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닮은 얼굴의 기억
"어머니,"
"오냐."
"이거 보아요. 윤국이가 이 말을 납작하게 해놨어요."
"바람이 빠진 게로구나."
"네. 바람이 다 빠져버렸어요."
"그럼 내가 바람을 넣어주마."
"아닙니다. 나도 바람 넣을 줄 알아요. 하지만 구멍에 붙은 쇠붙이를 윤국이가 떼어버려서 바람을 넣을 수가 없는 걸요."
서희는 고무로 된 장난감 말을 주워든다. 윤국이는 뒤뚝뒤뚝 방안을 걸어다니며 종이를 찢어발기더니 이번에는 경대 서랍을 열어 젖히고 그 속에 있는 것을 낱낱이 꺼내 방안에 늘어놓는다.
"망가졌구먼. 우리 윤국이 기운이 센가 부지?"
"응."
"어째서 아기는 찢고 부숫고 그러지요?"
"아기는 다 그런단다. 환국이 너도 어릴 적에는 그랬지."
"내가요?"
"음."
"그럼 윤국이는 나만큼 자란 뒤에 사랑에 가야겠네요?"
"어째서?"
"아버지 서책을 다 찢을 거 아닙니까?"
"그렇구나. 하지만 환국아."
"네. 어머니."
"아기가 찢고 부싯고 하는 것은 그것이 뭣인가 알고 싶어 그러는 거란다. 환국이는 다 컸으니까 이것은 종이이구나 저거는 상자구나, 하고 보기만 해도 알지만 아기는 걸어서는 모르지. 그러니까 찢어보고 부셔보는 거야. 그러니까 말리면 안 된다, 알겠니?"
"네."
"너 동생이 예쁘냐?"
"네. 예뻐요. 너무 너무 예뻐요. 하지만 윤국이가 상자 같은 것 꺼내려고 애쓰면 불쌍해요. 다칠까봐 겁도 나구요. 한데 말예요. 어머니, 윤국이는 지가 꼭 할려고만 하거든요. 내가 꺼내주는 거는 싫은 가봐요."
말끄러미 쳐다보다가 환국이는 싱긋이 웃는다.
"그러냐?"
서희도 미소한다.
'사랑스러운 것들, 너희들은 어디서 생겨났느냐? 하나님이 주셨지. 하나님, 정녕 꿈은 아닐까? 환국이는 이제 여섯 살, 윤국이도 돌이 지났고 어서 자라라, 어서.'
윤국이는 화장수병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한참을 놀다가 싫증이 났는지 환국이가 접어주는 종이배도 마다하고 엄마 엄마 하며 서희 무릎에 기어오른다.
"엄마?"
고개를 갸웃하며 정답게 부른다. 젖을 달라는 것이다. 젖은 돌전에 떼었는데 하루 두세 차례 엄마의 빈 젖을 잠시라도 빨아야 직성이 풀리는 윤국이다. 그 요구가 받아 들여지지 않을 때 떼를 쓰며 울고 하지는 않는데 아이는 기가 푹 죽는다. 그리고 아이는 노는 일에도 열중하지 못하고 억지웃음을 자꾸 웃는 것이 가여워 서희는 빈 젖을 잠시만 빨리곤 했다.
"조금만 빠는 거야. 우리 윤국인 착하니까, 그렇지?"
서희는 오지랖을 걷고 아이에게 젖을 물린다. 윤국은 기분이 좋아서 고사리같은 귀여운 손가락을 어미 입에 넣으며 또 쳐다보며 젖이 나오지 않는 젖꼭지를 빤다.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던 환국이 무릎을 민적거리며 다가온다.
"어머니?"
"으응?"
"나도 어머니 젖 먹고 컸지요?"
"그럼."
"저어,저어, 저 말이지요?"
"뭐냐."
"저어, 한번 만져봤으면."
"다 큰 도련님이?"
환국이는 얼굴을 붉히며 몸을 빙그르르 돌린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킬킬 웃으며 마루로 뛰어 나간다. 킬킬거리고 웃는 소리 뒤
"아버지?"
환국이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냐"
길상이 들어오는 모양이다.
"윤국아? 이제 됐지?"
젖꼭지를 물고 안 놓으려는 윤국일 달래어 내려놓으며 옷매무새를 고친다. 길상이 방으로 들어왔다.
"여보."
선 채 부른다.
"네."
길상이 낮에 안방으로 들어오는 일은 그리 흔치가 않다.
"사랑에 계신 손님께 인살 해야겠소."
"네?"
이 또한 거의 없었던 일이다. 서희는 길상을 쳐다본다. 다소 긴장된 표정이다.
"손님이 오셨어요?"
"방금 모시고 왔소."
"어떤 분이신데 제가 인살 합니까."
"만나 뵈면 알 것이오."
상현의 부친 이동진 씨라면 그렇다 할 것인데, 서희는 의아해한다. 그렇다면 달리 사랑으로 내려가 인사를 치러야 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길상이 독립지사들과 교분이 두터운 것은 알고 있으나 서희 쪽에서 외면하는 것은 물론 길상도 그런 명분에 서희를 끌어들이려 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은,
"뭘 하는 거요."
길상의 어세는 날카롭고 강했다. 유모를 불러 아이들을 맡기고 사랑으로 내려간 서희는 방문에서 어쩐지 가슴이 철썩 내려앉는 것을 느낀다.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길상이 먼저 들어가고 서희가 뒤따라 들어갔을 때 거기 단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사람은 김환이었다. 서희는 그를 일별하는 순간 전신이 굳어진다. 그는 윤씨부인을 보았던 것이다. 착각이었다. 분명히 그는 남자였고 장년이었다. 상대편 김환이 역시 미동 없이 서희를 쳐다본다.
"어른께 인사드려요."
부드러운 길상의 음성에 서희는 자신을 수습하였고 상대편도 희미하게 몸짓하는 것을 느낄 수 이었다.
'할머님...'
서희는 할머니 윤씨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 최치수는 희미하게, 어머니 별당아씨는 보다 더 희미하게 기억하지만 열 살 때 별세한 할머니의 얼굴만은 뚜렷하게 남아 있는 기억이다.
"돌아가신 할머님의 친정조카뻘 되시는 분이오."
"네?"
귀를 의심한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절을 올리시오."
길상의 음성이 또 날아왔다. 서희는 최초, 그 일별의 착각에 쫓기듯 저도 모르게 몸을 가누며 큰절을 올린다. 고개를 들고 상대를 바라본다. 똑바로 응시한다. 거기엔 전혀 다른 얼굴이 서희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어찌 할머님 생존시에는 한 번도 뵈올 수 없었습니까."
묻는 말에 길상은 말이 없고 환이도 말이 없다.
"할머님 친가 윤씨 집안은 서학으로 남은 분이 안 계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만,"
"그러하오면?"
"더 깊이 묻지 말게. 어떤 관계로든 돌아가신 할머님과 핏줄이 닿았으니 최참판댁 손녀에게 하대하는 게 아니겠느냐?"
"네."
서희는 고개를 숙인다. 범치 못할 위엄이 있다. 서희는 난생처음으로 그것을 느낀다.
'분명하게 생겼구나. 그 사람보다는 몸집이 작군. 뚜렷하기도 하구. 과연 최참판네 여인이구먼.'
넓은 이마를 바라보며 환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그 사람은 나약하였다. 부드러웠지. 서희처럼 총명하지 않았다. 산 속의 새, 산속의 꽃, 진달래꽃이었던가. 묘향산 북변 무덤 속에서 잠자는 사람.'
환이는 아직도 곁에서 그 여자가 숨쉬고 있는 것을 느낀다.
"지금 어디서 오시는 길이옵니까?"
소스하치다가 환의 몽롱했던 눈이 본시로 돌아간다.
"지리산에서 묘향산을 거쳐 오는 길일세."
서희 눈동자는 정지한다.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시었는지요."
"만주 풍물을 구경할려구 왔네."
"할머님 생전에 할머님을 보신 적이 계시온지요."
"만나뵈온 일이 있지. 그도 여러 번,"
"헌데 어찌 할머님께선 저에게 그런 말씀을 아니 하셨을까요."
환이는 쓰디쓰게 웃는다.
"그것은 저승에 가서나 물어볼 일 아니겠느냐? 할머님의 심중이시니,"
"..."
"그러나 장차 할머님의 심중을 알게 될 날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럼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사랑을 나서는 순간 서희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여 안방까지 건너왔는지 알 수 없다.
'옛날에 어디선가 보았던 얼굴이야. 어딘선가... 할머님 얼굴로 착각한 것 말구, 어디서 보았을까?
이날 밤 서희는 길상이 들어오기를 고대하였다. 새벽녘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기다렸으나 끝내 길상은 사랑에서 올라오질 않았다. 새벽이 지나고 아침도 지나고 길상은 손님과 함께 하얼빈에 볼일이 있어 떠났다는 전갈이다.
"이럴 수가?"
도사리고서 밤을 꼬박이 밝힌 서희는 노했다. 격노한 것이다. 서희가 남편 길상에게 이렇게 노해보기는 처음이다. 안절부절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마음, 서희는 이불을 깔고 드러눕고 말았다. 아이들을 멀리하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마구 울었다. 인척이라며 큰절까지 시킨 손님에 대한 짙은 의혹을 풀어주지도 않고 떠난 것도 괘씸하고 분하였으나 목적지가 하얼빈이라는 데도 쌓이고 쌓인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그러나 실컷 울고 난 뒤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무렵 서희는 안정을 찾는다. 냉정해지니까 왜 울고 왜 그토록 노하였는지 좀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손님과 함께 하얼빈으로 떠났기로 그것은 종전과 별다를 것이 없는 자신과 길상의 생활인 것이 깨달아진다.
'인척이면 인척인가보다 생각하면 될 거 아닌가. 그이도 모든 것 정리하고 할 일이 없어지니 손님 뫼시고 하얼빈으로 갈 수도 있는 일,'
결국 눈을 감아주기로 결심한다. 자리를 치우라 이르고 세수를 한 서희는 어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아이들을 불러들여 놀아주는 것이다. 더욱 자상하게 깊은 애정을 기울이며 오로지 아이들에게만 열중한다.
"어머님."
"오냐."
"어제 말예요? 산에 갔지 않아요?"
"산에,"
"그랬더니 새가 나를 쪼려 해서 혼이 났어요."
"어째서?"
"아마 둥주리에 있는 새낄 잡아갈까봐서 그랬나 봐요,"
"저런,"
하는데 서희 마음속에 묘향산! 하며 외치는 소리, 소리가, 지리산에서 묘향산을 거쳐 오는 길일세, 하던 말이 산사의 종소리처럼 과앙과앙 되풀이 심장을 치고 온다. 어제 그 말을 들었을 때도 묘향선이란 지명은 심장에 갈고리질을 했다. 진득진득 심장을 잡아당겼던 것이다. 그러나 서희는 그 말을 외면하고 말았다. 견디어야겠기에 서희는 외면하고 못 들은 척하는 일이 흔히 있다. 그 묘향산이 지금 아우성치며 달려나오려 한다. 그렇다! 오래 전 혜관은 서희를 찾아와서 묘향산 북변에 있는 무덤 얘기를 했었다.
"안자야! 거 안자 없느냐?"
안자는 이내 달려왔다.
"예, 마님."
"너 지금 곧장 객줏집에 가서 공노인더러 잠시 다녀가라고 일러라."
"예."
윤국이는 잠이 들었다. 환국이는 언제 나갔는지 뜰에서 강아지와 뒹굴며 놀고 있었다.
'묘향산...'
다시 길상에 대한 노여움이 치민다. 걷잡을 수 없는 외로움이 치민다. 혼자 타인들에게 둘러싸였던 지난날에도 이렇게 외로움을 느끼진 않았다. 느낄 겨를이 없을 만큼 숨가쁜 도약이 있었을 뿐이다. 싸움과 싸움의 연속이었다. 승리의 언덕은 외로운 자리였는지 모른다. 서희희 승리를 축복해주고 기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상에 오르기까지 외로운 싸움이었다고는 하지만 동행자는 있지 아니하였던가. 그 동행자들이 지금 서희의 승리를 외면한다. 아니 쓰디쓰게 바라본다. 공노인조차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기운 내! 서희야! 여기서 헛디디면 나락이다. 이제 내게는 최참판댁을 일으키고 원수들을 치는 목적만은 아니다. 내 아이들 내 귀여운 것들을 풍요한 토양에 심어야 하는 거야. 내 귀여운 것들 너희들을 말귀에 달고서 만주 땅을 헤맬 순 없다!'
그러나 서희는 옛날같이 꼿꼿이 설 수가 없다. 흥분하고 노하면서도 마음 밑바닥에는 칼날이 서늘한 기준이 미동하지 않고 있는다는 것을 서희 자신은 알고 있었고 또 사실이 그러했다. 한데 이 수습될 수 없는 혼란에서 서희는 차츰 공포를 느끼기 시작한다. 사랑이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 어느 편을 위해서도 잃어서는 안 되는 사랑 때문에. 아이들한테 아비가 있어야 하고 아비한테도 아이들은 있어야 한다. 끊을 수 없는 것이다. 내 쉬여운 것들을 말귀에 달고서 만주 땅을 헤맬 수 없다! 는 외침은 자신이 마구 흔들리고 있다는 이외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 낯선 손님과 떠나버린 길상은 돌아오지 않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는 오늘 이런 결과가 오기까지 꾸준히 기다려주었는지 모른다. 그 나름의 애정과 최참판댁에 대한 의리 때문에 이런 결과까지 끌어놨는지 모른다. 그리고 떠났는지 모른다. 서희 마음속에서 묘향산은 행방불명이 되고 오로지 길상의 마음, 길상의 행방을 뒤쫓고 있을 때
"무슨 일이신지요."
하며 공노인이 밖에서 헛기침을 했다.
"들어오시오."
"예."
공노인은 조심스럽게 방안으로 들어온다. 자리에 앉았어도 말이 없다. 공노인은 더욱더 조심스럽게 대기하는 상태였는데 왜 서희가 오라 하였는지 충분히 짐작하고 온 눈치였다.
"지리산에서 오셨다는 손님 그간 공노인댁에서 유하셨소?"
"예, 그렇습니다."
"그분을 공노인은 언제부터 아시었소."
"한 오륙 년 되나 봅니다."
"어떻게 아시었나요?"
"조선에 갔을 때 지리산에서 처음 뵈었습니다."
"그러면은 어찌하여 내게는 그 말씀을 아니 하셨던가요?"
"..."
"그러는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라도 있으셨나요?"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니겠습니다마는,"
공노인은 서희를 힐끔 쳐다본다.
"지금도 말씀하실 수 없겠소?"
"그거는..."
"..."
"못할 것도 없겠습니다마는 실은 저도 확실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확실한 것을 몰랐기 때문에 나에게도 말씀 안하신 건가요?"
"그, 그거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거 뭣입니까 이곳에선 독립지사라 합니다만, 그, 그러니까 의병으로서 또 그분의 신분이 세상에 들나는 것은,"
"신분이라면?"
"그, 글쎄 그것도 확실한 얘길 들은 바는 없습니다마는 잠작컨대,"
공노인은 말을 끊는다.
"짐작컨대?"
"거의 짐작에 틀림이 없는 것으로 알고는 있습니다마는 왕시 동학의 접주였던 김개주 장수의 외아드님이라는, 풍문도 그렇고, 예. 풍문도 그러했습니다."
공노인은 또다시 서희를 힐끔 쳐다본다. 서희 추궁에 못 이겨 말을 털어놓는 것은 아닌 성싶다. 이 정도면 말을 해도 괜찮을 것이요, 차라리 해두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었던 것 같다.
"그래요."
서희는 생각에 빠진다.
'지리산에서 왔다는 말과 서학이 아닌 동학이라는 말은 맞는군. 김개주의 외아들? 그러면 어찌하여 윤씨 가문과 핏줄이 닿는다는 게지? 윤씨와 김씨, 할머님께선 일찍이 여형제가 계셨더란 말인가? 나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괴정에 죽은 김서방이 윤씨댁 하인이었고, 그 사람도 여형제 말은 아니했다. 또 이상한 점은 있어, 김개준가 그 동학의 괴수가 중인이라 하였는데 윤씨 집안에서 혼인을 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의문은 또 있어. 만부득한 사정으로 그렇게 되었다 가정하더라도 집안이 그 풍랑을 겪는데 한번쯤 나타날 법한 일이 아니냐? 그런데 나는 할머님으로 착각을 했다... 그리고 묘향산은 또 무엇이냐?'
"정녕 공노인 말씀에 딴 뜻은 없겠지요?"
"딴 뜻이라니요? 딴 뜻이 있을 까닭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공노인은 서희 혜안을 안다. 그 말이 진정이냐고 물었어야 할 것을 왜 하필이면 딴 뜻이 없느냐고 묻는가.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어차피 알아야 할 일이라면, 아니다. 그것은 길상의 소관이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그분이 돌아가신 아버님 못지않은 훌륭한 자질과,"
하는데,
"치우시오!"
"아, 예."
"동학당하고 우린 아무 상관이 없고. 상관이 없다뿐이겟고? 양반에 대적한 사람들 아니었던가요?
"예. 그야 그렇습니요."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어찌하여 공노인이 우리집 서방님을 불러내어서 대면을 시켰느냐 그거요. 말씀하시오."
"그것은 그분이 원하셨습니다."
"그러면은 그분이 여기 사정을 소상히 알고 오셨다 그 말씀이요?"
"그런 줄로 압니다."
"좀 더 확실하게 말씀해 주시오."
"언젠가 이곳에 오신 일이 있었지요. 혜관스님이라구, 지리산에서 가깝게 지내는 여러 가지 사정말고도, 그러니까 우관스님이 그분의 백부님이며 혜관스림이 직계 제자이고 보면,"
"그게 육 년 전의 일이었소?"
"그런 줄로 압니다."
서희는 머릿속에서 두 개의 묘향산이 부딪치면서 소리를 낸다. 하나는 혜관의 묘향산이고 다른 하나는 김환의 묘향산이다. 두 사람은 묘향산 북변에 있는 무덤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즉 서희 생모와 어떤 관련이 있단 말인가. 그 비밀을 길상은 알고 있다.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서희는 단정을 내린다.
"우리 집 서방님하고 사흘 낮 사흘 밤을 어디서 무엇을 하고 지내셨지요?"
"줄곧 강가 횟집에서 약줄 드셨지요. 강가 모래밭에서 함께 뒹굴고... 한이 많으신 분일 것 같았습니다."
"알았소. 그럼 가십시오."
서희는 흩어지는 자신을 감추려는 듯 성급하게 말했다.
"예. 그, 그럼 가보겠습니다."
공노인은 황황히 나간다. 온통 머릿속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는데 서희는 무릎 위에 두 손을 깍지 끼고 앉아서
"가만히 있자, 가만히 있자... 가만히."
방바닥 한 곳을, 까만 딱지가 붙어 있는 방바닥을 골똘히 내려다보며 가만히만 되풀이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떤 생각을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가만히 있자, 우관스님하고 김개주! 그리고 그분 혜관스님... 그리고 또 환국이아버지... 절이다... 절,'
개미 쳇바퀴 돌 듯 서희의 생각은 같은 둘레를 몇 번이고 돈다. 돌고 또 돈다.
'어째서 할머님을 닮았느냐, 어째서 김씨가 할머님의 핏줄이냐,'
망치질하듯 머릿속이 광광 울린다. 소리는 소리를 낳고 또 낳고
'어찌 너는 도망을 치려 하느냐! 너가 만난 사람은 구천이 그 하인이 아니더냐! 할머님을 닮았다는 것, 할머님의 핏줄이라는 것, 그것을 방패삼아 너는 너의 기억까지 지우려 하느냐? 그것은 차후 규명될 일, 그자는 구천이다! 분명히! 분명히!'
서희는 입술을 떨며 옷을 갈아입는다. 뒤꼍에서 유모와 환국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안자야!"
"예!"
"천서방더러 인력거 준비하라고 일러!"
"예."
인력거에 오른 서희는
"절로 가는 게요."
"옛꼬망."
인력거는 절을 향해 떠났다. 그새 중이 들숭날숭하던 운흥사는 또 다시 중 없는 절이 되어 황폐해 있다. 마당에는 풀이 무성하고 절지기가 있는 아래채 쪽에서 장작을 패고 있던 절지기가 당황하며 쫓아나온다.
"어이구 마님, 어쩐 일이십니까."
"오래간만이오."
인력거에서 내린 서희는 습관처럼 말했다.
"예. 그 동안 통 안 오시기에, 예"
허리를 굽실거린다.
"법당 문 좀 열어주시오."
"예, 예"
절지기는 달려가서 열쇠를 꺼내왔다. 쇠통을 풀고 법당 문을 열면서
"찾아오시는 분이 안 계셔서 먼지가 잔뜩 쌓였구만요. 잠시만, 좀 훔치겠습니다."
"아니요. 개의하지 마시오."
서희의 흰 버선발은 주저 없이 먼지가 쌓인 마루를 밟고 올라간다. 주인 없는 집이나 중 없는 절이나 다를 것이 없다. 봄은 무르익어가건만 법당 안은 냉기가 감돈다. 촛불을 켜고 향을 피우고 하는 동안 절 뒤꼍에서는 쌈질하는 아이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육 년 동안 법당 안은 낡은 것 이외 달라진 것이 있다면 후불 탱화 앞에 보전이 안치된 것뿐이다. 치졸한 솜씨로 근래에 조성한 불상인 모양인데 그것도 도금이 벗겨져서 희뜩희뜩했다. 서희가 예배를 올리고 있는 동안 절지기는 방석을 가져왔다. 예배를 올릴 적마다 서희의 남색 법단치마는 먼지를 쓴다.
'서가세존, 저는 어느 길로 가야 하나이까?'
다시 예배
'한 지아비를 섬기고 살 수 없는 저를 굽어 살피옵소서.'
또다시 예배
'억만 억겁 세월에서 한 인생은 티끌이온데 티끌일 수 없는 이 마음을 불쌍히 여기소서.'
서희는 불단 앞에 정좌하여 불경을 송하기 시작한다. 패다 만 장작 옆에 을씨년스럽게 쭈그리고 앉은 절지기는 무료하게 툇마루에 걸터앉은 차부 천서방에게 말을 걸었다.
"그 동안 통 안오시더니,"
천서방은 마땅찮아 그러는지 대답 없이 바라볼 뿐이다.
"절이 이래 가지고는 안 지었느니만 못하니까, 세상에 중놈 씨가 말랐는지 용정 인심이 나빠서 그렇는지,"
"절이라도 지었으이, 신서방이 굶지 않았지비."
천서방 대꾸는 퉁명스럽다.
"절 안 지었으면 내가 본연스님을 따라 여기 왔을 리 없고, 제기랄! 한번 자릴 잡으면 뜨기가 왜 이리 어려운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 중 어디세, 무시레 하고 살지비?"
"내가 알 턱이 없지. 목탁이나 뚜디리며 동냥하고 다리겠지 뭐. 배운 도둑질이 염불인데... 한데 그 송씨네 자부가 미쳤다면?"
"미치기는, 어디세 그런 말으 들었지비?"
"글쎄 뜬소문이겠지만,"
"불고수보리하사되 제보살- 마하실 이응여시- 항복 기실이니 소유일체 중생- 지류에- 약난 생,"
법당에 울려 퍼지는 서희의 독경은 비명처럼 드높다.
"세상에는 하도 헛소문이 많이 나도니까 믿을 것은 못 되지만 내가 듣기엔 아편을 찌른다 하더구먼."
"패가망신이랍매."
"자고로 여자가 잘나면 팔자가 안 좋거나 집안이 망하거나 둘 중하나지. 송씨네 자부도 얼굴이 반반하기 때문에 집안이 망하고 멀쩡한 중 하나 망쳐먹구, 그 여인네야 잘못한 거 하나 없지."
"무시레?"
"그건 내가 안다니까. 잘못이라면 얼굴 잘난 것, 그놈의 잘난 얼굴 땜에 중이 하나 미쳤고 남편은 남편대로 못난 사내가 되고, 아무튼 여자가 잘나면 아무리 해도 남자는 못나기밖에 더 할 일이 없어지는 게지."
절지기는 독경 소리가 울려 퍼지는 법당 쪽을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서희를 두고 하는 말인 성싶다. 천서방은 절지길 빤히 쳐다보다가
"무시기, 그러믄 송씨네 자부는 결백하다 그르느 기야?"
"내 알기론 본연스님 손 한번 못 잡아봤을걸? 혼자서 미쳐 날뛰었지."
'이 도둑놈으 새끼! 그 도산을 피울 적에는 입 다물고서리, 불기경하잲앴는가. 실실 웃고서리?'
서희의 독경 소리가 낮아진다. 끝나가는가 싶었는데 다시 높아진다.
그리고 뱃속에서 밀어내듯 힘찬 음성으로 변해간다.
"말하자면 운수가 나빴던 거야. 여자 하나 버리는데 그치지 않고 집구석마저 흠싹 무너졌으니,망할려면 잠시야, 잠시. 그래 옛날에도 만석살림 자랑 말라 했잖어?"
"그러문 어찌 그때 용정이 좁다아 하고 도산이 났을 적에 그 자부 잘못 없다, 한마디 앙이 했음? 절에 있는 절지기 증거 설 만하잲음?"
"먹고 할 일 없어 그 짓을 해? 뭐가 답답해서,"
"심뽀 나쁘다당이, 그러문 못쓰는 기야. 사람으 말할 때 말으 해야지비. 억울한 사람으 도와주어야지비."
하면서 천서방은 난데없이 달겨들어 대로 한가운데서 소란을 피우던 송애 생각이 났다. 작년 가을의 일이었다.
"대자대비한 부처님도 아니겠고 남의 싸움에,"
"세상이 그러이 인심으 나빠지고 흑백 가리는 일이 없어지구, 신서방은 그런 일 앙이 당한다 장담하겠음?"
"나야 뭐 다 산 세상인데 흥, 어째 오늘은 길어지누만."
법당 쪽을 힐끗 펴다본다. 사방은 어둑어둑해오기 시작한다.
"다 산 세사앙? 그러문 나도 하남디 하겠음. 소문 들으이 신서방 돈으 받고서리 절방 빌리준다 하더랍매."
"벼락 맞을 소리!"
"그것도 남 눈으 피하는 남녀한테 빌려준다 하잲음? 억울하답매?"
"누가 그런 소릴 해!"
"자고 온 사람으 입에서 나온 말 아잉까? 절에 살문서리 질기 그러랑이. 남 망하는 거 바래문은 저도 망한답매. 여기 풀이나 좀 뽑지비. 이렁이 불공이 들겠는가?"
"걱정 말어. 쓸데없는 걱정, 나야 뭐 내일이라도 떠버리면 그만이야."
"흐음, 그렇기 되는 날 그러문 내가 와서 살아야지비."
천서방은 웃는다. 날이 어두워지는데 법당 안의 독경은 그칠 줄 모른다.
12장. 추적
유쾌한 여행이었다. 다음 정거장이 하얼빈이다. 길상은 환이 화술에 말려들어 웃기를 몇 번 했는지. 그 중에서도 조준구 골탕 먹인 얘기가 젤 우스웠다. 아마 환이 이렇게 말을 많이 해보기도 처음이겠으나 길상은 신기해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지금껏 뇌리 속에 있던 인물과 이렇게 상반할 수 있는가 하고. 이따금 환이는 소년같이 웃었고 창밖을 호기심에 가득 차 바라보기도 했었다. 평범한 친구였다. 손위라는 생각도, 신비스런 그 과묵의 얼굴도 아니었다. 수백 개 화살같이 세게 날아오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불륜의 죄악을 안고 어둡게 타는 눈도 아니었다. 누구든 함께 여행을 하다보면은 상호간에 가로놓인 의식의 울타리는 다소간 걷히게 마련이라지만 환의 경우 여행 탓이 아님은 물론이다. 만일 환의 이러한 모습을 혜관이나 강쇠가 보았더라면 천지개벽한 것만큼이나 놀랐을 것이다.
"공노인 그 노인네 여간내기가 아니거든."
"말해 뭣합니까."
"광대도 이만저만, 우릴고 웃기고 조준구를 곯려는대 손발이 척척, 그 사악한 놈도 그네를 타는 꼴이라. 나는 산중에서 도를 닦아 온 영험 있는 도사요 조준구한테 땅문서가 있는 한 공노인은 무한정의 전주이니 그자가 처음엔 여의봉을 양 손에 든 것 같았을 게야. 하하핫..."
환이는 악의 없는 장난꾸러기처럼 웃었다.
"오륙 년 동안 서울을 십여 차례나 오르내리며 그자라고 함께 놀아주었는데, 얘기가 많지. 생각하면 좀 너무했다 싶기도 하구, 두 번째 광산을 살 적에,"
하고 시작하는 일종의 사기극은 다음과 같다. 진짜 사기꾼이 광주하고 짠 일인데 그것을 공노인이 알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광주는 안 팔려 하는 시늉을 하고 사기꾼은 살려고 마구 덤비고 그러면서 슬쩍슬쩍 그런 정보를 조준구 귀에 넣어주는 꾼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사기극은 조준구가 처음 광산에 실패한 뒤 다시 만회해보려고 기를 쓰는 것에서 착상이 된 것이며 공노인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는데 아무튼 조준구가 그 사기극에 걸려주기를 바란 것은 말할 나위가 없었고, 그러던 참 산중도사가 행차하여 그 사기꾼 집에 자꾸 드나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짐짓 사기극은 모르는 척 이 집에 서광이 비쳤다는 둥 큰 재운이 있다는 둥 실없는 소릴 하는 한편 식지가 움직이는 상태의 조준구한테 가서는 그 광산을 사면 크게 손해를 볼 터이니 결코 사서는 안 된다는 충고를 수차 했다는 거다. 조준구는 또 자기편의 꾼들이 탐지해온 바에 의해 도사가 그 집에 드나든 다는 것, 어떠어떠했다는 것을 소상히 알고 있었으므로,
'오냐 네놈이 그놈한테 광산을 안겨주려는 수작이구나.'
일은 그렇게 되어 조준구한테 낙찰이 되고 결과는 도사가 예언한 대로 사기꾼은 어렵잖게 거금을 손에 넣었고 조준구는 또 크게 당하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보십시오. 제 말을 안 믿으시더니, 하고 환이는 실컷 윽박질렀으나 그때부터 조준구는 매달리더라는 것이다. 길상은 배를 잡고 웃으며
"거 너무했군요. 침 한 방울 안 묻히고서 하하핫..."
"그래 그자가 나를 깜박 믿게 되었는데 그 집안의 일이야 석이가 있으니까 명경알 들여다보듯 환한 터이고 물론 조준구는 끝내 석이하고 우리 관계는 몰랐지. 석이는 임역관이 천거했으니까. 미리 알고 드는 데야 도사가 안 될 수 없는 일, 재미나는 것은 기미에 미친 조준군데 이미 그땐 그도 완전히 내리막길이고 보면 무엇이든 거머잡으려 했겠지."
기미란 미두라고도 하는데 오늘날의 증권 매매 비슷한 투기업으로서 세계대전 중 곡가의 오름세 내림세가 조석으로 급변하는 시기, 흥한 사람 망한 사람이 속출했었는데 현물 없는 약속거래인 만큼 모험이 따르는 일종의 도박인 것이다.
"덕분에 나도 제물포를 드나들며 기미라는 것의 묘미를 터득할 기회가 있었지. 허나 조준구는 안 돼. 사악하고 교활하지만 사람 가지고 노는 것만큼도 안 되거든. 재물을 가지고 놀 위인이 못돼. 해서 처음엔 하락할 것을 알면서 사라고 권하는 게야. 그래 몇 번 실팰했지. 값이 오를 것을 알면서 팔라하고 그러기를 몇 번 다음엔 반대야. 틀림없이 하락한다 해서 또 팔라고 권하지. 안패는 게야. 몇 번을 그러고 나면 또 내게 매달릴밖에 나중엔 돌아버리더군. 미친 것처럼 마구 내던지고 마구잡이로 사들이고, 그 날뛰는 꼴이란 꼭 벼룩 같더란 말이야. 하하하..."
환의 웃음소리엔 힘이 빠져간다.
"누굴 물고 늘어지겠나. 날이 궂을려면 삼 년 묵은 옴자리가 가렵다든가? 최초에 잘못 산 광산을 들고 나와 임역관을 물고 늘어진 게지. 한들 별도리 있겠나? 본시 광산이란 그런 건데, 그자가 사악하기론 이를 데가 없지만 그릇이 작아. 그릇이 작은 놈이 곶감 빼먹듯 그렇게나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릇 작은 놈의 욕심이 너무 황당했거든."
장난꾸러기같이 웃곤 하던 환이, 그러나 역시 차창 밖을 내다보는 그의 눈동자는 열기가 오른 듯 떨고 있는 듯 그렇게 보여질 순간이었다. 환이가 들려준 얘기를 길상은 공노인으로부터 듣지 못하였다. 그것은 길상이 회피한 탓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공노인이 들려주었던 조준구의 본처 홍씨나 정식으로 혼인하였다는 신여성이나 향심에 관한 얘기를 환이 쪽에서는 하지 않았다.
"얘기를 하자면 많지. 술 마시는 것 이외 사철을 쏘다녔던 이십 년... 상하, 전후 좌우 사람 구경 많이 했으니까..."
용정에 나타는 그는 이십 년 세월을 결산하기 위해서든가. 어느 덧 기차는 하얼빈 역 구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다 왔나 보군."
"네."
"천천히 내리지."
"그러지요."
그런데 천천히 안 내릴래야 안 내릴 수 없는 사정이 하나 생긴 것이다. 무심히 차창 밖을 내다보던 길상이 눈에 말쑥한 회색 춘추복을 입고 손가방 하나를 들고서 플랫폼을 걸어나가는 사내 모습이 잡힌 것이다. 얼핏 지나서 뒷모습만 남겼으나 김두수였다.
"선생님."
실상은 나직이 속삭였다. 숙부님이 선생님으로 변했다. 환이는 호칭에 대해선 전혀 무관심이었다.
"먼저 내리십시오. 떨어져 가야겠습니다."
"어째서?"
"나중에 말씀드리지요. 역 앞에서도 제가 선생님께 다가가기 전엔, 멀찌감치 따라오시도록, 어서 내리십시오."
"알았네."
하고 환이 먼저 내렸다. 그리고 거의 막판에 가서 길상은 기차에서 내렸다.
'그놈이 하얼빈에는 뭣하러 나타났을까.'
길상은 조심스럽게 사방을 살피며 걷는다.
'혹? 저 양반 뒤에 밟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구먼. 그렇다면 그놈이 먼저 나갈 리 없지. 그러나 개찰구에서 지킬까?'
길상은 개찰구가 가까워지자 그쪽을 열심히 살폈으나 김두수는 없었고 개찰구 밖 저만치서 환이 얼쩡거리고 있는 것이 눈에 뛴다. 개찰구를 나선 뒤에도 길상은 사방에다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으나 김두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얼쩡얼쩡 시골 사람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는 환이만 눈에 뛴다. 재빠르게 길상은 역 광장을 질러가서 마차를 잡았다. 마차에 오르면서 환이에게 손짓을 한다. 몸짓이 분주하지 않았건만 환이는 순식간에 다가와 마차에 오른다. 도중에서 길상은 마차를 한 번 갈아탔다. 그리고서 여관을 찾아든 것이다.
"선생님. 혹 조선서 선생님 뒤를 밟을,"
"경찰 말이냐?"
"네."
"그런 일은 없겠으나 하기는 알 수 없는 일이지."
"김평산을 아시지요? 김위관 집의 김평산 말입니다."
"알지."
"그자의 아들놈이, 그러니까 큰놈이지요. 저하고는 아마 동갑쯤 되겠습니다만 그놈이 이곳에서 오래 전부터 밀정으로 놀았지요."
"이곳에 와 있다는 얘기로군."
"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회령서 순사부장으로 있었습니다. 한데 아까 기차 안에서 그놈이 가는 것을 보지 않았겠습니까? 필시 무슨 목적이 있어서 이곳에 나타났을 겁니다."
"목적이라면?"
"떠돌이 그놈이 젊은 나이에 순사부장까지 올라갔다면 과히 짐작 하실 수 있는 일이지요. 노일전쟁 때부터 이곳에 흘러와서 왜헌병 보조원 노릇을 했다는 예기고 그놈 손끝에 걸린 사람이 수울찮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해치울 수 없었던가?"
"얘기가 많습니다. 회령이라면 간도로 건너오는 길목인데 그곳에다 일본인도 아닌 조선인을 삼십 남짓한 젊은 놈을 순사부장으로 앉혔다면 그만큼 한 일도 많고 능력도 있었다 할 수 있겠는데 하여간 좀 귀신같은 데가 있는 모양입니다.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겼다니까 악운도 긴 편이구요."
길상은 그간 김두수와의 관계, 박재연으로부터 들은 얘기를 대충 설명한다.
"김평산이..."
중얼거렸을 뿐 환이는 이야기를 다 들은 후 별말이 없었다.
"만일의 경우르 생각해서 그랬습니다만 그놈의 지나가는 꼴을 보니까 전혀 이쪽은 모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의 뒤를 밟았다면 앞서 내릴리도 없고, 하지만 그놈이 하얼빈으로 왔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서든 좋잖은 징조지요."
길상의 얼굴은 궁리하는 것 같다. 그런 일은 없겠으나 하긴 알 수 없다는, 환이 무슨 일을 길상은 중요시한다. 조선서 환이 무슨 일을 했는지, 하고 있는지 세세히는 알지 못한다. 공노인이 조선에서 돌아오면은, 일종의 보고를 하게 되는데 서희에게 하는 보고가 있고 또 길상에게 들려주는 말이 따로 있었다. 김환이라는 이름을 들먹인 일은 한 번도 없었지만 혜관을 비롯하여 관수, 석이, 운봉노인, 윤도집 등에 관한 얘기, 그들 둘레에 관한 얘기를 종합해볼 것 같으면 어렵잖게 그들이 심상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혜관이 만주에 왔을 때도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님을 길상은 이미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환일 직접 대한 길상의 판단, 말하자면 거물이라는 것이다. 김환의 호칭이 선생님으로 낙착된 것이 바로 거물로, 권필응과 버금가는 거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선생님."
부르는 말에 환은
"싱겁군."
"네?"
"이렇게 맹숭맹숭 쳐다보고 있으니 하는 말일세."
도통 김두수 얘기엔 신경을 쓰고 있질 않는 것 같다.
"피로하진 않으십니까?"
"피로? 내가 걸어왔었던가?"
환은 껄걸 웃는다.
"산중에서 도를 닦는 도사가 머릴 깎으면 어떡허누."
"깎으셔야 합니다."
"어렵잖어."
"네."
길상은 여관의 사동을 불러서 서툴기는 했으나 중국 말로 마차 하나를 부르라고 부탁한다.
"마차 왔어해!"
사동이 소리쳤다. 마차에 김환과 함께 오른 길상은 송장환이 있는 약종상에서 과히 멀지 않은 명화원이라는 청요리집 앞에서 내린다. 큰 요리집이다. 깊숙한 곳에 방 한 칸을 잡은 뒤 요리와 술을 청해놓고 길상은 쪽지 하나를 써서 사동에게 쥐여주며 약종상 이름과 송장환의 이름을 대고 빨리 갔다오라고 한다. 사동은 연신 고갤 끄덕이고서 나갔다. 얼마 안 있어, 두 사람이 술상을 마주하고 있는데 송장환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김형. 여긴 왜 오셨소. 내 숙소로 가시지 않고,"
하다가 동행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주춤한다.
"앉으시오."
길상은 자리부터 권한다.
"인사하십시오. 송선생. 조선서 오신 김선생님이시오."
"아 네. 저는 송장환이올시다."
길상의 말에 잠시 기다리라는 시늉을 해보이며
"잔 받으십시오."
김환에게 공손스럽게 술잔을 바친다. 환은 잔을 받고 따라주는 술을 마시고 잔을 되돌려준다. 그리고 술을 부어준다. 아무 말 없이. 김환에게 공손스럽게 술잔을 바친다. 환은 잔을 받고 따라주는 술을 마시고 잔을 되돌려준다. 그리고 술을 부어준다. 아무 말 없이.
"실은 그곳으로 갈려다가 역에서 김두수를 만났소."
"김두수를,"
"네. 뭐 우릴 따라온 것 같지는 않습디다마는 조심은 해야겠기,
권선생님께서는 모레께나 오시지요?"
"네, 모레 오시기로 돼 있어요."
"그러면 나는 선생님 뫼시고 훈춘에 가서 기다리겠소. 권선생님을 그곳에서 만나뵙지요."
"그래도 무방하지요."
"그곳에서 연추까지 동행하게 되면 그러구요."
"김두수 땜에 그러시오?"
"꼭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하여간에,"
하다말고
"선생님."
"음."
"여기 송선생께선 용정에서 오랫동안 교육 사업을 하시다가,"
"혜관한테서 들었어."
"혜관스님 말씀입니까?"
송장환의 표정이 싹 달라진다.
"혜관이 다녀와서 송장환께 얘길 하더군요."
"그럼 혜관스님께선 안녕히 계신지요."
"별일 없이 지내고 있소."
명화원에서 주연은 간단하게 끝냈다. 송장환은 약종상에 돌아가고 김환과 길상은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 거리로 나섰다. 이튿날 길상은 그새 양복장이로 달라져버린 김환과 함께 훈춘을 향해 떠났다. 길상과 송장환이 수냥의 정체를 알았던들, 윤이병과의 삼각관계가 빚은 사건의 꼬임새를 알았던들... 아무튼 사흘 후 송장환은 약종상에서 권필응과 장인걸이 하얼빈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수냥 집에 도착한 권필응과 장인걸은 광동까지 다녀온 긴 여행길에 지쳐 있었다.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정결하게 준비된 침실에 가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금녀는 해를 감늠해보면서 장바구니를 팔에 끼고 장을 향해 집을 떠났다. 금녀는 무척 행복했다. 권필응이 빙그레 웃고 바라보는데
"금녀, 잘 있었소?"
하면 장인걸은 악수를 했다. 그 따뜻한 손의 감촉이 아직도 손바닥에 역력히 남아 있다. 금녀, 잘 있었소? 귓가에 맴도는 음성
'네. 선생님 무사히 돌아오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만났을 때 못한 말을 금녀는 장길을 가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혼자 웃는다.
'좀 얼굴이 안되셨어요. 피곤해 보였어요. 푹 쉬세요.'
금녀는 가벼운 보조로 걷는다. 햇빛은 밝고 인생이 아름답다. 아비가 딸을 술집에 팔아먹은 과거의 그 비정의 추억이, 애인을 짐승 아가리에 넣으려던 잔악한 사내의 추억도 이젠 말끔히 가셔지고 없다. 금녀는 현재가 더없이 만족스럽고 고마운 것이다. 헤어져 있고 범상한 남녀의 관계도 맺지 않았던 장인걸이지만 어디서든 마음으로 지켜주는 눈이 있다는 것은 삶에의 의지가 된다. 장은 풍성했다. 시장이란 언제나 풍성한 곳이지만 겨울을 겪고 무르익어가는 봄날의 장거리란 태양빛과 더불어 신선한 생명에의 향기다 언제나와 다름없는 소음이 장거리에 가득 차 있다. 소리와 소리, 또 소리, 합쳐서 꿀벌들처럼 닝닝거리는 소리, 언뜻언뜻 귓가에 스쳐가는, 얼마요, 싸게 하시오, 금녀는 그 소리를 헤치고 들어간다.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 눈에 익은 장사꾼 청인 할아버지, 모두모두 착한 얼굴이다. 소리는 꿀벌의 나랫짓처럼 생활의 활기찬 약동의 소리들이다. 금녀는 야채를 골라서 장바구니 속에 넣고 셈을 하고 다시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간다. 붐빈다. 사람들의 어깨와 어깨가 부딪는다. 과일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춘 금녀는 귤 몇 알을 고르는데 뒤에서 떼미는 바람에 쓰러지려다 돌아본다. 그때 금녀 눈에 들어온 것은 저만치 상당한 거리에서 필사적으로 사람을 헤치며 오는 사내, 앞사람 어깨에 가려져 코에서부터 윗부분 얼굴만 보이는 사내, 순간 금녀는 몸을 날리려고 허리에 힘을 주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원상태로 돌아간다. 그는 천천히 고깃관으로 다가간다.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듯 천연스런 태도다. 돼지고기, 쇠고기를 사서 바구니에 넣고 시장을 빠져나간다. 금녀를 뒤쫓아서 잡답을 헤치고 나온 김두수, 숨을 크게 내쉰다. 손수건을 꺼내어 땀을 딱는다. 얼굴 아랫 부분이 달라져 있었다. 만일 얼굴 아랫부분이 사람 어깨에 가려지지 않았더라면 금녀, 일별에서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기차에서 내렸을 때와는 달리, 시장을 배회할 작정으로 그랬었는지 김두수는 허름한 노동자 차림새다. 김두수는 금녀가 돌아볼지 모른다는 것에 대비하여 자주 손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닦곤 한다. 그리고 길가에 늘어선 점포 쪽으로 몸을 바싹 붙여, 점포가 엄폐물이기나 하듯 얼굴을 점포 쪽으로 돌려가며 금녀 뒤를 따른다. 금녀가 잡화상으로 들어간다. 김두수는 당황하여 점포 쪽으로 몸을 바싹 붙인다. 한참 후 금녀는 잡화상에서 나왔다. 천천히 아까와 똑같은 보조로 걸어간다.
'으흐흐흣... 이렇게 빨리, 이건 그저 호박이 굴러 들어온 게야. 으흐흐...'
당초부터 양서방이 이 장거리에서 금녀를 보았다는 말을 들었기에 김두수는 장거리에 늘어붙을 각오를 하고 왔던 것이다. 하얼빈에 도착하자 그는 시장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의 여관을 잡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곧장 나와서, 그러니까 오늘까지 나흘을 배회하는 터였다. 작년 가을부터 금년 오월까지 김두수는 면밀하게 준빌 했었다. 봉천에 가서 뻐드렁니도 교정하여 얼마간 밀어 넣었고, 그 동안 그는 연추에 금녀가 없다는 것도 몇 번이나 확인시켰다.
'드디어, 드디어 저 계집은 내 앞에서 지금 걷고 있다. 지금이라도 나는 저년을 잡아끌고 갈 수 있다. 한소동 벌어지겠지만. 그러나 참자. 너가 가면 어딜 가겠느냐. 조롱 속의 한 마리 새, 쭉지가 뿌러지게 퍼덕거려보아야 그곳은 조롱 속이란 말이야. 하하하... 으하하핫핫...'
김두수는 마음속으로 통쾌하게 웃는다. 전신이 으쓱으쓱 밀물 같은 기쁨이 밀려온다. 아까는 뒤쫓느라 혈안이 되어 미처 느낄 겨를도 없었던 기쁨이.
'저 계집 하나가 내 먹인 아니야. 뿌릴 뽑을 테다. 뿌릴. 박재연! 점박이놈! 점박이놈이 저년의 정부가 됐다구! 아무튼 좋다! 저년을 낚는 낚싯줄에 더 큰 고기가 함께 매달려올지 뉘 아나?'
그러나 금녀는 집이 있는 곳과는 반대 방향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것을 김두수는 알 리가 없다.
'예뻐졌구먼. 아주 쏵 빠졌어. 알른거리는 저 흰 다리, 발목! 미끈하구나. 영락없는 되년이다. 내가 이래도 계집 복은 있거든. 시초부터 계집이란 갖고 놀다가 버릴 적에는 돈이 되더라 그 말이야. 저 년도 커다란 고기를 주렁주렁 내게 끌고 올 게야. 아암 그래야지. 그렇지. 네년만은 죽이지도 않을 게고 버리지도 않을 게다. 얌전히, 얌전하게 회령, 응 그놈, 내 자식놈 어미가 되어주는 게야. 그 자리는 비어 있다. 아암 비어 있구말고. 개벽천지가 안 되는 이상 너는 그 자리에 앉을 것이다. 목에 새끼를 걸어서라도 그 자리에 끌고 갈 것이야!'
금녀는 길모퉁이를 돈다. 김두수도 길모퉁이를 돌았다. 길은 차츰 호젓한 곳으로 뻗어간다. 이리 돌고 저리 돌고 점점 더 후미진길, 김두수는 추호의 의심도 없다. 주택가로 금녀가 가는 것은 당연했으니까. 오로지 금녀가 돌아보지만 말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이판사판이야. 돌아본다면 저년 하나 낚아버리면 되는 거구 다행히 끝내 모르고 간다면 멀리서 저년이 들어가는 집을 확인했다가 그러고서 줄줄이 엮어낸다. 내일 새벽에라도 헌병 두 명만 있으면, 만일 저년이 돌아본다면, 일이 좀 까다로워지겠지, 제발이다. 돌아보지 말아다오.'
햇빛이 가려진 골목이었다. 강아지새끼 한 마리 없다. 한 켠엔 주택의 뒷담이면 한 켠은 굳게 문이 닫혀진 집들이다.
'이제 집이 가까워오는 모양이구나.'
그때였다. 슬그머니 금녀가 돌아본다. 김두수와 금녀의 눈이 마주친다. 금녀는 짐짓 놀란 척 엉거주춤한다. 동시 김두수는 뛴다. 뛰어서 금녀의 손목을 와락 잡는다. 그리고 아랫배에서 치미는 웃음을 웃는다. 허연 혓바닥이 들나고 양볼이 흔들린다.
"오늘 운수는 절반이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소리 지를 테예요!"
"질러보아. 하하핫... 마, 절반의 운이라도 운은 운이야. 하하핫,"
"이것 놓으세요! 나 달아나지 않아요!"
금녀는 잡혔던 손목을 확 뿌리친다.
"하기야 걸음마 배우는 아이도 아니겠고 혹 축지법을 쓴다면 모를까. 소원대로, 하하하..."
금녀 어깨에 바싹 몸을 붙인다. 금녀가 피하면은 또다시 몸을 붙여오고 그러나 손목을 잡으려 하지는 않았다. 금녀는 시장바구니를 김두수 쪽 팔로 옮겨서 건다. 김두수의 몸이 닿는 것이 싫어서 그러는 것 같았지만.
"어떻게 오셨죠?"
"어떻게라니? 금녀 만나러 왔지?"
"고맙군요. 나 혼자 내버리고 달아날 적은 언제였나요?"
"이거 듣던 중 처음 듣는 소리군. 조심해야겠는 걸?"
"흥! 그게 거짓말인가요?"
"목숨이 오락가락할 판인데 어쩌누. 금녀야 기회 보아 뺏아오면 되는 거구. 하지만 금녀는 천우신조라 생각했을 텐데? 안 그랬던가?"
"물론이지요. 하나님이 도우신 거예요."
"새삼스럽게 아웅다웅할 것 없다. 그래 금녀는 언제부터 중국 여자가 됐지?"
"자식 없는 늙은이들 양녀로 들어간 거예요. 난 조선 여자가 아니란 말이예요. 날 잡아가진 못해요! 아시겠어요?"
"제 서방이 찾아가겠다는데도?"
길 모퉁이였다.
"누구 마음대로,"
하는 것과 동시 금녀의 손은 시장바구니 속으로 들어갔고 한구석에 찔러 넣었던 권총, 그것을 김두수 허벅지에다 대고, 총성과 고함소리, 금녀는 바람같이 길모퉁이를 돌아간다. 길모퉁이를 또 하나 더 돌고 벽돌 이층집 문을 밀며 들어선다. 금녀는 안에서 문을 잠근다.
"구마 아주머니, 아주머니!"
우창한 중국말이다. 기름에 절인 듯 볼품없는 중국 여자가 얼굴을 내민다. 오십 가까운 연배다.
"오오, 들어와요."
금녀의 입술은 먹빛이었다.
"아주머니,"
여자 가슴에 쓰러진다.
"어찌 이러는 거야?"
"나 사람을 죽였어요."
"뭣이? 사람을 죽여해?"
"밀정놈을 죽였어요."
"밀, 정, 놈, 을?"
"네."
"어, 어디서?"
"저기 저어기 뒷골목에서,"
하며 금녀는 와들와들 떤다.
"아앙 그래 총소린가, 그러니까 그게?"
중국 여자는 놀라지 않았다. 금녀를 끌어다가 의자에 앉힌다. 그리고 주방에서 뜨거운 차를 부어서 내민다.
"이거 마셔요. 덜덜 떨기는, 떨지 말어."
"나 여기 있다가 어두워진 뒤 가겠어요."
"그, 그렇게 해."
뜨거운 차를 마신 금녀 이마에선 땀이 흐른다.
"에이고 또 씨끄럽게 됐구먼. 하지마는 할 수 없는 일, 좋은 세상 돼야 할 건데,"
이 집은 순전한 중국인의 집이다. 권필응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말하자면 비밀 연락을 취하는 장소이며 대개 금녀가 연락의 임무를 맡고 있는 터였다.
"누가 따라오지 아니했어?"
"아무도 없었어요."
"참말로 죽었다면 이 근방을 뒤질 거 아닌지 몰라?"
"글쎄요."
금녀는 망실상태였다.
"나 한분 나가보고 올까?"
여자는 금녀가 대답을 하기 전에 방에서 나갔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 내가 사람을 죽였어.'
다시 떨기 시작한다. 금녀가 장거리를 빠져나와서 길켠에 있는 잡화상으로 들어간 것은 호신용으로 장바구니 밑바닥에 넣고 다니던 권총을 꺼내기 위해서였다. 그는 핀 하나를 사고 지갑을 찾는 척하여 밑바닥에 있는 권총을 끌러 올려 고기 뭉치 사이에 찔러 넣었던 것이다. 마지막까지 침착했었던 금녀는 그러나 권총을 그을 때는 정신이 없었다. 과연 김두수가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그것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내가 어떻게 사람을 죽였을까? 내가?"
호신용으로 받았던 소형 권총으로 사격 연습까지 했었는데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금녀는 한번도 실감해본 적이 없다. 다만 습관처럼 장에 갈 때는 장바구니 속에, 외출할 때는 핸드백 속에, 그것은 권총을 건네주었던 장인걸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모른다. 여자가 돌아왔다. 기름에 절인 듯한 여자 얼굴에는 어리둥절해하는 빛이 있었다.
"이보아 수냥, 밀정놈 죽지 아니했다."
"네?"
"강도, 강도가 호주머니 돈 뺏아갔다 말하던걸?"
금녀는 바보처럼 기름때가 묻어 번들거리는 여자 옷깃을 쳐다본다.
"병원으로 갔어, 병원."
"사람들이 많이 모였어요?"
"많이 모여했어."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순경이, 저어기, 저쪽으로 뛰어갔어."
집과는 반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그래서요."
"사람들 다 가버리고 없어. 수냥이 정말 쏘았어?"
금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여자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 그럼 아주머니 난 가보겠어요."
"그렇게 해서 가면 안 돼. 옷 갈아입어. 다른 사람이 혹 보았을 수도 있으니까."
금녀는 여자가 내주는 낡고 헐렁한 회색 다브잔스로 갈아입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한다. 골목을 나선 금녀는 몇 번이고 고개를 흔들어댄다. 김두수를 만났다는 것부터가 사실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렇게 햇빛은 밝고 인생은 아름다워 보였는데, 시장은 풍성하고 사람들의 소리들은 꿀벌처럼 닝닝거리며 삶을 찬미하는 것만 같았는데 끔찍한 사건이 바로 코앞에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집에 도착했을 때 사방은 깜깜했다. 간신히 초인종 줄을 잡아당긴다. 땅바닥을 굴리는 발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그리고 또 요란스럽게 대문이 열렸다.
"어머나! 아씨!"
노래를 부르듯 높은 목청으로 계집애가 외쳤다.
"손님! 손님! 아씨 돌아왔어요!"
계집애는 안을 향해 높은 목청을 굴린다.
"조용히 해."
금녀는 계집아이 팔에 기대듯 집에 들어간다. 대문을 잠그고 뒤쫓아온 계집아이
"아씨! 왜 이리 됐어요? 나는 거러진가 싶었어요."
송장환과 장인걸이 복도 쪽에 나와 서 있었다.
"어찌된 거요! 수냥!"
옷차림새며 얼굴빛을 보고 심상찮은 일이 생겼음을 직감한 송장환이 먼저 물었다. 장인걸의 낯빛은 파리했다. 귀가가 늦은 금녀에게 심상찮은 일이 벌어졌으리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장인걸을 보는 순간 금녀는 울음을 터뜨린다.
"쫓긴 거예요."
"쪼, 쫓기다니, 수냥 뉘한테 쪼, 쫓겼단 말입니까!"
송장환의 입술이 실룩거린다. 장인걸은
"송군. 자넨 선생님 곁에 가 있게,"
"네."
"가 있게. 자아."
등을 떼민다.
"네 . 그, 그렇지만,"
"허허어, 가 있으래두, 내가 알아 선처할 테니까."
송장환은 못내 마음이 놓이질 않는지 민적거리다가 돌아보곤 하며 객실 쪽으로 간다.
"금녀."
"선생님."
더욱 흐느껴 운다. 비 맞은 참새 꼴이다. 훌렁한 옷 탓일까. 금녀의 몸이 아주 작아진 것 같다.
"돌아온 것만도 다행이야. 납치당한 줄 알고, 방에 들어가서 자세한 얘길 해."
금녀는 거처하는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뒤따라 들어온 장인걸은 문을 꼭 닫고 침상 옆 의자에 앉는다. 눈물을 닦으며 주춤거리다가 금녀는 침상에 걸터앉는다.
"김두수지."
"네."
"어떻게 빠져나왔지?"
"주, 죽이려고 총을 쐈는데,"
"어디서?"
"길에서요."
"뭐?"
흐느끼면서 금녀는 대강의 경위를 설명한다.
"너무 덤볐구먼."
"처음엔 침착했는데, 총을 쐈을 땐 뭐가 뭔지, 정신이 없었어요."
"괜찮어. 그것도 경험이야. 내가 사태를 판단하건데 그놈이 강도라 한 것은 금녀를 표면에 떠올리지 않으려는 계산에서 나온 말이야. 그러니 우선은 이 사건의 뒤끝이 시끄럽지는 않을 것 같다."
"저도 오면서 그걸 생각하긴 했어요. 더 섬?하고,"
"금녀를 납치하지 않고 뒤를 밟았다는 것은, 그렇지. 박재연 씨와 내가 목표였을 게야."
"모두 제 탓이예요."
"누구 탓이 어딨어?"
장인걸은 힐난하듯 금녀를 쳐다본다.
"하지만 이곳을 찾아낸다면 어떡허지요?"
"찾아내기 전에 쳐야지."
"..."
"병원에 갔다구 했었나?"
"네."
장인걸은 자신의 무릎을 내러보다가 금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금녀의 무릎이 떨고 있다. 안 그러려고 무척 애를 쓰는 것 같은데 찬비 맞고 온 아이처럼 떨고 있다. 소복히 솟은 유방도 흔들리고 있다. 옷은 낡고 때묻었으나 신선한 육체가 옷 밑에서 마구 떨고 있는 것이다. 장인걸은 현기증 같은 것을 느꼈다. 연추에서 장인걸은 금녈 위해 호신용 권총을 하나 구해주었고 사격술도 가르쳐주었다. 그것은 일하는 사람의 필수조건의 하나로 가르쳐준 것은 아니었다. 금녀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김두수로부터 지켜주자는 염려가 앞섰던 것이 사실이다. 금녀가 하얼빈에 온 것은 권필응의 제의를 금녀가 열광적으로 받아들인 결과였지 장인걸의 희망은 아니었다. 그러나
"선생님, 저도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십시오."
금녀는 장인걸에게 애원했던 것이다. 사실 금녀는 모든 면에서 준비가 완료된 여자라 할 수 있었다. 심운회 씨 댁에서 닦아진 처신은 원만하고 세련되었으며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그 자신 꾸준히 공부도 했었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살 수 있는 용모 그리고 분별할 수 있는 나이 이십칠 세. 장인걸은 연민과 애정으로 하얼빈으로 떠나게 될 그에게 사격술을 가르쳤다. 그것이 오늘 그를 구하게 된 것은 다행이나 앞으로 야기될 문제는 많다. 김두수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매듭을 지어야지.'
장인걸은 결론을 내렸다.
"금녀."
"네."
"금녀는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요."
"..."
"금녀가 아니래도 이곳을 탐지할려면 할 수 있는 거요. 김두수는 박재연씨와 내 얼굴을 알고 있으니까, 우연찮게 만나 뒤를 밟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지. 내 탓이다 하는 생각은 아예 말아요. 우린 무인지경을 가면서 일하는 게 아니거든."
"고마워요, 선생님."
"옷 갈아입고 쉬어."
방을 나서려다 말고 장인걸은 되돌아본다.
"용기를 내는 거요. 우리는 어차피 한 운명이오. 알겠어?"
금녀를 포옹해주고 등을 토닥거려준 뒤 장인걸은 방에서 나갔다. 객실로 돌아갔을 때 권필응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송장환은 꽁지 빠진 장닭 같은 꼴을 하고 창가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서, 선생님. 그러지 않아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만 쫓기다니, 밀정놈한테 쫓긴 거지요?"
"아니면 누가 그랬겠나?'
"실은 용정의 김형이,"
"김군은 훈춘으로 갔다지 않았나."
"네. 갔지요. 훈춘으로 간 이유가 이곳에서 선생님을 만나는 일이 좋지 않다 그런 판단 때문입니다."
"좀 요령 있게 말해. 나 지금 바쁘니까."
장인걸은 좀체 그런 일이 없는데 짜증을 부린다.
"그러니까 하얼빈역에서 김두수란 놈을 봤다는 겁니다."
"뭐? 왜 진작 그 말을 안했어!"
장인걸은 권필응도 안중에 없는 듯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네, 저어,"
"이미 일은 저질러졌는데 말하면 뭘 해!"
송장환한테 날벼락이다. 금녀 앞에서는 그렇게 말했으나 장인걸은 권총발사로 하여 그 꼬리가 쥐꼬리든 호랑이 꼬리든 일단 김두수에게 꼬리는 잡힌 거라 생각한 것이다.
"저어 변명 같습니다만, 김형이 훈춘 간다는 얘긴 수냥한테 말했습니다만 김두수 얘긴 수냥한테는, 저녁에 만나 뵙고 제가 말씀드리려 했었지요. 김두수 놈이 김형의 동행을 쫓는 게 아닌가고 의심 했기 땜에, 수냥의 경운 전혀,"
당황하며 횡설수설이다.
"할 수 없지. 사후책을 강구해야지."
장인걸은 노기를 푼다. 딴은 그렇기도 했다. 송장환이나 김길상이 금녀와 김두수의 관계를 모르는 이상.
"하지만 그놈은 박재연 씨 그리고 나를 알어."
송장환은 낭패한 듯 어쩔 줄 모른다. 권필응은 한마디의 말도 없이 담배만 태우고 있었다.
"그, 그렇담 그자가 이곳을 탐지했다 그 말씀입니까?"
"그렇게 해선 안 되겠다 생각하고 수냥은 다른 곳으로 유인하여 총을 쐈다는 게야."
"네."
권필응이 희미하게 웃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놈은 죽지 않았어. 부상을 입었을 뿐이야."
"선생님."
"음."
권필응이 재떨이에 담뱃재를 떨군다.
"나가보겠습니다.."
"어딜,"
"그놈이 병원에 입원을 했다니까 후환을 없이해야겠지요."
"음..."
장인걸은 모자를 쓰고 혁댈 조르며 나간다. 나간 뒤 권필응은 중얼거렸다.
"그놈이 그 병원에 있을까."
밤늦게 돌아온 장인걸은
"고 생쥐 같은 놈의 새끼, 병원을 옮겼더군. 어느 병원으로 옮겼는지 오리무중이오. 악운이 센 놈!"
13장. 김두수
악운이 센 김두수, 그가 입은 총상은 관통인데 총구가 빗나간 때문에 비스듬히 총알이 빠져나갔고 또 아슬아슬하게 뼈는 피한 상태여서 지극히 경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정도의 총상이라면 뭐 병원을 가릴 것도 없으련만 무리를 해서까지 병원을 옮긴 이유는 뭣인가. 그는 다시 습격해올 것을 예상한 것이다. 그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그러니까 박재연과 점박이 사내가 금녀 배후에 있을 것 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빠져 달아난 금녀로부터 사실이 밝혀질 것은 뻔한 일이었으니까. 당초부터 김두수는 금녀가 중국 여자로 변모되었다는 것에 심상찮음을 냄새 맡은 것이다. 용의주도한 김두수는 큰 병원으로 옮기면서도 다른 환자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삼등 병실에 입원을 했다.
'빌어먹을! 설마하니 그년이 권총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생각하면 머리끝까지 분통이 치밀지만 용케 참아낸다. 그보다 김두수는 상황 판단에 골몰하고 있었다는 게 옳을 성싶다. 총성을 듣고 동리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고 순경이 달려왔을 때 김두수는 돌발적으로
"강도야!"
하고 소리를 지른 것이다.
"어디, 어느 쪽으로 갔어!"
다급하게 묻는 순경에게 김두수는 금녀가 도망친 반대 방향을 손가락질하여 강도야! 계속 소리질러댔던 것이다. 첫째는 자신의 본색이 드러나는 것을 경계한 때문이요, 둘째는 금녀를 중국 관헌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다. 총상치고는 경상이었지만 다리에선 연신 피가 흐르고 충격적인 순간을 겪은 김두수가, 그것도 타고난 팔자였을까, 좋게 말하여 첩보원의 두뇌는 혼란 속에서도 냉철하게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금녀의 배후가 의외로 대단할 것이란 짐작이다. 그들을 제 손으로 낚으려면 조용, 조용해야 하는 것이다.
'한 번 실수는 병가상사라. 그년이 권총까지 소지하고 있을 줄은 누가 알았누. 흥, 크게 놀아, 어디 두고 보자. 언제까지 네가 크게 노는가. 흐흐흐...'
분노를 깨물며 웃는다.
"젊은이, 댁은 다리를 다쳤소?"
늑막염으로 입원한 늙은 중국인이 물었다. 노인은 옆구리에 끼워 놓은 고무줄대에서 피고름이 쏟아져 나오는데 아픈 것보다 심심한 것을 더 못 견디어하는 성싶었다.
"강도를 만났어요. 강도를,"
"저, 저런, 다리를 맞았으니 망정이지 배나 가슴을 맞았으면 가는 거 아니야? 불행 중 다행이구먼. 병신이 되어도 목숨은 붙었으니,"
"병신은 안 된답니다. 뼈는 가만히 놔두고 근육을 뚫고 나갔으니 아물기만 하면 된다는 거요."
"그건 더한 불행 중 다행이구먼. 하지만 총 안 맞았느니보담야 못하지."
"말해 뭣 합니까."
"그런데 젊은이 어째 말씨가 고르질 않소?"
"나는 조선 사람이오."
"아아 그래서 우리말이 어쩐지... 조선 사람이라, 그렇지. 일본 사람보담야, 아암 일본 사람보담이야 낫지."
"어째 그렇소?"
"조선은 우리나라 동생 나라 아니야? 옛적부터 우리 힘이 약해서 동생 나라를 못 건져주고 왜놈이 밥이 된 게야. 우리 대국이 이 빠진 호랑이 꼴이 됐거든."
가래 끓는 목소리로 측은하다는 듯 표정을 지으며 노인은 말했다. 김두수는 변성명한 것은 물론 중국인이라 하고 입원한 일을 생각했으나.
'다 뒈지게 생겨가지고 입은 살아서, 뭐 동생 나라? 이 빠진 호랑이? 크게 나오는군. 크게 나오는 것들이 왜 이리 많지?'
노인한테는 가족들의 출입이 잦았다. 먹고 살 만한 상인 집안인 것 같았다. 며느리, 딸, 아들, 사위가 번갈아가며 찾아왔고 때론 갓난아기를 딸이나 며느리가 안고 오는 일이 있었으며 손자라는 중학생. 소년도 오곤 했었다. 가족들은 노인이 병세가 비관적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있는 듯 때때로 우울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러나 노인은 어린 것을 보며 해골같이 마른 얼굴에 미소를 띠고 누운 채 머리를 흔들어 보이기도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어 아이를 얼러보기도 했다. 노인은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도통 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그 노인 옆에 있는 무슨 병인지 개복 수술을 한 소년에게도 드문드문 문병 오는 사람이 있었고 모친인 부골스럽게 생긴 중년 여자가 소년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목마르냐 하며 물을 먹여주고 머리 아프냐 하며 머리 위에 손을 얹어보곤 하는 여자, 술이 많은 머리에 금으로 된 고리잠을 찌르고 있었다. 찾아오는 사람이라곤 개미새끼 한 마리 없는 김두수를 가엾게 생각했는지 노인은 이따금 먹을 것을 나누어주었다. 며칠이 지났다. 김두수의 마음도 묘하게 허전해지기 시작한다. 다리의 통증이 차츰 덜해가니까 대신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누가 뭐라 하지도 않는데 노인한테 가족이라도 올라치면 혼자 마음속으로 허세를 부려보곤 한다.
'내가 누군 줄 아냐? 알면 뒤로 나자빠질 게야. 이 젊은 나이네 순사부장이란 왜놈들한테도 어려운 감투라구. 흥 내 사정 때문에 이 따위 더러운 삼등 병실에 숨져가는 늙은것하고 배때기 갈라제친 애새끼하고 함께 견디어 배긴다만 희령에만 있었다 봐라. 흥, 일등 병실 손님이라구. 너희들이 날 동정해서 먹을 걸 주어? 두 손으로 받들고 진상을 해도 먹을 둥 말 둥,'
식성이 좋은 김두수는 주는 것은 마다 않고 잘 먹었고, 아무리 마음속으로 허세를 부려본들 이불 밑에 활개치기. 이곳은 조선 땅이 아니오 아직은 주권을 거머쥐고 있는 중국, 일본의 감투가 무서워 벌벌 떨 중국인은 어디 있고? 치기에 가득 찬 푸념도 외로워서, 김두수도 몸 아프고 무료하니 옛날에 내버린 그 외로움이 찾아온 것이겠지.
'만일 희령에서 내가 다리를 다쳐 입원을 했다면 문병객이 줄줄이 이어졌을 게야. 유지란 놈들 내 눈치 안 보게 생겼어?'
그것도 서글픈 잠꼬대. 낙착되는 것은 금녀에 대한 증오다. 총을 쏘아서만도 아니다.
'그년만 고분고분 내 말 들었으면 나도 마음잡아 순사부장으로 눌러앉을 수도 있었다구. 안전한 자리에서 차근차근 출셀 할 수 있었다 그 말이야. 그런다고 내 계집년 하나 땜에 신세 망칠 못난 사내는 아니다만. 두고 보아. 내 기필코 알 먹고 꿩 먹을 테니 두고보란 말이야. 아무튼 이번 일로 큰 고기 꼬리는 만진 셈이고 큰 고기가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시일이 걸리더라도 낚게 되는 게야.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상태가 헛수고 아니겠냐?'
서슴없이 총을 들이댄 금녀에 대한 분노도 컸거니와 한편 앞으로 벌어질 사태에 대하여 김두수는 기름이 지글지글 끓는 것 같은 자신의 집념에 쾌감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입원한 지 일주일 남짓 늑막염을 앓던 노인은 죽었다. 노인의 시체가 실려나간 날 밤 김두수는 꿈을 꾸었다. 도포를 입고 살이 피둥피둥 찐 아비가
'이놈 거복아!'
'네. 아버지.'
'자빠져서 아비 말 들을 텐가?'
'아버지, 다리에 총을 맞아 일어나 앉을 수가 없습니다.'
'이 천하의 못난 놈 같으니라구. 오죽이나 못났으면 계집이 쏘는 총을 맞아? 으응? 이 애비는 세상을 못 다 살았어도 포부만은 컸느니라. 대역도가 따로 있는 게 아니야. 사세가 불리하면은 대역도가 되는 것이요, 시운을 잘 만나면 용상에도 앉는 법, 그래 고까짓 계집년한테 총을 맞아? 이이잉? 대역도가 되기는커녕 두만강의 사공질도 못하겠다.'
'하지만 아버지 용상이 없어졌는데 대역을 한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놈아 용상은 만들면은 있는 것, 땅덩어리가 물속에 가라앉았더란 말이냐? 이 만주 벌판은 넓고 쓸 만하구나. 그깟 최참판 만 석이 문제겠느냐?'
'네. 그러기는 하옵니다.'
'암, 암 최참판이 만석이 문제 아니구말구, 아암,'
아비는 벌렁벌렁 춤을 추기 시작한다. 하얀 도폿자락이 펄러덕거리는데 그 도폿자락 밑에 여자 하나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금녀!'
외쳤으나 히죽이 웃는 얼굴이 희령에 있는 아들아이를 낳은 하녀 오다께의 걸레 같은 얼굴이 아닌가.
'고노아마메! 나니시니 기다까(이 계집! 뭣하러 왔어)!'
오다께는 훌쩍훌쩍 울었고 아비 평산은 넓은 도폿자락을 너풀거리며 연신 춤을 춘다.
'암, 암 최참판 만석이 문제겠느냐? 문제 아니구말구.'
'아이고오! 어머니! 어머니가 아니십니까! 어머니!'
오다께의 모습은 생모 함안댁이었다. 눈을 희뜨고 김두수를 노려본다.
'어머니! 어머니!'
'이놈! 사람 안 될 거라 했더니! 부모 말이 문서이니라!'
김두수는 외치다가 잠을 깨었다. 전신이 땀에 흠씬 젖어 있었다. 마른 입술을 그 소 혓바닥 같은 혀를 내둘러 축이며
'고약한 꿈을 꾸었군. 재수 없게시리 죽은 사람들은 왜 꿈에 보이나. 제에기!'
김두수는 저도 모르게 사람이 죽어나간 옆자리의 침대를 바라본다. 소름이 오싹 끼친다. 창밖은 깜깜했고 전등이 희뿌연 빛을 방안에 던져주고 있었다. 그리고 소년의 모친이 염주를 매만지며 입속으로 중얼중얼 염불을 외고 있었다.
'마음이 뒤숭숭하니 그런 꿈을 꾸었나 보다.'
천장을 멀뚱멀뚱 쳐다보는데 이것은 또 어쩐 일인가. 김두수는 당황한다. 눈물이 볼을 타고 자꾸만 흘러내리는 게 아닌가.
'미쳤어! 이놈아! 아, 너 미쳤냐!'
하는데 소울음 같은 소리가 목구멍을 박차고 나온다.
"으으으... 으흣흣..."
소년의 모친이 놀라서 쫓아온다. 반듯이 누워 있던 소년도 얼굴을 치켜든다.
"아니, 아니, 왜 이러는 거요? 으으, 울지 말라니까, 이봐요. 남자분! 이 이걸 어쩌나?"
소년의 모친은 당황하여 어깨를 흔들어주려고 손이 왔다간 도로 가슴 위에 깍지끼고서
"이봐요, 어쩌나? 남자분!"
"으흐흣흣... 으응응, 아이구우 으흣흣..."
"가엾어라..."
김두수의 울음은 좀체 멎질 않았다. 하는 수 없었던지 여자는 아들 옆으로 돌아가서 우두커니 김두수 쪽을 바라본다.
"쯔쯔... 아무도 가족이 없는 모양이지? 죽 한 그릇 가지고 오는 사람이 없으니 딱하고나. 아빠오야."
"네, 어머니."
"세상엔 제 가족이 없는 사람이 젤 불쌍하단다."
"네. 그런 것 같아요. 아저씨 위로해드리세요."
그렇게 하여 또 일주일이 지나고 김두수는 퇴원을 했다. 충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고 보행이 자유롭지도 못하였다. 곧장 희령에 돌아갈 수 없었으므로 처음 묵었던 여관에서 얼마간 정양하기로 하고. 병원에서 한바탕 신나게 울어젖힌 김두수는 쉽사리 외롭다는 감정과 작별할 수 있었다. 여관에서 일하는 하녀 아냥에게 부탁하여 입에 맞는 음식을 별도로 청해 먹는 것과, 앙상하게 마르고 조그마했으며 이마가 좁고 턱 끝이 날카로운 아냥을, 날 유혹하세요, 하듯 뼈뿐인 듯싶은 엉덩이를 흔들고 다니는 아냥을 희롱하는 것이 정양을 하고 있는 김두수의 요즘 즐거움이었다. 그러는 중에도 김두수의 머리는 항상 금녀의 배후를 쫓고 있었다. 총 나부랭이 가지고 왕청형 깊은 골짜기에서 훈련이랍시고, 김두수의 말을 빌리자면 오합지졸에 불과한 기백 명의 병력으로 결빙기를 이용하여 강을 건너 국경 수비병을 건드리는 그런 정도와는 양상이 다른,
'연해주 방면과 하얼빈... 하얼빈, 중국 본토까지,,, 중국 여자, 일정한 주거지, 장바구니 속에 있었던 권총, 도망가기 십상인 골목, 금녀가 금녀가 말이지? 여관이나 음식점에서 연락을 하고 권총을 주고받고 그러고 누군가를 암살하고 붙잡고 독립 만세를 부르며 처형되고... 그런 류하곤 다르지. 금녀를 그렇게 훈련시켰다면은 이런 류하곤 다르지. 다르고말구. 상당히 계획적이며 큰 단체가 만들어지고 있다아?'
끊임없이 맴도는 그 대목, 그러나 김두수는 지치지 않고 그 대목을 씹어보고 또 씹어보는 것을 멈추질 않는다.
'아무튼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수확이라 할 수 있을 게야. 왜놈들이 어떤 놈인데? 흥, 내가 그래도 이만하니까, 조선놈이요, 학식이라는 것도 겨우 읽고 쓸 정도에 순사부장? 호호호... 어디 두고 보아라. 날고뛴다는 놈들 코 납작하게 해줄 테니 말이야. 그러면은 어떻게 한다. 일이 이리 된 이상 당분간은 금녀를 하얼빈에서 찾기는 글렀어. 서둘러보아야 꽁꽁 숨어 버린 이상 내 혼자 힘으로 서울 가서 김서방 찾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고, 그러나 아무리 마음이 바빠도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지. 하여간 이 다리가 자유로워지면은 일단 희령으로 돌아가는 거다. 가서 양가놈더러 연해주의 사정을 끊임없이 살펴보라 해야지. 금녀가 연주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리고 양가놈이 금녀를 아느니만큼 앞으로 여러 가지 써먹을밖에 없겠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윤이병 그놈 좀 두고볼 걸 그랬나? 그랬다! 왜 내가 그 생각을 못했을까? 금녀애비부터 찾아야겠군 동생 놈을 끌고 다녀도, 그것도 좋지. 하하 참 사람이란 생각을 하고 자꾸 하면은 뜻밖에 좋은 생각이 떠오르거든.'
만족스럽게 혼자 실실 웃으며 밀어 넣은 앞니를 따각따각 맞부딪는다.
'하지만... 연해주에도 없고, 먼 곳, 가령 본토 상해 같은 곳으로 날아버릴 수도 있는 일 아니겠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손님."
방문 밖에서 은근히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벌써 초저녁이 지나고 꽤 저문 시각이다.
"왔으면 들어와."
하녀 아냥이 다람쥐처럼 조르르 기어들어 온다. 그러더니 별안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기 시작한다. 한눈으로 헛울음이라는 것을 깨달은 김두수는
"왜 그래. 왜 우는 게야?"
정답게 허리에 팔을 감으며 묻는다.
"으흐으흣... 으흣,"
머리를 앞뒤로 주억거려가며 자못, 서러워서 더는 견딜 수 없네요, 하는 시늉이다.
'상해까지 뻗쳐서 생각할 건 없다구. 아무튼 연해주에서 하얼빈 그 사이에서 꼬리는 잡혀.'
계집애 허리에 팔을 감은 채 김두수는 생각한다.
"손님, 으흐흣흣..."
"허허어, 말을 해야 알지. 자아, 자 울지만 말구, 내 눈물 닦아줄까?"
"아, 아니에요. 저같이 불쌍한 계집애는 죽어야 해요. 기찻길에 가서 치여죽는 게 나아요."
"무슨 소릴 하는 게야? 아이구, 내 간 떨어지겠다."
"손님 같은 사람은 모를 거예요. 어떻게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말을 하라는 거 아니야?"
'제에기랄! 엿가락같이 늘어지는군.'
"편지를 받았거든요."
"남자한테서 받았나?"
"아아 아니에요. 저를 그런 여자로 아세요?"
얼굴을 감싸던 손을 내리고 빤히 쳐다본다. 명주 고름처럼 아래로 흘러진 굴곡 없는 얼굴에 짙은 눈썹이 묘하다.
"고향서 온 거예요. 아버지가 보낸 편지예요."
"그래, 아버지가 보냈는데?"
하면서 계집아이 허리에 감은 파렝 힘을 주며 침상 곁으로 밀어붙인다.
"병이 나서 약값이 없다구,"
"응, 그거 참 딱하게 됐구나."
"어떡허면 좋지요? 돈을 부쳐달라지 않겠어요?"
"그럼 돈 부쳐야지."
"저한테 무슨 돈이 있어야지요."
"걱정 마라. 효자는 하늘에서 아느니라."
걱정 말라는 말에서 계집아이는 일단 목적이 달성된 줄 믿는 눈치다.
"자아, 걱정 말구,"
김두수는 계집아이를 침상에 쓰러뜨린다. 그새 서너 차롄가 계집애는 이 침상에서 김두수와 어울린 일이 있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남자 경험이 많은 계집앤 퍽 순진한 척했다. 한데 오늘 밤은 오히려 계집애 쪽이 능동적이다.
'조그만한 계집애가 벌써 사내 맛을 알아가지고, 게다가 돈 울러내는 방법도 알고 있거든.'
김두수는 계집애를 좀 혼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다리에 총상도 거의 다 나았고 성욕은 왕성했다.
"이봐."
계집애는 콧소리로 응 하며 회초리같이 가늘은 손이 두꺼운 김두수의 목을 꽉 껴안는다.
"이걸 주인이 보면 쫓아내겠지?"
"쫓아 못 내."
'하하아, 주인 놈하고도 관계가 있군 그래.'
김두수는 병아리 챈 매같이, 저항할 수도 없는 유리한 고지에서 난폭하게 마음대로 힘을 행사한다. 계집애는 돈거래의 약속이 끝난 것으로 단정하고서 참아낼 수 없는 고통을 용케 견디어내지만 그래도 앓는 소리를 내곤 한다. 김두수는 모처럼의 흡족한 정사를 치렀다. 이튿날 아침.
"인력거 하나 불러다 주어."
김두수는 눈치를 핼끔핼끔 보며 하마나, 조바심내고 있는 계집애에게 부탁하고 손가방 하나를 챙겨들었다. 방을 나선 그는 마지막 셈을 하는데, 눈치를 살필 정도가 아니다. 아냥은 눈을 무섭게 희번덕이며 김두수의 주변을 맴돌았다. 이미 인력거는 와서 기다리고 있다. 셈을 끝낸 김두수는 아냥을 돌아보며 싱긋이 웃는다. 아냥도 일그러진 얼굴에 억지웃음을 띤다.
"그간 신세 많이 졌다."
"아니예요."
"그럼 잘 있어?"
계집애 얼굴이 순간 시뻘개진다. 김두수를 따라 총알같이 문밖으로 뛰어나온다.
"손님!"
"왜 그래?"
"약속한 돈 안 주시오?"
"뭐? 약속? 뭘 약속했나,"
"어젯밤에 돈, 아버지 약값,"
"아아 그 얘긴 들은 것 같군. 내가 그러니까 뭐랬느냐, 옳지.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라 했지 않아?'
인력거를 세워놓고 기다리고 있던 차부가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정말 그냥 가냐?"
"그냥 가지 뭘 들고 가란 말이야?"
껄껄걸 소리 내어 웃으며 김두수는 인력거에 오른다. 차부는 거친 동작으로 인력거를 끄는데 계집애 입에서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상욕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손짓 발짓, 전신으로 분노를 표시하는 계집애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김두수가 간 곳은 다른 여관이었다. 인력거에서 내려 차부에게 돈을 치를 때 차부는 멸시에 찬 눈초리를 김두수를 쳐다보았다.
"왜 보아?"
그러나 차부는 그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고 인력거의 손잡이를 잡는다. 수치를 모르는 자 세상에서 못할 짓이 뭐 있겠는가. 한 마리의 이리가 대로상에서 대상이 무엇이든, 어린이 늙은이 아름다운 여인이든 먹이인 이상 찢어발기는 잔인성은 수치가 없는 수성 그 본능인 것이다. 그가 힘센 이리인 이상 힘이 미치는 데까지 잔인성은 발휘돌 것이다. 늙고 이가 빠져 걸레 같은 한 마리의 이리가 되기까지, 그리고 죽을 때까지는. 포식을 하고 적당히 휴식하고 지극히 쾌적해진 김두수는 차부의 말없는 눈 따위, 희령 같았으면 얼굴에다 주먹질을 했을 테지만, 천천히 육중한 몸을 흔들며 새로운 여관에, 어쩌면 새로운 대상이 있을지 모르는 여관에 들어선 것이다. 이곳에서 일주일을 더 보낸 김두수는 여행에 지장이 없다는 확신을 얻고 하얼빈을 떠났다. 이럭저럭 하얼빈에 와서 한 달이라는 기간이 지난 것이다. 용정에 나타난 김두수는 요릿집 백화수를 찾아들었다. 요릿집 안주인 계월이
"오래간만이오 김부장."
좀 굵은 목청으로 말했다. 기색도 그 음성 비슷하여 반갑거나 싫은 것의 구분이 잘 안 된다. 푸르스름한 낯빛에 갸름한 윤곽의 미인이며 나이는 삼십을 넘었고 눈시울이 짙어서 눈매가 뚜렷하다.
"아늑한 방에 앉아보는 것도 오래간만이구먼."
다리를 쭉 뻗는다. 계월이는 버르장머리 없이, 하듯 김두수의 몸을 주욱 훑어본다.
"하얼빈을 다녀오는 길이오."
"으음? 한데 신색이, 아니 얼굴이 달라진 것 아니요?"
"호남이지요?"
"호남? 김부장이 호남되면 볼장 다 본 거지."
"허허 그러지를 마슈."
"하지만 달라진 것만은 틀림이 없는데?"
"어디가 달라졌는지 잘 알아맞혀 보시오."
"글세? 알았다, 이빨 고쳤지요?"
"역시 나잇값은 하는구먼."
"김부장. 입정 좀 고치시오. 나이 들었고 감투도 큼직한 걸 써봤는데 어찌 점잖게 처신 못하시오. 성정이 그래서는 앞으로 혼 좀 날게요."
"흥 내 혼날 때까지만 제발 살아주소."
계월에 대해서는 마구잡이로 나가지 않고 조금은 조심을 하는 눈치가. 성미가 파분하고 냉정한 여자이기 때문이지만 그를 보아주는 배후가 꽤 고위층임이 틀림없다.
"이빨도 고치고 했으면 앞으로 좀 점잔하게 놀아요. 저지르는 것도 한두 번이지."
"아아니 내가 뭘 저질렀다는 겁니까?"
"능청은 또, 아무리 일을 잘해도 처신을 그래서야, 일본인이 어디 귀머거린가?"
"무슨 말을 하는 게지요?"
"그 여자가 용정에 나타났습니다."
"언제요?"
"작년 늦가을인가?"
"난데없이, 허 참,"
"봉천서 왔다나?"
"안주인이 만났댔소?"
"만나긴 내가 뭐하러 만나?"
"그럼."
"소문을 들었지. 봉천서 화류계를 떠돌은 모양인데,"
"그야 뻔한 얘기 아니오."
"김부장은 한 가닥 양심도 없소? 뻔한 일이오?"
"안주인이 그런 일 하면 어쩌지요? 장사 못하겠구먼."
"장사 얘기는 왜 하지요? 장가하고 관계가 있나요? 내가 어느 놈팽이한테 처녀 유인해서 망가뜨려가지고 데려오라 하든가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 장대같이 꼿꼿한 얘기 하게 생겼소?"
"산전수전 겪었으면 겪었지, 내 산전수전 겪었으니 김부장 개망나니짓 잘했다 칭찬해드리까?"
"피장파장이란 얘기지요. 계집 사내란 원래 그렇고 그런 거 아니겠소."
계월은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아무리 일 잘한다고 무슨 일인들 허용된다 생각하면 잘못이요."
"감투 땜에 벌벌 떨 나는 아니니까."
"그 배짱 나도 알아요."
슬쩍 그래 놓고 계월은 대로상에서 송애가 최서희와 옥신각신했던 일을 김두수에게 들려준다. 김두수는 손뼉을 치며 좋아라고 웃었다.
"그렇게도 좋아요?"
"속이 씨원하구먼."
"송애가 망신을 당해서 말이오?"
"그보다 콧대 높은 그 계집."
하는데 계월이는
"이상하다? 김부장 그 댁하고 무슨 원한이라도 있수?"
김두수는 찔끔한다.
"원한이 있을 턱이 있소? 언제 보았다구?"
"최씨네 그분 이곳 영사관하고 여간 가까운 사이가 아니에요. 헌금도 하구, 이곳에선 친일파로 지목을 받고 있잖아요?"
"그래요?"
"몰랐나요?"
"전혀 몰랐다 할 수는 없지요."
"객줏집 양딸이 신셀 망친 것은 최씨 그분 집안을 살피려고 그랬다면서요?"
"아니 그런 억설이 어디 있소? 뭣 땜에?"
"나도 얘긴 들었어요."
"얘기라니! 뉘한테 무슨 얘길 들었단 말이오."
"뉘한테 들었건 그것은 말할 필요가 없고 최씨네 집을 영탐했었다 뭐 그런 얘기지요."
"그런 말 같잖은 얘긴 하지도 마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야 그럴 거 아닙니까."
"그러니 이상하다는 거지."
"허 참, 안주인이 그래 그걸 몰라서 그러시오? 이 집 집터를 살적에에만 해도 공가 그 늙은 것이 얼마나 훼방을 놨는지, 그것 모르시오?"
김두수는 초조해하는 기색을 드러낸다. 혹 서희와 계월이 사이에 무슨 줄이 닿지는 않았을까? 영사관을 서희가 들쑤신 거나 아닐까? 계월의 언동에는 그런 의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 충분히 있다. 이제는 서희를 쏠아댈 수도 없는 형편, 계월의 말이 아니어도 서희는 완벽한 친일파다. 김두수는 시초부터 선수를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다. 운흥사 건립의 시주로써 시작한 서희는 그의 재력과 문벌과 높은 교양과 미모로써 오히려 일본인들은 그를 우러러볼 지경이다. 만의 일이라도 최서희의 부친을 김두수의 부친이 살해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날엔...
"공가하고 최씨네하고 가깝겠다, 송애란 년이 공가 양딸 아니었소? 연해주 방면에서 손님들이, 그 손님이란 게 어떤 손님인지는 모르나,"
"이 고장에서야 다 그렇지 뭐. 되도록 그런 것에는 손 안 대는 게 좋아요. 여긴 회령이 아니라 용정촌이거든. 송앤가 그 여자도 왜헌병 나으리 여편네라 하며 뻐기다가 망신당한 거예요. 김부장 능력은 대단하지만 들나는 건 좋잖아요. 우선 우리부터가 의심받으면 장사도 안 되고 일도 안 되는 거예요."
김두수는 요릿집 백화수에서 술과 여자와 더불어 하룻밤을 호유했으나 겉보기였을 뿐 그의 마음은 편안치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전전긍긍하는 자신이 서글프기도 했다.
'제에기, 최가년이 발설했다간 봐라. 못 먹는 밥에 재 뿌리기, 그까짓 아편장사를 하든 뭘 하든 난 살 수 있어. 기왕지사 옷은 벗었고,'
이튿날은 일요일이었다. 김두수는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영사관의 최서기 집을 찾아갔다.
"어이구우 김부장, 이게 웬일이시오? 우리집엘 다 오시고,"
"나는 여기 오면 안 됩니까?"
"무슨 그런 말씀을, 반가워서 하는 얘기가 아니오? 자아 어서, 어서 여기 앉으시오."
나이는 김두수보다 적어도 칠팔 세는 위인 듯싶었는데 체신머리 없이 깜빡 죽는 시늉이다. 관료 사회에서 터득한 처신의 지혜인 것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용모, 그의 아내처럼 과히 밉잖은 행동거지다.
"지나는 길에, 혹 계시나 하고 왔지요."
"잘 왔어요, 잘 왔어, 술이나 합시다."
최서기는 큰소리를 지른다.
"여보! 여보!"
"예-"
마누라가 나타났다.
"어이고 김부장님 아니세요? 그란 안녕하셨에요?"
"아주머닌 영 늙질 않구먼요."
김두수도 적당히 아첨한다.
"나일 먹는데 늙지 않긴,"
"여보, 저기 뭐냐, 응 술상 차려요. 심심하든 참에 잘됐수다."
마누라가 나가려 하자
"안주는 장만하는 대로 들여오구 술부터 먼저 내와요."
"성미도 급하셔라."
하고 나간다.
"그래 사표를 냈다며요?"
"냈어요."
"거 잘한 짓일까? 아깝지 않소?"
"글세. 한곳에 매여 있는게, 그걸 견딜 수가 있어야지. 떠났다 해서 그 일 안 보는 것도 아닌데,"
"하기야 뭐 김부장이라면 또 만만찮은 일거릴 맡았겠지요. 아무튼 사표 낸 건 용단이었소., 나는 이 나이에 말단 서기 자릴 애지중지하고 있으니 말이요. 하하핫,"
그 말을 들은 척 않고
"그간 몸이 좀 불편해서 쭉 쉬고 있었는데 한 달을 쉬고 보니 캄캄 절벽이라, 뭐 달라진 건 없습니까?"
"달라진 게 뭐 있겠소."
"그 자릴 뜨고 보니 귀동냥도 수울찮은 일이구먼."
"탄탄해요, 탄탄. 이젠 안심하고 일할 수 있고, 아닌 게 아니라 그 동안 일진일퇴 그럴 때마다 수풀에 앉은 새 모양으로, 일본 편에서 있는 우리네 처진 다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러나 일본은 한 세월 전관 달라요."
술상이 들어왔다.
"미국이고 아라사고 간에 중국, 특히 만주에 대해서는 일본의 입김을 살피는 형편 아니오? 게다가 중국은 자꾸 무너져가고 있어요. 제가끔 땅 쪼가리를 쪼개갖고 독립이다 뭐이다 소란을 떠는 판국에 일본은 군비를 강화하고 있고 조선에는 언제든지 유사시에 출동할 수 있는 군대가 대기하고 있지 않소? 하하핫... 술 드시오."
김두수는 아니꼽다는 표정이다.
"중국뿐이오? 아라사도 지금 난리를 겪고 있지 않소? 들으니까 황제가 물러나고, 물러났을 뿐만 아니라 혁명군에 의해 총살됐다는 소문도 있고 분분하기가 말할 수 없는 모양인데, 그게 다 일본을 위해선 유리한 거지요 만주를 손에 넣는 거야 떠먹기보다 쉬운 일 아니겠소? 중국이나 아라사가 방해하려 해도 그럴 거물이 있겠소?"
"그런 나라의 얘기는, 그런 일이야 나라 웃대가리가 할 일이고 여기 사정 얘기나 해주슈. 내가 그 동안 봉천에 가 있었고 봉천에서 하얼빈으로 갔고 용정에 온 지 참 오랜만이오."
"여기야 좋지요. 전쟁 덕분에 경기가 좋았자요. 특히나 곡물 무역을 하던 사람들 톡특히 재미보았지. 그 왜 길서 상회, 하여간 그 집은 보통 운이 아니었어요. 많이 벌었을 걸. 그러나 호사다마라든가?"
김두수의 귀가 쫑긋해진다.
"호사다마라니?"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집사람이 어디서 들었는지 듣고 와서 얘길 하더구먼. 그 길서상회 바깥주인이 도망을 갔다든가?"
"도망이라니?"
"안사람들 하는 얘길 다 믿을 수야 없지만,"
"왜 도망을 갔을까?"
"그러니까 혼인 전에 회령여관에서 일해주던 과부하고 눈이 맞아 살림을 차렸다는 얘긴데 벌써 오륙 년 전에 나돈 소문이지요. 그러니까 그 과부를 버리고 최씨 그분하고 혼인을 한 셈인데 그 여자가 봉천이라든가? 장춘이라든가 그곳 어느 예배당 집에 있는 것을 알고서 옛정을 생각했던지 만난 모양이라. 만나기가 불찰이지."
"그래서 그 여자하고 도망을 했단 그 말이오?"
"그런가 봅디다. 해서 최씨 그 부인네 고향으로 돌아갈 차비를 하고 있다누마. 그 부인네야 우리 집사람하고 친면이 있고 왜 그 운흥사 지을 때도 힘 많이 썼지. 영사관 하고도 무척 가까워 용정에 사는 조선 사람한테 미움도 많이 받았고, 우리네들처럼. 하기는 남편이 저리 되면 여자가 사업 꾸려가기도 어려울 게요."
김두수는 서희가 이곳에서 떠주는 것만은 찬성이다. 그러나 길상이 여자를 데리고 도망갔다는 말은 좀 믿기지가 않는다.
"희령에서 여자하고 살림하였다는 얘기는 사실일까?"
"그건 틀림없는 얘기라더구먼. 그 왜 복지상회라고, 곡물 거래상에서 나온 말이고 여자는 한양여관에 잠시 있었다더군요. 본시 여자는 용정서 바느질품을 들다가 불이 나는 바람에 희령으로 갔었고 그러고 보면 용정 있을 때부터 눈이 맞았을 가능성도 있어요."
"그 과부가 미인인가요? 잘난 여편에 자식을 버리고 달아날 만큼."
"예쁘장하게 생겼다 하고, 고분고분해서 남자 마음 사로잡을 만하다든가? 최씨 그 부인네야 신분도 신분이러니와 너무 똑똑해서... 그러니까 사내로서는 애로도 안 있었겠소? 그런 점으론 이해가 돼요."
'한양여관이라... 자세한 얘기야 거기 가서 들으면 틀림없겠고, 아무튼 최서희가 이곳에서 떠주는 것만은 나로서도 좋긴 좋지. 천장에 뱀 든 것처럼 늘 찐찐했었다.‘
14장. 늙은 호랑이와 젊은 이리
훈춘에 도착했을 때 가도에는 뿌연 흙먼지를 날리며 많은 소들이 무리를 지어 노령 국경을 향해 가고 있었다. 식육이 될 농우들이 러시아에 팔려가는 것이다. 어중간한 양복장이가 된 김환은 노령을 향해 수없이 지나가는 농우들의 무리를 넋 나간 듯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하얼빈에서도 변두리, 러시아인 양복점에서 사 입은 연갈색의 양복은 싸구리 제품이라 몸에 맞지 않았고 고물상을 더듬어 찾아낸 찌그러진 모자며 구두는 어중간한 신사로서 안성맞춤이긴 했으나, 길상은 웃음을 많이 참아 온 터이다. 깎은 머리가 서운한지 목덜미에 손이 자주 올라가는 김환은 어중간한 신사였을 뿐만 아니라 매우 어리숙한 시골 신사이기도 했었다.
"선생님, 가시지요."
하는 말에 느린 걸음을 옮긴다. 눈에 잡힌 김환의 옆모습이 종전까지와는 사뭇 달라져 있는 것을 길상은 느낀다. 잿빛으로 보일 만큼 건조하고 심줄이 나돋은 것같이 변해버린 얼굴에서 뭔지 충격적인 절망을 본다.
'왜 저럴까.'
갑자기 부산스런 몸짓이 되며 길상은
"그 집까지 갈려면 꽤 걸어야 하는데 마차 한 대 빌릴까요?"
"날씨도 좋고, 구경삼아,"
짤막한 대답이다.
"하긴 날씨가 하 좋아서 걸어가고 싶긴 합니다만."
오는 동안 내내 기분이 좋았던 김환이 별안간 변화를 일으킨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한 발 한 발 내딛는 순간마다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는 것 같은 김환의 기분을 길상은 느낄 수 있었다. 뭔지는 모르나 처참하게 가라앉는다. 어떤 때는 한 발 내밀 적에 빠른 속도로 쑥쑥 떨어져 내리는 것을 역력히 느낄 수 있다. 길상은 가라앉는 환의 기분을 건져 올려야겠다고 생각하나 어떻게 해야 할지 초조하고 답답하다. 푸릇푸릇한 들판에 펼쳐진 봄은 화사했다. 들판 위에 떨어지는 새 그림자는 금방 겨울을 잊은 경망한 계집의 웃음 같기도 하고 벌써 낙엽인가 하는 착각에서 당황해지기도 하고, 햇빛은 먼 밖에서 얼쩡얼쩡 서성거린다.
"지금 우리가 찾아가는 곳은 추풍이라는 장사꾼의 집입니다."
겨우 짜낸 길상의 얘깃거리다.
"그 추서방이란 사람 좀 재미있어요. 주로 수피를 다루는 뜨내기 장사꾼인데 흑룡강 유변을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내오지요. 그곳 방언에 능통하고 그곳 사정이라면 훤하지요. 때 안 묻은 그곳의 토민들을 늘 찬양하면서 중국 문화에 물든 여진족을 매도하는 그런 위인입니다."
한양여관에서 처음 만났었던 일부터 시작하여 물론 강포수 얘기로 나오게 되었다.
"사람이 워낙 야인 기질이라 장사꾼 같지가 않고 사냥꾼... 아마 그 자신도 흑룡강 유역을 드나드는 일을 장삿길이란 것을 접어놓고 즐기는 것 같아요. 한번은 뒤를 보아줄 테니 곡물을 취급해보지 않겠느냐고 권한 일이 있었지요. 싫다더구요. 돈을 버는 일엔 관심이 없는 겁니다. 본시는 무산에 집이 있었다는데, 훈춘으로 옮긴 지 삼 년쯤 되지요."
길상의 얘기를 듣는지 여전히 말없이 걷고 있던 김환은 슬그머니 땅바닥에 주질러앉는다.
"발이 아프셔서 그러십니까?"
대꾸 없이 구두를 벗은 환은 두 짝의 구두끈을 풀더니 모아서 다시 묶는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일어섰다.
"벗고 가시려구요?"
"음."
"그럼 신발 하나 사 신지요."
"괜찮아. 아주 가벼워서 좋군."
"제가 들고 가겠습니다."
했으나 주질 않는다. 다시 걷기 시작한다.
"길상아."
"네."
"말짱 헛거야, 말짱!"
소릴 내지른다.
"말짱, 말짱 헛거야!"
"무슨?"
"조물주 같은 나쁜 놈이 어디 있으며 조물주 같은 사기꾼이 어디 있단 말이냐!"
"선생님."
"선생님? 내가 어째서 너 선생이냐! 어째서 너 선생이냐 말이다! 구역질나는 소리 집어치워!"
빙벽을 끊고 오는 바람 소리처럼 차고 드세다.
"나를 이십 년 동안 목숨도 아닌 목숨을 살게 해놓구서! 순 날도둑놈 같으니라구!"
"..."
"여자! 여자! 여자가 뭐야! 부모! 부모는 또 뭐야! 애국자는 뭐야! 독립지사? 개나 먹으라지! 부처님! 예수님! 하눌님? 네이놈들아! 인간이면 요만큼은 해도 좋느니라! 요만큼? 그게 뭐야! 손에 피묻히는 일이다. 꿈벅꿈벅한 눈, 슬픈 눈, 착하디착한 짐승의 눈을 향해 칼을 휘두른다. 소의 피건 인간의 피건 피는 피야. 소도 슬퍼할 줄 아는 동물이요 인간도 슬퍼할 줄 아는 동물이야! 그러나 하나님! 그런 정도라면은 눈감아주겠노라, 그만큼은, 뭐가 그만큼이야! 뭐가! 행위 말인가 마음 말인가! 똥 누다가 밑 안 씻은 것처럼 그따위로 어정쩡한 게 어디 있어! 살생하지 말아라! 그럴 순 없지. 모두 중 될 순 없으니까, 해서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며 허언하면 아니 되느니라. 흥, 하나님의 손은 말짱하고 입도 정갈하시니 그러실 테지."
김환은 풀무질하듯 숨이 차게 웃는다.
"팔려가는 소를 보고 운다, 울어! 성현들을 대신하여 죄인이 된 슬픈 백성을 위해 운다, 울어! 불쌍한 악마 백정아! 도수장 앞에서 마지막 가락을 뽑는 소야! 너희들 죽은 목숨, 산 목숨을 위해 운다!"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어느 누군가가 해야지 그렇지 않다면 세상은, 네, 소의 세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호랑이의 세상이 되고 늑대의 세상이 되고,"
"옳은 말이야. 그래서는 안 되겠지. 허헛...그러니까 요만큼은 괜찮다, 그거 아니겠나? 단 살생계를 범하였으니 부처는 될 수 없다 그거지.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나 희생자는 천물이요 죄인이지. 어쩔 수 없게 몰아넣어놓고. 하나님은 착하시지. 허허, 허허허... 누군가 소를 죽여주어야 소고기를 먹을 테고, 누군가 호랑이를 죽여주어야 호환을 면할 테고 누군가 나쁜 놈을 죽여주어야 살인 강도, 역적이 없어질 테고, 날이면 날마다 살생은 아니 끊이는데, 죄인은 날로날로 늘어만 가는데, 성현은 무엇을 했느냐! 살생 아니 하고 간음 아니 하고 도둑질 아니 하고 허언 아니 하고 모함 아니 하고 그 아니 하는 성현을 먹고 마시고 입고 잠들게 한 것은 하나님 아닌 죄인들의 덕분이라, 소의 세상, 호랑이의 세상, 살인강도의 세상에서 어찌 성인인들 연명하여 도를 닦았겠느냐? 살아생전에는 죄인들 덕분에 덕을 높일 수 있었고 죽어서는 또 극락 꽃밭에서 소요하는 신세, 그래 대성은 무엇이냐! 대오각성한 자가 대성이라, 무엇을 대오각성 하였느냐! 살생을 하지 말아라, 그러면 굶어죽을 것이요, 먹혀죽을 것이다. 간음하지 말아라, 그러면은 수만 수천억의 생물들이 날로 번식하여 지렁이도 우글우글 독사도 우글우글 메뚜기도 우글우글 호랑이, 늑대, 갖은 동물들이 우글댈 것이며, 인간의 종자는 날로 줄어들어 종국엔 사멸할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하여 죄짓게 해놓고서 죄 짓지 말아라, 요만큼은 해도 그 이상은 아니 된다. 요만큼도 실은 아니 되는 일이로되 죄인의 멍에를 지는 자는 있어야 할 것인즉 그렇지이, 대성의 자리가 맑고 그 자리가 피로 물들지 않는 것은 무수한 죄인들의, 무거운 죄인의 멍에 덕분이거늘 그 위대한 희생자는 도시 무엇이냐! 영원한 육도윤회의 죄인들이요 육도 중에서도 천상만은 아득한 노예들이다, 그 말이냐?"
미친 것처럼 소리소리 지르는 동안 김환의 사유는 말짱 헛거라고 외친 것에서 진전을 하고 있었으나 절망의 소리임에는 다를 바가 없고 갈팡질팡 실상 그 자신 자기 입술에서 튀어나가는 말의 뜻을 헤아리고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불교에 정통하신 분이 그런 억지 말씀을 왜 하십니까."
길상은 뭔가 얘기를 해야만 했다.
"뭐?"
김환은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그러나 길상을 보는 눈은 아니다.
"나 그런 것 몰라. 중놈들 잠꼬댈 알아 뭘 해! 애비는 살인귀! 어미는 부정녀? 얼마나 좋으냐? 죄인의 멍에를 끌고 저 세상, 업화지옥으로 간 사람들을 나는 좋아한다! 허어허헛... 하하핫... 나도 살인귀, 내 그 여인도 부정녀!"
"..."
"극락 천당 같은 것 일없다! 시름에 젖은 듯 죄인을 만들어내고 지우고 하는 그 따위 교활한 조물주의 총아가 되느니보다 지옥이야말로 내 고향이야! 영원한 업화가 꺼지지 않고 불붙은 그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 아암 고향이구말구."
"기탄없이 말한다면은 선생님의 말씀, 그것은 자기변명입니다."
비로소 길상의 입에선 확실한 말이 나왔다.
"뭐?"
"과연 그렇게만 해석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나 부처님이 없다고 가상하더라도 말씀입니다. 죽음이란 처참해도 있는 채 그대로 놔두고 사는 것이니까요. 사람이 사람 아닐 수 없는 이상 죽음은 넘어갈 수도 없는 거니까요. 설령 사람의 손으로 사람을 죽이고 짐승을 죽인다 하더라도 죽음은 죽음일 뿐이겠지요. 형벌만이 우리에겐 살아 있는 것일 겁니다."
"이놈아!"
돌연 김환은 달겨들어 들고 있던 구두로 길상의 얼굴을 내리친다.
"이놈아! 죽여줄 테니, 죽음은 죽음뿐이다. 형벌이든 보상이든 내가 받을 테니 안심하고 죽어라! 이놈아!"
신발짝이 마구 날아온다. 그러나 몇 번을 그렇게 얻어맞던 길상이 환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내지른다. 욱 하며 환이 길바닥에 나가둥그러졌다. 길상은 부풀어 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보다가 길켠에 쭈그리고 앉으며 호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내 붙여 문다. 환이도 나동그라졌던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다.
"네놈은 절에 가서 중질이나 할 놈이다."
"네에, 나는 절에 가서 중질이라도 하겠소만 김환 아저씨는 미치광이 병원에나 가서 들앉으시오!"
"오냐 이놈아! 중놈보다는 미친 놈이 낫다!"
"사십 고개를 넘었으면 시시껄렁한 옛일쯤 잊을 일이지. 윤씨 피가 흘러서 그런가요? 조카딸 아제비가 꼭같구먼. 나 같으면 이십년을 꾸역꾸역하지 않았을 게요! 죄인은 거룩한 희생자라 스스로 말하면서 뭣 땜에 이십 년을 허송하였던가요? 희생자면 희생자지 하나님 부처님 욕할 것 한 푼 없다구요!"
"이 중놈아! 누가 우관 밑에서 자랐다 하지 않을까 봐서 그러냐?"
"네에. 맞아요! 우관스님은 김개주 장수보다 그릇이 컸지요."
"중놈의 세계는 소천세계 중천세계 대천세계도 티끌이요, 시방 무진의 법계이니 그릇이 큰 거야 당연하지. 그놈의 엉터리!"
"잘 아시는군요."
환은 덤벼들어 칠 생각은 않는다.
"현감 놈 대가리 하나 덮치지 못한 그까짓 큰 그릇 있으나마나,"
구름이 가고 있었다. 부드러운 새 잎새들이 미풍 따라 곱게 몸을 누이고 있었다. 삼라만상의 질서, 법칙에 귀의하듯이.
"안 가시렵니까?"
환은 잠자코 일어섰으나 옆구리가 결리는 모양이었다. 길상의 얼굴을 치던 구두 짝을 들고 걷는다. 얼굴이 더욱더 부풀어 오른 길상이 잠자코 따라 걷는다. 걷다가 발밑을 내려다본다. 거기 구두를 신은 자기 발이 움직이고 있었으며 양말을 신은 김환의 발이 움직이고 있었다. 해란강변에서의 미쳐 날뛰던 사흘 밤의 일이 생각난다. 사흘 밤이 끝난 후 김환에게 일어났던 변화를 생각한다. 사흘 밤으로써 김환의 깊은 상흔은 치유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깊이 박힌 뿌리가 사흘 밤으로 뽑혀질 까닭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길상은 김환의 외침으로 오히려 자신이 굳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나서는 그 자신을. 그것은 생명의 유한이다. 죄에 얽매인 것 아닌 삼라만상, 모든 것은 생명이 있고 또 생명이 없는 유한, 역설이라면 기막힌 역설이겠으나. 어느 시기까지 유지될 안정일지는 모르지만 길상은 서희와 아이들에게로 향하는 사랑이 담백한 상태로 자리잡는 것을 느낀다. 모든 것이 죽 끓듯 하는 환의 그 반역의 피조차 돌연 잠들어버린 느낌이다. 왜 이리 고요한가. 고요하게 고요하게 네 개의 발은 내디뎌지고 있는 것이다. 추서방 집에 당도했을 때 환은 완전한 침묵 속에 갇혀 있었다. 이들을 맞이하는 추서방이란 사내, 빙긋이 웃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얼굴이 왜 그 모양이오."
"네."
하고 길상은 씁쓰레 웃는다. 방으로 들어갈 때 환은 신고 온 양말짝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하는 말이
"술 있습니까?"
통성명을 하지 않았는데 주막 주인을 대하듯 퉁명스럽게 내던졌다.
"있지요."
"그럼 듬뿍 주시오."
길상이 이곳에 오기론 두 번째다. 작년 가을 하얼빈을 내왕할 때 송장환과 함께 이곳을 찾은 일이 있었다. 술상이 들어왔다. 술상과 함께 추서방도 진을 치고 앉는다. 술 한 잔씩을 마신 후
"얼굴이 그래서 술이 해로울 텐데?"
하고 추서방이 말했다. 길상은 개의치 않았고 김환은 단정하게 앉아서 연달아 술을 부어 마신다.
"저보다 선생님, 허리가 결리실 터인데 괜찮겠습니까?"
김환은 노기 띤 눈으로 길상을 노려볼 뿐이다. 이런 두 사람의 미묘한 싸움을 눈치 채었을 텐데 그 일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고 추서방은 그의 평소 버릇대로 술이 들어가니 마구 지껄이기 시작한다.
"술만 안 마시면은 추서방 입은 촛병 마개만큼 미덥은데 술 들어갔다 싶으면 헤퍼진다, 그렇게 말들 하구 구박도 했는데 그 대신, 내 한 가지 남보다 월등한 것이 있긴 있어요. 지껄여서 안 될 경우엔 절대로 술은 안 마시거든. 마시고 안 마시는 것이 자유자재이고 보면 입 굳은 것보다 사실이야 그 편이 더 어려운 일 아니겠느냐 그 말인데."
"그렇게 장담하다가 누구 잡아가서 거꾸로 매달어 놓고 술을 들어부으면 어쩌시겠소."
길상이 타박을 준다.
"매달리는 것도 실수 있은 연후의 얘기라, 그럴 염려는 없지요. 술이란 지껄여가면서 독기를 풀어가면서 마셔야 하는 거구 그 독기를 풀지 못한달 것 같으면 저기, 저 양반 모양으로 길 가다가도 미치고, 하 이거 실례가 많소. 이곳 북방엔 양반이 드물어서요. 그는 그렇고오, 성씨 이름 함자도 피차 모르는 터이긴 하지만 저기 저어 앉아 계시는 분 참말로 만고풍상 다 겪은 얼굴이구먼. 내 말 틀림없을 것이오. 우리네 같은 사람 얼굴 자주 못 보는 사람일수록 실은 관상을 잘 보는 법이고, 그러니까 뭐냐, 좁은 조선 땅이 좀 갑갑했을까? 그렇지요? 내 말이 맞지요? 길서상회 주인 양반,"
"양반은 무슨 놈의 얼어 죽을 양반이오. 길서상회 주인이면 주인이지. 분명 하인은 아닐 터이니까."
"허어어, 준수하게만 생각했더니 뜻밖에 꼬부랑한 갈고리도 갖고 계시누마요. 저기 저분은 갈고리가 몇 개나 되는지 거 독기 좀 풀어가면서 술 드는 것이 좋을 성도 싶은데,"
주정 비슷하게 빗댄다.
"추서방도 나같이 얼굴 부풀어도 괜찮으려면 얘기 계속하시오."
"허어어 그렇게 됐소?"
그러자 김환은 뒤로 물러나 앉으며 발로 상다리를 확 밀어낸다. 상은 덜덜거리며 추서방 배 가까운 곳에서 멎었다. 그러더니 벌렁 나자빠진다. 나자빠지자 다시 벽을 향해 돌아누워 버린다.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잠이 든 모양인데 잠든 모습은 조용했다. 가엾을 만큼 조용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잠이 든 김환은 권필응 일행이 도착하기까지 잠에서 깨어나질 않았다. 방에 들어선 권필응은
"깨우지 말게."
하고 길상에게 말했다. 저녁을 먹은 뒤 장인걸은 하얼빈에서 일어난 일을 간단하게 설명한다. 길상은 놀랄밖에 없다.
"이상합니다. 그자가 어떻게 수냥을 알았을까요."
"알어요."
"네?"
"그 사정은 설명할 필요 없고,"
"그러면 수냥을 그곳에 남겨놓고, 그래도 되는 건지요."
"당분간은 이동 안 하는 게 좋고, 아무튼 연추로 함께 가는 거지요?"
장인걸이 간단하게 생략해가며, 그리고 물었다.
"네."
"그럼 차차, 차차 의논하기로 하지요."
방은 넓은 편이었으나 벽을 향해 누운 환이 옆에 권필응이 눕고 다음 장인걸이, 벽 쪽에 길상이 눕고 해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 환이 부시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잠이 덜 깬 눈을 하고서 두 남자와 대면하였다.
"나는 연추에 사는 권필응이란 사람입니다."
말에
"나는 조선 지리산에 사는 사람이오."
하고 김환은 대꾸했다.
"지리산에서 숯을 구우십니까?"
"네, 숯도 굽고, 목기도 만들고 짐승도 잡지요."
"하아, 등 따습고 배가 부를 일입니다."
환이 눈을 들어 권필응을 쳐다본다.
"으음...괜찮소."
"괜찮습니까? 하하핫..."
권필응이 웃는다.
"들쥐는 아니고, 조선의 늑대하고 만주 땅 늑대가 만나게 되어 반갑수다. 나는 오래간만에 세수 좀 하고 와야겠소."
김환이 휭하니 방에서 나가버린다. 권필응의 얼굴에는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고 조반이 끝나기 무섭게 네 사람이 된 일행은 연추를 향해 떠났다. 연추에서 숙소를 정한 길상은 김환과 함께 이동진을 찾아가는 것이다. 밤이었다. 이동진과 김환의 대면을 길상은 염려하지는 않았다. 이동진 쪽에서 어떻게 나오든. 이동진의 거처방은 넓었고 구석진 곳이었다. 창문 밖 뒤뜰에는 백양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부기는 빠졌으나 시퍼런 멍이 남은 얼굴을 하고서 길상이 앞서 들어가자 책상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이동진이
"오래간만이군. 이곳엔 무슨 일로 왔,"
하다 말고 뒤따라 들어오는 낯선 남자에게 눈길을 옮긴다.
"...?"
알아보지 못한다.
"어서 앉게."
길상은 오른편, 김환은 왼편, 그러니까 이동진과는 삼각을 이루는 자리에 각각 앉는다. 이동진의 눈이 날카로워지며 김환을 응시한다. 경악으로 번쩍 빛나던 눈이 다음 순간 흔들린다. 얼굴이 핼쑥해진다.
"오래간만입니다. 그간 안녕하시었습니까."
"너는 누구냐."
눈이 벌어지면서 쏘아본다.
"김환이올시다. 이부사댁 나으리께서 아시다시피 구천이라 부르던 시절도 있었지요."
"..."
"이곳에 온 김에 찾아뵙지 않는 것도 예가 아닌 듯싶어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선지 이동진은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문다.
"자네도 어지간히 낯가죽이 두꺼워졌군 그래."
김환은 희미하게 웃는다.
"그래, 예가 아닌 것 같아서 찾아왔느냐?"
"..."
"진작부터 그놈의 예라는 것을 차릴 것을 그랬군."
"..."
"예라는 말이란 편리한 것이어서 곧잘 그것을 앞장세워 용무를 보게 되는 오늘날의 인심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나 그것도 염치의 정도 나름이지. 뻔뻔스럽게 내가 누구기에 찾아왔나."
"..."
"자네가 이십 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으며 어떻게 살았는가, 그건 내 알 바 아니나 설령 의병장을 하였다손 치더라도 그것으로 과거의 파렴치가 상쇄된다는 생각을 한다면 의병장 아니라 왜놈의 산귀신(일본 천황을 이름)을 찔러 죽였다 하더라도 말짱 헛 거야."
담뱃재를 떨어내는 이동진의 손이 덜덜 떤다.
"그렇다면 김두수 같은 처지가 되어 나타났다면 뻔뻔스럽지 않았겠습니까?"
충격을 받으며 이동진은 환을 노려본다.
"그런 말씀이 두려웠으면 찾아왔겠습니까? 고매하신 도덕군자가 무서웠다면 말입니다."
"뭣이라구? 이놈!"
"살인, 간음, 도둑의 집안이어서도 아니 되겠으나 허울만 좋고 편협한 도덕군자의 집안이어서도 일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수신제가의 그 어정쩡한 자리는 당분간 아녀자에게나 맡기시는 것이 어떠하올지."
"이놈아!"
기막힌 수모다. 길상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어 아래를 내려다본 채 움직이지 못한다.
"네. 머슴놈 구천이놈아! 하시렵니까? 의암선생."
이동진의 앞으로 기울어지려던 자세가 그냥 고정되어버린다. 길상은 굳게 자세를 지키고 앉아 있다. 김환이 의암선생이라 함은 일종의 야유다. 왕시 상민 출신의 의병장 김백선이 같은 의병장 안승우가 원병을 보내주지 않아 일본군에게 패한 것을 분히 여기고 안승우에게 칼을 뽑아들었다 하여 의병대장 유인석이 추상같은 군기를 고집하여 죽기 전 노모를 보게 해달라는 마지막 애원마저 뿌리치고 사형에 처한 그 일을 두고 야유한 것이다. 상민 출신의 선봉장인 김백선은 유능한 인물이었으며 훗일 유인석이 충주 등지에서 패배한 요인이 김백선을 잃은 데 있었던 것이다.
"으음... 시절이 다르구먼. 허허헛... 기우는 햇빛이 뜨거우면 얼마나 뜨겁겠는가."
이동진은 자탄하듯 쓰거운 웃음을 흘렸으나 그것은 신음이었다.
"지난날의 양반이란 이젠 죄인이지. 자학하지 않으면 아니 되고 이유 없는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으면 아니 되고, 허허헛, 허허헛... 그러나 너!"
하고 이동진은 김환에게 손가락질했다.
"너를 보는 내 마음엔 마패 찬 어사또가 무척 아름답게 느껴지는군. 목을 댕강 짤라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높이 걸어 올리는 광경도. 허허헛헛... 오백 년 사직이 새삼스럽게 아름다워. 자나깨나 독립이라는 공염불을 위해 무엇이든 수용되고 허용이 되는 이 벌판에선. 그렇지, 그런 뜻에선 자넬 환영해야겠나?"
복받쳐 오르는 것을 참는 이동진.
"환영해주십시오!"
애원하듯 길상은 얼굴을 숙인 채 말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주게. 다음날 또 만나세."
"네."
김환과 길상이 나간 뒤 이동진은 오열한다.
'이 사람아, 석운(최치수의 호). 나는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겠네. 참말로 모르겠네. 이십 년을 방황하였건만 나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고 생각은 호박 오가리처럼 쭈글어들었네. 저네들은 싱싱한 호박 넝쿨처럼 사방에다 줄기를 뻗고서 내 앞에 나타났단 말일세. 어떻게 그리 변신할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일세. 철사 같은 그 신경의 줄이 나를 휘감더군. 옴짝할 수 없게끔 나를 휘감더군. 우리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은 한갓 감상이요, 그네들이 추하다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었네. 내 노여운 음성은 허울만 남은 호랑이 울음이었고, 그네들의 맞서는 음성은 발톱으로 먹이를 찢어발기는 이리떼의 울음이었네. 이 사람, 석운, 늙은 탓이 아닐세 늙은 탓이 아니야. 내 나이 이제 오십을 넘겼을 뿐인데 세월이 달라진 게야. 그리고 우린 이조 오백 년의 무거운 세월을 싫든 좋든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지. 하기야 살아남으려면 의관이 무슨 소용이겠나. 맨발로 뛰어야 할 때는 맨발로 뛰고, 물구나무를 서야 한다면 물구나물 서야 하고. 한데 그게 안 되거든. 자넨 선견지명이 있었지. 그래, 오백 년은 너무 길었어. 오백 년 동안에 된 또랑은 너무 깊었거든. 하기야 설피 한 켤레에 몸을 담고 설원을 질러가는 지독한 이곳 젊은이들의 그 지독한 욕설이야 당연하긴 하지. 서울서는 문벌 좋고 유복한 집 자제들이 주색에 빠져서 자포자기하는 것으로서 절개가 되는, 아아 그러니 의암을 희롱하고 이 나를 희롱한들 내 무슨 말로 대꾸할꼬.'
흐느껴 우는데 밖에서
"선생님."
"..."
"선생님, 이선생님."
"들어오시오."
이동진은 손수건을 꺼내어 코를 풀며 말했다. 장인걸이 들어왔다.
"장동지요?"
"네."
장인걸은 몹시 당황한다. 도대체 이동진이 울다니, 그도 눈이 시뻘개지도록, 우울한 그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나, 뜻밖이다.
"오늘 왔소?"
"네."
"그래 일은 어떻게 됐소?"
손수건으로 또다시 코를 풀며 말했다.
"권선생께서 말씀이 계시겠지요. 그보다 그곳 박군한테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호주머니 속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놓는다. 이동진은 그것을 집어 피봉을 찢고 내용을 읽는다.
"음,"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편지를 도로 피봉 속에 넣고서
"글쎄,"
애매한 대답이었으나 이동진의 표정은 한결 밝다.
"만 원 정도는 어떻게 되지 않을까 그런 얘긴데, 본인이 직접 보낸 편지가 아니니까."
"그래도 맥은 충분히 있는 것 아닙니까."
장인걸도 희색을 띤다.
"아무리 있어도 남아돌아가는 법은 없으니까 부딪쳐볼 만한 곳은 다 부딪쳐보고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아야겠지."
"그럼요. 샅샅이 훑어야지요. 심정으로야 강탈도 불사, 장차는 조선 국내에도 그물을 펴야겠지요."
자못 흥분한 듯, 장인걸은 이동진의 침잠하는 마음에 불을 붙이고 싶은 심정이기는 했으나 군자금의 모금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항시 명심했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어떤 형태를 이루어가는 마당에서 사실 이동진의 좌절은 큰 손실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선생님."
"..."
"우린 밑거름인 것을, 어차피 우린 그렇습니다."
뭐라 더 말을 하고 싶지만 장인걸은 이동진의 눈물 앞에 관례적인 말을 꺼내기가 거북하다.
"새삼스럽게 무슨 얘기야? 내가 고향 처자를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다 생각하는 겐가?"
이동진은 껄껄 웃는다.
다음날 김환과 길상은 권필응의 초대를 받았다. 그 자리에 장인걸은 보이지 않았고 낯선 길상이 또래의 장연이 두 명 참석했다.
"김형."
권필응이 넌지시 김환을 불렀다.
"네."
"이동진 선생께선 일이 바쁘셔서 주연엔 참석 못하겠다 하셨고 그분 말씀이 주연이 끝나면은 김형께서 숙소로 오시라구, 하룻밤 함께 주무시고 싶다는군요."
그런 뒤 권필응은
"김형께서는 이곳에 오신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보고 느끼신 점을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소. 그리고 또 아시고 싶은 일이 있으면 사양마시고 물어보시구요."
격식을 차리는 어투다.
"그렇게 하지요."
김환도 손님된 예를 차리며 대꾸하였다.
"자네들 인사하게. 이분은 조선서 오신 김환 선생, 저기 김군은 자네들도 얘기는 들어 알 터이고."
하면서 권필응은 소개를 했다. 평범하게 생긴 두 장년, 몸집이 작은 편은 유씨라 했고 몸집이 큰 편은 석씨라 했다. 그들은 소박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으나 상당한 핵심 분자인 듯 별 동요가 없는 일관성을 지니고 있었다. 시초는 조용하게 술잔이 오고갔을 뿐이었다. 권필응은 김환을 상대로 술잔을 나누었으며 두 장년은 주로 길상을 상대하여 정중하게 술을 권하곤 한다. 쌍방이 뭔지 무르익어가는 시기를 기다리는 듯, 이윽고 김환이 먼저 입을 떼었다.
"지금 아라사에서 황제가 물러나고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곳은 어째 조용한 것 같습니다."
예상 밖의 말을 던졌다.
"네. 큰 혼란이 계속되고 있지요. 그리고 이곳이라고 조용한 것만은 아닙니다. 총동원령이 포고되고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부터 귀화한 사람들의 자제들도 전선에 나갔구요. 전쟁은 계속하여 러셔쪽이 불리했습니다. 그 영향이 이곳이라고 미치지 않을 수 없지요. 엄연한 노령이니까,"
"그야 그렇겠지요. 그러나 전쟁보다 내란의 영향이 보다 심각하지 않겠소?"
"물론이지요. 그러나 좋은 방향이냐 나쁜 방향이냐 예측하긴 어렵소. 그것을 염두에 두어야지요. 우리는 언제나 떠 있다는 상태, 그 상태 속에서 형체를 이루어나가야 하니까요."
"지금 내란의 상태를 좀 설명해주셨으면 좋겠소."
"정확하고 상세한 것은 모릅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세계대전이 나기 전부터 러셔 제정이 붕괴될 불씨는 심어져 있었던 게고, 전쟁이 단기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을 경우 그 명맥은 다소 연장됐을 테지만 불행하게도 그렇게 뜻대론 되지 않았으니, 게다가 몰락을 재촉한 것이 정부의 강압 수단이었습니다. 의회를 정지하고 극도에 달한 경제적 혼란 속에서 동요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에는 군대를 풀어놓고,"
"그러면은 수립된 임시정부는 그런 상황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권필응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리고 싱긋이 웃는다. 지리산 산골에서 온 사람이 제법 알고 있구먼, 하듯이.
"허약하기가 짝이 없지요. 어려운 사태로 말한다면야 전일의 유가 아니구요. 한데도 그 우둔한 사람들이 세계대전에서 발을 못 빼고 있으니 말입니다. 밀려난 보수 세력도 아직은 막강하고 진보적인 세력도 실은 복잡하기가 몇 갈래인지 군은 군대로 몇 조각이 날 게구요."
"임시정부를 이끄는 사람은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갖고 있소?"
"역량 말인가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변호사의 경력을 가진 케렌스키라는 사람이 의회의 대의사에서 이번 임시정부에 진보 세력을 대표하여, 말하자면 보수파인 르보프와의 연립내각이지만 우선은 케렌스키를 중심 인물로 보아야겠지요. 한데 진보 세력을 업고 나온 그 사람이 과연 국민들의 신임을 전적으로 받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아요."
"사람도 정부 형태도 모두 불완전하다 그 얘기군요."
"네, 그렇습니다. 모두가 불완전하지요. 모두가요. 우리로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확신을 가져볼 수 없는 상태지요.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고 생산 공장은 파업에다 폭동의 연발이요, 전쟁의 전망은 어두워오고, 제정은 무너졌다 하지만 만회할 힘이 전혀 없다 할 수는 없고, 어쩌면 군사 독재 정부가 성립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혁명당 속에서도 맨셰비키니 볼셰비키니 하여 아까 말한 바대로 가닥이 많은 모양이고, 얼마 전에는 케렌스키의 정적인 레닌이라는 사람이 망명에서 돌아왔다 하고, 결국 추측컨대 내란은 앞으로 상당 기간 계속되지 않을까요?"
조용 조용, 조심스럽게 대화는 진전되어간다.
15장. 화살같이
바람이 불어왔다. 어디서 어떻게 해서 불어오는 바람인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용정 거리에 불어오는 바람, 길모퉁이를 스쳐가고 시장 거리를 휩쓸어가고, 비 떨어지는 하늘을 보다가 급히 장독 뚜껑을 닫으면서 아낙들이 얘기를 나누는 여염집 안마당에 머물다 가고, 풍문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한때 두메가 하숙하고 있었던 집에서도 풍문에 대한 의견은 구구하였다.
"참말입지 이상하쟀읍매? 옥황상제 따님 같은 가물댁에다가 토란같은 아들 형제를 두고서리, 생각으 해보랑이? 환장으 해도 그렇기는 못한다이?"
"그 여자가 그러니까 불나기 전엔 용정에 있었다잖아요? 재봉소에 있었다던가?"
"응. 재봉소에 있었지비. 그 안깐도 얼굴으 쓸 만했답매."
"첫정이라 그랬을까? 남자 쪽에서 말이오."
"첫정 앙이라 뱃속서부터 정이래도 그럴 수는 없는 기야. 말으 들으니 그 가물댁 다 죽게 생깄다잲읍매?"
"그건 빈말이오. 눈 하나 깜짝할 여자든가?"
"말으 들으니 남자보다 담대하다 합두마네두 그런 일으 그러잲이오. 여자 맘으 매일반이라 말이. 어찌 벵이 나잴고?"
"어제도 내가 봤는걸요? 멀정해서 인력거 타고 절에 가더란 말이오."
"무시기, 뉘기 머래도 남으 그 마음 모른답매."
주점에선 또 약게 생긴 사내가 공연히 삐뚜름한 어조로
"길서상회 그 사람들 조선으로 간다며?"
하고 물었다.
"그런가 부지."
술을 들이켜고 난 뒤 권서방의 대꾸였고
"부동산 같은 것은 거의반 처분했다던가?"
"사는 집하고 곳간 뒤 있는 빈터만 남았을걸?"
"그럼 장터 점포도 다 넘어갔다, 그 얘기야?"
"그럼 셈이지."
"그 판에 권서방은 재미 좀 못 봤어?"
"손톱도 안 들어가더라."
"왜."
"그놈의 늙은이가 꽉 틀어쥐고서 내주어야지. 하기는 뭐, 살 사람이 없어 못 팔던 것은 아니니까.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거간 같은 것 거칠 필요도 없었지."
"그놈의 늙은이, 그럼 혼자서 해먹었단 말이야?"
"모르는 소리 말라고. 공노인이 그래, 구전 먹고서 그 집 일 보아주는 줄 아나?"
"세 없이 방 하나 얻어들었다고 역성 되게 드네. 사내자식이."
"뭐이라고? 사람 치사하게 만들지 말어. 그 사람들 관계란 옛적부터 그거 대단한 거라구. 아 조카딸 죽었을 때도 길서상회서 상여 만든 것 몰라?"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는데 그 많은 재산을 처분하면서 한푼 이득 없이, 누가 그 말을 믿어. 부모 자식간에도 셈은 무서운 게야."
"믿거나 말거나, 남의 일인데,"
"하긴 그래. 배 아파 봐야 소용없는 일이지. 그러나 기왕 말이 났으니, 그 집 남정네가 여자 얻어 달아나는 바람에 이곳을 뜨는 겐가?"
"나도 모르는 일이야."
"아무튼 그 사람이 용정에 없는 것만은 사실 아냐?"
"그것은 사실이지."
"흥, 귀신 곡할 노릇일세. 미인 마누라에 떡두꺼비 같은 아들 형제는 그만두더라도 그 많은 재산을 두고서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을까?"
"그러니 팔자지. 옛말에 일색 소박은 있어도 박색 소박은 없다잖어."
여름이 한더위에 접어들자 길상이 옥이네를 따라 도망을 쳤다는 소문도 차츰 가라앉았다. 서희는 인력거를 타고 절을 향해 간다. 그새 서희는 몹시 여위었다. 눈만 커다랗고 깨끗했던 피부엔 잡티가 섞인 듯 거뭇거뭇한 기미가 쓸었다. 아이 둘이 매달리고 이것저것 정리해야 할 일이 태산같은 나날 혼자서 생각하고 싶을 때 서희는 훌쩍 집을 나서 절로 향하는 버릇이 어느덧 몸에 배고 말았다. 인력거에 앉으면, 생각은 늘 일정한 것이다. 지난 봄 하얼빈으로 해서 연해주를 거쳐 길상은 김환과 함께 돌아왔다. 그러나 김환은 서희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객줏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조선으로 떠났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김환을 보내놓고 길상은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환국이는 말할 것도 없고 윤국이도 아비 팔에 매달려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데 길상은 다소 굳어진 표정으로 아이들을 대하였다.
"이제는 당신께서 말씀해주셔야겠습니다."
서희는 서방님이라는 호칭 대신 당신이라 하며 따지고 들었다.
"그렇게 하지요."
길상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는 것이었다.
"김환이라던 그 사람 옛날의 구천임이 분명하지요?"
다시 다그치듯.
"그렇소."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 얘기는 차차 하지요. 내 그렇잖아도 그럴 생각이었소."
하고는 사랑으로 내려가 온종일을 들어박혀 있던 길상이 해질 무렵 해서 올라왔다.
"우리 강가 횟집에 회 먹으러 갑시다."
"술집에 어떻게, 아니 됩니다."
서희는 할 얘기 땜에 그런가 보다 짐작은 했었다.
"술은 곁들여 나오는 것, 그 집은 본시가 횟집이오."
"하지만,"
"남편하고 함께 가는데 누가 뭐라겠소."
우겼다.
"마침 봄도 끝나가려 하는데 달밤에 강물도 볼 겸, 지금 떠나서 거까지 가면 어두워질 게요."
서희는 연보라의 자미사 치마저고리를 입고 길상을 따라나섰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선 담배만 태울 뿐 길상은 말이 없었고 횟집의 젤 좋은 방에 안내되어 마주앉았지만 역시 침묵은 계속되었다. 방에는 램프에 불이 켜져 있었다. 길상은 담배를 붙여물고 서희를 바라본다. 강한 눈길이었다. 서희는 이같이 강한 길상의 눈을 본 일이 없다. 아니 강한 사나이의 그러한 눈길을 본 일이 없다.
'나는 너를 소유했지만 넌 나를 소유하지 못할 게야.'
그런 말을 하고 있는 눈 같기도 했었다. 그 강한 눈을 서희는 강하게 받는다. 미동하지 않고 받는다. 그러자 길상의 눈에 말할 수 없는 비애의 그림자가 밀려왔고, 희미한 웃음이 번져나갔다. 비로소 서희는 그 눈에서 자신의 시선을 떨어뜨렸다. 서희는 싸움이라 생각했었지만 그쪽은 그것이 아니었다. 담배를 재떨이에 뭉개버리고 길상은 날라온 회접시를 서희 쪽으로 밀어주며
"집에서 해먹는 것보다 별미요. 들어보시오."
서희는 형식적으로 조금 먹어보았다. 회맛을 즐길 그런 심정이 아니다. 길상은 술을 조금씩 들었다. 집에서도 겸상해서 밥을 먹어본 적이 없었던 서희는 술을 마시는 길상의 모습이 다소는 신기해 보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길상의 입에서 나올 말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마음의 준비를 다져두지 않을 수 없었다. 질기고 억센 삼베같은 마음, 부드러우나 역시 질긴 명주 같은 마음, 지나간 세월이 억세고 부드러운 반복으로써 서희를 놓았다 붙잡았다 하는 것이었다. 잊어버리고 싶기도 했다. 묘향산이나 구천이를. 잊어버리고 싶을 뿐 잊어지는 일은 아닌 것이다. 지나간 세월은 세월이고 또 술을 들고 있는 눈앞의 사나이는 누구냐, 이 사나이는 처자를 버리고 떠날 사나이냐, 이쪽과 저쪽 사이의 깊은 또랑은 결국 메워질 수 없단 말인가. 아집이 고개를 치켜들고 아우성을 친다.
'당신은 나를 따라가야 해! 두 아이 쪽으로 와야 해요! 우릴 어떻게 떠날 수 있단 말이오!'
숨이 껄떡 넘어가기까지 울부짖었던 어린 계집아이는 아직 서희 마음속에 그 편린을 남겨놓고 있었다.
'묘향산? 구천이놈! 내 아버지 가슴에 못을 박고 어린 내게서 어미를 빼앗아간 놈! 남편을 배신하고 딸을 버린 부정녀!'
하는가 하면
'난 돌아가야 한다! 조준구, 홍가 계집을 잊는다면 나는, 이 최서희는 죽은 목숨이다!'
혼란과 혼란이 부딪고, 그 와중에서 서희는 필사의 헤엄질을 한다.
"여보, 거 회 좀 들어보아요."
"아, 아니,"
하다가 서희는
"말씀하십시오."
"..."
"말씀하십시오."
"..."
"말씀하시려고 이곳까지 오신 것 아닙니까?"
"하지요."
길상은 그렇게만 해놓고 술만 마신다. 램프 불은 쉴새없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한참만에 길상은 일어섰다.
"그럼 강가 달 보러 나갑시다."
서희는 먼저 횟집을 나왔다. 셈을 하고 뒤쫓아 나온 길상이더러
"마차는 없습니다."
사방을 둘러보며 서희가 말했다.
"돌아가라 했소. 우리 걸어서 갑시다. 밤바람이 시원해서 좋지 않소?"
길상은 다가서며 서희의 손을 잡는다. 서희는 당황하여 손을 뽑으려 했으나 누르는 힘은 컸다. 부부간이지만 집 밖에서, 아니 내실 밖에서 살갗이 닿았던 일은 처음이다.
"망칙스럽게, 이 손 놓으시오."
"오늘밤엔 최참판댁 손녀 최서희가 아니오. 내 아내야. 기생하고 나 이럴 수 있다, 그런 양반님네 법도는 잊어버리시오."
모래밭을 사북사북 밟는 발소리, 강물은 일렁이고 있었다. 강물 가까이 가서 길상은 서희의 팔을 잡아 끌듯하며 자기 옆에 앉힌다.
"춥소?"
"아닙니다."
"당신 섬진강 생각이 나오? 아마 당신은 섬진강을 자세히 본 일이 없을 게요."
"왜 못 보았겠습니까. 이제는 하실 말씀 들려주십시오."
"김환이 그 양반 말이지요."
"어째서 그자가 양반입니까."
"양반, 이거 실수였구먼. 그러나 근본이 없는 김길상하곤 좀 달라서 그분의 피엔 당신이 말씀하는 양반의 피가 반은 흐르고 있소."
"양반의 서자라 그 말씀이시오?"
길상은 어금니를 지그시 누르듯하다가
"그 반의 피는 당신 쪽의 피, 그러니까 당신 할머님의 아들이오. 당신의 작은아버지."
"뭐라구요? 뭐라 말씀하시는 거요!"
"그분의 어머님은 윤씨부인이오."
"그럴 리 없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이 무슨 간교한 계략이지요?"
"그러면 내가 더 자세히 설명을 하겠소. 옛날 청상이던 당신의 할머님은 백일기도를 드리기 위해 절에 가신 일이 있었소. 그곳에서 당신도 알고 있는 우관스님, 그 우관스님의 동생이신 김개주, 그렇지요. 김개주 장수에 대해서도 당신은 들어서 잘 알 거요. 그 동생이 정양차 절에 와 있다가 청상을 사모하여 겁탈을 했던 것이오. 청상의 죽을 목숨을 부지하게 한 것은 문의원과 무당 월선 아지매의 어머니 공이었소. 병을 빙자하여 남모르는 깊은 암자 속에서 몸을 풀었다는 게요. 그리고 그 아이는 아비 손으로 넘어가고, 후일 최참판댁 머슴으로 변성명하여 들어온 환이란 그분은 효수당한 아버님의 불행한 생을 가문의 노예가 된 생모 탓으로 돌리고 한을 품을 게지요. 당신의 할머님에게 고통을 주려고."
길상은 말을 끊었다. 서희는 강아지처럼 웅크린 채 말이 없었다. 모래밭을 핥고는 물러가고 핥고는 물러가는 물결 소리만, 목마른 사람같이 핥고는 물러설밖에 없는 안타까운 갈증에 몸부림치듯 강물은 달빛 아래 일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보복을 하기 위해서... 별당의 그 여자를 유인해갔다 그 말씀이시오?"
목에 잠겨 몸부림치듯 서희는 말을 밀어내었다.
"그것은 사랑이었소."
서희는 절을 향해 갈 때마다 그 일을 생각한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에 길상은 떠났고,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으며 용정촌에는 풍문이 돌았다. 법당으로 들어가는 모시옷의 최서희, 그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상처 입은 나비같이, 그래도 그는 아름다웠다. 한층 더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고뇌가 깊이 새겨진 얼굴은. 눈빛은 더욱 강렬하게 타고 있었으며 입매는 보다 빈번하게 뱅뱅 돌았다. 독경은 서희에게 일종의 치유 방법이다. 흐트러진 신경을 모아서 제자리에 놓아보는 수단인 것이다. 늦더위가 가고 수풀 속이 엉성해지기가 무섭게 길서상회댁이 이사를 시작했다는 소문이 다시 퍼졌다. 그것은 풍문 아닌 사실이었다. 이삿짐과 이삿짐을 취급할 머슴 두 명을 데리고 공노인은 조선을 향해 떠난 것이다.
"야! 정말로 뜨누마. 용정의 재물 싹 쓸어서 떠나누마."
사람들은 모두 그런 말을 한마디씩 했다.
"하기는 친일파니끼 조선 가서도 부재 살잲겠슴둥?"
"왜 아니라? 없는 사람이야 친일하고 싶어도 못하지. 친일하는 데도 밑천이 들지. 돈이 있어야 헌금도 하구 또 재물 지니고 살자면 친일 안 할 수도 없을 게야."
"여자가 워낙이 독해 그렇지. 젊은 여자가 아들 둘 데리고 간다는 것도, 아, 글쎄 한발 두발 길인가? 아무리 돈이 있다 해도 남편 생각하면 이가 갈릴 게야."
"그렁이 부재 산다고 다 제 뜻대로 되는 거느 앙이랑이. 주는 복대로 살 기야. 남으 부러바할 것도 없지비."
"흥,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좋으니 부자 한번 살고 싶군. 나중에 삼수갑산에 가더라도,"
"앙이 삼수가 앞산입매? 하하핫... 서울 태생이라 할 수 없답매. 여기가 어디멘지 알고서리 하는 말입매까?"
두 사내는 소리 내어 웃어젖힌다. 산수갑산엔 갈 것도 없이 이미 그곳을 넘어서 오지 않았던가. 일진을 거느리고 조선에 갔었던 공노인이 돌아왔다. 처분할 것은 모조리 처분하였고 옮겨야 할 것은 모조리 조선으로 실어내 갔고 집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살풍경한 뜰에는 환국이가 윤국일 데리고 놀고 있었다. 서희는 서류 같은 것이 든 봉투 한 장을 꺼내놨다.
"공노인."
"예."
"이게 집문서 곳간 뒤에 있는 땅문서요."
"..."
"거두어두시오."
공노인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 그는 벌써부터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물려줄 자손도 없는 저에게 집문서 땅문서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하나 연해주에 계시는 분을 위해 보관하겠습니다."
서희는 공노인을 빤히 쳐다본다.
"그것은 공노인이 알아 하실 일, 내 뜻은 아니오."
"예. 하오나 이 집은 일하는 분들 숙소로 삼겠습니다. 땅도 역시 그분들 소용에 따라서 쓰여질 것이고요. 그것만은 저로서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지 본의를 알아주시란 얘기는 아니겠습니다마는, 이 늙은 것도 태어난 강산을 잊지 못하니까요."
그 말은 서희에 대한 마지막의 일침이었고 가족을 버리고 떠난 길상을 위한 변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희는 꿀 먹은 벙어리, 말이 없다. 공노인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서희의 말을 기다린다.
"그러면 이젠 떠나는 일만 남았소."
"예."
"내일 모레 떠나지요."
"내일, 모레 말씀입니까?"
"그렇소."
"그러면은 내일 염서방을 보내어 배를 얻어놓게 해야겠습니다."
"그래야겠지요."
"그러니까 일행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안자하고 유모가 따라가기로 작정하였소."
"저하고 복산이놈하고 염서방, 어른이 여섯이구먼요."
"그렇소."
"여기 마차엔,"
"애들하고 우리가 타는 게요. 그러니 마차 한 대는 세내야겠지요."
"가져가실 짐은 별로 없는 거로 아는데요."
"당장에 쓰일 것이 있을 뿐이오."
"예."
"모든 것은 다 끝이 났소. 공노인의 수고는 잊지 못할 것이오."
서희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떠오른다. 공노인도 만감이 치미는지 얼굴을 수그린다.
"어머니?"
"오냐."
환국이, 동생의 손을 잡고 들어온다. 공노인은 아이들에게 웃는 낯을 보내며
"도착하기까지 도련님들 고생하겠소."
그러나 환국은 알은 체하지 않고
"어머니?"
"왜 그러느냐?"
"우리 이사 가는 거지요?"
"그렇단다."
"아버지는 왜 안 오셔요?"
웬일인지 아버지 말은 통 하지 않았던 환국이가 풀쑥 물었다. 서희가 미처 대답을 못하자
"할아버지? 아버진 왜 안 오셔요? 공할아버지도 모르세요?"
하며 얼굴을 공노인 편으로 돌린다.
"왜 모릅니까. 아버님께선 볼일 보시고 오시지요."
"함께 조선으로 가시는 거지요?"
"그거는, 일을 다 보시면은 그러시겠지만,"
"환국아? 할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서희도 얼굴에 미소를 띠며 거들었는데 환국이 얼굴에는 의심이 가득 차 있다.
"참 오래됐는데 말예요. 아버진 윤국이도 보고 싶으지 않으실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왜 보고 싶으지 않으시겠습니까. 볼일만 보시고 나면 늦더라도 곧 뒤쫓아가실 겁니다. 하하핫..."
공노인은 헛웃음을 웃고 서희는 돌처럼 굳어서 앉아 있었다. 윤국이는 그림책을 펼쳐놓고 그림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호아이, 코게이, 멍멍, 야웅 하며 귀엽게 혼자 놀고 있었다.
"그럼 지, 지는 가보겠습니다."
허둥지둥 도망치듯 공노인이 나가는데
"환국아? 이 봉투 할아버지 갖다드려."
"네."
환국이 집문서가 든 봉투를 들고 마루로 쫓아나간다. 신발을 신는 공노인에게
"할아버지 이거,"
"아, 저어,"
하다가 또 공연히 헛웃음을 웃으며 받아든다. 밖으로 나온 공노인은
"참말로 세상만사가 뜻대로는 안 되는구나.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어야 할란고."
객줏집에는 추서방이 마루끝에 걸터앉아 공노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몇 해 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깡마른 몸매 그대로, 후주레한 차림새다.
"추서방 왔소?"
썩 기분이 좋지 않은 공노인 음성이었고 추서방은 애매하게 웃는다.
"바쁜 모양인데?"
"바빠요."
"늙은네가 근력도 좋소."
"늙을수록 일복이 많아야 하는 게요. 안 그러면 앉은뱅이 되기 십상이제."
"노익장하니 좋긴 좋소만,"
"하여간 방에 들어갑시다."
추서방을 떼밀다시피 방에다 밀어놓고
"순아!"
"예!"
"할머니 어디 갔냐?"
"장에 가셨어요."
"알았다. 그는 그렇고 추서방은 무슨 일로 왔소."
마주앉으며 공노인이 묻는다.
"볼일 보고 오는 길에 들렀지요. 무슨 소식이라도,"
"조선에 다녀왔고,"
"그건 들었소."
"어디서?"
"훈춘이 그리 먼 곳이오?"
"그곳엔 모두 별고 없겠지요?"
"별일이야 있겠습니까마는 가만히 앉아서 노는 사람들 아니니, 하기야 그러기 때문에 식구들도 더러 잊기야 하겠지요."
"길서상회 그 댁은 모레 떠납니다."
"모레요?"
"예."
공노인은 쓰거운 듯 입맛을 다신다.
"그 큰아들이 어찌나 영특하든지... 어머니 간장이 녹겠구만."
그 말은 들은 체 않고 추서방은
"모레라,"
중얼거린다.
"내 조선까지 갔다오면은 훈춘으로 가겠소. 자세한 얘기는 그때, 본인을 만나서 얘기하기로 하고."
"그건 그렇게 하시오만,"
"그러면은 김두수놈 동태에 관해 얘기하지요. 그놈이 지금 심씨 동생을 찾아서 미친 듯 헤매고 있다는 게요. 심노인이 죽은 것은 이미 안 것 같고,"
"그러면 심씨 동생이 연추로 온 것은 아직 모르고 있다, 그거요?"
"알면은 청진이다 원산이다 하고 헤매다니겠소? 그러니 포염에 있는 양가놈을 조심해야겠지요."
"심씨 동생은 변성명하고 그곳에서도 심씨와 형제라는 것을 모르지요."
"어쨌든 그놈보다 선수를 친 것은 잘한 일이고, 그 안은 누가 냈는고?"
"그건 모르지요."
"하여간에 좀 심한 얘긴지는 모르나 양가놈이 김두수 수족인 것만은 확실하니..."
하고 말끝을 흐리다가 공노인은 피식 웃는다.
"추서방."
"예."
"우리 늙은것들이 이러고들 있으니 독립투사 같구먼."
"공노인이 늙었지 내가 늙었소? 허 참,"
"마, 이렇게 되니 오래 사는 것도 과히 욕은 아니구만."
"칠십이나 되거든 그 말 하시오."
"아 참, 그리고 길서상회 그 사람한테 전하시오. 조선에는 유모와 안자라는 아이가 동행하게 됐다고, 염서방은 갔다가 날아 돌아오겠으나 복산이놈은 아마 그곳에 주질러앉을 게요."
"그렇게 얘기하지요."
사무적으로 얘기를 끝낸 공노인은 곰방대에 담배를 넣어 붙여 물면서 추서방에게도 담배쌈지를 밀어주며 권한다. 얼마 후 방씨가 장에서 돌아왔고, 술상을 차려 들여보냈다.
"추서방."
"예."
"우리 다 늙어가지마는,"
"허어어 참, 공노인이 늙었지 내가 늙었소? 공연히 동무하려고 그러네. 아직이야 몇 놈 메치는 것쯤."
"그거는 호기고오, 하여간에 늙더라도 일복은 있어야 하는 게요, 소리치고 더 살아봐야 앞으로 십 년, 우리 같은 사람이 쓰이는 만큼 좋은 세상이 아닌 것은 분명하나 그러나 쓰이지 않았던 김훈장, 추서방도 김훈장을 알지요?"
"얘기는 좀 들었지요. 돌아가신 분이라며요?"
"돌아가셨지요. 꼬장꼬장한 선비요. 내가 그 양반 유서랑 유고를 고향에 있는 자손한테 전했지요. 아무튼 좋은 시절이면은 그런 양반도 더러는 쓰였을 테지만, 안 그렇소? 추서방, 이런 시절에는 우리가 쓰이는 거요. 옛말에도 배리데기 소자 노릇 한다 안 했소? 일곱째 배리데기는 내다 버린 딸이지마는 서천서역국의 약물 길어다가 부모를 살렸다 하듯이 예사 공 안 든 자식이 효행하는 법이고, 우리같이 괄시받던 서민들도 제가 태어난 곳이니 어쩌겠소."
"그런 말 하니 눈물 납네다."
"정말로 울랑가? 이 사람이,"
떠나는 날의 하늘은 쾌청하였다. 두 대의 마차는 이른 아침부터 문밖에 대기하고 있었으며 대강의 짐도 실었고 사람만 타면 되게 돼 있었다. 방씨를 위시하여 여러 사람들이 떠나는 사람과 석별의 정을 나누려고 마당에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사고가 난 것이다. 아침부터 환국이의 태도가 수상쩍긴 했었다.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뭔가를 찾는 것 같았고, 또 그의 표정은 몹시 사나웠던 것이다. 그러던 아이가 막상 떠나려 하자 보이질 않는다. 안자랑 유모가 서희 몰래 찾다가 할 수 없이
"큰도련님이 안 계시오."
"뭐?"
옷을 갈아입으려던 서희가 방에서 나왔다.
"환국이가 어찌 됐단 말이냐?"
"글쎄 마님. 옷 갈아입히려고 아무리 찾아도 안 계세요."
안자의 얼굴빛은 파아랗고 서희의 낯빛도 달라졌다.
"모두들 나가서 뒷숲을 찾아보아요."
서희는 침착하게 말했다. 식구들이 뒷숲으로 다 몰려간 뒤 심상찮은 분위기에 놀란 윤국이, 어미한테 매달리며 운다.
"오냐, 오냐, 괜찮아,"
서희는 아이를 안고 집안을 두루 살폈으나 아이는 눈에 띄지 않는다. 뒷 숲속을 부르며 헤매는 사람들은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안 계셔요, 마님."
안자는 운다.
"그러면 집안을 다시 찾아보자. 곳간 속, 항아리도 다 뒤져보아라."
마당에서 웅성거리고 있던 사람들도 어찌된 일이냐면서 바깥 길 쪽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아이를 찾으러 나간다. 서희 얼굴이 파들파들 떤다. 그러나 역시 환국은 없었고
"이상한 일이구나, 집안에 있으면 나올 텐데, 이 애가 어딜 갔지?"
서희는 하마 소리를 지르며 울 기세다.
"저기, 혹 안방 다락 속에나,"
하며 공노인이 말했다. 우우 하니 안방으로 몰려간다.
"마님! 마님! 도련님 여기 기세요!"
"안 나오시겠다 합니다! 마님."
"오냐. 알았다. 내 가마."
서희 얼굴에 핏기가 돌아왔다. 윤국일 유모에게 넘겨주고
"환국아?"
다락 안을 들여다본다. 두 무릎을 세우고 아이는 웅크리고 있었다.
"환국아."
적의에 가득 찬 눈이 서희를 쏘아본다. 여태껏 환국이는 그런 눈으로 어미를 본 적이 없다.
"이리 나와요."
"안 나가겠어요."
"어째서?"
"모두 조선으로 가세요! 나는 아버지 오시면 함께 가겠어요."
"뭐라구?"
"전 여기 있을 테에요! 아버지 오시면 함께 간단 말입니다."
"아버진 볼일 보시고 뒤따라오신다 하지 않았느냐?"
"거짓말인 것 저는 알아요, 아버지만 내버려두고 가는 거 아닙니까!"
서희의 눈알이 시뻘겋게 충혈된다.
'오냐! 나 당신 용서하지 않을 테요! 저 어린 것 가슴을 멍들인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테요! 결코, 결코!'
"환국아."
"안 간단 말입니다! 안 가요!"
무섭게 눈을 치켜뜬다.
"그러면 넌 아버지하고 살겠냐? 어머니랑 윤국인 내버려두고서?"
"아닙니다. 아버지랑 함께 갈 테예요."
아무리 달래어도 환국이는 꼼짝하질 않는다. 결국 서희도 목놓아 울고 말았다. 그러나 환국이는 울지 않는다. 울면은 지는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마당에선 모두 숨을 죽이며 사람들은 감히 들어와 아이를 함께 달랠 생각도 못한다.
"마차를 타고서, 또 강을 넘을 땐 배를 타고,"
서희는 흐느껴 울며 말했다.
"그 다음 또 기차도 타고 그러는 동안 윤국인 어떡허니? 그럴 땐 형님이 손을 꼭 잡아주어야지. 안 그러느냐?"
윤국이 말이 나오면서 환국의 표정이 달라진다.
"아버지가 안 계실수록 넌 아버지 대신 윤국일 돌보고, 형님이 그러면 어떡하니? 안 그러냐, 윤국이가 형님을 찾아서 자꾸 울면은 어떡허지? 아, 안 그러냐?"
입을 비쭉거리는 환국이는 별안간 엉엉 하고 소리를 내지르며 울어젖힌다.
"아, 아버지는 뒤따라 꼭, 오실 거야."
엉금엉금 기어나오는 아이를 끌어안으며 서희는 눈물을 쏟는다.
'결코 용서 안 할 게요! 당신을 용서치 않을 게요!'
마당에서 서성거리던 공노인이
"아무래도 시간이 늦어서 내일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고 말했다.
"아니오. 곧 출발해야 해요."
서희의 음성은 단호했다.
"환국인 또 내일 그 소동을 벌일 테니까요. 도중에서 묵더라도 떠나요."
서희는 서둘렀으나 침착했다. 유모가 환국일 안고 먼저 마차에 올랐다. 다음은 서희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사람들을 헤치고 나가 마차에 올라 안아 올려주는 윤국이를 받아 안았고 사람들은 마차를 둘러싸고 모여왔다. 마지막에 장만한 음식이 든 찬합이며 당장에 갈아입어야 할 아이들 옷이 든 가방이며 옷보따리를 마차에 밀어 넣고 안자가 올랐다. 방씨는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다. 서희는 마차 속에서 밖을 내다보며
"안녕히들 계십시오!"
말굽 소리 그리고 두 대의 마차는 출발하였다. 마차 속에서 환국이는 내내 울었다. 서희도 울었다. 마차가 역두를 지나가려 했을 때다. 그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일본 여자들, 그리고 최기남의 마누라가 마부에게 손짓하여 마차를 머물게 한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는 최서기 마누라 음성이 맨 처음 들려왔다. 서희는 윤국이를 안자에게 넘겨주고 마차에서 일단 내린다. 영사 부인을 위시하여 소위 용정촌의 유지라는 일본 여자들, 그러니까 친목회 회원이 한 사람 빠지지 않고 나와 주었던 것이다. 맨 먼저 영사부인이 서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세요. 하지만 결국 가족들한테 돌아오실 겁니다. 마음을 편하게 가지세요. 그리고 저희들도 조선에 가면 부인을 찾아뵙겠어요. 편지나 주십시오. 이곳에 와서 부인 같은 분을 만나 친히 지냈다는 건 영광이었어요."
다른 여자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인사말을 하였고 장교부인인 코가 길었던 여자도 전과는 달리 정중하게
"고향으로 가시니 얼마나 기쁘세요. 또 만나뵐 날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쯔무라 양행의 안주인은
"아주, 아주 오랫동안 인상이 남을 거예요. 당신은 참 멋진 여성이에요."
했다. 서희도 간단하게 대화를 나누고 마차에 오르는데 아이의 선물이라면서 여러 개의 꾸러미가 마차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두 대의 마차는 빤하게 난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남은 여자들은 손수건을 흔들고, 그리고 속력을 낸 마차는 활시위에서 떠난 화살같이 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