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5부 제2편 운명적인 것
1장 밀수 사건
1941년 정초의 신경, 거리에는 설 분위기가 아직 가셔지지 않았고 일본인 주택가에는 가도마쓰(설이나 문간에 솔을 세우는 일본 풍습)도 걷어내지 않은 상태였으며 긴 소매에 금실이 든 붉은 오비를 맨 설빔 차림 일본 계집아이들이 하고이타로 하고를 치는 풍경도 더러 눈에 띄었다. 그러나 신년 분위기에 못지않게 성전완수니 총력앙양이니 일로매진이니 따위의 군부 고위층 담화를 실은 신문들은 전쟁 분위기를 드높이고 있었으며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지원병에 나갈 것을 독려하며 환골탈태 일본인이 된 이상 부끄럽지 않은 일본인이 되어야 한다는 등 재만 조선인 친일 분자들의 글귀도 신문에 나 있었다. 거리에는 일본군 기마대가 포도를 차며 지나가고 관서에는 일장기와 만주국 국기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양력설을 쇠지 않는 만주인들의 초라하고 기죽은 모습들이 대조적으로 포도 위에 흩어져 걷고 있었다.
공장은 삼일까지 쉬기 때문에 홍이는 집에 있었다. 물론 아이들도 집에 있었고 식구가 모두 지내지도 않는 설 때문에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리고 달포 전부터 임이가 와 있었다. 나이는 쉰여덟 아직 환갑이 멀었는데 칠십 노인처럼 늙고 초라해진 모습을 본 홍이는 차마 가라 하지 못하였고 돈을 쥐어주는 것도 한두 번, 흐지부지하는 홍이 태도에 얼씨구나 잘되었다 싶었던지 눌러붙어 있었는데 한 달 전이던가 보연은 입술이 툭사발같이 부어서 남편에게 임이를 보내라 했다. 뭔지 비위가 많이 상한 것 같았다.
"나가면 거지밖에 할 짓이 없을 긴데 당신이 참아."
"돈 좀 주면 될 거 아니오?"
"돈을 주더라도 해동이나 해야지."
했던 것이다.
"아이고오. 점심들 묵자. 머들 하노. 배고파 죽겄는데."
임이 말에 상의와 보연은 다같이 눈을 흘긴다.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던 모양이다.
"고모는 젤 많이 먹으면서 밤낮 배고프다, 배고프다."
상근이가 핀잔을 주었다.
"이눔 자식, 머라 카노? 늙으믄 밥심으로 산다. 니도 늙어봐라. 다른 집에서는 양력설도 쇠든데."
보연은 들은 척도 안 했다. 그래도 비윗살 좋게
"떡도 묵고 저븐 너물도 묵고 접고 와 이리 묵고 저븐 기이 많은지 모리겄네. 옛날 울 엄니 먹성이 좋더마는 나도 어매 닮았는갑다."
신문을 보고 있던 홍이는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고
"점심 차리지."
하고 말했다. 상의가 거들어서 점심상을 차렸고 식구들은 둘러앉았다.
"고모!"
밥을 먹다가 상의가 소리를 팩 질렀다.
"와 그라노? 사람 간 떨어지겄네."
밥상에는 명란젓이 놓였는데 썰지 않은 상태로 깨소금과 기름을 친 것이었다. 임이는 그 명란젓 한 봉지를 송두리째 입에 넣고 꿀꺽 삼켰던 것이다. 보통 사람이면 그것 하나로 밥 한 그릇 먹고도 남았을 일이다.
"위장을 소금에 절이도 분수가 있지 정말 왜 그래요?"
상의는 아비의 눈을 의식하고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지금까지 비교적 관대하게 대해왔던 상의는 요즈막에 와서 임이에게 몹시 쌀쌀하게 대하였다. 그러나 임이는 왜 그러느냐 따지지 않고 슬금슬쩍 넘기곤 했다. 상근이 상조가 재잘거렸다.
"복 나간다. 잠자코 밥 먹어."
보연이 아이들을 나무란다.
"아버지."
상의가 불렀다.
"은자언니가 말예요."
하자 보연이 말을 막듯
"쓸데없는 소리 또 한다."
"엄만 덮어놓고 그러시네. 아버지 은자언니가 말예요."
"은자언니가 누군데?"
"상급반 언니예요. 그 언니 저한테 참 잘해주어요. 같은 조선인이라고."
그래서?"
"은자언니는 졸업하면 백의의 찬사가 되겠대요?"
"뭐?"
홍이 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여학교 나와서 간호부로 들어가면 대우가 참 좋다는 거예요. 보통 소학교만 나와 가지고 간호부가 되니까 말예요."
"그 따위 소리 하지 마."
딱딱한 홍이 음성에 의아해하며 상의는 말했다.
"아버지 왜 그래요? 저는 좋아 뵈든데, 병원에 가면 그 언니들 깨끗하고 거룩해 뵈고, 그중에는 굉장히 예쁜 사람도 있었어요."
"너도 간호부가 되겠다 그 말이냐?"
"그런 거는 아니지만... 그래도 좋긴 좋든데요?"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부나 해."
"선생님도 그러셨어요. 백의의 천사가 되어 전선에 나가서 부상병을 돌보는 것도 애국하는 길이라구요."
홍이는 단발머리에 고집 세게 생긴 딸을 가만히 바라본다.
'천방지축을 모른다. 애국이라니, 나라가 어디 있다구.'
그러나 홍이는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위장을 철저히 해온 처지, 어디서 꼬리가 잡힐지 모르기 때문이다.
"왜 있잖아요, 아버지. 나이팅게일 말이에요. 지가 존경하는 사람이에요. 부상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을 돌보아주는 것은 아름다운 일 아닐까요?"
"그 따위 소리 두 번 다시 했다가는 매 맞을 줄 알아라!"
홍이는 자신도 모르게 신경질을 부리고 있었다. 군에 납품했던 관계로 일본 군대 사정은 다소 알고 있었다. 종군 간호부의 실태가 어떻다는 것도. 갑자기 밥맛이 떨어졌다. 아직 철이 덜 든 아이에게 뭐라 설명할 수도 없었고 설령 철이 들었다 하더라도 아비로서 그것은 말하기 거북한 문제였다. 그러나 그 일 때문에 신경질을 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간밤의 뒤숭숭했던 꿈자리가 되살아났고 울적했다. 어디 가서 실컷 화풀이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거 봐. 쓸데없는 말하지 말랬잖았어?"
보연히 혀를 찼다. 임이는 열심히 밥을 먹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가 모두 구부러져서 마치 갈고리 같았다. 그 손으로 반찬 이것저것을 입 속으로 거머들이고 있었다. 상근이와 상조는 밥을 먹다 말고 뒹굴면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밥 먹다 말고 왜 이래?"
홍이는 수저를 놓고 일어났다. 본시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서 습관처럼 신문을 집어들었다.
"참 이상해. 화내실 일도 아닌데 아버지가 왜 저러실까? 아이들이 얼마나 동경한다구. 백의의 천사, 듣기만 해도 멋지고 근사하잖아요?"
"그만 해."
보연이 나무란다.
"상의야."
음식을 삼키며 임이가 불렀다. 어지간히 뱃속이 찼는지 음식 먹는 속도가 느려졌다.
"니가 몰라서 그런 말을 한다. "
"모르긴 뭘 몰라요?"
"김두수라고, 니는 모릴 기다마는, 공장에는 가끔 올 기다. 우리가 어릴 적에 한 동네서 살았제. 그래서 잘 아는데 그놈이,"
하다 말고
"아니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하는지 니는 모릴 기다."
"왜 보지도 못한 사람 얘길 끄내는 거예요?"
"잠자코 들어보아라. 그 사람 본업이 가씨나 장산기라. 조선서 데리오는 가시나들을 받아가지고 팔아 묵는데 그러이 그쪽 사정은 환하게 안다."
"아이들 데리고 별소리를 다 하요."
의도적으로 임이에게 말을 하지 않던 보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머가 우때서? 야아가 백의의 천사라고 해쌓으니께 하는 말이제."
보연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외면을 한다.
"상의 니가 몰라서 그러는 기라. 왜년들이사 그렇지도 않을 기다마는 조선 아아들은 맹색이 간호부지 군대 따라댕기믄서 병정을 받는다 안 카나."
"받는 게 뭔데?"
"이 덩신, 함께 자는 기지. 몸을 준다 그 말이라."
홍이는 신문을 팽개치고 소리를 질렀다.
"교육상 이래가지고는 안 되겠어요. 쓰레기통 같은 말만 하고 아이 버리겠소."
보연이 눈을 치뜨고 화를 냈다. 얼굴이 싯벌개진 상의는 헛구역질을 하며 제 방으로 달아난다.
"아이구 얄궂어라. 나이 찼는데 그런 거 모릴까바서? 촌에 가믄 그 나이에 시집가는 제집아아들이 얼매나 많다고. 너무 그래쌀 것도 없거마는, 요조숙녀가 따로 있나? 서방 잘 만내믄 요조숙녀지."
하고는 아니꼽다는 듯 숟가락을 놨다. 먹을 만큼 먹었는데 마치 속이 상해서 그러는 것처럼.
"며느리가 밉으믄 계란 같은 발뒤꿈치도 숭이라 카드마는. 입만 뗐다 하믄 식구들 모두가 아구성이네. 사람 팔자를 누가 알 기든고?"
홍이는 화가 난 얼굴로 나갈 채비를 하듯 방에 들어와 옷장 문을 열었다.
"당신 어디 가실라 캅니까?"
밖에서 보연이 말했다.
"나가면 또 술을 마실 텐데..."
"..."
"초정월부터 술집에 문이나 열었겠어요?"
그러고 보니 그랬다. 홍이는 외투를 입으려다 말고 내던지며 방바닥에 철썩 주저앉는다. 그리고 담배를 붙여 문다. 요즘에는 공장도 불황이었다. 부속품 구하기도 힘이 들었고 군에서 불하하는 차도 거의 없었다. 그 덕분에 김두수 꼴을 보지 않으니까 속이 편하기는 했으나 종업원들을 줄일 수도 없고 이대로 나가면 적자를 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얼빈에나 한번 다녀올까? 송선생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자식들이 다 장성하여 마음은 놓이지만.'
관수가 죽은 뒤 홍이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의욕 상실의 징후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의욕 상실뿐 아니라 외로움이 어떤 공포감으로 엄습해올 때도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생각을 할 때 섬뜩해지는 것이다. 사실 아무도 없었다. 석이를 본 지도 오래되었고 두매는 그보다 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중국 본토로 들어간 사람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사조차 알 길이 없었다. 연해주 쪽은 이제 단념을 했지만. 마치 빗자루로 싹 쓸어버린 듯 주변은 적막강산이었다. 용정촌에 가보아도 매갈잇간의 박서방 말고는 아는 얼굴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왜 이럴까? 마치 기름이 떨어진 남폿불 같다. 주갑아제는 아마 돌아가셨겠지. 고향처럼 늘 그리워하는 용정이 어째 그리도 낯설었을까? 이렇게 우리가 밀리기 시작하면...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만 끝이 날까?'
신경에 와서 공장을 처음 차렸을 때 홍이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밤낮을 모르고 일을 했다.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고 그들과 어울려 밤을 새워가며 술도 마셨다.
'그때가 행복했구나.'
홍이는 간밤의 뒤숭숭한 꿈을 잊으려고 별의별 생각을 다 해본다.
"여보 손님이 오셨는데."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는 보연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두 사나이가 방문을 들이차듯 하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거실에도 한 사나이가 서서 출입문을 막고 있었다.
"누, 누구요?"
순간 홍의 얼굴은 돌덩이같이 굳어졌다. 기어이 올 때가 왔구나 싶었던 것이다. 두 사나이는 아무 말도 없이 방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양복장 서랍을 방바닥에 엎었다.
"왜, 왜 이래요!"
보연이 소리를 질렀다. 상의가 제 방에서 달려 나왔고 상조가 울음을 터뜨렸다.
"왜, 왜 이러는 거요!"
역시 사내들은 아무 말 안 했다. 한참 후 방바닥에 쌓인 옷가지 속에서 금비녀와 한 냥쭝 쌍가락지 석 돈쭝 복숭아반지 팔찌를 발견한 사내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도, 도, 도둑놈! 도둑이야!"
보연이 입술은 떨면서 목에 걸린 소리를 냈을 때
"뭐 도둑이라고? 아지매, 우리가 바로 도둑놈 잡으러 다니는 사람이라요."
능글맞게 웃으며 말하는 사내는 조선인이었다. 또 한 사내는 일본인이었다. 그들은 형사였던 것이다.
"오이 고노 야쓰라 쓰레테 유케(이봐 이것들 데리고 가)."
밖에 있던 사내가 들어와서 홍이와 보연에게 수갑을 채웠다.
"엄마!"
아이들이 울며 매달렸다. 보연은 넋이 빠진 상태였으나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고 홍이는 재빨리 사정을 알아차리고 돌 같이 굳어졌던 얼굴이 조금씩 풀렸다. 그는 비녀랑 가락지에 대하여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다만 보연이 자기 몰래 장만한 것으로 짐작했고 어떤 경위로 형사대가 들이닥쳤는지 모르지만 사건은 그 금붙이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홍이는 형사들에게 끌려 나가면서
"상의야 걱정 말고 공장 아저씨한테 가서 알려라."
아이들은 문 밖까지 쫓아나갔다. 그러나 사내들은 홍이와 보연이를 차에 싣고 떠났다. 상의는 미친 듯 집안으로 뛰어 들어와 임이를 떠밀었다.
"말해요! 당신이 밀고했지요!"
"야, 야가 머라 카노?"
임이는 뒷걸음질 치며 어리둥절해한다.
"형사들이 우리 집에 금비녀 있는 걸 어떻게 알아!"
"야아가 미쳤나?"
"그래 미쳤다! 아버지도 모르는 금비녀, 그, 그럼 네가 스파이질했나? 말해요! 이 천하에 못된 늙은 것!"
하다가 상의는 소리 내어 운다.
"허허 참 도모지 우찌 된 일고? 이거 참 속절없이 내가 당하겄고나 이 제집아야! 내가 아무리 몹쓸 년이기로 한 배에서 난 동생을 엉구렁에 밀어넣겄나!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내사 멋 땜에 금을 가지가는 지도 모리겄고 참말로 귀신이 곡할 일이네."
상의는 소리 지르고 울다가 상근이한테
"상조 보고 있어! 아무데도 가지 말고 꼼짝하지 마라! 나 공장 아저씨 데리고 올게."
하고는 쏜살같이 나간다. 상근은 자세한 일은 모르나 누이가 하는 짓으로 보아 아버지 어머니가 잡혀간 것은 이 귀신같은 고모 탓으로 생각하고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임이를 노려본다.
"아이구야 참, 머가 우애 됐다 카노? 팔자 사나운 년은 가는 곳마다."
상의가 임이를 지목하고 밀고했다 하며 울부짖은 것은 그럴 만한 곡절이 있었다. 한 달 전이던가. 임이가 온 지 한 달포 됐으니까 그 일은 한 달쯤 전에 벌어졌던 웃지못할 사건이었다. 십이월로 들어선 신경의 날씨는 한랭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상의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상근이와 상조는 털모자를 쓰고 마당에서 미끄럼을 타며 놀고 있었다. 무심히 집안으로 들어간 상의는 안방에 보연이 있으려니 생각하고 문을 열며
"엄마."
하고 불렀다. 그러나 보연은 없었다. 임이가 당황하며 돌아보는데 크게 벌어진 눈동자는 마치 허공 같았다.
"거기 왜 그러고 있어요?"
장롱 서랍이 열려 있었다. 쭈그리고 앉은 채 뭔가를 필사적으로 가리고 있는 것 같았다.
"뭐하는 거예요!"
이번에는 날카롭게 물었다.
"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방 좀 치우니라고."
"방을 치워요? 장롱 서랍은 왜 열려 있지요?"
의심을 품은 상의는 책가방을 든 채 방안으로 들어갔다. 아편쟁이처럼 자질구레한 것까지 숨겨가지고 팔아먹는 임이 버릇을 상의는 알고 있었다. 보연의 여우목도리도 그랬고 심지어 상의 손목시계도 그렇게 해서 없어졌는데 그럴 때마다 임이의 잡아떼는 품은 철석같았고 오히려 도둑 누명을 씌운다며 되잡기가 일쑤였다. 다만 그가 손을 대지 않는 것은 홍의 소지품이었다.
"거기 감춘 게 뭐예요!"
그때 마침 장에 갔다 온 보연이 목도리를 끄르며 들어왔다.
"방문을 안 잠그고 갔었나?"
중얼거리다 말고 다급하게 방으로 들어간 보연의 안색이 변했다. 진퇴유곡, 심장이 질기기로 쇠가죽 같은 임이도 엉겁결에 일어섰다. 순간 방바닥에 소리를 내고 떨어진 것은 금비녀 금가락지 반지 팔찌 등, 팔면 웬만한 집 한 채 값의 금붙이였다. 보연이 그것들을 주워 두 손에 움켜쥐었다. 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몹시 놀란 것 같다.
"가지고 달아나려 했지요?"
"아, 아니다. 무신 그런 벼락 맞일 소리를 하노."
하면서 임이는 가렵지도 않은 손등을 긁는다. 살가죽이 밀리고 뼈만 앙상한 손등을 뿍뿍 긁어대는 것이었다.
"그러면 잠의 장롱은 왜 뒤졌어요!"
"구겡한 것도 죄가? 구겡했다고 주리를 틀라나? 좀 열어보믄 우떻노? 남도 아닌 형제간인데 별시럽게 그랬쌓는다."
차츰 시간이 지나가자 임이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것이 분하고 억울했든 것 같았다. 저희들은 그것 없어도 사는데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절망과 분노의 눈빛으로 보연을 쳐다본다.
"나가요! 상의 너도 나가!"
딸과 시누이를 떼밀어내고 방문을 닫은 보연은 비로소 사시나무 떨듯 떤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금붙이를 서랍 속에 간수하고 방안을 둘러본 뒤 방에서 나왔다.
"양심이 있어요?"
상의가 임이에게 따지고 있었다.
"조막만한 기이 머를 안다고 어른들 하는 일에 나서노."
"부끄러운 줄 아세요."
"운냐 니 잘났다! 가시나 하나 자알 키워놨다! 똑똑 소리나게, 똑똑하게 키웠구나! 에미 애비 수덕망덕 보겄다! 자식 없는 년은 접시물에 빠지죽어야겄네!"
"없기는 왜 없어요! 자식 버린 사람이 누군데."
"머 우짜고 우째! 어이서 들었노! 발톱만한 가시나까지 나한테 정게거네!"
"방에 못 들어가겠나!"
보연이 소리쳤다. 상의는
"고모라 부르기 너무나 창피스러워."
하며 제 방으로 들어간다.
"운냐아! 모녀가 작당을 해서 날 퍼붓는고나. 내가 사람가! 너거들 발싸개보다 못하는 내가 어디 사람가!"
놓친 가오리가 멍석만하더라고, 임이에게는 정녕 그러했다. 눈앞에 있던 황홀한 순간이 어쩌다 캄캄 절벽이 되었는가, 분하고 억울하여 임이는 바야흐로 장탄식을 잡힐 모양이다.
"팔자 좋구나! 팔자 좋다! 우떤 년은 무식 대복을 찌고 나서 전신에 금을 휘감는고, 그것 좀 보았다고 이년은 죽데기를 치는 신세, 아이고 내 팔자야! 야속하고 무상한 놈! 제집은 금으로 휘감아줌서 세상에 둘도 없는 누부, 실반지 하나 해주었던가. 야속하고 무상한 놈! 내간 살믄 얼매나 살 기라꼬, 혈혈단신 의지가지할 곳 없고오, 떠도는 내 신세가 가련코 불쌍쿠나! 이런 구박 박고 사느니 쇠를 물고 죽어야 하는 긴데 모진 목심, 그러지도 못하고 어이구우, 어이구우."
두 다리를 뻗고 넋두리를 하며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짜며 곡을 한다.
"상의 아버지가 그런 것 알기나 해야 말이지."
힘이 다 빠져버린 듯 보연이 중얼거렸다.
"머라 캤노? 상의애비는 모린다꼬?"
임이는 귀가 번쩍 트이는 듯 반문했다.
"상의아버지가 어찌 알겠소. 내 혼자 한 짓인데."
보연은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정말가!"
단순한 보연은 홍이 모른다는 그 말 때문에 한 가닥 희망을 가지는 임이 의중을 몰랐다. 우선 금붙이 있는 것을 홍이 모른다면 오늘의 사건도 발설하기 어려울 것이란 계산이 나왔고 겨울 한철 뭉개고 있을 만하다는 것, 어쩌면 황홀한 기회가 또다시 올지 모른다는 희망, 결코 나쁜 얘기는 아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보연은 그 문제를 덮어둘 것 같았다. 상의에게도 단단히 일러서 금붙이에 관한 얘기는 입 밖에 내지 못하도록 했고, 해서 임이는 싫어하고 상대하지 않는 것쯤이야 이력이 나 있는 처지, 한 달 동안 불편할 것 없이 지내온 터였다. 얼마 후 상의가 어떻게 설명을 했는지 천일은 얼굴이 시뻘개져서 그의 댁네와 함께 달려왔다. 그들 뒤를 상의도 울면서 따라왔다.
"집안에 있는 구미호부터 치아야 안 하겄나!"
들어서자마자 천일은 고래 땅 같은 소리를 지르며 임이를 집어삼킬 듯 노려보았다.
"어어? 와 이라제?"
천일의 표정이 너무나 험상궂어 임이는 질리면서 뒷걸음질 쳤다.
"와 몰라서 묻소!"
"영문을 모리겄다. 자다가 봉창을 뚜디리도 유분수제."
천일의 댁네 호야네도
"세상이 무서바서 우애 살겄노."
한마디 하고 임이에게 일별을 던졌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아이들은 누이를 보자 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상의는 우는 동생들을 끌어안고 함께 운다. 호야네가 그들을 달랜다.
"하기야, 거기 그 자리에 꼼짝 말고 있이소! 일 돼가는 거 봐감서 사생결단을 내든지 누구 대갈통이 박살나든지, 참말이제 숭악한 세상이다. 이런 일이 어느 세상에 또 있겄노."
홍이와 오랜 우의도 우의려니와 동기간에 그럴 수 없다는 윤리관 때문에 천일이는 폭풍과도 같은 노여움을 느꼈던 것이다. 일찍이 천일은 이같이 노한 적이 없었다.
"상의야."
"예 아저씨, 어떻게 해? 정말 어떻게 하면 좋아요."
"울지 말고 내 말 들어라. 니가 이러믄 상근이 상조는 우짤 기고? 셈난 니가 정신을 차리야제. 아부지는 모르는 일이라 카이 곧 풀리 나올 기고, 에잇! 더러븐 놈의 세상! 천지개벽을 하든지 해야지. 호야 니는 아이들 데리고 꼼짝 말아라. 저 할망구도 감시하고, 비단가리 하나, 손 못 대게, 알았나!"
"할망구라니!"
발악하듯 임이 말했다. 그리고 털썩 주저앉았다.
"배추시레기 겉은 상판에다가 짜놓은 걸레맨크로, 그 꼬라지 하고서 할망구도 오감타!"
"이노옴! 내 뒤에는 사람 없는 줄 아나! 나한테도 사람 있다아!"
"물론 있겄지요."
"경찰서장까지 한 사램이 있다! 김두수를 몰라? 질기 이러믄 나도 앉아서 당하지는 않을 기다!"
"본색 드러내누마요. 아무리 여수가 사람으로 둔갑해도 꼬리는 못 감춘다 카더마는,그랬을 기요. 김두수를 와 내가 모리겄소. 공장에도 나타나고 옛날 옛적 평사리에서 귀에 못이 박일 만큼 듣든 김거복일 와 내가 모리겄소. 도둑질이든 밀고든 간에 손발이 맞아야 해묵는 기라."
했으나 천일은 눈에 띄게 기세가 줄어들었다. 그는 좀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라믄 나는 여기저기 좀 알아보고 올 긴께 모두 정신 똑바로 채리고 있거라. 상의야, 이 차중에 아이들 병나믄 큰일인께 놀라지 않게 해라."
가슴을 치고 외쳐대는 임이에게 곁눈질을 한 천일은 허둥지둥 쫓아나갔다. 그가 나가자 집안은 늪과 같은 깊은 정적 속에 빠져들었다. 임이도 지친 듯 말이 없었고 아이들 역시 섬 속에 갇힌 날개 부러진 새처럼 숨을 죽이고 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아니 점심 먹을 때만 해도 아무 일이 없었던 집안이 눈 깜짝할 사이에 수라장이 된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 사건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금붙이를 가지고 있다 해서 어미와 아비가 수갑까지 차고 끌려 갔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였다.
"상의야."
호야네가 불렀다.
"예."
"아무래도 식구가 함께 모여 있어야겄다. 나 가서 아이들하고 머 좀 챙기가지고 올게."
상의는 불안하게 호야네를 쳐다보았다.
"속히 올게. 아부지 어무이 오실 때까지 우리가 함께 있어야 안하겄나."
상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근아 니도 이자는 다 컸어이 울지 마라이?"
호야네는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나갔다.
아이들은 웅크린 채, 상의도 세운 무릎 위에 얼굴을 얹은 채, 더 이상 임이와 다투려 하지도 않았다. 난생 처음 겪는 일이며 진이다 빠져버렸던 것이다. 겨울해가 지고 있다는 것을 아슴푸레 느꼈지만 상의는 꿈인지 생시인지 알지 못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갔을까. 상근이가 일어섰다. 상의는 그가 용변을 보러 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목욕탕 쪽으로 간 상근은 얼마 안 되어 빨랫방망이를 들고 나왔다. 상의가 무릎 위에 얹은 얼굴을 드는 순간 그 빨랫방망이는 허공으로 올라갔고 다음 순간
"아이구우!"
임이 비명이 들려왔다. 상근은 빨랫방망이로 임이 머리통을 향해 내리친다는 것이 방망이는 어깻죽지를 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직일 놈이!"
한쪽 어깨를 감싸 쥐다가 임이는 발딱 일어섰다. 그리고 상근이 멱살을 잡았다. 뼈뿐인 손이 상근의 뺨을 갈겼다. 상의가 달려들었다. 상조도 달려들었다. 삼 대 일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상조는 임이 손등을 물었다. 그야말로 소리 없는 격투였고 늙은 고모와 어린 조카들이 뒤엉킨 광경을 비극이라 해야 할지 희극이라 해야 할지, 어쩌면 가장 원시적인 것이었는지 모른다. 두 아이와 함께 보따리를 들고 들어온 호야네가 겨우 뜯어말렸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임이는 임이대로 두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임이는 말을 못하고 입술만 실룩거렸다. 그러더니 드디어 두 다리를 뻗고 통곡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음산한 겨울 해는 졌다. 호야네는 저녁을 짓고 상의는 무섭다면서 울며 파고드는 상조를 달래고 있었는데 천일이 돌아왔다. 두꺼운 외투를 입었고 털모자도 쓰고 있었는데 양쪽 귀는 빨갛게 얼었으며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는 임이를 힐끗 쳐다보며 모자를 벗고 외투도 벗었다. 두 손바닥으로 턱을 받치고 앉은 임이는 이상하게 통곡을 끝낸 후부터 말이 없었다. 그는 천일을 거들떠보지도 앉았다. 염치없고 넉살이 이만저만 아니며 속이 없는 임이의 침묵은 어떤 면에선 불안한 것이었다.
"안방으로 좀 오너라."
하고 천일은 호야네와 상의를 불러들였다. 반나절 사이, 상의 얼굴은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공포와 분노, 절망에 절여낸 것처럼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제 겨우 열여섯 살 나이에.
"연강루에 가서 부탁을 하고, 알기는 알아봤는데,"
천일이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내일쯤 조선으로 압송돼갈 기라 하더마."
"왜요!"
"형사들이 잡을라꼬 조선서 왔다 안 카나. 일은 거기서 터진 기라. 통영서 말이다."
천일은 입맛 쓰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기서 터졌다니, 그기이 무신 말입니까?"
호야네가 물었다.
"실은 나도 경험이 없어서 머가 먼지 잘 몰랐는데 간단하게 말하자믄 조선서는 금 가진 사람들 모두가 국가에다 금을 팔아야 하고 개인이 금을 가지는 것을 금한다, 그러이 위법이다 그거지. 그라고 금을 나라 밖으로 실어내는 것 역시 위법이라, 밀수라는 기지. 그러이 통영서 니 어무이한테 금을 판 사람이 적발되고 보니 자연 모든 사실이 밝혀져서."
"아버지는 아니지 않아요."
"일단은 공동으로 했다고 보는 기지. 그러나 형님은 모르는 일이고, 조사를 하면 밝혀질 것이니 쉬이 나오겠지마는 형수는 재판까지 받게 될지 모린다 하더마. 우선 통영 외갓집에다 전보를 쳐놨다."
보연이 아파서 친정에 정양하러 갔을 때 천일은 홍이 대신 송금하러 가기도 했기 때문에 홍이 처가의 주소는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보소, 그라믄 저 할매는 상관이 없는 일이구마요."
호야네가 물었다.
"그런 셈이지."
천일은 다시 입맛 쓰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연한 사람을 의심해서 큰일 났네."
"이 차중에 그기이 문제가! 의심쯤이사 머가 대수고! 수갑 차고 붙들리간 사람 생각하믄 의심받을 짓도 했고."
말은 그렇게 했으나 천일은 낭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까는."
상근이가 빨랫방망이를 휘둘렀다는 말을 하려다 만다.
"하기사 머, 모두 제정신이 아닌께."
호야네는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내일 떠난다 카이 면회하기는 글렀고."
"우리도 가야잖아요."
함께 가지 않으면 영 이별이 될 것처럼 상의는 말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어머니 아버지가 상근이 상조 자신으로부터 떠난다는 사실 이외 아무것도 없었다.
"외갓집에 전보를 쳤이니 너거 외삼촌이 아마 올 성싶다. 걱정 마라. 외삼촌이 못 오믄 나랑 가지."
전시 하에 개인은 금을 소유할 수 없다. 일본 정부의 그같은 포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정부가 금을 회수하겠다는 것이며 공출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라에 충성하기 위하여 국민은 고시한 가격으로 금을 정부에 팔아야만 했다. 금이 탄환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쇠붙이는 전선으로 가게 돼 있는 판국인데, 물론 많은 사람들은 소유한 금을 내놨고 고시 가격으로 팔았지만 그것에 불응하여 금을 은닉한 소위 반역자가 없지도 않았다. 은닉한 일부의 금이 비밀리에 유통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고. 만주 혹은 중국 본토, 그 방면으로 유출되는 것이 이른바 밀수였는데 전문적으로 하는 밀수꾼의 조직도 상당수 있었겠지만 만주서 조선으로 다니러 온 사람, 만주에 볼일이 있어 가거나 혹은 이주해가는 사람, 이들 중에도 조선서 금을 매입하여 실로 기기묘묘한 방법으로 숨겨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대일본제국의 경찰이라고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사람들은 이윤을 위해 위험도 무릅쓰게 돼 있었다. 그러나 보연의 경우는 장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훨씬 단순했고 물정 모르는 만용이라 할 수도 있겠다.
지난해 정양하기 위하여 조선으로 나왔을 때 보연에게는 적잖은 속주머니 돈이 있었다. 남편을 속이자는 것은 아니었고 홍이 내놓는 가용은 늘 여유가 있었으며 반대로 보연은 짠 편이어서 자연 모아진 돈이었다. 게다가 조선에 나온 후 약값이다, 생활비다 하며 보내 온 돈도 수월찮이 많았다. 보연은 그 돈을 한 푼 쓰지 않았다. 넉넉한 친정에서 베풀어주는 대로, 그 자신 돈을 쓸 필요가 없었다. 하기는 늙은 부모, 어린 조카들, 애정의 베품을 마다할 사람을 없을 것이지만 결국 보연의 그같은 이기적인 성품은 결혼 전과 별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친정에 머물고 있던 어느 날 옛날의 친구였으며 집안끼리 가닥을 잡아보면 생판 남도 아닌 경선이가 보연을 보러 왔던 것이다. 중년 티가 나는 그의 모습은 차림새부터 부유해 보였고 윤이 흐르는 피부하며 건강하고 행복해 보였다.
"너 본 지가 십 년, 그렇게 되나?"
경선은 감개무량하다는 듯 말했고
"경선이 넌 안 늙었네? 살기가 편한 모양이지?"
보연은 무엇보다 그의 건강이 부러워 한말이었다.
"소문 듣기로는 큰 공장을 하고 돈도 잘 번다 하든데 얼굴이 말이 아니구나."
"늘 몸이 아파서."
"하기는 아파서 왔다 하기는 하더라만."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날은 경선이 돌아갔는데 손아래 올케가 말을 꺼내었다.
"승아어머닌 보통 사람 아닙니다, 형님."
아이 이름이 승아인 것 같았다.
"자랄 때부터 야무졌지."
"야무진 정도가 아닙니다. 소문난 알부잔데 안 하는 장사가 없어요."
"장사를 해?"
"뭐 외고 펴고 하는 장사는 아니지만... 앉은 장사지요."
"앉은 장사가 뭔데?"
"철철이 값이 오를 만한 물건을 물색해서 사 재놨다가 값이 오르면 장사꾼들 불러다가 물건을 내는 거지요. 장사눈이 여간 밝은 거 아닙니다."
"어째 그런 재주가 다 있지?"
"두 손 동개얹어 놓고 돈 버는 거지요. 남 보기에는 밤낮 놀러만 다니는 것 같지만. 머리가 참 좋은가 봐요."
칭찬인지 비판인지 모를 말을 올케는 했다. 그 후 경선은 몇 번인가 찾아왔고 보연이도 그의 집에 가곤 했다. 경선의 집 살림살이는 기름이 좔좔 흘렀다. 보연은 살벌하기 짝이 없는 신경의 집을 생각하며 혼자 쓴웃음을 띠기도 했다.
그날 경선은 사과를 깎으면서 말했다.
"보연이 너 패물 많지?"
"그런 것 없다."
"돈 벌어서 어디 쓰게?"
"그런 것 모르고 살았어. 아이 셋을 키워놓고 보니 어느새 세월은 가고."
"무슨 소릴 해? 늙어 꼬부라졌어? 지금부터라도 늦잖다."
"하긴 몸만 건강하다면, 실은 고운 옷 입고 밖에 나간 일도 별로, 밤낮 골골거리는 데다 우리 애아버지는 노상 바쁘고 어찌 헛산 것 같은 생각도 드네."
"하기야 패물이 있어도 차리고 다닐 수 없으니."
"너는 많이 있나부지."
"보여줄까?"
"그래."
해서 본 것이 그 비녀 가락지 팔찌 등이었다.
"차리고 다닐 수도 없지만 돈 좀 쓸 데가 있어서 팔려고 해도 아무 앞에나 꺼내놓을 수도 없고."
보연은 패물들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만주 가는 사람들은 더러 금붙이 사가는 모양이더라. 그곳엔 금값이 좋다던데? 무사히 가져가기만 하면."
결국 보연은 돈을 다 털어서 그 많은 금붙이를 샀던 것이다.
이튿날 홍이와 보연이 조선으로 압송되었다는 소식이 왔다. 상근과 상조는 소금에 절인 푸성귀같이 풀이 죽어 있었다. 천일의 아들 호야하고 놀려 하지도 않았다. 상의도 압송되었다는 소식을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임이의 거동이었다. 밥만 먹고 나면 방구석에 처박힌 채 꿈쩍하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가고 또 하루가 지나갔다. 나흘째 되던 날 천일 부부는 몸살이 나고 말았다. 아이들 때문에 지나치게 신경을 써서 탈진한 것이다. 상조는 한밤중 자다 말고 일어나서는 어미를 찾고 소리 지르며 울곤 했다. 천일은 상조가 병날까봐서 벌벌 떨었다. 천일 부부가 몸살을 앓고 있는데 상가를 찾은 메까마귀처럼 김두수가 나타났다. 소문을 듣고 온 것 같았다. 집에 오기는 처음이었다. 인버네스를 입고 수달피 모자를 쓰고 육덕은 여전했다. 동삼을 삶아먹었는지 혈색도 좋았다. 그런데 좋다는 그 자체가 그의 약점으로 뵈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누워 있었던 천일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밀고에 대한 의심을 풀렸지만 홍이 심중을 잘 알고 있는 천일은 경계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그를 대한다.
"허허어. 무슨 그런 해괴한 일이 다 있는고?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이 함께 잡혀갔으니 집안 꼴이 뭐가 되겠나."
"..."
"길게 끌면 큰일인데?"
"형님이야 무관하니까 곧 풀려나겠지요."
"무관한 걸 어떻게 증명하나. 한 지붕 밑에서 일어난 일을."
하고는 곁눈질을 하며 천일의 표정을 살핀다.
"형님이 관련됐다는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부부지간이라도 얼매든지 비밀은 있인께요."
천일은 볼멘소리로 응수했다. 찌뿌드드한 몸 때문에 신경질이 나기도 했다.
"법이라는 게 다 옳고, 참된 것 편에 선다고 믿었다가는 큰 코 다치지."
"하는 말이 꼭 잘못 돼라 하는 것 같소."
천일은 말투를 바꾸었다.
"그럴 리가 있겠나. 노파심에서 한 말이고 또 사실이 그러하니, 한데 이 할망구는 어디 갔나?"
두리번거린다.
"누구 말입니까."
알면서 짐짓 그렇게 나가본다.
"아이들 고모 말일세."
"여기 와 있는 거를 우찌 알았십니까"
"여기 간다고 나한테 말하고 갔으니 알지."
"예... 어디 갔는지 아침부터 안 보이네요."
"흥, 그는 그렇고 공장은 휴업이라며?"
"예."
"이럴 때일수록 일은 계속 해야지. 쉬었다가 일어설려면 힘들어."
"일거리도 시원찮소."
"그럴 때도 있지."
"내리막길이요. 일을 할래도 자재가 있어야지요 충전만 해주고 밥먹겄십니까."
의도적으로 부수어댄다. 그것을 알아차린 김두수는 씩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헌데 자네 태생은 어딘가? 경상도 말씨를 쓰네? 전에도 한번 물어볼려다 말았지."
"하동이요."
"하동의 어디?"
"악양의 형사리요."
천일의 태생이 평사리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마씨 부부가 평사리에 들어온 것은 김두수가 떠난 뒤, 그리고 호열자가 지나간 뒤의 일이었다. 김두수는 노린재 챗국 마신 상을 했으나 그 화제를 계속하지 않았다.
"이 집은 어찌 돼 있나? 홍이 소유인가?"
"셋집이지요."
"셋집이라? 그럴 리가 있나."
"객지 생활에 뿌리박고 살 것도 아니겄고 집 장만해 머하겄소."
짜증도 나고 별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들어서 천일의 어투는 점점 더 소홀해진다.
"흥, 불각처에 들이닥쳐서 잡혀갔으니 중요한 서류 같은 것의 보관은 잘돼 있는지 모르겠네? 모두 도둑놈 세상인데 믿을 만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노골적으로 천일을 빗대어 말했다. 한번 떠보는 것 같았다.
"그렇지요. 상가집의 개같이 머 얻어묵을 거 없나 하고 이분거리는 것들 많지요."
한번 뿌리쳐놓고
"중요한 서류라 카믄 공장에 관한 것 말입니까?"
"그렇지이."
김두수의 상체가 성급하게 앞으로 기울었다. 애당초 글러먹은 수작이었다. 옛날의 그 악마의 독기는 녹슨 쇠붙이처럼 푸석푸석했고 사람에 대한 자질도 엉성했으며 일직선으로 재단된 도화지처럼 그 빳빳한 판단력, 먹이에 정확히 참을 꽂는 순발력, 모두가 무디어진듯 김두수에게서 어떤 치기마저 엿볼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조락의 모습이었다. 심신의 노쇠보다 일본이라는 거대하고 튼튼한 밧줄이 이제는 썩은 새끼줄이 된 때문이리라. 그가 놀던 부대, 그가 주름잡던 인간들, 이제는 가고 없다. 몹쓸 여자 장사로 축재는 했겠지만 돈으로 메우기에는 그 악의 구렁텅이가 너무나 깊고 권력의 단맛은 너무나 절묘했다. 제발 만수무강하여 지하에 잠든 원혼들의 해원이 될 그날까지 살아주어야 할 터인데, 평범한 천일의 눈에도 김두수는 허수아비로 보이기 시작했다. 비웃듯 대답이 없는 천일을 보다 못해
"명색이 내가 동업잔데, 마치 샛바람이 자나간 벌판같이 된 이 꼴을 그냥 보아 넘길 수는 없지. 차질이 없도록, 홍이 돌아올 대까지 챙겨놔야 할 게다."
"동업자라 했십니까?"
천일은 갑자기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래 동업자다!"
"무신 그런 말심을 하십니까? 세상에 봉사들만 사는 줄 아십니까?"
"뭣이!"
"그런 기이 통하든 세상도 있었십니까?"
"이놈이 뉘를 놀리는 게야! 수상쩍은 놈이로구나!"
"아저씨 이러지 맙시다. 아이들만 조선으로 데리가믄 그만인 기라요. 아이들 외삼촌이 시적 을 기고, 아무것도 없소. 빈털터리라요. 공장이라 캐야 휭한 빈 땅밖에 더 남겄소? 건물이야 바라크 아니요. 땔감밖에 안 될 기고 형님은 순전히 기술 팔아 묵고 산 셈이제요."
천일은 또다시 너털웃음을 웃는다. 몸살도 다 달아난 듯 속이 후련해지는 것이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말 잘한다 싶었던 것이다.
"네놈이 벌써 일 저질렀구나! 그렇게는 안 될 거다! 내가 누구냐! 하하핫 핫핫핫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더라고 천방지축이네. 형사들이 줄줄이 내게 이어져 있는 걸 모르는 모양인데 뜨거운 맛 좀 봐야겠다."
"아저씨 흥분하지 마이소. 없어니 없다 한 기이 죄가 되는 법도 있소? 또 그렇소. 내가 모리는 동업자가 어디 있단 말이요. 그거야 말로 사기죄가 될 성싶구마는. 자동차 불하받을 때마다 아저씨가 와리 묵는 거는 나도 아는 일이요만 그기이 동업자다 그 말이요? 아따 그렇담 시경 천지 동업자가 얼매나 될지 모리겄네. 머 날 잡아갈 근거가 있이믄 휘파람 불어서 형사나으리 모시오소."
김두수는 기가 막히는 모양이다. 으르렁거리며 잠시 생각해본다. 공갈 협박이 영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옛날 같으면 이깟놈 내 새끼손가락 하나로 문드러 버릴 것을. 대체 저놈은 뒤에 누가 있길래 큰소리 뻥뻥 치느냐 말이다.'
"아저씨."
"."
"침 삼키노라고 목젖 주저앉을까 걱정되어 하는 말인데요. 공장은 애당초 형님 것이 아니었소. 물론 명의는 형님이지마는 빚 얻어서 시작한 일이라 공장 등기는 옛날 옛적에 저당 잡혀 있다, 그 말입니다. 내 말뜻 그래도 모리겄소? 물론 저당 잡은 사람은 부자고 명망이 있고 관가하고도 가까운 중국인인데 형이 원한다믄 공장이야 계속해 할 수는 있지요. 서류 가지고 따질라 카믄 그 집에 가서 따지시지요. 하하핫핫핫, 그리고 휘파람을 불든 호각을 불든 해서 형사들 데리고 가보소."
"이 육시랄 놈 같으니라고!"
그러나 김두수는 미적거리고 앉아 있었다. 왠지 상대를 빠뜨릴 함정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놈아! 처음부터 이거는 잘못된 얘기다! 내가 언제 침을 삼켰느냐!"
"그라믄 나는 언제 일 저질렀소.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제요."
"내가 흥분 좀 했기로서니 나잇살 먹은 사람한떼 그 따위 버르장 머리가 어디 있어!"
김두수는 목소리를 높였으나 내용은 다듬고 있었다.
"이자 그만 가시이요 불난 집에 부채질 하지 말고. 이홍이를 관 속에 넣어 못질한 것도 아닌데 와 그리 성미가 급합니까."
김두수는 일어섰다.
"나 오늘은 이대로 갈 것이로되 내 성질이 남하고는 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게야."
그 말에는 김두수 특유의 옛날 모습이 다소 남아 있었다. 그가 나가고 난 뒤 호야네는
"보소 와 그랬십니까. 그냥 귓등으로 흘리고 말 일이지. 사람 영악한 것 범보다 무섭다 안 갑디까."
"잔소리 마라! 저런 놈은 쳐직이야 하는 기라. 사람이 천년만년 살기가! 울 아부지는 왜놈 헌병한테 총 맞아 죽었다!"
"정말 와 이캅니까. 큰일 나겄네."
아이들 한곳에 모여앉아 천일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들 밥은 해믹있나!"
"이자부터 점심 채리야제요."
"상근아 상조야! 걱정마라 이 아저씨가 너거들 지키줄 기니 밥 많이 묵고. 외삼촌 오시믄 아부지 어무이 있는 고향으로 갈 긴께."
홍이와 보연이 조선으로 압송된 지 팔 일 만에 보연의 남동생 허삼화가 드디어 나타났다. 깊이 잠든 한밤 중 같았던 집안이 선잠을 깬 듯 요란스럽게 술렁거렸다.
"외삼촌!"
상의가 울부짖었다. 어릴 적의 기억은 희미했고, 그러니까 재작년 인가 한번 다녀갔으며 작년 모, 보연이를 데리러 온 일이 있었을 뿐인데, 그때 아이들은 빙긋이 웃었으나 몹시 낯가림을 했었다. 그런 삼화에게 상의는 스스럼없이 매달렸고 상근이와 상조도 비실거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오냐, 모두 별 탈 없이 있었구나."
삼화는 막내 상조를 안았다. 상조는 두 팔로 외삼촌의 목을 감으며 어깨에 볼을 대고 눈을 꿈벅거렸다. 삼화의 얼굴은 비교적 밝은 편이었다. 그는 상조를 내려놓고 천일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맙소. 자형이 잘 있을테니 걱정 말라 하기는 하더군요. 믿는 곳이 있어서 그랬든 모양이오."
지가 머,"
하다가
"인자 정말 살 것 같십니다.'
천일이뿐만 아니라 호야네도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했다. 팔일 동안은 이들 부부에게 힘들고 고통스런 시간이었다. 가볼 곳이라고는 연강루밖에 없었다. 의논할 곳도 연강루밖에 엇었다. 그러나 천일은 호이만큼 중국어가 능숙하지 않아서 의사 소통이 충분치 못했고 홍이만큼 가깝게 접촉한 사이도 아니었기에 허물없이 비비댈 처지도 아니었다. 김두수가 왔다간 뒤 그 일을 보고하러 갔을 때도 연강루 주인 진씨는 덮어놓고 염려하지 말라고만 했다. 어쩐지 그냥 건성으로 하는 말 같아서 친일은 서운했고 불안했다. 홍이가 없는 신경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천일이 부부에게도 공아 된 것처럼 외롭고 두려웠다. 만리타국이라는 것을 뼈아프게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슬그머니 나간 채 돌아오지 않는 임이에 대해서도 근심이 안 될 수 없었다. 김두수와 함께 계략을 꾸미고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서 심히 신경이 쓰였다.
"그라믄 형님을 만나보싰습니까."
"만났소."
"."
"전보를 받고 곧장 올 생각이었는데 자형을 면회하고 오느라 늦었소."
"우떻게 돼간다 합니까."
"모두 놀라기야 했겠지만 대단한 죄질이 아니니 너무 적정들 마시오."
"하지마는 조선서 형사들이 온 걸 보이."
"전문적인 밀수꾼들 소행인지 알고 그랬겠지요. 그러나 어쨌든 위법은 위법이었으까. 자형은 쉬이 풀리겠지만 누님은 좀 고생해야 할 겁니다. 그러나 모두 힘들 쓰고 있으니,"
했을 때 상조는 삼화의 무릎을 잡으며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상조야 걱정 마라. 조선에 나가면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랑 친척이 많으니까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다."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이들 얼굴에는 이미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생명이란 얼마나 신비스런 것인가. 삶에의 의지는 영악하고 핏줄을 당기는 힘은 불가사의하다. 천일이 부부가 혼신으로 아이들을 감싸왔지만 저토록 스스럼없지는 않았다. 신뢰하고 의지하면서도 아이들은 엄청난 사건을 겪은 뒤 두려워하며 자신들을 숨기려 하고 방어하려는 기색이 늘 있었다. 그랬는데 한두 번 본 외삼촌에게 모든 긴장이 풀려 기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솔직히 말해서 천일부부는 다소 서운했다.
오래간만에 이 집 저녁 불빛은 사람이 사는 흔적을 강하게 나타내며 일렁였다. 간혹 웃음소리가 나기도 했고 호야와 그의 동생 호준이하고 상조는 놀기도 했다. 상의는 아이들 옷을 갈아입히기도 했다. 호야네는 오래간만에 장을 보아 손님을 위해 정성스런 저녁을 차렸고, 몸집이 자그마한 삼화는 천일이보다 한두 살 아래인 듯 했으나 성품이 온화하고 나이보다 노숙했다. 그는 외할아버지인 꼬장꼬장한 김훈장을 닮은 것 같지 않았다. 말 많고 상민의 자식인 홍이에게 딸을 주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던 부친 쪽을 많이 닮은 것 같았다. 긴장이 풀어진 아이들은 일찌감치 잠에 떨어졌고 천일이 부부, 허삼화, 상의가 거실에 앉아서 떠날 준비에 대하여 얘기를 하고 있었을 때 뜻밖에 하얼빈에서 송장환이 들이닥쳤다.
"아이고 선생님!"
"할아버지!"
천일하고 상의가 동시에 소리쳤다.
"우떻게 아시고 오싰습니까?"
"연강루에서 기별이 있었네. 아이들은 다 괜찮은가?"
"예. 저, 이, 인사하시이요. 이 어른은 형님 선생님이십니다."
천일은 삼화를 보고 말했고 다음은
"조선서 막, 낮에 오신 상의 와삼촌입이다."
하고 송장환에게 말했다.
"네, 자형한테서 선생님 말씀을 듣고 왔습니다. 절 받으십시오."
그러나 송장환은 손을 내밀었다.
"송장환입니다."
하며 악수를 청했으나 삼화는 기어이 절을 했다. 용기백배한 천일은 호야네보고 술상을 차리라 하며 서둘렀고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서운해 했던 연강루 전씨에 대하여 미안하게 생각했다. 일부러 하얼빈까지 연락해준 것이 고마웠고 김두수에 대한 공포감도 풀리었다. 상의와 호야네는 안방에서 옷가지를 챙기기 시작했고 남자들은 거실에서 술상 앞에 앉았다. 송장환의 얼굴도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천일은 김두수에 관한 얘기를 소상하게 말하였다.
"그 놈이 진작에 죽었어야 하는데, 몹쓸 놈."
했으나 얘기는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 역시 연강루의 진씨처럼.
"그놈 걱정은 하지 맣게. 그놈 자신이 아편, 금 밀수에 걸려 있고 지금은 실 떨어지 연이다. 이젠 힘이 없어."
하고 말했다. 그리고 삼화에게
"헌데 이군은 뭐라 하든가요?"
물었다.
"송선생님한테 한 말이 있으니까 공장에 관한 것은 일임하라 하더구만요."
송장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아이들 데리고 되도록 빨리 출발하도록 하시고 천일이는 이군이 돌아올 때까지 여기 있도록, 이군이 돌아와야, 이 기회에 공장은 처분하는 게 좋고 천일이 문제는 이군이 다 생가가고 있을 게야."
"지야 뭐 지금 그런 생각할 때도 아니고 아이들만 데리고 간다면 한시름 놓겄십니다."
"천일이 자네 수고했네. 사람이 살자면 별의별 일을 다 겪게 되는게야."
"이번 일은 제 누이의 생각이 얕아서 저지른 일이라 정말 자형한테도 미안하고 여러 사람한테 폐를 끼치게 됐습니다."
삼화가 말했다.
"이군이 속이 깊고 또 공장 문제는 진작부터 얘기가 있었소. 적당한 기횔 바서 털고 일어날 생각을 했던 거요. 하니 너무 심려 마시오."
"그러면 자형은 조선으로 돌아올 생각이었습니까?"
"글쎄 그거는, 이군 판단에 달린 거 아니겠소?"
송장환은 자세한 얘기를 할 수 없었다. 해서는 안 될 일이기도 했다.
"그럼 언제 떠나시겠소?"
"내일이라도 가야겠지요. 누님이 아이들 때문에 온정신이 아닙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오. 내일 역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는 볼일이 있어서 이만 가야겠소."
하고 송장환은 갔다. 이튿날 아침 임이는 어디서 뭘 했는지 옷 보따리를 하나 들고 나타났다. 식구들은 모두 그를 의심했던 것이 미안하여 반갑게 맞이했다. 임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추위에 떨고 있었으며 옷도 얇았다.
"짐들을 와 싸놨노."
"오늘 떠납니다."
호야네가 말했다.
"누가? 모두 떠나나!"
임이는 낭패한 듯 말했다.
"아니요, 아이들만 갑니다. 아이들 외사촌이 오시서."
"그라믄 나는 우짜고."
"그나저나 어디 갔십디까?"
천일은 한 가닥 의심을 놓지 못하고 물었다.
"대련에 갔다가... 거기도 있을 형편이 못 돼 왔는데 그라믄 나는 우짤 기고!"
"있는 대로 함께 있어봅시다. 형님 오실 동안 우리는 여기 있일긴께요."
안도하는 것 같더니 다음 순간,
"무신 이런 난이 있겄노? 하나밖에 없는 내 동생이 수갑을 차고 잽히갔으이 아이고 아이고."
하며 헛울음을 잡히는 것이었다. 방안에 외삼촌이라는 사람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러는 것이었지만 삼화는 차표를 사기 위해 일찍 집을 나가고 없었다.
"어지가지할 곳 없는 나는 어짜믄 좋노! 나이나 젊단 말가. 자식새끼 하나 없고 천지간에 붙이라고는 동생 하나뿐인데 아이고 내 팔자야!"
상근이는 방안에서 꿈쩍하지 않았다. 호야네와 상의는 아침을 짓고 떠날 준비에 바빴으며 어린아이들만 임이가 우는 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천일이는 임이의 속마음을 알기 때문에 미워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참는다.
"그만해두소.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치겄소. 집안이 이 꼴인데 이녁살 걱정만 하고 무신 인심이요."
"시끄럽다! 니가 뭐를 아노!"
했으나 방안에서 아무 기척이 없는 것을 깨닫고 흐지부지 울음을 거두었다. 그리고 차려낸 밥상을 차고 앉아서 여러 끼 룸은 사람처럼 임이는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통한 것은 상근이가 빨랫방망이로 때린 일에 대해서는 일절 말이 없었다. 넋두리할 적에도 그 말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어린 조카에게 맞았다는 사실이 그에게도 창피스러웠던 모양이다. 상근이는 임이 눈을 피해가면서 밥을 먹는다. 떠날 준비는 다 되었고 아이들은 기둥시계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쉬운 생각은 티끌만큼 없었다. 학교며 친구도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쏜살같이 부모 있는 곳으로 마음은 달리고 있었으며 일각이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을 뿐이다.
"누나, 외삼촌 왜 안 와."
상근이 물었다.
"곧 오실 거야."
"올 때가 되믄 올 긴데 오도방정을 떨어쌌는다. 여기 있으믄 누가 잡아묵나. 고몬데 아이들 건사 못할까봐서?"
임이가 말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누나 외삼촌 왜 안 와."
하고 상근이는 또 물었다. 그때 마침 삼화가 돌아왔다. 그는 호야와 호준을 위해 과자를 한아름 사들고 왔다. 그리고 안사돈, 홍이 누님이라는 임이와 수인사를 하게 되었는데,
"올캐는 친정이 권속이 많아서 만리타국까지 일봐줄 사램이 다 있는데 우리 상의애비는 전지간에 누부 하나밖에 없어이 처가에 눌릴 만도 하제."
삼화는 당황했다. 다소 충격을 받기도 했다. 누이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산전수전을 다 겪은 듯 처연하리만큼 노추가 드러나 있는 노파가 과연 아이들의 고모인가, 점잖고 자존심 강한 매부의 누님인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좌우간에 이리 오싰이니 고맙기는 고맙소. 집 걱정은 말고 아이들이나 데리고 가이소. 생활비만 좀 있이믄 집이사 내가 어련히 지키겄십니까."
듣다 못해 천일은
"시간 늦겄십니다. 할매는 좀 가만히 기시이소."
"할매라는? 굴러온 돌이 본돌 찬다 카더마는 말짱 남의 식구들이 판을 칠라 카네. 더러바서 참."
사돈 면전이라 하여 체면 차리는 것도 없었다. 그는 다만 만주바닥의 거리가 무서웠고 그 거리는 그에게 있어서 굶주림의 거리였었다. 수전노였던 임이네와 달리 임이는 악랄하다 할 수 없는 정신뱍약이었다. 호야네와 임이가 집에 남고 작별을 한 삼화를 따라 아이들과 천일이 집을 나섰다. 얼마만큼 가다가 상의는 되돌아섰다.
"외삼촌 잠시만."
하고 그는 집으로 달려간다. 지갑을 꺼낸 상의는 돈을 다 털어냈다.
"고모 이거 받아요."
어리둥절해하는 임이 손에 돈을 쥐여준 상의는
"고모 미안해."
하면서 눈물을 닦고 급히 달려 나왔다. 상조의 손을 잡은 상의는 뒤돌아보지 않고 한 길가까지 나와 마차에 오른다. 신경은 흐린 겨울 하늘 밑에 소리 없이 드러누워 있는 것 같았다. 마차 속에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말발굽 소리만 경쾌하게 울리고 있었다. 털외투에 털모자를 깊숙이 쓴 아이들 입에서 입김이 서리고 있었다. 역 대합실의 잡담을 헤치고 개찰구 가까이까지 갔을 때 송장환이 그곳에 기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
"오냐."
아이들은 비로소 이별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도 같이 가세요."
상근이가 말했다.
"요다음에."
하고 송장환은 웃었다.
"와보니, 저의 자형이 외롭지 않았구나 생각했습니다."
삼화 말에
"이군은 상근이만할 때부터 내가 가르쳤소. 장난이 심하고 공부는 잘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그간 오랜 세월이 흘렀소이다."
송장환은 잠시 동안 감회에 젖는 듯했다.
"선생님을 만나뵈니 자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거의 만나지 않고 지내왔으니까요. 아무튼 선생님께서는 몸조심을 하십시오."
삼화는 송장환을 평범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뭔지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었다. 송장환은 조용히 삼화를 바라보았다.
"이군 처남도 만사에 신중하고... 나잇살이나 먹은 사람의 얘기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래도 만주는 조선보다 자유로운 것 같습니다."
"그래요?"
"말씀 낮추십시오."
그 말대답 없이,
"칼날 같은 세상요. 이군보고도 부디 자중자애하라 전해주시오."
"전하겠습니다."
"이곳 걱정은 말라는 말도."
하고나서 송장환은 손을 내밀었다. 삼화는 두 손으로 송장환의 내민 손을 잡으며
"고맙습니다. 다시 뵐 날이 있을 것을 믿겠습니다."
송장환은 아이들 머리를 쓸어주고 돌아섰다.
2장 송화강의 물
여행 가방을 메고 간편한 차림의 중년 사내가 허공로에 있는 운회약국으로 들어왔다. 매우 세련된 모습이었다. 그는 일본말로 소화제를 달라고 했다. 흰 가운을 입은 여자가 돌아서서 약을 꺼내는데 머리를 걷어 올린 목덜미가 눈이 부시게 희었다. 여자는 포장을 하다 말고 사내를 쳐다보았다. 동시에 사내도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두 사람은 돌이 된 듯 행동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본다. 여자의 얼굴은 차츰 백지장으로 변해갔고 남자 눈에는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여자는 유인실이었다. 여행 가방을 메고 들어온 사내는 조찬하였다. 그것은 기구한 만남이었다. 유인실은 얼마 전에 상해에서 하얼빈으로 돌아왔고 당분간 머물면서 수앵이를 위해 운회약국 일을 도와주고 있었던 것이다. 조찬하는 단순한 여행이었다. 울적하거나 딜레마에 빠졌을 때 스스로 자신을 건져 올리려 여행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주에는 전에 몇 번인가 온 적이 있었다. 그는 만주의 북부 지방을 여행하는 것을 특히 좋아했다. 러시아풍 고건축이 들어선 하얼빈도 그가 즐겨 찾는 도시였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인실씨!"
찬하의 목소리는 역시 분노에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인실은 멈추었던 손을 놀리며 약을 포장했다. 그리고 찬하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입술은 얼음장같이 차게 보였다.
"오래간만입니다., 조선생님."
조찬하는 뭐라 소리지르려다 간신히 참는다.
"정말 무섭군요. 이런 기우가 어디 또 있겠소, 인실씨."
"..."
"어디 가서 차라도 마시며 얘기 좀 합시다. 안 된다는 말은 못할 겁니다."
인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느릿느릿 가운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인실은 스프링코트를 입은 모습으로, 핸드백을 들고 나왔다. 점원 아이에게 중국말로 뭐라 하고 약국을 앞장서서 나갔다. 그는 느릿느릿하게 걷고 있었는데 때때로 휘청거렸다.
"점심 전이시지요?"
인실은 물었으나 찬하는 차츰 유인실을 만난 것을 실감할 수 없었던지 분노는 사라졌고 자꾸만 고개를 흔들곤 했다. 유인실이 찬하를 안내해간 곳은 유명한 양식점 흑룡이었다. 웨이터가 인실의 코트와 찬하의 여행 가방을 받아 간수했다. 테이블에 마주앉는다. 다 같이 바라보면서 침묵한다. 숨이 막히는 침묵이었다. 찬하가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인실은 영원히 침묵할 것만 같았다. 찬하가 먼저 말을 했다.
"묻고 싶은 말은 없습니까."
"..."
"뭣이든 물어보십시오."
"물어볼 말이 뭐 있겠습니까."
"진실입니까?"
"..."
찬하는 입이 타는지 갖다놓은 컵의 냉수를 마신다.
"인실씨에게는 이제 그 솔직함도 없어졌습니까?"
"물어볼 권리가 저에겐 없지요."
그 말을 했을 때 테이블 위의 깍지 낀 손이 떨었다.
"하기는 다 지나간 일이지요. 이제 와서 제가 뭐라 비난을 하겠어요. 인실씨만큼 결단력이 없었던 저 자신 때문인데."
"저에게는 지난날이 없습니다."
수프를 날라왔다. 샐러드 빵, 인실은 그것들은 차근차근 먹고 그릇을 비웠다. 그리고 고기를 썰어서 규칙적으로 먹었다. 음식을 못 먹는 찬하는 인실의 행위가 거의 무의식적인 것임을 느꼈다.
식사가 끝나고 홍차를 마시면서 찬하가 말했다.
"두 번 다시 이런 기회는 없겠지요."
"아마."
"아이가 어찌 되었는지 상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
"인실씨에게 고통을 주려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아까는 저도 모르게 격해 있었습니다. 인실씨는 물어볼 권리가 없다 했으나 저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수가 없습니다."
인실은 눈을 들어 먼 곳을 바라본다.
"말할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지요?"
"아이는 열한 살이 되었고 제 호적에 입적하여 기르고 있습니다."
순간 인실의 눈이 돌팔매같이 찬하 얼굴에 날아왔다.
"그렇게 시초가 잘못되었습니다. 인실씨는 제가 기르는 것을 원치 않았을 테니까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은 다시 흘렀다.
"오가다상이 어디 있는지 모르시지요?"
"..."
"말씀 좀 해보세요."
찬하는 차라리 애원조로 나왔다.
"모릅니다."
"신경에 있어요. 일 년에 한 번 정도 일본에 오는데 그럴 때는 꼭 저의 집에 들르곤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오가다상이 찾아올 때 마다 저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왜 그렇게 하셨어요."
인실은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그 말대답은 없이 찬하는 냅킨을 접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송화강 강가에라도 나가보시겠습니까?"
인실은 순순히 따랐다. 송화강 강가 광장을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인실은 따라왔다. 마음도 그러했지만 말 역시, 거의 찬하는 횡설수설이었다. 별안간 부딪친 놀라운 현실 앞에 뭔지 모르지만 사태가 갈기갈기 찢겨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인실을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얼빈인가 신경인가 어디서 마차를 타고 가는 인실이를 보았다는 오가다의 말이 겨우 생각났다. 그냥 지나쳐도 죄 될 것이 없었던 남의 여자, 그들의 깊은 관계에 다소는 책임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찬하의 마음이 다소 냉정했더라면 이런 기막힌 해후는 아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강가에 앉아서 대안을 바라본다. 어느덧 겨울은 가고 초봄도 떠나려 하고 있었다. 지상의 나무며 풀들은 터질 듯 푸르름으로 발버둥 치고 있었다. 강물 위로 유유히 흐르고 있는 돛단배는 바람을 잔뜩 안고 있었으며 유람선은 물살을 가르며 지나갔다. 멀고먼 강기슭은 봄 아지랑이에 녹아들고 있었다. 바람은 다소 쌀쌀했지만 구름은 한가롭게 강물 따라 떠내려가고 있었다.
"오늘 이 만남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지요."
찬하는 담배를 붙여 물고 그어대었던 성냥개비를 물 위에 던진다.
"인실씨는 오가다를 만나야 합니다. 만나서 인실씨 자신이 아이의 얘기를 하십시오. 아이가 고아원에 간 것도, 알지 못할 사람의 양자로 간 것도 아닙니다. 그 아이는 인실씨가 알고, 또 오가다가 아는 바로 제가 기르고 있으니까요. 십일 년의 세월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돼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실씨가 소망한 대로 아이는 일본 땅에 존재도 모르게 묻혀버리지는 않았지요. 이제는 인실씨가 짐을 져야 합니다. 아무리 고통스런 일이라도, 오가다를 만나 얘기하십시오. 당신의 아이를 내가 낳았노라고. 그것도 아니 하겠다면 인실씨는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을 겁니다."
"영원히, 네 그렇지요. 영원히."
"나는 사실 그 아이를 사랑합니다. 거의 내 자식이거니, 착각하고 살아왔습니다. 집사람도 그렇구요. 하지만 그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요. 자기 자식을 눈앞에 두고 친구의 자식이거니 생각하고 있는 오가다를 볼 때 나는 과연 인실씨하고의 약속을 지켜야 하는지 갈등에 빠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아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내 이성이 마비된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것은 죄악이다! 하고 생각하곤 하지요. 그간 세월이 많이 흐르지 않았습니까? 인실씨 심경에도 변화가 있는 것이 자연스런 일 아닐까요? 민족의식이 에고이즘이 되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 말 할 자격이 저게는 없는지 모르지만. 일본은 멀잖아 패망하겠지요. 일본인도 사람입니다. 사람으로서 피해자이기도 하구요. 이런 정세 하에서 오가다나 저나 앞날은 안게 속입니다. 일본인인 오가다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는지 그것도 의문입니다. 일본인을 살아했다는 죄의식에서 벗어나십시오. 인실씨는 사람을 사랑한 것뿐입니다. 인실씨는 오늘까지 있어온 용기보다 더 큰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얘기를 하다 보니 십일 년 전과 내용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찬하는 깨닫는다. 그때 인실은 그 말로 설득되지 않았다.
"제가 무지하게 보이지요?"
인실은 혼잣말같이 되뇌었다.
"어떤 면에서는."
동경 하비야공원에서 인실은 만났던 일이 마치 어제일처럼 되살아났다. 찬하 눈앞에 머리를 바짝 걷어 올려서 고무줄로 동여매고 흰 바탕에 회색 물방울무늬의 헐렁한 원피스를 입은 인실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우리는 이제 다 끝났습니다. 후회하지 않아요. 두렵지도 않습니다. 다만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그때 인실의 음성도 똑똑히 들려오고 있었다.
"하기는 저같이 무위하게 사는, 용기도 결단도 못하고... 가문을 산산조각 박살을 내었건만 그래도 갈 곳이 없더군요. 어떤 면에선 인실씨는 무지할 만큼, 네, 무지할 만큼 자신을 밟아 뭉개고 나가더군요. 부럽기도 하구요. 그러나 제가 인실씨의 사는 방식에 관여하고 간섭해서도 안 되겠지만 아이의 문제만은 인실씨 자신이 처리하십시오. 십일 년 동안의 괴로움을 이제 나는 벗어야겠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인실씰 만나지 않았더라도 지금쯤 나는 인실씨와의 약속을 포기했을 겁니다. 신경에 가게 되면 오가다를 만나게 될 테니까요. 불쌍한 친구, 네, 불쌍한 친구지요. 그러나 행복한 사냅니다. 그런 인간이 얼마만큼이라도 현실 속에 있다는 것은 희망이지요."
"조선생님."
"네."
"제가 하지요. 선생님은 약속 안 깨셔도 됩니다. 제가 하지요."
찬하가 벌떡 일어섰다.
"정말입니까?"
인실을 내려다본다. 웅크리고 앉은 여자의 눈부시게 흰 목덜미가 보였다.
"네. 그렇게 하겠어요."
"잘 생각했습니다."
하는데 의외로 찬하 목소리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그 애는 행복했군요. 행복하게 자랐군요."
"영롱한 샛별 같은 아입니다."
"눈물을 흘린다는 것도, 죄송합니다."
"실은 저도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농치듯 말했으나 건성으로 하는 말만은 아닌 것 같았다.
"무도한 여자를 누가 용서했을까요? 조선생입니까?"
"스스로 용서받은 거지요."
인실은 고개를 들고 찬하를 올려다보았다. 눈에 핏물이 괸 듯 핏발이 서 있었다.
"선생님, 저 여기 한 달 가량 있을 거예요. 그 동안은 언제라도 좋습니다. 운회약국, 아까 오신 그 약국을 찾아와서, 저말고 윤광오씨를 만나면 됩니다. 윤광오 씨는 오가다 그분하고도 아는 사이지요. 오래된 일이지만 동경에 유학했을 당시 동경 대지진이 있었을 때 윤광오 씨가 피신해간 곳이 오가다 그분의 집이었어요. 만나게 되면 서로 알아볼 거예요."
찬하는 재빨리 수첩을 꺼내어 이름을 적고 약국 이름도 적어 넣었다.
"설마 인실씨가 결혼하신 거는 아니겠지요?"
찬하는 또 농담 비슷하게 물었다.
"결혼이라구요?"
"만일 그렇다면 오가다에게 나는 아무 말도 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일 없습니다."
인실은 고지식하게 대답했다.
"봄인데 참 쓸쓸하군요."
그것도 풍경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말하는 것 같았다. 말로는 그랬으나 찬하는 인실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의지보다 오가다를 만날 때마다 약속을 깨지 못했던 것은 감정 쪽이 훨씬 강했다. 그는 쇼지를 사랑했고 깊은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조선생님."
"네."
"저 혼자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그, 그러지요. 그럼 나는 강가를 돌아서 가겠습니다. 괜찮겠어요?"
인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돌아서서, 뒷모습을 보이고 가는 찬하에게
"안녕히 가세요. 용서하시구요."
그러고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인실이 운회약국에 돌아왔을 때 사방은 어둑어둑했다. 약국 안에는 수앵의 근심스런 얼굴이 있었다.
"언니!"
문을 밀고 들어서자마자 수앵이 소리를 질렀다.
"어디 갔다 오는 거예요?"
"아는 사람을 만나서."
얼마나 놀랐다구요. 저 애 말로는 이상한 남자가 와서, 그것도 성난 얼굴로 강제로 데리고 나갔다 그러잖겠어요?"
"미안해. 걱정시켜서."
"안색도 안 좋은데, 정말 아무 일 없는 거지요?"
"걱정 말래도, 이따 얘기할게."
"모두들 긴장했어요. 하여간 돌아와서 맘 놨다."
"수앵아."
"네."
"윤성생님 어디 가셨니?"
"집에 들어갔어요. 옷 갈아입는다구."
"웃을 갈아입니다니?"
"언니도 참 까맣게 잊었나봐요?"
"뭘."
"오늘 밤 큰집에서 잔치가 있잖아요?"
"아아 참 그렇지."
"우리도 들어가서 옷 갈아입고 준비해야지요. 언니 기다리느라 늦어졌어. 이애 일찌감치 문 닫아."
수앵은 점원 아이에게 일러놓고 인실의 등을 밀다시피 밖으로 나왔다.
"언니 공기 참 좋지?" 나뭇잎 냄새가 풍겨 나오는 것 같아요. 봄은 또 왔는데, 마음은 사춘기만 같은데, 언니 나 늙나봐요."
"또 그 소리."
"아니야, 요즘엔 좀 불안해. 우리 집 그이 나한테 여간 냉담한 게 아니에요. 어디 나 몰래 애라도 낳아놓은 거 아닐까?"
"너도 성가신 병에 걸렸구나."
"그런 소리 말아요. 언니, 아이 없는 여자의 맘은 당사자 아니면 아무도 몰라요. 언닌 숫제 결혼 같은 것 안 했으니까 그렇지만."
굽이 높은 구두, 날씬한 종아리, 수앵은 아직 아름다웠으나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옛날 같은 사업에 대한 정열도 식어가는 것 같았다.
"언니 아까 찾아왔다는 사람 누구예요?"
"찾아온 게 아니야. 우연히 약 사러 들어왔다가 마주친 거지."
"옛날 애인이유?"
"아니."
"한데 기분이 왜 그래요? 굉장히 세련돼 뵈는 남자라 하던데."
"굳이 말하자면 애인의 친구야. 더 이상 묻지 말아."
천성이 단순한 수앵이었고 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몹시 서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로 넘어갔다. 추스르려 무진 애를 썼지만 인실은 지렛대가 부러진 허수아비였다. 십일 년 전, 부른 배를 안고 동경 바닥을 끝없이 헤맬 때, 그때는 그에게 깡다구가 남아 있었다. 요코하마의 부둣가, 항구에 떠 있는 상선이며 여객선을 바라보았을 때, 하코네의 그 짙푸른 아시노코를 들여다보았을 때도 그는 자살을 결행하지 않았다.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오가다와 자신과의 핏줄을 버리면서 인실은 자기 자신을 땅속에 묻어버렸다. 깡그리 묻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두만강을 건너면서, 새로이 태어나려고 몸부림쳤다. 그를 일으켜 세워준 것은 용정, 해란강 강가에서 중학교에 갓 들어간 밤송이 같은 소년들이 강물에 돌을 던지며 모래밭을 뒹굴며 목이 터져라 부르던 선구자의 노래였다. 인실을 오늘 존재하게 한 것은 항상 죽음과 맞선 시간 때문이었다. 긴장과 긴장의 연속 속에서 인간적인 사고와 인간적인 삶을 포기하고 황막한 대륙에서의 투쟁 때문에 그는 살아 있을 수 있었다. 눈물 한 방울 허용하지 않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자비, 그것 없이 그는 대지에 발을 붙이고 서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 인실은 자기 내부에서 지렛대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수앵의 백부 심운구의 팔십회 생신 잔치는, 팔십회라는 연륜 때문에 의미가 큰 것이었지만 요즘에 와서 만나지 못하는 연해주의 동생, 심운회로 인하여 깊이 상심하는 심노인을 위로하고자 한 자손들의 배려도 있어서, 집에서 해마다 행사를 치러왔던 관례를 깨고 H궁 호텔의 연회장을 이용하여 성대히 잔치가 베풀어지는 것이었다. 친척 말고는(친척도 태반은 중국인이었다) 초대된 사람들 거의가 중국인들, 중에서도 주류를 이룬 것은 하얼빈의 거상들이었고 심씨 일가가 벌려놓은 사업체에 종사하는 식구들, 송장환도 물론 참석했으며 일본인 고위층도 몇 명 초대받아 와 있었다. 치장하고 나온 여인들의 의상은 화사한 봄을 실내에 옮겨놓은 듯 싱그러웠다.
심노인은 조카딸 수앵이부부를 각별히 사랑하여 곁에 있게 했으며 소식이 끊긴 연추의 동생을 생각하여 한숨을 짓곤 했다. 잔치는 무르익어 따로 마련된 무도장에서는 나직한 반주, 노래 부르는 가수, 춤추는 사람들, 연보랏빛 드레스 입은 가수는 일본 유행가 [소주야곡]을 부르고 있었다.
꽃잎을 띄우고 흐르는 물의
내일 가는 길은 어디메인지
오늘 밤 비쳐진 우리의 모습
사라지지 말아요 언제까지나
일본 유행가의 레퍼터리는 얼마든지 있었다. 지나의 밤, 국경의 마을, 상해의 길모퉁이, 심지어 군가 보리와 병사까지 부르고 있었다. 대일본제국의 대륙 진출, 대륙 강점의 정책을 측면 지원하여왔던 감상의 허울 밑에 숨겨진 야욕, 값싼 유행가를 중국인들은 부르고 들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 연회에 참석한 고위층 일본인들을 기분 좋게 하기 위하여. 그러나 그들은 비통하여 마음속으로 이를 갈고 있지는 않았다. 엄청난 살육, 아녀자들을 유린한 필설로 안 되는 만행, 섬나라 짐승들을 마음속으로 경멸하며 그들 사탕발림의 노래를 불러주고 있는 것이다. 심노인의 아들 심재용, 못생겼으나 체격 좋고 멋쟁이인 그도 나와서 하일군재래를 부르고 있었다. 봄이 감돌며 기웃거리는 창밖에는 푸른 가등이 정원을 비춰주고 수목들도 수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사람들은 모처럼 흥을 돋우고 있었다. 그러나 흥에 취해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사실 이들은 모두 내일을 알지 못했다. 내년에도 이와 같이 행사가 있을 수 있겠는지 아무도 기약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계는 전운에 가득 뒤덮여 있었고 지금 이 시각에도 중국 본토 어디선가 포성이 울리고 있을 것이다. 만주 일대에서도 저항의 불길은 엄폐된 채 타고 있었으며 비적이라 일컫는 조선독립군 중국의용군의 출몰이 끊긴 것은 아니었지만 삼엄한 소만 국경과 치안이 철통같은 남만주 사이에서 대부분 전투로부터 공작으로 전환한 항쟁의 투사들이 맹렬히 활동하고 있었다. 지난 가을에는 일본이 무모한 불인 진주를 감행했고 그보다 앞선 삼월에 왕조명은 위정부를 남경에다 세웠으며 구라파도 전쟁의 도가니로 화해 있었다. 독일군은 마지노선을 뚫었으며 영국은 됭케르크에서 총 철퇴, 드디어 파리는 함락된 상태, 각일각 세계의 정세는 예측 불허였다. 뿐인가, 소만 국경은 화약고나 다름없었다. 언제 어느 곳에서 터질지, 언제 하얼빈이 전화 속으로 들어갈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연회가 성대하고 여인들 의상이 현란하며 남자들이 폭음하는 것은 내일을 모르기 때문일까. 일본인이라고 예외는 아인 것이다. 절망은 오히려 그들 편이었다.
심씨 일가의 친척으로, 또 중국 여인으로 위장하고 연회에 참석한 인실은 가까스로 윤광오와 마주치는 기회를 잡았다.
"윤선생님."
삼재용과 얘기를 하고 있던 광오가 돌아보았다.
"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요."
"무슨 얘긴데요?"
"..."
"비밀 얘긴가요? 자리 비켜드릴까요."
심재용이 웃으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여기선 좀."
"그럼 나갑시다."
광오가 말했다.
"그래 주시겠어요?"
두 사람은 연회장에서 회랑으로 빠져나왔다. 인실은 광오에게 등을 보인 자세로 회랑 난간을 짚으며 불빛이 뿌려진 시가를 바라본다. 광오는 심상찮다는 생각을 하며 담배를 붙여 물고 인실과 나란히 난간 앞에 섰다. H궁 호텔 정원을 두른 철책이 가로등 빛을 받고 주뼛주뼛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하늘에도 시가와 같이 별빛이 뿌려져 있었다.
"윤선배."
인실은 일상의 선생이라는 호칭 대신 선배라 불렀다. 그가 처음 하얼빈에 와서 윤광오를 만났을 순간 선배라 불렀던 그때처럼.
"말하시오."
하고 광오는 담배를 빨아 당겼다. 붉은 담뱃불이 그의 콧날에서 미끄러지며 어두운 눈을 비춰주었다.
"오가다 지로라는 사람, 기억하고 계신가요?"
"기억하구말구요."
"..."
"처음 이곳에서 인실씨를 만났을 때도 맨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오가다였지요. 아무려면 은인을 잊었겠소?"
"그 사람 지금 신경에 있어요."
"신경에 있다구요?"
광오는 놀란다.
"신경에 있어요."
인실은 되풀이 말했다.
"만나보고 싶군."
감개무량한 듯 말하다가
"하지만 어떻게 변했을까? 충의에 불타는 대일본제국의 국민이면, 전쟁에 이긴다고 믿는 일본인이라면 만난다는 것, 좀 곤란할 것 같은데."
"그 사람, 옛날과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요. 진재 때 조선인 학생들을 구해주던 그때처럼, 함께 옥고를 치르던 그때처럼."
"만나보았소?"
"아니오."
"그럼 어떻게 알아요?"
"그냥 알아요. 틀림없이 알아요."
광오는 인실의 옆모습을 쳐다본다. 한참 있다가
"신경에 오가다가 있는 것은 어떻게 알았지요?"
"어떤 나그네가..."
하다 말고 인실은 나직한 목소리로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웃음이 아니었다.
"이곳을 지나던 사람을 우연히 만나서 알게 되었어요."
"좀 납득이 안 되는군. 이야기의 골자가 뭡니까?"
윤광오는 미심쩍어하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나타내었다.
"아마 수일간에 그는 운회약국으로, 윤선배를 만나러 올 거예요."
"가만 있자아, 그러면 오가다가 나를 만나러 오는 것은 공적인 일입니까, 아니면 사적인 겁니까, 만나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아니 사실은 그 친구 만나보고 싶어요. 그러나 전후 사정을 도통 모르겠고 단순한 일 같지는 않은데."
"사적인 일이에요. 저 개인에 관한 일입니다."
"인실씨 일이라...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요?"
오가다와 인실이 서로 사랑했던 사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퍼뜩 광오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친구로서 만나시고... 저녁을 함께 하시든지..."
"인실씨는?"
"그걸 지금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점점 오리무중이군. 안 만나겠다는 뜻이 있는 겁니까?"
"한번은 만나야 해요. 한번은요. 어떻게 만나야 할지."
하다가 별안간 인실은 울음을 터뜨렸다. 심하게 흐느껴 운다. 광오는 아연실색하여 어떻게 할 바를 모른다.
"인실씨!"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왜 이래요?"
마침 수앵이 남편을 찾아 회랑으로 나오다가 이 광경을 보았다. 처음에는 멈칫했다가 당황한다. 난간에 머리를 얹고 흐느껴 우는 인실, 광오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인실의 등을 두드리고 있는 광경을. 수앵의 눈에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보."
저도 모르게 수앵은 날카롭게 남편을 불렀다.
"아아 마침 잘 왔소. 당신 인실씨 데리고 집으로 가요. 이거 정말 큰일 났네."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나도 아직 자세한 거는 모르겠고, 그보다 큰아버님은?"
"들어가셨어요?"
"그럼 됐어. 인실씨!"
광오는 인실의 등을 또 토닥거렸다.
"이러면 안 됩니다.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수앵이도
"왜 이래요? 언니!"
난간에서 몸을 일으킨 인실은 수앵에게로 쓰러졌다. 수앵이 그를 안았다. 인실은 계속하여 격렬하게 흐느껴 운다.
"수앵이, 당신 인실씨 데리고 어서 집으로 가요. 처남 만나보고 나도 곧 갈 테니까."
광오는 급히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왜 이래요? 정말 언니 왜 이러는 거지요?"
수앵이도 아까 광오가 그랬던 것처럼 망연자실, 어떻게 할 바를 몰라 한다. 이럴 사람이 아니데, 이럴 사람이 아닌데 하는 생각만 수앵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흐느껴 울기는커녕 눈물 한 방울 보인 적이 없었던 인실이었다. 감정의 동요조차 내보인 적이 없었던 인실이 마치 불을 쥐었던 어린 아이같이, 그의 흐느낌은 울부짖음 같았고 사람의 마음을 찢어놓는 통곡 같았다. 인실을 부축하고 수앵이 호텔을 나서려 했을 때 광오가 뒤쫓아 왔다. 심재용도 따라 나와서 걱정스럽게 떠나는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집에 온 수앵은 인실을 거실 소파에 앉혀놓고 포도주 한잔을 가져왔다.
"마셔요."
인실은 고개를 저으며
"냉수를."
했다. 인실은 냉수를 두어 모금 마셨다. 광오와 수앵은 어두운 눈빛으로 인실을 내려다보면 서 있었다. 수앵의 얼굴은 창백했다. 광오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령 인실이 오가다와 비극적인 연애를 했다 하더라도 그같이 이성을 잃을 여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언니"
"..."
"낮에 만났다는 그 사람 땜에 이러는 거예요?"
인실은 탁자만 내려다보며 대답이 없었다.
"정말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어. 약 잡숫고 한잠 주무시겠어요?"
"아니다. 좀 나아."
뜻밖에 체념한 듯한, 조용한 목소리였다.
"윤선생님도 앉으세요. 죄다 얘기하겠어요."
손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닦은 인실은
"윤선생님 죄송합니다. 아마 제가 미쳤나 봐요."
"진정이 됐소?"
"네."
인실은 담담한 어조로 지난 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따금 이마에 쏟는 땀을 닦으면서 밤이 깊도록 그는 또박또박 상세하게 얘기를 했다. 수앵은 눈물을 흘렸고 광오는 이해한다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 인실이 별안간 왜 그렇게 처절하게 울었는가 그 이유를 이들 부부는 알게 되었으며 인실의 고뇌를 이해하게 되었다.
"언니 강한 여자야. 나 같음, 도저히 그럴 수 없었을 거예요."
수앵은 그리고 또 눈물을 흘렸다. 그날 밤 이후 인실은 이틀 동안을 앓았다. 고열에다 헛소리까지 하면서 마치 홍역을 치르는 아이처럼 심하게 앓았다. 앓고 난 뒤 창가에 앉아서 머리를 빗는 인실의 모습이 안쓰러워 수앵은 눈길을 돌리곤 했다.
오가다는 왔다. 키가 크고 깡마른 그는 헐렁하고 얇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운회약국으로 들어온 그는 낯설어하듯 윤광오를 바라보았다.
"오가다상!"
윤광오가 불렀을 때도 오가다는 망설이는 것 같았다.
"잘 왔소."
윤광오는 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그는 어리둥절하며 손을 잡았다.
"내가 누군지 모르겠소?"
"어디서 본 듯하지만."
중얼거리듯 말했다. 신경으로 간 찬하는 운회약국과 윤광오의 이름을 적은 부분을 수첩에서 찢어 오가다에게 주면서
"거기 찾아가면 인실씨 소식을 알 수 있을 거요."
했을 뿐 그 이외는 일체 다른 말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여간 나갑시다."
광오는 오가다의 등을 밀다가 어떤 연민과도 같은 눈빛으로 오가다를 바라보는 수앵에게
"저녁 준비하도록, 집에서 할 거요."
말한 뒤 오가다와 함께 나왔다. 나란히 걸으면서 흥분한 광오는
"한눈에 나는 알아보았는데, 오가다상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구려. 그건 내가 얼마나 변했는가를 말해주는 거고 오가다상은 변하지 않았다는 걸, 정말 별로 변하지 않았소."
"생각이 날듯 날듯 하는데 영."
오가다는 고개를 흔들었다.
"동경진재 때 당신 집에서 신세진 윤광오."
"아아 맞다! 맞아!"
오가다는 걸음을 멈추고 크게 소리쳤다. 안경 속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윤상! 맞어."
그는 광오의 손을 굳게 잡았다.
"당신도 변하지 않았소. 몸이 좀 나기는 했지만."
"그런데 어째 못 알아보았소."
"윤상은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인데, 나는 전혀 모르고, 또 마음의 여유도 없어서."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거의 이십 년, 우리가 만난 지 거의 이십 년이 다 돼가는 것 같소."
"벌써 그렇게 됐어요?"
오가다가 반문했다.
"동경진재가 1923년에 있었으니까 지금은 41년 아니오."
하고는 서로 간에 말이 끊어졌다. 그들은 어느 주점에서 마주보고 앉았다. 이 이십 년 만의 해후를 기뻐하기에는 이들의 심정은 사실 착잡했다. 서로가 안고 있는 문제가 무겁고 심각했다.
"운회약국을 찾아가서 윤광오 씨를 만나면 인실씨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다고 해서 왔는데."
오가다는 술잔을 들고 술잔 속의 술을 내려다보며 문제에 접근해왔다.
"잘 왔어요. 곧 인실씨를 만나게 될 거요."
"뭐라 했어요? 만나게 된다구요?"
오가다는 펄쩍 뛰듯 말했다. 광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지 않고... 아, 아직 살아 있어요?"
"그래요. 죽지 않고."
오가다는 술잔을 탁자 위에 놓았다.
"만나게 된다구요?" 아아 참 꿈같은 얘기야."
하는데 목덜미에서부터 면도 자국이 파아란 얼굴에 홍조를 띤다. 맑은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광오를 쳐다본다.
"당신네들 인연도 참 질기군."
광오는 탄식하듯 말했다. 오가다는 술잔을 꽉 쥐고서 술을 마셨다.
"부럽기도 하구, 몸서리 쳐지기도 하구."
광오도 술을 마셨다.
"불구대천의 원수, 왜놈이 조선의 딸에게 욕을 보였다. 그런 생각은 안했습니까? 나를 잘 아는 조선인 친구조차 그런 생각을 하던데."
그것은 찬하를 가리켜 한 말이었다.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인실씨를 잘 아니까, 그의 진실을 아니까."
"모든 사람이 윤상처럼 생각지 않아요. 사랑을 동물적 본능으로 보는 시니시즘, 아니면 명분을 강요하고... 내 가슴 속에 남은 것은 원한뿐이오."
"조선인에 대해서?"
"조선인, 일본인 모두... 세상에 태어난 그 자체부터. 세상을 이끄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바로 그 역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조선인을 비난하지 마시오. 당신이 일본인인 이상."
"항상 나는 그것에 걸려 나자빠져왔어요. 그것에 부딪치면 손도 발도 내밀 수가 없었소. 손에 피 묻히지 않았던 한 영혼이 짊어져야 하는 짐이 더 무거운 까닭이 뭡니까? 더 가혹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인실씨를 사랑한 오가다는 늘 개 취급을 당했습니다. 늘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윤상 당신, 철저하게 이쪽저쪽에서 소외당한 인간의 모습을 상상해본 일이 있습니까?"
"..."
"불의 때문에 많은 생명들이 결단 났지만 정의라는 이름하에 비인간화돼가는 일을 윤상은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어쩔 수 없지 않아요?"
"정의란 뭐지요? 진실이 용납되지 않는 것도 정의인가요? 인간의 염원은 정의입니까 종자입니까?"
"나 자신 당신에게 그같이 묻고 싶소. 인간의 염원은 정의냐 종자냐 하고 말입니다. 그란 집단의 불의는 집단으로 대응할 수밖에 무슨 방법이 있겠소."
"또다시 나는 비명을 지를밖에 없군요."
오가다는 서글프게 웃었다. 인실을 만나게 된다는 일에 대하여 그는 조금도 들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보다 깊은 절망에 빠져드는 것이었다. 수첩을 찢어줄 때 찬하의 우울한 표정이며 반가워하면서도 뭔가 분명히 벽을 쌓고 있는 것 같은 광오 태도에서 오가다는 희망을 볼 수 없었다. 어쩌면 결정적으로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예감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가다는 그 동안 인실을 만나게 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디선가 우연히 만날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확실하게 인실은 가까이 있는 것이다. 한데 어째 두려운가? 어떤 종지부를 찍을 것만 같아 두려웠고 자신으로부터 막연하나마 품어왔던 기대를 앗아갈까 봐 오가다는 불안했던 것이다.
"인실씨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저녁에 만나게 될 거요."
"건강합니까?"
"비교적."
광오는 오가다에게 담배를 권하고 자신도 붙여 문다. 두 사람은 누구랄 것도 없이 서로의 형편이나 하는 일에 대하여 묻질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친구라 할 수 있고 적의를 가질 이유도 없었지만 사실 심리적으로 이들은 팽팽히 맞서 있었던 것이다.
"그 동안 하얼빈에는 여러 번 왔었는데 어째 윤상을 만나지 못했을까요?"
"참 그렇군."
두 사내는 공허하게 웃었다.
"숙소는 정했소?"
"네. 하얼빈에 오면 늘 들었던 곳이오. 송화강 옆에 있는 H궁 호텔이오."
"아아."
"어딘지 모르게 음산해 뵈는데."
"이곳 건물이 대개 그렇지요."
"그게 마음에 들어서, 호텔 방안에 들어가면 밀폐된 것 같아서 아늑해요."
"여행은 자주 합니까?"
"네 자주 하죠. 안 가본 곳이 거의 없소. 요즘에는 소만국경이 삼엄해서 가볼 기분도 아니지만 전에는 흑하 애훈 만주리까지 꽤 여러 번 갔었지요. 자연 조건이 험하고 준열한 그런 곳이 사람으로부터 도망쳐가기에 알맞지요. 서로 의지하는 느낌이 드니까요. 국경이라는 절박감도 있구요."
"오가다상은 아직 순수하고 낭만적이군요."
"낭만적이라..."
쓰디쓰게 웃는다.
"낭만적, 낭만,"
하다가
"그런 여유가 나한테 있었을까..."
하는데 얼굴이 오소소해졌다. 몹시 추위를 타는 것처럼. 그는 마음속으로
'인실씨는 멀리 갑니까? 왜 나를 만나려 하지요?'
해가 떨어질 무렵 광오는 오가다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거실 문을 열었을 때 인실은 창밖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인실씨."
광오가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인실이 돌아섰다.
"오래간만이오."
인실은 광오 옆에 장석같이 서 있는 오가다에게 말했다.
"옷 좀 갈아입고."
광오는 허둥지둥 침실로 들어갔다.
"앉으세요."
인실로부터 눈을 떼지 않고 오가다는 자리에 앉았다. 수앵이 차를 가져와서 말없이 놔두고 간다.
"참 오래간만이오."
중얼거리듯 오가다가 말했다.
"차 드세요. 식기 전에."
그러나 오가다는 담배를 붙여 문다. 그는 입을 꿰매놓은 듯 말을 할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슬픔이 목구멍에서만 끓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쳐다보아도 인실에게서 감정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그를 위축하게 했다.
"우리에게는 할 말이 없는 건가요?"
간신히 오가다가 말했다. 순간 인실의 눈이 흔들렸다.
"몇 해 전에 하얼빈 역전에서 마차를 타고 가는 인실씨를 보았어요."
옛날과 같이 오가다는 인실을 히토미라 하지 않고 조선말 발음으로 인실이라 불렀다.
'나도 그때 당신을 보았어요.'
인실은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뒤쫓았지만 허사였소."
담뱃재가 무릎 위에 떨어졌다.
'알고 있어요.'
"나는 인실씨를 상상할 때 늘, 얼굴이 새까맣고 눈이 빛나고, 거친 손에, 손마디가 굵고 남루한 중국옷을 입은 여자로 떠올리곤 했어요."
"왜 그러셨어요?"
"투사니까."
처음으로 인실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 여자를 끌고 흑하며 만주리, 얼음으로 꽁꽁 얼어붙은 도시로 가는 꿈을 꾸었지요."
인실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 꿈, 이제는 꾸지 마세요."
"그건 무슨 뜻입니까?"
"내일 얘기해 드리지요."
"어째서 내일입니까?"
"오늘은 윤선생님 초대를 받아 오셨으니까요."
침실에서 나온 광오는 또 허둥지둥 식당으로 간다.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조선생님은 동경으로 떠났어요?"
"아니 날 기다리고 있을거요."
"..."
"그 친구 만났습니까?"
"네."
"한데, 어째서 인실씨 만났다는 얘길 내게 안 했지요?"
"그게 그분 성품은 아닐까요?"
"만주는,"
하다가 오가다는 얘기의 방향을 바꾸는 것 같았다.
"일본이 망하더라도 떠나고 싶지 않소."
"어째서요?"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 같아서, 한 마리의 개미같이 꾸물거리는 것 같아서."
하다가 오가다가 뭔가 북받치는 듯 말을 끊었다.
광오는 수앵이를 데리고 거실로 돌아왔다.
"엉겁결에 집사람 소개도 안 하고."
엉겁결이라는 표현이 말하듯 광오는 안정을 잃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거북하고 불안해지는 것 같았다. 남의 일이라 구경만 하면 된다는 기분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며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보아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수앵이도 그 마음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오가다와는 친면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대로 신중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내가 동경진재 때,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오가다상, 이 사람 덕분이오. 당신 감사해야 할 게요. 오가다상 이 여성은 철부지 내 아내요. 러시아어, 중국어로 하라면 달변이지만 일본말은 영 서툴러요."
다소 과장을 하여 너스레를 떨었으나 분위기는 조금도 밝아지지 않았다. 오가다가 일어서서
"오가다 지로입니다."
자기소개를 하고 절을 했다.
"환영합니다."
서투른 일본말로 수앵이는 진심에서 말했다.
"그럼 식당으로 가실까요? 저녁 준비를 해 놨습니다."
식당은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비극의 연인들을 위하여 수앵은 세심하게 마음을 쓴 것 같았다. 꽃병에도 신선한 수선화가 꽂혀 있었다. 그리고 조촐한 만찬이었다.
"부인께서 요리 솜씨가 대단한 모양이군요."
가라앉은 마음을 일으켜 세우듯 오가다가 치사를 했다.
"아니에요. 큰집에서 숙수를 보내주었어요."
역시 서투른 일본말로 말하면서 머리가 흘러내린 오가다 이마를 쳐다본다.
"전쟁은 어찌 될 것 같소?"
화제에 궁한 광오의 말이었다.
"이기고 있으면 욕을 하겠는데 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말 못하겠어요. 비극이지요. 전쟁에 지는 것도 비극이고 내 고향, 내 조국이라는 인식도 비극이지요."
오가다는 음식을 삼키면서 말이 없는 인실을 건너다보았다.
"망명하면 되지 않아요?"
수앵이 엉뚱한 말을 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저의 아버지는 조선인이지만 러시아에 귀화했고 큰아버지는 청나라 때 청국으로 귀화했어요."
오가다는 유심히 수앵이를 쳐다보았다.
"인실씨는 귀화할 사람이 아닌데요."
그 말에는 모두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는 한층 경색되고 말았다. 그러나 인실은 그것을 전혀 모르는 듯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언니!"
"으, 음."
소스라치듯, 그러나 그의 시선은 오가다에게 가 있었다.
"뭐 말씀 좀 하세요."
"음,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거라 생각을 하고 있었어."
인실은 역시 엉뚱한 말을 했다.
"오가다상 돌아가실 때 오빨 찾아봐주시겠어요?"
"그, 그러지요."
오가다는 젓가락을 손에서 놨다.
"유인실이가 살아 있다는 얘기는 당신 생각대로 하구요."
"그러겠소."
"참 모질고 독하네!"
광오는 저도 모르게 내뱉고 있었다.
"그럼 나, 어떻게 하라는 거요."
"내가 하라 한다고 할 사람도 아니고, 오가다상 뭣 때문에 이런 여잘 좋아했어요!"
오가다는 헛웃음을 웃으며 그 말대답은 하지 않았다.
"하긴 우리 부부에게 고백하기 전에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만큼 울었어요. 그리고 며칠을 앓았지요."
인실의 의사를 묵살한 채 광오가 그 말을 한 것은 오가다에 대한 깊은 동정심 때문이었다.
"압니다."
오가다 말에
"어떻게 알어?"
"알아요."
"참 이상한 일이오."
모두 잠자코 있었다.
"인실씨도 안다고 했어요. 그냥 안다, 틀림없이 안다고 했소.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심전심, 그런 거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겠지요."
그 말은 수앵이가 했다.
"당신 참 맞는 말을 했구려."
저녁이 끝났다. 모두 음식 맛을 몰랐고 어떻게 먹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저녁이 끝난 얼마 후, 내일 오후 두시 송화강 강가에서 인실과 만날 약속을 한 오가다는 더 이상 머물 용기가 없었던지 하직을 하고 떠났다. 창가에서 떠나는 오가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인실은 말없이 자신의 거처방으로 들어갔다.
수앵과 광오는 서로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광오는 탁자를 탁! 치면서
"왜 이리 어렵지? 온몸이 쑤실 만큼 힘든 시간이었소. 두번 다시 이런 기회 갖고 싶지 않아."
이튿날 오후, 약속한 시간에 인실은 송화강 강변 광장에 나타났다. 바람이 좀 불었다. 웅장한 석조 건물 H궁 호텔에 시선을 보낸다. 제법 푸른 새잎이 돋아난 수목들은 투명한 연록색 깃을 하늘에 활짝 펼쳐놓고 있었다. 감색 코트에 자주색 플란렌 목도리를 두른 인실의 복장에는 봄이 온 것 같지 않았지만 아직 그에게는 미열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얼굴도 몹시 창백했다. 강변의 산책길은 세 갈래로 뻗어 있었다. 따라서 길과 길 사이의 가로수도 세 줄로 뻗어 있었으며 군데군데 벤치가 놓여 있었다. 인실은 강 쪽의 길로 접어들었다. 오가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길은 한적한 편이었다. 저만큼 벤치에 웅크리듯 앉은 오가다가 다가가는 인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실은 코트 주머니 속에 두 손을 찌른채 오가다 옆에 가서 앉았다.
"얼굴이 창백해요."
오가다가 말했다. 그러는 그 자신도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던지 핏기 잃은 얼굴이었다. 인실의 옆모습을 쳐다보다가 오가다의 시선도 인실을 따라 강물 쪽으로 간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잠자코 있었다. 말이 없어도 이들은 어제보다 훨씬 자유스러워 보였다.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니 그냥 남자와 여자, 연인으로만 보였다.
오가다가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물었다.
"실감할 수가 없어요. 만나지 못했을 때의 그리움이 좀 어이없기도 하구."
실감할 수 없는 것은 인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어젯밤 생각해보았어요. 인실씨는 나를 안 만나고 피할 수도 있었는데 어째서 만나려 했을까 하구."
"한번은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어째서 한번입니까? 어디 멀리 떠나갑니까."
"..."
"산카상(찬하)은 어떻게 만났지요?"
"우연히, 약을 사러 오셨어요. 운회약국에서."
"그 우연이 없었더라면 우린 만나지 못했겠군요. 산카상이 설득하던가요?"
"그런 셈이에요."
인실은 시선을 돌려 오가다를 쳐다본다. 두 사람의 눈이 서로를 응시한다.
"설득당할 인실씨는 아닐 텐데, 뭔가 이유가 있지요?"
인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저에게 처음이며 마지막 사람이었어요. 당신을 잊은 것은 의지였지 감정은 아니지 않아요."
오가다의 물음과는 상관없는 말을 했다. 인실의 소식을 알고자 찾아온 오가다, 그 절망적인 모습의 사나이에게 처음으로 드러내는 인실의 따뜻한 진실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오가다는 불안해지는지 외면을 하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래서 의지를 굽혔어요?"
"아니오."
"그럴 테지요. 인실씨가 의지를 굽힐 리 없지. 당신은 그 숭고한 의지를 한번 굽혔어요. 두 번 굽히지는 않을 거요."
자조하듯
"그러지 말아요. 정말 그러지 말아요. 나는 생명보다 더한 것을 후회 없이 다 드렸어요. 지금의 나는 빈껍데기예요. 아시겠습니까?"
인실의 말은 번번이 궤도에서 이탈하는 것이었다. 그해 여름, 히비야 공원에서 찬하를 만났을 때 인실은
"저는 그분한테 생명보다 중한 것을 주었습니다. 더 이상 나는 줄것이 없어요."
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생명보다 중한 것, 그것은 단순히 여자의 순결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찬하는 알았다. 인실에게 생명보다 더한 것이란 조국과 내 겨레를 배신했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알아요. 그래서 인실씨를 아주 잃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그 일이 없었더라면 당신은 이 북만주까지 오지 않았을 거요."
"오가다상을 만나려고 생각한 것은,"
"..."
"꼭 한 가지 알려드려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리 해야 했으니까요. 조선생님을 더 이상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그것은 은인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네, 그래요."
하다 말고 인실은 이내 자신의 말을 뒤집었다.
"아니 그것은 아닐 거예요. 조선생님에 대한 것, 그것 생각할 여유는 없었어요. 너무 절박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왜 이리 마음이 편안할까요? 참 다행이구나 싶어요."
그 순간 인실은 막연했던 것이 손에 꽉 잡히는 것을 느낀다. 고아원에도 가지 않았고 이름 모를 남의 손으로 건너가 생사조차 모르게 되지도 않았고 조찬하가 아이를 길러주었다는 사실, 그것이 얼마만한 축복인가를, 인실의 눈에서 눈물이 소리 없이 흘렀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살아 있다는 것도.
"십일 년 전에, 봄이었어요. 나는 동경에 갔습니다."
"동경에 왔었다구요?"
"네."
"십일 년 전이라면 조선서 돌아와서, 내가 삿포로에서 중학교 교사로 있을 때구먼. 산카상을 찾아갔으면 내 거처를 알 수 있었을 텐데."
"조선생님을 만났어요. 그리고 당신이 삿포로에 있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하면은 어째서 산카상은 나에게 연락을 안 했을까?"
"못하게 내가 부탁을 했어요."
인실은 간략하게 그때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오가다의 얼굴은 붉으락 푸르락 입이 붙어서 말도 못하는 상태였으나 그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인실의 뺨을 때렸다.
"다, 당신에게 내 자식을 버릴 권리는 없어!"
외치는 것이었다.
"지독한 여자다! 지독한 여자다!"
분노에 그는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급히 강가로 뛰어가서 인실에게 뒷모습을 보이며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그는 깊은 자괴심에 빠졌다. 인실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와 고통을 함께 할 수 없었던 일을 그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인실을 용서할 수없는 격정을 누를 길이 없었다.
"나 가겠어요."
인실이 다가 오며 말했다. 오가다는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연민의 감정도 나타낼 수 없었다. 분노만이 그의 눈에서 타고 있었다.
"가겠어요."
인실이 또 말했다. 그리고 와락 오가다의 허리를 안았다. 그리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일본이 망할 때까지,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을 잊지 않겠어요."
인실은 오가다로부터 떨어지면서 발길을 돌렸다. 돌처럼 서 있던 오가다는
"나는 너를 잊을 거다!"
절규였다. 오가다는 해가 질 때까지 하얼빈 시가를 쏘다녔다. 정신없이 쏘다녔다. 그리고 낯선 주점으로 들어가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그가 신경으로 돌아온 것은 이튿날 오후였다. 역에서 내린 그는 곧장 회사로 달려갔고 휴가원을 낸 뒤 찬하가 묵고 있는 호텔에 전화로 찬하가 있는 것을 확인한 뒤 호텔로 향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무서운 사람들이오."
첫 마디가 그것이었다.
"소름끼치게 무서운 사람들이군."
"하여간 앉기나 해요."
"당신네들 심장은 무쇠로 만들어진 서요? 그러고도 어찌 나라를 잃었는가, 이해할 수 없소!"
"나라를 잃었기 때문에 그리 됐겠지요"
찬하는 오가다에게 담배를 권했다.
"산카상 집에 내가 방문할 때마다 당신 양심의 가책 느끼지 않았소?"
"양심의 가책이라니? 다만 마음이 아팠을 뿐이오."
찬하는 담배 연기를 내어뿜으며 심각해지려는 것을 늦추려는 듯 웃음기를 띠며 말했다.
"언어도단이다!"
"일본 여자를 데리고 살며 나라를 망하게 한 고관대작의 자손으로 나는 별 볼일 없는 인간이지만 오가다상, 내가 조선인이라는 것은 잊지 마시오. 인실씨가 그리 된 데는 내게도 다소 책임이 있었고 또 그와의 언약은 지켜주는 것이, 그는 평범한 길을 가소 있는 여성이 아니오. 생각해보아요. 오가다상이 현실을 비판하고 군국주의를 증오하지만 자기 자신 일본인인 것을 부정할 수 있어요?"
"그건 문제가 달라요."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과 가장 소중한 것을 버려야 했던 사람, 어느 쪽의 고통이 컸을까?"
그 말대답은 못한다.
"몰라 그렇지, 그 여름에 인실씨가 겪어야 했던 고통은 신파 같은 건 아니었소. 나는 그 당시 회피할 수 있다면 회피하고 싶었소. 회피할 수도 있었지요. 인실씨는 매달리며 호소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오가다의 기세는 차츰 꺾였다. 엄청난 변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 그러나 그것은 오가다에게는 희망적인 것만은 사실이다. 나는 너를 잊겠다! 하며 절규했으나 인실은 그에게 진실의 여운을 남기고 갔으며 인실이 낳아준 자신의 아들이 있었다는 것은 어떤 환희를 그에게 안겨주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알지 못할 폭풍이 불고 있었다. 안정을 잃었고 격노한 것도 그것은 역설적인 것이었는지 모른다.
"당신은 아들을 얻었고 나는 아들을 잃었소. 날 위로해줄 생각은 하지 않고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나는 당신한테 축하주를 살 것이니 당신은 나에게 위로주를 사야 할 게요. 자아 나갑시다. 신경의 마지막 밤 술이나 실컷 마시지."
3장 서울과 동경
찬하와 함께 오가다는 유인성의 집 앞까지 왔다. 집주인의 성품처럼 조촐하고 단정해 보였던 옛날과는 다르게 밖에서 바라본 집은 노쇠하여 허덕이는 것 같은, 묘하게 어둡고 찬바람이 이는 느낌이었다. 오가다는 잠시 동안 눈을 감았다. 지난 일들이 발밑을 감아올리는 삭풍과 같이 그의 인식 속을 휘몰고 지나갔다. 그것은 사건이기보다 세월이었던 것 같았다. 세월이었다는 느낌 속에는 한 아이의 해맑은 얼굴이 있었다.
찬하가 함께 온 것은 오가다가 부탁한 때문이다. 오래된 일이지만 제명회사건 때 함께 옥고를 치른 유인성과 오가다의 관계도 그렇고, 만주에서 오는 길목이어서 혹시나 당국이 주목하게 될까, 염려도 있었지만 옛날 인성의 집을 찾아봐서 만용을 부릴 때와는 달리 오가다는 위축이 되어 혼자 갈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유인성에게 알려줄 필요는 없었지만, 아니 알려서도 안 되는 일이지만 하나의 사실로서 드러나게 된 아이의 존재가 자기 자신에게는 경이로움이요 희망이었겠지만 유씨 문중으로 보면 치욕일 것이라는 의식 때문이다. 찬하의 경우에도 유인성과 생판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다. 죽은 형과 유인성과 그 무렵 모두 함께 동경 유학을 했고 그들의 관계가 그다지 좋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친구할 수도 없었다. 해서 찬하는 유인성과 면식이 있었으며 후배들이 그의 존재에 큰 비중을 두는 것과 같이 찬하 역시 유인성의 학식과 인격에 대하여 존경해왔기에 방문이 생소하다고만 할 수 없었다.
찬하가 내다보는 행랑아범을 보고 내의를 말했다.
"지금 병환이 나셔서 누워 계십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긴장한다.
"용태가 심하시오?"
"심하신 거는 아니지만, 요즘 손님들을 만나지 않으십니다."
"그래요? 하면은 전갈이나 해주시오, 기다릴 테니."
찬하는 명함을 꺼내어 뒷면에다 몇 자 적어서 건네준다. 행랑아범이 들어가고 시간이 꽤 지났다 싶었을 때
"들어오십시오."
행랑아범은 그들을 사랑으로 안내했다. 그새 이부자리는 개어놨고 방안도 대충 정리한 듯, 인성은 옥양목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예나 다름없는 단정한 모습을 하고서 이들을 맞이했다.
"오래간만입니다. 선배."
오가다는 두 손을 집고 절을 했다. 오가다로서는 실로 만감이 오가는 대면이 아닐 수 없었다. 찬하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오래간만이군."
하고 인성은 찬하에게 눈길을 돌렸다.
"조찬하 씨는 왠일이오."
조찬하가 찾아온 것은 의외였던 모양이다.
"이 친구가 함께 가자고 해서 인사차 왔습니다. 몸이 편찮으시다고 들었습니다만 저희들이 무례하지 않았는지요."
"뭐 크게 병이 든 것은 아니고, 울적해서, 요즘엔 늘 이런 상태요."
감정 절제에 엄격한 유인성 입에서 울적하다는 말이 나온 것은 드문 일이다. 표정도 다소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인실의 소식을 이들이 가져왔으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집안을 박살내버렸다는 소문이든데, 왜 그렇게 했소"
역시 그답지 않은 질문이었다. 불안이 쌓이는 것 같았다. 찬하는 씁쓰레하게 웃었다.
"제문식이 고전을 한다는 얘긴데 그 친구 생각했던 것보다 의리가 있는 모양이오."
인성은 다시 조용하기 죽은 뒤 방직회사를 떠맡은 제문식의 얘기를 꺼내었다.
"고전이나마나, 어차피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다 끝장난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시국에는... 전쟁만 있을 뿐이지요."
야릇한 표현이었지만 유인성은
"그렇기는 하지."
하고 동의를 표했다.
"저의 부덕 탓도 많겠습니다만."
행랑아범이 어줍게 차를 날라 왔다. 찻잔을 들면서 인성은 오가다에게 시선을 옮겼다.
"자네는 왠일인가? 자네하고 내 사이에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는가."
말은 그랬으나 비난하는 투는 아니었다. 일말의 연민이 있었다. 오가다도 그것을 느낀다.
"여러 가지로 면목 없습니다."
"으음..."
"실은 우연히 하얼빈에서 인실씨를 만났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인성은 차를 마셨다. 찻잔을 놓았다. 얼굴빛은 달라져 있었으나 아무 말이 없었다.
"건강하게 잘 있고, 신념대로 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
그러고는 오랜 침묵이 흘렀다.
"그래... 그러면 됐네."
하고 인성은 다시 찻잔을 들었다. 더 이상 머물러 있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상상 밖으로 유인성의 상심은 큰 것 같았다. 그러면 됐네, 말로는 그 한마디뿐이었지만 회한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은 그의 눈빛을 두 사람은 더 이상 쳐다보고 앉아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직을 하고 나왔다.
"애씨에 대한 정의가 보통 아닌 것 같소. 유인성 씨같이 깐깐해 뵈는 분도 혈육에 대한 집착을 끊을 수 없는 모양이지요?"
찬하가 말했다.
"늘 인실씨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는 것 같았어요, 전에는, 하여간 내가 나쁜 놈입니다. 내가 그를 국외로 쫓아낸 거나 다름없어요."
"그건, 그렇다고만 말할 수 없지요."
"미안합니다."
"나보고 그러는 거요?"
"여러 가지로 여러 사람한테 폐만 끼쳐왔어요."
"지나간 일 생각지 마시오. 어떤 모양으로든 세월은 우리 곁을 지나갈 수밖에 없는 거고."
"돌이킬 수 없으니 괴로운 거지요.
"잊어요, 잊어."
하다가 찬하는 화제를 돌렸다.
"오래간만에 뵈어 그런지, 그럴 분이 아닌데 상당히 의기소침해 계시는 것 같지 않던가요?"
"글쎄올시다. 다른 근심되는 일이라도 있는지 실은 나도 맘속으론 좀 놀랐어요."
말하면서 오가다는 자신과 인실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유인성은 과연 어떻게 나올까? 생각해본다. 그 순간 오가다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 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자각도 왈칵 덤벼드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곧장 산장으로 향했다. 찬하의 양친이 세상을 버린 뒤 본가에는 우선 누이 부부가 들어서 살고 있었고 산장은 찬하가 조선에 오면 묵는 곳이었다. 제문식도 더러 이용하여 산장은 보존이 잘돼 있었다. 조용하가 자살한 곳이지만 보존하는 데는 제문식과 찬하 사이에 이견이 없었다. 이심전심이라고 할까, 그들 마음속에 조용하를 위한 일말의 연민이 있는 것을 서로 느끼고 있었다. 자식도 아내도 없이, 그에 대한 기억을 간직할 사람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조용하가 최후를 맞이한 산장마저 없애버린다면 그에 대한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질 않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다소 으스스한 곳이었다. 조용하의 피가 낭자했던 욕실, 제문식은 그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찬하나 제문식은 되도록 활용하여 사람의 훈기를 남겨두려 했던 것이다. 동생으로서 친구로서, 그것이 그들의 최소한 조의였으며 행복을 비는 마음이었는지 모른다. 오늘 밤은 제문식이 산장에다 찬하를 위하여 술자리를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산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숙수가 와서 음식을 장만하고 있는 눈치였다.
"제사장 말고 다른 사람들도 오는 게 아니오."
오가다가 꽁무니를 빼듯 물었다. 다른 사람들이 오면 오가다가 불편해지고 처지가 난처해지기 때문이다.
"왜? 죄 지었소?"
"죄인 취급하는 건 사실 아니오."
"죄인 취급은 조선인만 당하는 줄 알았는데 기분이 과히 나쁘지 않군."
물론 농담이었다.
"걱정 말아요. 제사장과 함께 오는 사람은 선우신."
"아아 신상!"
오가다는 기뻐한다.
"나하고 친한 걸 어떻게 알았소."
"당신하고 학교 동기라며?"
"그렇소. 진실한 사람이지요."
"실직하고 있는 걸 제사장이 구제한 모양이오. 제명회사건 때 함께 들어갔다면요?"
"그래요. 참 오랫동안 못 만났소."
찬하는 거실 소파에 앉아 담배를 붙여들었다. 거의 잊고 살았지만 이곳에 오면 찬하는 형을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놨고 정자의 특권, 독재로써 모든 것을 제압하려했던 조용하, 그러나 그 스스로가 자초했다고 하나 고독했던 그의 생애를 생각할 때 찬하의 마음속에서 증오는 사라진다. 아무도 그 무엇도 사랑할 수 없었던 사람의 불행, 그것은 자기 자신도 궁극적으로는 사랑하지 못했던 불행이었다. 살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어느 누구의 곳간 속에 가두어지는 재산 목록이 아니며 박제하여 곁에 두는 것도 아니다. 곳간의 열쇠만이 유일한 친구라 할 수 있는 지배자의 고독은 처절한 것이다. 지배자는 지배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며 지배당한 자는 재산 목록이 되고 박제품이 되어 훼손되기 때문에 불행하다. 결국 상호가 다 불행한 것이다. 찬하는 형과 명회의 그런 관계를 회상해보면서 이제는 완벽하게 자신이 객관적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불행했던 형, 불행한 형수 명희에 대한 연민이 순수해진 것을 깨닫는다. 그 순수는 타인의 입장에서의 순수였다.
'망각이란 이와 같이 비정한 것이었던가. 그러면 나는 형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 궁극적으로 인간이란 자신을 살리기 위한 이기적 동물에 불과한 것인가...'
그 바닷가에서 자기 방어의 연약함을 필사적으로 나타냈었던 임명희, 그 이기심에 상처를 받았고 그로 인하여 인연 없는 타인이 된 자기 자신, 따지고 보면 이기적인 면에서는 별반 다를 것이 없을 성싶었다. 찬하는 명희의 소식을 어느 누구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제문식이 그랬던지, 혜화동인가 어디서 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다는 말을 듣긴 들었으나 말라버린 우물처럼 마음은 그냥 허공이었을 뿐이었다. 다만 찬하는 자시 자신을 위하여 서글퍼졌던 것이다.
'세월이 비정한가 망각이 비정한가, 어느 쪽일까?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 잃어가며 살아간다. 자기 자신도 잃어가며 살아간다. 잃은 것의 시체가 추억이다. 그리고 마지막 잃는 것이 죽음일 것이다.'
내일이면 찬하는 서울을 떠났다. 동경에 가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곳은 십일 년간, 세월의 덧없음과 사랑의 덧없음이다. 장중의 구슬같이 기른 아이, 크나큰 위안이었던 아이와 이별을 해야 한다. 그리고 세월이 가면 잊어질 것이다. 찬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 당신은 값없이 세상을 살다 갔지만 나 역시 값없이 살다 갈 것 같소. 피장파장이오, 하하핫핫...‘
한편 오가다는 베란다에 서서 해 지는 산마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뻘겋게 물든 하늘과산마루에 가라앉는 태양, 장관이다. 그 하늘을 질러서 날아가는 새들의 가냘픈 날개, 애잔하게 울음 울며 날아간다. 석양 햇빛이 가득 들어찬 정원에는 산수유 진달래가 제철을 만나 그 전성기를 한껏 누리고 있었으며 목련은 터질 듯 봉오리를 물었고 라일락 황매도 물이 들기 시작했다. 눈보라를 보내고 바람을 보내고 빗줄기를 보내더니 어느덧 자연은,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현란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얼빈에서 신경까지, 신경에서 서울까지 오는 동안 오가다는 줄 곧 들떠 있었다. 노여워했을 때 자책했을 때 풀이 죽었을 때 절망감을 씹었을 때도 그는 들떠 있었다. 깊은 땅속을 흐르는 물과 같이 마음속에서 흐르는 그 소리 때문에 들떠 있었던 것이다. 산장에서 묵을 하룻밤이 그에게는 아득하게 멀었다. 마음은 동경 하늘을 헤매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알지 못할 두려움이 엄습해왔고 운명과도 같은 두려움이어서 며칠을 서울에 죽치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찬하 집에 갈 때마다 아저씨, 아저씨 하며 유난히 따르던 아이, 산책길에 데리고 나가기도 했고 백화점에 가서 선물을 사주기도 했던 아이, 그렇게 하기를 은근히 조장하듯 한 찬하의 태도,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래서 그랬었구나,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이상했던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째 그 당시는 그렇게도 까맣게 몰랐으며 한 오라기의 의심도 없었는지.
"일본이 망할 때까지,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을 잊지 않겠어요."
별안간 인실의 목소리가 뜨겁게 귓가에서 울렸다.
"일본이 망할 때까지..."
동시에 아까 유인성의 집을 나서면서 나는 누구인가! 그 강렬했던 자각이 인실의 목소리에 부딪쳐 무섭게 소리를 낸다. 그 음향이 머릿속에서 진동하고 파장을 일으킨다. 엄청난 사실 앞에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인실의 그 마지막 말이 이제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반전주의자요, 일본의 패전을 예감하는 오가다, 오가다 자신도 그 말이 이렇게 충격을 주리라는 것을 미처 몰랐다. 비수로 꽂혀 있을 줄이야. 그 말이 인실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오가다에게는 절벽이었다.
거실로 들어온 오가다는 찬하와 마주앉았다.
"산카상."
찬하가 쳐다보았다.
"인실씨는 이런 말을 했어요."
"..."
"일본이 망할 때까지,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라구요."
"그래서?"
"그때는 내가 도망갈 차례가 아닐까요?"
"당신은 분노하고 있군."
"네, 그래요."
"그렇다면 인실씨의 모든 행동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까?"
"그, 그렇지요."
"사람은 본질적으로 자신을 부정할 수 없는 거요."
"..."
"인실씨가 근본은 모르게 아이를 버리려 했던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소."
"산카상의 경우는? 말해보아요."
"네 경우는, 글세 내 경우라면 아마도 일본이 망할 때까지라기보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라 했을 거요. 나는 인실씨처럼 투사가 아니니까."
찬하는 씁쓸하게 웃었다.
"산카상도 일본이 망하기를 바라고 있소?"
"내가?"
그는 또 씁쓸하게 웃었다.
"대일본제국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집안이며 일본 여성과 혼인하여 사는 처지에 무슨 할 말이 있겠소. 사회주의 쪽에서는 인민의 적이요, 민족주의 쪽에선 민족의 적, 내 형편이, 잘 알지 않소? 그런다고 해서 일본의 만수무강을 빌 수는 없지."
"..."
"일본이 망하는 것을 원치 않는 오가다상이나 망하기를 고대하는 조선인, 따지고 보면 같은 차원이오. 일본을 비판하고 압박 민족에 깊이 동정하는 오가다상도 조국이 망하는 꼴은 못 본다, 그와 같이 어쩌다 친일파로 몰린 사람들 심중에 회한이 없겠소? 종속을 누가 원하겠소. 민족에 대한 존엄은 면할 수 없는 보편적 윤리 아니오? 게다가 그것은 짙은 감정이니까."
"우문이었소."
"악질 친일분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분자는 제 나라가 융성하면 애국자가 되고 충성을 하고, 항상 강자 지향의 노예들이지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노예근성, 나같이 우유부단의 방관자는 있게 마련, 사실은 조선인들의 경우 그 대부분이 친일하게 하는 잔혹성 밑에서 신음하고 있으며 친일하는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실상 아닐까?"
"우리의 평행선, 적입니까? 영원히."
"그렇지는 않지. 그 해답은 당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거 아닌가요?"
"내가요?"
"세계가 하나 될 때, 그게 당신의 주의였고 이상 아니었소? 그리고 또 이웃으로서 우리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을 때 적이 될 이유가 없지 않아요? 당신의 반전사상은 그거 아니었소?"
"그건 그래요."
"하면은 우리가 어찌 적이었소. 친구지."
하는데 제문식과 선우신이 나타났다.
"심각한 얼굴들 하고서, 왜들 이래?"
제문식이 말했다.
"신상 오래간만이야."
오가다가 일어섰다.
"음, 그 동안 별고 없었지?"
선우신과 오가다는 굳게 악수를 했다. 선우신의 미소는 옛날과 다름없이 달콤하고 청순했으나 모습은 피폐한 것같이 보였다. 제문식은 연공의 탓인지 제법 중후해 보였고 혐오감을 느끼게 했던 옛날보다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오가다상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서울에 나타난 거요."
말투만은 거리낄 것 없는, 전과 다름없는 그대로였다. 조용하가 살아 있을 때 이 산장에서 베푼 주연에 제문식과 합석한 일이 있었고 신랄한 일본 비판과 천황이라는 칭호에 대하여야유조로 말하던 제문식의 투를 오가다는 기억하고 있었다. 몹시 기분이 상했던 것도. 그 후 만주로 가는 길에 조찬하의 부탁을 받고 잠시 제문식을 만난 일이 있었다. 찬하의 태도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거의 사갈시하던 제문식을 형 대하듯 했고 신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네 사람은 안방에 마련된 술상 앞에 앉았다.
"우리 모두의 건강을 위하여, 우리 모두가 무사통과하기 위하여 건배합시다!"
제문식 말에 따라 네 사람은 술잔을 부딪고 나서 술을 마신다.
"모두 샌님이 돼놔서 기생을 부를 수도 없고, 야, 선우야 네가 흥을 좀 돋아야겠다."
제문식의 말에
"제가요? 그런 재주 없습니다. 형님이 기생 노릇 하십시오."
"저놈의 버르장머리, 직원이 사장보고 그래도 되는 거야?"
모두 낄낄거리며 웃는다. 선우신은 오가다에게 술잔을 내밀고 술을 부어준다.
"서울 형편은 좀 어떻습니까?"
찬하가 제문식에게 물었다.
"빈사 직전이지."
"인심들은 어떻습니까."
"말 마라. 서로 잡아먹으려는 판국이지."
"이해관계에 있어서 그럽니까?"
"아암 있지. 서민들이야 진작부터 체념하고 사는 족속이고 뺏을 능력은 물론 빼앗길 것도 없고 몸뚱아리 하나 간수하기에 필사적이지만."
표현이 과격했다. 같은 내용이라도 제문식의 입에 오르면 과격해진다. 여하튼 그의 말대로라면 그야말로 동족상쟁을 방불케 한다.
"그런 형편이야 어디 서민들뿐이겠습니까. 몸뚱이 하나 간수하기에 필사적이긴 다 마찬가지요."
"그렇기는 하지. 그러나 요상한 곳이 한군데 있어."
"그게 어딥니까?"
"지식층 한량들이 모여든 곳이지."
"네? 지식층 한량이라구요?"
"글줄이나 쓴다는 놈, 말 깨나 한다는 놈, 그게 다소 쓸모 있게 된 시국이다, 그 말씀이야."
그 말에 대해서는 모두 입을 다물고 반응이 없었다. 새로운 얘기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문식은 얘기를 계속한다. 뭣이든 화제를 이어서 분위기를 녹여가며 주연을 이끌어가야 했고 서로 헤어졌던 기간이 길었던 만큼 거리를 잡아당길 필요가 있었고 아닌 게 아니라 반가우면서 서먹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후배격인 세 명의 사내들은 가기 성격이 다르고 환경도 달랐지만 공통된 것이 있었다. 내성적이며 고지식하다는 점, 너스레를 떨고 광대 노릇을 할 위인들이 못 되었다. 결국 선우신의 말대로 궂은 일을 곧잘 맡아야 하는 제문식이 기생 노릇을 할밖에 없었다. 그러나 얘기의 내용은 술안주에 적합한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말발이 거센 편이며 늘 빗대는 것 같고 과장이 좀 심해 그렇지 실은 제문식 나름의 예리한 시각은 늘 그의 말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반도의 인원 구성을 보면, 조선조 시대의 상부층 중간층 소속이 합방 후 아주 소수의 지식인 지주들을 제외한 거의가 다 어떤 형식으로든 농민층 노동자층으로 흡수되고 말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두 거대한 인간 덩어리 밑창에 간신히 들러붙어 연명하고 있는 것이 영세한 상인 어민, 도시의 자자부레한 각종 업소의 경영주 종업원 그리고 하급 사무직, 그런 것들이지. 알다시피 근자에 와서는 농촌에서 많은 인력이 임금노예로 도시 혹은 일본 만주로 빠져나갔고 노동력은 보충되지 않은 채 전과 다름없는 면적의 농경지에서 농산물을 생산하고 있는 형편에 노동력 소모에 따른 공급이 마땅히 있어야 하는데도 농토 면적과 마찬가지로 변할 것이 없는 공급이라, 결국 빈곤과 열악한 생활환경은 더 내려갈 수 없는 지경까지 온 것이 농촌의 실상이다. 이런 판국에 새로운 복병이 나타났다 말씀이야. 소위 공출이라는 건데 이것이 농민에게 새로운 수탈 방법으로 나타나게 되었지만 그 동안 복락을 누리고 일본의 비호를 받아온, 하기야 그것은 기업에의 진출을 막는 일본의 정책이었지만 여하튼 공출이라는 것 때문에 수탈자였던 지주 계급이 피수탈자로 전락한 것은 뻔한 일 아니겠소?"
"한데 얘기가 왜 그리로 돌아갑니까? 댕강 잘라놓고는 다른 데 가서 불 피우고 있습니까?"
선우신의 핀잔이었다.
"잠자코 듣기나 하게. 골자 내놓고 사방에서 몰아 들어가고 있으니, 아직은 짧지 않은 봄 밤, 급할 게 뭐 있누. 하여튼 일본은 농민들을 그런 식으로 정비해놨고 다음은 노동잔데, 하 참, 체판에다 걸러서 잘도 가지런하게 해놨지. 절로 돌아가고 있단 말씀이야. 양 날개가 부러진 노동자들 뭘 어찌겠나. 이제 그들의 문제는 일자리 그 자체가 풍전등화라. 제발 일자리에 붙어 있게만 해달라, 조건이 없어졌어. 왜냐, 그들이 거리에 나가게 되면 징용이라는 아가리가 기다리고 있거든. 그 허방에 빠져들어 갈밖에 달리 길이 없다. 그러고 아까 말한 밑창에 간신히 달라붙은 눈물 나게 가련한 잡종업의 종사자들은 뿌리박은 양대 덩어리와 운명이 같으니까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고, 자아 그러면 명료해지는데 농토 농민을 합하여 농촌은 일본의 군량미 저장소요, 노동자들은 깡그리 군수품, 그것도 군수품의 부품이다 그 말씀인데."
제문식은 일단 말을 끊고 술을 마셨다. 다른 사람들도 술을 마셨다. 찬하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새삼스런 얘기도 아니구먼."
그러나 다소 과장은 있었으나 제문식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고, 그의 유창한 일본말도 오가다의 귀에는 설지 않았다. 그리고 찬하말대로 새삼스런 얘기도 아니다. 하지만 제문식의 언변에는 새로움, 새로운 자극을 주는 힘이 있었다.
"그런 면에서는 일본 국내에서도 대동소이한 게 아닐까요?"
오가다가 말했다.
"물론 그렇겠지. 전시체제란 바로 그런 것이니까. 그러나 이 전쟁은 조선 사람의 전쟁은 아니거든. 우리가 살아남아야 하고 우리가 이득을 챙기는 전쟁이 아니란 말이야. 보다 정확하게 얘기를 하자면 자멸 자살을 강요당하고 있어. 왜냐하면 우리를 구속하고 우리를 소멸하려 드는 힘에 우리가, 우리의 고혈이 보태어지고 있다는 비극, 오가다신상은 그걸 알고 있소오? 또 한 가지, 상부층 중간층이 일본에는 엄연히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 바로 그들이 주전파요 사령부니까."
"..."
"무슨 군수회의라도 하는 것 같습니다, 형님. 도대체 우리들은 뭐지요? 지식층 한량들, 허허허헛..."
선우신이 서글프게 웃었다.
"이제부터야, 대낮에 낮도깨비."
"대낮에 밤도깨비가 나오면 안 되지요."
선우신이 또 말했다.
"저 자를 데리고 온 것이 화근이라. 선우야 자네 언제부터 그렇게 비뚤어졌냐? 신문사의 밥자릴 잃어서 그러냐? 아니면 신문사에서 왜놈한테 아부하는 버릇이 생겨서 그런 거야?"
"모두들 환장을 했는데 저라고 돌부처겠소? 하여간 막막합니다."
"서울 사정 얘기나 하세요."
찬하가 말했다.
"하던 지랄도 멍석 깔아주면 못한다 하더니, 하라니까 주늑 드네."
"주늑들 사람이 따로 있지, 형님 주무기가 배짱 아니던가요?"
"흥 알아주어서 고맙네. 내가 송두리째 다 들어먹으려 했는데 그것도 안 되는 한심한 시절이야."
"임자 없수, 누가 말려요?"
찬하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 뭔가 모르고 있군 그래. 내 손이 작아서 못 그러겠나? 다 쓸모가 없게 됐으니 그렇지. 폐차다, 온통 폐차야. 조용하가 살아 있어도 별 수 없었을 걸? 누구처럼 도망갈 곳이라도 있으면 도망갔을 게야. 쌍말로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어."
"엄살 그만하세요. 태수형님은 자알 해가고 있질 않소."
"만주 진출 말인가? 그거 아주 잘못된 일일세. 멀잖아 본전 놓고 손들 게야. 지금은 가만히 있는 거야. 누구든 가만히 있는 게 상수라."
하다가
"여하튼 낮도깨비가 횡행하는 서울 얘기나 끝내자. 어디까지 얘기 했더라? 음 그래, 조금 남겨둔 부분의 얘기였지. 아주 쬐그맣게 남겨둔 부분, 그러니까 기업체는 군수공장으로 징발되든지 헌납하든지 양단간 그 문제만 남았으니 이익 추구를 위한 경쟁은 물 건너갔고, 고문 패스한 몇 송이 꽃은 안배해주는 대로 고분고분 자리에 앉으면 되는 거고, 학생? 참 그래 학생이 있지. 학생은 병영장에 가두어두었으니 학교가 즉 병영장이라. 해서 동원령만 내리면 줄줄이 나오게 돼 있지. 보충병이든 아니면 일본군을 빼내고 최전방 총받이로 세우든지, 그것도 시간문제 아니겠나? 신문사 두 개가 문을 닫았지만 까짓것 어차피 관보에다 싣고 애국 충정의 미담이나 대서특필하고 허위 전과를 배짱 좋게 나열하고 헌금 헌납, 지원병이나 독려하고 그런 거라면 종이가 모자라 죽을 판인데 어용 신문 하나면 족하지 않겠느냐, 옳은 처사지. 그만큼 친일의 금줄이 줄어들 테니 말씀이야. 한데 이제는 확성기가 필요하게 됐다. 그런 시점에 왔거든."
선우신이 그 말뜻을 알고 낄낄 웃었다.
"허허어 선우야. 웃을 일 아니네. 자네 모가지에도 칼끝이 닿은 걸 몰라? 울어도 씨원찮은 판국인데."
"네. 그래서 남천택이 그 형님이 삼십육계를 놨지요."
"남천택이 누군데요?"
찬하가 물었다.
"자네 모르나?"
제문식의 말이었다.
"모르겠는데요?"
"그런 괴물이 하나 있어."
하자 선우신이
"양대 괴물의 하나지요. 제문식이, 남천택이, 장안의 기생들도 다 아는 인물인데 제사장은 그로테스크 귀신이고 남천택 그 형은 광대 귀신이지요."
"눈에 뵈는 것 있어 없어? 밥줄 놓으려고 그러는 게야?"
"형님 밥줄은 어디 길게 가겠어요?"
"참 선우신이도 많이 늘었다. 남천택이 서의돈을 따라다니더니 못 배울 것만 배워가지고 사람 버렸어."
"남천택이라는 사람이 어찌 되었는데요?"
"모습을 감춘 지가 한 육칠 개월 된다 했지? 선우야."
"그러더군요."
"잡혀갔습니까?"
"그 꾀주머니가? 흥 잡혀갈 위인이 따로 있지."
"소문이 분분해요. 중국으로 갔다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소련으로 월경했다는 말도 있어요."
"오나가나 요란한 인물이지. 종잡을 수도 없고 알 만한 사람들의 얘기로는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거야. 한 번도 콩밥을 먹은 일이 없는 공산주의 골수분자."
"아무도 확실한 거는 모르지요. 지나치게 두뇌가 명석하고 가만 천재라 할 수 있는데 사생활이 또 기기묘묘해서 사람들 입질에 오르내리는 모양이더군요. 신문사 교수직이 얼마 하다가는 내던지고 결혼도 안 했는데 늘 여자는 있고, 볼 때마다 여자가 다르다는 겁니다. 그러나 원망하고 매달리는 여자는 없다더군요."
"차림은 어떻고? 순 딴따라, 그 이상이지. 그리고 평생 남의 돈으로 살고 남의 호주머니에서 돈 털어내는 것도 천재적이라 하더군. 그런데 돈 대주는 사람들 끝까지 그를 버리지 않는다는 거야. 돈키호테지 원."
"제사장은 만나보았어요?"
찬하가 물었다.
"만나만 봐? 술자리도 많이 같이했는데."
"제사장 보기엔 어떤 인물입니까?"
찬하가 관심을 나타내었다.
"천재인 것만은 틀림이 없어. 그의 박식은 당대 첫손가락으로 꼽힐 거야. 한데 그의 정체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단 말이야. 실로 성격이 복합적이고 사람을 매료하는 어떤 힘이 있는 것도 같고 하여간 비밀스런 그것이 사람을 끄는지, 콩밥 한번 안 먹은 공산주의 골수분자, 사람들의 억측이겠지만."
"천택이, 그 형에 관해서 말들이 많은 것은 어쩌면 사람들 심리속의 자기 자신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르지요."
남천택의 얘기가 깊이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던지 선우신은 제문식을 가로막듯 말했다.
"자기 자신의 반영이라면?"
찬하가 말했다.
"겉으로는 평온한 것 같지만 서울의 기류는 갈팡질팡, 모두가 허둥대고 있어요."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한 거지."
제문식이 말하며 술을 마셨다.
"작년 초 창씨 제도가 시행되면서부터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아시다시피 폐간되었고 이어서 구월에는 반전운동 단체라 하여 기독교도들을 비질하듯 검거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국민총력연맹의 조직, 그것은 아까 문식형님이 말씀하신 대로 농촌은 군량의 저장고로, 노동자들은 깡그리 군수품의 부품으로, 그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그걸 보다 강화하기 위하여 황국신민 운동인가 뭔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데 한마디로 만화지요. 처처에서 만화 같은 작태가 벌어지고 있어요. '윌리엄 텔'의, 압제자 모자 앞에서 절하는 것쯤, 그거 약괍니다. 가장 저질의 광신을 우리는 지금 강요당하고 있는 겁니다. 가장 야만적으로 가장 무지 몽매한 종족으로 우리는 추락하지 않으면 안 되게 돼 있어요. 일본인들은 그런 일에는 거의 불감증인 듯하지만 현인신을 믿지 않는 조선인들 처지에서 보면 뱃가죽이 터질 지경이지요. 그러나 조선인이 그 희극의 관객 아닌 연기자다, 하는 점이 참혹한 거지요. 여하튼, 금년에 들어와서 종전에 있었던 사상범 보호관찰령이 개정되어 예방구금령으로 공포된 것은 한층 목을 죄자는 것인데 예상하지 않았던 일은 아니었지만 심리적으로 사람들이 급박해진 것은 당연하지요. 어디든 국경을 넘고 싶다는 유혹은 거의 모든 사람이 느끼고 있을 겁니다. 의식하건 안 하건 간에. 그런 심리 상태가 천택형이 소만국경을 넘었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을 낳게 한 것 아닐까요?"
겨우 결론이 나왔다.
"말하자면 탈출 심리다, 그 말이군요."
찬하 말이었다.
"그렇지요."
"거의 모든 사람이란 말은 정확하지가 않아."
제문식이 말했다.
"저는 지식인을 두고 한 말입니다. 애초, 글줄이나 쓰고 말 깨나 하는 사람들 얘기가 아니었던가요?"
"알어."
"친일파들이 뭣 땜에 탈출하고 싶겠느냐 그 말씀인가요?"
"하기야 뭐 친일파도 친일파 나름 아닌가. 그것도 여간 복잡하고 다양한 게 아니지."
"형님은 인간의 기미를 몰라서 그러는 겁니다. 이론이야 늘 빈틈없이 쏙 뽑아내는 것이 형님의 장기지만 그게 도판이지 입체는 아니지요. 사람의 심리를 이해하는 데는 모자라요. 하기야 뭐 연애 한번 못 해본 처지고 보면 사람의 마음 심층을 어찌 알겠습니까."
모두 웃는다.
"얘기가 왜 그리 빠져? 이 자식아, 누가 안 하고 싶어서 안 했나. 원래 연애란 미남미녀의 불장난인데 나같은 상판은 애초부터 자격이 박탈돼 있었으니 낸들 어쩌누."
"노트르담의 꼽추도 있잖아요."
"미녀를 납치해갈 종탑도 없었고, 하긴 선우 네가 어떻게 내 사정을 알겠나, 소문난 연애치고 진짜는 드물어."
제문식은 껄걸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따위 신소리는 그만하고, 어째 술이 고루 돌아가지 않았는가? 얘기가 거듭 행방불명이네."
"원래 그게 형님 화법인걸요. 고자를 던져놓고 둘레를 서서히 압축해가다 보면, 한데 이번에는 너무 속도가 없어서 그리 된 겁니다."
"이 자식아, 이번엔 네가 그랬다. 빙글빙글 돌리더니 얘기를 구석에 처박은 건너야. 그 위인들을 따라다니더니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형님이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일본의 몬쓰키 식복을 입고, 조선 신궁에 가서 신관 주례로 혼인하는 순수한 친일파 아닌가요?"
"알기는 좀 아네."
"탈출 같은 것 생각하지 않는 그들 충의를 말씀하시려 한 거 아닙니까?"
"그렇지."
"형님 얘기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아니면 건망증이든지, 형님은 늘 그랬어요. 그런 무리는 강자지향의 노예들이라구, 제 나라가 융성하면 그런 대로 애국자요 충신도 되는 무리들이라구."
"그랬지이."
"노예들은 주인이 바뀌어도 충성하는 법이라구, 누구든 개 줄을 잡은 사람이 주인으로서 그들은 개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랬는데? 그게 뭐 잘못됐단 말인가?"
"그 순수한 친일파들이 누구보다 먼저, 강하게 탈출에의 유혹을 느낄 거라, 저 생각은 그렇습니다."
"..."
"그들이 살아남는 비밀이 뭔지 아십니까? 힘의 무게를 다는 아주 정확한 저울을 가지고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흐음..."
"일본이 망할 거란 냄새는 그들이 맨 먼저 맡는 거지요."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선두에 서서 지랄들 하고 있어."
"그 속에는 정세 분석을 못하는 바보들, 겁쟁이들, 또 우직파도 있겠지요. 갑자기 각도를 틀 수 없는 미련둥이는 결국 우치지니를 하는 거지요.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누가 압니까? 순수한 친일파들이 독립국의 뒷돈의 뒷돈을 대주고 있는지, 형세 보아가며 대한독립 만세! 하고 외치며 나왔다가 몇 달 구류 살고 그런 뒤 조선이 독립될 그날 길이 좁아라며 활보할 궁리를 하고 있는지 그건 모를 일이지요. 가장 지혜롭고 영악하게 사는 사람들, 어디든 적응하는 식물같이 끈질기게, 본시 생물은 다 그렇게 하게 돼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사람이다! 해봤자 별무 소득이지요."
선우신은 이빨 사이에서 밀어내듯 신랄하게 내뱉었다. 오가다는 놀란 듯 선우신을 바라본다. 오랜 세월, 선우신이 목도했던 현실은 움츠리고 그를 또 움츠리게 했지만 앙금같이 몸에 묻은 때를 의식하듯 그의 눈은 절망적인 비애에 젖어 있었다. 오가다는 선우신과 부딪친 눈을 간신히 떼어내듯 고개를 숙였다.
"이원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찬하도 우울해진 표정으로 별 뜻 없이 물었다.
"그 사람은 단념한 것 아닐까요?"
"단념이라면, 어떻게?"
"자신은 어느 쪽에서든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그럴까요?"
"모르지요. 혹 우직한 편인지, 방향을 틀지 못하고 있는지."
"나는 오히려 광신하고 있다는 인상이었습니다. 만주서 발행되는 신문에 실린 신년사를 본 적이 있어요. 첫째 간 데마다 일본 사람 되시기를 바라오며 천황폐하에게 충양한 신민이 되도록 힘쓰시고, 지원병에도 많이 응모하시고 내 지식 씨명도 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말들이 씌어져 있었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좀 심하다 싶었어요."
침묵이 흘렀다. 잠자코 한동안 술만 마시는데 이들은 갑자기 고독해졌던 것이다.
"확성기 얘기는 어찌 되었습니까?"
알면서 침묵을 메꾸려는 듯 찬하는 어색하게 말했다.
"선우야. 자네가 끝마감해라. 가로채갔으면 매듭을 지어야지."
제문식이 담배를 뽑아 물며 말했다.
"허 참, 사람 꼴 우습게 돼갑니다. 기왕지사 치마 벗고 사거리에 나앉은 몸, 뻔하게 누구나 다 아는 일, 핏대 올려보아야 별 수 없는 일, 얘기하지요. 해."
선우신은 상당히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았다.
"아까 문식형님이 모판 펴놓듯 하신 말씀, 농민이 어쩌고 노동자가 어쩌고 맞아요. 그 얘기 다 맞는 얘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소리 없이 되어진 일이지요. 물밑에서 한 작업이라고나 할까요? 북 치고 나발 불 필요가 없었지요. 총대면 되는 거 아닙니까? 물밑에서 총을 흔들든 칼을 휘두르든 소리가 나지 않으니까. 그러나 들내놓고 하는 일, 만천하 명명백백한 일에는 악대 동원하여 혼 좀 빼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확성기도 설치하구요. 창씨개명에다가 지원병에다가 황국신민의 운동, 여기에 지식인 주둥이가 빠져서야 되겠소? 앞으로 징병이 있을 거구 학병도 있을 거구, 애국지심에 불타는 진리 탐구의 학자님, 인생의 가치를 책정하는 문학가, 대일본제국의 간성을 기르는 교육가, 어찌 그냥 있겠소. 그것에도 주도권 잡은 파벌이 있고 소외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머리 싸매고 다니면서 끼어들려는 분자가 있고 눈치 보아가며 시골로 낙향하려는 양심파, 만주 중국의 천지를 의지하여 달아나는 사람, 병을 칭하여 두문불출하는 사람, 실로 이합집산이 눈부신 상태다 그거지요. 나 같은 존재는 언제 어떻게 예방구금이 될지 모르니까 차라리 속편합니다. 정말 이놈의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죽어야 하는지... 꽃샘바람에 중늙은이 죽더라고 겨울 다 나고서 봄을 보며 죽는 꼴 많이 생길 겁니다. 지조를 지키는 사람들이야말로 풍전등화, 변절하기 쉽지요. 친일하여 단물 다 빨아먹고 막판에 와서 독립만세! 하는 애국자하고 수없는 영을 넘어 버티다가 넘어간 변절자, 어떤 계산법으로 해답을 내야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소."
"그야말로 난리군요."
찬하 말에
"난리이기도 하구 경사 났다 할 사람도 있구요."
"말이 났으니, 유인성 씨는 어떻게 지내지는지요."
넌지시 물어본다. 순간 술이 싹 깨는지 선우신이 눈이 고정된 채 찬하를 바라본다. 그러더니 자신이 취한 언동을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변했다.
"조형께서 유선생님을... 아시는 사이신가요?"
하고 물었다.
"안면 정도지요. 죽은 형하고는 사이가 나쁜 친구였다고나 할까요?"
"그래요? 참 그렇겠군요. 문식형님하고도 사이가 별로인 친구간이니까 그렇게 되는군요."
멋쩍게 웃으며 선우신은 고개를 떨구었다.
"진일 마른일 다 봐주었건만 선우야, 네 마음속에는 어찌 그리 계급의식이 확고부동하냐. 유인성에 대해서는 항상 선생님이고 나보고는 형이라, 에에라 썩을 놈, 빈말이라도 아첨 좀 해보아."
농담 반 진담 반이었다.
"그만두시오, 형님. 새앙쥐 불가심할 것도 없는 사람보고 풍악 잡힐 겁니까?"
"새남터에 나가도 먹어야 한다, 그게 인생 아니냐. 산다는 게 뭐게? 다 그런 거야. 심각해한들 뭐 뾰족한 수 나겠어? 풍악 치고 놀아보는 거지. 그간 기방이 성업한 것도 전후좌우, 사방팔방 콱콱 막혀버린 때문이 아니겠나? 갈 곳이 없었던 게야. 사실 그렇지 돈푼 있고 친일한다 해서 왜놈들, 살점 좋은 고기 써억 비어서 내준 일 있었나? 모두 저희들 차지, 눈물 값도 안 되는 돈푼, 이권 받고 알랑방귀 뀐 친일파도 생각해보면 가련한 족속이야. 여하튼 부럽네. 유인성이 부럽다. 이런 세상에 자네 같은 추종자가 있다는 것은."
"유인성 씨한테 무슨 일이 있습니까?"
찬하가 말했고 오가다의 표정은 긴장돼 있었다.
"유인성의 집안 꼴이 말이 아니라네."
"어떻게요?"
제문식은 잠시 동안 오가다를 쳐다보았다. 눈길을 돌리면서
"불운이란 늘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모양이야."
"..."
"하나 있는 아들이 지금 마산 결핵요양소에 가 있어. 그것도 상당히 중증이란 얘기고, 딸들은 출가시켜 그런 대로 이럭저럭 괜찮은 모양인데."
하다가 제문식은 중간을 생략하는 눈치였다.
"물론 당국도 그렇지만 친일파들이 좀 괴롭혀야지, 과거 논적들도 호기도래라, 송곳 바늘 숨겨서 마구 찔러대는 판국이고 되잖은 짓 했다가 유인성이한테 무안당했던 소인들은 느긋이 뒷짐 지고 서서 그의 불행을 구경하고들 있는 거지.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믿었던 사람들이 차례로 훼절해가는 꼴을 눈앞에 보는 것이 젤 고통스러웠던 거야. 그야말로 고립무원, 찬바람이 슁슁 돈다. 서의돈이 같은 사람이야 황태수가 뒷배를 보아주어서 동생 영돈이가 회사의 간부 사원이고 본시부터 형네 식구들 책임을 지고 있으니 내일 잡혀가는 한이 있어도 김삿갓 신세, 넉살 좋고 언변 좋아서 어디로 가나 제자리를 찾지만 유인성같이 원리 원칙에서 벗어나지 못하
는 사람은 살기가 힘들고 괴로워. 난세에는 더욱더. 그의 성품이야 그의 아끼던 후배 오가다상도 잘 알 거요."
"물론, 아, 알지요."
오가다는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제국주의 일본을 성토하는 거야 늘상 그래 왔으니 구태여 유념할 필요는 없겠으나 중간을 생략한 듯한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필시 자기의 인실에 관한 일일 것이다. 오가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인성이 상처를 받은 것을 물론 생각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자기들로 인하여 뭔가 더 심각한 일이 있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가다의 자격지심이었다. 생략된 부분은 유인성의 처석씨에 관한 것이었다. 딸들을 출가시켰고 늙어가는 마당에 바람이야 났을까마는, 시어머니가 세상 떠나고 견제하는 이가 없어지면서부터 석씨의 잦은 외출과 눈에 띄게 낭비하는 습벽, 그로 인하여 차츰 집안이 황폐해지는데 말로는 아들 때문에 심화가 나서 그런다고 했으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본시부터 이상하게도 그에게는 모성애가 없었다. 할머니가 아이들을 거두어 그랬는지 모를 일이나 하여간 석씨는 전혀 자식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가끔 유인성은 마산으로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 있었다. 그러나 결핵이라는 병이 옮겨올까 봐 그랬는지 어미된 석씨는 일절 아들을 찾지 않았다. 먹을 것 다 먹고 입을 거 다 입고 좀 쇠약해졌다 싶으면 보약 먹고 가고 싶은 곳 다 찾아다니고, 혼인하느라 중퇴했으나 명문예고를 다닌 것이 자랑이요. 생각이 천박하여 일본 통속 소설이나 탐독하고 저속한 잡지 나부랭이나 뒤적이고 그것으로 지성적 여성인 양 착각하는 여자, 너그럽게 그런 면을 덮어주며 사랑했던 유인성은 아들이 병이 나면서부터 모성 부재인 석씨에게 진저리를 치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짐승도지 새끼를 위해서는 창자가 끊어지게 울부짖는데."
유진성은 한탄했다. 아니 아내를 증오했다. 남의 남자와 불륜 관계에 빠진 이상으로 병든 자식을 팽개친 그에게 분노를 느끼는 것이었다. 석씨는 석씨대로 남편을 대수로 여기지 않았다. 학벌 좋고 인격자이며 애국지사라 하여 대단한 긍지를 가지고 남편을 우러러 받들며 순종했던 옛날을 이제 와서는 갇혀서 허송세월한 것처럼 억울해했고 다시는 그렇게 안 살겠다며 돈푼 있고 할 일 없는 여자들과 어울려 다녔는데 황새들을 따르자니 그는 빚을 내게도 됐고 잘사는 친정 형제들한테서 돈을 얻어다 쓰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남편을 경제적 무능력자로 치부했으며 유인성의 입지가 좁아지면 질수록 이 빠진 늙은 호랑이 취급이요 방자하기 그지없었다. 한 지붕 밑에서 서로 남남으로 지내게 된 것이 벌써 여러 해가 되었다. 피폐할 대로 피폐한 유인성은 사실 이 빠진 늙은 호랑이였다.
"그래도, 땅은 좀 가지고 있겠지?"
"모르겠어요."
제문식이 묻는 말에 선우신의 대꾸였다.
"아들 땜에 목재소는 팔았다던가? 남의 손에 넘어갔다지 아마? 선우야 안 그러냐?"
"넘어갔지요."
찬하와 오가다는 낮에 만났던 유인성의 모습을 생각한다.
"당장 뭐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딱하지. 성정이 꼿꼿해서 남의 도움 받아들일 위인도 아니구."
"구금되는 것을 젤 두려워하는 사람이 유선생님이라 한다면 믿겠습니까?"
선우신은 돌연 냅다 던지듯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지만 그 양반 끝까지 훼절은 안 할 겁니다. 살아남을 겁니다."
"어째 그런 말을 하는가."
"한마디로 괴로운 투쟁이지요. 자책감도 심할 겁니다. 선생님은 자신이 구금된 후의 아들 운명을 생각하시는 거지요."
유인성의 자책감에는 인실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으면서 아들을 원망하는 모친과 인실을 그 길로 내보낸 것은 자기 자신이라 믿는 아픔이 짙게 깔려 있었으나 선우신은 그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아들의 죽음을 생각하시는군요."
찬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죽는 거야 하늘에 맡기고 계시겠지만 죽든, 살든, 어떤 모습으로 죽으며 어떤 모습으로 살아 있을 것인가, 그걸 생각하시는 거지요."
"그러니까 마누라 땜에 그러는군."
제문식의 말을 받아서 선우신은
"그럴 겁니다. 모두 제 뱃속에 집어넣겠지요. 머리카락 하나 다치려 안할 거고 바람만 불어도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겠지요. 배고프면 청요리 시켜다 먹을 거고 솟정 나면 돼지고기 사다가 삶아 먹을 거구, 그러는 사이 아들은 창문만 바라보고 있겠지요. 남몰래 혼자 죽어갈지도 모르지요. 선생님은 자기 품속에서 아들을 보내고 싶을 겁니다. 비참하지요."
선우신은 그런 식으로 유인성 집안일을 조금 건드렸다.
"그런 경우는 좀 드물 거야. 성격적으로 일종의 불구자라 할 수 있겠지."
"하기야 뭐 딸을 청루에 팔아먹는 에미 애비도 있긴 하지요. 그런 인종들은 저주를 받고 이 세상에 태어났을 겁니다."
"가난이 죄라 했다."
"효행이 부모의 권리가 된 데 문제가 있는 거지요. 권리 말입니다. 심청전을 이 땅에서 영원히 추방하고 말살해야 합니다. 가장 추악한 에고이즘, 에고이즘의 극치 아닙니까."
"그런가 하면 고려장도 있어."
오가다는 슬그머니 일어섰다. 화장실에라도 가는 듯, 복도에 나왔을 때 오가다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리고 머리가 터질 듯 아팠다. 작은 머리통에 온갖 것을 다 꾸겨서 밀어 넣은 것 같은 기분이다. 그는 지난 밤 묵은 침실로 찾아들어갔다. 달빛을 받은 창가 침대에 가서 짐을 부리듯 자기 자신을 던진다. 달은 창밖 느티나무 잔가지 사이에 걸려 있었다. 물결이 오고 또 오듯 끝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끝없는 지속이며 끝없는 변화다. 밤새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대로 가는 게 아니야. 이대로는 못 가아.'
눈을 감는다. 망막에 아이 얼굴이 나타났다.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다. 깊이 생각해볼 여유도 없이 눈부시게 시간이 지나간 것이다. 무턱대고 신경을 떠나왔다. 어쩌면 그것은 허우적거리기만 했던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아이를 만나야 한다! 아이를 만나야 한다! 그 설렘은 먼 곳에서 깜박이는 등불을 향한 것이기도 했으며 아주 가까이 다가와서 심장을 지져대는 것 같은 불덩이이기도 했다. 오가다는 아이의 운명을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의 운명을 검토하고 떠나야 하는, 오가다는 준열한 현실과 부딪친 것이다.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 또 대체 아이는 나를 어떻게 따라올 것이며 바뀌어진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오가다는 밤을 꼬박 새웠다. 그런데도 그는 제문식과 선우신이 언제 돌아갔는지 알지 못했다.
길을 떠나는 새벽은 다른 시각에 비하여 한층 어수선하다. 찬하와 오가다는 각기 여행 가방을 들고 역으로 나왔다. 찬하는 코트의 깃을 세우고 시종 침묵하고 있었다. 차표는 이미 끊어다놨기 때문에 그들은 이등 대합실에 선 채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가다는 침묵을 깨고 들어갈 수 없는 압력을 찬하에게서 느낀다. 아니 압력이라기보다 쓸쓸한 그만의 세계였다. 기차에 오른 후에도 이들은 수면 부족 때문에 잠을 잤고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식당 칸에서 점심을 먹을 때만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을 뿐이다.
오가다가 심각하게 얘기를 꺼낸 것은 관부연락선 선상, 갑판 위에서 밤바다를 바라보았을 때다.
"부인은 알고 계십니까?"
"아이 얘기요?"
"네. 내가 그 아이의 아비라는 것을."
"몰라요."
"왜 얘기를 하지 않았소?"
"이유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였지만."
"부인을 믿지 않습니까?"
"믿어요. 처음엔... 그냥 얘기하고 싶지 않았소. 비밀을 지킨다는 것은 핑계였고."
"혼혈 때문에 그랬지요"
"그랬을 거요. 내 자신도 혼혈아를 낳았지만... 그러나 나중에는 이유가 달라졌소."
"..."
"아내를 실망시키고 싶지가 않았지요. 아버지가 당신인 것을 안다면 그는 아이를 빼앗길 거라 생각했을 게요. 나 역시 그냥 내 아들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집착이 강했으니까. 아내는 쇼지를 사랑했어요. 가끔은 내가 어디서 낳아 데려온 아이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에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소. 그 사람이나 나도 그 애를 기르면서 행복했으니까."
"지금의 생각도 그런가요?"
"말할 수 없이 허전하오. 어딘가가 뻥 뚫린 것만 같소. 집사람 생각을 하면 겁이 납니다. 충격을 받을 겁니다. 청천벽력일 거요."
"그런 뜻이 아니고, 아이에 대한 애착 애정 말입니다."
"참 이상한 걸 다 묻는군. 어떻게 며칠 사이 애정이 변하겠소?"
"부럽고 샘이 납니다."
"...?"
"내 몫을 앗아간 것에 대해 미운 생각도 들구요."
"별사람을 다 보겠네."
찬하는 담배를 붙여 물고 쓰게 웃었다.
"그건 농담이구, 산카상."
"이제부터는 진담인가요?"
"그렇소. 내 나이가 아직은 쉰 살이 아니오. 마흔의 중반인데 소집을 안 받을 거라 장담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찬하는 놀라며 오가다를 쳐다본다.
"어젯밤 꼬박이 생각했습니다. 아이의 앞날을. 그 아이를 만주까지 끌고 와서 홀아비인 내가 기르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감정으론 그 아이와 헤어져 있고 싶지 않아요. 나는 이제부터 삶을 진지하게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감정 내 인생이지... 그 애는 다정한 부모와 누나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것을 파괴할 권리가 내게 있는가. 내일을 알 수 없는 떠돌이 같은 아비를 따라서 겪어야 하는 새로운 세계, 물론 이와 같은 전시가 아니라면 나는 결코 그러진 않을 겁니다. 산카상이 원한다면 성장하기까지 그대로 두는 게 어떨
까 싶어서."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요?"
찬하 목소리에 탄력이 실렸다.
"전쟁이 끝나고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다면 그때 돌려주시오."
"잘 생각했소. 정말 잘 생각했어요. 나도 그런 생각을 했지만 내 처지에서는 그런 말 할 수가 없었소."
"참 비극이지요?"
"그런 생각은 말아요."
"어미 아비를 두고... 여하튼 기구한 거지요. 그러나 지금까지 말 못한 것이 있어요."
"말하시오."
찬하는 서두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웠어요."
오가다는 절을 했다.
"별말씀을, 내가 고맙소. 정말 쇼지를 보내고 싶지 않았소. 여러 가지로 날 용서하시오."
찬하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감정이 흐트러져서 여기 저기 널리는 것 같았다. 오가다도 담배를 붙여 물었다.
"우리의 인연도 참 질긴 것 같소. 하얼빈에서 윤광오라는 친구를 만났을 때 그는 인실씨와 나의 인연을 질기다 하더군요. 우리는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달빛 아래, 수평선이 아득한 바다, 오가다는 자신의 앞날을 수평선이 아득한 바다같이 느껴졌다.
"네, 그래요. 전쟁이 끝나고 인실씨를 만날 수 있다면, 두 사람이 살아남았다면 그 사람과 내 아들을 끌고 나는 북국으로 갈 겁니다. 빙하를 건너서요."
믿을 수 없는 꿈을 꾸듯 말하고서 오가다는 소리 내어 웃었다. 웃다가 웃음을 거두는 순간 오가다 귀에 연락선 기관 소리가 굉음과도 같이 울려왔다. 쇠붙이가 마찰하고 마모되는 것 같은,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굉음, 심장이 파열될 것만 같았다. 그것은 또 자신의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이기도 했다. 파도를 가르며 밤배는 조선해협을 지나가고 있었다. 관부연락선 공고마루, 끝도 없이 조선인들을 노동자로 실어 들였던 거대한 배, 끝도 없이 실어낸 식민지 이주자, 만주 개척민과 병사들, 군부와 결탁하여 착취가 목적인 각종 사업체, 그리고 인원, 오가다는 자신도 그 사업체에 빌붙어서 사는 한 마리 바퀴벌레인 것을 느낀다. 자신과 자만에 가득 찬 관부연락선 공고마루, 육지와 육지를 이어주는 거대한 기계, 바다를 건너는 동안 그는 절대적인 군주다. 현대 문명의 산물이며 어둠 속에서도 찬란하게 불 밝히며 그 위용을 자랑하는 배, 그러나 오가다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거대한 기계의 박동, 기관 소리만 하늘과 바다를 뒤덮고,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오가다는 생각한다. 것은 공포였다. 이 기계의 무수한 쌍생아들, 탱크며 대포, 비행기며 기차, 기선, 자동차, 군함, 그런 것들에 제압되고 순종하며 또 비명을 지르는 인간들은 오로지 시간만을 재고 수치만 살피면 되는 또 하나의 기계인가.
"언제까지 미쳐 날뛸까요? 얼마나 사람이 죽어야 전쟁은 끝나지요? 전쟁 미치광이 땜에 과학이 발달되고 부를 축적하기 위하여 과학이 발달되고 없어도 될, 아니 없어야만 할 것 때문에 자원과 인력이 동원되고 생산에 미쳐 날뛰는, 이 끝없는 낭비는 결국 인류가 전멸한 뒤에 끝이 날까요? 그래요. 군국주의는 망해야 해요! 식민지 정책은 끝이 나야 해요. 낭비와 축적의 이 병적 상황을 극복하지 않는 이상 사람답게 살 수 없고 생명이 부지될 수도 없을 겁니다. 제사장 말대로 농촌은 거대한 군량의 저장소이며 노동자는 모조리 군수품의 부품, 뿐이겠어요?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볼 때, 지주들이 농민으로 전락하는 것처럼 노동자 아닌 사람도 노동자로 공급이 될 것 아니겠어요? 이제는 저항 없어요. 망해야 합니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역사의 변혁을 위해서, 인류를 위해서 망해야 합니다."
오가다의 목소리는 비통했다.
"맞소. 신국 아닌 지구의 어느 지역에 태어난 사람으로, 누구나 다 그렇게 살아야지요. 현인신이 아닌 사람으로서 추앙을 받아야 할 겁니다. 네 그것이 타파되어야... 허황한 논리는 깨어져야 합니다. 부의 산실이며 상징인 기계문명도 막아야겠지요. 그러나 언제? 가장 합리적인 과학이 사람의 이성을 파괴하고 있다는 이 아이러니, 하기는 나타난 이상 끝장 보지 않고 물러나겠어요?"
찬하는 비관적으로 말했다.
두 남자가 조후에 있는 찬하 집에 갔을 때 따뜻한 봄 햇살을 받으며 노리코는 가위를 들고 화단의 수선화를 자르고 있었다.
"어머!"
노리코는 깜짝 놀라며 일어섰다.
"돌아오셨군요."
하고 인사를 한 뒤,
"웬일이지요? 두 분이 함께 오시다니 정말 뜻밖입니다."
노리코는 회색 바탕에 점 자줏빛 꽃무늬가 대담한 기모노에 황금빛 오비를 매고 있었다. 그리고 녹색 오비히모의 큼직한 비취 오비도메가 눈에 띄었고 하얀 다비와 주반이 청결해 보였다. 그러나 그가 기모노를 입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찬하를 의식한 때문인지 거의 일상은 양장이었는데 기모노의 모습은 농염했다.
황급하게 달려나와 공손하게 인사하는 하녀 오하루에게 여행 가방을 넘겨주며
"그렇게 됐어요. 우연히."
찬하는 말했고 역시 오이찌에게 가방을 건네준 오가다는
"오래간만입니다. 부인, 그간 격조했습니다."
하며 노리코에게 인사한다
"잘 오셨어요. 자아 들어들 가십시오."
하는데
"아이들은 어디 갔소?"
찬하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숙제하고 있습니다."
응접실에 일행이 들어가자
"후미짱 쇼짱! 아버지 돌아오셨어."
노리코는 울림이 좋은 음성을 높여서 말했다. 방문이 우당탕 요란스럽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딸 후미와 쇼지가 달려 나왔다.
"돌아오셨어요? 아버지."
여학교에 갓 들어간 후미는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쇼지는
"아빠!"
하며 찬하의 아랫도리를 감싸 안고 턱을 쳐들어 내려다보는 찬하 얼굴을 올려다본다. 그것은 아름다운 광경이
었다.
"아저씨한테는 인사 안 하니?"
노리코는 아이들을 노려보는 시늉을 하며 나무란다.
"앗... 참"
쇼지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저씨 안녕."
후미는 배시시 웃었다. 빨간 스웨터를 입어 그런지 부끄러워서 그랬는지 얼굴이 빨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아저씨."
다소곳이 절을 하며 어른 같은 말투로 인사를 했다.
오가다는 안경 속의 속살을 좁히며 쇼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토끼처럼 좋아서 깡충깡충 뛰는 아이, 구김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아이도 아니었지만 오가다는 처음 보듯이, 찬하가 인실에게 말했듯이 샛별처럼 영롱했다. 그리고 그 모습 속에는 마치 각인처럼 인실의 자취가 있었다. 오가다는 저도 모르게 한숨 짓는다. 이 신비스런 조물주의 귀한 은혜를 도시 어떻게 해야 할지 오가다는 막연했다. 다만 막연했을 뿐이다.
"자아, 자아 이제는 방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노리코 말에 쇼지는
"싫어 엄마."
"숙제 해놓고 놀아야지."
병아리를 모는 어미닭처럼 두 팔을 벌리고 아이들을 몬다.
"그만두시오."
찬하는 오가다를 힐끗 쳐다보며 우물쭈물 말했다. 후미는 순순히 제 방으로 돌아갔으나 쇼지는 노리코의 팔 밑에서 빠져나와 찬하의 겨드랑 밑에 몸을 숨긴다. 노리코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아빠 왜 이리 늦었어요?"
"여기저기 좀 다니느라 늦었다."
"아저씨는 어디서 만났어요?"
"응 만주서."
하다가
"신경에서 만났지. 신경 계시다고 했잖아."
"으음."
쇼파에 모두 앉았다. 쇼지는 찬하와 노리코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아빠 왜 그리 늦었어요?"
쇼지는 아까 물었는데 또 물었다.
"여기저기 다니느라 좀 늦었다."
찬하도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대답했다. 오이찌가 홍차를 내왔다. 쇼지는 소학교 사학년이었다. 그러나 일이학년 아이같이 응석받이였다. 찬하가 돌아와서 그는 마냥 행복한 것 같았다.
"도무지 철이 안 들어서요. 아직 애기예요. 어리광쟁이, 쇼짱?"
"네."
"오늘은 아버지가 돌아오셨으니까 이대로지만 다른 때, 손님 오셨을 땐 이러면 안 돼, 알았니?"
엄격하게 말했으나 노리코의 눈은 연신 웃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 아저씨도 손님일까?"
"음, 그, 그야."
"참 오래간만에 오셨잖아요, 그치요? 아빠."
찬하는 고개를 끄덕였고 오가다는 얼굴을 숙였다.
"아저씨?"
"으, 음."
오가다는 소스라치듯 대답했다.
"수염이 막 길었네."
저도 모르게 오가다는 얼굴을 쓰다듬는다.
"까, 깎을게."
얼굴이 빨개지며 허둥지둥 말했다. 그새 오가다는 면도를 하지 않았다. 노리코는 오가다를 아주 재미있어하며 까르르 웃었다.
"거 보세요. 게으름피우니까 쇼지한테 당하잖아요."
"아저씨 바빴어요?"
"음 바빴어. 굉장히 바빴다."
찬하의 식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오가다는 내일 아침에 오겠노라 하며 작별하고 갔다.
"오가다한테 무슨 일 있어요?"
뉴스를 듣고 나서 라디오를 꺼버린 노리코가 물었다.
"무슨 일?"
찬하는 아내를 외면한 채 말했다.
"통 말이 없었잖아요. 어딘지 슬프게 보였어요."
"피곤해서 그랬을 게요."
"아직 결혼 안 했나요?"
"안 했지."
"왜 그러는 거예요? 이해할 수가 없어요."
"맺어질 수 없는 사람을 잊지 못해서... 다 나름대로 사정은 있는 거요."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남자가 나이도 들었는데 그러고 있는 거 딱해요."
"뭐 적당히 사귀는 여자야 없을라구? 목석 아닌 이상, 결혼하지 않았다 해서 인생을 포기한 사람은 아니니까 염려할 것 없어요. 그는 어느 누구보다 삶을 사랑하고 진실하게 살고 있소."
찬하의 부드러운 음성에는 오가다에 대한 깊은 이해와 우정이 서려 있었다.
"여보."
"..."
"저 어떤 땐 샘이 나요."
"그게 무슨 소리요?"
"당신들 우정이 부러워서."
찬하는 픽 웃는다.
"순수한 데 대한 동경이, 아직 당신에게 남아 있소?"
"그럼요. 사람마다 다 그렇지 않을까요?"
"순수, 하긴 그것은 고향 같으니까... 오가다하고 함께 있으면 센께모도마로 생각이 날 때가 있어."
센께모도마로는 귀족 출신이지만 민중파의 대표적 시인으로, 천진무구, 밝고 깨끗한 영혼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시종 노래했으며 일본 시단의 독특한 존재다.
"저도 센께의 [나는 보았다] 그 시집 읽은 적이 있어요. 원래 시인은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일본인에게 가끔 그런 사람이 있어요. 사실은 싫은 사람이 훨씬 많지만, 사악하고 잔인하며 턱없는 겁쟁이 소심증, 어른이 되어도 골목대장같이 유치하고, 식민지에 나온 일인 중에 그런 유형이 많지. 그러나 오가다를 보고 있으면 그런 악랄한 무리들도 다 용서하고 싶어지거든."
"당신 마음속에도 원한이 있었군요."
노리코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나 친일파는 아니오. 당신은 내게 다만 여자였을 뿐, 그리고 내 아내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저 말이에요."
노리코는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전에 결혼 얘기가 있었던 오가다상 사촌 누이동생... 얼마 전에 남편이 전사했대요."
"전사?"
"참 안됐어요. 지에코상은 오가다상을 사랑했던 것 같은데."
"전사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소."
"정말 지긋지긋한 전쟁, 물자도 많이 귀해진 것 같아요. 앞으로 식량도 배급제가 된다든가요?"
"당신 오늘 참 예뻐 뵈는군."
찬하는 화제를 돌렸다.
"옷 땜에 그럴 거예요."
"오늘 무슨 날이요?"
"그런 건 아니지만."
"안 입던 와후꾸를 다 입고"
"앞으로 좀체 못 입을 것 같아서요."
"어째서?"
"전쟁이 심해지면, 농속에 넣어두는 거 아깝잖아요."
"..."
"만주 돌아보시고 온 느낌이 어때요? 얘기 안 해주실래요?"
"그쪽으로 피난 가고 싶소?"
"이이가? 참, 거긴 전선인데 피난을 가요?"
"만주가 어째서 전선이요? 전선은 중국 본토, 그것도 오지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질 않소. 왕도낙토, 만주는 일본인의 천국이지."
"만소 국경은 모두들 걱정하고 있어요. 노먼한 사건도 있었고 소련이 언제 어떻게 나올지 모른대요."
"그런 얘기는 누가 했소? 마리코상이 하던가요?"
"신문을 유심히 보면 그 정도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일 아니겠어요? 만소 국경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쯤. 마리코 언니도 물론 말했지만, 그 언니 말로는 미국하고 전쟁하게 되지 않겠느냐, 정말 미국하고 전쟁하게 될까요?"
보다 목소리를 낮추며 노리코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미국하고 전쟁하면 승산은 있다 하던가요?"
"그거야 뭐 언니가 어찌 알겠어요?"
말끝을 흐렸다.
"남편이 고관 아니오."
"군부에서 다 하는데 일반 관직인 국장급이 뭘 알겠어요. 하지만,"
"..."
"하지만 입 밖에 내지 말라 하면서 언니가 얘기하더군요. 미국하고 전쟁하는 날에는 끝장이다. 형부가 그러더라는 거예요."
"불인에 일본군이 진주했는데, 불란서가 독일에 패한 틈을 타서, 말하자면 일본은 빈집을 턴 꼴이고, 한편 미국에 칼을 뽑은 거나 다름없으니 미국이 가만있지는 않을 거요."
하다가
"일독이 상국동맹이 있질 않소. 상부상조하겠지."
하는데 찬하는 노리코에게 자신이 타인이었다는 것을 인식한다. 국수주의자도 아니요 감상적 애국자도 아니요 일단은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노리코였는데 찬하는 습관적으로 그에게 진정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지 않고 살아왔다. 미안하기도 했고 죄의식도 있었다.
"우리는 잘 몰라 그렇지 아카가미가 많이 나온다는 거예요. 젊은 사람 있는 집에는 거의 나왔다나 봐요. 앞으로 사십대도 마음 놓고 있을 수 없다 그런 말들 해요."
"돼가는 대로 살아야지 어쩌겠소? 걱정은 두었다 합시다. 대범한 사람이 이상하군. 조급증을 내는걸 보니."
"전사했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니까 불안한 거지요. 정말 전쟁이구나 실감하게 되구, 아이들 생각도 하게 되네요."
"피곤한데 이제 그만 잡시다."
"목욕하고 주무셔야지요."
"그러지."
목욕을 하고 찬하는 오래간만에 노리코를 안았다.
이튿날 아침, 일요일이었다. 오가다는 면도 자국이 파란 얼굴로, 말끔하게 차려입고 나타났다.
"쇼짱, 아저씨하고 구경하러 가자. 날씨 참 좋지?"
아이를 보자마자 오가다는 말했다.
"아빠도 함께 가요."
쇼지의 눈은 유난히 반짝였다.
"아, 아니야. 아빠는 바뻐. 아저씨랑 함께 갔다 와."
"엄마 가도 돼?"
"그럼."
"아저씨 저도 가고 싶어요. 함께 가도 되지요?"
후미가 말했다. 오가다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넌 안 돼."
굵은 목소리로 찬하가 막았다.
"아버지 왜요?"
"넌 심부름, 내가 시킬 것이 있어."
"함께 가게 하세요. 시킬 일이 뭔데요?"
"하여간 넌 남아."
"저도 좀 놀다 오고 싶어요. 꽃이 만발해 있을 건데 시킬 일, 오하루나 오이찌가 하면 되잖아요?"
"요 다음 일요일에 식구들 모두 가면 되잖겠어?"
찬하는 끝내 완강하게 후미가 가는 것을 막고 나섰다.
"그래 아버지 시키는 대로 해. 쇼짱 옷 갈아입어야지."
쇼지도 누나가 함께 못 가는 일에 다소 불만인 것 같았다. 긴 양말을 신고 감색 반바지와 윗도리, 하얀 셔츠를 입고 그러고 모자를 쓰고 쇼지는 나왔다.
"소공자님 다녀오세요."
노리코가 손을 흔들었다. 기분이 좋을 때 노리코는 쇼지를 곧잘 소공자라 불렀다. 오가다의 손을 꼭 작고 가다가 아이는 팔짝팔짝 뛰기 시작했다.
"쇼짱 좋은 날씨지?"
"응."
"기분 좋으냐?"
"응 참 좋아. 아저씨."
"응."
"작년에 말이에요. 아빠랑 모두 요시노야마에 갔었어요. 아유! 온 산이 벚꽃, 굉장했어요."
"그건 말이야 산에서 자생한 야마자쿠라고 특히 요시노야마 것은 요시노사쿠라라 하는거야."
"지금도 그렇게 많이 피었을까?"
"그럼, 하나미 계절이니까 쇼짱."
"응."
"아저씨 너 안아주고 싶어."
"나 어린애 아닌데? 창피스러워."
오가다는 껄걸 웃는다. 웃는데 콧날이 시큰거리는 것이었다.
"아저씨 돈 많아. 갖고 싶은 것 말해봐."
"아빠가 야단쳐요."
"아니다. 절대로 그러시지 않을 거야. 아저씨 장담할 수 있어."
말하면서도 오가다는 물질로밖에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목마름,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아저씨 그럼."
"말해보아."
"공원에 가서 말이예요. 비둘기들 모이 사줘요. 많이많이 주고 싶어요."
"그래 그러자꾸나."
"아아 신난다!"
이들은 택시를 잡아 탔다. 그리고 히비야 공원 앞에서 내렸다. 오다가는 처음부터 히비야 공원에 올 생각이었다. 인실이 이 아이를 뱄을 때 히비야 공원에서 찬하를 만났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얘기를 찬하는 자세하게 얘기해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가슴 저리는 얘기였다. 오가다는 아이의 손을 꼭 쥐었다. 축복 받지 못한 생명을 안고 찬하에게 도움을 청했을 그때 그 모습을 오가다는 히비야 공원 어느 모퉁이에서 찾기라도 할 듯
'아니다. 이 애는 축복받은 생명이다. 이렇게 무구하고 신비스럽게 자라주지 않았는가. 이 아이는 우리들 사랑의 등불이야. 세상을 밝혀줄 것이다. 인실의 뜨거운 눈물과 나의 비원을 받아 태어난 아이, 이 영롱한 생명은 세상을 밝혀줄 것이다.'
오가다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빠 왜 울어."
오가다는 아이의 손을 놓고 한발 뒤로 물러섰다.
"너, 쇼짱, 지금 뭐라 했지?"
"아아, 아빠라는 말이, 습관이 돼서 그랬나 봐요. 아저씨 그런데 왜 울어요?"
"아니야 감기가 들어서, 재채기가 나올 것 같아서."
이들은 비둘기 모이를 샀다. 그리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모이를 뿌려준다.
"많이 먹어 비둘기야. 많이많이 먹고 저기 저 지붕 밑에 가서 쉬어라."
아이는 무아지경에 빠진 듯, 모이를 뿌려주고 또 뿌려주는 것이었다. 누가 보아도 행복하고 다정한 부자처럼.
"아저씨."
"응."
"남자는 울면 안 된다 했지만요 며칠 전에 나 많이 울었어요."
쇼지는 연신 모이를 뿌려주면서 말을 했다.
"왜 울었나."
"얘기가 길어요."
"말해보아."
"도둑고양인데요. 추운 날 우리 집 헛간에서 새끼를 낳았나 봐요. 내가 발견했을 대는 새끼들 눈도 뜨고 제법 컸어요. 헛간의 판자 틈으로 들여다보면 보여요. 엄마는 들여다보지 말라고 막 야단 쳤지만, 들여다보는 것 알면 어미고양이가 새끼를 물고 달아난다는 거예요. 달아나서 새 보금자리 찾으려면 어미 새끼가 다 고생을 한대요."
"그럴 거야."
"하지만 난 엄마 몰래 밥이랑 생선을 근처에다 갖다놨어요. 판자 틈으로 들여다보진 않았지만."
"그래서 어떻게 됐니?"
"그랬는데 새끼가 우는 거예요. 계속 울어요. 나가봤더니 두 마리가 나란히 앉아서 울다가 날 보면 달아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미가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거였어요. 어찌나 그 우는 소리가 슬프던지 밤에는 잠도 잘 수가 없었어요."
"..."
"아마 어미는 어디 가서 죽었나 봐요. 그렇지 않고서는 왜 돌아오지 않겠어요?"
"그래 새끼는 어찌 되었지?"
"밥도 갖다 주고 맛있는 생선도 갖다 주었는데 그래도 울어요."
하는데 쇼지의 눈에는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며칠을 울었는데, 그만 새끼들이 없어져 버렸어요. 어미 찾아 나갔다가 어디서 죽었을까요?"
"아니다. 어미가 와서 데리고 갔을 거야."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랬을 거다. 틀림없이. 자아 울지 말고."
오가다는 손수건을 꺼내어 아이 얼굴의 눈물을 닦아준다.
"남자도 슬플 때는 우는 거야. 그건 수치 아니다."
쇼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쇼짱은 나중에 뭐가 되고 싶지?"
"산지기가 되고 싶어요."
"산지기?"
"네. 아빠는 산지기가 되고 싶다 했더니 막 웃었어요. 엄마는 야단을 치고요."
"어째 산지기가 되고 싶지?"
"산에 사는 동물들 도와주려고요. 돈 많이 벌어서 배고프지 않게 모이도 나눠주고요."
"뱀도 도와줄래?"
"싫어! 그건 싫어요. 개구리 잡아먹는 걸 봤는데 징그러워."
쇼지는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쇼지는 동물을 좋아하는 구나."
"불쌍해서요. 겨울에 참새들이 울타리에 앉아서 우는 걸 보면 너무 너무 불쌍해요. 철새들도 먼 남쪽 나라까지 가려면 날개가 찢어지지 않을까 싶어서 눈물이 나요."
"그래 그렇지. 이 세상에 불쌍한 것이 제일 가슴 아프단다. 추운 것, 배고픈 것, 어미 잃은 것, 자아 우리 모이 또 사오자."
"네 그래요!"
쇼지는 지칠 줄 모르게 모이를 뿌리는 것이었다.
'자비스런 아이다.'
산지기가 되겠다 했을 때 찬하의 웃는 모습이 오가다 눈앞에 떠올랐다. 그가 어째서 아이에게 깊은 집착을 가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샛별같이 영롱하다는 표현도.
이들은 한 시가 다 되었을 때 일어섰다. 배고프다는 말을 둘이 동시에 하고는 웃었다.
"가자. 가서 비어버린 배부터 채우고 다음 계획을 세우기로 하자."
"네!"
둘은 식당을 찾아들었다. 오야꼬돈부리를 시켰다. 식당은 아주 작았지만 돈부리 맛은 아주 좋았다. 맛있게 음식을 먹는 쇼지를 바라보며 또 바라보며 오가다도 그릇을 비웠고 쇼지가 조금 남긴 것도 제 그릇에 덜어서 다 먹는다.
"아아 배부르다. 아저씨."
"응."
"오늘 참 재미있었어요. 아저씬 언제 가지요?"
"곧 가야 해."
"언제 또 오세요?"
"명년 이맘 때."
"그럼 그때도 우리 비둘기 모이 주어요."
"그러자. 한데 오늘 히비야 공원엔 처음 왔어?"
"아니오. 몇 번 아빠하고."
"아빠하고만?"
"네. 아빠하고 외출할 땐 히비야 공원에 왔어요."
"그래..."
오가다는 잠시 식탁을 내려다본다.
'좋은 사람이다. 따뜻하고...'
쇼지를 데리고 히비야 공원을 찾았다는 조찬하
"참 고마운 아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