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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2-2-1

토지 21/2. 꿈속의 귀마동

 

1. 뱀은 죽여야

유하현 삼원보에서 선배이자 동지요 신민회 회원인 신모가 보내온 편지를 앞에 놓고 장환은 깊은 생각에 잠긴다. 지출을 줄이려는 형과의 암투 때문에 학교 일이 말이 아니어서 우울한 심정을 적어 보낸 서신의 회답이다. 절망적이기론 그 쪽도 매한가지였다. 이시영, 이동녕 등 신민회의 여러 지도자들이 독립운동의 기지를 삼으려고 솔가하여 그곳 삼원보에 모여든 사정은 장환도 소상히 알고 있는 일이거니와 지난해 중학 과정 정도의 학과와 군사 훈련을 겸한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장차 독립운동에 투신할 청소년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는 것, 금년 들어서는 자치 기관인 경학사를 세웠고 신흥강습소를 통화현 합니하로 옮겨 중학교로 개칭하게 되었다는 그간의 소식은 들어왔었지만, 짐작하지 않았던 일은 아니었다. 그곳이 신민회의 조직체인 만큼 회원 육백 명이 체포된 국내의 소용돌이가 미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러나 장환이 생각한 것보다 사태는 뭔지 더 심각한 모양이다.

'정말 꿈도 희망도 가질 수 없단 말인가.'

장환은 조갈증 같은 것을 느낀다. 느긋하게 뻗쳐볼 수 없는 초조함이 피를 거칠게 한다. '하마나 하고 기다렸지만... 아무 변화도 없었다. 국경은 한치도 무너지지 않았고 더욱 굳어졌다.' 한줄기 희망의 등불같이 감명을 받았던 권필응의 모습이 떠올랐으나 곧이어 상현의 부친 이동진은 어느 위치에 서 있을까 하고 문득 생각한다. 상현은 늘 불초자식이라 하며 한 번도 자기 부친의 활동 상황에 대하여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상현의 부친이 연추의 최재형과 거취를 같이하고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고 이범윤과도 각별한 친분이 있다는 것은 아는 일이다. 장환이 왜 갑자기 그 생각을 했는가 하면 재작년 연추에서 최재형이 이범윤을 암살하려 했었다는 그 불미한 풍문을 상기한 때문이다. 불미한 사건의 원인은 이범윤이 최재형의 이름으로 모금한 군자금을 유용한 때문이라 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친일배들의 교묘한 이간 술책이 빚은 낭설이라고도 했었지만 두 사람이 반목하게 된 것만은 사실인 듯했다.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이 근년에 와서 국내 침공이 소문만 파다하였지, 산발적인 국경 침투가 없지는 않았으나 일본 수비병을 교란하는 데 그쳤을 뿐, 두망강 얼음을 밟고 간도로 건너 왔다가 연해주로 옮겨가서 이범윤과 제휴한 홍범도조차 이렇다할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으니 뭔지 잘못되어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연해주의 실정을 볼 것 같으면 현재 어느곳보다 강력한 무장투쟁의 기지라 할 수 있다. 반일 감정도 가장 치열한 곳으로 거기서는 노유 귀천 차별없이 친일 분자라면 가차없는 응징을 당해야 했고 밀정들도 발붙이기에 매우 위태로운, 그렇게 단결이 굳은 곳이다. 간도의 오랜 영토권 분쟁으로 말미암아 조선인과 청국인 간에 반목과 대립이 빚은 숙원 때문에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들이닥친 일본에 대하여 한때 우매한 민심이 쏠렸던 사정과는 달리 연해주는 순전한 이민이요, 귀화를 강요당하기도 했었지만 서로간의 원한이 없는 만큼 그쪽도 느슨하고 이쪽도 적의가 없었으며 설령 귀화하였다 손치더라도 간도에서처럼 변발하고 다브잔스를 입음으로써 동화되어가 버리는 그런 현상은 없었다.

민족의식의 자연스러운 발로에 따라 조선인으로서의 행동은 자유스러웠다, 낙인처럼 피차 판이한 인종적 외모 탓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이같은 여건 하에서 조선 의병들의 적극적인 독립투쟁이 전개되는 연해주에 과민한 신경을 써온 일본 당국은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조선 의병의 무장해제, 체포와 소환을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지만, 일본과의 국경분쟁을 원치 않는 러시아 정부로서는 일단 민간인들의 총기 거래, 체류, 조선인들의 여권 검사 등 단속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형식이었을 뿐, 오히려 일러전쟁 때 참전한 러시아군 퇴역 장병들은 많은 동정을 표시하여 이범윤에게 예비병 사단과 총기 탄약을 빌려주겠다는 제안도 있었다고 했으니 - 그 제안은 정부의 제지로 성사를 못 보았다 - 게다가 군자금 모금도 활발하였고 헐값으로 일본 군대의 총기보다 월등 우수한 것을 얼마든지 사들일 수 있었던 것도 연해주의 유리한 사정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어째서 그곳 지도자들은 침착하고 있는 것일까. 국경이 한치도 무너지지 않았던 것은 일본 수비대의 국경 수비가 철통같았기 때문이라 하겠지. 그 점도 있었겠지. 국내에서 적극적으로 호응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노라?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게다. 그러나 그보다 지도자들의 보조가 맞지 않게 된 데 더 큰 원인이 있는 게야. 그 틈을 타고 소위 계몽파, 물론 나도 계몽파에 속할지 모르지만 양두구육, 그놈들은 계몽파라는 탈을 썼을 뿐이지... 필시 내부 분열에는 최봉준놈 일파의 농간이 있었던 게다. 그놈의 미적지근한 신문만 봐도 능히 짐작 할 수 있는 일이었어.'

연해주 교포 간에 제일가는 거부 최봉준은 몇 해 전에 그가 출자하여 "해조신문"이라는 것을 발간한 일이 있었다. 발간 시초부터 지극히 소극적인 논조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압력에 이 개월을 넘겼을 뿐 폐간해버렸는데 그의 상선이 북선 일대를 내왕하며 치부에 여념이 없는 이상 일본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던지 재작년에는 최봉준이 그자가 연추 의병파를 맹렬히 공격하고 나섰던 것이다. 무력항쟁이 무효하다는 언론을 공공연히 자행했던 것이다.

"폭탄을 안고 달려가든지 무슨수를 써야지. 내살속에 들끊는 구데기부터 쓸어내야, 죽일 놈들!"

중얼거리는데 안에서

"어째서 그런 흉칙한 소문이 났는가 말 못하겠소오!"

영환의 고함 소리가 들려온다. 또 발악이 시작되는가 보다. 요즘 송영환의 발악은 일과의 하나였다.

"정녕 말 목하겠소오? 당자가 모른다면 그러면 뉘가 아느냐 그말아니요오!"

굵지 않고 높은 목청이어서 고함이 괴상스럽다. 아직은 경어를 쓰는 것으로 보아 위험 상태는 아니나, 저러다 언제 어떻게 수라장이 될지 모를 일이다. 장환은 혀를 차면서 이맛살을 찌푸린다. 그렇잖아도 울적한데 하루가 멀다고 벌어지는 소동, 장환은 참말이지 넌더리가 난다. 형수인 장씨를 족치는 것이다. 처음에는 영환도 별채에 누위 있는 부친이나 집안 하인들이 들을세라 아내를 가두어 놓고 닦달을 하는 모양이었지만, 이제는 숫제 드러내놓고 남의 눈치 살필 것 없는 란이다. 이유인즉 괴상망측한 소문 때문인데 장씨부인과 운흥사의 중 본연의 관계가 심상찮다는, 연기같이 피어서 퍼진 소문, 본연이 한밤중에 송병문 씨 댁 담장을 넘더라는 둥, 운흥사 승방에서 남녀의 웃음소리가 들리더라는 둥, 송병문 씨 댁엔 과년한 딸도 없고 며느리가 미인이니, 필시 그렇고 그런 게 아니겠느냐, 얘기는 꼬리를 달고 삽시간에 회오리바람같이 일었고 용정조선인 사회에 쫙 퍼졌던 것이다. 영환은 아내가 설마한들 중놈과 그러랴 싶으나 사실이 그렇잖다 하더라도 흉악한 소문이 나돌았다는 자체가 그에게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의심하기에 앞서 왜 이런 끔찍스런 재난, 불행이 들이닥쳤느냐는 것이었다. 원인의 장본인이 바로 장씨라는 그 점 하나만 가지고 날이면 날마다 사업도 팽개치다시피 추단하고 욕설하고 욕설에서 폭행인 것이다. 장씨는 부인했다. 부인할 수밖에 없는 게, 사실 무근한 일이니 도리가 없다.

장씨는 본연에게 관심을 가지기는커녕 본연의 열띤 눈길을 의식해본 일조차 없었다. 포류의 체질이나 날카롭고 심지가 강해 뵈던 미청년 상현을 볼 때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두근거린 일은 있었지만 장씨는 중을 중으로 보았을 뿐 한 번도 사내로 생각한 일은 없었다.

"아가리에 자물쇠를 채웠나아! 왜 말을 못하는 게야!"

'유모는 애를 데리고 달아났겠지.'

장환은 쓴웃음을 띤다.

"정녕 말 못할까! 인두로 주둥이를 지져야겠어!"

'지겹다, 지겨워. 아버님만 안 계셔도 집구석에 불을 지르고 싶다! 못난 사람.'

그러나 정환은 귀를 기울인다. 욕설이 들려오고 기물 던지는 소리가 난다. 창피하여 하인들도 쥐죽은 듯 기척이 없다.

"이 화냥년! 계집이 꼬릴 쳤으니 그런 소문이 났지이! 에이! 죽어라! 죽어!"

'하루이틀도 아니고.'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장환은 방안을 빙빙 돌다가 더 견딜 수 없어 방문을 열고 나간다. 모르는 척 내보려두리라 결심하기를 한두 번이 아니었건만, 형에 대한 격렬한 증오심을 가지고도 모질지 못한 장환인 것이다. 어쩌면 영환은 동생이 와서 싸움을 말려주겠거니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장씨의 비명이 급히 걷는 장환의 발목을 휘감는다.

"왜 이러시오?"

아내를 치고 밟고 하는 영환의 허리를 뒤에서 껴안고 방구석으로 밀고 간 장환은 장씨의 몸을 가려주듯 뻗치고 서서 숨을 할딱이는 형과 마주본다. 등뒤에서 히익히익 울어대는 여자의 울음소리.

"정말 왜 이러시죠?"

영환은 동생보다 몸집이 작고 키도 작았지만 머리는 동생보다 큰 편이였다. 장환의 얼굴은 불그레했고 영환의 얼굴은 누리끼리한 검은 빛이다. 살가죽은 두꺼워 보였고 이목구비는 정연했으나 빡빡한 용모다.

"내가, , 내가 챙피스러워서 어떻게 용정 바닥에서 살겠느냐."

"도시 뭐가 챙피하다는 겁니까."

"집구석에 망쪼가 들었다. 이런 망신이 어디 있겠느냐."

"형님은 몰라서 이러시오? 몰라서 날이면 날마다 이 소동이냐 말입니다."

"그래 모른다! 모르니까 알고 싶어 이런다."

두 어깨로 숨을 쉬며 마른 입술을 축인다.

"참말 딱하시오."

하다가 돌아보며

"형수씨는 건넌방으로 가십시오."

장씨는 꺼이꺼이 울면서 방문을 열고 나간다.

"형님."

"..."

"뭣 땜에 이러시는 거지요? 체면 때문입니까."

"용정 바닥 어디다 얼굴을 쳐들고 다니겠냐."

"그게 어디 형수씨 때문인가요?"

"그럼 뉘 때문이냐."

"소문 때문이지요."

"그래 소문 때문이다. 너 형수 소문 때문이다."

"형님은 알고 계십니다. 형수씨가 결백하다는 걸."

"그렇지만 너 형수 때문에 난 앙화가 아니냐?"

"앙화를 당한 사람은 형수씹니다. 길 가다가 기왓장이 떨어져 머리를 깬 사람을 끌고 와서 매질하는 경우도 있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형수씨는 법회에 혼자 나가신 건 아니잖습니까? 여러 부녀들과 함께, 그 속에서 불륜을 저질렀단 말씀이오? 집에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형수씨는 법회 이왼 밖에 나가신 일이 없고, 술도 안 하시고 친구도 없는 형님은 늘 일찍 귀가하셔서 함께 저녁을 드셨습니다."

"술 안 마시고 친구 없는 게 그래 그게 어떻다는 게냐?"

삘죽한다. 장환은 방바닥을 내려다본다. 물사발 하나, 낡은 손거울 하나가 부서져서 흩어져 있다.

"어떻다는 게 아니라... 외박하신 일이라곤 없었고...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형수씬 중놈을 만났겠느냐 그 말이지요. 연기가 되어 나갔단 말입니까?"

영환은 대꾸를 못하고 장환은 맥이 빠지는 듯, 그러다가 음성을 높인다.

"그놈의 절을 때리부시는 겁니다! 유부녀한테 사련을 품은 파계승이 있는 절을 말입니다!"

영환의 작은 눈에 겁이 실린다.

"아니면 중놈을 용정서 쫓아내든지 잡아다가 닦달을 하시든지요."

", 그것도 꼬투리를 잡아야."

장환은 한숨을 내쉰다. 어지간히 지겹다.

'도대체 이 양반의 머린 어떻게 생겼을까?'

거의 매일이다시피 되풀이되는 형과 아우의 대화인 것이다. 장환은 형이 질투에 눈이 뒤집혀 날뛰었다면 오히려 인간적이요 동정이 갈 성싶다. 아내의 정조는 문제 밖이다. 오로지 풍문으로 손상된 자기 체면! 너 때문이다.! 너 때문이다! 그 일념에 ?겨 분별을 헤아리지 못하면서, 소심한 그에겐 절을 때려부술 용기가 없고 중을 끌고 올 용기도 없는 것이다. 세상이 부끄러워서 내 저런 것을 계집으로 맞이한 게 잘못이었다. 차라리 박색이었던들, 이런 기막힌 꼴이야 당하겠느냐?"

주먹으로 얼굴을 치고 싶은 증오감을 가까스로 누른 송장환 얼굴에 모멸의 웃음이 번진다.

"저어, 도련님."

마침 잘되었다 싶어 장환이 얼른 방을 빠져나간다. 신돌 아래 촐랑이 같은 점생이가 엉거주춤 서 있었다.

"왜 그러나?"

"손님이 오셨습매다."

"그럼 안으로 모실 일이지."

"앙입매다. 도련님으,"

"또오."

"앙이 선생님으 나오시라 하옵꼬망."

"뉘신데?"

"학교으 새로 오신 선생님입매다."

송장환이 대문께까지 나간다. 자그마한 몸집인 윤이병이 벙청한 꼴을 하고 서 있었다.

"들어오시잖고 왜 이러고 계슈?"

"아니 저어,"

"들어오시오."

윤이병은 민적거린다.

"바쁘시지 않소?"

"아니오."

"그럼 강가로, 산책이나 하잖겠소?"

산책이나 할 그런 여유 있는 표정은 아닌데 어딘지 절박한 것만 같은데, 그러나 이쪽도 울적한 터이라

"그럽시다."

송장환은 순순히 따라나선다. 강가로 가자던 윤이병은 그새 자기한 말을 잊었는지 사뭇 언덕을 향해 걷는다. 언덕 위에 못미처 나무 그늘로 찾아든 윤이병은 펄썩 주저앉으며 송장환을 쳐다보고 한숨울 내쉰다. 여자이이처럼 곱살스럽고 항상 명랑하게 웃길 잘하는 윤이병으로는 좀 드문 일이다. 방학이 되었어도 고향에는 돌아가지 않고 용정에 머물러 있엇는데 그새 교회에 많은 사람들을 사귀어 이집저집 놀러 다니며 무료하지 않게 날을 보내고 있는 성싶었다. 천성이 명랑하고 싹싹해서 그런대로 환영을 받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소?"

궐련을 뽑아 입에 물고 성냥을 그으면서 송장환이 묻는다. 어색하고 난처해하는 웃음이 윤이병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좀 곤란한 일이 생겼어요."

"무슨 일인데?"

하면서 송장환도 풀밭에 앉는다.

"실은,"

"..."

"누이가 집에서 도망을 오지 않았겠소?"

"?"

"그러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기에,"

"매씨께서는 어째서?"

". 저어 말씀드리기가... 시집 안 가려고 그, 그런 모양이오."

좀 상상이 안 간다는 듯 송장환은 어리둥절한 얼굴이다. 윤이병은 한때 망설이는 눈치다.

"이크!"

별안간 송장환이 뛰어 일어선다.

", 뱀이오!"

얼굴이 새파래진다. 윤이병은 재빨리 발 아래에 있는 커다란 돌을 두 손으로 번쩍 들어올린다.

"어딥니까?"

", 여기요!"

손가락질을 하는 곳에 과히 크지 않은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 윤이병은 애이! 하고 소릴 지르며 돌을 던졌다. 똬리는 풀었으나 뱀은 돌 밑에 깔리고 말았다. 이번에는 서둘지 않고 다시 큼직한 돌을 주운 윤이병이 뱀의 머리통을 때려부순다.

"사탄이오. 뱀은 죽여야 합니다."

살생을 끝내고 씩 웃는다. 송장환의 얼굴은 노랗게 돼 있었다.

"나는 뱀이라면 아주 딱 질색이오."

이 뜻하지 않은 사건에 용기를 얻기라도 한 듯 윤이병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뱀은 영원히 인간의 저주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 교도들은 뱀을 죽여야 할 의무가 있어요."

"뱀을 죽여야 할 의무가 있다면 나는 야소교를 못 믿겠는데요? 난 뱀을 못 죽입니다."

두 사람은 웃는다.

"한데 송선생."

"."

"어떻게 돈 좀 마련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월급에서 빼기로 하구요."

"얼마나?"

"이십 원 쯤이면... 돌려보내야잖겠어요."

"드리지요."

"고맙소."

돈 이십 원 때문에 풀이 죽을 사람은 아닌데 하고 송장환은 다소 괴이쩍게 생각한다. 그들은 언덕에서 내려왔고 집에 들러서 돈 이십 원을 받은 뒤 윤이병은 송장환과 헤어졌다. '어째 일이 묘하게 됐군.' 실상 윤이병은 이런 결과를 가져올 양이면 당초부터 송장환을 밖으로 불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실토를 하고 돈을 부탁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결국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누이라 한 것은 그 순간의 착상이며 사실은 애인? 아무툰 애인이었던 여잔데 삼 년 전, 그러니까 청진에 있을대 예배당에 나가면서 알게 된 여자다. 상민이지만 조촐하게 사는 집 딸로서, 윤이병은 결혼을 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상현이나 송장환 앞에서는 집안 자랑도 하고 했지만 그것은 별 악의 없는 허풍이며 기실 윤이병의 문벌은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사귐성 있는 성격 때문에 교회의 주선으로 중학을 마쳤지만 집안 살림은 그를 도울 형편이 아니였다. 그랬는데 여자의 집안이 망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비가 투전에 재미를 붙여 가산을 탕진한 끝에 주정뱅이가 되었고 끝장에는 딸을 술집에 팔아먹은 것이다. 그렇게 되어 엷은 추억을 남기고 두 남녀는 헤어졌다. 그 후 여자는 어떤 사내가 몸값을 치르고 빼내서 해삼위로 갔다는 소식이었는데 한 달을 못 넘기고 여자는 도망을 쳐서 윤이병을 찾아온 것이다. 그의 말로는 술집에 있었음 있었지 그 사내하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흐느껴 우는 첫사랑의 여인 모습에 윤이병이 동정을 느낀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 결혼의 의무 없이 육체를 소유할 수 있다는 심리가 불장난으로 끌고 갔다. 하숙방에서 한 사나흘을 함께 지냈는데 느닷없이 들이닥친 사내는 물론 여자를 앗아갔지만 유뷰녀를 유괴했다 하여 윤이병은 나가던 학교를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지난 유월의 일이였고, 마침 어떤 연줄로 하여 정중히 모시러 온 송장환을 따라 용정으로 온 것이다. 한편 끌러간 여자는 해삼위에는 가지 않았고 친정에 맡겨져서 감시를 받게 되었는데 상대편 사내는 노상 떠나 있었으므로 해삼위에 근거를 둔 생활도 아니어서 여자를 잡아둘 수만 있다면 아무 곳이든 상관없었던 것이다. 그 사내가 바로 김두수요 여자의 이름은 심금녀.

여비 조로 돈 이십 원을 주어서 금녀를 달래어 돌려보내리라 마음먹은 윤이병은, 그러나 하룻밤은 아무래도 묵여 보낼 수밖에 없었다. 저녁때가 다 되었는데 마차편이 있을 리 없고, 하룻밤은 이미 서로가 터놓은 젊은 육체여서 아무 저항 없이 선을 넘었다. 날이 새었을 때 윤이병의 긴장은 느슨해지고 말았다. 이렇게 되어 책임감도 사랑에 순교하겠다는 열정도 없이 다만 환락 때문에 윤이병은 민적민적, 금녀를 옆에 둔 채 시일을 넘기고 있던 어느 날 늙은이 한 사람을 앞세운 김두수가 상이학교에 나타났다. 방학이어서 학교는 텅 비어 있었으나 학교 건물에 잇따른 초가집에는 학교지기 박서방네 식구가 살고 있었다.

"어째 오싰습매까?"

박서방이 이들을 보고 물었다. 김두수는 늙은이를 밀어젖히고 나섰다.

"댁은 뉘시오?"

공손스럽게 묻는다.

"여기 핵교 지키고 있는 사람입꼬망."

"네 그러시오? 다름이 아니라. 이 노인께서 윤이병 선생을 찾아 오셨는데, 바로 윤선생의 부친 되시는 어른이오."

실상 늙은이는 금녀의 아비였다.

"아 그렇습매까?"

선생의 부친이라는 말에 굽혔던 박서방 허리가 더 굽혀진다.

"지금으 방학 앙입매까? 윤선생님 하숙에 계실 겝매다."

"하숙을 모르니 학교로 찾아온 게요."

". 저도 모릅매다. 아 참 우리 아아새끼, 오봉아! 오봉이 거기 있니야?"

"옛꼬망! 아바이."

예닐곱 살 됨직한 아이가 쫓아나온다.

"윤선생님으 하숙으 알지비?"

"옛꼬망."

"그러문 됐다. 어서 이 손님으 뫼시다 드레라."

김두수는 히쭉 웃는다.

"그럼 가실까요?"

우물쭈물하던 늙은이는 매에 채인 병아리처럼 눈알도 굴리지 못하고 디둑디둑 걸음을 옮겨놓는다. 머리꼬랑지를 늘인 머슴아이 뒤를 따라 골목을 지나서 어느 집 앞에 이르렀다. 아이는 쪽문을 밀고 별채 뜰안으로 들어간다. 김두수도 따라들어간다.

"선생님! 손님 오셨습매다!"

"뭐라구?"

방안에서 후다닥 일어서는 소리가 들려온다.

"수고했구나."

김두수는 동전 한 닢을 아이에게 주며 이제 돌아가라고 손짓을 한다. 쪽문 밖의 늙은이는 답답한 듯 수염을 문지르고 있었다. 김두수는 신돌 위의 여자 신발을 보고 또 히쭉 웃는다. 방안에서는 폭풍을 예감한 듯 조용하다. 아뭇소리도 없다. 돌아본 김두수는 눈초리로 쪽문 밖에 서 있는 늙은이를 뜰안으로 끌어들이고 나서 좁은 마루를 밟고 올라가 방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순간 윤이병은 도망을 칠 듯한 몸집을 하다가 쓰러지듯 자리에 자리에 앉는데 얼굴은 사색이었고 여자는 불길 같은 증오를 뿜어내며 김두수를 쏘아본다.

"노인장, 들어보슈. 여까지 함께 왔으면 일의 끝막음은 해주셔야잖겠소?"

늙은이는 마루로 올라서기는 했으나 김두수 뒤에 몸을 숨기려한다. 김두수는 옆으로 비키며 늙은이 등을 확 떼밀어버린다. 비틀거리며 방안으로 들어선 늙은이는 부들부들 떨다가 금녀 눈을 피해 한구석에 가서 웅크린다. 들어선 김두수는 팔을 뒤로 돌려 방문을 닫고 두 남녀 앞에 바싹 다가앉는다.

"오래간만이구먼."

윤이병에게 조소를 보내고 나서 불길 같은 증오에 타고 있는 금녀를 냉엄하게 바라본다.

", 내가 금녀를 오, 오해는 마시오."

그러나 못 들은 척 김두수는 금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 돌려보내려고 했지만."

"이 쥐새끼 같은 놈이 뭐라는 게야? 신대를 잡았나? 떨기는 왜 그리 떨어?"

쥐를 어르는 고양이다.

"이새끼야, 이번에야말로 부다고야(돼지우리, 감옥소라는 뜻) 맛을 좀 볼래?"

"?"

"이놈의 새끼 혼 빠졌나? 내가 누군지 으흐흣... 내 할라고 마음만 먹는다면 네깐놈 한둘쯤 돌 채운다."

"?"

"머저리 같은 놈의 새끼, 그 주제에 선생이라? 임마? 돌 채운다는건 두만강에 처넣는다 그 얘기야! 그뿐인 줄 아나? 죽기가 소원이라면 더 멋진 방법도 있지. 배때기 갈라서 말이다, 아편덩이를 넣고 길림으로나 날라다줄 수도 있지. 저년한테 상복을 입혀서 말이야. 으흐흐..."

소름끼치게 웃는다. 윤이병은 입이 붙어버린 듯 넋이 나간 듯 김두수를 쳐다본다. 김두수는 시선을 금녀에게 옮긴다. 금녀의 눈에는 여전히 증오의 불길이 타고 있었다.

"금녀."

"..."

"그 동안 더 예뻐졌군 그래."

순간 김두수 얼굴에 침이 날라왔다. 궁지에 몰린 짐승같이 금녀는 으르렁거린다. 옷소매를 들고 얼굴의 침방울을 닦으려다 말고 김두수는 눈을 치켜뜨며 금녀를 노려본다. 그러나 그의 주먹은 윤이병의 턱을 치고 있었다.

 

 

2. 남도사내

도랑물에 얼굴을 씻은 용이는 나무 그림자가 희미하게 깔려 있는 뜰안으로 들어오면서 베수건을 허리춤에 찌른다. 기둥에 초롱을 걸어놓고 영팔이댁네는 소금물에 손을 적셔가며 주먹밥을 뭉치고 있었다. 베밤방이 모습의 영팔이 기웃이 들여다보며

"넉넉하게 하라고. 길 가믄 배가 고프네라."

". 넉넉할 깁니다."

판술네는 손바닥 위의 밥덩이를 이리저리 굴러가며 꼭꼭 쥔다.

"날씨는 좋겄구마."

용이 말에 영팔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전에는 머리숱이 많아서 주먹만했던 상투가 어째 작아진 것 같다.

"별이 총총 나 있네."

"설마 비야 안 오겄지."

"그러모. 비는 무신."

하는데

"아이고 치버라. 새북바램이 제법 설렁하네요'

임이가 팔짱을 끼고 홀닥홀닥 뛰어들어온다.

"오나아."

삼베수건을 펴고 뭉친 주먹밥을 옮겨놓으며 판술네는 알은 체한다.

"아아니! 아부지 점심은 우리가 쌀라 카는데 와 이럽니까?"

천부당한 일이란 듯 호들갑을 떠는 임이를 애키 요년! 하듯 영팔이 눈을 희뜨고 쳐다본다.

"누가 하믄 어떻나?"

판술네의 말투도 예사롭지는 못하다.

"아부지 점심 싸디릴라꼬 막 밥 안치놓고 안 왔십니까."

", 너거 해주는 밥 얻어묵고 길 떠날라 캤다가는 아마 해가 중천에 떨 거로?"

임이 말은 속이 들여다보이는 인사치레라는 것을 용이도 알고는 있었으나 영팔의 핀잔은 못 들은 척 잠자코 곰방대에 담배를 넣는다.

"누가 이렇기 첫새북부터 떠나실 줄 알았이야 말이지요"

"백릿길을 첫새북부터 안 떠나믄 우짤 기든고?"

"좀더 일찍이 일어나는 긴데 빌어묵을 남정네가..."

"잘못된 거는 모두 조상 탓이라네."

"앗따. 새북부터 무신 잔소리가 그리 많소."

판술네는 남편을 나무라듯 했으나 그 역시 마음속으로는 임이가 괘씸하다. '빌어묵을 년. 저눔으 조둥이만 달고 다니믄 비렁땅에 가서도 굶지는 않을 기구마. 새살만 찰찰 깠지. 순 도칙이 같은 년 한다 한다해도 너무한다. 사램이 은공을 모르믄 금수만도 못한 기라. 멩색이 지를 키운 아밴데.'

"그래도 임이가 소자는 소자로구마. 이리키 첫새북에 일어나 왔이니께로"

평소 입이 뜨로 유순한 영팔이지만 임이가 미워서 견딜 수 없는 모양이다. 그로서는 좀 집요하게 걸고든다. 빈정거리거나 말거나 들은 척도 않고

"그라믄 구야아배 깨워야겄심다."

임이는 씽하니 나간다.

"이르지마는 아침은 묵어야 안하겄나. 방에 들어가자. 임자, 어서 밥상 딜이라고."

방으로 들어온 영팔이는 장대같이 늘비하게 잠든 아이들을 저만큼 밀어붙이고 등잔의 심지를 돋군다. 용정에 불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영팔이를 따라 용이는 이곳에 와서 두 달을 훨씬 넘게 시일을 보냈다. 그 동안 청인들에게 농사품을 팔아서 곡식섬이나 장만했는데 그것을 임이한테 맡겨 놓고 오늘떠나기로 한 것은 영팔이와 의논 끝의 일이다.

'혓바닥 세 치 가지고 오만 생색을 다 내는 천성이기로 곡식섬이나 매련해주었이니께 설마한들 한겨울이야 지에미 거친 못하겄나.'

용이는 한겨울 동안 임이네를 딸에게 맡겨놓고 자신은 정목수가 다리를 놔준 청인 목파를 따라 산에 들어갈 심산이었다. 영팔이도 동행하기로 작정을 보았다. 이 새로운 계획에 대하여 용이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으나 영팔이는 희망을 걸었다. 돈을 벌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희망, 한편 벌목일이 끝나면 함께 와서 농사를 짓겠다는 용이 말에도 그는 씨익씨익 숨을 내쉬며 무척이나 기뻐했던 것이다. 조반을 끝낸 용이는 판술네가 꾸려준 망태기 하나를 들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때를 같이하여 임이와 그의 남정네 허서방이 나타났다.

"아이구 아부지! 떠날라깝니까."

"."

"아이구 참, 우짜믄 좋노. 차일피일하다가 그만, 보소! 그래 내가 머라 캅디까? 장날엔 나가서 홍이 옷벌이나 사다놓으라고 그렇기실이 노이 되도록 일렀건마는,"

죄없는 남정네 탓을 하며 역시 그 혓바닥 세 치로 생색을 낸다.

"그런 말으 어디새 했지비?"

"어이구, 이 답답! 귀구멍이 맥?던가배!"

허서방은 무안한 듯 뭉실한 코를 만지다가 바지에 슬슬 손을 문지르다. 머슴살이의 뜨내기지만 소같이 일 잘하는 그 점을 보고 영팔이 임이에게 중매를 들었는데 허서방은 좀 모자라는 위인이었다. 무골호인으로 뵈기도 했으나 쪼맨한 눈에는 진득한 욕심도 다소는 있는 성싶고.

"무시기... 이렇게 떠낭이, 장인어른 미안스럽습매다."

", 그래도 밥 묵는 입이라고 인사는 할 줄 아는구마."

"허허 버릇없이, 가장한테 그래서 쓰나?"

용이 나무란다.

"그래도 임이가 소자는 소자다."

영팔이 또 빈정거린다.

"소자 되고 저븐 마음이사 태산 겉지마는 못사니 우짭니까? 우리도 잘살믄 옛말 안 하겄십니까."

샐쭉해져서 응수하다가

"아부지, 이거 넣어이소.

하며 봉지 하나를 내민다.

"멋꼬?"

"담뱁니다."

""

하고 용이는 봉지를 받아 망태 속에 넣는다.

"이렇기 떠나시믄 서분해서 우짭니까."

"서분할 것 없다. 곧 너 어미하고 올 거 아니가."

"홍이도 올 깁니까?"

"그거는 가봐야제. 핵교 댕기는 놈을... 그라믄 아지마씨 잘 기시이소."

용이는 영팔이댁네에게 인사를 하고 삽짝을 나선다.

"잘 가시이소."

삽짝 앞까지 나온 판술이네가 인사를 한다. 임이 내외 영팔이 해서 네 사람은 휭하니 트인 벌판길을 나선다. 달은 없지만 별빛이 밝다. 잠든 마을에 불빛은 없고.

"이자 너거들은 들어가거라."

"."

하면서도 따라 내려온다.

"너거들은 들어가거라. 내가 바래다주고 올 기니,"

이번에는 영팔이가 말했다.

"그라믄 우리는 들어가겄십니다. 애새끼가 깰까 싶어서,"

임이가 걸음을 멈추고 허서방도 걸음을 멈춘다.

"그라믄 장인어른 편히 가옵소."

"잘 있게."

두 사람은 처지고 영팔과 용이 걷는다.

"용아."

"."

"아무래도 시일이 좀 걸리겄제?"

"가봐야 알겄지마는 일찍 오믄 머 하겄노. 용정에는 아직 집일이 한창일 기고 품 좀 팔다가 산에 들어갈 시기쯤 해서 오든가."

"여기도 품일이야 얼매든지 있지. 웬만하믄 추석은 여기와서 새라."

"가봐서."

한참동안 말없이 걷다가 영팔이 입을 연다.

"나는 니가 온다니께 이자는 살 성싶으다. 우떡허든지..."

"..."

"뻬가 빠지는 한이 있어도 돈 모아서 고향 가야제. 맘 겉애서는 빌어묵으서라도 가자... 하로에도 몇 분 그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이 험한 고장에 와서 돼지겉이 살믄서 되놈들 종노릇까지 할라카니, 옛날에는 땅 한 때기 없는 농사꾼 신셀 원망도 많이 했지마는, 지금 생각하믄 그때가 청풍당석이던 기라."

"그렇지마는 고향 돌아가는 일이 그리 쉽겄나. 조가놈이 있는 한에 있어서는 고향 가기 어러블 기다. 의병 나갔다고... 여기서도 의병이라 카믄 왜놈우 순사들 눈가리에 핏발을 세우는데,"

"머 나도 그쯤은 생각 안 해본 것도 아니다. 고향에는 못 가더라고 근가죽에 가서... 아 지리산에 들어가서 화전을 부치묵더라캐도... 참말로 하나님은 무심타. 죄없는 백성을 이렇기 고초를 겪게 하다니, 하기야 죽은 사람 생각을 하믄 멩 보전한 것만도 고맙기 생각해야겄지마는 죽은 윤보형님 생각을 하믄 실프네 서럽게 말도 못하겄다마는,"

"멩이 붙었다고 머 고마울 것 하낫도 없다. 윤보형님은 그렇기 잘 죽었지. 죽을 때 말마따나 육신을 벗어던지고 훌훌 잘 날라갔지머,"

사십이 넘은 두 사내는 별빛을 밟고 주거니받거지, 헤어질 줄 모르고 간다. 서로의 마음에 친구 이상의 것이 짙으게 흐르고 있다. 한 살갗 한 피 같은 것이, 여자에 대한 그리움과는 또 다른 그리움, 그것은 서로를 통하여 고향을 느끼는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향, 어쩌다가 고향을 잃었는가.

"이자 그만 돌아가거라."

"."

"언제꺼지 따라올라카노?"

"조금만 더, 아직 날이 안 밝았다."

한동안 묵묵히 걷는다.

", 내가 거복이 만낸 얘기를 너보고 안 했제?"

"거복이?"

", 김평산이 아들놈 말이다."

"가아를 어디서?"

영팔이 놀란다.

"용정서 만냈는데..."

"그눔아아가 우찌 여길 왔던고?"

"차마 만냈다는 말을 못하겄기에 아무보고도 얘기를 안 했다. 처음에는 반갑더마는... 차차 시일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우째 맴이 찜찜하더마. 꼭 김평산을 만낸 것 겉애서,"

영팔이는 찜찜하다는 말을 실감할 수 없는 모양이다. 우선 신기롭고 반가운 기색이다.

"지딴에는 원한에 차서 울더마는,"

"하기야 여까지 왔으니 곡절이야 얼매나 많았겄노."

"곡절보다도, 내 짐작이지마는 벨로 좋은 일 하는 것 같지도 않고,"

"부모가 없으니,"

"지 말로는 떠돌다가... 뭐 장사도 하고 노동판에 십장 노릇도 했다 카지마는 믿을 수 없고."

"아무튼지 희한한 일이다. 가아가 이곳까지 오다니,"

"우린들 이곳까지 올 줄 뉘 알았겄나."

"죄가 있이믄 애비한테 있지 자식이 무신 죄 있겄노."

"그건 그렇지."

했으나 용이 마음은 여전히 찜찜하다. 만났다는 얘기는 할 수 있었으나 막연한 불안까지는 말할 수가 없었다. 개천가지 온 용이는

"이자 돌아가거라."

"그러까?"

용이는 개천에 놓인 돌을 건너뛰고 영팔이는 머문다.

"그라믄, 될 수 있는 대로 어서 오라고."

"."

용이는 걸음을 빨리한다. 그리고 용이는 돌아보지 않았고 영팔이는 오랫동안 서 있다가 용이 모습이 조그맣게, 그리고 보이지 않게 됐을 때 발길을 돌려놓는다. 퉁포슬까지 나온 용이는 국자기로 뻗은 넓은 길을 버리고 세림하 물줄기를 따라 두도구 쪽을 향해 발길을 꺾었다. 국자가로 돌아가나 두도구를 돌아가나 용정에 이르기는 매일반, 두 이정이 모두 실팍한 백릿길이다. 초가을의 흙모래 실은 바람이 백양나뭇잎을 선들선들 흔들어주며 자나가지만 아직은 머뭇거리는 ‡? 짚신발 밑의 볕살에 익은 외줄기 길바닥은 뜨겁다. 홀로 걷는, 굽이져 뻗어가는 이 타관의 길이 새삼스레 서러울 까닭이야 없겠는데 가도가도 황토의 남도길, 등짐장수가 맨발로 갔으며, 액병과 보리 흉년에는 집안에, 길바닥에 송장이 썩던 그 고국의 산천, 척박한 땅에선들 아니 서러울 날이 있었을까마는, 기름지다고 찾아온 간도 땅의 사위는 어찌 이다지도 삭막한가고 용이는 생각한다. 헤어질 무렵 뻬가 빠지는 한이 있어도 돈 모아 고향 가야제 하던 영팔의 말이 가슴에 맺힌 때문일까.

사십 리는 넘게 걸었을까? 서북쪽과 서남쪽으로 갈라지는 강줄기와 외줄기 길, 길을 따라 강줄기와도 작별하고 야트막한 언덕을 넘고 평지를 지나고, 줄곧 이르니 길폭이 넓은 용두가도가 가로누워 있다. 오른편 멀찌감치 두도구의 시가가 바라다 보인다. 용두가도로 들어선 용이는 두도구를 뒤로 하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곡식이 익는 들판 너머 해란강이 보인다. 이정은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줄천의 해도 서편으로 조금은 기운 듯, 목이 컬컬하여 주막에 들러 술 한사발 들이켜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그러나 용이는 마을 어귀 길켠에서 물 긷는 아낙에게서 물 한 바가지를 얻어마시고 남은 물로 얼굴을 씻은 뒤 나무 그늘 밑에 가서 다리를 뻗고 앉는다. 두도구나 용정, 어느곳에도 장이 서는 날이 아니어서 사람과 우마의 내왕이 뜸한 길거리를 맥없이 바라보다가 용이는 망태 속에서 점심꾸러미를 꺼낸다.

'집은 다 지었는가 모르겄네.'

월선의 얼굴이 떠오른다. 용이는 주먹밥 한 덩이를 베어먹는다. 저만큼 도랑물에 오리들이 노닐고 삿갓 쓴 청인 농부는 양켠 광우리에 채소를 실은 천칭을 어깨에 지고 밭둑길을 간다. 들판에서 불어오는 흙바람에 곡식 익는 내음이 실려온다. '무신 희맹이 있노. 영팔이는 아아들겉이 좋아하더라마는 왜놈이 안 망하는데 우찌 우리가 고향으로 돌아가노 말이다.' 삼베에 싼 주먹밥을 절반도 못 먹었는데 배가 불러왔다.

"내가 머 황소라꼬 이거를 다 묵을까?"

풀잎에 손을 비벼 닦고 점심꾸러미를 망태 속에 집어넣은 용이는 허리춤에서 곰방대를 뽑아 담배를 넣는다. 영팔이처럼 희망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용이는 호되게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다가 겨우 땅을 짚고 일어선 것 같은 느낌이긴 했다. 전신에 멍이 들어 얼얼한 아픔이 상기도 계속되고 있지만 발바닥이 땅에 붙어있다는 안도감에 심신이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수렁 속에 빠져들어가지는 않으리라 다짐하는 용이 머릿속에 불현듯 십 년 전의 일이 떠오른다. 날마다 마을에서 송장이 나가던 무서운 그해, 사람의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스러지던 황막한 시기를 살아남았을 때 용이는 방종과 무기력의 수렁에서 기어나와 자기 자리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번에는 용정을 휩쓸고 지나간 화재 뒤끝의 폐허 속에서 생활에 순응하던 구역질나는 자기 자신과 작별할 수 있었다. 그 치욕스러운 생활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선은 장래에 대한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사치요, 희망이 없어도 좋았다. 내 자리에 내가 돌아왔다는 안도만으로 충분하지 않느냐. 용이 생각은 그러했고 잘게 갈라졌던 신경이 굵게 뭉쳐지면서 메말랐던 바닥에 물이 고여드는 것을 깨닫는다. 사내로서의 자부심이 풍요한 사랑의 물길이 되어 흐르는 것을 - 용이는 월선의 체취를 강하게 느낀다.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를 보는 것도 아니요. 들판을 보는 것도 아닌데 용이 눈에 무엇인가 가로막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사람이었다. 한 사내가 맞은켠에서 용이를 보고 실쭉 웃는다.

'....?'

"행색을 봉께로 나그넨디, 어디까지 가시는 게라우?"

용이는 마음속으로 놀란다. 전라도 사투리는 뜻밖이었다. 강을 하나 끼고 이쪽은 경상도요 저쪽은 전라도인 고향 땅에서는 귀에 익었던 말씨, 용이는 저도 모르게 반가운 표정이 되어서

", 용정까지 가요."

"으응?"

상대편도 놀란다.

"아아니 경상도 아니랑가?"

"그렇소."

"허허허, 이거 반갑소."

하더니 사내는 머슴아이처럼 코를 한번 들이마시고 겨드랑에 낀 때 묻은 괴나리봇짐을 추스르며 나무 그늘 안으로 들어선다.

"어이크매."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쬐금 쉬었다가... 나도 용정 가는 길잉께."

사내는 용이와 엇비슷한 나이로 보인다. 형편없이 여위고 빈약한 체구다. 사내는 들판을 바라보는 척, 그러나 왠지 조마조마해하고 있는 것 같다. 늘어난 목덜미 살가죽이 불럭불럭 흔들리고 먼지 낀 눈시울도 자주 흔들린다. 용이 담뱃대를 털자 얼른 얼굴을 돌리고 쳐다본다.

"형씨."

"."

아까처럼 힐쭉 웃는다. 들숭날숭한 이빨이 담뱃진에 절어서 시꺼멓다.

"거 담배 한대 적선하소."

"그러소."

담배쌈지를 풀어주고 곰방대도 내미는데

"담뱃대는 여 있당게로."

허리춤에서 제것을 뽑아들고 골통에 담배를 담는다. 부싯돌을 비벼 불을 붙이더니 뱃속 깊은 곳까지 빨아당긴다. 눈이 가물가물하고, 그러기를 몇 번,

"온종일 딤배를 굶었어라우. 어지럽네?"

물부리에서 입술을 뗀다. 얼굴이 노오래진다.

"허 참, 밥을 굶었이면 굶었제 담배 굶곤 못 살 거라 혔는디. 빈속이라 하늘이 비잉비잉 돈당께."

그렇잖아도 용이는 처음 사내를 보았을 때 허기진 얼굴이라 생각했었다. 망태 속에 손을 넣어 점심꾸러미를 꺼낸 용이는

"묵던 기라 안됐소만 요기 좀 하겄소?"

"아니 워째 이러신다요?"

당황한다.

"시장할 때는 개떡 하나라도,"

", 야아, 하모니라우. 허나 이거 이래 쓰겄소?"

"나는 배불리 묵었인께 그냥 가지가봐야 쉴 기고..."

"미안스러 우쩐디야?"

사내는 몹시 수줍어한다.

", 그라믄 한 개만 얻어,"

하는데 목구멍 속으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난다. 뼈와 껍데기뿐인 마디 굵은 손이 주먹밥 하나를 잡는다.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는 소리가 꿀떡꿀떡 들려온다. 몹시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한 개만 얻어먹겠다던 사내는 저도 모르게 남은 주먹밥을 모조리 먹어치운다. 그리고 나서 정신이 드는가 껄껄 웃는다. 웃는데 눈꼬리가 젖는다.

"참말이제 이기이 무슨 고생인지 모르겄소잉. 하하핫.... 나 이틀을 굶었당게로."

"집이 어딘데?"

"? 집은 무슨 집이랑가?"

"그라믄 식구들은?"

"이 차중에 식구라도 있었이면 되놈한테 팔아먹었을 것이여."

옛말에 눈물도 배가 불러야 난다 하더니 주린 배를 채우고 보니 설움이 치미는가 보다. 용이는 입맛을 다시며 외면을 한다.

"그런디 형씨."

"."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 아니랍디까여? 고향은 경상도 어디지라우?"

"떠도는 처지, 고향을 말해 머 하겄소."

"하기는 그려. 그놈의 가지도 못헐 고향 말해 머 헌디야? 다 엇비슷한 사정일 것이니... 좌우당간에, 객지에 나와본께로 내 땅 까마귀만 보아도 반갑다 안 하더라고? 안티 묻은 곳이사 어디든간에 전라도 경상도가 아니 먼 이웃이니께... 수천리 되놈우 땅에서 이리 만내는 것도 예사 인연 아니랑께. 그런디 성씨는 어찌 되지라우?"

"이가요."

", 이씨라. 나는 주가요. 이름은 갑이고 그러니께 주갑인디 어떤놈은 주걱 주걱 하고 부르들 않는개비여? 헌디 내가 고향을 떠나올 적에, 대국 땅으로 가노라 혔더니 우리 아부지 말심이, 허허엇 갑이 이노움, 예 아부지, 니 성씨가 어찌 되더라고? . 아부지 주가 아니게라우? 이노움 주가가 아니라 주씨라 혀, 주씨. 그려 니가 대국 땅에 간당께 내 당부헐 일이 있는디 대국 땅에 가거들랑 조상을 찾아봐야 헌다. 그거여. ? 조상을 어찌 찾는다요? 주천자를 찾으믄 된다 그 말이여, 주천자를. 대국 땅까지 가서 조상을 안 찾는대서야 자손된 도리에 쓰겠눈감? , 아부지. 찾아보겠으라우, 하하핫... 어디 가서 찾는당가? 하하핫핫..."

용이도 웃는다. 말솜씨가 재미나서 심심산골 수수깡울타리 앞에서 수작하는 부자간의 모습이 훤하게 떠오른다.

"허허헛헛... 허헛 주천자를 찾으라고? 허허헛..."

기분좋게 웃는 용이를 힐긋 쳐다본 주갑이는 지극히 만족해한다.

"헌디 형씨 내 말 좀 들어보더라고."

"허허헛, . 말해보소."

"실은 그러크름 혀서 이 땅에 왔는디 와봉께로 이곳은 주천자 땅이 아니고 오랑캐 땅이더라 그 말이여."

두 사내는 또 다시 유쾌한 웃음을 터뜨린다. 웃는 주갑의 얼굴은 언제 슬퍼했나, 언제 배고파했나 싶으리만큼 태평스럽다.

"이자 길 떠나야겄소."

용이 망태를 둘러매고 일어섰다.

"그러십시다."

주갑도 엉거주춤 일어서는데 용이 도로 주질러앉으며 망태 속을 부실부실 뒤적인다.

"보소."

"왜 워찌 그런디요?"

"담배쌈지 있이믄 내놓으소."

어리둥절하다가 주갑이는 낡고 때에 절어서 번들거리는 담배쌈지를 내 놓는다. 용이는 임이가 준 담배봉지를 뜯고 주갑의 담배쌈지에 꾹꾹 눌러가며 옮겨넣는다.

"아니 이거 기찰 일이구마. 니라우 이런 인심이 어디 있더랑가?"

주갑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말라비틀어지고 검버섯이 얼룩덜룩 핀 얼굴이 갑자기 팽팽해지며 윤이 흐르는 것만 같다. 기분에 따라서 그렇게 달라지는 주갑의 얼굴을 어이없이 바라보다가 용이는 망태를 어깨에 걸머진다. 먼저 길켠으로 올라선 주갑이는 아이처럼 몸을 삥 돌리며 건너오는 용이를 쳐다보며 또 빙글빙글 웃는다. 담배 한 쌈지 얻은 게 그에게는 그렇게 행복했던 모양이다. 둘은 나란히 길을 걷는다. 주갑이도 키는 작은 편이 아니었지만 워낙 여위어서 가랑잎처럼 몸이 흔들거린다.

"듣자니께 용정서는 큰 불이 났다 그러는디 형씨는 용정 사시오?"

"살았지마는 이번에는 이사하러 가는 길이요."

"."

"..."

"벌어묵고 살 길이 없어서 그러는 게라우?"

"벌어묵고 살 길이 있이나마나, 본시 농사짓던 처지니께..."

그 말은 그것으로써 흘려버리는 듯하더니

"실은 좀 만낼 사람이 있어서 용정으로 가는 길인디 그 사람이 지금도 거기 살고 있을랑가 모르겄고, 내 아깨부터 형씨한테 물을란걸 다른 말 하니라고 정신을 뺏겼당게로. 그 사람도 경산돈디 뜽금없이 신집에서 만나갖고."

"..."

"천보산으로 함께 일자리 찾아간 일이 있었어라우, 갔다가 허탕만 치고 나는 그냥 봉밀구로 갔었지라우. 그리 헤어지고는 못 봤는디. 참말로 좋은 사람아여. 참말로,"

"그 사람 김영팔이라 안 합디까?"

"아니! 워찌 형씨가 그걸 안당가?"

주갑이는 펄쩍 뛴다.

"영팔이한테 들었소."

"? 그게 정말인게라우?"

용이는 주갑이 마음에 들었다. 사귄 지 오랜 사람 같았고 함께 걷고 있노라니 여러 해 동안 풀어보지 못한 어둠과 긴장이 풀어지면서 옛날, 그 아주 옛날처럼 농치던 버릇마저 주빗주빗 돋아나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 지금 영팔이 집에서 오는 길이요. 헌데 봉밀구에선 아편쟁이 되놈한테 매맞고 쫓겨오는 것 아니요?"

"워찌 그리 잘 안다요? 그는 그렇고 영팔이 그 사람 병 안 나고 잘 있습디여?"

"퉁포슬 쪽에서 되놈 땅 붙이고 입에 풀칠이야 하고 있소."

"그기이 어디여? 식솔도 많다 혔는디."

"멋하믄 우리하고 산에 안 가겠소? 시적 벌어묵고 살아야 할 형편인가 본데,"

"산에라니?"

"산에 말이요."

"광산 말이랑가? 어림없제, 어림없당게로. 나 우리 아부질 두고 맹셀 했이니,"

주갑은 엄숙한 표정을 짓고 용이는 웃는다.

"가겄다는 사램이 있다 캐도오 내 두 손 마주잡고 말릴 긴께. 아금매, 그러면 형씨가 그놈의 산으로 간다 말씨?"

"되놈한테 당하긴 대게 당한 모양이구마."

껄껄 웃는다.

"말도 말랑께. 내 이력을 말헐 것 겉으면 책을 모아도오 하모니라우, 책을 모아도, 소싯적부텀 동학당 땜시로 안 혀본 고생이 없고오 맷집도 좋아서 애지간헌 일로는 끄덕도 안 혀. 헌디 그놈의 고장은 생판 사람백정들만 살고 있더란 말씨, 사람백정들만. 나도 이런 약골은 아니었는디 더 있다가는 게우 붙어 있는 살가죽도 남아나지 않겄다 생각허고 줄행랑을 놨지라우. 형씨, 아예 광산 갈 염일랑 굴컥 샘키부리랑께. 내 진정코 하는 말인게라우."

주갑의 사투리를 즐기듯 듣고 가는 용이

"그게 아니고, 산이믄 모두가 다 광산인 것도 아니겄고 나무산도 있다 그 말이구마는."

"..."

"벌목하러 가자 그 말이구마."

"벌목! 벌목꾼으로 가자아 그 말심이랑가?"

"영팔이도 함께 가기로 약조를 했이니께."

"가만 기시요. 가만, 그러면,"

주갑은 망설이는 게 아니었다. 너무 좋았던 김에 팔을 뻗고 용이 가는 길을 막고 선다.

"참말로 영팔이 그 사람도 함께 간다 그 말인게라우."

"빈말 아니요."

"그럼매. 형씨가 빈말헐 사람이건디? , , 그거라면 쓸만허다뿐이겄소? 하 참 내가 간밤에 무신 꿈을 꾸었제?"

"용꿈 꾸었소?"

"허허허헛... 담배 한 쌈지 얻었고, 주린 창자에 밥이 들어갔고 영팔이 그 사람 소식을 들었고 또오 일자리도 구헐 판이면,"

주갑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가며 지껄이다가

"하하핫... 그까짓 용꿈 꾸나마나. 돔무 따라 강남 간다 안 헙디여? 영팔이 거 좋은 사람인디,"

주갑은 걷기 시작한다.

"용정 가믄 지금쯤 집일이 한창일 기요. 거기서 품 좀 들다가, 벌목은 겨울 일잉께."

"하모, 하모니라우. 벌목이사 겨울 일이란 걸 모르간디? 이렇게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일이란 난생 첨이랑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혔는디 참말로 그런개비여."

도중, 줄곧 얘기를 나누면서 그들이 용정에 당도했을 땐 사방에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다.

 

 

3. 사진

차일 귀퉁이를 잡아맨 소나무 기둥 옆에 금녀는 서 있다. 한 손은 나무기둥을 짚고 손수건을 쥔 다른 한 손은 맥없이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 이마 위에 흘러내린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린다. 햇빛과 비바람에 바래어 회갈색으로 변한 차일도 이따금 펄러덕거린다. 운명과 같이 가열한 햇빛이 튀는 들판을 금녀는 바라보는 것이다. 어둡고 잠긴 눈에 끝도 없는 들판, 먼 지평선 위에 아직한 구릉이 권태롭게 드러누운 것을 볼 수 있었지만 그 구릉조차 금녀에게는 막막하고 그저 한없이 뻗은 벌판으로만 느껴진다. 모래실은 바람은 여전히 얼굴을 치고 머리칼을 나부끼게 하고, 이곳이 어디메쯤인지, 무슨 이름의 역두인지 금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자신의 행선지가 훈춘이라는 것, 뉘에게 들었던지, 아니면 출발시 무슨 팻말이라도 눈앞에 지나갔었는지 희미한 기억 같은 게 있을 뿐이다. 행선지가 훈춘이건 혹은 청진이건 금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옥을 가고 있다는 생각이 이외엔. 서러운 마음은 터럭만치도 없고 울음 같은 것도 잠들어버린 지가 얼마 만인가. 가뭄에 갈라진 땅바닥처럼 가열한 햇빛이 튀고 있는 저 길바닥처럼 차라리 거칠 대로 거칠어 암산같이 무디어버린 신경이 지옥과의 싸움을 위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처음 해삼위에서 청진에 있는 윤이병한테 도망을 갔을 때 금녀는 울었다. 그리고 김두수에게 끌려 떠날 때는 무력하고 겁 많은 사내 윤이병을 원망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용정으로 윤이병을 찾아왔을 때 금녀는 거의 몽유병자 같은 상태였었다. 당황하고 겁에 질린 사내 얼굴을 대했을 때도 금녀는 그저 막막했을 뿐 서러움도 그리움도 원망도 가질 수가 없었다. 인심처럼 바싹하게 메마른 마루 끝에 혼자 앉혀놓고 마치 액병을 지닌 병자를 보듯, 비실비실 피해 달아나듯

"나 잠시 다녀올 데가 있어서 말이야. 나 다, 다녀와야겠어."

하며 황황히 나가는 사내 뒷모습을 바라본 금녀는 이 세상 넓은 천지에 오로지 자기 혼자밖에 없다는 것을 가슴이 터지도록 절감했다. 혼자밖에 없다! 금녀는 차일이 펄럭이는 소리를 들으며 어제일을 생각한다. 윤이병을 멸시해서도 아니요 원망 같은 것은 더욱 아니었다. 억세어지는 마음 사잇길을 지나가는 풍경 같은 거, 윤이병과 김두수 사이에 어떤 타협이 이루어졌는지 금녀는 그런 것을 살필 겨를도 없었거니와 하여간 그들은 술상을 벌이었다. 그리고 금녀의 아비는 과객처럼 그들 사이에 끼어서 죄없는 술만 축내고 있었다. 금녀는 방 한구석에 짐짝처럼 처박혀서 기묘하기 그지없는 그네들 주연을 돌같이 굳어진 눈동자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어때? 내 시키는 대로 하는 게지?"

김두수는 술을 들이켜고 술잔을 놓으며 다짐하듯 물었다. 윤이병은 술잔을 든 채 눈을 내리깔았다. 정맥이 내비친 손이 하얗게 보였다.

"내 시키는 대로만 해준다면 자네가 저지른 일쯤,"

졸개를 대하듯 김두수의 태도는 느긋하고 관대해 있었다.

"물론 앞으로 또 다시 이런 일이 있다면 그땐 말해 뭣 하나? 끝장나는 게고 아무튼 내 시키는 대로만 해준다면 이번 일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어디 그뿐이겠나? 내 보아하니 자네도 노상 돈이 아쉬운 꼴인데 그까짓 양심이고 개나발이고 내가 잘사는 것 이외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나. 돈푼 만지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잘만 하면 큰돈 만드는 구멍도 뚫어줄 수 있다 그거야. 또 자넨 명색이 선생이라 학식이 있으니 뉘 아나? 나도 자네 같은 끈이 있으면 좋겠기에 하는 말일세. 누이 좋고 매부 좋고."

"..."

"내 말 알아듣겠어?"

"..."

"내 말 알아듣겠느냐 말이다!"

"알아들었소."

윤이병의 목소리는 의외로 퉁명스러웠다. 위기를 모면한 안도감도 있었겠지만 자기를 필요로 하는 상대방의 의도를 안 이상 기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성싶다. 금녀아비는 게겔스럽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딸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게슴츠레한 눈을 불안하게 깜빡거리다간 우는 것도 아니요 웃는 것도 아닌 표정을 짓고 젊은 놈들 어느 한 사람 술을 권하는 일이 없건만 연방 자작으로 술에 절어드는 것이었다. 그새 무슨 말을 했던지 김두수는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내 네놈 목을 댕강 달아매놓고 갔으면 좋겠다마는 자아 술이나 받게."

김두수는 제법 호기스럽게 군다. 윤이병이 술 마시는 것이 째려보다가 피멍이 든 윤이병의 턱을 바라보며 힐죽 웃는다.

"내가 알지 알어. 그걸 모른다면 내가 네놈 목을 댕강 달아매놓고 가지 그냥 두나? 저기 저 계집이,"

김두수는 금녀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네가 좋아서 달아나왔다면 어림 반푼어치나 있는 일인가? 저년은 자네 아니라도, 나무 둥우리라도 도망갈 수 있는 곳이라면... 저년하고 나는 원수로 세상에 태어났단 말이야. 나는 평생 저년을 잡으러 다닐 게고, 하긴 내 팔자가 잡으러 다니게 돼 있는 팔자긴 하지만 말이야. 그러니 자네도 내게서 도망갈 생각일랑 아예 말어. 어쨌거나 내 한 말을 깊이 명심하고, 싫든 좋든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될 테니,"

순간 윤이병 얼굴에 공포의 빛이 지나갔다. 차일 안에는 머리에 꽃을 꽂은 청국 여인과 농부들이 서 있었다. 칡덩굴로 탄탄하게 엮은 광우리 속에서 중병아리가 삐약삐약 운다.

'어떻게 하면 달아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금녀는 김두수를 무서워하지는 않는다. 증오할 뿐이다. 너무 격렬한 증오심 때문에 불안이나 공포증이 없는 것이다. 목숨이 찢겨지는 한이 있어도, 자기 심장에 비수를 꽂는 광경을 상상하여도 도무지 무섬증을 느낄 수가 없다. 무섬증을 느끼기는커녕 전신을 내던지고 싸워야 하는 것에 대한 어떤 희열마저 솟아난다. 저항하고 증오하는 것도 일종의 정열인지 모른다.

'두번 다시 윤선생한텐 가지 말아야지. 두 번 다시는...'

해는 서편 쪽으로 기울어 차일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의 그림자는 동쪽으로 뻗는다. 저만큼 풀섶에 퍼질러 앉은 김두수는 궐련을 꼬나물고 튀튀하게 나온 입술을 젖히며 한 마차를 타고 온 나그네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죽어버릴까? 차라리, 마차 바퀴에 깔려서 죽어버릴까? 아냐! 살아야지.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마지막까지... 난 저 악당놈한테 굴복하지 않아.'

"형씨."

","

김두수는 격에 맞지도 않게 공손한 대답이다. 나그네는 햇볕에 그을리어 그랬던지 꺼무스름한 낯빛인데 왼편 귀 근처로 해서 입술 가까이까지 푸르스름한 낯빛인데 왼편 귀 근처로 해서 입술 가까이까지 푸르스름한 반점이 퍼져 있었다. 어떤 때는 다부져 보이는 표정이었고 어떤 때는 아주 병신스러워 보이기도 했었다. 몸은 단단하고 날렵한 것 같다. 장사꾼은 아닌 듯싶고 선비 같은 인상도 아니었으며 차림새는 초라했다. 그러나 어쩐지 사람 자체는 초라해 뵈지 않는다.

"형씨를 어디서 많이 뵌 것 같소이다."

"그래요? 어디서 나를 봤을까요?"

김두수는 여전히 공손스런 표정을 지으며 그러나 상대편 기색에 재빠른 주의력을 모으며 묻는다.

"글세... 어디 사시오?"

"어디라 딱이 말할 수 없구먼요. 철새처럼 장삿길 따라다니니 말입니다. 동주리 틀고 자리잡아 앉을 새가 있어야지요."

"무슨 장살 하시는데."

"이것저것, 젊을 때 돈을 벌어야잖겠소? 닥치는 대로 해보는 거지요."

"젊을 때... 그야, 그러나 돈 버는 일이 어디 쉬워야지요."

"사내자식 배짱 하나 튼튼하면야 재물쯤..."

"그 배짱이라는 것도 날 때 타고나야지요."

"아암, 그야 그렇지요."

"첫눈에 보기에도 형씨 담력이야 보통은 아니라 싶었소만 수단도 보통은 아닌 모양이오. 하하핫..."

"그건 또 왜요?"

김두수는 마음속으로 경계심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되묻는다.

"저기 저 서 있는 여인을 보니 말이오."

사나이는 금녀 뒷모습에 눈짓을 했다.

"내 여핀네요."

"그렇다면 더욱 놀라운 수단이지요. 저렇게 보기 드문 미인을 형씨 같이 못생긴, 하 이건 말이 지나쳤구만."

김두수의 부숭한 눈두덩이 빨개진다. 불쾌한 모양이다.

"본시 계집이란 가지는 게요. 재물과 같은 거 아니겠소? 가지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천하일색 양귀비가 대수겠소? 개 핥아놓은 죽사발같이 얼굴만 멀쩡하고 속빈 놈이나 계집이 오길 기다리는 게지."

옹졸하게 응수한다.

", 바로 그렇소이다. 남자 못생긴 것하고 잘났다는 말과는 상관이 없으니까요. 저렇게 미인인 부인을 가진 사람이면 아암요 잘난 남자지요."

나그네는 낭패한 듯 허둥지둥 말을 꿰맞추었으나 마음속으론 낭패했던 것 같지는 않다. 또 돌아서 있는 금녀를 말처럼 그렇게 미인으로 감탄하는 것도 아닌 성싶다. 사실 금녀는 훤하게 드러나 보이는 미인은 아니었다. 키는 여자치고 다소 큰 편이며 몸매가 고왔고 뽀오얀 얼굴빛에 담백한 느낌의 별 특징 없는 얼굴이지만 쌍꺼풀이 크게 진 눈, 어두우면서 강한 눈빛이 평탄찮을 운명을 암시하는 듯싶었고 김두수를 향할 때 그 눈은 표독스럽게 이글거린다. 훈춘에 도착한 김두수는 여인숙을 찾아가는데 얼굴에 반점이 있는 사내도 그의 뒤를 따라온다. 김두수는 돌연 몸을 휙 돌렸다. 사내의 표정을 잡기 위해서다. 사내는 천하태평인 얼굴로 따라오는 것이었다.

"형씨께서는 어딜 가시오?"

묻는 김두수 말에는 대답 없이

"형씨께서는 여관으로 가시는 길 아닙니까?"

되묻는다.

"여관엘 가지요."

"나도 여관을 찾아가는 길이오."

이윽고 이들은 조촐한 여관으로 들어갔다. 일행으로 생각한 사동은 나란히 붙은 방 두 개를 정해주고 나간다. 금녀는 여전히 방 한구석에 몸을 쑤셔박듯 도사리고 앉는다. 그러한 그 여자의 습벽에는 이미 익숙해진 김두수는 방 가운데 뻗치고 서서 지긋하게 바라볼 뿐, 말이 없다. 남폿불이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윽고 저녁상이 들어왔다. 겸상이 아닌 각각 다른 밥상을 마주하고 치러야할 의무처럼 밥을 먹는다. 이런 분위기나 따로따로 밥을 먹는 행위에도 익숙해 있는 듯 김두수는 그의 인간성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이만큼 인내심 깊게 말이 없다. 도시 금녀에게 가는 김두수의 애정이란 어떤 성질의 것이었을까? 끝내 거역하고 나서는 여자의 끈질긴 고집 앞에 끝내 맞서보고야 말겠다는 그도 그러한 고집 때문일까? 아니 역시 애정이었을 것이다. 밥을 절반쯤 먹었을 때 김두수는 금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마치 혼잣말같이 씨부렸다.

"네가 죽어 없어지지 않는 한 넌 나한테서 몸을 숨길 순 없어. 나는 본시부터 사람 찾아내는 재주만은 비상하게 타고났으니 말이야."

하고 밥이 가득 든 입을 헤벌리고 끼들끼들 웃는다. 금녀는 밥숟갈을 탁 놓고 본시의 구석자리로 돌아가 도사린다.

"음 그만치 먹었으면 굶어죽진 않겠지."

김두수는 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고 사동이 가져온 숭늉을 한 모금 머금은 뒤, 입가심하듯 굴럭굴럭 입을 굴리는데 금녀는 그 소리에 몸서리치듯 부르릉 떤다.

"어허허 잘 먹었다."

하며 툇마루로 나간 김두수는 옆방 기색을 은근히 살핀다. 그러자 그 방에 든 점박이 사내도 열려진 방문 사이로 얼굴을 쑥 내밀며 어리석은 것 같은 웃음을 띤다. 방안에서 새어나온 불빛이 마루를 희미하게 비춰준다.

"형씨는 이곳이 초행이시오?"

김두수는 지체없이 말을 던진다.

"아니외다. 이곳에 형님이 계실 때는 가끔 왔었지요."

"형님이,"

","

"한데 지금은 안 계시다 그 말씀이오?"

"전엔 이곳에서 제법 버젓하게 살았었는데 속임수를 당해 홈싹 망해버린 게요. 그래 이곳을 떠났습니다."

"헌데 이번엔 무슨 일로?"

"이곳에 왔다기보다 지나는 길이지요. 나는 웅기 형님한테 가는 길인데 조카가 하나 있어서요."

"그럼 거기서 유하실 수도,"

"한데 거시 가서 묵을 형편이 못 됩니다. 실은 그애를 데리고, , 그애 장가를 들이러 가는 길이지요."

"그렇습니까."

사내는 일어섰다.

"어디 가시려고 그러시오? 술이나 하십니다."

김두수는 점박이사내를 좀더 다루어보고 싶은 심정이다.

"나중에 하십시다. 그앨 데리고 와야겠어요. 내일 아침에 떠나야 하니까 지금 기다리고 있을 겝니다."

사내가 나가버리자 김두수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쩐지 이상하다. 수상쩍은 구석이 있단 말이야. 마차에서부터... 혹 내가 누군지 알고 노리는 놈이 아닌지 몰라.' 김두수는 용정 그 막다른 골목에서 당할 뻔했던 일이 있고부터 퍽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어쩌면 크다만 고긴지도 모르지. 어딘지 냄새가 다른 것 같단 말이야. 어디 한번 두고 보자.' 방안으로 들어간 김두수는 벽에 머리를 기대인 채 졸고 있는 금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온종일 마차를 타고 왔으니 지칠 대로 지쳤을 것이요 연일 긴장된 신경도 피곤했을 것이다. 김두수는 자신이 생각해보아도 금녀와 자신의 관계가 어처구니없이 여겨진다. 수없이 여자를 겪은 김두수다. 농락하고 난 뒤 술집에 여자를 팔아먹은 일도 몇 번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여자에게만은 집념이 계속되는가. 금녀는 소스라쳐 놀라면 자세를 꼿꼿이 세운다. 졸고있던 눈이 샛별 같이 빛나고 표독스럽게 눈빛이 변해간다. 김두수는 순간 여자의 머리채를 와락 잡으며 메어칠 듯하다가 놓아준다. 남폿불을 불어 끈다. 그리고 밖으로 나온 그는 점박이사내가 든 방과는 반대쪽에 있는 방 앞에 가서 안의 기척을 살핀다. 불이 꺼져있는 방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한 뒤 그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리고 보일락말락 방문을 열어놓고 그곳에다 눈을 갖다대어 바깥을 내다본다.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 그만큼 김두수는 용의주도했던 것이다. 이윽고 사람이 들어오는 기척이 났다. 김두수는 슬며시 몸을 일으켜 문틈으로 눈을 가져간다. 두 사나이가 들어서는데 점박이사내는 손가락질을 한다.

김두수가 든 방을 가리킨 것이다. 점박이사내보다 키가 큰 다른 사내가 손가락질한 방을 힐끗 쳐다보는데 방에서 새어나온 희미한 밝음 속에 나타난 사내 얼굴을 본 김두수는 놀란다. 용정 막다른 골목에서 마주쳤던 바로 그 박모의 동생이 아닌가. 그러나 김두수는 다음 순간 씩 웃는다.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기 있는 게 안전하다 할 순 없지. 이 장소에서 떠나는게 옳을 게야. 금녀를 어떡하나?' 점박이사내에게 의심을 품기는 했으되 박모의 동생이 나타나리라는 것은 전혀 생각 밖의 일이었다. '우연인지 누가 알아? 아니다. 그자가 점박이놈 조카가 아닌 것만은 틀림이 없어. 그러니 우연이라 할 수는 없다. ? 나하고 아무상관이 없이 저놈들은 일을 꾸미려고 만나는지... 하여간 이렇거나 저렇거나 여기서는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김두수는 바쁘게 생각을 굴려본다. 그러나 자기 목숨을 노리고 왔다는 것이 제일 정확한 판단인 듯싶다. '빌어먹을! 저년만 아니면, 이래가지고는 꼼짝할 수도 없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얼마 동안이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두운 방안에서 곤두세우고 있는 김두수의 귀에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룻장 밟는 소리가 났고 다음 옆방 문 열리는 소리...

'역시 그랬었구나! 한데 점박이사내놈, 그놈이 어떻게 내 얼굴을 알았을까?'

금녀는 여전히 쪼그리고 앉은 채 졸고 있었다. 졸면서 그녀는 꿈을 꾸다간 놀라 깨고 졸다간 꿈을 꾸고, 꿈은 토막토막이었고 잠도 토막토막이었다. 푸른 물이 밀려오는가 하면 마차 속에 자신이 앉아 있었고, 수염을 흔들며 술을 마시던 아버지 얼굴이 나타나는가 하면 윤이병의 목이 졸린 모습이 지나가고, 인기척이 있어 금녀는 눈을 떴다. 김두수가 들어온다고 생각했다. 무시무시한 싸움이 벌어질 것을 대비하며 금녀는 두 팔에 힘을 준다.

"이놈! 꼼짝 말아라!"

전혀 다른 목청이다. 목소리를 죽인, 그러나 무시무시하다.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이야?"

나직이 눌러 찌그러뜨린 경악의 소리다.

"계집뿐이야."

"뭐라구?"

"계집 혼자란 말이다."

"그놈 여핀네야. 계집을 두고 멀리 갔을 리 없어."

점박이사내 음성이다. 금녀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한다.

"이봐."

"?"

"네 서방놈 간 곳을 대라."

"..."

"어디 갔는지 말 못해?"

", 난 몰라요."

"거짓말 말고 어서 대답하란 말이야!"

"나 난 아무것도 몰라요."

금녀는 사실 김두수가 어디 갔는지 알지 못했다.

"이놈이 눈칠 챘다!"

"어떻게 눈칠 채누? 조용히 기다려보자구. 뒷간에 갔는지도 모르니."

"아니야, 자세히 보게. 자리에 든 흔적이 없어."

"?"

"저 여자도 불 꺼진 방에 앉은 채, 뺀 거다!"

"계집을 두고 빼?"

"빼는 데는 귀신이야. 빌어먹을!"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계속된다. 금녀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거라 생각한다.

"할 수 없다."

"그럼 여자를 끌고 가자."

"여자!"

", 인질이야."

"계집을 버리고 달아난 놈이."

"허나 그놈한테는 과남한 미인이거든. 필시 계집 찾으러 나타날게야."

"하여간 그럼 그래보세. 여보시오!"

"..."

"일어서란 말이오."

"아니 제가..."

"잔말은 안 하는 게 좋고 우릴 따라가주어야겠어! 시끄럽게 굴면 그땐 사정없이 한방 갈겨버릴 테니까."

키 큰 사내가 팔을 와락 잡아끈다. 일어선 금녀의 등을 떼밀고 방 밖으로 몰아낸다.

"끽소리 마라. 옆구리에 총구멍 낼 생각 없으면,"

금녀의 몽롱해 있던 의식이 살아났다.

"김두수를 죽이러 온 사람들! , 그러면 이 사람들은...'

금녀의 전신이 와들와들 떤다. 무서움 때문이 아니다. 환희다. 날아갈 듯, 금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한다 생각했으나 혀가 굳어버렸는지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았다. 대체 당신네들은 뉘시오, 하고 물어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여인숙을 빠져나와 어두운 거리로 나왔을 때 금녀는 하늘의 별들을 우러러본다. 비로소 마음속으로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가는 곳이 도둑의 소굴이든 악마가 살고 있는 곳이든, 다만 김두수를 떠나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금녀는 정체 모를 두 사나이가 불가사의한 힘을 지닌 신비스런 존재로 여겨진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4. 바닷가에서

마차가 다닐 수 없는 좁고 울퉁불퉁하고 험한 길을 얼마 동안이나 걸었는지, 금녀는 찝찔한 바닷바람을 허파 깊숙이 들이마시었다. 몇 번을 그렇게 했는지 모른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묵묵히 걷고 있는 두 사내는 금녀를 인질로 납치해간다고 생각할 터이지만 금녀는 줄곧 신비스런 환상과 흥분에 들떠 있었다. 구름 위를 둥둥 떠온 듯 피곤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않았다. 지금은 옛일이지만 그렇다, 그것은 꽤나 아득히 먼 옛일인 것이다. 짙은 나무숲에서 매미가 힘차게 여름을 노래할 때 찬송가를 부르던 예배당이 생각난다.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던 딱딱한 마룻바닥의 감각도 생생하게 살아난다. 빼앗긴 내 나라를 찾아야 한다고 울먹이며 외치던 두루마기 입은 중년 남자는 누구였던가? 교회당 안이 술렁거리고 소용돌이치고, 젊은 사내들 얼굴에는 땀방울인지 눈물방울이었던지, 그리고 벌겋게 상기되어 그것은 참 아름다웠었다.

'여러분, 거룩한 우리의 하나님 예수를 믿는 사람이 백만이 되는 그날! 그렇습니다! 그날이 오면 우리는 잃었던 내 강토를 찾을 것이외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날의 영광과 승리를 위해 복음 전파에 몸 바쳐야 할 것이외다!'

음성이 귓가에 쟁쟁하다. 강 하나를 넘어서면 그곳에 우리 빼앗긴 조국을 찾기 위한 눈빛 강한 사내들이 신출귀몰한가는 얘기들은 누가 들려주었던가? 금녀는 지금 그 전설 속을 걷고 있는 것을 느낀다. 불과 일 년이 못 되는 세월이었는데, 새까만 어둠이었으며 과거 일체를 깡그리 망각해버렸던 불과 일 년이 못 되는 오욕의 세월이었는데, 그 새까만 한 장의 책갈피를 넘기고 보니 새로운 천지가, 아니 그것은 아직 성급한 얘기겠고 행복했던 낡은 시절이 희미하게, 차츰은 뚜렷하게 빛깔을 띠며 나타나는 것이다. 종소리에 흔들리는 교회당의 풍경이 있고 어머니의 미소 짓는 얼굴이 있고 연한 새순에 햇볕이 일렁이는 봄날이 있고 머리꼬리에 자줏빛 댕기를 물리던 거울 속에 청순한 얼굴이 있고 항구에 정박했었던 화륜선을 구경 하러 나갔었던 조그마한 계집아이도 있다. 어깨에 모포를 걸치고 지나가던 눈동자 푸른 아라사인과 견장이 시뻘겋던 왜병들의 구둣발 소리와 갓 쓰고 장죽 문 늙은이와 얼음판 위에 팽이를 치는 머슴아이와 마치 그림책처럼 한 장 한 장 책갈피를 넘길수록 선명해지는 추억의 알록달록한 풍경 - 그러나 윤이병의 모습만은 어느 책장 속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새까맣게 먹칠된 그 장 속에 묻혀 버렸는가. 키 큰 사내가 담뱃불을 붙인다. 보기 좋은 콧날이 성냥불빛에 솟아났다가 사라진다. 뿌연 연기가 어둠 속에 흩날린다. 다시 빨아당기는 담뱃불에 콧날이 나타나고, 여까지 오는 동안 두 사내는 자신들의 신분을 짐작케 할 만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바닷바람에 젖어서 눅눅한 것 같은 땅을, 아직은 지열이 식지 않고 있는 길바닥을 타둑타둑 밟으며 금녀는 사내들을 따라간다. 그리고 비로소 금녀는 앞으로 전개될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더할 수 없는 기대와 흥미를 가져보는 것이다.

"이제 다 왔구먼."

점박이사내가 뒤에서 말했다. 마을 불빛이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쓸쓸한 한촌임을 알 수 있었다. 포염시에서도 외떨어진 단호산포대 및 흑룡만을 바라보는 마치와야라는 곳이다. 키 큰 사내는 길바닥에 담배꽁초를 휙 던진다. 바람에 불꽃이 튀다가 어둠 속에 묻혀버리고 만다. 사내는 나직한 목소리로 혼자 웃는다. 그의 웃는 심정을 잘 헤아리고 있는 듯 점박이사내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다 뚝 끊어버린다. 판자로 벽을 친 오두막 앞에 이르렀을 때 점박이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문을 두드린다.

"뉘시오."

맑고 드높은 여자의 음성이 집안에서 울렸다.

"나야"

이번에는 키 큰 사내가 말했다.

"작은 아버님이세요?"

"."

문이 열리고 젊은 여자는 손에 든 등불을 치켜들며 밖을 비춰준다. 집안으로 들어선 키 큰 사내는 젊은 여자에게 묻는다.

"애비 왔냐?"

"아뇨. 기별만 왔어요."

점박이사내와는 이미 구면인 듯 친숙한 표정을 지었으나 금녀에게 눈길을 보낸 여자는 누구냐고 묻듯 키 큰 사내를 쳐다본다. 집 외모에 비해 꽤 넓은 온돌방으로 금녀는 사내들을 따라 들어갔다. 자자부레한 세간이 놓여 있는 방, 그러나 그 세간들은 일상을 위한 청빈한 비품이었을 뿐 생활이 어렵다는 것은 역력했고 방 아랫목에는 젖먹이 아이가 잠들어 있었다.

"앉으세요. 누추합니다."

여자는 금녀에게 공손스럽게 말했다. 나이는 스물넷쯤 됐을까? 금녀보다는 적어도 네댓은 위인 듯싶고 차림새는 초라하다. 용모도 아름답다 할 수는 없으나 눈빛이 맑고 총명해 보였으며 단정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두 사내는 자리에 앉은 후에는 무뚝뚝해진 얼굴을 마주볼 뿐이었다. 키 큰 사내는 김두수에게 체포되어 총살된 의병장 박모의 동생이며 정호의 삼촌 박재연인데 용정 골목에서 김두수와 마주쳤을 그때처럼 옷차림은 남루하지가 않았다. 여자는 송장환이 짝사랑했었다가 청혼까지 한 일이 있는 정호의 누님 정순이, 그러니까 박재연의 조카딸이다. 남폿불을 받고 앉아 있는 점박이 사내는 장인걸, 지금은 그 병신스러웠던 얼굴, 천하태평인 듯한 표정은 말끔히 가셔지고 다부진 일면만 남아서 얼굴의 윤곽이 뚜렷했고 준열한 감을 준다. 왼편 귀 근처로 해서 입술 가까이까지 퍼져 있는 반점도 음영 같아서 오히려 어떤 우수를 자아낸다. 이들은 용정에서 우연히 김두수를 보았고 김두수가 훈춘으로 가는 것을 알아낸 후 박재연은 한발 먼저 훈춘에 와서 대기하고 있었으며 장인걸은 김두수를 따른 것이다. 물론 이들은 일을 위한 동지요, 이들은 용정행이 김두수를 잡자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금녀를 끌고 오기는 왔으되 이미 큰 기대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눈치는 아니었다.

"저녁은..."

정순은 물었다.

"안 먹었다."

박재연은 입맛이 쓰다는 듯 눈길을 돌린다.

"시장하시겠어요. 그럼 잠시만..."

정순은 방문을 열고 나간다. 금녀는 꾸어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을 수밖에, 때론 낯가림하는 아이처럼 눈을 깜박거리기도 하고, 그러나 그는 앉은자리가 몹시 편하다는 생각을 한다. 염치없이 졸음까지 오는 것이다. 한참 만에 장인걸이 고개를 들고 물끄러미 금녀를 건너다본다.

"고향이 어디시오?"

느닷없이 물었다.

"?"

금녀는 졸음을 떨어버리듯 고개를 흔든다.

"고향이 어디시오?"

"저어 청진..."

"그러면은 댁의 남편, 그자의 고향은 어디지요?"

"남편 아닙니다!"

장인걸이 피익 웃는다. 금녀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다.

"아무 인연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말할 테지요. 그렇다 하고 고향은 알 거 아니오?"

"경상도라 하더군요."

"경상도라,"

박재연이 힐끔 눈을 들어 금녀를 본다.

"한데 그자가 댁을 찾으러 오리라 생각하지오?"

"아마,"

"댁은 찾아오는 걸 기다리시오?"

"아니오. , 전 도망쳤다가 붙잡혀가는 길이었어요."

"설마,"

"저어, 용정의 요, 용정에 가셔서 상의학교 선생 윤이병이라는 사람한테 물어보심 아, 아실 거예요."

금녀는 엉겁결에 말했다. 그러고 보니 달리 자신에 대해 증명할 길이 없었다. 오는 동안에는 그러했고 이 집안에 들어와서도 그러했던 금녀의 얼빠진 것같이 안심스러워 뵈던 얼굴에 처음으로 격렬한 분노가 떠오른다.

"상의학교? 그건 송병문 씨가 경영하는 학굔데."

박재연의 말이었다.

", 저는 잘 모르겠어요. 윤이병이라는 사람한테 도망갔다가, , 숨어 있다가 저어..."

얼굴이 분노로 긴장된 것과는 반대로 말은 허둥지둥이다. 자기의 처지를 설명해야겠다는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무딘 다리로 민첩하게 뛰려고 몸부림치는 거 같은, 그런 혼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사내들은 더 이상 금녀 말에 관심을 기울이려 하질 않는다.

"상의학교라... 송장환.."

박재연은 별안간 껄껄 웃는다.

"왜 그러지?"

장인걸이 의아해서 묻는다.

"사연이 좀 있어서. 그 일이 생각나 웃는 것세. 송병문 씨 둘째아들을 송장환이라 하는데 거 착실한 청년이야."

혼자말처럼, 그러고는 더 이상 설명은 않는다. 그것으로써 금녀는 다시 잊혀진 존재로 오두마니 남겨지고 사내들은 제각기 생각에 빠지는 듯 말이 없다. 이윽고 저녁상이 들어온다.

"안손님은 방이 누추하지만 저쪽에다 차렸는데요."

정순은 면구스러워하는 얼굴로 금녀에게 말했다.

"그럴 것 없다. 내외도 옛날얘기, 마우제놈 땅에 살면서 무슨,"

박재연은 혀를 찼다. 정순은 급히 나가 다른 방에 차려놨다는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드세요."

"."

금녀는 행동거지에 자유를 느끼며 사양 않고 밥숟갈을 든다. 무안하고 생소하고 어쩌고 그런 것을 금녀는 느낄 겨를이 없었다. 우선 배가 고팠고 또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낄 만큼 그는 일체의 대결 의식에서 놓여나 있었다.

"정순아."

"."

금녀 때문에 엉거추춤 서 있는 조카딸을 불러놓고 박재연은 장난스럽게 웃는다.

"너 아무래도 잘못된 것 같다."

"무슨 말씀이신지,"

"송씨댁에 시집을 갔었더라면 이 고생은 아니 할 걸, 안 그러냐?"

"작은아버님도,"

정순은 몹시 난처했던지 얼굴을 붉힌다. 그러고는 얼른 나가버린다. 이날 밤 금녀는 아기를 안고 온 정순이와 함께 고리짝 궤짝이 놓인 조그만한 방에서 잠을 잤다. 버릇이 그러했는지 한방에 자리를 깐 낯선 안손님에 대해 정순은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상을 받았을 때 금녀는 두 사내가 말도 없이 떠난 것을 알았다. 정순이는 각별한 친절을 베풀지는 않았으나 사람됨이 은근하여 금녀는 외갓집에라도 와서 묵는 듯 마음이 평온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이삼 일 동안이었고 정순이 빌려주는 모시적삼으로 갈아입고 땀에 젖은 제 모시적삼을 벗어서 비누질을 하고 빠는데 금녀는 별안간 손끝에서부터 형용할 수 없을이만큼 무서운 고독이 뻗쳐오르는 것을 느낀다.

'내가 왜 여까지 와 있는 걸까? 난 뭐야? 옳지! 난 술집에 팔려 갔었던 계집이었지. 술집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

금녀는 저도 모르게 비눗물 묻은 손으로 쪽머리를 만져본다. 그러고 나서 일손을 놓고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본다. 집안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드려온다.

'김두수놈이 날 채갔다. 김두수놈하고도 아무 일이 없었다. 윤이병이...'

'윤이병이, 그 사람이 나를 잡아먹었다. 아니야 아니야.'

하늘이 흐르는 구름으로부터 눈길을 거둔 금녀는 그늘진 뒤안, 습기가 습습하게 풍겨오는 땅바닥을 내려다본다.

'이미 난 글렸다. 술집 계집... 밀정놈 김두수 여편네...'

금녀는 다시 적삼을 빨기 시작한다. 새까맣게 지워버렸던 불과 일 년이 못 되는 세월이 빛깔을 띠며 마음속에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아픔으로, 오욕으로. 적삼을 빨랫줄에 널어놓고 금녀는 정순에게는 아무말도 없이 바닷가로 나간다. 갑자기 정순이 거북하게 느껴졌고 조그마한 오두막집이 생소하게 느껴진 것이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삭막하기 그지없는 마을이다. 사오십 호 가량의 볼품없는 오두막들이 모여 있는 마을에는 대개가 고깃배를 타거나 노동에 종사하는 하루살이 인생들이 등을 비비고 사는데 포염시 뒤켠 언덕을 하나 넘은 곳에 소위 카레스카야 스라브도카라 불리는, 수천명의 조선 이민들이 살고 있는 그 부락과도 별로 내왕이 없는 빈한하고 외로운 마을, 금녀는 무릎을 세우고 세운 무릎을 두 팔로 끌어안으며 바다를 바라본다.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얼마나 큰 약점인가. 절망에서의 탈출 뒤에 온 희열이란 또 얼마나 서글픈 찰나인가. 희망이 일렁이는 금녀 가슴에는 뜻하지 않았던 조바심이 아프게 바다의 파도가 방천을 치듯 쉴새없이 밀려오고 있는 것이다. 빼앗길 그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겐 불안이 없다. 지금 금녀가 가져보는 앞으로의 자기 운명에 대한 기대와 흥미가 과연 희망적인 것인지 그 어떤 실마리도 잡아보지 못한 채 방향도 알지 못한 채 악몽 속에 허덕여온 여자는 희망 그 자체를 겁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천만금을 가졌어도 높은 베개에 깊숙이 잠드는 사람이 허다하거늘 때 묻은 염낭 속의 찌그러진 구리돈 한 푼을 갖고 잠 못 이루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지금 금녀와 같은 처지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금녀에게는 절망 그 자체가 삶이었었는지 모른다. 순간 불꽃 튀기듯 뻗치어온 절망과의 대결, 그 긴박한 찰나가 삶의 증거였었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서러움이나 근심이나 불안은 절망의 덫으로부터 빠져나온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다를 바라보고 앉은 금녀는 목구멍까지 꾸역꾸역 치밀어오르는 오열을 참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살아야 해?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수없이 자신에게 되풀이 물어보는 것이지만 검푸른 바다처럼 막막할 뿐이다. 술 없이는 살 수 없는 늙은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겁에 질렸던 윤이병의 모습도 떠오른다. 그들에 대한 원망스러움이 싹트기 시작한다. 심화병으로 죽은 어머니와 눈먼 망아지처럼 아버지 곁에 있을 어린 사내동생이 생각난다. 한곳으로 똘똘 뭉쳐졌던 증오심이 그 대상을 잃자 풀리어나면서 그와의 성질이 다른 미움과 사랑이 금녀 가슴에 젖어든다. 금녀가 바닷가에 앉아서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있을 때 장인걸이 정순의 집에 나타났다.

"그 여자 있지요?"

장인걸이 낮은 음성으로 정순에게 물었다.

"아까, 바닷가에 나간 모양이에요."

바닷가에 나갔다 해도 도망가지 않을 것을 확신하는지 장인걸은 놀라지 않는다.

"데려오기는 왔는데 처치곤란이구먼."

혼자말처럼, 그리고 금녀를 찾을 양인지 발길을 돌린다. '이상한 여자다. 도대체 어떤 신분의 여자일까?' 무관심한 척했으나 장인걸은 금녀를 데리고 오는 도중에도 늘 그 생각을 했었다. 용모가 아름답다거나 그렇지 못하다거나 그런 점에선 별 흥미가 없지만 머리를 올린 것을 봐서는 분명 처녀는 아닐 터인데, 그런데 어쩐지 아낙으론 보이지 않았고 교육을 받은 것 같은데 그렇다고 양가집 소생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저기 앉아 있구먼.' 장인걸은 웅크리고 앉아 있는 금녀 가까이 다가간다.

"여보시오."

돌아본다. 얼굴이 온통 눈물에 젖어 있다. 묵묵히 그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던 장인걸이

"놓아드릴 테니 가시려오?"

뜻밖의 말을 한다.

"? 저를 말이에요?"

"그렇소."

금녀의 입술이 파들파들 떤다.

", 갈 곳이 없는걸요."

"그러면은?"

어쩌겠냐는 것이다.

"가면 붙잡힐 거예요. 틀림없이 붙잡힐 거예요."

"그자한테 말이오?"

"."

장인걸은 멀찌감치 엉덩이를 내려놓고 앉는다. 담배를 붙여물고 나서

"도대체 그자와는 어떤 관계요?"

"팔려갔지요. , 팔려간 거예요."

"팔려가다니?"

눈살을 찌푸린다. 양미간이 솟으면서 표정이 살벌해진다.

"하긴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하지요. 헌데 말씨로 보아 글을 배웠소?"

"."

"어디서?"

"예배당에 다니면서 거기 학교에 다녔어요."

"그럼 언문은 다 알겠구먼요."

"한문도 조금은,"

"올해 몇이시오?"

"스물한 살입니다."

오랫동안 침묵이 계속되고 장인걸은 담배만 피운다.

"그자가 밀정놈이 것을, 아니 헌병 보조원을 지냈다는 것을 알았었소?"

"밀정이라는 정도는, 늘 장사한다고 했었지만요."

"아무 물정 모르는 여인네라면 몰라도 교육까지 받은 사람이 어찌 그리 무모한 처사에 순종하였소?"

"집이 망한 탓이었어요. 차음엔 술집에, 술집에는 잠시였었지만,"

하다 말고 금녀는 두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운다.

"하기는 사람마다 사정이 다를 테지요."

장인걸의 목소리는 한결 부드럽고 약해져 있었다.

"사람마다,"

장임걸은 다시 중얼거리다가 푸르스름한 얼굴의 반점을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멀리 먼 곳, 바다끝으로 시선을 던진다. 눈에 눈물같은 것이 어리다가 별안간 일어선다.

"들어갑시다. 댁의 처신에 대해선 우리도 책임이 있는 듯하니 생각해보기로 하구요."

그러다니 발길을 돌린다. 금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씻으며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 휘적휘적 걷는데 남자가 한 말에 매달릴 수 없는 강한 자비 의식이 눈앞을 캄캄하게 한다.

"그 그러면 절 보내주시겠어요!"

금녀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 전 술집 여자였단 말예요!"

금녀는 시비라도 거는 듯 장인걸을 노려본다.

"그래서요?"

금녀는 깜짝 놀란다. 그리고 다음, 얼굴이 홍당무가 된다. 참말이지 그래서 어쨌다는 갠가. 그게 이 남자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장인걸은 다시걷기 시작한다.

"그놈을 잡아죽일 때까지, 그럼 기다려보슈. 고생스럽겠지만 연추로 가면 혹 댁이 할 만한 일거리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

"하여간에 내일 연추로 떠나는 게 좋을 듯싶소."

"...."

"앞날이 창창한 사람이, 글도 배웠다는 사람이 남한테 팔려가는 일이 있어도 안 되겠지만 술집에 있었다고, 무슨 벼슬을 한 것도 아닐 테인데 술집 여자란 말이에요! 하고 큰소리칠 것도 아니오."

장인걸은 금녀의 말투를 흉내내어놓고 웃는다. 금녀는 가슴이 뭉클하게 고마운 생각이 들었지만 착찹한 얼굴 표정은 펴지지가 않는다. 정순이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장인걸은 이튿날 아침 금녀를 데리고 연추를 향해 떠났다. 그들이 떠난 뒤 김두수는 포염시에 잠입해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끄나풀인 전당포 주인 양서방을 찾아갔다.

", 오랫간만이오."

양서방이란 유들유들하게 살이 찐, 사십 가까이나 된 사내였다. 사실은 김두수의 끄나풀이라기보다 일본 영사관에서 심어놓은 앞잡이다.

"이번엔 무슨 일로 오셨소."

비록 나이는 훨씬 처지는 김두수였으나 일본 경찰과 영사관의 신임이 두텁고 민활한 일꾼으로 인정받아온 터이어서 양서방도 김두수에겐 저자세다.

"혹 아실지는 모르겠소만,"

"무슨 일인데요?"

"얼굴에 이렇게,"

김두수는 자기 얼굴에 귀밑으로부터 입술 가까이까지 손으로 가리켜 보이며

"푸르스름한 점이 박힌 사내를 아는지? 나인 서른을 좀 넘었을까?"

"귀밑으로부터 푸르스름한 점이 박힌 사내라구요?"

"키는 중키보다 좀더 될까?"

"생각이 안 나는데..."

"그럼 수소문이라도 좀 해보슈."

"여기 사는 사람이오?"

"그건 모르겠고 하여간에 여기까지 온 것만은 틀림이 없으니까."

"그런데 무슨 일로?"

"놈이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것도 그렇거니와 내 여편내를 달고 갔으니,"

양서방은 의아한 듯 쳐다본다.

"마 그런 내막이야 차차로 얘기하기로 하고 나는 마음대로 나다닐 수 없는 처지라 양서방이 한번 잘 알아보슈. 제에기! 재수가 없으려니,"

김두수는 마치 자기 안방에나 온 듯 자리에 벌렁 나자빠진다. 그리고는 이내 코를 골기 시작한다.

'돼지 같은 놈.'

양서방은 노상 나이 대접을 안 해주고 떵떵거리는 김두수에게 유감이 많다. 그러나 하라는 일은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허술하게 차려놓은 전당포보다 그런 일거리가 그에게는 생계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저녁때 밖에서 돌아온 양서방은 그때까지 코를 골며 자고 있는 김두수를 흔들어 깨운다. 부스스 일어나 앉은 김두수는 눈을 비비며

"무슨 소식이라도 들었소?"

"글세, 듣기는 좀 들었는데, 이름도 성도 모르고..."

양서방은 감질나게 말했다.

"이름도 성도 모른다면 그럼 뭘 들었다는 게요."

김두수는 역증을 낸다.

"글세, 그게,"

"하여간에 지금 이곳에 있긴 있다는 게요?"

"연추로 떠났다는구먼."

"뭐라구요?"

펄쩍 뛴다.

"이곳에 사는 사람이면 내가 환희 다 아는 터이지만, 여기저기 수소문해봐도 알 재간이 있어야지요. 그것도 눈치껏 해야 하니까."

"그럼 연추로 갔다는 건 어떻게 알았소."

"그것도 확실치는 않고 역두에 나가서 지게꾼한테 물어봤구먼. 혹 얼굴에 푸르스름한 점이 있는 사내를 본 일이 있느냐고 했더니 아침에 연추 가는 마차를 타는 것을 봤다는 게고 여자를 데리고 가더라는 게요."

", 그럼 틀림없구먼."

김두수는 혀를 찬다.

 

 

5. 임이네 작전

"이 사람아, 서둘 것 없네. 찬은 없지만 저녁이나 먹고 가게."

", 저어..."

종호 모친 신씨의 만류도 그렇고 방학이 시작되면서부터 만날 수 없게 된 정호를 모처럼 만나 앞뒤를 쏘다니며 좋아서 어쩔줄 몰라하는 홍이를 갈라낼 수도 없어 월선은 엉거주춤하다.

"너무 폐스러버서,"

"별말을 다 하는구먼. 그새 김생원께서 돌아오실지도 모르잖나."

"그러세요..."

"그 어른이 딱해서 그러는 게야. 자네라도 찾아온 걸 보시면 한결 위안이 될 게 아닌가."

". 다 저희들 생각이 모자라서..."

"아닐세. 남남끼리 그만할 수도 없지. 그러면 여기 앉아 쉬고 있게."

""

서편에서 뻗어온 햇볕이 오지항아리를 자글자글 태우고 있었다. 열기 실은, 아니 뜨거운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온다. 나뭇잎도 치덕치덕 물기를 머금고 흐느적거린다. 뒤꼍에서 웃는 흥이 웃음소리, 지껄여대는 정호 목소리. 아이들은 여름 햇빛이 오히려 즐거운 모양이다.

'홍이아배는 와 아직도 안 오까? 설마 무신 일이 있는 거는 아니겄지. 우찌 날도 이렇기 긴지 모르겄다. 절에나 한분 가봤이믄...'

칠월 백중날 절에 못 간 생각을 한다. 지난 초봄 절을 짓는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해는 죽은 어미를 위해 백중날엔 동참하리니 월선은 마음먹었었다. '사는 기이 멋인지, 불났다는 거는 핑계 아닌가. 내 정성이 없어 그랬겄지.' 부모 기일이면 월선은 자기와 임이네를 귀밑머리 마주 푼 계집이 아니라 하여 참여하는 것을 엄격하게 막아버리던 용이를 생각한다. 모든 것을 용이 스스로 외아들 홍이와 함께 진행시키던 제삿날의 행사, 그것은 떳떳하고 도도했으며 월선이뿐만 아니라 임이네도 고독하고 씁쓸한 날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월선은 아무도 몰래 숨어서 혼백을 부르며 메상을 올리던 어미 기일은 간장이 찢겨져 나가는 것 같은 서러운 날이었고 해서 백중에는 절에 가려니, 흠씬 울고 망령의 천도를 손발이 닳도록 빌려 했었는데.

'어매, 우찌 아들자석 하나 못 두었소. 살아생전보다 어매 죽은 뒤가 더 서럽소. 무배믄 우떻고 사당이믄, 백정이믄 우떻소. 서러운 사람끼리 만나서 아들딸 낳아서, 와 그리 못 살았소. 참말로 차생이 없다믄 땅속에 누운 어맨들 우찌 한을 풀 것이며 낸들 우찌 눈을 감고 죽을 수 있겄소. 서럽게 나서 서럽게 살다가 서럽게 죽어야 하는 우리네들 신세가... 어매, 우찌 아니 서럽다 하겄소?' 월선은 강가를 향해 뛰어가는 두 아이의 모습을 바라본다. 아이들의 모습은 차츰 작아져서 콩알만큼 되고 녹두알만큼 되고 그런 뒤 없어져버렸다. 강둑 가까이 나무 한 그루만이 우두커니 싱겁게 서 있다.

그늘진 나무 밑에 깔아놓은 멍석에서 호박잎 찐 것, 열무김치, 된장국, 맛깔스러운 찬에 조밥으로 저녁을 끝냈을 때 해는 넘어갔다. 멀리 보이는 육도천 냇물은 비 오신 뒤의 흙탕물처럼 뿌엏고 불그리하게 노을을 반사하고 있었다.

"모두가 다 고생이네."

멍석 위에 그릇들을 함지박에 옮겨놓으며 신씨는 혼잣말처럼 뇌었다. 그릇을 옮겨놓을 때마다 풀발이 서고 악센 삼베치마에서 서걱서걱 천이 부딪는 소리가 들린다. 허리도 굵고 손목도 굵고, 햇볕에 그을러 구릿빛 나는 신씨 얼굴에 땀이 흘러내린다.

"고생이사 머... 고생을 낙으로 삼고 살 수도 있겄지마는,"

손등으로 땀을 훔치는 월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신씨

"자네도 입이 없는 여잘세."

하고 빙긋이 웃는다. 과묵하기론 신씨도 마찬가지, 월선의 처지를 소상하게 알고 있는 신씨는 측은한 마음에서 위로의 말을 하고 싶었겠지만 그러나 천성이 그렇지도 하려니와 사대부집 여인으로 감정의 억제가 일상이었으니 얄싹한 말돌림을 삼가는 것이겠는데, 그러나 자네도 입이 없는 여잘세, 한 말에는 고통에 순종하는 착한 마음을 칭찬하고 아울러 나도 말을 못하나 자네 슬픔은 알고 있네, 하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여벌의 소반 하나가 없는 가난한 살림살이. 함지박에 담아와서 멍석에 폈던 음식 그릇을 도로 함지박에 담으니 정호가 얼른 그것을 들고 부엌으로 간다. 홍이도 덩달아서 멍석 위에 남은 빈 그릇을 거둬들고 정호 뒤를 따라 부엌으로 쫓아간다.

'이상타? 울 옴마는 사내자식이 부석에 들어오믄 못씬다 카더마는, 정호는 나보다 공부도 잘하고 양반이라 카는데 와 부석에 들어갈꼬?'

이상하다는 생각은 이내 잊어버린다. 홍이는 어둡기 전에 정호와 밖에 나가 한바탕 더 놀고 싶어 좀이 쑤신다.

"잘 묵었십니다. 그라믄 날도 저물고 생원님께서도 안 오시니."

갈 채비를 차리듯 월선이 일어선다.

"갈려고?"

". 저어 노마님께,"

"그냥 가게. 지금 잠이 드신 모양이야."

"홍아! 홍아."

뒤꼍에서 홍이 달려나온다.

"옴마야. 갈라꼬?"

","

"벌써?"

"벌써라니? 해가 졌다. 어둡어오는데,"

"그놈 참, 눈이 샛별 같구나."

신씨는 새삼스럽게 홍이를 찬찬히 뜯어본다. 씨가 따로 없다더니, 하며 감탄하는 표정이다. 월선의 입이 절로 벌어진다. 자랑스러움이 염치없이 얼굴 가득히 퍼진다.

"얼굴값을 못하고 행사는 개차반입니다."

"사내자식이 그래야지, 얌전만 해서 어디 쓸려고."

신씨는 몇 걸음 따라나오며 월선의 작별 인사를 받는다.

"또 오게,"

"."

월선은 홍이 손목을 잡고 걸음을 빨리한다.

"홍아아--"

홍이 돌아본다. 저만큼 정호의 손을 흔들어주는 모습이 보인다.

"또오 놀러 와라아--"

"그래애--"

대답하며 월선의 손을 뿌리치고 홍이는 팔랑개비처럼 몸을 빙글빙글 돌린다. 기분이 좋을 때 버릇이다.

"넘어지겄네."

"안 넘어진다아."

"어서 가자. 저물겄구나."

여광이 자취를 감추면서 정호네 초가삼간도 저녁 안개 속에 멀어진다.

"저기 또랑이다."

월선은 아이 손목을 잡으며 실개천을 건너뛴다. 핏줄이 닿지 않는 모자는 타박타박, 말없이 걷는다. 도랑가 풀섶에 숨은 개구리가 운다.

"옴마."

"."

"아부지는 와 안 오노."

"보고 접나?"

"."

"언제는 아부지가 무섭다 카더마는?"

"아부지가 성을 내믄... 그때 그만 나도 따라갈 거로 그랬다."

"핵교는 우짜고?"

"그런께 안 따라갔지 머."

"따라갔이믄, 벌써 한 달이 헐껀 넘었는데 옴마 보고 저버서 울었일 거 아니가."

홍이는 히힝 하고 웃다가 코를 들이마신다.

"홍아."

"?"

"니 아부지 따라갔이믄 옴마 보고 저버서 울었겄제?"

"사내자식이 울어?"

"그라믄 옴마 떨어져도 아 보고 접다 그 말이가?"

"울지는 안 해도..."

아직 보드라운 아이의 손을, 꼬무락거리는 손을 손아귀 속에 느끼며 월선은 위태, 위태롭게 이어온 모자지간의 정을 생각한다. 얼핏 보기는 개구쟁이요 응석받이 같지만 한 가지, 다른 아이들 보다 홍이에게 예민하고 조숙한 면이 있는 것을 월선은 느낀다. 생모 임이네와 자기 사이에서 양켠의 심중을 재빠르게 헤아리고 적당히 안개를 피울 줄 아는 홍이를 임이네보다 월선이 더 잘 알고 있었 다. 사실 홍이에게는 월선이나 임이네의 애정이 늘 불안한 것이다. 집안에서 소동이 벌어질 때마다 임이네는 홍이를 점령했고 방어의 성곽을 삼았고 월선은 공포에 떨며 바라보았던 것이다. 홍이는 어쩔 수 없이 피가 부르는 그 인력 때문에 생모한테 가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싸움도 없이 또 전의조차 없었던 월선은 성곽을 향해 백기를 흔들어야 하는데 홍이는 그것을 보는 일이 민망하였고 슬펐다. 아비가 보고 싶다 한 것도 두 편의 불안스런 애정의 틈바구니서 불안해지는 때문이며 할머니 할아버지 제삿날에만 겨우 부자지간의 정을 표시했을 뿐인, 평소에 냉정했던 아비가 실상 홍이 마음속에서는 든든한 기둥이었던 것이다.

"옴마."

","

"정호가 그러는데 말이다, 정호형님은 삼촌이 데리갔다 카더라."

"삼촌이니까 데려갔겄지."

"그런데 말이다. 그기이 양코배기가 사는, 뭐라 카더라? 아아 마우제 땅이라 카든다? 거기로 데리고 갔대. 마차를 타고 한참 동안 가는 곳이래."

"그 멀리꺼지?"

별안간 홍이는 신중해지는 것 같더니 갈음을 멈추고 발돋움하듯, 그리고 목소리를 낮춘다.

"옴마, 정호삼촌은 독립운동하는 사람이래. 정호형님도 독립운동하로 갔다 카더라."

"머라꼬?"

월선은 움찔한다.

"강에서 헴질함서 말이다. 정호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라 캄서나 보고만 살짝 말해주는데 옴마도 남보고 말하믄 안 된다?"

"운냐. 말 안 하께."

"정호아부지는 말이다. 왜놈한테 붙잡히소 총 맞고 죽었대, 그래서 정호도 좀더 크믄 독립운동하로 나갈 기라 캄시로 나보고도 어른이 되믄 독립운동하로 나가자 안 카나? 그래서 우리는 헴질하다가 새끼손가락을 걸고 맹세를 했다."

"머라꼬?"

"두만강에 얼음이 얼믄 말이다. 우리 독립군 아저씨들은 총을 메고 말을 타고 왜놈을 쳐들어간다 카는데, 옴마 참 신나겄제? 나도 크믄 총 메고 말 타고,"

"큰일날 소리!"

아슴한 어둠에 하얗게 떠오른 아이 얼굴을 월선은 노려본다. 그 강한 기세에 홍이 머쓱해진다.

"니 저분때도 일을 저질러서 큰일날 뻔 안 했나!"

"그거사 머,"

"그때도 길상이아제랑 선생님이랑 아니었으믄 우찌 될 뻔했제? 니는 영사관에서 맞아죽었을 기다!"

일부러 겁을 준다.

"그래도 머 선생님은 야단 안 치던데? 옴마만 그러지, 선생님은 늘 말했는데 머, 왜놈은 우리 원수놈이라꼬. 그러이 왜놈으 핵교 댕기는 조선놈으 새끼 다 직이야 한다꼬,"

"그래 선생님이 그러시더나!"

"그거사 머 다른 아아들이 그랬지마는 선생님도 독립,"

"듣기 싫다! 눈먼 말이 요령 소리만 듣고 가더라고 니가 머를 아노."

하다가 월선은 홍이 손목을 다시 잡고 걷기 시작한다. 큰길로 나섰을 때 마차 한 대가 지나갔다. 불빛과 그리고 길섶에서 우는 풀벌레 소리, 풀 내음새.

"그런 일이사 양반들이나 유식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제. 우리네 겉은 상사람은 그저 일이나 꿍꿍 하고, 그 양반들이사 나라 은덕도 많이 입었고 벼슬자리도 살았고 영화도 누›이니... 자손만대꺼지 백정은 백정으로 살아야 하고 무당은 무당으로 살아야 하고 노비는 노비로 살아야 하는데 어느 세상이라고... 무신 좋은 일이 있일 기든고? 상놈들이 해서 되는 일 하나 없었고, 떼죽음당한 것 밖에는 머가 있었노."

"그래도 옴마, 학교서 그러는데 홍장군은 포수라 카더라."

"하기사 윤보목수 겉은 사람도 있긴 있었다마는..."

월선은 휘적휘적 걸으며 지난날의 그 쓰라렸던 기억을 더듬는다. 야밤에 최참판댁을 습격하고 마을을 떠난 그 숱한 장정들, 지리산에 있다고도 했고 순창에서 떼죽음당했다고도 했고 덕유산으로 몰렸다고도 했고 그 분분한 소문 속에 한겨울 늦은 봄까지 어느 하룻밤인들 스산한 꿈 없이 지낸 일이 있었던가. 한 가지 솔잎에다 희망을 걸고 한 개의 조약돌에도 기원을 걸고 나뭇배 장배가 드나드는 나루터에서 기적의 소식을 기다리며 겨울바람보다 맵고 아팠던, 실날 같은 희망, 김훈장은 이르기를 의병은 이 나라의 얼이요 꽃이라, 그러나 얼이요 꽃인 그네들 대부분은 황량한 산천의 객귀가 되었고 장정들을 이끌고 분투한 윤보도 골짜기에 피를 뿌리며 숨졌다 하지 않던가.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 김훈장과 영팔이와 용이, 그리고 길상이 이역 수천리 남의 땅에서 지금 구차스런 명을 잇고 있는 것이다.

"옴마, 나 잠온다."

"온종일 뛰고 솟고 놀았인께 잠도 올 기다."

볼멘 소리다.

"잠이 와서 못 걷겠다."

"업어돌라 그 말이가?"

"."

"청 메고 말 타고 왜놈은 쳐들어갈 기라 카더마는 그런 생각 함시로 업어돌라꼬?"

월선은 엎드리며 등을 내민다.

"치이. 잠이 오느데 머."

얼마 가지 않아 홍이는 등에 머리를 박고 잠이 들었다. '언제 이리 컸는고 모르겠네. 제법 묵직하구나. 이자 한 칠판 년만 있으믄, 칠팔 년만... 그라믄 헌헌장부가 안되겄나.' 가냘픈 두 어깨에는 아이 무게가 겨웁다. 그러나 무게만큼이나 월선의 기쁨은 크다. '어디서 이눔자식 짝이 있는지 모르겠네. 배필은 천상에서 맺어주는 기라 카더마는 우리 홍이 짝이라믄 월궁의 선녀 같아야지. 천지간에 다 봐도 우리 홍이겉이 잘 생긴 아이는 없더라. 없고말고. 이만한 나이믄 한창 밉어질 땐데, 모두 솔밤싱이맨치로 밉어질 땐데.' 마음속으로 중얼중얼 중얼거리며 혼자 웃는다. 아이의 무게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미래의 찬란한 오색 무지개의 꿈은 더욱더 넓게 깃털을 펴서 걸음은 가벼워지고 월선은 갈길이 먼 것을 잊어버린다. 용정 움막집 앞에 당도했을 때 밤은 꽤 저물었고 길켠에는 부채를 들고 아낙들이 나앉아 바람을 쐬고 있었다.

"홍이어망이. 어디 갔다 저물기 옵매까?"

"야아, ..."

"다 큰 아아르 업고 오당이, 무시기, 그리 키워 되겠습매?"

아낙 한 사람이 말을 걸었다.

"잠이 들어서..."

월선은 남톳불이 새나오는 움막 출입처에 늘어뜨린 거적자락을 걷고 아이 업은 등을 구부리며 안으로 들어간다.

"...?"

남톳불울 등지고 임이네가 앉아 있었다. 흡사 돌부처로 변한 것처럼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도 미동을 않는다.

"자식이 우찌나 무겁든지 이자는 못 업고 댕기겄네."

중얼거리며 삿자리 위에 내려 뉘고 베개를 끌어당겨 머리 밑에 받쳐준다. 아이는 입맛을 다시다가 모로 돌아눕고, 그리고는 새끈새끈 고른 숨소리를 낸다. 임이네는 여전히 미동도 않느다. 월선은 무슨 일이 있었구나 싶었지만 이웃 아낙들과 돈 거래 때문에 싸웠거니

"무슨 일이 있었나?"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잡아먹을 듯 소리를 버럭 지른다. 남톳불을 등져서 얼굴에는 그늘이 졌는데도 눈이 번쩍번쩍 빛난다.

"와 그라는고?"

월선은 바보스럽게 되묻는다.

"와 그라다니!"

성님, 성님 하던 그 존댓말은 고사하고 손아래, 마치 집에서 부리는 종을 대하듯 표변한 임이네 언동에 월선은 어안이 벙벙해진다. 어차피 최참판네 서희가 허락지 않은 일이라면 임이네가 무슨 재주를 넘어도 월선이를 따라 국밥집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물론 그것은 임이네가 공서방으로부터 말을 듣는 순간 알아차린 것이다. 그리고 또 월선의 어리둥절해하는 얼굴을 보아 월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쯤 능히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치를 떨며 덮쳐들 듯이 사납게 나오는 것은 월선이말고 달리 분노를 터뜨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월선이야 억울하건 말건 헤아릴 여자도 아니겠지만 국밥집 때문에 빌붙어온 세월이고 보면 국밥집의 활용 가치가 사라진 지금 월선을 어떻든 숙명적인 자신의 적수로 간주할 수밖에 없느 임이네는 그런 여자다.

"이 수천년 묵은 백여시 겉은 년!"

", 아니 뭐라 캤제?"

월선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천년 묵은 백여시 겉은 년이라 했다! 했으니 우떻다는 것꼬! , 나는 니한테 년자 붙이지 못할 사람으로 알았더나?"

", 아닌 밤중에 홍두께도 유분수지 무, 무신 영문이제?"

월선은 허둥지둥 일어섰다가 삿자리 위에 주질러앉곤 한다.

"뭣이 어쩌고 어쩨? 김훈장한테 문안드리로 간다꼬? 그놈의 삼촌인지 공간지하고 자알 짰다, 자알 짰어! 한 년은 슬쩍 피하고 늙은 구렝이 겉은 게, 뭐 어쩌고 어째? 우리 모자한테 객줏집 방 하나 비워주겄다고? , ! 심보가 먹빛이다. 겉으로 숫되고 어진 척함서 속에 수년 묵은 땟국이 흐르고 있는 네년이다!"

"사람 참 기차네. , 무신 일이 우찌 됐는지 알기나, , 알기나 알아야,"

"어멍떨어도 그걸 모를 내가 아니구마. , 쓴물 단물 다아 빨아묵고, 쓴물 단물 다아 빨아먹고 오! 이자는 소앵이 없어졌다아, 그 말이제? 그 말이제?"

임이네는 펄쩍 일어선다. 월선에게 덤벼들어 칠 기세다.

"하하핫핫... 서천 쇠가 웃일 기다! 순순히 물러나갈 내가 아닌께. 몰작하게 볼 사람이 따로 있지."

월선이는 민적민적 뒤로 물러나 앉으며 새파랗게 질린 채 입술을 떤다.

"머슴이 삼 년을 남의 집에 살믄 새경이 얼맨 줄 아나?"

통통하게 살찐 팔뚝을 휘두르며 삿대질이다.

"그냥은 안 나간다아! 안 나가야! 산도 설고 물도 선 이 되놈으 땅에까지 와서 내 손발 잦아지게 종질했다! 새경을 내놓으란 말이다! 새경을! 못 내놓겄나? 이 순 백여시 같은 년! 어림도 없다! 서방 뺏고 자식 뺏고 나를 종겉이 부리묵더마는 이자는 갈데올데 없는 나를 떼어버리겄다 그 말이제? 어디 간대로 되는가, 허어 간대로는 안 될 기다! 천하없이도 안 될 기다! 내 눈에 이렇게 피눈물을 나게 하고 네년이 따신 방에 발 뻗고 잠잘 줄 알았더나?"

청산유수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만 목도 쉬지 않는다. 놀라 잠이 깬 홍이 한구석에 처박히듯 하고 앉아서 까만 눈을 굴리며 두 사람의 어미를 번갈아 본다.

", 아무래도 이, 이거 미쳤는갑다."

"오냐! 미쳤다. 환장 안 하고 우찌 사램이 살겄노! 어린 자식 데리고,"

다짜고짜 경위 설명이 없다. 경위 설명을 못하는 게 아니고 안 하는 거다. 경위 설명을 해버린다면 욕설을 퍼부을 구실이 없어지는 것이고 아예 사실을 깔아뭉게고 앉아서 하는 지랄인 것이다. 결국 아이고데고, 동네가 시끄럽게 울음잡히는 것을 본 월선은 허둥지둥 밤길을 뛰어서 공노인네 객줏집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김훈장을 뵈려고 정호네 집에 간 새 일어났던 일과 서희의 의중을 알게 된 것인데, 그래서 임이네가 지랑발광을 하게 된 까닭도 알게 된 것인데, 알았다 하여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요, 답답하기론 마찬가지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지만 월선의 성미가 물러서도 그랬으나 벙어리 냉가슴 앓듯 말을 할 수 없는 형편이기도 했다. 공노인의 경우도 답답하기론 마찬가지였다. 지독스런 계집에 대한 미움과 노여운 생각 같아서는 평안감사도 제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고 한마디 내뱉어버리면 그만이겠으나 그러질 못하는 게 서로 얽혀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미묘복잡한 사정이고 보면. 임이네가 공노인 객주집에 옮겨만 준다면 문제는 썩 간단하게 끝나지겠는데 가게에 함께 드는 것은 서희의 말이 일단 떨어진 이상 될 법도 않는 일이요, 그러자니 움막에 그들 모자만을 남겨둘 수밖에 없고 사정은 여하튼 우선 용이가 돌아와서 그들 모자만 움막에 동그마니 남은 꼴을 본다면 월선이나 공노인의 처지가 실로 난감해지는 것이다.

"할 수 없십니다. 홍이아배가 올 때꺼지 가게는 비워두고 함께 있일랍니다.."

"그래도 야아야, 아기씨께서 마음내키는 김에... 그러더가 사정이 또 달라지면 죽도 밥도 아니다."

"..."

"무슨 놈의 계집이 그렇기 염치없고 뻔뻔한지, 아무래도 쇠가죽을 덮어썼는갑다."

"..."

"떼거지를 쓰기만 하면 함께 밀고 들을 거라 생각는 모양인데, 아닌게아니라 우리 겉으면 지겠다. 하야간에 지고 이기고 간에 아기씨가 안 된다면 그건 안 되는 거 아니가."

"설마 ... 홍이아배가 근일간에 오기는 안 오겄십니까? 기다리보겄십니다."

"하기야, 그렇게밖에 할 도리가 없겠지."

공노인은 입맛을 쩝쩝 다신다.

"사람 영악한 건 범보다 부섭다 하더라마는 이서방도 팔자는 고약하지. 에잇..."

공노인은 재떨이를 끌어당겨 가래를 뱉고

"거 담뱃대 좀 주소!"

걱정스럽게 쭈그리고 앉은 방씨에게 화를 된통 낸다. 월선이 움막에서 떠나지 않게 되자 이번에는 임이네 쪽에서 당황하기 시작했다. 함께 가게로 들어간다는 것은 단념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자기가 야료를 부려서 월선을 움막에 묶어두었다 한다면 용이 돌아왔을 때 자기 처지가 불리해질 것이 뻔하다. 그렇다고 공노인네 객줏집에 든다는 것은 월선이나 공노인의 입장을 좋게 할 뿐이고, 어떻든 한 가지라도 자신에게 유리한 편을 취하는 것이 현명하리라는 생각을 임이네는 했다. 월선은 가게에 들어야 하고 자기 모자는 움막에 남아서, 용이 돌아왔을 때 비참한 느낌을 주어야 한다. 그들이 객줏집 방을 하나 치워서 들게 하려는 것도 바로 용이의 심정을 염려하는 때문이 아닌가.

"엿장수 마음대로? 누군 밸이 없는 줄 알았던가?'

해서 임이네는

"내가 설어서 그랬소. 성님 생각해 보이소. 처음엔 성님이 날 괄시하여 그러는 줄만 알았지 뭡니까? 좁은 소견에 사정이 그렇다는 것을 믿을 수 없더마요."

임이네가 그렇게 표변하고 나오자 뒤늦게 화가 치미는지 월선은 눈물을 찔끔거린다.

"성님이 여기 움막에 우리랑 함께 있다고 해서 밥 나오고 옷 나올것도 아니고 염치없는 생각인지 모르겄소만 홍이를 위해서도 한나이나 젊어 두 곰뱅이 성할 때 벌어야 안 하겄소? 공든 탑이 무너지겄소? 나한테도 그렇지만은 성님한테도 천지간에 누가 있십니까. 저거, 비리깽이 겉은 저눔 자식 하나뿐인데 짜작빠작 싸워싸아도 우리 죽으믄 물 떠줄 자식 아니겄소? 다 내가 잘못했소. 그러니 가게에 들도록 하이소. 객주집에는, 성님도 생각해보소, 무신 염치로 내가 들겄소. 남우 영업집 방 하나를 내가 차지하다니 그기이 어디 될 말이겄소? 아즉은 여름이고 여기서 견딜 만도 하니, 장시 시작하믄 먹는 거사 갖다 묵을 기고,"

장장 그칠줄 모르는 사설에, 그 사설에 지쳐 자빠진 월선은 아무튼 그도 그럴법한 얘기 아닌가 싶기도 했고 삼사 일의 승강이 끝에 임이네는 소기의 목적을 거두었다. 그 동안에라도 행여 용이가 들이닥치지 않을까 조마조마 마음을 써가면서. 월선이 국밥집을 시작하자 임이네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횡포해져갔다. 그것은 또한 돈을 장만하리라는 꿈이 깨어져버린 데서 온 분통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튼 국밥집에는 머슴아이 하나를 데렸고 객줏집의 송애도 때때로 와서 거들어주고 해서 순탄하게 개업을 한 셈인데 임이네는 마치 인질처럼 홍이를 감시하여 가게에 보내는 일이 없었다. 결국 월선이 찾아가게 되고 ?아가면 임이네는 자식 없는 설움을 뼈가 녹아나게 받아야 했다. 임이네는 세 끼 밥을 날라오게 했다. 그게 다 심술인데, 양껏 밥은 먹고 할일은 없고 본시 게으른 여자는 아니었으므로 임이네는 답답하기도 했을 것이다. 불더미 속에 사라져버린 돈 생각을 하면 당장 미쳐날 것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회수하지 못한 돈이 있었던 게 다행으로 화재 때문에 망하기론 매 한가지인 그런 사람을 번질나케 찾아다니며 단돈 십 전, 오 전이라도 받아내는데 다소는 재미를 붙인 눈치였다.

 

 

6. 정 떼고 가려고

"하따야아, 굉장하구만."

헐렁하지만 풀기가 없이 축 늘어진 심베적삼 앞섶을 무심결인 듯 자꾸 잡아당기면서 주갑이는 눈꼬리가 찢어질 만큼 크게 벌리고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점두에서 새나온 불빛도 있었으나 거리는 아직 어둡지는 않았다.

"불도 대게 큰 불이었던 모양인디, 그보담도 고랫등 겉은 집들이 그단새 들어섰다 그 말이구만이라우? 무슨 수로 이리 들앉았다 말이랑가? 하따야."

"만리장성도 쌓는데 머 그리 눈깔을 뒤집을 것도 없거마는."

그새 또 달라진 거리를, 용이도 바라보며 낯선 고장에 들어선 듯 공연히 찬바람이 이는 마음을 꾹꾹 눌러지르면서 주갑이 말에 비벼대듯 휘청거려지는 객담을 걸어보는 것이다.

"참말로, 참말로 걱정인디,"

"걱정은 무신 걱정, 산 입에 거미줄 칠까봐? 몸뚱아리 하나 누일 곳 없일까봐?"

오는 동안 무관해져서 용이 어투는 무척 조잡하다.

"거미줄 칠라 치면 입은 금세 땅밑에서 썩어 있을 거고 잠자리야 한바다면 몰라도 대천지에 이 내 한몸 누일 곳 없을랍디요? 그기이 아니랑게로."

"그라믄."

"내 동포가 못살아도 걱정이요 잘살아도 걱정이다 그 말이어라우. 못살면은 애간장이 타서 못 보겄고 잘사면은 부러워서 주린 창자가 띠끔띠끔,"

하는데 용이 걸음을 멈춘다. 그는 줄곧 걸으면서 국밥집을 눈으로 찾고 있은 것이다. 국밥집, 월선옥, 뜨내기풍의 사내 서너 명이 책상다리를 하고서 국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월선은 가겟방에 넋나간 것처럼 앉아 있었고 송애가 가마솥에서 국을 푸고 있다.

"주서방, 술 한잔 하겄소?"

"마달 사람이 있을 것이요?"

용이는 가게 안을 한번 더 살펴보고 나서 고개를 푹 숙이며 들어선다.

", 언니, 아제가 오시오!"

송애가 먼저 보고 월선을 부른다. 주갑이 맹해진 표정을 짓고 월선이 역시 용이를 보기는 보았으되 맹해진 얼굴이다. 용이는 말없이 짚세기를 벗고 가겟방으로 올라간다. 주갑은 어릿더리하면서도 용이 곁에 바싹 달라붙듯 신발을 벗더니 방으로 올라선다. 들고 온 짐꾸러미를 한구석에 밀어붙인 용이는 길다랗게 만들어놓은 판 앞에 앉는다.

"여기 술 좀."

월선이 얼굴이 순간 벌겋게 상기된다.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온 사람처럼, 용이를 모르는 사람이면 손님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집일 때문에 타처에서 찾아왔는지 국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뜨내기풍의 사내들도 용이를 단골손님쯤으로 보는 눈치다. 그러나 용이 거동의 새삼스런 것은 아니었다. 삼 년을 장사하는 동안 익힌 버릇이다. 눈에 띄게 완연하게 달라진 월선이 얼굴을 힐끔힐끔 숨어보는 사내들은 단골이기보다 정인이 아닌가고 추측을 해보는 것이지만 남의 정사에 호기심을 가져보기엔 너무 지쳐버린 하루살이의 인생들, 국밥 사발의 남은 국물을 쏟아붓고는 슬금슬금 자리를 뜬다. 용이는 가게 안의 분위기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아랑곳하지 않았다. 월선에게 등을 돌린 채 주갑에게 술을 권하고 자신도 메마른 속을 축인다.

"대체 어찌 되는 거간디, 아까 들은게로 아제라 하였는디,"

용이는 월선이 있는 곳에 고갯짓을 한번 하고 나서

"저기 저 여편네가 내 안사람이요. 그렇거나 말거나 우리 술 마시는 것하고는 무신 상관이요? 보아하니 일은 제대로 돼가는 성싶고, 마음을 놓아도 좋을 것 겉고 하니 마지막으로 오늘밤은 진탕 마십시다. 자아 주서방 술잔 비우라 카이."

용이는 주갑의 술잔에 술을 그득히 붓는다. 그러나 주갑은 국밥집 안주인이 용이 안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부터 뭣이 그리 불편한지 술을 마시기는 마시되 콧구멍을 후비다가 머리를 만지다가 발바닥을 쓸어보다가, 어느덧 손님들은 한 사람 없이 다 떠나고, 뻗치고 앉은 용이 뒷모습이 거북하였던지 송애도 온다 간다 말없이 가버렸다. 월선은 월선대로 임이네와 홍이를 움막에 남겨둔 것이 죄책이 되어 얼어 있었다. 꽤 술이 돌았는 모양이다. 주갑은 별안간 상 위에 술상을 소리 나게 놓더니

"형씨!"

"와 그러요?"

"이런 법은 없지라우! 경상도 법은 어떤지 모르겄소만 구중궁궐도 아니겄고 아래윗채 따로이 거하는 것도 아니겄고 공짜술이니께로 국으로 처먹어라 그런지는 모르겄는디 지척간 얼굴을 빤히 대하고 있음서 인사 한마디 없이 술만 퍼마시라 그 말씀이랑가? 나 술 안 마실라요!"

가랑잎같이 마르고 가뿐해 보이는 몸뚱이가 뒤로 훌쩍 물러나 앉는다. 용이 피식 웃는다.

"아따! 얻어먹는 주제에 챙기는 것도 많다. 임자 여기 와서 인사 하라고."

"."

"오다가 만냈는데 알고 봉게 영팔이하고도 아는 처지라, 또 고향이 전라도고, 주서방."

". 이렁게로 성이 반분이나 풀리는디 워디 잡것이 굴러와갖고 신소리하는 건가 생각했을 것이요잉, 미안스럽소. 용서하시게라우. 이리 뵈야도 나무 패라면 팰 것이요 밥 하라면 밥 할 것인께, 형씨 말씸이 산엘 가자고 혔으니 워째 영문을 모르겄으라우."

"인사는 그만 하소. 자아 술, 마시고 저버도 오늘밤 아니믄 못 마실 기니."

다시 술잔이 오고가는 데 따라서 말도 수월찮이 오고간다.

"대체 워디다가 돈을 싸놨기에 이 용정 바닥에 집들이 이러크름 번듯번듯하게 들어섰겄냐, 내 생각으로는 그렇다 그 말인디, , 세상 조화가 참말로 희안치도 않소. 비렁땅 내 고향 두고 괴나리봇짐 겨드랑이 끼고 떠나올 적에는 그놈이 그놈인디, 눈깔 세 개 박힌 놈도 없고 그놈이 그놈인디, 하 참 보따리가 보통이 되고오 곁방살이가 제집살이 되고,"

"그거 다 까닭이 있지, 까닭이 있다니까."

"그만헌 까닭이야 내 모르는 배도 아닌디,"

"? 주갑이 자네 이런 국밥집 차렸다고 날 빗대 하는 말인가!"

"엇따야, 이건 어느 보에서 터지는 물이란가?"

"나중에 보고 놀래 자빠지지 말고 하하하핫..."

호탕하게 웃는 웃음 소리에 월선은 껌쩍 놀란다. 전에는 들어보지 못했던 웃음 소리다. 웃음에 이어서

"여보게 주모, 여기 술 좀 더 가져오라고."

하며 돌아보지도 않고 주전자로 술판을 친다. '여보게 주모... 여보게 주모라니,' 얼굴은 파아랗다 못해 실룩실룩 눈밑의 근육이 떤다. 술을 담은 주전자를 가지고 갔을 때 용이는 힐끗 눈을 들어 월선을 쳐다본다. 험악한 눈빛이다. '불쌍한 것, 너에게 무신 죄가 있노. 죄가 있다믄 이 내, 이 용이라는 이놈한테 죄가 있지, 하지마는 너가 좀 당해주어야겠다. 너는 살인 죄인의 계집이 아니니 말이다!'

"월선이."

"."

앉지도 못하고 가지도 못하고 월선은 엉거주춤 선 채 눈밑 근육이 파들파들 떨고 있다.

"홍이에미하고 홍이는 어디 있노?"

", 저어,"

"저어? 저어라는 곳에 있단 말가?"

용이는 마음속으로 못난 놈 못난 놈 하고 외치며

"어디 있오!"

"거기 움막에 있소."

"움막에?"

", --"

"으음 그렇게 됐구나. 그렇기는 그럴 테지."

"어찌 당신 남으 소, 속도 모르고 그러시요."

"내가 점쟁이가? 남으 속을 알게?"

", 너무하시오."

"여기 있는 연놈들이 너무했지! 내가 너무한 것 머 있노! 오냐. 월선이 덕분에 내 계집새끼 잘 묵고 지내기야 했었지. 그걸 누가 모르나?"

"참말이제 당신 환장하였소?"

주갑은 얄싹한 아래위 입술을 마음놓고 벌린 채 안사람이라 했다가 주모라 부르기도 한 이상야릇하기만 한 이들을 번갈아 보기에 바쁘다. 길고 긴 세월, 질기고도 한 많았던 인연, 그 엄청나게 긴 세월 동안 한 번 거역이 없었던 월선의 눈에 처음으로 칼날이 섰다.

"네가 손가락에 불을 키고 득천을 해봐라. 자식 낳은 계집을 버리는가! 오만천 지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천대한다고 그 계집을 버릴 내가 아니란 말이다! 나쁜 연놈들! 젊은 거나 늙은 거나."

월선은 남부끄러운 것도 잊은 듯 퍼질러앉더니 흐느낀다.

", 내가 멋을 우, 우떻게 했다고,"

용이는 별안간 상을 발길질하여 엎어버리더니 벌떡 일어선다.

"아아니 형씨! 이게 무슨 짓이랑가? 참말로 이게 무슨 놈의 행실이랑가? 천하 명관도 알아야 송사헌다 혔는디?"

그러나 이미 용이는 신발을 신고 가게를 나서는 판이었다.

", 이거 워쩐디야? 이 이런 날벼락은 내 생전 첨인디 아주머니."

하다가 행여 용이를 놓칠세라 그도 짚세기를 반쯤 끌고 급히 달려 나간다. 나가다가 돌아보고 엉거주춤하더니 에라 내 모르겠다 싶었는지

"형씨! 형씨!"

부르고 쫓아간다.

"형씨!"

용이를 뒤쫓은 주갑이는 어깨를 덥석 잡는다. 용이는 울면서 걷고 있었다.

", 아니 워찌 이런다요? 우는개비여?"

"..."

"나 아무래도 사람 잘못 본 것 같소."

"주서방."

"와 그러요. 말허소."

용이는 울면서 한편 허허 하고 웃는다. 술냄새가 마구 풍겨온다.

"나 정 떼고 갈라고 그랬소, 이번에 눌러앉으믄 나는 개새끼거든. 아암 개새끼! 소새끼! 사람 아니제."

"정을 떼고 가는 데도 유만부득이제. 제 가숙을 두고 정을 떼고 가다니."

"모르거든 말 마소. 지금부터 우리가 가는 곳에는 백 년 묵은 구렝이가 한 마리 있일 기요. 그 구렝이가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내 기출의 에미거든. 주서방."

"..."

"계집도 그렇겄자마는, 주서방."

"말허소."

"주서방 장개 안 들었소?"

"까매기괴기 먹었는개비여. 낮에 말 안 헙디여?"

"식구가 없다는 것하고 장개 안 갔다는 것하고는 다르제."

"다르기는 뭐가 다를 것이요? 매한가지제,"

"아 그러세. , 하여간에 계집도 그렇겄지마는 사내한테도 기영머리 마주 풀고 법으로 만낸 여편내가 오래 살아주어야, 파뿌리 되도록 살아주어야, 계집이 팔자가 세도 안 되겄지마는 사내도 팔자가 세믄 그거는 볼장 다 보는 기라. 산다고 살아도 그거느 부평초 인생인 기라. 어이구 취한다. 으윽윽."

울음을 터뜨린다.

"참말 환장하겄으라우. 워찌 이런디야? 이런 세상에 못난 사내 또 보겄더라고?"

"정 떼고 가니라고 그런께 우는 거는 참견 안 했이믄 좋겄고, 어이구, 어이구 빌어묵을, 사내 되기가 이러크름 어러븐 긴가, 어어다, 다 왔소, 다 왔구마, 주서방!"

"귀창 떨어지겄소."

"이자 다 왔구마. 이자는 보따리가 보퉁이가 되고 곁방살이가 제 집살이 되고 그 따위 주딩이는 안 놀릴 기구마. 홍아! 이놈 홍아!"

", 아부지다!"

홍이 총알같이 뛰어나왔다.

"흐음 나 술 묵었다. 너거 에미 자빠져 자나?"

"아니요. 옴마! 옴마! 아부지!"

거적을 걷고 용이는 움막 속으로 들어간다.

"주서방 들어오소, 마음놓고, 여기는 큰 배 탄 것만치나 편할 기요."

주갑이 들어간다. 임이네는 쪽을 고쳐 비녀를 찌르면서 부어터진 얼굴이다. 그 얼굴을 삐닥한 몸짓을 하고 서서 눈에는 웃음기를 풍기면서 용이 바라본다.

"그간 아이 어른 편안하시고요?"

"이녁 보기에 편안하시고요?"

낯선 손님 주갑은 안중에 없는 모양이다.

"보아하니 잘 자시고 잘 주무시고 얼굴이 봉덕각시 겉구마."

남폿불이 신나게 타고 있다.

"봉덕각시오? 기가 맥히요."

"그래 월선이는 어디 가고 없다 말고?"

"자개 길 찾아갔지 어디 가기는 가겄소."

"자개 길이라... 홍아!"

"!"

"황주, 황주 사오너라. 여기 돈."

하며 용이는 십 전짜리 두 닢을 홍이 앞에 던진다. 홍이는 술병을 들고 쫓아나간다.

"주서방 앉으소. 그라고 저기, 저기 앉은 여편네가 내 아들 어미요."

하자 임이네는 빨끈해져서

"처자식은 죽는지 사는지도 모르고 앞일을 생각하믄 눈앞이 캄캄한데 무신 주정은 주정이요! 그 동안에 우떤 일이 생깄는가 알기나 알고 이러는 기요?"

"알지. 아니께 내일 짐 싸믄 되는 기라."

"머라꼬요?"

그러나 용이는 임이네에게 더 말을 시키지 않았다. 임이네는 용이가 옛날, 몹시 두려웠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을 막연하나마 느낀다. 말이 없어도 의사를 쫓을밖에 없었던 사내. 한때는 남편보다 자식보다 돈만 있으면 보장된 앞날을 확신할 수 있었던 임이네에게 그 확신이 사라진 때문일까. 그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용이 역시 삼 년 간의 치사스러웠던 생활을 청산하기로 이미 굳게 마음먹고 돌아온 것이다. 밤이 깊어지도록 술을 마시던 용이는 차츰 말수가 줄고 주갑이 혼자 떠들어대다가 언제 쓰러져 잤는지 거의 동시에 두 사내가 눈을 떴을 때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임이네는 움막에 남게 된 모자의 비참했던 꼴을 이모저모, 마치 금간 곳을 찾으려는 듯 뚜드려보고 내비쳐보고 했으나 용이 도통 대꾸가 없었다. 점심인지 아침인지 밥을 먹은 뒤 용이는 주갑과 함께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움막을 나와 버렸다.

주갑은 신전을 하던 박서방을 찾아본다면서 가고 용이는 길상을 만나기 위해 서희 집으로 간다. 거의 집이 다 된 것을 보고 떠나기는 했어도 살림이 꽉 짜이고 사람이 살게 된 최서희의 거점, 늘씬늘씬하게 잡은 기와집은 용이 마음을 위압했다. 움막에 남아 있던 임이네 생각을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서방 앙입매까?"

점심을 먹고 나오던 응칠이가 반가워한다.

"언제 오싰습내까?"

"어젯밤에, 길상이 있나?"

"옛꼬망. 성님 방에 았습매다."

"방이 어딘데?"

응칠이는

"저기 저 방입매다."

손가락질을 하며 가리켜준다.

"무시기 바빠서 나는 가겠습매다."

용이는 길상의 거처하는 방 앞에서 기침을 한 번 하고

"길상이 있는가?"

길상이는 방문부터 열어젖힌다. 수척해진 얼굴이다. 그러나 집일할 때와 달리 낯빛은 본시대로 희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어젯밤에."

"영팔이아제는 편안하시고요."

"음 그럭저럭."

"올라오시지요."

"애기씨한테 인살 해야겄제?"

"나중에 하시지요. 하여간에 올라오시오."

길상과 마주앉은 용이 허리춤에서 곰방대를 뽑으려 하는데

"담배 여 있습니다."

하고 길상이 궐련을 내어놓는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그 담배가 절반쯤 타들어가는 동안 서로 말이 없다.

"김훈장께서는 안녕하시고."

"."

"... 일간에 떠날까 싶어."

"영팔이아제 계시는 곳으로?"

"우선은."

"이번에... 섭섭하게 생각지 마십시오."

"자네도 그런 말을 하나?"

"..."

"그러지 말게."

"제가 어디 몰라서 하는 말입니까?"

길상은 용이를 가만히, 유심히 바라본다.

"일간이라 하셨는데 언제쯤 떠나시려구요."

"?"

용이 표정에는 준열한 것이 있었다. 용정에 온 이후 처음 보는 표정이다. 서로의 마음가짐까지가 전도된 것을 길상이 느낀다. 아직도 내가 애기씨 선심에 매달려 있는 줄 아느냐? 그런 눈빛이다. 아닌 게 아니라 길상은 용이를 위해 얼마간의 금전을 주선해보리라 생각하고 떠날 시기를 물었던 것이다.

"국자가에 가서 청인 목파를 만나본 뒤 떠날까 싶다."

"목파..."

"겨울 한 철 벌목벌이나 해보까, 그리 작정을 했네."

"고될 건데요?"

"나는 아직은 젊다. 세상에 수울한 일이 어디 있을라구."

"그러나 사서 고생할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세상에 못할 것은 맘고생이제. 육신을 부리묵는 기이 훨씬 편치. 안 그런다? 오장에 기름이 꺼니께 인간이 더러바지더구마."

용이는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끈다. 길상은 대항할 듯이 용이를 응시한다. 용이 말에서 서희를 위시하여 자기에 대한 비난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용이는 이들을 비난했던 것은 아니었다. 월선을, 공노인을 비난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월선을 위해 가게를 마련해준 서희나 길상에게 감사하는 마음이요 월선을 두고 떠나는 마당에서 공노인이 용정에 있다는 것을 다행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쩐지 우리 생각이 다 변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뜻이제?"

"뿔뿔이 다 흩어져가고 있다 그 말이지요. 내 자신부터가..."

"..."

"실은 남들에게보다 지 자신 마음속에서 무엇이 흩어져가고 있다는 게 옳을 겁니다. 이렇기 살아야 하는 겐가..."

하다가 길상은 얼굴을 붉히며 눈에 노기를 띤다.

"얼굴이 안 좋구마는. 어디 몸이 아픈 거 아니가?"

용이는 말허리를 잘라버린다.

"용이아제는 제가 머 변명이라도 하고 있는 줄 아시오?"

길상의 음성이 별안간 투박해졌고 신경도 따라서 투박하게 모여든 느낌을 준다.

"나 장가들 생각입니다."

"들어야겄지."

"계집아이가 하나 따른 과부요."

"머라꼬?"

"나이는 스물셋인가 넷이가... 얼굴도 반반하구요."

"무신 그런 소리를 하노?"

"와요? 종놈한테 과부라면 제격 아닙니까?"

"와 니가 종놈고. 종놈이라면 요즘 세상에, 니답지도 않다."

하면서 용이는 서희와의 소문을 머릿속에 떠올려본다.

 

 

7. 노동자들

매사를 자기 뜻한 대로 주저없이 한다고는 하지만 월선에게 들기를 허락한 가게 건에 관하여 여러 가지 면에서 서희의 심기가 좋지 않았을 것은 뻔한 일이다. 인사하는 용이를 쌀쌀하게 대하는 것도 그 때문이겠는데 용이로서는 서희 처사를 가혹하다 할 하등의 이유가 없고 원망하는 마음도 아니었지만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자격지심과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대상도 분명찮은 분노 같은 것 때문이고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이 아니었다. 임이네 문제가 거론되었더라는 그간의 사정은 능히 있음직한 것이다. 그럼에도 등에 붙어 다니는 혹덩어리같이 흉한 임이네 과거사가 좀더 명료하게 떠올려졌으리라는 상상은 견디기 어려웠다.

'설마 모릴 리가 있겄나. 그때는 나이 어린 아이였다 하지마는 모릴 리가 없지. 그러세... 혹 누가 옆에서 말 안 했다믄 모리고 기실 수도 있겄지. 무신 좋은 일이라고 일러 까바치까.'

이따금 생각을 해보지만, 그래서 그나마 어정쩡하게 버텨왔었다. 지금은 모호한 안개가 걷히고, 햇볕을 가리던 차일도 걷히고,타는 듯 뜨거운 햇볕이 정수리에 내리쏟아지는 것 같은 기분, 뜨겁고 아프다는 느낌이 어떤 영악한 소리를 충돌질한다. 자격지심이 격해지면 그럴수록 등에 붙은 흉한 혹처럼 험했던 이력을 짊어진 임이네를 전신으로, 온 심장으로 가려주고 싶은 증오와 연민이 격렬하게 갈등하는 그 숙명적인 감정을 용이는 가눌 만한 여유를 못 가진다. 서희의 처사를 가혹하다 생각지는 않으면서, 원망하는 마음도 아니면서 그러나 처음부터 남정네가 죄를 졌으면 남정네가 받을 것이요, 이미 벌을 받아 죽은 사람인데 어째 계집이 그 죄를 또 받아 짊어져야겠느냐, 그런 항변은 있었다.

"그래, 그곳에 간 일은 잘되었는가?"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 서희의 보랏빛 생수 겹저고리는 제철이건만 삼베 고의적삼의 용이 몰골은 간밤의 술이 과했던 탓도 있겠지만 누추했다. 세월에 바래어진 생활의 황막함이 전신에서 배어난다. 탈망한 사내를 보면, , 저기 탈망한 사내가 온다! 기겁을 하며 숨던 고향의 사대부집 여인네들 생각을 했었는지 서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헝클어진 용이 맨상투를 바라본다.

"잘되고 못되고가 있겄십니까."

삐죽하니 비어져나온 듯 대꾸가 퉁명스럽다.

"잘되고 못되고가 있겠느냐?"

서희도 말꼬리에서 감정을 치켜올린다.

". 본시부텀 땅 파묵던 놈이 두더지맨쿠로 땅 팔 일말고 다른 무신 일이 있겄십니까."

"으음?"

"송충이는 솔잎을 묵어야지 갈잎을 묵으믄 죽십니다."

퉁명스런 정도를 넘어서 노골적으로 비꼬며 서희 권위를 때려부수려 드는 기색이다. 오만했던 서희 눈빛이 별안간 흐려진다. 어둠에 자백질하듯 절망 같은 것, 외로움 같은 것이 솟구쳤다 가라앉곤 한다. 드디어 서희 눈에는 환하게 영롱한 본시의 빛이 켜진다.

"내가 너희들한테 빚진 게 있느냐?"

", 아닙니다. 그런 말심을."

비로소 당황한다.

"왜들 이러는 게지? 모두들!"

작은 주먹으로 마룻장을 내리친다. 날카로운 음성이 넓은 집안에 울려퍼진다.

"너희들이 나로 인하여 이 만주 벌판에까지 왔더라 그 말이냐? 왜들 이러는 게지!"

용이 얼굴이 시뻘개진다.

"아닙니다. 애기씨! , 지가, 지 자신이 노여바서 그렇십니다. , 누굴 원망하는 기이 아닙니다.'

"이제는 최참판댁 작인도 하인도 아니란 그 말이겠다? 세상이 달라지고 고장도 달라지고 오오라, 그 말이렷다! 그쯤은 나도 알고 있어! 모두 마음대로 하는 게야. 누가 발목을 묶어놨기에 제 갈길을 못 가는 게냐, 마음대로 가면 될 거 아니겠느냐?"

용이는 입이 붙어버린 듯 말을 못한다.

"하동 땅에서 의병인가 뭔가 일으켰으면 그게 어디 최참판댁을 위해 한 짓이겠느냐? 김훈장 그 늙은이만 하더라도, 길상이 역시, 난 다 알고 있어. 알고 있단 말이야. 고향서 살수 없었던 것은 내 탓이 아니야! 최참판댁 탓도 아니야! 왜들 빚 준 것처럼 내게 감고 드는 게지?"

흥분했으나 서희는 임이네 말을 꺼내지는 않는다.

"사세가 불리하면 순임금이 독장사를 하더라고 혈혈단신 계집아이가 사고무친한 이곳에 있기로 어찌 인심이 여반장, 간사스럽구나."

내리 두드리면서도 여전히 임이네 말을 꺼내지 않는다. 역시 서희는 지혜로움을 잊지 않았다. 임이네 얘기를 꺼내면 마지막, 용이도 그렇거니와 자기 자신부터 용이를 다시 대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아는 때문이다. 용이는 끝내 변명 한마디, 항변 한마디 못한다. 서희 앞에서 물러난 용이는 그 집 담장을 끼고 걸어간다. 새로 쌓은 담장에서는 아직 마르지 않은 횟가루 냄새가 풍겨왔다. 돌을 끼운 하얀 회벽의 담장과 맑아서 일렁이는 것 같은 푸른 하늘과 멀리 멀리서, 지평선 저쪽에서 비적단이 사진을 몰고 나타날 것만 같은 불안한 예감과 - 용이는 문득 옛날 최참판댁 담장을 생각한다. 치수 도령에게 까닭없이 매를 맞고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핀 긴 담장 옆을 울면서 가던 어린 소년의 모습이. 능소화보다 짙은 놀이 하늘과 강물을 미친 듯이 불태우던, 마치 엊그제처럼 생생히 떠오른다. 삼십 년도 전의 일이다. 울고 가는 소년은 용이 자신이었으나 홍이로 착각되기도 한다. 절에서 윤씨부인 가마를 따라오던 까까머리 길상이 같기도 하다. 잘못한 일도 없는데 왜 맞기만 해야 하느냐고 울부짖었을 때 도련님은 양반이고 너는 상사람 자식이니께, 하던 어미 슬픈 눈도 생각난다. 참하게 생긴 누이, 서분이라는 이름과 같이 하얀 얼굴의 누이가 죽던 날은 언제였던지 송곳 같은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밤이었었던가? 조그마한 시체를 거적에 말아서 지게에 얹고 곡괭이를 지팡이 삼아 뒷동산으로 올라가던 아비의 뒷모습, 비는 개이고 일렁이는 것처럼 맑고 푸른 하늘이었던 듯싶다. 싸리나무 울타리 밖에 서서 치수 도령은 울고 있었다. 치수 도령의 얼굴과 그의 딸 서희의 얼굴이 번갈아 눈앞을 어지럽힌다.

"의리 없는 놈이지요."

방금 과부한테 장가 들겠다던 길상이 그 일과 나와 무슨 상관이겠느냐 그러듯이 중얼거렸다. 내리깐 눈꼬리가 뚜렷하게 패여진 창백한 얼굴에 수염이 꺼무꺼무하다. 육신보다 영혼이 피폐한 것 같다. 꽉 다물린 입술이 묘하게 육육적이고 청수했던 그 투명한 정열과는 다른, 암벽을 뚫고 나가려는 암담한 몸부림 같은 것이 느껴진다.

"무신 말을 하노?"

"나는 의리 없는 놈입니다."

"그거를 따지자 카믄 사람마다, 나부터가..."

"..."

"사람이 도리를 다하고 의를 지키는 기이 어디 인력으로만 되더나?"

"그런 뜻이 아니고, . 그런 얘기는 아닙니다."

쓴웃음을 띠었다.

"...?"

"은혜를 입었으니까 은혜는 갚아야 한다, 사람의 도리는 그런 거라고... 항상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수천 수만의 노비들이 말입니다. 상놈들이 말입니다. 양반들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

"이를테면 죽은 수동이아제겉이 말입니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주가를 위해 바쳐야 하는 거로, 수동이아제는 그 생각이 골수에 박혀버렸던 사람이었지요. 실제 또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무서운 정열이더군요. 용이아제도 아시다시피,"

낮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도시 은혜란 뭡니까? 양반들 먹고 남은 찌꺼기를 던져주는 게 은혭니다. 상놈 노비들은 먹다 남은 찌꺼기를 얻어먹으면서 감지덕지 은혜를 받는 게지요. 나는 말입니다, 돌아가신 마님을 그렇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괴팍한 서방님도 그렇게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베푸는 사람으로 생각지 않았단 말입니다. 서방님은 어린 마음에도 영악한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직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은혜를 준다거나 갚으라거나 그런 생각은 안 했던 분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분한텐 슬픔 같은 것, 그렇습니다. 한이라 하는 게 좋겠지요. 이 세상 아무도 믿지 않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님도, 그 어른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러러 뵙고 싶은 분이었습니다. 나에게 글을 배우게 하시고... 어릴 적에는 나는 그것을 크나큰 은혜로 알았지요. 그러나 그건 정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보내는 정 말입니다. 상전이 하인에게 베푸는 은혜, 그건 아니었습니다. 그 어른은 웃으신 일이 없었지만 웃음보다 더 정을 느끼게 하는 슬픔이 있었습니다. 그 어른 눈에는 자기 자신을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는 빛이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슬퍼할 줄 모르고 불쌍하게 생각는 마음이 없이 어찌 남을 위해 슬퍼하겠습니까. 배고파본 사람만이 배고픈 것을 알 듯이 말입니다. 아파본 사람만이 아픔을 알 듯이 말입니다. 해서, , 그렇지요. 나는 그렇습니다. 그분을 불쌍히 여기고 정을 느낀 겁니다. 애기씨의 경우에도... 애기씬 세상에 귀한 보물이었지요. 연꽃이고 꾀꼬리새끼고 뭣이든 원하는 대로 해드리고 싶었고... 산에 있을 때 말입니다, 나는 부엉이를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도 울음소리는 똑같은 거리 밖에서 울었습니다. 아무리 쫓아가도 쫓아간 것만큼 앞서가는 달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지치고 잠이 들었지요. 어떤 때는 노루새끼를 뒤쫓아 온종일 산을 뛰었습니다. 잡으면 안아주고 맛난 풀을 먹여주고 가슴이 아파서 미어지는 것만 같았는데 그놈의 노루새끼는 한사코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진달래철에는 진달래를 따먹고 머루철에는 머루를 따먹고 해가 져서 사방이 캄캄해진 뒤 돌아가곤 했습니다. 우관스님이 이놈 다리몽댕이를 뿌질러놓겠다고 벽력같은 소리를 지르며 정말 몽둥이를 들고 달려나오셨지요. 나는 스님 눈에서, 호랑이한테 물려가지는 않았을까? 그런 겁에 질린 빛을 보았습니다. 돌아온 것만이 반가워 어쩔 줄 모르는 빛을 보았습니다. 나는 그 정을 확인하기 위해 번번이 산속을 헤매다가 어두워서 절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스님은 몽둥이로 때리진 않았지만 그럴 때마다 커다란 주먹으로 내 머리를 쥐어박았습니다. 스님은 내게 있어서 어머님이요 아버님이었습니다. 법의에 싸인 넓은 가슴은 어머님의 품이었습니다. 하얀 눈썹밑에 굵다란 눈은 잊을 수 없는 아버님의 눈이었습니다. 어머님의 눈이었습니다. 아버님도 어머님도 아니었던 노승... 나는 그 어른이 보고 싶은 때가 많습니다. 나는 누구든 사람을 보면 솔나무에선 솔냄새가 나고 느릅나무에선 구린내가 나고 계피나무에선 맵싸한 향기가 나듯이 단박에 그 사람의 냄새를 알 수 있습니다. 나쁜 사람 좋은 사람 그런 얘기는 아니고요, 사람의 정이 있느냐 없느냐... 아무리 남에게 좋게 보여도 정이 없는 자는 거짓말쟁입니다. , 거짓말쟁입니다. 가증한 거짓말쟁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그건 거짓말쟁입니다. 자신을 슬프게 생각해본 일도, 불쌍하다 생각해본 일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슬픈 것처럼, 불쌍한 것처럼 읊조리지요. 남에게는 대자대비한 것처럼 몸짓이 아주 큽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한테 하는 거짓말입니다. 나는 언젠가 어느 주막에서 눈물 한 방울을 쪼르르 흘리며 이보란 듯 옷고름으로 찍어내는 늙은 영감쟁이를 본 일이 있소. 눈물은 아닌 흘려도 슬픈 것이요 비오듯 쏟아져도 슬픈 것인데 어거지로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을 소중하게 옷고름으로 찍어내는 그 품을 보고 구역질을 느낀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을까요? . 의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서희 애기씨는 보물입니다. 연꽃이지요. 꾀꼬리새낍니다. 윤보 목수는 웃어도 슬펐지요. 울어도 태평스럽고요. 그 못생긴 곰보 얼굴이 얼마나 예뻤는지 생각나시지 않습니까?"

꿈결의 헛소리처럼 지껄이는 것이다. 용이는 이렇게 지껄여대는 길상을 별로 본 일이 없다. 어쩌면 그는 마음속으로 혼자 지껄이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지도 모른다.

'이눔아아가 와 이라제?'

"사람의 탈을 쓰고 사람의 정이 없는 거짓말쟁이는 아무래도 탈바가지일 수밖에 없고 평산이 같은 극악무도한 살인귀 한테조차 느낄 수 있는 연민마저 느낄 수 없고, 나는 알고 있습니다. 김평산이가 제 자식 역성을 들어 막딸네를 때린 일을 말입니다. 그나마 쥐꼬리만한 육친의 정이라도 있으니 말입니다."

"지나간 일 얘기하믄 머 하노."

"?"

길상은 용이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생각에서 깨어난 사람 같았다. 여지껏 말을 했던 것이 아니었고 생각에 헤매고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돌연 길상은

"종이 종을 부리면 식칼로 형문 친다더라고 그렇게 말들 하는가분데."

내뱉었다 지난 초여름 집일이 한창일 때 막둥이라는 젊은 일꾼의 면상을 쳐서 코피 쏟는 것을 보고 일꾼들이 길상에게 빗대어 한 말인데 그 말을 늘상 마음속에 새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모리고 하는 소리를 맘에 낄 거 없다."

"과히 틀린 말 아니지요. 용이아제는 그렇게 생각 안 하신다. 그 말씀이오? 나한테 유감이 없다 그 말입니까?"

"억지쓰지 마라."

"억진지도 모르지요. , 억지쓰는 겁니다. 이곳에 있는 이상, 그렇지요. 이 댁에 있는 이상 나는 종이 종을 부리면 식칼로 형문 친다는 허물에서 벗어나진 못할 겝니다."

"남이야 머라 카든,"

"용이아제는 남이 뭐라 하든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그야,"

하다가 용이는 얼굴을 붉힌다.

"남이 뭐라 하든, 하기는 상관이 없겠지요... 내 마음 때문이겠지요."

"전에 없이 니가 와 이라제?"

"전에 없이 ... 그럴까요?"

"떠나겄다, 설마 그 생각은 아니겠제? 그런 생각 함시고 과부장가 들겄다 생각한 거는 아니겄제?"

"떠나고 싶지요. 어디든 말입니다."

오랜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지나간다. 뒤꼍에서 재재거리는 새침이 목소리가 들려온다.

"인간세상 오만가지가 뜻대로 되는 기이 없다. 생각하믄 머리 깎고 중 되는 기이 젤 편치."

"다시 절로 들어갑니까?"

길상은 쓰디쓰게 웃었다. 용이는 걸음을 멈추고 아까 길상이 건네준 궐련갑 속에서 담배 한 가치를 뽑아 문다.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아당긴다. '그러면은 어디로 가는 거지?' 떠날 것을 굳게 작정했건만, 물론 이 길로 떠나는 건 아니었지만 발길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 여전히 방황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용이는 깨닫는다. '에라 모르겄다!' 길켠 처마 밑에 가서 주질러앉는다. 길폭은 넓지만 내왕이 변화하지 않는 뒷길은 차분히 가라앉은 분위기다.

햇볕도 여름과 달리 튀질 않고 스며들어 있다. 맞은켠에는 문살이 촘촘하고 잘게 된 출입문이 하나, 청인 집이다. 무슨 장사를 하는 집인지 검정칠을 한 판때기에 금박을 한 흔적이 있는 글씨를 판 간판이 나붙어 있다. 출입문이 열리면서 여자가 우는 아이를 안고 나온다. 소매가 넓은 푸른빛 무명옷에 높이 걷어올린 머리에는 요란스런 꽃삼을 꽂고, 전족을 아니 한 것으로 보아 만주족인 듯 예쁘게 생긴 젊은 여자다.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고 여자는 아이를 흔들어댄다. 다시 출입문이 열린다. 이번에는 변발한 사내가 나왔다. 그는 여자로부터 우는 아이를 받아 안으며 여자더러 집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하는 눈치다. 여자는 들어가고 이마빡이 불거져나온 사내는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 그리고 우는 아이를 흔들어대며 뭐라 중얼대며 어디론가 가버린다.

'짐승도 새끼를 낳고 새로 알을 까는데...' 담배 연기를 후욱 뿜어낸다. '마음을 말로는 다 못하지. 골백분을 말해보아야 그럴수록 마음과는 딴판이제. 죽으믄 육신이야 썩어서 흙이 될 기지마는... 맘은 남아서 허공을 떠다니까? 그런다 카더라도 썩는 송장하고 멋이 다를꼬. 살아서도 버부리 혼이 떠다닌다고 입을 열까?'

어젯밤 월선에게 표덕스럽게 군 것을 뉘우치는 것이다. 말로는 정을 떼고 가노라 그랬다 했고 여자를 위해 울기도 했으나 따지고 보면 움막에 남은 임이네 홍이를 위한 분노 때문이었다고, 그러는 편이 진심에 더 가까운 것을 모르는 용이는 아니다. 기영머리 마주 풀고 법으로 만난 여편네가 오래 살아주어야, 파뿌리 되도록 살아 주어야, 어젯밤 술 마시고 주갑이한테 한 말도 생각이 난다.

"법으로 만낸 계집하고 파뿌리 되도록 살았으믄 흥, 흐흐흥..."

용이는 헛웃음을 웃는다. 월선이 무당 딸이 아니었더라면, 육례를 갖추어 혼인을 했더라면, 떡판 같은 아들 샛별 같은 딸을 낳아주었더라면, 수숫대 움막인들... 이보다 더 좋은 얘기는 없다. 도깨비 방망이를 치면서 밥 나와라 하면 밥 나오고 옷나와라 하면 옷나오는 황당한 꿈이다. 밥 나와라 하면 밥 나오고 옷 나와라 하면 옷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 같이 황당하고 선심만 쓰게 돼 있는 하나님이란 도시 어디메서 낮잠을 주무시는가. 천둥만 치지 않았더라면, 홍수만 나지 않았더라면, 흉년이 들지 않았더라면, 액병이 돌지 않았더라면, 전쟁만 나지 않았더라면... 우둔한 자의 별 따러 가는 얘기가 아닌가. 그래도 다시 강청댁한테 정을 붙이고 월선을 잊을 수 없었더라면, 보부상 늙은이한테 시집갔던 월선이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월선이 또 다시 마을을 더나지 않았더라면, 하룻밤 실수, 임이네를 건드리지만 않았더라면, 강청댁이 자식을 낳아주었더라면, 죽지 않았더라면 - 회한 없는 세월이 어디 있을 것이며 세월과 더불어 가중되는 운명의 무게를 피할 자 그 누구겠는가. 그러나 수고는 싸움이지 복종이 아니기에, 회한과 운명의 무게와 더불어 있는 자만이 영혼은 높은 곳으로, 육신은 낮은 곳으로, 그리하여 도깨비 방망이와는 아무 상관 없는 진실의 쓴잔을 마시게 되는 것이다.

'과부장가... 길상이가 말이지?'

한 사내가 길 아래켠에서 걸어온다. 우쭐우쭐 걸음걸이가 매우 활달하다. 홍서방이다.

"홍서방"

걷어올린 바짓가랑이, 일을 하다 나왔는가. 뚜룩뚜룩 정맥이 솟아 난 정강이를 쳐다보며 용이 불렀다.

"! 난 또 누구라고?"

군살을 흔들고 웃으며 홍서방은 용이 옆에 와서 펄썩 주저앉는다.

"담배나 한대 피우고 갈까?"

허리춤에서 담뱃대를 뽑으려 한다. 용이 궐련 한 가치를 내밀어 준다.

"고맙소."

담배를 붙여물고 성냥개비를 휙 던지며

"퉁포슬에 갔다더니?"

"."

"그래서,"

"그래서 머 금송아지라도 얻었일 것 겉소?"

"그야아 천년 묵은 동삼인들 못 얻으란 법 없지."

"하나님 눈이 멀었다믄 모를까."

"하나님의 눈이 멀었는지 어쨌는지 그건 모르겠지만 부처님만은 아무래도 눈이 멀은 모양이오."

"그거는 무슨 소리요?"

홍서방 입에서 입김처럼 담배 연기가 새나온다.

"그놈의 운흥사, 중놈이,"

"...?"

"세상이 망조라. 별 희한한 일이 다 있지."

"..."

"송씨댁 알지요? 이서방도."

"송씨댁이라믄 상의학교의,"

"그렇지. 꽤 인심도 쓰고 한 집안인데 그 댁 어른이 중풍으로 앓아누운 뒤는 집구석이 콩가루가 된 모양이오."

"그럴 리가 있겄소. 송선생님은 우리아아 선생님인데 착실하고 잘난 사람 아니오?"

"그 동생 얘기가 아니오. 아직 장가 전이니 별문제고 그 댁 며느리 애긴데 별의별 해괴망칙한 소문이 떠돌더니만 결국 끝장을 보기는 본 셈이지."

"우쨌기에 그러요?"

"운흥사 중놈을 붙어묵었더라 그 말 아니오."

"뭐라고요?"

"얼굴 반반하게 생긴 계집치고 행토 없는 게 없더라고, 저렇게 되면 그 집구석도 쑥밭이라."

"아무리 그렇지만는,"

"아아 바로 며칠 전에 운흥사 중놈이 몰매를 맞고 쫓겨났어도?"

"..."

"덕분에 부처님은 촐촐하게 굶고 계실 터인즉 부처님 눈이 안 어둡고서야 그 고생이겠소?"

"중이 괴기맛을 알믄 머 우떻다 카더마는,"

"법당에 파리 떠날 날이 없다 그 말인데, 빌어먹을! 멀쩡한 상투달고도 평생 코맹맹이 계집 하나 보고 살아가야 하는 이눔의 팔자, 하기야 이서방 경우는 다르지."

홍서방은 곁눈질을 하며 씩 웃는다.

"요새는 어디서 일을 하고 있소?"

용이 말을 돌려버린다.

"사람 괄시하누만."

"?"

"아 그래, 내가 언제까지 남의 밑에서 일할 사람으로 보입디까?"

"얼굴에 안 써붙있이니께."

홍서방은 만족스럽게 몸을 좌우로 흔들어대다가 짤막해진 꽁초를 버린다.

"돈을 댄 사람이 있어서 엿도가 다시 차렸수다."

"그거 잘된 일이구마."

"개미 쳇바퀴 도는 격이지 뭐. 나는 그렇다 치고 이서방도 거 썩 잘됐구먼요."

"..."

"거기야 계란 노른자위 아니오? 게다가 공짜로 얻은 가게요, 부자 되기는 따놓은 당상, 옛말에도 불난 자리는 재수가 있다더구먼."

"갈쿠리로 돈 걷게 생깄소."

용이는 비웃음을 띠었다.

"남의 일 같네?"

"나하고 무신 상관이요"

"주머닛돈이나 쌈짓돈이나,"

"실없는 소리는 안 했으믄 좋겄고 박서방은 요새 머하는고오?"

"그놈의 늘 푼수없는 갖바치, 노상 그렇지요. 지 말로는 용정의 집일 끝나면 판자벽이라도 둘러쳐놓고 가겔 내겠다는 건데..."

"..."

"장사하기가 싫은 모양이라,"

"그래도 생업인데,"

"해골바가지처럼 말라비틀어져서, 보기가 딱하더만. 하기는 따른 식구들이 많으니 고생이지. 이놈의 갖바치 박가야, 배운 도둑질이나 해! 할라 치면 밑천을 벌어야지 헤벌쭉 웃는데 흥? 주변머리없는 자식."

"일은 어디서 하는데요?"

"거 왜 전당포 뒤켠에 있던 지씨, 그 양반 집 자리에 지금 큰 기생집을 짓고 있거든요."

"기생집을,"

"아마 가을까진 그 집 일이 계속될 모양인데 말이 많더구먼."

"..."

"땅을 판 지씨도 욕을 먹는 모양이고, 왜 그런고 하니 뒷돈을 대주는 게 왜놈이라는 게요. 서울서 기생 데려다 장사할 사람은 조선 사람이지만, 그러니 실제 주인이 누군지 아무도 모른다 그 말이지."

"사단이 있는 집이구만."

"기생 천 명이 온들 우리하곤 아무 상관 없는 일이긴 하지만, 어이크! 내가 너무 오래 지껄였구만. 해도 짧아지는데 움직여야 먹고 살지."

홍서방은 우쭐우쭐 걸어가버리고 용이도 일어선다. 전당포 뒤켠 지씨 집터에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주갑이 혼자 뒷짐을 지고서 바삐 움직이는 일꾼들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일꾼들의 몸들이 좋아서 그랬던지 주갑의 목은 몹시 길어 보였고 박서방의 모습은 눈에 띄질 않았다.

"주서방."

"오매, 워찌 온다요?"

검버섯이 핀 얼굴에 가물가물 웃음기가 번진다.

"큰애기, 길이라도 안 잃었는가 싶어서 왔거마는."

"울아부지 겉은 소릴 혀?"

"멀 하고 있소?"

"구겡하고 있었어라우."

"박서방은 안 보이네?"

"저어기, 안쪽서 흙 파는개비여."

"만냈소?"

"잠시, 남의 일 허는디 진 야길 헐 수도 없고 그런다고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헐일없이 어정거리고 있었지라우."

용이는 맞은켠 처마 밑에 가서 쭈그리고 앉는다. 따라온 주갑이 홍서방이 그랬던 것처럼 용이 옆에 털석 주저앉는다. 날람하게 가벼워 보이는 몸집이 다를 뿐이다. 아까처럼 궐련을 나누어 피운다.

"형씨."

"."

"불각처 생각이 나는디, 기집이란 요물이랑께."

"저 집 짓는 것을 보니, 기생집이라 허니 말이요. 피 빨아먹는 깍다구 겉은 기집들이 모여들겄다는 생각이 든다 그 말 아니겄어?"

"..."

"내가 봉밀구에 있을 적 이야근디 하참, 그 불쌍한 고아부들 땀 밴푼돈을 노리고 깍다구 겉은 기집들이 모여든단 말씨. 나도 푼푼 절용해서 모은 두 냥을 곱다시 삐얏기지 않았더라고? 첨엔 신세타령으로 사람 풀을 콱 직이놓고 다음은 살짝살짝 피함시로 간장을 녹이놓고 담은 심센 놈 불러다가 몽뎅이질헙디다요. 그래 내가 은두 냥을 어떻게 삐얏ƒ…는고 허니 심센 놈들 몽뎅이질에 그만 항복혔다 그 말인디, 심이 없인께로 맴이사 가뭄날의 찰흙맨치나 단단혔지마는 무신 수로 당할랍디여? 더 있다가는 게우 붙어 있는 살가죽도 남아나지 않겄다 생각허고 중행랑, 형씰 만내 여게 앉아 있는디 참말로 인생이란 일장춘몽이라. 그 일이 지금은 까매득허요잉. 하하핫 하하하..."

용이도 따라 웃는다.

"거놈의 은 두 냥만 있었으믄... 홍이 그놈아아 눈깔사탕을 사주는 긴데 그 빌어묵을 깍다구 겉은 기집년 밑구멍에 쑤시넣었으니 지기랄! 어른 체면이 말도 아니란 말요."

주갑은 하늘을 쳐다보며 빙글빙글 웃는다.

"그라믄 내 돈 십 전 빌려줄 것이니 사탕 사주소."

용이 웃음을 머금은 채 주머니끈을 끄르려 하는데

"그렇다믄 그 국밥집 아짐씨 박하분 한 통도 사주고 싶소잉."

슬쩍 곁눈질을 한다.

"시시한 소리, 그라믄 다 집어치우소."

끄르려던 주머니서 손을 떼는데 그러나 용이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주갑이 옆에 있으면 왠지 마음이 태평해진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집일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서다.

"이눔새끼 무슨 잔소리야! 품삯 정한 대로 주었으면 고만이지. 어제도 쭝얼쭝얼 턱주가릴 놀리더니 오늘 또오, 뭐 어째!"

캡을 쓰고 당꼬바지를 입은 사내가 눈알을 굴리며 소리치는 것이었다.

"아아니, 그리 화만 낼 것도 아니란 말이오. 경위가 그렇지 않다 그 말 아니오."

상투가 헝클어지고 몸집들이 좋은 일꾼들 속에 유독 볼품없는 사내, 박서방이다.

"개나발 같은 소리 하지도 말어! 따타부타 씨부려봐야 허기밖에 들 게 없어!"

"딴데서 한 푼수가 있는데, 생각들 해보시오. 장골이 온종일 일을 하다 보면 힘도 부치고 국수 한 그릇 막걸리 한잔이라도 마셔야 허릴 필 것 아니겠소? 사람을 그리 우격다짐으로 부린다고 비용이 더 적게 드는 것도 아니라 말이오."

"그럼 딴데 가서 일하면 될 거 아냐. 못 가게 누가 잡았나? 재수없이 왜 자꾸 이 지랄이야."

일꾼들의 일손이 느적느적해지고 행인들이 서넛 모여든다.

"아니 저 따깔모자 쓴 자가 누구다요?"

엉덩이를 털고 일어선 주갑이 길 가다 멈추고 시비 구경을 하는 사람에게 묻는다.

"글세, 도급 맡은 모앵인데 나도 모르겠음. 차린 꼴로 봐 무시기, 왜물으 많이 퍼마신 것 같소꼬망."

행인도 당꼬바지를 입은 사내를 좋잖게 바라본다.

"여기 다 물어보면 알게요만 나는 술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 말이오. 그러니 뭐 술 생각이 나서 하는 얘기도 아니고 뒷바라지할 여인네들이 없어서 점심을 안 내놓겠다는 것은 알 만한 얘기요만 술이야 술집에서 가져오는 거 아니겠소? 출출한데 한잔씩 들이켜면 일도 신이 나서 많이 할 게고."

박서방은 눅진눅진하게 물러서질 않는다.

"이눔새끼가 도대체 너 뭐길래, 뭘 믿고 이러는 게지?"

"허허 참 믿을 것이 어디 있다고? 뭘 믿는단 말이오. 본시 술은 즐기지 않는다 그러지 않았소? 경위가 그렇지 않다 그 얘길 하는게요."

엇비슷하게 되풀이되는 얘기에 사내는 사내대로 화통이 터졌는가

"이런 벽창호 같은! 이 건방진 새끼야!"

주먹을 쥐고 박서방의 면상을 내리친다. 박서방이 퍼썩 쓰러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주갑이 달려간다. 어느덧 그는 사내 뒷덜미 양복깃을 낚아챈다.

", 아니!"

사내는 목을 흔들어대며 돌아서려 한다. 그러나 좀처럼 그렇게 되지는 않았고 눈알만 뒤로 돌아가고 목은 삐딱하니 기울어 마치 목병 앓는 사람의 꼴이 되었는데 구경꾼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진다. 용이도 껄걸 웃는다. 몸집이 땅땅한 사내는 실상 입으로만 큰소리를 쳤지 힘은 별것이 아니었던 모양이고 삐쩍 말라서 뼈다귀만 남은 것 같았으나 노동에 단련된 주갑의 뚝심은 보기와는 달랐다.

", 넌 누구야!"

"누구긴, 조선 사람이어라우."

", 이새끼 죽고 싶어 이래!"

"엄살도 가지가지랑께."

"못 놓겠어? 놓아!"

"놓는 거야 어렵잖은디 보아허니 나이도 많들 않은개비여? 쇠가 굳은 것도 아닌개비여? 검배팔도 아닌개비여? 헌디 워찌 입정은 그리 더럽고 손목때기는 방정스럽다요?"

구경꾼들은 또 웃는다. 일꾼들은 숫제 일손을 놓고 모여든다. 버둥거리다가 간신히 빠져 나간 사내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다.

"이새끼!"

"하따 천지간에 새끼 아닌 게 있더라고? 사람 새끼냐, 짐승 새끼냐, 조선놈 새끼냐, 하 이거 아부지한테 미안스럽소잉. 용서하시쇼. 아무튼 조선 사람 새끼냐 왜놈으 새끼냐, 그거는 구별되얐이믄 쓰겄소잉. 따깔모자 썼다고 까불지 마시라 그 말인디."

"이새끼 수상한 놈이구나."

사내는 위신을 찾으려고 무척 애를 쓴다.

"수상하기사 이녁 아닌게라우? 꼴을 보면 알쪼다 그 말인디, 얼마에 도급을 받았는지 모르겄소만 내 보기에는 도급 맡을 만헌 인재도 아닌 성싶고오, 내 이런 형편은 다소 안다 그 말이여. 공사판이라면 안 댕기본 곳이 없잉게로 눈치 하나 벌었제. 물어보나마나 뻔혀. 도급 맡은 인재라면 이러크름 곤장허지는 않다 그거여. 십장이제 십장, 허니 술값 점심값을 이녁 개비에 넣어부맀다 그거여. 뻔혀, 뻔허다 그거란 말시."

파랗게 질렸던 사내 얼굴이 순간 홍당무가 된다.

"이눔새끼 죽어봐라!"

미치광이처럼 벽돌이 쌓인 더미 쪽으로 몸을 돌린다. 벽돌 하나를 집는 순간이었다. 크다만 짚세기 신은 발이 벽돌 집은 손을 밟는다. 일꾼 중의 한 사람이었다. 험악해진 일꾼들의 눈이 밟힌 손으로 집중되고 주갑은 내리 지껄이고 있었다.

"모두 벅수여, 벅수랑게로. 한 공사판에서 함께 품일 판달라치면, 같은 처지 한 형제 겉은 처지 아니더라고? 합심을 허얄 것인디 한 사람을 매를 맞고 다른 사람들은 구겡만 허고 어디 이런 인심이 있을 것이요? 다같이 손해보는 처지랄 것 겉으면 다같이 따져야 그래야 되는 것인디."

벽돌은 집지 못하고 간신히 손만 뽑아낸 사내, 겁에 질려서 사방을 둘러본다. 빙 둘러싼 일꾼들의 눈에는 살기가 돌고 그 살기에 기름을 붓듯이 주갑은 여전히 지껄여대고 있다. 사내는 잽싸게 인부를 울타리를 비집고 뛰어간다. 뛰면서

"이 이 개새끼들! 영사관에 알려서 혼달음내줄 터이니 꼼짝 말고 있어!"

고함을 친다.

"굿헌 뒤 날장구 친당께!"

주갑이 사내 등을 향해 응수한다. 그러고는 허허어 허허어 하고 웃는다. 구경꾼 일꾼들도 웃는다. 박서방은 뒷전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좀도적이여, 좀도적, 두고 보랑께? 내일이믄 점심값 술값이 나올것이요. 좀도적이란 본시 겁이 많으니께, 좀도적이란 으레 계집이나 아아새끼들, 심이 없는 사람들이나 이분이분 건디리는 불쌍한 친구랑께. 뭐 연장 들 것 없이 손목때기만 한분 밟아주어도 간이 오그라들었을 기고오."

 

 

8. 심장을 쪼개어 바치리까

길상은 뒤곁에서 서희의 노한 음성을 들었다. 그의 노여움은 용이보다 자기 자신에게 던져진 것이라 생각한다. 뒤곁을 들락거리며 일을 하던 새침이 달래오망이가 길상을 힐끗힐끗 훔쳐본다. 이들 역시 길상과 마찬가지로 용이를 거쳐서 길상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용이와의 깊은 사연을 잘 모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왜들 이러는 게지? 모두들! 하는 모두들, 그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었고 그간 서희의 무거운 침묵을 이들은 잘 알고 있다. 때때로 벌어지는 체통 잃은 신경질도 보아왔다. 왜 그러겠느냐? 중늙은 찬모와 어린 계집아이는 길상이 회령에다 여자를 얻어놓은 때문이라하며 수군거렸다.

"우리 아가씨보다 그 과수댁 더 미인으로 생긴 모앵이디?"

호기심에 차서 달래오망이가 말하면 새침이는

"설마... 우리 아가씨보다 그럴 리 있겠슴둥?"

그의 이름대로 새침해서 말했고

"그러문 어째 빠졌는가?"

"그러기 별난 일이랑이."

"송애는 상기 혼자 생각으 한답매?"

"어째 생각으 앙이 하겠슴둥?"

"그래도 소앵이 없지비. 돈이구 권세문 제일인 이런 세상 암잉둥? 그것도 싫당이, 그런 사람으 송애가 목으 매다안다고 무시기 맘 돌리겠음?"

소문이라는 것은 흔히 사실보다 한발 먼저 가는 수가 있다. 길상의 이번 경우가 그러하다. 회령 한영여관에서 우연히 만난 옥이네라는 젊은 과부는 시초부터 치한의 추태 대상으로 나타났었다. 송장환 같은 순정파라면 모를까 술집 여자를 희롱한 경험이 있었고 스물일곱 나이의 건장한 사내인 길상에게는 그 사건이 자극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고, 해서 그는 '내가 알기론 우리 사내새끼들이란 본시부터 아까 그 치한 같은 종자여서, 성인군자도 여자와는 무관하지 않았고, 하물며 우리네 범부들이야... 흐흠 사실은 왈가왈부할 것도 아니었지.'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 모녀에게 도움을 준 것에는 별 저의가 없었다.

"손님으 어찌 만나뵈옵습매까?"

고개를 숙이고 여자가 물었을 때도 무심히 말했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장거리 복지곡물상회로 연락을 하라고. 여자를 두고 정사를 생각했더라면 길상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다만 자진하여 딸을 떠맡기려는 은씨를 귀찮게 생각는 터라 그 은씨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고 싶은 기분은 있었던지. 소문은 바로 그 은씨 입에서 시작된 것이거니와 창고 앞에서 응칠이가 그 여자와의 일을 말했고 송애가 험악한 태도로 대했을 때 사실 소문은 앞서 와 있었다 할 수 있겠다. 여자에 대해 심상찮은 욕망은 이미 발동된 후였다 하더라도 회령에서 가끔 피우는 바람기였을 뿐 구체적인 것인 아니었으니 말이다.

"김형, 거 소문 고약하던데 설마 사실은 아니겠지요?"

언젠가 송장환이 물어본 일이 있었다.

"왜요? 사실이면 어쩌시겠소?"

"턱없이 품행이 방정치 못하오."

"그럼 머릴 깎을까요?"

"머리 깎은 놈도 마찬가집디다. 거 불쌍한 과부 울리지 말구 정들기 전에 손 떼시오."

길상은 옥이네에게 어떤 장래를 약속하는 따위의 언질을 준 일은 없다. 냉정하다기보다 무책임했다. 그것을 그는 여자에게 감추려 하지 않았다.

"손을 떼라니요? 장가갈 생각인데 그러시오?"

여자에 대한 감정이 무책임했을 뿐만 아니라 소문에 대해서도 길상은 무책임했다. 여자와의 혼인을 그는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면서도 입으로 부담 없이 지껄이며 스스로 소문을 조장해온 것이다. 누가 어느 정도의 소문을 서희에게 옮겨놓았는지, 아니면 새침이 달래오망이가 하는 말을 그들 모르게 우연히 들었는지 알 길은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희령의 일을 서희는 거의 정확하게 알고 있으리라는 것이다. 가느다란 실오라기 한 가닥 같은 귀띔만 잡아도 예리한 추리력은 맹렬하게 인내 깊게 전체를 규명해나가고야 마는 그런 지독한 성미였으니까. 그간 길상과 서희 사이에는 줄곧 침묵이 계속되어왔었다. 그것은 바람 없는 바다같이 표면상으로는 지극히 조용했었지만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생물들이 끊임없는 사투를 벌이고 있을 바닷속처럼 서희 심중 깊은 곳에서는 모조리 동원된 지혜와 걱정이 무서운 싸움을 벌이고 있으리라는 것을 일거수일투족 그 습벽을 잘 아는 길상으로서는 능히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길상의 사랑이 범상한 남녀의 사랑일 수 없게 잘 조련되어온 것이었다 할지라도, 관음상을 향해 느끼듯이, 전혀 일방적이요 정밀한 그런 유의 사랑이었었다 할지라도, 어느 날 갑자기 그 대상이 이쪽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게 된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무상에서 보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일이며 상대의 고통이 고통으로 오되 희열이 따를 것이 거의 틀림이 없다. 그런데 길상은 왜 절망하는 것일까. 견디기 어려운 오뇌 속으로만 빠져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견디기 어려운 오뇌 속으로만 빠져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더 이상 접근할 수 없는 거리에서 이상현은 빙빙 돌다가 떠나고 말았다. 그들의 접근할 수 없었던 거리는 길상과 서희 사이의 거리이기도 하다.

서희의 대상으로서 상현은 사모와 기혼자, 이두 상극선상의 존재며 길상은 야망과 하인,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상극된 것은 아니다. 야망은 불순물이다. 불순물은 혼합될 수 있는 것이다. 상현과 사이에 질러놓았던 지름목은 길상과 서희 사이에는 제거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드러내려는 서희의 모험을 길상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서희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다던 길상은 그러나 그것만은 용납할 수가 없다. 서희와의 거리는 절대절명의 것이다. 왜냐? 자존심 따위, 사내로서의 오기 따위 그런 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랑의 순결 때문이다. 순결을 지키고 싶은 때문이다. 대체로 길상의 심정은 이런 정도로 밝혀볼 수 있겠고 서희의 경우, 길상이 생각했던 것처럼 서희 역시 그렇게 믿고 있음을 틀림없다.

시초부터 야망의 수단이 아닌 길상과의 결합은 가능할 수 없었다. 적어도 길상과의 결합에 있어 그것 이외 어떤 구실로 서희는 자신을 설득시킬 수 있었겠는가. 자식을 버리고 구천이를 따라간 생모를 생각해서라도, 그렇다면... 서희의 보다 깊은 영혼 속에는 수명적인 길상과의 애정이 잠을 자고 있었다 할 수는 없을까. 무시무시한 내적 투쟁은 과연 야망의 좌절에서만 빚어졌다 할 수 있을까. 강렬한 질투, 강렬한 패배감, 광적이 증오심 - 이튿날 열두시가 지난 뒤 길상은 편지 한 장을 조끼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집을 나섰다. 처음에는 왼편 쪽을 곧장 가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발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빨리한다. 그가 들어간 곳은 상의 학교 교사실이었다. 윤이병이 넋 나간 사람같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윤선생."

윤이병은 펄쩍 뛰듯 놀란다. 잘못을 들킨 사람 같고 몸집이 더욱 더 작아 보인다.

"아 예. , 어떻게 오시었소?"

헐레벌레 일어서며 의자를 끌어당겨준다.

"자아 앉으시오."

"고맙소."

"무슨 일로?"

역시 안정을 잃은 표정이다.

"송선생은 아직 공부 가르칩니까?"

". 곧 끝날 겝니다."

"그 댁에 손님이 와 계시다는 말을 들었기에."

"? 손님이라구요?"

"연추에서 오신 손님이라 들었는데 편지 한 장 그 편에 보낼까 싶어서요."

", ."

하는데 윤이병의 눈에 긴장하는 빚이 돈다. 그러니까 금녀를 데려가면서 발목을 묶어놓듯 자기 끄나풀 되기를 강요했던 김두수에게 한 달 남짓 되는 동안 윤이병은 비교적 충실히 첩자 노릇을 한 셈이었다. 김두수가 용정에 나타나는 일은 드물었고 수족 노릇을 하는 한가라는 위인에게 연락을 취하곤 했었다. 그런데 우선 김두수가 수집하고자 한 정보는 최서희를 중심한 일군의 사람들, 영문을 모르는 윤이병은 서희를 중심한 일군의 사람들이 독립운동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고 그러는 한편 서희의 미모나 처지 그리고 재산 등 매우 식지가 움직이는 것을 윤이병은 다만 방도가 막연하여 관망 상태에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저런 일들로 하여 자연 태도에 심상찮음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요즘 듣건대 윤선생께선 술을 많이 하신다면요."

신문에 눈을 주다가 길상이 묻는다.

"많이 하다니, 낭설이오."

윤이병은 필요 이상으로 강하게 부정한다. 순간 길상의 머릿속에 떠오른 말이 있었다. '윤선생, 그 사람 왠지 불안한 것 같소. 요즘 돈 쓰는 게 헤프고 남자가 몸치장은 뭣 땀에 그리 하는지, 나가는 월급은 뻔한데 말이오. 얼마 전만 해도 누이가 왔다면서 여비도 변통해가곤 했었는데...' 송장환은 입맛이 쓰다는 듯 뇌었던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작은 몸집이 더욱 줄어든 듯한 꼴을 하고 있긴 했으나 해사한 얼굴에 썩어울리는 하늘색 양복은 새로 지어 입은 것인 듯싶다. 윤이병은 한동안 어디 몸이라도 불편한 듯, 망설이는 것 같더니

"손님이라면 역시... 운동하는 분이겠군요."

그 말은 일기 시작한 의혹에 갈구리처럼 걸려들었다.

"아니 내가 듣기론 친척이라든가, 그렇게 들었소."

하면서 길상은 송장환이 경계하여 윤이병에게 아무말 하지 않았던 것을 눈치채었다. 손님이란 다른 사람 아닌 권필응이었다. 마침 종이 울리고 송장환이 벌건 얼굴을 하고서 돌아온다.

", 김형."

하고 웃는다.

"끝난 게요?"

", 토요일이니까."

윤이병은 가만히 다음 대화를 기다리는 눈치다.

"좀 나갑시다."

술 마시러 나가자 한다면, 해도 안 저물어 이상할 게고 윤선생도 나갑시다, 하지 않을 수 없어 길상은 난처한 대로 그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다.

", 그럽시다."

송장환은 다행히 왜 그러느냐 하고 묻질 않았다.

"그럼 윤선생, 나 먼저 나가겠소. 뒷일 부탁합니다."

윤이병은 그러라고 대답하기는 했으되 실망보다 묘하게 외로운 표정이 된다. 거리로 나선 길상은

"권필응 선생 아직 안 떠나셨지요?"

"."

"댁으로 혼자 찾아갈까 하다가 송선생 편에 전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뭔데 그러시오?"

"편지요."

"이동진 선생께 말입니까?"

"그렇소."

"그것뿐이오?"

"그런 셈이지요."

"그건 그렇고."

하다가 송장환은 길 위에서 생각하는 것 같다.

"김형."

"."

"우리 강가에 회 먹으러 안 가겠소? 별일 없지요?"

"내일 회령에 갈 일만 남아 있소."

"그럼 됐수다."

송장환은 이마 위에 내려온 머리칼을 더풀거리며 걷기 시작한다. 나루터와는 사뭇 떨어진 한적한 강가 언덕에 제법 운치가 있어뵈는 주점이 하나 있었다. 풍류객에 고담준론의 우국지사 등이 드나드는 좀 색다른 주점인 것이다.

"아주머니, 횟거리가 뭐 있소."

송장환은 들어서면서 물었다.

"오늘 회는 안 되겠는데,"

"왜요?"

"물이 좋잖아요. 생선찜 같으면 되는데,"

"그럼 그거라도 해주슈. 우선 술부터 들여주시고요."

열려 있는 들창에서 강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방으로 들어간 송장환은 윗도리를 벗어놓고 자리에 앉는다.

"그동안 골치가 지근지근 쑤셨는데 오늘 좀 풀어야겠소."

중 본연 사건 때문에 송장환은 골치를 앓은 모양이다. 남의 집안 사정이어서 길상은 아무말 하지 않는다. 술이 들어오고 대작으로 몇 순배 한 뒤

"김형."

송장환의 표정은 자못 심각하다.

"."

"나 결국은 떠나기로 작정했소."

"이번에 말이오?"

"아니, 권선생께서 연추 다녀오신 뒤, 그 양반이 상해로 가신다니까 나도 동행할 작정이오."

"상해는, 왜요?"

"나야 뭐 본시부터 심부름꾼 아니오? 권선생 따라다니면서 시중이나 들어드릴 생각이오."

송장환은 조금 전의 심각했던 표정과는 달리 하하핫... 하고 웃는다. 그러나 공허한 울림이다. 그러고는 다시 우울하게 말없이 술을 마신다. 어느덧 생선찜도 들어왔고 주기도 상당히 올랐다.

"붕괴될 것이 시간 문제로만 남아 있는 대청제국인데,"

송장환이 얘기를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이놈의 땅 만주가 미묘하게 될 게고."

"이미 미묘하게 돼 있지요."

길상이 짜증스럽게 말한다.

"남의 집안싸움이라 해버리면 고만이겠으나 그게 그렇게도 끝나지 않을 테니 걱정이지요. 왕창 그냥 무너져서 그것으로 고만이면 중국을 위해서 그렇고 앞으로 전개될 우리들 일을 위해서도, 우선 우리가 뛸 수 있는 자리의 일관성은 있어야겠는데 말입니다."

"그 일관성이라는 것도 나름이지 뭐."

길상은 여전히 짜증스럽게 말했다. 뻔히 아는 일들을 밤낮 되풀이하는 것이 지겹고 그래서 송장환이 싫어질 때가 있다.

"그건 그렇소. 일본의 입김이 들어간 일관성이라면 그건 절망이지요. 아무튼 예상하건대 청조는 이곳을 그네들 마지막 보루로 삼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연해주와 중국 본토와의 연결이 어려워 질 게고 분열을 일삼는 게 인간 본성인데 활동 범위가 몇 동강이 나고 보면 작은 대가리들만 불어날 게고 처처에 흩어진 우리 이민들의 자각이란 발라 수도 없는 거구 그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자리에서 동화되고 만단 말입니다. 영원히 죽는 거지요."

"그럴까요? 나는 그렇게는 생각지 않는데? 삼백 년 가까이 만주족한테 지배되어온 한족이 오늘날 청조를 엎어버리려 하는 것을 눈앞에 보지 않소?"

"소수민족하곤 경우가 썩 다르지요. 조선이 삼백 년을 지배당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씨가 말랐을 것이오."

길상은 잠자코 만다. 그것은 송장환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옳아서 어쨌다는 거냐, 다만 옳을 뿐이 아니냐, 너는 그 자리에 그렇게 앉아 있고 나는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 있을 뿐, 너는 조급증에 사로잡혀 있고 나는 혼란 속에 빠져 있다. 그것뿐이야. 권필응이라는 사람을 따라간다고는 하지만 사실 어디로 가나 교육 사업 이상의 적격 장소는 아마 없을 걸? 근거와 열정은 있어도 자넨 영악하질 못해. 민첩하지도 못하고 말이야. 길상은 속으로 뇌이며 송장환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까닭 없이 깔보는... 그것은 자기 자신을 깔보는 심정임에 틀림이 없다.

"하여간에 이러나저러나 답답하기론 마찬가진데, 아무튼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처음부터 손문이 일본을 끌어들이려 했던 그거요. 외제를 끌어들여 안 망한 나라가 없고 설령 망하지 않았다 손치더라도 제 육신의 일부를 찢어준 역사를 우리는 잊을 수 없을 거요. 결국 배신이 다반사로 되어 있는 일본이고 보면 약속대로 할리도 만무고 그래서 우리는 그 광동점령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보았소. 어째 그 일을 생각하면 김옥균의 경우가 눈앞에 떠오른다 말입니다. 물론 땅덩어리가 크고 하니 그 규모에 있어서나 광범위한 조직 도처에서 감행되는 치열한 투쟁이라든가 시야가 넓은 지도자에 자각하고 호응하고 나서는 일반민들, 어느 면으로는 석금을 논할 처지는 아니지만 겨우 몇자루의 총과 일본도 나부랑이로 궁성 담장이나 넘던 김옥균이 왜 눈앞에 떠오를까요? 왜 모두들 전철을 밟느냐 그거겠지요.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을 거라구."

"경상도 속담에 낭개에도 돌에도 못 댄다는 말이 있지요. 그러나 할 수 없어 그랬다는 변명 같은 얘긴데, 그 손문선생께서도 다급한 김에 그랬을 거요. 조갈증이 나서 말입니다."

길상은 심각한 송장환을 발길질하듯 냉정하게 웃는다. 그러나 송장환의 열이 식을 리 없다.

"하여간에 그놈의 혁명 세력이라는 것도 가닥이 너무 많아서 과연 앞으로 중국이라는 이 땅덩어리 위에 어떻게 엮어나갈는지, 우리는 또 어느 곳에다 포석을 놔야 하는지, 그러나 이렇게 미적지근하게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들은 말에 의하면 혁명 단체의 결사대 대원들은 일 주일 이내에 효험을 나타내는 치명적인 독약 주사를 맞고 전투에 나선다고도 하고... 그런 말을 들으면 왠지 우리는 잠을 자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든단 말입니다."

언제 내렸는지 들창 밖에 비가 내리고 있다. 빗발이 고와서 거의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안개에 싸인 강물과 강물에서 번져나간 것만 같은 모래밭과 거의 평면으로 펼쳐진 숲, 그리고 뗏목들, 멀지않아 겨울이 오고 강물이 얼어버리면 뗏목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열띤 송장환 음성을 바람 소리처럼 이제는 무심하게 들으며, 술잔을 손에 들고 창 밖을 바라보는 길상의 가슴에 돌연 뜨거운 것이 치민다. 불덩이 같은 슬픔이, 생명의 근원에서 오는 눈물 같은 것이, 무엇 때문에 슬픈가. 무르익은 봄날 보랏빛 꽃이 포도송이같이 주렁주렁 매달린 등나무에는 크고 퉁겁고 윤이 흐르는 곰벌만 찾아왔었다. 스산한 가을바람이 부를 들판의 작은 꽃에는 무슨 벌레가 찾아드는 걸까. 심장을 쪼갤 수만 있다면 그 가냘픈 작을 벌레에게도 주고, 공작새 같고 연꽃 같은 너희 애기씨에게도 주고, 이 만주 땅 벌판에 누더기같이 찾아온 내 겨레에게도 주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운명신에게 피흐르는 내 심장의 일부를 주고 싶다... 술잔을 놓은 길상이 담배를 붙여문다. 길상이 자기 얘기로부터 와전히 떠나 있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송장환이 당황한다.

"김형."

"."

"김형이 무슨 일로,"

"뭐 말이오?"

"이동진 선생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편지 때문에 그러시오?"

"좀 궁금해서,"

길상은 갑자기 취기 어린 눈이 된다.

"이 사람이 언제부터 남의 일에 열심인가... 좀 모르겠군."

담배를 비벼끄고 술잔에 술을 붓고 그리고 마신다.

"김형 심경에 무슨 변화라도 생겼나 싶어서요."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그런 변화 말이오?"

피식 웃는다.

"우리 상전 애기씨 혼처 땜에 그러는 게요."

"...?"

"연추에 계시는 그 어른은 우리 상전 애기씨 아버님이나 다를 바 없는 분이니까."

"어디 혼처가 생겼다 그 말이오?"

"? 생겼다면 송선생 마음이 좀 달라질까?"

"허 참 거북하게 자꾸 이러기요?"

"혼처가 아니 생기니 그 어른더러 오시라 가시라 하게 됐다 그 말 아니오. 나도 나이 삼십을 바라보는데 몽다리귀신은 되기가 싫고,"

"그러면!"

"파발은 안 태우고 말만 달리면 되겠소? 성미도 급하지."

송장환은 서희와 길상과의 혼인을 생각했음을 분명하다. 얼굴이 빨개진다.

"회령서 눈이 빠지게 날 기다리는 과수댁이 있다는 것을 설마 송선생이 모르실 리가 없겠는데?"

길상은 큰 소리로 웃는다. 두 사람은 어둡기 전에 우산 하나를 빌려 쓰고 주점을 나왔다. 붐비 같은, 그러나 한결 살갗을 차가운 비를 맞으며 이들은 윤이병에 대한 얘기를 약간 했다. 서로간에 경계하라는 암시 정도로. 이튿날, 이른 아침 길상은 회령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서희는 깨어서 길상이 나가는 것을 알고 있는 기색이었고 사업을 위한 회령행이지만 서희의 기분이 심상할 리 없다는 것을 길상은 쓴약을 머금듯 느낀다. 밤에는 계속하여 부슬비가 내리더니 이른 아침 하늘을 맑게 개이고 얼마지 않아 해가 솟아오를 것 같다. 그러나 거리는 아직 조용하다. 장거리 쪽으로 들어섰을 때 무엇을 하러 나왔는지 우두커니 서 있는 월선의 뒷모습이 눈에 띈다. 길상은 인사를 할까말까 망설이다가 축 처진 두 어깨며 힘없이 늘어뜨린 두팔 하며 망실 상태의 모습이 안쓰러워서 못 본 척 급히 지나쳐버린다. 떠나기로 작정한 용이와 가게를 차리고 앉은 월선이, 축 처진 두 어깨며 힘없이 늘어뜨린 두 팔하며, 길상은 월선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오광대굿이 벌어지던 하동 장터의 장작불이 타오르던 밤. 명주수건을 풀어 어린 봉순이 얼굴을 싸주던 그 외로운 여자. 순간 길상은 목을 꺾어 발끝을 내려다보며 달아나듯 급히 걷는다.

마차는 쾌적하게 달렸고 푸른 두만강을 질러서 나룻배는 대안 조선의 땅으로 길상을 내려놨다. '빌어먹을! 용이아제도 떠나고 모두 다 떠나는구먼. 나도 따라갈까부다. 송선생 따라서 상해나 북경이나, 뒷골목의 쓰레기통 뒤지는 거지가 돼보든지 아니면 권총 솜씨를 익혀보든지.'

자기 몸가짐이 허물어져가는 것 같다. 팔난봉으로 히죽히죽 풀려나가는 것 같다. 아니 그보다 높은 봉우리를 향해 쇄부채 같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한 마리의 독수리 같은 생각이 든다. 그 영약한 눈알과 발톱을, 전율하는 힘을, 심장을 쪼아먹는 그 구부러진 주둥이를, 도시 운명은 어디 있단 말인가, 평화는 어디 있고 사랑은 또 어디 있는가, 심장을 쪼개어 받쳐질 그것들은 도시 어디메에 있는가... 싸움은 있을 뿐이다. 자기 자신과의.

"날씨 좋습니다."

같은 나룻배를 타고 왔을 뿐인 생면부지 나그네에게 길상은 말을 걸었다.

"비 오신 뒤라 산천이 맑아졌소이다."

나그네는 묵객 같은 말을 한다.

", 사람의 마음도 산천같이 씻겨졌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글쎄울시다. 사람의 마음이 빗물에 씻겨진다면야 공자 맹자가 무슨 소용이겠소."

나그네는 성큼성큼 앞서가고 뒤따르던 다른 행인도 길상을 앞서 지나가고 하늘의 구름만이 다가오다가는 머리 위를 넘어 사라진다. 회령으로 들어가서 여관에 방을 잡은 길상은 저녁을 청해놓고 행구에서 책자 하나를 꺼내어 비스듬히 드러누워 읽기 시작한다. 책자는 벌써 오래 전 상해에서 간행된 추용의 저술 혁명군이다. 내용은 청조 타도의 선언이요 혁명의 필연을 설파한 것으로, 그 저자도 이미 옥사하여 세상에 없다. 이 책자를 길상은 송장환에게 빌렸던 것이다.

"저녁상 들어가요오."

방 밖에서 뜻밖의 여관집 안주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상은 재빨리 책을 뒤집어놓으며 일어나 앉는다. 방문을 열어놓고 밥상을 들여오는 안주인, 뜻 모를 미소를 띤다.

"아주머니께서, 이거 황송해 어쩌지요?"

"그놈자식 석이놈을 심부름 보냈더니 영 와야지요? 바쁘면 내 장산데 어쩌겠소."

"천천히 먹어도 되는데..."

"이거 다 김씨 탓이야."

"?"

"쓸만한 계집을 싹 돌려뺐으니 내가 이 고생 아니오? 자아 어서 들어요, 식기 전에,"

밥그릇의 뚜껑을 벗겨준다. 길상이 수저를 드는데 여자는 나가지 않고 엉거주춤 서 있다.

"그래 요즘 재미가 어떻소? 깨가 쏟아지는 거 아니오?"

길상은 비웃음 반 무안기 반 하여 웃는다.

"나야 뭐 장사가 되니 좋기야 좋지만 살림을 차려놓고 밥은 여관에 와서 자시는 심보를 모르겠구먼?"

단순한 호기심을 위한 천착인가, 아니면 나이를 잊은 계집의 교태인가. 길상은 밥을 뜨다 말고 여자를 힐끔 쳐다본다. 여관에 들어올 때 가짜배기 상아 물부리에 궐련을 끼워 물고 태깔을 부리며 앉아 있던 여자의 남편 얼굴이 떠오른다.

"아주머니가 보고 싶어서요."

"정말?"

"네에!"

길상은 후딱후딱 밥을 먹기 시작한다. 여자는 간드러지게 웃다가

"늙은 게 한이로군."

겨우 방문 닫아주고 나간다.

"제에기랄!"

밥을 먹은 뒤 길상은 여관을 나섰다. 복지곡물상에서 계산을 끝내고 내온 술상을 마다하지 않고 얼근히 술이 취해 거리를 나섰을 때 밤은 꽤 저물어 있었다. '용정에는 송애도 있고 그 밖에 시집오겠다는 처녀도 있고 은씨 딸도 그만하면 됐는데 왜 하필 과부장가, 과부장가, 하는 겔까. 이 나쁜 놈의 새끼야! 언제든지 손쉽게 버리려고 그러는 게지? , 누가 약속이라도 했더란 말이야? 밖에서 과부장가, 과부장가 하는 것 하고 옥이네한텐 손님같이 찾아가는 것하곤 상당히 거리가 있지. 여자는 함께 산다는 것 꿈도 꾸고 있질 않단 말이야. 양해하고 들었는데 나쁜 놈이고 좋은 놈이고 어딨어? 여관에서 못 사내들 희롱감이 되느니보다 아암, 여자는 다행으로 생각할 게야. 그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됐으니 어차피 누구에게든 먹인 먹이야. 여자를 위해 슬퍼할 것도 안스러워할 것도... 음 뭐 그렇지 뭐.'

비틀거리며 여자가 세든 방의 방문을 열었을 때 남폿불 아래서 바느질을 하고 있던 여자는 후다닥 놀라서 일어섰다. 아랫목에는 옥이 잠들어 있었다.

"누가 잡아먹으러 왔나? 놀라기는 왜 놀라는 게요?"

여자는 체념한 듯 눈을 내리깐다. 자기 몸을 바치는 체념이 아니다. 사내의 마음을 체념하는 것이다.

 

 

9. 구만리 장천 나는 새야

일요일이어서 홍이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길거리에 아이들이 노는데 저만큼 주갑이 보따리 하나를 들고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주갑이아제? 어디 가요?"

"저기, 저어기."

팔을 들고 허공을 가리키며 벌죽 웃는다.

"저기, 저어기, 어딘데?"

"강가에 간당게로."

"강가에? 뭐하고 갑니까?"

"그거사 뭐,"

"그라믄 나도 따라갈라요."

"니가?"

"."

"아따, 그리 허자고."

이번에는 시꺼멓게 담뱃진에 절은, 들쑥날쑥한 이빨을 드러내놓고 웃는다. 홍이는 주갑이가 좋다. 아버지처럼 무섭지 않아서 좋았고 엄마들처럼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좋았다. 그가 하는 말이면 어쩐지 우습고 재미가 난다. 길모퉁이를 돌아갔을 때

"홍아, 이 보따리 좀 받더라고."

하며 주갑은 들고 온 보따리를 홍이에게 건네준다. 그러고 나서 때묻은 주머니를 끄른다.

"이보랑께."

잡화상 앞이다. 계집아이가 삐죽 얼굴을 내민다.

"여기 돈 두 푼인디 눈깔사탕 돈대로만 주시요잉."

그새 며칠 동안 집 짓는 곳을 찾아다니며 날품을 팔더니 돈푼 생겼다고 걸핏하면 홍이에게 군것을 사주곤 했었다. 그러면 홍이는 으레 그러려니 사양 없이 받아먹는 것이다. 주갑은 보따리를 되받아 들고 홍이는 신문지 조각에 싼 사탕을 쥐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강가에까지 갔을 때

"주갑이아제."

"워찌 그려?"

"정말로 우리 내일 촌으로 가요?"

"간당게로, 니 아부지가 그런다 혔응게로 틀림없이 가기는 갈 것이여."

"그라믄 나는 핵교도 못 가겄소."

"그놈의 공부 헌다고 벼슬헐 거란가? 성명 삼 자만 쓰면 된다 말씨."

"아제는 성명 삼 잔가 뭐? 성명 두 자 아니요? 주갑, 나도 이홍."

"이잉 안 그려. 주씨 성에다 갑이니께로 성명 삼 자 아니더라고?"

홍이는 개글개글 웃는다. 웃다가 다시 시무룩해지며

"핵교 못 가믄 정호도 못 보고..."

"정호가 누군디?"

"우리 반에서 젤 공부 잘하고 또오 나하고 젤 친한 동무요."

"처처에 사람은 살고 있잉게로 맨들면 되는 거여. 걱정허지 말어."

"옴마도 보고 저블 기고..."

"그건 그려. 내가 생각혀도 국밥집 니 엄니 데려갔이면 좋겄는디."

그 말 대꾸는 없다. 강가 모래밭을 밟고 가던 주갑은

"홍아."

"?"

", 저어기 저기, 풀밭에 가서 나비나 잡고 놀들 않겄어?"

"나비가 있어야제요."

"그라면... 옳지! 여치가 있을 긴디 가보더라고."

주갑은 별나게 갑친다.

"와요?"

"허 이눔아아가 어른 말 들어야 헌당게로?"

여간 엄격하지가 않다.

"나 좀 있다 널 부를 것이니 어른 말 듣더라고."

홍이는 시부롱해서 내려온 곳을 되잡아 풀밭 쪽으로 간다.

"홍아-"

홍이 휙 돌아본다.

"눈깔사탕 빨고 이잉-"

홍이는 풀밭에 와서 펄썩 주저앉으며 사탕 한 알을 입에 넣는다. 따돌리려 드는 주갑이 섭섭해서가 아니다. 눈물이 날 것 같다. 길에서 아이들과 놀 적에는 그렇지도 않았는데 내일 떠난다는 생각을 하니 슬퍼진다.

'와 가겟집 옴마한텐 못 가라 카노. 와 아부지는 성만 낼까? 가겠집 옴마한텐 한분 가보지도 않고, 이렇기 말도 없이 떠나믄 정호가 나를 나쁘다 할 기고. 손가락 걸어서 지하고 나하고 맹세를 했는데 말이다. 선생님도 그렇고 김생원도 그렇고... 아부지는 와 그렇게 성만 낼까.' 사탕이 녹아서 침이 흐르려 한다. 얼른 침을 삼킨다. 그러나 홍이는 이내 달디단 사탕맛과 여치를 잡느라고 시간 가는 것을 잊고 슬픈 생각도 잊는다. 풀냄새도 좋고 발등을 간질여주는 풀의 촉감도 기분에 좋다. 뒹굴어보기도 하고 벅수를 넘어보기도 하고 풀꽃을 따서 신발에 소복이 담아보기도 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홍아--"

주갑이 부르는 소리에 놀라서 일어선다.

"여기 있소오-"

신발을 들고 홍이 쫓아 내려간다. 신발에 담았던 풀꽃들이, 그새 시들어서 모래밭 위에 더러 떨어진다.

"하 참, 몸이 날아갈 것같이 개볍네. 이러크름 좋은 거를..."

눈이 둥그래져서 홍이는 주갑이를 쳐다본다. 전혀 딴 사람이 거기 서 있는 것 같다.

"매욕하고 머리도 감고, 홍아? 이자는 사람겉이 뵈들 않더라고? 그렇지야?"

"옷도 갈아입었소?"

"하모. 무명옷으로 갈아입었제. 여름도 설설 물러갔잉게로."

주갑이 싱글벙글 웃는다. 단정하게 빗어올린 상투하며 땟국이 빠져버린 얼굴, 그리고 흰 베옷은... 학이 한 마리 거기 서 있는 것 같다. 입술은 푸르스름하다. 강물이 차가웠던 게다. 제삿날이면 옷 갈아입고 망건 위에 갓을 쓰고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홍이 마음에 자랑스러움이 넘쳤었다. 마찬가지로 지금 학같이 슬기롭게 보이는 주갑이아제, 왠지 가슴이 찐해진다.

"이자부터 벗은 옷을 빨아야제."

엄지손가락으로 코끝을 퉁긴다. 본시대로의 주갑이다. 그 꼴은.

"우리 옹마보고 빨아돌라 카믄. 남자가 우찌..."

홍이는 민망해진다.

"아니여, 남자가 우찌랑이? 그 따위 소린 약은 버려지가 허는 말인디 공자왈 선비들 양기로 모자래서 엄살 떤 거란 말씨."

"양기가 머요?"

"그건 니가 상투 찌르게 되면 저절로 알게 되여."

주갑은 물가에 주질러앉는다. 조그맣게 된 토막 비누를 꺼내여 빨래를 시작한다. 홍이는 옆에 쭈그리고 앉는다. 가죽과 뼈뿐인, 그러나 뼈마디가 굵은 손이 익숙하게 비누질을 하고, 주무르고 비비고,

"아제요."

"말하더라고."

"맹세를 안 지키믄 죽어 저승에 가서 세를 뺀다 카든데,"

"그려."

"그라믄 우짜꼬? 나 정호하고 맹세를 했는데."

홍이는 울상이 된다.

"무신 맹세를 혔는디?"

"후제, 크믄 말 타고 총 들고 독립운동하자고."

"후제 일 아니랑가?"

주갑은 껄걸 웃는다.

"하지마는 촌에 가서 공부도 안 하고 촌놈 되믄 말을 우찌 탈 기요? 총은 우찌 쏘고? 우리 선생님이 그러는데 배워야 나라를 찾는다고,"

"지이기럴! 아따야아 안 배워도 동학난리 때 이 주갑이 총 쏘았당께. 말이사 안 타보았지마는, 자고로 식자우환이란 말이 있덜 않더라고? 니 거 무른 대가리에 식자깨나 들었다고 벌써 우환인 기여. 하늘 보고 땅 보고 절기를 알면 세상 이치는 거기 다 있다 그 말인디, 애라 모르겄다."

하더니 주갑은

"새가 새가 날아든다아-"

별안간 목을 뽑는다. 어찌나 목소리가 크든지 홍이는 깜짝 놀란다.

새가 새가 날아든다아

온갖 새가 날아든다

남풍 쫓아 떨치나니

구만리 장천에 대붕새

문황이 나 계시니

기상조양의 봉황새애

문한기후 깊은 회포오

울고 남은 공작새

소선적벽 칠월야

....

기막히는 목청이다. 쩌렁쩌렁 산천을 울리는가 하면 애연하게 올라가고 침통하게 내려오는, 자유자재로 굴리는 가락가락 - 신이나서 앉은 채 어깨를 들석이기도 하고 목의 복숭아뼈가 전율하기도 하고 일손을 멈추며 얼굴을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본다. 구만리 장천을 나는 대붕새를 생각함인가, 만경창파 녹수상에 원불상리 원앙새를 생각함인가, 스르르 눈을 감고 눈꼬리에 한 줄기 눈물이 흐르듯.

성성제혈 염화지

귀촉도 불여귀이

홍이는 나른한 채 신발에 남아 있는 풀꽃을 모아 다발을 지어서 강물에 퐁당퐁당 담그곤 한다. 이따금 지나가는 뗏목배 나룻배 사공과 선객들 중에 좋다! 잘한다! 소리가 들려오고 뱃전을 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삿갓을 쓴 청인 사공들은 대개 이쪽을 응시한 채 가버리고 혹은 제 할 일만 하기도 하고.

야월공산 저문 날에

저 두견이 울음 운다아

이산으로 오며 귀촉도

저산으로 가며 귀촉도

짝을 지어서 우르-음 운다아

이이이이잇 이이잇 이, ,

주갑이는 다 빤 옷을 모래 위에 펴놓고 물가로 돌아온다. 곰방대를 꺼내어 담배를 넣는다. 손등은 까맣고 물에 불은 손바닥이 희여끄름하다.

"주갑이아제."

"워째 그려?"

"주갑이아제는 아들 없소?"

"있었제."

"어디에?"

"그거는 지금 모르겄구마."

"그라믄 미적단이 데리갔소?"

"아니제. 전생에 있었다 그거여. 아들만 있었간디? 딸도 있었고 마누래도 있었고 사방처마에 풍겡이 빙글빙글 도는 기와집에 살았었구마. 앞뒤로 기화요초는 우거지고오 나무가 너불너불 춤을 춤시로, 새들은 사철을 지저귀고 비단 보로 위에는 나는 이러크름 앉아서."

허리를 쭉 편다.

"치이 거짓말,"

주갑은 곰방대를 물고 불을 붙인다.

"들판에서 깜박깜박허는 별을 치다봄시로 그런 생각을 허는 것도 재미진 일이니께. 심심허거나 배가 고플 적에, 치불 적에 그런 생각허믄 배고픈 것 치분 것 더러 잊을 수 있다 그 말인디 홍이도 후제 그런 일이 있일 것 겉으면 그리 해보더라고?"

"주갑이아제, 배 많이 고파봤소?"

"하모. 배 많이 고파봤제. 헌디 굶는다고 사람으 목심이 관대로 없어 안 지니께 조화가 요상타 그거 아녀?"

주갑은 킬킬 웃는 것 같더니 성급하게 담뱃대를 빨아당긴다. 꺼지려던 담뱃불이 희미하게 피어나고 주갑이 콧구멍에서 연기가 풀려나온다.

"뭐니뭐니 허도 배고픈 정 아는 그게 사람으로서는 제일로 가는 정인디, 혀서 나도 니 아부지를 믿고 정이 들어서 따라가는 거 거로 시작된다 그거여. 저기 보더라고. 저기 물새도 모이 찾아서 지 새끼 먼저 먹이는 거, 어디 사람뿐이간디?"

두 다리를 세우고 무릎 위에 턱을 괴고 앉아서 풀꽃 한 송이를 띄워 보내고 있던 홍이 얼굴을 들면서

", 나도 아요!"

"뭐를?"

"주갑이아제."

"말허라니께."

"길상이아제 아요?"

"모르는디?"

"우리 선생님하고 친하고 또 나를 귀여워하고 또오 자알 생기고 또 공부 많이 하고."

하다가 킬킬 웃는다.

"언젠가 말이요? 작년인가, 아부지 심부름을 갔는데 길상이아제 방으로 간께 흐흐흐흣... 길상이아제 방으로 간께 말입니다. 아제가 들창문에 문구멍을 뚫어놓고 밖을 내다보고 있었소. 아제, 하고 불렀더니 손을 흔들믄서 가만히 있으라 안 캅니까?"

"워째 그러더랑가?"

"그러더니 아제는 나를 번쩍 안아서 들창문 문구멍에 눈을 갖다 대주느 거 아니겄소?"

"뭐가 있었지야?"

"참새요"

"참새애?"

". 참새들이 모여서 수수알갱이를 묵고 있는데 모두 새끼들을 데리고 안 있겄소? 어미 참새도 여러 마리고 새끼 참새는 더 많아요. 참 신기롭더마요."

"으음."

"길상이아제가 수수알갱이를 준 거라요. 그런데 길상이아제는 홍아! ? 한께 참새란 놈이 저리 사람을 안 믿으까? 문을 열고 내다보믄 다 달아나거든. 지금도 쫑긋쫑긋 사방에다 정신 파니라고 어미는 제대로 묵지도 못한다 말이다. 벌써 여러 날짼데 도무지 나하고는 친하려 안 하거든, 함시로 슬픈 얼굴을 하드라 말입니다. 나도 그때 문구멍에서 새끼 주둥이 열고 모이 먹이는 것 똑똑히 봤소."

주갑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 이른 새벽, 어둠이 걷혀지려면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 할 무렵이다. 실하게 꼰 새끼줄로 멜빵을 삼아 짐을 짊어진 용이와 주갑이, 옷보퉁이를 이고 간장이 든 두루미병 하나를 든 임이네. 그리고 조그맣게 만든 보따리를 짊어진 홍이는 흡사 바랑을 짊어진 새끼중 같았다. 이들 일행은 야간도주라도 하는 것처럼 소리없이 움막을 나서는 것이었다. 장거리를 피해서 사잇길로, 희미한 불빛을 밟으며 간다. 임이네는 못내 머리끄덩이가 뒤로 끌리는 것 같은 심정을 버리지 못한다. '머 거기가 천 리 만 리 밖이라든가? 오고가고 이백릿길 설마한들 다시 못 올라더나?' 거둬들이지 못한, 얼마간의 빚 준 돈 때문에 그렇다. 공노인네 객줏집 앞을 지나간다. '못 받는 돈이사 그렇고, 그년 오지기 당하는 기이 고소해서 내사마 춤이라도 추고 접다. 그만 말라져 죽어부리라 이년아! 내 낭군 내 자식이 어디로 갈 기든고? 머리카락으로 신을 삼아 보지? 지 사람 되고 지 자식 될 기든가. 이자는 홍이아배도 아주 끊어부리기로 단을 내린 모앵이니, ! 공가놈 늙은 것도 그렇지. 누가 자개만치 꾀가 없이까바? 사람을 사알살 꼬시더마는 내가 언제 난 여자라고? 그러크름 사람을 괄시하고 구박허더마는, 나는 내 낭군 내 자식하고 떴다 봐라 하고 떠난다 말이다.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되고, 얼매나 속이 씨언하노.'

그러나 누가 있어 남편을 따라 통포슬로 가겠느냐. 아니면 대신 월선이를 보내고 너는 남아 그 가게를 차지하겠느냐, 어느 편을 택하겠느냐 하고 말한다면 임이네는 과연 어느 편을 택했을까? 사실 그의 독백이라는 것도 평소의 야멸찬 말재간에 비하면 맥이 빠져 있고 마음과 말이 따로따로 노는 느낌이 적지 않다.

임이네는 앞서가는 용이 뒷모습을 흘낏 쳐다본다. 짐 위에 올려놓은 바가지 두 짝이 조금씩 흔들리고 널찍한 어깨도 좌우로 흔들리고 있다. 두 사내는 말없이 걷는다. 홍이도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걷고 있다. '저놈의 흑덩어리는 와 달고 가는 거지?' 춤을 추고 싶다 하지만 역시 기분이 안 좋은 거다. 주갑이를 빌어 꼬투리를 잡으려는 것이다. 며칠을 있으면서 임이네는 주갑에게 여간 거만했던 것이 아니다. 얼빠진 못난 사내로 치부했으며, 때문에 날품을 팔아 밥값을 냈어도 심드렁하게 굴었고 용이는 모르는 그 돈이 제 주머니 속에 들어갔고, 주갑이 밥그릇에 밥을 담을 때는 밑빠진 그릇에다 밥을 담듯이 조심조심, 그러고도 주걱 잡은 손은 망설이는 것이었다. 좀더 적게 담을 수는 없을까 하고, 옛날 윤보 목수를 홀아비에 가난뱅이 무식꾼 쟁이받이 이상으로 생각지 않고 업신여겼듯이.

'덩신 같은 년. 지 주제에 장사라고? 내가 있어서 손발이 맞았이니께 그만치라도 돈을 벌었지. 세상에 그런 벅수가 어디 있노. 돈이 들고나는 것도 모름시로 만판 해봐야 남 좋은 일 시키는 기지 머. 송애 그년의 가시나만 호박구덩이에 굴렀다. 고 가시나아도 약아빠져서 자알 해처묵을 기구마는.'

배가 아프다. 배가 아파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월선이 돈을 번 게 아니라 임이네 자신이 돈을 벌었다는 내막은 내막인 채 내버려두고 송애도 생쥐처럼 돈을 물어낼 것이라는 것은 생각만 해도 억울하다.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월선에 대한 미움이 송애에게로 옮겨간다. 철천지 원수같이 미워진다.

'발톱만한 제집아년이 간덩이가 부풀게 생겼고나. 고 가시나아 앞길도 뻔하지 뻔해. 시집도 안 갔으믄서, 하기사 누가 아냐? 객줏집에서 컸으니께 뭇 사나들이 들랑거리는 객줏집이고 보믄 말이 가시나지. 지가 무신, 정차 잘돼바야 기생이고 색주가밖에 더 되랄고?'

미움은 자꾸자꾸 피어오른다. 뭉게구름같이 부풀어오른다. 억울하고 괴씸하다. 신경질이 치밀어서 이고 가는 보통이를 길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어진다.

'거기는 장차 젤 좋은 자리가 된답매. 가만 누버서 돈 버는 장소랑이. 국밥집으 아주망이 쇠스라앙으 돈 긁으 거라, 무시기 그런 말들 모두 하지 않겠음?":

새벽바람을 마시며 가는 임이네 얼굴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온다. 수결을 태산준령을 넘는 듯 거칠어진다. 남편 자식도 갖고, 국밥집도 갖고 월선이는 죽어버리고 미운 사람들도 다 죽어버리고 그래주었으면 임이네는 오죽이나 좋았을까. 참으로 욕망 무한, 슬픔없는 목숨이며 비렁땅 꽃 한 포기 새 한 마리 없는 황막한 인생이다.

시내를 막 벗어나려 했을 때다. 용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마치 그러기로 미리 약속이나 돼 있었던 것처럼 주갑이도 걸음을 딱 멈추기는 멈췄으되 용이를 쳐다보지는 못하고 목을 뽑으며 보이지 않는 강변 쪽을 바라본다. 용이는 길 한켠에 가서 다리를 꺾고 비스듬히 드러눕듯 몸을 넘어뜨리며 어깨에 걸린 새끼멜빵을 벗긴다. 짐을 내려놓고 일어선 용이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른다.

"주서방."

"."

주갑의 음성은 계집아이처럼 가냘프고 기어든다.

"여기서 좀 기다리주겄소?"

", 그렇기 허겄소!"

기어들던 목소리가 용수철 모양으로 튀어오른다.

"홍아."

"."

"니 날 따라가자."

"어디로요?"

"암말 말고, 가자."

평생 없었던 일이다. 용이는 아들의 손목을 잡았다. 뒤늦게 무엇인가를 깨달은 임이네

"홍이 데꼬, ,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임자는 여기 주서방하고 기다리는 기이 좋겄고."

"안 하랄요! 나도 따라갈랍니다. 내가 가서 안 될 곳이 어디 있소."

"따라가야?"

되묻는데 무시무시한 분위기다. 움직이는 않는데도 전신을 후들후들 떠는 것만 같다. 임이네는 물러선다.

", , 내가 가믄 우떨 기라고, , 우째서 그라요."

"너 신상을 생각해서 그런다."

"그기이 무신 말이지요?"

"두말 마라. 홍이하고 월선이를 데리고 내 종적을 감추어부리믄 니는 혼자 살겄제?"

"? 뭐라꼬요?"

"그렇기 안 되기를 원하거든 여기 기다리고 있어라. 가자, 홍아."

"아부지."

"와야?"

"이 짐은 우짜고요?"

"이 짐은 짊어지고 가자. 그거는 니 소용품이니께ㅣ."

홍이는 매인 양새끼처럼 아비를 따라간다.

"홍아-"

뒤에서 울부짖는다.

"옴마아-"

홍이는 손등으로 눈물을 씻으며 아비를 따라 걷는다.

"홍아- 공부 잘혀어! 총 들고 말 타게 말이여-"

주갑의 고함이 귀청을 친다. 국밥집에 갔을 때 월선이는 없었다. 송애가 자다 일어나며 어디갔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홍이 니는 여기 있거라."

홍이를 가겟방에 남겨두고 용이는 어둠을 헤치듯 뛰어간다. 그는 움막으로 가는 것이다. 걷다가 뛰다가 미치광이 같다. 움막의 거적을 걷고 들어서며

"월선아!"

씽 하니 되돌아오는 정적과 어둠,

"월선아!"

캄캄한 움막 안을 더듬는다. 미친 듯이 해맨다.

", 월선아-"

손 끝에 닿는 굳어진 몸뚱이, 낚아채고 뜨겁게 포옹하고 흐느껴 운다.

"지가 여기 있는 거를 우떻게 알았소?"

여자의 목소리는 싸늘하다.

"니는 내가 떠나는 거를 우찌 알았노."

"꿈을 꾸었소."

낮게 웃는다.

"호랭이 새끼는 산으로 가고 오리 새끼는 물로 간다 하더마요."

"그거는, 그거는 다아 우리하고 상관이 없는 얘기다."

여자 얼굴에 입맞춤하며 뜨거운 눈물로 얼굴을 적신다.

"이리 될 줄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소. 지가 들어서 당신 신세를 궂힌 것도 다 알고 있소. 버리고 가, 가소."

"..."

비바람이었다. 뇌성벽력이었다. 휩쓸고 가는 사내의 정열, 그것은 경건한 의식이다. 참으로 여러 해 만에. 밀려갔던 조수가 천천히 다시 되돌아온다. 조용하게 슬프게. 물 부피는 불어나서 방천벽에 금을 그으며 조용하게 슬프게 올라온다. 충만하고 넘친다.

"가게에 홍이 데리다놨다."

"?"

"심이 들겄지마는 공부시키고 니가 키워라."

"참말이요?"

"."

"지 엄마가,"

"데리고 가믄 아이는 버린다. 내가 그곳에 가기는 가되 가을 한철 있일 기고 곧 산으로 갈 기구마."

"산에는 머 할라꼬 가시오."

"벌목꾼들 벌이가 좋다더마. 겨울 보내고 산에서 내리올 적에는 이리로 오께. 여름 한철은 가서 농사지어주고 내 맘 알겄나?"

"."

월선이는 사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운다.

"니가 알았으믄 됐다. 우리가 더 이상 머를 바라겄노. 나를 위해 모질게 맘을 묵을라 캤더마는... 결국에는 이렇기밖에 못 살 긴갑다. 그라고 내 간 뒤 객줏집 어른께 내가 그 동안 저지른 일들, 내 잘못을 잘 알고 있더라고, 무신 면목이 있어 인사를 하겄느냐고 니가 잘 말해라."

용이로서는 긴 얘기였다. 꽤 곰상스럽게 타이르는 투이기도 했다. 움막 사이로 희미한 새벽빛이 새어든다. 역두 쪽에서 말 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개울가에 짐을 풀어놓고 점심 요기를 끝낸 일행은 각기 제마음대로 시선을 던지고 있다가 용이는 담배를 붙여물었고 임이네는 개울물에 얼굴을 씻기 시작한다. 팡파짐한 엉덩이는 아직 탄력에 넘쳐 있다. 서른아홉, 황혼은 바라보는 무르익은 나이. 흐르는 시냇물같이 활기차고, 자식과 이별하고 온 슬픔이 없을 리 없겠는데 시냇물같이 바위벽같이 여자의 모습은 자연 그것으로만 보인다. 머리에 쓴 수건을 벗겨 상기된 얼굴을 닦는다. 그러자 주갑이 훌쩍 일어서며 밥을 다 비워버린 양푼을 절렁 든다. 개울 옆에 가서 물을 퍼서 마신다. 입가에 흐르는 물방울을 손등으로 닦고 별안간 양푼을 치켜들고 주먹으로 치기 시작한다. 쇠붙이 아닌 주먹에서 뭐 그리 희한한 소리가 날 리도 없겠는데 그러나 장단이 썩 잘 맞고 곁들여서 그 일품의 노래를 뽑으니 임이네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용이는 변화 없는 표정이 한참을 혼자서 신을 내던 주갑이는

"형씨."

"와요."

"나 이래봬도 어떤 여자한테 옷 한 불 얻어입은 일이 있어지라우."

"."

"아마 그 여자가 나헌티 반혀서 그랬나비여."

"눈이 멀었든 게지."

"눈이 멀었든 게 아녀. 귀가 밝았다 그거여."

"."

"그게 또 기생이다 그 말인디, 하기사 기생 퇴물이었제. 주막서 술쪽 든 신세가 되릿?기생 퇴물이라, 아 그 기생 퇴물이 귀가 밝더라 그 말이요."

"하든 가락이 있어 그랬겄지."

"하모니라우. 바로 그거여. 그래 뭐래는고 허니, 아깝도다. 명창이 됐을 것인디 이 손이 이리 험허게 되릿?만고풍상 다 겪었소잉. 함시로 내 손을, 이 내 손을 어루만지더라 그거여."

"."

용이는 귀담아 듣고 있지도 않는 듯 먼 곳을 바라보며 담배만 피운다.

"그리하여, 며칠을 공짜로 주막에서 묵음시로 가는세 베옷 한 불을 얻어입었지라우."

"함께 살지 그랬소?"

"한데 그게..."

주갑이는 장난스럽게 웃는다.

"반해서 옷까지 해주었으믄...."

용이의 말은 어디까지나 건성이다.

"귀만 밝아서는 안 되겠더라 그거요?"

느닷없이 임이네가 말참견이다. 용이 눈에 조소가 지나간다. 새벽길에서 홍아 - 하며 울부짖던 소리가 멀리서 차츰차츰 꼬리를 감추듯 용이 마음에서 아픔이 사라진다.

"홀가분해졌다."

"?"

주갑이 되물었으나 용이는 대꾸 없이 담배통을 돌에 대고 뚜드린다.

"아짐씨, 귀만 밝아서는 안 되겄다 그게 아니랑께요."

주갑은 임이네에게 말머리를 돌린다.

"쪼그랑할매더라 그 말이어라우."

용이 웃는다. 화가 나서 웃고 서글퍼서 웃고 자기 자신이 옹졸해서 웃고 주갑이 부러워서 웃고, 임이네는 샐쭉해진다. 방심한 사이, 뭔지 주갑이한테 말려든 기분이 들었다. 성난 임이네 얼굴에 곁눈질을 하며 주갑은 다시 양푼을 치기 시작한다.

"양푼 쭈그러지겄소!..."

임이네가 팩 소리를 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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