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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1-7

38. 눈보라의 세월

"그러지 말고 치료부터 좀 해주시오. 곧 가서 돈 구해오리다. "

두 손을 가슴 앞에 맞잡은 허진의 할머니는 또 애원했다.

"글쎄, 똑같은 말 자꾸 하지 마시라니까요. 입원 수속이 끝나야 치료를 시작하니까 입원 보증금부터 빨리 가져오시라구요."

간호원이 짜증스럽게 대꾸하며 다른 환자 쪽으로 돌아섰다.

"아 글쎄 돈은 가져온대니까. 환자가 저리 아파하니 당장 좀 덜 아프게 해달라는 거 아니유."

간호원을 막아서는 허진의 할머니 얼굴은 온통 울음이었다.

"당장 어찌 되는 병 아니구요, 병나면 다 아픈 거 아니에요? 할머니가 자꾸 이러면 환자만 손해예요."

간호원의 기색이 좀 더 싸늘해졌다.

"보시유 간호원 아가씨, 이런 말 안 하려구 했는데, 재가 독립투사 자손이라우. 재 조부께서 한평생 독립투쟁을 하셨다니까."

얼굴에 더 주름이 잡히며 허진의 할머니 말이 떨렸고, 간호원이 멈칫하며 허진의 할머니에게 눈길을 돌렸다.

"알았어요. 덜 아픈 주사 한 대 놔줄 테니까 빨리 다녀오세요."

"고맙수, 고맙수 그래도 젊은 사람이라 귀가 열려 있구만 그래. 복 받으리다. "

고개를 숙이고 또 숙이는 허진의 할머니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중환자 대기실의 한쪽 침대에 신음하며 누워 있는 허진의 얼굴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해 있었다. 병색이 짙은 얼굴은 너무 말라 핏기 없이 창백했고, 밭은기침과 함께 가쁜 숨을 할딱거리는 게 여간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허진의 헐머니는 간호원이 손자에게 주사를 놓는 것을 보고서야 부랴부랴 중환자 대기실을 나섰다. 그녀는 가슴 푸들거리는 두려움에 쫓기며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쳤다. 의사가 당장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는데도 손자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을 떼칠 수가 없었다. 시름시름 앓던 손자가 정신을 잃다시피 되어 쓰러져서야 병원으로 데려갔다. 손자는 돈 때문에 한사코 병세를 속였고, 자신도 행여나 행여나 하며 요행수만 바랐던 것이다. 동네 병원의 의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서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대학병원 의사는 늑막염이 심하다며 빨리 입원시키라고 하고는 돌아서 버렸다. 허진의 할머니는 큰길로 나서며 눈물을 삼켰다. 처음 발병해서 철공소를 며칠 쉬게 되었을 때 몸살이라고 해서 예사롭게 넘겼던 것이 큰 잘못이었다. 그 뒤로 몇 달 동안 계속 병을 키워온 셈이었다. 철공소 주인은 철공소에 맞지 않는 약골이라며 더 이상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함께 셋방살이하는 이 씨가 소개한 것이 성냥공장이었다. 그곳은 철공소보다 일이 덜 힘든 만큼 월급이 적었다. 밤에는 앓고 낮에는 겨우겨우 일을 나다니던 손자는 결국 며칠 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는 따로 돈을 구할 길이 없었다. 방법은 단 하나, 전세를 다시 사글세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거 사정은 참 딱하게 됐는데 돈이 어디 당장 되나요. 우선 급한 대로 딴 데서 좀 돌려쓰세요."

집주인은 싫은 기색을 감추려 하지도 않고 말했다.

"아니, 한꺼번에 다 달라는 게 아니라우. 우선 입원하게 조금만 주고 나머지는 차차 달라는 게지."

"글쎄, 조금이라도 있어야 말이지요. 은행에 맡겨둔 것도 아니고."

"그리 말하지 말고 어디서 좀 변통해 주구랴. 쥔 양반이야 발 넓은 제 이 늙은이보다야 열 배 낫잖우."

"발 넓으면 뭘 해요. 이자 붙지 않는 남의 돈은 땡전 한 닢 구경하기 힘든 세상인데."

허진의 할머니는 집주인의 눈길을 싹 외면했다. 엉큼하게도 빚돈을 구해줄 수 있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었다.

"알았수. 급한 불은 내가 끌 테니까 그 돈은 언제까지 해주려우?"

"어서 복덕방에 내놓으시오. 내 수중에 돈 없으니 그리 빼가는 수밖에 없잖겠소."

집주인은 전혀 미안한 기색이라고는 없이 이렇게 말했다. 전세로 바꿔 목돈을 받을 때와는 정반대의 얼굴이었다. 그 염치도 체면도 없이 넉실거리는 꼬락서니가 고깝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허진의 할머니는 속입술을 깨물며 뒤틀려 오르는 감정을 억눌렀다. 병역기피에 첩 질까지 해서 직장에서 쫓겨나고 요새는 밤낮 술타령에 아무하고나 싸움판을 벌이는, 그 하는 짓짓이 군던지럽기 짝이 없는 위인을 상대했다가는 손자에게 액운이 끼칠 것만 같았던 것이다. 허진의 할머니는 근심 자욱한 마음으로 산동네 비탈을 오르느라 잰걸음을 쳤다. 산등성이의 큰길 어딘가에 눈에 잘 띄지도 않게 끼어 있는 복덕방을 어서 찾아가야 했다. 복덕방은 대개 가게를 번듯하게 내고 있는 것이 아니었고 구멍가게 옆의 처마 밑이나 골목 어귀에 민걸상 하나를 놓고 영감들이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붓으로 '복덩방'이라고 쓴 흰 천이 때에 절어 후줄근하게 걸려 있었다. 그 영감들은 날이 춥거나 비가 오거나 하면 당연히 보이지 않았다. 복덕방은 가족을 먹여 살리는 직업이 아니라 글줄이나 해독하고 있는 토박이 영감님들의 소일거리였다.

"우리 손자 쾌복하고 못하고는 영감님 손에 달렸세요. 하루라도 빨리 방 나가게 애써 주셔야 해요. 아셨지요?"

허진의 할머니 말은 간곡했다. 그러나 눈물과 근심이 담겨 있는 눈과 얼굴은 말보다 몇 곱절 더 간절했다.

"알았수, 알았수. 늘그막 낙이라는 게 손자새끼들 무병하게 잘 크는 건데, 돈까지 궁하니 그 맘이 얼마나 쓰리고 아프겠수. 내 열 일 제쳐놓고 그 일부터 성사시키리다."

허진의 할머니는 복덕방 영감의 정 따스한 말에 다음 일을 할 힘을 얻었다. 그녀는 봉투 붙이는 일을 함께하고 있는 정 보살을 찾아갔다.

"세상에, 어쩌면 좋아요 그래. 그런 중병을 앓으면서 그동안 진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어요. 어서 가보도록 하십시다. 천씨 아저씨한테 매달려 봐야지요."

정 보살은 지체하지 않고 앞장섰다.

"궂은일 있을 때마다 매냥 귀찮게 해서 그저 정 보살한테 미안허구 면목 없어 못살겠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할머니. 한 식구끼리 이런 일 서로 돌보는 거야 당연한 거지 뭐가 미안허구 면목이 없어요. 그런 말씀 하시면 서운하지요."

정 보살은 보살이라는 호칭에 걸맞도록 선선하게 말하며 허진의 할머니 손을 감싸 잡았다.

"고맙수, 고마워. 정 보살 없으면 내가 누굴 믿고 의지하고 살겠누....."

허진의 할머니가 목이 메어 중얼거렸다. 그녀는 정 보살의 '한 식구'라는 말이 그렇게 고맙고 눈물겨울 수가 없었다 '한 식구'란 같은 독립투사 집안이라는 뜻이었다. 정 보살네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순국선열유족회를 통해서였다.

"시어머니는 해방 전해에 돌아가셨고, 시아버지는 해방되고 4년 만에 돌아가셨지요. 고문당하고 해서 감옥에서 얻은 병은 자꾸 깊어가고, 살림은 쪼들려 병 다스릴 돈은 없고, 나라가 섰대도 독립 운동한 분네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히려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시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실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니까 말예요, 이승만이가 시아버지를 죽인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새 나라가 서고 장관들이 임명되는데, 그중에 소문난 친일파들이 한둘이 아니었잖아요. 그걸 보시고 시아버지께서는 한바탕 통곡을 하시더니 그 다음부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셨어요. 그런데 글쎄 다음날 보니까 베갯잇에 눈물 젖었던 자리가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지 않겠어요. 처음엔 그게 뭔가 했는데, 그게 글쎄 말로만 듣던 피눈물이었어요. 그 뒤로 시아버지께서는 말 대신 한숨만 땅이 꺼지게 쉬시고, 병세는 날로 심해지다가 결국 한 달을 못 넘기고 돌아가셨어요."

정 보살이 울먹이며 한 말이었다.

유족회에서는 국가에 생계보조를 요구했다. 그러나 정 보살네 시아버지나 허진의 할아버지나 해방된 다음에 죽어서 보사부 지원기준에 해당되지 않았다. 허진의 할머니는 정 보살네 시아버지가 흘린 피눈물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의 남편도 새 나라에서 정권을 잡은 이승만이 친일파들을 옹호하며 앞장세우고 나서자 그 울분을 어쩌지 못해 매일같이 술을 마셨고, 어느 날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옛 동지와 꺼이꺼이 울기도 했다.

"내가 죽을 때 자식들한테 남길 유언이 꼭 한마디 있네. 그게 뭔고 하니, 나라를 또다시 뺏기게 되더라도 절대로 독립운동하지 말아라. 눈치껏 요령껏 사는 게 최상수다. 하고 말할 작정이야."

어느 날 만취한 옛 동지가 한 말이었고

"! 그것 참 명언 중에 명언이로군. 그래, 나도 그리 해야 되겠구먼. 허허허허....."

남편의 헛웃음은 공허하고 길었다. 그러나 남편은 나라에 대해 불평과 원망을 품은 아들을 다독거리고 쓰다듬다가 전쟁 때 폭사하고 말았다. 정 보살네 남편도 학식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학교 문턱은 한 번도 넘어보지 못하고 굴러다니면서 익힌 것이 달구지 끄는 기술이었다. 남편의 마부 노릇으로 살기 어려워 정 보살은 한 장에 10전 벌이인 봉투를 붙여서 살림에 보태고 있었다. 그런데, 시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시고 세상살이가 분하고 억울한 것을 풀 길이 없어 가슴이 벌떡거리고 화끈거리는 울화댕이 깊어지다가 누군가를 따라 절에 발길이 닿게 되었다.

"베풀고 베풀어라. 그리고 베풀었다는 그 일 자체를 잊어버려라."

이 세상을 참답게 살고 다음에 극락왕생하려면 물질이든 마음이든 끝없이 베풀어야 하는데, 그 자비행이 참으로 결실을 맺게 하려면 도와준 일을 다 잊어버리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도움 받은 사람이 도움 받은 것을 잊고 있을 경우 도와준 사람이 도와준 것을 기억하고 있으면 당연히 배신감을 느끼게 되고, 그 배신감은 미움이 되고, 미움은 새로운 번뇌가 되어 지난날의 순수한 자비까지 망치게 되기 때문이라 했다. 그 설법을 듣자 정 보살은 분함과 억울함이 가득 차 터질 것만 같은 가슴에 한줄기 빛이 비치는 것을 느꼈다. 그 부처님 말씀은 꼭 자기네 집안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만 같았다. 그 깨달음을 간직하며 마음을 다스렸고, 혼자 힘으로 마음을 동일 수 없어 절에 발길이 잦다 보니 언제부턴가 '보살'이란 호칭까지 얻게 되었다.

"에이, 사정이 딱하긴 하오만 낸들 그런 목돈이 어디 있나. 글쎄 이 봉투장사라는 게 다 아다시피 이문이 박한데다 외상거래 아니냔 말야. 거기다가 군사혁명 이후로 경기가 통 풀리지 않는 것 세상이 다 알잖아. 경기가 안 풀리니 물건이 안 팔리고, 물건이 안 팔리니 봉투가 안 나가고, 봉투가 안 나가니 깔린 외상이 돌지를 않는다구. 이거 마음만 있으면 뭘 하나, 큰일났구먼 그래."

앞니가 많이 빠져 입이 합죽한 천 씨 영감은 천장까지 쌓여 있는 봉투묶음을 가리키며 안타까워했다.

"네 아저씨, 괜찮아요. 돈 빌려주신 거나 마찬가지예요. 딴 데서 구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정 보살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허진의 할머니는 두 번째로 마음이 내려앉는 낙담 속에서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옆구리에서 나쁜 물을 빼내야 할 중병을 앓고 있는 손자의 애처로운 모습과, 그 어디에도 몸 기댈 데 없이 눈보라치는 세월을 살아온 세상인심에 다시금 한기를 느꼈다.

"할머니, 권 회장님을 찾아가 보는 게 어떻겠어요?"

정 보살은 천 씨네 가게를 나서며 일부러 활기찬 목소리를 지어냈다.

"권 회장? 유족회 말인가?"

", 그분이면 어찌 될지도 모르잖아요. 발도 넓으시고 정도 많고 하니까. 뵌 지도 오래됐으니까 겸사겸사해서 찾아가 보도록 하지요."

", 그분이 우리 유족들 일에는 열성이고 지극하시지."

권 회장의 가난을 알면서도 더 가볼 데가 없어서 허진의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신백화점에서 안국동로터리에 이르는 길에는 작고 예쁘장한 2층집들이 줄지어 있었다. 대개 몸통은 붉은 벽돌이고 지붕은 한식기와를 얹은 그 건물들은 왜정시대에 개화바람을 타고 태어난 얼치기들이었다. 그 건물의 1층은 상점들이었고 2층은 사무실이었다. 순국선열유족회는 조계사와 마주보고 있었다. 2층에는 조계사의 대웅전 지붕이 묵직하게 바라다보였다 정 보살이 앞장서고 허진의 할머니는 그 뒤를 따라 나무계단을 올라갔다 발을 옮겨 디딜 때마다 나무 계단은 삐걱빼각 소리를 내며 지나온 연륜의 길이를 말하고 있었다.

"저어, 권 회장님 좀 뵈러왔는데, 어디 가셨나요?"

정 보살은 슬그머니 민 문을 붙든 채 무척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건 겁나거나 주눅 들어서가 아니라 유족회가 남의 사무실 한쪽에 얹혀 지내는 처지인 까닭이었다.

"유족회 찾아오신 건가요?"

나이 든 여사무원이 물었다.

", 유족회 권 회장님요."

"유족회 진작 없어졌어요."

"예에?"

정 보살은 얼떨결에 소리치듯 하고는 얼른 허진의 할머니를 돌아보았다.

"여기 올라오기 전에 아래층에 붙었던 간판 없어진 것 못 봤어요? 벌써 몇 달 전에 나라에서 없앴어요."

"나라에서? 왜요?"

"몰라요. 맘에 안 들었나 보지요."

"세상에 ..... 그럼 권 회장님은 어찌 되셨어요?"

"저기 탑골공원에 가보세요. 거기서 소일하시면서 여긴 어쩌다 한 번씩 들르세요."

"예에 ..... 고마워요."

돌아서는 정 보살의 얼굴에 실망스러운 빛이 드러났고, 허진의 할머니 얼굴에는 짙은 구름이 끼어 있었다. 지저분한 탑골공원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거의가 남자 노인네인 그들은 하나같이 궁하고 맥 빠지고 쓸쓸해 보였다. 그 노인네들은 여기저기 20-30명씩 모여앉아 그들 나름대로 하루를 소화시켜 내느라고 애쓰고 있었다. 어느 장소에서는 요란한 무대복을 입은 초로의 남자가 아코디언 솜씨를 뽐내고 있었고, 또 다른 장소에서는 두루마기 차림에 쥘부채 를 든 노인이 고수의 북소리 장단도 없이 소리를 열창하고 있었고, 거기서 좀 떨어진 곳에서는 30대 젊은 사람이 단돈 10원씩을 받고 땅바닥에 한자를 달필로 써갈기며 이름풀이를 하고 있었고, 그 건너편에서는 염소수염을 한 깡마른 영감이 소금을 찍어 넣어가며 입심 좋게 삼국지를 엮어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전에는 한꺼번에 서너 군데에서 벌어지고는 했던 열띤 웅변 장소는 보이지 않았다. 정치를 비판하고 정부를 공박했던 그 정치연설은 5,16 이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정 보살과 허진의 할머니는 공원을 두 바퀴째 돌다가 권 회장을 찾아냈다. 머리가 반백인 권 회장은 13층 석탑의 탑 그늘에 주저앉아 공원 중앙의 정자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텅 빈 것 같은 속절없이 보이는 모습이 넋이 나간 것 같기도 했고, 모든 걸 초탈한 것 같기도 했다.

"회장님, 권 회장님, 여기 계셨군요."

반가움이 넘친 정 보살이 외치자 권 회장의 먼 눈길이 가까워졌고, 얼굴에도 화색이 돌아왔다.

"아니 , 여기까지 어쩐 일들이십니까?"

그들을 알아본 권 회장은 신문지를 깔고 앉아 있던 땅바닥을 차고 일어났다.

"사무실로 뵈러갔다가 여기 계실 거라는 말 들었지요. 회장님 근데 왜 나라에서 우리 유족회를 없앴나요?"

"아이고, 그거 말도 말아요. 사회정화를 한대나 어쩐대나 하면서 군인들이 난을 일으키자마자 각종 사회단체들을 전부 강제해산시키기 시작했어요. 앞뒤 가리지 않고 군인들 하는 일이라는 게 꼭 깡패 소탕하듯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순국선열유족회를 이래서 되느냐고 따지고 버텼지요. 그랬더니 경찰서 유치장에 가뒀어요. 닷새 만에 나와 보니 간판이 온데간데없이 없어지고 말았지 뭡니까."

권 회장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쓴 입맛을 다셨다.

"아니, 군인들이 뭘 좀 하는 줄 알았더니 우리한테는 이승만 때보다 더 인정머리 없이 하네요. 왜 그러지요?"

"글쎄, 갈수록 태산이오. 헌데, 두 분이 어쩐 일이시오."

권 회장은 귀에 꽂고 있던 꽁초에 불을 붙였다. 정 보살은 허진의 사정을 간추려 이야기했다. 허진의 할머니는 고개를 떨구고만 있었다.

"허어, 그것 참 기막힌 일이오."

권 회장은 하늘을 향해 담배연기와 한숨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그리고 한동안 말없이 담배만 뻐금거렸다.

"목숨이 천하인데 무슨 수를 써서든 구해야지요. 가봅시다. 이런 때 의지할 만한 사람이 하나 있어요."

권 회장이 바지를 털며 일어섰다. 그 바지는 낡아 무릎께에 보푸라기가 일고 있었고, 구두의 접히는 부분은 가죽을 덧대 꿰매져 있었다. 권 회장이 찾아간 곳은 남산 아래 필동 끝자락에 붙어 있는 판잣집이었다. 곧 쓰러질 것처럼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는 판잣집은 마치 기차의 객차처럼 창이 많고 길었다. 그리고 그 옆의 비탈진 공터는 쓰레기장이나 마찬가지로 온갖 잡동사니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잡동사니들은 종류별로 구별되어 있는 것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곳은 다름아닌 넝마주이들의 집합소였다.

"아이고 회장님, 이거 어쩐 일이십니까."

바쁘게 일손을 놀리고 있던 남자가 권 회장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 사장 그간 잘 있었어? 사업은 잘되구?"

권 회장도 정 뜨겁게 그 남자와 악수를 했다.

"아이고, 조발이보고 사장은 무슨 사장입니까. 회장님도 건강하세요?"

서른 중반의 그 남자는 쑥스러워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땅딸막한 몸집에 기운깨나 쓰게 생긴 그 남자의 얼굴에는 선한 웃음과 함께 어떤 강단진 기운이 내비치고 있었다.

"거 무슨 소리. 이젠 시청에서 떠받드는 당당한 사업에다 당당한 사장님이지. 거 옛날 조발이란 말 이제 쓰지 말어. 괜히 사람 천해지고 이상해 보여."

"..... 안으로 좀 드시지요."

그는 누구냐고 묻듯 두 여자에게 눈길을 보냈다.

", 바쁜데 들어갈 건 없구, 여기서 잠깐 얘기하고 가야지. 자아, 서로 인사들 하시오. 우리 다같은 유가족이오."

권 회장은 이쪽저쪽에다 서로 인사를 시켰다.

"우리 이용진 사장 선친께서는 만주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돌아가셨어요. 나라에서는 투쟁한 물증이나 증인을 대라고 하는데, 형무소에서 옥사한 것이 아닌 한 물증이고 증인이고 대기가 난감한 것 아니겠소. 그래서 나라에서 아무런 생계비 지원도 못 받고 이 일을 하고 있다오."

권 회장의 설명이었고,

"배운 건 아무것도 없고 완력은 좀 쓰고, 죽지 못해서 이것저것 하다 보니 이런 천한 일을 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이용진은 허진의 할머니와 정 보살에게 허리가 반이 접히도록 깊은 절을 했다. 권 회장은 허진의 사정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허진의 할머니 옆에서 정 보살까지 손을 모아 잡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 그래야지요. 치료비를 다 대지는 못할망정 빌려드리는 거야 당연히 빌려드려야지요."

옹색스러워하는 권 회장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용진이 말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허진의 할머니는 고개를 숙이고 또 숙였고, 정 보살도 덩달아 방아깨비 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철공장에 나가기 전에는 뭘 했었나요?"

", ㅅ고등학교를 다니다 말았지요."

"예에? ㅅ고등학교요? 그럼 머리가 아주 좋은 학생이잖아요?"

이용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글쎄요..... 공부는 좀 하는 편이었지요."

"허어, 그것 참 아까운 인재였구만 그래. 그거 예삿일이 아닐세."

권 회장이 연달아 혀를 차댔다.

", 우선 몸부터 낫고 봐야죠."

이용진은 바지 뒷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더니,

"이거 애들 물건 값 해주려던 건데 급한 대로 쓰세요. 만 환인데 될지 모르겠군요"

하며 세어 넘겼다.

"고맙습니다. 방이 나가는 대로 곧 갚겠습니다."

허진의 할머니는 또 머리를 조아리고 조아렸다.

"이젠 시에서는 딴 간섭 안 하나?"

권 회장이 흐뭇하게 웃으며 물었다.

", 그때 혼이 난 다음부터는 그저 빨리빨리 잘하라고만 하고 있어요."

이용진이 묘하게 웃었다. 그때란 5,16 직후에 벌어진 사태를 말하는 것이었다. 쿠데타의 성공과 동시에 군부정권이 즉각적으로 실시한 것이 깡패 소탕이었다. 그 싹쓸이에서 넝마주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넝마주이들을 보호해 주는 조발이들까지 다 잡아들였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면서부터 시내 도처에서 해괴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음식점마다 쓰레기통에 소뼈들이 넘쳐나다 못해 뒷골목에 쌓이며 파리들이 들끓어대고, 약국마다 크고 작은 약병들이 큰길까지 즐비하게 쌓이게 되고, 인쇄소와 제본소들은 날마다 불어나는 파지더미 때문에 새 일감을 받아들일 자리가 없어져 아우성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주택가 쓰레기통들도 그전과 다르게 쓰레기가 줄지 않고 자꾸 불어나기만 해 골목골목이 지저분해지고 악취까지 풍기기 시작했다. 그런 사태들은 넝마주이들이 자취를 감추면서부터 벌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여러 가지 탈은 거기서 끝나진 않았다. 재생용지공장에서는 원료인 파지가 들어오지 않아 재생지를 생산하지 못하게 되고, 재생지 품귀현상은 학습장의 생산 차질로 이어졌다. 그리고 제약회사들은 재사용하는 약병들의 공급이 끊겨 혼란이 일어나고 있었고, 우골유며 부레풀을 만드는 공장에서는 원료인 소뼈가 들어오지 않아 생산 차질이 빚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넝마주이들이 모으는 재생품들은 그런 것들만이 아니었다. 고철 구두창과 고무, 유리, 헌옷, 나일론 조각 같은 것들까지 모아 각 재생공장으로 보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넝마주이들은 깡패가 아니라 시청에서 노임을 받지 않는 도시의 청소부인 동시에 물자 빈곤한 나라에서 없어서는 안 될 재생원료 공급자들이었다. 그들이 수집하는 폐품량은 한 달 평균 1억 환에 이르는 돈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사회적 심각성을 뒤늦게 알게 된 군인들은 넝마주이들을 부랴부랴 풀어주었다. 그러면서도 안심이 안 되어 시청에 의무적으로 등록을 시킨 다음 취업시키는 조처를 취했다. 각 구역에 따라 넝마주이를 20-30명 거느리고 있던 조발이들은 취업 등록을 했고 증명서를 받았다. 그리고 넝마주이들은 지정된 복장과 이름표를 달게 되었고, 그들에게는 근로재건단이라는 새로운 명칭이 붙여졌다. 그런 조처는 군대식의 강압이기는 했지만 긍정적인 점도 없지 않았다. 그동안 넝마주이들 중에서는 남의 물건을 슬쩍하는 일이 더러 있었고, 통일된 제복에다가 이름표까지 붙이게 된 말끔한 모습은 그전의 지저분하고 불량스러운 인상을 지워 시민들을 안심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다. 그뿐만 아니라 조발이를 어엿한 사업가로 인정하는 한편, 넝마주이들을 부하로 부리거나 수집품의 이익을 착취하게 되면 사업 등록을 취소시키고 처벌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그 상사는 어찌 됐어?"

넝마수집장을 나서며 권 회장이 이용진에게 속삭이듯이 물었다.

", 며칠 전에도 면회를 갔다 왔는데 아무래도 좀 살아야 될 것 같아요. 워낙 소문난 거물이잖아요."

이용진이 침울하게 대답했다.

"그것 참..... 면회나 자주자주 가보게. 세상이 아무리 깡패라 취급해도 자네 알아보고, 도와준 은혜는 은혜니까."

", 그 의리 안 지키면 사람이 아니죠."

금세 이용진의 목이 잠겼다

 

낙엽 따라 가을이 가고 하의바람에 실려 겨울이 오고 있었다. 나목이 된 가로수들의 긴 행렬이 도시의 계절감을 한층 쓸쓸하게 하고, 애저녁의 어스름이 퍼지면서 진해지기 시작하는 군밤 냄새나 군고구마 냄새는 추운 겨울밤을 녹여주는 한 가닥 따스함이었다. 행상들이 밝힌 카바이드 등의 푸른 불꽃은 찬바람에 나부껴 곧 꺼질 듯 애잔하고, 그래도 그 미약한 불빛은 좌판을 넘쳐나 다정스럽게 행인들의 발길까지 비춰주고 있었다.

원병균은 중국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어둑발이 퍼지고 있는 주위를 재빨리 살폈다. 그러고는 그만 민망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발동하곤 하는 그 경계심이 쉽사리 마음에서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그건 수배를 피해 다닌 지난 몇 개월 동안에 몸 깊이 스민 습관일 수도 있었고, 지나친 긴장 속에서 의식에 상처를 입은 것일 수도 있었다.

"예에, 어서 오옵셔어, 어서 오옵셔어!"

원병균이 쇠바퀴 달린 반 유리문을 옆으로 열고 들어서자 계산대를 지키고 있는 살찐 중국인이 중국식 발음을 뒤섞어 목청을 높였다. 어느 중국음식점이나 손님을 맞이하는 중국인 주인들의 어조는 똑같았고, 그 아래서 일하는 한국인 종업원들도 똑같이 목청을 뽑아댔다. 신문팔이 소년들이나 버스 차장들의 외침이 희한하게도 다 똑같은 것처럼. 원병균은 코를 큼큼거리며 음식점 안을 둘러보았다. 코를 독하게 쏘는 것은 연탄가스 냄새였다. 중국 음식점들은 모두 개방된 홀보다는 칸칸이 막은 방들이 차지하는 면적이 훨씬 더 넓었고, 그 방마다 바퀴 달린 연탄화덕을 아궁이에 피우는 바람에 겨울만 되면 연탄가스 냄새가 진동할 수밖에 없었다.

"일행 찾으세요? 누구신데요?

종업원 청년이 고개를 꾸벅하며 물었다.

", 대학생들 찾아요. 박준서나 또오..... 신무영이라고....."

"아 예, 저쪽 방임다. 따라오십쇼."

경쾌한 음악에 박자라도 맞추듯 걷는 종업원을 따라가며 원병균은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그의 눈길은 남녀의 구두가 나란히 놓인 방들을 훑고 있었다. 원병균의 미묘한 웃음과 남녀의 구두와 독방, 그것은 중국집 특유의 은밀함이었다. 중국 음식은 중국인들이 발붙이는 나라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말이 있다. 그건 적응력 강한 중국인들의 상술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음식만 현지인들의 입맛에 맞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6,25로 미군과 함께 양춤이 들어오고, 양춤은 춤바람을 일으키고, 춤바람은 성문란을 불러왔다. 그런 사회 분위기에 재빨리 편승한 중국인들은 칸칸이 방을 막기 시작했다. 그 독방들은 대낮에 여관을 드나들어야 하는 거북살스러움을 거뜬히 해결해 줄 뿐만 아니라 여관비도 아끼고 식사도 할 수 있는 일거삼득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중국집에 가자'는 말을 아무 여자에게나 함부로 썼다가는 큰코다치게 되어 있었다.

"여어 원병균, 이거 가가린의 귀환처럼 근사하고 당당하군 그래."

신무영이 벌떡 일어나며 악수를 청했다.

", 신 형! 가가린?"

원병균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 그 최초의 쏘련 우주인 말이로군. 신 형, 아직도 정신 못 차렸는데? 쏘련 우주인을 예로 들면 용공인 거 몰라? 예를 들려면 당연히 우리의 우방이며 혈맹인 미국 우주인을 예로 들어야지. 거 미국 우주인 이름은 뭐지?"

그는 아주 심각한 표정을 꾸며내며 말했다.

"맞어, 세퍼드를 두고 유리 가가린을 내세웠으니 그건 용서할 수 없는 용공 이적행위고, 고무 찬양인데."

박준서가 말을 받았다.

",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첫 번째만 암기하는 버릇 때문에 그만 실수를 한 겁니다. 다시는 그런 일 없겠습니다."

신무영은 허리까지 굽실거렸고 다른 서너 사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쏘련 놈들한테 1등을 뺏긴 것도 분해죽겠는데 한국 놈들이 감히 약까지 올려? 이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성난 목소리와는 달리 원병균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다른 사람들하고도 악수를 나누었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소련과 미국의 우주인들은 지난 4월과 5월에 각각 인류 최초로 탄생한 존재들이었다. 그 일이 벌써 반년이 넘었는데도 그들이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최초의 우주인에 대한 관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계적으로 냉전을 벌이고 있는 미, 소는 원자폭탄으로 경쟁할 뿐만 아니라 '우주 정복'이라는 황당한 말을 내걸고 또 다른 힘 겨루기를 해오고 있었다. 두 나라는 로켓에 동물들을 실어 쏘아 올려서는 생환시키고 하더니 마침내 소련이 인류 최초의 우주인을 탄생시켜 그 선두 다툼에서 이기고 말았다. , 소 두 강대국의 냉전 대립 속에서 6,25라는 끔찍한 열전을 치르고, 휴전상태에서 반공의 깃발을 드높이 들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소련의 승리란 너무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소련은 적국 중의 적국이었고, 미국은 어떤 일에서나 소련을 이겨야 했던 것이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듯이 모든 신문들은 우주인이 탄생할 때마다 요란하게 보도해 댔다. 그 요란함은 사회적 관심을 어느 정도 가진 사람에게는 우주인들 이름을 기억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그들은 통일운동에 나서고 있었으니 그 이름을 총총히 기억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제기랄, 서운하게 옆방에는 아무도 안 들었네. 기막힌 음악 감상을 할까 했었는데."

원병균은 옆방 벽을 흘끗 쳐다보고는 자리 잡고 앉았다.

"원 형 이거 상습범인 모양이네. 혹시 누구처럼 너무 몸 달아 매달리다가 벽 떠다 넘긴 일은 없나 몰라?"

", 여러 번 있지. 한번은 벽이 벌렁 검어갔는데 여자가 하는 말이, 이 남자 시원찮던 참인데 마침 잘됐어요, 하잖아, 그래서 15센티미터의 거포 맛을 화끈하게 보여줬지."

"또 나온다 또."

"근데, 정말 이런 데서 그 짓 하는 인간들도 있을까? 이 얇은 판자벽을 사이에 두고 말야."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

"글쎄, 괜한 소문 아냐?"

"미칠 듯 불붙는 사랑을 해보지 않은 자는 말하지 말라. 그게 때와 장소를 가리면 진정한 사랑이 아니니라."

원병균의 가성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한 사람이 더 오고, 술판은 벌어졌다. 그들은 작은 유리잔에 중국 술 배갈을 남실남실 가득 따랐다.

"끝끝내 체포되지 않은 우리의 승리를 위하여!"

"좋았어! 군발이들을 결국 우리 앞에 굴복시킨 장쾌한 승리를 축하하며 !"

"쭈아, 쭈아! 더욱 굳은 단결과 양양한 앞날을 기념하여!"

그들 여섯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배갈 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숨 막힐 듯 독한 술기운에 제각각 괴상한 소리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냄새만 맡아도 그 독기에 몸이 부르르 움츠러드는 배갈은 성냥불을 가까이 대면 금방 불이 붙어 푸른 불길이 일렁거렸다. 중국인들은 그 푸른 불꽃을 보며, 자신들의 변함없는 신용을 과시하는 듯했고, 한국인들은 그 술이 독하기는 했지만 빨리 취하고 뒤탈이 없어서 즐겼다. 그들은 서로서로 잔을 권하고 서로의 잔에 또 술을 가득 따랐다. 그들의 얼굴은 활력이 넘치고, 맘껏 술을 마시고 싶어 하는 욕구가 출렁거렸다. 그들은 지난 몇 개월 동안 쫓기고 숨어 살아온 수배생활에서 풀려났다. 군사정권은 며칠 전에 구 정치인들을 관대하게 처리하기로 결정하면서 학생 용공 혐의자들의 공소를 취하하고, 수배자들의 수배도 풀었던 것이다.

"근데 말야, 그 관대한 처분이란 게 알고 보니 박정희 그 사람이 미국 방문을 위해 취한 제스처였더구만."

"거 무슨 때늦은 잠꼬대야? 그야 케네디한테 민주주의 하는 척하려고 꾸민 연극이지. 그러니까 박정희 출국 날짜에 딱 맞춰 그런 조처를 한 거 아냐. 야비하고 속 보여. 그래도 좀 며칠 전에 할 일이지."

"이번에 박정희에 대해서 놀란 것 없어? 그 사람 아주 곤란하던데."

"일본군 출신이라는 것 말이지? 드디어 박정희라는 인간에 대한 과거가 한 꺼풀씩 벗겨지기 시작하는 건데, 그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야. 만주 벌판에서 독립군들의 등뒤에 총질을 한 자가 어떻게 이 나라의 정권을 좌지우지할 수가 있어. 독립군들을 죽이면서 왜놈에게 충성한 자가!"

", 그것도 심각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그자의 득세로 그자와 똑같은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이승만 때보다도 더 기승을 부리게 된 점이야. 이승만은 그래도 독립운동을 한 경력 때문에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다소 눈치라도 보았지만, 이젠 오히려 친일 경력이 동류의식을 갖게 할 판이니 이게 어찌 되겠어.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제2의 부흥기가 온 셈이야."

"그거 듣고 보니 그렇네. 근데, 이번 일본방문에서 옛날 일본육사의 교관인지 선생인지를 일부러 만났다는데, 도대체 그 이유가 뭐야? 불법이든 어쨌든 일단 한 나라의 대표가 되었으면 그에 걸맞는 체통과 위신을 지켜 그쪽에서 만나자고 해도 거절했어야지. 맹렬 친일파였던 걸 자랑하자는 건지, 그런 과거를 상기시켜 일본 정객들한테 호감을 사려는 건지, 도무지 그 의도를 모르겠어. 혹시 국익을 위한 어떤 목적이 있었다 하더라도 대한민국 대표로서 절대 할 짓이 아니야. 일본에 대한 국민감정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치욕스럽고 분해서 견딜 수가 없어."

"몰라, 그게 어쩌면 지금 열리고 있는 한, 일 회담을 좀 잘 풀어보자고 머리를 굴린 것일 수도 있지 하지만 그건 어림없는 꼼수야. 힘 있는 놈들에겐 그런 짓을 할수록 오히려 무시당하고 업신여김만 당할 뿐이야. 왜놈들이 박정희를 바라보며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겠어? , 너 많이 출세했구나. 그게 다 우리가 가르쳐준 덕인 줄 알아라. 이런 생각밖에 더하겠어? 더럽고 창피해서 사람 미칠 일이야."

"그래, 만석꾼 지주가 돈 좀 벌었거나 논마지기 좀 장만한 옛날 머슴을 대단하게 봐줄 리가 먼지."

"박정희의 과거나 그가 일본에서 한 짓은 문제가 있는 건 틀림없고, 그런데 우리가 주시해야 할 건 어제 미국에서 케네디를 만났다는 사실이야. 그건 미국이 드디어 쿠데타정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거고, 그건 바로 이 땅에서 박정희의 시대가 열렸다는 의미 아니겠어? 박정희, 그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운동 진로도 판가름 나게 돼 있으니까."

"난 그 점에 대해서 케네디한테 너무 실망했어. 처음엔 잘 나가더니 결국 쿠데타를 인정하고 초청까지 하다니 말이나 돼?"

"이봐, 술도 아직 안 취하구선 그런 순진한 소리 하지 말어. 케네디가 뭐 별거야? 그는 충실한 미국 대통령일 뿐이야. 미국은 공산주의 종주국인 쏘련과 대적하는 자유민주주의 종주국을 자처하고 있고, 케네디는 그 총사령관으로서 세계에서 제일가는 반공주의자야. 그러니까 그가 가장 환영하는 건 반공을 내세우는 나라의 지배자들이지 박정희는 바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인 거야. 그런데, 박정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반도가 차지하고 있는 지정학적 중대성이야. 미국의 입장에서 남한이 적화된다 하면 어떻겠어? 그거야말로 눈 뒤집힐 끔찍한 일인 거야.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는 곧바로 일본의 공산화로 확대되고, 그렇게 두 겹의 방어벽이 무너지면 미국은 자기네 호수처럼 독차지하고 있던 태평양을 반이나 잃으면서 쏘련과 맞닥뜨리게 되는 거지.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아. 태평양으로 진출한 쏘련의 승리는 즉각 중공을 자극해서 대만을 단숨에 손아귀에 넣게 되고, 월남이나 라오스같이 지금 불안한 상태에 있는 나라들까지 금방 중공의 영향권에 들어가고 말야. 그럼 어떻게 되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는 연쇄적으로 적화 위험에 빠지게 되고, 미국은 동북아시아에 이어 동남아시아까지 잃게 되어 마침내 세계 2대 강국에서 탈락하는 비참한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는 거야."

"이봐, 지금 무슨 공상 소설 쓰고 있는 거야."

"가만있어 봐, 이거 아주 중대한 얘긴데 들어보자구. 어서 계속해!"

"이거 한참 잘 나가는데 김 빼고 그러지 말어. 그러니까 말야, 그런 사실을 날마다 지구본 빙빙 돌리면서 손바닥 들여다보듯 환히 알고 있는 케네디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게 뭐겠어. 공산주의의 마수로부터 남한을 철통같이 지켜내는 일이라 그거야. 그럼 그 위대한 소임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적임자가 누구냐! 그건 바로 별 넷에 빛나는 4성 장군 박정희 다 그런 말씀이야. 아까 누가 케네디한테 실망했다고 하던데, 제발 그런 순진한 소리 하지 마. 그건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미국 대통령 케네디한테 무슨 기대를 했었다는 뜻인데, 미국 대통령은 미국 국내에서만 민주정치를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을 뿐이지 국외인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민주정치를 하든 독재정치를 하든 아무 관심도 없어 . 그런데, 미국은 자기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의 지배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불변의 조건이 한 가지 있어. 그게 뭐냐! 바로 투철한 반공주의야. 혁명공약 제1항에 반공주의를 내세울 박정희를 결국 케네디가 미국으로 초청해 백악관에서 손 어루만진 건 당연한 결과야. 우린 이 현실을 직시해야 해. 거기서 우리의 앞길에 대한 해답도 나오는 거니까."

"그 해답은 뻔한 것 아닌가. 반공주의는 더욱 강화될 거고, 통일운동은 한층 더 용공으로 몰리겠지."

"그거 정답!"

"그럼 어떻게 하지?"

"오늘은 그 답을 찾은 것으로 만족하고 술이나 좀 편한 마음으로 마시자구 대안은 차차 찾구."

"그게 좋겠어. 그나저나 케네디한테 싸악 정 떨어지네."

", 김 형도 케네디의 젊음과 그 말에 반했었던 모양이지?"

"국가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지 말고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

"옳소!."

그 말은 케네디가 대통령 취임식에서 한 것이었고, 매력적인 젊은 대통령이란 케네디의 인기와 함께 그 말은 무슨 대단한 명언처럼 선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정치 냄새를 풍기는 강연이나 연설에서는 으레껏 인용되었고 소위 명사라는 사람들의 글에도 뻔질나게 등장하는가 하면, , , 고등학교 조회시간에도 교장들은 그 말을 끌어들여 유식한 척 해 가며 미국바람을 일으키는 데 솔선해서 앞장서고 있었다.

"근데 말씀이야, 박정희 그 사람 미국까지 가서도 선글라스 못 버리는 걸 어떻게 생각해?"

"아이구 맙소사, 백악관 실내에서 색안경 끼고 촌티 내는 것 하고, 챙피스러워 사람 까무러칠 일이야."

"그 사람 정말 왜 그러지? 키가 작으면 촌스럽지나 말아야 할 텐데 키도 케네디보다 훨씬 작지, 선글라스를 껴서 한없이 촌스럽기는 하지, 난 낯 뜨거워 신문을 덮어버렸어."

"그 사람 키는 작아도 얼굴은 깡다구 있고 다부지게 생겼던데 뭐가 겁나는 게 많아 색안경을 못 버리지? 외국 국가 대표가 백악관에서 선글라스 낀 것은 아마 전무후무하지 않을까 싶다. "

"그게 다 우리의 수준이고 우리의 현실이야. 땅덩어리만으로도 우리 남한의 백 배 가까운 게 미국이야. 애초에 국력도 약한데다 쿠데타까지 일으켰으니 그 사람 겁이 나기도 했겠지. 자아, 어서 남은 것들 마시고 2차로 가자!"

"좋아. 그런데 박 형 학교에서는 시험 못 본 걸 뭐라고 해?"

"괜찮다던데. 송 형 학교는?"

"야아, 부럽다. 우린 곤란하다는 거야."

"무슨 소리야? 이 형 학교는?"

그들은 독한 술에 빨리 취해 중국집을 나섰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어어, 바람 참 시원하다. "

"공짜라고 그 바람 많이 마시지 말어. '죽음의 재'가 실린 것 알지?"

소련이 대기권에서 원자폭탄 실험을 계속해 그 낙진이 계절풍을 타고 날아온다고 신문들이 연달아 보도하고 있었다.

 

 

39. 먼 그곳

"딸라 파세요, 딸라."

"딸라 있수? 딸라."

파마머리에 큼직한 손가방을 든 여자들 네댓이 오가는 행인들에게 은밀하고 빠르게 접촉하고는 했다. 달러를 사고 파는 그 여자들은 언제나 변함없이 달러를 사라고는 하지 않고 팔라고만 했다. 그러다가 손님을 잡게 되면 그 여자들은 뻘밭의 게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듯 시장 골목 어딘가로 날쌔게 사라졌다. 눈감고 아웅이긴 하지만 단속의 눈길을 피하려는 거였다.

"아주머니, 우리 엄마 어디 계세요?"

".....? 오라, 임 마담 딸이구나. 저기 사무실에, 손님하구."

", 감사합니다. 가자."

임채옥은 겁난 듯한 얼굴로 엉거주춤 서 있는 친구에게 눈짓했다.

"....."

손가방에, 책 서너 권을 껴안아 전형적인 여대생 티를 내고 있는 임채옥의 친구는 쭈뼛쭈뼛 임채옥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 뭐가 겁나니? 긴장하지 말어. 그렇게 긴장하다간 일 다 망친다."

천일극장 뒤의 동대문시장 골목으로 앞장서며 임채옥이 말했다.

"근데 말이지..... 난 느네 엄마가 저런 일을 한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 위험하고 힘드는데 여자 몸으로....."

"우리 엄만 그저 평범하게 생각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야. 우리 엄마는 이 세상에 여자가 하지 못할 일이란 없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그건 말야, 우리 엄마만 그런 게 아니라 38선을 넘어온 이북 여자들 거의가 다 그래. 여기도 그렇지만, 여기보다 몇 배 큰 딸라 시장인 명동 뒷골목의 여자들도 태반이 이북 여자들이야. 그리고 여기 동대문시장의 노른자위라고 하는 2층 포목점들이 이북 여자들 판인 거야. 세상이 다 알잖아. 그렇게들 돈벌이에 악착스러운 건 다 전쟁 탓이야. 이북에서 거의가 맨손으로 쫓겨 내려왔지, 의지할 만한 일가친척이나 아는 사람은 없지. 거기다가 전쟁까지 터졌으니 어찌 됐겠어. 악착같이 돈벌이를 나서지 않으면 다 굶어 죽는 거야. 근데 있잖아, 이젠 먹고 살 만하게 됐고, 그런 짓 창피하기도 하니까 그만두라고 해도 소용이 없어. 언제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계속 돈을 벌어야 한다는 거야. 믿을 건 돈밖에 없다고 그렇게 물불 가리지 않고 악착을 떠니까 38 따라지라고 손가락질 당 하지. 그래도 그건 못 고쳐, 일종의 불치병이거든."

"그래, 너두 그 기질은 엄마 꼭 빼박았구나."

"무슨.....?내가 언제 돈 그리 좋아하든?"

임채옥이 의아스러운 기색으로 친구를 쳐다보았다.

"아니, 그게 아니구.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악착같이 덤비는 그 악착스러움 말야."

"어머머 기집애, 난 또 무슨 소리라구."

임채옥은 친구에게 눈을 흘기며 때리는 시늉을 하고는,

"너 우리 엄마 앞에서 그런 내색 살짝 하기만 해도 큰일 나. 어찌나 눈치가 빠른지 넘겨짚고 앞지르고 하는 게 형사 열이 못 당해"

하며 고개를 내둘렀다.

"어머 , 나 겁난다 얘.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으시면 큰일이잖아."

"그래서 집으로 안 가고 여기로 온 거니까 푹 안심해도 괜찮아. 여기선 돈 벌기에 맘이 바빠서 꼬치꼬치 캐묻고 있을 수가 없거든."

"어머 기집애, 아주 치밀하구나."

"그럼 얘, 심리전술이라는 게 군사작전에만 있는 건 줄 아니? 넌 그저 길게 말하지 말고 느네 집에 놀러가게 해달라고만 해. 내가 미리 뜸을 들여왔으니까 의외로 쉽게 끝날 수도 있어. 첫인상에 너를 믿으면 말야."

2층 상가의 북적거림과 시끌벅적함은 시장 특유의 활력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임채옥은 빠른 걸음으로 구석진 방을 찾아갔다.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임채옥의 어머니는 막 나서려는 참이었다.

"엄마, 나 방학하면 시골 친구 집에 놀러간다고 했었잖아. 대전 얘네 집에 갈 거거든. 은순아, 우리 엄마한테 인사드려."

"안녕허셔유, 첨 뵙겠구먼유. 이은순이라고 허는디유 채옥이를 저희 집에 놀러가게 해주시면 고맙겠구먼유."

이은순은 두 손을 앞에 모아 아주 공손하기 이를 데 없이 인사하며 말했고, 임채옥의 어머니는 쿡 웃음이 터지는 입을 얼른 손으로 가렸다.

"아이고, 허락받으러 온 딸도 착하고 얌전하지만 그 친구는 더하네. 임 마담, 더 볼 것 없어. 보내줘."

파란 돈 달러를 세고 있던 여자가 말했고,

"거 요새 대학생들 같지 않게 착하고 예의 바르네. 내가 아들이 어리지 않았으면 둘 다 며느리 삼을 걸 그랬다."

담배를 빨고 있던 그 옆의 여자가 거들고 나섰다.

"으음..... 가는 건 나쁘지 않은데 그쪽 댁에 폐가 되지 않을까?"

여기서는 '임 마담'으로 통하는 황 집사가 이은순을 유심한 눈길로 살피며 말했다.

"아니구먼유. 저희 부모님이 오라고 허셨구, 저희 집이 엄청 넓어 폐가 될 리 없구만유."

"아버님은 뭘 하시나?"

"서점을 운영허시는디유."

"대전에서 제일 큰 서점이야."

임채옥이 어머니의 약점을 건드리듯 끼어들었다.

"고상하고 깨끗한 직업이시네. 그래, 그럼 언제 떠나지?"

"오늘 방학했으니까 낼 당장 떠나야지. 은순이가 내려가야 하니까."

임채옥은 야무지게 못을 쳤다.

"알았다, 그리 하렴."

밖으로 나와 어머니와 헤어진 임채옥은 날아갈 듯한 신바람을 억제하지 못해 친구를 붙들고 팔짝팔짝 뛰기 시작했다.

"어머머머, 넌 어쩜 그리 기막히게 일을 해치울 수가 있니 그래. 넌 일류배우야, 일류배우. 조미령, 이민자 뺨치는 일류배우라구 그 눈치 빠른 우리 엄마가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고 넘어갔으니 네 연기력은 정말 대단해."

", , 이게 칭찬인지 흥인지 잘 모르겠다. 난 연기한 게 아니고 그냥 충청도식으로 한 것뿐이야. 그 촌티가 재수 좋게 잘 들어맞은 거지. 나 배고픈데 어쩌지?"

"아이구, 능청 떨지 말어. 약속대로 한턱 낼 테니까 어서 가자."

"빵 정도론 안 돼."

"뭐야? 그럼 뭘 더 바라는데?"

"불백에 영화 감상. 안 그러면 일러바치는 수가 있어."

이은순이 고개를 꼿꼿하게 세우고 말했다. 불백은 음식 중에서 제일로 치는 불고기백반의 줄임말이었다.

"얘 좀 봐, 아주 등치고 간 내려고 하네. 별 수 없지, 당할 수밖에."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임채옥의 얼굴에서는 방글방글 웃음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세상에, 그렇게도 좋으니? 부럽고도 샘나서 못살겠다. "

"너도 빨랑 연애해 그래야 내가 도와줄 일이 생기지."

찬바람 속에 구세군의 종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길을 건너온 임채옥과 이은순은 자선냄비에 돈을 넣고 버스를 탔다.

", 너 혼자서 낼 당장 떠날 거니?"

이은순이 불고기를 뒤적이며 물었다.

"무슨 잠꼬대야, 지금?"

"아니, 강원도 산골이라면서 혼자 갈 수 있느냐구. 겁나지 않아?"

", 같이 가주려구? 미안하지만 그 우정은 사양하겠어."

"어머머, 재 뻔뻔한 것 좀 봐."

이은순은 천장을 쳐다보며 어이없어하고는

", 사랑을 하면 사람이 다 변하는 것 같은데, 그 사랑하는 마음이란 게 어떤 거니?"

앉음새를 고친 그녀는 아주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 그걸 어떻게 다 말로 해. 그게 아주 복잡하고 묘하고 그런데 뭐랄까..... 온몸에서 새싹이 파릇파릇 돋는 것 같기도 하고, 가슴 가득 벚꽃이 만발한 것 같기도 하고, 그 사람이 눈부신 태양 같기도 하고, 그 사람을 찾아선 땅속 아니라 바다 속까지 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대신 죽을 수도....."

", , 너무 징그럽고 유우....."

이은순이 재빨리 입을 가렸다.

"괜찮아, 유치하다고 해도. 누군가가, 진실한 사랑일수록 사랑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의 눈에는 유치하고 단순해 보인다고 했으니까. 그 흔한 말 있잖니, 내 마음 나도 몰라, 하는 거. 꼭 그대로니까 너도 어서 사랑을 해봐."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무슨 말할 자격이 있겠니. 나도 어서 그 황홀한 청춘사업을 해봤으면 좋겠는데 얼굴이 못나서 그런지 영 기회가 안 와."

이은순은 불고기를 맛있게 먹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얼굴이 좀 넓은 편이어서 그렇지 별로 흠잡을 데 없이 그런대로 잘생긴 인물이었다.

임채옥은 이튿날 아침 일찍 닷새 일정으로 집을 나섰다. 친구 집에 놀러 간다면서 이틀이나 사흘은 너무 짧아 닷새로 잡을 수밖에 없었다. 날짜가 남는 것은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날짜 맞춰 오너라. 더 오래 있는 건 흉거리니까."

황 집사는 딸에게 엄하게 일렀다.

", 아빤 아직도 주무세요?"

임채옥은 용돈을 더 챙길 욕심으로 눈길이 안방 쪽으로 돌아갔다.

"아서라, 효녀인 척하지 말고 그냥 떠나거라 아빤 요새 일이 자꾸 꼬여 너한테 돈 줄 마음도 없고, 어디 가는지 관심 쓸 여유도 없어."

황 집사는 어서 떠나라고 손끝을 빠르게 저었다. 작은 여행 가방을 들고 골목을 걸어 나오면서 임채옥은 마음 한구석이 우울해졌다. 아버지는 날이 갈수록 술을 많이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날이 늘어갔다. 사회적 상황이 달라지면서 아버지의 사업도 영향을 받는 모양이었다.

"그 사람들이 경상도고 충청도라서 이북 출신들을 싫어하는 거야. 군복 벗겼다 하면 이북 출신들이고,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몰라."

몸을 가누기 어렵게 술이 취한 아버지가 술주정에 섞어 어머니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래요, 우리 이북 출신들 좋은 시절 다 갔나 보우. 우리 가치 제대로 알아준 분이야 이승만 대통령 아니었수."

어머니가 한숨 섞어가며 반죽을 맞추었다. 아버지가 말하는 그 사람들이란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었다. 임채옥도 그 두 사람을 아버지 어머니 못지않게 싫어했다. 아무 죄도 없는 유일민을 무작정 잡아다가 몇 달씩 고생시키고, 그 때문에 한 학기를 고스란히 망치고, 군대까지 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 바로 그들이었다.

강원도로 가는 시외버스는 망우리고개를 힘겹게 넘어가고 있었다. 버스도 낡은데다가 길도 비포장 도로였다. 딱딱한 좌석이 쉴 새 없이 튀거나 말거나 임채옥은 설레는 가슴으로 반 접힌 편지 봉투를 꺼냈다. 눈에 익은 유일민의 글씨로 적힌 봉투 앞면의 주소는 이은순의 하숙집이었다. 그의 편지를 안전하게 받으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임채옥은 봉투를 뒤집었다. 강원도 인제군으로 시작되는 유일민의 주소가 봉투 뒷면 좌측 하단에 적혀 있었다. '일병 유일민'을 보는 순간 콧날이 시큰해지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다섯 글자는 볼 때마다 그립고도 안쓰러웠다.

오빠, 기다려요. 제가 곧 가요. 외로워하지 말아요..... 저를 피하려 하지도 말구요..... 그건 저를 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괴롭히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아무도 저를 못 막아요.....’

임채옥은 눈물로 흐려진 시야 속에서 우수에 젖고, 고민에 젖고, 피로에 젖은 유일민의 외로운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를 끌어안고 목놓아 울고 싶은 사무침이 가슴을 휘돌고 있었다.

‘.....나를 잊어. 잊어야해 이번 기회에 잊도록 노력해 내가 학기만 맞추려고 군대에 온 게 아니야. 처음부터 단호하지 못했던 내 잘못을 잘 알아. 그러나 그건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이었어. 서로 고이 간직하며 이젠 서로 잊으려고 노력해야 해. 나와 채옥이 사이에는 건너서는 안 되고, 건널 수도 없는 강이 있으니까 더 편지하지 마.....’

유일민이 보낸 첫 번째 답장이었다. 임채옥은 유일민 대신 '단호하게' 그 답장을 묵살하며 사흘거리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쫓아가고 싶었지만 하루 길이 아니라서 집을 떠날 수 있는 그럴 싸한 말거리가 없었다.

‘.....제발 면회 오지 말어. 여기까진 거리도 너무 먼데다가 길이 나쁘고, 버스도 고물이라 시간도 아주 오래 걸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그리고 이 산골까지 여자가 혼자 다닌다는 건 여간 위험한 일이 아니야. 제발 면회 오지 말어. 그건 나를 위하는 게 아니라 괴롭히는 거야. 기다려, 내가 휴가 나가서 만나게 ..... ’

유일민의 편지가 그렇게 다급할수록 임채옥은 겨울방학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다렸다. 처음부터 주저하고 망설이고 머뭇거리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건너서는 안 되는 강' 때문에 아예 건너기를 포기하기로 작정한 유일민의 속마음을 알게 되자 임채옥의 감정의 열도는 더욱 뜨거워졌다. 마음은 그를 향해 치달아가고, 끝끝내 그 강을 건너고야 말겠다는 결의가 푸른 칼날로 곤두섰다.

오빠, 우릴 아무도 못 막아요. 기죽지 말아요. 힘을 내요. 전 오빠를 알고 나서부터 운명이라는 것을 믿게 됐어요. 오빠와 저는 언젠가 아주 멀고 먼 옛날부터 만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는 운명의..... 운명의..... , 맞아요, 운명의 사슬로 얽혀 있었던 거예요, 그 사슬을 누가 감히 끊을 수 있겠어요. 오빠, 오빠아아.....’

임채옥은 봉투에 떨어지는 눈물을 문지르며 창밖 멀리 눈길을 보냈다. 강원도의 겨울 산들 모습이 너무나 썰렁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여름 산은 그나마 잡풀들이 우거져 나무 없는 산들의 속살을 어찌어찌 가릴 수 있었지만 풀들이 다 말라버린 겨울산들은 헐벗은 속살을 벌겋게 드러내고 있었다. 비탈이 심하고 산세가 험해 나무가 없이 헐벗은 산들의 모습은 더욱 볼썽사나웠다. 도시가 폐허가 되었던 것처럼 산들의 그런 모습도 전쟁의 상처였다. 적을 섬멸하기 위해서 산에 불을 지르고, 폭탄 투하로 산불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는 복구사업이 시작되자 목재가 무한정 필요했고, 전후의 무질서를 틈타 전국적으로 남벌이 자행되면서 산이란 산은 벌거숭이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가 시골로 갈수록 땔감까지 장만하는 바람에 어린 나무며 잡풀들까지 남아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겨울 산의 그 삭막함에 임채옥은 마음이 움츠려드는 것을 느꼈다. 헐벗어서 산세가 더욱 험해 보이는 그 산줄기들이 마치 자신의 앞날인 것 같아 문득 불길한 느낌이 스쳤던 것이다. 길은 끝없이 울퉁불퉁했고, 버스는 잠시도 쉴 새 없이 마구 들까불대고 질정 없이 뒤뚱거려 딱딱한 의자에 계속 엉덩방아를 찧어대면서 이리저리 조리질까지 당해야 했다. 가도 가도 산이고, 갈수록 산은 깊어지고 험해져 버스는 자꾸 힘겨워지고 있었다. 어느 개울가에서는 승객들이 다 내려 고장 난 버스가 고쳐지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하면, 어느 산모퉁이에서는 남녀노소 없이 승객들이 다 달라붙어 버스를 밀어대기도 했다.

말만 들어온 강원도땅에 깊이 들어갈수록 임채옥은 교과서에서 배운 국토의 75퍼센트가 산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고, 가도 가도 끝없이 이어지고 겹겹이 포개지고 있는 산들이 난생처음 슬프고 원망스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저 많은 산들이 절반만 평야였더라도 우리가 이렇게 가난하게 살지는 않을 걸 하는 생각이 이상하게도 선명했던 것이었다. 산이 깊어질수록 자주 나타나는 것이 검문소였다. 버스는 검문소마다 멈추었고, 그때마다 철모에 총을 비껴 든 헌병들이 올라와 검문을 했다. 그들은 어김없이 네댓 명의 군인들을 검문했고, 눈길을 날카롭게 번뜩이다가 몇몇 사람에게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고는 했다. 그런데 그 대상은 남자였고, 남자 중에서도 젊은 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그 잦아지는 검문에서 임채옥은 휴전 상태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실감했고, 군인들이고 헌병이고 지난날의 낯선 기분이 차츰차츰 친밀감으로 바뀌고 있었다.

일곱 시간을 시달려 오후4시 경에 인제에 내렸다. 시간에 비해 이상하리만큼 해가 설핏했다. 겨울해가 짧은데다 산들까지 높아서 해는 곧 산마루에 닿을 듯했고, 해를 등진 쪽의 산줄기로는 제 그늘이 지고 있었다. 임채옥은 손목시계를 보면서 서울에서도 6시면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한다는 생각과 함께 마음이 바빠졌다.

"2시에 다 끊겼어요."

"네에?"

임채옥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겨울에는 다 그래요, 빨리 어두워지니까. 여긴 전방이라 야간에는 민간인들 차는 운행 못해요. 누구 면회 오셨수?"

"네에....."

임채옥은 가방 든 손아귀에 힘을 주며 여드름투성이의 청년에게 경계의 눈길을 보냈다.

"뭐 그리 이상하게 보지 마슈. 나 이래봬두 차부 정식 직원이니까."

청년은 이빨 사이로 침을 찍 내쏘고는,

"누구든지 면회 오면 여기서 하룻밤자고 아침 첫차를 탈수밖에 없어요. 저기 저 건너편에 보이는 서울여관으로 가보쇼. 딴 데보다 깨끗하고 밥도 먹을 만하니까"

하며 턱짓 했다.

", 고마워요."

임채옥은 갑자기 가방이 무겁게 늘어지는 것을 느끼며 돌아섰다. 서울의 어느 변두리를 옮겨다 놓은 것 같은 산골 소읍은 한눈에 다 들어올 정도로 작았다. 그런데 면회객을 받으려는 것인지 여관은 서너 개나 보였다. 임채옥은 길을 건너가며 여관을 차례로 살펴보았다. 벌써 선입감이 작용하는 것인지 어쩐지 큼직한 간판부터가 서울여관이 제일 나아 보였다.

외박이 될까.....?’

또 떠오른 이 생각에 임채옥은 스스로 얼굴이 뜨거워졌다. 자신은 그의 외박을 생각하며 그중 가장 깨끗한 여관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어서 오세요. 서울서 면회 오셨구려?"

마흔대여섯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장작을 한 아름 안고 뒤뜰에서 나오다가 임채옥을 맞이했다.

"어머나....."

임채옥은 놀라움 반, 어이없음 반으로 그 여자와 눈길이 마주쳤다. 아무리 직업적으로 이골이 났다 해도 차부의 청년보다 한술 더 떠 서울이라는 것까지 맞히는 것이 희한하기만 했다.

"왜 그러우? 뭐가 이상해요?"

"글세..... 어떻게 그런 걸 다아시는지....."

"으응, 그야 척하면 삼천리 아니겠수, 서당개 3년이면 뭐 어쩐다는 말이 있는데 난 벌써 이 장사로 10년이 넘었어요. 근데 그런 걸 못 맞히면 개만도 못하게 될 판인데, 그게 말이 되겠수? 방 쓰시려고?"

"네 깨끗한 걸로 주세요."

"우리 집 방이야 다 깨끗하지만 처녀 몸이고 하니까 안전하게 내실 옆방으로 드리지 뭘. 보아하니 보통 뜨거운 사이가 아닌 모양이구랴."

주인여자는 장작을 부리며 손바닥을 털었다.

"네에.....?"

임채옥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뭐 부끄러워할 것 없수. 흔한 일인 걸. 첫 면회가 맞수?"

"네에"

"이런 쯧쯧쯧..... 그럼 일등병일 테니 외박 나오긴 글렀구랴. 우리 빽이 슬슬 통하던 때가 좋았는데, 다 옛날 얘기지."

임채옥의 신경은 곤두섰다. 건너지 못할 강, 건너서는 안 될 강을 건너버리고 싶은 음모가 줄곧 가슴속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일을 성취할 수 있는 길은 외박밖에 없었다.

"아주머니, 외박할 수 있게 좀 도와주세요. 서운찮게 답례할게요."

임채옥은 창피도 부끄러움도 모르고 불쑥 말했다.

"말 안 해도 그 맘 다 알고 있다우. 그 멀고 힘든 길 괜히 왔을 리 없지. 헌데 이젠 세상이 달라져서 사바사바가 콱 막혀버렸수. 옛날엔 누이 좋고 매부 좋고로 부대마다 안 통하는 데가 없었는데, 혁명 후론 그게 절대 안 통해요. 그 혁명바람으로 우리 여관업도 예편당한 장군들처럼 피 보고 있다우."

임채옥은 어깨가 처지며 마루에 걸터앉았다.

"보아하니 아가씨는 면회할 채비는 아무것도 안 한 것 같구랴. 면회라는 게 맨입으로 서로 얼굴만 쳐다보는 게 아닌데 밤새 그 준비나 제대로 하는 게 좋을 거유. 괜히 쫄병 애인 내무반에 들어가서 기합 받게 만들지 말구."

", 따로 준비해 오지 못했는데, 그러던 기합을 받는 모양이죠?"

"그야 척 들으면 모르겠수? 쫄병이 면회를 했으면 떡이든 뭐든 좀 가져와야 하는데 그냥 빈손으로 들어오면 은근히 기다리고 있던 고참들 기분이 어떻겠수. 제 놈만 배터지게 처먹고 들어왔다고 감정이 상할 수밖에. 그럼 돌아오는 거야 엉덩이 터지는 매타작에, 머리통 빠개지는 원산폭격밖에 더 있겠어. 서로 배곯아가며 고생하는 처지에 면회 때나 떡 쪼가리 좀 나눠 먹으면 그 얼마나 훈훈하고 좋겠수."

"그래요, 그거 참 좋은 일이네요. 근데 당사자를 위해선 뭘 준비해야 하나요?"

"그야 뭐니 뭐니 해도 먹는 것 아니겠수. 군인들이 겪는 젤 큰 고생이 뭔 줄 알우? 훈련이나 야간보초 서는 게 아니라우. 배고픈 거라우. 배고픈 거 먹고 돌아앉으면 배고픈 젊은 나이에 밥은 양이 적지, 반찬은 보잘 것 없지 일은 고되지, 사병들은 누구나 배가 고파 허덕허덕해요. 사병들 누구한테나 물어봐도 당장 소원은 배 터지게 먹는 거라고 한다우. 그러니 더 볼 것 뭐 있겠수. 흰 쌀밥에 불고기 굽고, 살 통통하게 잘 오른 암탁 한 마리 잡으면 더 바랄 게 없지."

"큰일났네요. 밤새 그런 걸 다 무슨 수로 장만해요."

임채옥은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었다 놓으며 울상을 지었다.

"남들 눈 피해서 살짝 오느라고 빈손인 아가씨 처지 내 잘 아는데....."

노회한 여우가 먹잇감을 살살 놀리고 어르며 호리다가 결정적 순간에 공격하듯 주인여자는 아주 딱해 하는 얼굴로 임채옥을 바라보며 허를 찼다.

"아주머니, 저 좀 도와주세요. 돈은 넉넉하게 드릴게요."

임채옥은 스스로 투망에 뛰어드는 물고기가 되고 있었다.

"돈이야 뭐..... 아가씨가 막내 동생 같기도 하고 큰조카 같기도 하고, 인상 좋은데다 형편이 딱하게 됐으니까 내가 탈 없도록 도와줘야지 어쩌겠어."

주인여자는 능란하고도 여유 있게 먹이를 삼켰다. 임채옥은 군불 땐 따끈따끈한 온돌방에 누워 밤늦도록 추위를 타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산골을 휩쓸고 가는 찬바람 소리가 차츰 심해지고 있었다. 그 바람이 통째로 가슴을 꿰뚫고 가는 것처럼 추위가 심했다.

그가 군대로 떠날 때 그러지 못했으니까 이번에는 꼭 함께 밤을 보내리라 작정했었다. 아무도 모르게 그와의 사랑을 완성시킬 작심이었다. 그가 건너지 않으려고 해도 무슨 수를 써서든 그 강을 건너게 할 참이었다. 그와 함께 밤을 보내기만 하면 그가 강을 건너게 할 자신이 있었다. 성욕 앞에서 남자의 이성이나 의지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남자 자체를 지배하는 절대적 본능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수없이 많은 남자들이 사랑하지도 않은 여자의 의도적인 유혹에 빠져 명예를 잃고 인생을 망치게 되는 것은 그 엄청난 본능의 힘에 지배당한 탓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남자의 의지력이나 자제력이 어떠한 것인지는 더 말할 것이 없다. 임채옥은 언젠가 읽었던 이 글을 믿고 있었다.

깊은 골짜기의 맑은 물속에서 발가숭이로 헤엄을 치다가 한 몸이 되고, 산을 넘고 넘어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한 몸이 되고, 비 쏟아지고 파도치는 어느 바닷가 백사장에서 한 몸이 되고, 첫 키스를 했던 남산의 그 자리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한 몸이 되었다. 그때마다 임채옥은 소스라쳐 잠이 깨고는 했다. 밤새도록 몇 번인지도 모르게 그런 꿈을 꾸느라고 머리가 멍해진 임채옥은 혹시 자신에게 탕녀의 기질이 있지 않나 슬그머니 겁나기도 했다.

헌 바께쓰에 질퍽하게 반죽해 놓은 석탄을 난로에 때고 있는 면회소는 온기 없이 썰렁하기만 했다. 면회소 건물이 넓은데다 허술했고, 질퍽한 석탄은 냄새만 요란했지 화력은 영 신통치 않았다. 면회소에는 임채옥을 빼고 세 집안이 더 있었다. 두 집안은 나이 50줄의 내외간이었고, 한 집안은 늙은 어머니와 30대 중반의 아들이었다. 그들이 드러내고 있는 공통점은 가난과 촌스러움이었다. 낭자머리에 한복인 여자들의 입성에서는 촌티가 질질 흐르고 있었고, 남자들의 한복 위에 걸친 싸구려 낡은 외투와 때 전 중절모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농부들의 나들이 차림이었다. 그 공통점은 아주 오래 전부터 세간에 떠돌아온 '돈 없고 빽 없는 놈들만 전방으로 간다'는 말을 유감없이 입증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서양식 차림의 신식 멋쟁이 임채옥은 영 어울리지 않는 이방인이었다.

첫 번째 군인이 나타났다. 유일민이 아니었다. 5분쯤 지났을까 두 번째 군인이 나타났다. 또 유일민이 아니었다. 임채옥은 자신도 모르게 탁자 위에 올려놓은 두 개의 보퉁이 매듭 끝을 검지손가락에 감았다 풀었다 하기 시작했다. 두 집안에서는 보퉁이를 풀어놓고 그저 먹이기에 정신이 없었다. 세 번째 군인이 숨을 헐떡이며 뛰어들었다. 또 유일민이 아니었다. 임채옥은 매듭 끝을 더 빠르게 감았다 풀었다 하고 있었다. 시계를 보았다 면회를 신청하고 20분이 지나 있었다. 임채옥은 손톱을 깨물며 한쪽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저쪽에서 식사를 마치고 보퉁이를 싸고 있었다. 손을 맞부비고 속입술을 깨물고 하던 임채옥은 다시 시계를 보았다. 30분이 다 되어 있었다. 그때 한 생각이 머리를 쳤다.

안 나올지도 모른다!’

임채옥은 위병소로 내달았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임채옥은 독촉을 부탁하고 다시 허둥지둥 면회소로 돌아오면서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목 아프게 눈물을 삼키는 임채옥의 눈앞에 유일민의 그때 모습이 떠올랐다. 뜻밖에도 그가 두 형사에게 잡혀가고 있었다 형사들을 가로막는 순간 떠오른 것은 무슨 수를 쓰든 그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음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커지고 뜨거워지고 단단해졌던 것이다.

다시 자리 잡고 또 5분이 지나갔다. 세 번째 군인까지 식사를 끝냈다. 임채옥의 몸은 비비꼬일 지경이 되고 있었다. 10분이 되었을 즈음에 군인 하나가 면회소로 천천히 들어섰다. 유일민이었다. 임채옥은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내달아가는 마음과는 달리 그대로 붙박혀 있었다. 자신을 똑바로 쏘아보며 걸어오고 있는 유일민의 눈초리에 질려 임채옥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뭐 하러 왔어. 안 나오려다가 나온 거야."

유일민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오빠..... 오빠....."

손을 맞잡고 떠는 임채옥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저 사람들만 없다면 그동안 엉키고 맺힌 것들이 다 풀리도록 꼭꼭 끌어안고 몸부림치고 싶은 충동을 임채옥은 가까스로 참아내고 있었다. 그가 보이는 냉정한 태도는 털끝만큼도 고깝거나 서운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와서 '단호하려고' 애쓰고 있을 뿐이었다.

"앉자."

유일민이 앉으며 담배를 꺼냈다.

"어머, 담배 피워요?"

임채옥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놀라움을 나타냈다.

"공짜니까....."

유일민은 화랑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후우 내뿜고는,

"괴로움도 조금씩 풀어주기는 하지. 여기 와서 보니까 말로만 들었던 휴전선, 비무장지대가 바로 코앞인데 ..... 그걸 지키는 건 바로 우리 아버지를 향해 총을 겨누는 일이더군 ..... 그 의미 알겠어? 심각하고 냉정하게 생각해 봐.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서로 잊어야해..... 오늘을 끝으로."

그의 낮은 말은 단호했다.

"싫어요! 안 돼요! 전 오빠 대신 죽을 수도 있어요. 아무 말 말아요!"

임채옥은 유일민의 손을 와락 잡으며 외쳤다.

 

 

40. 슬픈 구원

"축하, 축하, 또 축하!"

기쁨이 넘쳐 내달아온 강숙자가 거침없이 손을 내밀었다.

"축하하긴요, 시시한 대학."

유일표는 쑥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살피며 강숙자의 손을 맞잡았다. 사람 많은 빵집에서 여자와 악수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외국 영화에서나 보아온 그 행위는 무척 낯설고 어색스러웠다.

"어머, 배부른 소리 하지 말어. 국가고시 합격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아 초상집 된 고등학교가 한둘이 아니라는데. 그 대학도 엄연히 일류대학인데 얼마나 장해. 그럼, 장하고말구. 난 일표가 대학생이 되길 얼마나 기다렸다구."

시간이 지나도 강숙자는 손을 놓지 않고 자기 말에 맞추어 왼손으로 유일표의 손등을 토닥거리거나 쓰다듬으며 오른손에 점점 힘을 가하고 있었다.

"장하긴요. 과도 한심하고....."

유일표는 민망함을 견디기 어려워 손을 빼려고 꼼지락거렸다.

"에이, 이제 보니 일표는 기본 예의가 없네. 악수는 상대방이 손을 잡는 강도에 맞춰서 맞잡아야 하는 거야. 악수는 순수한 마음의 교환이거든. 근데 일표는 이게 뭐야. , 남들이 볼까 봐 창피해서?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남들한테 피해주는 것 아닌데. 빨랑 내가 보내는 만큼 축하를 받아들여. 그렇지 않으면 오늘 내내 이 손 안 놓을 테니까."

", 좋아요. 축하 고마워요."

유일표는 씩 웃으며 강숙자의 손을 지그시 맞잡았다.

"그래, 철학과는 나도 뜻밖이었어. 그치만 얼마나 매력적이야. 남자라고 생긴 것은 그저 어중이떠중이 법대, 상대, 의대로 박 터지게 몰려가는 꼴이란. 아니, 새로 유행하기 시작한 게 또 있지. 그 잘난 약대, 그따위 것들에 비하면 철학과는 얼마나 고상하고 멋져. 어찌 보면 일표한테 잘 어울려."

악수를 끝낸 강숙자가 빵집의 아가씨를 손끝으로 불렀다.

"글쎄요 ..... 밥 굶어죽을지도 몰라요."

유일표가 씁쓰레하게 웃었고,

"걱정 마. 내가 먹여살릴 테니까."

강숙자의 환하게 웃는 농담이었다. 유일표는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을 얼핏 떠올렸다. 지금 축하를 받고 있지만 마음은 한없이 쓸쓸했고, 자신의 깊은 속내를 모르기로는 강숙자나 다른 사람들이나 그 거리가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외로움을 더 하게 했다.

"글세, 뭐라고 말하기 참 딱한데.....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말야, 반공주의는 앞으로 갈수록 강화될 것이 분명해. 그리 되면 그 문제가 걸리지 않을 분야가 어디인지 잘 알 수가 없구나. 그게 꼭 병역기피자가 모든 사회활동을 금지당하는 것과 다를 게 없거든. 학과 선택은 최종적으로 형하고 의논하는 게 좋겠다."

판검사 훈련을 받고 있는 이규백 형은 아버지의 월북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 문제는 ROTC 장교가 될 수 없듯이 법대를 가서 고등고시에 합격한다 하더라도 판검사가 될 수 없었다. 신원조회라는 것을 필요로 하는 모든 분야에서 아버지의 월북은 극약이었다. 그것을 피할 수 있는 학과를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다가 이규백 형을 찾아갔던 것이다. 이규백 형은 좋게 말하면 말조심을 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책임회피를 한 거였다. 문과 대학의 모든 학과를 펴놓고 밤새도록 생각해 보아도 사회 진출을 하는 데 신원조회를 피할 수 있는 학과는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단 하나, 대학에 가지 않는 것이었다. 대학 공부하지 말고 농사를 짓거나, 대학 등록금을 밑천삼아 일찌감치 행상이라도 시작하는 길밖에 없었다. 입시 서류를 내야 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철학과로 정해 형에게 편지를 보냈다. 취직이 잘된다는 학과를 나와서도 고등실업자들이 드글거리는 세상에서 철학과는 실업과를 넘어 굶을 과로 통하고 있었다.

".....그래, 잘 생각했다 일단 다녀라. 대학공부는 먹고 살자고만 하는 것이 아니다. 속단하지 말고, 먼저 좌절하지 말고.....우리, 어머니를 생각하자....."

형의 답장은 어느 때 없이 짧았다.

"빵 어서 먹어. 양복 맞추러 가게."

강숙자는 여전히 기쁨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무슨 양복이오?"

유일표는 의아스럽게 반문했다.

"으응, 일표 양복! 입학 선물이야."

"허 참, 별말 다 듣겠네요. 양복이 나 같은 놈한테 어디 어울립니까. 저한테는 이 물들인 작업복에 군화면 제격이에요."

유일표는 자신의 작업복을 가리키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 작업복은 새것이 아니라 검정물이 바래 양쪽에 어깨 어름에 불그스름한 기가 드러나고 있는 헌것이었다. 그는 형이 벗어두고 간 것을 걸친 거였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대학생이면 사회인인데 격에 맞게 양복 한 벌쯤은 있어야지. 내가 오늘을 위해 돈 모아온 것 모르지? 옛날에 교복 거절한 것처럼 또 거절하면 알지?"

강숙자는 제 눈앞에다 주먹을 쥐어 보이며 유일표를 흘겨보았다.

"하 참, 생각해 보세요. 저 같은 놈한테 양복은 거지한테 비단옷이고 장님한테 색안경이라구요. 모든 게 격에 맞아야 되잖아요. 괜한 자존심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니까 이해해 주세요."

유일표는 장난기를 앞세워 밀어붙이려는 강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침착하게 말했다.

"어쩜,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까 정말 의젓한 남자네. 알았어, 그럼 양복 대신 교복을 해 입고 나머지 돈으로 책을 사든지 어쩌든지, 딴 선물을 생각해 보기로 해. 난 꼭 그 액수만큼 선물을 해주고 말 테니까."

"그런 거액의 선물은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이 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 왜 그러세요."

"일표,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어. 그동안 쌓여온 내 정이니까. 그렇잖아도 나 요새 세상 살맛 떨어져 괴로워 죽겠는데 일표까지 날 괴롭히면 어떡해."

강숙자의 눈에는 금세 눈물이 번졌다.

"아니, 왜요?"

유일표는 강 의원이 또 무슨 곤란한 일을 당했나 생각했다.

"말 마, 나 요새 자살하고 싶어. 아버지가 아버지 맘에 든 남자한테 시집을 가라고 성환데, 사람 환장할 지경이야. 그 상대가 누군지 알아? 이규백 영감님이셔, 이규백!"

"규백이 형....."

유일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강숙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글쎄요..... 그게 그러니까..... 으음....."

유일표는 복잡한 속마음을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이규백이란 이름을 듣는 순간 일어난 놀라움은 놀라움이 아니었다. 그 놀라움 속에 들어 있는 진짜 감정은 그 사실 자체가 아주 기분 나쁘고 싫었다. 그런 감정은 처음 겪는 것이 아니었다. 국민학교 4학년 때였던가, 풍금 잘 치고 노래 잘하는 담임선생님이 술도가집 아들한테 시집간다는 것이 얼마나 서운하고 분했던가. 그리고 중학교 1학년 때, 세상을 떠난 누나 대신 정을 나누었던 옆집 누나가 육군 중위한테 시집가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떠했던가. 두 번 다 소중한 것을 빼앗겨버리는 허망함 때문에 밥맛을 잃었고 학교 가기도 싫었었다. 지금의 심정도 그때와 마찬가지였다. 그런 감정을 애써 감추면서 유일표는 그동안 강숙자와 그렇게 정이 들었었던가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언제나 쾌활하고 솔직하고 인정 많고..... 강숙자는 지난 3년 동안의 고달프고 외롭고 찬바람만 휘몰아친 자신의 서울살이를 부축해 준 적잖은 힘이었고 바람막이였다. 아버지가 고약한 친일파라는 것뿐, 여자로서 흠잡을 데가 거의 없는 강숙자를 차지하게 될 이규백에게 강한 질투심이 솟았고, 그 가당찮고 엉뚱한 스스로의 감정에 유일표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끙끙거리지 말고 솔직히 대답해."

강숙자가 어깨를 늘어뜨린 채 서글픈 얼굴로 말했다.

"이규백이와 결투하고 싶어요."

강숙자의 그런 가엾은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져 유일표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말했다.

"어머머머, 어쩜 좋아, 어쩜 좋아. 여기가 빵집이 아니라 우이동 골짜기나 뚝섬 같은 데면 얼마나 좋겠어. 나 너무나 좋아서 팔딱팔딱 뛰고 막 소리소리 지르고 싶어 미치겠어."

두 팔을 바르르 떨어대는 강숙자의 얼굴은 정말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유일표는 이내 풀죽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완력으로 한다면야 이규백 같은 체구면 둘 아니라 셋도 자신 있었다. 이규백 보다 몸집이 클 뿐만 아니라 주먹을 쓰는 체력에 자신이 있었다. 늘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한 서울 살이를 해나가면서 누구를 먼저 때릴 건 없지만 허약하게 얕보여 얻어맞거나, 어떤 위기에 처했을 때 그냥 당하지 않기 위해서 나름대로 체력단련을 했던 것이다. 돈이 드는 구기는 할 수가 없었고, 돈이 안드는 철봉 평행봉 링 같은 것을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3년동안 해왔다. 그 덕에 팔씨름 세기로 소문이 났고, 대입 국가고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체력검시에서는 거뜬히 만점을 맞았다. 그러나 사람은 완력으로만 겨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이규백이란 존재는 감히 어찌해 볼 수 없는 거대한 대상이었다. 강 의원 같은 사람이 사위를 삼으려고 한 것이 벌써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 됐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강숙자도 허전한 바람만 남기고 이규백에게 시집을 가리라는 것을 유일표는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갑자기 맥이 빠졌어? 그 사람 지위가 겁난 거야?"

강숙자는 얼굴을 찡그렸다.

"몰라요. 결혼식은 언제지요?"

강숙자를 쳐다보지 않은 유일표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무슨 소리야, 지금. 그 남자 싫대니까. 아직 데이트도 한 번 하지 않았는데 결혼식은 무슨 결혼식."

", 그런다고 무슨 소용이 있나요. 결국 결혼하게 될 건데요, ."

"아니야, 난 정말 그런 남자가 싫어. 남보다 머리 좀 좋다고 혼자 잘난 체 다 하고, 공부가 뭐 인간 능력의 다라고 공부 잘 못하는 사람은 무조건 무시하는 그런 인간들이 고등고시까지 패스했으니 어쩌겠어. 아이구, 생각만 해도 징그러 우리 아버지가 이규백을 사위 삼으려고 신짝을 붙이는 건 지금 갓끈 떨어진 초라한 처지에서 울타리를 든든히 하자는 것만이 아니야. 이규백이네 동기생들이 군사정권 아래서 첫 번째 합격자라는 점이 더 중요해. 우리 아버지 판단으론 그들에게 앞으로의 출세 길이 환히 열렸다는 거지. 우리 아버지는 이규백의 판검사 권력이 필요하고, 이규백이는 우리 아버지 재산이 필요하고, 두 사람이 야합을 해대는 데 난 중간 이용물일 뿐이야. 그런 걸 뻔히 알면서도 내가 결국 결혼할 거라구? 어림없는 소리 하지도 말어. 난 죽기가 쉽지 애정 없는 결혼은 절대로 안 해."

강숙자는 고개를 짤짤 흔들었다.

"....."

유일표는 빈 빵 접시에 눈길을 떨군 채, 당신은 결국 그 남자와 결혼할 거야. 판검사 사모님이 되시는 건데,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답답한데 우리 나갈까?"

강숙자가 먼저 일어섰다. 어스름을 타고 부는 실바람 속에 봄기운이 서려 있었다.

"세상에, 대학생이 된 모습이 이렇게 다를 줄은 정말 몰랐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나하고 키가 비슷했는데 글쎄."

자신에 비해 머리 하나가 더 있는 유일표를 강숙자는 실눈을 뜨고 올려다보며 더없이 다정하게 웃었다.

"그리 잘 묵덜 못허고 하는디도 키가 쑥쑥 큰다 이. 아부지 탁해서 긍가 어쩐가....."

유일표의 뇌리에는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눈물 탓이었는지 어머니의 말끝은 잦아들고 말았다.

"명동 가주세요, 명동."

강숙자가 시발택시에 오르며 말했다. 머지않아 이런 자유로운 만남도 끝나리라는 생각과 함께 유일표는 가슴 허전한 쓸쓸함에 젖어들고 있었다.

"술 마실 줄 알아?"

강숙자는 속삭이듯이 물었다.

"담배도 피울 줄 알아요."

"어머나 역시 일표는 매력 만점이야. 담배는 언제부터 배웠는데?"

"한 서너 달 돼요. 벼락치기로 밤샘 시험공부 하면서부터요."

"저런, 저런 불량학생. 딱 퇴학감이었네. 담뱃값이 얼마나 궁했을까."

강숙자가 웃으며 혀를 찼다.

"함께 자취하는 애가 다 댔어요. 개가 골촌데다가 나보다 형편이 낫거든요."

"어쨌든 멋져. 규율 위반하면서도 자기 할 일 다 하고, 남들보다 먼저 남자의 기본조건을 갖췄으니까."

강숙자는 명동 중에서도 제일 번화한 양장점과 양화점 길목으로 앞장 섰다.

"교복은 학교에서 지정하는 데가 있을 테니까 오늘은 구두를 맞춰. 언제 신사화 신을 일이 생길지 모르거든."

"글쎄, 그건....."

"잠깐, 잠깐, 다 알았으니까 더 말하지 말어. 또 딴소리하면 나 정말 화낼 거야."

강숙자는 아랫입술을 물며 유일표를 쏘아보았다.

"차암, 이승만 독재 닮았나....."

유일표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말았다. 대학생들의 교복 착용은 재건 국민복을 공무원은 물론 선생들까지 입게 되면서 함께 시작되었다. 그 명분은 사치 근절 검소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그건 군대식 통일을 기하는 단견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학생들 절대다수는 사치를 할 수 있는 생활적 여유가 없었다. 유일표는 쭈뼛쭈뼛하며 강숙자를 따라 휘황하게 불을 밝힌 양화점으로 들어갔다. 서울생활이 4년째지만 양화점에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명동에 있는 최고급 양화점을. 괜히 주눅 들고 얼떨떨한 기분을 떼칠 수가 없었다.

"1주일 후에 찾으러 오세요."

깔판의 종이에 발 모양새를 그리고, 줄자로 발 두께를 잰 종업원이 말했다. 유일표는 양화점을 나오면서도 팔자에 없는 맞춤 구두를 신게 된 것이 실감나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았다. 청계천 일대에서 팔고 있는 기성화에 비해 두 배 이상 비싼 맞춤 구두의 값이 잔뜩 부담스럽기만 했다. 강숙자가 뒷골목을 이리저리 돌아 찾아 들어간 곳은 술집이었다. 그런데 그곳은 보통 흔한 술집이 아니라 새로 유행하기 시작하는 맥주집이었다. 어둠침침한 붉은 조명등 아래 시끄러운 음악이 출렁거리고 있는 실내에는 여자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술 잘 마셔요?"

유일표가 의자에 몸을 부리며 물었다.

"왜애? 여자가 술 마시는 게 불만스럽다는 말툰데?"

"....."

"호오, 이제 보니 일표도 남녀차별주의자네? 어쩔 수 없지, 유치원생도 여자를 우습게 아니까. 그치만 대학생이 됐으니까 환경에서 주입된 고정관념에 빠져 있지 말고 남녀평등 문제도 차츰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야."

강숙자는 정색을 하며 말하고는,

"너무 걱정하지 마. 술고래는 아니니까. 답답하거나 속상하거나 할 때 어쩌다가 한 번씩 오는데, 맥주 두 잔 정도면 충분해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분위기를 마시는 거니까."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역시 강숙자는 맥주 두 잔째를 마시며 술기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표네 형 잘 있다고 했지? 으응. 나 요새 유일민이란 사람 가끔 생각해. 그 사람, 형편이 급하면서도 3년 전에 내 동생 가정교사를 거절한 건 아마 우리 아버지가 친일파라 그랬을 텐데, 장학사에서 찍소리 하지 않고 편히 밥 얻어먹고 있는 그 수많은 수재들에 비하면 참 장해. 나 이제 사학과 졸업반인데, 그동안 들은 풍월 가지고 생각해 보면 장학사의 머리 좋다는 것들 다 인간쓰레기야. 다들 그렇게 비겁하니까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떵떵거리고 폼 잡고 살지. 나 할 말 많고, 슬픈데 ..... 오늘 일표가 크게 위로해 줬어."

강숙자의 취기 어린 얼굴에 쓴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 저기 저 구석에 있는 사람이 누구야? 저 이상한 몸짓 하고 있는 사람 말야.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인데."

최주한이 어설프게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눈짓했다.

"어디? .....으응, 저 사람 몰라? 액션 영화에서 깡패 역으로 잘 나오는 배우잖아. 라디오 성우로도 나오고."

이상재도 서투르게 담배를 뻐끔거리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 맞다. 맞다. 맨날 박노식이 꼬붕으로 나오는 그 사람이구나. 생김은 실물이 훨씬 더 낫다 야."

", 그 정도로 해서 들리겠냐? 더 큰소리로 해."

이상재가 담배를 끄며 눈총을 쏘았다. 최주한은 움찔하면서도 흥나는 이야기를 멈출 수 없다는 듯 말을 계속했다.

"역시 액션스타로는 박노식이 당할 사람이 없어. 얼굴 야성적인 미남에다. 남자답게 큼직하면서도 딱 균형 잡힌 체구, 손가락 잘라버린 가죽 장갑을 끼고 상대방들을 이리 치고 저리 치고 하는 폼이란 참으로 통쾌하고 기막히지. 그걸 감히 누가 당하겠어."

"순진하긴. 그거 다 연기야, 연기."

"무식할 때는 입을 얌전하게 닫고 있어야 50점이라도 하는 것 모르냐? 박노식이는 진짜 복싱선수야. 고등학교 때 벌써 전남 대표선수였다 그거야. 그 사람 연기는 그냥 가짜로 하는 연기가 아니라구. 박노식은 순천사람인데, 그가 쇼단을 따라 내려오면 그때는 순천 뒤집히는 날이야.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환장하는데, 그 인기는 광주에서도 마찬가지야. 한번은 광주 충장로에서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꼼짝을 못하다가 경찰들이 와서야 풀려났는데, 그 능글맞은 것 같기도 하고 징그러운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여유 있고 정다운 그 사람 특유의 웃음을 사람들에게 보내며 사라지는데 과연 멋진 사나이더군."

"아이고, 이거 큰 실수 챘네. 같은 고향사람인 줄도 모르고. 그거, 진짜 권투선수였다는 건 금시초문이네 ."

이상재는 미안한 듯 웃음 지으며 다른 한 가지 말은 꺼내지 않았다. 최주한의 그런 열렬한 반응은 완력 쓰는 데 약한 그의 열등감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싶었다. 최주한은 대입 체력검시의 성적이 너무 나빠 하마터면 떨어질 뻔해서 맨 꼴찌로 가까스로 들어갔던 것이다.

"근데 저 사람 지금 뭐 하는 거지? 무슨 연기 연습하는 건가?"

"그런 것 같은데, 저 자꾸 들여다보는 게 방송국 대본이고, 저쪽 건너편이 KBS잖아."

"글쎄, 성우들도 진짜 배우들처럼 저렇게 손짓발짓하고 얼굴도 찡그리고 그러나?"

"아마 그래야 될걸? 방송극 들어보면 책 읽는 것 같지 않고 아주 실감나잖아 성우라는 게 말로 하는 배우라는 뜻이니까."

"근데 저 성우들도 이제 한물가게 생겼잖아. 작년 말에 텔레비전 방송국이 생겼으니 말야."

", 그거 그렇겠는데. 텔레비전 때문에 영화 다 망하게 생겼다고 영화계가 벌써부터 시끌시끌 야단이잖아."

"나야 영화업자들 사정은 잘 모르겠고, 국민들이 라디오를 반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과연 텔레비전 방송이 필요한 것인지 의문이야."

"그래, 밥술이나 먹고 사는 사람들이나 안방에 영화관 하나씩 들여다 놓는 혜택을 누리는 거지. 텔레비전 한 대 값이 쌀 열 가마 값이라니까 말야. 빈부격차의 위화감만 더욱 커지고, 정부에서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원."

이상재가 쓴 입맛을 다셨다.

", 저기 허진이 왔다."

최주한이 문 쪽을 향해 팔을 흔들며 웃었다.

"일표는 어떻게 됐어?"

허진은 가까운 거리의 이상재와 먼저 악수를 나누며 다급하게 물었다.

"글쎄, 아무리 알아봐도 알 수가 없어."

이상재는 얼굴에 금세 그늘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게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야. 무슨 큰 문제가 아니고서야 우리한테까지 그렇게 소식을 끊을 수가 있나?"

최주한이 긴 한숨을 토해냈다.

"비관 자살 아닐까?"

"아니, ?"

"그럴 이유가 뭔데?"

최주한과 이상재가 동시에 되물었다.

"아니, 느네들 일표네 딱한 가정 사정을 모르는 모양이구나? 아버지가 월북하신 거 말야."

"? 월북?."

"그게 무슨 소리야?"

이상재와 최주한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으응, 그게 말야.....느네들 셋이 내 병문안을 온 다음 며칠 뒤에 일표 혼자서 또 왔었는데, 그때 날 위로하느라고 자기네 집안 형편을 다 얘기했어. 자기는 빨갱이의 자식으로 감시당하면서 장래 희망이 아무것도 없이 사는데, 너는 독립투사 자손으로서 너무 떳떳하니까 이까짓 가난이나 병 같은 것에 마음 약하게 굴복하지 말고 힘내라며 날 위로하는 거야."

", 그렇게 대충 말하지 말고 자세하게 얘기해 봐."

최주한이 담배를 뽑으며 말했고,

"아니, 넌 중학교 동창인데도 그런 걸 몰랐어?"

이상재는 핀잔하듯 말하며 그때를 퍼뜩 떠올렸다. 바뀐 시험 제도에 대해 설명을 듣던 날 유일표가 고민했던 것은 어머니가 아픈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니까 말야, 그 일로 당하는 고통이 우리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데 말이지..... "

허진은 유일표의 이야기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이제 별다른 병색은 보이지 않았다.

".....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그 일 때문에 또 무슨 사태가 벌어진 것 같은데....."

허진이 이상재와 최주한에게,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눈으로 묻고 있었다.

"일표가 그런 고통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철학과를 가다니 참 기막히구나. 그나저나 네 말이 맞는 것 같은데 어떻게 찾지?"

이상재가 침울하게 말했고,

"그래, 우리 눈치가 정확했어. 작년 5,16 직후에 일표가 아무래도 이상해서 우리가 무슨 근심이 있느냐고 자꾸 물었었잖아. 그때가 바로 형이 잡혀갔었을 때야. 근데 말야, 이번에 또 무슨 일이 생겨 경찰에서 군대 나간 형 대신 일표를 잡으려고 하니까 눈치 빠른 일표가 어디로 싹 피해버린 거 아닐까?"

최주한이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럴 수도 있는데, 어쨌거나 이 일을 어떡해야 좋지....."

허진이 근심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최주한과 이상재는 담배를 피워대고, 허진은 성냥개비를 부러뜨리며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야 허진, 그 의논할 일이란 일표가 없으면 안 되는 거냐?"

이상재가 담배를 끄며 그동안 묻어두었던 궁금증을 드러냈다.

"글쎄, 뭐 꼭 그렇지는 않은데 ..... 계획에 좀 차질이 생기기는 하지."

허진은 못내 주저하며 말했고,

"무슨 일인지 속시원하게 얘기해 봐. 우선 우리끼리 들어보자."

최주한이 의자에서 등을 떼며 다가앉았다.

", 그게 다른 게 아니고 내 입원비 보증금 빌려주신 분 있잖아. 그분이 날 도와주시겠다고 대학 갈 공부를 하라는데, 그분이 나한테 한 가지 부탁하시는 게 있어. 그분이 데리고 있는 근로재건단 단원들이 30여 명인데, 개네들한테 글을 좀 가르쳐달라는 거야."

"야학 같은 거 말이냐?"

이상재가 말을 받았다.

"그래, 바로 야학이야. 낮에는 넝마를 줍고 밤에 초등반, 중등반으로 나눠 두세 시간씩 가르쳐주기를 바래. 그런데 말야, 초등반에 국어, 산수, 중등반에 국어, 수학, 영어를 가르치려면 선생을 아무리 적게 잡아도 넷은 필요하잖아."

"그건 그렇지. 그런데 좀 미안한 말이지만 그분은 널 어떻게 도와줄 건데 그런 요구를 하는지 알면 안 될까?"

최주한이 말틈을 비집고 들었다.

", 검정고시 공부를 하는 동안에는 책값과 생활비를 대주고, 대학에 가게 되면 학비와 생활비를 대주실 모양이야. 확실하게 한 말은 아니고 대충 그래."

"그거 아주 호조건이다. 가난하고 불쌍한 애들을 위해서 대학생들이 야학에 그냥 봉사활동도 하는 판인데 널 그렇게 도와준다면 우리가 당장 나서야지."

최주한이 흔쾌하게 말했다.

"그래, 그거 정말 잘된 일이다. 일표와 소식이 닿을 때까지 우리 동창들 중에서 누구 하나를 끌어다 쓰기로 하고 빨리 시작하자. 그래야 너도 맘 편하게 공부를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이상재도 밝게 웃으며 동의했다.

"다른 사람 생각할 거 뭐 있냐. 장경식이 끌어오면 되지."

"경식이? 글쎄, 그 새끼 그거 다 좋은데 한 가지 곤란한 점이 있잖아? 그 야학의 분위기가 독특할 텐데 경식이가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을까? 개는 친일파 문제에 관해서는 언제나 생각이 삐딱하니까 말야."

". 그런 점이 없진 않은데, 경식이도 자신의 그런 점을 꽤나 괴로워하고 있어. 친일을 비판하자니 아버지한테 불효하는 것 같고, 아버지 편을 들자니 친일을 옹호하는 것 같고, 걔도 어찌 보면 참 불행한 놈이야. 우리가 경식이 입장이 됐더라도 아주 괴롭고 난처했을 거야. 이런 기회에 경식이를 끌어들여 자연스럽게 생각을 바꿀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 경식이는 그래도 홍성기하고는 다르잖아."

"으응,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긴 한데. 물론 경식이가 수치도 모르고 염치도 없이 나대는 홍성기하고야 많이 다르지 뻔뻔한 홍성기나 당당한 그의 아버지나 아주 잘 어울리는 부전자전이야."

"그래, 그 붉은 자지. 아 참, 너 그 얘기 들었어? 붉은 자지 아버지가 중앙정보부로 뽑혀 갔다는 거."

"뭐라고? 그 악질 고등계 형사가 중앙정보부로 뽑혀가? 아주 승승장구 출세로구나. 말끝마다 그저 혁명, 혁명 해대면서 잘하는 짓들이다."

", , 말조심해. 혁명정부 욕하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아주 혼쭐났다는 소문들 듣지도 못했어?"

허진이 황급히 말하며 주위를 살폈다.

"붉은 자지 그런 게 법대를 갔으니, 그게 판검사 되면 사람 여럿 잡을 텐데 말야."

이상재가 언짢은 얼굴로 혀를 찼고,

"그놈이 서울 법대 못 들어간 게 천만다행이지. 그놈 대가리나 불량기로는 고등고시 안 돼. 고등고시가 나이롱 뽕인가?"

최주한이 노골적으로 험담을 했다. 나이롱 뽕은 새로 퍼지고 있는 화투놀이의 한가지였다.

"아니, 꼭 그렇지도 않아. 걔네 아버지의 최대 소망이 아들을 판검사 만드는 거라는데, 붉은 자지가 말이지, 즈네 아버지가 평생 형사질하며 판검사들 앞에서 빌빌 기죽어 살아온 심정을 이해하고 마음 독하게 먹으면 고등고시 패스 못할 것도 없다구. 사실 고등고시가 뭐 별거냐? 우리 정도 머리 플라스 집중적 노력이면 되는 거잖아."

"그래, 홍성기 걔 함부로 보면 안 돼. 중학교 때 나하고 한 반이었는데, 거칠기도 하고 독기도 있고 아주 묘해. 수학시험을 50점 맞고 선생님한테 야단을 맞으면 다음 시험에서는 100점을 맞기도 해."

허진이 무언가 생각 깊은 얼굴로 말했다.

"맞어, 주먹 쓰기도 좋아하고, 붉은 자지 그게 아주 괴물이야."

최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필 '성기'인 그의 이름은 짓궂은 아이들 사이에서 '자지'로 변했고, 거기에다 성이 합해져 '붉은 자지'로 별명이 굳어지고 말았다.

"그럼 야학은 어디서 하는 거지?"

이상재는 남아 있는 커피를 마셨다.

", 거기 근로재건단 합숙소. 여럿이 쓰는 방들이니까 바로 교실을 겸용할 수 있대."

"시작은 언제부터고?"

최주한이 담배를 끄며 물었다.

"그분은 빨리 시작하기를 바라는데 어쩌면 좋지?"

허진이 둘의 눈치를 살폈다.

"그럼 이러고 있지 말고 장경식이를 찾아가자 허진이 너 공부가 급한데 ."

이상재의 말에 그들은 함께 일어났다.

"그 단장은 유식하냐?"

"아니, 학교 못 다녔대. 독학으로 겨우 읽고 쓴다고 하더라."

 

 

41. 까마귀떼

"여보오오, 당신은 언제 소령 달우우?"

화장 짙게 한 한정임은 군복을 갈아입고 있는 남편 앞으로 바짝 다가서며 말을 걸었다. 그런데 그 목소리에는 애교 부리는 콧소리가 지나쳐 '여보오오' 하고 휘어져 감기는 소리가 '여보오옹'으로 들릴 지경이었고, 눈이 감길 듯 사르르 간드러지는 눈웃음으로 금방 남자를 녹일 듯한 이상야릇한 빛이 번져나고 있었다.

"으흥, 소령은 무슨 소령. 대위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양용석은 익숙한 솜씨로 군복의 단추를 잠그며 아내의 애교에 화답하듯 눈을 흘겼다.

"어머, 무슨 소리예요. 박정희 장군은 서너 달 간격으로 별 셋, 별 넷 막 달았잖아요."

"아니 당신, 그런 소리!"

양용석은 소스라쳤다. 꼭 거짓말처럼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하게 굳어졌다.

"어머나 여보, 농담이에요, 농담!"

당황한 한정임은 울상이 되면서 남편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당신 말야, 꿈에라도, 정말 꿈에라도 어디서 그따위 농담해선 안 돼. 그런 걸 누가 만약 앙심먹고 수사기관에 밀고해 버리면 어떻게 되지? 그땐 가차 없이 요거야!"

양용석은 손가락 다섯 개를 쭉 펴서 '가차 없이 요거야!'에 맞추어 목 치는 시늉을 했고, 놀란 한정임은 두 손으로 자기 목을 감싸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요새 말야, 민정이양을 안 할 거라느니, 군대로 돌아가지 않고 무슨 방법으로든 정권을 계속 잡을 거라느니, 온갖 유언비어들이 부쩍 심하게 퍼지고 있는 판인데 특히 말조심해야 해. 특히 당신은 그냥 대위의 마누라가 아니지 않느냔 말야. 군대에서 말하는 시범쪼 알지? 자칫 잘못 걸리면 큰일 나니까 특히 조심하라구. 알겠어!"

양용석은 말끝마다 '특히'를 반복해서 강조해 대고 있었다.

"네에 잘못했어요. 여보, 정말 조심할게요. 미안해요."

한정임은 곧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울먹거렸다. 그건 꼭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작전만이 아니었다.

", 됐어, 됐어. 이번 정정법 발동으로 피해를 보게 된 구 정치인들이 불만을 갖게 되고, 그 부하들까지 불평불만을 하게 돼 요새 세상이 뒤숭숭하잖아. 이런 땐 그저 입 조심이 최고야. 우리 회사에도 입 잘못 놀려 잡혀온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양용석은 아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네 알았어요. 걱정 마세요."

한정임은 남편에게 한 건 부탁하려던 마음을 접었다. 괜한 농담을 했다가 어젯밤부터 특별히 공들여 온 게 물거품이 되어 여간 아쉽지 않았다. 한정임은 남편을 배웅하고 돌아서며 정정법과 오빠를 생각했다. 혁명 정부에서는 정치활동정화법을 공포하고 뒤따라 그 해당자들을 발표했다. 그 수가 4천 명이 넘었고, 다만 몇 개월이나마 국회의원을 했던 오빠가 낀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사람들은 6년씩이나 정치활동을 금지당할 위기에 처했는데도 오빠한테서는 전화 한 번 걸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딴 국회의원들이 연줄, 연줄을 찾아 만나자거니 찾아오겠다느니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오늘 부탁하려고 했던 것은 폭력사건이었다. 여고 동창생이 부탁해 온 것인데, 뒤로 내민 것이 엄청났다. 경찰에서 조사를 받고 있으니 재판에 넘어가지 않고 풀려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중정은 한마디로 이 나라 모든 수사기관들의 왕이었고, 간첩사건이나 반혁명사건만이 아니라면 중정 요원들의 입김이 얼마나 신속하고 큰 효과를 나타내는지 한정임은 이미 몇 번의 경험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한정임은 서둘러 외출복을 갈아입었다. 미장원에 들러 마사지에 고데까지 하려면 시간이 많이 남은 것이 아니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집을 나서는 한정임은 남편의 거취에 대한 자신의 판단에 또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오빠의 의견과 남편의 생각을 절충해 예편하지 않고 자리를 옮기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한정임은 마사지를 하라고 얼굴을 맡기고 편하게 누웠다. 똑같이 눕는데도 마사지를 하려고 누울 때가 가장 편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마사지를 받고 있노라면 몸만 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편안해지는 것이었다.

"저어..... 화장품 떨어질 때 되지 않으셨어요?"

콜드크림 듬뿍 바른 얼굴을 문지르며 미용사가 속삭였다.

"어머, 미제가 나왔어요?"

한정임은 감고 있던 눈을 반짝 뜨며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동시에 상체까지 일으키려고 했다.

"아이 손님도, 남들 들으면 어쩌실려고..... 단골 아니면 입도 뻥끗 안 하는 것 잘 아시잖아요."

미용사는 한정임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더 낮게 속삭였다.

"어머, 미안해요. 내가 맘이 너무 급해서 그만. 실은 콜드크림은 진작 떨어졌고, 파운데이션은 간당간당한 형편이거든요. 루주도 파서 쓰는 형편이구요. 어떻게, 좀 넉넉하게 나왔나요?"

한정임은 그만 제물에 마음이 동해 속을 다 내보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겨를이 없었다.

"그게 글쎄 단속이 워낙 심하니까 넉넉할 때가 어디 있나요. 늘 감질나게 찔금찔끔이지요. 단골들한테도 다 돌아가지 못할 형편이라니까요."

미용사는 여유만만하게 낚싯줄을 당기고 있었다.

"맞아요, 그게 그럴 거예요. 나 얼마 전에 남대문 도깨비시장에 나가봤는데, 물건도 없이 파리 날리고 있는 게 다들 망한 꼴이드라구요. 화장품을 눈치 보며 내놓기는 하는데 영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동대문이고 남대문이고, 시장 것은 태반이 홍콩이나 마카오제 가짜라는데."

"어머 손님, 그거 맞는 말씀이라구요. 외제품 단속이 심해진 다음부터 가짜 화장품들이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는데 글쎄, 그것 잘못 사 써서 피부 거칠어지고 주름살 생기고 하는 건 약과라구요. 어떤 사람들은 글쎄 얼굴이 붓고 두드러기가 나고 해서 피부병원 신세를 지기도 한다니까요. 그건 차라리 안 쓰느니만 못하지요."

"그렇구말구요. 보약 먹으려다 사약 먹는 격이지요. 근데 말예요. 그럴 리가 없겠지만 여기서도 깜빡 속을 수가 있어서 그러는데, 여기 건 진짜 믿을 수 있나요?"

"어머,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가 너무 서운하지요. 가짜 취급했다가 단골손님들 피해 입으면 미용실 문 닫게요? 우린 딱 PX 물건 아니면 절대 손 안 대요. 그건 우리가 이문 보는 건 아무것도 없고 단골손님 잘 모시려는 싸아비스잖아요, 싸아비스."

"그럼요, 그렇겠지요. 근데 단속을 그리 하는데도 PX에서 어떻게 물건들이 용케 나오기는 나오는 모양이지요?"

"그럼요, 다 사람 사는 세상인데요 거 있잖아요, 열 사람이 한 도둑 못 지킨다는 말. 미군들 있고 양공주들 있는 한 외제품 못 막아요. 단속을 하니까 물건들은 밑으로 숨고, 쓸 사람들은 뒤로 다 쓰고, 그러니까 물건 값만 세상모르고 치솟아 오르지요."

"별 수 없지요. 이따가 하나씩 챙겨주세요."

한정임은 이렇게 말하면서 더없이 가슴 뿌듯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일류미용실에서 마사지를 하고, 미제 화장품을 맘 놓고 척척 쓸 수 있는 팔자가 되리라고는 강원도 산골에서 셋방살이를 할 때는 상상도 못했었다. 이러한 호강은 남편의 소속을 서울로 옮겼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다시 자리를 옮기면서 가능해진 일이었다. 한정임은 순간순간 혁명의 고마움을 진정 가슴 떨리게 느끼고 있었다.

한정임은 고데에다, 금방 마사지한 피부가 안 상하도록 화장은 살짝 하고 나서 공주나 귀부인이 된 것 같은 달뜬 기분으로 미장원을 나섰다. 동창들과 약속한 소공동의 그릴까지는 걸어가기 알맞은 거리였다. 거리에는 4월의 햇살이 눈부시고, 가로수에는 새 잎들이 파릇파릇 피어나고 있었다. 한정임은 별을 단 남편을 상상하며 숨을 한껏 들이켰다. 2층의 '빠리 그릴'에는 서너 명의 동창들이 먼저 와 있었다.

"어머 얘 정임아, 넌 어쩜 갈수록 더 예뻐지니?"

"그러게 말야, 기집애 무슨 비결이 있는 거니? 사람 샘 나게시리."

"비결이야 확실하지. 남편 잘 만난 거."

그들은 왁자하게 한정임을 맞이했다.

"얘들아 이렇게 막 떠들어도 되는 거니? 이거 영....."

한정임이 얼굴을 약간 찌푸리며 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 그런 염려는 집에 놓고 다녀도 돼. 여긴 싸구려 중국집 칸막이 방이 아니라 프라이버시를 제일 중시하는 일류급 양식집이야. 우리가 왜 하필 이 집을 골랐는데? 안심하고 웃고 떠들 수 있어얄 것 아니니."

"맞아, 그게 바로 이 집의 프라이드야. 그리고 손님 끄는 상술이고."

"그야 오브코우스 하고도 물론이지. 그까짓 음식이야 맨날 먹는 거구, 우리가 만나는 건 인생을 해피하게 엔조이하자는 거니까 분위기가 좋아야지 ."

그 여자들의 입에 오르고 있는 꼬부랑말은 그들이 대학물을 먹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미국바람을 일으키는 데는 배운 사람들일수록 심했고, 여자들끼리는 경쟁이라도 하듯 한층 더했다. 곧 예약된 아흡 자리가 다 찼다. 그들은 비프스테이크부터 시켰다.

"무슨 소리야, 촌스럽게시리. 와인이야 기본 코스 중에 하나지."

"맞아, 투피스 입었으면 하이힐 신어야지 고무신 신고 있으면 말이 돼? 레드냐 화이트냐만 정해, 어서."

"대낮인데 술이 괜찮을까?"

"증말 얘 유치해서 상대 못하겠네. 와인이 술은 무슨 술이야. 비어나 마찬가지로 음료수 중에 하나지."

"얼굴 좀 빨개져도 괜찮아. 식사 끝나고 디저트 먹고 커피 마시고 하면서 얘기하는 동안에 알콜 기운 다 가셔."

그들은 하나같이 파마머리에 양장차림이었고, 입술들이 새빨갛도록 진한 화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울에서도 일류급에 드는 '양식 멋쟁이'들이었다. 시골은 여자들 거의가 다 낭자머리에 한복차림이었지만 서울은 절반이 넘게 파마와 양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급속도로 이루어지고 있는 그 변화에 따라 서울에서는 미장원과 양장점들이 날로 번창해 가고 있었다. 그 변화의 바람은 큰 도시에서 작은 도시로 차츰 불어가고 있었다.

"우리 동창들끼리 이렇게 모여 앉으니 정말 오붓한 게 너무나 좋다."

"그럼, 그럼. 두말하면 잔소리지. 까마귀도 제 땅 까마귀라는데 더 말해 뭘 해. 다시 못 올 청춘 시절 4년을 지지고 볶고 지낸 그 세월이야말로 평생을 가는 인연이지."

", 그렇구말구. 졸업식 때 총장님께서 동창, 동문의 인연은 부모 형제 다음가는 인연이니 평생 소중하게 간직하라고 하셨잖아. 살아갈수록 그 말씀이 새록새록 명언으로 느껴져."

"어디 그 말씀만 하셨니?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여자의 역할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직접 사회에 진출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남편들이 사회적으로 큰일을 하는 인물이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라는 것이었잖아. 그 말씀 역시 명언이시잖니?"

"그럼, 명언 중에 명언이지. 근데 말야, 나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어. 우리 대학 졸업생들이 그동안에 입법, 사법, 행정부의 핵심 실력자들의 아내로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해 왔다고 동창회에서 말했잖아?"

"아니, 동쪽에서 해 뜨는 걸 의심하지 너 그걸 의심하니?"

"어머, 너 잘났다! 왜 남의 말을 중간에서 치고 들어오고 그러니? 김 팍 새게."

"어머, 익스큐스 미다 얘."

"그러니까 말야, 그 말은 틀림없이 믿는데, 그렇다면 혁명 이후로 서리 맞고 찬밥 신세 된 사람들도 그만큼 많지 않겠어? 그건 우리들 백 그라운드가 그만큼 약해진 건데, 내 의문이 뭐냐면 말야, 고급 장교들의 아내도 우리 대학 출신들이 가장 많다는 말이 있긴 한데, 그게 사실이냐 아니냐 그거야."

"어머머, 그것 참 중대한 문제다 얘. 그것 좀 속 시원히 알았으면 좋겠다. "

"그래, 동창회에서 발 벗고 나서서 알아보라고 아이디어를 제공하면 어떨까?"

"괜히 헛수고들 안 하시는 게 좋을 걸? 그동안 세상살이들 좀 해봤으니까 알겠지만, 공무원 사회에서 급수냐, 직책이냐, 어떤 게 더 낫지?"

"두말하면 뭘 해. 그야 당연히 직책이지."

"잘 아네. 군대에서도 직책은 계급에 우선한다! 이 철칙을 몰라? 전방에 영관급 마누라들 100명 있으면 뭘 해. 중정 하사관사모님 한 명 못 당하는데. 언더스탠드?"

"맞아, 맞아. 완투가 해브 예스야."

"그러니 대위 사모님이야!"

그들은 고깃덩어리를 자르고, 씹고, 포도주를 마시고 하면서 쉴 새 없이 입들을 놀리고 있었다.

"얘 난숙아, 식사 다 끝났으니까 커피 마시면서 회장으로서 한마디 해야 되지 않겠니?"

", 그래야지. 저어, 우리 여덟 사람은 이미 아는 거고, 정임이한테 간단하게 말할게. 우리 구미회(아홉 미녀들의 모임이라는 뜻)의 매월 모임을 뜻 깊게 하고, 서로 상부상조하고, 요직에 있는 느네 낭군이 맡은 바 중임을 당당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우리들의 작은 뜻을 모으기로 했어. 그게 뭐냐면, 우리 여덟이서 매월 30만원짜리 계를 세 꾸찌씩 부러서 24개월을 만기로 했어. 액수를 더 키울 수도 있었지만 네가 부담스러워 할까 봐 우선 이렇게 한 거야."

"..... 뭐라구? 그게 무슨 소리야?"

한정임은 당황해서 동창들을 둘러보았다.

"무슨 소리긴 다 알면서."

"그까짓 걸 가지고 뭘 놀라고 그래?"

"싫어, 싫어, 나 싫어. 느네들 미쳤니? 어쩔려고 이런 일을 ....."

한정임은 고개를 마구 흔들며, 매달 30만 원이면 1년이면 360만 원, 2년이면 ..... 그 거액에 가위눌리며 제각기 웃고 있는 동창들이 무서워지고 있었다. 그들의 남편은 공무원도 있었고, 판검사도 있었고, 사업가도 있었다. 30만 원은 남편의 1년치 월급보다 많았다.

 

교정의 한가로움에 비해 총학생회실의 분위기는 심각했다. 담배연기 자욱한 속에서 열띤 의견들이 오가고 있었다.

"문제는 이번의 양주 린치사건이 지난 5월에 발생한 파주의 린치사건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달수로 한 달차이이지 날 수로는 보름이 못 되는 사이에 린치사건이 연달아 자행되고 있다는 것은 미군들의 안하무인의 만행인 동시에 우리나라 정부의 무대책과 국민들의 무관심한 방관 때문인 것입니다. 이 치욕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우리 대학생들이 나서지 않으면 누가 나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6.25 참전 16개국 중에서 아직도 태국 군과 터키 군과 미군들이 주둔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미군들의 횡포는 너무나 심합니다. 최근 2년 동안에만 해도 린치사건이 대여섯 건이 넘었습니다. 신문에 난 것만 이런데 신문에 나지 않고 덮인 것들까지 다 합하면 그 수가 얼마이겠습니까.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문제를 묵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 미군들의 린치사건은 우리 국민 전체를 모독하는 행위이고,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는 만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문제를 묵과해서도 안 되고, 방관해서도 안 되는 건 분명한데, 우리 앞에 가로놓인 큰 난관이 문제입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미국이나 미군 문제로 항의를 하거나 데모를 하게 되면 그 이유는 불문하고 무조건 반미로 몰고, 반미는 곧 용공으로 둔갑하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쿠데타 이후 미국과의 관계를 우방으로는 모자라 혈맹이라고 강조해 대고 있는 상황에서 이 난관을 어떻게 피하면서 우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 문제 아니겠습니까? 무슨 묘안이 없을까요7"

", 그 견해는 백 번 옳습니다. 그러나 반공을 국시의 첫 번째로 삼고 있는 한 그 그물을 무사히 피해갈 수 있는 묘책이나 묘안은 아마 없지 않을까요. 우리의 주장이 옳고 명분이 당당하면 정면으로 밀고 나가는 길밖에 없을 것입니다. 모든 저항과 투쟁에는 억압이 따르게 마련이고, 거기서 야기되는 고통과 상처는 오히려 더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그 교훈은 4.19혁명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4.19정신으로 재무장하고 투쟁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 좋은 의견입니다. 그러나 지금 국민감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정면으로 밀어 붙였다간 자칫 잘못하면 '양키 고 홈'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북에서 내세우고 있는 미군 철수와 맞아떨어지게 되어 수사기관에서 기다리고 있는 함정에 영락없이 빠지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그런 행위는 결코 용기가 아니라 무모함이나 어리석음일 것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방법론에 대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 좋습니다. 이 시점에서 안건의 혼선을 피하기 위하여 정리하고, 순서대로 표결을 해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미군 린치사건에 대해 항의데모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여부, 또 하나는 어떤 방법으로 행동화해야 정치적 오해나 누명을 피하면서 최대한의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두 가지 안건이 나와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집단항의에 나설 것인가의 가부를 묻겠습니다. 찬성하시는 분 거수해 주십시오."

의장의 물음에 여덟 명 전원이 팔을 뻗쳐 올렸다. 그들은 단과대학 학생대표들이 었다.

", 만장일치로 우리 대학 학우 전체가 항의데모를 감행키로 가결되었습니다. 그럼, 두 번째 안건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이나 묘안들을 지금부터 기탄없이 내주시기 바랍니다. "

회의장이 갑자기 조용해지면서 여기저기서 담배연기가 진하게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담배를 빡빡 빨아대는 그들의 얼굴은 심각하게 찡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침묵은 깨지지 않고 시간의 두께만 더해가고 있었다.

"어떻게, 묘안들이 잘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럼 선배님들의 고견을 좀 들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좋습니다."

", 그렇게 합시다."

"저어, 선배님들께서 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죄송합니다."

의장이 몸을 반쯤 일으키며 뒤쪽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그 뒤쪽에는 두 사람이 회의석과 늘 동떨어진 자리를 만들어 앉아 있었다. 그중의 한사람은 원병균이었고, 그 옆의 사람은 중국집 모임에 나왔던 얼굴이었다.

"에에 ..... 지금 여러분이 봉착해 있는 문제가 통일운동에 있어서나 미국과의 문제에 있어서나 가장 까다롭고 어려운 점일 것입니다. 아까 여러분들이 개진했던 의견들은 다 옳고 현명한 판단입니다. 우리는 학생운동을 전개하되 그 어떤 경우에도 용공으로 몰리거나 빨갱이로 몰려서는 안 됩니다. 그건 반공 기득권 세력들이 사용하는 가장 성능 좋은 백전백승의 무기이고, 이쪽에서는 치명상을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번 미군 린치사건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한국과 미국 두 나라 사이에 미군들의 각종 범죄행위를 규제하고 심판할 수 있는 법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건 창경원의 야수들을 서울 시내에다 그대로 풀어놓은 것과 마찬가지로 끔찍스러운 일입니다. 그 법, 이미 이름은 정해져 있는 한미행정협정을 너무 늦었지만 지금부터 하루라도 빨리 체결하라고 촉구하는 것을 명분으로 내걸고, 비폭력 평화시위를 하되, 대대적으로,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겁니다. 물론 한국 국민은 한미 우호를 바라며, 한미 우호를 돈독히 하는 첩경이 한미행정협정의 시급한 체결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설득력 있게 요령껏 잘 작성해야지요. 그럼 용공으로 몰리는 것을 피하면서, 국민적 호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원병균의 말은 진지하고 침착했다. 그들은 더 이상 다른 의견을 내놓지 않고 원병균의 말을 그대로 안건으로 채택해 통과시켰다. 그리고, 다른 대학과의 연대를 위해 데모 준비는 완료하되 날짜는 유동적으로 해두었다.

"어디 가서 차나 한잔하지."

원병균이 일어서며 옆자리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좋은데, 차보다는 왕대포 한잔이 어떤가?"

"또 민경섭의 풍류 나온다. 아무거나 좋으니까 어서 나가자구."

둘이는 후배들에게 손 인사를 남기고 회의실을 나섰다.

"박 형은 왜 안 보이지? 바쁜가?"

민경섭이 담배를 빼들며 물었다.

"글쎄, 앞으로 이런 자리에서 박준서 보기 어려울 걸."

"아니, 무슨 일 생겼어?"

민경섭은 라이터로 불을 켜려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 무슨 일이 생기긴 생겼지. 어서 걸어, 술이 기다리는데."

"누구누구처럼 마음이 변한 건가?"

"그건 아니구, 가서 자리 잡고 얘기하자구. 얘기가 좀 길어."

원병균은 손가락 두 개로 담배를 달라는 표시를 했다. 민경섭은 원병근에게 담뱃갑을 건네며 중얼거렸다.

"결과가 학생운동에서 떠나는 거라면 얘기가 길든 짧든 그게 그거지 뭐. 그거 참 서운한데. 박 형은 아주 든든한 동지였는데."

그들은 말없이 담배만 피우며 교정을 가로질렀다. 해질녘인데도 6월 초순의 더위는 벌써 땀기운을 느끼게 했다. 여름은 나무마다 무성해지고 있는 잎들의 그 찬란한 푸르름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원병균과 민경섭은 왕대포 잔에 남실남실 따른 막걸리를 단숨에 비웠다. 쌀이 부족해 정부와 재건국민운동 본부에서 혼분식을 장려하다 못해 감독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 막걸리는 이미 예전의 막걸리가 아니었다. 쌀이란 한 톨도 들어가지 않고 '밀가루 막걸리'라고 소문나 있었다. 그래도 그런대로 막걸리 맛은 났고, 마시면 틀림없이 취했다.

"뭐 긴 얘기 시시콜콜 다 할 것 없고. 결론적으로 줄여서 말하자면 말야, 아버지가 학비를 완전히 끊어버리고, 당신네 회사에 취직을 시켰어."

"오라, 그럴 거라는 말은 진작 있었잖아? 결국 아버지가 승리의 깃발을 올리셨군. 별 수 없지. 생산 능력 없는 자 앞에서 돈처럼 막강한 무기는 없으니까."

"아버지의 힘 앞에 굴복하긴 했는데, 사학과를 나와 가지고 건설회사에서 어떻게 견디어 나갈지 박준서가 참 딱해."

원병균이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말하긴 좀 뭐하지만, 그 아버지가 돈만 좀 있고, 무식하기는 이를 데 없으면서, 반공주의는 무조건 최고로 신봉하는 속물족 아니야?"

"귀신이네."

원병균은 픽 웃음을 흘리고는

"근데 그분이 그렇게 한 것은 아들을 운동과 차단시키려고 그런 것만이 아니야. 세상의 변화에 맞추어 회사조직을 강화하는 데 박준서의 힘도 필요했던 거야"

하며 술잔을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거 지난 1월에 발표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있잖아. 그걸 사업가인 박준서의 아버지는 큰 기회가 온 것으로 받아들인 거야."

", 사업가로서 눈치 빠른 건 좋은데, 그게 정말 계획대로 추진된다는 보장이 어딨어. 5개년 계획이고 국토건설단 창설이고 다 장면정권에서 계획했던 것이고, 더구나 떡이 있어야 굿을 할 텐데 돈은 어디 있고, 군인들이 뭘 또 알아야 말이지. 벌써 말들이 많잖아."

"글쎄 문제가 없는 건 아닌데 경제학 교수 얘기 들어보니까 꼭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야. 케네디가 장기적 경제발전을 위해 원조정책을 현금 차관으로 바꾸었고, , 일 회담에서 보상금을 받을 것이고, 독일 같은 데서 차관을 얻게 되면 자금문제는 해결되고, 거기다가 부정부패 없이 군대식 조직력과 추진력으로 밀어대면 뜻밖에 잘될 수도 있다는 거야."

원병균의 말은 그저 무덤덤했다.

 

 

42. 거기도 지옥

"이봐 윤 씨, 일어나 한술 떠."

", 이따가..... 이따가....."

자리에 누운 남자가 눈을 감은 채 들릴 듯 말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따가는 언제 이따가 찬도 읎는 밥 다 묵을 때 항꾼에 한술 떠야제 이따가 혼자서 무신 맛으로 묵어지겄어. 자아, 기운 채리고 일어나드라고."

천두만이 그 남자를 일으키려고 했다.

"아니 ..... 아니 ..... 나 비위가상하고..... 토해칠라고 하니까 괜찮아, 이따가..... 이따가....."

눈을 뜬 그 남자는 손을 저어댔다. 눈을 뜨자 그의 마르고 색깔 나쁜 얼굴은 더욱 병색 짙어 보였다. 퀭한 눈에 눈동자가 힘없이 풀려 있는 탓인지도 몰랐다.

"토해질라고 해? 이거 병원에 가봐야 되는 것 아닌가?"

"글씨 말이시. 몸살치고는 아조 되게 앓는 심이기는 헌디."

"이거 몸살이 아닌지도 몰라. 오늘이 나흘짼데 자꾸 더 심해지잖아?"

밥상에 둘러앉은 세 남자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니야..... 내 병 내가 다 알아. 곧 일어날 거니까..... 내 걱정 말고..... 어서들 먹고 일 나가..... ."

그 남자는 힘겨웁게 말하고는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힘들다는 듯 도로 눈을 감았다.

"우리 겉은 신세 몸떵이 하나 믿고 사는디 워찌 저런지 몰르겄네. 워째야 쓰까 이."

천두만이 낮게 혀를 차며 숟가락을 들었다. 다른 두 사람도 근심스런 얼굴로 밥을 떴다. 그들의 남루한 입성처럼 밥상에는 가난이 흐르고 있었다. 반찬이라고는 덤불김치 한 가지뿐인데 밥은 그릇마다 푸짐하게 담겨 있었다. 쌀을 찾기 어려울 지경인 보리밥은 그릇에 담긴 것보다는 위로 솟긴 것이 더 많아 보일 정도였다. 부두노동을 해야 하는 그들은 그 고봉의 밥을 금세 먹어치웠다.

"윤 씨, 밥 꼭 먹어야 해."

"윤 씨, 밥이 보약인 거 알제? 처자석 생각혀서 억지로 묵어야 써."

"그렇지 그럼. 처자식들이 우리만 바라보고 있잖아 기운 내."

그들은 누더기나 다름없는 짐받이를 하나씩 들고 집을 나섰다. 짐을 어깨에 질 때 받치는 그것은 깁고 기워 입다가 못쓰게 된 헌옷으로 만든 것이었다.

"병원이든 약국이든 돈이 있어야 가지. 몸이 아파도 그저 누워서 낫기를 기다려야 하는 팔자들이니 원."

"그러게 아프지를 말아야 하는데, 그게 어디 뜻대로 돼야 말이지."

"워디 병이 안 나게 생겼간디. 니나 나나 묵는 것은 부실허제, 날이 날마동 일은 뼛골 빠지게 심들제, 모다 골병 든 몸덜 아니라고. 언제꺼정 이러고 살아질란지 원."

그들의 말은 시름겨웠다. 천두만은 네댓 달 전에 자신이 앓았던 몸살을 생각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이 없었고, 전신 마디마디가 아프지 않은 데가 없었고, 머리카락까지 들뜨고 욱씬거리는 것 같은 지독한 몸살이었다. 날이 바뀌는 줄도 몰랐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흘이 지나 있었다. 그때 자신도 병원이나 약국에 가지 않았다. 돈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병원이나 약국에 갖다 바칠 돈이 아니었다. 병이 나도 병원에 가지 않는 것이 그를 부두노동자들의 처지였다.

"오늘은 일거리가 뭐지? 설마 또 쎄멘트는 아니겠지."

"어이 , 징허게 그런 소리 말어. 어지께 그 뿌연헌 먼지 숨맥히게 마신 것도 정떨어지는디."

"오늘은 어떻게 좀 '재수가 땡'하지 않을래나. 쌀이 바닥날 때라 어디서 쌀이 들어올 것도 같은데."

그들은 부두로 들어서며 오늘의 일거리를 점치고 있었다. 그건 부두노동자들이 매일 아침 지치지도 않고 신경 쓰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배에 싣고 내리는 물건에 따라 일하기의 쉽고 어려움이 크게 달라지는 탓이었다. 어제처럼 시멘트를 운반하게 되면 뿌연 돌가루 먼지를 숨이 막히도록 들이마셔야 하고 온몸에 뒤집어써야만 했다. 그렇다고 돈을 더 많이 받는 것도 아니었다. 시멘트 먼지를 하루 종일 들이마시다 보면 목이 칼칼하다 못해 콕콕 쑤시면서 아렸다. 그리고 그 먼지를 온몸에 뒤집어쓰다 보면 전신이 가렵고 따끔거렸다. 그러나 돈 내고 목욕을 할 수 없으니까 적당히 털어내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온몸의 근질거림과 스멀거림은 며칠을 갔다. 시멘트와 똑같이 고역스러운 작업이 비료 운반이었다. 비료 포대에서도 뿌연 먼지가 일어나 사람을 못살게 굴었다. 노동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양곡 운반이었다. 그중에서도 쌀이 단연 인기였다. 운반을 하는 동안 눈치껏 쌀을 입에 몰아넣어 생쌀로라도 허기를 메꿀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쌀 운반이 있는 날은 '재수가 땡'이라고 했다.

"오늘은 비료 운반이다. 농사철이 한창이라 급히 써야 하니까 빨리빨리 일을 해치우도록."

반장의 작업 지시였다.

"아이고, 사람 잡네."

"연달아 왜 이래 이거 ."

"이건 해도 너무하잖아."

여기저기서 불평이 터져 나왔다.

"입 놀리는 자가 누구야. 유감 있으면 앞으로 나와서 해 당장 '고향 앞으로' 해줄 테니까!"

반장이 눈을 부라리며 고함쳤다 노동자들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천두만은 아까부터 고개를 푹 떨구고 앉아 있었다. 무슨 일거리가 안겨지건 입을 놀릴 필요가 없었다. 이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맡겨지는 일을 꼼짝없이 할 수밖에 없었다. 반장의 한마디에 다들 고양이 앞에 쥐가 되어버리는 것은 이 일자리나마 잃을까 봐 겹이 나서였다. 반장이 늘 위세 당당한 것은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이 그의 앞에 줄을 서 있는 탓이었다.

"작업 개시 10분 전!"

반장의 외침을 따라 노동자들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천두만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또 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는 오래 있을 곳이 못 되었다. 통장의 말대로 날마다 일거리는 많았다. 그러나 층층이 상전이 많은 것이 탈이었다. 그놈의 상전 때문에 여기에 발을 붙이면서부터 돈을 뜯겨야 했다. 그 패거리들이 부당한 짓을 한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작업 개시 3분 전. 전체, 일어섯!"

반장의 구령에 따라 반원들은 일제히 일어서며 짐받이를 어깨에 걸쳤다. 천두만이 부두에 찾아들었을 때 일자리를 얻으려면 '교제비'를 써야 한다고 귀띔해 준 건 좌판을 편 막국수장사 아주머니였다.

"어쩌겠수. 일자리 구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 뒤로 교제비 안 쓰고는 어림도 없어요. 맨입으로는 되는 게 없는 세상 아니유,"

"얼매나 써야 되는디요?"

천두만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서울살이를 하면서 '기름칠'을 해야만 돌아가는 세상 이치를 모르지 않았다.

"그게 아무리 못해두 두 장은 써야지요, 아마."

아주머니는 손가락 두 개를 펴보였다.

"두 장?"

천두말은 얼른 감이 잡히지 않았다.

"2천환 말이우."

"2천환....."

천두만은 눈길을 내리깔았다. 천환도 아니고 생돈 2천환이 없어지는 건 좀 과하다 싶었다.

", 그만한 돈이 없으슈?"

"그걸 누구헌테 믹여야 허요? 헛방구가 안 돼얄 것잉께로."

"그야 걱정 마세요. 내가 잘 아는 반장한테 줄을 대줄 수가 있어요."

"믿어도 되겄소?"

"그럼요. 교제비를 미리 주는 게 아니라 반장이 일할 사람을 만나보고, 일 잘하겠다고 점찍으면 돈은 일 나가는 날 주는 거니까요."

"점찍어요?"

"아 예, 힘을 잘 쓰게 생겼나 어쩌나 보는 거지요. 유식한 말로 면접 보는 거 있잖우. 날마다 기운 쓰는 일인데 몸이 실해야 하잖아요. 아무리 교제비가 있어도 약골은 못 뽑혀요. 아저씨는 그럴 걱정 없으니 잘됐네요."

"나 하로가 급헝께 얼렁 소개혀 줏씨요."

"그런데 .....그게....."

그 아주머니는 무슨 말인가를 입에 담고 실실 웃었다.

"워째, 무신 헐 말 더 있으씨요?"

"그거 있잖아요, 방 소개할 때 복덕방에 주는 거."

"복덕방에 주는 거?"

천두만은 어리둥절했다.

"소개비 모르세요, 소개비?"

아주머니가 답답하다는 듯 말을 해버렸다.

", 아짐씨헌테 소개비 내놓으라고라? 디려야제. 얼매요?"

천두만은 어이없어하면서도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흔쾌한 척 말했다.

"많이도 말고 한 장이면 돼요."

"천환?"

천두만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아저씨가 막차 타고 어젯밤에 서울역에 내리셨나? 아무리 인심 사나운 세상이라지만 그리 비싼 소개비가 어딨어요. 100환 한 장 말하는 거지요."

아주머니가 머릿수건을 만지며 비식 웃었다.

"이것도 한 장, 저것도 한 장 헝께 촌놈이 워디 땅짐을 허겄소. 소개비도 자리 정해지면 디리는 것이제라?"

천두만은 선수를 치고 들었다.

", 그리 하세요."

반장을 다음날로 만났다.

"쌀 몇 가마니 질 수 있소?"

뼈대는 큰 편이었지만 노동자 티는 전혀 나지 않는 반장이 천두만을 살피며 물었다.

"두 가마니는 쉽게 지는디요."

"지게에 말고 어깨에 말이오."

"어깨에는 한 가마니 올리제라."

"여기 노동자들 중에 누구 아는 사람들 있소?"

"아무도 읎는디요."

"됐소. 하루만 기다리시오."

천두만은 반장과 헤어지고 나서도 왜 그가 노동자같지 않은지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비료 먼지를 뒤집어쓰며 배와 부두를 연결하고 있는 긴 널빤지를 타고 분주하게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비료 포대 두 개씩을 어깨에 올린 그들은 어떤 율동을 하듯이 뛰고 있었다. 대여섯 발짝씩 간격을 띄워 줄줄이 뛰고 있어서 어느 한 사람만 걸어갈 수 없는 흐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가벼운 뜀박질은 탄력 좋게 낭창낭창 춤을 추는 널빤지를 밟으면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긴 널빤지 위에는 앞서 출발한 사람이 한두 명은 있게 마련이고, 짐까지 진 그들의 뜀박질로 널빤지는 쉴 새 없이 출렁거렸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출렁거림을 잘도 타넘고 있었다. 널빤지에서 아래 바닥까지는 서너 길 높이였고, 그 바닥은 바닷물 머금은 시커먼 뻘밭이었다. 한순간 자칫 잘못하면 여지없이 곤두 박힐 판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일제시대부터 이어져온 그 상하역작업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그들의 휴식시간이란 따로 없었다. 저 멀리 있는 큰 배에서 물건들을 실어오거나 실어가는 작은 배들이 자리바꿈을 할 때 그들은 잠깐씩 주저앉아 담배를 피우거나 물을 들이켰다. 그런데 변소에 가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철을 가리지 않고 땀을 흘리는 데다 힘겨운 일로 체력 소모가 큰 탓이었다.

그런테 그들이 서글퍼지는 것은 점심시간이었다. 아침 5시부터 다섯 시간 동안 줄기차게 짐을 지고 뜀박질을 해댔으니 그들의 배는 텅텅 비어 있었다. 그들은 쇠도 녹일 만큼 허기에 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겐 배가 든든하게 먹을 돈이 없었다. 그들은 반장이나 노조 간부들이 찾아가는 어엿한 식당은 엄두도 못내고 싸구려 좌판으로 몰려갔다. 좌판에는 감자보리밥, 막국수, 돼지비계 감자 죽, 밀개떡, 고구마 같은 것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제각기 형편에 따라 좌판을 골라 앉았다. 국에 김치까지 나오는 감자보리밥이 최상품이었고, 돈이 없는 사람은 다 식어빠진 고구마 한두 개로 허기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천두만은 돼지비계 감자 죽 한 그릇을 받아들었다. 말이 돼지비계 감자 죽이었지 돼지비계는 찾기가 어려웠고, 비계에서 나온 기름기에 감자와 통밀이 섞인 죽이었다. 막국수보다 그것을 먹는 것은 묽은 비계 기름기라도 몸에 담자는 것이었고, 감자와 통밀이 속을 든든하게 해주었다. 천두만은 서울에서 지게질을 할 때와는 달리 여기 와서는 점심을 거르는 일이 없었다. 돈벌이가 좋아서가 아니었다. 지게질은 일거리를 만날 때만 쉬엄쉬엄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곳 부두일은 하루에 12시간씩 줄기차게 해대야 했다. 그런 숨 가쁜 형편에 돈 아까워 점심 배를 곯았다가는 황천길을 부르는 거나 다름없었다. 일을 하다가 맥없이 쓰러지는 사람들은 거의가 점심을 먹지 못한 탓이었다.

", , 저기 서부 활극 벌어졌네."

"그래, 영화관에 구경 못 가는데 어디 화끈하게 한판 붙어봐라."

"좋다, 좆같은 세상 조져라, 조져."

그들은 밥을 먹다 말고 저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판을 향해 목청을 높여댔다. 천두만도 천천히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두 사람이 주먹질 발길질을 해대고 있었다. 그런데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말리려는 기색 전혀 없이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게 이곳 부두의 인심이었다. 수천 명이 들끓는 부두에서는 싸움판이 벌어지지 않는 날이 없었다. 개인끼리 싸우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때는 일거리로 시비가 붙어 패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개인끼리 벌어지는 싸움은 거의가 돈 때문이었다. 벌이가 시원찮은데도 여기저기서 노름판은 성했고, 거기서 빌려주고 빚지고 한 돈이 싸움으로 이어졌다. 어쩌면 벌이가 시원찮으니까 손쉽게 돈을 몰아 잡을 욕심으로 노름판에 말려드는 지도 몰랐다. 그리고 살기가 힘들어서 그런지 어쩐지 노동자들은 사소한 일에도 걸핏하던 화를 내며 욕지거리를 했고, 그건 곧 주먹다짐으로 이어지고는 했다. 그런 거친 판에서는 기운 세고 싸움 잘하는 사람이 왕일 수밖에 없었다. 천두만은 노름 같은 것에는 아예 눈도 돌리지 않았고, 싸움도 피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맞고는 살 수 없는 일이어서 싸움하는 요령을 날로 배워가고 있었다. 싸움도 기운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었다.

"저거, 저거, 싸움하는 것들이 뭐 저래. 닭싸움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게 말야. 화끈하게 한판 붙지도 않고 벌써 지쳤나."

"그렇기도 하겠지. 점심 먹을 새도 없이 싸우기 시작했으니 지칠 만도 하지."

"아서라 말아라, 그만들 싸워라. 부자들 푼돈도 아닌 돈으로 치고 박고 해봤자 몸만 상한다. "

천두만은 뒷사람에게 자리를 내주고 일어났다. 아침밥에 비해 배는 반도 안 찼다. 그 아쉬움과 함께 고향 산천이 떠올랐다. 그리고 고향 냄새가 물큰 풍겨왔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고향이 떠오르면 꼭 냄새까지 풍겨왔다. 그런데 그 냄새는 두 번 맡으려 하면 더는 나지 않았다. 처음 풍긴 냄새는 그리도 짙고 선명했는데 왜 두 번째는 맡을 수 없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향은 더욱 그리웠다. 그리운 만큼 돌아가고 싶었다. 기름기 자르르 도는 쌀밥을 잘 익은 배추김치 쭉쭉 찢어 걸쳐 배 터지게 먹었던 그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고구마 그들먹하게 윗목에 쌓아둔 사랑방에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며 새끼를 꼬고 망태기를 짜다가 밤이 깊어지면 대숲에서 참새몰이를 한바탕하고, 참새구이와 생두부를 안주삼아 막걸리 내기 윷판을 벌리곤 했던 그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돈은 뜻대로 모아지지 않고 세월만 속절없이 흘러가며 고향하고는 자꾸 멀어지는 것 같아 고향 생각을 할 때마다 외로움이 커지면서 하염없이 눈물겨웠다. 30분의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 작업이 시작되었다. 언제나 오후 작업은 더 힘이 들었다. 오전 작업으로 기운이 빠진데다가 점심들이 부실한 까닭이었다. 그렇다고 게으름을 피울 수도 없었다.

"빨리 해, 더 빨리 ! 농땡이 까면 알지. 걸리면 국물도 없어."

그런 사정을 환히 알고 있는 반장들이 부쩍 설치고 다니며 외쳐댔다. '국물도 없다'는 그들의 말은 그저 엄포가 아니었다. 그들의 비위에 조금만 거슬려도 당장 '모가지'였다. 사람들은 줄서 있는 판이고, 새 사람이 들어오면 그들은 '교제비'를 챙길 수 있었다. 노동자들의 목숨은 그들이 휘둘러대는 지휘봉 끝에 달려 있었다. 조금만 게으름을 피워도 모가지였고, 별 이유 없이 미움을 사도 모가지였고. 기운이 좀 딸리는 것 같아도 모가지였고, 반장을 흉보았다는 엉뚱한 모략에도 모가지였다. 그러나 아무리 억울해도 따지거나 대들 수가 없었다. 반장은 혼자가 아니었고 그들 뒤에는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노조가 버티고 있었다. 200명이 넘는 반장들은 하급이긴 했지만 엄연한 노조의 간부였다.

", , 저거 누구야!"

창고를 향해 뛰고 있는 행렬 속에서 한 사람이 비틀비틀하더니 푹 고꾸라졌다. 그 바람에 비료 포대 두 개가 그 사람을 덮칠 듯하며 아슬아슬하게 땅에 굴러 떨어졌다.

"최 씨 같은데, 최 씨."

"아니야, 황 씨야."

그 사람 앞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창고를 향해 가고 있었고, 뒤를 따르고 있던 네댓이 그에게로 몰려들며 비료 포대들을 내렸다.

"맞아, 황 씨야."

"뒤집어, 조심해서 뒤집어."

사람들은 힘을 합쳐 그를 바르게 눕혔다.

"이거 정신을 잃었잖아."

"아이구, 이 얼굴 봐라. 이거 원 ....."

의식을 잃은 그 사람의 한쪽 광대뼈 부분은 쓰러지면서 땅에 사정없이 부딪쳐 피가 흐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으깨진 살갗에는 흙이 묻고 자디잔 돌들이 박혀 있었다.

"황 씨, 황 씨, 정신차려."

"이거 어떻게 해야지? 빨리 찬물 뿌려야 되잖아?"

그들은 어찌할 줄을 모르며 두서가 없었다.

"거기 뭐 하는 거야! 단체로 농땡이 까는 거야!"

그때 고함을 치며 반장이 뛰어오고 있었다.

"황 씨가 쓰러졌어요."

"기절을 했어요."

그들은 어물어물하며 반장보고 보라는 듯 쓰러진 사람 옆에서 조금씩 물러났다.

"이거 어쩐지 비실비실한다 했더니 결국 요 꼴이군."

반장은 짜증스럽게 내뱉고는,

"이봐. 뭣들 하고 있어. 너희들은 빨리 비료 옮기고, 거기 너희들, 빨리 뛰어와. 빨리."

그는 창고에서 비료를 부리고 발길을 되돌린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반장 앞에 뛰어온 세 사람 중에 천두만도 끼어 있었다.

"빨리 저쪽 그늘로 들어 옮겨."

한 사람은 황 씨의 두 다리를 잡고, 두 사람은 상체를 받쳐들었다. 천두만은 축 늘어진 황 씨를 내려다보고 걸으며 집에서 앓고 있는 윤 씨를 생각했다. 그리고 여름 땡볕 속에서 쓰러져 허망하게 죽어갔던 몇몇 사람을 생각했다.

"됐어, 여기 두고 빨리 가서 일해."

반장이 세 사람에게 명령했다.

"저 사람 무슨 병 들었나?"

"병이라면 골병이지 뭐. 또 사람 잡는 여름이 시작됐으니 원."

두 사람은 한숨을 쉬고 혀를 찼다. 천두만은 말없이 걸으며, 황 씨가 윤 씨 같기도 했고, 자신이 황 씨 같기도 했고, 서글픈 생각이 뒤엉키고 있었다. 길어지는 해가 지고 어스름이 깔려서야 하루 일이 끝났다. 노동자들은 반별로 작업 표에다 도장을 누르고 부두에서 벗어났다.

"윤 씨, 윤 씨, 몸은 잠 워떠?"

천두만은 방문을 열며 인기척을 낼 겸 물었다. 그러나 윤 씨 쪽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천두만은 가슴이 덜컥 해서 다급하게 윤 씨를 들여다보았다. 입을 반쯤 벌린 윤 씨는 가쁜 숨을몰아쉬고 있었다.

"윤 씨, 나여 몸이 잠 나슨 것이여 워쩐 것이여?"

천두만은 윤 씨를 흔들었다. 윤 씨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그리고 한참이나 걸리는 듯싶게 눈을 떴다. 그러나 희멀건한 눈은 아침보다 더 심하게 풀려 있었다. 그 눈이 사람을 알아보는 것 같지 않았다. 바싹 탄 입술이 약간 달싹이는 것 같더니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앉고 말았다.

"참말로, 앓아도 엄청시리 앓네."

천두만은 혀를 차고 돌아앉으며 아침에 차려놓고 간 밥그릇 뚜껑을 열어보았다. 밥은 서너 숟가락을 뜬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때 두 사람이 돌아왔다.

"밥얼 이리 못 묵었시니 큰일이시. 사람을 못 알아보는 것 같고, 자꼬 더 심해지는 것 같은디 ....."

천두만은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거 어쩔라고 이러지?"

"큰일이네. 이걸 어째야 좋아?"

방바닥에 주저앉는 두 사람의 한숨소리가 겹쳐졌다.

"안 돼겄구마. 쌀죽을 잠 쒀야제."

천두만이 무릎을 짚으며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당번은 나야. 천 씨는 그냥 있어."

"배 씨는 얼렁 우리 밥이나 혀. 혼자서 두 가지 일을 워찌 혀."

처지가 같은 네 사람은 사글세방 하나를 얻어 자취를 했다. 방이 더 컸더라면 다섯이나 여섯이 되었을 것이다. 시골에 처자식을 둔 부두노동자들은 생활비를 최대한 아끼려고 그런 식으로 덩어리를 이루었다. 윤 씨는 눈만 풀린 것이 아니라 몸도 다 풀려 일어나 앉지를 못했다.

"되았어, 되았어. 죽잉께 그냥 믹여도 넘어가."

천두만은 윤 씨의 입에 죽을 떠넣기 시작했다. 그러나, 윤 씨는 서너 번 받아먹는가 싶더니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윤 씨, 먹어야 살지 이러다가 큰일나."

"처자식들을 생각해서라도 억지로 먹어야 해."

"곡기 끊고 병 이기는 장사 읎는 법이여."

그들의 성화에도 윤 씨는 입을 열지 않았다. 저녁을 먹은 그들은 담배를 끄기가 바쁘게 픽픽 쓰러지듯 했다. 하루 종일 중노동에 시달린 그들은 마구 덮쳐오는 잠을 이기지 못했다. 네 사람이 눕자 방에는 빈틈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후줄그레한 옷들은 네 벽에 걸려 있었다.

"어이, 천 씨, 배 씨, 빨리 일어나봐. 윤 씨가 이상해 !"

그들은 윤 씨에게로 달겨 들었다. 천두만은 그의 손을 잡다가 섬찟하게 끼쳐오는 냉기에 손을 얼른 놓았다. 윤 씨는 이미 몸이 식어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한동안 굳어져 있었다.

"으쩌겄어. 다 팔잔디."

천두만이 돌아앉으며 꽁초를 꺼냈다.

"빨리 집에 연락해야지."

"전보를 쳐야겠지. 주소부터 찾아보자구."

그들은 윤 씨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거 돈이잖아."

"그렇네. 꽤 되는 것 같은데?"

"이건 주소고."

윤 씨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은 두 번 세 번 접혀 주소와 함께 들어 있었다.

"아이구 이 사람, 돈을 이렇게 가지고도 병원엘 안 가보다니. 쯧쯧쯧....."

"고것이 집에 보낼 돈이었제 병원에 갈 돈이었간디."

천두만이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빌어먹을, 결국 장례비 되고 말았잖아."

"그나저나 어쩌지? 이리 두고 일 나갈 수도 없고."

"가서 말허고 장례 치를 때꺼정은 일 못허는 것이제 어째."

"못해도 사흘은 걸릴 텐데, 그래도 봐줄까?"

"즈그도 사람인디 그것꺼지야 야박허게 허겄어?"

"그래도 누가 알아? 그 인정사정없는 놈들이."

"그려서 짤리면 여그 떠부러. 여그서 금뎅이 캐는 것도 아니고, 여그서 허는 고생 딴 디 가서 허면 이만 못헐 것이 머시여, 잡녀러 것 !"

천두만이 카악 가래를 돋우었다. 그건 감정으로 솟은 말이 아니었다. 오래 전부터 되작거려온 생각이었다.

"천 씨 말도 맞어. 알짜는 다 노조에 뜯기면서 평생 골 빠지게 일해 봤자 거지꼴 못 면해."

"그렇다고 어디로 가겠어. 이 더러운 목숨."

그들은 한꺼번에 한숨을 토해냈다. 노조에서는 각 회사를 상대로 상하역작업의 노임 결정을 도맡고 있었다. 그런데 그 노임은 노동자들에게 정확하게 분배되는 것이 아니라 미리 노조 운영비라는 것을 떼냈다. 노동자들은 일거리에 따라 회사에서 받는 상하역비가 얼마인지 알 수가 없었고, 노조에서 정해놓은 일당대로 계산해서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의심스럽고 억울했지만 따지고 들 수가 없었다. 몇 년 전에 어떤 똑똑한 사람이 그걸 따지려고 노동자들을 규합하다가 어느 날 바다에 시체로 떠올랐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때 경찰에서는 그 죽음을 자살로 처리했다는 거였다. 노조의 높은 간부들이 요정 출입을 한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반장들까지 짐 한 번 어깨에 올리지 않고 그 운영비에서 월급을 받고 있었다.

"산 사람은 그래도 또 먹어야겠지."

식사 당번이 밖으로 나가면서 중얼거렸다.

"나가 가서 반장헌테 말허고 올랑만."

아침을 먹고 나서 천두만이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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