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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연인들

하얀 연인들

Carole Mortimer

 

1

"축하해요, 브리나." 프랭크 스탭리턴이 미소 지었다. "임신 9주째에요."

진찰이 끝나 블라우스의 단추를 잠그고 있는 브리나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임신이라고? 그럴 리가 없어! 의사 프랭크 8년 전 그녀가 런던에 왔을 때부터 진찰받아 온 와 만날 약속을 했을 때조차도 그런 가능성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었다.

"우선 당신에게 일차적으로 비타민제를 처방하겠어요." 의사는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초기 몇 주간은 특히 조심해야 하니 분별 있게 행동할 것, 그리고 균형 있는 식사와 적당한 운동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걸 명심해요. 당신은."

"확실해요?" 긴장 때문에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나는 단지." 의사가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바라보며 브리나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난 백 퍼센트 확신하기 전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노라 생각해 왔기 때문에 그래서 다시 물어 본 거예요."

그녀는 의사가 그 진단이 전적으로 옳다고 확신할 수는 없노라고 말할까 봐 너무도 겁이 났다. 인생의 그 어떤 순간에라도 그 소식은 그녀에게 넘치는 기쁨을 안겨줄 일이었고 프랭크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임신할 수 없는 몸이 아닌가.

프랭크는 안심시켜 주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인다. "나를 믿어요, 브리나. 확실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내게 똑같이 되물었는지 몰라. 내가 그들에게 임신이라고 말했을 때 말이오." 그는 놀리듯이 말했다. "심지어 그들은 대부분 내게 오기 전에 스스로가 진단이 어떻게 나오리란 걸 웬만큼 짐작했으면서도 그랬다니까."

의사는 마지막 말을 강조하듯이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몰랐었다. 전혀 짐작조차도 하지 못했다. 지난주 의사의 검진 결과도 그녀의 몸이 또다시 변덕을 부리는 걸로 생각했었다. 감정적으로 긴장하면 임신한 것과 같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고 전문가들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최근 나는 너무도 긴장한 상태였다.

"이제 당신은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안정을 찾고 좋은 산부인과 의사를 찾아야 해요." 의사가 충고했다. "만약 원한다면 내가 한 사람 소개해 줄 수도 있는데."

"그건 그리 서두르지 않아도 되겠죠? 그렇죠?" 그녀는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일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너무 오래 지체해서는 안 돼요, 브리나." 의사는 미소 지으며 책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앞으로 7개월간 당신과 아기는 최고의 보살핌을 받아야만 해요."

임신! 아직도 브리나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의 그녀에게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별로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사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애쓰며 꼼꼼하게 블라우스의 단추를 채웠다. 옷을 다 입고 핸드백을 들었을 때 홍조 띤 그녀의 뺨을 보고 의사가 놀란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녀는 그에게 살짝 미소 지었다. "당신에게 왔던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나는 상당히 놀랐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군요." 브리나는 비틀거렸다. "왜 그런지는 당신도 알 거예요." 그녀는 잠시 멍하니 의사를 바라보았다.

"물론 알고 말고요." 프랭크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충격이 가라앉고 기분이 좀 나아지거든 내게 전화를 해요. 의논을 좀 해봅시다. 지금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당신의 건강상태가 매우 좋다는 것, 그리고 완전히 정상임신이란 확신뿐이오."

지난 몇 주 동안 그녀의 생활은 전혀 비정상적인 것이었고, 임신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게 될 뿐이다. 임신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벌써 그러하다.

"고마와요." 그녀는 힘겹게 말했다. "난 좀 당황했어요." 그녀는 다리를 후들거리며 핸드백을 끌어안았다. "나중에 전화하겠어요." 마치 몇 시간 후면 지금 느끼고 있는 충격에서 벗어날 듯이 덧붙여 말했다.

프랭크는 친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좋은 소식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모양이로군요."

누군가가 바로 아기 아버지를 가리키는 말임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래요." 그녀는 겨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마와요, 그리고."

"내게 고마워 할 것 없어요, 브리나." 의사는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 기적에 전혀 관계가 없어요. 순전히 당신과 아기 아빠 힘으로 이 모든 일이 이뤄진 거요."

브리나는 응접실과 대기실을 지나 주차장을 가로질러갔다. 차안에 앉아 핸들에 머리를 기댈 때까지도 몸이 떨려오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임신이라니! 여러 해 전에는 이런 날을 꿈꾸기도 했었다. 자신의 아이가 자신의 내부에서 자라는 것을 느끼게 될 날을. 하지만 그때 부모님들이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소녀시절 받은 바 있는 응급수술 때문에 자신이 영원히 아기를 갖지 못하게 됐다는 사실을.

그것은 너무나도 쓰디쓴 아픔이었다. 수많은 나날들을 울며 지샜고 지신의 운명을 저주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직도 여자로서 충분히 사랑할 수 있다고 결사적으로 자신을 타일러야만 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이 인생을 완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과, 모델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기까지에는 수년간의 자기확인이 필요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원했던 행복이 눈앞에 보이는 듯한 이때 임신을 하게 된 것이다. 바로 래프의 아기를.

하지만 래프는 아기에 대해 도저히 입도 벙긋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사람이다. 브리나는 자신의 배를 조심스럽게 싸안았다. 나의 아기! , 하느님! 얼마나 원했던 일이었는지요!

그러나 만일 내가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을 솔직히 털어놓는다면 나는 래프를 잃게 될 것이다. 아니, 어찌 됐든 나는 어차피 그를 잃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생각을 부정하고 싶어도 그건 부인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래프는 점차 그녀로부터 조금씩 멀어져가 결국 둘 사이는 끝났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단지 그가 아직도 그러지 않고 있는 게 이상할 따름이다. 어쩐 일인지 다른 여자들에 비해 나는 훨씬 오래 그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금융계의 명사로서 시()에서 막강한 세력을 휘두르고 있는 래프 갤러거와 같은 사람의 아내가 된다는 생각은 애당초 회의적이었다. 처음 그를 만난 순간 그녀는 그를 유념해 둘만한 가치가 있는 권력인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렇게 그의 안내가 될 생각을 하게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래프는 아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처음부터 내게 지난 10년 동안 그를 스쳐간 다른 여자들에게 한 것 이상은 해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말했다. , 정열과 배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그 두 가지 중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때는 진실만이 남게 된다는 것을.

 

그토록 확실하게 언명한 사람에게 그들이 가장 큰 실수를 했다는 것, 즉 그들이 서로를 원했던 동안 하나의 생명이 생성됐다는 사실을 어떻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에게는 절대로 말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다시 한번 통감했다. 그녀의 가녀린 몸매에 변화를 가져오기까지는 앞으로 몇 주밖에 남지 않았다.

래프가 조만간 우리 사이를 끝내리란 걸 잘 알면서도 어째서 난 몇 주가 남았나를 세고 있는 걸까? 심지어 오늘 끝내 버릴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아빠에게 얘기할 작정이니?"

브리나는 맞은편에 앉은 예쁘게 생긴 소녀를 흘낏 쳐다보았다. 병원 진찰실을 나온 후, 점심 생각이라곤 전혀 없었지만 케이트와 점심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정신없이 레스토랑으로 차를 몰았던 것이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는 전혀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케이트가 방금 전 레스토랑 안으로 민첩하게 들어섰을 때 그녀는 이미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케이트의 모양 좋은 검은 머리칼이 곱슬거리며 흘러내렸으며 회색 눈은 반짝였다.

반짝이는 케이트의 회색 눈이 브리나로 하여금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게끔 만들었다.

"그에게 뭐라고 말했다고?" 브리나는 얘기에 열중하려고 애쓰며 신중하게 물었다.

순간 짜증스러움이 짙은 회색 눈 속에 스쳤다. "브리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을 한마디도 안 들었잖아요!"

케이트가 그녀 아버지의 또 하나의 특징을 유감없이 보여 주는 동안 브리나는 반쯤 미소 짓고 있었다. 부녀가 모두 누구든 자신에게 완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못 참는 성격이다. 아버지의 경우 그것은 그의 강한 성격의 일부분을 형성하고 있으나 이 18살짜리 소녀에게는 단지 성급함으로 나타날 뿐이다. 그러나 브리나는 케이트가 만년에 완벽한 여주인이 되어 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미안, 아침에 너무 바빴거든."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딴 생각을 떨쳐 버리려 애썼다.

"." 케이트는 검열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좋아요! 나는 당신이 내 편에서 아빠에게 이 얘기를 해주길 원해요. 브렌다와 내가 함께 사는 걸로 말예요."

이 말에 브리나의 머리가 맑아졌다. "그 문제라면 네가 이미 아버지와 상의한 걸로 알고 있어. 그런데도 아버지께선 승낙하지 않으셨잖아?" 부녀간에 있었던 대화를 모두 알고 있었고 또한 그 결과 역시 불가피한 것이었음을 안 그녀는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 문제에 대해서 결정적인 얘기는 전혀 없었다구요." 케이트는 열렬히 주장했다. "만약 당신이 제 편을 좀 들어주신다면 아빤 좀 더 너그럽게 봐주실 거라구요."

브리나는 그것이 좋은 생각이라곤 결코 생각지 않았다. 물론 18년간 자라온 집을 떠나고 싶어 하는 케이트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녀가 혼자 살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곤 아직 생각할 수 없다. 특히 브렌다 샌더스와 함께라면 더욱 곤란한 문제다.

케이트는 지난 학기 대학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여러 친구들과 사귀게 되었다. 브렌다는 그중 한 명이었는데, 볼때마다 다른 남자친구와 어울리는 것 같아 맘에 들지 않았다. 한번은 지금 케이트가 함께 살기를 원하는 그 지저분한 아파트에 가본 적이 있는데, 졸린 눈을 한 벌거벗은 청년이 브렌다의 침실에서 튀어나왔던 것이다. 그런 식의 생활을 선택하는 것은 물론 브렌다의 자유겠지만 케이트의 경우는 다르다. 겉으로는 닳아빠진 것 같아 보이지만 아직 그녀는 퍽 순진하다. 케이트의 아버지는 그녀가 좀 더 순진한 채로 머물러 있어 주기를 원할 것이다.

"내 의견이 어떤 것이든 그게 네 아버지의 결정에 조금이라도 변화를 가져다 줄 것 같진 않아." 브리나는 미네랄 워터를 홀짝이며 냉정하게 대꾸했다. 웨이터에게 마실 것을 주문하려가 때마침 자신이 지금 알코올을 마셔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그렇지만 내 생각에는." 케이트는 갑자기 뭔가 깨닫기라도 한 듯 잠시 말을 멈췄다. ", 당신은 당신과 아빠와의 관계가 거의 끝났다고 말했죠?"

잔인할 정도로 무디고 솔직한 것이 갤러거의 자식들 20살 먹은 폭과 그 누이동생 케이트의 특징이다. 래프가 아주 어린 나이에 한 결혼에서 얻은 그의 두 자식들을 자신에게 처음 소개해 준 그 순간부터 브리나는 그 점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나와 래프가 왜 함께 살지 않는지, 왜 그들 사이를 공공연한 것으로 만들지 않는지를 물었었다. 마치 이젠 우리들도 어른이니까 다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물론 래프와 난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두 사람 모두 그런 밀접한 관계를 원하진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의 독립된 생활을 사랑했고, 래프는 결코 여자와 그런 깊은 관계에 빠지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 그런 식의 구속받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두 사람 모두에게 행복했다. 아니, 행복했었다.

"나는 믿지 않아요." 케이트는 그녀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았다. "당신과 아빠는 이미 5개월이나 계속돼 왔어요. 다른 여자들은 아무도 3달을 채 넘기지 못했다구요."

그녀 역시 자신과 래프와의 관계가 다른 여자들보다 두 배나 오래 지속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지난달쯤부터 그는 차츰 초조해하는 듯했고, 이제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끝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오늘까지, 아니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다른 여자들보다 나 지신에게 오래 주어지고 있는 보너스 같은 나날들에 대해 감사했었지만, 이제는 래프가 끝내지 않는다면 나 자신이 끝내 버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아닌가.

"그가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으로 그만인 거야."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요!" 케이트가 비웃듯이 말했다. "폴과 난 아빠가 당신과 얼마나 빠른 시일 내에 결혼할 것인가 내기까지 한 걸요."

브리나는 케이트를 측은해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아, 좀 더 알아야만 해."

래프의 눈과 똑같은 회색 눈이 안절부절못하며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쨌든 난 아빠가 마침내 결혼하기로 결심했을 때 상대 여자로부터 거절당하리라곤 생각지 않아요."

브리나는 케이트를 외면했다. "거절당하기 위해서 신청하는 사람들도 있지."

"당신은 아름다우니까 아빠는 틀림없이 곧 당신에게 결혼을 신청할 거예요." 케이트가 자신있게 말했다.

아름다움이란 게 도대체 결혼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람! 물론 나의 아름다움은 나 자신도 잘 알고 있다. 8년전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스스로가 선택한 직업에 지금껏 종사해 왔으니 말이다. 나의 날씬한 몸매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긴 금발머리와 검은 속눈썹, 그리고 보랏빛 눈동자가 얼마나 사진을 잘 받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외모라 지난 6년간 직업상 큰 역할을 했으며 앞으로도 몇 년간은 그럴 것이란 걸 알고 있다. 그녀는 2년전 자신의 모델 에이전시를 열었고, 그때도 자신의 외모가 아직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먹는 것에 주의하지 않아도 되고, 아침마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얼굴의 주름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재정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성공적인 도약이었으며, 래프를 만나게 된 것도 그 대행업체의 일을 통해서였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자신의 아름다움이 그의 주의를 끌었을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그의 흥미를 그토록 오래 지속시켜 주지는 못했으리라. 왜냐하면 자신 이전에도 그에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미인들이 있었을 테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아, 케이트." 브리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는 그 모든 경솔함에도 불구하고 케이트를 좋아했다. 어떻게 사랑하는 남자를 그토록 빼닮은 그의 딸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얽매거나 구속하지 말 것 이것이 애당초 그들의 관계가 시작될 때의 약속이었다. 브리나는 이 규칙을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래프를 사랑하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래프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심했다. 그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그들의 관계는 끝날 테니까.

나의 아기도 케이트처럼 래프를 닮을까? 엄마 아빠가 모두 키가 크니까 아기도 분명 키는 클 테고, 나는 맑은 금발이지만 래프는 검은머리니까 아마 짙은 색 쪽이 우성이겠지. 아기에게서 래프의 모습을 속속들이 보게 된다면 얼마나 이상한 느낌이 들까!

"브리나? 브리나!"케이트가 못 참겠다는 듯이 소리쳐 부르는 바람에 브리나는 다시 멍한 상태에서 깨어났다. "아시겠어요? 내 말은."

"알았어. 받아들일게." 브리나는 낮은 목소리로 케이트를 안심시켰다. "이제 우리 점심식사를 주문할까?" 웨이터가 다가오자 그녀는 서둘러 덧붙였다.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야.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날 때까지 만이라도 우리 서로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거야."

래프와의 관계가 끝나게 되면 떠나야 하는 것은 래프 한사람에게서만이 아니다. 비록 케이트와 폴을 좋아하지만 그들이 아버지의 전() 애인과 계속 우정을 지켜나가기란 힘들 테니 말이다.

음식을 주문하고 나서 케이트는 그녀를 향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은 실연당한 것 같아 보이지 않아요."

브리나는 짐짓 슬픈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악을 쓰고 울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니?"

"하긴 그래요." 케이트는 우울하게 동의했다. "하지만 당신은 기분이 더 좋아 보이기까지 한 걸요."

"아니, 그건 그렇지 않아." 브리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당신은 항상 너무 쌀쌀맞고 침착해요." 케이트는 그녀를 비난했다. "당신은 아빠를 전혀 생각지 않는 거죠?"

케이트의 억지소리에 브리나의 가슴은 무거워졌다. "나한테서 무슨 대답을 들으려는 건 아니겠지?"

"아뇨, 들어야겠어요." 케이트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아빠는 내게 사랑한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과는 함께 잘 생각일랑 하지도 말라고 말하셨어요. 그런데 아빠는 함께 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군요!"

브리나는 아무 생각 없이 후식으로 나온 새우를 집어 들었다. "그건 공평치 못하다, 그거겠지?" 그녀는 케이트의 말을 인정했다.

"또 아빤 내게 남자가 결코 결혼을 생각지 않는 그런 종류의 여자가 있다고 말했어요." 케이트는 그녀에게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심술을 드러내며 덧붙였다.

브리나는 그 비난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하며 힘들게 음식을 삼켰다. 래프가 자신을 두고 한 말이 아님은 잘 알고 있다. 그는 그녀에게 처음이자 유일한 연인인 셈이다.

부모님으로부터 아기를 가질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이후 그녀는 육체적 매력으로 남자들을 유혹했으되 깊은 관계로까지 끌고 가진 않았다. 성관계를 가지게 되면 자신이 완벽한 여자가 아니란 사실을 상대방이 알아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이 차갑고 냉담한 여자라는 평을 듣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얼음은 래프를 만나고서야 비로소 녹았다. 그녀가 처녀란 사실에 그는 놀랐을 테지만 전혀 내색은 하지 않았었다.

그 심술궂은 발언은 솔직하고 담백한 케이트에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브리나는 그녀 역시 자신을 좋아하고 있으며 시간이 가면 그리워하리란 걸 알고 있다.

"아빠가 옳아." 그녀는 케이트를 타일렀다.

케이트와는 6살밖에 나이 차가 나지 않지만, 브리나 자신은 18살 때 이미 나이보다 훨씬 성숙했었다. 그것은 스스로가 자신의 결함이라고 믿었던 그 상처 때문이었다. , 지금 난 얼마나 내 몸속에서 자라고 있는 생명을 누군가와 함께 기뻐하고 싶어 하는가. 또 상대가 얼마나 래프이기를 바라는가.

내게 남편이 있든 없든 아기를 가졌다는 소식은 의심할 여지없이 부모님들을 기쁘게 해드릴 것이다. 외동딸인 나의 불행으로 그들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것을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화로가 아니라 주말에 스코틀랜드로 직접 가서 얘기할 참이다. 그들의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긴 여행의 대가는 충분할 테니까.

"유감이에요, 브리나." 케이트는 자신이 혐오스러운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아빠가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니 말이에요." 그녀는 연어요리를 먹기 위해 포크를 들었다. "정말 실망이에요." 그녀는 짐짓 얼굴을 찡그려 보인다. "당신은 좋은 새엄마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10년도 더 전에 래프는 아내를 폴과 케이트는 엄마를 잃었다. 아내가 죽기 훨씬 이전부터 그들의 결혼생활은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럴 것이 래프는 1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결혼했던 것이다. 그러나 부부는 어린애들에게 헌신적으로 열중했었고, 그 때문에 별로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파탄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던 것이다. 폴과 케이트는 엄마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녀를 따뜻하게 대해 주고, 그녀가 엄마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하는 가정하의 말이지만. 물론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고맙구나." 브리나는 얼른 받아넘겼다. "이제 우린 그냥 친구야. 한데 식사를 서둘러야겠어. 난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야 하거든." 그녀는 괴로워하는 케이트 앞에서 일부러 더 재촉하며 밝게 웃었다. 케이트가 나와 래프 사이가 좀 더 행복하게 전개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오해를 가지도록 내버려 줄 순 없는 일이다. 래프는 39살이고 완전히 성인으로 이루어진 가정을 가지고 있다. 또다시 어린애를 한밤중에 젖먹이고, 아이가 이가 나고 기어다니고 걷고 하는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그 오만하리만큼 자신만만한 래프는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그것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불과 6개월 전, 이 식당에 들어서는 그녀를 보고 누가 오늘과 같은 일을 상상이나 했을 것인가!

그때 그녀는 커트니 스티븐을 만났었다. 그가 겨울 동안 유럽과 미국에 설치한 패션스토어 연쇄점에 그녀의 모델 6명을 쓸 것인지의 여부를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녀가 듣던 바대로 매우 매력적인 남자였다.

그녀는 심지어 그에 대해 경고까지 들었다. 그때는 그녀가 자넷 파커와 함께 일하고 있을 적이었다. 냉소적인 편인 자넷조차 그를 "매력적."이라고 표현할 정도였고, 다른 여자들도"기절할 정도로 매혹적."이라고 말했었다.

커트니 스티븐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에게 자신을 커트라고 부를 것을 강요했었다 는 체격이 좋은 금발의 미남이었다. 깊게 빛나는 푸른 악마와 간은 매력을 지녔고 그 눈빛으로 수많은 여자들을 끌어들였을 것이 분명했다. 브리나 역시 첫눈에 그에게 매혹 당했었다. 또한 그의 능란한 말솜씨에 그녀 자신이 이곳에 무엇 때문에 와 있는지조차 거의 잊을 정도였다.

"이제 어떤 모델들을 쓸 것인지 결정하셔야죠." 간신히 그녀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제 가문의 재산을 이용해야겠소." 그는 담담하게 말을 시작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나의 아버지는 켄트주에 장원저택을 마련했는데, 그걸 내가 유산으로 상속받았소. 지금까지는 그걸 사용할만한 기회가 없었지. 그건 즉 일행이 그곳에서 밤을 지내야 한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 어떻소? 모델들 중 보랏빛 눈동자에 금발의 키가 큰 여자와 함께 가보고 싶은데?" 그는 기대에 찬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함께 밤을 지내자는 그의 제안이 모욕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낮게 웃었다. "난 지금은 모델 일을 하지 않아요."

"이번 경우만 예외로 해줄 순 없겠소?" 그의 큰손이 그녀의 가늘고 긴 손을 감싸쥐었다.

그녀의 눈이 빛났다. "안되겠어요."

"안된단 말이지?" 그는 실망한 듯이 보였다. "그럼 이건 어떻겠소? 나와 함께."

"우릴 서로 소개시켜 주지 않겠어? 커트?" 갑자기 거칠고 쉰 목소리의 남자가 끼어들었다.

커트는 그 목소리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은 안 돼, 래프." 그는 거절했다.

"지금이라야겠는걸." 래프의 목소리가 천천히 울려퍼졌다.

"브리나, 래프 갤러거. 래프, 브리나 페어차일드." 커트는 기분이 상한 듯 냉랭하게 소개했다. 그리고 래프를 향해 다짐하듯이 덧붙였다. "브리나는 내 친구야."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페어차일드 양."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에겐 우뚝 선 감색 양복 차림에 쉰 목소리의 주인공으로밖엔 인식되지 않았던 한 남자가 그녀의 옆 의자에 앉았다.

그 남자의 목소리가 그들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었을 때,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는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방금 전 그를 흘낏 보고서야 그녀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달이 태양을 가린 듯한 느낌이었다. 커트가 개방적이고 까다롭지 않은 태양이라면, 래프 갤러거는 달이었다. 아무도 들여놓지 않은 비밀스럽고 깊은 어둠을 간직한 달.

그녀는 자신이 지나치게 예민하다고 스스로를 타일렀지만, 꿰뚫어보는 듯한 그의 회색 눈빛이 자신의 영혼 속으로 파고 들어와 그녀의 모든 것을 알아챌 것만 같았다.

래프는 미남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미남이라기엔 너무나 강하고 거칠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설득력 있고 강압적인 그 무엇이 그 이외의 다른 남자들을 가려 버리고 심지어 보이지조차 않게 만들어 버린다.

그는 커트와 비슷한 30대 후반으로 보였다. 그가 보낸 세월들은 그의 입가에 냉소적인 비웃음의 흔적을 남겼고, 그의 눈 속에 차가움이 깃들게 했으며 관자놀이엔 희끗희끗한 백발이 엿보이게 했다.

그를 바라본 순간부터 커트니 스티븐스는 단지 매력적이고 유쾌한 고객에 지나지 않게 돼버렸다.

"반갑습니다. 갤러거 씨." 그녀는 래프를 향해 냉담하게 인사했다. "래프라고 불러주겠소?"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난 당신을 브리나라고 부르고 싶소."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부르겠노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녀는 그를 알고 있었다. 사업을 하는 사람으로 래프 갤러거를 모른다면 그 사람은 바보이거나 곧 사업에 실패하게 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는 마이다스(손에 닿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했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왕의 이름)였다. 그가 만지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즉 땅에서부터 산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했다.

"래프, 왜 이러는 거야?" 커트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브리나와 난 사업상 의논할 게 좀 있어. 다른 얘기가 아니라 사업 얘기라구, 이 친구야." 래프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브리나를 쳐다보며 커트는 설명을 덧붙였다. "브리나는 페어차일드 에이전시를 경영한다네."

래프의 어두운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나도 그런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지." 그는 천천히 브리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해해서 미안하오. 사과하겠소."

브리나는 모델이란 직업상 잘못된 억측 때문에 모욕을 받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지금과 같이 심한 경우는 처음이다. 래프는 나에 대해서 전혀 모르면서도 감히 그렇게 말한 것이다.

브리나는 커트니 스티븐스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전 그만 가봐야겠군요." 그녀는 딱 자르듯 말했다. "전화를 주시든지 하시면 다음 기회에 이 문제를 매듭짓기로 하죠." 비록 커트가 일이 이렇게 된 걸 기뻐한다 해도 그녀로서는 사업상 대단히 큰 계약 하나를 놓여 버리는 게 될지도 모르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에 더 머물러서 마치 런던의 반이 제 것이라도 된 듯이 구는 실제로 그러하지만 남자로부터 모욕 받고 싶지는 않았다.

"자네 때문일세. 이게 뭔가?" 커트는 비난의 눈초리로 래프를 바라보았다. "정말 갈 거요, 브리나?"

커트가 계속 래프를 쫓아 버리려고 애썼음에도 그가 물러나지 않았던 것만으로도 그 둘의 사이가 퍽 가까움을 알 수 있었다. 브리나는 그들이 절친한 사이라는 걸 알게 되자 하가 치밀어 올라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했다.

"앉으시오, 페어차일드 양." 래프 갤러거가 일어서서 정식으로 사과했다. "용서하시오. 방해해서 정말 미안하오. 커트, 골프게임은 내일이야."

"좋아." 커트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럼 페어차일드 양, 이만."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레스토랑을 가로질러 그를 기다리고 있는 두 남자 쪽으로 가버렸다.

"그가 항상 이긴다니까." 커트는 투덜겨렸다. "제발 앉아요, 브리나." 그는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브리나는 래프 갤러거가 보이지 않도록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천천히 의자를 돌렸다.

"기숙학교 시절 첫 번째 주에 우린 친구가 됐죠. 래프가 크리켓에서 날 아웃 시켰어요. 화가 난 나는 그만 탈의실에서 크리켓 배트를 그에게 휘두르고 말았지요." 커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그는 코가 깨졌답니다."

브리나는 아까 래프의 매부리코에서 작은 혹을 발견했었다. 크리켓 배트를 들고 서로 험악하게 노려보고 있었을 작은 두 소년을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들은 아마도 집을 떠나왔기 때문에 더욱 난폭해져 있었을 것이다. "이상한 만남이 더 굳은 우정을 맺어 주는 법이에요." 그녀는 놀리듯이 말했다.

커트의 얼굴 가득 미소가 번져나갔다. "싸움 때문에 친구가 된 게 아니오." 그는 그녀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래프가 모두에게 자기가 넘어져서 코가 깨졌다고 말해주었기 때문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당장 기숙학교에서 쫓겨나고 말았을 거요."

어린 두 소년은 우정으로 맺어졌다. 아마도 래프에게 훌륭한 자질이 있는 듯하다. 그걸 발견하려면 깊이 사귀어 봐야만 할 테지만.

브리나는 래프 갤러거 쪽으로 등을 돌린 채 모델에 관한 커트와의 상담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래프가 떠나기 전에 그들의 테이블로 다가오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회색 눈이 다시 한번 그녀의 영혼을 꿰뚫어보는 듯했다. "다시 만나게 될 거요, 페어차일드 양." 그는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손으로 키스를 보냈다.

"내게도 기회를 줘야지, 래프!" 커트가 불평했다.

래프는 낮게 웃었다. "선택은 브리나 양께서 하실 테지." 그는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압도할 듯한 눈길로 그녀의 시선을 꼼짝 못하게 붙들며 부드럽게 말했다.

"경쟁이 안 된단말야." 커트가 포기하듯이 신음소리를 냈다. "항상 그렇다니까."

"갤러거 씨는 제게 아무 흥미도 없는 게 틀림없어요." 브리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그녀가 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붉은 장미꽃 한 송이가 담긴 상자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카드는 들어 있지 않았지만 그것이 커트가 보낸 게 아님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커트가 꽃을 보낸 장본인이라면 틀림없이 자신의 이름을 서명한 훌륭한 카드를 함께 넣어 보냈을 테니까.

반시간이 지나자 두 송이의 장미꽃이 또 도착했다. 그 후 반시간 후엔 세 송이, 그리고 또 세 송이, 또 세 송이. 그리하여 4시간 반이 됐을 무렵엔 그녀는 거의 한 다스나 되는 장미꽃을 받아 놓고 있었다.

그녀의 비서 겸 접수계원인 질리는 누가 보낸 건지를 알고 싶어 안달이었다. 하지만 5시에 래프 갤러거가 사무실에 모습을 나타내자 두 여자는 더 이상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됐다. 정중한 그의 만찬초대에 브리나는 황급히 이를 수락했다. 아까의 적대감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지금까지 그녀는 래프와 같은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훗날 그가 자신의 인생에서 멀리 사라진 후일지라도 그와 같은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으리라.

 

2

"케이트가 오늘 당신과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고 그러더군." 래프는 맞은편에 앉으며 뭔가를 묻는 듯한 눈초리를 던졌다.

브리나는 그의 시선을 조심스럽게 맞받았다. 그를 바라볼 때면 언제나 그녀의 가슴은 뛰었다. 6개월간이나 깊은 관계를 가져온 지금에도 그를 처음 본 순간과 같았다. 그것은 그의 주위에 맴도는 압도할 듯한 힘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늘밤 검은 야회복에 눈처럼 흰 셔츠를 입은 그는 평소보다 더 근사해 보였다.

", 그랬어요." 그녀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속으론 이 대화가 어느 쪽으로 나아갈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래프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슬픈 듯이 일그러졌다. "그 애가 당신에게 성가시게 구는가 보군."

케이트와는 레스토랑 밖으로 나와 매우 어색하게 헤어졌었다. 케이트는 자기 아빠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녀를 비난하는 듯했다.

브리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케이트는 내가 당신에게 얘기해 줬으면 하고 바라더군요. 케이트는 다음 학기에 집을 나가 브렌다와 함께 살기를 원해요." 그녀는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갑자기 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래서 당신은 그 애에게 뭐라고 말했소?"

그의 명백한 불쾌감을 대하고도 그녀는 냉정을 지켰다. "내가 뭐랬을 것 같아요?" 그녀는 침착하게 되물었다.

"난 당신이 나와 같은 의견이라고 생각해. 그 아가씨는 케이트의 친구로선 부적합해."

"브렌다는 곤란하겠죠." 그녀도 동의했다. "하지만 내 생각에 케이트는 이제 자신의 장소를 가지기로 결심한 것 같아요. 그리고 그애도 이젠 18살이 넘었으니."

"내 아이를 위해서 무엇이 최선인지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 브리나." 그는 말을 자르며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도 이제 가야겠군." 그는 짧게 덧붙였다. "상당히 늦었는걸. 더 늦으면 성가시겠어."

늦었다는 말은 늦게 온 그녀를 빗대어 빈정거리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럼 우리 가지 말아요!"하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밤 그에게 안기고 싶다. 그의 곁에서 그가 자신과 가까운 여자에게만 허용하는 그런 방법으로 그에게 다가가고 싶다.

자기애들의 행동에 대해 그녀가 흥미를 보이는 것을 그는 용납치 않았고 그녀 역시 이미 그 문제에 대해서는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가 그런 태도를 보인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였다. 브리나로서는 래프의 그러한 태도는 그의 인생에 있어서 그녀의 역할이 일시적이란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밖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브리나는 뱃속의 아기 때문에 파티에 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는 대신 그가 들고 있던 코트를 말없이 받아 입었다. 스웨이드(안쪽에 보플이 있는 양가죽)천의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커트는 우리가 늦었다고 해서 싫어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녀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브리나는 그가 웃어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래프는 웃으면 얼굴 표정이 완전히 변한다. 냉혹한 느낌이 사라지고 회색 눈엔 온기가 돈다. 그리고 야윈 뺨에 깊은 홈이 패면서 단호한 입매도 한결 부드러워지곤 한다.

웃는 대신 그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요즘 커트에게 계속 무례한 행동을 했었거든." 그는 딱딱한 어조로 덧붙였다. "이번에도 그러려니 할거야."

그 두 남자는 서로 너무도 딴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변함없는 우정을 지속하고 있었다. 래프가 거친 반면 커트는 부드러웠고, 래프가 무례할 정도로 무뚝뚝한 반면 커트는 친절했다. 래프를 사랑하면서 심하게 상심하게 될 때면 심지어 그때 왜 자신이 커트를 사랑해 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조차 했을 정도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고 그래서 대신 커트와는 친구로 지내 왔다.

"의사가 뭐라든가?"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그를 올라다보았다. "뭐라구요?" 눈썹을 모으며 코트 깃을 여미는 브리나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그들은 막 얼음장같이 차가운 12월초의 밤 속으로 나와 대기시켜 놓은 래프의 차 재규어 쪽으로 가던 중이었다. 갑작스러운 한기는 래프가 시동을 걸고 따뜻한 바람이 차안을 채울 때까지도 그녀의 몸에서 가시지 않았다.

"당신이 어젯밤 그랬잖소? 오늘 의사가 검사결과를 말해 줄 거라고." 그는 초조하게 설명했다. "의사에게 안 갔었소?" 운전석 앞 계기판의 불빛이 그의 찌푸린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물론 갔었어요." 브리나는 코트 깃 속으로 얼굴을 묻었다.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했다.

브리나는 속으로 한숨을 지었다. 어느 날 밤 그녀의 몸이 약해졌다고 정확하게 지적한 사람은 바로 래프였다. 그녀는 가끔 그럴 때가 있노라고 했지만 그는 두 사람이 함께 지냈던 넉 달 동안 한번도 그런 일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런 일이 또다시 일어났을 때 그는 그녀를 억지로 의사에게 보냈었다.

"빈혈이래요. 그뿐이에요." 그녀는 둘러댔다. "빈혈이 그렇대요. 의사가 비타민을 주더군요." 그런 다음에 진지하게 그렇게 덧붙였다.

래프는 그녀를 살피듯이 바라보았다. "얼굴이 좀 창백해 보이는군."

그녀는 아직도 임신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부모님께 주말에 가겠다고 전화까지 했는데도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이 조금도 실감나지 않았다. 곧 배가 불러오겠지만 아직은 자신의 몸이 너무도 날씬하고 입덧 같은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의사의 진단이 확실한 것인지 어쩐지 의심스럽기만 했다.

그뿐만 아니라 생각지도 못했던 뭔가 좀 색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마음속이 고요와 평화로 가득 찬 듯한 느낌이었다. 모성본능이란 말이 이전에는 그녀에게 있어서 단지 하나의 단어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한 존재를 향한 완전하게 이타적인 사랑 바로 그것이었다. 아직 그것의 존재에 대한 아무런 표시도 없고, 단지 자신의 내부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인데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젠 따뜻한가?" 래프가 그녀의 명상을 깨뜨렸다. "오늘 저녁엔 좀 피곤해 보이는데." 그녀가 무슨 얘기냐는 듯이 쳐다보자 그는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아깐 몹시 떨던데, 이젠 좀 따뜻해졌소?"

"." 그녀는 그를 향해 꿈꾸듯이 미소 지었다. "아름다운 밤이로군요."

"종일 비가 내렸잖소. 오늘밤엔 진눈깨비가 온다더군." 그는 조롱하듯이 천천히 말했다.

브리나는 무안해서 낮을 붉혔다. "나는 비를 좋아해요." 그녀는 변명했다. 황금빛 꿈은 무참하게 깨어져 버렸다.

"진눈깨비도?" 래프가 검은 눈썹을 모으며 물었다.

 

그녀는 래프가 달뜬 연인처럼 굴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깨달았다. 그러나 가끔씩은 그가 그토록 항상 침착하고 냉소적인 태도가 아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것이다. 때론 아주 편안한 분위기에서 그에게 자신이 얼마나 그를 사랑하는지 보여 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래프와 같은 사람에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그런 부드러운 감정에 대해선 담을 쌓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그런 바람을 만족시켜 줄 사람은 오로지 자신의 뱃속에 있는 아기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뇨." 그녀는 한숨지었다. "하지만 이렇게 나쁜 날씨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예고해 주는 게 아닐까요?"

"그렇게 되면 당신은 크리스마스 휴가 때 부모님께 갈 수 없게 되겠군." 그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겠죠." 그녀는 하마터면 그에게 이번 주말에 부모님께 갈 예정이니 그런 건 별 상관없다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파티에 가는 도중에 그에게 그런 얘기를 한다는 게 별로 좋을 것 같지 않아서 그만두었다.

"별다른 계획이 없다면 우리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지냅시다." 그는 자연스럽게 초대했다.

만약 그 초대를 몇 주일 전에만 받았더라도 서슴지 않고 당장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 초대 자리에서의 자신의 위치가 얼마나 어색할 것인가를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이제사 그 말을 했을 뿐 아니라, 그들과 크리스마스 휴가를 함께 지내지 못하게 된다 할지라도 불쾌해할 것 같지도 않았다.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지내야죠. 그렇잖아요?"

그의 턱이 굳어졌다.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다행히 래프의 집에서 커트의 아파트까지는 가까운 거리였다. 그래서 그의 초대를 거절한 후부터 차안을 내리누르기 시작한 냉랭한 분위기로부터 잠시 후엔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래프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초대에는 친절함이 전혀 없었고 게다가 크리스마스는 이제 겨우 2주밖에 남지 않은 너무 늦은 초대였다. 그도 내가 몇 주일 전에 미리 일정을 짠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을 텐데.

"친애하는 숙녀님." 그들이 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 커트는 그녀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는 코트를 받아들며 싱긋 웃었다. "나는 당신들이 여기 안 오는 줄 알았어. 늦어진 건 물론 래프의 잘못이겠지?"

"물론이지." 래프가 냉랭한 어조로 대꾸했다.

"알고 있을 테지만 내가 이 파티를 열게 된 유일한 이유는 브리나와 춤추고 싶어서였다고." 커트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 추실까요?"

"좋아요, 나도 춤추는 걸 좋아해요." 브리나는 즐겁게 웃으며 응했다. 아파트의 거실에 있던 가구는 모두 깨끗이 치워졌고, 그곳에서는 이미 12쌍 정도의 커플이 로맨틱한 음악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오늘밤 유난히 사랑스러워 보이는군."커트는 음미하듯이 찬찬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전에 래프도 같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자줏빛 드레스가 그녀의 눈 빛깔을 더욱 짙어 보이게 한다던가 하는 식이었지만 커트의 찬사가 덜 형식적으로 느껴진다. 그것은 오늘밤 그녀가 자신과 래프와의 관계에서 잘못된 것만을 찾아내려 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마음 아픈 것은 그 잘못들을 찾아내는 것이 그토록 쉽다는 사실이었다.

커트는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당신에게서 뭔가 불꽃같은 것이 느껴져. 설마혹시 내가 방해가 됐나?" 그는 당황한 듯 신음소리를 냈다.

그녀의 뺨이 빨갛게 물들었다. "래프와 난 만나자마자 곧바로 이리로 온 거예요만약 그런 의미에서 말씀하신 거라면." 브리나는 변명이라도 하듯 설명했다. "여기 늦게 도착한 것은 나 때문이에요. 내가 래프에게 늦게 갔거든요." 부모님께 전화 거는 것 때문에 늦어졌던 것이다. 부모님은 그녀가 주말에 갑자기 자신들을 방문하는 것에 대해서 물론 기뻐했지만 무슨 일인가 몹시 걱정했다. 딸에게 아무런 나쁜 일도 없다는 것을 확신시키는데 꽤나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커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래프가 당신에게 일을 너무 과하게 하지 말라고 했어야 하는데."

"그랬어요." 그녀는 웃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것을 못 참듯이 나도 그래요."

커트는 부드럽게 쿡쿡 웃었다. "당신이 래프에게 그토록 매력적으로 비치는 이유를 알겠어. 다른 여자들 같으면 그의 변덕에 맞추어 기꺼이 자신들의 계획을 바꾸고 포기하고 했을 텐데!"

"때로 난 당신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건지 미워하는 건지 모르겠다니까요." 그녀는 조롱하는 듯이 말했다.

"물론 사랑하지." 커트는 천천히 말했다. "비록 지금 날 죽을 듯이 노려보고 있긴 하지만 말야." 그는 그녀의 어깨 너머로 래프를 흘낏 쳐다보고는 신음하듯 말했다. "당신 때문이 아니라면 그가 왜 화가 났겠어. 아마 당신이 늦게 와 화가 난 것 같군."

래프는 별로 화가 나 있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을 노려보는 그의 눈초리는 뭔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 설마 크리스마스 초대 건 때문에 아직도 화나 있는 건 아닐텐데.

래프는 식당 옆 바에 기대 서 있었다. 술잔은 입에도 대지 않은 채 그의 손에 들려 있다. 그 옆에 선 로즈메리 채터가 그 불타는 듯한 농염한 아름다음으로 그를 유혹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로즈메리는 래프의 주의를 끌기 위해선 그런 식으로 해선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브리나가 생전 처음 보았을 정도로 그렇게 깊게 팬 드레스를 입지 말았어야했고, 그 아름다운 얼굴에 그토록 노골적으로 유혹적인 표정을 띄우지 말았어야 했다. 래프의 시선은 음악에 맞춰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커트와 브리나만을 쏘아보고 있었다.

아마도 래프는 크리스마스를 자신의 두 아이들과 함께 지내자는 그의 제의를 거절한 것 때문에 정말 화가 났는지도 모른다.

브리나는 커트를 향해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니, 그가 화가 난 건 당신 때문인 것 같은데요?"

"하긴 그럴지도 모르지. 오늘 내가 골프에서 이겼거든."

"그럴 리가!" 브리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녀가 이 두 남자를 알게 된 이후로 커트는 골프에서 한번만이라도 래프를 이겨 봤으면 하고 항상 열을 올렸었던 것이다.

"그랬다니까!" 커트는 의기양양하게 말하며 싱글거렸다. "물론 래프가 게임중에 내내 딴 생각만 하는 것 같긴 했지만." 그는 마지못한 듯 한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예전에 내가 졌을 때 누가 그걸 과중한 업무 탓이라고 봐주진 않았거든."

"래프가 요즘 과중한 업무로 시달리고 있진 않을 텐데요?" 브리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래프는 4개월 전 매우 유능한 조수를 고용했다. 그녀는 스튜어트 힐리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매력적인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상당히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그가 일만큼은 매우 훌륭하게 해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전까지 래프는 혼자서 그의 사업왕국을 통치해 왔으나 이제 그에게 많은 것을 넘겨주고 있었다. 사업에 관한 한 지난 4개월 동안 모든 것이 순조로왔다.

 

커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업이 잘되는지 못되는지 나야 모르지. 래프는 내겐 사업 얘길 전혀 않거든. 하지만 사업 때문이 아니라 해도 뭔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는 게 틀림없소."

자신이 바로 그가 고민하는 문제임에 틀림없다. 그들이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이다. 래프는 그 사실을 내게 말하기가 힘든 것이리라. 그도 나름대로는 나를 위한다고 위했을 테고 따라서 내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는 내가 자기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결단을 내려야 한다. 자존심이 엉망이 되기 전에 스스로 그의 곁을 떠날 것인지, 아니면 그가 모든 것을 끝낼 때까지 좀 더 기다릴 것인지를.

"이거 내가 해서는 안될 얘길 했나?" 커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브리나는 어두운 기분을 떨쳐 버리려 애썼다. 커트는 단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었을 뿐이다. 그녀는 그의 걱정을 떨쳐 주려고 밝게 웃었다. "로즈메리가 옷을 완전히 벗어버리기 전에 어서 가서 래프와 함께 있어 주는 게 어떨까요?" 음악이 끝나갈 때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렇게 말했다.

커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여자는 래프가 당신을 만나기 이전 그와 잠자리를 함께 할 바로 다음 타자였지."

지금 다른 여자가 마치 먹이를 채가기 직전의 독수리처럼 두 사람 주위를 빙빙 돌며 래프와 나 사이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할 수만 있다면 빨리 끝나도록 돕기라도 할 듯한 기세다.

처음부터 자신은 래프가 속한 세계의 이상한 특성들 냉소적이고 심술궂고 이기적인 에 억눌려 왔다. 수년간 톱모델로 활동해 와 상당히 단련돼 있었음에도 그러했다. 그러나 그녀가 만난 모든 여자들은 자기들 역시 래프를 원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노골적으로 표시했었다. 하지만 래프는 그들의 유혹에 철저히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 왔고, 그것만이 그동안 그녀에게 안도감을 줄 수 있었다

최근까지도 그러했다. 한데 래프는 지금 로즈메리와 같이 있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 듯했다. 실제로 그녀와 커트가 그들 쪽으로 다가갔을 때 그는 로즈메리를 데리고 춤을 추러 나가 버렸다. 심지어 그는 움직일 때마다 로즈메리의 몸이 찰싹 감겨 오는 것을 즐기고 있는 듯해 보였다.

"방해하면 소란을 피울 여자요." 커트가 옆에서 조용히 속삭였다. 그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브리나는 커트를 향해 감사의 미소를 보냈다. "그렇다면 방해하지 않겠어요."

그는 황금빛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저대로 내버려 둘 수 있겠소?"

그럴 수 있느냐구? 다른 여자들이 래프에게 일부러 유혹하려고 덤비는 것은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래프 자신이 그것을 즐긴다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녀는 그런 장면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춤추는 몸 동작 하나하나, 그 관능적인 움직임 하나하나가 자신으로부터 래프가 떨어져나가고 있는 가장 확실한 표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그러기는 힘들겠죠." 브리나는 억지로 미소 지어 보였다."일찌감치 식당으로 가서 당신이 준비한 멋진 저녁 식사나 즐길 걸 그랬군요." 시간은 어느덧 10가 가까워 있었다. 그녀는 점심식사 이후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였다. 의사의 지시대로라면 영양식을 해야만 하는데도 말이다.

"래프와는 괜찮아, 브리나?" 맛없게 샌드위치를 떼어먹고 있는 걸 보면서 커트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눈빛이 열에 달뜬 듯 반짝였다. 브리나는 로즈메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사무치는 슬픔을 안으로 삭였다.

소년과 같은 장난기가 걷힌 커트의 얼굴은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정말이오?"

그녀의 가슴은 산산조각이 나는 듯했다. 눈물이 양 뺨 위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당신은 래프가 내 앞에서 저렇게 행동하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래프가 로즈메리의 매끈한 목에 얼굴을 갖다 대는 것을 보는 순간 현기증과 구토가 느껴졌다.

"빌어먹을!" 그녀의 눈길을 쫓던 커트는 사납게 혀를 찼다. "내가 가서 떼어놓아야겠어." "안 돼요." 브리나는 커트의 팔을 잡으며 제지했다. "코트 좀 가져다주세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게 택시를 불러주세요. 부탁해요, 커트."

"내가 데려다 주겠소." "커트, 이건 당신이 연 파티예요."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더 이상 래프와 로즈메리를 쳐다볼 기운조차 없다. "주인이 손님을 버리고 나갈 순 없어요."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하게 말하려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너무도 쓸쓸하게 들렸다. 커트는 입을 꽉 다물었다. "아무도 그런 건 개의치 않아요. 반 이상이 내가 없어진 줄도 모를 거요."

"정말 혼자 가고 싶어서 그래요. 고맙지만." 그녀는 될 수 있는 대로 부드럽게 거절했다. 자신이 빨리 이 자리를 빠져나가지 않는다면 웃음거리가 될 판이었다.

커트는 다시 뭐라 한마디하고 싶은 표정이었으나 그녀의 애원하는 듯한 눈길을 보자 입을 다물어 벼렸다. 코트를 가지러 현관으로 가면서 브리나는 춤추는 그들로부터 얼굴을 돌려버렸다. 그들이 서로 그런 일은 없도록 하자고 항상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었던 것, 바로 래프는 범했다. 그들이 동반해서 참석한 자리에서 다른 여자에게로 돌아섬으로써 그녀를 공공연히 모욕한 것이다.

코트를 입혀 준 뒤 커트는 그녀를 마주보며 다정하게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기대 울고 싶은 어깨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그는 다정하게 위로해 주었다.

", 당신을 기억할게요." 그녀는 힘없이 웃었다. "당신은."

"어딜 가지?" 브리나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거친 목소리가 앞을 가로막았다. 래프와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선 다시 한번 마름을 가다듬어야 했다. 그의 눈 속 깊이에서 불타고 있는 분노를 보았을 때 그녀는 몸을 떨었다. "난 이제 그만 가보려고."

차가운 회색 눈이 커트 쪽을 향했다. "자네도 함께 말인가?" 래프는 차갑게 씹어뱉듯이 말했다. 커트는 친구의 도전적인 시선을 단호하게 받았다. "난 함께 가기를 원했지만 브리나는 혼자 가겠다는 거야."

래프의 입이 비틀렸다. "날 버리고 가는 건가, 브리나?" 그는 조롱하듯이 말했다.

"." "도대체 자넨 브리나더러 어쩌라는 건가?" 커트가 버럭 화를 냈다. "자네가 로즈메리에게 구애하고 있는 곳에 가서 자네 어깨라도 치며 먼저 가겠다고 말하라는 건가!" "빌어먹을! 난 그녀에게 구애하지 않았어!" 래프는 양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갈며 말했다. "한데 자넨 마치 그런 것처럼 행동했잖아!" 커트는 흥분하여 비난했다. 회색 눈이 차갑게 번쩍였다. "브리나!"

그녀는 참기가 힘들었다. 두 친구간의 분쟁의 씨앗이 된 것이 결코 유쾌할 순 없었다. "난 그저 내가 사라지는 게 제일 낫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렇다면 내가 당신과 함께 가지." 래프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뇨, 당신은 여가 계속 계시는 게 좋겠어요." 브리나는 힘없이 말했다. "둘 다 저녁을 망칠 필요는 없어요. 밤은 아직 한창인 걸요. 그렇잖아요?" 래프는 성큼성큼 걸어 나와 그녀의 팔을 꽉 움켜잡았다. "나도 함께 가겠다고 했어!"

"아마 브리나는 자네와 함께 가고 싶지 않을걸!" 커트가 빈정댔다.

래프는 입을 꽉 다물었다. "나와 함께 왔으니 나와 함께 가야 해."

브리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래프를 바라보았다. 래프는 왜 이러는 걸까." 이것이 그가 찾으려고 애쓰던 바로 가장 완벽한 방법이라는 걸 모르는 것일까? 왜 쓸데없이 질질 끌려고 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녀는 단호하게 굳어진 그의 턱을 보는 순간 그가 정말 함께 떠나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마와요, 커트." 그녀는 다짐하듯이 커트의 팔을 꼭 쥐었다. "래프가 날 집까지 데려다 주려나 봐요." "내일 전화하지." 래프가 커트를 향해 짜증스럽게 말했다.

"꼭 그러도록 해줘. 빠를수록 좋아. 안 그러면 내가 전화하겠어." 커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재규어의 난방장치는 뜨거운 공기를 내뿜었다. 그러나 아직도 브리나는 한기를 느끼고 있었다. 왜 래프는 이런 식으로 계속하려고 하는 걸까? 혹 이제부터 우리들 사이는 끝났다고 말하려는 건 아닐까? 내가 그런 사실을 아직도 눈치 채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지.

래프는 그녀의 아파트까지 함께 왔다. 커트의 집을 나선 이후 둘다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에게 눈길을 보낼 때마다 그의 거친 표정이 말문을 막아버리곤 했다.

브리나는 열쇠로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뒤돌아보며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들어올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천만에! 들어가야겠어, 브리나." 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래프는 그녀가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준 뒤 등뒤로 문을 닫았다.

브리나는 그와 함께 있는 동안 극도로 신경이 예민해졌다. 마치 경험 없는 십대들의 첫 데이트 때와 같았다. 그녀는 거실을 가로질러 멀리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손이 가볍게 떨려 온다. "로즈메리가 당신을 기다릴 거예요."

"날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는 거칠게 내뱉었다. 그리고 소리 없이 거실을 가로질러 그녀 앞으로 다가섰다.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이야, 브리나."

브리나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커졌다. "하지만 당신은."

"난 오늘밤 당신의 불꽃같은 열정을 원해, 브리나." 래프는 그녀 쪽으로 얼굴을 숙이며 신음하듯 낮게 말했다. "하지만 아까는."

"화가 나서 그랬어." 그는 잘라 말했다. "하지만 이젠 아냐. 이젠 당신의 그 매끄러운 피부를 느끼고 싶어. 당신을 내 품안에 껴안고 싶다구!" 브리나는 래프가 오늘밤 격렬할 것이라는 걸 예감했다. 그들은 둘 다 정신없이 서로의 열정 속으로 빠져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있고 난 직후이니 만큼 자신이 그가 원하는 대로 반응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그녀는 낮게 속삭였다. "래프, 내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

"물론 할 수 있고 말고." 래프는 그녀의 몸을 덮치며 도발적으로 움직였다.

물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마지막이 될 테니까. 그녀는 조금 전 그가 자신에게 지워 주었던 것과 같은 고통을 또다시 견뎌낼 만한 임이 없다. 그래서 이 빔을 마지막으로 그에게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할 참이다. "좋아요, 래프." 브리나는 긴장을 풀고 두 팔로 그의 몸을 감싸안았다. "날 사랑해 줘요."

래프의 몸은 근사했다. 탄탄하면서도 유연했다. 군살이라곤 전혀 없다. 마침내 그가 옷을 모두 벗어 던졌을 때 브리나는 완전히 흥분하여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을 덮었다. 뜨겁고 긴 키스가 이어졌고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채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손은 차츰 그녀의 젖가슴 쪽으로 옮겨갔고 그녀의 온몸은 환희로 꿈틀거렸다. 그 다음에 찾아온 것은 그녀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에로틱하고도 동시에 고문하는 듯한 괴로운 경험이었다. 그녀의 몸이 그의 몸과 함께 움직이면서 그들은 함께 절정에 도달했다.

그들의 정열은 이제껏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무서운 폭발이었다. 짧은 환희의 순간이 지나자 암흑 같은 심연이 앞을 가로막는 듯이 느껴졌다. 래프가 일어나서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이제는 당신을 위해서야."

그는 그녀가 정신을 잃을 정도로 몰아댔다. 잠시 후 그녀의 몸은 몸부림치며 뒤틀렸고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그녀는 무자비하게 몰아닥치는 이 고문과도 같은 열락에서 제발 해방시켜 달라고 그에게 속삭이듯 애원했다.

그녀는 노려보는 래프의 표정은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젠 내가 당신을 원한다는 걸 믿겠나?" 그는 천천히 말했다. "." 그녀는 거의 흐느끼다시피 말했다. "제발! 래프, 제발!" 그녀는 몸서리치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자신의 몸 안에서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일부를 느끼는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

비록 그와 헤어진다 해도 이날 밤의 기억은 가장 가슴을 아프게 에는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브리나가 눈을 떴을 때 래프는 이미 욕실에서 샤워와 면도를 하고 있었다. 그날이 토요일임을 깨닫고 그녀는 다시 머리를 베개에 묻었다. 그녀가 타고 갈 비행기는 아직 한참 후에나 있을 것이다. 지난밤은 무섭도록 열정에 휩쓸렸다. 래프는 잠들기 전에 다시 한번 그녀를 흔들어 놓았고 마침내 그녀는 거의 의식을 잃은 상태로 잠들었다. 지난밤의 거친 애무 때문에 지금 온몸에 통증이 느껴진다.

지난밤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웠었다. 브리나는 래프에게 이제 그만 만나는 게 좋겠다고 말하기가 두려웠다. 하지만 달리 도리가 없는 일 아닌가.

래프가 미소 띤 얼굴로 욕실에서 나왔다. 산뜻하게 면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침대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헝클어진 금발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며 미소 지었다. "당신 하루종일 잘 것 같은데." 그는 놀리듯이 말했다.

브리나는 얼마나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에게 키스를 퍼붓고 싶었는지, 또 그를 얼마나 사랑하며 자신이 그의 아이를 가졌노라고 말하고 싶었는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대신 그녀는 그로부터 물러나며 말했다.

"나는 오늘 스코틀랜드로 가서 주말을 부모님과 함께 보낼 작정이에요." 분노로 어두워져 가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느라고 그녀는 안간힘을 썼다. "이제 우린 서로 끝났다는 걸 인정해야 해요." 래프는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양손이 아래로 축 쳐졌다. "끝나다니, 무슨 뜻이지?" 그는 무뚝뚝하게 되물었다.

브리나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우린 둘 다 몇 주일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래프. 더 이상 서로를 기만하는 행동은 하지 말도록 해요." 래프의 회색 눈이 불타올랐다. "언제 결정한 일이지?" 그가 물었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난 때때로 문득 느끼곤 했어요." "내 얘긴 당신이 부모님을 방문하기로 언제 결정했느냐는 거요!" 그는 날카롭게 쏘아 붙였다.

"어제 오후에 부모님께 전화를 했어요. 그리고." "그렇다면 어젯밤 우리가 만났을 때 이미 결정돼 있었단 말이지?" 그는 무섭게 몰아세웠다.

브리나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요, 하지만."

"그렇다면 어젯밤의 일은 다 뭐였지?" 화가 나서 그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그녀는 간신히 속삭였다. "우리들의 마지막 밤이었어요."

"마지막?" 래프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는 그녀의 팔을 움켜잡고는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이 끌어당겼다. "날 똑바로 봐, 그리고 말해봐. 이젠 더 이상 날 원하지 않는다고 말야." 그는 거친 목소리로 명령했다.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그녀는 그렇게 말해야만 한다. 만약 두 사람의 관계를 그렇게 까지 타락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즉 그들의 관계가 대등하지 않을뿐더러 그녀 자신도 그가 여자를 품안에 안고 싶을 때 찾는 그런 여자들 중 하나일 뿐인 상태로는 아기의 얼굴을 떳떳하게 마주볼 순 없을 것이다. 브리나는 단호하게 그를 마주보았다.

"나는 이제 당신을 원하지 않아요."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빌어먹을!" 그는 미친 듯이 소리치며 갑자기 잡고 있던 그녀의 팔을 놓아버렸다.

브리나는 도로 베개 위로 쓰러졌다. 쓰러진 채로 그녀는 그가 옷을 주워 입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빌어먹을!" 아파트 문을 꽝 닫고 나가면서 그는 다시 한번 소리 질렀다. 브리나의 온몸이 전율하듯 흐느끼기 시작했다. 가슴이 저미도록 아픈 고통의 물결 속에서 그녀는 숨이 막할 듯 괴로웠다.

 

3

"정말이냐, 얘야?" 그녀의 어머니는 기쁨에 겨워 목이 멜 지경이었다. "의사가 확실하다더냐?" "틀림없이 임신이래요." 브리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 소식에 대한 부모님의 반응은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것은 순수한 기쁨 그 자체였다. 마침내 누군가에게 그 소식을 전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나누는 기쁨은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 대단한 것이었다.

"정말 믿을 수가 없구나!"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깊고 푸른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실 거예요." 브리나는 미소를 띠었다. "어젠 나도 너무나 충격을 받아서 믿기 어려웠다니까요. 하지만 오늘 아침 출발 전에 의사에게 전화해서 다시 물어봤죠. 정말 틀림없느냐고요. 물론 그 의사도 나의 병력을 알고 있어요. 의사 말이 가능성이 희박한 편이긴 한만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라더군요." 그녀는 뭔가 묻고 싶은 듯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얼굴을 찡그린 채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들 말로는 넌 임신할 수가 없다고."

"그랬었지요. 의사가 이렇게도 말하더군요. 요즘은 아무래도 옛날보다는 더 발달됐다고요. 아마, 옛날 의사들은 내가 임신할 수 없다고 믿었던 모양이죠. 하지만 그들이 틀렸어요." 그녀는 행복에 겨워하며 말했다. "의사가 이젠 아기 이름이나 생각하라는 거예요!"

", 얘야!" 어머니는 이제 본격적으로 울고 있었다. 그녀의 조그맣고 가무잡잡한 얼굴이 아버지의 무뚝뚝한 얼굴과 더불어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집에는 불과 30분전에 도착했지만 브리나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그 소식을 묻어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정기적으로 자기가 태어난 이 고향 마을로 부모님을 만나러 오곤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 스코틀랜드의 북동부지역에서 스키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우세요." 브리나는 쾌활하게 말했다. 그녀의 얼굴을 환하게 빛났다. "음식이 다 식기 전에 식사를 하셔야죠."

"축배를 들어야겠다." 아버지는 벌떡 일어서려다가 갑자기 주춤했다. "한데 너 포도주를 마셔도 되는 거냐?" 아버지는 잘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

"특별한 경우 한잔쯤은 괜찮아요."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특별한 경우> 임에 틀림없어요!"

식사가 반쯤 진행됐을 때 이미 아버지는 태어나지도 않은 손주를 어느 학교에 넣어야 할 것인지 심사숙고하고 계셨다. 브리나는 그러한 아버지를 애정 어린 눈으로 웃으며 바라보았다. 할어버지가 된다는 것이 그로서는 그토록 기쁜 일인 것이다!

"하지만 제임스." 어머니가 가볍게 타이르듯이 말했다. "그건 브리나와 갤러거 씨가 결정할 문제예요." 브리나의 눈가에 어두운 그늘이 스쳤다. "래프와 난 이제 더 이상 만나지 않아요." 그녀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래프와 만난 지 일주일쯤 됐을 때 브리나는 부모님께 래프와의 관계에 대해서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었다. 그들은 그녀가 이제 자기 일을 스스로 결정할 만큼 자랐음을 인정해 주었고, 필요하자면 실수나 시행착오마저도 존중해 줄 것임을 약속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눈살을 찌푸렸다. "난 네가 임신했기 때문에 너희들이 결혼해야만 한다고 생각할 만큼 구식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식에 대해서 권리를 주장하려 하지 않겠니?"

"이애는 내 아기예요, 아빠." "너 그에게 말하지 않았구나?" 그는 부드럽게 타일렀다. "그건 너무 이기적인 행동이 아닐까?"

브리나는 얼굴을 붉혔다. "그에겐 이미 자식이 둘이나 있어요. 그가 내게서 또 자식을 원할 히 없어요." "하지만."

"그만, 제임스. 오늘밤은 다투기 위한 밤이 아니에요." 어머니가 단호하게 아버지의 말을 잘라버렸다. "브리나는 자신이 뭘해야 하는가 쯤은 알고 있는 애예요."

"하지만, 메리." "오늘밤은 그만, 제임스!" 어머니는 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갈색 눈이 경고하듯 번쩍였다. 그녀는 작고 사랑스러웠지만 경우에 따라 무섭게 화를 낼 때도 있어 그럴 땐 남편마저도 두려워할 정도였다.

브리나는 힘없이 미소 지었다. 어머니보다 몸집이 두 배나 큰 아버지가 잠잠히 침묵을 지켰다. 그녀는 부모님들 사이에 마찰을 불러일으킬 마음도 없었고, 더욱이 이 주말에 래프 얘기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오늘 아침 스코틀랜드를 출발한 이후 줄곧 그에 대해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노력해 왔다.

저녁 시간은 그들 모두에게 즐거웠다. 그들은 장래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최고로 훌륭한 아기의 이름을 생각해내려고 이 얘기 저 얘기 웃음꽃을 피웠다. 아들의 이름은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 정해져 있었다 래피턴 제임스. 아버지와 할어버지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하지만 딸이라면 결정하기가 좀 어려웠다. 아마 마음속으로 분명 아들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어서인 듯했다.

예전에 사용하던 그녀의 방을 돌아와 자리에 눕자, 래프의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은 비탄과 고독의 눈물이었다.

그는 지금 로즈메리나 아니면 그 비슷한 어떤 여자와 함께 밤을 지내고 있는 건 아닐까? 감히 자신에게 먼저 이별을 고한 여자를 벌써 잊었을까마는.

 

그의 아이를 무척 아끼고 사랑할 것을 그녀는 신에게 맹세했다.

브리나에게 있어서 집이란 항상 스코틀랜드를 의미했다. 다음날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두텁게 쌓인 눈 속을 터벅터벅 걸어서 스키 산장까지 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스키 교사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들은 대부분 그녀의 아버지와 오랫동안 함께 일한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걸음마를 배움과 거의 동시에 스키를 배웠다. 지금 그녀는 다른 사람들처럼 스키를 타고 흰 경사면을 미끄러지듯 활강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스키를 타면 그녀는 무한한 자유를 느낀다. 그것은 마치 비행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 붕 뜨는 듯한 느낌. 그것은 래프와 관계를 가질 때의 기분과 흡사했다. 정말 그러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기를 그런 위험 속에 내맡길 만큼 이기적인 여자가 못된다.

"스키를 탈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 차갑고 거친 목소리가 뒤에서 천천히 울려나왔다. 브리나는 너무도 급히 홱 돌아서는 바람에 마치 땅바닥이 빙글 도는 듯했다. 래프의 얼굴이 언뜻 보였다가 사라졌다. 그리곤 어둠이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였을 때 그녀는 아버지의 응접실 가죽 소파 위에 누워있었다.

그녀는 흐릿한 시선으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이쪽으로 등을 돌리고 서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다시 고통스럽게 숨이 먹혀왔다.

그는 창 앞에서 바깥의 산들을 바라보며 서 있다. 그는 이제껏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캐쥬얼한 차림이었다. 두꺼운 검은 스웨터와 꼭 맞는 데님 천의 바지를 입었다. 숱 많은 검은머리, 넓고 힘세 보이는 어깨, 잘록한 허리, 탄탄한 넓적다리.

래프다! 자신의 괴로운 상상이 만들어낸 허깨비가 아니라 정말 래프였다.

브리나는 일어나 앉았다. 그 소리에 래프가 돌아섰다. 그는 호색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그의 탐문하는 듯한 눈초리에 결연히 저항했다.

"아버진요?" 그녀는 빠른 어조로 물었다.

"스키 교사들 편성문제 때문에 나가셨어." 그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당신이 그저 기절했을 뿐이란 걸 확인하고는 기꺼이 내게 맡기시고 나가시더군."

아버지는 이것이 래프에게 아기 얘기를 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신 게 틀림없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서로 인사는 했나요?" 브리나는 다리를 바닥에 내리며 의자에 반듯이 등을 기대고 앉았다.

래프는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그녀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기절한 딸을 안고 있는 남자에게 먼저 인사부터 하는 게 관습인가?" 그는 비웃듯 말했다.

"여긴 웬일이세요?"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그를 몰아세우듯 말했다. 아직도 가벼운 현기증이 느껴졌다. "난 당신이 어제 했던 말을 생각해 봤소. 그리고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결론 내렸소." 그는 너무도 부드러운 어조에 브리나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이미 난 말했잖아요. 난 이제 당신을 더 이상 원하지 않아요." "그랬었지." 래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리의 아기가 날 원할 거라고 생각해." 그는 거칠게 덧붙였다. 브리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도대체 무슨 얘길 하는 거예요?"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아기라뇨?" 래프는 엄격한 표정으로 싸늘하게 대꾸했다. "당신이 가진 아기, 즉 내 자식 말이오."

그 말은 브리나에게 충격을 주었지만 그녀는 곧 평정을 되찾고 비웃듯이 말했다. "난 당신이 무슨 얘길 하는지 모르겠어요." "난 의사에게 전화를 했었소, 브리나." 래프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내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했소."

"믿을 수 없어요."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의사는 환자의 비밀을 지켜 줘야 해요. 누가 뭐래도 말이에요!" "하지만 난 미리 내가 아버지가 될 거란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지." 래프는 의사로부터 사실을 듣게 된 경위를 털어놓았다. "그리고 당신의 임신경과가 좋을 것 같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걱정 말고 안심하라고 기꺼이 대답해 주더군." 브리나는 흥분해서 씩씩거렸다. "어떻게 의사에게 전화할 생각을 하게 됐죠?" 래프는 눈을 가늘게 떴다."당신은 내가 이미 두 번이나 아이 아버지가 됐었다는 사실을 잊었소? 임신 특유의 징조를 잘 알고 있을 수밖에." "무슨 징조를요?" 그녀는 대들 듯이 물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심하게 피로를 느끼는 점이라든지, 생선 냄새에 구역질을 한다든지 하는." "왜 내게 먼저 물어보지 않았죠?" 그녀의 얼굴은 온통 붉게 물들었다. "왜 내게 물어보지 않고 의사에게 전화를 했나요?"

"당신에게 물어 봤었지. 그런데 당신도 알다시피 난 엉뚱한 대답을 들었잖소!" 그는 나무라듯이 말했다. "난 당신이 내게 말해주길 기다렸어, 브리나. 그런데 당신은 사실을 말해 주기는커녕 이리로 도망와 버렸어!"

"내가 임신한 것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요?" 그녀는 점점 더 흥분했다.

래프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상관이 없지?"

브리나는 다시 도전하듯이 머리를 들었다. "이애는 당신 애가 아니에요!" 그녀는 그렇게 말함으로써 임신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된다 해도 개의치 않았다. 의사가 그에게 이미 말해 버렸다면 계속해서 부정해봤자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래프가 임신의 징조들을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곤 상상조차 못했었다. 그는 잠시 긴장을 푸는 듯했다. "내 애란 걸 알고 있어, 브리나." 그는 조용히 말했다. 브리나는 괴로운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작정인가요?" 그녀는 가까스로 그렇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할 작정이지?" 그는 매우 부드러운 어조로 되물었다.

"나 말인가요?" 브리나는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의 의도가 너무도 명백하여 그녀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다. "어떻게 감히 내가 그렇게 하리라고."

"브리나!" 그 순간 아버지가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는 딸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들여다보았다. "고맙게도 무사하구나."

브리나는 래프에 다한 분노를 억누르려고 애쓰며 아버지의 팔을 꼭 잡고 괜찮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전 괜찮아요." 그녀는 아버지를 안심시켰다. "일을 너무 과하게 한 모양이에요." 래프가 자연스럽게 끼여들었다. "제가 잠깐 데리고 나가서 맑은 공기를 쐬도록 하겠어요." "브리나, 괜찮겠니?"

"그게 좋을 것 같네요, 아빠." 그녀는 아버지에게 밝게 웃어 보였다. 래프가 그녀에게 아노락(후드 달린 방한용 코트)을 입혀 주었을 때 그녀의 가슴은 흥분으로 두근거렸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걸쳐놓았던 자신의 가죽 재킷을 걸쳐 입었다. "여긴 좀 더운 것 같아서요." 그녀는 변명하듯이 한마디 더 덧붙였다.

"제가 나중에 집으로 데리고 가겠습니다." 래프는 너무도 당당하게 말했다.

브리나는 아직도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의 펄을 다시 한번 꼭 잡았다. "점심 식사 까진 돌아갈게요, 아빠."

"아버진 이미 알고 계시는 것 같던데?" 시야가 가득 산들이 펼쳐지기 시작하는 산기슭에 이르자 래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스키 타는 사람들이 벌써 수십 명 사면에 흩어져 있었다. 브리나는 그를 흘끗 쳐다보고는 눈길을 돌려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두 분 다 알고 계세요."

 

그는 눈이 번쩍 빛났다. "그런데도 당신 어머니는 내가 집에 들렀을 때 잘 대해 주시더군. 당신 아버지도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고 말야. 나 같으면 결혼도 안한 딸에게 임신을 시킨 녀석인데 죽여 머리고 싶을 거야!"

"부모님들은 날 사랑하세요!" 그녀는 화가 너서 소리쳤다. "그분들은 내가 스스로 알아서 할 만큼 자랐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 당신은 아직 아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하지 않았소." 래프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을 재촉했다. "좀 전의 당신 반응이라든가 부모님께 알린 점으로 봐선 유산시킬 생각은 아닌 모양인데."

"물론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브리나는 딱 잘라 말했다. "이봐요, 래프. 왜 내가 당신에게 이런 얘길 해야 하죠?" 그녀는 말을 멈추고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어제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우리 사인 끝났다구요."

그의 억센 손이 그녀의 팔을 꼭 움켜잡았다. "우리들의 아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래프, 당신은 자식이 둘씩이나 있고, 또한 내게서 자식을 원하진 않잖아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따져물었다.

"당신은 아기를 원하오?" 그는 험악한 표정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그래요!" 그녀는 소리쳤다. 검은 두 눈에 눈물이 괴어 반짝인다.

"좋아, 나 역시 그렇소."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무엇 때문에요?" 그녀는 그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려고 몸을 비틀었다. "당신은 내가 아니라도 어떤 여자하고든 아기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그녀의 말이 갑자기 끊기자 그가 거칠게 다음 말을 재촉했다.

브리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 아이는 내 아기예요."

"우리들의 아기요." 그는 무뚝뚝하게 고쳐 말했다. "케이트와 폴의 동생이기도 하고."

이제껏 그런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었다. 아이가 그들과 비슷하게 생겼으면 잘생겼으리란 생각은 했었지만, 그들이 아이에게 누나가 되고 형이 된다는 건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었다.

퍼뜩 그녀의 뇌리 속에 케이트와 폴이 아기의 엄마와 아빠라 한다 할지라도 무방할 정도로 그들은 다 자란 애들이란 사실이 떠올랐다. 이렇게 모든 걸 다 해놓은 인생의 완성기에 있는 래프가 이제와서 갓난애가 새로 생기는 것을 원할 리 없다. 그건 케이트와 폴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다. "물론 그들이 원한다면 아기는 보여 주겠어요."

"그럼 난 어떻게 하지?" 래프가 화가 나서 대들었다. "난 언제 아이를 만나 보지? 한 달에 한번, 여름휴가 때 2주간, 게다가 운이 좋으면 크리스마스에 격년으로 한번씩 만나 보겠군!" 그는 혐오스러운 듯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건 변호사가 해결해 줄 문제예요."

"그들은 아무 문제도 해결할 수 없어. 왜냐하면 당신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든 우린 결혼하게 될 테니까!"

래프는 오만하고 독단적이었다. 게다가 지금 그는 명백히 이성을 잃은 상태인 듯했다. 브리나는 그가 이렇게까지 흥분한 것을 본 적이 없다. 그의 분노는 항상 차갑고 냉정하게 나타났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다.

브리나는 깜짝 놀라서 잠깐 주춤했다. "당신은 결혼한지 6개월만에 아기가 태어나는 결혼을 또다시 하겠다는 건가요?" 그녀는 부드럽게 따져 물었다.

언젠가 어느 따스한 여름날 밤 그들이 함께 침대에 나란히 누웠을 때 그는 이런 얘기를 했었다. 그와 조시가 그토록 어린 나이에 결혼했던 것이 조시가 그때 이미 폴을 가졌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그 당시 그들은 사랑에 빠져있었고 그래서 모험을 했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십대의 나이로 결혼했지만 그 값을 너무도 톡톡히 치러야만 했다. 브리나는 래프가 그런 일을 되풀이하고 싶어 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래프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그런 식으로 아내를 얻는 게 내 운명인가 보군." 그는 비웃듯이 말했다. "제기랄! 브리나, 그런 식으로 비교할 순 없는 얘기 아니잖소!" 그는 성급하게 잘라 말했다. "난 지금 39살이오, 18살이 아니란 말이오. 게다가 당신도 어린애가 아니잖소!"

 

브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난 당신과 결혼하지 않아요."

"그건 당신에게 있어서 내게 남자로서 끝났단 얘기요?"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는 당당하게 그를 마주보았다. "그래요."

그의 뺨에 경련이 일었다. "그건 문제가 안 돼. 내가 다시는 당신 몸에 손대지 않으면 되니까."

브리나는 혹시 그가 지금 심리상태가 이상한 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그는 단호한 한마디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한데 문제가 안된다구? 어쩌면 그렇게 즉각적으로 자신 역시 날 더 이상 원치 않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럼 최근 얼마 동안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내가 가졌던 의심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오로지 아기 때문에 내가 어떤 조건을 내걸든 결혼하기로 작정했단 말인가? 부모님들은 나를 매우 사랑하니 도와주고자 하시긴 하겠지만 영국, 아니 아마도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부호를 사위로 삼는 일을 마다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가 찾아낼 수 없는 곳으로 도망가 버리는 방법밖에 없지 않을까.

"지금 당장 대답할 순 없어요, 래프." 그녀는 온몸을 떨며 말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래프는 그녀의 배를 응시했다. "우리에겐 시간이 별로 많지 않아." 그는 천천히 말했다.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며칠 정도는 상관없잖아요!"

"좋아! 며칠간의 여유를 주겠소."

브리나는 래프가 그러고자 하기만 한다면 얼마나 매력적으로 될 수 있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부모님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그는 그 매력을 최대한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런던에서의 그들의 생활에 대해서 자유롭게 얘기했고, 케이트와 폴에 대해 묻는 말들에 재미있게 대답했다. 그녀와 아기의 장래를 결정하는 것은 브리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물론 부모님들도 인정해 주고 있긴 하다. 하지만 식사하는 동안 래프가 그녀에게 열심히 마음을 써주는 것을 보며 부모님들이 자신에게 묻는 듯한 시선을 던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왜 그녀가 래프와 끝났다고 하는지 그들로선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리라. 래프의 행동거지로 봐 끝내고자 한 것이 그가 아님은 명백했을 테니까. 또한 부모님들은 브리나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애초부터 그의 연인이 되지도 않았을 것임을 믿고 계시니까.

래프와 함께 보낸 첫 저녁은 그녀를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촛불 아래서의 호화로운 저녁식사, 너무나 분위기 있게 연주되는 로맨틱한 음악, 맞은편에 앉아 있는 래프의 빛나는 회색 눈. 그녀는 동요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그의 횡포와도 같았던 이전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날 저녁만큼은 그에게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브리나는 그가 레스토랑에서 집까지 차로 바래다 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차는 나중에 가지러 오겠다며 그녀의 집까지 함께 걸을 것을 제의했다.

그녀는 이러한 제안을 처음엔 별로 탐탁찮게 여겼으나 곧 감탄으로 바뀌고 다음에는 황홀해졌다. 초여름 밤의 꽃향기는 식사 때의 포도주보다 더 진하게 그들을 취하게 만들었다.

그날 밤 가장 놀라왔던 일은 그가 그녀의 커피 초대를 거절한 것이었다. 그는 들어가 커피 한잔 마시자는 그녀의 제의를 거절하고, 아파트 문 앞에서 망설이는 듯한 작별 키스만을 한 후 돌아갔다. 그녀가 래프에게 결정적으로 매혹된 것은 그 키스, 그 망설이는 듯한 키스 때문이었다.

다음날 커트가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고 전화했을 때, 그녀는 쉽게 거절할 수 있었다. 래프가 전화할 경우에 대비해서 저녁 시간을 비워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남자친구의 전화를 기다리는 십대 소녀처럼 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자신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래프는 전화하지 않았다. 그녀는 저녁 내내 머리를 감고 말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생쥐 같은 래프 갤러거 따위가 만에 하나 전화할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에 커트 스티븐스와 같은 멋진 남자의 초대를 거절해 버린 자신을 저주하면서.

그녀는 다음날까지도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서 매사에 퉁명스럽게 굴고 노여워하곤 했다. 어떻게 내가 래프와 같은 남자에게 속아 넘어갈 만큼 바보였단 말인가! 그는 단지 다시 만나자고만 말했을 뿐인데, 다른 여자들처럼 자신 역시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다니!

"그 연필이 나이길 바라오?"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천천히 울려왔다.

브리나는 래프가 소리도 없이 방문 앞까지 와 서 있는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녀는 질리에게 한마디 주의를 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우선 래프를 이 방에서 몰아내는 게 급선무였다.

"난 당신이 그렇게 잔인한 사람인 줄은 몰랐는걸." 그는 짙은 눈썹을 모으며 방안으로 성큼 들어와 조용히 등뒤로 문을 닫았다.

브리나는 손에 쥐어져 있는 부러진 연필을 놀란 듯 내려다보았다. 그것을 두 동상 냈다는 걸 깨닫지 조차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책상 옆의 쓰레기통 속에 던져 버렸다. "난 당신과 약속한 기억이 없는데요, 갤러거 씨." 그녀는 쌀쌀하게 말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맞은편 의자에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커피를 좀 주겠소? 잠이 깨질 않아서."

브리나의 눈이 분노로 번쩍였다. "그렇다면 잠자리에 좀 더 누워 계셨어야죠!" 어떻게 감히 다른 여자와 함께 밤을 지낸 후에 내게 와서 커피를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어젯밤엔 전혀 자질 못했소."

"갤러거 씨."

"나도 이젠 늙었나 봐." 그는 서글픈 어조로 중얼거리며 의자에 똑바로 일어나 앉았다. "몇 년 전만 해도 비행기로 미국에 가서 저녁 내내 여기 시간으론 밤이지 일하고, 일이 끝나면 다시 영국으로 날아오곤 했어도 끄떡없었는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젠 피로를 느끼겠어."

"당연하죠." 브리나는 지난 24시간 동안의 그의 빽빽한 일정에 깜짝 놀라 나무라듯이 말했다. 그가 전화를 못한 것도 당연하다. 도무지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 또한 비행기 여행의 지독한 피로감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심하게 일하다간 건강을 해치겠어요." 그녀는 그에게 커피를 따라 주려고 일어섰다.

그는 고마워하며 진한 커피를 마셨다. "난 내가 원하는 여인에게 커트가 프로포즈할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소." 두 잔째 커피를 마시며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어떻소, 지금 내가 프로포즈한다면?" 그는 따스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떠나기 전에 내게 그렇다는 전화쯤은 해줬어야 했어요." 그녀는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잘라 말했다.

래프는 눈이 가늘어졌다. "그건 내가 너무 늦었단 뜻인가? 벌써 커트가 당신에게 전화했었소?"

언제라도 이 남자가 너무 늦었다는 법은 없을 것이다. 어떤 여자가 그를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우선 집에 가셔서 주무시는 게 좋겠어요, 그리고."

"나와 함께 갑시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브리나는 그의 너무도 단도직입적인 접근에 할 말을 잃을 지경이었다. "아직도 날 다시 만나길 원한다면 나중에 전화하세요." 그녀는 지금 당장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려고 애쓰며 단호히 말했다. 만약 그가 한번 더 청했다면 뿌리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떠나려고 일어섰다.

"그럼 전화하겠소."

"좋아요." 그녀는 흥분과 초조감을 느끼며 대답했다. 흥분? 얼음같이 차갑다는 말을 듣는 내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브리나." 래프가 그를 껴안고 길게 키스했다. "꼭 전화하겠소." 그는 싫은 듯 마지못해 그녀를 풀어 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다음부턴 일 때문에 갑자기 멀리 가게 될 때는 꼭 전화로 알려주겠소."

다음부터? 브리나는 오후 내내 그 말을 음미했다. 그 말은 그들의 관계가 오래 지속될 것을 암시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와의 오랜 관계란 육체적인 관계가 도리 것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를 다시 만나기 전에 자신의 태도를 결정해야 했다.

이틀 전의 그 로맨틱했던 저녁식사와 공원을 가로지르는 달밤의 산책이 래프 갤러거처럼 냉소적인 사람과 함께였기에 그녀를 놀라게 했었다면, 그의 두 아이들과 함께 그의 집에서 보낸 저녁은 더욱 큰 놀라움이었다.

래프는 그녀의 퇴근시간에 맞춰 전화했다. 그것은 구원과도 같았다. 왜냐하면 래프가 그녀의 집 전화번호를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에게서 전화가 올 때까지 사무실 책상 앞에 밤새도록 이라도 앉아 있을 작정이었다.

그가 저녁식사에 초대하면서 옷을 간편하게 입고 오라고 했을 때만 해도 그녀는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그런데 차가 그의 집으로 향하는 긴 도로로 접어들었을 때 슬슬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비난의 눈초리에 래프는 놀리듯이 웃었다. "난 오늘 오후에 잠자질 못했거든." 그는 천천히 말했다. "그런데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을 모셔다 놓고 레스토랑에서 꾸벅꾸벅 졸고 앉아 있고 싶진 않단 말야!"

브리나는 웃었다. "그렇게 되면 당신 체면에 지장이 있겠군요."

래프는 짙은 눈썹을 모았다. "나에 대해서 읽고 듣는 걸 모두 믿어선 안 돼요." 그는 냉담하게 말하며 차문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조지 왕조 스타일의 집을 감탄하며 둘러보다가 그를 향해 웃었다. ", 당신은 아침식사 때마다 샴페인을 마시지도 않고, 밤에 실크 파자마를 입고 자지도 않는단 얘기죠?" 그녀는 언젠가 읽은 적이 있는 그에 대한 기사를 생각해서 놀렸다. 순간 그의 피부에 닿아 있을 실크 잠옷이 연상되면서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전율과도 같은 쾌감을 느꼈다.

"그렇소." 그는 싱긋 웃었다.

"어느 게 그렇단 얘기죠?" 브리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둘다 그렇지 않지. 첫째, 난 아침식사 때 샴페인을 마시지 않아. 둘째, 난 파자마도 안 입어. 하지만 만약 당신이 언젠가 나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된다면 그땐 샴페인 문제를 고려해 보겠소." 그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녀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언젠가의 저녁식사를 말씀하시는 거겠죠?"

"겁장이로군!" 래프는 웃으며 그녀의 팔을 가볍게 끌어안고 집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검은머리의 예쁜 소녀와 래프만큼 키가 크고 건장한 청년이 있었다. 그가 그들을 자기의 아들 폴과 딸 케이트라고 소개해 그녀를 깜짝 놀라게 했다. 래프가 자신을 단지 그의 침대로 데려가려고 집으로 데려온 줄로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을 흘끗 보았을 때 그의 표정에서 그녀는 그가 자신의 생각을 이미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케이트와 폴은 아버지가 누구와 함께 있든 오늘밤을 아버지와 함께 보내려고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브리나는 신경질적인 긴장상태가 되었다.

"맘 편안히 가져요." 래프는 셰리주를 한잔 건네준 후 그녀 옆에 와서 앉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내 애들이 잡아먹진 않아!"

그들은 그녀를 배척하진 않았다. 하지만 너무도 솔직하게 아무 질문이나 막 함으로써 그녀를 심적으로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20살인 폴은 래프의 젊었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싶을 정도로 래프를 빼닮았다. 게다가 그는 자기가 자기 아버지만큼이나 브리나를 매력적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조금도 숨기려하지 않았다.

캐이트는 패션에 대해 토론하는 것에 더 흥미 있어 해서 그 주제에 대해서 함께 즐겁게 얘기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이 시내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가고 케이트가 새로 사온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려고 자기 방으로 올라갔을 때 그녀는 녹초가 되다시피 했다.

"아이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그날 저녁 들어 처음으로 그녀가 편안하게 긴장을 풀었을 때 래프가 재미있다는 듯 눈썹을 모으며 물었다.

그 질문에 대해 생각을 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그의 아이들 물론 그들은 연령상으로는 이제 애들은 아니었지만 은 둘 다 친절했고 전혀 꾸밈이 없었다. 아마도 그것은 아버지의 영향인 듯했다. 부유한 집안 환경과 10년간이나 홀아버지 밑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생각보다 훨씬 까다롭지 않고 착했다. 래프가 그들을 매우 사랑하고 있음은 보기에도 명백했고, 그러한 사랑은 보답 이상의 것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케이트의 노골적인 솔직함은 그녀를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고, 폴은 계속 그녀와 장난을 치려고 들었다.

래프는 그녀의 오랜 침묵에 짧게 웃었다. "걔들은 항상 사람을 가만있도록 내버려두질 않지!" 그는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말했다. "여러 해 동안 난 경솔하고 무례하고 호기심 많은 선머슴 같은 애들은 뒀다는 소리를 들어왔어."

"난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어요." 그녀는 즉각 항의했다. "케이트는 지나치게 솔직할 뿐이고, 그리고 폴은 음폴은."

"내일 그 녀석에게 오늘 당신에게 한 행동에 대해서 한마디 해줘야겠어." 래프는 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 안 돼요!" 그녀는 재차 항의했다. "그는 단지단지."

"내가 원하는 여인을 가로채려 하다니." 래프가 갑자기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무도 내가 원하는 사람을 빼앗아갈 순 없어. 설령 그것이 20살짜리 내 아들 녀석이라 해도 말야." 그는 오만하게 말하며 머리를 그녀의 머리 위로 숙였다.

지금 그녀의 부모님들과 화기애애하게 담소하고 있는 래프를 보면서 브리나는 그가 아이를 원하는 것만큼이나 절실히 원하는 그 무엇을 자신이 지금 거절하려 애쓰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4

"꽤 말이 없군."

브리나는 눈을 뜨고 래프의 호화로운 자가용 비행기를 둘러보았다. 런던으로 돌아올 때 그가 자신의 비행기에 함께 탈것을 고집했던 것이다. "피곤해서 그래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심신 양면으로 극도로 피로해 있었다. 래프가 원하는 대로 결혼에 동의할 것인지 어쩔 것인지 망설이며 줄곧 자신과 싸우고 있는 중이다. 아직도 래프가 곧 대답해 줄 것을 요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편안하게 생각해, 브리나."그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진 않아."

래프가 그녀에게 뭔가를 강요한 적은 결코 없었다. 아니, 강제로 뭘 어떻게 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24년간 지켜온 순결을 허물던 그와의 첫날밤에조차도 그러했으니까.

래프의 아이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던 그날 밤의 일이다. 그가 매우 피곤한 듯해서 택시를 타고 돌아가겠다고 했지만 래프는 손수 운전해서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차를 아파트 앞에 주차시켜 놓고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서려는 그를 향해 그녀가 말했다. "지금은 당신에게 안으로 들어오란 말은 못하겠어요. 왜냐하면."

"들어오라고 해줘요, 브리나."그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당신은 피곤하고, 그리고." 그녀는 무턱대고 말하다말고 그제서야 그가 조금 전에 한 말을 알아들었다. "들어오길 원하세요?" 그녀는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간절히 원하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은 절실했다.

"당신은 피곤하고, 그리고."

"브리나 난 지금 정신이 맑아요. 그리고 당신이 들어오라고 청하기만을 원하고 있어!"

그토록 강력한 요구 앞에서 뭐라고 할 수 있었겠는가? 브리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요." 그녀는 약간 멍한 상태로 승낙했다. "원하신다면."

"물론이지."그는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그녀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방까지 올라가는 동안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녀는 래프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순간이 생각보다 빨리 닥쳐오리라는 것을 의식했다. 그의 아이들과 보낸 저녁이 그녀로 하여금 그와의 육체적 관계에 대한 공연한 안도감을 느끼게 했었던 듯했다.

래프는 생각에 잠긴 듯 긴장된 자세로 조용히 서 있었다. 브리나는 그를 바라보며 자신이 지난 수년 동안 다른 남자들과 나누었던 플라토닉했던 그런 관계에 그가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이란 걸 느꼈다. 그들이 방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이제야말로 자신이 그로부터 무엇을 원할 것인지 빨리 결정해야 할 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생각을 해?"

래프의 거친 목소리가 그녀의 추억 속으로 끼어들었다. 그녀는 눈을 뜨고 맞은 편 좌석에 앉아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요?"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성급한 어조로 말했다. "난 당신이 자는 줄 알았소. 한데 눈꺼풀이 움직이는 걸 보고서야 그게 아니란 걸 알았단 말이오!" 그 역시 싸울 듯이 말했다. "왜 싸우려고 애쓰는 거요? 브리나, 당신도 결국 동의하게 될 걸 알고 있잖소!"

"정말 그런 식으로 결혼하길 원하세요?" 브리나는 불타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서로 사랑하지도 않는 두 사람이 어쩌다 생긴 애 때문에 서로 결합하다뇨! 그런 식의 결합이 어떤 것인지 당신의 첫 결혼의 실패가 깨닫게 해주지 않았던가요?" 그녀는 비꼬듯 말했다.

"내 첫 결혼은 실패가 아니었소." 그는 잘라 말했다. "조시와 난 너무 어려 감정이란 것을 너무 이상적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가해지는 모든 압박들을 견뎌낼 수가 없었던 거요. 하지만 우린 서로를 존중했잖소."

"하지만 존중만으로 충분할까요? 그렇진 않겠죠." 그녀는 맹렬히 추궁했다.

"이번엔 충분할 거요." 그는 씹어뱉듯이 말했다. "당신은 임신이 마치 나의 잘못인 것처럼 말하지만, 아이는 우리 둘이 함께 만든 거요. 브리나, 난 그것이 실수였다곤 생각지 않소."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날 비난하는 건가요?"

"난 어떤 일로도 당신을 비난하진 않아." 그는 피곤한 듯 한숨을 지었다. "하지만 피임은 당신이 신경 쓰고 있다고 내게 말했었고, 난 그런 줄 알고 있었던 것뿐이오."

 

그리고 그녀 자신은 이미 오랜 전에 자연적으로 영구피임이 된 줄 알고 있었고, 그녀는 자신이 임신할 수 없는 몸이니 굳이 피임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래프에게 그런 말은 하지 않았었다.

래프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도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했겠지. 하지만 어쨌든 일은 일어난 거요." 그는 안전벨트를 끌렀다. 그리고 허리를 굽힌 자세로 기내를 가로질러 그녀 앞까지 왔다. "브리나, 우린6개월 동안 연인 사이였소. 함께 침대로 뛰어들어도 전혀 이상하지가 않아. 당신의 임신도 그런 어떤 밤의 결과가 아니겠소? 그런데 나와 결혼하는 것이 정말로 그토록 싫은 거요?"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감싸쥐며 달래듯이 말했다.

브리나는 거만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이미 말했잖아요! 결혼하면 각자 다른 생활을 영위하는 수밖에 없어요."

래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그녀의 손을 똑바로 내려놓고 그녀 옆 의자에 앉았다. "내 얘기는 각자 침대를 따로 쓰자는 얘기였소, 브리나." 그는 신음하듯 말했다. "난 또다시 각자 따 사랑의 상대를 구해야 하는 그런 결혼관계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없소."

브리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요." 그녀는 힘들게 말을 이었다. ", 난 당신이당신이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난 당신에게 다른 남자가 생기는 걸 용서할 수 없어." 그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만약 당신이 나와 결혼하면, 당신은 당신 침대 밖으론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을 거요! 만약 이것을 어길 경우 우리의 결혼은 끝장이야. 그리고 난 내 애에 대한 권리를 갖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어."

순간 브리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또한 그가 얼마나 말을 잘 수행할 사람인지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제안에 동의할 것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날카로운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은 일을 계속해도 좋아. 아기에게 유모를 대도 좋고.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지 해도 좋소. 하지만 날 거부하고 다른 남자를 받아들이는 것만을 절대로 용서 못해!"

만약 그와 결혼한다면 자신을 그의 집안의 아름다운 장식품, 고작 그 정도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난 사람이에요, 래프.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구요. 사업상 거래처럼 생각지 말아요!"

"물론 당신이 감정을 가졌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소." 그는 으르렁대듯 말했다. "그래서 내가 정상적인 결혼을 제의하는 거요."

자선이나 하듯이 형식적인 사랑을 줘 다른 남자에게 잘 필요가 없도록 해주겠다는 것일까? 맙소사! 난 절대 그런 식으론 살 수 없다. "임신은 내 문제예요, 래프. 왜 내가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거죠?"

"그애는." 그는 힘주어 말했다. "그애는 내 애기이기도해. 난 아일 원해."

"당신은 자기네 둥지 속으로 기어들 이 뻐꾸기 같은 우리 모자에 대해 케이트와 폴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해 봤나요?" 그녀가 물었다.

그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애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내 자식이오." 그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그들 역시 사실을 사실로서 받아들여야 하겠지!"

브리나로선 이제 더 이상 논박할 여지가 없었다. 단 한 가지 절실한 괴로움은 신이 래프를 사랑한다는 것, 그러나 그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훌륭한 아버지가 돼 주리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오히려 그쪽에서 어머니로서의 그녀의 능력에 대해 의심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브리나는 눈을 감았다. "좋아요, 래프."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난 내 침실을 따로 가지겠어요. 그리고 당신은 절대로 그곳에 들어오지 말아야 해요." 그녀는 그의 눈 속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승리의 불꽃을 보며 마지막 말을 재빨리 덧붙였다.

래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합시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다른 남자가 들어가선 안 된다고 말했소!"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만약 당신이 남자를 원할 땐 나에게 와야만 하오!"

그녀의 뺨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럴 필요는 없을 거예요."그녀는 차가운 어조로 대꾸했다. 그에게 사랑을 구걸하러 가느니 차라리 나머지 생애를 불만족으로 괴로워하며 사는 편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래프의 입술이 분노로 실룩거렸다. "그렇게 단언하진 말아!"

"단언할 수 있어요!" 그녀는 결사적으로 말했다. 그녀의 눈이 짙은 자주색으로 빛났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당신이 원한다면 그대로 될 거요. 아침식사 때 함께 샴페인을 마시는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못하겠군." 그는 비웃었다. "하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지." 그는 잘라 말하고는 그녀를 외면해 버렸다.

오늘 따라 그녀의 마음속에 그날 밤의 일이 이토록 생생히 떠오르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날 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원한다는 것만큼이나 자신도 그를 원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아직 경험이 없어 수줍고, 또한 자신이 남자를 만족시켜 줄 수 있을지 어떨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겉으로 봐서는 물론 자신이 신체적으로 다른 여자들과 똑같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래프는 수년 동안 수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가져 온 사람이 아닌가. 그러니 그녀 내부에 진짜 여자로서 필요한 그 무엇이 결핍돼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지도 모른다. 어쨌든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어.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결심했다.

"저녁 내내 지금 이 순간만을 상상했소." 래프는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칼 깊숙이 손을 집어넣으며 속삭였다. 마침내 그의 몸이 점점 기울어지며 그녀의 입술을 덮쳐왔다.

전날 밤의 키스가 단순한 입맞춤이었기 때문에 그의 키스가 전신을 마비시킬 듯 관능적일 거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었다. 얼떨떨해하고 있는 동안 래프의 몸이 점점 그녀에게로 기울면서 그녀의 머리를 떠받친 손에 힘이 주어졌다.

그녀는 그로부터 도망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손길이 가까이 와 닿을수록 물결처럼 밀려오는 쾌락으로 점점 긴장되어 가고 있는 상태였다.

래프와 또 그의 움직임 이외의 모든 것이 세상 밖으로 사라져 버리고 없는 듯했다. 고요 속에서 두 사람의 가쁜 숨소리만이 들렸다.

"오늘밤 괜찮소?" 그는 성급한 어조로 재촉했다.

브리나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괜찮냐구요? 하지만."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자 그녀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 전 괜찮아요." 그녀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여기서 내가 밤을 지내도 괜찮겠소?" 그의 시선이 그녀의 붉어진 얼굴을 따갑게 쏘아본다. "난 당신을 내 집으로 초대했지만, 거기엔 케이트가 있고."

"알겠어요." 그녀는 급히 그의 말을 가로챘다. 맙소사! 그것은 이런 식으로 행해지는 것이었던가? 서로의 욕망, 그리고 함께 밤을 지새는 것! 이 상황까지 와본 것도 그녀로선 처음이다. 만약 자신이 래프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이런 상태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래프가 자신을 바보로 생각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진 않았다. "여기서 밤을 보내는 게 편하겠군요."

"욕실은 저기예요." 그녀는 장alt빛 문을 가리켰다. "당신부터 사용하세요." "브리나."

"난 화장을 지우고 자리에 들 준비를 하겠어요." 그녀는 덧붙여 말했다. "미리 이 얘기를 해둬야 할 것 같은데." 그녀는 선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를 향해 망설이며 말했다. "난 아마 당신만큼은 경험이 없고 또."

순간 그의 강렬한 키스가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난 우리의 과거나 우리의 옛 애인들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오." 그는 거칠게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오직 이 순간뿐이오." 그는 다시 그녀에게 입 맞추었다.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 내가 지금처럼 당신을 지독히 원하고 있지 않을 때."

그는 자조하듯이 덧붙였다.

바보! 브리나는 흥분하여 자신을 나무랐다. 그가 지금 자신의 경험의 폭이라든지 경험의 부족 같은 것을 논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샤워부터 하세요." 그녀는 당황해서 얼른 그렇게 말하곤 재빨리 침실로 도망치듯 숨어버렸다.

맙소사! 브리나는 자신이 소위 노련해 보일 거라고 생각하고 보여 주었던 실수들 때문에 그가 자신의 무경험을 눈치 채지 않기를 빌었다.

만약 눈치챘다 해도 그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그녀가 샤워를 끝내고 나왔을 땐 벌써 그는 그녀의 침대 속에서 베개에 기대앉아 있었다. 허벅다리를 덮은 시트는 그 얇은 천 아래서 그가 완전히 벗은 상태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목에서부터 발목까지 화장옷의 단추를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화장을 지운 그녀의 얼굴엔 마치 십대 소녀처럼 쑥스러워함이 역력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해 보였고, 숨막힐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자신은 지금 자신이 사랑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이 낯선 남자와 사랑을 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래프가 시트를 젖히고 침대 밖으로 나왔다. 그의 황금빛 나체의 아름다움! 브리나는 순간 멍해져서 자신의 화장옷의 단추가 능숙하게 끌러지고 옷이 바닥에 흘러내린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사랑을 나눔에 있어 그녀의 경험부족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그가 자신을 원하는 만큼 그녀 또한 격렬히 그를 원했다.

한순간 고통과 함께 참으로 경이로운 완성감과 완전한 충족감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그러나 그녀가 아직도 자신과 알몸인 상태인 래프를 바라보았을 때 그녀의 눈 속에서 행복은 사라졌다.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단지 또 하나의 욕망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난 당신에게 이런 일엔 초보자란 사실을 알리려고 했어요." 브리나는 바로 코앞에 있는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볼 수가 없었다.

"초보자?" 래프는 거칠게 되물었다. "그게 아니라 당신은."

"당신같이 능숙한 사람을 첫 연인으로 선택한 건 참 잘한 일이었어요." 그녀는 가볍게 그의 말을 가로챘다. "솔직히 난 경험이 없어요. 하지만 우린 둘 다 규정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무슨 규정?" 그가 부드럽게 되물으며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브리나는 웃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의 시선을 마주보지는 못했다. "구속하지 말 것, 책임 지우지 말 것, 단지 서로 즐기기만 할 것!"

"물론이지." 래프는 그녀 옆자리에 누우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브리나는 그를 살피듯이 바라보았다. 내가 너무 서두른 게 아닐까? 나는 우리가 계속 연애할 경우를 생각하고 얘기했는데, 래프는 아직 나를 다시 만나길 원하는지 어떤지 조차 언급하지 않고 있는 상태가 아닌가.

"만약 오늘밤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면 말예요." 그녀는 재빨리 한마디 덧붙였다.

"물론 아니오." 래프가 거친 어조로 가로채듯 말했다. "난 당신을 원해. 그건 결코 하룻밤에 채워질 수 있는 건 아니오." 그는 그녀에게 맹렬히 키스하며 다시 사랑의 행위를 시작했다.

이후로 그들은 계속 사랑해 왔다. 마치 래프가 그녀의 반쪽이기라도 한 듯 그와의 사랑은 항상 그녀에게 어떤 완성감 같은 것을 주었다. 그러나 그 첫날밤처럼 감정적으로까지 충족되었던 적은 결코 없다. 그리고 최근 한달 가량은 두 사람이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의 아내가 됨으로써 그 마지막 조금 남은 것조차 포기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5

크리스마스의 결혼식, 얼마나 낭만적인가! 게다가 결혼식 또한 낭만 그 자체였다. 흰 시폰 드레스의 풍성한 레이스에 파묻힌 숨 막힐 듯 아름다운 신부와 4명의 아름다운 들러리들. 그 중 한 명은 신랑의 딸이었고 나머지 셋은 모두 신부의 가까운 친구들이었다. 신랑 역시 회색 예복을 입은 눈에 띄게 핸섬한 모습이었다.

교회는 손님들로 가득 찼다. 자랑스러워 뿌듯해하는 표정의 신부 아버지가 신랑에게 신부의 손을 넘겨 주고 서로 절을 교환했다. 브리나 페어차일드와 래프 갤러가의 결혼식엔 부족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본다면 신부가 그토록 힘겨워하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이처럼 완벽하게 사치스러운 결혼식의 준비에는 대대 몇 달쯤은 잡아야 하는데 이 결혼식은 불과 2주만에 준비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래프가 모든 준비의 지휘를 맡았다. 브리나가 흰 드레스를 입을 것에서부터 그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몇 명의 들러리를 더 뽑을 것에 이르기까지 그의 주장이 작용했다. 교회에 손님을 그토록 많이 초대한 것도 그였고, 이 유명한 호텔 연회장에서 피로연을 연 것도 그였다.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훌륭한 결혼식이요, 피로연이라고 입을 모았다. 신부는 좀 창백해 보이긴 하나 무척 아름답다고들 말했다. 그러나 그토록 부자고 잘생긴 남자의 아내가 되려는 순간에 약간 창백해지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하고 어떤 여자 손님이 옆 사람에서 소근거리는 것을 브리나는 들었다.

래프는 그들이 결혼하기 전 2주 동안 떠돈 소문들그들이 결혼을 서두르는 이유는 어느 신문기사의 표현에 따르면 <갤러거의 세 번째 상속자>가 생겼기 때문이라는을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부가 그토록 창백해 보였던 이유를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은 몇 달이 지난 후였다.

래프는 스코틀랜드에서 돌아오자마자 케이트와 폴에게 그들의 결혼과 아기에 대해 말하겠노라고 주장했다. 브리나는 그 각각의 뉴스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케이트의 숨김없는 기쁨을 접하고는 놀라는 한편 기뻤다. 폴은 자기 나이에 동생이 생긴다는 게 조금 당황스러운 듯했다. 그러나 그들은 둘다 전혀 아기를 거부하지 않았고, 그것은 이런 상황에서 브리나가 바랄 수 있는 것 이상이었다.

폴이 물론 그의 아버지의 들러리였다. 래프가 왜 커트 아닌 아들을 들러리로 뽑았는지에 대한 설명을 하려 하자 커트는 그만두라고 손을 내저었다. 그는 이미 한번 그의 들러리를 섰으니 그걸로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대신 브리나에게 축하의 키스를 했다.

"춤추시겠어요, 갤러거 부인!"

자신이 갤러거 부인으로 불리는 것을 듣자 브리나는 약간 당황했다. 그녀는 어색해하는 듯 미소 지으며 빙글거리는 커트 쪽으로 돌아섰다.

순간 커트의 표정이 걱정스러운 듯 어두워졌다. 그녀가 너무도 긴장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당신은 좀 앉아야겠어. 내가 먹을 걸 좀 갖다 주지.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처럼 보이는군."

"머리에 쓴 이 화관과 베일 때문이에요." 브리나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편안하게 매만졌다. 그녀의 머리에는 무거워 보이는 다이아몬드 관이 얹혀 있었고 게다가 그 관에는 베일까지 달려 있었다. 그 관은 래프가 준 결혼선물들 중 하나였다. 게다가 그는 거기에 어울리는 귀걸이와 가보로 내려오는 목걸이까지 주었다. 하지만 그 관을 쓰기 위해서 그녀는 긴 머리를 틀어 올려야 했고, 그것이 파티가 끝날 무렵에는 고문이라도 하듯 아파 왔다. 관을 고정시켰던 핀들이 그녀의 살을 파고들었다.

"벗어 버려요." 커트가 말했다. "그래서는 안 될 것도 없잖아. 내가 도와주지." 그는 웃으며 숨어 있는 핀들을 찾기 시작했다.

"안 돼요!" 그녀는 재빨리 그를 제지했다. 그리고는 사람들로 붐비는 연회장의 이곳저곳을 걱정스럽게 둘러보았다. 래프는 연회장 저쪽에서 그녀의 들러리였던 페니와 재닌, 두 사람과 얘기하며 그들의 댄스파트너가 돼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브리나를 똑바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눈초리는 얼음같이 냉랭했고 그녀를 비난하는 듯 했다. "래프가 싫어할 거예요." 그녀는 절박한 어조로 커트에게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커트가 얼굴을 찡그렸다. "래프는 그렇게 속 좁은 남자가 아니오."

"제발 제 걱정일랑 마세요." 그녀는 빠른 어조로 말했다. "신부가 베일도 없이 돌아다닐 순 없어요!"

"지금이야 그러면 어때." 커트는 계속 말을 이었다. "만약 당신."

"춤을 추는 게 어때요?" 래프는 이번 결혼에서 조금이라도 잘못된 점이 있다면 용납치 않을 것이고, 나 자신의 행동 역시 거기에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신부와 춤추는 것을 원치 않으세요?" 브리나가 놀리듯이 말했다. "색종이 조각이 뿌려지는 바람에 놀란 모양이에요? 자신의 결혼식을 생각했나보죠?" 그녀는 계속 짓궂게 놀려댔다.

"난 결혼은 안할 거요." 커트는 그녀를 능숙하게 플로어로 인도했다. "<까다로운 노총각>으로 알려져 있고, 또 그렇게 계속 살아갈 작정이오!" 그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브리나는 그에게 나무라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그렇다면 나의 네 번째 들러리를 혼자 내버려두겠군요!"

"한데 앨리슨이 매우 재미있는 얘기 상대란 걸 알게 됐단 말이오." 그 역시 비난하는 듯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렇고 말고요." 브리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니 오늘밤 이곳에 방을 예약하자고 당신이 제안했을 테죠!" 그녀는 눈썹을 모으며 놀리듯 말했다.

"난 그녀가 가겠다면 밤늦게라도 집까지 바래다주겠노라고 말할 예정이었소." 커트는 변명했다.

브리나는 쿡쿡 웃었다 "커트, 그녀의 집은 여기서 8거리예요."

"그렇군. 마음껏 비웃으라지!" 커트는 화가 난 듯 중얼거렸다. "여자들이란 도무지 비밀이란 게 없다니까!"

브리나는 미소 지었다. "이 말이 위로가 돌진 모르겠지만, 앨리슨도 거의 받아들일 뻔했어요."

"글쎄, 난 항상 그렇다니까!" 그는 한숨 지으며 한탄했다. "여자들이 항상 거의 받아들일 뻔하다가 그만둔다니까."

"래프 얘기론 항상 그런 건 아니라던 데요!" 그녀는 비난하듯이 말했다.

커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싱긋 웃었다. "알다시피 우리처럼 <까다로운 노총각들>은 때로 동지가 필요하지."

브리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당신과 래프가 그런 좋은 친구 사이란 건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커트는 갑자기 정색을 하고 말했다. "당신을 만난 이후 래프는 다른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았어. 그때 그 로즈메리 사건을 제외하곤." 그는 어색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아니었다구요?" 브리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커트는 그 사건에 대해 나보다 뭔가 더 많은 걸 알고 있는 것일까? 그 사건은 아직까지도 그녀에게 크나큰 상처로 남아 있었다.

"물론 그렇게까지 해선 안 돼는 거였지만, 그때 그는 사업문제로."

"그 사람이 당신에게 그렇게 말하던가요?" 브리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냉소를 띄웠다. 그녀는 그날 밤 일에 대해서 래프가 커트에게 뭐라고 변명했는지 래프에게 물어보지 않았었고, 래프 역시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는 친구에게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한 것이다. 왜 그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을까. 내게 싫증이 나서 딴전을 피고 있다는 걸.

그는 지난 2주 동안 내내 그녀에게 좀 더 나은 결혼식을 위해 의견을 물어 오곤 했다. 하지만 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을 때는 가차 없이 그녀의 의견을 무시했다. 그가 뭣 때문에 귀찮게 자신의 의견을 물었는지 그게 이상할 정도였다. 또한 그는 다시는 그녀의 몸에 손대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들의 결혼생활이 어떨 것인지, 또한 자신이 얼마나 불행해질 것인지 그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커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당신은 그게 아니란 얘긴가?"

브리나는 그의 얼굴을 살피듯이 바라보았다. "커트, 래프가 얘기 않던가요? 우리가 단지 아기 때문에 결혼한다는 걸."

"무슨 아기?" 그는 당황한 듯 눈을 치떴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시선을 그녀의 허리께로 떨어뜨렸다. 그녀의 드레스는 하이 웨스트의 고전적인 스타일이어서 부풀어오른 배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당신이 임신했다구?"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번엔 브리나가 당황했다. "래프가 얘기 안했군요?" 그녀는 래프가 적어도 가장 친한 친구에게만은 비밀을 얘기했으리라 생각했었다. "당신이 지금 임신한 상태라구?" 커트는 그녀의 팔을 잡은 채 춤을 멈추고 그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래요." 갑자기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괴었다.

"갑작스런 결혼이라 그런 소문이 떠돌긴 했지만." 그는 아직도 얼떨떨한 듯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래프는 그런 얘긴 한마디도 없었는걸. 맙소사! 전혀 몰랐다니!" 커트의 얼굴은 분노로 어두워졌다. "이런 바보 같은."

"래프의 잘못이 아니에요." 브리나는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내가 겁이 나서 그랬어요. 내가바보였어요."

"당신 얼굴을 보니 그가 당신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어 놓을 게 분명하군!" 커트는 얼굴을 찌푸리며 래프를 찾는 듯 방안 이곳저곳을 쏘아보았다. "어떻게 당신에게 이럴수가."

"커트, 제발!" 그녀는 애원하듯 그의 단단한 팔을 잡았다. 그들이 연회장 한가운데 우뚝 서 있었으므로 남들의 주의가 상당히 쏠리고 있음을 그녀는 깨달았다. "다른 곳으로 가서 얘기해요." 그녀는 재촉했다. "내가."

"브리나, 스튜어트가 당신과 춤추고 싶어해." 래프의 험악한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그 옆에는 그의 조수가 꿀려와 있었다. "자넨 이제 춤이 끝난 것 같은데, 커트."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커트는 당장에라도 따지려는 듯 보였다. 그러나 브리나는 얼른 스튜어트의 팔 속으로 옮겨감으로써 추태가 일어나는 것을 막았다.

브리나는 댄스파트너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조차 못한 채 그저 기계적으로 음악에 맞춰 움직이며 래프와 커트가 플로어를 벗어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손님들이 모여 있는 방을 벗어나 함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당신 부모님들께서 매우 즐거워하시는 것 같습니다.."

스튜어트 힐러어의 무뚝뚝한 그 한마디가 그녀의 정신을 현실로 되돌려놓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 닫힌 문 뒤의 두 친구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방 저쪽에서 부모님들이 함께 춤을 추고는 그들의 테이블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래프를 만나본 후 그를 좋아하게 된 부모님들은 브리나가 그와 결혼하기로 결정한 것을 기뻐했다. 그녀는 이 결혼이 자신에게 얼마나 고통인지를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녀가 행복하기만을 바랐고, 래프가 그렇게 해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들은 딸이 자신의 남편과 어떤 계약을 맺었는지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렇군요, 당신이 즐거우셨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그를 살피듯이 바라보았다.

"물론 즐겁구말구요." 그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의 태도는 아무리 봐도 호의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지난 몇 달 동안 지나칠 정도로 친절한 그의 모습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지금과 같은 태도는 뭔가 좀 이상하게 느껴진다. 조금 전 커트를 대하는 래프의 태도는 뭔가 좀 이상하게 느껴진다. 조금 전 커트를 대하는 래프의 태도를 보고 경계심을 가지게 된 게 아닐까?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기를 내심 바랬다.

그녀는 자신이 왜 이 남자를 싫어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항상 지나칠 정도로 예의발랐음에도 무엇 때문인지 그가 있으면 불편을 느꼈다. 래프나 커트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도 상당히 키가 큰 축에 속했다. 그리고 검은 머리와 갈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갈색 눈은 대개 따뜻한 느낌을 주는데 그의 눈만은 그렇지 않았다.

"졸아요." 음악이 끝났을 때 그녀는 밝게 웃으며 돌아서 그 자리를 뜨려했다. 순간 그가 그녀의 팔을 꽉 잡았다. "?" 그녀는 무슨 일이냐는 듯이 그를 돌아보았다.

"래프가 제게 부탁했습니다. 돌아올 때까지 당신을 돌봐주라고요." 스튜어트는 도전적으로 말했다.

"정말인가요?" 브리나는 도도한 표정으로 경멸하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내 결혼식에서 내가 당신의 돌봄을 받을 필요가 있을까요? 어쨌든 고맙군요."

"그렇지만." "힐리어 씨." 그녀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지금부터 난 내 사촌과 얘기하러 갈 거예요. 그런데 당신이 무슨 필요가 있죠?" 어떻게 감히 래프가 조수에게 날 감시하라고 말할 수 있지! 내가 혼자 내버려두면 사고라 저지르는 철부지 어린애라도 된단 말인가! 이제껏 누가 내게 이런 식으로 독재적인 태도를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 혼자 있는 시간을 못 미더워하는 인상을 준 적도 결코 없었다.

브리나는 사촌과 그녀의 약혼자와 함께 건성으로 재잘거리다가 커트가 래프와 함께 들어갔던 방에서 나오는 걸 보고 얼른 방을 가로질러 그들에게로 갔다. 커트는 험악한 표정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향했다.

브리나는 당황해하며 서둘러 커트의 뒤를 쫓았다. "커트."

"관둬!"

꽉 잡힌 손목에 아픔이 느껴졌다. 그러나 래프의 무서울 이만큼 냉랭한 얼굴을 뒤돌아보았을 때 느껴진 가슴이 아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마치 그녀를 증오하는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가 그토록 낯설게 느껴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녀는 래프의 차가운 눈초리를 피해 시선을 문 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커트가."

"갑자기 가게 됐어." 래프는 쉰 목소리로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브리나는 놀라 일그러진 얼굴로 그를 향해 돌아섰다. "당신은 제일 친한 친구에게 우리의 결혼식장에서 떠나 달라고 했군요?"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냐." 래프는 가볍게 내뱉었다. "그가 떠난 거야."

브리나는 비난하는 눈초리로 그를 마주보았다. "당신이 그렇게 만든 거죠!" 그녀는 정 떨어진다는 듯이 덧붙였다. "도대체 당신이 이럴 수가."

"난 추태가 일어나는 걸 미리 방지한 것뿐야. 그래도 당신이 원한다면." 그는 조금 전 커트와 자신이 나온 방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저리로 갑시다."

브리나는 기꺼이 그를 따라나섰다. 지난 4시간 동안 그녀는 가족과 친구들 앞에서 행복한 얼굴을 짓느라 몹시 피곤해 있었다. 이젠 정말 이런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 쉬고 싶었다.

그들이 들어간 방은 벽난로에 조그맣게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작은 거실이었다. 연회장의 축제에 지친 사람들을 위한 휴식처인 듯했다. 브리나는 이 방을 좀 더 일찍 알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4시간만 일찍 알았더라도!

브리나는 래프를 향해 돌아섰다. "왜 당신은 그렇게 오만하고 터무니없게 구는 거죠?" 그녀는 따져물었다.

래프는 싸늘한 눈초리로 잘라 말했다. "나는 내 행동이 대단히 이성적이라고 생각해. 당신이야말로 스스로 구경거리가 되고자 한 사람이오!"

그녀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난 커트와 춤추고 있었을 뿐이에요."

"미안하지만 내가 다가갔을 때는 확실히 춤을 추고 있진 않았소." 래프는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만으로도 당신들 두 사람은 남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어. 그리고 그 몇 분 전에 그가 당신의 머리칼을 애무하는 걸 수십 명의 손님들이 모두 똑똑히 목격했단 말이오."

"그는 내 머리칼을 애무한 게 아니에요." 브리나는 열을 올리며 변명했다. "내 베일을 벗겨주려고 한 것뿐이에요!"

그의 회색눈이 가늘어졌다. "왜지?"

"왜냐하면 그는 친절하기 때문이에요." 그녀의 보랏빛 눈에 눈물이 가득 괴었다. "베일 때문에 머리가 아팠어요!"

"그것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면 왜 당신 자신이 그것을 벗어버리지 않았소?"

왜냐구요? 그렇게 하는 걸 당신이 싫어할 것 같아서였다면요? 맙소사! 그녀는 탄식했다. 2주 동안에 그녀는 자신이 경멸해 마지않던 그런 여자가 되어 있었다. 독립된 여자가 아닌 남편을 두려워하고, 손짓 하나라도 그의 기분을 거스를까 겁내는 그런 못난 여자가.

"난 신부 차림을 계속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았어요!" 브리나는 분한 듯이 내뱉으며 능숙한 솜씨로 머리핀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당장에 머리를 짓누르던 압박감이 덜어졌다. "하지만 어떤 신부든 4시간이면 충분하겠군요." 그녀는 관과 베일을 벗어 앞에 있던 작은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자유로움을 확인하려는 듯 머리를 흔들어 보았다. "이제부터 난 남은 시간을 즐겨야겠어요. 당신은 맘대로 파수꾼처럼 굴어 보시죠!" 그녀는 나가려고 돌아섰다.

"그건 무슨 뜻이지?" 그는 날카롭게 내뱉었다.

브리나는 홱 돌아섰다. "당신은 날 바보로 생각하나요, 래프?" 그녀는 소리쳤다. "내가 결혼에 동의한 이후로 당신은 내 행동 하나하나를 감시해 왔어요. 왜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결혼식 날이니 만큼 바보 같은 짓을 하진 않을 테니 날 놔두어도 좋아요!"

그의 입술이 심하게 실룩거렸다. "당신은 이미 아까 커트와의 행동에서 많은 실수를 했어."

"무슨 행동 말이죠?" 그녀는 못 참겠다는 듯이 소리쳤다. "난 단지 그 사람과 춤을 췄을 뿐이에요!"

"그에게 아기 얘기를 했잖소!" 래프는 싸울 듯이 쏘아붙였다.

 

"그는 당신의 제일 친한 친구예요. 난 당신이 이미 그에게 얘기한 줄 알았어요!" 브리나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왜 내가 그걸 얘기했어야 하지?" 래프가 되물었다.

브리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왜냐하면 그건, ."

"그건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야!" 그는 냉랭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그녀는 지친 듯 한숨지었다. "이봐요. 난 나 때문에 두 친구 사이에 마찰이 생기는 건 원치 않아요."

"정말 그래?" 래프는 경멸하듯이 말했다. "여자들이란 모든 남자들이 자기 때문에 싸워 주기를 바라는 걸로 알고 있는데."

커트가 래프에게 그녀의 임신에 대해서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그 둘 사이에 결정적으로 파국을 가져온 것만은 분명하다. "나 때문에 당신과 커트가 싸울 이유는 없어요." 그녀는 성급하게 외쳤다. "그건 어리석은 짓이에요! 난 싫어요."

"그건 대단히 나쁘지." 그는 잘라 말했다. "왜냐하면 계속 당신이 그렇게 만들 거란 느낌이 들거든!"

"왜요? 뭣 때문에?" 그녀는 격하게 물었다. "커트는 그때 단지 당신이 아기에 대해서 털어놓지 않은 것 때문에 화가 난 거라구요. 그러니까 그는 돌아올 거예요."

"하지만 난 받아들일 수 없어." 래프는 부드럽지만 경고조로 말했다. ", 이젠 다시 손님들에게로 돌아가야 해." 그는 냉정하게 명령했다. "이제 손님들이 슬슬 돌아가기 시작할 시간이야. 당신은 좀 쉬어야겠군."

브리나는 지금까지 체면차리는 데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던 래프가 그녀가 얼마나 피로한지를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것은 아마 새색시는 남편에 대한 사랑과 활력으로 빛나야 하며 지쳐 보여서는 안 된다는 고루한 생각에서 나온 배려였을 것이다.

다행히도 손님들은 슬슬 돌아들 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래프가 그들에게 정중히 이제 그만 돌아가 달라고 부탁을 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경우 같았으면 신랑신부는 벌써 몇 시간 전에 연회장을 빠져나갈 수 있었을 것이나 오늘은 특별히 크리스마스이브였기 때문에 그들은 신혼여행을 떠나지 않고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기로 한 것이다. 그녀가 부모님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도록 래프가 그녀의 부모님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고, 래프의 부모님들도 물론 종일 함께 있을 예정이다. 신혼여행을 떠났다면 그 얼마나 이상했겠는가! 래프와 단둘이 있고 싶진 않았다. 그녀가 결혼에 동의한 이후 래프는 계속 이상하게 낮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손님들이 모두 떠난 것은 자정이 지나서였다. 폴은 여자 친구를 집까지 바래다 준 후 집으로 돌아올 예정이었고, 케이트는 로저 델러니가 집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로저는 케이트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유쾌한 젊은이로서 케이트는 망설이다가 결국 그를 결혼식에 초대했었다. 래프의 부모님들은 런던에 있는 자택으로 갔다가 내일 다시 그들에게로 와서 함께 보내기로 했고, 따라서 결국 함께 집으로 가게 된 것은 래프와 브리나,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들뿐이었다.

래프가 그녀를 안고 그녀의 방으로 가는 긴 계단을 올라갈 때에야 브리나는 눈을 떴다. 아마도 차를 타자마자 잠들어 버린 모양인지 차를 타고 오는 동안의 일은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다.

그녀가 깨어난 것을 알아채고 래프가 그녀를 흘낏 내려다보았다. "부모님들께서 잘 자란 인사를 하셨어."

절대적으로 접근을 허용해선 안 된다. "이제 날 내려 주세요." 그녀는 그의 팔 속에서 몸을 꿈틀거렸다.

래프는 팔에 힘을 주며 더 꼭 끌어안았다. "이제 다 왔어."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겨우 오늘 결혼했는데 두 사람 사이는 조금씩 더 벌어져 가는 듯만 했다. 만약 그들이 행복한 마음으로 결혼했다면 이렇게 계속 벌어지도록 내버려두진 안았으리라.

"래프, 난 당신이 커트에게 아기 얘기를 안한 줄은 정말 몰랐어요." 그녀는 약간 후회하는 마음으로 말했다. "그래서 나는."

"어쨌든 당신이 그에게 얘기했어." 그는 침실 문을 발로 차 열었다.

"그는 당신의 제일 친한 친구예요."

"당신이 가진 아이는 우리들의 애야. 아이와 관계된 것은 뭐든지 우리가 함께 결정해야 해!"

"하지만아니, 이건 당신의 침실이잖아요!" 그녀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래프는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 방이 누구 방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소." 그는 넥타이를 늦춘 후 흰 셔츠에서 딱딱한 칼라를 떼어냈다. "긴 하루였소, 브리나." 그는 피로한 듯 말했다. "샤워하고 잡시다."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서 구두를 벗었다.

브리나는 마른 입술을 축였다. "우리는 가방을 쓰기로 했잖아요!"

"우리는 각기 방을 따로 가지고 있소." 그는 선 채로 옷을 벗었다. "그런데." "브리나, 지금 집엔 손님들이 있어." 그는 엄격하게 말했다. "내 아들딸들도 있고. 첫날밤에 각방을 쓴다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소."

브리나는 놀라며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난 당신이 그렇게 딴사람에게 신경을 쓰는 줄은 미처 몰랐어요." 예전엔 그는 결코 그렇지 않았었다.

그의 눈이 분노로 번쩍였다. "당신의 부모님은 당신이 이 결혼을 원한 걸로 알고 계시고, 그분들은 사흘 후면 돌아가실 거요. 그동안 그분들의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는 일일랑 하지 맙시다. 그리고 케이트와 폴의 마음 역시 중요해. 그들 역시 사흘 후면 떠날 거야. 그때까지 이 방에서 이 침대에서 함께 자도록 하지. 그냥 잠만 자는 거야. 적어도 겉으로만이라도 정상적으로 보이도록 말야. 나중엔 당신이 혼자 자는 걸 남들이 알더라도 그게 당신과 아이에게 편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 그는 냉혹하게 말했다.

브리나 역시 부모님들이 자신과 래프와의 결혼이 선택이 아닌 강제라는 사실을 알게 될까 봐 겁이 났다. 그녀는 래프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케이트가 브렌다의 아파트로 옮겨가도록 허락한 이유를 이제서야 알 듯했다.

"래프, 케이트의 장래에 대해서 후회할 결정은 하지 말세요. 우린 할 수 있을 거예요, 당신만."

"케이트는 18살이오. 바깥세상이 얼마나 험하다는 걸 스스로 깨달을 때요." 그는 잘라 말했다.

브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그의 진심이 아님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 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당신은 후회할 거예요." 래프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단 말이오?"

그녀는 보란 듯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나도 한때는 순진하면서도 노련한 척했어요. 기억하세요?"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당신은 내가 딸을 강제로 쫓아내 임신의 위기에 처하도록 만들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요?"

"물론 아녜요! 난 그저!" 갑자기 밀어닥친 어지럼증에 그녀는 눈을 감았다. 래프가 재빨리 받쳐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았을 것이다. "미안해요."

"당신은 지쳤소." 그는 엄격한 표정으로 그녀를 침대 위에 앉히고는 약간 옆으로 돌려놓은 뒤 드레스 위에 달린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싸우지 맙시다." 그녀가 또 뭐라고 항의하려하자 그가 가로막았다. "난 당신에게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또 약속은 지킬 거요."

래프는 그녀에게 날개 같은 흰 잠옷을 입혀 준 후 베개 위에 머리를 편안히 놓아주고 턱 밑까지 이불을 덮어주었다. 너무도 편안함 속에 빠진 그녀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토록 피곤한 적은 난생 처음이다. 그녀는 어렴풋하게 래프의 움직임을 보았다. 애를 써도 눈이 절고 감겨왔다. 그녀는 반쯤 감긴 눈으로 래프가 그녀 쪽을 등진 채 옷을 벗고는 욕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브리나는 샤워하는 물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그리고는 그녀는 몸에 와닿은 래프의 손길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처음에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도 피곤해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그의 손길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래프가 자신의 몸을 만지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의식했다. 그의 한쪽 손은 그녀의 히프에 놓여 있고, 또 한손은 배 위로 더듬어 내려오고 있었다.

그가 계속하도록 내버려 둔다는 것은 무서운 고문이었다. 그러나 그걸 제지하는 것 또한 그녀에게 있어선 뼈아픈 고통이다. 하지만 그를 받아들임으로써 정신적 고통을 받느니보다는 육체적 갈망을 억제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그의 손길로부터 재빨리 빠져나와 그를 마주보았다. 어둠에 눈이 익어 그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래프, 당신은 약속했잖아요." 그의 눈이 은빛으로 빛난다. "난 약속을 지켰소." 브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난 당신을 만진 게 아니오, 브리나." 그는 거칠게 말했다. "난 당신이 날 만지는 걸 알고 있었단 말예요!" 그녀는 항의했다. 그는 한쪽 팔로 머리를 받치며 비스듬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구릿빛 부드러운 가슴을 냉정하게 바라보려고 애쓰면서도 손은 벌써 그를 만지고 싶어 했고, 몸은 이미 달아올라 있었다.

"난 내 아이를 만졌소." 그는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그래선 안 된단 얘긴 한 적 없잖소."

브리나는 어처구니없어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의 손은 그녀의 약간 불러오른 배 부분만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녀는 그와의 접촉 때문에 흥분돼 끓어올랐던 욕구가 사그라들어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만은 알아 둬야 해, 브리나." 래프는 그녀 옆의 베개에 똑바로 드러누웠다. "난 케이트와 폴과 나 사이처럼 이 아이와 나 사이도 똑같이 가깝기를 원해. 따라서 언제든지 내가 원할 때는 아이를 만질 거야!" 그는 눈을 감고 숨을 고르게 내쉬기 시작했다. 그녀가 뭐라든 자기 얘기는 끝났다는 태도를 시위하기라도 하듯이.

그의 권리를 가지고 그녀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느 아버지가 여자의 뱃속에 있는 자신의 아이를 만져 보고, 그 생명의 경이를 느껴보고 싶지 않겠는가?

남은 임신기간 6개월은 그야말로 산지옥 같은 생활일 것이다.

 

6

"일어날 시간이에요!" 케이트가 크리스마스 아침 일찍부터 그들을 깨웠다. 그녀는 아직 잠옷 가운을 입은 채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과 풀어 내려뜨린 검은머리가 그녀를 한결 어려 보이게 했다.

침실에 갑자기 케이트가 들이닥쳐 브리나는 자못 당황했다. 그녀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면서 어색하게 래프를 쳐다보았다.

검은 머리칼이 이마 위로 흘러내린 래프는 한층 젊어 보인다. 그는 졸린 눈을 껌뻑였다. 그의 단단해 보이는 턱에 거뭇거뭇한 수염이 자라나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노크를 해야지, 이 아가씨야."

"어머, 했는데요!" 케이트는 즐겁게 대답하며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대답이 없더라구요."

"아직 자고 있었으니 당연하지." 래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만약 자고 있지 않았다 해도 방해는 절대로 환영 안했을 거야." 그는 농담조로 말했다.

케이트의 뺨에 당황한 빛이 스치더니 그녀는 얼른 일어섰다. "그런데요, 아빠. 임신 초기엔 그런 요구를 지나치게 해선 안 돼요." 그녀는 타이르듯이 말했다.

순식간에 딸에게 보기 좋게 한 대 얻어맞은 래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니?"

케이트는 래프에겐 놀리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브리나에겐 공모자적인 웃음을 보냈다. "이 집에 진짜 어린애가 생겨나게 돼서야 제가 이제 어린애가 아니란 사실을 아셨나 봐요." 그녀는 즐겁게 웃었다. "서두르세요, 아빠. 빨리 내려오세요. 제 선물을 빨리 열어 보고 싶어요."

브리나는 미소 지었다. 래프 역시 케이트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지난 몇 주 동안을 통틀어 지금 이 순간이 가장 래프와 가까워진 느낌이다.

"금방 어른처럼 굴더니 또 금방 8살짜리 아이로 돌아가 버리는군."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두 다 선물을 열어 보고 싶어 할 거예요." 브리나는 미소 지었다. 어젯밤의 숙면으로 피로는 말끔히 가신 듯했다.

"우리들까지도?"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지난 6개월 동안 당신에게 아무 선물도 주지 않았다고 당신이 뭐라고 그랬던 것 같은데." "그땐 제가 당신의 아내가 아닌 일시적인 연애상대였기 때문이었죠."

"당신은 내 연애상대가 아니오." 그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부부요. 둘 다 각자의 생활을 인정해 주는 진정한 연인이오. 따라서 당신이 내게 선물을 사준대도 난 절대 거절하지 않겠소. 그리고 우리가 함께 침대 속에 있을 때 당신이 날 생각해 준다면 그건 최고의 선물이 될 거요." 그녀의 눈이 자줏빛으로 변했다. "래프, 제발 그만둬요!"

"좋아, 그만두지." 그는 그녀의 머리 위로 몸을 굽혔다. "메리 크리스마스, 갤러거 부인!"

"메리 크리스마스!" 그의 입술이 덮쳐오는 바람에 그녀는 겨우 이 말만을 중얼거렸다.

그토록 오랫동안 싸늘하게 거리를 두어 왔었기 때문에 그의 입술의 감촉만으로도 그녀의 온몸은 햇빛을 받은 꽃처럼 활짝 피어났다. 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그를 끌어 당겼다. 그의 열정과 그녀 자신의 격렬한 열망이 맞부딪치는 순간이었다.

"아버지, 아직도아니, 아버지! 임신 초기엔 조심하셔야 한다는 걸 모르세요?" 폴이 갑자기 뛰어 들어왔다가 래프와 브리나가 깜짝 놀라 쳐다보자 얼굴을 붉혔다. "그래야 하는데." 그는 겸연쩍은 듯 중얼거렸다. 그는 구겨진 파자마 위에 가운을 걸치고 있었고 검은머리는 헝클어진 채였다. "어디선가 책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그는 어색하게 덧붙였다.

래프는 목이 졸린 듯한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켜 아들을 노려보았다. "난 단지 키스하는 것뿐야. 딴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구." 그는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케이트와 네가 노크도 없이 방안으로 밀어닥치는 바람에 키스할 틈이 있었어야지!"

폴은 어색한 듯 머뭇거렸다. "난 노크를 했었어요. 그런데."

"우린 듣지 못했어." 래프는 피곤한 듯 말했다. "우린 신혼중이니까, ."

"알겠어요, 죄송해요." 폴은 휴 하고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빨리 내려들 오시지 않으면 케이트가 식구들의 선물을 모조리 풀어헤쳐 놓을 거라구요!" 폴이 계단을 내려가자 브리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딴 때는 어른 같다가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다시 어린애가 되나봐요."

"어린애니까 그렇지 뭐!" 래프는 이불을 걷어차고 침대에서 내려가더니 거리낌없이 뚜벅뚜벅 방을 가로질러 방 저쪽 끝에 걸려 있는 짙은 색 가운을 걸쳤다. "케이트가 선물을 모두 열어 본다는 얘긴 농담이 아냐. 언젠가 조시와 내가 내려가 서 케이트가 폴의 선물을 열어 보려는 걸 힘들여 막은 적이 있었지. 벌써 제 것과 나와 조시의 것은 다 열어 본 후였소. 이제 내려가 보는 게 좋겠소. 애들이 서로 싸우기 전에."

 

그녀는 그를 외면하며 말했다. "폴이 아기에 대해 흥미를 갖는 건 좋은 징조라고 생각하요."

"열광적이진 못하고?" 래프는 곤란한 듯이 말했다.

브리나는 그에게 안심시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그애 입장이라면 어떻겠어요, 래프."

"." 그는 유감스러운 듯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 앤 좀 어색해하는 것 같아."

그들이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케이트와 폴은 그들이 지난 주말 내내 장식한 3도 넘는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놓아 둔 선물을 재빨리 집어 들었다. 그 순간만큼은 그들 역시 어린애들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들은 그들이 받은 금시계에 대해서 열광한 것만큼 래프와 브리나가 함께 고른 조그만 선물에 대해서도 기뻐했다. 또한 새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받은 책들에 대해서도 진심을 고마워했다.

브리나의 부모님들은 그들의 새로운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여서 새로 태어날 아이와 마찬가지로 케이트와 폴 역시 그들의 손자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브리나는 부모님들을 도와 케이트와 폴, 그리고 래프에게 줄 선물을 함께 골랐다. 래프 역시 그들이 준 연회색 실크 넥타이를 무척 기뻐하며 받았다.

브리나는 멀찍이 뒤로 물러서서 그녀의 새로운 가족과 자기 부모님과의 관계를 지켜보았다.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매우 잘 어울렸다. 그때 케이트가 선물꾸러미를 그녀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자기 선물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부모님들의 선물은 그녀가 좋아하는 향이 들어있는 목욕 용품 일체가 든 선물 시트였다. 그녀는 그들에게 감사의 미소를 보낸다.

케이트의 선물은 임신과 출산에 관한 책이었다. 그녀는 케이트와 의미심장한 미소를 교환했다. 폴은 자신의 선물에 대해 왠지 수줍어했다. 그의 커다란 선물상자를 끌러보고서야 그녀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의 선물은 임부용 가운이었다.

"케이트가 사는 걸 도와 줬어요." 깜짝 놀라 쳐다보는 아버지를 향해 폴은 황급히 설명했다.

케이트가 생글거리며 그를 놀렸다. "무슨 얘기냐면요, 저한테 들어가서 사오라고 시켰다는 얘기예요."

폴이 여동생을 화난 얼굴로 노려보았다. "원래 내가 책을 사려고 했는데 네가 그걸 사겠다고 고집을 부렸잖아! 그래서."

"난 두 가지 다 너무나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 브리나는 그들의 뺨에 키스했다. 케이트의 눈이 장난기로 반짝였다. 그녀는 오빠를 놀리는 게 재미있는 모양이다.

"이젠 내 차례요." 래프가 조그만 꾸러미를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브리나는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이미 내게 너무나 많은 선물을 하셨어요. 목걸이랑 또."

"그건 결혼선물이오." 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게다가 당신도 내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했잖소."

브리나는 자신이 그에게 선물한 조각이 정말 그의 마음에 들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건 무명작가의 작품이었지만 그들은 그 조각가가 언젠가는 유명해지리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불행히도 그것은 그가 죽은 후가 되겠지만 말이다.

선물상자를 끄르는 그녀의 손가락이 가볍게 떨렸다. 작은 상자 안에 더 작은 상자가 들어 있다. 그 안에 든 상자의 뚜껑을 가볍게 여는 순간 그 속에선 반지가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그녀는 탄성을 질렀다. 상자의 크기를 보고 반지가 아닌가 생각하긴 했지만, 이것은 얇은 금테가 7개의 다이아몬드가 죽 둘러 박혀 있는 영원의 반지였다. 그녀는 뭔가 묻는 듯한 표정으로 래프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너무 예뻐요, 아빠!" 케이트가 외쳤다.

그것은 정말 예뻤다. 게다가 바로 어제 래프가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던 결혼반지와 썩 잘 어울렸다.

브리나는 아직도 그 선물의 의미를 확실히 알 수 가 없어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말 아름답군요, 래프. 고마워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든다니 나도 기쁘오. , 이제 우리 모두 옷을 갈아입고 아침식사를 합시다. 그리고 교회에 가야지."

시간은 참으로 빨리 지나갔다. 브리나는 오전에는 아침식사 후 교회에 다녀왔고, 지금은 칠면조요리로 늦은 점심을 먹은 후 벽난로 앞에 앉아 낮잠을 즐기고 있는 중이다. 래프와 아이들은 자신들이 저녁을 준비하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래프의 부모님들이 이 결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직도 잘 알지 못했다. 특히 혼전 임신이 된 경우니 더욱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더없이 좋은 분들이었다. 그날은 한마디로 완벽한 날이었다. 단 한 가지 흠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그들이 저녁식사를 끝내고 식탁을 치우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케이트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커트 아저씨가 오늘은 오시지 않았잖아!"

순간 얼음 같은 분노가 래프의 눈을 스쳤으나 그는 얼른 표정을 바꾸고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일이 있으시단다."

그러나 케이트는 그 대답에 만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저씨는 항상 크리스마스를 우리와 함께 보냈잖아요?"

"20년 후까지도 항상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니?" 래프가 되물었다.

"하지만."

"케이트, 우리만이 커트 아저씨의 친구는 아니란다." 래프는 단호히 말했다. 그의 어조는 더 이상의 반론을 용납치 않을 듯했다.

그 얘기는 그것으로 끝났다. 케이트는 뾰로통했고 래프는 단호했다. 어떻게 된 건지 브리나는 전혀 감을 잡을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두 친구 사이에 마찰을 가져온 셈이고, 이제 커트는 래프의 집에서 환영받을 수 없는 존재가 돼버린 것이다.

그녀는 뭐가 어찌된 건지도 모르는 채 죄책감을 느꼈다. 커트에게 아기 얘기를 했다고 해서 래프가 그토록 화가 났을 리는 없을 듯했다. 결혼식 피로연에서 커트와 춤을 춘 것 때문일 리는 더욱 만무하다. 그녀는 그 이전에도 여러 파티에서 커트와 함께 수십 번도 넘게 춤을 추었고 래프는 한 번도 그것에 반대한 적이 없었으니까. 어쨌거나 뭔가 오해가 생긴 것 같고, 그녀로서는 그 오해가 하루속히 풀리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무튼 그 사건은 그날의 나머지 시간들을 망쳐 놓았다. 게다가 그녀는 케이트가 아빠의 재혼과 커트가 오지 않은 것을 연결시키고 있는 게 아닌가, 따라서 자신에 대해서 화가 난 게 아닌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케이트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지만 브리나는 여하 간에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밤이 깊자 래프의 부모님들이 일어섰다.

"최고로 즐거운 크리스마스였어." 래프의 어머니가 브리나의 뺨에 키스했다. 그녀는 키가 크고 아들만큼이나 태도가 당당했으며 얘기할 땐 언제나 따뜻한 푸른 눈이 미소를 띠었다.

래프는 회색 눈과 큰 키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직도 핸섬했으며 래프보다 훨씬 원숙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다, 아가야." 그도 브리나에게 입맞추었다.

마이클 갤러거는 실업계에서 은퇴한 지금까지도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브리나는 그와 래프가 악수하는 것을 바라보며 한때 그들 부자가 얼마나 막강한 파트너로서 실업계에 군림했을지 상상해 봤다.

래프는 오늘도 핸섬해 보였다. 회색 셔츠와 딱 맞는 검은 바지의 간편한 차림이었다. 그녀가 결혼선물로 그에게 준 시계의 금줄이 그의 왼쪽 팔목에서 아름답게 반짝인다.

어젯밤엔 너무 지친 나머지 잠잘 채비에 전혀 신경쓸 여유도 없이 잠자리에 들었지만 오늘밤엔 피곤하긴 해도 가운을 집어 들고 욕실로 향했다.

오늘 래프와 그녀 사이의 팽팽한 긴장 상태를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주로 래프가 애쓴 덕분이었다. 래프는 교묘한 방법으로 그녀를 세심하게 보살폈다. 그것이 과연 오로지 뱃속의 아이만을 위한 보살핌이었을까? 아니면 나의 건강을 위한 것이었을까? 대답은 너무도 명백하고 괴로운 것이었다.

그녀는 침대 위에 돌아누워 잠든 척하고 있었다. 그가 욕실에서 나와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는 어젯밤처럼 그녀쪽으로 나란히 누워 손으로 그녀의 배를 쓰다듬었다. "당신 불감증인가?" 그는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불감증이냐고? 천만에, 그녀의 온몸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점점 떨림이 심해지며 숨이 가빠왔다. 머리는 진정하라고 명령하지만 몸은 전혀 말을 듣지 않는다. 이토록 그를 원하고 있는데 어떻게 진정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날 원하나, 브리나?"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괴로운 열망을 두드려댔다.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은 자존심을 완전히 포기하고 그가 자선인 양 베푸는 사랑의 행위를 받아들이는 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는 할 수 없다. "전부인의 임신 때 봐서 잘 알고 있는 것 같군요. 여자들이 임신했을 때 감성이 고도로 민감해진다는 걸 말예요." 브리나는 심술궂게 대답하며 계속 돌아누워 있었다. "그게 아니라 욕정이 강해지지." 그는 무뚝뚝하게 수정했다. "브리나, 내가 물은 말에 대답해."

브리나는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이를 악물고 눈을 감았다. 그의 품안으로 뛰어들어 제발 그렇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난 결코 그럴 기분이 아니에요, 래프." 그녀는 필사적으로 거짓말을 했다. 고통이 극에 달했다. "당신이 커트에게 오늘 이곳에 오지 말라고 했나요?" 그녀는 화제를 갑자기 바꿔버렸다. 커트 얘기를 함으로써 이 격렬한 고통이 잊혀지기를 바라면서.

그녀의 배를 어루만지던 래프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그러나 더욱 단호하게 다시 쓰다듬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그 자신이 결정한 일이야." 래프는 거칠게 대꾸했다.

"어제 일 때문인가요?"

"다른 일도 있었지." 그는 마지못해 내뱉듯 말했다.

"다른 무슨 일이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내며 열심히 캐물었다.

"지금은 그런 얘기하고 싶지 않아." 래프는 그녀에게서 손을 때고 반듯이 등을 대고 누웠다.

"내겐 중요한 일이에요, 래프." 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

"나도 알고 있어." 그는 비꼬듯이 말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빛이 위험스럽게 번쩍인다.

"당신과 커트가 싸운 것이 내탓이란 걸 알면 케이트와 폴이 날 미워할 거예요." 그녀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물론 애들의 의견이 당신에겐 무척 중요할 테지."

 

"그래요." 브리나는 열심히 변명했다. "그리고 난 내가 당신과 커트 사이를 갈라놓는 원인이 되고 싶진 않아요. 그럴 이유가 없어요." "이유가 없다고?" 래프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 모습이 어둠 속에서 거대하게 확대돼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긴장된 온몸에서 분노가 끓어 넘치고 있었다. 그날 낮의 정중함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당신은 우리의 결혼식에서 커트와의 관계를 여봐란 듯이 자랑해 놓고는 나보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받아들이란 건가?" 그는 무서운 어조로 말했다.

이명현상이 느껴지며 정신이 아찔해진다. 커트와 관계? 래프는 지금 농담을 하는 걸까!

그러나 그가 난폭하게 침대 머리맡의 램프를 켰을 때 그의 얼굴에 나타난 차가운 분노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지금 농담을 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난 그가 그런 생각을 하도록 할 만한 일을 한 적이 전혀 없잖은가> "래프, 이미 당신과 사랑을 나눴으면서 어떻게 커트와의 관계 어쩌구 하는 말이 있을 수 있겠어요?"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 따져물었다.

래프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애인에게 불성실한 것이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은 아니지."

"하지만 사실이 아니에요."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주장했다.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나요? 나는."

"생각만 한 게 아니오, 브리나. 증거도 있소."

지금 자신이 악몽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무슨 증거를요?" 그녀는 당황하여 반문했다.

"당신들 두 사람이 함께 점심식사를 하는 걸 본 사람이 있소. 아늑하게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것도."

"그 얘기는 당신에게 이미 했었어요."

"전부 말하진 않았소." 그는 화난 어조로 말했다.

"거의 전부 말했어요."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브리나는 자신의 사업 얘기를 래프에겐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그랬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따돌리는 느낌을 주고 있다는 것을 그도 느껴보게 하려는 생각에서 자신 역시 일부러 사업 얘기를 하지 않았던 것이 이토록 끔찍한 오해를 부른 것이다. "그건 사업상 만난 거예요."

"커트와의 계약은 몇 주 전에 끝났잖소!" 래프는 싸늘하게 못 박았다.

"난 내 모델들 중 몇 명을 또다시 커트가 써주었으면 하던 중이었어요." 브리나는 열을 올리며 설명했다.

"물론 그랬겠지." 래프는 비꼬듯이 받아넘겼다.

"정말 그랬어요! 한데 당신 커트와 이 얘길 했었나요?" 그녀는 화가 나서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는 당신들 두 사람의 관계를 부정하더군."

"그런데 어째서 당신은."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야!" 그는 가차 없이 말을 가로챘다. "어쨌든 지금 당신은 나와 결혼했고, 내 아이를 가졌으니 더 이상 모른 척할 순 없어."

"만약 커트와 내가 당신 몰래 관계를 가졌다면 이 앤 커트의 애일 수도 있겠군요?" 그는 말도 안 돼는 공격으로 그녀의 혼란스러움에 빠져 어쩔 줄 모를 지경이었다.

"그건 확실해." 래프는 싸늘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커트는 아이를 가질 수 없거든."

브리나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자신 역시 오랜 세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인 줄로만 믿었었던 사람이 아닌가. 그녀는 비극적인 커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래프에게 있어 그것은 단지 애아버지가 확실히 자신이라는 증거 정도밖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녀에게 결혼을 강요하던 래프의 위협을 설명해 준다. 아마도 래프는 임신 사실을 커트가 알게 되면 기꺼이 나와 결혼하려 들리라 생각했었던 것이리라. 또한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래프가 커트에게 아이 얘기를 하지 않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인 듯했다.

이제서야 그가 스코틀랜드에서 했던 말이 이해가 간다. 그때 그는 그녀가 어떤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든 자신과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래프는 커트가 그녀의 임신을 환영하며 받아들이게 될 위험을 염두에 두었던 듯했다.

맙소사! 그런 의심 대문에 지난 두 달 동안 내게 그토록 차갑게 대하고 커트의 파티에서 로즈메리와 가까운 척 함으로써 날 괴롭혔단 말인가? 그렇다면 나에게 싫증난 것이 아니라 내가 불성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란 말인가?

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브리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 막 옷을 주워입는 참이었다. "어딜 가세요?" 그녀는 실망하여 물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얘기하지 않은 채 지금 이대로 그를 보낼 순 없다.

"나갈 거요." 그는 거칠게 대답했다. "하지만." "걱정마시오, 브리나. 아침이 되기 전에 돌아오겠소." 그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내일 밤에는 당신이 당신 침실로 옮겨갈 수 있도록 그럴 듯한 구실거리를 생각해 보겠소."

"래프, 우리 얘기 좀 해요."

"너무 늦었소!" 그는 셔츠 자락을 바지 속으로 밀어놓으며 거칠게 말했다. "커트는 다음 애인으로 결정한 시기가 너무 늦었단 얘기요!" "하지만 그게 아녜요." "그도 나만큼이나 경험이 많던가, 브리나?" 그는 냉랭하게 물었다. "나만큼 노력하던가? 물론 그랬을 거야." 그는 역겹다는 듯이 내뱉었다. "하지만 어떤 남자도, 내가 한때 친구라고 불렀던 사람일지라도 내 애를 양육하도록 내버려두진 않겠어!" "래프!" 그가 문 쪽으로 나가려 하자 브리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래프, 사실이 아니에요!"그녀는 애원했다. "하나도 사실이 아녜요!"

"당신들 둘이 있는 걸 봤다고 그러더라니까." 그는 경멸의 눈초리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게 아니라면 여자가 침대에서 내게 대한 태도가 변했을 때 그걸 어떻게 생각해야겠소? 제기랄! 다른 남자를 나보다 더 좋아하는 여자를 아내로 맞아야 하다니!" 그는 자조하듯이 말했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변했다면 그건, 그건 단지."

"단지?" 그는 거칠게 재촉했다. "단지 당신이 변했기 때문이에요." 브리나는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맞아요, 당신은 변했어요!" 그녀는 그의 비웃는 듯한 얼굴을 향해 쏘아붙였다. "난 당신이 내게 싫증이 났다고 생각했어요. ."

"당신은 우리 관계가 끝날 때를 대비해서 미리 애인들을 줄줄이 대기 시켜놨군, 그래." 그는 역겹다는 듯 투덜거렸다. "뭐가 문제지, 브리나? 이젠 사랑놀음의 즐거움을 알았으니 잠시도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건가." 그래서 우리 관계가 끝나자마나 다른 남자가 필요해진 거야?"

"그만! 그렇게 멋대로 말하지 말아요!" 그녀는 화가나 소리쳤다. "하나도 사실이 아녜요! 커트는 과거에도 내 연인이 아니었고, 앞으로도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과거 일은 나도 어쩔 수 없지만, 미래에 대해선 당신 말이 옳아." 래프는 심술궂게 말했다. "앞으론 나를 제외한 다른 어떤 남자도 결코 당신 몸을 알지 못할 거요. 이제 당신이 얼마나 사랑에 약한지 난 알고 있소. 멀지 않아 당신은 내게 당신을 사랑해 달라고 엎드려 빌게 될 거요!"

그는 문을 세차게, 그러나 그 소리 때문이 다른 식구들이 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닫고 나가 버렸다. 브리나는 한동안 그 문을 멍하니 노려보았다.

그는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믿고 있는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 이런 식으로 굴 리가 만무하다.

커트와 내가? 어떻게 그런 어처구니없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나와 커트는 친구 사이인데. 물론 그는 늘 내게 관심을 표명하긴 했지만, 그건 그가 다른 여자들에게 항상 그러는 것도 그 이상은 결코 아니었다.

증거가 있다고 래프는 말했지만, 커트와 만나서 사업 얘기를 하면서 식사한 횟수조차 몇 번 안되지 않는가. 그러나 래프는 그렇게 믿고 있고, 내가 그의 마음을 바꾼다는 건 불가능할 듯하다.

아기를 가졌다는 걸 알고 내게 결혼을 강요한 후 그의 냉담한 무관심이 증오로 변했음에 틀림없다! 이제서야 그는 그 증오와 그 증오의 이유를 드러낸 것이다.

 

7

휴가기간이 끝나서 다시 일터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 브리나로서는 여간 기쁘지 않았다. 그것은 즉 래프와 함께 있는 압박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약속대로 래프는 브리나를 그녀의 침실로 보내 주었다. 하지만 그는 이 부부간의 돌연한 결별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고 그저 오만하게 입을 다문 채였다.

그녀의 부모님들은 스코틀랜드로 돌아갔고 폴은 자기 아파트로 돌아갔다. 브리나는 케이트가 브렌다의 아파트로 아사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것이 권할만한 일인지 어쩐지 불안하기만 했다. 그러나 래프는 그의 딸 문제나 그외의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그녀와 의논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그들은 결혼식 후 10일 동안을 완전히 타인들처럼 지냈다. 이젠 저녁식사 후의 의례적인 대화마저 하지 않는다. 저녁 식탁에서의 긴장이 너무나 팽팽해서 견디기 힘든 나머지 이틀 동안 브리나는 자기 침실로 식사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을 정도다. 그녀가 보기에 래프는 그녀가 안보인다는 사실조차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질리, 스티븐스 씨에게 전화 좀 연결해 줘!" 첫날 사무실로 들어서면서 곧바로 그녀는 질리에게 커트와의 전화연결을 부탁했다.

브리나는 전화를 기다리면서 책상 위에 쌓인 우편물들을 건성으로 넘겼다. 그녀는 래프와의 그날 밤 이후 그의 어리석은 의심에 대해 커트와 상의하고 싶어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집에서 커트에게 전화를 한다면 래프가 오해하기에 딱 알맞다. 그들 사이의 파탄은 이미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전화 벨 수리가 울리자 그녀는 수화기를 잡아채듯이 집어 들었다. "커트!" 그녀는 숨가쁘게 외쳤다.

"브리나?" 그녀의 목소리에 커트는 놀란 듯했다. "래프가 그녀에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똑같은 누명을 씌웠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일이다. "커트, 할 얘기가 있어요." 그녀는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다.

"맙소사! 래프가 그 터무니없는 소리로 당신을 괴롭힌 모양이군. 그렇지?" 그는 지겹다는 듯이 말했다.

"난 그게 환상이란 걸 그에게 일깨워 줄 수가 없었어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 날 동안의 긴장이 풀리면서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브리나, 래프가래프가 당신을 때리진 않았겠지?" 커트는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물론 그런 건 아녜요." 그녀는 재빨리 부인했다. 래프는 결코 여자에게 폭력을 휘두를 사람은 아니다. "난 그저 얘기할 사람이 필요해서 그래요."

"다행이오." 커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좋아요, 브리나. 점심을 함께하는 게 어떻소?"

그들은 점심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긴 크리스마스와 새해 휴가 때문에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그녀는 정신없이 일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이 너무도 좋았다. 래프가 커트와의 관계를 추궁하던 그 밤 이후로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걷잡을 수 없이 곤두박질치는 듯한 느낌으로 괴로워했었다. 아기가 태어나는 그날까지 일을 계속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행운인가!

브리나가 자리에 앉자 커트는 그녀를 살피듯이 바라보았다. "아이를 가진 여인들은 표정이 밝게 빛나던데, 당신은 전혀 그렇질 않군, 브리나." 둘 다 자리를 잡고 앉은 뒤 커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녀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불면에 시달렸고 식욕도 전혀 없었다. 수면 부족과 영양결핍으로 그녀의 머리칼은 윤기 없이 부석부석했고 눈가에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체중은 줄어들었음에도 아기는 점점 커져 가냘픈 몸에 배만이 강조돼 누구의 눈에도 임신은 확연하게 드러나 보였다. 헐렁한 옷을 입었음에도 전혀 소용이 없다.

"래프 때문이에요. 그는 우리 두 사람이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한숨지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테이블 위에서 신경질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며 웨이터가 마실 것을 물어 오자 차갑게 거절했다.

"래프가 당신에게 언제 그런 얘길 했소?" 커트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싹 가시고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식구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나서 잠자리에 들었을 때요. 그는."

"그래도 첫날밤은 무사히 보냈으니 다행이로군!" 그녀는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아녜요, 우린 그렇지가 않아요."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우린 그러지 않기로 약속했어요. 아시다시피."

"무슨 약속이 첫날밤 신랑신부의 사랑을 막을 수가 있단 말이죠?" 커트는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짓는다.

"아버지가 아이에 대한 모든 권리를 원하기 때문이에요."

"그게 래프가 당신과 결혼한 이유인가요?" 커트는 의심스러운 듯이 물었다.

"그게 이유의 전부예요."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커트는 화난 표정으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냥 그와 싸울게 아니라 법에 보호를 요청하는 게 좋을 것 같군."

"그래서 래프는 내가 안전하게 자기 아내가 될 때까지 그런 의심에 대해서는 전혀 비추지도 않고 결혼만을 서두른 것 같아요."

"바보 같으니라구!" 커트는 분개하며 소리쳤다. "도대체 왜 그는 당신들의 관계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가는 거요?"

 

브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증거가 있다고 말했어요. 우리가 함께 저녁 식사하는 걸 본 사람이 있다구요."

"일 때문에 만난 거잖소?" 그는 즉각 받아 말했다.

"나도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믿지 않았겠지." 커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결혼식장에서 내가 그런 의심을 얘기했을 때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난 그가 그런 얘길 가지고 당신까지 괴롭힐 줄은 몰랐소. 그럴 줄 알았더라면 환영받지 못하더라도 그 집으로 갈 걸 그랬군."

브리나는 비참한 표정으로 코트를 바라보았다. "그랬다면 그가 당신을 그야말로 밖으로 내던져 버렸을 거예요. 하지만 케이트는 당신을 찾더군요."

"그 앤 만났었소."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났다구요?" 브리나는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사흘전 케이트는 집에 와서 같이 식사를 했었는데, 그때도 전혀 그런 얘기가 없었다.

커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제 내게 전화했길래 함께 저녁을 먹었소. 그렇게 걱정스런 표정 짓지 말아요, 브리나." 그는 천천히 말했다. "래프는 더 이상 날 만나길 원치 않겠지만 난 애들을 만날 작정이니까. 그 애들이 내 아이들처럼 느껴지는 동안은 말이오."

그녀는 가장 친한 친구의 자식들에 대해 느끼는 커트의 감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애들도 당신을 무척 좋아해요." 커트는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케이트는 친구와 함께 지내는 게 즐거운 모양이더군."

"래프는 찬성하지 않아요." 브리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단지 우리가 침실을 따로 쓰는 걸 케이트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나가는 걸 허락한 거예요."

"어리석은 사람 같으니라구!" 커트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도대체 그에게 중요한 게 뭐래요?"

"나도 몰라요." 브리나는 부르르 떨며 대답했다. "우리 관계에 대한 의심 때문에 이런 일들이 생겨난 것 같아요."

"내가 만약 래프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가 질투하는 거라고 말하겠지만." 커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말도 안 돼요!" 브리나는 날카롭게 웃었다. "아기가 아니었다면 난 벌써 그의 인생 밖으로 밀려나 지금쯤 잊혀졌을 거예요!"

"." 커트는 중얼거렸다. "래프가 조시와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산 것도 케이트와 폴 때문이었지."

"그래요." 브리나는 멍하니 대답했다. "지금도 그는 그때와 똑같이 사랑이 없는 결혼생활을 하려고 하고 있어요."

"그가 당신이 남자친구를 만나도록 내버려두진 않을 거요." 커트는 비웃듯이 말했다.

브리나는 그를 살피듯이 바라보았다. "당신은 래프와 조시와의 관계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군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들은 각자 새 연인을 가졌었나요?"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케이트와 폴 외엔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 난 래프가 또다시 그런 반쪽 짜리 결혼으로 문제를 해결하리라 곤 믿을 수가 없어."

"문제는 뭘 해결하자는 게 아녜요." 그녀는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그는 아이를 원하고, 나 역시 아이를 원해요!"

"당신은 그를 사랑하고 있어. 아닌가? 그렇지?" 그는 자조적인 어조로 말했다. "그렇잖으면 왜 그와 결혼했겠어?" 그는 그녀의 손을 편안하게 감싸쥐었다.

브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믿어 줘요, 커트. 만약 다른 길이 있었다면 난 절대로 그의 아내가 되진 않았을 거예요. 내가 결혼에 찬성하지 않았다면 그는 곧 내게서 아이를 빼앗아가고 말았을 거예요."

"당신은."

"안녕들 하신가?" 부드러운, 그러나 억누르고 있는 듯한 음성을 듣는 순간 브리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그곳엔 래프가 싸늘하고 무서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내가 이리로 올 수 있으면 오겠다고 했었지?" 그는 가볍게 덧붙였다.

그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와 몰래 함께 식사한다는 걸 남들이 알게 될 것을 꺼리고 있는 것이다.

맙소사! 그녀는 한숨지었다. 커트와 나눈 얘길 래프가 어디서부터 듣고 있었을까? 그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는 데에서부터 듣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커트가 그녀에게 그녀는 래프를 사랑하고 있다고 했던 말은 아마도 듣지 못한 듯했다.

커트는 브리나의 손을 놓으며 의자에 편안히 기댔다. "함께 앉지 그러나?" 그는 정중하게 말했다.

"불행히도 사업관계로 동행이 있네." 래프가 험악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것만 아니라면 당신네들과 합석해서 이 재미있는 대화를 듣는 최고의 즐거움을 누리겠네만!"

브리나는 숨이 막힐 듯했다. 래프는 그녀가 그와의 결혼을 후회한다고 말한 부분에서부터 듣고 있었던 것이다.

"진정하게. 추태야, 래프."

"난 지금 굉장히 진정하고 있는 상태야." 래프는 커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내가 지금 추태를 부릴 생각이라면 레스토랑에 들어와 둘이 함께 있는 게 눈에 띈 순간 그 즉시 자네 얼굴에 한방 먹이고 아내를 데려갔을 거야!"

 

커트는 비웃듯이 입술을 실룩거렸다. "그건 내 성격에 맞는 행동인걸!"

래프는 커트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브리나가 가진 아이가 내 아이란 걸 우린 모두 알고 있어." 그는 목쉰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난 브리나에게 다시 한번 자네를 만날 경우엔 어떤 일이 일어나리란 걸 경고한 바 있어!"

브리나는 이 은근한 협박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점심식사를 함께 하는 것뿐이에요, 래프."

"내 최고의 벗과 아내의 열흘만의 점심식사라!" 그는 조롱하듯 말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남들을 의식해서인지 표정만은 계속 유쾌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대부분 신혼의 침대는 식을 틈이 없다고들 말하지!"

"내가 들은 바로는 자네의 경우는 미지근해지지도 않았다 하더군!" 커트가 맞받아 말했다. 그도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면서 그는 잠시 그녀를 향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실례, 브리나. 그러나."

"그거야 문제가 아니지." 래프는 이를 갈며 말했다. "오늘밤부터 시작이야!"

"래프, 그건 안 돼요!" 그녀는 멍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분노 때문이라면 그것은 동정 때문에 그러는 것보다 더 상처를 줄 것이다. "안 된다구?" 래프가 그녀를 향해 쏘아붙였다. "되는지 안되는진 기다려 보면 알 거 아냐!"

브리나는 그가 성큼성큼 레스토랑을 가로질러 함께 왔던 사람들에게로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세 사람은 모르는 사람들이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스튜어트 힐리어였다. 방금전 래프가 그녀로부터 홱 돌아서는 것을 그들이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녀는 걱정스러웠다.

"믿을 수 없군." 커트는 어리둥절한 듯 말했다. "그가 이렇게 구는 건 한번도 본 적이 없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9일 전 그날 밤보다도 그 이후의 어떤 날보다도 사태는 더 나빠진 듯했다. 그는 완전히 자제력을 잃고 있었다.

"당신은 그가 폭력을 쓰진 않는다고 그랬지만." 커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그래요. 지금까진 그랬어요." 그녀는 문득 앞으로는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커트. 난 어떡하면 좋아요?" 브리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돌아가지 말아요." 커트가 그녀의 손을 가볍게 두드린다. "내 아파트에 침실이 하나 더 있소. 우린."

"난 당신 아파트에 갈 수 없어요." 브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래프가 알면 우리 둘 모두 죽여 버릴 거예요!"

커트는 침울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거요!"

그녀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는 날 다치게 하진 않을 거예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

"집에 돌아올 때쯤엔 어느 정도 화가 가라앉을 거예요." 브리나는 불안을 억누르며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커트는 아직도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틀림없이 안전하리라고 확신한다면야."

"물론이에요. 틀림없이 그럴 거예요." 그녀는 가볍게 잘라 말했다. 래프는 레스토랑 저쪽에서 그녀와 커트를 무시한 채 자기 동행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래프가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샅샅이 살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난 아무래도 점심식사는, 전혀 생각이 없어서." "당신과 아기는 먹어야 해." 커트는 완강하게 주장했다. "그가 당신을 무시하듯 당신도 그를 무시해요." 그는 주문을 하려고 웨이터를 손짓해 불렀다.

붐비는 방 저쪽으로부터 진동돼 전해져오는 비난의 느낌을 무시하기란 힘들었다. 그러나 어쨌든 커트의 적극적인 권유에 못 이겨 브리나는 조금이나마 음식을 입에 댈 수 있었다.

잠시 후 그녀와 커트가 일어나 레스토랑을 떠날 때까지도 그 다섯 남자는 아직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떠나면서 커트가 래프 쪽으로 간단히 목례를 보내는 걸 보았지만, 그녀는 그냥 고개를 돌린 채 나와 버렸다.

밖으로 나온 브리나는 크게 한번 진저리를 쳤다. "미안해요. 이런 우스운 일에 말려들게 해서." 그녀는 커트에게 말했다. "래프가 제정신을 차릴 수 있을지 의문이에요."

"." 그는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아무래도 내 생각엔 질투 때문인 것 같은데그는."

"그건 아녜요." 그녀는 확고히 단언했다. "질투하는 남자는 여자를 증오에 가득 찬 눈초리로 바라보지 않아요!"

"그럴지도 모르지." 수긍하듯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하지만 그가 당신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왜 우리가 만난 것이 사업 때문이란 걸 믿어주지 않는 거요?" 그는 차근히 따져물었다.

"그건 내가 그때그때 그런 얘기를 그에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난 내 사업 얘기를 한동안 그와 하지 않았어요. 당신도 알다시피 그는 전혀 자기사업 얘기를 않잖아요? 그래서 나도 내 얘길 안하면 그가 그렇게 함으로써 얼마나 소외감을 주는지 깨닫게 되리라 생각했어요. 그렇게 되면 웬만큼은 내게 얘길 하게 되리라고 생각했구요."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설명했다.

 

"맙소사!" 커트는 눈을 감았다. "내 충고가 화근이었군!" 그는 잔뜩 미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군요." 그녀는 씁쓸하게 인정했다. 래프와 관계를 맺고 있는 동안 그녀는 커트와 좋은 친구로 지내게 되었고 그에게 종종 비밀을 털어놓곤 했었다. 그는 그녀보다 래프를 훨씬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론 내 의견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아야겠군." 그는 신음하듯 토해냈다.

그녀는 안심시키듯이 그의 팔을 잡았다. "그건 건전한 충고였어요. 유감스럽게 됐지만 말예요."

커트는 자책하듯 얼굴 표정이 일그러졌다. "얘기할 상대가 필요하면 꼭 전화해요."

브리나는 곧 다시 그에게 전화하게 될 것임을 예측할 수 있었다.

래프는 저녁식사 때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늦는다는 전화도 없었다. 브리나는 그가 어디서 누구와 함께 있는지 궁금해 하면서도 속만 태우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낮에 레스토랑에서 자신과 커트를 바라보던 그가 얼마나 화가 나 있었는지를 돌이켜봤다. 그의 회색 눈에서 튀어오르던 불꽃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러자 퍼뜩 그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기꺼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받아들일 로즈메리 채터와!

결혼식 때 자신을 바라보던 로즈메리의 표정은 악의에 가득 차 있었다. 그녀가 지금 얼마나 흡족해하고 있을까!

브리나는 저녁 내내 분노와 절망 사이를 오가면서 아래층 거실에서 래프가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11시가 넘도록 그는 돌아오지 않았고, 마침내 그녀는 잠자리에 들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이층 침실로 올라가 몇 분 지나지 않아서 현관문 소리가 들렸다. 탁 하고 닫히는 소리, 그리고 계단을 뛰어 오르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는 갑자기 방문이 활짝 열렸다. 브리나는 막 단추를 끄르려다가 옷을 다시 여미며 모욕감과 불안에 가득 찬 눈초리로 문 쪽을 돌아보았다.

래프가 천천히 문을 닫았다. 순간 그의 얼굴은 암흑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무섭게 번쩍이는 눈만은 또렷이 보였다. ", 이거 괜찮은데. 무대에서 쇼가 시작되려는 순간에 도착했군, 그래." 그는 경멸에 가득 찬 어조로 내뱉으며 기대서서 팔짱을 끼고는 그녀를 쏘아보았다.

브리나는 옷을 다시 한번 추스렸다. "쇼를 보고 싶으면 스트립쇼를 하는 클럽에나 가보시죠!" 그녀는 그를 쏘아보았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여자가 사람이 가득 찬 방에서 옷을 벗어 던지는 건 흥미 없어! 한데 당신은 어디서 오후를 보냈소?" 그는 갑자기 밝은 어조로 물었다.

브리나는 갑작스런 질문에 얼떨떨했다. "내 사무실에서요." 그녀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도대체 무슨 권리로 내게 그런 걸 묻는단 말인가? 그는 나의 저녁 시간을 몽땅 망쳐 버리지 않았는가!

"사무실엔 여러 번 전화했지만 없었소." 그는 의심스러운 듯 말했다.

브리나는 도전하듯 머리를 돌려 버렸다.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번번이 그랬어요." 그녀는 그가 여러 번 전화했었던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질리에게 너무 바빠서 지금은 받을 수 없다고 말하라고 지시했다. 질리는 이상한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브리나는 그 이상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한마디만 더하면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번 울음보가 터지면 도저히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물론 내 전화만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겠지." 래프가 씹어뱉듯이 말하며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눈빛이 번쩍였다. "당신 연인에게 우리 결혼이 실패라는 걸 알리는 걸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겠지? 그렇겠지?"

"그런 게 아녜요." 그녀는 숨 가쁘게 항의했다. "내가 커트를 만난 건." "사업 때문인가?"

그녀의 뺨이 붉게 물든다. "아뇨, 이번엔 아니에요." 그의 눈속에서 파란 불길이 이는 것을 바라보면서 재빨리 덧붙였다. "하지만 옛날엔 사업 때문이었어요. 정말이에요." 그녀는 열심히 주장했다. "오늘은난 얘기할 사람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러니 당신의 연인보다 더 좋은 상대가 어디 있었겠소!" 그는 비웃듯 쏘아붙였다. "안됐군, 여긴 그도 없고 당신 비서도 없어서 당신을 막아 줄 수가 없으니 말이오!"

브리나는 그가 몸으로 덮쳐 오는 것을 두려워하진 않았다. 그녀는 그가 그런 식으로 여자를 다치게 하지는 못할 사람이란 걸 알고 있다. 단지 자신이 그의 육체에 반응하게 될까 봐, 그리고 그가 그것을 눈치챌까 봐 그것이 두려울 뿐이었다.

그녀는 가운을 집어 들었다. "대신 욕실 문이 그렇게 말해 줄 거예요!" 브리나는 얼른 욕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렸다. 그리고 래프의 침실 쪽으로 나 있는 문도 서둘러 잠가 버렸다. 그리고 불안에 떨려 벽에 기대 서 있었다. 그녀는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어떤 문이든 한번 발로 차기만 하면 자물쇠가 망가지리란 걸 알고 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문 쪽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아직도 우리에겐 많고 많은 밤들이 남아 있소, 브리나." 갑자기 닫힌 문 앞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마치 형을 언도하는 것처럼 들렸다!

 

8

요 몇 주 동안 래프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녀를 피하는 것 같았다. 아침에는 언제나 그녀가 일어나기도 전에 출근했고 저녁식사는 거의 밖에서 했으며 집에서 할 때는 서재로 가져오도록 했다. 그동안 실제로 함께 보낸 시간은 그녀가 산부인과를 찾아갔을 때뿐이었다.

래프는 자신이 그녀의 임신과 관계있다는 것을 너무도 눈에 보이게 드러내고자 했다. 그는 의사에게 그녀보다 더 많은 질문을 했고, 그 중 몇 가지는 브리나로서는 낯을 붉힐 만한 것이었다.

임신 16주째 그녀가 초음파검사를 한다고 했을 때 그는 함께 병원에 따라가겠노라고 했다. 그곳에서 자궁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생명-태아는 이미 모든 세세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형성되어져 있었다-을 보았을 때 그들은 함께 황홀해했다.

그런 가슴 뭉클한 경험을 함께 한 후에는 그들 간의 적대감이란 게 결국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난 아까 당신의 얼굴을 봤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래프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당신은 아기를 무척 원하고 있었나 보군. 안 그렇소?"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행복하게 빛나던 표정이 사라지곤 날카롭게 그를 돌아보았다. "물론이죠!"

"너무 그렇게 경계할 필요는 없소."그는 한숨지었다. "난 그렇게 악당은 아니잖소."

브리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라보며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 같은 입덧은 전혀 없었고 또 건강도 매우 좋았지만, 대단히 심약해져서 걸핏하면 눈물을 흘리곤 했다.

"당신이 우리들의 아길 보면서 얼굴이 자랑스럽게 빛나는 걸 봤소." 래프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기적이에요." 브리나는 그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을 듬뿍 담아 말했다. 그들이 좀 더 가까웠다면 그녀는 어렸을 때 받았던 수술과 그 뒤의 공허했던 나날들에 대해 얘기할 수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그는 그녀가 자기 몸속에 있는 작은 생명을 보고 느꼈을 경이를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 멀어져 있었다.

"브리나, 우린 너무 늦었을까?"

그녀는 그가 길 쪽으로 시선을 돌려버리기 직전 그의 눈 속에 떠오른 후회의 빛을 놓치지 않았다. "무슨 뜻이죠?" 그녀는 의심쩍은 듯이 물었다.

"우린 결혼했고, 그리고 24주 후면 우리들의 아기가 태어날 거요, 우리 이제 이 결혼을 올바르게 이끌어 보지 않겠소?"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이 말이야말로 내가 가장 원했던 바가 아닌가. 하지만 내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고 있다고 그가 믿고 있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커트는요?" 그녀는 따지듯이 물었다.

"당신과 커트에 대한 내 감정은 변할 수가 없소. 하지만 당신이 노력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 당신은 그 레스토랑에서 만난 이후론 그를 한번도 안 만났으니까."

그랬었다. 그것이 더 이상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래프가 어떻게 그걸 알았을까? "커트를 만났었나요?" 그녀는 두 남자가 다시 친구가 되었으면 하고 열렬히 바라며 물었다.

"아니." 그는 거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럼 어떻게래프, 설마!"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 왔다. "설마 미행자를 둔 건 아니겠죠?"

래프는 거만한 태도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지 않고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소?"

"내게 물어 볼 수도 있잖아요?" 그녀는 신음했다. 얼굴도 모르는 낯선 사람이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정말 그 사람은 돈을 받을 만하네요. 그토록 지루하고 권태로웠을 일을 해야 했으니 말예요." 그녀는 역겹다는 듯이 덧붙였다. "며칠이고 간에 직장과 집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걸 내내 지켜보고 있었어야 할 테니 그 얼마나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겠어요!"

"브리나." "손대지 말아요!" 브리나는 그가 내미는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내 사무실로 데려다 줘요. 할 일이 있어요."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5시가 넘었소."

"당신이 잘 쓰는 말을 나도 써먹어야겠군요. 난 늦게까지 일하겠어요." 그녀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최근 한동안 그는 늦을 때면 언제나 전화를 해 일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곤 했었다. "당신이 새 애인에게도 말씀해 두시지 그래요! 미행시킬 테니 조심하라고!"

"난 딴 여잔 없어!" 그는 완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미행을 시킨 건 레스토랑에서 봤던 그날부터였소."

"왜죠?" 그녀는 신음을 토해냈다. "왜 날 믿지 못하죠? 왜 당신은."

"브리나, 당신은 휴가가 끝나고 출근하자마자 그에게로 달려갔소." 래프는 거칠게 말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받아 들였겠소?"

그녀는 슬픈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난 당신이 요즘 그런 일을 하는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어요!"

래프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브리나, 난 첫 결혼에서 딴 남자가 있는 아내를 경험했소."

"당신들 둘 다 각자 딴 애인들을 가졌었다고 그랬었잖아요?"

"처음엔 그랬었지." 그는 인정했다. "그러나 난 곧 그런 여자들에게 꾸며대야 하는 거짓말에 넌덜머리가 나버렸소. 그렇지만 조시는 그런 것 같지 않았소.""당신들 둘은 모두 대단히 불행했었군요." 브리나는 그 모든 쓰잘 데 없는 행동들을 생각하며 한숨지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당신과의 사이에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는 걸 원치 않는 거요. 우린 한때 함께 행복했었소. 브리나,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 거요." 그는 달래듯이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말 미행시켰어요. 게다가 집에선 항상 날 피하고 기회를 가지려고도 하지 않았잖아요!"

"난 그동안 늦게까지 일했소. 왜냐하면 집에 일찍 돌아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지." 래프는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우린 다시 시작할 수 있소. 오늘밤부터라도."

 

"당신이 고용한 사람은 어떡하구요?" 그녀는 냉정하게 따져 물었다.

"당장 없애겠소, 브리나." 그는 그녀의 다리 위에 놓여있던 손을 잡았다. "우리 해봅시다!"

그녀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 얼마나 그러고 싶었던가! 그동안의 결혼생활의 쓰라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가까워진다면 자신과 커트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도 그에게 믿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그들의 우정에 금이 가게 했다는 게 그녀로선 매우 고통스러웠다.

"나도 그러고 싶어요."

"그럼 그럽시다!" 그는 확고하게 선언했다.

브리나는 래프를 살피듯이 쳐다보았다. "이후 내가 또 커트를 만나야만 할 땐 어떻게 되나요? 당신도 알다시피 난 그와 사업상 거래가 계속되길 원하고 있어요." 래프의 턱이 굳어졌다. "인내심을 배워야겠지. 당신들간에 사업 외의 다른 일은 없다는 걸 당신이 내게 확신시켜 준다면 당신을 믿겠소." "당신은 이제껏 날 믿지 못했잖아요?" 브리나는 지친 듯이 그에게 상기시켰다. 그녀로선 이런 식의 휴전이 정말 가능할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지난 몇 달 동안 조금씩 믿음이 생겼다고나 할까?"

"난 당신과 함께 잘 순 없어요, 래프." 브리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신이 날 의심하더라도 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어요. 커트는 내게 있어선 유일한 진정한 친구라구요. 그건 사실이에요. 그리고 당신의 나에 대한 불신 때문에 나 역시 당신을 신뢰하지 않게 돼버렸어요!"

그는 고개를 숙였다. "난 당신이 자신의 방을 지키려는 이유를 이해해. 하지만 조만간 우리의 육체적 관계도 회복될 테고, 그 순간을 위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시다. 서로 전혀 모르는 사람들처럼."

"우리의 아기가 그 문제에 대해서 할말이 있을 것 같은데요!"

래프는 그녀에게 놀리는 듯한 미소를 보냈다. 그들은 순간적으로 동지애 같은 것을 느꼈다. 그의 미소를 보면서 브리나는 그가 그동안 얼마나 긴장하고 살아왔는지를 깨달았다. 그의 몸은 여위었고 눈가에 주름이 잡혀 있다. 그동안 그 역시 그녀만큼이나 괴로웠던 것이다.

"좋아, 그럼 완전히는 아니고 그냥 거의 모르는 사람들처럼." 그는 즐겁게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말한 적이 있던가? 임신한 모습이 당신에겐 너무나 잘 어울려." 그는 속삭이듯 덧붙였다.

그의 찬사에 브리나의 얼굴이 붉어지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래프의 믿음이 얼마나 빨리 시험 당하게 될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밤에 있어서의 그들의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엔 아직도 긴장이 감돌았다. 아무리 함께 얘기하고 웃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 긴장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 후 몇 주 동안 그들은 열심히 노력했다. 자주 함께 점심식사도 했고 저녁시간도 함께 보냈다.

이젠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친한 친구가 돼 있었다. 사실 그들은 만나자마자 첫 순간부터 너무도 빠른 속도로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알아야 할만큼 서로를 충분히 알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그들이 공유할 것들을 발견할 시간적 여유를 가진 셈이다. 서로에 대해 알아야 할 게 얼마나 많은지 새삼 놀랄 정도다. 심지어 래프는 절대로 그러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사업 얘기까지 그녀에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 사이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것은 정신적인 거라기보다 육체적인 것이었다. 브리나는 래프가 몸을 스치기만 해도 저도 모르게 몸서리쳐지곤 했다. 또한 그녀가 어쩌다 그를 건드리게 될 때면 래프 역시 몹시 긴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원하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으로 돌아가서 새로 시작했으며 일종을 우정 같은 것을 형성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너무도 서로를 원하고 있었던 그것이 그들이 애써 얻은 우정을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

브리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혼란한 상태였다. 그녀로선 이 모든 것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불안하기만 했다.

하지만 우선 그들이 적어도 친구로서 케이트의 저녁 초대에 함께 동행할 수 있을 만한 상태인 것에 감사했다. 애들 앞에서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수 있으리란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케이트는 그들에게 자신의 이사기념 파티에 와달라고 정식으로 초대했고, 래프 역시 정식으로 그 초대를 받아들였다.

"그 애가 쌀 푸딩과 감자를 차려 주었던 때보다 요리 솜씨가 늘었길 바랄 뿐이야!" 케이트에게로 가면서 래프는 슬픈 어조로 말했다.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섞어 주었다구!"

브리나는 그 돼지죽 같았을 음식을 생각하며 쿡쿡 웃었다. "몇 살 때였는데요?"

"9."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조시가 죽은 이후로 그앤 <꼬마 엄마> 같이 행동하려고 애썼지. 그애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폴과 난 그걸 억지로 먹어야만 했었소."

브리나는 다시 웃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을 거예요. 크리스마스 날 모두 함께 저녁식사를 준비할 때 케이트는 아주 잘하던걸요."

"그러길 바랄 뿐이오." 그는 천천히 말했다. "브리나, 오늘밤 대단히 아름답소." 그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오른손을 잡고 깍지를 끼었다.

그녀의 모습에 대한 그의 찬사는 너무도 반가운 것이었다. 임신 5개월이 지나면서 그녀의 배는 눈에 띄게 불러서 이전에 입던 옷 중 맞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래프가 주장해서 산 임신복은 그녀에게 잘 어울리긴 했지만 그녀 자신은 매끄럽게 흘러내리는 푸른색 드레스만큼 매력적이라곤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외모에 대해 점점 자신감을 잃어 가던 참에 래프의 찬사는 정말로 시기 적절한 것이었다.

케이트는 아버지와 브리나에게 알코올 음료를 따르면서 양해를 구하는 듯 한 눈을 찡긋했다. "특별한 경우에만 마시는 거예요." 그녀는 아버지의 치켜 올린 눈썹을 힐끗 쳐다보며 서둘러 변명했다.

"그러길 바란다.." 래프는 중얼거리며 브렌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밤엔 대단히 어른스러워 보이는군, 브렌다." 래프는 그녀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브리나는 브렌다가 래프의 정중함을 오해하여 받아들여 찧고 까부는 것을 서글픈 심정으로 지켜보면서, 한편으론 케이트의 볼이 당황해서 붉게 물드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는 케이트를 향해 명랑하게 웃어 보였다.

"주방에 가서 좀 도와줄까?" 브리나는 브렌다의 노골적이 행동에 전혀 동요하지 않고 부드럽게 말했다. 래프가 딸의 친구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만은 장담할 수 있었다.

"브렌다는 믿을 수가 없어요." 주방에서 마무리 손질을 하느라 덜거덕거리면서 케이트는 투덜거렸다. "오늘밤은 예절바르게 행동해 달라고 부탁했거든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구요. 그런데 아빠가 도착한 지 몇 분도 안 돼서 야단법석이잖아요!"

친구에 대한 케이트의 명백한 혐오감을 보며 브리나는 웃었다. "난 걱정 안해. 아빠는 그냥 상대해 주고 계실 뿐이야."

"우리야 모두 알고 있죠." 케이트는 화가 나서 예쁜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불평했다. "하지만 브렌다는 꼭 제 하고 싶은 대로 한다니까요!" 지난 몇 주 동안 친구와 아파트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케이트는 브렌다의 이기적인 성격을 알게 돈 듯했다.

"함께 사는 건 어때?" 브리나는 불쑥 물었다.

", 보시다시피." 케이트는 얼굴을 외면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함께 잘해 나가고 있어요."

그들이 거실로 돌아왔을 땐 폴과 그의 여자친구 린, 케이트의 친구 로저와 플립이라는 젊은이가 막 도착한 참이었다. 플립은 그날 밤 브렌다의 파트너인 듯했다. 물론 예전에 브렌다의 침실에서 나왔던 그 젊은이는 아니었다.

브리나는 래프 역시 자신처럼 이 6명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불편해하고 어색해함을 느낄 수 있었다.

8시쯤 초인종이 짧게 울리자 케이트가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커트와 케이트가 나란히 방으로 들어왔다. 브리나는 래프가 당장 나가라고 소리칠 듯한 눈길을 보냈다. 그러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그렇게 해버리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래프의 시선이 그녀의 눈길을 따라 움직이다 케이트의 상기된 얼굴에 이르자 그의 얼굴에서 냉기가 조금 가시는 듯했다. 딸은 그와 커트가 여기 함께 있어 주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래프는 다소 긴장을 푸는 듯했지만 눈만은 여전히 날카롭게 빛났다.

"여기 누가 왔는지 보세요!" 케이트는 이 마지막 손님의 도착에 한껏 웃으며 즐거워했다. "불쌍한 커트 아저씨는 파트너가 편두통이라 혼자 오셨대요." 그녀는 동정에 가득 찬 표정으로 그의 팔짱을 꼈다.

"아무리 시간이 급박했다 해도 대타를 구했어야지, 안 그런가?" 래프는 농담을 던졌다. 그러나 그의 눈빛만은 여전히 날카로왔다. "우릴 실망시키는군, 커트." 커트는 도전적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자네 같은 신사라면 여기 있는 모든 아름다운 숙녀들을 한꺼번에 공유하도록 해주리라고 생각했는데!"

브리나는 그 말속의 가시를 느끼고는 움찔했다. 커트는 래프의 행동에 대해서 화가 난 듯했고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사태는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 긴장된 사태를 누그러뜨려 준 것은 놀랍게도 케이트였다.

"커트 아저씨는 제 곁에 앉으시면 돼요." 케이트가 커트를 향해 명랑하게 말했다.

커트는 케이트에게 일부러 굳어진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럴 경우엔 내게 아저씨라고 부르지 말아야지!"

로저가 두 팔로 케이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냥 옆에 앉으시라고 했을 뿐이에요."

케이트는 로저의 노골적인 행동에 얼굴을 붉히며 어색하게 아버지를 흘끗 바라보았다.

브리나 역시 래프를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이제 그의 눈속엔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케이트가 얼마나 자신에게 속해 있으며, 다른 남자가 그런 소유권을 주장한 데 대해 아버진 자신의 반응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알고서 떠오른 웃음이었다. 그러나 케이트는 아버지가 유쾌한 로저 딜러니를 싫어할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로저는 키가 크고 검은 머리에 따스한 푸른 눈을 가진 젊은이였다. 그는 역사 선생이 되려고 공부하고 있었고 래프는 그를 매우 좋아했다.

브리나는 래프가 방을 가로질러 그녀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불러 오른 매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대차를 구해야만 했어, 커트." 래프는 천천히 말했다. "아무도 기꺼이 파트너를 공유하지 않을 테니 말이야." 그는 커트를 마주 노려보았다. "플립은 괜찮을 거예요." 브렌다가 재빨리 커트에게 몸을 기대며 불타는 듯한 미소를 던졌다.

플립은 물론 브렌다의 그런 행동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조용한 젊은이였고 자기 파트너의 지나친 활발함에 질려있는 상태였다. 아무튼 브렌다는 식사하는 동안 내내 플립을 무시해 버린 채 커트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래프는 커트가 이곳에 온 것에 화가 나 있었다. 그는 케이트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즐거운 자리며 따라서 그러고 싶더라도 커트를 모욕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브리나는 커트가 오늘밤 이곳에 온다는 사실을 자신이 알고 있었다곤 래프가 생각지 않기를 빌었다. 커트가 오리라곤 정말 몰랐었다. 알았다면 결코 이렇게 팽팽하게 긴장이 감도는 자리에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의사는 임신 생태에 대해선 낙관적이지만 단지 혈압이 오르락내리락한다며 염려했었다.

혈압 이상은 결혼 직후의 그 냉전기간 동안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서로 진정한 친구 사이가 됐으며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 이제 와서 단지 어쩌다 커트와 저녁을 지내게 됐다는 이유 하나로 이 모든 것을 잃고 싶지는 않다.

"실례하오."

래프가 그녀에게 오렌지 주스를 가져다주러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커트가 그녀 옆자리에 와서 앉았다. 브리나는 래프가 지금 그들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당황한 시선이 방 저쪽에 서 있는 래프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읽을 수가 없었다.

커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오늘밤 여기 오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브리나가 그를 응시하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당신과 래프가 오리란 걸 알고 있었기에 안 오려고 했소. 하지만 케이트가 하고 고집을 부려서."

브리나는 그에게 동정 어린 미소를 보냈다. 새로 형성된 래프와의 관계가 이 자리 때문에 손상될 정도라면 그 관계는 이미 파탄의 소지를 안고 있는 것이리라. 또한 그렇다면 그녀로서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일 아닌가. "어떻게 지냈어요?"

"잘 지냈어." 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활짝 피어 보이는군."

"그래요?" 그녀는 수줍어하며 웃었다. 커트는 살피듯이 그녀를 바라본다. "정말 괜찮소, 브리나?" 그는 조용히 물었다. "전날 레스토랑에서 만난 이후 내내 당신 걱정을 했었소. 한데 당신한테선 다시는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지!"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럴 필요가 없었어요."

"그럼 이제 래프와는 괜찮단 말이오?" 커트가 탐문하듯 물었다.

"내 생각엔 그 어느 때보다도 좋은 것 같아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커트는 살피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럼 당신은 행복하오?"

물론 행복하다. 황홀하게 무아지경에 빠진 듯한 행복이 아닌, 최근 래프와의 사이에 형성되기 시작한 새로운 이해로 인해 찾아온 마음의 평온이다. 래프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었고 그녀 역시 그걸 기꺼이 받아들였다.

브리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방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주스를 가져오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로저와 함께 이쪽을 의식하지 않는 체했지만 브리나는 그가 이쪽을 퍽 의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요." 그녀는 선뜻 대답했다. ", 그렇다면 우리들에 대한 래프의 의심에 대해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군?" 커트는 매우 걱정스러워하는 듯 보였다. 순간 그녀의 눈에서 온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곧 잡념을 떨쳐 버리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뭐든 새로운 얘기가 있다면 듣겠어요." 커트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 이건 그날 그 식당에서 래프와 함께 밖에서 식사할 때 몇 번인가 그자를 봤었소. 그자로부터." "그자가 누구예요?" 브리나는 조급하게 물었다.

"래프의 조수 있잖소. 이름이 뭐라든가? 힐리어? 우리가 함께 있을 때 같은 레스토랑에 그자가 있는 걸 몇 번 본적이 있소. 난 우연이라고만 생각했었지. 그런데 당신이 그랬잖소? 래프가 우리가 함께 있는 걸 본 사람이 있다고 말야. 내 생각엔 바고 그자가 우리를 정탐했을 것 같아."

"도대체 왜 그가 그런 짓을?" 브리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요." 커트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가 함께 있는 걸 본 사람은 그자뿐이오."

스튜어트 힐리어가? 만약 래프가 그에게 나를 미행하게 한 거라면? 래프는 이미 나를 미행하도록 시킨 일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전이라고 그런 일이 없었으리란 법은 없잖은가? 물론 그는 초기엔 미행시키지 않았다고 했지만 우연으로만 보기엔 너무도 공교로운 일이 아닌가.

"그 사람이 래프에게 우리 얘길 했다고 생각해요?" 브리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커트의 눈 속에 동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 역시 그녀가 차마 입에 담지 못하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리라. 래프가 조수를 시켜 그들을 염탐했다는 사실을!

"그렇게 생각 안하오?" 그는 부드럽게 되물었다.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해요."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삼켰다. 몇 주간 그녀와 래프가 쌓아올린 믿음과 진실한 우정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미안해, 브리나." 커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난 그저 당신이 알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물론 사실을 알게 돼서 다행이다. 이곳으로 오는 차안에서 얼마나 래프를 갈망했던가. 그러니 오늘밤 돌아가면 정상적인 부부관계로 돌입하게 됐을 것임에 틀림없다. 지난 몇 주 동안 난 얼마나 바보였던가! 래프는 나와의 우정을 원한 게 아니었다. 그저 의사의 충고-행복하고 만족해하는 어머니가 성공적으로 출산하다-를 받아들여 그것을 열심히 지켰을 뿐이다. 그래서 아기를 낳을 때까지 그런 것들을 기꺼이 잊으려 했을 뿐이다. 그럼 그 다음엔 어떻게 될 것인가? 다시 그 냉랭한 서로에 대한 무관심으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여기 있소, 브리나." 래프가 한참을 커트와 단둘이 있도록 내버려 둔 후에야 옆으로 다가와 마실 것을 건네주었다. "대단히 창백하군." 그는 걱정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걱정하는 척하는 것도, 저 표정도 모두가 위선이다! "상관없다면 난 지금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녀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래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커트를 응시했다. "물론 괜찮소." 그는 기계적으로 동의했다. "케이트에게 가서 돌아가겠다고 말하겠소."

"내가 잘못한 것 같아, 브리나." 그들이 다시 단둘이 있게 되자 커트가 말했다. "당신 말대로 힐러어가 뭣 때문에 그런 일을 하겠어?" 그들은 둘 다 힐러어가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알고 있다. 그건 래프가 시켰기 때문이다!

케이트에게 뭐라고 감사와 작별의 말을 했는진 기억하지 못하지만 브리나와 래프는 별로 이상한 눈길을 받지 않고 자리를 뜰 수 있었다. 케이트의 아파트로 오면서 그들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했던 그 우정이 집으로 돌아가는 지금 이 순간엔 어디론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브리나는 고뇌의 늪 속에 빠져 있었고 래프 역시 표정이 험악했다.

"디너파티에서 뭘 대접해야만 하는지 케이트는 이제서야 좀 알게 된 것 같더군." 래프의 갑작스런 말이 침묵을 깨뜨렸다.

참새우를 곁드린 아보카도, 백포도주 소스를 친 닭고기, 그리고 달콤하고 맛있는 것들이 예쁘게 담긴 접시 등은 매우 훌륭했다. ", 대단히 좋았어요." 브리나는 심술궂은 어조로 대꾸했다.

"로저 딜러니를 어떻게 생각하오?"

"괜찮아 보이더군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소." 그도 간단히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브리나는 잔뜩 긴장해서 그가 커트와 무슨 얘기를 했냐고 물어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래프는 묻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자 브리나는 래프 혼자 문을 잠그도록 내버려 둔 채 혼자 이층 침실로 곧바로 올라갔다. 그녀는 계단을 오르면서 래프의 눈길이 자신을 쫓고 있음을 느꼈다.

몇 분 후 그가 노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그녀의 침실로 들어왔지만 브리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코트를 입은 채 앉아 그를 기다렸다.

"도와주겠소." 래프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는 코트를 벗겨주었다. "커트가 뭐라고 했길래 이토록 화가 났소?" 마침내 그는 잠긴 목소리로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질문을 해왔다.

그녀는 완전히 벗은 상태로 그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난 몇 주 동안 그토록 그를 갈망했었건만 그런 감정들은 그의 허위 앞에 눈 녹듯이 사라져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 것도." 그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래프는 이를 악물었다. "뭔가 말했음에 틀림없어. 그전 까진 당신이 이렇지 않았어!"

"그랬었나요?" 그녀는 멍하니 대꾸했다.

"그래, 그랬어!" 래프는 그녀의 양팔을 꽉 잡았다. "브리나, 날 봐!"

그녀는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었다. 갑자기 눈까풀이 너무도 무겁게 느껴진다. 그는 항상 그렇듯이 오만하고 핸섬하고 독단적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 그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그 앞에서 달아오르지 않고 차가울 수 있었던 적은 없다.

"브리나!" 래프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녀의 눈 속엔 아무런 감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당신을 원해, 브리나." 그는 그녀의 어깨를 앞뒤로 흔들었다. "당신을 원하오!" "그럴 순 없어요." 그녀는 메마른 어조로 대답했다.

"!" 그는 신음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브리나?" 그는 다시 한번 그녀를 껴안으며 마치 경련하듯 그녀의 입술을 찾아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감정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그러나 키스를 계속하면서 그의 손길은 그녀의 몸을 필사적으로 더듬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굳게 닫아 걸었던 문이 조금씩 금이 가며 무너져내려 마침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느꼈다. 쾌락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자신이 혐오스러우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의 손길이 불러일으키는 황홀함을 맛본지 너무나 오래 되었고, 그녀의 몸은 래프만이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충족감을 갈망하며 아우성쳤다.

그의 손이 그녀의 불러 오른 배에 와 닿자 태아가 부친의 손길에 대답이라도 하듯 뱃속에서 꿈틀 움직였다. 그 순간 브리나는 모든 것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음을 느꼈다. 뱃속의 아이도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이 남자의 소유물이라는 것을. 그가 하고자만 한다면 나는 그를 막을 수가 없다. 나 역시 그를 간절히 원하고 있으니까.

브리나는 이윽고 그를 받아들였다. 그들이 하나가 됐을 때는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래프의 격렬한 움직임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그녀의 마음속에선 악마 같은 의문과 의구심이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격정의 순간이 자나자 래프는 그녀 옆에 나란히 누워 조심스럽게 아기를 매만졌다. "이제 커트가 뭐라고 했길래 당신이 그토록 화가 난 건지 말해 봐." 그는 대답을 재촉했다.

브리나는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나랑 커트가 만나는 걸 봤노라고 당신한테 알려 준 사람이 스튜어트 힐리어인가요?"

래프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게 누구든 무슨 상관이지?" "내겐 상관있어요." 그녀는 대답을 재촉했다. "바로 그 사람인가요?" 브리나는 똑바로 일어나 앉았다. "."

"!" 순간 그녀는 머리가 어찔해지며 정신을 잃었다.

 

9

"일주일 가량 여기서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지시오." 래프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후엔 집으로 가도 좋지만 계속 안정을 취해야만 한 대." 그는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들은 이곳에 약 2시간 전에 도착했다. 그녀가 정신을 잃자 래프는 곧바로 그녀를 병원으로 옮겼다. 의사의 응급조치가 끝났고 지금은 안정을 취하고 있는 중이다. 다행히도 조산은 아니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브리나는 두 시간 전 래프의 눈에서 진실을 읽을 수 있었다. 커트와 그녀가 만났다는 걸 그에게 말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스튜어트 힐리어였던 것이다.

"미안하오." 브리나는 깜짝 놀라 래프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고뇌에 가듯 차 있었고 얼굴은 격심한 긴장과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지난 몇 시간 동안 그는 톡톡히 대가를 치른 모양이었다.

"이젠 끝난 걸요." 그녀는 냉담하게 대답했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소!" 래프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다시는 당신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하겠소."

"그래서가 아녜요. 의사가 그랬어요." 그녀는 젊은 의사가 그녀에게 했던 질문들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아기를 가지게 되면 사생활이란 게 없어지는 것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건 내 혈압 때문이에요."

"아니, 커트를 만났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건 당신이 당신 아내의 진실보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거짓말을 더 믿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에요!" 브리나는 그가 화가 나서 떠들어대려는 걸 재빨리 가로막았다. 그녀의 눈이 짙은 자주색으로 빛났다.

래프가 조용히 말했다. "지금은 이런 얘긴 하지 맙시다."

"언제라도 얘기할 필요는 없어요." 그녀는 빈정대며 잘라 말했다. "당신은 어느 것이 진실인지 이미 결정했고, 하지만 그것은 틀렸어요. 이젠 막다른 골목이에요. 의사 말대로 난 쉬어야겠어요." 그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래프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내가 설명을 좀 할 수 있게 해줘, 브리나."

"난 지금 쉬어야만 해요. 아시겠어요?" 브리나는 싸늘하게 래프를 쏘아보았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지었다. "브리나, 내가내가 돌봐 주겠소. 만약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아기에게 말이겠죠. 하지만 그건 걱정 말아요, 래프. 난 이 아기를 당신보다 더 절실히 원하고 있으니까요."

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능하다면 좀 자도록 해요." 그는 몸을 굽혀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려다 그녀가 움찔하자 재빨리 도로 일어섰다. "아기가 무사했으면 좋겠소." 그는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다시는 당신이 임신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오!"

브리나는 방어하듯 턱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걱정 말아요. 만약 임신할 가능성이 있다면 절대로 당신을 아버지로 선택하진 않을 테니까요!" 순간 그녀는 그런 말을 한 것을 후회했다. 틀림없이 래프는 그녀의 말을 곡해해서 더 나쁜 방향으로 생각할 게 분명하다. 자신이 한때 임신할 수 없는 여자라고 믿었던 사실을 그에게 알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성미를 이기지 못하여 그만 말이 불쑥 튀어나와 버리고 만 것이다.

래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무슨 뜻이오?"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에요."

"무슨 뜻이냐구!"

브리나는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며 똑바로 그의 눈길을 마주보았다. "난 십대 때 수술을 받았어요. 그때 의사가 부모님께 말하길 난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됐다고 했어요." 그녀는 계속해서 거침없이 내뱉었다. "그래서 난 그 동안 한 번도 인위적으로 피임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래프, 난 내가 임신하리라 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래프는 의자를 침대 옆으로 끌어당겨 앉았다. "난 당신이 애들을 싫어하는 줄로만 알았소. 애들은 너무나 많은 책임을 요구하니까."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래서 커트가 애를 낳지 못한다는 얘기를 했을 때."

"그래요, 얼마나 어울리는 한 쌍이 됐겠어요?" 그녀는 씁쓸하게 말했다.

"? 무엇 때문에?"

"뭐가요?" 그녀는 그가 갑자기 입술을 악물며 턱을 쳐드는 것을 바라보며 도전적으로 물었다. "뭐가 왜냐는 거죠, 래프?"

"왜 그날 커트가 아닌 날 선택했느냔 말이오?"

브리나는 피가 아래로 몰리는 것을 느꼈다. "내가 당신을 선택한 게 아니라 당신이 날 선택했어요." 그녀는 힘겹게 내뱉었다. "그리고 난 커트와 함께 잘 것인가 어쩐가를 결정하기 위해 그에게 아기 아빠고 될 능력이 있느냐고 물어 볼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어요. 의사들이 오진해 혹시라도 내가 임신하게 될 경우에 대비해서 말예요!"

"물론 그랬겠지." 래프는 역시 역겹다는 듯 말했다. "뭐가 뭔지 도통 모르겠군. ."

"나도 그래요." 그녀 역시 역겹다는 듯 말했다. "당신은 날 최악으로 만드니까 내가 당신을 선택한 것도, 당신과 결혼한 것도 뭔가 숨은 의도가 있다고 생각했겠죠. 좋아요, 말해 드리죠." 그녀는 거칠게 내뱉었다. "당신이 내게서 아기를 뺏아갈까 봐 그 때문에 결혼했어요!" 그녀는 흥분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 돼 그를 노려보았다.

 

그의 뺨에 경련이 일었다. "."

"실례해요, 갤러거 씨." 간호사가 들어오며 부드럽게 말했다. "부인은 지금 쉬어야만 해요, 갤러거 씨. 당신도 그렇구요." 그녀는 친절하게 웃었다. "새벽 2시예요! 제 경험에 의하면 예비 아빠에게도 엄마만큼이나 휴식이 필요해요!" 그녀는 자신의 농담에 전혀 반응이 없자 얼굴을 찡그렸다. "이제 위험한 고비는 끝났어요, 갤러거 씨."

위험한 고비가 끝났다. 그녀의 결혼 역시 끝났다. 브리나는 이제 그들이 결코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남은 것은 법정에서 그와 투쟁하는 것뿐이다. 지금 당장 그에게 이런 모든 것을 말하고 싶지만 간호원이 계속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나가 주질 않았으므로 단둘이 있게 될 다른 기회를 기다리기로 맘먹었다.

그러나 단둘이 있게 되는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녀는 눈치 채지 못했던 일이지만 래프는 일부러 병원에 올 때마다 늘 케이트나 폴과 함께 오곤 했다. 그들은 브리나와 아기의 건강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었다.

 

"당신에게 주려고, 이 꽃은 당신의 눈빛을 연상시키니까." 커트는 보랏빛 바이올릿 한 다발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브리나는 그 섬세한 꽃잎을 쓰다듬으며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마와요."

"이봐요, 난 문병을 온 거지 울리려고 온 게 아니오!" 그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친근하게 싱긋 웃었다. "먹는 건 좀 어때?"

"먹는 것?" 브리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병원에 있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해야 할 질문이라고 하던데?" 커트는 설명했다. "병원 음식이란 지독하다고들 하더군. 하긴 뭔가 색다른 냄새가."

"음식은 좋아요." 브리나는 쿡하고 웃었다.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요?" 그녀는 궁금해하며 물었다.

"케이트." 그는 서글픈 어조로 대꾸했다. "그 애가 얘길 해주더군. 지금은 어떻소?"

"처음엔 상당히 위험했지만지금은 좋아졌어요."

커트가 갑자기 늙어 보였다. 그는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한 말이나 행동으로 인해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견딜 수 없을 거요." "아녜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그를 위로했다. "커트, 아기가아기가 태어나면 당신이 대부가 돼주겠어요?"

그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래프가 뭐라고 하지 않겠소?"

"아무말도 못할 거예요." 그녀는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요!"

그녀의 격렬한 어조에 커트는 다시 한번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와 헤어졌소?" 그는 당황한 듯 물었다.

"아직은 아니지만." 브리나는 마른 입술을 축였다. "아직 말할 기회가 없었지만, 하지만 그럴 거예요. 그래서 당신이 아이의 대부가 돼줬으면 해요."

커트는 그녀의 얼굴을 살피듯이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고통스러운 듯 어두워졌다. "래프가 당신에게 얘기한 모양이로군, 그렇군." 그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자신이 실수를 한 것이다. 그를 아프게 할 의도는 전혀 아니었는데. "커트."

"괜찮아." 그는 이상하리만큼 무표정한 얼굴로 일어섰다. "래프가 우릴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또 당신이 임신을 했으니, 어떤 상황에서 그런 얘기가 나왔을지 짐작이 가오." 그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가봐야겠어."

", 커트, 안 돼요!" 그녀는 애원하듯이 그에게 간청했다. "미안해요. 당신을 괴롭히려고 그런 게 아니었는데."

"괜찮소."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가 자식을 가질 수 없는 사내란 사실에 대해선 이미 무뎌진 지 오래요." 그는 씁쓸하게 덧붙였다. "당신을 남편으로 맞게 된다면 어떤 여자든지 기꺼이 아이를 입양해서 키울 거예요."

"어떤 여자든지!" 그는 냉소적으로 내뱉었다. "당신은 여자란 존재를 과대평가 하는군, 브리나."

"그래서 당신은 결혼하지 않기로 결심한 거로군요." 한때 그녀 역시 그와 똑같은 결심을 했었던 걸 상기했다.

"내가 결심한 게 아니오. 날 그렇게 만든 거지." 커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하지만 커트, 요즘엔 아이를 원치 않는 여자들도 많아요."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여자들, 자기 몸매가 망가질까 봐, 혹은 자기 일에 지장이 있을까 봐 몸을 사리는 그런 여자들." 그는 역겹다는 듯이 내뱉었다. "난 그런 여자를 아내로 맞고 싶진 않소."

브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녜요. 그들 중엔."

"제가 방해가 됐나요?" 앨리슨이 문 앞에 망설이듯 서있었다. 커트를 보자 그녀의 눈을 기쁜 듯 반짝인다. 브리나의 결혼식에서 그녀는 커트에게 대단히 호감을 가졌었다. "결혼식 이후 제게 연락이 없으셨죠?" 그녀는 커트에게 농담을 걸어 왔다.

 

커트는 아직도 간장이 감도는 씁쓸한 미소를 브리나에게 보낸 후 앨리슨을 향해 짓궂게 싱긋 웃었다. "오늘밤은 어떻소?"

"좋구 말구요." 앨리슨은 매혹적인 미소를 띠웠다. 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다시 브리나 쪽으로 돌아섰을 때 그의 표정은 원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아기와 당신을 위해 조심해요." "벌써 가려고요?" 그녀는 실망한 듯 말했다. 아직도 그들은 서로 할 말이 많은 터였다. 그는 자조적으로 입술을 실룩였다 "래프가 오기 전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 하지만."

"잘 있어요, 브리나." 그는 몸을 굽혀 그녀의 뺨에 키스했다. "행복하길."

그것은 마치 마지막 인사처럼 들렸다. "커트, 당신은."

그는 문 앞에서 잠깐 돌아보았다. "정말 가봐야 해."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 걱정은 말아요, 브리나." 계속 그녀가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자 그는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난 괜찮소." 그리고는 그는 앨리슨에게 목례를 하고는 나가버렸다. 브리나는 피로한 듯 침대에 기대앉았다. 자신이 커트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다. 자신과 래프 사이에서 커트는 너무나 많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내가 방해가 된 거 아냐?" 앨리슨이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으며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브리나는 침울한 분위기를 떨쳐 버리려고 애쓰며 고개를 가로 저였다. "아냐." 그녀는 친구를 향해 밝게 웃어 보였다.

"커트도 존 화가 난 것 같고." 앨리슨은 계속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전혀 네 결혼식장에서 내가 반했던 그 멋쟁이 난봉꾼 같지가 않단 말야." 브리나는 웃었다. "그가 난봉꾼이라고 생각했으면서 연락하라고 그랬어?"

"물론이지." 앨리슨은 한 눈을 찡긋했다. "요즘은 내게 연락하는 그 고집 센 아첨꾼 보단 나을 테니까."

브리나와 앨리슨은 8년 전 함께 직업 모델로 출발했지만 앨리슨은 그동안 늘 시시한 남자들과만 만나왔었다.

"넌 항상 남자를 잘못 골랐어."

"네가 충고를 좀 해주지 그랬니." 앨리슨은 투덜거렸다. "그랬다면 그 사람과 데이트하는 재난은 맞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무슨 수로 그걸 막겠니?" 브리나는 웃으며 대꾸했다.

"하긴 그래, 그 사람은 네 남편밖에 모르더라만. 하지만 이젠 너도 알아 둬야 돼. 그 사람이 얼마나 아첨꾼인지 말야!" 앨리슨은 격한 어조로 말했다.

래프에 대한 얘기가 언급되자 브리나는 긴장했다. 그러나 앨리슨의 말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피가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스튜어트 힐리어가 너에게?" 브리나는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물었다.

"그래." 앨리슨의 예쁜 콧등에 주름이 잡혔다.

그건 안 돼! 래프, 그럴 수가! "그 사람은 결혼식 때만해도 네게 마음이 있는 것 같은 기색은 전혀 없었다구." 브리나는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앨리슨은 다시 눈을 찡긋했다. "그가 그러는 건 정말 뜻밖이었어. 처음엔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를 모르겠더라구. 잠시 후에야 난 그가 네게 반했다는 걸 알았지만."

", 그건 말도 안 돼!" 브리나는 즉각 부인했다. "그래, 하지만 그는 어쨌든 네게서 눈을 떼지 못하더라구." 앨리슨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뭏든 결국 그는 날 선택했어. 상당히 매력적인 사람이야. 좀 따분해서 그렇지."

"그 사람 자기 자신에 대한 얘길 많이 하니?" 브리나는 스튜어트가 결혼식장에서 자신을 계속 감시하고 있었단 얘길 듣게 될까 봐 두려워 서둘러 말문을 돌렸다.

"래프 얘길 많이 하더군." 앨리슨은 또다시 눈을 찡긋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여자들 모두 네 남편한테 반한 것 같더라구."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래프는 오로지 너만의 남편이야. 난 스튜어트와의 데이트에서 좀 개인적인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브리나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스튜어트가 내 얘기도 해?"

"몇 번인가 했었어." 그녀는 기억을 더듬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나쁜 얘긴 아니었어." 그녀는 서둘러 덧붙였다. "그랬다면 내가 내버려두지 않았을 테니까. 아마 주로 이런 질문들을 했던 것 같아. 네게 흥미를 가져선 안 되느냐고 말야. 그래서 그토록 네게 흥미 있으면 래프에게 직접 물어 보라고 했더니 입을 다물어 버리더군!"

래프에게 물어 볼 필요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래프가 바로 스튜어트로 하여금 앨리슨에게 그런 질문을 하도록 시킨 장본인이니까!

이건 너무 심하다. 내게 말도 안되는 비난을 퍼붓고,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와 의절하더니, 심지어 이젠 내 친구를 통해 뭔가 알아내려 들다니. 도저히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녀는 앨리슨에게 억지로 밝게 웃어 보였다. "커트는 스튜어트보다 훨씬 멋있는 사람이야. 내 말을 믿어."

앨리슨은 기대에 찬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러길 바래!"

몇 분 후 래프가 돌아왔을 때까지 그들은 계속 얘기하고 있었다. 그는 혼자 왔다. 잠시 후 앨리슨이 가려고 일어섰을 때 브리나는 더 이상 잡지 않았다. 자기 없이 친구 혼자 회사를 운영하느라 얼마나 바쁜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래프는 가져온 책과 초콜릿 상자를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았다. "찾아와 줘서 정말 고맙군." 그는 앨리슨의 방문에 대해 가볍게 한마디했다.

브리나는 싸늘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더 마르고 볼이 움푹 꺼졌으며 눈빛은 광채를 잃고 있었다. 그가 죄의식 때문에 그렇게 됐기를 바라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래프는 죄의식을 느낄 만한 양심조차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래요." 그녀는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좀 있으면 케이트와 폴이 올 거요. 당신에게 줄 선물을 사러 갔소." 그는 다른 손님들처럼 침대에 걸터앉으려고도 앉고 그냥 침대 옆에 어색하게 서 있었다. "정말이지, 내게 올 때마다 뭔가를 사올 필요는 없어요."

"이번엔 집으로 돌아가는 걸 환영한다는 의미가 있지. 퇴원 축하하오." 래프는 만족스럽게 눈을 빛냈다. "지금 의사를 만났는데 내일이면 집에 가도 좋다고 했소!"

그녀도 알고 있다. 아침 회진 때 의사와 이미 얘기를 했었다. "그래요." 그녀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래프는 그녀의 부드럽지 못한 어조에 얼굴을 찌푸렸다. "당신은 별로 기쁘지 않은 것 같군."

"퇴원하라니 아기는 이제 안전하다는 뜻 아니겠어요? 물론 대단히 기뻐요." 그녀는 냉랭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요?" 래프는 살피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어요." 그녀는 가능한 한 침착하게 말했다.

래프는 놀라고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의사가 가도 좋다고 했어."

"의사 얘기는 나도 잘 알고 있어요." 그녀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집으로 가지 않겠단 얘기는 당신 집으로 가지 않겠다는 말이에요." 그녀는 도전적으로 불타는 그의 시선을 맞받았다.

"그건 우리의 집이오. 알겠소!" 마침내 그는 거칠게 내뱉었다. "그럼 도대체 어디로 가겠단 말이오?"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스코틀랜드의 부모님께로요."

"아직 여행은 무리요." 래프는 거칠게 말했다.

그녀도 그건 무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로지 한 가지 래프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생각만이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러면 어머니께 계속 런던에 계셔 달라고 부탁하고 아파트를 한 채 얻겠어요."

"어머니가 안 계시면 당신 아버지가 집에서 얼마나 곤란을 겪으실지 잘 알잖소. 더구나 지금은 그분들에겐 제일 바쁜 계절이기도 하고." 래프는 잘라 말했다. "게다가 당신은 아파트가 없잖소."

그녀는 흥분하여 뺨이 붉어졌다. "빌리겠어요."

"가구를 사러 돌아다닐 수 있겠소?" 그는 험악한 어조로 말했다. "가구가 딸린 걸로 빌리겠어요." 그녀는 필사적이었다. "어쨌든 당신과 함께 살진 않겠어요!" 그녀는 그를 노려보며 숨을 헐떡였다. "진정해, 브리나." 래프는 엄숙하게 명령했다. "혈압이 다시 오르길 바라오?" "아뇨!" 그녀는 굳은 어조로 대답했다. "하지만 우리의 결혼은 끝났어요, 래프. 난 이제 당신을 쳐다보기도 싫다구요." 그의 뺨이 실룩거리며 두 눈이 분노로 번쩍였다. "그 때문에 이사하겠다는 거요?"

그녀는 의심과 당혹이 가득한 눈으로 래프를 바라보았다.

래프는 성급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동안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무시하면서도 잘 지낼 수 있었소!"

"이번엔 그럴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녀는 단호히 말했다. "왜 못한다는 거지?" 그는 거친 어조로 물었다.

"왜냐면 당신을 믿지 않기 때문이에요."래프는 입술을 악물었다. "다시 당신을 건드려서 내 자식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생각은 없소!""우리는 애 때문에 결혼했고 그게 모두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봤어요. 그런데 당신은 그 약속을 깨뜨렸어요." 그녀는 매몰차게 그를 몰아세웠다. "난 당신을 믿을 수 없어요."

"믿어도 좋소!" 그도 화난 듯 소리쳤다. "다시는 당신 가까이 가거나 당신을 건드리지 않겠소. 난 단지 당신을 돌봐 주고 싶을 뿐이오. 당신을 돌볼 수 있도록 해줘." 그의 목소리가 차츰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그것을 원하는 게 아니다. 그로부터, 그의 끝없는 감시로부터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으리란 것도 잘 알고 있다. "당신이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겠다고 했죠!"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겠소." 그는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집에 당신을 돌봐 줄 사람을 고용하겠소. 당신이 과로하지 않도록 말이오. 그리고 당신 어머니를 더 이상 이곳에 붙잡아두는 건 그만큼 부모님을 걱정시켜 드리는 것밖엔 안되오."

"좋아요, 하지만 또한 당신과 부딪치지 않을 수 있기를 원해요, 래프." 그녀는 싸늘하게 말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면 곧바로 다른 곳으로 옮기겠어요." 이 마지막 말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임으로써 그녀의 조선을 수락했다.

 

10

케이트가 옷가방을 들고 나타난 것은 브리나가 퇴원한지 며칠 안 돼서였다.

브리나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걱정스레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케이트는 가방을 마룻바닥에 팽개치고는 울며 거실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브리나는 팔을 벌려 그녀를 껴안았다.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지?" 브리나는 부드럽게 물었다.

케이트는 손끝으로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렇게 몸도 안 좋은데 나까지 이렇게."

"지금 현재로선 난 네 엄마 대신이야." 브리나는 꾸짖듯이 말했다. "무슨 일이야? 걱정이 되는구나. 케이트."

"나도 당신이 걱정돼요." 케이트는 눈물 젖은 눈으로 미소 지었다. "난 당신을 엄마처럼 생각해요. 하지만 오빠와 내가 당신을 엄마라 부르기엔 당신이 너무나 젊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대신 큰언니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브리나는 폴과 케이트의 결정에 대해서 전혀 화 같은 건 나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지 않기로 한 게 단지 나이 때문이라는 사실을 오히려 따뜻한 만족감 같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큰언니는 신뢰받는 역할이야." 그녀는 케이트의 말을 재촉했다. 케이트는 얼굴을 찡그렸다. "브렌다 때문이에요!"그녀는 격하게 말했다.

이미 이렇게 되리란 것을 브리나는 예상했었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케이트가 브렌다와의 공동생활을 두 달씩이나 계속 버텨내고 있는 데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내게 말해 주지 않겠니?" 그녀가 가볍게 재촉했다.

케이트가 벌떡 일어섰다. "말씀드리겠어요!" 그녀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난 그앨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녀의 회색 눈이 불타올랐다. "그런데 아니었어요. 그앤 우정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조차 모르는 애예요!"

옷가방과 케이트의 맹렬한 분노는 두 소녀간의 불화가 심각함을 보여 주고 있었다. "브렌다가 용납할 수 없는 짓을 했니?" 브리나는 탐문하듯이 물었다.

", 난 그애의 단정치 못하고 이기적인 면, 심지어는 종종 집에 남자를 데려와 밤을 함께 지내는 것까지도 참을 수 있었어요." 마지막 말을 하면서 케이트는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이것만은 못 참겠어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요. 로저를 유혹하려 하다뇨!"

그것은 브리나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쁜 상황이었다. 그녀는 케이트가 로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다. 지난 열흘 동안 그녀에게 문병을 오면서 케이트는 몇 번인가 로저를 데리고 왔었다. 그때의 케이트의 태도로 봐 로저를 사랑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래, 성공했어?" "물론 못했죠!" 케이트는 분개하며 소리쳤다. "로저는 그 애에게 관심이 없다구요. 그는 날 사랑아니, 날 좋아하고 있어요."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정정했다. "그는 나만큼이나 그애의 행동을 역겨워하고 있어요."

로저가 그랬으리란 짐작을 하면서도 걱정이 돼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브리나는 로저의 케이트에 대한 사랑이 케이트만큼이나 깊다는 걸 알게 돼 무척 기뻤다. "그래, 구체적으로 무슨 일인지 얘기해 줄 수 있겠니, 케이트?"

"오늘 저녁 난 교실에서 좀 늦게 나왔어요. 한데 로저는 내가 벌써 집으로 간 줄 알고 바로 아파트로 찾아간 거예요. 내가 아파트에 들어섰을 땐 브렌다가 그에게 키스를 하려는 순간이었어요! 그는 그걸 피하는 중이었구요!" 그 장면을 떠올리며 그녀의 눈은 새삼스러운 분노로 무섭게 불타올랐다. "난 그가 키스를 피하는 데 성공해서 손등으로 입술에 묻은 그애의 키스 자국을 닦아내며 비키라고 소리치는 걸 봤어요. 그는 전혀 흥미가 없었어요. 그런데 브렌다는 날 보더니만 로저가 덤벼들었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내가 봤는데도 말예요! 난 그 길로 짐을 꾸려서 나와 버렸어요. 나머지는 나중에 가져오겠어요. 한시도 그곳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어요." 그녀는 몸서리를 쳤다. "그럼 지금 로저는 어디 있지?"

케이트는 뭔가 좀 대답하기 불편해하는 듯한 기색을 드러냈다. "로저는 나와 함께 집으로 오려고 했지만 내가 다음에 만나자고 했어요. 우선 나 혼자 아빠를 만나 본 다음에요." 그녀는 아버지를 혼자 만난다는 사실이 상당히 싫은 듯했다.

브리나는 케이트가 싫어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내가 그럴 거라고 말했잖니!" 하고 꾸중하실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엔 래프가 약속을 완벽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는 저녁 시간을 거의 서재에서 보냈으며 밤에 집에 돌아와서도 인사조차 나누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 역시 그편이 좋았다. 그러나 그가 케이트의 문제에 대해 어떤 식으로 나올지가 몹시 불안했기 때문에 브리나는 케이트 혼자 아버지를 만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작정이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두 사람은 순간적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케이트는 애원하듯 브리나에게로 돌아섰다 "아빠예요." 그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 혼자 만나고 싶진 않아요!"

브리나는 미소 지었다. "걱정 마. 난 아무 데도 안 갈 테니까."

그들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래프를 기다렸다. 래프는 거실 문을 지나 언제나처럼 곧장 서재 쪽으로 향했다. 지난 사흘 동안 매일 한결같았다. 그는 브리나가 소파에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이쪽으로 눈길조차 돌리지 않고 지나치곤 했었다. 하지만 오늘밤은 달랐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멈춰 서서 천천히 돌아섰다. 케이트가 브리나와 함께 앉아 있는 것을 보는 순간 그의 눈이 커졌다. 케이트의 옷가방은 그와 그녀들 사이에 놓여 있었다.

브리나는 두 부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래프의 표정은 뭔가 묻는 듯했고, 케이트는 이제라도 다시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이었다. "케이트가 당분간 집에 돌아와 있기로 했대요." 그녀는 래프에게 가볍게 말했다.

래프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약간 긴장을 풀고 방안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더니 의자 위에 서류가방을 내려놓았다. "그거 좋은 소식이군." 그는 중얼거렸다. "얼마동안이나 있게 되지, 케이트?" 여자들이 모두 거절하자 그는 자기 혼자 손수 마실 것을 따르며 물었다. ", ." 케이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브리나를 바라보았다.

브리나는 그녀에게 안심시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은 래프, 케이트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내 말벗이 돼주기로 했대요, 착하죠?" "브리나가 네 친절에 감사하겠구나, 케이트." 그는 딸에게 따뜻하게 말했다.

케이트는 과분한 찬사에 얼굴이 붉어졌다. "난 짐을 가지고 올라가야겠어요. 옷을 갈아입고 저녁식사를 해야죠." 그녀는 감사의 뜻으로 브리나를 포옹하고는 총총히 방을 나갔다.

케이트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래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갑자기 피로해 보였다. ", 정말은 무슨 일이오?"

둘만이 남게 되자 브리나는 긴장된 자세로 소파 한쪽 끝에 앉았다. 이것이 퇴원 후 처음 서로 말문을 연 순간이고, 그 이후 처음으로 그녀가 그의 얼굴을 마주본 순간이기도 했다. 그의 얼굴은 수척했고 눈은 쑥 들어갔고, 몸은 말라서 옷은 헐렁하니 커 보였다.

"브리나?" 아무 대답이 없자 그는 재촉했다.

그에 대한 동정심이 머리를 들지 못하도록 억누르며 브리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이 남자는 무적의 고인이고 누구의 동정도 필요치 앉는 사람이다. 특히 나의 동정은 더욱 필요치 앉는 사람이다. 특히 나의 동정은 더욱 필요치 않다. "브렌다가 너무 심하게 희롱했나 봐요."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로저와요." 그의 묻는 듯한 표정에 설명을 덧붙였다.

"!" 그는 신음했다.

"케이트가 당신에게도 말할 거예요. 마음이 좀 더 진정되는 대로 말예요."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매사에 대단히 환멸을 느끼는 상태일 거예요."

"로저에 대해서?"

"브렌다에 대해서요. 로저는 자신만만했던 샌더스 양을 매몰차게 거절한 모양이에요."

"다행이로군." 래프는 얼굴을 실룩였다. "케이트가 로저를 사랑하는 것 같던데."

브리나는 그의 어조가 반문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문제에 대해선 당신이 케이트에게 물어 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녀는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했다.

그는 갑자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그애가 뭔가 얘기할 상대가 절실히 필요할 때 당신이 이곳에 있어줘서."

브리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선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요?. 그녀는 마침내 솔직히 말했다. "난 당신 애들을 좋아해요. 내내 그랬어요."

"그들의 아버지가 당신이 옆에 오는 것조차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미안하게 생각하오!" 래프는 위스키를 삼켰다. "한데 케이트가 여기 있음으로써 모든 게 변화돼야 한다는 걸 알고 있소?"

"무슨 뜻이죠?" 브리나는 고개를 쳐들고 도전적으로 물었다.

"케이트와 한집에서 지내면서 그애 뒤에서만 계속 남남처럼 굴기란 힘든 일이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는 순간 지난 사흘간의 평화와 고요가 사라져 버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케이트를 더 이상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다. 인간에 대한 신뢰에 그토록 타격을 받고 괴로워하고 있는 케이트에게 아버지와 새엄마의 결혼의 타락상까지 보여 줄 순 없는 일이다. 하지만 또한 아무렇지도 않게 행복한 결혼인 척하기도 힘든 일이다.

"도움이 된다면 이제부터 당신과 함께 식사를 하겠어요." 그녀는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날 위해서가 아니라 케이트를 위해서겠지?"

"당신은 그 애처럼 연약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브리나는 단호히 말했다.

"난 아니라고?" 그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날 떠나 딴 남자에게로 갈 날만 기다리고 있는 아내에게 왜 매달리는 걸까?"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브리나는 호흡이 가빠왔다. "커트 얘긴 그만두세요!" 그녀는 불끈 솟아오르는 분노와 성급함에 한숨지었다. "벌써 그 사람을 못 만난 지가."

"나흘 전이겠지." 래프가 부드럽게 가로챘다. "그날 밤 그가 병실로 들어가는 걸 봤소." 그는 그녀의 놀란 얼굴을 향해 설명했다. "그 때문에 내가 일부러 늦게 들어간 거요." 그는 무섭게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당신은 그때 의사를 만나러 갔었다고."

"그전에 그를 봤소."그는 씹어뱉듯이 말했다.

"커트가 병실에 나와 함께 있는 줄 알면서 어째서 당신은?"

"당신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현장을 왜 덮치지 않았느냐고?" 그는 쓰디쓴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당신들 두 사람이 함께 있는걸 보고 싶지 않았소. 나중에 내가 들어갔을 때 당신이 날 떠나겠다고 말한 것만으로도 충분했소!"

"그건 커트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건."

"아빠, 옷 안 갈아입으세요?" 케이트가 방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평소에 원기를 거의 회복하고 있었다. "이층에서 로저에게 전화해서 저녁식사에 초대했어요. 몇 분 내로 올 거예요."

래프는 유감스러운 듯 브리나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딸을 향해 웃어 보였다. "언제쯤 결혼식에서 내 딸의 손을 신랑에게 건네줄 수 있을까?" 그는 케이트를 놀렸다.

케이트는 얼굴을 붉혔다. "우린 벌써 결정한 걸요. 몇 년 내로는 결혼 안할 거예요." 그녀는 어색하게 말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구나." 래프는 담담하게 말했다.

케이트는 싱끗 웃었다. "아기가 자라서 신랑이나 신부의 들러리가 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했어요!"

래프의 눈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꽤 시간이 걸리겠는데." 그는 냉담하게 말했다.

브리나는 그의 표정에서 그가 그때까지 아기가 이곳에 있을지 어떨지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의 관계가 끝날 경우엔 그와 그리고 그의 애들에게서 자신이 완전히 떠나야 할거라고 생각하곤 있지만 지금 당장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 아무튼 지금은 그의 아내이고 케이트와 폴의 동생을 임신하고 있는 게 사실이니까.

케이트는 어른들간의 긴장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어깨를 으쓱했다. "시간이 다 됐어요. 아빠, 서두르세요." 그녀는 성급하게 재촉했다. "전 배고파요!"

"넌 항상 그렇잖니! 아마 네 음식비에 대해서 로저에게 귀띔해 준다면 너와 결혼할 마음이 없어질지도 모르겠는걸!" 그는 케이트를 놀리며 이층으로 올라갔다.

케이트는 다시 한번 브리나를 안았다. "날 구해 주셔서 너무너무 고마워요."

"아버진 내가 말한 게 사실이 아니란 걸 알고 계셔." 브리나는 미소 지었다.

"그럴 거예요."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좀 있다가 제가 말씀드리겠어요."

브리나와 래프가 몇 마디밖에 주고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즐거운 식사였다. 로저와 래프는 여전히 의좋게 지냈다. 브리나는 케이트가 아버지에게 로저의 가치를 알리는 데 별 어려움이 없으리란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은 거실로 돌아와 커피를 마셨다. 브리나가 커피를 따랐다. 그녀는 뭔가 자기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에 새삼 기쁨을 느꼈다. 식사는 무사히 끝나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에겐 긴장된 순간이었다.

", 전 정말 기뻐요. 아빠와 커트 아저씨가 문제를 해결한 것 말예요." 케이트는 아버지에게 행복하게 말했다. "그 문제가 뭔지는 모르지만요." 그녀는 덧붙였다. "그렇게 놀리실 필요는 없어요, 아빠. 벌써 알고 있었어요. 아빠와 아저씨가 최근엔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걸 말예요."

브리나는 묻는 듯한 눈초리로 래프를 바라보았다. 래프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던 것이다.

래프는 케이트를 향해 얼굴을 찡그렸다. "넌 참 눈치가 빠른 애로구나. 그런데 어째서 문제가 해결됐다고 생각했는지 말해주겠니?"

케이트의 기쁜 마음이 동요된 모양이다. "그럼 아닌가요?"

", 그렇지 않아. 이봐, 케이트." 래프는 케이트의 실망한 얼굴을 향해 위로하듯이 말했다. "부딪치면 자꾸 싸우게 돼 도저히 함께 지낼 수가 없었단다."

"내 생각엔." "왜 네가 그렇게 생각하게 됐는지 그걸 모르겠구나."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난 요 몇 주 동안 커트와는 전혀 만나지도 않았는데." "아빤 아니지만 스튜어트가 만났거든요." 케이트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전 스튜어트와 커트 아저씨가 같이 있는 걸 보고 아빠와 아저씨가 사업거래를 시작하는 걸로."

래프는 눈이 가늘어졌다. "그게 언제지?" 그는 조용히 물었다.

케이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몇 주전에 함께 있는 걸 봤어요."

브리나는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커트와 스튜어트? 래프의 이익 때문이 아니라면 그 두 남자가 무엇 때문에 만난단 말인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으로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난 그런 일 없어아니, 브리나?" 래프는 걱정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의자 옆으로 다가와 싸늘해진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여보, 왜 그러는 거요?"

래프의 목소리는 정말 걱정스러운 듯했다. 그것이 정말일 수 있단 말인가? 그녀가 믿고 신뢰했던 그 남자가 그럴 수가?

"브리나?" 이제 래프는 필사적인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케이트, 의사에게 전화해서."

"아녜요." 브리나는 가까스로 말했다. "잠깐 가서 눕는 게 좋겠어요." 그녀는 짙은 보랏빛 눈으로 래프를 응시했다. "날 좀 데려다 주시겠어요?"

기쁨의 불꽃이 잠깐 그의 눈 속에 떠올랐으나 곧 그는 자제하는 듯했다. "물론이오." 그는 양팔로 그녀를 안아 일으켜 세웠다.

"피곤해서 그래. 그저 그뿐이야." 그녀는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케이트와 로저를 행해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래프는 그들을 행해 일부러 이를 드러내며 씩 웃어 보였다. "항상 이런 식으로 날 침대로 끌고 간다니까!" 그는 그들이 긴장을 풀 수 있도록 농담을 던졌다. "난 싸우지도 않고 늘 이렇게 끌려가지!"

그의 농담은 걱정하는 분위기를 풀어 주었지만 계단을 올라가면서 그의 표정은 다시 심각해졌다. "무슨 일이오?" 그가 부드럽게 물어왔다.

브리나는 잠시 눈을 감고 몰아치는 생각들을 진전시키기 위해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자신이 잘못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머릿속에서 왕왕거리는 그 무서운 생각들이 모두 사실이기를, 그래서 다시 마음껏 래프를 사랑할 수 있게 되길 바랐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의심이 만약 사실이라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기를 그녀 자신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도.

"래프, 나와 커트가 관계를 가졌다고 누가 당신에게 얘기했나요?" 그녀는 래프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브리나.""래프 제발 대답해 줘요! 이건 우리 결혼의 미래를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에요." 그녀는 재촉하듯이 그의 팔을 꼭 잡았다. "우리 결혼의 미래?" 언젠가 그가 주장했던 말을 되씹고 있는 듯 갑자기 그는 상처입을 듯이 보였다. "브리나, 날 놀리지 말아 줘!" "놀리는 게 아녜요." 그녀는 아직도 현기증을 느끼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누군가 우리를 놀리고 있어요. 구역질 날 정도로 무섭게요!" "무슨 얘기요?" 그는 신음하듯이 물었다.

"래프, 당신이 스튜어트에게 날 감시하라고 시켰나요?.

분노로 래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절대로 아니오." 그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가 내게 당신과 커트가 함께 있는 걸 봤다고 처음 말해 주긴 했소. 하지만 난 절대로 그에게 당신을 감시하라고 시킨 적은 없소!"

"그럼 누가 시켰죠?" 그녀는 조용히 물었다.

"아무도!" 래프는 성급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그럼 그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요?" 그녀는 고집스럽게 계속했다.

"그런 게 아니오! 그는 당신들이 레스토랑에 함께 있는 걸 몇 번인가 보고 내게 우연히 말한 것뿐이오."

"래프, 런던에 레스토랑이 몇 개나 될까요?" 그녀는 따져 물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모르겠소. 몇 백 개 되겠지."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항상 내가 커트와 함께 있는 게 당신과 스튜어트의 눈에 띄었을까요? 그것도 같은 레스토랑도 아니고 각기 다른 레스토랑에서 말예요!"

 

"우연이었겠지." "그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녀는 냉랭한 어조로 기억을 돌이켰다. "누구?" 래프는 완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스튜어트 말인가?" "아뇨, 커트 말예요."

케이트는 커트와 스튜어트가 몇 주 전에 함께 있는 걸 봤다고 했는데, 열흘 전 그녀가 커트와 얘기할 때 그는 스튜어트의 이름조차 잘 모르는 척했던 것이다.! 레스토랑에서의 우연, 케이트가 그 두 사람이 만나는 걸 목격한 사실, 그리고 스튜어트의 이름을 잘 모르는 척한 커트의 실수순간 불현듯이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제 뭐가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런 우연은 런던 같은 대도시에서는 일어나지 않아요. 미리 계획돼 있었던 거죠."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커트는 우리 사이에 쐐기를 박으려고 했어요. 처음부터 말예요." 그녀는 멍한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에요. 난 당신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하지만 이젠 알았어요. 그건 커트였어요."

그녀는 숨이 막혀왔다. 환멸과 고통이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진심으로 커트를 좋아했었는데 그는 자신을 파멸시키려 한 것이다.

래프는 어두운 표정으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어떻게 그걸 안단 말이오?"

그녀는 눈물을 삼키려고 눈을 깜빡였다. "내가 알게 된걸 얘기하면 그걸 받아들이겠어요?"

"여보! 브리나, 그걸 몰라서 묻는 거요? 당신이 검은 게 희다고 해도 난 받아들일 거요."

그랬었다. 처음 커트를 만나 래프를 소개받던 날 그녀는 커트를 태양처럼 밝은 존재라고 생각했었고 래프를 달처럼 어둡고 비밀스러운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래프는 그녀에게 햇살과 같은 빛이었고 커트야말로 어두운 파멸을 가져오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는 내 마음속을 꿰뚫어본 거예요." 그녀는 목이 메어 말했다. "난 당신을 사랑했고 그는 그 사랑을 날 파멸시키는 데 이용했어요!" "당신이날 사랑한다고?"

그것은 심장이 멎는 듯한 절실한 기원이었다. 그 사랑이 실현될 날을 얼마나 고대했던가. 브리나는 사랑으로 가득차 빛나는 눈길로 래프를 바라보았다. "난 항상 당신을 사랑했어요. 당신을 만난 처음 순간부터 난 사랑에 빠졌어요. 그리고 내내 그랬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결코 당신과 육체관계를 가지진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서글프게 덧붙였다.

래프는 그녀의 팔을 꽉 잡았다. ", 당신 마음이 그렇다는 걸 몰랐다니!" 그는 신음했다. "그걸 알았다면 그런 상태로 내버려두진 않았을 텐데!" "무슨 듯이에요? 육체관계만으로 끝내자는 건 당신 생각이었잖아요?"

래프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당신 생각이었소."

"하지만."

"그때, 우리가 처음으로 육체관계를 가졌을 때 난 당신에게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당신과 결혼하기를 원하는지 말하려고 했었소. 그런데 그때 당신이 그 얘기를 시작한 거요. 첫상대로 나같이 노련한 사람을 고른 게 현명했다느니, 우리는 둘 다 규칙을 알고 있다느니, 구속하지 말 것, 책임 지우지 말 것, 그리고 단지 서로 즐기기만 할 것. 그런 얘기들 말이오."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회상했다. "조시와의 풋사랑 이후 처음으로 난 한 여자에게 숨김없이 내 영혼을 모두 바쳐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말하려고 했던 거요. 그런데 그 말을 채 하기도 전에 당신은 단지 내 몸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듯이 말했던 거요!"

"난 당신이 그걸 원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그에게 매달렸다.

"난 두 번째 데이트에서 아무 여자나 집에 데려와 애들과 만나게 하진 않소." 그는 약간 격한 어조로 말했다. "난 당신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고 내내 당신 모습을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소. 내가 일 때문에 미국에 갔다 오던 날, 난 화난 암 표범처럼 날 맞는 당신을 보고 당신을 내 아내로 맞기로 결심했소. 난 내가 집으로 돌아가면 항상 그곳에 당신이 있어 주길 원한 거요. 하지만 내겐 다른 책임이 또 있었소. 그래서 난 당신이 케이트와 폴을 만나서 그 책임이 뭔지 알아주고 결혼을 승낙해 주길 원했소."

"난 당신이 날 사랑하는 줄 몰랐어요, 래프." 브리나는 그의 손을 꽉 쥐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어요. 우리가 서로의 감정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이용해서 우릴 괴롭힌 거예요."

"하지만 왜?" "나도 모르겠어요." 그녀는 한숨지었다. "브리나, 정말 날 사랑하오?" 래프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 가슴이 아플 정도로." 그녀는 열렬히 말했다.

"그렇다면 그동안 당신 역시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살았겠군." 그는 신음을 토해냈다. "브리나, 사랑해. 사랑하오!"

"래프, 날 사랑해 줘요!" 그녀는 콧소리로 재촉했다.

래프는 눈을 깜박였다. "지금?"

"싫으세요?"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놀렸다.

래프가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표정은 그의 마음을 말해 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지만 난 아기나 당신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우린 이미 한번 위험을 겪었어."

"그건 우리가 사랑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녀는 재빨리 말했다.

"당신은 지금 막 아래층에서 기절할 뻔하다가 올라왔잖소." 그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아기와 난 우리가 사랑하는 남자와 다시 친해지고 싶은 거예요!" 브리나는 눈이 빛났다. 이제 그에 대한 그녀의 사랑에는 아무런 그늘도 없었다. "만약 우리가 딸을 낳게 된다면, 그리고 그 애가 지금 당신처럼 날 바라보며 조른다면 난 아무 것도 거절하지 못할 거야!" 래프는 얼굴을 그녀의 머리칼에 묻으며 신음했다.

브리나는 정답게 그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이 멋진 남자가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안 것이다. "틀림없이 아들이에요. 그러니 당신의 권위가 손상될 염려는 없다구요." 그녀는 그를 놀렸다.

그는 천천히 그녀를 안았다. 그녀의 온몸을 구석구석 어루만지며 아기가 있는 부분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그들은 서서히 넘실거리는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그가 부드럽게 그녀 안으로 들어왔을 때 둘은 절정에 이르러 한참을 꼼짝 않고 있었다. 쾌락의 물결이 과거의 고통을 깨끗이 씻어 주는 듯했다.

"당신이 지금 임신하고 있지 않았다면 오늘밤 임신을 했을 거란 느낌이 들어!"

"사랑해요, 래프." 그녀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당신의 아이를 가진 게 자랑스러워요."

"나만큼 자랑스럽진 않을걸." 그의 촉촉한 입술이 그녀를 더듬었다. "맙소사, 그러고 보니 우린 서로 사랑을 감추려고 그렇게도 심술궂은 말들을 해댔었군 안 그래." 그는 그녀를 힘껏 껴안았다. "내가 당신을 안고 병원으로 달려갔던 날 당신이 내게 한 말 기억나오? 다시 아기를 가질 수 있게 된다고 해도 내 아인 절대로 가지지 않겠노라고 했던 말. 그 말을 듣는 순간 비수로 가슴을 찔린 것 같았소!" "그땐 케이트의 디너파티에서 커트가 내게 그런 얘길 했었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스튜어트에게 날 감시하도록 시켰다고요! 그리고 당신도 내게 그런 말을 했었잖아요. 내가 임신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거라구요!"

"그건 당신 때문이었소." 래프는 가볍게 떨며 말했다. "그때 난 당신이 죽어서 내게서 곧 떠나는 게 아닌가 했소." 그는 그녀의 왼손을 잡고 결혼반지와 나란히 끼워져 있는 영원의 반지에 키스했다. "내가 이걸 줬을 때 당신이 당황하는 걸 봤었소."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 반지는 말 그대로 영원의 반지요. 난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거요. 당신을 잃는다면 난 삶의 의미가 없을 거요!" "당신은 결코 날 잃지 않을 거예요." 브리나는 굳게 약속했다. "우리가 다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자신없는 어조로 말했다. "이애는 내겐 기적이에요."

"난 그앨 사랑하오.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만들었기 때문에 더욱." 그의 검은 눈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건 내가 계획했던 일은 아니었소."

브리나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당신은 이 집안에 어린애가 생기는 걸 정말 원하세요?"

"원하냐고?" 그는 가볍게 받았다. "난 아기를 고대하고 있소. 조시와 내가 케이트와 폴을 가졌을 때 난 너무 젊었기 때문에 아기를 돌보는 것은 여자들의 일이고 난 나가서 돈만 벌면 되는 걸로 생각했었소. 이 아기는 내가 뭐든지 일일이 참견할 작정이오."

", 래프! 난 당신이 날 사랑한다는 건 정말 생각도 못했어요, 한번도요!" 그녀는 신음했다. "당신은 내게 단지 아기 때문에 나와 결혼한다고."

"그래야만 당신과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는 대답했다. "처음 당신은 우리들의 관계에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것 같더니, 점차 날이 갈수록 내게서 떠나려고만 했소. 난 우선 스튜어트를 고용해서 그에게 내 사업을 웬만큼 이임하고 당신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했소. 내가 얼마나 당신을 필요로 하는지 보여 주려고 말이오."

"당신은 나와의 잠자리만을 원하는 거처럼 보였어요. 당신의 사업이나 케이트나 폴에 대해 내가 흥미를 보이면 당신은 매몰차게 잘라 버리곤 했어요."

"그건 내 일이나 애들에 대한 책임감이 당신으로 하여금 내게 잠자리만을 원하게 만든 이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케이트와 폴은 내가 당신보다 얼마나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은지를 상기시켜 줄 것 같았소. 그래서 당신을 그들과 떨어지게 하느라고 최선을 다했소. 그래서 당신을 그들과 떨어지게 하느라고 최선을 다했소. 완전히 성공한 것 같진 않지만. 당신이 그애들을 만나 어쩔 줄 몰라했던 그 첫날 이후 난 그렇게 되도록 정말 노력했었소."

"당신의 애들을 만나는 건 단지 좀이상했을 뿐이에요. 시간이 갈수록 난 그들과 함께 하기를 원했다구요." 브리나는 한숨지었다. 그들을 그토록 오래 가라놓았던 오해들은 참기 힘든 것들이었다. "당신이 그런 면으로 날 거부한 건 단지 나와 잠자리만 같이 하고 싶다는 뜻으로 비쳤어요. 당신 인생의 다른 부분에는 들어오지 말라는 것으로요. 그런데 잠자리마저도 점점 시들해지고 흥미를 잃어 가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다 내가 결혼해서 따로 자겠다는 조건을 내걸자 당신은 즉각 수락했죠. 그러니 당신이 날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밖에요." 래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당신과 결혼까지 하고서 따로 살 생각은 전혀 없었기 그냥 동의한 거요. 거짓말을 한 셈이지. 그리고 그때 내가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할 의도라고 당신에게 말했다면 아마 놀라 달아났을걸. 결혼한 후에도 난 따로 자긴 했지만 아무튼 계속 그렇게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소."

"당신은 단지 내게 아이를 만지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었어요!"

"아이와 당신 둘다지." 그는 빙그레 웃었다. "난 당신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의 얼굴이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졌다. 커트가 병원을 다녀간 후 당신이 내게 떠나겠다고 말 했을 때 나는."

 

"그날 밤엔 앨리슨도 왔었어요." 그녀는 변명하듯 재빨리 말했다. "앨리슨이 그러더군요. 스튜어트가 접근해서 함께 외출했는데 나에 대해 많은 걸 묻더라구요. 그래서 난 그게 모두."

"내가 시킨 거라고 생각한 거로군?" 래프는 험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그에게 그런 일을 시키지 않았소. 그 역시 커트의 짓일 거요." "래프, 우리 커트에 대해 예기 그만해요." 브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우선 우린 서로 사랑한다는 걸 믿어야 해요. 커트가 다시는 그걸 이용해서 우릴 다치게 할 수 없도록 말예요. 왜 그가 우리에게 상처를 주려 했는진 모르겠지만 이런 생각이 드는군요. 어린 소년이 다른 어린 소년에게 덤벼들어 크리켓 방망이로 코를 으깨 놓을 정도라면 어른이 됐다고 해서 그 성미가 완전히 없어졌을 것 같진 않다는 생각 말예요. 물론 훨씬 자제력이 생겼겠지만, 그 성질이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을 거예요."

"커트가 당신에게 그 사건을 얘기해 줬었군?"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 물론 그는 지금은 자제력 있는 신사임에 틀림없지만, 그 유쾌한 얼굴 뒤에는 그런 앙심이 잠재돼 있는 게 틀림없어요. 그에게 도전하기 전에 우린 서로의 사랑을 믿어야 해요. 그렇잖으면 그가 아직도 우릴 갈라놓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브리나, 맹세하오. 결코 다시는 당신을 의심하지 않겠소." 래프는 검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이제 그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 결혼한 이후 그가 그렇게 잔혹하게 굴었던 것은 스스로가 괴로웠고 또 자신을 잡기 위해서 몸부림쳤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는 나의 사랑을 의심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커트에게 전화해서 오라고 해요, 래프." 브리나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래프는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늦진 않았어요. 그리고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일이에요." 그녀는 고집했다. "왜 그랬는지를 알아야만 해요, 래프."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 바지를 입자마자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밖엔 케이트가 서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헝클어진 머리칼과 브리나의 붉어진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즐거운 듯 웃었다. "안녕히 주무시라는 인사를 하러 왔는데 이건 좀."

"케이트!" 래프가 엄숙하게 경고했다.

"내일 아침이나 아니면 오후에 다시 뵈요!" 케이트는 명랑하게 덧붙였다. "신혼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나 보군요!"

래프는 문을 닫으며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두고두고 놀리겠는걸!"

브리나의 눈은 즐거운 듯 반짝였다. "놀리는 것도 곧 시들해질 거예요, 맨날 이럴 텐데요, ."

그의 눈이 애무하듯 부드러워졌다. "제발 그래주길 바랄 뿐이오."

"물론 그럴 거예요." 그녀는 나직한 소리로 약속했다.

"당신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난 내가 당신의 첫남자란 사실에 무척 감사했었소." 그는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당신에게 말하려 했지만."

"그때 내가 규율이니 책임이니 하는 말들을 시작했군요." 그녀는 유감스럽다는 듯 기억을 돌이켰다. "난 당신이 그런 걸 원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이 그때까지고 처녀였던 건 두려움 때문이었소?" 래프는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뭔가 불안전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말이오?"

"그랬어요." 브리나는 그때의 슬픔을 돌이키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당신을 위해서 소중히 아껴 왔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맞아요, 사실은."

"사실은 당신 말대로요." 그는 재빨리 자신이 결론을 내렸다. "당신과 관계를 가지길 원한 남자가 내가 처음은 아닐 거요. 하지만 믿고 당신 자신을 맡긴 첫남자는 바로 나였으니까. 날 통해 당신은 스스로가 완전한 여자란 걸 느끼려 했던 거요."

"난 당신을 사랑했어요. 그래서 당신이 필요했어요."

"우린 늘 서로를 필요할 거요. 부리나, 약속하겠소. 어느 누구도 우릴 갈라놓진 못할 거요!" 그는 단호한 어조로 맹세했다.

래프가 커트에게 전화를 하자 그는 마침 혼자 있었던 듯했고, 곧바로 오겠다고 쾌히 승낙했다.

잠시 후 벨이 울렸을 때 브리나와 래프는 함께 소파에 앉아 있었다. 래프가 직접 문을 열었다.

커트는 저녁 외출에서 돌아온 뒤 곧바로 이리로 온 듯 야회복 차림이었다. 그는 브리나에게 친근한 목례를 보내고는 래프가 앉으라고 권한 의자도 거절하며 그를 향했다. "얼마나 중요한 일이기에 아침까지 기다릴 수도 없었단 말인가?"

"즐거운 저녁을 보냈나?" 래프는 친절하게 물으며 브랜디 잔을 건넸다.

커트는 당황한 듯 표정이 굳어졌다. "즐거웠어. 아무튼 고맙군." 그는 괴로운 듯이 대답했다. "무슨 일."

"저녁 외출에선 우리도 아는 사람을 만났나? 예컨대 내 조수라든지? 래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커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힐리어?"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왜 내가 그 사람을 만났어야 하지?"

"아니, 좋아. 자네가 오늘 저녁 밖에서 식사를 한 듯해서 그랬어. 최근에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만난 사건들도 있고 해서 말야. 자네들 두 사람이 혹시 또 마주치지 않았나 했지." 래프의 눈빛은 얼음같이 차가웠다.

커트는 브리나의 굳은 표정을 흘깃 보고는 래프의 험악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갑자기 주저앉으며 비명 같은 신음소리를 삼켰다. "이렇게 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어."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며 신음했다.

브리나는 깜짝 놀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래프를 바라보았다. 커트로부터 즉시 고백을 듣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그들의 무서운 의심이 사실이 아니기를 맘속으로 바랐다. 그러나 이제 그런 희망은 사라졌다. 하지만 커트가 얼마나 만신창이가 돼 있는 가를 보는 순간 그녀는 얼어붙었던 마음이 차츰 녹는 듯했다.

", 왜지? 커트?" 래프가 거친 목소리로 대답을 재촉했다.

"왜냐하면 난 그녀를 사랑했는데 그녀는 자넬 떠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부끄러움도 잊은 듯 커트의 두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함께 침대로 가는 것도 승낙했고 심지어 상당히 날 사랑하기까지 했는데도 그녀는 자넬 떠나지 않았어!"

브리나는 숨을 헐떡였다. "난 당신과 함께 잔 일이 없어요!" "당신이 아니오." 커트는 고개를 저었다. "조시, 조시 얘기요!" 그는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가 죽기 전 5년 동안 우린 연인이었소. 하지만 내가 간청하고 애걸해도 그녀는 래프를 떠나지 않았소." 커트의 말이 래프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으리란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물론 래프는 조시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게 바로 커트인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조시가 자네를 떠나 내게로 온다 해도 난 그녀가 그토록 원하는 아이를 그녀에게 줄 수가 없었어." 커트는 쉰 목소리로 계속했다. "조시는 자네를 떠난다면 자네가 케이트와 폴을 절대로 주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어. 나는 내가 조시를 사랑했듯 자네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날을 기다렸어."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래프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브리나가 나타났지. 하지만 자넨 너무 오만해서 그녀에게 자기 감정을 있는 대로 말하지 않았어."

래프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서 그걸 날 해치는 무기로 사용했군."

"내가 원한 건 자네에게 나와 똑같은 절망감을 맛보게 해주는 거였어. 조시를 사랑하면서도 그녀를 가질 수 없었던 그 절망을." 커트는 거칠게 말했다. "불행히도 브리나까지 다치게 됐지.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말야. 난 진심으로 브리나를 좋아했어. 그녀가 아기를 잃을 뻔했을 때 난 그런 짓을 그만둬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 난 태어나지도 않은 아길 해칠 순 없어! 어떤 아이도 해칠 순 없다구!" "힐리어는? 그는 어떻게 된 거지?"

커트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그는 아무 관계도 없어, 래프. 내가 매수했어!"

"난 자네를 친형제처럼 사랑했어, 커트." 래프는 괴로운 듯 내뱉었다.

"나도 그랬어." 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조시를 본 순간 난 사랑에 빠졌어. 내가 처음 그녀를 봤을 때를 기억하나, 래프?"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내 부모님께서 열어 주셨던 파티에서였지. 그런데 그녀는 자네만을 쳐다보았네." 그는 냉소적으로 덧붙였다. "난 자네가 조시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했었을 줄은 전혀 몰랐어!" 래프가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알 수가 있었겠나?" 커트는 자조적으로 웃음을 날렸다. "여자들이 항상 자넬 더 좋아했으니 자네도 어쩔 수가 없었겠지. 그리고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에겐 그런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 테고." 그는 무서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난 조시와 자네의 관계가 단순한 연애관계라고만 생각했어. 그래서 난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들려고 했었지. 한데 그녀는 이미 임신중이었고 나는 그저 자네들 둘의 친구로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됐지. 그러나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고, 몇 년 후 자네들은 둘다 다른 상대를 찾기 시작했어. 마침내 나는 조시가 날 바라볼 때까지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었네. 그러나 난 그녀가 그토록 원하는 아이를 줄수가 없었어!"

"자네들이 내게 와서 말했다면, 케이트와 폴을 데려가겠다고 말했다면 아마도."

"뭐라구?" 커트는 래프를 노려보았다. "자네가 그 애들을 우리에게 줬을 거라구?" 그는 비웃듯 입술을 비틀었다.

"아마도." 래프는 낮게 대답했다.

"절대로 안 그랬을 거야." "그랬을 거야." 래프는 조용히 말했다. "그건 내게도 힘든 일이었겠지만 난 조시가 그 애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고, 그리고 자네 역시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

커트는 래프를 화난 얼굴로 노려보았다. "자넨 지금 날 증오하지 않나?" 그는 목이 메었다.

"자네가 원한다면 증오하도록 노력해 볼 순 있어." 래프는 그에게 지친 듯 힘없이 말했다.

"난 자네와 브리나를 거의 가라놓을 뻔했어. 자네 애를 죽일 뻔했다구!"

래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가 그 둘 중 하나라도 성공했다면 난 자네를 미워했을 거야. 하지만 할 뻔했던 일 때문에 자네를 미워하기엔 우린 너무 오랫동안 친형제처럼 사랑해 왔어."

이 순간보다 더 래프를 사랑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브리나는 옆으로 다가가 그의 손을 굳게 잡았다. 그들은 둘다 커트 때문에 고통스러웠지만 그의 고통은 그녀보다 훨씬 더 큰 것이었다. 그는 그토록 친했던 친구를 잃은 것이다.

커트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일어섰다. "병원으로 브리나를 보러간 이후 난 내 사무실의 본점을 뉴욕으로 옮기는 작업을 했네." 그는 긴장된 어조로 말했다. "떠나기 전에 내가 한 짓을 모두에게 얘기할 작정이었네만. 이젠 일이 끝나는 대로 미국으로 옮겨가겠네. 내가 다른 용무가 없다면 말일세." 그는 묻는 듯한 표정으로 래프를 바라보았다. 래프는 브리나를 옆으로 끌어당겨 허리에 팔을 둘렀다. "자넨 위법을 한 건 아냐. 만약 했다 해도 그걸 가지고 어떻게 할 생각은 없네."

커트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작별해야겠군. 다시 만나게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유감스러운 듯 브리나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아기를 잃을 뻔했던 것에 대해선 진정으로 미안하오."

"알고 있어요." 브리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래프가 힘없이 그녀에게 기댔다. 그는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찡찡거릴 때마다 안아 주다가는 버릇을 몽땅 버려 놓겠어요!" 브리나는 아기 방으로 들어서면서 래프에게 비난조로 투덜거렸다. 래프가 크게 잘못하기라도 한 듯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아기는 그의 팔 안에 안전하게 안겨 있었다. "이 애가 숨이 막힐 것 같아서." 브리나는 단호하게 아기를 받아들고는 도로 아기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불이 나게 울어대는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래프의 팔을 잡아끌고 방을 나와 버렸다. "그러지 마세요." 그녀는 엄격하게 말했다. "저앤 벌써 버릇이 나빠졌다구요!"

제임스 래퍼티 갤러거-브리나가 처음 생각했던 이름은 래퍼티 제임스였으나 래프가 한 집에 똑같은 이름이 둘씩 있을 수 없다고 하여 순서를 바꾸어지었다-가 태어난 지도 7주가 흘렀다. 아기의 숱 많은 검은 고수머리와 자줏빛 눈은 너무도 예뻤다.

"울고 있어."

"버릇을 고쳐야 해요. 우유도 먹었고 안고 얼러도 줬으니 이젠 자야 해요." 래프가 뭐라고 항의하려 하자 브리나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이지 나 때때로 당신의 새 조수가 너무나 유능해서 당신이 평일에도 사무실에 나갈 필요가 없도록까지 된 게 유감스러울 때가 있다니까요!" 그러나 둘다 그것이 거짓말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녀와 래프는 거의 항상 함께 있었고 함께 아이를 사랑해 주었다. 래프의 새 조수는 정말 훌륭했다. 그리고 브리나의 임신 중반기 이후부터 모델 에이전시를 위임받은 엘리슨 역시 대단히 훌륭하게 일을 잘해내고 있었다.

"당신, 케이트, , 세 사람 틈에서 난 제임스를 안아보기도 힘들 지경이에요." 브리나는 불평했지만 사실은 진심으로 행복했다. 침입자라고도 할 수 있을 아기를 온 가족이 귀여워해 주는 게 그토록 고마울 수가 없었다.

"나한테 자꾸 트집만 잡으려 들지 말고 의사에게 다녀온 얘기나 해봐, 브리나." 래프가 볼멘 소리로 재촉했다.

브리나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 아들께서 잠들면 말씀드리죠." 그녀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래프는 그녀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아기 방 쪽으로 귀를 기울여 보고는 조용하자 그녀를 향해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저애가 뭐가 버릇이 나빠졌다는 거요?"

그녀는 즐겁게 웃으며 그의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그애가 자야 한다고 침대에 눕힌 게 누군데요!"

"그야 당신이지. 아니, 당신, 그럼." 래프는 신음했다. ", 하느님! 브리나, 난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 당신과 하나가 되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당신과 난 언제나 하나예요." 브리나는 그윽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해!"

이제 그들은 항상 자신의 감정을 서로에게 솔직히 얘기했다. 서로 안고 사랑하는 동안뿐만 아니라 그전, 그리고 그 후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