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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4-1-1

토지 4부 1편 삶의 형태

 

1편 삶의 형태

서(序)

어디로 가든지, 특히 소도시나 소읍 같은 곳은 거의가 다 그러한데, 양과점을 위시하여 담배 가게, 이발소, 목욕탕, 대개 그런 비슷한 업종은 일본인 경영이다. 다른 업체라고 그렇지 않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비교적 일인과의 접촉이 잦은 업종인 데다가 눈에 띄어야 장사가 되고 사업이 되기 때문인데, 눈에 띄어야 한다는 것은 결국 대중적이라는 내용이며 눈에 띈다는 그 자체가 벌써 식민지 백성들의 하층 구조에까지 스며들어 일상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일상화되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이 조선의 산천과 사물과 사람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은 보급이 된 지가 오래지 않아 그렇기도 하겠으나 다만 생소하다 하여 오는 거부감만은 아닐 것이다. 그 새로운 업종은 어디서 왔는가. 누가 들여왔고 누구의 손에서 경영이 되는가. 일본에서 건너왔고 일본인 그들에 의해 주로 경영이 된다는 사실, 그 사실에 대한 적개심이나 거부의 감정을 쉽사리 지적할 수 있을 것이지만 한편 유교 사상에 길들여진 조선 백성들의 잠재된 의식 속에는 예절과 검소 그 격조 높은 선비 정신의 잔영이 있었을 것이요, 생략할 수 있는 데까지 생략하는 세련된 미의식, 수천 년 몸에 배고 마음 깊이 배어 있는 안목에서 본다면 서양 것은 요란해 뵈었을 것이고 일본 것은 저속하고 치졸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서양 것, 일본 것이 혼합된 그같은 새로운 업종을 이용하고 거래하면서도 못마땅했을 것이며 보수파들은 더더구나 모멸하고 혐오하기도 했을 것이다.

곡물과 면포와 시탄이면 족하였던 종전까지의 서민들, 하기는 어떤 세월, 태평성세라던 치하에서도 그런 것들은 충분했을 리 없고 늘 흡족하지 못했을 것인데 하물며 일제에게 강토를 빼앗겼고 인성이 유린당하는 민족적 수난 속에서 없어도 생존이 가능한 과외의 것들, 서두에서 말한 바 있는 그런 것들이 서민들 생활에 기어들어가고 있다. 얼핏 생각하기엔 수수께끼요 이상한 일이다. 이씨 왕조가 무너질 그 무렵만 해도 바다를 건너온 문물은 싫든 좋든 지배층에 속하는 것, 언감생심 눈깔사탕 비누 한 조각을 어디서 구경했겠는가. 한다면 일본 그네들이 염불 외듯 하는 말인데 미개국을 개명시킨 시혜국이란 것도 그럴싸하긴 하다. 어떤 경박지사가 아이스크림의 맛을 어찌 나폴레옹이 알소냐! 하며 현대 문명을 구가했다던가, 그런 가락으로 말한달 것 같으면 연산군도 전차는 못 타보았을 것이다! 조선의 서민들이라고 뽐내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뻔한 이치는 동쪽에서 바라보는 산과 서쪽에서 바라보는 산의 모습이 다른데 어쩌랴. 금관에 용포도 왕이 쓰고 입으면 왕을 나타내는 것이요, 종이 쓰고 입으면 조으이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니, 연이나 지금은 배부른 종의 얘기를 할 때는 아니다. 이 대명천지 굶어죽고 얼어죽을 자유는 있을지언정 섬겨야 할 강산도 상전도 모두 괴멸되어 없는 터에 종의 뿌린들 남아 있을라구. 각설하고 편리하다는 것, 소위 그 위생적이라는 것, 혀끝에 감칠맛이 남는다는 것, 그걸 누가 모르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금종이 은종이에 싼 유리통 속의 꿈과 같은 고급 과자 무슨 옥이니 헌이니 하는 명이 찍힌 생과자를 아무나가 먹는가. 사십 전 하는 'GGC', 십오 전의 '가이다', 그런 고급 담배를 아무나가 피우는가. 재주껏 발돋움을 해보아야 '메이지 캐러멜' '모리나가 밀크'가 고작이며 담배는 십 전짜리 '피전'이 상한선, 조선인은 그 정도로 상류에 속한다고 착각들 한다. 거의 모든 사람은 엽초를 피웠고 젊은 층은 '마코'하는 오 전짜리 담배를 피운다. 아이들 역시 동전 한 닢으로 향료도 없는 흑설탕의 눈깔사탕 한두 개, '센베이'가 두세 개, 그걸 입에 물면 행복해지는데 단순한 그 행복도 위협을 받고 마음에 상처를 받아야 얻어진다. 과자점의 하얀 앞치마 입은 오카미상(여주인)은 동전을 내미는 아이를 노려보기 일쑤였고 과자 집게가 아이손에 닿지 않게 사탕을 떨어뜨려주곤 했었다. 식민지의 서민들과 일본인 업주와의 관계는 늘 그런 식이었고 거래라는 것도 대강 그런 정도였지만 '마코'를 피우고 눈깔사탕을 먹는 편이 절대 다수인 만큼 영업 성패에 무관하다 할 수 없건만 일인업주는 소비자를 거지 보듯 오만불손하였고 식민지의 가난한 백성은 내 돈 내고도 빌어서 먹는 시늉을 해야만 했다. 하기는 농토에서 잡초같이 뽑혀나간 농민들과 뭐 다를 것이 별로 없다. 소도시나 소읍에서 우왕좌왕하는 가난뱅이 소비자도 어차피, 조만간에 뽑혀서 버려질 잡초인 것은 매일반이며 결국 거지로 전락할밖에 길이 없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같은 부동 인구는 본래가 농민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남부여대 땅을 찾아 간도로 만주로 떠났고 모집에 휩쓸리어 광산 등, 노동력을 팔러 일본으로 건너갔고 혹은 하와이에 농장 노예나 진배없는 그런 조건으로 이민 간 사람들, 나머지가 이곳의 부동 인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상대대로 살던 땅에서 쫓겨나 산 설고 물 설은 남의 고장에서 그들의 처지가 나을 것도 없겠으나 소도시로 소읍으로 밀려나와 방황하는 무리의 참상 또한 목불인견인 것은 사실이다. 그들 무리를 살펴보건대 거리마다 밥 빌러 다니는 걸인들이 태반이요, 부두, 정거장, 여관, 저잣거리에는 팔짱 낀 지게꾼이 그리운 님 기다리듯 짐을 기다리는 광경이 그들의 형편이었다. 일본인 왈, 조선인은 게으르다, 조선에는 웬 거지가 이리 많으냐, 그 실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총독부에 가서 물어볼 일이다. 가렴주구에 항거하는 민란도 수없이 있었지만 조선조 오백 년, 나라에서는 공전이라 하며 농민으로부터 땅을 걷어 들인 일은 거의 없었고 설사 걷어들였다 한들 결국 조선 백성이 경작하게 마련, 사유지의 경우도 땅문서라는 것이 애매모호했으나 땅문서 이상으로 윤리 도덕이견고하여 남의 땅을 도적질하는 일은 없었다. 항상 족하지 못했지만 마을마다대개 객사라는 것이 있었고 여염집에서도 한두 끼의 끼니, 잠자리를 거절하는 풍속이 아니었기에 나그네는 있었으나 거지는 흔치 아니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삼천리강산, 이 땅으로 쫓겨간 사람이 부지기수인데 이 불운한 강산 거리거리에 거지들이 떼 지어 방황하고 있는 것인가. 일인들 왈 조선에는 웬 거지가 이리 많으냐, 총독부에 가서 물어볼 일이다. 땅을 악탈하여 배가 불러 터지게 된 동척에 가서 물어볼 일이다. 조선인은 게으르다. 어째 게으른가 그것 역시 총독부, 동척에 가서 물어볼 일이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내쫓긴 수많은 사람들, 날품팔이 행상, 남의집 고공살이, 그런 일자리나마 과연 충분하며 입에 풀칠할 만한 수입인가. 그러나 어쨌든 거지가 아닌 그런 부동 인구가 우선은, 앞서 말한 새로운 업종의 구매자요 이용자인 것만은 사실이다. 일자리를 얻기 위하여, 얻은 일자리를 부지하기 위하여, 장사를 하기 위하여, 상투가 잘렸으니 이발소라는 곳에 가서 머리를 깍아야하고 등물할 내 집, 마을의 시내도 잃었으니 목욕탕에 가서 몸도 씻어야 한다. 이발관에서는 머리에 바르는 자쿠 냄새가 났다. 활동사진관 주변에서 올백한 건달들이 사이다. 라무네 등을 마시며 오가는 사람들에게 면도날을 숨긴 새로운 직종이요 업체다. 칼날과 섹스, 그것이야말로 진실로 일본의 수천 년 역사의 진수가 아니었던가. 목욕탕에선 '가오시켄'이라는 비누 냄새와 우데다 크림의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등바닥까지 회칠을 하는 일본 기생을 연상하게 한다. 목욕탕에서는 언제나 그들 일본 기생들을 볼 수 있었다.

늙은 할미는 손녀를 보며 물었다.

"머 묵노?"

"사탕."

"어이서 났노?"

"아부지가 한푼 주데요."

"댓끼놈의 가시나! 양식도 못 팔아묵는데 배부릴 기라꼬 그거를 묵나! 회만 생기고 이빨은 안 썩을 기든가? 애비도 애비다. 죽물도 안 들어간 창자에 사탕이 웬 말고."

내일이 없는 아비 어미의 자포자기한 생활, 자포자기한 사랑 때문에 아이는 배도 안 부르고 이빨만 썩을 사탕을 먹게 된다. 떡 할 쌀, 엿을 고을 엿기름 한줌이 없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없는 것이 어디 그것뿐일까. 코딱지만한 남의 곁방살이, 처마밑에 부엌이며 아궁이에 지필 나무 한 가치 없고 간장 된장도 사먹어야 하는 뜨내기살림, 아이 입에 사탕만 물리던가? 돈 생기면 허기부터 달래려고 우동을 사먹게 된다. 우동만 사먹는가? 환장한 가장은 야바위판에 주질러앉아 돈 털리고 호주머니 바닥 털어 술 사먹고 돌아와서 계집자식 친다. 내일이 없는 뜨내기, 그들은 모두 허무주의자다. 허무주의는 소비를 촉진한다. 바닥을 털어가며 사는 사람들, 끝없는 노동력을 제공해도 바닥은 메워지지 않는다. 노동을 팔고 싶어도 팔 자리가 없어 빈털터리요 어쩌다 얻어걸리는 품팔이, 급한김에 아이 입에 사탕 물리고 허기 달래려고 우동이며 국수며 혹은 떡이며, 해서 이들은 왕도 손님도 아닌 거지의 시늉을 내는 소비자인 것이다. 머지않아 거지로 전락할 사람들인 것이다. 청루에 몸을 판 여자는 순결할 때 쓰던 녹두가루, 팥가루 같은 것 대신 비누를 쓰고 화장품을 소비한다. 혀가 꼬부라지게 과자를 먹고 창자가 썩을 만큼 술을 마시고 어차피 성병 따위로 천당 갈날이 머지않았으니 말이다. 아편보다 못할 것이 없다. 저속한 그 모든 것들은 서서히 서서히 노동력을 소모하고 가진 것을 내어줄 것이다. 그러면 도시 말고 농촌은 형편이 다를까. 아니, 가까스로 발붙인 농민들은 살아갈 한하지. 그게 그렇지가 않다. 잿빛 돌담에 비치는 햇빛은 비정하고 생활은 가열하다. 강가에서 주운 돌을 하나씩 쌓아올려 돌담을 만들던 시절, 삼태기를 만들고 물통을 만들던 가난했던 시절, 가난은 여전한데 아니, 더한데 돌담을 쌓고 삼태기를 만들던 생활을 농민들은 잃었다. 부평초 신세는 도시 유랑민 뿐만은 아니었다. 개척민 성격을 띤 일인들이 많은 농토를 차지했다. 처음 삼강오륜을 헤아리는 조선의 농부들 눈에 본토에서 버림받은 비천한 일인들이 짐승으로 보였다. 그들은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야만인이었다. 탈망한 사내가 온다고 숨던 부녀자들이 샅바 하나 찬 벌거숭이 왜인들을 만났을 때 기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일본 농부들은 무례보다, 넓어진 경작지에 과중한 노동을 하는데 수익은 전과 다름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경작지가 넓어지고 보다 많은 노동력을 투입하면 수익이 느는 것이 이치다. 하기는 인심이 그렇게 후했다면 애당초 잡초처럼 농민들이 솎아냈을 리가 없다. 보다 많은 노동력을 제공한다는 것은 짜낼 수 있을 만큼 시간을 짜낸다는 것을 의미하고 여가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기계가 짜내는 광목, 옥양목에 밀리어 농가의 수직 면포가 상품으로서 쇠퇴해가는 추세도 추세려니와 아녀자들은 이제 베틀에 앉을 체력을 잃었고 남정네는 나무 한 짐 해서 장에 내다 파는 시간을 얻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결국 생활에 보태는 방도가 끊긴 것이며 뿐인가 흉작, 풍작에 관계없이 소정된 소작료는 세금보다 무섭다. 액수가 부족하면 등바닥에 불난 것처럼 장리변, 일수 가릴 것 없이 아구를 맞추어내야 하는 것이다. 빚이 눈사람 모양으로 불어나는 것은 전에 없던 복리의 요술이겠으나 그 요술 때문에 식구들이나마 등 덮어주기 위해 베를 짜던 딸은 청루로 가거나 도방에 더부살이로 가거나, 나루터에서 울며 이별할밖에 없다.

"아부지, 점심때가 된 것 같소."

"아직 멀었다."

돌아보지도 않고 김을 매는 아비와 나뭇가지에 매달아놓은 보리 밥 한 덩어리를 보고 또 원망스럽게 해를 보던 아들, 한숨을 쉬며 다시 김을 매던 아들은 선금에 홀리어 모구리질(잠수부)을 하러 가는데 동네 사람들이 말린다.

"이눔아아야, 물속에서 시비리(마비)가 한분 오믄 그냥 죽어부린 단다. 차라리 일본에나 가지 그랬나."

아들은 등을 돌리며

"부모 형제가 있는데 멀리는 가고 접잖소."

어미는 돈이 원수라 하며 울었고 아비는 뒷짐 지고 먼 산만 보고, 뿌리가 뽑히기론 매한가지다. 농촌에서 딸 찰아먹고 아들 떠나보내는 것은 이제 다반사가 되었다.

훌륭한 개명파 지식인들, 일본 물 마시고 서양서 온 기독교에 목욕한 사람들, 미신 타파를 외치고 조선인을 계몽하려고 목이 터지는 사람들, 미신 타파하면 땅을 찾고 나물 먹고 물마시고 이만하면 대장부 살림살이, 대신 사탕 빨고 우동 사먹어야 땅을 찾을 것이던가. 사실은 긴구치나 하마키를 피우는 족속, 금종이 은종이에 싼 과자 먹는 족속, 우리 것을 길바닥에 내다버리는 족속 때문에, 그들 때문에 조선 민족은 말살될지 모른다. 남부여대 고국을 떠나는 사람들, 바가지 들고 거리를 헤매는 사람들, 지게 지고 그리운 님 기다리듯 서 있는 사람들, 그들의 신세는 마을 큰나무에 돌 얹고 절한 때문인가 성황당에 제물 바친 때문인가 요오앙을 모시고 터줏대감을 모신 때문인가, 그것을 총독부, 동척 아닌 어느 곳에 가서 물어볼꼬.

 

1장 노상에서

사팔뜨기 광주리장수는 이발소에서 지쿠 바르고 사이다, 라무네를 마시는 건달들, 그들이 서성대는 활동사진관을 멀리 바라보며 번화한 거리를 걸어오고 있었다. 그 활동사진관에서는 주로 챤챤바라바라라의 일본 무사 영화를 상영하는데 항상 간판이 요란했다. 두건 쓰고 칼 든 사무라이며 한쪽 눈에 칼자국이 있는 애꾸 검객, 어떤 때는 지팡이 끝에 보따리를 매달아 어깨에 메고 옷자락은 걷어 올려 허리띠에 지르고 그러자니 엉덩이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사내가 간판에 나와 있기도 했다. '다카시마다'인지 '마루마게'인지 아무튼 정신 시끄럽게 큰 머리 모양에 꽃이며 천 조각을 주렁주렁 늘어뜨린 여자도 종종 간판에 등장했다.

강쇠는 통영서 아침 배를 타고 부산 부두에 내린 뒤 번화한 거리로 들어선 것이다. 머리는 수건으로 도영매고 채, 마구니, 솔 따위를 칡넝쿨로 엮어 어깨에 걸친 모습으로. 초겨울의 바람은 파도 소리와 함께 스산하였다. 막 활동사진관 앞을 강쇠가 지나치려는 순간이었다. 팔 척이나 될 성싶은 거구의 사내와 마주치게 되었다. 백계 러시아인이었던 것이다. 강쇠는 당황했다. 말로만 듣던 양인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얼굴은 주라통같이 싯벌갰다. 노랑머리에 눈시울은 하얗고 눈동자는 잿빛이었다. 손등에까지 터럭이 나 있어서 강쇠 눈에는 짐승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헐거운 회색 양복을 입었으며 강쇠 꼴과 마찬가지로 어깨에 양복지 몇 감을 메고 있었다. 이쪽도 거구였지만 그럼에도 턱을 치켜들며 상대를 올려다봐야만 했다. 길가는 사람에게 강쇠는 물었다. 왜 옷감을 어깨에 메고 있느냐고, 했더니 행인은

"라샤 장사요."

라샤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장사라는 말을 생각건대 하아, 옷감장수로구나, 납득이 되었다. 극장 앞을 지나가는 사람에게 혹은 극장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상대하여 옷감을 파는 모양이었다. 걸음을 멈추고 넋이 나간 것같이 바라보는 강쇠 시선을 느꼈던지 그쪽에서도 강쇠를 쳐다보며 실쭉 웃었다. 엄지손가락으로 콧등을 문지른 러시아인은 강쇠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그리고 다시 자기 어깨에 맨 천을 가리켜 보인다. 그러니까 어깨에 물건을 멘 본새가 비슷하지 않느냐? 그런 뜻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본께 아닌 게 아니라 임자하고 나하고 신세가 같은 모양인데 나는 묵는 것하고 상관이 있는 거를 걸머졌고 임자는 입성...“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떻게 된 영문일까, 길바닥에 나가떨어지는 동시 강쇠는 굉음을 들었다. 일어서지 못한 채 얼굴만 들었을 때 자전거 한 대가 바로 옆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코를 찌르는 술 냄새, 술병이 구르고 부서지고 연방 술이 쏟아지고 있는 판국이었다. 삼십 남짓한, 단쿠바지를 입은 한 사내도 저만큼 나자빠져 있었다.

"이 얼빠진 새끼야!"

단쿠바지의 사내가 먼저 일어서며 일본말로 욕설부터 시작했다. 바구니며 채는 활동사진관 매표구 가까이까지 굴러가 있었다.

"에이구 허리야."

일어서며 강쇠는 옆구리를 짚었다. 얼굴 광대뼈 언저리에서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 넘어졌을 때 길바닥에 까진 모양이다.

"곤치쿠쇼오! 나니도 보케데루카!(이 짐승 놈아! 무슨 엉큼을 떠는 게야!)"

일본말은 모르지만 욕설 몇 마디쯤 부두 노동을 할 때 귀에 익혀 두었다. 험악하게 눈을 부릅떴던 강쇠는 다음 순간 등신같이 어리석은 본시의 광조리 장수로 표변하는 것이었다.

"뒤에서 내리꽂아놓고 이 사람이 무신 소리 하노?"

"뭣이 어쩌고 어째! 뭐라 짖는 게야! 짖어봐라, 소용이 없단 말이다! 변상해! 부서진 자전거, 쏟아진 술 모두 변상해야 한다! 이 조선 놈의 새끼야!"

강쇠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은 명확했다. 단쿠바지는 족쳐보아야 쇠전 한푼 건져낼 처지가 못 되는 뜨내기가 상대라는 데 더 화가치민 모양이다. 고양이가 쥐 노리듯 눈은 잔인하게 빛났다. 강쇠로서는 지독하게 재수 없는 날이었다.

"눈까리가 뒤에 있는 놈을 봤나? 가만히 용나시도 않고 서 있는 사람을 지쪽에서 디리 받아놓고, 허 참, 날벼락이란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이다.“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다.

"조선 놈의 주제에 뉘보고 따따부따 말대답이야! 조선놈의 새끼들은 모두 사기꾼이다! 도둑놈! 야만인이다! 그래 술하고 자전거를 어쩔 테냐!"

"똥 뀐 놈이 성낸다 카더마는 옛말 하나 그른 것 없데... 허리가 뿌러졌는지 모를 일인데 이쪽에서 치료비라도 물어돌라 카믄 우짤긴고?"

서로 모르는 조선말 일본말의 실랑이였는데 실랑이를 하다 보니 행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활동사진관 주변을 배회하는 날건달들도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다가왔다. 가장 정확한 목격자 러시아인은 어느새 모습을 감추고 없었다. 조선인과 일본인 싸움에는 끼어들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망명자의 결론이었을 것이다.

"이 사팔때기 개새끼야1 가자! 파출소로 가잔 말이다! 조선 놈의 새끼가 일본인한테 손해를 끼치고 대들어도 되는가 안 되는가, 맛을 보아야 알게 될 게다!"

"빌어도 씨원찮을 긴데 일월겉이 명백한 일을 가지고 생사람을 잡으니 왜놈이믄 못할 짓이 없다 그 말이제?"

생각 같아서는 주먹으로 몇 대 갈겨서 길바닥에 늘어지는 꼴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오기대로 할 수는 없었다. 일본관서만은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지만 강쇠는 계속 고의춤을 잡고 뒷간 앞에 서 있는 사람같이 엉거주춤 응수했던 것이며 어떻게든 이곳에서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는 궁리에 바빴다. 옆구리가 결렸다. 그러나 아픈 것 이상으로 엄살을 떨며 절룩거리며 강쇠는 걸음을 옮긴다. 굴러간 광주리 채를 챙겨들려고 허리를 굽히는데

"곤치쿠쇼오! 어디로 도망갈려구! 연기 피우지 마라! 그렇게는 안 될 게야. 파출소로 가잔 말이다!"

단쿠바지가 달려왔다. 그는 뜻하지 않게 본 손해의 대가를 기분으로나마 풀려고 작심한 눈치다. 힘없는 가난뱅이, 조선 놈이면 분풀이 상대론 안성맞춤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 역시 대단찮은 신분이고 보면 이런 경우 이런 상대 아니면 언제 폭군 노릇을 해보겠는가. 강쇠는 잠자코 흩어진 것을 주워 모은다. 입으로만 잦아대던 단쿠바지는,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거구에다 통나무 같은 뼈대, 작은 사내로서는 휘두를 곳이 없었다. 그러나 솟구쳐오를 것도 없이 단쿠바지는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강쇠 귀를 잡았다.

"와 이라노?"

귀를 잡힌 채 강쇠는 일어섰다.

"이거 놓으소!"

뿌리치면 때렸다 할 것이다. 몸을 흔들면은 상대가 나자빠질 것이다. 어느 쪽이든 상해죄의 구실이 된다. 진퇴양난, 강쇠에게 상대는 유리그릇만큼 조심스런 존재였다. 귀를 잡고 끄는 대로 비실비실 따라가는 외에 도리가 없다. 키 큰 사람이 키 작은 사내에게 귀를 잡혔으니 떠밀어버리지 않는 이상 몸이 휠밖에 없다. 얼굴도 잡힌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눈동자는 각각 하늘과 땅 양편으로 나뉘어졌고, 처음 건달들이 킬킬대며 웃었다. 모여든 구경꾼들이 웃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마음 놓고 모두가 웃었다.

'조선 놈이 조선 놈을 보고 웃는다. 야아! 이 불쌍한 것들아! 이자는 왜놈우새끼들 마음놓고 조선 놈, 음 우리 조선 놈들 허파를 뫼까매기맨크로 파묵을 긴께 두고보아라!'

강쇠는 귀를 잡힌 채 파출소까지 끌려갔다. 조선 놈의 새끼가 일본인한테 대항했다! 조선놈의 새끼가 자전거를 부수고 술병들을 박살냈다! 일방적으로 단쿠바지는 왕왕댔다. 강쇠가 순사에게 쥐어 박히고 걷어채이는데 단쿠바지는 계속 왕왕대며 반주를 했다. 강쇠의 개진 따위는 아예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들으려 하지 않았던 것은 조선말을 아는 바로 그 조선인 순사였다. 일본 순사보다 강쇠를 많이 때린 것도 조선인 순사였다. 대일본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받아서는 안 되겠기에 더욱더 때렸을 것이다. 자식 데리고 개가한 계집같이, 남편보다 앞장서서 제 자식을 때려야 하는 개가한 계집같이. 피의 배반, 제 피를 부정하고 배반한 자에 대한 분노는 핏줄을 부르는 감정보다 더욱 격렬한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혈흔같이 지워지지 않는 원한이 되는 것이다. 며칠을 경찰서에서 시달림을 당한 강쇠는 풀려났다.

'오냐, 내가 눈 감기 전에는, 내 목심이 붙어 있는 동안에는 네놈들하고 대항하겄다.'

마음속으로 뜨겁게 맹세하면서 강쇠는 보수동 검정다리 근처에 숨어사는 송관수를 찾아갔다.

"대관절 우찌 된 일고?"

화가 잔뜩 난 목소리였다. 그러나 관수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역력했다.

"말 마라. 재수 옴 붙었다."

"아제씨예, 아부지가 얼매나 기다렸다고요."

송관수의 딸 영선이 문간에서 따라 들어오면서 말했다. 열여섯쯤, 해사한 얼굴이다.

"몸이 말을 들어야 오제. 영선아, 세숫물 좀 떠줄래?"

"야아."

댕기꼬리를 흔들며 영선은 이내 세숫물이 든 대야를 가져왔다. 가오시는 세수를 하면서 가끔 신음 소리를 냈다. 영선은 눈살을 찌푸렸으나 왜 그러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다소 훈련도 됐겠지만 속이 깊은 아이 같았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방으로 들어간 강쇠는

", 아이고우 허리야!"

앉으려다 말고 신음한다.

"대기 당한 모양이구마."

"작두로 목을 쳐 직일 놈들!"

"온다는 날에 아무 소식이 없어서 무신 일 터진 줄 알았다."

관수 얼굴도 까칠했다.

"참말이제 못해묵겄다."

"답대비, 나이 들믄 느는 거는 엄살이라."

"니도 당해봐야 알겄나?"

"물구신맨크로 끌고 들어가야 씨원컸다 그 말가?"

"젠장!"

"의관은 어디 벗어던졌기 동저고리 바람인고?"

"의관?"

"광주리가 나제 의관 아이가. 없으믄 못 나간께로."

"지랄 겉은 소리 하네. 광주리고 나발이고 어느 놈이 줏어갔는지 내 알 턱이 있나. 그 소릴 한꼐 산 넘어갔던 부아가 또 치민다."

"김장사도 이잔 세월 다 갔구나."

알면서 이죽거린다.

"힘쓸 처지가 됐으믄 약조한 날에 안 나타났이까? 되잖은 소리는 두었다 하고 술이나 내놔."

"야아야! 영선아!"

대답과 동시에 영선은 방문 앞에 왔다.

"아부지, 술상 채리까예."

"아마도 그래야 할 것 겉다."

미리 차려놓고 기다렸던 것처럼 술상은 이내 들어왔다.

"아지마씨는 어디 가싰나?"

영선네는 낯가림이 심한 여자였으나 강쇠에게만은 형수처럼, 때론 제수처럼 마음을 터놨었다. 그러한 사람이 코빼기도 내밀지 않았으니 강쇠는 궁금했던 것이다.

"모르지. 절에 갔는가."

"영선이도 이잔 처녀꼴이 나는데 마땅한 자리가 있으믄 치아야겠네."

"마땅한 자리가 있을 턱이 있나. 백정한테나 주지. 오금이나 안 박히고 살게."

관수는 술을 들이켰다.

"사람 나름이제."

"백정도 사람 나름이다 그 말가?"

관수 눈에 순간 핏발이 선다.

"이자가 와 또 물어뜯을라 카노?"

"곧 죽어도 내 며누리 삼자는 말은 못하겄제?"

눈이 이글이글 탄다.

"뭐라꼬?"

"놀란 척하지 마라. 난감해지믄 사람들은 모두 놀란 척하더구마. 김강쇠는 머 별다른 인간이겄나."

판 위에 술잔 놓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자네 그 버릇 아즉도 개 못 주었고나. 혜관시님 말씸이 송관수는 다 좋은데 백정 말만 나오믄 사람이 달라진다 하더구나."

"달라질밖에."

관수 목소리는 약했다.

"내 여핀네는 평생을 남하고 상종 안 한 채 살아왔다. 사람만 보믄 죄인겉이 숨을라 카고..."

그 말은 들은 척도 않고 강쇠는

"혼사 못하겄으믄 못하겄다, 머가 무서바서 놀랜 척할 기고. 입때꺼지 그런 일은 생각해본 일이 없인께 놀랄 밖에 더 있겄나? 나이야 걸맞지마는. 거러나 영선이는 보통핵교를 나왔고 우리 휘는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리는 산놈인꼐, 가이방해야 생각도 해보았일 거아이가."

관수의 얼굴이 풀리면서 손을 내저었다.

"고만 없었던 얘기로 하자. 오기 때문에 한 말인꼐. 안 그러지 안 그러지 함서도."

강쇠는 콧방귀를 뀌었다.

"술이나 퍼묵어라! 이 졸장부야."

강쇠 말에 송관수는 허허 허허어 하고 웃는다.

"새양내 나는 떡이니께 안 받아묵을 기다, 그래 아아나 니 줄까했제? 넙죽 받아묵을라 카이 아까바서 못 주겄다, !"

송관수는 여전히 허허허 하고 웃는다.

"인심 참 고약하다. 수십 년을 새긴 친구가 이 모양이니 생판 모리는 조선 놈, 왜놈한테 희롱당하는 조선 놈을 보고 웃는 거야 말해머하겄노. 다 죽게 돼서 왔건마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제 식구 말이 나온꼐 눈까리가 뒤집어지고, 참말이제 누구를 믿고 살겄노."

"사설 그만 까고 자초지종 이야기나 해라."

술을 부어준다.

"일전이 사나웠던 기라. 제기랄! 참을라 카이 속에서 불기둥이 치미는데..."

"참을라 캤이믄 덜 급했던 모양이제?"

"급하고 안 급하고, 그런 일이 아이라 말이다."

술을 마시면서 강쇠는 활동사진관 앞에서부터 겪은 일을 관수에게 들려준다. 얘기가 끝나자 관수는 박장대소했다. 강쇠도 쓴웃음을 띤다.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분노가 치밀었으나 사건 자체가 희극적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양놈이 뭐가 그리 신기스러바서 한눈을 팔았더노. 산중 놈이라 할 수 없다 카이."

"이 도방 놈아, 양놈 보았다고 뒤서 자전거가 디리받았다 카더나?"

"내가 그러라고 시?? 와 나보고 성을 내노."

남은 솟치서 죽겄는데 부아를 실실 돋군께, 젠장! 베룩이 겉은놈이, 그놈한테 휘둘린 생각을 하믄 어이가 없어서, 아 엄지손가락으로 문때서 직이도 직일 놈한테 말이다!"

"사또는 지나갔고 암만 나팔을 부니 무슨 소앵이고."

"어디다가 비하노! 사또라니?"

", 내가 못할 말 했나?"

"그라믄 옳은 말 했다 말가?"

"니가 양반의 자손이라서 깃대를 치키드나? 선비 자손이라서 깃대를 치키드는 기가? 그놈이 그놈, 억울한 백성 잡아다가 곤장 치고 주리 틀고... 다르믄 얼매나 다르노."

"그래도 같은 우리 백성 아이가."

", 그럴 기다. 조선놈 순사한테 맞은 거는 하낫도 안 분하제?"

말문이 막힌 강쇠, 얼굴이 벌개진다.

"니놈 하는 짓이 엎친 놈 꼭 뒤 차는 격이다. 서울놈, 유식쟁이들하고 상종하더마는 꼬고 비틀고 말꼬리 잡고, 잘하는 짓이다.“

"하하하핫 그렇든가? 술이나 들어라. 참아온 김에 끝까지 참아야제, 신양에 해롭다. 하하하핫..."

"용이 물 밖에 나믄 개미가 침노한다 카더마는, 이놈의 세상, 맴겉에서는 번쩍 들어서 엎어부렸으믄."

술을 들이켠다.

"내 옛날에 똥물 묻은 손으로 순사놈 뺨을 때린 일이 있었지."

"호랭이 담배 묵던 시절 얘기, 새삼스럽기 와 하노. 자랑 늘어놓을 나이는 아니거마는."

관수는 술잔을 눈 높이까지 치켜들며

"서레구라이노 하라가마에다타라 에라이 햐쿠쇼쟈. 다가 히도가타네. 난토잇데모 다이니폰데이고쿠노 게이샤쓰쟈. 미세시메노 다메니모 유루수 와케냐이칸."

"무신 놈의 움대가리 찜쪄묵는 소리를 하노."

"그 당시 순사부장 놈이 한 말인데 배짱 좋은 농부다, 그 말이고 그러나 대일본제국의 경찰을 수모했이니 용서 못한다, 마 그런 뜻인 모앵인데 지금 같았이믄 며칠 구류로 끝났겄나?"

"징역을 살아도 한두 해는 살았겄지."

"그 시절만 해도, 그렇지이... 어중이떠중이 별의별 놈이 다 기어올라 오는데 허술한 놈도 더러 있었더라 그 말이고 원래 칼 쓰는 종자들이라 배짱을 숭상하더라는 얘긴데 지금이야 그런 털북시기 얼간이는 없제. 뺀뺀하게 생기가지고 소리도 안 높이고 웃지도 않고, 삼일운동 후부터 칼자루는 숨겼지마는 대신 쇠바닥으로 해북는데 그기이 더 무섭다. 총칼 없이 소리 없이 때리잡은께."

"칼자룬지 쇠바닥인지 그거야 내 겉은 산놈들이 알까마는, 날이 갈수록 용나시를 못하게 그렇게 돼가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대신 우리도 영악해졌다."

"영악해지믄 머하노. 아무리 뛰어도 그놈들이 먼지 와 있는데."

"우리는 바늘 가진 사램이고 그놈들은 도끼를 가졌다. 바늘 가진 놈을 도끼 가진 놈이 못당한다는 속담이 있제."

"저저히?"

"..."

"나도 그런 것쯤은 알고 있구마. , 저저히 모두가 다 바늘을 가지고 있음사?"

관수는 말을 잇지 않았다. 두 사내는 침묵한 채 술잔만 비운다. 밖에서 누가 돌아왔는지 영선의 높은 음성과 나직한 다른 음성이 어울려 들려왔다.

"대관절 혜관시님은 우찌 됐다 카노."

관수는 묵묵부답이다.

"석이 소식도 캄캄절벡이니 답답해서 어디 살겄나."

"석이는 별일 없일 기고 한복이가 돌아와야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기다."

하다가 별안간

"다 죽어가는 소리는 치아라! 김환이 혜관 없으믄 일 못하겄나!"

무엇에 들린 사람같이 소리쳤다. 작은 눈동자가 동그랗게 응고된다.

"와 이라노? 누가 머라 캤나?"

사팔눈이 동그랗게 응고된 듯한 눈을 쳐다본다. 힐난과 서글픔이 감도는 눈빛이다.

"내가 너거들 맘 다 알지. 그래도 옛날에는 일하는 보람이 있었고 신이 났다, 그런 생각들 하는 거를 어째 내가 모리겄노. 겉으로 보기에는 물에 물 탄 듯..."

"그거는 과히 먼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마는 죽은 성님을 두고 니가 삐딱하니 말하는 거는 마땅찮다. 시샘하는 것도 아니겄고, 사람마다 다 자개들 가진 기이 다른데."

어세에는 약간의 멸시도 있었다.

"강쇠, 자네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 내 맘을 보선목이라 뒤집어 뵐 수도 없는 일이고오. 우리가 머 정에 쏠리서 일 시작했더나? 애당초 김환이라는 사내를 위해 나선 거는 아니었은께."

"그는 그렇겠지. 하지마는 내 경우는 다르다. 성님한테는 정으로 쏠렸든 사람인께, 그렇기 때문에 지금 성님이 없어도 나는 중도지폐 못한다."

숨을 들이마신 관수는 술 한 잔을 들이켰다. 안주를 집으면서

"요새 나는 내 심이 부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성을 내는지 모리겄다."

"그렇다믄 김환이가 없어서 일 안 된다는 생각은 나보다 자네가 한 거 아이가."

"..."

"세상은 그때하고는 달라."

"그거 모리는 시래비자석도 있나?"

"성님이 살아 기싰으믄 그때맨크로 귀신겉이 일을 쳐냈일지... 지금 시절에는 안 맞는 사람 아니까?"

"맞고 안 맞고가 어디 있노. 그 사람 식으로 밀었겄지. 허나 귀신겉이, 그게 탈이거든. 사람겉이... 나는 요새 윤도집 그 어른 생각을 하는데...“

김환이 죽은 뒤 이 정도나마 터놓고 얘기하는 것은 아마 처음일 것이다.

"여하튼간에 성님은 평생을 몸 하나로 때운 사람이다. 죽어서 세월이 흘러도 생각하믄 가심이 찢어지는 것 겉다. 아무리 머니머니해도 거기 비하믄 우리는 청풍당석 아이가. 그렇기 살다 가기도 어러버."

"그만두자, 그만두는 기이 좋겄다. 죽은 사람 귀 간지러블 기고... 내가 심이 부친다 하기는 했다마는, 우리 생전에 우리 나라가 독립할 거란 믿음은 전보다 훨씬 굳어진 것만은 틀림이 없고."

"우리 생전에, 그라믄 오죽이나 좋을까."

"아까도 말했지마는 옛날에는 싸우는 데 있어서, 시쳇말로 우리들 황금 시절이었다. 물론 우리 동학당 처지에서는 그렇다 할 수도 있겄지. 그러나 그때는 뚜렸하게 독립할 거라는 생각은 못했고 왜놈한테 대항한다, 한사코 대항한다, 따라서 그 한도 내에서 재주도 넘을 수 있었지. 지금도 아무리 팔 뻗어봐야 허황하다. 우리가 그렇다믄 상대, 왜놈도 안 드렇겄나? 와 그럴까. 노동자, 학생들이 싸우는 시대니까, 또 싸움의 방법이 다르고, 그렇다고 해서, 머 죽은 형님이나 자네나 내가 동학 서학 가리감서 이 길에 나선 거는 아니었제. 해서 윤도집과 맞서기도 했고 지삼만이 겉은 악종의 배신도 당했다마는, 그러나 동학이 아주 갔다고 나는 생각 안 하는 사램이다. 동학하고 농민들은 마지막에 올 기다. 지금은 학생, 노동자다. 나는 원산의 파업을 복 희망을 가졌다. 남들은 항복했다고 끝장난 것겉이 말하더라마는 자꾸 일어날 기고 학생들도 자꾸 일어날기고, 왜놈들이 끝끝내 학생들, 노동자들 숨통을 틀어막을라 카믄 그만큼 그놈들도 다급해진 거 아니겄나?"

"니가 그 말을 한꼐 생각이 난다마는 영광이는 우찌 됐노?"

송관수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요새 학생들 들먹들먹 야단이라 카는데 괜찮겄나?"

몹시 괴로운 듯 술잔을 놓고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문다.

'부자지간에 무신 일이 있었고나.'

강쇠는 대강 짐작이 갔다. 영선이 오라비 영광은 중학 사학년인가. 아비보다 똑똑하다고 강쇠는 생각해온 터다. 장차 무엇이 돼도 될 놈, 열혈 청년임이 분명하다는 칭찬을 하기도 했었다. 송관수의 남다른 가족에 대한 애정은 진작부터 주변에서 다 알고 있지만, 그러나 항상 아들을 저지하며 일이 시끄러워지는 것을 경계해온 것은 송관수의 경우, 아들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어버이의 사랑이라기보다 자기 하는 일에 누가 될 것을 염려해서인데, 그런 만큼 송관수는 괴로웠을 것이며 영광이는 영광이대로 반발하며 아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족을 끔찍이 사랑하면서, 그러나 항상 자신이 하는 일편에 서서 가족이 남의 눈에 두드러지는 것을 싫어했고 있는 듯 없는 듯 하기 위해 압력을 가해왔으며 영선네나 장인 장모는 신분상 스스로 그런 생활 태도를 취해오기도 했었다. 그러나 아들 영광이 이십 세에 가까워지면서 그러한 균형은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광주학생사건을 두고 부자간에 의견 충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여느 때와 달리 관수가 안정을 잃었던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을 강쇠는 비로소 깨닫는다. 송관수는 영광에 대한 말은 일체 하지 않고 애써 태연한 척, 하다 만 말을 계속한다.

"저이 놈들이 편할라 카믄 우리 조선 사람들이 모두 일본 놈이 돼주어야 하는 긴데 사방팔방에서 우리는 조선 사람이다, 조선 사람이다! 하고 아우성이니 편키 잠잘 수 없지. 언제든지 지키는 일은 어렵고 지키는 사람 열 있어도 도적 한 놈을 못 당한다 했는데 그놈들이 옛날에는 도적이었지. 그러나 이자는 우리가 도적이다. 그놈들은 지키는 기고, 노동자들 파업은 왜놈들을 향한 공격이다. 학생들 맹휴도 왜놈들을 향한 공격이란 말이다. 옛날에는 총 든 놈 대가리 수만 가지고, 나라 찾는 일이 우리 당대에는 어러불 기라 생각했지. 어럽더라도 싸움은 하자, 우리는 모두 그렇기 말했다. 해서 도처에서는 의병들이 잽히가고 총 맞아 죽고, 왜놈들은 총이믄 그만이었다. 대포만 믿으믄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노? 일 안 하겄소, 공부 안 하겄소, 물러나는 긴데 실상은 달라드는 기거든. 수천, 수백의 대가리들이 몰려서 그리 하니 여기서 저기서, 힘이제, 무서븐 힘인기라. 총이나 대포 가지고도 쓸 수가 없고 부셔부릴 수도 없는 힘 아니겄나? 아닌게아니라 전쟁보다 어러분 일일 기구마는. 그놈들은 몇 분 있은 전쟁 덕분에 오늘 저렇게 떵떵거리는데 앞으로는 지보다 못한 놈하고 붙지는 않을 기고 센 놈하고 붙을 터이니 전쟁으로 흥청거리다 전쟁으로 제 가심 찌를 기고..."

또박또박 이치가 닿는 말이었으나, 그러나 평소의 육성 같지 않은. 마음과 말이 따로 노는 것 같아서 강쇠는 불안했고 지루하기조차 했다.

"언변은 그 정도 하거 술잔이나 비워라."

", ."

관수는 상체를 좀 흔들었다. 그리고 술잔을 들었다.

"희망이고 실망이고, 그런 거는 잠시잠시 왔다가는 거 아니겄나. 배운 도둑질, 늙도 젊도 않은 나이라 이대로 가는 기지 머. 하기야 산놈 무지랭이가 고생은 쇠빠지게 했다마는 운동가 됐이니 출세했고, 허허허헛... 허허허헛 신이 날 때도 있었고, 자네 말마따나 우리 생전에 독립이 된다믄 세상 나온 보람도 안 있겄나."

"아까는 죽는 소리 해쌌더마는 술 들어간께 간 커졌다."

"내 말 사돈이 하네."

"산에는 언제 갈래."

"여기 일 돼가는 거 봐감서."

"나도 거기 한분 갈 일이 있다. 도솔암에 새 중이 왔다믄?"

"그런갑더마. 나도 해도사한테 들었다만 공부 많이 한 중이라 카든가?"

"해도사는 누고?"

"그런 사램이 있다."

"자네는 어이서 들었노?"

"그러씨..."

"점쟁이라 칼 수는 없고 토정비결을 봐주는 정도다."

"하여간에 일간에 강쇠 니도 함께..."

"누구를 만날 긴데?"

"그때 가서, 그보다 여기 돼가는 꼴은 우떻노."

"원산 일이 있고부터는 경찰놈들 지랄발광하는 바람에 고무 공장, 방직 공장 아이들이 얼어부맀다. 뭔가 해보고 싶은 마음이야 꿀떡 겉지만 서로를 못 믿는 기라. 부두에서 몇 명 풀어넣기는 했다마는, 조심스럽고 신실한 사람들이라 걱정은 안 하는데 그래도 살얼음 밟는 것 겉다."

"밖에서 쑤시는 것도 니를 내문 안 되제."

"니를 내게 돼 있지는 않다."

''란 쌀 속에 들어 있는 벼이삭()를 말함인데 눈에 띄지 말라는 뜻이다.

"부산도 원산만큼 못할 것도 없는데, 관부연락선하고 그밖에 입항하는 배에서 짐짝 하나 풀고 싣고 못한다믄, 군산, 목포에서도 쌀을 못 나가게 할 수만 있다믄..."

뉘를 내면 안 된다는 말을 할 때부터 관수는 단단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 있었다.

"참 어러분 일이다. 할 수 있다는 맘이 목구멍까지 차 있음서도, 원산 일들이 있은 뒤 맘들이 요상하지. 원산한테 발등치기 당했다는 오기도 있고 무신 일이 일어날 기라는 기다림도 있고, 누가 앞장서는 사람 없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있고, 어수선하지. 젤 기죽이는 거는 때놈들 왜놈들 실어오는 일인데, 결국 원산서도 그것 때문에 일 그르친 거 아이가."

"때놈 왜놈뿐이던가? 조선놈도 모집해갔으니."

"개만도 못한 놈들."

"함께 앉아있다가 나가는 놈은 우짜고?"

"그러니께 그기이 민족 반역자지 머겄노. 그나저나 허리 아파서 오도가도 못하겄다."

 

 

2장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말고

멧상 드느라고 간밤에 잠을 설치기는 했다. 휘야네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운 채 어디 가는가, 가면 언제쯤 돌아오게 되는가 물으려 하지 않았다. 강쇠 역시 간다온다 말없이 집을 나섰다. 강아지가 쫄랑쫄랑 따라오다가 울타리 삼아 쌓아놓은 나뭇단 옆에서 주저앉았다. 그리고 우우 하며 한 번 울었다. 심하게 다툰 부부같이 서로 외면하며 지낸 것이 달포 가량 되는 성싶었다. 아들 휘도 그러한 부모를 피하며 밥만 먹고 나면 숯가마 쪽이나 짝쇠 집 헛간으로 가버리곤 했다. 숯가마에서는 물론 숯 굽는 일을 했고 짝쇠네 헛간에서는 솔, 채판, 광주리 따위 목기를 깎을 때도 있었다. 행동하면 공장 장에 내갈 물건들을 안서방과 짝쇠랑 함께 만드는 것이었다.

"저눔의 피리는 와 부는지 모리겄네?"

요즘 가락 하나에 사로잡혀 있는 자기 자신의 이상한 상태가 마치 그 피리 탓인 것처럼 강쇠는 중얼거렸다. 언재였던지 김환이 광대한테서 빼앗아왔다 하며 어린 휘에게 피리 하나를 갖다준 일이 있었다. 자신이 가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남에게 무엇을 갖다 주는 행위를 일체 생략하고 살다 간 김환으로선 아마 휘에게 준 피리 하나가 유일한 것이 아니었는지, 강쇠는 가끔 그것을 어떤 암시같이 받아들이며 휘의 운명에 대하여 두려움과 자랑스러움 같은 것을 동시에 느끼곤 했다.

두루미병을 든 강쇠는 눈 덮인 산길을 지나 고개 하나를 넘고 또한 고개를 넘는다. 망태나 짐짝 같았으면 어깨에 메면 거뜬할 터인데 두루미병은 그럴 수도 없다. 들고 가자니 손도 시렵고 여간 거추장스럽지가 않다. 언덕을 오를 때나 급한 내리막길에선 미끄러져서 술병을 깰까봐 신주 모시듯 해야 한다.

"한 오백 년으은 살자아더어니이이!"

목청이 터져라 강쇠는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하늘 밑을 빈틈없이 메운 듯이 산 너머 산, 그 산 너머에 또 산, 어디를 둘러보아도 산으로 가득 찬 공간은 미칠 것 같은 외로움과 무력함을 일깨울 뿐이다. 벌써 몇 번인지 모른다, 소리를 질러보는 것이. 그때마다 노래는 그 대목 한 절에서 잘리고 가락만 혼자 마음속 밑바닥을 맴도는 것이다. 심장을 핥는 것같이, 쪼아대는 것같이, 새벽녘에 사립짝 밖을 바라보는 청상과부의 탄식같이 맴도는 것이었다. 간밤에는 산 속의 모든 영신, 무덤 속의 모든 망령들이 합세하여 울부짖듯, 바람은 석벽을 내리치고 나무를 둥치째 뽑아버릴 듯이 날뛰더니 새벽녘에는 소리 없이 눈이 내렸다. 날이 밝으면서 눈은 멎고 차츰 개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멀리, 산봉우리 위의 겨울 하늘은 눈이 시리게 푸르고 솜같이 포근한 조각 구름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기온은 혹심하게도 떨어져서 나뭇가지에 실린 눈은 설화 아닌 빙화였고 빙화의 끝없는 수림이었다. 계곡과 언덕과 능선은 눈 속에 깊이 묻혀 영원히 잠들어버린 것만 같았다. 달콤한 본의 입김은 언제 일이었던지, 버들가지의 그 여린 연둣빛은 꿈속에서나 보았던 빛깔은 아니었던지, 굳어버린 적막 속의 끝없는 빙화의 수림은 전율같이 참혹하게 아름다웠다.

"아무렴 그렇지이 그렇고 말고오오!"

뜻밖에, 새로운 구적이 저절로 굴러나왔다. 그것도 한 절로 잘리고 만다. 그러나 마음속에, 귓가에서 계속 맴돌던 가락은 별안간 질풍같이 달려들어 아우성으로 변했다. 마음 바닥을 핥고 쪼아대던 것이 도끼질로, 난도질로 변했다. 간밤에 울부짖던 그 바람이 심장을 내리치고 삶의 지렛대를 뽑아버릴 듯 날뛴다.

"아무렴 그렇지이 그렇고말고오오! 아이구 그만."

두루미병을 놓고 배 아픈 사람같이 배를 움켜쥐며 강쇠는 눈밭에 무릎을 묻는다.

"참말로 와 이라는지 모르겄네."

이상한 일이었다. 그 가락에 사로잡힌 것은 벌써 여러 날 째였다. 평소 노래 같은 것은 불러본 일이 없는 강쇠였다. 하기는 노랫가락 한두 개쯤 불러본 일이 없다 하더라도 어느 주막 술판머리에서 귀동냥은 했을 터이고 하여 어떤 서슬엔가 생각 속에 떠오를 수 있으며 혼자 흥얼거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집요하게 떠나지 않고 떠났는가 싶으면 허겁지겁 뒤쫓아와서 기어드는 것은 아무래도 심상찮은 일이며 성가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저께는 구례장으로 나갔었다. 부친의 기일이 섣달 초엿새 날이다. 그러니까 어젯밤인데 제수를 마련하기 위해 장으로 갔었다. 장터는 한산했다. 난전은 그런 대로 구색이 갖추어져 있었으나 설을 앞두었기 때문에 대목장을 볼 심산인지 물건 사러 나온 장꾼들은 드문드문했다.

"모갯돈이 들어서 그렇제, 짚세기를 신는 거는 만고에 어리석은 짓인 기라요. 촌사람들 개멩을 못해서, 발가락이 쑹쑹 빠지는 짚세기, 와 못 버리는지 모리겄네."

신발을 펴놓으며 하는 고무신장수의 말이었다.

"그래도 짚세기는 품만 든께."

장바구니는 옆에 놓고 하얀 고무신 한 켤레를 뒤집어보고 만져보며 아낙이 말했다.

"짚세기 팔아서 고무신 사믄 될 거 아니요."

뜨내기 신발자수는 농담 삼아 말했다.

"그러씨... 그러자니 객일이 늘고, 이기이 비싸기는 비싸요."

"비싸다 캤소?"

"그라믄 안 비싸다아 그 말이요?"

"짚세기 수십 커래 몱은 할 긴데 그라믄 아짐씨는 짚세기 값으로 팔아라 그 말이요?"

"누가 운제, , 그런 말이사, 아 그러씨 흥정하는데 싸다 비싸다 못할 것도 없는데 징을 내요?"

"징을 내는 기이 아이라, 고무라는 거는 생전 가도 닳아지잖은께 그만큼 값이 나갈밖에 없는 기고, 아 생각해보소. 눈비가 오니 버선이 젖나, 신어서 편코 때가 묻으면 물로 싹싹 씻어보소. 백옥이지. 우리네는 공장에서 도리떼기를 해온께 다른 뜨내기하고는 값 차이도 많소. 머 사고 안 사는 거는 아짐씨 알아서 할 일이요마는..."

"돈 좀 더 보태믄 깔진을 지을라."

"깔진을 지어요? 돈 좀 더 보태서? 하하하핫, 아짐씨, 말도 가이 방해야제요. 그렇기 싼 거라믄 고무신 공장이 서지도 않았일 기요. 우리네야 물건 없어 못 판께 그 따우 실없는 말 안 하는 기이 좋겄소. 오늘은 장꾼이 없어서 하품 삼아 이러니 저러니 하지마는 대목이 코앞에 있는데 물건 못 팔아 걱정이겄소?"

얼굴이 조막만하고 눈매가 사나워 뵈는 고무신장수는 계집아이 신발을 우두커니 내려다보고 서 있는 강쇠에게 곁눈질을 했다. 분홍 빛깔의 앙증스런 고무신, 당혜를 본따서 하얀 전을 두르고 코끝 양켠에 곷 이파리 하나씩을 놓는 작은 신발이었다.

"생각이 있이믄 그만 망태 속에 집어넣는 기라요."

"..."

"못 팔아서 하는 말이 아니라요. 아이들은 발 크기에 층이 많아서 장사들이 어른 신맨치로 많이 가지오지 않은께, 귀찮거든요. 발에 맞일 성싶으믄, 애댕기이실 때 사가소."

"이 사람아, 사주고 싶어도 이자는 신발 임자가 없네."

내던지듯 말을 남긴 강쇠는 시전 앞에서 돌아섰다.

망태를 짊어지고 산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비연의 주막에서 강쇠는 막걸리 몇 사발을 들이켰다. 주막 술판을 치며 성가신 가락을 토해버리려 했으나 일어선 강쇠는 산속으로 들어온 후 비로소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한 오백 년으은 살자더어니이이!"

살자는데, 살자더니, 그런 차이 같은 것은 아랑 곳 없었다. 그나마 입 밖에 나온 것은 그 한 구절뿐이었으니까. 고장난 유성기처럼 한 오백 년만 되풀이하던 강쇠는 자신이 노래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통곡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을 계속하여 통곡을 하고 있었던 것을, 가슴이 멍든 것같이 아픈 것을 깨달은 것이다.

"와 이리 조용노. 사람들 모두 다 직이뿌릴라 카나!"

눈 속에 무릎을 묻은 채 하늘을 우러러본다. 김장사라는 칭호가 아직까지는 허명이 아니었다. 골격은 전과 다름없이 완강했지만 근육이 줄고 탄력을 읽은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생시의 지삼만이 말하기를 썩은 복쟁이니 막걸리살이 허옇게 오른 배때기니, 그러던 얼굴빛도 전과 같지 않게 누리끼리해졌고 홈같이 입 언저리로 흘러간 주름은 표정이 움직일 때마다 흔들렸다.

"어매!"

눈물이 솟아오른다.

"어매! 우찌 이리 적막강산입니까!"

쇠는 흐느껴 운다.

"어매, 생전에는 새끼들이 더 소중타는 생각을 안 했는데 와 그놈의 제집아아 신발만 눈에 보있이까요. 미련한 놈이지요. 밥만 처먹이믄 절로 크는 줄 아, 알았인께요. 좌우간에 잘 가싰십니다. 험한 꼴 안 보시고 허, 험한 꼴, 어매는 먼저 잘 가, 가싰습니다. 으흐흣흣..."

얼마 동안을 그러고 울었는지.

'나는 갈 나이가 되서 간 기고 아아는 지 멩이 그것밖에 안 된께 안 갔겄나? 사나아 눈에 눈물이 나믄 산천초목도 운단다. 아범아, 울지 마라.'

바람결같이 갈대가 흔들리는 것같이 모친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 맞십니다. 이 세상에 삼천갑자 동박석이 어디 있겄소. 지도 갈때가 오믄 안 가겄십니까?'

일어서서 눈을 턴다.

", 산신이 들어줄 기라고 내가 울었더나, 저 하늘에 기시다는 옥황상제가 들어줄 기라고 내가 울었단 말가, 허허헛 허허헛...“

두루미병을 들고 걷기 시작한다. 눈앞에 걸리적거리는 눈 실린 나뭇가지를 휘어잡으며 걷는다. 해는 중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해는 설원에서 희번덕였다.

"오살할 놈의 김환아!"

고함을 질러놓고 소리 내어 웃는다.

"그 빌어묵을 김환의 넔이라도 실맀단 말가. 성님! 성니임! 와 이리 오만간장이 찢어질라 카는지 알믄 말 좀 해보소오!"

하얀 능선이 허허롭다. 코를 풀고 옷섶에 손을 닦는다.

'성님.'

......

'참말로 전디기가 어렵소.'

...견디어보아라...

'이러크름 서러븐 것은 이치 때문이까요.'

...핏줄 때문이네...

'핏줄이 머길래,'

...징그럽게 질긴 거지 뭐겠나, 늘 가슴이 떨리는 것...

'와 떨릴까요.'

...죽어야 하기 때문이며 이별해야 하기 때문이며 끝날 수 없는 한을 남기기 때문이며...

'지로서는 좀 모릴 점이 있소.'

......

'성님은 효수를 당한 아부님하고 버리고 간 생모 따문에 그렇기도 했겄지마는 지가 알기로는 그보다 한 여인네를 가심에다 두고 평생 한으로 삼지 않았십니까?'

...평생 한으로 삼아...허허헛헛, 평생 한으로 삼아? 강쇠야, 태초에 계집과 사내가 있어서 핏줄은 시작되었느니라...

'그러고 본께 그도 그렇겄소마는, 지야 머 여인네로 인해서 눈물을 흘린 일이 없는 목석이고 부모 자석 간의 애착이야 사람마다 있는 거니, 옛날에 밤새도록 혼자 앉아서 말 한마디 없이 술을 마시던 성님 생각이 나요. 그렇기 외로운 모습이 세상에 또 있이까 싶었는데 지금 내가, 내 심정이 그런 것 겉소.'

...사람이 되어가는구나...

'흥 행복시럽기 사는 사람은 그라믄 사람이 아이다 그 말심 겉소.‘

...설움을 모른다면 어찌 마음이 있다 할 것인가. 마음이 없다믄 사람이라 할 수 없고 시궁창인들 어찌 더러울까...

'그렇지마는 기쁜 것도 맘 아니겄소?'

...만물이 본시 혼자인데 기쁨이란 잠시 쉬어가는 고개요 슬픔만이 끝없는 길이네. 저 창공을 나는 외로운 도요새가 짝을 만나 미치는 이치를 생각해보아라. 외로움과 슬픔의 멍에를 쓰지 않았던들 그토록 미칠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강줄기 같은 행로의 황홀한 꿈일 뿐이네. 만남은 이별의 시작이란 말도 못 들어보았느냐?...

'그거는 머, 다 하는 얘기 아니겄소.'

...부처는 대자대비라 하였고 예수는 사랑이라 하였고 공자는 인이라 했느니라. 세 가지 중에는 대자대비가 으뜸이라. 큰 슬픔 없이 사랑도 인도 자비도 있을 수 있겠느냐? 어찌하여 대비라 하였는고. 고이요 무이기 때문이며 모든 중생이 마음으로 육신으로 진실로 없는 저 안일지옥의 무리들이 어찌하여 사람이며 생명이겠는가...

'성니임!'

범패의 게송같이 읊조리는 환의 음성, 귀에 쟁쟁한 음성, 강쇠는 저승의 삼도천 강가를 지나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몸을 떤다.

...마음으로 육신으로 고통받는 자만이 누더기를 벗고 깨끗해질 것이며 뱃가죽에 비계 낀 저 눈물 없는 무리들이 언제 그 누더기를 벗을꼬. 고달픈 육신을 탓하지 마라, 고통의 무거운 짐을 벗으려 하지 마라, 우리가 어느 날 어느 곳에서 만나게 된다면 우리 몸이 유리알같이 맑아졌을 때일까... 그 만남의 일순이 영원일까, 강쇠야 그것은 나도 모르겠네...

'참 내, 무신 그런 말이 있소? 아아 그렇다믄, 성님 말씸에 따르자믄 성님은 후회도 여한도 없겄구마요. ! 그러크럼 고달프게 고통시럽기 살다가 갔인께요. 무신 후회가 있으며 한이 남을 기요.'

...하하핫핫...하하핫핫 후회라, 후회, 후회는 없겠구나.내 생전에도 후회는 아니 했으니, 한이야 지가 어디로 갔겠나...

'어째서 한이 남소? 후회 없이믄 한도 없제요.'

...한이야 후회하든 아니 하든 원하든 원치 않든 모르는 곳에서 생명과 더불어, 내가 모르는 곳에서 생명과 더불어, 내가 모르는 곳, 사람 모두가 알 수 없는 곳에서 온 생명의 응어리다. 밀쳐도 싸워도 끌어안고 울어도, 생명과 함께 어디서 그것이 왔을꼬? 배고파서 외롭고 헐벗어서 외롭고, 억울하여 외롭고 병들어서 외롭고, 늙어서 외롭고 이별하여 외롭고, 혼자 떠나는 황천길이 외롭고, 죽어서 어디로 가며 저 무수한 밤하늘의 별같이 혼자 떠돌 영혼, 그게 다 한이지 뭐겠나. 참으로 생사가 모두 한이로다...

환이 살았을 때 조금씩은 다 들었을 얘기였을 것이다. 소위 산중문답인데 생생하게 박진감을 주며 강쇠에게 압도해오는 것이었다. 오늘 처음 들려온 목소리는 아니었다. 김환이 죽은 뒤 강쇠는 가끔 생시의 그 목소리, 그 말을 산속에서 듣는 일이 있었다. 그럴 때는 산중 어느 곳엔가 김환이 살아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목을 매달아 죽었다. 경찰서에서 죽었단 말이다. 죽은 기이 언제라꼬.'

강쇠는 감환의 죽음을 확신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동시 이십여년 긴 세월을 함께해온 알지 못할 그 사내로부터, 그의 말년 무렵해서 조금은 알 듯 뭔가 보이는 듯했었던 그 사내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전술 전략도 아니요 포부나 경륜도 아니요 인간이 사는 이치도 아니요 오로지 그가 품은 평생의 한, 그것뿐인 것만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요즘에 와서 강쇠는 더욱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활동사진관 앞에서 내가 당했던 일을 성님이 보았이믄, 그보다도 만일에 성님이 당했다 할 것 겉으믄 어쨌일꼬? 실성한 사람맨크로 허허허, 허허헛 하고 울었일까? 능구렝이겉이 백배사죄를 했일까? 그란하믄 따깨칼로 그놈 배애지를 찔러 직있일까?'

성가신 가락이나 스스로를 비웃을밖에 없었던 울음은 정녕 그일로 인한 것은 아니었을 터인데 그러나 강쇠는 그때 일을 되새겨 가며 걷는다. 웃음이 솟구칠 것만 같았고 이놈들아! 하고 외쳐보고 싶기도 했다.

부산에서 있었던 일, 그런 일쯤, 한으로 삼아야 할 만큼 강쇠의 삶은 물론 한가한 것은 아니다. 부산에서 며칠을 묵은 뒤 산으로 돌아왔을 때 아들을 한번 보고 눈을 감으려 했던 것처럼 노모는 세상을 버렸으며 장례를 치른 지 열흘이 못 되어, 이번에는 열 살 난 딸애가 벼랑에서 떨어져 죽은 일, 그것이 응어리다. 마치 게으름을 피우고 있던 죽음의 사자가 아이크!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데, 하며 급작스레 달려와서 숨 돌릴 새도 없이 일을 끝내버린 듯, 강쇠는 두 죽음을 넋 빠진 사람같이 바라보아야만 했었다. 시산은 달포 가량 흘러갔다. 모친의 초상 때는 해도사가 와서 장례 절차를 도와주었다. 언제부터 지리산에 들어왔는지 오래 전부터 안면은 있었으나 이삼 년 만에 한 번씩 거처를 옮긴다는 내력밖에 모르는 해도사라는 인물, 강쇠 집에 이르는 길목, 길목이라 했지만 상당히 먼 거리였으나 그곳에 해도사가 옮겨온 것이 한 이 년쯤 됐을까? 서로 무관해지기로는 모친의 장례를 치른 그때부터였다. 딸애는, 짝쇠와 채귀에 쫓겨 산으로 도망온 안또병이 산비탈 곳에 묻어 주었다. 묘를 만들고 안또병이 떼를 떠서 묘에 입히는 것을 본 강쇠는 무덤 앞을 떠났다. 짝쇠는 곡괭이를 치켜들고 허둥대며 강쇠를 따라왔다.

"이눔 가시나! 와 죽었노!"

무덤에 발길질을 하며 울부짖는 휘의 소리가 뒤통수를 쳤다.

"허허어, 그라믄 쓰나. 아이도 영신이데 발길질을 마라."

삽 등으로 떼를 다지며 하는 안또병의 말이었다. 언덕을 돌아가던 강쇠는 마른 풀섶에 주저앉았다.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물었다. 짝쇠도 강쇠와 덤 떨어진 곳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붙였다. 강쇠의 눈은 유리알 같았다. 영혼이 빠져나가고 없는 죽은 사람의 눈이었다. 콧구멍에서 입술에서 계속 연기만 내뿜었다. 담배에 기갈든 사람같이 계속 피워대는 것이었다.

"그래도 마침 흙이 얼지 않아서, 음지는 벌써 얼어가지고 꼭괭이가 튀는데 마치 그래도."

어떻게 할 바를 모르던 짝쇠는 기껏 한다는 말이 그런 식이었다.

"한 열흘 지나믄 눈이 올 긴데..."

할 얘기는 따로 있는 눈치였지만 짝쇠는 겉돌듯 혼자 중얼거렸다.

"그는 그렇고오."

한참 있다가

"성님."

"..."

"저기, 성님."

"할 말 있으믄 해라."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

"우찌 한 달에 초상이 두 번이나 나겄소? 깨룸직해서 못 전디겄소."

"..."

"이기이 어디 심상한 일이겄소..."

"무신 소리를 할라 타노?"

"저기, 이 말 하믄 성님이 또 후박을 기요마는 저어 그런께 지삼 만이 그자가 환생을 못하고."

"이 미친 놈아, 지가놈을 내가 직있더나?"

", 하기는 그, 그렇구마요. 우리가 한 짓이 아인데 그 생각을 안 하는 것도 아인데 우떤 때는 우리가 직인 것 겉이, 꼭 우리가 직인것 겉은 생각이 든단 말이요."

"두 분이나 뫼구덕을 파다 보니 대가리가 돌았구나. 니 차례 될라, 정신채리는 기이 좋을 기다."

하기는 했으나 강쇠역시 지삼만을 자신이 죽인 것 같은 착각을 한 적이 한두 번 있었다. 죽은 자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끼거나 사위스런 생각은 안 했지만 그러나 짝쇠의 말로 인하여 강쇠는 팔이 길었던 한가의 모습을 생각한 것이다.

다만 그의 모습이 떠올랐을 뿐이다.

"그나저나, 아이구 음, 그나저나, 불시에 식구가 두 멩 줄었으니 형수가 우찌 전딜란고 모리겄소. 구비구비 생각이 날 긴데, 가난뱅이 한테는 그저 무벵한 기이 젤인데."

노모는 연로하여 세상을 떴고 아니는 사고로 죽었는데 짝쇠는 기껏 위로를 표한다는 것이 무병해야 한다는 초점 잃은 말이었다.

강쇠는 걷다 말고 호리병을 발부리에 놓는다. 누비저고리 속주머니 속에서 궐련을 꺼내어 붙여물고는 다시 술병을 들고 걷는다. 그때 무덤 가까이 풀섶에서처럼 연달아 기갈든 사람같이 담배를 피워댄다.

', 그런데 한가 그놈이 환생을 못하고, 해야만 아귀가 맞는 얘기 아이가.'

강쇠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쓴웃음을 띤다. 한가의 죽음을 짝쇠가 어찌 알 것이며 어느 누구도 한가의 죽음을 모른다. 시체는 짐승 밥이 되었는지 아니면 그 골짜기에서 아직도 썩고 있는지, 팔이 길어서 원숭이 같았던 사내, 살려 달라고 애원하던 그 눈동자, 소름이 돋아난 목줄기며 입 언저리가 선명하게 강쇠 눈앞에 떠오른다. 비수를 씻던 개울가며 흐르는 물에 번져나던 붉은 피, 붉은 노을이 악몽같이 떠오른다. 그러나 한 줄기의 연민이나 죄책감이 없는 것은 그만큼 김환의 죽음이 처절하고 빈틈없이 강쇠 마음을 가득 채운 때문일 것이다. 사실 강쇠가 한가를 생각한 것도 짝쇠말에 연유된 것이며 노모의 죽음이나 어린것의 참사를 한가의 망령과 결부시키려는 그런 마음은 터럭만큼도 없었다. 담배꽁초를 버린 강쇠는

"아무렴 그렇지이이, 그렇고말고오오, 한 오백 년 살자아더어니이이!"

소리는 냅다 지른다. 가사 한 절이 더 붙으니까 훨씬 속이 후련해진다.

 

 

3장 아들의 스승

"해도사 있소오!"

마당으로 들어서면서 강쇠는 소리부터 질렀다. 암벽으로 된 언덕을 등지고 남쪽을 향해 읍하듯 엎드린 오두막에선 아무런 기척이 없다. 마당의 눈은 말끔히 쓸려져 있었고 올라올 때 눈길에 발자국이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사람이 밖에 나간 것 같지는 않다.

"해도산지 달도산지 젠장, 있소오! 없소!"

기척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방문 앞을 바라본다. 눈에 익은 그 독특한 신발이 놓여 있었다. 짐승가죽으로 마든 신발이다. 해도사가 방안에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강쇠는 집 전체를 한 바퀴 돌아본다. 집이라기보다 산의 일부같이 눈에 잘 띄지 않는 오두막인데 어딘지 모르게 완강한 느낌을 준다. 암벽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탄탄해 뵈는 문틀 때문인지, 그리고 댓살문에 하얀 문종이가 눈에 설다.

"어디 아픈가?"

강쇠는 방 앞으로 다가가서 가죽꼬리를 잡고 거칠게 방문을 잡아당긴다.

"아아니?"

해도사는 방 한가운데 정좌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멀쩡해 있음서, 사람이 부르는데 그래, 코대답도 안 할 기요?"

해도사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사람을 기할 요량이믄 삽짝에다가 작대기나 놔둘 것이지, 어멍 그만 떨어 좀 알은체나 해보소."

민망스러워진 강쇠는 그러나 들어오라는 주인의 말 같은 것은 기다리지 않고 방안으로 쑤욱 올라간다.

"어허헛!"

기합인지 고함인지 해도사는 눈을 번쩍 떴다. 황황히 빛나는 눈, 운통 얼굴이 눈으로만 채워진 것 같은 느낌이다. 강건한 모습이었다. 아무리 배짱이 좋기로, 강쇠는 깜짝 놀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멀쑥해진다. 해도사는 앉은 자리에서 손바닥 하나로 방바닥을 짚고 팽이 같이 빙그르르 몸들 돌렸다. 벽을 등지고 책상다리를 하며 앉는다. 편안하게, 아주 편안하게 수양버들같이 양 어깨의 힘을 빼버린 자세로, 그러고서 강쇠를 바라본다. 멀쑥해하던 표정은 사라지고 강쇠 얼굴에 노기가 떠오른다.

"신대 잡았던 기요?"

낮은 목소리다. 해도사는 웃는다.

"아니믄 부채 들고 장대 탔던 기요?"

역시 해도사는 웃기만 한다.

"아아 밴 사람이믄 아아새끼 안 떨어졌겄나."

"장석같이 서 있지만 말고 앉기나 하소."

", 앉으라 마라 할 것도 없이 앉을 기요마는."

들고 온 두루미병을 한 곁에 놓고 강쇠는 자리에 앉는다.

"방안이 따뜻한데 그 누더기는 벗으시오."

강쇠는 해도사는 한 번 노려보고 나서 기장이 훨씬 긴 누비저고리를 벗는다. 속에는 비교적 깨끗한 솜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두 사내는 한동안 투계같이 머리를 숙이고 눈을 치켜뜨며 상대방을 노려보다가 제풀에 웃고 만다. 해도사는 강쇠의 나이쯤 됐는지, 한두 살 도 되는지 모른다. 몸집은 보통이었다. 부릅뜨지 않아도 눈은 커다랗고 시원했으며 범눈썹이었다. 몸집은 보통이었다. 부릅뜨지 않아도 눈은 커다랗고 시원했으며 범눈썹이었다. 그 이외에 별 특징이 없는 흔히 보는 촌부다. 해도사의 인상보다 훨씬 강한 것은 그가 거처하는 방안 분위기였다. 좀 과장하여 집 외모와 내용은 천양지간, 운니지차라 해야 할지, 대가댁 사랑방만큼이야 할까마는 또 값지고 유서 깊은 기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청량수로 씻어놓은 듯 방안은 청결하였다. 무쇠 주전자가 오지 화로 위에 올려져 있었다. 물이 끓고 있다. 칠을 안 먹인 박달나무 백골판과 역시 백골인 문갑은 닦아서 길을 내어 반들거렸다. 문갑 위에는 약간의 낡은 서책과 붓통, 벼루집 등이 놓여 있었으며 출입문 맞은켠은 벽장이었다. 그러나 방안이 정결하고 풍월 냄새가 풍긴다 해서. 아까도 말 했듯이 해도사는 결코 선비풍의 사내는 아니었다. 어허헛! 하고 기합 같은 고함을 칠적의 그 강건한 모습과는 딴판인 평범한 사내였다.

"봄도 멀었는데 눈병을 앓았소? 눈자위가 왜 그리 불긋불긋한고?"

강쇠 얼굴을 보며 해도사는 말했다.

"말도 마소. 그놈의 환장할..."

하다가

"그기이 꼭 청보따리 끼고 찾아온 제집 겉더란 말이요. 떠나보내노라고 한판 설게 울었구마요."

그것이 "한 오백 년"이라는 노래였었다는 설명은 하지 않는다. 해도사도 듣기만 했을 뿐 청보따리 낀 제집 같더라는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담배 안 할라요?"

강쇠가 담배를 권했다. 해도사는 손을 내저었다.

"담배도 안 피우고 무신 재미로 사는고? 신선 될 사람도 아닐 긴데.“

궐련 한 개피를 물고 강쇠는 성냥을 긋는다. 해도사는 판 밑에 있는 뚝배기 하나를 강쇠 앞으로 내밀어준다.

"왜 신선이 안 된다는 거요?"

"덫 놔서 짐승 잡고 산 밖에 나가 온갖 잡스런 거를 다 묻히옴서 신선이 될 기다, 그라믄 그 말이요?"

해도사는 껄껄껄 웃는다. 웃다가

"그래 이웃 사람은 편안한가요?"

"편할 것도 없지마는, 또 안 편할 것도 없지요. 게울이 어서 가야 나물이라도 훑어묵을 긴데."

안또병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일전에 내가 이 집 비워줄 테니 와 있겠느냐 했지요. 질겁을 하더구먼. 김장사 겨드랑에서 떠나면 죽는 줄 아는 모양이지요?"

"또 벵이 도지는 모앵이요."

"이 년을 넘겼으니."

"그렇기 엉덩이 박을 만하믄 털고 일어섬서 머한다고 신방겉이 꾸미기는 꾸미는고?"

"신방이라..."

"천년만년 살 것겉이 곰딱곰딱을 알뜰하게 해놓고, 우째서 해도사가 남자인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리겄소."

"남자 여자 까다롭게 따질 거는 뭐 있누. 사람이면 됐지."

"까다러븐 거는 그쪽이지. 내야 자식 있고 마누라 있고 남과 겉이 사는 사람 아니요? 안개 피우지 말고 남자믄은 남자답게 하나 뒤비시업고 오믄 될 긴데 청승스러버서 못 보겄네."

"사람이나 금수나 산천초목 그런 것이 순리대로 있어야, 그렇잖으면 명 보존하기가 어렵소. 바위에 주먹질하는 것은 안 하니만 못한일이고.“

해도사는 왠지 정색을 했다. 그런데 소인배 같기도 하고 여성적으로도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머라 캤십니까? 순리라 캤십니까? 허허어, 서천 쇠가 웃일 일이네. 사람이나 금수나 초목까지 암수가 있기 매련이고 짝을 짓는 것이 생기난 이치로 알고 있는데 그거는 순리 아니다, 그 말이요? 살다 보니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듣겄네."

"강남을 가고 오는 철새는 모두가 다 가고 오는 것은 아니오."

"...?"

"가다가 고중절도에 떨어지는 놈도 있을 것이요 떨어진 놈 중에서도 죽는 놈, 살아남는 놈, 암수가 맞아떨어지게 한곳에 내려앉는다 할 수도 없고."

"철새가 중도에서 떨어진다믄 살아남기나 하나 머."

"허허어, 아무튼 그렇게 되는 일이 새의 뜻은 아닐 것이며 사방에 불모인 암산에 홀로 소나무 한 그루 서 있는 그것도 어디 그게 소나무의 뜻인가."

"어찌 새나 나무하고 사람이 같을꼬."

"생명이면. 그 근본이 같다 아니 할 수 없지요. 사람의 경우도 몹쓸 병에 걸리고 조실부모 천애고아, 일조에 패가망신, 생이별에 죽어서 이별, 그게 어디 사람의 뜻이겠소?"

', 어디 듣던 말 같구만. 성님이 한 얘기하고 비슷한 긴가?'

"세상의 일이란 제 뜻대로 하자 해도 되지 않겠으나 제 뜻대로 됐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의 망상이며 망상은 순리가 아니지요."

"해도사 말심대로 아무것도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가만히 누어서 먹이든지 굶기든지 처분만 바라믄 되겄네요."

"사람의 주먹은 바위를 깰 수 없으니 그것을 감행하려면 역리요, 사람의 손은 흙을 팔 수 있고 연장을 만들어 나무를 뽀갤 수 있으니, 그것을 아니 한다면 역시 순리가 아니라 흙을 파지 않고 나무도 뽀개지 않는다면 그도 또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우니 두 경우는 다 같이 순리가 아니오. 생명에 집착하는 것. 버리는 것, 그것도 다 같이..."

해도사는 주술에 걸린 사람같이 보였다. 그리고 이야기의 내용보다 바보스럽게도 보였다.

"그런께 해도사가 짝을 안 짓는 거는 그것이 바위하서 그렇다 그 말이요?"

"? 아 예, 내 경우는 그렇지요."

"우째서요?"

강쇠를 힐끗 쳐다본다.

"사람은 물에서 배워야 하는 거요."

"허 참, 빠져 달아나네."

"산에서는 열매를 따고 짐승을 잡으며 살아야 하듯이, 물가에서는 고기를 잡고 해초를 뜯으며 살아야 하듯이, 예 그렇지요. 물이란 모난 그릇에 담으면 모난 모양이 되며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근 모양이 되고 그러나 물은 물이 아닌 때가 없었지요."

"물만 그렇건데? 만가지가 다 그렇지."

"안 그렇지이. 억지로 넣으려면 상채기를 내야 하고 느슨하면 구멍투성이고 흐르는 것과 구르는 것이 어찌 같을꼬?"

"물은 여행을 안 하면서도 물방울이 되고 홍수도 되고."

"가만히, 좀 기다리보소. 알 듯 모릴 듯한 말인데, 그릇 따라서 물의 모양이 변한다, 그라믄 내 한 가지 묻겄는데요, 지금 우리 조선 사람들은 왜놈의 그릇에 담겨 있는 판국 아니겄소? 한다면 우리 조선 백성이 왜놈의 그릇 모양으로 있는 것도 순리다, 그렇기 얘기 할 수도 있겄네요."

"우리 백성을 담은 왜놈의 그릇은 어떤 그릇일꼬?"

"그거를 내가 우찌 알겄소. 도사나 알 일이지."

"허허허헛헛...... 허허헛, 사람이 사람을 담는 그릇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산천이 그릇이지. 하기야 뭐 사람 담는 그릇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산천이 그릇이지. 하기야 뭐 사람 담는 그릇을 전혀 사람의 손으로 못 만든다 할 수는 없을 것이오만 굳이 말한다면 감옥이라는 것이 그렇고, 그러나 그것은 그곳에서 물같이 되라는 것하고는 다르지. 쌍방이 다 순리가 아닌 결과의 것이거든. 독립운동하는 사람을 가두었다믄 그것은 감옥소 쪽의 역리요 뚝질한 자를 가두었다믄 그것은 도둑놈 쪽이 순리를 따르지 않았다, 그렇게 되지요. 한데 우리 백성을 모두 물이라 비유한다면 왜놈의 그릇이란 접시 바닥이지. 조선 백성이 홍수를 이룰 만큼 많은데 그 얇삭한 접시 바닥에 담아질 수 있겠소? 담았다 담겼다 생각을 한다면 그것도 망상이요, 담으려 하고 담기려 한다면 그것은 역리요."

강쇠는 경청한다.

"저 천상천하 빈틈없고 거짓없이 모든 것은 가고 오는데 그것을 모두 왜종자가 다스리는 것도 아니겠고 풀입 하나 맨손으로 만들지를 못하는데 우리가 그들에게 순리해야 할 까닭은 없는 게요. 아까는 물을 두고 그릇에 담긴 모양만을 비유했지마는 물이 모이면 넘치고 홍수가 되고, 그 부드럽고 나약한 것, 어떤 것도 쳐부수는 무서운 힘이 된다는 것을, 뻔한 이치를 사람들은 잊고 살거든. 노하여 뚝을 쳐부수던 물은 그러나 강이 되어 생명의 젖줄이 되는 것이니 물은 어머니요 해는 생명의 아버지라."

하다가 해도사는 기분 나쁘게 씩 웃는다. 불쾌감을 주는 상호도 아니었는데 강쇠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 느낀다. 눈을 감고 않았을 그때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시각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동안 강쇠는 실로 변화무쌍한 그의 여러 개 얼굴을 보았다. 왜놈에 대한 애기는 대단히 기분 좋게 들었는데 찬물 끼얹듯 저 기분 잡치는 웃음은 무엇인가.

강쇠는

"목이나 축이감서 이야기해봅시다. 술은 가져왔고 고추장 장맛이 지리산에서는 제일이란 이 집 안주가 있으믄 되겄소."

하고 화제를 부러뜨린다. 그리고 한 켠에 놔둔 두루미병을 방 한복판에 옮겨놓는다.

"그거 조오치요."

해도사는 방에서 나갔다. 그가 나가는 동시 강쇠의 얼굴은 생각 깊은 것으로 변했다. 해도사란 물론 본명은 아니었다. 산사람들과 산기슭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호칭일 뿐 그 자신이 인정한 호칭인지 아닌지 그것은 모른다. 해가 생명의 아버지라는 그의 지론과 해돋이 때면 바위에 서 있는 모습을 간혹 볼 수 있었다는 데서 아마 그런 거룩한 호칭을 누군가가 선사한 것 같았다. 그에 대하여 사람들은 별로 아는 바가 업다. 손재주가 있어서 목수들 뺨치게 기물을 만든다든가, 칠칠한 계집같이 장무새 솜씨며 살림 꾸려가는 것이 여간 아니라든가, 서당개 풍월식의 식자는 있어서 정초가 되면 마을로 내려가서 토정비결도 봐주고 택일이며 방위도 봐주며 용돈을 벌어쓴다든가, 대강 그런 정도였다. 그러난 소수의 몇 사람은, 그러니까 화전민 아닌 근동의 식자 몇 사람은 해도사의 지식을 서당개 풍월식으로는 생각지 않았고 특히 풍수자리에 대하여 상당한 조예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들은 해도사라 칭하지 않았다. 본명인 성도섭으로 호명했다. 해도사는 산채 무친 것과 무김치 몇 조각을 썰어 올려놓은 소반을 들고 들어왔다.

"무슨 술이오?"

강쇠는 병마개를 빼면서

"매아주요."

"어디서 났소?"

"무신 맴이 생겼던지 초상치고 내리간께 비연이가 주더구마요. 그 기집한테는 욕한 것밖에 한 일이 없는데 허허헛......"

쑥스러워한다.

", 그 술맛 좋다."

잔을 비운 해도사는

"김장사."

"와요."

"아까 내가 한 말은 모두 신선 돼가는 이야기요, 으하하핫핫......"

어깨까지 흔들며 웃는다.

"들었다 놓았다 무신 짓이요? 이거 쭉다말 받듯기 사람을 갖고 놀았구마."

화난 척했으나 강쇠는 오히려 그 말을 들음으로 해서 마음이 놓였다.

"좋소. 그라믄 이분에는 해도사, 술값을 받아내야겄는데."

"그야 어렵잖지. 귀보리 두 됫박이면 족하겠지요."

"그런 말심 마이소."

강쇠는 해도사 술잔에 철철 넘치게 술을 부어준다.

"이 술이 우떤 술이라고."

"산전수전 다 겪은 비연이가 설마한들 기둥서방 삼으려고 술 주었을까."

"아니믄?"

"욕값이겠지요. 불쌍한 그 계집한테 누가 욕이나마 했겠소."

"허허어, 얘기는 그렇게도 할 수 있구마요. 그렇다믄 나겉이 몸 좋은 장사가 비연이 그년한테 욕이나마 시주를 했일 적에, 신선 될라꼬 도 닦는 해도사께서는 무엇을 시주하였이까요?"

"물으나마나지. 하하핫하하핫......"

"그라믄 이야기하소. 우째서 해도사 경우엔느 혼자 사는 것이 순리를 따르는 건지, 까짓것? 물이고 나발이고 신선 돼가는 이야기는 처자식 달린 놈, 무신 소용이 있겄소."

오래간만에 독주를 마셨기 때문인지 쉬 취한 것 같다. 강쇠는 두 팔을 올려 춤추듯 하며 말했다.

"말 못할 것도 없지요. 귀보리 두 되보다 쉬운 일이지. 그러나 내가 장가를 가기로는, 예 세 번이지요."

얼굴에서 웃음은 사라졌으나 해도사는 덤덤하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 한 분도 아니고 세 분이나 장가를 갔다니......"

"그렇소. 세 번이나 장가를 가게 된 것은 전혀 내 뜻이 아니었소. 말하자면 팔자가 사나웠던 게지. 처음 장가든 여자는 일 년에 못되어 죽었고 두 번째 장가든 여자는 반년을 못 넘기더구먼. 상처는 두 번 한 셈이지요. 그러고 나니 장가들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 오싹 한기부터 들고, 그래서 한 삼년을 수양 삼아 절을 찾아다녔소. 머리 깎을 생각도 해보았고. 그런데 집에서는 용모가 반반한, 초취 재취보다 월등 잘생긴 과부를 집에 들였지요. 이제는 남같이 자식도 보고 살려나 부다, 웬걸? 그때만 해도 양반축에 끼지는 못하나 재물이 넉넉하여 제법 떵떵거리는 가세였지요. 여자는 아마 살림을 보고 개가를 했던 모양이라 선친께서 빚봉수를 잘못하여 일조에 집안은 풍지박산, 설상가상으로 부친마저 심화병으로 세상을 뜨게 되었고 그렇게 되니 여자는 보따리를 싸서 미련 없이 떠납디다. 아마 그래서 법으로 만난 여자가 아니라는 말을 사람들은 나뵈는지 모르겠소만 하여간에 겨우 비바람을 면할 정도의 남의 집을 얻어서 초죽음이 된 모친을 뫼셨지요. 일 년 만에 어머님도 돌아가시고, 그게 다 삼십 년 전에 겪은 일들이오."

모친 초상 때 해도사가 일부러 찾아와서 모든 절차를 자상하게 돌보아주던 일을 강쇠는 생각한다.

"그때부터 취처 안 하기로 마음먹었지요. 실은 내가 결심을 했다. 기보다는 네 번째 장가를 든다면 그거는 순리가 아닐 것이다, 생각한 거고 또 그렇게 되니 마음이 편하더구만요 아주 편안해요."

"그렇다믄 차라리 중이나 되지."

"지켜야 하고 막는 것이 너무 많아서, 목에다 쇠줄 매고 끌려가고 싶지 않았소. 부처님이나 산신령이나 겁없이 생각해보는 것도, 흐르면 흐르고 넘치면 넘치고, 머리 안 깍고 절에 안 가도 천지만물은 순리대로 생명을 다하는데 어째서 사람만이 아니 그런지 헛참."

말은 끓어지고 두 사내는 술만 마신다. 이윽고 강쇠는 일어섰다.

"매화주를 마셨으면 머루주도 마시고 가야지."

강쇠가 떠나는 줄 알았던지 해도사는 말리듯 말했다. 그러나 옷깃을 여민 강쇠는 너부죽이 절을 했다.

"어찌 된 영문이오? 내일부터 천자문 배우려고 이러는 거요?"

", 천자문이든 신선 돼가는 길이든 허락만 해주신다믄 배워야지요."

"아들 일이구먼."

해도사는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말했다.

"우떻게 그걸 알았십니까?"

"세상에서는 나를 점장이라고들 하는데 그걸 모르겠소?"

"메주가 되든지 감주가 되든지."

"가르칠려면 신학문을 택해야지요."

"형편도 안 되지만 된다 해도 그거는 싫었구마요."

"그렇다고 뭐 내가 아는게 있어야지요."

", 그런께 메주가 되든 감주가 되든 상관이 없다 안 했소오."

"그거야 그쪽 형편이고."

곁눈질을 해보며 하는 말이다.

"앗따 참, 초정에 동네로 내리가서 토정비결이나 봐주는 것보다 나을 긴데 그러네."

너부죽하게 절할 때와 달리 강쇠는 다분히 강압적이다.

"우리 아들놈 혼자가 아니고 안서방한테도 아들놈 하나, 짝쇠한테도 아들놈 하나 세놈이믄 서당은 될 긴데 안 그렇소?"

"서당이라니? 데려다가 목수일이나 가르쳐준다면 모를까."

"애키 여보시오? 나를 벅수로 아는 모앵인데 도사가 그러믄 쓰나. 맘속으로 탐을 내고 있음서 웬 어멍이요. 해도사 눈에도 우리 그놈 머가 될 것겉이 보있일 긴데, 내가 좀 참고 있었이믄 해도사 발로 걸어왔일 거 아니요?"

"허허허헛 허허헛."

"내 분명하게 메주로 맨들든 감주로 맨들든 했인께 목수일이라도 개의 안 할 기니."

"좋소. 그러면 머루주나 마셔봅시다.“

 

 

4장 귀향

한복이가 평사리 나루터에 내린 것은 섣달 그믐달 한나절이 좀 지난 때였다. 넉 달 만인가, 추석을 지낸 뒤 곧장 떠났으므로 그러니까 넉 달이 넉넉한 시일인데 몇 번 있는 만주 내왕에서 가장 긴 체류 기간을 보내고 지금 막 돌아온 것이다. 휘청휘청 강둑을 넘어서다 말고 한복은 지리산 쪽, 눈에 덮인 연봉을 바라본다. 때 묻은 목도리가 나부끼면서, 목도리 자락이 시계를 가리곤 한다. 뼈에 스며드는 찬바람이 강상에서부터 계속 불어 닥친다.

'내일이 설인데......'

모양이 망가지고 빛도 바랜 갈색 중절모를ㄹ 눌러쓴 얼굴에 긴 행정의 고달픔이 앙금같이, 땟자국같이 잔뜩 실려 있다. 한복은 두려운 듯이 시선을 옮긴다. 마을과 집이, 당연히 있을 곳에 그것들이 있었다. 변함없이 위풍당당한 최참판댁을 중심하여 전면에 좌우에, 바위 곁에 돋아난 버섯 같은 초가 지붕들이 오목오목 널려 있다. 마을에서 외떨어진 곳에 밀려나 우두커니 서 있는 김위관댁이었고 지금은 김한복의 보금자리다. 물방앗간이며 텅 비어 있는 타작마당, 멀리 방송이 같은 까치집이 얹혀 있는 벌거숭이 탱나무며 모두가 다 떠날 때 있었던 그대로의 것이건만 실감할 수가 없다. 한복은 정말 내가 여기 와서 서 있는 것인가 하고 생각한다. 아래서부터 거슬러 올리던 모래바람, 만주 벌판의 모래바람 속을 희망같이 보이기 시작하던 마차 한 대, 어지럽게 날아가던 기차 선로의 풍경이며 잎 떨어진 나무들이며 점철된 듯 무수히 떠 있는 섬 사이를 누비고 지나온 하얀 물보라의 뱃길이며, 그런 것들은 책갈피를 넘기면 나타나는 그림같이 선명한데 눈앞에 보이는 고향의 풍물은 어찌 이렇게 아득하고 낯설기만 한 것일까. 무슨 까닭일까. 한복은 고개를 흔든다. 설핏한 겨울 햇살 속을 까치가 짖으며 날아간다.

'엿장수 가새 소리 겉다.'

까치 소리만은 정다웠다.

'내가 이런 소리나 하고 있을 처지가.'

바람 때문에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한복은 걷기 시작한다. 부산 부둣가에서만 하더라도 목마르게 집이 그리웠다. 군중에 떠밀리며 고함 속에 파묻히면서 가슴은 가족과 집을 향해 일직선이었다. 낮배였으니까 그렇게 서둘 필요가 없었는데 식전 신새벽부터 여관을 나와 선창가를 서성대며 요기하는 것도 잊은 채 선표 한 장을 보고 또 들여다보곤 했었다. 개찰이 시작되자 한복은 허둥지둥 초행자처럼 윤선에 올랐다. 화물의 선적이 끝나지 않아서 출발이 늦어지는 동안 삼등 선실에 쭈그리고 앉아 고향에, 집에 돌아가지 못할 것만 같은 망상 때문에 미칠것만 같았다. 출발의 뱃고동이 항구에 울리고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는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가. 그런데 지금은 무슨 까닭일까. 낯설고 두렵고, 찬바람 속에서 있다는, 사철을 찬바람 속에, 아니 평생을 찬바람 속에 서 있었다는 느낌이 회오리바람같이 전신을 떨게 하고 목이 메인다. 바람보다 차갑게, 뼛속까지 스며드는 외로움이다.

'내 맘도 질정이 없다마는, 오고가는 것이 마치 저승과 이승맨치로, 저승에서 이승으로 왔다가 갔다가 하는 것겉이 와 이리 까마득한지 모리겄네. 오만 기이 다 꿈길 겉고 나는 지금 꿈길 속에 서있는 거나 아닌지. 부모 형제, 가숙과 자식, 많은 사람들하고의 인연도 금길인가 거짓말인가 믿을 수가 없네. 내 어릴 적에 소달구지를 타고 함안서 이곳으로, 이곳에서 함안으로 오고가고 했일 적에도 바로 전의 일이 까마득하고 지척도 까마득하고...... 아아, 그렇구나!'

오랫동안 잊었는가 싶었던 일이, 아니 잊었을 리가 없다. 잊었다고 생각했을 뿐이겠지. 한복은 평사리 내려서면서부터 엄습해온 마을의 찬바람이 바로 어릴 적의 그 아픔이었던 것을 깨달은 것이다. 어릴 적, 노숙하면서 평사리 마을을 찾아오던 소년 시절, 운수 가 좋은 날엔 소달구지를 얻어 탈 수 있었다. 장터 좌판 밑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며 잠들 수 있었던 밤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풀모기떼의 습격을 받아 얼굴이 딸바가지가 되었던 수풀 속의 잠자리에 비하면. 소나무 밑둥에는 산개미가 많았다. 산개미는 하얀 송진을 개미구멍으로 물어 나르곤 했다.

"개미야 개미야, 너거들은 집이 있고 식구들이 많아서 참 좋겄다."

밀개떡을 조각내어 나누어주고 구름 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면, 그런 한때는 평화스러웠다.

"아까 창대겉이 이 비가 쏟아지는데, 비나 좀 멎거든 가거라."

낯선 여자가 말렸다. 한복은 가야 한다고 했다.

"부모가 없나?"

한복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씨를 보아서는 상사람우 자식은 아인갑는데 아이구 첫첫! 죄 많은 사램이 자식 두고 가지."

여자는 지붕을 덮기 위해 엮어놓은 이엉 몇 마디를 잘라서 잘려진 곳에 매듭을 지어주었다.

"그라믄 이거라도 덮어씨고 가거라."

한복은 이엉을 뒤집어쓰고 창대같이 쏟아지는 가을비를 맞으며 걸었다. 평사리로, 우묵장성 잡풀만 우거졌을 옛집으로 화살같이 날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평사리 마을에 이르면 마을은 멀기만 하고 낯이 설고 두려웠다. 샐인 죄인의 새끼! 샐인 죄인의 손! 수풀 속의 풀모기 떼같이 동리 사람들은 일제히 아우성을 칠 것만 같았다.

'너무 서러버. 자식도 가숙도 내 전사를 우찌 다 알꼬. 너무 서러버. 내가 죽어 저승으로 가더라도 아부지는 보고 접잖다! 참말로 보고 접잖아! 참말로!'

한복은 그리운 식구며 집을 눈앞에 두고 여러 가지 응어리가 되살아나는 까닭을, 허무하고 외로워지는 심정의 연유를 알기는 안다. 아들 영호 때문인 것이다. 지난해 광주에서 발생한 학생사건은 아무리 보고 관제를 하여도 사람들 입을 통해 소상히 파급된 사실인데 그 사건이 항일을 향한 학생 궐기의 봉화가 된 것은 역사의 정석으로서 연일 전국적으로 치열한 운동이 전개되어오던 바, 양력으로 정월 중순, 그러니까 얼마 전의 일인데 진주에서 진주고보, 일신여고보, 보통학교 등이 격렬한 시위운동을 벌였는데 진주농고는 좌절되었으며 그 후 다시 맹휴 계획이 발각되어 김영호는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경찰에 연행된 채 현재까지 석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놈아! 머리빡에 피도 안 마른 주제에 머가 잘났다고, 남하는 대로만 할 일이지 앞장은 와 섰노. 니가 그런다고 만 사람들의 지도자가 될 기가. 니는 샐인 죄인의 자손 아니가. 이놈아, 니는 남의 눈에도 띄지 않게 조신스리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말이다. 잘난체할 기이 아니라, 못난 체해도 돌맹이가 날아온다. 이놈아, 수모를 견디고....... 그러나 한복의 감정이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아들 문제에 대해서는 범상하게 대처해나가리라는 결의, 한복은 그 결의에 비애를 느낀 것이다. 주막이 가까워지면서 술 한 잔을 마시고 갈까 그냥 갈까 망설이는데 한복은 주막이 붐비고 있는 것을 느꼈다.

'내일이 설이제. 이제 나도 조상한테 물이라도 떠놓을라고 오는 길인께.'

읍내 장길에서 돌아온 마을 사내들이 언 몸을 녹이기 위하여 그곳에 진을 치고 있음이 분명했다. 걸걸한 사내들 웃음소리가 새나온다. 한복은 그냥 지나치려고 마음먹는다. 그랬는데,

"아니 저눔 자식, 한복이 아이가? 야아! 한복아!"

소피를 보고 나오던 바우가 소리쳤다.

"한복이가 왔소!"

이번에는 주막을 향해 소리쳤다. 다음 순간 늙고 절은 사내들이 밖을 내다본다.

"한복이다!"

"김서방!"

몇 사람이 달려 나왔다. 바우는 한복의 팔을 잡았다. 뒤늦게 쫓아 나온 끝봉이 보따리를 든 한복의 다른 한 팔을 잡았다.

"와들 이러요?"

몸은 흔들고 뿌리치는 시늉을 하며 한복이 물었다. 그리고 땅 위로 시선을 떨군다. 만주를 다녀올 때마다 늘상 하는 한복의 태도였지만 마을 사람들의 수선은 다른 때보다 지나쳤다. 누구나 할 것없이 외지, 부산만 다녀와도 무슨 신기한 소식이나 있을까, 호기심과 기대에 차서 모여드는 것은 옛적부터의 마을 사람들 습성이기는 했으나.

"와나마나 치분데 들어가기부터 하자."

바우가 팔을 끌었다.

"그려. 따끈한 국물부터 마시고."

솜저고리 짧은 소매 사이로 부지깽이 같은 팔목이, 그 팔목을 떨면서 영산댁이 말했다. 목소리는 샛바람에 날리는 것같이 들렸다.

"와들 이러요."

되풀이 물었다. 주막에 남은 사람들은 얼굴을 내민 채 손짓하며 오라고 소리쳤다. 영산댁이 등을 밀었다. 끌리다시피 한복이 주막 안으로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서둘러서 한복의 자리를 마련해준다.

"숙아! 어여 국부터 한 그릇 떠 내더라고."

수양딸로 들어온 계집아이에게 영산댁은 신이 나서 소리쳤다. 떠들썩했던 주막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국부터 마시고 난 다음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켠 한복은 손등으로 입 언저리를 닦으며 다시 같은 말을 했다.

"와들 이러요?"

입들을 다물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본다.

"와나마나, 김서방은 몰루고 오는 모앵인디."

영산댁이 입을 떼었다. 사람들 얼굴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술잔을 내려다보며 한복이는

"머 말입니까."

"나는 알고서 니가 돌아오는 줄 알았더마는 그기이 아인가배?"

한복이 옆에 한 사람 건너서 앉아 있던 봉기노인이 목을 뽑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봉기노인이 나서는 것에 눈살을 찌푸렸으나, 말하자면 대변자인데 그 역할을 묵인하는 표정들이다.

"학생들이 만세를 불렀다꼬 말장 잽히갔다 안 카나. 사방에서 붙잽히 갔단다. 영호 그눔아아도 잽히갔단 말이다. 참말로 니 모리고 오는 기가?"

한복은 당황하며 목을 뽑고 눈치를 살피는 보익노인을 쳐다본다. 참말로 니 모리고 오는기가? 그 어세의 정다움에 놀란 것이다. 인사를 하면 빙 오는 날 강아지 걷어차듯, 말끝마다 샐인 죄인의 자손하며 침을 뱉었고 근래에 와서는 농업학교에 진학한 영호를 두고 목에 걸린 가시처럼 증오하며 악담을 서슴지 않았던 봉기노인이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당황하며 한복은 저도 모르게 어설픈 웃음을 웃는다.

"눈치를 본께 전혀 모리고 오는 거는 아인갑는데."

"......"

"빌어묵을 놈의 세상, 머가 우찌 됐길래 이 나라 백성들이 이 고생이고. 쇠가 오만발이나 빠져 죽을 놈들! 꽃봉오리겉에 피어나는 남우 자석들 데리가서 떡을 치는 판이라. 그런께 조선놈우 새끼들은 공부할 필요 없다, 자자손손 똥장군이나 지고 저거들 처묵는 쌀이나 맨들어라, 그 말 아이겄나? 명천하늘에는 이자 벼락도 동이난 모앵이라. 생각 겉으믄 여기저기 사방에다 불을 싸질러서 말장꼬슬러부리고 마아 세상 끝장내는 기이 상수 아인가 싶다."

침을 튀기며 수염을 흔들며 제 말에 취한 듯.

"와 아니라요. 말깨나 하는 놈은 까막소 가고 힘깨나 쓰는 놈은 공동 묘지로 가고, 또 머라 카더라? 아무튼지간에 식자만 들었다 할 것 겉으믄 마구잽이라 안 카요. 식자 든 젊은 아이들이사 무서븐 기이 머 있겄소? 한꼐 그놈들이 지레 겁을 묵고 지랄방광을 하는 기라요."

봉기노인 또래와 그보다 좀 처지는 연배가 주동인 주막에서 감히 술을 못하고 국밥 한 그릇을 먹고 있던 복동이 용기를 내어 초점이 안 맞는 말 한 자리를 펴놓고 우물쭈물한다.

"무신 쇨 하노? 모리거든 입 다물어라."

복동에 자살 사건 이후 사이가 좋지 않았던 바우가 쥐어박듯이 말했다.

"내가 무신 못할 말 했소? 내 말이라 카믄 자다가도 쌍지팽이 들고 나온다 카이. !"

"니 말대로 하자 카믄 무식쟁이 농사꾼은 마 걱정이 없다, 헛 참 그놈들이 남녀노소를 가린다믄 제법 양반 아이겄나? 선악과 강약을 구별한다믄 부처님 가운데토막일 기고, 임마 복동아, 그렇다믄 말이다, 니는 잡아갈 염려가 없인께 주재소 앞에 가서 만세를 불러 보는 기이 우떨꼬?"

", 그거사."

"그런꼐 얼치기 겉은 소리는 안 하는 편이 좋고 입을 다물어라 그 말 아니가. , 무식한 농사꾼은 더 조지더라. 만세만 불렀다 카믄 태워사 직이고 찔러서 직이고 목을 쳐서 직이고 눈치볼 것 어딨더노? 유식한 사람들이야 재판이나 받지마는."

"그거난 바우 말이 맞다."

성근 수염의 오서방이 동의를 했다.

"그놈들이 지레 겁을 묵고 지랄방광을 한다는 말도 소금을 쳐야 할 얘기고, 겁이 어디 있더노? 아 개 끌듯기 끌고 가서 직일라 카믄 직이고 살릴라 카믄 살리고 그놈들 요량인데 지레 겁을 내기는 머를 겁내? 그거를 빤히 알믄서도 절’?혈기의 학생들 아이문 이 서릿발 겉은 세상 누가 나서겄소. 당해도 한분 두분 당했어야재."

"하모, 하모, 그렇지러. 그런께 요새 의병은 학상들이다 그 말이구마. 식자란 자고로 나라를 위해서 써묵는 기니께, 지방이나 축문 씰라꼬 배우는 공부가 아닌 기라."

오서방 말을 받아서 봉기노인은

"글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하믄은 나라의 충신 되는 기고 지방 충문 쓰는 거는 조상을 위해서 효도하는 기니께 다 같은 말인데 아무튼 지간에 우리 동네서도 공부간 학상이 있고 또 그놈아이가 넘한테 빠질세라 만세를 불러서 왜놈한테 붙잽히갔이니 기미년 만세 때맨치로 우리 동네도 근동에서는 제법 한다 하는,"

"보소, 덕수할배요. 다른 사렘이믄 몰라도 듣기가 민망하요."

저눔의 늙은이 낯가죽이 아니라 쇠가죽이고나, 마음속으로 욕을 하면서 끝봉이 핀잔을 준다.

"머라꼬? 멋 땜에 니가 민망하노!"

봉기노인이 화를 낸다.

"얼매 전만 해도 상급 핵교에 간 영호를 눈의 까시맨크로, 안 그랬십니까? 이런 자리에서는 가만히 기싰이믄 좋을 성싶은데."

바우의 말이었다.

"그기이 벵인데 우짜노.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가맹이 없는 뱅인꼐 장구 치고 북 치고 혼자 하게 내비리두어라. 허허헛......"

윗마을 강노인이 웃었다.

"지나간 일을 와 되배쌌노! 아 그때는 그때고, 오늘은 오늘이제."

화를 내다 말고 입술을 오므리며 웃는다. 느물느물하다. 모두 그 얼굴을 보고서는 계면쩍게 웃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김서방은 꾸린 입도 안 떼는디 넘들만 웨지 이 야단이라? 강노인 말심대로 저 혼자서 모두북치고 장고 치고 그래 쓰겄는가 모리겄네잉. 어사화 꽂고 금의환향허는 것도 아닐 것이요, 김서방 심정이 지금 기막힐 것인디."

실상 영산댁도 김영호가 칭송의 대상이 되어 기뻐해야 할지, 철장 속에 갇혔으니 슬퍼해야 할지 마음이 복잡했다. 한복이는 제 일 아닌 것처럼 멍청히 앉아 있었다.

"하기는 그래. 안에서 얼매나 욕을 보는가, 부모 맘치고...... 장래 일도 걱정 안 할 수 없지. 쓰고 남아서 자석 공부시키는 처지도 아닌데 그기이 다 허사가 되고 중도지폐한다믄."

오서방의 외사촌, 전서방이 곰방대를 털며 말했다.

"거 다 실데없는 소리라요. 나라가 있어서 과거를 볼 겁니까. 설사 왜놈한테 빌붙어서 어디 한 자리 한다 캐도 그기이 겔국에는 종질밖에 아닌 기라요. 조선놈 직이라! 카믄 직일밖에, 그 밥 묵자 카믄 말입니다. 그러니 동족 간에 원성만 사고 밤길 댕기기도 무섭고 역적이 되는 기지요. 당대만 그러고 맘사? 장사꾼이믄 몰라도 옛적부터 선비는 절개를 팔믄 안 된께, 공부한 사람일수록 독립운동은 더 많이 한께 그거를 보아도,“

"바우가 제법 알찬 소리를 하누마. 돼지 팔아서 놀음판에 날리든 니가 운제 그리 사람이 됐노."

"강노인도 참, 그기이 언제 일인데 그러요. 나도 이자 사우를 볼 나이가 됐는데, 명념도 좋소, 답대비 연로하시믄 세월이 가는 줄은 모리고 고랫적 일만 생생해지는 모앵입니다."

"댓기 이놈!"

강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때는 바우가 어디 사람 되겄던가? 많이 변했제."

봉기노인이 삐딱하게 말했다. 이때 오서방이 느닷없이

"한복이 니사 걱정 없다. 니 형이 소문대로라믄 순사부장, 높은 자리에 있다 칸께 조카 하나 안 건져주겄나."

앞 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사내들은 아연해진다. 그리고 복잡하게 가라앉는다. 다음 순간 오서방이 별안간 왜 그런 말을 했는가를 모두 깨닫게 된다. 여러 해 전에 우황 든 소를 속여서 팔려다 못 판 것을 오서방이 방해한 것으로 오해를 하고 경찰에다 의병일 했노라, 오서방을 모함했던 우가가 들어선 것이다. 그는 본시 토박이는 아니었다. 조준구 시절 타곳에서 흘러들어 뿌리를 박은 위인인데 마을에서 기피하는 인물로서 쌍벽을 이루었던 우둔하고 포악했던 마당쇠는 일본 헌병한테 총 맞아 죽은 지 오래요살아 있는 우가는 영악하기가 발톱을 감춘 산고양이 같았다. 모함 사건이 있은 후 오서방하고 상극인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갑자기 오서방이 순사부장 운운한 것은 한자리에 앉은 사람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동시 방어선을 친 것이며 한복을 그런 각도에서 존경하라는 우가에 대한 위협도 있었고 적대시하고 고립시킴으로써 늘 불타던 보복 심리를 달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우가의 얼굴은 온통 수염에 묻혀 있었다. 눈은 음흉하게 빛났다. 망태를 내려놓고 사람들을 헤치며 자리를 잡는다.

"주모, 막걸리 한 사발 주소, 어허, 날씨 참 고약하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말을 건네지 않았다. 독불장군, 고립에는 이골이 난 듯 답답할 것 한푼 없는 조소가 그의 입가에 맴돌고 있었다. 술 한 사발을 마시고 안주를 집으면서 우가는

"옛날 옛적에, 그게 언제던고? 관가 출입을 한분 하더마는 순사라 카믄 저승에서 할애비 만내듯 환장이라, 이웃 사람의 순사 형님이 아니고오, 사돈의 팔촌한테 순사 형님이라도 있었이믄 웬간하겄다."

"뭣이!"

오서방의 몸이 솟구치려 했을 때 옆에 있던 끝봉이 허리띠를 잡았다.

", 그거 수천 리 밖에, 그런지 안 그런지 긴가민가 하는 터에 참말로 애연하고 가련코나. 하하핫핫핫......"

"이 사람아, 무신말을 그렇게 하나, 오래간만에 김서방이 돌아왔고 한 이웃에서 걱정들을 해 한 말인데."

강노인이 나무란다. 우가는 그 말대꾸는 하지 않았다.

"시잘데 없는 소리는 그만들 허고, 어여 사람이나 보내더라고. 집에서는 식구들 다 죽어가는데, 이야기는 내일 모래도 있던 않겄어? 자아, 김서방 어여 가랑께."

영산댁은 키질하듯 부지깽이 같은 두 팔을 올렸다 내린다. 한복이 맨 먼저 주막 밖으로 나왔다. 사내들도 술값을 셈하고 망태를 챙겨든다. 강노인과 우가만 주막에 남았다. 강노인과 봉기노인은 장길에 들렀던 것이 아니었고 주막으로 마을 나온 셈이었지만.

", 어이구 날씨도 맵다. 간까지 얼어붙을라 카네."

"풀릴 때도 됐는데 조선 설도 왜놈 설을 닮아가는 모앵이제?"

사내들은 공연히 왕왕대며 서둘러대며 한복의 뒤를 따라간다. 지휘관을 앞세운 병졸같이 따라간다. 이들 중에 한복의 심정을 이해하고 동정하는 사람은 곱상하게 생긴 전서방뿐이었다. 대부분 사내들은 잡힐 듯 말 듯 아른아른한, 실낱같은 희망과 기대를 향해 들뜨고 들뜨다 보니 더욱더 들뜨게 되는 것인지 모른다. 확신할 수 없는 꿈, 아니 거의 불가능하리라는 막연한 예감 때문에 들뜨고 미치는지 모른다. 사실 희망이나 기대 같은 것도 그게 무엇을 향한 것인지 스스로 알지 못하는 상태라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독립되리라는 희망, 더더구나 좋은 세월이 와서 볏섬을 그득그득 쌓아 놓고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 그것이 아니다. 현재가 견디기 어려우니 희망에 매달릴 수밖에 없고 생존을 포기할 수 없으니까 희망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가난한 자여, 핍박받고 버림받은 자여, 희망은 그대들의 것이며 신도 그대들을 위해 있나니, 희망의 무지개는 저 하늘과 하늘 사이에 걸리는 것, 그것은 미래인 것이다. 아무튼 마을에서 김영호는 영웅이 되었다. 한복은 영웅의 부친이 된 것이다. 음지같이 빛 잃은 무반의 후예로서 그나마 영락하여 시정잡배와 다를 바 없었던 김위관댁, 중인 출신의 조모와 살인 죄인의 조부, 동네 머슴이던 부친과 거렁뱅이였던 모친, 그런 가계의 김영호가 지금 희망의 대상으로 부상된 것이다.

"샐인 죄인의 자손, 쪽박차고 문전 문전을 빌어묵어 댕기는 비령뱅이 아들이 상급 핵교가 웬 말고. 세상 참 많이 변했네."

봉기노인이야 들내놓고 빈정거렸으며 욕설도 서슴지 않았으나 마을 사람들이라고 질시와 혐오, 모멸감이 없었다 할 수는 없다. 농업학교 교복과 모자를 쓰고 영호가 귀향할 때면 마음씨 괜찮다는 사람도

"이제 오나?"

건성으로 말했고 영호가 멀리 가기도 전에

"개천에 용났다는 소리를 들었이믄 좋겄다마는."

그렇게는 아마 안 될 것이다, 하는 식의 탄식을 하는 것이었다. 어릴 적에 같이 자란 영호 또래의 소년들도 마찬가지였다. 따돌리고 업수이 여기던 어릴 적의 태도를 조금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영호 니 꼬부랑 말 배운다믄? 어디 한분 해봐라. 쇠바닥이 돌돌 말리는가 구겡이나 하자."

거침없는 야유, 유식한 데 대한 경의는 터럭만큼도 없었다. 한복의 부자가, 또 안사람 모녀가 아무리 성실하고 겸손하게 처신하여도 결코 회복할 수 없었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마을의 일원으로서 동등한 권리, 이제 그 존엄성을 찾았고 동등한 권리를 얻은 것이다. 진정한 뜻에서 한복이 일가는 마을 사람들과 화해한 것이다. 아니ㅡ 오히려 긴 세월 핍박한 몫까지 합쳐서 사람들은 한복의 일가를 인정하려고 서둘며 과장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잡혀간 학생들은 모두 이들에게 있어서는 홍길동이다, 사명당이다, 신출귀몰하는 신비한 존재로 착각하는 것이다. 과대망상 하는 것이다. 왕시 의병에게 그랬듯이. 그것은 이들의 한 때문이며 또한 그것은 환인 것이다.

"하야간에 무신 일이 일어나고 있긴 있는 기라. 보통핵교 꼬맹이들도 나섰다 하니 조선 팔도 핵교마다 벌집 쑤시놓는 것맨치로."

"학상들이 말장 들고일어나믄 어른들도 법구겉이 보고만 있을 일이던가!"

"누가 아나? 지금쯤 어느곳이 쑥 둘러빠?는가, 경찰서 면소가 박살이 나고 군수놈 볼기를 치고 있는지."

"볼기 정도 가지고 되나. 감질나는 얘기지. 대포랑 총칼을 다 빼앗고 왜놈들을 몰아내고 있다믄 얼매나 신바람이 나겄노, 옛적에 우리 이순신 장군이 하셨듯이 바다 속으로 말장 처넣어부렀이믄, 그래야 후환이 없일 기고."

"세상이 변할라 카믄 하루 아침이제. 세상일은 모리거마는."

"조선 없이는 안 된다는 말이 안 있나. 국운이 아주 간 거는 아닐기다. 하야간에 만백성을 회상시킬 인물이 나얄 긴데, 우리 강산이 세계서도 명당자리라 칸께. 우리 생전에 왜놈한테 호령하는 우리 조선을 한분 보았이믄."

"귓밥만 만지고 있는 기라."

저마다 내키는 대로 지껄이며 가는데 오서방은 우가 앞에서 말 한마디 못한 것이 분하였던 모양이다. 죽일 놈 살릴 놈 독사 같은놈, 우가 욕만 하는 것이었다. 마을로 들어섰다.

"저기 온다아!"

누군가가 외쳤다. 언제 소식이 갔던지 아낙들 아이들이 문밖에 나서 있었다.

"형님."

급히 걸어온 홍이 한복의 손을 잡았다. 홍이는 제사를 모시기 위해 평사리에 와 있었던 것이다.

"홍이가, , 그간 별일 없제?"

한복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표정이 나타났다.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지내던 몇 사람 중에 홍이도 한 사람이라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용정과 공노인과 홍이의 관계, 따라서 이번 만주행에는 홍이의 문제도 많이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석이요 영호, 홍의 인간적인 접촉을 아는 만큼 봉기노인의 백 ㅏ디 말보다 홍의 눈빛 하나가 한복의 마음을 녹여주었던 것이다. 와글바글 하는 속에

"한복아."

울기부터 하는 노파는 석이 모친이었다.

"석이 어무니!"

한복은 노파의 등을 두 팔로 감싸준다.

'걱정 마이소. 석이는 만주에 무사하게 가 있인께요.'

그 말을 입 박에 낼 수 있다믄 얼마나 시원할까. 한복은 목이 메인다.

"울지 마이소. 설 샐라고 오싰습니까."

",아니다. 아주 이사를 안 했나. 아이들 데리고 홍이 집에 왔구마."

", 잘했십니다."

"세상이 이래가지고 어디 살겄나? 영호까지 붙잽히갔으이 우야믄 좋노?"

"얼마 동안 지나믄 나오겄지요.

"소식은 듣고 오나?"

", 읍내에서 장서방을 만냈습니다."

"그라믄 소상히 다 들었겄네. 최참판댁 둘째도련님도 들어갔다 나오고 읍내 이부사댁도 부산서."

"그랬다 카더마요."

", 그라믄 어서 가야제. 영호네가 다 죽기 됐다."

야무네가 그 말을 받아서

"기다리는 사람은 일각이 여삼춘데 어서 가야 할 기다. 영호네 성상이 말이 아니네라. 떠났다 한 연에는 감감소식, 마적떼한테 잽히 죽었는갑다, 함서 울어쌌더마는 엎친 데 뒤친 격으로 영호까지 그리 됐이니 와 안 그러겄노. 인제는 우리도 좀 맴이 놓인다마는."

"형님, 그러면 저는 밤에 가지요."

홍이 길을 비키듯 물러났다. 한복이 걷기 시작하자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세상에 어질기만 한 줄 알았더마는 영호어매 깡다구가 보통 아니더마요. 가장 잃고 자석 잃고 살믄 머하겄나 캄시로 식음을 전폐하는데 우리가 애묵었거마는."

복동이댁네가 새된 소리를 지르며 은근히 자신의 공을 내세운다 .

"김서방이 만일에 그믐날을 넘기고 왔이믄 마누래 얼굴도 못 봤일기라?"

천일네, 그러니까 마당쇠댁네의 말이었다.

"등신겉이, 왜놈한테 잽히갔다고 다 죽는 기든가."

얼굴이 상기된 채 한복이 말했다. 그도 차츰 마을 사람 열기에 휩쓸리는 듯 하였고 진정한 화해에 감회가 없을 수 없다.

"이자는 왔인께 걱정을 해도 함께 할 기고, 영호네 애연해서 못 보겄더마는 한시름 놨구나."

영호네도 한복과 같이 이미 격상이 돼 있었다. 한복은 열기에 휩쓸려가면서도 마부가 말을 탄 듯 상놈이 도포를 입은 듯 당황스럽고 불편해지기도 한다. 집에 이르기 전에 막내 성호와 둘째 강호, 딸애 인호가 총알같이 뛰어왔다.

"아부지!"

막내가 매달렸다.

"오냐."

"아부지이."

강호는 불러놓고 이 손 저 손 번갈아가며 눈물을 닦는다.

", 어서 가자."

두 아들의 등을 민다. 인호는 재빨리 아비 손에서 보따리를 받아 들었다. 한복은 두 활개를 저으며 걸음을 빨리한다. 부산 부둣가에서 목마르게 그리워했었던 가족, 윤선 속에서는 고향에, 가족 곁으로 못 돌아갈 것만 같은 망상에 시달렸던 그 모든 감정이 가슴속에 살아난다. 한 발이라도 바삐 떼어놓지 않는다면 아내의 얼굴을 다시 못 볼 것같이, 와글거리며 따라오는 마을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외떨어져서 오도카니 서 있는 초가만이 시야에 뚜렷이 보일 뿐이다. 영호네는 마루에 나앉아 있었다. 들어서는 남편을 보자 쪼그렸던 두 다리를 뻗고 영호네는 초상이라도 난 것같이 아이고, 아이고오! 곡성을 터뜨렸다. 서둘렀던 마음과 달리 한복은 마루 끝에 걸터앉은 채 위로의 말 한마디를 할 줄 모른다.

"너무 서러버도 눈물이고, 너무 좋아도 눈물이고, 요상한 기이 사람이라."

마을 사람들은 돌아왔느냐 말 한마디 없이 통곡하는 영호네와 또 우두커니 마루 끝에 앉은 한복을 번갈아 보다가

"우리는 가자. 오늘이 우떤 날인데 여기 이러고 있을 기고."

"하기는 우리가 가야 저 사람들도 방에 들어갈 기고, 가자."

"인호야! 어매 미음부터 데파아서 주어라. 그라고 국 한 그릇 끓이서 보낼 긴께 아부지 밥 해가지고."

야무네가 마지막 비질을 하듯 말하고 나갔다. 인호는 바가지에 쌀을 담아 나오며

"아부지, 방에 들어가시이소, 차분데."

말했다.

"."

하다가

"이자 그만했이믄 좋겠구마는."

아내를 향해 한 말이었다.

"무상한 사람, 사람우 애간장을 그리 녹이놓고오 아이고 아이고오! 이자는 금도 싫고 은도 싫소. 아무데도 못 갈 기요! 쪽박을 차도 떨어져서는 못 살겄소오. 아이고 아이고오!"

통곡에 사설이 들어갔다.

"놀로 간 것도 아이고... 이자 돌아왔인께, 방에 들어가자구."

"어무이요, 아부지 서 기십니다. 어서 방에 들어가이소."

부엌에서 인호가 내다보며 말했다. 막내와 강호는 부엌에 나무를 나르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온 두 내외는 비로소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다. 영호에는 뼈만 남은 듯 앙상했다. 눈만 커다랗게 젖어 있었다. 남편을 외면한 채 사설을 늘어놓으며 통곡할 때와는 달리, 그랬기 때문인지 수줍음이 맴도는 얼굴, 자식을 다섯--하나는 잃었으나--낳고 살아왔음에도 영호네한테 수줍음이 남아 있었다.

"제수도 매련 못했겄네."

"."

"우짜노."

"지금부터, 나무새나 장만하지요."

"임자는 내가 죽은 줄 알았던가?"

"그믐날에도 안 오시믄, 그만 풍덩 물에 빠지죽을라 캤십니다."

"남은 자식들은 우짜고."

한복은 미소 지으며 궐련을 꺼내 붙여문다.

"애비 에미 없는 자식들도 살아 머하겠십니까?"

"영호 걱정은 하지 말고, 혼자가 아닌끼 그놈들도 다 우떻게 하지는 못할 기구마. 또 학생들이니."

"이 치분 날에, 밥이나 주는가 모르겄소."

"불상사가 있이믄 일이 자꾸 커지니께 함부로는 못할 기구마."

"만주서는 다 편키 기십디까."

"거기 걱정은 할 필요가 없고."

"알겄십니다. , 그라믄."

"나갈라꼬?"

"인지부터 나무새도 챙기고 제기도 닦아야 한께요."

"괜찮소. 이자는 천수만 묵은 것 같소. 신령님이 돌보아주신 기지요. 그라고 동네 사람들이 우찌나 걱정들 하고 죽 쑤어 오고 미음 쑤어 오고 그 은공을 우찌 했이믄 좋을지 모리겄소."

"살다 보믄 그런 일도 있겄지. 까꾸막길도 오르다 보믄 쉴 곳이 있는 것맨치로."

한숨 같았다.

"우리 인호도 이자는 혼처가 생길랑가 모리겄소."

해놓고 영호네는 남편의 눈치를 힐끗 살핀다. 그 말대답은 없다.

사실 인호는 영호보다 할 살이 위인 노처녀였다.

"그라믄 좀 드러누으이소."

영호네는 장문을 열고 갈아입을 옷을 꺼내놓은 뒤 밖으로 나갔다.

"인호야. 큰 솥에 물 붓고 불부터 지피라! 강호야! 소는 우찌됐노! 소 굶나?"

"아니요! 아침에도 소죽 쑤어주었십니다!"

뒤꼍에서 들려오는 둘째 목소리. 한복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머하고 나오십니까?"

"제기는 내가 닦지.“

 

 

5장 환상

밤에 오겠다던 홍이는 새벽녘에 왔다.

"제가 모시고 오느라고."

한복이도 제사를 모신 뒤였다. 예년같이 제수가 마련돼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나무새와 메만 올린 제사였다. 식구들은, 그 중에서도 특히 영호네는 제사가 끝나자 대강대강 치우고 나서 천년을 잠 못 잔 사람같이 깊은 잠이 들었다. 마음을 놓은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으나, 홀로 깨어 있던 한복은 잠시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홍이를 들어오게 하고 방문을 닫았다. 외떨어진 집 주변에서는 바람 소리 이외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이따금 밤새 우는 소리가 처량하게 들여오곤 했다.

"왜 그리 늦었습니까."

자리에 앉자마자 그 말부터 물었다.

", 좀 그럴 사정이 있어서, 피치 못할 사정이..."

잠시 동안 어쩔까 망설이듯, 그러나 한복은 피치 못할 그 사정 얘기는 일단 보류하는 눈치였다. 홍이는 담배를 꺼내어 한복에게 권하고 자신도 붙여 문다.

"그곳 소식도 궁금하고 할아버지는 아직 괜찮으시겠지요?"

"워낙이 단련이 된 어른이라 앞으로 몇해는, 그러나 노인들은 알 수 없인께."

"그건 그렇지요."

"안노인이 돌아가신 후 파싹 늙었다고들 하더라마는, 자손도 없이 두 양주가 서로 의지하고 한평생을 살았으니."

"..."

"지금 희망은 오로지, 홍이 니가 오는 일, 기다리는 기이 낙인갑더라."

한복이는 담배를 피우다가 잔기침을 했다.

"해동하면 가려고 준비중이오."

"갈 바에야 서두르는 기이 좋고 석이어무니를 오시게 한 것도 잘 한 일이네."

"영호는,"

말을 꺼내려 하는데 한복은 팔을 내저었다.

", 그 얘기는 그만두자. 어디 그놈 혼자 당하는 일가."

"실상 나도 그 얘기를 하려고 했지요. 너무 걱정 마십시오."

"세상에는 그보다 어려운 일을 당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고 어차피 조선 사람은 그런 일 겪게 매련인 성싶다. , 니도 전에, 일본 가기 전에 한 분 당한 일이 있었제?"

홍이 쓴웃음을 띈다.

"있었지요. 만세라도 부르고 그랬으면 억울하기나 안 했지요."

"오광대 구겡하다가 천일이아부지도 그때 죽었고."

'두 번 다시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요.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는데 분별 같은 것이라 할까요? 당하고 나니 그 분별 같은 게 생기더군요. 형님도 아시다시피 그때 나는 걷잡을 수 없는 시절이었고 아부지 속도 많이 썩여드렸지만 그 일 때문에 사람이 된 셈이지요. 하하핫... 형님도 조선 사람은 그런 일 겪게 마련이라 했지만 제 생각에도 조선 청년들은 누구나 한 번 지나가야 할 문이랄까, 잊어서도 안 되고 용서할 수 없는 그놈들, 짐승 같은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서도 말입니다. 그때 어떻게 이를 악물었던지 지금도 이가 좋지 않아요. 영호도 나오면 많이 달라질 겁니다. 겉으로는 흥, 흥 하지마는 섬나라 그놈들을 마음속 깊이에서 멸시하게 되더군요."

"그러세... 우떻게 달라질란고, 제발 쇳덩어리 겉은 맴이 되어서 나왔이믄 좋겄다. 아프고 쓰라리고 외로바하는 그 심정은 내 대로서 끝났이믄 싶다. 그래야 살아가기가 덜 어러버."

홍이는 조밭 무라고들 하는 한복의 조그마한 얼굴을 쳐다본다.

한복은 쑥스러워하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담배 몇 모금을 빨고 연기를 내뿜은 홍이는

"형님."

"."

"형님은 석이형님 거취를 알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찌르듯이 말해왔다.

", 그거는, 우째서 나보고 그런 말을 묻제?"

"들은 말도 있고 해서."

한복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그거는 마, 니가 만주로 가믄 알게 될 일이다."

결국 시인한 거나 다름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한복은 그 정도는 홍이 알아도 무방하리라는 판단을 내리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누가 아나? 자네가 간도에 가서 우연찮이 정선생을 길에서 만낼 긴지` 하던 연학의 말과 한복의 말이 일치한다고 홍이는 생각한다. 석이가 만주로 간 것은 이제 확실해졌다. 그리고 자기 자신, 만주로 떠나게 된다는 사실도 실감 있게 되새겨지는 것이다.

"다행입니다."

"..."

"그나저나 술도 없고 어짜제?"

"제사는 어찌 모셨습니까?"

"초상난 집맨크로, 제수고 뭐고 있어야제. 메만 짓고 술은 쓸 만큼만 얻어왔는데, 할라 카믄 야무어매한테서 얻어오까?"

"술이야 집에서 가져올 수도 있지요. 그러나 오늘은, 신새벽부터 술 마실 생각이 안 나네요. 나도 떠나기로 작정을 하고 보니 이곳이 예사롭지 않고, 좀 뭔가 생각을 깊이 해봐야겠어요."

"아부지 묘소 땜에 그러나?"

"여러 가지가, 전에 일본 갈 때하고는 다른 것 같소."

"묘소 얘기를 하다 보이... 옛일이 생각나누마. 윤보목수, 니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인께 윤보목수를 알 턱이 없지."

"얘기는 들었지요."

"그러고 본께 그분들 중에서 생존해 기시는 분이 영팔이아제씨 한분이고나. 그 은공도 못 갚았는데 모두.“

등잔불을 받은 한복의 얼굴이 소년처럼 앳되어 보인다. 주름살이 없는 것도 아닌데 몸집이 작아 그랬던지 평소에도 그는 앳되게 보이는 편이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홍이는 얘기의 내용 같은건 아무래도 좋았다. 영팔이아제 혼자만 생존해 있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홍이는 부친의 자취가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윤보목수의 얘기며 석이아버지 미쳐서 걸식을 하고 다녔다던, 소리 잘하는 금돌노인의 얘기며 그것은 모두 홍이에게 있어서 부친의 냄새요 부친의 빛깔이다.

"이제까지는 입 밖에, 감히 입 밖에 낼 수도 없었던 일이었다마는, 우리 집 내력이야 모리는 사램이 어디 있노? 서른세 해가 지나갔어도 앵혈겉이 지울 수 없는 일인데, 내 평생 이런 맘으로 옛일을 얘기하는 것이 처음 아닌가 싶다. 내 모친이 살구나무에 목을 메고 세상을 버렸일 적에, 최참판댁 눈이 무서바서 모두 다 피해갔일 직에 윤보아제씨, 니 아부지, 석이아부지, 영팔이아제, 그 네 분이 염도 해주시고 일을 다 쳐주싰다. 지금 그 묘소에 내 어무니를 묻어 주싰지. 윤보아제씨가 형보고 말씸하시기를 니 오늘이 며칠인지 아나? 열이레다. 너거 어무니 돌아간 날이 그러니께 이월 열엿세라 말이다. 여기가 니 어무니 산소고. 잘 명념해두어라. 운봉할아버지(서금돌) 그 노인은 지팡이를 짚고 지겅지겅이 쉬어감서 산소까지 따라오셨지. 내가 머리털만큼이라도 은공을 갚았다믄 운봉할아부지 뿐이제. 또 석이 아부지한테도 갚을 셈인가."

등잔불을 받은 한복의 얼굴마저, 사라져간 사람들 그 사람들의 얘기와 더불어 싸아! 하며 밀려오는 물결 같았고 싸아! 하고 소리내어 빠져나가는 물결같이 느껴진다. 부친의 자취가 사라져간다. 빠져나가는 물결 소리같이.

'저 형님도 지금 나 같은 생각을 하며 옛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옛일과 작별하려는 걸까? 설사 다르다 하여도 나는 오늘 밤, 아버지의 산천과 작별하는 이 신새벽을 잊지 못할 것 같다.'

", 홍아."

"."

"염을 했다는 이야기를 하다 보이 나한테 전할 소식들을 까맣게 잊은 기이 생각났다. 니도 그곳 소식 알고 저버서 왔일 긴데, 주갑이 그 사람 말이다."

"아직 살아 있든가요?"

"그러모. 아직은 정정하더라. 니 아부지 돌아가신 얘기를 한께 대성통곡, 내가 놀래서 말리니께 공노인께서 눈을 꿈벅꿈벅하심서, 없는 상막 앞에서 곡하는 거니께 내비리두어라. 그기이 저눔의 인사가 치리는 절차라 하시더마. 그래 아제씨도 돌아가시고 했이니 홍이도 쉽게 만주로 올 것이다, 내가 그랬지. 그랬더니 통곡을 하던 그 사람 입이 함박이만큼 벌어지믄서, 그래서 또 공노인한테 준통을 묵고, 그 사람을 보고 있이믄 슬프고 서러분 것도 우시개겉이 생각이 되더마."

그대 광경이 생각나는지 한복은 환하게 웃었다.

"그래 머라 하는고 하니, 내가 죽으믄 홍이가 염해주겄다,"

"염해주고말구요."

말하시고 홍이는 천장을 올려다본다. 언제 세월이 그리 흘렀는가. 이제는 주변의 죽음이 슬프기보다 하나의 의식을 기다리는 것 같은 심정이었는데 그러한 심정은 삶에의 끈질긴 집념을 안은채 죽은 어미의 모습과 만년에는 인생을 관조하듯 표표한 모습으로 죽음을 기다리던 아비, 그 두 죽음을 지켜본 데서 얻어진 것이었는데, 그랬었는데 내가 죽으면 홍이가 염해주겠다. 그런 말을 했었다는 주갑이, 홍이는 눈물이 흐를까 보아 천장을 쳐다본 채 앉아있다. 학같이 긴 두 팔을 펴며 춤을 추던 주갑이, 구만리 장천 대봉이 난다는 고스 머나먼 지평과 하늘을 우러러보며 새타령을 절창하던 주갑이아제, 그 아름다운 모습을 뇌리에서 지울 수 없는데 세월은 제 마음대로 흘러 죽으면 염을 해달라고, 그렇게 세월이 지났는가. 어린 소년이었던 홍이는 두 아이의 아비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간 것은 틀림이 없는 일이다.

"그래가지고는 또 공노인한테 준통을 묵고 주거니 받거니 입씨름을 벌이는데 그것도 머 소일거리지."

"그럼 주갑이아제는 할아부지댁에 함께 계신다 그 말인가요?"

"왔다갔다함서 연추의 정호, 박정호라 카지? 그 댁에 주로 있었는데 하무니가 세상 베리고 부터는."

"형님은 박정호를 만났습니까?"

"한 분, 니 친구라며? 준수한 젊은이더마, 참말로 훌륭하데."

두메 얘기며 송선생 얘기며 또 만주의 형편 같은 것을 꽤 소상하게 들려준다. 본시 눌변인 한복으로선 전에 없이 표현이 정확했고 얘기도 길었다. 날이 밝아왔다. 방문 문종이가 옥색빛으로,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홍이의 스물아홉 첫날이 밝아온 것이다.

"형님."

"."

"형님은 이곳에서 뜨고 싶은 생각, 해보았습니까."

"한 분도."

"안 해봤다 그 말십니까."

". 나는 살 기다. 어릴 적에 함안서 미친 듯이 이곳을 찾아 왔었제. 나는 아무데도 안 가고 여기 산다. 자식들이야 저거 뜻대로 할 일이다마는."

"여기, 이곳에 살아요... 하기는 그렇게 살 겁니다. 날이 다 밝았구만. 형님도 눈 좀 붙여야겠지요. 나는 이제 갈랍니다."

일어섰다. 함께 일어서며 한복이 물었다.

"니는 진주 언제 갈라노."

"형님은요."

"내일 가볼란다."

"나도 그럼, 함께 가지요."

마을길은 조용했다. 아직 한참 있어야 아이들은 케케묵은 설빔을 꺼내 입고 마을길에 나설란가. 홍이는 부친의 산소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이곳에서 뜨고 싶은 생각을 안 해봤느냐고 홍이 한복에게 물어본 것은 어쩌면 동병상련, 그런 것인지 모른다. 칠성이 아낙이었던 임이네는 홍의 생모, 그 수치스런 비극의 한 모퉁이와 관련된다. 실상 칠성은 음모에는 가담했으나 살인 사건과는 무관이다. 그러나 오명은 지워지지 않은 채 홍의 의식 한구석에 남아 있었고 또한 평사리 마을 사람들 의식 한 구석에도 남아 있어서 희미하나마 때론 적의로, 때론 모멸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다. 최참판댁에 대한 홍의 과민한 반응은 간도 시절부터 시작되었지만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게 된 후부터는, 일 년이 채 못 되었는데 귀향은 외로웠고 최참판댁의 첩첩인 기와지붕에 대한 이화감은 홍이를 못 견디게 했다.

'나는 여기 살 기다.'

한복의 그 말이 새삼스레 놀라움을 안고 되살아난다. 홍이는 자신의 만주행을 도망이라 생각지는 않았다. 어떤 면에선 고향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복의 경우는 분명히 도망가지는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삼십 년이 넘는 세월을 그는 도망가지 않았고 수없이 갈아대는 칼날 밑에 수더분한 본래의 모습대로 숫돌이 되어 살아온 것이다.

홍이는 아비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않았다. 스물아홉 해의 정월 초하룻날, 무덤의 마른 잔디 위로, 막 솟아오르기 시작한 햇빛이 비친다.

'아부지. 나중에 상의에미랑 다시 오겠습니다. 어쩐지 혼자 와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소나무 위에서 까치 한 마리가 장난스럽게 꼬랑지를 까딱까딱하며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내려다본다. 무릎으로부터 땅의 냉기가 스며든다. 오시시 몸이 떨린다. 추웠다. 그러나 추운 것에 쾌감을 느낀다. 나름대로 홍이는 아비 이용의 인간상이 자기 내부에서 하나의 소상같이 완성된 것을 느꼈던 것이다. 인간 이용이, 홍이는 멋진 남자였다고 생각한다. 뇌리를 스쳐가는 간도땅에서의 수많은 우국열사들, 흠모하고 피가 끓었던 그 수많은 얼굴들, 그러나 홍이는 아비 이용이야말로 가장 멋진 사내였다고 스스럼없이 생각한다. 열사도 우국지사도 아니었던 사내, 농부에 지나지 않았던 사나이의 생애가 아름답다. 사랑하고, 거짓 없이 사랑하고 인간의 도리를 위하여 무섭게 견디어야 했으며 자신의 존엄성을 허물지 않았던, 그 감정과 의지의 빛깔, 홍이는 처음으로 선명하게 아비 모습을, 그 진가를 보는 것 같았다. 사라져가는 아비 자취에 대한 마지막 전별의 순간인지 모를 일이었다. 묘소 근처에는 병풍 같은 송림이다. 낙엽지지 않고 남은 솔잎들은 겨울을 용케 나고 머지않아 빛깔이 달라질 것이다. 지난 해 용이 이곳에 묻혔을 때 검붉은 소나무의 밑둥 사이로 보이던 큰 바위 하나, 푸른 이끼가 찬란하게 끼어 있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긴 겨울은 가고 있으나 아직 봄은 저만큼 머뭇거리고 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도 그 큰 바위엔 찬란한 푸른 이끼가 온통 바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홍아."

"?"

홍이는 소스라치듯 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도 없다. 이름을 부르던 여자의 음성, 귀에 익은 옛날의 그 음성, 홍이는 사방을 둘러본다.

"홍아."

"! 어디 있어요?"

홍이 미친 듯이 다시 사방을 둘러본다.

"나 여기 있다."

파란 이끼 낀 바위 뒤켠에 월선이가 서 있었다. 흰 옥양목 치마에 옥색 명주 저고리를 입고 서 있었다.

"옴마!"

"운냐, 울 얘기야."

", 옴마!"

"니 본지가 참 오래고나."

", "

"이자는 남우 아아들 책보 뺏아서 강물에 던지는 그런 짓은 안 하겄제?"

"으으..."

"답대비 불 앞에 아아 앉히놓은 것맨치로 늘 걱정이구마."

홍이는 뭐라 말을 하려 했으나 입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발도 붙어버린 듯 오금을 떼어놓을 수가 없다. 홍이는 고개만 흔들어댄다. 세차게 흔들어본다.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은 일어서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무덤 앞에 꿇어앉은 채 있었다. 그리고 소나무 밑둥 사이에서 보이는 큰 바위에는 푸른 이끼가 없었다. 거무죽죽하며 잿빛이 돌기도 하는 바위였다. 잠이 들지도 않았는데 꿈일 리도 없다. 환영이었다. 생생한 환영이었다. 산소에서 마을로 내려왔을 때 해는 서너 뼘 가량 솟아올라 마을 전체가 온통 희번덕이는 것처럼 홍이에겐 느껴졌다. 특히 물방앗간 쪽이, 실제 전혀 그렇지는 않았는데 시뻘겋게 불붙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새해를 축복하는 서광이기보다 화상이라도 당할 것 같은 그러면서도 축축하고 음산한, 기이한 예감이다. 홍이는 아까 산소에서처럼 고개를 여러 차례 흔든다. 밤을 꼬박이 샜기 때문에 심신이 피곤하여 그러려니, 홍이는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산소에서 환영을 본 때 문에 그런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불 앞에 아이 앉혀놓은 것같이 늘 걱정이라던 그 말 때문에 그런지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홍이 한참 자고 일어났을 때 마루에 햇볕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장지문을 통해서 방안도 환했다. 홍이는 방문을 열어젖혔다. 아이들은 마루에서 놀고 있었다. 홍의 딸 상의, 아들 상근이 그리고 석이아들 성환이와 딸 남희, 석이 누이동생인 순연의 아들 하나, 해서 모두 다섯 명이었다. 연장은 성환이었고 상의와 남희는 동갑이었다. 제일 어리기론 상근이었다. 상의와 상근이는 도방 아이답게 화사하고 설빔도 앙증스럽게 예뻤다. 의복이 젤 험하기론, 깁지만 않았다 뿐이지, 그러나 순연의 아들 귀남이는 활발하였다. 상의나 상근에게도 거칠 것 없이 군다. 그러나 상의와 소꿉놀이를 하는 남희는 제 주장이 없고 매사에 있어 상의한테 양보하며 놀아준다. 설빔도 치마는 댕강하니 짧았고 소매도 짧아서 손목이 많이 드러났다. 성환이 역시 상근이가 울면 업어주고 어질러진 것을 치워가며, 착했지만 석이 자식들은 풀이 없었다. 아비 어미가 살아 있으나 이들은 아비 어미를 잃은 지 오래다. 순사가 집으로 찾아오고 할머니가 그들에게 끌려가고, 아이들은 그새 많은 일들을 겪었을 것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 저 아이들은 희생되어야 하는가.'

홍이는 담배를 붙여 물다 말고 작은방에서 석이네와 얘기하고 있는 아내 보연을 향해 소리질렀다. 술을 내오라고 그리고 방문을 닫고 담배를 빨아대는 것이다. 만주에 가면 만나게 될 석이에게 아이들 얘기는 어떻게 할까. 석이가 눈물을 바가지로 흘린다 하더라도 저 풀죽은 아이들에게 무슨 소용인가. 보연이 술상을 보아 왔다.

"상의아버지, 어쩔래요?"

"?"

"통영 안 가실 겁니까?"

"내가 거기, 거기는 뭣 하러."

눈살을 찌푸린다.

"수년 동안, 인사가 아니지 않아요. 초상 때도 다 오시고 했는데."

자동차부 안에서 있었던 사건 이래 홍이는 통영 땅을 밟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들하고 당신이나 다녀오지."

"아이 들을 데리고 나 혼자서."

"그렇지만 종도 없는 처지 아니오?"

공연히 트집 잡듯 비틀어댄다.

"그럼, 상의아버지 혼자 여기 계시겠어요?"

"내일 난 진주 가니까?"

"그럼 떠나시는 것 보고 전 통영으로 가야겠네요."

"이번에는 서둘러 올 필요 없고, 나는 영팔이아제 집에 있을 테니까."

보연이 방에서 나가려 했을 때

", 성환이할무니 좀 오시라고 말해요."

"멋 할려고요? 술상 받고서는."

", 하라면."

얼마 있다 석이네는 팔짱을 끼고 한기가 든 것 같은 표정으로 들어섰다.

"앉으시지요."

앉으면서

"무신 일이라도?"

불안스럽게 물었다.

", 아무 일도 없습니다. 젊은놈이 낮아서 오시라 가시라 해서 죄송합니다. 내 어머니거니 이모거니 생각하고 이별주 한잔 올리고 싶었습니다."

"니가 운제 그리 말이 늘었노. 생전 가도 말, 묻는 말에나 대답할까 했는데, 이별준 무신 또 이별주고."

"오늘은 정월 초하루 아닙니까? 이별주도 되겄지마는 만수무강, 아이들을 위해 오래 사시라고 형님 대신 술 한잔 올리고 싶어서."

홍이는 술을 부어 술잔을 내민다.

"받으십시오."

"홍아."

얼른 눈언저리를 닦는다.

"오늘은 초하루라 안 울라 캤더마는, 명절이 와 이리 섧노."

목멘 음성이다.

"자아, 술잔 받으시오."

", 운냐."

"어린것들 생각하셔서 몸을 돌보셔야 합니다."

"그래, 저것들 밥산 노릇 하기까지는 내가 살아야 돼. 저것들 두고 내 우찌 눈을 감겠노. 애비 에미 할 것 없이 다 몹쓸 년놈이다. 이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불쌍한 새끼들 생각밖에 없인께."

술을 조금씩 마셔본다.

"참고 좀 기다려보면 설마, 제가 간도에 가서, 그곳 형편이 적당하면은 성환이할머니 아이들 부르겠습니다."

"아니다. 싫다 내사, 만리타국에 어린것들 데리고 우찌 가겄노. 이자는 여기 온께 그래도 살 것 겉다."

석이네는 아들이 만주로 갔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알아도 곤란하겠으나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도 홍이로서는 안타까웠다.

"나쁜 여잡니다. 때려죽여야 합니다."

술을 몇 잔 마시지 않았지만 술 취한 사람같이 홍이는 메어치듯 말했다.

"여자만 나쁘나, 나는 여자만 나쁘다고 생각 안 한다."

"형님은 남자니까."

"남자믄은 자식을 버리도 좋다 그 말가?"

원망에 가득 찬 눈이다.

"버리기는요. 형님이 자식 버릴 그럴 사람입니까? 다 조상들 잘못 만나서 나라를 잃은 때문이지요."

석이네는 술잔에 남은 술을 다 마신다.

"이렇게 될 바에는 공부를 와 했는고 싶다. 농사꾼이나 품팔이를 했이믄 에비 에미 없는 새끼 꼴을 보았겄나. 여러 가지로 봉순이가 원망시럽다.“

"봉순이누님은 잘할라고 한 짓이지요."

"논이 나니께... 내사 괜찮다. 나는, 나는 괜찮다. 무신 일을 당해도, 아아들만 쳐다보믄, 못 배우고 못나도 사우는 제집 자석 건사하고 사는데."

"..."

"애비 없는 자석 셋을 키우믄서 그것들 볼 때마다 애비 없는 것이 포원이 되고 간이 아파서 울기도 많이 울었건만 갈수록 태산이다. 이자는 손자, 어이구 전생에 무슨 몹쓸 죄를 졌는고."

"형님 대신 딸이라도 있고 사위도 있으니 의지해가면서 조금만 참아보시오."

"사우는 사우, 남이네. 딸자식도 출가외인이고, 아이들끼리 싸워도 눈치가 뵌다."

"아들이나 사위나 사람 됨됨이지요."

"니도 남의 사우 노릇 한께 알 긴데 그러나?

"저야 본시, 사람은 괜찮지요?"

"술 묵으믄 주사가 좀 있어 그렇지, 지 가숙 지 자식 중히 여기는 것만도 고맙게 여기야겄지."

석이네 얼굴에는 서글픔 외로움이 끝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이때였다. 세상이 끝나는 것 같은 비명.

"이게 무슨 소립니까?"

홍이 방문을 열고 뛰어나간다.

"샐인났다아! 샐인이다!"

모두 뛰어나온다.

"상의아버지!"

보연이 홍의 옷자락을 거머잡는다.

"모두들 집에 있어요. 나가보고 오겠으니."

아래채 방문을 열고 머리만 내밀었던 귀남애비는 홍이를 보자 자라목같이 얼굴을 감추어버린다.

"어디서 나는 소리제?"

석이네는 손자와 손녀를 암탉 병아리 챙기듯 양 겨드랑이 밑에 잡아넣으며 떨리는 소리로 물었다.

", 우서방 집인 것 겉소"

순연의 말이다. 홍이 살짝 밖으로 나갔을 때 산발한 아낙이 뛰어온다. 오서방댁이었다. 그는 홍의 모습도 눈에 띄지 않는 것 같았다. 동생네, 끝봉이 집을 향해 샐인났다, 외쳐대며 뛰어가는 것이었다. 우가 집 앞에는 아낙 두 사람이 새파랗게 질려서

"우짜꼬 우짜꼬!"

그 말만 연발하며 한자리에서 뱅뱅이를 돌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 저기 저기."

아낙 하나가 손가락질을 했다. 싸리 울타리 쪽이다. 홍이도 발돋움을 하며 울타리 너머 집 마당을 들여다보았다. 홍의 얼굴도 아낙들같이 새파랗게 질린다. 밑에 깔린 사내는 오서방이었고 오서방을 올라탄 사내는 우가였다. 우가 손에는 낫이 들려 있었으며 낫 끝이 오서방 눈 가까이, 거의 닿을락 말락 깔린 채 오서방은 낫 든 우가의 손을 필사적으로 저지하고 있었다. 신음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혈투다. 오서방 얼굴 언저리에선 더러 피가 흐르고 있었다. 홍이는 삽짝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우가의 두 어깨를 뒤에서 감아쥐려고 하는 순간 우가는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 낫으로 후려쳤다.

"!"

"아이고오, 우짤꼬!"

아낙들이 비명을 지른다. 오서방이 바호같이 몸을 일으켜 우가 손에서 낫을 빼앗았다. 산발한 오서방 마누라가 동생 끝봉이와 함께 달려오고 동네 사내들이 달려왔을 때 마당은 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홍이 쓰러진 바로 옆에 피범벅이 된 우가가 쓰러져 있었고 오서방은 신돌 위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미친 사람같이 멀거니 하늘을 보고 있었다. 우가 마누라는 마루 밑에 기절해 있었다. 오서방 마누라는 입술만 실룩거리며 말을 못했고 끝봉이 달려가 엎어진 홍이를 안아 일으켰을 때 옆구리 쪽에서 피가 흘렀다.

"죽지는 않았다!"

보연이 소리 지르며 쫓아왔다. 끝봉이는 다시 우가 곁으로 간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모습이었다. 얼굴 가슴팍 십여 군데나 낫질을 당했고 이미 숨져 있었다. 홍이는 마을 장정들이 집으로 떠메고 갔으며 우가는 우선 거적을 씌웠고 우가 마누라는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마을 장정들이 겨우 할 수 있었던 일을 그 정도였고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우왕

좌왕, 아낙들은 살인이 난 집 밖에 몰려서서 제각기 떠들어대고 있었다. 어떻게 동네 사람도 모르게 한낮에 이런 일이 생겼느냐, 그 말에 대하여 옆집에 사는 엽이네가 벌벌 떨면서 설명한다.

"그런께로 내가 음식 관수를 하니라고 장독 도가지 두껑을 열고 있는데 오, 오서방이 마누래하고 함께 오더마. 그런께 처가, 처남 집에 갔다 집으로 가는 모앵인데 술이 거나하게 돼가지고, 그냥 지나 갔이믄 이런 일은 없었을 건데 일진이 나빴던 기라."

"본시부터 앙숙 아이가."

"참기야 오서방 족이 늘 참았던 편이제."

"그래 우떻게 됐다 카노."

엽이네와 함께 현장에 있었던 엽이네 시누이, 그러니까 여러 해 만에 친정으로 설 쇠러 왔었던 맹순이가

"술만 안 취했이믄 그런 일이 없었을 긴데. 지나가믄서 오서방이 큰 소리로 외양간에 소는 아즉 안 뒤졌나 했다 말입니다. 마치 마당에 나와 있었던 우서방이 그 말을 듣고, 질기 까불다가는 네놈 모가지가 그냥 붙어 있지는 않을 기다."

"일진이 나빴던 기라. 그냥 지나갔이믄 이런 일은 없었을 긴데."

엽이네가 다시 받아서

"마누라가 말리는데, 보소 그냥 갑시다 하고 말리는데 오서방이 훗차가더마. 술김이지. 그래 시비가 붙었던 처음에는 입씨름이었고 옆에서 오서방 마누라가 말린께, 우서방댁이 잡아비트는 소리를 하더마. 그러자 우서방은 오서방댁을 보고 욕설을 한 기라. 년짜까지 놔감서. 그란께 오서방이 주먹질을 했제."

"남정네들은 쌈을 안 말리고 머했든고?"

"옆집 짱구네는 제사 모시러 큰집에 가서 집이 비었고 우리 집은 윗마을 동서 집에 가고 없었인께. 있었다 캐도 우서방을 누가 건디릴라 카나."

"그래서."

"치고 박고 싸우는 것도 순식간, 언제 우서방이 낫을 들고 나왔던지. 어디 내 손에 한분 죽어봐라 함시로, 낫을 뺏으려고 달려드는 오서방댁 머리채를 잡고 후려치는데 세상에 그런 악종이 어디 있겄노. 오서방댁이 사람 살리라고 외치며 뛰어나가는데 우리는 너무 겁이 나서 오금이 떨어지야제. 아이구 세상에, 꿈에 볼까 무섭다."

안에서는 오서방댁의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혼자만 죽었일 성싶제? 저기 송장 한 놈이 앉아 있네! 혼자만 안 죽는다! 사람 직인 놈이 하늘 볼 기가!"

우서방댁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6장 찾아온 사람

환국이와 윤국이 놋화로를 마주하고 손을 쬐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아까부터 그러고 있는 것이다. 집안은 조용했다. 마을 쪽에서는 아무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끔찍한 사건이 휩쓸고 간 뒤, 그것은 전혀 개인적인 사건이었지만 마을 사람들 정열에 찬물을 끼얹은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정월 초하룻날, 피비린내 나는 살인 사건은 너나할 것 없이 마을 사람들 가슴속에 불길한 예고같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서른세 해 만의 살인 사건, 마을에서는 잊혀지고 있던 옛일을 새롭게 거론하기 시작했으며 크든 작든 한복이 일가, 최참판댁에 충격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양가는 다같이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에 대한 얘기를 기피하는 것이었다. 환국이와 윤국은 번갈아서 입맛을 다시며 마른 입술을 축이곤 한다. 화롯불 탓인지 방안 공기가 몹시 건조하긴 했다. 그러나 그보다 말머리를 찾아보려는 심리적인 것이었는지는 모른다. 침묵은 계속되었다.

환국이 동경서 돌아오기론 양력으로 지난해 세모 때였다. 윤국이 경찰에 연행돼간 것은 진주고보와 일신여고보, 제일 보통학교 그러니까 남녀 중학생과 보통학교 생도들이 가두시위를 벌인 정월 십칠일, 다음날이었다. 풀려난 것은 음력 설날 전이었으며 학교로부터 무기정학의 처분을 받았다. 문풍지가 운다. 바람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환국은 여수로 간다 진주로 간다 하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진주로 싣고 갔다는 홍이 생각을 잠시 했다. 서로 말을 나누고 친히 지낸 일은 없으나 그러나 서로의 내력이나 관계, 그리고 간도에 함께 가고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홍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아니, 그냥 안다는 정도가 아닌 최씨 일가와의 밀접한 관계를 잘 알고 있다. 그의 부친인 용이나 월선은 다 같이 어머니에게는 소중한 사람, 월선은 어머니의 할머니와 보이지 않으나 절실한 유대가 있었으며 이용이는 할아버지가 오직 하나 신임했던 작인의 아들이자 어린 시절의 친구, 그런 얘기들을 구체적으로 들은 바 없지만 어떤 서슬엔가 지나는 말을 귀담아들었고 그것은 어느덧 이야기의 줄거리가 되어 환국이의 마음속에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 환국의 생각은 박외과로 이동했다. 필시 홍이는 그 박외과에 입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자신의, 최씨 일가 언저리의 일에서 자신의 일로, 집안 일로 생각은 돌아온다. 정확하게는 동생 윤국의 일이다. 윤국에서부터 생각은 다시 시작된다. 시위 현장에서 만난 이순철, 그 모습은 윤국으로부터 시작되는 영상이다. 우람한 몸집에다 털이 복슬복슬한 스웨터를 입고 있어서 더욱 거대해 뵈던 모습,

"너도 나왔구나."

하며 뼈가 으스러지게 손을 쥐던 그 뜨거운 손.

"이 새끼들아! 기운 내!"

입술이 옆으로가 아닌 세로로 찢어지면서 외치는 순철의 음성이 방금 들려오는 것 같다. 후배들을 위해 행렬 밖에서 맹수의 울부짖음과도 같았던 음성. 순철의 거대한 모습은 영화 장면처럼 회전했다. 순철이 대신 허약한 김제생이 나타났다. 뼈와 껍데기뿐이다. 머리는 조그맣고 안경 쓴 얼굴, 얘기에 열중하면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 낀 궐련이 흔들리고 무릎 위에 담뱃재가 떨어졌다. 실상 환국은 김제생의 얼굴을 똑똑히는 그려낼 수가 없다. 안경만 뚜렷했을 뿐 그리고 말라비틀어진 모습만 뚜렷했을 뿐이다. 그는 광주학생사건이 터지자 환국이보다 한발 먼저 고향인 광주로 돌아갔다 그는 동지사대학 영문과에 적을 둔 학생이다. 환국의 하숙집과 가까운 곳에서 자취를 하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다같은 조선인 유학생이고 보면 자연 인사를 하며 지내게 되는데 본시 환국은 비사교적인 성품이요, 상대방은 약간의 적대 의식 같은 것을 갖고 있는 듯 처음에는 서먹서먹한 인사만으로 지냈다. 그런데 어디서 누구에게 들었던지, 환국의 부친이 독립투사요 현재 계명회사건으로 복역 중이라는 사실을 안 뒤부터 김제생은 적극적으로 환국에게 접근해왔다. 그는 과격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순직한 면이 더 많은 청년이었다. 순직하다 하여 쉽게 들뜨거나 낭만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환국은 그와 친교를 맺은 후, 그러니까 광주학생사건이 난 113일 이전부터 광주고보에서 일어난 갖가지 사건을 소상하게 들은 바 있었다. 물론 광주고보뿐만 아니라 3.1운동 이후 1920년대부터 전국 각처 수없이 많은 학교에서 항일 운동이 계속 되어왔던 것은 사실이다. 표면상으로는 일인 교사 혹은 일인 교장의 배척, 식민 노예 교육인 차별 제도 철폐 등을 내세운 맹휴였으나 그것은 물론 항일 투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운동의 배후에는 반드시 비밀 조직이 있어 학생들을 지도한 것도 사실이다. 전국 각처 학교에 불을 지른 11.3사건 역시 우발적인 단순한 사건은 아니었다. 통학 열차 안에서 일본 학생이 조선 여학생을 희롱했다든가 성저리 십자로 작은 다리를 사이에 두고 나무칼 단도 등을 들고 나온 일인 학생, 야구 배트를 들고 나온 조선인 학생이 대치하였다는 그런 일들은 일본 그네들이 말하는 것처럼 결코 우발적인 것은 아니었다. 뿌리는 이미 1924년 광주고보와 광주중학교(일본인 학교) 사이에 있었던 야구 시합에서부터 시작된다. 안도라는 일인 심판이 편파적인 심판을 함으로써, 항의한 광주고보생이 심판을 구타하고 맹휴로 들어간 사건. 그 사건은 돌발적인 것으로서 몇몇 학생이 퇴학당하는 것으로 끝났으나 응어리가 남아 있었던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 후 1926년 사회주의 물결을 타고 농민 운동, 노동 운동이 구체성을 띰과 동시 광주고보를 중심으로 하여 농업학교 학생 몇 명이 성진회를 조직하였으며 1928년 광주고보와 농업하교 맹휴 사건을 지도했던 것이다. 1928년의 맹휴사건은 이경채 사건이 시발점이다. 광주, 송정리 등지에 뿌려진 격문으로 광주고보 오학년이던 이경채가 조선 농민 총동맹의 간부, 성진회 관련자들과 함께 피검됨으로써 광주고보의 시라이 교장이 당국에 사과함과 동시 이경채의 부친을 불러 이경채를 권고 퇴학시킨 사건, 그 사건이 터지자 처음에는 이경채의 동급인 오학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이경채 권고 퇴학의 이유를 명시하라`하며 학교 당국에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학생 단체의 요구는 이경채 사건에만 머물지 않았고 확대되어 갔다. 확대되어 갔다기보다 1924년의 응어리가 터진 것이다. 학교 운영에 관한 것, 그중에서도 1927년 학생 맹휴 때 약속한 학교 시설의 확장을 이행하지 않았던 일, 교장 시라이가 광주고보의 경비를 광주 중학교에 양도한 일, 학교 도서실에 조선어 서적과 신문이 없다는 점을 들어 일인 교장, 교사의 배척과 조선인 본위의 교육을 내세우며 조직적인 맹휴 투쟁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학교 측은 퇴학, 정학으로 응징하며 양보하지 아니했고 학생들은 '맹휴 중앙 본부'의 지휘 아래 보다 격렬하고 과감하게 맞섬으로서 학교 당국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일본 식민지 정책을 규탄하며 민족의 해방을 표방하는 양상을 띠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학부형, 동창들이 동원되면서 보다 격화되는 방향과 온건한 방향으로 갈라지기 시작했으며 맹휴에서의 탈락자를 단속하는 신경전으로 복잡하게 진행되는 틈을 타서 학교 측은 처벌 강화, 철저한 탄압으로 나갔고 그런 만큼 저항은 더욱 강렬히 하여 타협의 실마리도 찾지 못하는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맹휴를 배신한 몇몇 학생에 대한 구타 사건은 재판에 회부되어 실형을 선고받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학교측은 학부형을 회유하거나 협박하며 학교의 진퇴 문제는 물론 장래에 있어서의 사회생활에도 미칠 것이라는 위협을 끝없이 되풀이하였던 것이다. 학교와 학생 간의 싸움에 있어서 특징 중의 하나는 소위 문서전이라 할 수 있었다. 학교 당국의 최고문과 학생의 격문, 그 숱한 격문은 그 내용으로 보아 일종의 폭동이었다. 수많은 격문 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었다.

'금후 학교 당국으로부터 어떠한 위협 불온적 문서는 전달받더라도 단연 부정하라! 그 문서야말로 제군을 주구화하려는 노예 교육아성의 입장권이다!'

맹휴는 유월에 시작하여 팔월 말부터 경찰이 개입함으로써 사 개월 만에 열여섯 명의 학생이 구속되어 실형을 받고 쉰네 명의 퇴학으로 일단 끝난 것이다. 그것이 1928, 그러니까 재작년의 일이었던 것이다.

"!"

환국은 윤국을 쳐다보지 않았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화롯가에서 손이나 쬐고 앉아 있어도 되는 건가요?"

"..."

"형님은 지금 회피하고 싶은 게지요?"

"윤국아."

", 말씀해보세요."

불만이 있을 때 윤국은 필요 이상의 경어를 쓴다.

"근간과 지엽을 너는 모르는 모양이다."

"무슨 뜻이지요?"

"문자 그대로다. 나 자신도 그것을 슬기롭게 헤아릴 만큼 내가 잘났다는 생각을 해본 일은 없다마는."

"그렇다면 나를 비난할 수 없겠지요."

"비난할 수 있지."

"좀 더 정확하게 알아듣기 쉽게 말씀하세요. 저는 형님 같은 수재가 아니니까요."

"바로 그 점이다. 진리 앞에서 수재 둔재를 논한다는 것은 수재든 둔재든 졸장부다. 수재 둔재가 진리 앞에서 좁쌀이니까."

"화로에 손 쬐고 있는 게 어떠냐? 혁명가는 화롯불 옆에 놓고 얼음목욕 해야 하나?"

윤국은 입을 다물어버린다. 그러다가 한참 뒤에

"문제는 그런 데 있는 것 아니잖습니까? 답답하다는 얘기지요. 한가하게 있을 수 없다는 얘기지요. 역시 형은 회피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하면 회피 안 하는 거냐? 일본 가서 막노동하면서 노동 운동을 하고 이론으로 밤을 지새고 그러면 너는 이 집에서 내가 해방될 거라 생각하나?"

"나는 이 큰 덩어리 같은 게 싫습니다. 죄악이니까요."

"그래 너의 고민을 이해한다. 나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니까. 너도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의 작 품 하나쯤은 읽었을 게다. 러시아 대 귀족 톨스토이, 나는 그가 쓴 책은 대체로 다 읽은 편인데 나는 거기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무엇을 얻으려고 했어요?"

"개인과 인생과 사회, 인류 문제. 나는 서적을 통해서 꽁지에 불붙은 것처럼 넓은 방안을 수없이 왔다갔다하는 톨스토이를 보았을 뿐이다.“

"잘 모르겠어요."

"시초에 그는 재산과 명문을 소유한 문단의 총아였다. 다음은 진보적 자유주의자가 되었고, 하여 명문과 재산은 끓임 없이 그를 괴롭히던 것, 명문과 재산 이외 또 하나 있었지. 종교였다. 그 세 가지가 다 미결인 채 그는 세계 구제를 생각하였고 그러기 위하여 무저항주의를 만들었다. 그가 그의 소유물 모두를 버린 것은 훨씬 훗날의 일이었지. 그러나 그는 죽는 날까지 그 자신을 해방하지 못했다. 또 있어, 일본의 이리시마 다케오, 역시 작가지. 그 사람도 톨스토이와 엇비슷한 점이 있는데 톨스토이만큼 몸짓이 크지는 않았다. 그도 사유 재산을 포기한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엔 재산을 포기하는 문제보다 인간의 본질과의 싸움, 그것이 아닐까? 두 사람은 다 패배자였으니까. 버린다는 것도 그것도 무서운 집착인 것 같다. 왠지 그런 생각이 들어. 물론 어떤 면에서는 위대하게 살다 갔다 할 수도 있지만, 소유물을 버린다, 가장 철저하게 버린다, 그것은 출가 이외는 없을 것 같다. 군더더기가, 소유라는 망령은 버렸어도 따라올 테니까 사찰이 아니면 막아낼 도리가 없지."

"그것은 변명이지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맞어. 그 사람들이 바로 어정쩡한 데 시달리다 갔지."

"형은 비겁해요. 명확한 건 하나도 없지 않아요?"

"화롯불에 손을 쬐서는 안 된다 그런 명확성 말이냐? 우리 더 크게 명확한 것을 찾아보자. 나도 너도."

하는데 이야기는 중단되고 말았다. 손님이 왔다는 것이었다. 환국이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누굴까?"

"학생이던데요?"

언년의 남편이 말했다. 환국은 이순철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찾아온 사람은 이순철이 아닌 김제생이었다.

"아니, 이게 웬일이오?"

김제생은 피식 웃었다.

"진주 갔다가, 찾아갔다가."

"어서 올라와요."

윤국은 들어서는 김제생을 유심히 쳐다본다.

"동생이오. 윤국아, 인사해. 김제생 씨, 내 친구다."

윤국은 꾸벅 절을 하고 또다시 김제생을 빤히 쳐다본다. 김제생은 개의치 않고 자리에 앉는다.

"정말 뜻밖인데? 별일 없었어요?"

"왜 없었겠소. 별일 없었다면 이 산골까지 찾아왔겠소? 피신 왔지요."

환국의 얼굴은 어두워졌고 윤국의 눈이 빛난다.

"경찰 때문에 그런가요?"

"그렇지요. 광주서는 그놈들이 이번 일을 굉장히 확대하고 있어요. 아주 단단히 조질 모양이오. 이 기회에 신간회도 때리 부숴버릴 작정인 것 같아요."

환국은 천천히 윤국에게 시선을 옮겼다.

"안에 가서 손님 오셨다는 말씀드리고, 어떻게? 점심은."

"하고 왔소."

"그럼 저녁 준비하라고 일러."

의식적으로 윤국이를 몰아낸다. 손님이 왔으면 스스로 나가는데 오늘의 윤국은 나가지 않고 버텼기 때문이다.

"윤국아, 어디서 손님이 오셨니?"

서희가 아들에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동경서 아는 친군가 봐요."

윤국은 광주서 왔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학생이더군요."

덧붙여 말을 하고 나서, 성난 얼굴로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김제생이 묵은 사랑에는 밤늦게까지 불이 커져 있었다. 이튿날 아침 사랑에서 올라온 환국은

"친구가 여까지 놀러왔는데 쌍계사에나 한번 갔다올까 싶습니다."

서희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 쌍계사를 피신처로 작정한 모양이구나.'

윤국은 생각했다.

"어머니, 저도 형 따라가면 안 됩니까?"

형을 겨냥해서 윤국이 말했다.

"알아서 하려무나."

그러나 환국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조반 때는 윤국이도 함께 세 사람이 사랑에서 들었다. 밥을 먹으면서 환국이는 주로 들어주는 편이며 김제생이 여러 가지 광주사건의 뒷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윤국에게 진주의 학생들 동향 같은 것을 물어보곤 했다. 김제생은 친구 동생인 윤국에게 각별히 친밀하게 대하지 않았다. 시위가 있은 뒤 경찰에 연행되어 며칠 고생한 일에 대해서도 그러냐고 했을 뿐 그 이상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연장자의 권위 같은 것을 세우려 했던 것도 아니었다. 조반이 끝나고 떠나는 일만 남았는데, 따라나서고 싶어 하는 윤국의 태도에는 어떤 열기, 강한 갈망 같은 것이 있었다. 환국은 냉담했다. 냉혹하기까지 했다.

방바닥에 놓인 담뱃갑 성냥을 챙겨넣고 일어선 환국은 두루마기를 입는다. 참다못한 윤국은

"형님, 나도 함께 가면 안 될까요?"

하며 김제생을 쳐다본다. 김제생은 무정하게 윤국의 시선을 받았다.

"어머님이 걱정하실 테니 너는 여기 있어야 한다."

어조는 평상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다만 눈이 험악했다. 신경질적인 거부의 눈빛이다. 동행을 허락하리라는 기대를 하고 한말은 아니었지만 윤국은 충격을 받는다. 그와 같은 형의 얼굴은 여태까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마 어머님은 괜찮다 하시더라는 말을 못한다.

"그럼 가볼까요? 김형,"

"그럽시다. 이렇게 신세를 져서 미안합니다."

"별말씀을."

망토자락을 펄럭이며 가는 김제생, 검정 두루마기에 학생모를 쓴 환국은 김제생보다 반 뼘 가량 키가 컸다. 언덕을 내려가는 그들 뒷모습을 바라보는 윤국은 입안이 타는 것을 느꼈다.

'왜 나는 못 가나. 함께 가면 어때서?'

따돌림을 당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윤국은 소외감 이상의, 배신을 당한 것만 같은 분노를 참을 수 없다.

'어린애 취급, 이젠 제발이다! 이젠 절대로 사양이다!'

엄격히 말하자면 환국은 동행을 거부했다기보다 김제생에게 접근하려는 윤국의 의지를 꺾은 것이다. 물론 윤국이도 김제생의 피신의 목적인 산중의 절 따위엔 흥미나 관심 같은 것은 없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음력으로 정월 초여드레, 설과 대보름 한복판이다. 강물엔 아직 살얼음이 남았는가, 둑길을 나뭇짐 진 소년이 간다. 봄은 가까이 오고 있는데 모든 일은 어둡고 희망이 없는 것 같은, 윤국은 아아! 하고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이다.

"도련님, 왜 그러고 계시오?"

언년이가 내다보며 물었다.

"추운데 들어가시지요."

"..."

윤국은 양 어깨를 추켜세우듯 하며 도리어 언덕길을 내려간다.

"어이구 저 청개구리 도련님."

언년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강가 모래밭까지 간 윤국은 바지주머니 속에 두 손을 찌르고 강물을 내려다본다. 강물은 다 풀렸지만 가장자리 군데군데 살얼음이 조금씩 흔적을 나기고 있었다. 윤국은 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 아버지가 그리운지, 자신의 감정도 실은 애매하다. 그래 그런지 모르지만 세 살 위인 형에게 부성 같은 것을 느낄 때가 가끔 있었다. 형은 자상하고 애정이 깊었으며 언제나 너그러웠다. 한때는 우락부락하고 주먹이 센 이순철을 존경하기도 했으나 형에게 실망한 일은 없었다.

지금도 실망 같은 것은 아니다. 분노였다. 배신을 당한 그런 분노였다. 왜 따돌리나, 나도 학생에 운동에 앞장서서 유치장 신세까지 졌다. 뜀뛰기에 일등 먹고 뽑내는 아인 줄 아는가, 윤국은 형도 괘씸했지만 김제생의 차가운 눈빛은 불쾌했고 몹시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육친으로서 연장자로서 윤국을 아끼고 보호하려는 심정에서 그랬으리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리고 윤국의 분노만 하더라도 실은 새삼스런 것이 아니었다. 그 동안 계속하여 마음속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었으니, 비통했다. 감정의 샘은 넘쳐서 걷잡을 수 없었다. 낯선 집, 울타리를 거머잡고 꺼이꺼이 울고 싶었던 마음, 흐느끼지 않아도 울음의 바다 속으로 꺼져 들어갈 것만 같았던 깊이 모를 슬픔, 어쩌면 그것은 윤국의 열일곱 생애에서 가장 아름답고 성숙한 감정의 약동이었는지 모른다. 장래가 약속된 수재같이 얌전하게 균형을 잡아가며 난 그렇게는 안 살아! 폭탄을 안고 살 테다! 윤국은 마음속으로 그 말을 몇 번 되풀이했는지 모른다. 폭탄을 안고 살 거라고--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턱주가리에 홈 같이 흉터가 패어 있었다. 너부죽한 얼굴에 안경을 썼고 목은 짧았다. 오십은 아직인 것 같았으며 사십은 넘은 듯 얼핏 보기에 호인이었고 인텔리의 냄새도 풍겼다. 이치가와 형사,, 그는 심야에 학생들을 쓸어 넣은 유치장으로 들어왔었다.

"멍텅구리 같은 놈들, 제 나라 지킬 능력이 있었으면 시초에 합병 같은 것 없었을 거 아닌가. 지금에 와서 왕왕거려도 소용 없어. 현실을 직시해라, 현실이 소리로 해결이 되나? 소리란 힘이 아니야. 약자들은 항상 울지. 갓난애기도 항상 울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해서 젖을 안 주면 죽는다. 너희들은 학문을 했으니 알 게다. 대영제국이 인도를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지, 백인이 유색 인종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또 중국에서는 백인 식당에 중국인과 개의 출입을 금한다는 팻말이 공공연하게 나붙어 있다고 했다. 역사란 강자가 약자를 지배한 바로 그 자체다. 이집트, 로마, 그리스, 그들은 모두 정벌한 타민족을 노예로 삼았다. 노예들은 일생을 지배자 채찍 밑에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너희들도 이미 아는 얘기다. 그러면, 대일본제국이 너희들 조선인을 개 취급했더냐? 노예로서 몽둥이질하며 사역하였더냐? 내 앞에 앉아 있는 너희들은 누구냐. 노예냐? 개냐? 분명 개도 노예도 아니다. 고등 교육을 받고 있는 당당한 학생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너희들이 학생이라는 것은 대일본제국의 은총이다. 옛날에는 서당이 고작이요 그것도 양반의 자식 몇몇이 꿇어앉아서 고리타분한 글자 좀 배우는 정도, 그러나 지금은 신분의 구별 없이 많은 청소년들은 균등하게 새로운 학문의 혜택을 받고 있다. 자아 보아라! 이 유치장을 비춰주는 전등을. 등잔을 켜고 살던 너희들의 생활은 전등으로 바뀌어졌다. 거리에는 자동차, 기차가 달리고 초가집이 있던 자리엔 이층 건물들이 들어섰다. 진주는 지방도시다. 서울에 비하면 말할 것도 없고, 부산보다 작은 도시다. 함에도 불구하고 현대 문명은 빠짐없이 들어왔다. 방안에 요강을 들여놓고 긴 담뱃대 물고서 팔자걸음으로 길을 걷는 너희들 조선인은 도시 위생 관념이 없고 게으르다. 그같은 민족성과 문명에 동떨어진 미개한 상태에서 언제? 백 년이 걸려도 안 될 발전을 우리 대일본제국이 실현시킨 것이다. 내 말이 틀렸느냐?"

고개는 꼿꼿이 세우고 눈은 내리깐 채 덩어리 같은 침묵에 잠겨 있던 학생들한테서 별안간 우우--우우우-- 덩어리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머리카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입술도 다물려져 있었다. 우우우 괴성이며 신음이며 분노이며 원한에 사무친 저주의 소리, 이치가와 형사의 얼굴이 시뻘개진다. 말깨나 할 줄 안다고 학생들 설득 작전에 나선 모양인데, 혹 그는 온건파에 속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산전수전 다 겪은 능구렁이, 하기는 경찰직에 종사하여 사십대가 넘어가고 있다면 노회하지 않다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꼬랑지 말고 도망가며 짖는 개 소리로 듣겠다. 그리고 나는 너희들에게 너희들은 꿀벌이다. 그 말을 선사하겠다. 침을 찌르고 나면 꿀벌은 죽는다. 다시 찌를 여벌의 침도 없을 뿐만 아니라 벌은 죽을 수밖에 없다. 찔린 사람은 다소 통증을 느끼고 가렵다가 만다. 힘은 역사상 언제나 정의였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리고 풍요한 것이다! 힘이 없다는 것은 언제나 불의, 추악한 것, 빈곤이다! 멍텅구리 같은 놈들! 뭐 어째? 일본 제국주의를 멸망시키자? 식민지 교육을 철폐하라? 독립을 쟁취하자? 자알 논다. 똑똑히 들어. 대일본제국에 있어서 조선은 우리 피의 대가다! 일청전쟁, 일로전쟁, 우리는 그 두 차례 전쟁에서 특히 러시아하고의 전쟁은 만세일계, 우리 국체를 걸었던 전쟁이었다! 우리 젊은이들의 시체더미와 피바다에서 얻어낸 보상을 너희들이 도로 찾겠다? 길 가다 주운 금화 한 닢이냐? 그러나 나는 너희들 젊은 의지를 존경하는 사람이다. 남아 장부가 그런 용기도 없다면 인간쓰레기다.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젊은 사람들한테는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든 문제가 있고 불만이 있게 마련이다. 극락정토에서도 불만은 없어지지 않을 게야. 하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것도 용기에 속한다. 특히 너희들 같은 입장에서는 더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현실, 물론 대일본제국이 처한 현실이다. 수천 년의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던 중국은 이제 이 빠진 늙은 호랑이요 만신창이가 되어 자신의 운명도 점쳐볼 수 없는 지경이라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 일이다. 러시아는 말할 것도 없다. 국세가 쇠한 것도 쇠한 것이지마는 공산주의 국가로 세계에서 고립되어 있고, 그러나 그것보다 그들은 백인종이다. 물과 기름, 대일본제국에 이를 가는 너희들도 백인종의 지배는 원치 않을 것이다. 여하튼 아시아에서 그 두 나라를 빼면 그야말로 무풍지대, 대일본제국의 나갈 길을 막을 자 없다! 머지않아 대일본제국은 동양의 맹주가 된다! 그리고 세계를 웅비할 것이다. 꿈이 아니다. 눈앞에 다가오는 바로 그 현실인 것이다. 너희들 조선 민족이 살아남으려면, 또 자손들의 안녕을 보장받고 행복을 누리려면 대일본제국에 동화되어야 한다. 황공하옵게도 천황폐하께오서는 일시동인을 유시하셨으니 크나큰 은총에 너희들은 무엇으로 보답하겠느냐. 결사보은해야 하거늘 가소롭게도 꿀벌의 침 하나 가지고 반역을 시도했다. 독립을 쟁취한다고? 조선이 언제 독립국이었었나. 일청전쟁 무렵까지도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 아니었나!"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오학년의 홍수관이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뭣이?"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조선 천지 어떤 변방에도 청국인 관리는 한 사람도 없었소. 다만 그들 사신이 객관에 와서 머물다 선물이나 얻어서 돌아갔지요. 소위 이웃 나라끼리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절차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네들의 땅덩어리가 큰 만큼 형제지국이란 명칭에서 형쪽을 차지했을 뿐입니다."

"건방진 놈, 그러니까 그게 바로 속국 아닌가!"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일본 요리집에서 간혹 흘러나오는 기생들의 노래 말입니다. 요이야 사토, 그 노래는 아시겠지요?"

이치가와는 어리둥절했다. 학생들은 큰소리를 내어 웃었다. 고의적인 큰 웃음 소리였다.

"시끄러! 조용히 해!"

악을 쓰고 나서 이치가와는 홍수관을 노려본다.

"할 말 있으면 해봐!"

". 요시야 사토의 사토가 무슨 뜻입니까? 아마도 일본 사람들은 그 뜻을 모를 겁니다. 사토는 조선말이니까요. 사또는 지방을 다스리는 고급 관리에 대한 존칭입니다. 옛날 중국에서 그러했듯이 조선에서도 일본에 소위 친선 사절이 갔었고 일본에서는 친선 사절을 환영하여 부른 노래가 요이야 사토임니다. 그렇다면 과거 일본은 조선의 속국이었습니까?"

"뭣이 어쩌고 어째!"

삶은 문어같이 시뻘개진 이치가와는

"누가 그런 말을 했나! 누가 그런 말을 했나!"

하며 홍수관의 뺨을 계속 후려치고 발길로 배를 걷어찼다. 학생들은 일제히 일어섰다. 배를 채어 쓰러’던 홍수관도 일어섰다. 홍수관의 두 뺨은 일장기를 찍어놓은 듯 선명하게 붉은 동그라미, 그 밖의 얼굴 부분은 백랍같이 희었다. 눈은 불타고 있었다. 처연하고 괴이스런 광경이었다. 흰 머리칼이 희번덕이는 이치가와의 머리가 전등 아래서 심하게 흔들렸다.

"왜 때립니까!"

"으음 이 새끼가!"

"지금 나는 독립 만세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노예 교육을 철폐하라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당신네 일본은 일로전쟁 당시 대영제국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국력으로 볼 때 분명히 영국은 형의 나라였을 것입니다. 당신의 나라는 그 강대국에서 대가의 약속을 받고 선전 포고를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국의 땅도 러시아의 땅도 아닌 우리 땅이 제물로 넘어 갔습니다. 과거 우리 조선도 오랑캐로 모멸했던 청나라와 싸운 적이 있었습니다. 명나라와의 우의를 저버릴 수 없다는 명분 때문에 싸운 것입니다. 대가도 지원도 없는 외로운 싸움, 만일에 지금 말하듯 속국이거나 식민지였었다면 누가, 하라 하지도 않았던 전쟁을 왜 합니까. 억압해온 힘에서 벗어난 기쁨 때문에 만세를 불렀음 불렀지, 검을 싫어하기에 뺀 검이었고 야만을 싫어하는 검, 침략을 싫어하는 검 그래도 조선이 미개국입니까?“

이치가와는 격노하여 신음 소리를 내며 덤벼 들려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안경을 벗었다. 손수건을 꺼내어 닦기 시작했다. 홍수관은 눈을 떨어뜨렸다. 절망적인 모습이었다.

나이는 스무 살, 장래가 촉망되던 수재, 과묵하고 남과 잘 어울리지 않으며 늘 외로워 보였던 홍수관, 일인 교사들도 그의 인품을 사랑했고 명석한 두뇌에 경의를 표했었다. 한동안의 침묵, 돌덩어리 같이 굳어 있었던 한 방의 동급 하급의 학생들은 차츰 숨 가쁜 입김을 내뿜는다. 홍수관의 반항이 놀랍기도 했지만 다음 벌어질 일에 대한 긴장은 터질 듯 고조에 달했다. 손수건을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안경을 쓴 이치가와는 씩 웃었다. 뱀이 꼬리를 치며 지나가는, 웃음은 소름끼치게 기분 나쁜 것이었다.

"너 말대로 하자면 역사적인 사실로서 현재의 얘기는 아니다. 역사란 사가에 따라 다르고 선 자리에 따라서 다르지만 네가 역사를 어떻게 보는가 그 따위 것은 일단 접어두고, 현재 얘기나 하자. 너는 아까 독립 만세를 부르지 않았는데 왜 때리느냐 했지? 식민지 노예 교육을 철폐하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왜 때리느냐 했겠다?"

빨갛게 타던 홍수관의 양볼에서 핏기가 빠져나간다. 새파랗게 질린다. 이치가와의 의도를 깨달은 것이다.

"앞으로 독립 만세를 부르지 않을 것이다, 식민지 노예 교육 철폐하라는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뜻이냐?"

"..."

"역사에 대한 견해는 앞으로 달라질 수도 있다. 그리고 지나간 일이니까, 너는 매우 똑똑하다. 아깝다. 해서 나는 확인하려는 거다. 여기 잡혀온 행위는 두 번 다시 되풀이 않겠다, 그 뜻으로 받아도 좋은가?"

"..."

"행위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그런 생각을 안 할 것으로 믿어도 좋은가? 안 했는데 왜 때리느냐, 그 항의는 매우 중요한 너의 심정일 것이기 때문이다."

", 말하지 마! 두 달이면 졸업이다!"

윤국은 자신도 모르게 외치고 있었다.

그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이치가와는 기름을 짜듯 육박해간다.

"너의 항의는 매우 희망적이다. 인재는 어느 곳에서든 필요하니까. 앞으로 대일본제국에 반역하는 행위와 생각을 않겠다, 그러냐? 대답하라."

"아닙니다. 마음속으로 안 할 수 없지요.?"

"좋다. 그러면 행위는 아니 할 것이다. 그 말이겠다.?"

홍수관의 얼굴은 풀빛이 되었다. 다른 학생들은 고개를 숙이며 모두 이를 악물었다.

"마음속으로 안 할 수 없다. 그러나 행동은 안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는 얘기구나."

"아니오."

나직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다음

"아닙니다! 아니요오!"

외친다.

"마음과 행위는 언제나 그럴 것이오! 내 나라 독립을 위해 죽는 그날까지! 비록 생명을 건 침 하나밖에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홍수관은 마루에 구부리고 앉았다. 두 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오열한다. 윤국이도 울었다. 모두 울었다. 두 달 후면 홍수관은 졸업한다. 학교 근처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홀어머니를 위해 홍수관은 울었을 것이다. 그의 집이 가난하다는 것, 잿물이며 숯이며 사탕 따위를 집 앞에 내놓고 파는 그의 홀어머니, 여름에는 풀을 쑤어 팔았고 겨울에는 나뭇단도 갖다놓고 팔았으며 사철 머리에 수건을 쓰고, 시위하던 날에도 맨 먼저 학교로 달려왔던 그의 어머니였다.

"수관아, 만세를 부르믄 잽히간다 카든데 우짤라꼬 니가."

"걱정 마이소, 어머니."

수관은 웃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등을 밀었다.

"그라믄 나도 함께 따라갈 기다. 니가 하는 일에 에미가 못하겄나."

수관의 어머니는 시위 행렬을 따라다녔다. 아들 옆을, 계속 따라 다녔다. 수건을 쓴 채, 치맛자락을 걷어 콧물을 닦아가며. 친구들과 후배들은 수관이 가난했기 때문에 함께 울었다. 그의 어머니를 알기 때문에 울었다.

"너도 죽었다. 퇴학은 물론이고 콩밥을 먹게 된다. 콩밥이 끝난 뒤에도 너는 내 눈 밖에 벗어날 수는 없을 게야, 역사적 사실 운운한 것만으로도 너의 반역죄는 충분했지만 말이야, 하하핫핫핫핫... 하하하핫..."

광대처럼, 들린 것처럼 이치가와는 웃으며 나갔다.

윤국은 돌을 주워 이치가와의 얼굴을, 턱주가리에 홈같이 패었던 흉터를 겨냥하듯 강물을 향해 던진다.

', 말하지 마! 두 달이면 졸업이다!'

평소에 친분이 있었던 사이도 아니었다. 선후배의 예절은 엄격했다. 그러나 윤국은 홍수관을 친형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반말을 한 것은 육친으로 착각한 순간 때문이다.

물결이 세차게 밀려오는 곳엔 얼음이 녹고 없었다. 축축히 젖은 모래는 여인네 살갗처럼 부드러웠다. 윤국은 마른 모래 한 줌을 집어 올린다. 왠지 따뜻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진주의 남강 모래와 섬진강의 모래는 다르다. 섬진강의 모래는 다르다. 섬진강의 모래는 순백색이며 가루같이 부드러웠고 남강의 모래는 느낄까, 그런 분홍빛, 아주아주 연한 밀빛, 그리고 좀 거칠었다. 윤국은 어릴 적 이웃에 살던 원조를 생각한다. 항상 코를 흘려 코밑이 빨갛던 아이였다.. 남강 모래밭에서 함께 놀 적에

", 윤국아! 이것 봐라! 모래가 반짝반짝하지이? 반짝반짝하는 거는 다 금이다. 남강 노래가 얼매나 많노? 그라믄 금도 참 많을 기다 그장? 후제 이 모래를 내가 쳐서 금을 자꾸자꾸 모아가지고 너거 집맨크로 부자가 될 기다."

그러던 원조는 보통학교도 이년에서 중퇴하고 시골 다니는 소금 장수가 되었다던가. 윤국이보다 두 살 위였으니까 열아홉일 것이다. 왜 뜻밖에 원조 생각을 했는지 윤국이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가난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홍수관의 가난 때문에. 윤국은 강을 따라 내려간다. 모래밭이 좁아지면서 바위가 솟아나온 곳, 방학 때 오면 곧잘 낚시를 즐기던 곳이다. 옛날에 얼굴이 빡빡 얽은 목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도 이곳에서 낚싯줄을 던져 놓고 세상일을 생각했다든가. 윤국은 솟아나온 바위를 따라서 돌았다.

'...'

바위에 가려져 둑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곳이었는데 윤국은 걸음을 멈춘다. 계집아이가 울고 있었다. 회색 바짓자락에 검정 치마가 얹혀 있는 두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양회색 인조견으로 누빈 누비저고리의 도련이, 울고 있는 그의 심장같이 흔들린다. 이따금 얼굴을 들고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닦곤 한다. 걸레를 빨러 나왔던지 발아래 놓인 통새끼 속에는 꼭 짠 걸레 몇 개와 방망이가 들어 있었다. 윤국이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모르는 계집아이는 여전히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닦아가며 운다. 손목은 터서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그러나 옷은 따뜻하게 입었고 오목한 검정 고무신 속의 버선도 솜을 많이 두었는가 도토롬했다. 이윽고 계집아이는 두 손으로 강물을 모아 얼굴을 씻기 시작했다. 또 다시 치맛자락을 걷어 앉은 채 얼굴을 닦는다. 놀려주고 흉보듯 까마귀가 짖으며 강을 질러 날아간다.

"오매!"

통새끼를 이고 돌아서려다 말고 계집아이는 나자빠질 듯이 뒷걸음을 쳤다.

"왜 울었어?"

입술만 떤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눈동자는 가엾게 고정이 되지 못하고 있다. 울어서 그랬을 테지, 강물에 얼굴을 씻어 그런가, 아니 너무 놀라서 그랬을 것이다. 얼굴은 해 떨어지기 직전의 그 진분홍 노을이었다. 살갗이 터질 듯 피가 소용돌이치는 것 같다.

"왜 울었어?"

"저기."

가겠으니 길을 비켜달라는 시늉을 한다.

"왜 울었는가 말해야 보내준다."

"저기."

"누구네 집 딸이지?"

그 말에 다시 놀라며 뒷걸음질치는데 계집아이는 학생이 누군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누구네 집 딸이야?"

", 주막집의."

"아아 그 할머니이? 아 아니지. 그럼 손년가?"

"아니요."

눈을 내리깐다. 영산댁의 양녀라던 숙이다.

"그럼."

"아배가 버리고 가, 갔십니다."

그러면 할머니가 구박을 해서 울었나?"

", 아닙니다."

통새기를 인 채 눈을 내리깔았는데 눈물이 또 흘러내린다.

"바른 대로 말해. 내가 가서 혼내줄께."

"그기이 아니고 으흐흣... , 그기이 아닙니다."

"말을 해야 길을 비켜준다. 왜 울었지?"

윤국은 계집아이, 숙이가 이고 있는 통을 달랑 내려놓는다. 숙이는 주질러앉으며 흐느껴 운다.

", 아배하고 동생이 보, 보고 저버서 으흐흣..."

울면서 숙이는 머지않아 죽을 그런 병에 걸린 아비하고 사내동생 세 식구가 방랑한 얘기를 했다. 방랑길에서 이곳 주막을 찾아들었고 하룻밤을 묵었는데 이튿날 아침잠에서 깨어보니 아비는 어린 동생을 데리고 간 곳이 없어졌더라는 것이다. 지금쯤 아비는 죽었을 것이 분명하고 어린 동생은 이 추운 겨울을 어디서 나고 있으며 무사하기는 하겠는가 대강 그런 애기였다.

"그럼 어머니는."

"모리겄소."

죽지는 않았다 그 말이냐?"

"그것도 모리겄소."

완고했다. 윤국은 숙이에게 길을 내어주었다. 숙이는 늦었다 싶었는지 둑길을 날으듯 걸어갔다. 머리꽁지가 흔들리는 것을 멀리서도 볼 수 있었다.. 사춘기의 호기심은 결코 아니었다. 울음에 끌렸고 왜 슬픈가에 끌렸을 뿐이다. 그러나 해 떨어지기 직전의 진홍빛 노을 같았던 얼굴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숙의 모습이 사라진 뒤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강물을 내려다본다. 출렁거리는 물 속에서 윤국은 일장기를 찍은 것만 같았던 홍수관의 얼굴을 본다.

"그것은 무슨 빛깔일까?"

홍진의 빛깔이 무슨 빛인지 모르지만 붉다는 것과 병이라는 연상 때문에 윤국은 중얼거려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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