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3부 제3편 태동기
1장 동행
"선생님."
신문으로 얼굴을 덮고 코를 골면서 자는 서의돈을 대학생 차림의 청년이 흔든다.
"용산입니다, 선생님."
"알고 있어."
퉁명스럽게 대꾸는 했으나 움직이지는 않는다. 맞은편 좌석의 중늙은 사내가 짐칸에서 보따리를 꺼내며 성급히 하차준비를 한다. 대전에서 탄 중늙은이와 동행인 젊은 여자는 병자인 듯 줄곧 신음 소릴 내곤 했었다.
"개새끼들!"
내뱉으며 신문을 접고 몸을 일으킨 서의돈은 걸레를 짜듯 신문을 비틀더니 바닥에 획 던진다. 눈은 핏발이 서서 시뻘겋고 험했다. 늙은이가 움찔하며 쳐다본다. 대학생 차림의 청년은 쓴웃음을 띤 채,
"헤이죠오구리이(평양밤)!"
기계로 찍어낸 것 같은, 꼭같은 말을 되풀이 되풀이하며 다가오는 열차 판매원의 입모습으로 시선을 옮긴다. 눈꼬리는 위로 치올랐고 광대뼈가 솟은 탓인지 양 볼이 다소 꺼진 것이, 일별할 적에는 여우상이라고나 할까, 냉정하고 날카로운 용모다. 그러나 청춘의 감미로운 분위기를 짙게 풍기는 청년은 선우일의 동생 신이었다. 영문학이 전공인 서운신은 동경 Y대학 문학부에 재적중이며 여름방학 때는 동경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거의 일년 만의 귀국인 셈이다. 서의돈과 함께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자면, 그러니까 지난 팔월, 중순도 지날 무렵의 일이었다. 선우일한테서 주소를 알았노라 하며 뜻밖에 서의돈이 하숙을 찾아왔던 것이다. 보따리 하나 달랑하니 들고 옷은 땀에 젖었으며 초라한 작은 체구하며 조선서 모집해온 노무자의 꼴과 흡사했다.
"나 이삼 개월 신셀 져야겠다. 밥값 내면 되겠지?"
그러나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선우신이 묻는 말에는 대꾸가 없었다. 형의 선배요 서울 있을 때는 자주 집에도 찾아와 익히 알고 있는 처지고 보면 다다미 석 장의 좁은 방에서 공부에 지장은 있겠으나 선우신으로서는 그러라할밖에 없었다. 다행히 경위 바른 하숙집 여자가 두 사람분의 식비를 생각하여 다다미 넉 장 반의 좀 넉넉한 방을 내어주기는 했었지만. 한데 서의돈이 온 지 며칠이 안 되어 구월 초하루, 정확히는 열두시 경 별안간 집이 흔들리면서 시작된 것이, 동경을 쑥밭으로 만든 그 관동대지진 이었던 것이다. 동경, 요코하마, 미우라 반도를 휩쓴 지진, 화재는 지진의 속성인데다 마침 점심때여서 집안에 불기가 있었고, 또 대부분 목조건물인 탓으로 시가는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했던 것이다. 아비규환으로 몰아넣은 그 무시무시했던 재난이 일본인들에게 악몽이었다면 재일 조선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아니 되는 조선인 살육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조선인들과 사회주의자들이 혼란을 틈타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사실무근의 유언비어에 선동된 군중이 불탄 거리를 몰려다니며 죽창, 곤봉, 갈고리, 식칼까지 꺼내들고 닥치는 대로 조선인을 참살했던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었다. 경찰서에서, 연병장에서, 공장에서, 총으로, 일본도로, 혹은 총검으로 수백 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한 것이다. 서의돈과 선우신은 함께 그 참상을 목격했으며 신변의 위협을 느끼기도 했으나 대향이 죽지 않고 살아서 지금 서울 향한 기찻간에 앉아 있다. 어떤 일인 식자는 미친 군중이라 했다. 그러나 군중은 미쳤을는지 모르지만 일본의 위정자는 지극히 예리하고 정확한 판든을 한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의 민중선동으로 일어날 폭동을 예상한 위정자들이 유언비어의 바로 근원인 까닭이다. 배고픈 이리들의 사나운 이빨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양을 내던진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의 선동으로 미칠 군중을 앞질러서 조선인 학살로 미치게 하여 혼란의 물줄기를 돌려놓은 그들의 계산이야말로 민첩하고도 정확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천이 넘는 조선인들의 목숨 따위, 그들에게는 양이기는 커녕 빈대로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속력을 줄인 기차는 기적을 울리며 용산역 홈을 향해 들어가고 있었다. 전등 빛과 냉기와 밤안개가 떠도는 공간에 역원과 아까보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보인다.
"개새끼들!"
또다시 서의돈이 뱉어낸다. 목소리는 낮았다. 서우신은 무릎에 팔꿈치를 괴며 머리를 붙안고 바닥에 눈길을 떨어뜨린다. 서울에 가까워질수록 서글픈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늙은이의 짚신과 무명옷에는 걸맞지도 않는 여자의 지단신을 내려다보며 선우신은 어제 부산서의 일을 떠올린다. 개새끼들! 뇌면서 바다를 향해 침을 뱉는 것은 서의돈과 선우신이 거의 동시에 취한 언동이었다. 연락선에서 내린 부산부두, 두 사람은 어처구니없는 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꼬릴 감추고 도망온 주제에,"
서의돈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주린 배창자에서 나는 소리처럼 서의돈은 끼룩끼룩 웃었다.
"내 집 문전에 와서 짖어대는 우리야말로 개새끼치고도 똥개다. 안 그래, 선우야?"
"맞습니다."
하고 둘은 소리 내어 웃었다.
"어서 나가자. 술이나 들이부어야지. 못 견디겠어."
"그거 좋지요."
부두에서 빠져나온 두 사람은 술집을 찾아들면서 또다시 개새끼들! 하며 동시에 침을 뱉었다.
"이거 왜 이러지? 일심동체도 아니겠고."
"이심전심 아니겠습니까."
"자네 조선사람인가?"
"틀림없는 조선 종자지요."
"거 이상하군. 피둥피둥하니 말이야."
두 사람은 신이 들린 것처럼 주점 앞에서 또 웃었다.
"희극이 비극보다 어려우며 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런 얘기를 들었는데 선생님, 비로소 실감할 것 같습니다."
전등 빛이 휑뎅그렁한 주점에서 술잔을 움켜쥐며 선우신은 말했다.
"미친 것처럼 희극적인 것이 어디 있을라구."
"네, 실성한 사람도 우는 것보다 웃는 편이 고치기 어렵다고도 하구요."
"덜 서러워야 눈물도 난다 하든가? 저기 보아, 눈감고 젓가락 두드리는 친구 말이야. 실성 아니면 환장이다."
"실성은 아닌 듯하고 아마 환장인 모양입니다."
"청루에다 딸이나 팔아먹었나? 아니면 땅문서 놓고 노름하다 고향을 등진 걸까?"
"오십 보 아니면 백 보겠지요."
"가락도 없는 젓가락 장단, 희극도 가지가지라."
"가지가지... 제아무리 영웅호걸이라도 달아나는 모습에는 비극보다 희극적 요소가 더 많은,"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의돈은 마시던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우리가 영웅호걸 아닌 것만은 확실하지마는, 그렇게라도 자위하는 것은 아주 퍽, 유익하다. 특히 문학도인 선우신에겐 말이야. 아암, 그래야지. 따지고 보면 위에서 아래가지 온통 어릿광대, 그런 주제에 조선 사람들 너무 비극 좋아하는 것 탈이라구, 하하하..."
무안을 당한 선우신의 얼굴을 벌개졌고, 선의돈의 웃음 속에는 강한 모멸의 울림이 있었다.
"흥, 몇 놈이나 될까?"
화가 난 선우신은
"죽은 사람 숫자는 알아서 뭣 하시게요? 위령제라도 지내시렵니까?"
"대안의 불구경이다, 불구경. 이를 갈며 맹세코 떠날 놈이 몇 놈이나 되겠는가 그 말이야."
"..."
"죽어자빠진 놈들은 어떤 놈이며 살아남은 놈들은 또 어떤 놈들이야, 흥! 그게 항상 문제거든."
"그야 대부분, 신사복 학생복이 살아남았을 테지요. 죽어 자빠지기론 일본말 못하는 족속들, 그들 처자였지요."
냅다 던졌다.
"신체발부수지부모라, 효행은 신사복 학생복이 한 셈인가? 하하하핫, 하하핫... 하긴 옛적부터 효행은 의관이 해왔지만,"
"..."
"고등관을 목표하여 일로매진, 사람들 낯짝이 책으로만 보이는 놈들, 알량한 글줄 써서 그것으로 애국한답시고 자부하는 놈들, 아무튼 그 말랑말랑한 혓바닥 세 치로 나불거리는 놈치고,"
"죽여주지 않는데야 별수 있습니까? 당꾸바지라고 죽고 싶어 죽은 것은 아니잖습니까?"
"누가 죽고 싶다 했어! 쥐새끼 같은 놈이 살아남았다 그 얘기야!"
"그렇담 선생님이나 저나 쥐새끼이긴 매일반이지요."
십 년이 더 넘는 연령의 차이지만 서우신은 공손하게만 대하려 하지 않았다.
"나라를 잃은 이스라엘인들은, 음... 내 백성들아! 할 적에 신이 들린 것 같았다. 조선의 신령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게에 내 백성들아! 해봤자 어항 속의 붕어 물 먹는 꼴이지, 제에기랄!"
서의돈은 딴전을 피우듯 했으나 결국 그 얘기가 그 얘기다.
"이스라엘인들이 외치는 것을 보셨습니까?"
"그야 어디서 읽었겠지."
"구약성서를 읽으신 모양이군요. 뜻밖인데요?"
비웃었다. 서의돈은 목에 핏줄을 세웠다.
"염통을 꺼내먹을 놈들! 톨스토이, 셰익스피어가 어디 뼈다귄지 핏대 세우는 꼴이 가관이고, 한수 더 떠서 나쓰메 소오세끼가 뭐 어쨌다는 거야? 그 군국주의, 아아 참 자네가 존경해 마지않는 영문학자요 대소설가였던가?"
"좀 망발 아닐까요?"
"깃발 치켜들 줄 알았다."
"군국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랬어? 만철의 총재 나가무라의 초청을 받고 그자가 조선 만주를 여행하고서,"
"여행했다고 반드시,"
"나까무라의 초청도 좋고, 느긋하게 서울서 묵고 간 것도 좋고, 돌아가서 쓴 글도 좋다 이거야. 군국주의건 뭐건 다 좋다 그 얘기야. 조선 놈 학생이 심취하는 꼴이 우습거든. 그자가 쓴 소설이라는 것도 기껏해야 인간의 이기적인 면을 파헤쳐본 것밖에 더 있어? 늘상 구경꾼 같은 그자의 글인데, 그 자신이 이기적 인간이었다. 그것 이외 뭐가 있어? 일본 놈들 죄악에도 아불관이요 내 옷에는 핏자국이 없다,"
"그 사람은 정치가도 군인도 아닙니다. 소설가이며 영문학자일 뿐입니다. 외곬으로 나가는 예술가를 두고 군국주의 운운하시는 것은 지나치고, 아불관은 예술가들의 속성 아닐까요?"
"그러냐? 예술가는 양심에도 아불관이란 말이냐? 적어도 일본인들의 치부는 느껴야, 양심 이전의 감정 문제다. 차라리 영국의 키플링같이 들내놓고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편이 낫지."
서의돈이 박식하다는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유학자로 이름난 문중어른이 망나니짓만 하고 다니는 서의돈을 닦달하려고 불러들였다가 도리어 학문에 대한 문답에서 노인이 낭패하고 코를 싸쥐었다는 얘기는 유명하였고, 어러 해 전에는 일본으로 유학이 아니라 유람 왔다 하면서도 광범위하게, 누구보다 빠르게 학식을 흡수했다는 얘기를 형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는 일이지만 동경서 같이 묵으면서 선우신은 서의돈이 문학에 관한 독서도 적잖게 한 것을 알았다. 하여 선생님이라는 칭호를 꼬박꼬박 붙여온 터였다.
"염통을 꺼내먹을 놈들, 내 동포가 개같이 죽어 자빠진 땅에 내일 해가 또다시 떠오르듯 경울방학이 끝나면 가방 치켜들고서 연락선을 탈 게야. 그러고는 또다시 나쓰메가 어떻고 톨스토이가 어떻고 셰익스피어가 어떻고 지껄여댈 거란 말이야."
기차는 홈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다. 짚신과 비단 신발이 움직이는 것과 동시, 선우신도 생각에서 깨어나 얼굴을 든다. 견딜 수 없는 불쾌감, 좌절감이 기차가 멎는 순간 현기같이 엄습한다. 십이월도 막바지, 헐벗은 들판을 부지런히 달려온 기차는 허덕이듯 증기를 내어뿜는다.
"제가 들어드리지요."
선우신은 벌떡 일어서며 노인의 짐을 받아든다. 병든 여자를 부축하는 노인을 도와 기차 밖에까지 짐을 재다준 선우신은 잘 가라는 인사를 한다.
"학생양반, 고맙소."
노인의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인다.
서의돈은 두 다리를 쭉 뻗고 늙은이와 병든 여자가 나가버린 빈 좌석을 컹청이 바라보고 있었다. 텅 비어버린 좌석은 여행의 끝처럼 쓸쓸하고, 밤기차란 으레 그런 것이지만 희망도 없는 듯 암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선우신이 자리에 돌아와 앉자 서의돈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과 불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움직임이 선명한 그곳을 방금 내린 승객들이 얼기설기 자나간다. 조선사람, 일본사람, 더러는 중국인도 볼 수 있었다.
"엽전들은 차림새부터 춥고, 추운 상판들이다."
서의돈이 창 쪽으로 얼굴을 돌린 채 중얼거렸다.
"따뜻한 낙타외투야 이등칸에서 느긋하게 밤경치를 감상하고 있을 테지요."
선우신은 빈정거렸다.
"느긋하게 밤경치를 감상한다, 그럴까? 상해서는 외국인 식당에 중국인과 파리를 사절한다, 그런 팻말이 나붙어 있다 했고, 미국 같은 곳에선 백인이 탄 기차칸에 흑인은 들어가지도 못한다는 얘기고 보면,"
"그렇다면 우리 모두 은혜로운 대일본제국에 감사 감사해야겠습니다."
"아암, 감지덕지할 일이지. 한데 자네 파상풍 환자를 본 일이 있나?
"못 보았는데요."
"이등칸 푹신한 자리에 앉은 엽전 신사 얼굴을 상상하면 될 게야."
"어떤 얼굴인데요?"
"왜놈들이 득실거리는 찻간에서 감사 감사하다보니 미소를 지울 수가 없고 바닥이 웃음 때문에 빳빳해졌을 거란 말이야. 파상풍 환자는 원래 웃는 얼굴이거든. 얼마나 고통스럽겠나."
"그거 재미있군요."
선우신은 못 견디겠는 비애, 자기혐오를 느낀다.
'졸장부들!'
피가 모여서 응어리진 것이 아닌, 눅진눅진한 아교풀이 응어리 같은 것을 느낀다. 흐느껴지는 것을 꾹꾹 눌러다져서 감정이 종잇장으로 변해버린 것 같은 것을 느낀다. 하찮고 지엽적인 것 때문에 왈가왈부하며 물어뜯고 쥐어 틀고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다는 것이며 무슨 위안을 얻는단 말인가, 개미 쳇바퀴 돌 듯 그 얘기가 그 얘기요 요설 이외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자학이라도 하지 않으면 시간에 갇혀버릴 것 같은 공포를 느끼게 되고 결국 절망적이라는 결론밖에 내릴 것이 없는데, 그러면서도 결론으로 끝낼 수없는 분노는 꼬리를 물고 있었으니. 선우신은 서의돈이 미웠다. 물론 자기 자신도 미웠다. 자신까지 포함하여 지식인을 깡그리 매도하는 서의돈의 심정을 선우신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또 자기 자신의 심정이기 때문이다. 깡그리 매도하고 경멸하고 증오하며 편견과 옹졸과 억지까지 동원하여 지식인들을 공격하여 지식인들을 공격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는 심정은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은 물론 아니다. 엄청난 힘, 저돌적인 돌진이 제아무리 격렬하다 하더라도 결과는 공중으로 붕하니 떠버리고 마는 엄연한 역학은 느낌보다 훨씬 앞서 나타나는 현실이었으니. 자해할밖에 감정의 출구가 없는 것이다. 『걸리버 여행기』의 거인국에서처럼 지식과 예술의 걸리버는 외포할밖에 없을 것이며 양심의 걸리버는 잡아먹힐 것이며, 정의의 걸리버는 밟혀 뭉개질밖에 없는 이제, 정복자는 여유만만하지 아니 한가.
'그러나 일본은 거인국이 아니다.'
선우신은 일본의 쇠망을 믿고 싶었다.
'조선이 거인국의 걸리버도 아니다.'
결코 민족의 소멸을 믿고 싶지 않았다.
선우신이 생각에 잠겨있는데, 서의돈은 철이 덜 난 사람같이 차 창 밖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품평을 하고 있었다.
"어깻죽지가 축 처진, 보나마나 낯빛은 누리팅팅할 게고, 서류가방인지 뭔지, 초조하게 걷는 저 친구는 하급관리겠고, 반대로 필요 이상 두 어깨를 치켜들고서 잔뜩 찌푸린 저 학생 놈, 마음속엔 열등감 비애가 일렁이고 있을 터인데 그나마 뭣 좀 배웠다고 애국의 꿈이라도 꾸는 겐가. 모두 으스스 추위 탄 상판들인데 예외는 저 중고품 신사라. 기찻간을 제집 드나들 듯, 이골이 난 뜨내기 장사꾼이구먼. 익숙하고 날렵하고 잘 누비고 나간다."
서의돈의 음성은 독이 빠진 듯 싱겁게 울렸다.
'왜 모두 이런 지경으로 되어가야 하는가. 처량하고 한심스럽다.‘
서의돈이 품평을 하는 유리창 밖의 사람들은 사실 그 대부분이 장사꾼이 아니며, 하급관리가 아니며, 학생도 아닌, 낙타외투의 신사는 더더구나 아닌, 차림새부터 춥고 추운 얼굴의 백성들인 것이다. 어느 곳에서나 마주치는 모습이요 얼굴이며, 뽐내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며, 뽐내어볼 쥐뿔도 없는 백성들인 것이다. 나으리 살려주시오, 나으리 억울합니다, 옛날 옛적부터 모에 밴 언어를 지닌 백성들인 것이다. 그들은 거대한 괴물, 귀청이 날아가게 기적을 울리며 당장에라도 허연 이빨을 드러내어 달려들 것만 같은 시꺼먼 기차에 쫓기듯 가고 있다. 어둠 속에 우뚝우뚝 선 건물이며 높은 쇠기둥이며 엿가락같이 휘어서 뻗어난 레일, 금테 모자를 쓰고 깃발을 든 사내,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역사여 어둠 속에 떠 있는 빨갛고 파아란 선호등이며, 생소하고 위협적인 모든 형체와 빛깔과 소리에 쫓겨가고 있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쇳덩이가 정수리를 칠 깃인지, 언제 어디서 굉음이 울리며 귀청을 찢을 것인지, 가난한 보따리를 마구 흔들며 쫓겨가고 있는 것이다. 바다에 떠밀면 물에 빠져죽을 수밖에 없고 불속에 던지면 타죽을 수밖에 없는 무력한 백성들, 어느덧 그들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기차는 서울역을 향해 어둠 속을 달리고 있었다. 선우신은 손발이 꽁꽁 묶인 채 수미다가와, 나가요바시 밑으로 수없는 시체가 떠내려가던 광경을 생각한다. 연무장에서는 기병들이 총성에 놀랄 이웃을 고려하여 수용한 조선사람들을 칼로 베어 죽였다는 것이며,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울음 터뜨리는 태아까지 찔러 죽였다는 소문을 생각한다. 계엄령을 편 일본정부는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곳곳에 집결시켜놓고 도리어 미친 군중에게 매어주어 집단살해를 감행하였다. 미친 군중은, 뿐인가, 버젓한 군인 경관까지 합세하여 호송중의 조선인들을 대로에서 살육했으며 집합소를 찾아다니며 조선인들을 살육했다. 수미다가와에서 건져낸 시체 중에는 등에 업은 아이말고도 양팔에 아이 하나씩을 껴안은 여자의 시체가 있었다고 했다. 그 숱한 죽음, 숱한 송장들은 누구인가. 방금 종종걸음으로 역사를 향해 쫓기듯 가던 바로 그 백성들이다. 한민족의 구할을 차지하고 있는, 차림새부터 춥고 추운 얼굴의 치와 땀밖에 팔아먹을 것이 없는 그들, 그들인 깃이다.
'죽어자빠진 놈들은 어떤 놈이며 살아남은 놈들은 또 어떤 놈들이야, 흥! 그게 항상 문제거든.'
서의돈이 내뱉은 말을 선우신은 되새겨본다. 항상 문제라는 것은 역사의 문젯거리라는 뜻이다. 서의돈이 사회주의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아직은 사회주의자가 아닌 선우신이지만 서의돈의 말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운명인 동시 운명이 다니다. 분명 운명이 아닌 쪽인지 모은다. 하느님을 섬길 적에 역사는 운명인 동시 운명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신과 인간의 포옹일 수도 있고 신과 인간의 싸움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을 몰아낸다면 피라미드를 쌓아올리던 고대의 노예나 노예선을 타야 했던 아프리카의 검둥이는 역사의 운명 탓이 아니다. 강자의 이빨이 찢어발긴 희생물일 뿐이다. 선우신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쉰다.
밤이, 물빛이 연신 달아나고 있는 차창에서 눈길을 거둔 서의돈은 어지간히 낡아버린 자신의 양복을 내려다본다. 고물상에서 맞는 것이 없어 좀 큰 것을 샀는데 허릿말을 가슴 밑에까지 바싹 올려야만 즈봉 가랑이가 안 끌렸다. 선우신은 플린 같다면서 놀려대곤 했었다. 차창 옆에 걸어둔 외투는 적당히 낡은 것이지만 서의돈과 갚은 왜소한 체격에도 선우신은 아마 아이가 입었던 것인가 보다 하며 올리는 것이었다.
"임마, 왜놈들 씨종자 작은 걸 몰라? 나보다 작은 놈이 있다는 것 그거 과히 기분 나쁘지 않다."
코트에 포개져서 걸려 있는 것은 신품, 진짜 신품의 캡이다. 약간 오렌지 빛을 띤, 회색과 연갈색의 올이 도드라져 뵈는 멋진 칩이다. 신파극 배우가 씀직한 물건, 서의돈은 자신의 복장과 필요 이상 두 어깨를 치켜들고 잔뜩 찌푸리며 걷던 학생의 모습을 떠올린다. 자신이 속한 부류가 바로 그 학생 쪽이었다는, 문득 깨달아지는 생각에 도달한다.
'뭣 좀 배웠다고 애국의 꿈이라도 꾸는 겐가... 그렇담 희망은 있어. 치졸한 거야말로 삯일 테니 말이야. 흐흐흣 으흐흐흣! 사실은 그것도 더 간 게야. 주먹이면 돼. 우리 실력은 주먹뿐이다. 흐흐흣으흐흣...'
뱃속에서 웃던 웃음이 입 밖으로 나왔다. 낄낄낄 웃는다.
"또 개새끼들입니까, 선생님."
지겹다는 듯 선우신이 말했다.
"선생님이라구? 집어치워라. 난 학생도 되기 싫고 주먹이야 주먹,"
하며 주먹을 들어올린다. 선우신은 웃는다.
"선우야."
"네."
"왜놈들 말이야, 왜놈들 말인데 어떻게 보이지?"
"사람의 상판이긴 마찬가지죠."
"모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군고구마같이 뵈지 않나?"
"군고구마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배창자가 터지는 한이 있어도 다 먹어 치우겠습니다."
"그러면은, 따뜻하고 귀중품 숨기기에도 든든한 하라마끼라면 어떨꼬?"
"모두가요? 그렇지만도 않지요. 해꼬오비(허리띠)에다가 신갱부꾸로를 걸머진 늙은 것은 어떻고요? 눈에 눈곱이 끼어서 벌벌 떠는 꼴이야말로 거지 중 상거지, 아 저기 보십시오. 맨 종아리가 드러난 여자 말입니다. 쪽바리 여자 말입니다. 털이 다 빠진 목도리로 입만 막으면 추위가 도망가나요?"
"그거야 난타외투의 엽전 신사만큼 귀한 것이고,"
"조선이니까 그렇지요. 일본에선 저런 부류의 사람들이 따뜻한 배싸개보다 훨씬 많은 것이 사실이지요."
"그런 것들도 조선 땅에 발을 들여놓고 보면 사정은 달라지거든. 게다짝을 쳐들면 아이들이 달아나고 길가에 오줌을 까지르면 모두 슬금슬금 피해가고, 술 처먹고서 조선 놈 치고받아도 주재소 갈 염려는 없고, 하다못해 곡괭이를 들어도 값이 달라진다, 이거야. 잘하면 땅뙈기 얻어내어 머슴새끼 부려가면서 지주도 되고 말이야. 하등에서 중등으로 올라온 놈의 호기야 상상할 만 아니 한가?"
"총독이 지 할애비 같을 테지요."
"종놈이 종 부리는 신세가 됐으니 대일본제국에 좀 충성하겠냐? 쓰기 좋은 하수인들이지. 지진 때 칼 들고 대창 든 놈들이 바로 그런 계층이요, 군중의 중심이 또한 그런 것들이거든."
"그렇다면 삼일운동 때 군중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언어 표현의 차이는 있겠으나 원칙적으론 선동되고 돌발적인 면에선 다 마찬가지야."
서의돈은 냉정하게 칼끝으로 찌르듯 말했다.
"그렇다면 군중에게 희망을 걸지 않는다는 얘기 아닙니까?"
"삼일운동은 실패였어. 보람이 없었지. 군중이란 모이기도 쉽지만 흩어지는 것은 더 쉽고 삽시간이야. 모이는 군중보다 물결처럼 끊임없이 오는 군중, 그때 비로소 군중은 뚜렷한 성격을 띠게 되지."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서의돈은 대꾸를 하지 않는다. 한참 후 어세는 본시로 돌아가서
"해꼬오비든 밑 빠진 조오리든 말할 거야. 어째 멍텅구리들이 이리 많으냐 하항, 이제부터는 안량미 반 됫박에 낫빠후꾸(노동복) 한 벌이면 철공소 방직공장 할 것 없이, 우리네 땀 흘릴 필요가 워 있느냐, 살찌고 양지바른 땅에 힘 좋고 먹새 적은 머슴새끼나 몇 좀 붙여서, 총독할아버지,"
서의돈은 주절대는 것이었다.
"생광스럽고 복되도다. 이것이 모두 오로지 우릿님의 명덕 탓이오니 거룩한 은혜에 젖은 이 몸 바다로 가면은 물풀이 무성한 공장이 될 것이요 산으로 가면은 산풀이 무성한 공장이 될 것이요 오직 우릿님을 위하여 죽으리다. 그리하여 우릿님의 세상은 조약돌이 바위 되고 푸른 이끼가 끼일 때까지 존속하소서, 왜 안 그러겠나, 추한 것도 아름답게 아름다운 것도 추하게, 참으로 무궁무진... 허파에 바람들게 웃기나 하지. 하하핫..."
주절대다가 웃다가, 웃음도 뚝 떨어진다. 그러고는 갑자기 서의돈은 선우신을 기피하듯 무거운 침묵속으로 가라앉는다. 서울역에 도착하여 서의돈은 짧고 꼭 끼는 외투를 입는다. 캡을 눌러 쓰고 언쟁이라도 벌렸던 사이처럼 두 사람은 우울한 낯빛으로 홈에 내린다. 개찰구를 향한 층계에는 사람들이 덩어리가 되어 밀려 올라가고 있었다. 홈은 다소 엉성했다. 두 사람은 굳게 입을 다물고 수많은 사람들이 덩어리져 가는데, 무성영화처럼 소리가 없는 것을 느낀다. 그 침묵에 자신들이 말려들고 있는 것같이 착각되기도 한다.
"눈이 내릴 것 같습니다."
저항하듯 선우신이 입을 떼었다.
"한박눈이라도 펑펑 쏟아져라."
막 걸음을 옮기려 하는데
"신상! 신상!"
회색 외투를 입은, 안경 쓴 사내가 여행 가방을 들고 급히 걸으며 불러댄다. 그의 뒤를,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주춤거리듯 여자가 따라온다. 성숙한 여잔데 얼핏보기엔 열일고여덟밖에 안 되는 여학생같이 앳되다. 나이를 나타내는 것은 큰 눈, 고통스러워 보이는 눈이었다.
"신상!"
의아해하며 선우신이 돌아본다. 다가온 사내는 활짝 웃는다. 남자치고는 굉장히 내혹적인 웃음이다. 머리통은 작은 편이었다. 중키보다는 크고 비쩍 마른 몸집, 매혹적인 웃음을 빼면 학구형의 인상이다.
"오가다상 아니오?"
선우신이 놀란다. 머플러로 얼굴을 싼 여자는 달팽이가 집 속으로 기어드는 자세를 취하며 우울하게 시선을 떨어뜨린다.
"왜 아닙니까. 내리자마자 신상을 만나다니, 기분 좋은데요?"
손을 내민다. 선우신도 손을 내어 악수를 한다.
"당신은 기분이 좋을지 모르지만 나는 기분이 나빠요."
오가다는 껄껄껄 웃는다.
"한데 웬일로 왔소."
"견문을 넓히기 위한 여행입니다."
"견문을 넓혀요? 위문 온 것 아니오. 그랬다간 당신한테 빰맞으려구요? 하하핫핫..."
선우신은 오가자 뒤에 서 있는 여자를 십분 의식하면서 모르는 척, 담배를 피위물고 서 있는 서의돈을 돌아본다.
"선생님, 이 친구한텐 인사 좀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 우리 학생들 신세 많이 졌지요."
"그래?"
"오가다상, 소개하지요."
"예, 저는 오가다 지로입니다."
오가다가 꾸벅 절을 한다.
"서의돈이오. 이번엔 우리 동포에게 많은 도움을 주어서 고마웠소."
노회한 미소를 머금고 손을 내민다.
"사함은 모드 동폽니다."
하는데 오가다 얼굴에 어둠이 스쳐지나간다.
"이 친구, 세계주의자라니까요."
선우신이 옆에서 거드는데
"네, 저는 인간입니다."
바보 같은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이 마음에 들었던지 서의돈의 표정이 좀 달라진다.
"그보다 인실씨는 웬일이지요?"
처음으로 여자를 주목하는 선우신의 음성은 평이했다.
"저는 집에,"
방학이니 집에 오는 것은 당연하다. 난처해하는 인실을 도와주듯 오가다가 얼른 말을 이어받는다.
"어수선한 시국 아닙니까? 기사 정신을 발휘하여 동행할 것을 자청했지요."
서의돈이 빙그레 웃는다.
"그럼 슬슬 나가보지."
네 사람은 개찰구를 빠져나왔다. 갑자기 역 구내에서의 괴이했던 침묵이 무너지고 고함이 일시에 터져 나온 듯 역 광장은 와글바글 시끄러웠다. 지게꾼들이 우왕좌왕 짐을 얻으려고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오가다상, 우리 집에 가는 게 어때요?"
돌아보며 선우신이 묻는다.
"아니오. 여관에서 다리 쭉 뻗어야 여행 온 기분이 드니까요."
"그건 그렇겠군, 님의 집같이 안 편한 곳은 없으니까. 결국 눈이 오시는구먼."
불빛이 비춰주는 역 광장에 하얀 눈이 날아 내린다. 꽃이 파리처럼 송이송이 눈이 날아 내린다.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누구에겐지도 모르게 유인실이 인사를 한다. 선우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가다상, 오빠가 여관에 가실 거예요."
한마디 남기고 인실은 눈 내리는 광장을 떠난다.
"여관은 정했소?"
서의돈이 묻는다.
"보오게쯔 여관입니다. 전에 한번 온 일이 있었지요."
"본정통의?"
"네."
"그렇다면 우리는 가는 편이 좋겠고 혼자 여행 기분 내시오."
"슬슬 걸어가보겠어요."
"유인성 형이랑 함께, 한번 마십니다."
오가다는 전찻길까지 함께 와서 전차에 오른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종로에서 내린 두 사람은 뭔가 작정이 안 된 마음으로 잠시 머문다.
"댁에서 걱정하실 테지만, 뭣하면 우리집에 가시지요. 형도 선생님 뵙고 싶을 것입니다."
"걱정은 무슨 놈의, 내가 일본에 있었던 것을 알기나 했을라구."
"그럼 저의 집에 가시지요."
"맥이 쑥 빠진다. 술이나 한잔씩하고."
"그렇게 합시다."
서의돈의 집은 효자동이었고 선우신의 집은 삼청동이다. 종로에서의 거리는 엇비슷한데 서의돈은 지기 집이 무척 먼 곳에, 외떨어진 곳에 있는 것만 같이 생각되었다. 거기까지 언제 가나, 피곤이 엄습해왔고 태산준령같이 느껴진다. 두 사나이는 청운동 술집을 향해 발길을 떼어놓는다. 사방은 어두웠고 착잡한 심정에는 술이 고혹적인 여자처럼 유혹해온다. 그들의 걸음은 빨라졌다.
"인실이 그 아이, 유인성의 누이동생 아니야?"
"누이동생이지요. 일본여대에 지학중입니다."
"그 집안, 남자 여자 학벌 하나 대단하다."
유인성은 동경제대 문학부를 졸업했다. 전공은 사학이었다.
"전에 한번 본 일이 있는데 그 애는 인사를 안 하더군."
"어리게 뵈지만 여간 깍쟁이가 아닙니다."
"인사하고 깍쟁이가 무슨 상과이랴."
"오가다하고 함께 오는 것을 우리가 보았기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아서 그랬을 겁니다. 지레 겁을 먹고,"
"소문나서 시집 못 갈까 봐서?"
"배일사상 때문이지요. 우리가 오해할까 봐."
"그렇담 왜놈하고 함께 오기는 왜 와."
"오가다의 경우가 좀 다릅니다."
"다르긴 뭐가 달라."
"첫째는 인성형과 오가다의 관계가 단순한 선후배라기보다 아주 밀접한 사이지요. 그리고 지난번 지진 때 인실이는 오가다랑 함께 뛰었습니다. 오가다를 일본인으로 보기보다 동료로 생각했을 거구 사실 제 지신도 오가다에 대해서만은 일본인이란 저항을 안 느끼니까요."
"젖비린내가 좀 나기는 나더라만,"
"착하지요. 오가다 도움을 받은 친구 말이 감격했다는 겁니다. 이 자식아, 그리 쉽게 친일파 되지 마라하고 농 삼아 했더니 그런 암은 안 통하다 하더군요. 땀에 흠씬 젖어서 얼굴이 새파랗게 되어 긴쌍 나랑 빨리 가요! 하며 하숙에 뛰어들더랍니다. 오가다 그자에겐 정말 맘을 꼬부릴 수가 없더군요."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서의돈이 물었다.
"인성일 만나본 지도 오래됐다. 요즘엔 뭘 한 대?"
"집에서 하는 제재소 일을 도운다 하든지,"
"대학 학부 나와서 제재소 일을 해?"
"생각이 따로 있겠지요."
"이삼 년 동안 세상 많이 변했다. 하긴 집안일 도우는 거야, 임명빈같이 우둔한 작자가 누이동생을 친일파한테 바치고서 교장자리 얻어내는 세상이고 보면,"
"아시면서 억지말씀만 하십니다. 작위를 받았다 해서 조병모 씨를 친일파라 할 순 없지요. 결혼도 본인 의사였다는 것은 선생님이 더 잘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
"형하고도 얘길 했지만 임선생님이 그 집안에서 설립한 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한 것은 피차를 위해 잘 맞아떨어진 일 아닐까요?"
"자네 형이야 으레껏 그랬을 테지. 황태수와 단짝이 되어 돈버는 것도 애국심이요 독립하는 방법의 하나다, 거창하게 민족자본의 육성 운운하지만 말이야. 방법은 뭐든 좋다, 결과만 얻는다면, 그따위지론, 독사 독이 오른 빈사자에게 화경 들이대어 문 자리 살피는,"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일단은 그 지론이 옳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일고 있는 물산장려운동은 미약하지만,"
"미친 소리 말어. 개미 한 마리 기어 올라가는 격이다. 그것으로만 그칠 줄 아나? 아주 복잡해져."
"그렇게 말씀하실 것을 예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한 마리라도 기어 올라가는 편이 안 기어 올라가는 것보담이야 낫지요."
"나아? 어째서? 기어 올라간 끝이 어딘 줄 알고나 하는 소리야? 내가 이런다고 무슨 사상의 사주를 받았다는 오해를 해도 별 수 없네만, 앞으로 그것이 안이한 구실, 자기변명으로 쓰이게 될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물산장려운동의 지금 실정으로 본다면 극언하여 감상주의, 하나 더 붙이자면 감상주의적 애국심이 중심이 되어 있어. 오늘날 실정을 명확히 알기 위하여 중국과 인도를 예로 들어보겠네. 중국의 경우 오사운동과 올해 들어서 여대 회수 문제와 더불어 일어난 일화 배척, 일상품 불매운동을 두고 생각할 때 사실 중국에서의 민족자본이란 무시할 수 없고 , 세계대전 덕분에 중국의 공업이 장족의 발전을 했으며 시장도 확보한 셈이데, 하기야 구미 각국이 전쟁 뒷수습을 끝내고 산업을 정비하여 또다시 그네들 상품을 중국 땅에 쏟아부을 기미는 거의 확실한 것이지만, 어쨌거나 주권은 가지고 있고, 그런데도 일화 배척, 일상품 불매운동에서 학생, 지식인, 노동자, 자본가의 합세는 어디까지나 외형이요 내부에서는 엄연한 한계가 있는 게야. 자본가들 좋으라고 하는 운동인줄 알어? 인도의 경우는 성격이 달라. 그곳에서의 소위 물신장려란 민족자본 육성에 목적이 있기보다, 그러니까 물량이 아닌 간디를 중심한 저항 정신의 구심운동으로 봐야 할 게야."
"그렇다면 우리라고 다를 게 뭐 있습니까. 민족자본의 육성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저항 정신의 구심운동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선생님이 어째서 부정적으로 보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주권이 없는 곳에 민족자본을 육성한다는 것은, 뿌리 없는 나무에 열매 맺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되어가는 꼴을 보아, 저항 정신의 구심운동과도 거리가 멀어. 선우일의 이론대로라면 더욱 그러하다. 사실 물산장려회란 빛좋은 개살구야. 민족분열의 씨앗이지. 총독부 놈들 그 일에 대해선 아주 소극적이거든.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지. 살찐 돼지 몇 마리 만들어두었다가 필요할 때 잡아먹자, 그놈들 내 땅을 먹었지만 국으로 먹은 줄알어? 횡재한 것도 아니구. 식민지 통치에는 귀신이 다 된 놈들인데, 정책면에선 상당히 길게 재다보는 게야. 쓸개 빠진 놈들은 삼일운동 때문에 왜놈들이 혼비백산하여 유화 정책을 쓰게 됐다면서 뭐 하나 따낸 듯 말하지만 어림없는 소리, 총칼보다 그놈의 유화 정책이라는 게 더욱 효과적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어. 우리 합방 시의 일을 생각해보자. 소위 매국노, 반역자, 그처럼 처참한 제물이 그리 흔할까? 그리고 떠 작의 받은 자, 연금 받은 자, 그자들이 평범했던 백성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지 않아? 그들이 반역자 대신 애국자였다면 상당히 비중이 나갈 인물인 것도 사실일 게야. 그게 소위 유화라는 올가미를 씌운 결과였지. 생각해보아, 총칼로 죽이느니보다 산송장을 만드는 것이 얼마만한 이득을 가져오느냐를. 첫째, 백성들의 분노가 손실되다. 일본에 대한 분노보다 매국노, 반역자, 친일분자에 대한 분노가 다 강한 것은 자네도 알 만한 일이 아니겠나? 백성들의 분노는 힘이야. 힘을 분열시키는 것은 정복자들의 금과옥조야. 둘째, 매국노 반역자, 친일파, 그런 자들도 있는데 내가 하는 일쯤, 하고 백성들 양심에도 타협의 소지를 마련하거나 또 힘이 약화됨을 느끼며 체념하는 것으로써 그나마 나는 깨끗하다는 자위에 빠져버린다. 만일에 그들이 매국노가 아니었더라면, 반역자가 아니었더라면, 친일파가 아니었더라면, 유화책의 올가미를 쓰지 않고 총칼에 쓰러졌다면 쓰러진 그 지체가 힘이었고 분노의 불덩어리는 똘똘 뭉쳐서 왜놈들 진지로 굴러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게 되는 거지. 내가 물산장려운동을 반대하는 것도 바로 지금까지 말한 이유 때문이야."
물산장려운동 얘기가 나오자 선우신은 여전해 동의할 수 없다는 눈빛을 띠었으나 다음 얘기를 들어보자는 태도로 침묵을 지키는 것이었다.
"내 살림 재 것으로, 참 좋지. 구보다 이상적인 것이 또 어디 있을꼬? 민족자본의 육성, 그 얼마나 번듯한 얘긴가. 그러나 어떻게 민족자본이 육성되겠나, 왜놈들이 문틈을 내어주지 않는 한. 어째 왜놈이 문틈을 만들어주었겠나, 만들어주었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주의 보호책과 비슷한 이유 말이야. 이미 국토는 그들 손아귀 속에 있고 이제 그들의 자본은 완벽하게 뿌리를 내렸다. 농민의 대가리 수에 비하여 지주가 몇 놈 되겠나. 또 노동자들 대가리 수에 비하여 기업가의 대가리 수가 몇이나 되겠나. 그래도 모르겠어? 특히 기업에 있어서는 불리한 조건 영세한 자본이 유리한 조건 풍부한 자본을 대항해나가자면 누가 희생을 해야 하겠나. 노동자야. 피땀을 싸게 팔아야 하고 피땀을 더 흘려야 하는 길밖에 없어. 몇 놈 살찌는 것으로 합방시의 양상이 그대로 되풀이되는 게야. 심각한 분열의 씨앗이 생기는 거지. 내 친구 황태수의 경우를 들어봐도 알 만한 일이다. 자본을 굴리자면, 경제적 독립을 외치자면, 영세한 이윤 분배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국 황태수는 부자요 호의호식하고 수만금을 가졌으면서 노동자를 착취한다는 결과밖에 얻는 것이 없다는 얘기야. 경제적 독립, 혹은 민족자본의 육성, 거룩한 대의명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를 혹사하며 착취한다는 치명적 고질을 안고 있다는 것 그게 바로 총독부가 노리는 바요, 소극적인 방해는 인도와 같은 정신운동으로 번질 것으로 고려하는 때문 아니겠나? 인도는 눈을 떠라! 눈을 떠라! 근대화를, 경제적 독립을 외치는 그런 시점에 서 있는 게 아니야. 물론 네가 나보다 거 잘 알겠지만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오히려 근대화의 물결을 막으려는 양상이지. 그렇기에 무저항의 투쟁 방법이 성립될 수도 있는 거구. 사실 일본은 사회주의의 물결에는 상당한 공포심을 가지고 대비하는데 이번에 겪은 진재에 있어서 사회주의자와 조선인을, 폭발하려는 군중들 본능의 제물로 삼은 것을 예로 들어도 알 만한 일 아니겠나. 그들은 사회주의자들의 혼란을 틈탄 폭동을 예상하고서 선수를 친한 미끼였고 자네도 알다시피 사회주의자 오오스기 사까에가 헌병에 의해 살해된 일만 하더라도, 하여간 머지 않은 미래에 필연적으로 부딪칠 사태를 생각하여 불리한 조건, 영세한 자본인 조선 기업가들에게 물산장려운동을 계기로 눈에 보이지 않는 젖줄을 물리면서 방패를 삼으려는... 내 생각이 극단일까? 과연 극단일까?"
2장 오가다 지로
바람 소리가 스산스러웠다. 곡선의 바람 방향을 느낄 수 있는, 스산하지만 흐르는 소리. 인실은 열심히 뜨개질을 한다. 우울하게 가라앉는 마음, 마음을 바늘이 실을 감아올리는 반복의 동작으로 제자리에 놓아주는 것 같은, 그래서 조반이 끝나자마자 손에 든 뜨개질을 인실은 영 놓질 못한다.
"무슨 놈의 바람이 밤새껏 불더니만 여직도 자질 않는구."
할아범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실은 실뭉치를 끌어당기며 들창문을 흘끗 올려다본다.
하늘은 흐려 있지 않았다.
'내가 뜨개질이나 하고 있을 처진가?'
공부도 해야 하고 찾아갈 곳도 많았다. 그러나 인실은 두문불출하고 있는 것이다. 집안사람들은 동경서 너무 끔찍한 일을 겪어서 그런가 보다고들 근심이었지만 인실은 서울역에서 선우신과 서의돈을 만난 일이 머릿속에 눌어붙어 좀처럼 지워버릴 수가 없다. 생각해보면 사소한 일인데 왜 그 일에 집착을 하며 생각할 때마다 불쾌한지, 어쩌면 오가다와 함께 온 일이 후회스러웠는지 모른다. 오가다의 삼정이 호의 이상의 것이라는 느낌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가 일본인 아닌 조선청년이었다면? 때때로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때문에 인실이 선우신과 서의돈을 만난 일이 잊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대문간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아씨, 계동 큰아씨가 오십니다요."
할아범 말에,
"애고머니나. 큰아씨 오신다구?"
오라범댁 양순의 음성이다.
'언니가 날 보러 오나 봐.'
그러나 인실은 뜨개질을 계속한다. 문간에선 여자들 웃음소리, 인사를 주고받는 목소리가 얽힌다.
"인실이 보러 온다온다 하면서도 말예요,"
"그러잖아도 왜 한번 안 오실까 했어요."
"글세, 아이가 아프질 않나, 나들이 가신 시어머님은 전에 없이 더디 오시고, 속이 상했어요."
인경의 푸념이다.
"그런데 이 반가운 손님은 어떻게 함께 오시게 됐어요?"
'누가 함께 왔나?'
"우연히, 오다가 만났지 뭐예요? 그냥 헤어질 순 없잖겠어요? 막 끌고 왔어요."
"네, 바로 끌려왔어요. 하하하..."
목이 쉰 듯 남자 목소리 비슷한데 귀에 선 음성이며 웃음소리다.
"잘 오셨소. 이렇게라도 해서 만나야지. 자아, 추운데 어서, 작은아씨 방에 계세요."
"그럼 인실이 방에 들어가서 잠시 기다려줄래? 안에 들어가서 어머니 뵙고 갈게."
인실이 방으로 오는 기척이 난다.
"요즘엔 어떻게 지내시지요?"
양순이 묻는 말이다.
"누구 데려가는 사람도 없고 삼십 넘은 생과부 뻔한 것 아니겠어요?"
"데려갈 사람이 없는 게 아니겠지요. 안 가시는 게지. 일전에 쓰신 글 저도 읽었어요.『신여성』에 쓰신 글 말예요. 속이 시원합디다."
"아아, 그러나 오해는 마십시오. 그런 글썼다 해서 난 독신주의자는 아니랍니다."
거침없이 얘기하며 인실의 방으로 쑥 들어선 여자는 뜻밖에 강선혜였다.
"젊은 아이가 무슨 청승이냐? 시간이 아깝다, 뜨개질이라니,"
인실이는 발딱 일어서며
"안녕하셨어요."
인사를 한다.
"왜 아니랍니까. 한창 좋은 시절인데 두문불출이지 뭐예요."
호기심에 가득 부푼 양순이 따라 들어서며 말했다.
"코흘리개 인실이가 언제 이렇게 컸지? 길에서 만나도 좀 모르겠군. 그러고 보니 세월이 빠르고 나도 늙었는가 보다."
외투를 벗고, 실크 양말을 신은 날씬한 다리를 뻗으며 선혜는 새삼스럽게 한심하다는 표정이다.
"날 기억하겠니?"
"기억하실 거예요. 큰아씨 출가 전에 노상 오시지 않았어요?"
양순이가 대신 말했다.
"그래도 선혜씬 조금도 늙지 않았어요. 옛날 그대론 것 같아요. 여자가 혼자 살면 다 그런가 보지요?"
갈색 체크무늬 투피스에 노란 색 스카프를 맨 강선혜 차림을 이모저모 살펴보면서 양순은 이야기에 굶주린 여자같이, 인실의 존재는 잊은 듯 도맡아 말을 한다. 강선혜는 인경하고 영성여학교의 동기동창이다. 학교 다닐 때는 단짝이었고 졸업 후 엇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했는데 선혜는 내소박을 하고 동경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오라범댁 석양순은 이들보다 이태 전에 다른 여학교에 입학하여 이 년을 다니다가 중퇴하고 유인성에 시집을 왔으니까 시누이와 강선혜하고 선후배의 관계는 아니었다. 양순은 호기심이 많고 허영도 적잖은 여자다. 살결이 고운 것 이외 별 특징이 없는 용모였으나 인성은 아내를 매우 사랑했다. 강한 호기심과 허영심까지도 철부지도 간주하며 너그럽게 감싸주었고 최고학부까지 나온 자신에 비하여 학력이 모자라고 때론 무식꾼같이 아는 것이 없는 아내에게 불만을 품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인실은 올케를 싫어했다.
'만풍수 집안 망친다더니 저런 여자를 두고 한 말일 거야.'
살림 살고 아이 기르며 바깥세상을 모르는 양순이지만 여학교를 이 년까지 다녔으니 나도 신여성이라는 자부를 항상 지니고 있었다. 모르면서 아는 척하기를 좋아했고 지식이 많은 여자를 존경하면서 자신도 애써 그 대열에 끼여들려는 경향이 짙었다.
"오면서 인경이한테 얘길 들었다만 이번엔 혼났었지?"
선혜는 양순이를 뿌리치듯 인실에게 말을 했다.
"좀... 혼이 났어요."
인실이 웃었다.
"씹어 먹을 놈들, 인실이 네가 무사히 돌아온 것은 다행이다만 지진이 그만 정도로 그친 것이 천추의 한이로구나. 몽땅 둘러 빠졌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니."
"선혜씨도, 끔찍스런 말씀 마세요."
양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요? 내가 못할 말 했나요? 죄 없는 조선 사람들 개 잡듯이 잡아 죽인 놈들, 무슨 악담인들 못할라구요? 나도 일본서 한 삼 년 지냈지만 그놈들이 그렇게 악독할 줄은, 씨를 말려야 해요, 씨를!"
"그런 말하면 잡혀가요."
"잡아가라지요. 나 무섭지 않아요."
"약소민족이니까 할 수 없어요."
"이 댁 유선생은 항일의 기수라 들었는데 언니는 형편없는 겁쟁이군요."
"그러니까 최고학부까지 나와가지고 남처럼 출세도 못하니 않아요."
인실이 바람 부는 들창 밖을 올려다본다.
"하기야 뭐 내 아무리 지껄여본들 이불 밑의 활개치기지만 말예요. 처음 동경서 돌아온 사람한테 얘기를 들었을 적에는 나 만주로 가려고 했어요."
"만주는 왜요? 독립운동 하시려구요?"
하고는 양순이 깔깔 웃는다. 선혜도 싱긋이 웃는다.
"독립운동도 미적지근했죠. 중국하고 만주 같은 곳에선 여자들도 큰소리친다니까 비적단의 여두목이나 될까 하고 생각했지요. 하하핫 하하하."
"잘 어울릴 것 같애요."
두 번째 인실이 입을 뗀다.
"그렇지? 첫째 내 목소리에서부터 덩치도 크겠다. 어째 잇몸이 근질근질해지는군."
"하긴 선혜씬 배짱이 있어서 남자 같으니까, 여자도 인간이 되자하며 용감하게 남자를 공박하고 쓴 그 글만 하더라도,"
"글 얘기를 하면 나 같은 여자도 부끄러운 생각이 든답니다."
"부끄럽기는요, 당당하지요."
"실은 쓰려고 해서 쓴 게 아니랍니다. 언니는 모르시겠지만 본정통에서 찻집을 하나 차렸지요. 지금은 때려치웠지만 오아시스라고, 찾아오는 손님들은 대개 학생, 문인들인데, 나도 그런 사람들을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래 우리 찻집을 드나들던『신여성』지의 김상태, 시도 쓰고 하는 사람인데 글 하나 써보라고 권하지 않겠어요? 못 쓸 것도 없다, 그것도 배짱이었어요. 문장은 김상태가 좀 고쳤지만 모두들 읽고 문재가 있다 하더구먼."
선혜는 코를 벌름거렸다.
"인실아."
인경이 들어왔다.
"언니!"
"어디 얼굴 한번 보자."
인경이 인실을 끌어안으며 얼굴을 들여다본다.
"수척하구나. 너 때문에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몰라. 무사하다는 편지가 왔다 하길래 겨우 맘은 놓았다만 진작 오지 않고서,"
"그럴 수가 없었어요. 방학 때까지 버텨본 거예요."
"고집은 여전하군."
"얼굴을 보아. 콧대 높게 안 생겼는가. 잘했어. 여자라도 오기와 고집은 있어야 해. 겁을 집어먹고 도망쳐온 사내자식들보다 월등하다."
선혜는 인실을 추켜세운다.
"특히 인실이는 눈이 좋다. 이지적인 아름다움이 있어. 어릴 적에도 눈이 좋다 생각했는데 눈 하나가 얼굴 전체를 지배하고 있단 말이야."
"선혜 네가 아무리 그래도 인실인 좋아 안 할걸? 찬물 한 모금도 가는 게 없을 텐데?"
했으나 인경이는 동생을 칭찬하는 것이 좋은 모양이다. 인실이는 쑥스럽게 웃는다. 인실과 사이가 좋지 않은 양순은 새초롬한 얼굴이었고.
"아닌 게 아니라 찬물 한 모금도 나오는 게 없군. 언니,"
"네."
"뭣 좀 주십시오. 십여 년만에 찾아온 손님을 이렇게 푸대접하깁니까?"
"성미도 급해라. 어련할까 봐요?"
양순이 나간다. 찬모에게 점심을 지으라 일러놓고 급히 되돌아온다. 인경이는 마치 어머님처럼 인실의 손을 쓸어주면서,
"나도 대강 네 형부를 통해서 듣긴 했다만 굉장했다며? 조선 사람들 많이 죽었다는 얘긴데 그게 사실이냐?"
"사실이에요."
"너는 그때 숨었는냐?"
"아니오."
"그럼,"
"여자, 또 학생이니까 조선 여잔 줄 몰랐던 게지요. 학생들은 대부분 무사했어요. 일본 사람들이 숨겨주기도 했었고,"
"나도 그런 말 듣기는 했다만, 아이 밴 여잘 배를 갈라 죽였다 그런 얘기도 돌던데, 사실이니?"
"사실이에요."
"짐승만도 못한 놈들!"
인경의 얼굴이 벌개진다.
"끔찍스러워서 온,"
양순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고, 선혜는 미리 힘을 뺀 탓인지 잠자코 있었다.
"나야 뭐 집안에서 아이나 기르고 살림하는 여자니까 뭘 알겠나만. 네 형부 말이 앞으로 점점 더 나빠질 거라 하더구나. 이젠 왜놈들 마음 놓고 차근차근 다 해먹을 가다 그러지 않겠니?"
"형부 말씀대로예요. 조선민족을 깡그리 없앨 수도 있겠지요. 그러고도 노예매매를 안 하는 저희들은 미국인보다 신시라 하더군요"
"망해도 말이야, 어쩌면 구렁이 담 넘어가듯 기척도 없이 이리 망했느냐 말이야."
선혜는 콤팩트를 꺼내어 콧등을 두드리면서
"대궐 안에서 쓱싹 해버렸으니 구렁이 담 넘어가듯 망할밖에. 상감이고 고관대작이고 정신 차릴 겨를이나 있었겠어? 동학란 때 꽝! 청일전쟁으로 꽝! 노일전쟁이 또 꽝! 기부터 죽여놨으니 망해도 창피하게 망했지. 맨날 해봐야 그 얘기가 그 얘기, 이젠 흥미도 없어. 뜯어먹든지 찢어먹든지 식성 좋은 놈들 맘대로 하라지. 저라고 천년만년 그러겠나? 망할 날도 있겠지. 그렇게라도 맘먹어야 살지 화통 터져서 못 살아."
"요즘엔 다 그런 것 같애. 될 대로 되라는 기분,"
"그렇지만도 않아요. 전쟁 때 경기가 좋아서 재산 모은 사람도 많고 생활수준도 나아진 편 아닙니까?"
"그래요?"
놀려대듯 선혜가 반문한다. 인실과 인경이는 오라범댁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는 터여서 뚱딴지같은 말엔 관심 없다는 듯 잠자코만 있다.
"새 양옥을 짓고 벽장도 마련하고 우리 친구들 중에는 그런 사람도 더러 있어요. 우리 그 양반도 의사 공부나 했더라면, 아무리 어쩌구저쩌구 해도 할 구 없어요. 조선 사람은 그저 의 사, 변호사, 업신여김 안 받고 돈벌고. 검사 판사도 좋지만 친일파 소리들을 거구요. 하기야 뭐 군수 한다고 욕하는 사람도 없더군요. 대우만 받데요.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이지만 중인 계급은 옛날보다 훨씬 좋아진 것 아니에요?"
"인실인 무슨 과야?"
선혜는 양순의 말은 안 들었다는 투로 인실에게 물었다.
"가사과예요."
"너도 가사과야?"
"요즘 와서 후회하구 있어요."
"너의 올케언니 말씀대로 의학이나 할 것 그랬나? 소질이 있다면 미술이나 음악도 괜찮은데,"
"그런 것엔 소질 없어요."
"전부, 너도나도 유학했다 하면 가사과야. 여학교는 어딜 나왔어."
"어디긴요, 명화여학교예요. 우리 작은아씬 우등만 했답니다."
양순은 화제에 끼어들려고 애를 쓴다.
"그렇담 이명희한테 배웠겠구나."
"배우다마다요? 애제자였다나 봐요. 얘기가 났으니, 잘 아세요?"
"알다뿐이겠어요? 동경서 한 기숙사에 있었어요."
"아아, 그러세요?"
양순이 감탄하듯 말했다.
"잘사니?"
인경의 말이다.
"잘살겠지 뭐,"
"어째 말이 그러냐?"
"어련하겠어요? 소문이 자자하데요. 명희선생의 오라버니하고 우리 집 그분하고는 친분이 두터워서, 새로 설립한 학교의 교감으로 와달라는 교섭도 있었어요. 교육도 최고로 받고, 명희선생같이 행운인 사람도 드물 거예요. 가지는 물건은 모두 박래품이요, 다이아 반지도 젤 큰 걸 갖고 있다나요? 흠이라면 재취라는 것뿐이지. 명희선생도 노처녀였으니까 그거야,"
숨이 가쁘다. 질투 때문에 헐뜯지는 않는다. 그저 선망과 동경일 뿐, 그런 면에선 부해무익한 여자다.
"요즘도 명희선생님을 만나세요?"
인실이 궁금한 듯 묻는다.
"요즘엔 별로 찾아가지 않지. 조용하가 날 싫어하거든."
"명희선생님이 그런 사람하고 결혼할 줄은, 너무 기대 밖이었어요. 만나 뵙고 싶지만 공연히 배반당한 기분이 들어서,"
"작은아씨,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여자 치고,"
계속하려는데,
"그렇게 된 데는 약간의 책임이 내게도 있어."
"그게 무슨 말이냐?"
인경의 말이다.
"글세 그렇다니까."
"애두 참, 묘한 말을 하는군."
양순은 눈을 깜박깜박한다. 이해 못하는 얼굴이다. 이때 마침 안에서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양순은 아쉬운 듯 일어섰다. 그가 나가자
"옛날과 달라진 곳이 없네. 조금도 닦여지지 않았어. 그 훌륭한 남편의 부인이 왜 저 지경이냐? 날 것도 아니고 익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일자무식인 편이 훨씬 낫겠다."
"입이 나쁘기론 여전이구나. 식구들 앞에서 흉보는 것 좋잖아."
"인경이 넌 역시 이 집의 큰딸답다. 아암 그래야지, 하하핫... 나 사실은 그래서 이 집 식구들이 좋더라. 너의 오빠 아니더면 너 올케 영락없는 소박감이야."
"내소박한 주제에 무슨 소리야."
"참 그랬었지."
"그러니까 조용하라는 사람도 널 싫어하는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내소박할 것을 사주할까봐. 그러나 그럴 형편은 아니야. 수대로 이어져 내려온 그놈의 양반 기질 때문이지. 양반이다뿐인가? 귀족 아니야?"
"너 채임이라 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
"얘길 하려면 길어."
"그러니까 더 궁금하네."
"너도 별 수 없는 여자로군. 실은 나도 얘기하고 싶었지만 너 올케 뭉개고 앉는 꼴이 보기 싫어서,"
"너무 그러지 마. 한 가지 버릇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니?"
"실은 지금 명희 처지가 말이야, 꽃구름 탄 것처럼 그리 행복하질 못해."
"좋잖은 일이라도,"
"애당초부터 그럴 요소가 충분히 있긴 있었지. 실은 말이야, 그들 인연은 나 때문이었어."
"네가 중매라도 들었어?"
"중매 든 거나 마찬가지 결과였지. 넌 잘 모르겠지만 조용하에게 윤덕화라고 사촌누이가 있었거든. 그 애하곤 일본서 함께 공부를 했으니까 신분은 달라도 친구인 셈인데 죽으려고 그랬던지 자궁암으로 죽었지만, 병 때문에 외가집에 와 있었지. 하도 오라오라 하길래 명희하고 찾아간 것이, 조용하 형제를 만나게 된 계기였다 이거야. 그때는 덕화도 자기 병이 무엇인지 몰랐지. 외삼촌과 친한 미국인 의사가 귀국하여 없었기 때문에 외가에서 의사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말하자면 심심했던 시기였단 말이야. 그것으로 그쳤다면 몰라. 명희도 저렇게는 안 됐을는지, 덕화가 입원하게 되고 죽음의 선고를 받았다는데 안 가볼 수 있겠어? 명희하고 또 갔었지. 그때 병실에서 두 번째 마주치게 된 것이 또 그 형제라. 형은 금슬이 좋잖지만 부인이 있는 몸이었고 동생은 미혼이니까 설령 로맨스가 벌어지더라도 그 동생이거니, 지금 생각해보면 조용하가 맨 먼저 동생 찬하의 감정을 알아차렸던 것 같단 말이야."
인경과 인실의 얼굴이 순간 심각해진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였지. 이혼 말이야. 상당한 위자료를 내놨다는 거야. 그러고는 덕화가 만나고 싶어한다는 구실을 내걸고 학교에다 전화질이니 명희와 조용하는 병실에서 또 몇 차롄가 만나게 됐었지. 명희의 결혼은 한마디로 비극이야. 아들 형제 두 사내가 명희를 만나는 순간 연정을 느꼈다는 것은 참말로 짓궂은 운명 아니겠니?"
"그럴 수가,"
"소설 같지?"
"뭔가 으스스해지는는군. 형이 나쁘다, 이애. 동생의 감정 알았으면 응당 미혼인 동생을 위해,"
"애정이란 어디 그런 건가? 또 우리 사회에선 장자의 권위의식, 독선적인 기질은 공통이 아니겠니? 조용하는 그런 면에서 더했으면 더했지."
"그럼 명희선생이 큰아들하고 연앨 했단 말이니?"
"그랬다면 문제는 간단했지."
"그럼? 동생을!"
"그것도 아냐. 내가 보기엔 노처녀의 처지를 청산하는 기분, 그랬기 때문에 쉽사리 이루어진 혼인이었을 거야."
"약간의 까다로움이 있긴 있겠지만 그렇담 명희선생한텐 잘못이 있는 건 아니지 않아?"
"그게 그렇지 않은 것이 인간사라. 그래서 예술도 있고 고통도 있고 기쁨도 있고,"
"그래, 그럼 동생은 어떻게 됐어."
"현해탄으로 막혀버렸지."
"...?"
"동경서 돌아오지 않는 거야.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집안에서 조금씩은 알게 됐다. 그래 명희 앉은자리가 편하겠어? 편하겠느냐 말이야. 바로 바늘방석이,"
"명희선생의 잘못인가?"
"그러나 여자 하나 때문에 아들 하나 잃는다는 기분이 안 들 부모가 어디 있겠어? 집안이 망한다는 생각도 들 거구 말이야."
"그건 그래."
"그러니 비극이다 그 얘기야."
인실은 남의 얘기를 듣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애제자였다는 지난날을 생각한 때문도 아니다. 인실은 남의 일이 아니라는, 고통의 실감 속에 오가다의 모습이 자맥질하듯 떠오르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인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뜨개질 감을 손에 들고 손가락에 실을 감는다.
"이 애가 얘길 듣다 말고 뜨개질은?"
인실은 깜짝 놀라며 뜨개바늘을 떨어뜨렸다.
"충격을 받았구나. 하니만 인실이도 이제 어린애는 아니니까."
"공부 때문에 인실이도 혼처 늦어질까 걱정이야."
"무슨 소리, 인실인 아주 줏대가 강해 보여. 저 턱 좀 보라구. 여자치고는 선이 여간 강하질 않아. 명희는, 그 애는 만사에 소극적이며 답답한 면이 있었지. 연애 한번 못하고 그야말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결혼을 하고 보니 가시 면류관이라. 만남이라는 것은 항상 그렇게 운명적이란 말이야."
하는데,
"작은아씨! 작은아씨!"
양순이가 허둥지둥 쫓아온다.
"일본 사람이 찾아왔어요!"
선혜와 인경이 어리둥절 한다. 인실이 일어났다.
"밖에 있어요?"
"오라버니도 안 계시고 어쩌겠어요? 할아범더러 오라버니 오시라 할까요?"
"아니에요. 제가 제재소까지 데리고 가지요."
인실이 외투를 걸치고 목도리를 두르는데,
"누구니? 할아범더러 데려가라면 될 거 아냐? 네가 갈 갓까지는,"
"일본인이지만 그렇게 대접해서는 안 될 사람이에요. 그랬다간 오빠가 화내실 거구요."
"네, 큰아씨, 그렇답니다. 그 일본 사람은 조선학생들의 은인이래요. 오라버니가 동경 있을 때도 젤 친한 가리였다나 봐요."
양순은 고개까지 끄덕여가며 말했다.
인실이 밖에 나갔을 때 오가다는 두둑한 반코트에 털실로 짠 모자를 깊숙이 쓰고 호주머니 속에 두 선을 찌른 채 거리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왠지 쓸쓸한 모습이다.
"오가다상."
"아, 히토미상,"
인실의 한자식 일본어 발음은 닌지쯔렸다. 그러나 일본식 이름으로 부르자면 인자는 히토 실자는 미가 된다.
"닌지쯔라는 그리 좋지 않습니다. 괴상하지요. 나는 앞으로 히토미상이라 부르겠어요. 조선말로 불러드리는 것이 젤 좋겠지만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서 내가 바보로 보일 테니까요."
언젠가 오가다는 그런 말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한자식 일본어 발음인 닌지쯔란 일본식 마술사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가다는 히토미라는 호칭을 남의 앞에서의 사용하지 않았다. 인실이는 일본 여자가 된 것 같아서 싫다고 했지만 둘이 있을 때는 꼭 히토미라고 불렀다.
"오빠, 제재소에 계세요. 거긴 한번도 안 가보셨지요?"
"안 가봤습니다."
"저랑 가세요."
"그럽시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걷는다.
"조선의 추위란 생! 하니 뭔지도 모르게 쇠 같은 느낌이 듭니다. 정신이 번쩍 나는 듯 상쾌하지만요."
"상쾌하지만 어떻다는 거지요?"
"히토미상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제가 쇠 같은 여자로 보이나요?"
"쇠같이 보이진 않지만 생! 하니 소리가 날 것같이 찹니다."
"사실 조선 사람 기질에 그런 것이 없는 것도 아니지요."
인실은 얘기의 방향을 돌려버린다.
"여행이란 이래서 좋은 건지 모르지요."
"네?"
"고아 같은 생각이 들어서요. 내 친구들이 많고 모두 나에겐 민족적 편견 없이 대하는데 말입니다. 하기는 고아 같다는 느낌은 전혀 개인적인 것이지만,"
"그건 그러실 거예요. 저도 동경 있을 때는 그랬으니까. 어떠세요? 황량하지요? 우리 나라가,"
오가다는 인실의 옆모습을 쳐다본다. 한참 있다가,
"겨울인 탓만은 아니겠지요. 화량합니다."
인실은 오가다의 눈길을 느끼며 시선을 떨어뜨린다. 명륜동에서 창경원 돌담을 끼고 걷는다.
"여기 들어가 보고 싶군요."
"아직, 안 가보셨어요?"
"아직, 옛날 임금님이 사시던 곳이지요?"
"임금님 사신 곳은 저 넘 경복궁이에요."
"그렇습니까."
오가다는 창경원의 정문을 미련스럽게 바라보곤 하면서도 들어가자는 말은 안 하다. 인실은 방금 고아 같다는 오가다의 말이 생각났고 옆에서 걷고 있는 여윈 사내가 실제 고아같이 뵈기도 했다.
"그럼 창경원 구경하고서 오빠한테 가볼까요?"
"그래주시겠습니까? 오빠 만나는 것 조금도 바쁘지 않소."
갑자기 기운이 생겨난 듯 오가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입장권 두 장을 사들고 두 장을 사들고 두 사람은 창경원 안으로 들어갔다. 겨울철이어서 사람들이 있을 리 없다. 그새 바람은 가라앉고 푸른 하늘은 차갑고 맑았다. 창경원 안의 나무에는 더러 눈이 실려 있었다. 인실이는 이내 후회를 한다.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서는 안 되는데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두 사람만의 호젓한 장소는 두 사람 사이에 굴이 소름으로 하여 울둑불둑한 것처럼 느껴진다. 아이처럼 좋아하던 아까와는 달리 몹시 추위를 타는 듯 두 어깨를 움츠리고 걷는 모습은 을씨년스럽고도 쓸쓸해 뵌다.
"히토미상."
"네."
"춥지요? 춥지 않습니까?"
"별로 춥진 않아요."
"내 반코트 안 입으시겠어요."
"춥지 않다니까요."
"그러세요..."
다시 침묵에 빠진다. 길이 미끄럽지는 않았다. 며칠 전에 내린 눈은 길켠에다 쓸어 붙여 언 채 있었다.
"히토미상."
인실은 으스스 떤다. 오가다의 음성은 두려움에 질려 있는 것만 같이 전해왔던 것이다.
"히토미상은 일본인을 싫어하지요?"
"네."
"나도 싫어합니까?"
"아니오."
"나도 일본인인데,"
"..."
순간 오가다는 두려움에서 빠져나온 듯 엉뚱한 말을 했다.
"나는 오오스기 사까에를 좋아했습니다. 이번 진재에 학살당한 오오스기 말입니다. 히코미상도 아시지요."
"네, 알아요."
"물론 직접적인 면식은 없습니다마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고독했던 시기, 한 십 년 전의 얘긴가요? 삼각연애 사건 후 동지들과도 헤어져 고민하던 시기를 좋아합니다."
"왜요?"
"그 인간적인 아픔 때문이지요. 그 사람은 물론 아니키스트지만 조직적인 노동운동가이기보다는 사상가요, 보다는 문예평론가로서의 특색이 짙은데... 인간작인 약점을 들낸 것이 가미 가미찌까 이찌꼬한테 칼질을 당한 사건이었지요. 삼각 관계한 어휘 자체가 지극히 불결한 느낌을 가지고 있긴 합니다만 노회한 사람, 계산이 빠른 사람은 빠지지 않는 함정 아니겠습니까. 이찌꼬라는 이미 있는 애인을 두고 이또오 노에를 사랑했다는 것은 도덕적인 면에서 볼 때 규탄 받을 일이긴 했지요. 그러나 사람에겐 진실이라 하고 잡았는데 진실이 아닐 경우가 왕왕 있는 일 아니겠어요?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오오스기는 위선자가 아닙니다. 정직했던 거지요. 더군다나 자신이 처해 있는 위치에서 본다면 정직한 만용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오히려 확실했던 것이지요. 노회했더라면... 잘한 일이라 생각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사회 운동하는 사람의 심장 문제에서 볼 때, 사상으로 심장에다 시멘트벽을 쳐놓은 것보다는, 나는 오오스기 편을 취하겠어요. 그 사람도 이제는 죽고 없는 사람이며 그의 처 이또오 노에도 함께 참살 당했지만,"
오가다는 걸음을 멈추고 나뭇가지에 쌓인 눈, 얼어서 반짝거리는 눈을 손바닥에 털어서 받는다. 인실이는 오가다가 왜 그 말을 하는가 알 수 있었다.
3장 산호주
오래간만에, 원고료를 받은 상현은 기자, 시 쓰는 친구, 평론한다는 사람들과 어울려 기생집으로 갔다. 청진동에 새로 생긴 집이라는 말을 듣고 찾아갔는데 상현은 그곳에서 산호주를 만났다. 전주에 갔을 때 상현을 기화 있는 집까지 데려다준 기생이다. 그때와 다름없이 안색은 검고 깡마른 몸매였으며 여전히 성깔께나 있어 뵈는 얼굴이었다. 놀란 것은 상현이보다 산호주였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기생한테 정한 곳이 따로 있겠습니까? 서방님께선 웬일이시오."
산호주같이 뻑센 여자가 놀라는 것도 수상쩍거니와 어투에도 뭔지 석연찮은 것이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네. 동가식 서가숙, 정한 곳이 따로 없기론 마찬가지야."
"내, 이내서 상현이하곤 기생집 오기 싫단 말씀이야."
전작이 있어 얼굴이 벌건 사내가 말했다.
"계집들 눈엔 매끄럼한 상판, 두둑한 속주머니밖엔 보이는 게 없지."
얼굴이 삼각형인 사내의 말이었다.
"가나오나 들러리 신세, 조선 은행이나 한번 털어먹을까 부다."
"한탄 마라. 박색 보구 침 삼킬 것도 업다구,"
초장부터 거칠다. 일류 기생집은 아니지만 그런데도 호주머니에 자신이 없기 때문에 허세를 부려보는 것이다. 산호주는 색죽하지도 않고 도리어 경멸하는 웃음을 띤다.
"그러면 이 박색은 물러가겠나이다. 대신 절색을 들여보내겠어요."
"어어, 그럴 것 없다구."
일행은 갑자기 당황한다. 발이 저리기 때문이다.
"가난뱅이 문사, 자네면 족하네. 돈 많은 기름덩이같이 번드르르 못하기론 매일반 아닌가. 절색이 내 치지 되겠느냐?"
"아니옵니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상현이
"나가! 나아가!"
냅다 소리를 질렸다. 하마 성깔을 무리지 않나 싶었는데 의외로 공손하게 절을 하고 나서 산호주는 물러난다.
"저런 계집은 톡톡 쏘는 맛이 있어야 좋은 건데 맥 풀리는군."
예쁘장한 어린 기생이 아나 들어와서 술시중을 들었다. 사내들은 마시고 떠들고, 마시고는 떠들었다. 박색이니 어쩌니 하고 투정하는 것과는 달리 사내들은 도통 기생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허겁지겁 술을 마셨고 허겁지겁 논쟁을 했고 마치 누가 쫓아오기라도 할 것처럼 좌불안석인데, 그렇다고 쉬이 자리를 뜰 것 같지도 않다. 아까 기화 생각이 문득 났을 때 상현은 산호주에게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상현은 기화뿐만 아니라 방금 만난 산호주도 잊고 말았다. 뭉뭉한 공기와 열기, 담배 연기, 술 냄새, 나락과도 같은 자포자기가 팽배해 있는 분위기, 그것은 상현에겐 언제나 아편과도 같은 망실의 쾌감이다. 작년 삼월달, 노령 연추에서 오십구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부친을 잊을 수 있었고, 잔인하게 버린 기화도 잊을 수 있었고, 공방을 지키며 시모를 모시고 아이들을 기르는 아내도 잊을 수 있었고, 세상일 모두를 잊을 수 있었다. 마시고 떠들고 이야기는 이어지는가 하면 뛰어넘기도 하고, 작가 이모에 대한 성토와 공격은 특히 이들 햇빛 못 보는 문인들에겐 비애와 울분을 해소하는 데 효력이 있었다.
"지가 무슨 성자라고 설교야. 예술은 예술일 뿐 누구를 지도하고 계몽하는 따위, 그건 구역질나게 불순한 거란 말이야. 그럴 양이면 문학 따위 집어치우고 운동으로 나가는 게야."
"엄격히 말해서 문학이란 어느 편에 서서도 안 된다. 그게 내 지론이야. 오늘 이 시점에서는 비겁자로 몰아붙일 테지만, 비겁자라는 말에도 불사하고 자신의 문학관을 지키고 나가는 거야말로 진정한 예술가라 할 수 있지. 비겁자 소리 듣는 것 두려워하고 설교 따위, 왜놈에게 안 잡혀갈 정도의 저항문학을 하면서 젊은치들의 갈채를 기대하는 그따위야말로 비겁자와 위선자 아니겠느냐,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그건 나도 동감이네. 치졸한 것에 애국이다, 독립이다, 혹은 사회주의자다, 하는 옷을 입혀서, 뭐 대단한 것처럼, 득을 보려는, 그것이야말로 사기 행위지. 그것은 결국 옷일 뿐 몸뚱이는 아니란 말이야. 그것들이 몸뚱이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말씀이야. 한마디로 치졸해. 박수갈채를 보내는 사람도 그렇지. 사실 계몽을 받아야 할 사람 같으면 엄격히 말해서 문학 독자의 자격이 없다 그렇게 봐야 해. 안 그런가?"
"흥! 그걸 우리 세대에서 바랄 수 있겠나?"
"때려치우는 거다. 아니면 길바닥에 내놓고 파는 염문소설이나 쓰지".
"그것도 아무나 하는 줄 아나?"
이야기는 또 뛰어서 작년 칠월에 공판이 열린 의열단사건으로 넘어갔다. 상해의 의열단원이 국내폭동을 모의하고 폭탄을 반입하다 발각이 되었는데, 경기도 경찰부 황옥 경부가 관련된 데서 크게 파문을 일으켰고, 아직 공판은 마무리되지 않고 있는 사건이다. 의열단은 1919년 만주 길림에서 김원봉, 이성우가 조직한 항일 단체로서 이미 밀양경찰서 습격 사건, 총독부 습격 사건의 전력을 가지고 있으며 폭력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자는 노선이다. 폭탄 반입, 누구나가 그랬듯이 기생집에 앉은 이들도 사건에 관련된 열두 사람 중 황옥 경부에 대해서 왈가왈부,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양론으로 갈리어 한참 떠들썩하게 핏대를 세우는 것이었다.
"공판에서 자신은 가담하지 않았다고 변명한 황옥을 두고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극단적으로 말할 것이 아니라, 공판정에서 애국투사로서 면목을 나타내던, 종전까지의 그런 태도를 검토해볼 시기가 되지 않았는가. 이미 의병 시대는 갔어. 유교를 바탕으로 한 개인의 완성이 주되었던 시절은 가벼렸다 그 얘기야. 의롭게 죽는 것도 나쁠 것이 없고 법정에서 재판장을 꾸짖으며 독립을 주장하는 것도 그 영향력을 생각할 때 물론 잘하는 짓이긴 하지만, 그러나 모두가 의인이 되는 동시 자폭한다는 것 말이야, 죽고 나면 그만큼 일꾼도 줄지 않겠느냐, 죽느니보다 살아서 일 좀 더 하고 , 음, 징역 십 년 살거면 오 년 살아서 오 년을 덕보고 기왕지사 우리네야 천하에 없는 졸장부니 술이 창자를 썩게 하고도 음, 그러고 나면 개죽음을 할 것이다마는 그네들이야 좀더 살고 봐야."
"그럼, 그, 그럼, 투쟁에 나선 이상은 이미 버린 목숨이요 그것은 백성들의 목숨인 만큼 아껴야 하는 것이, 그, 그럼, 힘을 막 쓰는 것 아니라구,"
"내 말이 그 말이야. 황옥이 고분고분했다고, 변절을 했는지 그야 모르지이. 그러나 고분고분할 것까지는 없어도, 팔팔 뛸 필요는 없고 능구렁이,"
"듣자듣자하니 모두 제 맘대로 지껄이는군."
상현이 실실 웃는다.
"뭐라구?"
"봉사 코끼리 만지듯 제각기 한마디씩 하긴 하는데 어디 그게 코끼리 모양인가?"
"흥! 잘난 친구야, 그러면 자네 코끼리는 어떠한고?"
"열두 사람 중에 황옥만 빼고 나머지 사람들이 팔팔 뛰었단 말이야? 능구렁이짓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지만 자알할 거라구. 비굴하지 않고 오만하지 않고 형량이 문제될 것 없는 게야. 밖에서 조잘조잘 해봐야 사또 지나간 뒤 나발 부는 격이지. 혁명가들의 모습은 자네들 말보다 훨씬 앞서서 새롭게 틀이 잡혀가고 있는데, 뭐 자네들보다 등신인 줄 알어? 우물 안의 개구리들 집어치워. 시시하다."
시시하다는 상현도 시시했다. 시시한 자신에 대하여 혐오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마음 편한 일인가. 만주 길림에서 조직된 항일 단체 의열단, 의열단의 얘기가 나와도 상현은 부친 이동진의 생각을 아니 했고 십여 년 전의 그 쓰라린 만주 벌판, 시베리아 벌판의 기억독 되살리지 아니 했다. 새까맣게, 새까맣게 잊은 것이었다.
"거룩한 얘기는 우리들 관내가 아니야. 술은 더 없어? 걱정들 말고 마셔! 얼마든지. 길 가다 옷깃이 스쳐도 전생의 인연이라 했는데, 그렇지, 뭐야, 이건 뭐야? 아아 맞어. 낯짝 익은 기생년 하나 있으니까 주머니 걱정 말구, 마시자구."
상현의 술 취한 꼴은 몇 해 전하고도 또 달랐다. 보가 터져서 흐르는 물 같이 낭자하고 흙탕이었다. 또다시 얘기는 이모로 돌아갔고 그의 개인적인 문제까지 들추어 욕직, 그 누구누구의 돈을 떼어먹었느니, 누가 누구 집에 목적으로 술병 들고 갔는니 시시풍덩한 화제들을 늘어놓는데 상현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내가 왜 소설을 쓰는지 알어?"
"알구말구."
"알어?"
"주색잡기, 잡놈, 술값 벌려고 쓰지."
"하하핫 핫핫핫..."
연방 웃으며 방문을 열고 나간다. 달이, 빈 대합실에 전등 하나 매단 것처럼 휑뎅그렁하니 떠 있다. 처마끝과 처마끝이 입맞춤하듯 물려 있는 사각의 하늘, 사각의 마당이 눈도 쓸어버렸는데 달빛을 받고 하얗게, 상현의 취안에는 부시다.
"많이 마셨다. 이놈의 집구석 뒷간이 어디야."
상현은 신발을 걸고 마당으로 내려선다.
"이봐! 아무도 없느냐구!"
"네, 서방님."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산호주가 나타났다.
" 너 산호주 아니냐?"
"네."
"이름 한 번 좋았다구. 내 그래서 기억을 했지."
"고맙습니다."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거 참 잘되었다. 한데 볼일 보는 곳이 어디냐?"
"저 모퉁이로 돌아가 보십시오."
산호주는 방향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상현이 소피를 보고 나왔을 때 산호주는 팔짱을 끼고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춥지 않느냐?"
"춥습니다."
"날 기다리는 게야?"
"네."
"나를 기다려줄 계집이 아직 있다니 기분 나쁘지 않은데? 왜상 술은 문제없겠군."
상현은 술 냄새를 피우며 산호주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서방님."
"왜 그래? 사랑 고백이냐? 기둥서방만은 관두자."
"보아하니 하도 차림이 허랑하여 제가 많이 참고 있습니다."
"호오? 참는 이유가 허랑한 차림에 있고... 못 참는다면..."
상현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지 고개를 흔든다.
"서방님, 왜 묻지 않으십니까."
"저를 보시면 기억나는 사람이 있을 것 아닙니까?"
"하항, 이제 보니까 기생년들 의리로구나. 그래, 기화는 잘 있느냐?"
"잘 안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허랑하게 떠도는 놈이 뭘 어쩌겠나. 그런 얘기는 만석꾼집 아들 놈 보고나 할 일이지. 아아 참 만석꾼 얘기가 났으니 생각이 나는 데에, 하동, 아아 아니지, 진주 최부잣집에 가면 먹여살려줄 게야. 거기 가라고 해."
"참아드리는 거예요."
"안 참으면 어떡허나? 그까짓! 처자식도 버린 놈이 기생 나부랭이, 흘러간 계집 생각하게 됐어? 아이구 취한다. 기화한테 의리 다 하려면 지체 없이 술이나 들여보내는 거다. 기화가 사랑하던 이상현 서방님, 하하핫..."
상현이 일어서는데 산호주는 옷깃을 찢어발기듯 강하게 잡아 젖혔다.
"할 말을 아직 못했기 때문에 또 한 번 참는 게요. 앉으시오!"
"이게, 미쳤나? 감히,"
"그래 장하오. 아직 양반님네 기개가 남아 있는 모양이니 희망도 있겠소. 고함질러서 망신당하기 전에 앉으시오!"
산호주는 흥분을 가라앉히느라 애를 쓴다.
"잘 들으시오. 기화언니가 얘기를 낳았소."
"뭐라구?"
상현이 얼굴을 번쩍 쳐든다.
"기화언니가 얘기를 낳았단 말입니다."
"얘기를 낳아?"
바보같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펄쩍 뛰듯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악을 쓴다.
"이상현의 아이니까."
"미친 소리 말어. 기생년도 애비 있는 자식을 낳아? 일없어!"
"이 개자식이!"
산호주의 손이 상현의 뺨따귀를 갈긴다. 반사적으로 상현의 손도 산호주 뺨을 향해 날았다. 그리고 다시 덤비려는 산호주의 손목을 꽉 잡는다. 상현의 눈은 미치광이처럼 번쩍번쩍 빛났다.
"잘 들어. 차후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그런 말 했다간 주둥이를 찢어버릴 테다!"
"개자식!"
산호주는 으르렁거렸다.
"뭣이!"
상현이 손목을 놓고 산호주 목에 두 손을 감는다. 안에서는 떠들고 노래하고, 영하 십도가 넘는 밖에는 두 사람 말고 얼씬거리는 그림자 하나 없다. 산호주는 상현의 손을 풀려고 버둥거린다.
"죽일 테야! 죽여주겠다!"
짐승같이 이빨 사이로 밀려나오는 상현의 신음 소리. 냅다 밀어 붙인다. 그리고 상현은 쏜살같이 밖으로 뛰어나간다.
길모퉁이까지 돌아 나온 상현은 담벽에 머리를 처박고
'내가 무슨 짓을 했나. 살인을 했나? 살인을, 살인을 했나?'
몸은 흔들어본다. 그림자가 따라서 흔들린다,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좋다 이거야! 기화가 애를 낳아? 낳아? 낳았음 낳았지 내가 살인할 것 없잖아... 애를 낳았다구, 애를 말이지... 낳았다, 나았다....'
상현은 길바닥에 픽 쓰러졌다.
상현이 눈을 떴을 때 피부에 닿은 이부자리의 촉감이 부드러웠다. 그러나 목은 타는 것 같았다.
"물, 물,"
눈은 떠지지 않았다. 힘껏 손을 뻗쳐 물기를 찾는데 입술을 적셔 주는 손길이 있다.
"물, 물,"
남자의 목소리, 여자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눈을 떠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다시 고통스러운 잠에 빠져 들어갔다.
상현이 누워 있는 곳은 산호주가 거처하는 방이다. 산호주의 목을 조르다 말고 외투를 벗은 채 뛰쳐나가다가 쓰러졌는데, 상현이 달아난 것으로 오해한 술친구들이 욕지거리를 하며 기생집을 나섰는데 길에 쓰러진 상현을 발견했던 것이다. 엉겁결에 떠메고 기생집을 되돌아온 그들은 어쩌겠는냐 좀 봐달라, 하고 도망치듯 가 버렸다. 산호? 술 친구들도 과음으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짜증스런 기분이기도 했다. 자고 나면 정신을 차리겠지. 그러나 상현은 밤새껏 신음했다. 몸은 불덩이 같이 달아서 헛소리를 질렀다. 사흘을 그렇게 앓았다. 왕진 가방을 든 의사가 몇 번 들락거렸는데 병은 급성폐렴이라는 것이다.
"겨우 위험한 고비는 넘긴 것 같소. 그러나 며칠은 더 안정해야 할 게요."
의사는 왕진 가방을 챙겨들고 일어서며 말했다. 의사가 나간 뒤
"딱한 양반,"
얼음주머니를 갈아주며 산호주는 혀를 끌끌 찬다. 기화가 아이를 낳았다고 했을 때 그 사실을 떨쳐버리듯 길길이 뛰었고 목을 조를 때 몸서리치게 눈빛이 무거웠던 사내, 가다가 얼음판에라도 미끄러져 뒈져라! 하며 뛰쳐나가는 뒤통수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던 사내, 그러나 이제 산호주 마음에 증오는 없어지고 말았다.
'눈감고 누워 있는 모습은 철 안 든 아이 같다. 이러다가 눈을 뜨면 날 원수 보듯 할 거야. 딱한 양반,'
산호주는 씁쓰름한 웃음을 머금는다. 아버님! 불효자식을 용서하소서, 상현은 계속하여 헛소리를 했었다. 간간이 내가 잘못했어, 봉순이, 용서해주게, 그런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 체면과 자존심을 버리고 자기변명도 없이 알몸을 드러낸 사나이의 고뇌를 산호주는 느낄 수 있었다.
작년 가을이었던가, 산호주가 기화를 만난 것은. 만났기보다 찾아갔었다. 산호주에게는 수향이라는 친언니가 하나 있었다. 일찍이 장사꾼의 소실로 들어갔는데 이 삼사 년 동안 장사를 곧잘하여 재산이 불어난 것을 기화로 남편을 졸랐다. 하나 있는 동생에게 요릿집을 차려주자고. 수향의 말인즉
"천서방만 죽어봐, 내 신세가 어찌 될 것인가. 제밋대 잃은 나룻배야. 눈이 화등잔 같은 아들 삼형제, 나한테 돌아올 숟가락 몽댕이 하나 있겠냐? 그러니 서울 올라와서 요릿집을 네가 맡아 해주어. 동기간에 니 것 내 것 따질 것 없이,"
"실패하면 어떡허우?"
"실패할 리도 없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집은 남겠지."
해서 산호주는 군산에 있다는 기화를 찾아갔던 것이다. 들어선 집은 초라한 오막살이였다. 장독대에는 항아리 하나, 단지 세 개가 덩그마니 먼지를 쓰고 있었다. 산호주는 기화가 앓고 있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
빨랫줄엔 또 웬 기저귀가 즐비하게 널려 있지 않은가.
"내가 집을 잘못 찾아왔나?"
중얼거리는데 눈이 불거진 계집아이가 어린 것을 업고 쫄랑쫄랑 삽짝을 들어왔다.
"얘야, 이집이 기화언니 집이냐?"
"몰라라우. 아짐씨 말이여라?"
하는데
"누구 왔냐?"
방문을 열고 기화가 내다보았다.
"언니!"
"아니, 넌 산호주 아니냐."
기화는 완연히 당황해하고 있었다.
"드, 들어와라."
산호주는 팔을 잡힌 채 천장이 낮은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짐씨, 아기는 어쩐다요?"
"데리고 들어와."
산호주ㅜ를 흘낏 보며 아까처럼 기화는 당황한다. 산호주는 영문을 몰랐다. 계집아이로부터 어린 것을 받아 안은 기화는
"넌 말이야, 음, 가게에 가서 사과 좀 사다주겠니?"
아이를 안고 자리걸음으로 다가서서 이불 사이로 손을 넣는다. 지갑을 꺼내어 오십 전짜리 동전을 계집아이에게 건네준다. 그 애가 나간 뒤
"언니, 대체 어떻게 된 거유? 이 애는?"
오륙 개월쯤 됐을까, 아이는 분홍색 저고리에 누분 양회색 두렁이를 둘렀는데 누추한 집에 비하여 차림새가 지나치게 깔끔하다.
"언니, 이애가 누구예요? 설마,"
"내가 낳았단다."
"뭐이라구요?"
"..."
"어디서 하나 얻어왔군요. 언니도 참 어쩌려구,"
"아니야, 내 딸이야."
기화는 조심스럽게 젖을 문지른다. 산호주를 빤히 쳐다보던 아이는 얼굴을 돌리고 강아지처럼 젖을 찾는다. 기화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웃었다. 산호주는 벌렸던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젖 넘어가는 소리, 쉴 새 없이 아이의 머리를 쓸어주는 기화의 손길, 배불리 먹은 아이는 젖꼭지를 문 채 잠이 들었다. 기화는 배게를 고르게 고쳐놓고 아이를 누인 뒤 포대기를 덮어주고 옷매무새를 고친다.
"놀랬겠지."
"기가 막혀서,"
"기생이라고 애 못 낳으란 법이 있니?"
"언니 나이 몇이우?"
"서른둘,"
산호주는 새삼스럽게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깜찍하게 생겼수. 크면 천하절색이겠네."
"천하절색이면 뭘 해. 잘못 생겨난걸."
"애아버지는 누구유?"
"..."
"이상현이 그 사람이군."
"....."
"애 낳은 것 알기나 해요?"
기화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알면 뭘 해. 술만 더 마실걸."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원하던 아인가?"
"원하든 원치 않든 생겨난 건 거두어주어야지요."
"거두어주어? 일신도 감당 못하는 사람이,"
기화는 아주 낡아버린 사람같이 보였다. 다시 기생으로 나서지 못할 것 같았다. 방에는 반닫이 위에 이불 한 채, 가방 두 개가 포개져 있을 뿐, 그리고 아이의 옷가지며 반듯하개 개켜놓은 기저귀가 눈에 띄었다.
"생활은 어떻게 하고 있수."
"가진 것 팔아가면서 그럭저럭 사는 거지 뭐."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앞으로 어떡헐래요?"
"나도 몰라. 서울서 운삼어른이 조금씩 도와주시지만."
"정성도 지극해라. 말 듣기론 평생을 여자 덕에 한량이라던데, 기생들도 많이 울렸다 하던데 언니한테만은 각별하구려. 허신한 사이도 아닌데 말이유."
"남녀의 정으로 어디 그러시냐? 운삼어른께서는 내게 희망을 많이 거셨지. 끝내 말을 안 듣고 내 마음대로 이렇게 됐지만,"
"그건 그렇수. 언닌 제 손으로 눈 찌른 거유. 언니보다 못한 기생이 지금 좀 날리우? 요즘엔 그왜 소리판, 뭐 그런게 있어서 한 번 부르면 기백 원, 누워서 떡먹기랍니다. 기왕지사 기적에 들었으니, 가무도 못하고 얼굴도 별난 것 아닌 나 같은 나무 기생도 아니겠고, 언닌 잘못한 거유."
"이제 와서 그런 말 하면 뭘 하누. 지나간 날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겠고."
마침 계집아이가 사과를 사왔다.
"그럼 넌 집에 가보아."
쟁반하고 칼을 가져온 기화는 잠자코 사과껍질을 벗긴다.
"데리고 있는 애 아니우?"
"이웃집 아인데 틈틈이 와서 애기를 업어주곤 하지."
껍질을 벗긴 사과쪽을 쟁반에 놓는다.
"사과나 먹으렴."
"목이 마르고 속이 답답해서 좀 먹긴 먹어야겠수."
장지문에 가을햇빛이 함빡 들쳐들고 있었다. 어디선지 닭이 한가롭게 낮울음을 잡히고 있었다.
"언니?"
"왜."
"서울 안 가시려우?"
"서울? 안 가겠다."
기화는 잘라 말했다. 고집스러움이 그의 얼굴을 딱딱하게 한다.
"안 가겠다는 까닭이 뭐유?"
"하여간,"
"기생질은 안 하겠다는 뜻인 모양인데 살아갈 방도도 없이 이곳에 묻혀 있자는 것은 살다가 막히면 죽는다 그 생각이우?"
"어떻게 되겠지."
"세상에, 이리 답답할 데가 있나."
"나 이부사댁 서방님, 그분이 알까 두려워서 그래."
"그렇담 어재서 이 지경까지 됐수."
"서로가 외로웠던 게지. 우린 애당초 그럴 사이가 아니었는데..."
기화는 쓸쓸하게 웃었다.
"내가 이리 된 건 내 탓이야. 그 양반이 그리 된 건 또 그 양반 탓이고, 피차 빚진 것도 갚을 것도 없어. 그 양반은 여자 복이 없었고 나는 남자 복이 없었다, 그래야 할까? 다지나간 얘기지만, 그나저나 다 늙게 생긴 아이가 걱정이야."
자는 아이에게 측은해하는 눈길을 보내며 칼을 놓고 쟁반을 산호주 앞으로 밀어준다.
"피차 빚진 것 갚을 것 없다 하지만 아이는 달라요. 핏줄을 찾아야지요. 아일 위해서도 할 수 없잖우? 본가에 갖다 맡겨요. 아일 달고서 언니 같은 사람이 어떻게 살우."
"무슨 소릴 하는 게야? 그렇게는 못해! 넌 본시부터 인정머리가 없었어. 어찌 그리 마구잡이로 함부로 말을 하니,"
얼굴이 시뻘개졌다. 기화의 기세가 하도 험악하여 산호주는 멈칫하고 말았다.
"내 성미는 언니가 잘 알지 않우. 늘 말투가 그런 걸 어떻게 해."
"이런 오막살이, 네 눈에는 우습게 하고 사니까 내일부터라도 당장 굶어죽을 것같이 보이겠지만 이삼 년은 넉넉히 살아갈 수 있어.옛날같이 생각 없는 계집은 아니야."
기화는 별안간 흐느꼈다.
"네, 네, 알았수. 내숭스럽긴, 그러고도 운삼어른 도움을 받았나요? 아닌 게 아니라 달라지긴 달라졌수."
산호주는 흐느껴 우는 기화에게 일부러 핀잔을 안겼다.
하룻밤을 함께 묵으면서 산호주는 집안을 치워주고 아침엔 마당도 쓸어주고 올 겨울을 대비하여 장작을 몇 짐 들여주곤 떠나왔던 것이다.
상현은 산호주 방에서 사흘을 더 보냈다. 병보다 마음 때문에 몸살이 나고 답답해 견딜 수 없는 사흘이었다. 겨우 회복기에 들어서긴 했으나 완쾌되진 못했는데 상현의 고집에 못 이겨 인력거를 불러온 산호주는
"떠나면 다시 오시겠어요? 하니 아시고나 가세요. 아이는 딸이구요. 언닌 군산에 살아요. 삼합이란 기생집을 찾으면 언니 사는 곳을 가르쳐줄 거예요."
"나한테 든 비용 갚으러 오겠다."
상현의 대답이었다. 산호주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으나 이내 사라졌다.
'딱한 양반,'
소용없는 짓인 걸 알면서 인력거에 오르는 상현에게 산호주는 또 말했다.
"저한테 비용 갚으러 오시지 말구 기화언니한테 한 번이라도 가보셔요."
"어서 가잔 말이야!"
상현은 차부에게 소리를 질렀다.
4장 노령의 빙판
"상현아! 자네 소리 소문 없이 죽을 뻔했다면서?"
부산하게 떠들며 선우일이 방으로 들어왔다. 방 앞에서 신발을 벗던 성삼대는
"호강했지 뭐. 기생방에 일주일 넘게 누워 있었다면. 하여간 인복있는 작자는 병이 나도 기생품속이라, 부럽네 부러워."
말쑥한 양복의 선우일과는 반대로 무명 두루마기에 수염도 안깍고, 목수건을 끄르며 성삼대는 선우일 옆에 앉는다.
"인복이 아니라 여복이네."
상현이 이불을 걷고 부스스 일어나 앉는다.
"얼굴이 축갔군. 앓기는 되게 앓은 모양이야."
선우일이 상현의 얼굴을 쳐다본다.
"본바탕으로 돌아온 게지. 술살이 쪼옥 빠졌던 게야. 바은 따뜻하군."
성삼대는 방바닥을 짚어본다. 농담부터 앞세우며 얼렁뚱땅 넘기고 있으나 상현은 이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불만을 가지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요즘 재미가 어때?"
상현도 딴전을 피우듯 물었다.
"재미? 죽을 지경이지. 재미는 자네가 톡톡히 보지 않았나. 그래 지성으로 병간호했다는 기생은 쓸만한 계집이든가?"
"박색이야. 성깔 고약하구,"
담배를 붙여물었던 상현은 심한 기침을 하다가
"제에기랄!"
담배를 눌러 꺼버린다. 태연스럽게 말은 했지만 심중이 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기화에 대한 죄택감보다 최참판댁의 침모 딸이며 기생인 기화 몸에서 자신의 핏줄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치욕감 없이 되새길 수가 없는 것이다. 뭣이든 닥치는 대로 두들겨 부수고 싶었다.
"당분간은 담배 안 피우는게 좋을 게야."
선우일은 험악해지는 상현의 얼굴에서 벽면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늘 그러했다. 두려운 것도 아닌데 정면으로 대하기만 하면 벼르고 별렀던 충고를 못하고 마는 이상현의 분위기다. 잇몸이 근질근질하지만 결국 그의 행사에 대해서는 말을 못하고 마는 것이다. 오늘은 충고 아닌 병문안을 위해 온 터이기는 했다.
"태수형님이 걱정을 하시더군."
겨우 선우일은 얘기를 이었다.
"무슨 걱정?"
"자네가 앓는다는 소문을 들었지."
"이젠 괜찮어, 나가기 싫어서 누워 있을 뿐이지."
"몸도 다스리고 글도 쓸 겸 절에 가볼 생각 없나?"
"태수형이 그러라 하든가?"
"그러라기보다 그러는 편이, 말하자면 심기일전하는 뜻에서 말이야. 나쁠 것도 없잖겠나?"
상현은 쓴웃음을 띤다. 살빛이 검은 편인 상현은 앓고 난 뒤라서 그랬던지 얼굴빛이 노오랬다. 좋지 않은 안색이었다.
"난 틀렸어. 죽을 용기도 없는 놈이라구. 값싼 동정심보다 훨씬 더 값싼 인간이거든."
"자학하는 게 바로 자네 병일세."
들은 척 만 척 상현은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며
"아주머니! 아주머니!"
신경질적으로 불러댄다.
"네 가요오."
하숙집 여자가 신발을 끌며 다가오자 뭔가 귓속말을 하더니 방문을 닫는다.
"요즘 선우일이 자넨 물산장려운동인가 뭔가 때문에 상당히 바쁜 모양 아니야?"
순간 선우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고 성삼대는 상현을 흘깃 쳐다본다.
"왜? 그 일 땜에 바쁘면 안 되겠나?"
시작부터 흥분한다.
"안 된다는 말 안했다. 덕분에 황태수 같은 사람 돈벌게 됐다는 얘기는 할 수 있겠지."
"자네도 공산당이야?"
"민족 전체가 호응하는 운동을 공산당만이 반대하니까 하는 말일세."
"흥부나지 말게. 공산당이라고 다 반대한 것도 아니었고 나도 반대하진 안았다구. 고무공장 설립에 열 올리는 황태수형이 부자 되겠다는 얘기, 그것뿐이야."
"그러면 태수 형이 그 운동을 이용한다, 그 말인가? 왜들 이러지? 왜들 이러느냐 말이야. 모두 삐딱하니, 사촌이 땅 사면 배아픈 상판들 하구서, 그러니 조선 놈들 될 일도 안 되는 게야."
"절에 가라니 마라니, 불쾌해서 그런다 왜! 값싼 동정보다 훨씬 더 값싼 인간이지말 말이야, 나 비럭질은 안 해!"
"공과 사를 혼동하니까 자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게야. 어째서 이 운동을 몇몇 기업가를 살찌우는 운동으로 보느냐 말이다."
"결과가 그렇다면 그런 말 들어도 별수없지. 아무튼 팔방미인 황태수보다 찧고 볶고,ㅡ 천하 망나니 서의돈 쪽이 내게는 매력이 있어."
"서의돈? 흥! 그 사람 공산당이야. 맹랑한 소릴 하고 다니더군."
눈살을 찌뿌리며 선우일은 씹어뱉듯 말했다.
"공산당이면 어떻고 사회주의면 어때? 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야 팔자 좋은 사람들의 일, 양반 놈들 백정하고도 야합하는 세상인걸. 하지만 말이야, 의돈형은 무정부주의자지 공산당은 아니다."
"백 보 오십 보 아닌가."
"이 친구 자본가 다 됐군."
"오핸 말게, 내 근본은 알다시피 응시 자격이 없었던 조상의 후손이고 보면 양본놈들 백정하고 야합했다하여 혐오감을 느낄 까닭이 있겠나."
"흥, 백정하고 쌈질하는 놈들은 농청놈이더군 그래."
모멸의 웃음을 띤다.
"나는 남의 얘길 하는 게 아니야. 내 얘기란 마일세. 내가 공산당 아니라 하여 무산계급을 옹호하고 나서는 공산당을 송충이 보듯할 하 등의 이유도 없지. 다만 물산장려운동을 방해하고 나서는 일만은 용서할 수도 없거니와 반대하는 놈들은 다아 총독부하고 붙어먹은 놈이다! 그렇게 말하겠어."
"나는 자네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네."
처음 농담 몇 마디하고는 뭔지 모르게 우울한 얼굴로 듣기만 하던 성삼대가 말했다.
"어째서!"
선우일은 날카롭게 반문한다.
"특히 의돈형님이 반대하는 이유 중에는 타당한 것이 있어."
"타당한 것이 있다? 천만에! 민족 분열 운운하는 서의돈이야말로 민족의 대동단결을 저해하는 해독분자다! 나는 감히 그렇게 말하겠다. 어떠한 이론으로도 반대의 이유는 못되는 게야!"
핏대를 세운다.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이 왜 그리 감정적으로 몰고 가누. 도무지 자네답지가 않단 말이야."
"물산장려운동이 단순한 경제적 자립에 한한 것이야? 자네 말마따나 경제를 한 나야. 뭐 인도식이다, 중국식이다, 남의 형편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도 우스운 얘기지만 우리에게 시급하고 절실한 문제는 일제에 대한 저항 아니겠느냐, 그 말이야. 중국과 다르다하여 반대하는 놈들, 별무소득으로 결론을 내리는데, 설사 일본놈 자본에 눌리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가정하더라도 삼일 운동 이후, 이 시기에, 어떻게 일으킨 불꽃인데? 그걸 끄려고 덤비는 놈들은 다 반역자다! 몇 사람의 기업가가 돈 좀 벌게 된다는 건 아무거도 아니라구. 새발의 피라구. 그걸 못 새겨서, 아 그래 초가삼간 타는 것보다 빈대 타죽는 것이 시원하다는 심보 아니고 뭐겠냐 말이야. 일본놈이건 조선놈이건 착취당하기론 마찬가지야. 길가에 쫓겨나 앉아서 집찾을 생각은 않고 싸움질하는 꼴밖에 더 되겠느냐 말이다. 계급투쟁을 나쁘다 하는 게 아니야. 계급투쟁 그 자체도 투쟁대상은 일본이어야 한다, 적어도 지금 이 시기엔 말이야."
선우일은 자제심을 잃고 떠들어 대는 것이었다.
"그건 정설이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사실이고, 삼일운동 하곤 성격이 다르지만 우리 민족을 동원할 수 있는 활력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순 없지. 허나 불길이 지나간 뒤에 솟아날 것을 일단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의돈 형님을 만나기 전에는 나도 자네 의견과 비슷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왜냐하면 물산장려운동을 방해하고 비난을 퍼붓는 이곳 좌파 과격분자들의 이론과 의돈 형님의 이론엔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표면으론 일치하는 것 같지만 의돈 형님은 심층을 찌르고 있고 이곳 좌파들은 일반론을 펴고 있단 말이야. 어느 곳에 가져가도 적용되는 이론 말이야. 의돈 형님은 동경서 지진을 겪으면서 목격한 현실을 토대로 하여 이 운동의 성격과 결과에 판단을 내린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총독부의 속셈이야. 문화정책이라는 미명아래 소극성을 띤 방해의 방습이란 말이야. 아까 자네는 중국식 인도식 왈가왈부하는 것이 우습다 했는데, 총독부가 두려워하는 것은 아마 인도식일 게야.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지금 조선에서 불고 있는 근대화 바람이란 상당히 오래 전부터였으며 지식인들의 구십구 프로가 계몽주의거든. 그게 먹혀 들어가고 있는 게야. 물산장려운동만 하더라도 근대화라는 용어는 아주 강렬하게 작용하고 있지 않나? 그런데 그것도 적당한 시기에 불을 꺼야 한다는 총독부의 심산이라면 뭘 의미 하는 걸까? 미구에 올 사회주의 혼란기를 대비하는 일환이라 본다면 비약일까? 형님 말씀이 영세한 자본, 불리한 조건으로 풍부한 자본, 유리한 조건, 그리고 뿌리를 깊이 내린 그들과 경쟁하는 것은 아예 있을 수도 없고 존립하는 것조차 그들 뜻대론데 자본이 최소한도 유통을 유지하려면 노동자들 임금에서 재주부릴밖에 달리 길이 있겠느냐는 거지. 사실이 그렇다구. 일본인 업체나 일본인에게 고용되면 일자리 잘 얻었다 하는 것이 일반의 인심 아니야? 왜냐, 든든하고 조선인들보다 임금이 후한 때문이 아니겠어? 일자리는 모자라고 노동력은 많고 결국 남아나는 노동력을 임금이 싸도 흡수되게 마련인데, 불평불만은 싼 곳에 있지, 비싼 곳은 적어도 싼 곳이 쓰러질 때까지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거 아냐? 장차 노사 문제로 혼란을 겪게 될 때 제일 먼저 칼끝에 올려지는 것이 조선인 기업가인 것은 뻔한 일이지. 그러니 몇 사람을 살찌우는 대신 그들은 일본 자본가의 방패가 되는 동시 민족 분열의 원천도 될 수 있다는, 나는 의돈 형님이 말한 중에서 이 한 가지만은 경청할 값어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그건 무산계급 쪽에서 서서 한 말은 아니었어. 착취하는 데 일본 놈 조선 놈 다를 것이 없다는 단순한 부정이 아니란 말이야. 일본이 지금 사회주의의 물결을 두려워하고 골머릴 썩이는 것도 사실이지. 중국이 러시아를 업고 공산화되는 것을 누구니 누구니 해도 젤 무서워하는 것은 아마 일본일걸?"
마침 술상이 들어왔다. 선우일이 반론을 제기할 겨를이 없어진 것이다. 병문안 온 처지에 술상을 받아서는 안 되겠기 때문이다.
"너 미쳤어?"
성삼대가 소리를 질렀다. 하숙집 여자는 쓴 웃음을 띠며 술상을 놔두고 급히 나가버린다.
"다 나았다고 했잖아. 나가기 싫어서 누워 있는 거라구."
"그러면 이 술 자네도 마시겠다 그 얘긴가?"
선우일이 묻는다. 상현은 피시시 웃으며,
"조금은 마실 수 있겠지."
"구제받을 수 없는 사내로군."
"구제는 자네들 같은 애국자나 받아라. 지금 내게는 이 술만이 구세주야."
상현을 술상을 질질 끌어당겨 술잔에 술을 친다.
"별수 없다. 제 몸 제가 아껴야지 남이 어떻게 해. 괜찮다는 말 믿기로 하고, 아닌 게 아니라 맨입으로 지껄였더니 입이 마르던 참이었는데, 마시자."
성삼대가 술을 들이켠다. 두 사라도 따라 술잔을 든다.
"의돈형님 동경에 있었던가?"
상현이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응, 이십 일이 넘었나? 신이놈하고 함께 왔다더군."
"지진을 겪었단 말이지?"
"음,"
"몸뚱이가 작아서 숨기엔 좋았겠다."
"상현이 어쩌고 있느냐고 묻더군."
"중국에 있는 줄 알았지. 태수형이 쓰디쓰겠다."
"숨바꼭질이지, 서로가."
성삼대가 말이었다.
"안 만났단 말인가?"
"음, 욕을 해쌌더마는 임명빈 씨는 만난 모양이더군."
"임명빈 씨..."
"그야 앞뒷집인데 안 만날 수 있어?"
선우일의 말이다.
"어쩐지 불안한 생각이 들어."
"뭐가,"
마땅찮은 것을 삭이려고 애를 쓰며 선우일은 성삼대에게 반문했다.
"의돈 형님 말이야."
"왜."
"이곳저곳 분주히 나다니는데 그래도 될지 모르겠네."
"걱정 마라. 잡아가진 않아. 물산장려운동의 반대잔데 무슨 걱정인고?"
"지랄한다."
"날보고 황태수 사냥개라 하더군."
"들어 싸지. 너무 두둔하고 다니더라니,"
"길게 그런다면 늑대가 될까 부다. 어디 일자리 없어서 태수형님을 돕는 줄 아나?"
"일자리 없을 턱이 있나. 경제학 학사신데, 은행에 들어가면 장차의 두치감이요 전문학교 교수 자린들 어려울 것 없지. 뼈빠지게 일 하고서 장사꾼 시녀 노릇 한다는 소리 듣는 건 확실히 억울한 노릇이야."
성삼대는 약을 올린다.
"자네 생각을 해서 참아야지. 나보다 억울한 자네 말이야."
"가만있자, 내가 남한테 돈 빌려주고 못 받은 일이라도 있었던가?"
"나는 장사꾼 시녀지만 자넨 안사람 시녀란 말일세."
순간 성삼대의 얼굴이 구겨진다. 큰소리는 쳤지만 병 후 처음 마신 술은 고통스러웠다. 비스듬히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상현이 선우일에게 눈짓을 한다. 어지간히 약이 올랐던 선우일이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과연 그렇군 그래."
성삼대는 헛웃음을 웃었다. 너무했나 싶었던지 선우일이 당황한다. 성삼대의 결혼 생활이 불행한 것은 친구들 간에 유명했다. 부모가 시킨 결혼이었지만 성삼대는 혼전에 여학교를 다니던 참한소녀를 본 일이 있었다. 그러니까 성삼대로선 만족한 마음으로 신부를 맞이했던 것이다. 온순하고 소극적이며 여학교를 나왔어도 구식의 사고방식에서 헤어나질 못한 여자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남편을 싫어하는 것이었다. 마음에 둔 사람이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며 안 살고 가겠다는 용단도 내리지 못하면서 거의 본능적으로 남편을 싫어하는 것이다. 계집아이를 하나 낳은 후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것은 남자에게는 거의 치명적인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고통을 청산 못하는 것은 성삼대가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또 피차를 위해 비극이었다. 그리고 무한한 인내이기도 했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과 사는 여자의 경우도 그러했고 사랑이 없는 여자를 옆에 두어야 살 수 있는 남자의 경우도. 언젠가 선우일과 상현은 폭음을 하고 우는 성삼대를 본 일이 있다.
"역시 좀 무린 것 같군."
상현은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쥔다.
"당연하지. 이제 마시지 마. 내가 대신 처분하겠다."
성삼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으나 비애와 분노를 짓씹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의돈형님은 일본에 뭣 하러 갔을까?"
머리를 싸쥔 채 상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화제를 돌려보려는 노력이었다.
"목적 없이 갔을 리가 없지."
선우일이 덤비듯 말꼬리를 잡았다. 성삼대에게 깊이 상처를 주었을 자신의 말이 무산되기를 바란 나머지 서둘렀던 것이다.
"무슨 목적이 있었을까."
"글세... 뭔지 심상찮은 것은, 박열이 지난 시월에 체포되었거든."
"그래서?"
"그게 마음에 걸린단 말이야. 아니키스트 박열."
"아지가 무슨 소릴 하려는 게야? 의돈형님은 아직 한 번도 자신의 입으로 무정부주의자란 말을 한 일이 없어. 함부로 어디 가서 그 따위 소리 지껄였다간,"
성삼대는 의혹 자체를 휘저어버리듯 강한 어세로 말했다. 무정부주의자 박열 박열을 두고 말할 것 같으면 독립운동에 관련되어 경성제이고보에서 퇴학을 당했고 지식청년들에게 매혹적인 무정부주의자로 변신한 것은 일본으로 건너간 후의 일이다. 비밀 결사 흑도회에 가입, 일녀 애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일본 천황 히로히토를 암살하려다 거사 전에 발각되어 체포된 것이 작년 시월이었다. 공산주의와 상충하면서 국제주의를 표방하는 무정부주의가 독립운동과는 계열이 다른 것은 물론, 상당한 조직과 위 을 내포하고 있는 일본의 무정부주의 사상을 토양으로 한 박열의 거사 계획을 두고 만주, 중국을 떠돌던 서의돈을 연관시켜보는 것은 사실 모호한 얘기였다. 또 서의돈을 아나키스트로 단정하는 것도 분명찮은 일이긴 했다. 성삼대가 강력히 부인하는 것은 그런 판단에 의한 것이기보다 천황 암살이라는 어마어마한 사건, 그 사건이 지닌 무게 때문에 서의돈 신변을 근심했던 것이다. 선우일도 평상시 같으면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도 않았을 테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까?"
선우일 말에 성삼대는 입맛을 다시며 술잔을 든다.
"사상을 입에 올리지 않고는 앞으로 지식인 대접 못 받을걸. 흥!"
상현이 한마디 툭 던졌다.
"그럴 게야. 노령에서 불어오는 공산주의 바람, 일본서 불어오는 무정부, 사회주의 바람, 맞불어젖히니 말씀이야. 불어오는 바람도 바람이거니와 바람맞이를 할 여건도 조성되어가고 있으니, 근간에 와서만 해도 소작쟁의가 전남을 비롯하여 각처에서 일어났고 백정들의 형평운동 또한 전국적으로 번질 기세, 특히 일본 니이가타에서 조선인 노동자를 백 명 가까이 학살한 사건, 동경진재 때도 그러하였고."
"새로운 단체도 우후죽순처럼 많이 솟아오르고."
상현은 관심 없다는 듯 말하고는 머리를 긁적긁적 긁는다.
"자금도 많이 흘러들어왔지. 이동휘를 통해서 말이야. 모스크바의 돈은 중국공산당, 일본 좌익 단체에까지 미쳤으니, 국내만 하더라도 흘러들어온 자금 때문에 말썽이 많긴 했지만 이렇게 단시일 내에 공산주의 세력이 침투할 수 있었던 것도 돈의 위력이 컸었다는 얘길 게야. 조직이란 주둥이나 손발 가지고 되는 건 아니거든."
선우일은 돈의 위력을 강조하는 것처럼 말했다. 상현이 이어,
"그 이동휘도 이제는 숨통이 막혀버린 것 아닐까? 작년에 이르코츠크파가 조선공화국이라는 것을 조직했으니.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중국 놈이 먹고,"
"이동휘는 이미 흑하사변때 간 사람이고 꽤 일은 많이 했는데 결국 이르크츠파가 승리한 것은 텃세가 주효한 것 아니겠어?"
"텃세나 재주가 어디 있어? 승리는 또 어디 있고? 조선독립군이 주축이 되 원동혁명군의 편성을 두려워한 일본의 입김이 흑하사변으로 몰고 간 게야. 이르크츠파의 중상모략, 자금 약탈, 사할린 군대의 이탈 같은 것은 표면상의 이유일 뿐이야."
성삼대가 매듭 짓듯 말했다.
이르크츠파란 1921년 6월 비참했던 흑하사변으로하여 사람들 귀에 익은 명칭이다. 귀화인이 중심되어 조직된 러시아내의 조선공산당인데, 성품이 강건하고 다분히 민족주의적인 발엘리야가 이끄는 사할린 부대, 저 유명한 1920년 겨울 니항사건때 적군계 빨치산과 합세하여 니항을 습격하여 일인을 전멸시켜버린 사할린 부대하고는 다 같이 귀화인으로 조직되었어도 앙숙이며, 이동휘가 장악한 상해파하고도 심각하게 대립해온 터이다. 흑하사변을 말할 것 같으면 그 배경 상황이 매우 복잡하고 요인에 대한 관점도 구구하지만, 러시아 형명에 성공한 레닌이 장차있을 중국과 일본의 적화를 염두에 두고 구상한 원동혁명군에 조선독립군을 모두 흡수하여 소위 '인터내셔널 오트랴드'를 편성하는데 조선, 중국, 일본, 몽고 등의 혁명적 청년들을 참가시켜 전초병을 훈련하자는 것이었다. 당면 목적은 대일전쟁이었으니 만주 일대에 흩어져서 일군 토벌대에 쫓겨야 하는 독립군이 노령으로 넘어간 것은 당연했고, 일찍이 막대한 자금을 받아 상해에서 공산당을 조직하고 국내와 일본, 중국에까지 손을 뻗쳤던 이동휘가, 전적으로 독립군을 받아들일 것이며 보다 강력한 군대로 훈련시키겠다는 러시아 혁명정부의 약속을 믿고 독립군의 노령행을 독려한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자유시에 군대를 집결해놓고 진작부터 꼬리를 물고 오던 상해파와 이르크츠파사이에 주도권 쟁탈의 불이 붙은 것이다. 살기등등한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고 결국 고려공산당대회를 열자는 결정을 보았는데, 대회 참가 대표에 관한 심사에서 이르크츠파의 일방적 심사, 이동휘와 노백린의 대회 참가 거부 등, 결국 대회에서 상해파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몰고온 각 군대들에 대한 실권마저 잃게 된 것이다. 반발한 사할린 부대가 이탈을 선동하고 집결한 독립군이 동요하고, 그러나 일본의 압력으로 정세가 변해버린 러시아 혀명정부는 이미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결정하고 있었다. 무장 해제에 앞장선 것이 이르크츠파의 사할린 부대와는 앙숙인 자유대대였으니 피비린내나 는 참극은 결정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쌍방 간의 총격전에서 사할린 부대는 대부분 살상대고 말았다. 무장 해제를 하는 쪽이 승리한 것은 당연하다. 결국 박엘리야, 그밖에 혼성부대의 인솔자는 체포되어 처형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일전쟁과 독립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또 그것은 조선 독립사상의 일대 오욕이었으며 약소민족의 피눈물 나는 비극이기도 했다.
"이동휘가 왜 당했을까? 왜 실패했을까...:
"자네 부친 생각을 하나?"
선우일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상현은 그 말대꾸는 아니 한다. 다시 선우일은
"글세 이동휘가 당한 원인... 무골의 로맨티스트, 한말의 그림자가 감도는 로맨티스트의 당연한 결말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지.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는데, 일리일교의 계몽주의자이기도 했었지. 아무튼 의병의 마지막 흐름이 이제 산송장이 된 게야."
순간 상현의 얼굴에 그간 찾아볼 수 없었던 분노의 빛이 떠오른다. 역시 부친 이동진의 죽음을 생각했던 것이다.
"독립투사들 중에서 이동휘만큼 변신을 거듭한 사람도 드물 게야. 아전의 아들로 태어나서 궁전진위대장, 참령에 까지, 기독교의 전도사가 된 일도 있었고, 교육 사업에 정열을 쏟았는가 하면 상해 임정을 요리하였고, 또 공산당을 조직하였으니, 기구하다면 참 기구한 생애 아니겠나."
성삼대는 주전자를 들어보다가 빈 것을 알고 술상에서 물러나 앉는다.
"그러나 그 사람을 변절자라 할 수는 없어. 독립투쟁의 신념만은 투철했으니까. 그런 민족적인 의식 때문에 패배했다 할 수도 있을게야. 민족자본주의자니, 기회주의자니 하고 욕을 먹은 것도 그 때문인데, 과연 이동휘 같은 인물이 아니었다면 러시아 혁명정부로부터 그 많은 자금을
받아냈을지 의문이야."
"이제 그만 일어나자. 패장에 대한 찬송가는 그만 하고,"
성삼대는 얘기를 계속하려는 선우일을 툭 치며 일어섰다.
"몸조리 잘하게. 술 마실 수 있을 때 다시 만나자."
성삼대는 모자를 눌러쓰며 나갔고, 선우일은
"절에 가는 것, 생각이 있거든 알려주게, 태수형님의 호의를 삐두름하게 생각하지만 말고. 그럼 가네."
그들이 돌아간 후 상현은 쭈그리고 한참 동안 앉아 있다가 무슨 생각이 났던지 벌떡 일어섰다. 목도리를 두르고 자리옷으로 입었던 한복 우이에 외투를 걸치고 모자를 눌러쓴 뒤 휭하니 하숙을 나섰다. 뒤에서 하숙집 여자가 뭐라 하는 말이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무턱대고 걷다가 상현은 얼굴을 들고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다. 해거름이었다.
'하여간 걸어보자. 아직 안 왔으면 기다리는 거구.'
그는 임명빈을 찾아가는 길인 것이다. 어쩌면 서의돈을 찾아가는 길인지도 모른다. 왜 가는지 가면서 생각하기로 하고 나선 길이다. 산호주의 마지막 말이 바늘 끝처럼 심장을 계속 찔러댔으며 목덜미에 스며드는 바람이 맵고 차가운데 어쩐지 몸이 날아갈 것 같은 해방감, 상쾌한 것을 느낀다. 무슨 까닭일까. 새로운 천지가 저만큼 서서 손짓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은 또 어디서 온 것인지, 그것도 아직은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왜 오늘 갑자기 부친의 죽음이 그처럼 뼈에 사무치게 슬퍼했더란 말인가. 춥고 뼈를 깎는 듯한 만주 벌판의 바람과 끝없이 번들거리는 노령 빙판이 어찌 그리 가깝게 가슴에 와닿았는가. 생전의 부친은 상현에게 천근같은 납덩어리의 무게였었다. 죽은 후 오늘까지의 부친은 상현에게 회한이요 죄의식의 고통이었다. 그 무지무지하게 고통스러웠고 무거웠던 구각을 오늘 돌연히 벗어던진 것은 홀연히 찾아온 기적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구, 이거 몇 해 만이지요?"
임명빈의 처 백씨가 놀란다.
"선생님 돌아오셨습니까?"
"곧 돌아오실 거요. 어서, 사랑에 드시오."
"어머님의 병환은 어떠신지,"
"차도가 있을 리 없지요. 지금 잠드셨어요."
"네, 제가 여기 온 지 한 삼 년 되겠지요?"
상현은 쑥스럽게 웃는다.
"그렇게 됐을 거요. 이선생도 얼굴이 많이 달라졌군요."
"저야 뭐, 사모님께서는 오랫동안 병간호에 수고가 많겠습니다."
"어느 집이나 노인을 뫼시면 으레 그렇지요."
상현은 옛날과 조금도 달라진 곳이 없는 사랑, 명빈의 서재로 들어갔다. 반신불수가 된 노인, 출가한 명희, 집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지난 일들이 뿌듯하게 가슴에 치민다. 임명빈은 조병모가 설립한 영화중학의 교장으로 취임한 후 인편을 통해서 학교에 오지 않겠는냐는 전갈을 보낸 일이 있었다. 그때 상현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던 것이다. 심부름하는 아이가 차를 끓여 왔다.
"명희아씨는 친정에 더러 오시느냐?"
"가끔 오세요."
아이가 나가고 뜨거운 차를 마시면서 산호주의 말을 생각한다. 고개를 젓는다. 명희의 행복하지 못한 결혼 생활과 성삼대의 괴로워하던 얼굴을 생각한다. 성삼대의 아내와 명희의 경우, 그 성품도 비슷한 점이 깨달아진다.
'최서희는 다르지. 어느 여자 어느 사내보다 그의 삶은 강렬하다.'
"상현이 왔다구?"
문 밖에서 들려온 음성이다. 이내 방문이 열렸다.
"이 사람아, 안 죽고 살아 있었구먼."
사십이 다 된 임명빈은 옛날과는 퍽 달랐다. 교육자 특유의 안정감을 풍겨주었고 나이보다 늙은 것 같다.
"죄송합니다."
"하여간 잘 왔어, 잘 와. 앉으라구."
명빈은 고수머리의 큰 두상에서 모자를 벗어 걸고 외투도 벗어 걸고 자리에 앉는다.
"그새 많이 늙었습니다. 교장 선생님 다 됐군요."
"별수 있겠나? 나같이 능이 없는 사람은, 돌아가신 아버님 말씀대로야."
서글프고 좀 미안해하는 표정이다.
"글쓰는 놈들이라고 별수 있습니까? 저같이 성격파탄자 아니면 허풍꾼들이 아니겠습니까?"
임명빈은 지난날을 생각하는가, 어쩌면 명희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새삼스럽게 상현을 바라본다. 상현의 근황에 대하여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얼마 전에 폐렴을 앓아 죽을 뻔했던 소식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매부 되기를 원해던 사내, 차림새와 얼굴이 다 피폐할 대로 피폐한 것 같은데 눈빛은 맑다.
"요즘도 술 하나?"
"얼마 동안 못했습니다."
아팠다는 얘기는 안 한다.
"그럼 나하고 술이나 하세. 놀다가 천천히 가아."
순간 명빈의 얼굴에 외로움이 스쳐간다.
"선생님, 술 늘었습니까?"
"별로, 조금씩 하지만,"
"저도 오늘은 많이 못합니다."
"그래? 그건 환영할 일이다. 신문사에 나가나?"
"때려치웠습니다."
"그렇담 글 많이 써야겠지."
"글쎄요."
"내게 자네만큼 재질이 있었다면 결코 훈장은 안 됐을 게야."
"무의미한 일입니다. 의의가 없어요. 그보다 의돈형님을 만나셨다구요."
"음."
"댁에 계실까요?"
"아마 없을걸. 어쩌다 한 번씩 오기는 오는 모양이지만. 자네 아직 못 만나보았나?"
"네."
"꼭 만나봐야 할 일이라도 있는가?"
"의돈형님 따라가려고 생각했습니다."
"뭐?"
놀란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마른안주에 따듯하게 데운 정종, 술상이 들어왔다. 상현은 명빈의 술잔에 술을 붓고 명빈은 주전자를 받아 상현의 술잔에다 술을 채운다.
"깊이 생각해보았나?"
"..."
"즉흥적으론 안 돼."
"이 문제는.... 제가 노령에서 돌아온 그때부터 마음에선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가겠다는 생각은 안 했습니다마는 가야 한다는 강박 속에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건 이해할 만하다구."
"솔직히 말해서 가겠다는 생각은 돌발적인 것입니다. 가서 뭘 하겠다는 작정도 아직 하지 않았고,"
"의돈이하고 자넨 맞지 않을 텐데... 감정 문제를 말하는 건 아니라구."
"압니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복잡한 심정으로 명빈은 술을 마신다. 상현이 문학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지 않고 있다는 불만은 늘 있었던 것이지만 재질에 대한 기대와 안타까움은 떠나겠다는 마당에서도 여전히 남는다. 그리고 묘하게 질투 같은 감정, 자기 혼자만 동그마니 남는 것 같은 외로움, 사돈댁 그늘에 덮여서 사는 비굴감, 그의 입에서 다시 한숨이 ㅅ어나온다. 그런 명빈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는 상현의 마음속에는 악마와 같은 해방의 환희가 스쳐가곤 하는 것이다.
'이젠 도망간다. 도망치는 게야.'
"세월이 빨라."
"네?"
"진주 최여사 큰아들이 중학에 들게 됐으니."
상현의 낯빛이 순간 달라진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길상을 생각한 것이다.
"선생님 학교로 옵니까?"
"명문도 아닌데 우리 학교에 오겠나? 다만 서울서 공부하는 동안 우리 집에 맡겼으면 하는 의사를 비췄더구먼."
5장 종놈의 아들
선생님 댁에서 돌아오는 길에 환국이는 책방에 들렀다. 달마다 나오는 소년잡지 한 권과 노구치 우죠의 동요집 한 권을 산다. 잡지에 간간이 실리는 노구치 우죠의 동요가 참 좋았기 때문이다. 수염이 검실검실한 책방 아저씨가 책방 아저씨가 책을 포장하면서 묻는다.
"환국이는 서울로 공부 간다믄서?"
"합격이 돼야지요."
다른 책을 들춰보며 하는 대답이다.
"합격이사 문제 없일 기구마는. 늘 일등만 해왔는데 무신 걱정고. 우리 집 학성이가 니 반만 돼도 발뻑도 자겄다마는,"
"학성이가 어때서요?"
"마, 돌대가린 기라."
"중간 성적인데 돌대가릴까요? 씨름도 잘하고 마음씨가 좋습니다."
"씨름꾼이나 된다믄 모릴까,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오늘도 남강에 얼음 타로 가서는 감감소식, 함흥차사아이가."
포장한 책을 내준다.
"아저씨, 안녕히 계세요."
"오냐, 잘 가거라."
바람이 몹시 차다. 땅이 꽁꽁 얼어서 발바닥이 톡톡 튀는 것 같다. 일주일만 지나면 서울에 시험 치러 가야 한다. 나이보다 환국의 키는 좀 큰 편이다. 며칠 전에 두만네, 석이네가 만났을 때 환국이 얘기가 났었다.
"길상이 어맀일 적하고 우짜믄 그리 꼭 같겄노. 걸음새까지 닮았더구나. 깨끗하게 잘생깄더마."
"옛 말에 안 그랍디까? 씨는 못 속인다고요."
"그러시. 저분 때도 두만이 가게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깜짝 놀랐다 카이. 하마 길상아 하고 부를 뻔 안 했겄나? 이제는 내 머리가 백발인데 세월 간 거를 깜빡 잊었구마."
하고 두 사람은 웃었다. 착각할 만도 했다.
"우리 석이가 그라는데요, 환국이 도련님 별명이 작은 공자라 카든지,"
"공자야, 공자지. 한 다리가 짧기는 해도 최참판댁 핏줄이믄 귀공자제."
"성님도, 그런 공자각 아니 기라요. 공자 맹자 하는 그 공자 말입니다."
"아아,"
"그라고 또, 공부는 말할 것도 없지마는 아바니를 닮아서 그림 재주가 비상하다 하더마요."
"씨도 좋고 밭도 좋은데 와 안 그렇겄노. 이런 말 하믄 우리 며누리가 섭하게 생각할 기다만 일 잘하고 맘씨 좋다고 인물을 너무 안보는 것도 아닌 기라. 너거 며누리는 참하게 생깄이니 손자 인물걱정은 안 해도 좋겄더라."
"그래도 복 많은 기이 제일이제요. 아들들 낳고 살림이 불티겉이 일었는데 그기이 다 그 며누리 복 아니겄소?"
촉석루 가까이까지 간 환국이는 집으로 가려다 말고 촉석루 쪽으로 내려간다. 강바람은 더욱 차가웠다. 그러나 깊숙이 눌러쓴 털모자는 따뜻하였고 털실장갑 속에 든 손도 시렵지는 않았다. 하얗게 얼어붙은 강바닥에 새까만 아이들이 썰매를 타고 있다. 연을 띄워놓고 얼레를 든 채 뛰어가는 아이도 있다. 강가에는 얼음을 깨고 빨래하는 여자들도 볼 수 있었다. 윤국이도 썰매를 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가깅 퍼뜩 들었다. 책을 겨드랑이에 낀 환국이는 외투 주머니 속에 두 손을 지르고 눈으로 윤국이를 찾아본다. 상당한 거리가 있어서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윤국이는 없는 것 같았다. 맞은편 대숲에서 바람지나가는 소리가 쏴아 하고 들려온다. 대숲이 마구 흔들린다. 햇빛은 서쪽에서 빛나고 남강 다리 위로 자동차가 지나간다. 달구지가 지나간다. 사람들이 지나간다.
"니 여기서 머하고 있노?"
동급생 이순철이었다.
"음, 저어."
애매하게 말하며 환국이는 골치 아프게 됐다, 하고 생각한다. 두둑한 회색 재킷을 입은 순철이는 혈색이 좋고 몸도 좋았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겁나서 구겡만 하고 있는 거제? 사내 자석이,"
"..."
"흥! 나 다 알고 있다. 알랑방구 뀌고 오는 길 앙이가."
"알긴 뭘 알어?"
"밤낮 갖다 바치는 것 말이다. 우리 집에도 너거만큼은 돈 있어. 없어서 안 갖다 바치는 줄 아나? 더러바서 안 그런다."
"무슨 소리야?"
"어멍 떨지 마라!"
"떼거리 쓰는 것 아니야."
"흥! 니 가는 학교 와 내가 못가노? 너거 돈으로 지은 학교가?"
"못 가라 안 했다."
"떨어지는 것보다 좀 낮추어서 원서를 내자고? 선생이 그러더라. 와! 와 그라제? 뻔한 기라. 니는 갖다바치는데 나는 안 갖다바친다, 그거 앙이가. 일등? 그것 다 그렇고 그런 기라. 누가 모릴 기라고, 그까짓 일등 부러워할 줄 아나? 우리 외삼촌이 선생 다리 몽댕이를 뿌질러놓을라 카다가 눈이 불쌍해서 그만두었다 카더라. 어디 두고보자. 니가 붙나 내가 붙나."
이빨을 드러내며 험악한 표정이 된다. 환국이는 으스스 떤다. 우리 집에도 너거만큼은 돈 있다, 한 거은 허풍이 아니다. 토지 가진 부자는 아니지만 양조장, 화물회사, 정비소 등 사업체를 많이 가진, 진주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잣집 아들인 것은 사실이다. 몸이 좋고 성미가 괄괄하고돈 잘 쓰고 해서 순철을 따르는 똘마니들이 많다. 뭣이든 제일이라야 직성이 풀리는 그는 공부도 곧잘 한다. 늘 환국이를 육박해가고 있었지만 육 년 동안 한 번도 환국이를 물리칠 수 없었다는 것은 이가 갈리게 분통 터지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번에 상급학교 진학 문제 때문에도 옥신각신이 있었다. 환국이 지원한 공립학교 K중학에는 좀 힘이 부칠 터인즉 그보다 B중학에 원서를 내는 것이 좋겠다는, 담임 선생의 충고였는데 순철의 외삼촌이 노발대발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의 고집대로 K중학에 원서를 내긴 냈으나.
"둘 다 붙으면 될 거 아니야?"
환국이는 되도록이면 싸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눈치다.
"뭐? 둘 다 붙어? 육 년을 낯바닥 치다보고 댕긴 것만도 속이 부글부글 끊는데 또 함께 댕기?"
"그럼 나는 떨어져라 그 말이야?"
"말해 머하노."
"심술꾸러기,"
"겨드랑이에 낀 그건 멋꼬?"
"책이다."
"이리 내놔라. 잡지지?"
"나 보고 난 뒤 비려줄게."
"와 이라노? 누구 거렁뱅인 줄 알아? 잔말 말고 내놔. 지금 보고 싶어서 그런다. 이리 내놔."
"싫다."
"와 싫노!"
팔을 뻗쳐 겨드랑이에 낀 책을 낚아 채려 한다. 그 손을 뿌리치며
"내 마음대로지. 내 꺼니까."
"이 새끼 바라? 내 마음대로?"
"지나쳐! 참는 것도 한도가 있어."
"제법 양반 같은 소리 하네? 하지만 니는 니 마음대로 못한다."
순철이는 씩 웃는다.
"왜 못해!"
"못하는 까닭을 가르쳐주까? 내 가르쳐 주께. 니는 말이다, 니는 종놈의 자식이니까 그렇다는 거다. 알았나? 농청사람들이 백정한테 몽둥이질한 것도 모르나?"
환국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니 어매는 양반인지 모르겄다마는 니 애비는 종놈이다 그 말이라구."
겨드랑이에 끼었던 책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어느새 그랬는지 눈 깜짝할 사이였다. 돌을 주워든 환국이는 순철이를 밀어뜨리고 깔고 앉은 채 얼굴을 내리찍고 있었다. 사색이다. 순철의 비명을 들은 사람들이 달려왔다.
"와 이라노, 이눔아이들이?"
환국의 멱살을 잡고 끌어낸다.
"말로 하지 와 싸우노? 다 큰놈들이,"
몸을 휙 돌린 환국이 쏜살같이 뛴다. 순철의 얼굴에서 피가 흐른다. 책꾸러미는 땅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대문을 열어주는 안자가 사색이 된 환국이 얼굴을 보고 놀란다.
"도련님, 어디 아프세요?"
아무 말 없이 쑥 들어온 환국이는 사랑으로 쫓아 들어가 버린다.
"왜 저러지?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안자는 살금살금 사랑으로 들어간다. 방안에선 아무 기척이 없다.
"도련님, 도련님!"
"..."
"도련님."
신돌 위에 신발은 있다.
'전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아프면 아프다 하실 건데 무슨 일일까?"
아무래도 그냥 돌아갈 수 없다. 안자는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간다.
"도련님."
살며시 방문을 연다. 책상 앞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었다. 동그라미, 네모꼴, 별, 그런 것만 되풀이 되풀이 그리고 있는 것이다.
"도련님."
돌아본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사람을 잡아먹을 듯 그렇게 험악하고 날카로운 눈빛이다. 불고 부드러운 입술은 새파랗게 떨고 있었다.
"어머님한테 말하지 말아요. 부탁이야. 나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거든 사랑에서 그림그린다고 말해줘."
"그렇게 하겠지만 저한테는 말씀하십시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
안자는 계속해 물었으나 환국이는 한마디의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할 수없이 안자는 물러난다.
"환국이 웬일이냐?"
저녁상 앞에 앉으며 서희가 물었다.
"형님은 사랑에서 그림 그리나 봐요."
윤국이가 말했다.
"지금이 어느 땐데 그림을 그린다는 게냐? 그림을 그린대도 그렇지. 저녁을 먹어야지."
서희는 잔심부름꾼 세양이를 부른다.
"사랑에 가서 저녁 먹고 그림 그리란다고 일러라."
귀엽게 생긴 계집아이는 네, 하고 쫓아간다. 이윽고
"마님, 배가 아파서 안 자시겠다 합니다."
"배가 아프다?"
"네,"
이때 대문 밖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모르겠습니다."
안자가 허둥지둥 쫓아온다.
"마님."
"무슨 일이냐?"
안자는 서둘며 방안으로 드어왔다.
"도갓집 아들, 그 애 어머니가 마님을 만나뵈자고 합니다만,"
"무슨 일로?"
육 년 동안 환국에게 짓궂게 굴어온 도갓집 아들, 순철이를 서희도 알고 안자도 안다.
"저기, 도련님이 아무말 말라 하시기에, 아까,"
안자는 환국이집에 돌아왔을 때의 상태를 설명하고 나서,
"아마 도련님 때문에 그러나 봅니다. 그 아이 어머니의 기세가 이만저만 아닙니다."
대문간에서는 여전히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서희는 잠시 생각하는 듯
"윤국아, 저녁은 좀 늦게 먹도록 하고 배고프면 사랑으로 날라달라고 해."
"형님한테 가 있으란 말씀이지요?"
"오냐. 안자도 같이 가 있게. 밖에 있는 부인네는 유모더러 안내하라 이르고, 알았느냐?"
"네, 마님."
서희는 심상찮은 것을 느꼈다. 찾아온 여자의 목적이 궁금하기보다 환국이가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말썽을 부린 일이 없는 아이였다. 참을성이 강하였고 부드러웠으며 매사에 분명했으므로 누구든 종중을 했었다. 그런 아이가 어째 새파랗게 질려서 돌아왔을까.
"마님, 손님 뫼시고 왔습니다."
"오냐."
서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모가 방문을 열었다. 그의 뒤의 뚱뚱한 중년여자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노기등등해 있었다. 순철의 어머니다.
"유모는 가게."
"네."
순철이 엄마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앉으십시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러나 선 채
"몰라서 묻소!"
악부터 쓴다.
"아니, 말씀을 하십시오."
환국에 관한 일이기 때문에 서희는 참을성 있게 공손하다.
"아이구 기가 차서,"
순철엄마는 주먹으로 제 가슴을 친다.
"세상에 무신 억하심정에서 금옥 같은 내 자식 얼굴을 짓이겨놨는가, 한분 물어봅시다!"
"네? 서, 설마,"
"당신 아들이! 당신 아들이 말이요!"
손가락질을 한다. 서희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우리 환국인 나비 한 마리도 못 잡는,"
"병원에 가보믄 알 기요! 도, 돌로 얼굴을 쳐서, 긴말 할 것 없고 내 자식 본시대로만 해놓으소! 당신도 자식 키우는 사람이믄 억장이 무너지는 부모 심정 모리겄소? 아이구, 이기이 세상에 무신 날벼락인고? 평생 남 때리고 들어오는 걸 봤이믄 봤지 맞고 들어오는 걸 본 일이 없는 그놈이 맞아도 유분수지. 어이구, 이 일을 우짜믄 좋을꼬? 보소! 장석같이 그리서 있이믄 우짤 기요! 우릴 몰작하게 봤다가는 큰코 다칠 기요. 내 아들 얼굴에 험만 갔다 봐라, 당신자식 얼굴인들 말짱할 줄 아요! 우리도 짓이겨놓을 기요!"
서희의 굳어졌던 얼굴이 흔들린다.
"만일 그랬다면,"
"만일은 무슨 놈의 만일! 피를 철철 흘리는 아이를 병원에 업어다 놓고 치가 떨리서 쫓아왔는데 만일이라니!"
"그러면 우리 환국이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요."
순철엄마는 제 가슴을 또 한 번 친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께, 그놈 아아를 내놓으소! 와 그런 숭칙한 짓을 했는가! 내 아들이 지 할애비 핼미를 잡아묵었단 말가!"
"아이는 집에 없습니다. 아무튼 함께 병원에 가보기나 하지요."
모욕을 감내하며 두루마기를 입는다.
상처가 어느 만큼 났는지, 빨리 손을 써야 흠집도 작을 거고, 어서 가시지요."
소리 안 나는 북을 계속 내리친 것처럼 순철엄마는 멍하니 쳐다본다. 한바탕 분탕을 치려고 달려왔는데 맥이 풀리는 것이다. 오만하고 도도하고 웬만해서는 사람을 사람으로도 보지 않는다는 그 파다한 소문과는 너무나 딴판이 아닌가. 이렇다 할 문벌도 없이 개화 바람을 타고 번 돈을 조상에게서 물려받았고 당대에 와서 이것저것 손댄 사업이, 때가 맞아 그랬던지 운이 트여 그랬던지 이제는 이름난 부자로 자리는 굳어졌으나. 달려올 때는 단단히 별렀다. 열등감이 노여움에 채찍질을 했다. 여차하면 욕설도 불사할 것이요, 아이를 끌어내어 매질도 하리라. 그러나 최서희는 공손하게 순철엄마더러 앞장설 것을 몸짓으로 나타낸다. 우아하고 아름답게 침통해 하는 얼굴은 자신도 모르게, 순철엄마로 하여금 발을 떼어놓게 했다. 밖은 어둑어둑했다. 따라 나서려는 유모에게 손짓으로 저지한 서희는,
"환국이가 제정신 아닐 테니 유모가 잘 살피도록,"
나직이 속삭이고 나간다. 찾아간 곳은 서희네 식구들의 주치의이기도 한 박효영 의원이었다. 순철의 외삼촌이라는 청년이 대합실에 앉아 있다가 들어서는 서희를 보자 불쾌한 듯 외면을 한다. 험악하게 노려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상처는 대단치 않다, 하고 서희는 판단한다.
"야아야! 우리 순철이, 순철이는 우찌 됐노?"
"들어가보소. 제에기랄!"
청년은 대합실 바닥에 침을 뱉는다. 급히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철엄마의 뒤를 따라 서희도 들어간다. 순철이는 오두마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간호원이 이마에 눌러놓은 가제에다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으며 박의사는 한가하게 회전의자에 앉아 있었다.
"놀라셨지요?"
박의사는 순철엄마를 보며 미소했다.
마른 체격에 테가 굵은 안경을 썼고 갸름한 얼굴이다.
"애들은 싸워가면서 크는 겁니다. 사내애들이니까요."
"사, 상처는 우떻습니까?"
"머리 쪽에 두어 바늘 꿰매었지요. 별로 흠집은 남지 않을 겝니다. 또 머릿속이니까 상관없어요. 피는 거기서 좀 흘렀지요."
그러고 보니 왼쪽 귀에 가까운 머리에 가제를 눌러놨다.
"저, 저기 이마빡은요."
"약만 발랐습니다. 찰상이지요."
턱밑과 왼편 뺨에 옥도정기를 바른 흑적이 있다.
"환국이 어머님께서도 놀라셨겠어요."
"네, 그만 되기 다행입니다."
여유가 생기니까 오히려 반감이 살아나는가 순철이 엄마는 심한 적의를 나타낸다.
"다행은 무신 다행이요."
순철이는 힐끔힐끔 곁눈질만 한다.
"죄송합니다."
서희는 고개를 숙이다.
"그, 공자같은 아이가, 뜻밖인데요?"
박의사는 껄껄걸 웃는다.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면 그만이요?"
"치료비는 물론,"
"그까짓 치료비가 뭐길래, 남의 자식을, 매 한 번 안 때리고 기른 남의 자식을,"
우두커니 얼굴을 숙이고 있던 서희는 박의사의 시선을 느끼며 얼굴을 든다. 박의사 눈빛 속에는 놀라움이 있었다. 그런 서희의 모습을 상상해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순철아."
눈을 치뜨며 쳐다보다가 순철이는 그의 외삼촌처럼 외면을 한다.
"환국이가 너를 왜 때렸지?"
"..."
"말해 보아."
"..."
"덮어놓고 때리더냐?"
"아니요."
"그럼?"
"선생한테 알랑방구 끼고 댕기는 기이 미돔?"
"그래서 네가 먼저 때렸느냐?"
"아니요. 부애질을 했소."
서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슨 말로 부애질했지?"
"어디 두고 보자, 니가 붙나 내가 붙나, 함께 둘 다 붙으믄 될 거 아닌가, 그러드마요, 환국이가. 육 년 동안 함께 학교 댕긴 것만도 지긋지긋한데, 내가 말한께로 그라믄 나는 떨어져라 그 말이냐고 함서,"
"함서 때리더란 말이냐?"
순철이는 고개를 숙인다.
"그 말 때문에 때린 거는 아니고요, 니 아부지는 종이라 했더니,"
"그랬었구나. 말한 대로 들려주어 고마워."
서희의 음성은 잠긴 물처럼 조용했다.
"순철아."
"야"
"그랬다면 환국이 잘못한 것은 없구나. 네 잘못이야. 왜냐하면 환국이 아버님은 종이 아니었거든. 그리고 나라 위해 몸 바친 분이었단다."
박의사는 눈길을 떨어뜨렸다. 강인한 억제, 마지막의 말은 모든 것을 건 모성의 승리였다.
"순철어머니, 순철이 상처가 빨리 아물었으면 좋겠군요."
통통하게 살찐 손을 잡아주고 미소 지으며 서희는 돌아섰다. 병원 문을 나서는 순간 서희 입에서 낮은 신음이 새나왔다. 거리는 어두웠다. 아주 어두웠다. 강가까지 온 서희는
'여보, 당신이 그곳에 남은 뜻을 이제 확실히 알겠소. 하지만 장하지 않아요, 당신 아들 환국이가?"
찬바람 속에 서서 서희는 오랫동안 흐느껴 울었다.
6장 초대
혜관이 찾아온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의 말로는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는 것이었다. 환국이 서울로 공부 간다는 말을 들었기에 가고 나면 당분간 보기 어려울 것 같아서 한 번 보려고 왔다는 말도 했다. 그러나 서희는 혜관이 왔다는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순철에게 한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나라 위해 몸 바친 분이란다, 소용돌이처럼 되살아나는 자신의 목소리, 무슨 수로 그 말을 감당하랴. 모든 것이 흔들려도 상관이 없고 아이의 영혼만은 지켜주자, 그것은 어미로서의 승리였는지 모르지만 길상을 위해서는 경거망동 이외 아무거도 아니었다. 그간 계속하여 고통스럽기만 했던 문제가 혜관은 출현으로 표면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만 같아서 서희는 무서운 망상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고을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구두쇠 첨지가 하나 살고 있었는데,"
사랑이 춥다하여 윤국이와 환국의 침실인 건넌방으로 들어간 혜관이 아이들을 상대하여 옛날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렁우렁 울려 퍼지는 혜관의 음성은 안방 서희 귀에까지 들려왔다.
"어느 날 중이 동냥을 하러 왔지. 구두쇠 첨지가 중이라고 시주를 하겠나? 어림도 없는 얘기라. 시주만 안 했던 게 아니야. 처음에는 목탁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하여 마구 욕설이었고, 그래도 중은 문간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하더란 말씀이야. 화가 난 첨지는 물바가지를 중한테 안기며 썩 물러나라! 허허어, 그러나 여전히 목탁 치는 소리는 그치지 않았지/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첨지는 도끼를 쳐들고 나와서 이 중놈아! 목탁 소리 안 나게 해주겠다.! 목탁을 빼앗아 난도질을 한 게야. 그리고 첨지는 안심하고 집안으로 들어갔는데, 마음씨착한 며늘아이가 딱하게 생각했음인지 시아버지 몰래 품판 돈으로 시주를 하더라는 게야. 했더니 중이 말하기를 그냥 가려 했으나 며느리 심성이 고와서 알려주노라, 아무 달 아무 날 댁의 시부는 소 우자 짐승엑 해를 입어 죽임을 당할 것인즉 그날은 각별하게 조심하라, 그러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게야."
"소 우자 짐승이 뭐지요, 스님?"
윤국이 묻는다.
"소 우자 짐승이라면 소지 뭐겠어?"
그 말은 환국의 음성이었다.
"얘기를 다 듣고 보면 자연히 알게 도리 것이야. 그리하여 중이 일러준 그 날이 왔고 구두쇠 첨지라고 제 목숨이 아깝잖을 리가 없지. 그날은 출입을 아니 하고 복더위의 찌는 날씬데도 불구하고 방문을 닫아건 채, 물론 외양간의 소도 밖으로 내몰았지. 한나절이 지나고 해질 무렵, 아이고 내가 그놈의 땡땡이중한테 속았구나, 첨지는 한증막 같은 방에서 벌떡 일어났지. 방문을 여니 해거름의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서 살 것 같더란 말씀이야. 문지방을 베개 삼아 누우니 눈까풀이 가물가물, 달콤한 잠이 오기 시작한 게야. 한데 또 귀가 간질간질해. 귀이개를 찾아서 다시 누웠지. 바람은 시원하고 귀이개로 귀를 후비니 기분 좋고, 한데 때마침 일진의 강풍이 불어와서 열어놓은 방문을 탁 닫아버리더란 그 얘기지."
"그런데요? 그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모르겠냐, 윤국아?"
"네."
"귀이개가 귓구멍을 찔러서 죽었다는 얘기야. 그 귀이개가 뭔고 하니 쇠뿔로 만든 것이었거든."
"하하하, 그렇구나아."
윤국의 감탄하는 목소리다.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는 참으로 기기묘묘하여 크고 힘찬 두 개의 뿔과 튼튼한 이빨, 몸뚱이를 말할 것 같으면 사람의 몇 배요 힘도 몇 곱절인 황소에게는 죽음을 아니 당하는 사람이 쇠뿔의 가느다란 한 가닥으로 죽임을 당하니 말씀이야."
서희는 혜관이 아이들에게 왜 그런 얘기를 들려주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아이들을 통해서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길상에 대한 불안이 쌓인다.
환국은 K중학교에 합격이 되었다. 한사코 겨루던 순철이는 낙방했고. 사흘 후면 짐을 챙겨서 환국이는 서울로 가야 한다. 시험 칠 때는 연학이가 따라갔으나 이번에는 서희가 함께 가기로 작정이 돼 있다. 임명빈에게 맡기기로 한 만큼 서희가 함께 나서 인사하고 부탁하는 것이 예의상 좋고 몇 달을 집 떠나 있을 환국이에게도 어머니의 손길이 필요한 것이다. 그간 환국이는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순철의 말이 독침같이 가슴에 박혀 있을 것이 틀림없다. 난생 처음 남을 때려본, 그것도 유혈이 낭자하게 때린 기억은 악몽같이 남아 있을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수습이 되었는지 환국은 그것을 알려 하지 않았다. 서희도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환국이는 어머니가 어떻게 했으리라는 짐작은 하고 있었으며 서희도 환국이 짐작하고 있을 것을 안다.
이윽고 혜관은 하직해야겠다면서 서희에게 들렀다.
"모레 떠나신다던가요?"
"네."
"가시면서 임씨댁에 묵으시렵니까?"
"저까지 폐를 끼쳐 되겠습니까? 여관에 들겠습니다."
"그러면 유모나 안자가 함께 가겠구먼요."
"유모랑 갈까 합니다."
"네에... 임씨댁이 효자동이니까 가까운 곳에 잡으셔야겠습니다."
"네."
"효자동 어귀에 선일여관이란 게 있습지요."
서희는 혜관의 눈을 빤히 쳐다본다. 혜관도 서희의 눈을 응시했다. 서희는 그 여관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직감한다.
"아닙니다. 나는 거기 들지 않겠소."
뒷걸음치듯 서희는 말했다. 여자의 한계점이다. 불가능을 가능케 한 최서희가 어머니기 때문에 부딪쳐야 하는 한계점, 이제 다시 지어미이기 때문에 부딪치는 한계점을 보아야 한다. 서희는 거기 들지 않겠다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환국이와 순철이 싸운 경위를 간략하게 얘기한다. 만일 마지막에 한 자신의 말이 발설되었다면 그것은 자신만이 책임질 일인 것이다. 길상이 그곳에 나타날지 모른다는 상상은 지금 서희에게는 고통 이전의 공포인 것이다. 혜관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나 심각한 얼굴은 아니었다.
"한 가지 이상한 일은 있습니다."
혜관이 눈을 내리깔았다. 눈 밑으로 처진, 마치 주머니처럼 처진 근육이 흔들린다. 그것은 마음의 동요 때문은 아니었다. 근육이 탄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못난 백성들인데 그런 말은 좀체로 입 밖에 내지 않는다는 것 말입니다. 경찰관 아니면은 그것은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소이다."
혜관은 효자동 어귀에 있다는 선일여관에 대해서 다시 말을 잇지 않았다.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는지, 그는 떠났다.
삼월말의 철도연변은 봄이 완연했다. 바람이차기 때문에 봄은 더 신선한 것 같았다. 차창에 기댄 서희 가슴에는 위험을 동반한 환희가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낯선 역을 맞이하고 낯선 거리를 기차가 지나칠 때마다 서희는 그 거리에서, 정거장에서 길상을 만났다. 홈에 우뚝 서 있는가 하면 거리를 지나가는 뒷모습이 있었고, 서울에 닿을 때까지 줄곧 차창 밖만 내다보는 조용한 자세였으나 서희는 봄에 눈뜬 유충같이 세상이 경이에 가득 찬 것을 느낀다. 아무것도 실증은 없다. 그러나 실증 이상으로 길상이 서울에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서희는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역에는 임명빈이 마중 나와 있었다. 서로 첫 대면이었지만 두 집 사이의 연고 관계로 처음부터 스스럼이 없었다. 환국이는 지난번 연학이와 함께 임명빈 집에서 묵었기 때문에 구면이었다.
"일부러 나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겠습니다. 환국아,"
"네."
"합격을 축하하네."
"고맙습니다, 선생님."
"열심히 해야 돼."
"네."
역두에서 최서희는 차도 인력거도 마다했다. 전차를 타고 가겠노라고 단호히 말했다. 그리하여 전차를 타고 종로에서 내린 일행은 효자동 어귀에 다다랐다. 어귀에는 과연 이층으로 된 선일여관이라는 것이 있었다. 서희는 몸으로 느끼면서 여관 옆으로 지나갈 때 그곳을 쳐다보지 않았다.
명빈의 집안은 손님맞이의 준비를 끝낸 것처럼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어싸. 그러나 식구들이 서희의 아름다움에 압도당하여 조용하기도 했던 것이다. 두루 인사를 끝내고 나서
"노마님께서는,"
"아 네, 사람을 못 알아보셔서,"
명빈이 인사를 생략하라는 뜻으로 말했다.
"옛날에 제가 쓰던 사랑이 한적하고 해서 환국이 거처를 그곳으로 정했습니다. 방이 넓고 작은 방도 하나 있어서 며칠간은 묵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명빈은 자신이 옥중에 있었을 때 서희가 베푼 호의에 대한 보답인 듯 성의를 다하여 말하는 것이었다.
"저까지 폐를 끼쳐 되겠습니까. 여관으로 가겠습니다."
"무슨 말씀을, 그래서는 안 됩니다."
명빈의 댁네 백씨가 펄쩍 뛰듯이 말했다. 서희는 몇 번 사양하다가 권에 못 이긴 듯
"폐스러워서 어떻게 하지요?"
미소하며 슬그머니 동으로 표한다. 여관에는 가지 않으리라, 처음부터 굳힌 결심이었다. 그러나 서희는 위험이 따르는 환희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물론 길상을 만나리라는 기대는 아니었다.
나흘을 서울서 묵는 동안 서희는 환국의 입학식에 따라갔다. 유모와 함께 서울거리에 나가 물건을 사기도 했으며 창경원에는 환국이와 함께 가서 구경을 했다. 그러면서 그 여관 앞으로 오가는 동안 서희는 눈길을 돌리지 아니 했다. 이층 창가에 어느 사내가 서 있으리라는 상상만으로 서희는 하루하루의 양식을 마련하는 것 같았던 것이다. 그리고 길상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깨달았을 때 서희는 가파로운 고갯길에서 땀을 닦으며 쉬고 있는 것 같은 자신을 느끼는 것이다. 엿새를 보내고 떠날 예정이었는데 닷새째 되는 아침에
"국이 어머님."
부르기가 거북했던지 되도록 호칭은 빼고서 말하던 명빈이 또 환 자를 빼고서 국이 어머님이라 불렀다.
"제 누이가 매부랑 함께 저녁 초대를 해왔습니다. 피곤하시겠지만 그 사람들 성의를 봐서 가시지 않으렵니까."
"고맙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안 하셔도 되는데,"
명희에게는 서희도 적잖은 관심이 있었다. 명희에 관한 얘기는 오래 전부터 공노인을 통해 들은 바 있었으며 조선으로 나온 후에도 그 집에 관한 것과 더불어 그에 관한 얘기도, 상현과의 감정 갈등만 모른다 뿐이지 대개는 듣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명희로부터 도움을 주어서 감사하다는 서신을 받은 적이 있었다. 명빈은 저녁 초대에 관한 얘기 끝에
"참, 잊었군요. 이상현 군과는 집안끼리 잘 아신다지요?"
"네."
서희는 별로 큰 동요가 없는 자신에 오히려 놀란다. 말을 해놓고 당황한 것은 임명빈이 편이었다. 동시에 서희를 초대한 명희 심정은 어떠한 것인지 갑자기 의혹을 느낀다.
"요즘엔 어떻게 지내시는 지요. 더러 소설을 쓰신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부친께서 별세하셨는데 아시는지요."
"네, 본가를 통해 들었습니다."
우울하게 서희 얼굴이 가라앉는다.
"고생만 하시다가, 상현이도 부친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플 것입니다."
"용정에 있을 때 제가 그 어른께 잘못한 일이 많았습니다."
"혹, 만나보시지 않으시렵니까?"
"요 다음 기회에,"
"네 알겠습니다. 술이 과해서, 재주가 아깝습니다."
명빈으로서는 서희에게 상현의 근황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었다.
"본가에서는 사시기가 어떤지 모르겠군요."
은근히 비춘다. 좀 도와주라는 뜻으로. 서희는 말이 없었다.
약속한 시간, 해가 좀 남아 있었다. 조용하가 자동차를 보내주었다. 조병모 남작 내외가 연만했을 뿐만 아니라 남한테 말 못할 집안 갈등을 피하여 주로 별장에 가 있었으며 따라서 본가를 비롯하여 재산에 관한 것, 사업에 관한 재량이 조용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명희가 친정에 온 손님을 위해 자동차를 보내는 것쯤은 대단한 일이 아니다. 조병모 남작의 으리으리한 집 앞에 자동차가 닿았을 때 대문이 활짝 열렸다. 차고는 뒤꼍에 있었던지 손님을 내려놓은 뒤 담장을 따라 돌아가 버렸다. 명빈과 서희를 안내한 곳은 처음 명희가 왔을 때처럼 별채에 있는 서재 겸 응접실이었다. 명희가 다가서서 서희의 손을 잡았다.
"처음 뵙지만 우린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었지요? 반갑습니다."
"네, 안녕하셨어요."
조용하는 여간하여 감정을 잘 나타내지 않는 인물인데, 또 서희를 초대한 목적이 사무적인 것이었는데도 뜻밖이라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소개하지요. 인사하게. 우리가 신세를 많이 졌던 최참판댁 부인이네. 여기는 저의 매부 되는 조용하올시다."
"잘 오셨습니다. 앉으십시오."
네 사람은 각각 소파에 앉았다. 조용하는 회색 싱글에다, 늘 그는 회색을 애용해온 터인데, 청동색과 노란 줄무늬의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소쇄한 그 모습은 귀공자의 풍모가 역력했고 냉담해 보이는 인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에 비하면 검정에 가까운 감색 양복을 입은 임명빈은 시골 면장같이 보였다. 명희는 기장이 길고 넉넉하게 만든 분홍과 보라의중간색 비슷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한 마디로 쌍벽이라고나 할까, 아름다움의 차이를 말한다면 최서희는 기품이요 명희는 지적인 세련이다. 그리고 명희는 놀랄 만큼 달라져 있었다. 행복하고 불행하다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변모였다. 레몬 한 쪽을 띄운 홍차를 날라 왔다. 홍차를 들면서 조용하는
"처남한테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한테서도 들었습니다만,"
그러나 조용하는 다른 곳에서 최서희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그것은 퍽 오래된 일이었다. 조준구가 폐광을 속아 샀을 때 그 폐광의 임자는 이모대감이었고 이모 대감이 조병모 남작과 선이 그어지는 그런 처지였다. 그 폐광을 일인과 공동명의로 산 조준구가 욕심이 지나친 나머지 일인을 물리치고 독점하려 마련한 자금의 출처, 그것으로 인하여 최서희라는 여자가 화제에 올랐던 것이다. 물론 그 얘기는 공노인이 물러가고 최서희라는 숨은 진주가 표면화되면서 나온 얘기였다. 만석 토지는 최서희 손아귀에, 폐광을 판 막대한 돈은 이대감 손아귀에, 그리하여 비 오시는 날의 개 신세 같았던 옛날의 조준구로 되돌아간 것은 상당히 재미있는 화젯거리였던 것이다.
"이번에는 아드님께서 K중학교에 합격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기쁘세요?"
명희가 말했다. 조용하는
"우리 학교도 상당한 명문인데 거 섭섭하군요."
"왜 아니겠나."
네 사람은 함께 웃었다. 조용하는 다시
"서울에는 며칠이나 계실 계획입니까."
"내일 내려가겠습니다."
"오신 김에, 뭐 별 볼 것은 없겠습니다만 천천히 계시다 가십시오. 효자동이 불편하시면 우리 집에 오셔도 좋고, 이 사람도 할 일 없이 심심한 시내 안내도 해드릴 것입니다. 차도 있고 하니,"
임명빈은 내심 초대한 것은 명희라기보다 매부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그럴 처지가 못 됩니다. 어린 것이 있고해서,"
조용하는 말보다 분위기에서 얼마나 도도한 여자인가를 실감한다. 명희는 의사 표시가 명확한 가 하면 때론 거세당한 사람같이 멍하니 눈빛이 흐려질 때가 있었다. 대충 그 정도에서 얘기는 명희와 서희가, 조용하와 임명빈이 나누게 되었다. 여자들의 얘기는 주로 신변에 관한 것이었고 남자들의 얘기는 사회문제, 국제 정세, 그리고 경제적 동향에 관한 것이었다. 서희는 말하기보다 듣는 편이었다지만 대충 조용하의 사람됨을 간파했을 뿐만 아니라 저녁 초대를 한 것에 목적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조용하는 귀공자의 풍모가 역력했지만 세지에 능하고 타산가이며 사무적이라는 서희의 판단이었다. 그것은 사실 그러했다. 귀족들 자제로서는 좀 드문 형, 미련한 욕심을 경멸하고 상큼하고 속빠르게 목표물을 낚아채는, 말하자면 속결주의요 사정거리를 잘 겨냥한다고나할까. 능력 있는 사내, 명희를 손에 넣을 때 도 그는 그러한 자기 식을 발휘했던 것이다. 찬하처럼 얼굴 붉히며 인사하지는 않았다. 냉담하고 무관심한 척, 한눈을 파는 척, 하다가 찬하를 앞질러 어느덧 명희에게 활시위를 당겨버렸던 것이다. 아내하고 이혼을 성립시킨 것도, 많은 위자료를 군더더기 없이 사무적으로 내밀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서희는 조용하라는 인물을 간파했으나 명희에 대해선 그렇지 못했다. 명희에 대해선 무방비의 상태이긴 했으나 뭔가 막연하게 종잡을 수 없다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옛날의 명희를 보았더라면 소극적이요 재래종의 여성이라는 것을 알았을 터인데, 서희가 종잡을 수 없다고 느낀 것은 옛날과 달라진 것이 없는 성품에다가 귀족의 부인이라는 의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누구든 명희를 변했다고 한다. 귀족의 부인으로서 그렇게 확실하게 틀이 잡히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명희는 실상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손가락에 낀 두 캐럿의 다이아몬드 반지, 작은 다이아몬드를 박아서 만든 백금 팔지, 그리고 더욱더 뽀오얗게 빛나는 목덜미, 그것이 변화라면 변화일 뿐이다.
사나이들의 얘기는 예외없이 물산장려운동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임명빈은 주로 물산운동의 성격이나 영향에 대하여 말했으며 조용하는 실제적인 동향, 누가 무슨 회사를 설립했으며 그 자본금의 내력에 관하여, 또 누가 무슨 회사를 지금 설립하고자 준비 중이며, 누구의 자본이 어디로 투입되는가 그런 테두리에서 얘기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러더니 조용하는 얘기를 일단 끝내었다.
"이거 남자끼리만 흥미도 없는 얘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여보,"
"네."
"식사 준비는 어찌 되었소?"
"제가 가보고 오겠습니다. 그런 잠깐만,"
명희는 조각처럼 보기 좋은 허리를 약간 구부리듯 방에서 나간다.
"진주는 어떻습니까. 살기 좋은 곳이지요?"
조용하는 번번이 서희한테 화제를 돌리고 신경을 쓰는데 자를 재듯 어딘지 딱딱했다. 서희의 미모에 대한 감탄, 그러나 조용하에게 명희에 대한 정열이 약화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동생 찬하의 존재로 말미암아 명희에게 가는 집착이 강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찬하는 용하의 애정에 자극제였었다고나 할까. 그런 만큼 서희의 미모는 어디까지나 그에게는 풍경화적인 가치였지만 자신의 목적의식에 저해가 되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살 만한 곳이지요."
"부인께서도 그렇습니다만 대개 지주들이 많은 곳 아닙니까?"
"좀, 그런 셈이지요."
"어떻습니까. 부인께서는 모험 좀 해보실 생각이 없으신지,"
서희는 그 말의 뜻을 어렵잖게 알아차린다. 임명빈만 어리둥절한 얼굴이다. 그리고 평소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욱 냉담한 용하 성품에 비추어 처음부터 예상 밖의 태도를 취하는 데 석연찮은 느낌을 짙게 한다. 그리고 자신의 입장이 퍽이나 난처하게 된 것을 깨닫는다.
'멍청이 바보같이 내 꼴이 왜 자꾸 이리 되어가나. 오십만 되면 허리 꼬부라지겠다.'
임명빈이 바라서 한 혼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한가. 풀고 나오기에는 너무 자신의 인생이 황혼 쪽으로 기울어버린 것 같다.
"모험이라면,"
"부인께서도 아시겠지만 물산장려운동이 일고 있는 이 시기는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지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토지에 잠긴 자본을 공업 내지 상업 쪽으로 돌리는 일인데, 토지를 중심한 화폐유통이란 일 년에 한 번으로 불 수 있고 상공업에 있어서의 화폐유통이란 시시각각인 것 아니겠습니까?"
"..."
임명빈의 좁혀져 있던 눈이 커다랗게 벌어진다. 석연찮았던 것이 일시에 확 풀어졌던 것이다.
"부인께서는 용정 계실 적에 무역을 하셨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해서 제 말을 이해하시겠지요. 이해하시고 투자할 생각이 없으신지요."
"너무, 생각지 않았던 일이어서,"
"물론 만나 뵙고 보니 즉흥적으로 떠오른 생각입니다만 우리가 지금 설립 준비를 하고 있는 회사는 자본금이 가장 크고 참가할 자본주의 면면이 모두 거물급이지요."
서희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용하에게 제동을 걸었다.
"하 참, 저도 모르게 약장수 노릇을 한 것 같습니다. 하하핫...요즘엔 자나깨나 그 일 생각을 하다보니,"
"이 사람, 여기가 사무실인가?"
임명빈이 얼버무린다. 서희는 여자가 어떻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저는 농토에 대해서 집착이 강합니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그리고 지루하다는 생각을 한다. 환국이가 기다린다는 생각, 효자동의 그 여고나 옆을 지나가는 생각. 조용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오른다. 한방 호되게 맞은 것 같은 기분이 그런 웃음으로 나타났다.
음식맛보다 빛깔이 화려한 저녁 대접을 받고 다시 내어주는 자동차를 탔을 때 거리에는 불빛이 나돋아 있었다. 운전석 옆에 앉은 임명빈과 뒷좌석에서 혼자 흔들거리고 있는 서희는 서로의 생각에 잠겨 있기는 했으나 오늘 저녁 초대에 대하여 불쾌감을 느낀 것은 공통점이다. 여관 옆을 차가 지나갈 때 차 속에서 서희는 처음으로 여관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층 창문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그러나 한 사내가 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서희는 갑자기 자신이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상상이 무너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혜관은 효자동 어귀에 선일여관이 있다고 했지 그곳에 누가 있을 것이란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확실하게 물어보지는 못했을까? 어느 쪽이든 확실하게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희망도 절망도 깡그리 뭉개버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상상 속으로 모든 것을 가두어버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무도 없는 창문, 실제 아무도 없었을 것이란 절망, 차가 멎었을 때 서희는 잠시 눈을 감았다.
밤에 잠자리에서 서희는 물었다.
"환국아, 너 아버님 기억하느냐?"
"합니다."
"보고 싶으냐?"
"네."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처럼 잠긴 목소리였다.
"아버님은 훌륭한 분이시다."
비로소 순철이가 환국이에게 던진 말에 대하여 서희는 아들에게 해답을 준 것이다.
7장 죽음의 자리에서
외상환자의 치료를 끝내고, 환자가 치료실에서 나가는 것을 본 뒤 조수 허정윤은
"배고프다."
하며 가운 호주머니 속에 두 손을 푹 집어넣는다. 간호원 김숙희는 기구를 닦다 말고 힐끗 쳐다본다.
"선생님, 아직 점심 안 드셨는데,"
"환자는?"
"이제 없어요."
호주머니 속에 찔렀던 두 손을 뽑아서 정윤은 얼굴을 문지르며 한숨을 토한다.
"고단해요, 정윤씨?"
안쓰러워하는 표정이 되며 숙희는 나직이 묻는다.
"응."
시무룩하게 대답한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다.
"간밤에는, 또 늦게까지 공부했나 부지요?"
"공부하면 뭘 해."
"..."
"희망도 없는걸."
"왜 희망이 없어요."
"무슨 희망!"
"학교 가는 것 말예요."
"차라리 숙희하고 결혼해서,"
순간 숙희 얼굴이 빛난다.
"다른 길로 나갈까 부다."
"아니예요. 정윤씨는 꼭 붙을 거예요. 그러기 위해 준비해오지 않았어요?"
"공부만 해서 되는 일 아니잖아."
두 사람의 눈이 부딪는다. 감싸주고 안타까워하고 사모하는 숙희 눈빛을 바라보는 정윤의 눈은 숙희를 지나서 더 먼 곳에 가 있는 것 같다. 숙희가 어떤 마음을 담고 자기를 바라보는가, 그런 인식보다 자신의 미래를 추구하는 정열과 비애만이 가득 찬 눈빛이었다. 정윤의 얼굴은 깨끗하고 수려한 편이었다. 숙희는 노인들의 말을 빌리자면 여식답게 생겼다 할 수 있고 도투름한 입술이 특히 귀여웠다.
"학비는...저도 도울 수 있어요."
정윤이 다가섰다, 일그러진 얼굴로. 포옹할 듯이 어깨를 꽉 자다가 말고, 치료실을 나가버린다. 환자가 뜸해진 병원 안은 음산하리만큼 조용했다. 박효영 의사는 멍청히 진찰실에 앉아 있었다. 회전의자에 걸친 두 팔은 힘을 다 빼버린 듯 축 늘어져서, 편안한 자세이긴 했다. 가장 좋은 방향으로 자리 잡은 진찰실은 밝고, 얼마 전에 난로를 걷었으나 실내는 알맞은 온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벼원의 규모는 꽤 큰 편이다. 진찰실, 수술실, 대합실, 약제실, 그리고 입원실이 세 개 있었다. 지방에서는 병원이나 의사는 매우 희귀한 존재일뿐더러 대개의 경우 전문의 아닌 의사가 과에 구애됨이 없이 모든 환자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설령 전문의라 하더라도 모든 환자를 보아주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박효영 의사는 외과 전문의였다. 진주에서 박의사의 명망이 높은 것은 수술을 잘한다는, 바로 외과 전문의이기 때문이다. 대개의 병은 한약으로 다스리려 했고 신령의 힘을 빌리고자 굿을 한다거나 불공을 드리는 기습이 뿌리 깊게 남아 있는 만큼 서민층은 째고 자르고 하는 외과에 속한 병이거나 마지막 단계 이른 병이 아니면 병원을 찾지 않았다. 박의원이 번창하는 이유는 외과를 필요로 하는 서민층, 일반 환자인 상류층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해서 박의사는 늘 바빴다. 조수 허정윤과 간호원 김숙희 그리고 약제실에서 처방대로 약을 짓고 치료비, 약값을 수납하는 강남, 도합 네 사람이 질서 있게 움직이는데 그래도 손이 달릴 때가 많았다. 점심시간이 가까운 이런 때만 환자가 뜸해 지는 것이다. 치료실에서 숙희가 기구를 챙기고 있는 모양인데 그것들이 부딪는 소리가 꽤 귀에 거슬린다고 박의사는 생각한다. 썰물같이 빠져버린 환자들, 소음, 아이의 울음소리, 후텁지근한 사람들의 입김, 병원은 잠긴 듯 고요하고 다만 기구들의 부딪는 금속성 음향만이 살벌하게 들려온다. 박의사는 일어서서 창가로 걸어간다. 봄이 한가운데까지 와 있는 거리를 내다본다. 초봄은 흙바람 때문에 스산했었다. 이제는 완전하게 자리 잡은 하늘과 대지 사이의 계절은 청초하고 무엇보다도 한가롭다. 박의사는 진주의 이 계절을 사랑했다. 여자보다, 아니 아내보다 사랑했는지 모른다. 아내 익란은 청초한 여자는 아니었다. 한가로운 마음을 가지게 하는 여자도 아니었다. 새빨간 다알리아처럼, 송이가 너무 커서 가는 줄기가 휘듯, 우선은 그런 인상의 여자였다. 그러나 신학문을 했다하여 꽤나 요란스런 자존심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은 철판 같은 이기심과 잡초같이 무성한 허영이었을 뿐이다. 평범한 결혼이었다. 여자는 남자가 의사라는 점에서, 남자는 여자가 고등 교육을 받았다는 정부와 함께 달아난 여자, 그것도 집을 드나들던 박의사의 후배와 함께. 배신감은 터럭만큼도 일지 않았다. 어떤 형태로든 헤어질 것을 예감하며 지속한 결혼 생활이었으니까.
'이번만은 아주 영리했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박의사는 쓰디쓴 웃음을 띤다. 말하자면 익란이 박의사를 한발 앞지른 것이다. 승부를 따지자면 판정패라고나 할까. 아무튼 박의사는 익란을 생각할 때 불쾌감을 떨쳐버릴 수 가 없는 것이다. 한 남자의 권위에 먹칠을 하고 그는 떠났다. 높이 받드는 의사의 위신을 구겨놓고 익란은 떠났다. 왜 진작 이쪽에서 이혼을 제기하지 않았더란 말인가. 자신의 명예를 위해 민적거렸다. 그 결과는 그보다 더한 불명예를 안겨준 것이다. 그런 자신의 속셈을 알고 보복하기 위한 행위였다면 익란에게 타당성이 있고 또 그가 노렸던 것이 적중된 것도 사실이다. 익란의 애정 행각이 사랑을 위한 용기로써 결행된 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얼마 안 되어 헤어지고 말았다는 소문이었다. 요란스런 자존심, 적잖은 위자료를 받아낼 수 있는 이혼보다 배신이라는 시끌벅적한 화제들을 제공한 저의는 박의사에게 망신을 주고 박의사의 자존심을 짓밟아버리겠다는 그것이었겠는데, 그렇다고 해서 익란이 자기를 사랑한 때문에 반발했거나 보복했다고 박의사는 생각지 않는다. 상대가 누구이건 그 자신의 수준과 비등한 인물이면 남편이요 남자라는데 뜻이 있을 뿐이다. 특별히 익란이 음란한 여자라는 얘기도 아니다. 이조 오백 년이 만들어놨던 재래식, 본질은 그 재래식의 여자였던 것이다. 카르멘도 노라도 아니면서 신학문을 했다는 이유 때문에, 머릿속에 먹물이 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자존심이란 것이 요란스럽게 거론되는 것이며, 나는 이혼당하지 않았다, 내 쪽에서 발길질을 했다 할 수 있는 방법도 착상할 수가 있엇을 것이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생각한다면 박의사로서는 초연할 수도 있는 일이련만 그렇지가 못했다. 계집이 달아났다, 다른 사내와 눈이 맞아서 달아났다, 그런 뒷공론은 끔찍스럽고 소름끼치게 싫은 것은 그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옥도정기를 얼굴 한가운데 바르고 길을 다니는 것 같은 기분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환자들이 득실거리고 바빠 돌아갈 때는 잊는 그 미열과도 같은 불쾌감이 이렇게 환자들이 빠져나가고 없는 시간에는 어김없이 찾아든다.
'나도 어지간히 자신 없는 인간이구먼.'
비웃어보지만 불쾌한 것은 불쾌할 뿐이다. 박의사는 담배를 붙여 문다. 뚱뚱한 여자가 창 밖 거리를 지나간다. 금봉채, 말뚝잠, 나비잠, 국화잠, 금붙이를 쪽머리에 가득 찌르고 꽂고 가는 뚱뚱한 여자는 순철이엄마다. 수박색 치마에 미색 저고리를 입고, 하얀 버선발에는 자주색 당혜, 어디 나들이 가는 모양이다. 박의사는 싱긋이 웃는다. 언젠가 아들 하나만 더 낳게 해달라던 말이 생각나서다.
'저 뚱뚱한 몸 해가지고선 임신하기 어렵지.'
활갯짓도 부산스럽다. 치맛자락이 펄러덕거린다. 그가 지나간 뒤 신행 가는 신부의 가마 행렬이 지나간다. 하늘은 봄빛에 취한 듯 약간은 뿌옇고 멀리 지붕 너머 버드나무 주변에 아지랑이가 일렁이고 있다. 박의사 눈앞에 최서희가 떠올랐다. 수모 속에서 인내하던 그날의 모습이다.
'이상한 여자다.'
박의사가 서희를 생각할 때 연상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탱자나무의 울타리다. 서울 태생인 박의사는 남쪽으로 내려와서 처음 탱자나무 울타리를 본 터이지만 강인하고 날카로운 가시가 밀생한 탱자나무 울타리를 바늘 하나의 출입도 거부하듯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느꼈던 것이다. 그것은 저승의 사자를 출입 못하게 막기 위한 것이라는 말을 들은 바 있지만 박의사는 서희를 처음 만났을 때 어째 그랬던지 그 탱자나무의 울타리를 생각했던 것이다.
"선생님, 점심 드셔야지요."
숙희가 조심스럽게 등뒤에서 말했다.
"응? 응,"
돌아본다.
"나는 좀 있다 하기로 할까? 먼저들 하는 게 좋겠구먼."
"네. 그러면,"
숙희는 나가고 박의사는 창가에서 떠나 의자에 파묻히듯 앉는다. 병원 뒤켠에 붙은 살림집에 익란이 떠난 후 중 늙은 식모가 혼자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그곳으로 세 사람은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고 한층 더 적막해진 병원에 박의사 홀로 생각에 잠긴다. 찌꺼기 같은 불쾌감이 다시 치민다. 이 불쾌감을 해소하기 위해선 재혼을 서두는 방법밖에 없다. 일 년 넘게 지내본 독신 생활도 불편한 것이었다. 올해 나이 삼십칠 세, 성공은 빨랐다. 그 동안 의사로서 병원일에 전념해온 그에게 사생활의 비중은 가벼운 것이었다. 결혼 초기에 잘못된 결합을 깨달은 것도 원인이 되겠지만 애당초 자신에게 주어진 의업에 대하여 야망과 포부에 넘쳐 있었던 그는 결혼 그 자체를 소홀히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지방도시라는 한계는 있으나 자산과 명성을 얻었으며 자신의 능력과 기량을 발휘할 환자는 항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번창 뒤의 외로움, 한편의 소리가 크면 클수록 한편의 침묵이 더욱더 두드러지듯이 박의사는 사생활의 공허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새 여자 쪽에서 보내온 혼담도 더러 있었다. 별 병도 아닌데 진찰 받으러 온 젊은 여자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용모에 자신 있는 과부도 있었으며 과년한 딸을 가진 어머니가 노골적으로 심중을 떠보려고도 했다. 나이 많고 재취라는 것 이외 침을 삼킬 결혼 상대였으니까. 그런데 우스운 것은 학력이 모자라거나 인물이 좀 못하거나 재산이 없는 경우, 또 한 번 결혼한 일이 있는 쪽에선 박의사가 소위 내소박을 당한 일을 들추어 자신들의 약점을 상쇄하려 들었고 모든 것을 갖춘 상대들은 우위에서 자선하는 듯 그런 태도로 나오는 일이었는데, 박의사는 일종의 조롱하는 심정으로 그런 것을 적당히 회피해온 것이다. 한 번은 밤에 위급한 환자라 하여 왕진을 갔었는데 돈푼이나 있는 과부가 환자였다. 본인의 말로는 가슴앓이라 했지만 별 이상이 없었다. 언젠가 식중독으로 인한 두드러기 때문에 병원에 온 일이 있는 여자였다. 엷은 화장까지 하고 화려한 이불에 파묻혀서 여자는 말했다.
"선생님, 왜 자꾸 가슴앓이를 할까요?"
박의사는 청진기를 말아 가방 속에 넣으며
"글쎄요, 결혼하면 나을 병 같군요."
여자의 얼굴이 빨개졌다. 밤길을 돌아오면서 투덜대는 정윤을 보고 박의사는
"의사란 몸의 병을 고치는 동시 마음의 병도 고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게야. 자네 같은 의사 지망생은 특히 명심해야 할 일이지."
필요 이상 엄숙하게 말하면서 마음속으로 자신을 비웃었고 날이 갈수록 사람의 마음을 손바닥 위에 놓은 듯 환하게 볼 수 있는 일이 쓰디썼던 것이다. 마음이 눈에 띄는 순간마다 말할 수 없는 혐오감이 자신의 감정을 고갈시키는 것이었으며, 편협하게 하는 것이었으며, 수술대 앞에서 메스를 들고 절개할 부위를 내려다볼 때처럼 그렇게 냉엄하게 하는 것이었으며... 박의사는 재산과 명성을 물론 원했었다. 그러나 의사로서의 사명감이 마비되는 것을 결코 원치는 아니 했다. 사실 그는 환자를 취급하는 과정에서 순수하게 열중해왔으며 그 과정은 그의 생활의 전부였다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숙달된 의술, 적절한 치료를 한다 하여도 필경은 사람이 하는 일이고 보면 실수나 착오나 오진을 보완하는 것은 의사로서, 인간으로서 성실해야 하는 것인데, 성실한 만큼 자라고 꽃피어주는 식물과도 같은 것이 환자다. 인간 멸시, 인간에 대한 기대를 저버린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 위험을 가장 많이 안고 있는 것이 의사이고 보면 병과 죽음이 항상 동의를 내포하고 있으며 환자의 구십구 프로가 죽음의 공포로 하여 인간의 존엄성 따위를 내동댕이쳐버린, 가장 나약하고 비겁한 모습을 서슴없이 의사 앞에 드러낼 때 의사는 그들 앞에 군림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또 의사에게 함정이기도 한 것이다. 아무튼 인류를 위한 사도로서 확고한 신념을 가지지 않는 이상 박의사는 자신의 고갈된 사생활이 이제는 의사로서의 의욕까지 위축시킬 것이란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박의사는 가끔 생각한다, 내색을 한 일도 없고 주의를 준 일도 없지만 정윤과 숙희의 관계에 대하여. 정윤의 모습에서 옛날의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에 그런지 모른다. 가난한 선비집 자손으로 겨우 중학 과정을 마친 정윤은 의전진학을 꿈꾸며 박의사 밑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숙희는 상민 출신의 기독교 집안의 딸이었다. 목사의 천거로 채용하여 벌써 이 년이 지났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던 박의사는 부모의 유산으로 중학까지는 마칠 수 있었으나 일본으로 건너가서 의학을 공부 할 때 그는 가시밭길을 걸었다. 고모가 한 분 있어서 얼마간 보조는 받았지만 전문의를 따기까지 기막힌 고학을 했던 것이다. 정윤이 의전으로 간다면, 그리고 의사가 된다면 그 경로는 자신과 매우 흡사하리라, 박의사는 생각하는 것이었고 의사가 된다면 정윤이는 과연 숙희와 혼인할 것인지 궁금한 숙제처럼 생각되기도 했던 것이다. 자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럴 경우 숙희하고 결혼하지 않을 것이란 결론은 쉽게 내릴 수 있었다. 불우한 청년이 미래의 큰 꿈을 바라보면서 다만 현재가 쓸쓸하고 외롭기 때문에 모든 순정을 바치는 여자를 의지한다...
'정윤이 그놈도 필경 무엇인지 모르지만, 누구인지도 모를 여자를 찾게 될 게야.'
그러면서도 박의사는 젊은 그들에게 묘한 선망을 느끼는 것이었다. 젊은 남녀의 애정의 비중이 어떤 것이든 애정이 갖는 윤기가 부드러운 것이다. 그 윤기를 얻기 위해 향락적인 방법을 취할 수도 없는 결벽증, 적당히 타협하기엔 너무나 쉽사리 정체가 눈에 띈다.
"선생님, 점심 드십시오."
박의사는 몸을 일으켰다.
"먹어야지."
숙희를 쳐다본다. 숙희 윗입술에 고춧가루가 묻어 있었다 박의사는 눈살을 찌푸린다.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늙은이를 보았을 때처럼 혐오감을 느낀다. 갑자기 싸늘해진 그 눈빛에 숙희는 어쩔 줄 몰라 한다. 약제실 옆에서 박의사는 정윤과 마주쳤다.
"삼호실 환자 또 야단났습니다."
정윤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왜 또 그래."
"선생님 불러달라고 막 악을 쓰지 않겠어요?"
"그럼 가보지."
"가시지 마십시오. 뻔합니다."
"아직은 살아 있는 사람, 소원 좀 들어주어야지."
박의사는 점심 생각이 없었다. 늘 식욕이 없는 것이다. 되도록 이면 미루고 싶은 마음에 때문에 입원실로 발걸음을 돌린다. 하는 수 없이 정윤도 뒤따른다.
"어떠시오, 아주머니."
삼호실의 환자는 임이네였다. 천년을 살 것 같았던 그 무성한 생명력은 어디로 간 것일까. 참혹한 몰골이다. 복막염 수술을 한 지 열흘이 지난 것이다.
"좀 괜찮은 것 겉기도 합니다."
"그러면 됐어요."
"그런데 보혈 주사는 와 끊었습니까?"
어제 물었던 말을 되풀이 묻는다.
"이제는 끊어도 괜찮소."
어제와 같은 대답이다.
"내 생각에는 그거를 좀 더 맞았이믄 싶은데요."
"그럴 필요 없어요. 곧 퇴원하게 될 겝니다."
"다 낫기 전에는 안 나갈 깁니다. 안 나가고말고요."
임이네 눈에 불기둥이 서는 것 같다.
"아주머니는 돈이 많은가 보지요."
"그만한 돈이사 없겄십니까? 그래도 배를 쨌이믄 의사가 책임지야제요. 안 그렇겄소?"
"입원비로 허비하느니보다 퇴원해서 몸을 보하는 편이 훨씬 낫지요."
"그렇기 사알살 꼬아도 내는 안 나갈 기구마는,"
"수술할 환자가 또 있는데 그러면 안 되지요. 수술 자리는 썩 잘 아물었소."
"그러믄 묻겄는데요, 나는 살 수 있십니까, 못 살 깁니까."
임이네 목소리에는 울음이 가득 차 있었다.
"수술은 잘됐다고 하지 않았소? 죽고 사는 일은 아무도 몰라요. 의사도 다 마찬가지로 죽으니까요. 물에 빠져 죽는 일도 있고 언덕에서 떨여져 죽는 일도 있고 사람이 어디 병으로만 죽는 건가요?"
박의사는 임이네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것은 습관이었다. 환자의 시선을 피하는 것은 환자에게 불안감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익혀진 버릇인 것이다. 임이네의 한 팔이 허공을 가르듯 내려왔다. 박의사의 손을 덥석 잡은 것이다. 박의사 등골에 서늘한 것이 타고 내린다. 환자를 대할 때 흔히 있는 일인데 회복의 가망조차 없는 중 늙은 여자의 힘에는 살기마저 느껴졌던 것이다. 죽음의 심연까지 끌어들이는 것 같은 아주 기분 나쁜 힘이었다.
"선상님요, 나 나이가 이자 겨우 쉰다섯입니다. 나는 못 죽십니다. 참말로 못 죽십니다. 무신 남 못할 짓 했다고 멩대로 못살겄십니까. 디건이 목에 피 내묵고 살덧기 살았는데 한이 첩첩산이요, 선상님, 살리주시이소!"
울을을 터뜨린다. 눈물이 펑펑 솟아오른다. 철색을 띤 얼굴이 흠뻑 젖는다. 박의사는 꽉 물려드는 손가락을 뜯어내며 간신히
"맘을 단단하게 먹어야 병도 항복을 하는 법이오."
"선생님,"
정윤이 혀를 찬다. 박의사는 시계를 본다.
"점심 드셔야지요. 환자가 곧 들이닥칠 텐데."
"그럼 점심이나 먹어볼까?"
울음을 뚝 그친 임이네, 정윤을 무섭게 노려본다.
"야 이놈아! 머리빡이 허여질 때까지 이 집에서 종질하고 살아라! 예사, 나그네보고 먼지 짖는 거는 개새끼라 카더라마는, 흥!"
"보자보자 하니,"
정윤의 얼굴이 시뻘개진다.
"나가자. 환자하고 그러면 쓰나,"
정윤의 등을 밀고 박의사는 복도로 나간다.
"영악한 아낙이야. 자기 죽음을 예감하는 것 같다."
"환자치고 저런 환자 처음 봤습니다. 어떤 때는 반미치광이같이 날뜁니다. 사는 것이 저리 추악한 것이라면 살아서 뭘 합니까?"
"젊은 사람들은 다 그렇게들 말하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천당이든 지옥이든 내세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나."
"정말 퇴원 안 하려고 떼를 쓰면 골칫거립니다."
임이네의 병은 결핵성 복막염치고는 급성이었다. 삼십구도의 고열인데다, 환자는 심한 복통을 호소했다. 복막염으로 진단했으나 결핵성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죽더라도 원이나 없게 수술을 해달라는 가족과 본인의 의향도 있고, 또 화농성 복막염일 경우 화급을 요하는 일이었으므로 착수한 수술이었다. 개복한 결과는 의심했던 바로 그 결핵성 복막염이었던 것이다. 장벽에는 이미 별만큼 무수한 결절이 형성돼 있었으며 군데군데 궤양을 일으키고 있었다. 환자가 복통을 호소하고 고열인데다 병력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한 헛소리만 지껄였기 때문에 배를 도로 꿰맨 뒤 비로소 박의사는 환자가 늑막염을 앓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환자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삼 년 전에 시나브로 숨이 차고 가슴이 답답해서, 옆구리도 결리고 해서 자라를 삶아 먹었느니, 흰 비둘기를 털 있는 채 고아먹었느니, 다릅나무의 잎을 달여 먹었느니. 굿을 했다는 애기만은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말짱하게 나았소. 씻은 듯이 나았단 말입니다. 본시 무병한 편이라서 그러고느 아무 일 없었는데,"
임이네는 씻은 듯이 나았다는 말을 되풀이 되풀이하였다. 마치 그것을 빌미 삼아 병을 고쳐주지 않고 의사가 도망이라도 칠까 두려워하듯이.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장결핵이란 폐결핵의 말기 현상인데..."
정윤에게 하는 것도 아닌 그런 말을 하고 박의사는 안으로 들어간다. 차려놓은 점심상 앞에 앉은 박의사는 우두커니 밥상을 내려다본다. 먹는다는 일이 무슨 사무 절차와 같이 귀찮고 짐스러운 생각이 든다. 산다는 것과 먹는다는 것의 차이란 어느 만큼이나 될까,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수저를 드는데 윗입술에 고춧가루가 묻었던 숙희 얼굴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내 탱자나무 울타리와 더불어 서희의 모습이 떠오른다. 처음에는 어쩐지 서먹하고 경원하고 싶은 여자였던 서희가 요즘에 와서 번번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의사가 겪은 범위 안의 여자가 아니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환하게 들여다뵈는 여자가 아니다. 박의사는 자신의 취향이 입술에 고춧가루 묻힌 여자보다 탱자나무 울타리 속의 여자 쪽이 아닌가 하고 쓴웃음을 띤다. 일본 있을 때 머리를 짧게 깎고 소년 같은 차림새를 한 젊은 여자를 더로 본 일이 있다. 대개 전찻간에서였고 그런 유의 여자는 거의가 학생들이었다. 차림새뿐만 아니라 말씨도 거칠었고 상말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박의사는 불쾌감이 없었다. 매우 신선하고 발랄한 젊음의 아름다움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익란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처음부터, 활발하고 화제는 이론적으로 거칠었지만 신선하기는커녕 부패한 냄새를 맡는 것 같았다. 청춘조차 없었던 젊은 날을 겪은 그에게 자존심이니 지성이니 여자의 인격이니 따위의 남발되는 용어를 메스껍게 느낀 것은 애정도 싹트기 전 결혼 시초부터였다.
저녁 때 홍이가 박의사를 찾아왔다. 수술하던 날 잠시 만나고는 처음 대면이다. 홍이에게선 기름 냄새가 풍겨왔다. 처가곳 통영에서 화물차 운전수, 그것이 홍이의 직업이었다. 부산 나가서 운전 기술을 배운 그는 처외가의 주선으로, 차주는 일인이었지만 화물차를 굴리게 된 것도 일년이 넘는다. 행선지는 진주, 마산, 부산 등지다. 그중에서도 해로가 없는 진주를 자주 온다. 생선을 싣고 오면 야채, 과실, 곡식 등을 싣고 가게 된다.
홍이는 모자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퇴원은 언제쯤 하게 될까요."
"더 이상 병원에 있을 필요는 없겠는데, 환자를 만나보았소?"
안경 속의 눈이 똑바로 홍이를 쳐다보며 묻는다.
"아닙니다. 선생님 말씀 들은 후에 가보려구요."
"자세한 얘기는 수술 후 들었던가요?'"
"그때 잠시, 가망이 없다는 말씀 들었습니다."
"뭐라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의외로 끌는지도 모르겠고, 그러나 지금 의술론 별도리 없지요... 그런데 퇴원을 하자면 환자가 좀 말썽을 부릴 것 같소."
"그건 저희들도 압니다."
시무룩하게 말하며 고개를 숙인다.
'귀공자같이 잘생겼군. 참 이상하다. 이 청년이 돼지 목 따는 소리를 질러대던 그 환자의 아들이라니,'
박의사는 유심히 홍이를 바라본다. 요즘 세태엔 새로운 직업운전수가 상당히 인기 있고, 따라서 다분히 건달기도 있는 것이 운전순데 귀티가 나고 세련되고 어딘지 모르게 저력을 숨기고 있는 듯한 인상, 특히 청년의 눈빛에는 교육을 받은 흔적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매우 침착하며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하기는 병간호를 위해 통영서 왔다는 며느라라는 여자만 해도 그러했다. 전혀 가족이라는 분위기가 없는 것이다. 시초부터 정윤이나 숙희는 삼호실 환자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다. 환자 쪽에서 불만이 많아 광태를 부리기 때문인데, 박의사 역시 이색적인 환자라는 것은 느끼고 있다. 대개의 환자는 의사에게 목숨을 위탁하는 복종심을 있는 법이다. 매달리는 눈빛, 심약한 미소, 혹은 겁먹은 반항, 그러나 삼호실의 환자만은 의사의 권위 같은 것은 서푼짜리도 못되었고 당당하게 자기 생명의 소중함을 주장했다. 수틀리면 행패부리겠다는 늘 그런 자세인데 꼼짝 못하고 누워 있을 적에도 입에서는 계속 돌팔매질하듯 말이 튀어나왔고 눈물을 흘릴 적에도 눈물은 슬픔이 아니었다. 시위요 저주요 협박이었다. 신에게조차 날 살려내지 않으면 물어뜯겠다는, 그렇게 철저하고 완벽한 아집을, 그러나 박의사는 그 앞에서 서글프게 웃고 만다. 죽음은 절대적인 승리자요, 거대한 암벽에 모래알을 던지는 환자는 눈물 나게 측은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윤과 숙희는 번번이 끔찍스럽다고들 했다.
"삼호실 환자 말인데요, 어떻게 생각하면 좀 불쌍하기도 해요. 더러 문병 오는 사람이 있긴 있지만 한결같이 구경온 사람 같지 뭐예요? 미치광이처럼 막 지껄여대는데 대꾸조차 하는 사람이 없어요. 어떤 할머니 한 사람만 불쌍하다 하며 울데요."
"그것 다 인생을 잘못 살아서 그런 게야. 죽음을 맞이할 때야말로 어떤 형태로든 숨김없는 한 인간의 결산이 나온다고들 하지."
숙희에게 무심히 그런 말을 하곤 했었다. 박의사는 회전의자를 빙그르르 돌리며
"내일이라도 퇴원하는 것은 무방하니까 가족이 잘 설득해보슈."
"그렇게 하겠습니다."
홍이는 일어섰다.
"환자를 위해서도 그렇지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살풍경한 병원에 있기보다는... 아무튼 안됐소."
진찰실을 나온 홍이는 입원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죽을 쑤어가지고 막 도착한 모양이다. 보연이 죽그릇을 챙기고 있었다.
"아니, 당신 짐 싣고 오셨어요?"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
"응, 내일 아침엔 가야 해."
홍이는 모자를 던지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반듯하게 누운 임이네는 벽 쪽으로 얼굴만 돌려놓고 꼼짝하지 않았다. 잠이 든 모양이다.
"아아, 고단하다."
"그럼 집에가서 좀 주무세요."
"어때? 지치지 않았어?"
"..."
"상의는 잘 놀아요? 보고 싶어요."
"왜할머니가 잘 거둬주시는 모양이요."
"내일은 아침 일찍 떠나야 해요?"
홍이는 입맛을 다신다.
혼인날 억수같이 쏟아지던 비 때문에, 또 대례청의 닭이 죽었다하여 초상집처럼 근심에 싸였던 혼가, 이래저래 말도 많았는데 이들 부부는 햇수로 삼 년, 작년 가을에는 딸을 낳았고 별 탈 없이 살아왔다. 방자하고 분별없는 말을 곧잘 하며 이기적인 보연의 성품이 달라진 것은 아니나 세상 물정을 모르던 단순함과 순진성이 그의 성격의 결함을 많이 덮어주었고 무엇보다 보연이는 홍이를 좋아했으므로 늘 명랑하여 집안에 잡음이 없었다. 홍이도 그런 집안 분위기에 안주하는 듯 보였다. 용이는 아직 생존해 있었다. 그 자신이 최참판댁 고옥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며느리를 아들 옆에 가 있기를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다만 명절과 제삿날, 생신 때만 아들 며느리가 와서 그들의 집, 평사리의 그 집에서 가정 행사를 치르곤 했었다.
"아침에, 떠나기 전에 퇴원을 서둘러야겠는데 한소동 벌이겠다."
홍이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그때 자는 줄만 알았던 임이네가 고개를 휙 돌렸다.
"머라꼬? 이놈아, 니 여기 머하로 왔노? 머하로 왔노 말이다!"
벽력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다른 방에 있는 환자 생각도 해야지 여긴 병원이란 말입니다."
"우세스럽나? 그거는 아네? 잔소리 할 것 없다. 팔자에 없는 며누리, 머 몰라 죽은 기이 며누리고. 아들 없는 며누리가 어디 있노? 데리고 썩 가거라! 실데없인께. 체면치레 할라고 연놈들이 애쓴다. 내 돈 가지고 너거들 체면을 세워? 흥! 퇴원? 어림없다! 송장이 돼서 나갔임 나갔지 어느 연놈들 좋은 일 시킬라꼬 내가 나가노! 똥 묻은 중우 팔 때까지 병원에 있일 낀께,"
"어머니도 참, 퇴원하셔가지고 하시고 싶은 것 다 하면 될 거 아닙니까."
보연의 말이었다.
"눈감고 아웅하는 기가? 하고 싶은 것 다 하라꼬? 남의 눈이 있인께 죽물이라도 끓이오지. 너의 연놈들이 날 집구석에 콕 처박아 놓고 굶기직일 걸 내가 모릴 줄 아나! 언선스런 말 해도 나는 꼭대 위에 서 있인께, 내가 우찌 살아왔다고 그거를 모리까. 자식이 아니라 불구대천의 원수 놈, 비단가리 하나 냉기고 내가 죽을 줄 아나?"
이를 부드득 간다.
"어머니도 참, 그걸 바랄 사람입니까."
"니는 상관 마라! 넘찐 것이 말대꾸는. 야 이놈아! 네놈이 평양감사라도 내 속에서 나왔다! 하늘에서 떨어진 줄 아나? 땅에서 솟은 줄 아나? 진자리 마린자리 가리감서 손발 잦아지게 키웠더마는 악문을 해도 우짜믄 그렇게 하겄노. 네놈은 내 가심에 맷돌을 얹었다!"
"어매는 나한테 공 안 들였소."
하다 말고 홍이는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그는 순간 임이네의 여명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다.
"어머니, 너무 그러시지 마시오. 자식 낳아 호랭이밥으로 던져버리는 부모는 없으니까요."
보연의 당돌한 말이었다.
"시끄러!"
홍이 소리를 질렀다.
"오오냐! 양반년 행토 좋구나."
임이네는 일어나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더니 바바리의 휘파람 같은 한숨을 내쉰다.
"오오냐! 쇠 한분 물어끓으믄 고만이다. 하동 땅에 그놈의 인사 살아있는 동안은 내 저승차사 애목을 물고라도 안 죽을라 캤더마는, 쇠 한분 물어끓으믄 고만이다! 하늘 밑에 낯짝 치키들고 댕길긴가 어디 두고 보아라!"
"어머니!"
보연의 얼굴에 겁이 더럭 실린다. 홍이는 잠자코 입원실을 나간다.
"상의아버지! 상의아버지!"
보연이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홍이는 급히 나간다. 이삼 년 동안, 만 이 년인데, 그 동안 임이네는 병으로 굿을 쳤다. 며느리를 두고 안 들어올 사람이 들어왔기 때문에 병이 난 것이라 하여 굿을 하고 보연이는 나타나지도 못하게 했다. 씻은 듯이 나았다는 것은 빈말이었다. 좋다는 약은 다 먹었고 좋다는 한의는 다 찾아다니며 법석을 피웠다. 심지어는 새끼 낳은 고양이의 안태까지 뺏어다가 날것으로 먹었을 지경이었으니까. 병원에 입원하던 그날도 지나놓고 보면 홍이가 왔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급성복막염도 아닌데 방금 죽어가듯 소동을 피웠던 것이다. 홍이는 걸으면서, 입원하던 그날 어미를 업고 병원으로 가던 길에서 어깨를 물어뜯던 이빨의 섬찟함이 아직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한다. 어깻죽지의 남아 있는 아픔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