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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균(1914~1993)

가로수

가신 누님

고향

공지(空地)

광장

구의리(九宜里)

기적(汽笛)

노신(魯迅)

녹동 묘지에서

눈 오는 밤의 시

다시 목련

대낮

대화

데생(뎃상)

등(燈)

목련

목상(木像)

밤비

복사꽃과 제비

비(碑)

비풍가(悲風歌)

빙화(氷花)

사향도(思鄕圖)

석고의 기억

설야(雪夜)

성호부근(星湖附近)

수철리(水鐵里)

승용마차

시를 쓴다는 것이 이미 부질없고나

신촌(新村)서

안개의 노래

야차(夜車)

언덕

영미교(永美橋)

오월화(五月花)

오후의 구도(構圖)

와사등(瓦斯燈)

외인촌(外人村)

은수저

장곡천장에 오는 눈

젊은 손수 운전자에게

조화(弔花)

창백한 산보

추일서정(秋日抒情)

취적(吹笛)벌

파도가 있는 해안에 서서

한등(寒燈)

한려수도

해바라기의 감상

해변가의 무덤

향수(鄕愁)

향수의 의장(意匠)

황혼가(黃昏歌)

회귀(回歸)에의 헌시(獻詩)

흑설(黑雪)

UN군 묘지에서

3·1날이여! 가슴 아프다

 

 

 

가로수

김광균

 

1

푸른 잔디를 뚫고 서 있는

체조장 시계탑 위에

파―란 기폭이 바람에 부서진다

 

무거운 지팽이로 흰구름을 헤치고

교당(敎堂)이 기울어진 언덕을 걸어 내리면

밝은 햇빛은 화분(花粉)인 양 내려 퍼붓고

거리는 함박꽃같이 숨을 죽였다

 

 

2

명등(明燈)한 돌다리를 넘어

가로수에는 유리빛 황혼이 서려 있고

포도(鋪道)에 흩어진 저녁 등불이

창백한 꽃다발같이 곱기도 하다

 

꽃등처럼 흔들리는 작은 창 밑에

밤은 새파란 거품을 뿜으며 끓어오르고

나는 동상이 있는 광장 앞에 쪼그리고

길 잃은 세피아의 파―란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가신 누님

김광균

 

누님은 가셨나요 바다를 건너

뛰-뛰-하는 큰 배 타고 머나먼 나라로

사랑하는 나를 두고 누님은 가셨나요

쓸쓸한 가을비 부실부실 오던 밤

희미한 촛불 아래 고개를 베고

재미있는 옛이야기 번갈아 하는

내 누님은 가셨나요 바다를 건너

달 밝은 밤 만월대(滿月臺)의 우거진 풀 속에서

베짱이의 우는 소리 들려오고요

옛 비인 대터의 반석(盤石) 우에는

누님 찾는 내 노래가 슬프기도 합니다 ?

 

멀고 먼 그 나라의 그리운 내 누님

누님의 떠나던 날 꽂아 놓은 들국화는

지금(至今)은 시들어 볼 것 없어도

찬 서리는 여전(如前)히 때를 따라서

오늘 밤도 잠자코 나려옵니다.

 

 

 

고향

김광균

 

하늘은 내 넋의 슬픈 고향

늙은 홀어머니의 지팽이같이

한 줄기 여윈 구름이 있어

가을바람과 함께 소슬하더라

 

초라한 무명옷 이슬에 적시며

이름 없는 들꽃일래 눈물지었다

떼 지어 우는 망아지 등 너머

황혼이 엷게 퍼지고

실개천 언덕에 호롱불 필 때

 

맑은 조약돌 두 손에 쥐고

노을을 향하여 달리어갔다

 

뒷산 감나무꽃 언제 피었는지

강낭수수밭에 별이 잠기고

한 줄기 외로운 모깃불을 올리며

옷고름 적시시던 설운 뒷모습

아득―한 시절이기 더욱 그립다

 

창망한 하늘가엔 나의 옛 고향이 있어

마음이 슬픈 날은 비가 내린다

 

 

 

공지(空地)

김광균

 

등불 없는 공지(空地)에 밤이 내리다

수없이 퍼붓는 거미줄같이

자욱-한 어둠에 숨이 잦으다

 

내 무슨 오지 않는 행복을 기다리기에

스산한 밤바람에 입술을 적시고

어느 곳 지향 없는 지각(地角)을 향하여

한 옛날 정열의 창랑한 자취를 그리는 거냐

끝없는 어둠 저으기 마음 서글퍼

긴-하품을 씹는다

 

아- 내 하나의 신뢰할 현실도 없이

무수한 연령(年齡)을 낙엽같이 띄워 보내며

무성한 추회(追悔)에 그림자마저 갈가리 찢겨

 

이 밤 한 줄기 패잔병 되어

주린 이리인 양 비인 공지(空地)에 호올로 서서

어느 먼- 도시의 상현(上弦)에 창망히 서린

부오(腐汚)한 달빛에 눈물 지운다

 

 

 

광장

김광균

 

비인 방에 호올로

대낮에 체경을 대하여 앉다

 

슬픈 도시엔 일몰이 오고

시계점 지붕 위에 청동 비둘기

바람이 부는 날은 구구 울었다

 

늘어선 고층 위에 서걱이는 갈대밭

열없는 표목되어 조으는 가등

소리도 없이 모색에 젖어

 

엷은 베옷에 바람이 차다

마음 한구석에 벌레가 운다

 

황혼을 쫓아 네거리에 달음질치다

모자도 없이 광장에 서다

 

 

 

구의리(九宜里)

김광균

 

쓸쓸하고나

구의리(九宜里) 모래밭에

내리는 밤비

비인 들에 가득한

물소리 찾아

갈대밭 찾아

갈대밭 헤치고

내려가 볼까.

 

광나루 십릿벌엔

누가 우느냐

눈물에 어린 길을

등불이 간다.

저 등불 사라지면

밤이 새는지.

 

천리에 사모치는

물길을 좇아

바람도 가다가는

돌아오는데

고달픈 날개

여울물을 적시고

물새는 어느 곳에

잠이 들었나.

 

쓸쓸도 하다

구의리(九宜里) 모래밭을

적시는 밤비

서러운 생각

고요히 싸서

강기슭 풀언덕에

묻어 버릴까.

 

 

 

기적(汽笛)

김광균

 

잠결에

기적이 들린다.

사람들이 잠든 길은 밤중에

멀리서 가차이서

기적은 서로

쓸쓸한 대화를 주고받는다.

 

밤중에 들리는 기적 소리는

멀-리 간 사람과

이미 죽은 사람들을

생각케 한다.

내 추억의 촉대(燭臺) 위에

차례차례로

불을 켜고 간 사람들

그들의 영혼이

지금 도시의 하늘을 지나가는지.

 

기적이 운다.

기적은 공중에서

무엇을 찾고 있나.

나는 얼결에

잃어진 생활의 키를 생각한다.

기적이 운다.

발을 구른다.

고가선(高架線) 위에 걸려 있는

마지막 신호등을 꺼버리고

아 새벽을 향하여

모두들 떠나나 보다.

 

 

 

김광균

 

갈라진 일도 오라 가라 함도 없이

거기 섰다가

꿈처럼 가던 길 다시 돌아와

비인 자리에 고이 피네

만물 속에 홀로 웃는 미소

사랑의 증건가

옛 빛 새로 있음

꽃은 빛 꽃은 마음

 

꽃의 아름다움

마음의 아름다움

그렇다

떨어진들 어떠리

우리 사이엔 겨울에도 꽃이 있는걸

 

 

 

노신(魯迅)

김광균

 

시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잔다

먼 기적 소리 처마를 스쳐가고

잠들은 아내와 어린 것의 베갯맡에

밤눈이 내려 쌓이나 보다

무수한 손에 뺨을 얻어맞으며

항시 곤두박질해 온 생활의 노래

지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

등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담배를 피워 문다

쓸쓸한 것이 오장을 씻어 내린다

노신이여

이런 밤이면 그대가 생각난다

온 세계가 눈물에 젖어 있는 밤

상해 호마로 어느 뒷골목에서

쓸쓸히 앉아 지키던 등불

등불이 나에게 속삭어린다

여기 하나의 상심한 사람이 있다

여기 하나의 굳게세 살아온 인생이 있다

 

 

 

녹동 묘지에서

김광균

 

이 새빨간 진흙에 묻히어 여길 왔던가

길길이 누운 황토 풀 하나 꽃 하나 없이

눈을 가리는 오리나무 하나 꽃 하나 없이

비에 젖은 장포 바람에 울고

비인 들에 퍼지는 한 줄기 요령소리.

 

서른 여덟의 서러운 나이 두 손에 쥔 채

여윈 어깨에 힘겨운 짐 이제 벗어났는가.

아하,

몸부림 하나 없이 우리 여기서 헤어지는가.

두꺼운 널쪽에 못박는 소리.

관을 내리는 쇠사슬 소리

내 이마 한복판을 뚫고 가고

다물은 입술 위에

조그만 묘표위에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눈 오는 밤의 시

김광균

 

서울의 어느 어두운 뒷거리에서

이 밤 내 조그만 그림자 우에 눈이 나린다.

눈은 정다운 옛이야기

남몰래 호젓한 소리를 내고

좁은 길에 흩어져

아스피린 분말이 되어 곱-게 빛나고

나타-샤 같은 계집애가 우산을 쓰고

그 우를 지나간다.

눈은 추억의 날개 때묻은 꽃다발

고독한 도시의 이마를 적시고

공원의 동상 우에

동무의 하숙 지붕 우에

카스파처럼 서러운 등불 우에

밤새 쌓인다.

 

 

 

다시 목련

김광균

 

사월이 오면

목련은 왜 옛 마당을 찾아와 피는 것일까

어머니 가신 지 스물네 해

무던히 오랜 세월이 흘러갔지만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고

잔디잎이 눈을 뜰 때면

어머님은 내 옆에 돌아와 서셔서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 보신다

 

하루 아침엔 날이 흐리고

하늘에서 서러운 비가 내리더니

목련은 한 잎 두 잎 바람에 진다

 

목련이 지면 어머님은 옛집을 떠나

내년 이맘때나 또 오시겠지

지는 꽃잎을 두 손에 받으며

어머님 가시는 길 울며 가 볼까

 

 

 

대낮

김광균

 

칸나의 입술을 바람이 스친다

여윈 두 어깨에 햇빛이 곱다

 

칸나의 꽃잎 속엔

죽은 동생 서러운 얼굴

머리를 곱게 빗고 연지를 찍고

두 눈에 눈물이 고이어 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대낮

비인 마당 한구석에서

우리 둘은 쓸쓸히 웃는다

 

 

 

대화

김광균

 

머루덩쿨이 떼를 지어 산비탈을 기어 내리고

파랑새 한 마리 푸른 햇빛을 쪼읍고 있는

낙엽이 그윽-한 수풀가에서

가엾이 두 눈이 먼 계집애를 만났습니다.

눈부신 치맛자락 물결 위에 서리이고

외로운 암사슴같이 시냇가에 울고 있어요.

 

그것은 어려서 죽은 네 누이란다.

이마에 작을 별을 가지고

두 볼이 장미 같은 계집애였다.

뚫어진 지등(紙燈) 위에 밤비 뿌리고

호롱불이 바위 위에 졸던 밤에

초라한 무명옷에 눈물지우며 호을로 산길을 넘어갔었다.

 

청동화로에 촛불이 타고

녹슬은 촉대(燭臺) 위에 함박눈이 퍼붓던 겨울밤이면

흩어진 오색꿈 고요히 지켜 주고

밤바람이 서글픈 바닷가에 나가면

아득-한 물거품 속에서

나를 부르는 이가 누구입니까.

 

이끼 앉은 돈대 너머 흩어진 오동잎이 곱게 빛나고

수풀가에 흰 비둘기 떼지어 울던 날

흰구름을 헤치고 가서 안 오는

네 아버지의 그리운 목소린 게지.

 

어머니 이 화창한 하늘 아래 왜 우십니까.

들길 위엔 하-얀 영란(鈴蘭)이 졸고

파도 소리가 산너머 고요합니다.

땅 속에 고이 묻어 두었던

은빛 마차를 내어 주셔요,

흰 국화를 한 아름 가슴에 안고

누나와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먼- 여행을 떠나렵니다.

 

 

 

데생(뎃상)

김광균

 

1

향료를 뿌린 듯 곱단한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먼- 고가선 위에 밤이 켜진다.

 

 

2

구름은

보라빛 색지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

 

목장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부을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

 

 

 

등(燈)

김광균

 

벌레 소리는

고운 설움을 달빛에 뿜는다.

여윈 손길을 내어젓는다.

 

방안에 돌아와 등불을 끄다.

자욱--한 어둠 저쪽을

목쉰 기적이 지나간다.

 

비인 가슴 하잔히 울리어논채

혼곤한 벼개머리 고이 적시며

 

어둔 천정에

희부연 영창 위에

차단--한 내 꿈 위에

 

밤새 퍼붓다.

 

 

 

목련

김광균

 

목련은 어찌 사월에 피는 꽃일까

창문을 열고 내다보시던

어머니 가신 지도 이제는 10여 년

목련은 해 저문 마당에 등불을 켜고

지나는 바람에 조을고 있다.

 

 

 

목상

김광균

 

집에는 노처(老妻)가 있다

노처와 나는

마주 앉아 할 말이 없다

 

좁은 뜨락엔

오월이면 목련이 피고

길을 잃은 비둘기가

두어 마리 잔디밭을

거닐다 간다

 

처마 끝에 등불이 켜지면

밥상을 마주 앉아

또 할 말이 없다

 

연년세세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우리 둘은 목상이 돼 가나 보다

 

 

 

밤비

김광균

 

어두운 장막 너머 빗소리가 슬픈 밤은

초록빛 우산을 받고 거리로 나갈까요

 

나즉히 물결치는 밤비 속으로

모자를 눌러쓰고 포도(鋪道)를 가면

바람에 지는 진달래같이

자취도 없는 고운 꿈을 뿌리고

눈부신 은실이 흩어집니다

 

조각난 달빛같이 흐득여 울며

스산-한 심사 위에 스치는 비는

사라진 정열의 그윽-한 입김이기에

 

낯설은 흰 장갑에 푸른 장미르 고이 바치며

초라한 가등(街燈) 아래 홀로 거닐면

이마에 서리는 해맑은 빗발 속엔

담홍빛 꽃다발이 송이송이 흩어지고

빗소리는 다시 수없는 추억의 날개가 되어

내 가슴 위에 차단-한 화분(花粉)을 뿌리고 갑니다

 

 

 

복사꽃과 제비 - 어린이날을 위하여

김광균

 

불행한 나라의 하늘과 들에 핀 작은 별들에게

복사꽃과 제비와 어린이날이 찾아왔구나.

 

어린 것 껴안고 뜨거운 눈물로 뺨을 부비노니

너희들 키워줄 새 나라 언제 세워지느냐.

 

낮이면 꽃 그늘에 벌떼와 함께 돌아다니고

밤이면 박수치는 파도 우로 은빛 마차 휘몰아가고

 

거칠은 바람 속에 다만 고이 자라라

온 겨레의 등에 진실한 땀이 흐르는 날

너 가는 길에 새로운 장미 피어나리니

황량한 산과 들 너머

장미여 삼천리에 춤을 늘여라.

 

불행한 나라의 하늘과 들에 핀 작은 별들에게

복사꽃과 제비와 어린이날이 돌아왔구나.

 

 

 

비(碑)

김광균

 

어머님은 지나간 반생의 추억 속에 사신다

어머님의 백발을 에워싸고

추억은 늘 희미한 원광을 띠고 있다

 

창랑한 기적이 오고가는 정거장에서

유적(流滴)의 길가에 스미는 황량한 모색(暮色) 앞에서

내 서러운 도시 위에 낮과 밤이 바뀔 때마다

내 향수의 지붕 위를 바람이 지날 때마다

어머님의 다정한 모습 두 눈에 어려

온-몸이 젖는다

황홀히 눈을 감는다

 

어머님은 항시 고향에 계시면서도

항시 나와 함께 계신다

 

 

 

비풍가(悲風歌)

김광균

 

쓸쓸한 곳에서 바람이 불어 온다.

진흙빛 산과 들을 건너

황량한 도시의 등불을 죽이고

떼지어 오는 통곡 소리.

 

램프에 심지를 돋군다.

비인 방에 가득한 벌레 소리에

눈이 감긴다.

 

항시 돌팔매에 쫓겨 온 서른네 해

내 가는 길에

또다시 찬비 뿌리고 잎이 돋는가.

 

기적 소리 따라가고 싶고나

거기 쓸쓸한 사람이 모여 사는 곳

허망한 세월에 부대껴

내 속절없이 돌아가는 날

햇볕 다사롭고

오곡은 무르렀으리.

 

원통한 생각이 밤새 끓어오른다.

원통한 생각에 밤새 잠이 안 온다.

별은 내 이마 위에 못을 박고

어제 벗었던 상복 다시 입는가.

바람이여

화살을 싣고 나를 따르라

나도 인제 나의 원수를 찾자.

 

 

 

빙화(氷花)

김광균

 

이즈러진 가로(街路)의 어두운 화포(畵布) 위에

밤 깊도록 함박눈이 스쳐갑니다.

 

가버린 시절의 발자취같이

소리도 없이 퍼붓는 눈은

먼- 계절의 그리운 향기입니까.

 

조각난 달빛같이 싸늘한 빛을 하고

내 가슴 위에 눈부신 장미를 던져 줍니다.

 

얼어붙은 분수같이 하이-얀 가등(街燈) 위에

송이송이 꽃다발이 흩어집니다.

 

이 어두운 밤에 초라한 상복을 입고

슬픈 기억 위에 내리는 눈은

자취도 없는 청춘의 낙엽입니까.

 

화려한 음악같이 수없는 날개를 달고

내 마음 위에 서글픈 추회(追悔)의 시(詩)를 씁니다.

 

 

 

사향도(思鄕圖)

김광균

 

1 - 정거장

긴- 하품을 토하고 섰던 낮차가 겨우 떠난 뒤

 

텅 비인 정거장 앞마당엔

작은 꽃밭 속에 전신주 하나가 조을고 섰고

한낮이 겨운 양지 쪽에선

잠자는 삽살개가 꼬리를 치고

지나가는 구름을 치어다보고 짖고 있었다.

 

 

2 - 목가(牧歌)

장다리꽃이 하-얀 언덕 너머 들길에

지나가는 우거(牛車)의 방울 소리가

긴- 콧노래를 웅얼거리고

김매는 누이의 바구니 옆에서

나는 누워서 낮잠을 잤다.

어두워 오는 황혼이면

흩어진 방앗간에 나가 나는 피리를 불고

꼴 먹이고 서 있는 형님의 머리 위에

남산(南山)은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3 - 교사(校舍)의 오후

시계당(時計堂) 꼭대기서

하학(下學) 종이 느린 기지개를 켜고

백양나무 그림자가 교정에 고요한

맑게 개인 사월의 오후

눈부시게 빛나는 유리창 너머로

우리들이 부르는 노래가 푸른 하늘로 날아가고

어두운 교실 검은 칠판엔

날개 달린 `돼지'가 그려 있었다.

 

 

4 - 동무의 무덤

진달래를 한아름 안고 산길을 내려오다

골짜기 너머 공동묘지에 올라

우리들은 모자를 벗고 눈을 감았다.

 

지금 아득-히 생각나는 이른 봄날 황혼

가난하였던 동무의 무덤 위엔

하-얀 요령초(搖鈴草)가 바람에 흔들리고

우두커니 서 있는 작은 패목은

가늘은 실비에 젖어 있었다.

 

 

5 - 언덕

심심할 때면 날 저무는 언덕에 올라

어두워 오는 하늘을 향해 나발을 불었다.

발 밑에는 자욱-한 안개 속에

학교의 지붕이 내려다보이고

동리 앞에 서 있는 고목 위엔

저녁 까치들이 짖고 있었다.

 

저녁별이 하나 둘 늘어갈 때면

우리들은 나발을 어깨에 메고

휘파람 불며 언덕을 내려왔다.

등 뒤엔 컴컴한 떡갈나무 수풀에 바람이 울고

길가엔 싹트는 어린 풀들이 밤이슬에 젖어 있었다.

 

 

 

김광균

 

꿈 속에 아아(娥娥)한 연봉(連峰)이 솟아 있더니

아침에 침묵의 계곡에서 올라오는

안개 속에 산은 서 있다.

 

영원을 향하여

길길이 누워 끝없는 산들

솔개미 하나 안 뜬 하늘 저쪽에

그 끝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다.

 

어두워 오는 황혼에

산들은 되돌아온다.

낙조에 잠겨 가는 수풀 속으로

바람 소리를 몰아 오면서

 

깊은 밤중에

고독한 이마를 달빛에 적시며

산들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북두칠성이 자정 넘어 기울어진 뒤

천년이 동터 오는

새벽을 향하여

산들은 돌아눕는다.

 

 

 

석고의 기억

김광균

 

창백히 여윈 석고의 거리엔 적은 창문이 있고

어두운 가열(街列)이 그친 곳에

고웁게 화장한 종루(鐘樓)가 하나 달빛 속에 기울어지고

 

자금빛 향수 위에 그렇게 화려한 날개를 펴던

지금 나의 망막 위에 시들은 청춘의 화환이여

나는 낡은 애무의 두 손을 벌려 너를 껴안고

싸늘―히 식어진 네 가슴 위에

한 포기 장미와 빛나는 오월의 구름을 던져 주련다

 

 

 

설야

김광균

 

어느 먼 -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워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여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먼 -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디찬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성호부근(星湖附近)

김광균

 

1

양철로 만든 달이 하나 수면 위에 떨어지고

부서지는 얼음 소래가

날카로운 호적呼笛같이 옷소매에 스며든다

 

해맑은 밤바람이 이마에 나리는

여울가 모래밭에 홀로 거닐면

노을에 빛나는 은모래같이

 

호수는 한 포기 화려한 꽃밭이 되고

여윈 추억의 가지가지엔

조각난 빙설이 눈부신 빛을 발한다

 

2

낡은 고향의 허리띠같이

강물은 길-게 얼어붙고

 

차창에 서리는 황혼  저 멀얼리

노을은

나어린 향수처럼 희미한 날개를 펴고 있었다

 

3

앙상한 잡목림 사이로

한낮이 겨운 하늘이 투명한 기폭을 떨어뜨리고

푸른 옷을 입은 송아지가 한 마리

조그만 그림자를 바람에 나부끼며

서글픈 얼굴을 하고 논둑 위에 서 있다

 

 

 

수철리

김광균 

 

산비탈엔 들국화가 환-하고 누이동생의

무덤 옆엔 밤나무 하나가 오뚝 서서

바람이 올 때마다 아득-한 공중을 향하여

여윈 가지를 내어 저었다

갈 길을 못 찾는 영혼 같애 절로 눈이 감긴다

무덤 옆엔 작은 시내가 은실을 긋고

등 뒤에 서걱이는 떡갈나무 수풀 앞에

차단-한 비석이 하나 노을에 젖어 있었다

흰나비처럼 여윈 모습 아울러

어느 무형한 공중에 그 체온이 꺼져 버린 후

밤낮으로 찾아 주는 건 비인 묘지의 물소리와 바람 소리뿐.

동생의 가슴 우엔 비가 나리고 눈이 쌓이고 적막한 황혼이면

별들은 이마 우에서 무엇을 속삭였는지 한 줌 흙을 헤치고 나즉-히 부르면

함박꽃처럼 눈뜰 것만 같애 서러운 생각이 옷소매에 숨었다

 

*수철리 - 현 서울 금호동. 당시 공동묘지

 

 

 

승용마차

김광균

 

안개 속을 말이 간다.

기울어진 지붕에 가스등을 달고

허리엔 녹슬은 방울 소리

마권(馬券) 없는 경마장인 서울 거리

네거리마다 서서

마른기침을 한다.

종로에 밤이 들면

짓무른 두 눈에

거리의 등불이 곱긴 하다만

말아

늙은 회사원처럼 등이 굽은 말아

가을 바람에

낡은 갈기 흩날리며

술취한 손을 싣고 어딜 가느냐.

고오스톱과

신호등을 부숴버리고

마부와 고삐를 내어던지고

차라리 민주주의 쪽을 향하여

오곡이 익은 들로 달려라.

 

 

 

시를 쓴다는 것이 이미 부질없고나

김광균

 

주안 묘지 산비탈에도 밤벌레가 우느냐,

너는 죽어서 그곳에 육신이 슬고

나는 살아서 달을 치어다보고 있다.

 

가물에 들끓는 서울 거리에

정다운 벗들이 떠드는 술자리에

애닲다.

네 의자가 하나 비어 있고나.

월미도 가까운 선술집이나

미국가면 하숙한다던 뉴--욕 하--렘에 가면

너를 만날까

있더라도 <김형 있소>하고

손창문 마구 열고 들어서지 않을까.

네가 놀러 와 자던 계동집 처마 끝에

여름달이 자위를 넘고

밤바람이 찬 툇마루에서

나 혼자

부질없는 생각에 담배를 피고 있다.

번역한다던

<리촤-드·라잇>과 원고지 옆에 끼고

덜렁대는 걸음으로 어델 갔느냐.

 

철쭉꽃 피면

강화섬 가자던 약속도 잊어버리고

좋아하던 <존슨> <부라운> <테일러>와

맥주를 마시며

저세상에서도 흑인 시를 쓰고 있느냐.

해방 후

수없는 청년이 죽어간 인천 땅 진흙밭에

너를 묻고 온 지 스무날

시를 쓴다는 것이 이미 부질없고나.

 

 

 

신촌(新村)서 - 스케치

김광균

 

구름은 한 떼의 비둘기

꽃다발같이 아련하고나

 

전봇대 열을 지어

먼 산을 넘어가고

늘어선 수풀마다

초록빛 별들이 등불을 켠다

 

오붓한 동리 앞에

포플러나무 외투를 입고

 

하이얀 돌팔매같이

밝은 등불 뿌리며

이 어둔 황혼을 소리도 없이

기차는 지금 들을 달린다

 

 

 

안개의 노래

김광균

 

내 가는 곳 어디나

비정(悲情)의 안개 서리어 있다

안개 속엔

지나온 산하(山河)가 잠기어 있고

황폐(荒廢)한 사구(砂丘)에서

바람소리도 들리어온다.

 

안개는 산을 넘어 동리(洞里)로 간다

세월(歲月)에 눌리어 기울어진 고가(古家)들

추녀 끝에 호롱불 숨을 죽이고

노목(老木) 하나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 곳에 살던 옛날 사람들

지금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은하(銀河) 같이 길고 긴- 신작로(新作路) 하나

어두운 밤속에 사라져 있다

 

그 길로 가면

고향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바라보일까

 

안개는 다시 산을 향하여 돌아간다

허공(虛空)을 깍아세운 연봉(連峰) 가까이

안개는 길-게 걸치어 만산(滿山)을 덮어간다

 

아 나는 돌아갈 집도 없고

마음속에 피어 있던

한그루 매화(梅花) 나무도 쓰러져 있다

 

차라리 이름없는 새들과 함께

바람부는 벼랑에 누워

망각(忘却)의 안개 속에 잠기어갈까.

 

 

 

야차(夜車)

김광균

 

모두들 눈물 지우며

요란히 울고 가고 다시 돌아오는

기적 소리에 귀를 기울이더라

 

내 폐가(廢家)와 같은 밤차에 고단한 육신을 싣고

몽롱한 램프 위에

감상(感傷)은 자욱-한 안개가 되어 내리나니

어디를 가도

뇌수를 파고드는 한 줄기 고독

 

절벽 가까이 기적은 또다시 목메어 울고

다만 귓가에 들리는 것은

밤의 층계를 굴러내리는

처참한 찻바퀴 소리

 

아- 새벽은 아직 멀었나 보다

 

 

 

언덕

김광균

 

심심할 때면 날 저무는 언덕에 올라

어두워 오는 하늘을 향해 나발을 불었다.

발 밑에는 자욱한 안개 속에

학교의 지붕이 내려다보이고

동리 앞에 서 있는 고목 위엔

저녁 까치들이 짖고 있었다.

 

저녁별이 하나 둘 늘어갈 때면

우리들은 나발을 어깨에 메고

휘파람 불며 언덕을 내려왔다.

등 뒤엔 컴컴한 떡갈나무 수풀에 바람이 울고

길가에 싹트는 어린 풀들이 밤이슬에 젖어 있었다.

 

 

 

영미교(永美橋)

김광균

 

경마장 낡은 철책 위에 가마귀 떼지어 울고

장안을 왕래하는 무수한 인마(人馬)

이곳을 스쳐가나

벗은 여기 백포(白布)에 싸여 말이 없으니

서른다섯의 짧은 세상 다녀가기

그리 총총하고 서러웠던가.

 

애처럽고나

우리 서로 기약한 일 뉘게 말하랴.

어린 상제 나란히 목메어 울며

황망한 모색(暮色) 위에 꽃을 뿌리나

시들은 갈댓잎 바람에 서걱거리고

어둠 속에 사라지는 남천(南川) 물소리.

 

새봄이 오면

오간수(五間水)엔 봄빛이 흐르고

천변(川邊)가의 잔디도 움 돋아 오리

아 우리 언제 다시 만나

왕십리 하늘 밑을 서성거리랴.

 

 

 

오월화(五月花)

김광균

 

세월이 오면 꽃피고

세월이 가면 꽃이 진다.

 

꽃밭을 지나는 바람 소리에

한숨도 역겨워

 

사람만 가면 안 오나 보다.

 

 

 

오후의 구도

김광균

 

바다 가까운 노대(露臺) 위에

아네모네의 고요한 꽃망울이 바람에 졸고

흰 거품을 몰고 밀려드는 파도의 발자취가

눈보라에 얼어붙은 계절의 땅 밖에

나즉이 조각난 노래를 응얼거린다

 

천정에 걸린 시계는 새로 두 시

하이얀 기적 소리를 남기고

고독한 나의 오후의 응시 속에 잠기어 가는

북양 항로의 깃발이

지금 눈부신 호선을 긋고 먼 해안 위에 아물거린다

 

긴 뱃길에 한 배 가득히 장미를 싣고

황혼에 돌아온 작은 기선이 부두에 닻을 내리고

창백한 감상에 녹슬은 돛대 위에

떠도는 갈매기의 날개가 그리는

한 줄기 보표(譜表)는 적막하려니

 

바람이 불 적마다

어두운 커어튼을 새어 오는 보이얀 햇볕에 가슴이 메어

여윈 두 손을 들어 창을 내리면

하이얀 추억의 벽 위엔 별빛이 하나

눈을 감으면 내 가슴엔 처량한 파도 소리뿐

 

 

 

와사등(瓦斯燈)

김광균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 여름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高層) 창백한 묘석(墓石)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夜景),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思念)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외인촌(外人村)

김광균

 

하이얀 모색 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란 역등을 달은 마차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룻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우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나리고,

갈대밭에 묻히인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안개 자욱---한 화원지의 벤치 우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다.

 

외인 묘지의 어두운 수를 뒤엔

밤새도록 가느란 별빛이 나리고.

 

공백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의 시계가

여읜 손길을 저어 열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같이 언덕 우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의 지붕 우에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은수저

김광균

 

산이 저문다.

노을이 잠긴다.

저녁 밥상에 애기가 없다.

애기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한밤중에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서 애기가 웃는다.

애기는 방 속을 들여다 본다.

들창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먼 들길을 애기가 간다.

맨발 벗은 애기가 울면서 간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림자마저 아른거린다.

 

 

 

장곡천장에 오는 눈

김광균

 

찻집 미모사 지붕 우에

호텔의 풍속계 우에

기울어진 포스트 우에

눈이 나린다

물결치는 지붕지붕의 한끝에 들리던

먼 - 소음의 호수 잠들은 뒤

물기 낀 기적만 이따금 들려오고

그 우에

낡은 필림 같은 눈이 나린다

이 길을 자꾸 가면 옛날로나 돌아갈 듯이

등불이 정다웁다

나리는 눈발이 속삭인다

옛날로 가자 옛날로 가자

 

 

 

젊은 손수 운전자에게

김광균

 

네가 벌써 자동차를 가지게 되었으니

친구들이 부러워할 만도 하다.

운전을 배울 때는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을

네가 대견스러웠다.

면허증은 무엇이나 따 두는 것이

좋다고 나도 여러 번 말했었지.

이제 너는 차를 몰고 달려가는구나.

철따라 달라지는 가로수를 보지 못하고

길가의 과일 장수나 생선 장수를 보지 못하고

아픈 애기를 업고 뛰어가는 여인을 보지 못하고

교통 순경과 신호등을 살피면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구나.

너의 눈은 빨라지고

너의 마음은 더욱 바빠졌다.

앞으로 기름값이 또 오르고

매연이 눈앞을 가려도

너는 차를 두고

걸어다니려 하지 않을 테지.

걷거나 뛰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남들이 보내는 젊은 나이를 너는

시속 60km 이상으로 지나가고 있구나.

네가 차를 몰고 달려가는 것을 보면

너무 가볍게 멀어져 가는 것 같아

나의 마음이 무거워진다.

 

 

 

조화(弔花)

김광균

 

여기 호올로 핀 들꽃이 있어

자욱-히 내리는 안개에

잎사귀마다 초라한 등불을 달다

 

아련히 번지는 노을 저쪽에

소리도 없이 퍼붓는 어둠

먼- 종소리 꽃잎에 지다

아 저무는 들가에 소복히 핀 꽃

이는 떠나간 네 넋의 슬픈 모습이기에

지나던 발길 절로 멈추어

한 줄기 눈물 가슴을 적신다

 

 

 

창백한 산보

김광균

 

오후

하이얀 들가의 외줄기 좁은 길을 찾아 나간다

 

들길엔 낡은 전신주가

의장병(儀仗兵)같이 나를 둘러싸고

논둑을 헤매던 한 떼의 바람이

어두운 갈대밭을 흔들고 사라져 간다

 

잔디밭에는

엷은 햇빛이 화분(花粉)같이 퍼붓고

고웁게 화정장(花程粧)한 솔밭 속엔

흘러가는 물소리가 가득-하고

 

여윈 그림자를 바람에 불리우며

나 혼자

조락한 풍경에 기대어 섰으면

쥐고 있는 지팽이는 슬픈 피리가 되고

금공작(金孔雀)을 수놓은 옛 생각은 섧기도 하다

 

저녁 안개 고달픈 기폭(旗幅)인 양 내리덮인

단조로운 외줄기 길가에

앙상한 나뭇가지는

희미한 촉수를 저어 황혼을 부르고

 

조각난 나의 감정의

한 개의 슬픈 건판(乾板)인 푸른 하늘만

멀-리 발 밑에 희미하게 빛나다

 

 

 

추일서정(秋日抒情)

김광균

 

1

가을풀 길길이 누운 언덕 위에

소월(素月)은 무명옷을 입고 서 있다

남시(南市)의 십년(十年)을 떨치고 일어나

흰구름 오가는 망망한 남쪽 바라다보며

원망이 서린 두 눈에 눈물이 고이어 있다.

 

꿈을 깨고 일어나 창문을 여니

창 밖에는 가을이 와 있었다.

돌담 위에 서린 안개 속에

가지마다 휘어진 감들이 보인다

팔, 구월에 달려 있던 청시(靑恪)들

알알이 등불을 켜고

감나무는 절반이 가을 하늘에 잠기어 있다

아- 어느 보이지 않는 손이 열매를 맺게 하고

조용히 지상(地上)을 지나간 것일까.

 

어둡고 지루한 겨울을 맞이하기 위하여

나뭇잎들은 황엽(黃葉)이 지고

사람들은 가을 도배를 하고 새옷을 꺼내 입는다

허망히 떠나가는 한 해를 다시 보내며

괴로운 세월(世月)에 부대끼는 사람들

그들의 지붕 위에

다사로운 가을 햇빛이 내리고 있다.

 

창문을 닫고 들어앉아

처마끝을 지나가는 바람 소릴 듣는다

가을은 찬바람을 몰고 와

지상(地上)에 모든 것을 조락시키며

무한한 곳으로 떠나나 보다.

 

 

2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즈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가닥 꾸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우에 세로팡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버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을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1947년>

 

 

 

취적(吹笛)벌

김광균

 

구월은 서러운 달

해 지는 신작로길 풀벌레에 묻히고

취적벌 자갈밭엔 오늘도 바람이 부나.

 

눈을 감으면 생각나는 것,

벌떼처럼 초록별 날아오던 초가지붕 밑

희미한 등잔 아래 구겨진 어머니 얼굴.

밤꽃이 내려 쌓이던 황토산(黃土山) 마루

노래를 잊어버린 어린애들의

비인 눈동자에 노을은 지나.

허공에 걸려 있는 한낮 서러운 등불처럼

어두운 지평 한끝에 깜박거리는 옛 마을이기

목메는 여울가에 늘어선

포프라나무 사이로 바라다뵈는

한 줄기 신작로 너머

항시 찌푸린 한 장의 하늘 아래

사라질 듯이 외로운 고향의 산과 들을 향하여

스미는 오열 호올로 달램은

내 어느 날 꽃다발 한 아름 안고

찾아감을 위함이리라.

 

 

 

파도가 있는 해안에 서서

김광균

 

어두워 가는 해안의 별빛 조으는 곳에

흐릿한 은선(銀線)을 저어 가는 상선(商船)의 돛대는 잠기어 가고

고독한 노을에 덮인 부두의 황혼에 서서 멀―리

고개 숙인 마음에

저물어 가는 파도 소리는 목메어 온다

 

창백한 해양의 물결에 잠긴 작은 항구의 가슴을 떠나

밤마다 안개에 덮인 푸른 바다의 월광을 굴러가는

낙엽의 탄가(嘆歌)에 젖은 희미한 뱃노래는

지금 어두운 밤바다 위를 헤매고

처량한 음계 위에 스러져가는 파도의 노래 위를

고향을 찾아가는 갈매기의 늘어진 두 날개는 애처롭다

 

밤새도록 서리에 젖은 등대의 시선을 쫓아

끝없는 비극 속에 누워 있는 먼― 선로(船路)의 가는 곳에 오늘밤

전도한 수평선 위에 적막한 애상을 그리는 마음이

해안을 스쳐가는 낙엽 속에 고요히 휘파람을 분다

날카로운 시각에 허물어진 그리운 우리들의 항로여

푸른 바다를 스쳐가던 화려하였던 그 시절의 애처러운 회억(回憶)이여

 

이즈러진 현실의 어두운 장렬(葬列)을 떠나 보낸 포구는 말이 없고

육지를 떠나 헤어져 가는 발자취 속에

긴― 성조(星條)의 애화(哀話)를 속삭이던 어두운 물결도 이제는 대답이 없다

 

 

 

한등(寒燈)

김광균

 

기울어진 경사(傾斜) 위에 걸려 있는 한등(寒燈)에

불이 켜지면

성북동 계곡에 밤이 내린다.

 

아-

그 가늘고 고단한 불빛.

 

겨울나무의 앙상한 가지 위에

까마귀 둥우리가 하나 있고

그 너머로

거리의 오색 등불이 껐다 켜진다.

 

무수한 세월에 등을 밀리어

나는 여기 홀로 서 있으나

머지 않아 이곳을 떠나야 한다.

 

밤이 깊어 집들은 창을 내리면

사람들이 침소(寢所)로 돌아간 뒤에

등불이 혼자 남아

성북동의 밤을 지키고 있다.

 

 

 

한려수도

김광균

 

한려수도가 안개 속을 달리어간다.

갈매기 날개 위에

떠올랐다 잠기어 가는 섬 섬들

그곳에는 누가 사는지

한 줄기 밥짓는 연기

어두워오는 파도 위에 서리어 있다.

 

삼선도(三仙島) 가까이

낡은 배는 기웃거리고

삼천포 향하여 기적을 울리고 가나

밀려나가고 또 되돌아오는

바닷물의 나즉한 통곡 소리뿐

 

이 사망(沙望) 파도 끝엔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물소리와 함께 저무는 인생 위에

내 조그만 사념(思念)의 배는 돛대를 내리고

어디를 향하여 흘러가는 것일까

 

해도 저물고 섬도 저물고

한려수도는 끝이 없고나

껴안고 싶은 섬돌 하나 둘 사라진 뒤에

떼지어 오는 바람 배 난간을 때리고

나는 어두운 램프등(燈) 아래 기대어 앉아

지금은 돌아오지 않는

모-든 것에 눈을 감는다.

 

 

 

해바라기의 감상

김광균

 

해바라기의 하-얀 꽃잎 속엔

퇴색한 작은 마을이 있고

마을 길가의 낡은 집에서 늙은 어머니는 물레를 돌리고

 

보라빛 들길 위에 황혼이 굴러 내리면

시냇가에 늘어선 갈대밭은

머리를 헤뜨리고 느껴 울었다.

아버지의 무덤 위에 등불을 키려

나는 밤마다 눈 멀은 누나의 손목을 이끌고

 

달빛이 파-란 산길을 넘고.

 

 

 

해변(海邊)가의 무덤

김광균

 

꽃 하나 풀 하나 없는 황량(荒凉)한 모래밭에

묘목(墓木)도 없는 무덤 하나

바람에 불리우고 있다.

가난한 어부(漁夫)의 무덤 너머

파도는 아득한 곳에서 몰려와

허무한 자태로 바위에 부서진다.

 

언젠가는 초라한 목선(木船)을 타고

바다 멀리 저어가던 어부의 모습을

바다는 때때로 생각나기에

저렇게 서러운 소리를 내고

밀려왔다 밀려나가는 것일까.

 

오랜 세월에 절반은 무너진 채

어부의 무덤은 잡초(雜草)가 우거지고

솔밭에서 떠오르는 갈매기 두어 마리

그 위를 날고 있다.

 

갈매기는 생전에 바다를 달리던

어부의 소망(所望)을 대신하여

무덤가를 맴돌며 우짖고 있나 보다.

 

누구의 무덤인지 아무도 모르나

오랜 조상때부터 이 사람들은 바닷가에서 태어나

끝내는 한줌 흙이 되어 여기 누워 있다.

 

내 어느날 지나가던 발길을 멈추고

이 황토(黃土) 무덤 위에 한 잔 술을 뿌리니

해가 저물고 바다가 어두워 오면

 

밀려오고 또 떠나가는 파도를 따라

어부의 소망일랑

먼- 바다 깊이 잠들게 하라.

 

 

 

향수(鄕愁)

김광균

 

저물어 오는 육교 우에

한줄기 황망한 기적을 뿌리고

초록색 램프를 달은 화물차가 지나간다.

 

어두운 밀물 우에 갈메기 떼 우짖는

바다 가까이

 

정거장도 주막집도 헐어진 나무다리도

온-겨울 눈 속에 파묻혀 잠드는 고향.

산도 마을도 포플라나무도 고개 숙인 채

 

호젓한 낮과 밤을 맞이하고

그 곳에

언제 꺼질지 모르는

조그만 생활의 촛불을 에워싸고

해마다 가난해 가는 고향 사람들.

 

낡은 비오롱처럼

바람이 부는 날은 서러운 고향.

고향 사람들의 한줌 희망도

진달래빛 노을과 함께

한번 가고는 다시 못오지

 

저무는 도시의 옥상에 기대어 서서

내 생각하고 눈물 지움도

한 떨기 들국화처럼 차고 서글프다.

 

 

 

향수의 의장(意匠)

김광균

 

1 - 황혼에 서서

바람에 불리우는 서너 줄기의 백양나무가

고요히 응고한 풍경 속으로

황혼이 고독한 반음(半音)을 남기고

어두운 지면(地面) 위에 구을러 떨어진다

 

저녁 안개가 나즉히 물결치는 하반(河畔)을 넘어

슬픈 기억의 장막 저편에

고향의 계절은 하이-얀 흰 눈을 뒤집어쓰고

 

 

2 - 동화

내려 퍼붓는 눈발 속에서

나는 하나의 슬픈 그림을 찾고 있었다

 

조각난 달빛과 낡은 교회당이 걸려 있는

작은 산너머

엷은 수포(水泡) 같은 저녁별이 스며 오르고

흘러가는 달빛 속에선 슬픈 뱃노래가 들리는

낙엽에 싸인 옛 마을 옛 시절이

가엾이 눈보라에 얼어붙은 오후

 

 

 

황혼가(黃昏歌)

김광균

 

여기

낯익은 솔밭 사 이사이에

들국화 가즈런-히 피어 있으나

하늘 한구석은 그냥 비어 있고나.

 

백만 장안에 누가 살기에

오늘도

하나의 아름다운 노래도 없이

해가 지느냐.

저물어 가는 나의 호수

호수 속 자욱-한 안개 속에서

등불이 하나 둘 깜박거린다.

 

우리 집 조그만 들창에도 불이 켜지고

저녁 밥상에 어린 것들이 지껄이리라.

내 그곳에 또 어두운 밤을 맞이하고

날이 밝으면

퇴색한 옷을 입고 거리로 가리라만

인마(人馬)와 먼지와 슬픔에 덮인

도시를 뚫고

나의 남은 반생의 길은 어디로 뻗쳐 있기에

낮과 밤이 들려주는 노래는

다만 한 줄기 오열뿐인가.

 

 

 

회귀(回歸)에의 헌시(獻詩)

김광균

 

용인 땅 호암미술관 앞마당에

부르텔의 헤라크레스상(像)이 있고

그 옆에 이백 년 넘은 노목(老木)이 하나 서 있다.

수피(樹皮)는 풍파에 거칠고 뿌리도 패인 채

목이 잘린 나무가 머리를 숙이고

호수 위에 저물어 가는 가을 하늘을 받치고 있다.

 

울연(鬱然)히 하늘을 덮은 가지는 없어져도

나무에선 이조(李朝)의 바람 소리가 들리어 온다.

노수(老樹)에 봄이 오면 수피(樹皮)를 뚫고 나온 새 가지에

숲이 돋고 꽃이 핀다.

노수(老樹)는 기적같이 서서 부는 바람에 화분(花粉)을 뿌리고

앞뒤에 새로 자란 묘목 가운데 우뚝이 선다.

어느 날 태고의 바람에 날려온 한 알의 씨가 땅에 떨어져

유구백년(悠久百年) 생명의 노래를 부르나 보다.

 

아- 어느 사이 내 마음의 공동(空洞)에 노수(老樹)는 서서

밝아 오는 새벽을 향하여 두 손을 편다.

나무 위에는 한낮이면 새들이 날아와 노랠 부르고

황혼이 오면 고개를 떨구고 기도를 한다.

나는 나무를 믿고 나무는 나를 믿고

우리는 매일 밤 천년의 거문고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흑설(黑雪)

김광균

 

늘어선 빌딩 사이 어두운 골목길에

아침부터 검은 눈이 내리고 있다

눈은 불길한 소식을 가지고

황량한 도시의 지붕을 덮어 온다

촛불만한 희망을 안고 사는 시민들은

유리창 너머 내리는 눈발을 쳐다본다

눈발이 가져오는 불길한 소식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떨구고 생각한다.

 

검은 눈발은 흑사병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그 눈발이 지나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창문을 닫고 숨을 죽인다.

언젠가는 일어나 싸울 것을 생각하면서

 

내리는 눈발 위에 쌓인 안개를 뚫고

정오의 종소리 멀리서 들려온다.

종탑에서 종탑으로 퍼져 가는 종소리

종소리는 시민들의 마지막 결의를 재촉하며

눈 내리는 도시의 천정 위에 퍼지어 간다.

 

 

 

UN군 묘지에서

김광균

 

꽃 하나 피지 않고 한 포기 풀도 없는

거칠은 황토 언덕에

이미 고토(故土)에 돌아갈 수 없는 몸들이 누워

수정 십자가 떼 바람에 통곡하는 수영(水營) 앞바다

파도는 서러운 소리를 내고 동서로 갈리나

그대들의 고국은 자욱한 수연(水煙)에 가려 찾을 길 없고나.

 

낯선 나라 항구에 내려 포화를 헤치며 북녘 향할 때

오늘 이곳에 하나의 표목(標木)이 될 줄 어찌 뜻하였으랴.

서러운 노래 천리를 덮고

꽃그림자 어두운 사월(四月) 초이일(初二日)

우리 이곳에 서서 한 잔 술을 뿌리니

그대들의 피로 물들인 신세계(新世界)의 철문 위에

그대들, 만년(萬年)을 지워지지 않을 이름이 되라.

 

 

 

3·1날이여! 가슴 아프다

김광균

 

조선독립만세 소리는

나를 키워준 자장가다

아버지를 여읜 나는

이 요람의 노래 속에 자라났다

아 봄은 몇 해만에 다시 돌아와

오늘 이 노래를 들려주건만

3·1날이여

가슴아프다

싹트는 새 봄을 우리는 무엇으로 맞이했는가

겨레와 겨레의 싸움 속에

나는 이 시를 눈물로 쓴다

이십칠년전 오늘을 위해

누가 녹스른 나발을 들어 피나게 울랴

해방의 종소리는 허공에 사라진 채

영영 다시 오지 않는가

눈물에 어린 조국의 깃발은

다시 땅 속에 묻혀지는가

상장(喪章)을 달고 거리로 가자

우리 껴안고 목놓아 울자

3·1날이여

가슴 아프다

싹트는 새봄을 우리는 무엇으로 맞이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