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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5-1-3

5장 관음탱화

진주서 자동차를 대절한 서희는 안자와 함께 하동으로 향했다. 자동차 운전수는 만주로 간 홍이 또래였으며 같은 직업이라 서로 친면이 있었다. 그리고 홍이를 통하여 알게 된 연락이하고도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었다. 말씨에서 짐작이 되지만 연학은 그를 우녘(서울 방면)에서 온 사람이라 했다. 그러저러한 관계로, 자주 자동차를 이용하게 되는 서희도 그를 임의롭게 대했다. 달리는 차창 밖의 하늘은 맑고 높았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무르익고 있었다. 인사는 음산하고 각박했으나 가을은 찬란하고 자연은 풍요로웠다. 새들은 자유롭고 풀꽃이며 코스모스는 평화스러웠다. 다만 인간만은, 조선 땅에 태어난 사람들만은 날로 찌들어가고 있었다. 아니 조선 땅뿐이랴, 조선 사람뿐이랴.

"며칠 안 가서 아마 다꾸시도 폐지될 듯싶은데 사모님께서는 불편해서 어쩌지요?"

운전수 윤씨가 신작로를 응시하며 말했다.

"지금 때문에 어차피 그럴 수밖에 없겠지. 불편한 대로 살아야 할밖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서희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이 배급제라 그렇지도 하지만 그보다 불급한 것은 다 없앤다는 방침 때문일 겁니다."

"점점 더 어려워질 게야."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해가고 있습니다. 물자가 바닥날 때도 멀잖을 것 같고, 어제는 형님 환갑에 구두 한 켤레 지어드리려고 양화점엘 갔더니 돼지가죽밖엔 없었습니다. 그나마 여자 구두 한 켤레분만 있다 하더군요. 아마 알음알음으로 해주는 눈치였습니다. 야미로 해준다는 말도 있고, 우리 이웃에 사는 어떤 사람은 어장하는 친척한테서 돛베 몇 쪼가리를 얻어다가 신발을 지었다 하더구먼요."

"돛베로 신발을 지어?"

".그것도 배급으로 나오는 모양인데 가죽 못잖게 질기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무나가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창씨는 했는가?"

"했습니다. 안 하고 배기겠습니까? 학교 다니는 아이들 때문에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조선 사람들은 성을 갈겠다는 말이 큰 욕인데 이제는 속절없이 모두가 다 성을 갈아야 할 팔이니 조상한테 면목이 없지요."

"이 자동차가 폐지되면 윤씨 일자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것은 염려 없습니다. 운전수는 흔치 않으니까요. 하다못해 도라쿠라도 몰 수 있으니까요.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군에 끌러가지 않을까, 그겁니다."

"운전수로 말이지?"

", 다른 거야 뭐 지 나이가 있으니까, 하여간에 지원병 제도가 생기고부터는, 말이 지원병이지, 산골의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이면 모를까 누가 전장에 나가려 하겠습니까. 그러니 이수 저수 써가면서 강제로 내보내는 거지요. 젊은 사람들 나다니기도 어렵습니다. 아무 일도 아닌 것을 트집 잡아서 경찰서 오라 가라, 결국 나가네 됩니다."

"탄광에 사람들이 많이 뽑혀간다는데 그것도 강제로 가는 겐가?"

"아직은, 그러나 먹고 살 수 없는 사람들은 이판사판 돈벌어 오겠다며 떠나는데 처음 한두 달은 돈도 오고 편지도 오지만 좀 지나면 종무소식이라 하더군요. 하니 그곳 사정을 어찌 알겠습니까. 급해지면 그것도 강제로 뽑아가겠지요. 전쟁이 빨리 끝나야, 하자세월 전쟁 시작한 지가 벌써 몇 년입니까. 이래가지고는 못 살지요."

"그러게 말이다."

차창 밖에 벼 익는 냄새가 풍겨왔다. 나뭇잎은 높은 곳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으나 찢기고 먼지를 뒤집어쓴 길 양편의 포플라가 휘딱휘딱 지나간다. 초가 위의 붉은 고추가 눈부시다. 전개되는 풍경을 바라보며 서희는 한숨을 깨문다. 하루하루가 고문의 연속이었다. 숨을 죽이며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아예 이별을 하고 나면 체념이 될지 모른다. 얼마 전에 반전공작을 했다 하여 다수의 기독교 교도들이 검거되었다. 그것은 첨예하게 대립되어온 영미를 의식한 때문인지 모른다. 황국신민화의 강도를 높이기 위한 예비 작업인지 모른다. 여하튼 그 사건은 서희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그러한 사건들은 남편 길상의 예비 검속의 날이 멀지 않았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자식들이나 남편 앞에서 늘 태연하게 처신해왔지만 이렇게 혼자, 풍경과 자신이 마주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문제의 핵심 속에 자신이 앉아 있는 것을 느낀다.

", ."

말없이 앉아 있던 안자가 무슨 생각이 났던지 서희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저기 마님은 모르시지요?"

"?"

"박의원의 의사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서울 계시는 동안에."

"지금 뭐라 했느냐?"

서희는 몽롱하게 물었다.

"박의원의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언제?"

서희의 안색이 변했다.

"보름쯤 됐나 봅니다. 갑자기 그리 되셔가지고."

안자는 머뭇거렸다. 서희는 서울서 밤기차를 타고 내려왔는데 집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나서 하동으로 향해 출발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박의사의 죽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

"어떻게? 무슨 병으로."

"그게, , 글쎄요. 이런 말씀을 드려야 할지."

"말해보아."

"자살을 하셨다 하더구먼요."

"자살을"

서희는 전신이 떨려옴을 느낀다. 자기 자신의 생각에도 충격이 심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최씨 집안의 오랜 주치의였던 박의사의 갑작스런 죽음, 그것도 자살이라니, 충격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자살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서희는 돌팔매가 심장 한가운데에 날아든 것 같았다. 그것은 박의사의 죽음에 자신이 관련되어 있다는 바로 그 느낌이었다. 안자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서희의 충격이 상상 밖이어서 당황했고 뭐라 더 이상 말하는 것이 무서웠다. 안자는 어느 정도 박의사와 서희의 내력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박의사는 서희에 대한 감정을 가슴에 묻어둔 채 간 것은 아니었다. 항간에 소문이 나돌 만큼 그는 서희에 대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특히 본인인 최서희에게는. 그런데도 서희는 박의사를 회피하지 않았다. 쏟아놓은 감정을 마치 박의사 가슴에다 주워 담아 주듯이, 그것은 서희의 일관된 태도였다. 거의 당황하는 일 없이, 주저하는 일도 없이. 박의사가 서희를 단념하기 위하여 최후의 수단으로 결혼을 한 것은 서희를 눈앞에 두고 이루지 못할 사랑을 번민한 불행보다 더 큰 불행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결혼과 가정, 그것은 결혼이 아니었다. 가정도 아니었다. 전투장이었고 살벌한 벌판이었다.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마지막의 것까지 내버려야 했던 일종의 지옥이었다. 물론 여자가 나빴고 저속했으며 아귀와도 같이 물질을 탐했지만 박의사는 그것을 방치했다. 애당초 골라서 잡은 여자가 아니었고 그는 다만 형식만을 통과하자는 무책임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박의사의 자살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서희가 심장에 돌팔매가 날아든 듯 느낀 것은 박의사의 죽음에는 자신의 무게가 실려 있다는 자각 때문이지만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 때 자신으로 인하여 박의사가 불행했고 불행한 결혼을 했으며 자살을 택할밖에 없었다는 것에 대한 가책보다, 그 가책을 진부한 것으로 밀어붙여놓고 그에게 엄습해온 것은 왜 자신은 박의사를 회피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어째서 쏟아놓은 감정을 그의 가슴에 주워 담아주듯 그런 태도로 일관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최소한 친구로서 그를 잃지 않으려 했던가. 길상이 만주에 있는 동안 또 감옥에 있는 동안 박의사의 지극한 사람이 버팀목이 되어 준 것은 아니었던가. 아니 그런 것 이상의 감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서희는 눈물을 흘렸다.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는다. 안자는 또다시 당황하고 놀란다. 서희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죽음의 얘기가 나오고 분위기가 이상하여 그랬던지 윤씨도 말없이 운전만 한다. 가로수가 얼마만큼이나 지나갔을까. 하동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부사댁에 들렀다 가자."

서희는 평사리에 직행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시우의 모친 박씨는 언제나와 같이, 그렇다, 그에게는 서희를 맞이하는 데 고정된 표정이었다. 은근하면서 차갑고 단정하면서 모멸감을 숨기고 감사하면서 원망하는, 그 미묘한 심리가 만들어낸 표정.

"어서 오십시오. 오르시지요."

두 여인은 방으로 들어갔다. 바느질감을 한곁에 밀어붙인 박씨는 자리에 앉으면서, 그리고 두 여인은 예의바르고 그윽하게 맞절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무릎 위에 두 손을 얹고 서로 마주본다.

'내가 그대 간도에 아니 갔더라면, 이동진어른께서 그곳에 계셨다 하더라도 이댁 서방님은 따라나서지는 않았겠지요. 댁은 평생 동안 나를 원망하고 계십시다.'

서희 눈은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그때 당신이 이 집에 오지 않았더라면 남편이 저리 되지는 않았을 게요. 내 세월 자식들의 세월도 그렇게 험하지는 않았을 게요. 수없이 흘린 눈물을 당신은 아십니까? 알 리가 없지요.'

박씨의 눈도 늘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서희는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혼자 적적하시겠습니다. 아드님댁에 가시지요."

"아닙니다. 평생을 이리 살아서 그런지 새삼스럽게 적적할 것도 없습니다. 그보다 걱정되시겠습니다."

걱정되겠다는 것은 길상을 두고 한 말이었다. 길상에 대해서는 대개 지칭이 없는 것이 박씨 대화의 특색이었다. 길상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하는 망설임 때문은 아니었고, 삼십 년 넘게 세월이 흘렀으며 자식들이 장성하여 손자까지 본 마당에, 변함없이 확고부동한 박씨의 의지 표명이었다. 최참판댁의 하나 남은 혈육 최서희와 혼인을 했다 해서 하인 김길상을 격상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문벌과 부와 미모, 강인하며 위엄으로 무장이 된 최서희를 대적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박씨였지만, 그들 최서희와 김길상의 결합을 철저히 부정하는 단연 압도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자의 시샘, 수십 년 가슴에 묻어두고 있는 원망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사대부 집안이라는 연대감에서도 물론 그러했지만 오랜 세월 돈독하게 지내온 양가의 내력을 보아서도 하인과의 혼인은 용납될 수 없는 수치요 오욕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최씨 문중의 불명예였을 뿐만 아니라 이부사댁도 무관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는 박씨였다. 길들여진 가치관, 그 가치관은 그토록 오래 인고를 지탱할 수 있었던 지렛대이기도 했다. 앞서 대적이라는 말을 했지만 당대의 두 여인은 사실 균등한 자존심으로 양가의 형식적 교류를 유지해왔다 할 수 있겠다. 한쪽은 장자풍으로, 다른 한쪽은 청백리의 가풍으로 크게 손상되지 않고 이어져왔다고 볼 수 있었다. 서희는 도와주어야겠기에 도와주었을 뿐, 아니 도와준다면 어폐가 있고 가을 추수가 끝나면 인사차 곡식이며 피륙을 한 바리 이부사댁 문전까지 실어다 날랐고 박씨는 또한 고맙게 받았으되 그것으로 인하여 사리 판단을 달리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규범이었던 것이다.

"걱정한들, 속수무책이지요."

서희는 가볍게 받아넘겼다. 길상을 존중하지 않는 의도에는 무관심이었던 것이다.

"시우는 진주서 가끔 봅니다만 민우는 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다들 잘 있는지요."

"젊은 애들이야 뭐, 윤국이는 동경서 더러 만난다 하더구먼요."

"그런 모양입니다."

"우리 민우는 학운이 없어서수재 아드님을 둔 환국이 어머님은 얼마나 좋으시겠어요."

"학벌이 좋으면 뭣합니까. 써먹지도 못하는데, 시우같이 의학을 해서 의사가 되는 일이원."

관례적인 인사치레 몇 마디, 괴롭다면 괴롭고, 불편한 대면을 굳이 아니 해도 될 일이었다. 하동을 지나쳐 평사리로 곧장 갈 수도 있었다. 특히 심경이 혼란스러운 오늘 같은 날에 왜 하필 이부사댁에 들렀는지 서희 자신도 알지 못했다. 자동차 안에 앉아 있을 기분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막연한 상실감 때문에 견딜 수 없었는지 모른다.

'서른 두 해 전이던가? 이 집에서 용정으로 떠나던 그 해가. 이동진 어른의 생사를 알기 위하여 우리 일행과 함께 떠나려고 이상현씨가 나섰을 때 나이 어린 댁네의 마음이 어떠하였을꼬? 내가 없었던들 그렇게 마음이 괴롭지는 않았을 것을.'

정작 가슴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은 다른데 그와 상관없는 지난 일을 서희는 떠올리고 있었다. 회한도 아니요, 인위적으로 어쩔 수 없었다는 발뺌도 아니요, 새삼스런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눈앞에 앉아 있는 초로의 여자 모습이 갑자기 기이하게 눈에 비쳤다. 고집이 뭉쳐진 듯 하나밖에는 알려 하지도 않는, 완강해 뵈는 두상, 결코 웃을 것 같지 않는 갸름한 얼굴, 회색 자미사 저고리 앞섶에는 바늘이 꽂혀 있었다. 눈을 내리깐 채 한 번도 서희를 정면으로 보려 하지 않았던 서른두 해 전의 깡말랐던 그 새댁, 도대체 그 사이 무엇이 지나갔으며 어떻게 빼앗아갔는가 숙연해지면서 일종의 전율을 느낀다. 박씨의 세월은 서희 자신의 세월이었기 때문이다.

"양현에게 혼담이 있을 법도 한데 어떻습니까?"

벼르고 있었던지 박씨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었다.

"아직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니까 서둘 필요가 있겠습니까?"

했으나 다분히 곤욕스러워한다.

"학생이라도 그렇지요. 과년한 처녀 아닙니까."

". 나이는 꽉 찼지요."

"혹 그 아이 근본 때문에 혼인길이 쉬이 열리지 않는 것이나 아닌지."

"웬만한 곳에서 감히 청혼을 못하는 거지요."

처음으로 서희 음성에 감정이 실렸다.

"그렇다면 다행이겠습니다만, 그러나 혼담이 있을 때는 반드시 그 일이 거론될 것인즉 미리 생각은 해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생각이야 골백번도 더 하지요. 아이가 총명하니까 그 아이 판단에 맡기는 것이 좋을 듯도 하고, 부인께서는 양현이 어여쁘지 않습니까?"

매우 원색적인 질문이다.

"말 가지고 환국이 어머님께서 믿으시겠습니까?"

질문에 상응한 답변이다. 당신이 내 마음을 의심하는데 굳이 변명할 이유가 없는 뜻이다. 서희는 희미하게 웃었다.

"용서하시오. 제가 지나쳤나 봅니다. 양현의 근본 얘기가 나오니 어째 마음이 언짢았습니다."

"저 역시 근심이 되어 한 말이었고, 하기는 품에서 기른 환국이 어머님만이야 하겠습니까만 그래도 명색이, 어찌 되었거나 어민데 그 애 장래를 걱정하는 마음은 다를 바 없는 줄 압니다."

"덮어두고 넘어갈 일은 아니지요. 그것을 알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여의사가 되라 하며 길렀습니다.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본인이 원한다면 독신으로 살 수도 있는 일 아닐까요?"

"그러나 출가는 해야지요. 좀 낮추어서 고른다면."

그 말대꾸는 없이

"그 아이 근본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처지라면 양현을 굳이 여의고 싶지 않습니다."

박씨 얼굴에 완연히 불쾌해하는 빛이 나타났다. 비록 양현을 길렀다고는 하나, 이씨 집안의 엄연한 핏줄이며 이미 호적까지 옮겨온 형편인데 여의고 싶지 않다는 서희의 말은 깡그리 이쪽 의사를 무시한 독단적인 것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그간, 양현을 저만큼이나 길러주신 것을 모르는 바 아니요, 고맙게 생각합니다만 이씨 집안의 핏줄인 만큼 혼사에 관한 일은 저희들도 알아야 하고 상의도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서희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다. 한참 후

"그야 말할 나위가 없지요."

"진작부터 우리가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당연히 데려다 길러야 했던 아이였고, 터놓고 얘기하자면 그 점, 유감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죽은 봉순이가 저더러 길러달라 하기도 했지만 시우아버님께서 밝혀야 했든 일이었기에."

그 말에 대해서는 박씨도 반격할 여지가 없었다.

"하기는 저만큼 훌륭하게 기르지는 못했겠지요. 한데 이번에는 무슨 일로 내려오셨습니까?

박씨는 화제를 바꾸었다.

", 도솔암에 가보아야 할 일이 생겨서요. 내일 법당에 관음탱화를 장엄하는데."

"내일까지 대 갈 수 있을까요?"

"글쎄, 서둘렀지만 이미 늦어진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 하고 서희는 일어섰다. 대문을 나서려 했을 때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어디 불편한 데라도."

박씨가 말했다.

"차멀미 땜에 그런가 보지요."

작별을 하고 자동차에 오른 서희는

"나루터까지."

하고 말했다.

"?"

운전수 윤씨가 돌아보며 의아해한다.

"나루터에서 날 내려주고 윤씨는 돌아가도록."

"어째 그러십니까?"

안자가 물었다.

"나룻배를 타고 가겠다."

한없이 가라앉는 서희 분위기에 질려서인지 윤씨나 안자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항상 그림자같이 서희를 따라다니던 유모는 요즘 병이 잦아 진주 집에 남았고 혼인한 지 십여 년이 지났으나 아이가 없는 안자가 유모를 대신하여 서희를 수행해온 것이다. 나루터에서 윤씨는 진주를 향해 돌아갔고 옷가방을 든 안자와 서희는 나룻배에 올랐다. 높고 푸른 하늘과 같이 강물도 푸르고 잔잔했다. 건너편 강가에는 가을을 타는 숲이 있었고 어디로 가는지 철새들이 높이 떠서 날아가고 있었다. 애처롭게 날아가 있었다. 어찌하여 삼라만상, 머무는 것이 없는가. 마흔여덟의 최서희는 아직도 아름다웠다. 서산에 해가 지는, 그 노을빛같이 아름다웠다. 물살을 가르며 가는 배, 뱃전에 서 있는 여인, 하얀 숙소(熟素) 겹저고리치마를 입고, 옷고름이 나부끼고 치맛자락이 강바람에 나부낀다. 그는 진정 아름다웠다. 고귀하고 위엄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외로운 모습이었다. 안자는 근심스럽게 서희 뒤에 서서 상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사리에 닿기까지 서희는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 마을길로 들어섰다. 집에 이르는 오르막길로 접어들었다. 이때 길가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석이의 모친, 성환 할머니가 늙은 몸을 일으켰다.

"마님!"

부르며 서희에게 다가서려는 순간, 쏜살같이 내려오던 자전거가 서희와 성환 할머니를 가르듯, 그러나 핸들을 휙 꺾는 바람에 성환 할머니가 길 위에 나둥그러진다. 어떻게 보면 고의적으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자전거에서 내린 개동이 언성을 높여 말했다.

"할일이 없이믄 집구석에서 낮잠이나 자지, 무신 청승 떠노라고 날마다 길거리에 나앉아 있소!"

적반하장, 도리어 입정 사납게 개동은 노인을 몰아세운다. 안자는 얼른 가방을 놓고 나둥그러진 성환 할머니를 안아 일으키고 있었다.

"국가 비상시국에 식량도 모자라는데 늙으믄 죽어야 하는 기라. 강아지맨크로 발질에 걸거적거려서 사람 부아 돋구기 딱 알맞구마는."

하면서도 개동은 서희에게 곁눈질을 하며 기색을 살핀다. 처음부터 시비를 걸자고 시작한 노릇, 두려워서 기색을 살핀 것은 물론 아니다.

"이놈!"

서릿발같이 매서운 서희 눈이 개동을 쏘아본다.

"이놈이라니요?"

일부러 어리둥절해하는 시늉을 하며 푸르죽죽하고 두툼한 입술을 혀끝으로 핥으며 되뇌었다.

"네가 면소에서 서기질 한다는 바로 그놈이냐?"

"지가 머를 잘못했길래 놈자를 붙이는 깁니까. 알기는 잘 알고 있구마요. 최참판댁 종놈 아닌 면소 서기라는 것을. 아심서 국가와 관리를 보고 놈자 붙이도 되는 깁니까?"

기고만장이다. 목을 꼿꼿이 세우고 눈을 부릅뜨며 거칠 것 없이 지껄였다. 성환 할머니는 허리를 다쳤는지 앉은 채 일어서질 못한다.

"차서방댁."

서희가 불렀다. 혼인한 이후로는 안자를 차서방댁이라 불렀다.

"가서 건이아범을 불러오게."

"."

안자는 가방을 놔둔 채 집을 향해 급히 달려간다.

"면소 서기면 서기지. 면민들한테, 더구나 노인한테 일부러 자전거를 들이대어 부상을 입히고, 뭐 강아지? 죽어야 한다구? 그런 희롱을 해도 괜찮다는 상부 허락이라도 받은 게야?"

"허 참, 그만 가시이소. 남의 일에 와 그캅니까? 최참판댁이 일일이 참견할 그런 시절이 아닌 기라요."

자기 숙모나 이웃집 아주머니 대하듯, 친숙한 말투가 서희 자존심에 흠집을 내고 분을 참지 못하여 파랗게 질릴 것을 예상하며 능글맞게 군다.

"허파에 바람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구먼. 말귀도 어두운 모양이니, 내 내일이라도 하동에 나가서 군수보고 따져봐야겠다. 일개 면소 서기가 이 같은 행패를 부려도 되느냐구."

"행패는 무신 행팹니까. 일부러 그랬든 것도 아니겄고 길이 가꾸막이라."

당황한다. 군수에게 가서 따지겠다는 말에 켕긴 것이다.

"할머니한테 빌어!"

", 그거는."

정신이 번쩍 드는 모양이었다. 얼굴빛도 달라져가고 있었다. 공연히 몸이 근질근질하고 자기 과시도 해보고 싶었으며 까닭 없이 미웠던 최씨네 식구들, 심술을 부려본 것인데 일 크게 벌어진 것을 개동은 깨달은 것이다. 오서방을 죽이려고 낫을 휘둘렀다가 되레 자기 자신의 목숨을 잃고 만 아비 우서방보다 배짱이 작은 건지, 보통학교는 나왔다 하나,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운 서기 직함에 거는 집착이 너무 강한 때문인지, 개동의 낭패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길상이 요주의(要注意) 인물로 주목을 받고 있었지만 사실 서희의 경우는 외관상 분리된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다. 간도에서 돌아온 후 이십여 년 동안, 김환과 길상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활동과 투쟁을 교묘히 엄폐해가면서 꾸준히 최씨 일문의 기반을 튼튼하게 다져왔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앞뒤가 다른 가면을 쓰고서도 늘 앞면만 보여왔다 할 수 있고, 그러니까 친일적 경향을 띠면서 회유의 손길을 뻗쳐놓을 필요가 있었고 요소요소, 상당히 광범위하게 호의의 통로를 만들어놨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막대한 재력이 투입되었고 서희의 지략이 탁월했기 때문이지만 한편 그의 미모, 천성적으로 부여된 위엄, 그리고 어렸을 적에 조준구에게서 배운 일본말 일본글을 기초 삼아 능란하게 일본말을 구사하고 독서를 통하여 일본 사정에 소상했던 것이 큰 비중으로 작용했음도 부정 못한다. 만석꾼의 대지주요 근화방직의 대주주, 또한 근화방직의 사주이자 사장인 황태수와는 사돈지간이니 그 세가 대단하다면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길상을 약점으로 보고 방자하기 짝이 없는 우물 안 개구리 개동이가 생각하듯 주재소 순사가 들락거리며 죄인 다루듯 그런 수준은 아니라는 얘기다. 계명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지만 독립자금 강탈 사건에서는, 길상에게서 혐의가 멀어졌고 그 사건 자체가 미궁으로 끝난 지 십여 년, 잊혀진 상태였다. 그 사건이 길상의 주변에서 무산된 데는 서희의 노력, 서희의 존재 자체가 큰 몫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하튼 군수를 만나 따지겠다 한 말은 으름장이 아니었다. 서희는 그럴 수 있었다.

"동네에서 횡포가 자심하다는 말을 듣긴 들었으나 이토록 방자하고 포악한 줄은 몰랐구나. 할머니한테 무릎 꿇고 빌지 못하겠느냐?"

어느새 소식이 갔는지 동네 사람들이 나와 먼발치에서 맴돌고 있었다.

"노인네 부상이 심하면 고소할 수도 있고 치료비도 물어야 할 게야. 동생이 지원병으로 나갔으면 형은 더욱 모범을 보여야 하거늘."

개동은 결국 마음을 정한다. 시간을 끌어봐야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며 입장만 난처해질 것이 뻔했다. 빨리 끝을 내고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지가 잘못했십니다. 이후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

개동은 길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성환이 할무이 잘못해소. 일진이 나빠서 그만, 용서하시이소."

성환 할머니는 물끄러미 쳐다볼 뿐 말이 없었다. 허리를 다쳤는지 다리를 다쳤는지 얼굴을 찡그리곤 한다. 건이 아범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안자도 뒤따라왔다.

"건이 아범은 할머니를 집까지 업어다 드리게."

서희가 말했다.

"예 마님."

땀을 닦고 나서 건이 아범은 안자의 도움을 받아 성환 할머니를 들쳐 업는다. 개동이도 도와주는 척했다.

"가자."

안자에게 말한 서희는 앞서간다. 서희가 가고 성환 할머니가 업혀간 뒤 마을 사람들은 개동이 주변에 모여들었다.

"무슨 구겡거리가 났나!"

악을 쓰며 개동은 눈을 희번덕거렀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 하나 말없이 개동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제에기랄!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라니."

투덜거리며 자전거를 끌고 가려 하는데 뒤늦게 소식을 들은 개동의 어미 우서방댁이 거품을 물고 달려왔다. 그의 뒤를 쫓아 맏이인 일동(一東)이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무신 일고!"

우서방댁이 아들에게 소리쳐 물었다.

"어느 연놈이 내 아들을 갬히! 나라에서 녹을 묵는 내 아들을 갬히! 무릎을 꿇렸다고?"

딱 바라진 체구,, 길길이 뛴다.

"개동아! 대관절 우찌 된 일고오! 내가 알아야 사생결단을 내든지, 지 죽고 내 죽지 해볼 거 아니가!"

늘 하는 그 투에 그 말이 총알같이 퉁겨져 나온다. 큰 시비건 작은 시비건 간에 초장부터 험하게 몰아치는 것이 우서방네 식구들의 상투적 싸움의 수법이다. 그리고 식구들이 한꺼번에 달려드는 것도 그 집 식구들의 특징이었다.

"대관절 누하고 머가 우찌 됐다 카노! 말을 해라 이놈아! 나는 자식까지 나라에 바친 몸이다! 그런 내가 무서블 기이 머 있겄노! 수 틀리믄 싹 씻갓아 엎어부리든 불을 싸질러부리든지 그라고 나 하나 죽으믄 그만 아니가?“

말을 하면서 치맛자락을 걷어 질끈 동여매고 소매도 걷어붙인다. 좀 모자라는 일동이는 소 울음 같은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모두들, 흔히 있는 우가네 식구들 광증을 지켜볼 뿐 누구 하나 나서서 경위를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이 사람들아! 말 좀 해도고! 와 말이 없노! 꿀묵은 버부리가? 아이고오 알겄다, 운냐 너거들 심보를 알겄다. 인심이 이래가지고 우찌 살겄노. 나중에 우떤 연놈이든 내 집에 와서 아습은 소리만 했다 봐라 쇳바닥을 뽑아부릴 기다! 아이구야아 숭악한 인심이네!"

우서방댁은 개동을 흔들었다.

"와 니는 말이 없노!"

"강약이 부동이라."

씹어뱉듯 개동이 말했다.

"머라? 강약이 부동이라니? 무신 말고! 이 동네에서 니를 하시라는 연놈이 있다 그 말가?"

개동이는 어미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며 귓속말을 했다. 우서방댁 얼굴빛이 달라졌다. 그리고 풀이 죽는다.

"그만 떠들어라!"

우서방댁은 신경질적으로 큰아들 일동이 옆구리를 쥐어박았다. 개동은 뭇시선을 뒤통수에 느끼며 볼서납게 자전거를 끌고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우서방댁도 일동의 등을 떠밀다시피 슬그머니 사라졌다. 군수 한번 들먹인 것이 포악한 우씨 일가의 즉효약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떠나자마자 사람들은 와글바글 떠들기 시작했다.

"하늘 높은 줄 모리고 깨춤을 추더미는 꼴 좋다!"

"어이구 씨원해라. 삼 년 묵은 체증이 내리간 것 겉다. 아침저녁 자전거 끌고 댕기는 꼴만 봐도 독사를 만난 듯 가심이 설렁하더마는."

"와 아니라. 제세상 만낸 듯키 갈롱 피는 그 꼬라지 눈이 씨어서 못 보겄더마는 코가 석자 오치나 빠져서 가는 꼴을 보이 정말 씨원하다. 개도 방 봐감서 똥 싼다 했는데 개동이 그놈이 감히 최참판댁을 대적해? 하늘을 쓰고 도리질을 하지. 예날로 치믄 면소 서기는 아전 찌꺼러기도 안 되는데, 언감생심, 말이나 되나?"

"그러이 면장이라도 됐더라믄 동네 사람 달 삶아 묵을라 안 카겄나? 우서방을 동네 사람들이 직인 것도 아니겄고 잘못한 기이 없는데 동네 사람이 오서방을 사형하라고 소청해야 했든가? 밤낮 하는 말이 원수 갚겄다. 아까도 들었제? 씻갓아 엎어부리느리 불을 싸질러부리느니, 세상에, 살다 살다 그런 악종은 처음 봤다. 한두 분 하는 소리라야제. 구보다 니 무신 소문 못 들었나?"

"소문이리니?"

"아들 때문에 쉬쉬했다 카드마는, 그저껜가? 우서방네 제집이 김훈장댁에 가서 산청댁한테 온갖 행패를 다 부렸다 카데."

"아니! 행패를 부리다니 무신 소리고?"

"세상 참 많이 변했제. 명색이 양반댁 마님인데 개망나니 짙은 제집한테 욕설까지 들었이니, 사람이나 엄전하지 않다믄 또 몰라. 엄전하고 사리 밝고, 없이 살아 그렇지 만사가 칠칠한데 그 제집이 년자까지 놓으믄서 퍼부었다 카이 복통을 칠 일 아니가. 남의 일일 지마는 내가 다 분해서 벌벌 떨리더마."

"멋 땜에 그랬든고?"

"대단치도 않은 일 가지고, 아마 산청댁이 아잇살이나 위일 거로?"

"위지이. 네댓 살은 조히 더 먹었일 기다."

"그 제집 입이 하도 험해서 사람이 그리믄 못쓴다 했다든가? 다짜고짜 삿대질을 함서 달라들더라는 기라. 주제넘게 누굴 훈계하는가, 별의별 소리를, 내사마 더러바서 입에 올리기도 싫다마는 양반년의 무엇에는 금테두리 둘렀느냐."

"그년 정말 미쳤구나."

"곱다시 당하고 말 한마디 못했단다. 그거를 갈바서, 체통이 있지 욕을 하겄나 쥐어박겄나. 한대 때맀다가는 머리채 감으믄서 달라들기고, 멍하니 쳐다만 보더라 그러더마. 남이 부끄러버 우애 얼굴 들고 댕기겄는가 한탄함서, 그 자리에 있었든 사람보고 신신당부를 했다누마. 아들 모리게 하라고, 하기사 그 유순한 아들이 알았다 봐라? 분을 못 참고 머라 하는 날에는 그놈 집구석 벌떼겉이 달겨들어서 아들이 무신 봉변을 당할지 뻔하제. 참 세상 많이 변했다."

"그 계집이 김훈장댁에 무신 유갬이 있었든가?"

"있었제.

"무신?"

"오서방댁이 여기 살 때까지만 해도 김훈장댁을 자주 드나들었거든. 글을 모르다 보니 까막소에 있는 오서방 일로 의논도 하고, 김훈장맨크로 범석이 그 사람도 동네 사람 일이라 카믄 어디 마다할성미더나. 자연고로 가게 되믄 산청댁보고 하소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그것을 우가네 제집이 가심에 접어두었던 기라. 이자 아들이 면소 서기가 됬이니 기고만장해서."

"앙갚음한다 그거지."

"하모 그러이 무섭제."

아낙들이 그런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남정네들은 우가네 식구들을 마을에서 쫓아내느냐 마느냐 양쪽으로 의견이 갈리어 떠들고 있었다.

"쫓아내고 싶은 심정이야 꿀떡 같지. 하나, 재동이놈이 지원병인가 뭔가 나갔고 개동이놈은 면소 서긴데 그기이 어디 쉬운 일이겄나? 자칫 잘못 건디맀다가 무신 횡액을 당할지 그 악종들을 몰라 하는 소리가? 다 당해본 경험이 있음서, 안 될 일 가지고 왈가왈부할 것 없다."

"하지마는 최참판댁에서 나서주믄은 안 될 것도 없지. 읍내에 가서 군수를 만나 그놈 악행을 고하고 우리도 연판장을 내고 해서 개동이 모가지를 짤라부리믄 되는 기라. 동네가 시끄러버서 견딜 수가 있어야제. 친정에 구렝이 든 것 갚애서 맨날 기분이 안 좋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최참판댁 마님이 나서주시믄 개동이놈 모가지는 뗄 수 있겄지, 그러나. 그놈 서기질만 그만 두믄은 쫓아내는 거사."

"허허허, 하나는 아는데 둘은 모르고 있네. 지원병으로 군대에 나간 재동이놈 가족을 동네에서 내어쫓는다믄 문제가 크지지. 순순히 나갈 것들도 아니지마는 당국에서 가만있겠나? 도리어 발목 잽히는 꼴이라."

"그거는 그렇네."

"최참판댁에서도 그거를 아니께. 오늘도 그댁 마님이 그 정도로 하신 기라. 예날 같으믄 내어쫓을 것도 없이 나무에 매달아서 패직이제."

"김훈장이 기실 적에는, 하기야 김평산이 같은 놈도 있어서 동네가 쑥밭이 되다시피 했지마는.

조준구는 우떻고?"

"그기이 다 왜놈들이 들어온 탓이 아니겠나."

길섶에 쭈그리고 앉아 곰방대를 빨면서 들판을 바라보고 있던 바우, 이제 동네에서 연장자가 되어 있는 바우는 큰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입조심들 하라고. 고해바치는 연놈이 있을지 누가 아노. 답대비 주둥이만 가지고 일 치를라 카는 기이 사단이라. 정작 일 벌어지믄 자라모가지맨크로 쑥 들어감서."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착잡하고 이상야릇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성환할매가 허리를 뿌라았다 카든데 그기이 정말가?"

누군가가 유독 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아니, 다리를 삐었다 카지?"

"건이아배가 와서 업고 갔이니 어딜 다쳐도 다쳤겄지."

그러나 목소리들은 어딘지 공허했고 불안스러움이 깃들여 있었다. 바우가 곰방대를 길가 돌에다 대고 탕탕 치더니 일어섰다. 그리고 중얼거리기를

"사람 같은 거는 다 가고 없으이."

하다가

"모두 돌아가서 구들막이나 지키라. 그래야 신상에 안 좋겄나?"

하고는 횡하니 가버린다. 사람들은 차츰 흩어지기 시작했다.

"성환네 집에 가자."

야무네가 말했다.

"그러입시다."

친일네가 일어섰다. 두 사람은 질러서 가느라고 논둑길로 들어섰다. 논둑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간다. 허탈한 듯한 모습이다. 뜻밖의 사건이 터지고 사람들이 와글바글 모여들었으나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개동은 내일도 자전거를 타고 마을길을 지날 것이다

"성님 마목이지요."

천일네가 앞서가는 야무네한테 말했다.

"마목이제. 동네 마목이다. 왜놈 세를 업고 그라는데 그놈이 좀체 해서는 씨러지겄나."

"어이구이 사는 기이 와 이런지 모리겄소. 세상만사 다 귀찮고 딱 눈 감아부맀이믄 좋겄소."

"자네는 대금산일세. 나겉은 것도 숨이 붙어 있는데."

야무네의 머리는 백발이었다. 허리도 구부정했다. 천일네도 많이 늙었다.

"내사 우리 야무 때문에 죽을까 겁난다. 그 불쌍한 거 내비리두고 내가 가믄 어느 누가 돌보겄노. 그거를 생각하믄 밤에도 잠이 안 온다."

"성님 그 심정 아요."

"모린다. 우째 저저히 그거를 아노. 골병이 든 내 가심 천지간에 어느 누가 알꼬. 제집아 하나가 내 가슴에다 못을 박고 가더니 그거를 잊을 만하니까 야무가 저 형상 되어 돌아오고. 세상에 버선목이라 뒤집어 뵈겄나, 시시로 억울한 맴이 들믄 하늘이 원망시럽다."

"그래도 성님 그 일만은 발설하믄 안 됩니다."

"그러이 가심이 터지제. 내 속에서 났는데 우리 야무가 도적질했겄나? 청백 같은 내 자식이 도적질해서 까막소 살았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안 그라나? 밤낮없이 방구석에서 천정만 보고 있는 것만도 가심이 찢어지는데."

눈물을 닦는다.

"빌어묵을 놈, 남 안 하는 노동운동인가 머 공산당이라 카든가 일본에 보낸 기이 이리 후회가 된다. 죽이라도 묵음서 함께 살았이믄 장개도 가고 며느리 볼 나이 아니가."

"성님 그 말만은, 입 꼭 다물고 있이소. 그거를 알믄은 주재소에서도 시끄러불 기고 개동이 그놈한테도 구실을 주는 기라요. 내 아들은 도둑놈이다 아예 그리 생각하고 기시이소."

"하니 내가 이리 가심이 터지지. 아이구 숨 차다. 좀 쉬었다가 가자."

"그라입시다."

두 늙은이는 논둑길에 주저앉는다. 벼익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개구리들이 퐁당퐁당 논물 속으로 뛰어든다.

"천일네."

"."

"생각해보믄. 오복이 애비도 괘씸타."

"그리 생각지 마소. 딱쇠 맘인들 오죽하겠소."

"지가 뉘 덕에 논마지기나 가지고 굶잖고 사노."

"그걸 모리겄소."

"다 지 성이 일본 가서 피땀으로 벌어 부치준 돈 아니었으믄 우찌 땅을 장만했을꼬. 그런 성이 병들어 돌아왔으믄 받드는 것이 도리 아니겄나? 설사 성이 할 짓을 안 했다 카더라도 내 살인데 내치겄나?"

"그거는 성님이 이해해야 합니다. 어디 한두 해요? 십 년 넘기 저러고 있이이 짜증날 만도 하지요."

"아니다, 아니다, 딱쇠각 예날에는 안 그랬네라. 지금도 생각이 난다. 우리 푸건이 병났다도 시가서 데리가라 했일 때, 딱쇠하고 둘이서 섬에 갔던 일이 엊그제만 같다. 푸건이를 집에 데리와서 병수발을 할 직에 우리 딱쇠는 약값 대노라 참 나뭇짐도 많이 졌제. 날이믄 날마다 나무를 해서 하동으로 팔러 갔다. 그래도 어디 한분 군담을 할까. 그러든 그놈이 제집을 얻고부터는."

"제집 말 안 듣는 소나아가 없다 안 카요. 집집마다 다 그렇지. 그거 일일이 생각하믄 논이 나서 못 사요."

"그래도 너거사 무신 걱정고, 집안에 우환이 없으이."

결국 논둑길에 퍼질러 앉아서 두 늙은 여자는 익어가는 벼를 등지고 함께 울기 시작했다. 임인년(壬寅年)의 호열자와 그 이듬해 보리 흉년을 겪었을 때 삼십대였던 천일네와 야무네는 마을에서도 몇 안 남은 세대다. 진주에 영팔노인과 두만네가 살아 있었고 평사리에는 문밖출입을 못하게 된 봉기노인, 그의 안사람 두리네와 윗마을 강노인 정도, 좀 나이 처지는 축에 김훈장의 양자 한경이가 있었다. 끝봉이 오서방의 외사촌 전사방, 바우는 육십줄의 중반이었으며 성환 할매 야무네보다 서너 살 딸어지는 천일네가 칠십 고령이었다. 사십 년 가까이 흘러버린 세월, 많은 사람들이 갔고 자취도 남아 있질 않았으며 몇 사람 있는 늙은이들에게 황혼은 더욱 짙고 어둡게 다가오고 있었다. 천일네의 눈물은 날로 무력해지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또 멀고 먼 만주 땅에 있는 큰아들 천일의 식구들이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떠나버렸음을 슬퍼한 것이다.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처남과 의논하여 진주에다 기와집 한 채를 사놨다는 것인데 어미에게는 의논이 없었다. 함께 사는 둘째며느리 성자네의 경우도 뜻이 맞지 않아 더러 티격태격 다투게도 되는데 그럴 때마다 아들은 제 가속 편이었고 정성을 다하여 기른 손자 손녀까지 제 어미 편을 드는, 그런 저런 일에 대한 설움인데, 야무네는 노인들이 대부분 겪게 되는 고적, 쓸모없는 존재를 한탄하는 그런 눈물은 아니었다. 병들었다 하여 시가에서 내친 딸을 데려다가 병을 고쳐보려고, 그때 딱쇠는 누이를 위하여 허리가 휘도록 나무를 해서 하동장에 내다 팔곤 했다. 그러나 허사였고 푸건이를 보내고 말았다. 오직 등불과도 같았던 야무가 일본서 파업에 가담했다든가, 노동운동을 했다든가, 여러 해 복역을 하고 폐인이 되어 돌아와서 아직도 신음 중이니 야무네로서는 설사 불측한 자식일망정 살아남아 있고 몸 성하게 부모 곁에 있다면 그 이상 부러울 것이 뭐겠느냐 싶었을 것은 당연하다. 한편 성환 할매의 경우도 여러 가지 형편이 딱하게 돼 있었다. 요즈막에 와서 성환 할매는 길가에 나앉아 하염없이 강가에 이르는 길 쪽을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다. 사람들은 나이 드니까 돌아오지 않는 아들 석이를 기다린다고들 했지만 물론 아들을 기다리는 마음이야 한결같았지만 보다 절실한 일이 또 있었다. 애당초 고향으로 돌아와 거처하게 되면서 못사는 딸네 식구들을 불러다 합가했던 것이 잘못된 일이었다. 늙은 몸, 어린 것들을 위탁했다기보다 성환 할매는 오히려 짐을 하나 더 짊어진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육친의 배신을 뼈가 저릴 만큼 체험하였다. 딸 귀남네는 친손자 손녀만을 위한다 하여 불만이었고 최참판댁에서 성환을 학교에 보낸 것까지 시기하여 노골적으로 어미에게 몹쓸 딸이 되었고 성환 할매는 또 아비 어미 없는 조카들을 눈밖에 내며 제 자식만 챙겨 먹이는 귀남네에 분노를 느꼈다. 게다가 동네에서 이마빡에 소 우자를 붙이고 다니는 사내로 치부하는 사위는 본 바 없고 제 욕심만 채우는 미련한 위인이었기에 최참판댁에서 떼어준 땅이며 훙이가 물려준 집이며 다 성환할매와 석이 자식들을 위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식구처럼 노인과 어린 것들의 설 자리는 좁아지기만 했다. 그러던 참에 소같이 일하고 제 식구밖에 모르던 귀남 아비에게 바람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일 년 열두 달 너절한 옷차림이던 그가 나들이옷으로 갈아입고 읍내 출입이 잦아졌을 때 사람들은 소가 제법 사람 같다는 말로 놀려댔지만 차마 그가 딴 짓 하리란 생각은 못했다. 그러나 집에 들면 곧잘 귀남네를 두들겨 패고 읍내서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투전판에서 많은 돈을 땄다, 어떤 과부와 눈이 맞았다, 장터 야바위꾼과 어울려 다니더라 등등, 기어이 그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가 사라진 지도 팔구 년이나 된다. 귀남네는 풀이 죽었고 성환 할매를 의지하는 이와 살아갈 방도가 없어졌다. 사람들은 어매와 조카들에게 몹시 하더니 벌을 받아 그렇다는 둥 쑥덕공론이었다. 귀남네도 딸자식, 그의 시름을 생각하면 불행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집안은 소강상태였다. 보통학교를 나온 성환은 연학이 진주로 데려가서 중학교에 넣었고 지금은 최씨집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졸업도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귀남은 남의 집 고공살이로 떠났고 남희는 읍내 보통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땅은 마을 사람들이 부쳐서 식량은 되었고 고성에 사는 작은딸 복연이가 많이 도와주는 편이었다. 시부모가 다 세상을 버렸고 살림이 넉넉해졌기에 친정을 많이 돌보아주는 것이다. 이런 참에 평지풍파가 일어났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환과 남희의 생모 양을례가 평사리에 나타났던 것이다.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고 머리를 지지고 나타났다. 원래 살빛이 희었지만 잘 가꾸어서 윤기가 도는 얼굴하며 야하게 보였으나 세련이 된 모습이었다. 결혼 전에는 크리스천이었고 독립운동을 하는 이복(異腹)오라비의 영향도 있어서 꽤 괜찮은 여자였던 양을례가 와서는 안 될 곳에 나타난 것이다. 작년 봄의 일이었다. 기화(봉순이)와 석이 사이를 의심하고 질투의 불길을 태우며 매달리는 시어머니를 뿌리치고 어린 자식 둘을 팽개치고 떠나버린 양을례, 석이에게 보복하기 위하여 야합했던 나형사와 추악하게 이별을 했던 양을례, 성환 할매는 망연자실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일본 놈하고 산다, 젊은 놈을 꿰어차고 대만(臺灣)에 가서 가시나 장사를 한다, 더러 들려오는 말은 그러했다. 도대체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다 이제 나타난 것일까. 뭘 하기 위해 나타난 것일까. 벌겋게 성이 난 사타구니의 종기, 몸이 불덩이가 된 어린 남희를 을례 친정에서 데리고 나온 성환 할매는 밤늦은 시간, 박의원의 문을 두드렸다. 종기를 째고 고름이 쏟아지고 자지러지듯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 성환 할매의 기억에는 생생하게 어제 일같이 뚜렷한데 양을례는 말했다. 성환은 진주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으니까 그대로 두겠지만 남희는 데려가서 명년에 여학교를 보내겠노라.

"니가? 와 그래야 하노."

성환 할매가 뇌듯 말했을 때

"어미니까요."

"니가 에미가? 우째서 니가 에미고."

"지난 일 따지면 뭐하겠어요. 내가 아이들 어미인 것만은 사실이잖아야. 애비가 기르고 있다면 나 오지도 않았을 거요."

"니한테는 심장이 몇 개 있노?"

당당했다. 자신만만했다. 동네 사람들이 이 이상한 양복쟁이 여자를 보기 위하여 모여들었다.

"우떤 제집인지 얼굴 한번 보자."

성환 할매와 양을례 사이에 언쟁이 벌어지면서 동네 사람들이 가세했다.

"간이 덕석만한가부다.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여놓노 말이다."

"자식 두고 가는 제집 간장이 오죽 찔기문 그러겄나."

중과부적, 배짱 좋은 을례도 물러갈 수 밖에 없었다. 타협을 포기한 양을례는 그러나 읍내 학교로 찾아가서 몰래 남희를 만났고 어떻게 꼬드겼는지 전학 수속까지 밟아서 아이를 데려가 버렸던 것이다. 기별을 받은 성환이 진주서 달려왔다. 넋이 나간 듯 손녀 이름을 부르는 할머니를 달래가며 읍내 학교에서 성환은 전학해간 학교를 확인하고 할미와 손자는 부산으로 남희를 찾아 나섰다. 학교 문 앞에서 지키고 있다가 남희를 붙잡았을 때

"할무이 나 안 갈 기요."

남희는 외면을 하며 말했다.

"뭣이 어째!"

성환이 노한 얼굴로 다가서자

"오빠, 나 그만 여기 있을란다. 여기서 상급학교도 가고 이자 촌구석에서 살기 싫다."

성환은 남희의 뺨을 후려쳤다.

"두 번 다시 그런 소리 했다 봐라 직어부릴 기다!"

"나는 엄마 옆에 있고 접다! 와 엄마하고 못 있노!"

아우성을 치던 남희는 순간 몸을 날렸다.

"남희아!"

성환 할매는 울부짖었다. 보행이 더딘 할머니를 차마 두고 뛸 수 없었던 성환은 남희를 놓치고 말았다.

"이 일을 우짜믄 좋노."

"걱정 마이소. 학교에 가면 주소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이튿날 주소를 알아낸 이들이 찾아간 곳은 양을례가 일본인 정부(情夫)와 함께 경영하는 사가미라는 요정이었다. 사가미온나라 하면 정이 짙고 호색(好色)이라는 전설인지 뭐 그런 말이 있어서 붙여진 요정 이름인 것 같았다. 으리으리하지는 않았지만 깨끗하고 아담했으며 상당한 고급 요정인 것 같았다. 성환은 그곳에서 일본 옷을 입은 생모와 대면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왔어요!"

양을례는 당황했으나 한편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

", 여기는 사람 올 곳이 못 되나? 그렇기 험한 곳이가?"

주저하는 기색 없이 성환 할매는 을례를 노려보며 말했다.

"촌 늙은이가 감히 남의 영업 방해하겠다 그거요? 어서 돌아가요!"

"가지 말라 캐도 갈 기다. 이 더러분 곳에 누가 있고 저블꼬? 아이만 내놔라. 우리 남희 내놔."

"대체 뭐를 바라는 거요?"

"바라는 것 없다. 인연도 없고 아아만 내주라."

성환은 두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동안의 양육비 내놔라 한다면 생각해줄 터이니 어서 가요!"

"이년이!"

처음으로 성환 할매 입에서 욕설이 나왔다.

"뭐라구! 촌것이 도통 세상일을 모르는군. 이년이라니? 어디에 와서 행패를 부려?"

성환이 을례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할머니의 그 정도 말씀을 고맙게 여기시오."

"뭐라구?"

"내 주먹이 날아가지 않은 것만도 고맙게 생각하시오."

"이놈이!"

"남희를 순순히 내놔요."

불같은 증오심이 타고 있는 성환의 눈동자가 을례의 눈을 놓치지 않고 잡고 늘어진다.

"어미를 보고 감히!"

을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미? 당신이?"

"네가 누구 속에서 나왔니!"

"그것이 한탄스러울 뿐이오."

"나를 때린다구? 어디 때려봐!"

"때릴 그런 정도가 아니지요. 죽이고 싶소."

별안간 을례는 미친 듯 웃었다.

"병신 같은 놈!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중학교를 나오고 나면 대학은 내가 시킬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병신 같은 놈."

"그런 공부 하느니 차라리 죽지."

을례 웃음소리에 살그머니 남희가 얼굴을 내밀었다.

"남희야! 이눔 가시나 못 오겄나! 여기가 어딘지 알기나 해!"

성환이 외쳤을 때 남희는 재빨리 숨어버렸다. 남희가 숨는 것을 본 성환 할매는

"아이구."

하며 바닥에 철썩 주저앉는 것이었다.

"야 이놈아! 니 애비는 뭐야! 니 애비는 뭐가 그리 위대해! 자식 버리긴 매한가지 피장파장이다. 니가 내력이나 알고 하는 소리야!"

을례는 히스테리를 부리며 꽃병을 집어 들고 바닥에 메어쳤다. 그러자 서방인지 정부인지 몸집이 작은 사내가 안에서 나타났다. 여자같이 얼굴이 하얗고 얇은 입술이 불그스레했다. 마치 노멘 같았다.

"난다! 나니오 호자이데루노카!(뭐야! 뭘 지껄이는 게야!)"

얇고 불그스레한 입술이 가로가 아니고 세로로 입술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칸카! 고노 바카야로! 구빗타마오 힛코누이테야루!(못 가겠나! 이 바보 같은 놈! 모가지를 뽑아줄 테다!)"

결국 성환 할매는 물벼락을 맞았고 성환은 불러들인 불량에 의해 몰매를 맞고 밖으로 들려 나왔다. 그 사건은 성환이나 성환 할매에게 치유될 수 없는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물벼락을 맞고 불량배에게 몰매를 맞은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할머니와 오라비가 수모를 당하는 꼴을 보고도 숨어버린 그 육친의 배신은 너무나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성환은 흐느껴 울었고 성환 할매는 넋이 빠져 있었다. 그런 일을 당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성환 할매가 길거리에 나와 앉은 것은 행여 남희가 돌아올지 모른다는 가냘픈 기대 때문이었고 못 견디게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자 그만 가입시다. 서산에 해가 거렁거렁 넘어가요."

천일네가 먼저 치맛자락을 걷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래 그러자. 눈물 짜봐야 달라질 기이 머 있겄노."

두 늙은이가 성환네 집에 들어섰을 때 집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누구 아무도 없나?"

천일네가 중얼거리는데 부엌에서 귀남네가 내다보았다.

"오십니까?"

내키지 않는 듯 그러나 인사는 했다. 여러 해 전에 성환 할매한테 잘못한다 하여 야무네가 뼈아픈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 풀세기 날뛰다가 뜨거운 일 볼까 무섭네. 죄는 지은 대로, 부모 눈에 눈물 나게 해서 니가 복 받을 것 같나? 어디 세상에 그런 법이 있노. 저거 집에 얻어묵으로 가도 안 그랄 긴데."

그런 말이 나오게끔 주거니 받거니 했으나 심하기는 심했다.

"야아, 그러믄 오복이 할매는 지은 죄가 많아서 소싯적에 남편 잡아 묵고 딸자식 잡아묵 고 지금도 방안에 산송장이 앉아 있십니까?"

귀남네는 눈이 새파래져서 악을 썼던 것이다 그때 아무네는 까무라치고 말았다. 그 일이 있은 후 두 사람 사이는 항상 뜨악했으나 귀남네는 남편이 있을 때처럼 도발적이지는 않았다.

"어매가 우떻다 카노."

천일네가 물었다.

"머 괜찮은 갑십니다."

"그래도 노인이라, 며칠 두고봐야 알 기다."

"약을 가져와서 붙있인께."

"약은 어디서 가져왔노?"

"최참판댁에서 보냈더마요."

"고맙다. 그리도 그 댁을 의지한께 성환 할매가 살지, 성환이가 알았이믄 분해서 펄펄 뛰었을 기다."

"일부러 그런 거는 아니라 카데요."

"누가 그러더노."

야무네가 날카롭게 물었다.

귀남네는 그 말대꾸는 하지 않았다. 암울한 표정, 찌들리어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복동이 제집이 왔다 간 모앵이구나."

야무네 정곡을 찌른다.

"동네가 두 패로 갈리어 큰일이다. 서기질 한다고 해서 먹이살리 줄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와 그럴꼬? 옛날의 조준구 시절에도 두 패로 나누어져서 왼수맨크로 으르렁거리더마는 귀남네."

천일네가 불렀다.

"."

"복동이댁네하고 친한 거는 알것는데 개동이 그놈 편드니라고 깃대 치키들믄 안 될 기다. 니가 뉘 덕에 사노? 사람이란 인공을 모르믄 금수만도 못하지. 안 그렇나?"

타이르듯 말한다.

"지사 뭐... 패거리에 끼여들 처지나 됩니까. 내 앞길만 생각해도 눈앞이 캄캄한데 누구 편역을 들고 자시고 할 것도 없십니다."

옛날같이 톡 쏘는 말투는 아니었다.

"하기야 뭐 무슨 경황이 있겄노."

두 늙은이는 힘들게 마루로 올라간다.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간다.

"좀 우떻소 성환 할매."

야무네가 물었다.

"괜찮은데 오기는 머하러 오요."

"정말 꽨찮겄소?"

천일네가 물었다.

"허리를 삐끗했지마는 자고 일어나믄 낫겄지. 전에도 종종 그랬인께, 별일 아닌 거를 가지고 동네가 시끄럽고, 참판댁 마님이 그놈한테 수모를 당한 것이 미안스러바서 죽겄구마는."

"그래도 그놈이 오늘은 혼이 났일 기요."

천일네 말에 야무네는

"그놈이 어디 혼날 놈이건대? 서기질 못하게 될까 봐서 혼이 난 척했을 뿐, 두고 보아라. 잠잠해지믄 무신 지랄을 또 할지, 그 심보가 어디 가겄나? 옛날의 삼수 그놈 같다. 두리 어매는 지금도 삼수 말만 나오믄 이를 뽀도독 갈더마."

"어느 세상이든 그런 놈이 더러 있어서."

"꼭 삼수 그놈 같다 카이. 그런 놈들은 남을 해코지 안 하믄 밤에 잠이 안 오는 모앵이라."

"그나저나 석이네 성님."

천일네가 정색을 하고 불렀다.

"이자는 길가에 나앉지 마이소."

"..."

"남희 그 제집아 땜에 그러지요?"

"가깝해서."

"그만 잊아뿌리소. 다 컸는데 머가 걱정이오."

"여식아아는 생물 겉애서."

"고슴도치도 지 새끼는 귀타 캅니다. 직일 년 살릴 년 하지마는 에미 아니요. 할매만 못하겄소?"

"그거는모르이 하는 말이제."

성환할매는 듣기 싫은 듯 얼굴을 찌푸렸다.

"돈도 많다 하고 달리 소생도 없다 카이 그 제집도 돈벌어 어디다 쓰겄소? 공부도 시키준다 카이."

"벌써 상급핵교에 들어갔다 카든데? 지난 봄에."

야무네 말이었다.

"돈이 있이믄 머하노. 호강을 하믄 머하노. 철없는 것이 꼬임에 빠졌지. 그곳이 우떤 집인데, 소나아를 상대해서 술 팔고 여자 팔고, 그 일을 생각하믄 자다가도 가심이 두근거린다. 제집아아가 허방에라도 빠지믄 신게, 그거로 조지는 것 아니겄나. 내가 그거를 우떻게 키았다고. 눈물로 키았다."

성환 할매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는다.

"시끄럽소. 다 팔자요. 에미 애비 없이 큰 것도 팔자고."

그러자 야무네는

"팔자라 하지마는 사람의 맴이 안 그렇네라. 눈감는 날꺼지는 단념을 못한께. 자식 그거 다 피멍 겉은 기지. 집안이 와 이리 허퉁하노?"

하고 말했다.

"식구가 없어이, 귀남에미하고 나밖에 더 있나. 사람 사는 것 같지도 않다. 그놈의 제집아가 눈에 자꾸 밟히고."

"허 참 성님도 그만 했이믄 좋겄소. 그렇기 가아들만 찌니게 귀남에미가 섭섭하고 속상할 만도 하요."

"에미 애비가 없인께 그러지."

"귀남이는 잘 있다 카든가요?"

"잘 있다 카기는 하지마는 남의 집 고공살이, 고생 안 한다 하겄나."

"연학이 그 사람이 자게 여관에 둘라꼬 데리갔다믄서요?"

"그러이 보냈제. 아직나이도 어린데."

"그만하믄 다 컸지 어리기는."

"장래를 생각해서 보냈는데 지 에미가 보고 저븐 눈치라."

"보고 접겄지요."

"진주 한 분 다녀오겄다 하는 거를 내 허리가 어서 나아얄 긴데."

"그나저나 귀남애비는 영영 그만입니까?"

"그놈 말은 끄내지도 말아라."

"어디 가서 죽었이까?"

하는데 야무네가

"그게 언제였든지, 산에서 약초 캐는 거를 보았다 카든가."

기억을 더듬듯이 말했다.

"말짱 헛소문이다. 근가죽에 왔다믄 제집은 그렇다 치고 지 새끼가 있는데 도척이 겉은 놈이라 캐도 안 와보겄나? 면목이 없어 그럴 놈도 아니고, 가도 멀리 갔든지 아니믄."

"하기사, 죽었거니 생각하는 기이 차라리 속 편할 기다. 십년이 다 돼가는데 일본 간 것도 아니고 만주 간 것도 아닌데 와 못 올 기고. 귀남이나 믿고 살아야지."

한동안 말이 끊겼다. 성환 할매 천일네는 어쩔 수 없이 잊고 살자던 아들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만주에 간 아들, 거처가 확실하든 확실치 않든 만주는 이들에게 멀고 먼 곳 아득한 곳이었다. 한참 후에 성환 할매가 말했다.

"귀남에미 듣는 데서는 그놈 말 끄내지 마소, 야무어매 천일네도. 다 부모 잘못 만내서... 그런 놈한테 보낸 내 불찰 아니겄소."

이 무렵, 최참판댁에서는 서희가 별당 연못가에 서 있었다. 계획으로는 오늘 중에 도솔암으로 가게 돼 있었다. 해서 밤기차를 타고 왔으며 진주서는 집에 잠시 들렀다가 서둘러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부사댁에서 시간을 잡아먹고 자동차는 진주로 되돌려 보냈으며, 무의식적인 계획의 변경이었지만 오늘은 도솔암에 가지 않겠다는, 역시 무의식적 마음의 반영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역사, 사연이 똬리를 틀 듯 둘러싸여 있는 평사리의 최참판댁, 고래등 같은 기와집, 꿈에서도 잊지 못했던 탈환의 최후 목표였던 평사리의 집을 거금 오천 원을 주고 조준구로부터 되찾았을 때, 그것으로 서희의 꿈은 이루어졌고 잃었던 모든 것을 완벽하게 회수했던 것이다. 그때 서희의 감정은 기쁨보다 슬픔이었고 허망했다. 그리고 뭔지 모르지만 두려움 낯설음, 과거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낯설음이었다. 서희는 회수한 평사리의 집에 꽤 오랫동안 접근하지 못했다. 그렇다. 서희는 과거를 두려워한 것이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일들은 모두 음산한 비극뿐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평사리의 집은 의식 속에 방치된 채, 서희는 현실에 쫓겼는지 모른다. 연못가에서 서희는 새삼스럽게 그토록 열망했던 곳을 찾는 순간부터 회피하려 했던 그 모순을 의아하게 되새겨본다. 그리고 처음으로 옛집에 돌아온 사람같이 집안 여기저기를 마음속으로 짚어보고 매만져보는 것이었다. 호열자에 할머니 윤씨가 떠났을 때 홀로 남은 서희, 그때 열 살이었던지, 역시 어미를 호열자로 떠나보낸 봉순이는 열한 살, 열두 살이었던지 짚베 옷을 입고 낙엽이 떨어져 내려앉는 연못을 바라보며 서 있었던 광경을 마치 한 폭의 그림 보듯 서희는 눈을 감고서 골똘히 바라본다. 평사리의 집은 그런 그림이 천폭 만폭, 쌓여 있는 곳이다.

서희는 별당 마루에 가서 걸터앉는다.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안자를 불러 따끈한 작설차 한잔 마시고 싶다는 말을 한다. 왜 오늘 도솔암에 가는 것을 포기했는가, 서희는 그 일에 대한 생각을 쉽게 버릴 수 있었다. 길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자신만을, 서희는 자기 자신만을 지금 현재 생각하고 싶었다. 자신을 위한 시간 속에 있고 싶었다. 박의사, 박효영, 그의 자살은 서희 자신에게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추구다. 물론 그것은 길상과 무관하지는 않다.

안자가 다기를 올려놓는 다반을 들고 왔다.

"가보아라. 혼자 있고 싶다."

"."

안자가 물러갔다. 자동차 안에서부터 서희는 안자에게 자기감정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감추려 하지 않았다기보다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 옳았다. 천천히 작설을 덜어서 넣고 주전자를 기울여 물을 부은 뒤 다완에 옮겨 붓고 두 손으로 다완을 싸안는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를 한동안 느껴보다가 마신다. 황혼에 물들어가고 있을 하늘, 대기에서 차가움을 뿜어내는 일몰의 시기, 작설차는 정답게 서희 심장을 적셔주었다. , 초로 나누어보면 흘러가버린 시간이 얼마인가. 천문학적 숫자다. 그 많은 숫자 속에 순수한 자신의 시간이 거의 없었던 것을 서희는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그것은 서희에게 매우 충격적인 자각이었다. 가문과 자식과 그리고 남편이라는 존재, 그것과 그들을 중심하여 모든 것을 돌게 하였던 자기 자신은, 애정이든 의무이든 자기 자신은 시계바늘 같은 것이나 아니었는지. 중심에서 멀리 벗어난 박의사는 자신에게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그는 서희를 위한 시계바늘이었는지 모른다. 의술을 원했다면 박의원 아닌 곳에도 있었다. 박효영의 심중을 알면서 주치의를 변경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때, 서울서 내려올 때, 급성맹장염으로 부산에서 수술을 받았을 때 진주서 달려왔던 박효영의 얼굴이 서희 눈앞에 풀쑥 솟아올랐다. 사랑은 박효영뿐만 아니었고 서희 자신 속에도 있었음을 강하게 느낀다. 서로의 사랑이, 한쪽은 개방되고 한쪽은 밀폐된 사랑이 박효영을 불행하게 하였고 자살에 이르게 했다. 서희는 흐느껴 울었다. 소매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았으나 흐르는 눈물은 멎지 않았다. 그가 앉은 별당, 어머니 별당아씨가 거처하던 곳, 비로소 서희는 어머니와 구천이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과연 어머니는 불행한 여인이었던가, 나는 행복한 여인인가 서희는 자문한다. 어쨌거나 별당아씨는 사랑을 성취했다. 불행했지만 사랑을 성취했다. 구천이도, 자신에게는 배다른 숙부였지만 벼랑 끝에서 그토록 치열하게 살다간 사람, 서희는 또다시 흐느껴 운다. 일생 동안 거의 흘리지 않았던 눈물의 둑이 터진 것처럼. 어느새 사방은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마님."

어둠 속에 안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님."

"무슨 일이냐."

목이 꽉 잠긴 목소리였다.

"저 저기."

안자는 되돌아갈 듯 몸짓을 하며 어찌할 바를 모른다.

"말해보아라."

". 낮에, 그 불량했던 놈이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로?"

"사과를 올리겠다 하면서."

"그래?"

"..."

"이번만은 그냥 넘어갈 터이니 앞으로 그런 일 없도록, 돌아가라 하게."

". 바깥 기운이 찹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오냐. 그러마."

이튿날 아침 일찍 서희는 안자와 건이 아범을 거느리고 도솔암을 향해 떠났다. 도솔암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때가 훨씬 지난 뒤였고 관음탱화를 장엄하는 의식도 끝나 있었다. 절 마당까지 내려온 지감에게 서희는 합장하고 인사를 했다.

"늦었습니다, 부인께서."

". 제 사정 때문에 죄송합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절은 적막했다.

"법당에 드시겠습니까? 아주 훌륭한 관음상을, 김형은 성취했습니다."

하며 지감은 미소를 머금었다.

"나중에 뵈옵지요."

"일봉아!"

"!"

상좌 일봉이 달려왔다.

"모셔라."

"."

일봉이 안내하는 방으로 서희가 들어갔을 때 길상은 단정하게 앉아서 불경을 읽고 있었다.

"늦었구려?"

". 좀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길상의 얼굴은 환하게 밝았다.

"관음상을 장엄한 뒤 당신 생각을 했소."

"어째서요?"

"당신 모습이 있어서 그랬나 보오."

"관음상 말씀입니까?"

"그렇소."

"관음께서 어찌 수전노를, 저를 두고 수전노라 한 사람이 있었지요."

"몰라 그랬을 게요. 당신을 두고 친일파라 하는 사람도 있으니."

"그건 사실이지요."

"친일파가 나 같은 사람을 감추어두겠소?"

"..."

"시장하지 않소? 점심 먹을 시간이 없었을 터인데."

"화개에서 주막에 들러 국밥을 먹었습니다."

"그게 정말이오?"

". 일행도 있고 배가 고파서야 산길을 오르겠습니까?"

"그건 참 잘한 일이오."

길상은 유쾌하다는 듯 껄껄걸 소리 내어 웃는다.

"참 송관수의 부인이 이곳에 계시는 거 모르지요?"

"이곳에요?"

"그렇소."

"왜 그랬지요? 갈 곳이 없었나요? 자식이, 그 누구죠? 영광이 그 아이가 있질 않습니까? 또 재영 애비는 어째 뒤처리를 못했을까요."

"웬 성미가 그리 급하시오. 전에 없이,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서?"

"..."

"만나보면 당신도 느끼겠지만 영광이 어머니는 조신하고 어린아이같이 낯가림이 심한 사람이오. 말수도 적고, 갈 곳이야 아들, , 사돈도 있었고 한데 본인이 이곳에 있기를 간절하게 소망했다는 게요. 본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했소. 공양주하고 함께 기거를 하는데, 착하고 부지런하고 지감스님이 절에 큰 복이 터졌다며 여간 기뻐하질 않았소. 보기에도 영광어머니는 이곳에 있는 것을 만족해하는 것 같더구먼. 우리가 섣불리 금전적 도움을 준다는 것은 오히려 상대 자존심만 상하게 할 것 같소."

"어렵게 지냈을 텐데 어째."

"어렵고 가난하게 지낸 사람들 속에 오히려 귀한 그런 정신이 있는 거요."

서희는 말이 없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재영 애비는 토요일에 내려오겠다 했습니다."

"무리해서 내려올 것까지는 없는데."

무안을 타듯 길상은 묘하게 이지러진 웃음을 보였다. 아주 드물게 길상은 그렇게 웃는 일이 있었다. 영광의 모친이 절에 있었고 송관수의 사후 처리가 미진하다고 생각하는 환국이 겸사 겸사 내려오는 것이겠지만 주목적은 길상이 완성한 관음탱화를 보기 위해서인데 자식의 도리, 뭐 그런 것을 떠나서라도 관음탱화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자신이 화가였으니까. 미술학교를 마친 후 환국은 동경서 유수한 미술 단체와 기타 권위 있는 공무전에 입선한 바 있었다. 개인전도 동경서 한 차례, 서울서 두 번, 상당한 반향이 있었으며 역량 있는 화가로 인정을 받고 있었지만 길상의 경우는 환쟁이가 아니었다. 금어라 할 수도 없었다. 다만 어릴 적에 그 재능이 비범하다고들 했으나 어깨너머로 익힌 불화였고 그나마 오랜 성상, 붓을 놓았던 처지, 그야말로 소인에 불과하다. 환쟁이도 금어도 아닌 그가 관음탱화를 조성한 것은 우관의 당부도 있었지만 원력을 건 행위 이외 그 아무것도 아니었다. 준비 작업으로 이삼 년 동안 수천 장의 초화를 그렸으며 마지막 신명을 다하여 조성했고 또 부자지간 스스러울 것도 없으련만 길상은 환국이 내려온다는 서희 말을 듣는 순간 왠지 쑥스럽고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그 쑥스러움이나 위축감은 아들과 아내에게 대한 어떤 거리감이었는지 모른다. 어떤 낯설음이었는지 모른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서희는 일어섰다. 밖으로 나온 그는 갈아입을 옷을 챙겨 든 안자와 함께 도솔암을 나섰다. 눈 익은 오솔길을 지나 한참 갔을 때 길이 깎이어지면서 개울이 나타났다. 개울을 따라 좀더 올라갔을 때, 언덕을 휘돌아서 물이 흐르는 곳, 바위와 언덕과 나무숲에 가려진 곳에 폭포라 할 수도 없지만 두자 가량 높이에서 물이 떨어지고 우물보다 훨씬 큰 웅덩이에 옥수 같은 물이 넘치고 있었다. 서희는 도솔암에 오면 이곳에서 목욕재계하고 법당에 드는 것이 순서였다. 절에 큰 불사가 있을 때말고는 인적이 전혀 없는 곳이었지만 안자는 멀찌감치서 망을 보고 서희는 옥수 같은 물속으로 들어간다. 눈을 감고 살 속으로 스며드는 냉기를 심장 깊이까지 느끼며 산 속의 다정하면서도 무서운 정기를 느끼며 서희는 자신의 마음이 맑아지기를 기다린다. 올 때는 들려오던 새소리 뻐꾸기 울음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나뭇잎 서걱거리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오로지 물소리만 의식 속에서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곤 했다. 이윽고 물을 털고 나온 서희는 옥을 깎아 만든 듯 단려하고 아름다운 몸을 수건으로 닦은 뒤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말없이 왔던 길을 말없이 되돌아간 서희는 법당으로 곧장 들어갔다. 후불탱화 앞에 대지권인을 쥐고 연화대에 앉으신 대일여래상을 향해 수차례 예배를 한 서희는 동편 벽면에 새로 장엄된 관음탱화 앞으로 옮겨간다. 감식할 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서희에게 그같은 속기는 발동하지 않았다. 그림이라는 생각에서 떠나 다만 관음보살을 대하는 것이며 느끼는 것이며 일체 잡념이 없었다. 그 앞에서 수없이 예배를 하다가 염주를 건 손을 모아 깊은 정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었다. 법당 밖에 해가 훨씬 기운 것도 모르고. 일봉이 저녁 공양을 들여왔다. 가사를 걸친 지감이 목탁을 두드리며 예불을 시작했다. 서희는 본존 앞, 지감의 뒤쪽으로 자리를 옮기며 예배를 한다. 산사는 마치 이 세상이 아닌 곳처럼, 육신이 사라져가는 것처럼 오로지 목탁 소리, 자감의 송경 소리만이 흐르듯 구르듯 가득 차듯, 정적 이상의 세계로, 억겁무진한 세계로, 티끌 하나 없는 세계로.

법당을 나서는 순간

'아아 사람은 도시 무엇일꼬? 번뇌의 본체는 대체 무엇일꼬?'

서희는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물었다. 여느 때와는 다르게 방금까지 자신이 있었던 자리, 그 법열의 여운이 급속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낀다.

'야망인가 존엄인가 모성인가...'

가슴 가득히 슬픔이 밀려왔다. 사람으로 태어난 슬픔, 사물을 쓸어안고 놓을 수 없는 슬픔이었다. 일봉이 들여온 저녁상을 마주하고 내외는 말없이 저녁을 먹었다. 침묵을 지키고 있는 서희에게 길상은 구태여 말을 걸려 하지 않았다.

물린 밥상을 가지러 온 사람은 영선네였다.

"아니, 일봉이를 시키지 않구요."

길상이 나무라듯 말했다.

", 아입니다. 인사를 디릴라고 왔십니다."

영선네는 잔뜩 긴장해 있었다.

"여보 영광이 어머니요."

하고서 길상은 서희를 쳐다보았다.

"아아."

영선네는 서희에게 큰절을 했다. 서희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큰일을 당하여 얼마나 상심이 됩니까."

서희는 위로의 말을 했다.

"다아 가는 길인데 우짜겠십니까?"

하다 말고 영선네는 당황한다. 자기 처지로서 대단한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한 말이 잘못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영선네는 옷고름을 비틀면서

"저기, 저어 우리 영광이를, 그 못된 놈을 돌보아주시서 머라고 은혜를 가, 갚아야 할지 모리겠십니다."

영선네는 절에서 처음 길상을 만났을 때도 꼭 그같은 말을 했다. 밖에서 하는 일도 그랬지만 관수는 사람 관계에 대해서도 일체 말하는 일이 없었고 영선네 역시 남정네가 하는 일을 알려 하지 않았으며 특히 사람 관계는 영선네 스스로 회피해왔기 때문에 최참판댁에 관해서 거의 아는 바 없었다. 그러나 만주로 떠날 때 오매불망, 자식들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영선네에게

"최참판댁에서 영광이를 책임지겠다 했고 공부도 시키겠다 했이니 그놈 걱정은 안 해서 될 기고 영선이는 강쇠가 맡았이니... 핵교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머심아가 출중한께 걸맞은 짝이라, 우리 처지에 그만한 작도 달리 없일 기구마."

하며 관수는 달랬던 것이다. 영선네는 그 말을 잊지 않았고 또 이것은 홍이하고 관수가 하는 말을 들었는데, 일본 노가다패한테 두들겨 맞아 다 죽게 됐을 때 환국이 덕분에 다리가 약간 잘못되기는 했으나 생명은 건졌다는 내용, 해서 영선네는 그 못된 놈이라 표현했던 것이다. 권하는 대학을 마다하고 경음악으로 빠져버린 일도 포함해서.

"오히려 부끄럽소. 우리 노력이 부족해서."

서희 역시 영광이 경음악 쪽으로 나간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절에서는 지낼 만한지요."

"."

"전부터 절에 다녔어요.?"

", , 그라믄 지는 나가보겠십니다. 편히 쉬시이소."

영선네는 물린 밥상을 들고 서둘러 나갔다. 길상은 한동안 무표정이었고 서희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법당을 나서는데."

하고 말문을 열었다.

"왠지 모르게, 막연하게 관음보살께서 저를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째 그런 생각을 했소."

길상은 서희를 쳐다보았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슬픈 생각이 들었어요."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던 거요?"

"있었지요. 이일 저일... 용정의 운흥사 생각나십니까?"

서희는 화제를 돌렸다.

"...?"

"관음탱화 생각을 하니까 그때 운흥사 법당이 떠오르는구먼요."

"이상하군요. 관음상을 그릴 적에 나도 운흥사의 흑탱 생각을 했는데, 아마 그게 후불탱화였지요?"

". 당신이 그리신 관음상이 너무나 현란하여 그곳 생각이 났을까요? 법당에는 협시보살은 물론, 본존 자리도 비어 있었고 후불흑탱만 댕그머니 장엄되어 있었습니다. 채색이라돈 불단을 두른 붉은 천밖에 없었구요."

"현몽을 해서 찾았다는 자그마한 관음이 한 구 있었소."

"단청도 입히지 않았고 법당문이 열려 있던 절은 흡사 부웅새 같았습니다. 어찌 그리 황량했는지 바람 소리마저 마치 신음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고향 잃고 타국에 모여든 사람들의 마음이 황량해서 그랬겠지요. 사실 좋잖은 일도 있었고."

"그때 쫓겨난 본연스님의 설법 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일체중생아! 어디 있느뇨! 망상으로 있는 것이라, 십이망상이 어디 있느뇨! 십이망상은 본래 공이거늘, 망상으로 있는 중생을 어찌 있다 하느뇨! 만법도 무명의 그림자이어늘 하물며 천지간에 무엇이 있다 하느뇨!'

본연의 쩌렁쩌렁 울리던 목청, 형형한 눈빛이 떠올랐다.

"그러고도 그 망상 때문에 쫓겨났으니."

서희의 혼잣말이었다.

"송씨댁 자부 얘기요?"

". 결국 그댁도 몰락했으니 전생에 무슨 인연이었을까요?"

"중도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기는 남의 땅까지 왔다면 무참괴승인지 뉘 알겠소. 설법은 잘하든가요?"

"글쎄요. 잘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속이 비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눈이 빛나고 목청이 좋아서 맹목적인 신도들에게는 대단하게 보였을 것이오. 그런데 어제 오면서 하동 이부사댁에 들렀습니다."

별안간 서희는 또 화제를 꺾었다.

"시우어머니를 만났는데 양현의 얘기를 하더구먼요."

"양현이? 무슨 얘기를?"

"혼담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아직 학생이니, 하고 얼버무렸습니다만 기분이 좋지 않았고."

하다가 서희는 몸을 일으켜 등잔에 불을 밝힌다.

뚜렷한 서희 얼굴의 윤곽이 드러났다가는 흔들리곤 한다. 장방형 절방의 공간이 외부와의 단절을 새삼 일깨워준다. 서희는 세운 무릎에 두 손을 올려놓고 길상을 응시하듯 쳐다본다.

소쩍새가 울었다. 아주 먼 곳에서.

"시우어머니는 양현이 근본 때문에 혼담이 쉽지 않는 거 아니야, 하고 물었습니다."

"..."

"사실이 그렇지요."

"사실이 그런데 새삼스리 문제 삼을 거는 없지 않소."

"그렇지요.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입니다. 밖에서는 끊임없이 문제가 되는 거지요. 아이는 탐이 나는데 근본에 가서 걸리게 되고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가 넘볼 수 있는 그런 양현이는 아니고, 자연히 어려워질 밖에요."

"어렵게 생각할 것 없소. 집안이나 재산 같은 것 생각지 않고 사람 하나만 보면 될 거 아니오."

다소 짜증스럽게 말했다. 당신이 날 택할 때 집안 보고 재산 생각했느냐 하는 의도를 나타낸 말이었다.

"가문을 보자는 것도 아니구 재산을 따지자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가문이 실하지 않고 재산도 없는 사람이 대학 교육까지 받기가 쉬웠겠느냐, 양현이 의전에 다니는데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하고 짝 지워줄 수는 없는 일이지요."

서희는 물고 늘어지듯 그 화제를 놓으려 하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생각해본 일이지만 아예 양현이를 내보내지 않는다면."

"무슨 뜻이오?"

"윤국이하고 맺어준다면 출가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는 게요!"

"왜 그리 역정을 내시오."

서희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 정도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눈치다.

"당신은 어느 하나도 잃지 않으려는 욕망, 그 욕망 때문에 젊은 아이들까지! 그들은 남매로 자랐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오."

"제 욕심으로, 진정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욕심이 아니면?"

"윤국이는 잘 생기고 똑똑한 청년입니다. 양현이는 총명하고 아름다운 처녀구요. 그리고 그들은 타인입니다. 이부사댁 핏줄과 최씨네 핏줄, 같은 조건의 그들이 맺어져서는 안 될 이유가 있습니까? 어째서 그게 저의 욕심인지요. 사랑하는 마음도 욕심입니까?"

같은 조건이라는 말에는 길상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강요할 일이 아니오. 윤국이 양현이 두 애들이 선택할 일이오."

"당연히 그렇지요. 다만 우리는 그 아이들이 갈 수 있게 길을 막은 바위를 치워주어야 합니다."

서희는 강력하게 말했지만 강압적인 것은 아니었다. 뭔지 처참한 표정이었다. 그것은 윤국과 양현의 문제인 동시, 그들 자신의 건드리고 싶지 않는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리라.

"어째서 당신은 양현에게 고통을 주려 하는 거요."

길상은 한탄하듯 한숨을 쉬었다.

"그 아이를 사랑하는 제 마음을 몰라 하시는 말씀입니까?"

"놓아주시오."

서희 얼굴빛이 변했다.

"놓아주어도 이제 양현이는 제 갈 길을 갈 수 있게 다 자랐소. 매우 분명한 성품으로 자랐소. 우리가 염려한다는 것은 그 아이 짐일 뿐이오."

"놓아주라 하시었습니까?"

"..."

"."

길상은 응시하는 서희의 눈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혹 당신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은 아닌지요."

"..."

"사로잡혀 있다는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까?"

"부인은 모르고 계시었소?"

이번에는 서희 쪽에서 대답을 못한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자기 태생대로 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오."

"당신의 경우도 그렇다 그 말씀이군요."

"지금은 양현의 얘기를 하고 있질 않소."

"당신 경우도 말씀해주십시오."

전에 없이 서희는 핵심을 찌르며 다가왔다.

"지나간 얘기는 해서 뭘 하겠소. 무의미하지요."

"후회하시는군요."

"후회하지 않소. 다만 자기 뿌리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 그건 인지상정 아니겠소?"

한동안 말이 없다가 서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로잡혀 있기론 피차 마찬가지지요."

전에는 부부간의 이런 일이 없었다. 발단은 양현이었지만 서로 회피해온 문제가 정면으로 부딪쳤던 것이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그러나 항상 가로놓여 있던 벽에 부딪친 것이다.

"법당에 가겠습니다. 예배드리다가 마음이 편안해지면 오겠으니 먼저 주무십시오."

서희는 낮에 한 묵상을 다시 한 번 시도해볼 것을 작정한 것 같았다. 서희의 치맛자락이 사라지면서 방문이 닫혔다. 길상은 치맛자락이 방금 사라진 곳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어디서 잘못 되었을까? 언제부터 내가 내가 이 안일지옥에서 무너지기 시작했을까? 나는 그렇다 치고 저 사람은 전과 달리 몹시 불안정해 보인다. 사로잡히기론 서로 마찬가지라 했던가? 옳은 말이다.'

길상은 손자 재영의 돌 잔칫날 생각을 한다. 그날의 고통스러웠던 침묵, 가끔 만나 술잔을 나누며 비교적 격의 없이 지내는 사람들이었는데 입이 붙어버린 듯 말을 할 수 없었던 그날의 고통스러움을 생각한다. 손님들이 다 돌아가고 빈자리에 홀로 앉아 왜 자신이 이곳에 있는가 하며 자신에게 물었고 자신의 삶의 진실한 의미를 물었던 일, 관수의 유서 생각도 났다.

'...내가 죽으믄 모두 고생만 하다갔다 할 기고 특히 영광이 가심에 못이 박힐까. 그러나 나는 안 그리 생각한다. 그리고 후회도 없다. 이만하믄 괜찮기 살았다는 생각이고...'

그것은 길상이 되풀이하여 생각해보는 구절이었다. 주어진 자기 삶에 밀착하여 혼신으로 끌어안고 치열하게 살다 간 송관수, 길상은 자기 삶이 얼마나 낭비적인 것인가를 깨닫기 시작했다. 마치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지렛대를 받쳐가면서 그것은 정체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생활도 애정도 바로 그 정체 상태였다. 순환이 안 되었다. 약동도 없었다. 한 개인의 삶은 객관적인 것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불행이나 행복이라는 말 자체가 얼마나 모호한가. 가령 땀 흘리고 일을 하다가 시장해진 사람이 우거짓국에 밥 한술 말아먹는 순간 혀끝에 느껴지는 것은 바로 황홀한 행복감이다. 한편 산해진미를 눈앞에 두고도 입맛이 없는 사람은 혀끝에 느껴지는 황홀감을 체험할 수 없다. 결국 객관적 척도는 대부분 하잘 것 없는 우거짓국과 맛좋은 고기반찬과의 비교에서 이루어지며 남에게 보여지는 것, 보일 수 있는 것이 대부분 객관의 기준이 된다. 사실 보여주고 보여지는 것은 엄격히 따져보면 삶의 낭비이며 진실과 별반 관계가 없다. 삶의 진실은 전시되고 정체하는 것이 아니며 가는 것이요 움직이는 것이며 그리하여 유형무형의 질량으로 충족되며 남는 것이다. 길상의 생각은 그러한 변두리로 맴돌고 있었다. 젊은 날, 상전으로서 어린 서희를 지켰고 간도까지 그를 수행해 갔으며 타국, 사고무친한 곳에서 절치부심, 조준구에 대한 복수와 최씨 가문의 잃은 것의 탈환을 맹세하는 서희를 길상은 도왔다. 회령에서 돌아오는 길, 학성 부근에서 마차가 굴러 서희가 부상을 당하는 일로 인하여 결혼을 했던 길상이, 그러나 그는 가족과 동행을 포기하고 간도에 남아서 그것 조직에 합류했다. 그때부터, 포승에 묶이어 왜경에게 끌리어 조선으로 나왔고 옥고를 치렀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길상은 아내와 두 아들의 비호를 받으며 견디어 왔다. 어찌하여 길상은 사랑하는 가족을 보내면서 그 곳에 혼자 남았던 것일까? 만주에 있는 오늘의 홍이처럼 독립운동 단체의 뒷바라지를 했으며 직접 운동에는 참가하지 않았던 길상이는 가족과 함께 돌아올 수도 있었다. 대의를 위하여, 물론 그렇다. 그러면 왜경에게 체포되지 않았더라면 그는 돌아오지 않았을까? 그랬을는지도 모른다.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충정은 흔들릴 수 없는 확고한 신념이었지만 그러나 길상의 경우, 대의와 가족을 두고 선택한 길은 결코 아니었다. 자아와 가족을 두고 선택한 길이었다. 실로 어렵게 그는 자기 설 자리를 선택했으며 지킨 것이다. 이씨왕조가 간신히 그 잔명을 이어가고 있었을 무렵, 최참판댁을 찾아온 하동 이부사댁 이동진이, 서희의 부친 최치수에게 작별을 고했을 때 최치수는 울었다.

"자네가 마지막 강을 넘으려 하는 것은 누굴 위해서, 백성인가, 군왕인가?"

"백성이라 하기도 어렵고 군왕이라 하기도 어렵네. 굳이 말하라한다면 이 산천을 위해서, 그렇게 말할까?"

이동진의 산천과 김길상의 강산, 청백리로 이러졌던 선비 이동진의 산천과 버려진 생명을 우관대사가 거두어 길렀으며 윤씨 부인 요청에 따라 최참판댁 하인이 된 김길상의 강산은 다르다. 이동진이 이 산천을 위하여 강을 넘었다면 길상도 이 강산을 위하여 간도에 남았다. 그러나 다 같은 길이었지만 길상의 경우는 일종의 귀소본능이라 할 수 있었다. 제 무리에 어우러지기 위한 귀소본능, 이동진은 돌아오기 위해 떠났지만 길상은 제 무리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남은 것이다. 절에 와서 관음탱화를 그린 것도 입적한 지 오래인 우관대사 뜻에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귀소본능과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애정 때문에 길상은 자신과 동류였던 그 무리에 대한 그리움이 잊혀졌던 것은 아니었다. 아픔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심신을 저미듯 그렇게 살다간 김환, 우관이며 혜관 관수 석이 용이 영팔노인 그 밖의 수많은 사람들, 용정촌 연해주의 그 끌끌한 사내들, 그 뜨거운 피를 잊지 못하는 것이며 그들로 인하여 끝없이 인내하고 협조하는 가족들마저 낯설어지는 것이었다.

밤은 깊어갔다. 얼마 동안이나 생각에 잠겨 있었던지 자정이 지난 것 같았다. 그러나 서희는 돌아오지 않았다. 길상은 절 마당으로 나갔다. 법당에도 불은 꺼져 있었다. 초가 다 타서 저절로 꺼진 것 같았다.

"법당에서 잠들었는가?"

하늘에도 달이 교교히 떠 있었다. 바람 소리도 없고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도 없고 네모난 절 마당은 달빛에 바래지기라도 한 듯 하얗게 떠 있는 듯, 처마 그림자가 새까맣게 내려앉아 있었다. 세상은, 아니 산중은 오로지 적막할 뿐이었다.

"잠이 들었나?"

다시 중얼거린다. 법당 마룻바닥에 엎드린 채 서희는 잠들어 있을 것만 같았다. 회령 병원에서 작은 새처럼 잠들었던 서희 모습이 생각났다. 애써 서희와의 혼인을 회피했으며 회피하기 위하여 가스댁 옥이네와 동거까지 했던 길상은 잠든 작은 새와도 같은 서희에게 꺾이고 말았다. 결국 길상은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건만 다 이루어진 서희에게 더 이상 헌신할 필요가 없게 되고 오히려 그에게 무거운 짐만 지게 했다.

"차서방댁."

길상은 공양주 방 앞에 가서 나직한 소리로 불렀다. 건이 아범은 서희를 따라왔다가 돌아갔고 안자는 공양주 방에서 영선네와 함께 자리를 마련했던 것이다.

"차서방댁."

영선네가 먼저 기척을 냈다. 안자를 깨우는 모양이다. 안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길상을 보자 놀란다.

"마님이 법당에서 잠이 든 모양이오."

"저를 어찌! 산을 오르시느라 고단하셨든 모양입니다."

안자는 법당으로 달려가고 길상은 절을 나섰다. 그가 찾아간 곳은 해도사의 산막이었다.

"해도사 계시오?"

"뉘시오?"

귀도 밝지 이내 해도사는 되물었다.

"나요."

"들어오시오."

자다 일어난 해도사는 등잔에 불을 밝히고 눈을 비비면서

"이 오밤중에 무슨 일 났소?"

"내소박을 당한 사내가 나와 보니 갈 곳이 있어야지요."

길상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

"듣던 중 반가운 말이오. 팔자 기박한 홀애비 샘이 나서 잠이 안 오더니 그 참 썩 잘된 일이오."

"심보가 그러하니 홀애비 신세 면칠 못하는 거요."

두 사내는 껄껄걸 소리 내어 웃는다.

"잠자리 얻으러 왔소? 아니면 술 동냥이오?"

"달도 밝은데 술이나 하지요."

"우리 마을로 내려갈까요?"

"마을에는 왜요?"

"주막에 가잔 말이지요. 주막에 당도할 즈음이면 해장국이 구수하게 끊고 있을 게요."

"주모가 젊소?"

"젊지요. 게다가 머리를 지진 하이칼라요."

"하이칼라라."

"마음이 동하시오?"

하다가 해도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큰일 해놓고 부정 타면 안 되지. 안 되고말고."

"그렇지요?"

"여보시오 김선생, 핑계한번 좋소. 부정 탈까봐 그러시오? 엄처시하라. 동정하오."

"홀애비 동정 받는 신세 처량하구먼. 하기야 쫓겨나면 나는 갈 곳도 없는 사내요."

"머리 깎지 뭐. 본시 절식구였으니."

"그래 볼까요? 허나 경찰서에서 멀지 않아 날 찾을 테니 두고 봅시다."

주거니 받거니 실없는 말을 하며 해도사가 차려온 술상 앞에서 천천히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마시다가

"이거 참 무슨 청승인지 모르겠소."

길상이 한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절에 오기만 하면 언제나 이 산막에서 술을 마신다. 해도사, 지감과 함께, 때론 강쇠도 어울리곤 한다.

"옛날에 강포수가 있었는데."

길상이 말을 하자

"아아 강포수? 나도 압니다. 내 팔자나 강포수 팔자나, 어디 가서 죽었을까?"

그러나 길상은 강포수를 간도에서 본 얘기, 가야호에서 오발 사고로 죽은 얘기는 하지 않는다.

"새장에 갇혀보지 않은 새는 넓은 하늘이 얼마나 좋은지를 모르고 나 같은 사내 꼴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강포수 팔자가 얼마나 좋은지를 모를 게요."

상머리에서 물러나 앉아 담배를 꺼내어 길상은 붙여 문다. 아주 가끔 길상은 담배를 피운다.

"하하아 그러고 보니 생판 찌그러진 인생은 아니구먼."

"뉘 말이오?"

"이 해도사지 누구겠소."

해도사는 손을 제 가슴 위에 놓으며 히죽히죽 웃었다.

"동녘동 하니까 서녘서 한다더니 강포수 팔자를 말했지 누가 이녘 얘길 했소?"

"강포수 팔자나 내 팔자나 다를 것 하나 없지. 계집을 데려다놓으면 죽기 아니면 달아나기, 산에서 사는 것도 같고."

"등천하려는 도사하고 총대 멘 포수하고 어찌 같겠소."

"그거야 남들이 보기 나름이고 강포수라 해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는 아니지 않소."

"죽어도 얽매이고 싶지 않는 강포수와 얽매일 곳이 없어서 홀로 있는 해도사가 어찌 같다 하겠소."

"너무 그러지 마시오. 사방천지 발 닿는 곳이면 얽어매려고 시퍼런 칼이 날을 세우고 있는데 얽매일 곳이 없다니요? 머릿속에 먹물이 좀 들다보니 속세가 걸거적거리는 거지."

"통영까지 가서 도인 행셀 했다든데요?"

"그야 뭐 그렇게 대접을 하니 낸들 어쩌겠소."

"지감스님 말씀으로는 해도사가 조준구의 중풍을 고치겠다, 장담을 했다면서요?"

"허허어, 그 땡추, 입이 무거운 줄 알았더니 언제 고자질을 했을꼬?"

"정말 그랬소? 자신은 있구요?"

"정말 그랬지요. 자신은 손톱만치도 없었지만 하하핫 핫핫..."

"거짓말 그리 하다가 조준구한테 팔뚝 물어뜯기면 어쩌려구."

"거짓말은 아니었고 진정이었소. 그 형상을 보니 너무나 가련하고 측은하여 희망이라도 보시하자."

"꿈보다 해몽이 좋소. 그래 다 죽어가든가요?"

"오래 가면 식구들 다 잡는 거지."

"병수 그 사람 고생하는구먼."

"전생의 업을 벗노라, 한꺼번에 갚아버리고 천상행하려고 그런 거지요."

"..."

"그나저나 겨울이 오기 전에 어딜 옮겨갔으면 싶은데, 이제는 힘이 부쳐서 새로 마련할 수도 없고 어디 반반한 목기막이라도 있으면 하고, 찾아 나설 작정이오. 김형, 동행 안 하겠소? 봄도 좋지만 가을산도 볼 만한데."

"해도사가 옮겨가면 지감스님은 어떡허구? 술 생각나서 못 견딜 텐데요."

"그 땡추, 요즘엔 술 별로 안 합니다. 마지못할 때만 조금 드는 정도, 내가 떠나는 편이 훨씬 홀가분할 게요. 김형이나 절에 남아서 탱화를 더 그려보시지요."

"글쎄올시다."

"재줄 썩이면 되겠소? 큰 공덕인데 말씀이오. 지감하고도 얘기했지만 한 폭만 달랑하니, 허전하지 않소?"

"생각해보지요."

씨도 먹지 않는 이런 저런 얘기를 어수선하게 하며 술을 마시다가 두 사내는 새벽녘에 곯아떨어졌다. 점심때가 지나서 길상이 절로 돌아왔을 때 서희는 단정한 모습으로 방에 혼자 앉아 있었다.

"법당에 잠이 들었던 거요?"

길상이 물었다.

"그랬던 것 같습니다."

서희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감기 들면 어쩌려구 그랬소."

"신심이 불실해서... 조반은 드셨습니까."

"조반은 안 했고 점심은 들고 왔소."

"안 오시면은 차서방댁하고 바람이나 쐬러 나갈까 했습니다. 함께 안 가시겠어요.?"

"그러시오."

두 사람은 나란히 절문을 나섰다.

"어젯밤에 달이 밝더니 날씨 참 좋군."

두 사람은 다 같이 어젯밤 빚은 갈등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는다.

"재영 애비가 내려온다니까 떠날 수도 없고, 천상 와야 떠날 텐데 예배 볼 기분이 아닙니다."

"토요일에 온다니까 기다렸다가 함께 가야지요."

"당신은 안 가시게요?"

"당분간 절에 있고 싶소."

"그렇게 하세요."

어제 갔던 그 길을 따라 이들은 서희가 목욕재계했던 그곳까지 갔다. 개울가 큰 잡목을 타고 청설모 두 마리가 오르내린다. 울음소리인지 이상하게 경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새끼를 기르나 봐요."

서희는 잡목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앞으로 얼마 동안은 먹을 것이 풍성할 거요."

서희는 치맛자락을 걷으며 물가 바위 위에 앉았다. 좀 떨어져서 길상도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서로 마주 쳐다보다가 눈길을 돌렸다. 옥색 수단 치마 저고리를 입은 서희 모습은 서리 맞은 푸새 같았다. 얼굴은 투명하고 창백했다. 길상은 간밤의 술 탓인지 수면 부족 때문인지 눈이 충혈돼 있었다. 개울에 물 흐르는 소리, 흐르고 돌돌 구르는 소리를 듣는다. 서로의 마음속에서도 가느다란 물소리가 나는 듯했다. 물이 흐르고 있는 듯 느낀다. 청설모 두 마리가 나무를 오르내릴 때 들려온 소리 역시 뭔지 모르지만 흐르는, 흘러내리는 것 같은 그런 소리 아니었을까? 서희는 막연하게 그런 생각을 한다. 청설모를 보는 순간 그 소리가 청설모한테서 났던 것을 깨달았고 깨달았을 때 이미 소리는 끊겨 있었다. 그게 울음 소리였는지 오르내리는 기척 소리였는지, 무척 화사하고 음악처럼 경쾌한 우짖음 같기도 했지만 아슴푸레했다. 마치 미지의 새를 인식하려는 순간 푸드득 날아가 버리고 느낌만 남아서 그 새의 모습이 환상으로 화해버린 것처럼.

'바로 그게 세월일 거야. 잡히지 않는 안개 같은 그게 세월일 거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시시각각 달아나고 희미해지는 것을, 새삼스럽게 서희는 가슴이 죄어드는 것을 느낀다. 묵은 상처들이 모조리 들고 일어나듯 가슴이 아파온다. 길상은 바라본다. 두 어깨가 좀 구부정해 보였다. 흰 머리칼도 제법 눈에 띄었다. 오십을 넘긴 사내의 모습이다. 면도한 지 이삼 일이 지났을까. 턱수염이 파아랗게 돋아나 있었다.

어디서 오는 슬픔일까. 어디서 온 지난날들일까. 그것은 모두 바람이다!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서희 의식 속에서는 바람 따라 나뭇잎 풀잎이 드러눕고 흔들리고 나부끼며 전율하고 있었다. 눈보라가 치고 나뭇가지가 휘면서 신음하고 울부짖으며 여자의 머리칼 옷자락이 끊어질 듯 찢어질 듯 바람 가는 곳을 향해 나부끼고 있었다. 지난날들이 눈보라같이 함박눈같이 흩어져 내리고 있었다. 서희는 두 손을 들어 두 눈자위를 꽉 누른다.

"왜 그래요? 어지럽소?"

길상이 물었다.

"아니오."

"감기 든 모양이구먼."

"그렇지 않습니다."

가을 하늘은 어디까지 가면 닿을까? 한없이 높았다. 노오란 은행잎 하나 놓아보고 싶게 하늘은 푸르렀다. 유리 파편처럼 햇빛은 물길에서 회번덕이고 유리가루처럼 햇빛은 나무숲에 내려앉곤 했다. 풋풋한 숲의 냄새 상큼한 향기,

"박효영 의사 죽었대요."

"뭐라구요?"

"그분은 자살을 했대요."

길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다음 뭔지 모를 것이 치밀어 올랐다. 서희는 울기 시작했다. 계집아이같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우는 것이었다. 그것은 길상에 대한 무한한 신뢰였는지 모른다. 어릴 적에 떼를 쓰고, 등에 업혀서 버둥거리며 주먹으로 길상의 등짝을 때리며 울던 그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아직도 길상의 기억에 남아 있는 일, 산에서 토끼를 놓쳤을 때 일이었을까?

"커다란 연을 타고 올라가봤이믄 얼매나 좋겄십니까. 자꾸자꾸 연을 타고 올라가봤이믄,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가보믄 참 희안하겄지요?"

"뭣하러 올라가아?"

"스님이 말심하싰습니다. 자꾸자꾸 올라가믄 수미산이 있다 캅니다. 그 수미산에 가믄 말입니다, 은금보화로 말짱 집을 맨들어놨다 캅디다."

"은금보화가 뭐야?"

", 애기씨 설날에 찬 노리개 안 있십니까? 그 파아랑 구슬이랑 마님께서 손가락에 끼신 가락지랑 그런 거를 은금보화라 합니다."

"아아 알어! 나도 알어. 울 어머니도 파아랑 가락지 노오랑 가락지 하얀 것 그리고 또, 또 비녀랑 또, ..."

하다가 서희는 말을 탄 것처럼 등에서 한 번 우쭐대더니 두 팔을 벌리고

"이반큼, 이만큼 많이 있어."

"..."

"어머니가 그랬는데 그것 다 나 준댔어. 구슬이랑 가락지랑 비녀랑 그것 다 나 준댔어."

어머니 데려오라 하며 악을 쓰고 기암을 하고 집단 사람들 넋을 쑥 빼놓던 서희는 차츰 그 짓이 소용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뒤로는 꼬투리가 있기만 하면 은근슬쩍 어미 얘기를 꺼내어보곤 했지만 역시 어미에 관한 일에서만은 모두 입을 다물었고 아무도 그를 상대해주지 않는 것을 서희는 알게 된 것이다.

"길상아."

"."

공연히 한번 불러보고 등에 볼을 비비며 서희는 엎드렸던 것이다.

담배를 꺼내어 붙여문 길상은 연거푸 담배를 빨아 당기고는 연기를 뿜어낸다. 그도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얼마간 알고 있었다. 박의사의 도전적인 시선도 여러 번 느꼈다. 그러나 길상은 주치의를 갈아보자는 말을 꺼낸 적은 없었다. 아프면 찾는 곳이 병원이요 주치의라는 것에 개의치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고 갈고 어쩌고 하는 호들갑도 같잖은 일이거니와 소인배 같은 짓거리로 생각한 때문이지만 환국이나 윤국이 박의사를 존경하고 감사해하는 것도 그렇고 그러나 무엇보다 길상은 서희를 모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왜 아무 말씀 안 하세요?"

흐느껴 울면서 서희는 말했다.

"어째 비난을 안 하십니까."

또 말했다.

'뭘 비난하라는 거요?'

길상은 피우던 담배를 던졌다. 일어서서 서희 곁으로 다가왔다. 덥석 팔목을 잡았다. 팔목에 힘이 물려들었다.

"갑시다."

"이거 놓으세요."

그러나 길상은 서희 팔목을 거칠게 잡아채듯 하며 걷는다.

"남편 앞에서 다른 사내 죽음을 슬퍼하며 우는 여자가 세상에 어디 있어! 도대체 당신 나이 지금 몇 살이오?"

"이거 놓으세요."

길상은 손목을 놓아준다. 서희는 소매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자국을 부지런히 닦으며 걷는다. 걷는데 미쳤구나 하는 생각이 별안간 떠올랐다. 어제 자동차 속에서 울었고 별당에서도 울었고 오늘 또. 철나면서 오늘까지 울어야 할 일이 없어서 울지 않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천애고아가 되어 이곳까지 오는 동안 뼈마디마디 으스러지는 슬픔이 어디 한두 번이었겠는가.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보지 않았는가. 길상은 한 마리 염소새끼를 몰고 가듯 서희를 앞세우고 가면서

"내가 목석이오? 바지저고리요? 정 그러면 내 머리 깎고 중이 되리다."

했으나 그 목소리에는 이미 노여움이 없었다.

"패주고 싶었지만."

"..."

"참는 게요."

절에 돌아오자 서희는 무안하여 그랬던지 평사리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환국이가 올 텐데 함께 안 가구요?"

"어차피 평사리에 올 거니까요."

"그런가?"

길상이 어정쩡하게 말하자 서희는

"저를 패주겠다 하셨습니까?"

따지듯 묻더니 다시

"지가 뭘 어쨌기에요?"

하고는 돌아섰다.

길상은 화개 나루터까지 서희와 안자를 데려다주고 돌아왔다. 도솔암 가까이까지 왔을 때 해는 떨어지고 사방에서 저녁안개가 밀려들었으며 새들도 서두르릇 날아갔다. 달이 떠올랐다. 나무 잔가지 사이에서 어른거리는 반달

'추석도 며칠 안 남았구나.'

환국은 온다는 날보다 이틀이나 앞당겨서 나타났다. 그러니까 서희가 떠난 다음날이었다. 부자는 절문 앞에서 마주쳤다.

"웬일이냐? 토요일에 온다는 말을 들었는데."

길상은 놀라면서도 몹시 반가워했다.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떠나고 수업도 없고 해서 내려왔습니다. 어머님은 어디 계시는지요."

"평사리에 들르지 않고 왔느냐?"

". 갈 때 들르려구요."

"네 어머니는 어제 평사리로 가셨다."

"들렀다 올 걸 그랬습니다."

넥타이는 매지 않았고 연회색 셔츠에 연갈색 양복을 입은 환국은 좀 수척해진 것 같았다. 나란히 절문을 들어서는 부자는 키가 비슷했고 분위기도 비슷하여 남의 눈에 썩 보기 좋은 풍경이었다. 부자지간이기보다 선후배 사이처럼 보였다.

"식구들 잘 있겠지? 재영이는?"

"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탄력이 없었다.

"그는 그렇고 어쩐다?"

갑자기 생각이 난 듯 길상은 걸음을 멈추었다.

"뭐 말입니까?"

"우선 너는 지감스님한테 가서 인사부터 하고 나는, 저어 해도사한테 가기로 했는데..."

길상은 머뭇거리듯 말했다. 환국이 슬그머니 웃었다.

"그럼 가보아라. 나는 해도사한테 갔다오마."

심약하고 눈부신 듯한 표정의 길상은 발길을 돌려 허둥지둥 내려간다.

'아버지도 참.'

부친의 뒷보습을 바라보다가 환국은 지감이 있는 거처로 걸음을 옮긴다. 부친이 왜 그러는지 환국은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자상하면서도 의연하며 소신을 굽히지 않는 부친을 환국은 존경해왔다. 그리고 신분의 흔적을 느끼게 하는 비굴함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환국은 아들로서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그것은 본래적인 것이겠지만 수줍음을 부친한데서 가끔 발견하는 일이었다. 그가 걸어온 역경을 생각한다면 일종의 수수께끼 같기도 했다. 그 나이에 소년 같은 면모가 남아 있다는 것이 신비롭기도 했다. 그것은 혁명가의 모습이기보다 예술가의 모습이었다. 환국은 관음탱화가 거론되는 것을 부친이 두려워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더더구나 아들과 함께 법당으로 들어가서 자신이 그린 것을 바라보는 그 쑥스러움을 감내할 수 없어서 피해가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환국에게 초화를 보인 적이 없었다. 언젠가 한번 환국이 보고 싶다고 했을 때 길상은 몹시 당황했던 일이 있었다.

", 반 푼수, 돌팔이가 그리는 걸 봐서 뭘 해."

중얼거리듯 그러고는 외면을 했다.

"스님 계십니까."

지감이 거처하는 방 앞에서 환국이 말했다.

"뉘시오."

"환국입니다."

"들어오게."

문을 열고 환국이 들어갔다. 뭔가를 쓰고 있던 지감이 얼굴을 들었다.

"토요일에 온다고 들었는데."

". 좀 일찍 왔습니다."

"앉게."

환국은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그래 아버님은 만나뵜나?"

". 해도사 산막에 가셨습니다."

"그랬을 테지."

지감은 웃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자네 오는 걸 보고 피해간 게야. 참 별난 사람을 다 보았네. 탱화얘기가 나오면 안절부절, 영 자신이 없는 모양이야."

갑자기 환국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없는 모양이야, 하고 말하는 지감의 속을 짚을 수 없었다. 환국이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부친의 말대로 돌팔이가 그린 그런 그림이면 어쩌나 싶었던 것이다.

"스님게서는 어찌 보셨습니까."

"화가가 보아야지. 이 땡추가 알게 뭐람."

지감은 미소를 띤 채 환국에게 곁눈질을 했다. 환국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중으로서는 그의 말대로 땡추인지 모른다. 그러나 지감의 안목이 대단하다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청년기 장년기를 방랑으로 보낸 그는 한때 가마를 찾아다니며 그릇을 구워본 적이 있었고 통영의 조병수를 사귀게 된 동기도 목공예에 대한 관심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도 두루 돌아다니면서 미술에 대한 이론서를 상당히 탐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예비지식이 없다 하더라도 방학 때면 환국이 평사리에 내려왔고 평사리에 오게 되면 자연 도솔암에도 들르게 되어 지감과 심심찮게 나눈 대화에서도 능히 짐작이 되는 일이었다. 지감은 개인적인 얘기는 일절 하지 않았지만 서울서 그에 관한 얘기는 많이 들었다. 장인 황태수도 그렇고 임명빈 서의돈 유인성이 모두 지감의 또래이며 집안 내력이나 그의 청년 시절, 장년 시절을 소상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환국은 내온 작설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영광이 어머님은 요즘 어떠신지요."

하고 물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계신 것 같더군. 아직 만나지 못했겠구나."

"."

"읍내 장에 갔을 거야."

"절에 눌러앉으실 작정인지."

"아마 그럴걸?"

"영광이가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생각하기 나름이지."

"..."

"보나마나 그 사람, 자신의 영혼을 위해 고통 받고 있겠지. 어머니의 영혼을 생각한다면 괴로워할 필요가 없어. 세속적으로 생각 안하면 되는 게야."

"그럴까요? 그렇게 됩니까?"

"멀리, 멀리서 비잉 비잉 돌다가 이곳에 와서 머리를 깎고 법의를 걸친 나보다 신심이 깊다면 쉬이 절을 떠날 수 없을 게야."

"스님께서는 아직 번뇌가 남아 있습니까?"

"말해 뭘 하나. 내 형편이 진작부터 사바를 떠나 있어서 세속적 욕망 번뇌는 어느 정도 극복이 되었다 할 수 있겠지만 진리에 대한 확신이... 어려워. 착한 심성의 단순함이야말로 불심이며 천심이겠는데 먹물에 대가리 적신 놈치고... 복잡하거든. 그리고 무엇이든 틀에다 끼우려 하는 합리주의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지. 그나저나 자네 왜 이러고 있나?"

"?"

"민적거리고 있는 꼴이 부친과 흡사하구먼. 두려운가?"

"솔직히 그렇습니다."

"어서 가보게나."

"."

환국이 방문을 열고 나오려 했을 때 바로 방문 앞에 지연이 서 있었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이었다. 그의 눈에는 환국이도 잘 뵈지 않는 것 같았다. 아주 흥분된 상태였다. 환국은 신발을 신고 나서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했다. 십 년 가까이 도솔암에 오곤 했기 때문에 지연과는 구면이었다.

"아아 참, 언제 내려오셨소?"

"방금 왔습니다."

지연의 목소리를 듣고 지감도 방에서 나왔다.

"또 무슨 일이냐."

"오라버니,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이상한 일이라니?"

"너무 놀라서 아직 가슴이 두근거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무슨 일인지 말을 해야 알게 아니냐? 또 마당에 구렁이가 나타났느냐?"

신경질적으로 말했으나 옛날같이 지감은 지연에게 각박하지 않았다. 환국은 오도 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암자 앞에 누가 갖다놨는지 갓난 애기가 있지 뭡니까."

"갓난아기?"

"허허어. 그러면 마을로 내려가서 물어볼 일이지, 여기 오면 어떻게 해?"

"마을로 내려가다니요?"

"젖이라도 얻어먹여야지."

"에그머니, 끔찍스러워라. 제가 기르란 말씀입니까?"

"부처님이 너를 가엾게 생각하셔서 점지해주신 거다. 아암 길러야지."

"싫습니다."

그들의 실랑이는 좀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환국은 법당으로 갔다. 법당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낡은 것들 속에 새로움이 한결 선명한 관음탱화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는 천천히 관음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미동도 없이 관음상을 응시한다. 오른손에 버들가지를 들고 왼손에는 보병을 든 수월관음, 또는 양류관음이라고도 하는데 아름다웠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청초한 선에 현란한 색채, 가슴까지 늘어진 영락이며 화만은 찬란하고 투명한 베일 속의 청정한 육신이 숨 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찌 현란한 색채가 이다지도 청초하며 어찌 풍만한 육신이 이다지도 투명한가. 환국은 감동에 전신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법당을 나선 그는 절 마당에 멍하니 서서 산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할 말 없지?"

등뒤에서 지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국은 말없이 돌아본다. 지감이 다가왔다.

"저어 일봉이는 없습니까."

첫마디 말은 엉뚱했다.

"뭐할려구?"

"김장사댁에 갈 일이 좀 있어서요. 길을 모르니까요."

지감은 관음상에 대하여 언급이 없는 환국의 심정을 충분히 아는 것 같았다.

"나하고 가지. 일봉이는 영광 어머니랑 읍내 가고 없다."

두 사람은 절문을 나서서 한동안 말없이 산길을 올라간다. 한참을 가다가 환국은 좀 쉬어가자고 했다. 나무 밑에 그들은 나란히 앉았다.

"아버지는 참 외로운 분 같습니다."

환국이 말문을 열었다.

"관음상을 본 감상인가?"

"."

"자네 말이 맞네. 원력을 걸지 않고는 그같이 그릴 수는 없지. 삶의 본질에 대한 원력이라면 슬픔과 외로움 아니겠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

"그렇게 오랜 동안 붓을 들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세월인 게야. 자네 부친의 세월 말일세. 식을 맑게 간직하고 닦아온 자네 부친의 세월. 사람들은 대부분 본래의 때 묻지 않는 생명에 때를 묻혀가며 조금씩 망가뜨려가며 사는데 결국 낡아지는 것을 물리적인 것으로 인식하지. 생명은 과연 물리적인 것일까?"

지감은 자신에게 묻듯 말했다.

"말로는 탱화를 또 그려라, 그러나 김형은 두 번 다시 탱화를 그리지 못할 거야."

지감은 앞서 한 말을 놔둔 채 화제를 옮겼다.

"어째 그럴까요."

"종교적 의식이었으니까."

"금어는 항상 그 의식을 되풀이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네 부친은 금어가 아닐세. 금어가 탱화를 그리는 것은 예불과 그 성격이 같다 할 수 있으나 자네 부친은 원력을 걸고 한 일이었네. 매번 어찌 원력을 걸겠는가. 또 자네 부친이 환쟁이로 그림을 되풀이 그린다면 그건 세속적 욕심의 성격을 띠게 되는 게야."

"그렇게 됩니까?"

환국이는 처음으로 웃었다.

"내 식대로 한 말이다."

"저의 경우는 그럼 욕심이군요."

"그렇지. 야심작이다 하는 말이 그냥 된 건 아니거든, 예술 자체에 대한 것이든 명리를 위한 것이든 하여간 욕심이 포함된 것을 틀림이 없다."

"하긴. 사바의 일이니까요."

"슬슬 가볼까?"

"."

두 사람은 일어서서 산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사로잡히지 말아야, 사로잡히지 말아야지. 예술가도 어떤 면에서는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이다. 그러나 자유는 쓸쓸하고 고독한 거야."

지감은 앞서가며 탄식하듯 말했다.

 

 

6장 해체

환국이 재판소 앞을 지나가려는데 간수 두 명이 짐승 몰듯 몰고 나온 것은 용수를 쓰고 오랏줄에 엮은 네댓 명의 죄수였다. 언제보아도 그것은 끔찍스런 풍경이었다. 비교적 한적한 거리였는데 죄수랑 간수가 떠난 곳에 이번에는 삿갓을 쓰고 긴 작대기, 지팡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길어서 작대기로 보였는데 그것을 들고 종을 치면서 나타난 것은 왜중이었다.

"나무묘호렌겟쿄 나무묘호렌겟쿄, 나무묘호렌겟쿄!"

소위 일련종의 삼대비법의 하나를 외면서 왜중은 지나갔다. 그것 역시 기분 좋은 풍경은 아니었다. 환국이 자신은 불교 신자가 아니었지만 어릴 적부터 절과는 친숙해져 있었고 이번에는 더군다나 부친의 관음탱화를 보고 머릿속이 씻긴 듯 맑아 있었는데 진주 거리에서, 그것도 재판소 앞에서, 죄수들이 지나간 자리에서 왜중을 만났다는 것이 기이했고 거부 반응이 심하게 발동했다. 긴 작대기가 순식간에 나기나타로 변하여 벤케이처럼 그 중이 난동을 부릴 것만 같았다. 벤케이는 일본에서 숭상되는 사람 중의 하나로서 가마쿠라 시대, 유명한 미나모토 요시쓰네의 부하로서 성질이 거칠고 많은 인명을 살상한 중이다. 중이 사용하는 무기가 주로 나기나타였던 것이다. 중의 모습에서도 위협적인 것을 느꼈지만 일련에 의해 창시된 일련종 자체도 결코 조선인에게는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법화경에 의거한 것이지만 타종에 대하여 가장 공격적이며 전투적인 일련은 이른바 국난내습을 외치면서 입정안국론을 주장했는데 후일 일련은 국수주의의 괴뢰로서 정한론자 군국주의자들이 곧잘 치켜들고 나오는 역사적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군국주의가 완벽하게 일본을 장악한 현재에서 본다면 신도에 비하여 허울만 남았다 할 수도 있겠다.

기분이 잡쳐진 환국이 찾아간 곳은 장연학이 경영하는 남강여관이었다. 그가 막 여관으로 들어서려 하는데 안에서 불쑥 나타난 사람은 뜻밖에도 이순철이었다.

"이게 누고! 환국이 아니가!"

잠바 차림의 몸이 비대해진 순철이는 소리 지르듯 말했다.

"이거 참, 왼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허더니 거 틀린 말 아니네. 너 참 잘 만났다!"

"오래간만이다. 여기는 웬일로 왔어."

환국이도 상당히 반가웠던 모양이다. 순철이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야말로 코흘리개 때부터의 친구였으니.

"거래처 손님이 서울서 왔거든. 잠시 인사차 들렀는데 하여간 반갑다. 우리 이대로 갈라설 수 없는 일 아니가."

"그럼."

"무슨 일로 왔는지 모르지만 시간 걸리겠나?"

"아니, 잠시면 된다. 지나가는 길에 장서방 보고 가려고 왔어."

"그러면 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볼 일 보구 나와라."

"그러지."

환국은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순철이 담배 한 대를 다 태우기 전에 나왔다. 두 사내는 어깨를 가지런히 하고 거리로 나왔다.

"몸이 많이 났군."

환국이 말에

"늙는 거지 뭐."

"그런 소리 말게. 사업을 하면 노티를 내야 하는 겐가?"

"그런 경향도 없진 않지."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며?"

", 작년에."

"훌륭한 어른이신데."

"훌륭하게 된 거는 다 자네 부친 덕이지. 돈이야 기천 원 잃었으나 하하핫."

"무슨 그런 말을 하나."

"? 내가 빈말하는 것 같은가? 강탈당하고서 고마워하는 쪽이나 강탈해가고서 존경하는 쪽이나, 참 기기묘묘한 우리의 현실이지."

"함부로 말하는 거 아니다."

하면서도 환국은 마음속으로 찔끔했다.

"다 농담이고 자네 처가가 굉장하다며?"

"그런 쑥스러운 얘기는 그만두자. 오십 보 백 보지 뭐."

"하기야 시달리기론 더하지. 그놈들 비위 맞추려니 오장육부가 썩는다."

"고문은 왜 그만두었나."

"삼 년을 내리 낙방을 하고 보니, 해봤자지 뭐. 요즘엔 사업도 내겐 벅차다. 아버님이 안 계시니 낸들 어쩌겠나. 고문 패스란 소싯적 꿈이지 패스했다 하더라도 조선 놈들 재주 부리자면 피가 마를 게야. 뒷방구석에 처박혀 있느니보다 못할 경우도 있을 테니. 민족반역자 되고 얻는 거는 쥐꼬리만한 것."

그들은 순철이 단골로 다니는 요릿집으로 갔다. 진주서는 유지요 자산가인 순철을 안내한 방은 운치가 있고 차분했으며 조용했다. 요리상이 들어오고 기생도 두명 들어왔다.

"야 너거들 다 나가아. 여기 이 골샌님 켕겨서 술 못 마신다."

순철은 사정없이 기생들을 쫓아냈다.

환국이 생각을 했다기보다 순철은 조용하게 할 얘기가 많은 눈치였다.

"술 좀 늘었나?"

순철은 술을 따르며 물었다.

"조금."

"자네 술은 내가 가르쳤지 아마?"

"그랬지."

조용히 술을 마신다.

"환국아."

"."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었다.

"?"

"전쟁 말이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내 생각에는 말기에 접어들지 않았나 싶어. 얼마 전에 일본은 불인에 진주했는데 일본의 계산으로는 장개석의 원조 루트를 차단한다 그거지만 의외로 전선은 확대되어 일본이 말라죽게 되는 거 아닌지."

"말라죽는 데는 시간이 걸릴 거고 미국이 나서지 않을까 싶어. 미국만 나서주면 일본의 패망은 눈앞에 있게 되는데."

"일본이 그거 생각지 않고 불인에 진주했을 리는 없고."

"물론이지. 그러나 미국의 참전은 미지수. 참전한다는 확률이 구십프로라 하더라도 일본은 십 프로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다급한 사정이거든. 당장 전쟁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정이지. 장개석 원조의 루트를 차단하는 것도 그렇지만 전쟁물자 고갈이야말로 발 등에 불 떨어진 격이니."

"어쨌거나 일본에 승산이 없는 것만은 확실하지?"

"그야 내가 어찌 단언하겠나. 자네 생각이나 내 생각이나 비슷하다는 말밖에."

"정말 요즘 같아서는 백화점이고 뭐고 딱 때리치우고 싶어. 어떻게 설쳐대든지. 참 자네도 알 거야 김두만이라고. 왜 그때 우리 잡히고 함께 털린 그 작자, 술도가 하는."

"알지."

"그 작자 아들 김기성도 아는지 모르겠네."

"동경서 본 일이 있지."

"명색이 대학이지,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는지도 모를 학교를 유학이랍시고 다니면서 뽐내기로는 구역나게 뽐내든 놈인데 지금 뭘 하는지 아나? 돈을 처넣었겠지만 경방단 단장이야."

"출세했네."

"알고 보면 경찰서 시녀 노릇이나 하는 별 실속 없는 거지만 이 작자가 진주 거리를 활갯짓하고 다니면서 어리석은 사람들을 꽤 울리는 모양이야. 옛날엔 내 앞에서 쪽도 못 쓰든 놈이 하참, 세상 더러바서."

"유도의 유단잔데 수틀리면 내리꽂아. 그러면 될 거 아닌가."

"나 농담하는 거 아니야. 옛날의 그 가정부 자금 강탈사건이 있고부터 그놈의 집구석 사사건건 우리하고 대적하려 드니, 하늘 울 적마다 벼락 칠 수 없고 아주 귀찮어."

"같은 피해잔데 그럴 이유가 없잖은가."

"왈 우리는 가정부하고 내통하고 강탈극을 꾸몄다는 거고 저이들은 길 걷다가 기왓장 맞았다는 그런 말을 나불대고 다니는 거야. 사실 그런 풍설이 돌면 지장이 많거든. 하여간에 삼간 오두막 다 타도 빈대 죽는 것 시원타는 말처럼, 우리 집 다 타도 좋으니 그놈의 김두만 빈대나 타죽었으면 속이 시원하겠다."

"실은 그 사람하고 우리 집하고도 앙숙이네. 자네나 우리 골치 아프기는 마찬가지다. 하기는 뭐 그자뿐이겠나. 평사리 작은 마을에도 면서기가 날뛰고 걸핏하면 반국가다 반정부다,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감정이 격해지면 술잔 기울이는 횟수도 잦아진다. 동경에서 일류대학의 법과를 나온 이순철이고 보면 김기성이 같은 날건달에게 압박을 받는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일 것이다. 말단말직, 실속 없는 명예직이라도 하나 얻어 걸치고 보면 세력의 판도는 여지없이 뒤집히는 현실. 가진 자 못 가진 자 할 것 없이, 눈먼 구렁이처럼 얽히어 친일에 열을 올리는 군상들.

"거 광주학생사건 때 여기 중학에서 주모자로 잡혀갔고 형가지 살고 나온 후배가 있었지. 아마 윤국이는 알 거다. 홍수관이라고."

"홍수관이? 알지. 윤국이 일 년 선밴데 아주 친하다."

"그눔아를 우리가 데리고 있거든. 서기로 말이야."

", 자네가 데리고 있어?"

"."

"금시초문이구나. 하여간 고맙네. 그 무렵 강탈사건 땜에 우린 손도 발도 내밀 수 없었는데 자네 좋은 일 했군 그래."

"하여간 내가 그눔아아를 끌어다놨는데 잊을 만하면 경찰에서 오는 거라. 김기성 그놈도 기웃거리며 협박을 하지 않나. 악종이다."

순철의 말은 어쩐지 토막토막 끊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뭔지 복잡하고 격해 있는 듯했다. 실제 하고 싶은 얘기는 정리되지 못했고 표현하기가 쉽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들은 독립자금 강탈사건이 있은 뒤 거의 만나지 못하였다. 만나지 못했다기보다 형편이 서로가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 순철은 섬세하고 감각적이지는 않지만 부유한 집안에서 거리낄 것 없이 자란 탓으로 비교적 통이 컸고 순조롭게 대학까지 마쳤으며 고문에 도전도 했던 만큼 머리가 명석했다. 게다가 도복을 꿍쳐 메고 도장을 드나들며 유도로 단련이 된 몸은 날렵하면서도 튼튼했다. 보스 기질이랄까, 협객 타입이랄까 그런 사내였다. 그러나 사명감이 투철한 편은 아니었으며 대학 시절, 사회주의 사상이 일본 전토를 풍미했던 시기, 그도 그 방면의 책들을 탐독한 일은 있었지만 사회 인식은 희박했다. 하여간 환국이를 만난 순간부터 순철이는 흥분해 있었다. 그간의 사정을 생각하면 그의 흥분은 물론 우정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독립자금 강탈사건이 있은 후 환국이 순철이, 이들의 양가를 보는 일반적 시각은 두 갈래였다. 순럴의 부친 이도영을 피해자로 보고 길상을 가해자로 추측, 길상의 경우는 물론 가정이었다. 당국에서 혐의를 두고 한때 수사의 대상이었기 때문인데, 다른 한 갈래는 이도영을 협조자로, 길상을 주모자로 보는 시각이었다. 이 두 번째 추측은 이도영이 매우 훌륭하며 추앙할 사람으로 진주 사람들 사이에 부각되었으나 대신 당국에서는 실로 형용키 어려운 시달림을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함께 돈을 강탈당한 김두만이가 협조라라는 불똥이 자기 발등에 떨어질까 봐서 전전긍긍하면서도 바로 그 두 번째 추측 때문에 그는 양가에 대하여 이를 갈며 깊은 원한을 품게 된 것이다.

"김기성이가 그런다고 뭐 어찌 되는 것도 아니겠고 신경 쓸 것 없다. 지난 일은 다 잊어버리고 술이나 마시자."

환국이 부어준 술잔을 들어 올리며 순철은

"신경을 안 써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되질 않아."

한숨 짓듯 말했다.

"자네답지 않군. 다 열등감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겠나. 나는 학교가 달라서 소원했지만 자넨 중학교 동문인데 그를 너무 괄시했어. 실은 그의 부친의 경우도 그래. 우리 집에 대해서 강한 증오심을 갖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열등감, 그 때문인데, 하기는 뭐 평등의 원칙에서 본다면 우리에게도 문제는 있었어."

환국은 얘기가 깊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김두만의 조부 조모가 최참판댁에서 면천되어 나간 종의 신분이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공자 같은 말씀 하시네."

"공자는 평등주의자 아니었어."

"그랬나?"

"물론 나도 평등주의를 실천하지 못했구, 우유부단, 그저 콧구멍으로 숨만 쉬고 있는 형편이지만."

"문제는 남들한테 있었던 게 아니고 내 자산에게 있는 거지."

"...?"

"김기성이가 신경에 걸거적거리는 이유도 실은 따로 있네. 그놈이 경방단 단장 아니라 그보다 높이 되었다 하더라도 또 과거 무시당한 분풀이로 지분거린다 하더라도 내가 꿀릴 게 뭐 있어? 어느 면으로 보나 그놈의 상대가 되진 않아. 그까짓 날건달 마음만 먹으면 몰아낼 수도 있어."

그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진주에서 순철의 위치는 확고했다. 학벌이며 재력, 사업가로서의 기반, 모두 튼튼했다. 게다가 순철에게도 일본인 친구가 많았다. 학연 관계도 있었고 사업 관계, 또 유도 도장을 드나들 때 사귄 각계의 일인들. 대개가 상부층이며 서로 연관들을 가지고 있어서 김기성을 깔아뭉개는 것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내성적인 부친 이도영과 달리 순철은 활달했고 대인관계에서도 잘해 나가는 편이며 특히 강자숭배 기질인 일본인들은 순철의 보스 기질, 협객 스타일을 매우 좋아했다.

"그놈을 만나면 신경이 곤두서는 이유는 바로 그 사건 때문인데 나는 진실을 모른다."

"그 점은 나도 마찬가지 아닌가."

환국은 다소 굳어지며 말했다. 느낌으로는 강하여 온 것이 있었지만 환국이 역시 진상은 모르고 길상으로부터 일체 들은 말도 없었다.

"뭐 내가 진실을 캐묻자는 것은 아니네. 지난 일을 왈가왈부할 생각도 없고."

"어폐가 있군. 캐묻다니? 뉘한테?"

환국의 어세는 날카로웠다.

"야아, 이거 참, 심술 했구나. 하도 일이 혼란스럽고 복잡하게 얽혀서 착각에 빠질 때가 있어. 미안하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자신의 사정을 두고 하는 말일세. 내 나름의 고민인데, 단도직입으로 말을 하자면 돌아가신 내 아버지한테 문제가 있었던 거야."

하고 순철은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물었다.

"가족들에게 보인 아버지의 태도, 그게 문제였다. 어째서 아버지는 가족에게 담을 쌓듯 그렇게 홀로 침묵을 지켰는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가족에게는 물론 나에게조차 일체 함구하신 그 진의를 나는 아직도 모르겠단 말이야.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는지, 무엇을 암시하는 것이었는지, 누구를 위해 침묵하신 것인지, 환국이 너도 생각해보아. 경찰서에서 아니다 하셨으면 가족에게도 마땅히 아니다 하셔야 하지 않았을까? 어째서 아버지는 그토록 완강하게 입을 다물고 계셔야만 했는가."

순철은 당시의 괴로움이 생각났던지 얼굴이 일그러졌다. 피우던 담배를 눌러 끄고 말을 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의중을 두 가지로 생각해보았다. 하나는 협조,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연극인데 아버지의 침묵은 가족들에게 연극이었음을 시인한 것이냐, 또 하나는 비록 강탈당하기는 했으되 조선민족으로서 독립자금을 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는지, 그러나 이상하지 않아? 그 정도의 얘기는 어머니나 나한테 할 수 있는 일 아니겠어? 강탈을 당했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돈을 건넸으면 조선 사람으로서 면무식은 했다,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는 일 아니겠어?"

"..."

"만일 협조한 것이 진실이라면 그것은 우리 집안을 송두리째 걸고 한 모험이었다 하겠는데 그렇다면 아버지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쪽을 차단하기 위한 침묵이었을까?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침묵이었을까? 아버지의 생각을 내게 심어주기 위한 침묵이었을까? 지금도 그 의혹은 마치 유혹하듯 나를 그 언저리로 맴돌게 한다. 아버지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환국이도 차츰 이도영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궁금증을 품기 시작한다.

"아버지한테 진상에 대해 물어본 적은 없었나?"

"자네는? 자네 아버님이 명의를 받았을 때 물어보았나?"

"아니."

"나는 한 번 물어보았다."

"그래서."

"대답을 안 하시더군. 마치 돌로 굳어져버린 것처럼. 그렇게 엄한 얼굴을 본 적은 처음이었다."

두 사람은 다같이 한숨을 내쉰다.

"그 당시, 협조니 연극이니 그런 말만 나오면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어. 아버지가 잡혀가는 악몽도 수없이 꾸었다. 내가 이런 말을 입 밖에 내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지만 아버지가 생존해 계셨더라면 아마 이런 말 할 수 없었을 거야. 그때의 두려움은 아직 남아 있어.. 그런데 두려워하면서도 호기심을 갖는 아이처럼 내 두려움 속에는 늘 흥분이 있고 자부심이 있는 거야. 그런가 하면 움켜쥔 물이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버린 듯 아무것도 남아 있질 않는 것을 느껴. 불안해지는 거야. 아버지를 모를 때 이상하게 나는 내 자신에 대해서도 알 수 없게 되는데, 막연하다는 것은 불안이야. 이 기분을 자네는 모를 거다."

"알어."

"김기성을 만날 때 내 신경이 곤두서는 것은... 그들처럼 우리도 피해자냐, 아니면 가해자냐, 혼란스러워. 까닭없이 당황해지고 설 자리 잃은 사람처럼 막연해지고, 그놈은 번번이 내 불안의 불씨가 되거든. 그럴 때 내 꼴이란 찻간에서 자리를 못 잡아 허둥대는 노파 같단 말이야. 아주 기분이 나빠."

환국은 순철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들어."

"."

술잔을 비운 순철은 환국에게 잔을 돌리고 술을 붓는다.

"바보처럼 웃고 살자. 광대가 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

"언제까지?"

순철은 환국의 눈을 깊숙이 쳐다보며 말했다.

"글세... 멀지 않았다고 믿어야지. 멀지 않았을 거야."

"마치 허공을 걷고 있는 것만 같다. 어떤 왜놈도 날보고 그러더군. 이것은 삶이 아니라구, 꽤 괜찮은 녀석인데 소집을 받고 전선으로 나갔지. 바짝바짝 죄어들기론 그네들이라고 다를 게 없다. 언제 소집장이 날아올지 모르는 강박에 쫓기고 있거든. 겉으로야 천황폐하를 위하여 우리는 죽겠다 하지만 자신의 삶이 동강나는 절망이야 감출 수 없는 거지. 어깨디를 두르고 일장기 물결 속에 서 있는 가면 같은 얼굴, 그들 아내나 모친이 거리에 서서 행인들에게 센닌바리를 바툭하는 모습에서도 우수수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 수월찮이 전사도 했을 거고."

센닌바리란 흰 천에 천 사람이 붉은 실로 한 땀씩 매듭을 짓는 것인데 그것을 배에 감고 있으면 총알이 비켜가고 무운장구한다고 믿는 일본인들의 풍습으로 소집 받은 사람의 가족이 거리에 나서서 행인들에게 한 바늘씩 부탁하여 만드는 것이다. 진주 거리에서도 흔히 보는 풍경이었다.

"몇 마리의 군국주의 악령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자칫하면 국가 존립조차 어렵게 되어갈 판인데 왜 그 따위 미친 지랄을 하는지, 하여간 일본도가 문제라."

"자업자득이지. 반전사상이 지나갈 바늘구멍만한 통로도 없는 게 일본 아닌가."

환국이 말에 순철은

"전쟁이 나면 어느 나라이든 사정이야 비슷한 거지 뭐."

"전쟁이 나기 이전의 얘기를 한 거다. 반전사상을 성토하고 말라죽게 한 것은 군부보다 한술 더 뜨는 국민, 그들 스스로가 앞장선 일 아닌가."

"그거야 정부가 유도하니까, 일등국민이라느니, 세계의 강국이라느니, 섬나라에서 세상 넓은 줄 모르고 살아온 백성들을 솜사탕같이 부풀려서 간에 바람 잔뜩 집어넣고 신국이라는 환상 속에 대갈통 적셔가며 몰아붙이니, 자고로 대중이란, 아주 허약한 것이거든."

"자네 말마따나 몇 마리 군국주의 악령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죽음의 길도 마다 않으며 가는 그 소리에 귀 기울여봐. 무섭지? 일사불란이 천치들의 행진이라는 것을 까맣게 모르는 그들은 더욱더 무섭다. 아프리카에서 개미의 대군이 지나간 자리에는 남은 것이 없다 하는데 마치 그 개미떼처럼 일본인들은 일치단결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고, 우리들 식자 중에서도 그들 단결을 일본인의 장점으로 꼽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그 일치단결이 파괴로 돌진할 때 가공할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더군. 파괴란 새 질서를 세우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휴머니즘을 결여한 새 질서란 허구이며 허구에서 시작되는 파괴란, 남뿐만 아니라 자신도 무너지고 마는 결과를 초재하지. 오늘의 일본을 보면 명백해. 그리고 일본이 패망하는 날 그것은 증명될 것이다. 일본에서는 여하한 경우에도 혁명은 없을 거야. 자멸할지언정. 그들은 허구를 존재케 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잡동사니로 호도해왔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새로움이 없다는 얘기고 새로움이 없다는 것은 생명이 없다는 것, 창조하지 못한다는 것, 그들은 뻔뻔하게도 전쟁은 창조의 아버지요 문화 의 어머니라 했다."

평소 환국이답지 않게 그의 어투는 매우 신랄했다.

"나는 그 의견에 반대다. 민족성에다가 못 박는 것은 반대다. 체제에 따라 변질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보편성 아닌가."

"민족성에 못을 박은 것은 아니다. 나는 그들의 역사를 말한 거야. 인간의 보편성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일본의 역사는 변해야 할 것이 변하지 않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변해왔다. 그렇게 본다. 나는 민족성에다 근거를 두고 말한 것은 아니다. 길들여진 상태를 말했을 뿐, 그러니까 그들 스스로도 피해자인 셈이지."

"변해야 할 것이 변하지 않고 변해서는 안 될 것이 변했다. 그게 뭔데?"

"우라시마 다로의 다마데바코처럼 속이 텅텅 비어 있는 신도, 속은 신국사상과 현인신이라 부제가 붙은 만세일계는 변해야 하는데 변하지 않고 변해서는 안 되는 진리와 진실, 또는 사실은 그들 형편 따라 변화무상이지. 결국 그것들은 일맥으로서 변하건 변치 않는 것이건 허구다 그 얘기야."

"..."

"그들은 우라시마 다로의 다마데바코를 열어야 해. 그리고 진실과 직면해야 해. 설령 백발이 될지라도, 그래야만 다시 태어나고 새로워지는데 일본은 결코 빈 상자 뚜껑은 열려 하지 않을 걸세."

우라시마 다로의 다마데바코는 어부였던 우라시마가 용궁으로 가서 환대를 받고 다마데바코를 선물로 받아 육지로 돌아와보니 모든 것은 변해 있고 아는 얼굴 하나 없고, 우라시마는 바닷가로 나가서 열어보지 말라는 다마데바코를 열었다. 그 순간 우라시마는 백발노인이 되었다는 대강 그런 얘기의 일본 전설이다.

"글세 알긴 알겠는데, 그러나 일본은 있어왔고 현재도 존재하고 있어. 현실이란 어차피 현실을 위해 꿰어 맞추어지는 거 아닐까? 국가 통치의 형태는 각양각색, 현실은 이상과 너무 멀어."

순철은 다시 막연해지는지 자신 없이 말했다. 환국의 이상론에 반박할 적당한 말도 없었고 다만 환국의 논리가 현실적으로 얼마만큼의 효용성이 있는지 의문이었다.

"현실은 정지된 시간이 아니다. 또 추상적인 것 현상적인 것에 비하여 물질이 가시적이며 확실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가시 밖을 생각하면, 확실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눈앞에 있는 것은 하나의 점에 불과해. 시간 역시 정체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현실의 시간들은 한순간에 불과한 거고, 한 점에다가 한순간을 붙잡아서 아무리 견고한 성을 쌓아도 그게 뭐겠어? 가시 밖을, 불확실한 것을 탐구하고 과거와 미래가 이어지는 현실 속에서만이 창조는 가능해. 창조는 생명이야. 창조 없는 곳에선 파괴뿐이고 사람이 짐승으로 전락하지."

"예술가인 자네가 지향하는 길과 다른 대부분 사람들이 지향하는 길이 반드시 일치하는 건 아니야.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히 현실적 동물이며 잘산다는 것의 기준을 물질의 다과에 두고 있지. 그건 생존 본능으로 당연한 거고, 올바르게 소신껏, 큰 가치를 위해 헌신하는 것, 그러한 삶을 잘사는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지극히 소수라 할 수 있다. 그건 엄연한 현실이구, 정치란 예외 없이 그런 대다수를 상대로 하는 체제 아니겠어? 얼마나 그 대다수를 말아먹느냐, 얼마나 그 대다수의 허리를 펴게 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현인신을 신봉하건 공자를 떠받들건 또 예수 불타를 섬기든 간에 어차피 정치란 신이든 성인이든 도구화하는 게 그 속성 아니겠는가 그 말인데, 자아 술 들어."

술을 단숨에 마신 환국은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본다. 외로움, 해거름과 같은 외로움과 어떤 분노 같은 것이 그의 양어깨에 실리어 있었다.

"법과를 나온 나하고, 예술의 길로 간 자네와의 견해차이겠지만 또 자네는 당연히 그래야 하고, 나같이 사업을 한답시고 떠벌리고 다녀야 하는 처지로서는 싫든 좋든 현실에 밀착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의 일치점이라면, 어디 우리뿐이겠나? 조선인 모두, 뭐니 해도 우리의 설 땅이 없다는 것, 당면한 우리의 공통된 현실은."

순철은 하다 만다. 환국의 표정은 전에 없이 우울했다.

"기운 내! 환국아."

"..."

"그런 저런 얘기 다 그만두고 요즘 자네 그림 그리고 있나?"

"지금 표류하고 있다."

"표류하다니?"

"갈 곳을 몰라하고 있다 그 말이야.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왜 그림을 그리는가 반문하게 된다."

"지금도 반문하고 있어?"

". 무의미한 것 같아서, 무용지물인 것 같아서."

"그런 생각 말어. 소수란 선택받은 존재야. 다수와의 갈등, 이해부족, 있게 마련이다. 내 말이 널 실망시킨 모양인데 미안하다."

", 아닐세."

"내가 자네 처지라면 학교 관두고 그림에 전념하겠다. 자넨 이제 틀이 잡혔지 않아? 이 소리 저 소리 듣지 말고 그림이나 그려."

"학교를 관둔다고 해서 자유로워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주저앉고 싶어질 때가 있어. 부잣집 아들이 주색잡기, 방탕 하는 모습이 훨씬 정직하게 느껴지기도 하구."

", 그런 생각 할 때도 됐다."

"그림 자신 없다. 길을 잘못 든 게 아닌가 싶어."

"그런 소리 말어!"

순철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자네가 다른 길을 택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큰 후횔 했을 거다."

"재능도 모자라고 불꽃 튀는 삶과의 정직한 대결도 없고 그림이란 화실 안에서 반복되는 수련의 과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것을 새삼스럽게 절실히 깨달았다."

환국은 부친의 탱화에서 받은 충격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관음상으로부터 받은 감동, 자신의 그림 세계에 대한 회의 절망감, 원목을 도끼로 찍어서 세운 건물처럼, 수없는 인생의 영을 넘어 그곳에 우뚝우뚝 선 듯한 김강쇠 지감 해도사 모습에서 자신의 왜소함을 느끼게 된 일, 또 서울서의 다른 일, 그것에 대한 갈등도 아직 정리가 되지 못하고 있었다.

"도망갈 길이 딱 하나 있긴 있는데."

환국의 얼굴이 다소 풀리면서 쓸쓸하게 웃었다.

"그게 뭔데?"

"자연 속으로 파묻히는 것."

"머리 깎겠다 그 말이야? 설마."

"그런 뜻은 아니고 순수한 생명으로 살아보고 싶어. 또 그려보고 싶어."

"못할 것 없지. 산포수가 되건 나무꾼이 되건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그게 쉬운 일이라면 실행에 옮기지 자네보고 얘실 하겠나? 윤국이 같으면 그랬을 거야... 이래봬도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거든. 칡넝쿨 같은 그 인연들에 칼질하기가."

"하긴... 자넨 예술가이기보다 성직자가 더 맞았는지 모르지."

"화가 되기보다 그쪽이 더 험난했을 거야. 불가능했지."

"생각해본 적은 있었나?"

"공상으로, 있었지."

"하여간 힘들다 힘들어. 그래 윤국인 잘 있나?"

"학교 다니고 있지 뭐."

"생각나는 일 없어?"

"아 참, 매씨는 잘 사나?"

"이럭저럭, 그 애도 그 사건 땜에 단념은 했으나, 하기야 뭐 윤국이는 심에 차지 않았겠지만."

순철의 누이동생이 윤국이를 짝사랑한 것은 양가에서도 아는 일이었다. 그 사정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들이 요릿집을 나섰을 때 밖은 어스름 달밤이었다. 초저녁이었다. 환국이와 순철은 굳게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환국은 내일 아침, 일찍이 서울로 떠날 생각을 하며 걷고 있었다. 취기가 올랐다. 요릿집에서 술을 마신 간에서는 정신이 맑고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걸어갈수록 발끝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곧장 집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초저녁의 거리는 상점에서 새나온 불빛의 소용돌이 속에 사람도 주변 풍경도 아름답게 보였다. 약간은 들뜨고 행복한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환국은 집으로 가는 도중 남강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신사로 가는 돌계단을 피하여 옆길로 빠져서 강변으로 내려갔다. 강가에 앉아 머리를 좀 식힌 뒤 집에 들어갈 참이었다. 달빛 받은 강물이 일렁이고 있었다. 실제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강 건너 대숲에서 싸아! 하며 댓잎을 흔들고 지나가는 사람 소리가 들려오고 것 같았다. 촉석루 굵은 기둥이 그늘져 꺼무꺼무했고 그 뒤켠 신사를 에워싼 나무숲도 꺼무꺼무해 보였다. 산과 밤하늘의 경계선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환국은 담배를 붙여 문다. 학교 교사로 들어가면서 조금씩 피우기 시작한 담배다. 생각해보면 강혜숙을 처음 만난 것은 어수선한 병원에서였다. 간다에 있는 개인 병원, 외과 전문이었다. 안경 너머 눈을 치뜨고 쳐다보던 의사의 눈, 깐깐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수봉이가

", 혜숙씨."

하던 여자, 그는 화닥닥 비켜섰다. 여자이기보다 소녀, 아이처럼 겁에 질려 있었고 그는 연신 떨고 있었다.

"내 친구고 또 영광이 친군데 최환국, 그리고 여기는 강혜숙 씨."

수봉이 소개를 했을 때 혜숙은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영광이 일본 노가다 패거리한테 두들겨 맞고 사경을 헤맬 때 일이었다. 환국은 그때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연민의 정도 애정입니까?"

애부사댁에 가던 날, 나룻배에서 환국이 부친에게 물어본 말이었다. 길상은 빙긋이 웃었다.

"내 생각에는 그렇다."

"..."

"아마 너는 연민과 동정을 혼동하여 물어보는 것 같구나."

"역시 애정이군요."

"대자대비를 한번 생각해보아라."

"대승불교, 아니 종교적인 입장에서 여쭈어본 것은 아닙니다."

"인간적인 애정 말이구나."

"..."

"연민은 순수한 애정의 출발인 게다. 젖을 물리는 어머니의 마음도 연민일 것이다. 사별의 슬픔도 다시 만날 수 없는 슬픔보다 연민에서 오는 슬픔이 한층 더 진할 것 같구나."

"아버님은 어머님에 대하여 연민을 느끼셨습니까? 어머님은 대단히 강하신 분인데."

공격하듯 말했을 때

"사고무친한 남의 땅에, 타민족이 오고 가고, 이십이 못 된 천애고아인 처녀가 강했으면 얼마나 강했겠느냐."

일렁이는 남강 물을 바라보며 환국은 한숨을 내쉰다. 부친에게 연민도 애정이냐고 물었을 때 애정 없는 영광을 필사적으로 바라보던 강혜숙의 애처로운 모습을 떠올렸던 것이다. 연민이든 애정이든 환국은 강혜숙을 멀리서 가까이서 지켜보며 오늘까지 왔다. 부모를 버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영광을 찾아왔던 여자, 영광이를 놓아주기 위하여 결국 떠났던 여자, 환국은 잔잔하고 조심스런 연민으로 혜숙을 보아왔다. 영광에게, 아내 덕희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부끄러워할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환국은 믿어왔다. 그는 친구로서 영광을 무한히 사랑했고 아내 덕희도 그 나름의 애정을 가지고 있다 하며 믿었다. 그랬는데, 얼마 전의 일이었다. 동료 교사 한 사람이 뜻밖에도 강혜숙과의 중매를 부탁해왔던 것이다. 언젠가 한 번 그와 함께 양장점 앞을 지나치다가 강혜숙을 만났고 인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동료 교사는 눈여겨보았고 그 후에도 그 앞을 지나치며 혜숙을 보곤 했던 모양이다. 젊은 나이에 그는 상처를 했고 독신이었던 것이다. 마다할 이유도 없었기에 환국은 그들을 만나게 했다. 그때부터 환국은 마음에 이상한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강혜숙을 만났을 때 혜숙은 매우 명확한 어조로 구혼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 순간 환국은 저도 모르게 망연자실했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영광씨는 제가 이러고 있는 이상 죄책감 때문에 자유로워질 수가 없을 거예요."

"그럼 영광이를 위해 내키지 않는 결혼을 하겠다 그 말씀입니까?"

"체념하고 살아왔는데 그게 무슨 대수겠어요?"

"그건 자학입니다."

"아닙니다. 좋은 분 같았고 혼자 이러고 있으니까 여러 사람한테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요."

순간 그의 눈에 눈물이 글썽 돌았다. 폐를 끼친다는 것은 덕희의 의심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덕희가 강혜숙의 존재를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환국이도 아는 일이었다.

'얼빠진 놈,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그 길모퉁이에서 미싱을 밟으며 혼자 살아가길 바랬든 건가? 비정하고 잔인한 그 따위 생각을 내가 하고 있었단 말이야? 연민이 그렇게 이기적일 수는 없다. 도덕적인 문제를 떠나서, 인간으로서, 사내자식이, 그건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환국은 여러 사람한테 폐를 끼친다는 혜숙의 말이 몹시 아팠다. 상처받은 새 같아서 꽉 껴안아주고 싶었다.

'그래야지. 그래야 해. 결혼해야지. 바람 부는 거리에 언제까지 홀로 서 있겠는가. 원선생 그 사람 꽤 괜찮은 사내야. 불행하게 하진 않을 거다. 축복을 해주어야지. 행복해지기를 빌면서 누이같이 떠나보내야지. 사실이 그렇다. 그 길모퉁이에서 미싱을 밟으며 홀로 있는 한 영광은 결코 자유로워질 수는 없는 거다.'

하면서도 허전해지고 쓸쓸해지는 것을 환국이 자신도 어쩌지 못한다.

'이렇게 모든 일이 엇갈리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인가. 아니다. 그건 네 자신을 위한 변명이요, 합리화하려는 심사다. 너는 용기가 없다. 늘 두려워하고 있다. 너는 소림의 경우도 그러했다. 끝없이 넌 너에게 변명만 했었지.'

환국은 일어섰다. 걸찍하고 탁한 목소리로 육자배기라도 불러보고 싶은 기분, 환국은 강가에서 올라왔다. 걸직하지도 못하고 탁하지도 않은 생래의 목소리로 육자배기를 부를 수 있었겠는가. 육자배기 가락도 모르면서. 엇갈리기만 하는 여인들과의 인연은 엇갈리기 때문이 아니며 생래적인 그의 기질 탓인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사랑을 이루지도 못했으면서 멀리서 맴돌다 말았으면서, 아니 의식도 깊이하지 않았으면서 환국은 구름같이 번민하는 것이다.

집 앞에까지 갔을 때 대문간에서 환국은 성환이와 마주쳤다.

"선생님 이제 오십니까."

성환은 꾸벅 적을 했다.

", 어디 가나?"

". 남강여관에 갑니다. 귀남이가 아프다 캐서요."

"어머님 계시지?"

". 손님 오셨습니다."

"손님? 어디서."

"서울서 오신 모양입니다. 양교리댁 친척이라 하더마요. 지금 막 오셨습니다."

"알았다. 어서 가보아라."

"다녀오겠습니다."

환국은 사랑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넓은 방에 막 드러누우려 하는데 안자가 왔다.

"저녁을 어쩔까요."

"먹었어요."

"술 많이 했나 봐요?"

"친굴 만나서 했지요."

용정촌에 있을 때, 어린 그 시절, 안자! ! 안자! ! 하고 놀려먹은 안자, 안자도 그랬지만 환국이 역시 서로 흉허물이 없었다.

"이상한 여자가 왔어요."

안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양교리택 친척이 왔다던데요? 홍성숙이란 그분 아닌가요?"

". 노래하는 가수, 그 사람은 구면이지만 따라온 여자가 좀."

"누가 함께 왔소?"

"치렁치렁한 검정 양복을 입고, 눈은 올빼미처럼 큰데 얼굴은 씨꺼멓고 턱이 짧은, 어쩐지 인상이 고약한 여자더구먼요. 귀신같고 심술궂게 뵈고."

"어지간히 맘에 안 들었던 모양이군. 올 만한 일이 있어서 왔겠지요."

"마님께서는 분명히 만나지 않으셨을 텐데 마침 마루에 나와 계시는데 그 사람들이 마당에 들어서는 바람에, 혹 양현아가씨 혼담 가지고 온 사람들 아닐까요?"

환국은 혼자 있고 싶었는데 안자는 전에 없이 말이 많았다.

"그렇지는 않을 거요."

안자가 나가자 환국은 윗도리만 벗어던지고 방바닥에 나자빠지듯 눕는다. 천장을 쳐다보는데 천장이 올라갔다 내려왔다 했다.

'술이 과했구나. 무슨 놈의 말은 또 그렇게 지껄였을까?'

누우면 이내 잠이 들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잠은 오지 않았다. 돌아누워 본다. 홍성숙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기억이 있었다. 서울서 어머니와 함께 형무소에서 아버지와 면회를 하고 돌아오는 길, 열차 안에서 그를 만났고 부산서 여관에 들었을 때 조용하와 함께 여관으로 들어오는 그를 보았다. 그 기억은 조용하의 자살에 이어졌고 임명희를 생각하게 했다. 이웃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임명희, 조용하의 자살에 이어져서 얼마 전에 자살한 박의사의 모습이 별안간 떠올랐다. 어머니가 맹장수술을 받았을 때 부산까지 달려왔던 박의사. 그때 환국은 그가 어머니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적개심이나 반감은 일지 않았다. 아버지한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환국은 박의사의 순수한 애정을 아름답게 보았고 그의 고뇌에 동정했다. 아주 어릴 적에 아버지와 헤어졌고 십여 년 동안의 공백기를 어쩌면 박의사는 이들 형제를 위하여 부성적인 것으로 메워주었다 할 수도 있었다. 그는 최씨네 식구들을 위하여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환국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반대편으로 돌아 눕는다.

안방에는 서희와 두 여자가 막 들여온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낮에 올까 했습니다만 안 계시면 어쩌나 싶어서 저녁을 먹고 왔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았는지요."

홍성숙의 말이었다.

"괜찮소."

서희의 대답은 썩 내키지 않는 것이었다. 습격이라도 당한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 화급하게 만나 뵐 일은 없습니다만 여쭈어볼 말이 있고 인사도 드릴 겸 해서."

여쭈어볼 말이 있다 했으나 서희는 그게 뭐냐고 묻지 않았다. 물끄러미 바라본다. 임명희의 후배라는 말을 서희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분명 홍성숙은 자기보다 대여섯 살 나이 아래일 것이다. 마흔에서 한두 살 넘겼으면 여자치고는 사양길이겠지만 한편 무르익을 나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십여 년 전 서울서 내려오는 열차 안에서 홍성석이 자청하여 자기소개를 하며 인사를 했을 때, 또 그의 언니 되는 양교리댁 부인과 함께 독창회 초대권을 가지고 찾아왔을 때, 그 무렵의 모습,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홍성숙은 엄청나게 달라져 있었다. 비대해진 것도 그렇고 늙기도 많이 늙은 편이었지만 몸 전체가 망가져버린 것 같은 인상이었다. 눈빛은 초점이 확실치 않았고 시선은 끊임없이 움직였으며 마치 조울증 환자처럼 행동거지가 불안해 보였다. 미인은 아니었지만 워낙 가꾸었고 여왕같이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다니던 여자가, 지금이라고 화려하게 치장을 안 한 것은 아니었지만 화려한 그 치장이 오히려 육체의 초라함을 강조하는 것이었고 낡고 때 묻은 곳에 페인트칠을 한 것만 같이 생동력을 잃은 얼굴에는 칠이 벗겨진 것처럼 분이 먹지 않아서 군데군데 얼룩이 져 있었다. 아무리 가는 세월이 무섭기로, 저렇게 사람이 변할 수 있는 건지 서희는 마음속으로 심히 놀라고 있었다. 홍성수의 옆에 앉아 있는 여자, 방금 무용가라고만 소개한 배설자라는 여자의 경우도, 젊기야 훨씬 젊었으나 맑고 잘생겼다 할 수 없는 그 얼굴이며 빼어나게 균형 잡힌 몸매며 안자의 말대로 치렁치렁, 주름이 많이 잡히고 긴 검정 새틴 치마에 역시 검정빛 블라우스의 차림이며, 지방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라 제아무리 세련되었다 하더라도 이화감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어쨌거나 나란히 불빛 아래 앉은 두 여자는 몹시 희극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비극적으로 볼 수도 있었다.

"정말 부인께서는 아직도 아름다우십니다. 아름다움이 유지되는 무슨 비결이라도 있으신지요."

용건은 내버려둔 채 홍성숙은 아주 친숙해진 사이처럼 말했다. 서희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불로초라도 잡수셨습니까?"

"..."

"하도 늙지 않으셔서 그러는 것입니다. 설자씨 안 그래요?"

서희가 말이 없으니까 홍성숙은 배설자에게 동의를 구하듯 말을 걸었다. 배설자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 말씀으로는 많이 들었습니다만 뵈오니까 신비스럽습니다."

말의 품격을 한층 올려서 경건하게 말했다. 그야말로 쌍나발이다.

"그렇지? 심미적인 우리 예술가 눈에 저토록 완벽하신데 하물며 일반인들의 선망이야말로 말해 뭣하겠습니까. 조물주의 편애가 야속할 지경입니다."

"과공도 비례라 했습니다. 그만들 하시지요."

"아닙니다. 과공이라니요? 오히려 모자랐으면 모자랐지."

'아무래도 한물간 사람 같구먼. 전에는 저렇게까지는 안 했는데?'

"변하지 않는 것은 이 방안도 마찬가지군요. 십여 년 전 그대로예요, 설자씨."

", 홍여사."

하자, 홍성숙은 다소 움찔한다. 대체로 홍성숙에 대한 배설자의 호칭은 세 가지가 있었는데 상황에 따라서 그것은 적절하게 사용되었다. 동석한 살마들이 홍성숙을 대수로 여기지 않을 때 배설자는 마치 동료처럼 홍여사 하고 부르며 홍성숙의 콧대를 꺾고 자신을 돋보이게 했다. 그러나 홍성숙의 가족이나 친지들 앞에서는 언니라 부르며 매우 친밀한 사이라는 것을 과시했고 홍성숙의 입지가 좋거나 자신의 이해가 걸렸을 때는 홍선생, 그 이상으로 홍선생님이라 칭할 경우도 있었다. 언젠가 불쾌해진 홍성숙이 따진 일이 있었다.

"그거야 뭐 누구나 경우 따라서 호칭은 변하는 거 아니겠어요?"

배설자는 떠밀어내듯 냉정하게 말했다. 그리고 검고 암울한 눈동자는 홍성숙을 응시했다.

"설자 넌 너무나 타산적이고 비정하다."

"언니는요? 언니는 안 그런가요."

"나는 널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어."

"그건 언니 자신을 위한 일 아니든가요?"

"나쁜 년!"

번번이 당하고 치사스럽게 싸우기도 하면서, 그야말로 배설자가 가지고 노는데 홍성숙은 그와 헤어지지 못했다. 상종하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을 하면서도 사흘이 못 가서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배설자를 만나곤 했다. 홍성숙의 외로움 때문이었다. 사회적 발판을 다 잃은 때문이었다. 그에게서 모든 것은 쇠퇴해가고 있었다. 초창기의 성악가 홍성숙은 그 희귀 가치 때문에 존재했고 화려한 황금기를 누렸다. 그러나 자질이 뛰어나고 정통적으로 공부한 후배들에게 밀리면서 급속하게 그는 퇴조의 길을 걷게 되었다. 게다가 허영과 사치와 경박한 성품에 불미스런 사생활은 결과적으로 음악계에서 추방당한 것 같은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울분과 초조, 오뇌와 권태, 사그라지지 않는 야망을 안고 뒹구는 가정생활은 황폐 그것이었고 살림에 무관심한 나태한 생활은 그를 겉늙게 했다. 무골호인이지만 무미건조한 남편에, 슬하에는 자식도 없었다. 욕구불만에서 정신없이 먹어대는 음식, 소화불량은 반복이 되고 비대해질밖에 없었다. 몸이 망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 배설자를 만났고 어울리면서 홍성숙은 별 수 없이 유한마담으로 전락해갔다. 배설자는 그런 홍성숙을 앞세워 그 방면의 사회, 부유하면서 부패의 냄새가 감도는 소위 상류층에 교묘히 잠입해갔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배설자는 애국지사, 독립운동가의 딸이라는 탈을 더 이상 쓸 필요가 없었다. 그의 부친이 대련에 살았던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상해에 있었던 것도 그러나 독립운동가는 아니었다. 일본의 밀정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배설자는 조선을 통치하는 당국과 맥이 통하는 여자, 권력을 배경으로 한 무용가 배설자로서 그는 자신의 영역을 넓혀갔다. 그가 경찰의 끄나풀인 것은 사실이었다. 경찰의 간부이자 죽은 부친과도 지면이던 곤도 게이지의 정부인 것도 사실이었고. 언젠가 배설자는 무심한 듯 꾸미면서 홍성숙에게 홀린 말이 있었다. 조선의 예술가들을 통합하는 단체를, 관의 주도하에 결성할 것을 추진 중이라는 말이었다. 홍성숙을 사로잡는 데 그 이상의 달콤한 미끼는 없었다. 관의 산하 단체, 그 후원으로 재기하고 싶은 욕망, 헛된 꿈을 꾸게 되었으며 통합 예술단체에서 감투라도 하나 얻었으면, 홍성숙은 멋지게 자신을 추방하고 소외한 무리에게 일력을 가하고 싶었다. 아니 최소한 예술자로서 낙오되지 않고 그 명맥이라도 잇고 싶었다. 이리하여 배설자와 홍성숙의 공생 관계는 굳어졌던 것이다. 공생 관계라기보다 실은 배설자라는 매 발톱에 홍성숙은 꼼짝없이 채인 것이다. 부당한 욕망이 없었다면 어째 함정에 빠졌을 것인가. 소모를 재촉하는 함정에.

"서울서도 이렇게 격조 높은 가구로 꾸며진 댁은 그리 흔치 않지? 안 그래요? 설자씨."

"그렇지요. 가구라기보다 제 눈에는 예술품으로 보입니다. 일본인들도 조선의 가구, 목기를 보면 사족을 못 쓰던데요? 상당히 오래된 것 같기도 하구."

"그럼 유서 깊은 집안이니까."

"저 이층장 삼층장의 나무결 빛깔이 정말 기막히군요. 백동 장식의 디자인도 기발합니다."

"솜씨 좋은 장인이 여러 해를 두고 만들었을 거야."

"아까부터 보고 있었지만 정말 황홀하네요."

기발이니 디자인이니, 유서 깊은 집안이니, 황홀하다느니, 서로 질세라 주고받는 말을 들으며 서희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는다. 홍성숙은 서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울에는 자주 올라오신다는 얘긴 들었습니다만."

"가끔 가지요."

"저희들도 저희들 나름으로 사회 활동을 하고 있는 처지라서 좀체 찾아뵈올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설자씨랑 바람도 쏘이고 유람하는 기분으로 왔더니 마침 계신다 하기에, 네 그렇지요. 저어 그리고 어떤 분의 부탁도 있고 해서."

여쭈어볼 말이 있다는 데서 어떤 분의 부탁이라는 말까지 진전이 되었는데 아까처럼 그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평소 설자씨가 부인 뵈옵기를 소원하기도 했었지요."

시작부터 서툴렀다. 따지고 보면 가정의 주부에 지나지 않는 서희를 어떻게 내력을 알고 만나보고 싶어 했는가. 그것에서부터 마각은 드러났는데 홍성숙은 알지 못했고 배설자는 눈치가 빨라서 눈살을 찌푸린다. 이 사람이 이렇게 주책이 없어요, 하듯이.

"설자씨를 말할 것 같으면 제 동생이나 다를 바 없고 예술가라는 공통점도 있고 해서 여러 가지 동병상련하는 처지입니다. 조선과 같이 아직 미개한 나라에서는 성악가다 무용가다 하면은 제대로 인식이 안 돼 있는 것 같더군요. 이런 풍토에서는 예술가가 걸어야 하는 길이 그야말로 가시밭길입니다. 보호는 못할망정 중상모략을 일삼으며 어떻게든 꺾어버리려는 악습이 있습니다."

불미한 소문을 의식하며 그것을 지우려는 듯 홍성숙을 말했다.

홍성숙은 말을 계속한다.

"외국에서는 일류 성악가나 무용가라 하게 되면 국가의 보배요 국민들이 아끼고 사랑하며 보호를 받게 되는데 이곳에서는 박해를 당하기 일쑤지요. 하필이면 왜 예술가로 태어났을까 한탄할 때도 있답니다.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야, 그래야 비록 약소민족일지라도 그나마 대접을 받지 않겠습니까? 부인에게 이런 말씀 드리는 것이 좀 뭣합니다만 저도 그간에 겪은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숱한 낭설에 시달리기도 했구요. 접시바닥 같은 계집들 입방아."

배설자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홍여사 그런 얘기 좀,"

하다가 서희를 보고 어중간하게 웃으며

"뭔가 억울해서 그러는가 봐요. 사람만 만나면 저렇게."

위하는 척하면서 주책을 용서하라는 뜻을 깔며 말했다.

"내가 언제 사람만 보면 그랬어?"

이야기의 내용은 균형 잃은 것이며 상대를 고려에 넣지 않는 것이었지만 어조는 평이했는데 갑자기 고음이 퉁겨오르듯 홍성숙의 어세는 날카로웠다.

"말하는 홍여사는 모르겠지만 좀 그러는 편이에요. 신경과민 아닌가요?"

"설자씨! 너무 덤비는 거 아니야?"

이성을 잃고 발끈했다. 비윗장을 확 긁는 말도 그랬고 말을 막은 것도 그랬고 특히 여사라는 호칭이 괘씸했던 것이다. 사실 유치할 지경으로 예술가를 연발하여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은 근래에 와서 생긴 홍성숙의 새로운 버릇이었다. 그러나 배설자는 홍성숙의 비윗장을 긁기 위해 한 말이기보다 어쩌면 주로 침묵하고 있는 서희의 반응을 보기 위한 시도였는지 모른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세요. 누구나 다 겪는 일인데 뭘 그리 꼬장꼬장 생각을 해요."

"하긴 뭐... 그렇기는 하지만 남의 일이니까 말로는 그러지만."

슬그머니 가라앉는다. 한동안 시무룩해 있던 홍성숙은 자신을 달래고 타이르는 것 같았다.

"가끔 제가 이렇게 흥분한답니다. 용서하십시오. 나이 탓이지요."

"그럴 때도 있지요. 개의치 마시오."

서희 마음에 일말의 동정이 일었다. 사람의 형상이 저토록 변했는데 성품인들 어찌 변하지 않겠는가 싶었던 것이다. 홍성숙은 누가 쫓자오기라도 하는가 다급하게 다시 말을 이었다.

"설자씨가 곁에서 늘 도와주어서, 동생 같으니까 성질도 부리곤 한답니다. 제 성질을 다 받아주고 무던하지요. 아끼는 설자씨를 무용가라고만 했습니다만 아무쪼록 부인께서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 가지 재능이 있는 사람이니까요. 서울서 공연도 한 번 한 일이 있었고 뜻있는 분의 후원으로 지금은 무용교습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본인을 앞에 두고 말하는 것이 좀 뭣하지만 체격을 보아도 그렇고 타고난 무용가예요. 최승희의 수제자이기도 했구요. 하기야 뭐 제이의 최승희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비꼬시는 건가요?"

배설자 말은 들은 척도 않고 말을 계속한다.

"게다가 설자씨는 일본인 실력자 중에 친분 있는 사람이 많아서 발전하기도 쉽지요. 또 여러 가지 어려운 중개 역할도 맡아서 하고 있는 형편이며 사교의 범위가 아주 넓습니다. 우리의 형편이, 부인께서도 아시다시피 희망이 없는 거 아니겠어요? 실현되지 못할 일이면 진작 버리는 게 좋고, 조선이 독립하리라는 것은 버얼써 물 건너 간 일 아닙니까? 기왕지사 이렇게 된 바에야 일본과 서로 손잡고 상부상조하는 길밖에 더 있겠습니까? 조선 민족이 다 죽을 수는 없지요. 제가 듣기로는 부인께서 일본에 대하여 매우 우호적이며 일본에 대한 이해도 깊다 하더구요. 다만 바깥분이 그래서 심려가 큰 줄 압니다만 그것도 부인께서 하시기 나름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런 일에 대한 복안이라도 있어서 찾아왔단 말입니까?"

서희는 짐짓 관심이 있다는 듯 물었다.

"?"

어리둥절하다가 당황한다. 어디서 얘기가 그리고 빠졌을까 생각하듯 그러나 강하게 부정하는 몸짓으로

", 아닙니다. 이번에 찾아뵌 것은 그런 일이 아니며."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필요하다면 복안이야 왜 없겠습니까."

재빨리 배설자가 받았다. 그의 말에는 왠지 모르지만 소름 끼치는 것이 있었다.

"..."

애매하게 대답하고 서희는 배설자를 한동안 쳐다본다. 백해무익의 인물이라는 것은 초장부터 간파하고 있었지만 배설자의 마지막 말에서 서희는 결코 소홀히 넘겨서는 안 될 여자라는 것을 깨닫는다. 횡설수설, 정신이 나갔다 돌아왔다 하는 홍성숙에게 들러붙은 찰거머리 같았고 검정 옷에 핏빛이 스쳐가는 것을 느낀다.

'섣불리 상대했다가는 큰일 날 여자다. 이런 종류의 여자는 흔치 않아.'

"앞으로 정세가 나빠지면 염려되는 일이 생길지 모르나 아직은 우리 집안에 별일이 없으니."

", 앞으로도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너무 노골적이었다고 생각되었는지 배설자는 일단 후퇴를 했고 대신 홍성숙이 드디어 본론을 꺼내는 것이었다.

"실은 따님을 한 번 본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아이를?"

", 어떤 분이 함께 가자고 해서 따라갔습니다만, 학교 앞에서 기다리다가 본인 모르게 보았지요. 참 눈부시게 아름답더군요."

"어째 그러셨지요?"

"물어보나마나, 선보러 갔지 뭣하러 갔겠습니까. 혼담이 많은 줄 알지만 제가 말하는 혼처는 나무랄 데 없을 만큼 거의 완벽하지요. 총각은 현재 동경에서 유학중인데 경응대학 법과에 다니는 수재구요. 인물도 잘 생겼습니다. 까놓고 얘기하자면 우리 시댁과는 집안간인데, 해서 어릴 적부터 그 애를 보아왔습니다. 성품도 자상하고, 마침 규수를 찾던 중이었는데 연비연비로 알게 된 따님이 마음에 들어서 찍은 모양입니다."

"그 아이 내력은 아시오?"

"물론 알지요. 그러한 약점을 물리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처녀 아닙니까? 눈부신 아름다움에 장차는 여의사가 될 것이며 친정이 든든하질 않습니까? 그쪽에도 약점은 있지요.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지만 시어머니 될 사람이 홀로 되어 아들딸을 기르다보니 살림이 넉넉지는 못합니다."

벌써 감을 잡은 서희의 표정은 우울해 보였다.

"부인께서는 규수를 친자식 이상으로 사랑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사랑받을 만한 처녀였습니다. 옛날 생각나시지 않습니까?"

"..."

"형부하고 저의 언니가 댁의 아드님을 두고 몹시 탐을 냈지요."

"아아."

"성사가 되지 못해서 얼마나 서운하게 생각했던 지요. 우리 소림이도 손 등의 그 흠집만 없었다면 원하는 만큼 사윗감을 고를 수도 있었는데, 하기는 지금 잘 사니까 다행이지만 생각해보면 어찌 그렇게 파란만장을 겪으면서 혼사가 이루어졌는지 신기합니다. 가난뱅이 의전 학생, 의관의 집 자식이라고는 하나, 게다가 짝사랑하던 간호부가 학비를 보태어주었으니, 장래를 믿고 한 일이고 보니 그 분란이 오죽했겠습니까? 용모로 보나 학력으로 보나 어느 모로 보아도 도저히 짝이 될 수 없는 여잔데 참말 분수 모르고 날뛰었지요. 조카사위는 말하더군요. 공부는 해야겠고 가난이 죄다, 금전을 내미는데 물리칠 수 없었더라는 거예요. 약속한 바도 없고 손목 한 번 잡아본 일도 없었다는 거예요. 그때 형부가 현명하게 단안을 내렸지요. 그 간호부에게 적잖은 돈을 주고 해결을 보았는데 그렇게 하자니 의견이 분분하고 말도 많았고 양교리댁 체면도 많이 깎였습니다. 친척들은 딸을 늙혔음 늙혔지 그런 데 시집을 보내느냐고 노골적으로 말하곤 했지요. 사위의 학비 일체를 대고 병원까지 차려주었으니, 우리 언닌 억울해서 많이 울곤 했습니다. 부인께서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소림이도 이 댁 따님에 못지않게 아름다운 처녀였습니다. 집안 좋고 재물 있고 여학교도 서울서 명문을 나왔고 삼박자가 다 맞았는데, 운명이겠지요. 손등의 흠집은 치명적인 것이었으니까요."

듣기 좋게 흠집이라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치명적인 혹이었던 것이다. 양현의 경우도 그 혹 못지않게 그의 내력은 거의 치명적인 것이다.

"솔직히 얘길 하자면 규수의 출생을 상쇄하는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서희는 대꾸 없이 묵묵히 앉아 있었다.

"노골적으로 얘기하자면 지참금 문제 아닌가요?"

배설자의 말이었다.

"말하자면 그렇지."

"혼담 가져간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내용은 잘 몰랐는데 아주 약고 계산이 빠른 사람들이군요."

"설자씨! 혼담이란 본시 그런 거 아니겠어? 피차 손해 안 보려는, 그래서 고르는 거구."

"여의전을 나오면 장차 의사 아니에요? 거기다 지참금까지, 너무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가 않아. 시댁 집안이라 해서 그쪽 편을 드는 것도 아니구. 그만한 혼처도 쉽지 않겠다 싶어서 권하는 건데. 시집도 안 간 설자씨가 뭘 안다구 그래."

"홍선생이 맘을 써주어서 고마우나 글세 섭섭하게 생각지 않았으면 좋겠소. 우리 아이는 이미 정혼한 데가 있어서."

"? 정혼을 했습니까?"

"했어요."

"이거 참 헛수고를 했군요."

홍성숙은 약이 올라 말했다. 서희는 드물게 소리 내어 웃으며

"용서하시오. 사람의 욕심이란 원래 미련한 것이어서 더 좋은 자리일까? 하고 듣고 있었지요."

"그러면 정혼한 곳이 월등하다 그 말씀입니까?"

"그런 셈이지요. 지참금은 필요 없으니까."

"..."

맥을 놓고 홍성숙은 서희를 바라본다.

하직을 하고 문밖에 나온 성숙은

"우롱을 당한 것 같다."

하며 길바닥에 침을 뱉었다.

"청혼한 곳이 있다는 것은 빈말인 거예요. 완곡하게 거절하기 위해 그랬지 않나 싶은데."

"! 기생 딸을 지참금 없이 누가 데리구 가누."

"지참금보다 장래 의사가 실속은 더 있는 거 아니유?"

"그래도 여기 조선에서는 아직 안 그래. 우리 소림이는 손등뿐이지만 그 아이는 몸뚱어리 전체가 치명적이야. 지참금 주고도 그런 혼처 구하나 두고 보면 알어."

"유부녀가 외도를 하면서 꽤 구식 이론이네."

둘이 되면서부터 이들 사이에 오가는 말은 거칠었고 직설적이다. 부패되어가는 감성을 거리낄 것 없이 토한다.

"모르겠다 모르겠어. 내 코가 석자나 빠졌는데 남의 일, 실은 처음부터 관심 없었어. 끝없이 권태롭고 죽고 싶을 만큼 권태로워. 서울을 떠나와도 속 씨원한 그런 일이 있어야지."

"밤거리를 좀 걸어봅시다."

"그러자꾸나."

하다 말고 성숙은 걸음을 딱 멈춘다.

"설자씨, 아까 왜 그랬지? 그렇게 날 망신주어도 되는 거야?"

"다 언닐 위해서 한 말인데 뭘 그러우?"

"말은 꽃같이 아름답고 비단같이 매끄럽지만 냄새가 나. 창자까지 훤히 들여다보여. 우리가 하루 이틀 보는 사이냐?"

"또 시작하네."

혀를 차면서 설자는 홍성숙을 내버려두고 간다. 홍성숙은 또 부지런히 그를 따라간다.

"나 솔직히 말해서 홍여사 할 땐 싫어! 설자 너 나이 몇인데 날 보고 여사라 하니?"

"밥 짓고 빨래하고 애 낳아 기르는 아낙이 아니잖아요. 사회활동을 하는데 그럼 여사라 하지 뭐라 하지요? 그 말이 어때서? 진주까지 와서 또 쌈 할래요? 그렇담 나 내일 갈 거예요. 바쁜 사람 끌고 와서는."

이들은 어두운 길에서 불빛이 환한 신작로로 나왔다.

"생각해보니, 생각해보나 마나지 뭐. 희망이 없어. 집이 지옥 같애. 나이 젊다면 연애하다가 동반 자살하고 싶어."

"침이나 바르고 하는 소리예요? 나이 젊다면 명성을 위하여 동분서주, 혈안이 되어 서울거리를 쏘다닐 걸요? 연애는 무슨 놈의 연애, 계산된 정사지 뭐."

"너나 나나 피장파장이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겠든 데요?"

"누가?"

"방금 만난 여자."

"최서희? 그거 대단한 여자야. 철옹성이란 말이 있지. 그 여자 철옹성이야. 함락 안 될 거야. 손가락 빨지 말구, 한데 어지 그리 늙지도 않았지? 볼로초 삶아 먹었나? 그런데 말이지, 설자는 바늘로 찌르면 피가 나올까? 검은 피가 나올지도 모르지."

"왜 이래요? 고약하군. 술도 안 마시고 주정하나?"

"알어.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것, 넌 항상 그랬잖았어?"

"하면은 손해 볼 시비는 왜 거는 거유?"

"심심해서 그런다. 설자 너는 복수심이 강해. 무섭단 말이야."

"홍여사는 안 그렇고?'

"까불지 마. 쥐꼬리만큼 있었던 것도 옛날 옛 시절이고 이젠 맹물이다. 너는 질기고 무자비하고 사악해. 독사같이."

"맞아요. 홍여사는 착해서 버림받는 거예요."

"뉘한테?"

"조용하, 나같음 놓아주질 않지. 아주 쉬운 상댄데, 바보라구요."

"내가 바보라 그 말이지? , 빚 받을 것 없었어. 계산은 다 끝났던 거야."

밤바람이 제법 썰렁했다. 지상에는 불빛이 있고 하늘에는 별이 많았다. 오가는 사람들이 치렁치렁, 검정 옷 입은, 밤에 보니 흡사 마귀 같은 배설자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지나간다.

"언니 요즘 형부하고 각방 쓰나요?"

"그건 왜 물어."

"증세가 날로 심해지니 물어보는 거지요. 정서불안 욕구불만, 형부가 안아주지 않는 모양이죠?"

설자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음탕한 웃음이었다.

"옛날 옛적에 졸업했다. 누가 너 같은 줄 아니? 한 남자 가지고는 모자라는 여자, 참 살 맛 나겠다."

"어디루 가는 거요?"

"몰라."

"언니댁에선 홍여사 환영 안 하는 눈치든데 밤늦게 들어갔다가 구박받으면 어떡허지?"

"형제도 유세해야 대접하는 거야."

"유세보다 평판 때문이겠지요."

"그럴지도 모르지. 언니는 요조숙녀니까."

"언니."

"무슨 청이 있어? 겁난다아."

"조카딸 집으로 가요. 방도 많은데."

배설자 목소리에 탄력이 실린다.

"그럴까?"

"술 사가지고 가요."

"그러려무나."

하다가

"그만두지. 술 있을 거야. 내놓으라 호통 치면 돼. 조카사위가 날 괄시하지는 않아. 저이들이 인연 맺은 것 그게 다 뉘 때문인데? 가자."

홍성숙의 목소리에도 활기가 돌아왔다.

그들은 허정윤과 양소림이 사는 병원 뒤편의 살림집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밤은 제법 저물었는데 응접실에 내외가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잠이 든 모양이다.

"밤늦게 웬일이에요?"

소림이 놀라서 일어섰다.

"이모님이 웬일이십니까."

정윤이도 신문을 놓고 일어섰다.

"우리 또 왔어요."

배설자가 명랑하게 말했다.

". 오셨어요."

소림이 배설자에게 인사를 했다.

"점심을 얻어먹었는데 또 왔지 뭐냐. 잠자리 빌리려고. 허서방 자네도 알지? 자네 장모님께서 나를 박대하는 것."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룻밤만 잠자리 빌리자꾸나."

"빌리다니요? 모셔야지요."

"됐다. 소림아."

소림은 연민 어린 눈으로 홍성숙을 바라본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것 같은 홍성숙, 옛날 조용하에게 편지 심부름을 시켰을 때 불쾌하고 불결해 보였던 홍성숙, 그러나 그는 소림을 매우 사랑했다.

"우리 술 한 잔씩만 하지. 우리 넷이서 괜찮지 허서방."

"그럼요."

"설자씨 우리 조카사위 호남이지?"

"이모 왜 이래요? 술 마신 사람같이."

소림이 언짢아하며 말했다.

"잔말 말고 술이나 가져와. 너 내 주량 알지 않니? 주정꾼도 알콜 중독자도 되긴 글렀어. 자아 설자씨 앉아. 사실은 우리 허서방을 내가 병원에서 발견했지. 박효영 그 사람 병원에서, 참 박의사가 죽었다며?"

"."

정윤이 대답했다. 소림은 주안상을 차리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자살했다며?"

"."

"잘 죽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순정파는 죽어야 해. 그런데 설자씨 병원에서 허서방을 발견했을 때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지금이야 미꾸라지 용 됐고 기생들이 목을 맨다 하지만 그땐 초라했어. 하나 한 가지 귀한 것은 청순했지. 처가 덕에 돈도 벌고 의사로서 성공은 했으나 또 화목한 가정도 꾸몄지만 그때 그 청순함은 간 곳이 없어. 나같이 명성을 쫓아다니는 여자가 어찌 허서방을 발견했을까? 그리고 적극적으로 내가 밀었거든."

"알고 있습니다."

"우리 소림이같이 착한 아이. 허서방 명심하게, 처가에서 얻은 재물보다 자네를 복되게 한 건 우리 소림이야."

"이모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겠지요."

배설자가 한마디 했다. 배설자는 백만불짜리 다리를 과시하듯 소파에 깊이 몸을 묻고 다리를 포개어놓고 있었다.

"이모라서 하는 얘긴 아니야. 모두가 다 별 신통이지만 이모로서 소림에게 만점 받게는 돼 있었는데 다만 한가지 그 애한테 부끄러운 일이 있었지."

"이모 관두세요!"

술과 안주를 준비해온 소림이 날카롭게 말했다.

"알았다. 소림아씨."

소림은 낙오자같이 돼가는 홍성숙에게서 때때로 솔직한 면을 보는 것이 괴로웠고 가엾게 여겨졌다. 그리고 지난날의 불쾌감, 홍성숙에 대한 불결하다는 느낌이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탁자에 놓은 술잔에 술을 붓는데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봐. 내가 할게."

홍성숙은 소림에게서 술병을 받아든다. 방으로 들어온 소림은 우는 아이를 안고 다독거리며

'가엾은 이모, 어찌 사람이 저 모양으로 변해가는 걸까? 아무도 도울 수가 없어. 명성이란 마약 같은 것일까? 마약이 떨어진 아편쟁이... 이모는 아편쟁이처럼 변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명성은 나비 같은 걸까? 너무나 이르게 서리가 내렸어. 가엾은 이모. 어머니 아버지는 왜 좀 따뜻하게 대해주질 않는 걸까?'

소림은 아이를 자리에 누인다. 아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또 울음을 잡힐 모양이다. 소림은 아이 옆에 누워서 다독거리며 눈을 감는다. 화려했을 시절의 홍송숙을 떠올려보려 했으나 그 모습 대신 응접실에 앉아 비대한 홍성숙의 모습만 떠오르는 것이었다.

잠은 깨었으나 허정윤은 눈을 뜨지 않고 누워 있었다. 간밤의 일이 게저분하게 떠올랐다.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니었는데 머리가 무거웠다. 가슴도 답답했다. 돌아 눕는다. 이상한 밤이었다. 악몽 같기도 했다. 붉은빛과 검은빛이 여울같이 휘말리어 눈부시게 돌고 있는가 하면 선명하게 두 가지 빛깔이 윤곽을 드러내며 갈라지기도 했다. 강렬하게 다가오는가 하면 몽롱하게 멀어져가기도 했다. 정윤은 가끔 흰색과 붉은색의 대비에서 공포를 느낄 때가 있었다. 그것은 수술실 안의 환자 피와 의사의 흰 수술복에서 연유된 것인데 그가 공포를 느끼는 것은 생명이 겪게 되는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생명의 존재 여부를 기다리는 안타까움 때문도 아니었다. 생명 자체의 부재를 절감하기 때문이다. 여자의 눈은 집요하게 타고 있었다. 때론 그 눈빛이 도깨비불처럼 날아와서 이마빡에 꽂히곤 했던 어젯밤의 느낌들이 되살아난다. 어젯밤처럼 피가 싸아! 하고 가시는 것 같다. 오렌지빛 전등과 여자의 검은 옷, 창밖의 검은 옷, 그가 눈을 내리깔 때는 세필로 그린 것 같은 눈매의 선과 입술 턱의 선, 양어깨에 흐르는 선이 선율같이 잔물결같이 흔들렸다. 바라보며 웃을 때 정윤은 여자의 하얀 이빨이 볼에 와서 닿는 것 같았다. 한 마리의 검은 표범이었다. 꼬고 앉은 긴 다리와 긴 팔은 뱀같이 전신을 휘감아오는 것만 같이 꿈틀거렸다. 섬찟섬찟한 느낌과 함께 이상한 흥분에 몸이 떨렸다. 그것은 저주 같았고 압박 같았고 여자는 저주의 화신같이 어두웠다. 죄의 심연같이 어두웠다.

"닥터 허."

배설자가 불렀다.

"."

"젊은 여자의 가슴을 열어놓고 청진기를 댈 때 느낌이 어때요? 의사도 남자잖아요?"

홍성숙은 몇 잔 술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이었고 우는 아이를 달래러 들어간 소림은 아이와 함께 잠이 들었는지 나타나지 않았다.

"어떻게 그리 정확하게 발음을 하십니까?"

정윤이 되물었다.

"?"

"닥터 허라 하셨지요?"

선생님, 의사선생님, 허선생, 원장님, 귀에 익은 말은 그런 것이었다. 일본식 발음의 도쿠도루라는 호칭도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닥터라니.

"몰랐어요?"

"...?"

"나 대련서 살았고 한때는 상해에도 있었어요. 그곳 영어는 영국인 혹은 미국인의 혼바시코미의 영어예요."

"영어는 잘하십니까?"

"좀 배우다 말았어요. 한데 닥터 허, 당신 내 묻는 말엔 대꾸 안했어요."

"그런 대답을 왜 당신한테 해야 하지요?"

"현명하구먼 아무런 느낌이 없다는 거짓말보다는 훨씬 정직해. 호호홋 호호홋... 자아 내 술 한 잔 받아요. 이 술은 천국으로 가는 술이야요."

"죽기는 싫은데요?"

"능청을 떠는 거요? 아니면 아직 애숭인가?"

"글쎄올시다."

"우리들의 천국은 바로 눈앞에, 손이 닿는 곳에 있고 예수쟁이들 천국은 알지 못할 먼 미래,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게 천국 아니겠어요?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 예술 긴 거야 뭐 우리가 죽은 뒤 일이니까 상관할 바 없고, 인생은 짧아요. 다만 짧을 뿐, 욕망을 위해 사는 것만도 너무나 모자라. 안 그래요? 닥터 허."

"그렇군요."

"극기하고 인생의 가치를 찾고 도덕을 준수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그 따윈 모두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지. 안 그래요? 닥터 허."

"허무주의군요."

"천만에, 나는 어느 누구 못지않게 인생을 사랑하는 쾌락주의예요. 술 몇 잔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내 옆의 이 여인은 쾌락주의도 도덕주의도 아닌 오락가락, 명성만 잡으려고 기를 쓰다가 이 지경으로 무너진 거 아니겠어요?"

"너무 심한 말씀 아닙니까?"

"심한 말? 언제나 사실을 말하면 심하다고들 하지. 인간이란 뭣이든 걸치고 가리기를 좋아하는 동물인가 봐요."

"배선생께서는 그럼 발가벗고 사십니까?"

배설자는 깔깔대고 웃었다.

'그러고 싶지만 호호호, 호호. 나 육체에는 자신이 있거든요. 하지만 옷을 입는 것은 생리적 문제고 내가 가리면서 사는 것은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아요. 삶은 선택하는 게 아니야요. 욕망을 위해 가는 거지. 욕망을 선택하는 게 아니며 가지는 거. 모든 것은 가지기 위한 수단 아니겠어요? 안 그래요? 닥터 허.'

배설자는 눈을 치뜨고 허정윤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탁자 위에 팔꿈치를 짚었다. 커다란 눈이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정윤은 몸을 젖히며

"발상이 일본식이군요."

거의 무의식적으로 한 말이었다.

"뭐라 했어요?"

"남의 나라를 먹어치우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말입니다."

"애국자시군요. 뜻밖인데요?"

정윤은 멋쩍게 웃었다. 이때 소림이 잠이 깨었던지 거실로 나왔다.

"안 주무실 거예요?"

정윤은 저도 모르게 화다닥 일어섰다. 배설자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고 소림은

"이모! 여기서 주무시면 어떻게 해요? 일어나세요. 방에 들어가서 주무셔야지요."

소파에 기댄 채 잠든 홍성숙을 흔든다.

"부인께서는 청초하시고 정결하시고 사바에 계시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 같아요. 수녀원에나 가실 걸 그랬습니다."

성숙을 깨우다 말고 소림은 배설자를 똑바로 쳐다본다. 얼굴이 빨갛게 상기돼 있었다.

"제가 실례된 말씀을 드렸습니까? 술잔 들어간 탓이라 생각하세요."

하고는 경멸하듯 배설자는 웃었다.

정윤은 다시 몸을 뒤척이다가 베개를 가슴에 받치고 담배를 찾아 붙여 문다.

"일어나셨어요?"

소림이 방에 들어오며 말했다.

"."

몸을 일으킨 정윤은 재떨이를 끌어당겨 담뱃재를 턴다.

"그 사람들 일어났소?"

"아니오."

소림은 올곧잖게 대답했다.

"어젯밤 기분이 상했던 모양이군."

"이모도 참, 저런 여자하고 왜 어울리는지 모르겠어요."

"이름난 무용가라는데 뭐가 어때서."

하고 정윤은 소림의 눈치를 살핀다.

"이름난 무용가라구요?"

눈살을 찌푸리며 소림은 남편을 쳐다본다.

"예술가라서 그렇게 자유분방한 모양이지?"

"자유분방하기보다 예절을 모르는 거예요."

수녀원에 갈 걸 그랬다는 말은 소림에게 상당한 상처를 준 것 같았다.

세수를 하고 들어오면서 정윤은

"그 사람들 깨우지 말아요. 밥상도 안방으로 가져오구."

그러는데 장모 홍씨가 들이닥쳤다. 홍씨의 안색이 나빴다. 항상 조촐하던 옷차림이 오늘 따라 초조해 보였다.

"아직 병원에 안 나갔군."

". 늦잠을 잤습니다."

정윤이 앉음새를 고치며 말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갔나?"

"갔어요."

소림이 대답했다.

"윤이는?"

"미자가 업고 나갔어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이모 여기 있지?"

하고 홍씨는 물었다.

"."

"그럴 줄 알았다."

"..."

"그래서 내가 왔지. 젊은 사람들한테 이 무슨 망신인지, 허서방도 그래서 어젯밤 잠을 설쳤겠구나."

정윤은 저도 모르게 당황한다. 장모가 자기 심중을 뚫어보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 그랬다기보다."

"말 안 해도 알 만하다. 어째 그 꼴이 되어가는지... 한심스럽다. 그나마 혼자 왔으면 나 말도 않겠어. 그 따위로 논다니 같은 계집을 달고 와서 이웃 사람들 볼까 두렵구나."

"예술 하는 사람이라 그렇겠지요."

사위 말에 발끈해진 홍씨는

"춤추는 것도 예술인가? 그럼 기생들 모두가 예술가겠구나."

언성을 좀 높였다. 소림이 받아서

"어머니, 그분은 현대무용 하는 사람이에요."

"현대무용이고 뭐고 창피스러워서."

"남인데 뭐... 그보다 조반은 하셨어요?"

"이 애가? 지금이 몇 신데?"

"이모 땜에 속상해하지 말아요."

"속 안 상하게 됐니? 허서방 보기도 민망하다. 조카딸 생각을 한다면 그런 걸 끌고 여기 와서 처자빠져 자겠니?"

"어머니가 이해하세요. 이모도 여러 가지 괴로우니까 내려왔을 거예요. 저는 왠지 가슴이 아파요."

"성숙이는 그렇다 치자. 따라온 그 계집 꼬라지가 그게 뭐냐. 젊은 것이 집안에 어른 계시는 것도 아랑곳없이 잠옷 바람으로 칫솔 입에 물고서 마당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다니질 않나. 너 오라비가 마주치고서 기겁을 했다는구나. 너의 아버님도 민망하여 마당에 나오질 못했다. 아무리 내외가 없어진 세상이기로 그리 막돼먹고 망측스런 계집은 처음 봤다."

"오늘 내일 서울로 갈 거예요. 이모 체면도 있으니까 참으세요."

"너의 이모 체면 버린 지가 언젠데 그런 말을 하니?"

찬모가 조반상을 들여다 놨다. 소림이 밥그릇의 뚜껑을 벗겼다.

", 혼자 먹겠습니다."

정윤은 수저를 들며 홍씨보고 말했다.

"어서 들게.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을 걸세. 시간이 수을찮이 지났구나."

정윤은 국에 밥을 말아 술 먹다가 상을 물리고 장모를 피하여 병원으로 나왔다. 왠지 장모는 자기 속을 환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불안하고 두려웠던 것이다. 홍씨도 사위가 비켜주기를 고대하고 있었던지, 왜 밥을 그렇게 들고 마느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동생에게 따지려고 단단히 작심하고 온 것 같았다.

병원에는 서너 명의 환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울한 얼굴로 대충대충 환자를 보고 난 정윤은 담배를 붙여 물고 창가에 가서 거리를 내다본다. 단조롭고 권태스런 언제나의 그 거리였다.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는, 하얀 길 위에 가을 햇빛이 튀고 있었다. 번화가에서 비켜선 거리의 사진관, 약국, 양복점 그리고 담벼락, 담벼락에는 시들시들한 나팔꽃 줄기가 걸려 있었다. 평범했지만 아이를 셋이나 낳은 결혼 생활은 십 년이 넘었다. 처음 이삼 년은 돈에 팔려온 것처럼 위축되어 소림에 대한 애정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그의 손등에 난 혹을 볼 때마다 정윤은 혐오감을 느끼기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러나 큰애가 자라고 아우를 보고, 병원을 개업하여 성공한 의사로서 지위가 확립되고부터 그런 심적 갈등은 극복이 되었고 소림을 사랑했으며 처가에 대한 부담감도 엷어져가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나는 그 불우했던 시절의 꿈을 꾸는지 모르겠다.'

그의 꿈은 항상 우중충했다. 가난했던 청소년 시절의 풍경이 꿈속에서 재현되곤 했다. 박효영의원의 그 좁은 방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꾸었던 꿈, 시골의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문짝이 없어진 자기 방에 서 있다든지 문짝을 찾아 헤맨다든지, 산에 가서 칡뿌리를 캐는데 무지무지하게 큰 칡뿌리가 어느덧 무꼬랑지처럼 작아져 안타까워했다든가, 그런 중에서도 정윤은 일념에 두세 번은 숙희의 꿈을 꾼다.

'나는 너에게 결혼을 약속한 일이 없다! 사랑을 고백한 일도 없다! 동정은 했으나 사랑한 일은 없었다! 학비를 보내달라고 부탁한 일도 없다!'

그렇게 아우성을 치다가 깨곤 했다. 그 꿈은 숙희가 내미는 돈, 숙희의 심정을 빤히 알면서 거절 못하고 받은 돈, 그 사실을 강하게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마음속 깊이 몰려든 치욕의 가시였다. 숙희도 이제는 남의 후실댁으로 시집을 갔고 아이도 하나 낳았다는 소문인데 정윤의 마음속에 박힌 가시는 빠지지 않았다. 그 가시는 숙희의 행복과 불행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어쩌다가 거리에서 숙희를 만나는 일이 있었다. 숙희는 도전적으로 정윤이를 쏘아보곤 했다. 입술을 실룩거리며 어디 얼마나 잘 사는가 두고 보겠다는 저주의 눈길을 퍼붓기도 했다. 그때마다 정윤은 피가 역류하는 것을 느낀다. 이성을 잃고 덤벼들고 싶은 충동을 느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빚진 것 없다! 너에게 빚진 것 없다! 나는 너에게 학비 보태달라 부탁한 일이 없다! 책임질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결혼하겠다는 약속도 한 바 없고! 가난하고 불우하여 호의를 받은 죄밖에 없다! 언제까지 날 괴롭혀야 하는가!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지불했다! 그래서 아직 남아 있단 말이야?'

숙희 눈빛에 대하여 정윤은 마음속으로 아우성을 쳤지만 여전히 치욕으로, 세월이 흘러가도 치유되지 않았다. 치유되지 않는 것이 정윤은 억울했다. 숙희의 꿈을 꾸지 않고 숙희를 만나지 않는다면 잊어질 수 있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정윤은 다른 지방으로 옮겨갈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처가와의 유대는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그런데 정윤은 창밖을 바라보며 어떤 계기도 없이 지난 일을 왜 생각하고 있었는지, 분명히 그는 어떤 망상으로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간밤의 일 때문이다. 십여 년 결혼 생활에서 아내 이외의 여자와 전혀 접촉이 없었다 할 수는 없다. 그는 몇 번인가 외도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술자리에서 알게 된 기생, 취중을 핑계 삼아 여자와 동침한 일이 있었다. 그것을 소림이도 눈치 채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그런데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아무 일도 없었다. 술 마시고 얘기한 것밖에는. 그러나 실제 이상으로 배설자와 간음하고 치정의 극을 넘나드는 것 같은 느낌이 머릿속에 눌러 붙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리고 또 그것에서 오는 죄책감이 강렬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무서운 여자다! 난 일찍이 그같은 여자를 본 적이 없다! 악마같이 나를 끌어당겼다.'

"선생님."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돌아보았을 때 간호원의 난처해하는 얼굴이 있었다. 그새 환자가 밀린 눈치였다. 열두시까지 환자가 붐비는 시간이다. 정윤은 다 잊고 의사로서 환자에 전념했다. 환자들이 거의 빠져나가고 열두시 반쯤 됐을 때 환자의 발길은 뚝 끊겼고 병원 안은 이상한 침묵 속에 가라앉았다. 정윤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목을 젖혀 천장을 올려다본다. 몹시 피곤했던 것이다.

'점심을 먹으러 가야 하는데 집안 사정이 어찌 되었을까? 장모님은 가셨을까? 처이모는? 그 여자는 갔을까?'

어쩐지 냉큼 일어서지질 않았다. 만일 그들이 아직 집에 있다면 자신의 처지가 난처해질 것 같았다.

'이러고 좀 있어보는 거다.'

정윤은 책상을 밀어내고 두 다리를 쭉 뻗었다.

"선생님 전환데요?"

진찰실 문을 열고 들여다보며 간호원이 말했다.

"어딘데?"

"여자 분인데요?"

전화는 조제실 옆 벽면에 있었다.

"여보세요?"

"! 닥터 허, 나 배설자예요."

"웬일이십니까?"

"지금 여관에 있어요. 말하자면 쫓겨난 셈이지요."

하고는 깔깔 웃었다.

"농담이겠지요."

"농담이긴? 장모님께서 홍여사를 족대기는데 내가 아무리 강심장이기로 뭉개고 앉아 있을 수 있겠어요?"

"이모님도 함께 계신가요?"

"홍여사는 장모님께서 데리고 갔어요. 아무렴 동생을 여관 신세지게야 하겠어요? 정말 서러워서 어쩌지?"

"장모님께서, 그러실 분이 아닌데 이모님 땜에 화가 나셨겠지요."

"나 기분 좋아요. 해방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 그런데 닥터 허, 날 위로해줄 사람은 당신뿐인데 어쩌실래요?"

"농담이 지나치시군요. 진담으로 받으면 어쩔려구요."

하고 나서 정윤은 아차! 했다.

"낯선 고장에 와서 외톨이가 된 내 심정 알겠지요? 지금 당장에라도 만나서 위로받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고 저녁에 만나고 싶어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야 해요!"

"안 됩니다."

"부담 가질 것 뭐 있어? 여행이란 사람 마음을 굉장히 로맨틱하게 하는가 봐요. 하여간 저녁 여덟시에서 아홉시까지 촉석루에서 기다릴 게요."

"그러지 마십시오."

"지금은 그러지만 마음이 변할 거예요. 하여간 난 기다린다니까."

하고는 전화가 뚝 끊겼다. 정윤의 얼굴에서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아이 보는 미자가 조르르 달려왔다.

"선생님, 점심 드시러 오시라 캅니다."

"알았다."

정윤은 집으로 들어갔다.

"당신 얼굴이 왜 그래요?"

소림이 물었다.

"어떤데?"

눈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창백해요."

"간밤에 잠을 못 잤고, 환자들도 많아서."

방으로 들어온 정윤은 팔베개를 하고 누었다. 심장이 멎은 것 같았는데 눕는 순간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고 한편 것은 무서운 심연이라는, 상반된 강렬한 감정과 이성이 팽배하여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소림이 밥상을 들고 왔다.

"그 사람들 갔어요."

"."

"배설자 씨가 여관으로 가겠다며 먼저 나갔어요. 이모는 나중에 어머니 따라 갔구요. 어머니가 굉장히 화를 내셨어요. 그리고 당신한테 미안하다구."

"나한테 미안할 것 없구."

"역시 기분이 안 좋았든 모양이지요? 당신."

정윤은 밥상을 끌어당기며 소림을 힐끗 쳐다본다.

"하긴 되잖은 계집이더군. 삼류의 창부 같았어. 예술가는 무슨 놈의 예술가? 생긴 꼬라지를 보아도 입맛 떨어지게 돼 있지. 아닌 게 아니라 이모님도 그 여자하고 어울리면 좋은 평판은 못 듣겠더군. 한마디로 재수 없는 갈보라."

"당신? 어찌 그리 입이 험해요? 전에 없는 말을 서슴없이 하네요?"

소림이 질색을 한다.

"내가 어쨌기에?"

정윤은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아연한다.

"상스럽게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어요?"

"불쾌해서 그러오."

"남 들을까 무서워요."

그러고는 묵묵히 밥을 먹던 정윤은 밥상을 밀어냈다.

"나 굉장히 피곤해요, 한숨 잘 테니까 깨우지 말아요."

정윤은 소림이 깔아준 요 위에 쓰러지듯 눕는다.

세시가 넘어서 정윤은 가슴을 짓누르듯 답답하고 무거운 잠에서 깨어났다. 계속하여 꿈을 꾼 것 같았는데 뚜렷이 기억에 남은 것은 없었고 마치 쓰레기통처럼 머릿속이 복잡하고 지저분했다. 병원으로 나왔다. 오전에 한꺼번에 몰렸던지 기다리는 환자는 별로 없었고 대합실에서 귀남이와 함께 기다리고 있던 장연학이 일어섰다.

"오셨습니까."

친밀한 어투로 정윤이 말을 걸었다. 박효영의원에서 잔뼈가 굵어진 정윤이는 자연 최참판댁 식구들과 모두 잘 아는 사이였으며 따라서 그 집 일을 도맡아 해온 장연학도 오랫동안 정윤과는 친숙한 사이였다.

"오래 기다렸습니까?"

"좀 기다리기는 했는데."

박의원에서 정윤이 조수로 일했을 때 말을 놓고 지낸 사이였기에 장연학의 말씨는 다소 어정쩡했다.

"들어오십시오."

귀남을 앞세운 장연학은 정윤을 따라 진찰실로 들어간다.

"좀 어떻습니까?"

정윤이 물었다.

"부기는 빠진 것 같기도 하고."

"좀 빠졌군요. 그런데 약은 아직 남아 있을 텐데요?"

그러니까 병원 올 날이 아니라는 뜻이다. 정윤은 습관적으로 진찰을 했다.

"실은 의논을 좀 할라고 오긴 왔는데."

입맛을 한번 다시고 나서

"여관에 있으니까 아무래도, 챙기노라 챙기지마는 음식도 때맞추고 간맞추고 일이 충실찮은 것 같고 저거 집만큼이야 하겄는가. 아이가 또 염치 발라서 누워 있기도 안 편한 모양이라. 그래서 집에 보내어 정양을 하믄 어떨까 싶어서, 약은 여기서 타다가 보내주믄 될 기고."

정윤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귀찮아서 그러는 거는 절대 아닌께 가서 안 된다믄 물론 내가 데리고 있을 기고."

"집에서 지시한 대로 음식 조절만 잘한다면 별 지장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많이 좋아졌어요. 명심할 것은 절대로 짜게 먹여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정윤은 귀남의 부기가 남은 얼굴을 유심히 쳐다본다. 병은 신장염이었다. 처방을 써서 조제실에 넘긴 정윤은 모처럼 환자도 없고 한가하여 그랬는지

"여관은 어떻습니까? 잘 돼갑니까?"

하고 물었다.

"여관 해가지고 무신 떼돈을 벌겄나? 식구들 입치레나 하고 빚 안 지믄 되는 기지. 요새는 제법 짭짤한 편이구마는. 여관업이란 철을 타니께."

"다른 사업도 하실 수 있을 텐데 하필이면 여관업입니까?"

"이런 시국에 멀 해도 다 마찬가지지 머. 시국 안 타는 일이라 카믄 병원밖에 더 있을라고? 어쨌거나 이렇기 성공을 했이니 고생한 보람이 있고 참 고마운 일이제. 아이들은 잘 크는지 모리겄네."

"잘 있습니다. 환국이 윤국이도 잘 있겠지요?"

"그 아이들이야 별일이 있일까마는... 편안하게 사는 사램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참 양현이 그 아이가 여의전에 다닌다면서요? 참 세월이 빠릅니다."

장연학은 드물게 환하게 웃었다.

"여의사 하나 생길 기구마는."

만족스럽게 말했다.

정윤이와 작별하고 약을 탄 뒤 두 사람은 병원 밖으로 나왔다.

"귀남아."

"."

"니 집에 가고 접지 않으믄 가지 말고 여기 있거라. 니가 귀찮아서 보내는 기이 아인께."

"아입니다. 집에 가서 병 나으믄 오겄십니다."

"염치 채리노라 그러는 거는 아니겄제?"

열여섯의 어린 나이였다. 우락부락, 미련퉁이 아비와는 다르게 귀남은 수굿했다. 개구쟁이였던 어린 시절과는 사뭇 달랐다. 그리고 그 모습에는 어딘지 모르게 서러움이 감돌고 있었다. 아비가 집 나간 후, 자라면서 그는 인생의 슬픔과 외로움을 체득한 것 같았고 어미와 살아야 한다는 책임감을 다진 듯했고 세상은 혼자 헤쳐나갈 수밖에 없다는 냉엄한 이치도 깨달은 것 같았다. 그러나 어미와 헤어져서 객지살이는 쉽지 않았고 병까지 겹쳤으니 어린 마음이 비관이 되는 것 같았다.

"아무 염려 할 것 없다. 의사선생님도 괜찮을 기라고 장담을 했고 돈드는 일이라 카믄 조맨치도 걱정할 것 없다. 사람이란 살다보면 병도 나고 험한 꼴도 보고, 그기이 사는 거 아니겄나. 내일 아침에 나랑 같이 평사리로 가자."

"."

"자아 그라믄 나는 어디 들를 곳이 있는데 나는 여관으로 먼저 가 있어라. 저녁답에는 아마 성환이가 올 성싶다. 그라믄 가봐라."

전에는 정연학이 이같이 자상하지는 않았다. 자상함은 모조리 마음속에다 집어넣고 오로지 행동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세월 때문에 장연학이 변하였는가 관수의 죽음 때문에 심약해졌는가. 귀남을 보낸 뒤 장연학이 찾아간 곳을 영팔노인의 집이었다. 영팔 내외는 마당가에 앉아서 가을볕을 쬐고 있다가 연하기 들어오는 것을 보자

"장서방 아니가. 웬일이고? 참 오래간만이네."

영팔노인이 반색을 했고

"안 죽으이 또 보네."

하면 판술네도 반가워했다. 두 늙은이는 모두 이가 빠졌고 머리는 백수였다. 주름 사이사이에 간 세월의 흔적이 구겨져 있었다.

"거동하실 만합니까?"

연학이 물었다.

"다 틀렸다. 집 도랑은 사알사알 댕기지마는 문밖 출입이사 어디 하겄더나. 지팽이를 짚어도 어줍어서... 정신도 오락가락하고, 진종일 늙은네 둘이 마주보고 있일라 카이 참말이제, 해도 질고 밤도 질어서."

"그래도 아직은 짱짱하십니다."

"짱짱하기는. 노망기가 있는데?"

하고 판술네는 영팔노인에게 눈을 흘렸다.

"자개 얘기구마는. 저 할망구 노망들어서 시적 똥싸게 생깄이니 큰 걱정이라."

"얼씨구? 내 말 사돈이 하네."

"평사리의 봉기도 문밖출입은 못한다. 카제?"

"그런 모양이더마요."

"나이 들믄 죽어야 해. 오래 사는 것도 죄다."

"그런 말심 마시이소. 판술이가 들으믄 서분타 할 깁니다. 자기가 잘못해서 그러나 하고. 실은 내일 평사리에 가는데 함께 가실 수 있을까, 행여나 싶어서 와봤십니다."

"평사리는 뭐하러 가는고?"

"귀남이가 아파서... 아무래도 어매한테 가서 조리하는 기이 좋을 성싶고 나이 어린께 생각이 안 나겄십니까."

"무신 벵인데?"

"뭐 큰병은 아닌 것 같고 신장염이라 카는데 얼굴이 붓고 오줌을 잘 못 누고, 그런 병인데 지금은 많이 좋아졌십니다."

"그 벵이라 카믄 좋은 약이 있제."

"그게 멉니까?"

장연학이 바싹 다가앉았다.

"아주 쉬운 기라. 큰 배를 하나 사다가, 가에 진흙을 발라서 숯불에 뭉굿이 구워가지고 먹이믄 담박이라."

"하모. 생각이 나네. 그거 해믹이믄 탈벵할 기다. 우리 판술이도 어릴 적에 그 병을 앓았니라. 그래서 누가 가리쳐주길래 해 믹있더마는 코피를 쏟더니 씻은 듯 나았다."

판술네도 생각이 났던지 맞장구를 쳤다. 이들은 아직 관수의 죽음을 모르고 있었다. 연학이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수 얘기만 나오면 흥분하고, 고함치면서 역성을 들던 영팔노인, 연학은 자기 자신이 받은 충격을 생각하여 관수의 죽음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금만 힘이 있어도 따라가겄는데 늙는 거를 이길 장사는 없는 기라."

영팔노인은 한탄하듯 말했다.

"석이네도 보고 접고 야무네도 보고 접고 아부이 어무이 무덤에도 가보고 저븐데 몸이 말을 들어야제. 이자는 살아생전 그곳에는 못 갈 것 같다."

판술네도 한탄하듯 말했다.

"웬간하믄 독골에는 한분 가볼까 했는데 할망구가 아야 자야 함서 갈라 캐야제. 그래도 두만어매는 정정하드마. 일전에 찰떡을 해가지고 한분 왔다가 갔다. 그 직일 놈이 기어 기성에미하고 민적을 팠다 안 카나."

"저러이 노망 들었다 할밖에. 그거이 언제 일인데 그러요? 그 말도 벌써 수십 차례나 했일 기요."

판술네 타박에 영팔노인은 눈을 부릅뜨고

"내가 언제 그랬노? 허허어, 날이 갈수록 행사가 저 모양이라. 갬히 남정네 하는 말을 가로막고 무신 놈의 못된 버르장머리고."

영팔노인은 축담에다 대고 곰방대를 두드렸다.

"정신이 오락가락, 하든 말 또 하고 또 하고 사람이 얼씬했다 카믄 저승에서 할애비 만난 것맨치로 거머잡고는 실이 노이 되게 말을 안 하나. 그런께 손주들도 절을 하기가 바쁘게 달아나는 기지."

"임자는 안 그렇고? 그나저나 그 직일 놈이 조강지처의 민적을 파부리고 서울네 그 제집하고 민적을 했다 카는데."

"저보라고 장서방, 하든 말 또 하제?"

장연학은 웃음을 참는다.

"내가 그 말 할라 한 기이 아니고 자식놈 기성이 그놈 얘기를 할라는 기라. 그놈도 직일 놈이다. 어매 앞으로 돼 있는 전답을 말짱 팔아서 기생년 밑구멍에 처넣었다 안 카나. 그 때문에 영만이하고, 그런께 삼촌 조카 사이에 대판 쌈이 나서 이혈이 낭자하고, 저승간 이평이가 그 일을 알았다믄 무덤 속에서 벌떡 일어났일 기다."

"그걸 장서방이 모릴 기라 생각하고 말하요? 사돈지간인데 이녁보다 더 소상히 알 기고 싸움을 말린 사람이 누군데? 저러이 노망 들었다 할밖에."

판술네는 또 눈을 흘기고 혀를 두들겼다.

"어허엇! 보자보자 하니 말말이 토를 달고 나서네. 어디서 배워 묵은 버르장머리고!"

영팔노인은 호통을 쳤다. 그러나 판술네는 끄떡없다.

"살 만큼 살았는데 와 내가 할 말 못할 기요! 같이 늙어감서."

맞대거리를 한다.

"그래도오! 이빠지고 머리빡 허연 나를 우짜리, 싶어서 간 큰 소리를 텅텅 하는 모앵이다마는, 허허어 참 제집이란 늙으믄 여수가 되는 긴가, 내가 그거를 모리고 데꼬 살았이니 말장 허세비다 그말이제?"

"얼씨구, 지금도 늦잖소 길 좁아서 못 가겄소? 하지마는 내가 없어지믄 눈물을 쫄쪼올 흘릴 사램이 누군데 그러요? 입에 침이나 바리고 말하소."

"눈이 불쌍해서 놔둔께 점점 한다는 기이, 이자는 어른 상투 끝에 올라앉을 라 카네."

하다 말고 영팔노인은 슬그머니 연학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머리도 돌린다.

"하야간에 두만이 그놈도 멀잖을 기다. 그놈이 지 근본도 모리고 돈푼 있다 해서 들까불까 욜랑거리고 뿐가, 하늘이 시퍼런 줄 모리고 왜놈한테 붙어서 내 백성한테 해코지를 하는 천하에 무도한 놈, 연학이 니도 알제? 그놈이 관수를 못 잡아 묵어서 미친 개맨키로 지랄하든 거를. 지 앞만 가린다고 숭을 본 이팽이도 아들놈한테 비하믄 성인군자라. 관수는 한동네서 자란 배꼽친구 아니가. 그놈은 애비뻘이나 되는 나한테도 의병질을 했느니 한통속이니 함서 행피를 부리고, 썩은 새끼줄 내 목에 걸어서 관가에 끌고 가라 하며 내가 그놈한테 다잡고 하든 일, 그게 이팽이 초상 때 일이었을 기다!"

늙으면 옛일은 새로워지고 방금 있었던 일은 잊기가 일쑤다. 영팔노인도 예외는 아니었고 지나간 일일수록 어제같이 똑똑히 생각이 나는 모양이다.

"삼대 구년 묵은 얘기 또 하누마."

못 참고 판술네 또 핀잔이다.

"어허엇!"

"야아 알았소 알았구마요. 입이 닳도록 말하소. 듣는 사람이사 제옵든지 말든지."

판술네는 일어서서 부엌쪽으로 간다.

"집의 식구들은 다 어디 갔습니까?"

연학이 뒤늦게 물었다.

"손주며느리는 해산하로 친정에 갔고 자부는 고치 뽀우로 간다 카든지, 아아들은 핵교에 갔제."

하다가 큰기침을 한 영팔노인은

"하야간에 두만이 그놈 멀잖을 기구마.자식놈이 그 꼬라진데 무신 장로가 있을 기고. 말짱 헛공부 시킨 기라. 그 불쌍한 어미를 떠다밀고 논문서를 강탈해가질 않나 삼촌을 들고 패질 않나 하는 짓이란 주색잡기, 살림이 빠질라 카믄 하루아침이다. 세상이 아무리 변했다 캐도 물이 놓은 곳으로 흐르는 법은 없인께. 지은 죄가 어디로 가노? 조준구 그놈을 봐라. 최참판댁에서 뺏은 그 많은 재산, 동전 한푼 건사하지 못하고 알거지가 돼서 버린 자식 집에 기어들어왔다 안 카나? 하기야 그놈이 벌을 받을라 카믄, 어림없제. 멀었다, 멀었고 말고. 개과천선을 해도 그 죄를 못다 갚을 긴데 머라? 자식한테 호통을 치믄서 수발을 받는다고? 볼로초를 구해오라 하믄서 지랄발광을 한다고?"

담뱃재로 축담을 탕탕 친다.

"설마 들은 말이 있어서 하는 얘기라. 그놈은 그러고도 남을 놈이제."

"갈 날이 얼매 안 남았는데 그래봤자 무신 소용이 있겄십니까. 똥오줌 받아내는 처지, 그만하믄 벌 받는 기지요."

"이 사람아 장서방, 무신 말을 그리 하노? 갈 길이야 나도 바쁜 사람이다. 노인네가 중풍 들어서 똥오줌 받아내는 거는 흔히 있는 일이고, 그것으로 죄 갚음이 되겄나?"

"잊어뿌리이소."

"잊어뿌리라니? 우째 잊노? 나한테 조맨치라도 심이 남아 있다믄 가서 그놈 모가지를 비틀어서 직일 긴데 잊어뿌리라고? 만주 벌판의 설한풍, 그 무서븐 세월을 우찌 잊을 기고. 부모 산소에 풀이 우묵장성했을 생각을 하믄서 울었던 일, 너거들은 모린다. 그 설움을 모린다. 석이 그놈아이를 생각해도 눈물이 난다. 아비 직인 원수놈 밑에서 일하믄서 우떻기 젼딨겄노. 하루에도 수십 분 맘속으로는 칼을 들었을 기다."

"다 그렇기 젼딨이니께 조준구가 망했지요."

"성환이를 보믄 석이 생각이 난다. 잽히가는 한돌이를 따라 신짝들고 뛰어갔다는 석이 생각을 하믄, 석이어매한테 맺힌 한은 우쩌고."

옆집에서 거위가 괘액괘액하고 울었다. 영팔노인은 담배쌈지를 열고 손바닥에 담배를 덜어서 침을 뱉고 담뱃가루를 문지른다. 사실 영팔노인은 그가 말하는 만큼 증오심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한 둘 곁을 떠나버린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모른다. 지난날들을 새김질하노라 그랬는지 모른다. 그에게는 이제 기쁨이든 슬픔이든 남아 있는 것은 추억밖에 없었다. 영팔노인은 문지른 담뱃가루를 곰방대에 채우고 나서, 수염에 묻힌 입에 물고 불을 댕기며 깊숙이 담배를 빨아들인다. 유달리 커 보이는 손이 떨리는 것 같았고 담배 연기 가는 곳에 시선을 보내고 있는 모습은 외로웠다. 판술네가 풋콩을 담은 바가지를 들고 와서 연학이 옆에 앉아 까기 시작했다. 참새들이 모여들었다가는 한꺼번에 날아서 달아나고 해는 서산에 걸려 있었다.

"장서방."

판술네가 불럿다.

"."

"저녁 묵고 갈 기제?"

"저녁 해주실랍니까."

"하모, 해주고 말고. 안 묵고 가믄 내가 얼매나 섭운컸노. 풋콩 넣고 고슬고슬하게 밥해 줄 기니 묵고 가거라. 저 늙은이, 요새 들어서 부쩍 지난 얘기를 끄내싸아서 내 귀가 따갑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제. 저더라다 짚불 잦아지듯 안 가겄나."

그러나 영팔노인은 멍하니 담배 연기 가는 곳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해가 지면서 식구들이 모여들었고 정성껏 지어낸 저녁을 연학은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판술이와 함께 저녁 거리로 나왔다.

"요새 장사는 우떻노?"

연학이 물었다.

"별로, 실속이 없다. 몸만 고단하지."

판술은 시장에서 청과물 장사를 하는데 주로 대구에 가서 사과를 사다가 팔고 있었다.

"어디 가서 술 한 잔 하까?"

판술이 말했다.

"방금 밥 묵었는데, 그보다 자네 여관 맡아 할 생각 없나?"

"머라 캤노?"

판술이 걸음을 멈추었다.

"여관 맡아서 해볼 생각 없는가 했다."

"내가 우찌? 경험도 없지마는 여관 맡아 할 만한 돈도 없고."

"그냥 와서 하믄 된다. 필근이가 있어서 일머리는 환한께."

"그라믄 자네는 머할 기고."

"평사리에 가 있일까 싶다. 세상일 좀 잊어뿌리고."

"하믄 좋기야 하겄지마는 겁난다."

"겁날 기이 머 있노. 안 돼도 여관 건물은 남을 기고."

"생각 좀 해보고."

판술과 헤어진 연학은 이튿날 아침 첫차로 귀남과 함께 하동으로 떠났다. 하동에서는 본가에 잠시 들렀다가 장터에서 배 한 광주리를 사들고 평사리에 왔다. 사립짝 밖에 우두커니 서 있던 성환 할매가

"장서방 이기이 우애된 일고!"

귀남이와 함께 오는 것을 보고 놀라서 소리쳤다.

"귀남이가 와 오노!"

귀남이 이름을 듣고 귀남네는 부엌에서 달려 나왔다. 연학을 따라 마당으로 들어서는 귀남이

"귀남아!"

"옴마!"

모자는 부르며 서로 껴안았다. 연학은 마루에 걸터앉았고 성환 할매는 불안하고 근심 띤 얼굴로 마당가에 서 버린다.

"귀남이가 좀 아파서 데꼬 왔소."

연학이 말에

", 어디가요!"

귀남네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우리 귀남이가 아프다 캤나?"

성환 할매도 어쩔 줄 몰라 한다.

"걱정마소. 큰 병 아닌께."

"아아 얼굴이 부었구마. 귀남아 어디가 아프노? 큰 벵 아니믄 우찌 데리고 왔십니까?"

"볼 일도 좀 있고 해서, 오는 길에 데꼬 왔지요."

"아아 얼굴이 와 이리 부었습니까?"

귀남네는 날카롭게 연학을 쳐다본다. 연학은 그간의 일이며 의사의 말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래도 그렇지 데꼬 온 거를 보이."

귀남네는 의심이 풀리지 않는 눈빛이었다. 아들이 와서 반갑기보다 무슨 병일까 하는 두려움이 앞서는 것 같았다.

"신장염이라 하는데."

연학이는 배를 꺼내놓고 영팔노인이 하는 말을 또 상세하게 설명을 한다.

"와서 반갑기는 하지마는 우떻기 했길래 벵이 났이꼬? 믿고 어린거를 맽깄는데 성해서 나간 아아가 병이 들어서 돌아오니."

귀남네는 울기 시작했다.

"옴마, 걱정 마이소. 아저씨 말심한 대로요. 며칠 있다가 여관에 도로 갈 기요."

"그래 걱정 마라, 아플 때도 있지. 사람이 우찌 무병으로 사노."

성환 할매는 딸을 달랜다. 귀남네가 잠자코 있는 것을 본 성환 할매는

"귀남아."

"."

"성을 만나보고 왔나?"

"."

"장서방 우리 성환이는 잘하고 있다 카드나?"

"잘하겄지요. 그 아아가 우떤 아인데 못하겄소."

귀남네는 발끈해서 말했다. 순간 성환 할매는 당황한다. 귀남네 심사가 왜 틀어졌는가 깨달았고 연학이 앞에서 일 벌어졌다, 싶었기 때문이다.

"잘 하겄지요. 잘하고 말고요. 여포 창날 겉은 성환이 무신 잘못을 하겄소!"

울부짖는다. 연학은 예상했던 일이 벌어졌다 생각한 듯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묵묵히 있었다.

"우리 귀남이하고는 천양지간인데 못할 까닭이 있겄소? 물어볼 것도 없십니다. 우리 귀남이같이 남의 집에 고공살이하는 처지도 아니고 명색이 학생 아입니까? 병 들어서 돌아오는 일도 없일 깁니다.어이구 천천무리, 머할라꼬 태이났노!"

거의 광란 상태다.

"옴마 와 이러요?"

귀남이 어미의 어깨를 흔들었다.

"이놈아 니하고 나하고 그만 죽자! 무신 희망이 있노!"

"니가 맘이 대기 상했는갑다. 참아라, 내가 잘못했다. 아픈 아아 앞에서 성한 놈 걱정을 했이니 섭했일 기다."

팔을 잡으려 하자 귀남네는 성환 할매를 뿌리치며

"엄니는 언제나 그랬소! 엄니 눈에는 귀남이 겉은 거 사람으로 뵈지도 않았일 기요. 밥이나 축내는 버러지로 보았일 기요."

"그런 말 하지 마라.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노?"

"귀남이가 병들어서 돌아왔는데 우찌 그리 손톱만치도 생각 안 하고 친손자 걱정만 합니까! 야속하요. 참말로 야속하요. 친정에 얹혀 산다고 괄시하는 거사 내 팔자가 그러려니, 그 어린 것이 에미 떨어져 간 것만도 가심이 미어지는데, 누구는 팔자가 좋아서 중학생 모자 쓰고."

"옴마 이러지 마소. 머가 우떻다고 이러요? 난 진주서 편키 있었고 성이 찾아와서 걱정도 많이 했십니다. 성이 잘 되믄 나도 잘 될긴데 와 자꾸 이러요."

"그거는 귀남이 말이 맞소."

처음으로 연학이 입을 뗐다.

"말이 사촌이지. 따로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니니 친형제나 진배없고 머어보다 아이들 둘이 잘 지내는데 어매가 이라믄 되겄소?"

울음소리가 낮아졌고 조금 흐느낀다.

"하기야 머 맘이 상하기는 상했겄지요. 귀남이가 아프니 걱정도 됐일 기고 그 심정 이해합니다."

귀남네는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는다.

"귀남아, 니 질기 이럴 기가? 장서방 맨입으로 보낼라고 이러나? 귀남이를 믿고 맡길 사람이 어디 또 있일 기라고, 죽으나 사나 우리 식구들 장서방밖에 믿을 곳이 없다. 일어나거라."

"야 믿어도 좋을 깁니다. 공부했다고 모두 잘 되는 것도 아니고, 곤부 안 해도 성공한 사람 얼매든지 있소. 아아들 일이란 모리는 기라요. 맘 상해하지 마소."

노여움을 푼 것도 아니었고 의심이 없어진 것도 아니었지만 귀남이를 위하여 힘이 되어줄 사람은 연학이밖에 없다. 그 현실을 깨달은 귀남네

"미안합니다. 아픈 귀남이를 본께 설움이 북받쳐서, 그만 방에 올라가시이소. 점심 잡숫고 가시야제요."

", 아닙니다.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어서 그만 갈랍니다."

연학은 간신히 뿌리치고 밖으로 나왔다.

"어이구 가는 곳마다 모두 와 이렇노?"

중얼거리며, 연학은 오르막길을 쉬엄쉬엄 올라간다. 건이네가 대문 앞의 넓은 터에서 고추를 펴널고 있었다.

"아이구."

올라오는 연학이를 본 건이네는 인사도 하지 않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남편을 부르러 가는것 같았다. 집안으로 들어간 연학은 사랑채 쪽으로 갔다. 건이 아범이 별채 쪽에서 달려왔다.

"이거 웬일입니까."

연학은 웃으면서

"참 오래간만이지?"

"."

사랑마루에 걸터앉은 연학은

"배가 고픈데 식은 밥이라도, 요기 좀 했이믄 좋겄는데."

"예 그, 그러지요."

그는 건이네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예고도 없이 나타나서 놀란 것 같았다.하기는 상당히 오래간만에 연학은 평사리에 온 것이다. 건이 아범은 또 이내 달려왔다.

"점심은 하라 했십니더."

"찬밥 한술 먹으면 되는데, 일찍 오는라고 아침을 드는 둥 마는 둥 했더니,"

"무신 일로 오싰십니까?"

그 말대꾸는 없이

"집안이 설렁하네."

"식구가 없어이 자연."

"무섭지 않은가?"

"마 습관이 돼나서 무서븐 줄 모립니다."

"사당에는 비가 샌다며?"

". 일전에 마님이 오싰을 때 말심을 드렸는데 그러믄 그 일 땜에 오싰습니까?"

"겸사겸사 왔네."

건이 아범은 의외란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여관을 차려 나가면서 최참판댁과 일단 관계가 끓어진 것으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해서 연학은 그간 평사리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궁금했지만 건이 아범은 다시 최참판댁 일을 보게 되었느냐고 물어볼 수 없었다. 그는 전부터 연학을 어려워했고 연학의 태도 역시 성환 할매를 대하듯 그러질 않았으며 어딘지 모르게 엄격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점심이 될 동안 집안을 한번 둘러볼까?"

건이 아범이 뒤따르려 하자

"자네는 따를 것 없네."

찌르듯 냉정한 어세에 건이 아범은 머쓱해진다. 연학은 대숲 사이에 난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광선이 차단된 대숲 안은 어두컴컴했고 댓잎의 반영인지 푸르스름한 기가 서려 있는 듯했다. 냉기가 흘렀다. 대숲 흔들리는 소리, 그 소리. 싸아! 와삭와삭 싸아! 소리는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바깥세상은 아득히 먼 피안에 있었고 사람 있는 그곳이 오히려 저승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혼백이 있다면 과연 이 자리는 있을 만한 곳인가 하고 연학은 생각해본다. 사당을 에워싸고 있는 담벽 일부가 무너져 있었다. 무너지면서 땅바닥에 떨어진 용마름의 기와가 여기저기 깨어져서 흩어져 있었다. 사당 뒤편으로 돌아가 본다. 이끼의 향기와 습기가 스며왔다. 뒤쪽 한부분에 거적때기가 덮여 있었고 떨어지지 않게 새끼로 엮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건이 아범이 임시 방편으로 그래 놓은 듯싶었고 그곳에서 빗물이 새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최참판댁에도 문제는 있었다. 이 넓은 집을 건이네 부부 두 사람이 건사한다는 것부텨 무리였다. 그들은 김서방 내외가 거처하던, 채마밭이 딸린 별채에 살고 있었다. 몸채와 사랑은 여름 겨울 방학 때면 대개 식구들이 내려왔고 비교적 길상이 자주 오기 때문에 그런대로 괜찮게 보전이 돼 있었으나 별당과 행랑의 수많은 방, 도장은 퇴락된 상태였고 마구간에는 말이 없었으며 외양간에는 소가 없었다. 마당에는 대충대충 풀을 뽑은 흔적은 있었으나 다른 일 다 제쳐놓고 풀만 뽑는다 해도 연방연방 돋아나는 풀을 따라잡기는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식구들이 많고 오가는 사람 많았던 시절과는 다르다. 추수 때면 그 많은 행랑방에 사람들이 그득그득 들어찼고 뒤뜰의 큰 가마솥에서는 연신 땀을 흘리며 밥을 펴내던 그런 시절도 있었지만. 건이네 내외는 집만 돌보고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그들 자신의 양도를 위하여 논 세 마지기와 밭뙈기 하나를 부치고 있었다. 집은 서희가 서울에다 일부 거처를 마련하면서부터 더욱더 소홀해졌고 늙어버린 것이다. 연학은 사방을 다 둘러보고 별당까지 왔다. 별당 역시 담이 허물어져 있었고 비가 새는 것 같았다. 연못에는 낙엽이 어수선하게 떠 있었다. 가지를 치지 않은 나무들은 제멋대로 햇빛을 찾아 뻗어나 있었다. 풀을 나지 않게 하는 사람의 발바닥은 지독하고 집안에 온기를 공급하는 사람의 기운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며 연학은 별당 마당에 서서 연방 잎이 떨어지고 있는 담장 옆의 느티나무를 올려다본다. 서희는 평사리에서 돌아온 즉시 장연학을 불러 의논을 했다. 집수리 문제를 두고.

사랑마루에서 점심상을 받은 연학은 얼쩡거리고 있는 건이 아범에게 말을 걸었다.

"보리밥 한솥에서 한복판에 넣은 쌀밥만 도려내어 밥상에 올려놓은 듯, 집안 꼴이 그 형국이다."

"?"

건이 아범은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 한다.

"사랑하고 몸채만 쌀밥이다 그 얘기지."

", 영 손이 돌아가지 않아서."

"자넬 나무라는 게 아니다. 집의 형상이 그렇다는 얘기지."

건이 아범은 집이 퇴락한 것이 자기 잘못이기나 하듯 풀이 죽는다. 연학은 밥을 먹으면서

"적어도 장정이 두 사람은 있어야. 건이 아범 혼자서 농사짓고 집안 손질하고 그거는 어렵지."

", 그렇습니다. 혼자서는."

마음을 놓은 듯 말했다.

"목수와 기와장이를 불러야겠는데."

"삼사일 후에나 시작해볼까? 일꾼들 주선해두게."

"그러겄십니다."

연학은 집을 나와 마을길로 들어섰다. 한복이한테 가는 길이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연학은 자신의 행적이 마치 먼 길 떠나는 사람이 두루 작별인사를 하고 다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쓰게 웃는다. 하기는 오래간만에 평사리에 나타난 만큼 찾아가서 인사할 집이 더러 있었다. 김훈장댁에도 들러야 했고 문밖출입을 못한다는 봉기노인도 들여다보아야만 했다. 그러나 마을과 작별할 하등의 이유는 없었지만 이번 행보가 그 이별이라는 것하고 결코 무관하지는 않았다. 그는 내일쯤 그들과의 이별 절차를 밟기 위해 산으로 가야만 했다.

"형님 기십니까?"

사립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며 연학이 말했다. 마루 밑에서 강아지 으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덜거덕 열리면서

"누고?"

한복이 얼굴을 내밀었다.

"아 니 장서방 아니가! 어서 올라오게."

연학이 허리를 구부리고 방으로 들어가면서

"집에 혼자 기십니까?"

"모두 나갔다. 몸이 찌뿌두해서 좀 누워 있었드마는. 참 오래간만이다. 와 그리 볼 수가 없노."

한복이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고친다.

"그래도 숨을 쉬고 있이니 이리 만나는 거 아니겄소."

"앉아라."

"."

"점심은 했겄제?"

"했십니다."

그라믄 술을 해야겠구나."

"몸이 편찮으시다며요?"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술 없이 그냥 지나가겠나? 몇 천 년이나 살겠다고, 잠깐 기다리게."

하고 한복은 밖으로 나갔다. 마누라를 찾아나간 모양이다. 방안은 깨끗했다. 도배를 했고 방문 창호지도 새로 발라서 방안은 은은했다. 머릿장 위의 이부자리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안정된 살림살이를 느끼게 한다. 한복은 이내 돌아왔다.

"그나저나 소식 좀 듣자."

마주보고 앉았다.

"무신 소식이 있겄소. 왜놈들 지랄발광하는 꼬라지말고 머가 더 있겄십니까. 형님은 더러 소식을 듣습니까?"

하고 살핀다. 혹 만주에 있는 김두수한테서 편지 연락이라도 있었는가 그것을 물었던 것이다.

"없어."

한복은 관수 죽음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통영서도 소식이 없었습니까?"

"잘 있다는 말밖에는, 별 소식이 있겄나."

연학은 이상하다 싶었다. 영호가 관수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상했던 것이다. 그는 영선과 휘가 초상 치르러 간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터인데.

"가아들 추석에는 올 깁니까."

"올 거다. 추석도 며칠 안 남았지."

'인편에 전하기도 그렇고 편지 쓰기도 그렇고 추석에 와서 말할 모양이구나. 신중히 하노라 그랬을까? 아니믄 냉담한 길까?’

그 점은 판다하기가 어려웠다. 한참 후 영호네가

"오싰습니까"

인사를 하며 술상을 들려왔다.

"들자."

권하는 데로 술잔을 든 연학은 그러나 술은 마시지 않고

"형님."

"말해라. 무슨 어려운 말인가?"

"관수형님이 죽었소."

"뭐라?"

한복의 목소리는 속삭이듯 낮았다. 무겁고 긴 침묵이 지나갔다. 연학은 술을 마시고 안주를 집었다.

"형님도 술 드시이소."

한복이도 술을 마시고 안주를 집었다. 그리고 또 긴 침묵이 지나갔다.

"잡혀서 죽었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아니요."

"그라면."

"호열자로 지난여름에, 그리 됐다 하더마요."

"초로인생이다. 빌어먹을 놈의 세상!"

"..."

"시신은 어떻게 했다 하든가."

"화장해가지고 식구들이 유골만 가져왔소."

"그러면 초상은 여기서 치렀겠네?"

"그런 셈이지요."

"어디서?"

"절에서요."

"그래?"

한복은 연거푸 술을 마셨다.

"나는 사람도 아닌갑다."

"?"

"나는 초상에 참여할 자격도 없다 그 말이지."

좀체 그런 일이 없는데 한복은 울분에 차서 말했다.

"참여한 사람은 없십니다."

"뭐라."

"양가 식구 이외는."

"아무도 참여 안 했다고?"

"나도 안 했십니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무신 죄가 그리 깊어서 작별도 못하고 갔는고."

눈에 눈물이 괴었다.

"인자 나는 만주 왔다갔다 안 해도 되겠구나."

"..."

"나는 이리 편히 있는데."

"..."

"형님 잘 가소."

한복은 기어이 흐느껴 운다. 이튿날 일찍 연학은 산에 왔다. 도솔암에 거의 다 왔을 때였다. 연학은 바위 위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해도사의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바위의 일부분인 듯싶었다. 연학은 나무 밑에 주저앉아서 쉬어갈 겸 해도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을이 이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산중 풍경은 마지막 정열같이 붉고 노오란 색채를 펼쳐놓고 있었지만 비정의 칼날 또한 숨겨놓고 있었다. 한 계절을 절단하는 칼날을. 하늘은 맑고 햇빛은 따사롭게 보이는데 나뭇잎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움츠리며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바람의 틈새로 이따금 산새울음이 들려오곤 했다. 연학은 되도록이면 해도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함께 가고 싶었다.

"왼종일 저러고 있을 긴가?"

중얼거리는데 마침 해도사는 움지락거리더니 일어섰다. 그는 연학이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연학과 마주쳤다.

"머하시는 겁니까? 기도했십니까?"

연학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장서방이 본 것처럼 앉아 있었네."

"돌이 될라고 그랬십니까?"

"? 하하핫 하하 그거 좋지."

"어째서 좋습니까?"

해도사는 연학에게 언제나 편한 사람이었다. 해서 연학은 다소 버릇없이 재미삼아 얘기를 걸곤 해왔다.

"이유가 뭣에 필요하다고? 있는 거는 다 좋은 거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변하니까"

"사람도 그렇십니까?"

"아암."

"그렇다믄 말입니다. 해도사께서는 와 여기 기십니까? 어디 가시서 임금 노릇이나 하시지 않고."

"임금이라는 것에 형체가 있는가?"

"?"

"몸뚱아리가 있을 뿐일세."

"말뜻을 잘 모르겄십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내버려두게. 아무 상관없는 일이네."

"그럴까요? 아까는 앉아서 멀 하셨십니까? 생각입니까?"

"듣지."

"무엇을요?"

해도사는 고개를 돌려 연학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목숨 있는 모든 것의 숨소리, 살아 있는 소리, 억겁의 소리였다."

"바람 소리였겄지요.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였을 깁니다."

"다음은 우주의 박동."

"바람 소리였일 깁니다."

"그리고 빛깔이 살살 스며드는 것 같은 소리, 알겠는가?"

"글쎄 도통 모르겄십니다."

"허나, 대개는 앞의, 첫 번째 소리를 듣는 게 고작이고."

하다 말고 해도사는 깔깔 웃었다. 웃을 만한 일도 없는데 하늘을 보고 웃었다.

"도사님."

"나 여기 있네."

"도인은 과연 있십니까?"

"도인은 되어본 사람 알지 진실을 누가 알겠나."

"신령은 있십니까?"

"그것도 신령이 아니면 뉘 알겠는가."

"하 참, 도사님도 하나마나의 말씀만 하십니다."

"그런가? 실상은 다 하나마난데 모두들 하고 있는 게지."

"부아 돋구기 꼭 알맞구마요. 그래가지고 점을 우떻기 칩니까?"

"그게 모두 하나마나의 얘기라."

"하든지 말든지 두 개 중에 참말만 해보이소."

"허허어, 참 뭘 알아야 그놈의 부안가 보안가를 가라앉혀주지. 저기 굴러 있는 돌멩이, 저기 서 있는 나무, 저기 흐르는 물보라, 날아가는 저 새, 하늘을 떠도는 구름, 그게 다 나랑 다르지 않다, 그것 가지고는 안 되겠나?"

할 수 없이 연학이는 웃고 만다.

"겨울 준비는 하싰습니까?"

"했다. 다람쥐가 도토리를 물어 나르지 않든가?"

"날씨 참 좋습니다."

연학은 일부러 딴전을 폈다.

"하늘이 높으네, 그러나 참 낮구먼."

"학을 떼겄십니다. 멋모르고 말 걸었다가 질게 하믄 미치겄네요."

두 사람이 도솔암에 당도했을 때 절문을 등지고 강쇠가 인왕처럼 서 있었다.

"이자 오나."

연학이를 향해 강쇠가 말했다.

"."

"그놈의 점쟁이는 와 달고 오노. 신양에 해롭다."

"간밤에 몽정을 했나? 신양 얘기는 왜 나오는고?"

해도사의 응수였다.

"몽정이 멋꼬? 몽둥이 말인가?"

연학은 킬킬거리며 웃는다.

"김장사."

"와 부르요."

"안사돈 계시는데 조심하는 게 좋겠소."

"우리 사부인이야 보살님 다 됐는데 무신 걱정. 연학아."

"."

"구례서는 사람 오게 돼 있제?"

"올 깁니다."

밤이 늦어서 해도사 산막에 모인 사람들은, 지감이 빠지고 모두 다섯 명이었다. 길상이 강쇠 해도사 연학 그리고 길노인의 아들 막동, 장년을 넘어선 연배들이었다. 좁은 방에 다섯 명 초로의 사내들은 무릎이 닿을 만큼 빽빽하게 들앉은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들 다섯 사람, 이 자리에 없는 지감을 합한다 하더라도 그랬겠지만 도무지 공통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모든 면을 살펴보아도 역시 공통점, 혹은 동질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쩐지 그것은 기이한 것으로 드러났다. 모습, 차림새에서도 그러했고 분위기 역시 그랬으며 서로가 서로를 서먹서먹하게 바라보는 눈빛, 산 중에서 오랫동안 이웃으로 흉허물 없이 지내온 강쇠와 해도사 사이에서도 그랬고 그 동안 수족같이 밀착되어 지내왔던 길상과 연학 사이에서도 그러했다. 결국 이들 모임의 성격이 문제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송관수가 만주로 가기 전에 구례 길노인 생신 때 이같은 모임이 한번 있었다. 그때만 해도 최소한 동학의 잔당이라는 기치는 있었다. 동학의 골수분자였던 윤도집의 아들 윤필구, 동학란 때 농민들을 이끌고 참가했으며 여러 가지 일화를 남긴 조막손이 손가의 아들 손태산, 김환의 그림자였던 김강쇠, 아비를 동학란에 잃은 송관수, 그 밖에도 풍상을 이기고 한가락씩 한다는 사내들, 이들 배후에는 동학군 패배에 한을 품은 적잖은 사람들의 후손이 여러 가지 인연으로 얽혀 있었다. 다만 그때 송관수의 은밀한 배려 때문에 영문 모르고 생일잔치에 참석했던 소지감, 출가하기 전이었고 이종 민지연의 약혼자로서 속세를 버린 일진을 도솔암에 데려다놓을 만큼 실질적 절 임자나 다름없는 길노인과 친면이 있는 터이라 생신 잔치에 참석한 것이 이상할 것도 없었는데 강쇠는 이분자로 간주하고 송관수를 밖으로 불러내어 그의 전횡을 따지며 떡치듯 송관수를 두들겨 팬 사건이 있었다. 여하튼 객원 비슷하게 참석했던 해도사와 소지감을 제외하면 앞서 말했듯이 모두 동학과는 인연이 깊었던 인물들이었다. 물론 성격은 시초에 비하여 많이 변질되어 있었지만. 그런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조직의 과정에 대하여 한번 되새기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삼십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묘향산에서 숨을 거둔 별당아씨를 입었뎐 자신의 저고리를 벗어 감싸서 묻은 뒤 김환은 팔도강산을 방랑하며 거지 행각을 했는데 우연히 지리산에서 죽은 부친 김개주를 통렬히 비판하는 왕시 동학의 장수였던 운봉노인을 만나게 되고, 연곡사에 들른 김환은 그곳에서 뜻밖에 생모 윤씨부인이 남겼다는 유산 얘기를 듣게 된다. 일생을 최씨 가문에 봉사한 새경에 불과한 것으로 기르지 못한 자식에 대한 보속이라 하여 김환에게는 백부였던 우관선사에게 맡겨놓았던 오백석지기의 땅은 구례 사람 길씨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는데 길씨는 평소 흠모하던 김개주가 아들 김혼에게 남긴 유산으로 믿고 착실하게 관리하여 그 동안 추수라는 새끼를 쳐서 적잖은 재산으로 불어나 있었던 것이다. 운봉과 자금, 김환은 운봉을 중심으로 동학의 잔당을 규합하기에 이르렀다. 반일이든 친일이든 조직이 표면화되어 있는 중앙의 동학과는 아무 관련 없는, 동학란에 참가했고 숨어 살고 있는 무리를 모았으며 우관의 제자이자 금어로서 김환이 어렸을 적에 돌보아주었던 혜관까지 끌어들여 도처에서 일어나는 의병 등을 엄폐물로 삼아 교묘하게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시초부터 그러나 문제는 있었다. 동학을 현실적 강령으로 삼고 항일투쟁이 앞서야 한다는 김환과 동학을 교리로서 교세의 확장이 전제요, 점진적 항일운동을 주장하는 윤도집과의 끊임없는 대립과 갈등이 있었다. 모임이 있을 때마다 격론이 벌어졌고 김환파와 윤도집파 사이에 난투극이 있곤 했다. 그러나 흩어지지 않게 가닥을 잡아주는 사람은 운봉이었지만 자금줄을 쥐고 있는 기환이 주도적으로 밀고 나갔으며 그것을 따르는 것이 추세였다. 운봉이 세상을 뜬 뒤 결국 윤도집 쪽으로 기울었던 지삼만의 밀고에 의해 김환은 체포되었고 유치장에서 자살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 시절의 사람들은 천수를 다하였거나 비명이거나 간에 거의 다 죽었고 이세들로 볼 수 있는 그들, 구례에서의 모임은 그 동안 활동 무대가 도시로, 혹은 만주로 뻗으면서 방치 상태였던 산과 농촌과의 연계를 꾀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다 하겠으나 직접적 계기는 출옥하는 길상을 잡아두기 위하여 일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고 해서 서희는 고육지책으로 오백 석지기의 땅을 내놓은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인 인물들이 동학의 잔당이라고는 하나 역시 활동의 무대는 산속이 아니었고 농촌도 아니었다. 또 그러했기 때문에 의병이 소탕되듯 그들은 소탕되지 않았으며 명맥을 이어왔는지 모른다. 그러한 과정으로 끌고 왔으며 다진 사람은 송관수였다. 진주서 형평사운동에 참가하면서 그의 시야는 넓어졌고 활동의 방향을 잡았으며 의병에서 동학 잔당으로, 형평사운동에서 사회주의 흐름 곁에 서게 된 것이다.

형평사운동을 하는 동안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이범준을 위시하여 적잖은 사회주의자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과 친숙해진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연줄로 하여 서울의 진보적인 식자들과 연관을 맺게 된 것 역시 무리한 짓은 아니었다. 그러나 송관수는 무조건 그들을 추종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론에 밝다 하여 영문 모르고 존경했던 것도 아니었다. 식자풍의 허영심 우월감이라든지 실천이 이론을 따라오지 못하는 허약함을 때로는 비웃고 경멸하기도 했다. 송관수의 사회주의란 지극히 단순하고 명료했다. 그네들 식자가 말하는 남의 나라의 사상이라는 것도 대충 듣고 보니 동학의 실천적 요강과 그리 먼 것 같지 않게 생각되었으며 사실 동학의 실천적 요강이라는 것도, 그야말로 요강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송관수가 파악한 것은 그보다 훨씬 더 간략했으며 뼈다귀만 추려낸 것이었다. 그에게는 교리 같은 것은 도통 관심이 없었고 복잡할 필요도 없었다. 세상을 바꾸어놔야 한다는 것, 배고프고 핍박받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그의 정열의 모든 것이었다. 어쨌거나 송관수는 발바닥에 불이 날 지경으로 돌아다니며 노동 현장에 잠입하여 부산 부두의 파업을 비롯해서 기타 크고 작은 일에 개입하고 측면 지원을 했다. 식자층도 쑤시고 다니며 은근히 충동질하고 유인했으며 또 수삼차 한복이를 만주로 보내어 그 곳과도 길을 트면서 조직의 형체를 확장해가면서 길상의 출옥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송관수가 차지하고 있었던 자리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가 없는 빈자리는 메울 수 없을 만큼 컸다는 것을 사람들은 느끼게 되었다. 오늘의 모임은 사실상 해체와 결별의 자리였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이상한 것은 해체하고 결별해야 할 당사자들이 없었다는 점이다. 공통된 것, 동질적인 것이 없는 분위기는 아마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엄밀히 말하자면 동학당은 한 사람도 없다고 보아야 하며 길상을 동학당이 아니다. 만주서, 그것도 연해주의 권필웅 계열로 일을 했으면 김환은 어릴 적에 최참판댁 하인, 글을 가르쳐준 일이 있는 구천이기도 했으나 최참판댁의 비극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그와 재회했던 것이다. 그러니 동학과는 관계가 없다. 강쇠는 동학당이기보다 철두철미 김환의 신봉자였을 뿐이며 해도사는 지리산의 방랑자로서 이기적일 만큼 독자적이었고 지감도 물론 그랬다. 막동의 경우는 죽은 부친이 김개주를 흠모하기는 했으나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동학군의 패배를 안타까워한 방관자의 한 사람이었다. 연학은 최참판댁 집사에 지나지 않았다. 길상과 강쇠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동학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열렬한 독립투사 우국지사도 아니었다. 해도사와 지감은 복잡한 역정을 거쳐왔지만 연학과 막동은 평범하고 자신들의 삶을 신중하게 살아온 그냥 백성이었다. 다만 그들은 이 강산에 태어났다는 것, 피에 반역할 수 없다는 것, 그것 때문에 주어진 일을 마다할 수 없는 입장을 취해온 사람들이다. 해체를 결심한 것을 길상이었다. 길상은 진작부터 독립자금 강탈을 실패로 보고 있었다. 자금이 국외로 나가서 그쪽의 도움이 된 것은 다행이나 그것은 거사의 큰 비중이 되질 않았다. 체념하고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친일하고 살 수밖에 없다는 경향에 대한 일깨움과 푸석푸석 속에서만 타고 있는 불길에 기름 역할을 하려 했던 의도는 크게 주효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쉽게 가라앉고 말았다. 조직의 응집을 계산에 넣었는데 그것도 오히려 반전하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었다. 도화선이 되려면 희생자가 났어야 했다. 반대로 조직을 응집하려 했으면 혐의 밖에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혐의를 받았고 송관수를 위시하여 적잖은 일꾼들이 만주로 탈출했으며 조직은 약화되었다. 게다가 길상이 자신 꽁꽁 묶이어 파상적으로 지속하려던 일은 정지 상태로 빠져버린 것이다. 무위도식의 세월은 적잖게 그의 신념을 무너뜨렸고 왜소한 상태로 퇴화한 느낌을 주었다. 해체하리라 마음먹은 것은 정세가 날로 각박해졌고 자신이 수감될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며 무의미한 침체 상태에서 조직의 멍에를 벗겨주는 편이 나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이야기는 연학이 먼저 꺼내었다.

"토지 문젠데요, 벌써 대강은 다 알고 기시겄지마는."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길서방하고 상의해서 처분할 일만 남았십니다마는 행여 나은 의견이 있을 수도 있고 해서요."

사실이 그랬다. 해체 문제는 의미 양해된 일이었고 토지 문제도 의견 교환이 있었던 만큼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는 것은 연학과 막동의 소관이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길상은 합석했다. 산에 있었으니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길상이 합석하는 만큼 강쇠 해도사도 자연 함께 하게 된 것이다.

"할 수만 있다믄 토지를 매각하는 것이 젤 좋은데 그게 좀."

하다가 연학은 길상을 쳐다보았다.

"계속하게."

길상이 말했다.

"아무래도 앞으로 공출이 자심할 것이고 정세가 그러하니 토지를 살려는 사람이 쉽지 않을 깁니다. 지금 형편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 실정이니께 호욕 사자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제값 받기가 어럽고."

"본시 최참판댁 땅이니 우리가 감놔라 배놔라 할 수는 없지마는, 그라믄 우짜자는 기고?"

강쇠는 연학이 얘기를 끄는 것이 마땅찮았던지 내뱉듯 말했다.

"땅을 갈라주자는 의견도 있었십니다마는, 땅 때문에 근거지를 옮기는 것도 야단시럽고 또 땅에 발목이 잽히 있는 것도 그렇고 시국이 시국인 만큼 그 사람들 운신이 편해야 하니께요."

"그래서."

해도사도 답답했던지 얘기를 재촉했다.

"해서 나온 방안인데 땅을 최참판댁에 되돌려 보내는 것이 우떨까 싶어서."

방안에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그건 자네 생각이가."

강쇠가 따지듯 말했다.

"."

"그라믄 몇 년 없이 고생한 사람들 빈손 털고 가고 저븐 대로 가라, 그 말이가? 그런 거 바라고 일한 사람들은 아니지마는 기왕에 내놓았든 것을 되보내는 것은 무신 경우고!"

"참 와 그리 성미가 급합니까."

"...?"

"최참판댁에서 땅값 내놓으믄 되는 거 아닙니까?"

"그거 조옿지."

해도사가 말했다. 다소 무안해진 강쇠는 부르튼 표정으로

"연학이 자네 생각이라믄? 떡 줄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거 앙이가?"

하고는 길상을 그 사팔눈으로 힐끗 쳐다본다.

"의향은 떠보았십니다. 알아서 처리하라는 마님의 분부였고."

"그거 잘되었다. 길서방."

해도사는 막동을 불렀다.

"자네 짐 풀었네. 그 지긋지긋한 일도 끝났으니 얼마나 홀가분한가."

"아닌 게 아니라 그렇소이. 늘 근심이 되얐는디."

막동은 환하게 웃었다.

"좋기도 하겄다. 마구 깨지는 판국인데 좋기도 하겄다. 죽은 놈만 말이 없제."

강쇠는 울분에 차서 말했다.

"김장사 섭하게 생각지 마시오. 끝난 것은 아니오."

길상도 울적하기론 마찬가지였다.

"끝난 거지요 머, 우리 앞날이 얼매 남았다고, 한평생이 모두 허사였소."

"삼천갑자 동방석이는 없으니 죽기야 죽겠지요. 김장사 혼자만 가는 길 아니지 않소."

가라앉은 분위기를 휘젓듯 해도사가 말했다.

"그 빌어묵을 놈만 뒈지지 않아도 뻗이여보는 긴데 그곳까지 갔이믄. 총에 맞아 죽은 것도 아니고 벵으로 죽어? 박복한 놈."

"너무 상심 마시오 김장사. 사태가 급박하면 할수록 일본의 패망도 그만큼 빨라질 것이오. 우리만 이러는 거 아니오. 모두, 일하는 사람 모두 땅밑에 숨었어요. 우리 생전에 독립이 올 거라 믿읍시다."

길상의 말이었다.

"관수형님 얘기가 났으니 하는 말인데 얼마 전에 신경서 짐이 왔길래 찾아다 놨십니다."

연학이 말했다.

"짐이 와?"

강쇠는 귀를 발딱 세우듯 되물었다.

"홍이가 뒤처리를 다 해서 부쳤는데 아직 거처를 정하지 못했이니 지가 보관하고 있십니다. 그라고 집도 팔고 머 이것저것 합해서 수을찮게 돈도 부쳐왔든데 오는 길에 가지고 왔십니다. 일단 김장사하고 의논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나하고 의논할 것 없다. 사부인하고 의논을 해야제."

집을 팔고 해서 홍이로부터 돈을 부쳐온 것은 사실이나 조선에 와서 그 금액의 액수는 달라져 있었다. 지난날 길상은 관수에게 약속한 것을 이행하지 못했다. 그것은 영광이 공부할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갔어야 했던 비용을 첨가하여 금액의 액수가 달라진 것이다.

밤은 점점 깊어갔다.

"길서방."

해도사가 불렀다.

"여기 자고 갈 건가?"

"내려가야 하는디 너무 저물었지라? 아침에 쌀이 들온다는디."

"장사는 잘되고?"

"아직은 그럭저럭 삐대고 있지라우. 헌디 앞으로 배급제가 된다한께로 근심 아니겄소. 배급소를 줄랑가. 장사 못허게 될랑가."

"김장사, 우리 길서방하고 내려갑시다. 주막에 가서 한잔씩 걸치게. 김선생은 안 가겠소?"

"모두들 내려가시오."

사내 셋은 산막에서 나갔다. 연학과 길상이 서로 우두커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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