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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5-3-3

5장 사랑의 피안

 

경인열차였고 낮이어서 승객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출찰구는 다소 붐볐다. 사람들 틈새로 빠져나온 양현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영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안 나왔구나!"

눈앞이 캄캄해졌다.

'안 나왔어.'

역 광장에 서서 양현은 막연한 시선을 던진다. 도시에는 가을이 머물고 있었다. 물들기 시작한 가로수 아래, 얼음 갈라지는 소리라도 들려올 것 같은, 서늘하고 푸른 하늘 아래,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는 군상들, 누더기 같은가 하면 곤충 같기도 한 군상들이 서로 방향을 달리하며 짐 실은 우마차를 지나가고 있었다. 여인을 신이 만든 꽃이라고 했던가, 자연의 열매라 했던가, 꽃으로도 열매로도 볼 수 없는 우중충한 모습들, 남자들은 한결같은 카키색, 사람들에게는 계절이 없었다. 배급소에서 식량을 달아주고 배급표를 챙기는 그 현실만이 있었을 뿐이다.

양현은 걷기 시작했다. 검은빛 슬랙스에 갈색 재킷, 가방 하나를 들고, 또각또각 나는 구두소리가 색 바랜 것 같은 것 같은 마음에 비정한 무게로 실려 온다.

'전보를 받지 못했을까? 아니면 집에 없었던가.'

그러나 그 생각도 양현에게는 위로나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만일 영광이 서울에 없다면 어쩔 것인가. 어떻게든 양현은 영광을 만나야만 했다. 인천에서 전보를 친 그 순간부터 양현은 영광을 만나야만 했다. 그 하나의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럼 어떻게 해!'

전차를 타기 위해 길을 건너야 하는 지점까지 왔을 때, 그곳에 영광이 서 있었다. 그는 양현의 모습을 줄곧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오빠.....'

소리는 입 밖에까지 나오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사라졌다.

"무슨 일이야? 전보까지 치구 ."

영광이 물었다.

"그냥."

"그냥?"

되묻다가 영광은 대답 같은 것 바라지 않는 듯 걸음을 옮긴다. 두 사람을 길을 건넜다. 전차를 기다린다.

"오빠."

"......"

"어디 갈 곳이 없을까?"

갈 곳이 없었다. 남산? 창경원? 우이동? 자하문 밖? 옛날에는 그런 곳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곳도 젊은 사람들은 마음 놓고 갈 수가 없다. 전시라는 의식은 그런 곳에 더욱 높은 장벽으로 군림한다. 히고쿠민이라는 딱지가 붙기에 십상인 것이다. 총후의 국민이 할 일 없이 유원지에서 노닥거리고 있어 되겠는가.

"대관절 뭣하러 왔어."

"오빠 만나려고요."

"나 만난 뒤 진주로 내려갈 건가?"

"..."

전차가 왔다. 두 사람은 전차에 오른다. 영광은 왜 양현이 자신을 만나려 하는지 알고 있었다. 언젠가 이런 때가 올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들은 돈암동 종점에 내리기까지 각기 생각에 잠겨 말이 없었다.

"집으로 가는 거예요?"

"아니."

짤막하게 대꾸하며 영광은 앞서 걷는다. 재작년 가을부터 영광은 돈암동에 정착했다 할 수 있었다. 지리산 도솔암에 있던 영선네가 깊이 생각한 끝에, 사돈인 강쇠와 장서방과도 의논을 해서 관수의 유산이라며 손에 쥐어준 목돈, 내막적으로는 최참판댁에서 보태어서 내놓은 돈이었지만 여하튼 그것으로 서울 돈암동에다 자그마한 집 한 채를 마련했던 것이다. 그리고 떠돌이같이 생활하고 있는 아들을 위하여 그가 결혼하게 될 때까지라는 단서를 달고 영선이는 서울에 와 있었다. 영광이도 지방공연이나 위문 공연이 있을 때 부득이 집을 비우지만 서울에 있을 때는 어김없이 집으로 돌아왔고, 말하자면 반란적인 그 자신의 기질을 누르고 비교적 안정된 생활에 적응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양현은 서울 있을 때까지만 해도 가끔 그 집을 찾았고 영선네도 만났으며 환국이 역시 울적할 때는 술병을 들고 와서 영광이와 함께 마시곤 했다. 양현은 금년에 여의전을 졸업했으며, 지금은 인천의 어느 개인병원에 취직해 있었다. 학교 부속병원에 남을 수도 있었고 진주 도립병원에 갈 수도 있었지만 양현은 덕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인천으로 간 것이다. 서희가 노발대발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서희는 양현의 졸업을 고대했으며 진주에 돌아올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윤국이와 결혼시키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서희 꿈의 완성인지 모를 일이다. 이상현과 봉순의 딸 이양현과 최서희와 김길상의 아들 윤국이의 결합은. 당장 진주로 내려와야 한다고 엄명을 내린 서희를 설득한 것은 환국이였다.

"학교병원에 남을 수도 있고, 진주에도 도립병원이 있고 의논도 없이 그 애가 어째 그랬더란 말이냐."

"성적이 좋으니까 학교에 남을 수는 있었겠지만 도립병원은 관립이니만큼 다소 문제가 있겠지요."

"어째서 하필이면 인천이냐? 그것도 개인병원이라며?"

"개인병원이지만 규모가 크니까요. 실은 원장아주머니께서 유치원 문을 닫고 보니, 건물은 비어있고 양현이더러 경험을 쌓은 뒤 개업을 하면 어떻겠느냐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개인병원에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것은 안 된다. 병원 차릴 정도가 되면 명희씨한테 신세질 이유가 없다."

", 그건 그렇습니다."

환국은 대답하면서 마음속으로 어머니가 변했다는 생각을 한다. 신세질 필요가 없다 한 말이 너무나 감정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당분간 양현을 놓아주십시오. 현명한 아이니까 그릇된 판단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애도 집 떠나 남들이 사는 곳에서 부대껴보는 것도 경험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애가 그러는 데는 무슨 까닭이 있을 거 아니냐?"

"무슨 까닭이 있겠습니까."

말하면서 환국은 어머니의 기색을 살핀다.

"양현이는 까닭 없이 그럴 애가 아니다."

하고는 한숨을 쉬는데 그 순간 환국은 어머니와 자신의 생각이 일치하는 것을 강하게 느낀다. 그것은 원인이 덕희에게 있다는 것과 그 일에 대해서 거론하지 말자는 생각의 일치였던 것이다.

"당분간 양현이 하는 대로 지켜보다가 기회를 봐서 진주로 데려오든지 그러시는 게 놓을 듯싶습니다."

환국은 진작부터 양현에 대한 덕희의 거부감을 알고 있었다. 양현이 아프다는 핑계로 아버지 면회에 나타나지 않았을 환국은 한순간 오해를 하기도 했으나 그럴 리 없다는 강한 의문을 느꼈고 어떤 서슬엔가 명희가 암시적인 말을 하기도 했다. 환국은 비정상적인 덕희의 시샘과 양현에 대한 증오가 이미 위험 수위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을 문제 삼는다면 일이 미묘해질 뿐만 아니라 양현에게는 물론 덕희에게도 좋을 것이 없고 더군다나 아버지가 옥고를 치르고 있는 마당에 집안이 분란과 갈등에 휘말리는 것을 환국은 원치 않았다. 서희 역시 그런 생각인 것 같았지만 그걸 삼켜버리기가 힘든 것 같았다. 그러니 설득을 하는 아들이나 화를 내는 어머니나 이심전심은 하면서 말로는 변죽만 친 꼴이었다.

"너의 아버지가 저리 되시고 내 마음이 갈피 잡을 수 없이 어지러운데, 양현이라도 곁에 있었으면 싶었다."

서희는 드물게 아들 앞에서 자신의 허약함을 나타냈던 것이다. 어쨌거나 모자간의 묵약이라고나 할까, 양현의 인천행은 흐지부지 승인이 된 것처럼,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영광은 양현이 따라오거나 말거나. 큰 것은 아니었지만 가방을 들어줄 생각도 않고 아리랑고개 쪽을 향해 걸어간다.

"오빠 어딜 가는 거예요?"

"산에."

두 사람이 간 곳은 돈암동 뒷동산이었다. 나무도 별로 없는 민둥산이었다. 돈암동 일대, 신설동까지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에 두 사람은 다같이 죄인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군데군데 체면처럼 들국화가 한두 포기, 보라색 꽃이 피어 있었다.

"왜 전보를 쳤지?"

오랫동안 말이 없다가 영광이 먼저 입을 떼었다. 대답대신 양현은 울기 시작했다. 영광은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문다. 담배연기를 뿜어내면서 먼 산을 쳐다본다. 흐느껴 우는 양현이보다 영광의 눈이 더 절망적으로 보였다. 양현이 왜 우는지 영광은 가슴이 저리도록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 일 때문에 몇 밤 몇 날을 자신이 번민했던가.

'양현이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고 있겠지, 차라리 몰랐더라면.'

담배연기를 후우하고 내어뿜는다. 그것은 얼마 전의 일이었다. 함께 술을 마시다가 환국이 흘려버린 말이었다. 어머니가 양현을 며느리로 삼으려 하시는데, 그게 가능할까?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그 순간 영광은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양현에게 사랑을 고백한 일도 없었고 자신의 신부로 꿈꾸어본 적도 없었는데, 그러나 영광은 때때로 양현을 소유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그것은 불가능에 대한 몸부림 같은 것이기도 했다.

"오빠."

양현은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으며 스스럽게 불렀다.

"나 오빠하고 함께 살면 안 돼?"

영광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전신으로 전율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너 미쳤어?"

잠긴 듯한 목소리는 지극히 낮고 평정했다.

"오빠는 날 사랑하지 않나요?"

쏘는 듯한 영광의 눈빛이 양현에게로 왔다. 눈을 다시 먼 산으로 옮기며

"그거는, 그거...사랑한다는 것과 함께 사는 것은 다르다."

"어째서 다르지요?"

"나는 아마도, 너를 파괴할 거야."

"어째서요! 어째서요 오빠!"

양현은 필사적이었다.

"내게는, , 그런 게 있어. 잠자고 있는 폭력이 있어. 그것은 피, 칼이야."

"그건 아니에요! 오빤 아직도 과거의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거예요."

"그런지도 모르지. 그러나 너무 늦어버렸어."

"무슨 뜻이지요?"

"아니면 양현이가 술집 여자든지."

"아아 오빠,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나는 공주를 얻기 위해 결투장에 나갈 수 있는 기사가 아니야."

"그건 오빠의 진심이 아니에요. 기생의 딸하고 백정의 아들, 다를 게 뭐 있지요? 우리는 다 사람이지 않나요?"

"상투적인 그런 애기 하지 마. 수평이 맞아야 한다는 그 따위 시시한 얘긴 하지 말어."

"그럼 워지요? 오빠 난 다급해요. 너무 고통스러워요."

"결혼해."

"..."

"결혼해서 잘 살아. 다 그렇게들 살고 있잖아. 사람은 구십구 프로 상식적인 동물이야."

영광은 일어섰다.

"이러지 말아요! 제발."

양현은 영광의 팔에 매달렸다. 그 순간 영광은 양현을 껴안았다. 격렬하게 입맞춤하면서

"사랑해! 사랑한다! 널 잃고 싶지 않다!"

"..."

"나는 나쁜 놈이다! 나쁜 놈이다!"

영광은 땅바닥에 주저앉는다. 두 사람은 넋이 빠진 것처럼 산등성이에 언제까지나 앉아 있었다. 사방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영광은 일어서서 오두마니 놓여 있는 가방을 들었다.

"내려가자."

두 사람은 비탈길을 내려온다.

"혜화동으로 갈 거지?"

"..."

"혜화동으로 가아."

"안 갈 거예요."

"..."

"거긴 안 가요."

"어떡하겠다는 거야?"

영광의 눈에 두려움이 실린다.

"하룻밤만 재워주세요. 어머니 곁에서 잘 거예요."

"어머니는 안 계서."

"?"

"통영 가셨어. 누이 집에 다니러 가셨다."

"언제요?"

", 어제."

하는데 영광은 왠지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한다. 양현은 그러한 영광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조석은 어떡허구요."

"앞집 할머니가."

두 사람은 어느덧 전차 종점까지 와 있었다.

"이거."

하고 영광은 가방을 내밀었다. 떠나는 것도 보지 않고 영광은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을 밀치고 들어선 영광은 방으로 들어가서 벌렁 나자빠졌다. 그러다가 몸을 굴리듯 엎드러져 두 팔 위에 얼굴을 묻는다. 인천의 양현으로부터 전보를 받은 것은 어제 낮이었다. 영광은 몹시 서둘러서 모친 영선네를 밤기차에 태워 통영 영선에게 가게 한 것이다. 영선네는 그 전보가 통영에서 온 것으로 착각했던 모양이다. 사유를 말하지 않는 아들에게 거듭 물어볼 겨를도 없이 황망하게 떠난 것이다. 어머니를 그렇게 서둘러 보낸 것은 물론 양현을 만나기 위한 공간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아니 그보다 양현을 얻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었다 하는 것이 옳았다. 그것은 거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부끄럽고 치사스런 일이기도 했다. 그 순간에는 그것을 헤아리지 못했다. 오직 양현을 쟁취하리라는 일념 때문에 그는 자기 자신 정열의 불덩어리가 되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욕망과 희생의 싸움이었다. 사람 속으로 뛰어들어 자기도 한 몫을 하겠다는 충동과 세상을 바라보며 국외자로서 흐르는 대로 흘러가겠다는 에고이즘과의 싸움이었다. 집념과 포기의 싸움이었다. 도덕과 반도덕, 그에게는 윤국이 거대한 성으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광은 더욱더 자신이 피를 많이 흘려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치명적인 것을 믿지 못할 자기 성격적 결함이었다. 2의 혜숙을 또 만들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은 그의 전진에 제동을 걸었다. 영광은 양현을 사랑했으며 이 세상에 나와서, 가장 강렬한 집념이었다. 영광은 일어나 앉았다. 전등이 켜져 있었다. 재떨이를 끌어당겨 담배를 붙여 문다. 그의 얼굴은 온통 눈물에 젖어 있었다. 한편 혜화동에서 내린 양현은 영희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는 영광에게 윤국의 얘기를 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며 걷고 있었다. 너무나 두려워 양현은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편지에는 병원을 그만둘 것, 중대 사안이 있으니까 곧바로 하향할 것, 동경서 윤국이 왔다는 대충 그런 내용이 쓰여 있었다. 양현이 서희의 의중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양현은 단 한 번도 윤국이를 친오빠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얼마나 윤국이를 사랑했던가. 그러나 그것은 오빠를 사랑했던 것이며 그를 이성으로 본다는 것은 끔찍스런 일이다.

"아주머니."

"양현이니?"

"."

뜨개질을 하다가 명희는 내다보았다. 방으로 들어서는 양현의 얼굴을 본 명희는 깜짝 놀란다.

"이애 니 얼굴이 왜 그러냐?"

"왜요? 여위었지요!"

"너무 수척해졌다. 남의 밥 먹기가 쉽지 않는 모양이지?"

"."

"차 마시겠니?"

"주세요.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그럼 밥부터 먹어야겠구나!"

"차부터 주세요."

명희는 심부름 아이를 불러 이른다. 유치원을 그만두면서 홍천댁 내외도 그만두게 했고 명희는 대신 여자아이를 하나 데려왔다. 그만두게 된 홍천댁 내외를 겪어내면서 명희는 세상살이의 어려움과 배신의 쓰라림을 구역질나게 체험했다. 여러 가지 교묘한 수단을 써가며 횡령한 금액도 적지 않았지만 그것이 백일하에 드러나 가겠다, 생활의 방도를 강구해달라 협박하듯 대어들던 그 끔찍스런 얼굴은 꿈에서 만날까 두려웠다. 세상에는 가지가지 삶이 있겠으나 이런 삶도 있었던가 명희는 진저리를 쳤다.

"소문 듣자니까 원장도 남편 버리고 갔는데 시동생하고 좋아 지낸 덕분으로 많은 유산을 받았다 하더군요. 우리가 뭘 그리 큰 잘못을 했다고 빈손으로 내어 쫓을라 하지요?"

홍천댁은 잡아 비틀 듯 말했고 남정네는

"수 틀리면 싹 불질러버리겠다. 그까짓 콩밥 몇 해 먹지 뭐."

하고 으름장을 놨다. 환국이가 오고 명희의 재산 관리를 하고 있는 변호사가 오고하는 바람에 사내와 계집은 풀이 죽었고 협박한 일 없다며 잡아떼다가 야간도주를 했던 것이다.

"인천서 곧장 오는 길이니?"

"아니오. 어디 좀 들렀다가."

홍차를 마시며 양현이 말했다.

"집에는 아직 안 갔겠구나."

", 나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에 내려갈 거예요."

"인천으로?"

"아니, 진주 갈 거예요."

"어머니가 보시면 놀라시겠다. 얼굴이 말이 아니구나."

"온종일 굶어서 그래요."

"당장 병원 그만두라 하시겠네."

"그러지 않아도 병원 그만 두고 내려오라는 편질 받았어요."

"어째서?"

"모르겠어요."

어째서? 하고 물었지만, 명희는 짐작하고 있는 일이 있었다.

'고민을 많이 하는가 보군. 가엾은 아이.'

밥상이 들어왔다. 명희는 저녁 전이어서 함께 밥을 먹는데 양현은 몇 술 뜨다 만다. 대신 숭늉을 한 대접 다 마신다.

"너 어디 아픈 거 아니겠지?"

"안 아파요."

"왜 그리 힘이 없어 보이니?"

"아주머니."

"."

"서울이라고 와보아도 참 갈 곳이 없데요."

"갈 곳이 없다니? 고아 같은 말을 하네." 우리 집도 있고 오빠 집도 있구 친구들도 있잖아."

"집말구요. 아마 요즘엔 거지들도 돌아다니기 어려울 것 같아요."

"그래, 맞어. 얻어먹을 것도 없을 거야 아마."

"청량리 여옥아주머니는 어떻게 지내시지요?

"괜찮다. 지금 서울에 없어."

"어딜 가셨는데요?"

"전에 있던 곳에 간다면서......곧 돌아오겠지."

"그러다가 또 잡혀가면 어쩔려구."

"지켜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하면서 명희는 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을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아주머니도 저랑 여행 안 해보시겠어요?"

양현은 명희를 쳐다보지도 않고 우울하게 말했다. 여행을 할 때는 어느 정도 설렘이나 활기 같은 것은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것은 무의식적인 것 같았고 죽은 말이기도 했다. 눈동자는 흐려져서 생각은 먼 곳에 떠돌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랑의 환희, 사랑의 성취, 목마르게 소망하던 그 진실을 가슴에 안았고 입맞춤의 촉감은 아직 입술에 남아 있는데 그 성취감 환희보다 짙고 절망적인 고통이 옥죄어 오는 것은, 분명 까닭이야 있었다. 양현은 자신을 추슬러보려고 애를 썼으나 허사였다.

"양현아."

"."

"무슨 일이니? 지금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그냥 모르는 척 하고 넘어가려 했다. 그러나 명희는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양현의 처참하고 절망적인 내면이 선명하고 안타깝게 명희는 느껴졌던 것이다.

"저기 그건."

하다가 양현은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아주머니, , 전 의리가 아니에요. 으흐흣흣......그런 것 아니에요."

"의리라니?"

얼굴을 가린 두 손, 두 손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진주 어머니한테 말이냐?"

"오빠두요, 으흐흐흣......"

"윤국이 말이구나. 의리가 아니구 애정이다 그 말이지?"

"......"

"너 그 남자를 사랑하는 거지? 그렇지?"

", 그 사람 때문이 아니에요. 혼자서 늙어 죽는다 해도 난 오빠하고 결혼 같은 것 안할 거예요. 결단코."

막상, 양현이 시인하는 순간 명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결코 누그러질 수 없는 긴장 속으로 들어간 느낌이었다. 양현은 계속해서 울었다. 명희는 저도 모르게 뜨개질하다 만 것을 집어 들었다.

'언제나 그렇게 엇갈려. 왜 그렇지? 그러면서도 사람은 살아간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그런 슬픔 속에서도 사람은 살아가고, 얼마나 신기한 일이냐? 양현아, 사실 나도 혼란스러워.'

바늘에 실을 걸어 빼고, 또 실을 걸어서 빼고 하면서 명희는 어떤 착각에 빠진다. 양현의 운명이 마치 자기 운명인 것처럼, 그러나 깊고 뼈저린 회한이 엄습해 왔다.

'나는 세상에 나와 이룬 것이 없지만 너의 눈물은 뭔가를 이루기 위해 흘리는 것이다. 울어. 많이 울어라. 양현이 너는 나같이 자신을 기만하며 살아가지는 않을 거야. 너의 청춘은 정말 아름답다. 고통도 슬픔도 어쩌면 그렇게 투명하니? 나는 허울만 쓰고 살아왔구나. 세상의 눈이 두려웠고 내 명예 내 결백만을 신주 모시듯, 실은 그것조차 기만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야. 희생이라는 미명하에 나는 무풍지대로 기어 들어갔고 그러다가 오히려 태풍을 만났던 거지. 왜 나는 전과 같이, 홍천댁이 시동생과 좋아 지냈다 했을 때 억울하지 않았을까? 분노하지도 않았다. 왜 그랬을까? 내 명예 내 결백을 위하여 나는 잔인하게 그 진실에 상처를 입혔다. 남이 뭐라 하건 개의치 않고 나를 염려하여 찾아온 사람에게 나는 오로지 내 자신만을 지키기 위하여, 그것은 참 추악한 모습이었을 거야. 뭣 땜에, 누구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고통스러워했는가? 지금은 그것조차 알 수가 없다. 백치 같은 삶이었지. 그러고도 내가 무엇을 이루었다 할 수 있을까? 인실이도 그렇고 여옥이 선혜 언니도 그래. 양현이 너도. 분명히 자기 자신보다 소중한 것이 그들에게 있었다. 자신을 내어던질 대상이 있었다. 살았다는 것, 세상을 살았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세는 살았다는 흔적이 없다. 그냥 그 날이 있었을 뿐, 잘 견디어내는 것은 오로지 권태뿐이야. 양현아. 난 네가 시집갈 때 꽃베개를 만들어주고 싶어. 현란한 결혼 의상도 만들어주고 싶어. 하지만 그것도 내 몫은 아니겠지?'

"아주머니."

"."

양현은 눈물을 닦으면서

"실망하셨지요? 아주머니도 절 비난하실 건가요."

"어째서."

"안 그런가요?"

"나는 몰라. 한번 보았을 뿐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데 실망할 단계는 아니잖아?"

"아시게 된다면......"

"너를 믿으니까."

"어째서 저를 믿으시는가요? 아주머니가 믿는 양현이 아니라면 어쩌시겠어요?"

"그래, 믿는다는 말 대신 사랑한다 해야겠지."

"아주머니는 뜨개질만 하고 계시잖아요. 저는 절박해서......"

"우는데."

명희는 웃었다. 양현의 말은 아직 성숙되지 못한 흔적이었기 때문이다.

"나 무슨 생각 했는지 모르지?"

"......"

"양현이가 시집갈 때 꽃베개랑 아름다운 결혼 의상을 만들어주는 것을 공상하고 있었어."

양현은 명희를 쳐다보았다.

'결혼할 수 있을까? 아마 난, 결혼 못할 것만 같다.'

양현은 갑자기 영광과 자신이 쌓은 성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를 깨닫는다. 무너지고 말 것 같은 예감이 엄습해 왔다. 늘 그랬었다. 자신에게 비쳐진 영광은 항상 떠나는 사람이었다.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뒷모습을 보이며 머리칼을 바람에 나부끼며 떠나는 모습이었다. 가까이 다가오는가 하면 어느덧 뒤돌아서 가고 있었다. 너를 잃고 싶지 않다는 그 절규와도 같았던 고백은 실상 얼마나 불안한 것이었던가. 진실의 한 순간은 이미 지나갔고 이제는 없는 것인지 모른다. 그의 방은 비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영원히 떠도는 영혼인지 모른다. 그런 부질없는 생각에 양현은 떨었다. 영광이 쪽이 무너지고, 윤국이 쪽이 무너지고, 섬진강 강가에 가서 꽃다발을 던지며 생모를 부르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 눈앞에 크게 떠오른다. 인천서 전보를 쳤던 일에서부터 양현은 자신이 정상적이 아니었던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영광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고백이 아니었더라도 양현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왜 그랬을까? 양현이 자신은 그를 향해 밧줄을 던지는 사람이면 영광은 항상 밧줄을 걷어내고 도망치는 사람이었고 그의 실체는 언제나 손가락 사이로 빠져버리는 물과 같이 허망했다. 언젠가 서울에서 공연이 있을 때의 일이었다.

"오빠, 나 거기 가면 안돼요? 연주하는 모습 보고 싶어요."

그때 영광의 얼굴은 시뻘겋게, 무섭게 변했다.

"만일 온다면 나는 영원히 색소폰 불지 않겠다."

양현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어떻게나 그 태도가 격렬했던지, 그 후 영광은 가끔 말했다.

"양현이 오지 않았을까 그 생각을 하면 불안해서 연주를 못하겠어. 오지 않았지?"

"절대로요."

이튿날 아침 차로 양현은 진주에 내려왔다. 올 때마다 설레었던 대문 앞, 양현은 가방을 든 채 한참 동안 대문을 바라본다. 자신이 이 집 가족이 아니라는 것을 이때처럼 절실하게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집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방문 여는 소리, 하얀 버선발이 먼저 나왔다. 여느 때 같으면

"들어오너라."

했을 것을, 서희는 마루에까지 나왔다. 그는 양현을 보고 놀라는 것 같았다. 양현이 역시 놀란다. 서로가 다 말할 수 없이 수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어디 갔습니까? 왜 이리 조용할까."

뒤늦게 찬모가 부엌에서 내다보여

"아씨 오셨군요."

하고 인사를 했다.

"모두 부역 나갔어요. 곧 돌아오겠지요. 차서방댁은 병원에 약 타러 가구요."

"누가 아픈가요?"

신발을 벗으며 양현이 물었다.

"소화가 안돼서."

서희가 대답했다.

"어머니가요?"

"."

방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마주보고 앉아서 서로를 바라본다.

"너 많이 수척해졌구나."

"차 타고 오느라 그럴 거예요. 저보다 어머니가."

"나는 괜찮다. 너 어디 아픈 것 아니냐?"

"아니요. 아픈 데는 없습니다. 병원에는 가보셨습니까?"

"신경성이라 하는구나. 요즘엔 이래저래 맘 쓰이는 일이 많아 그런가 보다. 너도 사회생활에 익숙지 않아 그런 모양이지? 그런데 도무지 여의사 같지 않구나."

양현은 웃었다.

"요새도 성가시게 굴어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사람은 가두어놨고, 저이들 하자는 대로 하는데... 헌금 내라면 내고 부인회에 나오라면 나가고."

자조하듯 서희는 웃었다.

'어머니 힘이 다 빠지셨다.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병원은 그만 두고 왔느냐?"

"휴가를 받아 왔습니다."

"..."

"일단 혼인부터 하고, 병원을 차리든지."

"병원을 차리기에는 아직 경험이 부족합니다."

"그 일은 차차 생각하기로 하고."

혼인부터 해야 한다는 말은 예상하고 왔지만 양현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낀다. 하여간 못 들은 것으로, 양현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굴을 숙이며

"작은 오빠는 어디 가셨어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지리산에."

말끝을 맺지 못하다가

"시우랑 함께 도솔암에 갔다."

서희의 어조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시우 오빠하구요?"

""

각일각 다가오는 사태는 마치 플랫홈을 향해 돌진해 오는 기관차와도 같이 공포감과 긴박 르 안겨준다. 이제 어쩔 것인가. 어떤 방향으로 돌파해나가야 할는지, 양형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오빠, 작은오빠! 정말 그럴 거예요?'

양현은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도시 윤국이는 지금 위치에서 있는 것일까,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무슨 까닭으로 도솔암에 가 있으며 병원 일도 바쁠 시우가 어째 동행을 했을까. 시우까지 동원이 되었다면 구체적인 격식 절차는 이미 다 갖추어졌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우의 등장은 말할 것도 없이 윤국에게 양현은 완전하게 타인이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일이기도 했으며 이시우의 이복누이, 이상현의 딸 이양현이라는 신분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하기는 이씨 일가가 양현의 혼사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리를 따지자면 그들이 주도한다 해도 과히 틀린 일은 아닌 것이다. 사태의 진전은 명약관화, 그럼에도 양현은 항거, 항변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꿀먹은 벙어리로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혼인이라는 말이 잠시 나왔으나 서희는 아직 구체적인 말을 꺼내지 않았고 혼인의 상대가 윤국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지중지 딸로서 기른 아이, 감정적으로 완전히 딸이 되어 있는 양현에게 별안간 타인임을 선고하고 며느리가 되어라, 양현이 혼란에 빠지는 것도 염려스러웠지만 심리적으로 자기 자신도 그렇게 급격하게 회전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윤국이와 양현을 맺어준다, 그것은 바람이요 희망이었지만 마음이 착잡해지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시우가 떠나면서 네가 내려오면 도솔암으로 보내라 하더구나."

"저를요?"

"평사리에 가서 장서방더러 데려다 달라 해라. 그리고 오랫동안 못 가뵈었으니 너의 본가에도 가보구, 며칠 묵는 것도 괜찮겠지."

'오빠 이건 안돼요! 정말 안 되는 일이예요.'

"양현아."

"..."

"얼굴이 왜 그리 어두우냐? 무슨 근심이라도 있어 그러냐?"

"어머니."

"말해보아."

"아버지가 나오신 후에 혼인하면 안 되겠습니까?"

"?"

"아버지가 저러고 계시는데."

돌파구가 되지 못할 것을 너무나 빤히 알면서 해본 말이었다.

"철없는 소리."

했으나 웬일인지 서희의 안색이 변했다.

"언제 나오실지 기약이 없는데 어째 그런 말을 하느냐."

"..."

"낸들 어찌 그 생각을 안 해보았겠느냐. 세상이 험해서... 갈 끝에 서 있는 것 같은데, 꿈자리는 시끄럽고."

서희는 간밤 꿈에서 길상을 보았다. 서희는 윤국과 양현의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그 애들의 혼인을 나는 찬성할 수 없소. 저희들끼리 좋아서 그런다면 모를까."

"찬성 못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남매 사이로 그냥 두시오. 순리를 어기면 부작용이 생기는 법이오. 양현이는 당신 딸이 아니었소.?"

"그 아이한테 걸맞은 혼처도 없거니와 출생을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 애가 출생 때문에 기죽여가며 사는, 그 꼴 못 봅니다."

"그것은 구실이겠지."

"어째 그런 말씀을 하시오."

"양현이 누구의 딸인가. 이상현의 딸이 아니었고?"

"? 뭐라 하셨습니까?"

길상의 얼굴은 순간 무섭게 변했다. 눈이 이글이글 타듯 빛났다.

"최서희는 이상현과 이루지 못한 연분을 윤국이 양현이 그 아이들을 통하여 이루려 하는 거요.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소! 진정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말이오!"

"여보!"

"나는 빈껍데기를 데리고 산 게요. 구천에 사무치는 한이오. 내 인생이 아니었소."

하는데 갑자기 흰 바지저고리를 입은 길상의 모습은 남루한 몰골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얼굴도 어느덧 구천으로 변해 있었다.

"여보! 환국이 아버지."

"떠나면 되는 거지, 무거운 절 떠날 것 없이 가벼운 중 떠나면 되는 게요. 진작 떠났어야 했는데 말이요. 천지가 변했음 변했지 최서희가 변할 여자요?"

"아아, 아아, 왜 이러십니까! 당신의 몰골은 왜 이리 된 것입니까!"

팔을 잡으려 했으나 그는 안개같이 물러났다.

"나는 최가가 아니요! 나는 김가요! 내 자식들은 최가가 아니오!"

안개같이 사라지면서 음성만이 울려왔다.

"아아 아아."

안타깝게 팔을 휘저으며 외치다가 서희는 잠에서 깼다. 가슴이 뛰고 전신이 땀에 흠씬 젖어 있었다.

'아아 끔찍스럽다! 어째 그런 꿈을 꾸었을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아침 내내 꿈 때문에 서희는 우울했고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아서 안자를 병원으로 보냈던 것이다. 다른 볼일도 한 가지 있었기 때문에, 안자는 유모가 죽을 뒤 그가 하던 일을 대신하고 있었다. 평소 그런 말은 고사하고 일치 그같은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았던 남편이 꿈속에서 잔인하리만큼 정곡을 찌르고 나왔다는 것이 놀라웠고, 자기 자신도 미처 의식하지 못하였던 일을 추궁하는데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일보다 떠나야 한다는 마지막 부분의 말이 마치 화인과도 같이 가슴에 들어붙어 서희는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불길한 꿈임에 틀림이 없다.

'그 분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게 아닐까? 신변에 무슨 일이!'

안자가 왔다. 그는 양현이 낮아 있는 것을 보자 필요 이상 놀라움을 표시했다. 약봉지를 내려놓으며

"양현아씨 오셨구먼요."

", 안녕하셨어요?"

"얼굴이 몹시 상했습니다."

하다가 시선을 서희에게 돌리며

"의사선생님이 마님께서 지나치게 신경을 쓰시나부다고 했습니다. 요즘엔 위장병 환자가 많이 적어졌다 하시기도 하구요."

집안의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을 의식하며 애써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아무 반응이 없자 안자는 밖으로 나가서 물 한 대접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약 한 봉지를 풀어서

"드십시오."

하며 서희에게 내밀었다. 서희는 약을 받아서 입 속에 털어놓고 물을 마신 뒤

"양현아."

"."

"가서 쉬어라."

양현은 나갔다.

"가보았는가?"

양현이 나간 뒤 서희는 안자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

양현이 나간 뒤 서희는 안자에게 물었다.

"."

"어떻게 났던고?"

안자는 지갑 속에서 꼬깃꼬깃 접은 것을 꺼내어 서희에게 건네준다.

'음력 912... 한 달 넘기 남았구나.'

"저기, 말씀을 드려야 할지..."

안자는 엉거주춤 말했다. 서희가 쳐다본다.

"저기, 궁합을 보아주겠다고 자청을 하기에."

"그래서."

"말씀 드리기가 좀."

"안 좋다 하더냐?"

", 좀 살이 끼었다 하더군먼요."

잠시 동안 말이 없다가 서희는 이마를 짚으며

"쓸데없는 짓을 했다. 자리 깔아놓고 나가 보게."

아침에 걷은 자리를 다시 깔면서 안자는 스스럽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마님."

안자는 나가고 서희는 자리에 들었다. 낮에 자리에 들기는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천길만길 나락으로 가라앉는 기분이다. 서희는 돌아 눕는다. 정연하게 엮어온 그물코가 일시에 뒤엉켜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어 제자리에 돌려놔야 할지 막막했다. 이제는 아주 지쳐 버리고 만 것 같았다. 위태위태했던 세월, 제반 상황들이 간밤에 꾼 꿈으로 하여 왕창 주저앉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길상의 신변을 조심하다가 그 불길한 예감을 달래고 다독거리고 나면 또 다른 괴로움이 솟아오른다.

'내 마음속에 정말 그이가 말했듯이 이루지 못한 연분에 대한 한이 남아있었더란 말인가. 그렇지는 낳아 결코 그렇지는 않아. 나는 양현을 전생의 인연으로 생각했다. 그 아이의 행복을 원하는 마음에는 추호도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이제 와서 날더러 어떻게, 내가 뭘 어떻게 잘못 했는가.'

서희는 다시 벽쪽을 향해 돌아줍는다. 돌이켜야 하는지 진행을 해야 하는지 그것도 구분할 수 없으리만큼 혼란해 있었으나 일은 이미 서희의 소망이라는 한계를 넘어서버린 상태였다. 문제는 모두 윤국이에게 넘어간 셈이다. 윤국은 양현을 누이로서보다 한 여인으로 사랑했으며 오랫동안 감추어졌던 그의 본심을 서희는 알게 된 것이다.

'저희들끼리 좋아한다면 모를까...'

꿈속에서 길상은 그 말을 하기는 했었다. 그가 구금되기 전에 도솔암에서 두 사람의 혼인을 반대했던 일도 있었다. 서희가 그의 의중을 말했을 때 길상은 펄쩍 뛰었다.

"당신은 어는 하나도 잃지 않으려는 욕망, 그 욕망 때문에 젊은 아이들까지! 그들은 남매로 자랐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요."

서희는 그때 길상이 한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욕망이라 했었지. 욕망, 그렇다면 그 욕망이란 바로 이상현 그 사람을 집착한다 그런 뜻이었던가.'

의식 깊은 곳에 그것이 남아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양가의 결합은 다만 할머니 윤씨만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서희가 원했을 때, 그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서희가 이상현을 잊은 지는 오래였다.

'전세가 악화되면 형무소에 있는 사상범은 온전할 수가 없을 게야. 내 자식인들 무사할까?'

서희의 생각은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서희는 애국부인회의 간부였다. 처음에는 회장으로 물망이 올랐으나 길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그것을 핑계 삼아 서희 쪽에서 사양하였던 것이다. 물론 총명하고 품위가 있고 능력이 있기 때문이지만 뭐니 해도 회장이 거론된 데는 그의 막강한 재력 때문이며 지금까지 상당 액수의 헌금을 해온 그 공로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인데 서희로서는 일종의 남편의 구명책이기도 했고 아들 둘에 대한 보호책이기도 했다. 본시부터 도움이 될 만한 일인들과 연관을 가져온 터이기도 했으나 애국부인회 관계로 그들 요로의 부인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고 민감한 서희는 그들 사회 분위기가 전과 같지 않을 것을 느끼고 있었다. 영미와 전쟁이 시작되고 햇수로만 18개월이 지나간 지금, 확실히 사태는 전과 같지 않았다. 신문지상에서도 금년 들어 일본군은 과다카날 섬에서 철수를 했고, 4월에는 연합함대사령관 야모모토 이소로쿠가 비행기 속에서 전사했으며, 5월에는 또 앗쓰 섬 일군은 전멸했다는 보도였다. 소위 옥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맹우 독일도 소련의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했으며 북아전선의 독일군도 항복했으며 이태리의 무솔리니도 실각, 파시스트당은 해산이 되었다. 일본의 패색이 짙은 것은 이제 부인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것은 희망이기도 했지만 조선인에게는 절망이기도 했다. 일본은 결코 그냥 물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모두 옥쇄한다고 떠들지만 저들만 옥쇄할 것인가. 서희는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어린 처녀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으며 농부며 노동자, 심지어는 도시의 중산층 청년들까지 어디로 끌려가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언제 어느 때 학생들이 몽땅 전선으로 내어몰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 전에 조선에도 징병제가 실시되어, 그것에 대비하여 중학교에서는 그토록 치열하게 군사 훈련을 해오지 않았던가. 식량 배급의 통장은 어디든 달아날 수 없는 조선 청년들 소녀들, 그리고 중장년들의 무겁고도 무거운 멍에였다. 제 방에 가있던 양현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어머니는."

하고 양자에게 물었다.

"주무시는 모양이오."

"그럼 나 오빠 집에 갔다 온다고 어머니가 찾으시거든 말씀하세요."

"오라버니는 도솔암에 가셨는데요?"

"알아요. 올케언니 만나러 가는 거예요."

", 그럼 다녀오십시오."

거리에 나왔다. 속으로는 헐벗고 굶주리고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위기의식 속에 전전긍긍하고 있겠지만 거리는 평온해 보였다. 어차피 사람들은 사는 날까지 살 수 밖에 없었고 구르는 바위 아래 새알 같은 순간일지라도 모질게 순간을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인가. 아들은 모조리 전선에 보내었고 그들이 모조리 전사를 했건만 몬빼 입은 노파는 배급 쌀을 타러 갈 수밖에 없으며 장한 어머니로서 나라에서 주는 표창을 묵묵히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본인도 사람이며 일본인도 어머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현인신 천황 폐하에게 자식을 모조리 바친 것을 영광으로 아는가, 아니다. 그것은 불가항력인 것일 밖에 없기 때문이다. 양현은 자신의 문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을 생각하며 길을 걷는다. 자신의 문제에 도망치고 싶은 무의식적인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칼끝에 서 있는 세상이라 하셨지만 바로 도상의 세월이다. 아무 일도 없는 듯 이 거리는 평온하지만, 사람들은 무엇이든, 심지어 양은솥도 식량하고 바꾸어 며칠을 산다. 결혼? 결혼은 왜 해야 하나. 난 작은 오빠하고 결혼 안할 거야. 결단코! 영광 오빠하고도 안 할 거야!'

양현이 간 곳이 옛날의 그 박효영 의원이었다. 이복오라비 이시우가 그 병원을 인수하여 개업하고 있었다. 양현은 병원 문을 밀고 들어간다.

병원을 통하여 살림집으로 들어가는데 양현은 복도가 어두운 탓도 있었지만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현기증을 느낀다.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일하는 여자가 나오다 말고

"아이고."

하다가

"인혜 어머니, 인혜 고모님 오십니다."

안을 향해 부산스럽게 말했다. 시우댁네 정란이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어서 오시오. 아가씨."

정중하게 말했다. 평범한 용모였지만 몸집이 작고 재바르게 보였다.

"손님 계신가 본데."

양현이 주춤했다.

"소림 언니예요."

방안으로 들어간 양현은 구면인 양소림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셨습니까."

"오래간만이군요."

소림은 반갑게 말했으나 다소 당혹해하는 빛이 있었다. 소림은 양현을 민날 때마다 처음에는 당혹해하는 것이다. 양현이 환국의 누이로 자랐기 때문이며 환국을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소림과 정란은 고종사촌관계였으며 남편의 직업도 같았기 때문에 서로의 집을 자주 드나드는 사이였다.

"언제 내려오셨어요?"

정란이 물었다.

"오늘, 새벽차로 왔어요."

"축하합니다. 아가씨.

"나도 축하해요."

소림이도 말해놓고 빙긋이 웃었다. 양현은 다만 망연한 표정으로 그들은 번갈아 바라본다. 소림이나 정란은 다같이 양현이 쑥스럽고 부끄러워 그러는 줄만 안다.

"오빠 윤국씨랑 함께 도솔암으로 가신 것 아시지요?"

"들었습니다."

"참 잘 됐어요. 오빠가 얼마나 좋아하던지, 조선 천지 다 다녀도 어디서 그만한 신랑감을 구해오겠느냐 하면서."

"정말이야 나도 처음 얘길 들었을 때는 좀 어리둥절했어. 어딘지 이상하기도 하구, 하지만 곰곰히 생각하니까 이상할 것 하나도 없지 뭐니? 정말 잘된 일이고 기가 막히는 한 쌍이 될 거야."

소림은 진심으로 말했다.

"하동의 어머님께서도 여간 기뻐하시는 게 아니예요. 한시름 놨다, 이제는 걱정 없다 하시면서 말예요."

양현은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등을 돌려야 하는 앞으로의 일이 무섭고 무거운 바윗돌같이 사슴을 짓누르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아니예요! 그게 아니란 말이예요! 마음속으로 울부짖듯 했으나 입을 떼지는 못한다. 입을 떼지 않았던 것은 양현의 가냘픈 이성 때문이다. 자신의 의사를 어머니나 윤국이를 제쳐놓고 제3자에게 먼저 토설할 수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을. 그러니 재갈 물린 꼴이며 소름이 돋아나는 기분일 수밖에 없었다.

"언니, 학벌도 그만하면 최고 아니예요!"

"그럼."

"대학 나왔다고들 하지만 알고 보면 대개 전문부지 학부까지 나온 사람은 그리 흔치 않아요. 전문부 나와 가지고 징용 피하느라 경찰서 순사로 들어간 사람도 두 명이나 있어요."

얘기가 묘하게 꼬인다.

"그게 정말이니?"

", 정말이예요. 누구누구 하면 알 만한 사람인걸요. 그것도 교제를 해서 들어갔다나 봐요."

"기가 막혀서."

얘기는 자꾸 엉뚱한 곳으로 흘러간다.

"세상이 그렇게 돼버린 걸 어떻게 해요? 할 수 없지."

"그렇다고 돈 쓰고 공을 들여서, 일본까지 뭘 하러 공부하러 가느냐 말이야."

"처음에야 뭐 순사될려고 그랬겠어요? 전문부 나와 가지고 사실 조선 사람들 취직자리가 어디 쉬워요? 놀고먹기 십상이지. 소사 급사 서기 순사가 고작 아니예요? 고등문관에나 패스하면 모를까, 그건 하늘의 별따기,선생이나 의사가 최고급이지 뭐. 어떡하겠어요? 놀고먹다가 징용에라도 잡혀가면 그것으로 그만이에요. 살아서 돌아오기 어렵다 하더구먼요. 차라리 군대 가는 편이 낫다 그러고들 말하대요."

"하긴 그래. 징용 안 가려고 성한 다리를 뿌러뜨리는 사람도 있다든가."

"어마, 얘기가 왜 이리 돌았지요?"

두 여자는 웃었다. 그러나 양현은 웃을 수가 없었다. 정란이 일어섰다. 밖으로 나갔다. 돌아오면서

"저녁 준비 시켰으니까 언니도 잡숫고 가세요. 형부는 밤늦게 오신다면서요?"

"."

"무슨 일인데요?"

"유지들이 모여서 무슨 회의를 한다나? 회의 끝나면 자연 술도 마시게 될 거라 하면서."

"아이구, 남자들 없으니 편하지, 안 그래요. 언니?"

"그래, 일 년 열두 달 한 지붕 밑에 있으니까 때론 숨이 막혀."

소림은 전적으로 정란의 말에 동조했다. 양현은 가라앉다가는 떠오르고 가라앉다가는 떠오르듯 수없이 자신을 다스리고 또 다스리곤 했다. 소림이나 정란도 차츰 양현이 뭔가 깊이 상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18세 소녀도 아니겠고 어엿한 사회인인 여의사가 결혼한다 해서 들떠 있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렇게 깊이깊이 가라앉는 이유는 뭣일까? 그러나 두 여자는 다같이 그것을 물어볼 수가 없었다. 소림이도 원래 그렇지만 정란이 역시 맘이 약하고 선량한 성품이었으니까.

여자 세 사람은 넉넉한 둘레판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양소림의 손이, 그 손들에 있는 흉스러운 혹이 눈에 띄게 된다. 그러나 양소림은 그것을 극복한 듯 보였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그의 결혼 생활이 순조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니."

"."

"요즘에도 그 여자 형부한테 편지하나요?"

"아니."

밥이 입속에 가득해서 그랬던지 소림은 목멘 소리로 말했다.

"무슨 여자가 그런 게 다 있어?"

"그때 이모랑 함께 내려왔을 때, 어머니가 좀 지나치게 푸대접을 했거든. 아마 그래서 앙심을 품은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그래도 그렇지. 그게 어찌 언니한테 와? 안 그래요?"

"글쎄, 좀 정상이 아닌 것 같기는 해. 인상도 고약했고, 자칭 예술가라 하니까 그런가 부다 하기는 했지만."

"형부가 혹 틈을 보인 건 아니예요?"

정란은 웃으며 소림을 놀려먹듯 말했다.

"얘두, . 틈을 보일 사람이 따로 있지, 나이도 많고 이쁘기는 커냥 숭해. 이모가 데리고 왔으니까 대접 상 그날 밤 술을 몇 잔 함께 했을 뿐이야. 틈을 보일 시간이나 있었나?"

"순진하기는. 아무렴 형부가 그런 여자한테 관심을 보였겠어요?"

"이모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 아예 세상을 버린 것같이 자포자기하고, 그런 여자는 왜 상종하는 건지."

양소림은 추호도 남편을 의심하지 않았다. 얘기의 장본인은 다름 아닌 배설자였다. 그는 서울로 돌아간 뒤 일부러 소림이 보란 듯 허정윤에게 편지를 보내오곤 했다.

"당신, 어떻게 된 거예요?"

소림이 편지를 내밀며 물었을 때 허정윤은 정신이 번쩍 드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그날 밤 촉석루에 나가지 않았던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던가를 깨달은 것이다. 말하자면 응해 오지 않았던 허정윤에 대한 분풀이, 심통 같은 것이었으며 반은 앙심, 반은 장난삼아서 집안에 분란을 일으키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미친 계집이오."

정윤은 비로소 촉석루에서 만나자는 배설자의 전화 얘기를 털어 놨다.

"물론 가지 않았지. 당신도 알지 않소. 그날 밤 일찍 들어가서 잠자리에든 것."

그런데 그 일을 알게 된 친정어머니 홍씨는 노발대발 서울에 있는 동생에게 편지로써 크게 나무랐던 것이다. 홍성숙은 자신의 행적이야 여하튼 소림을 지극히 사랑했던 만큼 배설자를 찾아가서 대판 싸움을 했다는 것이었다.

"정란이 너 시동생도 곧 장가보내야 하지 않아?'

소림은 새로운 화제를 꺼내었다.

"학교를 마치야지요."

"아니, 여직도 졸업을 못했어? 누이도 졸업을 했는데."

"그게 다니던 학교가 형편없는 사립이었잖아요. 인혜 아버지도 그걸 늘 마음에 기고 있었는데 작년에 다시 시험을 쳐서 와세다 대학에 들어갔어요."

"그거 참 잘 됐구나."

"그 동안 대련님도 자존심이 상해서 술 마시고 성질도 영 거칠어져서 걱정들 했어요. 그러잖아도 그이 요즘 아주 느긋하게 기문이 좋은가 봐요. 아가씨 혼사만 끝나면 걱정할 것 없다 하면서."

"이서방 형제간의 우애가 보통 아닌가 봐."

"그건 그래요. 진작부터 아버님을 대신해 살았기 때문인지 책임감도 강하구. 도련님이 시험에 떨어질 때마다 그이가 먼저 앓아 누웠다니까요. 이번에도 병원일 바쁜데 만사 제쳐놓고 윤국씨를 따라갔지 뭐예요. 하나뿐인 누이동생이다, 하면서."

정란이 힐끗 양현의 눈치를 살피는데 양현은 얼굴을 숙였다.

저녁이 끝나고 소림이도 돌아간 뒤 갓난아기를 돌보는 새 양현은 돌아갈 생각도 않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란에게 할 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아가씨 어디 몸이라도 불편하세요?"

왜 그렇게 우울하냐 묻고 싶었지만 정란은 간접적으로 물었다.

"아니오, 기분이 좋지 않아서 그래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하며 정란이 긴장하는데 뜻밖에도 시우가 들어왔다.

"아니 여보!"

"오빠."

정란과 양현은 동시에 불렀다.

"양현이 왔구나."

시우는 자리를 털썩 주저앉으며 기분 좋은 표정으로 양현을 쳐다보았다. 그는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되긴? 윤국이가 가라 해서 왔지. 누구 명이라고 거역하겠나, 아암 가라면 와야지."

"그건 또 왜 그래요?"

정란이 좀 불안한 듯 물었으나 그 말 대꾸는 없이

"양현아."

"."

"너같이 지성적인 여성에게는 상투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말이야, 너 굉장히 복 많은 애다. 윤국이 그 자식 원래 똑똑하다는 것, 내 모르는 바는 아니로되 그 자식 사내 중에 사내야. 잘난 놈이다. 이 나 이시오 두 손 바짝 들었어."

",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여보 저녁은 어떻게 했지요?"

"저녁 안 먹어도 배불러."

"이이는? 샘나게 자꾸 그러실 꺼예요? 누이동생만 보였지 마누라 얼굴은 눈에 뵈지도 않는 모양이지요?"

정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농을 걸었다,

"이봐요. 인혜 엄마, 이부사댁 자부가 그래도 되는 거요? 청백리 이부사댁 법도가 아니 그렇다는 것 아시오 모르시오."

정란은 킥하고 웃는다.

"아가씨 가관이지요?"

"허허헛."

"저녁 차려요?"

"어디가 경방단 단장인가 뭔가 하는 작자를 만났소. 우리 병원 환자 아니요."

"해서요?"

"술 한 잔 마시자고 해서 좋다! 하고 따라갔지요."

"자알 했소. 그 따위 날건달하고 어울렸으니 출세했군요."

"내 기분이 좋고, 술 생각이 났던 참이라 사양할 것 없지."

"청백리 이부사댁 당주가 친일파하고 어울린 거는 썩 잘하신 일이지요."

"허어? 말할 줄 아네? 양현아."

"."

"너 내일 평사리에 가거라. 윤국이 거기 와 있다."

"."

", 네 하지만 말고, 왜 그리 기운이 없어."

"아니예요, 오빠."

정란은 그들을 바라보며 왠지 일말의 불안을 느낀다. 오라비는 한없이 들떠 있고 누이는 한없이 가라앉고

'씨 도둑질은 못한다 하더니, 나란히 앉아 있으니까 어쩌면 저렇게 닮았을까? 하기는 누이가 훨씬 더 미인이지만, 행복의 조건이 넘치고 넘치는데, 그런데 왜 저렇게 상처받은 사람같이 우울해 있는 걸까?'

"아무튼 세상이 더럽게 돌아가고는 있다마는 우리 집은 경사의 연속이니 어째 미안한 생각도 드는구나. 돌아가신 할아버님께 죄송한 생각도 들구, 하지만 일본은 머잖아 망할 게야. , 암 윤국이는 큰 기둥이야. 처음에는 다소 어색하고 난처하기도 하겠지만 시일이 지나면 그것도 없어질 것이고... 윤국이 잘난 것도 그렇지만 양가의 오랜 인연을 생각하더라도 썩 잘된 일인 게야."

"당신 왜 그리 말씀이 많아요? 어째 두렵습니다."

"정한의 말에 시우는 다소 무안한 타는 듯했으나

"말이 없어도 걱정, 말이 많아도 걱정, 여자들이란. 양현이는 제 발 그 뽄 보지 말어. 알았냐?"

"오빠 나 갈래요."

"좀더 있다 가지?"

"내일 평사리 가야 하니까요."

"음 그건 그렇다."

"집에까지 좀 데려다주세요."

"그러지."

시우는 얼른 일어섰다.

"언니 저 갈게요.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양현은 우울해 있는 자신을 근심스럽게 바라보던 정란의 눈빛을 생각하며 말했다. 밖으로 나온 오누이는 나란히 밤길을 걷는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번화가에도 불빛은 많지 않았으며 상가들은 호젓하게 어둠에 젖어 있는 것 같았다. 천륜이라 했던가. 그것은 무엇일까? 참으로 신비한 것이었다. 물론 세상에는 그렇지 못한 경우도 얼마든지 있긴 있다. 이복형제가 원수지간이 되어 지내는 사람도 흔히 있다. 그러나 시우는 처음부터 양현을 애틋하게 생각했으며 호적을 옮기는 일도 그가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다. 민우는 아버지에 대한 환멸 때문에 거부 반응을 했으나 시우는 그렇지가 않았다. 귀한 씨앗을 걷어들이듯. 원래의 성품은 냉담한 편이며 의지적이었는데 양현에 대해서는 오빠인 동시 아버지와도 같은 연민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양현에게 육친이라고는 시우와 민우 이외는 없었으니까.

"오빠."

"."

"나 이 결혼 못해요."

"? 뭐라 했나!"

"이 결혼 못해요. 차라리 죽겠어요."

시우는 걸음을 딱 멈추었다. 어둠 속에서도 낭패하는 그의 모습을 역력히 느낄 수 있었다.

"일이 왜 이렇게 되어가지?"

혼잣말처럼 시우는 중얼거렸다.

"오빠에게도 그렇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인지 그거 저도 알아요. 하지만 이 결혼 한다면 더 깊은 상처를 주게 될 거예요. , 돌이킬 없는 상처를요."

"억장이 무너지는구나."

", 만일 집이 파탄지경에 빠져서 저를 팔아야 한다면 아무리 싫은 사람이라도 팔려가겠어요. 하지만 이 결혼만은 안돼요. 오빠 절 이해해주세요."

"이유가 뭐냐?"

"..."

"이유가 있을 거 아니겠어? 윤국이가 싫으냐?"

"아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오빠예요. 저의 오빠란 말이에요.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에요."

양현은 흐느낀다.

"그게 이유의 전부냐?"

시우는 걷기 시작했다. 양현도 따라 걷는다.

"그 기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시일이 지나면 해소될 수 있는 일이고 그런 경우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지 않아. 윤국이는 한 여자로서 너를 깊이 사랑하고 있어. 그가 여태 결혼을 안 한 것도 너 때문이며 혼자서 많이 번민을 한 모양이야. 너도 어린 나이가 아닌데 그런 여태까지의 감정을 바꾸는 데 뭐가 그리 힘들겠냐."

"..."

"혹 너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거 아니냐?"

시우는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대답이 없자 다급해진 시우는

"말해. 기왕, 둑은 터진 거다."

"있어요."

순가 시우의 두 어깨가 축 처졌다.

"끔직스런 일이다."

시우는 다시 걷다 말고 서 있는 양현에게 말했다.

"그게 누구냐!"

"아직은 말할 수 없어요."

"떳떳하다면 돼 말을 못하냐!"

"오빠."

두 사람은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까지 말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내일 평사리 간다는 게냐?"

"피할 수 없지 않아요. 나 그냥 도망갈 생각 몇 번 했는지 몰라요."

"가서, 그러면 어쩌겠다는 겐가."

"..."

"윤국이 어머님한테는 말씀 드렸어?"

"아니요. 오빠가 처음이에요."

"! 자알 했다 자알 했어! 네가 나한테 이런 실망 안겨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물며 윤국이는 어떻겠는가. 정말 이럴 수는 없다."

하다가 땅이 꺼지게 시우는 한숨을 내시는 것이었다.

"어떤 놈이 그리 잘났어! 이놈은 그만 다리 몽댕이를,"

"오빠."

"..."

"저를 용서해주세요. 땅 끝에 혼자 서 있는 것 같아요. 너무 감당하기 힘들어요. 아까 오빠가 기뻐했을 때 전 그 자리에서 그냥 눈처럼 녹아버렸음 싶었어요."

"..."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며, 태어났더라도 온갖 천대 받아가며 자랐더라면."

양현은 더욱 격렬하게 흐느껴 운다.

"다 왔다. 들어가보아."

의외로 시우의 음성은 부드러웠다.

"오빠."

"더 이상 너에게서 무슨 말을 듣겠느냐. 나로서는 속수무책이다. 자아 들어가아."

시우는 허탈한 것같이 발길을 돌렸다. 양현은 눈물 젖은 얼굴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별빛이 너무나 찬란했다.

"엄마!"

그 엄마가 서희였는지 봉순이였는지 양현이 자신도 구별이 되지 않았다.

", 저 별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싶어요. 영원히 숨어버리고 싶어요. 엄마."

집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오세요? 양현아가씨."

안자가 마루에서 내려오면서 말했다.

"어머니는요."

"기다리시다가 막 잠이 드셨습니다."

"아프신 데는."

"좀 가라앉으신 모양입니다. 저녁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오빠 집에서 먹었어요."

캄캄한 방으로 들어간 양현은 전등을 켰다. 이튿날 아침, 양현은 평사리를 향해 떠났다. 시우와 함께 도솔암으로 간 윤국의 의도나 또 시우를 돌려보내고 혼자 평사리에 남은 윤국의 심정 같은 것을 양현은 깊이 헤아려볼 겨를이 없었다. 하여간 윤국이를 만나야만 했다. 만나지 않고 연기처럼 그냥 사라져버리고 싶은 충동과 절실하게 만나고 싶은 마음이 상충하는 자기 자신을 간신히 싸안고 하동 포구 나룻배에 몸을 실은 것은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무렵이었다. 본가에는 들르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었다, 평사리에 올 때는. 하동을 지나치면서 본가에 들르지 못하는 것은 양현의 의지 밖의 일이었다. 큰어머니 박씨가 그 일을 두고 섭섭해 하는 말을 했으나 또 박씨의 섭섭함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양현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집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평사리에 가서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만 할 것처럼 발이 그곳으로 향해지지 않는 것이다. 언제부터였는지 하동 포구는 양현에게 괴로운 곳이 되었다. 본가를 의식하게 되는 것도 그랬고 섬진강에 몸을 던진 생모를 떠올려야 하는 것도 그러했다. 나이 들면서 그것은 더욱 깊어지는 상처였다. 그러나 양현은 지금 그러저러한 생각이 머리속에 없었다. 뱃바닥에 가방을 의지하여 웅크리고 앉은 자기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왜소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세월이 되돌아오기라도 한 듯 점점 자기 자신이 작아져가는 것 같았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고아, 계집아이. 성숙해진 여자도 아니었으며 여의사라는 그 빛나는 사회적 지위도 간 곳 없고 가지가지 누릴 수 있었던 남다른 특혜 역시 환상이었던 것만 같았다. 잎을 털어버리고 헐벗은 겨울나무, 바람 부는 노지에 홀로 서있는 빈집 같은 자기 자신.

'옛날과 같은 나의 오빠... 작은오빠였다면 내가 지금 오빠를 찾아가는 것은 아마도 고통스런 내 애정 문제를 의논하기 위하여, 그래 나는 맨 먼저 작은오빠에게 고통을 털어놨을 거야. 그러기 위해 지금 가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무라고 야단치고 설령 때린다 하더라도 나는 지금 이같이 불행하지는 않을 거야.'

언제나처럼 강물은 짙푸르렀다. 하늘도 푸르게 드높았다. 나룻배에는 승객이 몇 사람 되지 않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들은 모두 숨을 죽인 듯 말이 없었다.

"점심은 어떻게 됐는고?"

연학이 묻는다.

"곧 될 깁니다."

건이네는 부리나케 부엌으로 들어갔다. 윤국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성냥을 그어대는 그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흥분과 불안이 얼굴에 역력했다. 연학이 양현의 기색을 살피면서 물었다.

"인천의 병원은 그만두고 내려왔나?"

"아니오."

"그럼?"

"휴가를 받았어요."

"휴가를 받다니?"

"..."

연학은 대답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서울 식구들은 모두 편안한지 모르겄네?"

"들르지 않고 바로 왔어요."

"일간 나도 한분 올라가기는 가야겠는데."

하자 윤국이가

"어째 안 들르고 그냥 왔어?"

양현에게 말했다.

"어쩌다가 그리 됐어요."

윤국은 초췌한 양현의 모습이 마음에 걸리는 둣 눈을 내리깔았다.

"오빤...오신 지 오래 됐어요?"

"일주일쯤."

그러고는 말이 끊겼다.

"요즘 서울 사람들은 머 묵고 사는지 모리겄네."

침묵을 휘저어버리듯 연학이 말했다.

"배급 타먹고 살겠지요."

역시 무뚝뚝하게 윤국이 말했다.

"배급 가지고는 태부족이니께 그러는 거 아닌가."

"시골에 옷가지 일용품 가지고 곡식을 구해오나 봐요."

양현은 간신히 말했다.

"양현이 니 임교장 소식 모르제?"

"."

"많이 좋아졌더만. 윤국이 자네도 임교장 만나보았제?"

". 서울에는 안 가시겠다 하시더군요."

"친구 따라 강남 가더라고, 산골에 모여서 신선돼 갈려는지 온."

비꼬는 투가 없지도 않았다. 윤국은 쓴웃음을 띠었다.

점심은 세 사람이 함께 둘러앉아 먹었다. 양현은 밥보다 물을 많이 마셨다. 안 내려가는 밥알을 어거지로 내려 보내려는 듯 물을 마시는 것이었다. 점심이 끝나자 좀 쉬라는 연학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물가에 가서 손발과 얼굴을 씻은 양현은 안방으로 들어와서 드러누웠다. 이리저리 몸을 뒤쳤으나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잠을 자려고 드러누웠던 것은 아니었지만, 윤국이와 연학은 사랑으로 간 것 같았다. 건이네도 설거지를 끝내고 채마밭으로 나갔는지 집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다만 시계 소리가 뇌수를 찍듯 채칵채칵 소리를 내고 있었다. 쉬기는커녕 긴장은 한층 고조되어 가슴을 짓누르기만 하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배어났다.

"베주머니에 의송 들었더라고 장서방 사람됨이 그렇다."

무슨 말끝에 나온 것인지 어머니가 유모보고 하던 말이, 아무런 그럴 계기도 없이 양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주 어릴 때 일이었던 것 같았다.

"어머니, 의송이 뭐에요? 그런 과일도 있나요?"

했더니 어머니는 유모와 함께 웃었다.

"그것은 말입니다. 과일이 아니고 송사에 지게 되면 더 높은 사람한테 항소하는 문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양현아."

"네 어머니."

"그 속담은 겉보기에는 별 수 없이 보이지만 실상은 똑똑한 사람이라는 뜻이니라."

"..."

전혀 뜻밖의 기억이 되살아났다는 것은 그럴 계기가 있든 없든 긴장을 완화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어쩌면 그것은 본능적인 자구책이었는지 모른다.

"양현아."

윤국의 목소리였다. 양현은 숨을 죽인다.

"양현아 자는 거야?"

"아니오."

"바람 좀 쏘이러 안 나가겠어?"

"..."

"피곤하면 관두고."

"아니오. 나갈게요."

양현은 일어났다.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마루로 나갔을 때 윤국은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양현을 힐끗 쳐다보았다. 보기만 하면 눈에 연신 웃음이 실리곤 했던 그 눈이 아니었다. 뭔지 형용하기 어려운 그런 눈빛이었다.

함께 집을 나섰다. 해는 서편 산마루에 걸려 있었다. 당국화가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윤국의 걸음은 빨라졌다. 양현을 의식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마치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그는 앞서서 급히 걸어가는 것이었다. 한복을 벗어버리고 감색 즈봉에 역시 감색의 긴팔 셔츠를 입은 윤국은 발 빠르게 걸으면서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간 곳은 강가, 옛날 숙이가 곧잘 빨래를 하러 오곤 했던 장소였다. 사춘기 무렵, 윤국의 엷은 연정이 스민 곳이다. 그 일은 거의 다 잊고 있었지만, 무릎을 세우고 무릎 사이 모래밭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호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내어 붙었다. 양현은 모래를 밟고 내려가다가 잠시 멈춘다. 멈추어서 윤국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윤국의 뒤통수는 여전히 보기가 좋았다. 진주 남강에서 놀다가 날이 저물어 윤국에게 업혀서 집에 돌아온 어릴 적 일이 생각났다. 양현은 강 하류 쪽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윤국이 옆에 가서 그도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무슨 새인지, 새는 물장구를 치듯 물 위에 두 발을 담갔다가는 날아오르곤 한다. 둑길을 도부꾼이 노래를 부르며 간다.

"얼굴이 왜 그래?"

양현을 쳐다보지도 않고 담배연기 뿜어내며 윤국이 말했다.

"직장 일이 고단했나?"

"아니오."

"그럼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건가?"

역시 양현을 보지 않고 말했다. 상당한 거리를 두고 아주 자제하는 음성이었다. 양현의 대답이 없자 무릎 사이로 모래밭을 내려다보던 윤국은 피우던 담배를 강물을 향해 휙 던진다.

"웬 잠자리가 이렇게 많아."

하다가 이야기를 별안간 돌렸다.

"얘기 듣고 왔나?"

"."

"무슨 얘기?"

"오빤 무슨 얘길 말하는 건가요?"

양현은 설움이 복받쳤다. 윤국은 정말 타인 같았다. 그보다 심술궂기까지 했다.

"우리 혼인 얘기."

"..."

"모르고 온 건가?"

"아니오."

"그래서."

"어머니는 말씀 안하셨어요. 서울 새언니가."

"어떻게 생각했나."

윤국의 목소리도 그러했으나 분위기는 압축기에 넣어서 눌러버린 듯 딱딱했고 뭔가 갑자기 정지된 것처럼,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양현에겐 느껴졌다.

"오빠, 그건 안 될 일이에요."

윤국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나 심한 동요는 나타내지 않았다.

"어째서."

절망적으로 신음하듯, 그러나 역시 태도는 평이했다.

"오빠잖아요."

"..."

"저는 어느 순간에도, , 오빨 남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남자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 말이군."

"..."

"이유는 그것뿐이야?"

"또오."

하는데 윤국은 양현의 입에서 나올 말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낀 듯 가로막아서 말했다.

"예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양현이 너가 들어서는 순간...그걸 느꼈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 오빠. 이젠...우리 남매가 아닌가요? 우리 인연은 이것으로 끝인가요? 오빠."

"인연이 저주스럽다!"

"으흑."

양현은 울음을 터뜨렸다. 무릎 위에 얼굴을 묻고 절실하게 흐느껴 운다. 윤국은 돌이 된 듯 앉아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일어나야지, 이곳을 떠나야 해, 하면서도 몸이 모래밭에 붙박힌 듯 움직일 수 없었다. 네가 들어서는 순간 그것을 느꼈다, 하기는 했으나 윤국의 예감은 그보다 휠씬 전부터 있어온 것이다. 어쩌면 양현을 누이 아닌 한 여자로 의식했을 때,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그 순간부터 윤국은 내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란 괴로운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도 양현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수없이 생각하곤 했었다. 어머니한테서 양현과의 혼인 얘기를 들었을 때 전신에서 피가 끓는 것을 느꼈고 또 피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환희인 동시 일종의 공포 같은 것이기도 했다. 양현은 늘 그의 마음속에서 피안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정체 모를 불안이 있었다. 양현이 사랑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불안이었다. 그리고 그 상대에 대해서는 상상의 문에다가 자물쇠를 걸어놓고 굳게 밀폐해 버렸던 것이다. 스스로 망상이라 생각했으며 터무니없는 일로 치부했다. 그러나 그것은 늘 꿈틀거렸고 숨통을 막는 것만 같았다. 3,4년 동안 동경 생활에서도 그랬지만 조선에 돌아와도 그는 늘 우울했다. 물론 그것은 양현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투옥과 윤국이 관계하고 있는 조직이 여러 번 위기에 봉착한 현실의 정세 때문이기도 했다. 조선 유학생 몇이 주축이 되고 운동에 경험이 있는 노동자 출신을 포함하여 조직이 된 사회주의 성향의 비밀결사였는데 조직의 두 명은 이미 체포되었고 관헌에게 쫓기는 사람도 몇 있었다. 그러나 조직의 성격상 결사의 윤곽은 드러나게 돼 있지 않아 윤국에게까지, 아직은 위험이 미치지 않고 있었다. 연장자이며 농과대학을 졸업했고 Y대학에서 다시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는 윤국은 비밀결사의 이론적 지도자로서 상당히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그러한 처지에서 사실 윤국은 결혼 운운할 계제는 아니었다. 그는 결혼하기 위해 귀향했던 것은 아니었다. 가능하다면 약혼 정도는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그는 나오라는 어머니의 편지를 받았을 때 일단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망상에서 떠나고 싶었고 양현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다만 양현을 누이 아닌 여자로 한번 안아보고 싶었다. 살벌하고 긴장의 연속이며 메말라가는 일상에서 양현은 지극히 인간적이며 순수한 것을 지탱하게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 또 다른 이유는 뭐냐."

윤국은 기어이, 결국 묻고 말았다.

"저기."

"말해. 이제는 괜찮다."

말로는 그랬으나 윤국은 흡사 지옥 같은 곳을 헤매고 있는 기분이었다.

", 누굴, 사랑하고 있어요, 나룻배 타고 오면서... 그 일을 의논하기 위해 오빠를 찾아가는 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어요. 오빠 절 용서해 주세요."

"..."

윤국은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성냥을 그어대는데 아까 집에서 그랬던 것보다는 그의 손은 훨씬 심하게 떨고 있었다.

"오빠."

"그가 누구냐."

"저어."

"대학생 놈이냐? 유부남이냐? 아니면 동료 의사냐!"

", 아니예요.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제발."

", 영광이오."

하는데 윤국은 두 손에 모래를 꽉 움켜쥐고 벌떡 일어섰다. 창백하다 못해 그의 얼굴은 백지장이었다. 눈은 형형이 빛나고 있었다.

"오빠! 날 용서해주세요."

"너 지금 뭐라 했지! 한 번 더 말해보아."

"제발."

"영광이라 했나? 송영광 그 자라 했나?"

양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돼! 그건 안돼!"

윤국이 소리쳤다.

"그 죽일 놈! 만일, 잘 들어. 양현이 너, 단념을 안 한다면 나는 그 놈을 죽일 거다."

"그러지 말아요. 오빠!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그놈만은 안 된다. 하늘이 깨어지는 한이 있어도 그놈만은 안 된다. 그 놈은 인간 이하, 악마에 들린 놈이다. 너를 망가뜨릴 거야. 너를 못 쓰게 망가뜨릴 거야! 그놈은 지옥에서 왔다! 음탕하고 무책임하고 영혼이 썩었어!"

윤국은 완전히 이성을 잃고 있었다.

"오빤 백정에 대해서, , 심한 편견을 갖고 있어요. , 그럼 안 되는데. 안 되는 일이에요. 제발 그 그러지 마세요."

윤국을 올려다보며 말하는 양현의 눈에 눈물이 또 가득 고인다.

"저라고 뭐 별수 있나요? 저도 기생 딸인걸요. 세상에서 멸시하는, 안 그래요? 오빠!"

윤국은 고개를 꺾었다.

"안 된다 양현아."

"왜 안 되나요? 어째서 그렇지요?"

"나하고 약속해. 그를 단념하겠다고 약속해."

"안 한다면요."

"해야 돼."

"그럴 수는 없어요."

"그놈은 전과자야! 한 여자를 망쳐놓은 전과자란 말이야! 나쁜 놈이다! 도덕심이 마비된 파렴치한이다!."

윤국은 또 한 번 이성을 잃는다. 양현은 어리둥절하며 윤국을 쳐다본다.

"몰랐어? 서울 가거든 형님한테 물어보아."

하다가 윤국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다.

"아아. 가아! 집으로 가아! 어디든 가버려! 내 앞에 나타나지 말어!"

"..."

"제발 양현아."

"..."

"날 혼자 있게 내버려두어. 견딜 수가 없다. 부탁이야."

양현은 비실거리며 일어섰고 몇 발짝 걸어가다 뛰었다. 뛰어서 그는 둑길로 올라간다. 그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있던 윤국은 모래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모래 바닥을 주먹으로 쳤다. 사방은 어두워져 오고 있었다. 어느새 해는 지고 없었다. 둥지로 돌아가는 새들의 모습도 끊기고 없었으며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 길로 윤국이는 하동으로 나왔다. 옛날 동학군이 쳐들어왔을 때 벼슬아치들의 목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는 곳, 강가 송림까지 온 윤국은 강쪽을 살핀다. 하얀 모래가 반달에 반사되어 사람 하나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룻배가 강가에 매여 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윤국은 급히 그곳까지 내려간다.

"사공 없소?"

소리를 지른다. 모래밭에 꺼무끄름하게 보이던 사람이 돌아보았다.

"와요."

하며 그는 되돌아왔다. 늙수그레한 사공이었다.

"배 나갈 수 있소?"

"하참, 방금 다녀왔는데."

"후히 줄 테니 건넙시다."

"그럽시다."

사공은 선선히 말하고 배를 매어둔 밧줄을 푼다. 윤국은 배에 올랐다. 사공은 장대로 배를 밀어내면서

"술 생각이 나서 가는 거요?"

하고 실죽 웃었다.

"그런갑소."

강 건너에는 유명한 횟집이 하나 있었다. 섬진강에서 건져 올린 물고기가 횟감이었는데 특히 은어회는 천하 일미였다. 작년 여름 윤국은 밍우랑 함께 그곳에 간 적이 있었다.

"젊은 사람 나다니기가 상그러분데 조심하소."

장대를 걷어 올리고 노를 저으며 사공이 말했다.

"그래서 도둑고양이처럼 밤에 오는 거 아니겠소."

"면소에서 통지하고 소집을 해서 데리고 가던 것도 이자는 옛일이요. 대나깨나 마구잡이로 끌고가이 이런 시절에는 무자식이 상팔자요."

"징용 말입니까?"

"그거 아니문 머할라꼬 사람 끌고가겄소. 갔다한 연에는 돌아왔다는 사람이 없인께."

"전쟁이 끝나야지요."

"어느 세월에? 씨 다 말리고 전쟁 끝나믄 머할꼬?"

"그래도 살아남는 사람은 있을 겁니다."

"일전에도 강가에서 양복쟁이 몇 놈이 서성대고 있더마는 나룻배가 닿자마자 젊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나이 지긋한 사람까지 끌고가더마요. 모친 약 지으러 왔다가 그리되고 보니 약이나 지어주고 오겄다, 통사정한들 무슨 소용이 있겄소. 절은 댁네는 또 울면서 남정네를 뒤쫓아가고 참말이제 눈 뜨고 못 보겄더마. 저승차산들 어디 그놈들 같을라고."

"..."

"덕분에 살판난 기이 면소 읍소 서기 놈들이지. 그놈의 집구석에 가믄 없는 기이 없다 하더마. 징용을 면해볼라꼬똥 묻은 중우까지 팔아서 그놈들 배애지다 쑤셔넣는 판국인께."

"그런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소. 어차피 갈 데까지 가겠지요."

"하여간 면소 읍소 서기 놈들 살판났다 카이. 아까도 면소 서기 놈이 읍소 서기 놈 몇 데리고 건너갔구마."

윤국이 배에서 내릴 때

"좀 있다가 이 배가 오기는 올 기요. 그놈들이 오라 했이니. 하여간 젊은 양반 몸조심하소."

"고맙소."

윤국은 오르막길을 올라간다. 마을도 아니었고 가파로운 언덕위의 강을 내려다보는 곳에 그 횟집이 한 채 있었다. 횟집에 들어서자

"저물기 오시네요."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말했다. 벌써 요란벅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사공이 말하던 그 서기 패거리인 것 같았다.

"혼잡니까?"

여자가 또 물었다.

"그렇소."

"최참판댁 서방님이제요."

"어떻게 알았소?"

"작년에 이부사댁의."

"."

총각이었지만 삼십이 가까운 윤국을 보고 여자가 서방님이라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윤국은 조그마한 방에 안내되었다.

"횟거리가 씨원치 않은데."

"술만 있으면 괜찮소."

"옆방이 좀 시끄럽제요."

"그런 것 같군.'

"여기서는 굿을 쳐도 모린께 저리 야단입니다."

이윽고 술상을 차려왔다. 깔끔하게 정성들여서 차려온 술상 같았다. 윤국은 술 한 잔을 부어놓고 우두커니 그것을 내려다본다.

'송영광, 정말 그는 도덕심이 마비된 파렴치한인가? 아니다. 그는 정말 인간 이하인가? 그것도 아니다. 여자들 농락을 일삼는 색마인가? 그것도 아니다. 악마에 들린 것도 지옥에서 온 사내도 아니다. 왜 그런 말을 했지?'

윤국은 술을 들이켠다. 속이 타는 것처럼 아팠다.

'하지만 그는 안 돼. 신체가 불구인 것처럼 결코 정성적인 인물은 아니야. 어딘지 병적이고...그렇지만 난 또 뭐야! 아까 왜 그렇게 미친 지랄을 했지?'

그것은 참 이상한 일이었다. 처음 영광이 평사리에 나타났을 때 윤국의 감정이 왜 그랬는지, 직감적으로 뭔가가 머리를 내리치는 것 같았다. 윤국은 자기 자신도 모르게 격앙했다. 양현과 영광의 태도가 어색하여 그들이 이미 아는 사이가 아닌지 단순히 넘겨짚은 것만은 아니었다. 강가에서 우연히 만난경위를 나중에야 양현한테서 듣긴 했으나 그래도 경계심은 남았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격앙했는지, 경위 설명을 들은 위에도 어째서 경계심을 풀지 않았는지, 그것은 결코 오라비가 누이를 걱정한 마음은 아니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윤국은 경악했고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그해 여름은 윤국에게 우울한 계절이었다. 어쩌면 그때 오늘을 예감했는지 모른다. 그 후 윤국은 때때로 뭔지 모를 상실감에 빠지곤 했다. 그럴 때 그를 추스르게 하는 것은 일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구금은 그런 상실감에 제동을 걸었다. 윤국이 사회주의 노선으로 간 것은 아버지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었고 아버지의 신념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다. 그러나 윤국은 아버지가 공산주의자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사실 전쟁에 광분하는 일본의 심장부 동경에서 일본의 사회주의는 함몰했고 철저한 군국주의 통제 하에서 윤국이 관여하고 있는 조직이란 실로 미미한 존재다. 반전의 기색만 있어도 자유주의의 편린만 보여도 용납 못하는 체제하에 많은 일본의 진보적 인사들은 투옥되었으며 죽임을 당했으며 말살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조직은 미미했을 뿐만 아니라 실은 풍전등화 같은 위험을 안고 있었다. 다만 희망을 일본 패망에 걸고 작으나마 조직의 강화를 꾀하며 이론 무장의 방향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정도였다. 이 조직에는 일본인도 두 명 있었다. 이 같은 윤국의 처지에서는 송영광은 충분히 비판받을 만했다. 자유주의자, 이기주의, 방관자, 부패분자, 세속적으로도 영광은 결함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를 떠나서 순수한 인간적 입장에서 본다면 아무리 헐뜯어도 영광은 경멸당할 그런 인물은 아니었다. 백정의 자식이라는 것도 사상적으로 윤국은 거론할 처지가 아니었다. 다리가 약간 불편하다는 것도 그의 모습 전체에서 우러나는 강한 매력은 그것을 커버하고도 남는다. 대학은 비록 나오지 않았으나 그의 지식과 안복, 깊은 문학적 소양을 윤국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런 장점과 장래성을 홀연히 버릴 수 있었던 영광은 어떤 면에서는 정신적 강자라 할 수도 있다. 유랑극단의 색소폰의 주자, 소위 딴따라, 그게 어떻단 말인가. 강혜숙과의 관계도 환국이로부터 들어서 윤국은 대강 알고 있었다. 한 여자를 버리고 망쳤다고 했으나 실상 그것은 사실과 달랐다. 사춘기 때 편지질이 유죄일 수는 없었다. 그것도 여자 쪽이 먼저 아니었던가. 그것으로 인하여, 혜숙의 부모들에 의해 영광은 학교에서 쫓겨나야 했으며 백정의 자식이라는 신분이 공개적으로 성토되었던 것이다. 영광의 미래는 그것으로 끝장나고 말았다. 일본으로 달아난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받았고 철저하게 자신을 포기했으며 불구가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일본으로 영광을 찾아온 것도 혜숙이었다. 자포자기한 혜숙과 동거하게 되었으며 공부를 다시 시작하라는 황국의 간곡한 부탁을, 최참판댁에서 학비를 내겠다는 제의도 다 마다하고, 결국 상처가 깊었던 영광은 혜숙과의 생활도 감당하지 못했다. 혜숙이 떠난 것은 그를 놓아주기 위해서지만 영광을 자신이 망쳐 놨다는 회한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술을 마시면서 윤국은 자신의 편견이 심한 것이 아닌가고 생각해본다. 영광은 분명히 피해자다. 그러나 역시 아무리 자신이 바로 서보려고 해도 양현과 결부시키는 것은 견딜 수가 없었다.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양현을 잃었다는 것도 견디기 어려웠다. 정말 양현을 잃은 것일까? 그는 자문해보는 것이다.

'아버지 용서하십시오. 역시 이것은 길이 아니지요? 양현은 제 누이지요? 아버지. 저는 누이를 잃었습니다. 차라리 그 애가 죽었다면 마음속에나마 남아 있을 것을...사내자식이 왜 그리 나약하냐,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윤국은 빈 술잔에 술을 따라 단숨에 마신다.

"거 얘기를 들은께 젊은 놈들, 지리산으로 많이 숨어들어간다 카는데 그렇기 내비리두어도 될까 모리겄소? 우떻게 잡아내올 도리는 없이까요?"

옆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면사무소 서기 우개동의 목소리였다.

"무신 수로? 산도 보통 산이건데? 처박히버리문 별 수 없제. 배애지가 고파서 기어 나온다믄모리까, 누구네 방안이라서 뒤져보겠나."

"군대라도 동원한다믄."

"이 사람이 정신이 있나 없나. 지금 시국이 우떤데 그런 소리를 하노. 전선에도 병정이 모자라는 판국에, 조선인 징병제도는 병정을 쓰고 남아서 하는 줄 아나?"

"하기사 그렇소만, 징용 할당량은 많고 사람은 없어이."

"없기는 와 없노. 아직이야 쌨다. 젊은 놈 없이믄 늙은 거라도 보내야지, 우리가 알께 멋꼬? 시키는 대로 하믄 되는 기라. 우서기집에는 형님이 있잖은가."

걸걸한 목소리에 누군지 모르지만 일부러 약을 올리려고 한 말인것 같다.

"무슨 소리 하요? 우리 성이 가고 나믄 농사는 누가 지을 깁니까. 우리 식구 죽는 꼴 볼라꼬 그랍니까?"

발끈해서 하는 우개동의 목소리다.

"할당량이 많다고 해쌓으니께 해본 말이제."

"그래도 그렇제요. 세상 사람이 다 가도 우리는 못 그러요. 남 먼저 내 동생이 지원으로 일선으로 나갔고 그만하믄 나라에 봉사할만큼 안했십니까? 우리가 출정 가족이라는 거를 몰라하는 말입니까."

"그거를 누가 모리나? 그 덕분에 자네는 서기 감투를 썼고,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일 아니가. 출정 가족이라..."

"그러지 마이소. 허주사를 지가 얼매나 존경을 하는데 그리 빈정거리 쌓십니까."

우개동이 숙어든다.

"말만 가직 존경하믄 머하노. 입다실 기이 있어야,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안하든가배? 술 몇 잔가지고 고울라 카는 우서기 심보가 훤하게 들여다 보이서 그랬다."

"하아 참, 지가 그리 미련둥이는 아닙니다. 그 집 처지가 하도 난감해서 나선 일인데, 원래 돈푼은 있는 집인께 빈손으로야 부탁을 하겄소? 그 점은 걱정 놓으이소."

"하하핫 하하하핫, 좋도록 하지 머, 누부 좋고 매부 좋고, 그거 다 우리 손에 달린 거 아니가, 하핫핫핫..."

"저러니, 면소 읍소 서기 놈들 살판났다 할밖에, 그놈의 집구석에는 범의 눈썹도 안 기럽다는 소리를 듣지."

그것은 다른 목소리였다.

"! 점잖은 강아지가 부뚜막에 올라앉는다 카더마는 만판 정한 척 그래 봐야 소용없제. 꿩 묵고 알 북고, 배급계에 있는 놈들 세상이 다 아는 도적놈 아니가."

"나는 도적놈으로 치자, 너희들은 지금 머를 하는기제? 목숨들을 바꾸어치기하고 있는 것 아니가."

"둘러치나 메어치나 매일반 아니가. 다 살고 볼 일이다. 자네나 내나 시절 따라 살아가는 인생이니 별수 있겠나."

"그건 그렇고, 우리끼리니 하는 말인데."

갑자기 목소리다 낮아졌다.

"뭔가 조짐이, 영 기분 나쁘다. 전세가 씨원찮은 눈치라, 보도만 보아도 철퇴니 전멸이니 하고."

"한두 번의 실수야 병가상사라 하니께요. 걱정할 필요 없십니다."

우개동의 잘난 척하는 목소리였다.

"야마모토 사령관의 경우만 해도 미국 놈들이 사령관이 탄 것을 미리 알고서 비행기를 떨어뜨렸다는 말도 있고."

"그건 확실히 기분 나쁜 소식이더마. 진주만 공격 때 지휘관이라 해서 그놈들이 복수한 걸까? 명색이 별 세 개짜리 해군대장 아니가. 쭉지가 부러진 기지. 일본 사람들 라디오에서 그 뉴스를 듣고는 얼굴이 노오래지더마. 아닌 게 아니라 예사 사건이 아닌 기라."

"만일 일본이 지믄 우리는 우찌 될까?"

"재수 없는 소리 그만두라! 그렇기 되믄 이판사판, 제에기랄! 머 일본이 질 리도 없겠지마는 징용에 끌리가서 죽느니, 내일 산수갑산 갈갑세, 오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산께."

"이태리서는 무솔리니가 손을 들었다 카고, 독일군도 소련에서 항복했다 카고..."

"일본은 절대로 손 안들 깁니다. 다 죽었이믄 죽었지 항복할 나랍니까? 일본에 앙갚음할 놈들 살려두지도 않을 기고, 그렇게 되는 날에느 나라도 가만히 안 있을 깁니다. 안 있고말고요."

"어쨌거나 돈으 있어야 해."

나는 도적놈으로 치자, 했던 사내의 말소리였다.

'죽일 놈들!'

윤국은 술잔을 움켜쥐었다가 또 퍼마시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면서 그는 잠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요? 살아서 만날 수 있을까요?'

정신이 몽롱해진다. 눈앞이 흔들리고 있었다.

'양현아! 너 그러면 안 된다! 정말 그러면 안돼! 가지 말어! 가지 말어! 내 누이로 돌아와. 내가 잘못 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거야.'

손에 든 술잔이 흔들이며 술이 엎질러졌다.

'송영광이, 그래 여자들이 좋아할 만하지. 인정한다. 그에게는 외로움과 절망과 허무주의의 짙은 그늘이 있어. 그는 세상을 용서 안하고 있어. 세상에 안기려 하지도 않아. 나는 그 점을, 바로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다. 송영광 그대는 죽어야 해! 죽어! 그대는 진실로 여자를 사랑하는가? 양현아 점잖고 머리 좋고 능력 있는 의사하나 골라. 마음이 따뜻한 사내를 말이야. 아아 머리가 터질 것 같다. 난 난...한가하게 이, 이러고 있을 수 없어. 양현...'

윤국이 눈을 떴다. 타는 듯 목이 말랐다. 손을 뻗쳐 자리끼를 더듬었으나 없었다. 방안을 둘러본다. 집이 아니었다. 그리고 밤도 아니며 사방은 환했다. 이불을 걷으며 벌떡 일어나 앉는다. 가슴이 꽉 메인 듯 아팠다. 어젯밤 일이 생각났다. 뭔가 마음으로 외치다가, 외치다가 쓰러져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일어나싰구마요."

어젯밤 그 여자가 들여다보며 웃었다.

"이거, 미안하게 됐소."

"아입니다."

"나 물 한 그릇 주시겠소?"

여자는 얼른 물 한 그릇을 가져다준다. 윤국을 시계를 보다가 물을 마신다.

'저런 남자를 지아비로 삼는 여자는, 우떤 여잘까? 갖출 것 다 갖추고 저 잘생긴 얼굴, 보기만 해도 가슴이 뛴다.'

윤국은 물그릇을 비우고 그릇을 방바닥에 놓았다.

"어젯밤 옆방 손님들 데리러 배가 왔일 때 깨우려 했지마는 정신없이 주무시는 바람에."

"그 서기 놈들 말입니까?"

여자는 킬킬 웃었다.

", 그 서기 놈들 말입니다."

신이 난 듯 그도 서기 놈이라 했다. 윤국이도 슬그머니 웃는다. 횟집 주인 남자에게 셈을 하고 나서려 했는데

"좀 있어야 나룻배가 올 깁니다. 여기서 기다리다가 배가 오거든 나가시지요."

여자가 말했다.

"아닙니다. 강가에서 기다리지요."

윤국은 횟집에서 내려왔다. 강가에서 얼굴을 씻고 손수건을 꺼내어 닦고 나서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문다. 늦은 아침의 강과 하늘 숲은 마치 사춘기의 시절같이 싱그럽고 좀 어설펐다. 이쪽은 산이 가파르고 산기슭이 강물에 바싹 다가서 있었다. 저쪽은 하얀 모래밭과 둑길과 마을이 있었다. 그쪽 물가는 흰빛을 띠고 있었으며 이쪽 물가의물은 청록 빛이었다. 흐르지 않는 청록 빛의 강물, 세월의 이끼와 자연의 엄숙함, 냉담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저쪽은 따사로운 햇빛이 부서지고 있었으며 엉성하고 잡다한 사람들의 입김이 서려 있었다. 윤국은 차안에 서서 피안의 양현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 강을 결코 건너지 못하리라는 것을, 피안에 닿지 못하리라는 것을 윤국은 깊이 깨닫는다. 양현은 양현의 길을 가고 자신은 자기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자기 자신에게도 어두운 그림자는 있다. 죽을지도 모르고 체포될지도 모른다. 언제 딛고 있는 땅이 함몰할지 모른다. 그것은 현재 조선인이 처해 있는 입지이기도 했다. 마음으로나마 풀어주자. 양현을 그 인습에서나마 풀어주자, 편견에서나마 풀어주고 세속적 기준에서도 풀어주자.

나룻배가 건너오고 있었다. 늙은 사공은 이따금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부셔하며 노를 젓고 있었다. 배를 보았는지 횟집 여자도 비탈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물가까지 온 사공은 간밤에 긴가민가 했는데 낮에 대면하게 된 윤국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여자는 윤국에게 자기는 하동읍에 장을 보러 간다고 했다. 쑥색 치마에 연분홍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몬빼가 아닌 여인의 모습이 흔치 않은 때인 만큼 여자 모습은 연연해 보였다.

집으로 돌아갔을 때 연학은 대문에서 뒷짐을 지고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윤국을 근심하며 마을길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윤국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대문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윤국이 마당으로 들어섰을 때 건이네가 뒤뜰에서 달려 나왔다.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저기, 저어 양현아가씨가 아침에 떠났습니다."

맨 먼저 보고를 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는지 서둘러 말했다.

"그래요?"

윤국의 태도가 태연하여 건이네는 당황하고 무안해한다.

"걱정 마십시오. 진주에 갔을 겁니다."

윤국은 사랑으로 돌아 나왔다. 연학이 역시 뒷짐 진 모습으로 파초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빌어 묵을 놈이 들어서 동네 씨를 말릴라 칸다."

그의 첫마디가 그것이었다. 양현이가 떠났다든지 어젯밤 윤국이 어디 가서 잤느냐는 따위의 말은 내비치지도 않는다.

"처음에는, 엽이네 아들을 맨 먼저 보국대(징용)에 내보내더마는 눈 밖에 난 사람만 차례차례 뽑아 보내고 이자는 니내 할 것 없이 싹 쓸고 안 있나, 그래서 그 공으로 표창까지 받았으니 그 직일 놈!"

"씨를 말리기도 하겠지만 더러는 빼내주기도 한다면서요?"

"어디소 그 말을 들었노."

"아저씨 저도 귀 있습니다. 남 듣는 말 저라고 못 듣겠어요."

윤국이 웃으니까 빤히 쳐다보던 연학은 얼굴을 돌리며

"옛날 같으면...관수형님이 살아 기싰더라면 개동이 그놈 못이 온전했겠나...“

 

 

6장 옛날의 금잔디

몸에 꽉 끼는 국민복을 입고 낡은 구두를 신은 홍수관은 작년보다 더 몸이 줄어든 것 같았다. 옷이 작아서 작게 보인다면 모를까, 몸이 줄어들었는데 몸에 옷이 꽉 끼었다면 그 연유는 알 길이 없다. 이순철의 도움으로 간신히 생계는 잇고 있는 모양이지만 요즘에는 이순철의 사업도 개점휴업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명색이 서긴데 별로 할 일이 없는 것이다.

"어머님은 안녕하시지요?"

걸으면서 윤국이 물었다.

"그럭저럭 이어가고 계신 셈이지."

기운이 없는 수관의 목소리였다. 윤국은 수관이한테 그의 어머니 안부를 물을 때마다 거의 어김없이 그때, 십 년 넘게 세월이 흘러버린 그때 일을 생각하게 된다. 학생들이 시위하는 대열을 쫓아오면서 수관아! 수관아! 하며 부르던 그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내일 간다며?"

수관이 물었다.

"가야지요."

"장가는 안 가고 안 가고? 혼자 살 건가?"

"해방이 되면 가지요."

"그게 언제일까..."

수관은 꿈꾸듯 말했다.

"머지 않소."

"나도 그런 생각은 하지만 때때로 그게 믿기지 않아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될 때가 있다."

체념하고 타협하고 귀 막고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 시절의 오기는 찾아볼 수 없었고 그 시절의 준수한 모습은 간 곳이 없었다. 생활에 찌들리고, 어깨에 힘주고 거리를 누비는 자들 눈초리에 찌들리고, 보행조차 옛날처럼 단정치 못했다. 구멍가게를 하면서, 남의 집에 드난꾼으로 드나들면서 오로지 아들 하나 바라보며 졸업 후에는 월급쟁이가 될 것을 꿈꾸며 희망을 걸었던 그의 모친, 또한 두뇌가 우수하여 장래가 촉망되던 홍수관이 아니었던가. 광주학생사건의 여파가 진주에도 거세게 밀어닥쳐 학교마다 시위가 벌어졌을 때 주동자의 한 사람이었고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취조관에게 대어들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조목조목 따지던 홍수관이 졸업을 앞두고 학교에서 쫓겨났으며 징역살이를 하고 사회에 나왔을 때 그에게는 발붙일 자리가 없었다. 그때 어머니는 가슴앓이의 지병을 얻었던 것이다.

윤국이 진주에 오면 대개는 수관을 한번 찾아보고 간다. 집에서도 윤국이를 통해 도움을 주기도 했다. 윤국이 조금 전에 백화점을 찾았을 때 수관은 창고 정리를 하고 있었다. 배를 채우기도 힘든 세상에서는 화급히 필요로 하지 않는 재고품들이었다. 마침 순철이가 나오다 말고

"윤국이 아니가?"

큰소리로 말했다.

"형님, 그간 별고 없었습니까?"

윤국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나야 그날이 그날이지 뭐. 언제 왔노?"

"한 열흘 됐습니다."

"아주 왔나?"

"가야지요."

"졸업 안 했던가?"

"일 년을 까먹고, 명년에 졸업입니다."

"남들은 학부를 한 번 나오기도 힘든데, 하기야 뭐 농과 경제과 다 좋지. 수관아."

"."

"윤국이 데리고 산홍이 집에 가거라. 나 좀 바삐 다녀올 곳이 있어서 나중 갈게."

순철은 서두르듯 말하고 나갔다. 수관은 민적거리듯 윤국을 쳐다본다. 기생집에 가는 것이 내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순철은 일방적으로 말하고 나가버렸으니.

", 갑시다."

"너는 그런 곳에 더러 가나?"

"가본 일은 있습니다. 술 마시러 가는데 아무데면 어떻습니까?"

해서 수관과 윤국은 거리에 나온 것이다.

"형수씨랑 아이들도 다 별일 없지요?"

뜸했던 말을 윤국이 이었다.

"나야말로 결혼한 게 잘못이었어."

"왜 그런 말을 합니까."

"가장 노릇, 애비 구실도 못하는 주제에."

"노릇이나 구실은 뭘 두고 하는 말이지요? 지게꾼도 처자는 거느립니다. 하긴 말할 자격은 없지만."

"차라리 그 편이 떳떳하지. 우리 어머니를 저리 사시게 한 것도 다 내 탓 아니겠나? 희생도 보람이 있어야지. 내가 뭘 했다고, 입 놀린 것밖에 더 있나?"

"그런 생각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습니다. 다 산 것은 아니지 않소?"

"글쎄... 그 미래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을 때 미칠 것 같다니까. 이건 사는 게 아니야. 목에 올가미를 씌우지 않아도 서서히 죽이고 있는 것 같다."

"..."

"물론 나만 그런 거 아니라는 것은 알어. 억울한 게 아니다. 자기 경멸이지."

자기 경멸이라는 수관의 말에 윤국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한참 걷다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가난한 것은 수치가 아니다. 일을 해도 배불리 먹을 수 없는 척박한 땅에 사는 것은 수치가 아니다. 사로잡혀서 사는 거야말로 수치다. 너는 내 종이다, 너는 나의 노예다, 배가 터지게 먹일 수도 있고 굶겨서 죽일 수도 있다, 노리개로 삼을 수도 있고 고혈을 빨아먹을 수도 있다, 너는 내 곳간을 채우기 위해 뼈가 으스러지게 일을 해야 하며 약탈과 살육을 위해 나팔 불며 일장기 휘날리며 진군할 때 너희 조선 놈들은 총받이로 앞장을 서야 하고 화기를 위해 쇳물이 되고, 분쇄기에 넣어 가루가 되며 압축기에 넣어 기름을 짤 수도 있다, 가죽을 벗겨 군화를 만들 수도 있고 우리 속에 가두어 두었다가 화학전에 대비하여 실험 인체로 쓸 수 있다. 아니, 이미 실험 인체로 쓰이고 있다. 정액의 홍수 속에서 미치고 죽어가는 계집아이들, 아아 너희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무엇이든, 이 짐승들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모습이 몽롱해 보였다. 윤국은 마음속으로 꿈결같이 외치고 있었다. 흐릿한 시야에 등을 보이며 둑길을 달음질쳐 사라지는 양현의 모습, 낮에 뜬 반달같이 서늘하고

허무한 그 뒷모습.

"살아남아야지요. , 우리는 살아남아야 해!"

"그래, 그래, 그날이 오면 우리 저 남강 물에 뛰어들어 목욕하자. 더러운 왜놈의 때 빡빡 밀어내는 거야."

수관의 얼굴에는 아주 엷은 미소와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두 사람의 옥봉 산홍의 집으로 갔다. 산홍은 성깔깨나 있어 뵈는 삼십대 기생이었다.

"이사장은 안 옵니까?"

산홍은 윤국을 곁눈질해 보며 물었다.

"좀 있다 오실 거요."

수관은 앞장서 방으로 들어가는 산홍의 뒤꼭지에다 대고 물었다.

"니 내 할 것 없이 다 마찬가지 아니겄소. 기생들이 몸뻬 입고 훈련받으러 나가야 하고 근로 봉사하러 나가야 하고... 옥봉에서도 장사하는 집 몇 안 돼요. 그놈의 나아리들 땜에, ! 반시국적 분자다, 입으로는 그러지마는 금주할 수 없는 높으신 나아리... 덕분에 이럭저럭 아직은 문을 안 닫았을 뿐이지요."

산홍은 수관을 믿고 말하는 것 같았다. 좁은 지방이어서 수관의 전력을 대개는 다 알고 있었으며, 그 무렵의 수관은 젊은 여자들의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고 또 이순철이 산홍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기에 자연 산홍과 수관은, 터놓고 얘기한 바 없지만 마음으로는 서로 무관한 사이는 아니었다. 날라다 주는 요리를 상 위에 옮겨놓으면서 산홍이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중학교에서 봉안전 앞에다가 똥 싸놨다는 소문 그게 정말이오?"

"글쎄, 정말인지 아닌지."

수관은 덤덤하게 말했다. 윤국이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수관을 쳐다보았으나 수관은 윤국의 궁금증을 풀어줄 생각을 안했다.

"쉬쉬들 하는 모양인데, 사실이라면 아이들 참 맹랑하지요?"

"글쎄, 아이들이 했는지 어른이 했는지 모를 일이지요."

"전에, 가정부에게 와서 군자금을 뺏어간 사건도 끝내 밝혀내지 못했는데 이번 일도 죄 없는 아이들만 많이 끌려가고들 한다는데...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그런 말이 요새 유행이라 합니다."

"그때도 그 말이 유행어였지요."

하며 수관은 윤국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술 드십시오. 기생은 물러갑니다."

눈치 빠른 산홍은 분위기에서 자신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했는지 일어서 나갔다.

"봉안전 어쩌고 하는 그 말, 무슨 일이 있었소?"

"그게 극비로 되었으나 태평양에서 일어난 일도 아니겠고 바로 코앞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비밀이 보존될 수도 없고... 아까 말한 대로 봉안전 앞에다가 누가 똥을 싸놨다는 건데..."

"허어, 참 교묘한 발상이군요."

수관은 싱긋이 웃었다. 산홍이 앞에서 소극적이던 그가 윤국이 앞에서는 기정사실로 인정한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소위 치고 빠지는 전법을 쓰고 있는 모양이다. 세상이 많이 변했어. 우리 때는 정공법이었거든."

"..."

"성과는 적고 희생은 크고."

"그렇게만 말할 수 없지요. 정신적으로 심어준 것이 크니까."

"그 일 아니라도 요즘 아이들 많이 잡아간다. 현행범은 없고 모두 심증범이지. 경찰서에서도 애를 먹는 모양이다. 딱 잡아떼니까, 나는 그런 일 안 했다. 보통 영악한 게 아니라는 게야. 고문을 해도 안 했다로 일관하니까."

"소위 그 죄질이 뭔데요?"

"알다시피 요즘 학생들 군사훈련 아니면 군수공장에 가서 일하는 것 아닌가. 말하자면 노동자들 선동하기, 눈치껏 태업하기, 공장기구 파손, 변소간에는 말할 것도 없고 후미진 곳이라면 어디든 벽면에 낙서하기, 그 낙서의 종류에는 별의별 것이 다 있는 모양인데 조선독립만세서부터 귀축 일본 물러가라, 해방의 그날이 오면 너희들 모가지는 추풍낙엽이다, 친일분자의 모가지부터 비틀어 버리겠다 등등 지워도 지워도 끝이 없다는 거고, 하는 수 없이 학교 당국에서는 호주머니 속에 백묵이나 연필 따위가 들어 있는지 조사를 해서 들여보내는데도 낙서는 줄지 않는다는 거다. 요즘 애들 결코 정면 대결은 하지 않아."

"신통하군요."

"그 애들 보면 희망이 생겨, 옥쇄가 아니고 지속성이거든."

"하여간 봉안전 똥 얘기는 걸작이군요. 참 교묘한 발상이오."

"결국 철통같은 일본의 치안도 구멍이 뚫렸다 볼 수도 있어."

"한계에 온 거지요."

"통제한다는 것은 치안 유지의 금과옥조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실은 그만큼 인원을 동원해야 하고 요즘 같은 시기, 일본의 인적 자원의 고갈 현상에서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어? 죄수가 많으면 옥졸도 늘리는 게 당연하지 않나? 그게 지금 일본은 어렵게 돼있거든. 참 자네 강병택이 알지?"

"알지요. 나보다 한 반 밑이었지요."

"지금 뭘 하는지 모르지?"

"병택이가 지금 순사질을 하네."

"?"

"믿기지 않아?"

"그럴 사람이 아닌데... 하필이면 순삽니까?"

"법정전문학교를 나왔으니 뭘 하겠나. 법원의 서기 자리가 적격이지만 병택이를 위해 자리가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자리가 있다손 치더라도 하늘의 별 따기지. 집이 살 만하니까 그 동안 놀고먹은 셈인데 징용 문제가 급해졌거든. 끌려가지 않으려니 별 수 있겠나? 전문학교 출신의 신참 순사라니, 본인도 괴로울 게야. 기껏해야 보통학교 나온 졸때기 속에서 큰 눈을 꿈벅꿈벅하고 있을 병택이 생각을 하면 안쓰럽다."

"형은 괜찮겠습니까?"

"모르지. 그걸 어찌 알겠나. 순철형도 고민이 많아. 사실 바쁜 것처럼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바쁠 게 하나도 없어. 그냥 엉거주춤 만사가 그런 상태다. 그 사정이야 일본인들도 마찬가지지만. 관공서도 늙다리만 남아서 목소리만 요란했지 거세당한 느낌이다. 순진파들이 신문 보도에 핏대를 올리지만 뭔가 가라앉고 있어. 결국 배급받아 먹는 것 이외 정열이 없다고나 할까. 그런데도 나는 때때로 절망해. 일본은 어디까지 가서 끝을 낼 건가 싶어서..."

"하기는 막판이 어렵지요. 얼마만큼 조선인들을 몰아낼 것인지... 어떤 경우에도 형, 징용만은 피해야 합니다. 한번 죽는 게 아닙니다. 차라리 형무소에 들어가는 편이 나아요. 여기서는 실정을 잘 몰라서 설마 하는 경향이 있고... 동경서 비밀히, 징용자들 실태에 대한 정보를 모아보았는데 한마디로 지옥입니다. 매맞고 고문당하고 그런 차원을 넘어섰어요. 굶겨가며 일을 시키다가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숨이 끊어지지도 않은 사람을 생매장하기 아니면 숲 속에 던져서 야수들이 뜯어먹게 하는 겁니다. 숨을 쉬는데 콧구멍에서 구더기가 기어 나와요."

수관은 몸서리 쳤다. 말하는 윤국이도 술잔을 들며 눈을 감았다.

"."

윤국은 술을 마시고 빈 잔을 수관에게 건네준다. 술을 부어주면서

"우리가 살아남는다면, 뭔들 못하겠소. 살아남은 목숨 값은 해야겠지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마음으로 지고 들어가면 그것으로 끝장입니다. 우리는 다 모아야 하며 다 느껴야 하며 사회주의로 가야합니다. 그것은 역사의 법칙입니다."

윤국의 목소리는 뜨거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째서요?"

"나는 민족주의다."

"사회주의는 민족주의가 아니란 말인가요?"

"일단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계급투쟁은 이 민족을 분열시킬 거야."

하는데 밖에서 기척이 났다.

"많이 기다렸지?"

방문을 여는데 순철이 혼자가 아니었다. 경방단장 김기성이 동행했던 것이다. 방안의 두 사람도 놀랐지만 김기성도 깜짝 놀란다. 김기성 등뒤에 서 있는 이순철이 두 사람을 향해 강하게 눈짓을 했다.

"들어가게."

순철이 기성을 떼밀었다.

"내가 올 자리 아닌 거 같은데?"

"무슨 소리 하나. 오늘 여기서 동창회 하자 안 했던가? 모두 동창인데 꽁무니 빼서 쓰나."

순철은 넋 빠진 듯 앉은 채 올려다보는 윤국과 수관에게

"너희들 뭘 해?"

"..."

"버릇없이, 선배를 대하는 그 꼴이 그래 되겠나? 일어서서 깍듯이 인사해!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도 아니겠고."

그러고는 심하게 인상을 쓰고 눈짓을 여러 번 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 ."

두 사람은 엉거주춤 일어섰다.

"선배, 오래간만입니다."

하고는 꾸벅 절을 한다. 김기성의 마음은 두 갈래였다. 수관하고는 동석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껄끄럽기는 했으나 윤국이하고는 합석하고 싶은 유혹이 있었다. 그것은 김기성의 허영심 때문이다. 최윤국, 그가 누구인가. 최참판댁 둘째아들, 귀공자라는 것은 그만두더라도 세상이 다 아는 수재요, 진짜 제대로 명문대학의 학부를 마쳤으며, 뿐인가 또 다른 대학에서 다른 분야를 전공하고 있으니, 말로는 대학이라 하지만 전문부 아니면 예과를 다니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하나도 난감한 학사를 두 개나 따게 생겼으니 그 점에서 윤국이 기성에게는 별과 같은 존재다. 그리고 기성의 입장은 아버지 김두만의 경우와 다소 다르기도 했다.

"앉게. 뻗장나무같이 서 있지 말고, 후배들이 환대하는데 선배의 도리가 있지, 앉자, 앉어."

기성을 잡아 끌어 앉힌다. 순철은 요즘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앙숙이던 김기성과 좋게 지내보려고 노력하는 것을 수관도 알고는 있었다. 그리고 순철이 까닭 없이 덤벙대는 위인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새로운 요리상이 들어왔다.. 순철이나 기성도 다 같이 산홍의 단골이며 봉이다.

"참말, 김단장은 오래간만이에요. 왜 그리 얼굴을 볼 수 없을까? 제가 뭘 섭섭하게 했습니까?"

산홍이 슬쩍 기성의 신경을 건드려본다.

"바빠서 그래."

"그게 아닐 겁니다."

"무슨 소리."

"섭섭해서 그러셨지요? 하지만 우리 잘못 하나도 없습니다. 월화가 그리 된 것 정말 우리도 모르는 일이었어요."

"무슨 얘길 하나?"

순철이 궁금한 듯 묻는다.

"글쎄 월화 아시지요?"

"알지."

"그 애가 김단장 아버님 소실로 들어갔지 뭡니까?"

"이거 보통일 아니군 그래."

기성은 쓰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우리 집에만 매여 있는 애도 아니겠고 그리 된 연후에 우리도 알았어요. 정말 그러지 않아도 오해가 있으면 어쩌나 생각했습니다. 며칠 전에 월화를 만났지요. 신색이 훤하더군요. 그때도 부디 본댁한테 잘하라고 누누이 타일렀습니다. 본시 심성은 괜찮은 아이니까."

간들간들 간드러지게 약을 올리는 건지 위로를 하는 건지, 알쏭달쏭한 눈웃음을 치며 산홍은 말했다. 본댁이란 서울네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성의 생모, 강제 이혼을 당하고 독골에서 시모랑 함께 사는 기성네를 두고 한 말이었다.

"그 때문에 집안이 쑥밭이 됐다. 골치 아파서."

기분이 언짢은 것 같았지만 그러나 기성은 그 사실을 인정했다.

"소실 둘 나이도 됐지 뭐. 재력을 보나..."

순철은 어물쩍 넘기려 한다.

"그럼 이사장도 나이 들면 소실 두겠네요?"

옆구리를 찌르듯 산홍이 말했다. 그는 김기성과 순철의 만남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그거야 세대가 다르지 않는가."

따근따근하게 데운 정종이 든 주전자를 산홍이 들었다.

"그거 이리 내놔."

순철은 사기주전자를 산홍으로부터 받아든다.

"오늘 밤은 우리 동창들의 모임이다."

",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하니 산홍이는 좀 비켜주는 것이 어떨까?"

", 네 그렇게 하옵지요. 한데 다른 젊은 아이들도 들여보내지 말까요, 이사장님?"

농치듯 말했다.

"필요 없어. 후배들 앞의 선배 체통이 있지."

", 네 알아서 기겠습니다."

"저 늙은 여우."

산홍이가 나가자 대신 술을 따르려는 수관의 손을 밀어내고 순철은 자신의 술을 부었다.

"자아 그러면 우리의 미래를 위해 건배하자."

순철은 술잔을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멋쩍은 듯 앉아 있는 기성에게 은근한 눈길을 보내며 술잔을 들라는 시늉을 한다. 수관과 윤국은 엉겁결에 술잔을 들었다.

어색한 건배가 끝나자

"생각을 해보면 우리가 서로 등지고 지낼 까닭이 뭐 있겠나. 우리 모두 오 년 동안 잔뼈가 굵은, 빛나는 역사의 진주중학교 동창들 아닌가, 수관이는 사불여의하여 졸업은 못했지마는, 지금이 어느 때고? 전쟁 중이다. 언제 적기가 날아와서 폭격을 할지 모르는 비상시국, 내일이 어찌 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서로가 협심을 해서 살아도 아쉬움이 남을 세상인데 하잘것없는 감정 때문에 서로 원수 보듯 해야겠나? 안 그런가? 기성아."

"내가 뭐 어쨌기에."

볼멘소리다. 그 목소리에는, 너희들이 나를 깔보았고 너희들이 나를 소외했으며 날건달로 치부하지 않았느냐, 아비 돈으로 이름 없는 전문학교 나왔다 해서 빛나는 너희들 수재 놈들, 나를 둔재라 하지 않았더냐, 나도 오기는 있는 놈이다, 학교의 우등생이 사회서도 우등생 되라는 법 없지, 홍수관의 꼬라지를 보아, 그런 투의 항의가 있었다. 하기는 그랬다.

"뭘 어쨌다기보다 서로 소원했던 것은 사실이고, 나이가 가르친다는 말도 있듯이 이제는 그래서 안 되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자네나 나나 명색이 동경 유학생 아니었나. 그리고 좁은 지방이지마는 그래도 우리 조선인 사회에서 먼저 깼다 할 수 있고 지도적 위치에 있는 만큼 전후좌우를 돌아볼 줄도 알아야 할 것 같다. 안 그런가, 기성아."

"..."

"똑똑한 후배 충고도 들어줄 줄 아는 아량과 어려운 후배 도와줄 줄도 아는 의리도 있어야 할 것 같다. 또 후배는 후배대로 어려울 때 선배를 떠받쳐주는 힘이 되어야 하고 상부상조, 독불장군으로는 못 사네. 너희들도 그렇다. 어떤 경우에도 선배는 선배인 게야. 너희들이 선배를 존경하는 것은 즉 너희들 자신의 힘이다. 이끌어주고 떠받쳐주고 그래야 뭔가 돼도 되지 않겠는가. 그게 사람 사는 게 아니겠어? 지난 일이야 어떻게 되었든 그건 다 지나간 일이고 또 그것은 부모들 세대의 일이니까 우리가 그것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우리대로 사는 방식이 있어. 내 말이 틀렸나?"

부모들 세대의 일이란 자신과 기성과 윤국의 집안이 얽혔던 지난날의 가정부 군자금 강탈 사건을 두고 한 말이었다. 윤국은 순철의 저의를 깨달았는지

", 그렇습니다. 순철형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동의를 하고 나섰다. 기성은 좀 의외란 듯 윤국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너희들 말만 그러지 말고 선배 술잔 비워두고 왜들 그러고 있나."

"."

이번에는 수관이 기성의 술잔에 술을 부었다.

사실 김기성이 날건달인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허영심이 강하고 한편 단순한 면도 있었다. 그것은 그의 성장 과정과 무관하지 않았다. 서울네가 본가로부터 남편과 아들 둘을 떼어내어 독점하기 위한 책동 중 하나가 기성과 기동을 회유하는 일이었다. 생모 막딸이 보잘 것 없고 무식하며 부끄러운 존재라는 것을 두 아들에게 주입하는 것은 물론 환심을 사기 위해 아이들 요구는 무엇이든 다 들어주었으며 결국 자기중심의 이기적 성품으로, 인내심 없고 나태하며 인생을 향락적 시각으로 보는 방향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생모를 경멸하며 어떤 위기에 섰을 때도 생모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던 기성은 그러나 서울네에 대해서 애정이 있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형식이었을 뿐 그에 대한 마음은 차가웠다. 아버지 김두만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옛날 주종 관계였다 해서 그 열등감 때문에 까닭 없이 최참판댁에 증오심을 갖고 있는 두만과 달리 기성은 그런 것은 없었다. 자신이 무시당하며 최씨네 우수한 형제들에 비하여 열등한 자신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그것은 이순철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어디 두고 보자는 심보였던 것이다. 내면적으로 사실 그들과 어울리고 싶은 동경 비슷한 것이 없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었다. 이해 상관 때문에 열렬한 친일파 행세를 해온 김두만에 대해서도 역시 기성은 무관심한 편이었다. 그는 아비가 모은 돈을 쓰기만 하면 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국가니 민족이니 하는 의식이 희박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에 충성하여 앞길을 열어보겠다는 야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경방단장은 아비가 따내준 것이었지만 그것으로 기성은 거들먹거리고 다니면 되는 것이었다.

"아버님이 고생하고 계시다며?"

기성은 윤국에게 뭔가 말을 해야겠다 생각한 것 같다.

"."

"거 참 큰일이다. 시국이 이러니 쉽게 나오시지도 못할 거구."

서로 간에 쌓여있던 것이 일시에 풀릴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일단 내딛고 보니 기성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순철의 사람 다루는 솜씨는 기성보다 한 수 위였고 윤국이나 수관은 나름대로 다 세파를 겪었기 때문에 역시 감정의 절제는 훌륭했다.

"자네 동생은 지금 어디 있나."

순철이 물었다.

"부산에."

"취직은 했고?"

"음 철도국에 있어."

"그거 괜찮군."

"그럭저럭인 셈이지 뭐."

기성은 동생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는 태도였다.

"아까 듣자니까 산홍이가 극구 변명을 하던데 월화는, 혹 자네가 찍어놓은 아이가 아니었던가?"

화제에 궁했다. 해서 구차하게 꺼낸 말이었다.

"예키! , 별 망측스런 소릴 다 듣겠네."

기성은 화를 내는 체했으나 슬그머니 웃었다. 그러니까 그런 관계는 아닌 모양이다.

"집안에 분란이 생기니까 산홍이 그러는 거지. 하여간 골치가 아프다. 사실 아버지가 소실 두는 것을 좋아할 아들이 어디 있겠나.“

"지금 함께 사는 사람도 소실 아닌가."

"그거는 사정이 좀 다르지. 호적도 버젓이 돼 있고 소실이라 할 수는 없다."

"그래도 생모는 아니지 않은가."

"몰라, 그따위 일 생각하는 것만도 귀찮아. 육친, ... 육친에 대한 정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거 습관 아닐까?"

밋밋하게 생긴 기성의 얼굴에 희미했으나 죄의식 같은 것, 회환 비슷한 것이 떠돌았다.

"습관이라 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씨가 생기면서부터 그건 변하지 않았던 습관이다."

"하지만 자랄 때 환경이라는 것도 무시할 수는 없지. 어쨌거나 그거는 부모들의 책임이고 우리는 희생자야."

"그럴까? 아무튼 쌍바람이 불었다. 아버지는 늦바람, 아들은 올바람."

윤국과 수관이 씁쓸하게 웃었다. 기성의 여자 행각은 유명한 얘기였기 때문이다.

"나야 뭐 소문만 요란했지 별 실속도 없지만 아버지 경우는 문제다."

"어째서?"

"백팔십도로 변했거든."

"아직 환갑 전이시지?"

"."

"허무해서 아마 그러실 거다. 돈이 많아도 쓸 곳이 없고."

"허무해서 그렇다는 말엔 나도 동감이다. 자네도 알다시피 사업은 올스톱, 돈의 가치는 날로 떨어지고 부동산 매매나 된단 말가, 땅에서는 공출로 몽땅 나가버리니, 전쟁은 불리하고... 현재를 실감하는 데 여자밖에 더 있어? 나 역시 그래. 마음 붙일 곳이 있어야지. 나는 출발에서부터 야망 같은 것 없었으니까, 자네들 수재하고는 형편이 달랐어. 한 순간, 순간을 즐기다가 가는 거지 뭐. 어차피, 땅속에 들어가 썩을 몸 아닌가."

윤국은 그들 말을 귓가에 흘리면서 술잔을 기울인다. 양현의 모습이 다가오기도 했고 송영광의 우울한 얼굴이 다가오기도 했다.

"형님."

수관이 순철을 불렀다.

"?"

"내일 윤국이 떠나는데 이쯤하고 우리는 가야겠습니다."

"내일 떠나나?"

기성이 윤국에게 물었다.

"."

"일본의 사정은 어떤가?"

"다를 게 뭐 있겠습니까."

"소문으로는 소개가 시작됐다 하던데?"

"더러 연고가 있는 사람들은 시골로 가는 모양이더군요. 그러나 아직 소개 명령이 내린 것은 아닙니다."

"만일 소개 명령이 내린다면 자네도 동경에 머물기가 어려워질 텐데..."

경방단장인만큼 그런 정보에는 빠른 것 같았다.

"그것은 그때 가서 생각해보아야겠지요."

"그나저나, 지금 일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순철이 기성을 보며 말했다.

"생각이라니?"

"이태리는 이미 항복을 했고 독일도 스탈린그라드 전선에서 항복했으며 북아전선의 독일군 역시 그러니 전세를 만회하기는 어려울 게야. 독일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보고들 있는데, 일본도 역시 철퇴, 전멸, 전황이 그러하니... 만일의 경우 일본은 본터에서의 결전을 각오하고 있는지, 각오를 하고 있다면 대책은 있는 건지."

"본토에서까지 미군이 상륙하게 될 경우 그건 일본 국민 전원의 옥쇄를 의미하는 것 아닐까?"

얘기가 그렇게 되자 수관은 서둘러 일어섰다.

"형님, 우리는 그만 가볼랍니다."

"그래, 그럼 가보아."

수관과 윤국은 작별인사를 하고 나갔다.

", 우리끼리 더 마시자."

하고 순철은 산홍을 불렀다.

"이젠 선배 체면 안 차려도 되겠네요."

산홍이 웃으며 왔다.

"술 떨어졌어."

"술도가도 아닌데 술이 무진장 있습니까? 어디,"

"술도가도 바닥났어."

기성이 말했다.

"아주 폐업을 했습니까?"

"폐업 직전이지 뭐."

"그래도 그 동안 많이 벌었으니까, 그렇지요? 김단장."

"못 벌었다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건 아버지 소관이니까 난 잘 몰라."

"한땐 김단장이 맡았다는 소문이던데요?"

"그거 다 빈말이고 아버지가 나한테 맡길 것 같아? 오죽했으면 독골 땅을 팔아서 썼을까? 삼촌하고 육박전까지 하면서, 그 일 땜에 나는 독골에는 발도 디딜 수 없게 됐다."

"추옥이한테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지요?"

"지난 얘긴 왜 해."

"지난 얘기는 김단장이 먼저 했습니다."

"하긴 다 돼 가는 세상에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리. 그래 추옥이는 잘산다 하든가?"

"네애, 영감님이 신주단지 위하듯 한답니다."

"그게 젊은 나를 마다하고 늙은 것을 따라갔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늙기는 했어도 그 어른 풍류를 알지요."

"그러면 나는 풍류를 모른다 그 말인가?"

"압니까?"

"모르지, 허허어 헛헛헛..."

"풍류가 뭐야?"

순철이 물었다.

"멋이지요."

"? 멋이라...."

"동경유학생들은 그런 것 몰라요. 신식이지요."

"그러면 기생은 구식을 좋아한다 그 말이로군."

"그렇지는 않아요. 멋이란 신식 구식을 다 꿰뚫는 거랍니다. 일본에는 멋이란 게 없다 하더구먼요. 해서 일본 기생은 몸을 먼저 팔고 조선 기생은 마음을 먼저 판다는 것입니다."

"유식하군. 제법 유식해."

"저도 들은 풍월이지요."

"그러니까 얘기를 하자면 진주 기생은 논개다?"

"황진이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그래, 그 말은 맞다. 일본에는 관기라는 게 없어. 관기란 무엇이냐, 따지고 보면 선비 상대가 아닌가. 칼잽이들하고는 다르지. 하핫핫핫... 기성아, 말 되지?"

"그렇군."

"우리 동경유학생들이 칼잽이 밑에서 배워왔기 때문에 멋이 없다. 그 말인 게야."

계속해서 술을 마시고 노닥거리다가 산홍의 집을 나온 두 사람이 서로 거머잡고 비틀거리다가 헤어진 것은 열두 시가 지나서였다. 집으로 돌아간 기성은 그냥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보소, 보소! 일어나이소."

아내 금옥이가 흔들어 깨우는 것을

"왜 이래?"

손을 뿌리치고 기성이 돌아눕는데

"큰일 났어요."

비로소 기성은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는다.

"무슨 일인데 그러나."

"안방에 가보이소. 아버님이 어머님이, 칼부림이 났습니다."

"?"

기성은 벌떡 일어섰다. 마당에 나갔을 때 사방은 뿌옇게, 어둠이 걷히고 있었다.

"날 죽여! 죽여라! 이 개상놈아!"

쇳된 서울네 목소리가 귀청을 뚫고 지나갔다.

"이년이 푼수를 몰라도 유만부동이지, 어디다 대고 쇳바닥을 함부로 놀리나. 니 푼수에 안방마님?"

"망태 메고 이집 저집 빌어먹으러 다니던 목수 놈이 뉘 덕에 오늘이 있어? 내죽고 니죽고 함께 죽자!"

놈을 붙이며 막나가는 것이 오늘 처음은 아니었다. 패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기성이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부엌 식칼이 저만큼 나동그라져 있었고 두만이와 서울네는 한덩어리가 되어 방안에서 구르고 이었다.

"남부끄럽게 와들 이러십니까! 길게 이럴라면 차라리 갈라서이소!"

하면서 기성은 뜯어말렸다. 산발을 한 서울네는 작은 마귀 같았다. 두만이는 곰 같았다. 비대해진 몸에 숨이 가빠서 허우적거렸다.

"내 일생이 허사구나! 이렇게 배반을 당하다니 내가 죽어도 이 원수는 갚고 말 거야. 그냥 물러설 내가 아니다! 갈라서라고? 이 놈 기성아! 감히 그 말이 너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느냐! 내가 너희 형제들을 어떻게 키웠다고, 갈라서라고? 왜 내가 갈라서노. 이 목을 쳐 죽일 놈들! 너희들 빈 몸으로 나가라! 나가아! 피알 하나도 다 내 것, 너희들 게 뭐 있어!"

"남산 쇠가 웃겄다. 저년이 아주 미쳤구마."

"미쳤다고? 그래 미쳤다! 미쳤어! 거리거리를 미쳐서 쏘다니며 저주할 거야! 아아, 아아, 정말 이대로는 못 살아! 불을 지를 거야! 모두 함께 죽어야 해!"

서울네의 눈은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분노가 충천하여 그의 조그마한 몸뚱이도 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들은 완전한 타인이었다. 삼십 년 가까이 동고동락하며 함께 살아온 남자와 여자의 정의는 티끌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김두만은 월화 집에서 자고 새벽녘에 돌아왔다. 밤새도록 이를 갈며 눈 한번 붙이지 않았고 식칼을 옆에 두고 기다리고 있던 서울네는 방으로 들어서는 두만을 보는 순간 칼을 휘둘렀던 것이다. 그러나 우람한 남자의 손은 서울네의 손목을 비틀었고 칼은 방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서울네의 분노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서울네 없는 오늘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진실이다. 김두만이 서울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서울네가 진주서 쪼간이 비빔밥이라는 음식점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서울네 말대로 연장망태 짊어지고 과거 윤보가 그랬듯이 목수로 방랑했을지 모른다. 오늘 김두만의 부는 그 기틀이 서울네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그만큼 서울네는 전횡을 했고 유별나게 가족으로 똘똘 뭉쳐 있던 김씨 일가에서 김두만을 잘라내었으며 부모와는 등졌고 조강지처 막딸과는 기어이 호적을 팠으며 공부시킨다는 명목 아래 진주로 데려온 아들형제도 자식 없는 그 자신을 위해 독점하고 말았던 것이다.

"네년이 나한테 칼을 들이대 놓고서도 그 자리가 온전할 것 같나? 독사 같은 년, 내가 그거를 모리고 이날까지 살았제. 만정이 떨어진다."

서울네는 새우같이 등을 꾸부리고 앉아서 눈을 치뜨고 두만을 노려본다. 힘이 다 빠져서 입도 몸도 뜻대로 놀아주지 않는 것 같았다.

"이래가지고는 어디 마음 놓고 집이라고 찾아오겄나? 저년은 서방 밥그릇에 비상 타고도 남을 년이다. 생각해보믄 저년으로 인해서 부모형제하고 등졌고 죄 없는 제집 민적까지 파고 자식 놈은 저모양..."

새우처럼 꾸부리고 있는 서울네 등이 튀듯 움직였다. 전등 빛을 받고 서 있던 기성이

"지금 와서 그런 말씀 하시면 뭐합니까."

볼멘소리로 말했다.

"이마작해서 이런 말 하는 나를 내가 생각해봐도 가소롭다. 내가 직일 놈이제. 눈에 명태 껍데기 붙이고 살았는갑다. 돈이 있이믄 뭐 하노. 전쟁이 쳐들어오믄 그거 다 소앵이 없는 기라, 내 맘이 갈바를 몰라 설령 바람을 피웠기로, 소실 하나 얻었기로 그기이 무신 큰 죄고. 세상에 저리 흉악한 년이 어디 또 있겄노. 남정네 말이라카믄 죽는 시늉도 하는 제집 본색이 저러크럼 흉악할 줄은 차마 몰랐다. 저년이 지 탓으로 내가 오늘 이리 됐다고 말말이 들고나오는데 그까짓 음식점 해가지고 이리 됐단 말가? 그거야 새발의 피, 제 년이 눈먼 돈 몇 푼 가지고 떠돌아댕깄이믄 못된 놈한테 걸리서 돈털리고 버림받고 지 신세가 어찌 되었일꼬? 안방 차지하고 눈에 뵈는 사람이 없는 오늘을 누맀일까? 생각할수록 푼수 모리는 제집이다. 설령 내가 소실을 얻었다 하더라도 제년같이 월화가 안방 넘볼 기든가. 다 지 한 간이 있어서 저 지랄이제."

순간 서울네는 용수철같이 튀어올랐다. 그리고 비호같이 달려들어 두만의 머리칼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이년이!"

기성이 뜯어말린다.

"저울에 달면 한품도 차가 없겠습니다. 아무리 막돼먹은 자식이지만 부모의 체면이 있는데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렇게 실랑이를 해가 돋을 때까지 했다. 결국 조반도 못하고 김두만과 기성이 나가버린 뒤에야 안방은 흐느낌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을 뿐 조용해졌다. 집안이 좋다는 조건 하나로 데려온 며느리 금옥은 말없이 찬모와 함께 아침준비를 했고 밥상을 안방으로 들고 들어갔다.

"어머니 아침진지 드시이소."

하고 웅크리고 있는 서울네 앞에 밥상을 내려놓는다.

"목구멍에 밥이 내려가겠느냐."

의외로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래도 좀 드셔야지요. 어젯저녁도 안 드싰는데."

"거기 좀 앉아라."

"."

금옥은 슬그머니 자리에 앉는다.

"아가."

"."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말할 사람은 너뿐이니... 이렇게 적막강산일 수가 없다. 내 살아온 걸 어느 누굴 보고 다 얘길 하겠니?"

실은 자기 자신이 어떻게 어떻게 해서 오늘을 이룩했는가 귀에 목이 박이도록 며느리에게 얘기해왔다.

"그걸 아버님이 모리실 리 없십니다. 화가 나믄 마음에 없는 말도하게 되니까 어머니께서 이해하십시오."

노리끼하고 잔주름이 모인 서울네 얼굴이 한때 멍하니 금옥을 바라본다.

'저러다가 미치기라도 하믄 오짤꼬?'

금옥은 서울네 시선에서 얼른 비킨다.

"어떻게 해? 나는 어떻게 하면 좋으냐?"

"시간이 지나면."

"변했다. 변해도 기막히게 변했어. 내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곧이 듣던 사람이 어째 하루아침에 그렇게 변할 수 있을까? 정말이지 살고 싶지가 않아. 마른하늘의 날벼락이 이런 걸까. 세상에 이런 배신이 또 어디 있겠니. 내 죄라면 자식 못 낳은 그것밖에 더 있어? 생각하면 기성이 그놈도 괘씸하다. 내가 지를 어떻게 키웠고 공부를 시켰는데, 지 에미야 낳았다 뿐이지 아무 한 것이 없다. 그놈이 지 아버지한테 말 한 마디 하는 법이 없고, 뭐 갈라서라고?"

"자기 행실도 그런데 아버님보고 머라 카겄십니까."

"그래도 그렇지. 그래도, 키운 공을 생각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다. 오리새끼 물로 간다더니."

"독골에 발 끊은 지가 언젠데요. 처자 생각도 안 하는 사람입니다."

"다 소용없네. 나만 혼자, 나만 혼자 신다 버린 짚세기 꼴이 되었구나. 누굴 믿고 살꼬, 나한테 자식 하나만 있어도 이렇게 억울하고 서럽지는 않을 게야."

서울네는 또 흐느껴 울었다.

"옛날에는 나 없이 하루도 못 살 것처럼, 내 말이라면 천도복숭아도 따올 것처럼, 돈벌 때는 둘이서 밤 가는줄 모르고 일했으며 누가 내 마음에 거슬리기라도 할 것 같으면 대천지원수로 삼던 그 사람이... 어이구 나는 못 산다 못 살아. 이제 와서 부모형제하고 등진 것도 나 때문이며 제집하고 민적 판 것도 나 때문이며 자식까지 잘못 길렀다고? 나 아니었으면 시골구석에서 보리죽도 못 먹을 주제에 내 덕에 실컷 보고도 눈엣가시처럼 내 마음에 응어리를 심었고 그까짓 추물, 나 아니라도 데리고 살았겠어? 애당초 정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날 원망해? 정말 이대로는 못 죽는다. 아이고!"

흐느끼다가 자기 머리를 쥐어뜯는다.

"어머니 왜 이러십니까. 진정하시이소. 이래봐야 어머니만 상하십니다. 이럴수록 잡술 것 다 잡숫고 냉정하게 생각하셔야제요. 지사 뭐 하도 당하니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집에 들어오면 오는가부다, 나가면 나가는가부다, 그런께 오히려 심관이 편하더마요."

"어째 너 경우와 내 경우를 함께 생각하나. 내 집에 기르던 강아지한테 물려도 유만부동이지. 아아, 정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천하의 사내들이 다아 첩질을 해도 자기는 못 그런다, 아암 못그러고 말고! 내가 그만 월화 그년부터 죽여버릴까? 눈에서 피눈물 나는 꼴을 못 보고는 나 눈을 못 감는다! 옛날 김목수, 그 무지랭이 시절로 되돌려놓지 않고는 나 떠날 수 없어."

하면서도 서울네는 오늘 지금의 자기 처지가 믿어지지 않았다. 호적상 정식으로 마누라가 된 후 서울네는 이제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엊그제 일인 것만 같았는데, 이제는 자기 앞길을 가로막을 그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었다. 부모 형제에 대한 원망도 김두만이가 더 많이 했고 막딸이와의 인연을 저주했던 것도 서울네보다 두만이 쪽이 강경했다. 물론 그것은 다 서울네의 입장을 생각한 때문이다.

"나가보아. 너하고 얘길 한다고 속이 풀리겠느냐?"

"진지 좀 드시지요.?"

"아니다. 먹고 싶지 않다. 그냥 내가거라." 하다가

"아가."

새삼스레 불렀다.

"너 혹시 월화 그년하고 살림 차린 집 아느냐?"

"지가 우찌 알겄십니까?"

"됐다. 어서 상 들고 나가."

며느리가 나가자 서울네는 방바닥에 쓰러지듯 눕는다. 비로소 온 삭신이 쑤시기 시작했다. 꿈도 아니었고 현실도 아니었다. 서울네는 자기 자신이 한없이 떠내려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가 하면 보따리 하나 끼고 삼가람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자기 자신을 보기도 했다. 아득한 옛날 김두만을 만나기 전의 자기 모습이었던 것이다. 비아냥거리는 시어머니의 얼굴이 지나가고 노려보는 시아버지의 모습도 지나갔다. 말을 걸어도 대답 안 하던 시동생의 얼굴도. 그야말로 적진 속에 갇힌 자기 자신을 서울네는 보았다.

"아아, 못산다. 못살아!"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들이 일제히 자기 자신을 향해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다.

'달도 차믄 기우나니, 남한테 몹쓸 짓 하고 죽는 날까지 영화를 누릴 줄 알았던가?'

그들은 일제히 자신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일어나 앉아 보아도 다시 드러누워 보아도 몸을 가눌 수 없었다. 흐느껴 울어도 보고 울부짖고 넋두리를 해보아도 서울네에게 보이는 것은 캄캄한 절벽뿐이었다. 쌓아올린, 삼십 년 가까이 쌓아올린, 철통으로 믿었던 성이 무너졌다는 실감 이외, 한줄기 희망의 빛도 볼 수 없었다. 처음 두만이가 어떤 나이 어린 기생과 바람을 피운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서울네는 새파랗게 질려서 두만에게 따졌다.

"어째 그런 소문이 돌지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제가 알아듣게 당신이 해명을 해보세요."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손발이 닳게 두만이 빌어도 서울네는 용서하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을 먹었다.

"사내가 바람 피는 것, 그게 뭐 그리 대수라고 따지나."

뜻밖에 두만은 냉담하게 말했다.

"지금 뭐라 했습니까? 제가 혹 잘못 들은 것은 아닙니까?"

"삼 십 년 동안 죽어라고 돈을 벌었으니 이자는 나도 숨구멍 좀 터 보자. 머 그게 크게 잘못된 일가?"

두만은 주저하는 빛도 없이 뇌까렸다.

"어이구, 사람의 탈을 쓰고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옵니까? 혼자 돈을 벌었어요? 혼자서 재산을 만들었어요?"

"누구한테 눈을 흡뜨고 달라드노! ? 사람의 탈을 쓰고?"

"사람이면 그 짓 못할 거예요."

했으나 서울네는 허둥지둥 이었다. 이런 사태가 믿어지지도 않았다.

"나도 사람이니께 그런다 와? 사내로 태어났이니께 그런다, 우짤래? , 언제까지 제집 밑깔개가 되어서 살 줄 알았더나?"

서울네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응수하려다가 기가 넘어서 그만 까무러치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두만은 나가고 집에 없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바람을 피운 것도 그렇지만 사람이 그리 변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조금 전의 일이 과연 생시였던가 의심스러웠다. 서울네는 그 후 두만이 집에 들기만 하면 싸움을 걸었다. 믿어지지 않아서, 확인하기 위하여 싸움을 걸었다. 억울하고 분하다 하며 땅을 치고 통곡을 했으며 때로는 애원도 해보았지만 김두만의 식어버린 마음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한 달 가량을 서울네는 지옥과 같은 속에서 발버둥 치며, 결국 행동도 언어도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졌으며 그 자신 옛날과는 전혀 다른 여자로 변해갔던 것이다. 예사로 놈자를 붙이며 욕설, 육박전을 하고 발광을 했다. 외박을 한 것은 어젯밤이 처음이었다. 서울네는 위협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진정 두만이 나타나기만 하면 죽이리라 마음먹었다. 식칼을 놔두고 기다린 긴긴 밤, 그것은 사랑을 잃었다는 절망감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소유에 대한 상실감이었을 것이다. 소유를 위하여 서울네는 긴 세월을 걸어왔다. 한 남자를 소유하기 위하여, 남편을 소유하기 위하여, 아들 둘을 소유하기 위하여, 재물을 위하여, 남들보다 우월하며 남들에게 군림하기 위하여, 그런 자신의 위치를 확보해야만 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김두만이 아니었어도 그랬을 테니까. 하여튼 그 모든 것을 얻었건만...서울네는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때 집을 나섰다. 그가 찾아간 곳은 이미 오래 전에 팔아버린, 비빔밥으로 유명한 쪼깐이 집이었다. 그것을 인수한 여자가 기생 출신이었고 오가며 인사는 하고 지내는 처지였다. 서울네는 가게에 들어가지 않고 주인여자를 불러내었다.

"우짠 일입니까?"

"."

"하여튼 들어오시이소."

주인 여자는 마음속으로는

'니나 내나 다를 기이 뭐 있노? 돈푼 있다고 갈롱을 피운다마는 니 근본을 누가 몰라서?'

했으나 겉으로 반색을 했다. 그것이 현실이었고 추세를 따르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어쨌든 부잣집 유지의 마누라가 아닌가.

"들어갈 거는 없고, 나 뭣 좀 물어보려고 왔는데."

"말심 하이시소."

"혹 월화라는 기생을 아는지."

"알지요."

"어디 사는지 그것도 알아요?"

"무신 일 땜에 그럽니까?"

주인 여자는 그간의 사정은 도통 모르는 눈치였다.

"만나볼 일이 있어서... 어디 사는지 그걸 알아야겠는데."

"나는 잘 모르겠는데, 아 참 그 아이 오라비가 시장에서 야채 장사를 하고 있는데 거기 가서 물어보시이소."

"글세 어쩔까?"

하다가

"사정이 있어서 부탁을 하는데, 누구 심부름시켜서 알아올 수 없을까요?"

"그야 어렵지 않십니다. 우리 집 아아들 시키지요."

"한데, 내가 그러더라는 말은 말고 댁이 물어보는 것으로, 그래 주었으면 좋겠는데."

주인여자 얼굴에 의혹의 빛이 돌았다.

"부탁이오. 까닭은 묻지 말고..."

찜찜해하는 것 같더니

"그러지요."

겨우 승낙을 했다.

"고맙소. 나 보답하리다."

"하여간 아이를 보낼 테니까 들어와 기다리시이소."

"아니 걱정 말아요. 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게요."

주인 여자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심부름꾼을 내보내는 것 같았다. 서울네는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이를 갈았다. 월화를 만나 어떻게 하리라는 생각도 없었다. 무조건 달려가는 그런 심정이었다.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나를! 이게 내 공로에 대한 보답이란 말인가'

이윽고 주인여자가 나타났다.

"저기 술도가 뒤에 있는 기와집이라 합니다. 기와집이 두 채 있는데 큰 기와집이랍니다."

"알았어요. 한번 날 찾아와요."

서울네는 휭하니 돌아섰다.

'술도가 뒤라고? 뻔뻔스럽게, 지척에다 숨겨두었구먼.'

저녁도 굶고 아침도 굶었는데 서울네는 기운이 펄펄 나서 달리듯 걸어간다.

'온종일 거기 쳐박혀 있었구먼! 벼락 맞을 놈의 인사! 어떻게 하면 이 분을 다 풀까.'

김두만이 월화에게 사준 기와집은 아담하고 조촐했다. 품에 옴싹 들어오는 계집같이 간드러져 보이기도 했다. 서울네는 대문을 밀치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마루에는 보자기로 싸놓은 물건이 두개 있었고 어디 나갈 채비를 하는지 남치마에 옥색저고리를 입은 월화의 됫모습이 보였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일하는 계집아이가 물었다. 그때 뒤돌아선 월화는 몹시 놀란다.

"여기가 김두만이 집이냐?"

월화를 노려보며 서울네가 말했다.

"그렇습니다만."

월화는 눈을 내리깔았다. 결코 녹녹해 뵈는 여자는 아니었다.

"하면은 너는 누구냐!"

"아시고서 오신 모양인데 새삼스럽게 묻기는 왜 묻습니까."

항상 노리끼했던 서울네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누구 허락받고 김두만의 집에 들어왔지?"

"누구한테 허락을 받아야 하지요? 영감께서 들라 해서 들었습니다."

"아아니 이년이!"

달려들어 월화의 치맛자락을 잡는 순간 치맛말이 터져서 치맛자락이 흘러내렸다. 월화는 그 손을 착 뿌리치면서

"점잖지 못하게 왜 이러시오!"

"뭐 어쩌고 어째? 네년은 점잖아서 늙은 영감 첩살이 하냐?"

"지난날, 독골 본댁에서도 당신께서 이러셨던가요?"

나이 스물일곱, 김두만의 팔자가 그러했는지 월화도 몸집은 작았다. 모습은 연연해 보였지만 아주 당차다.

"이 주리를 틀어서 죽일 년이 뉘 앞에서 감히."

했으나 이미 약세였다.

"기생 팔자 남의 첩살이하기 예사 아니겠소? 불만이 있으면 영감한테 말할 일이지, 저보고 따질 이유 없습니다. , 독골의 본댁이 그러신다면 모를까, 나도 남사스럽지만 댁도 얼굴에 철판 깐 행실이오. 이치가 안 그렇습니까?"

"나는 호적에 오른 정처다! 그걸 몰라 하는 소리냐!"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나는 민적 파라는 말은 안 할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기생생활 십여 년, 수작에는 이골이 나 있는 월화에게 서울네는 적수가 아니었다. 이렇게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몸집이 크고 눈이 부리부리한 삼십대쯤의 사내가 뛰어들었다.

그는 서울네를 째려보다가

"뭐가 우찌 됐다 카노."

하고 월화에게 물었다.

"독골에 갈려고 막 나서려 하는데 저분께서 오셔서, 뻔한 일 아니겠어요?"

"엉겁결에 집을 가르쳐주고 이상하다 싶어서 비빔밥집에 갔더니."

하다가 월화오라비는 뻗장나무같이, 거의 넋을 잃고 서 있는 서울네한테 시선을 보낸다.

"뭐하러 오셨어요. 장사 안 하고."

월화 말에는 대꾸 없이 사내는

"기생 누이를 두었으니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하겄지마는, 이보시오, 피차 남사스러운께 그만 돌아가소. 월화가 잘한 것도 없지마는 묵고 살자니 할 수 없고 들내놓은 노류장화, 따진들 무신 소용이 있겄소?"

월화오라비는 일단 온건하게 나온다.

"댁도 월화를 면박할 처지가 아니지 않소. 월화를 나무라기보다 돌아가서 영감 맘을 돌리놓는 것이 상수 아니겄소?"

"독골은 왜 가나!"

울부짖듯 말했는데 서울네 목소리는 피리 소리 같았다.

"도리 아니겠소? 내일 모레가 추석인데 소실은 소실의 도리가 있는 겁니다."

"누구 마음대로!"

한마디로 비참했다. 그것을 느꼈는지 월화오라비 얼굴에서 도전적인 빛이 사라진다. 그가 달려온 것은 작당을 해서 월화에게 폭행을 하고 살림을 때려 부수고, 그러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치맛말이 뜯어진 것으로 보아 다소 실랑이가 있었던 것은 짐작이 되지만 일대 일이라면 젊은 월화가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로가 다 팔자 기박해서 이런 지경이 된 것 아니겄소. 오기로 해결이 될 문제가 아닌 기라요. 그만 돌아가시이소. 월화 니도 같은 여자 입장이니 풀세게 그럴 거 없다. 전사야 우떻게 되었든 그거를 왈가왈부하는 것은 니나 내나 주제넘는 짓이고, 다 그거는 남정네 하기에 매인 일 아니겄나. 기왕지사 일은 이렇게 됐으니 월화 니가 굽히는 기이 순서일 것 같다."

월화는 오라비를 힐끗 쳐다보았다. 서울네는 멍청히 서 있었다. 발광을 하다가도 멍청해지곤 하는 것이 요즘 서울네의 버릇이었다.

"독골에는 갈 것 없다. 가만히 들어푸리 있거라. 당을 만들어서 머할 기고? 영감하고 천 년 만 년 살 기가? 기영머리 마주 풀고도 갈라서는 기 기생 팔자..."

하다가 그는 호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내어 서둘러 붙여 문다. 가난한 것이 죄지, 장바닥에서 월화오라비는 사리 밝은 사람으로 통해 있었다. 오라비로서 누이를 기생으로 내보낸 것을 항상 부끄럽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멍청하게 서 있던 서울네는 온다간다 말도 없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아아니, 가부렸네?"

"오빠가 오니까 봉변당할까 봐서 갔겠지요 뭐."

담배를 몇 모금 빨다가 버리면서

"월화야."

"왜요?"

"아까는 머한다꼬 독골 가느니 어쩌니, 그런 말을 했노."

"구데기 무서버서 장 못 당구겠소."

"그렇게 말하는 기이 아니다. 그 여자 처지나 니 처지가 다를 거 머 있노? 넘한테 적악하기로는 매일반 아니가. 오히려 니야 공로 없이 영감 덕에 호강하는 셈이고 그 여자는 그럴 만도 하다. 그 여자가 피나게 벌어서 오늘 그 집안이 일어선 거를 진주서는 모릴 사램이 없다. 예사 잘되고 보믄 시기심에서 못한 것만 들추게 매련인 것이 인심 아니겄나? 그만 알 듯 모르듯 독골에 다니오믄 되는 긴데 그거를 이봐란 듯 그 여자 앞에서 나뵐 것은 머 있노? 그거는 잘한 짓 아니다."

"오빠는 참."

"하기야 기생 오래비가 입이 열 개라도 무신 할 말이 있겄노. 내가 집안 처리를 잘했이믄 니가 기생이 되었겄나."

오누이간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집안도 정적에 싸여 있었다. 빨간 벽돌로 야트막하게 담을 산 장독가에 철늦은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나 갈란다."

월화오라비가 일어섰다.

"오빠."

"..."

"영감이 장터 가게 하나 비면 오빠한테 주겠다 하데요."

"그런 소리 마라. 지금 난전에서도 우리 식구 입에 풀칠을 한께, 니 장래나 생각해라. 항상 젊나?"

하고는 대문을 열고 나갔다. 월화는 마룻가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독골에 갈까 말까 망설이는 것이었다. 어젯저녁, 밥상을 물린 뒤 식곤증에 빠졌는지 비스듬히 누워서 숨가빠하는 김두만에게 독골 다녀오겠다 했을 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어쩔까?'

오라비의 충고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울네가 와서 야료를 부려 기분이 상한 탓도 아니었다. 서울네가 오기 전부터, 준비해둔 것을 마루에 내어놓고 옷을 갈아입을 때 월화는 망설였던 것이다. 독골에는 달포 전에 한번 다녀온 일이 있었다.

"우리하고는 인연 끊어진 지가 오래인데 각시가 그 몹쓸 놈의 인사하고 어떤 사인지 모르겄지마는 찾아올 까닭이 없고 절 받을 까닭도 없제."

백발이 성성한 두만의 모친은 월화의 절을 받지 않으려고 돌아앉았다.

"어무이도 참, 여까지 왔는데."

기성네는 난처해하며 말했다. 그의 머리도 반백이었다. 늙어서 더욱더 체구는 조그맣게 되어 있었으며 얼굴빛은 몹시 검었다. 며느리 말에 다소 누그러진 두만의 모친은

"그 숭악한 인사가 각시 자네보고 가보라 하든가?"

역시 궁금하기는 했던지 물었다.

"아닙니다. 제 자작으로 왔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도리일 것 같아서."

"도리를 아는 사램이 남의 소실로 들어왔나?"

아픈 곳을 찔렀다.

"가세가 곤궁하다 보니...기생 팔자를 어쩌겠습니까?"

하는데 월화는 그 순간 목이 메었다. 두만의 모친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기성네는 점심을 먹고 가라고 권했다.

돌아오는 길은 나룻배를 타지 않고 걸었다. 걷다가 월화는 짙은 노을을 바라보며 사람 없는 강가에 서서 눈물을 흘렸다. 도리를 아는 사람이 남의 소실로 들어왔느냐, 그 정도의 수모, 비난은 밥 먹듯 받아온 신세, 새삼스럽게 눈물이 흐를 이유도 없겠는데 월화는 울었던 것이다. 얼굴이 새까맣고 반백이 된 중늙은이, 본댁 티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낯가림하는 아이처럼, 그리고 수굿했던 김두만의 본마누라, 그 자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월화는 가슴 아프게 느꼈던 것이다. 호적이야 어찌 되었건 귀밑머리 마주 풀고 일부종사한 여자의 당당함을 월화는 느꼈던 것이다. 늙고 못생겼으며 난쟁이같이 볼품없는 체구 그 어디에선가 풍겨나는 당당함, 인생에는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시어머니 후광 속에 있던 그, 이웃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시동생, 손아래 동서 그리고 조카들에게 떠받침을 받고 있는 기성네 처지는 견고한 성만 같았다. 그것이 부러웠다. 자기 자신은 결코 가질 수 없는 자존심인 그것. 아무나 꺾을 수 있는 노류장화, 서로 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묶이어 그늘에서 숨어 사는 것도 아니며 돈이 많아 호강은 한다지만 늙은 영감 수발이나 드는 소실 신세가 서러워 월화는 울었던 것이다.

결국 월화는 치맛말이 뜯어진 남색치마 대신 검정치마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초행 때보다 두만의 모친은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못 이기는 체 절을 받기도 했다. 처음 냉대로써 며느리나 동네사람들에게 체면은 섰다 생각한 것 같았다. 그 광경을 보고 마을 왔던 이웃집 노친네가 말했다.

"하모,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말고."

초행 때도 그랬지만 동네 사람들이 월화를 배척하지 않고 은근히 호의를 보내는 것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서울네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어디 세상에 서울 년 그년같이 모질고 독한 년이 있일까, 기성 아배 발걸음 끊은 지가 몇 해고?"

"그거사 머, 문전에 발 딜이놓기만 하믄 내 죽는 꼴 볼 기라고 했인께."

죽일 놈 살릴 놈 했으나 역시 어미의 마음, 천하 악독한 불효자로 만들고 싶지 않았고, 폭력으로 이혼장에다 며느리 지장을 찍게 했을 때는 두 번 다시 아들과 상면하지 않으리라 두만의 모친이 결심한 것도 사실이나 그것도 세월이 흐르니 잊혀졌고 내심으로 설 명절 제사 때가 되면 혹시 아들이 나타나지 않을까 기다리기도 했으니 월화의 출현이 당혹스러우면서도 한편 반갑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맞아죽는 한이 있어도 자식된 도리, 발걸음을 끊다니 말이나 되는 일이든가."

"우리 고향의 석이어매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들 소식도 모리고 십 수 년을 살고 있구마는. 품안의 자식이제, , 자식 없는 중이 사까?"

"이자는 작은 각시를 보내는 거를 보이 기성아배도 길 털라꼬 작심을 한 모앵이요."

"누구 마음대로?"

"길을 두고 뫼로 가나? 부모자식이 우떤 인연인데, 역적질을 해도 오믄 받아야제."

"그런 말 마소. 민적 도로 가지오기 전에는 어림없구마."

"그 제집이 다른 거는 다 그만두더라도 우애 천륜을 끊는단 말고. 각시도 그 뽄만은 봐서는 안 될 기구마. 본처 맴을 달래놔야 작은집 살림도 편한 법, 본처 눈에 피눈물 나게 해서 잘되는 것 못 봤인께. 사내들이란 과부나 여염집 제집하고 오입질을 하믄 본처 박대하기가 일쑤라 카고, 화류계 제집하고 오입질을 하믄 개심을 하여 본처한테 돌아온다는 말들이 있는데 그것 다 각시 하기 탓인 기라 안 그렇소? 기성 할매."

마을 온 노친네 말대답을 기다리다 못해 월화는

"어머니 이거 받으십시오."

하고 보따리를 내밀었다.

"멋꼬?"

"옷감입니다."

하고는 허리를 굽혀 보따리를 푼다.

"치수를 알았으면 지어서 가져왔을 건데 몰라서."

"그거사 무신 작은며느리 손끝이 야물아서 옷 맨드는 거사, 득달 겉이 해 내놓을 긴데."

노친네가 두만의 모친을 대변하듯 말했다.

"이거는 어머니 것입니다. 쑥색은 형님, 분홍색은 작은댁 동서 거구요."

"옷이야 머 기럽나. 늙은 기이 입고 나갈 곳도 없고."

하는데 또 노친네

"그런 소리 마소. 늙을수록 옷은 잘 입어야 대접을 받는 기요. 참 좋네. 이런 것을 어이서 샀을꼬?"

노친네는 부러운 듯 옷감을 만져본다. 쑥색과 분홍색의 옷감은 호박단이었다. 흰색은 하부타에 라는 천인데 일본서 만든 고급 견직물이었다. 포근포근 하고 눈이 부시게 흰 천이었다.

"요새도 이런 감 파는 데가 있나?"

궁금한 듯 노친네는 또 물었다.

"포목점에서 피륙을 팔기나 합니까? 전에 끊어다놨던 것이지요."

월화는 내키지 않는 듯 대답했다.

"그러믄 그렇지. 광복 몇 마 배급받는 것도 꿈자리가 좋아야 애댕기는 세상 아니가. 혼사를 할라 캐도 예단감 구하기가 그리 어렵단다. 오새 나오는 갈창겉이 엷은 비단도 달라는 것이 값이고 그것도 솔옵을 알아야 천신을 한다 카이, 없는 놈들 찬물 떠놓고 예를 올리는 핑계가 돼서 좋기는 하다마는, 요새 이리 좋은 감이사 어디서 구하겄노. 참 좋네. 기성이 할매는 복도 많소."

"그런 말 마소. 복이 많아서 자식하고 담쌓고 사요?"

"그래도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리를 덮더라고 진주 김두만의 모친이라 카믄 어누 누가 하시하겄소."

"속 모르는 소리 그만두소."

"와 속을 모릴꼬. 못사는 자식이 하나나 있어야제. 여수 사는 딸만 해도 안 그렇소? 철철이 친정어매 옷을 해서 안 보내나, 명절 때 제사 때는 개기며 제수 비용까지 보내주고, 효성이 지극해서 그러겄지마는 그것도 없이 살믄 그럴 수 있겄소?"

"그거는 그렇지마는."

처음으로 두만의 모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여수의 우리 그 아이는 키울 때부터 실겁었고. 시집을 갔다 한 연에는 복덩이 들어왔다고 시부모가 오금덩겉이 위했고, 아닌 게 아니라 그 아이가 들어가고 부터는 시가 살림이 불티겉이 일었인께. 하지마는 살림보다, 무엇보다 복 많은 거는 시부모를 잘 만나 일이요. 딸 사위보다 사돈네 일이라 카믄 어른들이 먼저 챙긴께."

"그러니 그것 다 기성 할매 복 아니겄고? 모진 시에미 만나서 친정에 울고 오고 울고 가는 딸을 봐야 하는 어매, 골병 드는 사램이 얼매나 많다고."

"내 평생 여수의 우리 가아 거겅은 안 했거마는."

평소 수다스럽게 자랑 같은 것 하는 성미가 아니었는데 딸 선이 얘기를 할 때는 두만의 모친 얼굴에 만족과 자랑스러움이 떠올랐다.

"뿐이건데? 작은 아들 기완애비는 우떻고? 그런 효자 없제. 형수한테 하는 거만 보아도 그런 시동생 없일 기고 밤낮으로 일해서 사람은 곱돌겉이 튼튼하니 무신 걱정이 있겄소. 성이사 그러거나 말거나 등 댈라 안 카고, 마아 아니 할 말로 진주 나가서 성한테 비비대믄서 거들먹거리고 댕길라 카믄 못 그랄 것도 없제. 하야간에 기성이 할매는 대복을 찌고 나온 기라요. 동네 사람들이 얼매나 불버라 하는지 아요? 그러고도 한 가지 근심이 없다믄 그거는 재앙을 부르는 일 아니든가배?"

노친네의 입담이 여간 아니다.

"그래도 머니머니 해도, 딸은 출가외인이요. 기완이 애비는 제금을 나갔이니, 젯상 받들 사람이사 기성에미 아니겄고? 뿐만 아니라 기성에미는 우리 집 살림밑천이요. 고생도 많이 했고, 내사 마, 민적파가든 그날을 생각하믄 지금도 눈앞이 캄캄해지오."

그 말은 월화 들으라고 한 말인 것 같았다.

"그거사 머 두말 하믄 잔소리제. 하늘이 무심치 않아서 눈앞에 안보요? 서울네 이자는 쭉지 뿌러진 신세 아니든가? 내가 벌써부터 머라 캅디까? 아무리 그래싸아도 오리는 물로 간다고, 서방 뺏고 자식 뺏고 그래봐야 말짱 허사라 안 했소? 오다가다 만냈이믄 자식이나 있든가, 자식이라는 거물장도 없는 처지 늙으믄 뻔한 신세라 말했는데 바로 그렇기 됐제. 기동이가 부산으로 간 것도 서울네 꼴 보기 싫어서 그랬다믄서요?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되고 세월이 잠깐이라요."

"기성이 그놈은 틀렸어. 그놈은 사람 되기 글렀제."

"그래도 경방단의 머라 카든고? 웃대가리라 하더마."

두만의 모친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둘째 기동이가 달라진 것은 사실이었다. 장가를 들어 아이도 하나 낳았는데 명절에는 식구들과 함께 독골로 돌아왔고 어미를 위로했으며 부산에서도 안부 편지를 종종 보내오곤 했다.

노인들의 얘기가 길어지는 것이 지겹기도 했지만 동네 사람들이 한둘씩 모여드는 것도 민망하고 어색하여 월화는 얘기가 끊어지는 순간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머니, 또 오겠습니다. 오늘은 좀 바쁜 일이 있어서."

"갈라꼬?"

이번에도, 두만의 모친 대신 이웃 노친네가 말했다.

"."

"요다음 올 때는 기성이 아배하고 함께 오니라."

"무신 소리 하요?"

두만의 모친이 가로막듯 화난 음성으로 말했다.

"내쫓기는 한이 있어도 와야제."

기성이 아배와 함께 오라는 이웃 노친네 말은 월화를 당황하게 했다.

", , 그렇게 하겠습니다."

권한 밖의 일이었지만 우물쭈물 대답한 뒤 두루 인사를 하고 동네 사람들의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에서 몸을 감추듯 월화는 종종걸음으로 떠났다.

"실데없이 와 그런 말을 합니까?"

두만의 노친은 노친네한테 화를 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구, 깨소금겉이 꼬시다. 이 사람들아 안 그렇나?"

동네 사람들이 와글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기성이 아배도 바람 필 날이 다 있든가배."

"그게 어디 바람 피는 정도가. 아주 딴살림을 차린 거 아니가. 허참, 피어나는 꽃봉오리 겉은 기생첩을 두었으니 서울네가 얼마나 복장을 칠꼬. 밤에 잠이나 오겄나. 내 원수는 남이 갚는다 카든 옛말이 하낫도 그른 거 없다."

"와 아니라. 올바람은 잡아도 늦바람은 못 잡는다 안 하든가배? 젊은 것한테 푹 빠지믄 서울네 신세, 눈먼 구렁이 갈밭에 든 기지머."

"그러기, 사람이 너무 뺏독시럽게 해굴어도 신앙에 해롭은 기라. 엊그제 지가 남한테 한 짓을 오늘은 남한테 지가 당하니 입이나 어디 한분 뻥것 하겄나. 그기이 다 정한 이치제. 꽃도 피믄 지는 법이고 달도 차믄 기우는 법이고."

월화가 떠나자마자, 말을 못해서 입이 근질근질하던 동네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으며 마치 자신들의 일인 양 신명을 내고 있었다. 그새 기성네는 베밑콩 따겠다 하며 소쿠리를 들고 밭으로 나가버렸다. 어른들이 있는 앞에서 동네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을 당돌한 성격도 아니었지만 일을 낙으로 살아온 그의 일상은 항상 그랬으니 특별한 것도 없었고 동네 사람 역시 그러려니,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두만이 모친은 아까 노친네 말에 기분이 언짢아 있었고 동네 사람들 입방아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사람들아 대강 해라. 무신 경사가 났다고 야단이고."

하며 타박이었다.

"서울네 따문에 인병이 들어서 주야로 탄식을 하더마는 그라믄 기성 할매는 속이 씨원하지도 않다 그 말입니까? 남인 우리도 삼년 묵은 체증이 내리간 것 맨치로 씨원한데 말입니다."

"못할 짓 하믄서 남의 앞(소실)이 되어 사는 제집들이사 그년이 그년, 뭐가 다를 기고. 내가 셋째 년보고 치하라도 할 줄, 너거들은 그리 알았더나? 삼간 오두막 다 타도 빈대 타죽는 것 좋아라, 날보고 그러라 말가."

"아이참 그러지 마이소. 괜히 맘속으로는 좋아하심서, 고분고분 찾아와서, 인사도 하고 이바지도 하는 거를 보믄 머지않아 기성이아배도 안 오겄고? 제집 소나아 지아무리 죽네사네 해싸아도 돌아눕으믄 남 아닙니까. 오두막이 불타서 없어지지도 않을 기고 아무나가 기생첩을 거나리건데? 다 그럴 만한 성시가 된께 그러제요. 초년 고생이 노년의 낙이라 카더마는 기성네도 이자는 괜찮을 깁니다."

"하모요. 괜찮고 말고, 이자는 오금 박아감서 기성 할매나 기성네 큰소리 치믄서 살게 될 깁니다. 다 심덕 탓으로, 기성네가 그렇기 시부모 공양함서 참고 살았는데 공든 탑이 무너지겄고? 사람은 노리가 좋아야, 참말로 기성네 고생 많이 했제요."

한소끔 요란하게 떠들어대던 동네 사람들이 다 빠져나갔을 때 영만이 내외가 슬그머니 나타났다. 장독가에서 김칫거리를 다듬고 있던 기성네는 무안해하듯 히죽이 웃었다.

"형님, 그 여자가 또 왔따믄서요? 와보고 접었는데 기완아배가 말리서 못 왔십니다."

기완네는 치맛자락을 걷고 쭈그려앉으며 함께 김칫거리를 다듬으며 말했고 영만이는 그런 여자들을 외면하듯 모친이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진주서 여자가 왔다 믄서요?"

영만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

"머하러 왔든가요?"

"추석이 가까워온께 인사하러 온 모앵이더마."

"망쪼 들었구마요. 기생첩이라니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그거는 그렇다."

두만이 모친은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안 한다 하더니 집안꼴 자알 돼갑니다. 하기야 넘같이 담쌓고 사니께 우리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마는 사람이 분수를 알아야지. 기가 맥힙니다."

"제집이 심성이 나빠 뵈지는 않더마는 사람 속을 누가 알겄노."

"심성이 좋고 나쁘고 간에, 부자가 함께 그 살림 결딴 내겄소."

"그거야 누가 아나. 하도 제집이 독한께 정이 떨어져서 한눈을 팔았는지. 지도 나이가 든께..."

"여자 나무랄 것 뭐 있십니까. 성이 집안 처리를 잘못했인께 그런 거지요. 형수 보기 민망합니다."

한참 말이 없다가 두만이 모친은

"나도 그렇기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번 일로 해서 니 성이 조맨치라도 맴이 달라져서 집에 오고... 함께 살라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니 형수를 본댁으로 대접한다믄 다행 아니겄나? 하니 그 젊은 아이를 박대해서 오기를 돋굴 것이 아니라 살살 구슬러서 일이 좋게 됐이믄 싶다."

영만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그런다고 제 버릇 개 주겄소."

영만은 조금치도 기대를 하고 있지 않는 표정이다.

"그렇기만 몰아세울 것이 아니라, 사램이 나이 들믄 생각하는 것도 달라지네라. 그까짓 재물이사 있건 없건, 옛날겉이 우리 식구 화목하게 사는 것을 보아야... 내가 살믄 앞으로 얼매나 살겄노."

"..."

"내사 니 성 돈 많다고 너무 입질에 오르내리는 거 싫구마. 그때 가정분가 하는 데서 돈을 털어갔일 직에도 내사 마, 세상 보기가 부끄럽었다. 부자믄 뭐하노? 한 끼에 밥 열 그릇 묵을 기가? 이밥도 입에 쓸 때가 있고 깡보리밥도 입에 달 때가 있제. 사람 사는 기이 그런 것 아니다."

"..."

"그러니 기완이 애비 니도 성을 내치지만 말고 옛날겉이 성지간에 잘 지낼 수는 없는 기가? 내 살인데 우쩔 기고? 에미사 뭐라 카든지 간데."

"누가 그러고 접지 않아서 안 그랬십니까? 저거들 재산 넘기다볼까 싶어서 미리 똥을 싸는데, 앵이곱고 디러봐서 지도 자연 성질이 났지요. 한마디로 성은 졸장부요. 돈이야 벌었는지 모르지마는."

"그거 다 서울네 농간 아니가. 답대비, 두만이 가아는 귀가 여린기이 병이다. 밤에 잠이 안 오고, 이일저일 생각을 해보믄 후회가 될 때도 있네라. 그만 그때, 윤복목수 딸리서 서울로 보내는 거 아니었는데 싶기도 하고, 요새는 왜 그런지 자꾸 지난일 생각이 난다."

"그리 안 했으믄 그때 어울리서 산으로 들어갔을지도 모리지요."

"그럴 인야나 되건네?"

"다 팔자소관 아니겄소."

"니 아부지 살아 생전 부끄럽기 생각한 일이 꼭 하나 있었네라."

"산에 안 가신 것 말이지요?"

두만이 모친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만이가 돈을 벌어서 진주로 나오기는 했다마는 니 아부지 고집에 그 일만 아니었다믄 고향 버리고 떠났을 리가 없다. 나 역시도 그렇고, 살아도 살아도 뜨내기 겉은 생각, 나이 들수록 그곳 생각이 난다. 그때가 좋았제. 어디로 가도 내 나온 고향보다 좋은 곳은 없다."

"지난 일 생각하믄 뭐합니까. 만리타국에 가서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선이 시집보낼 때 일이 엊그제만 같고 타작마당에서 굿판 벌이던 일, 함안댁 성님이 살구나무에 목을 맨 일도 눈앞에 생생하다."

영만은 그러는 모친을 근심스럽게 바라본다.

"그런 기막힌 일을 겪었는데 한복이 가아는 고향에서 안 사나? 얼굴이 딸바가지가 돼가지고 달구지를 타고 어돈 그눔아아, 이자는 옛말이고 살제... 애당초 잘못한 기라."

"뭐가요?"

"니 아부지 세상 버맀일 직에 뫼를 평사리에다 쓰는 건데 잘못했다."

"..."

"그때는 어마도지해서 그런 생각도 못했는데 오새 와서 곰곰이 생각한께 잘못했다는 생각이 드네. 그랬이믄 나도 함께 고향에다 뼈를 묻은 긴데."

"아부지는 생전에 그런 말씀 안 했습니다. 기색으로 나타낸 일도 없었고요."

"이녁 입으로는 차마 말 못했일 기다, 마음에는 있었어도."

하는데 모친의 눈이 순간 젖었다.

"정 그렇다믄 이장하지요 머."

"그기이 어디 쉬분 일가."

"어려불 것도 없십니다."

"산소는 함부로 건디리는 기 아니다. 그랬다가 집안 망한 경우가 흔히 있었인께... 그냥 내 맴이 그렇다 그 말 아니가."

"평사리 김훈장댁 양자도 만주서 김훈장을 이장해왔다 카든데요?"

"그 말은 나도 들었다. 양반의 법도가 참 무섭구나 생각했제."

"어무이가 정 원한다믄 못 할 것도 없십니다."

"아니다, 그렇게까지는 할 필요가 없고, 보나마나 니 성은 길길 뛸 기다. 우리 근본 얘기만 나오믄 자다가도 방맹이 들고 나올 사람 아니가. 어림없는 일이다."

"성을 참니시키지 않으믄 안 됩니까."

"그렇게는 못한다. 그거는 그렇고 영민아."

"."

"세상이 우찌 된다 카노?"

"?"

"우리 동네서도 보국대로 뽑히간 사람이 수울찮은데, 연방도 뽑아간다 카든데 우리 집 아이들은 괜찮겄나?"

"직장이 있은께 아직은 별일 있겄십니까. 그러나 앞일이야 모리지요."

영만은 떨떠름하게 말했다. 큰아들 기완은 사범학교를 나온 뒤 거창 산골, 국민학교 교사직에 있었고 둘째는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우편국 사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징용에서는 일단 안전권에 있다 할 수 있겠으나 둘째 기태는 호적이 잘못되어 실제보다 나이가 두 살 아래로 되어 있어서 징병에 걸릴 위험은 있었고 스무 살 난 막내딸 기숙의 남편은 같은 독골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는 처지였으나 징용에 대한 불안이 있었다.

"보래, 영민아."

갑자기 모친의 음성이 낮아졌다.

"만일에 말이다, 일본이 싸움에 져서 손을 든다믄."

"누가 그런 말을 하든가요?"

영만은 긴장했다.

"? 촌구석에 있다고 아무것도 모리는 줄 알았떠나? 늙어서 귀도 먹고 눈도 멀었는줄 알았더나?"

"그런 게 아니고 함부로 말했다가는 무신 봉변을 당할지 몰라서."

"에미가 함부로 말할 사람가?"

"..."

"그런께, 만일에 그렇기 되는 날이믄 니 성이 우찌 될꼬?"

영만은 깜짝 놀랐다.

"사람들은 니 성을 친일파라 안 카나. 또 그때 돈 뺏겼을 직에도 니 성이 좀 야단을 했나? 사람들 입질에도 오르고 인심 많이 잃었제. 천방지축 모리고 이 사람 저 사람 찍어넣고... 기성이 그놈도 안 그렇나? 경방단장인가 먼가, 그것도 큰 흠이 될 것 겉은 생각이 든다."

소싯적부터 대범하고 지혜로운 모친이라는 것은 잘 아는 일이지만 그런 것까지 깊이 생각하고 있을 줄은 영만이 미처 몰랐다. 아닌게아니라 요즘 영만이 자신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보곤 했던 것이다. 그것은 영만의 국량이기도 했으나 사돈뻘 되는 장연학의 영향도 컸다. 부친의 장례식이 끝난 그날 밤 소동을 영만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두만이 군자금 강탈 사건의 범인으로 어릴 적 친구였던 송관수를 지목하며 흥분해 날뛴 데서 사건은 발생되었고 드디어 영팔 노인하고 시비가 붙었던 그날 밤,

"예끼 순! 이 나쁜 놈아, 동냥은 못 줄망정 쪽박을 깨지 마라 했는데 니 말대로 하자믄 관에서 쬐끼댕기는 놈이 날 잡아주소 하고 진주에 왔겄나? 종무소식,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리는 사람을 두고."

처음에는 영팔노인도 그 정도로 말했다.

"! 초록은 동색이라 카더마는 다 그렇고 그런께 편역 들고 나서는 거 나도 압니다. 의병인지 동학인지 옛날에는 다 한통속인 거를 누가 모립니까."

"뭐 우째?"

"울 아부지가 산에 안 들어갔다고 후회를 했다고요? 어림 반 푼어치 없는 말 하지도 마소. 의병질을 했건 동학당을 했건 만주 가서 독립군을 했건 그거는 아저씨 소관이지 울 아버지가 와 후회를 합니까. 누구 망해 묵을라꼬 한단 말입니까."

"말 다 했나?"

그때 영팔노인은 분노에 차서 벌떡 일어섰다.

"이노오음! 이 불가사리 겉은 놈아! 그래, 니 말이 맞다. 나는 동학당도 했고 의병질도 했고 만주 가서 독립군도 했다! 우짤라노? 내 이 늙은 모가지에 썩은 새끼줄 감아서 왜놈한테 끌고 갈라나? 끌고 가믄 상 많이 탈 기다! 다 산 목심, 내 그기이 무서브믄 성을 갈겄다. 이 천하 무도한 놈! 지 뿌리 짤라묵고 사는 놈!"

모두가 뜯어말려서 영팔노인을 영만의 집으로 데려갔던 것이다. 두만이 모친도 그때 가만있지 않았다.

"니 아부지 숨을 거둘 때 뭐라 카싰는지 벌써 잊었더나? 남의 가심에 못박지 마라, 그 말을 벌써 잊었나? 별말 할 거 없다. 판술아배, 판술어매, 그라고 니 에미꺼지 모두 끌고 가서 까바치라. 그라믄 상금 많이 줄 기고 축간 돈 아귀가 맞일 거 아니가."

"기가 차서."

"기가 차는 거는 나다. 아무리 돈이 좋기로, 죄 없는 사람을 모함해도 되는 기가? 니 아부지 땅에 묻고 날도 안 밝았다. 피알 하나 안 속이고 살아온 아부지 겉은 노인을 모함해?"

"모함은 무슨, 말이 그렇다는 거고."

"관수는 와 들먹이노? 못하는 친구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자식 키우는 놈이 사람을 사지로 몰아?"

모친은 그때 두만의 역살을 잡았다. 십여 년 전 그날 밤 일이 엊그제처럼 영만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영만이도 형을 비난했다. 평소 못마땅하기도 했으나 군자금 강탈 사건 후 진주서 비등하는 여론을 모르지 않았고 순철의 부친을 칭송하는 대신 두만을 멸시하는 인심도 영만은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형에게 충고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던 참이었다.

", 성은 자기 한 대만 살고 말 생각이오?"

"..."

"자기 한 대만 살고 말라 카믄 마음대로 하소."

"무신 말고?"

"나는 내 자식 자손 대까지 살아주기를 바라는 맴이니께 이렇게 되믄 성하고 남이 되든지 해야겄소."

"좀 더 알기 쉽게 말해봐라."

"그라믄 내가 묻겄소. 성은 왜놈이 천 년 만 년 우리 백성을 누르고 살기라 믿소?"

"..."

"우리 백성이 천 년 만 년 왜놈의 종으로 살 기다, 성은 그렇게 믿고 있소?"

"나중 일을 누가 알꼬."

"모리지요. 나도 모리요. 하지마는 한 가지 틀림없는 일은 만일에 나라가 독립한다믄 성은 역적이 된다, 그것만은 틀림이 없일 기고 삼족을 멸한다믄 조카 두 놈에 우리 새끼들은 우찌 될 기요?"

"야아가 무슨 소리를 하노? 지금이 어느 시절인데, 이 개명천지에 삼족을 멸할 기라꼬? 자다가 꿈 겉은 소리 하네."

그러고도 형제는 한참 동안 말씨름을 했다. 이러한 시시비비에 찬물을 끼얹은 사람은 장연학이었다. 시종 말이 없었던 그는 송관수의 이름이 나오자 긴장했고 두만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묘수로 생각해낸 것이 일종의 협박이었던 것이다. 연학이

"그런 일로 안 잽힌 경우가 별로 없지요. 그것이 또 가정부서 정말 그랬는지 의심스럽기도 하고, 차라리 강도한테 당했이믄 후환이나 없을 긴데."

하고 말했을 때

"후환이라니?"

퉁기듯 두만이 되물었다.

"첫째는 경찰에서 시끄럽고 혹시 내통하지 않았나 의심을 한께."

", 그 점은 나도 생각했고 이도영이 그 사람도 그것 때문에 오라 가라 했던 모앵인데..."

그때 두만의 눈은 몹시 불안해 보였다.

"두번째는 반대로, 그 사람들이 잽히는 날이믄, 또 친일파로 지목을 하고 그랬다믄은 물귀신맨크로 끌고 들어갈 수도 있는 일 아니겄소."

그것은 무서운 말이었다. 입 다물고 있는 것이 신양에 이로울 것이라는 뜻이 짙게 깔려 있었던 것이다. 어쨋든 그때 일은 돈 기천 원이 문제가 아니었다. 두만의 경우는 다르겠지만 이들 김씨네 일가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며 뭔가 생채기 같은 흔적을 남긴 것만은 틀림이 없다.

"실데없는 걱정 마이소. 왜놈이 그리 쉽기 손들 것입니까."

영만은 그 문제를 밀어버리듯 모친에게 말했다.

"미우니 고우니 해도 내 속에서 낳고 니는 동기간이니께... 그만 남 사는 대로 살믄 될 거로, 돈이 원수다."

"돈 벌라꼬 친일도 한 거 아닙니까."

"그러이 돈이 원수라 안 하나."

"코앞에 닿은 근심도 많은데 먼 앞날 걱정은 그만 두이소. 가볼랍니다."

영만은 일어서 나갔다. 그가 나가자 두만이 모친은 며느리 둘을 불러들였다.

"우쨌거나 가지고 온 기니께, 자아 너거들 몫이다."

하며 두만이 모친은 월화가 가져온 옷감을 나누어준다. 기성네는 묵묵히 받아들었으나 기완네는 얼른 펴본다. 천을 만져보는 그의 눈이 황홀하게 빛났다.

"성님, 옷감이 참 좋네요. 요새 이런 것 눈 닦고 볼라캐도 없십니다."

"내사 뭐 입고 갈 데나 있나?"

"성님 것도 구겡 좀 합니다."

기성네가 옷감을 내밀었다.

"기생이라 눈이 다르거마는. 성님 나이에 알맞게 쑥색, 참 좋네요."

"동서 자네 주까?"

"무슨 말씀을 그리 합니까."

"? 분홍은 기숙이 주고 싶고 쑥색은 자네가 입으믄 꼭 좋겠제?"

", 우찌 남의 마음을 그리 잘 압니까."

기완네는 까르르 웃는다. 시어머니 앞에서 기성네보다 기완네가 훨씬 임의롭게 굴었다.

"실데없는 소리 말고, 옷감을 본께 추석치레보다 설 치레다. 올 설에 해입어라."

"어디 갈 데가 있어야 해입지요."

기완네 말에

"와 갈 데가 없노. 산소에는 안 갈 기가?"

"엎어지믄 코 닿는 곳인데요."

"맘 묵고 가지온 기니까 자식들 줄 생각 말고 해입어라."

"맘 묵고 가져왔다 카시지마는 이거 다 아주버니 호주머니서 나온 건데요 머."

"그라믄 더욱 좋고, 기성 에미 평생 처음으로 남정네 덕을 보이."

"참 그렇네요. 어무이 말씀을 듣고 보이, 성님."

"..."

"오래 살면 이런 일도 있는 모앵이제요? 그 감 이리 주이소. 지가 온갖 정성 다 해서 지어디리겄십니다."

하며 기완네 기분이 썩 좋은데 밖에 누가 온 모양이었다.

"아무도 없나?"

"뉘요?"

방문을 열고 내다본 기완네가

"아이구 구야 할무이."

하며 황급하게 마루로 나갔고 기성네도 얼른 따라 나간다.

"우짠 일입니까."

기성네가 물었다.

"그냥 와봤다."

구야 할매는 비시시 웃었다. 늙어서도 깔끔한 차림이었다.

"성님 기시나?"

"나 여기 있네."

며느리들이 대답하기 전에 두만이 모친은 방안에서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아이구 성님!"

"운냐."

"괜찮십니까?"

"올라오기나 해라."

"." 하고는

"댜아들아, 이거 받아라."

신문지에 싼 것을 구야 할매는 내밀었다.

"멉니까."

기완네가 받았다.

"소개지다."

"이리 귀한 거를 우찌."

"성님 국 끓여디리라."

방으로 들어오는 구야 할매를 올려다본 두만이 모친은

"앉거라."

"."

"무신 바람이 불었노?"

"구야애비가 어이서 소개기를 좀 구해왔기에 앞가림 삼아서, 성님도 보고 접고 해서 왔십니다. 좀 우떻십니까? 신색은 좋아 뵈는데."

"갈 때가 지났는데 이리 살아 있이니 욕이지 뭐."

"그런 소리 마시이소. 기성네가 누구를 믿고 사는데."

"그거는 그렇다. 내 지금 눈감아도 아무 걸리는 기이 없거마는, 기성 에미 하나가 내 가심에 박힌 못이다."

"이자부터는 안 괜찮컸소? 말년은 좋을 깁니다. 자식들만 돌아오믄."

", 무신 얘기 들었더나?"

"좀 들었습니다."

"우떻게?"

"쌈이 잦다 카데요. 부모형제 인연 끊은 것도 조강지처하고 민적판 것도 다 서울네로 인하여 그랬다 캄서... 기성 아배가 후회를 하는 갑더마는."

"기성이댁네, 친정 어마니가 우리 이웃에 삽니다. 성님하고 우리하고 가까운 거를 알고 그런 말을 한 모앵이라요."

"..."

"이웃에서 보믄 사람이 엄전하고 본바 있고, 함부로 말할 사람은 아닙니다. 살림이 빠져서 생활은 넉넉잖은 형편이지마는..."

"실개 빠진 놈, 죽자 사자 은앙새,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곧이 듣는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누구를 원망하노. 그놈이 후회를 해서 그런 말 한 줄 아나? 새 제집한테 빠져서 그러제. 개과천선할 놈이 아니다."

"성님도 참, 자식한테 우찌 그렇게 매력꿎게 말을 합니까."

"자석 질 엎은 부모가 아네라. 키울 때도 그랬네. 그 불쌍한 한복이, 쪼맨할 때지. 함안 외갓집에서 그 어린기이 걸어서 평사사리에 왔을 직에, 풀모기에 물리서 얼굴이 딸바가지가 돼가지고 그 애인한 성상을 우찌 말로 다 하겄더노. 영만이는 그기이 불쌍해서 우짤 줄을 모르는데 두만이 놈은 샐인 죄인 자손 우짜고 함서 돌린 기라. 내가 야단을 쳤제. 아무래도 천성은 타고 나오는 모앵이더마. 그 아이는 애비 에미 닮은 구석이라고는 없인께."

"사람은 열 번 변성한다 카는데, 애비 에미 자식, 에미 안 닮고 뉘 닮겄소."

"모리거든 말 말아라."

두만의 모친은 역정을 냈다.

"제집 나무랄 거 뭐 있노? 다 손발이 맞아 그래놓고 이제 와서 제집 탓을 해? 천하의 못난 놈, 지가 사내자식이믄 못 그란다. 정말 개과천선을 했다믄 제 발로 걸어와서 사죄하는 기이 옳지, 새 제집 얻었다고 죽자 사자 은앙새였던 제집을 하루아침에 몰아세워? 아무리 내가 서울네를 미버라 하기로, 내 자석 옳고 그른 것 분별 못 할까."

"이치로는 그렇소."

"사람이 몇 백 년을 사나. 남의 눈에 피눈물 내감서 와 그리 살아야 하노. 내가 내 며느리라꼬 역성을 드는 거는 아니다. 우리 기성네를 보고 있이믄 긴긴 세월을 하루같이 남 원망하는 일 없고 남 해꼬지하는 일없고, 두 가지 맘 쓰는 일없고 일이 낙이라, 말이나 더분더분 한단 말가. 불쌍하고 간이 아프다. 모두 희희낙락 할때 일하고, 가장과 함께 오손도손 얘기할 때 지는 등잔불 밝히감서 바느질 하고..."

두만이 모친은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는다.

"심란키 생각지 마이소. 그런께 기성네 아입니까. 누가 와서 그 자리를 흔들 깁니까. 기완아배도 형수를 엄첩게 생각하고."

"그나저나 너거들 추석에는 평사리에 갈 기제?"

". 성님은 우짤랍니까."

"우리는 못 가지."

"하기는 그렇겠소. 기성이 할배 산소가 여기 있인께."

"지난 한식 때 기완이 애비가 평사리에 갔다왔네라. 그것도 내 살아생전이다. 나마저 없어지고 나믄 고향 떠나 있는 자석들이 조상 산소 찾아가서 벌처하고 사초하고 그기이 어디 쉬운 일이겄나. 청물이야 떠놓겄지마는, 자네는 그래도 작은아들이 남아 있인께."

"그러시... 성님."

"."

"무신 심산인지 모리겄소. 만고에 편하고 아들이나 며느리가 다시 없이 하는데 와 이리 갑갑증이 나고 심란한지, 태산 겉은 농삿일, 날이 날마다 동동걸음으로 밭에 가랴 논에 가랴, 지금 와서 생각한께 그때가 호시절이었소."

"..."

"심장이 상해도 호밋자루 하나 들고 밭에 나가믄 시름도 잊고 노래를 부르니 누가 뭐라 하나, 또랑물에 얼굴 씻고 일어서믄 살 것 겉앴는데 여기서는 심장 상할 일이 머 있겄소. 조석 걱정을 하나, 아무 근심이 없는데 와 평사리 생각만 자꾸 나는지, 철만 바뀌어도 눈앞에 들판이 선하게 떠오르고 바람난 제집겉이 갈 발을 잡을 수 없고.“

두마이 모친은 웃는다.

"그거 다 일에 넋이 들어서 안 그렇나."

"일에 넋이 들다니요?"

"바느질쟁이 삯일 놓고 있으믄, 또 도부꾼이 도붓길에 나서지 않으믄 여기저기 삭신이 쑤시고 아파서 못 젼디는 법이라, 번걸증이 나고, 그기이 다 일에 넋이 들어서 그런 기다."

"일 땜에 그렇겄소? 아입니다. 산 설고 물 설고 사람들이 낯설어서 그럴 깁니다. 하루믄 갈 수 있느 고향을 두고 내 맴이 이런데 영팔노인은 만주꺼지 가서 수삼 년을 우떻기 살았이까요."

"죽도 사도 못해서 살았겄제. 판술네 말이 많이 울었단다. 추석 때가 되믄 우리 부모 묏덩이 우묵장성 풀에 덮여서 돌아가도 묻힌 곳이나 찾을란가, 어느 누가 벌초를 해주겄나 함서 판술아배 대성통곡을 했다 안 카나. 요새 사람들이사 어디 그렇더나? 고향 떠나 부리믄 그만이제. 하기사 떠나고 접어서 떠난 사램이 어디 있겄노. 또 돌아올 형편이 못 된께 돌아오는 기고, 윤보목수 자네 알든가?"

"알고말고요. 용수골에 있일 적에 우리 집 까대기도 지어주었소. 근동에 윤보목수 모릴 사램이 어디 있겄소. 빡빡 얽은 얼굴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요."

"장개도 한 분 못 가보고 사시사철 발 닿는 대로 돌아댕기믄서 목수질을 하다가 몽다리구신 됐다마는, 명절이나 부모 제삿날이믄 돌아오더니라. 그래서 김훈장한테 수틀리믄 달라들고 하는 윤보목수를 김훈장은 엄첩게 생각했제. 산으로 들어간 그 사람은 죽었고 함께 갔던 김훈장도 만주로 달아났다가 만리타국에서 돌아가싰지. 모두 엊그제 일 같다마는... 자네만 그런 줄 아나? 낯설기로는 나도 매일반이다. 옛사람은 하낫도 없고... 우리도 그 일만 없었이믄 멋하로 고향을 떴겄노. 아무리 두만이가 성공을 했다 하더라 캐도 평사리를 등지지 않았일 기다. 그기이 또 생전의 두만아배 한이었고."

"그 일이라 카믄."

"최참판댁의 조준구를 직이고 물자를 탈취해서 산으로 들어갈 낌새를 알고 두만 아배는 사돈댁으로 피했네라. 그라고 참판댁 애기씨가 곤욕을 겪었을 때 우리는 아무 한 일이 없었다."

두만이 모친은 탄식하듯 말했다.

"흉년에 조준구가 나누어주는 쌀도 받아 묵었고, 그기이 어디 예사 쌀이든가? 편 가르는 쌀이었제."

"그때 우리는 용수골에 있어서 자세한 거는 모리겄소만 어디 그기이 성님네 혼자 뿐이겄소. 강약이 부동이라꼬."

"만 사람이 그래도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되었던 기라, 최참판댁이 누고? 애기씨는 우리네 상전 아니더나. 면천해준 은공도 있었고 자식 없는 가난이 바우 두 양주를 위해 제우답으로 참판댁 마님께서 닷마지기나 떼어주싰고. 그것도 조준구가 걷어 가버맀지마는."

"그거는 와 주싰지요?"

"그 양주는 마님을 위해서 공이 많았인께 다 같은 종이라 할 수 없었제. 우리하고는 촌수가 멀어도 인척인께 맽기신 기다."

"언젠가 제우답 얘기를 들었지마는, 그기이 바로 그 얘기구마요."

"아날꺼지 기일에 물은 떠놓고, 영만이가 평사리에 가믄 벌초도 하네라."

"지난 일 다 잊어뿌리이소. 다 살기 위해 그랬는데 우짤 깁니까."

"하기사 그때 산으로 따라갔으믄 죽었일지도 모르지. 식구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고."

"성환이 할매도 그때 당했다 카더마요."

"석이아배는 아무것도 모리고 어디 갔다가 돌아오이 그 일이 벌어졌제. 사람들은 산으로 간 뒤였고. 있었이믄 그 성질에 따라 갔일기다. 평소 감정이 좋지 않았던 것이 빌미가 되어 조준구 그놈이 석이아배를 죽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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