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최종 보고
'제에기랄! 이놈의 곳을 그만 훌훌 털고,'
저녁 무렵, 퇴근 때가 가까워지면은 속을 부글부글 끓이는 김두수였다. 요즘에 와선 그런 심화가 부쩍 더해가고 있는 것이다. 털고 일어서려면 언제든 그럴 수 있었고 애초부터 김두수에게 이 자리는 잠정적인 것, 자신의 결정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거리에만 나가면 득의에 찬 얼굴, 존대해지는 걸음걸이. 도시 세상이 우습게 여겨지는 것은 이 년 전 회령 경찰서에 왔을 당시와 다를 것이 없었다. 제왕이라도 된 듯 조맨한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휘둘러보며 가죽 장화가 지신지신 땅을 밟는 소리, 아비를 닮아서인지 사십이 못 되었는데 살이 붙기 시작하여 배가 나온 것은 물론 바지가 찢어질 만큼 엉덩이의 살도 무겁게 보였다. 그 엉덩이 쪽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 가죽집 속에 넣어서 허리에 찬 권총이다.
'흠, 조선놈의 새끼치고 순사부장이 어디야? 네깐놈들 꿈이나 꾸어봐? 손가락에 불을 켜고 하늘로 올라갔음 갔지.'
김두수가 특히 의기양양해지는 것은 거리에서 일본인 순사를 만났을 때다. 구두 소리가 탕! 날 만큼 뒷굽을 모으며 경례를 붙일 때 김두수는 에에헴 하고 잔기침을 한다. 아이들은 달아나고 가난한 백성들은 슬금슬금 피하고 장사꾼들은 두 손을 비비며 헤헤 하고 웃거나 절을 하게 마련이다. 왜기생들은 추파를 보내었고 관공리들의 아내나 딸들은
"고꾸로우사마(수고하십니다)."
깍듯한 인사를 잊지 않았다.
'이만 하면 나도...'
그럴 때면 그의 뇌리 속에 동생 한복의 모습이 스쳐가곤 했다. 추위에 먹빛이 되었던 얼굴, 꽁꽁 얼어서 게다리같이 꾸부정했던 손.
'지는 지, 나는 나야. 너는 착하게 살아라. 천대받고 살아라! 흥.'
햇빛조차 인색한 비탈진 북편의 음지, 그곳에 만들어진 어미의 무덤을 생각하기도 했다.
'살인 죄인의 아들이라? 흐흐흣... 아버지, 나는 말입니다, 살인을 해도 좋은 허가장 받은 놈이오. 참 세상 우습지요? 재미있지 않습니까?'
이런 모습으로 그 고장에 간다면? 비오는 날 개새끼처럼 쫓겨났던 그 마을에.
'아버지, 모두 내 앞에선 뻔하지요. 두 손을 마주잡고, 네, 반한 여자를 보듯이 웃습니다, 부장님, 부장님, 부장님, 흐흐흣... 육모 방망이를 든 어사또,'
그러나 김두수는 사무치는 그 옛날 일에다 자신의 생애를 거는 그럴 위인이 아니었고 호기를 부리되, 획 부리는 것만으로 만족해하는 사내도 아니었다. 보다는 현실적, 계산속이 빠른 사내다. 경찰관의 제복을 입은 후 몇 달이 못 되어 그는 자유로운 활동을 원하기 시작했다. 첫째는 그 동안 몸에 붙은 습벽, 한곳에 죽치고 앉아 있질 못하는 그 습벽 탓일 게고 둘째는 예금통장의 금액이 뭉청뭉청 올라가지 않는 일, 다음이 가장 중요한데 그것은 금녀 때문이다. 김두수가 회령 경찰서에 자릴 잡게 된 것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다. 금녀가 얽혀든 박재연의 피습사건, 그것에는 또 해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인과관계가 있었으나, 어쨌든 박재연을 피습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두수 자신이 연해주나 그 근방에 발붙이기 매우 곤란하여 위험하다는 상황과 금녀를 잃었다는 단순한 결과에 그치지 않고 금녀로 인하여 김두수 윤이병의 정체가 드러난 결과는 더욱더 금녀는 물론 그 주변에 근접할 수 없는 사정을 야기시킨 것이다. 결국 일하기 어렵게 되었고 동시에 금녀를 뺏아오기도 어렵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당분간 안전지대에서 침잠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순사부장이라는 자리가 그리 대단할 것은 없으나 정규적인 교육을 받은 바 없고 떠돌이 같은, 근본이 희미한 그에게, 더군다나 조선인에게 그런 자리가 마련되었다는 것은 그의 말마따나 조선놈의 새끼치곤 순사부장이 어디야? 꿈이나 꾸어봐?였을 것이 틀림없긴 없다. 과거 그의 행적으로 미루어 유능한 밀정, 밀정이기보다 소질이 풍부한 첩보원으로 인정되어온 것도 그러려니와 흑룡강 일대를 답사하여 제출한 보고서가 그의 앞으로의 지위를 굳혔다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쓰다 버릴 물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고서는 면밀하고 요령이 있었으며 아주 긴요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일본 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김두수, 중국 말에도 통하였고 게다가 조선인, 영사관이나 헌병대나 혹은 경찰서에서 그런 인물을 확보해두고 싶은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해서 당분간 침잠의 필요성이 있다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회령에다 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제에기랄! 이놈의 곳을 그만, 하며 퇴근 때가 가까운 한가한 시간에는 속을 부글부글 끓이는 것도 실상 벗으려면 언제든지 벗을 수 있는 처지면서 그 시기를 가늠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초조함에서 나온 말이긴 했다.
'금녀를 하얼빈에서 보았다구?'
책상에 턱을 괴고서 김두수는 중얼거린다. 달포 전에 포염의 양서방이 물어다준 정보다.
'금녀를 하얼빈에서 보아?'
턱을 괴었던 손을 풀고 김두수는 입맛을 쩍쩍 다신다.
"그런데 말요, 그게 금년지 아닌지 확실치는 않소."
"뭐요?"
"차림새가 간 데 없는 되년이더란 말이오."
"되년?"
"영락없어요. 시장에서 장바구니를 팔에 걸고 있는 꼴이..."
"그럼?"
"한데, 얼굴 역시 영락없는 그 여자라."
"하기야 닮은 사람도 세상엔 얼마든지 있지."
"글쎄... 그렇게 되년으로 변장하구서 윤가 그자하고 숨어사는 건 아닌지?"
"윤가? 으하하핫... 으하핫... 윤가라? 그놈하고 살림 차렸을까? 그야 모르지, 귀신이라면 똑똑히 알겠는데 말이야. 으하핫핫,"
양서방의 얼굴빛이 변했다. 윤이병의 죽음을 확실하게 감지한 것이다.
"그놈하고 살든 안 살든 그년이 거기 정말 하얼빈에 있는지 확인하는 게 먼저야."
김두수는 양서방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연상인 자기에게 반말지거리를 하는 김두수에 대해 늘 불쾌해했던 양서방은 그럴 겨를도 없을 만큼 공포를 느낀다.
"내 말 잘 들어. 포염에 돌아가거든 연추에 금녀가 있는지 없는지 그걸 알아내야 해. 확실한 거를, 그리고 나한테 보고하는 게야."
그러겠노라 하고 떠난 양서방한테선 아직 아무런 기별이 없다.
'하여간에 그년의 거처만 확인된다면, 이건 의외로 큰 수확이 있을지도 모르지.'
결코 김두수는 금녀를 찾아내는 일에만 열중하는 것은 아니다. 김두수는 점박이 사내 얼굴을 생각했고 절름발이가 되었다는 박재연을 생각했고 그밖에 뜻하지 않은 거물이 걸려들지 모른다는, 그런 공상을 아울러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그년은 죽어도 내 손에 죽을 것이요 살아도 내 손에서 살아난다!'
김두수는 이빨을 따각따각 맞부딪친다. 결심을 굳히는 시늉이기도 했지만 요즘 새로 생긴 버릇이다. 그 버릇의 내력은 어떤 계획에서 비롯된 것인데 뻐드렁 이빨을 고치는 일이다. 미관상의 이유에서보다 앞으로 자유롭게 활동하는 시기에 대비하여 인상이 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은 대단히 필요한 일이다. 봉천이나 그밖의 큰 도시에 나가서 뻐드렁니 두 개쯤 빼고, 남과 같이 되지 않더라도 튀튀하게 튀어나온 입술만은 어떻게 좀 달리 해야겠다는, 그것에 착안한 후부터 김두수는 앞니빨 부딪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문을 홱 열고 조선인 염순사가 샤벨을 철거덕거리며 들어왔다.
"부장님."
"왜에."
눈을 치뜨며 쳐다본다.
"그 늙은이가 왔습니다."
"와? 언제?"
"조금 전에요."
"어디 들었어?"
"그 왜 늘 드는 객줏집에 들었습니다."
"그래..."
앞 이빨을 따각따각 부딪다가
"그러면은 어쩐다? 가서 데리고 와."
"뭐라 하고 데려올까요?"
"지금이 몇 시야?"
팔을 들어 시계를 본다. 다섯 시 반이다.
"가서 말이야,"
"네!"
"무조건 가자구 해. 잔소릴 자꾸 하면은 내가 보잔다구."
"알았습니다."
염순사가 나가버린 뒤 김두수는 의자에서 슬그머니 일어선다. 가죽장화에서 비걱비걱 소리가 난다. 방으로부터 걸어 나간 그는 유치장을 한 바퀴 둘러본다. 유치장은 만원이다. 두만강을 건너는 관문인고로 사건의 건수가 많았고 간도지방 일대에서 잡은 범인을 압송 해오는 일도 많았기 때문에 유치장은 항상 넘치게 마련이다.
"어이구! 사람 살려! 아, 아무 잘못, 어이구우, 어구구."
"고노야로우 (이놈의 새끼) 바린 말이 해라! 곤치쿠쇼 (이 짐승놈)! 말이 안 하게소까!"
취조실에서 새나오는 비명 소리, 취조관의 고함 소리다.
'내가 이대로 주질러앉는다면 그까짓 서장... 경부쯤이야 문제 없겠고.'
제에기랄! 이놈의 곳을 그만, 했으되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을 밀고 들어서며
"수구 후유다나 (곧 겨울이야)."
김두수 말에 보고서를 쓰고 있던 왜순사가
"아사유우와 히에마스네 (아침저녁은 차갑다)."
맞장구친다.
"도만고오가 고옷다라 우루사쿠나루조 (두만강이 얼면 귀찮아진다)."
사진 두 장을 놓고 비교해보고 있던 형사의 말이다.
"시여우노 나이 야쯔라다나 (할 수 없는 새끼들이야)."
왜순사 대꾸였는데 할 수 없는 새끼들이란 독립군을 두고 하는 말이다.
"부죠상 (부장님)."
사진을 보고 있던 형사가 다가오며 김두수를 부른다.
"나니까 (뭐야)?"
"이 사진 좀 보십시오."
사진 두 장을 내민다.
"아무래도 동일 인물 같지 않단 말입니다."
하나는 독사진이었고 하나는 여러 명이 찍은 사진이다.
"동일 인물이야. 두 얼굴을 다 눈여겨두는 게야. 놈은 어느 한쪽의 얼굴을 하구서 나타날 테니까."
김두수는 아무렇지 않게 밀어버린다. 이윽고 염순사가 공노인을 앞세우고 들어왔다. 밖은 어스름하니 어두워져가고 있었으며 벌거숭이 전구가 책상들, 실내 기물에 붉은 빛을 던지고 있었다.
"무슨 일로 오라 가라 하는 게요?"
공노인은 대뜸 삿대질을 하며 고개를 흔들어 대었다.
"거기 앉기나 해요."
김두수는 손가락을 아래로 가리키며 지극히 사무적이다.
"오라 하는 데는 그만한 명분이 있을 터이고 가라 하는 데도 명분이 있을 터인데 그 말부터 들어야만 앉겠구먼."
"명분이고 나발이고 앉으라면 앉는 거요."
소리를 바락 지르며 눈알을 디굴디굴 굴린다. 그렇다고 공노인이 기죽지는 않는다.
"이런 행폴 해도 괜찮다는 법 있나? 내 입에서 육도문짜 나오기전,"
하며 으름장을 놓는다. 그러나 김두수는 태연하게 말했다.
"조선 출입은 왜 그리 잦소?"
"잦은 것도 법에 걸리나?"
"아편장사라도 하는 게요?"
"예사, 제 밑 꾸린 놈이 남의 밑도 꾸린 줄 알지."
순사도 아니요 명색이 순사부장인데, 그러나 방 보아가며 똥싸더라고 김두수의 여러 가지 약점을 잡고 있는 공노인 뱃심 좋게 나간다. 김두수 입속으로 웃으며
"좀 앉아 기다려주어야겠어."
책상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하더니 순사 하나를 불러댄다.
"네! 부장님."
"이게, 이게 뭐야 이 보고서 다시 작성해서 내! 그따위로 어벙하게 굴지 말구 알았나!"
"네!"
공노인이 또다시 삿대질을 하며 덤빌 판인데 김두수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모자걸이에 걸린 모자를 집어쓴다.
"좀 나가실까요? 늙은이."
하고는 먼저 밖으로 나가버린다. 뒤따라 나가는 공노인 속으로
'그 놈의 자리가 자리 값은 하는 모양이야. 저 녀석이 제법 의젓해졌어? 제 버릇 개 줄까마는.'
중얼거리면서도 뒤통수에다 대고 삿대질이다.
"날 건드러봐야 재미 한 푼 없다! 아암 재미 없구말구. 이 늙은 놈이 이래뵈도."
"건드리긴 누가 건드려."
앞서가며 대꾸한다.
"그럼 왜 오라 가라! 내가 이래뵈도 안 가본 곳 없고 안 해본 짓 없고, 긁어 부스럼이란 말 몰라서 그러는 게야? 몰라서 그러느냐구!"
갈 곳 없는 장돌뱅이 행셀 한다.
"입 못 다물겠소? 할망구처럼 걸음걸이도 조신스런 늙인이가, 허참, 주책없는 척, 성미 급한 척, 하하하핫... 능구렝이 같으니라구,"
공노인도 김두수가 웃는 데는 김이 샐밖에, 새삼스럽게 오 년 전 묵은 송애 일을 쳐들어 힐책하기도 맥 빠지는 일, 다만 이자가 무슨 까닭으로 자길 불러왔으며 지금 또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그것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다. 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너는 용의주도한 공노인, 다시 사태를 검토하기 시작한다. 이곳저곳 자신의 발자취를 돌아본다. 누굴 만났으며 무슨 일을 했는가 차근차근 기억을 살려 더듬어본다. 걸릴 만한 일이 없다. 모든 것은 합법적이었다.
'이자가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노인장."
"..."
"내 집으로 가는 게요."
"거긴 왜."
"술이나 한잔 대접할려구요."
"뭣 땜에."
"우린 여러 가지로 인연이 깊지 않소? 안 그렇습니까?"
"깊다면 그건 악연이지."
"술대접 받을 이유도 없고, 그거라면 나는 내 거처로 가야겠구먼."
"허어, 조준구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놀려먹는 공노인이 그리 융통성이 없어서야,"
"뭐이라구?"
고노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왜? 놀랍소?"
"놀라울 것 없지."
"서울 출입이 잦는데 그런 정도야 내 다 알고 있지요. 하하핫... 하하아."
"내가 조준구를 손바닥에 올리건 발바닥에 올리건 그것은 임자가 상관할 일 아니지."
"상관할 바 아닌지 그건 두고볼 일이고,"
"누구네 부친은 그놈을 손바닥에 올려놓질 못해서 이용만 당했다 하긴 하더라만."
"누구네 부친?"
반문하는 김두수, 걸음을 멈춘다.
"그게 누구지요? 최서희의 부친 말씀이오?"
"글세 그것까진 모르겠구, 재주는 곰이 넘었는데 돈은 중국놈이 먹었다 하기도 하더구만."
김두수는 다시 걷기 시작했는데 숨을 거칠게 쉬는지 양어깨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객담은 그만두는 게 좋겠고 내 집에 노인장을 초대하는 만큼 용건이 있다는 것쯤, 날 심히 건드리면 좋잖을 게요."
의외로 침착한 목소리였지만 걸음을 빨리한다.
'약이 좀 과했나? 흥, 제놈이 어쩔 거야? 회령바닥을 제 집 안마당같이 설치고 다니기는 한다마는 제놈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 있지.'
공노인의 배짱이 두둑해진다. 굳이 피할 이유도 없다 싶었다. 아니 피하기보다 무슨 일인지 알고 싶은 마음이 차츰 강해진다. 어느덧 거리에는 어둠이 깔려 물컹물컹한 늪과 같은 검은 기류가 흐르고 그 물컹물컹한 어둠에 거리의 불빛, 붉은 불빛들이 스며들고 있었다. 공노인이 김두수를 따라간 곳은 그의 말대로 그가 사는 집이었다. 목조의 왜식 건물, 소위 관사라는 집이다. 여기서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다. 좁은 현관에서 문을 열면 바로 그곳에 갸구노마인데 김두수가 문을 열자마자
"오동쨩(아부지)!"
하고 뛰어나온 아이, 쟌자꼬리는 일본 아이의 옷을 입은 사내아이는 네 살쯤이나 됐을까? 그런데 그대로, 그야말로 그대로, 만일 김두수의 몸이 줄어져서 그 아이만큼의 크기가 된다면 쌍둥이 한 쌍이 될 것이 틀림없다. 공노인은 치미는 웃음을 참는다.
"꼬라, 꼬라, 도께(아서, 아서, 비켜)."
매달리는 아이를 떼밀어내긴 했어도 눈에 웃음기가 돈다.
"야다이! 미야게 오꾸레요 잉(싫어! 선물 줘 잉)."
"고멘, 고멘, 와스레다. 아스 갓대구로가라, 사아 오갸꾸상다. 앗찌에 유께(미안 미안, 잊어버렸다. 내일 사올 테니, 자아 손님이다. 저리 가거라)."
아이는 나온 김두수의 배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오도쨩노 바카(아버지 바보)!"
아이가 달아나자 김두수, 고래땅 같은 고함을 지른다.
"나니쓰루까! 데데공까(뭐해! 나오지 못해!)."
"하이 하이."
하며 나타난 여자, 추녀는 추녀이나 정체가 야릇하다. 기모노의 긴 소매를 걷어 올리기 위해 어깨에 걸었던 끈을 풀면서 연신 고개를 주억거린다. 얼굴빛은 아편장이처럼 누리팅팅했다. 두 볼은 장난스런 조물주가 반죽한 것을 한 덩이씩을 더 붙였는가, 솟아오른 두볼 사이에 코와 입이 묻혀버렸다.
"고노 아마메! 나니오 보야보야시도루까(이 계집년! 뭘 꾸무적거리고 있어)!"
"스미마셍(죄송합니다),"
"사께다! 준비세(술이다! 준비해)!"
공노인은 객실에 올라갔다. 방안에 먼지 한 톨 볼 수 없게 깨끗했으나 별 세간은 없고 방석과 화로가 있었는데 화로 속에는 숯불이 빨갛게 타고 있었다.
"장가 들었구만."
얼떨떨해 있던 공노인이 말했다.
"장가요? 그런 악담 마슈."
"그러면은?"
"하녀요, 하녀."
"아까 그 아들아이는?"
"그거야 뭐 어디서 낳거나,"
입맛을 쩍쩍 다신다.
"하긴..."
하고 공노인은, 혼자 중얼거린다. 아편장이처럼 얼굴이 누리팅팅한 여자는 하녀도 되고 작부도 되는, 용정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유의 여자라는 것을 공노인은 진작부터 짐작했다. 김두수는 공노인 앞에서 경찰관 제복을 훌렁 벗고 속내의 모습을 드러내더니 다시 고함을 쳤다. 하이 하이 하면서 여자는 단젠(두툼한 일본 남자의 겨울옷)을 가져 나와 사내에게 입혀준다. 그러는 동안 김두수는 계속 여자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오비(허리끈)를 묶으면서 김두수, 화롯가에 와서 앉는다.
"불이나 쪼이슈. 저녁이 되니까 설렁하구먼."
김두수는 살이 통통한 손을 화로 위에 쬔다.
'개상놈 같으니라구, 아니꼽고 더럽다마는 기왕지사 여가지 왔으니 나도 알아볼 만큼 알고 가야겠다..."
그런 공노인 눈에 대하여,
'이 백 년 묵은 너구리 같은 늙은이, 내가 명심코 잡아먹으려면 그거야 문제없다마는.'
김두수의 눈은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일본 사람 다 됐구만,"
"일본놈 안 되고서 내 설 자리가 어디요?"
일말의 자포도 풍긴다. 그러나 그것이 꾸며대는 것임을 공노인은 안다.
"하기야 순사부장까지 됐으니 분골쇄신해야겠지."
"순사부장? 그까짓 것쯤이야."
"그까짓 것쯤..."
"노인장."
공노인은 빤히 쳐다본다.
"소리 지르고 삿대질하고, 이젠 조용해졌구먼."
"웃는 낯에 침 뱉진 못하지. 술대접 하겠다는 데야."
"나는 또 상당히 보챌 줄 알았지요."
"순장부장 아니라 서장이라도 그렇지, 늙은이보고 그 말버릇이 뭔고? 좋든 궂든 뻔히 아는 처지에 보채다니,"
눈을 부릅뜬다.
"내가 공노인이니까 반말이라도 들어주지, 몰라 그러는 게요? 피차 알 만큼 다 알면서 안개를 모락모락 피울 필요 없소."
"아는 거는 아는 거고 버르장머린 버르장머리야."
"답답한 늙은이로군. 내가 노인장한테 반말 지껄인들 못할 게 뭐 있수. 순사부장 아니라두 말이야."
"김위관댁 자손이라서?"
"그렇다! 이 늙은 것!"
별안간 김두수 얼굴에 살기가 넘친다.
"행사가 좋아야 양반 행셀 하지. 족보만 가지고? 하기야 그놈의 족보도 아주 못쓰게 되어 없느니만 못한 형편이지만."
김두수의 뻐드렁니가 떠걱떠걱 소리를 낸다. 이번에는 습관적인 그것이 아니다. 아래턱이 덜덜 떨고 있었던 것이다.
"내 하나 밑천이란 다름 아닌 담력 그것인데 그거에다가 이젠 살만큼 살았겠다 할 일 다 했겠다 남한테 몹쓸 짓 한 일 없고 법 어긴 일 없고 세상에 무서울 게 뭐 있나. 그놈의 순사부장 감투 아니라 총독 감투래도 마찬가지야."
이만저만 약을 올리는 게 아니다. 아는 수 없었던지 김두수, 밖을 향해 빨리 술 가져오지 않느냐고 소리소리 지른다. 조그마한 술상이 들어왔다. 김두수는 연신 여자한테 욕설을 퍼부으나 그것이 습관이 되었는지 여자는 으레 그러려니, 일본 말을 모르는 공노인은 욕인지 뭔지 알지 못했지만
'저것도 사람이라고,'
그러면서도 작전을 세우듯 곰곰이 생각한다.
"술이나 드슈."
술은 일본 술 아닌 매화주였다. 어디서 선사 들어온 술이었던 모양이다. 공노인은 술맛 좋다고 생각했다.
"이리저리 빙빙 돌려댈 필요 없이 오늘 공노인을 내 집에 오라 한 것은 다름이 아니오. 최서희 그 여자가 전갈해 보던 말에 대한 내 답변이요."
"전갈해온 말이라구?"
공노인은 눈이 휘둥그레진다.
"자세한 설명도 필요 없고 닥 이 말만 전해주슈. 앞으로 당분간은 이 김두수, 길상하고 언약한 것 지켜나갈 생각이라구."
"이상하구만. 그쪽에서 뭐 꿀리는 일이라도 있단 말인가?"
"길상이 의병질 한 걸 내가 모를 성싶소? 앉아서 천리 보는 사람이요."
"내 듣기하곤 매우 다르구만. 내가 듣기로는 조준구 그자가 최참판테 살림을 가로채는 바람에 박살을 냈다, 그런 얘기였고 아, 조준구에 관한 얘기라면 시시콜콜 내 모르는 일 없으나 의병질이란 금시초문이구만?"
"속 들여다뵈는 소릴 하니까 일견 거간쟁이 같긴 하오만, 조준구 일이라면 시시콜콜 다 안다구? 뭘 알아요! 뭘!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중국인이 먹었다?"
한정 없이 늘어지고 좀체 말꼬리를 잡히지도 않는 공노인 성격에 신경질이지만 재주는 곰이 넘었다는 얘기가 김두수 가슴속에서 뭉클거리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신경이 굵기론 피장파장 담력은 공노인이 위겠으나 배짱 하나야 김두수가 월등했을 테니, 그러나 아비에 관한 일이었으니까.
"그게 글세 전혀 근거가 없는 일은 아닌 기라. 왠고 하니?"
하다가 공노인은
"뭐 그리 긴요한 것은 아닌데 그만두지. 다 지나간 얘기,"
김두수는 몇 번이나 근거가 뭐냐 파고 물으려다 꾹 참는다. 공노인 말마따나 지나간 얘기다. 죽은 아비가 살아 돌아올 리도 없는 거고 살인자란 저주스런 죄명이 없어질 까닭도 없는 것이다. 억울한 죄명을 쓰고 죽은 것도 아닌 바에야 들추어 뭘 하겠는가. 김두수로서는 그러한 사실을 발설해주지 않을 것만 바랄 뿐, 아비 일에 발을 쑤셔넣어 좋을 것이 없다. 설사 공노인이 암시하는 조준구와의 어떤 관련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조용하길, 오로지 조용하게 그 일을 잊어주길 바랄 뿐이다.
"공노인의 말이 맞소. 지나간 얘기 피차 안 하기로, 그게 길상이하고 나하고 사이에 한 언약이오."
공노인의 경우도 그렇다. 필요 이상의 말, 하고 싶어 하는가. 다 김두수의 속마음을 떠보자는 것이요, 김두수와 조준구 그 악인 둘 사이에 깊은 도랑을 파두자는 것이 현명하다는 셈속밖엔 없다. 조준구에 대한 은근한 모략만 하더라도 공노인으로선 억지춘향이다. 최치수 살해의 암시를 준 조준구 언동에 관해서는 하나님과 조준구 자신밖에 알지 못하는 만큼 공노인으로서 억지춘향격인 일을 김두수가 공노인에게 꼬치꼬치 캐고드는 것보담을 그렇게 나오는 편이 훨씬 수얼하다. 도리켜 생각해보건대 그들 악인끼리 손을 잡을 리 없겠으나 잡은들 별 수 없다. 조준구 재산에 관한 한 조준구가 불법이었지 서희 쪽에선 빈틈없이, 합법적으로 회수하였으니까, 김두수의 촉수가 혜관이나 김환이 있는 지리산 쪽에 뻗쳐 있지 않다면. 잠자코 술을 마시던 김두수
"조준구는 아주 작살이 난 게요?"
역시 궁금한지 묻는다.
"거의."
"뭘 어쨌기에 그리 됐소?"
"알면서 왜 물을꼬?"
"안다 해도 당사자들같이야 확실하겠소?"
"확실히는 알아 어디다 쓸려구, 광산과 미두를 해서 그랬지 뭐."
"뒷돈은 이쪽에서 대주고,"
"인심 조오치. 만석살림을 빼앗기고도 사업 밑천 대어주었으니, 으허허헛..."
"사업 밑천을 대어주어요?"
"작살난 거야 제 운이 없었거나 아니면 천벌을 받았던 게지. 이치가 제가 한 몫은 제 차지, 남이 대신 해주진 않아. 콩 심은 데 콩나고 아편 심은 데 아편 나고."
"흥."
공노인이 말을 비웃는다.
"그나저나 경상도 양반, 뭉개진 왜짚세기 같이 못생긴 계집을 얻어살 건 뭐란?"
"뭐라구?"
"기왕이면 다홍치마랬다구 송애는 거기 비하면은 천하일색 양귀비 아닌가."
"까마귀 고길 먹었소? 내 계집 아니라 하잖았소. 하녀요 하녀! 멀쩡한 정신으로 주정을 왜 하는 게요."
"아 참, 그랬었던가? 그래 송애는 어떻게 하였나."
"봉천까지 데리고 갔다가 떼내지 못해 땀을 뺐지요."
"그래 어찌 되었나."
"보나마나 술집 신세 안 졌겠소?"
"죽일 놈,"
"적선했지요."
"뭘 적선했나."
이때부터 공노인 감정에 에누리가 없어진다.
"싹수가 노랬어요. 나, 독립 운동하는 놈과 여자 하나는 잘 보거든. 양딸이랍시고 시집도 보내야 해, 앓는 이 빠진 꼴이 됐지요 뭐."
"이놈아, 콩 심은 데 콩 나고 아편 심은 데 아편난다!"
"나지요. 그거 뻔한 얘기 아닙니까? 한데 아편이 콩값보다 비싸다는 것 모르는 모양이구먼."
"뭣이 어째? 이 개놈아!"
"나 화나면 미치니까 웃어야지. 하하하핫, 핫핫..."
하다가 김두수는 뒤로 벌렁 나자빠진다. 단쟁 자락이 걷히고 디룩디룩 살찐 종아리가 불빛을 받고 고깃덩이처럼 번들거린다. 공노인은 술상을 때려 엎고 일어섰다. 현관문을 나서면서,
"개놈 같으니라구."
공노인이 어둠을 향해 몇 발짝인가 걸었을 때 두르륵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욕설이 공노인 뒤통수에 마구 날아온다. 그러나 발목을 현관 기둥에 묶어버린 듯 달려오지는 않는다. 공노인은 돌아보며,
"개상놈아."
외치고서 하늘을 향해 주먹질을 한다. 김두수는 멧돼지처럼 날뛰었으나 여전히 달려오지 않았다. 얼마를 걷는 동아 김두수의 악쓰는 소리는 차츰 멀어져갔다.
"짐승이지, 설마 사람일까?"
공노인은 취기가 도는 머릿속에서 조준구와 김두수를 비교해보고 있었다.
'확실히, 확실히 조준구 놈이 더 악인이다. 저놈은 개지랄이라도 한다. 내야 원래 나쁜 놈이지 하고 들내놓기도 한단 말이다. 음.'
이튿날 해가 한 뼘쯤 남았을 무렵 공노인은 용정에 도착했다. 집에 들어서자 그는 월선의 용태부터 묻는다. 방씨는,
"이녁 겉은 한량이 그거는 머할라꼬 묻소."
"한량? 엔병지랄하는구만?"
전에 없이 욕설을 하며 공노인은 화를 낸다.
"늙어감서, 안 하던 욕가지 하네. 아 그렇기 걱정이 되믄 와 진작 못 왔소!"
방씨도 화를 낸다. 물으나마나, 대답하나마나 월선의 용태는 뻔하지 않는가. 몇 달 동안의, 아니 몇 년 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듯 공노인은 자리에 주질러앉는다. 기적을 바라며 온 것도 아니었고 내내 월선을 생각하며 온 것도 아니었다. 성은 모조리 함락했고, 그것이 비록 최서희를 대신한 대리전이긴 했었지만 심혈을 기울였던 과제는 끝난 뒤의 허무, 알맹이가 떠나고 빈껍데기를 느끼는 순간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월선이, 가슴에 주먹질하며 통곡하고 싶은 기왕의 현실이 공노인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허둥지둥 곰방대를 찾는다, 담배쌈지 속에 골통을 밀어놓고 담배를 재는데 담뱃가루가 방바닥에 출출 떨어진다.
"언제 우떻기 된지 모리는데."
"..."
"홍이애비 그 목이 뿌러져 죽을 인사는 코끝도 안 보이고 어느 누가 그 아아 머리맡에 앉아줄 기라고 이녁을 그리 태평이오."
방씨, 찔금거린다.
"초상이 났단 말가! 방정스럽게 울기는 왜 우노!"
피워물었던 곰방대를 뽑아 마누라를 칠 듯이 내저으며 화를 낸다.
"이녁도 이사 말 안 들었는 기요? 남이사 모라도 이녁은 아는 일 아니오?"
"으흠..."
"생각하믄 괘씸해서, 괘씸해서 이가 뽀독뽀독 갈리요. 전생이 일 월선이가 그놈의 집구석 이가놈의 집구석에 얼매나 빚이 졌기에 이렇기 모지락스럽게도 당하는가. 그놈의 식구들 아니믄 와 벵이났이꼬? 지 하나 주둥이 묵으면 얼매나 묵을 기라고, 그 고된 장시하니라고 벵이 났지."
넋두릴 하면서도 공노인이 갈아입을 옷을 챙겨 내놓는다. 그러나 넋두리하는 숙모의 마음보다 말이 없는 삼촌의 마음이 더 아플 것은 정한 이치다.
"내사 마, 가고 저버도 안 가거마는. 보믄 눈물이 나싸아서 아픈사람 마음만 심란할 게고."
"먹는 거는 좀 어떻는고?"
"참판네댁에서 조심부리 임석을 내리보내는데 속에서 받아야 말이제."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옷을 갈아입은 뒤 공노인인은 냉수를 가져오라 하여 한 대접을 다 들이켰다. 대접을 내동댕이친 공노인은 자그마한 무명보따리 하나를 들고 간다온단 말없이 집을 나선다. 길서상회댁 대문을 들어서면서 공노인은 길상을 찾는다.
"주인어른 하얼빈 갔소꼬망. 아직 앙이 돌아오셨습매다."
하인의 대답이다. 방으로 들어갔을 때 서희는 윤국이를 안고 있다가 유모에게 건네준다.
"그새 많이 컸구만요."
"오시는 길이오?"
"예."
"수고가 많았소."
"이것저것 마무리 짓노라 이번 행비는 시일을 많이 잡아먹었습니다."
"그랬을 테지요."
"들어오면서 듣자니까 도련님 부친께서는 하얼빈에 가셨다구요?"
"가셨소."
"무슨 일이?"
"돌아가신 김훈장 유품을 가지러 가신다구."
"아, 예예."
"..."
"그러면은,"
공노인은 삼 보따리 같은 무명보자기를 끌러 서류뭉치를 꺼낸다.
"이것은 집문서올시다."
서류 속에 끼여 있는 봉투 하나를 꺼내어 서희 앞으로 내민다. 서희는 집어 들고 봉투 속의 서률 꺼내어 대강 훑어본다.
"제가 본 바로는 조촐했습니다마는,"
"집은 비웠어요?"
"예, 집 볼 사람을 구해서 넣어놨습니다. 생각한 것보다 진주란 곳은 엉성하더만요. 두드러지게 큰 집도 없고."
공노인은 나머지 서류뭉치를 또 밀어내놓는다.
"이젠 바닥이 났습니다."
말없이 서희가 서류를 들춰보고 있는 동안 공노인은 허탈한 상태로 멍하니 창문 쪽을 쳐다본다. 굵었던 눈망울이 축 늘어져 보인다. 이제 일이 끝났다. 사오 년 동안 조선을 내왕하며 미치듯 몰두했던 자기 자신이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제 회령에서도 그런 생각은 아니 했다. 아니 오늘 용정으로 오는 마차 속에서도 그런 생각은 아니 했다. 객줏집, 자기 집에 들어섰을 때, 십년, 이십 년을 한꺼번에 건너뛴 것 같은 노쇠한 자기 육신을 느낀다.
"한 오백 석 가량 남았지만 그거야 이삼 년 생활비로 다 들어갈깁니다."
중얼거리듯 말한다. 서희는 서류를 한테 모아 옆으로 밀어내놓으며,
"요즘 봉순이는 어떻게 지내던가요."
"예, 이번에는 서울에도 없고 지방으로 내려갔다는 얘기였습니다마는 어느 지방으로 내려갔는지 알 수 없더구만요. 제발 소리공부나 하고 있었으면 좋으련만, 독심이 없어서. 모두들 얘기가, 지긋이 공부하면은 명창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한데도 번번이 중도지폐, 이번에도 공부하러 내려갔다 하기는 했으나 한두 번이라야지요. 보기는 안존한데 정이 헤퍼서 중심을 못 잡는 모양입니다. 소리공부 하러 갔대도 그렇고, 어디 알거지 같은 사내를 얻어갔대도 그렇고 얼마 안 있어 서울로 또 오겠지요."
공노인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 동안 봉순에 대한 소식은 그 범주에서 벗어난 일어 없건만 서희는 서류를 훑어보고 난 뒷면 반드시 봉순의 얘기부터 묻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공노인 말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일은 없었고 질문이 없는 서희에게 공노인은 또 습성처럼 보고를 시작한다.
"이분에 가니까 이부사댁 젊은 양반이 일본서 돌아오셨더구만요. 저는 무식해저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임역관 댁 자제분과 몇몇 분이 함께서 책을 내신다고, 그런 말심을 들었습니다. 몸이 많이 축난 것 같고 술이 과하신 눈치더군요. 음 또 그라고 석이 그 아이 말심입니다마는 조준구 집에 더 있을 일도 없구 해서 진주로 내려갔습니다. 석이 말이 서기질이나 하겠다면서, 여러 가지로 그 아이 한 일이 많았습니다. 마음으로야, 조준구를 쳐죽이고 싶은 적이 한두번 아니었겠지요. 잘 참아주었으니, 마님께서도 각별히 유념하셔야,"
공노인은 최종 보고를 하면서 문득 서희가 전처럼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는 것을 깨닫는다.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 친다.
'공노인.'
'예.'
'공노인.'
'예.'
별안간 최서희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공노인도 허허허헛 하고 웃는다. 공노인의 웃음은 울음 같았고 최서희의 돌연한 웃음은 미친 것 같았다. 그 웃음은 이내 멎었다.
"수고가 많았소, 공노인."
"별말씀을."
"우리 차차 의논하기로 하고 피곤하실 텐데 가서 편히 쉬십시오."
"네, 그러겠습니다."
일어서려다 말고
"아 참, 회령서,"
공노인은 도로 앉으며 김두수를 만난 얘기를 한다. 서희는 유심히 들었을 뿐 역시 아무 말이 없다.
7장. 벌목장의 오두막
추수가 끝난 들판이 동토로 변하는 것은 삽시간이다. 명년에 찾아올 봄의 파종 시기도 삽시간이고 보면 그 삽시간 틈새에 가을갈이를 해놓는 것은 좋다. 좋다는 걸 뉘가 모르는가, 소를 빌리는 게 문제였다. 아무튼 용이는 소를 빌렸고 가을갈이를 하고 있었다. 나뭇잎을 다 털어낸 발둑의 고목이 엷어진 햇살을 엉거주춤 받고 있다. 쇠꼬리가 흔들릴 때마다 쟁기는 앞으로 쑥쑥 빠져가고 검게 기름진 흙이 이쪽저쪽으로 갈라지며서 흩어진다. 밭둑을 넘어 발 끝을 넘어 밭을 밟고서
"이랴! 이랴!"
소가 되돌아오면은 쟁기도 방향을 돌려 오던 길을 되돌아가는데 이러기를 몇 차례인가. 밭둑에 밋밋이 서 있는 고목 한 그루갈이 용의 모습도 그러하다. 밋밋이 하고 물기 빠진, 나무는 동면으로 들어갔을 테지만 용이의 끝없이 되풀이되는 움직임만 같으다. 가끔 야트막한 둑길을 길손이 지나가고 멀리 쟁기질하는 농부가 한둘 눈에 띄기도 한다. 밭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저 끝에서 이 끝으로 되풀이되는 쟁기질, 회뿌연 해는 중천에서 기울고 밭둑길을 밟고 멀리서 임이네가 점심을 이고 온다. 쟁기질을 하는 용이와 점심을 이고 오는 임이네의 거리는 가까워지지만.
"점심 가지고 왔소."
용이는 말이 없고 거들떠보지 않는다. 발 끝까지 소를 몰고 간 뒤 소에서 쟁기를 풀고 둑 밑에 박아놓은 말뚝에 소를 맨다. 밭둑으로 올라온 용이는 마른풀을 내려다보며 펄쩍 주저앉는다. 통 속에서 주전자를 꺼내어 술부터 한잔 마시고 다음 조와 콩을 섞은 밥을 먹기 시작한다. 그때까지 장석처럼 서 있던 임이네가
"우떤 사람이 집에 와서 기다리고 있소."
"와."
"이녁 만나러 왔다 카드마."
"그라믄 같이 오지."
아무 말 안 한다. 손님은 내버려두고 슬며시 나왔을 거시 틀림없다.
"어디서 왔는고?"
"용정서 왔다요.":
대답하면서 눈을 흘긴다.
"손 왔다는 얘기라도 함께 인심 좋아졌구마."
"흥."
"그 손님 임자 아들네미가 보낸 사람은 아니든가?"
밥그릇만 내려다보고 밥을 먹으며 묻는다.
"뭐라꼬요? 홍이 말이오!"
"에미 보고 접다는 전갈이나 아니든가?"
"그저, 용정서 사람 왔다는 말마 하믄 붙었던 입도 떨어지고 안하던 농담도 하고 흥!"
"..."
"그놈이 내 새끼든가? 그년 새끼 다 됐지. 오금 겉은 남으 자식, 생나무 가르듯 빼앗더니, 하늘이 무심하까. 벌받아 벵이 났지."
"공부시키지 말고 데리고 오지. 나무나 해 나르게, 그라믄 주머니 돈 몇 닢이 불어나겄지. 못 그래서 분하기야 분할 기구마."
"그렇소! 그래요! 내가 낳은 자식 볶아묵든 지져묵든 누가 말할기요!"
용이는 밥을 씹으며 먼 들판으로 눈을 던진다. 도시 마음이라곤 한 오래기도 없는 눈이다. 숟가락을 놓고 숭늉을 마신다. 임이네는 술주전자와 술잔 그리고 고추장 보시기 하나를 남겨놓곤 빈 그릇을 통 속에 챙겨 넣는다.
"봐라."
밥통을 이고 일어서며
"머 또 할 말 있소?"
"내가 일하다 들어갈 수 없고 소를 놀릴 수도 없인게 용정서 왔다는 사람 이리 오라고 하지."
"답답은 사램이 우물 판다 캅디다. 내가 멋 땜에 그런 심부름 할기요. 흥! 궁둥이가 덜석덜석하겄소."
"하모 궁둥이가 와 덜석덜석 안 할 기고. 죽었다믄 재산 정리하러 쫓아갈 기고, 아니믄 누가 아나? 죽기 전에 벌어놓은 돈 주라꼬 날오라 카는지."
"누구 비양치는 거요! 그까짓 앵이곱은 돈 조금도 안 반갑소!"
용이 담배를 붙여 문다. 그리고 부지런히 돌아가는 임이네 뒷모습을 바라본다. 임이네가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길에 괴나리봇짐을 겨드랑이에 낀 사내 하나가 우줄우줄 걸어온다. 안면이 전혀 없는 사내다. 땟국이 조르르 흐르는 초라한 사내다.
"여보시오."
용이 눈을 들어 본다.
"댁이 이용이란 사람이오?"
"그렇소."
사내는 비스듬한 밭둑길을 뛰다시피 내려온다.
"세상에 그런 인심이 어디 있담?"
"..."
"진작 가르쳐주었으면, 갈 길이 바쁜 사람인데,"
불평을 늘어놓는다. 용정서 왔다는 것만으로도 눈꼴이 사나웠을 임이네, 초라한 몰골의 나그네를 무던히 박대했을 것은 뻔한 일이다. 용이는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다.
"거, 형씨 마누라요?"
"그렇소."
"방망이 좀 안겨야겠습니다."
대답이 없자 나그네는 부르튼다. 꽤나 고지식하게 생긴 얼굴이다.
"하여간에 부탁받은 일이나 치루고 가야지. 다름이 아니라 편지 한 장을 받아왔소."
사내는 허리춤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며
"꼭 이용이라는 사람한테 전해야지 다른 사람은 주지 말라 하기에, 여 있소."
용이는 편질 받는다. 받았을 뿐 들여다보지도 않는다. 사내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랬었는지 묻지도 않는데 편질 받아온 경위를 설명한다. 역두에 중학생이 하나 나와 퉁포슬 가는 사람을 찾더라는 것이다. 나그네는 내가 간다 했더니 편지 전해주면은 마차 삯을 내겠노라, 그래 선뜻 전하마 하고 받아온 거시라 했다.
"자세히 가르쳐주어서 집 찾는 데 힘이 들진 않았으나 아까 그 여인네가 그 중학생의 계모는 아니오?"
"생모요."
"헌데 어찌 편지는 형씨한테 전해야 한다고 당부 당부 했을까?"
그 말대꾸는 아니 하고
"술 한 잔 드시겄소?"
"주시면 고맙지요."
몹시 시장하고 갈증이 난 듯 용이 부어준 술 한 잔을 사내는 들이켰다. 얼마 후 갈 길이 바쁘다며서 사내는 떠났다. 소는 마른풀을 뜯고 있었다. 용이 얼굴에 소름이 돋아난다. 천천히 편지 피봉을 찢는다. 홍이 편지가 들어 있었다. 먼저 인사말 몇 마디 적고,
'편지 받으시는 대로 곧 용정에 오시기를 소자는 바라고 있습니다. 오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병환은 날로 나빠져서 언제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만일 이번에도 아버지께서 아니 오시면은 소자 대단히 당돌하오나 아버지를 다시는 뵈옵지 않을 것을 결심하였사옵니다. 재차 엎드려 비옵니다.'
용이는 담배 한 대를 더 태우고 나서 천천히 일어섰다. 소를 몰고 아까처럼 발끝에서, 저 끝으로 다시 이 끝으로 끝없는 반복을 되풀이할 뿐 철새가 무리지어 날아가는 하늘 한번 올려다보지 않는다. 소 임자에게 소를 돌려주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사방은 어둑어둑했다. 영팔이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자 오나."
"음."
"밭은 다 갈았나?"
"음."
"용정에서 사람이 왔다면?"
"음."
"무신 좋잖은 기별이라도 있었나?"
"머, 별일 아니다."
"그런데 와 일부러,"
"일부러 보낸 기이 아니고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이라."
"그런가?"
"밥은 묵었나?"
"묵었지."
"방에 들어가자."
호롱불을 켜놓고 두 사내는 우두커니 서로 마주본다.
"니 용정에 한분 가보지. 가을갈이도 했고 했이니,"
불안스럽게 쳐다본다. 실상 영판은 월선이 아프다는 것은 알지만 위중한 사정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곧 산에 갈 긴데..."
"아직 얼매간의 시일은 안 있나."
"..."
"한분 갔다오지."
"산판일 끝나믄 갈 긴데 머."
임이네가 저녁상을 들고 와서 메치듯 내려놓는다.
"아지마씨."
영팔의 노한 눈이 임이네를 쳐다본다.
"와요? 무신 할말 있소?"
"질기 그러다가 뜨거운 꼴 한분 볼 기요."
"아이고 무서바라. 이가네 집구석에서 쫓기나믄 이 일을 우짜노? 당장 바가지를 들고 사도거리에 나갈 긴데, 흥!"
"내 겉으믄 그만,"
"그만? 우짤 기요? 가랑이를 찢어부릴라요?"
번번이 있는 일이다. 그럴 때마다 당하는 것은 영팔이었다. 그것을 알면서 영팔은 못 참는다.
"흥, 무시 할 일이 없어서 남의 제집까지 챙길라 카는고? 앵이곱고 더러바서 할 일이 없이믄 햇빛에 나가서 흰머리나 뽑을 일이지."
방문을 탁 닫고 나간다.
"어이구 가심이야."
가슴을 치는 것은 용이 아닌 영팔이다. 임이네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용이는 남의 일을 구경하는 구경꾼으로 뒷전에 물러나 있었으니 그것을 바라보는 영팔이 견디질 못하는 것이다. 그는
"목에서 이런 게 올라온다!"
하며 주먹을 밀어올리곤 했었다. 사실 주위에서 보기엔 용의 무관심은 뱀꼬리처럼 차갑고 무자비한 것이었다. 해서 영팔이는 용아,니 심장은 쇳덩이로 됐느냐, 하고 물었으나 줏대 없는 사내라고 나무라진 않았다. 그러나 그런 면에선 우둔한 임이네다. 설령 우둔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개의할 임이네는 아니었지만, 방자하기로는 천성이라 치고 날마다 느는 것은 신경질이었다. 왜 신경질이 느는가. 그것은 초조하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월선의 죽음을 기다리는 심정에서도 그러했고, 만일 그가 죽고 나면 얼마나 될지 모르는 재산은 과연 어찌 될 것인가, 공노인이 차지할 것인가 아니면 홍이 몫으로 떨어질 것인가. 홍이 앞으로 떨어진다면 그것이 순조롭게 자기 손으로 굴러 들어올 수 있을까? 도시 월선의 재산은 얼마나 되며, 이미 자기 모르게 처리된 것이나 아닐까? 홍이아배하고 무슨 암약이 있는 것이나 아닐까? 용정촌 동정에 대해서는 극도로 예민해진 임이네다. 가능하다며 그곳으로 가서 월선의 주변을 맴도는 것이 가장 상책일 것인데 꿈쩍 않고 용이 뻗치고 있는 것도 미워서 견딜 수 없고 시시로 신경질이 발동하게 되는 것은 순전히 재물과 관련이 있다. 졸갑스런 귀신이 물밥도 못 얻어먹는다는 옛말처럼 임이네 신경질은 또 졸갑 그것이기도 했다.
"용이 니도 참말이제 팔자 사나운 놈이다. 우짜다가 저런 계집을 만나서, 삼신도 눈이 어둡다."
영팔이 한숨 섞인 말을 했다. 홍이가 나지 않았으며 저런 악종계집을 짊어졌을 리 없었을 것이란 뜻이요, 월선에게 기출이 있었다면 하는 뜻이기도 했다. 영팔은 이십 년이 가까운 옛일을 생각한다. 월선이가 달아났을 때의 일을. 그때 용이는 앓았었다. 앓고 일어난 용이는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일을 했었다. 마누라 옷가지 빨아준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강청댁은 자파한 사람처럼 암담한 성질로 변했던 것을 영팔이는 알고 있었다. 용이 얼마나 무서운 사내인가를, 부부관계를 갖지 않았던 것을 영팔은 알고 있다. 말없이 밥을 먹고 있는 용이를 바라본다. 주름지고 여윈 것도 그렇지만 사람이 바스라진 것만 같다. 영팔은 이십 년 전의 용이 얼굴을 생각해보려 했으나 그때 얼굴을 기억해낼 수가 없다.
'나는 그래도 아들이 삼형제, 이자 다 안 컸나? 판술에미도 나 없이믄 죽을 줄 알고, 고생이다 고생이다 함서도 자식 가장밖에는 모리는데, 어디 세상에 임이네 같을라고. 도척이도 저러지는 않았을 기다. 클 때는 용이가 우리 또래에선 젤 잘살 줄 알았다. 농사꾼 되기 아까분 인물이라 안 했나. 우짜다가 인연이 잘못돼가지고 저 꼴이 됐노. 계집이 사나아를 잘못 만내도 골벵이지마는 남자가 계집을 잘못 안내도 일생이 허사라.'
"이봐라."
용이 쳐다본다.
"니 그만 홍이하고 월선이를 데리고 그만."
"..."
"그마 소리도 매도 없이 가부리라."
"..."
"그렇기 하믄 월선이 벵도 나을지 모르지. 니도 사람답게 한분 살아보고,"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머라꼬요?"
임이네가 방문을 박차고 들어선다. 행여 용정의 얘기나 하지 않을까 싶어서 엿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 한 말 한분 더 해보소!"
"하라 카믄 못 할까봐요!"
증오에 차서 임이넬 노려본다.
"멋이 어찌고 어째? 홍이하고 그년하고 소리도 매도 없이 가부리라?"
"그랬이니 우떻단 말이오."
"내하고 무신 철천지 원수가 져서 그러노오! 니 할애빌 잡아묵었나! 니 에미를 잡아묵었나!"
막 나온다
"아니 이 계집이,"
그러다가 영팔은 악이 오르는 모양이다. 용이 숟가락을 놓고 밥상을 밀어낸다.
"으응? 세상 좋구나! 과연 좋구나. 죽으라믄 죽는 시늉을 내도 멋할 긴데 사람을 밟아? 야 세상 좋고 돈 좋구나! 이 좋은 세상에 돈에 둥때난 계집은 거 누구 딸맨치로 화냥질을 하는 기다!"
영팔이 과거사를 건드려 말하기는 처음이다. 임이네 기가 꺾인 듯 했으나 다음 순간
"오오냐! 돈 내놔라 이놈아! 너 먼지 붙어묵을란다!"
밥그릇이 날았다. 임이네 어깻죽지에 맞아 방바닥에 떨어지면서 그릇은 깨어지고 남아 있던 수수밥알이 사방에 흩어진다.
"아이고오! 분하고 원통하고오!"
다리를 쭉 벌리고 앉아 통곡이다. 용이는 일어서 나가고 영팔이도 할 수 없이 피할 수밖에 없다. 이런 소동이 벌어진 지 사흘이 지났을까? 첫새벽에 임이 남정네 허서방이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왔다. 용이는 겨울 땔감을 보태기 위해 마른풀을 메려고 지게와 낫을 챙겨들고 있었다.
"자, 장인!"
"아침부터 왜 이러나."
"다, 다, 달아났습매다."
"뭐가?"
"구, 구야에미가 다, 다, 달아났습매다!"
"뭐라구?"
"옷으 챙게가지고."
하다가 마당에 펄쩍 주저앉는다.
"이 일으 어쩝매까! 어이구 이 일으 어쩌믄 좋지비?"
"아침부터 무신 일인고? 어디 초상이 났나?"
부엌에서 들었을 터인데 임이네는 딴청이다.
"장모! 내 말으 들어주시기요. 구, 구야네 장모보고서리 어디 간다 말하지 않았슴둥?"
"어디 가다니?"
"다, 달아났소꼬망! 옷으 챙게가지고 다, 달아났다 말이! 장모! 말으 해주소꼬망! 어디에 가다 했습매까!"
"아닌밤중에 홍도깨라더니 무시 소린고, 내사 통 못 알아듣겄네."
"어이구 이 일으 어쩌지비? 간나이 새끼는 누가 키운답매? 어이구우,"
"차라리 잘됐네. 질잖은 일이라믄 일찌감치 조짐이 나는 기이 낫다."
우두커니 서 있던 용이 내뱉은 말이다.
"앙이 됩매다! 그년을 찾아야 합매다! 장모 그년으 간 곳으 가르쳐주옵께나. 딸으 가 곳으 모를 리 있겠슴둥? 어망이한테는 한마디 하고 가잲앴겠음? 가르쳐줍세."
"이거 참말로 학을 떼겄네. 임자가 간수 못한 년을 낸들 우짤 기든고? 알면서 와 안 가르쳐줄꼬? 허 참, 별의별 일이 다 있고나. 그년 땜에 내가 당하는 거를 생각하믄 이가 뼈가 갈린다. 하기사 화냥질을 하드 사당질을 하드 그년 꼴 눈앞에 아 보는 편이,"
허서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면은 좋습매다! 장모가 우리 구야르 맡아주시기요! 그거를 달고서리 그년으 찾아다닐 수는 없잲이요?"
"아이구 맙시사!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와 내가 너거들 새끼를 맡노. 그런 소리 두분 다시 했다 봐라! 제년을 키워 시집도낸 것만도 태산 같은데, 자네도 알다시피 여기는 이씨네란 말이다! 이씨네! 어디 그년이 이씨 성이든가?"
임이네는 펄쩍펄쩍 뛴다. 용이는 온다 간다 말없이 지게를 지고 나가 버렸고 허서방은
"좋소! 좋단 말이!"
외치며 달려간다. 한참 후 그는 여섯 살짜리 사내아이 손목을 끌고 왔다. 얼굴에 코와 눈물이 범벅이 된 아이는 연신 소리소리 지르며 울어댔다. 임이네 마당에 뻗치고 서 있었다.
"안 된다믄 안 되는 줄 알아라! 이 집이 뉘 집인데 허가네 자손을 받을 기고오!"
고래 땅 같은 소릴 지른다.
"그년으 여기 딸이라 말이! 찾아달래래잲으 것만도 고맙지비!"
"뭣이 어째?"
"아일 맡으랑이! 사람으 탈으 쓰고서리, 외손자는 자식 앙임둥?"
아이를 밀어내고 밀어들이고 아이는 왕왕거리며 울다간 파아랗게 질리고, 종내 허서방은 아이를 내버려둔 채 임이를 찾는다면서 동네를 뛰쳐나갔다. 농가가 띄엄띄엄 있는 마을에서도 임이는 늘 화제였는데 도망을 쳤다는 말 은 꽤 심심찮은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 독한 여자가 손주아일 굶겨죽일 게야."
"어째 굶기죽인단 말이? 사위네 집에서 양식 퍼가던데? 내 이 눈으로 똑똑히 봤답매. 양식 가지가구서리 간나르 굶겨직여? 그러면은 참말입지 벌받는당이."
"벌 받는 걸 생각하나?"
임이네 얘기서부터
"자식 두고 가는 년 앞길이 뻔하지 뻔해."
"간나새끼느 말할 것도 없지비. 아이애비 눈이 화등자 같아도 샛서방하고 댕기던 거를 생각 앙이 합매?"
어쨌거나 아이가 눈물과 콧물과 땟국이 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서 양지바른 곳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마을 사람들은 가끔 보게 되었다. 아이는 어망이 하고 울지는 않았다. 아방이 하고 울었다. 그것은 찍히고 할퀴우고 상처투성이가 될 한 생장의 출발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시간은 간다. 인간사의 격동이 무슨 상관일까. 경천지동이 무슨 상관일까. 시간은 천연스럽게 가는 것이다. 용이와 영팔이 그리고 영팔이 큰아들 판술이는 제철이 되었으므로 보따리 하나씩을 들고 예년과 다름없이 산을 향해 떠났다. 여전히 시간은 무심히 가고 있었다. 능란한 벌목군 용이와 영팔이는, 그러나 이젠 힘이 부치는 노동이다.
"이젠 늙었고나. 이 짓도 앞으로 얼매나 해묵을란고?"
일을 끝내고 벌목꾼들이 묵는 오두막에 돌아온 영팔은 장작불 앞에 앉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마 올해로 끝장날 것 같구먼. 나이 들면 별 수 없는 거야. 제아무리 항우장사라 해도 늙는 것은 못 당하지."
밥솥에 불을 지피던 벌목군 송서방 맞장구에,
"그렇슴. 그렁이 고래장을 한단 말이. 제발 제발 올해만 해먹고서리 물러가랑이. 젊은 놈도 그래야 벌어먹잲잉요?"
"아따 지랄 같은 소리 하네. 아 그럼 너도 젊은 축에 든다 그 말이야?"
"오뉴월 하루 해가 무섭다는 말으 앙이 들었슴둥?"
"얼매나 아쉬우믄 저런 말을 하까. 그거는 둘짜리 아아들이 나보고 하는 말이고 고래장감으로는 피장파장이라."
영팔의 말이었다. 용이는 곰방대를 물고 잠자코 있었다. 한편에선 옷을 벗고 이를 잡는 사람도 있다. 오두막 하나에 열 명 가까운 일꾼들이 묵는다. 취사는 돌려가며 교대로 했고 나무는 무진장이어서 오두막 안은 훈훈했다.
"저녁밥이나 처먹고 나서 이 사냥을 하드 곰 사냥을 하든 할 일이지 피 묻은 손톱으로 밥 먹을 거야? 입맛 떨어지게,"
정갈한 서울태생 유가가 눈살을 찌푸린다.
"가려워서 미치겠는 걸 어떻게 해?"
"거 등짝 보니가 떡 쳤으면 좋겠는 걸?"
"떡을 치든 굿을 치든 이놈의 이나 싹 쓸어주었음 좋겠네."
방안은 불길과 사람들 입김으로 오히려 후덥지근한 편이다. 밥솥국솥에서 피어오르는 김 때문에도 그러했고, 김과 담배연기는 안개처럼 자욱하다. 사람의 모습, 불빛 그리고 의식까지 혼합이 된 듯 방안은 차츰 몽롱해진다. 용의 얼굴은 더욱더 몽롱하다.
"금년 들어 아주 진가가 쭉 빠지는 모양이지?"
"뉘기?"
"이서방 말이야."
"그 사람으 원체 말이 없답매."
"그렇지 않어. 술적슬적 하는 말이 여간 익살스럽지가 않았다구."
"익살이구 대살이구 우리도 멀잲이요. 담박 저꼴 된당이. 남으 걱정 그만둡세."
"허참, 산을 내려갈 적에는 수울찮은 돈을 쥐고 가는데 말이야. 그게 꼭 물을 쥔 것 같단 그 말이야. 언제 빠져나갔는지 빈 손바닥을 들여다보면 기가 차지."
"험하게 번 돈으 험하게 쓰기 마련임매."
"험하게 벌다니? 도둑질로 벌었단 말이야?"
대답은 서울태생 윤가가 한다.
"아따 도둑질이 그리 험한 벌인 줄 아냐? 울타리 넘으면 그만이지. 그건 좀도둑의 경우고 큰도둑이야 푹신한 보료에 앉아 긴 담배대를 물고 에헴! 에헴! 하고 있어도 재물은 저절로 쌓이는 게야. 벌목꾼같이 험한 벌이가 어디 또 있을라고."
"험하기론 광부도 그렇지. 그 바닥은 더 험하다구."
"그나저나 돈을 쓰게 되는 건 목돈이기 때문인데 간덩이가 커지거든. 몇 달 고생했으니까 한잔, 한잔에 끝이 나야지. 홀애비는 목돈 손에 들고 그냥 갈 수 있어? 여잘 찾아갈 수 없는 거야. 그러다보면 돈은 절로 술술, 옛다! 모르겠다 될대로 돼라! 그렇게 되는 게야."
"제일 좋은 것은 선금 받고 오는 건데. 그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단 말이야. 선금을 받고 하는 일은 어쩐지 공일을 해주는 것 같아서 신명이 안나거든."
"선금 주는 사람은 또 어디 있구."
"그러니까 사람이란 본시부텀 도둑 심보라. 그저 그날 벌어서 그날 사는 게 우리 같은 처지에선 제일 좋은 거지. 가족들 입치레는 맘 놓아도 되니까. 그러나 그놈의 날일도 일 년 열두 달 눈비 오는 날 빼고 하면은, 고생이야 타고난 것, 사는 날까지... 젊은 시절에는 설마 내가 뭘 한들 남만 못살까 보냐 했었지만,"
일꾼들은 둘러앉아 타령이다. 이러 생활의 연속...
"어이 배고프다. 밥이나 먹자."
오두막 안에 찬바람이 씽 하고 몰려든다. 등불이 흔들린다. 뿌옇게 서린 공기가 맴을 돈다. 두 사람이 눈을 털고 들어섰다.
"영팔이아제!"
소년이 소릴 질렀다.
"이기이 누고!"
"아제!"
"홍아! 니가 우짠 일고? 니 아부지 저기 있다."
홍이는 소매끝을 끌어당겨 눈물을 닦으며 돌부처 모양으로 앉아있는 용이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누구야?"
누군가가 묻는다.
"누구긴? 이서방 아들네미지."
"학생이구만."
"중학생이구마."
영팔이 자랑스럽게 뽐낸다.
"여기까지 머하러 왔노!"
돌부처 모양으로 앉아 있던 용이 입에서 노한 음성이 터져나왔다.
"몰라서 그릅니까."
새파랗게 질려서 홍이 대답한다. 눈에는 증오가 이글이글 타고 있다.
"죽었나?"
"그랬으면 저는 여기 오지 않았을 겁니다."
"무신 소릴 하노?"
영팔이 어리둥절해한다. 그러나 홍이는 양보하기로 결심한 듯 잠자코 구석자리에 가서 앉는다. 불안스럽게 용이와 홍의 얼굴을 번갈아보던 영팔이는 일꾼들과 어울려 앉아 있는, 홍이와 동행한 사내를 보고 묻는다.
"외팔이 넌 뭐하러 왔노."
벌목하다가 팔이 바스라지 사내는 아랫마을에 사는 이서방이다.
"술잔 값이나 벌라고 왔소."
"뭐?"
"저기 학생이 데려다달라 하기,"
"그라믄 홍아, 니 판술일 못 만냈다 그 말이가?"
"야?"
그러나 외팔이 이서방이
"판술이는 상계마을로 갔소. 우리 동네는 건건이가 떨어져서, 내일 아침에나 올 게요."
"판술이가 고생하는구먼."
누군가가 말했다.
"젊은니까, 어서 밥이나 먹자."
벌목꾼들은 밥솥을 중심하여 둘러앉는다. 외팔이 이서방도 그들 사이를 비비고 들앉는다.
"홍아 니도 오너라."
영팔이 불렀다.
"지는 안먹겠습니다."
"허어 빼지 말고 온나."
"배 안 고파요."
홍이는 구석자리에서 처박히듯 앉아서 대답한다.
"거 이서방 아들 하나 잘 두었군. 아까는 털모자 속이라 모르겠더니 인물이 훤하군."
"이서방 아잇적하고 꼭같지."
영팔이 밥을 먹으며 말했다. 외팔이는 얻어먹는 밥이어서 그런지 게걸스럽게 허둥지둥 먹는다. 용이는 모래알 씹듯 밥알을 씹고 있는 것 같다. 그 용이를 영팔이는 곁눈질하며 보곤 한다. 겨울이 아무리 길다 하여도 종일 고된 일을 한 벌목꾼들은 저녁이 끝나고 잠시 잡담을 하다가 아내 잠이 들었다. 모두 다 잠이 들고 산중의 밤은 바람뿐, 눈더미가 무너지는 소리뿐, 그리고 잠들지 못하는 사람은 용이와 홍이다. 홍이는 구석진 벽에 붙어 누웠고 그 옆이 영팔이, 용이 떨어진 저쪽 구석에 누워 있었다. 새벽녘이 가까워서 용변 보러 나갔다 온 영팔이 홍이를 흔들었다.
"아제."
홍이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이야기 좀 해보라. 나는 무시 영문인고 모르겄다."
"정말 모릅니까."
"그러세, 머 말고."
"옴마 아픈 것도 모른다 말입니까."
"알지. 그거사 알지."
"알면서 그런 말을 합니까."
"여기 산판일 끝나믄 너거 아부지 갈 거 아니가."
"산판일이면, 그게 대순가요?"
홍이는 울먹인다.
"옴마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산판에서 돈 벌어 팔자 고치겠소! 너무, 너무."
하다 흐느껴 운다. 소리를 죽여 흐느껴 운다.
"자세히 얘기 좀 해도라. 그냥 아픈 기이 아니다 그 말가?"
"아부지는 알아요. 옴마가 죽을 병이라는 걸, 알면서 아제보고 얘기 안 했는가 부지요."
"죽을 병이라고?"
비로소 영팔이는 깨달아지는 것이 있다. 용정에서 사람이 왔다는 얘기도 그렇고 용이의 심상찮은 근래의 태도도 생각한다.
"죽기 전에 하고, 이편에 편지도 보내고 했는데 아부지한테서 아무 소식도 없었소. 저는 두번 다시 아버지를 대면 안 할라 했지만 옴마가 불쌍해서 또 왔습니다."
영팔이는 코를 잡아당기다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른다.
"옴마는 며칠 못 가요. 의사도 그런 말을 했거든요."
"세상에 그 미친놈 좀 보게. 그게 온정신인가. 와 그라제? 나보고는 그런 말 입밖에도 안 냈다. 내가 지난여름에 갔을 때만 해도 니 옴마는 꿈직이길래 얼굴은 안 좋더라마는... 산판에서 금을 캔 것도 아니겄고 오늘만 내일만 하는 사람한테 그럴 수가 있나. 하여간에 내일 아침 맥당가지를 끌고서라도 가야지."
아직 날이 새려면 멀었다. 홍이 옆에 누웠으나 잠이 올 리가 없다.
'알다가도 모릴 일이제. 와 나한테 말을 안 하노 말이다. 우찌 보믄 그런 말 입밖에 내기 싫은 심정도 알 성싶기는 하다마는 그 성미에... 그렇지마는 용이는 와 거기 안 가노 말이다. 그기이 이상하지 않나. 남녀간의 정이 떨어졌어도 수천 리 타관에 와가지고 그럴 수는 없일긴데... 혼자 속으로 앓는 거는 확실하다. 이 몇 달동안 사람이 변한 것도 아지 보니 그 때문인데... 참,'
피리 소리 같은 샛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지쳐버렸는지 홍이는 잠이 든것 같다.
'월선이가 죽어? 월선이가... 허, 월선이가 죽다니 그게 웬말고,'
별안간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차고 올라온다. 눈언저리가 불덩이처럼 뜨겁다. 명주수건에 떡이랑 곶감이랑 약과랑 어미가 사준 제수음식을 들고 마을길을 헤작헤작 걸어가던 어릴 적 월선의 모습이 뚜렷하게 눈감은 망막에 떠오른다. 영팔이는 떡이랑 곶감이랑 그런 제수음식을 싼 명주수건을 쳐다보며 계집애 뒤를 따라갔다. 저절로 침이 넘어가고 나중엔 부아가 치밀었다.
'이눔 가시나, 나도 그만 무당새끼나 될 거로.'
침 넘어가는 것이 견딜 수 없는 영팔이는 계집애 댕기꼬리를 잡아당겼다.
"누가 이카노!"
계집애는 팔짝 뛰며 돌아보았다.
"누가 우쨌기?"
"와 남으 머리끄댕이를 잡아땡기노?"
"내가 안 그랬다. 바램이 그랬일 기다."
다시 헤작헤작 걸어가는데 더욱 심술이 난 영팔이는 댕기꼬리를 좀더 세게 잡아끌었다.
"와 이카노?"
"누가 우쨌기?"
"와 잡아땡기노!"
"내가 안 그랬다. 저기 저어기 깐치가 와서 그랬을 기다."
"누가 모를까 봐서? 용이오래비한테 일러줄 기다."
"일러. 그라믄 누가 겁낼까 봐서? 지 오래비도 아님서,"
사십 연도 더 되는 아득한 옛날의 일이다. 술에 취한 월선에미가 쓰러져 죽었던 그곳에서 비탈진 길을 자꾸 올라가며 앙상한 소나무와 오리나무가 몇 그루 있고 그곳에도 또 한참 가면 바로 영팔의 부모 무덤이 있다. 그곳에서 비스듬히 빠져내려간 고세 영팔이형 무덤이 있고 액병 때 죽은 계집아이는 어디 묻었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다. 영팔의 얼굴은 뜨거운 눈물로 젖는다. 월선이 죽을 것이라는 소식은 그간 뜸했던 망향의 설움을 몰고 온 것이다. 동이 텄다. 홍이 소스라치듯 일어나 앉았다.
"내려가야지."
영팔의 목소리였다. 희미한 속에 용이도 일어나 앉아 있었다. 곰방대를 물고 있었다. 홍이는 재빨리 외투를 입고 털모자를 깊숙이 내려쓴다.
"홍이 니 어젯저녁도 굶었는데 식은밥 한덩이 먹고 갈래?"
"싫습니다. 내려가다가 배고프면 사먹지요."
"외팔이는 깨울 것 없고, 자아 가자."
나서는데 용이는 옷과 털모자만 썼다뿐이지 보따리는 놔둔 채 나온다. 영팔이는 그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왠지 보따리 안 가져오느냐고 물어볼 수가 없다.
'하기야 판술이도 있고 나도...'
산을 내려가면서
"판수리기 오믄은 나도 곧 갈 긴께."
하고 영팔이 말했다. 대꾸가 없다. 얼마를 내려가다가 용이는 우뚝 멈추어 섰다. 홍이를 보는 것도 아니요 영팔이를 보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시선을 허공에 띄우며
"한 이레만 있이믄 여기 일이 끝나는데 일 끝내고 갈 긴께 오늘은 니 혼자 가거라."
"뭐라꼬?"
영팔이 뛰듯이 돌아섰다. 홍이는 매서운 눈을 하고 돌아보았다.
"오늘은 니 혼자 가거라. 일 끝내놓고 갈 기니,"
"정신이 있나!"
"정신 말짱하다."
"사람이 오늘만 내일만 한다 카는데 산판일을 끝내? 이놈아!"
삿대질을 하며 영팔은 고함을 질렀다. 그 말대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용이는 선 자리에서 움직이지를 않는다.
"좋습니다! 네 좋습니다. 산판일을 끝내고 오실 필요 없습니다."
번쩍번쩍 빛나는 눈으로 아비를 쏘아본다. 아들의 그 격렬한 눈을, 수천년을 괴어 있는 호수와 같이 맑았으나 빛이 없는 용이의 눈이 마주본다. 어떤 물체가 와도 그냥 퉁겨버릴 듯 차가운 눈이다. 늙어서 바스라지고 초라한 벌목꾼, 그러나 그 불가사의한 눈은 거대하기조차 하다. 정지한 그 상태가.
"좋습니다! 좋아요!"
홍이 달음막질 쳐서 뛰어 내려간다.
"홍아! 홍아!"
영팔이 외치며 뛰어 따라간다. 홍이 손목을 꽉 잡는다.
"홍아, 나랑 가자. 아제하고 같이 가자!'
하고는 용이에게로 몸을 돌린다.
"이 독사 같은 자석아! 니놈은 사람이 아니다! 그래 니놈은 산판에서 떼돈 벌어라! 오늘은 홍이 땜에 그냥 간다마는 어디 보자! 니놈 사지가 성할 긴가! 내 니놈을 직이부릴 기다."
용이는 길섶에 선바위같이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홍이의 울음소리, 죽인다고 소리 소리치는 영팔의 고함, 그러나 목소리도 모습도 사라졌다. 나무 위에 실린 눈이 바람 떠나 날아 내리고 일출의 장엄한 광경이 빛과 그늘을 부각하듯... 사방은 태고적 같은 침묵이 쌓여간다.
8장. 사랑
햇빛이 서편 창가에 두 줄기 비쳐들어 그 빛 속에서 시끄럽게 먼지가 날고 있었으며 이따금 풀쑥풀쑥 기어든 담배연기가 맴을 돌고 있었다. 겨울날에 모처럼 스며든 햇빛이건만 암울한 사람들 마음을 더욱더 암울하게 할뿐이다. 방에는 주름살투성이의 한층 얼굴이 길어진 영팔이 고개를 빠뜨리고 앉아 있었다. 얼굴이 새까맣게 탄 공노인은 담뱃대를 털기가 무섭게 누가 담뱃대로 뒤꼭지를 후려치기라도 할 듯 재빠르게 새 담배를 넣어서 불을 붙였고, 그것을 무한정 연기가 나든 안 나든 입에 물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방학이어서 학교를 쉬고 있는 방을 지키는 사람은 방씨였다. 이러기를 벌써 사흘, 월선은 기름 떨어진 호롱의 심지처럼 기름 아닌 심지를 태우고 있는 그런 상태, 죽음은 일각일각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다가오고 있다기보다 이미 사신은 머리맡에 와 있는 것이다. 끈질기게 심지를 태우고 있는 불길은 잦아졌다가 아슬아슬하게 되살아나곤 했다. 두메는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었지만 하마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 나간 채 기척이 없는 홍이 걱정을 하고 기회를 잡은 두메가 벌떡 일어선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부엌으로 나온 두메는 부엌을 들여다본다.
"홍이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던 안자
"몰라."
안자의 야올은 불길에 상기되어 사과처럼 빨갛다. 두메는 안자가 예쁘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고는 다음 순간 이럴 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 죄책감을 느끼며 거친 목소리로
"이 자식 또 거기 갔구나!"
내뱉는다.
"홍이 그애도 어디가 좀 어찌 됐나 부지? 길가에 나섰다고 소문났어. 지 아부지가 용정에 왔으면 길 몰라 못 올까 봐서 거긴 왜 자꾸 가누."
사정을 잘 아는 안자는 화를 내며 말했다.
"오죽 답답하며 그럴까!"
두메도 화난 소리로 응수하고 마당으로 돌아나와 변소가 있는 뒤꼍으로 간다. 홍이 거기 서서 울고 있었다. 털모자를 쓰고 외투도 입고 아마 거기 가지 않으리라 결심을 하고서 분하여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두메도 무슨 말을 할 수가 없다. 우두커니 뒷모습을 바라볼밖에. 임종이 가까워온다는 사실보다 실낱같은 생명이 끊겼다 이어지곤 하면서 홍이 아버지를 분명 기다리고 있을 병자의 끈질긴 소망을 두메도 알 듯했기 때문이다. 인편에 편지를 보낼 때 홍이는 두메에게 말했다. 이번에 만일 아버지가 오지 않는다면 평생 상면 아니 하겠다고, 주먹을 쥐고서, 그러나 홍이는 그 선언을 스스로 저버리고 사람까지 사서 산판의 아버지를 찾아갔었다. 그는 하산하면서 다시 맹세했으리라. 다시는 아버지라 하지도 않을 것이요 상면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울부짖었을 것이다. 그러나 홍이는 해질 무렵이며 그 길목에 가서 우두커니 서 있곤 하는 것이다. 행여 울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을 안고, 이제는 사랑하는 어머니와의 이별보다 아버지가 지켜보지 않는 자리에서 어머니를 가게 할 수 없다는 소망이 무너지는 분노 때문에 그는 울고 있는 것이다. 두메는 알 수가 없었다. 왜 홍이 아버지가 오질 않는가를. 그것은 비단 두메뿐만 아니었다. 모두가 그러했다. 모를 일이었다. 야속한 놈 인정머리 없는 놈, 뉘 땜에 병이 났겠느냐, 날이면 날마다 욕을 하는 방씨에게도 용이 오지 않는 일은 수수께끼였다.
"홍아."
"..."
"거기나 가보자."
"가면 뭘 해."
"그래도 여기서 울고 있으면 별수 있나?"
가면 뭘 해 하고서도 홍이는 걸음을 옮긴다. 행여 울지도 몰라, 홍이는 수 없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두 소년은 해란강의 바람이 몹시 부는 길목에서 털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눈만 내어놓고 서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러고 서 있지는 못했다. 그새 집에서는 어머니가 죽었는지도 모른다는 불현듯한 생각. 홍이는 안절부절 못하다 그만 돌아선다. 천천히 걷다가 걸음이 빨라지고 다음은 허둥지둥 미친 듯 뛴다. 따라서 그의 뒤를 따라가는 두메도 허둥대다가 뛰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치 홍이의 심정이 전염되자 자신의 심정이 된 것처럼, 냉철한 두메가. 홍이 엄마를 두메도 좋아했었다. 그러나 두메는 이 순간 임종도 못 본 아비의 임종을 혼동하고 착각했는지 모른다. 집에 갔을 때
"막 의사가 다녀갔어."
하고 안자가 말했다. 길서상회댁에서 특청을 하고 인력걸 보내어 모셔왔다는 것이다. 그전에도 의사는 서희 간청으로 몇 번 왔다갔었다. 의사가 왔어도 병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진통제를 쓰는 것, 보혈 주사를 놓아주는 것 이외 다른 방법이 있을 순 없었지만 의사가 다녀간 후면 월선은 반드시 홍이를 찾았다. 고통이 덜해지기 때문이다. 다른 때도 고통이 가셔질 땐 홍이를 찾았고 고통스러울 때는 홍이더러 나가라 했다. 마음속으로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을 용이에 대해선 일절 말이 없었다. 이 여자에게 이런 고집이 있었나 싶으리만큼. 그러나 죽음에 대비하는 것이었는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맘에서지 늘 몸을 닦아 달라 했고 머리를 빗겨 달라 했다.
"널 찾는다. 어서 가봐라."
안자가 말하지 않아도 홍이는 방씨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두메는 담배연기가 자욱한 작은방으로 들어가고 홍이는 월선이 누워있는 안방으로 들어간다.
"옴마!"
"운냐."
커다랗고 푸른기가 도는 눈이 홍이를 쳐다본다. 좀 생기가 나는 것 같다.
"어디 갔더노."
"바람 좀 쏘이고 왔다."
"치분데 감기 들믄 우짤라꼬?"
"이 사람아 너 걱정이나 해라."
방씨가 말했다.
"숙모요."
"와."
"우리 홍이, 에미 병 땜에 많이 야뮐熾?"
"아무리 야비도 아픈 사람만하까?"
월선의 얼굴은 주먹만 했다. 몸도 오그라든 것처럼 작아졌다. 본래 뼈대가 가늘었던 여자, 그 가는 뼈대가 드러난 손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다. 옛날과 다름없는 것은 푸른기를 띤 눈뿐이다. 아니 옛날보다 더 크고 더 맑게 빛나는 눈동자에는 이상하게도 어떤 충만감조차 넘실거린다. 육체적인 고통이 멎는 순간의 그의 눈은 항상 그러했다.
"홍아."
"응."
"니는 후제 커서 이사가 됐이믄 좋겄다."
"공불 많이 해야지 내가 어떻게?"
"그렇구나. 공불 많이 해야겄제? 공부 많이 하는 것도 그리 좋은거는 아니다. 공부도 할라 카믄 피가 마를 긴께. 그라믄 니는 그만 하동 가서 장시를 하는 기이 좋겄다. 베장시, 비단장시 말이다. 난리가 나도 짊어지고 달아나믄은 팔아감시로 굶지는 않을 긴께 안 그렇나? 그렇제?"
"옴마는 참,"
"부자도 안 좋을 기고 너무 기찹아도 못 살 기고 그냥저냥 묵을만치 하고 사는 기이 젤 좋다. 식구들이 화목하고 자식은 서넛 낳아서 나는 똑 그랬이믄, 우리 홍이가 그랬이믄 싶다."
"사람도, 아 그만해두어라. 얘기도 너무 하믄 지친다."
방씨는 울컥울컥 치미는 것을 삼키며 이불깃을 끌어당겨주며 말했다.
"내가 또 기운이 빠지고 아파오믄은 말도 못할 것 아니오. 숙모님은 내 맘도 모름시로 걱정만 해쌌소. 홍아,"
"옴마, 이자 고만 얘기해라. 옴마 하라 카는 대로 할 긴께, 기운 빠진다 카이."
"아니다. 지금은 아주 편안하다. 소원대로 말하믄은 사모관대하고 대례청에 서는 니를 보고 접지마는, 니겉이 착하고 세상에서 젤 이삔 니 각시, 쪽도리 쓴 것도 보고 접지마는 이대로도 괜찮다. 이자 다 컸고 어디 가도 구박받을 나이는 지났인께."
"얘비 에미가 있는데 와 구박을 받을 기고, 실데없는 걱정한다. 니 일신 생각이나 좀 해라."
참다 참다 방씨는 화를 낸다.
"야아. 그거를 누가 모립니까. 에미 애비가 있어도 어린거는 불쌍한게요. 우리 홍이가 열 살도 못 됐다믄 참말로 가심이 아플 깁니다."
홍이는 울고
"무신 인연이, 이런 인연이 있노."
방씨는 코를 훌쩍이며 중얼거렸다. 이러기를 또 며칠. 섣달 그믐날 해거름이었다. 공노인댁 방씨는 제사차림을 위해 객줏집으로 돌아갔고 공노인도 잠시 방을 비운사이 망태 하나를 어깨에 걸머지고 초췌해진 사내가 집안으로 들어섰다. 솜을 두어 누덕누덕 기운 반두루마기도 벗어던진다. 그는 마루 끝에 망태를 내려놓고 신발을 벗는다.
"홍아!"
부엌에서 쫓아 나온 안자가 외쳤다.
"홍아! 아버지 왔다!"
홍이 안방 문을 박차듯 뛰어나온다. 동시에 작은방의 문이 떠나 갈 듯 열렸고 영팔이와 두메가 나왔다. 홍이의 얼굴은 홍당무였다. 영팔이 얼굴도 벌갰다. 두메 얼굴만이 푸르스름하다. 모두 벙어리가 되어 버렸는지 마루에 걸터앉아 찌가다비를 벗고 있는 용이 뒷모습을 쳐다본다. 마루에 올라선 용이는 털모자를 벗어던졌다. 솜을 두어 누덕누덕 기운 반두루마기도 벗어던진다. 그러는 동안 말 한마디 없을 뿐만 아니라 누구 한 사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몸 전체에서 뿜어내는 준엄한 기운에 세 사람은 압도되어 선 자리에 굳어버린 채다. 방문은 열렸고 그리도 닫혀졌다. 방으로 들어간 용이는 월선을 내려다본다. 그 모습을 월선은 눈이 부신 듯 올려다본다.
"오실 줄 알았십니다."
월선이 옆으로 다가가 앉는다.
"신판이 끝내고 왔다."
용이는 가만히 속삭이듯 말했다.
"야 그럴 줄 알았십니다."
"임자."
얼굴 가까이 얼굴을 묻는다. 그리고 떤다. 머리칼에서부터 발끝까지 사시나무 떨 듯 떨어댄다. 얼마 후 그 경련은 멎었다.
"임자."
"야."
"가만히,"
이불자락을 걷고 여자를 안아 무릎 위에 올린다. 쪽에서 가느다란 은비녀가 방바닥에 떨어진다.
"내 몸이 찹제?"
"아니요."
"우리 많이 살았다."
"야."
내려다보고 올려다본다. 눈만 살아 있다. 월선의 사지는 마치 새털같이 가볍게, 용이의 옷깃조차 잡을 힘이 없다.
"니 여한이 없제?"
"야, 없십니다."
"그라믄 됐다. 나도 여한이 없다."
머리를 쓸어주고 주먹만큼 작아진 얼굴에서 턱을 쓸어주고 그리고 조용히 자리에 눕힌다. 용이 돌아와서 이틀 밤을 지탱한 월선은 정월 초이튿날 새벽에 숨을 거두었다.
"어이구우! 니가 이서방을 기다리노라, 어이구우! 이 불쌍한 것아!"
방씨는 땅을 치며 통곡했다. 그러는 사이 미리 준비해놨던 월선의 옷 한 벌이 지붕 위에 올려졌고 안자와 순이네는 사자밥을 짓는다. 공노인은 허허어 허허어 하며 앉았다간 서고 섰다간 앉고, 영팔이 두메는 눈물만 뚝뚝 떨어뜨린다. 기별을 받은 길상이 달려왔다. 그러나 방안의 사람들은 모두 물러나왔다. 용이 혼자서 염을 하겠노라 했기 때문이다. 시신이 놓인 방에서 물러나려다 홍이 뒤쫓아왔다.
"옴마!"
가슴 위에 모아놓은 뼈뿐인 손을 잡고 다시
"옴마!"
홍이 계속하여 옴마! 옴마! 부르며 방에서 뛰쳐나간다. 오랜 병 끝이어서 준비는 다 되어 있었다. 해서 장례는 차질없이 진행되었다. 입관이 끝나고 굴건제복한 홍이와 삼베두건을 쓴 용이 침착하게 빈소를 지키며 문상객을 맞이한다. 생전에는 외로웠던 월선이었으나 죽어 누워 있는 그의 빈소는 쓸쓸하지 않았다. 객주업과 거간업으로 알음이 넓었고 적당히 교활하면서 수완가인 반면 사욕이 없는 탓으로 쌓아올린 공노인의 지반이 있었으므로 그의 영향 하의 시정배라 할까, 그런 남정네들이 공노인의 면을 보아 많이들 다녀갔다. 국밥집 시절의 단골이던 역시 엇비슷한 사람들도 더러 다녀갔고 홍이 학교의 선생님, 친구들도 문사 왔었다.
"이서방 넋 빠졌구먼. 정신 차리라구. 멀지 않아 다 갈 건데 뭘 그래?"
거간 권서방이 그런 말을 했다. 신전 박서방과 엿도가 하던 홍서방은 눈을 꿈뻑꿈뻑하며
"홍아, 네가 젤 딱하구나. 엄마 보고 싶어 어쩔래? 그럴수록 공부 열심히 해야지."
그런 위로의 말을 했다. 그리고 길서상회 서희가 문상 온 것은 의외의 일이었다. 그는 남과 다름없이 절차대로 예를 치렀다. 옛날 하인이나 다름없는 작인 용이에게 맞절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이 광경을 본 영팔이는 너무 놀래어 얼굴빛마녀 샛노래졌다. 그러나 용이와 홍이는 서희의 정중함에 답하는 정중함으로 대하였을 뿐 비굴이나 감사의 특별한 변화는 나타내지 않았다. 빈소에서 나온 서희는 손수건을 꺼내어 눈언저리를 닦는다. 영팔의 얼굴은 다시 한번 노랗게 변하였다.
"김서방."
손수건을 소매 속에 넣으며 서희는 또 뜻밖에 영팔이를 불렀다.
"예 얘기씨! 아, 아니 마님."
"고생이 많았지요?"
"고생이랄 게..."
"조금만 참아요. 올해 안으로 우린 돌아가게 될 게요."
"예."
영팔이 실감도 하기 전에 서희는 어느덧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인력거에 오르고 있었다. 영팔이 뒤쫓아가서 허리를 굽히고 서희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리고 인력거는 떠났다. 넋을 잃고 서 있던 영팔이 작은방으로 쫓아 들어간다. 별안간 그는 어흥! 어흥! 하고 소같이 울어젖히는 게 아닌가.
"어이구우 어이구우 일 년만 더 살았어도, 어이구우 무신 놈의 복이 그리 없노오!"
돌아가게 된다! 꿈 같은 얘기, 꿈같은 일이 영팔을 울게 한다. 월선에 대한 연민과 그간의 세월의 설움이 울음과 더불어 목구멍에서 꺼이꺼이 넘어오는 것이다.
"어이구우!"
이 북새통에 두메는 어디로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초상 전에는 줄곧 붙어 있던 두메가 묘한 소외감 때문에 사라졌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한 가지 불상사는, 눈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중얼거리던 공노인이 마루에서 발을 헛디뎌 마당에 굴러 떨어져 발을 삐인 일이다. 대단찮다고 우겼으나 운신하기가 어려우니 결국 방에서 벽을 등지고 앉을 수밖에. 영팔이와 길상이 그리고 다시 밤샘하겠다고 찾아온 권서방 해서 네 사람은 한방에서 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술상이 들어오고 긴 밤을 새기 위해 이들은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뭐니 뭐니 해도 일을 당하고 보니 우리는 객식구라. 아무리 가슴이 미어지게 아파도 이서방 홍이만은 못하네. 그걸 나는 깨달았구만. 그 불쌍한 내 조카딸한테 홍이라도 없었더라면 상주 없는 빈청 내 어찌 그 적막한 꼴을 보겠나. 기왕지사 사람은 갔고오 이서방하고 홍이가 저러고 있으니 한결 마음에 위로가 되는구만. 고마운 생각도 들고,"
공노인이 눈물을 홀짝이며 말했다. 월선의 죽음으로 하여 공노인과 용이 부자간의 석연치 못하였던 감정은 눈 녹듯 하였고 그들 부자가 주관하는 장례는 공노인 마음을 다시 없이 애틋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슬픔에 미치지 못한 자기 슬픔에 회환보다 만족하는 것이기도 했다.
"예, 맞십니다. 안 낳았다뿐이지, 홍이가 산에 왔일 적에... 자기 낳은 자식인들 그러겄십니까?"
"암, 암, 남 낳은 자식이라도 저만만 하다면야, 내 낳은 자식 열이면 뭘 해?"
권서방도 영팔이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연신 끄덕여댄다. 으레 길흉사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의 감정이란 확대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좋은 것은 더욱더 좋게, 나쁜 것은 더욱더 나쁘게, 슬픔이나 기쁨도 표준을 잃기 쉽다. 그러나 용이와 홍의 슬픔이나 죽은 사람에 대한 애정은 그들이 느끼는 것 이상의 것임이 틀림없었다.
"돌아가시고 보니 아지매가 얼마나 우리에게 위로 주는 사람이었던가 그게 깨달아지는군요. 나도 울적할 땐 그분을 찾아가곤 했었는데, 이젠... 누굴 찾아가서,"
길상은 밖에서 술을 많이 하고 온 눈치였고 계속 술을 마시면서 말했다. 말씨는 침착했으나 주정을 부릴 듯 위태위태한 분위기를 내뿜는다.
"얘기씨도, 아, 아니 최참판댁 그분도 눈물을 흘리시던데, 누가 그거를 생각할 수나 있었겄나. 길상이가 있이니 말하기는 안된 일이지만 나는 세상에 그분 눈에 눈물이 있다는 건 참말이제 생각해본 일이 없었구마. 하도 이상해서 아마 애기를 낳고 아이 어무니가 되고 뵈 사람들 설움을 알게 된 기이 아닌가 하고,"
"그거는 아닐 겝니다. 그 사람 애기어멈이 되어 울었던 건 아닐게요. 월선아지매, 그분에 대해서만은 어머니를 대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있었지요."
"그럴까?"
영팔이는 아무래도 실감할 수 없는지 맹하니 길상을 쳐다본다.
"나도 때때로 어머니 같은 생각을 했으니까, 네에, 어머니같이 말입니다. 가서 주정하고 우두커니 앉아 있기도 하고,"
길상은 어지간히 휘청거리는 것 같다. 생과 사 그 틈바구니의 빛깔이란 참으로 미묘하다. 시신은 아직 방에 있고 땅속에 묻히는 그 동안 숨막히는 그 시간을 사람들은 고인과 그리고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의 얘기로 하여 숨구멍을 트고 있는 것이다. 슬픔이 덜한 사람은 그것으로 보충하는 마음, 슬픔이 깊은 사람은 그것으로 위로받고
"하야간에 우리 월선이는 마음씨 하나 가지고 그 기박한 팔자를 곱게 넘긴 셈이기는 하지. 내 이서방을 미워도 하고 욕도 하고 했었지마는 실상 그 사람만큼 분명한 사내도 드물어."
"그 그건 예. 맞십니다. 아랫도리 벗었던 시절부터 용이하고는 이날까지 예, 보기는 유한 것 같지마는 속으론 지 성미를 굽히고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못 합니다. 그러나 나도 모릴 일이 많고, 아, 이분 일만 해도 홍이가 그러크름 산가지 와서... 하 참, 산판일을 굳이 끝내고야 오느냐 그겁니다. 도무지 그럴 만한 일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라고 아프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마는 위중하다는 것도 홍이가 산에 오기까지 입을 다물고 말을 해야지요."
"영팔이아제 그거는, 그거는 알 만해요. 왜 용이아제가 그랬는지,"
"와 그랬이까?"
"그렇다 카더라도."
"그리고 또 월선아지매가 죽을 것이라는 확실한 일을 다짐하고 다짐하면서 받을 수 있는 고통을 다 받아보자는 심산이 아니었을까요."
"허 참, 우리네는 모를 일이구먼."
권서방이 웃었다.
"나는 이 세상에 나서 저 빈청에 있는 용이아제의 그런 얼굴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 얼굴이 무섭고 가슴이 저립니다. 슬픔 같은 것하고 비교가 안 돼요. 온 세상에 그럴 수 있습니까?"
"글세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고 우리네야 그냥 살면 사는가보다 하고,"
권서방이 중얼거리며 길상의 술잔에 술을 붓는다.
"옛말에 사람이란 관뚜껑에 못을 박아야만 그 사람이 어떻다는 말을 할 수있다 했는데 그 말이 맞는 말이야. 내 조카딸도 따지고 보면 못살다 간 것도 아닌 성싶네. 그리고 이서방도 복 없단 말은 못할 것 같애. 흔히 사람들은 팔자치레라는 말을 하는데 다지고 볼 것 같으면 육례를 갖추고 만난 부부라도 필경엔 남남 아니겠느냐 그거지, 여기 앉은 사람들이야 내 조카딸 근본을 아니 하는 말인데 그러니까 형수뻘 되는 사람이 그런 처지가 아니었거나 또는 이서방 모친이 그런 처지인데도 불고하고 허혼을 했다 한다며 물론 이서방하고 내 조카딸은 은앙새겉이 잘살았겠지. 그러나 만났다간 헤어지고 헤어졌다간 또 만나고 그 끈질긴 인연하고 기구한 세월이 반드시 음, 그렇지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들 맘이 더 굳게 떨어질 수 없게 되었다면은 반드시 박복했다 할 수만도 없을 것 같애."
"형님, 거 풍월 아는 소리외다."
"아암 풍월 알구말구. 내 비록 늙고 못생긴 마누라, 자식 하나 생산 못한 마누라지만 그 할망구 하나 보고 살긴 살았으되, 그러니 사람에 미친 일은 없으나 나는 미치는 성미야. 약촐 캔답시고 산에 미쳐서 다녔고 또 미친 일이 많았지. 남이 보기에는 헛일하고 고생한 보답 없다 하겠지만 내 마음에 열심히면 그게 보람이요, 미치는거지."
"지금이니까 그러시지. 조카딸 생전에야 어디 그러셨소. 이서방을 눈에 까시처럼 생각했던 게 사실이지 뭐."
"그거는 또 나대로의 애정일 게고 아무튼, 어쩐지 이서방이 이제는 내 아들 같고 홍이가 내 손자 같네. 이렇게 외롭잖게 그 아이가 저승길을 떠났으니 사람이란 어떤 뜻으로 외롭지 않게 죽는 그것이 복인 것 같단 말이야."
출관하는 날은 북쪽 날씨치고는 따스한 편이었다. 하늘도 맑았다. 흰 꽃상여는 서희가 경비를 내어 만들었고 아자랑 순이 순이네 그리고 시집간 새침이까지 흰 베치마 하나씩을 얻어입었다. 두건은 용이말고 영팔이 두메도 얻어썼고 상주는 홍이 혼자였으나 많은 사람들이 뒤따랐다. 생전의 월선을 아는 사람들이지만 흰 상여의 장례행렬이 조촐하여 구경삼아 따라가는 이도 적지 않았다. 돌아서 한참을 가 양지바른 곳이 장지였다. 상여가 멎고 바람에 펄럭이는 만장이 멎고 그리고 사람들도 멎었다. 사람들 속에는 꽤 많은 아낙들이 끼여 있었다. 그들은 홍이 칭찬에 침이 마를 지경이었고.
"이 산소는 길서상회 그 댁에서 마련했다잲이요?"
"상여도 그 댁에서 맨들었답매."
"어쩌믄? 친척도 아니라든데?"
"그 집 도렝이 아바이하고 무시기 걸린 게지. 그 댁 바깥주인으 본시 하인이었으니까 말이."
"아무튼 죽어서 호사하는 것도 괜찮구먼."
"무시기, 죽어 호사하느 기 어렵지비."
미리 간 인부들이 파놓은 곳에 막 하관을 하려 했을 때다. 돌연 여자의 곡성이 들려왔다. 사람들은 곡성이 나는 곳으로 머리를 돌린다. 두 아낙이 이곳을 향해 달려온다. 부고를 받고 오는 임이네와 영팔의 처 판술네였다. 비호같이 달려오는 것은 임이네였고 판술네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뒤따르고 있었다.
"하관하지."
영팔이 명령했다. 관은 밑바닥으로 내려갔다.
"아이고 성님! 이기이 웬 일입니까아! 아프다 아프다 해도 이리 쉬이 갈 줄 내 몰랐네에."
임이네는 달려오면서 가락에다 사설을 넣는다.
"성님! 성님! 우리 홍이 두고, 세상에 이럴 수도 있십니까? 아이고오! 아이고오!"
묘구덕 옆에까지 바싹 다가가 앉은 임이네, 주먹으로 땅을 친다.
"마지막 가는 길에 얼굴 한분도 못 보다니! 아이고오 아이고오!"
판술네는 묘구덕까지는 미처 가지도 못하고
"아이구우 성님요! 이이기 우찌된 일입니까."
하며 그 말만 되풀이하며 운다.
"시끄럽다. 일질에 저리 좀 비키라!"
영팔이 자기 아낙을 발길짓하듯 떼밀어낸다.
"야, 야,"
판술네는 민적민적 물러서면서 운다.
"흥, 저 헛울음 좀 보게? 청산유수구만."
"무시기 저리 슬프겠음? 참말로 흉내 잘도 낸당이."
아낙들이 수군거린다.
"아이고오! 아이고오! 저승차사도 무심하고 염라대왕도 무상하지. 부처 겉은 우리 성님 오사죽은 시키다니, 아이고! 아이고오! 장개가는 우리 홍이 와 안 보고 갔십니까! 야속하요! 성님! 성님 야속하요! 그리 소원하더니만 아이고오 아이고오 형제같이 의지하고 내가 살았는데 이자는 누구 믿고 살라 하요! 한번 가믄 못 올길을 언제 다시 불꼬! 아이고 성님! 기왕지사 갈라거든 고향에나 가서 죽지. 손발 잦아지게 애탕으로 끓탕으로 홍이 생각하더니만 와 며느리도 못 보고 혼자 갔고! 아이고오! 아이고오! 불쌍한 우리 성님!"
한 손으로 코를 풀어 뿌려가면서 자지러지게 입담도 좋은 곡성이다. 그러나 남정네들은 묵묵히 묘에 흙을 덮고 있었다. 한참을 울고 난 임이네도 멋쩍었던지 치마를 끌어당겨 콧물을 닦고 몇 발짝 물러나 앉으며
"위중하믄 위중하다는 기별이라도 있어야제. 그랬이믄 생전에 얼굴 한분이라도 보았을 긴데 세상에 이리 야속할 데가 어딨겄소. 모두 내식구고 나만 군식구란 말이든가? 참말로 인심 야박하구나."
'살판났는데 머가 야박하고 야속한고?'
영팔이는 삽질을 하면서 삽으로 내리쳐주고 싶은 미운 생각을 참는다. 누구 한 사람 와서 임이네 참으라고 말리는 사람은 없고, 더는 아이고 대고 하기만 민망했던지 미적거리고 있던 임이네
"흥 굴러온 돌이 본돌 치고 객이 주인 노릇 한다 카더니만,"
하고 삽질하는 영팔의 어깻죽지를 노려본다. 상대를 하며 시끄럽다 생각하면서도 영팔의 참을성이 터진다.
"거기 좀 비키소. 곡이사 상석 때나 하고,"
떼밀어낸다.
"와 사람을 치노."
"일질에 걸거치니께 그렇지."
"말로 하지. 곰배팔가? 사람을 치기는 와 쳐?"
"초상 끝이 좋을라 카믄, 저어기 가서 가만 앉아 있이소."
"초상 끝이 좋을라 카믄? 어디 두고봅시다."
드물게 양보를 한다. 그리고 물러는 나되
"흥! 그년 팔자 늘어졌고나."
조그만 목소리로, 그러나 영팔이 들을 수 있게 뇐다.
"저것을 그만!"
영팔이 역시 작은 목소리로 뇌며 분노를 꿀컥 삼킨다. 어쨌거나 둥그스름하게 무덤은 만들어졌고 일꾼들이 삽으로 흙을 다지면서 장사는 마지막에 이르고 있었다.
9장. 아귀지옥
장례가 끝난 뒤 안방에는 빈소가 있었고 작은방에는 용이 부자와 영팔이 거처하게 됨으로 임이네는 부득불 판술네와 함께 객줏집에 묵을 수밖에 없었는데 임이네의 안달은 이미 모두가 예사했던 일.
"비단가리 하나라도 챙기야제. 남 좋은 일 와 시킬 기고. 이게 다 누군 건데? 우리 홍이, 홍이 거란 말이다."
해가 뜨기도 전에 달려와서 들으란 듯 집 앞뒤를 쏘다닌다. 그리고 잡아먹기라도 할 듯 서슬 푸르게 영팔이 내외를 대하는 것이었다. 이틀 밤이 지난 뒤
"삼우제나 보고 갔이믄 싶지마는 아지매는 우리 판술네하고 함께 집에 가 있이소."
영팔이 입에서 말이 떨어지자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임이네는 팔을 걷고 나섰다.
"보자보자하니, 해도 가이방해야지 그래, 가라 오라 대관절 판술아배가 먼데 그러요?"
"여기 있어 봤자 동네방네 우세스럽소. 누구 귀머거린 줄 아나?"
"그래 귀머거리가 아니믄!"
"죽은 사람 얘기는 와 하고 댕기요! 우리 홍이가 있어서 사람 구실을 했다?"
"그거야 틀림없는 얘기제. 우리 홍이 아니었으믄 상주 하나 없는 생이. 꽃생이믄 머하고 금생이믄 머하노. 가련한 그 꼴 보기가 참 좋았겄소. 내가 어디 틀린 말 했단 말이오?"
"임이네를 잡고 말하느니 마차 끄는 말이나 보고 얘기하지."
"허어어, 내 말 사돈이 한다더니, 사람 좋은 체 그러지 마소! 누가 그 속을 모를까 봐서? 속에는 열두 꼬리가 달린 능구렝이가 들어 있다 카이. 피도 살도 안 닿았는데 만사 제폐하고 여기 와서 친정 오래비 행세하는 거는 무신 까닭이오. 마음이 시꺼멓다! 마음이 그래 집 하 채라도 거기 몫이 될 성 싶으든가? 입다 남은 옷가지 임자 없는 살림이니 나도 좀 차지하자 그런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내 눈이 시퍼렇기 살아 있는 이상은."
"이런 벼락을 맞아도,"
"돌아앉은 구신도 물밥으로 달래야지 나한테 우떻기 했다고? 내 맘이 좋아야 모지라진 빗자리 하나라도 얻을 기구마."
못 견디겠던지 홍이 작은방에서 뛰어나왔다. 용이는 장례가 끝난 뒤 이불을 쓰고 송장같이 밤낮으로 자고 있는 상태였다.
"가소! 가란 말이오!"
악을 썼다.
"뭐라꼬? 니 누보고 하는 말고? 여기 이 사람보고 하는 말이제?"
"어머니가 무슨 상관이오! 어머닌 아무 상관 없단 말이오! 권리도 없고! 끝내 그러면은 내 이 집에다 불을 지르고 말 기니가 네! 불을 지르고 싹 불을 지르고!"
하며 흐느껴 운다. 임이네 어세가 누그러진다.
"지랄한다. 다 니 생각해서,"
"내 생각할 거 없어요. 어머니 마음보나 고쳐요! 무슨 경사난 줄 압니까? 남이 부끄럽소!"
"어이구 자식도 에미 마음을 모르고, 우째 나는 이리 인덕이 없는고 모르겄다."
흐지부지 끝이 났으나 판술네만 혼자 돌아갔고 임이네는 전과 같이 설치고 다니지는 않았으나 바위틈에서 대가리만 내밀고 외계를 살피는 뱀같이 객줏집 일각에 도사리고 앉아 사사건건 귀를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객줏집으로 후퇴한 것은 용이와 홍의 날카로워진 감정의 칼날을 패해보자는 것이요, 둘째는 공노인의 내외가 월선이 남긴 재산에 대하여 상당한 재량권이 있는 거승로 짐작한 때문인데 그러면 공노인 내외는 어째서 그처럼 사갈시하던 임이네를 붙여놓고 있느냐, 체면상 박절히 할 수 없는 때문이지만 그보다 용이와 홍이를 대접해서 형식이나마 임이네를 존중해주었던 것이다. 사흘 만에 용이는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앉았다. 그는 정말 사흘동안 깊은 수렁과 같은 잠 속에 빠졌던 것이다.
"홍아."
옆에 앉아 있던 홍이
"아부지."
반가웠던 것이다.
"나 냉수 한 그릇 주라."
"야."
홍이 냉수를 떠다 건네준다. 단숨에 다 마시고 빈 그릇을 놓으며
"며칠인가?"
"사흘 밤 내리 계속해서 잤소."
"음... 영팔이아제는 어디 갔노. 집에 갔나?"
"아니오. 판술이옴마만 가고, 아제는 가라 캤는데 객줏집 할아부지가 좀 기다리라 캐서, 그라고 길상이아제도 그랬는가배요. 좀 있으라고,"
"그런데 어디 갔노?"
"심심하다 하서 권서방하고 술 마시러 가愿째」瓦?"
"..."
"점심 좀 잡수시야지요?"
"음, 그래야겄지."
이 무렵 영팔이는 박서방 가게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정초라 손님이 없고 일거리도 없는 거게에 권서방과 함께, 술은 권서방이 냈다. 조선서 공노인이 돌아온 후 공노인의 은덕으로 몇 군데 흥증을 붙여주어 한겨우 동안 호구지책은 되었으나 영팔이를 불러내어 술까지 사는 데는 권서방 나름의 은근한 술수가 있었다. 길서상희 뒤편에 있는 땅이 아직 팔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것을 영팔이가 어떻게 좀 다리를 놔주었으면 싶어서다.
"금년 설은 가꾸로 쇴는데, 여기 이렇기 앉아서 술을 마신께 별놈의 생각이 다 나누마."
"그럴 거야. 그새 김서방도 많이 늙었거든."
술을 못하는 박서방은 곰방대를 물고 콧구멍에서 연기를 내며 말했다.
"내가 여길 떠난 지도 칠팔 년 될거로. 그땐 신을 삼아서 박서방 한테 넘기고 주갑이를 만낸 것도 여긴데 광산에 일자릴 얻을라꼬 함께 떠난 일 하며... 지금 내 심정이 우떤지 당시들은 모를 기구마."
월선이 죽어서 쓸쓸한 것도 그렇지마 뜻하지 않았던 귀향에의 서광이 그의 마음을 몹시 복잡하게 한 것이다. 희비쌍곡이라고나 할까. 우직한 영팔이는, 자다가도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그 기막힌 소식을 되새겨보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영팔은 부끄러워지는 것을 느낀다.
'초상집에서 혼자만 좋아하고 있는 것은... 참말로 나도 야박한 놈이구나. 월선이가 죽었는데, 죽은 지 며칠이 됐다고,'
그러나 어느새 행복의 나라고 떠날 배를 타기 위해 뱃머리에 서있는 아이같이 영팔의 마음은 설레기 시작한다. 행여 배가 안 오며 어떻게 하나, 과연 나도 태워줄 것인가, 설레임은 불안과 초조로 변해간다.
'이거는 상가집에 온 까매기 겉은 것 아니가. 남은 사램이 죽었는데 좋아서 지랄을 하고 있으니, 하기사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산사람은 살아야제.'
하기도 했으나 들뜨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또 의기소침 하는 마음상태의 되풀이는 종내 신경질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따금 죽은 김훈장도 모습을 드러내며 영팔의 마음을 괴롭게 했다.
"모르기는 왜 몰라. 누군 안 겪었나? 고향산천 버린 것도 마찬가지 사고무친한 곳에 와서 고생하는 것도 마찬가지, 그래도 김서방, 우리네보담은 나은 편이야. 길서상회댁 든든한 울타리가 있어, 함께 온 일행들이 일가친척같이 서로 의지하고 살았으니,"
권서방 말에 영팔이는
"그거는 그렇소만, 김훈장이 돌아가시고 홍이네도 죽고 보니 그뿐이겄소? 참말로 말 못할 일이 많구마. 하기야 살아남은 사람은 궂이 일 마른 일 다 보지마는..."
"아까 말이 났으니 그러는데 주갑이 그 사람 요즘에 어디 있는지 김서방 아요?"
박서방이 물었다.
"일정한 거처가 있겄소? 연해주 방면을 돌아댕기겄지요."
"글세 작년에 난데없이 여기 왔더구만."
"섣달그믐께 이서방하고 함께 왔지요?"
"그랬다더구먼. 만나기론 초정이었지."
"뜻밖에 산판으로 찾아왔십디다. 그래서 이서방하고는 용정으로 가고 나는 집으로 갔인께."
박사방은 킥킥 웃는다.
"하여간에 그만치 재미있는 사람도 드물 거야. 만났다 하며 얘깃거리가 생기거든. 그때 마침 나는 다리가 아파서 절룩거리고 있었는데 아 글세 만나자마자 다짜고짜로 발바닥에 침을 놔주겠다고 덤비지 않겠어? 침을 함부러 맞나? 잘못 놓으면 흔히 죽는 수도 있는데 뭘 믿고. 그래 안할려고 했지. 했더니 허허 그러들 마시랑께 내가 박서방한티 해를 끼칠 사람인지 아닌지 잘 알 거 아니어라우? 해서 억지로 발을 내밀긴 했으나 아무래도 미심쩍어. 이놈의 뜨내기가, 싶어 겁이 더럭 나는 거라. 침을 막 놓으려는데 발을 빼버렸지. 오매 워째 이런다요? 그래 주서방이 의원도 아니겠고 했더니 누군 뱃속서부텀 배워 나오는 사람 있더란 말씨? 그러는 거 아니어라우, 사내장부 죽는 한이 있어도 간이 그러크름 콩마혀서야, 싸가지없는 소린 그만두고, 그래 할 수 없이 하하핫..."
"그래 어찌 되었나."
"씻은 듯이."
"주갑이가 우리한테서 도망친 것이, 그 말 할라 카던 긴데, 우떤 의원한테 반해가지고 간다온다 말없이 가 기라요. 그 한의한테서 침놓는 거는 배웄을 기거마는,"
"그 얘기는 하더군. 한데 전과는 좀 사람이 달라진 것 같고."
"그 한의가 누군지는 모르지마는 독립 운동하는 사람 같더마."
"옳아. 바로 주서방 하는 수작이 독립 운동하는 것 같더라 그 말이오. 아주 유식해지고,"
"무식했일 때도 주갑이 하는 말은 멋인지 뼈대가 있었지요. 사람이 수숫대처럼 남보기 헐렁벌렁해서 그렇지."
권서방은 주갑이를 모르기도 하려니와 무슨 궁리를 하는지 얘기에 끼여들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독립운동이고 머고우리네 무식군이야 무슨 일을 하겠나만 그것도 따른 식구가 없어야 말이지."
"그러니까 처자식이 거물장이라 안 하요."
"식구란 웃목에 밥상 보듯 늘 그런데 막상 떨치고 떠날라 하며 그게 그렇게 안 되더구먼."
"없인께 그러지요. 내 없이믄 못 살기라는 생각을 한 께요. 그까짓 묵고 사는 걱정만 없다믄 남자란,"
하는데 권서방이
"김서방, 나 청이 하나 있는데,"
허두를 꺼내었다.
"야?"
"부탁이 하나 있소."
"나한테 말이오?"
어리둥절 한다.
"김서방도 알다시피 일정한 직업도 재주도 없는 내가 거간이랍시고,"
시작하여 권서방은 신세타령을 한참 늘어놨다.
"해서 얘긴데 힘 좀 빌립시다."
"하참, 나한테 무시 힘이 있다고,"
"길서상희 바깥양반하곤 잘 아는 터가 아니오."
"그거야."
"다름이 아니라 장터에 그러니까 곡간 뒤에 빈터 말인데 그게 덩어리가 크거든요."
"그걸 팔려고 내놨다는 소문은 벌써부터였지. 한데 아직 팔았다는 말은 없고 또 듣자니까 곡간도 그렇고 가게도 모조리 판다 하고... 김서방. 날 좀 살게 해주소. 그걸 내가 맡아서 팔아주면은 목돈을 자아 조그마한 가게라도 하나,"
영팔이는 서희가 한 말이 틀림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다.
"내 사정을 길서상희 바깥양반한테 말을 좀 해주며은."
"나는 잘 모르겠소만 그런 일이라 카믄 공노인이,"
"그 늙인이 넋나갔어요. 세상만사가 다 귀찮다는, 저번에 조선 갔다 오더니만 영 폭싹 늙어버리고 이번엔 또 조카딸이 죽고 보니,"
"그, 그것도 그렇겄소만, 말하는 기야 어렵잖지마는 그러세, 그 사람들 생각은 따로 있지 않겄소?"
"되든 안 되든 말이라도 한 번 건네주시오. 김서방 나 알지 않소?"
"말만 엄벙했지, 재주는 없구먼."
박서방이 끼여들었다.
"옳아, 내겐 시 짓는 재준 없네."
"엿 고우는 재주도 없고,"
"그럼."
"엿판 메고 떠난다는 얘기는 했었지."
"안 되며 별수 있나. 사는 날까진 살아야지."
"김서방."
"야."
"엿판 메고 떠나는 것 볼 수 없지. 악마구리같이 우는 새끼들, 젊은 마누라 뿌리치고, 안 그렇겠소?"
"그야,"
허허 하고 영팔이 웃는다.
"하니, 어려운 일 아니거든 말 좀 건네주라고, 뜨물에도 아이 생기더라고 뉘 알아요?"
"말이나 해보겄소. 그놈의 가나오나 계집 자식 땜에,"
"김서방이야 이젠 고생 다 했지. 범의 장다리 겉은 아들아이가 셋,"
"하긴 이자 다 컸지요. 홍이애비 일이 난감하지.'
"난감할 것 뭣 있소.'
마음이 느긋해진 권서방이 명태를 찢어 초간장에 찍어서 입에 넣으며 말했다.
"국밥집 아주머니가 집도 한 칸 남겨놨겠다 그간 번 돈도 수울찮을 건데 식구가 많단 말가,"
"속 모리는 소리 하지도 마소. 은금보화가 산더미겉이 쌓여도 그사람 맴이사,"
"죽은 그 아주머니 생각 땜에 그렇다 그거요?"
"사내자식이 그런 거사 잊어부릴 수도 있겄지요. 거 세상에 사내치고 못할 것은 계집 하나 잘못 마내는 일인데,"
"홍이 엄마가 대단하긴 하지."
"대단할 정도가 아니라 사람이 아니라요. 쇠라며 다 삼키는 부가사리라카이. 자식이고 가장이고 살가죽가지 뺏겨묵을 계집인께. 웬만하면 이런 얘기 하고 접지도 않고 사내가 얼매나 못났이믄 친구 계집 험담할 기요. 나는 피도 살도 안 닿은 남이지마는 우떤 때는 꼭괭이로 그만 콱 찍어 직이부맀이믄 싶을 때도 있다 카이. 젊은 시절에도 영악하고 욕심이 많았지마는 그래도 촌에 살아 물정은 모리더니 도방에 나와 세상물정을 알고서부터는 날로 느는 게 패악이고 날 잡아묵으소, 그 판이라, 이거는 머 남 부끄러운 줄을 아나,"
흥분한다.
"사내가 물러서 그런 게요. 이서방이 용해서 그렇다니까."
"이서방이 용해? 그거는 모리는 소리라요. 그 사람이 그렇기 사는 거는 사람의 도리를 지키는 고집이제, 순 고집이라요. 내용을 몰라 그렇지."
"그래도 계집이란 말로 안 되면 매로 다스려야지."
그 말에 박서방
"장담하구먼요. 예사 제가 못하는 사람이 남의 말은 하기 쉽지. 하하핫..."
놀려준다.
"에키 순,"
"말이 무섭겄소. 매가 무섭겄소. 숨 끊어지지 않는 한... 용이 아니더믄 그 계집 뒤졌거나 다리 밑에 거적 쓰고 앉는 신세엿일 긴데 사람으 탈을 쓰고 그걸 모르는데 말해 머하겄소."
그 정도로 그쳤으며 임이네 과거사에 언급은 안 한다. 듣는 사람들도 남자들이라 미주알고주알 파고 묻지는 않았다.
"아까 권서방은 집도 남기놓고 돈도 남기놨을 기라 했지마는 두고 보라고요. 참말로 구신이 곡할 일들이 생길 긴께,"
영팔이는 한숨을 내쉰다.
"사람이란 팔자가 기박하다 보믄은 인성이 달라지기도 한다고들 하더라만 설령 그렇다 카더라도 그것도 정도가 있는 기리요. 고슴도치도 제 샜기는 귀타 카든데 제 주둥이 하나밖에 모리는 그기이 어디 사람인가."
영팔은 꾸역구역 올라오는 것을 꾹꾹 누르듯 술을 들이켠다.
"제에기, 아니꼬운 꼴 보기가 싫어서 한시라도 집에 가고 접지마는 무신일인지 좀 기다리고 있이라 카이."
영팔이는 박서방 가게에서 나온 뒤에 곧장 월선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할 일없이 이 거리 저 거리를 헤매다가 해란강 강가의 살을 에는 바람을 받으며 서 있기도 하고 어두워진 뒤 술집을 찾아들었다.
'왜 내 마음이 이리 이상한지 모르겄네. 정말로 고향에는 돌아가게 될 긴가? 그라믄 또 월선이는 정말로 죽었다 그 말이지? 나는 좋아해야 하나 실퍼해야 하나. 도라가문 아무 일 없일까? 왜놈의 순사가 잡으로 오지 않으까?'
또 하루가 지났다. 임이네는 여전히 마을을 돌아다니며 나발을 불어대고 있었다.
"말로만 우리 홍이, 우리 홍이 했지. 챙겨보니께 세상에 옷 한가지 변변한 게 없더라니까,"
"그래도 홍이는 늘 부잣집 아들같이 차리고 다니든데?"
"그러니께 그 계집이 예삿것이 아니다 그거 아니오. 겉만 번드르르 남보기 빈치만 낫지 옛이야기도 있지 않드가배. 투둑하게 입은 전실자식은 늘 오돌오돌 떨고 있는데 친자식은 얇은 옷을 입었는데도 추위를 안타더라고, 해서 아바니가 옷을 뜯어본께 전실자식의 옷에는 갈대꽃을 넣었고 제 자식 옷에 찰떡같은 목화솜을 넣었더라나?"
"월선옥 아주머니한텐 자기 낳은 자식이 없지 않았수?"
"그러니께 그 계집이 우리 홍이아배를 잡아놓을라꼬 사랑스럽지도 않는 우리 홍일 껌뻑 넘어갈 듯 좋아하는 시늉을 했제. 그러니 그년이 벌 받아 뒤진 거라 카이. 죄는 지은 대로 공은 닦은 대로, 소문엔 돈 많이 벌었다 카더마는... 그 내숭스런 년이 그걸 어디다 묻어놨는지."
"그런 얘기는 할 필요가 없지 않우? 홍이 아버지가 벌어준 돈도 아니겠고,"
얘기를 듣는 상대도 얄미웠는지 쏘아준다.
"그런 말 마소. 우리 홍이 아배가 산판서 번 돈 꼬박꼬박 그년한테 갖다준 걸 몰라 그렇지."
"그야 홍일 맡겨놨으니까,"
"맽기놨나? 뺏아갔지."
"아 말이야 바로 하지. 산판에서 떼돈 벌었겠수? 국밥집을 했으니 망정이지 굶고 있으며 남편이 벌어다 아 먹였을라구? 그런 소리 자꾸 하면 임이엄마 얼굴 쳐다봐요."
"알고 본께 한 통속이었구마. 돈 벌었다 하는 말이 머가 우째서? 영낭들고 나서는 거를 본께 이 집에도 그 돈 묻어놓은 거는 아니오?"
돈 잃어버린 사람은 세상 사람이 다 도둑이로 뵌다. 임이네 경우도 월선이 남겼을 것이 분명한 돈의 행방을 필사적으로 추적하다 보니 의심 안 가는 곳이 없다. 해서 시비가 붙는데 월선에게 호감적인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월선에게 동정이 모이니까 공연히 심통 나는 사람도 있고 국밥집 하던 여자가 호사스런 장사를 치렀다 하여 아니꼽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법한 얘기다.
"흥! 미꾸라지 용 됐네. 무당딸, 술 팔던 여자가 그런 꽃상여에 실려갔음 나는 금은보화로 만든 상여 타고 가야겠구먼."
그런 여자를 만나면 임이네는 신이 별의별 해괴망측한 얘기를 꺼내며 월선을 헐뜯는데 예를 들자며 고향에 있을 때 관계했던 사내가 한둘이 아니라는 둥, 숲속에서 백정놈한테도 치마를 걷었다는 둥 거의 자신이 밟아온 이력이 어느새 월선의 이력으로 둔갑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이네는 월선을 헐뜯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죽이 맞는 사람과 얘기를 주고받는 것도 그렇지만 시비까지 벌여가며 월선의 편역을 드는 사람들에게조차 접근해가는 이유는 돈의 행방에 대한 무슨 단서라도 잡자는 속셈에서다. 그는 자기 자신의 수법을 월선에게 적용했던 것이다. 남한테 돈을 주어 이자놀이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러나 불행하게도 임이네는 어떤 것도 알아내질 못하였고 환장이 된 그는 영팔을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며 왜 영팔이가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머무느냐, 왜 나를 따돌리느냐, 그렇다면 그럴 마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초상이 끝났을 때 먼저 가라 했던 영팔의 말을 새삼스레 꺼내어 시비를 건다.
"내가 와 가아! 내가 와 가느냐구! 여기가 어딘데 내가 가아! 그년 땜에 그 촌구석에 쫓겨가서 못할 고생 다 했는데 그것만 생각하믄 이가 뼈가 갈리는데 내가 와 가느냐고? 당연하게 있일 사램이 있는데 자개가 가라 마라, 거기서 가라고! 무신 상관이 있어서 이 집에 죽치고 있느냐 말이오! 그래 내개 객줏집에 가 있고 김서방은 여기 와 있어? 멋 땜에? 집 임잔가, 집 임잔가, 말이오! 그년 서방이든가 말이오! 내 참말로 이런 경우 없는 일 듣도 보도 못했구마!"
"미친개를 갈R이믄 갈R지 아무리 입에 거품을 물어도 내사 볼일 다 보고 갈 긴께, 그라고 여기 임이네 집이 아니고 홍이 엄마 집인께 다른 데 가서 잘 생각 없구마. 임예 집이라믄 있이라고 고사를 해도 있일 사람 아니니께."
영팔이도 어지간히 약을 올린다. 그러나 정작 일이 크게 벌어지기는 그날 밤, 홍이는 두메 하숙방으로 자러 가고 작은방에는 길상과 영팔이 용이 세 사람이 함께 자리를 했다.
"진작 이런 얘기를 했어야 하는 건데 나는 나대로 좀 깊이 생각해봐야겠기,"
길상이 말을 꺼내었다.
"실은 월선아지매 생전, 내게 돈 팔백 원을 맡긴 일이 있어요. 아지매 말이 홍이 아배는 내 생전 이 돈을 받지 않을 것이니 네가 가지고 있다가 전하라 그런 말 하더군요. 아지매 말이 또 홍이 공부도 시키고 장가도 들일 양으로 그 돈을 모았다는 겁니다. 나로서는 아지매가 말한 대로 용이아제한테 드리며 고만이겠으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 돈 받을 수 없다."
용이는 담담하게 말했다. 길상이나 영팔이 다 예상한 대로였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돌아가신 아지매가 그런 말을 하긴 하더구먼요. 그 성미에 받지 않을 거를 생각해서 그럴 경우 내가 그 돈을 맡아 있다가 홍이를 위해 필요할 때는 써달라구요."
"그럼 그기이 좋겠구마."
영팔이 말했다.
"그러나 제 형편이 그럴 수 없게 됐어요."
"그럴 수 없게 되다니?"
"그건 차차 알게 될 겁니다. 그러고 멀지 않아서 아제들은 고향으로 내려가게 될 건데 그렇담 영팔이 아제가 그 돈을 맡아주시는 게 어떨까요?"
"그 그러야 모, 못할 것도 없지마는."
이때였다. 아침을 먹기가 바쁘게 객줏집을 나와 온종일 싸돌아다니면서 동정에 전심전력을 기울이던 임이네는 길상이 가는 것을 보았다. 필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직가만 임이네는 집안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벽에 붙어 서서 방안의 말을 엿들은 것이다. 외치고 나오는데 주저할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와 내 자식 거를 김서방이 맡을 것꼬! 에미 애비가 눈이 시퍼러니 살아 있는데 에미 애비 손에 쥐어줄 일이지 누가 어느 놈이 그것에 손댈 것꼬!"
방문을 막차고 들어왔다.
"이 여자가 와 이러제?"
용이는 남을 보듯 중얼거렸다.
"하여간에 이 일을 옳게 끝단지우지 않는다믄 생사가 날 긴께! 나도 이잔 오기요! 오기! 누가 죽고 사는가 보자! 천금 겉은 내 자식! 그래 우리 홍이가 김서방 자식인가 길상이 자식인가! 우째서 우째서 내 자식 일을 좌지우지한단 말입네까!"
"자식이야 임이엄마 자식이지요."
길상이 말에
"그러면은! 그러면은, 우째서 내가 임이 엄만가 홍이 엄마다! 홍이 엄마!"
"그걸 누가 모르나요? 하지마는 내가 맡아 있는 돈은 실상 여기 있는 사람, 어느 사람의 돈도 아니고 홍이 돈도 아니지요. 죽은 월선 아지매 것이고 보면 월선 아지매 생각대로 해야지요."
"그 말 한 분 잘했다! 그 여자는 홍이한테 주기로 했다니까 그거는 홍이 돈 아니구 누구 돈이고? 그런데 우째서 길상이가 가져야 하고 또 김서방이 가져야 하노!"
"가진다기보다 맡아 있는 거지요."
"맡아 있거나 가져 있거나 매한가지, 그 돈 이래 내놔!"
"용이 아제가 안 가지겠다 하였소."
"애비는 마다해도 에미인 나는 가져야겠다. 내놔."
"그렇게는 못하겠는데요."
영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그 돈 못 맡는다! 나라 금사자리를 준다 캐도 안 맡을란다! 이 더러븐 꼴을 삼천갑자 동방석이라고 보까? 당할 때마다 명이 십 년씩은 줄긴데, 두 사람이 알아서 의논하라고,"
하면서 방문을 거칠게 닫아 붙이고 나간다.
"임자 거기 좀 앉아."
용이 음성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 임이네는 시위를 하듯 거친 몸짓으로 무릎 하나를 세우고 되바라진 눈을 휘두른다.
"그 돈, 임자 줄 수도 있다. 내가 받아서 임자 주믄 될 거 아니가?"
"그, 그야, 어차피 홍일 위해 쓸 거 아니오."
당장 회색이 돈다.
"그러나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다."
"무신 일인데요? 하라 카는 대로 하겄소."
"돈을 받는 대신, 그 대신 해야 할 일은 우리하고 인연을 끊는 일이다. 홍이 에미도 아니고 내 계집도 아니고 임자가 멀리 떠나든지 아니믄 우리가 멀리 떠나든지."
"뭐라꼬요?"
그렇게 말이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임이네는 놀란다. 길상은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임이네는 그렇게는 못하겠다는 말 대신 울기 시작한다.
"우째 그리 야속한 말을 합니까? 진작부텀 눈에 까시처럼 하더니, 사람이 죽어서 이제는 없는데 그래도 내가 까시가 됩니까?"
그것이 헛울음이라는 것은 뻔한 일, 눈앞에 다가온 황금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임이네는 아니다. 두 사내는 침묵으로 지켜본다. 그 큰돈을 어디서 만져보노, 논을 사도 서른 마지기는 더 살 긴데, 좋은 논 서른 마지기만 해도 나락을 팔구십 섬은 너끈히 추수할 기고, 이삼 년만 추수한 나락을 굴리믄 백 섬지기 백오십 섬지기는 누워서 떡먹기... 청국놈 땅 부치다가 일어서믄 남는 것은 이불보따리뿐인데, 이때를 놓치면 그런 돈 꿈에나 만져볼까? 헛울음을 울면서 임이네 생각은 재빠르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불속에 태워버린 돈 생각이난다. 그 돈까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팔자가 기박하여 그렇기 못 봐서 밤낮으로 천대하고, 그래도 갈 데 올 데 없으니 오늘까지 살았소마는 이자는 못 보아서 애간장을 태우던 사람도 죽고 없는데 우찌 그리 막말을 합니까. 이녁 마음만 고치묵으믄 남부럽잖은 자식 남과 같이 키워서 노리 보고 살 긴데,"
그래도 말이 없자 초조해진 임이네
"정 그렇다믄 좋소. 나 소리도 매도 없이 이녁 앞에 나타나지 않을긴께."
순간 용이 주먹이 임이네 얼굴을 친다.
"아아나 쑥떡!"
당장에 임이네 코에서 코피가 펑펑 쏟아진다.
"홍이? 천금 같은 자식?"
"아제! 이런 안 됩니다!"
길상이 얼른 임이네 상체를 뒤로 젖힌다. 임이네는 숨이 넘어가는 듯 나자빠진다. 용이의 잔인한 웃음이 방안을 흔들어댄다.
"길상이 보았나? 돈이 있으며 저 계집 혼자 아귀가 되는 거 아니다! 나도 홍이도 아귀가 된다! 아니면 살인 죄인이 되든지."
길상이 얼른 밖으로 나가 바가지에 물을 떠온다. 용이는 물건을 보듯 임이네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얼굴에 물을 끼얹고 벽에 걸려 있는 수건을 찬물에 적셔 이마에 올려놓고 그러는데 길상의 손을 확 뿌리치며 임이네는 일어나 앉는다. 바다에서 숨돌리는 비바리의 휘파람 같은 소리를 내고 나서
"이렇게 되고 보믄 이판사판,"
말을 시작하려 하는데 용이 말했다.
"길상아."
"네."
"나가자. 안 나가면 나는 사람을 죽이겠다."
"네. 나갑시다."
길상은 정말 살기를 느낀 것이다. 한 팔은 용의 팔목을 잡고 다른 한 팔로 벗어놓은 외투 털모자, 그리고 벽에 걸린 용이 흰 두루 마기와 털모자를 주섬주섬 거둬들고 밖으로 나온다. 집을 나서서 골목에 나온 뒤 비로소 길상은 뚜벅뚜벅 걸어가는 용이에게 두루마기를 걸쳐주고 털모자를 씌워주고 그런 뒤 자기도 외투를 입고 모자를 쓴다. 바람은 살을 에듯 차다.
"울 집에 갑시다, 아제."
"아니다. 가믄서 얘기 끝내고 작은아버지댁에 들리겄다."
"작은아버지?"
"객줏집 말이다."
용이 입에서는 처음, 공노인을 두고 작은아버지란 말이 나왔다. 삼촌도 아니요 아저씨도 아닌 작은아버지, 그 호칭 속에는 무한한 애정이 서려 있었다. 길상의 가슴에도 용이에 대한 애정이 솟는다. 인간에 대한 애정.
"아까 자넨 영팔이더러 그 돈을 맡으라 했는데 그거는 처음부터 안 될 얘기네. 나는 사내니까, 하는 오기에서 거절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홍이 에미가 원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피땀을, 홍이는 그것 없이도 큰다. 그것 없이도... 홍이가 기어 공부를 하겠다믄 무신 짓을 하더라도 내가 공부시킬 것이요, 하지마는 자식은 제 부모가 젤 잘 알지. 홍이는 공부에 별로 생각이 없다. 이곳에 있자 카니 공부랍시고 한 거지. 또 장가 드는 일도 그렇다. 형편 되는 대로 정화수 한 그릇 가지고 예는 올릴 수 있는 거고, 피땀 나게 살다 간 사람 땜에 우리가 편하게 살아 옳겄나?"
용이의 음성은 잔잔하였다.
"그래 이거는 내 생각이네만 그 돈은 죽은 사람을 위해서도 그렇고 홍이 처지로서도... 길가에 버릴 수는 없는 돈 아니가? 그러니 독립운동 하는 곳에 기부하는 게 좋겄다. 홍이에미가 홍이에게 남긴 거라면 홍이가 그걸 맡아서 독립운동 하는 데 썼다 할 것 같으면 과히, 안 그렇나?"
"아제!"
길상이 용이 팔을 꽉 잡는다.
"아제!"
"나보고 그럴 것 없다."
"어지 그리 못살았습니까. 아제하고 아지매는,"
"아니다. 우리는 많이 살았다. 살 수 있는 데까지 살았네라."
"그, 그건 압니다."
용이하고 헤어진 길상은 울면서 집에 돌아갔다. 용이 객줏집에 들어갔을 때 공노인과 방씨는 용이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아랫목에 끌어다가 앉히려 한다. 그러나 용이는 기어 윗복에 서서
"작은아버님 그리고 숙모님,"
공노인과 방씨의 눈이 화등잔만큼이나 커다래진다.
"절 받으십시오."
"응, 응, 그, 그러지."
공노인은 엉겁결에 안고 방씨도 낯선 집에 온 것처럼 두리번거리다가 공노인 옆에 앉는다. 용이는 절을 올린다.
"거, 거 이제 앉게, 앉아요."
"예."
두루마기 자락을 걷고 앉는다. 방씨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공노인은 쉴 새 없이 눈을 깜박거린다.
"그, 그렇잖아도 내, 자네하고 김서방을 만나려 했는데 오늘 밤은 김서방이 거기 간다기에."
"예, 방금 왔다갔십니다."
"그래?"
"이서방."
방씨가 새 사위를 본 듯 은근하게 부른다.
"저녁은 묵었나?"
"예, 묵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홍이 에미가 살던 집 말입니다만,"
"응."
"지는 내일 남은 일을 해놓고 떠날 작정입니다."
"떠나기는? 뭣하러 떠나누?"
그 말대답은 없이
"홍이 에미는 불쌍하게 살다 간 사람입니다."
"..."
"해서 작은아버님께서 알아 하시겠지마는 불쌍하게 살다 간 사람의 집은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쓰는 것이 좋은 듯싶어서,"
"그게 무슨 소린가."
"내일이라도 여기 방 하나 치워주시므은 빈소를 옮기고, 별거는 없지만 세간도 옮기고 홍이에미 옷은 무덤가에 가져가서 사루울 작정입니다. 아무튼 집은 싹 비워야겠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구렁이(임이네)가 들앉을 것이란 말은 차마 입밖에 내질 못한다. 그러나 공노인는 짐작을 한다.
"당분간, 홍이는 이곳에서 빈소에 상식도 올리야 하고,"
"그것은 어찌 하든, 내 말이나 들어보게."
"예."
"아무튼 자네하고 김서방은 이제부터 고향 갈 차비를 차려야 하네. 아니 고향이 아니지. 진주로 가는 게야. 길서상회도 여름, 늦어도 여름에는 이곳을 떠날 걸세. 허니 자네들은 미리 가 있는 게야. 진주에 가면은 관수, 관수를 알지?"
"예. 압니다."
용이는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
"그 사람이 거기 있어서 다 주선하게 돼 있고, 머 자세한 얘기는 떠날 때 해도 늦잖으니, 일단 퉁포슬로 돌아가서 차빌 서두는 게야."
"알겠습니다.“
10장. 찾아온 사람
빈소를 객줏집에 옮기는 동시 홍이의 거처도 그곳으로 옮기었고 텅 비어버린, 월선이 살던 집, 용이는 방 두 개와 부엌에 대못을 박았다. 자기 심장에다 대못을 박듯이. 그리고 텅 빈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장도리를 들여다보며 또 한참의 시각을 보내다가 마지막 대문에다 못질을 한다. 이 무렵 임이네의 분통은 절정을 넘었고 산송장처럼 나가떨어졌다. 임이네의 탐욕이 아귀 지옥의 그것이었다면 대못을 쾅쾅! 박아대는 용이의 잔인성도 바로 그와 흡사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전생에 자신은 미식을 하되 처자, 혹은 남편 자식에겐 주질 않아 식토귀로 변한 아귀는 남이 토해낸 것이 먹고 싶어 늘 괴로워하였다 하고, 주야로 아이 다섯을 낳아 제 낳은 아일 먹건만 배가 차지 않는 아귀, 자신의 머리를 무딪쳐 쏟아지는 뇌수밖에 먹을 수 없는 아귀, 똥과 고름과 피를 먹고 사는 아귀, 염열기갈에 견디지 못하고 청류를 향해 달려가면은 몽둥이 든 채귀가 길을 막고, 눈앞의 음식을 먹으려고 하면은 순식간에 화염으로 변하는, 그 고통 많은 아귀들의 전죄는 탐욕 질투라 하거늘, 과연 용이는 그 아귀지옥의 채귀는 아니었더란 말인가. 지난날 용정 대화재시에 돈을 숨긴 베개를 불속에 태워 버렸던 그때처럼 객죽집 방 한구석에 산송장이 드디어 나둥그러진 임이네는 식음을 전폐하고 짐승처럼 신음하는 것이었다. 냉혹한 소외와 처절한 고독, 임이네의 외관적인 그 병은 그러나 애정으론 치유될 수 없고 황금의 힘에 의지할박에 없는데 어느 누구, 애정도 황금도 그에게 시약하는 사람이 없었다.
용정 일이 일단락되자 용이와 영팔이는 귀향을 서둘기 위해 퉁포슬을 향해 떠났다. 그런 뒤 음력 삼월의 해빙기가 찾아온 용정 역두에는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그때처럼 별 가진 것 없이 이젠 늙어버린 용이 내외, 영팔이 내외, 그리고 코흘리깨 어린것들이 성장하여 늠름해진 소년 청년이 된 자식들을 앞세우고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형! 두메형!"
홍이는 두메의 손을 흔들며 차마 마차에 오르질 못한다.
"어서 타아. 나도 얼마 있으면 이곳을 떠나 군관학교에 갈 건데 뭐,"
"응, 알아 그건. 하지만 형! 나 또 온다. 형 만나러 올거야. 어머니 산소도 여기 있지 않어?"
"그래, 그래, 또 마나자."
"할아버지! 할머니! 나 또 오께요!"
"오냐, 오냐, 와야 하고말고,"
길상에게는 모자를 벗고 절을 했다. 그리고 마차는 떠난 것이다. 임이네의 저주, 저주의 피눈물도 멀어지는 마차와 더불어 가버린 것이다. 행방을 감춘 임이는 물론 동행하지 못하였고 친정에 맡겨졌던 임이의 아들 구야는 막사 떠난다니까 그 애비가 내 새끼 내가 기른다면서 찾아갔다. 그리고 영팔이 권서방을 위해 길상에게 청한 것은 성사를 못 보았다. 대신 대못질을 했던 월선의 빈집에 권서방네 식구와 홍서방네 식구가 세 없이 들 수 있게 된 것을 그들은 기뻐했으며 산 입에 거미줄 치는 일 없다는 공노인 말에 희망을 걸었다. 어수선한 봄이 무르익고 해란강 물빛이 푸르게 희번득일 무렵 두메도 중국 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용정을 떠났다. 송장환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동안 길상은 하얼빈을 세 차례나 다녀왔던 것이다. 사랑 툇마루에 햇볕이 들친다. 길상은 툇마루에 묵은 책들을 꺼내어 거풍도 할 겸 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
부르며 환국이가 쫓아온다.
"왜 그러느냐."
"아버지 또 어디 가요?"
"아니다. 누가 간더더냐?"
"아아니..."
환국이는 손가락으로 툇마루를 밀며 애매하게 대답한다.
"손에 가시들며 어쩔려구?"
길상은 마룻바닥은 미는 아이의 손을 떼밀어낸다.
"아버지?"
"왜."
"그때, 그때 말이지요?"
"음."
"그때 아버지가 하얼빈 가셨을 때 나 어머니 방에서 잤어요.'
"좋았겠구나. 어머니 옆에서 잤냐?"
"아아니,"
"그럼?"
"난 윤국이 손잡고 잤어요."
"왜?"
"어머닌 앉아 계셨거든."
"..."
"어머니는 울었어요."
길상의 낯빛이 변한다. 길상이 하얼빈으로 떠날 때마다 이젠 안 돌아올지 모른다 생각한 서희의 심중을 상상할 수 있다. 제아무리 담찬 여자, 자제심이 강한 여자이기로 그 심중이 온당할 리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집안 식구는 눈치 채지 못하였으나 아이가 느낀 것이다. 전후 사정은 여섯 살 난 아이가 알 리 없겠으나 어미 기분에 대해선 민감하다. 아이의 심장과 어미의 심장이 직결되어 있는 것처럼, 아이는 눈으로 머리로 느끼는 게 아니라, 공기로 피부로 느낀다.
"아마 어머닌 배가 아팠던가 부지?"
"약도 안 잡수던데도?"
환국이는 다시 손가락으로 마룻바닥을 민다.
"손에 까시 들어. 그러지 말아라."
얼른 손을 내린다. 모두 환국이는 아버지 길상을 닮았다고들 한다. 환국의 성질은 느긋하였고 인정이 많았다. 서희가 어쩌다 하인을 나무라는 그런 광경과 마주치면은 못 들은 척 안 본 척 조용히 혼자 장난질을 하고 논다. 하인이 돌아간 뒤에도 한참을 놀다가 슬그머니 꾸중들은 하인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고는 공연히 칭얼대며 업아달라든가 아니면 종이배를 만들어달라든가 해서, 그런 행동으로 위로하곤 했다. 아이의 눈은 샛별같이 반짝였다. 새를 좋아하고 고양이 강아지를 좋아했다. 돌이 지나기 전부터 달 보러 나가자고 밤이면 바깥쪽을 가리키곤 했었다. 집안의 모든 식구들은 아이를 사랑했으며 기쁨의 대상이었고 그럼에도 이 어린 것을 경의없이 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환국이에 비하여 둘째 윤국이는 겨우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성정이 강한 편이었고 예민했으며 아무에게나 더분다분 가질 않았다. 욕구가 거절되면 매우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해서 둘째는 어머니를 닮았나보다고들 한다.
"아버지."
"오냐."
"이 책 뭐할려고 내와요?"
"거풍하는 거야."
"거풍이 뭐지요?"
"오래 놔두먼 습기가 차서 책이 썩거든. 그래 말리는 거야."
"아아, 그런데 아버지, 어디 가시는 거 아니지요?"
"그렇다니까."
"아버지."
"또 왜 그러느냐."
"뒷숲에서 새가 알을 깠어요."
"그 알 집어내면 못쓴다."
"네, 알아요. 빨리 알 까서 새끼가 됐음 좋겠어요."
아이는 툇마루에 두 손을 잡고 팔작팔작 뛴다.
"아버지가 환국이보고 꾀꼬리새끼 얘길 했던가?"
"네."
하는데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길상은 아차 싶었다. 그때 꾀꼬리 새끼 얘기를 들려주었을 때 일이 생각났다. 처음 아이는 대단히 흥미 있게 그 얘길 들었으나 나중에는 기분을 상해했던 것이다.
"왜 엄마가 새낄 두고 갔을까요? 두고 안 갔음 새낀 죽지 않았을 텐데... 밤새 울고서 목이 아프진 않았을까?"
눈에 눈물이 글썽했었다.
"주인어른."
하인 장쇠가 와서 부른다.
"왜 그러느냐."
"저어, 횟집에서 심부름꾼이 왔습니다."
"뭣하러 왔더더냐."
"손님 심부름을,"
"들어오라고 해."
"이 책은 제가,"
"아니다. 내가 알아 챙길 터이니,"
얼마 후 장쇠가 횟집 심부름꾼을 데리고 왔다. 심부름꾼은 쪽지하나를 내밀었다. 쪽지엔,
'편지 받는 대로 곧 오시오.'
공노인의 필적이다.
"공노인이 주신 건가?"
"네."
"혼자 계시냐?"
"아닙니다. 낯선 손님 한 분하고 함께 계십니다."
"알았다."
환국이는 안으로 들어갔는지 없었다.
"내가 해지기까지 안 오면은 책들을 방에 들여놓도록,"
장쇠에게 이르고 길상은 옷을 갈아입는다.
'함께 있다는 손님은 누굴까?'
횟집으로 가면서 궁금해 한다. 하얼빈이나 연해주 방면에서 온 손님이면 공노인을 통할 리가 없다. 만일 조선서 사람이 왔다 하여도 공노인은 집으로 데려왔을 것이 아닌가.
'혹 김두수, 그럴지도 모르겠군?'
길상은 곧 횟집에 당도하였다. 안쪽에 있는 방으로 안내되어 갔다.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한 사내가 옆모습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한복차림이다.
"왔구먼."
그와 마주보고 있던 공노인이 얼굴을 돌린다. 약간 난색을 보이는 미묘한 웃음이 지나간다. 그러나 이내 낯선 사내에게 조심스런 시선을 보낸다.
"앉지."
공노인이 권했고
"네."
하고 길상은 자리에 앉는다. 길상은 사내의 강한 시선을 느낀다. 어쩐지 사내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는 곤혹감에 빠진다.
"자네 모르겠나?"
공노인의 조심스런 음성이다.
"저 무슨 말씀인지,"
"인사나 해야지."
비로소 길상은 낯선 사내를 바라본다.
"..."
"하기야 나도 좀 알아보기 힘들구먼."
사내 입에서 말이 떨어졌다. 낮은 음성, 웃음 섞인 말투.
"아니!"
"이제 알 만한가1"
"댁은 뉘시오!"
길상이 외친다. 사내는 껄껄걸 소리 내어 웃는다.
"무덤 속에서 망령이 나타난 것 같은가?"
"구, 구,"
"맞어. 구천이다. 내 본명은 아니지만,"
길상은 현기증을 느낀다.
"통성명할 필요도 없겠구만."
공노인은 조금 물러나 앉듯하면 어색하게 말했다.
"그래, 서희랑 애들은 잘 있느냐?"
환이 술잔을 들며 길상을 지그시 바라본다. 눈에 이글이글 불길이 인다. 그러나 한순간이었다. 차디찬 것이 동공에 모여들고 몸 전체에서 중심을 향해 모여드는 것 같다. 길상의 얼굴은, 귀뿌리끼지 붉게 타들어간다.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치민 것이다.
"네. 덕분으로,"
도전적으로 뇌가린다.
"소식은 다소 알고 있었으나,"
환이 중얼거렸다. 길상은 거칠게 고개를 돌리며 도대체 어찌 된것입니까? 그런 눈초리로 공노인을 쳐다본다. 공노인은 눈을 꿈벅꿈벅할 뿐이다.
'도시 어떻게 된 일이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공노인."
길상의 음성은 날카로웠다. 공노인은 엉금엉금 기어가는 베짱이처럼 서툴고 어설픈 연막을 피우며 길상을 본다.
"공노인께서는 아시는 사이신가요?"
"그, 그렇지. 알구말구. 거 뭐냐... 김개주 장수 외아드님이시고 또,"
하다 씩 웃는다.
"뭐라구요?"
"그러고 또 우관스님의 조카 되시는 분이지."
길상은 또다시 충격을 받는다.
"혜관스님이 자네보고 아무말 안 하든가?"
음흉을 떤다.
"못 들었습니다. 어찌 제게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는데 이마 뼈가 불룩불룩 흔들리는 것 같다. 공노인은 대답을 못하고 환이를 힐끗 쳐다본다.
"하기는 그러실 만한 이유는 있었겠지요."
하다가 실상은 대뜸 자기 앞에 놓인 빈 잔을 환이에게 내민다.
"잔 받으십시오. 옛날 글 배우던 제자가 드리는 잔입니다."
환이를 노려본다. 잠자코 잔을 받는다. 술을 따르는 길상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술을 들이키며 환이는 잔을 돌려주며
"내 잔도 받게."
하고 술을 부어준다. 길상은 술잔을 내려다본 채
"그래 여기는 뭣하러 오셨습니까."
"뜻 없이 왔느니라."
길상은 술을 들이붓듯 마신다.
"잘 오셨습니다. 옛날처럼 최참판댁을 또 한 번 망하게 해주십시오."
"김서방! 자네 무슨 소릴 하는 게야?"
공노인이 고함치듯 말했다.
"네. 지금 최서희는 옛날 만석살림을 회복하였습니다. 공노인께서 잘 아시다시피, 저는 그 살림 망하기를 소원하거든요."
"거, 괜찮은 생각이야. 그 재산 날 주면은 조준구보담 쓸 만한 곳에 쓸게야, 산중에 가서 반역과 패륜의 왕국이라도 세우면, 그거 조오치."
환의 대답이다.
"그, 그럼 나는 가보겠는데,"
공노인은 꽁지를 빼듯 일어섰다. 팽팽한 분위기를 휘저으며 문앞까지 가서
"김서방,"
"..."
"분별이 있어야 하네."
그러고는 나가버린다. 길상은 냉정을 되찾는다.
'왜 내가 흥분하는가. 흥분할 이유가 없지. 김개주 장수의 외아들? 그리고 우관스님의 조카, 그럴 테지. 김개주 장수의 아들이라며 마땅히 우관스님의 조카일밖에. 어째서? 그럼 어째서 최참판댁에선 머슴 구천이가 되었나.'
이십 년 세월만 무서운가? 이 무서운 인연들. 목구멍으로 술이 타고 내려가는데, 뜨거운 빼주가 넘어가는데 머릿속이 차츰 맑아온다. 선명하게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지난 일들이 새롭게 눈앞을 지나가고 있다. 소년 길상이는 구천이를 두려워했다. 쥐어박히며 태오하 그리기를 가르치는 혜관보다 남몰래 손짓하며 데려가서는 글을 가르쳐주던, 말이 적고 엄격해 보이던 사람. 무한한 숭배와 경의로 바라보던 그 사람은 최참판댁 몰락의 횃불을 든 최초의 인물이다. 서희의 불행은 그로 인하여 시작되었고 서희와 자신과의 인연도 이 사람으로 인한 인연이다.
'뭣 땜에 나는 이 사람에게 분노를 느끼나.'
길상은 눈을 들어 환이를 본다. 그림자 같기도 했고 쇳덩이 같기도 했고 그런 모습으로 조용히 자작을 하고 있었다. 신경의 어느 한 오리도 길상에게 뻗쳐오는 것이 없다. 무인지경에 있는 사람이다. 아니 거인이다. 그것이 그림자건 쇳덩이건. 쇠잔한 몸이다. 깡마른 얼굴이다. 늙었다거나 젊었다거나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모습이다. 길상은 차츰 숨결이 가빠오는 것을 느낀다. 시선을 느끼지 않을 리가 없다. 살아 있는 생명이 무슨 힘으로 저다지도 응고되어 반사할 줄을 모르는가. 길상은 숨이 가쁜 채 대결한다. 전신의 기를 뿜어내어 자신의 자리를 굳히며 대결하려 한다. 힘이 부친다. 힘이 빠져나간다. 지친다. 바위와 개미의 씨름 같다. 길상의 무엇이든 얘기를 하려고 빠져달아는 힘을 허둥지둥 모은다. 순간 환의 눈이 길상에게로 옮겨지면서
"내가 서희를 만나러 가도 되겠느냐?"
"네?"
"최서희를, 이 김환이가 만나러 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만나셔야 할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이곳에 뜻 없이 왔노라고 아까 말하지 않았던가?"
"제 생각 같아서는 만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과연 그럴까?"
"..."
"후안무치하다 그거로군."
"네, 그렇습니다."
"내 낯가죽은 이십 년 풍설 속에서 후안 정도가 아닐세. 쇠가죽처럼 단단해졌거든. 그래도 아니 되겠느냐?"
"쇠가죽이 아니라 쇳덩이가 되셨습니다 해도 만나서는 아니 되지요."
환이는 소리 내어 웃는다.
"그보다 별당아씨는 어찌 되셨습니까. 살아 계시오?"
"자네 장모님 말이냐?"
차갑다.
"네."
"언젠가 거지 한 사람이 분명 너에게 알려주었을 걸? 지금으로부터 십이년 전으로 기억하는데?"
"정말로 돌아가시었습니까? 혜관스님 말씀은 들었지만 저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때 오 년 전 일이라고 했었지. 자아 술 마시게, 오늘 밤에 징그러운 뱀이 허물을 벗는 날이야."
또 웃는다. 크게 소리 내어 웃는다. 길상은 순간 그 웃는 모습이 누굴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누굴 닮았을까? 저 웃는 얼굴... 우관스님도... 아니다.'
입에 뱅뱅 돌면서 생각나지 않는 이름 같다. 저런 웃음의 얼굴을 누가 가졌던가. 길상은 기억을 찾아내려고 애를 쓰다가 무거운 납덩어리 속으로 빠져 들어가듯 또다시, 침묵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환의 존재에 놀라기 시작한다. 조용히, 적당한 간격을 두어가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환의 술버릇이, 지리산의 숯 굽던 사팔눈 강쇠를 번번이 곤혹에 빠뜨렸던 그 술버릇, 강쇠는 에라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하고 코를 골면 되었다. 그러나 길상은 그럴 수 없다. 이따금 자신도 술을 부어 마시지만 낯선 주막의 낯선 나그네끼리 마시는 술이 아니다. 숨통이 막힐 것 같은 상황에서 길상은 술이 떨어져 아이를 부르고 술을 가져오게 하고 해서 숨구멍을 트곤 했는데 그새 두 번이나 술이 들어왔다.
'사람 미치겠군. 왜 이렇게 되는 거지?'
이럴 경우 어떤 장사도 못 당할 것이라 했던 강쇠의 말을 들었더라면 길상은 이렇게 몸을 뒤틀지 않았을지 모른다.
'남의 간을 빼먹는 여우도 아니겠고,'
웃는 얼굴이 누굴 닮았는지, 생각해내려던 것을 그만둔 것은 벌써였고 이제 길상은 환이와 자신이 얽혔던 지난 일, 김개주 장수의 아들이라는 놀라운 사실조차 염두에 없다. 방안 가득한 그의 존재와의 필사적인 싸움, 형용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힘과의 싸움에서 길상은 자신이 탈진해가고 있는 것을 느낀다.
"제가 뭐라 불렀으면 되겠습니까."
쉰 목소리로 길상이 묻는다.
"음?"
빤히 쳐다본다. 길상도 그 눈을 마주본다.
"장인어른 하고 부를 수는 없겠지."
'..."
"양반의 유부녀를 유인한 상놈이 선배라면 너는 상놈으로서 양반댁 규수와 혼인하였으니 후배 아니겠느냐?"
환이는 또 웃었다.
'저 웃음, 웃는 얼굴, 누굴 닮았을까?'
잊었던 의문이 다시 솟는다.
"그래 아들이 둘이랬지?"
"앗!"
"...?"
"알았습니다."
"뭘 알았어?"
그 웃음의 얼굴이 바로 자기 둘째 윤국이의 얼굴인 것을 길상은 깨닫는다. 바로 윤국의 웃는 얼굴 그 얼굴이다. 횟집 전체가 침묵에 빠져 있었다. 상춘객들이 다 돌아가고 밤이 온 것이다. 별안간 길상은 취기를 느낀다. 왠지 긴장이 풀어진다.
"네. 닮았습니다."
"..."
"우리 윤국이 그놈을 닮았군요."
환이 얼굴에 경련이 인다.
"그럴테지."
"네?"
"당연히 그럴 게야."
"당연히..."
"그 아이의 증조할머니, 즉 윤씨부인은 내 어머니였으니까 닮았을 테지. 그러면은 내가 작은 할아버진가? 반쪼가리 작은 할아버지군 그래. 하하핫..."
"뭐라 하시는 게요!"
길상이 일어섰다. 휘청거린다. 환이의 눈은 몽롱해진다.
"내 피가, 상놈 양반 반반이 섞인 핀데, 아 참, 그 두 놈 아이들도 그렇군 그래, 하하하..."
"정말, 정말로 그, 그렇습니까?"
길상은 도로 주질러앉으며 넋이 바진 듯 환이를 바라본다. 길상의 시야가 흐려지곤 한다. 모조리 지쳐버린 신경이 다만 술기운으로 숨을 쉬고 있는 것 같다. 계속되는 난타에 이젠 무릎을 꿇어버린 꼴이다. 취기가 밀물처럼 달려온다.
"길상아."
먼 곳에서 들려온다.
"나가지."
역시 먼 곳에서.
"강가로 가지 않겠느냐?"
"네. 가지요. 가겠습니다."
자신의 목소리조차 멀리서 울려온다. 물결 소리가 들려온다. 샛바람 소리 같은 것도 들려온다. 사방은 칠흑이다. 또 물결 소리, 철썩이는 물소리. 그리고 음산한 목소리, 그리고 폐부를 찌르는 것 같은 노랫소리.
"별당아씨가 어떤 여자던고? 어떤 여자였던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었던 현세와 하늘에 수명할 수 없었던 사람, 땅을 끊을 수 없었던 초나라의 굴원은, 그 굴원은 돌을 안고 멱라에 빠졌건만, 그 기나긴 방류도 끝이 낚건만 어찌 나는 살아 있는가,"
한 사나이가 어둠 속에서 통곡하고 있었다.
"형수를 범한 내가 백주대로에서 내 불륜을 외치고 또 외칠지언정 차마 내 어머니의 불륜은 햇빛이 부끄럽구나! 내 아버지의 만행은 햇빛이 부끄럽구나! 어찌하여 하늘은 그들을 벌하십니까! 어찌하여 나는 햇빛에서 어둠으로, 네! 어둠으로 내 부모를 몰고 가고 있는 겁니까! 하늘이여 그대는! 벌하였을지언정... 흐흐흐흣... 한 청상이 사람 없는 산중에서 힘센 사내에게 유린당한 것이 죄가 되겠습니까? 앙화를 당한 여자를 매질할 수 있겠습니까. 그, 그러나 나는 그 여인에게 매질을 하였습니다. 그 여인을 구렁창으로 떠 밀어넣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양반이어서 그랬을까요? 내 아버님을 사랑하여 그랬을까요! 아버님! 임자 없는 여인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있구말구요! 당신이 죄인입니까! 아닙니다! 으흐흐... 한데도 왜 당신네들 불륜을 이 어둠 속에서 나는 해명을 해야 하는 거지요? 아버님!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네들을 다칠 수 없습니다., 으흐흐흐..."
한 소년이 울고 있었다. 꿈속에서 한 소년이 웅크리고 앉아서 울고 있었다. 모래밭을 치는 물결 소리가 있었다. 철석철석, 무심한 물소리가.
"어머니! 어머니! 당신은 두 아들을 섬긴 한 며느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내게 진 빚 때문에 그려셨습니까! 아니면 그 강간자를 당신은 사랑했기 때문에 그러셨습니까! 대답해주십시오! 양반의 법도를 저주했노라고 말씀해주십시오! 어머님! 당신보다 며느님이 진실했다고 말씀해주십시오. 어머님! 저는 한번 짖어보려고 만주 땅에 왔습니다! 짖어보려고 무거운 쇠철갑을 벗어보려구요! 아버지의 피를 아십니까! 내 아버지는 옳았소! 옳았소이다! 당신을 유리한 것도 옳았고 아귀같이 피를 뿌린 것도 옳았소! 내게 더 많은 피를 뿌리게 하옵시고 더 큰 역도가 되게 하옵시고! 조선 천지를 피로 씻어내게 하옵시고! 방방곡곡 슬픈 울음이 끊기게 하옵시고 죄 아닌 것을 죄 되게 하지 마시옵고!"
꿈도 멀어져갔다. 빛깔과 빛깔이 난무했다. 우관스님이 거기 서있는 듯했으나 그 모습도 사라졌다. 길상이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이 객줏집 안방에 누워 있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머리맡에 앉아서 싱긋이 웃고 있는 얼굴을 발견했다. 길상은 소스라쳐 일어났다.
"젊은 사람이 술엔 나보다 약하구먼."
"어, 어떻게 되어서... 그,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었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정신을 잃어본 일이라곤 없었다.
"어떻게 여기 와 있습니까, 선생님."
저도 모르게 길상은 환을 선생님이라 부른 것이다.
"내가 끌고 왔지."
너무 너무 평정한 얼굴이다. 정녕 어젯밤 일은 모두 꿈이었더란 말인가. 그 통곡과 절규가. 길상은 들창문을 올려다보다. 창문이 뿌옇다. 날이 샌 것이다. 다시 방안을 둘러본다. 안방이다. 침구는 말짱 새것, 환이는 단정하게, 옷도 단정하게 입고서 앉아 있다. 준수한 선비다.
'아니다. 꿈은 무슨 꿈, 돌아가신 마님을 어머님이라 했다. 김개주장수와 윤씨부인...'
"세수를 하게. 해장국을 먹어야지."
"네."
세숫물은 마루 끝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얼씬거리질 않았다. 공노인과 방씨는 방을 비워두고 어디 갔는지, 세수를 하면서
'공노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알고 있었을까...'
얼굴을 닦고 방을 들어간 길상은 환이와 마주보고 앉는다. 멀리 길 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길상은 별안간 마구간에서 말을 꺼내어 이 사내랑 함께 타고 달아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면은 화살이 활시위에서 떠난 것처럼 돌아보지도 않고 달릴 것이란 생각이 든다. 왜 그랬는지 모른다. 이윽고 해장국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소반을 들고 순이네가 들어왔다. 주전자와 투박한 사기 술잔이 두 개다. 두 사내는 훌훌 불며 해장국을 마시고 집에서 담근 밀주인 듯, 탁배기를 단숨에 마신다. 공노인이 들어왔다.
"잘 주무셨습니까?"
정중하게 환에게 인사를 한다.
"내 평생 처음으로 편안한 잠을 잤소이다."
의아해하는 빛이 공노인 눈을 스치고 간다. 온유해 보이는 환의 얼굴을 신기한 듯 쳐다본다.
"길서상희 당주께서도 잘 주무시고,"
이번에는 길상을 향해 농조로 말했다.
"잘 잤습니다."
공노인은 자리에 앉으며 곰방대를 뽑는다.
"한잔 하시겠습니까?"
환이 묻는다.
"아닙니다. 속이 좋질 않아서,"
사양하고 담배를 붙여 문다.
"알고 보니 김서방 형편 없구만."
"어째서 그랬는지,"
"인사불성, 늘씬하게 늘어졌는데 지리산의 호랑님이 아니더면 노상에서 마차에 깔려도 모를 법하지 않았나."
"난생 처음입니다."
"하기야 그럴밖에, 사죽을 못 쓰다가 그만 축 늘어진 게야."
"공노인께선 경험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있다마다, 정기를 타고난 사람 앞에선 누구든 그렇지. 이런 말도 처음 하는 말이네만,"
"어째서 처음으로 말씀하시지요?"
"이 늙은 것이 이래봬도 수백 년 묵은 여우쯤은 되네. 사람이란 날 때부터 푼수라는 게 있는 게야. 그게 천질이라는 거지. 해서 내가 짐승으로 치자면 호랑이는 못 되고오,"
"오늘 아침 보아하니, 정기는 정기로되 독기가 폭 빠졌구만. 해서 입이 떨어진 게야."
본인을 앉혀놓고 하는 찬사는 때에 따라 불쾌한 것인데, 그러나 환이는 태연하게 듣고 있다가
"수백 년 묵은 여우보다 수천 년 묵은 너구리요."
"예. 독기가 좀 과했으면은 이완용 못지않게 나라를 팔아먹었을 게요. 그 놈의 독기가 모자라 조가놈의 목만 누르고 말았자먼,"
하며 공노인은 으허허헛 하고 신을 내어 웃는다. 길상은 자기와 김환과의 어색한 관계를 중재하기 위한 사설인 것을 깨닫는다.
'능청스런 늙은이.'
"그는 그렇고... 나하고 술내기, 오늘도 해볼 생각 없나?"
환이 길상에게 묻는다. 공노인이 거든다.
"그렇게 하지. 집 걱정은 말고."
"...?"
"집에는 못 들어간다고 내가 기별해놨네."
"그렇게 하지요. 며칠이고 제가 이길 때까지."
그리하여 두 사내는 붙어다니면서, 사흘 밤 사흘 낮을 마시고, 강가에 나와 외치고 함께 뒹굴고, 기묘한 시합을 계속하였다. 공노인의 말로는 백중지세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로 끝내는 게 어떠나 하며 흐물흐물 웃는 것이다. 참으로 기괴망측한 일이었다. 미친 지랄이었다. 환이도 길상도 세상에 나와 그렇게 껍데기를 훌랑 벗어본 일이 없다. 그것은 일종의 치료였는지 모른다. 아픔의 치료, 그리고 길상은 환이로부터 오는 갖가지 저항을 극복할 수 있었고 숭배감과 증오감 얽힌 감정을 극복할 수 이썼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의 장막을 걷고 환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환이는 만주 문턱에 와서 술 목욕과 모래 목욕을 썩 잘했다 하며 웃었다.
"숙부님! 우리 며칠 후 하얼빈으로 갑시다."
"거긴 뭣하러,"
"제가 만나기로 약속한 분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데 내가 왜?"
"누가 이기는가 내기하실 분이 계시오. 그분은 숙부님 앞에서도 결코 인사불성이 되진 않을 겁니다."
"음..."
"공노인은 지리산 호랑이라 하시었지만, 중국 땅 들쥐하고 조선 땅 들쥐가 한판 붙는 겁니다."
"중국 사람인가?"
"아니지요. 우리 동족입니다. 그분은 이곳에 오래 계셨으니까요."
나흘째 되는 밤 길상은 집으로 돌아갔고 환이는 객줏집에 묵었다. 그리고 비로소 이날 밤 공노인은 월선에 관한 얘기며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희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려준다.
"아직 한 번도 물어본 일이 없지만 길상이가 함께 갈 건지 안 갈건지... 역시 아무 말씀이 없지만 아이들 어머님도 온통 그것에만 정신이 쏠려 있을 겁니다. 시일이 다가오며 올수록,"
"공노인."
"예."
"서희는 최참판댁 여인이오. 주변의 사정은 사정일 것이고 서희 생각은 생각, 길상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니겠소?"
"그야 그렇습지요만... 내 생각도 그렇습니다만,"
"공노인은 가시는 게지요?"
"아아니 내가 뭣하러 갑니까?"
펄쩍 뛴다.
"가서 내가 할 일이 뭐 있다구요."
"여생을 편히 지내야지요."
"편하다는 그 날이 죽는 날이지요. 이래봬도 아직 일거리는 있소."
"..."
"그 댁의 일은 끝났지만 나는 나대로 이곳에 지반을 잡았고 이 사람 저 사람 참견해가면서 그러다 죽겠소. 그게 또 낙이니까요. 몇해 동안 그 조가놈이 내 진기를 다 빼먹었고 세상에 상대 못할 것은 양반들이라, 나는 이곳에서 시정잡배들한테 잔소리나 하고 사는 것이 제격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