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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4-1-2

7장 산사

놀러온 친구라는 말 이외 일체 설명이 없었지만 서희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아들 환국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딘 친구냐고 추궁하지 않았다. 의혹을 내색하지도 않았다.. 이미 환국은 성인으로서 가장과도 같은 집안의 기둥이었다. 신중하고 책임감이 강하니까 선처하리라, 그 생각과 함께 서희는 아들을 존중했던 것이다. 한 가닥의 불안은 있었다. 이제는 이래라저래라 하기 어려워진 아들, 품 밖에 나가버린 아들에 대한 어미로서의 외로움도 있었다. 어두운 현실과 찬란한 삶을 마주하여 저 혼자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투쟁의 차비를 차리는 윤국이도 서희에게 외로움을 재촉했다. 남편의 존재, 봄이 가고 여름이 오면 출옥하게 될 김길상은 실감할 수 없게 멀기만 하였고 얻는 과정에서 잃어가는 과정을, 아니 얻었기 때문에 잃어야 하는 과정을 서희는 시시각각 느낀다. 팽창에서 위축의 과정으로 들어선 육체적 자각과 더불어. 그 무섭고, 끈질겼던 집념은 다 어디로 갔는가. 이를 악물며 열 손톱이 닳아 빠져도 기필코 탈환하리라 맹세하였던 평사리의 옛집, 추억은 살아서 구석구석에, 능소화가 피던 울타리며 버들잎이 떨어지던 연당이며 흔적은 도처에 산재해 있건만 거창한 집은 때때로 낡은 상여 틀같이 느껴진다. 황량하고 공허하게 넋이 떠난 시체와도 같이, 햇빛이 눈부신 들판도 그러했다. 모두가 최참판네 소유인 기름진 땅, 여름밤이면 맹꽁이가 울어 젖히는 정다운 땅이건만 가도 끝이 없는 만주 벌판의 해질 무렵, 황막한 사막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무슨 까닭인가.

'아이들은 이 재물을 원치 않는다. 무거운 짐짝같이 생각한다. 아 암 그래야겠지. 부잣집 난봉꾼, 병신이 되어도 아니 될 게야.'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으며 서희는 서글픈 미소를 띤다. 얻고 잃는 것이 모두 꿈같이, 짧은 생애의 덧없는 일이라면 놓아도 좋으련만, 놓은들 잡은들 마찬가진 것을, 기왕의 지난날 치열하였던 불길은 그렇다 치고, 지금 가슴을 짓누르는 마음의 맷돌은 들어내고 허한 대로 고통에서 놓여남직도 하건만 뜻대로 아니 되니 인성의 본질인가 하고 서희는 한숨을 내쉰다.

'내게 베푼 사람은 진실로 할머님 한 분밖에 아니 계셨던가. 내 할머님, 그리고 위의 할머님 또 할머님, 그분들이 청상이 아니었던들 오늘날 최참판댁 재물은 없었을 것이며 그 옛날에도 최참판댁 재물은 없었을 것이다. 베푸는 자는 항상 무자비한 존재요 외로운 사람, 이 집안의 청상들은 끝내 베푸는 자리를 지켰으며 무자비한 군주였었더란 말인가. 청상은 베풂을 받아서도 아니 되고 능멸을 받아서도 아니 되느니, 가을마다 곡식 섬의 수를 헤어야 했던 그 가는 손목의 과부들, 어찌 참혹하니 아니할꼬. 천형의 죄인이로다.'

"마님."

문밖에서 언년이 불렀다.

"무슨 일이냐."

"약 가져왔습니다."

"오냐."

약사발을 들고 들어왔다. 서희 눈 언저리가 젖어 있는 것을 본 언년이 경악하여 어쩔 줄을 모른다. 하려고 마음먹으면 못할 것이 없는 여인에게도 눈물이 있었던가, 언년은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서희의 눈물을 본 일이 없었으니까.

"엎지르겠구나."

". 알맞게 식었습니다. , 드십시오."

약사발을 내려놓고 기다린다. 서희는 쓴 약을 마신다.

'잘해주면 얕보고 못하면 원망한다. 내 눈의 눈물은 며칠 동안 버릇없는 웃음이 될 것이며 불만의 얼굴, 거역의 몸짓이 될 것이다.'

약사발을 내려놓는다.

"장서방은 아직 안 왔느냐?"

"."

대답하고 언년이 얼른 나가려 하자

"잠깐."

"?"

"너의 아비는 연로하여 안 될 것이고 마을로 내려가서 읍내 이부사댁을 아는 장정 한 사람을 불러오너라."

"."

"소달구지도 준비하게 일러라."

해가 중천에 기우는데 벼 열 섬을 실은 달구지는 육로로 떠나고 서희는 유모와 함께 나룻배를 탔다. 머리를 싸맨 회식 비단 수건이 바람에 몹시 나부낀다. 자색 두루마기는 서희의 얼굴을 창백하게 했다. 사공은 감히 서희 쪽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열심히 노만 저었다. 강물은 찬란했다. 햇빛이 보석같이 부서지고 있었으며 뱃전에서는 물속을 헤엄치는 고기떼를 볼 수 있었다. 상류 쪽에서 배를 타고 온 두 사나이는 장사꾼인 것 같았다. 정월 대보름을 앞두고 밤 대추 값이 금값이라는 둥 작년에는 대추 흉년이어서 그렇다는 둥, 그러다가 세상일로 이야기는 돌아갔다.

"공연한 짓 하지, 공연한 짓 해. 삼일만세, 그런께 꼭 십 년 전이가? 십일 년째로 접어드는구만. 그때야 방방곡곡 들고 안 일어난 곳 있었나, 장터마다 사람모인 곳이라 카믄. 당장 독립이 될 것 같았지. 그래도 영악한 왜놈우 새끼들 눈 하나 깜짝 안 했는데 섣불리 나섰다가 얼매나

사람이 또 다칠 긴고."

"닭우새끼맨크로로 착착 잡아 가둣는다. 카이. 퇴학당하고 콩밥 묵고, 당하는 사람이 억울한 기라."

"억울하지. 우리네야 평생 억울한께 그 위에 또 겹치기로 억울하다가는 간다. 함부로 입 놀리지 말아야, 그저 배 부르고 등 따시믄 다스리는 놈이사 귀신이믄 우떻고 도깨비믄 상관 있겄나."

사내는 손가락으로 한쪽 콧구멍을 누르며 강물을 향해 힝! 하고 코를 푼다.

"등 따시고 배 부른 기이 예섯일가? 무신 복에? 허덕이다가 꼬꾸라지믄 그만, 별수없일 기구마. 아 참, 이 보래, 보래!"

"와 별안간 심이 넘어가노."

"여수에서 말이다."

"여수에서 무슨 일 났다 커더나?"

"아아니 그게 아니고 여수에게 광주까지 철로가 생긴다는 말 니도 들었제?"

"들었제. 그기이 우쨌다고?"

"우리 그 차편으로 건어물장시 안 해볼라나?"

", 혼자 똑똑하고나."

"무신 말고?"

"자네 밑천 단단한갑제?"

"와 그리 삐딱하게 나오노. 피차 주머니 사정은 뻔한 기고."

"얼빠진 소리는 그만두어라. 그 장시 할 밑천이 있다믄 나는 땅사서 편안히 농사나 짓고 살겄다.

"편안히 농사 지을 땅을 살 수 있는 형편이라믄 미쳤다고 그런 궁리를 할까."

"여수하고 광주 사이에 철로가 난다는 이 얘기는 니하고만 아는 일이제, 그제?"

"호 참, 같은 말이믄 신작로같이 바르게 해줄 수 없겄나? 답대비, 그래서 얻어묵을 술잔도 놓치지 않나. 그런데 자네 말로는 내남지간에 모두가 덤빌 기다, 그런께 장사 못한다 그 말인 모앵인데 하여간에 그도 그렇겄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리는고나. 자네를 따라 사는 사람, 속병이나 없는지, 아 그래 철로가 나믄 사람 실은 기차만 댕긴다 카더나?“

"그러씨..."

"화물차는 안 댕기고?"

"그렇게 되나가 멋꼬? 자본 많은 놈들 화물차에 물건 그득그득 실어다가 광주 바닥에 헐값으로 풀어먹일 긴데 장돌뱅이 발 딜이 놓을 자리가 어디 있을꼬? 기왕에 하던 소자본의 장사꾼도 산간으로 쫓기가게 생깄다. 비질이 끝나고 나믄 다음에는 부르는 기이 값일 기고, 손도 안 대고 코 푸는 격이제. , 이를테믄 물건장사가 아니고 돈 장시다 할 수 있제."

사나이는 반대편 콧구멍을 누르고 강을 향해 나머지 코를 힝! 하고 푼다.

"듣고 보이, 도부장시밖에 할 기이 없네."

"그것도 옛말이네. 농군들 됫박질하는 손이 자꾸 옹구라든께."

"인심이 점점, 야박해진다,"

"인심 쓸 기이 있이야 인심도 후해지는 거 아니겄나?"

서희 귓가에 흘러들어오는 그들 장사꾼들의 대화는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이십 년 전에 벌써 자본의 마력을 휘둘렀던 장본인이었으니까. 하동읍 나루터에 내렸다.

'찾을 수 있겠지.'

오가며 지나치기는 했었지만 이부사댁을 찾아가는 것은 열여섯 살 때 간도로 떠나기 위해 며칠인가 묵은 뒤 지금이 처음이다. 왜 그렇게 소원했는지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또 갑자기 오늘 집을 나서 이곳을 찾는 자기 행동에 대해서도 무슨 까닭인지 서희는 알 수 없었다.

'하기는 시우어머니도 나를 만나러 온 적이 없었다.‘

해마다 가을이면 적잖은 양곡을 보냈었지만 상현의 댁네 시우어머니는 얼굴 한번 비치지 않았다. 그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나뭇잎이 없는 감나무가 보인다. 영문을 모르고 말없이 따라오던 유모는 서희가 걸음을 멈추자 함께 걸음을 멈춘다. 팔뚝같이 손목같이 손가락같이, 크고 작은

감나무 가지는 허공을 찌르듯 앙상히 뻗어 있다. 거무죽죽한 고목. 억쇠가 엉기정엉기정 걸어나오다가 서희를 보고 기절초풍한다. 그러니까 육로로 보낸 볏섬 실은 달구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이구 이 일을, 아니 참말로."

하다가 집안으로 쫓아들어간다.

"마님! 마님!"

잿빛으로 바랜 대문간 기둥을 서희는 쳐다본다. 벌레가 먹어 곰보같이 구멍이 송송한 잿빛 기둥, 머지않아 붕괴할 것 같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시우어머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내가 간도로 떠나지 않았더라면, 이부사댁 서방님은 부인을 이렇게 내버리지 않았을까?'

조바심이 난 억쇠는 안마당을 왔다 갔다 했다. 양가의 오랜 친분도 친분이지만 잊지 않고 식량을 보내주는 구세주와 같은 서희의 행차인 만큼 시우어머니가 늑장을 부리는 듯한 인상이 억쇠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이가 빠져서 양 볼이 꺼진 유월이는

"문간에 이러고 기시믄, 너무 황송해서, 들어오십시요 마님."

꾸벅꾸벅 절을 했다. 이윽고 시우어머니는 나타났다. 옷을 갈아입고 버선도 갈아신고 머리도 매만진 것 같았다.

"누추한 곳에 어인 일로."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질린 얼굴이었다.

"지척을 오가면서 한번 찾아뵙지 못하고, 용서하십시오."

정중하게 사과한다.

"아닙니다. 사죄를 해야 할 사람은 제 쪽이지요. 많은 은혜를 입으면서도 보답 한 번 못하고 예가 아닌 줄 알면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시우어머니도 고개를 숙이며 인사 치레를 했다.

"어서 드십시오. 누추하여 부끄럽습니다만."

방으로 들어가 두 여인은 서로 마주보고 앉는다. 화로에는 인두가 꽂혀 있었다. 급히 치운 모양이지만 삯바느질을 한 흔적이 역력했다.

"상을 당하셨을 때도..."

"그런 말씀을 자꾸 하시면 저로서는 눈 둘 곳이 없어집니다. 바깥 분께서 그런 일을 당하셨다는 말을 듣고, 진주로 가볼 생각을 몇 번이나 했습니다만 오히려 번거로움만 끼칠 것 같고 해서... 저이들 사는 형편이..."

시우어머니는 희미하게 웃었다. 바깥어른 바깥양반, 상례적인 그 말을 쓰지 않았다. 바깥분, 순간이었으나 힐난과 모멸을 엿볼 수 있었다.

"저희 집의 둘째는 풀려났습니다만 댁의 아드님은."

어색해진 곳을 헤쳐 들어가듯 서희가 물었다.

"아직..."

낯빛이 어두워진다.

"중학교 학생도 아니었는데 어찌 그리 되었습니까?"

"방학이라 부산으로 나갔다가 운수가 나빴지요. 졸업생이라구, 뭐 배후 조종을 했다나요? 학교 다닐 때 그런 일도 좀 있고 해서 의심을 받은 모양입니다."

시우는 환국이보다 한 해 늦게 중학을 나와서 서울, 경의전으로 들어갔다.

"학비는 어떻게? 물론 어려우시겠지요."

"작은집에서, 외삼촌도 도와주시고 해서 이럭저럭 크게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시우어머니는 방바닥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유월이 작설차를 끓여서 들여왔다. 마침 목이 말랐던 서희는 찻잔을 들었다. 따끈한 차 한 모금을 마신다.

"생각해보면 양가가 다 남다른 액운을 겪는 것 같습니다. 그때 제가 간도로 아니 갔던들."

시우어머니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의혹을 담은 눈이 서희를 바라본다. 서희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일은... 그렇지가 않지요. 아버님께서 그곳에 계시지 않았던들 그 양반이 떠났겠습니까."

여자를 느끼게 한다. 이십여 년의 세월이 없었던 것처럼 생생하며 고통스러운 적대 의식이다. 시우어머니는 윤씨부인이 상현을 손녀사위로 탐냈었다는 옛일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사정이야 여하튼 열여섯의 꽃다운 소녀와 열여덟 홍안의 소년이 먼 북변 남의 땅을 향해 떠났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괴로웠을 것이 아닌가. 사실 상현의 인생에 최서희는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시우어머니 마음속에 응어리가 남아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원망을 하려면 할 수 있는 것이다. 허약해지기는 했지만 서희의 천성적인 미모는 아직 그 잔영이 뚜렷하였고 귀부인으로서 틀이 잡혀 있었다. 그러나 시우어머니는 영락한 반가의 찌들고 완고해진 모습으로, 눈물조차 내색 않는, 저 고목 감나무를 연상케 하였다. 그러나 서희는 상현에 대하여 명경지수 같은 마음이다. 이성에, 혹은 남편에 대한 애정의 절제는 시우어머니나 서희가 다같이 다를 바 없었으나 상현에 대한 애정의 절제는 먼, , 옛날의 얘기였다. 남편 길상에 대해서도 서희는 운명적인 것으로 그 애정을 간주하였지만 보다 자식들의 아비로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여하튼 두 여인의 대면은 서로가 표현할 수 없는 착잡한 구석지로 몰린 결과를 가져왔다.

"시우아버님 소식은 듣는 지요."

"모릅니다. 잊고 살아야지요,"

"..."

'양현의 존재를 안다면 어떻게 나올까? 나에게 대한 오랜 고통을 풀어버릴까? 그러나 그럴 수는 없지. 양현을 위하여... 먼 후일 알게 되더라도.'

서희 눈앞에 명희와 봉순이의 얼굴이 번갈아 나타났다. 의남매가 되자고 했을 때, 길상에게 시집가겠다 했을 때 격노하였던 상현의 얼굴이 떠오른다. 술래잡기, 아무도 잡히고 잡은 사람은 없다. 네 여자와 한 사나이의 얼굴만이 어두운 하늘의 외로운 달처럼 여기저기 동그마니 떠 있을 뿐이다.

서희는 달구지에 실은 볏섬이 도착하기 전에 떠나야겠다고 생각한다.

이튿날 아침, 밤늦게 왔다면서 연학이 나타났다.

"다친 사람은 어찌 되었소."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모양입니다. 수술도 무사히 끝나고, 선생님이 안부 전하라 하시더만요."

", 정월 초하루에 무슨 횡액인고."

"마을 인심도 슬렁슬렁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그렇고 그저께 친구라면서 큰애를 찾아온 학생이 있었는데."

". 진주에 왔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피신하러 오지 않았나 싶은데, 장서방은 어떻게 생각하오?"

"저도 그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쌍계사 구경을 하겠다고 어제 떠났으니 장서방에 알아서 처리하시오."

". 서울 가시는 일은."

"큰아이가 오면 떠나겠소."

"그리고 저어, 정선생이 간도에서 무사하다는 기별이 있었습니다."

한복이 돌아왔다는 얘기는 생략한다.

"그래요?"

그런 뒤 서희는 침묵을 지킨다. 속을 알 수 없는 때의 그 침묵이다. 연학은 기다린다. 기다리는 것은 무슨 조처를 하라는 압력이기도 했다. 최씨 일가를 재건하는 데 있어서 말단이지만 정석이도 공로자 중 한 사람이다. 정석으로서는 아비를 죽게 한 조준구를 파멸하게 하겠다는 일념에서 어린 나이에 가담하였고 그것이 동기가 되어 오늘 남다른 길을 걷고 있으나 어쨌든 결과적으로 공로자다. 그러나 그런 점을 유념하는 것을 서희는 싫어했다. 정석이 역시 비루하게 도움받기를 원치 않았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서로가 다른 위치에서 상부상조해온 것을 부인 못한다. 서희는 침묵을 지키고 연학은 기다리는데...

"가엾은 계집..."

서희는 탄식한다. 봉순이를 두고 하는 말인 것을 연학이도 안다.

"그러니까 생활이 될 만큼 부칠 땅은 준 것으로 아는데."

석이 식구에게 비로소 이야기는 돌아갔다.

"직접 부치는 게 아니고 사위가."

"그건 나도 알아요."

"."

"장서방이 정선생을 위해 맘 쓰는 것 고마운 일이오. 하지만 너무 다그치지 마시오. 나라고 지치지 아니겠소? 한두 가지 생각하고 처리하는 사람과 백 가지를 생각하고 처리하는 사람, 백 가지를 생각하고 처리하는 사람은 항상 미흡하고 원성 사기 마련이지요."

", 그런 게 아니라."

"아니기는 뭐가 아니겠소."

양미간에 힘줄을 바짝 세우다가 누른다.

"정선생 아들아이 취학할 나이면 읍내 학교에 보내도록 하시오."

연학은 서희 앞에서 물러낫다. 후우 하고 숨을 내쉰다. 석이 모친에게조차 알리지 못하는 일을 서희에게 보고한 것은, 지금까지의 관례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최서희는 계속 일에 관련되어왔었고 어려울 때 큰 몫을 해온 것은 사실이다. 정미년, 일군에 의해 이 나라 군대의 해산이 참령 박성환이 자결했으며 해산을 거부한 군대의 마지막 저항이 있었던 그해, 평사리에서는 윤보목수가 이끄는 마을 장정들이 최참판댁을 습격했었다. 나이 어린 여주인 최서희를 몰아내고 깡그리 횡령하여 단주로 군림하던 친일파 조군구를 응징하기 위하여 군자금으로 재물과 군량미를 실어내기 위하여, 그 시작에서부터 자의든 타의든 서희가 그들, 맥을 이어온 사람들의 방패 역할을 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운명적인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지만 그것은 또 필연적인 것이기도 했다. 얼키고 설킨 인연의 거미줄 한 가닥에서 뻗어 나온 새로운 줄기 또 새로운 줄기, 복잡하고 다난했다. 한 그루 나무로 비유한다면 잔가지가 무성했다. 이제 최씨네 나무 둥어리는 시비하지 않아도 저절로 살찌게 돼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잔가지를 쳐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살찌지만 외로운 나무 둥우리엔 잔가지가 무성했다. 열매는 미지수지만. 두 아들을 제외한다면 마지막 핏줄이었던 김환이, 윤씨의 고통의 응혈이던 김환의 존재와 남편 김길상이 잔가지를 지기 않고 지탱하는 이유 중의 가장 큰 의미를 지녔었는지 모른다.

연학이 쌍계사로 찾아왔을 때 해는 좀 남아 있었다. 절문이 멀리 바다보이는 개울가에 환국은 혼자 서 있었다.

두루마기를 벗은 바지저고리 차림이었다. 잎 떨어진 나뭇가지를 휘어잡고 하염없이 흐르는 개울을 내려다보는 것이다. 우울한 모습이었다. 연학은 담배부터 꺼내어 붙여 문다, 인기척을 느낀 환국은 나뭇가지를 휘어잡은 채 고개만 돌렸다.

"내일 집에 가려고 했는데."

반가워하는 눈빛이었지만 말씨는 무뚝뚝했다.

"볼일이 있어서 구례까지 왔다가 어머님이 여기 갔다 하시기에."

시치미를 뗀다.

"진주로 실려간 사람은 어찌 되었지요?"

"괜찮을 거라 하더마. 수술 결과도 좋고."

"불행 중 다행이오. 그만 되기가."

"사방팔방에 구멍이 뿡뿡 뚫리서 정신을 못 차리겄네, 초정월부터 무슨 놈의 변인지."

연학은 환국의 눈치를 살핀다.

"어지럽고... 어수선하고... 그만 중이나 돼버릴까 부다."

쓴웃음을 띤다.

"중이 되어 어지러운 일이 해결될 것 같으믄 당장에라도 머릴 깎겄다. 환국이는 고생이 뭔지 아직 모른다. 귀창이 덜덜 떨리는 생바람 속에 서 있이야, 또 그래야 사람 사는 맛도 나는 거 아니까?“

어릴 때부터 거의 동거하다시피 해온 연학은 환국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해야 할 말을 안 하는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렇겠지요. 그럴 겁니다."

"친구분은 어디 갔나?"

"방에 있는 것 보고 나왔으니까 방에 있겠지요."

"그 친구 오래 묵게 되나?"

"알면서, 모르고 여기 오시지는 않았을 텐데요?"

환국이 역시 연학에게는 만만하게 군다.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구마."

"안 좋아요. 사방팔방 온통 벽이니까요. 조금만 움직여도 이마빡이 부딪치고 좀 더 움직이면 골통이 박살날 겁니다. 도대체 사람은 열쇠를 몇 개나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

"불교 같은 것 잘 모르지만 깡그리 인연을 다 끊는다면, 그렇지 않고는 재산도 완전히 포기하지는 못할 겁니다. 장서방은 어떻게 생각하지요?"

만만하게 대할 뿐만 아나라 답답한 내심까지 털어놓는 것은 연학이 단순한 관리인이 아니라는 것을 환국이 알기 때문이다. 서로 간에 그것을 물어보거나 밝힌 일은 없었지만, 그러나 환국이 연학에게 늘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자기 내부에 안고 있는 모순, 자기 둘레를 감싸고 있는 모순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환국은 털어놓을 곳이 없었다. 벼르다 한 말은 아니었다. 즉흥적인 것이었지만, 또 신학문은 물론 종래의 학문도 거의 몸에 배지 않았던 연학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그 어느 누구보다 최씨 집일에 깊이 관여해온 사람이었다는 점과 막연하나마 뜻이 큰일에 가담하고 있다는 점인데 환국은 실천의 경험이 풍부한 그에게서 뭔가 해답을 얻고 싶었는지 모른다. 대소사 간에 치밀하고 정확한 그의 추진력이랄까 능력이랄까 그것에 대하여 환국은 존경과 신뢰를 해왔으니까.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그것은 해결이 아니다. 필요에 의해서 끊는 거지 덮어놓고 다 끊어? 누구나 답답하다보면 그런 생각도 하게 되지마는. 그보다도 니 친구는 우짤래?"

"뭘 어떻게?"

"여기 묵는 거는 마땅찮을 것 같으니께 하는 말인데, 혜관스님이라도 계신다믄 모리까."

"그럼 어디가 마땅합니까. 쫓아버릴까요?"

치밀하고 정확하여 믿고 존경도 하면서 한편 정확하기 때문에 감정의 결여를 느껴온 환국은 반발한다. 어쩌면 화가 나는 상대는 연학이가 아닌 자신의 생명과도 같이 사랑한 어머니였었는지 모른다. 두 아들과 양현이 이외 어머니가 애정을 표시했던 사람을 환국이는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환국은 어머니가 사랑을 표시하지 아니했던 그쪽을 향해 윤국이와 같이 일도양단의 논리를 거부하며 더더구나 동정을 거부하며 어디까지 가야 진실에, 피차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 가를 고민했던 것이다.

"내 생각에는 도솔암이 어떨까 하는데, 조용하고 그곳이라믄 잘하는 처지니께 마음놓고 묵을 수 있지."

환국은 잠자코 만다. 김제생을 쌍계사까지 데려오기는 했으나 막상 와보니 난감했던 것이다. 터놓고 얘기해볼 만한 중이 없었고 그냥 김제생 혼자 내버려두고 집으로 오자니 마음이 놓이지 않을 뿐더러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 괴로웠던 참이다.

"어떻게 하겠나."

"도솔암이 어디 있지요?"

"여기서 과히 멀지는 않으나 또 가깝다 할 수도 없고, 환국이는 서울로 떠나야 한께 나한테 맽기고 가는 것이 우떨꼬?"

"예의상 그럴 수는 없지요. 친구라기보다 손님으로 보아야 할 처지니까요."

"그래가지고 깡그리 모든 인연 자알 끊겄다. 환국이는 답대비 약한 기이 탈이라. 모진 구석도 있어야제. 해가 거렁거렁 넘어갈라 카는데."

"장서방."

연학은 힐끗 쳐다본다.

"내가 약한 거는 항상 상대들이 약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강하고 싶어서 강해진 것은 아니지만, 부잣집 아들, 일등으로 졸업하고, 동경 유학생, 또 얼굴 잘생겼다는 말도 많이 들었지요. 내 약점이란 아버지가 옛날 하인이었다는 그것뿐입니다. 해서 어릴 적에 나는 순철이 머리통을 깨버린 일이 있었지요.. 장서방도 잘 아는 일이지만."

한참 있다가

"나는 죄인이다, 나는 죄인이다, 남보다 더 가졌기 때문에 죄인이다, 그래서 나는 더욱더 약해져야 했습니다. 나는 우월감을 느끼기보다는 소외감을 더 느끼며 자랐습니다. 따지면 약한 게 아니라 비겁했던 거지요. 그러나 자신들의 약한 면을 고의적으로 들추어 무기도 삼는 것도 비천한 거 아닙니까?"

환국은 나뭇가지를 잡아당겼다가 확 놓아버린다. 핑 하고 소리를 내며 나뭇가지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환국은 연학에게 등을 돌리고 성난 것처럼 절문을 향해 걷는다. 연학이 따라간다. 한참 가다가 환국은 미진하였던지 돌아보았다.

"나 이런 말 하고 싶었습니다. 장서방도 반대편에 서서 왜 너는 더 가졌느냐 더 가졌느냐 하는 사람인지 모르지요. 배가 고파서 우는 사람 헐벗고 추워서 우는 사람 천대받고 우는 사람, 내 얘기는 그런 차원에서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또 그런 사람들을 둘러메고 저항할 힘을 모으는 것, 그것이 일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그 힘이 약자를 누르고 소외하는 방향이라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물론 내 처지에서 내 처지의 말을 한다 하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거짓말을 해야 합니까? 어릴 때 일을 기억하는데, 외톨백이 아이 하나가 사탕을 가져와서 나누어주었지요, 그랬더니 사탕을 나누어준 아이하고 사이가 좋지 못했던 아이는 외톨이가 되더란 말입니다. 이번에는 외톨이가 과자를 가져와서 나누어주었지요. 사탕을 나누어준 아이는 다시 외톨이가 됐어요. 얻어먹는 아이들은 항상 명령에 복종했어요. 명령에 복종하는 아이, 외톨이는 언제 없어지지요? 정말 역사가 그렇게만 되풀이되는 거라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연학은 말없이 따라 걷는다.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는 적개심, 분노, 슬픔, 그것이 순수하면 힘이지요. 순수한 힘은 우월감이 아닙니다. 우월감을 쳐부수는 것이지요. 우월감을 쳐부수는 이론을 가지고 스스로는 우월감에 젖어 있다면 이편에 서든 저편에 서든, 친구가 되든 원수가 되든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조리 있게 말도 못하고 조리 있는 생각도 못한다마는 니 말 뜻은 알겄다. 그러나 다 그런 거는 아닌께. 또 사람이 하는 짓이라 하느님겉이 완전할 수야 없제. 단을 내리믄 안 된다.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고...“

"그러다 보면 뭉개고 앉아 있는 꼴이지요. , 그래요. 뭉개고 앉아 있는 겁니다."

하고 환국은 힘없이 웃었다.

"자아, 해가 진다. 크고 작은 일, 일부터 하나씩 처리해감서 생각은 틈틈이 해보는 기이 좋겄다. 그라믄 니는 가서 친구를 데리고 나오너라. 집으로 간다 카고.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긴게. 셋이서 도솔암으로 가서 하룻밤 자고."

환국은 절문을 향해 계속 가고 연학은 마른 풀 위에 주저앉는다.

담배를 붙여 문다.

'쇠젓가락겉이 꼿꼿하지마는 가죽겉이 질기지는 못하고, 고생 모리고 자라서, 앞으로 살아가기가 얼매나 어러불꼬. 말이야 옳은 말이제. 식자든 놈 그놈들이 그렇고 허파에 바람든 무식쟁이 반편이가 그렇고... 세상에서 김환이를 어떻게 알며, 잘났다고 세상에 쩌렁쩌렁 울리는 놈 십중팔구 야뱌위라.'

 

 

8장 여옥을 전송하고

홍성숙과의 사건이 있은 후 조용하는 약간 근신 비슷한 생활 태도를 취하는 것 같았다. 명희에게는 미안했던지 아니면 홍성숙을 가지고 노는 동안 명희가 월등 돋보였기 때문인지 신혼 무렵, 그 시절과 같은 기분을 내곤 했다.

"요즘엔 회사 사정이 안 좋아요. 당신 오라버니가 학교를 그만둔 것도 충격이었고, 회사 쪽으로 와서 나를 좀 도와주었으면 그런 생각도 하는데"

임명빈이 학교 교장직을 그만둔 데 대해서는 불안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때론 내가 신경질을 부리더라도 당신이 양해해주어야겠소. 밖에서 있었던 일이 집에까지 연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소?"

그러나 신경질을 부리는 일은 별로 없었다. 고차적인 수법으로 명희를 괴롭히던 그 버릇도 많 수그러졌다. 그리고 양장을 간혹 하라면서 다이아몬드를 물린 백금 목걸이를 사다주기도 했다. 그러나 의지적으로 감정 표시를 안 한 것이 아니며 감정 표시가 안 되게 메말라 있던 명희에게 이따금, 아니 빈번하게 절망적인 몸짓 표정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마치 도망갈 기회를 놓친 죄수와도 같은 절망이. 전적으로 그럴 것이라 단정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조용하는 명희가 절망을 느낄 때 홍성숙으로 인하여 받은 마음의 상처 때문일 것이라고, 해서 그는 명희를 풀어주려고 작심을 했던 것 같다.

"집안에만 처박혀 있지 말고 좀 나다녀봐요. 친구도 찾아보고 백화점에도 가보고."

자주 그런 말을 했다. 그러나 역시 사랑은 아니었고 소유한 품목 중의 하나가 전보다 좀더 귀중해졌을 뿐이다. 사회의 제약이 없고 새로운 교육을 받은 교양 있는 신사라는 자부심이 없었더라면 조용하는 가지각색의 여자를 수집하여 유리장 속에 넣어두고 음미하며 소유의 쾌감으로 잉여에서 오는 권태를 상쇄할 그런 위인이었다.

보름이 지나고 대소가가 모여 어수선했던 집안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찬하는 일본서 오지 않았다. 그의 말을 꺼낸 사람은 시누이 남편뿐이었다.

"하필이면 일본 여자하고 결혼을 했누."

찬하가 돌아오지 못한 이유가 그것 때문인 것처럼. 그도 일본 음덕을 입어 고급 관리에 속하는 직분에 있었지만 유행을 따르는 사람같이 입가에 경멸감을 나타냈던 것이다. 조선 왕조의 피가 흐르는, 현재는 대일본제국의 귀족인 조병모 일가. 혁혁하게 빛나는 후손들 모두 그렇고 그런 명함들을 소지하고 어느 곳에 가도 상좌가 마련돼 있었으며 자동차가 아니면 인력거라도 타고 다녀야 했던 사람들. 일개 역관의 딸로서 이 문중에 들어와 박제된 한 마리의 학같이 된 명희는 그렇다 치고 그들 조씨 문중의 사람들은 본시부터 인간, 인간은 인간이로되 박제된 인간들이었다. 오히려 몸에 걸친 의복이 살아서 흔들리고 있었으니 그들의 의복이나 장신구를 두고 불란서제니 영국제니 이탈리아제니 하며 핏대를 올릴 만도 했다. 일제라는 말은 없었다. 반일파는 못 되어도 친일파는 아니라는, 아니 그보다 이들은 상것들 속에 일본도 포함해야 자긍심이 온전했을는지는 모른다. 여하튼 인간 박제가 사방으로 흩어져간 뒤 상록수는 시꺼멓고 나목은 움을 내밀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조병모씨 정원은 바람 소리 이외 완벽한 적막으로 가라앉았다. 음력으로 정월 십팔일.

"체면이 있으니까 나가려면 꼭 자동차를 타고 가야 하오."

아침에 용하가 한 말이었다. 강선혜의 생일 초대를 받아 가봐야 한다고 한 명희 말에 대한 대답이었던 것이다. 전과 같이 강선혜와 만나는 것을 싫어하는지 않았다. 한 가정의 주부로서 생활이 안착된 때문인지, 언동으론 마포강의 천인 취급을 했지만. 열두시 정각에 자동차는 왔다. 두루마기 차림인데 갈색과 회색의 무늬가 대담했다. 여우목도리는 최고급품의 진갈색이다. 명희는 장갑을 끼면서 자동차에 올랐다. 그답지 않게 화장이 짙었다. 혜화동의 그저 그만한 기와집 앞에 자동차가 멎기 바쁘게 대문이 활짝 열리면서 더욱더 비대해진 강선혜는 치맛자락을 질질 끌면서 뛰어나왔다.

"어서 와, 임여사!"

"어머, 임여사는 또 뭐유?"

끌려들어가다시피 하며 명희는 웃는다.

"임여사든 명희선생이든 나한테 매일반이야. 명희야 혼자만 초대했어. 혜화동에선 내 생일 챙겨줄 사람도 없지만 말이야. 그냥 보내자니 약 오르지 않겠어? 너랑 단둘이 점심 먹으며 독재자들 욕이나 실컷 하려구."

여전한 수다였다.

"아 참, 길여옥이 그 사람이 널 기다리고 있어."

"네에? 그 애가 여길 어떻게?"

어리둥절 한다.

"우리 집, 다음 다음 집이 그 사람의 친척 집인가봐. 우연히 만났지. 너가 올 거라고 내가 끌어들인 거야."

길여옥과 강선혜, 그들은 선후배의 관계가 아니었다. 동경 있을 때 여옥의 전남편인 오선권, 그러니까 현재의 아내, 그 여자와 면식이 있어서 강선혜는 비교적 여옥의 이혼 내막을 소상히 알고 있었고 귀국 후에는 명희를 통해 한두 번인가 만난 적이 있었다.

"애들은요?"

"모두 학교 갔지 뭐."

여옥은 안방에서 명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명희가 들어섰을 때는

넋빠진 것처럼 쳐다보았다.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널 여기서 만나다니."

명희는 목도리를 풀어 집어던지며 여옥의 두 손을 잡는다.

"으응, 나도 그래."

"언제 서울 왔니?"

"서울 온 거는... 오늘 내려갈 거야."

선혜는 부엌을 들여다보며 뭐라고 한참 지껄여대는 것 같더니 뒤늦게 방으로 들어왔다.

"내가 그랬잖아. 전도부인 관두고 시집가라고 말이야. 했더니 뭐래는 줄 알어? 강선혜 씨는 내소박을 한 때문에 재혼할 자격이 있지만 길여옥은 소박을 맞았기 때문에 자격이 없다는 게야."

"언니도 참."

"아아니야, 그거 내가 한 말 아니래두."

"여옥이 너도 이제 뻔뻔해졌구나. 그런 말을 다 하게."

"그 이상의 말은 못할 줄 아니? 하느님 아버지만 부르는 전도부인 그건 다 가짜라구."

여옥의 얼굴에서 넋나간 것 같은 표정이 걷혀진다.

"어째 전보다 빠진 것 같구나. 별일은 없겠지?"

"하도 싸돌아다니니까, 빠져서 다행 아니니? 날씬해졌다."

선혜는 수선스럽게 치맛자락을 끌며 또다시 방을 나간다.

"전주댁! 전주댁!"

하다가 신발 끄는 소리를 내며 부엌으로 가는 기척이다.

"그래 견딜 만하니?"

"이대로 더 나가다간 비명이 나올 것 같다. 닫아놓으면 일이 안되고 열어놓으면 열어놓은 대로 부작용이 여간 심하지가 않아. 시골에서도 전도하는 데 있어 과부나 소박데기보다 노처녀의 시세가 더 나가니 조선 사람들 무척이나 순결 좋아하지."

"그야 하느님 신부 될 자격을 잃었으니 그럴밖에."

명희는 농으로 말했으나 그렇게만 받아넘길 수 없는 심각한 것을 여옥으로부터 느낀다.

"나는 그렇고, 명희야 넌 왜 그러니? 처음 네가 아닌 줄 알았다."

"너무 늙어서?"

"넌 파파할머니 되기까지 그런 화장은 안 할 줄 알았는데 왜 그리 자신이 없지?"

"화장 짙은 바람기쯤이야 어떨라구."

"이애가, 좋잖은 전존데?"

점심상이 들어왔다.

"자아, 자아, 이제야 내 생일상이 들어왔다. 계집애를 정월달에 낳았으니 팔자가 좋을 리 없지. 사내로 태어났다면 하다못해 비적 두목이라도 됐을 거 아닌가."

세 여자가 상머리에 앉는다.

"먹음직스러운데요?"

여옥이 음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야 말할 것도 없지. 친정에서 베테랑을 뽑아왔거든. 우리 집 권선생도 전주댁 데려온 데 대해서만은 아무말 안 해."

"처갓집 재산 기웃거리는 바보자식은 아닌 모양이지요?"

여옥은 전에도 그랬지만 남자같이 말을 툭툭 던졌다. 그 어투 속에는 자산가의 딸을 얻기 위해 이혼을 강요했던 오선권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 있는 것 같았다.

"언니, 생일 선물이에요."

명희는 핸드백 속에서 조그맣게 포장한 상자 하나를 내놓았다.

"뭔데?"

"보다마나 향순가 봐요. 나는 오다가다 찾아든 나그네라 양해하세요. 강여사."

여옥은 또 툭툭 던지듯 말했다.

"그런 데 신경 쓸 것 없고, 국 식기 전에 들어요."

모두 수저를 든다.

", 과연 입에 붙는구먼."

여옥은 국을 마시고 나서 낙지찜을 집는다. 선혜는

"여기 앉은 사람들은 모두 음식맛 아는 사람들이지."

"그런 또 왜요?"

명희가 물었다.

"사대부 집안이 아니란 얘기야."

"음식맛 아는 것과 신분이 무슨 관계 있을까?"

"특히 양반들 종가의 음식이란 사람 쳐다보지."

"언닌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알지. 이치가 안 그러냐? 백결선생을 추앙했고, 나물 먹고 물 마시고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그것도 모르니? 청백리 송곳 똥 누는 것도 몰라?"

"해서요?"

"음식이야 중인들이 즐기고 중이들보다는 돈 있는 장사꾼이 더 잘해먹지. 아무리 돈 벌어봐야 먹는 재미밖에 없는 사람들이니까."

"사실 그럴 거야."

여옥이 동조했다. 밥상을 물리고 과일이 들어왔다. 커피도 들어왔다.

"지나친 호사를 해서 사고나 안 날까?"

여옥이 검정 치마 위로 배를 슬슬 만진다.

"어이구 오래간만에 옛날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좀 있으면 악마구리 같은, 남 낳은 내 자식들이 들이닥칠 거고."

선혜는 두 다리를 쭉 뻗는다.

"후회합니까? 강여사."

후회한다면 전도부인 관두고 시집가라 했을까?"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지난날의 강선혜를 상상하기 어려운, 그런 수줍음을 나타내며 웃는다.

"남자가 위대하긴 위대하군요. 남녀 동등을 외치던 여성께서 저렇게 변하다니 믿기 어렵소."

"남자가 위대한가? 권오송이가 위대했지. 하하핫핫핫..."

"언니 어딜 보고 권선생님이 데려갔을까?"

쓸데없는 말이라도 이어가야 하는 자리다. 여옥이 대신 명희가 이어주었다.

"앙큼하지 않아서 데려왔다는 게야. 초취라면 모를까 재취가 앙큼해서는 안 된다는 거지. 자기 자식 생각해서 그랬겠지 뭐, 보모 노릇 아니지, 가정교사도 할 만하니까, 결혼 동기 따져서 뭘 하니.“

"친정은 어떡허구요."

여옥은 그 점에 관심이 젤 쏠리는 모양이다.

"권선생 말이 쓰라 하면 잘 쓰겠지만 재산을 늘리거나 지키는 그따위 재주 타고나지 않았으니까 사양하겠다, 양자를 들이라는 거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선혜는 언제든지 그 말을 할 때 의기양양해진다.

"마포 장배는 이제 별볼일 없는 거 아니요?"

"별 볼일 없다는 거야 벌써 옛날이지. 미리부터 그런 조처 못했다면 마포 강서방이 돈 모았겠어? 철없기론 나 혼자, 그래서 권선생이 날 데려왔고, 그러고 보면 장단점은 다 갖고 있는 셈이지. 돈 많고 귀하신 몸의 명희한테는 자식이 없고 대신 여옥씨한테는, 하느님 계시고."

"세월 사는 줄 모르겠수."

"그래. 한데 명희야."

"왜요?"

"너 홍성숙이 그 계집 때문에 상당히 아팠지?"

"가슴이 말예요?"

"어어? 이 애가 도리어 날 놀리려 드네? 하지만 이젠 끝난 얘기, 바람이었다, 할 것 같으면 상처받을 필요 없어."

"끝났기에 아파요."

"배신감 때문에?"

"글쎄요."

"차림새를 보아하니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안 겪겠다, 각오가 역력하지만 넌 그렇게 안 차리는 편이 아름다워."

"횟가루를 뒤집어썼다, 그 말이지요 언니?"

선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불쾌해진 것 같다

"너 이상하구나. 아까부터 느꼈지만 너 말투엔 가시가 있는 것 같다. 혹 내가 너 잘못되기를 바라기라도 했단 말이냐?"

"무슨 소리예요?"

"그런 애가 아닌데, 건둥건둥하며 나를 놀리는 거니? 너 뭔가 오해한 거 아니야? 게다가 넌 전엔 안 그랬다아. 아주 속된 투야. 나야 뭐 본시부터 그렇지만 말이야. 안 그러던 애가 갑자기 그러니까 이상하구나. 속물들이나 하는 말투, 뭔가 비틀어쥐는 것 같구, 여옥씨 그렇잖아?

변했어."

"나 보기에도 명희가 변하기는 좀."

하다가 말끝을 맺지 않았다.

"그렇지?"

"뭐 제가 변했다면 변한 걸 거예요. 하지만 언니한테 무슨 오해가 있겠어요.“

명희는 그런 화제에서 피하고 싶은 듯 시선을 벽 쪽으로 보낸다. 절망의 빛이 지나간다.

"홍성숙이 천하라도 잡을 듯 안하무인일 때도 명희 넌 그렇지 않았다. 난 그때 종시일관 널 지켜보았지만 말이야."

"아이, 그런 얘긴 이제 관두세요."

"아니야, 난 그때 네가 독종 아니면 남자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 두 경우의 가능성이야 있지. 한데 일 마무리가 된 지금 넌 나를 의아하게 하는구나. 말씨며, 너를 보는 순간에도 그랬어."

"좀 변해야지, 안 그래요 언니? 죽을 수도 없고..."

"하기야 뭐."

하다 말고 선혜는 당황한다. 이상현을 생각했던 것이다.

"하기야 좀 어려운 나이가 돼가지."

하마터면 이상현을 들먹일 뻔했다. 여옥이 때문에 가까스로 참았는데 달리는 차에 급브레이크를 걸어 멎게 한 것처럼 선혜는 허둥지둥 몇 번이나 얘기한 바 있는 일을 되풀이한다. 물론 어색한 것이었다.

"아이라도 하나 있었더라면. 너의 남편한테 원인이 있는 것 아니냐?"

"누가 알겠어요."

명희도 항상 하는 그 대답이었다.

"조용하 씨한테 원인이 없다면 지금쯤, 아니 벌써 예전에 난리굿이 났을 텐데 말이야."

"남 낳은 내 자식 있다고 언니 뽐내는 거요? 나도 애기 있어요. 멀리요."

"멀리? 꿈속 고향에?"

"남 낳은 내 자식 말예요."

농담으로 들었고 명희 자신도 농담 삼아 한 말이었지만 그는 양현을 생각했던 것이다. 못마땅한 듯 말이 없던 여옥은

"하느님밖에 없는 여자가 속세의 남의 행복을 시기라도 하는 것 같아 조심스럽지만, 하기는 명희가 행복할 거라고 믿지도 않았지만 도대체 여자들이 뭣 땜에 공부를 했는가 그런 생각이 드는군. 욕을 해주고 싶을 만큼 실망이다. 강여사,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없어. 나도 동감이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패잔병들의 은신처가 결혼이하는 거지 뭐. 여자가 능력을 인정받으려면 요원해. 뭐 나야 별 재간도 없었던 여자지만 말이야. 결혼 잘했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그만큼 혼자서는 견디어 배기기 어려웠다는 얘기가 될 게야. 배운 여자가, 하면 그건 언제나 질책이었고 어떤 때는 숫제 화냥년 취급이니, 사방을 둘러보아도 배운 여자가 나가야 할 문은 한 군데도 열려 있지 않으면서, 철저하지 철저해, 조선 사람들 보수적인 것."

기염을 토하는지 개탄을 하는지 강선혜는 오래간만에 열을 올렸다.

"강여사는 화려한 중앙 무대에서 당했으니 그나마 덜 억울하겠수. 나같이 말똥머리 무명 치마... 한땐 쪽찔까 하는 생각도 했지요. 산골로 들어가면 아직 이 말똥머리가 구경거리라니까.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몇 사람이나 진정한 뜻의 하느님 말씀을 전달하였는가 의문예요 처음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리라, 그게 아니에요. 순박해서 정다웠던 처음 신도들은 교회라는 단체 속에 흡수가 되어 상호 연관을 갖게 된 후 얼마가 지나면 변해가고 있어요. 외길 하느님 말씀에 인간들 잡음이 들어가거든. 소위 그 신도들이 모인 사회에서도 말입니다. 약아지고 남의 눈치를 보게 되고 마음에 없는 겉치레를 하게 되고, 썩어간다고 외친 적도 있었지요. 왜 그런가, 왜 그런가 밤마다 뇌어보기도 했고 결국 떠오르는 게 계급이었소. 의복에도 용모에도 학식, 출신, 실로 많은 계급, 바로 그것이로구나! 비로소 내가 가시덩굴 속에 서 있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소박한 저희들 울타리 속에서 복음을 전하고 인간관계 속으로 끌어내 놓으면 진리는 형식화돼버리고 본래의 것에는 안 그래야 할 물들이 들기 시작하거던. 끝없는 봉사, 끝없는 희생, 그것만 가지곤 안 된다는 것, 절망이지요. 교역자가 전부 다 끝없는 봉사 끝없는 희생 그래도 과부족인데 조그마한 소도시에라도 나가보면 심하게 말해서 계층에 교회가 사교장으로, 특권층이 전시 효과장으로, 그런가 하면 소박했던 사람들은 그 소박함이 비루하게 달라져가는 거지요. 물론 모두 전부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뿌리가 박히고 뻗어나갈 때 조선의 앞으로의 교회는 어떤 꼴로 존재해 있을 것인지 알기 쉽게 말하자면 속물 교회, 쉽게 알아듣기 쉽게, 그런 소박함이 아니지요. 어렵게 속물적인 어려움, 그것이 어디 미신과 분리되는 방법이겠소? 밤에 깨어나서 대가리 수, 혼자 웃지요. 참되게 전도받은 사람이 몇 명이냐, 예수님 고통에 접근해가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냐, 가슴을 치고 통곡을 하면서 울지 않는 사람보다 경박한 신심, 결국 끼리끼리 허영을 쪼개어 나누고 종교는 의상이 된다..."

여옥의 내부에서 뭔가가 자꾸 터져나오려 하는 것같이 보였다. 강선혜는 하품을 깨물었고 명희는 여옥에게 쏠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다.

"."

여옥의 음성이 툭 떨어지듯 낮아졌다.

"요즘 늘 이렇기 때문에 미친년 취급받아요."

"그래, 흥분하면 사람들은 언제나 얕잡아보더군. 나도 신물이 나게 그런 경험 많이 했다."

하품을 깨물던 강선혜의 말이었다.

"어이구, 이러고 있을 형편 아닌데."

여옥이 화다닥 일어서며 시계를 본다.

"기차표를 끓어놓고서, 명희야 또 만나자. 나 먼저 가겠어."

"아니야, 나도 함께 가야 해."

"아아니, 가는 데도 뜸을 들여야지 별안간, 쫓긴 것같이 가슴까지 두근거린다."

"내 생활이 항상 이래요. 미안합니다. 강여사. 참 명희야, 인실이 너 제자지?"

"으음."

"그 애 잡혀간 소식 들었니?"

"또오!"

선혜와 명희가 동시에 말했다.

"나도 자세한 것은 모른다. 얼핏 들었는데 직접 학생 운동에 관련이 됐는지 그냥 신간회하고 관련인지."

"한 번 걸려놓으면 자꾸 저리 된다니까."

선혜는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 청 조사에도 형사 놈이 몇 먼 다녀간 모양인데 제발 성가신 일이나 없어야지. 이리 몸은 뚱뚱해가지고 옥바라지를 어떻게 하니?"

밖으로 나온 명희는 사양하는 여옥을 차에 타게 했다.

"가는 길에 타고 가는 게 뭐 어때서 그래. 시간도 바쁘다며?"

"아니 시간은 충분해. 그 집에서 나오고 싶어 그랬다."

"그럼 다른 데 가서 차나 마실까?"

"아니야, 역으로 가겠다."

"그럼 그러자꾸나. 역 이층에 그릴도 있으니까. 너무 고집스러워도 좋은 것 아니야."

"네가 날 보고 설교하니?"

"그럴 처지는 아니지만."

차를 타고 서울역을 향해 가면서 한 두 사람의 대화다.

"네가 뭐래도 난 널 만나서 기분이 좋다."

"어째 옛날 말 투 같구나."

"언제쯤 또 올라올래?"

"그건 모르지. 나는 별로 널 만나고 싶지 않은데?"

"그럼 아까는 선혜 언니 집에서 왜 기다렸지?"

"강여사 기운 세게 안 보여? 사람은 좋은데 순 속물 중의 속물이다."

"그거는 네가 한 면만 보니까 그래. 마포 강서방 강서방, 자기 스스로 그러니까 선입관도 있었을 거구."

"권오송이라는 사람이 연극쟁이라는데 꽤 소박한가 부지?"

"소박하긴, 면도날 같은 사람이야."

"그럼 얘기가 다르지 않아."

"처가 재산 얘기야?"

"그래."

"면도날 같으니까 그렇지. 그분은 아이들한테 비중을 많이 두었고 생활을 택한 거야. 그 언니 윅윅 소리만 컸지 순진한 면이 있어. 뱃속에 남겨두는 게 없거든. 그거니까 생활은 너저분해도 권선생 맘은 편할 거야."

"너 오라버니 학교 그만두셨다구?"

"."

"뭘 하셔?"

"기와 공장을 차린다고 동분서주하는데 역시 그 집에도 형사가 드나들어 골치깨나 썩이지. 더욱이 학교 문제가 꼬리를 무는 모양이야."

"어려운 세상이다. 이래저래... 학교는 잘 그만두셨지. 너한테서 사슬이 하나 풀린 셈인가?"

"오빠를 너무 과소평가하는군. 내가 옥살이시킨 거나 다름없었어."

서울역 광장에 내렸다.

"너는 이제 가아. 나 여기서 혼자 기다리다가 차 탈 테니까."

여옥이 말리는데 명희는 굳이 차에서 내렸다.

"식당에 가서 차 마시며 기차 기다리자."

"나 너하고 가면, 이 많은 사람들 속을 가면 위축된다."

"너에게도 하느님은 멀리 계시는구나."

명희는 여옥의 팔을 이끈다. 여우 목도리를 자동차 속에 끌러놓고 왔는데 그래도 사람들의 시선은 명희에게 그리고 여옥에게 쏠렸다. 도무지 걸맞지 않은 두 여자의 차림새였다. 여옥은 명희를 뿌리치고 혼자 가고 싶었지만 선혜 앞에서 못할 얘기, 운전수 듣는데 못할 얘기가 있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구내식당에 마주 앉았다. 계단을 오를 때는 마치 여학교 시절 교실을 손잡고 오르내리듯 그러던 명희는 늪 속같이 침울한 표정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명희야?"

"."

"너 나한테 무슨 할 말 있니?"

"? 이러고 있음 안 돼? 집으로 들어가기가 싫어서 그래."

"내 그런 줄 알았다. 그래도 네가 옛날 그대로 거의 있으니까 다행이다. 사실은 변했다면 내가 많이 변했지."

"정말 결혼 안 할 거니? 나 권하고 싶지도 않지만 말이야."

"아까 강선혜 씨 한 말 중에 한 말 중에 한 가지는 실감나더군. 결혼 잘했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그만큼 혼자서 견디어 배기기 어려웠다는 얘기가 된다, 그 말 말이야. 시골은 더 어려워. 교회를 등지고 서서도 말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건 결혼, 결혼이라기보다 남자지. 아마 나는 결혼 못할 거야."

"..."

"내가 어려울 때 이상하게 인실이 생각이 나더군. 왜 그런지 모르지만. 강해, 아주 강한 아이야. 교회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지만... 독립 운동이니 사회주의 혁명이니 하고 떠벌리는 소위 선구자, 그런 여성들 중에 심지가 박힌 여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될는지 나는 의문이야. 교회에서도 그렇지만 웃기는 여자 남자가 참 많다. 밑바닥에서 세상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말이야. 오늘 너를 보았을 때도 야아, 명희도 웃기는 여자로구나, 내 솔직한 고백이다. 하기는 말똥머리에 돔방치마, 투박한 구두, 이런 내 꼬락서니를 세상에서는 더러 웃음거리로 삼긴 하더라마는, 어떤 때는 내가 나를 비웃기도 하지마는... 곤두박질에 통곡, 절망과 비애가 밀어닥치고 떠나고 또 밀어닥치고 어쩌면 나는 계속 열병을 앓으며 헛소리를 하는 병자가 아닐까, 느껴질 때가 있고 정신 착란증에 걸린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러나 먼 곳에서, 먼 바다 쪽에서 밤배의 고동 소리를 듣는 것 같은 순간도 있었어. 무슨 뜻인지 무슨 말인지 너무 아득한 것 같아 절망을 몰고 오면서도 하느님의 음성이 아닌가 하고... 기다려라 여옥아, 기다려라 여옥아, 그러면 네게 좀 뚜렷한 길을 열어주마..."

"이애 여옥아, 너 무슨 소릴 하고 있니?"

명희는 불안해진 것이다.

"걱정이 되니?"

"...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것 같아서 그래."

"나도, 똑똑히는 들을 수 없는 소리라서, 하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희망일 거라는 확신은 있다. 이 불쌍한 민족에게, 날로 비천해져가는 인간들에게 복락이 아닌 철퇴가 내려질 것이라는."

정신 착란증에 걸린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균형 잃은 상태, 모순도 대담하게 드러난 언어에 비하여 다소 상기된 얼굴이긴 했지만 광기와 다른 명상적 깊이를 가진 눈빛은 명희로 하여금 다음 말을 잇지 못하게 한다. 리드미컬할 만큼 조롱과 야유가 충만해 있던 언어에 비하여 따뜻하고 비애에 가득 찬 눈길. 명희는 고개를 가볍게 내저어본다.

"사람들은 복락을 얻기 위하여 산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인 한에 있어서 복락은 축복이 아니다. 개인이나 민족을 막론하고 간악한 곳에 복락이 있었으니 말이야. 어찌하여 악한 자가 복락을 누리며 착한 자가 바람 부는 벌판에서 울어야 하는가, 참 많은 사람들이 내게 던진 질문이었다. 내가 나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했어. 과연 하느님은 계신가. 옛날 오선권이 내 가슴에 비수를 꽂아놓고 갔을 때 밤마다 하느님은 계신가 하며 울부짖었다. 잃은 사랑 때문이 아니었어. 하느님은 계신가, 그것은 진실이 있는가 영혼이 있는가 그 물음이었다."

명희는 전율 같을 것을 느낀다. 산발을 하고 가슴을 헤친 채 피 흐르는 맨발의 여자가 허덕이며 뛰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 지금은 확신하게 됐니?"

곪은 상처를 만지듯 명희는 두려움을 느끼며 물었다. 여옥은 대답을 안 하고 외면을 하고 있다가 피시시 웃었다. 웃는 얼굴에서 아까와는 사뭇 다른 어린아이 같은 천진스러움을 본다.

"나 사실은 말이야, 하느님은 계시냐고 울부짖었을 때 내 속의 가장 깊은 곳에는 하느님이 계셨어. 엄마는 죽은 게 아니고 마을갔다, 그런 느낌일까? 일어나라 여옥아, 일어나... 원망을 한 거지 뭐. 진실은 정말 있는 겁니까 하고 말이야. 나는 인간을 떠나서 살수 없었거던. 지금도 역시 그렇단다. 떡장수 할머니, 지게꾼 아저씨, 나무꾼 아이, 누구라도 좋아. 하느님 닮은 사람 만나고 싶은 게야. 멀리 계시는 분 말고 사람을 내 가까이서 확인하고 싶어. 거짓말쟁이는 모조리 벽이거든. 손이 닿지 않는 숨이 막히는 벽이야. 쳐부수고 두드려 부수고 싶어. 미움, 견딜 수 없는 미움, 내 천진했던 인생의 출발에서 당한 그 기만의 날벼락, 생생한 그 기억 때문에 더욱 더 사람을 통해 확신의 희망을 가지려고 이리 발버둥을 치는 건지 모르겠다만."

"엉터리 전도부인이구나. 전도부인을 네 쪽에서 찾고 있잖니?"

명희는 처음으로 웃었다.

"그런지도 모르지 아마. 물질로 인하여 나와 결혼했고 또 물질로 인하여 다른 여자한테로 간 그 독실했던 크리스찬 오선권은 도처에 있어. 산간벽촌에도 얼마든지 있어. 겉보리 한 말에 자기 양심을 파는 사람, 겉보리 한 말이 유죄지. 그건 악마의 힘이야. 겉보리 한 말만 더 있어도 하얀 마음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그 그림자를 끌면서 암흑 속으로 끊임없이 하느님을 기만하며 존재하는 거지."

"내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 배고픈 사람이야 어쩌겠니?"

"겉보리 한 말이라 한 거는 여벌 분을 말하는 거구 또 반드시 물질만을 얘기하는 것 아니야. 또 영혼을 팔지 않고 소유할 경우도 있겠지. 엄격히 말해서 사람들은 그 여분 때문에 사악해지는 거 아닐까?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 사람의 얼굴을 아마 명희 넌 본 적이 없을 거다. 바로 그때 그 얼굴이야말로 진실이다. 끽다점에서 칼피스나 마시는 그런 얼굴하곤 다르지. 해서 오선권이보다는 벌판에서 우는 사람이 낫다.“

"너 말대로 하자면 모두 배가 고파서 허둥지둥 밥을 먹어야 세상은 천국이 된다, 그러니?"

"내 뜻은 여분을 복되게 하오소서. 여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오소서."

"나는 여분의 노예로구나."

"그렇다. 너는 여분의 노예야. 누굴 배신하지는 않았겠지만 오선권이 부류다. 하지만 오늘 널 보고 놀란 것은, 명희도 벌판에서 울고 있구나... 생각했지."

"뭐라구?"

"넌 절망의 구렁창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점쟁이 같은 소리."

"아암, 그렇게 말해도 과히 틀리진 않아. 강여사나 명희 너는 동경까지 가서 전문 교육을 받았지만 그러한 너희들보다 내가 유식한거는 틀림없을 게야. 내 발바닥으로 하여 배운 지식이 교실 안에서 배운 지식보다 훨씬 진실에 가까우니까. 간혹 일자무식의 촌로 중에서 사부 같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어. 뭐 이론이 어떻고 체계가 어떻고 서구 사상이 어떻고 세계관이니 인생관이니 그것다 종이 쪼박지야. 해 넘어갈 때 새 소리를 듣는 촌로, 해 넘어가는 하늘 전체를 가득 안으며 육십 년 칠십 년을 살았으니 말이야. 생각이 깊고 넓겠지. 의자 하나를 놓고 다투면서 세계관이 어떻고 인생관이 어떻고, 바위든 풀밭이든 편안한 자리에 앉아서 유장하게 담배 한 대 피우는 사람 앞에 세계관 인생관? 소리질러보아야, 에미 부르는 송아지 울음만이나 할까?"

"너는 인간의 발전을 전부 부정하는구나."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여분이 낳은 교만의 어릿광대, 그 얘기를 하는 거야. 그들이 발전의 주역이라면 결과는 교만과 어릿광대가 비대해지는 것밖에 더 있겠어? 인간의 사는 곳 도처에 주역들은 교만을 경쟁하는 어릿광대들, 시골에선 그게 보다 원색이라 서울사람들 도시 사람들은 무식하니 미련하니 하지만 피장파장 표현의 차이뿐이야."

"어떻게 그리 생각하는 것을 꼭꼭 집어내서 말할 수 있니? 내가 휘둘리며 끌려 들어가는 걸 보면 너야말로 여분의 교만을 가진 사람 아니니?"

여옥은 웃었다.

"발바닥, , 눈이 모아준 지식이지. 너 말대로 여분의 교만이 내 속에서 자라는 걸까?"

"그보다 너 아까 날 보고 절망의 구렁창에 떨어졌다 했는데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했니?"

"그건 나도 누구한테였을까? 귀동냥을 한 건데 말이야. 어떤 목사님한테 들었는지, 사람은 절망의 구렁창에 빠지면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는 거야. 그 하나는 먹는 것 입는 것 다 잊어버리는 상태, 그리하여 짚불 잦아지듯 사라지는 사람이며 다른 하나는 주렁주렁 단다는 거야. 허기든 사람같이 뭣이든 계속해서 먹고, 전에 안 하던 화장을 하고 반지나 장신구 같은 것은 있는 대로 끼고 달고 옷은 화려하게, 절망의 시간을 빨리 먹어치우자는 잠재의식의 소행이라는 거야, 아이크! 이거 차 놓치겠다."

여옥은 말을 중단하고 당황하며 일어섰다.

"뛰어가야겠구나! , 그럼 명희야 잘 있어. 다음 만나 얘기하자."

여옥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명희는 엉덩이가 의자에 붙어 버린 것처럼 일어설 수가 없었다. 얼마 동안을 우두커니 앉아 있었는지...

"형수님."

", ?"

명희는 꿈길처럼 얼굴을 들었다.

"형수님이시군요, 역시."

찬하는 의아해하고 놀라는 표정이었다.

"아니, 되련님이."

". 기차에서 내려 차나 한잔 마시고 갈려구요. 긴가민가했습니다."

", 일본서 오시는 길인가요?"

"아닙니다. 대련서."

"그럼 만주서 오셨다 그 말씀이세요?"

". 그냥 부산으로 직행할까 싶었지만 내렸습니다."

여로에 피곤해진 찬하 얼굴에 서글픈 미소가 떠올랐다.

 

 

9장 사랑이 아니어도

구내 식당에서는 전혀 불빛을 의식하지 않았던가, 어두컴컴한 계단을 밟고 아래고 내려섰을 때 명희는 시야 가득히 불빛이 들어온 것을 느낀다. 이등 대합실 천장에 매달린 전등들이 황황히 빛나고 있었다. 어김없는 밤이었다. 이지러진 달빛과 오렌지빛 등불과 검은 안개 같은 어둠이 깔린 역 광장으로 나왔다. 두루마기 자락에 밤바람이 지나간다. 언제 시간은 그렇게 흘렀을까.

'여옥이하고 꽤 오랫동안 얘기를 했나 부다!'

명희도 놀랐지만 검정 외투의 깃을 세운 찬하가 명희와 함께 나오는 것을 본 운전수도 깜짝 놀란다.

"그간 잘 있었소?"

다가간 찬하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엄청난 파격에 당황한 운전수는 여행 가방부터 받아들고 굽신굽신 절을 할 뿐이었다 두 사람은 자동차에 올랐다. 문을 닫아주고 운전석 옆자리에 가방을 놓은 뒤 운전수는 핸들을 잡는데 놀라움, 당황함이 사라진 얼굴에 의아해하는 빛이 떠오른다. 짐짝들과 사람들, 밤바람과 쓸려가는 종이 조박지, 달무리같이 번져가는 등불, 그런 것들이 늦겨울 한기 속에 움직이고 뒹구는 역 광장을 떠나 자동차가 남대문 옆을 지날 때 핸드백을 만지작거리며 명희는 물었다.

"만주에는 무슨 일로 가시었습니까."

무연히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찬하는

"?"

하다가

", 뭐 별 목적도 없는 여행이었지요."

목적 없는 여행, 떠돌았다는 얘기다. 언제 동경서 떠났는지 알 수 없으나 명절이면 객리에 떠나 사는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관례요 또 심정이겠는데 서울을 비켜서 만주까지 목적 없는 여행을 했다. 전 같으면 두려움 없이 명희는 그 말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찬하 역시 결혼을 안 했더라면 그런 말 입 밖에 내는 데 주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사람하고 결혼했더라면 나는 이상현이... 그분을 잊었을까? 잊었을지 모른다.'

대담한 생각이었다.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의 기복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명희는 찬하를 남성으로 인식한 것이다. 당초에 찬하와 결혼했더라면... 아마 그랬을 것이다. 명희는 고풍의 여자였으니까. 얼굴도 모른 채 부모가 결정한 대로 출가하여 조강지처라는 명분 하나에 매달리어 해로하는 조선의 여자들, 명희에게는 신식 교육을 받은 신여성이란 모순이다. 하기는 고풍의 여자였기 때문에 꽤 오랜 세월 조용하하고 살았을 것이다. 또 전문학교를 나왔다는 이력 때문에 조용하에게 선택되기도 했었고, 아무튼 명희의 경우는 그렇다 하고, 조씨 일문의 사정도 명희가 둘째며느리였었더라면 훨씬 덜 심각했을지 모른다. 아니, 분명히 문제는 가볍게 끝났을 것이다. 차남이 지체 낮은 집안의 딸과 혼인한다는 것은 장남의 경우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그런 외형적인 일은 혼담 당시, 그때는 어떤 비극의 씨를 배태하고 있는지 찬하이왼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으나 하여 비극의 농도에 초점을 둔다면 용하는 여자를, 아내까지 포함하여 일시적 혹은 반영구적 소유로 간주하지만 찬하는 영혼의 목마름에서 여자를, 아니 명희를 원했다. 용하는 어떤 경우에도 상실이 없다. 상실이 없다는 것은 상실할 그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이 될지 모른다. 항상 모든 것의 포만 상태에 있는 그를 두고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사랑이 없다, 하면 납득이 될 것이다. 물체는 여기저기 옮겨놓을 수 있고 대치할 수 있지만 마음은 쉽사리 옮겨놓거나 대치하기 어려우니 끝내 단념을 못하게 되면 한 인생은 망가지기 마련이다. 해서 조병모 부처도 형제가 한 여자를 원한다, 동생이 형수를 사랑한다, 그 수치스런 가문의 내막이 외부로 새나가는데 대한강박과 아울러 찬하의 인생이 망가지리라는 예감 때문에 명희를 요물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허나 세상의 일이란, 우주의 모든 운행? 아니 질서란 묘한 것인가. 한 미물에서 우주의 질서를 느꼈다면 그 크기와 넓이가 또 시간이 어떤 것이든 만물의 영장으로 자부하는 인간을 우주 질서의 일부로 본들, 한 개인의 얽히고 비틀어진 행로를 우주 질서의 일부로 본들... 과장일까. 그러나 그렇게 안 되었더라면, 하는 과거의 회한이나 희미하여 명확한 답이 불가능한 미래를 생각할 때 우주 질서에 귀착시켜 운명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너무나 흔한 일이며 운명이란 미결의 그 흔한 용어이기도 하다. 여하튼 사람의 일이란 묘하다. 인간은 번번이 조물주의 능력을 대행하여 스스로를 희롱하는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조용하가 조강지처를 버리지 않았더라면, 찬하하고 결합이 됐더라면, 당사자나 객관적 판단으로도 되풀이하거니와 훨씬 덜 심각했으리라. 그러나 명희와 찬하의 결혼은 가능했을까. 천만에, 결코 조씨 집안에서 임역관댁에 청혼하지 않았을 것을 단언할 수 있다. 조용하는 모든 실권을 가진 죄 집안의 실질적인 당주였기 때문에 부모는 반대 의사를 표명할 수는 있어도 청혼을 막을 능력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차남 찬하는 부모에 또는 형에 소속된 처지였으므로 부모나 형은 마땅히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로 청혼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찬하와 명희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면 문제는 다르다. 두 사람끼리 결함하고 뒤늦게 용납하고 그런 경로로 갔겠지만 연애 관계가 아닌 이상 청혼 없이는 결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일본 여성 노리코와의 결혼에는 어찌하여 조병모 부처는 눈을 감았으며 아우성치지도 않았는가. 실은 찬하 자의대로 한 결혼이었지만 허락을 받아야 했을 경우라 하더라도 그것은 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찬하는 누구든, 결혼 그 자체, 결혼을 하는 것만이 조씨 일문을 위하여 그 이상의 좋은 해결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명희는 자동차에 흔들리면서 고귀한 조씨 가문에 이 무슨 횡액인가, 저런 요물이 들어와 기둥을 흔들어놓으려 하는고, 비탄하는 시부모의 시선이나 찬하의 암울한 얼굴을 볼 때마다 느껴야만 했던 죄의식, 죄인이라는 착각, 그 집요했던 강박감에서 자신이 해방된 것을 뚜렷하게 느낀다.

"노리코상은 안녕하신가요?"

"."

"어째서 함께,"

"임신 중이라, 혼자 떠났습니다."

"임신했어요?"

동요를 나타낸다. 아이를 낳아보지 못한 여자의 본능적인 선망이 순간 명희를 흔들어놓은 것이다.

"아버님 어머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축하합니다."

"기뻐하실까요?"

"그럼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형님한테는 거의, 단념을 하신 것 같아요. 그런 만큼, 기뻐하실 거예요."

명희는 형님한테, 하고 말했다. 부지중에 한 말이었지만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한 결과가 되었다. 이번에는 찬하 쪽에서 충격을 받은 것 같다.

"두고 보십시오."

"?"

"결혼 문제가 다시 거론될 거라 그 말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시니,"

"대를 잇는다, 하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요. 순종을 찾을 테니까요."

자조적인 웃음을 띤다.

"형님이 그 책임을 이행하지 못할 때 당연히 나올 논란이라, 형수님은 생각 못해보셨습니까?"

", 글쎄요."

"조선 여자와의 재혼을 강력히 밀고 나올 겁니다."

명희는 침묵한다. 한참 후

"그래서 설엔 안 오시고 만주로 가셨나요?"

"그건 아닙니다. 방금 생각해본 일이지요. 뭐 심각할 것도 없습니다. 떠나 있는 사람 붙잡아다 어쩌겠습니까."

껄걸껄 웃는다.

"그보다 처음에는 형수님 아닌 것 같아서 놀랐습니다."

웃음의 꼬리를 끌며 찬하는 화제를 돌렸다.

"천박하게 보였겠군요."

", 그게 아니구 화려해서요. 형수님한텐 안 맞거던요."

운전수 얼굴에 다시 의아해하는 빛이 떠오른다.

"오늘 세 사람으로부터 꾸지람을 받은 셈이에요. 선배, 친구, 그리고 되련님하구요."

"그렇습니까. 꾸지람이라 하시니 그럼 제가 버릇없었군요."

해방감을 느끼는 명희의 심정은 찬하에게도 전달되었다. 두 사람이 자동차를 함께 타고 가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지만 격의 없이 얘기하고 웃어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부산까지 직행하여 일본으로 떠날까, 잠시 집에 들렀다. 갈까 망설이다가 서울역에 떨어진 찬하는 그런 만큼 우울해 있었는데 우연히 만난 명희는 전전긍긍하며 시선이 마주치는 것조차 피하려던 옛날과 달랐다. 찬하는 편안함과 위안을 느낀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애상이 말끔히 치유된 것은 아니었지만 절망에서 일어섰고 조용한 방관자의 위치를 굳혔던 찬하. 사랑이 아니어도 간격을 좁혀준 것만도 위안이 되었다.

", 형수님은 무슨 일로 역에는 나오셨습니까? 형님께서 어디 가셨습니까?"

"아니에요, 친구 전송하러 나왔다가,"

하는데 명희 눈앞에 여옥의 투박한 구두 뒤축이 떠올랐다. 허둥지둥 기차 승강구를 오를 때 보일 구두 밑창, 검정 무명 두루마기, 말똥머리의 모습, 장님을 연상시킨다. 명희는 눈을 꼭 감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장님은 바로 너, 너 자신다.!'

"친구 말씀을 하시니까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만,"

찬하는 담배를 꺼내다 말고 도로 집어넣는다.

"괜찮아요. 피우세요."

"괜찮겠습니까?"

". 담배 냄새, 괜찮아요. 그보다 생각나는 일이란?"

담배를 붙여 물고 나서 찬하는

"아마, 전에 형수님이 계시던 학교 출신이지요? 무슨 사건 때문에 신문 지상에서 이름을 본 기억이 나는데, 일본인 한 사람이 낀 사건이었지요."

"계명회사건 말이군요."

"맞습니다. 계명회사건,"

"유인실에 관한 얘긴가요?"

"그렇습니다."

"그 애라면 제가 가르친 제자예요."

명희는 이상한 날이라는 생각을 한다. 여옥을 만난 것도 우연이었고 전에 없이 역까지 따라간 일이며 또 그곳에서 뜻밖에 시동생을 만났다. 우연히 만난 두 사람 입에서 우인실의 이름을 듣는다는 것은 유인실과 상관 없이 뭔가 급격한 변화가 자기 자신에게 밀어닥칠 것 같은 묘한 예감을 느끼게 한다. 찬하 때문인지 모른다. 명희는 유인실이 잡혀갔다는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제 짐작에도 형수님 제자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

"그 여성 때문에 한 번 곤욕을 겪은 일이 있었지요."

"인실이한테 말입니까?"

"아닙니다. 아직은 그 여성을 만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너무 당당하여, 그 여성이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더없이 못난 남자로 격하된 일이 있었지요."

하는데 무척 유쾌해하는 표정이다.

"당당하게 신념을 가지고 사는 아이라는 점에선 틀림이 없지만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군요."

일본인과 어쩌고저쩌고 하는 그 불미스런 풍문이 아닌 것에 마음을 놓았으나 명희는 어리둥절했다.

"친구라 하기엔 아직, 일본인의 사위가 된 덕분이지요. 자연 그들과의 교제 범위가 넓어지는데 그런 경로로 알게 된 사람입니다. 오가다 지로, 계명회사건 때 유일한 일본인 바로 그 사람의 얘긴데요."

'역시 그 일이구나.'

"어느 날, 그 사람하고 같이 술을 마신 일이 있었지요. 계명회사건도 그렇지만 관동 대지진 때 그는 많은 조선인 학생들을 보호했습니다. 팔은 안으로 굽더라고, 물론 인품에서 호감을 갖긴 했었지만, 어리석다 할 만큼 선량하고 순진한 위인이지요. 간혹 일본 사람 중에 그런 타입을 보는데 투명하다 할까요? 그렇게 투명한 느낌의 조선 사람은 좀처럼 없는 것 같더군요. 한마디로 로맨티스트, 그날 오가다는 술을 많이 마셨고 몹시 주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히토미, 히토미하고 자꾸 부르는 거 아니겠어요? 저도 술에 취했고 해서 히토미가 당신의 애인이냐, 물어 보았습니다 아니다, 동지다, 하더군요. 그러나 다시, 내게는 애인이지만 그 여자에게 있어서 반은 원수반은 동지, 내 천지는 그러하다, 아무리 열렬히 구애를 해도 내가 일본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거들떠보지 않는 지독한 여자다. 그러면 일본 여자가 아니냐? 하고 물었더니 바로 너의 동족이다, 하면서 히토미라는 이름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겁니다. 본명은 유인실, 인실을 한자음 일본말로 무르면 닌지쓰지요. 닌지쓰라 하면 요술 혹은 도술, 그러니 기분 나쁘다는 거지요. 일본음으로 부르면 히토미라 자기 혼자 그렇게 부른다는 겁니다."

"글자는 다르지만 일본 여자 이름에 히토미가 있지요."

". 그렇지요. 그런데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너는 뭐냐, 조선의 여자는 지조를 지키는데 사내자식 네 꼴은 뭐냐, 하며 공격을 시작하는 겁니다. 할 말 없지요.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요. 조선의 여자 히토미는 목숨을 건 내 구애도 원수의 동족이라 하여 거절하였다, 그는 철두철미 조선의 여자이며 독립 운동에 몸 바쳤고 사회주의 운동에 앞장서서 옥고까지 치렀다, 그것이 그 여자 진실의 모든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인하고 그렇고 그렇다는 그거 없는 풍문 때문에 능멸을 당해야 했으며 그 좋은 학벌을 가지고도 발붙일 곳이 없어 어두컴컴한 뒷골목의 야학 선생이 되었다, 한데 조선의 사내 너는 어떠냐, 일본 여자하고 결혼한 너는 서울에 가면 여전히 명문의 자제, 귀족의 칭호가 빛나는 귀공자로 행세할 거 아닌가, 어째서 그러냐, 나는 코스모폴리탄이다, 국가나 민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만을 인정한다, 이상주의라 비웃겠지만 세계가 하나고 되지 않는 한 약육강식의 비극은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는 내 친구들이 있고 히토미는 내 꿈이었다, 해서 나는 조선을 사랑했다, 그런 순수한 마음에 대하여 그들은 나의 가장 순수한 것을 개천에 던져 쓰레기로 만들었다, 아름다운 부분, 내게도 그랬지만 그들 자신에게 있어서도 가장 귀한 보석을 타락녀로 만들어 희롱하고 능멸했으며 매도했다. 한데 너는 어찌하여 반역자의 낙인도 아니 찍히고 세상에서 우러러 받드는 귀하신 존재냐 그 말이다, 구차스럽게 연명하는 뭐 왕족 나부랑이와 동렬이냐? 하며 마구 들이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지요. 인실이라는 여성에 관한 것은 너무나 큰 기대 희망 때문에 조그마한 구김살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감정의 작용이며 나에 대한 것은 일종의 기만, 조롱의 변형이다. 그 친구, 술상을 치면서 희망이 어찌 그리 참혹하냐, 희망은 그렇게 가학적인 건가, 그것은 일종의 민족적 사디즘이다, 하며 소리 내어 울지 않겠습니까. 전 놀랬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더군요."

숨이 막히는지 명희는 입을 열지 않았다. 찬하도 말을 끊은 채 차창 밖을 내다본다. 그의 귓가에서는 그때 오가다가 외치던 소기가 계속 울리고 있었다.

'그건 희망이 아니야! 희망일 수도 없어! 절망이 어떤 형태로 탈바꿈하여 다가올 것인가, 그것을 노려보는 눈초리에 불과한 거다! 심술궂은 눈초리 비겁한 체념의 눈초리, 그로테스크하고 편협하고 참혹한 것은 그 탓이다. 인간의 영혼 속에 잠겨 있는 신성한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리얼리스트, 나는 그것이 슬프다. 당신네 민족성을 비난한다고 대일본 군국주의를 비호하고 정당화한다, 그렇게는 생각지 마시오. 어느 곳에 머리를 처박아도 그런 일에 부딪히면 나는 똑같이 비명을 지르고 가슴을 치며 울 것이오. 인간의 치부를 차마 볼 수 없기 때문에, 식민지 백성을 무수히 학살한 일본의 만행을 분노 없이 생각 못하는 그것 이상으로 민중을 사랑하고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한 여성의 정신과 순결을 살해하는 더러운 군중 심리를 나는 증오하오!'

찬하는 불빛이 명멸하는 밖을 바라본다. 그때 오가다에게 응수하지 못했던 말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당신의 분노 당신의 비명 당신의 실망이 아직은 삼나무 같이 곧고 가을 하늘같이 청량하며 죽순의 가장 연한 부분간이 순수하오. 왜 그런지 아시오? 물론 당신의 천성이 큰 몫을 하고는 있어요. 허나 일시에 피고 일시에 지는 벚나무를 숭상하는 국민성 운운한다면 진보적인 지식인이나 당신 같은 코스모폴리탄이 어떻게 받아들일는지 모르겠소. 나는 일시에 피고 일시에 지는 벚나무, 그 당신네들 국민성에서 세푸쿠(배 가르는 것)를 연상하곤 한답니다. 그런데 배를 가를 때 솟구치는 피는 왕왕 피가 아닌 물일 것이란 착각을 하게 되더군. 의병자의 목을 쳤을 때 흐르는 그 끈적한 피를 당신들 벚꽃이나 하라키리(배 가르는 것)에서 느낄 수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한일합병 당시 많은 사람들이 자결하였소. 특히 늙은 유생들은 목매어 죽고 절식해 죽고 당신들이 볼 적에 결코 아름다운 죽음은 아닐 것이오. 그러나 그것에는, , 죽음의 참뜻이 있다고 나는 보는 거요. 죽음이란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고통스러운 것, 끔찍하고 추악한 것, 당신은 영혼 속의 신성한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리얼리스트라는 말을 했었소. 그러나 재차 말하거니와 죽음은 꽃이 아니며 아름다운 것도 아니며 바로 현실, 주어진 현실을 넘어가는 일이오. 출전하는 남편의 투구에다 향을 사른다든가 여자도 순절하는 데 유방을 찌르는 그 형식이라든가 조그마한 명분 때문에도 배에 칼날을 세우는 당신네 민족의 관습은 바로 벚꽃의 낙화를 선망한 결과 아니겠소? 죽음의 고통 죽음의 추악함, 코 막고 눈 감는, 그리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착각으로 공포감을 추방하는 거요. 그렇지요. 당신네 군국주의는 로맨티스므로 무장돼 있소. 로맨티스므는 허윕니다. 당신의 천황이 현인신인 것처럼. .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던가? 아마 당신의 곧고 청랑하고 순수한 것은 당신 천성이겠으나 그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를 하려 했지, 국민성과 현실의 문제지요. 모든 생물이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그것은 또 개인의 사고나 단정 같은 것하고 전혀 별개의 것인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우리가 타민족으로서, 우리 나름의 편견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당신의 그 순수함을 여우로 보는데, 여유로 보는 이유는 현실에 있소. 타민족을 정벌하고 지배하는 민족적 자부심이 당신의 배경이라는 현실 말입니다. 부정하겠지요. 세상 물정 모르게 자란 명문의 자식 혹의 부호의 자식들이 이상적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은 흔히 보는 일이며 길가에 내굴려진 돌멩이같이 자란 사람이 권력의 칼을 눈부신 황금을 갈망하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요. 이런 비유가 내 동족을 위해선 타당하다 할 수는 없으나 그러나 오늘 현실에 있어서 조선 민족은 돌산에 뿌려진 씨앗 하나, 이리 구부러지고 저리 비틀어지고 옹이투성이로 자란 소나무와도 같아서 곧을 수 없소. 하늘을 항상 먹구름이며 겨울바람에 터져나간 나무껍질처럼 순수할 수가 없소. 만일 일본의 현실이 오늘 우리와 같은 것이라면 오가다 씨 당신의 순수함도 상당한 면형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요? 지금 조선 이 땅에는 어설픈 자책감과 죄의식과 날로 잠식해오는 소리를 들으며, 인간 존엄의 자리엔 의자가 하나, , 그래서 눈 멀고 귀먹은 늙은이로 행세하는 무리가 있고 도금이 시시각각 벗겨져나가니까 에에라 모르겠다! 짐승이 이빨을 드러내어 으르렁거리듯 속물 근성을 유감 없이 드러내어 미치광이 모양으로 웃고 화를 내고 과시벽을 휘두르는 광대의 무리, 이 두 개의 우형은 대체로 민족 반역자 친일파의 낙인이 찍힌 부류로서 상부층을 구성하고 있소,. 이들은 스스로 비웃거나 민중이 비웃어주는, 말하자면 안일에 썩어가는 산송장들이오. 다음은 두 가지 얼굴을 가진 중간층입니다. 올려다보기도 하고 내려다보기도 하면서 열심히 자기 합리화를 꾀하는 이기주의자들이오. 한 편을 향해선 민족의 각성을 부르짖고 다른 한 편을 향해선 민족의 각성을 부르짖고 다른 한 편을 향해선 물량을 따져 행복의 자와 저울을 휘두르며 민중을 설득하려는 냉랭한 현실주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아병적인 것을 동반한, 그네들은 식자층이오. 전자나 후자는 모두 소수파며 한결같은 선택 의식의 소유자들이오. 어쩌면 후자 쪽이 더 강할지 모르겠군요. 소위 신흥 세력, 나라는 없어도 역사의 물결은 공평한 모양이오. 나머지의 전부, 조선 민족의 전부라 하여도 과언은 아닌 성싶소. 그들이야말로 조선 토종들이니가요. 민중들, 이들만은 생동하고 있소. 어떻게 행동해 있는가, 어떻게. 가난과 공포의 생동이오. 아시겠소? 가난과 공포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세요?"

","

"다 왔어요. 내리셔야지요."

대문이 활짝 열려져 있었다. 낯익은 청지기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달려 나왔다. 찬하는 집으로 돌아온 감회, 좋든 싫든 간에 그런 감정에 젖기에는 너무 먼 곳에 있었다. 근자에 와서 그는 한 가지 문제에 부딪치면 끝없이 끝없이 생각을 연결해나가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그는 그 생각의 연결 속에 서 있었던 것이다.

명희와 함께 들어오는 찬하를 보았을 때 용하의 얼굴은 순간 경직되었다. 자신이 돌아오기 전에 집에 와 있어야 할 명희가 늦게 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어 용하는 잔뜩 기분이 나빠 있었던 참이었다. 찬하를 만나 함께 오게 된 명희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러나 용하는 갑자기 얼굴 가득히 미소를 띠었다.

"늦게나마 잘 왔다. 내일 별장에 가면 아버님 어머님이 기뻐하실 게야. 그래 역에서 곧장 왔다면 저녁 전이겠구나."

"."

"당신, 아랫것들한테 저녁 준비하게 하고 잠자리도 돌보게 하시오.“

다른 때보다 자상했다. 명희는 동티의 징조라 생각했으나 그것을 기다리는 것 같은 이상한 기대에 찬 자신을 깨닫는다. 형제는 마주보고 앉는다.

"사업은 잘 되나요."

담배를 붙여 물며 찬하가 물었다.

"아직은 괜찮다. 네가 돌아와서 날 도와주었으며 좋겠다만."

"제가 와서 뭘 합니까. 아는 게 있어야지요."

"회사에 관여하기 싫다면 하다못해 학교에라도 나가야지. 학벌 좋고 성적도 우수했는데 일본서 허송세월한다는 것은 아까워."

"허송세월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전문학교 교수쯤, 집안 체면도 생각해야, 그것은 나보다 부모님의 절실한 소망이시다."

용하도 물론 대학은 나왔다. 학문에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명문 사립대학 경제과를 졸업했는데 성적도 상위에 속했다. 찬하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학부를 졸업한 뒤에도 그는 계속 학교에 머물러 있었다.

"본시부터 불효했으니, 불효자식은 지척에 두느니 멀리 있는 편이, 안 그렇습니까 형님."

"누구는 효도 하냐?"

"그보다 여기 형편은 어떻습니까?"

"형편이라면 집안 얘기는 아닐 테고, 시끄럽지. 술렁술렁한다. 학생 운동이 노동 운동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있지. 그렇게 되면 우리한테도 불꽃이 튄다."

"정말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요?"

"농후해. 학생 조직의 배후에는 공산당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야."

"신간회지요. 그들은 민족주의 진영입니다."

"표면상, 좌우 합작이지만 내용은 공산당이다."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너는 실정을 모른다. 학생들 손에서 나오는 격문이나 전단의 내용이 어떤 건지 모를 게야. 바로 공산주의 혁명의 선포다."

"일본과 대항하여 싸워나가자면 전술과 전략은 필요한 거 아닐까요? 싸움에 있어서 격렬한 것은 당연하구요. 저나 형님은 다 같이 묘한 위치에 서 있는 것은 사실인데, 자본가의 입장에서 일본 여자의 남편이라는 입장에서 판단해서도 안 될 것 같습니다."

"내가 밑바닥에서 돈 벌어 올라온 사람이냐?"

조용하는 쓰다는 듯 입맛을 다신다. 그러나 이내 그의 눈은 빛났다.

"그보다 내일은... ,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안 되겠고, 나도 너랑 별장에 가서 문안을 드려야하는데 어쩐다? 할 수 없지. 나대신 형수하고 함께 가보도록."

찬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저녁을 끝내고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찬하는 몸채로 건너왔다. 잠자리가 마련돼 있었다. 온돌방은 따끈따끈했다. 잠옷으로 갈아입은 찬하는 불은 켜둔 채 자리에 든다.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형은 제수인 노리코에 대하여 한마디 말이 없었고 자신도 노리코 임신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만주를 여행했던 일도, 솔직히 말해서 찬하는 형과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심각해서 토론 같은 것을 할 때도 용하는 진지한 적이 없었다. 한번도, 단 한 번도 대화에 열중하는 형을 본 적이 없었다. 열중하는 상대를 맥 빠지게 하고 쑥스럽게 하고 주책바가지로 만드는, 그것은 용하의 장기였다. 찬하는 몸을 돌려 배를 깔면서 담뱃갑을 집는다.

'음산한 얼굴이었다.'

담배 한 가치를 물고 성냥을 그어대며 재떨이를 끌어당긴다. 음산한 형의 얼굴 대신 생기가 돌아온 것 같은 명희의 얼굴이 떠오른다. 무심하게 쳐다보던 눈도, 역 구내 식당에서는 괴이했을 정도로 명희는 이상했었다. 찬하는 배를 깐 하인을 불러 커피를 끓여다 달라 하고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를 쳐다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신도 알 수 없는 시간이 흘렀다. 재떨이의 담배꽁초는 세 개가 되었다. 찬모가 커피를 가져왔다. 어릴 적부터 보아온 찬모는 찬하에게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안녕히 주무시라는 말을 남기고 나간다. 뜨거운 커피, 자기 입맛을 알고 알맞게 끓여온 커피를 혀끝으로 맛보며 찬하는 뒤늦게 어머니 같은 정을 찬모에게 느낀다.

'잠은 안 오고... 결론을 짓지 못한 일이 있었지.'

명희 둘레에서 현의 둘레에서 생각을 빼내야 한다고 찬하는 생각한 것이다.

'오가다 지로, 유인실...'

두 사람의 로맨스에 흥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얘기를 들었을 당시에는 상당히 감동적인 일이었지만 오늘 밤 생각의 연결을 지어나갈 주제는 별개의 것이다. 자동차 속에서 우연히 명희하고 얘기를 하다가 붙잡은 무제, 조선인과 일본인의 현실, 조선인과 일본인의 민족성, 생각은 미진했다. 미진하지 않았더라도 반추하고 싶은 문제였다.

'민족적 자해 의식, 약자는 왕왕이 자해적 충동에 빠진다... 다른 경우면 몰라도 일본, 일본인이라는 대상 때문에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가 자해 의식에 빠져 있다 할 수는 없을까. 남자인 경우와 여자인 경우, 물론 고래로부터 여자에게만 강요해온 정조 관념 때문일 것이겠지만 남자는 여자를 데려오고 여자는 떠난다는... 떠난다는 배신감은 없었을까? 또 한 가지 그들은 유인실이라는 여자의 결백을 안 믿으려 했을까? 일본에 대한 증오감, 약자의 강자에 대한 증오감은 왕왕이 자해로도 나타나는 법이다. 시어머니에 대한 증오감은 소중한 제 자식을 때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과는 다소 성질이 다르겠지만... 상상만으로도 증오심이 솟구치고 모멸감이 솟구치고, 오가다 당신이 말하는 보석 같은 여자를 창부로까지 아니 그이사의 괴물로까지, 당신은 정신의 살해, 민족적 사디즘이라 했소. 살해지요. 민족적 사디즘,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신문 귀퉁이에 난 대수롭잖은 구절이 눈덩이같이 불어나서, 왜 불어났는가 왜 그 여자는 죄 없이 창끝에 올려졌는가, 다수의 폭력이지요. 죄악이지요. 그러나 다수의 분노 증오가 그것도 자해 행위 같은 것으로 나타난 조선의 민중 심리를 정복자인 당신네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오. 어디든 터져야 하니까요. 터지지 못하면 자해라도 해야 하니까. 당신은 대일본의 군국주의를 합리화하여 말하는 것은 아니라 했듯이 나도 개인의 희생을 타당하다 할 생각은 없고 다수의 횡포를 두호할 마음도 아니오. 당신이나 나나 모든 사람, 인간이 생존해나가는 한에 있어서 소수의 희생은 끝이 없을 것이며 다수의 생존 또한 파괴할 수 없는 부조리를 동반하고 있다는 것... , 개인만 그러한가요? 성질도 형태도 다르지만 조선, 조선 민족도 세계라는 다수에 의해 희생이 된 나라, 민족이오. 유인성이란 여성은 투쟁하겠지요. 생존해 있는 한 어떤 형태로든, 조선 민족도 어떤 형태로든 생존하는 한 투쟁하겠지요.'

찬하는 빈 커피잔을 밀어놓고 담배도 눌러 끄고 전등도 끄고 자리에 든다. 장지문에 달빛이 들이친다. 흔들이는 나뭇가지의 그림자, 조용하다. 참 조용하다. 찬하는 사지를 뻗는다. 관절마다 해체되는 것 같은 피곤이 몰려온다. 그러나 여전히 잠은 올 것 같지가 않다.

'리얼리스트... 오가다씨, 당신은 지극히 부정적이며 혐오감으로 그 말을 했소. 조선 사람들은 리얼리스트요. 틀림없지. 나는 당신을 로맨티스트라 했지요? 뿐인가요? 당신네 군국주의는 로맨티스트로 무장된다 했었지요' 나는 그것은 수정해야겠소.'

찬하는 플랫폼에서 기차를 타듯 생각의 여행을 시작하다. 겨울밤은 기니까, 전등을 켜고 가방 속에 든 책자를 꺼내는 일도 번거로웠고. '일본인들 중에는 당신같은 로맨티스트가 더러 있지요. 그것은 벚꽃 같은 게 아니고 산간의 흰 백합 같은 것이오. 선량하고 깨끗하고 미적 감각이 예민하고, 그런 일본인을 만날 때는 참 기분이 좋소. 오히려 우리 동족에게보다 신뢰감이 생기지요. 내 처도 그런 부류의 여잡니다. 그런 소수를 제외하면 일본 민족의 긍정적인 면은 감상이오. 따라서 일본 군국자의는 센티멘털리즘으로 무장된다, 그래야만 옳을 성싶소. 당신은 센티멘털이 호도에 지나지 않는 감정이라는 것을 부인 못할 겁니다. 현인신의 사상이 그렇고 벚꽃이 그렇고 조그마한 명분 때문에 배를 가르는 무사, 천황 폐하 만세를 부르며 쓰러지는 병사, 당신은 그 기만에 구역질을 느끼지 않소? 그런 등등의 일을 미담으로 꾸며서 감상이라는 설탕을 발라서 당신네 일본인은 그것을 받아먹고 자랐다는 생각을 해보았소? 당신네 역사에 있어서 가장 정신이 빛났다고 내가 생각한 것은 천주교 교도들의 저 유명한 나가사끼의 순교요. 적어도 그것은 진리에 접근하려는 의지였으니까요. 자아, 그러면 일본 민족의 민족서이 떠오를 것이요. 창조적 능력이 희박하다... 창조의 능력, 창조는 진실에의 접근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상은 그 어떤 것도 창조해낼 수 없고 당신들 가난한 문화를 떠받친 것은 소수의 로맨티스트, 그러나 창조에 있어서 그것도 차원은 낮지요. 당신은 씹어뱉듯 리얼리스트라 했소. , 그러하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 중에서 불교 하나를 들어봅시다. 기라성 같은 고승을, 찬란한 불교문화, 자금도 그 잔해는 해변의 조개껍질만큼이나 도처에 굴러 있소. 당신네 나라는? 니치렌? 구가? 중으론 그렇게 밖에 손을 꼽을 수 없는데 그들은 뭘 했나요. 경전을 얻어왔고 국난 내습을 외쳤을 뿐. , 내가 흥분을 하는군. 돌아갑시다. 창조적 능력이, 능력이 희박하다 했지요. 그것은 개개인이 약하다, 더 심하게 말하자면 인자가 엉성하다 할 수도 있을 게요. 자연의 원리는 약하면 모이게 되는 거요. 생존의 본능이지요. 저 초원의 얼룩말이나 암벽을 타는 산양을 예로 들 수 있을 게요. 자연의 원리는 약하면 모이게 되는 거요. 생존의 본능이지요. 저 초원의 얼룩말이나 암벽을 타는 상양을 예로 들 수 있을 게요. 그러나 그 짐승들은 스스로를 지키는 지혜로 그쳤으나 인간은 모여서 힘을 가지면 약육강식의 맹수로 변하지요. 개개인은 양일지라도 전체는 맹수로 변하는 거요. 감상이나 낭만은 쉽게 전체의 합리주의 공리 주의로 변신한다, 나는 긍정하고 믿소. 그것은 진실에 접근하고자 하는 의지요 방법이니까요. 신비, 생명에 접근하고자 하는 의지, 그러니까 본시는 신비주의요. 현실적인 민족적 기질 속에서 불교의 진리를 가장 깊이 파고 내려간 연유가 바로 그거지요. 신비와 생명에의 탐구는 어떠한 형식이든 창조요. 궁극적으론 창조란 말입니다. 당신들이 조선에 상륙하여 한 말 중에 무지몽매하여 미신이 횡행하는 나라, 무지몽매하다는 말은 사양해야겠고, 미신이 횡행하는 것만은 틀림이 없소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미신도 하나의 창조이며 창조의 의지라 할 수 있지요. 그것을 긍정한다 하지는 마시오. 나는 지금 조선 민족의 저루를 더듬어보는 것뿐이니까요. , 조선 민족은 창조적 활성에 넘치는, 그러니까 개개인이 강한 개성을 지닌 민족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소. 당신들이 항용 말하는 민족적 분열, 분열의 요인이 열성에 있었던 거는 아니다, 그 말도 꼭 해야겠소. 문제를 뒤집어봅시다. 당신네들은 단결을 성취하였소. 배부른 돼지가 되었지요. 저 산간에도 하늘 보고 구름 보며 당신네들이 무지몽매하다는 바로 그 백성이 당신네들이 환장하고 미치는 천하 명품 다완을 만들었으니 표표한 영혼을 살찐 돼지가 비웃더라... 당신들은 당신네 문화의 대표적 정신을 사비와 와비로 농축해 말하는데, 쓸쓸하고 적막하고 그렇게만 처리해버린다면 안타깝겠지요. 와가나 하이쿠의 풀어나갈 수 없는 피안의 세계 사이교나 잇사를 들고 나오겠지요 나도 실은 사이교를 무척 좋아하지요. 맑은 줄기의 봉우리, 그러나 당신들은 리얼리즘에 접근한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모노가타리를 매우 귀한 것으로 모셔놓기는 하나, 일연의삼국유사의 세계에는 아득히 미치지 못하오. 인간과 자연과 신비, 우주적인 것이 혼연일체가 된 높고 아름다움에 비하면겐지모노가타리는 인간 잡사, 인간 정사의 나열이며, 귀신도 칙칙하고 밑바닥에서의 맑음이 없어요. 그는 그렇고, 대부분의 일본인은 다카야마 죠규를 열광하지요. 그는 정석대로 감상파에서 국가지상주의 즉 일본주의자로 변모해가지 않았습니까? 즉 배부른 돼지의 대변자가 되었다는 얘기지요. 와비나 사비 그런 추상적인 것을 조선에서는 풍류라고나 할까요? 그것은 상식이지요. 어떤 교양하고도 통할 거요. 표피지요. 물론 조선에 있어서 한이라는 것도 추상적 표현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와비나 사비가 사라져가는 것이라면 한은 오는 것이요, 절실한 기원이오. 당신네들의 피를 물처럼 착각하는 것은 와비와 사비의 정신 세계 때문일까? 끈적끈적한 피, 그것이 한이오. 진실만이 창조를 가능케 하고 진실에의 의지만이 창조력이 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개체로서, , 개체로서... 벚꽃은 거짓이오. 죽음은 아름답고 깨끗한 것은 아니오. 죽음을 고통 없는 아름다운 것으로 길들여온 당신네 야마토 다마시는 거짓이오. 약자의 엄폐술이며... 허위는, 껍데기는, 허위와 껍데기의 집단은 행할 것이 없고, 기계의 비정도 가능하고, 피가 물이라면 심장을 갈아 제끼는데... 모두 용감하오. 성실하게 용감하오.'

찬하는 잠의 수렁 속으로 차츰 빠져 들어간다.

 

 

10장 이혼 동의서

"이것은 제 생각인데,"

"무슨 말을 하려고 또 그러우."

임명빈은 아내 백씨가 꺼내려는 말을 가로막듯 화를 낸다.

"얘기를 들어보지도 않으시고서."

"들으나마나,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갈잎을 먹으면 죽는다는 그 얘기지 뭐겠소."

","

"조선 사람은 조그마한 일을 경영하려 해도 꼭 그 말이 나와야 하거던, 그러니까 발전도 없고 남의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는 게요. 아 글쎄 군함 만드는 공장을 세우자는 것도 아니겠고 기와 공장 하나 만들려 하는데 어찌 그리 말들이 많은고. 실패해도 임자 굶기지는 않을 테니 제발 걱정 말라구."

"그게 아니래두요. 공연히 격해서 그러시네요."

"제가 말을 잘못 꺼냈나 봐요."

"허 참, 하던 짓도 멍석 깔아놓으면 안 한다더니 대체 무슨 얘기요?"

임명빈은 요즘 늘 신경이 곤두서서 곧잘 식구들에게 짜증을 내게 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어세를 누그러뜨린다. 백씨는 어색하게 웃으며

"진주 최참판댁에서 기르는 여자아이 말예요."

"여자아이?"

"왜 고모가 한 번 말한 적이 있었지요. 기억 안 나십니까?"

"그래서?"

"제가 보기에 고모는 그 아이를 원한 것 같아서요. 그것도 아주 간절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이제는 아이를 가질 희망도 없지 않습니까?"

"..."

"이번에 최참판댁 마님이 오셨을 때 차마 말은 건네보지 못했지만 친자식이 아닌 것은 다 마찬가지, 안 그렇습니까?"

"아일 얻어보려면 뭐 그 아이 아니라도, 그보다 명희 의향대로 할 일이 아니지 않소. 정 아일 못 보게 된다면 문중에서 양자를 데려올 거고 그 일은 그 집에서 알아 할 일, 임자가 걱정할 일은 아닌 게요.“

"양자의 경우라면 의당 그렇지요. 하지만 계집아이니까 무료한 생활에 화초처럼,"

"허허허 이 사람이, 조씨 집안에서 걱정할 필요도 이유도 없질 않소."

"하지만 고몰 생각해서,"

"그도 그렇지. 내쳐서 나오면 내 식구로 받겠으나 있는 한 우린 객인이오. 쓸데없는 짓 하지 마오."

딱 잘라버린다. 달리 할말이 있는 눈치였으나 백씨도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이놈의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는지..."

"왜 또 그러셔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무슨 일이 있기는, 울화가 치밀어 하는 말이지요."

", 오늘 거기 가셔야지요."

"황태수 집 말이오?"

". 혹 잊으셨나 싶어서."

"내가 거긴 뭐하러 가겠소."

"그래도 사람까지 보내서,"

"임자도 옛날 같지 않구려. 황태수가 부자면 부자지 임자까지 덩달아 황송해할 것 없지 않소."

"..."

"기와 공장을 차린다니까 가서 구걸이라도 좀 하라 그 얘기요?"

"설마."

"이제는 그 사람 내 친구 아니오."

말 끝에 가서 울먹이는 것 같았다. 영문을 모른 채 백씨는 침묵할밖에 없다.

"아버지, 고모님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뜰에서 막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씨가 방문을 열고 내다본다.

"사람이라니?"

"운전수가 왔어요."

"들어오라 하지."

머뭇머뭇하듯 운전수가 뜰로 들려왔다.

"무슨 일로 왔나?""

임명빈이 묻는다.

"저기, 교장 선생님을 모시고 오라 하셔서 왔습니다."

", 교장 아니야."

", 저어,"

"무슨 일로 오라 하더냐."

"일요일이고 해서 점심을 함께 드시자고, 그렇게 여쭈라 하셨습니다."

"그래? 오늘이 일요일인가?"

명빈은 잠시 생각한다. 가지 않으면 황태수가 또 사람을 보냈을지 모를 일이었다. 집에 앉아서 거절하느니 집을 비우는 편이 낫겠다 작정한 명빈은

"지금 당장 가자는 겐가?"

".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럼 잠시 기다리게."

두루마기 입은 모습으로 모자를 든 명빈이 나왔다.

"가세."

자동차에 오른 명빈은 눈을 감는다.

'의돈이 집은 내가 책임진다! 어느 놈한테도 구걸 안 해.'

황태수에 대한 분노가 치민다. 실상 명빈은 자신의 큰 노여움이 부당하다는 것을 안다. 알면서도 견딜 수 없고 외로웠다. 구정을 앞둔 지난 연말, 선우일이 명빈을 찾아왔었다. 황태수 심부름으로 서의돈의 집을 다녀오는 길이라 했다. 명빈은 세모에 필요한 비용을 가져왔나 보다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것은 아니었고 사과 한 궤짝을 보낸 것이며, 그것만도 서운했는데 선우일의 말이,

"부자도 편치는 않아요. 명절이 오면 그야말로 가랭이가 찢어질 지경. 황태수 형도 명절이 없었음 좋겠다 그러더군요. 짜증이 나나 부지요.“

그 말이 왜 그렇게 고깝게 들렸는지, 집안에서부터 사업 관계, 관공서, 친분의 범위도 넓었고 세모가 되면 황태수의 머리가 어수선해지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으며 원만한 그의 성격으로 보아서 짜증이라기보다 지친 상태의 독백임을 명빈이 짐작 못하는 바 아니다. 그리고 또 서의돈 감옥으로 들어간 뒤 황태수는 계속 생활비를 보조해왔었다. 그런 만큼 선우일이 흘린 말 몇 마리를 가슴에 듣는 것은 용렬한 짓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명빈은 사과 한 궤짝은 고사하고 신 술 한 병 들고 서참봉댁을 찾는 사람이 없다는 데 서글픔을 느꼈고 화가 났었는지 모른다. 앞뒷집이나 실정은 환했다.

'나쁜 놈들, 의돈이가 살아 있으니 그나마, 죽어 없어졌다면 사과 궤짝이나 있을까?'

억진 줄 알면서 또 다시 괘씸한 생각이 드는데 한편 만날 걸 그랬다. 후회스런 마음도 스치고 간다.

'아니다. 이럴 때는 시간이 필요한 게야.'

자동차가 멎고 명빈은 차에서 내렸다. 오래간만에 와보는 집이었다. 청지기가 안내해주는 대로 별관으로 들어갔을 때 용하 내외와 찬하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래간만이군요."

명빈의 말에 찬하도 얼른 일어서며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정중히 절을 했다. 용하는 양주병 꺼내는 것을 본 명희는 유리잔 세 개를 탁자 위에 놓는데 행동이 민첩했다. 친정 식구를 대하는 거북스러움 때문에 명희는 그럴 때면 슬퍼진다. 그러나 오늘의 민첩한 행동은 타성이다. 슬프다는 생각이 없었다. 용하는 명빈에게 술을 권했다.

"그래 기와 공장은 잘 돼나갑니까?"

"봄이 돼봐야 알지. 기와를 만드는 단계까지 안 가 있으니까."

이런저런 얘기가 오갔으나 용하는 사표 문제, 학교에 관한 문제에는 일체 언급이 없었다. 인사 치레로도 기와 공장 그만두고 학교로 돌아오라는 말 한 마디쯤 있음직도 한데.

"언제 오셨습니까?"

명빈이 찬하를 보고 물었다.

"며칠 됐습니다."

"요즘, 일본 형편은 어떤지요."

"글쎄올시다. 그 속에 있으면 둔해지나 부지요. 오히려 조선이 더 뚜렷해지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찬하는 웃었다.

"소위 그게 감상적 애국심이라는 게야."

용하는 찬하를 빗대어 말했지만 명빈을 빗대어 한 말이기도 했다.

"그럼 말씀들 하세요."

명희가 일어섰다.

"당신 어디 가는 거요?"

"점심 준비 돌봐야지요."

"언제 당신이 그런 일 했나? 선수들이 있으니까 여기 있어요."

"아니오."

뭔가 고집스러움을 나타내며 명희는 나가버린다. 머쓱해질 줄 알았는데 그러나 용하 얼굴에는 재미나다는 듯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이름이 좋지 나 같은 사람이야 일본 유학 운운하지만 중으로 치면 땡땡이 중인데 젊은 사돈께서는 어떻습니까? 귀국하여 교편을 잡으셔야지요."

멸시 같은 웃음을 흘리면서도 용하는 동조했다.

"아닌 게 아니라 수차 그런 권고를 했는데 마이동풍이니 딱하지요."

"학벌만 가지고 되는 일은 아닐 겁니다. 제 생각에는 역관을 할까, 중국에나 가서 왜놈 앞잡이,"

하다가 찬하는

"임선생님, 죄송합니다."

사과를 한다.

"아니오. 자고로 역관이란 말 못하는 사람의 앞잡이 아니겠소? 하하하..."

"하기는 일어 역관이던 임교장보담은 영어 역관이 네가 훨씬 유능하고 멋도 있겠지. 따지고 보면 훈장이란 고리타분한 직업이니까."

형님이나 처남이라는 말 대신 임교장 하고 호칭한 것도 이상했고 훈장이란 고리타분하다는 말 며 곱절로 명빈을 친 격이다.

"역관이나 훈장이나 다 내 적성은 아니었고, 만년 문청이라 해야 할까?“

점잖게 명빈은 물리친다. 찬하가 맞장구치듯

"문청, 이거 임선생님하고 저하고 통하겠습니다. 아직 머리가 새까만 처지에 건방지다고 나무라시겠습니까?"

"천만에."

팔을 저었다. 명빈의 얼굴에는 생기 같은 것이 나타났다. 그는 찬하와 의기상통하는 것을 느낀 것이다. 자동차를 타고 오면서 내내 외로워했던 그였기에 더욱더, 매달리는 기분이기도 했을 것이다.

"예술에는 국경도 연령의 차이도 없는 법이오. 상투적이지만, 허참 훈장질 몇 해가 사람을 아주 속물로 만들었구려. 하하핫... 실은 문청이란 부질없는 얘기고, 나이가 젊다면 좋은 잡지 하나 만들어보겠다는 꿈은 버리지 않았을 것이지만,"

"나이보다 현실에 문제가 더 있는 거 아닐까요."

"그렇지요."

"내가 출자 좀 할까요? 위로도 겸해서."

용하는 묘한 말을 했다.

"청조사 권오송이 같으면 모를까, 나같이 심장 약한 위인이 매부 돈을 어떻게 쓰겠소."

"아닌 게 아니라 적성에 안 맞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교장직을 그만두시더니 여간 재기발랄해지신 게 아니구먼."

용하가 비꼬았다.

"아암 그렇구말구. 밥도 쓰고 단 밥이 있으니까. , 그보다 젊은 사돈, 일본 문단에서는 아직도 나쓰메가 왕입니까?"

하고 찬하에게 시선을 돌린다.

"왕이 아니라 아직은 황제지요."

"죽은 지 십여 년이 넘는데...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나쓰메가 왜 왕인지 모르겠더군요. 어렵게 이리저리 꼬아 쓰기 때문인가?"

"만년의 작품은 그렇지도 않지요. 그러나 흐르는 일관성, 그것은 그 사람의 체질인지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칙천거사, 그 사상에 이르기까지 길이 그렇게 험난해야 했는지, 모처럼 만났으니 조학사 의견 좀 들어봅시다."

학사라는 말에 용하는 픽 웃었지만 찬하는 학사라는 말보다 얘기의 내용 자체, 그것에 놀란 것 같다.

"임선생님께서 말씀 다 하셨는데 제가 뭘 덧붙이겠습니까."

"봉사 코끼리 만지는 격이지요."

"저도 임선생님 의견과 가습니다. 톨스토이하고 엇비슷한 점도 있구요. 나쓰메는 스웨덴의 작가 스트린드베리의 영향을, 영향 정도가 아니지요. 아주 농후해요. 톨스토이는 천진하다 할까요? 그의 인도주의는 전체를 포용했고 나쓰메는 깐깐하고 칙천거사의 사상은 개인에 머문 것 같더군요. 임선생님 말씀대로 왜 그렇게 험난해야 했는지 동감입니다. 그의 작품 세계에서 일관된 추구는 에고이즘입니다. 에고이즘의 가시덤불을 낫 들고 들어가서 간신히 빠져나온 길이 칙천거사 아닙니까?"

"맞아요, 맞아. 나 같은 다혈질에는 못 견디겠는 게 있더라구."

옛날 말투가 불거져 나온다.

"모리 오가이는 에고이즘 같은 것 곁눈으로 보면서 다카세부네 아베 일족에 이르렀으니, 그는 인류나 개인의 구제 같은 것 드러내지 않았지만 일본인으로서는 드물게 풍부한 작중 인물들을 만들어낸 것 같더군요. 그의 이상주의도 견고한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일본인치고는 드물게 뼈대가 크고 힘찬 작품 세계, 완벽함을 아울러 가진 예술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모리 오가이야말로 일본 문단의 진짜 황제인데 말입니다."

찬하는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

"그러니까 나쓰메는 마땅찮다, 그렇지요. 냉랭하고 현학적이고 소설을 위한 소설을 쓴다. 하하핫핫..."

"나쓰메가 어때서, 당대의 거봉인 것만은 틀림이 없지. 예술이란 육자배기 같은 건 아니야. 인정가화는 주막의 입에서도 들을 수 있지. 철저하게 에고이즘을 추구한 나쓰메는 자기 자신한테도 냉혹한 사람이었어. 그게 작가 정신 아닐까?"

용하가 한마디 했다.

"그런 일면도 있지요."

인정해놓고

"그의 후기 작품에선 일본적인 것, 대단히 일본적인 것이었는데 역시 밑바닥을 흐르는 것에 저항을 느끼게 하긴 하더군요."

"타민족이 일본적인 것을 알면 얼마나 알아."

타박 주듯 용하는 말했다. 순간 찬하는 간밤의 여행, 생각의 여행이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것을 깨닫는다.

'그럴까...'

왠지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막연한 절망 같은 것이었다. 하인 둘이 큰 상을 맞잡고 들어왔다. 찬모와 심부름아이가 밥과 국그릇을 올린 예반을 들고 따라 들어왔다. 명희도 뒤따라왔다. 남색 법단 치마의 자락이 무겁게 바닥은 쓸며 지나간다고 찬하는 생각했다. 옥색 반회장 저고리에 긴 목, 찬하 머릿속에 번개 같이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드십시오."

용하가 명빈에게 권했다. 식사를 시작한다.

"아까 형님은 타민족이 일본적인 것을 알면 얼마나 알겠느냐 했는데요."

"그래서?"

"객관적인 눈으로 본다는 것, 어떤 특징 같은 것은 남이 더 잘 집어낼 경우도 있을 겁니다."

"아까 무슨 얘기를 했나? 문학 얘기 아니었나?"

"문학 얘기였지요."

"그렇다면 작가 이외 독자든 일본인이라고 남이 아니겠나? 다 같은 남이라도 일본인 독자와 조선인 독자, 그런 경우는 객관성 문제보다 더 잘 안다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용하의 말은 예리했다.

"형님 말씀도 옳습니다. 그러나 작품을 통해서 개개인을 보는 것 보다 일본 민족의 덩어리를 볼 때는 보여지는 것과 보는 것, 즉 대상과 눈인데요."

"그 말은 재미있군."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일본인의 의상이나 색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다."

"어떻게 생각하다니?"

"갑충, 딱정벌레를 연상하지 않습니까?"

"..."

"반대로 일본 여자하고 결혼해서 그들 묻혀 살아온 처지인 만큼 조선을 대상으로 하는 제 눈이 맹목적일 수만은 없을 겁니다. 그래 조선의 의상과 색채를 생각해보았지요."

"그게 뭐냐?"

"나비, 학입니다."

"으음."

"팔은 안으로 굽는다. 그렇지 않소. 조학사?"

밥알을 씹으며 명빈이 말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일본의 옷이나 색채는 상당히 그로테스크합니다. 특히 색채는 불투명하고 부피를 느끼지요. 감색 검정, 갈색, 붉은 빛 그런 것이 주조인데 기타 빛깔도 순수한 색채는 없지요. 옷 형태에 있어서도 율동이 없습니다. 그들이 옷의 선은 거의 고정돼 있지요. 겨우 좀 흔들리는 소매도 거지 율동은 아니거든요. 그들의 앞머리는 밀어붙여 뒷머리만 모아서 뒤꼭지 쪽에 마개(상투)를 만드는데 맨들맨들한 앞머리는 불모이 산같이 역시 고정돼 있는 느낌입니다. 사실 그 칙칙한 빛깔에, 고정된 선의 옷에는 모자나 갓을 올릴 수 없었을 것이며 머리를 밀어서 맹숭맹숭한 공간을 남기지 않는다면 칙칙하고 고정된 선의 옷은 참으로 뭔가 눌리어 감당을 못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또 여자의 경우 탁하기는 하지만 색채는 있었으니까, 목이 부러질 만큼 느껴지는 큰 마개에는 주렁주렁 꽃이며 빗이며 천이며 그런 것을 달아야 했고 기혼자는 눈썹을 밀어버려야 했습니다. 또 있지요. 이빨을 검게 염색하는 것 말입니다. 한마디로 복잡하고 그로테스크하지요. 조선의 의상과 빛깔을 생각해봅시다. 구십 프로 이상은 흰색이며 나머지 색채도 거의 중간색이란 없어요. 모두 원색이며 투명하지요. 그리고 옷의 형태로는 율동하지 않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선도 밀착되지 않은 직선에는 풍부한 율동을 허용하고 밀착할밖에 없는 곳은 곡선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투명한 갓 ,갓이야말로 아마 세계적 명작이 아닐까요? 그러면 갑충 혹은 딱정벌레, 학 또는 나비의 설명이 될 것 같습니다."

", 그거 참 재미있군."

명빈이 아이처럼 손뼉을 쳤다. 용하는 저 주책바가지, 나잇값 하지 못한다, 그런 눈초리로 쳐다본다. 명희는 한마디 말없이 조용하게 밥을 먹고 있었다. 뭔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밥을 떠넣고 부지런히 씹어 삼킨 찬하는 다시 말을 잇는다.

"건물의 형태도 그런 것 같습니다. 일본의 성은 석축을 높이 쌓아 올려 그 위에다 앉히거든요. 사원 같은 것도 지붕에서 약간의 곡선을 볼 수 있는데 대단히 둔중한 느낌이며 일반 건물에 있어서 지붕의 구배는 모두 직선입니다. 촌락의 농가의 갈대 지붕도 역시 구배는 직선이지요. 여백이 없는 건축물, 여백이란 무슨 뜻인고 하니 뜰이 없다는 것입니다. 서민 주택은 대개 뜰이 없습니다. 뜰이 있는 주택들도 뜰이 없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건축 구조에 있어서 현관이란 것 때문이지요. 현관이 뜰을 차단해버리거든요. 일본에서 분재가 성행하는 까닭을 그들 건축에서 찾아보는 것도 과히 먼 얘기는 아닐 듯 싶고."

밥을 먹는다. 국도 먹고 반찬도 먹는다. 삼키면서

"조선의 건축, 지붕의 경우를 보면 하늘을 향하여 치올라간 처마나 용의 허리 같은 용마름, 그 곡선은 참으로 완벽하게 공간에 존재하지요. 시골의 초가는 반대로 굽습니다. 땅을 향해 오무려져 있지요. 기와집 지붕에서 비상하려는 새를, 혹은 비룡을 연상한다면 초가는 땅에 뿌리를 박은 식물을 연상하게 되지요. 그리고 궁이건 성이건 자연과 더불어 자연에 싸여 있다는 조선의 것과는 달리 의복이나 반자연적인 요소가 짙은 것이 일본입니다. 다음은 여백에 관한 건데 울타리가 없고 사립문이 없는 농가는 결국 집 밖의 땅이 여백이 된다 할 수 있고, 일본의 현관과 같은 성질을 띤 대문 사립문이 건물과 뜰을 포용하고 있지 않은 경우는 없어요. 상가를 제외하고 말입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여하한 형태로든 거기는 건물과 뜰이 공종하고 있지요. 성을 보더라도 적을 막는 것은 성벽이지, 즉 울타리지 건물 자체는 아닙니다. 석축에서 바로 이어진 성과 성벽 안에 있는 성 그 차이점에서도 우리는 여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을 예를 들어 비교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조선의 피조물엔 생명감이 넘쳐 있고 생명체를 보다 많이 수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이 완벽하다는 것은 살아 있다, 즉 생명이 있다는 얘깁니다. 청자나 백자 특히 백자 항아리는 빛깔과 선의 융합에서 생동하기도 하고 정밀을 느끼기도 하는데 어떤 경우든 살아 있다는 것, 생명력 그것을 자로 재어보고 가루를 내어 분석하고 해보았자, 사람을 놓고 해부해보아도 사람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결론과 마찬가지, 결국 생명은 무엇인지 모른다. 아무튼 그런 창조의 능력은 조물주에 접근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로 보아야겠습니다. 누가 우리를 리얼리스트라 했습니다. 리얼리스트이면서 신비주의자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감상이나 낭만이 흐려놓는 상태, 달콤하게 안주하거나 안개에 몸을 실은 그런 상태에서 의지를 볼 수 없지요. 접근의 의지 말입니다. 동화의 의지라 할 수도 있고 흔히들 도피사상이다 하기도 하지만 자연과의 동화를 두고 말입니다. 자연만큼 위대한 피조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즉 생명 말이지요. 함에도 불구하고 무위자연설의 도교가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고 불교 유교가 성행한 이 땅이었고, 애매모호한 신선의 세계 대신 수로부인에게 바치는 노인의 헌화가 겨지요. 나는 신을 칭송하는 여하한 노래 속에서도 헌화가만큼 무궁한 인간의 아름다운 정신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 헌화가를 높이로 하여 몸서리쳐지는 더러운 것에의 감각 그것은 우리 언어, 그러니까 속담이니 비유에서 보는 그 징그러운 감각, 높이와 낮음의 그 사이의 큰 진폭에서도 일본 민족과 조선 민족의 차이점을 볼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조선 민족의 찬송이군. 그런 것을 두고 아전인수라 하지."

용하의 말이었다.

". 바로 그 점 때문에 저도 자신에게 회의를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양면성이었습니다.

"양면성이라니."

명빈의 반문이다.

"복잡과 단순입니다."

"그건 어떤 것을 두고 하는 말이오?"

"일본 민족의 단순성은 그 단순함 때문에 색채에 있어서나 선에 있어서 선이라기보다 선이 행방불명된 개칠의 상태인데 단순함에서 오는 욕구일까요? 조선 민족의 복잡성 그것 때문에 반대로 색채나 선에 있어서 대담한 생략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생략이란 근원을 찾아서 불필요한 것은 쳐내버린다 그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생명을 찾는다는 것이지요."

"역시 찬송가다."

찬하는 용하를 향해 어색하게 웃는다.

"너는 애국자냐?"

조롱의 이탄이다.

"아니라는 전제 하에 시작한 생각입니다.

"네가 뭐라건 일본은 강국이고 우리는 정복당한 민족이다. 그런 소리 해봐야 이불 속의 활개치기지."

명빈의 얼굴이 붉어졌다. 찬하는 씁쓰레한 표정이었고,

"더욱 우스운 것은 일본 여자와 살고 있는 네 입에서 그런 말을 들어야 한다는 일, 안 그러냐?"

"그렇겠지요.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저의 객관적인 눈, 그 말을 앞서 했던 것입니다. 나는 오늘날 강국인 일본, 그 연유가 어디 있는지 약소국인 조선, 현재는 국가 자체도 없어졌습니다만 그 요인을 생각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강하고 약한 현상 문제도 말입니다. 진실한 뜻에서의 강자와 약자 문제도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형님과 나의 경우에도 적응될 수 있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물론 나는 애국자가 아닙니다. 또 애국자가 아니어야 할 수 있는 얘기, 진실에 혹은 사실에 접근할 수 있고 공정할 수도 있으니까요. 복잡하면 쳐내고 단순하면 덧붙인다는, ...바꾸어서 말하자면 결핍과 잉여 상태, 저는 얘기의 결론을 지어야겠습니다. 결핍이 오늘 일본을 강국으로 만들었고 잉여 상태로 하여 조선은 망했다."

"허 참, 조선이 잉여 상태? 야 그만두어라. 미친놈 취급 당할 게야."

"정신을 두고 한 말입니다. 물질적인 얘기는 아닙니다."

"그래서?"

"앞으로 일본은 더욱더 강국이 될 거란 말입니다. 계속하여 뭉쳐질 거란 말이지요. 개개인의 결핍은 전체를 풍요하게 하고 개개인의 풍요는 전체를 결핍으로 몰아넣고."

"결론이냐?"

"아닙니다. 강약의 척도를 양면에서 상반된 눈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 또 강약의 형태가 물결같이 오고 사라진다는 것, 물질의 시대와 정신의 시대가 명멸한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역시 애국자구먼."

용하는 코웃음을 쳤다.

"왜들 이러세요? 형제가 싸우시겠습니다."

다른 문에서 불쑥 들어온 것처럼 명희가 말했다. 상이 물려지고 각각 소파로 자리를 옮긴다. 명희가 커피를 끓여 내왔다.

"사실 조선에는 강가 모래만큼 애국자들이 많은데 왜 독립을 못하는지 모르겠어. 그것도 찬하의 잉여와 결핍의 논리처럼 보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구먼."

용하는 담배를 붙여 문다.

"사실은 얼마 전부터 우연히 맴도는 생각을, 왠지 모르지만 결론을 짓고 싶었습니다."

용하의 악의를 부드럽게 밀어내듯 찬하는 말했다.

"우연히 맴도는 생각이라.. 그보다 부인, 당신도 여기 와서 앉구려."

끓여낸 커피포트를 한 곁에 치우는 명희를 향해 용하는 손짓했다. 임명빈은 찬하의 말을 정리라도 하는지 눈을 감은 상태더니 뒤늦게 커피잔을 들었다. 명희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본 용하는

"실은,"

하다가 담배를 눌러 끈다.

"오늘 임교장을 오시게 하여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은,"

명희를 힐끔 쳐다본다. 명희는 고양이처럼 몸을 사리는 것 같았다. 무심해 보였던 눈이 어떤 기대, 기다림 같은 것으로 흔들리는 것 같다. 그 눈이 용하의 시선을 받는다.

"설명은 생략하지요. 우리 부부의 이혼 문제 때문입니다."

"뭐라구?"

임명빈의 몸이 소파에서 튀었다. 찬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피차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에 조용히 해결하고 싶어서 이 자리를 마련했지요."

"이혼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나,"

임명빈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나왔다. 처음 충격과는 달리 또 자신의 말대로 다혈질의 성격과 달리 침착한 음성이었다.

"임교장은 반대할 처지가 아니지요. 찬성할 처지도 아니구요."

"그 말은 맞지. 한 가지, 나는 임교장이 아니며 임명빈이네. 또 반대나 찬성할 처지가 아닌데 어째서 내가 이 자리에 와 있어야 하는가."

손은 떨린다. 들고 있던 커피잔을 접시 위에 놓는다.

"통고하기 위해서지요."

"명희와 합의했소?"

명빈은 경어를 썼다.

"아닙니다. 처음 꺼낸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통고에 있어서 설명이 따라야 하는 게 순서 아닐까요?"

용하는 이빨까지 드러내며 웃었다.

"이유는, 내 동생과 임명빈 누이동생 두 사람한테 물어야 할 겁니다."

"그 무슨 말을 하는 게요!"

임명빈이 두 주먹을 쥐며 벌떡 일으켰다. 그의 낯빛은 주황이었다. 용하는 웃기만 한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하여 긴 오찬을 진행했고 긴 찬하의 얘기를 참을성 있게 들어왔다, 그 말이 씌어진 얼굴, 얼굴에 가득한 웃음. 명희는 고양이같이, 아까 그 모습대로 침묵이었다. 찬하는 화석같이, 그러나

'형수님 당신은 뭔가 느끼고 있었군요. 참 바보, 이런 나 같은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한갓 유희의 대상이 되고 만, 작지도 않은 사내자식 덩치를 하고서 말입니다.'

새파랗게 질렸던 찬하 얼굴은 벌겋게 되었고 다시 핏기를 잃으면서 눈이 붉게 물든다. 순간 임명빈은 구원을 청하듯 핏발 선 눈을 명희에게로 옮겼다. 명희 눈빛 속에 용하 얼굴 위에 실린 웃음, 그와 흡사한 웃음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오라버니, 걱정 마십시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찬하의 몸이 기울었다. 용하는 멱살을 잡힌 채 찬하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사태는 예기치 못한 연출, 진행이다. 용하는 당황한다.

"이놈이 미쳤느냐!"

생애에 있어서, 미증유다. 자기 몸에 폭력이 와닿았다는 것은. 불복도 없었는데 말이다.

"가세요. 별장으로 가시잔 말입니다."

멱살을 놓아주지 않았다.

"뭣 하러 거긴 가냐! 놓아!"

"부모님한테요. 가서 보고도 하고 설명도 해야지요. 안 가겠다면 완력을 쓰겠소. 가겠습니까?"

"놓아! 못 갈 것도 없다!"

놓아준다. 용하의 모습은 비참했다. 그는 이런 결과를 상상해본 일조차 없다.

"운전수에게 차를 준비하라 이르겠소. 분명히 가시겠다 했지요? 식언하면 어느 곳에서든 저는 완력을 휘두를 것입니다. 형님도 추잡스런 일들이 이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은 원치 않겠지요?"

절대절명 용하는 어떻게 풀어야 할지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나무같이 서 있을 뿐이다.

형제를 태운 자동차는 출발했다. 별장에 이르는 어귀까지 왔을 때 해는 서쪽에 있었고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여기서 내립시다. 걸어서 갑시다."

일방적인 찬하의 명령, 자동차는 멎었다. 내린 뒤

"집으로 돌아가시오. 그러나 내일 아침 데릴러 오시오."

하고 찬하는 어서 가라는 듯 차체에 주먹질을 했다. 자동차가 길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진 뒤 찬하는 몸을 돌렸다. 눈에는 살기가 있었다. 용하 얼굴에도 목덜미에도 무수한 소름이 돋아나 있었다.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킨 찬하는

"두렵지 않습니까?"

"그러면 내가 오해를 했다, 그 말이냐?"

낮은 음성이다. 그러나 덤벼들어 물어뜯을지 모르는 저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설령 찬하가 완력을 행사한다손 치더라도 구경할 사람은 없는 것이다.

"오해였다고 풀어버리기엔, , 너 격렬한 태도는 무엇을 의미하지?"

여유와 미소가 용하 입가에 돌아왔다. 그러나 상상한 일조차 없는 모욕감에서 담배를 붙여 무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결혼하기 전부터 내가. 임명희라는 여성을 사랑한 것을, 형은 알고 있었는데 새삼스레 어물쩍거릴 필요가 없지요."

"그러니까 불륜에 빠져도 상관이 없다 그 얘기냐?"

"이제부터 불륜에 빠질 겁니다. 형은 이혼을 선언했습니다. 저는 이제 당당하게, 현재 처와 이혼하고 임명희 씨를 아내로 맞겠소."

", , 뭐라고..."

용하는 멍해서 찬하를 쳐다본다.

"못할 것 같습니까?"

"..."

"조병모 남작, 왕가의 피가 흐르는 가문, 그건 조찬하한테는 서푼 치의 값어치도 없는 것입니다. 형님도 알 만한데요. 친일파 소리 듣는 것이 두려워 일본 여자하고 결혼 안 하는 조찬하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 죽일 놈아!"

"나는 반드시 임명희 씨하고 결혼할 겁니다! 형이 이혼하는 한에 있어서, 협박이란 생각은 마시오."

"이혼 못한다는 얘기구나. 이 죽일 놈! 그렇게 사랑하는 법도 있나... 허허허... 허허헛..."

형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별장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용하는 데릴러 온 자동차를 타고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하룻밤 사이 그는 늙은이같이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철저한 참패였다. 생애에서 한 번, 그것도 철저하게 두들겨 맞은 것이다. 그는 애초부터 명희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생각은 아니 했다. 자아, 네가 좋아하는 물건을 나는 이렇게 버린다. 잉여 상태에서 오는 유희, 용하는 유희가 완벽하게 진행될 것을 믿는다. 강한 자극을 즐기려 했었다. 그런데 심각할 것도 없는 장난이 자신을 송두리째 뽑아 내동댕이치는 결과를 가져올 줄이야.

'이 보복을 어떻게 하지, 두고두고, 섣불리 덤비지 말고, 두고두고 기름을 짜는 거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그놈이 파닥파닥 뛸 만큼 명희 그 계집의 기름을 짜는 거다. 죽는 날까지 옆에다 두고, 오오냐 그것은 새로운 흥밋거리다!'

용하는 전신을 떤다. 분노는 시간이 흐르는 데 따라 숨이 가쁘게 밀려온다. 생생하게 가슴이 터질 듯이 밀려온다. 간밤에는 눈 한번 붙이질 못하였다. 이를 갈았다. 그러나 지금 이 아침은 이를 가는 정도가 아니다. 육신 전체의 뼈가 갈리는 느낌이다. 그는 별관으로 들어갔다. 정중한 사과의 말을, 준비해온 말을 냉정하게 보다 천연스럽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분노를 삼키려고 눈을 감는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명희가 아니었다. 조그마한 쪽지 한 장이었다. 이혼에 동의한다는 명희 필적의 짤막한 글이 씌어진 쪽지였던 것이다.

 

 

11장 사당패

노인이 되면 새벽잠이 없어진다. 젊은 사람들이 옅지만 달콤한 잠에 취하는 그런 시간 노인은 답답하고 외롭다. 금슬 좋은 아들 내외에 시샘을 한다는 오해를 받을까 봐 조심을 하면서도 담뱃대를 두드리게 되고 밭은기침을 하게 되고 칙간을 들락날락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울컥 설움이 치민다. 늙어서 무력해지는 자신이 서글프고, 모두 잠들었는데 홀로 깨어 있다는 고독감 소외감은 지난 세월을 허망하게 되살린다. 억울하다, 한스럽다, 그런 감정의 여울로 자신을 몰아넣게 되는 것이다. 시샘할 자식도 짜증부릴 한 짝도 없는 영산댁에게는 지난 세월이 허망하다든지 억울하다든지 한스럽다든지, 과거를 헤맬 여지가 없다. 외로움, 다만 그 외로움에 사로잡힌 새벽을 되풀이해왔다.

'한탄은 옛날 옛적에 끝나부린 거여. 여한을 남길 자식도 없인께로. 혈혈단신 아니여? 으흠... 대들보에 목을 매면 쓰까? 보따리하나 이고 정처 없이 떠나부리는 편이 나으까잉? 워쨌으면 쓰겄는가. 허구헌 날 이러크럼 앉아서 저승 차사 기다리는디 참말로 사람 지치게 허네잉. 사람 지치게 헌단 말씨.'

새벽이면 버릇이 되어 화투짝을 떼다가 중얼거리곤 했었다. 그러나 숙이 오고부터 영산댁의 새벽은 달라진 것이다. 어둠 속을 더듬으면 사방은 벽이요 여닫이문이 하나, 등잔을 켜봐도 사방은 벽, . 그림자 하나뿐이었던 방에 이제는 사람의 숨소리가 들여온다.

'저 제집아이는 사람 될 것이랑께.'

아직 숙이는 영상댁이 깨워서 일어난 적이 없다.

'에미 없이 컸는디 워째 그러크름 정갈허고 제부르고 매사가 다그려. 천성인개비요.'

대견하고 만족스러웠다. 어떤 때는 저것이 하늘에서 떨어졌나 싶기도 했다. 그간 계집아이를 두어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돈을 훔쳐 달아나는가 하면 나 먹여살리라는 식으로 늙은 영산댁을 오히려 부려먹으려 드는 염치없고 기갈 센 계집애에 학을 뗀 일이 있었고 하나는 음탕하여 사내들이 끊이지 않는 주막에 둘 수가 없어 내쫓았다.

'허기는 여거 온 것도 지 복이제잉. 애비가 사람보는 눈은 있어서 둘 자리 두고 갔당께로.'

병색이 완연했던 사내는 숙이를 맡아달라든가, 두고 잔심부름이나 시키면 어떻겠느냐, 그런 부탁 상의 한마디 없이 도망치듯 새벽에 사라졌다. 그 전날 밤

"머시매는 애비 에미가 없어도 밥이사 빌어묵을 깁니다. 새견이 나믄 온당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요, 그렇지마는 제집자식은 몸을 버리게 된께요. 한분 뻘구둑에 빠지믄은 사람의 구실을 못하고 차라리 죽느니만, 야아 머시매는 어디 가서 굴러도, 개똥받에서 굴러도 명만 질몬 된다 캤지요. 제집자석은... 지 맴이 청백 같애도 소앵이 없고...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마는..."

중얼중얼 혼잣말같이, 남긴 말이라곤 그것뿐이었다.

'암만, 그렇다마다, 틀린 말 아뇨. 바람둥이 노름쟁이 도둑놈, 대역죄인만 빼고 사내자삭은 한분 작심허기에 달린거 아니더라고? 계집이야 워디 그러칸디? 해방에 빠졌다 허면 장바닥에 돌멩이라, 붙쌍헌 것, 곱기곱기 키워서 신실한 남정네 찾아 맡길 것이께. 내 나이 허고서는 죽을 날이 아니 멀다 헐 수는 없지마는 숙이 나이도 과년헌께로,'

숙이 일어났다.

"더 자지. 날이 밝을라면 한참 있어야, 어련히 깨울가."

"아니요. 많이 잤소."

숙이는 웃매무새를 고치고 이불을 개킨다. 영산댁도 화투짝을 쓸어 모은다.

"이제 겨울은 다 가는개비여. 멀잖아 냉이국을 찾겄제잉?"

". 강에 얼음도 다 녹았십니다."

하다 말고 숙이 얼굴이 빨개진다. 열흘쯤 지났을까? 강가에서 윤국이를 만났던 생각이 났던 것이다.

"사람이란 늙어갈수록 봄이 좋고 기다려지기도 허고, 금년에는 너가 있인께 나물 캐러 가볼 것이여."

"..."

"참꽃 따다가 화전도 맨들고, 어디 생청이 좀 남아 있을 것인디."

"..."

"참꽃술도 그게 기침에는 영약인디."

이불을 개켜낸 자리에 걸레질을 하는 숙이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진다. 방바닥에 떨어진 눈물 자국을 걸레질로 지우며, 영산댁에게 등을 보이며 구석지를 닦는다.

"이삼 년 묵힌 술은 천만병도 고친다 혔인께."

영산댁은 다시 화투짝을 하나씩 놓아간다. 방안을 고루고루 훔쳐낸 숙이는 걸레를 들고 밖으로 나온다. 새까만 어둠과 냉기가 전신을 휩싸는 것 같아 우두커니 한참을 부엌 앞에 서 있다. 어둠에 익은 눈에 맞은 켠 산허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참꽃 화전을 만들자 했을 때 숙이는 동생 몽치 생각을 했다. 오누이가 산속을 헤매며 진달래꽃을 따먹어도 따먹어도 배는 부르지 않았다. 노릿노릿하게 탄, 기름이 흐르는 화전 하나, 반으로 갈라서 동생 한 쪽 누이 한 쪽, 오래오래 씹어 먹을 수 있는 화전, 시장기를 달랠 수도 있었으련만 진달래꽃은 따먹어도 따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았다. 천만 병을 고친다는 진달래술, 아비의 병이 천만은 아니었지만 목에서는 항상 가래가 끓었고 끊임없이 기침, 기름 끝에는 피를 토하곤 했었다. 봄이 되면 더욱 기침은 심해졌고 피를 토하는 도수도 잦았다. 봄마다 봄 넘기기 어려울 것이란 말을 들어야 했었다. 부엌으로 들어온 숙이는 더듬더듬 가마솥 뚜껑을 열어 물을 붓고 솔가지를 끌어당겨서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솔잎 타는 냄새, 서까래에 불빛이 너울거린다. 눈물 자국이 남은 숙이 얼굴도 불빛에 탄다.

"야속한 울 아배."

부지깽이로 불을 헤집으며 뇐다. 아비가 야속했을까? 숙이는 아비에 대하여 자기 자신이 야속했을 것이다. 양지바른 산골짝에다 움집이라도 하나 만들어보리라, 마른 풀을 베다가 잠자리 마련하고 지천으로 굴러 있는 가랑잎 긁어오고 죽은 나뭇가지 꺾어다 쌓아놓고 관솔로 불 밝히며 마을로 내려가서 비럭질이라도 한다면 겨울 한 철 얼어 죽지 않고 연명하려니, 아비가 죽더라도 맑은 산중에 묻어주면 여한이 없었을 것인데 그 시신을 어느 누가 거둘 것이며 배고파 우는 동생...

"야속한 울 아배, 무상한 울 아배, 제집자식은 자식이 아니라 말이던가."

"야속다 생각지 말랑께. 니 전사 생각허고, 말없이 떠나부린 심정이 오죽혔을 것이여? 명이 붙어 있으면 언젠가는 만나게 될지 뉘알겄어라?"

언제 나왔는지 영산댁이 말했다. 그리고 사기 속에 담가서 불려 놓은 무 시래기를 바가지에 건져낸다.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었는가 솥뚜껑 사이로 눈물이 흘렸다. 솥전에 떨어져 피식피식! 물방울 튀는 소리가 난다. 숙이는 치맛자락을 걷어 콧물을 닦는 시늉을 하면서 눈물을 닦고 더운 물을 퍼내어 걸레를 빤다. 숙이 가겟방을 쓸고 닦는 동안 영산댁은 건져낸 시래기를 곱게 다지고 국솥에다 된장과 함께 바락바락 주무르고 숙이가 받아놓은 뜨물을 붓는다. 멸치 한 줌을 집어넣는다.

"국 안쳤다. 국솥에 불 지피야 혀."

"."

가겟방에서 대답소리가 들려온다.

"불쌍한 것, 워찌 생각이 안 날 것이여. 더운 밥 먹을 적마다 목이 메일 거여."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왔다. 영산댁은 가겟방으로 들어오고 숙은 국솥에 불을 지피려고 부엌으로 나간다.

"세상에 태어나서 안 서러불 사람이 있을까마는, 귀밑머리도 못 푼 어린것이 죽어 이별, 생이별을 다 겪었으니 그 가심의 못을 어느 뉘가 뽑아줄 것이여?"

처음 아비가 떠난 것을 알고 통곡을 했던 숙이는 그 뒤 영산댁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다. 해서 영산댁은

'찌무리기를 혀싸아도 된정날 것인디.'

마음속으로 다행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어이구 치버라. 속 좀 따사가지고 가도 가야겄구마."

제대로 옷을 차려입은 바우가 주막으로 들어왔다.

"겨울 다 갔는디 젊은 사램이 춥기는 뭐가 그리 춥디야?"

"앗다 참, 꽃샘바람에 중늙인이 얼어죽는다는 말도 모리요? 내가 바로 중늙인이 아니냐 그 말이요."

"자알 논다. 신새벽부텀 두루마기 차리입고 워디로 가는 기라?"

"제집아아 혼사일 때문에 가기는 가요마는, 술이나 주소."

바우는 두루마기 자락을 조심스럽게 걷고 술판 앞에 앉는다. 어젯밤에 숙이가 걸러서 부어놓았기에 술단지에는 술이 그득 차 있었다.

"가을 혼사 안 허고 봄 혼사 헐려구 그러남?"

"가을에 하는 기이 좋겄지마는 임자 생긴 김에, 그쪽이야 농사짓는 사램이 아인께 이쪽 형편만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미는 술잔을 받아 들이켠 바우는 김치 조각을 집는다. 숙이가 해장국을 내왔다.

"신랑 될 사람이 뭐 허는디?"

"배를 탄다요. 아직 작정은 안 했소만."

"개깃배를 타는가?"

"개깃매 탄다믄 그거야 안 되제요. 윤선을 탄다 카더마요."

해장국을 후우, 후우 불면서 마신다.

"객리 바람은 많이 들었겄다. 하동 사람이여?"

". 부모들은 틀림이 없는 사람인데, 부모 안 닮은 자식은 없인께 그거를 보고 귀가 솔깃했구마요."

"그건 그려. 근본을 알아야,"

"숙이가 이 집에 오고부터 국맛이 좋아졌구마."

"어멍떨지 말더라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국은 내가 끓인께 맛이 달라질 리 없제."

"보기 좋은 떡은 묵기도 좋더라고 숙이가 오고부터는 집안이 훤해졌인께 자연 국맛도 나는가 배요. 숙이 시집보낼 때는 한 밑천 톡톡히 해주어야겄소."

그냥 해보는 말은 아니었다. 떠나지 말고 있으면 너에게 해로울 것이 없다는, 감언이설 같은 것이었지만 외로운 늙은이를 위해 마음을 쓴 것도 사실이다.

"실없는 소리는 다 그만두고 오서방 일은 워찌 될 것이지 무슨 소식이라도 듣지 못혔는가?"

"한 달이나 있이야 재판이 붙는다 카지요?"

"재판이 붙으면 오서방 설마 죽에 되는 것은 아니지야?"

"그렇기는 안 되겄지요. 직일라꼬 덤비든 쪽은 우서방인께. 잘하믄 질게는 옥살이 안 할거라 하기는 합디다만,"

"그건 그려. 오서방 사람 죽일 인재가 아닌 것을 동네 사람이 다 아는디,"

"재판이 잘 되고 못 되는 거는 증인 입에 달린 거라, 그기이 걱정 마세요."

"갈껴?"

"처음부터 끝까지 본 사람은 엽이네하고 맹순인데,"

"본 대로 증언하면 될 일 아이랑가?"

"그리, 더군다가 여자들이라,"

"무슨 소리 허는 거여? 사람의 명이 경각에 달린 일인디,"

"무가 마누라 그 독사 때문이지요. 밤낮으로 엽이네, 맹순이는 시집에 가부맀인께 그렇다 하고 엽이네 집에 와서 살다시피,"

"뭐 땀시 그런당가?"

"증언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겄소? 오서방한테 유리하게 한다믄 식구들을 몰살허겄느니 불을 놔부릴 것이니 보통 골칫거리가 아닌 거라요."

"그래도 이서방 아들이 있잖여?"

"홍이도 중도에서 뛰어들었인께,"

"참말로, 도둑놈 제집은 도둑년이라 혀쌌더마 그 말이 맞는 말이여."

"그거야 머 안 그런 사람도 있제요. 마서방댁네 천일어매는 상사람 소리 듣기 아깝제요."

"허기는 그려. 그래 지금까지 한 말대로라면 오서방 일은 맘 못 놓는다 그거 아녀?"

"머 그거사 동네 사람도 가만 안 있일 기고 질기 우가놈 제집이 그런다믄 동네서 들어내는 수밖에 없겄지요."

", 소이를 생각헌다면, 그러나 지는 쪽은 그쪽인께 환장혔을 것이여. 미우나 고우나 넘이 뭐라 헌들 제 낭군 아닌개비여? 눈에 보이는 거이 있겠어? 양쪽이 다 살이 끼어서 그랬을 것이구먼.“

"그 사람들뿐이겄소? 온 동네가, 초정월에 그런 일이 났인께 더군다나, 이자는 좀 가라앉았지마는 처음에사 제정신 가진 사람이 있었소? 무섭다고 해만 지믄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밖에 나갈라 캐야제요."

"일이 좋기 된다 혀도 이자 오서방 버린 사람이여. 온 정신으로 살겄어라?"

"좋긴 된다 해도 몇 해는 콩밥 안 묵겄소? 징역살이하고 나온다 캐도, 자식들 앞날을 생각하믄 소리도 매도 없이 떠나얄 기구마는."

"살다 보면 별 희한한 일이 다 있지라."

"그 일도 그 일이고, 시끄러븐께 이 말 저 말이 다 나돌기는 하겄지마는."

"무슨 일이 또 있이야?"

"거 최참판댁 둘째도련님이,"

"만세 불렀다고 잽히간 이약을 들었제."

"그 일은 나와서 해결이 됐인께. 참말인지 온, 행방불명이라 카던지, 강물에 떠내리갔다는 흉칙스런 말도 있고."

"무슨 소리여? 장마 도깨비 여울 건너가는 소리 헌다."

"장마 도깨비 여울건니는 소리라, 그기이 무신 말이요?"

"씨잘 데 없는 말 아니란 말이여? 헐 일이 없으면 누워서 서까래나 세더라고, 어여 술이나 들어."

술을 마시고 입 언저리를 닦으며 바우는

"그라믄 내가 없는 일을 맨들어서 하는 말이다 그거요? 허 참, 오라 카는 사람은 없어도 실없이 바쁜 기이 내 사정이거마는. 소문이 하도 숭칙해서, 거러지 않아도 정월 초하루에 샐인이 나지 않나, 그것도 두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라. 오서방이 사람 직일 인야였소? 귀신이 씌어서 한 짓이제. 그러니 동네가 술렁대고 모두들 망할 징조라고 쑥덕쑥덕..."

"입들이 도낏날이여. 횡액을 불러들이는 그놈의 주둥아리 누가 몰루남? 넘들헌티 좋은 일이 있다 허면은 벙어리 냉가슴 앓는 꼴상이고, 넘들헌티 언짢은 일이 있다 허면은 궁둥춤이라도 추고 싶은 그런 복장들 가지고서 걱정을 허는 척, 속이 빤히 들여다보인단 말씨. 사람이 살면 몇 백 년을 살 것이며 안 죽을 사람 어디 있디야? 한치 앞을 몰루는디, 풀잎 겉은 인생인디, 터럭만큼도, 나야아 최참판댁허고는 상관이 없이 지내온 처지. 아 금매, 조가네 시절을 생각혀보다라고? 그 시절을 생각혀서라도 그러는 거 아니여. 그 댁 도령이 언제 이곳에서 살았간디? 보이들 않는다고 강물에 떠내려가아? 그것 다아 넘 망하기를 바라는 심뽀에서 나온 말일 것이여. 그럼 못써. 못쓴다 말이여."

"아아니 할매가 와 이리 풀세게 나오는 기요? 사람 우습기 보지 마소. 누가 머를 우쨌다고."

"바우는 성난 눈으로 영산댁을 쳐다보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영산댁은 고삐가 풀린 것처럼 계속한다.

"옛말에 천 냥 시주보다 애맨 소리 안 하는 편이 낫다, 그것 다 당해본 사람들이 헌 말일 것이여. 그놈의 도낏날 겉은 주둥이 땜시 복동네가 죽었잖이여? 말들 좋아하지 말더라고. 뭣이 워떠크름 해서 생겨났는지 사람의 종자란 하루도 넘을 찍지 않고는 편하들 못 허니 하누님이 내리는 재앙도 모자라서 서로 물고 뜯는가. 한심허다, 한심혀."

", 마치 죄인 다루듯기 하누마. 진똥 개똥 나무라고. 그러나 내가 할매를 갈바서 이렇고저렇고 해봐야 사내자식 꼴도 아이고, 마 그만둡시다."

"내가 꼭이 바우를 보고 허는 말은 아녀. 인심이 그렇다 그 말이여."

"나도 그 댁을 감지덕지 신주 위하듯 하는 사람은 아니요마는 그렇다고 그 댁이 망하기를 바래는 사람도 아니요. 젊은 한 시절 허랑하여 노름판에 미쳐 댕기노라고 누구처럼 의병질은 못했소마는, 또 누구처럼 조가한테 알랑방구를 뀌감서 쌀대배기나 얻어묵던 과거사도 없고요."

"뜬금없이 의병은 또 무슨 소리여라?"

"그때 의병이야 최참판댁하고 한당이었인께 하는 말 아니겄소."

"그랬남?"

"어멍시럽기는, 이 동네 일이라 카믄 고릿적부터 할매 모리는 일이 있소?"

"허기는 그려."

영산댁은 웃는다.

"내가 몰루는 일 없을 것이여. 첩첩이 쌓인 그 많은 사연들이 눈앞에 훤허네잉. 세월은 참말로 화살겉이 가부›는디 냄기고 간 이약은 끝이 없으니 전생 차생이 없다면 그 많은 한을 워찌 풀까나?"

"또 욕을 묵겄지마는, 하야간에 그 집터가 고릿적부터 세기로 이름이 나 있었인께."

"최참판댁 말이라?"

"아마도, 그 집에서 남자치고 비명횡사 안 한 사램이 거의 없을 거로요? 전해오는 말도 그렇지마는 우리가 알기로도."

"송장 안 나가는 집도 어디야? 집이란 백 년 이백 년, 오백 년도 가겄지만 사람의 명이야 워디 그렇간디?"

그 말에는 영산댁도 입을 다물어버린다. 딴은 그랬었다. 사실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외포 없이 최참판댁을 생각할 수 없었다. 오랜 세월, 실질적인 영주로서 군림해온 권위에 눌려서도 그랬었지만 그보다 최참판댁을 둘러싼 갖가지 불행한 내력과 불길한 사건은 마을 사람들의 잠재의식 속에 공포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동네서 그 집 망하기를 바래는 사람은 없일 기요. 그런 사람은 이미 다 죽어부맀고 앞으로 사세가 우떻기 변할지 그거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마는 지금 형편으로 봐서 왜놈 밑에 소작하는 것보담이사 낫고 후하다 안 할 수도 없제요."

"그려. 최참판댁도 최참판댁이지만, 악독한 마름놀들 밑에 시달리다 못혀 야간도주허는 사람이 부지기수. 거 장서방이 사지역지혀서 원망허는 사램이 없인께 그만허면, 그리 되기도 실은 여러분 일 아니겄어?"

바우의 표정이 수굿해진다.

"옛날의 김서방은 사람이 신실하고 착허기는 혔어도 단이 없고 겁이 많았는디 장서방은 용한 것 겉으나 뱃심이 있고 틀림이 없는 사람이여."

"뭣 때문에 뱃심이 없을 기요. 최참판댁 아니믄 밥 굶을 사람이건데? 여수서는 장서방 큰집을 두고 새 부자 났다고들 한답디다. 읍내 본가만 하더라도 밥술이나 두고 사는 형편이고 그러니 머가 답답할 기요.“

"그려. 장서방 큰아배, 그런게 장배 구리던 장서방인디 참말로 사람의 일은 몰러. 근동에 소문이 높이 날 만큼 떵떵 울리는 부자가 될 줄이야 뉘가 알았을꼬잉. 두만네 집의 선이가 시집갈 때만 혀도 밥술 두고 그럭저럭 산다 혀서 시집 잘 간다고들 야단이었제. 하야간 선이 그 아아가 대복을 찌고 났는개비여. 시집가고부텀 집안이 불티겉이 일었인께로. 그 아아 시집가던 날이 엊그제맨크로 눈앞에 선헌디, 세월이 화살이여.“

"선이뿐이겄소? 두만이는 우떻고요. 이자는 술도 가까이하고 진주서는 주름을 잡는다 카이, 사돈끼리 시운을 타도 보통으로 잘 탄 게 아닌개비요."

"알던 사램이 잘살게 돼야 좋기는 좋은디. 두만네도 전날겉이 임우럽기 대허지는 못헐 거이여."

바우는 펄쩍 뛰는 시늉을 하며

"일우럽기 대해요? 어림 반푼도 없는 소리 마소. 만날 일도 없일기요마는 두만이 그눔아아가 하동 사람이라 카믄 눈에 든 까시맨크로 여긴다 안 카요. 그뿐이겄소? 최참판댁하고도 대항할라 카니 그만 하믄 알조 아니겄소? 간난할매 덕분에 그 댁에서 문전옥답도 얻었고 어쨌거나 옛 상전인데 말이요."

"그 땅은 조가놈이 뺏기야 했제."

"그눔아아가 클 때는 안 그랬는데..."

"옛일 땀시 그럴 거여. 옛일을 넘들이 들춘다면 싫겄제잉."

"그런께 졸장부제요. 참말로 잘난 놈이믄, 하기야 요즘 제상 잘난 놈이 돈 벌었겄소. 돈이란 남의 눈에 피눈물을 내야 버는 거고 보믄."

이때 봉기노인의 아들 도식이가 슬그머니 들어왔다. 망태를 한 곁에 놓고 바우를 힐끗 펴다본다.

"아침부터 어디 갈라고 여기 와 있소?"

심드렁하게 물었다.

"제집아아 혼사 말이 있어서 읍내 갈라누마. 자네는 장날도 아인데 읍내 가는니가?"

바우도 떨떠름하게 말했다.

"지난 장날에도 피치 못할 일이 좀 있어서 못 갔더마는 내일이 제사라."

도식이는 바우 옆에 앉았다.

복동네 자살 사건이 있었을 때 봉기노인을 응징하는 데 앞장섰던 바우인 만큼 만나면 서먹서먹해질 수밖에 없는 사이다. 그러나 도식의 성품이 아비하고는 달라서 과묵했고 남과 다투는 것을 싫어하여 그런대로 말은 나누며 지내온 터이기는 했다.

", 아까 할매한테 야단을 맞았다마는,"

도식은 술판에 내놓은 해장국을 떠먹고 술잔을 들었다.

"최참판댁 둘째아들이 머 우찌 됐다, 그런 말은 도식이 자네 입에서 나왔다 카든데 그기이 정말가?"

바우는 일어서서 가야 하는데, 생각은 했다. 그러나 서로가 미묘하게 감정이 얽혀 있었기에 오해를 사면 안 되겠다 싶어 말을 걸었던 것이다.

"와요? 나도 타작마당에 내세워놓고 돌멩이질 할라고 그러요?"

술을 반만 마시고 김치를 어적어적 씹으며 도식은 도전적으로 말했다.

"지난 일은 피차 덮어두더라고. 그때 형편 봐서는 그럴 만혔인께, 도식이도 아배 성질 몰러? 사람이 죽었잖이여?"

영산댁이 나무라듯 말했다. 도식은 쓴웃음을 띤다. 몸은 그렇지도 않은데 도식의 얼굴 뼈대는 몹시 크고 완강해 보였다. 무서울 만큼 짙은 눈썹, 입술은 투박하고 얼굴 윤곽은 사각이었다.

"자석 된 도리에 원망시럽기는 했일 기다. 그렇지 않다믄 사람 아이제. 그라고 또 자네가 허튼말이나 하고 댕겼다믄 내가 묻지도 않았일 기고."

바우는 사과 비슷하게 말했다.

"그날 밤, 그런께 처갓집에 갔다가 밤늦게 오는데 최참판댁 식속들이 등불을 켜 들고 강가에서 그 댁 둘째도련님 이름을 부르믄서 찾고 있더란 말입니다. 가심이 섬찟하더마요."

"그래서?"

"그래서라니 머가요?"

도식은 나머지 술을 마신다.

"강가에서 우찌 됐노 말이다."

"최참판댁에서 아무 소리 없는 거 보믄 별일 없었겄지요."

대답은 간단했다.

", 하기는."

도식은 돈을 술판에 놓고 일어섰다.

"나도 가야지. 함께 가자."

바우도 서둘러 일어섰다. 그들이 떠난 뒤 영산댁은 심란해졌다.

"숙아!"

"."

"낮에 손님 들라, 밥쌀 좀 씻어놓어라고."

"얼매나요."

", 두우 뒷박 낙낙히 허면 쓰겄다."

"."

영산댁은 화투짝을 놓는다. 역시 마음이 잡히지 않는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런 것에 대한 염려나 두려움과 담을 쌓은 지는 오래다. 설령 귀신이 찾아왔다 하더라도 날 잡아잡수, 미래가 없다. 따라서 희망도 욕망도 없다. 희망이 없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이다. 다만 심란했을 뿐이다.

'아까는 바우헌티 워찌 그랬을까잉? 고깝게 들을 말도 안 혔는디 기를 쓰고 워찌 최참판댁을 그러크름 두둔혔을까? 크기 흉허물 본 것도 없는디 말이여. 내 소시적부터 이 성미 땀시 원수를 사고 혔는디.'

소시적에는 분별과, 정곡을 질렀던 영산댁 나름의 판단이 있었다. 그러나 나이 들면서 그런 판단은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때론 넘쳐서 감당을 못하게 되는 일도 왕왕이 있었다. 오늘 같은 경우도 그러했는데, 어쩌면 그것은 사라진 세월이 대신 남겨놓고 간 가지가지 기억, 그 기억에 대한 애착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의 말대로 터럭만큼도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최참판댁이지만 그러나 최참판댁은 마을 역사의 봉우리로서 골짜기를 타고 흘러간 냇물이 마을 사람들 내력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말하자면 그 집, 드높은 곳에 겹겹이 들어앉은 거대한 기와집은 기억의 본산. 영산댁이 그 모든 기억에 애착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덤으로 사는 것 같은 자신을 현실에 밀착시키려는 의지 같은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의지는 번번이 덤 그 자체인 것을 영산댁은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마을에는 영산댁보다 연로한 노인이 아직 몇 사람은 살아 있었다. 호호백발, 주름지고 저승꽃, 부스럼이 나돋은 얼굴에 이는 바지고 등은 굽고 봄이면 양지바른 곳에 나앉아 들판을 바라보는 그들 얼굴에서 웃음을 찾기는 어렵다. 표정조차 잃어버린 얼굴들. 그 노인들은 이제 대들보에 목을 매달 생각을 아니 할 것이요, 보따리 하나 이고 정처 없이 떠날 생각도 아니 할 것이요, 어두운 저승길 삼도천을 건너갈 그때 일도 생각지 않을 것이다. 붕괴되고 한편 굳어져 풍화되어가는 육신으로부터 어느 날 소리 없이 영혼이 제 갈길을 가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크름 죽질 못혀 안달복달이더니... 한 번은 강가든가? 이 근처에까지 기어왔었던가? 아무튼 다 죽어가는디 술손님들이 몰려 거사 업어다 놓고 살려낸 일이 있었제. 지금은 통영에서 소목 일을 헌다든가? 그 곱새도령, 얼굴이 관옥 겉은 그 도령도 아마 나이가 사십질, 그쯤 됐을 것이여. 부모의 죄업인가. 불쌍헌 도령... 최참판댁 별당아씰 뀌어차고 달아났던 구천이도 우리주막에서 맞아 죽을 뻔혔잖이여? 그때 순사 온다 안 혔으면 `마서방헌티 맞아 죽었을 것이여. 죽었는가 살았는가, 그 후에는 본 일이 없인께로.'

영산댁의 생각은 엉뚱한 곳으로 뛴다. 그러나 눈앞에는 뜻하지 않게 월선이가 해죽이 웃고 있다. 그 얼굴은 전복 입고 꽃갓 쓰고 철쇠 방울을 흔들며 쉰대 부채를 활짝 펴 든 월선어미의 땀에 젖은 얼굴로 바뀌어진다. 뛰는 모습, 방울 소리, 피리, 장구 소리, 영산댁은 고개를 내젓는다.

거의 점심때가 다 돼갈 무렵이었다.

"구례 가서 배 채울라 카믄 가는 동안 허리 곱칠 긴께, 이 동네서 한판 놀기는 다 글러부린 일이고오."

"재수 더럽게 없다."

"오늘만? 맨날이제. 그놈의 재수가 우리한테 왔다면 그건 세상 변한 거지."

두신두신 씨부렁거리며 주막에 들어선 것은 한 무리의 사당패들이었다.

"워째 맴이 씌이더랑께. 삭신 쑤시면 비든 것 알듯이 내 그래서 쌀 씻어놓으라 혔는디."

영산댁이 내다보며 말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겄소?"

눈이 부리부리한 사내 말이었다. 깃발이며 소도구가 든 짐짝이며 북, , 꽹과리 따위를 마당 한 곁에 밀어놓고 감발을 친 사당패는 짚세기, 혹은 미투리를 벗어놓고 술청에 오른다. 남장을 한 여자도 둘 끼어 있었다.

"숙아! 밥솥에 불 지피더라고. 불은 쌀이라 금세 될 것이여."

양반들도 쉬어가는 주막이다. 몰론 상민들이 애용하는 주막이라 하여 한 시절 전만 하더라도 사당패가 스스럼없이 술판 앞에 진을 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우선 술부텀 들겄는가?"

영산댁이 무었다.

"밥은 없소? 제집들이 배애지 고프다고 지랄이니."

눈이 부리부리한 사내가 말했다.

"다 돌아가지 않어 그렇제잉. 주막에 술밥이 떨여져 쓰겄는가?"

"그라믄 두 그릇만 먼저 말아서 제집들 배부터 채워주소. 우리는 술이고."

사내들과 마찬가지로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두 여자 중에 눈썹이 가느다란 여자가 눈을 흘긴다. 영산댁은 국밥부터 두 그릇 말아 여자들 앞에 놓는다.

"어여 들더라고, 시장헐 것인디."

여자 둘은 허겁지겁 국밥을 먹는다. 사내들 앞에는 술사발을 내놓으며 영산댁은 묻는다.

"금년 정월엔 재미들 보았는가?"

"재미가 다 뭡니까. 죽을 지경이지요. 입에 풀칠이나 함사요."

조그맣게 생긴 중년 사내의 말이었다.

"해마다 세월이 달라진께로."

"말 시바인지 소 시바인지 그녀러 것 땜에 이자는 사당패들 명도다 갔지요. 빌어묵을, 하다가 이 짓도 못하게 되믄 도둑질이라도 해야지 별수 있겄소?"

"그런다고 술값 떼묵고 갈 생각은 말더라고."

지리산을 중심하여 돌아다니며 노는 사당패와 섬진강을 길목에 주막을 차려 수십 년을 보낸 주모 사이에 면식이 없을 수 없다. 도둑질을 하겠다는 사람이나 술값 떼먹지 말라는 사람이나 서로 주고받는 말의 가락으로서 말과 같은 각박한 현실은 아니다. 비록 가난하고 천대받는 떠돌이, 술장사 처지이긴 했지만.

"이 동네서 한판 놀게 해주지 않는다믄 술값이고 밥값이고 떼묵지 별수 있을라고요. 사흘 굶어 집 담 넘지 않는 사람 없다 캅니다."

"여거서는 놀기 글렀어야."

"제에기랄! 하필이면 정월 초하룻날에 샐일이 날 거는 머꼬. ! 정월 초하룻날의 샐인? 허기는 그것도 흔치 않는 일이제. 쉬운 일 아니라고.“

"니 말이 내 말이야, 정말 쉬운 일 아닌 기라. 자고로 이 평사리 마을에서는 쉽지 않은 일만 생기왔인께 그기이 조상님의 탓인지 지맥 탓인지 알 수는 없다마는,"

"워따매 이 사람 좀 보소? 무슨 말을 그러크름 허는가. 사람의 생목숨이 갔는디 넘의 죽음을 갖고 노는 게라우? 불난 집에 부채질 허는 꼴 아니여?"

"있어도 소앵이 없는, 없일 정도가 아니제. 남한테 해독을 끼치는 인종 하나 없어졌다고 그라믄 나더러 곡을 하라 그 말이요? 살고 죽는 것도 제가끔 값어치가 있는 벱인데 개만 못한 인생 그만하면 점잖기 임종한 기라요. 작년 봄에도 그런 개보다 못한 죽임이 있었제요. 남원의 청일굔가 백일굔가 도둑놈가, 거기 교주놈이 칼침을 받아서 월궁인지 달궁인지 애첩하고 함께 뒈졌는데 샐인에 가담한 두 놈도 천하에서 둘째 가라믄 서러불 그런 악당놈이었인께, 말하자믄 자중지난이 나서 그리 된 기지요. 가다가 하누님도 그런 식으로 한꺼번에 네 년놈들을 쓸어내시기도 하더마요. 이분의 경우는 오서방이 좀 안됐소."

눈이 부리부리한 사내 말이었다.

"오서방을 아는감?"

"안면 정도지요. 불뚝성이 있어서 입바른 소리 하고, 그래 그렇지 남한테 몹쓸짓 하는 사람은 아닌데, 그런께 일진이 나빴다 할밖에 없소."

"부치가 까꾸로 서면 용한 사람도 앞뒤 분별없이 되는 수가 흔히 있은께로. 그것 다 전생의 지은 죄를 갚고 가노라고 그렇거니 생각혀야제. 그래 남원서 샐인한 사람은 워찌 되얏디야."

"사형이지 무슨 수로 살아남을 기요? 머 듣자니께 전주의 부자 놈도 관련이 되어 십 년인가 이십 년 징역살이 한다 카지요 아마.“

"할무이, 밥 펐는데요."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밥사기를, 무거웠던지 숙이는 얼굴이 빨개져서 들고 왔다. 밥사기를 포대기로 싸매어놓고 숙이 일어섰을 때

"아니, 자아가."

술을 마시던 자그마한 중년 사내가 목을 뽑아 올린다.

"야아야! 니 숙이 아이가!"

사내는 벌떡 일어섰다.

"?"

하다가 숙이

"아이고, 구식이아제요!"

쫓아가서 사내 옷소매를 거머잡는다. 그리고 울음을 터뜨린다.

"울 아배 보았십니까, 아제요!"

"참 기찰 노릇이네. 우찌 된 일고오, 대관절."

잔뜩 긴장한 영산댁은

"아비 되는 사람이 나헌티 맽기고 갔지라우."

못을 박듯 강한 어세로 말했다.

", 하기는 잘했다마는, 그라믄 니는 아배 간 곳을 모린다 그 말가?"

울면서 숙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몽치하고 가는 거를 지리산에서 보았다 카기에 나도 궁금했는데..."

구식이아제라는 사내는 울음이라도 참는가, 양쪽 입매가 아래로 처진다.

", 언제 일입니까!"

"지난 가실이다."

"."

몽치란 숙이 사내동생 재수의 별명이다.

"바쁠 긴데 나가봐라. 여기 있는 거를 알았인께 오며가며 앞으로 만낼 수 안 있겄나?"

사내는 영산댁의 눈치를 살폈다.

"."

숙이도 울음을 그치고 순순히 부엌으로 나간다.

"숙이허고는 친척간인 게라우?"

숙이를 빼앗아갈 사람인 것처럼 영산댁은 다그쳐 물었다.

"아니요. 숙이아비하고 친구..."

말끝을 맺지 못한다.

"그라믄 숙이아배도 사당패였더란 말이여?"

"그렇지는 않소. 어릴 적에 앞뒷집에서 함께 컸지요. 살기도 괜찮기 살았는데 그럴 사정이 좀 있어서 알거지가 됐지요. 어서 국밥이나 주소."

사내는 눈을 내리깔았다.

"거 오양이 반반하구마."

눈이 부리부리한 사내가 숙이를 두고 새삼스런 말을 한다. 순간 영산댁의 눈빛이 날카로워졌고 구식이아제도 거의 비슷한 몸짓을 했다. 영산댁은 국밥을 한 그릇씩 돌려놓는다. 술로 허기를 달랜 사내들은 아까 여자들처럼 허겁지겁 덤비지는 않았다.

"그럴 사정이 좀 있었다니 그게 무신 사정인고?"

눈이 부리부리한 사내가 또 물었다.

"남의 사정 말하믄 머하노."

묘하게 완강함을 나타내며 질문에 응하지 않는다.

"괜찮기 살다가 알거지가 됐다면 빚봉술 했나?"

"..."

"여편네가 달아났거나 아니면 몹쓸 병에 걸렸거나."

사내는 좀 집요했다.

"상처할 수도 있는 거지 하필이믄 와 달아나누."

구식이아제는 그 말이 걸리는 듯 반응을 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영산댁을 향해

"할무니, 저 아아 숙이 말입니다."

하고 정중히 나온다.

"배운 거는 없지마는 천성으로 요조하고."

"그렇기 말한께 뭣한 핏줄겉이 들리네. 요조하다?"

눈이 부리부리한 사내가 비꼰다.

"씨가 따로 있나? 나라가 망하믄 왕손도 거지가 된단다."

"대단하구나. 사당패 입에서 왕손? 왕손이 다 나오고."

그러나 구식이아제는

"클 때부터 아아가 조신하고 나무랄 데가 없소. 할무이, 부디 잘 키워주시이소."

영산댁에게 당부한다.

"걱정 마시요. 숙이아배가 보통 사람은 아닌개비여. 여거 떨어뜨리 놓고 간 걸 본께로."

영산댁이나 구식이아제가 한 말은 결국 일종의 엄포다. 숙이를 침노하지 말라는

"자식이라 카믄 죽고 못 사는데 여기 두고 갈 직에는 그 사람 천분 만 분도 더 생각했일 깁니다."

눈에 눈물 같은 것이 번득인다.

"국밥 식겄다. 어서 묵어라."

국밥 그릇에 코밑 수염을 적시듯 그릇을 들고 먹던 중늙은이, 한 마디 말도 없던 사람이 구식아제한테 말했다.

"어이구, 아배!"

별안간 부엌에서 공포에 질린 고함이 들려왔다.

"이거 무신 소리고!"

구식이아제가 젤 먼저 뛰어나갔다. 영산댁도 구르듯 나간다.

"아이구매!"

숙이 옷에 불이 붙은 것이었다. 당황한 숙이는 소리를 지르며 뛰고 있었다. 머리칼에도 불이 붙었다. 구식이아제가 기명물 통을 번쩍 들었다. 머리통으로부터 쏟아 붓는다. 숙이는 기절한 듯 부엌 바닥에 쓰러졌다. 영산댁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구식이아제 얼굴은 납처럼 변해 있었다.

"거 부석 앞에서 울었거마는. 불이 옮겨붙는 것도 모리고."

눈썹이 가느다란 여사당이 말했다.

 

 

12장 독창회

진주 시내 요소 요소에는 홍성숙 독창회를 알리는 포스터가 나붙어 있었다. 실물도 괜찮은데 커다랗게 박아넣은 사진은 실물보다 월등했으니 굉장한 미인으로 돼 있었고 조선의 꾀꼬리, 조선의 프리마돈나, 문화의 고도에서 초춘을 장식하는 일대 행사가 아닐 수 없다는 등, 동경 음악학교 졸업이라는 약력 소개의 글자도 대문짝만하였고 아무튼 요란한 포스터였다. 그런데도 천재적 성악가라는 구절이 빠진 것을 홍성숙은 대단히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문안은 홍성숙 편에서 대충 만들어 보냈는데 주최자 측이 포스터의 체제상 말을 줄이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아무리 얼굴 가죽이 두껍기로 차마 그것을 지적하지는 못하고

"포스터가 너무 빈약하지 않아요? 지방이라 그런지 모르지만 예술가를 대접할 줄 모르네요."

눈살을 찌푸리며 성숙은 그런 투정을 여러 번 하였다. 양교리댁에서도 성숙은 결코 대범하지는 못하였다.

"형부, 나 망신당하게 하면 알지요?"

"?"

"청중이 적거나 너절하면 나 못 견딘단 말예요."

"그러니까 삼분지 일의 표는 내가 책임지기로 했잖아."

"입장권만 책임지면 그걸로 끝나나요? 그 입장권으로 어떤 청중을 동원하느냐 그게 문제지요."

"허허어, 빈 자라만 메우면 될 거 아닌가."

약을 올린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렇게 안이하게 생각할 줄 알았어요. 서울 같으면 이런 일 신경 쓰지도 않을 건데 공연한 일 시작했나 봐요."

"노래 몇 곡 부르고 나면 끝나는 건데 뭘 그래. 진주서 처음 있는 독창회도 아니겠고."

"난 처음이란 말예요. 와서 창가나 부르고 간 사람하곤 다르다는 걸 형부는 왜 모르세요? 동경까지 가서 공부하고 왔으면서 무식한 사람같이 답답한 소리만 하구."

"내가 뭐 음악 공부하고 왔나?"

"음악을 듣는 귀, 귀 말이예요. 무식쟁일들 모아놓고, 소 귀에 경 읽기지 뭐. 뭘 알아야지요. 하니까 일본인들을 많이 동원해야 한다 그 말이예요. 예술엔 국경이 없다 하지 않았어요? 청중이 깨끗해야 노래를 부를 기분도 나구요. 꽃다발이나 화환 같은 것도 준비는 하겠지만 부윤이 보내는 것, 저의 권위 문제도 있지 않겠어요? 그 정도는 형부 노력에 달린 것이예요. 서울선 내가 독창회 한번 열었다 하면 왕족 귀족들도 꽃다발을 보내오는데."

왕족, 귀족이란 조용하를 지칭하여 한 말이었다.

"부윤이 보내는 것이라... 허허헛..."

양재문도 좀 어이가 없었던지 헛웃음을 웃는다.

"처제 말대로 하자면 일본인은 깨끗하고 조선 사람은 더럽다, 그 말인가?"

성숙은 순간 당황한다.

"누가 뭐 그런 뜻으로 얘기했나요? 소도시인 만큼 음악을 감상할 층의 수가 적으니까, 일본 사람들은 아무래도 서구식 교육도 먼저 받았고.“

"그건 처제의 잘못된 생각이오. 진주는 결코 소도시가 아니야. 적어도 고도, 인구는 적지만 어중이떠중이 각처에서 사람들이 모여든 부산하곤 달라. 도청 소재로 부산과 진주는 옥신각신하기도 했었지만. 내가 들었으니 망정이지 자긍심이 강한 진주 사람들 귀에 지금 한 말이 들어가기라도 했다면 독창회는커녕, 그러니 처제도 앞으로 언동에 있어서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양재문은 정색을 하고 나무랐다. 그러나 그의 처 홍씨의 경우는 달랐다. 동생을 위하여 그렇기도 했겠지만 자신의 높은 콧대를 더욱 높이자는 무의식중의 욕구가 이번 독창회에 열중하는 결과를 낳았다. 친정 집안을 과시하고 싶은 충동, 문벌이 좋다는 것은 이미 혀가 닳아지도록 말해온 터이고 자기 자신은 개명의 문이 덜 열렸던 시절이었던 만큼 집안 깊숙한 곳에서 고학이나 배우다 시집을 왔지만 내 동생은 동경 유학까지 했고, 그것도 조선에서는 손꼽기조차 어려운 여류 성악가, 바로 내 친정이 이러하다, 실은 홍씨에게도 홍씨 나름의 응어리 같은 것이 있었다. 양교리댁의 위세가 드높아서 항상 도도했었지만 앞에서는 굽신굽신, 그러나 서울 여자라 하여 경원당할 때가 있었고 설마 양교리댁이 시시한 가문하고 혼사했을 리 없다 하면서도 사람들은 암암리에 서울은 넓다, 못 보았으니 누가 알아, 인물이 좋으니까 낙혼인지 뉘 아나, 그런 것을 비치기도 했고 쑥덕공론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딸 소림의 신체적인 결함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 그런 딸의 결함 때문에 허정윤을 사위로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혼은 또한 비난을 샀다. 양재문은 남자니까 예사롭게 넘겼으나 홍씨는 묘하게도 도전적인 심사, 그런저런 것 때문에 성숙의 독창회는 말하자면 도전장 비슷한 것이라고나 할까.

"모모한 곳에 초대권을 다 돌렸다. 네 형부 얼굴을 봐서라도 만사 제쳐놓고 나올 거야. 뿐인 줄 아니? 초대권을 받고 감지덕지하는 사람도 많아요."

"언니, 거 무슨 섭섭한 말을."

"?"

"홍성숙 독창 들으러 오는 게 아니라 형부 얼굴 봐서 온다 그 말 아니예요?"

"애두 참, 노래를 들어봐야 네가 누군지를 알 거 아니냐. 많은 사람들이 서울 있는 널 어떻게 아니."

"하긴 그래요. 지방에서 뭘 알겠어요. 풍금 타며 부르는 창가나 알지."

형부한테 하던 말투, 그 투정이다.

"그런 소리 말어. 진주 사람들 보통 아니야. 서울 사람 뺨친다, . 옛날부터 풍류의 고장 아니니?"

"기생 끼고 노는 풍류 말이지요?"

"신파 연극도 진주서는 많이 먹힌다더라. 활동사진도 그렇고."

"내가 미치지. 신파 연극 딴따라하고 맞먹는다니. 활동사진은 또 뭐예요? 영화지. 언니조차 이렇게 무지몽매하고 보면 내가 미치지 않고 어떻게 해. 이래저래 서울서는 속이 상해서 바람 쏘일 겸 계획한 일인데 내 자존심만 빡빡 긁어놓고."

얼굴이 핼쑥해진다. 자존심을 빡빡 긁어놓는다는 말은 성숙이 조용하와 임명희가 별거를 했느니 이혼을 했느니 하던 소문을 상기한 것이다. 조용하가 참혹하게 자신을 버리기는 했지만 그들의 별거나 이혼의 소문은 분명 기분 좋은 일일 터인데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 성숙을 우울하게 했다. 명희가 이혼을 결심하고 집을 나갔는데 조용하가 혈안이 되어 그를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쁜 자식! 나쁜 놈!'

그날 산장에서 발길질이나 다름없는 언동으로, 그것은 결별의 선언이었으며, 낯가죽을 벗기듯 잔인한 수모였었다. 자살을 하든지 미치든지 그러나 성숙은 그럴 여자는 물론 아니었다. 본능적인 자위 수단으로 그는 남편에게 밀착해 갔었다. 자신의 명성? 하여간 그런 것이 땅에 떨어질 뻔했던 위험한 고비를 넘긴 성숙은 남편에 대하여 전보다 훨씬 강한 권태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먹다 남은 식은 밥 대하듯, 사사건건 남편의 하는 짓이 눈에 거슬렸고 신경질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무능하다는 말을 하루에도 몇 번이나 내뱉었다. 누가 살짝 건드려주기만 하여도 달아나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어디 조용하와 비견할 만한 사람은 없는가, 용감하게 이혼을 하고 조용하에게는 복수도 될 것이 아닌가.

"누가 너 자존심을 빡빡 긁니? 거리마다 나붙은 광고를 보렴. 얼마나 너를 우러러 받들었는데?"

"광고요? !"

"자랄 때부터 성질이 유별나기는 했지만, 제발 너도 그 성질 좀 죽여라. 세상이 개명되고 남자 못잖게 됐으니 망정이지 사대부 집에서 여자가 처신하기 얼마나 어려운지 너 알기나 해? 속이 언짢아도 원만하게, 상대를 칠적에 언성을 높이면 아니 되고, 아랫것들만 하더라도 낮은 소리가 더 무서운 게야. 처지가 같아야지. 모두들 내려다보고 사는데 화를 내고 언성을 높이면 그만큼 한 팔 내주는 꼴이 되는 거야."

"조용하게, 조용히 물어뜯어라 그 말이죠?"

성숙은 낄낄 웃는다.

"아니지. 조용히 숨통을 막아버리는 거야. 호호홋... 호호홋... 해서 날 보고 뭐래는 줄 아니? 김 안 나는 물이 뜨겁다."

자매는 소리를 합하여 웃는다.

"그는 그렇고, 언니."

"."

"소림이는 왜 여태 안 오는 거지요?"

"몸이 무거우니까 그렇지."

"집에 데리고 있지 왜 그랬어요?"

"지 남편 공부 끝날 때까지 우리도 그럴려고 생각했는데 허서방이 오면 아무래도 주눅이 드는 모양이야. 불편한 거지."

"남자가 뭐 그래."

"혼인 때 하도 말썽이 많아 풀이 죽은 거지. 살림을 내놨다고는 하지만 바로 옆이니까."

"그래 사위는 이뻐요?"

"사위 안 이뻐하는 사람 없대더라."

"거 말썽 피든 계집애는 어찌 되고?"

"적잖은 돈을 주었으니까, 일본으로 갔다든가 서울로 갔다든가."

"가서는 뭘 하누."

"떠났으니 우리 알 바 아니지."

"간도 크지. 허서방 처지가 딱했기로 여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천한 것이 의사 마누라가 되겠다구?"

"뭘 알아야 지방도 쓸 거 아니냐."

"두 사람의 금슬은 좋지요?"

"허서방이야 뭐,"

"저절로 굴러온 복덩어리 아이유?"

"소림이 성질이, 그애는 어릴 때부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 없는 아이였으니까 좀 걱정이구나."

"첨 언니."

"왜 또오, 겁난다 얘, 무슨 투정 나올까 봐."

"최참판댁 말이유."

"."

"그 댁에 초대권 보냈나요?"

"아니."

"왜요?"

"그 댁 형편이 어수선하여 망설이는 중이란다."

"남편 땜에?"

"그 일도 작은 일은 아니지. 독창회같이 사람 모이는 데 나올 부인도 아니고."

"무슨 일이 또 있어요?"

"작은아들에 관한 일인데 소문을 듣자니까."

"이번의 학생 사건 때문이군."

"학생 사건 때문인데 경찰서에서 많이 맞았다든가, 병신이 됐다는 말도 있고."

"정말이에요?"

성숙이 놀란다.

"소문이니까 확실한 건 모르지만, 정학인지 뭔지 그런 처벌이 풀려서 학교 나오게 됐는데 나타나지 않는다는 게야. 진단서를 학교에 냈다든가."

"아버지 땜에 당했을까요?"

"글쎄... 아이 성질이 상당히 팔팔하다 했으니 반항을 하다가 당했는지 모르지. 최참판댁 그 부인은 일본 사람들하고 사이가 나쁘지도 않다던데, 관가하고 잘 통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머닐 봐서 병신이 될 만큼 때렸을 리도 없고."

"그럼 언니, 찾아가 봐요."

"뭣하러?"

홍씨는 뒷걸음하듯 말했다.

"초대장은 어떻게 됐든 위로 삼아 가볼 수도 있잖아요?"

"나는 싫다. 소림이 일도 있었고."

"소림인 시집갔잖아요."

"하지만 오고가고 한 사이도 아닌데."

"그러니까 앞으로 오고가고 할 사이가 되는 거예요. 해로울 것 없잖아요? 나도 기찻간에서 한 번 인사를 나눈 적이 있어요. 왜 전에 얘기했잖우?"

"그래도 그렇지."

"양가가 비슷한 수준인데 언니도 답답해. 진작 그런 집하고는 사귀어두는 거예요. 언니 상대할 사람이 좁은 지방에서 몇이나 된다구, 안 그래요? 체통 없이 아무나하고 교제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언제 아무나하고 교젤 했니? 어림없다."

하여 자매는 가장 고상하게 치장하고 가진 것 중에서 가장 값진 패물로 몸을 장식하고 최참판댁을 향하였다.

"마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안자가 조심스럽게 방 밖에 와서 말했다. 서희는 물었다.

"어디서 오신 손님이냐."

"양교리댁에서 왔다 하면 아실 거라고, 부인네 두 분입니다."

"드시라고 해라. 문간에 계시냐?"

"."

대문 앞에 서 있던 자매는 안자에게 안내되어 들어왔다. 대청에 서희는 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방까지 들어오자 서희는 팔을 들어 보이며 앉기를 권하였다.

"안녕하세요, 부인."

성숙이 먼저 인사를 했다.

"이거 초면은 아니지만 서로 인사가 없었습니다."

홍씨도 인사를 했다.

", 안녕하세요."

얼굴은 몹시 여위었으나 서희한테서 흐트러진 구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뜻밖의 방문인데 의아해하는 빛도 없었다.

"어떻게 무슨 일로?"

"무슨 일이 있기보다 한 고장에 살면서 인사가 없다 하기에 초대권을 빌미 삼아 언니보고 가자고 했지요. 실은 저의 독창회가 있어서요. 하지만 못 오실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있는 것도 예가 아닌 듯싶고."

성숙의 입에서 말이 줄줄 나왔다.

", 그렇습니까. 구식이라 음악은 잘 모릅니다만."

성숙은 핸드백을 열고 초대권을 꺼내어 서희 앞에 내밀었다. 서희는 그것을 받아들고 한 번 읽어보고서는 봉투 속에 도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 문갑 위에 올려놓는다.

"일부러, 고맙습니다."

간다 못 간다는 얘기는 없었다.

"따님은 결혼했다지요."

홍씨에게 말을 건넨다.

"뉘에게 들으셨습니까?"

"박선생님한테 들었지요."

", 부끄럽습니다."

"무슨 말씀을."

"지난 얘기니까, 이 댁 큰 도령이 탐나서 우리 내외가 안달복달했었지요."

홍씨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는다. 서희도 웃음을 띠며

"아직 장가갈 나이가 아니어서."

"혼사란 항상 그렇게 뜻대로 아니 되는 모양입니다. 짝이 따로 있는가 부지요. 그러니까 제 딸의 팔자 아니겠습니까."

홍씨는 순간 서글퍼하는 표정을 짓는다.

", 그런가 부지요."

"그러니까 바깥어른께서는 오는 여름에 나오신다지요?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았을까."

이번에는 성숙이 말했다.

"살다보면 마음고생은 항상 하는 거 아닐까요."

"하지만 바깥어른께서는 내 민족을 위해 성상을 보내셨으니 고생은 하셔도 보람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우리들도 그분 고생을 감사하게 생각해야겠지요."

"그런 사정이라면 보람도 있겠습니다만 운수가 불길하여 그렇게 된 것뿐이니까. 아닌 게 아니라 인사를 받을 때면 면구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고국에 돌아오시지도 않고 이국땅에서 고생을 하셨으니."

"본래 우리는 금슬이 좋지 않아서, 그분이 그곳에 남은 것은 순전히 개인의 사정이지요. 말하자면 제가 소박을 맞았다..."

서희는 천연스럽게 거짓말을 해놓고 희미하게 웃는다. 홍씨와 성숙은 서로 마주보며 거북해하는 눈치였다.

"네에, 어렵기는 어려웠을 거예요. 부인께서는 벼랑에 핀 꽃같이 고귀하시고."

마침 안자가 차를 끊여 내왔다.

차를 마시면서

"이번에는 아드님 때문에 근심하셨지요?"

홍씨가 슬쩍 떠본다. 어쩔 수 없이 서희 얼굴에는 고통의 빛이 지나간다. 맞았느니 병신이 되었느니 진주의 소문은 그러했고 평사리에서는 강물에 떠내려갔다는 끔찍스런 말들이 잠시 돌았으나 그것은 모두 헛소문이었다. 실은 윤국이 집을 나간 것이다. 걱정하지 말라는 편지가 집 나간 지 나흘 만에 진주 집으로 날아든 것이다. 서희는 동경에 있는 환국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필시 서울에 갔으리라. 그리하여 장서방이 서울로 올라갔고 임명빈을 통해 수소문해보았으나 벌판에서 바람 잡기, 윤국의 흔적은 묘연하기만 했다. 결론으로 혹 만수에나 가지 않았는가, 해서 우선 학교에는 박의사가 떼어준 진단서와 함께 결석계를 내놓고 있는 형편이었다.

서희가 침묵을 지키자 성숙은 이 집에 찾아온 목적이랄 수 있는 얘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저기, 서울 소식은 더러 들으세요?"

"뭐 별다른 소식이 있겠습니까?"

"그게 아니구 임역관댁의 근자 소식은 아마 모르실 거예요."

양쪽 입꼬리를 치올리며 성숙은 웃는다.

"하긴 그 언니 마음 고생도 많이 했을 거예요. 역관 집 딸이 손꼽는 명문에, 후취 자리긴 했지만."

서희는 가만히 성숙을 바라본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명희언니에겐 안된 얘길까요? 이혼당한 것은 해방을 얻었다는 뜻이 될든지도 모르겠어요."

소문과는 반대되는 얘기를 한다. 자존심을 빡빡 긁어놓은 얘기, 조용하가 혈안이 되어 명희를 찾고 있는데 반대로 이혼을 당했다.

"이혼..."

하면서도 서희는 조용히 상태를 바라볼 뿐이다. 서울 다녀온 장서방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명희가 윤국이 일로 무척 걱정을 하더라는 얘기, 아버지가 계시는 형무소 근처를 배회할지 모르니까 자신이 틈나는 대로 그곳에 자주 둘러보겠다 하더라는 얘기 정도였다. 그리고 서희는 조용하와 성숙의 관계를 전혀 모른다. 부산에서 두 남녀가 나란히 여관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환국이 목격했지만 서희가 맹장염 때문에 병원으로 실려가고 하는 소동이 있었고, 설령 그런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환국은 어머니는 물론 남에게도 말할 성질이 아니었다. 서희가 단단한 성벽같이 명희 이혼에 관하여 침묵을 지키게 되니까 자연 성숙은 횡설수설이 될밖에 없고 그것이 전염이 되어 성숙이보다는 분별이나 자제심도 있는 홍씨마저 횡설수설이 되었고 두 여자는 다같이 이 집을 빠져나갈 것을 간절히 바랐음에도 저 혼자 굴러가는 바퀴처럼 요설을 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간신히 간신히 수습하여 그들이 작별 인사를 하고 나가는 것을 본 서희는

"앞으로 저 사람들이 오거든 나 없다 하여라."

", 마님."

서희는 방으로 들어오면서

"까마귀들."

남의 불행을 쪼아먹고 사는 까마귀, 희번덕이던 눈빛은 소름끼치도록 기분 나쁜 것이었다. 사실 서희는 윤국으로 인한 근심 때문에, 그들을 태연히 대한 것도 의지의 힘이었고 윤국의 가출을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심신을 가누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명희의 이혼 소식에 귀를 기울일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서희는 환국이를 믿듯 윤국이도 믿고는 있었다. 부잣집에서 아버지 없이 자란 아이들, 하면 의지 박약, 놀기 좋아하고 방탕하고 잔인성을 띤다. 그러나 환국이도 그러했으나 윤국의 성격도 매우 강건했다. 서희를 외롭게 하고 슬프게 할 만큼 윤국이는 부유하다는 사실을 혐오했으니까. 왜 부자냐, 왜 가난하냐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끊임없는 의문이다. 사춘기의 막연한 불만, 손짓하는 미지에 대한 유혹 때문에 가출한 것이 아님을 서희는 믿는 것이었다. 학생사건이 그의 뜨거운 피를 들끓게 했으며 기다린다는 것은 자기 합리, 도피주의로 간주했을 것이 분명했고 학업을 출세의 과정으로 보았을 것도 확실하였다. 윤국의 그러한 확고한 신념이나 이상 때문에 서희는 또한 아들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무렵 윤국은 패잔병같이 평사리 마을을 향해 걷고 있었다. 몰골이 말이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윤국은 숙이가 걸레도 빨고 울기도 하던 그 장소를 찾아간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뭔가 정리를 해야 할 일이 있을 듯했고 만날 수 있다면 숙이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이 행한 일, 생각하는 일을 이해하지는 못하여도 열심히 들어줄 거란 기대 같은 것이 있었다. 어디를 가든 학생이 아니면 소년으로 제외되기 일쑤였고 집안에서는 귀한 도련님, 주변에서는 부잣집 아들, 사금을 터놓고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장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사람은 홍수관이었다. 그만은 말을 하지 않아도 가슴을 터놓고 대해줄 것만 같았다. 꾸밈 없이 거짓 없이 어느 길을 가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서로가 양해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를 만남 수는 없다. 혼자서 남몰래 울던 숙이, 그가 울지만 않았어도 마을에 사는 계집아이쯤으로 생각하고 무심했을 것을, 윤국은 그 우는 모습이 절실했고 정직하게 비치였다. 가난하고 병든 아비와 어린 동생을 잃고 남의 집에 얹혀사는 숙이. 동정 같은 것도 아니었다. 애정 같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지쳐버린 자기 자신에게 용기와 인내를 불어넣기 위하여 불행한 숙이를 만나고 싶었는지 모른다. 윤국은 바위에 가려진 모래밭에 주저앉았다.

'배고프다.'

호주머니 속에서 먹다 남은 인절미를 꺼내어 베어 먹는다. 강물은 봄볕에 번득이고 있었다. 바람은 한결 부드럽다. 서울의 하늘이 생각난다. 가슴을 펴고 서울 거리를 걷던 생각이 난다. 하늘은 높고 넓었으며 두려울 것이 없었던 자기 자신의 넓은 가슴, 젊음이 자랑스러웠고 입은 채 집 나갔기 때문에 몰골은 말이 아니었지만 비로소 자기 자신은 자기 능력에 의해 가고 있다는 확신, 희열에 전율을 느끼곤 했었다. 서울서는 줄곧 걸었다. 서대문 형무소 앞을 우두커니 서 있곤 했었다. 역 대합실에서 잠을 잤고 거지를 따라가서 다리 밑, 창고 속에서도 잠을 잤다. 일 전짜리 떡, 이 전어치의 팥죽으로 끼니를 때운 일도 여러 번이었다. 얼마 동안은 중국집의 배달원 노릇도 했다. 장바닥을 싸돌아다니며 역까지 짐을 들어다주고 약간의 돈을 받기도 했다. 장터에서는 금찬이라는 소년을 사귀게 되어 그가 가르쳐주는 대로 성냥을 받아 팔아보기도 했다. 팥죽장수 할머니는 예사 아이 같지가 않다 하며 덤으로 팥죽을 주곤 했다. 불량배들한테 얻어맞은 일도 있었고. 몰론 그런 생활을 하려고 윤국이 서울 간 것은 아니었다. 처음 집을 나와 서울을 향했을 때 그는 '청조'라는 잡지 한 권을 길잡이로 가지고 있었다. 월간지는 아니었으나 몇 가지 잡지 중에서 윤국은 '청조'가 가장 은유법이 능하다는 생각을 한 일이 있다. 총독부 검열관의 눈을 속이는 그 은유법, 그러나 그런 것보다 '청조'는 계명회사건을 지극히 간략하게 소개한 바가 있었고 선우신을 비롯하여 계명회사건에 연루된 사람 중 몇 사람이 '청조'의 필자였던 때가 있어서 그것을 길잡이로 삼았던 것이다. 청조사를 찾아가면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으리라, 계산한 것이었다. 계산대로 윤국은 그런 사람들을 만났다. 모두 훌륭한 사라들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공부를 계속하라는 것이었고 연도 연줄이 있어야 창공을 날지 연줄이 끊어지면 나뭇가지에 걸리거나 지붕 위에 떨어져서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고 비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 나이가 어려, 목적은 크고 뚜렷하다 하더라도 방법은 캄캄절벽 아니겠느냐, 방법이란 분별이며 분별은 나이와 더불어 정교해진다. 어떤 사람은, 자리를 잃으면 아무 일도 못하다, 소년은 본시 있던 그 자리에서 일하라, 호구를 위한 일자리를 구한다든지 고학을 해보겠다면 별문제겠으나 학생운동도 학교를 잃고는 못해, 학교가 바로 현장이다. 노동자는 공장이 현장이듯 농민은 농토가, 룸펜은 다시 뒷골목이, 또 어떤 사람은, 덤빈다는 것은 나를 망치고 동지를 망친다고 했다. 또아리를 틀어 지금은 도사릴 때라고도 했다. 다 옳은 말이었다. 앞뒤가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윤국은 너무 옳은 만큼 앞뒤가 맞는 만큼 그런 만큼 지혜롭고 순수할까 싶었다. 차라리 별말이 없었던 선우신이란 사람이 가장 인상에 남았다. 그들은 모두 내려가는데 여비로 보태 쓰라며 얼마간의 돈을 내밀었으나 윤국은 받지 아니했다. 그랬을 적에 그들의 눈은 둥그레졌다. 의외라는 표정들이었다. 윤국은 어떤 사람에게도 자기 아버지가 김길상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강 건너 대숲이 파아랬다. 대숲 그늘이 떨어진 강물도 녹색이다. 강물은 녹색도 되고 청람빛이 되기도 하며 하늘색 때로는 흰색에 가까워질 때도 있다. 그리고 아침에는 황금빛, 저녁놀에는 진홍빛, 우중충한 잿빛일 때도 있다.

'그 빛들을 다 가져야지. 하늘의 빛 땅의 빛 모든 것을 내 속에 가져야지!'

꾸들꾸들한 마지막 떡조각을 입속에 집어넣고 손을 털다가 윤국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본다. 손바닥을 뒤집고 손들을 내려보다. 빙긋이 웃는다. 일어서서 강물 가까이 가서 손을 씻고 얼굴을 씻는다. 숙이가 그랬던 것처럼 얼굴을 씻는다. 옆구리에 끼워둔 수건을 뽑아 얼굴을 닦는다.

'참 따뜻하다. 남쪽은 따뜻하다. 어차피 앞으로도 어머님은 속상해 하실 거야. 자꾸자꾸 속상하시면 그것도 습관이 되어 견딜 만한 거구. 서로 생각은 다르지만 어머님도 보통 여성은 아니니까. 내 어머님처럼 의연한 여성을 나는 아직 못 보았다. 형은, 그래 형은 어머님 땜에 마음 아파하겠지. 그러나 내 행위를 비난하지는 않을 거야. 형도 나처럼 하고 싶었을 테니 말이다. 나폴레옹은 불가능이라는 글자를 사전에서 빼버리라 했다. 나는 나폴레옹 같은 것 존경 안 해. 그러나 저 높은 하늘과 광활한 대지에 내가 서 있고, 나는 어디든 걸을 수 있다. 나는 불가능을 향해 걸을 수 있다! 불가능이 있기 때문에 불가능은 목표가 된다. 따뜻한 밥, 따뜻한 옷 그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조그마한, 아주 조그마한, 아주 조그마한 일부에 불과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에 매달리어 노예가 된다! 부자일수록 더욱 더 노예가 된다! 내가 나에게 노예 되기를 거부해야만 남도 해방시킬 수 있고 내 나라도 찾을 수 있다. 서울 사람들은 뭔가 모르지만 훌륭한 말들은 하고 있지만 어째서 거미줄에 묶인 사람같이 보였을까. 나는 수관형이나 숙이를 보았을 때만큼 감동하지 않았다. 방법, 방법, 방법이라 했다. 자리, 자리, 자리라고도 했다. 나는 그것을 많이 생각해보아야 해. 그 사람들과는 다르게 말이다. 형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내 마음을 좀더 정확하게 전과는 다르게 전할 수 있었을 터인데.'

"아이구마!"

윤국은 얼굴을 돌렸다. 통새끼를 인 숙이였다.

"울려고 왔나? 놀라기는 왜 놀라."

", 거진 줄아, 알고."

"아아."

윤국은 소리 내어 웃는다. 그러나 숙이 얼굴이 파아래진다. 미친 줄 생각한 모양이다. 얼마 전에 주막에서 바우가 하던 말을 엿들었던 숙이는 거진 줄 알고 놀랐고 윤국인 줄 알고 반가웠으며 그가 웃었기 때문에 또 기겁을 한 것이다.

"나 거지도 아니구 미치광이도 아니야. 여기 좀 있다가 집으로 갈 거니까. 한데 발등은 왜 그리 싸맸지? 어어? 머리털은?"

윤국은 바위에 등을 붙이고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 너 심하게 당했구나! 누가 그랬어!"

", 아니요."

"누가 그랬느냐니까!"

"저기 부석 앞에서."

"?"

"부석 앞에서 우, 울다가 불, 불이."

윤국이 어이없다는 듯 숙이를 쳐다본다. 아닌 게 아니라 머리털은 불에 그을린 것이었다.

"너 울보구나. 다음에는 울다가 강물에 떠내려가겠다."

"강물에 떠내리갔다는 얘기사, , 도련님을 두고, , 소문이 그리났십니다."

"그래? 허허헛..."

숙이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을 해놓고 당황한다. 그리고 통을 내려놓고 걸레를 빨아야 할지 아니면 그냥 돌아가야 할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생각 같아서는 뛰어가서 영산댁에게 도련님 살았소! 돌아왔소! 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생각해보니 감추어야 할 그 아무것도 없는데 감춘 것이 드러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보다 철사줄로 얽어놓은 듯 꼼짝할 수가 없다.

"그럴 만도 하지. 갑자기 사람이 없어졌으니까. 강아지도 없으면 찾지.“

자신이 행한 일, 생각하는 일을 이해하지는 못하여도 숙이는 열심히 들어줄 것이란 기대를 가졌었는데 윤국은 머리털이 그을린 숙이를 보고 있노라니 마음속으로 웃음이 나올 뿐 자기 자신의 찬란한 얘기는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말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하고 동생 소식은 아직도 몰라?"

"저기, 저어, 구식이아제가."

"구식이아제?"

", 아는 사람인데, 아배 친군데, 지리산에서 누, 누가 보았다고."

"으음, 그래서 아궁이 앞에서 울었구나."

"."

숙이 입에서 순순히 대답이 나왔다.

"나 배가 고픈데 어쩌면 좋지?"

", 집에 어서 가시요."

"아니야. 여기 더 있고 싶어."

"그라믄 우짭니까?"

숙이는 또다시 안절부절 한다. 여전히 통을 이고서.

"주막에 가서 밥 한 덩이 갖다 줄래!"

", 야아."

부리나케 이고 있던 통을 내려놓는다. 비로소 통에서 해방된 것 같다.

"떠들지만 않으면 할매보고 얘기해도 괜찮다. 말 안 하면 나중에 숙이가 곤란해질 거야."

숙이는 아주 마음이 놓이는 듯 뛴다. 손살같이 뛰어간다.

"할무이!"

"아니, 자아가 걸레 빨러 갔는디 워찌 빈몸으로 온다냐?"

"할무이!"

"워찌 들심날심이여? 무슨 일 생겼남?"

"저기 최참판댁 도련님이."

영산댁의 눈이 화등잔같이 벌어진다.

"그려서, 싸게싸게 말하더라고."

"강가에."

"강가, 강간디 워떠크름 되었어. 싸게싸게 말하더라고."

"기시요."

"기시? 다 죽기 생겼남?"

"아니요, 그게 아니고 배고프다 하심서 밥 좀 갖다달라고 그러요."

"이 제집아, 그럼 그렇다고 진작 말헐 것이지 가심이 뛰어나 죽겄네잉."

영산댁은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는 윤국이 시체가 되어 강가에 떠밀려 있는 것을 상상했던 것이다.

", 그러면 배고프다? 무슨 소리 허는 기여?"

"밥을 굶고 걸어왔는가배요."

", 그려? 그라믄 너는 한달음에 뛰어갔다오더라고. 최참판댁에 가서 먼저 알리는 기여. 밥은 내가 가지고 갈 것인께 싸게 하더라고."

"아니요. 도련님이 떠들지 말라 하심서 할무이한테 말하여 밥 좀 갖다 달라고."

"죽게 생기지는 않았남?"

"아니요. 말짱해요, 옷만 거지."

", 그려 무슨 사연이 있긴 있는개비여. 그릇 깨끗허게 혀서 국밥부터 한 그릇 말더라고. 싸게 혀."

영산댁은 정신 나가게 서둔다.

영산댁과 숙이가 국밥을 가지고 강가에 갔을 때 윤국은 바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태양과 눈싸움이라도 하듯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이구 도련님, 워찌 된 일이라요? 이 무슨 형상인 게라우?"

"할머니, 걱정 끼쳐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나 괜찮소."

윤국은 그야말로 게 눈 감추듯 국밥 한 그릇을 먹어치웠다.

"몹시 배가 고팠던 모앵인디 집으로 어서 가시야겄소."

"해가 지면 갈 거요."

"그라믄 우리 주막에라도 가십시다요. 따끈한 국밥 한 그릇 더 잡수셔야겄는디."

"이제 됐어요. 할머니랑 다 가시오."

"아니어라우. 그럴 수는 없제요잉. 그러다가 도련님 다른 곳으로 후딱 떠나시면 우리가 무슨 낯으로 마님을 대할 것이요? 사게 가시시요."

"허 참."

윤국은 웃는다.

"할머니도 생각해보시오. 할머니도 놀랬지요? 하면은 집에까지 가는 동안 몇 사람이 더 놀랄 것 아니겠소?"

"그는 그렇구만이라우. 그라면 좋은 수가 있지라. 우리 주막에 가시시면 숙이더러 살픈히 옷 가져오게 헐 것이여. 그라믄 되덜 않겄소?"

영산댁은 달래듯 말했다.

"허 참, 괜찮데두 그러네."

"그러면 좋아라우. 해질 때까지 우리도 여거 함께 있일라요. 맘 변해서 어디 또 가부리면 큰일 날 것인께."

영산댁은 모래밭에 주저앉는다.

"할머니 고집도 여간 아니구먼. 나 조금도 이상하지 않소. 거짓말도 안 한다 말입니다."

"야아, 나아 고집이 센 늙은이여라. 몇 시간이고 이러고 있을 것인께 도련님 생각대로 허시시요."

윤국은 할 수 없었던지 일어섰다.

"그럼 갑시다. 주막에 가면 국밥 한 그릇 더 먹을랍니다."

웃는다.

"암만, 국밥만 드리겄소? 생각 잘 혔소. 마님께서 얼매나 근심을 혔을 것이요? 잘 오셨지라. 숙아, 너는 싸게 가더라고, 가서 갈아입을 옷이랑, 어여 가는 기여."

영산댁은 망아지 한 마리 앞세우듯 윤국이를 앞세우고 주막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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