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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1-2

7. 하늘이여, 하늘이여

8월 초순의 더위가 다방 안을 끈끈하고 후끈거리는 열기로 채우고 있었다. 문 쪽에서 대형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손님들은 저마다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체구가 큰 선풍기는 낡을 대로 낡아 털털거리는 소리만 요란했지 바람 일으키는 것은 영 신통찮았다. 보나마나 미군부대에서 폐품 처리한 것을 빼내다가 청계천의 만물수리상들이 적당히 손보아 겉만 멀쩡하게 페인트칠을 했고, 다방에서는 여름 장사를 하려고 그저 구색을 맞추어놓은 것이 뻔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부채를 따로 준비했다가 손님들이 자리에 앉기 바쁘게 내밀 리 없었다.

"숙자 씨는 왜 벌써 올라왔어요? 아직 한 달이 더 남았는데."

김선오가 냉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입을 열었다.

"머리 좋다는 건 다 헛말이네. 숙자가 아니라 자숙이라 그랬잖아요."

강숙자가 톡 쏘며 눈을 흘겼다.

", 그렇지요. 이거 머리는 나쁘지 않은데 두뇌가 나빠서......."

김선오는 비위 좋게 생긴 넓적한 얼굴에 어울리게 어물쩍 응수했다.

"알았어요, 무관심의 결과라는 거."

강숙자는 다시 톡 쏘며 칼피스 잔을 기울이고는,

"시골에 더 박혀 있으면 뭘 해요. 새 영화를 봐도 서울이 낫지요."

하며 그녀는 눈길을 문 쪽으로 돌렸다. 강숙자 옆으로는 안경자와 박영자가 앉아 있었고, 그 맞은편에 김선오와 이규백이 앉아 있었다. 강숙자를 뺀 나머지 네 사람은 첫 만남의 인사를 나눈 참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더위에다 어색함까지 보태져 있었다. 안경자는 고개를 숙임막한 채 하얀 가제손수건을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박영자는 부채를 살랑거리며 두 남자를 빠른 눈길로 순간순간 살피고 있었고, 인상이 김선오와는 달리 예민하고 깐깐해 보이는 이규백은 무표정하게 담배를 피우며 부채에 적힌 낙서들에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안 오는 것 아녜요? 벌써 10분이 넘었는데."

강숙자가 목에 닿는 머리칼을 넘기며 부채로 바람을 세게 일으켰다.

"아니오, 그런 희미한 사람이 아니오. 아마 공부가 좀 늦게 끝났거나, 그렇지 않으면 걸어오느라고 좀 늦는 거요."

김선오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자신 있는 어조로 말했다.

"이 더운데 걸어 다녀요?"

"그 친구는 버스든 전차든 다섯 정거장 이상이 아니면 절대로 안 타는 게 원칙이오. 그게 고학생의 현실 아니겠소."

"어머 딱해라. 얼마나 힘들겠어요."

강숙자가 금방 울상을 지었다.

"저어......, , , 경 씨라고 하셨던가요?"

김선오의 조심스러운 말에 안경자가 고개를 들며 얼굴 붉게 부끄러움을 탔고

"자경 씨도 새 영화를 보려고 일찍 올라온 겁니까?"

그는 불쑥 물었다.

", 영화도 보고 전문영어도 좀 공부하려구요."

상대방의 말에 들어 있는 경멸을 순간적으로 감지한 안경자는 강숙자의 입장과 자신의 입장을 동시에 옹호하려고 이렇게 대답했다. 그때 유일민이 막 들어서고 있었다. 김선오가 먼저 보고 팔을 들어올렸다. 유일민은 강숙자의 소개로 안경자하고 박영자와 인사를 하면서도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땀 닦기에 바빴다. 그는 무척 피곤하고 지쳐 보였다.

"뭐 찬 걸로 드세요, 빨리 땀 식게. 뭘로 드시겠어요."

강숙자가 안쓰러운 얼굴로 서둘렀고,

", 아무거나......."

유일민은 연신 땀을 닦으며 어물거렸다. 겸손이 아니라 그는 찬 것들이 뭐가 있는지 잘 모르는 처지였다.

"이봐요, 빙수하고 칼피스하고 어떤 게 더 빨리 돼요? , 그럼 칼피스 빨리 주세요."

강숙자가 민첩하게 주문했다. 시큼한 가루를 찬물에 타서 마시는 칼피스는 신종 유행 음료수였다. 유일민이 찬 것을 다 마시자 그들은 곧 자리를 떴다.

"이런 말 안 했잖아요. 선배님 생일이라고 했지."

뒤에 처진 유일민이 미간을 찌푸리며 김선오에게 따지듯 말했다.

"내 생일인 건 틀림없고, 저 강숙자가 축하해 준다는데 어쩌겠어. 나비와 꽃이 어울리면 더욱 좋잖아? 너도 꽃들 속에서 오랜만에 휴식도 좀 해, 매냥 허덕거리고 살다간 탈나."

김선오의 능청맞은 대꾸였다.

그들은 화신백화점과 맞바라보고 있는 신신백화점 뒤의 한일관으로 갔다. 유일민으로서는 서울에서 제일 크다는 그 대중식당에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강숙자는 여럿에게 묻지도 않고 불고기를 시켰다.

"그거 맘 놓고 먹어도 되는 겁니까?"

이규백이가 불쑥 물었다. 그건 그가 처음으로 내놓은 말이었다.

"네에, 얼마든지 맘놓고 드세요. 이런 때 우리 아버지 골탕 안 먹이면 언제 먹여요."

강숙자가 대꾸했고, 안경자와 박영자는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잘 들었지? 오늘 영양보충 단단히 하자구, 나 지금 영양실조 상태야."

김선오가 팔꿈치로 유일민을 슬쩍 치며 말끝에 가시를 박았다.

"영양실조요? 괜히 모함하지 말아요. 기분 나쁘면 직방으로 밀고하는 수가 있어요."

강숙자가 잽싸게 꼬집고 들었다. 김선오의 영양실조 상태라는 말은 바로 남천장학사의 음식이 좋지 않다는 불만이었던 것이다.

"나 이거 잘못하다간 꼼짝없이 쫓겨나게 생겼네. 자숙 씨 생일이 언제요? 미리 빽을 써야지 안 되겠어."

김선오가 수첩을 꺼내는 시늉을 했고

"아니 자숙 씨, 내가 먼저 빽 좀 씁시다. 이 기회에 이 친구 쫓아내 버려요. 이 친구가 나보다 먼저 고시를 패스해 버리면 선배 체면이 말이 아니란 말이오."

이규백의 말에 안경자와 박영자가 아까보다 한결 편안하게 웃었다.

"아아, 이 소녀 마음이 괴롭고도 괴로웁도다. 수학선생을 따르자니 영어선생이 울고, 영어 선생을 따르자니 수학선생이 운다. 야속타, 이 운명의 장난을 어찌하란 말이더냐."

강숙자의 변사 흉내에 그들은 와아 웃음을 터뜨렸다. 차츰 그들의 자리가 부드럽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일민은 그런 분위기에 쉽사리 젖어들 수가 없었다. 겉으로는 그저 웃고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어머니 생각이 가득 차 있었다. 여름방학이 되어 1주일 전에 동생을 혼자 내려 보냈더니 어제 어머니의 편지가 왔던 것이다. 여동생 선희의 공책 한 장을 뜯어내 쓴 어머니의 편지는 글자마다 눈물이었다.

"......가정교사를 하는 것만도 너의 살을 깎고 피를 몰리는 일이고 아부지 압에 나를 죄인 맨드는 것인디 그것으로도 모지래 나이롱 치마저구리 감꺼정 보냈드란 것이냐. 나가 무신 염치 무신 체면으로 그 옷을 입고 나스겄냐. 이 못나고 부실헌 에미 곱곱으로 죄인 맹글지 말고 니 입치레나 제대로 허도록 해라. 초년 고생은 사서도 헌단다만 초년입치레가 부실헌 것은 평생 병치레가 되는 법잉께 세 끄니 꼭꼭 챙게 묵어야 헌다. 니 한몸이 천하고, 니가 실해야 이 에미가 기대고......."

"나이롱 치마저고리 감? 이거 되게 비싸잖아?"

상자를 받으며 동생이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그걸 임호태의 어머니가 사주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굳이 그 과정을 이야기하는 게 번거로웠고, 자신은 한마디 말도 하기 싫고 귀찮을 만큼 지쳐 있었던 것이다. 임호태의 어머니는 방학 동안에 시간을 세 배로 늘려 가르쳐달라고 했다. 모자라는 기초를 튼튼하게 할 마지막 기회라는 것이었다. 그건 학기말 성적을 그녀가 원하는 대로 10등은 못 올렸지만 그 절반을 올린 것에 대한 신뢰였다. 그러나 학기말에 다시 5등을 올리기 위해 자신이 몸부림쳤던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기만 했다. 시험과목마다 두세 배씩의 예상문제를 내서 외우게 하는 그 고역은 그야말로 소에게 억지로 물을 먹이는 격이었다. 5등을 올린 것은 임호태의 실력이 아니라 예상문제가 더러 들어맞은 자신의 몸부림이었다. 그런 아이를 상대로 삼복더위 내내 평소보다 세 배의 시간을 부대껴야 할 것을 생각하면 시험 때 치렀던 고역보다 훨씬 끔찍스러웠다. 그러나 그 요구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 거절은 곧 가정교사 자리를 스스로 박차는 일이었다. 그리고 보수가 평소의 세 배로 불어나는 것도 떼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 돈이면 2학기 등록금을 걱정할 게 없었다. 그러나 마음을 정하고 나니 어머니가 걸렸다. 자신보다도 어머니가 더 방학을 기다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죄송스러움을 다소나마 갚기 위해 생각해 낸 것이 나이롱 옷감이었다. 나이롱은 3~4년 전부터 퍼지기 시작해 이제 일대 유행을 이루고 있었다. 울긋불긋한 꽃무늬의 나이롱은 삼베는 말할 것도 없고 모시까지 밀어내며 여자들의 나들이옷으로 군림했고, 여자면 누구나 입고 싶어 하는 옷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신문들까지 '의류계의 총아''의류의 혁명'이니 해가며 그 유행바람에 더욱 부채질을 해대는 판이었다. 그러나 정작 옷감을 사는 일이 문제였다. 그 어느 상점이고 정찰제라는 것이 없었지만 특히 동대문시장이나 남대문시장은 물건 값이 제멋대로라서 잘 깎는 재주나 요령이 없어서는 바가지를 쓰는 것으로 유명했다. 헌책 값을 깎는 데는 자신이 있었지만 옷감을 알맞게 깎을 자신은 전혀 없었다. 생각다 못해 임호태의 어머니에게 부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그래, 아주 잘 생각했수. 남자가 옷감골목에 들어가면 그야 밥이지, 밥이야."

이렇게 수다스럽게 말한 임호태의 어머니는 잠깐 무슨 생각을 하던 눈치더니,

"효자 노릇 할려구? 됐수, 그 옷감 내가 선사하지."

뜻밖의 말을 했다.

 

"이봐, 넌 어떻게 생각해?"

김선오가 허벅지를 툭 쳐서야 유일민은 퍼뜩 그 생각에서 깨어났다.

"예에?......, , 뭘요......?"

유일민은 어리둥절해서 좌중을 둘러보았고, 그런 유일민을 보며 그들은 모두 웃어댔다.

"고기는 계속 입으로 들어가면서 어떻게 그리 딴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이 식사 끝나고 영활 보러 가는데 <형제는 용감하였다><여로>냐 골라잡고 있는 중이야."

", 어둡다고 먹을 것이 코로 들어가는 법 있나요. 그리고 먹으면서 딴 생각 안 하면 언제 해요. <여로>를 볼랍니다."

유일민의 뚱한 대꾸에 모두 와아 웃었고,

"어머, 멋져라!"

강숙자가 환성을 지르며 손뼉을 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남자 둘은 <형제는 용감하였다>, 여자 셋은 <여로>로 의견이 갈린 판이었던 것이다.

"너 지금 <여로>가 무슨 영환지나 알고 멋지다는 말 듣는 거야?"

김선오가 시비 걸 듯 말했고,

"그야 상식이죠. 율 부린너와 데보라 카 주연의 사랑 이야기 아닙니까."

유일민의 심드렁한 대꾸에 이번에는 박영자까지 합세해서 손뼉을 쳤다. 영화를 보고 나왔지만 날은 여전히 더웠다. 더위 탓인지 뚝섬으로 뱃놀이 가자는 강숙자의 말에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유일민은 김선오나 이규백이가 싫어하면 적극 합세하려고 했다가 또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섰다. 강숙자와 이렇게 어울리는 것이 더없이 거북하고 싫었다.

두 대의 시발택시에 남녀가 나누어 탔다. 유일민은 그동안 구경만 했었지 시발택시는 처음 타보는 것이었다. 헌 군용 지프를 개조한 그 시발택시는 그나마 서울 시내를 굴러다니는 유일한 택시들이었다. 물들인 군복처럼 그것도 전쟁이 남겨놓은 유산이었다. 정말 물 쓰듯 돈을 써대는구나. 지금까지 쓴 돈만도 내 가정교사 한 달 치 보수보다 많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유일민은 깜박 잠이 들었다.

뚝섬은 기분만으로도 한결 시원했다. 맑은 강물이 푸르게 넘실거렸고, 넓은 백사장이 눈부셨으며, 강둑의 수많은 미루나무들은 무성하게 짙푸르렀고, 수영객들의 환성이 물빛처럼 맑게 울리고 있었다. 여자들은 뱃놀이로 남자들은 수영으로 의견이 갈렸다. 처음 만난 남자들 앞에서 여자들은 아무리 더워도 수영복을 입고 나설 수 없는 세상이었다.

"또 저쪽 편을 들지 그래?"

김선오가 떠밀듯 손짓했고,

"물 본 김에 때 좀 벗겨야죠."

유일민의 능청스런 대꾸에 세 여자가 까르르 웃어댔다. 결국 남자들은 수영을 하고 여자들은 뱃놀이를 한 다음 한 시간 뒤에 미루나무 아래서 만나기로 미루나무 하나를 정했다. 남자들은 천막으로 가서 수영복을 빌려 입고 물로 뛰어들었다. 유일민은 머리를 물속으로 깊이 담그며 언젠가 사진으로 본, 갠지스 강에서 목욕하며 기도하는 인도인들을 떠올렸다. 자신도 무언가 기도하고 싶은 마음으로. 남자들이 수영을 마치고 지정된 미루나무 아래로 갔을 때 여자들은 벌써 그 그늘에 수박이며 사이다 같은 것들을 차려놓고 있었다. 강둑 저편으로는 풋풋한 남새밭이 또 하나의 드넓은 강을 이루고 있었다.

"저어, 조봉암 사형 사실을 보도관제한 걸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들이 둘러앉아 수박을 한 쪽씩 막 들었을 때 박영자가 느닷없이 물었다. 세 남자는 문득 긴장하는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 문제에 대해 유일민은 할 말이 많았지만 두 선배를 의식해서 말을 꾹 눌렀다. 김선오도 선배 이규백을 생각해서인지 입을 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글쎄요......, 사학도로서의 관심인가 보지요?"

이규백이 박영자에게 눈길을 보내고는

"그건 민주국가에서 재론의 여지가 없는 언론탄압이고 국민 기만행위지요."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당연한 원칙론이구요,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잖아요. 유족의 행위억제를 포함해서, 그게 조선총독부령을 끌어다가 적용한 것 아니에요?"

박영자는 더욱 진지해지고 있었다.

", 그건 독재정권의 극치에 달한 만행이고 웃지 못할 희극이죠. 다시 말하면 그 짓을 해서 이 정권은 주권국가를 스스로 부정하고 포기했으며, 법치국가의 위신을 스스로 훼손하고 말살한 겁니다. 소도 웃을 짓을 한 거죠."

김선오의 말이었다. 그건 신무영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고, 유일민으로서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는 김선오의 수준을 다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숙자는 잔뜩 긴장해서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자신은 조봉암이 사형당하기 직전에 설교와 기도를 자청하고 술 한 잔과 담배 한 대를 원했는데 술과 담배는 규정상 거절되었다는 기사를 읽고 안쓰러워한 정도였는데 그들의 말은 전혀 딴판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런 기회에 배워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정부가 끌어다댄 총독부령의 유족 행위억제는, 사형자의 비석을 세울 수 없다, 대중을 상대로 공공연히 부고를 낼 수 없다, 집단이 모여 장례식을 할 수 없다는 세 가지였다. 그건 총독부가 독립투사들을 사형시키고 나서 민심의 자극과 동요를 차단하기 위해 만든 대비책이었다.

"조봉암이 사형당한 건 단순히 개인의 죽음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뭐랄까......, 앞으로 사회적 영향 같은 건 어떻게 될까요?"

박영자의 동글한 눈은 한층 초롱초롱해지고 있었다. 이제 네 차례라는 듯 김선오가 유일민을 쳐다보았다.

"그건 간단치가 않습니다. 이승만의 정적을 제거한 것을 빼고 현시점에서 확실하게 예견할 수 있는 건 세 가지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첫째 평화통일론의 말살입니다. 둘째, 진보세력의 파탄이고, 셋째, 반공주의와 북진통일론의 강화입니다. 그러나 예측할 수 없는 큰 문제는 민심의 동요일 겁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민심의 동요는 조봉암의 옹호가 아니라 이 정권에 대한 불신입니다. 이승만은 정적 하나를 제거하는 데 성공한 대신 새로운 민심의 불신을 사게 되었습니다. 어떤 것이 더 이익이고 손해인지는 더 두고 볼 일입니다."

조봉암 사형 이후 줄곧 생각해 왔던 것을 유일민은 시원하게 털어놓아 버렸다.

"상대생이 왜 저래. 법대생 선배들 다 죽이고 앉았네."

이규백이 수박을 우물거리며 말했고,

"이거 마치 돌아가면서 실력테스트 받는 것 같잖아. 수박이나 좀 편히 먹읍시다."

김선오가 수박을 왈칵 베물었고,

"그러게 말야. 자영 씨 남편 누가 될러는지 영 힘들겠는데."

이규백이 과장되게 고개를 내둘렀다.

"바로 지금 말하신 분!"

강숙자가 냉큼 받았다. 그 바람에 박영자는 얼굴을 가렸고, 이규백은 얼굴이 어색한 채 벌게졌고, 다른 사람들은 맘 놓고 웃어댔다.

석양의 햇살이 강물에 번지고 있었다. 금빛 물결 현란한 강을 등지며 수영객들이 떠나고 있었다. 그들도 미루나무 그늘을 벗어났다. 이제 그들 사이에는 처음의 어색함이나 서먹함은 가셔지고 없었다. 더위는 많이 누그러졌고, 강바람이 남새밭 위로 불어가고 있었다.

 

9월과 함께 삼남지방을 휘몰아친 사라호 태풍은 서울의 남천장학사까지 강타했다. 그들의 고향 강진은 태풍 피해의 핵심지역 중의 핵심이었다. 임시통계의 사망자만 900명을 넘고 있었으니 태풍 사라호의 위력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했는지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남천장학사의 학생들은 다들 허둥지둥 고향 가는 열차를 탔다. 그 황급한 발길을 강기수 의원이 나서서 막았다 하더라도 그들을 제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강 의원은 학생들보다 먼저 고향에 내려가고 없었다. 그의 걸음이 빨라진 것은 자기 지역구에 대한 국회의원의 임무뿐만 아니라 많은 자기 재산의 피해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태풍의 피해는 전북에서부터 눈에 띄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피해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고향에 이르기 전에 낙담하기 시작한 학생들은 고향에 다다라 완전히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농촌의 초가집들은 성한 것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고, 다 자란 벼들을 삼켜버린 흙탕물은 망망한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그 흙탕물의 바다는 바로 죽음의 바다였다. 원조 받은 곡물을 마구 풀어 농산물 값이 몇 년째 계속 폭락하는 상황 속에서 9월 벼가 모두 흙탕물에 먹히고 말았으니 가난한 농가들은 굶어 죽게 된 판이었다. 그러나 그건 또 차후의 문제였다. 그보다 더 큰 비극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오야, 아부지가......, 아부지가......."

자신을 붙든 어머니의 통곡을 들으면서도, 뒤따른 동생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도 김선오는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아버지가 그 강인하던 아버지가 태풍으로 돌아가셨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흙탕물이 차오르다 빠진 흔적이 벽 중간쯤에 뚜렷하게 찍혀 있는 그 방에 아버지의 빈소는 마련되어 있었다.

"비가 억수로 퍼붓는 밤에 나가셨다가 보가 터지는 바람에......."

김선오의 어머니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이 자지러지고 있었다. 김선오는 어머니를 붙안으며 그제서야 울음이 터지고 있었다. 상복을 입은 김선오는 아버지 영전에 망연히 앉아 있었다. 비가 아무리 심하게 퍼부었어도 아버지는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아니 비가 심하면 심할수록 아버지는 더 나가서 논을 돌보려고 했을 것이다. 열 마지기의 논, 그건 아버지의 육신이었고 생명이었다. 소작인의 자식으로 태어나 손수 그 열 마지기의 논을 장만한 것은 아버지의 크나큰 긍지였고 자랑이었다.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철저한 착취구조 속에서 그것은 거의 기적 같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자신이 고등학생이 되고서였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더욱 크고 강하게 보였다.

"나가 무신 재미로 이 시상얼 사는지 아냐. 니 공부 잘허는 것 허고, 요 논에 나락이 쑥쑥 잘 크는 재미로 산다. 그려, 니가 공부 잘혀서 이 애비 한얼 풀어도라, 이 애비 일자무식으로 넘덜 밑에 볼피고 산 것이 평생 한잉께. 니넌 공부 잘혀서 크게 출세도 허고 권세도 누려야 쓴다. 니가 끈허니 공부만 잘험사 요 논덜 다 폴아 뒷대도 하나또 아까울 것이 읎응께. 니 애비 말 알아듣겄냐!"

자신이 우등상을 타올 때마다 아버지는 어깨에 무동 태우고 논두렁을 덩기덩기 춤추듯 돌며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그 무동을 국민학교 졸업할 때까지 탔다. 중학생이 되자 아버지는 무동 태우는 것을 끝낸 대신 보고 싶은 책을 사라고 돈을 주었다.

"나가 니헌테 큰절을 허고 싶은 맘이다, 시방."

광주의 고등학교에 합격했을 때 아버지가 한 말이었다. 읍내 중학교에서 그 고등학교에 합격한 것은 셋뿐이어서 동네 경사라고 하기도 했었다.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씩 꼭 광주 나들이를 해서 하숙비를 주고 갔다. 그때마다 보약이며 약과 같은 것을 가지고 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들이 때마다 학교 둘러보는 것을 거르지 않았다.

"그려, 이 핵교가 호남 질이라 그것이제? 핵교도 차암 자알 생겼다."

아버지는 운동장 가운데 뒷짐을 지고 서서 더없이 흡족하게 학교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학년이 바뀌면 꼭 담임선생을 찾아보았다.

", 이 애비가 우새시러와 그러지야!"

처음에 그럴 것 없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대뜸 한 말이었다. 그게 아닌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자신이 앞장서 아버지를 교무실로 안내해야 했다. 아버지는 담임선생 앞에 정말로 코가 땅에 닿도록 깊은 절을 하고는 소중하게 싸안고 있던 것을 내놓았다. 그건 달걀 두 꾸러미였다. 그 달걀은 시장에서 산 것이 아니었고, 꾸러미도 아버지가 손수 만든 것이었다. 아버지의 선물은 3년 동안 변함없이 달걀 두 꾸러미씩이었다.

"스승에 은공을 몰르는 것은 불효허는 것보담 더 못된 짓거리다."

역시 변함없는 아버지의 훈도였다.

"참말로 장허고 장허고 또 장허다. 이 애비 한이 다 풀린 것이나 진배 읎다."

대학에 합격했을 때 아버지가 목이 메며 한 말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돼지를 잡는 잔치를 벌였다. 법대에 진학한 것도 아버지의 소망이 절반쯤 포함된 것이었다. 아버지가 바라보는 판검사는 바로 하늘이었던 것이다. 고등고시 최연소합격자가 되려는 목표를 정했던 것도 단순히 공명심을 노리는 욕심이나 객기가 아니었다. 아버지를 하루라도 빨리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고, 그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효도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당신 말대로 한이 다 풀린 것이나 '진배없을' 뿐인 상태로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그 여한을 고스란히 자신의 가슴에다 옮겨 심어놓은 채. 김선오는 아버지가 떠난 허망하고 텅 빈 자리에 확대되어 오는 어머니와 다섯 동생들의 모습을 막막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규백 또한 겹 초상의 충격 속에 빠져 있었다. 형과 작은 아버지가 같은 장소에서 급류에 휘말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농부들은 누구나 논을 지키려고 나섰던 것이고, 태풍은 잔인하게도 그런 남자들을 삼켜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규백이 더욱 비통한 것은 형의 시신을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는 거였다. 그는 어머니, 형수와 함께 물길을 따라 정신없이 헤매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의 조심스러운 말로는 아직까지 찾지 못한 시체들은 거의 바다로 떠내려갔을 거라고 했다. 만약 그렇다면 형을 찾을 가망은 거의 없었다. 아직도 거센 흙탕물이 쏟아져 들어가고 있는 바다는 너무나 사납고 넓었다. 이규백은 사흘째 해변을 헤매다가 지쳐 쓰러졌다. 담배에 불을 붙인 그는 망망한 바다를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막막하고 허망하기가 국민학교 6학년 때와 똑같았다. 전쟁터에 노무자로 나갔던 아버지는 한줌 뼈로 돌아왔던 것이다.

"시상에나 시상에나 요것이 무신 날베락이다냐. 일정 때 북해도꺼정 끌려갔다가도 살아온 사람인디 인자 와서 요것이 무신 일이냔 말여. 살려내라, 이놈들아 살려내라."

그때 어머니는 읍사무소 직원들의 가슴팍을 치며 통곡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칠 수 있는 그 누구의 가슴팍도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 자신보다 더 젊은 나이에 홀로 된 며느리까지 부축해야 하는 처지에서 통곡마저 안으로 삼켜야 했다.

"나가 허는 고상에는 맘 쓰덜 말어라. 사람은 다 지 각각 타고난 팔자가 있는 것이고, 나야 원체로 공부는 잘 안 되는 머리 아니냐. 나는 농새일이 제참이고, 니나 고등고시에 딱 붙어부러라. 글먼 우리 집안 훤히 피고 와짝 양지 되는 것 아니겄냐. 니가 크게 출세혀서 조카덜 뒤 잘 봐주먼 고것이 이 성이 헌 고상에 보답허는 것이고 말이여."

그리도 넓은 마음을 지니고 집안을 실하게 이끌어왔던 형은 자취가 없었다. 형을 찾을 수 없는 절망감 위에 세 동생과 세 조카의 무게가 겹쳐지고 있었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대물림해 온 농사는 어찌할 것이며, 앞으로 집안 형편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암담함과 막막함은 곧 형이 차지하고 있었던 비중의 크기였고, 형이 남겨놓고 떠난 허망함의 크기였다. 거의가 농민의 자식인 남천장학사의 학생들은 태풍의 피해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논이 흙탕물에 잠기지 않은 집이 없었는데, 그나마 그것이 가장 가벼운 피해였다. 거기에다 집이 반파되거나 완파되고, 사람이 목숨을 잃는 것으로 피해는 확대되고 있었다. 그래서 학생들은 제각기 집안의 피해를 다스리느라고 매달려 있었다.

일단 자신의 사업장들을 수습한 강 의원은 경찰서와 군청을 오가며 사망자들을 파악해 조의금을 보내고 있다가 장학사의 학생들이 모두 내려와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비서의 보고를 받고서야 강 의원은 자신이 너무 서둘러 혼자 내려온 실수를 깨달았다. 피해가 너무 극심해 면목 없고 미안함은 더욱 커졌다. 학생들의 피해를 직접 확인하는 것이 도리였다. 강 의원은 비서를 앞세워 가까운 학생들의 집부터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사망자가 있는 집에서는 특별히 많은 조의금을 내놓고 빈소에 정중히 절을 올려 조의를 표하고, 학생과 가족들을 따뜻한 말로 위로했다. 현직 국회의원의 그런 성의는 슬픔에 젖은 가족들의 마음을 울렸을 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까지 감동시켰다. 그런 부수적 효과는 강 의원을 꽤나 흡족하게 해주었다.

"더욱 힘내게. 고난은 성공의 어머니 아니던가."

그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을 변용해서 이렇게 말하며 친근하게 학생의 어깨를 두들겨 격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망자가 없는 학생들의 집에서도 강 의원의 위로의 말은 정답고 자상했다. 그는 어느새 정치인의 감각이 예민해져 부수적 효과를 의식하는 일면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강 의원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또 다른 효과가 나타났다.

"가그라, 얼렁 가. 니 한나 없어도 일 다 된다. 니가 시방 요런 가당찮은 잡일 험서 허송헐 때냐. 얼렁 올라가서 큰 뜻 이룰 공부나 더 열성으로 혀라. 고것이 집안 살리는 일잉께."

초상이 안 난 집안의 부모들은 아들의 등을 떠밀었다. 그들은 강 의원을 보자 고등고시를 떠올렸고, 그들로서는 어려워진 형편에 장학사의 도움은 더욱 절실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강 의원이 바라는 것임을 알아채고 있었다. 부모들의 이런 말에 밀려 학생들은 폐허의 고향을 뒤에 두고 다시 서울 길에 올라야 했다. 보름이 더 지나 유일민은 김선오와 이규백 선배를 만나 때늦은 문상을 했다. 두 사람의 몰골은 몰라볼 지경으로 초췌해지고 진이 다 빠져있었다. 그러나 남천장학사에서 그들과 같은 변을 당한 학생들은 열이 넘었다. 그들이 모두 고향으로 떠난 것을 알게 된 다음부터 유일민은 날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남천장학사에 들렀던 것이다.

"그럼......, 집안 농사는 어떻게......."

유일민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몰라......, 별 수 없이 머슴을 두기로 했는데......, 그게 어찌 될지......."

탄식 같은 김선오의 한숨은 짙고 길기만 했다. 이규백 선배도 자꾸 한숨만 토해내기는 마찬가지였다. 유일민은 더없이 우울한 마음으로 그들과 헤어졌다.

"글 안 해도 외상값 받기 에로와 이사 못혔는디, 이리 지독시리 물난리 나부렀시니 이사는 더 에로와졌다. 허나 워쩔 것이냐, 다 하늘이 허는 일인디. 고상 되드라도 쪼깨 더 참고 기둘리자."

물먹어 망가진 살림살이의 어지러움 속에서 굳이 닭 한 마리를 과서 내놓으며 어머니가 한 말이었다. 이틀 동안 어머니를 도와 이것저것 정리하고 서울로 돌아오며 암담했던 기분을 유일민은 이제사 회복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무사한 것만으로도 천행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서울에서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태풍 피해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물가 오를 것을 걱정했고, 더욱 살기 어려워질 것을 근심했다.

"......숭년 드는 것이야 정헌 이치고......."

그때 기차에서 만났던 농부의 말이 유일민의 의식 속에 문득 떠올랐다.

 

 

8. 처음 한 짓

"너 나삼득이지?"

"근디요?"

"넌 천두만이지?"

"워째 그요?"

그들이 응답하기 바쁘게 그들의 팔은 뒤로 꺾였다. 나삼득과 천두만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그러는 사이에 지게가 벗겨지고 그들의 팔목에는 쇠고랑이 채워졌다.

"워째 이러시오. 우리가 머시럴 잘못혔다고."

상대방이 형사인 것을 알아본 나삼득이 상체를 요동하며 소리쳤다.

"하먼이라. 무신 일로 이러시오."

천두만도 나삼득을 믿고 몸을 힘껏 내두르며 소리쳤다.

"이새끼들, 시끄러!"

두 형사가 거의 동시에 정강이를 걷어찼다. 나삼득과 천두만은 곧 숨넘어가는 신음을 몰며 주저앉았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그 새끼들 빨리 서로 끌고 가."

다른 형사가 나타나서 지시했다.

나삼득은 새로 나타난 형사가 시장 통을 담당하는 안 형사인 것을 알아보았다.

"아이고 안 형사님, 우리가 잘못헌 것이 암것도 읎는디 워째 이러신다요? 머시럴 잘못 아셨구만이라."

나삼득은 두 팔이 뒤로 결박된 채로 안 형사를 곧 붙들 것 같은 몸짓을 했다.

"닥치지 못해. 새끼, 언제 봤다고 안 형사님이야. 할 말 있으면 서에 가서 해."

안 형사는 나삼득을 싸늘하게 노려보고는 돌아섰다.

"너 이새끼, 그 양복기지 어디로 빼돌렸어?"

취조실에서 안 형사가 대뜸 내지른 말이었다.

"야아? 무신 양복기지......?"

천두만은 어리둥절했다.

"이 새끼, 초장부터 오리발 깔 거야! 다 아니까 빨리 불어. 뼉따귀 다 부러지기 전에!"

안 형사는 버럭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경찰봉으로 천두만의 어깻죽지를 내려쳤다.

"아이고메......, 나 죽네. 무신 양복기지가 워찌 됐다는 것잉게라."

천두만은 아픔을 견뎌내며 무슨 일인지 몰라 애가 타고 있었다. 꼭 죄를 따지자면 며칠 전에 후생주택을 짓는 공사장을 지나다가 마침 사람 눈이 뜸해 못 한 주먹을 슬쩍 한 것뿐이었다. 그것도 모아두면 판잣집을 지을 때 요긴하게 쓰리라 싶었던 것이다.

"이 새끼야, 어제 느네들이 옮긴 양복기지 말야. 그게 밤새 싹 없어져 버렸는데, 그게 그 창고에 들어간 걸 아는 건 느네 네 놈들뿐이잖아."

또 경찰봉이 천두만의 팔을 후려쳤다.

"워메메......."

천두만은 비명을 토하며 그제서야 왜 끌려왔는지를 알았다.

"아니구만이라, 아니구만이라. 산신령님헌테 목심 걸고 그런 못된 짓 헌 일 없구만이라."

"이새끼, 산신령님 좋아하고 자빠졌네. 듣기 싫으니까 사투리 쓰지 말어."

안 형사는 험한 얼굴로 경찰봉을 또 치켜들고는

"네놈들이 그 짓 하지 않았으면 누가 해. 양복기지가 발이 달렸냐, 바퀴가 달렸냐"

하며 말에 맞추어 경찰봉으로 천두만의 가슴을 콱콱 질러댔다.

"아니랑께라. 그 기지가 그 창고로 들어간 것을 본 사람들은 시장 통에 쌔고 쌨제라. 글고, 우리가 도적질혔음사 천리 밖으로 좆 빠지......, 아니 저, 싹 내빼뿔제 멀라고 또 지게 지고 나왔을 것이오."

천두만은 형사가 싫어하는 사투리를 안 쓰려고 했지만 마음이 급하다보니 오히려 상소리까지 튀어나오려고 했다.

"이 새끼야, 나발 까지 말어. 들켰나, 안 들켰나 보려고 시침 뚝 따고 나온 거지 뭐야. 그게 모든 도둑놈들의 심뽀라 그거야."

"아이고메, 사람 복장 터져 죽겄소. 시장 통에 건달이고 깡패가 얼매나 많으요. 의심헐라면 그놈들을 의심혀야제 워째 아무 죄 읎이 불쌍헌 우리 지게꾼덜얼 요리 잡지고 이런다요, 금메."

천두만은 제 가슴을 치며 울먹거렸다.

"바로 그거야. 느네들이 그놈들하고 짜고 난짝 해먹은 거야. 그게 누군지 빨랑 대!"

경찰봉이 또다시 어깻죽지를 내려쳤다.

"워메 엄니......, 죽이든지 살리든지 맘때로 허씨요. 요런 각다분허고 씨부랄눔에 시상 더 살고 잡덜 안 헝께."

천두만은 이를 뿌드득 갈았다.

찬바람 이는 대목에 맞춰 동대문 도매상들이 양복기지를 비축하는 계절이었다. 어제 어느 집 것 100필을 지게질한 그들 넷은 번갈아가며 그런 고초를 당하고 있었다. 꼬박 이틀 동안 어깻죽지며 팔에 시퍼렇다 못해 검은 피멍이 들도록 매타작을 당한 그들은 사흘 만에 풀려났다.

"지 에미허고 붙어묵다가 좆대감지럴 못 빼고 뒈질 놈덜. 3대를 내리 염병을 앓다가 땀 못 내고 꼬드라져라."

경찰서가 멀어진 꺽임길을 돌아서며 나삼득이 욕 끝에다 가래까지 돋구어 내뱉었다.

"지게질 해묵는 것도 서러분데 이런 꼴까지 당허고 서러바서 우예 살겄노."

김 씨가 어깨를 주무르며 한숨을 쉬었다.

"니기미 씨발, 서럽기는 머시가 서럽소. 끄니 때마동 곰탕이다 설렁탕이다 얻어묵은께 신선 팔자가 따로 읎든디. 씨부랄 놈덜, 애맨 사람덜 잡아다가 매타작헐 기운 모트느라고 그리 잘들 쳐묵고 산가."

천두만이 말을 뒤틀어대며 담배쌈지를 꺼냈다.

"홧짐에 서방질허드라고 워디 가서 술 한 잔씩 혀유. 얼병도 풀어야 허닝게유."

송 씨가 마침 눈에 띄는 꽁초를 집어 들어 옷에 문질렀다.

"가드라고, 외상이먼 소도 잡아묵는 것잉께. 요런 때 술 안 묵으면 은제 묵어, 잡것."

나삼득이 앞서 길을 건너갔다. 그들은 시장구석에 박혀 있는 막소주집을 찾아갔다. 무엇을 시키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들이 드럼통술상에 앉자마자 술과 안주가 나왔다. 찌그러지고 칠 벗겨진 양은주전자에 담긴 것은 어디서 만든 것인지 모를 막소주였고, 양은접시에 담긴 안주는 소금 뿌려 구은 닭발이었다. 시장 통 막벌이꾼들을 상대하는 그 싸구려 술집에는 다른 것은 없었다. 닭발은 닭 집에서 잘라 내버리는 것을 모아다가 안주로 삼은 거였다.

"와따, 형사라는 것들이 왜정 때보톰 독허고 징허다고 소문은 났지만도, 그 자석 그거 참말로 아든 정 보든 정 읎이 독허고 징허대."

첫 잔을 단숨에 비운 천두만이 고개를 내둘렀다.

"그렇지유. 우리가 아무 보잘 것이 없으니 지 맘대로 매타작 놓기가 얼마나 좋았겄어유 지헌테 돈 솔솔 잘 주는 사람들 편은 들어야 허닝게유."

"그기 말이 아닌기라. 즈가 민주경찰 간판 내걸었다 카믄 최소한도 양심은 있어야제, 우째 빽 없고 돈 없는 백성이라꼬 그리 개 잡듯 패노 말이다. 이 분을 우째 푸노?"

"허허, 이 사람 유식헌 문자 혼자 다 써감서 자다가 봉창 뚜딜기고 앉었네, 시방 민주경찰에 최소한도 양심? 서울물 묵었으면 고런 소가 웃을 소리는 허덜 말어. 그놈이 워떤 놈인지 안직들 몰르제? 우리가 다 항꾼에 당혔시니 인자 허는 말인디, 놈이 뒷구녕으로는 창신동서 계집장사 허는 놈이여."

나삼득은 두 잔째도 단숨에 뒤집으며 쓰게 웃었다.

", 머시라꼬예?"

", 포주 노릇 헌다 그것이요?"

그들 셋은 다같이 놀라 어리벙벙해졌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암서도 말 잘못해 베락 맞을 것이 무서와 그냥 모른 칙끼 덮고 사는 것인디, 그놈이 즈그 장모 내세와갖고 그 짓거리로 떼돈 벌어딜이고 있는 놈이여. 무신 소린지 알어?"

"하아, 이거 정신이 하나또 없네. 우째 요놈으 세상이 이리 개판이고."

"참말로 환장헐 일이지. 경찰들이 교통단속으로 돈 뜯고, 포주들 등치고 헌다는 말이야 귀 아프게 들었어도 형사 놈이 지 손으로 포주 노릇 헌다는 것은 내 생전에 첨 듣는 소리시. 에라 잡것, 돈이 질인 시살에 돈 못 버는 우리 겉은 것들이 빙신이제 이. 술이나 묵어."

천두만이 한숨을 푹 쉬며 술잔을 꺾었다.

"그려유 그것 한 번 허는데 3천환씩이니 색시 대여섯만 부리면 돈 엄청 벌거여유. 월급이야 하품 나오는 것이겄쥬?"

송 씨가 느린 말투에 맞추듯 눈을 껌벅껌벅했다.

"아니, 꼬질대 소지 한 분 허는디 3천 환씩? 글먼 그것이 쌀이 멫 말이고, 꿀꿀이죽으로 치면 멫 그럭이다냐? 고것이 워찌 그리 비싸? 송 씨는 가봤는값소 이?"

천두만이 놀라움과 호기심이 엇갈리는 얼굴로 송 씨를 건너다보았다.

"워디가유. 그런 데 가볼 팔자면 양반 다 된 것이지유. 천 씨는 귀동냥도 못허고 사남유?"

송 씨가 허전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분허고 원퉁허드라도 우리 구억 안 뺏길라면 그놈이 시킨대로 이 술 묵고 우리가 당헌 것 싹 잊어뿌러야 혀. 그놈이 우리 몰아낼라고 맘묵으면 하로아칙잉께."

나삼득이 힘준 눈길로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내사 마 이 세상에 머할라꼬 태어났는지, 서러바 몬살겄소."

김 씨가 가슴 무너지게 한숨을 토해냈다.

"좌우간 어떤 놈들인지 장혀유. 그 많은 옷감을 쥐도 새도 모르게 해묵었으니. 우리가 해묵는다 해도 그리 되겄시유?"

송 씨가 꽁초에 불을 붙이며 뚱한 소리를 했다.

"잽히지만 않음사 팔자 고칠 돈일 것인디, 차를 들이댄 것이 아닐랑가 몰라? 하여튼지 그 기술도 참 굉장혀."

천두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고,

"잽히지 말거래이, 우리 원수 갚아주는 셈 쳐서라도 절대 잽히믄 안 되는 기라. 하모, 한 발 먼저 해묵는 놈이 장땡인 세상인께네."

김 씨가 술기 젖은 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천두만은 오랜만에 술에 흥건하게 취해 움막의 거적을 들쳤다.

"하이고, 돼지우리 겉은 움막이라도 내 집이 요리 좋은지 인자 알겄네 이."

그는 너저분하고 눅눅한 방바닥에 벌렁 드러눕다 말고 한쪽 어깨를 잡고 아이구구......, 신음을 물었다. 두들겨 맞은 자리가 찢어지는 듯 긴 꼬챙이로 찔러대는 듯 심하게 아팠다.

"요런 때 마누래가 있어야 찜질도 혀주고 주물러주기도 허고 헐 것 아니여. 요놈으 신세 참말로 눈물나시......."

천두만이 혼자소리를 하며 아내를 떠올렸다. 아내가 못내 그리웠다. 아내의 솜씨가 담긴 밥상도 받아보고 싶었고, 아내와 함께하는 그 아늑하고 푼더분한 잠자리도 하고 싶었다. 밥상보다도 더 간절한 것이 잠자리였다. 밥이야 붙여먹고 있으니 그런대로 넘길 수 있었지만 잠자리의 굶주림은 아내가 없고서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잘 먹지도 못하면서 허덕거리고 살면 그 생각이 나지 말아야 할 텐데, 어떻게 된 것이 그 생각은 밥 안 먹으면 배고파지는 것처럼 어김없이 마음을 설렁거리게 하고는 했다. 어찌할 수 없이 혼자 해결을 하며 사창가를 떠올리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돈이 아까워 그런 생각은 이내 지웠다. 그런데, 오늘 알고 보니 그 돈이 3천환이라......, 식구들을 불러올릴 때까지 앞으로 몇 년이 더 걸릴지 모르지만 여자 품어보기는 그른 일이었다.

"아이고, 이 젊은 삭신에 으째야 쓴다냐 와."

천두만은 크게 외친 탄식에 맞추어 쭉 기지개를 켜다가 또 아이구구......, 신음하며 몸 을 웅크렸다. 천두만은 다음날 일을 나갈 수가 없었다. 어깻죽지와 팔만 아픈 것이 아니라 옆구리며 몸통까지 결리고 들뜨는 것 같으면서 몸살이 이는 것처럼 온몸이 무겁게 늘어졌다. 밥상을 받고 보니 나삼득도 앓는 소리를 하며 맥이 풀려 있었다.

"애맨 사람덜얼 요리 골병들게 맹글다니, 그냥 당허고만 있어서 되겄소? 얼굴 안께 그놈헌테 직방으로 웬수 못 같을 판이면 그놈 새끼라도 잡아다가 반 죽게 맹글어뿌러야제."

그렇지 않느냐는 듯 갈포댁이 독오른 눈길로 천두만을 쏘아보았다.

"금메 말이오, 나도 엊지녁에 벨 생각을 다 혀봤는디.... 어째야 좋을랑가 안직 몰르소."

천두만은 갈포댁의 눈길을 피해 나삼득을 쳐다보았다.

"실답잖은 소리덜 말어. 시상이 분허고 원퉁헌 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닝께. 그리 웬수 갚음 헐라면 우리 다 죽을 작정 허고 나서야 허는 것이여. 그럴 맘 없음사 다 잊어뿌러. 재수 읎어 독새헌테 물렸다고 생각허고."

나삼득이 아내에게 눈총을 쏘며 엄한 기세로 말했다.

"야아, 성님 말씸이 맞구만이라. 분허고 원퉁절퉁혀도 참으시씨요, 형수님. 때린 놈은 발 못 뻗고 자도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잔다고 안 헙디여."

천두만은 갈포댁에게 위로의 눈길을 보냈다. 밥상에는 전에 없이 쇠고기까지 약간 다져 넣은 미역국이 올라 있었다.

"어깨 풀릴 때꺼정 메칠 지게질 허기는 글러묵었고, 그렇다고 구둘장 지고 눠 있으면 더 큰 병 도진께 요것 들고 날 따라나스소."

말이담배에 불을 붙인 나삼득은 헌 포대를 천두만 앞으로 던졌다.

"요것 갖고 워디 가는디라?"

천두만은 뜨악하게 나삼득을 쳐다보았다.

"동냥질 나스는 것 아닝께 걱정 말어."

나삼득도 움막을 나서며 헌 포대를 어깨에 걸쳤다. 그는 가끔 앓는 소리를 가늘게 낼 뿐 약수동에 접어들 때까지 말이 없었다. 천두만은 누워서 자고 싶은 생각뿐이었지만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의 뒤만 따라 걸었다. 천두만은 걷기가 너무 힘겨워 지나가는 시내버스들을 바라보고는 했다. 그러나 버스를 타자는 말은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 서울에 도착하는 날 마중 나온 나삼득을 따라 한 번 타보았을 뿐 그동안 더는 발을 올려놓은 적이 없는 버스였다. 지게 진 사람을 태워주지도 않았고, 차비가 아까워 탈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시장을 오가며 곁눈으로 보아온 약수동은 왜식 집들이 유난히 많은 부자동네였다. 고향에서도 몇 채 안 되는 왜식 집에는 이상하게도 부자들이 살고 있었다. 천두만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약수동 골목으로 들어선 나삼득은 집집마다 대문 옆에 나와 있는 시멘트 쓰레기통을 뒤지기 시작했다.

"성님, 시방 멀 허요?"

천두만은 답답하고 어이없어 더는 입을 봉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꼭 콩이야 폴이야 허고 말을 혀야 혀? 잘사는 동네 쓰레기통 뒤지면 빈 병이야 머시야 잡동사니 주워서 한두 끄니 벌이는 된단 말이시. 그냥 구둘장 지고 눠 있으면 누가 밥 줘?"

나삼득은 쓰레기통을 뒤지다 말고 고개를 꺾어들어 천두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마에 주름이 잡힌 그 얼굴은 검게 메마르고 초췌해 보였다. 천두만은 언뜻 그 얼굴이 나삼득 같지가 않았다. 그 얼굴에 또 다른 나삼득의 얼굴이 겹쳐지고 있었다. 달빛과 불빛을 받으며 환하게 웃고 있는 살 오른 얼굴이었다. 정월 대보름날 밤에 달이 떠오르는 것에 맞추어 달집을 태울 때 볼 수 있었던 나삼득의 그 얼굴. 꽹과리 소리에 맞추어 덩실거리는 몸짓을 따라 벙글거리던 그 복스럽던 얼굴은 어디로 가고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는 나삼득의 얼굴은 태어날 때부터 거지였던 것만 같았다. 천두만은, 고향산천이 떠오르며 서러움이 복받쳐 오르는 것을 감추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려라. 개맨치로 벌어서 정승맨치로 쓰면 된께 어여 벌어서 고향 찾어값시다."

천두만은 이렇게 말하며 다른 쓰레기통으로 발을 옮겼다.

천당허고 지옥이 죽어서나 있는지 알었둥마 그것이 아니여. 여그가 천당이면 나가 사는 디가 영축없이 지옥이여. 여그 사는 사람덜언 멀 혀묵고 살간디 요리 잘들 사는고? 사람이 사람이라고 다 똑겉은 사람이 아니여. 여그 사람들에 비허면 움막에 사는 것덜언 즘생 아니라고. 나가 평상 발싸심혀대도 이리 살아보기는 글른 것이겄제? 사람이 한 분 태어났다가 한 분 죽는 것이야 다 똑겉은디 워디서보톰 잘못되야 요리 차등이 나는 것이제? 삼득이 성님도 맴이 참 기맥히겄제.......’

이런 생각을 하며 몇 번인가 골목을 꺾어 돌았을 때였다.

"야 이 새끼들아, 어디서 굴러든 개뼉따귀들이야!"

갑자기 터져나온 고함에 나상득과 천두만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골목 가운데 한 사내가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커다란 망태를 한쪽 어깨에다 삐딱하게 메고 한 손에는 쇠로 된 쓰레기집게를 든 넝마주이였다.

"요런 호로새끼, 대갱이에 안직 피도 안 모른 놈이 어따대고 욕질이냐, 욕이! 매운 맛 잠봐야겄어?"

나삼득이 소리쳤고,

"쩌 호로새끼럴 당장 패대기쳐뿔께라?"

기운 쓰는 데는 자신 있는 천두만이 눈을 부릅뜨며 나섰다. 그렇잖아도 심란하던 참에 스무 살도 못 되어 보이는 넝마주이가 욕을 해대자 그는 그만 심사가 뒤틀리고 말았다.

"좆같은 새끼들, 둘이라고 까불어. 느네들 꼼짝 말고 그대로 있어. 우리 땅에 들어온 놈들은 뼈를 추리고 말 테니까."

넝마주이는 망태를 벗어던지더니, "형니임, 형니임!" 목청껏 외쳐대며 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어이, 싸게 튀세. 저 떼거리는 땅벌보담 더 무섭네."

나삼득이 다급하게 말하며 뛰기 시작했다. 천두만도 얼떨결에 그 뒤를 따라 뛰었다. 큰길을 몇 개 건너고 나서 그들은 뛰기를 멈추었다. 천두만이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워찌 그리 허망허니 내빼뿐다요?"

숨이 가빠 얼굴이 일그러진 나삼득은 가로수에 기대앉으며 손을 저었다. 천두만도 나삼득 옆에 주저앉으며 쌈지를 꺼냈다. 그는 천천히 담배를 말아 나삼득에게 건넸다. 그리고 자기도 한 대를 말아 물었다.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고 나서 나삼득이 입을 열었다.

"갸덜 구역쌈은 깡패덜 구역쌈보담 못헐 것이 읎제. 그 떼거리에 잽히는 날에는 반죽음 당헌께 튀는 것이 상수여."

"참말로, 이것이고 저것이고 벌어묵고 사는 것은 구두닦이꺼정 지 구역 읎는 것이 읎소 이."

천두만은 어깨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고,

"금메, 서울이 그려."

나삼득이 스산하게 웃음지었다.

"글먼 요것도 더 혀서는 안 되는 짓 아니요?"

"그 무신 배불른 소리여? 눈치껏 먼첨 묵는 것이 임자제. 넘 입에 든 것도 못 빼묵어서 환장 들린 시상에. 또 살살 가보드라고."

그들은 골목골목을 타고 성수동 쪽으로 빠졌다. 이것저것 돈이 될 수 있는 것들을 집어넣다 보니 포대는 반이 차오르고 있었다.

"어이, 저 그늘에서 잠 쉬어가세."

나삼득이 고갯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골목이 세 갈래로 갈라지는 그곳은 꽤 넓은 공터였다. 그 한쪽 집 그늘에는 이상한 시설을 한 리어카를 열댓 명의 아이들이 바글거리며 둘러싸고 있었다. 나삼득을 따라 리어카 가까이 간 천두만은 그 시설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그것은 가운데 쇠기둥에 연결시켜 양철로 다섯 개의 비행기 모형을 만들어 아이들을 태우는 놀이기구였다. 밀짚모자를 쓴 남자가 아이들을 하나씩 안아 올려 울긋불긋하게 칠한 비행기에다 태워나갔다. 비행기 몸체에는 뉴욕, 런던, 파리 같은 이름이 색색의 페인트로 씌어 있었다. 비행기에 탄 아이들은 셋이었다. 남자는 둘러선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그때 비행기에 탄 한 아이가 쨍하게 소리쳤다.

"아저씨, 뭐해요. 빨랑 떠나요."

"응 그래, 그래, 자아, 날아간다아......."

두 도시에 손님을 채우지 못한 채 그 남자는 비행기 날아가는 소리를 흉내 내며 손으로 모형 비행기들을 돌리기 시작했다. 생담배가 타는데도 나삼득은 담배를 빨 생각은 하지도 않고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그 놀이기구에 눈을 박고 있었다.

"성님, 아들 태워주고 잡아서 그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천두만은 이렇게 물었다.

"? , 아니여. 저것이 돈벌이가 어쩔랑가 생각혀 보는 것잉만."

천두만은 그제서야 나삼득이 왜 굳이 여기서 쉬자고 했는지를 깨달았다.

"야아, 저것이 돈벌이는 되기는 허겄는디......, 밑천이 솔찬이 들덜안컸는게라? 리야카도 그런디다. 저 비행기덜 맨그는 것은 훨씬 비쌀 것인디......."

"그려......, 솔찬헌 돈이겄제......."

나삼득이 무겁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5분쯤 지났을까. 그 남자는 비행기 돌리던 것을 멈추고 아이들을 차례로 내려놓았다.

"저어, 애 많이 쓰시오. 근디, 벌이는 잘되시오?"

나삼득이 그 남자에게 다가가 공손하게 인사하며 물었다.

"이거 말이오? 이거 원, 코 묻은 돈 받아서 세 끼 먹기 어려워요. 빈 자리 없이, 공치는 시간 없이 뺑뺑이를 돌리면 그래도 좀 돈이 모아질 텐데, 다들 살기가 넉넉잖으니 열 애들 중에 잘해야 두세 아이가 타는 형편이니까 본전 찾기도 어려워요. , 해볼 맘 있으슈?"

그 남자가 밀짚모자를 밀어올리며 목마른 입맛을 다셨다.

"아니, 첨 보는 것이라 그냥 물어보는 구만요. 나야 그럴 밑천도 읎는 지게꾼이어라. 글먼 돈 많이 버씨요."

나삼득은 고개를 꾸벅하고는 돌아섰다. 천두만은 그런 나삼득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도 이것저것 눈에 띄는 돈벌이에 마음이 끌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겨울의 풀빵장사, 여름의 냉차장사, 철을 안 타는 야미 담배장사, 어서 돈을 모아 그런 것을 해보고 싶었다.

"나가 말이시, 질로 허고 잡은 것이 먼지 아는가? 고물상이여 고것이 밑천 들어가는 것에 비혀서 이익이 엄칭이 큰께로. 사딜이는 값보담 다섯 배, 열 배가 남는 것이 그 장사란 말시. 넘 보기에 추접시럽고 하품 나게 뵈는 그 속에 알짜가 들었단 말이여. 근디 은제나 그날이 올랑가 원."

나삼득이 골목을 걸어가며 시름겹게 말했다.

"금메요, 워디서 돈다발을 줍는 재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천두만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쓰레기통을 뒤지며 한참을 걷다가 나삼득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워째 대문이 열렸제......?"

중얼거리는 그의 눈길은 반쯤 열린 어느 집 대문으로 가 있었다.

"집 비우고 잠시 어디 간 것일랑가."

그는 머뭇거리며 대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는 안을 기웃기웃하다가 소리쳤다.

"고물 삽시다아."

집 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보시오 아주머니, 고물 삽시다아."

그의 외침은 더 커졌다. 그러나 집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어이, 빈 집이여. 나가 망볼 것잉께 자네 싸게 들어가서 저 옷들 싹 걷어 갖고 나와."

나삼득이 이상한 눈빛으로 천두만에게 재빨리 말했다.

"워메, 그것이 긍께......, 저어......, 머시냐......."

천두만은 겁 질린 얼굴로 두서없는 소리를 하며 허둥거리고 있었다.

"요런 지기럴, 자네가 망봐."

나삼득이 급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빨랫줄에 널린 옷 네댓 가지를 한꺼번에 몰아 걷어 포대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대문을 나오기까지 그 시간은 미처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나삼득은 아까 약수동에서보다 더 날쌔게 뛰었다. 천두만도 그 뒤를 따라 뛰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숨을 쉴 수 없도록 가슴이 벌떡거리고 눈앞까지 아찔아찔했고, 누가 곧 뒷덜미를 잡아채는 것만 같았다. 큰길로 나선 나삼득은 뛰기를 멈추었다.

"성님, 워쩔라고 그요? 더 멀찍허니 내빼야제."

천두만은 몸이 달아 뒤를 돌아보았다.

"자네는 당아 멀었어. 아까는 잽히면 피럴 본께 그리 좆 빠지게 뛰었제만, 시방 더 뛰면 의심살랑가도 몰릉께 그만 뛰는 것이여. 요만치 왔으면 그 집허고는 뚝 떨어졌응께."

나삼득은 자신감이 찬 얼굴로 씨익 웃었다.

"성님, 워디 가서 잠 쉽시다."

천두만은 길을 건너며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까지도 가슴은 심하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 간이 그리 콩알만혀 갖고 워찌 서울 살아지겄어? 첨에넌 다 그런 법잉께 너무 걱정허든 말소."

나삼득은 허허허 두툼하게 웃으며 천두만의 어깨를 두들겼다. 천두만은 자기도 어서 그리 되고 싶었다. 자신도 분명 옷이 탐이 났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다리가 딱 굳어지며 꼼짝을 못하게 겁이 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전에 남의 물건에 전혀 손을 댄 일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보리서리, 밀서리는 주인에게 쫓겨 다니면서 해먹었고, 다 커서는 닭서리도 예사로 해먹었던 것이다. 그런데, 옛날에 그런 짓을 할 때는 히히덕거리며 했는데, 아까는 왜 그리도 가슴이 벌떡거리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남의 물건에 손대기는 마찬가지니까 앞으로는 옛날처럼 마음먹어야 한다고 천두만은 스스로를 일깨웠다. 그렇게 겁먹은 꼴을 나삼득에게 보인 것이 은근히 창피하기도 했고, 다음에 또 그래서는 병신 취급을 당할 것 같기도 했다. 나삼득에게 병신 취급을 당해서는 좋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사흘째 되는 날 일을 나가기로 했다.

"성님 몸 괜찮허겄소?"

"참아야제 워째. 벌이도 벌이고, 우리 구역 더 오래 비워두면 안 된께."

"그간에 벨일 읎겄제라?"

천두만은 그동안 마음이 쓰였던 말을 꺼냈다.

"하먼. 무신 일 있으면 그냥 두가니? 우리 없을 때 벌어 묵었으면 되았제 더 까불면 다리몽뎅이럴 뿐질러 내몰아야제."

나삼득은 섬뜩한 살기가 느껴지도록 거세게 말했다.

"그런 놈 있으면 나가 맡을라요, 성님. 우리 밥그럭얼 누가 건디려라."

천두만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화답했다.

 

 

9. 나라 아닌 나라

혹독했던 9월이 끝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9월 들어 태풍의 잔혹한 피해만 겪은 것이 아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뇌염이 창궐하는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뇌염은 8월 중순 무렵부터 퍼지기 시작해 9월 초순을 넘기며 기세가 꺾여들었다. 그런데 그 한 달이 못 되는 사이에 뇌염 발병자는 2천여 명이었고 사망자는 자그마치 500여 명이었다. 그나마 올해는 태풍이 모기떼까지 휩쓸어 가 그랬는지 덜한 편이었고, 해마다 전국 학교들이 뇌염방학을 따로 할 정도로 뇌염 발생은 연중행사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정부의 무대책 속에서 여름은 뇌염 사망시대, 겨울은 연탄가스 사망시대가 연출되고 있었다.

"다 깨어지는 때에 혼자 성키 바랄소냐.

금이야 갔을망정 벼루는 벼루로다.

무른 듯 단단한 속을 알 이 알까 하노라."

국어선생이 운율을 맞추어 시조를 읽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나?"

국어선생이 책을 내리며 물었고, 학생들은 조용했다.

"이건 친일을 안 할 수 없었던 입장을 변호하는 거다. 그럼 다음 시로 넘어간다."

국어선생을 따라 학생들이 일제히 책장 넘기는 소리가 무슨 화음 잘 맞는 가락처럼 신선하게 교실 안에 퍼졌다. 그런데, 시 한 편을 가지고 한 시간씩 세세하게 분석하고 해설하고 감상해 왔던 것에 비해 국어선생의 그런 태도는 뜻밖이었다.

"선생님, 질문 있습니다."

그때 한 학생이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이미 책장을 넘긴 학생들의 눈길이 그쪽으로 쏠렸다.

"왜 이런 친일파의 시조가 교과서에 실려 있는 겁니까?"

학생이 벌떡 일어서며 던진 질문이었다. 그는 아직도 경상도 어감이 그대로 살아 있는 이상재였다. 유일표는, 하 저거 제법이다, 하고 생각했다. 그 질문은 자신도 얼핏 생각하며 그냥 지나친 문제였다.

"그래, 저거 말 되잖니?"

옆자리의 학생도 유일표에게 속삭였다. 유일표는 선생에게 눈길을 보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런 게 교과서에 실렸냐구? 에에......, 그게 말야......, 그게 그러니까......."

국어선생은 몹시 난처하고 곤혹스러운 얼굴로 어물거리다가,

"누구 대답할 수 있는 사람?"

하며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학생들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 조용함이 운동장에서 체육을 하고 있는 학생들의 소리를 불러들였다.

"좋아, 이건 숙제다. 모두 다음 시간까지 알아오도록."

국어선생의 갑작스럽고도 엉뚱한 말이었다. 대답을 피하는구나, 유일표의 느낌이었다. 왜 대답을 피하십니까 하는 질문이 반사적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참았다. 이상재가 하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이상재는 그 질문을 하지 않았고, 국어선생은 다음 시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유일표는 새 시를 보지 않고 그 시조에 눈길을 박고 있었다. 그건 육당 최남선의 <깨진 벼루의 명()>이었다. 이상하다, 왜 대답을 피하지? 이상재는 또 뭐야. 선생이 대답을 피하는 눈칠 채지 못했나? 유일표는 이런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유일표는 곧 이상재에게로 갔다. 아이들은 변소 가기에 바쁘고 잡담으로 소란할 뿐 그 문제를 화제 삼지 않았다.

"너 아까 국어선생이 대답을 피하는 눈칠 못 챘냐?"

", 내가 그리 바보로 보이나?"

이상재가 책을 꺼내며 반문했다.

"근데 왜 대답을 피하느냐고 다시 묻지 않았어. 난 그 질문을 할 줄 알고 기다렸는데."

"듣고 보니 그렇네. 나는 숙제라 캐서 그냥......."

"너희들 그 얘기 하니? 그 얘기 땜에 그러는데 이따가 점심시간에 좀 만날래?"

그때 그들 옆으로 한 학생이 다가서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는 이름보다 지각대장으로 더 잘 통하는 23번 허진이었다. 이상재와 유일표는 어리둥절했다가, 이상재가 곧 입을 열었다.

", 지금 얘기하면 안 되나?"

"곧 시간 시작되잖아. 이따가 봐."

허진은 무표정하게 돌아섰다. 그들은 점심을 서둘러 먹고 운동장 한쪽의 바위동산으로 갔다.

"아까 들으니까 국어선생한테 왜 대답을 피하는지 다시 묻지 않았느냐고 하던데, 안 묻기 잘했어. 물어봤자 그런 비겁자는 제대로 대답할 리 없거든."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눈썹 짙은 허진이 대뜸 한 말이었다.

", 비겁자?"

이상재가 놀라며 되물었고, 유일표도 그 당돌함에 놀라고 있었다.

"그래, 국어선생은 비겁한 자야. 왜 그런지 모르겠니? , 이따위 시조가 교과서에 실린 건 친일파들이 교과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게 국어선생이 해야 할 대답이었단 말야. 근데 국어선생은 무서워서 그 말을 피해버린 거야. 학생들한테 그런 말했다는 게 알려지면 당장 이거니까."

허진은 쪽 편 손바닥으로 목을 치는 시늉을 보였다.

"아니, 넌 그런 걸 어떻게 다 아냐?"

동급생 같지 않은 허진에게 충격을 받으며 유일표가 물었다.

"그건 알 거 없고, 난 이상재 너의 질문이 나왔을 때 반가웠고, 국어선생이 제대로 대답하길 바랐어. 그건 학생들 모두가 알아야 하고, 국어선생은 올바로 가르쳐줄 책임이 있는 중요한 문제거든. 근데 국어선생은 얼렁뚱땅 넘겨버렸으니 비겁자고, 국어선생 자격이 없어. 국어가 낱말 뜻풀이나 하는 게 아니잖니? 난 오늘부터 그 사람 경멸해."

허진은 꼭 유식한 어른처럼 말하고는 경멸을 강조하듯 침을 내뱉었다.

"너 혹시 느그 집안이......?"

이상재가 허진을 응시하며 물었고, 유일표도 같은 생각이 스치고 있었다.

"왜 말을 하다 말지?"

허진은 짙은 눈썹이 꿈틀하도록 눈에 힘을 모아 이상재를 맞바라보았다.

"독립투사 집안이지?"

"그래, 자랑할 것도 없고 숨길 것도 없는데 잘 맞췄어."

더욱 어른 같은 말투로 말하며 허진은 엷게 웃었다. 그 쓴 것 같기도 하고 찬 것 같기도 한 웃음이 스쳐간 허진의 얼굴을 유일표는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가슴은 묘한 감정으로 울렁거리고 있었다. 말로만 들어왔던 독립투사, 그리고 그 집안의 아들....... 감격스럽기도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그는 왜 지각대장이란 별명이 붙도록 지각을 자주 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근데 말야, 이 말을 해야 좋을지 어쩔지 모르겠는데......, 너 왜 자꾸 지각하지? 그건 좀......."

"됐어. 그건 차차 알게 될 거야."

유일표의 말을 자르며 허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더 말없이 바삐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로 갔다. 유일표는 새로운 친구 허진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은 궁금증이 커져가고 있었다. 담임선생은 지각이 결석보다 더 나쁘다며 아침마다 자신이 조회에 들어온 다음에 오는 지각생들의 볼기를 갈겼다. 결석은 피치 못할 이유가 있지만 지각은 게으름 때문이라는 거였다. 그러나 담임선생의 볼기치기로 허진의 게으름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는 1주일에 두세 번은 교탁을 잡고 엉덩이를 세 대씩 맞는 단골손님 노릇을 해오고 있었다. 그런 그는 그나마 뛰어왔다는 것을 입증하듯 으레 땀 흘린 모습이고는 했다.

"너 정말 버릇 못 고치겠어!"

담임선생이 화를 내도 허진은 아무 말 없이 교탁을 잡고 엉덩이를 내밀었다. 허진에 대해 아는 건 그 정도뿐이었다. 그런데 허진의 한마디는 지각하는 것에 어떤 다른 이유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사실 엉덩이를 맞는 것은 아프고도 창피스러운 일이었다. 유일표는 전차 속에서도 두 가지 의문에 줄곧 시달리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 친일파들이 교과서를 만들게 되었을까? 어째서 국어선생이 그런 걸 가르친 게 알려지면 쫓겨나게 될까?

"얘들아, 미안해. 내가 할 일이 있어서 바빠. 담에 얘기하자, 정말 미안해."

수업을 다 마치고 더 얘기하고 싶었지만 허진은 이 말을 남기고 허둥지둥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유일표는 몇 번 망설였지만 남천장학사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 의문을 풀지 않고는 다른 공부가 될 것 같지 않았다. 그 생각 때문에 오후 수업도 다 망친 꼴이었다. 김선오 형은 나가고 없었다. 유일표는 이규백의 방을 찾아갔다.

"뭘 좀 여쭤볼 게 있어서 왔는데, 공부에 방해될까 봐서......."

"들어와. 공부에 관한 것이면 괜찮아."

수척한 얼굴의 이규백은 눈을 비비며 희미하게 웃었다. 유일표는 국어책을 꺼내놓고 오늘 있었던 일을 간추려 이야기하고, 그 두 가지 의문을 덧붙였다.

"그래, 아주 골치 아프고 중대한 문제에 네가 부딪쳤구나. 너도 이젠 수염이 나는 나이니까 알 건 알아야겠지."

담배에 불을 붙이는 이규백의 얼굴은 처음의 흐릿하던 얼굴이 아니었다.

"자아, 나도 다 아는 건 아니고, 아는 데까지만 얘기할 테니까 들어봐라. 우리나라가 해방되었을 때, 왜놈들 편에서 앞잽이 노릇을 했던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은 대략 160만 명쯤 되었다. 그놈들은 당연히 법에 따라 처벌을 했어야 하는데 미군정에서 과거를 불문한다면서 그놈들을 다시 써먹었지. 독립투사들을 고문했던 고등계 형사 출신 놈들이 다시 경찰 노릇을 하고, 총독부 관리질을 해먹었던 놈들이 다시 공무원 노릇을 해먹는 꼴이 된 거야. 더 기막힌 건 말야, 왜놈들이 비워놓고 간 높은 자리에 그런 놈들이 승진까지 되는 판이었지. 미군정은 자기들 뜻대로 남쪽을 지배하기 위해 앞잽이들이 필요했던 것이고, 꼼짝없이 감옥살이를 할 줄 알았던 그놈들은 자기들의 구세주인 미군정에 충성을 다 바치고, 아주 궁합이 잘 맞았던 거야. 그러나 그런 부당한 처사에 대한 국민들의 원성과 반발이 격렬해 48815일 대한민국을 수립하자마자 97일 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통과시키게 되었지. 그리고 492월부터 반민특위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면서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 문필가 이광수, 최남선, 고등계 형사 노덕술 같은 자들이 속속 체포되기 시작했지. 그러나 위기를 느낀 왜경 출신 경찰간부들이 주동해서 반민특위를 습격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만행이 벌어졌어. 이승만 정권은 그 엄청난 폭거를 묵인했고, 결국 반민특위는 498월 말로 해산되고 말았지. 그 뒤로 친일파들은 모든 분야에서 멋대로 득세하기 시작하면서 이 나라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천국이 되어버린 거야. 국가의 3대 기구인 입법, 사법, 행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교육계, 예술계 그리고 사업가들까지, 실권은 모두 그놈들이 장악했지. 그래서 제놈들 입장을 변호하고, 반감을 없앨 목적으로 그런 시조까지 교과서에 실리는 음모를 꾸민 거야. 너희 국어선생이 대답을 피한 것도 비겁하긴 하지만 딱하기도 하지. 교장부터가 친일파일 거고, 친일파를 매도하는 교육을 했다는 게 상부에 알려지면 공립학교 선생 목숨은 하루아침이야. 그리고 친일파들이 제일 싫어하고 미워하는 존재가 누구겠냐? 도둑놈들이 경찰 싫어하듯 독립운동가나 그 집안 아니겠어? 6.25 직전까지 독립운동 했다면 취직이 안 되던 게 이 나라였다. 지금도 천대받고 괄시당하기는 마찬가지고. 어찌 좀 도움이 됐냐?"

이규백은 혀끝으로 입술을 축이며 담배를 빼들었다.

"이건 나라도 아니잖아요!"

유일표의 떨리는 외침이었다.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이 정신 차려야지. 그만 가거라, 가서 밥해야 되잖아."

유일표는 비탈길을 오르며 또 허진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쉬는 시간에 이상재의 자리로 찾아왔던 심정을 이제야 비로소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진창의 구덩이에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무수한 발들이 걷어차고 있었다. 간신히 가장자리를 붙들면 수많은 발들이 걷어차 구덩이 가운데 진창에 처박혀 허우적거리며 다시 사력을 다해 팔을 뻗치고, 또 채이고....... 그 무수한 발들은 군홧발이었다. 지치고 지쳐 끝내 진창 속으로 꼴깍 잠기고 말았다. 그 순간 한인곤은 무슨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잠이 덜깬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그의 이마는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고, 눈은 잠을 잔 것 같지 않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며 긴 숨을 내쉬었다. 날이 새 아내가 나가고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는 어금니를 물며 담뱃갑을 끌어당겼다. 그런 악몽은 한 달이 지나도록 하룻밤도 거르지 않고 찾아들었다. 잊어야 한다고, 잊을 수 있다고 자신을 했지만 스스로의 마음은 스스로의 뜻대로 말을 듣지 않았고 지배할 수도 없었다. 끝도 없는 낭떠러지에서 곤두박히는가 하면, 총알이 빗발치는 속에서 온몸이 구멍 뚫려 죽어가기도 했고, 수많은 탱크에 쫓기다 쫓기다 깔려 죽기도 했다. 그건 예편이 몰아온 병이었다.

"그건 직장을 잃는 경우 흔히 나타나는 증상인데, 빨리 새 일을 찾도록 하십시오. 그것도 일종의 병인데 오래 방치하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다 잊도록 노력하세요."

아내의 성화로 병원에 끌려가서 의사한테 들은 말이었다. 의사가 준 안정제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종기나 맹장이 아닌 바에야 의사를 탓할 수도 없었다. 스스로의 마음을 스스로가 어쩌지 못하는데 그 형체도 모양도 없는 마음이라는 것을 의사더러 어떻게 해달라고 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분명 새 일을 결정했는데도 악몽이 계속되고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군대에 그리도 애착을 가졌었던가......, 깊이 빨아들인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한인곤은 새삼스럽게 자신을 되짚어보고 있었다.

"아빠, 일어났어?"

"아빠, 아빠, 동전 줘, 동전."

아홉 살, 여섯 살짜리 두 아들이 요란스럽게 뛰어들었다.

"오냐, 오냐, 이놈들아 뛰지 말어."

한인곤은 마음을 바꾸며 있는 껏 기지개를 켰다. 칙칙한 마음처럼 아침마다 몸도 찌뿌드드 했다.

"아빠아, 빨리 동전."

작은놈이 왼손을 받쳐 오른손을 내밀며 어리광을 부렸다. 새로 나온 동전을 구해다 주기로 어제 손가락까지 걸어 약속했던 것이다.

"그래 기다려라. 어디 보자......."

한인곤은 양복주머니에서 종이에 싼 동전뭉치를 꺼냈다.

"자아, 100환짜리하고 50환짜리는 하나씩, 10환짜리는 둘씩."

한인곤은 두 아들의 손바닥에다가 말에 맞추어 세 가지 동전을 나눠주었다. 그건 10월 중순부터 유통되기 시작한 최초의 동전이었다.

"와아, 우리 아빠 최고!"

두 아들은 환성을 지르며 서로 다투어 아버지를 얼싸안고 매달리고 법석을 피웠다. 그래, 이놈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정신을 차려야지. 아직도 시퍼런 나이가 아니냐. 한인곤은 행복감과 함께 새로운 의지로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아유 시끄러, 얘들아! 오빤 애들 버릇은 안 잡고 함께 놀아요?"

"왜 또 투정이냐?"

한인곤이 여동생을 올려다보았고, 두 아이는 고모를 향해 혀를 빼물고 용용 죽겠지를 해대고 있었다.

"책 사게 돈 좀 주실래요?"

한정임의 목소리는 나긋하게 변했다.

"며칠 전에 준 건?"

"선풍적인 베스트셀러가 새로 나왔어요."

"베스트셀러? 또 연애소설이냐?"

"어머, 오빤 참. <8요일>이라구, 폴란드 작가 소설인데 오빠도 한번 읽어봐야 해요. 사회인 자격 갖추려면."

"아니, 8요일도 있나? 하긴 세상 물정 배울려면 그런 것도 읽긴 읽어야겠지."

한인곤은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입맛 없는 아침을 먹고 한인곤은 장롱을 열었다. 그리고 몸을 획 돌리던 그의 동작이 딱 멈춰졌다. 그의 상체는 반쯤 돌려졌고, "여보, 군복 어딨어" 하고 외치려던 입이 크게 벌어져 있었다. 한인곤은 잔뜩 힘이 실렸던 어깨를 늘어뜨리며 푹 한숨을 쉬었다. 이 습관에서 벗어나려고, 이 착각을 떼치려고 얼마나 애를 써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밤마다 악몽이 집요하게 달라 붙는 것처럼 그 습관과 착각도 야속하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그런 습관과 착각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대문을 나서며 출근할 지프를 찾았고, 길을 가다가 군인을 만나면 경례받을 준비를 했고, 민간인과 첫인사를 하며 손이 이마로 올라갔고, 식당 같은 데서 구두를 벗고 신으며 구두끈을 풀고 매는 헛손질을 하고는 했다. 명령조의 말투로 다방 아가씨들의 눈총을 받거나, 학교 운동장을 연병장이라고 하는 것쯤은 그나마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한인곤은 어설픈 솜씨로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었다. 장롱을 닫자 그 문에 붙은 거울에 전신이 비쳤다. 한인곤은 또 군복을 입고 버티고 선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으며 신음을 씹었다.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은 대령 계급이 아니었다. 양쪽 어깨에 별 여덟 개가 붙은 4성 장군 한인곤이었다. 정치인들이 하나같이 대통령을 꿈꾸듯이 직업군인들이 4성 장군을 꿈꾸지 않는다면 그건 비정상이었다. 4성 장군의 꿈은 소위에서부터 계급이 올라갈수록 점점 크고 강해져 갔던 것이다.

"이제 그만 찾는 게 어때요."

한인곤이 구두를 신는데 그의 아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야. 임전무퇴야."

한인곤은 말을 해놓고 곧 후회했다. 그것 역시 군대용어였다. 그러나 힘주어 한 그 말은 아내한테보다 자기 자신에게 한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남재구 중령을 찾아야 했다. 새로 시작할 일에 그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한술 주웁쇼. 먹다 남은 밥 한술 주웁쇼오!"

대문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쉰 목소리가 담을 넘고 있었다.

"여보, 빨리......."

한인곤은 아내에게 눈짓했다. 밥 때 밥을 얻으러 다니거나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숱한 거지들이 마음에 담기기 시작한 것은 남재구를 찾아 변두리 판자촌을 뒤지면서부터였다. 판자촌의 가난은 사람이 저런 식으로 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비참했는데, 그들보다도 더 비참한 것이 거지였다.

"고맙습니다요, 복 받으십쇼."

때 절은 깡통에 밥을 받은 거지가 깊은 절을 하고 돌아섰다. 아내가 대문을 닫고 들어가자 한인곤은 누더기 걸친 거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뒷모습에 자신과 남재구의 모습이 어리고 있었다. 거지 노릇만 하지 않을 뿐 초라하고 남루하기는 저 거지꼴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한인곤은 버릇처럼 또 어금니를 맞물었다. 어디 두고 보자, 내가 이대로 죽진 않는다. 이 더런 놈의 세상을....... 그는 주먹을 말아쥐며 힘주어 발을 내딛었다.

금호동 산동네를 찾아가기 전에 한인곤은 다방부터 들렀다. 한가한 사람들처럼 모닝커피를 마시려는 게 아니라 정동진 준장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서였다. 집에 전화가 없으니 천상 다방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커피 줘. 너도 한잔하고."

한인곤은 전화 쓰는 눈치를 받지 않으려고 이렇게 말했다.

"어머, 정말요?"

아가씨가 활짝 반색을 하고는,

"모닝 둘이요."

주방쪽으로 가며 신바람 나게 소리쳤다. 모닝 둘? 한인곤은 쓰게 웃음 지었다. 모닝커피라는 것도 멋대로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그걸 줄여 모닝이라고 하는 건 더 멋대로였던 것이다. 모닝커피란 커피에다 달걀 노른자위를 띄워 아침나절에만 파는 한국식 커피였다. 그 맛이 이상야릇할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여보세요, 정동진 준장 부탁합니다."

"누구십니까?"

"한인곤 대......, 한인곤이라 합니다."

", 죄송합니다. 지금 긴급 회의 중이십니다."

"......!"

한인곤은 또 이상한 느낌을 받았지만,

"언제쯤 끝나겠습니까?"

감정을 누르며 물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군대식의 딱딱한 대꾸가 끝나면서 전화가 끊어지고 말았다. 이 짜식이 정말! 한인곤의 가슴에서 머리끝까지 화가 직통으로 치솟아 올랐다. 화가 너무 격심해 그는 현기증을 느끼며 송수화기를 놓았다. 그건 오해가 아니었다. 확실한 육감이었다. 정동진은 고의적으로 전화를 피하고 있었다. 세 번째 전화에서부터 그 느낌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오해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다섯 번째 전화를 건 거였다.

너마저 날 괄세해? 세상 인심 참 무섭다. 내가 무슨 손해를 입히는 것도 아니고 예비역을 만나면 안 된다는 근무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잖냐. 입장 난처하고 거북해서? 아무 쓸모가 없어서? 혹시 출세에 방해가 될까 봐? 그래 좋다. 인연을 끊겠다면 끊어야지.......’

한인곤은 담배를 연거푸 빨아대며 감정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참담한 패배감과 배신감은 어느 때 없이 거세게 밀려오고 있었다.

"참 면목 없네. 내가 무슨 힘이 있어야 말이지. 다 잊어버리고 새로 시작하게. 아직 서른여덟 아닌가."

예편 직후에 만난 정동진이 한 말이었다. 그때 다 잊어버리라고 했던 것은 자기까지 잊어달라는 뜻이었을까. 한인곤은 정동진에게 다시는 연락하지 않기로 작심하며 다방을 나섰다. 금호동 판자촌도 산비탈을 따라 퍼져나가고 있었다. 아래서부터 위로 야산을 점령해 나가고 있는 무허가 판잣집들의 볼품없는 모습은 거지들의 누더기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산을 뒤덮고 있는 광경은 가난한 나라꼴의 확대판이었다. 그런데 길들이 좁고 꾸불꾸불한데다가, 하수시설이 전혀 안 되어 더러운 물을 아무데나 버리고, 변소들마저 허술해 골목골목마다 퀴퀴하고 찝찌름하고 시금털털하고 쿠리텁텁한 냄새들이 뒤섞인 악취가 진동하고 있었다. 한인곤은 그런 산동네가 있는 신설동, 종암동, 미아리를 벌써 한 달이나 뒤지고 다녔다. 그러나 남재구의 행방은 감감하기만 했다. 그래서 금호동까지 발길이 이어지게 되었다. 그를 찾아 무작정 산동네들을 헤매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집을 찾아가니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이사 가고 없었고, 새 주인이 신설동 어디 산동네로 가는 눈치더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신설동 산동네를 뒤지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계속해서 산동네들을 찾아다니는 것은 그새 주인의 말이 확실하지가 않았고, 남재구가 다른 산동네로 또 이사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한인곤은 먼저 구멍가게부터 찾아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혹시 이 동네에 예비역 남재구 중령이라고 사는지 아십니까? 그 사람이 저하고는 군대 동기인데, 저도 이번에 예편해서 새 일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그 사람이 필요해서 찾고 있습니다."

한인곤은 그동안 수백 번을 되풀이한 말을 또 했다

"남재구 중령?......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 이게 제 명함입니다. 앞으로 좀 신경 써서 찾아 이 주소로 연락 주십시오. 제가 꼭 섭섭잖게 사례하겠습니다."

한인곤은 명함을 내밀었다. 그건 일반 명함과 달랐다. 명함 위에는 '예비역 남재구 중령을 찾습니다'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 다음에 한인곤은 반장 집을 찾아가서 똑같은 순서를 되풀이했다. 동회를 찾아가지 않은 것은 산동네일수록 동적부가 형편없이 부실했던 것이다. 드물게 눈에 띄는 복덕방도 물론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엿새 동안 금호동을 돌았지만 역시 남재구는 자취가 없었다. 한인곤은 지칠 만큼 지쳐 있었다. 그동안의 고생이 힘들기도 했지만 더 찾아가볼 만한 데가 없는 것이 더 맥이 떨어지게 했다. 남재구를 꼭 찾아야 하는 건 자신의 일 때문만이 아니었다. 남재구가 그런 산동네에서 사는 걸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전쟁에서 목숨을 내걸고 싸웠던 예비역 중령이 호의호식은 못하더라도 그런 지옥 같은 곳에서 산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만 애태우고 신문에 광고를 한번 내보세요. 본인이 못 보더라도 딴사람이 보고 알려줄 수도 있잖아요."

그의 아내가 한 말이었다.

"글쎄, 그게 무슨 효과가 있을까......."

한인곤도 오래 전에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젠 딴 방법이 없잖아요."

한인곤은 이틀을 더 생각하다가 마지막 방법으로 신문광고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보통 사람 찾는 광고와 다르게 했다. 크기를 세 배로 늘리고, 자신과 남재구가 함께 찍은 사진을 넣고, 소식을 알려주는 사람에게 '후사(厚謝)'하겠다는 막연한 말을 쓰지 않고 '50만 환 사례'라고 확실하게 밝혔다. 그 돈은 쌀 50가마 값이라고 아내가 소스라쳤지만 한인곤은 "이건 우리 돈이 아니라 아버지가 내실 거야"하며 무질러버렸다. 광고를 내고 한인곤은 날마다 외삼촌 사무실로 나갔다. 전화 연락처가 그곳이었다. 그러나 닷새가 지나고 열흘이 지나도 남재구에 대해선 전화 한 통화가 없었다. 이 신문 저 신문을 뒤적거리며 나날을 보내는 데도 한인곤은 지쳐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꼴들 더럽게 떨고 앉았네."

한인곤은 뒤적이던 신문을 팽개치듯 하며 내뱉었다. 남산 꼭대기에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우남정(雩南亭)으로 했다는 기사였다. 우남은 이승만 대통령의 호였고, 한인곤은 100환짜리 새 동전에 이승만의 얼굴이 새겨진 것도 못내 역겨워해 오던 참이었다. 친일파들을 옹호해 온 이승만을 줄곧 비판적으로 생각했다가 예편을 당하면서 그의 감정은 완전히 뒤틀리고 말았다. 이승만의 동상은 남산공원만이 아니라 탑골공원에도 세워져 있었고, 이미 지폐에도 그 얼굴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새 동전에 얼굴을 새겨 넣고, 정자의 이름까지 그의 호가 붙여지는 것을 보면서 한인곤은 독재자의 추태에 경멸을 금치 못했다. 이승만 독재는 기필코 타도해야 한다. 한인곤은 또다시 그 생각을 다지며 자신이 선택한 길에 새로운 확신을 느끼고 있었다.

12월이 되면서 추위는 매서워졌다. 한인곤은 남재구 찾는 일에 차츰 마음을 접어가고 있었다. 그에게 맡길 일에 다른 사람을 물색할 도리밖에 없었다. 그동안 일을 준비하려고 천안의 고향집을 오르내리며 들은 소식으로는 정동진은 보직이 바뀌면서 영전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우정이라는 게 이런 것인가? 인간이라는 게 무엇인가? 이런 근본적인 회의에 괴로워하며 그는 자신이 아직까지도 정동진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음을 깨닫고 있었다. 신문에서도 군데 관계 기사에 제일 먼저 눈길이 쏠리는 것처럼. 12월 들어 군대 부정사건이 연달아 터지고 있었다. 퇴계원의 병참기지창에서 대량의 겨울피복이 유출되다가 적발됐다고 하는가 하면, 1년 동안에 부정 유출되는 각종 군수물자를 압수한 것이 506천여 점이고, 대통령이 군 부정 철저 단속을 특별지시하고, 한미합동단속반이 취재 강화에 나서는 지경이었다. 단속된 것만도 그 정도일 때 단속되지 않은 것까지 합치면 그 부정량은 어마어마할 거였다. 동대문과 남대문시장에 넘쳐나는 온갖 군수품들이며, 청계천이나 미아리 개천가에서 절반을 자른 드럼통 솥으로 끝없이 검정 물을 들이는 군복들이 그 사실을 잘 입증하고 있었다. 그런 알량한 군대를 가지고 대통령은 해마다 신년사에서 북진통일을 외쳐대고 있었다. 공무원 부정은 1년 동안 입건된 것만 4천여 건이었다. 군대와 공무원 집단은 나라 망치는 경쟁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한인곤은 그런 세상을 새롭게 응시하고 있었다.

 

 

10. 어떤 출세의 길

서동철은 한 시간의 아침운동을 끝냈다. 한겨울의 도장 안에는 난로가 없는데도 그의 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는 큰 거울 앞에서 당수복을 벗었다. 팬티만 입은 알몸이 드러났다. 운동으로 다져진 군살 없는 몸에 땀이 번들거려 거울에 비친 모습에서는 더욱 탄력이 넘치고 있었다. 쇠의 질감을 느끼게 하는 그의 육체미는 역도선수나 유도선수가 아니라 권투선수나 육상선수처럼 날씬하고 매끈했다. 서동철은 거울 속의 자신의 몸을 응시하며 또, 내가 믿을 건 내 몸뚱이뿐이다. 하고 속말을 뇌었다. 그는 운동을 시작하고 끝내며 자신의 알몸을 거울에 비춰볼 때마다 주문 외우듯 그 말을 자기 자신에게 했다. 그 말은 가끔, 내가 믿을 건 내 주먹뿐이다. 하는 말로 바뀌기도 했다. 의미가 다를 것 없는 그 두 가지 말은 아침저녁으로 한 시간씩 꼭 운동을 하게 만드는 힘이었다.

서동철은 대야에 떠다놓은 찬물에 수건을 적셨다. 냉수마찰을 겸해 땀을 닦아냈다. 냉수마찰이야말로 격렬한 운동으로 팽창된 근육을 질기게 다져주는 신체단련이었다. 냉수마찰을 하고 나면 피돌기가 잘되어 뱃속까지 시원하게 퍼지는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서동철은 군화 끈을 단단히 맸다. 동료들은 그놈의 군화 좀 벗어던지라고 놀렸지만, 천만의 말씀이었다. 그놈들은 겉멋 들어 신사화를 파리가 낙상하면 코 깨지도록 광내서 신고 다니지만 군화는 그것에 비해 열 배 위력이 큰 무기였다. 군홧발로 내지르는 옆차기, 돌려차기를 맞고 한 방에 나가 뻗지 않은 놈들은 없었다. 패거리들은 군화가 보기에 촌놈 같고 남들에게 무시당할 뿐만 아니라 싸움판이 벌어지면 뛰거나 발길질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거였다. 그놈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돌대가리들이었다. 군화를 신고도 신사화를 신은 것처럼 발놀림을 가볍고 잽싸게 하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게 바로 아침저녁으로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는 운동이었다. 노름판에서는 노름 잘하는 놈이 장땡이고 싸움판에서는 싸움 잘하는 놈이 왕초다. 서동철은 또 이 생각을 하며 군화를 내려다보았다. 그 붉은색과 묵직함이 더없이 마음에 들었다. 붉은색은 모든 악귀를 쫓는다지 않더냐. 동지에 팥죽을 마루 밑이고 사립문께 뿌리는 것처럼. 군화야, 내가 어서 왕초가 되도록 내 앞길을 열어라. 서동철은 도장을 나섰다. 날아갈 것처럼 몸이 가볍고 기분이 상쾌했다. 열 명, 아니 스무 명도 때려눕힐 것 같은 기운이 전신에서 뻗치고 있었다. 정해진 식당으로 가서 곰탕을 두둑하게 먹었다. 운동을 열성으로 하는 것만큼 세 끼 밥도 언제나 든든하게 챙겨 먹었다. 몸을 실하게 간수하는 데는 먹는 게 운동보다 먼저였던 것이다. 맘 놓고 양껏 먹을 수 있는 밥값은 공짜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식당은 세금 바치는 것을 밥값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그런 식당이 자기네 구역에 서너 군데였다. 식당을 나선 서동철은 담배를 꼬나물고 다방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정식 출근인 셈이었다. 다방은 그들 하부조직의 연락처고 대기실이며 놀이터였다. 서동철이 구석자리에 앉자 아직 머리며 얼굴에 잠자리 흔적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아가씨가 신문을 재빨리 가져왔다. 서동철은 진지한 얼굴로 신문을 훑어나가기 시작했다.

"야 기자 나으리, 뭐 좋은 소식 나왔냐?"

한 사내가 건들거리며 서동철의 맞은편 자리에 주저앉았다.

"죽치고 모닝이나 빨아라."

서동철은 신문에 눈길을 박은 채 대꾸했다. 목소리만으로도 상대방이 짝눈인 것을 알았던 것이다. 서동철의 별명은 여러 개였다. 앞뒤 짱구라 쌍짱구였고, 그 머리로 박치기가 유별나 평안도였고, 신문을 열심히 읽어 기자 나으리였다.

"이 집구석에 껀수 터졌다."

"껀수? 뭔데?"

그제서야 서동철이 눈을 들었다.

"한 놈이 외상 왕창 먹고 날랐어."

"얼만데 껀수까지 돼?"

서동철은 유일민 같은 고향사람을 만나는 자리가 아니면 고향 말을 쓰지 않았다.

"20만 환."

"씨펄, 가오마담년 돌았구나? 술값도 아니고 커피 값으로 20만 환이라니. 차라리 지년 밑구멍을 내줄 일이지."

서동철은 막 가져온 모닝커피를 휘저으며 거칠게 내질렀다.

"니기미, 외상 그리 퍼준 사인데 밑구멍 안 내줬을 리 있냐. 미친년이 돈도 주고 몸도 주다가 왕창 당한 신파지. 근데 말야, 그놈이 사무실 차려놓고 뻑쩍하게 사업한다고 폼 잡고 다니며 떼거리로 퍼마셔서 안 당할 수도 없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우리보고 쇼부 보래?"

"지가 반이라도 건지려면 용빼는 재주 있나. 낙원동 어디로 튀었다니까."

"그 새끼 간뗑이 부었네. 심심한데 한판 돌리지 뭐."

서동철은 다시 신문으로 눈길을 돌렸다.

"야 쌍짱구, 너 제발 그놈에 신문 좀 안 볼 수 없냐? 그따위 걸 그리 열심히 본다고 밥이 나오냐 죽이 나오냐, 좆같은 세상 좆같은 얘기만 바글바글한 게 신문 아니냔 말야."

"이 새끼야, 무식한 아구통 좀 닥치고 있어. 너하고 나하곤 짱구 돌리는 게 다르니깐."

"아이구 많이 달라봐라 우리 같은 하바리 인생에 달라지면 뭐가 달라지겠냐, 좆이나."

짝눈이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서동철은 그 말을 탓하지 않고 신문에만 정신을 모았다.

"그 세계에서 출세하겠다는 네 생각을 내가 뭐라고 할 수는 없어. 그런데 한 가지만은 말할 게 있다. 잘은 모르지만, 그 세계에서도 우두머리가 되려면 주먹 힘도 세야 되겠지만 머리도 잘 써야 될 거야. 그러니까 마음먹고 공부도 해. 뭐 학교 식으로 수학, 영어 같은 걸 하라는 게 아니야. 신문을 막히지 않고 줄줄 읽어 세상 돌아가는 건 알아야 하고, 머리가 빨리 빨리 돌아야 조직을 운영하고 무슨 계획을 세우고 할 것 아니겠어. 신문을 제대로 읽으려면 하루에 한 자씩 한자를 익혀 천자문을 떼고, 머리 회전을 빨리 시키고 인간 심리를 터득하는 데는 탐정소설이나 무협소설 같은 게 좋을 거야."

이렇게 말한 유일민은 굳이 책방까지 끌고 가서 천자문을 사주었던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유일민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정말 하루에 한 자씩 한자를 익혔고, 그 효과는 신문을 읽으면서 바로바로 나타났고, 그 신통함이 더없이 기분 좋고 가슴 벅차 한자를 더 열심히 익혀 넉 달밖에 안 됐는데 천자문 절반을 떼게 되었다. 탐정소설이나 무협소설도 읽는 재미가 좋을 뿐만 아니라 정말 배우고 얻는 것이 많았다. 특히 무협소설은 자기네 세계와 너무 흡사해서 그 계략이나 권모술수는 참으로 살아 있는 공부가 아닐 수 없었다. 주먹이라고는 쓸 줄 모르는 유일민이 그런 것을 안다는 게 거듭 희한하고 감탄스러울 뿐이었다.

", 곰보 아직 안 왔냐?"

체구가 씨름꾼 같은 사내가 다방으로 들어서며 큰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신문을 보고 있던 서동철과 다방 아가씨와 노닥거리고 있던 짝눈이 벌떡 일어나더니 허리가 반으로 꺾이는 인사를 했다. 나도 어서 흑곰처럼만 될 수 있다면....... 규칙에 따라 깊은 절을 하며 서동철은 매일 아침 하는 생각을 또 했다. 조장격인 흑곰은 더없이 부러운 대상이었다. 조장만 되어도 적잖은 돈이 생기고, 그러면 어머니의 고생을 덜어드릴 수 있을 거였다.

", 그놈 사무실 알아가지고 곧 온댔어요."

짝눈이 부동자세로 서서 대답했다.

"쌔끼, 빨랑 오잖코 뭘 해. 그거 해장거리로 해치워버려야 하는데 말야."

흑곰이 큰 체구를 의자에 부리며 혀를 찼다. 운동으로 다져진 그의 두껍고 넓은 어깨는 마치 바위덩이처럼 완강해 보였다. 서동철과 짝눈은 그의 맞은편 자리에 두 손을 모아잡고 조심스럽게 앉았다.

"편히 주무셨어요? 마담언니는 미장원에 들렸다 오느라고 좀 늦는 거예요."

커피를 가져온 아가씨가 한껏 애교를 부리며 흑곰에게 나붓이 인사했다. 그녀가 탁자에 내려놓은 쟁반에는 달걀 노른자위를 띄운 모닝커피와 빨간 색깔의 양담배 팔말 한 갑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커피 잔을 흑곰 앞에 얌전하게 옮겨놓은 다음 익숙한 솜씨로 담뱃갑을 뜯었다. 그리고 담배 한 개비를 뽑아 흑곰의 입술 끝에 물리고는 성냥을 켰다.

저 기분 째질 거라. 왕이 따로 없다니까....... ’

아침마다 대하는 광경이면서도 부러움은 늘 새로웠다.

"아니, 형님 벌써 나와 계십니까? 늦어서 죄송합니다."

다방으로 들어서던 두 사내가 흑곰에게로 뛰어오듯 하며 말했다.

"어찌 됐어?"

흑곰이 두 사내를 쳐다보지도 않고 커피 잔을 휘저었다.

", 찾아냈습니다."

코와 눈 아래가 얽은 사내가 마치 군인처럼 대답했다.

"됐어. 빨리 커피 한 잔씩 빨고 조지러 간다."

", 알았습니다."

흑곰의 말에 그들은 일제히 목소리를 맞추었다. 앞장선 흑곰을 따라 그들은 둘씩 나누어 양쪽에서 걸었다. 흑곰한테서 한 발짝 뒤로 떨어져 걷고 있는 네 사람은 마치 흑곰의 날개 같았다. 흑곰은 2층에 있는 사무실의 문을 걷어차고 들어갔다.

"어머, 뭐예요? 당신들 뭐 하는 사람들이에요?"

놀란 여사원의 목소리가 쨍했고, 서너 명의 남자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사무실로 몰려드는 그들을 쳐다보았다.

"당신들 누구예요. 왜들 이래요."

여사원의 목소리는 더 높아졌다.

"이년아, 아가리 닥쳐! 내 여동생 생각해서 봐주는 거니까 그 아구통 박살내기 전에 가만 죽치고 있어."

곰보가 여사원을 노려보며 곧 후려칠 것 같은 몸짓을 했다. 여사원이 자지러지듯 조그맣게 몸을 움츠리며 물러섰다.

"당신들 아침부터 왜 남의 사무실에 들어와 이래요?"

한 남자가 겁 실린 얼굴로 나섰다.

"사장새끼 어딨어. 너 사장이야?"

흑곰이 내쏘며 그 남자의 어깨를 쳤다. 그는 비척거리며 뒤로 밀렸다.

"뭐가 이리 시끄러워? 일들 안 하고."

그때 안쪽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당신이 바로 사장님이시군."

흑곰이 그 남자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너 뭐야. 이거 못 놔, 이거!"

"요런 치사한 새끼야. 불쌍한 가오 마담 등쳐 커피 값 떼쳐먹고 도망가면 무사할 줄 알았든? 이 개좆만도 못한 새끼야, 니놈이 부산 아니라 평양까지 내빼도 우린 쫓아가게 돼 있어. 이 새끼야, 당장 20만 환 토해내!"

흑곰은 말하는 것에 따라 그 남자의 멱살을 점점 치켜 올리고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잡았을 뿐인데도 그 남자의 몸은 조금씩 위로 뻗치고 있었다.

"미스 김, 뭐 하고 있어. 빨리 경찰에 연락해 빨리 경찰 불러."

그 남자는 버둥거리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얘들아, 이 사기꾼이 경찰 부르랜다. 빨리 경찰 불러드려라."

흑곰의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네 명의 행동이 시작되었다.

"좆같은 새끼, 놀고 자빠졌네."

이런 욕설과 함께 책상 하나가 우당탕 뒤집어졌다.

"야 이 씹새야. 좆 까는 소리 마."

책상 하나가 또 뒤집어졌다.

"쭈아, 쭈아, 경찰 불러. 이 새끼야, 경찰 많이 좋아해라. 좆이나 탱고다."

캐비닛이 더 요란한 소리로 넘어졌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돈 줄 테니까 여기 놔요."

사장이 목을 켁켁거리며 말했다.

"좋아하지 말어. 돈부터 여기다 딱 갖다놔. 대가리 박살나기 전에."

흑곰이 멱살을 더 조여 올렸다.

"알았소. 오늘은 돈이 다 안 되니까 10만 환만 내겠소."

"얘들아, 이 새끼 꼼수 쓰는 것 좀 봐라. 느네들 지금 사장실에는 예의 갖추고 있냐?"

흑곰의 말에 네 명은 사장실로 우루루 몰려 들어갔다.

", 알았어요, 알았어요. 야 미스 김, 빨리 은행에 가서 돈 다 찾아오고, 자네들도 가지고 있는 돈 다 털어내."

사장이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당신 말이야. 뼈 안 부러진 것 고맙게 생각해. 이자는 안 받아가니까 다시는 이따위 치사한 짓 하지 말고."

흑곰이 말아 쥔 돈으로 사장의 머리를 치고 돌아섰다.

"어머머, 역시 우리 흑곰 동생은 화끈해서 좋아. 고마워, 고마워."

흑곰이 세서 넘겨주는 10만 환을 받아들며 마담은 흑곰의 옆볼에 입술을 맞추었다.

"그런 새끼한테 다 빨린 입술을 어디다 맞추고 그래."

흑곰이 퉁명스럽게 내질렀다.

"의리 없이 애들 앞에서 꼭 그렇게 찔러야 돼? 누구 덕에 부수입 놀린 건데."

마담이 팩 토라지며 고개를 외틀었다.

"아이구, 나 이런 부수입 안 올려도 좋으니까 놈씨들이나 똑바로 고르라구. 애 데리고 어떻게 살려고 그래?"

"하긴 그래. 내가 미친 년이지 첨엔 다 돈 있는 척해 놓구선,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지 뭐."

마담은 한숨을 쉬며 자리를 떴다.

"자아, 느네들 수고했으니 용돈 받아라."

흑곰은 기세 좋게 부하들에게 만 환씩을 돌렸다.

"고맙습니다, 형님."

"잘 쓰겠습니다, 형님."

그들은 돈을 받으면서 깊이 절을 했다.

"난 딱벌 형님 뵙고 당구장으로 갈 테니까 느네들도 조금 있다가 그쪽으로 와."

흑곰이 담배를 끄며 일어났다. 그들은 다방 문 앞까지 흑곰을 배웅했다.

"하 이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 있다니까. 여동생 수학여행비하고 교복 값이 없어서 고민 고민했는데."

곰보가 허공에 완투 스트레이트를 뻗어대며 신바람이 났다.

"새끼, 그저 자나 깨나 여동생 타령이지. 그나저나 느네 여동생은 쪼다 같은 아버지 둔 애들보다 훨씬 낫다."

짝눈이 눈이 더 짝짝이가 되도록 눈을 흘겼다.

"모르겠다, 벌써 3학년이 될 판인데 모아둔 돈은 없고, 어찌 될 건지."

"그거 뭐, 여자가 꼭 대학을 가야 맛이냐? 형편이 안 되면 딱벌 형님한테 말해서 적당한 데 취직시키면 되지."

"얌마, 덜 떨어진 소리 까지 말어. 대학을 쇳가루께나 있는 것들처럼 맛나고 폼 나라고 보내는 줄 아냐?"

서동철은 짝눈의 옆구리를 질벅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넌 여동생을 대학에 보내는 게 좋아. 우리도 차차 커갈 테니까 지금부터 너무 걱정하지 말어. 흑곰 형님 같이만 돼도 동생 하나 대학 보내기는 식은 죽 먹기니까."

"그렇지. 안 될 때 안 되더라도 우선 말은 그렇게 해야지. 쌍짱구 넌 역시 의리 있는 놈이야. 야 이 짝눈 새끼야, 말 듣기 좋게 하는 데 돈이 드냐, 힘이 드냐? 너도 좀 배워라, 의리라고는 반 푼어치도 없는 놈아."

"아이구 알긋다. 이 지독한 놈아. 괜히 침 길게 뱉으려다가 실망할까봐서 그런다. 무식한 놈 눈에는 이런 마음은 의리로 안 뵈지?"

짝눈이 이죽거렸다.

"새끼, 그따위 의리 두 번만 있었다간 절교 일보직전이다."

곰보는 아직도 돈을 주머니에 넣지 않고 되작되작 살피며 흐뭇하게 웃었다. 서동철은 그런 곰보가 자신과 너무 같아 특별히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자신도 어머니와 동생들을 위해서 어서 돈을 모을 생각밖에 없었다. 곰보는 여동생을 고아원에 맡겨둔 고아였다. 전쟁 때 피난을 가다가 미군 폭격기의 폭격을 당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가 업고 있던 막내 동생까지 죽었다. 그때부터 여동생을 데리고 거지 노릇을 하다가 요행히 고아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던 해에 돌림병인 천연두에 걸렸다. 고아들은 절반이 넘게 천연두를 앓았고, 고아원에서는 아무 약도 쓰지 않았다. 며칠을 열에 들떠서 앓는 동안 아이들이 죽어나갔다. 그런데 살아남은 아이들은 전부 곰보가 되고 말았다. 그는 자기가 곰보가 된 것보다 여자인 동생이 곰보가 된 것이 너무 슬펐다. 그런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동생이 자신보다 덜한 편이었다. 그는 공부도 싫었고 고아원은 더구나 지긋지긋했다. 그런데 여동생은 늘 5등 안에 들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그는 여동생에게 돈을 빨리 벌어 고아원에서 데리고 나가겠다는 약속을 하고 열일곱 살에 고아원에서 뛰쳐나왔다. 그러나 돈은 벌리지 않고 양아치 노릇을 하며 주먹질만 익히다가 이 세계로 흘러들었다. 그런데 고등학생이 된 여동생은 그런 얼굴로 시집가기는 틀렸으니까 평생 혼자 살 수 있도록 대학을 가고 싶다고 했다. 의대나 약대를 가면 그 문제가 쉽게 해결된다는 거였다. 그는 자기가 책임질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여동생과 단단히 약속을 했다. 그 다음부터 여동생은 공부를 더 열심히 했다.

"우리 아버지는 머리가 터져 즉사했고, 우리 어머니는 배가 터졌는데, 정신없이 우는 여동생과 나를 붙들고 어머니는 말했어. 여동생을 꼭 데리고 다니라고. 그게 끝까지 잘 보살피라는 건데......,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어머니하고 한 그 약속을 틀림없이 지켜야 돼."

술이 취한 곰보가 울면서 한 이야기였다. 그 다음부터 곰보가 달리 보이고, 한층 가까워지게 되었다.

"야 곰보야, 수학여행은 어떨지 모르지만 교복은 그냥 그대로 입는 게 어떠냐? 한 푼이라도 어서 돈을 모아야 될 형편에 새로 교복 맞출 건 없잖냐?"

서동철은 좀 더 진지하게 말했다.

"글쎄 그게 남학생이라면 모자도 일부러 찢어서 재봉틀로 박아 폼 잡고 쓰고 다니고 하니까 괜찮은데 말이지, 여학생은 좀 골치 아파. 그리고 여학생 중에서도 우리 동생은 또 달라. 고아원 밥 먹는 처지에다 곰보딱지 아니야. 빌어먹을, 세상 사람들은 고아라면 이상하게 색안경 쓰고 봐서 고아들 더 기죽고 서럽게 만들고, 우리 같은 곰보나 화상 입은 사람을 괜히 업신여기고 병신 취급하고 들잖아. 그러니 생각해 봐라, 고아에다 곰보인 내 여동생이 교복까지 헌 것을 입고 다니면 얼마나 후지게 보이고 무시당하고 하겠냐. 안 그래?"

곰보가 슬프고 괴로운 기색으로 말했다.

"그 말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네. 별수 없다. 교복이나 멋들어지게 맞춰줘라."

서동철은 자기가 곰보에 비하면 동생들에게 너무 마음을 쓰지 못하고 있음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새끼들은 형제 얘기만 나오면 그저 신짝을 붙인다니까. 나발통 그만 까고 빨리 당구장으로 가자. 형님 오셨을지도 모른다."

무뚝뚝한 야쿠샤가 퉁명스럽게 말하며 일어났다.

"아이고 모르겠다, 나 하나도 살기 어려워 길길 매고 있는 판에 부모고 형제고 뭐고. 씨팔, 무슨 횡재가 왕창 좀 안 터지나."

짝눈이 일어나며 기지개를 켰다.

"이새낀 그저 색 쓰는 것 아니면 횡재 타령이지. 다리 후둘거리기 전에 색 작작 쓰고 운동이나 더 좀 열심히 해."

곰보가 일어나며 짝눈의 엉덩이를 툭 찼다. 그들 패거리 다섯은 11시쯤에 당구장에서 합류했다. 이상하게도 장마철에 곰팡이 슬듯 길목마다 샛길마다 생겨나느니 다방이고 당구장이었다. 그들로서는 자기네 구역에 그런 것이 많이 생길수록 신나는 일이었다. 그게 다 세금이 불어나는 먹잇감이었다. 그들이 당구에 한창 열이 오르고 있는데 종업원 아가씨가 외쳤다.

"흑곰 아저씨, 빨랑 전화 받으세요."

조장격인 흑곰이 뛰어가고, 나머지 넷도 동작을 멈추었다.

", , 알겠습니다. 아현동 고개, , 곧 출동하겠습니다."

흑곰의 전화 받는 소리를 듣고 그들은 벌써 당구봉을 버리고 행동개시 자세를 갖추었다.

"불났다. 가자!"

흑곰이 외치며 앞장서 뛰었다.

"어떤 놈들이 지른 거유?"

"새로 낯짝 내민 촌놈들 패라는데, 영화 촬영을 못하게 완전히 깽판을 쳤대."

"그 새끼들, 식초 마시고 환장했나."

"촌놈에 새끼들이 걸려도 잘못 걸렸지. 깨끗이 골로 보내라는 단장님 특명이야."

"그 새끼들 천당 승차권 어서 달라고 고사 지내고 있구만."

"그쪽이 몇 놈인데? 우리만 가지고 되겠수?"

"딴 부대도 동원됐대."

그들은 2층 나무계단을 우당탕 쿵쾅 뛰어 내려가며 떠들어대고 있었다. 서동철은 그 말질에 끼어들지 않고 '단장님 특명'이라는 말에 신경 쓰고 있었다. 그런 일은 별로 흔하지 않았다. 샛길을 벗어난 그들은 앞뒤 볼 것 없이 무작정 큰길로 뛰어들었다. 차가 드문드문 다니기는 했지만 그건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길을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한 줄로 쭉 늘어서더니 달려오는 시발택시를 가로막았다. 시발택시가 브레이크 소리 요란하게 멎자 그들은 우르르 차로 몰려갔다. 그리고 택시 문을 열어 다짜고짜 승객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내려, 빨리 내려!"

"이거, 왜 이래, 이거."

"씹새끼, 아구통 돌아가야 알겠어."

양복 입은 승객이 끌려 나오고 그들이 잽싸게 차에 올라탔다. 그런 그들의 행동은 그게 처음이 아니라는 듯 아주 익숙하고 숙달되어 있었다.

"망할 놈에 세상, 깡패들까지 저리 무법천지로 날뛰니, 다 틀렸어, ......."

멀어져가는 차를 타라보며 양복 입은 남자는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사실 깡패들의 기승은 대단해 한낮에도 남대문 지하도를 못 다닐 지경이었다. 아현동 고개에서는 양쪽 열댓 명씩이 뒤엉켜 패싸움이 벌어졌다. 서동철은 주먹을 거의 쓰지 않았다. 거의 두 발은 옆차기, 돌려차기, 2단 옆차기를 기민하게 구사해 가며 상대방들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그의 두 주먹은 주로 방어용으로 쓰였고, 어느 순간 상대방에게 붙잡히게 되면 그는 번개같이 박치기를 해댔다. 그의 군홧발에 걷어 채이거나 박치기를 당한 상대들은 더는 힘을 쓰지 못하고 버르적거렸고, 그는 단연 돋보이는 솜씨를 발휘하고 있었다. 패싸움은 20여 분 만에 끝났다. 서동철네의 기세 좋은 승리였다. 상대방의 네댓 명은 도망을 갔고, 나머지는 치명상을 입고 몸들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구경꾼들만 멀찍이 몰려 있을 뿐 경찰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싸움에 이긴 그들도 경찰을 염려하는 기색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 새끼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영화 촬영을 방해해. 영화계의 왕임 단장님도 모르고 설쳐? 요런 개새끼들아! 한 번만 더 까불면 그땐 갈빗대를 쏵 추려버릴 거야. 이 쪼무래기 새끼들아, 당장 꺼져버려, 당장!"

중간 보스가 겨우 무릎 꿇고 앉아 있는 패잔병들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 부축하고 몸을 가누며 허둥지둥 달아나기 시작했다. 서동철네 패거리 중에서도 눈 가장자리에 피멍이 들고 입술이 터지고 한 부상자들이 예닐 곱이었다. 서동철도 외상은 없었지만 왼쪽 허벅지에 뻐근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순간엔가 호되게 채인 거였다. 언제나 싸움판이 벌어지면 말짱할 도리가 없었다. 상대방들도 그 나름으로 다 단련된 몸이었다. 그들은 늦은 점심을 배 터지도록 먹고 자기네들 구역으로 돌아갔다.

"목욕이나 하고 낮잠 꺾자."

흑곰의 말을 따라 그들은 목욕탕으로 갔다. 서동철은 잘됐다 싶었다. 허벅지의 통증을 푸는 데는 뜨거운 물에 푹 담그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아이구구 옆구리야, 그 씹새들."

"아이구야 허리야, 종간나 새끼들."

그들은 탕 안으로 잠겨들며 이긴 자의 느긋한 엄살을 피우고 있었다. 여관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났을 때는 해가 거의 기울어 있었다. 그들은 주인의 인사를 받으며 여관을 나와 다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목욕탕에서도 여관에서도 돈을 내기는커녕 주인들의 깍듯한 인사까지 받는 이 생활이 서동철은 언제 생각해도 멋들어지고 만족스러웠다. 더구나 자기네의 상납금을 빨고 사는 형사들을 생각하면 통쾌하기까지 했다. 어렸을 때부터 서동철이 가장 무서워한 것은 경찰이고 형사들이었다. 산사람들이 언뜻 스쳐간 기미만 있어도 경찰이나 형사들은 어김없이 들이닥쳐 어머니를 끌어갔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매타작을 당하곤 했다. 자신도 네 번이나 끌려가 코피가 터지도록 따귀를 맞고, 살 껍질이 까지도록 정강이를 걷어 채였다. 아버지가 언제 왔는지. 무슨 일을 시켰는지 대라고 했다. 전쟁이 끝나고 빨치산들이 씨가 말라간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끌려가는 일도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나 자신은 먼발치로 경찰의 모습만 보아도 무서워 떨었고, 경찰서나 파출소는 아예 멀리 피해 다녔다. 그 두려움은 서울에 와서도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이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그 무서움증은 차츰 사라져 갔고, 이젠 형사가 우습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전히 경찰을 무서워하며 피하려고 애썼다. 그런 어머니가 딱하고 불쌍했지만, 더 문제는 나이가 들수록 골병이 심해지는 거였다. 지난날 수없이 당한 매타작으로 어머니는 몸을 망쳐 나이에 비해 너무 늙어 보이고 늘 골골거렸다. 그런 어머니를 어서 서울로 모셔다가 몸을 실하게 하고 호강도 시켜드리고 싶었다. 매일 남들보다 운동을 열성으로 하는 것도 하루라도 빨리 서열이 올라 어머니한테 효도하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운동도 싸움에서 가장 효과를 볼 수 있도록 요령껏 했다. 여러 가지 공격법 중에서 제일 치중하는 것이 발길질이었다. 다리는 팔보다 길이로 두 배가 길고, 힘으로는 네 배가 강했던 것이다. 흔히 주먹으로 공격하는 싸움판에서 발길질은 거리로 두 배, 파괴력으로 네 배의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는 팔보다 다리가 빠르기와 정확성에서 다소 뒤진다는 점이었다. 그 문제를 날마다 수련하는 것으로 거뜬하게 해결해 냈다. 각종 발길질을 아침저녁으로 200번씩 하다 보니 다리가 팔만큼 빨라졌고, 발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노리는 급소마다 정확하게 타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손쓰기를 등한히 하는 것이 아니었다. 팔다리는 따로 노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리가 강하려면 팔도 강해야 했다. 그리고 박치기도 그냥 되는 것이 아니었다. 매일 모래주머니에 이마를 박아댔다. 한 방으로 상대를 기절시키거나 코뼈를 내려앉게 하는 박치기의 위력은 이마와 함께 목에서 나오는 힘이었다.

그들이 다방 구석자리에서 오늘 밤 몸을 풀려면 창신동으로 갈까 종3으로 갈까 흰소리들을 하며 노닥거리고 있는데 아가씨가 쪼르르 달려왔다.

"쌍짱구 전화 받으래요."

"나아? 누군데?"

서동철은 뜨악하게 눈을 치떴다.

"딱벌 오야붕이에요."

", 뭐야!"

서동철은 튕기듯 일어났다. 딱벌은 중간 왕초이면서 직속상관이었다.

", 저 쌍짭굽니다......."

"그래, 나다. 너 빨리 극장으로 와."

"예에......?"

"새끼, 놀래긴. 극장으로 오라니까."

", , , 알겠습니다."

서동철은 긴장과 공포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극장이란 본부를 말하는 것이었고, 조무래기들은 감히 얼씬도 못하며 천국처럼 바라보는 곳이었다.

"나 그, 극장으로 오래요."

기가 질린 서동철은 말을 더듬었다.

"너 무슨 골로 갈 일 저질렀어?"

놀란 흑곰이 대뜸 물었다.

", 몰라요. 나 가요."

서동철은 숨을 헐떡거리며 극장 2층의 사무실 문을 떨면서 열었다.

", 쌍짱구라. 별명이 잘 어울리는군 그래. 오늘 보니 솜씨가 아주 대단하던걸. 내일부터 극장 기도로 옮겨."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조무래기들이 하늘처럼 우러러보는 반공예술인단 단장 임화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서동철은 반으로 꺾은 허리를 펴지 못했다. 극장 기도가 된다는 것은 출세 중의 출세였고, 최고 왕초의 측근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11. 이상한 일

박영자는 사장실 문을 살그머니 열고나서 똑똑 노크했다.

"! 사무실엔 웬일이냐?"

박부길 사장의 얼굴은 엄했다. 가족들에게 회사 출입은 금지되어 있었다.

"아빠 보고 싶어 왔지요."

박영자는 생글 웃으며 투박한 사무용 소파로 가서 앉았다.

"어허, 거 무슨 딴소리."

박부길 사장은 뼈대 큰 체구를 무겁게 일으키며 딸에게 눈총을 쏘았다.

"어머 아빠, 딴소리긴요? 집에서 아빠 얼굴 못 본 지가 벌써 얼만지 아세요? 열흘이 넘었다구요. 아빤 양심도 없으세요."

박영자는 입을 뽀로퉁하게 내밀었다.

"허허, 그게 그리 됐나? 내가 워각 일이 바빠서......."

박 사장은 비로소 멋쩍게 웃으며 딸과 마주앉았다.

"아무리 바쁘셔도 그렇지요. 딸이 아빠 얼굴 잊어먹게 생겼어요."

"그래, 넌 잊어먹어라. 내가 네 얼굴 안 잊어먹으니까 아무 탈 없다."

"어머머, 아빠 농담 실력 느신 것 좀 봐."

박영자는 입을 가리며 까르르 웃고는,

"아빠, 정말 아빠가 제 얼굴 잊어먹게 생겼더라구요."

그녀는 심각한 척 표정을 꾸미며 말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박 사장은 파고다 담배를 빼 물었다.

"거 있잖아요, 서울 시내 집 모자라는 거. 6.25전란으로 파괴된 게 595천여 호인데, 정부와 민간사업으로 9년 동안 지은 게 61만여 호로 전시에 파괴된 건 완전 회복됐지만, 그러나 서울시 인구가 200만을 돌파해 해방 당시의 네 배가 넘었고, 자꾸 분가까지 해 아직도 30만여 호가 모자라는 형편이며, 매년 2만 호를 건축한다 해도 주택난 해결은 심각하잖아요. 이런 형편이니 아빠가 제 얼굴 잊어먹는 건 시간문제지요, ."

"아니, 네가 어찌 그런 걸 다 쫙 꿰고 있냐?"

박 사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니까 광일건설 박부길 사장님 딸이잖아요."

박영자는 사르르 눈웃음을 지었다.

"하 그놈 참, 회사 전무보다 낫네."

박 사장은 딸이 너무 기특하고 대견해 더없이 흐뭇하게 웃으며,

"그래, 애비 찾아온 용건이 있으렷다."

그의 손은 양복 안주머니로 들어가고 있었다.

"어머, 아빤 역시 눈치 빠르셔. 우리 아빠 최고야!"

"옛끼 이놈아, 이거 버릇 될라."

박 사장은 지갑에서 돈을 듬뿍 꺼내주며 눈을 부라렸다.

"네에, 버릇 들일래요. 아빠, 엄마한텐 비밀이에요오."

박영자는 생글생글 웃으며 검지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댔다.

"내 당장 전화로 알릴랜다. 그래, 어서 가서 돈 쓸 궁리나 해."

박 사장은 딸의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내렸다. 40대 중반을 넘긴 그의 어글어글한 얼굴에는 아버지의 정겹고 따스함이 넘치고 있었다. 회사를 나온 박영자는 작전 성공에 두 발을 동동거리고 두 팔을 떨어대며 소리 없는 환호를 질렀다. 한마디로 아버지의 기분을 좋게 해 용돈을 타낼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다가 며칠 전 신문에 난 심각한 주택난을 골랐는데, 그게 정통으로 들어맞은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기쁜 것은 아버지가 집에서와는 다른 살갑고 도타운 정을 보여준 점이었다. 평소의 아버지는 특히 아들들에게 엄하고 무뚝뚝하고 꾸지람을 많이 했다.

박영자는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달뜬 기분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명동까지 가자면 약속시간이 촉박했다. 다방으로 들어선 박영자는 김선오를 발견하고, 역시 괜찮은 남자야, 하는 생각을 했다. 약속시간 5분 전인데도 김선오는 벌써 와서 무슨 작은 책을 읽고 있었다. 한국 사람들이 시간을 너무 안 지켜 미군정 시절에 '코리안 타임'이란 말이 생겨났고, 그 말이 지금까지도 들어 맞는 실정이라 박영자가 시간을 놓고 그런 호감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저어......, 오신 지 오래되셨어요?"

", 아닙니다. 앉으세요."

김선오는 황급히 책을 덮고 벌떡 일어나며 박영자에게 자리를 권했다. 박영자는 조심스레 자리 잡으며, 정말 괜찮은 남자야, 하고 또 생각했다. 굳이 일어나서 자리를 권하는 예의가 아주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건 여자를 위해줄 줄 알고, 여자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남자다움이라 여겨졌다.

"무슨 책 읽으세요?"

박영자는 둘만의 첫 만남을 옹색스럽게 하지 않기 위해 먼저 책을 가지고 화젯거리를 삼으려고 했다.

"아 예, 기분도 그렇고 해서 값싼 문고판을 하나 샀어요. 쉑스피어의 <햄릿>을 좀 읽어보려구요."

김선오가 내밀어 보인 앙증맞은 책은 작년부터 발간되기 시작한 최초의 문고판인 양문문고였다.

"설마 햄릿처럼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그게 문제로다 하는 심정은 아니시겠지요?"

박영자는 동그란 눈으로 김선오의 마음을 헤집듯 빤히 쳐다보았다.

"벌써 읽으셨군요? 그런 심정이면 여기 나오지도 않았죠."

김선오가 씩 웃으며 커피 잔을 들었다.

저 눈치 빠른 것하고, 저 의젓한 배포하고, 남자답고 멋져. 그러고 보니 우리 아빨 닮은 데가 많아.’

이런 생각이 부끄러워 박영자는 얼른 입을 열었다.

"이규백 씨는 어떠세요?"

"이 선배는 나보다 충격이 컸겠지요. 학년 차가 있으니까."

"그럼 충격 받으셨단 말예요?"

박영자는 호칭 없이도 말이 잘 통하는 우리말의 신통함에 처음으로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야 충격 안 받았다면 거짓말이지요. 시험은 떨어질라고 보는 게 아니니까요."

"어머나, 겨우 2학년에서 시험을 치면서도 고등고시에 붙길 바랬어요? 그건 좀 뻔뻔스럽거나 오만한 것 아니에요?"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 배짱에 박영자는 또 남자다움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그럼 장난으로 시험을 쳐야 옳단 말인가요?"

"네에, 연습게임이라는 거 있잖아요. 2학년이니까 앞으로를 대비해서 연습해 볼 수 있잖아요. 물론 합격하면 더욱 좋구요."

박영자는 위로의 말을 이렇게 에둘러서 하고 있었다.

"연습게임이라......."

김선오는 담배에 불을 붙여 두어 모금 빨고는,

"자영 씨 말이 맞군요. 그리 생각해야 맘이 편해지겠어요."

그는 박영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영 씨? ......그가 부른 최초의 호칭에 박영자는 가슴에 찌르르 전기가 오르고 있었다.

저 뜻이 뭐지? 젊은 남녀 사이에 여자 이름을 단순히 호칭만으로 그렇게 부르는 법은 아니잖아? 그럼 무슨 감정을 나타낸 건가?’

박영자는 속생각을 하면서도 차마 부끄러워 '사랑의 감정'이라고 꼭 박아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장난삼아 친구들과 이름자를 바꿔 부르기로 한 것이 백 번 잘한 일이었다 싶었다. 이런 경우에 '영자 씨' 했더라면 어쩔 뻔했는가. 그 촌스럽고 천한 느낌으로 분위기가 다 망쳐지고 말았을 것 아닌가. 이런 날을 위해 이름자를 바꿔 부르기로 한 것만 같아 박영자는 그날의 의미가 새삼 크게 느껴졌다.

"좀 우스운 말이지만, 언제까지 그 시험에 합격하고 싶으세요?"

박영자는 커피 잔을 들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야 빠를수록 좋은데......, 내년엔 하늘이 무너져도 패스해야죠."

김선오의 말은 마치 무슨 맹세라도 하듯 단호했다. 그의 의식 속에서는 아버지 없는 난감한 집안 형편이 또 떠오르고 있었다. 이미 바로 손아래 여동생은 여고를 중퇴했고, 그 아래 남동생은 집안을 위해 농고로 전학을 하겠다고 하고 있었다. 여동생은 어쩔 수 없었지만 남동생은 우격다짐으로 눌러놓고 있는 처지였다. 아버지는 그 어떤 자식이든 농사꾼이 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다. 다른 모든 농부들이 그런 것처럼.

"잘은 모르지만, 소문 들으면 대학 졸업 때까지만 합격해도 대단한 걸로 치지 않나요? 기한을 그렇게 짧게 잡으면 긴장해서 열심히 하는 효과도 있겠지만, 그 대신 너무 고생이 되고 몸도 상하고 하지 않겠어요?"

박영자의 조심스러우면서도 차분한 말에 김선오는 가슴 어딘가가 찡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 속 깊은 말이 자신의 외로움을 감싸주는 것 같았고, 그 마음씀이 그지없이 여자다웠던 것이다. 지난번 뚝섬에서 조봉암의 사형 문제에 대해 관심을 보였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 순하고 얌전한 생김이 한결 곱게 돋아보였다.

", 그럴 염려도 있지만 어차피 한 번 뚫어야 할 길이고, 정신 똑바로 차려서 안 될 일 없으니까요."

김선오는 허리를 세우며 자신 있게 말했다. 이상하게도 집안의 어려운 형편은 감추고 싶었고 그와 반대로 자신감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커지고 있었다.

"저 배고파요. 어디 가서 저녁 먹는 게 어떨까요?"

", 그러지요."

김선오가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잠깐만요.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오늘은 위로하고 격려해 드릴려고 제가 먼저 만나자고 한 거니까 돈은 한 푼도 쓰실 생각 마세요. 초대받은 손님의 예의 아시죠?"

박영자는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 일부러 장난기를 섞어 말했다.

", 그렇게 마음먹었으면 많이 위로하고 격려해 주세요."

김선오는 그의 특유의 활달함으로 말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세심한 배려에 또 색다른 호감을 느꼈다. 사실 자신에게는 커피 값 정도밖에 없었다. 박영자는 김선오의 그런 활달함과 솔직함이 너무 좋았다. 남천장학사의 학생들은 모두가 집안이 넉넉하지 못한데다 태풍의 피해까지 입어 더 어렵게 된 처지였다. 그런데 남자 체면을 살리겠다고 나서면 그것처럼 거북하고 옹색할 일이 없을 터였다.

"저어, 사학과 공부가 재미있어요?"

밥을 먹기 시작하며 김선오는 박영자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관심을 표명하고 싶기도 했고, 상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기도 해서였다.

"네에, 전 원래 옛날 얘기를 참 좋아했거든요. 역사란 게 일단은 다 옛날 얘기잖아요. 좀 유치한 얘기지만, 고등학교 때 계속 100점 맞는 과목이 딱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역사에요. 근데 대학에 가니까 비판하고 평가하는 걸 배우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더 재미있어요."

박영자의 동그란 눈에 색다른 윤기가 돌고 있었다. 그 느낌이 토끼 같다고 김선오는 생각하고 있었다.

"적성이 잘 맞는 모양이군요. 아무래도 선생님으로 모셔야 될 것 같은데요."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시험에 국사가 포함돼 있잖습니까. 그거 아주 까다롭고 골치 아프거든요. 이번에 그것 때문에 낙동강 오리알이 됐는지도 몰라요."

김선오가 콧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아 네, 수업료만 두둑하게 내세요. 만점 맞게 해드릴 테니까요."

박영자가 입을 가리며 쿡쿡거리고 웃었다.

"그나저나 조병옥 박사가 미국으로 떠나 대통령 선거가 문젭니다."

김선오는 다시 공동 화젯거리를 찾아 말머리를 돌렸다. 가족 관계 같은 것이 궁금했지만 설익은 밥솥을 열지 않기로 했다.

"이번에도 왠지 불길해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김선오가 놀라는 기색을 드러냈다.

"아니 뭐, 그냥 느낌이에요. 4년 전에 멀쩡하던 신익희 선생이 그리 허망하게 떠날 줄 누가 알았나요. 그런데 조병옥 씨는 병이 얼마나 중하면 이 다급한 시기에 미국까지 갔겠어요. 당에서는 별거 아니라고 하고 있지만, 한국에서 고칠 수 있는 병인데도 미국으로 갔겠어요? 별거 아니라고 하는 건 다 정치적 연막술이고, 중병인 건 틀림없잖아요."

"그건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명확한 분석 아닙니까."

김선오는, 난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는데요, 하는 말은 삼켜버렸다. 그건 그런 생각을 못해서가 아니고 병세가 별게 아니라는 말을 믿고 싶어서 그런 불길한 생각을 굳이 피하려고 했는지도 몰랐다.

"괜히 여자가 방정맞게 그런 말 했나 봐요."

박영자가 시무룩해지며 눈길을 떨구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런 일에 남자 여자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정말이세요?"

이 말이 나가버린 것을 박영자는 곧 후회했다. 속마음을 너무 드러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연하지요. 여자가 그런 말 못하게 하려면 대학교육을 시키지 말아야죠."

, 저 트인 남자......, 박영자는 그 어떤 점보다도 큰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작은오빠의 친구들한테서 가장 기분 나쁜 게 그들이 예사로 쓰는 '여자가 건방지게' 하는 말이었다.

"그 문제하곤 상관없는 건데요, 거물 정치인들을 꼭 박사, 박사 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승만 박사, 장면 박사 하는 것 말인가요? 글쎄요......."

김선오는 말뜻을 종잡지 못하고 박영자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대통령 이승만 박사, 부통령 장면 박사,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 박사, 모든 신문들이 그렇게 쓰고 있는데 보기가 너무 역겨워요. 국가나 정당의 최고급 직함이면 충분하지 뭐가 또 모자라서 줄줄이 박사를 붙이는지 모르겠어요. 박사가 무슨 자랑거리도 못 되고, 그렇다고 정치인의 자격도 아니고, 그런 걸 과시하고 싶어하는 당사자들이나, 박사가 무슨 대단한 것처럼 여기는 신문들이나 너무 유치하고 치졸해요. 딴 나라들도 이런 짓을 하겠어요?"

"그것 참, 듣고 보니 정말 유치하고 치졸한데요. 그런 게 다 속물근성의 발로고 우리 사회의 수준일 텐데, 글쎄요......, 그런 것을 무신경하게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인 나나 대다수의 사람들도 문제구요."

김선오는, 그게 여자의 섬세함인지 박자영 특유의 예리함인지 구분하지 못한 채로, 저게 여간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또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가까운 중앙극장으로 가기로 했다. 길을 걸으면서 그들은 한 발짝 정도 간격을 띄웠다. 그건 관계가 아직 모호해서 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열렬한 사이라 해도 처녀 총각이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걷는 것도 흉거리였고, 손을 잡고 걷는 것은 아예 용납이 안 되는 세상이었다. 박영자는 영화를 건성으로 보고 있었다. 이규백은 체구도 남자답지 못했지만 어딘가 깐깐하고 내성적인 것 같은 인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유일민은 그늘진 인상도 그랬지만 동급생이라서 아예 어리게 보였다. 그런데 김선오와의 관계에서 앞으로가 문제였다. 언제까지고 강숙자를 중간에 놓아 연락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여자가 먼저 연락처를 적어줄 수도 없었다. 그리고......, 격려의 뜻으로, 또 첫 만남의 기념으로 선물을 사주고 싶은데......, 실용적인 만년필 같은 것으로......, 아니야, 여자가 너무 속 드러내는 것 아닐까....... 박영자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갑시다. 바래다 드릴 테니."

"어머, 효자동에서 성북동까진 너무 멀어요."

"괜찮아요, 밤엔 깡패가 위험해요."

박영자는 믿음직스러움과 함께 그의 감정을 확인하는 행복감을 느꼈다.

"앞으론 직접 연락하세요."

박영자의 집이 바라보이는 골목 어귀에서 김선오가 쪽지를 내밀었다.

"공부에 방해 안 되시겠어요?"

"1주일에 하루는 하느님도 쉬었잖아요."

"네에, 어서 가세요. 통행금지 싸이렌 울리겠어요."

박영자는 다음에 만날 때는 만년필을 사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래야 내년에 꼭 합격될 것 같은 예감과 함께.

"너 어제 어땠니? 재미 봤어?"

다음날 강숙자는 학교에서 박영자를 만나자마자 호기심 넘치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얘는, 흉하게 재미는 무슨 재미. 처음 만나가지고."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라 박영자는 시치미를 뗐다.

"흉하기는, 뭐 재미란 게 손 잡고 뽀뽀하고 그런 걸 말하는 거니? 너 영화 안 봤어?"

강숙자는, 너 내숭 떨지 말고 다 털어놔, 하는 얼굴로 박영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래, 영화는 봤지. 다방에만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박영자는 멋쩍게 웃었다.

"어머나, 너 김선오한테 홀딱 반했구나!"

강숙자는 허풍 심하게 손뼉을 한 번 치고는,

"첫 번째 만나가지고 극장엘 갔다는 건 본격적인 연애 시작이라는 신호잖아."

그녀는 단 입맛을 다시며 박영자 옆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어머머, 얘 사람 잡네. 그런 기준이 어딨어."

박영자는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어이없는 척 코웃음을 흘렸다.

"그야 상식이잖아, 세상에서 다 그렇게 통하고 있는 상식. 너 그런가 안 그런가 당장 애들한테 한번 물어볼래?"

"어머 얘, 너 미쳤니!"

박영자가 당황스럽게 강숙자의 팔을 붙들었다. 활달한 강숙자로서 그럴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거 봐, 너 왜 그렇게 당황하고 얼굴 빨개지고 그러냐? 이 세상사람 다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여. 난 그 분야만큼은 베타랑이거든. , 홀딱 반하지는 않았더라도 맘은 있는 거지?"

강숙자는 장난기 가신 얼굴로 물었다.

"글쎄, 맘이 있다기보다는......, 뭐랄까......, 사귀어봐도 괜찮은 남자가 아닐까 하는......, 뭐 호감 정도랄까."

박영자는 속마음을 감추려고 한마디, 한마디를 막연하게 하며 담을 쳤다. 연애 감정을 감추고 싶은 것은 달거리를 할 때 어머니가 아는 것조차 싫은 마음과 똑같았다.

"그래, 여자라면 호감을 가질 만한 대상이기는 하지. 일류대학 법대생에, 고시패스 가능성 1, 게다가 허우대까지 멀쑥하니까. 그런데 말야, 한 가지 경계해야 할 게 있어."

"경계......?"

"그 집이 너무 가난하다는 것."

"가난......?"

". 첫 만남에서 극장엘 갔다는 건 김선오도 너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표신데, 그게 느네 집안의 조건을 본 것일 수도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너도 잘 알잖아? 요새 가난한 대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풍조. 부잣집 딸들을 잡아라 하는 거. 그래서 부잣집 가정교사로 들어가 그 집 딸을 꼬시고, 그게 안 되면 약대생이라도 잡아라 해서 약대 여학생들이 신붓감 1위인 거. 그리고 고시 패스했다 하면 거의 틀림없이 부잣집 사위들이 되잖아. 너도 이미 아다시피 우리 장학사에 있는 학생들이 다 머리는 좋지만 가난한데, 작년 사라호 태풍으로 전부가 더 쫄딱 가난해졌어 그러니 조건 좋은 집 딸들 찾기에 더 혈안이 되어 있는 셈이지. 혹시나 해서 하는 소리니까 새겨들어."

"조건으로 치자면 나보다 네가 더 좋은 것 아니니?"

"난 그런 남자 아예 흥미 없어."

"그런 남자......?"

", 제 능력도 아니면서 머리 하나 좋게 타고난 걸 가지고 뻐기려 들고, 잰 체하고, 티껍게 구는 건 딱 밥맛 떨어지거든."

내 영어를 가르칠 때......, 하는 말이 곧 쏟아질 판이었는데 강숙자는 가까스로 되삼켜 넘겼다.

"그래, 천재의 오만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 그건 우리 같은 범재들로서는 확실히 역겹고 기분 상하는 일이긴 해. 그 사람 그게 심하니?"

"그 정도로 알아두고 차차 사귀면서 확인해 봐. 인간성의 깊은 면에 대해선 나도 잘 모르니까."

"글쎄, 그런 말 듣고 나니 마음이 이상해진다. 네가 진작 가위표 해버린 사람 내가 괜히 관심 쓰는 것 같고."

말이 병도 되고 약도 되더라고 박영자는 언짢아진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 그럼 안 돼. 그런 점들을 미리 알아두라는 것뿐이지 그게 어디 김선오 혼자만의 단점이니? 그래도 평범한 남자보다 똑똑한 남자가 훨씬 나으니까 선입감 갖지 말고 슬슬 사귀면서 점수 매겨. 그건 그렇고, 이따가 학교 끝나고 자경이 만나기로 했는데 너도 함께 가자."

", 무슨 일 있어?"

"있잖니, 브라쟈 사게 남대문 도깨비시장에 가기로 했거든."

강숙자는 박영자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너 그거 아직 안 찼어?"

박영자가 입을 가리며 킥 웃었다.

"얘는, 이 강자숙을 뭘로 보고 하는 소리야? 난 그런 건 남들보다 열 발 빠른 것 몰라?"

"근데?"

"글쎄, 자경이 그 쑥맥 우등생이 여태까지 미착용 상태지 뭐야. 그러니 옷을 입어도 태가 날게 뭐냐. 나도 모양 다른 걸로 새로 사고 싶고. 근데 말이지, 난 아직까지도 그 도깨비시장만은 혼자 가기가 겁나고 정신없고 그렇거든."

"자경이는 어쩌고 혼자야?"

"얘 눈치 없는 척하는 것 좀 봐. 자경이 개가 뭐 사람이니? 개는 서울 10년 살아도 촌닭인 걸."

"하긴 그래. 죽어라고 공부만 파고 있으니까. 근데 개가 브라쟈는 하겠데?"

박영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개는 뭐 여자 아닌가? 알고 보면 개도 속으로는 온갖 짓 다 해보고 싶어해. 워낙 머리가 좋고 공부가 재미있어서 책 속에 파묻히다 보니 시간이 없고, 우등생에 얌전이가 된 거지."

"참 별나, 공부가 재미있다니."

"말 마. 개는 이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게 공부라고 하는 애니까. 그런 별종들이 더러 있잖아."

"알았어. 같이 가지 뭐. 자경이 만난 지도 꽤 됐으니까."

"근데 왜 우리나라에선 아직 브라쟈 하나 못 만들어내니, 그래서 그 험한 도깨비시장에 가게 만들고."

강숙자가 눈을 흘기며 혀를 찼다.

"못 만드는 게 어디 한두 가지니. 그보다 급한 것도 못 만드는 게 쌔고 쌨는 걸."

"그건 뭐 안 급하니? 이 땅에 여자가 절반이고, 여자의 절반 이상은 브라쟈를 해야 되잖아? 그럼 그 수가 얼마니?"

"그건 우리 대학생들만 보고 하는 소리야. 지금 여자들 양장보다는 파마가 훨씬 더 유행인 데도 파마 한 사람들보다는 낭자머리가 더 많잖아. 그리고 우리 여대생들이 전부 양장을 하긴 했지만, 아마 브라쟈 안 한 애들이 절반을 넘지 않을까?"

"그래, 그리 보면 그러네. 근데 이런 추세로 가면 머지않아 다 양장으로 바뀌지 않겠어?"

"그야 그럴 테지."

"그럼 결국 브라쟈 쓰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아지겠니. 그거 굉장한 돈벌이 되지 않겠어? 방금 생각난 건데 말야, 느네 아버지보고 그 사업도 준비하라고 아이디어를 드려라."

강숙자는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얘 좀 봐, 큰일 날 소리 하네."

박영자가 킥 웃었다.

"왜에......?"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여자를 무시하는 줄 아니? 암탉이 울면 집안 망한다는 걸 철저하게 믿는 분이시다 그거야, 여자가 앞을 가로질러 가면 그날은 재수 더럽다고 침을 내뱉고. 그런 거룩하신 분에게 여자 젖가리개를 만들어 돈 벌라고? 그건 벼락 맞기 딱 좋은 소리야."

"그야 어디 느네 아버지만 그러니? 우리 아버지도 똑같애."

강숙자가 입을 삐죽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오후에 안경자를 명동에서 만났다. 커피를 마시고 곧바로 다방을 나왔다. 화교 상점들이 밀집해 있는 골목으로 들어서자 '딸라 파세요', '딸라 파세요' 하는 여자들의 은밀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 골목을 벗어나 큰길로 나서며 강숙자가 킥킥대고 웃었다. 안경자와 박영자가 왜 그러느냐는 눈길로 강숙자를 쳐다보았다.

"난 저 소리를 들으면 꼭 '딸 낳아 파세요' 하는 말이 생각난다니까."

강숙자의 말에 두 사람도 실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시골 노인이 서울에 올라와 '딸라 파세요''딸 낳아 파세요'로 잘못 듣고, 서울 놈들은 딸을 낳아 팔아먹는 놈들이라고 개탄했다는 거였다. 그런데 그 말은 언제부턴가 유흥업소들의 번창과 함께 몸을 파는 여자들이 많아지고 있는 사회상을 상징하는 말이 되어 있었다.

"핸드백들 조심해. 쓰리꾼 천지니까."

남대문시장으로 들어서며 박영자가 말했다.

"쓰리꾼만 있으면 좋게? 날치기, 들치기들까지 드글드글하니까 혼자 못 오는 거지."

강숙자가 핸드백을 팔 안에 꼭 끼며 점검하듯 안경자를 쳐다보았다. 안경자도 핸드백을 단속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시장의 골목골목마다 사람들이 바글바글 끓었다. 그 많은 사람들에 걸맞게 시끌덤벙하고 왁자지껄한 소리들도 끊임없이 일어나며 시장의 생기를 북돋우고 있었다. 상점은 상점들대로, 노점상은 노점상대로, 행상은 행상들대로 손님들을 목청껏 부르고, 장 보러 나온 사람들은 그들대로 맘 놓고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미제 물건들만 파는 도깨비시장은 다른 상점들 골목에 비해 번잡하기는 더한대도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그곳 상점들은 호객 행위를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핸드백들 조심해. 이 골목에 쓰리꾼이 제일 많아. 돈 좀 있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니까."

박영자가 다시 나직하게 말했다.

"세상에 무슨 미제 물건들이 저리도 많지?"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걷던 안경자가 억누른 소리로 말했다. 골목 양쪽에 촘촘히 박힌 작은 상점마다 온갖 색색의 미제 물건들이 층을 이룬 진열대를 따라 가득가득 쌓여 있었다.

", 저거 보고 놀랄 것 없어. 저 사람들이 상점보다 몇 배씩 큰 창고들을 가지고 있대니까."

박영자가 안경자를 보며 지그시 웃었다.

"몇 배씩 큰 창고......?"

놀라는 안경자의 눈에는 무언가 의문이 담겨 있었다.

"그런 이야기는 이따가 해."

박영자가 말을 막으며 걸음을 빨리 했다. 그들은 한 상점에 들어가 브래지어를 고르기 시작했다.

"이게 우리한테는 다 큰 편이니까 제일 작은 것으로 고르면 될 거야. 유방이 크면 머리가 나쁘다고 하는데 서양 여자들은 왜 그리 큰지 몰라."

박영자가 브래지어를 대보며 웃었다.

"그거 다 헛소리야. 자경이 얘는 나보나 훨씬 더 커, 기분 나쁘게."

강숙자가 불쑥 말했고,

"어머, 너 정말!"

안경자가 얼굴이 붉어지며 강숙자의 팔을 꼬집었다. 강숙자는 죽는 소리로 엄살을 떨었고, 박영자는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아줌마, 5천환이 뭐에요. 지난번에는 3천환에 샀는데."

"그때 얘긴 왜 해. 어제가 옛날인걸."

"세 개나 사니까 3천환씩 해요."

"안 돼, 안 돼. 물건은 딸리고 찾는 사람은 많아지니까 난들 어떡해. 세 개 사니까 5백 환씩 빼드릴게."

"아이 참, 아줌마두. 35백 환!"

주인과 박영자 사이에 값을 깎는 실랑이가 벌어졌다.

"인사로 2백 환 더 빼드릴게. 더는 한 푼도 안 되니까 돈 안 맞으면 그냥 두고 가."

"좋아요, 4천 환. 안 되면 그냥 갈 수밖에 없어요."

박영자가 강숙자와 안경자의 팔을 잡고 돌아섰다.

"됐어, 가져가. 학생은 참 짠돌이야. 시집가면 잘살 거야."

시장을 나오다가 어느 길목에서 안경자가 입을 열었다.

"저 사람들 왜 저렇게 줄을 서 있지? 다 가난해 뵈는데."

"으응, 꿀꿀이죽 사먹으려는 사람들이야. 저녁때가 다 됐잖아. 너 또 꿀꿀이죽이 뭔지 모르는 거 아냐?"

박영자가 대꾸했다.

"알아, 들어봤어. 근데 웬 사람들이 저렇게 길게 줄을 섰지?"

"그야 당연하지. 아주 싸니까 사먹는 사람들이 많아서 늦으면 못 먹게 되는 수도 있대나 봐."

"그게 얼만데?"

"나도 잘 몰라. 안 먹어봤으니까."

", 왜 또 그딴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쓰고 그러니? 골치 아프게."

강숙자가 안경자의 어깨를 툭 치며 퉁을 놓았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어디 가서 저녁 먹고 영화나 보고 들어갈까?"

시장을 벗어나며 박영자가 말했다.

"그거 좋지, 문화생활을 빼놓을 수 없잖아."

강숙자가 냉큼 말을 받았다.

"근데 말이야. 그거 좀 이상하지 않니? 그 많은 상점들에 미제 물건들이 가득가득 쌓여 있고, 창고들까지 그렇게 크게 가지고 있다는 게."

음식을 시키고 나자 안경자가 아까 미루었던 말을 꺼냈다.

"그게 왜? 미군 부대들이 있으니까 흘러나오는 거지."

박영자의 대꾸였다.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지. 왜냐하면 우리나라에 주둔하는 미군들의 수는 일정할 거고, 그들이 소비하는 물건의 양도 한정되어 있을 텐데 어떻게 해서 그 많은 물건들이 계속 흘러나올 수 있느냔 말이야. 전쟁이 끝난 이후로만 쳐도 7년인데, 그동안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 물건들을 다 합해 놓으면 그 양이 도대체 얼마겠어. 그거 이상하지 않아?"

"글쎄, 그 말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네. 그럼 네 말은 주한미군들의 소비량보다 더 많은 물건들이 들어와 우리 시장으로 흘러나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뜻이지?"

"그래, 그런 의심이 안 들어?"

"글쎄, 그거 알 수 없는 수수께끼네."

"얘 자경아, 좋은 머리 엉뚱한 데 굴리지 말고 넌 의대 공부나 열심히 해. 우린 필요한 물건만 사면 됐지 골치 아프게 그런 것 따져서 뭐 하니. 음식 다 식는다. 밥이나 빨리 먹자."

강숙자가 팔을 내젓고는 숟가락을 들었다. 안경자는 상으로 다가앉으면서도 미심쩍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갸웃하고 있었다.

 

 

12. 자멸의 전야제

바람 세찬 깊은 겨울밤은 앞뒤 분간이 안 되도록 캄캄했다. 드문드문 보이는 불빛도 흐리기 그지없었다. 인가가 많지 않은 변두리인데다가 전깃불까지 나가버려 어둠은 그리 짙을 수밖에 없었다. 연탄난로가 있는데도 냉기가 서린 사무실에는 흐린 호롱불이 그을음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불빛은 겨우 주변만 밝혔을 뿐 사무실은 어둠침침했다. 비가 많이 오는 여름에도 특선, 일반선으로 구분해 제한송전을 하는 형편인데 겨울이 되자 전기 사정이 더욱 나빠진 거였다.

"원장님 좀 더 내놓으세요. 이것 가지고는 운반비도 안 빠지잖아요."

"글쎄, 내가 쌓아놓고 안 드리는 게 아니라니까요. 많이 줄 수 있으면야 나도 좋지요."

"그래야 서로 좋지요. 혹시 딴 선 트신 건 아니시구요?"

"아니 황 집사님, 그 무슨 서운한 말입니까. 나를 어디 한두 번 겪어 봤습니까."

원장이란 남자의 어조가 달라지며 흐린 불빛 속의 얼굴에도 불쾌한 기색이 드러났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하도 답답해서 그냥 해본 소리예요. 이래 가지고선 이젠 이 장사도 더 못해 먹겠네요."

황 집사란 여자가 폭 한숨을 쉬었다. 그 얼굴은 임호태의 어머니였다.

"그래도 황 집사님이야 구호물자 줄어드는 눈치 채고 벌써 딸라 장사를 시작한 지가 2~3년이니 무슨 걱정입니까. 나 같은 사람이 큰일 났지요."

"어머, 원장님도. 호시절에 다 든든하게 챙기시구선, 우리야 쥐꼬리만한 이문 먹겠다곤 장사하느라 얼마나 고생고생하며 살았다구요."

"든든한 게 다 뭐요. 이리 급하게 줄어들어 버리면 아들놈 미국 유학이고 뭐고 다 깨지는 판인데. 이제 고아원도 어디 해먹겠어요."

"그렇지요, 원조가 줄어들면서 세상 살맛 떨어진 사람들이 어디 한둘인가요. 전쟁 끝나고 4~5년이 참 좋았지요. 그런 시절 다시 오긴 영 틀린 거지요."

"그러게 말이오. 나도 앞일을 생각하면 밤잠이 안 와요. 이나마 구호물자 끊기는 날에는 이 짓을 무슨 재미로 하겠소."

"원장님. 우리끼리니까 살짝 하는 말인데, 이쯤 해서 팔아치우는 게 어때요. 눈치 모르고 이거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적잖다구요."

황 집사의 목소리가 속삭이는 것처럼 낮아졌다.

"하긴 그래요. 황 집사님이 먼저 말을 꺼내니까 하는 말인데, 그런 생각이 없지도 않아요. 그 담에 할 일이 마땅찮아서 그렇지."

"참 원장님도 걱정도 팔자시네, 돈 있는데 무슨 사업인들 못하겠어요."

"걱정이 아니고, 사업 경험이 없는데 괜히 돈만 날리면 그 꼴이 뭐겠소."

"어머 원장님, 엄살 그만 떠세요. 이 사회사업은 사업이 아니라 장난인가요? 기막히게 잘 하시면서 괜히."

"글쎄요, 나도 임 사장님처럼 그 땅 짚고 헤엄치는 군납업체나 하나 할 수 있다면 당장 결판을 내겠는데......."

"어머, 그런 속 모르는 말씀 마세요. 땅 짙고 헤엄치기란 다 헛소문이구요, 위로 뜯기고 아래로 뜯기고, 공무원들 뺨치게 군인들이 이거 좋아하는 것 원장님도 잘 아시죠? 그러다 보니 정말이지 빛 좋은 개살구라구요."

황 집사는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며 고개를 내둘렀다. 원장의 생각을 단숨에 꺾고, 남편의 돈벌이를 감추려는 의도였다.

"그야 이놈에 세상 어디나 다 그런 거고, 어쨌거나 이 짓도 손 털 때가 된 것 같은데, 황 집사님이 발 넓으니까 사람을 좀 알아봐 주시겠소? 내 구전은 톡톡히 드릴 테니."

"네에, 구전만 많이 주시면 나서보죠. 약으면서도 어리숙한 게 세상이니까 넘기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황 집사는 구전도 챙기고 거래선도 그대로 붙잡을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소문 안 나게 해야 돼요."

"당연하죠. 그만 가보겠어요."

황 집사는 털목도리를 둘렀다.

 

유일민은 가정교사를 맡고 최초로 맛보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임호태네 대문을 두들겼다. 임호태가 고등학교에 합격해 저녁 초대를 받은 것이다. 지금 그의 기분은 단순히 홀가분한 것만이 아니었다. 고등학교에 합격시켜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벗어난 해방감, 끝내 합격시킨 성취감, 그동안의 긴장과 초조가 한꺼번에 풀린 허탈감, 가정교사 자리가 굳어졌다는 안도감, 이런 것들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었다.

"어서 오세요, 선생님."

대문을 열며 임채옥이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빨간 스웨터를 입은 그녀는 포장된 조그만 물건을 유일민 앞에 내밀었다.

"이거 뭐요?"

유일민은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재빨리 살폈다.

"축하 선물이에요. 엄마 아빤 아직 안 들어오셨으니까 염려 마시구요."

임채옥은 고등학생답지 않은 묘한 눈웃음을 지었다.

"축하 선물은 동생한테 줘야 되는 것 아니오?"

유일민은 일부러 딱딱하게 말했다. 철없이 나대는 여고생의 감정이 번거로웠고, 부모들의 괜한 오해를 사 곤란한 처지에 빠지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

"동생한테야 진작 줬지요. 이건 선생님이 우리 집에 더 계시게 된 걸 축하하는 거예요. 빨랑 받으세요."

임채옥은 또 웃으며 선물을 유일민 앞으로 더 디밀었다. 이따가 저녁 먹을 때 줘요, 하는 말이 곧 나가려 했지만 유일민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건 선물을 안 받겠다는 거절이나 마찬가지였고, 그녀의 감정을 너무 심하게 밟는 짓이라 싶었다.

"학생이 무슨 돈 있다고 이래요. 담부턴 이러지 말아요."

유일민은 무표정하게 선물을 받아들었다.

"겨우 2~3년밖에 차이 안 나는데 꼭 어른처럼 그러는 것 싫어요."

임채옥은 유일민을 똑바로 쳐다보며 또렷하게 말하고는 획 돌아섰다. 유일민은 그 당돌함에 놀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지난 크리스마스에도 임채옥은 카드와 선물을 내밀었었다. 카드에는 다른 아무 말도 없이 꼭꼭 박아 쓴 글씨로 시 한편이 적혀 있었다. 김소월의 <미처 몰랐어요>였다. 그리고 선물은 가죽장갑이었다. 자신은 그때까지 맨손으로 가방을 들고 다녔던 것이다. 장갑을 낄까 말까 하룻밤을 고심했다. 끼자니 그 시에 화답하는 것이었고, 안 끼자니 너무 표 나게 그녀의 마음을 거부하는 깃이었다. 그러나 결국 장갑을 끼기로 했다. 그 집을 드나드는 동안 그 누구하고도 불편한 관계가 되고 싶지 않았고, 시린 손도 감싸야 했다. 그 대신 임채옥을 철저하게 묵살하는 쪽으로 행동했다. 마주쳐도 눈길을 피했고, 수학 문제 같은 것을 가져와 물어도 동생 공부 때문에 시간이 없다며 물리쳤다 그런데도 그녀의 눈길은 줄기차게 자신을 에워싸 왔던 것이다. 유일민은 임호태네 다섯 식구 모두와 밥상을 같이하기는 처음이었다. 합격을 자축하는 상답게 음식들이 푸짐하고 걸었다. 그리고 임호태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싱글벙글 웃음이 넘쳐흘렀다.

"우리 호태도 열심히 했지만 선생님이 너무 수고 많이 하셨어. 자아, 선생님 한잔 받아. 내 오늘 특별히 죠니워카로 준비했으니까."

임호태의 아버지 임상천 사장이 양주병을 따서 앞으로 내밀었다.

"아닙니다. 제가 먼저......."

유일민은 얼른 무릎을 세워 예의를 갖추었다.

"아니, 아니, 오늘 주빈은 어디까지나 선생님이니까. 자아, 얼른 받으라우."

"그럼요, 당연히 선생님이 먼저죠."

황 집사가 손짓까지 하며 거들었다. 유일민은 술잔을 받았다.

"자아, 저놈이 서울대 들어갈 때까지 책임지라구. 무슨 말인지 알지?"

임 사장이 술잔을 부딪치며 말했고,

"서울대만 합격시키면 내가 크게 인심 쓸 거예요. 자아, 이것 받아요."

황 집사가 봉투를 내밀었다. 유일민은 두 손을 받쳐 봉투를 받으며 마음 가라앉는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봉투에 든 것은 단순히 돈이라기보다 그들 부부의 신임장이고 새로운 임명장이었다. 앞으로 3년 동안 가정교사 자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 그건 대학을 무사히 졸업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자신에게 그보다 더 큰일은 없었다.

", 역시 본토배기 양주라 그런지 술이 빨리 오르는데."

군살 없이 좁은 얼굴이 유난히 강단져 보이는 임상천 사장이 술잔을 비우고는

", 춘부장이 6.25 때 돌아가셨다고 했던가?"

무슨 이야깃거리를 찾아야 되겠다는 듯 불쑥 물었다.

"."

유일민은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으레껏 일어나는 감정의 반응이었다.

"어떻게 돌아가셨는데?"

", 노무자로 나가셨다가......."

유일민은 평소에 해왔던 대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누가 묻거나 아버지의 직업은 농부였고, 사망 원인은 전쟁에 노무자로 나간 것으로 했다. 대답은 더 이상 다른 이야기로 번지지 않고 그것으로 끝나는 신기한 효과를 발휘했다. 어머니는 그런 효과까지 다 감안해서 그 응답을 준비해 준 것이 아닌가 싶었다.

", 노무자......, 그것도 애국은 애국이지."

임상천 사장은 묘하게 웃으며 번들번들 빛이 나도록 포마드를 많이 바른 머리를 손버릇인 양 건성으로 쓰다듬었다. 포마드를 바르는 것은 양복을 입는 것과 함께 멋쟁이의 상징으로 유행하고 있었다.

"난 말야, 6.25 때 온갖 전투를 다 치르며 전선을 누빈 용맹스런 장교였지. 532월에 부상만 당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장군이 됐을 거야. 내 동기들이 다 완 스타, 투 스타니까."

얼굴에 술기운이 불콰한 임상천 사장은 지난날의 회고에 젖어들며 눈이 가늘어졌다.

"아빠 또 술 드셨나 부다. 또 저......."

임채옥이 말을 하다 말고 그만 입을 다물었다. 황 집사가 눈을 부라리며 아랫입술까지 물어보였던 것이다.

"우리가 4738선을 넘어왔는데, 그때 참 암담하고 기막혔지. 있는 재산 다 뺏기고, 부모님들은 화병 나고, 김일성이 놈한테 원수 갚는 길은 공산주의를 쳐부시는 길밖에 없었어. 그런 생각은 월남한 사람들이 다 똑같았지.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김일성이를 때려잡고 공산당을 깨부시기 위해 서청(서북청년단)으로 군문으로 들어가 반공애국의 선봉대로 나서기 시작했던 거야. 난 그때 서청보단 정식 군인의 길을 택했지. 6.25가 터지고, 9.28수복과 함께 북진에 북진을 거듭할 때 나도 대위로 최선봉에서 진격을 했었는데 말야, 중공군 놈들 때문에 1.4후퇴가 발발했지. 그때, 그때 원자폭탄을 터뜨렸어야 해!"

임상천 사장은 갑자기 지른 고함에 맞추어 밥상을 내려쳤다.

"그렇구말구요, 그랬음 일이 얼마나 깨끗하게 끝났겠어요."

황 집사가 제때 맞장구를 쳤다.

"아빠아, 우린 다 아니까 괜찮지만 처음 당하시는 선생님은 놀래시잖아요."

원망조로 말하는 임채옥은 한심스럽다는 듯 어깨 숨을 내쉬었다. 사실 유일민은 그 느닷없음에 깜짝 놀랐던 것이다.

"잔소리 말고 너희들도 잘 들어, 이건 백 번 천 번 해도 과할 것 없는 살아 있는 반공 교육이야."

임상천 사장은 엄한 눈길로 자식들을 휘둘러보고는,

"영웅 맥아더 장군의 말을 듣지 않아 미국은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야. 트루만 같은 졸장부가 대통령이었으니 일을 다 망칠 수밖에 없었지. 어쨌든 38선 그어지고부터 오늘날까지 뭐니 뭐니 해도 반공, 멸공, 승공에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애국자들은 우리 월남민들이야. 그 애국심은 아무도 못 당한다구."

그는 자족감에 취하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들었다.

"그러믄요, 우리가 일등 애국자 집안이지요."

황 집사가 또 박자를 맞추었다.

"아빠, 그런데 통일되면 땅 되찾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그러던데요?"

임호태가 불쑥 말했다.

"아니, 어떤 놈이 그따위 소릴 해? 그런 놈이 도대체 누구니?"

황 집사가 쨍하니 소리치며 화를 냈다.

"우리 고등학교 학생들이 하는 말을 들었어요."

어머니의 기세에 눌려 임호태의 목소리에는 기가 빠져 있었다.

"아직 새파란 고등학생 놈들이 그따위 소릴 지껄여? 그것들이 전부 빨갱이 집안 자식 놈들인 게 틀림없다. 그런 것들은 당장 신고해서 뜨거운 맛을 뵈야 한다. 너 그놈들 얼굴 알지?"

눈을 부릅뜬 황 집사는 무서운 기세로 화를 내고 있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냥 슬쩍 보고 지나갔는데."

"이 멍청아, 그런 놈들은 얼굴을 똑똑히 보고 외워둬야지."

"됐어, 여보. 괜히 호태한테 화내지 말어. 그 어린놈들이 철없이 하는 소리가 무슨 상관이야. 땅문서만 잘 가지고 있으면 꼭 되찾게 되는 거니까 아무 염려 말어."

임상천 사장은 남편답게 여유를 보이며 아내를 다둑거렸다.

"호태 너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 우리 대에 못 찾으면 독자인 네 대에 가서라도 꼭 찾아야 되는 거야. 이 에미가 왜 38선 넘고, 난리 치르고 하면서도 이날 이때까지 땅문서를 신주단지 모시듯 해온 줄 아니? 땅문서만 있으면 땅은 언제든지 되찾을 수 있고, 그 땅이 기름진 논으로만 700마지기야, 700마지기, 700마지기면 네 평생 지주 노릇하며 부자로 살 수 있는 땅이란 말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어?"

"아이고, 수옥이하고 나하곤 뭐니? 여자로 태어난 것 참 서러워서 못 살겠다. 그치 수옥아?"

임채옥이 동생을 바라보며 입꼬리 처지도록 쓰디쓰게 웃었다.

"저 건방진 에미나이 또 어디다 초치고 앉았네?"

황 집사가 표독스러우리만큼 사납게 딸을 쏘아보았다.

"됐어, 됐어. 그만 해두고 밥들 먹자구."

임상천 사장이 술잔을 치우고 숟가락을 들었다. 음식이 걸고 푸짐했는데도 유일민은 맛도 모르고 저녁을 먹고 임호태네 집을 나왔다. 지난 날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풀려날 때의 기분과 너무나 흡사했다. 몸속을 휘도는 찬바람과 전신을 옥죄어오는 그 집을 드나들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에 휘말리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자신의 가정사를 알게 된다면 경찰들처럼 혹독하게 자신을 내칠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입을 열지 않는 한 그 사실이 덮어진다 하더라도 그들을 속이는 것이나 다름없는 자신의 입장이 괴로웠다. 그리고 그들의 서슬 퍼런 기세 앞에서 자꾸 상처가 덧나는 아픔을 견디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나 가정교사 자리를 새로 구한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아이고메 말도 마라, 서청놈들. 그놈들은 경찰보담도, 청년단 놈들 보담도 더 무서운 놈들잉께. 그놈들 무법천지로 나대는 판에 애맨 소작인들 수없이 상허고, 그놈들헌티 웬수 갚을라고 입산헌 사람들도 있었응께. 아이고 서청, 말만 들어도 징허고, 꿈에 볼까 무섭다."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던 말이었다. 그들이 왜 그랬었는지 비로소 확실하게 잡히는 것이 있었다. 지금까지도 원한이 그렇게 시퍼런데 38선을 바로 넘어온 그때 그들은 당연히 물불을 가리지 않았을 거였다. 그 깊은 감정의 골이 또 하나의 휴전선이라는 것을 유일민은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유일민은 집에 돌아와서 선물을 뜯었다. 한눈에 만년필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작고 예쁜 상자 뚜껑을 열었다. 만년필 위에 빨간 쪽지가 놓여 있었다.

"저는 선생님보다는 오빠라고 부르고 싶어요. 저는 마음이 추워요."

유일민은 난생 처음 받은 그런 편지를 손아귀에 구겨 쥐었다.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미국에서 세상을 떠난 소식은 사람들의 말을 잃게 했다. 사람들이 충격을 받은 것은 지난번 대통령후보 신익희에 이어 두 번째 당하는 돌연사였기 때문이다. 그 뒤숭숭한 여론을 간추리면 두 가지였다.

"나라가 망할려고 쓸 만한 인물들은 하늘이 다 데려간다."

"역시 이승만 대통령은 하늘이 내린 인물이다."

이 상반된 반응은 이미 보름 전부터 본격화된 정, 부통령 선거운동과 직결되어 있었다. 서울에서 처음 열린 자유당과 민주당의 집회에서 민심은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자유당 집회에 '실려온 민심 6', 장충단 공원에서 열린 민주당 집회에 '걸어온 민심 13'이라고 신문이 표현하고 있었다. 자유당에서는 각 동별로 버스와 트럭을 동원해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그것도 모자라 전차까지 전세차 노릇을 시켰는데, 민주당에서는 그런 일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 거였다. 그렇듯 정권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가 분명한 상황 속에서 조병옥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사람들의 충격과 낙심은 클 수밖에 없었다. 심장마비로 사망한 조병옥의 유해는 비행기에 실려 왔다. 돈암동 자택까지 운구 되는 것을 보려고 남천장학사의 학생들은 가까운 혜화동 로터리로 나갔다. 부슬부슬 가랑비가 내리는 속에 로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하늘이 무심치 않구만 그래."

"그럼, 하늘도 안 우시게 생겼나."

"좌우간 큰일 났어. 이 나라 국운이 없는 게야."

사람들이 우울하고 침울하게 나누는 말이었다.

"웬 사람들이 그리 많이 나왔지?"

"그게 민심이라는 거 아니야."

"광화문이나 종로 같은 데는 더 많았을 텐데, 다 합치면 굉장하지 않겠어?"

", 이십만은 되지 않겠어?"

"20? 20만 환이 아니고 사람 20만이면 얼마나 많은 숫잔데."

남천장학사의 학생들이 무거운 발길로 돌아오며 나눈 말이었다. 그런데 김포공항에서 돈암동에 이르는 70여 리에 모여든 애도 인파는 50만을 넘었다.

"서울 인구 200만에서 성인 인구 50만이면 유권자 절반 이상이잖아?"

"그렇다니까. 근데 민심이 서울만 그렇겠어? 전국적으로 거의 비슷하지."

"그럼, 민심의 심판은 끝났다는 건가?"

"당연하지. 거리로 나오지 않은 사람들까지 합치면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불신은 압도적이야."

"그럼 이승만은 대통령후보 사퇴하는 수밖에 없잖아."

"두말하면 잔소리지."

", 순진하게 김칫국부터 마시지들 말어. 세계 역사에서 독재자들이 권력을 스스로 내놓는 것 봤어? 3인조, 9인조로 짜서 공개투표를 하겠다고 공공연하게 떠들어대기 시작한 게 벌써 언제부턴데 그런 한가한 소리들 하고 앉았어. 내무부 장관 최인규 설쳐대는 꼴 못 봤어?"

"그따위 부정선거하면 끝장이야. 지금 민심이 얼마나 흉흉한 줄 알아?"

"글쎄, 끝장나면야 좋지."

남천장학사 학생들은 자유당 소속인 강기수 의원이 들으면 기절초풍할 말들을 다른 때와는 달리 터놓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일민은 그런 사회적 분위기와는 동떨어져 있었다. 그는 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똥이 더 급했다. 아니, 그건 불똥 정도가 아니라 훨훨 타는 불길에 에워싸인 거나 다름없었다. 며칠 전 검찰, 군대, 경찰의 사찰 관계관 회의에서 더 효과적인 간첩 색출을 위해 월북자 가족 명단을 작성하고 사찰활동을 대폭 강화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어머니는 줄기차게 감시당하며 시달려왔었다. 거기에다 더 '대폭 강화'하면 어쩌자는 것인가. 차라리 이 땅에서 살지 말고 죽어 없어지라는 것인가......, 유일민은 그 불길의 공포에 짓눌리며 암담한 좌절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대통령후보를 잃은 민주당에서는 정부에 선거일 연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중앙선거위에서는 변경 불가로 못을 박았다. 민주당은 대통령후보 없는 선거전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부통령후보 장면이 첫 유세지로 선택한 곳은 대구였다. 정치의 도시로 소문난 대구에서부터 기선을 잡으려는 의도에 맞추어 일요일이 유세 날이었다. 그런데 대구 시내 모든 중, 고등학교는 학생들을 강제로 등교시켰다. 그 강압조처는 곧 말썽을 불러일으켰다. 고교생 1천여 명이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시위 진압에 나선 경찰과 학생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학생들 수십 명이 부상을 당하는 동시에 250여 명이 연행되었다. 그건 이승만정권의 노골적인 선거운동 방해에 저항한 최초의 학생 시위사건이었다.

"언제 돌아오세요?"

남편을 배웅하는 한인곤의 아내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 전주 거쳐 광주 유세 끝나면 5일에는 서울 유세니까 아무리 늦어도 4일 날 밤까지는 돌아올 거야."

아내와 달리 한인곤의 얼굴에는 활력이 넘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정치에 투신한 것에 만족을 느끼고 있었고, 가슴속에는 국회의원이 될 꿈이 한없이 부풀고 있는데다, 이번에 장면 후보의 대도시 유세를 수행하게 되어 그의 양쪽 겨드랑이에서는 날개가 돋는 기분이었다.

"조심하세요. 반공청년단 깡패들이 무법천지로 날뛴다는 소문이잖아요."

"아무 걱정 말고 당신이나 집 잘 지켜. 당신 내 실력 알잖아?"

한인곤은 오른팔을 굽혀 알통을 내보이는 시늉을 하고는 급히 돌아섰다. 대구 유세를 치른 민주당에서는 자체 경호대를 강화시키는 게 시급한 문제로 등장했다. 애초에 경찰은 자기네 편이 아니었고, 정치깡패들이 설치는 판에서 후보자와 당 간부들의 신변 위협은 가중되고 있었다. 한인곤은 입당이 서너 달밖에 안 되었지만 육군 대령이란 경력에 힘입어 경호대의 1개조를 책임 맡게 되었다. 민주당 유세단은 밤 10시에 전주에 도착했다. 장면 후보를 앞세운 유세단이 막 역 광장으로 나서는 참이었다. 단 하나뿐인 가로등이 갑자기 꺼지고 말았다.

"이게 뭐냐!"

"조심해! 방해공작이다."

"경호대, 스크람을 짜! 빨리 박시님을 둘러싸라구!"

어둠 속에서 다급한 외침들이 터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중 나온 사람들로 붐비던 광장에서는 왁자지껄 소란이 일어났다. 드문드문 자동차가 지나가는 불빛뿐 광장은 짙은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빨리 택시를 잡아, 택시. 박사님을 앞뒤로 경호해야 하니까 대여섯 대를 잡으라구."

어두운 광장에서 빨리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경호대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또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택시마다 승차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휘발유가 떨어져 더 못 가요!"

"시방 빵꾸 때우러 가는디요."

이유도 가지가지 였다.

"한 번만 봐주씨오, 나 맘이 아닝게."

이렇게 말하는 건 그나마 솔직했다. 어쩌는 도리가 없었다. 한 대뿐인 민주당 지프차에 장 후보와 고급 간부 서너 사람이 타고 경호대는 그 차를 에워싸고 뛰면서 숙소로 향했다. 그들이 숙소에 도착하자 또 좋지 않은 소식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초저녁에 벌써 전주 전역에서 반상회를 소집해 내일 강연회에 가지 말라고 종용하고 협박했다는 거였다. , 태평동 일대에서는 쌀표, 고무신표, 비누표를 한 가지씩 배부했다는 것이다. 다음날 모든 공무원들은 하루 종일 자리를 비우지 못하는 고역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민주당 유세는 사람의 바다를 이룬 속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선거바람이 뜨거워지면서 반공청년단에도 비상이 걸렸다. 그런데 그 비상이란 군대식의 엄한 긴장상태가 아니었다. 선거운동원 겸 감시원으로 탈바꿈한 주먹패들은 어느 때 없이 신바람 나고 활기차 있었다.

"히히, 이거 정말 살맛나네."

"오랜만에 사람값 톡톡히 올라가고, 씨팔 선거가 좋긴 좋다."

"그래, 메뚜기 한철이다. 좆이나, 이 판에 신나게 돌려보는 거야."

그들은 평소와는 반대로 위에서 내려오는 돈을 두둑이 받았고, 극장표도 주머니에서 넘치고 있었다. 더구나 형사들까지 자기네한테 슬슬 아부하며 표만 많이 긁어모으라는 데는 기분이 달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용돈을 풍족하게 쓰며 여기저기 극장표를 선심 쓰고 다녔다. 물론 그때마다 겸손하고 은근하게 기호 몇 번을 찍으라고 토를 달았다. 그들은 아주 예절바른 선거 운동원이었다.

흑곰네 패거리의 짝눈과 꽁치는 어느 다방으로 들어섰다. 그들을 본 마담의 얼굴이 당황스럽게 변했다.

"이번에 꼭 갈아치워야 해. 이번에 못 갈아치우면 나라 망한다구."

"그럼, 그럼. 다 썩을 대로 썩었는데 이게 나라야 큰일 났어."

"근데 지방에서 부정선거를 해대면 그거 문제 아니겠어?"

세 남자가 큰소리를 내며 한창 열이 올라 있었다. 얼굴이 험하게 변한 짝눈과 꽁치가 곧장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형씨들, 남의 영업집에서 그만 떠들고 우리 좀 보실까?"

짝눈이 탁자 다리를 툭툭 차며 일어나라는 턱짓을 했다.

"아니, 당신들 뭐야?"

세 남자가 그들 둘을 불쾌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보면 몰라? 여기서 깽판치고 싶지 않으니까 얌전하게 따라 나와."

꽁치가 한 남자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아니, 이 자식들이 이거 어디서......."

다른 두 남자가 동시에 일어서며 곧 싸움이 붙을 것처럼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그들의 기세가 당당한 것은 자기네 수가 더 많은 것을 믿어서인지도 몰랐다. 그때 마담이 소리치며 나섰다.

"왜들 이래요. 커피 값이고 뭐고 당장 나가요, 나가 여기선 안 돼요."

마담에게 두 아가씨가 합세해서 남자들을 밀어댔고, 열서너 명의 손님들은 멀뚱멀뚱 구경을 하고 있었다.

"이것 봐, 마담상이 나가래잖아. 빨리 나가자니까 그래."

이렇게 말한 짝눈이 가까운 남자의 얼굴에 침을 뱉고 급히 돌아섰다.

"이 새끼들이 정말!"

세 남자는 앞서 나가는 둘을 뒤쫓아 다방을 뛰쳐나갔다. 그들이 다방을 나서자마자 골목에서는 곧 싸움판이 벌어졌다. 꼰대의 세 남자는 짝눈과 꽁치의 적수가 못 되었다. 그들은 주먹을 휘두르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헛 주먹질이었고 그나마 오래가지 못하고 짝눈과 꽁치의 잽싸고 정확한 주먹질, 발길질에 무너져 길바닥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요런 좆만한 새끼들아, 비싼 밥들 처먹고 여물통 함부로 나불대지 말어. 아가리는 가죽이 모자라 뚫어놓은 구멍이 아니니까."

짝눈이 한 남자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한쪽 다리를 까딱거리며 찬바람 돌게 내뱉었고,

"야 이 잘난 새끼들아, 가죽피리 불려면 똑바로 불어. 또 한 번 그따위로 불다가 걸리면 그땐 확 천당행이야!"

꽁치는 험악한 얼굴을 지으며 구둣발을 번쩍 들어 다른 남자의 얼굴을 곧 짓밟을 듯 위협적인 몸짓을 했다. 짝눈과 꽁치가 승리를 과시하며 가죽장갑을 털고 어깨를 삐딱하게 틀어 돌리며 움직이기 시작하자 구경꾼들은 슬금슬금 양쪽으로 밀리며 길을 텄다. 둘이는 그 길을 지나 유유하게 사라졌다. 영화표를 돌리던 때와는 전혀 다른 그런 행동도 그들이 맡은 임무 중의 하나였다. 어쩌면 운동원 노릇보다 그 감시원 역할이 더 중요한지도 몰랐다.

한편, 한인곤네 경호대가 앞장선 민주당 유세단은 정오 무렵에 광주에 도착했다. 그런데 마중 나와 있던 지구당원들은 당황해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와따 참말로 요것이 무신 괴변이랴. 그 흔턴 다꾸시가 워째 씨가 몰라 부렀다냐."

", 긍께 말이시. 개똥도 약에 쓸라먼 없다등마 딱 그 짝이시."

"근디 그놈에 택시덜이 그림자도 안 비친 것이 발써 반시간이 넘덜 안혔어?"

"하매 그리 되제라."

"하이고, 요것 탈 나부렀다. 우리가 쫄딱 속고 있었든 것이여."

"거 무신 소리여?"

"어허, 착 허먼 척 알아묵어야제. 경찰에서 미리 야료 꾸민 것이란 말이여."

"아이고메, 고것 맞은 게비네, 안 그럼사 택시 모자리판인 역전에 요리 한 대도 안 올 리가 없제."

그 시간에 광주 시내 이곳저곳에서는 택시 운전수와 손님들 사이에 똑같은 내용의 시비가 벌어지고 있었다.

"워메 아저씨, 기차 뜬단 말이오. 싸게 잠 딜다 주랑께라."

"와따 참말로 땁땁허요 이. 역전에넌 얼찐도 못허게 혔당께라."

"아이고, 땁땁헌 건 아자씨요. 발통 달린 택시야 지 맘대로 굴러댕기는 물건인디 워째서 역전에넌 못 가게 허랴."

"목 말른 놈이 샘 파는 것 아니겄소. 급허고 땁땁헌 건 아주머닌께 아주머니가 경찰서에 핑 가서 물어보든지 따지든지 허씨요. 나 딴 손님 태울랑께 얼렁 내리시게라."

"아니, 요것이 무신 변괴랴 그랴."

지구당원들은 뒤늦게 시내의 100여 대 택시 전부가 역까지 승차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유세단은 지구당 사무실까지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소식은 더욱 참담했다. 정오 12시부터 시내 여덟 개 극장에서 일제히 무료입장을 시작했고, 사람들은 통, 반장 집에 모여 집단으로 입장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래서 광주 장날인데도 장터에는 사람들이 없이 텅텅 빈 형편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유세장에 가는 사람들을 막으려고 골목마다 형사들이 사진기를 들고 지킨다는 거였다. 그러나 사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시내 전체 학생들의 발을 완전히 묶어놓고 있었다. 대학과 중, 고등학교에서 느닷없이 학기말시험을 실시한 것이다.

"이건 전주보다 훨씬 심합니다. 어째야 좋겠습니까?"

"전주에서 방해가 실패하니까 여기서는 더 조직적으로 강화한 거겠지요."

당 간부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회의가 벌어졌다.

"방해에 맞서 우리도 유세시간을 늦추면 어떻겠습니까?"

", 그거 좋은 생각이오."

"글쎄요, 늦추는 건 좋은데 이렇게 앞뒤가 막힌 상황에서 시민들에게 그 사실을 선전할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 짧은 시간에 그걸 신속하게 알릴 방안도 문제고, 더구나 시간을 늦추게 되면 내일 열릴 서울 유세에 차질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요, 그게 또 문제군요."

"사실 시간을 늦춘다 하더라도 이렇게 심한 방해공작 상태에서 시민들이 얼마나 더 올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서울 유세에 차질을 빚을 수는 없고, 이 악조건 속에서 우리가 유세를 강행하면 청중들은 좀 적을지 모르나 이런 악랄한 방해공작이 시민들을 자극해 오히려 역효과의 득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요, 유세를 통해 이 방해공작 전모를 철저히 규탄해서 시민들에게 알리도록 하구요."

"다 각오했던 거니까 예정대로 유세를 추진하도록 하십시다."

장면 후보가 내린 결론이었다. 유세단은 강연장인 공설운동장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그들은 중간쯤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어야 했다. 갑작스럽게 도로공사가 벌어져 있었다. 군대작전을 뺨치는 그런 방해공작들을 보면서 한인곤은 계속 놀라는 한편으로 어이없는 감탄을 하고 있었다.

 

서동철은 밤이 깊어 필동의 비밀장소를 찾아갔다. 유난히 일본식 집들이 많은 동네에서 그 집은 표 나게 커서 찾기가 쉬웠다. 어둠 속에서도 어렴풋하게 드러나는 정원수들과 넓은 정원을 보면서 서동철은, 어떤 왜놈새끼가 잘 처먹고 잘 살았었구나, 생각하며 가래침을 돋우어 내뱉었다.

"너희들은 특공대다. 1개 소대 다섯 명, 한 도에 1개 소대씩 투입된다. 작전은 앞으로 1주일, 작전 대상은 모두 현지에서 찍어줄 것이다. 작전은 죽이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다시는 행동하지 못하도록 가차 없이 해치워라. 작전을 끝내면 신속하게 다음 도시로 이동한다. 특공대가 뜨는 것은 현지 단원들의 얼굴이 팔려 비밀유지가 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희들은 말과 행동을 특히 조심해야 한다. 만약 한 군데서라도 작전이 실패해서 신문에라도 나는 날에는 그때는 각오하라. 소대원들은 소대장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서 작전을 수행하라."

왼쪽 볼에 칼자국이 팬 남자는 인상만큼 살벌하게 말하며 부하들을 휘둘러보았다. 그가 뿌리는 독기 앞에서 넓은 다다미방에 꿇어앉은 그들은 뻣뻣이 얼어붙어 있었다.

"쌍짱구 서동철."

", 쌍짱구 서동철."

서동철은 세 번째로 벌떡 일어섰다.

"3소대장, 경상남도."

"옛 명령대로 임무 수행하겠음."

서동철은 부하 넷을 거느리고 다음날 부산행 첫 기차를 탔다. 그들은 눈 많은 여관을 피해 광복동 어느 개인집에 진을 쳤다. 밥하는 여자 하나뿐인 집이었다.

"이기 손볼 열성분자 명단임더."

씨름꾼 같은 부산 사내가 서동철 앞에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모두 몇 놈이오?"

서동철이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물었다.

"열넷인데, 요게 사흘 동안에 다 뭉캐지겄능기요?"

"다 뭉캐야지요."

서동철은 쿡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대꾸했다. 부산 출신 뱅코가 걸핏하면 "팍 쌔래 뭉카뿌까"하는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무신 수로 다 뭉캔다는 기요? 일대일로 한다은 몰리까......."

"그건 우리한테 맡겨두고, 형씨는 우리가 찍는 놈들 뒤에 우리 안내할 애들이나 제때제때 붙여주쇼."

"그기야 염려 놓소 마. 그것 말고도 형씨들 튀기 좋구로 우리 아덜 좌악 깔아놀끼니 께네."

"됐소, 오늘 밤부터 시작합시다."

서동철은 소대를 2개조로 나누었다. 일을 빨리 처리하고, 다섯이 한 패로 행동해서 드러날 수 있는 고의성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느네들 절대로 선거 이야기를 입에 올려서는 안 돼. 그냥 시비가 붙은 것으로만 해서 까 부셔 알겠어?"

서동철은 2조 세 명에게 독한 인상을 쓰며 다짐했다. 어둑어둑해지는 초저녁에 서동철은 해운대로 나갔다. 첫 번째 표적이 서너 사람과 횟집에서 술을 마시며 떠들고 있었다. 횟집으로 들여선 서동철은 탁자에 걸려 넘어지는 척하며 그 남자의 옆얼굴을 들이받았다.

"아이쿠야......."

그 남자가 얼굴을 싸쥐었고,

"이 새끼, 니 뭐꼬?"

다른 두 남자가 벌떡 일어나며 서동철을 잡아챘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로......."

"이 새끼야, 사람 죽이놓고 잘못했다 카믄! 아가리 닥치그라."

얼굴을 받친 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서동철의 얼굴을 철퍽 갈겼다.

"뭐 이런 새끼들이 다 있어."

서동철의 욕설에 술 냄새 풍기는 네 남자가 기세 좋게 덤벼들었다. 서동철을 따라 밖으로 나온 그들은 5분이 지나지 않아 다 땅바닥에 눕듯 해버렸다. 서동철은 군홧발을 높이 들어 그 남자의 무릎을 장작 분지르듯 힘껏 내려찍었다. 비명소리가 요란했다.

서동철은 진해, 마산, 진주를 거쳐 예정대로 서울로 돌아왔다. 날이 갈수록 가열되고 있는 선거바람은 산동네 움막촌이라고 해서 비껴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천두만과 나삼득이 통장한테 처음 받은 것이 영화 무료입장권이었다.

"하아 요것 참 아까우요 이. 기왕에 줄람사 요것을 현찰로 주면 피차에 을매나 좋았겄소."

천두만은 입장권을 되작거리며 아쉬워했다.

"알았소. 우선 받아두시오. 내가 더 힘을 쓸 테니까."

통장이 눈을 끔벅끔벅했다.

"성님, 우리 신세에 어디 영화 귀경허니라고 일거리 놓치게 생겼소. 요것을 반값에 폴아넴기는 것이 으쩌겄소?"

천두만이 내놓은 생각이었다.

". 폴 수만 있음사 그것 존디."

그래서 다음날 시장에 나가 영화표를 팔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웃음거리만 되고 말았다. 그런 입장권 없이도 아무 영화관에나 가면 그 앞에서 좌석표를 나눠준다고 했다. 그 표를 버리기는 아깝고, 천두만은 어쩔 수 없이 팔자에 없는 영화 구경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틀이 지나 통장이 또 밤에 찾아와 비누표와 고무신표를 내밀었다.

"딴 동네는 둘 중에 하나씩뿐이지만 우리 동네는 내가 특별히 힘써서 두 장씩이오. , 알지요?"

", 사람이 의리럴 지켜야지라."

먹고 안 찍으면 그만이다 하는 배짱으로 천두만은 찰방지게 대답했다. 그 두 가지는 돈 주고 사 써야 하는 것이라서 영화표에 비할 것 없이 기분이 좋기도 했다.

"받아묵기는 받아묵는디 워째야 쓸랑가 속이 껄쩍지근 안 허요?"

이튿날 아침을 먹으며 천두만은 말을 꺼냈다.

"껄쩍지근허기는 머시가 껄쩍지근혀? 받아묵고 안 찍으면 그만이제. 우리럴 요 꼬라지로 맨근 것이 누군디 그 영감탱이럴 또 찍어?"

나삼득이 화를 내듯 말했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고 또 통장이 찾아와 밀가루 한 포대를 빨리 가져가라고 했다. 천두만은 그 횡재를 믿을 수가 없었고, 어깨에 밀가루 포대의 묵직한 무게를 느끼며, 이것을 받아 먹고 표를 안 찍어줄 것을 생각하니 그 통쾌함이 더없이 좋은 꿀맛이었다.

"밀가루는 잘 먹고 있소?"

다음날 밤에 통장이 또 움막으로 기어들며 물었다.

", 덕분에 아조 잘 묵고 있구만이라."

천두만은 중국집에 팔아넘긴 것을 싹 감추며 입맛까지 다셔 보였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은 또 무엇을 주려는가 하는 기대로 통장의 눈치를 살폈다.

"날품벌이라는 게 하루만 공쳐도 살기 어려운데 내일 투표에 나갈 것 뭐 있겠소. 천 씨가 나한테 약속한 대로 잘 찍어줄 테니까 천 씨 투표 통지표를 내놓으시오."

"예에......?"

천두만은 통장을 멍하니 쳐다보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편, 이규백의 어머니 영암댁은 며느리를 데리고 이틀밤째 가까운 국민학교로 불려나갔다.

"참말로, 흰 것도 아니고 씨커먼 고무신 한 짝씩 주고는 요것이 무신 일인지 몰르것네. 한 분 연습혔으면 되얏제 누구럴 바보 등신으로 아는가 어찐가."

며느리는 시어머니 뒤를 따라가며 군시렁거렸다.

"아이고메, 입 싸게 놀리지 말그라. 누구 들을랑가 무섭다. 그러다가 규백이헌테 해되면 으쩔라고 그려. 쪼간 마땅찮드라도 관에서 시키는 일은 그냥 바보입네 허고 따라가는 것이 무사형통인 것이여."

영암댁은 질색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며느리 해남댁은 속이 더 꼬였지만 시동생에게 해가 갈지 모른다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이제 남편이 떠나고 없는 형편에 시동생이야말로 집안의 기둥이었다. 시어머니와 다르게 시동생이 어서 고등고시에 합격하게 해달라고 정화수 떠놓고 빌게 된 것도 남편이 떠난 다음부터였다. 시동생이 출세하지 않고는 자신의 세 아이들의 앞날도 막막해질 판이었다.

"자아, 지금부터 다시 한 번 연습을 허겄습니다. 어지께 헌 대로 세 사람씩 짝을 맞추고, 조장이 가운데 서서 붓대롱을 얌전허니 꼭 눌른 담에, 세 사람은 실수가 없는지 서로서로 투표용지를 바꿔서 확인허고, 그것을 투표함에 넣기 전에 우리 참관인헌테 꼭 보이고 나서 잘 접어 투표함에 넣는 것이오. 지금부터 실습을 할 것잉께 어지께맨치로 실수하고 틀리는 일 없도록 혀야 허요. 만일에 한 조라도 틀리면 내일 저녁에 또 연습허게 된께. 다들 정신 똑똑허니 챙겼소?"

면서기의 말에 사람들은 마치 아동들처럼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3인조 공개투표의 실습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셋씩 조를 이루어 면서기가 지시한 대로 해나갔다. 두 번째 연습이라서 틀리는 조가 없었다.

"참말로 얄궂고 요상헌 꼴 다 보겄네."

"긍께 말이시. 글라면 멀라고 투표허고 자시고 헝고. 눈감고 아웅도 유분수제."

"아이고, 대통령 자리가 그리도 존가. 요 꼬라지 허는 것 아그덜헌테 낮부끄러와 워디 살겄어."

사람들은 어둠에 묻힌 길을 더듬어 집으로 돌아가며 혀를 차고 있었다.

또한, 유일민의 어머니 해촌댁은 저녁밥 손님이 거쳐간 다음 한숨 돌리고 있다가 달갑잖은 사람을 맞아야 했다.

"선거 대목에 한몫 보요?"

정 형사가 멋대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참새도 앉는 자리가 따로 있제라."

해촌댁은 오금을 박으면서도 등줄기가 서늘해지고 있었다. 형사나 경찰만 대하면 일어나는 증상이었다.

"아덜 유일민이 안 내래왔소?"

"공부허기 바쁜디 멀라고 내래와라?"

태연하게 대꾸하면서도,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해촌댁의 가슴은 철렁했다.

"저번달에 서류 작성헌 뒤로 아덜이 머시라고 헙디여?"

"암 말도 없었는디요."

해촌댁의 가슴은 더 철렁했다. 그 서류는 월북자 가족 명단이었다.

"죄인이 헐 말이 있을 택이 없제."

정 형사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낼 투표 헐 챔이요?"

해촌댁을 꼬나보며 물었다.

"글씨요, 어째야 헐랑가......."

낌새가 이상해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해촌댁은 어물거렸다.

"구렝이 담 넘지 말고 아싸리허게 헌다, 안 헌다 딱 잘라 말허씨요."

"금메, 혀도 그만 안 혀도 그만......."

그들에게 하도 시달려 온 해촌댁은 무슨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고 여전히 우물쭈물하며 몸을 사렸다.

", 고것 마침 잘 되얏소. 일도 바쁘고 귀찮허고 헌디 투표 그까진 것 그만두씨요. 여그 아덜 표꺼정 두 표제라? 나가 잘 알어서 헐 것잉께 투표 통지표 얼렁 갖고 나오씨요."

해촌댁은 그제서야 그가 왜 찾아왔는지를 알았다. 그의 그물에 걸린 이상 빠져나갈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짜아, 요것 찾아다가 잘 쓰시오."

정 형사가 쪽지 두 개를 탁자에 던지고 나갔다. 그건 고무신표 하나와 비누표 하나였다.

 

14일부터 경찰들이 싹 자취를 감추고 헌병들이 교통정리와 순찰에 나서는 바람에 서울 거리는 갑자기 카키색으로 덮이는 것 같았는데 선거 당일인 15일에도 경찰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짐작하고 있었다.

서동철은 하루 내내 지프차를 타고 서울 변두리로 돌아다니며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말썽부리는 민주당 참관인들을 내쫓느라고 그는 지칠 지경으로 완력을 써댔다. 그는 자유당 정권에 충성하려고 그렇게 열성을 다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한 번 동원될 때마다 양복 한 벌과 구두 값 명분으로 5만 환씩을 받았다. 5만 환이면 하급 경찰의 두 달 월급이었다. 서동철은 이번 기회에 한밑천 톡톡히 잡을 작정을 하고 그 돈을 착실히 모으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정, 부통령 선거는 끝이 났다. 개표 결과를 기다리며 다음날 조간신문을 받아 든 사람들은 새로운 사태에 놀라야 했다. 데모대에 경찰이 발포를 하여 11명이 사망하고, 37명이 총상을 입은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건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마산에서 벌어진 데모 진압의 결과였다. 데모는 서울에서도 일어나며 세상 분위기는 자꾸 뒤숭숭해지고 있었다. 부정선거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며 며칠이 지났다. 그런데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시체 하나가 세상을 뒤흔들어 놓았다. 시체의 얼굴에 박혀 있는 포탄은 그 양쪽 끝이 눈과 목덜미께에 조금씩 나와 있었다. 신문에 난 그 참혹한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끔찍스러운 전율에 떨었다. 그 감정을 수습하고 나서 사람들은 포탄이 시체의 눈을 뚫고 들어가 목덜미로 솟았다는 것을 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비로소 분노에 찬 입들을 열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이러고도 민주경찰이고 민중의 지팡이야!"

"이거, 포탄을 쏴서 죽인 거야, 죽은 시체에다 포탄을 쏜 거야?"

"이 포탄이 불발이었기 망정이지 폭발했더라면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했을 것 아닌가. 죽일 놈들 같으니라구."

"수장시켰다는 게 헛소문은 아니었군 그래. 이거 다된 세상이야."

사람들의 이런 분노를 부채질하듯 마산에서는 데모가 더욱 격화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며칠간의 침묵을 깨며 마침내 서울에서 대규모 데모가 터졌다. 고대생 전체가 결의한 데모대 3천여 명은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학교를 출발해 구보를 하며 종로로 진출했다. 여러 개의 크고 작은 플래카드들은 그 데모가 며칠에 걸쳐 준비된 것임을 보여주었고, 그것은 대학생들이 집단적으로 일으킨 최초의 데모였다. 데모대는 종로5가에서 버스들로 길을 가로막고 나선 경찰대의 제지를 받았다. 그러나 성난 데모대의 물결은 그 저지선을 쉽게 무너뜨려버렸다. 고대생들은 '방관자는 비겁자다, 우리 모두 총궐기하자'는 구호를 외치고 삐라를 뿌리며 화신 앞까지 진출했고, 다시 경찰들의 저지선을 돌파해 2시 반쯤 국회의사당에 도착했다. 그런데 데모대는 그들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종로를 관통해 오는 동안 길가에서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내던 시민들이 언제부턴가 합류하기 시작해 의사당 앞에 이르렀을 때는 데모대는 3만여 명으로 어마어마하게 불어나 있었다. 태평로 넓은 길은 온통 사람의 바다를 이루어 차량 통행이 완전히 중단되고 말았다. 경찰들은 데모대를 해산시키려고 들지 않고 멀찌감치 중앙청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다. 그건 데모대가 경무대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대학생들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농성을 벌이며 격렬하게 구호를 외쳤다.

"민주 역적 몰아내자!"

그들의 구호를 선창으로 그들을 에워싼 시민들이 복창했다. 그런데 겹겹이 싸인 시민들의 수가 너무 많아 선창이 전체에 다 퍼지지 못해 시민들은 복창을 받아 복창을 하고, 또 복창을 받아 복창을 해서 서울 심장부에서는 긴 메아리처럼 구호의 물결이 굽이쳐 나아가고 있었다.

"마산 사건 관련자를 전원 처단하라!"

시간이 흘러가도 대학생들은 해산할 낌새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신들의 요구를 국회가 의결할 때까지 농성을 풀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4월 중순의 해가 기울고 있었다. 결국 그들의 해산을 설득하기 위해 유진오 총장이 학생들 앞에 나섰다.

그 시간에 반공청년단의 종로구단 동대문 특별단부에 소속된 단원들은 단부 사무실로 다급하게 집결하고 있었다. 그들에겐 긴급 출동명령이 떨어져 있었다. 사무실로 모여들고 있는 그들의 얼굴은 긴장된 탓인지 한층 험상궂고 사나워 보였다. 반짝거리는 구두에 바지 줄을 칼날처럼 세워 양복을 빼입고 다니는 평소와는 달리 중간 보스들도 잠바나 작업복 차림으로 자기네 부하들을 단속하고 있었다.

"넌 뭐야?"

쭉 찢어진 눈이 고약스럽고 얼굴에 독기가 지르르 흐르는 딱벌이 턱짓했다.

", 이겁니다."

짝눈이 서둘러 뒷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묵직한 느낌으로 풀리는 것은 자전거 체인이었다.

"됐어 꽁치 넌?"

", 여깄슴다."

꽁치의 왼쪽 소매 속에서 흘러나온 것은 쇠파이프였다. 흑곰, 야쿠샤, 곰보가 차례로 내보인 것은 쇠갈퀴, 각목, 쇠사슬 같은 흉기들이었다. 딱벌이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양담배 팔말을 꼬나 물었다.

"다들 들어라, 우리는 곧 빨갱이 앞잽이들을 소탕하러 나간다. 우리 반공청년단의 본때를 보여줄 때가 온 거라 그런 말씀이야. 너희들은 맘놓고 학삐리새끼들을 조지고 박살내서 공을 세워야 해. 빌빌대는 새끼들은 골통 바숴지는 줄 알라구, 다들 알아들었지!"

중간 보스 중에서 고참인 왕발이 40여 명을 휘둘러보며 살벌하게 말했다. 그들은 자기네의 공격대상이 고대생들이라는 걸 다 알고 있었다. 고대생들이 경무대로 갈지 몰라 중앙청 옆의 청년단 본부까지 출동했다가 되돌아왔던 것이다. 서동철은 또다시 유일민의 학교가 아닌 것을 큰 다행으로 여겼다. 그때 한 사람이 사무실 문을 열어젖히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떴다. 떴어!"

그는 그들의 눈에 익은 형사였다.

"가자, 출동이다."

왕발이 팔을 치뻗으며 외쳤다. 그들은 우르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패거리는 그들만이 아니었다. 길 건너편에서도 그들만큼의 수가 큰길로 나서고 있는 참이었다. 그들은 패를 나누어 여기저기 골목으로 몸을 감추었다. 거리는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서동철은 천일백화점 맞은편 골목에서 또 유일민을 생각하고 있었다.

일민아, 넌 데모하지 말어. 데모하다 걸리면 넌 꼼짝없이 빨갱이야. 빨갱이 알지? 평생 신세 조지는 거.’

"방관자는 비겁자다. 다같이 궐기하자!"

대학생들이 외치는 우렁찬 구호가 가깝게 들리기 시작했다. 경찰 백차와 취재차량들의 선도로 데모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넓은 길을 가득 메운 데모대의 행렬은 엄청났다. 경찰 백차가 지나가고 데모대의 선두가 그들의 포위망에 들어섰을 때 외침이 터져 올랐다.

"돌격!"

"까부셔!"

이 골목 저 골목에서 튀어나온 패거리들이 흉기를 휘두르며 데모대의 선두를 덮쳤다. 비명과 아우성이 뒤엉키며 학생들이 푹푹 쓰러지고 나둥그러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수십 명의 학생들이 길바닥에 널브러졌고 데모대의 선두는 갈팡질팡 흩어지고 있었다. 패거리는 그 뒤를 쫓으며 계속 흉기들을 휘둘러댔다. 그러나 데모대는 그 정도로 무너지지 않았다. 데모대에서 함성이 일어나며 돌과 벽돌 같은 것들이 패거리 쪽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깡패새끼들 죽여라!"

"다 때려잡아라!"

학생들의 외침이 점점 커지며 벽돌과 돌은 더욱 거칠게 날아왔다. 그 기세에 눌린 패거리는 더 공격을 못하고 빗발치는 돌과 벽돌을 피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수많은 시민들은 손에 잡히는 대로 돌이며 벽돌, 각목 같은 것들을 가져다가 학생들을 돕고 있었다.

"와아아!"

격렬한 함성이 터지며 학생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각목이며 몽둥이를 들고 내닫는 학생들의 열기 앞에 패거리들은 허둥지둥 어둠속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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