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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2-5-1

토지 2부  5 편 세월을 넘고

 

5편 세월을 넘고

1. 황막하다는 것

길상이보다 두세 살쯤 위일까? 몸집이 작은 사내는 시종 여유있는 미소를 띠며 술잔을 거듭했다. 그러나 미소 짓는 사내의 얼굴은 온유하기보다 오히려 그 미소로 하여 싸늘한 냉기를 느끼게 한다. 연장자인 귄필응의 앞이어서 그랬는지 술버릇도 좋았고 단정한 몸가짐에는 잘 훈련된 흔적이 있었으며 평지를 같은 보조로 가듯이 억양 없는 나지막한 음성이었다. 어쨌건 좀 파악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는 상해에서 오는 길이며 이름은 신태성이라 했다.

"대체적으로, 중국으로선 이번 세계대전의 덕을 보는 형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럴 리가."

"?"

하며 신태성은 신경이 무딘 것처럼 길상을 희미하게 쳐다보았다. 길상은 불쾌했던지 미간을 찌푸린다.

"교주만을 비롯한 청도 산동반도 등, 독일이 차지했던 것을 참전을 빙자하고 일본이 탈치한 것이 바로 재작년의 일 아닙니까."

"그는 그렇지요."

"뿐이겠소? 원세개가 일본이 내민 이십이 조 요구 조항에 도장을 찍은 것도 바로 작년이었구요. 한데도 이번 전쟁에 덕을 보나요?"

신태성은 다음 말을 기다리듯 잠자코 있었다.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은 19147월의 일이다. 영국과 공수동맹국인 일본은 호기도래, 쾌재를 부르며 교주만의 공격 개시로 세계대전에 참가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독일이 획득했던 중국에서의 디딤판을 차례차례 공략하여 손아귀에 넣었는데 그것은 물론 영국과의 공수동맹국으로서 대독선전에 의한 군사행동이라는 정당성을 앞세운 노골적인 침략이었던 것이다. 그 저의는 원세개 코앞에다 디민 소위 이십일 조에 이르는 요구 조항에서 여지없이 드러났다. 구라파에서 열강이 전쟁이라는 급한 불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사이 교활하기 그지없는 여우는 독일을 몰아내기가 바쁘게 이십일조에 이르는 요구 조항에 도장을 받아내어 부당한 권리를 굳히려 한 것인데 이십일 조 요구 조항에는 점령한 교주만 청도 산동반도 등 독일에 속해 있던 기왕의 권익을 일본의 권익으로 인정하라는 조항은 더 말할 나위가 없고 남만과 몽고에 대한 정치적인 개입, 기타 경제적 침략을 골자로 한 요구 사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은 그들의 목적을 관철하는데 있어 무력으로 위협하였고 거금으로 원세개 측근을 매수하였으며 대총통 자리는 물론 유지하게 할 것이나 황제에의 열망도 뒷받침하겠노라 회유하였던 것이다. 결국 원세개는 도장을 찍었고 황제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그 너구리 또한 배일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부채질하며 자신의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던 것이나, 1913년 토원군이 봉기했을 때 손문을 일본으로 패주케 하고 남경을 함락했던 그때와 달리, 원세개는 옥좌에 오른 지 석 달 남짓 재차 봉기한 토원군에 밀리어 제정취소를 선포하는 희극을 연출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다시 석 달 후, 그러니까 금년 유월, 중국의 역사를 뒷걸음질시킨 인물 원세개는 그 나름대로 우울한 심정을 안고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세계대전은 아직 계속되고 있으며 중국의 정정은 미로와 안개, 예측할 수 없는 혼란 속에서 단기서 내각이 성립되었고, 무창 혁명 때부터 꼭두각시였던 여원홍이 지금은 대총통이다.

"노일 전쟁이 끝나기 무섭게 을사보호조약이라는 것을 강요하여 통째 먹어치운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 아닙니까?"

"."

계속 얘기를 해보란 듯 신태성은 또다시 길상을 희미하게 쳐다본다.

"그때 경우와 지금 중국의 형편이 한푼 다를 것이 없는 거로 소생은 생각하오."

"물론 흡사하지요."

"한데도 신형은 세계대전의 덕을 중국이 보고 있다 말씀하시오? 나로선 납득되지 않는 얘기요."

". 흡사합니다. 그놈들의 수법이, 그리고 그놈들의 노린 바와 같이 될지도 모를 불행을 예상할 수도 있는 일이지요."

"그렇다면은?"

"그러나 조선의 경우 그 노일전쟁이란 게 좀 묘해요. 결국은 일본이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일시나마 막은 거지요. 그 결과로서 너 떡 하나 먹어라 하고 내던져진 것이 바로 조선 아니겠소? 허나 중국의 경우 떡 하나 먹으라는 식으로 내던져질까요?"

"..."

"그러기엔 너무 땅덩어리가 크지요. 무슨 인심이 좋아서 왜놈 혼자 처먹게 내버려두겠습니까. 지금이야 발등에 떨어진 불 끄노라 정신이 없지만요."

싸늘하게 웃는다.

"하면은,"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왜놈들이 아무리 뜀박질을 해본들 그보다는 중국의 경제 성장이 앞설 거란 그 말입니다. 그 경제 성장이야 말로 중국으로선 지금이 절호의 기회요. 세계대전이 갖다준 기회란 말입니다. 모두 이해가 상반되어 얽히고설켜 복잡한 이번 세계대전은 그 싸움터가 구라파인만큼 당분간 세계열강들은 중국을 잊어버릴 수밖에 없고 군비에 총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이고 보면 상품을 생산하며 외국에 팔 여력이 없어집니다. 결국 중국에 수입해 온 모든 그곳 공업 상품이 품절될 밖에요. 일본이 제아무리 뛰고 날아도 구미 각국에서 쏟아붓던 상품을 대신 충당하기는 어려운 일이지요. 하여 거대한 외국 자본이 중국의 허약한 자본을 짓밟아 자라나지 못하게 하던 힘에서 중국이 당분간이나마 놓여나면은? 뻔한 얘기지요. 어디 중국 사람이라고 멍청이 보고만 있겠어요? 이미 그런 조짐은 시작되고 있습니다. 민족자본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는 얘기지요. 결국 무순한 독충에 시달리어 만신창이가 되었던 몸뚱아리에 새살이 돌아나고 있다는 얘기도 되겠구요. 아무리 잠식해와도 일본은 기껏 남만주 정도를 넘지 못하지요. 물론 제 얘기는 중국에 한한 것이겠습니다만,"

"그것은 신군의 말이 옳아."

권필응이 말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그 점에서는 퍽 기회가 좋았던 게야. 허나 일본의 경우도 기회가 좋았던 거지 하하하핫..."

길상은 주판으로 머리를 호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눈앞에는 사무실의 장부가 펄럭이고 있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길상의 물음은 하나의 타성이었다.

"어떻게 되라라 누가 장담하겠나. 사람이 미치듯이 역사라는 것도 때론 미치니까. 예측할 수 없는 일이란 얼마든지 있는 거구. 대체로 그렇게 되는 거 아닐까, 그러니까 예측일 뿐이지."

신태성은 생선포를 찢어서 입에 밀어 넣고 우물우물 씹으면서 희미하게 또 쳐다본다. 그 눈길엔 무슨 뜻이 있는지 아니면 버릇인지, 결코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다. 길상은 자신이 산중 개구리라면 신태성은 양자강 잉어겠구나, 엉뚱한 비유를 해보는데 자조의 웃음이 푹하고 터지려는 것을 술잔으로 막는다. 술이 창자를 타고 내려간다. 노여움도 비애도 아닌데 뜨거운 것이 마디에서 마디로 도약하듯 울컥 치밀고 또 치민다.

'아니지.'

다시 술잔을 들어 목구멍에 들이 붓는다.

'네모반듯하게 줄을 그어간다. 사방팔방으로 아주 정확하게 도판 하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머리통 속에 차곡차곡 밀어 넣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그래 선생님 말씀대로 사람이 미치듯이 때론 역사도 미친다면은, 사방팔방 정확했던 줄도 서로 얽히고설켜서 쓸모가 없게 된다. 저 친구 대단히 똑똑하고 대단히 머리가 좋아 뵌다. 도판 하나가 머릿속에 들앉아 있는게야. 하지만 미치는데야... 함께 미쳐야지. 저 희미한 시선이 미쳐? 싸늘한 냉기는 찬바람도 아니고 얼음장 밑을 흐르는 차디찬 강물도 아니고 그냥 냉기일 뿐이다. 미쳐? 어림없지. 그럼 나는 미쳤나? 미칠 수 있단 말이야? 지금 나는 외도하듯이 이 사람들 속에 끼여 있는 거 아니냐말이다. 해서 긴가라는 저 친구가 나를 우롱하는 게야. 임마, 보아하니 돈푼이나 있는 모양인데, 그러니까 독립운동가, 응 그놈의 독립운동가라는 비단옷도 한벌 걸쳐보겠다 그거야? 병신 같은 자식, 하고 날 우롱하고 있는 게야. 그렇고말고. 상해 바닥에서 새물 먹고 머리통 속에 도판 하나 꾸겨 넣고, 그렇담 그런 조롱 할 만도 하지. 아암 할 만하고 말고, 미친놈 소용없고 미치지도 못한 이런 놈은 더욱 소용없고, 왜 불쾌해. 어째서 저 친구가 맘에 안 들어? 못난 놈!'

돌연 주갑이라던 사내 얼굴이 길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주갑이, 작년 섣달그믐께 산판의 일을 끝내고 용정에 돌아오는 용이를 따라왔었던 사내다. 전라도 사투리의 수수깡같이 야윈 사내, 그 무식한 사내가 길상을 우롱했던 것이다. 길상의 뺌을 겨냥하여 우스개의 일격을 가했고 길상의 가슴팍을 겨냥하여 세상을 두루 다녀본 경험담의 난타질을 했다. 미끄럽기가 미꾸라지 같은 말은 모두가 화살이었다.

"내가 이런 이야그를 헌다고 혀서 댁의 덕을 좀 보자, 그건 아닌게라우. 없이 사는 우리 성님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트집부리는 것도 아닌께로 오해는 마시더라고."

술이 거나해진 용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저놈의 인사 또 사설 나온다. 때리치어라! 때리치워!"

했으나 아랑곳없이

"이리 뵈야도 나는 내 근본 믿고 사는 사람, 세상에는 제 근본이 제일이어라우. 지 애비 지 에미가 제일 아녀? 개천에 빠졌거나 용상에 빠졌거나, 하늘 밑에서 땅 위에서 사는 거는 다 마찬가지란 말씨. 마찬가지랄 것 같으면은 제 근본이 남만 못헐 것 없는거여."

"군대쟁이 영문 모르는 소리 그만두라!"

혀 꼬부라진 소리가 다시 끼어들었으나,

"형님, 산판에서 몇 해 동안 벌목을 혔어도 아직 머리털 안 빠졌당가?"

"대포 겉은 소리 뻥뻥 하는고나."

", 암은이라우. 대포가 소리만 크더란가? 박살은 안 내고오?"

"그까짓 모기다리 겉은 몸뚱이로 박살을 내 누굴?"

"심자랑 하는 놈치고 제 대가리 안 깨는 놈 없더랑께?"

"말 잘하는 놈치고 옥살이 안 하는 놈 없지."

"제법이오 성님. 좌우당간 내가 헐라는 말은 뭐였지라? 아 그렇구만이라우. 좌우당간 개명천지가 되야서 니도 나도 양복 입꼬 모자 쓰고, 아 그게 웨찌 나쁠 것이여? 허나 눈까리 머리텅은 까맣다, 그걸 잊지 마시라 그말이어라우. 근본 잃은 놈은 산에도 물가에도 못 가는 법이여. 연해주 방면을 몇 해 동안 돌아댕기면서 가만히 살펴본 께로 역시나 돈푼 있는 놈들이 다 썩었어야. 내가 몇 해를 따라다닌 강의원께서 말심하시기를 설한풍허고 강냉이죽은 소금이날, 썩을래야 썩을 수 없지야. 식자 들었다는 놈도 마찬가지여. 계집년 옷고름에 노리개 달고 댕기는 것과 별다를 게 없더랑게로. 식자라는 게 노리개더란 말씨. 남헌티 자랑허는 상판대기 뻔뻔한 놈치고 계집 덕에 호강허겄다는 생각 안 가진 놈 없고오,"

순간 용이 술상을 번쩍 들어 엎었다.

"네놈 말이 맞다! 계집 덕에 호강한 놈이 여기 있어! , 여기 있단 말이다!"

용이는 제 가슴에 주먹질을 하며 별안간 아우성을 쳤다.

"그 계집이 죽게 생겼다! 살아서 오래오래 날 호강시켜줄 그 계집이, 와 그 계집이 죽을라 카노!"

주갑이 얼굴이 새파래졌고 길상은 술상을 엎을 수 없었던 자신을 덫에 걸린 한 마리의 쥐라고 생각했다. 월선이 살아나기 어려운 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은 뒤 용이를 위로하기 위해 마련한 술상이었던 것이다.

"이번 세계대전이 얼마나 갈지... 중국이 웬만큼 힘을 회복하면은 결국 일본과의 싸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신태성의 목소리였다.

"싸움이 붙으면 우리가 좋지."

"여기까지 파급되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만 지금 본토에선 배일운동이 한창입니다. 특히 일본 상품, 일본 화페 배격에도 정부에서 부채질을 하는데다가 자본가 상인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 국민들은 또 자발적입니다. 그러니까 물결이 크지요."

"끈질긴 저항이 될 게야. 이젠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닌, 저항은 조직화되어가고 있다. 아편전쟁 때처럼 평영단의 깃발을 세우고서 모여든 수만 농민들이 이백여 명의 영국인을 노상에서 살해하는, 앞으론 그런 일은 없을 게야. 그러나 더 무섭지. 자각하고 꾀가 생긴 민중이란,"

"그렇지요."

"만일 일본과 싸움이 붙게 된다면 이번에는 양상이 달라. 물론 세계대전이 끝나준 후의 경우겠지만 이젠 일본이 고립될 수밖에 없지."

"남은 핏댈 세우고 싸우는 판국인데 무방비 별 저항도 없는 곳을 점령하여 저 혼자 요리하여 처먹는데 어여삐 볼 사람이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자면 불난 집에 든 도둑 격이지요."

"김군."

권필응은 신태성과의 화제를 끊고 길상을 불렀다.

"."

"자네 중국인들, 특히 서민층의 기질이 어떤 것인지 아는가?"

"글쎄올시다."

"실속을 차리는 사람들이야. 그런 점에서는 우리 조선 사람들 따라가려면 아득해. 흔히 소리를 지르고 떠들어대는 그들을 보는 경우가 있지만 그들은 떠드는 척해 보이는 거야. 잘못했다고 연신 이마방아를 찧어대지만 그것도 잘못한 척해 보이는 거구. 천치바보처럼 맹하니 사람을 쳐다보지만 그것 역시, 실상 그네들 알맹이는 소란하지 않고 비굴하지도 않고 아주 잔잔하거든. 그네들의 행동이나 태도는 옷과 같은 것이어서 필요할 때 입고 불필요할 적엔 벗어던지는 게야. 그러니 알몸은 언제나 말짱하지. 물론 모두가 다 그렇다는 건 아니구 대체로 그렇다는 건데 그들은 빌어서 될 일이면 빌어서 되게 하구 볼기를 맞아 될 일이라면 볼기를 맞으며 되게 하구."

"응큼한 민족이지요."

감정의 요동이 없는 신태성의 음성이다.

"일본놈들 배 가르고 자결하는 따위 그건 말하자면 속결전법의 부산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그네들은 그것으로 한몫보고 있긴 하지. 어쩔 수 없는 섬나라 일본이 가지는 한계점을 가장 유효하게 활용하고 있는 셈이야. 백번이라도 도망갈 필요가 있으면 도망가서 다시 싸우는 중국인은 그러니까 언제나 힘을 다 빼지 않는다 그런 얘기가 되겠군. 국민성이 겁쟁이다 비굴하다 애국심이 없다, 그건 일본의 성급한 속단이야. 어째 하필 일본의 견해를 말하느냐, 조선의 식자들은 부지불식간 일본 여론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지. 중국인만큼 존대한 민족도 그리 흔친 않아. 달겨들어 물어뜯고 질겅질겅 씹어도 슬그머니 빠져나가 제자리에 서는 민족이야."

그런 얘기를 하는 권필응의 저의를 깨달으면서 모르는 척 길상은 듣기만 한다.

"지금 중국 도처에서 배일운동이 날로 고조되어가고 있는데 아까 신군이 말한 것처럼 정부가 부채질하고 자본가 상인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하고 국민들은 자발적인 게 사실이야. 하니 혼연일체 같긴 하지만 알고 보면 동상이몽이거든. 원세개는 자신의 권자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이십일조 조약에 도장을 찍어놓고서 자신에게 올 국민들의 화살을 일본 쪽으로 돌려놓을 필요가 있기 때문에 배일운동을 부채질한 것이요 자본가들은 자신들 자본의 신장을 위한 배일운동의 열렬한 지지, 그러나 국민들은 결코 어느 개인의 권력 유지 어느 개인의 자본 발전을 위해선 아니거든. 민족과 국가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지. 어떤 뜻에서는 이들 삼자간의 관계야말로 치열하고 원한 깊은 것이라 보아야 해. 그들의 싸움은 오랜 옛날부터 계속되어왔고 앞으로도 계속되어 나갈 것인데, 군벌시대라 하여 칼든 사람이 정치하는 시대라고 한마디로 말해버릴 수 없는 것이 오늘날의 중국 형편이긴 하나... 군벌정치의 특징으론 중간층이 없어지는 상태를 말할 수 있지. 자고로 군벌정치란 백성과의 힘내기 정친데 그런 만큼 강력한 힘을 제켠으로 몰아들이는 것은 당여지사, 강렬한 힘은 무엇이냐 그건 말할 것 없이 무력과 금력이지. 결국 그러니만큼 자본가들은 권략과 결탁하지 않는 이상 존재할 수 없고 필연적으로 군소자본가들을 잡아먹는 것이 그들 생리고 보면, 그리고 또 권력층과 이윤 분배를 위해서도 군소자본가들을 잡아먹고서 자신이 비대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존재하는 자들의 운명이기도 하니까. 그러면 결과는 어찌 되나, 와해된 중간층은 별수 없이 하층으로 흡수된다. 중간층이 내려앉아 깔리는 만큼 저변은 넓어진다. 이렇게 되면 또 불안해지는 것은 권력층이야. 힘을 보강하지 않으면 안 돼. 간단하게 비유를 한다면 산처럼 저변에서 경사를 이루며 정상이 있는 정치 형태와는 다르게 저변에다 꼿꼿이 칼을 곶아 놓은 것 같은 군벌정치 형태에 있어선 칼은 칼이로되 산보다는 허약하지. 저변에 쫙 깔린 수억의 개미들이 스물스물 기어 올라가는 날엔? 칼끝을 높일 수밖에, 결국 힘의 보강인데 화급해지면 외세를 끌어들이는 것도 어렵잖은 일이요 그 넓은 저변에 우글거리는 개미떼를 소모하기 위한 전쟁도 불사 아니겠나?"

권필응은 일단 말을 끊고 술잔을 들었다. 신태성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의 요동 없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길상은 권필응의 내리깐 눈언저리를 바라본다. 삭막한 그늘이 새 그림자처럼 지나간다.

"배신에서 시작하여 배신으로 끝내는 야망..."

혼잣말같이 했다. 그리곤 술잔으로 놓고 얼굴을 들었다.

"아까 내가 그 서민 기질을 말한 것은 중국의 저변이던 것을 한번 생각해보고 싶어서였지. 오늘날 구미에선 대개의 나라들이 민주주의라는 것으로 정치이념을 삼고 제도라는 것도 그것에 따라서 정해져 있으며 중국에 있어서도 손문이 시도해본 정치 형태인데 사실은 말이 새롭다뿐이지 그러한 관념은 고대 중국에서부터 상당히 뿌리 깊게 박혀온 정치사상이야. 요순시대가 바로 그러한 소위 민주주의 정치 형태라고 나는 생각하지. , 순은 황하를 터뜨림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백성들에 물었던 거지. 권력을 구축함으로써 백성들에게 힘자랑을 하려 하진 않았거든. 요순시대란 중국인들에게 있어선 그네들의 이상이요 바라는 정치 형태, 우리 조선에 비하여 그런 정신 면에서 상당히 훈련이 된 민족이라 나는 생각하네. 조선에서도 민란이 끊일 새 없었으나 정권을 엎은 일이 없었고 동학이라는 종교적 조직과 합함으로써 비로소 대규모의 민란이 가능했었지만 중국에 비하면은 상당히 소극적인 것, 군왕을 부정하지 않았거든. 나는 가끔 의심 많은 중국인 기질을 생각할 때가 있어. 그것을 나는 결함으로 생각하지 않지. 배신당하고 기만당해온 역사, 왜 중국의 민중들은 기만당한 것을 자각하느냐, 그것은 그들 농민들 스스로가 엎은 정권을 가로채간 패자, 어제까지 동지였던 그 패자의 칼끝을 농민들은 등줄기에 느껴야 하는 역사, 반복되어온 역사 때문이지. 조선 사람들에겐 군왕에 대한 배신감 같은 것은 아주 희박하거든. 중국인은 의심이 많다, 당연하지. 믿지 않는다는 것은 믿을 수 있는 것을 찾는 욕망이 강하다, 그렇게도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이것은 민족성의 얘기지만... 중국의 서민들 기질 얘기야. 김군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겠지만... 그러면 더부살이 같이 이곳에 와 있는 우리는 막말로 어느 곳에 빌붙어야 하는가..."

다시 권필응은 길상이 부어놓은 술잔을 들고 눈을 내리깐다.

"지금 배일을 외치는 중국 사람들... 부채질 하는 사람, 열렬하게 지지하는 사람들 모두 우릴 배신할 걸세. 우린 중국 민중들에게 배워야 해. 볼기를 맞아 될 일이면 볼기를 맞고 도망갈 필요가 있으면 백번이라도 도망가고. 그리고 우린 그들 민중들게게 빌붙어서 함께 가야 해. 지구전에 도전해오는 속결전이란 일종의 환상이며 항상 기만당하는 것, 일본놈들은 중국 사람들을 겁쟁이로 보고 있다. 기만당하고 있는 게야. 우린 기만당해선 안 돼."

밤이 자물어 신태성은 돌아갔고 길상은 권필응에게 안녕히 주무시라는 인사를 겨우 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입은 채 불도 켜보지 않고 길상은 자리에 쓰러졌다. 얼마쯤이나 잠을 잤을까. 길상은 눈을 떴다. 몸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어제 저녁에 술을 마셨다. 아주 많이 마셨다.'

중얼거리는데 끈적끈적한 문어다리 같은 것이 철버덕 얼굴 위에 떨어져서 목을 감는다. 길상은 징그러운 환각에 머리를 마구 흔들어댄다. 이상한 환각과 더불어 육체는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는 것같다. 사지에 감각이 돌아온다. 손을 뻗쳐 어둠속을 더듬더듬 더듬는다. 자리끼를 더듬다 말고 길상은 일어서서 전등을 켠다. 부신 눈에 흰버섯 같은 두 개의 얼굴이 보인다. 작은 얼굴 큰 얼굴 두 개의 얼굴은 푸른 산돌 틈새서 솟아난 흰 버섯. 아내와 둘째아들, 생후 육 개월 된 윤국의 잠든 얼굴이다. 어둠이 눈부신 밝음으로 변했는데 어미와 어린 것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첫 아이 때도 그러했었다. 아이가 젖을 많아 빠는 요즘은 서희는 업어 가도 모르게 깊은 잠속에 빠진다. 또 많이 잤다. 길상은 자리끼를 찾던 생각을 잊어버리고 어린것과 아내 얼굴을 번갈아 내려다본다. 유모 젖을 먹여라 했었지만 기여 제 젖을 먹이는 서희다. 길상은 두 개의 얼굴 말고 유모 곁에서 꼼작 않고 잠들었을 큰아들 환국이를 생각한다.

'그놈을 데려다 놓으면 문어다리 세 개가 되겠구나. 하나는 내 목을 감고 둘은 각각 내 한 팔씩을 감는다. 그러면 나는 꼼짝할 수 없지. 꼼짝할 수 없구말구.'

허리를 구부려 어린것의 볼을 쓸어주고 전등을 끈 뒤 길상은 소리 없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속박에서 풀려나는 순간의 공허, 공허 속에 어둠이 스며오고, 가득히 스며오고 밤의 침묵이 모난 짐짝처럼 창자를 타고 내려간다. 모서리에 찔리는 통증과 더불어 마음바닥에 짐짝이 가라앉는다. 밤인가, 아니 신새벽이다. 물먹은 듯 별들이 희미하게 하얗게 깜박거린다. 초가을의 냉기가 옷깃 사이로 기어든다. 가난하다. 허기지게 마음이 가난하다. 길상은 안마당으로 돌아나간다. 옛날 최참판댁 안마당을 걸어가는 착각이 든다. 오소소 떨며 신새벽 안마당을 건너서 사랑에 군불을 때러 가던 소년. 그 동안 과연 세월을 흘렀는가. 흘러갔는가. 사랑에서 불빛이 새나온다.

'벌써 일어나셨구먼.'

창문에서 새나온 불빛은 사랑채 처마 밑을 어슴프레하게 비쳐준다.

'그렇게 술을 많이 하시고서도,'

길상은 그곳을 피하듯 급히 뒤꼍으로 돌아나간다. 숲에서 밤새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꺼뭇한 잡목숲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곧장 숲속으로 들어간다. 나직한 잡목숲에서 얼마 안 가 별빛을 가리는 짙은 숲이 이어진다. 육 년 전 용정을 삼킨 대화재 때 불길을 면할 수 있었던 숲이다. 가득히 들어찬 나무 그림자를 두 어깨로 가르듯 길상은 성큼성큼 걷는다. 숲은 완만한 구릉을 이루고 있었다. 성큼성큼 걷는 걸음걸이와 달리 길상의 입에선 늙은이처럼 한숨이 자꾸 새나온다.

"이렇게 나와 보는 것도 여러 해 만이군."

낙엽더미 위에 엉덩이를 박고 앉는다. 앉아서도 한숨을 쉰다. 답답한 것이다. 밤이슬에 젖은 바지가랑이가 살갗에 차다.

"왜 이리 답답한가. 가슴에다 맷돌을 얹어놓은 것 같다."

들어주는 사람이라도 있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맷돌을 가슴에 얹어놨다기보다 아까 자리 속에서 느낀 그것, 끈적끈적하고 물컹물컹한 것, 문어다리가 목과 양쪽 손목에 휘감기어 흡반이 피를 빨아대는 것처럼 죄어드는 느낌. 눈앞에 보이는 것은 하얀 버섯 세 개가 푸른 바위 곁에서, 서희의 얼굴이요 환국이와 윤국이의 얼굴이다. 아이들은 유모 젖 아닌 제 젖으로 기르는 서희, 그 끈질긴 종족보존 본능에 길상은 넌더리를 칠 때가 있다.

'당연하지 당연해. 천애고아가 제 핏줄을 보았는데, 나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내 핏줄, 세상에 나서 처음 보는 핏줄이다. 소중하기론 그 사람하고 뭐가 다를까.'

그러나 기상은 내 할머님, 할 적의 서희 얼굴을 잘 기억하고 있다. 내 아버님 하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그 절절함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애정이라기보다 숭배와 절대적인 감정이랄밖에. 서희는 열 개 손톱이 다 빠지는 한이 있어도, 기어서라도 돌아갈 거라 했다. 잃었던 모든 것을 찾을 것이라 했다. 그 무서운 집념은 핏줄에 대한 흐느낌에서 비롯된다. 길상은 공노인으로부터 전해들은 정한조의 아들 석이를 생각한다.

"흐흐흐흐...흐흐흣, 이를 갈아야 하고 칼을 갈아야 할 그런 아무것도 내겐 없다."

허전하다. 가믓이 메인다. 가슴을 쥐어뜯고 싶은 아픔이 온다. 다시 허전해진다.

"돌아가겠지. 금년은 아니고 늦어도 명년엔 돌아갈 거야. 내게는 조가 그놈에 대한 응어리도 없는데, 한이 맺힌 것도 없는데 다만 악질 친일파 나쁜 놈일 뿐이지. 최서희는 친일파 아니란 말이야? 보복을 위해서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든 어떤 이유든지 이유를 이마빡에 붙이고 다니는 친일파는 아무도 없어. 돌아가겠지. 명년에... 내가 왜 거길 가나. 뭣하러 돌아가나."

눈앞에 공노인이 웃고 있다. 그새 앞니가 빠져서 하부죽한 입술을 오므리며 웃고 있다.

"나머지 이천 석에 목을 매고 있는데 허허허헛... 별 수 없지이. 별도리 없을 거야. 하긴 이천 석이라면 그것도 장자는 장자라. 천석꾼이 아무데나 굴러있나? 조가놈 지 신상을 위해 그것이나마 꼭 붙들고 있어야 하는 건데 욕심이 사람 잡지. 내리막길을 또 멎어지는 것도 아니구. 광산에 미쳐 미두에 미쳐, 한 번 미치고 보면 끝나는 법이거든. 잃은 것 찾으려고 두 번 미치니께. 자고로 노름꾼이란 마지막 껍데기까지 뺏겨야 손 털고 물러나거든. 회를 쳐 먹든 초를 쳐 먹든 그것은 조준구 사정이고 아무튼지간에 돌아갈 날도 멀지 않았으니, 허허헛헛..."

공노인의 웃음소리가 갈가마귀 우는 소리처럼 길상의 귓가를 맴돈다.

"망해라. 망해라, 최서희! 망해! 망해! 망해라. 그러면 넌 내 아내가 되고 나느 환국이 윤국이 애비가 된다. 그리고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어떻게 망해? 어떻게 망하느냐 말이다! 비적단이 몰려와도 최서희는 안 망한다. 고향에는 옛날같이, 옛날과 다름없는 엄청난 땅이 최서희를 기다리고 있어!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지금까지,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만은 타인이었다. 오 년 동안 - 서희가 독단으로 일을 진행해 왔었다. 그 독단은 서희의 의사였다기 보다 조선에서 매입되는 토지에 관한 일엔 길상이 극단적으로 회피해온 것이 실정이다. 서희는 서희대로 얼마나 외로웠을 것인가. 그러나 서희는 의지로 뻗쳐왔고 길상은 애정 때문에 뻗쳐왔다. 먼동이 트려면 아직 한참은 더 있어야 한다. 나뭇가지가 얼기설기 걸려 있는 희뿌연 하늘에 별이 하나 동편 기슭을 향해 떨어진다. 날이 갈수록 애정의 질곡은 뼛속 깊이 몰려 들어가는데 그럴수록 몸을 흔들며 질곡에서 빠져나가는 꿈은 희망봉만큼이나 거대해지는 것. 자승자박의 상태는 바로 그 상승작용의 갈등 때문이다.

'그러면은 오늘, 오늘은 아니야. 청진의 이씨가 오기로 돼 있고 권선생님도 아직 떠나시지 않았으니, 그러면 내일? 모레?'

길상은 하얼빈에 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하얼빈의 상가를 한번 둘러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지는 오래된다. 그러나 지금, 돌아갈 준비에 착수해야 하는 지금 그것은 전혀 무의미한 일인 것이다. 다소의 용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송장환이 김훈장의 유품 몇 가지를 가지고 지금 하얼빈에 와 있다는 기별을 받긴 받았다. 이 년 전 상의학교 운영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삼원보에 갔었던 송장환이 그보다 앞서 그러니까 오 년을 거슬러올라 당시 혜관과 함께 떠났던 김훈장은 삼원보에 눌러앉아버린 것인데 그 김훈장이 별세하고 이미 장례까지 치렀다는 송장환의 편지를 달포 전에 길상은 받은 바 있다. 송장환은 어떤 임무를 띠고 당분가 하얼빈에 머물 것이라 했으니 서둘 것은 없고 그러나 그가 떠나기 전에 한번 가기는 가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간나아르 달고서리 어디에 재가르 하겠수꼬마?"

여자는 쓸쓸하게 웃으며 말하였다. 옥이네였다. 회령 셋방에서 자취를 감춘 후 오 년인가 육 년인가 세월이 흐른 후의 대면에서 길상이 묻는 말의 대답이었던 것이다. 우연히 나루터에서 마주쳤을 때 여자는 당황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눈 둘 곳을 몰라했다. 그러나 여자는 곧 평정한 상태로 돌아갔었다.

"옥이는 어떡허고 혼자요?"

"하얼빈에 있소꼬망."

"하얼빈?"

"예배당핵교르 댕깁매다."

"아아 벌써... 옥이엄마는 뭘 하구서?"

"예수 믿으이 서양 사람 목사님댁에 있습매다. 일해주고서리,"

"옥이랑 함께?"

"."

"다행이구먼"

길상은 강바람을 막으며 담배를 붙여물었다. 옥이네 차림새는 깨끗했다. 검정 치마에 흰 무명적삼이었으나. 길상은 물살에 흔들리는 뱃전에 등을 붙이며 다시 물었다.

"헌데 어딜 가는 길이오?"

"하얼빈 목사님댁으로 돌아가는 길입꼬망. 한 분 계시는 오라바이 만났다는 기별을 받고서리,"

길상은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나루터에서 만나 한 배에 오르자마자 하필이면 개가했느냐 그 말부터 물을 것은 뭣인가, 물어본 자기 자신에 대하여 고소를 머금었다. 여자의 담담한 태도가 오히려 마음에 아팠던 것이다.

"어차피, 옥이엄마도 시집을 가야, 혼자 살 수 없을..."

길상은 또다시 그 말을 하고 있는 자신이 미웠고 딱했다.

"예술 믿고 살잲고? 우리 옥이 크느 거르 보구서리 낙으 삼겠습매다."

길상은 나루터에서 옥이네 만난 얘기를 서희에게 하지 않았다. 무슨 까닭인지 서희는 가끔 옥이네 행방을 궁금해 했었지만. 길상은 예수를 믿고 옥이 크는 것을 낙으로 삼겠다면서 발끝을 한 번 내려다보고 고개를 들어 강기슭에 눈을 던지는 검정 치마에 흰 무명적삼을 입은 여자를 다시 생각한다. 그를 만난 것은 한 보름쯤 전의 일이다. 하얼빈이 넓은 도시라하여도 서양 사람의 목사댁이라면 쉬이 찾을 수 있으리라, 찾아가서 어쩌겠다는 겐가, 돈을 주어? 정을 주어? 돈은 받지 않을 것이요 정은 줄 수가 없다. 개갈하지 않은 한 여자는 어느 하늘 밑에서건 버림받은 사내를 생각할것이요 사내는 또 가끔 고독한 여자의 생애를 묵은 상처처럼, 궂은 날 묵은 상처의 통증처럼 마음 한구석에 떠올릴 것이다.

'그까짓 처녀도 아닌 과부, 한평생을 나하고 함께 살 생각이야 당초 안했을 것이고 개갈 하건 아니 하건 제 쯧대로 하는 거지 내 관여할 바는 아닌 게야.'

어둠과 숲속의 기척들이 길상의 등을, 양어깨를 누르며 떠밀어내는 것만 같다. 숲속에서 내려온 길상은

"선생님 일어나셨습니까?"

사랑방 앞에서 묻는다.

"."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별로 탐탁해하는 음성이 아니다. 길상이 방안으로 들어갔을 때 권필응은 책을 보는 것도 아니요 방 한가운데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자리에 들지도 않았던 것처럼 침구도 말짱하니 개켜놓았고, 마주앉은 뒤 한동안 길상은 멍한 표정이었고 권필응 역시 그러했다.

"선생님"

"..."

"저는 정말로 뼈아프게 내 나라를 사랑하는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순간 권필응의 깡마른 몸이 약간 동요를 일으키는 것 같다.

"모두 열심히 목숨을 내걸고서, . 저도 그럴 수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 육친 같이 제 피같이 그렇게 조국이란 것을 실감할 수 없습니다."

"당연한 얘기지."

"?"

권필응은 말이 없다. 오랫동안 침묵을 지킨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선생님 부끄럽습니다."

"말로써 되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는... 그만두지. 그보다 자네 부인께서 친일하는 덕분에 내가 이곳에 무사할 수 있으니 고마운 일 아닌가."

권필응은 웃었다. 길상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런 말을 하는 권필응의 저의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겉으로는 비난한 것 같았으나 따뜻한 마음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권필응, 말로써 되어지는 일이 없다는 것은 어젯밤 신태성을 두고 한 말인 듯, 서희의 경우도 역시 깊이 개의치 말라는 뜻인 것이다.

 

 

2. 사춘기

"무시레? 월선옥네 안깐 말임둥?"

"그렇다니까."

"쯔쯔쯧, 거 아무래도 살기 어렵Ÿ珦六?"

"그러니까 말이에요."

"이해르 넘기기... 어렵지비."

"그래가지고 며칠 전엔 물 길러 나오지 않았겠소?"

"홍이 앙이 시키려고 그랬을 기야."

"무슨 청승인고."

"객줏집 공노인이 데리고 가서 벵구환 하겠다면서리, 별의별 말으 아이 했겠음? 무시기, 그래두 앙이 듣는다이. 홍이 땜에 한새쿠 고집부린다 말이."

"제 속에서 난 자식이래두 제 일신이 병들면 귀찮은 법인데 그까짓 남의 자식, 난 그 속을 모르겠구먼. 입버릇이 우리 홍이 공부시키고 장가들이고, 눈이 시퍼렇게 생모가 살아 있는데 말예요."

"그는 그렇기 말으 할 수 없습매. 홍이 가아느 다르다이."

"다르기는 뭐가 다르겠소."

"다르지비. 며칠 전에도 밤중에 뛰어들Ÿ向鳧? 우리 어망이 죽는다구 울면서리, 그래 갔덩이 피를 쏟고 까무라쳤답매."

"아무리 그래두 오리새끼는 물로 가는 거예요."

"그 안깐 홍이가 낙이구 보람인데 어쩌겠음."

"나이가 어찌 되지요?"

"오십이 다돼간다이. 마흔아홉이랍매."

"사람마다 아홉수가 사납지."

"되우 고생으 하덩이 돈으 모아 발뻗고 사재니까 병이 나잲슴? 불쌍하답매."

마루에 앉아 고추 꼭지를 따며, 두 아낙이 이웃집에 사는 월선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함경도 말씨를 쓰는 오십 안팎의 여자는 가위로 고추를 자르며 씨를 털어내고, 마을 왔다 일을 거들어주는 서울 말씨의 여자는 고추꼭지를 딴다. 가을 하늘에는 구름이 한가롭게 지나가고 예배당 종소리는 은은하게 울려온다. 두메는 책을 펴놓고 앉았으나 공부할 기분이 아니다. 몇 주일 동안 성당에 나가지 않았던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열여덟 살의 사춘기, 소학교는 시초부터 고학년에 들어가 진작 졸업을 했고 지금은 중학생으로서 명년 봄에는 졸업이었다. 정호네 일가가 연해주로 이사하는 바람에 시내 하숙으로 옮긴 지도 어느덧 일 년이 넘었다.

'공부를 하면 머하나. 내가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좋아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남이 칭찬해주면 머해, 남인데.'

정호가 연해주로 떠나버린 후의 일 년은 두메에게 더욱 외롭고 쓸쓸한 날들이었다. 강포수가 죽은 것은 삼 년 전의 일이다. 장마가 계속되는 여름방학, 가야하 상류에 있는 소삼차구로 가려던 두메는 하천의 범람으로 떠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장마가 그치고 아비 있는 곳에 갔을 때, 두메는 아비가 죽은 것을 알았다. 산막 근처 화전민들에 의해 이미 장사를 치렀다는 것이었다. 사인은 오발사고라 했으나 다분히 미심쩍은 점이 있었다.

"아부지! 아부지! 두메가 왔소!"

울부짖었으나 험준한 산속에 돌아오는 것은 울부짖음의 메아리뿐이었다. 강포수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나 있었던 것처럼 그해 봄, 그러니까 두메를 학교에 넣어놓고 돌아간 후 한 번도 용정촌에 나타난 일이 없었던 그가 뜻밖에 송장환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로서는 거금인 삼백원을 내놓았다.

"선생님이 요량하시어 두메 학자로 했이믄 좋겄십니다."

그 말뿐이었다.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는 두메를 불러내어 잠시 만나본 뒤 강포수는 아무 말 없이 그림자처럼 사라졌던 것이다. 공노인을 찾지 않고 송장환을 찾아온 것은 방학에 돌아온 두메로부터 선생님이 얼마나 잘해주시는가 소상하게 얘기를 들은 때문일 것이며 스승이란 부모나 마찬가지라는 종전의 생각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경상도 사람, 경상도와 연고가 있는 사람에 대한 강포수의 기피증이 작용 아니했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송장환은 학자금 삼백 원을 공노인에게 이관하고 적절한 조치를 부탁하면서 용정을 떠났다. 공노인은 그것을 활용하여 이자만으로 두메 학자금에 충당했는데, 학자금이래야 늘 수석을 차지해온 두메였으므로 학교에 내는 돈이란 별로 없었고 하숙비와 약간의 잡비 정도였으니까 원금 삼백 원은 축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셈이다. 밖에서는 여전히 함경도 사투리와 서울 말씨 아낙들이 주고받는 얘기, 고추를 자르는 가위 소리가 들려왔다.

'용돈이 떨어졌는데, 벌써 떨어졌는데...'

두메는 죽은 아비 생각을 하다가 공노인을 찾아가야 할 필요를 느낀다. 필요를 느꼈다기보다 가야 하는데 가기가 싫은 것이다. 공노인댁 방씨 할머니가 들먹이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래도 가기가 싫다. 열려 있는 들창에 새 그림자가 지나간다.

"사람이 저 지경 되었는데, 사내는 그림자도 안 비치지 않아요? 본처는 아니지만..."

"본처 앙이기로는 홍이에미도 같소꼬망. 시집으 보낸 딸애는 전 남편 사이에서 났답매."

"그런 시시꼴꼴한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데리고 살든 여자 아니예요? 아픈 사람을 내팽개쳐놓구 너무 야박하지 않소."

"그거는 행펴이 좀 다르당이. 홍이아바이가 와봅세? 얼시구 홍이에미가 오재능가. 지난해도 와가지구서리 벵재가 누워 있지도 못했다이. 벵이 더 나빠지잲앴음? 홍이르 다글다글 볶고서리 가지구 팔으 잡아끌구 도산으 피웠답매."

"학교 다니는 애를, 그래 데려가서 어쩌겠다는 겐가?"

"그러잉 에미 값세도 못하느 거이 앵이요."

"..."

"홍이아바이는 가슬걷이 하구 나문 산판에 갈 기구, 거기서리 일으하구 나문 설에는 올 것입매."

"정월의 견우직녀구먼."

"호호홋홋... 그 말이 바로 맞다잉."

"설이 오기 전에 죽으면 어떡허지요?"

"무시기... 그렁이 불쌍하지비."

"자식까지 맡겨놓구..."

"앙임매. 홍이까지 없어보라이. 그 안깐 깜박 죽어버린답매."

"아주머니두, 홍이네 얘기라면 사사건건 역성이요."

"마음이 착하이."

"어쨌거나 사내가 물렁죽이라 그래요. 다스리지도 못할 두 계집 거느리긴 왜 거느렸는구."

"도척이 같은 성정으 하누님도 관대루느 못하신답매. 옥루몽으 보며느 양창곡의 둘째부인 황씨든가, 무슨 보살이 오장육부를 끄내서 냇물에 씻재잉요? 악하다고 해서리 직일 수도 없는 일입매. 그 안깐 두고 도망을 해보랑이? 바늘산이라도 피흘리감서리 다라오잴까? 전생에서 죄르 짓구서리 만낸 인연이지비."

"죄를 짓고 만났다..."

'나가보기나 하자. 답답해서 꼭 미칠 것 같다.'

두메는 후다닥 일어선다. 학생복 상의 단추를 끼우며 나가는데 베수건을 쓴 아낙 둘이 고개를 치켜든다.

"무시기, 학생 어디매 나가능가? 공일이라 성다앙에 갑매?"

"아니오. 저기이..."

"나가보랑이. 방으 지키구서리 그새 앙이 나가더이..."

"갔다오겠습니다."

"갔다옵세."

"어이구, 저 도령 거동 보소. 현언장부 아니오?"

서울 말씨의 아낙이 까르르 웃는다.

"인물이 훤하지비. 일등 신랑감 앙입매? 자랑스럽다이."

문을 열고 나가는 두메 목덜미가 시뻘겋다.

'만사가 다 시시해. 그만 총 메구 산에나 들어갈까부다.'

집 앞에서 몇 발짝 걸어 나온 두메는 남의 집 울타리를 올려다보며 우두커니 서 있다가 방향을 바꾸어 발길을 옮긴다. 부끄러운 기억 때문에 아무래도 객줏집에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자신의 행동거지가 부끄러웠고 그들이 주고받던 말은 또 얼마나 모욕적이던가. 두메가 용정 시내로 하숙을 옮기면서부터 한 가지 버릇이 생겼는데 할 일 없이 거리를 쏘다니는 그 버릇이다. 두메는 항상 외로웠고 쓸쓸했다. 사람이 그리웠다. 특히 여인에 대한 그리움은 번번이 충동적으로 그의 마음을 괴롭게 했다. 그 날은 토요일이었다. 해거름, 두메는 저도 모르게 백화수라는 요리집 앞에 넋을 잃고 서 있었던 것이다. 권번에서 정식으로 수업한 기생도 아닌 기생들, 얼굴들은 반반하고 수심가 잡가정도는 흉내낼 줄 아는 그런 여자들이 저녁 술손님을 맞기 위해 분단장을 하고서 드나들고 있었다. 두메는 그 여자들을 바라보고 서 있었던 것이다.

"두메야."

누가 불렀으나 두메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두메야! 니 거기서 뭐하노?"

두메는 아찔했다. 돌아보았을 때 공노인댁 방씨가 근심스런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그러고 며칠 후 두메는 객줏집에 용돈을 받으러 갔다. 공노인은 조선에 가고 없었으며, 일전에 일도 있고 하여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왔다는 말없이 마루 끝에 걸터앉아 사람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봉놋방 옆방에서 얘기 소리가 흘러나왔다. 방씨와 순이네의 음성이었다. 송애가 나가고 머슴 권서방도 이태 전에 새경을 받아 고향으로 가버린 뒤 딸애를 데리고 사십 가까운 순이네라는 여자가 들어왔던 것이다. 순이도 열다섯 그도 자기 몫의 일을 맡아하고 있었다.

"늘 보믄 에미 가난이 든 아이 같다. 그 날도 넋을 잃고 서 있는데 어찌 불쌍한지..."

"열여덟 살 아니오? 에미 가난은 무슨, 계집애 생각할 나이지요, ."

"그러세. 에미 없이 자라서 그런 데 눈이 먼저 떠지는지도 모르지만,"

"여자 좋아하게 생겼습니다. 저번에도 우리 순일 눈이 뚫어지게 쳐다보는 바람에 순이가 무안해 죽을 뻔했다 그러더구먼요."

"그건 순이 편이 조달해서 그런 게지. 두메가 무신..."

"그렇게만 말할 수 없지요. 하필이면 기생집 앞에 서 있을 건 뭐람? 열여덟이면, 장가들어서 아이아범도 될 수 있는 나이 아니오?"

"그건 그렇지만, 두메 처지로는 공부를 더 해얄 기고 장개사 늦잡아야지. 핵교 선상님도 그렇지마는, 우리 집 늙은이가 얼매나 그 아아한테 희망을 보고 있다고? 장차 큰사람 될 기라 카고 신동이란 두메를 두고 하는 말이라 카든지... 에미 애비가 없어도 자알 커야 할 긴데,"

"신동이고 뭐고 그런 데 눈뜨면 별 수 없는 거요, 패가망신하는 것도..."

"무신, 아직 어린 것을 두고, 무신 말을 하노?"

"아니 그렇다는 얘기지요."

"하고 버릴 말이라도... 그 나이가 되믄 가시나 머시마 할 것 없이..."

"두메 아버지가 죽은 건 나도 알지마는 어머니는 어찌 됐어요?"

"그러세, 그걸 뉘 알겄나. 두메를 낳아놓고 이내 죽었다던가? 그것도 우리집 늙은이가 들은 말이고..."

"누가 아나요?"

"머를?"

"두메는 좀 잘났수? 꺼무꺼무한 눈하며, 산포수 아들 같지가 않아요."

"내사 한 분 설핏 봤지마는, 아비사 못났지. 그래도 두메 피섯이 있더마. 해천에 용 나는 수도 있인께."

"모르는 일이지요. 그애 어머니가 살았는지. 안 그래요? 두메를 보면 그래 어머니 인물이 보통 아닐 거요. 산포수 계집 되기는 아까운 여자였다면? 바람 잡아 나갔는지 뉘 알아요? 호호홋홋... 두메 그 애도 좀 여자 좋아하게 생겼수?"

"별소릴 다 하네. 안 본 일을 가지고 간둥간둥 얘기하는 거 아니다. 어림짐작만 가지고 말한다믄 그 아아 어마니 공주마마라고는 못할까? 이럭저럭 다 됐구만."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방씨는 순이네와 함께 이불호청을 꿰매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두메야!"

당황한 방씨, 새파랗게 질린 두메 얼굴을 보자 그도 낯빛이 변한다. 두메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쏜살같이 뛰어나간다.

"두메야!"

돌아보지 않았고 대문을 탕 닫는 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두메는 고물상 모퉁이 골목을 들어선다. 찾아간 곳은 육 년 전, 작부 출신인 서울댁이 살았으며 김두수가 가끔 와서 묵고 가던 그 집이었다. 서울댁이 용정을 떠난 것은 벌써 옛날의 얘기였고, 송애가 김두수 계략에 걸려 몸을 버렸던 그날 밤, 문을 따주던 여자는 물론 그 후 집 임자가 여러 차례 바뀐 뒤 월선이가 사들였다. 초가는 함석지붕으로 갈아 얹혔으며 나무판자 문도 대문으로 달라져 있긴 했다. 월선이 이곳으로 옮긴 것은 병이 무거워지면서 국밥장사를 할 수 없게 된 때문이다. 공노인 내외는 집 사는 것을 처음부터 반대했다. 월선이를 객줏집으로 데려가서 병을 고쳐야 하며 방씨가 옆에서 병간호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월선은 자기 병이 그렇게 중병도 아니며 장사 안 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회복될 수 있는 거라고 우겼다. 그것이 다 홍이 때문이라는 것은 뻔한 일, 공노인 내외는 남의 속에서 빠진 것 수덕망덕 볼 거라 그러느냐 하면서 화를 냈던 것이다.

"홍아! 홍이 있어?"

두메는 문을 흔든다.

"두메 형! 어서 와."

홍이 뛰어나온다. 그새 키가 많이 컸다. 목소리는 앳되고 얼굴도 여리게 보였지만 아비를 닮아선지 키는 두메와 비슷하다.

"어서 들어와. 일요일이라구 왔어?"

". 어머닌 좀 어때?"

"그저 그렇지 뭐."

환하게 밝았던 홍이 얼굴이 어두워진다. 열려진 대문 사이로 마루에 걸터앉은 남자의 모습이 반쯤 보인다.

"손님 오셨어?"

"."

"어디서?"

"몰라. 한데 말이다, 그 손님 절름발이야."

홍이는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두메가 마당에 들어갔을 때 마루에 걸터앉은 남자는 사십 남짓 콧날이 보기 좋은 얼굴이었다. 그는 들어선 두메를 유심히 바라본다. 눈에 미소가 흐르고 있는 것같이 느껴진다.

"두메 왔나?"

방안에서 월선이 반갑게 묻는다. 두메는 마루까지 올라가서

"네 아주머니. 좀 어떻습니까. 일요일이라서 놀러 왔습니다."

", 잘 왔다. 홍아."

"?"

"누부보고 점심, 어서 하라 캐라. 손님도 기시고 두메도 왔인께로."

"."

"그라고 니도 점심 묵고 나믄 두메랑 놀러 가거라. 집구석에만 들어배키 있지 말고."

"옴마는 편안하게 누워 있이믄 될 긴데 별걱정을 다 한다. , 우리집에 말이다? 서누나가 와서 밥해준다."

"그래?"

"누나!"

"알았어!"

홍이 미처 말하기도 전에 부엌에서 미리 대답한다. 안자는 얼마 전 서희가 보내준 그 집 심부름아이다. 편애라 하면 좀 우스운 얘기지만 옛날 최치수가 용이에게 그러했듯이 월선에 대한 서희의 관심은 각별하였다. 육친에 가까운 그런 정인데,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주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국인이 경영하는 병원에도 여러 번 보내었고 월선이 치명적 병을 앓고 있으며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은 후에도 자상하게 돌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색다른 음식을 만들게 하여 안자에게 들러 보낸 것도 수차례, 그래서 안자는 이 집에 자주 드나들게 되었던 것이다. 남의 눈치를 핼끔핼끔 보는 객줏집 순이와는 달리 안자는 투박하게 생겼고 무던했다. 순이보다 나이도 많았으며 홍이 누나같이 따랐다. 안자! ! 안자! 서 하며 곧잘 놀려주기도 하고, 언제부턴가 안자는 서누나로 불렸는데 누나라는 호칭을 안자는 매우 만족해했다.

"학생이냐?"

마루 끝에 걸터앉은 손님이 말을 걸었다.

", 아저씨."

두메 대신 홍이 나선다.

"이 형은 우리 학교 졸업반입니다. 전교에서 젤 공부 잘해요."

"그러냐? 고마운 얘기군. 아암 공부 잘해야지."

손님의 눈빛은 홍이랑 두메를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두메는 손님에게 별반 관심이 없고 부엌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서누나? 안자누나? 누나...'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좁은 이마에 약간 고수머리, 광대뼈가 솟아오른 안자 얼굴이 떠오른다. 안자가 진짜 누님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안자보다 더 못생기고 호박같이 못생긴 여자라도, 그런 여자라도 진짜 누님이 하나 있었으면 하고 두메는 생각한다. 두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가 아는 아이가 하나 있지. 그 아이도 아마 너이들 학교에 다녔을 게야."

"누굽니까? 이름이 뭐지요? 아저씨."

홍이 성급하게 묻는다.

"음 지금은 연추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마는,"

"네에? 뭐라구요?"

두메가 고개를 휙 돌린다.

"아저씨! 그 애 이름 박정호 아닙니까?"

"아니 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

눈을 껌벅껌벅하며 손님은 장난스런 미소를 띤다.

"맞아요! 알았어요!"

홍이 얼굴이 시뻘겋게 부푼다.

"아저씬 정호 작은아버지, 틀림없어요. 그렇지요?"

다그치듯 말했으나 목소리는 낮았다.

"그럴까? 잘못 알았다."

"아저씬 우릴 믿지 못해 그러시는 거지요? 하지만 우리도 애국잡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모두 애국자 될 사람들입니다. , 저는 담박에 알아차렸습니다. 정호 말이 나왔을 때, 저는 정호한테서 작은아버지가 밀정놈 때, 땜에 다리를 다쳤다는 얘길 들었거든요."

손님 얼굴을 바라보던 두메는 눈이 다리 쪽으로 내려간다. 손님은 애매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우릴 철없는 애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린 정호하고 두메형하고 맹셀 한 사이란 말입니다. 독립을 위해 같이 싸우고 같이 죽자구, 모르셔서 그렇지 두메형은 정호랑 한집에 살았어요. 우린 아저씨 얘기 입밖에 내지 않아요. 그 정도는 우리도 알구 있어요."

홍이 음성은 아주 낮았다. 부엌의 안자가 들을세라, 방안의 어머니가 들을세라.

"애국자 되려면 앞으로 알고도 모르는 척 그런 것도 배워야지. 핫하핫하핫...."

손님은, 아니 박재연은 크게 소리 내어 웃어젖힌다. 홍이도 따라서 귀엽게 웃었고 두메는 싱긋이 한번 웃는다.

"아저씨는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는데, 정호놈이 밤낮 너희들 얘기만 하잖겠어?"

박재연은 권필응과 동행하여 용정까지 왔다. 용정에서 모종의 회합이 있어서인데 안전을 꾀하기 위해 권필응과 따로 숙소를 정해야 했고, 여관이나 객줏집도 일본의 경찰력이 강화된 요즘 위험이 없다 할 수 없으므로 길상이 월선의 집을 주선한 것이다. 박재연은 이 집 골목에 들어설 때 육 년 전 김두수와 마주쳤던 그 골목이라는 것을 깨닫고 매우 심기가 좋지 않았으나 자기를 피하여 한잠 늘어지게 자고 밤이 되어 양복과 캡으로 변장한 김두수가 빠져나간 바로 그 집이라는 것을 알 리가 없다.

"아저씨"

두메가 점잖게 불렀다.

"오냐."

"할머님이랑 아주머님께선 안녕하십니까?"

응석받이 홍이하고는 다르다.

". 모두 편안하시다. 아주머님께서도 가끔 두메 얘길 하시지."

"아저씨 제 얘기는요."

샘이 나서 얼른 묻는다.

"홍이 얘기도 물론 하시구."

"저도 자주 놀러 갔었거든요. 셋이서 늘 붙어다녔어요."

이리하여 두 소년과 점심상을 함께 받은 박재연은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막상 조카애들에겐 엄격했으면서도. 그의 기분이 좋은 것을 기화로 홍이는 스스럼없이 이것저것 질문이었고 두메는 침착하게 요점만 따서 질문을 하곤 한다. 점심이 끝난 뒤에도 두 소년은 박재연에게 늘어졌다. 열다섯 사춘기에 들어선 홍이와 사춘기에 있는 두메, 그들 세계에서의 느낌이란 의외로 엉뚱한 것이 있었다. 상상력은 자유로웠으며 분방했다. 가령,

"그까짓 대포나 총 같은 것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사람 없는 밀림 속에 큰 굴을 파놓고 쇠붙이랑 화약을 실어들여서 만드는 거예요. 중국 사람 아라사 사람들도 다아 왜놈을 미워하니까 말입니다. 그 사람들 기술자를 불러와서, 안 하겠다면 아무도 모르게 부대에다 넣어가지고 데려가는 겁니다. 탄약이구 총이구 막 맨들지요. 그래가지구 결판을 내는 겁니다."

하는 식이다. 두메는 두메대로

"철없는 소리 마. 그럴 군자금이 어디서 나와? 그보다 열 명이든 다섯 명이든 조를 수백 개 맨들어서 영사관이고 파출소고 불을 지르고 다니는 겁니다. 그리고 왜놈 순사 헌병을 죽이는 겁니다. 밀정놈들은 이잡듯 없애야 하구요. 그러노라면 잡혀서 죽는 사람도 많이 생기겠지요. 하지만 총질하는 전쟁보담이야 덜 죽을 거 아니겠습니까? 한 곳에서만 하는 게 아니라 여기서 번쩍, 저기서 번쩍, 정신을 못 차리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은 자연 중국 사람들도 나설거 아니겠어요?"

홍이는 덩달아서

"아저씨 저는 이런 생각을 했어요. 조선 사람 두 명이 왜놈 하나를 죽이면 된다구요. 그러면 이 용정에선 왜놈 씨가 마를 거 아닙니까? 조선 사람이 훨씬 많거든요. 중국 사람들은 좋아라 할 거구요. 지금 중국 사람들도 모두가 배일 운동을 하구 있잖아요?"

"글쎄다. 하하핫핫...."

속으로 박재연은 땀을 뺀다. 워낙이 흥분의 도수가 올라가 있는 소년들에게 너희들은 공부나 해, 하며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갈 시간이 되자 그는 다소 엄격한 표정이 되어 일어섰다.

"우리 훗날에 또 만나자."

박재연이 나가버린 뒤 홍이와 두메는 맥이 확 풀어진다.

"우리도 나갈까, ?"

"."

신돌 위에서 신발을 신으면서 홍이는

"옴마 우리 좀 나갔다 오께."

"그래라. 두메는 밥 많이 묵었나?"

". 많이 먹었습니다."

"어이구, 어이구, 좀이 쑤셔서 일요일을 그냥 배길 수 있담?"

걸레를 빨며 안자가 핀잔이다. 고물상 앞길까지 나온 두메는 어쩔까 망설이는 듯

"홍아."

"."

"객줏집에 안 가겠니?"

"거긴,"

대답이 찐찐하다.

"나 거기 가기 싫어하는 거, 형 잘 알지 않아?"

"그래. 실은 나도... 그럼 선생님한테 놀러 갈까?"

"그게 좋겠다!"

홍이 빙긋 웃는다.

"! 호떡 사가자!"

"나 돈 없다."

"걱정 마. 나한테 있어."

호주머닐 툭툭 친다. 홍이 다른 날보다 들떠 있는 것을 두메는 이상하게 생각한다.

'정호 작은아버지 때문이겠지.'

그렇다손 치더라도 홍이는 여느 때완 사뭇 다르다. 얼핏 보기에 명랑하고 흥분에서 오는 수선스러움 같았으나 어쩐지 그런 행동이 억지처럼도 느껴진다. 호떡 열 개를 사든 홍이와 두메가 문을 닫고 나오는데 호떡집 간판이 흔들리고 간판에 걸려 있는 붉은 천이 흔들렸다.

"저눔의 간판 좀 높이 매달 수는 없을까? 매번 부딪친단 말이야."

머리를 매만지며 화가 나서 두메는 말했다.

"."

"."

"우리 선생님한테 가지 말고 강가에 안 가겠어?"

"강가는 왜.

"그냥,"

"그럼 가자꾸나. 나는 아무래도 좋아."

호떡봉지를 들고 홍이는 터덜터덜 앞서 걷는다. 종전까지 들떠있었던 홍이 뒷모습은 기운이 빠진 듯 두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두메가 함께 걷고 있다는 것도 잊은 듯 보였다. 강가에 나갔을 때 노을과 단풍이 강물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뗏목이 강 위를 흐르고 있었다.

"좀 있으면 너이네 아버지 산판에 가시겠구나."

","

홍이는 짤막하게 대꾸하고 모래밭에 다릴 뻗고 앉는다.

", 호떡 먹자."

봉지를 찢어 호떡을 펴놓고 두메를 한 번 쳐다본 뒤 홍이는 호떡 하날 입 가득히 베어문다. 소년들은 피차 아무 말 없이 노을을 받고 떠내려가는 뗏목을 바라보며 한 개, 두 개, 세 개, 호떡을 먹어 나간다.

"왜 그래?"

"."

"실컷 까불더니 맥빠졌나?"

"맥빠지긴,"

입안에 가득 찬 호떡 때문만도 아닌 듯 목멘 홍이 음성이다.

"어럽쇼? 울어?"

"!"

"말해보아."

"우리 옴마 죽을 거래."

"..."

"못 고치는 병이래."

"누가 그랬어?"

"옴마하고 나만 모르고 있었는데... 병원에서 그랬다는 거야."

베어무는 호떡 위에 후둑후둑 눈물이 떨어진다. 호떡을 꿀컥 삼킨다.

"저번 때 응칠이가 하는 말을 내가 몰래 들었거든."

"오래 앓았으니까 너도 그만한 각오는 돼 있어야지."

"옴마가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야 안 한 것도 아니지만 병원에서 딱 잘라서 말했다니까... 불쌍한 옴마!"

먹던 호떡을 버리고 무릎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껴 운다.

"그래도 너에겐 친어머니가 또 계시지 않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 불쌍하다는 거지. 흐흐흣흣... 흐흐..."

격렬하게 흐느낀다. 흐느끼면서

", 나 벌 받을지 모르지만 퉁포슬에 있는 어머닌 싫다! 날 낳아준 사람 같지가 않아. 나쁜 사람이야! 욕심꾸러기야! 세상에 돈밖엔 몰라!"

두메는 떠내려가는 뗏목을 바라본다.

'넌 그래도 나보담은 낫다.'

"! 나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알어? 모를거야. , 모를거야!"

"알 턱이 없지."

홍이는 울면서

'퉁포슬의 어머닐 난 왜 미워할까? 미워하는 내가 또 밉고, 부끄럽기도 해. 하지만 우리 옴만 죽는다. 죽는단 말이야! 그걸 좋아할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려. 난 옴마 눈만 보아도 기분이 좋았다. 홍아, 이놈 자식아, 하면은 화나는 일도 다 풀어지고, 그런 옴마가 죽다니, 어이구우...'

"옴마가 죽으면 나, 나 퉁포슬 어머닐 용서 못할 거야."

"임마, 그건 너 옹졸한 생각이야. 너 친엄마가 여기 엄마 죽인 것도 아니고 병이 나서 그런 건데,"

콧물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쳐들고,

"그걸 누가 몰라? 모르느냐고!"

별안간 악을 쓴다.

"나한테 비하면 넌 팔자가 늘어진 거야."

"뭐이라구? 팔자가 늘어져?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난 내 아부지 돌아가시는 것도 못 봤다. 묏등을 치며 혼자 울었어."

", 그렇지마는 모, 모르는 편이 낫다! 죽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 쳐다보고 있는 것보담,"

"그쯤 해두어. 사내자식이, 나는 난생 엄마라 불러본 일도 없고 불러볼 사람도 없었다, 임마."

"지나간 얘기는 왜 하노! 나는 지금,"

"그만 하라니까! 홍아, 서러워 말아라 해야겠니? 시시하게. 한데 너이네 아버진 왜 안오시냐?"

"아부진 그런 사람이야. 냉정해. 나한테도... 산판일 끝나면 오시겠지. 오시면 산판서 셈해온 돈 반으로 똑같이 나누어서 옴마한테 주겠지."

홍이는 비웃듯 말했다.

"불쌍한 울옴마."

"제에기랄! 또 울옴마야? 실컷 혼자서 울어! 나 갈 테니까."

두메는 훌쩍 일어선다. 짜증이 난 얼굴이다. 그러나 두메는 모래밭을 왔다갔다할 뿐 혼자 돌아가진 않는다. 노을은 차츰 사라져가고 있었다. 불붙듯 붉은 노을, 강 건너 단풍든 숲이 서서히 검은 빛깔로 옮겨지고 있다.

"두메형."

"실컷 울어."

"가아."

돌팔매질을 하며

"실컷 울라니까."

"깜깜해온다."

두 소년은 모래를 밟으며 돌아간다.

"호떡 네 개 남았다."

"그게 어쨌다는 거야."

"선생님한테 들고 가기가 안됐어."

"선생님한테 갈 테야?"

"집에는 눈이 부어서."

"그래, 그러자. 돈 남아 있으면 서너 개 더 사라."

호떡 꾸러밀 안고 그들은 김사달 선생의 하숙집을 찾아 들어간다.

"선생님!"

", 놀러 왔구나."

"!"

"들어와라."

김사달은 코를 매만지며 책상 앞에서 책을 읽고 있다가 돌아앉는다. 아주 젊은 동안의 청년이다.

"계실 것 같아서 찾아왔어요."

홍이 호떡 봉지를 한곁에 놓으며 말했다.

"나야 밤낮 있지. 학교 가는 일말곤,"

벽에 붙여 책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으며 고리짝 위에는 이불이, 그리고 벽에 양복 한 벌이 대롱대롱 걸려 있을 뿐 몹시 살풍경한 방이다.

"그게 뭐냐? 이리 내."

"호떡입니다."

홍이 얼굴이 빨개져서 내놓는다.

"함께 먹자."

두메와 홍이 마주본다. 두메가

"저희들은 먹었습니다."

"그래?"

김사달은 출출했던지 호떡을 뭉떡뭉떡 베어 먹는다.

"그래 공부는 좀 하고 놀러 다니냐? 홍이 말이야."

"실은,"

두메가 말을 하다 말고 홍일 힐끗 쳐다본다. 홍이 눈을 깜박거린다. 씩 웃는 두메

"홍이가 찔찔 울어서 끌고 왔습니다. 종아리 좀 때려주시라구요."

두메는 선생님이라기보다 형님을 대하듯 한다.

"울긴, ?"

"어머니 병환 땜에 그러는 거지요 뭐."

"... 그거 야단났군."

사정을 다소 아는 김사달 얼굴이 흐려진다.

"어머니 병환은 의사에게 맡겨두고 홍이는 공부나 열심히 해. 성적이 시원찮아. 그래서 어머님이 병나신 것 아니야?"

홍이는 잠자코 있다.

"그는 그렇고, 두메야."

"."

"너 이름말이다."

"이름요?"

", 아버님께서 두메산골이 좋아 그렇게 지으신 ?? 너 이름 좋다고 생각해. 그러나 앞으로 넌 아무래도 음에 맞는 한자 이름이라도 있어야겠어."

"."

"강두메, 나도 이름 짓는덴 자신이 없지만 두메 두, 메는 매화나무 매, 그러니까 머, 두매 어떠냐?"

"두보의 두짜지요?"

"그렇지이."

"두는 좋은데요. 매화나무 매가 어쩐지 여자 이름 같을까?"

"그렇지가 않다. 중국사람 중에는 매화나무 매자의 사람이 더러 있어."

"글쎄요, 좋긴 좋은데요."

"그럼 그렇게 하는 거다."

김사달은 다시 호떡을 뭉떡뭉떡 베어먹는다.

"일전에 송선생님한테서 편지가 왔었다."

"? 송선생님한테서요?"

". 두매 너 얘기가 있었다. 명년엔 졸업인데 중국 군관학교에 들어갈 수 있게 주선중이란 말씀이 씌어 있었어. 열심히 해야 해, 너에게 기댈 걸고 있어."

"."

"선생님 저는요."

실은 샘이 나는 것도 아닌데 홍이 말했다.

"홍이 너는 아직 새까맣다. 아직은 몇 년 더 있어야지."

". 그건 알아요."

"어머님 간호나 잘 해드려. 공부도 더하구."

그러나 아무래도 홍이는 풀이 죽는다. 안 그런 척하려고 하려는 눈치였으나 때때로 멍해지곤 한다.

 

 

3. 가난한 사람들

동저고리바람으로 권서방은 헐레벌레 객줏집을 들어선다. 들어서자마자 고함을 지른다.

"아주머니!"

"와 그라요?"

햇볕 바른 마루에 걸터앉아 마늘을 까고 있던 방씨가 짱구 이마를 든다.

"형님 안 오셨지요?"

"오기는 어디로 와."

"안 오셔요..."

"함흥차사가 된 모양이구나."

머리가 빠져서 가리맛길이 훤했다. 이마만 툭 불거졌을 뿐 양볼은 더욱 꺼지고 방씨의 허리는 한층 길어 보인다.

"큰일 났는데, 제에기."

마루에 몸을 내던지듯 앉으며 권서방은 한숨을 내쉰다.

"큰일은 무슨 큰일, 다 늙어빠진 처지에 마누라 해산달도 아니겠고..."

"그런 악담 마시오. 해산달이라니? 날 죽어라 그 말입니까?"

해산달도 아닐 거라 했는데 권서방은 역정을 낸다.

"그거는 삼신님 하시기 탓이고, 다 지 묵을 거는 타고 나오니께 생기는 거야 어쩔 수 없지. 그런데 큰일이라니 무신 일이요?"

"아주머니한테 얘기해봐야 소용없어요. 아무튼 형님이 오셔야 얘기가 되는 건데,"

권서방은 콧구멍을 후비다가 마루 밑을 내려다보며 풀이 죽어서 말했다. 목덜미의 살갗은 늘어지고 머리칼도 희끗희끗한 권서방. 늦장가를 들어 올망졸망 손자 같은 자식들. 세월이 바쁘고 마음도 바빴을 것이다.

"아이구 참, 그래요? 이자는 사정이 영 달라졌거마는..."

"?"

"아 그러세, 권서방이 급할 때 부르는 거는 노상 아주머니 아니었소? 그래 봐야 별 실속도 없일 기구마는..."

"무슨 말씀이오?"

"우리집 늙은네 말이오. 권서방이 찾아싸아도 별 실속이 없일 기다 그 말 아니오?"

"하긴 그렇소. 실속은커녕 얼굴 보기도 어려운데 그러나 이번만은 꼭 만나야..."

하다 말고 순이네가 뒤꼍으로 옮겨가는 무 배추를 힐끗 쳐다본다.

"실은 말입니다, 길서상회 그 댁에서 그 왜 곳간 뒤에 있는 땅을 판다 했다면서요? 그게 틀림없는 얘기겠지요?"

"그러기, 그런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한데... 나야 뭐 밖의 일을 알아야 말이지."

"그 땅을 사자는 사람이 있어요."

"판다면야 사자는 사람은 많을 기요."

"그걸 내가 좀, 그래야 겨울을 나지 않겠소? 형님이 어서 오셔얄텐데..."

"오는 거사 기약이 없는 일이고 바깥주인한테 말해보는 게 좋을성싶구마는..."

"그걸 나도 생각 안 한거는 아니지만 몇몇 거간들이 명함을 들여 본 모양인데 자기는 모른다 공노인한테 물어보아라, 하더라는 게요."

방씨는 짐작이 가는 듯 잠자코 만다. 자기 말대로 바깥일은 모르는 방씨였으나 길서상회댁이 불원간 조선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 길상이 그것을 싫어하고 있다는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늙은이가 기력 좋은 것도 탈이라니까."

"왜 아니라요."

"환갑을 지냈으면 편안하게 안방 차지나 하고 계실 일이지, 큰 집 드나들 듯 조선에는 뭣하러 밤낮 가시는지 모르겠소."

"역마살이 들어서, 그것도 병이라."

"혹 서울에 소가라도 둔 것 아닙니까? 늘그막에 자식이라도 보려고?"

"그 주제에? 무신 억만장자라고,"

"약초 캐러 다니던 젊었을 시절에 백두산을 위시하여 안 가본 산이 없노라고 노상 자랑하더니 산삼을 캐서 장복을 하싰는가?"

"모르지요 그거야. 내사 동삼 꼬랑지도 구겡 못했인께."

방씨는 웃는다. 가리맛길이 훤하고 양볼은 푹 꺼졌어도 웃는 눈매는 여전히 귀엽다.

"볼품도 없는 늙은이가, 하긴 코밑이 길어서 수는 하게 생겼습니다만."

"아무튼지 젊었을 때부터 한곳에 붙어 있이믄 몸살이 나는 성미니께 그것도 집안 내림인가배요."

"내림요?"

"월선옥의 그 아아 부친, 그러니께 시숙도 객지로 객지로 떠돌아 다니시더니 객사 죽음하싰지."

"참 월선옥의 그 아주머니 좀 어떠시오?"

"..."

"금년 넘기기 어렵다고들 하던데,"

방씨의 얼굴빛이 금시 달라진다.

"누가 그런 말 합디까?"

"글쎄, , 소문이..."

"아프다고 사람이 다 죽는가요?"

"그야 그렇지요."

"그놈 아아는 고집이 세서..."

"..."

죽는다는 말에 발끈 화를 내던 방씨는 제풀에 기가 죽는다.

"우리 늙은네 뒤 핏줄이라고는 그 아이 하나뿐인 거는 권서방도 알지만 그만 우리말을 듣고 여기 오믄은 좀 좋겄소? 아무리 집에 가자고 타이르고 달래도 보고, 남의 이목이 있지 않소? 남이 부끄럽다 카이. 그놈의 아이새끼 땜에 못 오는 기요. 수덕망덕을 볼 그놈의 아이새끼 땜에,"

치마를 걷어 콧물을 닦는다.

"남 부끄러울 거야 뭐 있겠소. 아무도 병든 조카딸 내버려둔다는 말 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이서방은 통 안 오는 모양 아니요?"

방씨 얼굴이 벌개진다.

"그 목이 뿌러져 죽을 놈의 인사, 안 와보는 거는 고사하고 지 새끼까지 아픈 사람한테 처맡기놓고, 아 그러시, 천 리 밖에 산단 말가 만 리밖에 산단 말가, 가물치 콧구멍, 분한 생각 같아서는 못할 짓이 없겠지마는 참는 기지."

"그 사람 그래도 속으론 끓을 게요. 본시 의리가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런 소리 마소. 마음속으로 육도벼슬을 하믄 뭐하는고? 와서 찬물 한 그릇이라도 떠주는 그기이 남남끼리 함께 살던 정이지. 세상에 그리키 매몰차고 독사같이 모질고,"

"글쎄요. 사내들이란 떠나 있으면 자연 잊을 수도 있고 그 사람도 살기가 고생스러우니,"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아픈 사람만 하까? 내 이분에 오기만 해봐라. 모가지를 비틀어부릴 긴께."

"그 팔로 장골 모가지를 비틀어요? 하하핫 하하하..."

"오직 괘씸하믄 그런 말을 하까? 하기사 아무리 괘씸해도 이쪽은 지는 해, 죽는 사람만 불쌍하지. 그 찬한 기이 명이나 길어서 살았이믄 좋겄는데 어이구 신령님도 야속하시지."

"박복한 사람은 가로 뛰고 세로 뛰어도 별수없어요. 신령님이 어디 있으며, 그것 다 구름잡는 얘기고 제기랄!"

"그러기, 박복한 사람은..."

"더럽고 아니꼬운 놈들만 잘사는 이눔의 세상 아니오? 도둑질 많이 하는 놈일수록 잘살고 신령님이 있긴 어디 있어? 신령님? 복장 터지는 얘기지."

갑자기 흥분하여 허공에다 주먹질을 하던 권서방은 벌떡 일어섰다.

"아주머니. 나 가겠소!"

무슨 급한 볼일이라도 생각나 듯 허둥지둥 쫓아나간다.

"온 사람도..."

문간을 쳐다보던 방씨는 다시 마늘을 까기 시작한다. 거리에 나온 권서방은 제에기랄! 제에기랄!을 연발하며 걷는다. 공노인의 귀가가 늦어져서 화가 났지만 노상 하는 공노인 잔소리가 생각나서 울화가 치민 것이다.

"내가 복장 옳게 못 써서 떼돈을 벌었단 말이야? 옛날이나 지금이나 남의 석가살이, 어린 자식새끼들 배불리 못 먹이고 흥! 집 사는 사람이, 땅 사는 사람이 누구냐 따져가면서 흥정 붙이게 생겼어? 상대가 누구면 어때? 거간이야 흥정 붙이고 구전 먹으면 그만이야.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구. 아 내가 독립 운동하는 사람을 찔러서 왜놈한테 돈을 받아먹었나아?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삼시 세끼 죽물이라도 먹어야 애국자도 되고 양심가도 되지. 나도 공노인만큼 지반 잡고 산다면야, 그 늙은이보다 더한 양심 찾고 애국자도 되겠다! 제에기, 제에기랄! 지금 같애서야 왜놈 아니라 왜놈의 할애비라도 좋다! 우리 식구 먹여만 살려준다면, 이 나이 해가지구서 기저귀 차는 어린것부터... 생각만 하면 눈앞이 캄캄한데 그것 찾고 이것 찾고, 언제? 우리가 잘못해 나라를 잃었나? 빌어먹을, 참말이지 사람이라도 잡아먹고 싶은 심정이다!"

마마자국만큼 굵었던 땀구멍도 졸아들고 검버섯이 핀 얼굴이 푸릇푸릇하다. 설렁한 날씨 탓이겠지만 울분, 누구에겐지도 모를 분노 때문에도 그런 성싶다. 객줏집을 찾아갔을 때 권서방은 조급했을 뿐이었다. 공노인이 아직 오지 않았으리라는 짐작도 했었고 땅 사자는 사람이 성화를 부린 것도 아니었다. 다만 자기 혼자서 그냥 조급했을 뿐이다. 박복한 사람은 가로세로 뛰어도 별 수 없다는 자신의 말이, 그 말 때문에 권서방의 울분이 제풀에 폭발한 것이다. 굳이 따진달 것 같으면 공노인이 권서방을 도와야 할 의무는 없는 것이고, 권서방 처신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권리도 없는 것이지만, 그간 공노인은 그를 도와준 것이며 처신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했었다. 그러나 이 몇 해 동안 이들의 관계가 약간 달라진 것이다. 한마디로 공노인은 권서방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용정 형편에 도통 관심이 없어졌던 것이다. 그는 서울 조준구와의 싸움에 열중해 있었다. 처음 서희의 부탁을 받고 혜관을 따라 서울에 갔을 때 공노인은 자기 임무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이유와 정당성이 있었지만 어느새 공노인은 조준구와의 지략적 싸움에, 싸움 그 자체에 빠져 들어갔던 것이다. 미쳤다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으로, 논문서가 넘어올 때마다 공노인은 성 하나를 공략한 쾌감과 나머지 성을 향한 용솟음 때문에 그는 자신이 노쇠해가고 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그 일 이외 관심을 가졌다면 그것은 월선이 중한 병을 앓고 있다는 일이며 겨우 현상 유지를 하는 객주업에 대해서도 무관심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권서방의 분노는 차츰 가라앉았다. 별도리가 없다는 체념이 그이 걸음걸이를 더디게 한다. 무슨 바쁜 일이 있는 듯 객줏집을 뛰어나오기는 했으나 별볼일이 없었고 갈 만한 곳도 없었다.

'내 잘못이야. 늦장가는 왜 들어서 이 고생인고. 털고 일어서자 해도 딸린 식구가 없어야 말이지. 홀몸이라면 되든 안 되든 훌쩍 떠나서 고깃배를 타든지 광산 일을 하든지, 그것도 못하면 길가 송장이 되면 그만 아냐? 이건 죽도 사도 못하고, 그놈의 아이새끼들 생각만 하면 머리빡의 핏줄이 터질 지경이야. 겨울이 눈앞에 있는데 내 잘못이야. 늦장가는 왜 들어서,'

"아저씨 어디 가세요?"

권서방 앞을 젊은 여자가 가로막는다.

"뭐야?"

권서방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를 모르시겠어요?"

"저라니?"

"아저씨도. 나 송애예요."

"아아니 뭐이라구?"

"그간 안녕하셨어요?"

"대관절 어찌된 일이야."

"제가요? 왜요?"

상글상글 웃는다. 신수가 훤했다. 손목시계를 차고 금반지를 끼고 옷도 비단이다. 눈썹을 가늘게 치켜올려 그린 얼굴은 옛날의 송애를 연상할 수 없다.

"이거, 그래 그간 어디 가 있었지?"

"봉천에요."

"시집은 갔나?"

"글쎄요?"

"살기가 편해진 모양이구나, 아주 하이칼라가 됐네?"

"저라구 못살라는 법 있나요?"

눈에 날이 선다.

"그야 그렇지. 그래 객줏집에 오는 길이냐?"

"거긴 왜요? 제가 거길 뭣하러 가나요?"

"아아니이, 이 말하는 것 좀 보게나?"

"난 거기 볼일이 없어요."

"거기 볼일이 없다니? 이봐 송애."

눈을 부릅뜬다.

"말씀하세요."

"낳은 사람이 부모면은 길러준 사람도 부모는 부모야. 거기 볼일이 없다니? 네가 어떻게 해서 나갔는지 곡절이야 모르겠다만 그러는 게 아니야. 보아하니 썩 잘된 모양인데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안하면 못쓴다."

"실컷 부려먹구, 나 그집에서 공밥 안 먹었어요. 그리고 난 빈 몸으로 나간 거예요. 그 사람들한테 신세진 것 없어요. 공연히 모르는 말씀 마세요."

쌀쌀하기가 이를 데 없다.

"네가 자란 이력을 내가 아는데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해? 애키! , 잔말 말구 술 한 병이라도 사들고 찾아가아. 사람이 은혜는 알아야지. 아무리 철이 없기로서니,"

"그런 얘기는 그만두시구요. 듣고 싶지도 않으니까, 그보다 나 아저씨하고 의논할 일이 있어요. 찾아가 뵐려고 생각던 참이었는데 마침 잘 만났네요. 다름이 아니라 집칸이나 장만해볼까 싶어서요."

"그만두어. 한다는 얘기가 괘씸하기 짝이 없구나."

화를 낸다.

"아저씨한테 이득이 되는 일인데 왜 그리 화를 내죠? 객줏집에서 먹여살려 주나요?"

"이득이 된다구?"

"구전이라도 받을 거 아니에요. 누가 공짜로 해달랬어요."

", 야아! 이 계집애야! 네까짓것 구전 안 먹어도 이 권필구 굶어죽진 않아. 앞길이 먼데 복장을 그따위로 써가지고 빤하다 빤해. 몹쓸 기집애 같으니라구."

! 침을 뱉은 권서방, 송애를 떼밀어내고 걷는다.

", 계집애?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사는구먼."

"그래, 그새 세월이 오십 년 백 년 지나갔다! 이 할망구야!"

권서방, ! ! 또 침을 뱉는다.

'제에기랄! 오늘은 연달아 화난는 일만 생기는군. 제에기랄!"

왜놈 아니라 왜놈의 할애비라도 좋으니 우리 식구 먹여만 준다면... 방금까지 그랬었던 권서방이다.

"참 세상이 더럽고나야. 이마빡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새파랗게 젊은 것이 만리장성 같은 앞날을 두고, 내 나이 오십이 넘었어도... 무섭군. 세상 인심 무서워. 하아 참!"

탄식한다. 다음 권서방이 찾아간 곳은 갖바치 박서방의 가게다. 손바닥만한 점포에서 박서방은 신발을 짓고 있었다.

"바람 한번 잘 불었군요."

가죽신발 한 짝을 신틀에 끼워놓고 징을 받으면서 박서방이 말했다.

"샛바람이 불고 있는데 또 뭐라?"

"샛바람? 그건 또 왜요?"

"온갖 게 다 아니꼬와서 못 살겠네.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젊은 마누라한테 혼짝났구먼..."

"돼지꼬리만한 상투라도 있었다면 모르지. 누구처럼..."

권서방은 엉성하고 성근 박서방의 상투머리를 곁눈질하며 성난 얼굴로 말했다.

"하긴 잘 생각했어요. 형님 상투 짤라버린 건 썩 잘한 일이었지. 봉변을 덜 당할 테니까. 우리 마누란 상툴 끄덕이재두 늙어빠져서 그럴 힘이 없소."

약을 올리면서 박서방은 끌을 찾아든다. 권서방은 삿자리가 깔린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지랄 같은 세상. 나도 진작, 누구처럼 엿판이나 메고 용정을 떠나는 건데..."

"배꼽 웃을 얘기 하지도 마시오. 홍가 같은 놈도 들어왔는데..."

"언제?"

"그저께 왔다던가,"

남한테 이용만 당하고 빚만 지게 된 홍서방이 엿판이 짊어지고 용정을 떠난 지가 이 년이 넘었다. 그 홍서방이 돌아왔다는 박서방의 얘긴 것이다.

"돈 좀 벌어 왔나?"

"물으나마나, 무슨 돈을 벌어요? 홍가 허풍이야 세상이 다 아는 일이구. 엿판 메고 다니면서 돈을 벌었다면 그건 누웠던 송장이 일어날 일이요."

"그야, 엿판 메고 나갔지만 딴 일도 할 수 있는 거구..."

"혹 모르지요. 가다가 금덩이나 줏었다면,"

", 돌아오는 사람이 왜 그리 많아? 떠난 사람이 돌아오는 철인가?"

권서방의 기분은 여전히 우울하다.

"누가 또 돌아왔기?"

박서방은 일손을 놓고 곰방대를 꺼낸다.

"그 왜 객줏집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아아 데려다 길린, 그애 말이구먼. 아주 몰라보게 됐던데요?"

"으음..."

"닷새 전인가? 당혜 한 켤레 지어달라고 왔었는데, 나도 처음 몰라 봤지요. 땟물이 쪽 빠졌더만. 거 아무래도 온당치 않을게요."

"아 글쎄 고년이 내가 객줏집에 가느냐 물었더니 거긴 왜 가느냐, 볼일이 없다. 그러질 않겠어?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자식 없는 늙은이들 자식삼아 기른 것을 내가 뻔히 아는데 세상에 그럴 수가 있나?"

"아닌 게 아니라 나도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들더구먼. 무슨 원한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 늙은이들 심성 몰라서 하는 얘긴가? 그년이 바람이 나서 나갔지."

"하여간 여염집 여자는 아니 것 같고 그렇다고 술집 여자도 아닌 것 같고 뭐 봉천에 가 있었다던가?"

"뻔하지."

"뻔하지요."

"돈푼 있는 놈 물어서 첩살이 아니면 지가 무슨 재주로 시계다 반지다,"

"상판이 반반하니까. 기명통에 손 안 당구고 살자면은, 그런 길밖에 없었겠지요."

하는데, 사내 하나가 바쁜 일일라도 있는 듯 헐레벌레 들어선다.

"아아니, 이 사람 홍가 아닌가?"

"어이구, 이거 누구요? 오래간만이구먼."

홍서방은 머리를 긁는 시늉을 한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박서방은 곰방대를 발 밑에 떨고 일손을 잡는다.

"이 년 넘기, 많이 늙었네?"

"세월이 거꾸로 돌지 않는 바에야 안 늙고 어쩌겠수. 형님도 많이 늙었수다."

"그래 돈 많이 벌었다면?"

"또 저 놈의 박가, 쫑알거렸구먼."

", 그게 참말이라면 오죽이나 좋을까? 떨어진 밥풀이라도 줏어 먹게."

"알기는 아는구먼. 내 잘되면 덕보는 것쯤,"

"홍가가 돈을 벌었다면 나는 벌써 옛날에 돈방석에 앉았겠다아."

"혀는 짧아도 침은 길게 뱉는다."

"아암. 엿판 메고 돈 벌어왔다는 놈도 있는데, 그 까짓 침 좀 길 게 뱉기로서니."

"아아니, 이놈의 인사가 누굴 바람 따라 굴러온 가랑잎 신세로 아나?"

홍서방의 어투가 삐딱해진다.

"망망대해서 오가도 못하는 철새 신세지."

"꼬막딱지만한 점방에서 남의 밑창이나 꿰매주는 갖바치 신세 안 부럽구먼"

"그럴 거야. 저승에 먼저 가서 재상 노릇 할 테니까."

"누굴 굴리는 거야?"

"엿가락도 아니겠고 거적을 쓰면 굴릴 수도 있겠지."

홍서방의 얼굴이 벌개진다.

"내가 네놈한테 밥 달랬나? 얻어먹으러 왔냐?"

"화내는 것부터가 수상쩍어. 기어들어온 놈이 고갤 숙여도 뭣할텐데 뭣처럼 대가릴 치켜들어? 그래가지고는 홍가야, 밥 빌어먹기 썩 글렀다. 썩 글렀어."

"뭣이 어쩌고 어째? 너 이놈! 말 다 했냐?"

홍서방이 주먹을 휘두를 기세다.

"아아, 왜이래? 노상 하는 친구간의 가락인데,"

권서방이 막고 들어선다.

"말 다 안했지.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았다."

"박서방은 태연하세 연장통을 뒤적이며 둘을 찾아내어 신발 모서리를 쓸기 시작한다.

"야 이놈아! 밥 빌어먹기 썩 글렀다구? 사람을 뭘루 보는 게야! 네깐 놈이 날 업수이 보아? 꼬막딱지만한 점방 하나 생겼다구 도실청에 오른 성싶냐! 이 개새끼!"

치려고 덤비는데 권서방이 팔을 꽉 잡는다.

"이 사람이 왜이래? 안하던 짓을 하는구먼."

"놔요!"

권서방을 뿌리치려 하자 박서방은 줄을 던지고 일어섰다.

"이놈아 정신 차려!"

소리를 지른다.

"뭣이 어째?"

"노상 몸이 성할 줄 아냐? 피래미라도 열 마리 잡으면 중고기야! 되지도 않을 고래 잡을 생각만 하구서, 판판 생일은 굶고 넘기면서 생일 잘 먹을 생각만 하고 이틀 굶는 놈이 바로 네놈이다."

"굶거나 말거나 웬 참견이야! 네놈 참견을 왜 내가 받누. 오사죽음할 놈 같으니라구."

"다 친구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화낼 것 없네. 자아 앉으라구. 앉으라니까"

권서방은 억지로 홍서방을 눌러 앉히려 한다. 못 이긴 척 물러서며 홍서방을 길을 행해 침을 뱉는다.

"더러워서. 되지 못한 것이 사람 괄시하는구먼."

한결 누그러진다.

"옛말에도 영에서 매 맞고 집에 와서 계집 친대더라."

"네놈이 계집이야! 계집이냐구! 하기야 쓴물 단물 다 빠진 늙은 쥐새끼 같은 놈이니까 계집보다 나을 것이 없지."

욕설을 하면서 홍서방은 계면쩍게 웃는다. 웃는 얼굴을 힐끗 쳐다본 박서방 던진 줄을 찾아 일자리에 앉으면서

"내가 네놈 계잡 같으면 벌써 옛날에 쓸모없는 그놈의 연장 뽑아 버렸을게야."

". 계집같이 입만 살아서."

"제수씨 물이 눅어 그렇지."

권서방이 껄걸 소리 내어 웃는다.

"닭싸움이군. 그런데 싸움이 끝나면은 그 왜 화해주란 거 있잖은가? 듣자 하니 홍서방 돈 좀 잡은 모양인데 이럴 때 인심 쓰는 게야."

", 그야..."

풀이 죽어 우물거리더니 무슨 생각이 났던지 벌죽 웃는다.

"허허어 참, 형님두 하루만 기다리슈, 내 떡 벌어지게, 예 일류 요리 집에서 기생 불러다놓고 떡 벌어지게 한턱하겠소."

"에키! , 이 능구렝이야. 곧 죽어도 돈 없단 소린 못하는군. 그나저나 세월은 가고 동지섣달 단대목같이 저승길은 다가오는데 아직도 끼니 걱정이라, 이거 이래가지고 정말 안 되겠는걸?"

자탄하며 거리를 내다보던 권서방

"여보게들, 저기 안깐이 온다."

홍서방과 일하던 박서방이 동시에 거리 쪽을 내다본다.

"용정 사람들 노망한 게야. 저렇게 당당한 신살 보고 안깐이라니, 허허어허..."

권서방은 맥빠진 웃음을 웃는다. 거리에는 배가 나와서 그렇지 당당한 초로의 신사 한 사람이 개화장이란 것을 짚고, 뽐낸 몸짓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중절모자를 눌러쓰고 회색 춘추 코트를 입고 코밑의 소위 카이젤 수염이란 게 엄숙하다. 시천교의 간부며 열렬한 친일파 남비산이란 사람이다. 이때 어디선지 왜병이 탄 말 한 필이 질풍같이 달려왔다. 남비산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가는데, 순간 남비산의 몸이 기운다. 길 위에 나자빠지는가 싶더니 용케, 나온 배 덕을 보았는지 몸의 균형을 잡는데 얼굴은 홍당무, 번쩍 쳐들었던 손의 개화장이 그냥 허공에 떠 있다. 그 모습은 개화장을 든 채 만세를 부르는 꼴이다.

"으하하핫...으하하핫..."

신전에 앉은 세 사나이 입에서 동시에 폭소가 터진다. 남비산은 울 듯이 입을 비죽거리다가 팔을 내리고 개화장으로 땅을 짚으며 눈알을 굴린다.

"으흠..."

큰기침을 한다.

"으하핫핫... 하핫핫..."

세 사내는 다시 목청을 합쳐서 웃어제친다.

"고얀놈들!"

남비산은 개화장으로 삿대질을 하다가 종종걸음으로 가버린다.

"아이구 배야! 으하하핫. 아이구 배꼽 터지겠네."

남비산을 왜 하필이면 안깐이라 하느냐, 남비는 왜말로 나베요, 산은, 정확한 발음으로 상이지만 씨나 혹은 님, 그러니까 남비산은 남비님 왜말로 아낙을 부엌데기로 낮추어 말한 속어다. 그러니까 이곳 말로 안깐이 되는 셈인데 그런 별명으로 불리어지는 남비산이 용정 주민들에게 미움과 경멸의 대상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우리네 홀쭉 들어간 이 배가 웃음 때문에 지금 터질 지경이지만, 그놈의 뚱뚱이배는 보통 조화를 부리는 게 아니라구. 으허헛헛핫핫..."

박서방이 또 웃어젖힌다.

"어떻게?"

권서방이 묻는다. 박서방은 줄을 든 채 일어섰다.

"이렇게 배를 쑥 내밀고, 개화장이 도리깨질을 하며 걷다가..."

"아아, 그거 틀렸다. 이렇게 이렇게..."

좁은 점방 안에서 이번에는 홍서방이 배를 쑥 내밀고 개화장 흔들어대는 시늉을 한다.

"아이구 배야! 아이구"

하며 권서방이 웃는다.

"그러다가 왜놈 순사만 얼씬했다 싶으면 그눔의 배 간데 온데가 없어진단 말슴이야. 왜말도 못하는 주제 대가리는 연신 떡방아를 찡어대고..."

"실속이 없는 게지. 진짜 놈들은 엎어치고 메치면서 속 차리고 협조하고, 저눔의 개화장은 말짱 헛거야."

권서방 말에 홍서방이

"도대체 그놈의 개화장이란 뭣인고?"

"뭣이긴, 개화장이지."

"허허 개화장을 뉘 몰라서?"

칠 듯이 으르렁거리더니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 홍서방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아? 개화장이고 개뿔이고 다같은 막대긴데 그러니까 지팽이다 그거 아니겠어? 안 그래? 내가 이상히 여기는 것은 사대육부 멀쩡한 놈이 먼길 가는 것도 아닌 터에 그걸 휘두르고 다닌다 그거야. 지팽이라는 것은, 본시 눈 어두운 사람, 늙어서 다리에 힘 빠진 사람들이 짚는 게야. 또 있지. 수백 리 먼길 가는 사람, 험한 산길 가는 사람이 그걸 들고 다닌다 그 말씀이야. 그리고 동냥 얻으려 밤낮 쏘다녀야 하는 중놈이 드는 거구, 아이고대고, 빈 창자 움켜쥐며 곡을 해야 하는 상주, 그러니까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인데 모자 쓰고 양복 입고, 구두 신은 놈들 엎어지면 코 닿는 곳엘 가도 개화장이라. 모자 쓰고 양복 입고 구두 신은 양놈들은, 그러면 모두 양기 부족이다 그런 얘기가 되지 않겠어?"

"지랄 같은 소리."

"그 말은 맞네. 지팽이라는 건 대체로 장님이나 늙은네 거지들이 드는 거니."

권서방이 홍서방 말에 동의하고 박서방은 연장들을 밀어붙이며 일어선다.

"나 잠시 나갔다 올 테니 점방 좀 보라고."

접은 등을 펴면서 나간다.

권서방과 홍서방은 하던 얘기가 뚝 잘린 기분이다. 웃음과 객담 뒤에 오는 허무와 절망 같은 것이 두 사람의 가슴을 적신다. 울어도 시원찮을 텐데 뭐가 좋아서... 두 사람은 다같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형님."

"."

"형님은 살기가 어떻습니까."

"나앉은 거지가 도신세 걱정하누만."

"그렇게 되는구먼요."

"하기야 피장파장, 우리 같은 어정개비가 큰일이라..."

"듣자니까 길서상회댁에 마차가 있다는데..."

"짐마차?"

"그건 전부터 있었던 거구, 내가 용정 떠나기 전에 마차 한번 끌어보지 않겠느냐, 말이 있었지요. 그걸 마다하고 떠났는데 이번에 오니까 그댁 식구들이 타고 다니는 마차가..."

"그거라면 끌어보겠다 그 말인 게로군."

"내가 차마 찾아갈 순 없고 공노인이 계신다면..."

"그 늙은인 말도 말어. 함흥차사야. 그 늙은이 기다렸다간 목 뿌러진다."

"..."

"헛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길서상회 그 댁 조선으로 돌아간다는 얘기도 있어. 창고 뒤의 공지를 팔려고 내놨다는 것은 확실한... 그래서 나도 공노인을 일각이 여삼추라 기다리고 있는 판이지."

"그래요?... 용정바닥의 돈 싹 쓸려가겠소. 땅이다 집이다 팔고 가면은... 그래서 공노인 조선 출입이 잦구먼요."

"아마..."

"오나가나 돈 있는 사람이야 무슨 걱정이겠소."

"하여간에 되는 놈은 엎어져도 금가락지가 코에 걸리니까. 그 집은 이번 전쟁통에 무지무지하게 또 벌었지."

"어떻게요?"

"그 집에서 두류를 많이 취급하긴 옛날부턴데 생각해보면 눈이 밝고 꾀가 많았던 게지. 허기야 밑천이 든든하니까 그 짓도 했겠지만. 다른 곡물에 비하여 아무래도 두류는 수량이 적다 그거야. 그걸 몽땅 사서 혼자 차지... 남이 안 가진 물건 값이야 마음대로 아니겠어? 헌데 이번 난리통에 어찌 되었는고 하니, 강낭콩 완두콩 한 섬이 많아야 칠팔 원... 그게 글쎄 이십오륙 원에서 삼십 원까지 세 배 네 배로 치솟았거든. 하참! 그러니 그 장사가 어찌 됐겠어? 갈구리로 마구 돈을 거둘 수밖에. 강낭콩 완두콩은 코쟁이들이 좋아 먹는 거라나? 멀리 미국 영국으로 나간다는 게야. 하여간에 되는 사람은 엎어져도 코 끝에 금가락지가 걸린다니까."

"구만리 밖의 얘기 들으나마나..."

"공노인이 돌아오면 내놨다는 땅이나, 그것만 흥정 붙이면 그럭저럭 겨울은 넘기겠는데 글쎄..."

"공노인은 번질나게 조선을 드나들면 무슨 부가 있소?"

"그 늙은이야 뭐 미쳤지 미쳐. 요즘에 아주 유식해져서 에헴! 자고로 사람이란 어쩌고저쩌고 천년 묵은 여우가 다 돼간다."

"홀몸만 같애도 제에기이, 여기 올 것도 없이 아주 멀리 날라 버리는 건데."

"입 하나 더 보탠 거지. 자네가 떠돌아 다니는 새 식구들 굶어죽진 않았어. 사는 거야 기막혔지만."

"그건 빈말이 아니오."

두 사내는 우두커니 서로 바라본다. 뾰족한 수가 없다. 한 해, 두 해 책장 넘기듯 쉽게 가버리고 설마 설마 하며 보낸 세월 배불리 먹은 일 별로 없고 일 안 하며 놀아본 것도 아니지만 이들 눈앞에는 황혼의 서리가 내리고 있는 것이다. 길서상회 그 집을 지을 때만 해도 이들은 퍽이나 낙천가들이었다. 어설픈 도방 출신, 땅에도 사람에게도 매이기 싫어한 기질 탓으로 여름 한철 노래 부르지 않았건만 겨울 메뚜기 신셀 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덩치는 큰 것이 오히려 더 을씨년스럽다. 권서방이 아침에 집을 나올 때

"이보우 돈 있으면 몇 닢 주옵게나. 이불, 솜이 돌뎅이 같아서리 타오Ÿ?앙이 되었겠음. 겨울으 어찌 날까 심란하답매."

젊은 마누라가 뒤통수에다 대고 말했다. 아저씨한테 이득이 되는 일인데 왜 그리 화를 내죠? 송애가 던진 말이 울린다. 귓가에서 자꾸만 울린다. 홍서방은 혼자 주절거리고 있었다.

"연해주에 가서 고깃배를 타보았는데 안 되겠더군. 물이 무서워서, 도무지 물이 무서워서 꼼짝할 수가 있어야 말이지. 배라곤 나룻배 말곤 타본 일이 없었거든요. 처음부터 늙었다고 하는 것을... 별수 있어요? 미역국이지. 몇 해 전에 용정서 함께 막일을 하던 막둥이놈, 그놈도 배 타는 게 어설퍼서 쩔쩔매는걸... 그래도 젊은 놈이니, 이제 우린 해먹을 것이 없어."

우리라고 했으나 권서방은 잠자코 있었다. 자긴들 거간 아니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이제 제법 설렁해지는군."

박서방이 술병을 들고 들어온다.

"그게 뭐야?"

"보면 몰라?"

"술 들었냐? 아니면 맹물이야?"

"술이다! 네놈이 화해술 안 사오니 내가 사왔다 왜?"

"술도 못 처먹으면서... 되놈이 맹물 부어준 건 아닌지 모르겠네."

중얼거리듯 그러나 홍서방 눈에 눈물이 핑 돈다. 점심에 먹고 남은 김치와 풋고추졸임을 꺼내놓고 술잔으론 밥그릇 뚜껑에 물대접을 내어놓는다.

"형님, 우리 듭시다..."

두 사내는 엉거주춤 등을 꾸부리고서 찌꺼기 같은 값싼 술을 허겁지겁 마신다.

"지금 오면서 공노인댁 양딸로 있던 그앨 또 만났구먼."

"뭐라구 해?"

권서방은 아까와는 사뭇 달랐다. 아저씨한테 이득이 되는 일인데 하던 말이 단비같이 마음바닥에 스며들고 있었다.

"뭐라 하긴요. 어떤 사내하고 함께 가는데 그애도 영 온당찮어. 이마빡의 제비초리 하고선 사내 몇 잡아먹을걸."

"사내가 뻐드렁니에 돼지상 아니던가?"

"제법 곱상하게 생겼던데? 뻐드렁니에 돼지상이랄 것 같으면 왜 그..."

"이상한 놈이었지. 송애가 객줏집에서 나간 것도 그놈 때문인 모양인데..."

하면서도 여전히 권서방 귀에는 아저씨한테 이득이 되는 일인데, 그 말이 맴을 돈다. 홍서방은 그들 대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형님 술 안 드시겠소?"

"들지."

 

 

4. 예감

마차가 있었지만 가까운 거리였으므로 서희는 인력거를 타고 집을 떠났다.

'마음이 왜 이리 소란스러운지 모를 일이야.'

서희는 눈을 감는다. 뭉게구름같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정체 모를 근심은 벌써 달포 가까이 서희를 어지럽혀온 터이긴 했다. 실상 정체를 전혀 모른다 할 수만도 없는 근심인 것이다.

'서두는 게야.'

얄팍한 입술을 굳게 다무는 서희의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마음이 그럴 때는 서둘러야 한다는 것, 보다 결연히 단안을 내려야 한다는 것, 이미 내디딘 걸음이 비틀거려서는 안 될 것이며... 서희에게는 모든 일이 뜻대로 어김없이 아니 예상 이상으로 된 것이 사실이다. 다만 마무리가 남아 있을 뿐, 강남으로 가는 제비처럼 날면 되는 것이다. 자식 둘을 앞세우고 날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리 허한가. 때때로 마음 밑바닥에서 거슬러 오르는 설렁한 냉바람은 무슨 까닭인가. 전신을 떨 게 하는 춥고 적막한 바람 앞에 그냥 주저앉아 버리고 싶어지는 그 까닭을 서희가 왜 모르겠는가. 내내 외면해 왔었다. 보이지 않게 가로질러진 벽을 서희는 무던히도 둔하게 느끼지 않는 듯 외면해 왔었다. 그런데 그것을 이제는 외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과연 길상은 처자와 더불어 조선으로 돌아갈 것인가. 인력거에 흔들리면서 서희는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길상은 조선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내의 경우는 그렇다 치고 두 자식의 끈질긴 핏줄을 설마 외면하기야 할라구. 다짐했으나 대단히 자신 없는 일이다.

'어쩔 수 없는 일, 나는 가야 해. 돌아간다는 것은 이미 정해진 일이 아니냐. 십 년 동안 이를 갈았다. 아니 십오 년 동안 이를 갈았다. 원한에 맺힌 세월을, 원한대로였다면,'

원한대로였다면 밤낮으로 이를 갈아 이빨 하나 남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남지 않았을 것이다.

'돌아간다! 돌아가서 조가놈! 홍가 그 계집! 마지막 살에 붙인 내의까지 벗게 할 테다! 내 소망은 바로 눈앞에 와 있어. 내 주저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서희의 양볼이 파아랗게 질린다. 증오와 저주의 바다다. 조준구와 홍씨의 두 물기둥이 솟아오른다. 연속적으로 최참판댁을 엄습해 왔었던 불운의 씨앗들이 두 물기둥 둘레에서 맴을 돈다.

'어찌 너희들이 넘보았느냐. 어찌 너희들이 강탈하였느냐. 어찌 너희들이 감히 오욕을 끼얹을 수 있었더란 말이냐. 나는 돌아간다! 그이가 돌아가지 않는대도 나는 돌아간다! 그것은 애초부터 말없는 약속이 아니었더냐? 그것은 엄연한 약속이다. 이제 내 원한은 그이의 원한이 아니며 그이의 돌아갈 이유도 아닌 것을 안다. ? ? 왜 내 원한이 그이 원한이 아니란 말이냐! 남이니까, 내 혈육이 아니니까.'

서희 심중에 경풍이 인다. 자기 뜻한 대로 자기 소망대로, 그것이 되지 않을 때 이는 어릴 적의 그 경풍이다. 양볼은 더욱더 푸르게 질린다.

'내 인내는 그이를 위한 인내가 아니었다.'

숨을 돌리듯 서희는 자신의 현장으로 돌아간다. 무조건이 있을 수 없는. 세월에서 터득한 판단이 그의 경풍을 잠재운 것이다. 판단. 서희의 소망과 서희의 가진 것 그 모든 것을 잃지 않는 이상 길상은 길상 자신을 잃을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다. 양반도 아니요 상민도 될 수 없었던 김길상, 남편도 하인도 될 수 없었던 김길상, 부자도 빈자도 될 수 없었던 김길상, 애국자도 반역자도 될 수 없었던, 왜 김길상은 허공에 떠버렸는가. 그것은 서희의 가진 것과 서희의 소망의 무게 탓이다. 시초, 치열한 소망과 기득권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관 때문에 휘청거렸지만 최서희는 기왕의 자리에서 떠나지는 아니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무게에 최서희는 눌리어 떠나질 못했다. 그 무게는 소망과 가치관의 약화와 반비례하여 가중되어왔다. 이제 무게는 완벽하다. 그렇다. 떠나는 일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마상에 상전 아씨를 싣고 말고삐를 잡으며 가는 하인이 아니고서는 돌아가지 못할 길상의 문제가 남아 있다. 서희에게 그것은 처절하고 절대절명의 판단이다. 아이 둘이 아비의 옷깃을 잡아주리니 그 희망에 기대를 걸지 못하는 것도 자신이 애소하지 못하는 것도 그 판단 때문이다. 파아랗게 질렸던 서희 얼굴에 핏기가 돌아오고 평정으로 돌아간다. 무릎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별안간 인력거가 전후로 강하게 흔들렸다.

"무시기! 어째 이럽매!"

차부 천서방이 고함을 질렀다.

"아아니! 뭣이 어째?"

앙칼진 여자 목소리가 뒤쫓아 울렸다.

"어째 가는 인력거 앞에 달기드는 기야!"

"달기들어? 이게 성한 사람이야? 가는 사람을 디려받고서 무슨 개수작이지?"

"앙이 이 간나아! 사람으 잡아묵는당이? 꿈꾸다 나왔니야!"

"간나아랑이! 어디다 대구 함부르, 이놈아! 눈깔이 멀었냐! 네놈 눈에 내가 간나아로 보이니?"

여자가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려는 기색이다.

"이거, 이거! 하 참, 기가 차서 말으 못하겠다이."

여자 팔을 뿌리치는 모양이다.

"아 모두들 보았잲앴음? 이 안깐이 덤벼들었지비?"

구경꾼이 모여든 것이다. 와글와글 소리가 요란하다.

"손이야 발이야 빌어도 내 가만히 안 둘 것인데 아아, 글쎄 이게 뒤질려고 이래? ? 가는 사람을 디려받아 놓고 뭐 어째? !

다리몽댕이 성할 줄 아냐?"

"이거 참말입지, 마른하늘 울잴까?"

"천서방, 시간 없네."

인력거 안에서 서희가 말했다.

"옛꼬망. 내 니르 죽이주잲은 거 고맙기 생각하랑이."

천서방이 인력거 손잡이를 드는데

"곱게 갈 줄 아냐? 사람을 치어놓고 욕설까지, 가긴 어디루 가아!"

인력거가 또 흔들린다.

"이 쌍간나아! 비키지 못하니야!"

"쌍간나아? 어느 놈 집구석의 종놈인지 모르겠다만 자손 대대로 종질할 이놈아!"

"가는 차에 뛰어들고서리 미친 지랄 혼자 한답매."

"천서방, 안 가고 뭘 하는 게야."

"이 간나가 못 가게서리 막지 앙이합매까?"

비로소 서희는 인력거의 가리개를 젖힌다. 예상한 대로 악쓰는 여자는 송애였다.

"거기 좀 비켜줄 수 없겠느냐?"

"뭐라구요?"

송애 입가에 경련 같은 웃음이 떠오른다.

"비켜줄 수 없겠느냐 했느니라."

똑바로 송애를 쳐다본다. 구경꾼들의 눈이 일제히 서희에게 쏠린다. 투명한 얼음 조각이다. 푸르고 아름다운 비수의 날이다. 그리고 고귀한 학 한 마리. 구경꾼들은 다음 벌어질 광경에 숨을 죽이며 지켜본다. 송애는 잠시 비틀거리듯, 가까스로 중심을 잡는다.

"비켜줄 수 없다면요? 어쩌시겠어요 마님."

"..."

"타고 다니는 양반만 사람이지 걸어 다니는 우리네 상것들은 사람이 아니다. 설마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마님."

구경꾼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거기서는 친일파로 명이 나신 모양인데 이쪽에도 고래 심줄만큼이나 튼튼한 뒷줄이 있답니다. 하늘 밑에 머리 둔 사람이 어디 당신네들뿐인 줄 아셨소?"

계속 지키는 서희 침묵이 송애에겐 기분 나쁘다.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사람을 치고 욕설까지 하고 그냥 보낼 순 없어요. 나두 왜헌병 나으리의 여편네니까요."

"무시기, 저 안깐 왜헌병 여편네라?"

"지금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았음?"

"저게 객줏집 양딸 앙입매까?"

구경꾼들 속에서 숙덕거리는 소리.

"송애야! 너 그러면 못쓴다아?"

드디어 구경꾼 속에서 큰소리 하나가 튀어 올랐다.

"모르는 처지도 아닌데 그럴 수 있냐? 아까부터 내 보고 있었다. 부딪친 건 너 쪽이란 말이야. 일부러 찍자를 부리자 하는 건데 아서, 아서. 사람이 그럼 못써 못쓴단 말이야."

"뭐라구요?"

송애가 인력거 손잡이를 움켜쥔 채 돌아본다. 거간 권서방이다.

"그렇답매! 증거가 있다이! 본 사람이 있는 기야!"

살았다 싶었던지 천서방이 소리 지르고 송애도 소리 지른다.

"남의 일 참견 말아요!"

"사람 변할라니 잠시, 너도 이젠 막돼먹었구나, 야아!"

"창자에서 소리가 꼬갈꼬갈 나는 가난뱅이 살판나겠네? 돈푼이나 좋이 받겠구먼."

하다가 그쪽은 내버려두고

"아무튼 그냥은 못 가! 땅에 엎디어 빌어도, 뭐 쌍간나아라구? 이 새끼야! 끌고 다니면 무법천지냐? 경찰서에 가서, 거기 가서 따지자!"

경찰서에 가자는 것은 진심이 아니었으며 애를 먹이자는 것이었는데 인력거에서 서희가 내려섰다. 수군거리던 구경꾼들이 잠잠해진다. 옥색 자미사의 춘추 두루마기, 미색 장갑을 끼었고 순백색 치맛자락이 물결친다. 고독과 고뇌와 멍에를 쓴 불행한 여인 천부의 미모는 과연 자기 자신을 위한 행복은 아닐 성싶다. 자신의 미모로 하여금 행복을 느끼는 가엾은 천치가 아니면은 그 행복이 환상일 따름이요 기만일 뿐이다. 여자의 미모는 타인의 행복이다. 행복하리라 오해하는 뭇 사람들에게 바수어서 나누어주는, 가령 지금의 이런 경우다. 서희에게 집중되는 뭇 시선들은 바수어서 나누어 가진 일순의 작은 행복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호기심과 흥미와 동경과, 자아, 그러면은 다음 어떠한 광경이 벌어져서 구경꾼들을 흡족하게 해줄 것인가. 미인은 노상 무대 위의 희극배우요 익살꾼은 무대 위의 광대다.

"타지."

나직한 음성이다.

"타는 게야."

송애는 당황하고 구경꾼들은 의아해한다.

"마침 그쪽, 영사관으로 가는 길이니 타고 가는 게야. 왜헌병 부인께서 걸어가 되겠느냐?"

송애는 풀이 콱 죽으면서 낭패한 기색을 드러낸다.

"내가 왜 타요?"

뒷걸음질을 친다.

"내 발 있으니 걸어가겠소."

인력거 손잡이를 슬그머니 놓는다.

"하 참, 아니꼬와서..."

길가에 침을 뱉고,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응? 여보세요! 권간지 거간인지 하는 아저씨!"

하고 몸의 방향을 바꾸어버린다. 권서방은 어처구니가 없었던지 허허허 하고 웃는다.

"되게 걸렸답매."

누군가의 말에 구경꾼들도 웃는다.

"마님. 타시옵게나."

해서 인력거는 떠나고, 송애는 권서방에게 시비를 건다. 그것은 건성이며 일종의 무안수세인데,

"막돼먹었다구? 내가 막돼먹어선 누구 할애빌 붙어먹었나?"

오 년 간의 험악했던 생활을 들내어놓는다.

"온당한 여자가 길가에서 가는 사람을 잡고 시빌 해?"

권서방은 시비 상대가 안 되는 것을 깨닫고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럼, 그럼. 시비하게 생겼지비. 헌병나리 가물댁 아입매?"

"밟혀죽어도 말 못한단 말이요!"

"무시레, 인력거 떡 타고시리 가Ÿ?"

"아암! 친일파보다 헌병나리 가물댁이 높다이. 송사하면 어길 것입매."

여기저기서 야유가 날아온다. 그러나 송애는 얼굴도 붉히지 않는다.

"비켜요, 비켜!"

구경꾼들을 헤치고 송애는 나간다. 뒤통술 치듯이 날아오는 웃음 소리.

"뱁새가 황새 따라가자면 가랑이가 찢어지지, 찢어져!"

"되게 영광이겠궁, 왜헌병 가물댁이랑이. 허허헛, 허허헛헛..."

망신을 주기 위한 것이 도리어 자기쪽에서 당하고 말았다. 타고 다니는 양반만 사람이지 걸어 다니는 우리네 상것들은 사람 아니냐 까지는 좋았는데 일본의 헌병 나으리 여편네에서 들통이 난 것이다. 울림장을 영 잘못 놓은 것이다. 왜헌병 여편네라는 말이 전혀 근거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실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오 년 전에 객줏집을 떠난 송애는 김두수를 따라 봉천까지 갔었다. 그곳에서 김두수는 귀찮은 짐짝을 버리듯 송애를 떨어뜨리고 떠났는데 떠나면서 두칠이라는 사내를 면대시켜주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두칠이 동생이 송앨 돌봐줄 테니까, 알았어?"

그러고는 너털웃음을 웃었다. 송애는 지금도 김두수의 그 웃음소리만은 기억하고 있다. 두칠이가 처음 송애를 데려간 곳은 카페였다. 송애는 많이 울었다. 그러나 김두수가 떠날 때 이미 버림받은 것을 예감하였고 자포자기 상태에 있었던 송애는 한편 카페라는 화려하고 새로운 분위기에 호기심이 없지도 않았다. 봉천은 용정에 비하여 말할 수 없이 큰 도시였으며 한때 여진의 서울이었던만큼 신구 건물이 그득히 들어찼고 그 도시를 수없이 오가는 행인 속에 잘나고 멋진 여자들도 많았다. 처음부터 송애의 가슴은 설레이고 있었다. 그러나 울었던 것이다. 얼굴이 반반했던 송애는 카페 여급으로 출발하여 전전한 곳은 다 그렇고 그런 장소였는데, 그렇고 그런 장소에서의 오 년은 수치심 없는, 자포자기한 세상을 우습게 보는, 뻔뻔스럽고 거칠고 배짱 하나 대단하여 교활하고 가학적인 한 여자를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사내라면 모두 같은 개, 그 개의 본성을 이용하여 여자는 적당히 울궈내면 된다는 신조도 터득하기에 이른 것이다. 다소의 돈을 모으긴 했다. 최근에 와서 일본 헌병 하나를 알고 지내게 되었는데 그자가 송애에게 반하기는 반한 모양인지 술집에는 나가지 못하게 하고 생활비랍시고 돈을 갖다주곤 했으나 결혼한 것도 아니며 결혼의 약속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술집에 나가지 않고 빈둥빈둥 놀 게 된 송애는 사내가 오지 않는 밤이면 자연 이일 저일 생각이 많아지기도 했는데,

'집을 하나 살까? 이 돈 가지구? 어림도 없다. 이 봉천바닥에 이 돈 가지고 살 집이 어디 있어. 그 새끼는 걷어차고 어디 중국놈 하나 잡아볼까?'

돌아누워 보지만 하릴없이 낮잠만 자다 보니 밤은 길고 지루하기만 했다.

'아니야. 가만 있자... 용정 같으면? 살 수 있을 게야. 그러면 내가 용정에 간단 말이야? 아니지. 사서 세를 내면 되지 않겠어? 돈 더 벌어서 그것 팔아 보태고 하면은 큰 집 마련이 어려울 것 없지. 그리고 요리집을 차리는 거야. 내 보란 듯이, 송애는 죽지 않았다고.'

공상은 공상을 낳아 드디어 결론을 내린 송애는 마음이 달떴다. 있는 대로 다 끼고 차고 걸치고서 용정에 나타났던 것이다.

'지랄 같은 말을 했지. 최가 계집이 친일파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영사관에 볼일이 있어 가는 거야 빈말은 아닐 것이고 필시 웃대가리나 상대하지 피래미 같은 거야, 그래 내가 거기 갔더라면 내 꼴이 머가 되누. 나 땜에 그 새끼도 혼짝날 건데, !'

하늘과 땅 사이만큼이나 아득하다. 아득할 뿐만 아니라 최서희에게 보복하리라는 계획도 없었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순간적으로 심술이 났던 것이다. 저기 길서상회 인력거 간다는 행인의 말에 어디 한번 곯려주자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인력거 안의 사람이 길상인지 서흰지, 어느쪽이거니 생각하고서. 왜헌병의 여편네라 한 것도 순간적인 착오였다. 그러면 일본 헌병의 여편네란 어떤 것이냐. 제일 밑바닥 색주가보다 못한 것이 일본인하고 사는 조선 여자다. 그것도 지극히 드문 일이지만.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구경꾼도 없는 호젓한 길을 거니는 송애, 아무리 수치심을 잃고 배짱 하나 두둑해졌다지만 다른 곳 아닌 용정에서 그것도 긁어 부스럼, 처량하고 심란해질 수밖에 없다.

'모르겠다. 웃으려면 웃으래지. 조롱하고 욕하고, 그 이상 지들이 뭘 해? 욕이 살을 뜯고 들어가나? 이미 난 들내놓은 계집이야. 싯누런 상판들 하구서 구경이랍시고 모여든 꼴이라니, 막돼먹었건 온당찮건 그래도 난 네놈들보담은 배가 부르단 말이야. 웃어? 이 새끼들아! 웃고 싶은 건 나야, 나아! 지게 지고 서 있던 놈, 보퉁이 이고 서 있던 년들, 그래 인력거 타고 가는 년은 친일을 해도 좋고 걸어 다니는 나 같은 년은 왜놈 계집년이니 죽일 년이다 그거지? ! 웃기지 마라. 인력거 타고 다니는 년은 갖다 바치지만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나는 이 나는 왜놈을 뺏겨먹는다 이거야. 병신같이 늙은 놈! 햇볕에 쭈구리고 앉아서 어느 놈이 술이나 안사주는가, 어디 흥정거리나 없는가 하고 궁리나 할 일이지 주제넘게 뭐 그러면 못쓴다구? 못쓰기는 옛날 옛적에 못쓰게 됐다! 못쓰게 안 됐으면 지가 밥 먹여주어? 옷 입혀주어? !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사람 한평생, 에라 모르겠다. 수 틀리면 이곳에서 날라버리면 그만, 내 답답할 것 한 푼 없다구. 이 세상에 그것 달린 놈이 있는 한 밥 먹을 수 있고 옷 입을 수 있는 내 신세가 좀 좋으냐! ! 비단옷에 잇밥 먹기론 최가 계집이나 나나 마찬가지란 말이야. 꿀릴 게 뭐 있누? 좋아하네 죽네 사네 그거 다 말짱, 말짱, 헛거라구.'

속으로 쫑알거려보는 것이지만 심란하기론 마찬가지다. 여관 있는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명색뿐인 여관, 방 한구석에 뎅그렇게 놓인 가방 하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수염 자국이 까실까실한 왜헌병 나까지의 체취가 되살아난다. 여관방에 나까지라도 기다리고 있었으면 싶어진다. 봉천에 있는 자가 올 리도 만무하건만, 악질로 소문이 나 있지만 여자에겐 숙맥인 나까지였다. 구석진 여관방의 벌거숭이 전등이 생각난다. 그 벌거숭이 전등 밑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나까지를 상상해본다. 가슴에 쓰러져서 한바탕 울어버릴까? 아니야 실컷 아양을 떨고 즐거운 밤을 보내는 거야.

'미친년! 나까지 그 새끼하곤 머리카락 파뿌리 되도록 살 것 같애? 미친년! 그런 것 기대했던 것은 옛날 옛적 고릿적 얘기야. 왜놈이고 되놈이고, 아무라도 좋다 이거야. 살다가 송장 되면 버려주는 놈 있다면 말이야. 김두수! 그 죽일 놈! 어디서 뒤졌나? 개처럼 뒤진 것 아냐? 뒤져도 그놈이 옳은 죽음은 못했을 거야. 악독한 놈! 아마 그놈이 윤이병을 죽였을 게야. 김가놈이 윤가놈을 죽였다면? 흐흐흐... 그건 썩 잘한 일이지. 그랬다면 말이야. 아암, 잘한 일이구말구, 그 쥐새끼같은 놈 땜에 나도 김두수한테 당한 게야. 다 뒈져라! 다 뒈져! 김길상이 그 개새끼! 모두 개새끼다! 사내놈은 왜놈 나까지놈도 개새끼야. 모두 다아, 세상의 사내놈들 다아!'

이름도 기억에 없는 사내들 얼굴이 눈앞에 풀쑥 솟았다간 자맥질하듯 사라지고 솟곤 한다.

'미친년, 여기다 꼬딱지만한 집은 사놔 뭘 하누. 집이고 대궐이고 공연한 미친 지랄이지.'

송애는 얼굴을 숙이고 풀이 죽어서 여관에 들어선다. 이 무렵 서희는 여사집 내실에 와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용정촌에 거류하는 일본인 상류층 부인네들이 모임을 갖고 회식하는 날이다. 비공식적인 친목회라고나 할까. 막강한 국력을 업고 이곳에 와 있는 일본의 관공리와 거상의 부인네들, 든든한 존재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못하다. 적막하기로 말한다면 이들이다. 아무리 국력이 막강하다 하여도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용정에서 일본인 수효를 능가하는 조선인들의 사상은 배일 일변도, 일인을 백안시하기론 중국인도 마찬가지였다. 시시로 이는 정세의 불안과 유언비어의 범람,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원인이 있다. 숫자상으로 볼 때 간도 전역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칠백여 명, 그 반수인 삼백사오십 명이 용정에 있는데 남녀가 반반이다. 이 반수를 차지하는 여자들 대부분이 소위 작부, 창부 중에서도 아주 저질의 계집들이다. 여러 해 전 일본이 용정촌에다 임시 파출소를 설치하면서부터 관공서를 따라 어중이떠중이가 밀려들었을 때 이들을 겨냥하여 기생작부들이 몰려왔었고 가족을 동반하지 못한 일본인 관민들은 자연 이들에게 의존할 수박에 없었는데 그 천하고 음탕한 언동은 조선인들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후 임시 파출소가 없어지고 대신 영사관이 생기면서 일인들의 수가 줄어들었으나 자국인들의 유치 작전으로 여러 가지 토목 공사를 영사관이 일으켜 다시 일인들은 증가하여 오늘에 이르렀는데 역시 여자들의 대다수는 창부들이었다. 이런 사정 속에서 소수인 양갓집 부녀들의 외로움도 외로움이거니와 용정 땅의 주민들은 고의적이든 아니든 이들 양갓집 부녀들까지 비천한 창부로 대하는 일이 비일비재 하였다. 북극의 겨울은 길고 모든 것이 낯설은 풍물 속에 거의 밀폐되다시피한 몇몇의 부녀들이 모임을 갖는 것은 그럴 수 있는 일이긴 했다. 열 명이 못 되는 이들 회원 중 유일한 조선 여자가 서희였다. 회원 중에는 이미 이곳을 떠난 사람도 있었고, 용정에 있는 사람 중 두 명이 불참하여 다섯 명의 여자가 지금 차를 마시며 담소하고 있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서희는 이 모임에 참석한다. 이같은 공개적인 친일 행동은 서희의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조선총독부에서 파견된 헌병장교의 처는 영사부인과 마찬가지로 양복 차림의 젊은 여자다. 갸름한 얼굴에 코가 길었다. 또 한 여자는 이마가 좁고 살결은 희었으나 무턱이다 싶게 생겼는데 곡물과 잡화 무역을 하는 쯔무라 양행의 안주인, 여자는 황매 빛깔에 연두빛의 잔무늬가 있는, 지리맨 바탕의 기모노 그리고 연갈색과 남색이 얽섞인 하오리를 걸쳐 입고 있었으며 상당히 세련되고 교양 있는 분위기를 가졌다. 이들 중에서 연장자인 듯 우중충한 회색 계통의 기모노 하오리에 남색 오비를 맨여자는 우편 국장 마누라였고.

"그렇게 해주어서 우리 여자들 입장에선 좋긴 좋지만요."

쯔무라 양행의 안주인은 까르르 웃고 나서 다시,

"조선 여자는 일본 남자하고 결혼하는 일이란 거의 없지 않아요?"

하고 말했다.

"그건 틀립니다아. 일본 남자하고 결혼 안 하는게 아니에요, 일본 남자가 조선 여자하군 안 하는 거지요."

코가 긴 헌병 장교의 처가 나무라듯 말했다.

"그럴까? 그러면 일본 여자는 조선 남자하고 결혼하는 사례가 더러 있던데, 그러고 보면 이거 불명예 아니유? 남자의 정조관이 여자보다 훨씬 높다 그 얘기가 되니 말예요. 호호홋..."

코 긴 여자 말이 막힌다. 그러나

", 그야 첩으론 데리고 사는 일이 흔히 있겠지요만 여자야 어디 첩을 거느리고 살 수 있나요?"

자기 한말이 우스웠던지 호호호오하고 웃는다.

"술집이나 유곽의 여자 얘기겠지요. 나는 양갓집 딸의 경우, 일본 남자와 결혼하는 일이란 거의 없지 않느냐는 거예요."

서희는 노상에서 행패를 부리던 송애 생각을 한다. 일본 헌병 나으리의 여편네라고 뽐내는 송애, 그 자리에서는 철저하게 묵살했으나 기분이 좋을 리는 없다. 그런데 또 이곳에 와서 송애 말과 관련 있는 얘기를 듣게 되니 이래저래 착잡하다.

"그거야 뭐 일본의 경우도 그렇지요. 양갓집 여자가 조선 남잘 따라 사는 건 아니지 않아요?"

"내가 듣기엔 그렇지 않아요. 조선 남자는 화류계의 여자를 처로 맞이하는 법은 절대로 없다는 거예요."

"아아니, 쯔무라상. 무슨 말 하는 거예요? 당신 일본 여잔데 그래 일본 여잘 그리 깎아내리기예요?"

"깎아내린다는 것보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있어요."

"어머, 알고 보니 쯔무라상 당신 조선인 편이구먼. 그것 좀 곤란한 얘기 아녜요? 차라리 아이누족 편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럴까?"

쯔무라 양행의 안주인은 실실 웃는다. 아이누족이란 일본에서 가장 이단시되고 혐오하는 일본 북방에 사는 종족이다. 서희는 그 모욕을 감내하고 앉아 있다.

"도시 그런 것에 관심한다는 게 우스워요."

"하여간 일본 여자의 경우가 비율이 높다... 그보다는 조선 여자의 비율이 높은 편이..."

중얼거리는데

"아아니 이분이, 집요하군요. 쯔무라상 당신 총독부에 보고서라도 내시겠어요, 아니면 그 문제 가지고 박사 논문이라도 쓰시겠어요?"

"박사 논문 안 될 것도 없지만..."

쯔무라 양행의 안주인은 깔깔거리고 웃다가 서희를 향해

"오꾸사마(부인)."

군계 속의 일학처럼 앉아 있던 서희

"."

"오꾸사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조선 여성의 입장에서..."

영사 마누라, 정확히 영사대리의 마누라는 아까부터 우편국장댁과 열심히 그들 집안 얘기를 하고 있었다. 서희는 웃고 만다.

"나는 이런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오꾸사마의 견핼 듣고 싶군요."

"글쎄요... 보호받는 사람의 심리 같은 것은 아무래도 적개감...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여자의 정조관 같은 것과는 관계가 없이?"

"글쎄요. 수치겠지요. 그보다 더한 수치는 없을 테니까."

"그러면 반대의 경우라면? 일본이 조선같은 처지라면요?"

"우리 나라에선 타민족에 대한 그런 역사가 없었으니까, 뭐라 말 할 수 없지요. 그러나 역시,"

"역시?"

"그럴 경우에도 수치로 생각하겠지요."

"양쪽의 경우 다아?"

"글쎄요. 내가 조선 여자 전부의 입장에서 말하긴 어렵지요. 그렇지만 옛날에 중국 왕족에게 시집가는 경우에도 그건 죽으라는 것보다 더한 것으로 여겼으니까."

"그야 이역만리 부모형젤 떠나서 가니까 그런 것 아니겠어요?"

"그러나 살아 이별은 죽음보담은 나은 게 상식 아니겠소? 임진왜란 때도 많은 조선 여자들은 그 수치심 때문에 자결을 했으니까요."

코 긴 여자 입에서 이때

"시다다까,"

"시다다까모노입니까?"

서희가 미소 지으면 말했을 때 여자는 낯을 붉힌다. '시다다까'라 할 적에는 강하다는 뜻이 되지만 '시다다까모노'라 할 것 같으면 여간내기가 아니라는 뜻이 된다. 그러니까 서로 예의를 지켜야 할 사람을 면전에 두고 할 말은 못 된다. 여자는 서희가 온유하게 웃으며 찔렀기 때문에 당황한 것이다. 사실 코 긴 여자는 모노라는 말까지 붙이려다 그만두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조를 지키는 것보다 상대가 이민족이란 점이 중요하다 그거로군요. 그렇담 자존심일까요? 우월감은 가졌을 리 없겠고..."

"피의 순수 때문인 겝니다. 듣자니까 일본서는 사촌끼리도 혼인을 한다지만 조선에서 사촌은 커녕 남이라도 성씨가 같으면 혼인 못하지요. 일본에 비하여 성씨도 얼마 되지 않는데도,"

"왜 내가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내 조카가 조도전대학 사학과에 다녀요. 수재지요. 그 아이 말이 일본인과 조선인은 혼인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피를 섞어서 조선인이 없어져야 한다는 거 아니겠어요? 중국은 워낙이 인구가 많아 어렵겠지만 조선쯤이야 가능한 일이라나요? 서양 역사에서 보면 알레기산다 대왕도 그 땅을 정복하면은 그 땅에서 반드시 제 나라 남녀를 데려가서 씨를 뿌렸다는 거예요."

이건 또 지독한 얘기다.

"그렇게 될까요? 통치는 받지만 한 민족이 말살이야 되겠어요?"

서희는 흥분도 감정도 없이 말했다. 연연한 연분홍 저고리의 순백색 치마, 볼을 쓸어보는 그의 흰 손에 심해 같은 비취 쌍가락지가 눈에 스민다. 코가 긴 여자는 차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

"그 말뜻은 나도 알겠지만 민족의 순수한 것을 따지자면 우리 일본같이 순수한 민족도 드물 거 아니겠어요? 왜냐하면은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사방이 바다예요, 해서 일찍이 외적이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거든요. 그런 순수한 나라도 조그마한 섬나라이지만 세계 도처에 식민지가 있고, 구태여 피 섞지 않아도 잘만 해나가지 않아요? 생각해보세요. 피부빛이 씨커먼 인도인하고 영국인이 피 섞겠어요?"

우편국장댁말고 모두 여학교는 나온 처지여서 일단은 유식하다.

"아무튼 정복을 당한 나라는 노예의 처지를 벗어날 순 없지요. 그 학생은 인도적 입장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보다 내 조카는 멀리 내다본 거 아닐까요?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학문하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불만이에요. 멀리보다 당장이 문제거든, 좀더 철저히 할 필요가 있어요. 도대체 우리가 지금 지배하는 처진가요? 이곳에서 조선인들이 판을 치고, 마치 우리가 지배당하는 꼴 아니에요? 반일분자는 가차 없이 색출해야 해요. 우환덩어리지 뭡니까?"

이때

"그만들 두어요. 여자들이 무슨, 정치적 얘긴 필요 없어."

영사부인이 서희의 기색을 살피며 말했다.

"이런 얘기라도 안 하면, 노가미상 가문 자랑을 들어야 하니까? 안 그래요? 오꾸사마."

쯔무라 양행 안주인 말에 모두 깔깔 웃는다.

"내가 무슨 자랑을 했다구..."

우편국장댁이 멋쩍게 웃는다.

"아 참! 사이상."

코가 긴 여자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오꾸사마가 아닌 사이상 하고 부른다.

"."

"조선 사람 욕해서 미안해요."

"패장은 말이 없지요."

태연스럽게 서희는 여자 눈을 본다.

"일전에 말예요, 나 누굴 만났는데 혹 아시는지 모르겠어요?"

"..."

"김두수라는 사람 아시죠?"

"네 알아요."

역시 태연자약이다.

"어떻게 아시지요?"

"만난 일은 없어요. 말로, 잘 알지요."

엄격해진 서희 눈빛이 여자를 당황하게 한다.

"글쎄, 좀 이상한 얘길 한 것 같았어요. 확실하진 않지만,"

"그래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구요."

이번에는 서릿발 같은 웃음이 지나간다. 여자는 더 이상 말을 못한다.

"혹 만나게 되면 전해주시겠습니까?"

"무슨?"

"내가 한번 만나잔다구요. 도움이 됐으면 싶지만 그 사람 부친에 대해 할 얘기도 있다구 그렇게 전해주십시오."

이 일본 여자 귀에는 그저 심상한 얘기로 들렸지만 그것은 김두수에게 무시무시한 협박인 것이다.

"전하지요. 회령에 자주 가니깐,"

"회령에 있나요?"

서희는 알면서 묻는다.

"그곳에서, 지금은 순사부장이에요."

"출세했군요."

"그 사람 처지로선 그렇지도 않나봐요. 자유롭게 일선에서 뛰고 싶은 모양이죠?"

돌아오는 인력거 속에서 서희는 나직하게 웃는다. 하하하하... 나직이 소리내어 웃는다.

'오늘은 송사리들이 꽤나 나를 번거롭게 했다.'

서희는 나직한 목소리로 다시 웃는다.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모서리가 다 깎여버린 능숙한 태도는 그 옛날의 윤씨부인을 연상케한다. 이날 밤 길상은 서희의 얼굴을 피하면서 말했다.

"나 내일 하얼빈에 가겠소."

"거긴 뭣하시려구요."

"상가를 한 번 둘러보구... 전부터 그러려니 했었는데,"

이번에는 서희 쪽에서 길상을 외면한다. 두 사람 사이에 굳게 뚜껑을 닫아놓고 지낸 일을 길상이 처음으로 건드린 것이다.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하는데 하얼빈의 상가를 둘러볼 필요는 없다. 억지라면 억지였고 나는 가는 것에 반대라는 의사 표시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서희가 느낀 것은 길상의 고민이다. 결정적인 일이라면 억지를 쓰지 않을 것이며 의사 표시 같은 것 할 사람이 아니다. 뜨거운 것이 서희 목에 치밀었다. 일종의 안도, 안도라고나 할까, 그러나 다음 순간 뜨거운 감정 속에 냉혹한 판단이 밀려든다.

'아니다. 고민이란 진작부터 있어왔던 것, 저이는 결정을 내리려고...'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말이 길상의 입에서 나왔다.

"송선생이 그곳에 와 있는 모양인데, 김생원 유품을 가져왔다는 얘기니까 가보기는 가보아야겠소."

"송선생이 이곳에는 왜 못 오십니까?"

"그쪽에 볼일이 있는 모양이오."

침묵이 계속된다. 서로의 얼굴은 가면같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가면 뒤에는 의지의 싸움이 불꽃을 튀긴다. 서희에게는 쓰러지려는 마음이 십분의 일, 그 십분의 일을 두려워하여 싸운다. 길상은 반반이다. 그러나 서희만큼 치열하지는 않다. 그에게는 반반 이외 방황이 있었다. 북국의 바람소리 말발굽 소리 그리고 숨 막히는 사진의 벌판이 바닥을 넓히고 있었다. 마음의 바닥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 서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오늘 이상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길상이 힐끗 쳐다본다.

"헌병 장교 이와자끼의 처가 김두수 얘기를 하더구먼요."

"어떻게?"

재빠른 반응이 나타난다.

"이상한 얘기를 하더라면서 얘기의 내용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뭐라 했소."

"한번 오라고, 부친 얘기도 있으니까 만나거든 그리 전하라 했습니다."

"잘했소."

길상은 빙그레 웃는다. 서희는 한숨을 깨물고

"저문데 주무시지요."

"그럽시다."

 

 

5. 하얼빈행

작은 창문에 쇠덧문이 달린 벽돌집들, 벽돌 빛깔도 그렇고 쇠덧문의 녹슨 빛깔도 그렇고 우중충한 길 하며 암울한 것, 음산한 분위기다. 겨우 마차 정도는 드나들 수 있는 길폭인데 송장환이 약도를 그려준 대로 길상이 찾아간 집은 이웃과 비슷한, 눈에 별로 띄지 않는 건물이었다.

'아무래도 조선 사람이 사는 집 같진 않아.'

주변을 둘러본다. 이층집도 군데군데 있어서 마치 벽돌더미의 계곡으로 들어선 것 같다. 육중하고 어둠침침한 중국인 주택가의 독특한 느낌, 그러나 집들은 비교적 깨끗했고 지나가는 행인도 드물었으며 중류 정도의 사람들이 사는 곳인 듯하다. 잿빛 지붕의 골이진 기왓장에는 으스름 저녁빛이 묻어오고 있었다.

"누굴 찾아오셨어요?"

맑은 여자의 음성이다.

"아 네, 여기...."

하다가 조선 말씨와는 달리 상대가 중국 여자인 데 당황한다. 북청색 다브잔스를 입은 미끈한 체격이다. 귀엔 은귀고리가 흔들리고, 장을 보아오는지 꾸러미와 한 묶음의 꽃을 들고 있었다.

"송선생님을 찾아오셨어요?"

". 그렇습니다만,"

"잠깐만 기다리세요."

여자는 문틈에 매달린 줄을 잡아당긴다. 이윽고 앞머리를 자른 중국 소녀가 문을 열어준다. 여자는 소녀에게 나직한 중국말로 뭐라 얘기한다. 소녀는 빠르게 외치듯 높은 목청으로 대답했으며 돌아본 여자는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들어가시지요."

"."

외부에서 보기보단 집 내부는 아늑하고 깨끗했으며 상당한 취미인이 살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지금 송선생님, 기다리고 계시지요."

안내해가면서 여자는 말했다. 뽀오얀 목덜미에 보송보송 잔털이 청결하게 느껴지는데도 육감적이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송장환은 의자에서 급히 일어섰다. 그 역시 다브잔스 차림이다.

"고맙소, 수냥."

송장환은 여자에게 먼저 인사를 한다.

"별말씀을..."

불빛 아래 은귀고리가 반짝거렸다.

"잘 오셨소, 김형."

비로소 송장환은 길상에게 손을 내밀었다. 몇 해 사이 송장환은 아주 노숙해진 것 같다.

", 소개를 해야겠군요. 이분은 이 댁의 수냥입니다. 우리하곤 절친한 친구지요. 여기는 이미 수냥에게 말씀드린 일이 있는 김길상씨, 인사하시오."

"처음 뵙겠어요. 앞으로 자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자 얼굴에는 묘하게, 의미심장한 표정이 지나간다. 어쩌면 그는 길상을 잘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 네. 폐를 끼치게 되는군요."

시종 길상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그럼 전..."

하고 여자는 나간다.

"중국 여자가 어찌 저리 조선말을 잘하지요?"

"오히려 중국말이 서툰 편 아닐까요?"

"그럼 조선 여잔가 보군. 송선생도 그 옷 입으니까 조선 사람으론 보이지 않소."

"수냥은 틀림없는 중국 여자요."

"미인인 데다가 교육도 받은 것 같은데?"

"아무렴. 김형 부인만 할려구요."

"송선생도 꽤 응큼해졌소."

"오핸 마시오. 이미 졸업한 사람을 보구, 앉기나 하시오."

"입학도 않구서 졸업이오?"

송장환과 마주앉으며 길상은 궐련을 꺼내어 붙여 문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난 원체 여복이 없는 사람이라,"

틀림없는 중국 여자, 수냥이라 부르는 여자, 그러나 수냥은 중국 여자는 아니다. 연추에서 선생을 하던 심금녀다. 길상과 송장환은 심금녀를 모르지만 옛날에 심금녀를 아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알아보기 힘들지 모른다. 어찌하여 그 여자는 중국 여자가 되었으며 이집에 와서 살고 있는가.

"하여간 오래간만이오."

담뱃재를 털며 길상은 새삼스럽게, 우울하게 말했다.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지요. 하마나 하구..."

"아까 찾아간 그 약재상 굉장하든데요?"

"이곳에선 거상으로 손꼽히지요. 그리고 조선 사람인 것을 대개는 모르구요. 사실 귀화한 지도 오래됐지만,"

"그래 송선생은 선생질도 그만두고 독립운동도 그만두고 약재상서기로 눌러앉을 작정이시오?"

"하하핫......"

대답없이 웃기만 한다.

"권선생님 거기 가셨지요?"

", 오셨더군요?"

"아까는 실례가 많았소. 남의 고공살이니까 할 수 없이..."

"남의 고공살이치곤 하숙방이 아주 훌륭하오."

"이건 객실이구 내 방은 따로 있지요."

한 폭 신선도에 길상의 눈이 간다. 격조 높은 그림이며 연대도 오래된 것 같다. 그림 한 폭 이왼 장식이라곤 없고 의자와 탁자 그 밖의 몇 가지 비품은 품위 있고 정교한 제품이다. 방안은 살풍경한 편이었다. 그림을 보고 있는 길상의 옆모습을 눈여겨본 송장환이 묻는다.

"어째 안색이 좋잖은데 건강은 어떠시오?"

"건강요? 좋을 리 없지요. 그 왜 곳간에 돈이 쌓이면 사가 생긴다지 않소?"

자조의 웃음을 흘린다. 송장환은 우물쭈물하다가

"인사가 늦었소만 아이들은 잘 크겠지요? 부인께서도 안녕하시구."

"매우. 순풍에 돛 단 듯 잘 되어가는 것 같소."

송장환은 언짢아하는 듯 입맛을 다신다. 뒤틀리어가는 길상에게서 그는 형 영환을 연상한다. 하다가 당황한다.

"두메, 그 아이는 학교 잘다니고 있는지 모르겠소?"

"어째 남의 소식만 물으시오."

"그쪽 소식이야 물으나마나 아니겠소? 뻔하지요."

"형님께서는 그 집을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하셨소."

송장환은 밖은 어두워져, 방안 전등이 뎅그랗게 비치는 창문을 바라본다.

"할 수 없지요. 자업자득,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깨닫지 못한다면 그만이지요."

내뱉는다. 서로 맨정신으론 이야기가 겉돌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

소녀는 꽃병을 들고 수냥은 술안주를 차려왔다. 꽃병을 내려놓는다. 꽃병을 창문 가까운 곳에 놓은 소녀는 다람쥐처럼 달아난다.

"애가 조선말을 못해서요."

수냥은 변명 비슷하게 말하며 탁자 위에 접시를 하나씩 내려놓는다.

"고맙소. 굉장합니다. 워낙이 수냥 솜씨가 좋으니까."

외국 여자라서 그랬는지 송장환은 친구 대하듯 한다.

"이제 보니까 송선생님 아첨도 잘하시네요."

"이거 참, 하하하핫... 아무튼 중국 사람들, 남의 말 안 믿는 것이 탈이거든."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수냥은 웃는다.

"그는 그렇고 수냥. 저녁은 천천히 가져오십시오. 술은 꼬마 시켜서 들여보내주시고요."

"알았어요. 그럼 편히 드십시오."

길상에게 약간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아까처럼 나간다.

"이건 하숙인이 아니라 바로 주인 아니오?"

길상은 탁자 위에 놓인 술병과 안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 미리 부탁을 했지요. 김형하고 실컷 마셔보려고..."

송장환은 길상의 술잔에 술을 따르고 길상이 술병을 받아 송장환 술잔에 술을 붓는다.

"김형! 이렇게 만나서 반갑소."

술잔을 든다. 묵묵히 몇 잔을 거듭한 뒤

"불쌍한 늙은이, 고집불통 같으니라구."

하며 길상은 중얼거렸다.

"불쌍하긴, 그분 나름대로 소신껏 살다가 돌아가실 때가 되어 돌아가셨는데 노소간에 그런 끝장을 면할 수 있는 사람이 이곳에 몇이나 되겠소. 나라 잃은 백성 아니오."

"미구에 또 한 사람 죽을 사람이 있지요. 나라 잃은 백성이."

"무슨 소리요?"

"월선옥의 그 아주머니가 죽게 생겼어요. 금년 넘기기 어렵다는데 혹 모르지요. 명년까지 갈란가..."

"무슨 병인데?"

"암이라는 게요. 병원에서 그렇게 진단이 내렸소."

놀란다. 그러다가

"술맛 떨어지는 얘긴 그만둡시다."

송장환은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명년이면 그리운 고향산천을 밟게 생겼는데 말이오. 하긴 월선옥 아주머니 처지론 김훈장과는 달라서 가고 싶은 고향도 아니겠지만..."

길상의 찌푸려진 양미간을 슬며시 쳐다보다가 송장환은 아까처럼 창문을 바라본다. 빈집처럼 집안은 조용하다. 밖에선 바람이 일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래 김훈장의 유품이란 뭐지요?"

"유품이래야 별 것 있겠소?"

"아드님한테 쓴 유서 한 통하구, 그 동안의 기록인 듯싶은 글이 꽤 많더구먼요."

"그런 걸 쓰시다니, 그 노인네 청사에 이름은 남기고 싶었던 모양이지요?"

"무료한 시간에 해보신 장난이겠지요."

"고생하다 돌아가신 노인은 노인이고, 자아 술잔 받으시오. 그리고 그간 쌓인 얘기나 들려주슈."

"글쎄, 쌓인 얘기보다... 그럼 김형도 물론 떠나시겠군요."

"내가요?"

"아니란 말씀이오?"

길상은 허허헛 하고 웃는다. 맥없이 웃는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송선생."

", 그걸 제가 어떻게... "

"능청스럽기는,"

"허어 참, 아까는 응큼스럽다 하더니 이제 능청스럽다구요?"

"술수가 늘어서 다행이오."

"마음으로야 골백번이라도 남으시오! 남아야 합니다 하고 싶지요. 이곳에서 뛰는 사람 가족 생각하게 생겼소?"

"권선생께서 날 잡으라는 말씀은 안 하시던가요?"

그 말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며 아무런 기색도 나타내지 않는다.

"가문이 내게 무슨 상관이겠소. 최씨 가문의 재건, 하인이었을 시절에는 그래도 쥐꼬리만한 의미는 있었겠지만,"

길상은 연거푸 술잔을 기울인다.

"! 내가 가문에 장가든 것도 아니겠고..."

"용렬하긴. 김형!"

"말씀하시오. 부르지만 말구,"

"김형답지도 않소."

"별 수 없는 놈이지요. 본시부터,"

"핑계요. 핑계. 나 저래서 장가 못 간다니까."

길상의 처지, 길상의 마음을 잘 알면서 짐짓 농담으로 돌려버린다.

", , , 하하하핫... 이름 한번 좋소. 길서상회? 길할 길에, 서역 서, 길상서희상회로 왜 안 했는지 모르겠구먼. 그놈의 한 짝씩만 갖다 붙여 놨으니 이꼴인가 보오. 서로 손 한 개씩만 잡고서 한 손은 제각기 반대로 향해 필사란 말이요. 하하핫..."

"와락 끌어당겨 나머지 손도 잡으시구려. 하하핫..."

소녀가 술을 가져왔다. 송장환은 소녀에게도 중국 말로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바람이 부는군.'

창밖에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북국 특유의 샛바람 소리다. 머지않아 겨울이 온다. 어둡고 침침한 겨울이. 얼음무덤 같은 벌판에 유랑민들은 망령같이 헤맬 것이다. 강이란 강은 모두 육로가 되어 비적들의 말굽이 소란할 것이며 운수업, 산판에 활기가 넘칠 것이다. 그 긴 겨울, 독립군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짐승 가죽의 신발을 신고 구레나룻이 무성하더라는 강포수, 고향을 물으니까 화를 내더란 늙은 포수가 송장환을 찾아와서 학자금을 맡기고 그러고 나서 돌아간 그는 오발사고로 죽었다. 강포수, 강두메... 강포수, 귀녀, 강두메?'

길상의 생각은 여기서 멎었다.

"송선생은 언제까지 여기 계실 작정이오."

"당분간, 그 당분간이 얼마가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오만 어딘가 또 옮겨지게 되겠지요."

상당히 많은 술을 마셨는데 두 사람은 다같이 취하질 못한다. 얘기를 겉돌리고 있을 뿐 정작 중요한 것엔 피차 시기를 기다리는 눈치다. 김훈장의 유품 전달이 주목적이 아님은 뻔한 일,

"앞으로 고난은 중첩이오. 그런만큼 일하는 보람은 있겠짐나요."

"..."

"식자들간에 정세를 낙관하여 김칫국부터 마시는 사람이 있고 지나치게 비관하여 이젠 독립이고 머고 다 글렀다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사실은 비관도 낙관도 할 수 없어요."

"같은 상황인데 왜 그렇게 견해 차이가 나지요?"

"김칫국부터 마시는 사람의 시국관은 그러니까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면 국제적으로 일본이 되게 몰릴 것이며 영국과의 관계도 지난날과는 달라서 공수동맹은 한갓 휴지가 될 것이요, 일본을 이용하여 로셔의 남진을 막았던 그때 사정과는 판이한 만큼 일본 자체가 열강의 강적으로 등장했으니 결국 사면초가,"

"그러면 조선은 독립할 수 있다, 그 얘긴가요?"

"일본이 고립하게 되면 독립의 기운도 짙어진다, 그 얘기겠지요."

"중국에서 일본 세력을 몰아내주고 조선을 독립시켜주고... , 꿀같이 달콤한 공상이오. 오나가나 그놈의 세계대전 얘기뿐이긴 하나, 그래 비관하는 사람들은 어떤 견핸가요."

"바로 그거요. 오나가나 세계대전 얘기, 독립을 절실히 바라면서 실천력이 약한 사람들의 희망이지요. 더 과하게 말하자면 요행을 바라는 마음일 게구. 나는 비관적인 편에 동의를 하지요. 아무튼 이기든 지든 구라파는 황폐했고 또 당분간은 전쟁을 바라지 않을 것이며 만주와 밀접한 이해관계가 있는 로셔의 경우를 생각하더라도 전쟁의 주동국인만큼 전쟁이 가져온 피폐를 단시일 내에 복구 할 수 없을 거 아니겠소. 외부에 힘을 돌리기는커녕 눈을 돌릴 겨를도 없을 거요. 그 틈바구니를 이용 안할 일본인가요. 국제 여론이 아무리 와글와글해도 먹어버리면 고만이오. 그렇게 되면 우린 바로 우리말입니다. 만주의 우리 독립군 거점은 완전히 와해돼버리는 거지요. 말살입니다. 그렇게 되면은 연해주와 중국 본토는 개별적으로 놀아야 합니다."

길상은 담배를 붙여 문다. 뿜어내는 담배 연기를 바라보며 송장환 이야기에 유념하는 것도 아닌 모호한 시선이 한 폭 그림 쪽으로 간다.

"우리가 앞으로 할 일은 바로 그런 상태에 대한 대비를 하는 일이오. 말하자면 그런 상태 하에서 투쟁할 수 있는 기틀과 방법의 훈련이오. 두만강 얼음판을 넘나들며 국경 수비병이나 집적이는 데 불과한 그런 따위의 일 아무 소용도 없거니와 일본이 만주를 먹어 버린 후에는 가능하지도 못한 일이오. 오지대에서 군대를 조련하여 기회가 오면은 일군과 일전을 불사한다, 그건 망상이오. 도시 우스운 일 아닙니까? 그러나 그네들은 그네들대로 땅 위에 있게 하구 이쪽은 이쪽대로 두더지처럼 땅속을 파가면서 일을 하면 되는 거니까 도리어 그네들, 쟁쟁한 명성의 독립투사들과 그들이 거느린 수병은 그대로 들먹들먹해주는 편이 좋지요. 그 양반들이 알면은 천장이 낮다고 뛰겠지만 우리로서는 일종의 엄폐역할로 이용이 되는 것 아니겠소?"

송장환의 생각에서 나온 말이 아님을 길상은 안다. 옛날에 비하여 매우 정리가 된 얘기였으나 술이 들어가면 늘어놓는 그의 장광설의 잔재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서 안 될 얘기를 흘릴 위인이 아닌 것도 길상은 안다. 단순한 시국 얘기가 아닌 것도 길상은 안다. 단순한 시국 얘기가 아닌 어떤 목적 의식을 갖고 하는 말이라는 것도 그것을 예상하고 길상은 이곳까지 오지 않았던가.

"본론으로 들어가시지요."

길상은 담배를 눌러 끄며 말했다.

", 그러지요.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 그러니까 그것을 일종의 변법이라고나 표현할까요? 정규적인 군사 훈련이라든가 몇몇 명성 있는 사람이 뛰어다니면서 쥐꼬리만한 정치적 흥정을 한다든가 국제 여론에 호소한다든가, 극단적으로 말해서 의병 봉기의 연장으로밖에 볼 수 없는, 물론 만주 땅의 독립운동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지도자들 거의가 의병 출신인 것도 사실이고 그런 종래의 것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것,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하다가 송장환은 그 얘기를 끝내지 않은 채 훌쩍 딴 곳으로 넘어 간다.

"우리가 지금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멀지 않은 앞날 통화현의 신흥무관학교(군사학을 포함한 중학 정도의 교과를 가르치며 교명도 신흥중학교로 개칭하였음)가 산산조각이 났다는 것, 왕청현의 중광단도 마찬가지겠지만,"

목을 축이듯 술을 마시는 송장환은 본론에 들어가서도 아직 핵심은 오리무중이다.

"그러니까 산산조각이 날 것이 뻔한데 한마디로 말해 그럴 바엔 우리가 쪼개버려야 한다 그겁니다."

"쪼개다니요?"

길상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본다.

"깨버려야 해요."

"그건 또 어째서요?"

"아까 내가 일종의 변법이라 하지 않았소? 덩어릴 되도록 이면 잘 게 부셔서 여기저기 뿌려놓는다 그거지요."

"뿌려놔서 어떻게요? 어떻게 활용한다는 거지요?"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은 많아야 칠팔 명, 대개 오륙 명이 한조가 됩니다. 그 한 조가 신흥무관학교 하나 혹은 독립군의 한 소대, 연대, 사단도 될 수 있지요. 그 한조가 열 개의 스물, 서른, , , 그물 고리처럼 엮어나가는 겁니다. 그러나 어느 조도 자신들의 조가 그물 고리처럼 엮여 있는 걸 모르지요. 서로 독립되어 전혀 직접으론 연관을 갖지 않기 때문이오. 처음 출발에 있어선 몇 개의 조가 만들어질런지 예상할 수 없고 또 나로선 몰라야 합니다. 가르치는 교과, 교과라기보다 훈련이겠지요만, 그것도 일률적인 것은 아니지요. 소요에 따라 훈련의 성질이 달라질 수 있는, 말하자면 다양한 것이 되겠지요."

"왜 그리 복잡하지요?"

"아마 내 설명이 복잡했던 모양이오."

"그러면 신흥학교, 중광단과는 의논이 됐소?"

"아니지요. 의논할 성질이 아니지요."

"의논도 없이 될 법이나 한 일이오?"

"내 설명이 두서가 없어 그렇소. 보충하지요. 그쪽 사람들과 합의를 보는 것도 어려운 일이거니와 설령 합의를 볼 수 있다 하더라도 합의하에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그것은 전혀 의미가 없게 되어버리지요. 합의란 결국 드러내놓은 일 아니겠소. 애초부터 그쪽 인원을 믿고 그쪽 인원으로 기간을 삼자는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신흥 학교나 중광단뿐만 아니라 대소 어느 독립단체이든 마찬가지겠으나 그들 모두를 서로 모르게 흡수한다는 것은 이상이지요. 그 것은 이상입니다. 크게, 먼 곳을 내다보는 견지에선 그보다 튼튼한 보신과 존속하여 투쟁하는 방법이란 달리 없어요. 하나 당장에야 좁게 생각하면은 그것은 틀림없는 배신이요 파괴 공작이지요. 정도도 아니구요. 아무튼 그러니까 시작에 있어선 이쪽에서 확보한 인원으로,"

"한데 송선생 말씀에는 약간의 모순이 있소."

"?"

"모순이 있단 말이요. 아까 그네들은 지상에서 들먹들먹해주는 편이 엄폐 역할을 해주는 폭이란 말씀을 했었소. 또 산산조각을 내어 여러 곳에 흐트려야 한다고도 했었지요? 그런가 하면 쪼개는 데 있어서 그들과의 합의 없인 가능치 못할 일을, 합의하여 이루어지는 일이란 의미가 없다... 나로선 납득이 가질 않소."

송장환은 머리를 긁었다. 그리고 나서 술을 먹는다.

"역시 설명 부족이오. 마음이 조급하다보니, 그러니까 엄밀히 말한다면 깨뜨려야 할 것은 신흥학교 그것을 두고 한 말이오. 쓸만한 사람 쓸 만한 학생을 쥐도 새도 모르게 훔쳐내야 하는 거지요. 군관 학교에서 정규적 군사 훈련을 받은 사람을 활용하자 그것이겠고 나이들이 젊어야 한다는 점도 있지요. 그러나 그런 도둑질하기엔 좀 시일이 필요할 게요."

설명은 엉성하였으나 길상은 다시 뭐라곤 하지 않는다. 송장환의 말에 모순이 있다고 지적했을 때 이미 길상은 자신의 지적이 피상적인 것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권필응은 그런 일에 대해선 말이 없었다. 권필응은 길상이 자기들 대열에 깊숙이 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들이 강가 횟집에서 처음 대면했을 때부터.

"오랫동안 훈장질한 사람의 말이, 지독하게도 설득력이 없구먼."

송장환의 얼굴이 환해진다. 느슨해진 길상을 느낀 것이다.

"마음이 조급해서 그렇지요. 하하핫... 자아 술, 술 듭시다."

", 들지요."

두 사람은 함께 술잔을 든다.

"간단명료하게 말해서 너도 나도 모르게, 아무도 모르게, 귀신같은 손이 홍시 속을 속 빼내고 홍시 겁데기는 놔둔 채, 그 홍시 속을 또 아무도 모르게 봉지마다 갈라서 또 모르게 여기저기 숨겨두고 일조 이조 그런 식으로 형성하는 거구, 물론 홍시 속말고도 여기저기서 훔쳐오기도 하고 꼬셔오기도 하고 오고 싶은 사람 골라내어 데려오기도 하겠으나 그 아무도 모르고 보이지도 않는 한 조, 한 조, 제각기 제나름의 구실을 한다 그거겠고 그 한 조 한 조의 움직임은 아무도 모르는 새 전체의 큰 대열이 된다,"

". 맞습니다. 바로 그거지요. 나는 김형만 믿소."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지요."

"나보다는 권선생님께서 더 믿으시는 모양이던데요?"

"공부 잘했다구 사탕 하나 주시는 거요."

"하하핫... 자아, 자 술,"

"군사 활동과는 직접 관련이 없겠구먼."

"관련이 없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고요. 개미가 뚝을 무너뜨리는 일, 벌들이 이곳저곳을 쑤셔대는 일, 그것도 쌈이라면 싸움이니까, 무기도 대포나 기관총 아닌 성냥 한 곽, 단도 한 자루, 심지어는 혓바닥 세치까지 무기로 쓰면 무기가 되는 거요."

"혓바닥 세 치로 목줄기를 물어뜯습니까?"

"허허허, 왜 이러시오?"

송장환은 비로소 취기가 도는지 빙글빙글 웃기 시작한다.

"그 왜 있지 않소. 몇 해 전에 용정선 산으로 도망가구 왜인들은 짐을 싸가지고 회령으로 달아나고,"

길상도 킬킬대며 웃는다. 비적이 습격한다는 유언비어가 빚었던 그때 그 희비극을 상기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 가난한 동포들 골탕먹는 생각은 못하구요?"

"머릴 짜면은 별의별 방법이 다 생기겠지요."

이날 밤 길상은 송장환과 함께 잤다. 새벽녘까지 밖에선 바람이 불었다. 길상은 뭐가 뭔지 모를 착잡한 심정의 밤을 보냈다. 하얼빈을 찾아오려고 했을 때의 심정, 그 심정의 변화는 없었다. 고통이나 갈등도 없었다. 막연한 공백 같은 것, 그 공백의 의식이 바람 소릴 듣고 있는 것이다. 이따금 그 공백에 월선이 죽을 것이라는, 김두수가 회령에서 순사부장을 하고 있다는, 혜관스님이 관수의 백정 장인으로부터 혼이 났었다는, 아주 오래된 그런 따위의 일들, 자기 자신의 거취와는 하등 관련이 없는 일들이 떠올랐다간 사라지곤 하는 것이었다.

"어째 일어나셨소, 더 주무시질 않고."

길상이 일어나 부시럭거리는 기척에 송장환도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일찌감치 가지요."

"아직 날이 새지 않았소."

"그럭저럭 나가면은 날이 밝을 게요. 일찌감치 서둘러야 구경도 할 것 아니오. 여관은 잡아놨고 늦더라도 어젯저녁에 돌아가는 건데,"

길상은 허리의 혁대를 조른다.

"조반이야 어디서 드나 마찬가지 아니오. 자아, 자 앉으시오. 앉으라니까."

송장환은 기를 쓰고 말린다. 길상은 송장환의 손을 밀어낸다.

"술 안 취한 맨 정신으로 또 무슨 말씀 하시려구요?"

". 깨고 보니 할말은 한마디도 못한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좀 포악하게 구시오."

"."

길상은 양복저고릴 입는다.

"내가 의병인가 뭔가... 산으로 들어갔었던 일 아시지요?"

"압니다."

"그런 행적이 있는데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최참판댁 가문을 다시 세우는 데 방해물이 되지 않겠소?"

"?"

"하하핫... 그런 이유 땜에 안 돌아간다는 얘기는 아니외다. 하하핫..."

결국 송장환에게 주는 확답인 셈이다. 길상의 말은 타성이었는지도 모르고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한 못질이었는지도 모른다.

"환영이오! 대환영이오. 김형! , 나는 어렵게 생각했소. 어려운 일이라구요. 자신이 없었거든."

송장환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고 길상이 나가는 것을 한 번쯤 더 말려야 하는 여유를 잃을 만큼 들떠 있었다. 문간에서 길상은 돌아보았다.

"송선생."

". 말씀하시오."

"부탁이 하나 있소. 수냥이라던 그 여자한테 좀 알아봐달라구요."

"뭔데요."

"미국인 목사의 집, 나 그럼 가겠소."

무성의한 부탁이었다. 그 말뿐이었다. 미국인 목사의 집. 그나저나 송장환은 기분이 좋다. 새벽 공기는 상쾌하게 심장에 스며들었다.

"제에기! 미국인 목사의 집! 무슨 놈의,"

하며 집안으로 들어가는데

"손님 가셨어요?"

검정 다브잔스를 입고 단정하게 머릴 빗어넘긴 수냥이 물었다.

". 갔습니다. 그놈의 친구,"

"아침 준빌 다 해놨는데,"

"또 올 겁니다. 참 미국인 목사의 집! 그 친구가 알아봐달라구요."

"어머. 뭐가 그리 기분 좋으시죠?"

". 기분 좋습니다. 날씨도 좋을 것 같군요. 바람도 자구요."

수냥은 웃으며 제 방쪽을 향해 가는 송장환 뒷모습을 바라본다.

"아 참, 수냥! 수냥!"

"나 여기 있어요."

"그 친구 부탁, 알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 알아봐드리지요."

길상이 미국인 목사집을 찾아간 것은 그로부터 나흘 뒤의 일이었다. 과연 그 집에 옥이네가 있을지 그것은 의문이었으나 숲에 싸인 빨간 벽돌집 지붕은 푸른 기와였다. 그 건물 옆에 납작한 창고 같은 부속 건물이 있었다. 창고는 아니었고 사람이 거처하는 곳인 듯, 노인과 중국옷 입은 계집아이가 뜰에 나와 있었다.

"여보시오."

노인보다 소녀가 재빨리 돌아본다.

"앙이! 뉘기요? 아지방이 앙입매!"

옥이였다.

"옥아."

"아지방이!"

옥이 달려와서 두 손을 맞잡는다.

"많이 컸구나. 언제 이리 컸니?"

"아지방이 어찌 알고서리 찾아왔습매?"

","

그러자 노인이 중국말로 누구냐고 묻는다. 옥이는 자랑스럽게 발음이 좋은 중국 말씨로 아저씨라고 대답한다. 길상은 엉거주춤 노인에게 허릴 구부린다. 노인은 고갤 끄덕이고 신사양반이라 하며 중얼거린다.

"아지방일 보구 신사라 하Ÿ? 양복으 입으서이까 그러지비."

우쭐해진 옥이는 노인에게 곁눈질을 한다. 간데없는 중국 계집아이다.

"아지방이 이 할바이 교회지기답매."

". 어망이는 어디 있니?"

"어망이?"

길상의 손을 잡은 옥이의 두 손이 긴장을 나타낸다.

"저리로 가기요."

어감이 싹 달라졌다. 얼마를 가다가 옥이는 길상의 손을 놓고 뛰어간다.

"어망이! 어망이!"

길상은 옥이 가는 곳을 향해 따라간다. 큰 건물 속에서 행주치마를 두른 옥이네가 나온다. 길상을 보는 순간 나무막대기처럼 우뚝 서 버린다. 옥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홱 돌아서며 엉뚱스럽게 노랠 흥얼거린다.

'옥인 이제 철이 들었구나.'

길상은 씁쓸하게 웃는다.

"어찌 오싰습매까?"

물으면서 옥이네는 행주치마에 손을 닦는다.

"여기 올 일 있어서 왔다가..."

"괜스런 짓을 하십매다."

"좀 나갈 수 없소?"

"목사님 부배가 다 안 계십매다. 집이 비어서 그냥 돌아가시옵께나."

"잠깐만. 교회지기도 저기 있고 잠시 못 나올 건 없지 않소?"

갑자기 험악해지는 길상의 눈에 질렸던지

"그럼 잠깐만 저기 길에서리 기다리주잲겠슴둥?"

"그러지."

옥이네는 총총히 집안으로 사라진다.

"옥아."

"옛꼬망."

"엄마랑 같이 나가자."

"싫습매다."

"어째서?"

"집 보아얍지."

"교회지기가 있는데두?"

"앙이랍매. 나는 집 보아야 한다이."

하다가 뒤꼍으로 돌아가는 강아지를 향해

"! !"

갑자기 몸을 날리며 달아난다.

"옥아! 옥아!"

그러나 옥이는 뒤꼍으로 사라졌고 존 존 하며 부르는 소리만 슬픈 가락같이 들려온다.

'철이 들었구나.'

옥이네는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는 아무말 없이 종종걸음으로 나갔고 길상은 뚜벅뚜벅 뒤를 따른다. 한참을 종종걸음으로 걷던 옥이네는 길거리에서 돌아섰다. 성이 난 얼굴이다.

"어찌 오싰습매까?"

"아까 말했잖았소."

"볼일이 있어 오신 거느 압매다. 여긴 뭣하러 오십매까?"

"만나러 왔지. 뭣하러 오긴,"

"사람으 체면도 있잲잉요? 만내서리 어쩌겠다느 겁매까?"

"..."

"옥이도 이젠 철 들었습매다."

"알고 있소."

한참을 내려와서, 길가 청요리집으로 길상은 떠밀다시피 옥이네를 밀어젖힌다. 내내 화를 내고 있던 옥이네는 겁먹은 눈으로 길상을 힐끔 쳐다보았다. 자그마한 방에 딱딱한 의자에 마주보고 앉은 후에도 옥이네는 겁먹은 눈으로 길상을 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눈을 내리깐다.

'뭣하러 이 여잘 만나러 왔을까.'

여자의 오목한 턱을 바라본다. 옥색 솜저고리를 입고 있다. 겹저고리로 보일 만큼 차분하고 동정 끝이 꼭 맞는 저고리다. 길상은 주문 받으러 온 소년에게 요리 몇 접시와 소량의 술을 주문한다.

"저 어서 가야 합매다."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길상은 궐련을 붙여 물고 연기를 뿜어내며

'뭣하러 이 여잘 만나러 왔을까?'

"우린 만나면 앙이 되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옥이엄마."

"옛꼬망."

"여기 내가 찾아온 것, 지난날의 일들, 용서해주시오."

"... "

"내가 잘못했소."

옥이네한테 사과하는 길상의 의식 속에는 봉순이를 포함한 모든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참회가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 말씀으, 무시레 합네까. 회령에서 일으... 도아주세서 고맙게 생각으 하고 있습매다. 잘못한 거 없소꼬망."

"아무 일 없이 내가 도와준 거요?"

옥이네는 고개를 들고 길상을 바라본다. 왜 그런 말을 하느냐, 잘못한 일이라고? 그런 식으로 후회하기냐? 비로소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없었던 일로 생각하기요."

눈물을 닦아내며 매몰차게 말한다.

"어디세, 무시기 자겍 있다아고, 생각으 하겠습매까. 그런 일 있었다는 것 발설 앙이 할 터이이까 걱정으 마옵소. 우세 앙이 시킬 것이니."

흐느낀다.

"내가 임자보구 말을 잘못 한 것 같소."

우는 여자를 멍하니 쳐다본다. 여자는 왜 우는가. 예수를 믿고 옥이 자라는 것을 낙으로 삼겠다던 여자가 울기는 왜 우는가. 잘못했으며 용서해달라고 했다. 게다가 아무 일 없이 내가 도와주었느냐고도 했다. 길상의 진실이 여자에게는 아픔이다. 길상은 반쯤 몸을 일으켜 탁자 건너, 눈물을 닦는 여자의 손을 와락 낚아챈다. 잡힌 손을 뽑으려고 몸부림을 친다. 길상은 두 손으로 꼭 눌러 잡으며

"내가 나쁜 놈이야. 자격이 없기론 내 편이지."

그리고 손을 놓아준다.

"용서해주옵소! , 가겠습매다!"

여자는 방에서 달려 나간다. 어떻게나 날쌔든지 일순간만 같다. 길상은 탁자 위에 두 주먹을 얹은 채 멍해 있다가 허허헛 하고 웃는다.

"미친놈."

길상은 일주일을 머물다가 옥이 털외투 한 벌을 사가지고 수냥에게 전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하얼빈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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