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돌아와서
최참판댁의 기둥 군데군데 초롱이 내걸려 있고 행랑이 불빛도 환하게 밝았다. 제상에 멧밥이 올라갈 무렵 윤씨부인 무덤에는 쉬어가는 방 나그네같이 한 사나이가 묘비를 등지고 앉아 있었다. 덤벼드는 풀모기를 쫓다 말고 사내는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문다. 담배를 빨아 당길 때마다 아직은 망가지지 않은 얼굴의 윤곽이 나타나곤 하는데 사내는 환이였다.
골짜기에서 뻐꾸기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을 쪽에선 이따금 개 짖는 소리, 여름밤의 별들은 황홀하게 반짝이고 뻐꾸기는 계속하여 운다.
"제삿밥 잡수러 가셨겠군요."
어둠 속에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다.
"먼 곳에서 제삿날 생각하고 온 것은 아닙니다만 와보니, 제야 뭐 빈집에 찾아와서 절 한번하고 가지요."
풀섶에 담배를 비벼 끄고 엎드려 절을 한다. 무덤 앞에서 일어서는 순간 환이는 불이 환하게 켜졌을 최참판댁 넓은 대청과 제상과 서희와 그의 두 아들의 모습이 불덩이 같은 열도를 띠며 가슴에 와 닿는 것을 느낀다. 단숨에 달려가서 제상 앞에 꿇어앉고 싶은 유혹은 가슴을 메이게 한다. 환이는 풀섶을 지신지신 밟으며 산을 내려간다. 적막한 어둠과 마음 끝을 간질여주는 갈대 같은 외로움이 스며든다. 마을의 불빛이 깜박이고 있었다. 모깃불 연기 속에 뿌옇게 비치는 불빛도 볼 수 있다. 차가운 빙하 같았던 생애, 먼 곳에서 찬란하게 빛을 내던 사람들, 인생은 보석의 빛이 결코 아니요 뿌옇게 타오르는 모깃불, 목화씨 같은 것이란 생각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발자취는 순전히 역행이었다는 생각도 한다.
"무슨 놈의 밤도깨비 같은 짓이었나."
허허 하고 웃는다. 생모 무덤에서 절한 것이 그랬었고 자신의 인생 전부가 허허헛 허허, 하고 계속 웃는다. 김평산의 외딴집에서도 물빛은 새나오고 있었다. 한복 내외가 밤을 새워가며 일을 하고 있는 걸까. 환이는 마을에서 발길을 돌린다. 발길이 빨라진다. 역풍을 향해 달리듯이, 그렇게 한참 달리다가 우뚝 서며 돌아본다.
"뭣 땜에 따라다녀!"
소리를 버럭 지른다.
"성님 한 말이 맘에 끼여서요."
길섶 수풀 속에 반쯤 몸을 가리고 앉아 있던 강쇠가 엉덩이를 털며 일어섰다. 그리고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무슨 말을 했기에?"
"머 기분 좋은 말도 아닌데 꼽씹어서 머하겄소."
"어느 놈한테 칼 맞아 죽을 거라 하든가?"
"점점 한다는 소리가."
"네가 날 낳아준 어미야? 어미! 웬 잔걱정이 그리 많아!"
"어이구 참, 천지개벽을 해도 그런 촌수는 없겄소. 남자가 애기 낳는 법도 있다 캅디까?"
"강쇠야"
"허허 참 성님도, 사십 다 된 가장, 이자는 대접 좀 해주었이믄 좋겄거마는."
"내가 뭐라 하든가."
"말한 사램이 날보고 물으믄 우짤 기요? 성님도 늙었소. 총알 겉은 그 명념은 다 어디 갔소? 자개 한 말을 잊는 거를 보이."
되뇌기가 싫은 모양이다. 강쇠는 걸음을 빨리하며 어둠 속을 살피듯 목을 뽑는다.
"죽을 자기 찾아온 것 같다는 말이 무서운 걸 보니 너도 간덩이는 줄어든 모양이다."
"늙을수록 간덩이는 줄어들게 매련 아니겄소?"
"걱정 말어. 죽을 자리 죽을 자리 하면서 삼십 년 사십 년 이 지나갔다. 어느 산천, 묘소로 보이지 않는 것은 한군데도 없었느니라. 실은 죽을 자리도 시기도 다 잃은 셈인데, 그는 그렇고 임실의 지나는 지금 어떻게 돼 있지?"
"시님이 말심 안 하시던가요?"
"잠시 동안 만나서 말할 새도 없었다."
"교주 노릇을 하고 있소."
"교주?"
"야아."
"...?"
"그놈을 직이야 하는데 직일 수 없게 돼 있는 기라요."
"교주라..."
"백일굔지 청일굔지 흥, 상말로 X 같은 잡신을 내걸어놓고, 머지않아서 천지개벽이 있일 긴데 살아남을 연놈들은 내게로 오라! 해서 간이 디비진 연놈들이 집 팔고 땅 팔고 딸년꺼지 바치는 미친 지랄이 시작된 기라요. 졸지간이지요. 이삼 년 동안에 신도들을 거머들인 기라요."
"그놈으로서는 최상으로 궁릴 잘했구먼."
"무신 소리 하는 기요? 남의 일로 아요?"
강쇠는 화는 낸다.
"흑세무민하기로 그까짓, 내 백성을 원수에게 넘기는 것보담이야 낫지."
"깜깜한 한밤중이거마는."
"노상 한밤중이지. 소상히 안들 그게 머 대수겠나."
"속 편한 소리 그만 하소! 꾹꾹 누르고 참아온 기이."
"백보 오십보야. 본시부터 싸우느냐 교세 확장이냐, 그래서 갈래가 난 것 아니었나. 그자가 잡신이든 뭐든 윤도 집의 주장을 이어받은 셈이군."
별안간 환이는 자신의 뺨을 찰싹 친다. 풀모기를 때린 것 같다. 강쇠는 한동안 말없이 걷는다. 환이가 돌아왔다 하여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이란 기대를 할 수 없다. 지삼만의 일로 열올리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놈을 쳐죽일 라고 별의별 계책을 다 꾸밌지마는 다 허사였소. 그놈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제요. 옥황상제겉이 깊숙한 고에 틀어박히서 신도들한테 목소리만 들리준다 카이, 미칠 지경이지요."
"..."
"그놈이 흉악한 교주 노릇을 시작하믄서부터 우리 사람들을 재물로 꼬시내고 그것으로도 안 될 적에는 뽄배기로 찔러 넣고, 간악한 수단은 다 써 묵은 기라요. 그놈이 내막으로 왜놈하고 손잡았다는 소문이 빈말은 아닐 기구 마는."
"그렇다면 넌 어떻게 된 건가?"
"그놈이 웃따까리만 남긴 기지요. 성님이 있었다믄 방법이 달랐일기고 사정도 달랐겄지요. 그놈은 성님이 못 돌아오거나 죽은 줄 알고 있일 기요. 약은 놈!"
겉으론 태연하게, 담담하게 얘기하는 척했으나 지삼만의 악랄한 수법과 그의 의도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을 못하는 것은 전달에 적합한 어휘가 부족한 탓도 있겠으나 내심 굉장히 흥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울분과 실망도 있었다. 울분은 보람이 없다는 생각에서, 실망은 환에 대한 것이다.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강쇠는 지렛대가 빠져버린 것 같은 환이를 느꼈다.
"나 그렇잖애도 성님보고 따질라 했구마요. 이곳 형편이야 며칠만 더 기시믄 알게 될 기지마는, 대관절 앞으로 우짤 심산이요?"
바싹 다가서듯, 던지는 말이다. 그러나 환이는 그 말 대꾸는 하지 않고
"좀 앉았다 갈까?"
하자 환이보다 강쇠가 먼저 주저앉는다. 환이는 천천히 엉덩이를 내린다. 길켠의 버드나무가 선들선들 움직였다. 열기가 남아 있는 어두운 땅과 수풀에 강바람이 지나간다. 바람은 물결같이 오고 또 온다.
"강쇠야"
대답 대신 한숨만 내쉰다.
"몇 년을 소식 없이 뭘 했느냐, 물어볼 만도 한데... 왜 묻질 않는가 모르겠어."
두 팔로 허벅지를 꽉 껴안듯이 그리고 어두운 땅바닥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더니
"묻는다고 대답하는 성미 건데요?"
"..."
"자개가 하고 저버야 얘기를 하니께, 물으나마나, 설마 왜놈들으밀 정이야 했겄소."
"그보다 더한 짓을 했는지 모를 일이지."
강쇠는 들은척만척, 허벅지를 양팔로 껴안은 채 발바닥으로 땅을 몇 번 구른다.
"가입시다."
팔을 풀고 일어섰다. 화개까지 온 두 사내는 어느 편이랄 것도 없이 불빛이 새나오는 주막 앞으로 다가섰다. 강쇠가 먼저 들어섰다.
"비연이 없나?"
대답 대신 불이 꺼져버린다.
"비연아!"
대답이 없다.
"이런 떡을 칠 놈으 행사를 봤나? 정 이럴 기가? 기둥뿌리 뽑기 전에 불 못 키겄나?"
"밤늦기 누고?"
겨우 졸려 죽겠다는 시늉의 늘어져빠진 여자 목소리가 술청 뒤켠 방안에서 들려왔다.
"밤늦기? 초지녁부터 무신 지랄 하노."
"새는 날에 오소. 잘라 카는데 술은 무신."
환이는 마당에서 뒷짐을 지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모서리에서 술 팔아묵고 살 작정이믄 속곳 걸치고 나오는 기다. 소나아만 밝히가지고 아가리에 밥 들어 가겄나."
강쇠는 술청에 올라가 앉는다. 방안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나고 소곤거리는 소리도 들려온다. 이윽고 등잔을 켜든 삼십을 넘은 여자가 나왔다. 사내는 뒷방 문을 빠져나가는 기색이다. 그러나 뒤란을 돌아 나오려던 사내는 뒷벽에 쌓아 올려놓은 솔가지에 얼른 몸을 감춘다. 술청에서 새나오는 불빛을 받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서 있는 환이를 본 것이다. 방에서도 강쇠 음성을 알아차리고서 여자를 내보냈고 뒷방 문으로 빠져나온 눈치다.
"오밤중에 이기이 무슨 짓이요? 술장수는 당신네들 종이요?"
쨍쨍 울리는 여자 목소리.
"넘찐 소리 마라. 부애 돋구믄 대가리를 깨부릴 긴께. 사당년이 주모로 출세했이믄 옛날 행사는 버리는 기이 우떻노? 더러바서 술 마시겄나."
"더러분 술 안 마시믄 될 거 아니요!"
"그라믄 주막 뜯어 개라. 다른 사람이나 해묵고 살게."
"누구 맘대로, 이녁이 내 서방이요?"
"별 탈 없이 오늘밤을 지낼라 카거든 술상이나 잘 채리 내. 시끌 버끌한 참에 성미 나오믄, 알겄나? 성님, 안 들어오고 머하요?"
환이 술청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사내는 슬그머니 주막을 빠져 나간다. 주모 비연은 환이 기색을 슬쩍 살피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서 오소."
하고 눈웃음을 친다.
"이년이 또 꼬리를 치네. 제 버릇 개 못 준다 카더니."
여자는 강쇠의 사팔뜨기 눈을 노려본다.
"말말이 이년 저년, 입정 고약한 사내 구마."
"그렇기 나오이 제법 머엇 겉다. 니 이모가 이 주막을 했일 적에는 임석이 깨반하고 오밤중이라도 나그네가 들믄 군담 없이 술상 밥상 다 채리 냈고 행신이 조신스러바서 어는 누구도 넘보거나 업신여기진 않았다. 이모 죽은 덕분에 이만한 집칸이라도 물리 받아서 사당패 생활을 걷었이믄 죽은 이모 반몫은 해얄 거 아니가. 이놈저놈 집적이는 대로, 그래서는 못쓰지. 이거 다 죽은 니 이모하고의 정리를 생각해서 하는 소리니 새겨서 들어라."
강쇠는 타이르듯 말했다. 그러나 여자는 고개를 돌리며 입을 비쭉거린다. 이렇게 해서 밤을 새가며 환이과 강쇠가 술타령을 하고 있을 때 주막에서 빠져나온 사내는 남원을 향해 줄달음을 치고 있었다. 동이 훤하게 틀 무렵 남원에서도 훨씬 더 깊숙하게 들어간 곳, 그러니까 지삼만이 창설한 청일교의 소위 교당까지 사내는 왔다. 똥짤막한 키에, 팔이 길어서 마치 원숭이만 같은 사내는 꽤 건각이다. 피로한 기색도 없이 교당의 뜰 안을 이리저리 살핀다. 누각도 비각도 아닌, 묘하게 생긴 건물이 중앙에 우뚝 서 있었다. 홍살문이 중앙에 있고 벽면에는 (삼국지)의 관운장, 장비 따위의 요란스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뒷면에는 행랑 같은 건물이 즐비하게 서 있고 그와 마주본 곳, 그러니까 큰 건물에 가려진 곳에 돌담을 친 꽤 큰 기와집이 있었다. 모두 나무 냄새가 날 만큼, 신축한 지 얼마 안 되는 집들이다. 그림자라곤 없다. 벽면의 요란한 그림 탓인지, 관례를 깨뜨리고 건물 중앙에다 갖다 붙인 홍살문 탓인지 요괴스런 분위기가 감도는 청일교의 본거지. 도대체 지삼만은 이 삼사 년 동안 어떻게 해서 이만한 기틀을 이룩하였는가. 아무도 자세한 것은 모른다. 극히 소수의 사람들, 그것도 막연한 추측인데 전주의 어느 부자가 막대한 비용을 내어 교당을 지어주었다는 것이며 그것도 신심에서가 아니라 그 부자의 무서운 범죄의 비밀을 지삼만인 알고 있어서 비밀을 지켜주는 대가로 거금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환이가 심어놓은 하부조직을 부수기 시작했으며 위협과 감언이설로 포교사로 둔갑시켜 신도들을 포섭하며 지반을 넓혀간 것이다. 그는 배일사상을 적당히 가미하여 직설적이며 조야한 변설로써 인심을 사로잡았고 동학의 교리를 약간씩 변조하여 설법함으로써 심오한 성자 행세를 했다. 그러나 언동으로써 그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일본이 망할 서이며 그리하여 동방의 새로운 횃불이 조선 땅에서 높이 솟아오를 것인즉 그때 동방을 다스릴 자 누구일 것인가, 하늘로부터 인을 받을 자 누구일 것이가, 지금은 비어 있는 옥좌인데 장차 그곳에 좌정할 어른을 위해 백미 열 섬의 공덕을 쌓으면 그날이 왔을 적에 홍포도사가 될 것이요, 백미 백 섬의 공덕을 쌓으면 청포도사가 될 것이요, 백미 천 섬의 공덕을 쌓으면 황포도사가 될 것이요, 그러나 청일교를 믿지 아니하고 교주를 믿지 않는 자는 그때를 기하여 금수로 환생될 것이며 청일교를 비방하고 교주를 비방하는 자는 생을 다시 받지 못하리라, 대충 그런 골자의 주장이었다. 친일파라든지 뒷구멍으로 일본 경찰과 손을 잡았다는 풍설은 사실 신빙성이 없었고 교당을 지어주었다는 전주의 모 부자가 친일파라는 말이 있었다.
"제에기랄! 모두 끼고 누워서 자알들 한다."
엄지손가락으로 코끝을 튀기며 원숭이 같은 모습의 사내는 행랑같이 기다랗게 칸칸으로 된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셋째 칸 툇마루에 한 손을 짚고 방문을 열려는 순간
"거 뉘시오."
"굵은 음성이 뒤통수에서 들려왔다. 사내가 고개를 획 돌린다. 그러고는 얼굴색이 싹 달라진다.
"아아니, 그게 무슨 짓이오!"
머리털이 하얀, 그러나 몸은 장대하고 튼튼해 뵈는 늙은이가 시퍼런 칼을 들고 서 있었다.
"내가 워쩌는디 그러요?"
"이 영감탕구 눈까리가 멀었나? 사람이 눈에 안 보이요!"
"아아 나는 또, 이 칼 땀씨 그런다요? 헤헤헤헤..."
"새벽부터 재수 더럽게시리."
"칼이 사람 쳐다보들 않겄소? 도무지 들지를 않는단 말씨. 혀서 뒤꼍에 나가 도둑눔맨치로 쓰윽쓰윽 가느디."
"아, 아 알았소."
사내는 손을 내젓는다.
"헌디 한서방은 신새벽부터 무슨 일이요?"
"그런 알 것 없고."
열려던 방문을 두드린다.
"오서방! 오서방!"
"아따, 참 시끄럽네. 우떤 놈이 와서 잠도 못 자게 지랄을 하노."
"급한 일인께 오서방이 일어나 나오든지 아니믄 내 들어가네."
"기다리라! 내 나가서 급한 일 아니믄 골통을 깨부릴 긴게."
옷을 주워 입는 기색이다.
"아아니, 그놈의 칼은 언제꺼지 들고 거기 서 있을 기요?"
아무래도 칼이 꺼림칙했던지 한서방이라 불리던 사내는 작은 눈을 부릅뜬다.
"헤헤헷..."
늙은이는 한 눈을 찡긋하고 음탕한 웃음을 웃으며 어슬렁어슬렁 걸어간다.
"대관절 무신 일고?"
삼베 고의적삼을 입은 오가가 굵은 맨상투 머리부터 들내고 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한가는 잠자코 걷는다. 같은 또래의 사십대 오가는 중키였고 턱밑에 칼자국이 있었다. 투덜거리며 따라간다. 행랑과 마주 보이는 돌담, 일각 대문 앞에까지 온 한가가 걸음을 멈춘다.
"내 지금 화개서 오는 길인데 급히 교주를 좀 만나야겄다."
음성을 낮추며 말한다.
"만나 잔다고 하믄 만날 수 있나? 무신 일인지를 알아야제."
"김환이가 왔다."
"머라꼬?"
"김환이가 왔단 말이다."
"그거 정말가!"
"이 눈으로 똑똑히 봤다. 안 봤다믄 미쳤다고 밤길을 걸어왔이까?"
오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오가는 지삼만의 심복이었고 한가는 강쇠의 수하로서 등을 돌린 인물이며 환의 얼굴 정도는 아는 처지였다. 그러니까 한가가 밤을 새워가며 남원까지 달려온 것은 지삼만에 대한 충성심보다 환이에 대한 공포의식과 자기 보신을 위한 본능이 더 강했을 것이다. 한가하고 사정은 다르지만 김환에 대한 공포심은 오가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마주본다. 인가도 없는 주변의 숲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괜히 으스스하다.
"죽었는 줄 알았는데... 하여간에 물구신 겉은 사램이다."
"앞으로 우떻기 나오까?"
"모르지."
"무사할 수는 없일 기라."
"하기야 머 이제는 수족이 있이야제, 도술을 쓴대도,"
"이러고 있일 기이 아니라 교주."
하는데 일각 대문, 그 안에서 빗장 빼는 소리가 들렀다. 육십 가까운 안늙은이가 저자 바구니를 들고 나온다.
"여기서 워째 이러고들 있는 기여?"
"예, 저기."
두 사내가 굽신거린다. 지삼만한테 딸을 바친 신도, 그러니까 장모격인데 교주의 조반상을 위해 아침장을 보러 가는 길이다.
"워째 말을 못혀? 무슨 일이 생깄는감?"
위세가 당당하다. 눈꺼풀이 아래로 처져서 사납게 생기기도 했고,
"교주님한테 급히 알려야 할 일이 생겨서요."
"그럼 얼쩡거리지들 말고 들어가보랑께요. 아직 주무시는디."
"예. 그러면 다니오시이소."
늙은이가 가버리자 두 사내는 대문 안으로 들어간다. 한가는 엄지손가락으로 코끝을 튀기면서 문간에 처지고 오가만 안으로 들어간다. 꽤 오랜 시간 한가는 대문 안뜰을 서성거린다.
'어디 있다가 나타났이까? 맨 먼저 등돌린 우리들한테 칼끝을 돌리는 거 아니까? 제에기랄! 별 수 없는 일이었제. 언제꺼지 기다릴 수도 없는 일이었고 줄타기 같은 생활도 젊은 한 시절, 옳고 그른 기이 어디 있더노. 좋아서 지가 놈한테 붙어 사는 것도 아니겄고, 순야바우꾼, 지가 무신 교주라고. 아이유! 머가 먼지.‘
오래 기다리니까 기다리는 것만큼 불안해진다. 밤길을 뛰어올 적에는 빨리 가야지 빨리 가야지, 했을 뿐인데 한가는 오줌 마려운 사람같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한다. 오가는 집안으로 들어갔지만 자기는 의붓자식처럼 밖에 서 있어야 하는 차별 대우도 전에 없이 못마땅하다. 그렇다 하여 청일교에서 나오고 들어가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인가. 김환의 칼끝과 지삼만의 칼끝이 동시에 자신을 향해 있는 것 같은,
'빌어묵을! 머를 하고 있노.'
이때 저만큼 모습을 나타낸 오가는 손짓을 했다.
"우떻게 됐노?"
"오라 하신다. 가자."
"머라 카더노."
"말조심해. 머라 카더노가 멋꼬? 안전에서 그랬다가는 모가지가 날아갈 기다."
"..."
대문 앞에서 한참 돌아나간다. 난간으로 둘러진 쪽마루가 양켠에 있고 복판은 큰 대청인데 신발을 벗고 대청으로 올라서며 오가는 왼편 방을 향해 말했다.
"데리고 왔십니다."
대답 대신 큰기침 소리가 났다. 오가를 따라 한가는 방안으로 들어간다. 지삼만은 웃통을 벗은 채, 여름에 실내용으로 쓰는 평상에 앉아 있었다. 오가는 선 채였고 한가는 이마에 두 손등을 붙이고서 절을 한다. 지삼만이 노려본다. 본시 땅땅하게 되바라진 체격인데 그새 옆으로만 벌어졌는지 주둥이가 좁은 항아리만 같다. 노리끼하고 성긴 수염은 옛날과 같이 초라했다.
"네 눈으로 그자를 똑똑히 보았다 그 말이 틀림없는감?"
"예."
"좀 자세히 말해보더라고."
"예. 지가 하동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화개주막에서 술을 마셨십니다. 그러다 보이 밤이 되고 해서 자고 갈라고,"
하다가 우물쭈물한다.
"계속혀"
"불을 껐는데 술꾼이 찾아왔십니다. 주모가 술을 안 판다고 해도."
"흐흠, 그런께로 제집을 끼고 누웠더라 그 말인디."
씩 웃는다.
"예, 그, 그거야 머 오다가다."
"그럴 수도 있지. 계속혀."
"밤이 늦었으니 새는 날 오라 해도 술상 차리라고 야료를 부리는 기라요. 방에서 듣자니께 강쇠더마요. 그냥 물러갈 것 겉지도 않고 거기서 맞닥뜨리도 골치가 아플 기고해서, 계집더러 나가라 하고 지는 뒷방 문을 열고 빠지나온 깁니다.
"했더니?"
지삼만은 다시 한가를 쏘아본다.
"마당으로 돌아서 나갈라 카는데 김환이 서 있더마요. 똑똑히 보았십니다."
"그자도 니를 보았남?"
"아니요, 보았다믄 여기 왔겄십니까."
"음."
"먼저 술청으로 들어간 강쇠가 성님, 하고 부르니께 김환이가 들어가더마요. 강쇠가 성님, 하고 부를 사램이 어디 또 있겄십니까?"
"성상은 워쩌드냐?"
"옛날 그대로, 밤인께 자세히는 보겄십디까?"
"그놈이 오기는 온 모앵인디. 뭣이냐, 대단헌 일은 아녀. 거 담배."
오가가 얼른 다가가서 긴 담뱃대에 담배를 재어서 내민다. 지삼만이 빨대를 입으로 가져가자 담뱃불을 붙여준다. 두세 모근 빨아서 연기를 뿜어내던 지삼만이 별안간 큰소리를 내어 껄껄껄 웃어젖힌다.
"그놈이 나한케 기어온 다면은 내 그놈을 내 옆에다가 앉힐 아량은 있는디. 하하핫... 으하하핫핫..."
"그렇기 할 사램이 따로 있지 설마 그러겄십니까?"
"뭐 어찌여? 그렇게 헐 사램이 따로 있어?"
너털웃음을 멈추고 눈을 부릅뜬다. 살기가 돈다.
"저기, 저 무신 계책이 이, 있일 성싶어서 지, 지는 걱정이 돼서 마, 말심디린 것입니다."
한가가 목을 움츠리면서도 꾸역꾸역 말을 내뱉는다.
"한심스런 일이여. 새 세상이 와도 네놈은 게우 개돼지나 면허겄어. 허기야 그것만이라도 고마운 일 아니여? 헌 일이 있이야제."
들난 상체, 자신의 굵은 팔뚝을 찰싹찰싹 치며 지삼만은 모멸의 웃음을 머금는다.
"그, 그게 아니고 갬히 교주님을 우떻게 하겄십니까마는, 우리 겉이, 등 돌린 처지고 보믄 언제 어디서 앙갚음을 할라 칼지 그, 그기이."
"알 만혀, 이 줄때기 겉은 놈아, 허나 내 날개 밑에 있이니 워쩔것이여, 걱정 말어, 걱정 말더라고, 날고 기어도 이제는 별 재간 없일 거여. 들판에다 세우놓은 허세비란 말씨. 참새가 낯짝을 쪼아먹는다 혀도 꼼짝없이 당할 긴께로. 흥, 가만히 내버려두면은 말라서 죽을 것이여. 암, 암 그렇제. 재 그놈을 없이헐 맴을 가졌다면은 벌써 옛날 옛적에 그랬을 거여. 불쌍헌 인생 죽을 자리 찾아서 제 고장으로 왔는디 가만히, 가만히 내비리두더라고. 알았지야. 으흐흣흣 으하핫..."
"그렇기만 말심."
"어허! 모두들 나가서 한상 자알 차려먹고 낮잠이나 늘어지게 자는 거여. 밤이슬 맞고서 쫓아올 것까지는 없었는디. 자아, 나가더라고, 나가란 말씨."
독기가 빠져버린 듯한 지삼만의 말에 한가는 맥이 풀리는 모양이다. 일어서서 비실비실 뒷걸음질치며
'저러다가 뒤통수 빠개지는 거 아니까? 말하는 기이 너무 쉽구마. 그 사램이 우떤 사램이라고? 하룻밤에 몇 백 리를 뛰고, 참말 이제 직일라 캤으믄 그 손에 자개 모가지가 남아 있일 성싶든가?'
"헌디 이보더라고."
"예, 옛!"
"놀라기는 워찌 놀란다냐?"
"..."
"거 주모라는 제집 말여."
"예."
"자네허고 전부텀 잘 아는 사인감."
"아닙니다."
"나제가 누군지는 알겄제?"
"모릴 깁니다. 통성명도 안 했고 그새 그곳에는 얼씬거리지도 않았인께요. 옛날 주모 아니더마요."
"그려? 그것은 잘된 일이여. 만일에 자네가 방에서 나간 것을 알았다면은 그자들, 살려놓으려 허지를 않았일 것이고, 왜 그런고 허니, 배신혔다는 그런 사감은 별거 아닌디 숨어 다니는 몸이고 보니 발설이 무서울 것이여. 호옥 또 관가에 찔러넣길도 헌다면은? 입을 없이 혀얄 것 아니더라고?"
살살 만지면서 독침을 찌르는 것이다.
"허니 내 이르는디 그놈 만낸 이야그를 아무보고도 발설 혀서는 안 될 것이여. 그것이 보신책이라는 거여. 그것만 명념헌다면은 걱정할 것 없인께로. 잘 알아들었지라?"
"하, 하지마는 무신 계책을 꾸미고서 왔다믄 앉아 당할 수만 없지 않겄십니까."
"허허어. 네놈만 못헌 사람이 우리 청일교에 있다 그말이여? 잔소리가 많아 못쓰겄단께. 쇳바닥 더 이상 놀리지들 말고 일들이나 열심히 허더라고. 어여 나가아."
"이제 나가지."
말 한마디 없이 있던 오가가 한가의 팔을 잡아 끈다.
두 사내가 나간 뒤, 지삼만은 대청을 질러서 맞은편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딸 뻘이나 돼 보이는 젊은 여자가 웅크리고 앉았다가 일어선다.
"한잠 더 잘 것인디 워찌 자리를 걷었단가?"
"저, 월궁형님."
"거 찢어 죽일 것이 아직도 새를 보는 거여?"
"..."
"그러면은 어쩐다아? 임가가 안 가고 있던가?"
"예."
"그럼 좀 불러오라 허게."
한참 후 옛날의 보부상 임가가 나타났다. 머리칼이 더러 희끗거렸고 주름살도 생긴 얼굴이다. 눈 가장자리며 입술은 여전히 푸르스름했다. 옛날보다 훨씬 더 음흉해 보인다. 그는 현재 지삼만의 왼팔 노릇을 하고 있었다. 지삼만도 이자에게는 함부로 대하질 않았다.
"무슨 일로 아침부터."
"긴 이약은 두었다 허고 임서방."
"예, 말씸허시시오."
"김환이가 왔다네."
"김환이가 와요?"
임가는 그리 놀라지는 않는다. 지삼만은 한가한테 들은 얘기를 대충 들러준다. 그러고 나서
"서둘러야 하네. 서둘러야 할 까닭을 말헌달 것 겉으면 두 가진디, 우리는 왜놈한테 대항하는 단체로 알고 있으며 또 장차 신도가 수십만을 넘을 시, 왜놈을 치고 나갈 것인께 김환이를 찔러 넣었다는 이야그를 알어서는 안 될 것이여. 그러고 다음 그놈이 우리가 찌를 것을 눈치챈달 것 겉으면은 우리를 끌어들일지도 모를 일 아니겄소?"
"그러자면은 제놈 편도 쑥밭 되는 거 아니겄소?"
"그렇다고 장담은 못혀. 그러니 서둘러야 의심을 덜 받는다 그 말 이여라. 두 놈헌테는 발설 못하도록 입을 꼭 막아놨인께."
"서두는 거야 어렵잖은 일 아니겄소?"
"그러고 또 한 가지 명념헐 일이 있는디 반드시 우리가 밀고를 혀야 한다, 워째 그러냐 헐 것 겉으믄 저리 돌아댕기다가 다른 연줄로 김환이가 붙잡히게 되는 날, 그때 우리까지 주렁주렁 매달리어 나온다믄 그냥 가는 거여. 경찰에다 우리가 고한 것을 명백히 해둘 필요가 있단 말씨. 그것이 최악의 경우 우리 보신책이 될 것이여. 내 말 뜻 알 만혀?"
"알겄소"
지삼만은 씩 웃는다.
14장 자살
복동네 집이 바라보이는 타작마당에 마을 아낙들이 모여들어 수군거리고 있었다. 고추잠자리가 해진 줄도 모르고 제비와 경주라도 하듯 땅을 거슬러 오르며 날고 있었다.
"그 동안 동네가 잠잠하더마는 궂인 일이 생기고 시끄러버서 온,"
"해필이며 최참판댁 제삿날 밤에 죽노 말이다."
"실데없는 소리 마라. 우짜다가 그리 됐겄지."
"우짜다가가 그리 되다니? 양잿물 마시고 지 목심을 지가 끊었느데 우짜다가 그리 돼?"
"지랄 겉다. 누가 죽은 것을 두고 한 말가. 죽은 날을 가지고 말을 맨들라 카이 그런 기지."
"아따, 충신 났고나. 그라믄 땅마지기 얻어 걸릴까바서?"
"참 네,그래서 땅마지기 얻을 것 겉으면 밤새도록 경문 읽듯 하겠다."
"시끄럽다, 이 사람들아. 넉들은 살아 있인께 신둥건둥 남의 일갈제? 그러는 기이 앙이다. 내사 마 불쌍해서 가심이 아프다. 세상에 설네, 설네 해도 과부 설움보다 더한 거는 없일 기다."
야무네는 두 다리를 뻗고 앉아서 연신 눈물을 찍어내며 나무라듯 말했다.
"와 아니라요."
"말로는 그래도 알기는 어디로 알아. 너거들은 모리네라. 당해본사램이 아니믄 모리고말고."
"야, 당해본 사램이 아니믄 모리지요."
왜현병한테 총맞아 죽은 마당쇠의 댁네가 혼잣말같이 뇌었다.
"나는 사십질에 과부가 됐다마는, 굽이굽이 그 설운 애기를 우찌다 할 기든고? 제집이 어디 사람가. 남자 한마디믄 될 일이라도 제집은 열 마디로도 안 되는 세상 매사가 다 그렇제. 아이 배태 한분 못해보고 청상과부로 곱사시 늙은 북동네, 한을 풀기는커녕 애참하게 죽었으니,"
"그러기 말입니다."
"실성한 시아부지 모시고 근근하게 살다가 복동네 거상을 혼자서 치르고 양자를 얻어서 장개까지 들여 대도 있어고, 어이구, 그 무서리나는 길쌈, 며누리 손에 밥 얻어묵고 이자는 편할 긴데."
"며누리 봤다고 어디 편합디까."
눈알이 새까만 불들이댁네가 입술을 삐쭉거린다.
"다 늙어서, 가리늦기 세상에 그런 벼락 맞일 누명이 어디 있겠노."
"구설수가 있으믄 할 수 없는 기라요."
"깔끔코 엄전하든 그 여편네가 하필이믄 그런 누명을 쓰고 그렇게 죽을 줄은 참말이제,"
야무네는 자기 설움도 곁들여 흐르는 눈물을 닦아낸다.
"구설수 따문에 죽었이까요? 내 낳은 자식도 멋한데 남의 자식, 며누리가 시어미를 대수로 여깄겄소?"
분들이댁네는 묘하게 북동네의 사인을 며느리 쪽으로 몰고 가려 한다.
"그러씨, 이 일 저 일 다 겹쳐서 살기가 싫은께 갔겄지."
고부간의 불화가 전혀 근거 없는 일은 아니었던지 야무네도 부인하지는 않는다.
"노소간의 죽음에 무신 사정이 있일까마는 한참 살 긴데, 지가 지를 직이다니 애참타."
야무네는 악센 삼베 치마를 끌어당겨 눈물을 닦고 일어선다.
"이러고들 서 있이믄, 나는 갈란다."
다른 아낙들은 우두커니 서 있었고 마당쇠댁네만 야무네랑 함께 타작마당을 떠난다. 강 건너 산허리는 어느덧 검게 하늘과 강물에 선을 긋고, 노을이 꼬리를 감춘 하늘과 강물은 흰빛으로 퇴색돼가고 있었다.
"말인 났으니,"
야무네 옆을 우죽우죽 따라오던 마당쇠댁네가 말을 꺼내었다. 경우없는 욕심꾸러기이며 억지를 썼다 하면 당할 사람이 없었던 마당쇠와는 달리 차분하고 말이 적은 마당쇠댁네는 뭔가 애기를 하지 않으면 못 배기겠는 그런 표정이다. 그는 과부가 되면서부터 복동네와 무척 가까이 지낸 사이였다. 깔끔하고 부지런하고 선량한 사람됨이 비슷했다. 그는 야무네처럼 눈물을 짜지는 않았으나 복동네의 자살로 충격은 더 받은 것 같았다.
"이 애기를 안 하믄은 죽은 북동어매가 나를 원망할 것 같고 해서..."
야무네는 비로소 마당쇠댁네가 따라온 까닭을 알아차린다.
"그렇지만 애기를 하고 보믄 그 뒷감당을 내가 우찌 하꼬 싶어서,"
"내사 말해서 안 될 일이믄 입을 봉할 기다마는 무신 일인지 몰라도 말은 함부로 할 거는 아니제."
"너무 억울해서,"
"..."
"살았일 직에 참으라꼬 말린 것도 한이 되고,"
"그라믄 복동네 죽음이 미심쩍다 그 말이가?"
"그거는 아입니다. 실은 야무어매도 알 깁니다마는, 이상한 그 소문 말입니다."
"그거사 말로 안 되는 일이다. 이십 연도 더 되는 옛날 일, 말 같지도 않다. 어느 연놈의 주동이가 그런 말을 했는고."
소문이란 이십여 년 전, 최참판댁의 종 삼수가 최참판댁 살림을 송두리째 가로채어 평사리에 들앉은 조준구에게 빌붙어서 제법 마을 작인들에게 호령하던 시절, 과부 북동네한테 쌀마씩이나, 져다주고서 잠자리를 같이했다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는데, 북동네의 인품을 아는 마을 사람들은 출처 모르는 그 말을 쉬쉬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문은 북동네가 없는 자리에선 괘 화젯거리가 된 것도 사실이다. 곧이 듣건 곧이 듣지 않건 사람이란 항상 남의 일에 대해선 무책임하게 마련이다.
"지도 처음 그 말을 들었일 적에 혼자 사는 것도 서러운데 별 더러운 소리를 다 듣는다 싶었습니다. 그런 소문이 있는 것도 모리고 북동네는 요새 와 나를 만내믄 모두 이상한 눈으로 보는지 모리겄다고 푸념을 할 적마다딱해서 겐딜 수가 없데요. 북동네는 며누리하고 가끔 다투는 일 땜에 그러는가 그리 생각는 눈치였십니다. 그랬는데 어느 날 새파랗게 돼서 찾아왔더마요. 그때 죽는다는 말을 합디다. 그러나 이 애먼 때는 벗고 죽어야 안 하겠느냐고 울더마요. 그러잖애도 내놓은 그자식이 아니라서 아무리 공이 들어도 며누리가 시어미를 대수로 안 여기는데, 하믄서 설게 울더마요. 참으라고 달랬지요. 남이사 머라 카거나 말거나 나만 청백 겉으믄 고만 아니냐고, 그랬는데 북동네는 그 소문의 출처를 종구고 댕긴 모양이라요. 소문을 맨든 사램이 누군지 아요?"
"원수진 사람도 없일 긴데 그러씨,"
"봉기 그 늘근이 아니겄소"
"머라꼬?"
"그래서 북동네는 봉기 그 늙은이를 찾아갔는데,"
"그 늙은 것이 미쳤던갑다."
"말도 마이소. 말을 캐로 간 북동네는 말을 캐지는커녕 세상에 그럴 수 없는 수모를 당했지 멉니까? 누한테 그런 애기를 들었으면 그런 짓 한 것을 어느 눈구멍이 보았느냐고 한께 그 늙은이 말이 삼수, 예, 삼수라 카데요. 그 삼수한테 들었다믄서 도리어 입에 못 담을 욕을 한 기라요"
"저런 세상에,"
"어째서 그런 말을 하믄서 북동네를 퍼부었는가 하믄 그 와 시집간 큰딸 안 있습니까?"
"두리 말가?"
"야. 그 딸을 삼수라는 최참판댁 종놈이 수수밭으로 끌고 가서 욕을 보있다, 그 말을 복동네가 했다는 겁니다.,"
"그, 그렇다믄 우리가 시집가기 전의 일이구마. 생각이 난다. 삼수 그놈이 보고 침을 흘리믄서 댕기든 일이. 그래서,"
"이년아, 쌀 몇 말에 니가 붙어 묵고서 천금 겉은 내 자식한테 덤턱을 씌우느냐 하고 칠 듯이 덤비더랍니다. 반쯤 죽게 돼서 집으로 기어왔더마요. 기가 넘고 입술이 말라붙어서 처음에는 말도 못하데요. 삼수한테 들었다는 말 때문에, 내가 황천에 가서 그 일을 밝히겠나, 방바닥을 치믄서, 그라고 수수밭에서 욕R다는 말 역시 듣도 보도 못한 일이라,"
"그런께 알 만하다. 봉기 그 늙은거이 능히 그랬을 기다. 제 자식 일이라믄 무신 짓이라도 할 사람이제. 그래 지 딸의 말이 걸려 있어서 그런 소동을 감쪽같이 덮었구나. 그런데 복동네도 모리는 일이 우째서 일이 그쯤됐일꼬?"
"알고 보이 북동네 며누리한테서 말이 났던 모양입니다. 그 아아성이, 말은 그 아아 성 입에서 났는데, 뭐 삼수한테 들었다 카든지봉기 늙은이 딸아아한테 들었다 카든지,"
"자식 낳고 사는데 그것도 보통일은 아니다."
"그래 그 말이 그 늙은이 귀에 들어가서 며누리가 닦달은 당했는데 지 성한테 들었다는 애기는 쑥 빼고 시어머니한테 뒤집어씌운 기라요."
"나쁜 년! 그러이 늙은 것이 죄 없는 북동네를 잡았구마. 지 딸 말막음도 하고 원하도 풀고, 세상에 아무리 제 자식이 귀하기로 몹쓸 짓을 했제. 그러기 옛말에 사람 무서분 거는 범보다 더하다 안 하더나."
"그러니 며누리하고 봉기 늙은이가 사람 하나 직인 거지요."
"음, 그보다도 이십 년 넘기 옛말에 죽은 놈이 산 사람을 직인기다. 생전에도 숭악한 놈이더니 삼수 그놈이 화근이었제. 세상 무서버서 이래가지고는 어디 살겄나? 그렇지마는 이대로 있일 수는 없다. 너나 내가 안 기이 붙찰이제. 안 이상 복동네 애먼 때는 벗겨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자면 우리가 안 당하겄소?"
"말깨나 하는 남정네들이 설동해서, 빌어묵을 여핀네, 죽기는 와죽노. 살아서 흑백을 가릴 일이지."
두 아낙은 자신들도 모르게 마을길에 멈추어선 채 애기를 하고 있었다.
"그 일도 그 일이고 복동네는 낳지만 않았다 뿐이지 그래도 공이 든 복동이라 어미가 당한 수모, 분풀이를 해줄 줄 알았는데 며누리가 수수밭 애기를 뒤집어씌운 것은 제쳐놓고 그 늙은이 한 말이 사실이 아닌가 의심을 했다는 깁니다. 며누리가 역시나 그 말을 믿고, 그것이 더 서럽고 억울했던 모앵이라요. 남의 자식 소용없다,내가 헛살았고, 신령이 어디 있노, 이 세상에 믿을 것 하나 없다, 몇 분씩이나 그런 말을 하더니만 기어,"
길섶 풀밭에서 풀벌레가 몹시 울어쌌는다. 마당쇠댁네는 숫제 길 바닥에 주저앉아버린다. 논둑길을 아이들이 소를 몰고 돌아간다. 방울 소리, 또 개구리 울음, 후텁지근한 강바람, 길바가에 주질러앉은 마당쇠댁네가 흐느껴 운다.
"남의 일 겉지가 않소. 임자가 있었다믄 갱히 누가 그런 말을 했겄소.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위해서 그리 애발스럽기 살고 나부대었는고. 참말이제 남의 일 겉지 않소. 으흐흣흣... 혼자 사는 것도 뼈가 저리게 설운데, 이놈의 세상, 머릿기름 한분 바릴라 캐도 남의 눈치 보고, 옷 한분 갈아입을라 캐도 남의 눈치 보고, 아무렇게나 하고 다니믄 또오, 남정네들 보믄 마주칠까 길을 돌아가고, 이것저것 귀찮아서 남을 기하고 살믄 신들맀다 카고, 말도 많고, 어이구 과부 팔자, 직일 놈 살릴 놈 해도 가장 겉은 그늘이 또 어디 있겠소,"
"와 아니라. 벽을 지고 있어도, 그러이 악처보다 효자가 못하다는 말이 안 있나. 여자의 경우도 마찬가진 기라."
"우짜다가 이웃이라고 안쓰러워하믄 남의 남정네기 따문에 고마우믄서도 모린 척하고, 마구잡이로 나오믄은 임자 없는 하시려니, 안 그렇십디까, 야무어매,"
"마찬가지다. 늙으나 젊으나,"
"여자끼리는 우떻고요? 같은 여자믄서, 아이고 시장스러바라. 제임자 누가 뺏아가까봐서, 손이야 발이야 빌어도 어림없는 것을 두고, 그럴 때는 오장이 틀어져서 속앓이를 한다 카이. 덮어놓고 흘뜯고 몹쓸 년을 맨들어놔야 맴이 놓이는가. 누가 우쨌기에, 가만히 있는 사람을,"
마당쇠댁네는 울분이 한꺼번에 터진 것 같다. 쌓이고 쌓인, 참고 견딘 분통의 둑이 터진 것 같다. 조신하고 말수 적었던 여자가 미친 듯이 지껄여대는 것이다.
"엎어진 놈은 발로 걷어차고 그런 인심 아니더믄 복동네가 죽었겄소?"
"죽자사자 길쌈을 해서 봄이믄 절 많이 베를 냈제. 그래서 시기도 받았네라."
"야무어매."
"와."
"생각해본께 그냥 있일 수 없는 일이요."
"내 말이 그 말이다."
"그놈의 늙은것한테 무신 봉변을 당해도 좋소. 나 나설라요. 사람이 죽었는데,"
마당쇠댁네는 성난 닭처럼 푸르륵 일어섰다.
"며누리년부터 족쳐야, 아무리 세상이 옛날 겉지 않다 캐도 이런일은 동네서 판결을 내야,그래야만 앞으로 그런 일이 없지."
"맞십니다."
"우리 둘이, 그러니께 과부끼리 설친다 해도 멋하니, 내사 다 늙어무신 소리를 들어도 좋다마는, 우짤꼬? 무신 방도가 없일까? 옳지, 훈장댁으로 가자. 산청댁한테 가서 의논을 한 뒤 남정네들을 설동해서,"
"야, 그기이 좋겄소. 가입시다."
두 아낙은 선걸음에 김훈장댁으로 달려간다, 가면서 야무네는 숨찬 목소리로
"이럴 적에 두만네 성님이 있었이믄 얼매나 좋겄노. 니사 잘 모릴 기다마는,"
김훈장댁에 갔을 때 마침 한경이는 읍내에 가고 없었으면 한경이댁네 산청댁은 마루에 나앉아서 풀먹인 삼베 고의적삼을 손질하고 있었다.
"어서 오게. 둘이서 웬일인가."
"의논할 일이 좀 있어서, 남의 일이라고 물리치지 마시고 들어주시이소."
야무네는 깍듯하게 말을 꺼낸다.
"어째 그러니 가슴이 설렁하네?"
산청댁이 웃는다.
"다름이 아니라 죽은 복동네 일입니다."
"나도 그 애기는 들었네. 양잿물을 마셨다 하던데 그게 정말인가?"
"지 목심을 지가 끊었지요."
하고 나서 야무네는 대강의 사정을 설명하고 모자라는 점은 마당쇠댁네가 보충한다.
"기가 막혀서,"
"이러고도 그만 있겄십니까?"
"안 되지."
산청댁은 단호하게 말한다.
"그래 우떻게 하믄 좋겄십니까?"
한참을 생각하다가
"우리 셋이 간다면 무슨 행패를 부릴지 모르겠고 봉기 늙은이를 누를 만한 남자 두 사람하고 가는 게 좋겠구먼. 이런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마을 사람들 앞에서 복동네 누면은 벗게 해야지."
"그라믄 누구를?"
"내 생각 같아서는 우리 바깥사돈하고, 얘길 들으니 그 집에 선생하는 석이가 와 있다 하든데,"
"장서방은 우떻십니까? 장서방 앞에서는 그 늙은것도 꼼짝 못하지요."
"최참판댁 마름 말인가?"
"예."
"그 사람은 아무래도, 타곳 사람이니께,"
"그렇긴 합니다."
산청댁은 굉장히 분개한 것 같았다. 체통 문제도 한번쯤 생각해 봄직한데 그는 머리를 매만지고 나서 앞장서 나간다. 늙은 과부, 중 늙은 과부, 두 아낙은 백만 원병을 얻은 듯 의기양양해서 따라나 간다.
"아니, 사부인께서 우짠 일이십니까."
초상집에 다녀와서, 그렇잖아도 석이하고 함께 얘기를 하고 있던 용이 몸을 일으키며 정중하게 인사한다.
"숙모님이 무슨 일이십니까?"
부엌에서 뒷설거지를 하던 보연이 앞치마로 손을 닦으며 나온다. 이웃 간이어서 자주 내왕이 있었으나 왔다가도 용이 있는 기척이면 돌아서곤 했던 산청댁이었기에 보연은 좀 의아해한다.
"오늘은 자네 시아부님한테 청이 있어서 왔네."
"예?"
"할머니!"
뒤뜰에서 놀던 용이 손녀가 뛰어온다.
"오냐, 밥 먹었냐?"
"예, 할머니."
"애비 언제 오니? 손을 얹는다.
"옳지, 애비 곧 오겠구나."
산청댁은 아이를 안아올려 볼에다 입을 맞춘다. 임이제가 죽은 뒤 홍이는 평사리 용이 있는 곳으로 솔가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돈 좀 벌어야겠다면서 일본으로 들어간 것이다.
"올라오시지요."
마루에 앉아 있던 석이 물러나 앉으며 말했다.
"무신 일입니까?"
야무네와 마당쇠댁네는 산청댁을 대접하여 말문을 먼저 열지 않는다. 산청댁은 아이를 내려놓고 마루 끝에 걸터앉으며 간략하게, 그러나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게 찾아오게 된 경위를 설명한다.
용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를 듣고 석이는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잖아도, 그 이상한 소문이 어디서 나왔는가, 뜻밖의 삼수 얘기는 왜 나왔는가,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참입니다."
"그냥 있일 수 없는 일 아니겄소."
야무네가 섣둘듯 말했다.
"조져야지요."
석이 내뱉었다.
"삼일장이믄 내일이 출상인데, 시체가 나가기 전에 밝히야 할 깁니다."
야무네가 또다시 말했다.
"아제씨,"
석이가 말했다.
"제가 가지요 아제씨는 계십시오."
"그 늙은놈 성질이나 알고 하는 소리가?"
"시끄럽게 할 것도 없고 하여간에 마을 사람들 앞에서 자복하게 하면 될 거 아닙니까."
"그렇지. 그러나 그기이 쉬울까?"
"어림없다. 석이 니는 그 늙은것을 몰라서 그렇다. 우리 다섯 사람이 가도 당적하기 심들 긴데,"
야무네 말이다.
"안 될 적에는 다시 여러 사람이 가더라도 지가 한번 부딪쳐보지요. 다 늙은 사람을 동네서 내?을 수도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
"언성 안 높이고 조용하게 해보다가, 오히려 그 현을 원할지도 모르지요. 시집가서 사는 딸을 생각해서라도 많은 사람이 가고 시끄럽게 떠들게 되면은 도리어 궁한 쥐가 고양이를 무는 격이 되겠지요. 또 한편 말없이 살고 있는 한 여자, 신세 망치게 할 수도 없는 일이지요. 저한테 생각이 있으니까 한번 시험삼아서, 부인네들이 갔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말을 듣고 보이 그 말도 옳은데, 우떻십니까?"
용이 여자들한테 동의를 구한다.
"그렇게들 하는 게 좋겠소."
산청댁이 동의하고 야무네도
"여자들이 아무리 해도, 남자들겉이 생각이 안 깊으다. 쇠뿔은 단김에 빼더라고 그라믄 색히 가봐라."
"네."
석이는 부채를 놔두고 일어섰다. 가면서 석이는 당부한다.
"아무한태도 말씀 마십시오."
"그러지."
석이 울타리 옆을 지나가는데,
"아무래도 배운 사람은 다르요. 석이네는 고생하고 산 보램이 있어서 좋겄소."
석이는 쑥스레 웃는다. 상갓집의 초롱이 보인다. 하늘에는 은하가 뚜렷하게 흐르고 있었다. 석이는 비극적인 복동네 죽음을 묘하게 희극적인 것으로 착각한다. 봉기에 대한 증오감조차 묘하게 절실치가 않았고, 사람의 사는 모습들이 모두 광대만 같다. 무궁한 곳에 무궁한 은하가 흐르는데-
석이는 봉순이 문제를 아직 꺼내놓지 못하는 자신의 감정을 다시 되씹어본다. 서울서 함께 내려온 김환의 모습도 눈앞을 지나간다. 형평운동에 깊이 관여했으며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청년들과 부단히 접촉하고 있는 관수의 근황도 머릿속에 떠오른다. 김환이 돌아왔기 때문에
관수의 현 위치를 검토해보는 것이지도 모른다. 늙어서, 아주 늙어버렸기 때문에 기대할 수 없는 혜관의 모습도 눈앞을 지나간다.
'평양에서 기화를 만났네. 폐인이 됐더군. 아편쟁이가 됐더란 말이야.'
서울서 우연히 만난 서의돈의 말이었다.
'황태수한테 부탁해볼까 싶었으나 돈만 가지고 될 일인가? 누군가가 아이는 거주어주어야 하는데, 자네가 주선 좀 해보게. 최부자댁에다가.'
봉기 집 앞에까지 왔다. 집안이 괴괴하다.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계십니까?"
대답이 없다. 아주까리 잎만 바람에 너울너울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무신 일로 왔노."
풀이 죽은 봉기의 목소리다. 소리나는 곳을 보니 아주까리나무 밑에 불도 꺼진 곰방대를 물고 봉기는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복동네의 죽음 때문에 떨고 있었던 것 같다.
"저녁 잡수셨습니까?"
"저녁? 응, 저녁 묵었지. 무슨 일고?"
불안해하는 음성이다.
"네, 좀... 두리아버지."
"어?"
두리 아버지라는 어세가 강하기는 강했었다.
"두, 두리 아버지라꼬?"
"네. 그 두리 누님은 시집가 잘살지요?"
"그, 그건 와 묻노!"
"아이들도 몇 되겠지요?"
"뜬금없이 무신 소리고?"
봉기는 곰방대를 뽑아들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저랑 애기 좀 하실까요?"
"무신 얘기! 아무 할말도 없다!"
"저하고 얘기 좀 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내일이면 아주 시끄러워질 테니까요."
"그, 그기, 그기이 나하고 무신 상과고!"
"자아, 그러시지 말고 조용한 곳으로 갑시다."
팔을 잡는다. 봉기는 기겁을 하고 석이 손을 뿌리친다.
"와 이라노!"
"허허어 참, 이러면 안 되는데, 두리 아버지, 죽음 복동이 어머니보다 두리 누님 장래가 더 길다는 생각을 왜 못하십니까?"
"머, 머 머라꼬? 복동이네하고 우, 우리 두리가 무신 상관고!"
하기는 했으나 곰방대를 이 손에 뒤었다 저 손에 쥐었다 하며 안절부절이다.
"복동이 어머니가 정말 그런 짓을 했기 때문에 죽었습니까?"
"그, 그거를 와 나보고 묻노!"
"말이 사람을 죽였지요. 그렇다고 보면 두리누님의 경우도 말로써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대답을 못하고 봉기는 후들후들 떤다.
"두리 누님의 소문을 막을 생각이면 내일, 출상 전에 마을 사람들 앞에서 자복하십시오."
"자, 자복을, 내가 멋 땜에 자복을 하노!"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근거가 있든 없든 말이란 나고 보믄 복동이 어머니처럼, 제가 여기 찾아온 일도 사후 약방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새는 날 마을에서 들고 일어나면은,"
"드, 들고일어나아?"
"예. 복동이 어머니가 왜 양잿물을 마셨는가, 왜 그런 소문이 돌았는가, 그렇게 되면 두리 누님 얘기가 나오게 돼 있어요."
"..."
"자아, 갑시다. 시원한 강가에라도 가서 어떻게 하면 두리 누님을 다치지 않고 복동 어머니의 누명도 벗겨드릴 수 있는지 의논해봅시다. 제가 여기 올 적에는 속속들이 내말을 다 알고 왔을 거 아닙니까. 갑시다."
봉기는 슬며시 따라나섰다. 강가 모래밭에까지 간 석이는 돌연봉기의 등바닥을 내리친다.
"짐승만도 못한 늙은 것 같으니라구, 사람 백정은 유도 아니다!"
"아야! 아이구! 이놈이."
네댓 번을 후려갈긴 뒤
"한 소위를 생각하면 멍석 밑에서 죽어야,"
"날, 날, 살려도고. 그, 그라고 제발 그 불쌍한 것,어이구우, 간을 끄내어 회를 쳐 묵어도 씨원찮을 그놈 삼수놈!"
"그러면 내 시키는 대로 하겠소?"
"하, 하지, 하지러."
"이 말 저 말 할 것 없고 내일 출상할 때 가시오."
"가서?"
"자복하시오."
"어이구 내 가심이야!"
봉기는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치다가
"자, 자복을 우떻게 하꼬?"
"내가 일러드릴 테니,"
"우, 우떻게?"
"소싯적에,"
"음, 소싯적에,"
"복동네한테 내가 욕심을 내어서 월장한 일이 있었다."
"으, 음,"
"그때 복동네는 식칼을 들고 ?아나왔다,"
"으,"
"내 꼴을 당한 놈이 또 하나 있었는데 그놈이 삼수라."
"그, 그래서,"
"이십 년이나 지난 일을 가지고 복동네가 야무어매한테 귀띔을 했고 야무네는 또 우리 집 할멈한테 귀띔을 했기에 너무 괘씸해서 그런 말을 만들어 퍼뜨렸다."
"..."
"알아들었습니까? 집에 가서 두리어머니하고 말을 맞추어놓으시오. 나는 야무어머니하고 말을 맞추어놓을 테니까요."
"아, 알았네."
"어떻습니까? 두리 누님 말은 한마디도 안 나왔지요?"
"그, 간을 끄내어 회를 쳐 묵어도 씨원찮을 놈!"
"양잿물 마시고 죽은 사람도 있소!"
석이는 소리를 바락 질렀다. 그리고 뒤도 보지 않고 모래밭을 걸어나오면서 배를 움켜잡고 웃고 싶은 것을 참는다.
"제에기, 그런 말 들었다고 죽을 건 뭐람."
15장 석이의 청춘
석이는 둑길 쪽으로는 가지 않고 강물을 따라 상류를 향해 곧장 걷는다. 걷다가 돌아본다. 유난스럽게 하얀 모래반을 마치 거미처럼, 게처럼 봉기는 기어가고 있었다.
'저 늙은이, 나한테 등짝 맞은 일은 입 밖에 내지 못할 거라.'
모래밭을 지나서 봉기는 둑을 기어 올라간다. 웃음 때문에 배창자를 움켜쥐고 싶었던 충동이 일시에 가신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이 치민다. 산다는 것이 통곡인 것만 같다. 오뉴월, 커가는 새끼를 먹이려고 야위어진 까치 생각을 한다. 봉기 늙은이도 그 야위어지는 가치 한 마리였다는 생각을 한다. 강물이 휘번덕인다. 밤에도 쉬지 않고 흐르는 강, 세월의 눈금도 없이 흘러가고 잇다. 오만하고 냉정한 젊은 여자같이 강물은 혼자 흐르고 있다.
다시 걷기 시작한다. 석이는 야무네와 용이 기다릴 것을 생각했으나 발길을 돌리지 않는다. 옛날 아비 정한조가 낚시질하던 낚시터까지, 그곳에 가서 주질러 앉는다.
'흠, 내 어머니는 빨래꾼이어서 다행이든가.'
담배를 붙여문다 석이는 어머니가 혼자 됐을 때 갓 서른이었다고 생각한다. 신세 한탄할 새도 없었다. 남의 눈치 살피며 갈아입을 옷도 없었다. 검정 빛 돔방 치마에 누덕누덕 기운 흰 저고리 하나로 가을, 겨울을 보내면서 먹고 살기에 쫓겼던 시절이었다. 산더미 같은 삯빨래를 이고 와서 개천의 얼음을 깨야 했던 겨울 한철의 어머니 손은 늘 빨갛고 피딱지가 앉았으며 잠자리에 들 때는 들기름을 바르고 버선목을 양손에 낀 채 잠을 잤다. 여름에는 양잿물 내고 빨래 삼고 풀 쑤느라고 청솔가지 매운 연기에 눈은 항상 짓물렀었다.
'어머니!'
선생님의 자당이라 하여 학부형들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면 지금도 어머니는 그저 부끄럽고 황송하여 얼굴이 벌개지곤 했다. 도망갈 구멍이라도 찾듯이 허둥지둥 주변을 둘러보기도 했다.
"아범아, 자당이 무신 말고?"
"인자한 어머님, 어머니를 높여서 남이 하는 말입니다."
"아이고, 내사 마, 처머니라는 말도 황감한데,"
면소 서기질만 해도, 경찰서 급사질만 해도, 내 아들이 어디 있는지 알기나 하느냐, 하기야 경찰서 면소가 다 무서운 곳이기는 하나, 경위 없는 짓 경위 없는 호령을 일삼는 그런 부모가 하다한데.
"아범아, 단단히 해라이. 님으 귀한 자식들 말아서 가리키는 일이, 그기이 예삿 일가? 그저 직심으로 달래감서, 성난다고 야단치기 말고, 그라고 또 니 어릴 적 일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없는 집 자석이 라고 차벨하믄 못씬다."
"엄니도 참,"
아내가 혀를 찼다.
"머가 자랑이라고 지난 일을 자꾸 들먹입니까."
"그, 그러씨."
며느리 말에 어머니는 자라같이 목을 움츠렸다.
"옛날에도 선생이라 카믄 제자는 그 그림자를 안 밟았다 카는데 그리 썰썰맬 것 머 있십니까?"
"무식해서 안 그렇나. 하기사 너거들이 더 잘 알 긴데, 늙으믄 실데없는 걱정이 많아지네라."
아내는 언제나 지난 일에 대해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남의 아목이 있는데, 아들 체면은 안 생각하시는가, 엄니는 지난 애기를 와 자꾸 하시는지 모리겄소,"
"창피해서?"
"그라믄 머, 자랑스런 일이겄소? 빨래꾼이 무슨 벼슬이줄 압니까? 장차 성환이가 알까 무섭십니다."
"알면 어때. 애비도 물꾼이었어!"
"아아니 이분이, 지가 무신 해될 말을 했다고? 공연히 화를 내시네?"
"할머니는 정부인이었다, 자식보고 그런 말 할 수 있는 곳으로 시집갈 거지, 잘못했어. 당신 말이야!"
"억지소리 말아요. 사람 사는 기이, 그러믄 벌거벗고 나가란 말입니까?"
아내는 작은 코를 벌름거렸다.
"나는 어떤 놈같이 그렇게는 안 살아. 병신 같은 놈, 옛날의 종이었음 종이었지 오늘 잘산다고, 그따위로 노니까 가난을 면하고도 천해지는 게지."
누구란 말은 하지 않았으나 석이는 두만의 치지를 들먹이며 화를 내곤 했었다. 그럴 때 아내는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여자 같았다. 아니 그 이상으로 더불어 살 수 없는 절망과 적의까지 느꼈던 것이다. 3.1만세 때 함께 잡혀갔으며 청년운동에 앞장섰고 상당히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처남 양필구, 친구요 동요지지만 끝내 뭔가 이질감을 버릴 수 없었는데, 그의 이복 누이동생인 양을례는 오라비에게 없는 교만과 허식이 있는 여자다. 물질적인 허영이라 할 수 는 없지만 의식적인 허영은 상당히 강한 편이었다. 결혼 전에는 몰랐던 상풍이다.
"백정이다, 와! 백정놈이 니 할애비 간을 내묵었나! 와 이라노!"
우뚝 서서 뱃속에서 밀어내던 목소리, 관수의 작은 눈의 살기, 석이는 그럴 때 관수가 좀 안 그랬으면 싶었다. 그러나 처자식을 제등으로 가리고 선 듯이 격렬한 관수의 그 신경질과 아내가 나타내는 신경질적 반응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석이는 아내는 타인같이 느낄 때마다 관수의 위치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이 아니며 진실과 허식에서 온 차이점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장차 아내는 아들에게 무엇을 원할 것인가.
"하긴 미꾸라지 용 됐지."
담뱃재를 떨며 석이 중얼거렸다. 밤낚시를 하는지 강 건너편에 불빛이 두셋 깜빡이고 있다.
돈푼 있다 하여 참봉 벼슬을 산 전아무개, 벼슬을 사고도 전서방에서 전참봉으로 호칭되는 데 참 많은 시일이 걸렸었다. 그 사내 생각이 난다.
'고향에 와서, 오래간만에 돌아와서 진주 일은 왜 자꾸 생각는 걸까.‘
전참봉 손목의 털토시가 눈앞에 떠오른다. 이 개쌍놈이 눈구멍에 말뚝을 박았느냐 하며 인사 안 한다고 욕설을 퍼붓던 위인, 덩치에 비하여 작은 손이었으며, 그 손목에 낀 털토시는 얼마나 따스할까하고 부러웠던 일이, 들기름 바른 손에 버선을 끼고 자던 어머니 생각을 했기 때문일까. 모두 십여 년 전의 일이다. 십여 년 전, 자석에 붙어나오는 녹슨 쇠붙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나오는 옛일들, 불앞에 와서 손 좀 녹이라던 봉춘네는 당목 솜저고리를 입은 깨끗한 중년의 여자였으며 기화가 인색한 전참봉의 소실로 있을 적에 기화랑 함께 살았었다. 석이 물독에 물 한짐을 붓고 나면 따끈한 숭늉에 찬밥을 말아주며 봉춘네는 말했다. 허기가 들믄 더 춥네라. 숭늉에 만 흰밥은 꿀맛이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봉춘네는 요즘도 진주서 가끔 만난다. 기화 얘기를 활 때는 언제나 잔주름진 눈 가장자리에 눈물이 넘치곤 했었다.
"고맙다. 참말이제 석이 니가 잘돼서 얼매나 고마분지 모리겄다. 다 니가 근하고 신실한 덕분이제. 어이구 참, 내가 선상님을 보고 이름을 불러서, 이래 되거나?"
하기도 했다.
"세상에 믿을 기이 있어야제. 나는 요새 예배당에 나간다. 예수님만 믿고 안 사나."
봉춘네는 성경과 돋보기가 들었을 조그마한 손가방을 들고 있을 때도 있었다.
잉어가 뛰는가, 물살 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는 다시 조용해 진다.
'미꾸라지 용 되고말고,'
석이는 새 담배를 붙여서 깊숙이 빨아당기며 쓴웃음을 띤다. 미꾸라지 용 됐다는 말은 어제 마을에 들어섰을 때 들었다. 아버지 생전에 별로 좋은 사이가 아니었던 것 같은, 희미한 기억을 더듬게하는 사내가 석이를 보고 내뱉은 말이다. 사내는 마을에서 노름꾼이라 했다. 제삿장 보아오라고 아비가 내준 돼지를 팔아서 노름판에 날리고 빈 망태 들고서 돌아왔다는 얘기며, 그 사내는 아버지를 형님이라 불렀다. 아버지는 바우 그놈 사람 되기 글렀다 하며 욕을 했었다. 아주 어릴 적의 기억이다.
'다 쓸데없는 생각이다.'
일어선다. 걸으면서 석이는 담배를 피운다. 담뱃불이 바람에 날린다. 코끝의 빨간 담뱃불과 강 건너의 등불 두셋.
'희망이 있을까. 도대체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자각하기는커녕 옛날같이 상부상조하던 소박한 인심마저 잃어가고 있어. 장사꾼처럼 약아진다는 장서방의 말은 맞는 말이다.'
발길을 돌려놓지 않고 석이는 강 상류 쪽을 향해 걷는다. 김환이와 함께 서울서 내려왔는데 그 사람을 만난 것이 어째서 절망감을 안겨주는지 석이는 알 수가 없었다. 소박한 인심마저 잃어가고 장사꾼처럼 약아졌다는 말은 연학만의 견해는 아니었다. 관수도 그런 말을 했었다. 사회주의운동들 하는 서울의 이범준이 내려 왔을 때 술자리에서 그 얘기가 나왔던 것이다. 이범준은 석이 또래, 전문학교 중퇴의, 말하자면 인텔리였고 형평사운동으로 관수하고 알게 됐으며 석이와도 스스럼없게 된 인물이다.
"학식이 깊어서 이론으로는 꽉 째여 있다 캐도 실정이란 그런 이론이 척 들어맞는 거는 앙이라구. 서울 사람 중에는 쌀은 쌀 나는 나무에서 연다. 그렇기 생각는 사람이 있드끼 농민들을 쌀 나는 나무맨치로, 그래가지고는 일 안 되네 사실 농민혁명, 농민혁명 하고 너거들이 자주 들먹이는 그것도 이자는 쓴물 단물 다 빼묵은 고목이고, 그거를 모리고 설친다믄 운동은 한날
놀음에 불과한 기라."
관수 말에 범준은
"형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관 짜놓고 죽을 날 기다릴 일밖에 없겠습니다."
"허 이 사람 보게? 농민들 집적이는 일 외에 달리 할 일이 없다 그말가? 아서. 너거들 농촌에서 설쳐봐야 백해무익이다. 호박줄기에 달라붙은 비리밖에 안 될 기다."
"너무 심한데요? 형님 말씀대로 하자면 우리는 해충인데 쓴물 단물 다 빼먹은 고목이라면 진딧물이 좀 달라붙은들 어떻습니까."
"고목에 달라 붙으믄 비리가 굶어죽을 기고 호박 줄기에 달라 붙으믄 호박이 안 열린다. 마 그런께 총독부 앞의 나무에나 가서 잎사귀나 갉아 묵어."
"농민들을 쓴물 단물 다 빨아 먹힌 고목이라지만 내가 보기엔 서당 옆에 핀 복사꽃 같습니다. 몇 다리나 건너야 진짜 말이 나오지요?"
"어느 미친놈이 날보고 농사꾼이라 말하든고? 나야 너거들의 말을 빌리자믄 룸펜이라 카든가? 그거제. 아부튼지 간에 쌀은 함지박 들고 나무서 따내는 열매가 아니고 낫으로 벼야 하는 풀에서 나는 열매다, 그 정도는 알아야. 혁명이고 나발이고, 일없어!"
"알고 모르고의 얘기가 아니잖습니까. 죽 먹고 밥 먹는 게 문제가 아니지요. 쌀이 나무에서 나건 풀에서 나건 우선 제쳐놓고 원칙적인 얘기를 한 겁니다. 혁명의 주력 부대는 농민이며 농민의 봉기 없이는, 특히 조선에서는 혁명이고 독립이고 불가능하다 그 얘기가 아닙니까?"
"그 얘기는 옳아. 그러나 주력 부대 아니라 심장 부대라도 그렇지. 살았이야 말이제. 숨을 쉬야,"
"그게 소위 비관론이란 말입니다. 어째서 우리 조선의 농민들이 죽어 있다는 말만 자꾸 하시지요? 근자에 와서는 각처에서 소작쟁의도 활발하게 일고 있으며 동학란에 있어서 그 규모 큰 농민전쟁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할 것입니다."
"아암, 생생하고말고. 동학란에 아비를 잃은 내게도 참말로 잊을수 없제. 이군."
"네, 말끔하십시오."
"너거들 일본 가서 공부해가지고 농민전쟁이다, 농민혁명이다 하는 그런 말 가져와서 동학란이 난 줄 아나? 또 농민들의 봉기 없이는 독립이고 혁명이고 안 된다, 그 얘기도 그렇다. 와 농민의 봉기 없이는 안 되는가? 그거야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수가 많은께, 수가 많아야 이기는 거 아니겄나?"
이범준은 머쓱해졌다.
"젊은 오기에 내 하는 말이 아니꼬울 기다. 그러나 그거는 피장파장인 기라. 자네가 사회주의인가 머 그런 운동을 안 한다믄 이런 말 소용없제. 아니꼬운 말 들을 이유도 없고, 나는 알다시피 핵교는 커냥 서당 문턱도 넘어본 일이 없는, 게우 언해 꼬꾸랭이를 끼적일 정도니 무식꾼이다. 그러나 너거들 유식쟁이들의 새로운 사상이며 세계가 우찌 돌아가고 있는지 그런 거는 항상 귀담아 들어서 요새는 제법 유식해진 셈인데, 한다믄 무식쟁이만 귀담아 들어야겄나? 유식쟁이도, 더 많이 귀담아들어야 한다, 그 얘기구마. 자네가 농민 어쩌고저쩌고, 무산계급이 어쩌고저쩌고 할라 카믄 한데 엉키야만되는 기다. 기름하고 물맨크로 따로따로 돼 있다믄 그는 호박 줄기에 엉겨 붙은 비리밖에 아니다 그 말이구마. 내가 이군 자네한테 똑똑히 일러두고 저븐 것은 너거들 식자나 물 위에 뜬 기름이 돼서는 안 되겄다, 그리고 너거들이 무식쟁이 농부, 노동꾼들한테 멋을 주고 있다,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부터 싹 도리내야 하고. 서로 주고받으믄서 운동을 하든 투쟁을 하든, 너거들만 주고 있는 기이 앙이다, 그 말인 기라. 너거들 목적이나 야심, 그기이 아무리 옳은 일이 라 캐도 무식꾼들 바지저고리 맨들믄은 천년 가도 그렇고 골백분 정권이 배끼도 달라지는 거는 없일 기다. 마, 이거는 과외 말이고,"
말을 일단 끊은 관수는 이범준에게 곁눈질을 했다.
"아까 내가 농민들을 두고 쓴물 단물 다 빼묵은 고목이라 캤는데 그 얘기를 하지. 뼈다구만 추리서 내 얘기할 것이니, 너거들이 생각는 것하고 내가 말하는 것하고 얼매나 차이가 나는가 생각해봐라. 그러니께 한 십여 년 전만 해도 내가 생각하기로는 대체로 농민들한테는 두 가지 면이 있지 않았나 싶다. 양맨크로 어진 면이 있고 늑대겉이 사나운 이 두 면인데, 그라믄 우떤 때 어질고 우떤 때 사나운가. 입에 풀칠을 하는 동안은 어질다. 입에 풀칠밖에 못하믄서 어질다믄 그것은 실개도 간도 없는 기이 앙이가, 겁쟁이요 비굴하고 남우 옷실 앞에 떨어진 밥풀이나 줏어묵는 거렁뱅이 근성 앙이가, 너거들은 대뜸 그렇게 욕하고 나올 기다. 안 그렇나?"
관수는 또 곁눈으로 이범준을 본다.
"그, 그야."
관수는 씩 웃었다.
"사람이란 가난하다 해서 실개도 간도 없어지는 거는 앙이다. 숫제 실개를 빼부리고 사는 놈이야 돈맛 들인 그런 놈 아니겄나? 가난은 죄가 앙이다. 좀맛 아는 놈이 죄인인제. 죄인은 비굴하고 천해지기 매련이거든. 한 시절 전만 해도 농사꾼이 어디 돈을 알고 살았더나? 농촌에서는 물물을 바꾸어서 살았인께. 그래서 농촌은 가난해도 도끼뿌리 맞일 인심은 아니었제. 장사꾼 보리 한 됫박하고 농사꾼 보리 한 됫박에는 한 흡 가량의 칭아가 있었인께. 도부꾼한테는 됫박 후하게 주고도 잠재우주고 죽솥에 물 한 바가지만 더 부으믄 객식구 죽 한 그릇이사, 목마른 길손에게 무시 하나 뽑아주기 예사요, 그래도 인성이 비굴해졌다 하겄나? 죽물 묵어도 맴이 떳떳한 기이 농사꾼이라. 자고로 도둑질 잘라는 놈이 벼슬 밝히는 법, 부자치고 세도에 아부 안 하는 놈 없고, 와 그럴꼬? 욕심이 사람을 잡는 기라. 노비들이야 애시당초 실개 뽑아놓지 않으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요, 장사꾼은 노상 돈을 만지는 푼수고, 쟁이바치나 막일꾼은 일용을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고 보믄, 살기가 농사꾼보다 낫다 한들 밭에서 무시 하나 뽑아주듯기 배고픈 나그네한테 돈 한푼 주기는 어려운 일이제. 해서 농사꾼들 맘은 항상 넉넉했다고 봐야겄지. 그거는. 새 소리 물 소리 들으믄서 사철이 변해가는 들판이며 산이며 강이며 바라보고 사는 탓도 있일 기다마는. 농촌에서는 도방겉이 도둑이 없고 사람의 도리를 중히 여기며 인류대사도 양반 못지않게, 오히려 더 정성 딜이서 지키니 비록 까막눈이라도 성현의 말실을 잘 지키기론 농사꾼이 으뜸이제. 그러나 이렇기 어진 농사꾼들도 입에 풀칠하기가 어러버지믄은 사나분 늑대가 되는 것은, 그거야 부처님이 아닌께 당연한 일이고 해서 미련한 위정자는 백성을 굶기지만 간교한 위정자는 굶어 아 죽을 만치 백성을 믹이는 기라. 내가 이렇게 말한께 농민들 칭송만 하고 있다, 생각을 한다믄 이군 자네 머리는 과히 좋다 할 수 없을 기구마. 그 머라 캤제? 너거들이 노상 말하든, 응 농민들은 봉건적인 사상이다, 내 칭송은 그렇기 받아야 한 기구마."
"그러니께 그 머냐,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도방하고 농촌은 별로 내왕이 없었고 서울 천리길이라 카믄 지금 기차 타고 만주 가는 것보다 몇 배나 더 멀었인께. 그래 외지 소식은 장날에나 가서 귀동냥 하고 아니믄 도부꾼 방물장시한테나 들었제. 소식이 캄캄하믄 별난 일도 없는 기고 농촌이란 본시부텀 사계절이 가고 오고, 풍년 흉년, 그런 거로나 달라질까 변하는 기이 없는 곳인데 누가 죽고 누가 태이나고, 누구네 집에서 삼베 몇 필을 짰는가, 누구네 집 고추 밭이 절단 났으며 간밤에 멧돼지가 내리와서 고구마 밭을 낭태질했다, 마 그런 거야 수백년 되풀이해서 내리온 일들이고 다 어슷비슷, 변하는 기이 머 있었겄노. 개화바램이 불고 왜놈이 와서 우리 땅을 묵어 치우기 전까지만 해도 이놈의 나라부텀 그랬인께. 임금이고 신하고 간에 좀더 나아지는 일보다는 더 못하게 되는 일에만 겁을 묵고 똥을 쌌인께. 웃물이 흘러서 고이는 곳이 농촌인데 하여간 난리 굿은 맘에 안 내킨다, 적기 묵고 가는 똥 싸자, 가는 똥도 안나올 직에 별수 있겄나? 쇠스랑 들고, 낫 들고 도끼 들고, 수효만 많으믄 그까짓 사또 모가지 하나 베는 기이 대수겄나? 그 판국에다 동학이 민란 아닌 전쟁으로 바뀌어갔으니 농민들도 자신이 생기서 나라까지 둘러엎을라 했거든. 한데 오늘날은 어떠한가. 전쟁은커녕 민란도 안 돼! 온갖 잡것들이 농촌으로 들어가고 나오고 뿌리를 내리서 수백 년을 지킨 토지가 이놈 손 저놈 손, 빼앗기고 뺏기고, 엄청난 변화, 시시각각 흥하고 망하는 꼴을 눈앞에 겪는데 모진 놈을 만났거나 억지도 못쓰는 치들은 결국 보따리 싸서 간도로 가고 도방에서 비럭질하고 모집으로 일본에 가고 남은 사람조차 흔들리는 가지 끝에 게우 매달린 형국이다. 그래도 어질겄나? 자아, 그라믄 쇠스랑 들고 낫 들고 도끼 들고 나서겄나? 베아 할 사또 모가지는 어디 있노? 동학란이 농민들의 자신에서 발전한 거라믄 동학란은 또 왜놈으 그 최신 무기와 수효에 농민들 자신을 꺾어버린 끝말이었다. 어질지도 못하고 늑대도 못되고 죽도 밥도 아니게 됐다. 중도 속도 아니게 됐단 말이다. 더욱이나 삼일만세는 우떤 면으로 봐서는 농민들한테 물을 끼얹은 기라. 동학이 농민들의 전쟁이었다믄 삼일만세는 조선 사람 전부의 반항이었네. 그러나 농민들은 왜놈이 철갑선이라는 것을 다시 전부의 반항이었제. 그러나 농민들은 왜놈이 철갑선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고, 왜놈 앞에서는 쇠스랑도, 낫도, 도끼도, 만세 소리, 방화, 파괴 그 모두가 아무 소앵이 없다는 것을 똑똑히 본기라."
"그러면 삼일운동을 부정한다 그 말씀입니까?"
"나는 지금 농민들 얘기를 하고 있다. 조선 사람 얘기를 하는 것은 앙이다. 아까 내가 말했듯기 농민들은 변화를 싫어하고 또 농민들은 확실한 것을 찾는다. 쉽게 달뜨지 않는다는 말도 되겄지. 장사꾼들은 셈이 빠른 것 겉지마는 짐을 두고 이문을 예상하는 것은 확실찮은 일이고, 농민들은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생각이며, 장사꾼은 한 장을 기다리지마는 농민들은 일 년을 기다린다. 그러니께 내 말은 뭔고 하니 쉽게 불이 안 붙는다는 얘기다. 더욱이나 이 시기에는 절대로 불이 안 붙는다. 양도 아니고 늑대도 아닌 요새 농부들, 양도 아니고 늑대도 아니라믄 그거는 고앵이다, 고앵이라. 제 편한 자리 찾을라 카고, 속으론 늑대, 겉으로는 양, 그런께로 해코지나 해서 울분 푸는 고앵이란 말이다. 아까 고목이라 했는데 그거는 내 잘못된 말이었고, 움이 틀 때꺼지 기다리야 하네. 지금은 헛수고, 힘을 낭비해서는 안 되제. 빨리 달고 식더라 케도 풍각 잡힐 곳은 도방이다."
"그러는 동안 기독교 세력이 뻗칠 것이오."
"아무도 못 묵어! 농촌은 아무도 못 묵어. 못 묵는다 카믄 못 묵는 줄 알아! 농촌은 맨 마지막이다. 상투도 남아나는 곳은 농촌이 니께."
물줄기를 따라가다가 석이는 맨 마지막이다. 상투도 남아나는 곳은 농촌이 니께."
물줄기를 따라가다가 석이는 발길을 돌려놓는다.
'각도는 다르지만 김선생도 그런 말씀을 하셨지.'
"농촌엔 음폐물이 없어. 산속은 공격해야 할 목표가 멀고."
김환의 말을 지극히 간단한 것이었다.
석이 돌아왔을 때 모깃불을 피워둔 채 용이와 한복이 마루에 앉아 있었다. 아낙들은 돌아가고 없었다.
"우찌 됐노?"
무척 기다렸던지 곰방대를 성급하게 떨며 용이 물었다.
"출상 전에 동네 사람들 앞에서 발명하기로 했습니다. 형님 오셨어요,"
"음"
한복은 모깃불에 쫓기어 날아드는 나방을 한 손으로 쫓음 거북한 듯 대답했다.
"그 음흉스런 인사가 참말로 발명하까?"
미심쩍은 듯 용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할 겁니다, 틀림없이."
신발을 벗고 미루로 올라가며 석이 말했다.
"그렇기만 하다믄 동네가 안 시끄러바서 좋겄다마는,"
"그런다고 안 시끄럽겠습니까? 돌매는 좀 맞일 깁니다."
"그러씨... 그놈은 늙은 것이 지 버릇 개 못 주고 생사람 잡은 생각을 하믄 좀 맞아야 할 기다."
한복은 잠자코 있었다. 용이와 석이도 그 문제를 그 이상 말하지는 않는다. 복동네의 죽음은 마을 사람들에게 까맣게 잊어버렸던 함안댁의 죽음을 불러일으켰다. 남들이 그러한데 아들이 한복이가 어미의 죽음, 그 괴로운 과거를 생각 안 했을 리가 없다. 동네가 죽 끓듯 했으나 한복은 여느 때와 달리 온종일 집 밖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었다.
동네에서 비명에 간 여자가 함안댁과 복동네만은 아니다. 미친 또출네는 불길 속에서 죽었고, 삼월이는 물에 빠져 죽었으며, 귀녀는 현장에서 죽어다. 그러나 맑은 정신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함안댁과 복동네는 매우 비슷했다. 하나는 지아비의 죄과를 부끄러워한 나머지 목을 매었고, 하나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여 양잿물을 마신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복동네 자살과 관련이 있다는 보이 노인, 돌매를 맞을 거라는 석이 말에서 한복은 옛날을 생각한다. 어미가 목맨 살구나무가 약이 된다 하여 맨 먼저 나뭇가지를 타고 올라가서 목맨 새끼줄을 걷고 나뭇가지를 휘어잡으며 분지르던 봉기, 눈언저리에 푸르스름한 달무리가 져서 올빼미 같았던 얼굴, 샐인 죄인 샐인 죄인, 입버릇같이 하던 말, 세월이 흘러서 다 잊었던 그 한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관수형님은 별고 없는 지 모리겄네."
생각을 밀어붙이고 한복이 말했다. 어정쩡한 어조다. 아랫도리 벗었을 때부터 보아왔고 나이도 훨씬 위여서 반말은 하지만 석이는 교육을 받았고 선생님이라는 데서 마음까지 만만해질 수 없는 모양이다.
"네,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관수 본 지도 오래구나."
용이 말이다.
"그러잖아도 홍이 소식 있었느냐고 물어보더군요."
"지난 적에 펜지하고 돈이 좀 왔더마."
돈이 왔다는 용이 말에 한복이 껌쩍 놀란다.
"쉬이 나올 기란다. 갈 때도 질기 있지는 않을 기라 했지마는,"
용이 얼굴이 평온해 보였다.
"관수형님 아들이 부산서 공부한다 캤제?"
한복이 관수에게로 얘기를 되돌린다.
"진주서 싸워봤자 안 되는 일이니 할 수 있습니까."
"다 같은 사람인데 머 그래 싸울 것도 없지 싶으다만,"
한복이 말에 용이는
"싸우다보믄 서로 어깃장 놓게 매련이데 그것도 머 차차로 나아지 겄지. 옛날겉이 서얼이나 상놈은 과거 못 보게끔 법으로 돼 있는 거는 아닌께,"
"그렇지마는 형평사운동은 그리 단순하진 않습니다. 일본에서도 백정들로부터 수평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만 그게 어디 백정만의 문제 겄습니까? 얼핏 생각하기론 백정하고 농청의 싸움이다, 그러니 조선 사람들 신분끼리의 쌈질이다 할 수 있지요. 형평사의 조직이 전국으로 퍼질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조선 사람끼리의 싸움이라는 점이 크게 유리했던 겁니다. 물론 사회주의자들이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왜경들도 감시를 늦취지 않고 있겠지만 조직된 힘이란 특히 우리와 같이 일제 압제하에 있는 형편에는 절대로 필요한 거지요. 관수형님이 백정네 사위기 때문에 열 올리는 거만은 아닙니다."
"관수는 좀 보통사람하고는 다르제."
용이는 이십 년 전 자기 자신도 혈기가 왕성했던 그 시절, 산으로 들어갔을 때 양반이라면 치를 떨던 관수의 그 강한 기질을 생각하는 것이다.
밤은 깊어간다. 더위 때문에 잠 못 이루던 마을 사람들은 잠이 들었는가 사방은 조용하다.
"실은,"
"석이 너하고 의논 좀 하까 싶어서 왔는데,"
"...?"
"우리 집 둘째 놈, 핵교를 우짤고 싶어서."
"네, 몇 살입니까?"
"열세 살인데 명년에 보통핵교를 졸업한다."
"그러면 상급학교로 보낼려구요?"
석이 놀란다.
"그래볼까 싶은데,"
"힘들 겁니다."
"내 처지에 심들 거는 알지만 설사 중도지폐를 하더라 캐도 하는 데까지 시키볼 생각으로,"
"둘째라 하셨는데 큰아들은요?"
"큰아들은 여러 해 전에 잃어부지."
용이 대신 말했다.
"그놈아 살았이믄 올해 열여섯이제."
눈을 껌뻑거리며 한복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석이 말머리를 돌린다.
"공부는 잘합니까?"
"응, 공부를 잘한께 아까바서 안 그러나. 그거 하나라도 사람 맨들어보까 싶다. 다만 어느 방면으로 택해서 보내야 할지 니는 선생질을 한께 알겄제?"
"본인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되도록 원하는 대로 해야겠지요."
"지야 머, 나이가 어리고 머를 알겄나? 어른이 끌어주어야지."
"대학이나 전문학교까지 갈 생각이면 그냥 보통중학교로 가는 것이 좋게고,"
"그, 그거는 꿈이나 꿀 일이가?"
"그렇다면 사업학교 농업학교 또 사범학교가 있는데
"상업핵교라 카믄 장사 같은 거를,"
"졸업 후 은행이나 금융조합 같은 데 취직이 되지요."
"그러씨 그래도 ... 내 생각 겉애서는 진주에 있는 농업핵교가 우떨고 싶은데,"
"아아니,미리 작정을 해놓고서 그럽니까?"
석이 웃는다.
"작정을 한 거는 아니고 여러 가지 궁리 끝에, 마침 니가 왔다기에 니는 선생님이기께 그런 질수는 잘 알 거 아니가."
석이는 한복이가 아비의 행적을 고려에 넣고 배수의 진을 치듯 농업학교를 택한 것을 알아차린다.
"농업학교, 좋습니다. 본인 하기에 따라서 더 하려면 농과대학도 있습니까.?"
"그런 소리 하믄 남이 웃는다. 우리 처지에 농업핵교만 시키도, 그놈아아가 공부는 잘하지만 영 얼되놔서,"
"생각 잘했다. 시키는 데꺼지 시키봐라. 그놈 사람 되겄더라."
용이 말에 한복은 기쁜 듯 웃는다.
"형님."
"음,"
"간도에나 한번 가시지요."
"가, 간도에는 머하로."
당황한다. 아까 홍이한테서 편지와 돈이 왔다는 말이 있었을 때도 한복이는 당황했다. 그에게도 몇 달 전에 두수로부터 돈과 편지가 왔던 것이다. 그건 간도롤 오든지 아니면 그 마을을 뜨라는 편지가 여러 번 왔으나 한복은 묵살해왔다. 돈이 오기론 이번에 처음 이었다. 일금 삼백 원, 한복은 도둑질이라도 한 것처럼 읍내 우편국에 저금한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처한테 자식한테도 알리지 않았다. 석이로서는 매국노든 역적이든 더러운 돈이든 형제니까 도움 못 받을 것 없다, 오히려 그런 돈은 받아쓰는 편이 낫고 올바른 인물 하나 만드는 데 써주어야 한다, 그런 저의로 말한 것이지만 지나치게 당황하는 한복을 보자 다시 말을 잇지 않는다.
과묵한 세 사나이는 멋없이 우두커니 앉았다가 한복이는 돌아가고 용이와 석이는 등잔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잠자리를 마련하고 등잔불도 껐다. 석이는 몇 번이나 몸을 뒤채다가
"아저씨, 주무십니까?"
"안 잔다."
비로소 석이는 기화에 대한 얘기를 꺼내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 용이 말없이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 부시럭거리다가 곰방대에 성냥을 그어댄다. 한 모금 깊숙이 빨아 당긴다. 밖에선 모깃불, 그 매캐한 냄새도 가시지 않았는데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거들이 말 못하겄이믄 내가 얘기하지."
"..."
"아무리 대범한 양반이라도 봉순이 일을 가심에 맺히 있을 기다. 주종이라도 예사 주종가."
석이는 잠이 오는 것처럼 돌아 눕는다. 그러나 잠이 올 리도 없고 가슴은 답답했다. 기화를 위해 자신은 무엇을 할 것이며, 아니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되는데, 미진한 마음은 그칠 줄 모르게 내부 깊은 곳에 항사 도사리고 있는가. 빗방울 소리를 듣는 머릿속엔 안개가 자욱한 것 같고, 심장 복판을 타고내리는 뜨거운 것. 기화는 동색같이 생각했을 테지만 석이에게 옥색 치마 분홍 저고리의 기화는 사랑이었고 청춘이었다. 입 밖에 내서도 안 되는 마음이었고, 비취서도 안 되는 마음이었다. 그 감정이 석이 청춘에서 가장 찬란하고 유일하게 아름다운 것이었다. 처참했던 소년기에서 절도를 배우고 사명감을 갖게 된 청년기, 사막했던 터전에, 견고하게 다 져졌던 마음의 터전에 한 떨기 핀 꽃이던 기생 기화. 증오와 저주와 분노로 치닫던 감정의 황막한 지대를 뜨겁고 감미로운 눈물로 젖게 한 그 불행한 여자. 석이는 서울서부터 평야의 기화를 찾아가고 싶었다. 기차를 타고 오면서 줄곧 계속하여 평양으로 갈 생각을 했었다. 몸은 더 멀리 떠나오면서 마음은 더욱 가깝게 평양으로 치닫는 것이었다. 그 욕망을 묻어둔 채 석이는 어느 때보다 더 많은 다른 일들을 생각했던 것이다. 빗방울은 어느덧 조용 조용히 내리는 빗소리로 변해 있었다.
16장 군중심리
"동네 사람들이 이넉을 나무에 매달기라도 하믄 우짤 기요?"
잠을 못 이루고 있다가 첫닭 우는 소리에 일어난 봉기의 마누라 두리네는 등잔에 불을 켜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말했다. 역시 잠을 못 이루고 멀뚱멀뚱 천장만 보고 누워 있던 봉기는 획 돌아 누우며
"석이놈이 그리 되지 내비리두지는 않을 기구마는. 식자깨나 들었다고 넘찐 소리는 해도 지각을 있인께."
하다가 화를 벌컥 낸다.
"신새벽부터 제수 없게끔. 방정 그만 떨어라!"
"강약이 부동인데 동네 사람 성나서 서둘믄은 석이 혼자 감당할 기든가."
"속타는 사람한테 와 이리 불을 지르노!"
"그라믄 임자가 가서 맞아라."
"그렇기만 됨사. 그러이 내가 머라 캅디까. 애먼 소리 마라고 그렇기 말을 해도 안 듣더마는,"
"모리거든 아가리 닥치라! 다 내 깊은 생각에 한 짓이데 그리 쉽게 죽을 줄 누가 알았더나!"
"그래서 참 잘됐소! 남으 생목심 끊게 하고 내사 마, 얼구 치키들고 동네 나갈 수 없일 기요."
"부끄러분 생각을 한께 임자는 청풍다억이구마. 남부끄런 생각백분 해도 좋으니까네 자식 낳고 사는 두리 신세나 안 궂있으믄 좋겄다."
"언성은 와 높이요! 며누리 들으까 무섭소."
"..."
"참말이제 남사스러바서 우찌 살꼬."
"매맞는 것 구겡 안 하믄 될 거 앙이가."
"매맞일 생각은 하누마요. 매만 맞고 말김사?"
"그라믄 머가 또 있단 말고오! 사지를 찢을 기가!주리를 틀 기란 말가!"
벌떡 일어나 앉는다.
"동네서 쫓아내믄 우짤 기요."
"멋이 우짜고 우째?"
방바닥에 두 손을 짚고 엉덩방아르 찧어대던 봉기는
"그렇긴는 안 될 기다! 그렇기는 안 되고 말고! 불을 싸악 질러부리제, 불을! 권석들 끌고 어디로 가아! 가기는 어디로 가아!"
입에 거품을 문다.
"그만 복동네가 찾아왔일 적에 잘못 했다고 빌었이믄 이런 일은 없었일 긴데 아이고 무써리야, 그놈의 계집아아 하나 따문에 인벵 든 생각을 하믄, 시집을 보내놓고도 하마 쫓기오나 애간장을 태웠는데, 그 생각을 하믄 삼수 그놈, 그 숭악한 놈을 찢어서 포를 맨들어도 내 맘이 안 차겄소. 그 목이 뿌러질 놈!"
"그놈 얘기는 와 하노! 누구 복장 터져서 죽는 꼴 볼라고 이라나?"
"욕심이 사람 잡제. 욕심만 안 부이믄 그놈이 두리한테 눈독을 딜있일까. 다 이녁 욕심,"
"이 제집이!"
달려들어 가슴을 쥐어박는다. 두리네는 쥐어 박힌 가슴을 제 주먹으로도 한 번 치고 소리를 죽이며 운다.
"일은 벌어진 기라요. 매는 매대로로 맞일 기고 두리 험집도 한 사람 두 사람, 말이란 건니다보믄, 그 아아 시집까지 가는 거사,"
제 가슴을 또 친다.
"그런께 내사 나가서 발명하기로 한 거 앙이가. 그 일 아니라믄 미쳤다고 내 발로 발명하로 가까? 잡아떼믄 그만이제. 밤새도록 생각을 해봤는데 석이가 일은 씩 잘 꾸민 기라."
풀이 죽는다. 그러나 말만은 희망적이다. 봉기에게는 복동네의 죽음 같은 것은 안중에 없었다. 죄의식도 태산 같은 근심 앞에 지푸라기만도 못한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모면할까, 딸자식 흠집을 어떻게 가려줄까, 다만 그 일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새벽이 뿌옇게 걷히기 시작했을 때 며느리가 조반을 지으러 나왔는지 부엌 쪽에서 달거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때 같으면 벌써 일어나 논물을 대러 가든지 풀이나 한짐 베어왔을 터인데 아들의 기척은 없고 손주 놈도 숨을 죽인 듯, 말할 기력이 빠져버린 늙은 내외는 서로 외면한 채 바깥 기색에 귀를 기울인다.
한나절이 지나서 타작마당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덩달아서 아이들도 몰려나왔다. 강아지들도 쫄랑거리며 쫓아온다.
"데끼놈들! 여가 어디라고 나와노. 집에들 못 가겄나?"
남정네가 아이들을 몰아내는가 하면 아낙은 아낙대로 아디들 오는 곳이 아니라면서 참새 쫓듯 휘여! 하고 팔을 벌리곤 했다. 들내놓고 시시덕거리는 사람은 없었지만 마을에 굿거리가 든 것처럼 들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밤사이 사발통문을 돌린 것도 아니었을 텐데 마을 사람들 중에 봉기가 자복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에는 이러쿵저러쿵 예삿말로 주고받던 마을 사람들 화제는 사람들이 불어나면서부터 분개하고 규탄하고 처단하자는 공론으로 들끓었다. 출상을 본다는 생각은 깡그리 내던져버리고 오로지 흥미는 나타날 봉기한테 집중되는 것이었다. 타작마당은 마치 신풀이 한풀이의 장소로 변해간다. 상대가 심술궂기로 이름난 봉기였고, 안 좋은 꼬투리는 대개 한두 개쯤 갖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고소해하고 한층 신이 나는 모양이다. 말뚝같이, 송곳같이 복동네 심장을 때려 박고 찌르지는 않았다손 치더라도 뒤꼍에서 바늘 하나쯤은 복동네 심장을 꽂았을, 그런 위인일수록 이상하게 남보다 분개하고 규탄하고 처단하자는 주장이 강했으니. 그것도 양심인지 모를 일이다.
"늑대 겉은 그 늙은것 동네 가운데 두어서는 안 된다. 동네가 시끄러버, 대소사에 그놈의 주둥이 안 내미는 곳이 없고오,"
"동네 가운데 두고 안 두고는 고사하고 돌로 쳐직이야지 그냥 두어?"
"흥, 열분 죽는다고 복동네가 살아올 기든가? 허물을 벗으믄 머하노. 시상에 그기이 제집도 앙이고 소나아가 할 짓가? 똥물에 튀길 놈의 인사지."
"그런 기이 있인께 동네 인심이 말이 아닌 기라. 이곳저곳 쑤시고 땡기믄서 이간질, 쌈질이나 시키고, 그 늙은 것 옛적부터 그랬네라. 그래도 우리 동네 인심이 좋아서 그나마도 멩 보존하는 그거를 모리고 억지만 쓰믄 다 되는 줄아니께, 남들도 그 뽄 볼라 아 키나? 그렇기도 못하는 사람은 울믄서 게자 먹는다고,"
"간에 붙었다가 실개에 붙었다가 그기이 어디 사람이건데?"
"계묘년 보리흉년 때만 해도 온동네 사람이 다 죽는다고 소동인데 그놈의 집구석에서는 쌀밥만 처묵었지. 의리고 우애가 있어야제. 약 할라 캐도 없다. 조가한테 알랑방구나 뀌고 삼수놈한테는 찰떡겉이 붙어서 행여 문전옥답이 내 차지나 안 될까, 그런 놈이라고, 우리끼리니 하는 말이지마는 최씨네가 들왔이믄 마땅히 그런 표리부동한 놈의 땅은 거뒤딜이야 하는 게지. 땅을 못 얻어서 기갈인데 멋 땜에 그런 놈한테 땅 주노."
"실가락만한 것이라도 남을 칠 건디기만 있이믄 신나제. 남 먼저 설동하고 몰아세우는 데 앞장 앙이가. 홍, 이분에는 뜨거운 맛 좀 봐야 할 기요."
"이분에는 제 편에서 맞아야제. 언젠가 그 와, 주막 앞에서, 최참판댁 머슴 하든 구천이 안 있나? 지 제집을 뺏긴 것도 아닌데 동네 사람들을 몰고 가서 개 패듯이 패서 죽었다는 소문도 있더마."
대개 연령이 높은 층의 얘기였고 젊은 층도 무조건 신나는 그런 얼굴들이다. 간밤의 비 때문에 햇빛은 유난히 부시다. 일을 꾸민 장본인들, 마당쇠댁네와 야무네는 죽 끓듯 하는 타작마당에 끼어들지 않고 좀 처진 밭둑에 걸터앉아 말이 없다. 오히려 불안한 눈으로 타작마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밭둑 찔레꽃 덤불 밑으로 미련스런 두꺼비 한 마리가 뒤뚝뒤뚝 기어간다.
"야무어매."
"음."
"동네 사람들이 저리 기승을 부리는데 봉기노인 맞아죽기라도 하믄 우짜것소?"
"설마, 나이를 처묵었인께 그러기야 하겄나."
"기왕에 죽은 사람은 죽은 기고, 잘못한 짓이나 아닌지 모리겄소. 내 입만 다물고 있었이믄 벨일없이 지내는 거를,"
"..."
"만일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믄 쥐 잡을라 카다가 독 깨는 쪼가 안 되겄소?"
"걱정 마라. 젊은놈 겉으믄 혹 모리겄다마는 늙었이니 마구잡이로야 하겄나. 울림장으로 그칠 기다."
"그는 그렇고 동네서 쫓아내는 일이라도 있이믄 두고두고,"
그 말에는 야무네도 풀이 죽는다. 보복이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 영악한 거는 범보다 무섭다 카는데 악이 받치믄 무슨 짓을 할지,"
"이자는 할 수 없는 일 앙이가."
"빌어묵을 제집, 죽기는 와 죽노. 살아서 애먼 때 벗으믄 될 긴데 그렇기 죽는 것도 남 못할 짓 시키는 기라요."
"평시는 순한 제집인데 죽고 보이 독하구마."
드디어 타작마당에 낡은 상여가 나온다. 얼마 안 있어 복동네 집에서 장정 몇 사람이 관을 들고 나타났다. 그 뒤를 이어 재최 굵은 삼베 상복을 입고 상장을 짚은 양자 복동이와 며느리가 곡을 하며 따라 나온다. 관은 상여에 실리지 않았다. 멍석 위에 놓여졌다. 언제 왔는지 봉기는 도살장에 끌려온 송아지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었다. 이따금 치뜨고 사방을 살피는 눈알이 불면 때문에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곡성이 멎고 와글바글 벌집 쑤셔놓은 듯했던 타작마당이 일시에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봉기의 그 흥미진진한 자복의 광경을 기다리는 것이다. 까마귀가 공중을 선회한다. 열기를 타고 벼 익는 냄새가 풍겨온다. 침묵은 하마 폭발할 것처럼 무겁게 사방을 누른다.
"머하노! 해 지겄다!"
누군가가 외쳤다. 그리고는 또다시 침묵이다.
"오밤중에 등불 들고 묏구덕 팔 기가!"
두 번째 외치는 소리다. 봉기는 뱃등 위에 두 손을 깍지 끼고 비실비실 걸어 나온다. 얼굴은 누우렇게 떴고, 입술은 하얗게 바래졌으며, 진저리치듯 몸을 한번 떨었다.
"내가,"
하다가 봉기는 제 가슴에 주먹질을 몇 번 한다.
"내가 직일 놈이제."
이번에는 제물에 놀라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냉혹한 눈들이 일제히 쏘아본다. 비비대볼 수 있는 눈동자는 한 개도 없다. 고개를 숙인다.
"남으 생목심 끊어놓고 내가 우, 우째 살기를 바라겄노."
밤새껏 외어온 말을 시작한다. 눈물을 줄줄 흘린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제자리를 잡은 듯한다. 주먹으로 눈물을 씻어내며
"그렇지마는 죽은 사람 허물을 벗기주어야 안 하겄나. 다 늙어빠진 기이 앞으로 살믄 얼매나 살 기라고, 우짜다가 한분 마음 잘못 묵어 한 짓이 이렇기 될 줄은 꿈에나 생각했겄나."
울먹이는 소리가 곧 잘 나온다.
"목이 메이서 차마, 그런께 이십 연도 더 되는 옛적 일이구마. 나도 그때는 한창 나이였고 해서, 그 멋꼬 그런께 욕심을 품었다 그 말인데, 그, 그런께 달이 밝은 밤에 청상과부 서금돌이 자부가 혼자 자는 집으로 간 기라. 이 나이 해가지고 낯 뜨거운 마, 말이지마는 전후 사정 얘기를 하자 카이, 흉년에 시어매는 죽고 실성한 시아비는 집 비우기가 일쑤라. 그런데 그런 일이 더러 있었던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머리맡에 둔 식칼을 들고 복동네가 고래 땅 겉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그만 혼겁을 했구마. 도망쳐 나오는데 삼수 놈이 오더란 말이다 마음속으로 생각했제. 옳다꾸나, 저눔하고 정을 통했구나 싶었제. 그래서 살금살금 되돌아가서 싸리 울타리를 비집고 들여다보이 삼수 놈도 내 꼴을 당하더란 말이다."
청산유수라 할까, 시뻘건 거짓말을, 밤새도록 얼마나 뜯어 맞추었던, 사람들 뒷전에 서서 바라보고 있던 석이는 매창자를 움켜쥐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는다. 한편 진실에 가깝게 재주를 부리는 봉기 모습에 서글프지만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도 같다.
"밤새도록 얼마나 연습을 했으면."
미워할 수가 없었다. 한철을 사는 나비가 부드러운 속잎을 찾아서 알을 까는 일이며, 파헤쳐진 흙더미 속에서 알을 먼저 피난시키는 개미며, 벌레 중에서 애벌레의 먹이가 되는 수컷이 있다던가. 석이는 문득 구 신비한 조화를 생각한다. 도시 본능은 무엇인가 생각 한다.
"그 챙피스렁 일을 뉘한테 말하겄노? 혼자 꽉 묻어두었는데, 그러다가 다 잊어부맀는데, 이십 년이난 지난 오늘에 와서 얼굴은 조그랑바가지가 된 주제에 어디서 그 얘기가 난 기이 돋더마. 말이 났다믄 복동네말고 입이 없었인께, 요것봐라? 싶더마. 그래서 삼수놈하고 그렇다고 뒤집어씌운 기라. 그런 일이사 흔히,"
"야 이 도둑놈ㅁ아!"
봉기 또래가 외는 위동네 윤서방이, 평소 봉기하고 사이는 좋지 못했으나, 그러나 진심에서 욕설을 퍼붓는다.
"네놈의 낯가죽은 쇠가죽으로 맨들었드나? 머이 우째?"
"그, 그거야, 사, 내들 욕심 묵기 예사 앙이가. 또오 과부가 험담 좀 들었기로 저저이 다 죽나?. 내 운수가 나빴든 기지."
사이가 나쁜 윤서방의 욕설이었기 때문에 순간 봉기의 오기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고 말을 다 해버리고 나니 실수 없이 치른 것이 대견하였고, 배포가 커졌으며, 생래의 생떼도 동했다. 늙은 것을 어쩌랴. 석이를 믿는 마음도 있었고, 말을 하고 보니 운수나 나빴고 억울한 것은 자신이라는 착각도 들었다.
"아 생각해봐라. 세상에 애먼 소리 안 듣고 사는 사램이 있나? 애먼 소리 들었다고 다 죽을 것 겉으믄 사람으 씨가 남을 끼든가? 말 한마디 잘못한 죄로 이러크름 경을 치는 벱이 어디 있노? 내가 도둑질을 했나 칼 들고 샐인을 했나? 다 늙어서 낼모레 황천객이 될이 나를 끌어다놓고 닦달질을 해야 하겄나!"
딸의 일은 장보에서 싹 지웠다는 생각을 하는지 별안간 봉기는 두 주먹을 불끈불끈 쥐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싸움의 태세로 들어간다.
"말 가지고는 안 되거마는."
누군가가 말했다.
"직일라 카믄 직이라! 복동네 애먼 때는 벗기주었으니 이자 나는 할링 다 했다. 세상에 무신 놈의 인심이 이렇노? 응? 남을 핑계하고 너거들이 사감들이 사감으로 이러는 줄 나 다 안다. 안단 말이다아! 무신 죄를 졌노! 말 한마디 잘못하기 예사지. 너거 놈들은 성인군자가! 밑낑이 들쳐보믄은 다 그렇고 그런 놈들이, 네놈들이 날 우짤 기고!"
"이보시오. 낼모레 황천객이 될 영감님, 내 말 좀 들어보소."
바우가 척 나선다. 격에 맞지도 않는 제법 점잖은 거동으로
"영감님 말심일 듣고 보이 복동네가 와 죽었는고 확실하게 알겄소. 그러나 애먼 때 벗은 거를 알아야 할 사람은 복동네 아니겄소?"
봉기는 어리둥절하다가 말뜻을 새겨보려고 애를 쓴다.
"그러니 아무래도 죽은 사램이 일어나 앉아야 안 하겄소?"
구경꾼들 속에서 낄낄대며 웃는 소리가 났다.
"바우 네 이놈! 이 사기꾼 노름꾼아! 니가 머 잘났다고 애비뻘되는 나를, 나를 놀리묵어?"
삿대질을 한다. 제 얼굴빛을 찾았던 봉기 얼굴이 시뻘겋게 물든다.
"염치도 좋다! 주리팅이가 없어도 유분수지 어느 아가리서 그런 말이 나오노!"
돌멩이가 날아왔다. 그것이 신호인 양 두 번째 세 번째 돌멩이가 날아왔다.
"아이구우."
세 번째 돌멩이는 이마를 쳤다. 당장 이마에서 피가 흐른다. 봉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바로 대놓고 때릴 수 없는 젊은 사람, 아낙들에게 돌은 참 편리한 것이다. 누가 던졌는지 알 수 없는 돌멩이는 그 수가 많을수록 군중의 심리를 폭력으로 이끄는 데는 안성맞춤이다. 삽시간에 돌멩이는 우박이 되어 봉기한테 쏟아진다. 얼굴을 가린 손등에서 피가 흐르고 머리를 감싸면 얼굴에 돌이 날아오고, 봉기는 쓰러진다. 석이가 사람들을 헤치고 나가는 것과 동시 타작마당 한곁에 있는 물방앗간에 숨어서 동정을 살피고 있었던 모양이다. 쓰러진 아비를 가리고 서서
"날 때리라! 날 때리란 말이다!"
호랑이 울음 같은 소리, 입이 찢어질 것 같다. 순간 팔매질하던 마을 사람들은 주춤한다.
"야 이놈들아아! 너거들은 애비 에비도 없나아! 다 늙은 울 아부지 쳐죽이야 시원컸나아! 아이구우 아부지이!"
통곡을 한다.
"아이구우 아부지이 아이구우우 ---- 말 한마디에 죽은 사램이 모질고 독하지이! 야, 이 연놈들아! 너거들은 없는 말 지어서 안 하고 살았더나! 아이구! 아부지, 아부지이!"
아비를 흔들며 안아 일으키려 한다.
"이놈들아! 또 쳐라! 이놈들아, 사생결단 해보잔 말이다! 우리 부자 죽으믄 그만 앙이가! 직이라, 직이! 와 안 치노오! 너거들 손에 죽을라 카는데 와 안 치노오!"
고함은 강을 넘어 멀리까지 퍼진다.
"도식아, 이자 그만 해라. 어서 아버지 업어라."
어린 때 친구간인 석이 도식의 등을 두드린다.
"어서 업으라 카이, 자아,"
"늙은 사람이 제 발로 걸어와서 자복햇으믄 그만이지! 그 이상의 망신이 어디 또 있일 기라고, 야 이놈들 내 똥 묻은 중우를 내다 팔더라도 재판 걸 기다아! 어허허홋."
목이 쉬었다. 도식은 미친 사람 같았다.
"자아, 자 출상도 해야 안 하겄나. 아무리 억울해도 죽은 사람만이야 할라구. 자아."
석이는 억지로 봉기를 아들 등에 업혀준다.
"아이구 아부지, 다 큰 자식 두고 이기이 무신 꼴이요."
도식은 어이어이 울면서 타작마당을 떠난다. 마을길로 접어들자 봉기는 등 뒤에서 신음 소리를 냈다. 도식이는 계속하여 울면서
"아부지가 동네서 인심을 잃어 아 그렇소. 이자는 제발 남우 일에 챙견 마소."
꺽쉰 목소리로 말한다.
"이자는 다 치르었인께. 아, 아야! 어이구우, 니 누부 땜에, 그 그랬지. 내가 마, 맞일 사람가. 아이구 아야아!"
어느덧 해는 서쪽으로 푹 기울어져 있었다. 관은 상여에 실렸다. 상여 앞에 놓인 제상에 제수를 차리고 상주는 제사를 지낸다. 남정네들은 일단 일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낙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상주 두 사람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어이구우, 어이구우."
"아이고 아이고오,"
높고 낮은 음성이 곡을 시작한다.
"우는 아가리에 똥이나 퍼넣지."
아낙들 속에서 야무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와 아이라. 너거들 상주 된 덕 톡톡히 보는 줄이나 알아라. 상주 아니더믄 몸뚱이 성해나지 못했을 기다."
다른 아낙이 받아서 메어친다. 곡소리가 기어든다.
"남의 속에서 빠졌기로 키운 공이 있는데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노? 늙은 놈하고 어울리서 짝짜꿍을 쳤이나 복동네 공든 세월이 원통해서 죽었을 기다."
곡소리는 더욱더 기어들어간다.
"이 사람들아, 내 말 명념해두는 기이 좋을 기다. 초상 끝나거든 집이고 전답이고 팔아서 너거 양보 회원굿 해주어라. 야장스럽게 너거들 떠주는 물 얻어묵을라고 복동네가 오겄나."
"얻어 묵고 산 것만도 은공이 태산인데, 너거들 것이 어디 있노. 하모, 회원굿 해야 하고말고. 비명에 갔으이 해도 크게 벌이야 할 기구마는."
아낙들의 말을 듣고 보니 남정네들도 새삼스레 깨달아지는 것이있다.
"어헛! 자석 없는 놈은 사람도 아니다. 죽을 죄를 져도 자석 있인께 업고 가네. 애비 대신 한사코 안 덤비더나? 헛 참, 자석 많다고 지천을 해싸았더마는 그기이 앙이고나. 복동네한테도 자석이 있었다믄 봉기가 자석 등에 업히 갔것나?"
"그렇고말고. 자석이 있었다믄 밟아직이든지 찢어직이든지 했겄지. 만판 공 딜이봐야 남의 속에서 빠진 것 아무 소앵이 없다."
"하기야 눈이 등잔 겉은 자석이 있었다믄 복동네가 그런 허물을 쓰지도 않았을 기고, 차라리 중이나 돼 가지, 남의 핏덩이는 머할라꼬 받았는고."
"그거 다 사람 나름이제. 김훈장댁 양자는 친자식이 그러하까? 참말로 정성이 지극하데. 얼매나 정성스리 선영봉사를 한다고?"
"그라믄 여기는 상놈이라 그런가?"
"상주들은 고개만 빠주고 있일 일이 앙이다. 곡이라도 크게 해주었이믄 좋겄네."
"가소롭다. 맴이 없는 곡소리만 크기 하믄 머하는고? 아이고오 불쌍한 복동네, 말짱 헛지랄하고 살았제."
사방에서 마구 꼬집어댔으나 장사는 치러야 했다. 한이 많은 생애, 사연이 복잡했던 영결식, 애통하는 혈육 하나 없는 망자를 실은 상여는 고개를 넘어간다. 혼령의 흐느낌 명정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더러는 장지까지 따라갔고 나머지는 타작마당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한바탕 죄인 없는 성토를 벌이다가 하나씩 둘씩 빠져나가고 빈터만 쓸쓸히 남는다. 갈가마귀가 무리를 지어 날아간다.
석이 장지에서 돌아왔을 때 하늘에는 가득하게 노을이 져 있었다. 마당에서 혼자 놀고 있던 홍이의 딸 상의가
"아져찌, 우리 할배 기와집에 갔다와?"
하며 쪼르르 달려와서 석이 손을 잡았다.
"안 울고 놀았나?"
"응."
홍이댁네 보연이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부엌에서 나온다.
"거기, 최참판댁에 아버님이 가 계시는데 그리로 오시라는 전갈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석이는 상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발길을 돌리다. 몸이 아주 온전치 못한 용이는 장지는 물론 타작마당에도 나오지 않았다. 그새 최참판댁으로 올라간 모양이다. 기화 문제 때문에 그럴 거라는 짐작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눈금 없는 강물처럼 온갖 사물은 매듭 없이 흐르고 있다. 아이들은 소를 몰아붙이며 밭둑길을 걸어오고, 늙은이는 채마밭에서 서성거리고, 장정들은 풀을 베어서 돌아온다.
"석아!"
우렁우렁한 목청이 올려왔다. 배추밭에 거름을 냈는지 똥장군 옆에 앉아서 곰방대를 빨고 있던 사내가 목청껏 불렀던 것이다.
"으음, 거름 내나아?"
성큼성큼 걸어가며 석이 대꾸한다.
"니 정말로 우리집에 한분 안 올 기가?
"일 바쁠 건데 가면 뭘 해. 이리 보면 됐지 머."
다가간 석이 걸음을 멈춘다. 어릴 적 친구다.
"농사꾼은 상종 아 하겄다 그 말가? 그래 봐라."
"무슨 소리를 하노. 내가 찾아가봐야 폐만 끼치지."
석이는 궐련에 불을 붙여 내민다.
"이것 피우라고."
"응."
사내는 기쁜 듯 얼른 받는다.
"그래도 그러는 거 앙이다. 망해서 고향 돌아온 사람은 우리가 청해야겄지마는 잘돼가지고 고향 온 사람은 그쪽에서 찾아야제. 만내서 씬 술 한 잔이라도 나누어묵는 기이 친구된 우애 앙이겄나."
석이는 자신도 담배를 붙여물고 그 당여한 말에 미소 짓는다.
"알았네. 지금 볼일이 좀 있어서 가는데 밤에라도 찾아가지."
"그래야지. 있거 없고 간에 정이사 다르겄나."
"날 저문에 자네도 일 그만 하게."
"머 다 끝났다. 한 고랑만 남았인께. 다른 일 따문에 배추밭 돌볼 새가 없어서 내비리두었더마는 장에 내기는커녕 김장도 못하겄다."
"지금이라도 늦잖지. 그럼 나중에 보자."
"응, 꼭 오니가."
최참판댁을 들어서려는데 뒤에서
"정선생님."
돌아본다. 환국이다.
"낚시질 갔었댔나."
"네."
"좀 잡았어?"
"조금요."
키가 훤칠했다. 중학교 삼학년이다.
"방학도 얼마 안 남았다."
"네. 온종일 어디 가셨어요?"
"초상집에 가고,"
"아아 참, 초상이 났대지요."
환국은 그 이상 일은 모르는 것 같다.
"선생님은 진주 언제 가십니까."
"내일은 가야지."
함께 집안으로 들어간다. 용이 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어둡지도 않았는데 마루엔 모깃불 대신 향을 피워놨다. 뒷마루, 후원을 바라 볼 수 있게 활짝 문을 열어놓고 발을 쳐놓은 채 그 발을 등지고 서회가 앉아 있었다. 환국이는 고기가 든 바구니를 언년에게 건네준다. 그리고 용이와 얘기하는 듯한 어미를 힐끗 한번 쳐다보고서는 사랑으로 돌아간다.
"석이 오나. 저기 마님께서,"
용이 일어섰다.
"그라믄 지는 가보겄십니다."
절을 하고 물러간다.
"정선생 올라오시오."
"네."
석이는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오른다.
"뭐 시원한 것 들겠소?"
"아닙니다."
"그러면, 방금 이서방이 봉순이 얘기를 했는데 정선생은 서울서 뉘에게 들었소?"
"아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서의돈이라고 임역관댁 바로 뒷집에 사셨지요 임역관댁 교장 선생님, 또 이부사댁 이선생님하곤 막연한 사이올시다."
"그분이 어째서 봉순이를 아는고?"
"처음 서울 갔을 때 이선생님 면을 봐서 그분들이 모두 후원했지요."
서희는 고개를 끄덕인다.
"봉순이가 병을 앓고 있다는데 무슨 병이라 하든가요?"
석이는 고개를 숙인다. 용이한테는 신병이라 했지만 대답이 없자 서희는 순간 눈살을 찌른다 하더군요."
"뭐라구!"
"그분 말씀이, 봉순이누님보다 아이 걱정을 하더구먼요. 그러니까 가망이 없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아이 걱정...계집아인가?"
"네."
"음... 그러면 개학까지 며칠이나 남았을까?"
"칠팔 일, 남았지."
"칠판 일, 평양은 다녀오겠구먼."
"..."
"어떻소? 정선생이 좀 다녀오겠소?"
"네?"
석이 고개를 쳐든다.
"장서방은 여기 일이 많기도 하지만 정선생님보다 생소할 게요. 형편 보아서 재량껏 하는 것도 정선생이 나을 게구."
"네."
"가시겠소?"
"..."
"웬만하면 가주시오. 그냥 내버려둘 수 없는 일이니까."
"제가 힘이 있을는지요."
석이는 혼란에 빠진다.
"하는 데까지 해볼밖에 없질 않소?"
"그러면, 가보겠습니다."
17장 뜨거운 모래
산청장 객줏집 주인 석포는 오십 고개를 넘고도 중반기에 접어들긴 했지만, 좀체 늙을 것 같지 않았던 곱상한 그 얼굴은 주름투성이였다. 병을 앓는지 안색도 좋지 않았다.
"이서방 오래간만이요."
삼베 동저고릿바람에 보릿짚 모자를 쓴 환이, 목에 걸친 수건을 걷어 땅을 닦으며 말했다.
"아니!"
석포는 확인 줄 알면서, 그래도 반신반의의 눈으로 바라본다.
"김환이요."
광주리면 목기를 잔뜩 실은 지게를 삽짝 옆에 내려놓은 강쇠도 머리를 동여맨 수건을 끌러 얼굴에 빡빡 문지르면서
"요새는 좀 우떻십니까?"
하고 석포에게 묻는다. 석포는 그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 듯
"어, 어서 방으로 들어갑시다."
허리를 펴지 못하고 구부정한 자세로 석포는 허둥대며 뒤꼍으로 돌아간다. 뒤꼍을 향해 방문이 있는 방의 발을 걷어 올리며
"자아, 들어가시지요."
장날이 아니어서 객줏집은 텅텅 비어 있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방에 들어와서 마주보고 앉으며 석포는 그 말부터 물었다.
"오기론 한 삼사 일 됐을 게요. 한데 이서방 어디 아프시요?"
"속병이 좀 있어서,"
버릇인 듯 가슴을 쓸어 보인다.
"얼굴이 말 아니구먼."
"먹는 게 통 받질 않소."
석포는 심약하게 웃는다. 반갑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반가운데, 몸이 마음을 따라와 주지 않는 것 같은 그런 웃음이다. 흙 묻은 발을 씻었는지 강쇠는 뒤늦게 와서 툇마루에 걸터앉아 얼굴 닦던 수건으로 발을 닦고 방안으로 들어온다.
"그 동안 무슨 변이나 당했을까, 걱정했지요. 변만 당하지 않았다면 다 요량이 있을 터인즉,"
하며 석포는 환의 기색을 살핀다.
"요량은 무슨 요량이요. 하기는 내 나이 사십마 돼더라도, 하하핫... 마적질인들 쓸모가 없었겠소?"
"무슨 말씀을, 오십을 갓 넘기고서. 이제부터 무르익을 겝니다."
환이보다 다섯 살 위인 석포는 개주업으로 처신하고 있을망정 상당한 학식이 있고, 지금은 죽고 없는 유도집에 비등할 만한 동학의 이론가지만, 환이에게는 전과 다름없이 깍듯한 예로써 대한다. 그리고 마적질이란 말에는 개의치도 않았다.
"돌배가 무르익은들 얼마나 무르익을 것이며,"
환이는 픽 웃는다.
"이제는 지릿대를 가져오셨을 것이고 하니, 나도 산에 들어가서 약수나 마시며 병으 고쳐야겠소."
"이서방 병 고치는 거야 찬성이요만 그까짓 다 썩은 초가삼간 일으켜 세우면 뭐하겠소."
차갑게 말한다. 강쇠는 잠자코 앉아 있었다.
"지금 형편이 고약하게 돼 있기는 합니다마는, 그것은 앞으로 하기 나름이지요. 지삼만이 그자 처분에 달려 있는 거 아니겠소? 그 놈만 묻어버리면 오히려, 그 식솔들이 많이 불어났으니까."
"그거는 이서방 생각하고 내 생각이 다르구마요."
강쇠가 끼어든다.
"나도 한때는 그놈을 때리직일라고 벼르기도 많이 해지마는, 그 미친놈 밑에 빌붙어 사는 놈들이야 미친 우에다가 천치가 됐는데 머에다 씹니까? 어리석은 생각이라요. 윤도집 생전에, 신도들을 많이 모으자는 주장 따문에 시비가 많았는데, 그 신도까지 심 안 딜이고 물리받을 심산을, 그거는 이서방이 생각을 잘못한 기요. 옥황상제 노릇, 그짓 할 시비자석도 없일 기고, 하기는 환이성님이 눈 딱 감고 얼마간 구신 노릇 해주신다믄은 혹 모르지요. 미친 연놈들이 갖다 바치는 가시나들, 궁뎅이나 뚜디리믄서,"
신랄하다. 강쇠는 현재 상황에 대한 울분과 환에 대한 불만을 한꺼번에 메치는 것 같았다.
"막말을 하면 쓰나. 그렇게 몰아서 얘기할 것만도 아니네."
"속 터지는 소리 이자는 듣고 접지도 앉소."
"그러면 멋하러 왔나?"
"내가 아요? 성님이 가자니께 왔제요 속 시원한 소리나 들을까 하고, 하마나 하마나, 미련한 놈이 별수 있겄소?"
하다가 제풀에 파시시 웃는다. 다소 머쓱해진 석포는 환의 기색을 또 살핀다.
"구신이고 대신이고 하라면 못할 것 같은가? 누워 떡 먹기지. 객쩍은 소리는 그만 두고,"
하다가 환이는 석포를 향해 말을 잇는다.
"운봉어른과 윤도집, 그 밖의 연로한사람들이 다 떠난 마당에서...그때는 시절이 좋았지요."
"네?"
어리둥절 한다. 석포는 환이 무슨 말을 하려는가, 비로소 의혹을 느끼는 것 같다.
"우리도 불원간 죽을 것이며 새 사람들은 제 갈 길로 갈 게요."
"말뜻을 어떻게 새겨야 할지 모르겠소만 김장수가 전주 감영에서 효수당하고 녹두장군이 처형된 지 삼십 년이 더 지났소이다."
석포의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만일 환이가 일을 포기한다면 삼십여 년 전에 죽은 부친을 생각하라 하는 의도가 있었으며, 거두들이 다 죽은 뒤 동학당은 지리멸렬, 친일파로 정좌했으며, 매국노로 타락했으며, 거듭되는 분파에다 동학란 때 중추를 이룬 농민들은 대부분 탈락했고, 또 3.1만세 때 삼십삼인의 서두를 장식한 손병희의 이름은 찬연하였지만, 지방마다 기독교의 조직이 강렬하게 들난 데 비하여 동학은 참담한 약세였으니, 대가리뿐이 동학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매, 그러한 삼십 년 세월 속에서도 무명노장 양재곤을 돛대 삼아 소리 없이 일해오지 않았느냐, 새삼스럽게 상황 얘기 할 까닭은 없다, 그런 뜻도 있었을 것이다.
"삼십 년이면 강산이 세 번을 바뀌었을 터이고 이서방의 마음도 세 번쯤 변했을 거요."
환이는 왜 그러는지 석포를 빤히 쳐다본다. 석포는 고개를 흔들었다. 강쇠가 말했다.
"계속 이런 식이라요. 복장이 터질 일이제. 이것저것 좀 잊어부리 구로 술이나 주소."
석포는 다시 고래를 흔들었다. 환이는 다음 말을 이으려 하지 않았다.
"체머리는 와 그리 흔들어 쌌습니까? 술 못 주겄다 그 말이요?"
사팔눈이 석포를 노려본다.
"덤비지 말게. 술이 대순가? 소라도 한 마리 잡고 싶은 심정이다. 나도 오늘은 술 좀 마셔볼라네."
"그란다고 지가 사양할 것 같십니까? 속병 앓는 사람 사정 봐주게 안 돼 있단 말입니다."
"이 사람이, 나도 자네 사정 봐주게 안 돼 있어! 끝장이라는 건 어떤 꼴이든 끝장이니 매국노든, 열사든, 도둑놈이든, 하기야 뭐 나도 순 사기꾼일 게야."
석포는 갑자기 헛바닥이라도 굳어버린 듯 횡설수설하다가 술 시키러 나간다면서 등을 구부리며 방을 나갔다.
"사람이란 다 저렇게 발라맞추며 살게 마련이야."
환이 벽에 등을 기대고 한 다리를 뻗은 채 웃는다. 그리고 물었다.
"병을 앓은 지 얼마나 됐는고?"
"한 이년 남짓 됐을걸요."
"이서방은 죽는 걸 두려워하고 있어."
"다 마찬가지 아니겄소?"
"...."
"꼿꼿하기가 대쪽 겉고 초기도 초롱초롱한가 싶으면 별안간 허리가 확 꺾여 부린 사람겉이, 저래가지고는 이서방도 얼매 못 갈 기요."
얼마 후 술상이 들어왔다. 석포도 와서 술상 앞에 앉는다.
"정말로 마실 깁니까?"
강쇠가 묻는다. 술잔에 술을 치면서 석포는
"사팔뜨기 호걸이 제법 심약한 말씀이라. 자아 김장군, 우리 동학을 위하여 북만주 우리 독립군을 위하여,"
묘하게 허황하고 가장 된 것 같은 말이다. 그는 술을 주욱 들이켠다. 환이는 석포말에는 일고의 관심도 나타내지 않고 가만히 술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정말로 괜찮겄십니까?"
소심하게 상쇠가 또 물어본다.
"병이란... 좀더 살고 더 사는 것쯤 맘먹기에 다린 게야. 하기야 뭐 일이 년 더 살아본들 그게 그거지 병을 앓으면서 죽을 날 기다리는 건 사실 목에 칼 대놓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지 그게 어디 사는 건가?"
정말 병은 마음먹기에 달린 걸까, 술을 몇 잔 마신 석포 얼굴에 생기가 돈다. 착각인지는 모르지만.
"김장군."
석포 입에서 김장군이라는 말이 나오기는 오늘이 처음이다. 물론 비꼬아서 한 말이겠지만. 그간 석포는 김환을 대할 때마다 호칭을 어떻게 하 것인가 늘 거북해왔다. 거북해하는 이유는 김환의 신분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동학의 풍운아 김개주의 외아들, 최참판댁 머슴으로서 패륜의 악명 높은 존재, 그런가 하면 생모는 어는 지체 높은 양반댁 규수였다는 풍문이 있어고, 신분만 복잡했던 것은 아니었다.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서 그의 행적은 안개 속에 가려서 알 수 없었다. 양재곤을 끌어내어 동학의 잔당을 모았을 때 중추적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고, 모든 계책이 그에게서 나온 것도 사실이며, 암암리에 강한 발언권을 가졌음에도 그에게는 아무런 직명이 없었다. 일을 도모하는 데 전술적인 면으로 보아 조직의 종횡을 흐려놓은 것은 당연한 일이나 환의 동태는 어림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여 석포는 늘 호칭을 생략하고 그를 대해왔다. 그런 환에 관한 여러 가지 면을 이해 될 수 없었지만 그런 만큼 실제 이상 의 기대를 가지게 된 것도 사실이고, 그 기대는 불만으로 변하기도 했으며, 실제 이상의 의혹을 품고 경계 인물로 지목받기도 했었다. 환이는 김장군이라는 말을 시답잖게 듣는 듯 대답은 아니 하고 술을 마신다. 석포는 밀고 들어오듯이 말했다.
"내 오늘은 기필코 김장군의 얘기를 좀 들어야겠소이다."
"무슨 얘기가 듣고 싶소."
"오랫동안 함께 일을 해왔으면서도 일을 떠나서 얘기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소. 김장군의 경륜도 한번 들어보고 싶고 먼 곳을 다녀왔어도 그곳 사정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었소."
"율도국의 왕이 된 홍길동도 아니겠고 내게 무슨 경륜이 있겠소."
"그러나 강쇠 같은 사람은 김장군을 홍길동이라 생각할걸요?"
강쇠는 술을 마시다 말고 힐끗 쳐다본다.
"그래요? 홍길동은 임금한테 재롱 피우는 강아지였지요."
"허허허,"
"북쪽 나라에 대해서도 할 얘기가 없소이다. 중국, 노국 그 어느 나라든지 일본하고 박이 터지게 싸우는 게 좋다는 말밖에는."
"좀 소상히 말씀하지요."
그 말대답은 없이
"조선 놈한테 쌈 잘 붙이는 재간 있는 놈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겠소. 약자에겐 어부지리 얻는 길 밖에, 안 그렇소, 이서방?"
"네,"
하는데 석포는 눈에 띄게 풀이 죽는다.
"자아, 내 술 한잔 받으시오. 이서방한테는 김장군이요, 밭에서는 똥장군이요, 북군에서는 말장군, 마적말씀이오. 하하하핫... 뭐 그런 거지요."
석포는 입술을 문다. 화가 나서 그러는 것 같지는 않다.
"이서방."
환이를 쳐다본다. 생기가 돌던 석포의 얼굴은 종전과 같이 누리 팅팅했다.
"무슨 변화를 바라시오? 무슨일이 있기를 바라시오?"
"새삼스럽게, 다 아는 일을 왜 물으시오? 내가 무슨 일확천금의 꿈이라도 꾸는 줄 아십니까?"
"애국 애국, 민족 민족 하고 떠드는 놈치고 몽상가 아닌 놈이 없는데, 나는 여태까지 이서방을 그런 몽상가로 보지는 않았소. 꼭지가 덜 떨어진 그런 시기도 지났거니와 본시 그런 사람도 아니었는데 목에 걸린 칼이 그렇게 무섭소?"
석포 얼굴에 놀라움이 나타난다. 그리고 당황한다.
"병자만 목에 칼 걸어놓고 사는 건 아니잖소. 산다는 것은 목에 칼 걸어놓은 거요. 사는 것 아니라니까요."
"그거는 성님 말이 맞소. 항상 칼 든 놈이 뒤따라오는 것 같은 생각을 했인께요. 이서방이 허약해져서 그 생각을 많이 하는 깁니다.
강쇠가 거든다.
"무서운 게 아니요. 외로운 거요. 뭐이든 거머잡고 싶은 심정이요."
목소리는 낮았다.
"성님, 이서방 병난 연유 모리지요?"
술이 웬만큼 돌았는지 갑자기 어세가 달라지고 들뜬 것같이 말한 강쇠는 킬킬대며 웃는다.
"미친놈,"
석포는 허겁지겁 술을 마신다.
"서울서 내리온 어떤 전도부인을,"
"이 미친놈아!"
"히히힛 흐흐흣... 말도 마이소. 거 저 나이 해가지고, 꼭 선머심아이 안 겉십니까?"
"그런 게 아니요."
하다가 다시 석포는 환이를 보고,
"그 여자 때문에 병난 것은 아, 아니요. 병이 났기 때문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더군요. 술자리니께 뭐 이런 얘기 하는 편이 낫겠소."
석포는 처음으로 씩 웃는다.
"아시다시피 정한 여자도 없이, 보따리 싸서 나가고 들어오고 마 그런 형편인 것은 다 아는 일 아닙니까? 내 처지가 그러하니 바람둥이라는 것도 은폐물이었지요. 한데 병이 들고 보니 당황해집디다. 계집을 계집으로 아니 보고 물건 보듯이 살아온 내 생각이 무너지더란 말입니다. 젊은 시절 동학에 투신하여 별의별 고초를 다 겪으면서 내 열기가 그곳으로 모두 쏠린 탓으로..."
하더니 석포는 메치듯
"뭐가 뭔지 알 수 없소. 나를 쥐어짜는 게 이젠 하낫도 없지요."
석포는 폭음을 했다. 몸도 마음도 와해되어가는 과정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목마른 사람같이 무슨 일거리가 생기지 않을까, 필시 서울서 왔다는 전도부인에 대해서도 그러했으리. 발버둥을 쳐보는 것이다. 환이는 뭔지 알 수 없는 전율을 느낀다. 와해되어가는 석포모습은 동학 잔당에게 다가오는 운명인 것을 환이는 예감한다. 몇 사람이나 살아남아서 어느 물줄기를 찾아 흘러갈 것인다. 들판에는 은폐물이 없고 산속은 공격 목표하고 너무나 멀다. 도시는 동학의 것이 아니다.
이튿날 아침 석포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성님, 나 짝쇠한테 가보고 오겄소."
늦은 아침을 먹은 뒤 강쇠가 일어섰다. 3.1만세 때 옥고를 치른 강쇠의 이종사촌 짝쇠는 석포의 연비로 산청정에 와서 대장간을 하고 있었다. 장가도 들고 아이도 생기고, 여전히 어딘가 모자라는 그런 푼수였지만. 강쇠가 나가고 난 뒤 도로 자리에 든 환이는 살포시 잠이 들었다. 시커먼 공간에 달무리 같은, 날카롭고 기분 나쁜 빛이 다가오고 멀어지고, 잠결에도 그것을 피해보려고 돌아 누우면 불그죽죽하고 마치 쇠고시 썩은 것 같은 물체가 꾸물꾸물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그런 빛깔 물체와 실랑이를 하다가 환이는 눈을 떴다. 골 반쪽이 지끈지끈 쑤신다. 간밤의 폭음 탓이겠는데, 꿈도 아니요, 맑은 정신에서 본 것도 아닌 그 기분 나쁜 빛깔과 물체는 아주 좋잖은 뒷맛을 남긴다. 그것은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이란 의식의 경고인 것이다. 입맛을 다시며 모기에 물린 팔뚝을 긁고 있는데 밖에서 누구 없느냐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순사였다.
"네가 김환이지."
"..."
"너를 체포한다.."
순사는 쳐다보기만 하는 김환에게 포승을 채우는 것이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요." 환이와 함께 끌려 나오면서 석포는 중얼거렸다.
"이게 어찌 된 일이요!"
이번에는 외쳤다.
"이놈이 찔렀구나."
석포의 이놈이란 누구를 두고 한 말인지 그것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객줏집을 나간 채 돌아오지 않는 강쇠를 두고 한 말같이 환이는 생각되었다. 그들은 곧장 경찰서로 끌리어갔다.
그들이 잡혀간 것을 강쇠는 객줏집에 못 미쳐서 알았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잡혀간 그들을 두고 화젯거리를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필시, 나도 종구고 있을 기다.’
강쇠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곧장 짝쇠 대장간으로 되돌아온다. 마침 짝쇠댁네가 물동이를 들고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계수씨, 집에 누구 안 왔십디까?"
"아니요, 아무도 안 왔는데?"
"그러믄 짝쇠보고 좀 나오라 카소."
안색이 달라진 강쇠를 본 짝괴댁네는 겁을 먹으며 비실비실 뒷걸음치듯
"저어. 예, 예."
비로소 여자는 몸을 돌려 뛰어간다. 이윽고 짝쇠가 나온다. 그의 뒤를 짝쇠댁네가 주춤주춤 따라나온다. 강쇠는 손을 흔들어 짝쇠댁네한테 들어가란 시늉을 하고
"큰일 났다."
"와요."
어리둥절 하는 짝쇠 팔목을 잡고 강쇠는 급한 걸음으로 걷는다. 곧장 걷는다.
"무신 일이 있소?"
"객줏집 이서방이 잽히갔다."
"야?"
"그러니 잠시 피신해 있다가 형편을 살피자."
환이 붙잡혀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이거 큰일났소."
두 사내는 대장간과는 반대 방향으로 접어들어서 한참 쉬다가 길목 주막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온종일 그곳에 묵으면서 술을 마셨다. 밤리 되기는 기다린 강쇠는
"나가자."
"야."
두 사내는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온 강쇠는
"니는 말이다, 객줏집 근처까지 가봐라. 내일이 장날인께 필시 주변에는 장사꾼들이 나돌기다. 무신 말이든 잠자코 들어보아라. 그라고 저기 저어기 산 밑으로, 그 큰 바우 있는 곳으로 오는 기다. 와서 내가 없어도 기다리라."
"야."
하다가,
"집식구는 모리는데 이야기 좀 하고 오믄 안 되겄소?"
"거기는 내가 가볼 것인께."
두 사내는 헤어졌다.
밤이 깊어서 일러준 대로 짝쇠가 산 밑의 바위 있는 곳까지 왔을때 강쇠는 거기 서 있었다.
"집에는 별일 없더라. 그러나 나를 찾을라 카믄 그곳이 들날 기다."
"그라믄 우짤 기요."
"볼일이 있어서 며칠 못 들어온다는 말을 해놨인께 니는 곧장 진주로 가거라. 가서 관수보고 얘기하는 기다."
"머라 카꼬요."
"음... 객줏집 이서방하고 구천이가 잽히다는 말만 하고... 피신하라 카믄 알 기다."
"지금 갑니까?"
"가다가 주막에 들더라도, 다문 한 발이라도 더 떼놓아라. 자아, 여비."
하고 강쇠는 지전을 쥐어준다.
"성님은 우짤라요."
"여기 돼가는 형편을 봐야제."
함께 걷다가 두 사람은 헤어진다.
‘이상한 일이다. 성님 온 지가 사나흘밖에 안 됐는데, 그라믄 만주서 묻어온 길까?’
강쇠는 고개를 흔든다. 그러나 어떻게 알고 잡아갔는냐는 것보다 석포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었다. 관수더러 피신하라, 그 말을 짝쇠에게 이를 때 강쇠는 석포를 염두에 두었다. 과연 석포가 일경의 혹독한 고문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환이가 잡혔다는 것이 가장 큰 충격이다.
산청서 사흘 만에, 강쇠는 환이와 석포가 진주로 압송돼간 것을 알아냈다.
‘일 커졌구나.’
산청에 더 머물 필요가 없었다. 강쇠는 곧장 진주로 달려갔다. 광주리를 장에서 받아 광주리 장수로 가장하고, 그야 몸에 밴 광주리 장수였지만, 최참판댁을 찾아간 강쇠는 연학이를 찾았다. 연학의 얼굴은 긴장되어 있었다.
"우선 쪼깐이집, 그 비빔밥집에서 밥 사묵고 있으소. 내 이내 갈 것인께."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알았소."
강쇠는 엮은 광주리를 어깨에 둘러메고 돌아선다.
‘이거 끝장나는 거 아니가? 혜관스님한테는 알렸는지 모리겄네.’
쪼깐이집이 어디내고 물어서 강쇠는 찾아갔다. 마당 한구석에 짐을 내려놓고 가겟방으로 들어간 그는
"여기 비빔밥 한 그릇 주소."
서울네가 힐끗 쳐다본다. 심부름 아이가 밖을 향해
"비빔밥 하나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니, 술부터 먼저 주소. 무신 술이 있노."
아이한테 묻는다.
"소주, 정종, 탁배기도 있소."
"소주를 도라."
소주를 마시고 날라온 비빔밥을 먹으려고 숟가락을 드는데 연학이 나타났다. 강쇠가 뭐라 하려는 순간, 외면을 한 연학은
"안녕하심니까, 사부인."
"바같사돈은 안 계시네요."
"늘 점방에 계사지요. 약주 드시겠어요?"
"예 한 잔만 주이소."
그새 살이 쪄서 그런지 서울네는 별로 늙은 것 같지 않았다. 따뜻한 정종을 마시며 연학은
"지나다가 술 생각이 나서 들리는데 사돈간에 서로 보기가 어렵소."
"왜 아니겠어요. 가끔 오십시오."
연학이 수작을 하는 동안 비빔밥 그릇을 비우고 물러나 앉으며
"잘 묵었다. 꿀맛이구마는,"
하고 너스레를 떤다. 두 번째 술잔을 비운 연학은
"낮술은 과하믄 안 되지묘. 일간 또 찾아 오겄십니다. 바깥사돈한테 안부 전해 주이소."
하고 일어선다. 속으로 피차 꼬투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네, 또 오세요."
술값을 내도 받지 않았겠지만 속으로 당황해 있던 연학이는 술값 내는 일을 까맣게 잊고 나가버린다. 성냥개비로 이를 쑤시고 있던 강쇠는 부시시 일어난다. 돈을 내고 광주리 꾸러미를 주워들어 어깨에 걸머진 뒤 나간다. 연학의 뒷모습이 저만큼 보인다. 강쇠는 잠자코 뒤따라간다. 연학이는 남강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남강에는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그 아이들을 피해서 연학이는 강 하류 쪽으로 내려간다. 강쇠가 멀찌감치 따라간다. 모래밭은 뜨거웠다. 고무신에 넘쳐 들어오는 모래도 뜨거웠다. 긴장의 연속, 강쇠의 눈에서 눈물이 울컥 쏟아진다. 환이가 체포되었다는 사실이 현실로서 뜨거운 모래열기와 함께 강쇠의 가슴을 쳤던 것이다.
‘빌어묵을, 오기는 와 오노, 고만 그곳 구신이 될 기지, 오기는 와오노 말이다.’
일 그르쳤다는 원망은 아니었다. 모두 잡혀갈지 모른다는 원망도 아니었다. 환이에 대한 뜨거운 정, 그를 기둥 삼아서 살아온 자신의 생애가 가슴 저리도록 아팠던 것이다.
‘산놈으로 태이나서, 사람으로 맨들어주더마는, 이자는 다 틀린 기라.’
계속 눈물이 흐름다. 흐려진 눈에 연학의 앉는 모습이 보인다. 다가간 강쇠를 올려다보는 연학은 피시시 웃는다.
"우는 꼴 좋소. 한 두 살 묵은 아아요?"
"마 이자는 끝장이 났는가 싶구마."
모래밭에 펄썩 주질러 앉는다.
"진주로 압송된 거를 알고 왔소?"
"몰랐다믄 거기 있었제. 연학이는 우찌 알았노?"
"손을 썼지요."
"그라믄 가맹이 있단 말가?"
바싹 다가앉는다. 연학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라믄 우찌 되는 기고?"
그 말대꾸는 없이
"혜관스님한테도 알렸십니다."
"..."
"관수형님은 피신하고 석이는 평양 갔인께,"
"평양?"
"사사로운 일로 갔은께, 머 우선 이곳에 없는 기이 좋으니께요, 마침 잘됐지요."
"니는 괜찮겄나?"
"아마, 괜찮을 깁니다."
"앞으로 우찌 하믄 좋겄노. 성님이 우찌 될꼬?"
"그거는... 김선생이 가진 힘밖에는 믿을 기이 없겄소. 우떻게 안에서 요량을 하고 기신지."
"흐음..."
"환국이어머님한테 말심을 디릿십니다마는, 환국이아버님 일도 있고 해서, 참말이제. 이분 일은 집안에 머리 푼 꼴이 됐지요."
"연루될 것이 없일 긴데?"
"그러씨,"
"나는 답대비, 석포 그 사람이 걱정이다. 벵나고부터 영 사램이 갈피를 못 잡고 허약해져 있인께, 배신할 사람은 아니지마는 고문을 심하게 하믄... 환이성님이 징역살이 일이 년 하는 거사 기다리믄 되는 거지마는,"
"..."
"돌아와서도 이상한 소리를 자꾸 해싸아서 맴이 씨었는데 겔국 이런 일이 있일라꼬. 그는 그렇고 우찌 알고 그놈들이 잡으로 왔는가 그거를 아무리 생각해도 모리겄다."
"나도 그 생각은 많이 했십니다. 온 지 며칠도 안 되고, 관수형님도 내가 하동서 와가지고 이야기를 해서 알았을 정도지요. 지가 놈이 손쓸 새나 있었겠소?"
"내 생각으로는 만주서부터 따라붙친 거 아닌가 싶은데... 그렇다믄 절에서부터 당했을 거 아니겄나?"
"하여간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수는 없고 강쇠형님도 안전한 곳에 기시야 한께 가입시다."
"어디로,"
"우선 영팔이아제 집으로 갑시다."
"영팔이라 카믄,"
"형님은 모립니까?"
"잘 모리겄는데?"
"그 집에는 삼일만세 때 형제가 잽히가고는 했지마는도, 이자는 벨일 없을 기오. 임시니께."
"참, 짝쇠는 우찌됐노?"
"관수형님 따라갔소."
18장 환의 죽음
"계십니까?"
대문간에서 찾는 사람이 있다.
"누구십니까?"
머슴 배서방이 대문간으로 가며묻는다. 문을 열고 내다본다. 노타이셔츠를 입은 사내가 눈을 치뜨듯 하며 배서방을 노려본다.
"누구를 찾십니까?"
"경찰에서 왔다"
"야?"
"장연학이 있지?"
"겨, 경찰서 말입니까?" 배서방 얼굴에 겁이 더럭 실린다.
"있나, 없나!"
"예, 예, 나갔십니다."
"어디 갔어!"
"일보러 나, 갔겄지요. 곧 돌아올 깁니다."
"무슨 일보러 갔나."
"모리겄십니다."
"간 곳은 어딘데?"
"그, 그것도 모리겄십니다."
"흥, 이새끼도 도망친 거 아니야?"
"머라꼬요?"
사내는 열려진 대문사이로 고개를 쑥 디밀며 안을 살핀다.
"안주인은 있겠지?"
"마님 말입니까?"
비로서 전세를 가다듬은 병사처럼 배서방은 불손한 사내에 대하여 까끄름한 어투로 되묻는다.
"하면은 다른 안주인이 또 있냐?"
"마님은 기시요."
"내가 좀 만나보잔다고, 서에서 나온 나형사라고 해."
배서방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로 쭝얼쭝얼하며 일부러 늦장을 부리듯 안으로 들어간다.
‘마님인가 지랄인가 그 기상 세단은 여자를 어떻게 다룬다?’
담배를 붙여 문다.
‘보자고 한 건 잘못한 일일까? 도리어 코떼이는 짓 아닐까 모르겄네.’
들추다보면 어떤 결과가 될지 그것은 알 수 없으나 사실 장연학이한테 혐의가 있어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다만은 관수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하여, 우선은 그렇다.
배서방은 유모와 함께 나왔다.
"마님께서 무슨일로 오셨는지 여쭈어 보라 하십니다."
유모가 말했다. 순간 나형사는 당황한다.
"저기, 장연학에 대해서 말씀 좀 드리려고 그럽니다."
표변한 태도로 말한다. 배서방은 수문장 같이 뻐치고 서 있고, 유모만 들어간다. 이윽고 유모는 다시 나왔다.
"들어오십시오."
나형사는 손에 든 담배를 문간에 버리고 구둣발로 밟은 뒤 유모가 인도하는 데로 대청에 올라가 앉는다.
"좀 기다리시오."
유모가 물러간 뒤 아무 일도 없는 듯 집안은 괴괴하니 가라앉는다. 정적은 마치 나형사의 뺨따귀를 갈기듯 엉덩이를 걷어차듯, 그러한 조롱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천박하게 사방이 번쩍번쩍 빛나는, 이른바 새 부자의 집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나형사는 위축당하지 않으려고 양 무릎에 손을 얹은채 꾸부정했던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헛기침을 한다. 그러나 육중한 대청대들보가 머리를 누르는 것 같았다. 섬세하고 단정한 장지문 문살은 냉랭한 눈초리만 같았다. 앉을 자리에 꽉 들어찬 것처럼 엄격하게 배치된 가구며, 분명 못 올 자리에 와서 자신이 앉아 있는 것 같은, 묘한 강박관념이다. 지방의 상민 출신인 나형사 의식 속에는 아직도 명문거족, 만적 살림을 아울러 가진 그 저력에 대한 공포가 남아 있는 것이다. 어릴 적에 양반 댁에서 하정배하던 아비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나형사는 활짝 열어젖혀놓고 발을 내려놓은 후원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물을 뿌렸는지 후원의 수목은 푸르고 시원해 보였지만 불어오는 바람은 후텁지근하다.
‘제에기랄, 언제까지 기다리나.’ 하는데 기척이 나면서 하얀 모시옷 입은 서희가 안방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나형사는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쳐들고 일어서려다 만다. 서희는 발을 등지고 화문석 위에 앉는다. 자세를 바로 한 뒤 서희는 넌지시, 그러나 정면으로 나형사의 눈을 바라본다.
"죄송합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하시오."
"저기,"
형사 노릇을 하다 보니 안력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나형사는 얼음장 같이 찬 서희 시선을 이겨내지 못한다. 막상 말해보라니까 서희보고 할 말은 아닌지 모른다는 의구심도 앞선다.
"저기, 이 되게 있는 장연학이란 사람에 대해서 여쭐 말씀이 있어서 뵙자고 했습니다만,"
"..."
"그러니까, 그 사람은 이댁의 마름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집사요."
"집사라면, 집사가 뭡니까?"
서희는 쓴웃음을 띤다. 마음속으로 아주 못쓰게 막돼먹은 인간이 아닌가 보다고 가늠을 해보면서
"집의 안팎일을 내 대신 다 맡아서 하는, 시쳇말로 지배인인가요?"
서희는 의식적으로 연학의 처지를 높여서 말을 한다.
"아 네에, 마름하고 엇비슷한 일이군요. 그러면 부인의 심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막돼먹지는 않았어도 만만하지는 않았다. 오륙 년의 이력이 있는 나형사다. 그는 다음 말을 계속했다.
"그렇다면은 부인께서 장연학에 대하여 의심 같은 것 가져보신 적이 없었겠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게요?"
"아, 아니,"
"장서방이 내 소유 재산을 횡령이라도 하였다 그 말이오?"
"아, 아니올시다."
"그러면 도둑질이나 사기를 하여 지금 장서방이 경찰에 구금된 거요?"
"아, 아니,"
"그러면은,"
서희의 어세는 강했다.
"그게 아니올시다."
"그게 아니라면 어째 내게 와서 심문을 하는 게요."
"시, 심문이라니요?"
나형사는 펄쩍 뛰듯 말한다.
"만부당한 말씀입니다.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사실은 지금 불온한 일에 관련된 관계로 수배된 자가 있습니다. 그자하도 장연학이 그 사람하고 가까운 사이라는 말이 있어서, 일차적으로 그자 행방에 대하여 수소문해야했기에,"
"내 아랫사람이 범행한 것도 아닌 터에 나를 보자 한 것은 말단포졸의 횡포치고는 좀 심한 편이구먼."
"그, 그렇겠습니다만 일단은 장연학이도 의심 안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상부의 지시란 말이오?"
"아, 아닙니다. 절대로 그건 아닙니다. 장연학을 찾아왔는데 마침 없어서,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러면 돌아가시오. 일에는 순서가 있고 예절도 필요한 게요."
서희는 일어섰다. 나형사는 별 수 없이 문밖으로 쫓겨난 셈이다.
"제에기랄! 아닙니다, 아닙니다로 볼일 다 봤군."
예상한 대로 코를 떼인 꼴이라 화도 났으나 대항할 상대가 아닌 것을 실감한다. 나형사가 대문 앞에서 막 떠나려는데 저만큼, 발이고운 삼베 고의적삼에 흰 모시 조끼, 회색 대님을 친 연학이 보릿짚 모자를 쓰고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봐!"
나형사는 저도 모르게 악쓰듯 고함을 친다. 연학은 힐끗 한번 쳐다보고는 시답잖다는 듯 걸음을 빨리하지 않았다.
"부르는 소리가 안 들려!"
"귀머러기는 아닌께요."
다가왔다.
"제에기랄! 어디 갔다 오는 게야?"
"그건 와 묻소?"
좁은 지방이라 인사하고 지내는 처지는 아니지만 서로 면식은 있다.
"물을 만하니 묻는 게지."
"거 너무 그러지 마소. 엇비슷하게 나일 묵어감서 반말할 것까지는 없일 성싶은데요?"
장연학은 화가 난 얼굴이디.
"대관절 이 집터가 어떻게 돼먹었기에 입김들이 그리 드세나. 하인까지 이 지경이면 용꼬리라도 묻혀있는 거 아니야?"
"하인? 뉘보고 하는 말이오?"
"그럼 하인 아니던가?"
"실없는 소리 마소. 나형사가 계속 반말을 하믄 친구건니, 나도 반말 해야겄고."
"좋소. 그러면 내 동대하지. 장서방, 어디 갔다 오는 거요?"
해놓고 나형사는 피식 웃는다.
"장작을 딜이야겄기에 강가로 나가봤더마는 나뭇배마다 성냥개비 겉은 거만 있어서 그냥 돌아오는 길이오. 이러믄 됐소?"
"음, 여기 서서 얘기할 수 없고 서장대로 올라갑시다."
"무신 얘긴데 그러요?"
연학은 초조한 마음을 털끝만큼도 내보니지 않고 나형사를 따라 어슬렁거리듯 서장대로 올라간다. 바람 쐬러 나온 사람들이 없지 않았으나 그런대로 서장대는 한적했다.
"장서방."
"말하소."
"장서방은 무슨 단체에 가입한 일 있지요?"
"단체라 카믄, 가만있자, 단체라... 그런 일 없는데요?"
"독립 운동하는 단체 말이오!"
비수를 들이대듯, 그 순간 나형사의 눈살이 실뱀같이 물결친다.
"머라꼬요? 그, 그런 기이 어디 있소? 사람 간 떨어지게 그런 소리 마소!"
연학은 내심 경악했다. 당황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낭떠러지 아슬아슬한 곳에서 몸을 날려 안전지대로 내려서듯 당황한 그 자체를 역이용한다.
"살다가 별꼴 다 보겄네. 그런 일을 저저이 다 할 수 있일 기든가? 내가 할 수 있다믄 나형사라고 못할 게 없제. 그따우 실없는 소리는 집어치우소."
"그러면 형평산가, 그 단체하고는 관련이 있는 거지요?"
"내가 와요? 머가 답답해거 새 백정 소리 들어감서 그 짓을 할기요?"
나형사 눈이 풀리면서 실실 웃는다.
"에이 여보시오! 그런 말, 만에 일이라도 최참판댁 귀에 들어가믄은,"
"마님 아니구먼."
"사람 우습게 보지 마소. 알고 보믄 당신도 대접이 좀 달라질 거로요."
"그럼 좀 압시다."
"아까도 하인 어쩌고 하길래 내 돋는 것을 억지로 참았소만, 여수의 장아무개 하믄 모릴 사램이 없고 어장배가 수심 척, 이름난 부자가 내 큰아부지요."
"그렇담 우습군. 뭣 때문에 최씨네 일을 보아주나."
"내 아부지가 그렇다믄 남의 일 보아주겄소? 한 다리가 천리라고, 그러나 그보다 의리가 있인께."
"의리라면?"
"옛날부터 내 부친이 그 댁 땅덩이 오고 가는데 참니를 했이니께요. 말하자믄 거간인데 팔거나 사거나 그 댁에서는 내 부친 이외 딴사람한테 맽기지 않았소. 그것도 그렇고, 말이야 바로 하지, 실상 의리라는 것도 실속이 없이믄 지키기 어러분 것 아니겄소? 시쳇말로 지배인이라 카믄 과히 나쁘지 않고 수입만 하드라도 은행 서기보다 월들한께 큰아부지 도움이야 내 급할 때 쫓아가믄 되는 기고,"
"아주 큰 보따리 푸는구먼."
"아, 만석이 넘는 큰살림인데 그 재산 관리가 적은 일이오?"
"그 얘기는 그 정도로 하고 당신 송관수 간 곳 알지?"
"가기는 어디로 가요?"
"음흉 그만 떨고 나중에 며칠 경칠 때 후회한들 소용없으니,"
나형사의 눈살은 다시 실뱀같이 흔들린다.
"그라믄 관수 그 사람이 이곳에서 떴다, 그 말이오?"
"어허! 왜 이러나, 응?"
"영문도 모리는 사람한테 다짜고짜로 이러믄 우짜요?"
"정말 몰라?"
"알고 모리고가 어디 있겄소. 대관절 무신 곡절이오? 형평산가 먼가 그것 땜에 그러요?"
"그런 것은 알 것 없고 송관수하고는 어떻게 된 사이지?"
"여보시오, 나형사."
연학은 노기를 띠고 나형사를 노려본다.
"내가 도둑질을 했단 말이오? 강도짓을 했단 말이오? 살인을 했소? 아니 할 말로 독립운동을 했소? 나는 그 흔한 예수쟁이들 찬송가도 불러본 일이 없단 말리오! 죄인 추달하듯기, 반말로는 대 대답 못하겄소."
화를 버럭 낸다.
"아, 알았소. 버릇이 돼서, 하하핫..."
"오며가며 서로 면대하고 지내는 처지, 그러는 기이 아니라요. 당신이 칼 찬 순사보다 높은 줄을 아요만, 죄 없는 백성한테까지 마구잡이로 굴라는 법은 없인께."
"내가 잘못했소. 송관수 그놈을 못 잡고 보니 나도 모르게 신경질이 된 모양인데, 자아, 송관수에 대한 얘기나 해주시오."
"그야 머 어럽잖지요. 그 사람은 본시 백정은 아니었소. 장돌뱅이 아들이었지요. 아까 나하고 우떻게 된 사이냐고 물었는데 좀 대답하기가 어렵구마요. 친구간이랄 수도 없고 호형호제하는 사이랄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고향 사람이랄 수도 없으니 말이오."
"그럼 대체 뭐요?"
"그러니께 내 본가가 하동인데, 관수 그 사람 옛적에는 아비랑 마찬가지로 장돌뱅이였소. 우리 집이 장터에 있기 때문에 내 어릴 적 에는 장날이믄 관수 그 사람이 우리 집 앞에 전을 폈지요. 우리 집이야 거간이지 장삿집이 아닌께 난전을 쫓을 까닭도 없고, 그래 그랬던지 나한테 엿도 사주고 떡도 사주고, 예적 일이지요. 그러고는 까맣게 잊었는데 뜻밖에 여기서 만났지 멉니까? 고향 사람은 아니지마는 머 비슷한 처지고 보니 만나믄 더러 술도 마시고,"
"알았소. 송관수에 대해서 아는 대로 얘기 좀 해주어야겠소."
"아는 기이 머 있겄소. 처지가 처지인 만큼 좀 상종하기가 어렵지요."
"어렵다면?"
"백정의 일이라 카믄 비늘만 거슬리도 천길 만길 뛴께, 말조심 안하믄은 대가리 깨질 판국이지요. 그래서 피할라 카믄 또 거머리겉이 달라붙어서 백정이 사는 술은, 머 그것도 심술이겄지마는,"
나형사는 입맛을 다신다. 신경질을 내려다 참으면서
"살기는 넉넉한 편 아니오? 집안 살림의 푼수는 어떻소."
"그러씨요. 어럽지는 않는 모앵입니다마는 자세한 내막이야 모리지요. 집에 가본 일도 없고 집에 가자는 소리도 못 들었인께. 나도 아닌 게 아니라 밥술 떨만하믄 잠잠히 있지 쌈에는 와 끼여드노 싶기도 했소. 사실 농청하고 백정들의 그 충돌이 좀 심했소? 백정하고 이야기만 해도 농청 쪽에서 쌍불을 키는데, 그러나 그 사람ㅁ들한테 못을 걸거나 원한을 사도 그거 좋은 일 아니거든요. 백정이 무서분 거는 나형사도 잘 아는 일 아니오? 니 죽고 나 죽겠다는 대는
당할 재간 없인께. 소 잡는 백정이 사람인들 안 때리잡겄소?"
"아따, 약기는,"
상대가 형사라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듯 마치 친구지간인 것처럼 차분하게 얘기하는 연학의 분위기는 말려든 나형사는 다소 친근해진 투의 말을 던지고 나서
"하여간에 골치 아프게 생겼어. 이놈을 어디 가서 잡아오지?"
"..."
"웃대가리들 날이면 날마다 불호령인데 형사징 해먹기도 어려워. 수십 척 어장배 가진 부자한테나 태어났더라면,"
"일본 유학이나 했겄지요."
"장서방 사촌들은 유학했다 그 말이오?"
"모두 나보다 나이 많은데 유학은 무신, 조카들은 보내겄지요."
나형사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연학의 눈이 날카롭게 나형사 등바닥을 쏜다. 그러나 이내 사람 좋고 고지식한 표정으로 돌아간다.
"그놈을 잡아야 일의 실마리가 풀리는데 이래가지고는 오리무중, 어디 단서가 잡혀야 말이지. 화통 터져서 못 살겠다."
"화통 터지는 거는 술로 달래야지요.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자 안할라요? 새귀놓고 보믄 피차 손해볼 것 없일 성싶은데,"
"그럴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바빠서 오늘은 가봐야겠소."
연학을 돌아보며 과히 기분 나쁘지 않다는 듯 나형사는 웃는다.
"그럼 요다음에 만납시다. 나는 먼저 가야겠소."
손을 쳐들어 보이고 나서 나형사는 급히 서장대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가면서 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곤 한다. 나형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연학은 중얼거린다.
"네놈을 잡아묵으까 우찌 하까?"
고등계에는 연학과 줄이 닿는 형사가 하나 있긴 있었다. 오륙 년 전 홍이가 하동서 진주경찰서로 넘겨졌을 때 약을 먹여놓은 사람인데, 그 동안 부산으로 가 있다가 요즘 다시 진주로 돌아온 오형사, 그러나 연학은 이번 사건을 위해 그에게 접근하지는 않았다. 홍이의 경우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홍이 진주로 넘어왔을 때는 이미 혐의가 없다는 그네들 심증이 있었고 사실 캐봐야 캐낼 건더기, 근거가 없었으니까 형사를 매수하는 데 위험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표면상으론 오늘 나형사가 찾아옴으로써 그것도 막연하게 들나기 시작한 것이지만 저변에는 어마어마한 일들이 깔려있는 것이다. 냉정하게 차단하는 방법 이외 도리가 없다. 그런만큼 연악은 무슨 영문인지 모른다는 연극을 당분간 지속할 필요가 있고, 이쪽에서 접근해서도 안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보를 캐내려는 행동은 더더구나 금물인 것이다. 하여 연악은 오형사와 아는 사이라는 말을 나형사 앞에서 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앞으로 사태변화가 있을 적에 오형사를 이용할 생각은 없었다. 만일 필요하다면 다른 대상을 물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등계의 형사는 약을 먹이기도 어렵거니와 만약 먹었다 하면 연학의 독백처럼 잡아먹히는 꼴이 된다. 환이와 석포가 진주경찰서로 이송된 정보를 알아낸 것은 연학이 하동서 가족을 데려와 살림을 차린 봉산정집 뒷집에 세든 윤순사에게서다.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매수한 것은 아니었다. 평소부터 친해둔 터이라 눈치 채지 않게 교묘히 유도해서 얻어낸 정보였다. 연학은 서장대를 내려오면서 관수와 친한 사이라는 말이 김두만이 입에서 나온 것을 짐작한다. 그러나 괘씸하다는 생각보다 오히려 안전하다는 결론을 먼저 내리는 것이다. 그것은 관수와 연학이 친하다는 것 이상으로 나형사가 알지 못한다는 것이 명확했기 따문이다. 관수와 자신에 대하여 감정이 좋지 않았던 두만이가 얼씨구나하고 내뱉었겠지만 다음 순간 그는 후회했을 것이다. 수십 척의 어장배를 가진 거부, 여수의 장서방을 적대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 한 말을 후회했다면 앞으로는 말조심을 할 것이요, 또 최참판댁 일만 하더라도 두만이는 이미 진주서 유지로 자리를 굳혔으며 경찰의 간부들과도 교류가 있는 만큼 동의 집안이라는 약점을 들내지 않기 위해서 관여 않을 것이며, 의리를 중히 여기는 어미의 압력도 고려에 넣을 것인즉, 생래의 약고 제 앞가림에는 절도가 있는 위인이라, 연학이 그 점 저 점을 종합하여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한편 경찰서 유치장의 환이는 연일 계속되는 심문과 고문에 시달리어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마룻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고문보다 금식(禁食) 때문에 그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가고 있는 것이다. 의식은 맑았다. 방금 절도범의 코를 핀셋으로 집어서 장난삼아 끌고 나가던 왜형사 소노의 유들유들한 얼굴을 뚜렷하게 보았고, 연신 울려오는 밖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도 똑똑하게 들려온다. 핀셋에 코를 집힌 절도범이 어기정어기정 소노가 가는 대로 따라 걷는 모습, 그것을 보고 웃는 경찰서 놈들, 하기는 고춧가루 탄물을 콧구멍에 들이 붓는 일보다 훨씬 고마운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 절도범은 자백을 했고 조서도 꾸몄으며 감옥에 넘어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억울한 덤이다. 높다란 곳에 뚫린 철창문 사이로 구름 한 송이가 지나간다. 환의 눈이 오랫동안 구름에 머물다가,
‘죽기는 잘 죽었다.'
눈을 감는다. 고문과 신병으로 석포가 죽은 것은 어제 일이다.
"나, 나는 모르오. 지, 진주 있는 송관수한테 물어보소."
고문에 못 이긴 석포 말에 관수가 체포 대상이 되었고, 관수를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가족은 물론 환이와 석포는 더욱더 큰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석포는 어제 숨을 거두었다. 환이는 이제부터 자신에게 가해질 고문의 손길이 늦추어질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어쩌면 단서를 잡지 못할 때 석방을 결정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무혐의로 낙착 짓지 않는 한 그것은 견디기 어려운 궁지임은 뻔한 것이다. 입을 열게 하기 위하여 살려두는 것이나, 연루를 찾기 위해 놓아주는 것이나 다 마찬가지로 환이에게는 진퇴양난이다. 그렇다고 해서 환이 그럴 경우를 심각하게 생각해보는 것은 아니었다. 체포되는 순간부터 살아서 나오리라는 희망을 그는 버렸던 것이다. 어쨌거나 환이는 석포 죽음에 대하여 뼈에 사무치는 서글픔과 햇볕 못 본 그의 생애를 애도했으나,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홀가분한 마음이 된 것도 사실이다. 석포와의 동행은 마지막의 오기를 꺾고 말았다. 석포를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사건이 심상찮음을 왜경에게 입증하는 것이며, 따라서 석포에게는 주사를 찔러가면서도 살아남게 하여 기름 짜듯 짤 것이요, 피해는 확대될 것이기 때문이다. 말할 입은 석포의 죽음으로 닫혀버렸다. 눈치 채지 않게 금식함으로써 서서히 죽어가든 아니면 혀를 물고 죽든 이제는 홀가분하게 된 것이다. 아주 홀가분하게. 뒷일을 위해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 죽음이 적절할 테지만 사세 여하에 따라 자살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죄상을 내놓은 기결로 가서는 절대 안 되기 때문이며 오로지 미결, 영원한 미결, 무혐의는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이 있을 뿐인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구름송이가 지나가던 높다란 철창문에 노을이 타는데, 온종일 환이를 불러내가지 않는다. 어젯밤에도 불러내가지 않았었다. 노을이 타는 철창문을 바라보다가 환이는 다시 눈을 감는다. 홀가분하다. 말할 수 없이 홀가분한 것이다. 그러나 마음 밑바닥에서 불어오는 차디찬 바람은 무슨 바람인가. 모골을 쑤시는 것 같은 허무.
'더 늙으면 추해진다.'
눈을 뜨고 노을이 타는 철창문을 또 바라본다. 생애를 통하여 철창문에 비치는 저 노을만큼 아름다운 것을 보지 못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조용히 다시 눈을 감는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환이는 자신의 생애가 성인의 길이 아니었음을 새삼스럽게 생각한다. 투쟁과 방랑, 애증과 원한의 가파로운 고개를 넘은, 평지가 오히려 발끝에 설었던 오십 평생은 마음과 몸이 피로 물들었던 것처럼 격렬했었다. 환이는 무엇 때문에 살고 죽는 것인지 그것을 생각한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게 여장을 다 꾸려놓고 떠나기만을 기다리는 그 얼마 남지 않았을 시간에 열리지 않을 벽을 두드려 본들 모슨 소용인가. 눈을 감은 채 환이 싱긋이 웃는다. 여러 해 전부터 진달래꽃의 여인은 꿈속에 나타나지 않았다. 자신의 저고리를 벗어 시체를 싸고 묘향산 골짜기에 묻어버린 여자, 묻고 나서, 지나간 지상의 세월은 여자와 더불어 영원히 사라진 바람인 것이며, 영겁의 세월이 흐르고 있을 저 머나먼 곳에서 여자를 다시 만날 수 있는가고, 환이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았던 푸른 은빛의 그 밤하늘.
'그 꽃 따서 화전을 만들어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여자의 목소리는 진달래꽃 이파리가 되고, 꽃송이가 되고, 계속하여 울리면서 진달래의 구름이 되고, 진달래의 안개가 되고, 숲이 되고, 무덤이 되고, 붉은 빗줄기, 붉은 눈송이, 붉은 구름 바다, 그 속을 걷고 있다는 환가에 빠져 쓰러지면은 꿈속에서 오열하였고 꿈속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처음에는 번번이 꿈속에서 울었고, 몇 달 만에 한 번씩 몇 년 만에 한 번씩, 그리고 삼십여 년 세월이 흘러서 지금은 꿈속의 울음을 잊었고 여자도 잊었다. 지금은 꿈속도 아니요 진달래의 눈보라, 붉은 빗줄기, 구름바다의 환각도 아닌데 환이는 눈을 감은 채 오열한다. 눈물도 아니 흘리고 몸짓도 아니 하면서 환이는 통곡하는 것이다. 만주 벌판 마적단에 사로잡혀 두목의 두호를 받으며 그들과 행동을 같이하였던 우스꽝스런 세월, 상해거리를 아편쟁이 거지처럼 헤매던 세월이며, 포부는 있었으나 그 세월은 이미 가을이었다. 연해주를 건너가 권필응을 만났을 때 환이는 더욱더 짙게 가을을 느꼈다. 권필응의 주름진 얼굴에서 지난날 보았던 이동진의 모습이 어른거렸던 것이다. 그 수많은 독립투사 애국열사들의 마지막 운명의 그늘이 권필응만 피해가는 것은 아니었다. 나라가 없는데 발바닥 몇 치, 안좌할 곳이 어디 있었겠는가. 뛰어야 하고 뛰지 못할 때 냉엄한 것은 인심 탓이 아니다. 망명의 풍상은 눈물을 마르게 하고 사정은 누구나가 죽이고 왔으니 말이다.
"마적질 할 만하든가요?"
함께 술을 마시다가 권필응이 웃으며 물었다.
"할 만하더이다. 화적떼 출신인 줄 모르셨소?"
"그랬던가요? 하핫핫..."
두 사내는 공허하게 웃었다.
"신라 놈들이 못나서 빼앗긴 그 땅인데, 아직도 우리 것이라면 못해도 장작림, 설마한들 김형이 마적의 종자 노릇이야 하였겠소?"
"죽은 자식 고추 만지는 격이지요."
"신라의 경우를 우리 역사상 오류라 지적한다면 일본의 대륙 진출을 비난하기도 어렵고, 아전인수로밖엔 논리가 성립되지 않을 것 같소. 먼 앞날을 내다볼 때 민족주의라는 것도 한낱 고물이 돼버리지나 않을는지..."
권필응은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권필응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환이는 모르지는 않았다.
"핏줄이란 본능인데, 생명이 있는 한 애비 어미를 부정할 수 있겠소?"
"그렇지요. 문제는 거기서 잘라버려야 할 게요. 우리는 철학자가 아니니까,"
"성인도 아니구요. 저승에 가면 아마 바늘산으로 내몰릴 거요."
두 사람은 껄껄걸 하고 한바탕 웃어젖혔다. 모스크바에서 불어오는 바람, 민족주의자 권필응이 인터내셔널의 고개를 넘기 얼마나 어려운가를, 연해주에 거주하는 독립지도자 권필응은 나이에서보다 그 양편의 갈등으로 하여 급속하게 구세대로 탈락되어가는 것을 환이는 느꼈다. 이동진보다 훨씬 앞섰던 사람, 기존 가치를 깡그리 부정했던 과격분자 권필응, 그는 공산주의자는 될 수 있었을지언정 민족주의, 독립에 대한 갈망만은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마적놈들이 쉴새없이 들쑤셔주어야 하는데, 왜놈과 내통을 하든 아니 하든 왜놈 군대를 대륙 깊숙이 끌어들여 불을 질러야,"
"중국인들이 들으면 김형을 타살하려 할 게요."
"뭉개고 있다고 해결이 나겠소?"
"..."
"어차피 어느때든 치러야 할 일이라면 빨라서 나쁠 것 없겠지요. 상대가 쇠하기를 바라고 싶겠지만 바람이 차서 절로 터지는 불통은 아닐 테니까, 차라리 그리 되면은 국공합작이다, 봉천토벌이다 할 것도 없고 내 잘났다 너 잘났다, 쫓고 쫓기는 그 대가리들도 별수 있습니까? 손잡을 도리밖엔,"
"그럴까요? 쉬운 일일까요? 변절자도 함께 사는 이 대륙의 특성을 김형은 모를 게요. 땅덩어리가 좁은 조선이나 일본의 신경질적인 결벽증하고는 양상이 딴판이오. 우리네들은 목적을 위해 과정에 대해서는 비정해져야 한다는 다짐이 필요하나, 그들은 목적을 위해 과정을 대수롭게 여기질 않는 편이라 봐야 할 게요. 신해혁명을 전후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수많은 혁명가, 집권자까지 숙적인 일본을 등에 업고자 한 사람들을 얼마든지 예거할 수 있지요. 장작림을 보시오. 어차피 왜놈 손에 갈 게요만,"
"장작림이 뒈지든 어쩌든 그건 남의 집 사정이고, 러시아, 중국이 일본의 출병을 송충이같이 싫어하는 것도 작금의 일이 아닌데 따지고 보면 그것도 미봉책에 불과한 거지요. 아무튼 조선은 중일전쟁이든 노일전쟁이든 전쟁 없이는 결과가 나지 않소. 지난날 청일전쟁, 노일전쟁의 결과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니 또 다시 중일전쟁, 노일전쟁으로 빚을 갚아주어야 하는 게요."
"그 결과가 문제지요. 해서 우리 자리가 필요한 건데... 결국 사람과 돈 아니겠소? 내국의 성금은 기대할 게 못되고 중국과 소련에서 짜내는 것이, 그러나 중국은 자중지난이요, 소련은 흑하사변에 데었으니, 허허헛... 김형 말씀대로 전쟁에 기대해볼밖에 없구려. 우리도 함께 피를 흘리는 전쟁 말씀이오."
길상은 또 이런 말을 했다.
"중국만 자중지난이겠습니까? 내 나라도 잃은 주제에 우리 쪽은 어떻고요? 그러나 저는 희망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정치나 지도자들이 그 지랄발광이라도 백성들은 자라고 있으니까요. 문물이 발달하는데 인성이 발달 안 하겠습니까? 세계대전 후, 자중지난 속에서도 중국은 상당한 국력을 회복했으니까요. 자란 것이 어떻게 자리를 잡을 것인가, 그때 지도자의 역할이 큰 것 아니겠습니까? 민중은 지도자가 키우는 게 아니라 생각합니다. 스스로 크는 거지요. 저는 중국이나 조선이 결코 정복되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
환이는 몸을 돌린다. 창살문 밖이 캄캄했다. 꿈속에서 울다가 깨어난 것처럼 목이 꽉 잠긴 듯했고 가슴은 맷돌에 짓눌린 듯 답답하다.
"저놈 눈깔 보통 아니야. 이건 의외로 큰 수확인지 몰라. 여간해서 저새끼 입 열지 않을 게야. 그러나 두고 보면 알게 된다."
고등계 주임은 계속 내리깔거나 눈을 지레 감고 있는 환이에게 그런 말을 했다. 눈깔이 보통 아니라는 그의 말은 직감에서 온 건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환이 고문을 당하지 않았다. 고문과 심문은 이석포에게 집중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얻어낸 것이 송관수의 이름이었다. 환이 고문과 끈질긴 심문을 당하기로는 관수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한 데서 시작되었다. 도둑질을 했다든가 살인을 했다든가 그런 답변에는 증거 제시가 뒤쫓아 오고, 그러다보면 오히려 시끄러워질 것인즉 환이는 계속 묵비권을 사용할밖에 없었다. 사실 호적도 없었고 어디 기재된 주거지도 없었고 연고지는 입을 다물고 있는 이상, 물론 호적이 있고 기재된 주거지가 있다손 치더라도 묵비권을 행사하는 한 알 도리가 없는 일이지만,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설사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간주한대도 환이로서는 이런 경우 빠져 나가기 위해 어떤 교묘한 재주를 부린들 그게 함정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어느덧, 유치장의 빨가숭이 전등이, 파리똥이 무수하고 거미줄이 늘어진 천장을 비춰주고 있었다.
'장횡거는 우주의 본체를 태허라 했다. 태허는 기체로서 기에는 음양이 있고, 기가 응결하여 고요함이 음이요 기가 흩어져서 움직이는 것이 양이라, 하여 만상은 음양이기의 부침승감이며, 모여서 만물이 되고 흐트러져서 태허로 돌아가며 생멸은 불증불감이라. 허허헛... 허허헛... 귀신은 음이요 신은 양이라 하였던가?'
장횡거는 중국의 철학자, 송대의 사람이다. 그가 즐겨 병사를 논함을 보고 범문공이 그의 재주를 아껴 중용을 내어놓으며, 유생은 높은 가르침을 즐길 것이어늘 어찌하여 군변의 담론으로 일을 삼느뇨 하고 꾸짖었기 때문에 대오하여 학문에 전념했다 한다.
환이는 갑자기 왜 장횡거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생사의 벽을 생각다보니 장횡거의 태허설이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귀신은 음이요 신은 양이라...'
묘하게 환이는 그 말에 매달린다. 오십년 생애에 수많은 사람들과 작별을 하였다. 이제 작별하였던 사람들에 대한 추억이나 그리움하고도 작별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전주 감영에서 효수된 부친, 제삿날 밤 무덤을 찾아갔었던 무덤 속에 잠든 모친, 묘향산 골짜기의 불여귀 같은 여자, 생애를 피로 물들였던 그 사람들의 추억도 버리고 가야 하는 것이다. 영겁의 세월이 흐르고 있을 저 머나먼 곳에서 여자를 다시 만날 수 있는가,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았던 푸른 은빛 그 밤하늘이 아직 가슴에 있어서 환이는 귀신은 음이요, 그 말에 집착해보는 것일까. 귀신은 음이요 신은 양이라, 음양의 이기가 굴신하여 자연의 묘용천지만물을 낳게 한다면 환이는 여자를 꽃이 되게 하고 자신은 나비가 되고자 하는가. 아비, 어미는 길 잡아주는 도요새가 되고 자신은 새끼 도요새가 되어 머나먼 창공을 날자 하는가. 아니면 불륜, 패륜의 어미와 아비와 여자와 자신이 손잡고 피 흘리며 바늘 산을 걷고자 하는가.
한밤중이다. 유치장의 문이 열렸다.
"김환이 나와."
환이는 엎드린 채 꼼짝 않는다. 다른 잡범들은 잠에서 깬 모양인데 숨을 죽이며 자는 시늉이다. 형사가 들어와서 환이를 일으킨다.
"기운 없어?"
어조가 부드럽다.
"자, 내 팔 끼라구."
"어디 가는 거요?"
"여기는 냄새도 나고 더러우니까 깨끗한 독방으로 간다. 대우해주는 거야."
"그래요?"
이끌리어 방을 나가면서 환이는 돌아본다. 실눈을 뜨고 쳐다보는 잡범들을 향해
"잘 있게."
독방에 들여주고 형사는 가버렸다.
"흠, 이젠 밥 줄 사람도 없군."
그간 취조관들은 환이 금식하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금식이라고는 하지만 아주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속이 안 좋다는 변명을 하며 아주 소량만 취했을 뿐 잡범들한테 나누어주곤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금식이라기보다 감식이라 해야 옳겠다.
"허허헛... 허허허허어헛... 이 날 대우해주는 거라구?"
이튿날 아침, 환이는 스스로 목을 졸라서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