인데?"

정남희의 눈이 커졌다.

", 서독에서는 잡아간 사람들을 무조건 석방해서 서독으로 돌려보내라 하고, 우리나라에선 그 말을 안 듣고 하는데, 그렇게 계속 사이가 나빠지다간 서독에서 광부고 간호원이고 다 한국으로 보내버릴지도 모른다는 거야."

"아니, , 뭐라구?"

정남희는 걸음을 뚝 멈추며 소리쳤다. 그 바람에 스카프 위에 내려앉았던 눈송이들이 흩어져 날렸다.

"어머 왜 그리 놀라고 그러니? 당장 내쫓기는 것도 아닌데."

"안 돼, 안 돼, 그리 되면 우리 집은 쫄딱 망해. , 20만 원이나 들이고 비행기 탄 건데, 그게 다 빚이라구, ."

정남희는 겁에 질린 얼굴로 자신도 모르게 뒷돈 쓴 것을 실토하고 있었다. 20만 원이면 쌀40가마가 넘는 거액이었다. 그리 큰돈들을 써야 했는가..... 생각하며 김광자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정남희를 바라보았다. 정남희의 눈에는 눈물마저 그렁그렁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아마 그렇게까지는 안 될 거야. 왜냐면 서독이 우리나라 광부나 간호원들을 불러들인 건 이 사람들이 뭐 특별히 마음이 좋아서 우리한테 인심 쓰는 게 아니니까. 자기네 일손이 부족해서 당장 우리가 필요한 형편인데 그런 일을 저지르진 못할 거야. 사이가 정 나빠지면 더 받아들이지 않을지는 몰라도.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난 믿어."

김광자는 그동안 생각해 왔던 것을 힘주어 말했다. 그건 정남희만을 위로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게 정말 그럴까?"

"그럼 당연하지. 우리나라 광부와 간호원들이 일 잘한다고 독일사람들 사이에 벌써 소문이 나 있잖아. 근데 우릴 내쫓아봐. 손해 보는 건 자기네 독일이거든."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어쨌거나 제발 그런 일은 벌어지지 말아야 해, 우리들 신세가 어찌 되겠어."

"너무 걱정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할 생각하자. 우리가 살길은 그것밖에 없잖아."

"그래, 나도 독일어 열심히 할 거야."

그들은 서로 눈길을 나누며 병원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얼크러지고 설크러지고 휘돌고 맴돌며 황홀한 군무를 추고 있는 무수한 눈송이들 저편으로 병원 모습이 어렴풋이 드러나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 3개월 동안의 독일어 교육이 끝나면서 김광자와 정남희의 병원 근무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근무는 아침 6시부터 여덟 시간씩 3교대였다. 김광자는 오전근무에, 정남희는 오후근무에 배치되었다.

"난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지 몰라.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으니."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정남희는 침울한 기색으로 말했다.

"뭐가? 근무시간 땜에?"

김광자는 얼른 정남희의 마음을 짚었다.

"차암, 눈치 빠르기는. 오전근무가 되기를 바랐는데 글쎄 ....."

정남희는 무거운 손놀림으로 감자를 찍으며 전혀 식욕 없는 얼굴이었다.

", 따로 또 돈벌이하려고? 그럼 나하고 바꾸면 되지 뭐."

김광자는 한시라도 빨리 정남희의 근심을 덜어주려고 이렇게 말했다.

"아니, 넌 아르바이트 안 해?"

문득 정남희의 얼굴이 밝아졌다.

", 난 동생들도 많지 않고, 너처럼 정식으로 간호학교를 나오지 않아서 병원 일만 잘하기에도 벅차거든."

김광자는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정남희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얼른 둘러댔다.

"근데, 의사들이 말을 들어줄까?"

"그럼, 독일 사람들은 논리적이고 납득할 수 있는 말이면 다 들어준대잖아."

"그렇지만 아르바이트 때문이라고 할 순 없잖아. 그건 눈치껏 하는 일인데."

"그야 그렇지. 어쨌든 나한테 맡겨."

3교대 근무에서 한국 간호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야간근무였다. 야간근무는 고된 만큼 야근수당이 따로 나오는데다가, 3주를 근무하면 2주간의 휴가까지 주었다. 그 기간에 딴 병원에 가서 일하면 또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래서 야간근무는 독일에 먼저 온 고참들의 차지였고, 병원 쪽에서도 경험자들을 우선 배치했다. 그 다음의 인기가 오전근무였다. 오후2시에 근무가 끝나면 곧바로 꽃집 같은 데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다. 그런 아르바이트는 시간당 5마르크였고, 한국 간호원들은 다투어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김광자는 정남희와 함께 의사를 찾아갔다. 자신은 아침잠이 많아 오전근무가 곤란하니 오후로 바꿔달라고 했다. 양쪽 의사는 그들에게 근무시간을 서로 바꿀 마음이 있는지를 확인하고는 이내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광자야, 너무나 고마워. 나 이 은혜 꼭 갚을게."

정남희는 김광자의 손을 싸잡으며 눈물을 글썽거린다.

"얘는, 은혜는 무슨 하여튼 돈벌이도 좋지만 몸 상하지 않게 해야 해."

자신도 돈 욕심이 안 나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김광자는 속으로 딴 욕심을 다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돈벌이하는 시간에 자신은 공부에 전념하기로 한 것이다. 의사가 되기 위해서였다. 앞서 독일에 온 간호원들 중에서 3년 계약기간을 끝내고 의대에 진학한 사람이 서넛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김광자는 눈앞이 확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나도 의사가 되자! 그 욕구는 좌절되어 버린 선생의 꿈이 되살아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꿈은 오직 돈벌이를 위해 모국을 떠나왔다는, 조금은 서글프고 무언가 암울한 감정을 일거에 뒤집는 빛이고 희망이었다. 오빠에게 꼭 복수하고 말리라! 의사가 되려는 또 하나의 목적이었다. 이제 그 꿈은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하거나 흔들리지 않게 가슴 깊이 박힌 새 삶의 기둥이었다. 공부할 수 있는 능력만 갖추면 학비가 거의 무료나 마찬가지인 서독의 교육제도를 알고 나서부터 그 꿈은 더욱 바윗덩이로 단단해졌다. 3년 동안 매달 월급에서 최소한의 숙식비를 떼내 저금해 나가면 집안을 돕고, 의대 공부도 할 수 있는 두 가지 목적을 모두 이루어나갈 기막힌 기회였다.

정남희는 병원 식당의 독일 음식에 질려 진작부터 밥을 따로 해먹자고 성화였다. 먼저 와 있던 여섯 명이 둘씩 짝지어 김치를 담가 밥을 해먹고 있었다. 물론 자신도 밥에 김치며 된장찌개를 먹고 싶은 생각이야 간절했다. 그러나 그건 식당에서 먹는 것에 비해 너무 큰 돈 낭비고, 시간 낭비였다. 그리고 남들보다 더 오래 독일살이를 하려면 어차피 독일 음식을 입에 익혀야 했다. 한 고비를 넘기면 될 그런 고역쯤 얼마든지 달게 치를 자신이 서 있었다.

김광자와 정남희가 배치된 곳은 노인네들의 치매병동이었다.

"각오 단단히들 하라구 거긴 지옥이니까. 신참들은 거길 거쳐야 간호원 인생이 뭔지 안다구."

서울 어느 종합병원에서 수간호원을 했다는 이정옥이 자신의 경력을 과시하듯 말했다. 마흔이 넘은 그 여자는 자신의 경력을 인정해 주지 않는 것에 늘 불평을 털어놓았고, 서로 평간호원이면서도 한국 간호원들에게 군림하려고 해서 모두에게 미운털이 박혀 있었다. 그 여자는 남자들이 흔히 쓰는 어투인 '내가왕년에.....' 하는 말을 곧잘 해서 별명이 '왕년'이었다. 독일 병원에서는 한국에서의 경력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모두 평간호원으로 출발시켜 그 능력을 평가하고 있었다. 정남희는 첫 근무를 시작하기 30분 전에 간호원 휴게실로 갔다.

", 정 간호원, 어서 와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수간호원인 독일 여자가 상냥하게 웃으며 정남희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정남희는 간단하게 인사하고 빈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긴장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데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첫 근무인데다가 독일 사람과 말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 여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먼저 와 있던 독일 간호원 둘은 마치 무슨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입맛까지 다시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정남희는 그들을 곁눈질하며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간에 보아온 것으로는 담배를 안 피우는 간호원보다 피우는 간호원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리고 또 이상한 것은 그들 대부분이 나이가 많고, 노처녀라는 점이었다.

"딴 좋은 직업들이 많아 젊은 여자들은 간호원 생활을 안 하려고 한대잖아. 그 덕에 우리가 여기 온 거지 뭐."

김광자의 말이었다. 그런데, 왜 노처녀로 늙어가는 것일까? 남자들이 간호원을 싫어하는 것인가? , 담배들은 왜 저리 피워댈까? 노처녀 신세가 속상해 그러는 걸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알쏭달쏭했다. 간호원 두 명이 더 오자 수간호원이 끓이고 있던 커피를 잔마다 손수 따라 나갔다. 그리고 간호윈들에게 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정남희는 너무 놀랍고도 당황스러우면서도 어찌해야 옳은 것인지 몰라 이쪽저쪽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수간호원이 아래 간호원들에게 손수 커피를 끓여주다니 .....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아래 간호원들이 미안한 기색 같은 것 전혀 없이 태연하게 커피 잔을 받는 것이었다. 물론 커피 잔을 받으면서 그들은 당케 쉔(고맙습니다) 하기는 했지만, 그건 그저 서양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늘 입에 달고 사는 몇 마디 중의 하나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정 간호원, 오늘부터 우리하고 함께 일하게 돼서 반가워요. 앞으로 일하면서 모르는 것은 그때그때 묻도록 하세요. 물론 새 일을 시작할 때는 미리 가르쳐줄 테니까 걱정할 것 없고요."

수간호원이 웃음 넘치는 얼굴로 정남희를 바라보며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정남희는 잔뜩 긴장한 채 고개만 끄덕거렸다. 수간호원의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한 채 무슨 인사말이겠거니 짐작했다.

"여러분도 그동안 겪어봐서 알겠지만 한국 간호원들은 열심이고 성실하고 영리해서 일에 아주 빨리 숙달돼요. 그들이 가진 약점이라면 우리 독일어를 잘하지 못한다는 것뿐이에요. 그럴수록 여러분은 일을 친절하게 가르쳐줘야 합니다. 그건 그들을 위하기 이전에 우리 독일과 독일 환자를 위해섭니다. 이 정 간호원도 특별히 뽑혀온 사람이니까 전 사람들처럼 일을 잘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녀를 친절하게 도와주기 바랍니다."

수간호원이 아까 정남희에게 말할 때와는 달리 네 간호원을 둘러보며 진지하고 엄한 얼굴로 말했다. 근무교대 시간에 정확하게 맞추어 그들은 병실로 들어갔다. 수간호원의 손짓에 따라 정남희는 그 뒤를 따라갔다.

"앞서 여기서 일한 한국 간호원들에게 대강 이야기 들었겠지만, 여기서 할 일을 지금부터 설명하겠어요. 이쪽으로 와요. 여기에 침대 시트가 있어요. 자아, 여긴 환자복이 있어요. 그리고 그 옆에, 자아, 여기가 화장실과 샤워장이에요."

수간호원은 말에 따라 손짓을 하고 문을 열고 해서 일일이 확인시켰다. 정남희는 미리 치매병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게 무슨 뜻인지 쉽게 이해했다.

"치매환자들은 손수 밥을 먹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간호원이 밥을 먹여야 해요."

수간호원은 환자에게 밥 먹이는 시늉을 해보였다. 정남희는 연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또 대소변을 스스로 가릴 수가 없어요. 그 일도 간호원이 미리미리 시간 맞추어 화장실로 데려가야 해요."

수간호원은 환자를 부축해 침대에서 내리는 시늉을 하고, 그 다음에 정남희의 한쪽 팔을 어깨에 걸치고 화장실로 갔다. 그리고 하의를 끌어내리는 손짓을 하고는 정남희를 변기에 앉히며 알겠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정남희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에 가장 어려운 일이 있어요. 아무리 미리미리 살핀다고 해도 환자가 많고, 딴 일도 생기고 해서 환자들이 대소변을 그냥 옷에 싸버리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요. 그때는 환자를 화장실로 옮겨 옷을 다 벗기고 샤워를 시켜야 하고, 침대 시트를 갈고, 다시 새 옷을 입혀 침대에 눕혀야 해요."

수간호원은 말이 바뀔 때마다 정확한 동작으로 말뜻을 표현했다. 정남희는 그 동작만으로도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아 듣고 있었다.

"자아, 그럼 일 열심히 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나를 찾아요."

가벼운 손인사를 하며 돌아서는 수간호원에게 정남희는 고개를 꾸벅했다. 정남희는 가슴 가득 숨을 들이켜며 자기 자신에게 환기시켰다. 절대로 옷에 똥오줌을 싸게 해서는 안 된다고. 그건 일이 몇 배로 힘들어지는 고역일 것이 뻔했다. 옷에 싼 똥을 치우고, 똥 묻은 몸을 씻겨야 하고..... 생각만으로도 끔찍해 정남희는 진저리를 쳤다. 그녀는 미리미리 똥오줌을 뉘어야 한다는 단 하나뿐인 방법을 어서 실천에 옮기려고 첫 번째 침대로 다가갔다. 머리가 하얗고 살이 많이 찐 남자 노인은 눈을 번히 뜨고 누워 있었다. 그런데 그 큰 눈이 초점 없이 멍하고 텅 빈 것처럼 공허해 보였다. 자기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고, 자식들마저 알아보지 못하는 치매환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저하고 소변보러 가세요."

독일 말을 할 수 없는 정남희는 한국말로 하며 노인의 팔을 흔들었다. 노인은 눈을 껌벅거리며 정남희를 이윽히 쳐다보더니 거부의 몸짓을 지었다.

"자아, 내려오세요. 부축해 드릴 테니까. 옷에 싸면 안 되잖아요."

정남희는 다정하게 웃으며 아까 수간호원이 시범을 보인 것처럼 노인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었다. 그러자 노인은 거센 힘으로 팔을 뿌리쳤다. 그녀는 예상치 못한 힘에 밀려 약간 비틀거렸다. 독일 말이 아니라서 그런가? 얼굴이 낯설어서 그런가? 대소변이 안 마려워서 그런가? 이런 생각들이 빠르게 스쳐가며 정남희는 난감해졌다. 싫어하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내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 옆 침대로 옮겨갔다. 얼굴만 다를 뿐 그 환자도 눈동자가 풀리고 몸이 뚱뚱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는 그 노인은 정남희에게 의지해 순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어머 !"

정남희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 노인의 몸무게에 눌려 무릎이 휘청하며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그녀의 몸에 비해 노인의 몸은 두 배는 더 커 보였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노인의 몸을 떠받치며 화장실로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노인은 화장실 앞에서 더는 걸음을 옮겨놓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옷에 싸면 안 되잖아요. 들어가세요, ?"

정남희는 다정하게 웃으며 노인을 끌어당겼다. 그러나 노인은 완강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 힘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때 그녀는, 근무교대를 하면서 전 간호원이 대소변 처리를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언뜻 했다.

"네에, 돌아가세요. 억지로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정남희는 다시 노인을 부축하며 가자는 손짓을 했다. 노인의 큰 몸집은 불안정한 걸음걸이와 함께 축 처져 있었다. 그 몸을 떠받치며 한 걸음, 한 걸음 옮겨놓기가 힘에 벅찼다. 그런데 노인은 침대 앞에 이르러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고 멍하니 서 있었다. 정남희는 노인을 침대에 걸터앉히고 낑낑거리며 두 다리를 받쳐 올렸다. 가까스로 노인을 침대에 눕히고 나자 숨이 가쁘고 진땀이 났다. 정남희는 이마를 훔치고 긴 숨을 내쉬며 암담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한국에서는 전혀 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일은 보호자나 간병인의 몫이었다. 그러나 여기는 독일이었다. 정남희는 가난한 집안과 큰 빚을 생각하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그 어떤 고생을 하더라도 참고 견디며 큰돈을 벌어 돌아오겠다고 결심하면서 비행기를 탔던 것을 다시 떠올렸다. 정남희는 아르바이트는 우선 제쳐두고 병실에서 필요한 독일어를 어서 빨리 익혀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최소한의 말이 안 통해서는 환자 간호가 훨씬 어려울 거라는 실감이 났다. 그런 생각과 함께 어떻게 해야 미리 대소변을 가릴 수 있게 하는 것인지 답답해 조바심이 났다. 그런데 한 노인이 침대에서 내려서며 비틀거렸다. , 변소에 가고 싶은가 부다! 정남희는 그쪽으로 내달았다. 그 노인 앞으로 급히 다가서던 그녀는 주춤했다. 쿠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설마 하며 그녀는 코를 가까이 댔다. 역한 냄새가 확 풍겨왔다.

"엄마, 어떡해 난 몰라."

그녀는 울상이 되며 발을 굴렀다. 그런데 노인은 어기적어기적 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정남희는 질끈 감았던 눈을 뜨며 노인을 부축했다. 그녀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고, 안으로 접혀 들어간 위아래 입술이 안 보일 정도로 꼭 물려 있었다. 정남희는 노인을 화장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 다음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또 눈을 질끈 감았다. 옷을 벗기고,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그 순서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 난감한 일을 피할 도리는 없었다. 그녀는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눈을 떴다. 악취는 계속 풍기는데 노인은 희멀겋게 웃고 있었다. 이걸 못 해내면 맨주먹으로 쫓겨 가야 해. 그 많은 비행기 요금까지 빚이 되면..... 그녀는 입술을 물며 노인의 바지를 끌어내렸다.

으악!

그녀는 질겁을 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더 심한 악취와 함께 눈앞에 불쑥 드러난 것. 성인 남자의 그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바로 눈앞에서, 정면으로. 기껏 보았어야 젖먹이들의 꼬치였고, 의학서적에 그려진 그림이었다. 그러나 실물의 흉물스러움과 당혹감에 그녀는 혼비백산했다 그것도 외국 남자의 그것이었다.

엄마, 엄마, 나 어떡해 .....’

"각오 단단히들 하라구. 거긴 지옥이니까. 신참들은 거길 거쳐야 간호원 인생이 뭔지 안다구."

선배 간호원 이정옥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 나도 해낼 수 있어. 얼마든지 해낼 수 있어.’

정남희는 이를 맞물며 눈을 부릅떴다. 노인의 아랫도리를 다시 살펴 본 그녀는 진저리를 쳤다 침대에 누워서 싼똥은 엉덩이는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의 아래까지 맥질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진동하는 악취로 속이 메스꺼운 것을 참아내며 바지를 노인의 발목에서 완전히 벗겨냈다. 그리고 노인을 샤워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샤워를 가장 세게 틀어 물줄기를 노인의 하체에 들이댔다. 거센 물줄기의 힘으로 똥이 씻겨져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겉에 붙은 것일 뿐이고 살갗에 짓뭉개져 있는 것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물줄기를 오래 들이대도 소용이 없었다. 똥을 완전히 씻어내려면 천상 손으로 문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 나 죽을 것 같애. 이 일을 어쩌면 좋아.’

정남희는 또다시 진저리를 쳤다. 속이 더 심하게 메슥거리며 눈물이 솟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수만 리 밖에 있었고 여기는 자기 혼자뿐이었다.

나만 당하는 일이 아니다.’

정남희는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이를 맞물었다. 그리고 손에 마구 비누칠을 했다. 물줄기가 쏟아지는 샤워기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을 노인의 엉덩이로 가져가며 그녀는 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손을 마구 문질러대기 시작했다.

난 악착같이 이겨낼 거야. 난 꼭 해내고 말 거야. 누구처럼 미쳐서 갈 수는 없어. 난 꼭 성공해서 돌아갈 거야. ..... .....’

이렇게 울부짖고 있는 그녀의 꼭 감긴 두 눈에서는 눈물이 비어져 나오고 있었다. 노인의 살찐 엉덩이 사이로 디밀어진 그녀의 손은 항문까지 닦아내고 앞으로 옮겨졌다. 여전히 눈을 꼭 감고 있는 그녀의 손이 노인의 그것 아래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웩 소리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우웩 ! ! 우웩!"

그녀는 가슴을 끌어안고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떨어진 샤워기가 내뿜는 물줄기가 마음대로 그녀의 가운을 적시고 있었다.

"우웩! 우웨엑!"

그녀는 소리를 토할 때마다 상체를 들썩이며 눈물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아니 왜 그래요, 정 간호원?"

수간호원이 급히 화장실로 들어왔다. 정남희는 숨을 헐떡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 비누칠까진 다 했군요. 어려운 일을 참 잘해 냈어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첨엔 다 그래요. 특히 순결한 한국 처녀들의 마음 잘 이해해요."

수간호원이 정남희의 눈물을 닦아주고 등을 토닥거렸다. 정남희는 수간호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위로라는 것을 알았다. 그 마음이 고마워 울컥 눈물이 나려고 했다. 수간호원은 시범이라도 보이듯 환자를 씻기고, 큰 수건으로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히고, 바지를 뒤집어 똥을 변기에 털어냈다. 그리고 가운을 꺼내 정남희에게 주며 환하게 웃었다.

"당케 쉔, 당케 쉔. (대단히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남희는 자신도 모르게 독일 말을 하며 두 번, 세 번 허리를 굽혔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정남희는 김광자를 찾아갔다.

"아니, 눈이 왜 그래? 많이 운 것 같은데?"

책을 보고 있던 김광자가 먼저 물었다.

"말도 마, 부끄러워서 말도 못해. 왜 하필 남자 환자들 방이 걸렸는지 몰라."

정남희는 입을 씰룩이며 눈을 훔쳤다. 아까와 다른 서러움이 일며 눈물이 솟으려고 했다.

"옷에 변을 본 환자가 있었어?"

김광자는 무슨 일인지 금세 알아챘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아? 어찌 그리 귀신이야?"

정남희는 그만 눈이 휘둥그레졌다.

"귀신이기는. 먼저 일한 선배 간호원들 말 다 들었잖아. 특히 이정옥씨 말 듣고 나도 남자 환자들을 어떻게 대할지 걱정되고, 마음 단단히 먹으려고 애쓰고 있으니까."

"글쎄, 그게 애쓴다고 되는 게 아니더라구. 글쎄, 나도 각오를 단단히 했는데 글쎄 막상 딱 당하니까 글쎄,눈앞이 캄캄해지고 죽을 것 같은 게 글쎄, 막 눈물이 쏟아지고 구역질이 나는데 글쎄 말로 할 수가 없는 게 글쎄 ....."

정남희는 연달아 나오는 '글쎄'에 맞추어 두 손을 맞비비다가, 가운에 문지르다가, 냄새를 맡다가 하며 눈물이 글썽글썽해지고 있었다.

"왜 안 그렇겠어. 그렇지만 결국 그 일을 해냈잖아?"

"으응....."

정남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훔쳤다.

"그럼 됐어. 큰 고비를 넘긴 거야. 왜 우리나라 속담에 이런 게 있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너는 이제 해방됐으니 얼마나 좋아. 난 앞으로 당해야 하는데. 네가 부럽다. , 밥 먹으러."

"아니야, 아니야, 나 밥 못 먹어 지금도 구역질 나."

정남희는 입을 막고 돌아서며 웩웩 구역질을 해댔다.

"이것도 이겨내야 해 밥을 굶고 어떻게 힘든 일을 하겠어. 여기까지 와서 그까짓 것 못 이겨내면 안 되잖아."

김광자는 정남희의 등을 다근다근 두들기며 좀 싸늘하다 싶게 말했다.

"너는 밥 먹을 자신 있어?"

정남희는 눈물 어린 눈으로 김광자를 쳐다보았다.

"우리한테 자신이 있고 없고가 어딨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낭떠러지에 서 있는데."

"그래 ..... 그렇지, 낭떠러지지. 누구나 그렇지. 알았어, ."

정남희는 외롭고 슬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훔쳤다. 김광자는 식당으로 가며 어쩔 수 없이 이동원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을 속여 남자를 경험하게 하고, 잊기 어려운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자신을 여기까지 오게 한 남자. 그의 덕으로 자신은 정남희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속웃음을 쓰게 웃고 있었다. 김광자는 이정옥의 말마따나 각오를 단단히 하고 간호원 인생을 시작했지만 치매병동은 역시 지옥이었다. 자기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고,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노인네들은 대소변도 가릴 줄 몰랐다. 노인네들은 그저 먹는 것만 밝히면서도 스스로 식사할 능력도 없었다. 그러니 일일이 음식을 먹여야 하고, 옷을 입혀야 하고, 돌아가면서 대소변 수발을 해야 하고, 아무리 재빠르게 부지런히 움직여도 옷에다 똥오줌을 싸버리는 노인네가 생기고, 그럼 목욕을 시키고 옷을 다시 갈아입혀야 하고..... 궂은일은 끝없이 되풀이되었다.

"독일은 한국하고는 너무 달라. 한국에서는 가족들이 하는 더러운 일들을 여기선 간호원들이 다 떠맡아하니 말야. 가족들은 코빼기도 안 비치고, 내가 간호원인지 똥 치다꺼리 하는 몸종인지 모르겠어."

정남희의 탄식이었다.

"힘내, 그래도 정신병동보다 낫대잖아. 언제까지고 여기 근무하는 것도 아니니까."

김광자는 이 말을 분명 자신에게 하고 있었다. 자신의 내부에서도 정남희가 느끼는 것과 다름없는 회의와 실망이 엇갈리고 있었다.

"넌 어쩌면 그렇게 맨날 어른 같니? 기분 나쁘게."

정남희는 입이 뽀로통해져 눈을 흘겼다.

"그럼 어쩌겠니. 여긴 독일이니까 독일식을 따라야지. 어쩌면 한국식이 잘못됐는지도 몰라. 언제 나을지도 모를 환자한테 가족들이 매달려 할 일도 못하면서 고생하는 것보다는 할 일 제대로 하면서 세금 많이 내고, 모든 걸 병원이 맡아서 하는 게 말야. 독일 간호원들도 다 하는 일이니까 참고 견디자. 괜히 돈 많이 주는 것 아니잖아."

김광자는 정남희에게 다정한 웃음을 보냈다.

"그래, 돈 앞에서 할 말 없지 뭐."

정남희의 풀죽은 대꾸였다.

"남희야, 너 교회 안 나갈래?"

"교회.....?"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 정남희는 뜨악한 반응을 보였다.

", 닥터 한스가 하는 말이, 일을 쉽고 즐겁게 하려면 신앙을 가져보라는 거야. 간호윈을 왜 '백의의 천사'라고 하느냐 하면, 간호원은 환자들을 대하는 데 마음속에다 천사와 같은 사랑을 간직해야 한다는 거야. 그냥 의무와 책임으로만 일을 하면 일이 힘들고 괴롭지만, 천사 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하면 쉽고 즐거워진다는 거지. 예수를 믿으며 그 사랑을 배우라는 것인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야. 그래서 그런지 닥터 한스는 환자들을 대하면서 얼굴을 찡그리는 일이 한 번도 없이 언제나 웃고 다정해. 꼭 친부모 대하는 것같이."

"어머, , 너 그런 어려운 말을 다 알아들었단 말야?"

정남희의 관심은 엉뚱한 데로 튀고 있었다.

"다 알아듣기는, 대충대충 그런 뜻으로 짐작을 한 거지."

김광자는 꿀밤 먹이는 시늉을 했다.

"그런 말을 대충 짐작이라도 하는 네가 부럽다."

정남희는 가는 한숨을 쉬고는

"그래, 힘든 일이 쉬워진다면 나가보지 뭐."

그녀는 지친 얼굴만큼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광자는 똥을 치우며 비위가 상하고, 한 사람의 옷을 두 번씩 갈아입히면서 짜증이 날 때마다. 내 부모라고 생각하자, 내 부모라고 생각하자, 하며 스스로를 다스리려고 애썼다. 그런데 닥터 한스의 말을 듣고는 언젠가 보았던 나환자촌의 수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 외국인 수녀는 한국의 나환자들을 치료하고 돌보면서 더없이 정겹고 포근한 모습이었다. 그 수녀는 아무 보수도 없이 그저 봉사하는 것이었고, 자신은 한국에 있는 간호원들보다 열 배가 넘는 엄청난 돈을 받고 있었다. 그 수녀가 간직하고 있을 천사의 마음을 배우려고 교회에 나가고 싶었다. 김광자로서는 옷에 싼 똥을 치우는 것 못지않게 고역스러운 것이 살찐 노인네들을 다루는 것이었다. 살찐 노인네들은 노망기로 몸까지 늘어져 있어서 무겁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들을 침대에서 굴리듯 하며 옷을 갈아입히고, 샤워장으로 부축해 가고 하면서 김광자는 힘이 달려 낑낑매야 했다.

"엄살들 떨지 마, 아직 멀었으니까. 허리 디스크에 걸리고, 손가락 인대 가늘어나고 해봐야 제맛을 아는 거니까 괜히 고참 되는 것 아니라구."

이정옥의 밉살맞은 말이었다.

"아이구 얄미워. 고참 좋아하고 있네. 저건 여군이나 되지 왜 간호원이 됐나 몰라. 저 여잘 보면 소화가 안 돼."

정남희가 성깔을 부렸다. 일요일 아침에 한국 간호원들은 기숙사의 휴게실에 모여 앉아 모처럼 한가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찌르릉, 찌르릉, 초인종이 울렸다.

"또 피아노 쳐대네."

이정옥의 말에 그녀들은 쿡쿡거리며 창가로 몰려갔다. '피아노 친다'는 것은 간호원들을 찾아다니며 기숙사의 초인종을 누른다는 광부들의 말이었다. 꽃을 찾아온 벌 셋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