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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2-3-1

토지 22

 

3편 밤에 일하는 사람들

 

1. 땡땡이중

대문간에서 누군가하고 얘기를 주고받는 것 같은 기척이더니, 대문 닫히는 소리가 났었다. 그런 뒤 싸리비를 치켜들고 사랑뜰에 들어온 행랑아범 전서방은 새벽녘에 내린 눈을 담장 겉으로 쑤욱쑤욱 쓸어붙인다. 쥣빛 수염에 덮인 전서방 입 언저리를 하얀 입김이 바람 부는 방향 따라 휘날리고, 오동나무 가지에선 눈가루가 날아 내리곤 한다. 처마 끝에 실린 눈, 담장 용마름에 실린 눈에 아침 햇살이 퍼지면서 반짝거리고 녹아서 물방울이 되어 떨어진다.

창덕궁과 경복궁 사이에 끼여 있는 가희동의 아침은 양반님네 기지개처럼 느리고 한가롭기만 하다. 이상현이 기식하고 있는 이판서댁도 아직 식전이다. 당주 이범창의 부인 강씨는 어젯밤 둘째아들과 함께 친정에 간 채 돌아오지 않았다. 지난봄 생때같은 외아들이 감옥에서 죽어 나온 뒤 후사를 정하기도 전에 심화병으로 오늘내일 하고 있는 오라버니의 임종을 보기 위해 간 것이다. 집안이 괴괴하다. 눈을 다 쓸어붙인 전서방은 싸리비를 담장 옆에 휙 던진다. 사양길을 걷고 있는 이 집 뜰안을 서성대던 춥고 배고픈 참새 서너 마리가 푸르륵 날아올라 오동나무 가지에 앉는다. 전서방은 사랑채 작은 방 쪽을 힐끔 쳐다보며 바짓말을 추킨다. 뭉실한 코는 늙은이답지 않게 주독이 올라 벌겋고 눈까풀은 늘어져서 심술이 더럭더럭해 보인다. 세도가 빨랫줄 같았던 선대의 그 좋은 시절, 청지기였던 전서방은 사양길로 치닫는 이 집에 행랑아범으로 눌러앉아 긴 성상을 보낸 늙은이다. 그에게는 소싯적부터 약간 심상찮은 주벽이 있었다. 주벽이라곤 하나 남에게 뭐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었고 나무란다고 고쳐질 것도 아니어서 이판서댁에선 무관심하게 보아온 터인데 육십이 다 된 오늘날까지 그 심상찮은 주벽은 여전하였다. 노상 술을 마시는 것은 아니었다. 노상 술을 마실 처지도 못 되지만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 달 석 달 만에, 그것은 그의 주머니가 일정한 무게에 도달했을 적에 결행되는 일이었으니까. 하기는 풀밭이 섰던 옛날에는 한 달에 두서너 번이 넘었을 테고 요즈막 같아서는 주머니의 무게가 금저울같이 각박했으므로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으나 주머니를 술판에 끌러놓고 술을 마시는데 바닥에 나도록 밤이 새도록, 마치 보가 터진 것 같은 무시무시한 폭음이다.

날이 희뿌옇게 셀 무렵 관가에 끌려가서 곤장 백 대쯤 맞은 꼴이 되어 돌아오면 자리에 쓰러지는 동시 인사불성이 되고 이튿날은 한 시각 가량 늦게 일어나는 것 외엔 맡은 소임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장님같이 눈을 감고 다니는가 하면 짐승처럼 으르렁거리곤 했었다. 그는 한두 잔의 술은 결코 거들떠보지 않았다. 아니 한두 잔쯤 술을 내밀어도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니 공술은 안 먹는 꼴이 되었고 한 번의 폭음을 위해 전서방만큼 돈을 사랑하는 위인도 흔치 않을 성싶다. 한번은 상현이 이 불쌍한 늙은이를 위해 밤늦게 돌아오면서 술 한 병을 사온 일이 있었다.

"그거 마셔봐야 간에 기별이나 가겠소? 차후는 술 사는 돈 소인 한테 주슈."

하며 경멸하듯 술병은 거들떠보지 않고 거만을 떨었다. 심사가 뒤틀린 상현은 그 말에 대해선 아무 대꾸를 않고 방에 들어가서 혼자 술병을 비우고 말았다. 그 후에도 상현은 몇 번인가 방에 혼자 앉아서 사온 술병을 기울인 일이 있었으나 전서방에게 두 번 다시 술병을 내밀지 않았고 술값으로 돈을 준 일도 없었다. 나이 젊어서 편협하고 콧대가 센 상현의 곯려주는 방법인데 전서방은 전서방대로 지체도 별 것 아닌 시골 선비의 자제, 필경은 우리 상전댁 식객 아니겠느냐는 은근한 거드름과 멸시하는 거동이었고, 해서 두 사람의 사이는 자연 좋지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전서방의 술버릇이라는 것도 소싯적 그의 말을 빌자면 계집이 샛서방질을 한 그때부터 얻은 것이라나?

"하동 서방님."

전서방은 댓돌 아래까지 가서 작은 사랑방을 향해 부른다.

"왜 그러느냐."

대답이 퉁겨나왔다.

"일어나셨소?"

"그래 일어났다."

"손님이 찾아왔소이다."

앞 뒤 매듭이 분명치 않은 해파리같이 흐물거리는 음성이다. 그것은 늙어서 이가 빠진 탓이겠다.

"내게 말이냐?"

"그렇소."

방문을 열고 내다본다. 방안의 이불이 개켜져 있었고 상현은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다보는 까무끄름한 얼굴에 우수는 있었지만 실의에선 벗어난 듯 안정된 느낌은 있다.

"어디서 오신 손님이라든가."

"중이오."

"?"

"지리산 중놈이라니까요."

방자하기 이를 데 없구먼, 지금도 이판서 시절인 줄 아나? 싶었으나 상현은,

"중하고는 아는 이가 없는데... 이상하군. 분명 나를 찾드냐?"

"그렇소이다. 하동서 왔다니까 틀림없는 일 아니겠소?"

"."

"실은 어제도 왔었고 그저께, 그 전날에도 왔었소. 처음에는 시주 받으로 온 땡땡이중인 줄 알고 내쫓았고 다음은 서방님이 부재중이라 허행을 했습지요."

"그렇다면 왜 내게 알리지 않았느냐?"

"이가 빠져서 말씀이오, 아마 이빨 사이로 생각이 슬렁슬렁 빠져 버리는 모양이외다. 잊어버렸소. 헤헤헷..."

약을 올리려는지 웃는다.

"들라 하게."

상현은 성이 나서 말한다. 전서방은 허리춤을 추켜올리며 어슬렁 어슬렁 걸어간다.

'심술궂은 늙은이 같으니라구.'

문간까지 나온 전서방은 헛기침을 하고 대문을 연다. 엄동 추위에 얼굴이 푸르딩딩하게 언 혜관이 눈을 부릅뜨고 서 있었다.

"들어오라 하시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혜관은 허둥지둥 대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아따, 곤두박질치겠구먼."

전서방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집안으로 들어선 혜관은 어디로 가야 할지 서둘면서 사방을 둘레둘레 살핀다.

"날 따라오우."

전서방은 중문에서 옆쪽으로 발길을 꺾는다. 사랑 댓돌 아래 이르러서,

", 아니 손님 오셨소."

"오냐."

상현이 마루까지 나온다.

"나를 찾아오셨소?"

의아해하며 혜관을 쳐다본다.

"."

혜관은 단주 든 손을 모아 합장하고 나서

"하동서 서울에 당도하기론 나흘이 지났소만 이판서댁 문턱이 어쩌나 높든지요. 해서 오늘은 염치불고하고 식전에 왔더니, 하마터면 문전에서 동태가 될 뻔하였소."

푸르딩딩하게 언 얼굴, 혜관은 정말 화가 나 있었다. 떠나지 않고 서 있던 전서방이 받아서,

"아암요, 이판서댁 문턱이 아니 높을 수 있겠소? 개차반 같은 시절이라 그렇지 판서직이 뉘집 애 이름인 줄 잘못 알았나보오."

상현은 눈을 부릅뜨고 전서방을 노려보다가,

"추운데 어서 오르시오."

혜관에게 말한다.

"."

혜관은 마루 끝으로 다가가며 다시 말했다.

"중이 동냥을 가면 언제나 먼저 짖어대는 게 강아지더구먼요."

뭐라 응수하려고 입술을 쭈뼛거리던 전서방은 갑자기 늙은이 시늉을 하며 주독이 올라 벌개진 코를 소매 끝으로 문지르다가 슬그머니 물러나간다. 바랑을 마루 끝에 풀어놓고 상현을 따라 방으로 들어선 혜관은 다시 합장하고 나서 자리에 앉는다.

"소승 혜관이라 하옵고 쌍계사에 있는 중이올시다."

"나는 이상현이오."

새삼스럽게 인사를 나눈다. 상현은 눈썹 속에 돋은 몇 가닥 흰털을 바라보며 이 중 나이는 오십에 가까운 모양이라 짐작하고 얼굴 광대뼈가 불거진 것을 보아 옹고집이 있으리라는 생각도 해본다. 혜관은 혜관대로 이동진을 본 일이 있어서,

'부친보다 그릇이 작아 보이는군. 빨근빨근한 성미는 있겠고.'

"한데 무슨 일로 오시었소?"

"네 다름이 아니오라... 하동서 마님을 뵙고 오는 길입니다마는..."

"무슨 전언이라도..."

"전언이라기보다... 마님 말씀이 설 명절에는 꼭 내려오셔서 제사를 뫼시도록,"

"... 집안은 별고 없다 하시든가요?"

"가내가 두루 편안하신 듯, 별일은 없는 것 같고 마님이 섣달 보름께쯤 억쇠를 올려보내겠다, 그러시더구먼요."

"무슨 일로?"

알면서 묻는 것이나 혜관은 모른다 하고 상현의 얼굴은 침울해 진다. 집을 떠날 때 설에는 꼭 오겠노라 했는데 이 낯선 중에게 당부하고 그래도 아들이 못 미더워 억쇠를 올려보내겠다는 어머니의 심정을 왜 모르겠는가.

"먼젓번 떠날 적에도 아버님을 뵈옵고 곧 되잡아 오겠노라, 철석같은 맹세를 아니 하였더냐? 그러고도 사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느니라. 아버님은 이제 돌아오지 못하실 것으로 내 작정하였으니..."

모친 염씨 눈에 눈물이 희번덕였다. 이동전보다 더 늙어버린 염씨, 느슨하게 태평스러웠던 성미도 사오 년 동안 변한 모양이다.

"그러하니 아예 의지하고 믿을 생각은 전혀 없다. 사사로운 일이라도 아녀자가 막고 나설 일이 못 되거늘 하물며 나랏일을 한다는 마당에서 내 뭐라 하겠느냐? 다만 내가 바라고 소원하는 것은 후사, 가문이 끊겨서야 되겠느냐? 아직도 너 나이 젊다마는... 이곳에 몸져 살기만 한다면야 내 가슴이 이리 답답할까? 앞으로 세월이 어찌 될려는지, 너 말로도 일본으로 갈지 중국으로 갈지 모른다 하지 않았느냐? 서울에 있는 동안 그 동안만이라도 제발 자주 내려오도록 하여라. 옛날 같지가 않아서 수삼일이면 기차라는 것이 있어서 내왕이 수월타 하니."

상현은 어머님이 말씀을 잘하신다는 생각을 했었다. 말씀이 많아졌다는 생각도 했었다. 며느리를 불러다놓고 고담책을 많이 읽으시나 보다 생각하기도 했었다.

"아기 처지도 생각해보려무나. 하늘을 보아야 별을 따지 않겠느냐? 남의 가문에 들어와서 할 짓을 못하는 게 어디 아기 죄겠느냐? 한데도 노상 민망하고 죄스럽게 여기는 게 여자의 마음이니라."

떠나는 남편을 보지 못하고 장독대 옆에 돌아서 있던 아내 뒷모습이 잠시 눈앞을 스쳐간다. 혜관은 침울해진 상현으로부터 눈길을 돌리며 두 손바닥을 싹싹 비빈다.

"날씨가 고추같이 맵소이다."

"북방이니까요. 섬진강 겨울바람은 두만강 강바람에 비하면은 차라리 훈풍이지요."

별로 걸맞지 않은 대답이다.

"그럴 테지요. 남쪽이야 어디 강물이 제대로 얼고 겨울이 너어가나요?"

혜관도 민적거리기 시작한다.

"헌데 스님께서는 무슨 일로 서울 올라오셨소?"

", 그게 실은, 서방님을 꼭 뵈어야겠기에 소승이 본댁으로 찾아가서 서울의 거처하시는 곳을 물었습지요."

"나를 만나려고요?"

"."

"그건 또 무슨 까닭이지요?"

상현은 생면부지의 늙지도 젊지도 않은, 일견하여 동냥을 빌고 다니는 땡땡이중으로밖에 볼 수 없는 혜관을 유심히 살펴본다.

"간도의 소식을 알고자 불원천리 이곳까지 왔소이다."

"뭐라는 게요? 간도의 소식을."

긴장한다. 조준구의 염탐꾼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지나간 것이다.

"간도의 소식을 알아야겠기에, 보시다시피 운수의 처지라 거처가 일정치 않아서 여러 가지 일들이 꼬여드는 모양입니다마는... 서방님께서 돌아오시지 않았더라면 소승이 간도로 한번 건너갈 심산이었소."

"대관절 스님께서는 소생이 돌아왔다는 얘기를 뉘한테 들으셨소? 아는 이가 집안 식구말고는 없을 텐데 말씀이오."

내가, 소생으로 변한 만큼 상현은 단순한 땡땡이중이 아니라는 생각을 굳힌 것이다.

", 봉순이라고, 서희애기씨랑 함께 자란 침모 딸 봉순이를 아실 겝니다."

"알지요."

"그 아이는 지금 진주에 있습니다마는 하동에 들르는 길이 있어서 억쇠를 만났던 모양이고 그래 서방님 돌아오신 소식을 듣고 절로 소승을 찾아왔었더구먼요."

"그랬었군요."

대개 경위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 중이 소식을 알기 위해 간도까지 가려 했었다는 이유가 상현에게는 궁금하다. 그러나 혜관은 보따리 속에 꾸겨 넣은 무슨 중요한 밀서이기나 하듯 좀체 본론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바깥쪽에서 톡톡 두드려보는 것 같은, 분명찮은 허두를 다시 꺼내었다.

"소승으로 말할 것 같으면 최참판댁과는 깊은 연고가 있다 할 수는 없겠습니다마는 서희애기씨를 뫼시고 떠난 길상이는 소승이 업어서 기른 거나 다름이 없습지요."

비로소 혜관의 눈에 감정이 서린다. 솟은 관골 언저리가 불그레하게 물들기도 하고, 추위에 얼었던 얼굴이 방안 온기에 녹으면서 열이 나는 것인지 모른다. 상현의 눈에도 열기가 오른다.

"그 아이는 어릴 적부터 재주가 비상했습지요. 소승이 금어인 관계로 마음속 깊이 애지중지했습니다. 경전을 외기보다 화필 한 자루 가지고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으로 믿는 무식한 땡땡이중이 무엇을 알겠습니까마는 길상이 그 아이야 말로 금어로서뿐만 아니라 장차 대덕으로 크게 빛을 내려니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노장스님께서 어째 그러셨는지 그 아이를 속계로 풀어주시고 말았지요. 몇 해 전, 그러니까 노장스님께서는 어지러워지는 세상을 한탄하시고 천수관음상 조성에 뜻을 둔 일이 있었소. 그때도 떠나보낸 길상이를 몹시 아쉽게 생각하셨지요. 길상이놈이면 해낼 수 있는 일인데, 하시면서 말입니다."

상현은 방바닥을 내려다보며 있었다. 혜관은 얘기가 옆길로 간 것을 되돌린다.

"연이나 그 아이하고 소승과의 인연 같은 것은 오늘 이 곳을 찾은 일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이고 노장스님의 간곡한 부탁을 받은바가 있고 해서 또 다른 일로도."

"그럼 그 노장스님의 부탁 때문에 오셨다 그 말씀이오."

"."

"노장스님은 또 왜 그러셨을까요?"

"노장스님 역시 돌아가신 최참판댁 마님으로부터 서희애기씨 부탁을 받으셨지요."

"노장스님이란 어떤 분이시오?"

"우관선사라 하옵고 서방님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최참판댁과는 선대 때부터 깊은 불연으로 맺어졌습지요. 지금은 돌아가시고 아니 계십니다."

"그러면 또 다른 일이라 했는데 그건 무슨 일이오?"

상현은 취조관처럼 차근차근 묻는다. 혜관은 잠시 당혹해하는 것 같았으나,

"그것은 소승으로서 말씀드릴 수가 없소."

"그래요? 그럼 간도 일에 대해서 물어보시오."

"서희애기씨에 대해서 좀 소상하게 말씀해주시오."

"그건 어렵잖은 일이지요."

상현은 침착하고 냉정한 듯했으나 두 주먹을 꽉 쥐었다 펴는 것이었다.

"최서희 규수는 몸 성히 잘 있습니다. 몸 성히 잘 계실 뿐만 아니라 최규수는 최참판네 여장부답게, 그렇지요, 축재하는 데는 비상한 재간이어서 왕시 누리던 위엄과 영광을 그곳에서도 변함없이, 네 그렇습니다."

상현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서희에 대한 얘기를 혜관에게 모조리 털어놓는다. 길상과의 혼담에 관한 것만 제외하고. 혜관은 안심이 된 얼굴이라기보다 신중한 궁리를 하는 표정으로 듣고 있다.

"조금도 염려하실 것 없소. 멀지 않아 최규수는 조가네를 평사리에서 몰아내려 돌아올 겝니다. 근심하셔서 서울까지 소생을 찾아오신 스님 얘기를 듣는다면... 하하, , 핫하... 웃을 겝니다."

맥이 쑥 빠진 웃음소리다. 찬모가 조반상을 들고 들어왔다. 혜관은 구석지로 엉덩이를 밀어 붙이며,

"어서 조반 드십시오. 염려 마시오."

했으나 일어서서 하직하려 하지는 않는다. 할 얘기가 남아 있는 모양이다.

"따로 밥상 내올 것 없고 밥 한 그릇과 수저 한 벌만 가져다주게."

한사코 사양하는 혜관과 어떻게 해야 할 지 어중간한 꼴을 하고서 있는 찬모 사이에서 중재라도 드는 것처럼 상현이 말했다. 막상 밥과 수저가 밥상 위에 놓여지자 혜관은 순순히 밥상으로 앞으로 다가왔다. 씨근덕거리듯이 밥을 먹으면서 혜관은 물었다.

"서방님은 서울서 뭘 하시오?"

"별로 하는 것도 없소. 일본글을 좀 배우러 다니지요."

"일본으로 가시려구요?"

"그럴 셈인데 그건 두고봐야겠지요. 배워야 한다고 모두 떠들어 대니까, 죽창 들고 나설 계제도 아니고 젊은 놈들 죽어나는 시절이지요."

쓰디쓰게 웃는다.

"이 댁과는 인척,"

말이 끝나기 전에

"아니오. 이 댁 이범창 선생은 아버님과 잘 아시는 사이지요."

"그러면은 지금 연해주에 계신다는 왕시의 관리사 이범윤 그 어른하고 이 댁은 한 집안인가요?"

"아주 척이 멀지요."

흉금을 풀어놓은 듯 상현은 경계 없이 털어놨으나 실상 그의 기분은 여전히 자포자기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의심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었으나, 이를 시초로 하여 혜관은 간도 방면, 이동진이 있다는 연해주 방면, 그곳 독립군에 대한 얘기를 물어오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목탁이나 두드릴 것이지 중놈 분수에 쓸데없는 관심은 왜 가지누.'

상현은 노골적으로 신경질을 나타내며 모멸하는 것이지만 혜관은 눈치코치 없는 미련둥이같이 톡톡 쏘아대듯 하는 말을 부지런히 주워담듯 고개를 끄덕이는가 하면 입맛을 다시고 또 질문을 하고. 밥상을 물린 뒤 두 사람의 앉은 자리는 멀어졌다. 혜관은 오히려 숨을 꿀꺽 삼키며 기맥이 통한 몸짓을 하며 독립군의 활동 상황을 보다 소상하게 캐내려 든다.

"아니 내가 뭐 독립군 하다 온 사람이오. 그리 꼬치꼬치 묻는다고 내가 알 턱이 없지 않소."

상현은 벌컥 소리를 질렀다. 마찬가지다. 눈치코치 없기로는.

"그러나 서방님께서는 아버님 곁에 머물다 오셨으니 그곳 사정이야 훤할 게 아닙니까. 이곳 산산골골에 숨어 있는 의병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그곳 형편이오."

"아버님 아버님 하지 마시오! 그곳에 가 있다고 모두 독립운 동하는 줄 아시오? 독립군 잡아먹는 조선놈도 얼마든지 있단 말씀이오."

"그야 그렇겠지요. 이곳인들 사정이야 매한가지 아니겠소? 의병이 있는가 하면 의병 잡으러 다니는 조선놈 순사 헌병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 놈부터 모가지를 댕강댕강 짤라놔야 한다니까요."

그 말만은 중 혜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화통이 터진 상현은 결국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마구 지껄여준다. 연해주 사정, 간도 사정 그리고 서희가 군자금 거절한 얘기까지 마구 털어놓는다. 아주 사악스런 얼굴로, 앙칼진 목소리로, 우둔한 혜관의 몸뚱이를 꼬집어 쥐어뜯고 하는 것처럼 사정이 없는 구박이며 화풀이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그렇게 지랄을 하듯 성미를 부리고 나니 좀 속이 가라앉고 오히려 혜관과는 옛적부터 알았던 사이처럼 친숙해지는 것 아닌가. 지쳐서 서로를 우두커니 바라본다. 상현이 무안쩍어 싱긋이 웃는다. 혜관도 씩 웃는다. 울퉁불퉁한 까까머리, 광대뼈 언저리는 불그레하고, 상현은 불현 듯 저 중머리하고 주막에 가서 술을 마셔 보았으면 생각다가 낄낄 웃는다.

"스님."

"."

"내 앞에선 앞으로 길상이 칭찬은 마시오."

"길상이 칭찬을요?"

"칭찬뿐만 아니라 그놈자식 얘기도 말아요."

"간도서 사이가 안 좋았구먼요."

"대판 싸웠지요. 도시 건방진 놈이오."

하고서 상현은 또 낄낄 웃는다.

"잘난 사람은 잘난 사람을 싫어들 하지요."

"거 중이 마음에 없는 아첨 하면 못써요. 속으론 양반 자제란 것을 명패처럼 달고 댕기는 아니꼬운 졸장부 하면서 말이오."

"하 참, 잘난 것도 층층이, 가지가지 다르니까요. 하핫..."

"그보다 스님이 봉순이 얘기를 했는데, 그 아이 아니 지금은 이십세가 넘어서 어른일 테지만 어떻게 됐지요?"

"? 아 네. 그게 좀."

"그때 봉순이는 왜 오지 않았는지, 무슨 사고가 난 줄 알고 우린 떠났지요."

"봉순이는 그때 절에 있었소. 소승도 일행이 기다리고 있을 터인데 일단 진주로 가서, 간도로 가든 아니 가든 하라고 타일렀지마는 무슨 까닭인지 막무가내더구먼요."

혜관은 봉순이 길상을 사모하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다. 음력 오월달이었을 것이다. 봄이 꼬리를 감추면서 싱싱한 푸르름이 산과 들을 덮고, 밤이면 나무 그림자가 미친 듯 소용돌이 쳤었다. 뻐꾸기가 또 어쩌면 그렇게 이숲 저숲에서 흐드러지게 울어쌌던고. 봉순이는 산사에서 며칠 묵었는데 젊은 사미승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존재, 고통스러운 밤이었을 것이다. 상전을 모시고 온 계집종도 아니요. 신성불가침의 양반댁 규수도 아니요. 의지가지할 곳 없는 외로운 처녀가 홀로, 뻗치면 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봉순의 자태는 비록 사바를 떠난 사문이라 할지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금지된 정욕이기 때문에 한결 치열했을 것이 아니겠는가. 길상을 떠나보낸 우수와 천부의 교태를 겸한 봉순의 모습, 화류계에 몸을 던질 심산이었던 만큼 무방비 상태를 엿보았을 사미승들의 고통을 혜관은 지금도 능히 헤아릴 수가 있다. 어디 그들뿐이었던가. 여자에게 둔감하였던 중 늙은 혜관도 절마당을 알짱거리며 지나가는 봉순이를 보았을 때 가슴에 봄 아지랑이 같은 것이 몰려왔었고 남모르게 한숨을 쉬곤 하지 않았던가.

"기왕의 고집이라고 해야 할지... 딱하게 되었지요. 절에서 며칠을 묵은 뒤 간다온다 말없이 떠나버렸는데 나중에 들려온 소문을 들으니까 읍내 소리꾼을 찾아갔다는 게요. 그 후 무슨 광대 단체를 따라갔다는 말이 있더니 이번에 본인이 와서 하는 말을 들으니 그동안 고생도 많이 한 것 같고 진주서 기생으로 나간다는 거였소."

"왜 기생이 되려는 생각을 했을까? 인물이 그만하면."

"인물이 그만하니까 그랬을 테지요. 게다가 천성으로 광대기가 있는 애였던 것 같소."

"그렇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지요. 이번에 고향 내려가면 진주로 한번 놀러 가봐야겠소. 길상이 소식도 전해주기로 하구."

혜관은 움찔한다.

'능청스럽긴.'

서방님 아닌 도령하며 혜관은 마음속으로 웃었고 상현은 못난 돌산 대가리를 하고서 그래도 생각은 잘게 미치는구나, 그런 말을 눈속에 떠올리는 것이다

"봉순이 그 아이 일은 그렇고 최참판댁 애기씨 나이가 이십이 다 되었을 텐데... 아직 혼인은 아니하셨을 테지요?"

상현은 혜관을 빤히 쳐다보다가

"내가 용정을 떠날 때까지 혼인은 아니 했소."

길상과의 혼인 말은 입밖에 내지 않는다. 모친 염씨에게도 못 한 얘기다.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잊어버리고 싶은 얘기, 염두에서 싹 몰아내고 싶은 얘기다. 그러나 때때로 생각이 나는 일이며 그럴 때마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아파오는 기억이다.

"우리 그럼 나가보실까요."

상현은 발작적으로 일어섰다. 기와집 처마가 가지런히 도열한 골목길은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어 여전히 조용한 듯했으나 햇볕에 녹아 번지는 눈물,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마음에 어수선하다. 이윽고 장옷에 나막신을 신은 늙은 여자 하나가 지나간다. 그 뒤를 이어 하인에게 업혀가는 소년이 있다. 학교에 가는지 서당으로 가는지. 상현과 혜관이 길을 꺾어 도는데 뒤에서 인력거 하나가 달려오더니 그들 옆을 바싹 스쳐서 앞서간다.

"스님."

상현이 속삭이듯 불렀다.

"."

"저 인력거에 누가 탔는지 모르시지요?"

"알 턱이 있겠소."

"조준구가 타고 있다면 너무 우연이라 생각하겠소?"

"조준구가!"

"그렇소. 나는 가끔 이 길에서 저 인력거를 본답니다. 인력거꾼의 어거지로 잡아빼는 저 자라모가지모습도 이제 눈에 익어버렸지요."

"그 위인이 이 근방에 살고 있다 그 말씀이오."

"소가가 이 근방에 있다더군요. 본가는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소만."

"하동서도 소문이 자자합디다. 서울서 대궐 같은 집에 산다구요. 대궐 같은 집에 살건 용궁 같은 집에 살건 마을 사람들은 그 홍씨라는 여인이 동네를 떠준 것만도 고마워서 춤을 출 지경이었지요. 아주 극악무도한 계집이었소."

극악무도한 계집이라는 말도 중 혜관의 목소리는 아니다.

"서울 장안도 그리 넓은 곳은 아닌 모양이오. 나 같은 젖비린내 나는 서생에게도 조준구 그자의 행장을 심심찮게 들려주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오. 뭐 요즈음엔 왜인들과 합자한 광산 회사를 설립했다던가요?"

"그 소문이라면 소승도 들었소. 그 일 때문에 많은 땅을 처분했다던가요?"

"밑져야 본전이니까."

"최참판댁 만석 살림을 먹어치우는 것만도 식상할 터인데 또 어떤 짓을 한 줄 아시오?"

"둔답을 적잖이 착복했다더군요."

", 도장을 한 바가지나 만들어서 토지 조산가 뭔가 한다는 작자들과 짜고 말이오. 말이 둔답이지 그놈의 나라 땅 속을 들여다볼 것 같으면 가난뱅이 한두 섬지기 땅도 숱하게 묻혀 있으니 말씀이오. 셋돈 안 물려고 맡긴 땅 솔랑 날아가지 않았소? 벼룩이 간까지 꺼내먹은 게지요."

"사람이 염치불고하면 못할 짓이 뭐있겠소. 안 하는 놈이 천치바보 아니오? 목탁 치면서 문전마다 동냥을 비는 스님이나 나같이 한빈하여 남의 집에 기식하는 소년 서생이나 다 못나서 이런 말이나마 지껄이는 게요. 하하핫핫... 인심이란 걸렛조각이오."

"그건 호의호식하는 사람들만 보아온 탓이지요. 그렇지가 않소. 인심이란 천심이오. 백성을 믿어야 합니다."

혜관은 떼를 쓰는 아이같이 말한다.

"그래요? 믿어야 합니까?"

비꼬며 놀려대듯 웃음기 머금은 반문이다.

"돌아가신 우리 노장스님께서,"

"아따, 우리 노장스님, 우리 노장스님, 그것도 염불인가요?"

"허허 참, 이번엔 노장스님 얘기가 아니외다. 노장스님의 죽마고우 문의원 말씀인데,"

"아아 그 늙은 의생이라면, 나도 어릴 적에 침을 맞은 일이 있었소."

"그 문의원께서 언젠가 말씀하시었소. 가난한 백성들은 영신환 한 알이라도 소중하게 정성들여서 먹고, 그 한 알의 영신환 몇 배의 정을 느끼지마는 배부른 사람들은 천하 명약도 정으로 받지는 아니 한다구요. 초봄 들판에서 나물을 캐는 고사리 같은 손은 정에다 정을 돌려줄 줄 알지만 시궁창에 흰밥 쏟아버리는 아낙은 허기든 사람에게 식은 죽 한 그릇 베풀 줄 모른다구요."

", , 알았소이다. 허나 장안에 들면 조준구 그 사람도 인심이 후해진다더군요. 한다 하는 날건달 양반들이 그자 문객 노릇을 한다니까 과히 인색치 않다 그 말 아니겠소? 하기는 자신이 천대받던 옛 시절을 생각하여 보복하는 심정으로 그런다고들 하기는 합디다마는... 요지경 같은 세상이오."

"조준구 얘기가 났으니 말입니다마는 그 병신 아들 있지 않소?"

"꼽추도령인가 그자 말이오?"

"흔히들 병신 마음 고운 데 없다고들 하지만."

"장가는 들었소?"

"아직은, 그 도령이 혼자 하인배들하고 최참판댁에 남아 있는데 몇 번인가 대들보에 목을 맸다는 게요."

"거 신통하군요."

"하인들한테 들켜서,"

"들킬 것을 예상하고 목 매단 것 아니오? 병신 좀 존경하라는 투정으로 말이오."

"허허 참 사사건건이, 아무튼 지금은 감금된 거나 마찬가진데 주야장천 서책만을 낙을 삼고,"

"그럼 됐지요 뭐. 그런 낙도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다구요."

이야기를 동가리 동가리 내듯 눙쳐버리는데 혜관은 인내심 깊게 이어간다.

"한데 그 도령이 밥상만 받으면 운다는 게요."

"그건 또 무슨 청승이지요?"

"가슴을 치면서 말이오. 이 더러운 밥을 아니 먹는 의지가 왜 자기에겐 없느냐고 하면서 말이오."

"그건 제법이군요."

"그러다가 서울서 모친이라는 그 계집이 한번 내려오기만 하면 불쌍한 그 병신자식을 무섭게 닦달을 한다니 그게 어디 사람의 탈을 쓰고... 하여간 기기묘묘한 세상이오.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게 바로..."

그들은 함께 나란히, 그리고 막연한 걸음걸이로 남대문 근처에까지 이르렀다. 물론 상현은 이 중머리하고 함께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은 까마득히 잊어버렸고 두 사람은 역시 막연하게 어물어물, 서로의 갈길도 묻지 않은 채 작별 인사를 한다. 상현은 멀어져가는 혜관의 바랑 진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발길을 돌린다. 갑자기 겨울날 찬바람이 검정 두루마기 소매 사이로 설렁설렁 기어드는 것을 느낀다. 상현은 몸을 한번 부르릉 떤다.

 

 

2. 나룻배

겨울은 겨울인데, 설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어중간한 시기여서 장은 쓸쓸하고 한나절이 지나자 벌써 파장이다. 남 먼저 와서 뱃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봉기는 찌그러진 갓에 누덕누덕 기운 두루마기를 입은 서서 방을 배안으로 이끌어 올리는 한복이를 쳐다본다.

"용케 한복이를 만났구마, 서서방. 길가다 엽전 줏은 것보다 재수 좋은 날이오."

봉기가 말을 걸자,

"애애라 이 사람아! 너거들도 청춘이 아니 멀었네라."

서서방이 지팡이를 치켜들고 허공에다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며 가래 끓는 소리를 질렀다.

"하이고 청춘이 아니 멀었다니 이 무슨 가뭄에 비 내리는 소리요?"

서서방을 뱃바닥에 앉히면서 한복이도 시죽시죽 웃는다. 백발이 아니 멀었네라 해야 할 것을 정신의 혼미 상태가 여전한 서서방은 청춘이라 한다. 효부며느리가 있고 양자로 얻어온 손자도 방안 심부름쯤 하게끔 자랐는데 서서방은 읍내로 나다니며 걸식 행각을 그냥 계속하고 있었다.

"저 늙은네 죽으면 열부비 세워야 할 기구마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마누라 묏등에 앉아 씨부렁거리며 걸식해온 밥을 먹는 것도 여전하였다. 오늘 한복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육로 삼십 리 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다음은 혜관이 나룻배에 올랐다.

"시님 그간 편안했십니까? 어디 먼길 갔다오시는가배요."

봉기는 배에 오르는 사람마다 말을 걸리고 작정했는가. 구두쇠 소리 듣기론 옛날과 다름없지만 주머니 무게와는 상관이 없는 말씨만은 싹싹했다. 심술꾸러기 같았던 눈빛도 묘하게 쓸쓸해 보인다.

"뭐 먼 길이랄 것도 없고 발 닿는 대로 다녀오는 길이오."

혜관은 눈이 부신 듯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 나서 식은 밥덩이를 싼 베수건을 뱃바닥에 놨다가 다시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중얼 중얼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서서방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눈길은 봉기에게 돌아왔다.

"요즘엔 살기가 좀 어떠시오?"

"물으나 마나, 빤히 아시믄서 그러시오?"

눈을 부릅뜨며 실쭉 웃는데 망건만 두른 봉기 상투머리도 어지간히 희어졌다. 혜관도 허허 하고 웃는다.

"말도 마이소. 진작 세상이 이럴 줄 알았더믄 나도 머리 깎고 산에나 갔일 것을."

"이제도 늦지 않소."

"쪽박에 밥 담듯이 자식새끼들 냉기놓고 말이오? 이자는 할수헐수 없구마. 계집자식 그기이 거물장인께로."

"처자식보다, 이거 얼매요? 한냥이라꼬요? 닷돈 하소. 이거 보소, 험 투성인데 온돈 받겄다 그 말이오? ... 그런 재밀 못 버리는 게 아니오?"

봉기 목소리까지 흉내 내는 바람에 멀거니 서 있던 사공이 큰 소리를 내며 웃고 한복이 낄낄 웃는다.

"아따 시님도 별걸 다 아시오."

옛날 같으면 성을 발칵 냈을 봉기가 허허허 하고 웃는다.

"사램이란 답대비, 음 답대비 말입니다. 세월에 속아서 사는 기이 병이다 그 말인 기라요. 내일은 우떨고, 모레는 우떨고? 하 참 그러다 보믄 어느새 북망산 뫼구덕이 아가리를 떡 벌리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차생 길을 닦게 절에 오시오. 내 그러면은 머리 자알 밀어주지요."

"허허허헛..."

드높은 봉기 웃음소리에 굵직한 혜관의 웃음소리가 겹쳐든다. 세 사람의 농부가 나룻배에 오르고 배는 강심을 향해 물에서 떨어져 나간다.

"봉기."

윗마을에 살다가 화개 쪽에 땅을 얻어 이사 간 농부 한 사람이 불렀다.

"저눔으 인사 좀 보게? 손자까지 본 나한테 이름자를 놔? 으응?"

눈을 부릅뜬다.

"손자 이름을 알아야 아무게 할애비 할 거 아니가. 하기야 외손자 그기이 어디 자손인가? 나겉이 친손자를 보아야만 소리 한분 치지."

"애키 순!"

"그런데 거 두만애비 진주로 이사갔다믄?"

"갔제."

"살림이 따실 긴데 와 동네를 떴는고?

"다 떠날 만한 까닭이 있인께로."

옆에 앉은 농부에게 담배 한 대를 얻어서 피워 문 봉기는 말을 잇는다.

"이팽이 그자가 동네를 뜬 첫 까닭은 아들놈을 잘 둔 때문이고 둘째 까닭은 자네도 알다시피 간난할매 제우답으로 얻은 금싸래기 겉은 논 다섯 마지기를 뺏긴 때문이고 셋째 까닭은 두만어매가 순사한테 뺨을 맞은 때문이제."

"아따, 돌박에 솔씨 나기를 기다리지. 성급한 사람, 왔다갔다하다가 종을 못 잡겄네. 무신 놈의 까닭이 그리 길고 꼬여 있노. 한마디로 잘돼서 갔다는 기가 못돼서 갔다는 기가."

"못되기도 하고 잘되기도 하고 반반이라."

"이팽이댁네가 순사한테 뺨은 와 맞았는고?"

머리를 싼 수건을 턱 밑에서 묶은 초동이 나뭇짐을 지고, 강심에서 가까이 보이는 강변길을 지나간다.

"그러니께 지난 초여름의 얘기구마. , 머라 카더라? 그놈의 요새 신식 말인데 머라 카더라? 아무튼지 간에 말이사 별기이 아니고, 집안 앞뒤를 깨끗하게 치우라는 통문이 돌았던 일이 있었지."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 벵이 돈다고."

"그때 일이구마. 빌어먹을, 무슨 놈의 통문은 그리 많은고. 농사꾼은 땅이나 꿍꿍 파믄 되는 긴데 제에기, 아무튼지간에 집안 앞뒤를 깨끗하게 치우라 카든 그날 주재소 왜순사가 검사마치로 나오지 않았겄나? 그러이 사람으 일이란 우습다는 긴데 두만어매 그 사람 동네서도 둘째 가라믄 서러울 만큼 정갈하고 야물고, 허 참 궃고 짜잔한 계집들은 아무 일이 없었는데 우째 그리 됐던지 솥을 안 씻어놨던 모앵이라. 왜순사 그놈도 좁쌀 양식 오실앞에 싸고 다닐 놈이제, 남으 부석에 들어가서 솥뚜껑까지 열어본 기라. 그래 와 통문대로, , 머라 카든고? 제기랄! 아무튼지 간에 깨끗이 치우라는 어명을."

"미친 지랄 겉은 소리 다 듣겄다. 어명은 무슨 놈의 말라빠진 어명이고. 그래 왜순사 그놈이 이 나라 금상이라 말가?"

"아 그러세. 말이사 우찌되었든 간에."

난처해진 봉기는 반쯤 졸고 잇는 혜관을 힐끗 쳐다본다. 사공은 맥이 빠진 듯 노를 젓고 있었다. 때 묻은 수건 밑에 젊은 나이 해서는 시들어버린 것 같은 얼굴이 솟아올라서 흘러내린 능선, 청자 빛으로 웅크린 겨울 산을 향하고 있다. 저 젊은 사공을 위해, 수년 전 호열자에 죽은 늙은 사공은 황천길을 너무 서둘렀던 것 같다.

"무식해도 유만부득이지. 어명이라니,"

농부는 여전히 분개해 마지 않는다. 우쭐해진 기분과 더불어.

"서당 문턱도 안 넘어봤이니 무식한 거는 정한 이치 아니가. 잘난 체하지 말고 내 말이나 들으라이. 아 그러세, 그 왜순사놈이 솥뚜껑을 열어보고 나서 다짜고짜로 두만어매 뺨을 찰싹 때리지 않았겄나. 거 사람 겉만 보고 말할 거 아니더마. 두만어매 그 사람 아주 독하데 독해."

"어쨋기에, 목이라도 매달아 죽었소?"

안면이 없는 다른 농부가 물었다.

"목을 매달았다는 게 아니라,"

"그라믄 사생결단하고 순사한테 달라들었다 그 말이요?"

"그것도 아니고, 밀개떡을 한 보따리 해 이고 서울 아들 찾으러 나섰거든. 큰자식 없다고 업수이 보아 당한 봉변이라는 기지."

"하 참."

"서울이 한두 발 길인가? 여인네 몸으로 동네 밖을 모리고 살든 사람이 말이다. 그라고 아들 있는 곳을 딱이 아는 것도 아니고, 서울 가서 김서방 찾는 꼴이제. 남정네 둘째 놈 영만이가 한사코 말렸지마는 그 엄전한 마누래가 그때만은 황소 고집인 기라."

돌아앉아 있던 한복이 돌아본다. 이십이 넘었으나 아직 머리를 땋아 내린 불머슴아이 같은 한복이는 죽은 어미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어머님도 고집이 세셨지 하고 마음속으로 뇌었을까.

"아무튼지 간에 보리떡 한 보따리를 해 이고 한 달을 걸었다 카든가 보름을 걸었다 카든가, 서울에 가기는 갔는데 목수 김두만을 어디서 찾은 기든고?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모르겄다마는 수일간을 앓아 헤매다가 굶고 지쳐가지고 남대문 밖에서 해장작겉이 나자빠져 있었다는 게지. 참말이지 모자 상봉을 옛적 얘기책으로 들었네만은 바로 두만어매 모자 상봉이 얘기책 그대로다 그거라."

"그래서 아들 데꼬 와서 분풀이를 했는가?"

"분풀이? 일개 목수놈이 우찌 순사한테 분풀일 할꼬? 철랑개비 자줄 지닜다고 분풀이를 해? 아들이 어매 기차 태워가지고 같이 온 것만도 두만어매로서는 분이 반분이나 풀›일 기고 동네 사람한테도 체모가 섰을 기고."

"거 순사 얘기가 났으니게 하는 말이지마는 저어기 미늘고개서 조선놈 순사 하나가 등을 찔리서 죽었다네."

"머라꼬? 등을 찔리서 죽어?"

반쯤 졸고 있는 것 같은 혜관이 눈을 번쩍 뜬다. 그러더니 묘한 몸짓으로 염주를 매만지며 뱃전에 부서지는 물살을 내려다본다.

"순사가 찔리 죽었다믄 그거는 뻔한 일이고 우리네도 그리 생각하는데 왜놈들이사 말할 거 있겄나? 의병의 짓이지 머. 그래 왜놈들이 군대를 풀어서 샅샅이 뒤지는데 그 통에, 실상 무신 일을 한 것도 아니고 의병이라고 이름 찍힌 기이 무서바서 숨어댕기든 사람들마나 무더기무더기 잽히온다누마. 그래도 정작은 누가 했는지 가리내지도 못하고."

"조선놈 순사 하나쯤 그리 야단벼락 떨 거는 머 잇노."

"조선놈 순사 하나가 큰일이다 그기이 아니지. 그것뿐이라믄. 주재소 몇 군데나 불을 지른 일이며 왜순사도 벌써 여러 명 목을 제가고 등을 찔러 직이고 한 일이 이곳저곳서 있었다는구마."

"그래 그런가? 일전에 우리 동네에도 순사가 왔데. 호구 조사를 한다 캄시로, 그러니 의병 나간 가솔들 조사하러 온 기라. 그렇지마는 우리 동네사 조씨네 눈이 무서바서 그해 그 난리를 겪은 뒤 의병 나간 사람 가솔이라곤 한 사람도 없신게로. 김훈장 아들네밖에 더 있어야제. 나도 떠도는 말을 조맨 들었는데 말이 윤보가 아즉 살아 있다고도 하고."

"그 말이야 나도 들었거마는. 내 그런 말 믿지는 않으나 축지법을 써서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별의별놈의 재주를 다 부린다 카고, 그거는 머 그렇다 카더라도 이때까지 윤보가 살아 있다믄 국으로 있지야 않겄지. 무슨 사단을 꾸미고 댕기도 댕길 기라."

"그렇지요. 그 사람 동학 때도 장수 노릇 했다는 말이 있십니다."

다른 농부도 화제 속으로 끼어든다.

"하여간에 동학 때 쌈질한 것만은 틀림이 없지. 장수를 했는지 접주를 했는지는 모르겄다마는, 그거이 윤보 짓인가 아닌가 알 바 없는 일이라 캐도, 지리산 골짜기에 쥐도 새도 모르는 군사가 천 명은 넘기 숨어 있어서 여차 하믄 치고나올 기라니 대단한 일이제."

", 나도 그 얘기를 들었소. 천 명 넘기 숨어 있다는 군사가 모두 동학군 하든 사람들이라요. 그때 동학군이 수십만이었으니 천 명 모으기란, 잘난 장수 한 사람 있으믄 어려븐 일은 아닐 기요."

낯선 또 다른 농부의 말,

"윤보라는 그 사람이 곰보딱지 흉칙스리 생겨서 아이들도 보믄 달아난다 카고, 연장망대 짊어지고 집이나 지어주는 목수라 해서 사람들이 대우를 안 해주지마는, 실상은 유식하기가 이를 데 없고, 옛날 동학군에 있을 적에 저어기 저 백두산, 그 백두산의 정기를 타고난 무슨 도사한테서 비법을 배웠다 카이, 예사 인물은 아니라더마요."

죽어서 땅속에 썩고 있을 윤보, 그 윤보를 두고 허무맹랑한 얘기는 솜뭉치처럼 부풀어 가는데 무슨 서슬에선지 말이 뚝 끊어져버린다. 신이 났어야 할 사람들이 이상하게 풀이 죽으면서 침묵을 지킨다. 뱃전을 치는 물소리 노 젓는 소리가 갑자기 높아지는 것 같다.

"금싸래기 겉은 제우답 다섯 미지기라..."

화개 쪽으로 이사간 농부가 곰방대에 담배를 재면서 혼잣말을 한다.

"금싸래기믄 머하고 산몰랭이 비렁땅이믄 머하노. 말해보아야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지."

봉기가 한숨을 쉰다. 먼 산을 바라보는 눈초리는... 그렇다, 실낱같은 희망이랄까. 의병에게 겉어 보는 실낱같은 희망이 서글펐던 것이다. 못 박힌 손바닥과 굽어진 등과 날로 늘어가는 흰 머리털과 지친 산천, 실낱 같은 희망을 믿을 수 없다. 이 삼사 년 동안 겪어야 했던 웃을래야 웃을 수 없고 울래야 울 수도 없었던 일들, 적든 많든 당할 수밖에 없었던 억울함이, 뚜렷하게 막연하게 들려오는 궁핍의 발소리가, 이들을 견딜 수 없게 한다. 관원들의 토색질이 심하고 양반들 하시가 피눈물 나는 것이었다고 하지만, 땅 보고 하늘 보고 시절 좋을 것을 축수하며 들판을 초조하게 바라보아온 세월이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내 땅이다! 내 조상이 물려준 내 땅이다! 하늘에 대한 믿음 만큼 확실한 믿음이 언제 어떻게 하여 앞 뒤 돌아볼 새도 없이 무너져버렸는가. 토지조사란 무슨 놈의 낮도깨비냐. 괴상한 측량 기구를 둘러메고 산산골골에 스며들어온 주사라 하고 통역이라 하고 기수니 측량원이니, 그 양복쟁이들이 칼 차고 총멘 순사 헌병보다 더 무서울 줄이야. 아이고오, 하느님 맙소사! 땅을 치고 통곡한들 감나무를 쳐다보고 짖어대는 것은 강아지뿐이었다.

"아무말 말아, 사전을 둔답으로 숨겼다고 큰 벌을 내린단다. 입 꼭 다물고오."

입을 다무나마나 땅 임자는 어느덧 소작료 무는 소작인이 되어 있었고,

", 이건 내 땅 아니여락우."

양복쟁이들 서슬에 놀란 농부는 엉겁결에 토래질인데 어느덧 논가에 깃대가 꽂히고 새끼줄을 치고. 다라 아닌 일본 정부의 소유로 기록되는 것을 땅 임자는 곡괭이자루만 매만지고 천치처럼 입을 헤벌리며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같은 판세에 훤하게 사태를 아는 친일파 무리들이 죽치고 앉았을 리 없다. 애매한 둔답을, 위조한 도장 꾸러미로 유유히 착복했던 것이다. 도처에서 벌어진 이 웃지 못할, 스스로 포기한 결과를 초래한 무지, 호소할 방법을 모르고 호소할 증거도 없는 영세 농민의 소유지는 도처에서 국유지로 흡수되고 탐욕스런 무리들이 횡령하고, 아이고오 하느님네! 명천의 하느님네! 한들 산천이 말을 할까.

"금싸래기 겉은 제우답 다섯 마지기라 카지마는 그거야 감나무 밑에 누웠다가 입에 떨어진 감 아닌가. 본시 공거로 생긴 기니께, 몇 해 자알 걷어 묵었이믄 억울할 것 하나 없제. 번하게 치다보고 서서 구린 입 한분 못 떼보고 땅 뺏긴 사램이 얼매나 많다고, 이팽이야 밑져도 본전,"

"하야간에 난리는 난리라. 땅 한뼘 없다고 해서 남의 집 불기경하듯이, 그럴 수 없는 기이, 우리네 사정도 목구멍에 단내가 나게 생ƒ…다 그거 아니가. 모두 해묵고 살 기이 없인께 농사 안 짓든 사람들까지 땅마지기나 얻어 부칠라고 눈에 불을 키고, 대체 이치를 생각해봐도 안 그렇나. 네댓 마지기 제 땅 가지고 살든 사람들이 제 땅 뺏기고 남의 땅 부치묵고 살자믄 그 배는 되게 땅을 얻어야 하니, 땅 임자는 줄고 작인들은 늘었다 할 것 같으믄... 그렇지 물건의 경우를 보더라도 살 사람이 많으믄은 물건 값이 오르는 기이 이친데..."

"그러니 마름놈들 농간이 좀 하겄나?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고 그러고도 마름놈 코밑에서 눈치만 보자 카니 이거는 수풀에 앉은 새맨치로 맴이 놓여야지."

"그러니 인심만 사나워지는 것 아니겄소."

"제기랄! 맨날 해봐야 그게 그 얘기, 봉기!"

"저눔의 주둥이를 고만..."

봉기는 눈을 흡뜨고, 정말 성이 난 것 같다. 실상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근심이 되어 그랬었지만.

"빌어묵을! 시끌시끌한데 이팽이 아들 잘 둔 얘기나 듣자. 그 아이 장개는 갔고."

"가구말구. 장개만 갔나?"

봉기는 음탕스럽게 웃는다. 농부들은 남의 일에 활기를 되찾는다.

"장개말고 어디로 또 갔는고?"

그러나 그 얘기를 미루어놓고

"우리네들하곤 다르네, 달라. 이팽이 내외가 본시부터 물 한방울 안 샐 만큼 야물다는 것을 모릴 사람이 없는데 참말이지 아들 혼사가 성사된 거를 보고 동네 사람들은 모두 놀랬제."

"과부딸 막딸이한테 갔다믄?"

"그러니 하는 말 아닌가배. 우리네 겉으면 어림 반푼어치나 있일기든가? 첫째 온당찮은 에미 행실을 봐서도, 그런 계집 딸을 뉘가 데리고 갈 기고. 그래도 그 사람들 생각은 딴판이라. 심덕 좋고 일잘하믄 그만이다, 그거지. 내 사람 된 바에야 친정 어매가 무슨 지랄을 하든 상관할 바 아니라는 거지. 인물이나 좋음사? 말이야 바로 하지마는 난쟁이 아니가 난쟁이. 연분이라는 게 그거 참, 하야간에 말이 없고 일만 꾸벅꾸벅 한께 집안이야 태평이다마는 흐흐흐..."

"사람도 싱겁기는 말을 하다 웃기는 와 웃노."

"흐흐흐흣... 그놈의 집구석, 흐흐흣... 조선팔도 다 돌아댕기도 그렇기 송편겉이 꼭같은 며느리 둘을 골라오기 심들 기거마."

"작은아들 장가보냈다는 얘기는 못 들엇는데?"

"아들 하나에 며느리가 둘이라. 내가 머라 카든고?"

"..."

"아들 잘 둔 덕이라고 아까 말 안 하든가배. 새파랗게 젊은 놈이 또 날로 벌어서 사는 목수 주제에 말이다. 계집이 둘이라니? 허나 그 계집 둘이 다 보물단지니께 할 말 없지. 그러니께 어매가 순사한테 뺨 맞은 일이 있은 뒤 두만이 놈은 서울서 거산을 해가지고 돌아왔거든. 몇 해 번 돈 한 푼 축 없이 갖고 왔고, 그 돈이 수월찮았든 모양인데 계집을 하나 달고 왔제. 얼굴은 서울내기라 때가 쪼옥 빠졌더라마는, 참 내 골라도 우찌 그리 안성맞춤으로 골랐일꼬? 그것도 난쟁이라, 막딸이하고 꼭같더라 그 말이구마. 과분지 소박댁인지 그거는 모르겄고 아무튼 처니는 아닌데 서울서 주막을 했다든가 밥집을 했다든가, 머 그거는 그렇고 진주로 이사한 뒤의 소식이 들을 만하제. 가보고 온 사람의 얘긴데 벌어온 돈으로 몽땅 논밭전지를 사서 부모하고 본댁한테 맽기고오 두만이놈은 목수질을 하고 그것만도 오붓할 긴데 말이다, 밥 위에 떡이더라고 작은 며느리가 비빔밥집을 차렸다누마. 뭐 쪼깐이집이라 카든가? 비빔밥 맛이 천하일미라 손님이 대나고 대들고."

봉기 목구멍에 침 넘어가는 소리가 나고 다른 사람들도 입맛을 다시는데 분위기가 부뿟해진다.

"진주라는 데가 기생 많고, 내로라 하는 한량들도 다 와서 그 집 비빔밥을 묵고 간다 카니 그 집구석 문딩이 되듯 안 되겄나?"

"차돌 겉은 애비보다 한수 더 떠서 국량까지 넓으니 되겄다, 집구석 되겄어."

이쯤 되면 사람의 마음이란 또 심란해지는 모양이다. 땅이 꺼지게 한숨인 것이다. 공연히 코끝을 만져보고 목덜미를 쓸어보기도 하고

"이팽이하고 사돈 맺은 장서방도 그렇고."

"그 사람이야 졸부 소리 듣는 게 언제라고? 해마다 장배를 늘리서 지난 가슬만 해도 추수는 장서방 배가 독으로 실어날랐다 카이. 모두 망하는 판에... 뫼를 잘 썼든지 무슨 수가 있거마는."

나룻배는 평사리 나루터에 닿았고 세 사람이 배에서 내렸다. 서서방과 한복이 함께, 좀 떨어져서 망태를 둘러멘 봉기, 그 세 사람이 모래를 밟으며 둑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혜관이 바라본다. 서서방의 두루마기 자락이 바람에 펄럭인다. 혜관의 눈은 그들 뒷모습에서 마을 족으로 옮겨진다. 옛날 지조 있는 선비는 이 평사리를 지날 때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아니 보았다는 최참판댁, 고래등 같은 기와집주인이 바뀌어도 높이 그 권위를 자랑하고 있다. 언덕 아랜 읍하듯 엎드린 초가 마을, 이엉을 갈지 못하고 회갈색으로 변한 지붕이 눈에 띄고 마을길을 달려가는 아이들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사공."

혜관이 강심으로 나와 방향을 잡는 사공을 불렀다.

"."

"쌍계사 주지스님, 근간에 이 나룻배 타고 가시지 않든가?"

"못 보았소."

"그래?"

뱃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농부 세 사람은 담배를 피우며 계속하여 잡담을 하고 있다. 등짐장수가 어떻겠느냐, 여수나 삼천포에 나가서 미역, 건어 등속을 받아 산촌으로 도붓길 나가면 재미를 본다는 둥, 누가 그걸 몰라 땅을 파겠느냐 밑천이 있어야 그것도 할 수 있는 노릇 아니겠느냐는 둥, 차라리 도방으로 나가 날품팔이 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는 둥.

"처자식만 없다믄 멋이든지 해묵고 살겄는데, 훌쩍 떠날 수도 있고."

"말해 머하겄소."

하다 말고 얼굴을 숙이는 농부는 뱃바닥을 내려다보며,

"열 살 난 여식아이를... 자식 삼아 키우겄다는 사램이 있어서, 배나 곯지 말라고 데려다주고 오는 길인데..."

중얼거린다.

"말이 시영딸이지. 손쪽박으로 부리묵자는 기고... 갈 때는 그렇지도 않았는데."

다시 얼굴을 든 농부는 먼산을 한번 바라보고 나서 곰방대를 뱃전에다 대고 두드린다. 그리고 몇 번 빨아보고서 허리춤에 찌른다. 다음 나루터 화개에서 혜관과 농부 세 사람은 내렸다. 여식을 수양딸로 주었다던 농부는 주막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각기 제 갈 길을 가고, 혜관은 잠시 해를 가늠하듯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둡기 전에 갈라나 모르겠군.'

걸음을 떼어놓는다. 발바닥에 익어서 익숙한 이 고장 길이다. 그러나 혜관은 절과는 다른 방향을 잡아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다. 산골짜기 개울물은 얼음 밑에서 흐르고 있었다. 얼어붙은 오솔길을 지나고 낙엽이 푸석푸석 소리 내는 겨울, 메마른 수림을 뚫고 한참을 나가자 희뜩희뜩한 눈이 발아래 밟힌다. 혜관은 바랑을 끌러서 설피를 꺼내어 신발을 갈아 신는다.

'어둡기 전에 당도해얄 텐데...'

가파른 산길을 다시 오르기 시작한다. 능선을 따라 내려가고 오르고 비스듬한 암벽을 흰 노루 한 마리가 지나간다. 희귀한 흰 노루다. 살생 아니 하는 중을 알았더란 말인가. 개울을 끼고 이켠 길을 가는 혜관을 노루는 가던 길을 멈추며 물끄러미 바라본다. 얼핏 보기엔 사슴 같기도 하다. 흰 노루는 별안간 생각이 난 듯 뛰기 시작한다. 사방이 어둑어둑해올 무렵, 잎은 다 떨쳐버렸으나 볏가리 더미같은 산철쭉 가쟁이가 도랑을 향해 쓰러진 옆의 오솔길로 접어든다. 옥수수뿌리가 앙상한 뼈다귀처럼 남아 있는 화전의 빛깔은 우중충하고 삭막하다. 인가가 가까워진 것이다. 혜관은 잠시 숨을 돌리듯이 걸음을 멈추고 일찌감치 저녁 안개 속에 희미하게 드러나 보이는 초막 지붕을 바라본다. 높은 산봉우리는 운무에 가려져 천상에 두둥실 떠 있다. 다시 걸음을 옮겨서 혜관이 들어선 초막은 수년 전 환이 지나는 길에 요기를 청한 일이 있던, 그러니까 족제비 가죽을 벗기던 노인을 만난 바로 그 집이다.

"윤봉선생 계시오?"

"뉘시오?"

뒤꼍에서 돌아 나오는 사람은 백발이 성성한 예의 그 노인이다.

"혜관스님이구만."

"."

"일찍 돌아오셨소."

"이를 것도 없지요."

"그래 사람은 쉬이 만났소."

"어렵게 만났소이다."

노인은 빙그레 웃는다.

"방안으로 들어가시오."

방안으로 들어선 혜관은 바랑을 내려놓고 숨을 후우 하며 내쉰다. 방안이 어둡다. 혜관은 부스럭거리며 부싯돌을 찾아 흙벽에 꽂아놓은 관솔에 불을 댕긴다. 밖에도 어둠이 급히 몰려오고 있었다. 노인은 야트막한 기침 소리를 내며 부엌으로 들어가서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아침에 끓여놓은 식은 죽을 데우는 것이다. 불빛에 너울너울 춤을 추는 백발의 모습, 굵은 눈망울에 강한 눈빛이 물결처럼 미끄러지곤 한다. 버릇인 양 노인은 불길을 바라보며 귀를 기울인다. 발자국 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발자국 소리는 아니었고 바람 소리, 바람에 굴러가는 낙엽 소리다. 먼 숲속에서 짐승이 운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노인은 산나물죽을 바가지에 뜨고 포개진 그릇 두 개, 주석 숟가락 두 개를 합하여 한 손에 들고 한 손엔 죽바가지, 꼿꼿한 자세로 방으로 들어설 땐 허리를 구부렸다. 죽그릇을 앞에 놓고 노인은 물었다.

"서울 구경은 잘 하셨소?"

"구경이 다 뭡니까?"

"중이라고 구경 못하란 법도 없지 않소?"

놀리려 든다.

"구경은 커녕 동태가 될 뻔하였소."

"어서 드시오. 식기 전에."

"."

혜관은 합장하고 나서 죽사발을 받쳐든다.

"한데 환이는 있습니까?"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소. 나갔더라도 곧 돌아올 게요. 말은 없으나 묵척 기다리는 눈치였소."

한동안 침묵 속에 죽을 먹고 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순창 쪽에서 일이 좀 잘못되어 두 사람이 붙들러갔다는 소식이오."

노인의 말에 혜관은 관술불을 쳐다보며 우울해진다.

"나룻배에서 잠시 들었지만 환이는 자릴 옮기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글세..."

"아니면 만주 같은 넓은 천지를 한번 다녀오든지요."

"나도 그런 말을 비쳐보았소만 도통 갈 생각을 안 하는 모양이오."

"하기는 들은 바에 의하면 그곳 역시,"

"서울 형편이나 얘기하시오."

"소승이야 뭐 그냥 거리를 스쳐갔을 정도니 깊이 묐을 보았겠습니까마는 왜인들이 꽉 짜고 들앉아서 빈틈이라곤 도무지 있을 성싶지 않더이다. 멀쩡한 낯짝 하구서 연장 달고 다니는 조선 사내놈들이 많기는 합니다만."

"허허 스님께서 거 무슨 말버릇이오?"

"스님이고 나발이고 간에, 이거 윤봉선생 앞에 안됐소만, 소승이 보기론 그 많은 사내놈들 중에 보리죽 먹고 산길 걸으며 죽창이라도 다듬을 성싶은 위인은 눈에 띄지도 않구요."

지리산 산중까지 무사히 당도하고 보니 혜관은 비로소 화통이 터지는가, 말투는 매우 거칠다.

"자고로 흰밥 먹는 서울 사람들치고 똥 안 싸는 자 없고,"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노인은 도무지 감정의 기복을 나타내지 않으며 그러나 놀려주듯 되묻는다.

"겁쟁이라 그 말씀이외다. 흰밥 먹는 중놈까지. 중이 동냥 가면 언제나 먼저 짖어대는 게 강아지더라 했더니 꺼져버리더군요."

"괄시를 단단히 받았구먼."

", 흰밥 처먹는 서울 사람들 눈엔 자고로 적을 보면은 적의 눈까리가 화등잔만해서 쥐구멍밖엔 아니 찾는다 그 말씀이오."

씨근덕거린다. 서울 가서 당한 일이 이만저만 유감이 아닌 모양이다.

"작위 거절한 것만 가지고도 지조 높은 선비로 뽐내는 게 서울 양반들 아닙니까? 울화통 달래노라 기생집에 처박혀서 기생이나 껴안고 술 처먹는 자도 우국지사고요."

"소승이 찾아가 이부사댁 자제만 하더라도 뭐 왜말 배우러 다닌다 든가요?"

어세는 약했으나 내뱉듯 하는 말이다.

"그쪽 소식은 좀 들었소?"

", 대강은."

짤막하게 대답하고 나서 혜관은 자기 생각을 모아보듯 눈을 깜박깜박한다. 간신히 부아통은 가라앉힌 눈치다.

", 어쩌면 오백 섬지기 땅이 떠오를 것 같습니다."

노인은 그 말에 대해 더 이상 캐묻질 않는다.

"그러면 소승은 다녀와야겠습니다."

혜관은 일어섰고, 마당을 나섰을 때 노인은 혜관에게 들고 있던 ?불을 넘겨준다.

"그럼 다녀오시오."

혜관이 횃불을 들고 찾아간 곳은 초막에서부터 오 리즘 떨어진, 깊숙한 골짜기였다. 목기막 비슷한 곳, 그 앞에 걸음을 멈추는데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혜관은 횃불을 들고 천천히 돌아선다.

"이제 오시오."

잠긴 목소리가 마치 너울을 타고 건너오듯 들리는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혜관은 길을 비춰주듯 횃불을 치켜들고 서 있을 뿐이다. 불빛 아래 나타난 사내, 쇳덩이같이 곧은 몸의 사내, 눈이 번쩍 빛을 발한다. 꾹 다물린 입술과 짙은 눈썹, 얼굴에는 온통 붉은 불빛과 검은 어둠이 너울거리는데 그것은 괴기스러운 힘이며 광기며 절망의 정열이다. 뚜벅뚜벅 혜관 옆을 지나서 목가막 안으로 들어가고 혜관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간다. 목가막 바닥에는 모닥불이 타고 있었다. 횃불을 끈 혜관은 모닥불 앞에 앉는다. 환이도 맞은 켠에 웅크리고 앉는다. 눈은 내리깐 채 혜관이 내어놓은 말에는 아예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태도다.

"서울 가서 이부사댁 자제를 만났네."

"..."

"소식은 소상하게 들었다. 잘 있다더군."

환의 눈까풀이 희미하게 흔들린다. 그러나 그것은 불빛 탓인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형편인 것 같더구먼."

혜관은 그쯤 운을 떼어놓고 나서 차근차근 전후 사정을 상현에게서 들은 대로 얘기를 해나간다. 얘기가 끝나자 끝난 뒤에도 환이는 아무런 감정의 표시도 말도 없다.

"순창 쪽에서 두 사람 잡혀간 얘기 들으셨수?"

불쑥 말을 했다.

"들었지, 방금."

"혜관스님."

"."

"이젠 그 땅을 처분해도 좋을 성싶소."

혜관은 힐끗 쳐다보고 나서 목을 젖히며 천장을 올려다본다.

"억새풀같이 끈질긴 계집아이구먼요."

"..."

"역시 최참판네 핏줄이구먼."

환이는 갑자기 세운 두 무릎 위에 얼굴을 묻으며 웃는다. 나직이 목소리를 굴리며 웃는 것이다. 바람이 낙엽을 몰고 가는 소리, 암벽을 쓸고 지나가는 소리, 망령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바람결을 타고 오는 산짐승들의 울음소리, 모닥불이 허물어지면서 불꽃이 튄다.

 

 

3. 산청장의 살인

한밤중 혜관이 눈을 떴을 때, 그때까지 환이는 두 무릎을 세운 채 모닥불을 지켜보고 앉아 있었다. 계곡을 거슬러 올라오는 바람 소리는 칠흑을 향한 산의 울음같이 무시무시하게 들려온다. '저놈의 눈까리엔 잠도 없나부지.' 입맛을 다시며 잠이 안 깬 시늉을 하고 돌아 눕는다.

'내가 저 빌어먹을 놈이 파놓은 함정에 빠졌거든.'

혜관은 가끔 죽은 우관스님을 원망한다. 그놈의 땅 오백 석을 위임받지만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느 절간에서 팔상도나 그리며 이 고생은 아니 했을 것을 하고. 한가로운 절 생활이 그리워서라기보다 법의 입은 몸으로 피비린내 속에 서 있다는 것이 깨달아 지면은, 제에기 죽어 육신이 썩어지면 그만, 중생이 갈 극락이 있긴 어디 있어? 마음속에 극락이지. 재가에서 오종계 지키는 자 몇이며 중이라고 십종계를 다 지키나? 하다가 부처님께 무안쩍어서 변명 비슷한 원망이 나온다. 화필을 놓아버린 아쉬움도 있었다.

'빌어먹을, 저놈 눈까리엔 잠도 없나부지. 저 대가리 속에는 지리산이 가득 들어차 있을 게야.'

혜관 눈앞에 불길이 솟아오르고 등에 꽂힌 비수를 타고 피가 넘쳐흐른다.

'나무관세음보살!'

골짜기마다 숨어사는 화전민,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다니는 남사당패들, 인근 고을마다 장터마다 그 눈들이 떠오른다. 수효는 적으나 절을 굽히지 아니 하고 가장 혹독한 수난을 겪었던 그들의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길 하나하나가 떠오른다. 다음은 어디에서 불길이 솟아오를 것이며 어느 등바닥에 비수가 꽂혀질 것인가. 숨이 가빠온다. 재채기가 나오려 하고 목구멍이 간지럽다. 혜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는다.

"여태 안자는 게야?"

"자야지요."

의외로 부드럽고 어진 음성이다.

"새벽이 오는가본데, 어서 자지 그래."

"."

환이는 곰 가죽을 몸에 둘둘 감고 모닥불로부터 저만치 떨어진 벽을 향해 드러눕는다. 우우우 - 계곡을 거슬러오고 휩쓸고 내려가는 바람 소리, 소리 사이를 타고 날카로운 산짐승의 울음이 아슴푸레 들려온다. 약육강식의 피비린내가 풍겨올 것만 같은 밤이다. 환이는 곧 잠이 든 모양이었고 모닥불 앞으로 바싹 다가앉은 혜관은 나무토막 두 개를 모닥불 위에 올려놓는다.

'나무관세음보살.'

불꽃을 튀기며 올려놓은 두 개의 나무토막에 불길은 옮겨”L는다. 한 번 잠이 들기가 무섭게 환이는 깊고 바닥 모를 수마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지 송장처럼 움직일 줄 모른다. 불빛이 혜관의 골진 머리빼기를 비춰준다.

'중놈이 하필이면 동학에 끼어들어가지구... 생각해보면 우관스님도 나같이 땡땡이중임에 틀림없을 것 같고 십종계를 지켰을 리 만무야.'

모닥불이 무너지면서 반쯤 타고 있던 나무토막이 나둥그러진다. 제자리에 집어다놓고 혜관은 두 팔을 쭉 뻗으며 하품을 한다. 진심은 어느 누굴 원망하는 것이 아니었다. 파놓은 함정에 빠졌다는 생각이 들 적에도 환이 괘씸하거나 미운 것은 아니었다. 후회하는 것도 아니었다. 후회는커녕 국난에 승병을 끌고 출전한 서산대사라도 된 듯 우쭐해질 때가 있다. 승병이 없는 것이 한탄스럽긴 했지만 그러나 전국에 흩어진 사찰에 뜻있는 동조자가 없지도 않아 혜관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이것은 윤씨부인이 너에게 물려준 전답 문서야. 차후 혜관에게 맡길 터인즉 받고 아니 받는 것은 너의 뜻대로 할 것이고."

우관은 다음 말을 잇지 않고 환이를 외면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러간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땅은 출가시 윤씨부인이 친정서 가져온 것... 최참판네하고는 아무 연고 없는 땅이다."

음성이 낮았다. 그리고 우관은 혜관을 쳐다보았다. '이 땅이 어째 환이에게 가는가, 그건 자네 좋을 대로 생각하게나.' 그런 말을 눈은 얘기하고 있었다. ', 스님. 알고 있소. 윤씨부인께서 환이에게 땅을 남기고 간 연유 말입니다.' 수락도 거절도 없는 환이 얼굴에 모멸의 빛이 일렁였다. 별안간 우관은,

"환이 이노옴! 듣거라. 네가 어찌하여 인륜을 범한 죄인으로서 원한은 품느냐!"

눈을 부릅뜬다.

"여인에게는 재난이 있었을 뿐, 원한을 풀고 명복을 빌어야 하거늘."

숨결이 거칠어진 우관은 눈을 감는다. 끝내 말 한마디 없이 눈을 감고 앉은 우관에게 절을 하고 일어선 환이는 다음날 새벽 절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은 서희 일행이 간도로 떠난 그해 가을 어느 아침나절이었다. 우관은 세상을 떠났고 혜관이 그를 맞이했다. 행색은 그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거지꼴이었다. 바람과 햇빛에 거칠어진 검은 얼굴이며, 우선 혜관은 우관의 죽음을 한마디로 끝내고 서희에 관한 얘기를 좀 길게 상세하게 들려준다.

"그래서요?"

와락 떼밀어내는 차고 모지락스런 반문이다.

"아니 뭐, , 그렇다는 게지."

혜관은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 서희 얘기를 장황하게 한 것은 서희의 유일한 혈육이 환이라는, 그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심증이었을 뿐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래서 혜관은 당황했다.

"제가 이곳에 찾아온 것은 오백 섬지기 땅 때문이오."

"...?"

"군자금으로 쓸려구요."

", 뭐라구?"

"군자금으로 쓰겠다, 그겁니다."

"그러면은 의병을 일으키겠다 그, 그 말인가?"

"아니오."

"...?"

"동학군을 모아보겠소."

"동학군이나 의병이나."

"의병 잡아먹는 동학군 말입니다."

"의병을 잡아먹다니!"

"..."

"의병을 잡아먹다니... 히기는 어떻게 쓰든 그건 너의 몫이니까... 돌아가신 두 분의 소원도."

하다가 혜관은 말을 뚝 끊었다. 환의 눈이 무서웠던 것이다.

'빌어먹을! 지가 잘한 건 뭐 있다구?"

그러나 우관처럼 어찌하여 인륜을 범한 죄인으로서 원한을 품느냐고 소리지를 수는 없었다. 넓고 큰 발이 덥석덥석 비난의 심정을 밟아 문드러뜨리는 것 같았다.

"남원에 사는 길서방이라고, 아주 신실한 사람인데."

혜관은 문서를 꺼내며 지껄였다.

"그 동안 길서방이 그 땅을 맡아주었는데... 그러니까 세 번 추수를 했고,"

꺼낸 문서 속에서 명세서의 장부를 뽑아내어 손 끝에 침을 묻히며 혜관은 설명을 할 찬인데,

"그거 보자기에 싸십시오!"

환이 말했다.

"?"

장부를 넘기려다 말고 혜관이 환이를 쳐다본다. 환이 얼굴에 옷음기가 있었다.

"...?"

"스님."

대답 대신

"뭐가 좋아서 웃는 거야."

혜관의 목소리는 굵고 노기에 차 있었다. 불거진 양쪽 관골이 시뻘개졌다.

"금수도 제 새끼 제 어미가 죽으면 슬피 우는 법인데 웃어? , 웃어? 비록 추, 출가는 하셨을망정 명색이 백부신데, 생전 네놈 때문에 그 얼마나 마음을 썩였는가 나보다 너, 네가 더 잘 알 거 아니야. , 그 죽음을 듣고도 웃어? 발칙한 놈! 쓸개 빠진 놈이다!"

주먹을 쥐고 삿대질을 한다.

"인륜을 버린 계집년 하나 때문에 신셀 쫄딱 망친 놈이, , 그러고도 못 잊어서 걸인 행각으로 날을 지새우는 놈이, 계집은 또 얻으면 계집이야! 자식은 또 낳으면 자식이고오! 네 부친이 어떻게 도, 돌아가셨나! 설마 그걸 잊지는 않았겠지! 만백성을 살리겠다고 칼을 뽑은 장수가 형장의 이, 이슬로 사라졌는데 그 부친을 위한 애간장은 없었더란 말이냐! 지금이 어느 시절이지!"

기고만장이다.

"뭐 어쩌고 어째? 의병을 잡아먹겠다구? 그래 의병 자, 잡아먹겠으면 읍내 헌병대로 가면 될 거 아니냐! 군자금 투, 투둑이 주, 줄게다! 이 천하의 역적놈아! 부친 얼굴에 똥칠을 해도 유분수지."

계속하여 욕설을 퍼붓던 혜관은 제풀에 놀라서 입을 다문다. 눈을 꿈벅거리며 환이를 바라본다. 어째서 이리 됐더라? 행방불명이 된 것을 두리번두리번 찾는 눈이다. 옳지! 네놈이 웃은 때문이었다.

"의병을 잡아먹든 왜병을 잡아먹든 일어서시오."

"안 일어서겠다!"

"나랑 함께 갑시다."

"안 가아!"

"가자면 가는 게요."

환이는 혜관의 법의를 확 잡아챈다. 살기를 뿜은 눈이 이글이글 혜„œ의 얼굴 위로 내리 쏟아진다. 혜관은 비슬거리며 일어섰다. 실상 비슬거리는 척했다. 무안쩍어 그랬었다. 마음속은 후련하고 통쾌했다. 전답 문서랑 든 바랑을 짊어지고 절문을 나섰을 때 환이는

"환쟁이라 다행이오."

"...?"

"떠돌이 중, 매인 몸이 아니어서 그렇다 말이오."

"어딜 가는 거야? 남원의 길서방을 찾아가는 겐가?"

"아니오."

"그럼."

"가시면 압니다."

두 사람은 구례와는 방향이 다른 세식쪽을 향해 발을 옮겨놓는다. 산죽 지대, 갈대밭을 지나간다. 앞서가던 혜관이 물었다.

"그 동안 어디 가 있었나?"

"조선 팔도,"

하다 말고

"제주도에도 가보구요. 저어기 북쪽, 두만강까지 가보았소."

혜관이 돌아본다. 빨갛게 물든 열매 네댓 개 붙은 망개 가지 하나가 환의 구멍 난 백립 갓전에 꽂혀 있다. 오는 도중 꺾어서 꽂은 모양인데 혜관은 처음으로 환이 백립 쓴 것을 깨닫는다. 차림이 너무 남루하여 으레 그러려니 생각한 탓이다. 그렇다면 환이는 진작부터 우관이 죽은 것을 알았더란 말인가. 중이란 절에서 죽었으면 그만이지 상을 입을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아니면 길가다 주운 것을 아무 뜻 없이 머리에 올렸을까? 망개는 왜 꺾어 백립에 꽂았는가. 저게 그러면 온정신일까? 설마 실성한 것은 아니겠지. 혜관은 생각하며

"조선 팔도... 제주도 두만강까지 뭐하러 갔었댔나."

물었다.

"홍길동이 제줄 배울려구요."

"..."

'점점 한다는 소리가 괴이쩍구먼. 설마 실성한 건 아닐 텐데?'

"처처에 사람도 많이 삽디다. 인심 후한 데도 있구 각박한 데도 있구요."

혜관도 발이 빠르지만 환이도 산을 타는 속도는 옛날과 다름없이 비상하다.

"남해, 어느 섬에 갔다가, 배를 탔었지요. 그 배 안에서 울고 있는 어떤 여인네를 보았소."

"..."

"친정 가는 여인이었소. 친정어머니, 동생들이 굶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을 자맥질해서 잡은 해물로 곡식을 바꾸어 가는 길인데 바다 복판까지 나온 배가 굽이를 돌 때 뱃전에 놓은 곡식 자루가 물에 빠져버렸던 게요... 세상에는 수천 석, 수백 석 전답을 가지고 시집오는 여인도 있는데 말이오."

'윤씨부인을 빗대어 하는 말이겠다? 미친놈의 언사는 아니구먼.'

이윽고 해가 서너 뼘이나 남았을 무렵 혜관과 환이는 운봉노인이 있는 초막에 당도하였다. 운봉노인은 혜관이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눈치였다.

"나 양재곤이오."

먼저 통성명을 한다.

"소승은 혜관이라 하오."

"기연이구려."

"?"

운봉노인은 활기에 차서 껄걸 소리내어 웃었다.

"아 그렇지 않소이까? 동학과 불교는 그다가 사이가 좋은 편도 아닌데 말씀이오. 스님께서는 우리 일을 도우려고 발 벗고 나서주셨으니."

"아니 무슨 말씀이오? 소승은 도통 모르겠소이다. 발 벗고 나서다니."

"몰라도 할 수 없는 노릇, 몰랐다면 이곳까지 오시기가 불찰이었소."

운봉은 흰 수염을 흔들며 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장년 시절 일군을 질타하던 풍모가 늙은 모습 속에서도 약여하다.

"오늘 밤 이곳에 유하시면서 스님이 납치되어온 까닭을 들으시오."

저녁을 먹은 뒤 밤은 이슥해졌다. 관솔이 타는 방안에 운봉과 혜관이 대치하고 환이 옆자리에 비켜 앉았다. 혜관 쪽에서 먼저 말한다.

"아까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국은 그 땅 때문인 것 같은데 소승으로선 그것을 환이 개인이 쓰든 군자금으로 쓰든 하등 관여 할 이유가 없고, 하루 속히 넘겨주는 게..."

"아니외다."

운봉은 말을 막았다.

"이쪽에서 바라는 것은 군자금이려니와 곤궁한 살림을 규모있게 살아줄 가모요. 혜관께서 우리네 살림을 맡아주슈."

"살림은 무엇이며 가모는 또 무엇을 이르는 말씀이오? 불도 닦는 중을 보고 도통 모를 얘기요."

"중은 목탁만 두드리고 우리 동학도는 사람만 죽이구."

"그야 뭐."

"중은 비단 가사나 걸치고 그렇게들 죽은 망령에게 지장경이나 외주겠다 그거요?"

"지장경이나마 소승보고 그러신다고 이 땡땡이중 무슨 힘이 있겠소?"

"괴승이 되고 요승이 되면은 힘이 절로 생길 게요. 땅 밑에서 썩을 황천객한테 지장경 외느니보다 살아 있는 사람 위해 칼을 드는 편이 극락길에 가까울 게요."

계속하여 운봉은 객담투였다. 그러나 밤을 새워 얘기를 나눈 다음날 서로간에 양해가 되었고 혜관은 길을 떴다. 그러나 의병 잡아먹겠다던 환의 말을 혜관이 깨닫기는 훨씬 후의 일이다. 화적떼로 타락한 무리들, 일본 토벌대에 쫓겨만 다니는 허약한 선비가 이끈 의병들을 환이는 끈질기게 추격하면서 마치 그림자처럼 그들 무리에게 달라붙어 방화 살인을 감행하고 그들에게 범행을 전가하는 수법을, 그러나 혜관은 별로 놀라지 않았고 환이를 비난하지 않았다. 어차피 일은 일이요, 눈물은 눈물. 이쪽에 전혀 희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느 길목이든 환이 수하는 복병이요, 화적떼와 빚 좋은 개살구격인 의병들은 별 수 없이 노정되는 정규군 이었다고나 할까. 아침 안개를 등지고 혜관이 목기막 안으로 들어갔을 때 환이는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무슨 염불을 산이 떠나게끔 하는 겁니까?"

혜관은 씩 웃는다.

"간밤에 왕생한 이곳 산 식구를 위해 경을 외웠네."

"고라니라도 죽어 자빠져 있습디까?"

"무엇인가가 죽긴 죽었겠지. 안 죽었으면 굶어죽는 놈이 생겼을 테고."

"곧 길 떠나야 합니다."

"아침은 먹어야지."

환이 고개를 흔든다.

"지금부터 떠나야, 가다가 강쇠의 집에서 아침을 해야겠소."

"그러지."

"강쇠의 집에서 스님은 순창으로 가시오. 그곳에는 천서방이 기다리고 있을 게요."

"알았네."

뚱뚱한 몸을 기울이고 을씨년스럽게 행구를 챙긴 혜관은 가진 것 없는 환이와 함께 목기막을 나선다. 숯 굽는 사내. 강쇠의 초막에 당도했을 때 해는 떠올랐다. 오는 도중 땅을 처분해도 좋을 성싶다던 간밤에 한 말의 결론을 환이는 내리지 않았다. 혜관은 역시 땅 처분보다 서희의 소식을 궁금하게 여겼을 환이 심정을 짚을 수 있었다. 대문에 혜관도 어떻게 할까 보냐 묻질 않았고. 강쇠 모친이 지어낸 아침을 서둘러 먹은 혜관은 순창으로 떠났다. 떠나는 뒷모습을 쳐다보다 돌아선 환이는 수수깡 한아름을 안고 부엌으로 들어가는 강쇠를 불러 세운다.

"산청으로 가야 하네."

"나도 갑니까?"

", 내일 산청장이 선다."

"그라믄 이서방한테 기별을 했십니까?"

"사람만 잡아놓으라 했다. 그러니 서둘러서 가야 한다."

덩치가 크고 사팔눈인 강쇠는 손끝으로 입술을 만지며 생각에 잠긴 환이를 쳐다보는데 눈은 환이를 향하지 않고 한눈을 팔고 있는 것만 같다.

"어중간한 때라 장꾼이 모이겄십니까?"

"장은 한산할 게고 파장도 이르겠지. 그러나... 서둘러봐야겠어. 떠날 준비나 해."

환이 또래로 보이지만 실상 나이는 강쇠가 아래였다. 사팔뜨기만 아니었다면 과히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그의 모친이 만나는 사람마다 들려준 얘기에 의하면 강쇠는 쌍둥이 중 살아남은 아들이라는 것이다. 갓난아기 적에 하도 영약하게 우는 한 놈을 업고서 나무도 하고 보리방아도 찧고 그러다보니 다른 한 놈은 방에 혼자 누운 채 늘 밝은 방문 쪽만 쳐다보아서 그래서 사팔뜨기가 됐다는 거였다. 그 말을 할 때마다 강쇠의 모친은 안쓰러워하곤 했다. 얼마 후 두 장정은 칡덩굴로 얽어맨 목기 한 짐을 짊어지고 나섰다.

"오매 갔다오겄소."

헤진 수건을 쓰고 허둥지둥 도랑까지 나온 강쇠의 모친은,

"강쇠야."

강쇠가 돌아본다. 모친은 팔짱을 끼고 오들오들 떨고 있다.

"치븐데 들어가소."

"운냐."

"다니올 깁니다. 내일이나 모레."

"그래 어 오니라이. 에미 속 썩이지 말고오."

"."

환이는 햇살이 퍼져나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두 장정은 짐 진 사람 같지 않게 산길을 성큼 성큼 걷는다. 이끼가 말라붙은 바위는 강쇠 모친의 검버섯 핀 얼굴 같다.

"성님."

"."

"인이가 병들어 죽었다는 소식이오."

"..."

"과부가 어찌 살란고 모리겄소."

산비둘기가 푸드덕 날아오른다. 발밑의 눈이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낸다. 얼음 밑을 흐르는 물 소리---

"니가 데려다 살려무나."

강쇠의 양 뺨이 벌개진다.

"우찌 친구 가숙을, , 그럴 수는 없소."

"그럴 수 없다는 법도 없지. 왜 억지로 서럽게 살아야 하나. 흐흐... 흐흣..."

나직이 웃는다.

"억지로 서럽게 사는 사램이 어디 있겄소. 그렇기 말한다믄야 성님이 더 그렇지 않소."

"..."

"나겉이 오양이 이런 놈을 좋다 하지도 않을 기고."

"빡빡 얽은 곰보도 계집 있더라."

"그런 이야기사 머, 아즉 할 때가 아니고... 인이도 고생만 하다가 죽었지요. 하기사 살아남은 우리도 밝은 세상 볼 것 같지도 않지마는."

"..."

산청에 들어선 환이와 강쇠는 객줏집에서 짐을 풀었다. 객줏집 주인 석포가 집 마당에서 가오리 껍데기를 벗기고 있다가 칼을 놓고 일어섰다.

"하따, 목기장수 오래간만에 보겄구마는. 그새 가물치 콧구멍맨치로 와 그리 볼 수 없었는가 모르겄소?"

"보믄 이 갈리고 안 보믄 보고 접다 그 말이구마. 이분에도 밥값은 외상일 긴데 우짤 기요?"

숯 굽는 사내요 총각인데 강쇠의 수작은 제법 능란하다.

"아아 짐 지고 왔는데 밥값 걱정하는 객줏집도 있더란 말이오?"

"거 짜질짜질 웃는 눈 본 게로 이분에도 안사람 속깨나 썩있겄소."

"안사람? 총각도 그런 말 할 줄 아나?"

"장가든 벵신보다 실속이야 이쪽이지. 사팔뜨기 눈은 안 닮았인께."

강쇠는 완강한 두 어깨를 쑥 펴 보인다.

"이거, . 잡놈 찜찌묵겄네?"

환이는 시죽시죽 웃고 서서 구경만 한다.

"주인장, 이제 금나해둡시다. 우리 새각시 겉은 성님 간 떨어지겄소."

항용 시시덕거리기를 좋아하는 장돌뱅이, 객쩍은 소리를 늘어놓던 이들 주객은 그러나 밤이 깊어지자 골방에서 술상을 마주하고 오랫동안 쑤군쑤군 얘기를 나눈다.

"지금 용줏골에 숨어 있는 무리들은 지난 가슬에 진주 근방을 쓸고 다니든 화적패들이오. 그 동안 자세히 알아보았는데 서른 명은 미처 못 되고, 스무남은 명, 힘깨나 쓰는 모양이지만 머리 쓰는 놈은 한 놈도 없고,"

석포의 설명이다.

"의병에서 갈라져나온 패거리요?"

강쇠가 묻는다.

"하여간에 처음에는 그랬던 모양인데 건달 한 놈이 졸개 몇 놈을 구슬러내어 별도로 무리를 만든 모양이라. 이놈들이 못됐고 사납기로 이름이 났는데 민가에 불 지르고 재물 뺏고 여자들을 겁탈하고 업어가기 일쑤, 그러면은 어쩌해서 토벌대가 손을 대지 않고 있느냐, 이상한 얘기 아니겠소?"

석포는 술을 마시는 환이를 쳐다본다. 환이는 다음 말을 계속하라는 듯 잔을 비우고 다시 술을 부어 마신다.

"그러니까 간악한 왜놈들이 셈을 놔본 거지요. 양민들이야 어떻게 시달림을 받든지 간에 제놈들에게 오히려 유리하다는 것 아니겠소? 첫째는 백성들이 의병에 넌더리를 낼 것이라는 셈이고 실컷 시달린 끝에 토벌대가 들어간다면 환영을 받을 것이란 속셈이겠지요. 화적놈들 목표가 왜놈들 아닌 백성일진대 얼마 동안 관망한다 해서 손해볼 것 없잖습니까. 결국 그러니 불 지르고 재물 뺏고 여자를 겁탈하고 그런 포악한 행위 그것도 가증스럽기 짝이 없으나 그것에 못지않게 근심스런 것은 일본에 저항하는 일체 행동에 대해서 민심이 멀어져갈 것이란 점이오. 악랄한 왜놈들이 노리는 게 바로 그 것. 민심이 깨어지고 흩어지고 종래는 왜병들에게 협력하는 사태까지 빚어진다, 생각할 수 있는 일이지요."

석포의 논리는 정연한 편이었다. 객줏집 주인으로 생업을 영위하고 있으나 석포는 동학 잔당 중에서 상당히 유식한 편이었다. 환이보다 다섯 살이 위인만큼 동학 전쟁에 참가하여 경험도 풍부했다. 석포는 김개주보다 운봉 양재곤 계열의 사람이다.

"그러나 종전과는 달리 우리도 되도록, 설사 허약하다손 치더라도 의병들한테 누를 끼치는 일은 삼가야 할 것 같소. 화적단놈들은 물고 늘어지는 편이, 그게 내 생각이오."

강쇠는 고개를 끄덕인다.

"성님 이서방 말심에도 일리가 있소. 그런 형편으로는 화적 놈들이야말로 토벌대 이상으로 잡아 없애야 할 거로 생각이 되구마요. 그런데 그거는 그거고 이번 일에 있어서 근심이 되는 것은 그놈들 산채에다가 흔적을 남기고 또 그쪽으로 도망을 가믄서 유인한다 카더라도 말입니다. 왜놈들이 속을 것인지 그기이 걱정이구마요."

"그거는 염려 없네. 서로 내통해 있는 거는 아니니까."

환이는 두 사람 사이에서 듣고만 있다가 처음으로 물었다.

"지금쯤 일은 벌어졌겠지요."

"아마 지금쯤... 틀림없이."

다음 날 산청 장바닥이 술렁거렸다. 이상한 소문이 쫙 퍼졌다. 잡화상을 하는 일본인 집에 도둑이 들었는지 의병의 소행인지 알 수 없으나 적잖은 물건을 도난당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남겨놓고 간 물건이라는 것도 쓰지 못하게 모두 부숴버리고 갔다는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라누마. 왜놈 왜년을 묶으고 입에는 재갈을 물리어 나무에 매달아놨다든가."

"내가 듣기로는, 찔러직있다는 말도 있고 벽에다 온통 황을 그리놨다 카데. 뭐라고 쓰이 있는고 하니, 무슨 머이라 카더라? 의병이 왔다 가노라 그렇기 씌어졌다든가?"

"그러믄 그냥 도적놈이 아니고 의병이다 그 말이가?"

"공연한 소리들 하네. 아침에 내가 그 일본 계집을 그 집 앞에서 보았는데? 얼굴이사 죽을 상이더라마는."

"하기야 하도 세상이 분분하니께 별의별 말이 다 나돌지."

세상이 분분하여 별의별 말이 나돈 게 아니라 어젯밤 일본인 잡화상에 괴한이 침입한 것은 사실이었다. 일본인 부부를 나무에 매달기까지는 아니 했으나 묶고 재갈을 물려놓고, 가져간 물건은 많지 않았지만 온통 부숴놓고 간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술렁거리는 장터에 왜순사 하나가 매눈이 되어 벌써 몇 차례 순사를 했는지 모른다. 환이와 강쇠는 다른 전과는 좀 떨어진 곳에 목기를 쌓아놓고 엉거주춤 서있었다. 때 묻은 무명 수건을 쓰고 누덕누덕한 손저고리 속에 두 팔을 찌르고, 덜덜덜 떨면서 서 있었다.

"아이고오, 날씨도 고추겉이 맵다. 이거, 오늘 장사하기는 다 글렀구마. 무신 일이 있어났다고 술렁술렁하노 말이다."

강쇠가 씨부렁거렸다. 환이는 눈을 내리깔고 있을 뿐인데 가끔 눈을 들어 물건 흥정을 하고 있는 건달풍 사내들 서너 명 쪽을 주의 깊게 바라보곤 했다. 복작거리는 장꾼들 속을 헤치고 들어갔던 순사는 샤벨을 절렁거리며 되돌아 나온다. 건달풍의 사내 세 명이 선 자리에서 이동하고 이동하면서 환이를 쳐다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건이 터졌다. 건달풍 사내들이 순사 둘레를 싸는가 싶더니 외마디 소리와 언제 소매 속에서 팔을 뽑았는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였더란 말인가, 소매 속에 두 팔을 찌르며 환이는 강쇠 옆으로 돌아오고 있었으며 건달풍의 사내 세 명이 달아나는 것이다.

"샐인났다아!"

"순사가 찔려죽었다아!"

", , 저기 달아난다아!"

엎어진 왜순사 등에 비수는 깊숙이 꽂혀 있었다. 피는 순사복 바짓가랑이로부터 흘러내렸다. 장세 걷으러 다니던 사내가 요란하게 호각을 울렸다. 장꾼들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흰옷을 입은 건달풍 사내들이 저만큼 뛰어간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순사 하나가 그들 뒤를 쫓아가고 뒤늦게 나타난 헌병들이 공포를 쏘아대며 (이미 상당한 거리였으므로) 달려간다. 다음날 아침 환이와 강쇠는 팔다 남은 목기와 목기를 팔아 사들인 소금을 짊어지고 고개를 넘었다. 그들은 토벌대가 용줏골 화적의 산채를 포위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순경을 유인해간 건달풍의 사내 셋도 무사하게 도피했다는 것, 용줏골 산속에 흘려놓은 왜인잡화상의 물건 등을 토벌대가 수거했다는 얘기도 듣고 떠나온 것이다.

"순차에 잡힌 그 애들이 풀려나올지도..."

환이 중얼거렸다. 대낮, 사람이 득실거리는 장터 한복판에서 아슬아슬한 모험을 한 데는 환이의 의도가 달리 있었다. 혐의를 용줏골에 은거한 화적떼들에게 명확하게 돌려놓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4. 개화당의 반개화론

구리개에 있는 황춘배의 집 사랑방에서 일본어 교습이 막 끝나고 방 임자 황태수가 두루마기 자락을 여미며 황급히 일어섰다.

"전갈이 와서 잠시 아버님께 다녀와야겠소."

"아아니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수작이야. 생일술 먹자 해놓구서 이건 누굴 희롱하는 겐가?"

서의돈이 빨끈해서 눈알을 굴린다. 울퉁불퉁한 얼굴, 몸집은 작고 대추씨같이 야무지게 생긴 사내다.

"성미도 급하긴, 내 올 때까지 설마 술독 바닥이 날까? 곧 돌아올테니 그 동안 술들 하구 게슈."

서의돈은 금세 누그러져서 허허 웃는다.

"그렇다면야 방 임자 까짓것 있으나마나. 기생도 아니겠고,"

태수는 나가고 방안에 남은 세 사람은 화롯가에 손을 쬐기도 하고 담배를 붙여물기도 한다. 일본어 강사격인 임명빈이

"까막눈 늙은네, 보일 문서가 있어 그러나부지."

중얼거렸다. 고수머리에 두상이 크고 까만 양복 차림이다.

"있는 서사는 무엇에다 쓰려구? 그것도 돈 드는 물건이라 아끼는 겐가?"

"서사는 서사구 아들한테 보일 게 따로 있는 게지."

강사 교습생 사이지만 친구간인 이들의 대화는 스스럼이 없다. 연소한 상현은 교과를 계속하는 자세로 말없이 앉아 있다. 임명빈은 담배 연기를 푸 하고 내어뿜으며 다시 말했다.

"내 일전에 들은 얘기가 있는데 그 일 때문인지도 모르겠군."

"무슨 얘길 들었기에?"

다잡듯 묻는다.

"조준구 그자가 말이야. 자금 때문에 땅문서를,"

"하하하 알겠네. 자네 부친이 다릴 놨군 그래. 황부자한테 말야."

"그런 셈이지."

임명빈이 싱그레 웃는다.

"자알 망하게 생겼다, 생겼어. 임역관의 줄타기가 보통인가? 황부자는 어떻구? 쇠전 냄새라면 천리 밖에서도,"

"만리 밖에서도, 해야지."

만리 밖이란 청나라와의 밀무역으로 거상이 된 황춘배의 내력을 꼬집는 말이다. 한편 임역관이란 다름 아닌 임명빈의 부친이며 전직이 역관인데 왕시 조준구가 매우 불우하여 권문세가에 발붙일 길도 없었을 무렵 역관 자리나마 하나 얻어서 권력에 접근하려는 어리석은 꿈을 가지고서 임역관 집을 드나든 일이 있었다. 그런 연고로 요즘 임역관은 조준구의 문객 노릇을 하고 있는 터이다.

"만리 밖이고 천리 밖이고 간에, 늑대 같은 늙은이... , 뻔히 다 알고서,"

하다 말고 서의돈은 이마를 숙이고 장난꾸러기처럼 킬킬 웃는다. 임명빈은 상현을 힐끗 쳐다본다. 상현은 관심 깊게 듣고 있는 척했으나 기실 혜관에서 서희로, 서희에서 길상에게로 생각이 전전하고 있었다.

"늑대라 한 대도 조준구 그자는 뭐 숙맥인가? 남의 만석 살림 꿀꺽 삼켰다면 그 수완도 알아봐주어야 한다구."

", 임자 없는 시골 땡뙈기, 그거 집어삼킨 수완으로 이 바닥에서 광산을 해? 하하핫 하하핫... 약은 쥐가 밤눈 어둡는 얘기가 있지."

"어두울 것도 밝을 것도 없어.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그놈의 신회사령인가 뭔가 땜에 사실 조선 사람들 사업하기가 어렵게 되었지 않어? 지금 이 마당에 조선 사람치고 고래심줄 같은 정치줄 잡은 사람도 없지만 말이야. 조준구 그자의 경우는 친일파치고도 피라미거든. 시골 바닥에서 헌병대장이나 군수 따윌 삶아보는 실력, 그러니 자네 말대로... 하기야 실력이기보다 처지라 해야겠지. 그 처지로서 사업이라시고 벌이는데 일인과 합자했다는 것은, 또 적당한 시기에 떠밀어내는 그거 괜찮은 술수라고."

고수머리에 두상이 큰 탓도 있겠지만 질깃하고 무거운 인상과는 달리 임경빈의 얘기는 사뿐사뿐 가볍게 나간다. 임명빈이 말한 신회사령이란 작년 십이월 조선총독부에서 기왕에 있었던 회사령을 한층 보강하여 공포한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가혹한 식민 정책의 일환으로서 일본의 경제계 독점을 조장하고 조선인 자본의 진출을 막아보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소위 회사 설립을 허가제로 해서 까다롭고 악랄한 조건으로 조선인에게는 되도록 허가를 아니 하는 방침, 그것은 조선인이 설립한 회사가 삼십 개에도 미달인 데 비하여 일인이 설립한 회사는 백 개를 넘어서고 있다는 실정만으로도 설명이 된다.

"괜찮은 술수라구?"

"그럼. 너무 가볍게 보는 것도 잘못이야. 미운 놈이라도 인정할 것은 하구 남들은 분수없이 떠벌리고 다닌다고들 하지만 말이야. 그것만은 아닐 거란 말이지. 실속은 차리고 있더라, 그것 아니겠어?"

여전히 킬킬대며 웃던 서의돈은

", 명빈아, 너 정말 캄캄절벽이구나. 그러고 보니 자네 부친도 어지간히 능구렝이구, 하기야 그 따위 흑막을 자식 놈한테 얘기할 수 없는 게 부모된 죄이긴 하지만 말이야. 하하핫... ,"

"흑막이라? 흑막이라면 한 시절 외척되는 모세가를 등에 업고 오늘날의 황부자를 만들어준 서참봉(의돈의 부친), 그 양반이 선수 아니었든가 몰라?"

", 암 그것 틀림없는 일이라구. 자네를 말할 것 같으며 아랫도리 벗은 시절부터 앞뒷 집 이웃이기는 하나 서참봉의 행장이야 이 나보다 더 잘 알 사람이 없지. 하데 자넨 나보다 자네 부친의 근황을 모르고 있으니 말이야."

"뭐라구? 자네가 알긴 뭘 알어. 방금 하하아 알겠네, 자네 부친이 자릴 놨군 하든 사람이 누군데? 그 말을 들었을 순간 난 환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거든. 세상에는 말이야, 사기술도 가지가지라. 그 땀을 낼 왜구놈들이 쓸모 있는 거라면 산을 무너뜨리고 돌도 캐내가는데 이 땅에 들여오는 건 총검이다 병이고 사기술이거든, 하기는 도둑질도 늘면 편하고 덩치 큰 기술로 옮겨가게 마련이지만."

얼굴이 핼쑥해진 임명빈

"이거 그냥 들어 넘길 수 없는 말이군. 그러면은 내 아버님이 왜놈의 사기술을 본 땄다 그 말이냐?"

"그렇지, 바로."

"뭣이라구?"

"하하핫."

"어디다 그, 근거를 두고!"

"근거 없는 말을 왜 내가 하누."

"근거를 대봐!"

"어렵잖지."

"뭣이라구? 네놈이 천, 천리안 가졌니? 잘난 체하는 게냐! , 지금이 어느 세상,"

임명빈은 흥분하며 말을 잇지 못한다.

"이거, 왜 이래? 흥분하지 말라구. 그래 넌 양반이 소반꼴이 된 세상에 꼴사나운 양반 행세냐. 그 말이 하고 싶은 게지? 왜 그리 사람이 못났어 응? 저 부모라 해서 남의 말 끝까지 들어보려 하지도 않고 사리를 헤아려보려 하지도 않고 덮어놓고 맞서려 드는 그게 옳은 줄 아냐? 양반 흉내야 흉내. 그놈의 효도라는 것 말일세. 우리들이 밥 먹는 입 가지고 같이 좀 공정해지자구."

"뭘 가지고 공정해지자구? 너 말 잘했다! 바로 네놈의 아가리가 적꾼도 만들고 도적놈도 만들구, 응 입이면 다냐!"

명빈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상현이 팔을 잡는다.

"선생님 참으십시오."

"참을 수 없어! 자네 같으면 참겠나?"

"의돈 형님은 노상 그렇지 않습니까? 성미를 잘 아시면서."

"성밀 알아도 유분수. , 내 일이라면,"

하는데 명빈은 상현에게 창피한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상현이 억지로 잡아 앉히고 명빈은 또 못 이기는 척 앉아서 씩씩거린다. 의돈은 두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다.

"이봐 명빈아, 임역관 음덕으로 자네가 일본까지 가서 공분가 유학인가를 하고 돌아오기는 했어도 내 모르는 바는 아니야. 임역관이 재직시 별 오류가 없다는 걸, 아들 유학 보내려고 좀 굽실거린 일 말곤 말이야."

서의돈은 슬쩍 추켜 세워준다.

"합방에 된 후에는 그 직책을 헌신짝 같이 버린 임역관, 내가 그걸 모르겠어? 자네만 하더라도 직업을 아니 갖고 빈들거리는 심정 나 다 알구 있다구. 왜놈들한테 직업 얻으려 아니 하는 갸륵한 심정 말이야."

"이거 누굴 놀리는 게냐?"

서의돈의 심통을 알지만 명빈은 그러나 상현이 앞에서 체면은 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또 내 심정을 말할 것 같으면 통쾌하다 그거야. 임역관께서 합작을 했건 아니 했건 간에 조준구 같은 놈 벗겨먹는 데 배 아플 이유가 뭐겠나?"

"또 그 소리야? 도시 왜 이러는 거지?"

"허허 내 말을 듣고서 화를 내든 지랄을 하든, 근거가 있긴 있지."

서의돈은 무엇이 그리 재미가 나는지 고양이처럼 유연하게 몸을 구부렸다 폈다 하며 장난스럽게 웃는다.

"조준구가 왜놈 미야모도하고 합자해서 사들인 그 광산 말이야. 그 광산 말인데, 그게 폐광 직전이다 그거 아니겠어? 금이 나기는 어디서 나아?"

나직한 음성이다.

"뭐라구? 폐광 직전이라구?"

"그 광산 임자가 누군지 모르지?"

"..."

"자네 부친이 상전만큼이나 섬기는 그 이대감."

", 그런 얘기 듣긴 했으나,"

임명빈이 당황하기 시작한다.

"소위 비밀이다 그거지. 최근 우연한 자리에서 그 얘길 들었는데 자네 부친이 관련됐으리라는 것은 오늘 바로 눈칠챘지. 아마 틀림없을 거로? 그런데 어떤 형편인고 하니 미야모도 그자, 완전무결한 허깨비, 허수아비란 말이야, 돈이 어디 있어서? 합자는 무슨 놈의 합자야? 이대감한테 들어간 돈은 조준구 몫뿐이고 말하자면 서류상으로만 미야모도가 절반을 출자한 것처럼 돼 있다 그거야. 이대감이 동업자 행셀 하라고 그자를 고용했다는 얘기고, 그러고 철저하게 사기 친 거지. 이대감 그 양반 속으로 되게 웃었을 걸. 음흉하게 보다 익살스런 사람이니까 말이야. 이놈아 너 그 공돈 나도 공으로 먹어보자. 어차피 그러저러한 곳에 갈 자금이니, 강도질이야 할 수 없고 흐흐흣... 하고 웃었을 게야."

임명빈의 미간이 풀어진다.

"명빈아 이제 속이 좀 풀리니? 사기는 쳐도 이대감 그 양반 썩은 선빈 아니야. 골샌님도 아니구. 하여간에 그놈의 욕심이란 게 무엇인가. 불을 보고 뛰어드는 나방같이. 허 참 드디어 이대감 계획이 무르익어서 조준구는 미야모도의 출자금을 내주고 폐광을 독점하겠노라 동분서주, 절반 값으로 잡힌 땅은 황부자한테 떠내려갈 것이 뻔하니 나중에 튀는 꼴이 가관일 게야. 하지만 어쩌누, 동아 썩는 것은 밭임자도 모른다고 그놈의 광산 속 몰랐다면 그만 아니야?"

"허 참, 진정 그게 사실인가?"

"사실이잖고? 자네 부친한테 물어보게나."

"그러면은 조준구가 아주 거꾸러진다, 그 얘긴가요?"

처음으로 상현이 입을 떼었다.

"아직은 멀었지. 광산 하나 넘어진다고 만석 땅이 하루아침에 없어지기야 할려구."

얘기가 막바지에 이르렀는데 마침 음식상이 들어온다. 건장한 두 하인이 맞잡아서 들여다놓은 상 위의 음식이 거창하다. 의돈이 입맛을 다신다.

"생일상 받으려고 사흘을 굶었더니,"

"자네 생일 같은 소릴 하는군 그래."

명빈이 타박을 준다. 서의돈은 나가려는 하인을 불러세운다.

"김서방 아니면 박서방이겠는데, 김서방, 기왕이면 술 한잔씩 부어 놓고 나가지 그래. 권할 주인 없는 술상 아닌가."

", 그럭협쇼."

소댕 같은 너부죽한 버선발이 술상 가까이 다가온다. 술잔에 술을 그득그득 채운다. 술 한잔을 쭉 들이켠 서의돈은 빈 술잔을 하인에게 내민다.

"한잔 받게."

", 아닙니다요. 감히,"

"감이나 배나, 받게나."

"아 아닙니다요."

"허허허 안 받겠으면 빨리 꺼져. 명색이 연장 달린 놈인데 술시중 들라 할 수야 없지."

하인은 콧물을 들이마시며 히죽히죽 웃는다.

"아암요. 나으리. 그렇구 말굽쇼."

의돈은 하인에게 내밀었던 술잔을 상현에게 돌린다.

"소년지사야, 이 잔 받게나. 저기 임선생께서는 달짝지근한 약과 전과나 핥으면 되는 게고 술은 자네하고 나하고,"

임명빈은 눈살을 찌푸리며 생선전을 급히 집어먹는다. 의돈은 상현으로부터 술잔을 되돌려받으며

"만주 바닥에서 뜨거운 술맛을 익혀왔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

"내 시기심이 자네 그 매끄럼한 콧등을 이렇게,"

손가락을 들어서 집게 꼴을 해 보인다.

"청루 왜년한테 끌고 갔을 게야. 으하하하핫핫..."

"지랄 같은 소리 또 늘어놓는구먼."

임명빈이 건성으로 거든다.

"자넨 잠자코 있어. 지랄 같은 소리 아니 한다 해서 왜년을 데리고 사는 그 누구더라? 이름 한번 유명하지. 이인직, 지금은 경학원 사성 이인직보다 위대할 것 한푼 없다구."

"이인직은 왜 들먹이누."

"자네 동업자니까."

"내가 언제 벼슬 살았었나? 역관직에 있었단 말이냐? 동업자는 무슨 놈의 동업잔구?"

"엇비슷한 처지니까 하는 말일세."

"엇비슷하다니? 나라 팔아먹은 이완용놈 수족 노릇을 내가 했더란 말이야?"

"그런 일 아니 했다고 뽐내본들 자네 키가 좀더 높아지는 건 아니야. 다 같이 왜년이 퍼주는 하숙밥을 처먹고 왜글 나부랑일 배워 왔으니 엇비슷하다는 거고. 한 놈은 너무 똑똑해서 나라 팔아먹는데 한다리 낀 것도 사실이나 신소설을 씁네, 연극을 합네, 하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온 것을 흉내나마 낸답시고, 헌데 자넨 뭘 했지? 매일 쌀가마나 축내는 밥벌레 아니었나 말이다."

"신소설이고 연극이고 그거 다 무슨 소용이야. 지 부모, 지 나라 파, 팔아먹는 개새끼가,"

"허허허, 말귀 어둡다. 애국지사연하지 마라. 피장파장이야."

의돈은 씩 웃다가 상현에게 고개를 돌리면서

"홍종이 그애 외삼촌 장지까지 따라 내려갔나?"

묻는다.

"내려갔습니다."

"거기도 애국지사연하다가 개죽음한 아들 때문에 또 개죽음이라... 하기는 이 풍진세상 갈창 같은 그따위 얇은 뱃가죽 하구서 뒷간 가노라 볼일 못 볼 바에야 일찌감치 자알 갔다만 웃기는 얘기야."

"배짱 두둑한 자넨 한 백년 살게애."

"아암. 하여간에 죽어도 치사ㄹ스럽게 죽었거든. 옥사? 무슨 놈의 개나 같은 옥사야?"

"그 친구 본시부터 새색시였다구."

"존경하고 미치고 반하고, 그래서 어쨌다는 게지? 안중근한테 미치고.. 반하고... 그것도 항일이다, 그러니 죄목이다, 그건가? 죽은 놈이나 가둔 놈이나 다 제정신인가?"

"심약한 게 탈이었다구."

의돈이 눈꼬리에 잔주름을 모으며 술잔을 든다. 맞은켠에 있는 상현의 모습이 죽은 홍종의 외사촌, 유인승으로 착각된다. 별안간 술기가 오르는 것 같다.

'빌어먹을 놈.'

유인승의 얼굴은 희다. 말 대신 히죽이 웃는다. 몸매는 가늘고 약골이다. 해서 친구들은 그를 인순아씨라 불렀다. 그런데 유인승이 달라진 것은 하얼빈 역두에서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암살한 그 사건이 터지고부터 주눅이 들어 말을 못하던 그가 떠들기 시작했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흥분하고 눈에 핏발을 세우고.

"인순아씨께선 이제 겨우 서방님이 되신 모양이야."

함께 떠들다가도 그의 엄청난 변모에 의아해진 친구들은 웃었다.

"아니 저 사람이?"

웃던 친구들도 종래는 웃을 수만도 없게 유인승은 좀 더 이상하게 변해갔다. 방바닥을 치고 통곡을 하는가 하면 때론 소리 없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넋두린지 혼잣말인지 시부렁거리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저 사람 머리가 이렇게 돌아버린 게 아냐?"

한번은 화가 난 서의돈이 유인승 면상에 술잔을 던진 일이 있었다.

"이 자식아, 정신 차려!"

"정신 차리라구? 정신만 차리면 죽은 사람이 사, 살아온단 말이냐?"

옷소매로 얼굴을 닦으며 유인승은 혀 꼬부라진 소리로 의돈에게 달려들었다.

"미친놈! 계집을 상대로 앓는 상사병이라면 그런대로 봐주겠다! 안중근은 사내야, 사내."

그러나 서의돈은 유인승의 머리가 이상해졌다는 생각은 아니했다. 이 무렵 안중근의 종제 안명근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가 밀고에 의해 평양역에서 체포된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북조선 일대에 조직화되어가던 배일 문화운동의 비밀 결사인 신민회를 분쇄하려고 노리고 있었던 총독부는 안명근 체포를 기화로 총독 및 총독부 요인 암살 음모란 터무니없는 내용을 날조하여 신민회 회원을 대량 검거, 투옥한 것이 작년 초정월의 일이다. 소위 안악 105인 사건이다. 처음 육백여 명이 체포되었을 때 유인승도 함께 끌려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유인승이 체포된 이유는 좀 색다른 것이었다. 요릿집에 들어가서 물마시듯 술을 퍼먹었다는 게 일종의 발작이었고 다음엔 운수 사납게 형사와 맞붙어 용감하게 육탄전까지 벌인 게 발작이었고 독립만세를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죽은 안중근을 살려내지 않는다면 모두 다 모가지를 댕강댕강 잘라 죽여버리겠다고 악을 쓴 것도 발작이었다. 검거 선풍이 불고 있는 시기, 날 감옥에 데려다다오 하며 부탁한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후일 같은 감방에 함께 있다가 풀려나온 사람이 전해준 말에 의할 것 같으면 감옥에서의 유인승은 너무 어이없었다는 것이다. 겁에 질려서 거의 반미치광이였었다는 것이다. 비단 포대기 속에 자란 유인승으로서는 감옥소의 풍경이 바로 죽음의 현장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결국 조급증과 공포심이 그를 죽게 했다는 것이다.

"생일 술 마시면서 죽은 사람 얘긴 이제 그만두지."

명빈이 돼지고기에 새우젓을 놓으며 말했다.

"그래 관두자."

한동안 말이 끊어진다. 술이 센 두 사람 사이에서 면무식하듯 조금씩 마신 술에 명빈의 얼굴은 홍당무다. 홍당무가 된 명빈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의돈 얼굴에 장난끼가 또 서린다.

"아까 여기 오는 길에서 말이야, 무당년 푸닥거리하는 구경을 했지. 덕구 덕구 덩덕궁 덩덩,"

손끝으로 술판을 치면서 서의돈은 명빈에게 곁눈질이다. 순간 명빈의 낯빛이 변했으나 꾹 참는 기색이다.

"덩덕 덩덕궁, 덕구 덕구 덩덕궁, 덩덩 덩덕궁.. 하하하핫... 신풀이 자알 하더구먼. 빌어먹을, 구경꾼 속으로 대가릴 디밀었다가 호되게 쥐어박히긴 했지만 말이야. 애숭인 줄 알았던 모양이지."

상현이 픽 웃는다. 민적민적 뒤켠으로 물어 앉았다가 상 곁으로 다가오곤 하는 명빈의 모습이 불편해 보인다. 임역관의 이름이 덕구다.

"그놈의 무당년들 신풀이 자알 하고서 돈은 돈대로, 그런 상팔자가 어디 있어?"

"그렇게 따지자면 무당뿐이겠나, 기생도 그렇고,"

명빈이 엉거주춤 어물어물 뇐다.

"그렇지, 잘 처먹고 재미보고 돈 벌고, 사내 직업치고 그런 거 없는지 모르겠네?"

"있지요!"

술이 들어갈수록 얼굴이 창백해지는 상현이 불쑥 말했다.

"그게 뭐야?"

"바로 그, 기생이나 무당의 기둥서방이 되는 일이지요."

"으하핫핫... 핫핫..."

서의돈은 박장대소한다.

"그렇지. 그래, 맞았어. 일본 바람 쐰 놈보다 북만주 매운 바람 쐰 놈이 낫구먼. 나이깐엔 제법이야. 하하핫... 덕구 덕구 덩덕궁 덩덩 덩덕궁."

술판을 뚜드린다.

"무당이라구 너무 괄시할 것만도 아니라구."

명빈이 부르터서 말했다.

"괄시는커녕 부러워서 그러네."

"무속이라는 것도 그 나라의 문화 유산인 만큼 보존할 가치가 있는 거라구."

"그래?"

"."

"언제였더라?"

"..."

"목욕재계하고 도포깃 세우고 갓끈 바로하고 양잿물을 마신다는 시골 양반을 비웃던 친구가 있었는 성싶은데 나도 함께 비웃었네. 그리고 또 총독부에는 세금 아니 내겠다 해서 붙잡혀간 늙은네한테 비하면은 양잿물 파는 한량이 아니겠느냐구, 그런 말도 했던 것 같은데 나도 동감을 했네., 전자는 수구당이구 후자는 개화당이라 그런 말도 했었지. 그 친구가 자네 아니었던지?"

"그래, 그랬다! 내가."

"하하핫핫 하핫핫.. 이봐, 명빈이. 이젠 임역관 허물은 아니 할테니, 덕구 덕구 덩덕궁도 아니 하겠고 하니 화내지 말구, 그런데 목욕재계하고오, 도포깃 세우고오 갓끈 바로하고오, 양잿물 마시고오, 하하핫... 그놈의 선비 문화를 깡그리 말살을 해야만 조선에 산업이 발달하고 근대화하는 게고오, 하든 자네가 말일세, 무당 문화는 보존하야 한다 그 말인가? 촌수가 그곳에 가까워서 그러는 게야? 하기는 역관도 한때는 궁중 깊숙한 곳에서 요물 노릇을 했으니 촌수가 아니 가깝다 할 수 없고."

"마음대로 지껄여."

명빈은 술을 훌쩍 마신다.

"자네가 그래 문명국 일본에까지 갔다가 왔으면 그놈의 요물 대신 자전거라는 것이나 한 대 사올 일이지, 고작 무당년과 촌수 당기기야? 한심해."

", 일본이라고 요물이 없나?"

"호오? 그놈의 대포 군함 가지고도 요물을 못 잡는단 그 말이야? 아라사도 잡아먹고 청국도 잡아먹고 조선은 송두리째 삼켜버린 그 실력 가지고서?"

"자네 얘기 듣고 있다간 대가리가 돌든지 빠개지든지."

명빈은 술잔을 들고 꿀꺽꿀꺽 마신다.

"옳지! 그쯤 돼야지."

"임선생님 조심하십시오. 의돈형님 수에 걸리면은 또 앓으셔야 하니까요."

상현이 웃으며 충고하는데"

"무속이 한 나라의 문화유산인 만큼 보존할 가치가 있다! 내가 그 말을 했기로, 그게 어째서 잘못이야?"

명빈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얼씨구, 술 들어가더니 간덩이 커졌네?"

"어느 나라구 무속이 없는 나라는 없어! 우물 안의 개구리들이 밖의 사정은 모르고 하나만 우겨대는 것 그것도 여간 곤란한 게 아니라구. 일본 유학 했다구 날 빈정거리지만 말이야. 그런 자넨 왜 일본말을 배워?"

"나야 뭐 유학이 아니라 유람 갈려고 그러네. 왜놈들 씨종자가 작다고들 하니."

"흥 세발자전거 한 대 갖고 오겠군."

"세발자전거라니?"

"애들 타는 자전거야."

"이거 말발 서는구먼."

"일본 가거들랑, 일본에도 무당 있는 거나 알고 와라. 무당은 어디든지 있어. 서양 문명한 나라라구 무당이 없는 줄 아나? 미신도 있고 귀신도 있고 다아 있는 거라구. 일본 동경의 그 은좌라는 번화가에도 저녁이 되고 보면 복술쟁이 늙은이가 좌판 펴놓고 앉아서 오는 사람 가는 사람 손금도 봐주고 운수도 점쳐주고, 제에기 무당하고 나하구 촌수가 가깝다구? 오냐 가깝다, 가까워!"

명빈의 상세가 흔들린다. 흔들면서 술을 부어 마신다.

"제에기 미신이 어쨌다구? 알고 보면 말이야, 일본이라는 나라 전체가 미신 덩어리야 미신. 알지도 못하구서 날 친일파로 몰아? 내가 뭐 일본 그것들을 숭배하는 줄 알어? 천만의 말씀이라고, 천만에. 소위 일본에서는 신궁이라는 게 있단 말이야. 무당들이 신위를 모신 당집하고 비슷한 게지. 그건 절도 아니구 교회당도 아니구, 그곳은 귀신이 사는 곳이다, 그거야. 귀신도 하나가 아니라 무슨 놈의 대신이니 무슨 놈의 천황이니, 무슨 놈의 공신이니, 신궁마다 귀신도 가지가지라. 내가 알기로는 불교하고 유교하고 기독교하고 회교라는 그게 말할 것 같으면 세계에서 등록을 끝낸 종교라는 건데 흥,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야. 자넨 말이야, 날 친일파로 모, 몰아붙이려고 갖은 애를 다 쓰지만 말이야, 그게 아니라구. 신궁이라는 곳에 가보면 말이야? 이상야릇한 고대 의장을 한 신관이라는 자가 있어서 하얀 종이를 오린 신대 같은 것을, 그것을 이렇게,"

명빈은 신대를 잡아 좌우로 힘차게 흔드는 시늉을 한다. 입술 끝이 아래로 축 처지면서 상현을 서의돈으로 착각했는지 노려본다.

"또 손뼉을 타악! 타악! 치면서.. 그거 무당하고 다를 것이 조금도 없는 거라구. 조금도 다름이 없는 그곳을 천황이고 고관대작이고 농사꾼, 젊은 것, 늙은 것 할 것 없이 찾아들어 참배를 하는 판이니, 왜놈들 미신이란 알아봐주어야 한다구. 그자들은 우리 조선백성을 야만이다 미개다 하지만 말이야, 어디 이 나라 백성들이 임금 능에 찾아가서 손뼉치고 절하든가. 사당이라는 것도 조상을 고양하는 거지 누가 줄줄이 찾아와서 참배를 하누."

서의돈은 명빈이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사설을 허용한 모양이다. 시죽시죽 웃으며 술잔을 비울 뿐 응수하지 않는다.

"내가 무속도 보존할 가지가 있다 한 것은 그 속 검은 왜놈들이 저희들 미신은 뒤로 감추고서 야만이다, 미개다 하는 수작을 빤히 알기 때문이라구. 그것이 다 이 나라 문화를 깡그리 없이 하자는 수작이거든. 그러니 내가 보존하자는 것은 미신을 보존하자 그것은 아니라구. 무속도 우리 백성들이 살아온 자취요, 풍속이라면, 그걸 아주 싹 지워버릴 수는 없어. 아암 없구말구. 내 말이 어디가 글러? 나를 친일파로 몰려고 너희놈들이 기를 쓰지만 말이야, 알고 보면 나라는 이놈이, 더 내 나라를 더 잘 안다 그거라구. 자네는 몰라. 모른다 그 말이라구. 민속이라는 것도 학문이거든. 내가 일본 있을 적에 민속학을 한다는 일본인한테 들은 얘기가 있어. 말이 그럴 듯 하더라 그거라구. 민속이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라는 게지. 때문에 그것은 그 민족의 전통이다, 이거야.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다손 치더라도, 경제 사정이 윤택해진다손 치더라도 전통이란 물건이 아니다, 그거야. 그러니 기계로써도 그거를 맨들 수 없고 돈으로 그것을 살 수도 없다는 게야. 그래 그 일본 사람이 말하기를 이렇게 기계만 돌아가는 세상이니 소중한 민족의 오랜 유산들이 날로 날로 소멸해가는 판국이라 슬프다! 일본도 이러하거늘 침략을 당하고 정복을 당한 나라에서야 오죽하랴, 그러더란 말이야. 그래! 자전거 한 대 사온 것보다 무속이라도 보존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알고 돌아온 내가... , ,,, 뭐랬지? , 그렇구먼. 그 악랄한 왜놈들이 미신이다! 미신이다! 하고 무당 잡으러 다니는 게, 그래 그게 조선 근대화 작업인 줄 알어? 도포가 어딨어? 갓끈이 어딨어? 깡그리 조선 것은 없이해보고 싶은... , ."

명빈은 혀 꼬부라진 소리로 한참 횡설수설, 그러더니 어느새 자리에 고꾸라져서 잠이 들어버린다. 서의돈이 상현을 보고 빙그레 웃는다.

"임선생님 며칠 앓으시겠군요."

상현도 쓴웃음을 띤다.

"앓으면서라도 술은 배워야 해. 두두둣! 하면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그놈의 주눅도 고쳐져야 하구. 상현아."

"."

"우리 이 자는 여기다 내버려두고 달아나자."

"그럴 수야 있습니까. 선생님을 뫼시고 가야지요."

"아니 태수가 오면 잘 해서 보내줄 걸세. 정은 없어도 하는 짓은 자상한 편이니까... 명빈이하고 싸우는 건 괜찮지만 말이야, 태수 하고는,"

"..."

"싸우면 골나해진다. 독선생 앉혀놓고 왜말 배우는 이 사랑방에 자네나 내나 더부살이로 온 처지고 보면, 안 그래?"

서의돈은 눈을 찡긋한다.

"나는 지금 취해 있구 그자는 맑은 정신으로 돌아올 텐데, 필시 내 입에서 듣기 좋은 말은 안 나올 거라."

그도 그렇겠다고 상현은 생각한다. 이 새끼야! 만리 밖에서도 쇠전 냄새 맡은 네놈 애비가아, 하고 삿대질이라도 하는 날엔 의돈보다 상현이 거북해진다. 집안끼리 얽혀 있기도 하지만 서의돈은 명빈과 태수와도 친구 사이여서 이 사랑방 교습에 끼어들었지만 상현의 경우는 생판 낯선 집이다. 홍종의 형, 그러니까 지금은 만주 유하현 삼원보에 가 있는 이판서댁 맏아들 윤종과 의돈이 지극한 사이였던 연고로 의돈이 이판서댁 사랑에 나타났고 젊은이 두 사람이 일본 유학을 작정하고 마땅한 일어 강습소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리하여 어울려진 공부방이었으니까. 상현을 끌고 밖으로 나온 서의돈은 개구멍받이로 빠져나온 개구쟁이 처럼 싱글싱글 웃는다.

", 상현아. 날 따라와라."

"어디루요?"

"예쁜 처녀 얼굴 보러 가자."

"처녀 얼굴을 어떻게 봅니까?"

"볼 수 있어. 명빈이 집에 가면 말이야."

"?"

"명빈이 누이동생 그애가 천하절색이거든."

"형님 혼자 가십시오."

"허 참, 나 자네하고 겨루고 싶어서 그러는 게야."

"무슨 말슴이오?"

"기왕이면 미소년하고 겨루겠다 그거 아니냐? 그래야 내 자존심이 만족할 게고. 또 모르지, 자넬 물리치게 될지 뉘 알어?"

"그거는 어찌 되었든 형님이나 저나 처녀 볼 자격 없습니다."

"허 장가들 자격이야 없겠지만 쳐다보는 자격까지 없을라구?"

"..."

"사내 장부가 그런 유연성도 없이 무슨 일을 하누? 가보자."

"그럭헙시다."

두 사람은 두루마기 자락을 겨울바람에 펄럭이며 걷는다. 상현은 대추씨같이 작은 서의돈을 내려다보며 마음속으로 웃는다.

'서의돈, 그 형님 망나니로 소문이 난 사람이야. 술도 말술이지만 취하면 남의 집 담장 밑이고 길바닥이고 아무데서나 태평스럽게 잠이 드는 위인이거든.'

홍종이 귀띔해주던 말이 생각난다. 거리에 어둠은 아직 아니 깔렸으나 해는 졌고 나귀를 탄 시골 선비가 지나간다. 눈이라도 내릴까 싶었던지 갈모를 쓴 모습이 어쩐지 처량해 보인다. 마부도 하인도 없는 혼자 행차신가.

'노름꾼, 광대, 천하잡놈은 말할 것 없고 물지게꾼 백정까지 어울리길 좋아해서 부모님 속도 무던히 썩혔지만 보기보담 호걸이야. 대추씨 같은 몸집에 배짱하나 두둑하지. 가문이고 조상이고 도통 우습게 알거든. 그러나 저래봬도 아는 건 많아. 한번은 문중에서 유식하다 이름난 어른 앞에서, 불론 불러 들여서 꾸중으로 시작한 거겠지만 의돈형님은 겨루었던 모양이야. 당돌하게 이론으로 공박하여 상대를 무색하게 했거든. 그러고부턴 아무도 간섭 안 하게 됐다는 게야. 한데 무슨 놈의 꿍꿍이속일까? 이제 알아서 일본말 배울 생각을 하니 말이야.'

홍종의 말이었다.

"명빈이 막내누이 말이야. 내가 열한 살 때 그 집 앞에서 태어나는 울음소리를 들었거든."

"아직 나이 어리군요."

"어리지도 않지. 열일곱인가? 나는 그 애 삼줄 내거는 걸 보았는데 물론 고추는 없고 숯덩이뿐이었어."

의돈은 비밀스럽고 신기한 것처럼 시부렁거린다.

"그런데 고 계집아이가 절세미인이 될 줄 뉘 알았겠나? 내가 장가 갈려고 말을 타고 나섰을 때는 그 계집아이가 아장아장 걸음 말 배우고 있었거든. 나도 장가 들면은 저런 계집아이 아비가 되겠지... 한데 그놈의 세월의 조화라는 걸 도통 알 수가 없단 말이야. 나는 아직 늙지 않았는데 그 계집애느 방년이라!"

휘적휘적 걸으면서 의돈의 말도 휘적휘적 힘이 없다.

"그 계집애 개명한 아비 덕분에 숙명학굔가 거길 다니는데 말이야. 그래 그런지 여간 밴질맞지가 않아. 말을 걸면 되받을 줄 안단 말이야. 임역관 그 늙은네 아들보다 막내딸 덕 보게 생겼어."

효자동까지 온 서의돈은 몸을 돌리면서 상현을 돌아보고 웃는다.

"이 새끼야!"

"!"

"자네 나한테 굽실굽실하는 거야. 자네 덕 좀 보자구. 미소년을 종자로 거느렸으면 나도 좀은 돋보일 거 아니겠어?"

"그럭허세요. 대신 나중에 술 사야 합니다."

"마신 술은 어쩌구?"

"벌써 깼어요."

"좋아. 술 사지. 대신 굽실굽실하는 게야?"

겉보기 규모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기와집 앞에 머문 서의돈이 기웃기웃하는가 싶더니 이리 오너라! 말 대신 주먹으로 대문짝을 내리친다.

"뉘시오?"

계집종이 놀라서 쫓아 나온다.

"아씨 계시냐?"

". 뉘시오?"

"나 서의돈인데 오라버니한테 변괴가 생겨 왔으니 너희 아씨보고 내가 좀 만나잔다고 여쭈어라."

", 서방님한테 변괴가! , 아씬 친정 가시구."

"허허 명희아씨한테 여쭈라 하지 않느냐?"

", ."

계집종은 허둥지둥 쫓아 들어간다. 이윽고 명빈의 막내누이 명희가 달려 나온다. 얼굴이 초지장이 되어서

"아니! 올아버니가 어, 어찌 되셨어요?"

과연 미인이다 하고 상현은 생각했으나 터무니없는 서의돈 거짓말에 굽실거리겠다는 약속을 까먹고 만다.

"태수 집에서 지금 늘어졌구먼."

"?"

"처음에는 주하고 사하고 꼭 죽는 줄 알았는데,"

", 그래서 어찌 되셨어요?"

"하여간에 우리가 떠메고 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우선 기별하러 왔는데,"

"이 일을 어쩌나? 아버님 어머님도 아니 계시고 올케도,"

훌쩍훌쩍 우는 모습이 아직 어리다.

"거기서 가야겠군."

", , 그렇게 해야겠어요."

허둥지둥 들어가는 명희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서의돈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돌아선다.

"어서 가자구."

"그럽시다."

두 사내는 뛰다시피 골목을 돌아 나와서 함께 소리 내어 웃는다.

"어때? 절세미인이지?"

"미인은 미인인데 절세미인은 아니오."

"그래? 저보다 더한 미인을 보았나?"

"보았지요."

"어디서?"

"만주 벌판에서요. 형님, 목이 칼칼합니다."

"그래 가자! 오늘은 기생집이다아!"

 

 

5. 귀향

상현은 배앓이 하는 것처럼 두 다리를 구부리고 배는 요 위에 붙인 채 생각을 하고 있다. 방문이 희끄름하게 밝아오고 부엌 쪽에서 조반 짓는 기척이 들려온다. 서울에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어머니 염씨는 대만족이었으나 새댁은 남편을 지척에 두고도 늘 쓸쓸한 표정이었다. 의무를 치르듯, 밤의 잠자리는 이를 악물어도 여인에게서 치욕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어쩌다가 발이라도 닿으면은, 차라리 걷어차는 편이 낫지 살그머니, 눈치를 챌까봐 숨을 죽이듯 멀어지는 남편의 몸, 그나마 어두운 잠자리 속에서만 남편을 느꼈을 뿐 진종일 남편의 얼굴 한번 볼 수 없는 가혹한 반가의 법도, 그 법도를 빙자하며 사랑에다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치고 앉은 남편이다. 거리는 구만리, 남녀란 정에 따라서 구만리도 되고 동체도 되는 건가 하고 새댁은 아궁이 속의 타는 불꽃을 바라본다.

'먹기 싫은 음식은 웃목에 두었다 먹지만 사람 싫은 거는 어쩔 수 없고, 그러나 법이 무섭지. 조강지처는 안 버리는 법이야, 할머님이 그러시든가?'

"아씨 이것 맛 좀 보시오. 간이 맞는지 모르겠소."

유월이 숙주나물 무친 것을 내민다. 새댁은 먹어본다.

"참기름이 너무 든 것 같소. 서방님은 기름 냄샐 안 좋아하시는데,"

". 쇤네 손이 미끄러져서 그만 기름이 좀 더 들어간 것 같소."

음식 솜씨에는 자신이 있는 억쇠 마누라 유월이 낭패한 얼굴이다.

"조반은 많이 드시질 않으시니까 너무 염려 말아요."

하는데 귀가 밝은 유월이

"아씨, 서방님 기동하시는가베요?"

"글쎄에,"

"들어가보시야지요."

"부르시지도 않는데..."

"안 부르시더라도 가보시오. 곧 서울로 떠나실 긴데,"

"걱정 말아요. 내 알아 할 테니,"

새댁은 화를 낸다. 벌써 사랑으로 나가고 있는 남편 발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남남끼리 만내서 정 하나로 살아가는데 서방님도 너무하시지... 이번에는 반가운 소식이 있어야 할긴데,"

유월이 중얼중얼 혼잣말같이 시부리며 솥뚜방에 물걸레질을 하는데

"억쇠야! 억쇠 게 없느냐?"

사랑에서 상현의 음성이 들려온다.

"아이구, 저 번시가 아직도 안 일어났는가베? 내 간밤에 술을 과하게 마신다 싶더마는,"

"억쇠야! 억쇠 없느냐?"

행주를 내동댕이치고 행랑을 향해 유월이 달려간다.

"보소오! , 보소!"

"으 음, 와 그라노."

잠에 취한 목소리다.

"와 그라다니? 서방님이 부르요."

"."

벌떡 일어난다. 침이 흐르고 눈곱도 덜 떨어진 얼굴의 억쇠가 급히 방문을 열고 나온다.

"어이구 그놈의 술이 원수요. 초정월부터 꾸지람 들으면 일년 내내 좋은 일만 생길 기니께."

유월이는 혀를 뚜드리며 부엌으로 돌아가고 억쇠는 사랑으로 달려간다.

"서방님 부르셨십니까?"

흘러내리는 허리춤을 끌어올린다.

"오냐."

"무슨 분부라도,"

"방으로 들어와."

"그냥 여기서 듣겄십니다."

"들어오래두."

"아니,"

"허 참, 긴히 할 얘기가 있어."

"."

억쇠는 눈을 비비며 눈곱을 닦아내고 허리끈을 풀어 다시 졸라맨다.

"뭘 해?"

". 들어갑니다."

방으로 들어간 억쇠는 아랫목에 쭈그리고 앉는다.

"긴히 할 말심이란,"

". 그게 좀,"

"어려블 거 없십니다. 소인이 다 하겄으니께요."

"그래 다름이 아니라 억쇠 네가 봉순일 만난 것은 들었고."

", 만났십니다."

"진주 어느 곳에 있는지 찾아가면 알까?"

", 그건 소인 모릅니다. 진주 있다는 얘기만 들었소."

"하여간에 진주에 가면 찾긴 찾겠지."

", 그러시오... 서울 가서 김서방도 찾으니께요. , , 그렇구마요."

"뭐가?"

"저어 소리꾼 배서방이 혹 알는지 모르겄소."

"어떻게?"

"처음 봉순이는 그 소리꾼을 찾아갔이니께요. 또 그 바닥 사람이라서 대개 알지 않겄십니까?"

"그럼 그곳에 지금 가보아."

"지금요?"

"음 되도록 빨리, 서둘러야 하네. 가서 봉순이 거처하는 곳을 알아와."

"혹 어디 가지나 않았는지 모르겄소. 일이믄 알아보기 쉽을 듯한데, 그라믄 소인 한달음에 다니오겄십니다."

억쇠는 바람이 들지 않게 문풍지가 접히지 않게 조심스레 방문을 닫아주고 나간다. 상현은 사라져가는 억쇠 발소리를 듣다가 궐련 하나를 꺼내어 불을 붙여 문다. 서울서 혜관에게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줄곧 봉순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어떤 집착처럼 느껴진다. 봉순이 보고 싶은 이유도 없다. 꼭 만나야 할 사연도 없다. 한데도 무엇 때문에 만나려 하는지... 군소리 없이 집으로 돌아온 것도 어쩌면 봉순이를 만나야 한다는 그 유혹 때문인지 모른다. 담배 연기를 후우 내뿜는다. 방안은 따스하고 놋화로에는 발그스름한 불씨가 묻혀 있다. 어느 곳으로 가도 이곳 방처럼 편한 곳은 없다. 한데도 왜 편안한 집에 붙어 있질 못하는가. 남아 장부의 야심이란 때문이란 말인가? 생각다가 상현은 씁쓰름하게 웃는다.

'무슨 야심이냐?'

사랑 울타리 쪽에 까치가 까까까 까깍... 하고 운다.

'저놈의 까치 망령났다. 오늘 떠날 사람이 있는데 울기는 왜 울어? 반가운 손님 찾아올 리도 없는데 말이야.'

"서방님 소세하시오."

유월이 세숫물을 마루 끝에 놓고 가버린다. 상현은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끄고 세수를 했다. 조반도 들었다.

'억쇠가 왜 여태 안 오는 게야?'

상현은 조바심을 내기 시작한다. 멀다 해야 읍내, 벌써 돌아왔어야 할 억쇠가 웬일일까? 생각하며, 그러나 상현은 소리꾼 배서방을 못 만나고 억쇠가 돌아온다손 치더라도 진주에 들르리라 결심을 굳힌다.

"서방님!"

헐떡거리며 억쇠가 사랑 중문을 들어서는 소리가 난다.

"어째 늦었느냐? 들어와."

". 빌어묵을 놈."

억쇠는 아까처럼 방으로 들어와서 아랫목에 쭈그리고 앉는다.

"아 그러시 서방님, 그놈이 봉순이하고 무신 사단이 있는지 나를 보고 그런 지랄이 어디 있겄십니까?"

"모른다고 하든가?"

"아닙니다. 알기는 아는데 안 가르치주겄다 그겁니다. 온 세상에 그런 심청궃은 놈 처음 봤소."

"그래 알아냈어, 못 알아냈어? 그 말부터 해."

", 그러니께 그놈을 구슬리노라고 진땀을 뺐십니다. 온 세상에 꾼들이라 제각기 고집 하나는 갖고 있는 모양이지요."

"어디 있다더냐?"

'. 진주 가면 말입니다, 연홍이라는 기생이 있답니다. 그 연홍이만 찾으믄, 연홍이 집이라 카믄 모리는 사램이 없다 카믄서요, 봉순이가 그 늙은 기생집에 아마 있일 기라 하더마요."

"그래? 그럼 어서 떠날 준빌 해."

"."

"진주서 며칠 묵었다가 서울로 곧장 갈 게야."

", 그라믄 다니오시는 기이 아니구마요."

"그래."

"작은 서방님도 안 만나시고 떠나시겄십니까?"

"남의 식군데 뭐, 쉬 돌아오지도 않을 거라며?"

"그러세요. 보름도 새고... 아씨께서 해산을 하셨으니께 처가에는 며칠 더 묵으시겄지마는,"

"급히 서둘러. 곧 떠나야 해."

". 한데 발등에 불 떨어졌나, 하시겄소. 마님께서,"

억쇠는 행구를 차리기 위해 급히 나가고 상현은 염씨를 뵈려고 안방으로 들어간다.

"어머님, 오늘 떠날까 합니다."

"아니 아무 말 없다가, 갑자기 무슨 일이냐?"

"가긴 가야지요."

"가는 건 아는데 발등에 불 떨어질 일이 있는 것도 아니겠고,"

상현이 싱긋이 웃는다. 억쇠 말이 생각나서다.

"차일피일할 순 없지요. 서울 가서 할 일도 있지마는 진주를 들러서 갈까 싶어서요."

"진주에는 왜?"

어세가 강하다.

"그곳에 최참판댁 유모 딸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갈할 말도 있고 해서,"

"."

염씨는 역력히 불쾌감을 나타낸다.

"억쇠를 시켜 편지라도 써 보내려무나."

"그건 좀..."

"나도 억쇠한테 얘긴 들었어. 뭐 그 아이가 기생이 됐다면?"

". 소자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기생된 아일 찾아가는 게 마땅찮구나."

"하오나 사정이 다르잖습니까?"

"그야 그렇다만... 아직 너 나이 많다 할 순 없고, 처신을 바로 해야 하느니라."

", 명심하겠습니다."

상현이 나귀를 타고 집을 떠날 때 새댁은 제 방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다듬은 명주 옷감이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내리는 것을 되잡아서 홈질을 하다간 구김살도 없는 옷감에 인두질을 하고 또 하곤 한다.

'간밤에 떠난다는 말 한마디 없더니.'

"억쇠야."

"."

"."

"서방 얼어 죽을까봐서... 흐흐흣 둥둥산겉이 솜을 놔주었으니께요."

"너희들은 참 금슬이 좋구나."

"새끼 하낫도 없고 누굴 믿고 살겄십니까?"

"그래 너는 팔자가 좋다."

"서방님."

"."

"봉순이는 왜 만나실라 캅니까?"

"그걸 몰라서 묻나?"

"역시 최참판댁 애기씨 일로 그렇십니까?"

"..."

"서방님이 영 말심을 안 하시니께 소인 복장이 터질 것 같십니다."

"니 복장이 왜 터지나."

"나으리 지내시는 것도 궁금하고... 언제쯤 돌아오실 건지... 세상이 분분해질 때마다 나으리가 원망스러바집니다."

"그건 왜?"

"아 그러세 한분 쳐들어오시지도 못하고 하마나하마나 하다가 이 소인 늙어 죽겄소."

"그게 그리 쉬운 일이겠나."

"그러게요. 산산골골이 왜병놈들이 이 백히듯 백히 있이니 사람들도 이자는 다 틀렸다 카기도 하고 참말이제 우리 나리를 언제 다시 만나뵙게 될란지. 마님이나 아씨 처지도 딱하지 멉니까."

"..."

"그도 그렇지마는 길상이 그 아이랑 이서방 월선이 그 사람도 이자 돌아오기 글렀십니까?"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조준구가 망하는 날에."

"조가 그 사람이 그리 쉽기 망하겄십니까? 왜놈들하고는 찰떡 궁합이 돼서 땅도 많이 뺏고 전보다 더 부자가 안 됐십니까?"

"고방에 돈이 쌓이면 사가 생겨서 절로 나가는 게야."

"그렇지마는 아직이사 신총 갓심 내놨는데, 왜놈들이 속히 망해야 겄지요. 우리 나으리는,"

또 나라마님 타령을 하려는데 상현은 눈길을 들어 구름을 쳐다본다. 파란 하늘에 구름이 떠내려간다. 오묵오묵한 초가들이 오소소 떨고 있는 것 같다. 초정월인데 나무꾼들이 지나가고 도부꾼들이 지나간다. 어째 연을 날리는 아이들은 눈에 띄질 않고 왜식 목조 건물이 유독 두드러져 보이는지. 읍내를 지나 진주 가는 길로 접어들면서 억쇠도 말이 없어지고 이리저리 산천을 살피며 간다. 파아랗게 돋아난 보리밭에 까마귀가 무리지어 앉아 있다. 만주라면 봄날 같은 겨울 날씨다. 주막에 들어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다시 길을 떴다. 거의 진주가 가까워왔을 무렵

"서방님."

"."

"서방님이 봉순이를 만내시믄 놀래실 깁니다."

"?"

"소인도 처음에 깜짝 놀랬으니께요. 그 아이가 클 적에도 외양이사 반반했지마는 비단옷 입고 분 바른다고 사램이 그러크름 변할 수 있는 건지 얼굴이 계란을 삶아서 벗기놓은 것 같고 맵시도 기가 맥히더마요. 소문 들으니께 진주서 권번 다니믄서 배울 것 다 배우고 또 소리가 명창 될 만하다 하고... 그래서 소리꾼 배서방이 억울해서 못 견디는 모양입니다. 소인이사 잘은 모르지마는 그만한 인물이믄 서울바닥에 갖다놔도 예, 사내들 애간장을 녹힐 기라 하더마요.?"

"니가 머를 알어."

"하 참, 소인도 서울에 가봤이니께요."

"기생방에도 가봤었나?"

"헤헤헷... 그거사 머, 우찌 갬히 그런 데를,"

"그래 서방은 얻었다더냐?"

"봉순이 말심입니까?"

"."

"기생이 뒷배 봐주는 서방 없이 될 말이겄습니까? 하기는 실찮은 기생이나 머리 얹어주고 고만일 수도 있지마는 봉순이만하믄 든든한 봉 하나 물었일 깁니다."

"그렇게 인물이 좋아졌느냐."

". 하지마는 서방님은 딴생각 마십시오."

상현이 픽 웃고 만다.

"봉순이 그 아아 형편을 봐서, 잘한 건지 못한 건지 그거사 모르겄지마는 기왕 화류계에 나갔으니 그 바닥에서라도 잘 되얄 긴데, 소인이 서방님이 오셨다는 말을 했더니 많이 울더마요. 애기씨한테 정이 들어 그랬겄지마는 눈치에 길상이 생각을 더 하는 모양이고,"

"..."

"그만하믄 심성도 괜찮고 짝이 맞는데 길상이는 와 마다했는지 모르겄소."

상현은 듣기도 하고 안 듣기도 하면서 진주에 당도하기론 해나절이었다. 성내 객줏집에 여장을 푼 뒤 상현은 억쇠를 시켜 연홍의 집을 알아오게 이른다.

"주인장."

객줏집 앞, 양지쪽에서 거리를 바라보고 앉아 있던 객줏집 주인이 돌아본다. 초정월이라 한가로운 표정이고 상현의 주종이외 손님도 없는 모양이니 실상 한가롭기도 했을 것이다.

"연홍이라는 기생집이 어디 있는지 압니까? 진주 가믄 다 안다 카든데."

"연홍이 집이라믄 옥봉에 있지 어디 있겄소."

"옥봉, 여기서 멉니까?"

"머 멀지는 않소. 초정월부터 연홍이는 와 찾소."

"그런 사정까지사 알 것 없고,"

"독골 가는 길로 가믄 중도가 옥봉이오. 가믄서 물으믄 가르치줄 끼니께."

"하기사 머, 서울 가서 김서방도 찾는데,"

연홍의 집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남강이 내려다보이는 기생 동네 옥봉, 번듯하고 운치 있게 꾸며진 노기 연홍의 기와집은 조용했다. 억쇠가 소리를 질러 사람을 청하니 열네댓쯤 돼 보이는 동기 하나가 대문 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거동이 경망스럽고 생김새도 그러하다. 눈이 큰 것은 귀염성스럽고.

"뉘시오?"

"여기 하동서 온 봉순이라느 애가 있느냐?"

상현이 묻는다.

"? 봉순이라굽쇼? 그런 사람은 없소."

"하동서 온 아이도 없단 말이냐?"

"그럼 기화언니 말씀이셔요?"

"글쎄다, 기화? 음 그렇겠구나. 그러면 그 기화라는 아일 만나러 왔느니라."

"어디서 오시었소?"

"하동서 왔다."

"하옵지만 기화언닌 여기 안 계시는 걸요?"

"여기 없다구?"

"."

"그럼 어디 있단 말이냐!"

"영감이 대궐 같은 집을 사주시어서,"

"그 집이 어디냐?"

"무슨 일로 오시었소?"

동기는 상현의 아래위를 훑어본다.

"허 참 갈 길이 바쁜 사람이야. 어디 있는지 알려라."

"기화언니한테 꾸중 들으면 어쩌게요?"

"꾸중 아니 들을 게다. 나는 중한 전갈이 있어 온 사람이야."

"그러면은 절 따라오사이다."

동기는 간드러지게 두 어깨를 흔들면서 기생 탯거리를 내려고 애를 쓴다. 남치마에 분홍 반회장 저고리를 입은 맵시에 풍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고년 참 맹랑하구나.'

상현의 뒤를 따라가는 억쇠는 기생집들이 모인 동네를 도둑놈 같이 슬금슬금 살펴본다. 소매를 끌어당겨 코를 풀기도 하고, 골목을 빠져서 한적한 큰길로 나선 동기는 고목 한 그루가 서 있는 으슥한 좁은 길로 들어간다.

"여기 잠깐 기다리시오."

당돌하게 명령을 하고 대궐은 아니지만 제법 큰 대문 안으로 들어간다. 얼마 후 다시 나온 동기는 아까 연홍의 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성함이 누군지 알아오라 하시오."

"거 참, 봉순이 세도도 보통이 아니구마는. 이부사댁 서방님이 오š愿鳴?말해!"

억쇠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아이구 참 귀청 떨어지겄소."

핼끈 눈을 흘기며 동기가 들어간 얼마 후

"서방님!"

울먹이는 봉순이 목소리가 마당에서 울렸다. 대문을 와락 열어젖힌다.

"서방님! 어인 일이시오."

버들가지처럼 유연한 몸이 상현에게 쏟아질 듯 쏟아질 듯.

", 오래간만이구나."

"한분, 한분 서울로 찾아가 뵐까 생각도 했었지요."

봉순이는 연신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아낸다.

"어서, 어서 드십시오, 서방님. 박서방도,"

내내 까불랑거리던 동기는 봉순이 우는 것을 처음 보는 터이라 눈이 커다랗게 벌어진다.

"기화언니! 전 가요?"

골목을 뛰어가는 발소리, 그리고 상현과 봉순이는 방에서 마주앉는다.

 

 

6. 쪼깐이집

흐느끼도록 몰아대는 바람 속의 둑길을 물지게 진 석이가 부지런히 걷는다. 찌뿌드드하게 흐린 날씨다. 강 건너 대숲 위에 온통 덩어리 같은 잿빛 하늘, 석이 두 귀가 새빨갛다. 누덕누덕 기운 솜저고리는 오늘 날씨 같은 빛깔이었고 버선이 두둑하여 발은 시렵지 않으나 저고리 도련 사이로 기어드는 바람이 맨살을 찌른다. 물에 젖은 바지 아랫도리는 강정같이 얼어서 오금을 떼어놓을 때마다 서걱서걱 소리가 날 것만 같다.

"석이네도 이자는 한심 돌리겄네. 세월이 잠깐이라 어느새 석이가 저리 커서.. 머시매 꼭지라고,"

"한심 돌리기는요? 우리 석이가 열다섯 적부텀 물지게를 지는데! 살아가기는 날이 갈수록 태산이고."

"그래도 이자는 평지에 나선 셈 아닌가. 사내 대장부는 입이 중천금이라 카든가? 머시마가 입이 없으믄서도 미련하지 않고 꾸벅꾸벅 일만 하는 거를 보믄은 참말이제, 남으 자석이지마는 애인한 생각이 들어서... 우찌 아아가 그리 실겁겄노."

"실겁으믄 머하겄소. 소도 언더막이 있이야 비비더라고 아무리 나부대봐도 세상에, 딛고 일어설 작지가 있어야지요. 생때 겉은 가장잃고... 그리만 안 됐이믄 하다못해, 무신 일을 하더라도 자석들이 이 고생이사 하겄소? 참말이제 사는 기이 죽느니보다 나을 기이 없소. 사시사철 부석강생이 맨치로 남으 물독에 물이나 채워주고... 불쌍한 우리 석이 어느 시울에 허리 페고 장개는 갈 긴지."

치맛자락을 걷어 콧물을 닦으며 이웃 아낙과 주고받는 어미의 푸념이지만 겨울이 가고 강둑 수양버들에 물이 올라야 석이는 이가 들끓는 누더기 솜옷을 벗게 되리. 옥봉의 기화네 집 대문을 밀고 석이 들어섰을 때 팔자걸음의 허우대 좋은 중년 사내가 마당을 질러 걸어나왔다. 코끝이 뭉실하고 구레나룻이 짙은, 두리널찍한 얼굴의 사내는 매우 심기가 좋지 않은 듯 헛기침을 한다. 여느 때와 달리 기화도 배웅하러 따라 나오질 않았고 고개를 숙인 채 석이 지나치려 하는데 가래침을 돋구어 퉤! 하고 내뱉는 사내.

"이 개쌍놈이! 으응, 눈구멍에다가 말뚝을 박았나?"

벽력같은 소리를 지른다. 허리를 겨우 구부리며 시늉만으로 인사하는 석이, 마음속으론

'자개는 머 쌍놈 아니라 말가. 돈 가지고 산 그 따우 양반, 누가 모를 기라고.' 비웃는다.

"짐승을 구하믄은 은혜를 갚고 사람을 구하믄은 악문을 한다 카더라, 애흐흠!"

기화에게 들으란 듯한 말인가본데

'내가 무신 자개 은혜를 받았다고 저러까?'

흰 가죽신발과 털토시를 낀 손목이 석이 눈 밑에서 지나간다. 덩치에 비하여 작은 손이다. 그 손이 푸들푸들 떨고 있는 것 같다. 석이는 저런 털토시 한번 끼어봤으면 얼마나 따스할까 생각하며 부엌으로 가서 물독에 물을 붓는다. 아궁이 깊이 군불을 밀어 넣던 봉춘네가 석이를 쳐다보다 말고 깜짝 놀라며 부엌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는다.

"아이구매, 간 떨어졌다."

대문을 메어치는 요란한 소리가 울렸던 것이다.

"어이구 사람도, 아 문짝이 무신 죄고?"

다시 허리를 꾸부리고 불을 밀어 넣는 봉춘네, 혼잣말같이 중얼거린다.

"기생첩 거나리는 데 돈이믄 다라, 그런 생각이겄지마는 노류장의 계집이라고 어디 돈만 보고 살건데? 논마지기나 떼어주고 씨받이로 데려오는 무지랭이들하고는 다르지러. 사램이 그래도 기방 출입을 할 양이믄 풍류도 좀 알아야제."

고래 속에서 솔가지불이 훨훨 소리를 내며 탄다. 깨끗한 봉춘네 당목 솜저고리에 불빛이 환하다. 이따금 아궁이 밖으로 몰려나온 불빛 그림자가 시꺼멓게 그을은 부엌 서까래에서 춤을 추곤 한다.

"나이가 젊다 말가 식자가 있어서 점잖다 말가. 기화도 자리잡고 살기는 어려블 기구마."

하다 말고 봉춘네

"석아."

하고 부른다. 물독에 뚜껑을 덮으며

"."

"바깥 날씨가 춥네."

"게울이니께요."

"여기 불 앞에 와서 손 좀 녹이라모."

"괜찮소."

"설 보름이 다 갔는데 금년 할만네 때는 물바가지가 얼겄네."

"..."

"가리 늦기 남강물이 꽁꽁 얼어 붙었이니 아아들 얼음 타기는 좋겄다마는, 석아."

"."

"숭님에 밥 한덩이 말아줄 기니 묵고 가거라."

부지깽이를 놓고 일어선다.

"허기가 들믄 더 춥네라."

석이는 잠자코 부뚜막에 걸터앉는다.

"따끈따끈하다. 묵어라."

봉춘네는 뜨거운 숭늉에 밥을 말아서 한 대접하고 김치보시기를 내밀었다. 숭늉에서 따스한 김이 피어오른다.

"자아 숟가락 여 있다."

투박스런 주석 숟가락을 선반에서 집어 건네준다.

"어 묵어라."

"."

봉춘네는 아궁이 앞에서 비질한다.

"너거 외숙모 요새 벵이 좀 나은가 모리겄네?"

"어디가요."

"그라믄 아득도 운신을 못한다 말가?"

". 자꾸 더해가는 모양이더마요."

"쯔쯔... 있는 집도 벵이 질믄 살림이 결딴나는 벱인데 남으 땅 부치서 근근히 사는 살림에 자식들이나 적다 말가. 셈찬 큰 자식이 있단 말가. 모두 잔밥에, 제 밥그릇 작은 거만알 긴데 여차한 일이라도 있이믄 늙도 젊도 않은 나이에 니 외삼촌 일이 난감을 기다."

"..."

"부모 마음하고 하누님 마음은 고르다고들 하는데 어이구, 세상사를 가만히 보믄 그것도 빈말이라. 어질고 착한 사람은 도처에서 고생을 하고 남으 입에 든 밥이라도 뺏아묵을 듯이 해구는 사람들만 떵떵 울리고 사는 거를 보믄은."

말없이 사발을 비운 석이 일어섰다.

"갈라나?"

"."

석이를 따라 부엌에서 나오던 봉춘네

"아이고! 눈이 온다!"

계집아이처럼 소리친다. 어느새 눈이 왔을까. 장독 뚜껑에 눈송이가 날아내려 제법 허옇다.

"참말로 별일이제? 기화야! 기화야! 눈이 온다! 방문 좀 열고 내다봐라."

진주 땅에 눈이 내리는 일이란 그리 흔치 않다.

"와 그라요? 어무니."

"눈이 온다 카이! 방구석에 누워 있지만 말고 눈구겡 좀 해라."

풀어진 머리를 걷어 비녀를 꽂으며 기화가 방에서 밖을 내다본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 종잇장처럼 희다. 이마의 생채기가 눈에 띈다.

"눈이사 오나마나,"

"젊은 사램이 그라고 있으믄 되나. 눈도 오고 하니 몸단장하고 밖에 나가서 한바퀴 돌고 오라모."

기화는 눈보다 눈을 맞으며 걸어가는 석이 뒷모습을 본다.

"석아."

"."

돌아보지 않고 걸음만 멈춘 채 대답한다.

"나는 니가 온 줄도 몰랐구나."

하다가 잠시 생각는 눈치고 석이는 다음 말을 기다린다.

"너거 어무니보고 내일... 내일 좀 오라고 안 해줄래?"

겨우 상반신을 돌려 기화를 쳐다보며 대답한다.

"그럭하겄소."

"잊어부리지 마래이."

그것은 봉춘네가 덧붙인 말이다.

"알았소."

빈 물통을 덜렁거리며 석이는 길을 돌아 나섰다. 제법 큰 눈송이가 너울거리며 날아 내린다. 아까보다 추위는 한결 누그러진 기분이다. 빈속에 따뜻한 숭늉과 밥이 들어간 때문인지 모른다. 아니면 눈이 내리는 탓일까. 화장기 없는 기화 얼굴이, 솔밋하면서도 부드러운 이마에 남아 있던 생채기 생각을 석이는 한다. 그 생채기가 옛 일을 생쥐처럼 물어내온다. 아주 먼 옛날 다섯 살 적이든가, 여섯 살 적이든가, 타작마당에 나동그라졌던 유록빛 꽃신 한 켤레. 나비같고 꽃 같은 신발코는 주황색이다. 신발을 두른 가느다란 선도 주황빛이다. 검정 담방치마 밑으로 흰 속곳자락이 황망하게 논둑길을 가고 있다. 흔들리면서 가고 있다. 그것은 물바가지를 든 영만 누님 선이다. 봉순이 이마빼기에서 피가 흐른다고 누군가가 외쳤다. 봉순이 죽었다고 외치는 소리도 들려온다.

'이 직일 놈들! 동네 가운데 두겄나! 네 이놈들! 당을 지어가지고 좋은 뽄은 안 보고 개백정 겉은 그놈으 손, 하는 짓만 따라하고, 네 이놈들! 나무에 매달아가지고 오줌을 싸게 패야지!'

얼굴이 거무칙칙한 막딸네가 주먹을 휘두르며 고함을 친다.

'우리는 안 그랬소!'

'봉순이가 상놈으 새끼라고 욕을 한께 거복이가 때렸소!'

'봉순이보고 길상이 각시라 칸께요.'

'아니요!'

'하하핫 하하하...'

조무래기들 목소리, 조무래기들의 웃음소리 - 밀물처럼 다가오고 썰물처럼 멀어져간다. 선이가 서희를 업고, 영만이 어매는 봉순이를 안고 간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겹겹이 솟아오른 최참판댁, 그 집으로 이르는 언덕길을 올라간다. 서희는 노랑 저고리에 분홍치마다. 봉순이는 검정 치마에 양회색 저고리다. 빛깔들이 생생하다. 뚜렷하다. 하늘도 나무들도 뚜렷하다. 굿구경을 갔을 때 손가락을 빨면서 침을 삼키면서 바라본 울긋불긋한 제수, 칼춤을 추던 무당의 장옷이랑 꽃갓 등, 그런 것만큼이나 빛깔이 생생하다. 그림같이 곱다. 눈발도 없고 누더기 칙칙하게 때묻은 옷도 없고 물지게도 없다. 그러나 석이는 지난날의 그 오솔길에서 펄쩍 뛰며 소스라쳐 놀란다. 한 사나이의 심장을 찢는 울부짖음을 들은 것이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겹겹이 솟아 있는 언덕길을 왜 헌병이 내려온다. 총대가 내려오고 구둣발이 내려오고 하이칼라 머리가 내려온다. 사내가 울부짖는다. 개 끌리듯 읍내 가는 길을 끌려가며 울부짖는다.

'이 천하에 극악무도한 놈아! 내 이 정한조가 살아서 돌아오는 날 바로 그날이 네놈의 제삿날 될 줄 알아라, !'

구둣발이 눈앞에 어지럽다.

'네 죽어서 못 돌아오게 되믄은 넋이라도 돌아올 기다아! 돌아와서 네놈에 목을 물어 씹을 것이니, 이놈아! 조준구 놈아!'

하이칼라 머리의 키 작은 사내가 오랏줄에 묶인 사내에게 달려든다. 주먹으로 입을 내지른다. 하이칼라 머리가 이마빼기에서 너풀거린다. 하얗고 빤들빤들한 이마다. 오랏줄에 묶인 사내 입에서 피가 쏟아진다.

'하하하하... 하핫핫...'

미친 것같이 웃어젖히며 사내는 피를 내뱉는다.

'윤보 이 개자식아! 네놈이 형이가! 네놈이 의병이가아! 내가, 내가아 있었다믄 머리카락을 헤쳐서라도 저놈! 조가 저놈의 숨통을 막았일 기다! 이 악독한 놈아!'

왜 헌병이 총대로 옆구리를 찌른다.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거린다. 넘어졌던 사내가 일어선다.

'조가 이놈아! 넋이라도오--'

어미는 밭둑에서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석이는 짚세기를 벗어 들고 맨발로 뛴다.

'아부지이! , 아부지이!'

포승을 잡고 가던 왜놈이 돌아보고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지른다. 구둣발로 걷어찬다.

'아부지이! 아부우--지이!'

이번에는 총대 든 놈이 돌아섰다. 총대 끝에는 칼이 꽂혀있다. 총대가 석이 가슴을 겨눈다.

'울 아부지 와 잡아가노오! 와 잡아가노오! 이놈들아! 나쁜 놈들아! 내 아부지 내놔아라아! 아부지이!'

물지게를 지고 가는 석이 입에선 신음 소리가 난다.

나루터 근처를 지나 장터 옆에 이르렀을 때 눈발은 뜸해져 있었다. 그새 온 눈 때문에 파장이 되지는 않았던가보다. 정월 들어 처음 서는 장이라 장터가 쓸쓸하다. 희뜩희뜩한 눈발 사이로 포립을 삐뚜름하게 쓴, 눈썹이 새까맣고 수염이 허연 가위장수 노인의 을씨년스런 모습이 보인다. 파는 사람 사는 사람 다 어려운 처지임이 뻔하다. 곡식 됫박이나 팔아가려고 전을 폈을 것이요, 장보러 나온 사람들 역시 비축한 것이 없어 나왔을 터인즉 쓸쓸하고 빈한한 장날이다.

"임마! 석아!"

부르는 소리에 돌아본다.

"아아 관수형님."

"형님이 멋꼬? 아제비다, 아제비."

웃으며 다가오는 사내, 바짓말기에 두 손을 찌르고 움츠린 양어깨 사이로 자라처럼 목을 묻은 꼴이다. 삼십이 될까말까. 핏발 선 눈이 조그맣고 얼굴빛은 까무잡잡하다.

"무신 생각을 하고 가니라고 사램이 불러도 모르노 말이다."

"아무 생각도 안 했심다."

"쪼깐이집에 가나?"

"."

석이와 나란히 걷는다. 물지게에 걸린 물통 때문에 거리는 있었으나.

"나도 거기 간다. 밤샘을 했더마는, 아이고 속쓰리다."

"..."

"니한테도 내 국밥 한 그릇 사지."

"점심은 묵었소."

"봉순이 집에서?"

"."

"젊은 놈이 점심 두세 그릇쯤, 그라고 점심때는 벌써 지났다. 내 주무니 걱정은 말고, 간밤에 한 놈 깝데기 벗긴인께."

"노름했구마요."

"했지러."

"형님도,"

"? 마땅찮다 그 말이가?"

"그렇소."

"바린 말을 한께로 기특하기는 하다. 그래도 이 아제비가 비리갱이 겉은 장돌뱅이 벳기묵지는 않는다. 꾼들하고 몇 판 벌였제. 하하핫..."

흰 이빨을 드러내놓고 태평스럽게 웃는다.

"말하잘 것 같으믄 이 아제비는 말이다, 암행어사 같은 거다, 그말 아니가. 비리갱이 겉은 장돌뱅이 털어묵는 장터 건달 놈들을 한 달에 한 분씩, 더도 말고 한 달에 한 분씩만 혼짝을 내주니께, 하하핫..."

움프린 두 어깨 사이에 자라처럼 목을 묻은 모습과는 달리 뱃심 좋은 큰소리다.

"그라고 또 노름판에서 걷은 돈 가지고 주색잡기하는 잡놈도 아니고 말이다. 어림없지, 어림없어. 마 그거는 그렇다 하고 봉순이는 집에 있더냐?"

"."

"머하더노?"

"아픈갑십디다."

"그럴기다. 심화병이 났일 기구마."

관수 입가에 묘한 웃음기가 번져나온다.

"니 길상이 알제?"

"길상이라 카믄,"

"봉순이하고 함께 있었던 그 최참판네 길상이 말이다."

"말이사 많이 들었지마는, 더러 보기도 했지마는 어릴 적이라서,"

"어리기는 머가 어릴 적고? 니 지금 열하홉, 아마 그렇기는 됐일거로?"

"."

"그러믄 보자,"

관수는 바짓말기에서 한 손을 뽑아 손가락을 꼽아본다.

"열세 살, 그러니께 니가 열세 살 적에 그 난리가 났구마."

"열세 살 적에 우리 아부지는 죽었지요."

"맞다. 그러니께 육 년 세월이 지났고나. 열세 살이라? 열세살이믄 길상일 모릴 턱이 없지."

"모린다는 기이 아니고 얘기해본 적도 없고 해서..."

그러나 관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난데없이 길상이 얘기를 꺼내었는지 궁금했지만 석이도 되묻지는 않는다. 육 년 전, 그렇다. 가을걷이를 앞둔 그러한 날, 아래위 마을에서 낫, 도끼, 쇠스랑, 대창 등 각기 연장을 손에 든 장정들이 모였을 적에 깃털을 세운 투계처럼 관수는 그들 속에 끼어있었다. 횃불을 켜든 그 무시무시했던 밤 조준구의 행방을 결사적으로 찾은 것도 그였었으며 산에서는 용감한 젊은이 중의 한 삶이었다. 끝까지 싸우고 행동을 함께 했었다. 그러나 윤보의 죽음으로 와해된 대열이 우왕좌왕 갈 바를 모르고 흩어졌을 때 양반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김훈장을 싫어했던 관수는 김훈장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마다하고 교분이 두터웠던 길상과 갈라서버렸던 것이다.

그 후 얼마 동안 관수는 화적떼를 따라다니다가 그것도 시시하여 산을 떠나 진주로 내려왔고 진주서는 또 얼마 동안은 백정네 집에서 은신했었는데 백정네 딸을 얻은 뒤부터 그의 전력을 알고서 추적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진주 성내를 활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생활의 뿌리를 박은 듯싶었지만 어떻게 보면 그런 것 같지 않은 점도 있었다. 그를 아는 사람이면 주먹깨나 쓴다는 것, 노름 솜씨가 대단하다는 것, 그리고 가끔은 막일 품팔이도 하고 소매통 실은 소달구지도 끌고 다닌다는 대개 그런 정도였었는데 한 가지 소문이 난 일화는 소매통 사건이다. 한낮, 여름 햇빛이 쏟아지는 날이 있었다. 길켠에 소달구지를 세워놓고 인가에서 인분을 담은 소매통을 들고 나오는데 마침 조선인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 고약한 냄새에 얼굴을 찡그렸다.

"영치기,"

관수는 우선 소달구지 옆에 소매통을 내려놓았다 소매통 아구리를 지푸라기도 막아서 달구지 위에 올려놓을 심산이었던 것이다.

"길바닥에 이게 뭐얏!"

하고 순사가 눈알을 굴렸다.

"보믄 모르시오?"

관수는 본체만체 지푸라기를 둘둘 말아서 소매통 아구리를 막으려 했다.

"? 이 건방진 놈이,"

"순사 나으리라고 설마 밥그릇에 모래 담아 잡숫겄소?"

"아아니 이놈이? 뉘 앞에서 감히 주둥아릴 놀리는 게야!"

"순사나으리 아니라 순사나으리 할배라도 머 못할 말 했소?"

관수는 지푸라기를 뭉치다가 그 조그만 눈으로 순사를 쳐다보았다.

"뭣이 어쩌고 어째?"

화가 난 순사는 구둣발로 소매통을 걷어찼다. 그러자 소매통이 구르면서 아구리로부터 인분이 길바닥에 콸콸 쏟아진 것이다. 졸지간이라 순사가 놀라기는 좀 놀란 모양이었다. 그러나 관수는 태연자약하게 무쳐 들었던 지푸라기는 달구지 위에 올려놓고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더니 두 손을 모아 인분을 걷어서 소매통 아구리 속에 쏟아 붓는 게 아닌가. 기가 질려버린 순사는 오도 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일어선 관수는 인분이 묵은 손바닥으로 냅다 순사 뺨을 갈긴 것이다.

순식간에 사람이 모여들었다. 하마 한 소동이 벌려질 판에 급보를 받은 순사들이 달려왔다. 그리하여 관수는 며칠 구류를 살기는 했으나 그 정도로 마무리된 것은 순사주임이라는 자가 식민지에 나온 따라지 일본인치고는 다소 양식이 있었던지 혹은 배짱을 숭상하는 일본인 기질 탓이었던지 관수에게 호의를 베푼 탓이다.

"소레 구라이노 하라가마에닷달 에라이 햐구쇼쟈. 다가 히도갓다네. 난또 잇데모다이니혼데이고꾸노 게이샤쯔쟈. 미세시매노 다메니모 유루수 와께냐이깡 (그 정도 배짱이면 훌륭한 농부다. 그러나 심했어. 뭐라 해도 대일본제국의 경찰이야. 본보기로서도 용서할 순 없어)."

칼날같이 양켠으로 뻗쳐오른 수염 밑에 두툼한 입술을 우물거리며 어눌한 음성으로 말했었다. 그러나 이 밖의, 백정의 딸을 얻어서 산다는 것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형님 먼저 가소. 나는 물 질러서 가겄심다."

"그래."

관수는 저만큼 보이는 쪼깐이집을 향해 입김을 흩날리며 가고 석이는 도중에서 길을 꺾어든다. 눈은 싱겁게 멎어버리고 하늘은 개기 시작했다. 길가 삽짝 앞에 강아지 한 마리가 오들오들 떨면서 앉아 있었다. 석이 그 앞을 지나친 뒤 강아지는 우우 하고 짖어보다가 그것도 싱겁게 그만둔다. 우물가에는 아낙이 보리쌀을 씻고 있었다. 소매 끝을 걷어 올린 두 팔뚝이 빨갛다. 석이는 우물에 두레박을 던져서 물을 퍼올린다. 누구든 적선하라는 듯 아무렇게나 놔둔 돼지 밥통에 아낙은 보리 뜨물을 부어준다. 물지게를 진 석이는 좁은 골목을 옆걸음질 쳐서 빠져나온다. 쪼깐이집 일각대문을 넘어 가겟방 옆, 장작이 쌓인 골목으로 해서 넓어진 안마당에는 장독대가 있었고 부엌에 잇달린 방 두 개가 나란히 있다. 물독에 물을 부어주고 물지게를 벗어 장독가에 놔둔 석이는 가겟방 쪽으로 간다.

"형님."

". 물 다 질었나?"

"."

"들어오너라."

짚세기를 벗고 강정같이 얼어버린 바짓가랑이 때문에 몸짓이 어색한 석이 방으로 들어간다.

"앉아라."

기다랗게 만든 술판 앞에 앉는다. 점심때도 저녁때도 아니어서 가겟방은 손님이 뜸했다. 쪼깐이집은 서울식 비빔밥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겨울이 되면서부터 국밥을 찾는 손님이 있어 국밥도 겸해 하는데 방안에 걸어놓은 솥에서 서리는 김과 온기로 방안 공기가 후끈하다. 그새 관수는 술을 마시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지마씨 여기 국밥 두 그릇 내놓으소."

", , 그러지요."

"아니 대답이 와 그리 찐찐하요?"

쪼깐이라는 별명의 서울댁은 묵살하듯 그 말 대꾸는 하지 않는다. 그것으로써 마땅찮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외상배기도 아닌데 냉랭하구마는,"

관수는 왜 이 여자가 찐찐해하는가를 알고 있다. 물지게꾼, 그러니까 집에서 부리는 하인 같은 존재에 대한 시중이 자존심을 상하게 한 것 같고 거지나 다름없는 행색의 석이가 가겟방에 뻗치고 앉은 것을 기분 나빠해 한다는 것을 관수는 어렵잖게 느낄 수 있다.

'빌어묵을 계집년이 지는 머 별수 있는가?'

서울댁은 느적느적 사발 두 개에 밥을 나누어 담고 솥뚜껑을 열어젖힌다. 김이 왈칵 솟구쳐오르고 솥뚜껑의 쇳소리가 꽤나 오래 파동하다 사라진다. 놋쇠 국자를 철벙거리며 국을 푸는 여자, 얼굴이 김에 싸여 아리송하다. 쪼깐이, 조그마한 여자다. 두만이보다 몇 살 위라던가? 얼굴이 조그맣고 코도 입도 밥풀같이 조그맣다. 큰 것은 쌍꺼풀이 굵게 진 눈뿐이다. 눈알이 불거져나온 듯 얼핏 본 느낌이 소눈깔, 윤곽도 다듬어졌고 생김 하나하나 뜯어보면은 나무랄 곳이 없다. 몸매는 가녈하다. 팔다리도 가녈하다. 다만 팔다리가 짧은 게 어쩐지, 어디가 어떻달 수 없는데 밤톨 같지가 않고 마늘각시랄까, 노르께하나 핏기 없이 흰 얼굴에 매쑥한 느낌을 안겨주는 마늘각시다. 마음속으론 욕지거리를 하면서 관수는 묻는다.

"영만이 독골에 있소?"

여자는 국자를 솥전에 걸쳐놓고 솥뚜껑을 닫으며

"거기 안 계시고 어딜 가시겠어요?"

오히려 반문하는 투다.

"두만형님은 요새 일 안 하지요?"

"겨울에 무슨 일이 있겠어요?"

말투는 여전하다.

"그이도 초정월이라고 독골에 가 계시오."

그러니 부재중이라는 것을 밝힌다.

'제에기! 누가 지 서방보고 술 내놔라 할까봐서? 더럽게 고만도 떨어쌌는다.'

자주 오는 것은 아니나 가끔 올 때면 남정네, 시동생과는 잘 아는 사이라 하여 말만이라도 친절했던 여자다. 조금 전만 해도 수굿하게 대하던 여자다. 순전히 석이 때문이다.

"지난해 독골에선 추수 많이 했소?"

관수는 또 물었다.

"많이 하기는요? 자리잡은 지가 얼마나 된다고요?"

국밥에 양념장을 뿌리고 여자는 사발을 관수 앞에 놓는다. 석이 앞에 사발을 놓을 때는 손길이 거칠었다. 술판 위에 국물이 조금 엎질러졌다. 관수는 곁눈으로 여자의 손길을 본다.

"석아, 어서 묵어라."

하고 자신도 밥을 설설 말아 퍼먹으며

"두만형이 독골에 파묻히 있인께 아지마씨 심사가 덜 좋겄소."

슬쩍 약을 올린다.

"덜 좋은 것도 없지요. 부모님이 계시는데 일 년 내내 발걸음 끊어야 되겠어요?"

말을 받아서 메어친다.

"하항, 그도 그렇소, 듣고 보니. 임마 석아! 달암질쳐서 묵어라."

관수가 넘겨다본다. 사발 속은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 쪼깐이집의 국밥, 무를 엇비슷이 썰어넣고 끊인 생대구국이다. 석이 입에 쫄깃쫄깃한 대구살이 달다. 젖빛깔이 방울방울진 고기는 입속에 들어가기가 바쁘게 녹는다. 향긋한 생파 내음, 사발의 바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발을 기울이며 남은 것을 아쉽게 퍼올리는 석이 모습을 여자는 멸시의 눈으로 힐끗 쳐다본다. 눈살을 찌푸린다.

"아지마시."

"."

"물지게꾼이 내놓는 국밥 값은 썩은 돈이요?"

"무슨 말을 그렇게,"

느닷없이 하는 말에 여자는 당황한다.

"똑똑히 들으시오, 각시. 그렇지 두만이 각시믄, 작은 각시든 큰각시든 각시는 각시니께로."

"아니."

얼굴이 벌개진다.

"보소 서울각시, 각시 씨애비 씨에미 그라고 서방도 다 그렇기 누데기 옷을 입고 살아왔소. 그거는 그렇다 치고 또 니는 머꼬? 술판이나 닦는 계집 푼수에 누굴 보고 괄시하고, 차벨할 개뿔이나 있다 그 말가?"

뒤에 가서는 주저 없이 반말을 뇌까린다. 여자의 말문이 막히나. 약은 여자다. 시비를 걸려고 별러 하는 수작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면천한 처지로서 오늘 이만큼이나 살게 된 것을 이웃사촌이더라고 맴이 안 좋을 까닭이야 없제. 멩색이 서방이나 시동생이나 모두 잘 아는 사이고 보믄 또 고향 있을 적에는 부모들도 형제 겉이 지낸 사정이고 보믄 작은 각시든 큰 각시든 간에 남과 같이 돈을 받더라도 생각은 좀 달라얄 긴데, 누구 동냥은 줄 알았든가?"

"제가 어쨋기에 이리 화를 내실까?"

여자는 누그러진다.

"그거야 가심에 손 얹어보믄 빤히 알 일 아니던가? 예사 별수도 없는 것들이 사람을 괄시하는 법이라. 앵이꼽아서,"

그때까지 아무 말이 없던 석이

"머를 그러요. 그만 나갑시다."

"임마! 니는 가만히 있어라. 아무튼지 간에 보소, 서울각시. 김두만을 따라 살라카믄 그 고만 떠는 버르장머리부터 고치얄 기요. 김씨네 부자가 자리꼽재기로 소문나 있기는 하지마는 경위에 틀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아닌께. 더군다나 두만이는 색에 반해부리는 얼간이도 아니고,"

서울댁은 움찔한다.

"서울서는 어느 대가댁 기출인지 각시 근본이야 알 턱 없고 영만어매나 두만이댁네는 다 심성 곱고 후덕한 사램인데 앞으로 조심하는 기이 좋을 기구마. 좋지도 않은 소리 귀에 들어가봐야 큰며느리만 싸고 도는 시부모 심사에 부채질일 기고 두만이도 역성들 사람은 아닌께, 내가 이래봬도 입이 싸고, 등쳐서 간 내묵는 솜씨도 노름판에서 자알 익힌 터이라,"

슬쩍슬쩍 급소를 찔러놓고 관수는 일어선다.

"석아 가자."

셈을 하고 밖에 나온 관수는 바람에 날려버리듯 침을 뱉는다. 석이는 빈 물지게를 지고 우두커니 기다리고 서 있었다.

'약삭빠른 계집년, 펄펄 뛰믄서 달라들기라도 했으믄 덜 밉겄다. 술판을 엎을까봐 겁이 났겄지. 망나니들 데리고 와서 분탕질할까봐 겁이 났을까? 흐흥 그보다 죽자 사자 따라 살라 카이 남정네 눈도 두럽고 시부모 눈도 두럽었겄지. 눈이 시퍼런 본댁이 있어, 지가 무신 자식을 낳았나, 가심이 설렁했을 기라. 제에기, 내사 그놈의 경사 쓰는 목소리만 들어도 정이 안 가는데 하기사 그 집구석 부자가 모두 셈이 빠르니께, 못난 것들!'

관수는 또 퉤! 하고 침을 뱉는다.

"석아."

"."

"나 그렇잖애도 한분 만낼라 캤더니라."

"..."

"마침 오늘 만냈이니께, 내 할 얘기도 있고 하니 저녁에 좀 오니라."

"그럭허소."

"자고 갈 셈치고."

"."

관수는 추수몰 쪽으로 가고 석이는 봉곡 쪽으로 간다. 봉곡에서도 한참 더 걸어서 띄엄띄엄 네댓 채 오두막이 있는 곳으로, 나무 한 뿌리 눈에 띄지 않는 자갈밭의 언덕이다. 울타리 없는 마당에 들어서며 석이 되돌아본다. 남강 건너편의 대숲이 아득히 먼 곳에서 어슴푸레 떠 보인다. 그 사이, 넓고 평평한 회갈색 들판이 한없이 뻗어 있다. 넓은 옥토의 임자는 대체 누구일까? 석이는 습관처럼 생각해보는 것이다. 하늘의 구름들은 걷혀지고 동천에 신열을 잃은 희미한 해가 서편 산마루에 걸려 있다. 멀지 않아서 저녁이 찾아올 것이다. 어미는 눈을 들어 아들을 쳐다보는데 눈알이 빨갛다.

"무신 일이 있었소?"

울어도 대성통곡을 한 모양이다.

"왜 그러요?"

"내가 온께 아이들이 울고 있더라. 순연이는 불때기가 씨퍼렇게 부어올라서,"

"와 그랬던고요?"

"와 그라기는? 산에 나무하로 갔다가 산지기한테 잽?더란다."

"...."

"나무하고 갈구리하고 뺏았이믄 그만이지 그 무상한 사램이 어디 때릴 구석이 있다고 어린것을 때맀겄노."

석이는 선 채 어미를 바라본다. 열두 살과 여덟 살짜리 두 누이의 손등이 터서 피가 흐르던 것을 아침에도 보고 집을 나섰다. 들판이 넓고 멀리 야산이 더러 있으나 진주는 본시부터 나무가 귀한 곳이다. 외지서 남강을 따라 숱하게 들어오는 나룻배는 성내의 땔감을 충분하게 대주지만 돈 없는 가난뱅이들 겨울 한철은 몇 리 길을 걸어야 솔잎이나마 긁어 올 수 있다. 얼음을 깨어 삯빨래를 해야 했고 여름 봄엔 끌밭매기, 치마 밑에 찬밥 한 덩이 얻어오는 드난살이에 눈이 진무른 어미와 일년 열두 달 물지게를 지고 나가는 오라비, 언제부터였던가 어린 두 자매는 산지기 눈을 피해가며 근처 산으로 가서 솔잎을 긁어오게 되었다. 틈을 보아서 석이는 한두 짐의 나무를 해다 부엌에 내려주지만 농사도 아니 짓는 처지에 수숫대 콩대 나부랑이도 얻어 볼 수 없고 땔감은 항상 감질나게 딸린다. 자연 어린것들도 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 산지기 몰래 산을 드나들었던 모양이다. 시래기죽을 끓여 양푼에 퍼다 놓고 식구들이 좁은 방안에 둘러앉았을 때 석이 눈은 시퍼렇게 멍이 든 순연의 얼굴 쪽으로 쏠린다. 어글어글한 눈이 확 풀어지는가 싶더니 빛이 번쩍 난다. 언제나 양이 차지 않는 아이들 배에서는 꾸럭꾸럭 소리가 난다. 먹는다는 기쁨에서 침이 넘어간다. 설움이 무엇이며 추위가 무엇인가 그런 것쯤이야, 아이들은 먹을 것을 앞에 둔 이 순간이 무한하게 행복할 뿐이다. 어미는 석이 몫의 시래기죽을 먼저 떠서 밀어준다.

"나는 안 묵을라요."

"?"

"관수형님이 밥 사주어서 묵었소."

몫이 많아졌다 싶었던지 두 어린 것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그래도 묵어라. 사주는 밥이 얼매나 될 기라고 장골들 배는 헛수바다라 카는데,"

"봉순이 집에서도 밥 한술 얻어묵었인께요. 자아들이나 실컨 묵어보라 카소."

아이들은 어미가 퍼주는 사발을 감싸안듯이 하고 후루룩 후루룩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죽을 먹는다. 어미도 한술 뜨다 말고

"관수는 우찌 만내서 밥을 억어묵었는고?"

불안해하는 눈빛이다.

"길가에서 만났소.:

"요새도 그 사람 노름장에 댕기는가? 클 때는 아이가 착실하더마는,"

석이는 대꾸하지 않는다. 방안에서는 후루룩거리는 소리만 들렸으며 밖은 어두워온다. 석이 호롱불을 켠다. 불빛 아래 아이들은 아귀같이 처먹는다. 그 꼴을 잠시 쳐다본 석이 눈이 호롱불같이 깜박인다.

어미 아들이 눈 오고 비오는 날에도 쉬지 않고 품을 파는데 네 식구 밥 먹기가 이렇게 고단할 리 없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어려운 사정이 따로 있었다. 빚이 있었던 것이다. 일금 심십 원의 빚, 관리의 한 달 월급에 불과하지만 십오 원짜리 조선인 서기도 수두룩하다면 적은 돈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일금 삼십 원의 빚, 이들에게는 짚고 일어설 수 없는 무서운 짐이며 잡힐 가산도 없는 처지, 비싼 변리 아니고는 얻어쓸 수 없었던 빚이었다. 빚진 경위는 이들이 믿고 온 친정의 사정서부터 시작된다. 친정 오라비는 누이동생(석이네)을 출가시킨 이듬해 부친이 사망하여 삼년상을 벗었고 상막 치우기가 바쁘게 모친이 죽었다. 혼사 한 번에 초상이 두 번, 작인이지만 부지런한 탓으로 어렵잖게 지내던 살림이 기운 것이다. 이 무렵 조준구 서슬에 견디다 못한 한조가 처가를 연줄 삼아 땅마지기나 얻어 부칠 요량으로 찾아왔는데 부지런한 처남을 믿는다면서 요행히 땅을 주겠다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솔가할 작정을 하고 평사리에 돌아가 변을 당했다. 막내 복연을 업고 두 아이를 거느린 석이네가 입은 옷 그대로 평사리 마을을 쫓겨서 친정으로 왔을 때 그 집에는 또 하나의 불행이 도사리고 있었다. 올케가 앓고 있었다. 병은 한 달 두 달에 끝나지 않았다. 자리에 누운 채 운신을 못했는데 허리뼈 속에 병이 생겼다는 것이다. 결국 약값으로 배먹이 소가 없어지고 뼈대가 쓸 만했던 사칸 집이 날아가고 오막살이 초가 한 칸으로 자기 식구들은 옮긴 뒤 친정 오라비는 어린 석이와 함께 지금 사는 이 집을 지어주었다. 진인 마른일 조카와 외삼촌이 했지만 일이 끝났을 적에는 빚돈 십 원을 안았다. 그러나 내집이랍시고 살림을 시작한 뒤 석이네는 밤낮 병든 사람처럼 울었다. 총맞아 죽은 남편의 시체를 평사리까지 옮기지도 못하고 읍내 어느 야산에 버리듯 묻고 온 그 일 때문에 우는 것이었다. 시체를 거기 내버려두고 어찌 내 집이라고 지붕 밑에서 잠을 자겠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이십 원을 다시 빚내어 시체를 진주까지 옮겨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고 본시 묻혔던 자리 근처에다 터를 사서 이장을 한 것이다.

"그때 그만... 봉순이가 순연이나 복연이 둘 중 하나를 달라 했일 적에 보냈더라믄."

허기를 반쯤 달랬을 때 어미는 한숨 섞인 말을 했다.

"식구 하나 줄이믄 니 허리도 폐이고, 하나라도 배는 안 곯고 살긴데."

"시끄럽소."

석이 화를 벌컥 낸다. 그러나 어미는 또 다시 밀어본다.

"거기 갔이믄 밥이사 배부르게 묵을 기고 떨어진 옷은 안 입을 기고, 이 치분 날에 나무하러 산에 갔겄나? 저렇기 볼따구가 멍들지도 않았을 긴데, 순임금도 사세 불리하니께 독장사를 했다 안 카더나? 우리라고 무신,"

"아무리 배불리 묵고 떨어진 옷 안 입어도 남자 노리개 되는 것보다 낫소."

"그거사 머 봉순이가 키운다고 꼭 그리 된다는 벱이 있나?"

"갈 데 있겄소? 그 속에서 살믄 자연고로 그리 되는 기지요."

"저 얼굴의 멍 좀 보라모. 내사 간이 아파서 죽겄다."

어미는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닦는다. 정신없이 죽을 퍼먹던 아이들도 배가 불러오니까 숟가락 놀리는 손이 무디어지며 어미와 오라비 말에 귀를 세운다. 큰애 순연이가

"오빠 나 갈란다, 거기 보내도고."

몸을 흔들며 조른다.

"니는 나무 해야 안 하나. 내가 갈 기다. 그제? 어매, 생이는 나보다 큰께로 나무 많이 할 기고, 어매 안 그렇나?"

막내가 어미한테 동의를 청한다.

"이눔 가시나야. 니가 거기 가믄 마리 닦고 군불 때고 밥하고 우찌 그거를 할 기고? 실데없이 까불지 마라, 문딩이가시나."

"거짓말이다. 누가 모릴까봐서? 밥하고 군불 때고 안 한다 카더라. 숭님이나 떠다주고 음. 또오 빗자리 가지고 방이나 씰어주고 그라믄 된다 카더라."

"누가 그라더노! 누가 그라더노!"

순연이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복연이 옆구리를 쥐어박는다.

"어매가 똥돌네보고 하는 말 다 들었다! 다 들었다 말이다."

작은 것도 지지 않고 언니의 얼굴을 할퀸다. 한 소동이 벌어질 판인데

"그만 못하겄나?"

오라비 말 한마디에 서로 덤벼들던 동작을 멈춘다. 슬그머니 일어선 석이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처마 끝에 붙여놓은 지게를 지고 낫을 들더니 휭하니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한 시각쯤 지났을까? 어미는 부엌에 호롱불을 켜놓고 두붓물에 빨래를 주무르고 있는데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생솔가지 한 짐을 들어다가 부엌바닥에 놓는다.

", 니 우짤라꼬 생솔가지를,"

"걱정 마소."

"낮에 순연이 그리키 야단을 맞았는데 알면 큰일날 기다. 그놈의 산지기놈 심술이 좀 하든가?"

"우리 순연이 볼따구 피멍 든 값이오. 생솔갱이 아무리 뿌질러도 아파서 울지는 않은께요."

석이 음성은 침울하고 무섭게 울렸다.

"어매."

"."

"관수형님한테 갔다오겄소. 밤에는 아마 못 올 기요."

"거기는 와 가노?"

일손을 놓고 아들을 쳐다본다.

"좀 다니가라 하더마요."

"나는 니가 그 사람 찾아댕기는 기이 좋잖다. 사램이 전에는 안 그렇더마는 노름방에나 댕기고 뽄볼 기이 머 있다고."

"..."

"사램이란 좋은 거는 배우기 어러바도 나쁜 거는 금세 배우니께. 백정의 딸하고 산다는 것도 내 마음에 끼누마."

"백정은 사람이 아닌가요? 어매는 그런 소리 마소. 설움받기로는 그 사람들이나 우리나 다 같소."

"그거사 그렇다 카더라도 노름방 드나들믄 볼장은 다 본 기다. 인이 한분 백이믄은 세상이 무너져도 그 버릇은 못 고치니께."

"갔다오겄소."

기분이 좋지 않은 어미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가버린 줄 알았던 석이 다시 나타났다.

"잊어부릴 뿐했소. 낮에 봉순이가 내일 어매 좀 오랍디다."

"무신 일이고?"

"모르겄소."

"알았다."

어미는 힐끗 눈을 뜬다. 가물가물한 불빛 아래 여위고 주름진 얼굴, 매달리듯한 눈빛.

"석아."

"."

"에미는 니를 믿는다. 제발 허방에는 발 딜이놓지 마라. 없이믄 없는 대로 살지.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치겄나?"

"어매는 관수형님을 잘 모르니께 그러요. 어매가 생각하는 사람 겉은믄 상종하지도 않을 기요."

"그래도 니는 아직 세상일을 모른다."

"허 참."

아들의 발소리는 멀어지고 어미는 힘없이 빨래를 주무른다. 바람 지나가는 소리, 먼 곳에서 개 짖는 소리, 아이들이 잠이 들었는가. 그러고는 온 세상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진다.

 

 

7. 홀어미와 기생

첫새벽에 일어난 석이네는 보리방아를 찧는다. 찧다가 허리를 펴고 찧다가는 허리를 펴고 하면서 아침에는 죽 대신 깡보리밥이나마 밥을 짓는다.

'날이 샐라 카믄 엄치 있어야겄지?'

아들 생각을 하는 것이다. 왠지 가슴이 뻐근하고 겁이 난다. 꿈자리가 뒤숭숭해선 지도 모른다. 석이가 어디로 훌쩍 떠나버릴 것만 같은 이상한 예감이 머릿속에 맴을 돌면서 떠나지 않는다.

"아이구 허리야."

방아질을 멈추고 허리를 두드리는데 새벽하늘에 깜박거리는 별들이 눈에 들어온다. 별이 깜박거리고 석이네 마음도 깜박거린다. 석이가 떠날지도 모른다, 떠날지도 모른다, 떠날지도 모른다. 관수를 찾아갔으니 행여 노름판에나 따라다니다가 몹쓸 날건달이 되지 않을까? 그것이 염려된다면 모를까, 어젯밤까지만 해도 그 점을 근심했었다. 역시 꿈 탓이다.

'어매, 나 겨드랑에 날개가 돋쳤소.'

'어디, 어디?'

석이네는 눈을 비비고 살펴봤으나 석이 겨드랑에는 날개가 없었다.

'날개는 무신 날개고? 내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

'아니요. 날개가 돋쳤소. 탄탄한 날개가요. 그러니께 나는 훨훨 날아댕길라요. 구만리 장천을 훨훨 날아댕길라요. 훨훨, 훨훨 - - -'

나중에는 아들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훨훨 하는 목소리만 되풀이 되풀이 들려왔다.그 목소리에 잠이 깬 것이다. 다 찧은 보리쌀을 사기에 담아 써억써억 씻는데 훨훨 날아다닌 거라던 꿈속의 석이 음성이 들려온다. 귀를 털어버리고 싶게 들려온다.

'무신 그런, 훨훨 가기는 어디로 가노?'

보리쌀을 삶아놓고 어젯밤 두붓물에 주물러놓은 빨래를 솥에 안친다. 둥그렇게 쌓아올린 빨래 한복판에 물을 붓고 양잿물을 넣고- 불을 지핀다.

'개꿈이지 머. 꿈을 믿다가는 환장한다.'

날이 새기 시작한다. 복닥복닥 빨래 끓는 소리가 난다.

'이눔 자석이 와 아즉 안 오노. 에미 걱정하는 것을 빤히 알 기믄서.'

석이네는 김이 서리는 빨래를 건져 통에 담는다. 방망이를 빨래 사이에 찌르고 바가지를 엎은 뒤 그것을 이고 자갈길을 달리듯 개천으로 간다. 얼음 밑으로 물 흐르는 소리, 심장을 가로지르고 가는 찬바람, 얼음을 깬다. 방망이로 툭툭 얼음을 깬다. 바스라질 가랑잎 같은 몸이 마치 신들린 무당처럼 일을 한다. 마음이, 독기가 얼음을 깬다.

'일이 보배지. 하모 일이 보배고 말고.'

'명천에 하나님네. 우리 석이 수명장수 비나이다. 비명횡사 아비 몫까지 살게 하소서. 재앙은 물 아래로 가고,'

떠난다는 것은 살아서만 떠나는가, 죽음으로도 떠난다. 석이네 마음 밑바닥에는 꿈이 그런 암시로도 깔려 있는 것이다. 얼음을 깬다. 허공에서 춤을 추는 잡신들에게 방망이질을 하듯 얼음을 깬다. 봄여름 가을엔 일거리가 많다. 들판이 잠들고 사람들은 아랫목에 웅크리는 겨울 한철에는 편안한 사람들이 내놓는 고된 빨랫거리말고는 돈을 벌 일이 별로 없다. 겨울은 석이네한테 빨래품의 계절인 것이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삶은 빨래와 손끝이 저리는 개울물이 함께 어울려지면서 빨래는 하얗게 때를 벗는다. 돌아오는 길은 더디다. 발이 얼어서 무겁다. 해가 떠오르고, 울타리 없는 두 칸 오두막 흙벽에도 햇살이 퍼진다. 아이들이 흙벽에 기대어 어미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비 아즉 안 왓나?"

"안 왔소."

"색히 안 오고 머하는고?"

"아침밥 묵고 올 긴갑다."

아이들은 자나깨나 밥 소리다.

"와 방에 안 있고 나왔노. 오늘은 빨래 삶고 해서 방이 따실 긴데."

"어매 오는가 볼라꼬."

복연이 누비저고리 앞섶을 잡아당기며 말한다.

"방에 들어가거라. 따신 방 식후지 말고, 내 밥해서 들어갈 기니."

아이들을 방에 몰아넣고 빨랫줄에 빨래를 넌 뒤 석이네는 밥을 짓는다. 삶은 보리에다 고구마 세 개를 썰어놓고 밥을 안친다.

"어매."

석이 얼굴을 쑥 내밀었다.

"아니구, , 오나."

얼굴이 어둡다.

"와 이리 늦었노. 아니 그, , 저고리는 웬 것꼬?"

저고리가 달라졌다 누덕누덕 기운 그 누더기가 아니다. 솜이 폭신해 보이는, 올이 굵은 무명저고리다. 품이 덤쑥하여 석이는 의젓한 총각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관수형님이 까매기 보믄 아제비야 하겄다 캄시로 입던 것을 벗어주데요."

"주니께 고맙기사 하다마는 관수가 니한테 와 그라제?"

떨떠름한 어조다.

"달리 생각할 것 없소. 그 형님은 여불이 있인께 준 기지요."

화가 난 목소리다.

"그거사 머... 방이 따실기다. 들어가거라. 밥이 끓으니께, 묵고 나가야제."

"밥은 묵고 왔소. 이대로 나갈라요."

석이는 뭔가 종이에 싼 것을 부뚜막에 놓는다.

"그거는 뭣꼬?"

"소개기요. 그 집에서 주더마요."

"소개기!"

이번에는 왜 쇠고기를 주느냐고 따지지 않고 말을 참는다. 물지게를 챙겨드는 석이 얼굴은 여전히 어둡고 근심하는 빛이 있었다. 그러나 탈기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야무진 매듭 같은 것, 무엇인가를 마음속으로 굳게 작정한 듯한 기색이 엿보인다. 어미를 힐끗 한번 쳐다보고 저만큼 나가다가 석이는 큰소리로 인사한다.

"갔다오겄소!"

아침을 먹고 순연이에게 뒷설거지를 시킨 석이네는 아랫목에 굴려놓은 버들고리를 연다. 고리 밑바닥에서 고동색 주란사 치마와 흰 명주 저고리를 꺼낸다.

"옴마, 내 설옷 한분 보자!"

누워서 발길질을 하던 복연이 벌떡 일어났다. 고리짝에서 인조견 자주 치마 연두저고리를 꺼내본다. 바닥에는 순연의 설빔과 석이 바지저고리 한 벌도 있었다. 재작년 가을이던가, 봉순이 머리를 얹을 무렵, 식구들에게 고루 한 벌씩 해준 옷이다. 아이들 옷은 댕강하니 짧아지고 품도 좁아졌지만 설날과 제삿날에 입어보고는 일 년 내내 옷은 고리 밑바닥에서 잠을 잔다.

"옴마, 봉순아지매 집에 가나?"

"운냐. 그 옷 못 넣어놓겄나?"

"넣으께."

복연이는 기분이 좋다. 봉순아지매 집에 갔다오는 날엔 먹을 것이 풍성해지기 때문이다. 오래간만에 나들이옷으로 갈아입은 석이네는

'우짜꼬? 개기를 가지가까? 맘 겉애서는 우리 석이 솟정 풀어주었으믄 똑 좋겄는데, 애라? 없었던 셈치고 가지고 가자. 밤낮 얻어만 묵고.'

수건에다 고기뭉치를 싸서 든다. 복연이뿐만 아니다. 석이네도 봉순이 오라고 기별을 보내오면 은근히 좋다. 염치를 차려서 오라 하기 전에는 잘 가지 않으나 그 집에 가서 해로운 일은 없다. 돌아올 적엔 언제나 빈손이 아니었으니까.

"빨래 널어놓은 거 잘 봐라. 바람에 날아갈라."

순연에게 일러놓고 집을 나선다. 옥봉 기화네 집에 갔을 때

"아이구 일찍 오네?"

봉춘네가 아랫방에서 내다보며 반색을 한다.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추분데 들어오소."

"."

석이네는 손에 든 것을 치켜 보인다.

"이거,"

"그기이 머요."

"소개긴데,"

석이네 얼굴이 순간 자랑스러워진다.

"아아니 석이어매 정신 나갔소?"

"저어, 저어, , 어디서,"

늙은이처럼 어린애처럼 피시시 웃는다.

"아 말도 안 되는 소리. 나중에 가지가소. 아이들이나 안 끓이주고. 개기가 기러분 집이오?"

마루 끝에 고기뭉치를 놔두고 석이네는 방으로 들어간다. 방 아랫목에는 봉춘네 또래, 오십이 다돼 뵈는 여자가 자리이불에 두 발을 밀어 넣고 앉아 있었다. 어떤 여편넨고?... 하는 눈빛으로 힐끗 쳐다본다. 검정 법단치마에 자주 고리를 입고 있다. 그러나 그 비단옷은 몇 번을 빨고 다듬었는지 몹시 낡아 보였다. 푸르스름한 입술하며 맵시 있게 올린 머리조차 딱하게 보인다. 국향이라는 퇴기다.

"추분데 이리 내리와 앉으소."

봉춘네는 일거리를 한켠으로 밀치며 자리를 내주었으나

"괜찮소."

석이네는 웃목에 앉는다. 봉춘네는 옷섶 앞에 꽂은 바늘을 뽑아 저고리 동정을 달면서

"좀 있으믄 기화가 올 기요. 아침 일찍 나갔인께,"

"어디 갔는데?"

국향이 물었다.

"와 그 소화라고 성내에 사는,"

"소화? 거긴 아침 일찍부터 머하로 갔는고?"

"답답해서 갔겄지. 어떻게 좀 몸부림도 쳐보고 싶은 심정도 있었을 기고."

"몸부림이라니?"

"요새 영감하고 사이가 안 좋거든. 요새가 아니라 처음부터 기화쪽에서는 억지 춘향이었지마는,"

"기생 팔자란 다 그런 거지 머."

굴향은 손가스러미를 물어뜯는다.

"그 차중에 하동서 손님이 왔거든. 참 잘생긴 선비더구나."

"그랬는데?"

국향은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니냐, 누가 그 사정을 몰라서? 비스듬한 눈길로 붕춘네를 쳐다본다.

"그 손님이 왔다가고부터 맴이 들떠서 아아가 영 정신을 못 차리누마. 불쌍한 생각도 들고 미븐 생각도 들고,"

"미븐 생각은 와 드는고?"

"죽은 봉춘이 생각이 나서..."

"..."

"얘기를 듣고 보니 옛적에 함께 크믄서 맘에 두었더라는 총각 소식을 들은 모양이라."

석이네 가슴이 철썩 내려앉는다. 옛적에 함께 크면서 마음을 두었던 남자라면 길상이말고 다른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의병 하다가 만주로 달아났다 하던 길상이 소식을 누가 전했을까? 궁금증이 났으나 무서웠던 그때 기억 때문에 석이네는 말조심을 하여 물어보지 않는다.

"! 마음에 두기 아니라 품에 안아도 못 믿을 거는 사내지. 소식을 들었이믄 들었지 어쩌겠다는 건고?"

"어찌겄다는 기이 아니라 참봉하고 살기가 싫어진 게지. 그 마음이사 나도 알 만하다. 쪽박에 밥 담아서 묵어도 뜻이 맞이믄 산다는 말이 안 있더나? 노류장 계집이라도 정이 없으면 종사하기 어렵네라"

"그러나 그만한 봉 물기도 안 어렵겄나?"

"소문남 높이 났지. 실속을 보믄 그렇지도 않다."

"아니 이 집만 해도,"

"집만 보믄 누구든지 봉 물었다 하겄지. 또 전참봉이 알부자라는 거는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일이고, 하지마는 그렇기 해서 재물 모운 사람치고 행토 없는 사램이 어디 있더나? 이름이 좋아 불로초고 빛좋은 개살구, 대궐 아니라 그보다 더한 집이믄 머하는고? 문서가 기화 앞으로 돼 있어야 말이제."

"아아니, 그라믄 그렇기 안 돼 있다 말이가?"

"글 안 하믄 빛좋은 개살구라는 말을 와 하꼬?"

"애시당초 일을 와 그리 조졌는고?"

"기화가 그런 거를 따질 성미가?"

"그거사 연홍이가 따지야제."

"공으로 주지도 않을 전참봉 재물에만 눈이 어두바서 깜박 엎어진기지. 자개야 실속도 채›일 기고. 아 생각해 보라모? 연홍이가 기개 있는 기생이 어디 있더나. 돈이라 카믄 박물장시 고리 속의 색실만치나 손쉬우니께."

"..."

"참봉도 자기깐에는 기화한테 헤프게 돈 쓴다는 생각을 하겄지마는 손톱 밑에 물 넣어가믄서 살림사는 여염집 지어미도 아니겄고 기화는 기생 아니가, 기생? 미련한 똥돼지 겉은 인사가 그걸 알아야지. 상놈양반이라 할 수 없는가보더라."

봉춘네는 전참봉을 아주 싫어하는 눈치다.

"내가 기화하고 일 년을 함께 살아봤지만 푸지게 돈 주는 것 한분도 못 봤다. 기화가 있이믄 한꺼번에 다 써부리는 성미이기는 하지마는, 겉으로 바르고 걸치고 하는 거사 그럴 듯, 실상 속은 텡텡 비었다."

"그라믄 소화를 찾아가서 어쩌겄다는 건고? 연홍이가 알믄 기화 머리끄뎅이 안 성할 긴데?"

"뭐 협률사라 커든가? 율협사라 카든가? 광대들이 당을 지어서 소리하고 댕기는,"

"으음 알 만하다."

국향이는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소화 옛서방이 아마 협률산가 뭔가 하고 연줄이 닿을 기다. 그러나 소화야 어디 제대로 된 기생가? 덤짜지 덤짜."

"덤짜나마나 그런 거 내사 모르겄고,"

"그러니 기화는 소리 쪽으로 한분 나가보겄다 그거로구마."

"그런 생각을 해보는 모앵이라."

"하기야 그 아아는 목이 좋으니께 한분 해볼 만도 하지. 그렇기되믄 기화는 진주서 털고 일어설 긴데 딸 삼아 함께 살든 봉춘네 섭운컸다."

"자식도 잃고 사는데 머."

봉춘네는 동정을 다 달고 실을 물어 끊으며 쓸쓸하게 뇐다. 과거 놀던 여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봉춘네를 여염집 여자라 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요염했고 세련된 옷매무새하며 의혹도 갖게 했지만 그는 다만 기생어미였을 뿐이다. 난봉꾼 남편이 딸을 기방에 팔아먹은 것이다. 딸 봉춘이는 얼굴이 예뻤고 재주도 있었다. 성미도 강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을 굳게 맹세한 어느 한량이 다른 기생과 하룻밤을 놀아났다 하여 양잿물을 마시고 죽었다. 그를 언니 언니하며 따르던 기화가 혼자 남은 봉춘네를 수양어미로 삼아서 함께 살아온 터이다.

"내사 머 살든 집도 있고 하니 그럭저럭 지내겄지마는 나보다 실상은 기화 일이 걱정이다."

"젊고 인물 좋고 어디 가믄 못 살까봐서?"

"그기이 아니라, 머라 카믄 좋겄노."

봉춘네는 다 된 저고리에 인두질을 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하고 석이네는 꾸어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말이 없다. 한편 속으로 봉춘네가 봉순이 험담을 하는지 칭찬을 하는지 화류계를 모르는 석이네는 어리둥절할 뿐이다. 길상이 얘기나 좀 해주었으면 싶었다.

"좌우당간에 그 아아는 한분 살아보겄다 하는 겔심이 없는 기라. 욕심도 없고, 누가 수만금을 한분 주어보지. 그날로 댓바람에 다 써뿌리고 다음 날에는 돈이 떨어져서 있는 물건 팔아가지고, 그런 성미니께 우찌 고생을 안 하겄노? 고생하지 고생해. 노류장의 기집이믄 좋은 한시절 벌어서 작량을 잘해야 노리에 편할 긴데, 삼십이 넘고 사십이 가까워지믄은 눈먼 새도 안 돌아볼 긴데, 자랑말이 아니라 내가 그래도 남으 살림이다 하는 생각 없이 이럭저럭 절용해감서 꾸리나간께, 지 혼자 살았이믄 영감 몰래 전당포 문턱이 닳았일 기다. 심덕이사 좀 착하나? 불쌍한 것 못 보고 애시당초 사내 덕은 못 볼 계집으로 생ƒ…. 그런 성질 갖고는 사내 덕 못 본다. 우리 봉춘이도 그랬지마는, 사나아한테 한분 빠지믄 간까지 끄내줄 기집이다. 내가 노상 타이르고 해보지마는 지도 천성을 맘대로 못하니 우짜노? 그래애, 노류장의 계집이믄 좋은 한 시절 벌어서 작량을 잘해야 노리에 고생을 안 하지. 고생을 안 해."

인두를 화로에 꽂고 다 된 저고리를 개킨다. 국향이는 남의 일로 생각할 수 없는 봉춘네 말에 저도 모르는 한숨을 내쉰다.

"아이구 내 정신 좀 보래? 석이어매 아침은 묵었소?"

봉춘네는 황급하게 일어선다. 얘기가 길었던 것을 깨달은 것 같다.

"묵고 왔소."

"기화가 와 여태 안 올꼬?"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독 뚜껑을 여는 소리가 들려오고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봉춘네는 작은 함지를 들고 들어온다.

"이거나 좀 묵어보소. 설에 한 긴데."

콩이랑 깨, 좁쌀로 만든 강정이다.

"아따 그기이 이때까지 있었나? 껍데기뿐이라고 징징 울어쌌더마는 그래도 부자 밑이라 걸거마는."

 

국향이 냉큼 하나를 집어서 와작와작 씹어 먹는다. 푸르스름한 입술, 기름때가 가라앉은 듯 거무칙칙하고 주름투성이의 얼굴, 기생말로의 스산한 찬바람이 그의 얼굴에서 사정없이 일고 있다.

"아이들이 없인께 묵을 사램이 있어야제. 석이어매, 묵어보소. 꼬맹이들 생각 말고."

끼니때마다 양이 적다고 투정인 어린것들 생각을 어째 안 할 수 있을까.

"꼬맹이들 몫은 있인께 자아 묵어보소."

"."

갈구리 같은 손이 조심스럽게 콩강정 하나를 집는다. 국향은 부지런히 집어먹는다. 와작와작 소리를 내면서 그래도 체면치레는 해야겠다는 생각인지

"요새는 당초 밥맛이 없어서,"

조심스런 석이네한테 공연한 미움의 눈길을 보낸다.

"석이 말 들은께 석이 외숙모는 아즉도 운신을 못한다믄서요?"

"."

"예삿일 아니거마는. 그래 가을이나 잘했는가요?"

"아무리 잘 해봐도 땅이 실찮으니께."

"땅이 실찮다니?"

"오래비 근력이 좋아서 농사는 더 지을 수 있는데 그기이, 그만 얻어 부치든 땅뙈기 서 마지기를 땅임자가 걷어갔다 커더마요."

"그럴 수가,"

"옛날 같잖아서 땅임자가 마구 바끼니께 농사도 마음 놓고 지을 수 없는갑십디다."

"왜놈들이 자꾸 묵어들어오니께. 그러니께 고향산천 버리고 만주다 어디다 하고 떠나는 사람이 좀 많든가요? 인심도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이래가지고는 니남정 할 것 없이 살기가 어러버질 기니 큰일이제."

"큰일이지. 왜놈 앞에 알랑방귀 끼는 놈말고는,"

국향도 한마디 거든다.

"요새 성내라도 나가볼라치믄 뚝닥거리는 거는 모두 왜놈들 집 짓는 소리고."

"와 아니라? 앵이꼽아서 참말로 못 살지. 진주가 우떤 곳인데? 이헤미(논개)가 왜장 끼고 물에 빠져죽은 곳 아니가. 요새 젊은 년들 보믄은 기생질 하는 기이 누워 떡 묵기라. 기생은 기생의 행신이 있는 법인데."

국향이 뒤늦게 열을 올리려 하는데 대문 미는 소리가 난다.

"어무니!"

"이자 오는가배? 운냐!"

봉춘네가 방문을 열고 나간다. 석이네도 일어서서 뒤따라 나간다.

"아이구 아지매 오š?"

봉순이 반가워서 웃는다.

"아까부텀."

석이네도 피시시 웃는다.

"많이 기다맀는가배요. 자아 우리 방에 들어갑시다, 어무니."

"."

"따신 점심 해주소이?"

어리광스럽다. 갔던 일이 잘되었는지 모른다.

"해주고말고. 걱정 마라. 참 석이어매가 소개기를 싸왔는데 내가 막 야단을 안 쳤나."

"아지매도 미쳤는갑다."

방안으로 들어간 기화는 수술이 달린 목도리를 벗어 걸고 장갑을 빼면서 자리에 앉는다.

"아지매도 앉으소."

밖에서 웃음 짓던 것과는 달리 기화의 목소리는 힘이 없고 석이네를 쳐다보는 눈도 쓸쓸하다.

"무신 일이라도 있었는가 모리겄네?"

묻는 석이네 말씨는 옛날 마을에서처럼 무관하지만 태도는 상전을 대하듯 한다.

"하도 답답하고 할 말도 있고,"

"할 말이라 카믄,"

". 숨 좀 돌리고... 며칠 전에 이부사댁 서방님이 다녀갔소."

기화 눈에 눈물이 빙그르르 돈다.

"이부사댁 서방님이라 카믄,"

"애기씨랑 함께 간도로 갔던 그 양반 모르요?"

"아아, 알었다. 그래 소식은,"

"소식이사 다 들었소. 나 아지매보고 실컷 울라꼬 오라 했소."

기화는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가며 상현이 전해준 얘기를 소상하게 들려준다. 영팔이와 용이 월선의 얘기가 나오자 석이네도 치맛자락을 끌어당겨 콧물을 닦으면서 운다.

"남들은 남으 땅에 가서도 멩이 붙어 살아 있는데..."

콧물을 닦던 석이네 드디어 꺼이꺼이 소리를 내며 운다. 머리칼이 희어지기에는 이른 나인데 흰머리뿐인가, 햇빛과 바람에 바래어 검은머리조차 누리께하고 기름기라 없다. 그 머리칼을 떨면서 운다.

"무상한 사램이 그, 그때사 와 돌아왔던고. 죽을라꼬 구신이 씌어서, 으흐 흐흣... 차라리 곰보목수나 따라갔더라믄."

"다아 지나간 일이요. 말하믄 뭐하겄소. 아지매나 내나 다 꽁 떨어진 매 신세요. 간 사람들은 다 좋고 남은 사람만 불쌍치. 복 많은 사람은 가나오나, 애기씨는 그곳에서도 여기 못지않게 부자가 됐다카이 좋으믄서도 서글프고... 길상이는 멩을 걸오놓고 도왔일 기요. 길상이는 애기씰 위해 태어난 사람인께."

"잘됐다 카이 고맙구마."

"이사부댁 서방님이 말심하시기를 애기씨는 세상 없이도 하동으로 돌아오고야 말 기랍니다. 애기씨는 조준구를 잡아묵고 말 기라 안 카요? 그 생각에 똘똘 뭉치서... 하기사 애기씨 성미가 우떻다고? 능히 그리할 기요."

"제발 그렇기나 됐으믄, 원통한 말을 어느 곳에 가서 으흐흣... 내 그렇기 되는 날이믄 머리털을 뽑아서 신이라도 으흐흣..."

석이네는 또 꺼이꺼이 소리를 내어 운다.

"김훈장 헹펜이 젤 딱한 모양이고... 아무튼지간에 그렇기 알고 접던 소식을 들었는데 우째 이리 가심에 구멍이 펑 뚫린 것맨치로 앉아도 그렇고 서도 그렇고 갈 바를 잡을 수가 없는지 모르겄소?"

들은 얘기는 다 털어놨고 눈물도 다 짜냈건만 허하기론 마찬가지, 기화는 멀거니 석이네를 바라보고 석이네는 또 우두커니 방바닥만 내려다본다. 시원할 것 같지만 시원치가 않다. 희망이 잡힐 것 같지만 손바닥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죽은 남편은 영원히 잠들어 깨어날 리 없고 날아가버린 길상이 품에 돌아올 리 없다. 방에 마주보고 앉은 사람은 봉순이 아닌 기생 기화와 오동지 섣달에도 빨래품을 팔아야 하는 가난한 홀어미. 웃음도 말도 허공에 먼지 되어 날아갔다. 무슨 희망이 있는가. 점심을 먹은 뒤

"김서방댁이 죽었다 캅디다."

풀쑥 말을 꺼내었다.

"김서방댁이 죽어? 누가 그러더노."

"억쇠라고 이부사댁 하인이 그러더마요."

"그 할매가 죽었고나."

"죽었소."

"..."

"그거는 그허고 아지매, 나 이곳을 뜰라요."

석이네는 아까 들은 얘기가 있어 잠자코 있다.

"어차피 기생 신세 한 남자한테 매달리 살 까닭도 없고, 살림 걷어치울 마음을 정하니께 관수 말이 생각도 나고."

"관수가 머라 카든고?"

갑자기 신경을 세우며 되묻는다.

"더러 집에 찾아오고 하는데, 관수가 옛날에는 길상이하고 친했거든요."

"그거사 나도 아는 일이고 안 할 말인지도 모르겄지마는 그 사람이 자꾸 우리 석이를 가까이할라 카는데 무신 심산인지 모르겄네?"

석이네 음성에는 심지가 생긴 듯 꼿꼿하다.

"그거사 한조아제 생각을 해서 그렇겄지요."

"그기이 아니다. 옛날하고 사램이 같아야 말이지. 요새는 딴판 아니가. 순 노름방만 돌아댕기믄서... 내사 마 간이 타서 죽겄다. 어지도 석이가 그 집에 가서 자지 않았던가배? 꿈자리도 시끄럽고,"

"그거사 아지매가 모르는 소리요. 관수는 겉보기하고는 다르요. 머이 말 아지매 귀에 가라고 한 소리는 아닐 기고... 한분은 훌쩍 들어서더니 막 속 뒤집는 말을 안 하겄소? 내 다른 사람 같으믄 그냥 듣고만 있지는 않았일 기지만, 봉순아 니 부자 영감탕구 얻어서 혼자 호사할 기가? 대뜸 그라고 시비를 안 걸겄소?"

"그래서?"

"아 그러세, 길상이 그깟 놈이 어쩌구저쩌구 씰개 빠진 놈이니, 쌍판이 멀쩡해서 똑똑한 놈이 없느니, 평생 종질밖에 못할 거라는둥."

"..."

"그래 나중에는, 석이 그 아이 물지게만 져서 되겄나, 사람 맨들어주자, 니 그 집 좀 도와주어라, 그러지 않겄소?"

석이네는 반신반의하는 얼굴이다. 이때 별안간 바깥이 왁자지껄하고 뛰어가는 여러 개의 발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에 봉춘네 국향이 쫓아나가는 기척이다.

"무신 일일꼬?"

한참 만에 숨을 몰아쉬며 봉춘네가 돌아왔다.

"기화야!"

"와 그라요, 어무니?"

"밖에서 큰 야단이 났다. 순사들이 쫙 깔맀구나."

기화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우리 집을요?"

기화는 왜 우리 집이라 했는지 그 자신도 몰랐다. 그는 순간 상현이를 생각했던 것이다. 왜 생각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우리 집을 와?"

"그라믄 누구 집이요?"

"누구 집인지 그거는 아즉 모르겄다마는 와글거리는 소리를 들은께 머 독립운동하는 사, 사람이라 카든가 의병이라 카든가, 그런 사람이 기생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입속이 말랐는지 침을 삼키고 나서

",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것을 알고 왜놈 순사들이 둘러쌌다고 안 하나."

", 그래서 잽힜소?"

석이네는 자세한 것도 모르면서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그는 순사나 일본 병정들 말만 들어도 떠는 버릇이 있었다.

"말이 이 동네를 다 들출 기라 안 카나. 그라믄 우리 집에도 오겄제?"

", 오겄지요."

기화는 또다시 상현이 생각을 한다. 이미 떠난 사람이며 그럴리 없다 하면서도 그의 부친 이동진을 비롯하여 그간 사정이 불안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밖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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