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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5-1

토지 1부 제5

 

1. 황천의 삼도천

칠월 백중날 월선이는 재를 올리기 위해 강 건너 선혜사로 갔다. 어미의 기일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그 동안 제사를 지내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보부상이던 늙은 남편을 따라 타관 땅을 떠돌아다니던 월선이 일부종사하며 팔자치레하고 살라던 어미의 말을 목에 걸린 가시처럼 되새겨가며 보따리 하나를 겨드랑이에 끼고 바람에 떠밀리듯이 마을로 돌아왔었던 그날, 비로소 어미의 죽음을 알았고 봉순네로부터 윤씨부인이 장사를 후히 지내주었다는 얘기며 월선이네가 딸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었는지 그런저런 얘기를 들었는데 그때 봉순네는 기일을 일러주었던 것이다. 월선이는 해마다 잊지 않고 제사를 모시기는 했으나 그때마다 - 간도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 - 절에 가서 불사로 치렀다. 딸자식이라서 그랬다기보다 노상 떠도는 신세이며 뿌리없는 나무 같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여 집에서 제사를 지내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러한 참에 작년 백중날부터 오랫동안 벌려오던 우란분재에 참례하게 되었다.

아침부터 절 마당은 사람들이 하얗게 모여들어 붐비었다. 지난해 보다 재꾼들이 많은 것 같았다. 괴질과 흉년의 아픈 상처가 다소 가라앉은 때문인지도 모른다. 강을 내려다보는 산중턱 숲에 싸인곳이지만 여름이 막바지에 접어들어 날씨는 무더웠고 불사에 쓰일 음식은 물론 재꾼들 점심 마련을 위해 아궁이마다 불을 지핀다 쌀을 씻는다 하며 분주히 오가는 공양 스님들, 행자들의 모습과 어미를 따라온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더위를 더 느끼게 한다.

숲의 나무들도 후줄그래하니 늘어진 듯, 구름은 움직이지 않았고 법당 네모 처마 끝에 달린 풍경도 꼼짝 않는다. 지장경을 송하는 법사의 목소리는 맑고 힘차다. 독경에 목탁 소리가 어울려 높고 낮음을 이루는 법당에는 사람들이 가득 들어찼으며 그들 속에 끼여든 월선이는 옷자락이 밝히지 않게 흰생고사치마에 옥색 허리끈을 매고 겉으론 지성스럽게 예배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월선이는 정성이 한곳으로 모이질 않아 애를 쓴다. 봄날 흩어진 병아리 불러 모으듯 지그시 눈을 감고 죽은 어미의 복락을 빌려 했으나 어느덧 마음을 홀로 사람 없는 삼가름길에 서있곤 하는 것이었다.

안개가 자욱 끼어 있는가 하면 회오리바람이 불로 흙먼지가 이는 삼가름길, 그런가 하면 끝도 없고 시작도 없는 망상이 꼬리에 꼬리는 물고 나서면서 의식을 낯선 곳으로 끌고 간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정신 쓰로 와가지고...' 검은 장삼에 붉은 법단가사를 두르고 독경하는 법사의 목덜미에서는 땀이 흐르고 있다. '정신이 부실해서 이런갑다. 와 이리 어지러불꼬?' 소리들이 멀어지기 시작한다. 목탁 두드리는 소리, 독경소리,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아득한 곳으로 물러간다. 법사의 검정장삼이 먹물같이 푸석푸석 번져나가더니만 붉은 가사는 핏물이 되어 출렁거리고 다음엔 목덜미를 흐르는 땀방울이 수백 수천의 구슬로 변해서 법당 안에 구르기를 시작한다. 달무리 같고 무지개 같은 환상이 깜박깜박 졸 듯이 다가오는가 하면 물러간다. 수백 수천의 구슬, 눈보라 같고 칠쇠 방울 같고 칠쇠 방울이 쇠된 소리를 낸다. 한 개의 쇳소리가 수백 수천의 쇳소리로, 그것은 또 산하의 인경 소리였다. 쉰 대부채살이 활짝 펴지고 꽃갓의 노랑 빨강 꽃송이가 뱅뱅이를 돈다. 홍색 관띠에 남색 전복이 구름같이 펴지면서 펄러덕거린다.

삼지창 대신 칼이 햇빛을 받고 번뜩번뜩 회번덕거린다. '어허헛! 대신이야아아.' 외치며 칼춤을 추는 어미의 얼굴,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창백한 얼굴이다. 눈을 크게 벌린 채 웃는다. 운다. 아니 입이 찢어지게 소리를 지른다. 넋 들이는 소리다. 귀신을 꾸짖는 소리다. 무지개처럼, 달무리처럼 환상이 깜박깜박 졸 듯 다가오고 물러간다. '월선아! 내 너를 당장 잡아갈 것이로되 정상이 가긍하야 이번만은 용서하느니, 듣거라! 너 임이네 죽기를 바란 것이 한두번이 아니거늘 그 부정한 마음으로 어찌 감히 부처 앞에서 어미의 극락왕생을 축원할 수 있단 말인고!' 울긋불긋한 색채를 뚫고 요란한 소리를 뚫고 벽력 같은 목소리가 울려왔다. ', 아니요! 그런 일, , 그런 일 없소! 갬히 우찌 남 죽기를 바라겄소!' 노하여 외쳤으나 월선이는 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염라청의 정파리경을 모르느냐? 너는 너를 속여도 정파리경에 비친 죄목은 못 속이느니!' ', 아니요. 그런 일 없소, 이 내 신세를 하, 한탄한 일은 있지마는.' '무슨 발명인고!' ', 꿈에 임이네가 죽을 것을 기, 기뻐한 일이 두, 두 분인가.' '그게 생시 마음의 소리로다! 눈으로 부정해도 아니 될 것이요 입으로 부정해도 아니 될 것이요 귀로 부정해도 아니 될 것이어늘 마음으로 부정하며 부처 앞에서 어미의 극락왕생을 축원하나뇨? 연분이 아니어든 그만인 것을 어찌 본복을 거역하려드는고? 어미가 짝지워준 서방을 늙다 하여 버린 죄목도 클 것인즉, 사내가 탐나기로 자식이 탐나기로 남 죽기를 바랄 것이며 악업 위에 또 악업을 쌓겠다 말인고?' '아니요! 아니요! 서방버린 죄는 있십니다마는 남 죽기를 바라지는 아니 했소! 이내 신세는 기박하여 잘못 태어난 탓으로 남들겉이 못 살아도 영신을 원망하지 아니 하였소! 어찌 애맨 말심으로 꾸중하시오. 야속,' 월선이는 전신을 떤다.

떨면서 법당 바닥에 엎드린 채 있는 자신을 깨닫는다. 버선목이 죄어들어 발목이 아픈 것을 느낀다. 지장보살을 뇌는 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촛불이 깜박이고 푸른 향연과 삽삽하고 매캐하면서 향그러운 백단향의 내음이 콧가에 스치고 지나간다. 석가여래의 좌상은 전과 다름없이 자비로우시고 협시한 보현 문수 두 보살은 아름다우시고 후불탱화에는 부처의 권속인 많은 천중들이 중앙 여래를 옹위하고 굽어보시는데, 몸을 일으킨 월선이 손을 모아 다시 예배를 올린다. 가슴이 뛰고 식은땀이 등골에 흐른다. '지장보살, 지장보살, 불쌍한 울 어무니 부디,' 하다가는 말이 뚝 끊어지고 다시 지장보살 지장보살 불쌍한 울 어무니 부디, 하다가는 다음 말을 잇지 못한다.

월선이 마음은 어느덧 사람 없는 삼가름길에 홀로 선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헤맨다. 안개가 자욱이 밀려오가는가 하면 흙바람이 일어서 앞을 볼 수가 없다. 손을 들어 헤쳐보지만 여전히 앞을 볼 수 없다. '여보시오. 이렇게 적막강산일 수가 있소? 도무지 어디를 우떻게 가야할지 모르겠소. 내 나이 서른여덟이오. 서른여덟인데 자식이 있소 남편이 있소 부모형제가 있단 말이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중이나 되어 사는 기이, 그란하믄 어매같이 무당이 되까요? 신을 풀믄 한이 없어지겄소?' '사람으 정을 못 끊는데 우찌 중이 될 것꼬. 신을 푼다고 한이 없어지나?' 하면서 뜻밖의 얼굴이 안개 속에 나타났다. 망건을 두른 조그마한 상투머리, 수염이 하나씩 둘씩 돋아난 안존스럽기 노파 같은 노인이다. '할아부지!' '오냐. 니가 그래도 내 말을 명념하고 있었고나. 하모 그래야지. 뿌리 없는 나무가 없고 부모 없는 자식이 없네라.' 히죽히죽 웃는다.

언제부터 월선의 집을 드나들었는지 그것은 알 수 없었다. 길손처럼 이태 만에 혹은 삼 년만에 한 번씩 들러 월선네의 칙사 대접을 받고 떠나곤 하던 노인이었다. 월선네 집에는 박수나 목배들이 수시로 출입하였고 장구잡이 소리꾼 같은 광대들 사당패들의 출입도 잦았는데 걸걸한 성미의 월선네는 곧잘 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놀기를 잘했으며 말버릇도 무관하여 너 내 하는 처지였으나 그 노인에게만은 깍듯이 어르신이라 불렀다. 문의원을 약국어른이라 부르는 이외 진심에서 존경하는 사람이 그 노인이었다.

"도를 통한 어른이구마. 절에서 이십 년 넘기 수도하시고 도를 깨친 분이지."

이웃 아낙에게 소곤거리는 어미의 말을 월선이는 어릴 때부터 들었다.

"그라믄 전에 중이었다 그 말이요?"

"그냥 거사지마는 축지법을 써서 댕기고 술법도 능해서 돈도 맨든다 카기는 카더라마는 그거는 사도니께로 엔간이 급하잖으믄 안 써묵는기라."

"누가 그럽디요?"

"그 어른이사 입 딱 다물고 기시지마는 전에 내가 데리고 댕기든 무배가 그러데."

"그라믄 그 풍골에 신선이라 그 말이요?"

"보기로는 ?딱지만 하지.그러나 모리는 거 업시 유식한 어른이제."

신선이라는 말에는 명확한 답을 못하고 어물쩍 넘겼으나, 월선네는 월선이에게도 항상 말했다.

"니가 우찌 난 줄 아나? 그 어른이 공을 디리주시서 태이났다."

노인은 월선이를 귀여워했다. 어미 말대로 모르는 것 없이 유식 했던지 곧잘 부처님과 보살의 얘기며 불교에 관한 여러 가지 설화를 어린 월선이에게 들려주었다. 그 노인을 마지막 본 것은 그러니까 월선이 출가를 앞둔 무렵이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옛날에 말이다. 육통을 얻은 목련존자라는 어른이 기싰는데."

슬며시 시작하는 말이었다.

"어느 날 도안으로 세간을 두루 살피니께로 아귀도에서, 아귀도란 어딘고 하니 육도윤희의 한 곳인 기라. 지옥보다는 조금 낫지. 생시 재물을 탐했거나 불쌍한 짐승 직있거나 거짓말하고 시기심 많은 죄인들이 가는 곳인 기라. 그러니께 아귀도란 염라대왕이 기신 땅 밑에도 있고 인간이 사는 염부제에도 있는데 말하자면 잡귀라 카는 그런 기지. 사람으 눈을 피해서 산중에서도 살고 뒷간에서 사는 놈도 있고, 잡귀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마는 모두가 다 흉칙하게 생겼고 노상 배가 고픈 놈들인데 그중에는 남이 토해놓은 것만 보믄 묵고 저버서 죽을 지경인 놈도 있고 제사 때 향 냄새만 맡고 게우게우 살아가는 놈, 주린 창자를 붙잡고 온 산을 헤매다가 게우 절 가까이 와서 설법하는 소리를 듣고 연명하는 놈, 목이 타도 아침 이슬밖에는 못 묵는 놈, 화장하는 불만 묵고 사는 놈, 하루 아이 다섯을 잡아묵어도 밤낮 배가 고파서 못 견디는 놈, 똥이나 피고름밖에 먹을 수 없는 놈, 아무것도 묵을 기이 없이니께 제 머릿골을 빠개서 골수를 꺼내 묵는 놈."

"아이고 무서바라."

"그래, 그래 이자 그 얘기는 고만두고 아무튼지간에 목련존자께서 세간을 두루 살피니께로 아귀도에서 전생의 업보로 도현의 고초를 겪고 있는 망모의 가련한 모양을 보게 되었다 그 말인데, 도현이란 거꾸로 매달린다는 말이고, 그래 그 어른은 바릿대에다가 반식을 담아가지고 불쌍한 망모 옆으로 가서 주림을 면케할라 카는데 이기이 우찌된 일이냐? 반식은 순식간에 불꽃으로 변해부리고 망모 입에까지 반식이 안 들어가는 기라. 그것을 슬퍼한 목련존자께서는 세존께 울면서 애원을 하싰는데 망모를 구해주십사 하고, 그 간절한 발원을 들으신 세존께서는 중승자자의 날인 칠월 십오일을, 그러니께 백중날을 택하시고 이날 시방불승한테 백미의 반식하고 오과를 공양하면은 망모에 대한 비원이 성취될 것이라, 뿐만 아니라 과거 현재 칠세에 이르기까지 망부모는 아귀도에서 사함을 받게 될 기고 천인이 사는 곳에 가서 복락을 누릴 것이라 하싰더란다. 이 연유로 해서 칠월 백중날의 우란분재가 숭상되어왔던 긴데... 요새 사람들은 집을 다가서 죽었기 때문에 기일을 모르는 혼신들의 제삿날인 줄로 알고 있거든. 그라고 제사를 안 지내는 아이들이나 비명으로 죽어서 저승으로 못 가고 허공에 따도는 귀신을 대접하는 날로도 알고 있단 말이다. 본뜻이야 어디 그렇건데? 시방불승한테 공양을 하믄 죄 많은 망령들이 죄 사함을 받는다 그거지. 아무튼지 그거는 그렇고 왜 이런 얘기를 하는고 하니 내 갈 길도 멀지 않았이니 또 니가 출가를 하게 된다 하니 언지 또 만나겄노. 니 어미는 죄가 많다. 죄가 많지러. 본시 탐심이 없고 거짓이 없는 여자지마는 그러나 술 처묵고 음행한 죄는 면키 어려울 기니 세상에 나서 기출이라고는 니 하나, 후일 잊지 말고 삼악도에 떨어질 니 어미를 위해 추선공양을 올리주얼. 그거사 머, 니 성시 따라서 해얄 기다마는 우란분재는 해마다 할 수 있는 기고 동참이믄 별돈 드는 것도 아닌께."

'작년 이맘때, 절에 왔을 적에도 그 어른이 보이더마는 맘에 씌어서 이러까? 어매는 참말로 삼악도에 떨어졌이까? 삼악도에, 이승서도 박복했던 어매가... 그렇다믄 낸들... 내 갈 길도 삼악도가 아니고 어디겄노. 남편 버린 제집이 가는 곳이 삼악도가 아니고 어디겄노. 임이네를 시기하지 않았다고는 말 못할 기다. 날마다 마음으로 죄를 짓는데.'

임이네 죽기를 바랐다는 생각만은 아무래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는 강청댁 죽음을 연상하며 다른 또 하나의 죽음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럴 경우를 생각하지 않았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 지난 설 무렵 가슴 한가운데에 못을 박아놓고야 만 소문을 들은 후부터는 '차라리 중이 되까. 머리 깎고 중이 되까. 남편을 지키고 살았던들, 그랬이믄 이승서 업이 끝날 기든가.' 월선이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재는 끝났다. 위패들을 법당 밖으로 내간다. 사람들도 법당 밖으로 쏟아져나갔다. 하루가 기울면서 바람이 거실거실 일기 시작했다. 위패에 불이 붙고 연기가 피어올랐을 때 독경 소리는 함층 더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망자의 유족들은 연기에 흐느끼고 울음으로 흐느낀다. 허리 꼬부라진 늙은이, 부골스런 중늙은이, 아이 없은 아낙, 풀어버린 귀밑머리가 서러운 젊은댁네, 말쑥한 차림새에 염주를 손목에 건 중인층의 여인들, 삼베적삼도 등바닥을 기워서 입은 촌부, 빈부귀천 할 것 없이 늙음과 젊음의 차별 없이 슬픔도 하나, 바람도 하나다. 망자의 극락왕생은 바람이요 뜬구름같이 덧없는 인연의 슬픔이다. '어매! 불쌍한 울 어무니! 부디 좋은 곳에서 환생하소! 그곳에서도 여자로 환생커든 한 남자를 만내서 일부종사하, 하고 아들 딸 낳아서...' 마지막에 이르러서 비로소 월선이는 간절하게 손을 모아 정성을 드린다.

강물을 물들여놓고 해는 떨어졌다. 숲에서 시작한 어둠은 절간 뜨락에 서서히 밀려들어왔다. 사방은 본시의 적막한 장소로 돌아가고 대부분 재꾼들도 돌아갔다. 먼 곳에서 온 몇몇 사람과 함께 월선이는 절에 남았다. 재꾼들은 거의 하동에서 왔으므로 해가 떨어질 무렵 나룻배편으로 당일에 돌아갔던 것이다. 어둠이 오기 전에 달이 떴다. 사라져야 할 밝음과 나타난 달빛이 서로 겨누듯 잠시 사방은 옅은 회갈색으로 흐리더니 여광은 아주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달은 산허리에서 솟아올랐다. 보름달은 은가루 같은 보송한 빛을 뿌린다. 밤이 깊어지면서 은가루는 물기를 머금기 시작했고 숲이 야기에 식어갔을 때 푸르름을 뿜어내며 달빛은 출렁이는 것이었다. 산사 뜨락의 도라지꽃 달맞이꽃, 창백한 꽃들은 애잔하게 고개를 쳐들며 혹은 엷게 스치는 바람에 흔들리고 나무 그림자도 흔들리고 개울물 흐르는 소리, 부엉이 울음이 들려온다. 처참한 적막은 저승일까 이승일까. 절간 행랑 툇마루에 걸터앉은 월선은 밤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가 막히는 밤이고나. 사램이라고는 어느 구석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만 같다. 무섭다. 낮에 들끓던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 갔이꼬? 어디 가기는 기아? 모두 이녁 집으로 돌아갔겄지. 날짐승도 해가 지믄 제 둥우리로 찾아가고 삼짐승도 제 구멍으로 들어가는데 나만 갈 곳이 없네. 내가 사는 집 그기이 어디 사람으 사는 집이건데? 허깨비들, 음 그래 허깨비들이 사는 집일 기다. 나도 허깨빈지 모르겄다. 아마 나도 허깨빌 기다... 염부제 어느 벌판에는 고독 지옥이라는 게 있다 카든데... 그것은 어디에쯤 있이까? 그곳에는 이런 적막한 밤만 있일 기다... 황천으로 가는 길에는 또 삼도천이라는 강이 있다 카든데 그 강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망령들을 비치주는 달도 아마 오늘겉이 저리 무서븐 달이겄지. 강을 건닐라 카믄 할매 할배가 나타나서 망자들 옷을 뺏는다 카더마는 울 어매도 그 강가에서 옷을 빼ƒ…시까? 염할 적에 손에 엽전은 쥐여주었이까?... 나도 죽으믄 그 강을 건너가겄지. 이렇게 무서븐 밤이겄지. 달도 없는 캄캄한 밤인지도 모르겄다. 하기사 무서블 거는 없네. 생각키 탓이니께. 내가 살고 있는 이곳도 고독지옥이 아니고 머겄노. 무서븐 지옥이기는 매일반 아니가. 넓고 넓은 세상에 내 하나 의지할 곳이 없는, 머리 깎은 중이라믄 부처님이나 의지하지. 무당이 되었더라믄 영신이나 의지하지. 애시당초 그 사람한테 정들있던 것이 불찰이라. 와 정을 못 끊을꼬? 내 없이믄 못살 기라고 정을 못 끊었일까. 야속한 사람, 무정한 사람... 누가 기다릴 기라고 남들겉이 허겁지겁 돌아갈꼬.'

"이러크름 더운 날씬디 방에 불을 워쩌자고 처넣었단가."

안늙은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방안에 들렸다.

"재꾼들 밥 삶아낼라니께 그랬지라우 재꾼들이 좀 많았이야?"

다른 늙은이의 대꾸하는 소리였다.

"아이고매 답답혀 워쩐다냐. 어디 자겄는 게라우?"

"그래도 새북이 돼보제, 치블 긴께로. 오늘이 백중 아니더라고? 여름도 이자 마지막이랑께 참말로 세월 잘도 가누마요잉. 인생 육십이 풀잎의 이슬 겉다 안협디여?"

"탕수국 물을 날도 아니 멀었제잉. 이자부터는 저승길을 닦아얄긴디 이런 날 아니믄 무신 수로 절에 온단가."

"금매."

"내 백중날이믄 만사 제쳐놓고 절에 오는디, 그거 자식들 본배기로 안 그러요."

"그러니께로 죽은 뒤 자식들이 재를 올리서 할매 좋은 데 가라고 빌어돌라 그 말이구마요."

"하모니라우. 아이고매, 답답혀. 배람이라도 쏘이야겄네."

안늙은이는 툇마루에 나와 앉는다. 시큼한 땀 냄새가 풍겨져왔다.

"이자 심이 좀 트이네잉. 바깥 날씨 식은 걸 본께로 비 오기는 글렁이야."

"머 철이사 다 가는디."

방안에서의 늙은이 대꾸다.

"아니여, 채전생각은 워찌 안 혀?"

"금매."

"참말로 달도 밝다! 이런 밤에 과부 안 미치까잉?"

"한분 미쳐보더라고. 젊으나 늙으나 과부는 과부니께로."

방안에서 핀잔이다. 안늙은이는 껄껄 소리 내어 웃어젖힌다.

"임자는 워디서 왔지라우?"

웃다가 월선에게 묻는다.

"하동서 왔소."

"그라믄 와 안 돌아갔이까아? 엎어지믄 코 닿은 곳인디."

"..."

"아아들이 없는가비여."

"?"

"아아들이 있이믄 한가스럽기 집을 비우놓고 절에서 잘 수 있간디?"

"없소."

"금매... 자석헌티 살림 내어준 우리 겉은 늙은이는 가나마나 이자는 소앵이 없는 몸이지마는... 그래 임자 서방은 있겠제이?"

"없소."

"없이야? 아아 자석 못 놓는다고 소박맞은 게라우."

"..."

"아니믄 과분개비여."

대꾸 없이 월선이는 용이를 남편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언제 내가 그이하고 귀밑머리 마주 풀었노. 귀밑머리 마주 푼 사람은 강청댁 아니가. 그라고 자식 낳아준 사람은 임이네고. 아무 상관없는 사램이다.

"부모형제도 없이까?"

"없소."

"그라믄 누구 재를 올리로 왔지야?"

"어매... 울 어무니요."

"허기야 부모 없는 자식은 없이니께로."

여염집 아낙이 아님을 눈치챈 늙은이는

"나무관세음보살, 임자도 팔자가 기박헌개비여. 그래 어매는 괴정땜시 죽었는가."

"아니요."

"그라믄 숭년 땜시?"

"그것도 아니고 옛날에."

"나는 우리 영감탕수 재 지내로 왔는디 우리 영감은 괴정에 죽었단게."

'그 늙은이도 죽었이까? 죽었을지도 모르지.' 도망쳐 나온 후 찾아온 일도 없었고 소식을 들은 일도 없는 남편, 어쩌면 입 하나 덜었다 싶어 다행으로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독한 구두쇠였었다. 젊은 아내의 두 끼 먹는 밥도 아까워 발발 떨었다. 그러나 구두쇠 그 늙은이야말로 월선의 귀밑머리를 풀어준 남편이 아니었던가. 월선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굴러 떨어진다.

"나무관세음보살. 서방도 없고 자석도 없고 워찌 늙을란가? 내 이 나이가 되어도 영감 없인께로 서글퍼서 못 살겠는디 아즉도 앞날이 창창한 사램이."

"앞날이 창창하지도 않소. 머지않아 사십이요."

"그러크름 뵈이지 안는디."

방에서는 코고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이고매 워찌 세상이 그래야."

땀도 식고 코고는 소리에 졸음도 오는 모양 늙은이는 중얼거리며 안방으로 들어가고 월선이만 툇마루에 혼자 오두머니 남는다. 달은 정말 미치도록 밝다. 나뭇가지와 나뭇가지의 짙은 그림자가 바람에 일렁인다. 부엉이 울음소리. 이따금 짐승 울음도 들려온다. 집에 가기가 허전해서 월선이는 못 돌아가고 절에 처졌다. 방문을 열면 거기 빈방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 두려워서였다. 빈방을 혼자 지키고 앉아서 밤이 지나가는 소리, 외롭게 굴러가는 나뭇잎 소리, 개 짖는 소리, 문풍지 흔들리는 소리, 그러다가 발자국 소리가 나면 소스라쳐 일어나 앉으며 행여 용이가 아닌가 하고 귀 기울이는 밤이 월선에겐 견디기 어려웠다. 절에서는 사람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용이 절에 올 리가 없는 것이다. 절간의 밤도 그러나 편하지는 못하였다. 종일 예배를 드려 다리가 무거웠다. 몸은 실실이 풀어졌는데, 잠이 오지 않는 것이다. 잠자리가 달라진 탓이라고 할 수 없었다. 재를 올리려고 절에 왔었던 작년만 해도 오늘과 같이 서럽고 절망하지는 않았었다. 용이를 의지하고 믿었었다. 그러니까 지나간 걸 이후부터 월선이 심중에 변화가 왔던 것이다.

"이서방이 설장에 갔다가 임이네 깔진을 사왔는데 니 그 소문 들었나?"

좁쌀 몇 됫박을 가져와서 팔고 돌아가는 길에 들른 김서방댁의 말이었다.

"?"

"자줏빛에 유록 전을 둘러서 오묵한 기이 이삐기는 이삐더마. 그것을 신고 내보란 듯이 동네길이 좁다 하고 쏘다니는데 농사꾼 계집의 무명옷에 당할 기든가? 개발에 편자 아니가. 임이년도 시적 남으 집에 보낼 나이가 되었는데 두었다가 시집갈 때 줄이지. 하기사 지도 신고 저버서 신은 거는 아닐 기구마는, 서방이 나를 오금딩이겉이 섬긴다 하고 자발을 떨고 저버 그랬겄지. 그래 이서방이 니한테도 깔진은 사갖고 왔더나."

"..."

"안 사주던가배? 그러기 소나아들은 다 도둑놈인 기다. 속 다르고 겉 다르제. 자석 낳았인께 장로로 데꼬 살 제집이 더 중하다. 그거 아니겄나.그러기, 하 참 니가 일편단심으로 그래싸이도 말짱 헛거라. 임이네는 나이 있이니께 또 자식 낳을 기고 그라고 보믄니가 짝 잃은 외기러기, 정이란 하나지 둘은 아닌께."

"..."

"하기사 머시마가 하 좋아서, 애비 간장을 녹이게 생깄거마. 메주덩이 겉애도 늦기 본 아들이라 밉잖을 긴데 돋아나는 달덩이 겉고 참말이제 상놈으 새기 되기는 아깝지. 밭 좋고 씨가 좋은데, 아 인물이야 이서방이나 임이네나 좀 좋은가? 피도 살도 안 닿은 나만 하더라도 그눔아가 달랑달랑 뛰어오는 거를 보믄 안아주고 저븐데 지 애비사 얼매나 사랑스럽겄노."

한참을 늘어놓고 간 김서방은 달포쯤 지나서 또 나타났다.

"마님 돌아가신 뒤 설네설네 해도 나겉이 서러브까. 옛말에 공든 탑이 무너지까 하더라마는 우리 김서방의 공도 마님 눈 하나 없어지니께 무슨 소앵이 있노. 다 소앵없더라 소앵없어. 푼돈이 답답해서 깨 한 됫박 가지고 나왔더마는 빌어묵을 장돌뱅이들 그저 뺏아갈라 안 카나. 그것도 옛날부터 부치든 밭에 내 젖국 겉은 힘으로 깨 심고 조 심고 했거마는 주친 닭맨치로 서울아씬가 마님인가 그 양반 알세라 모를세라 가지나온 긴데."

자기 신세타령에서 그치는 게 아니었다. 앙상한 몸을 흔들어대며 임이네 말투 몸짓까지 흉내내가면서 전하는 말은 '! 제년이 아무리 소나아 보비유를 잘한들 무신 소용고? 보비유 잘하기로야 기생년들이 우뜸일 기고 그거사 소나아 돈 빨아묵을라꼬 하는 짓일 기다마는 그년이사 미치고 기든 년이제. 머를 바래고? 깨알 하나 가지갈 사램이든가? 질잖을 기구마. 첫째는 우리 천금 겉은 홍이한테 해로블 기고 홍이아배가 그것을 모르겄소? 돌아가신 시어무니도 이언을 하싰는데 잡귀가 붙은 무당은 천하 없이도 안 되는 기라요. 집안이 망하니께요. 남자 맘을 끌던 것도 한 나이나 젊었일 적이고 이자는 할망구가 다 됐는데 언제꺼정? 법으로 만냈다 말가 자식이 있어서 거물장이 된다 말가. 우리 홍이아배도 인생이 불쌍해서 한분씩 딜이다보기는 하지마는 어리석은 년이지.' 나이에 관한 것이라면, 젊음에 관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의기양양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임이네는 서른넷, 터질 듯이 피가 지글지글 끓듯 정력이 넘쳐 보였으니,

"팔자가 더러바 그렇지, 제집이 아금발라서 살림이사 피가 나게 살지. 집에 가믄 따신 내가 나니라. 장무새 임석 솜씨도 좋고 상일을 하믄서도 농사꾼 여핀네가 남정에 옷 해 입힌 거를 보믄 손끝도 야물고 그만하믄 제집이 버릴 기이 없지."

김서방댁은 그런 말도 했다. 새벽녘에 월선은 잠깐 눈을 붙였다. 꿈에 어미를 보았다. 어미는 용이를 잡겠다고 삼지창을 치켜들고 달려가는 것이었다. '어매! 와 이러요?' '저눔아 초롱초롱한 눈알을 뽑을라꼬 그런다.' '아이고오! 그라지 마소? 봉사가 되믄 우찌 살겄소!' 어미가 깔깔대며 웃었다. '봉사가 되믄 니가 지팽이 노릇 하믄 될 거 아니가. 이 벵신 축구야! 그라믄 니를 안 베리고 펭생 데꼬 살 기다. 용이놈은 눈이 멀었이니 벵신이고 니는 에미를 잘못 만내 벵신이고, 벵신끼리... 아리고 청백 겉은 내 자석이 내 간장에 피가 진다아! 불쌍한 내 새끼야! 니를 우찌 키웠다고.'

울음소리, 종소리, 머리 가득히 밀려오는 종소리, 또 종소리. 잠이 깨었다. 잠든 지 한 시간도 못 된 성싶었다. '와 그런 꿈을 꾸었이가.' 가슴이 철썩 내려앉는다. 처음에는 왜 그랬는지 월선이 자신 어리둥절했다. '행여 어짓밤에 찾아오지 않았이까. 왔다가 그냥 헉걸음하고 돌아갔이믄?' 급히 일어나 앉으며 옷매무새를 고친다. '설마 왔일라고... 왔이믄 왔제. 내가 이녁한테 매이 사는 몸도 아니겄고 재수없이 집안 망해묵을 무당딸년이 무신 소용고, 법으로 만냈다 말가. 자식이 있어서 거물장을 처놨다 말가. 임이네 말이 하낫도 안 그르구마.' 독하게 마음을 먹으려 한다. 종소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쟁쟁 하면서 나지막하게 여음을 남기면서 울려 퍼진다.

 

 

2. 꽃신

"형니임!"

용이 돌아본다.

"술 한잔 안 사줄랍니까."

잠방이 바람의 한조가 밭둑길을 휘청휘청 지나서 다가온다. 핏발선 눈알에 입술은 까맣게 타서 신색이 몹시 언짢다.

"형님한테 돈 없이믄 내가 사지요."

비비대듯 트집을 잡듯 말했다.

"내가 내지."

둘은 나란히 마을길을 내려간다. 몹쓸 아이들의 장난이겠지, 배가 터진 개구리 한 마리가 길바닥에 굴러 있다. 흐르는 도랑물에 햇빛이 번뜩인다.

"어디 가시는 길인가분데."

", 바쁠 거 없다. 해는 아즉 중천에 있이니께."

멀리 타작마당 쪽을 바라보며 걷는 용이의 누르께한 살갗과 눈언저리의 잔주름이 피곤해 보인다. 풀발이 선 굵은 모시올 중치막이 서걱서걱 소리를 내고 꼬질꼬질 낡은 갓끈이 조금씩 흔들린다.

"동네에서는 나만 보믄 똥 묻은 개겉이 피하는데 형님은 함께 술을 마시도 되겄소?"

, 하고 용이 웃는다.

"이눔으 세상! 그만 싹 씻가사부맀이믄 좋겄소. 이래사지고는 동네에 질기 살지도 못할 기요."

"..."

"윤보 형님은 훨훨 떠났이니 얼매나 숙이 씨원하까?"

"떠나기는 노상 떠나니께 곧 돌아오겄지."

"약다 약다 했더니 이팽이형 참말로 약십디다."

"두만이를 서울 보낸 일은 잘한 것이지. 아이가 신실하니께."

"나도 괭이자루 집어던지고 진작 목수일이나 배읐더라믄, 이리 썩는 꼴 보고 사느니."

"그렇다고 오만 사램이 다 목수는 될 수 없는 일이고."

"계집 자식만 없어도..."

핏발선 눈에 눈물이 핑 돈다.

"쪽박을 차고 빌어묵었이므 빌어묶었지 아무리 죽어지내는 농사꾼이라 해서."

"자네가 죽어지냈이야 말이제."

"?"

"다른 사람들겉이 죽어지내기로 작정하지 않았을 바에야 매 맞을 것도 미리 작정해두어얄 기고 동네서 쫓기날 것도 미리 작정해도어얄 기고."

"..."

"어치피 눈밖에 난 사람들은 무신 수로든지 당하기는 당할 기구마. 세상 돌아가는 형세가 서울 그 양반한테 유리하다 카든가. 김훈장 말씀으로는 왜놈들하고 한당이니께 왜놈들이 득세하믄 자연히."

"목을 쳐 직일 놈들! 나라 은공은 저희 놈들이 더 받았심서."

"어느 세상이고 그런갑더마. 악문은 많이 묵은 놈이 더하더라고... 벌써 처서가 지났다고 덤불 밑이 훤하내."

그러고는 주막까지 가는 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어서 오시오. 오래간만에 보겄구만이라우."

영산댁은 각별히 반가워한다.

"와 이리 텅 비었소."

술판 앞에 가서 앉으며 용이 말했다.

"오늘이 백중 아니더라고?"

"백중이믄 백중이지 남정네들이 절에 간 것도 아닐 긴데."

"절에는 안 갔겄지마는 오늘 겉은 날은 집에서 술 빚어놓고 놀 긴게로."

"무신 팔자가 좋아서. 한두 집은 그런 집이 있겄지요."

"펭일이라도 매일반이제. 동네 사램 믿고 이 장사 하겠어라우?"

"그라믄 누굴 믿고 장사한단 마리요. 누가 세전 받으로 왔나? 오기지도 엄살 떨어쌌는다!"

화낼 일도 아니건만 한조는 화를 낸다.

"동네 사램이야 가뭄에 콩나기, 농사꾼이 무신 돈이 있단가? 풍년들믄 술 빚어서 묵을 기고 숭년 들믄 죽도 못 묵는디 술 사묵으야? 길목이니께로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나그네 주무니 보고."

시부렁거리면서 영산댁은 젓가락을 닦아놓고 술안주도 내어놓고 사발에 막걸리를 듬뿍 부어 놓는다.

"하기는 그렇지. 윤보형님이나 문턱이 닳게 댕기까, 무신 수로. 자아 술이나 마시지."

권하고 용이 자신도 술사발을 들어 마신다.

"요전분에는 억울하게 당했더마."

목구멍에 꿀꺽꿀꺽 술 넘어가는 모양을 바라보며 영산댁이 한조에게 말했다.

"아따! 술맛 없게 시리, 실데없는 챙건 마소!"

술사발을 메치듯 놓고 안주를 집으며 한조는 또 화를 낸다.

"하도 세상인심이 고약혀서 묻는디 목청 돋울 것도 없이야."

"고약하다고요? 하핫핫핫..."

"벵신겉이 웃기는."

"오늘 겉은 태평성세가 어디 있일 기라고. 동네 사램이 모두 우에서 밑에 까지 인심 쓰기를 서로 다투는 판국인데 여기는 귀가 먼가배."

"환장하게 생깄으라우."

"옛날 생각 좀 해보소. 여기서 이십년을 넘기 장살 했이믄 알만치는 알긴데 옛날에사 참판님댁 마님이나 사랑의 나으리 만내보기가 하늘에 별 따기, 갬히 그 댁 문전에 얼씬거리기가 했건데? 죄 없는 사람 잡아다놓고 북치는 일도 없었고 이것저것 물건 들고 진상하로 가는 사람도 없었고."

"일 년 열두 달 시래기죽만 묵음서 말이요이?"

"주고받고 사랑도 품앗이더라고 그만하믄 인심이 조옿지."

"장리빚을 내서도 말이요이?"

"하모오. 씨암탉에다가 아들딸 혼수로 매련한 명주필 무명필, 그것도 없이믄 장리빚을 내서라도 진상을 하고 하인 놈들한테는 술 사주고 담배 사주고 기색 살피고."

죽이 맞아서 지껄인다.

"그러크름 한께로 까매기떼라 하요."

"까매기떼라꼬요."

"내가 한 말이간디? 지체 높은 서울양반님께서 명절이믄 꾸역꾸역 밀어닥치는 진상꾼들보고 한 소리제이."

"듣던 중 처음 듣겄네. 여차하는 날이믄 소두꾼이 될 귀한 사람들을 까매기떼라니."

한조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는다.

"겉으로는 이삐한다고 마음속으로도 이삐 생각허까이. 갈쿠리 겉은 검은 손발하며 등 빠진 삼베잠방이서 물씬 나는 땀냄새허며 까매기보다 더 낫기 생각헐 리가 있겠어라우? 그런께로 까매기 모이는 곳에 백로는 안 가는 벱이여."

이번에는 썩 기분이 좋아서 한조는 껄껄 소리 내어 웃는다. 맥 빠진 듯 멍청히 앉아있던 용이도, 그런다고 술 많이 팔아줄 처지도 아니구마는, 우리가 백로도 아니겄고 여기 술이나 더 주소, 하며 피식 웃는다.

", 아니 내가 이서방을 술손님으로 치부한다 그 말이랑가?"

사발에 술을 뜨고 술단지 뚜껑을 탁 덮으며 세뚝해져서 묻는다.

"내 이서방 무정허다는 건 진작부텀 알고 있었지라우. 사램이 그러믄은 못쓴다아. 불쌍한 월선이 생각도 좀 못혀?"

희미하게 남아 있던 웃음기가 용이 얼굴에서 싹 가셔진다. 한조는 남은 술을 마시고 영산댁에게 술사발을 내밀었다.

"동네가 시끄럽기 깔진을 신고 댕기는 사램이야 떡판 겉은 아들 낳았인게로 그렇다 하겄소만 자식도 없는 월선이 왜 안 서러브까아!"

"실데없는 소리 말고 술이나 주소!"

한조는 용이를 생각하여 영산댁을 윽박지른다.

"발등에 불 떨어지는가? 옛소오!"

한조에게 술을 떠준 뒤

"태이나기를 잘못 태이나 그렇제. 노류장화도 아니겄고, 남으 말 할거는 아닐 것이요만 이서방 아니더믄 죽자사자 허는 사내들도 있었다든데 진작 팔작 고치고 살지 않았간디?"

벌겋게 상기되었던 용이 얼굴은 다시 파아랗게 변한다.

"전에는 안 그렇더마는 와 그리 말이 많아졌소?"

한조 말에

"금매, 나이 탓인개비여, 이 내 처지가, 아 금매, 그런게로 동정심도 있었던 게라우."

말을 꺼내기는 했으나 용이 기색이 험악하여 어물어물 넘기려한다.

"제가끔 사정이 있인께... 사람이 우찌 할말 다 하고 사는고."

씹어뱉듯 뇌이고 용이는 술사발을 덥석 잡더니 벌컥벌컥 들이켠다. 한조와 영산댁이 어색해져서 마주본다.

"술꾼을 쫓으라꼬 이라나, 와 그라요?"

한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술사발을 술판 위에 놓고 엽전 몇 푼도 놓고 용이 일어섰다.

"나 먼지 가네."

하기가 바쁘게 휭하니 주막을 나가버린다. 영산댁이 혀를 두드린다.

"남정네가 더분더분한 데가 없고 속도 좁다아. 웃어넘기믄 될 일 아닌 개비여?"

"웃어넘길 수 없이니께 안 그렇소. 성내고 간 거는 아닐 기니 께 씹어쌌지 마소."

"아 말이야 바로 허지 강청댁이라믄 모르까 임이네한테 비하믄 월선이는 청백 겉은 제집 아니란가? 내사 월선이하고는 사돈의 팔촌도 안 되지마는 임이네 까불랑거리쌌는 게 하 가소러바서."

"거 여자들끼리나 할 소리제 나보고 할말은 아니구마는."

그러자 영산댁은 웃었다.

"그러고 본께로 나도 이서방헌티 반했는게라우."

하고 이번에는 소리를 내어 웃어젖힌다.

"쭈그렁박이 된 얼굴 생각은 안 하고."

"그려. 쭈그렁박이 됐구마니라우. 그라믄 이자부터는 내 술 묵으시오. 오늘은 백중이고 나도 한잔 마실라누만. 마시고 온갖 시름 다 잊어부릴라요."

영산댁은 한조에게 술 한 잔을 더 권하고 자신은 탕기에 술을 부어 홀짝홀짝 마신다.

"내 생각도 바로 그렇소. 이 술 마시고 온갖 시름 잊어부린다믄 얼매나 좋겄소."

한조는 김치조각을 어적어적 씹는다.

"어려블 거 없이야. 산 입에 거미줄 치는 법 없인게로, 만사 곰보 목수맨치로 생각하믄 제집 자식 있는 게 탈이제이. 그는 그렇고 삼수놈 얘기 들었지라우!"

"삼수놈 얘기라믄 이름만 들어도 이가 갈라요."

"삼수놈이 봉기 딸 두리를 돌라 캤다가 혼짝난 얘기는 모르는개비여."

"내가 알아 송사하것소."

"아 금매, 그런게로 그저께 붙들이란 그눔아 아들이 와서 허는 소리를 나도 들었는디 봉기나 삼수나 다 아장부피자부 아니더라고? 그런게로 여간 재미있이야제. 봉기 그 사람도 좀 으뭉스럽간디? 곰 이제 곰."

영산댁이 하는 말에 의할 것 같으면 서울서 조준구가 심복 하인배들을 데리고 온 다음부터 삼수의 콧김은 숙어졌다는 것이다. 쓸만큼 써먹었고 자기 공이 대단한 것처럼 자칫 버릇없이 구는 삼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데다 삼월이 누구 씨인지도 모를 아이를 낳은 후부터는 더욱 삼수를 삼월이에게 밀어붙이며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시 위인이 사악한 데다가 푼수 없는 뚝심이 있어서 봉기한테 깔아놓은 밑천, 밑천이래야 흉년 때 남보다 곡식말이나 더 간 것하고 조준구에게 좋게 말하여 문전답을 부치게 한 것 등이지만 최참판댁에서 자기 처지가 떳떳치 못하게 되면서 부터 깊은 정을 느끼는 것도 아니면서 마치 장리빚이라도 받아내려는 심정으로 두리를 내놓으라 엉기엉기 덤비었던 모양이라는 것이다.

"언제 난 봉기간디? 어림이나 있는 일이까아? 뚝심으로 친다 혀도 그렇고 능청스러운 거는 한술 더 뜰 긴게로. 볼 만허게 붙었지야. 그래 뭐라 혔는고 허니 - 나 너거 상전한테 가서 물어볼란다. 삼월이년하고 짝을 지어주싰고 새끼까지 내질렀는디 우리 두리를, 아 우리 두리가 어디 종년이건데? 명색이 상사람으 딸자식하고 그래 계집자식 있는 종놈하고 혼사가 되겄는가, 그기이 사리에 맞는 일인가 물어볼라누마. 또 있지러, 물어볼 일이 니를 면천시키서 집안일을 몽땅 두량하게 할 기라 하싰다 카니 일자무식자 니를 말이다. 그기이 정말인가 물어볼라누마. 또 있지러. 삼월이 낳은 아이가 그 어른 씨종자임이 틀림없다 했고 최참판댁 살림을 그 양반이 뺏는 데는 공이 제일 크다는 말도 니 입으로 했이니 내 물어볼라누마. 듣기로는 아 서울서 온 그 지서방인가 하는 사램이 하는 말을 들으니께 딴판이더마. 딴판이라 - 그러크름 봉기가 말했다는 거 아니겄소? 되게 당했지라우. 그 늙은 곰 겉은 봉기가 벌써부텀 거서방인가 뭔가 하는 작자헌티 온갖 정성을, 왜 그 함안댁 목 매달은 줄까지 갖다줌시로 푹 삶아서 제 편역을 만들었인 게로 집안 형편은 다 알 만치 알아서 큰소리 탕탕 친 거 아니겄어? 삼수놈 한마디 말도 못하고 뒷맛이 썼을 것이요이."

", 호랭이 잡아묵는 담비가 있다 카더마는."

"그라믄 삼수가 호랭이란가? 거 출세했구마니라우."

"호랭이는 무슨 호랭이, 말이 그렇다는 기지. 살쾡이도 못 될 놈!"

"사램이란 제 푼수를 지키고 내일 어찌 될 값에라도 곧은 길을 가야 우리 집에 술 처묵으러 올 적마다 삼수놈 얼굴을 빤히 치다보곤했는디, 당장은 좋을지 모르지마는 남헌티 몹쓸 짓을 하믄 옳은 죽음 못히여. 세월이 보를 갚는 법이여."

"그렇다믄 이 세상에 억울한 사램이 어디 있겄소. 참말로 세월이 보를 갚는다믄 천년이라도 기다리겄소."

"그런다고 머 착한 사램이 고생 안 헌다 할 수는 없제. 그것은 전생의 죄 아니까아? 그래도 제 마음만 청백 겉으믄 무서울 기는 없일 기고 마음도 편헐 기고오."

"나쁜 짓 하는 사램들은 맘이 안 편할 기라 그 말이요?"

"수풀에 앉은 새맨치로 맘이 안 편할 사람도 있일 기고 편헌 사람도 있일 기지마는 업보를 받을 적에도 마음이 편하까아?"

월선이 집 앞까지 왔을 때 해는 떨어지려 했다. 둥근 선을 그은 초가지붕 위에 까치가 앉아 있었다. 반쯤 열려 있는 판자 삽짝을 떠밀며 용이 마당에 들어섰다. 암갈색 암수탉 두 마리가 붉은 벼슬을 흔들며 울타리 곁의 배추밭에서 배추를 쪼아 먹고 있었다. 이웃 조무래기들과 제기를 차며 놀고 있던 천석이가 땅바닥에 떨어진 제기를 얼른 주워들고

"아지매 없소. 절에 갔소."

하며 용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제풀에 무안했던지

"저녁에는 올 기요."

하며 천석이는 조무래기들을 몰고 밖으로 뛰어나간다. 마루 끝에 가서 걸터앉은 용이는 허리를 구부리고 신발을 내려다본다. 삼십 리 길을 걸어와서 땀에 젖은 옷이 후줄근했으나 그보다는 용이 얼굴이 더 후줄근해 보인다. 백중날이기 때문에 월선이 절에 갔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보고 싶어 못 견디어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 '월선이를 잡아두었던 기이 옳았던 일이까.' 눈을 감는다.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을 하다니...'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뭔지 모르게 가뭄 탄 푸성귀처럼 자기 내부에서 시들어가고 있는 것을 용이는 느낄 뿐이다. '나이 탓이까., 홍이가 커가는 때문이까.' 흥이 커가는 때문일까 했으나 그는 아들의 장래를 꿈꾸어본다거나 기대를 걸어본 일은 별로 없었다. 농사꾼 자식이면 농사꾼 될밖에 없다는 막연한 체념 비슷한 생각은 했었다.

'월선이는 이렇기밖에 살 수 없는 기고 나 역시 그렇기밖에, 무신심이 있다 말고. 내 나이 이제는 사십이다.' 감았던 눈을 뜨고 허리를 구부린 채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부드러운 수염이 손바닥에서 미끄러진다. 불에 단 쇠를 두 손으로 꽉 쥐는 것 같은 아픔, 가시덤불 속에 몸을 굴리고 싶었던 안타까움, 푸른 눈동자 속에 일렁이던 정염은 참으로 찬란한 희열이 아니었던가. 그것들은 이제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바닥 모를 심연이요 끝이 없었던 오뇌, 그것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줄기차게 넘쳐흐르던 감정들은 싸늘한 재가 되어 핏줄을 흔들어주는 힘이 없는 것이다. 용이는 자신이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봄볕 따스한 장다리밭에 보송보송 핀 노랑 꽃이파리 위를 노랑나비가 나풀거리는 것 같았던 화사한 젊은 날, 아니 어린 날 월선이를 못 잊어 울었던 소년은 장가를 들었고 꽃샘바람이 불던 이름봄 할미꽃을 꺾어왔던 담방치마의 어린 새댁을 연민의 눈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던 어진 젊은이는 가끔 우스갯소리도 했고 명주수건에 장구를 메고 맴을 돌면서 인생의 허무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기도 했엇다. 월선이 돌아왔을 적에 수줍고 염치 바르고 도덕심이 굳었던 삼십의 사나이는 그러나 보송보송 핀 노랑 꽃이파리에 나풀거리던 나비는 될 수 없었다. 벌겋게 단 무쇠를 잡듯이 그 아픔은 참으로 황홀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월선이 다시 종적을 감춘 후 줄이 끊겨 허공에 뜬 연처럼 이태의 세월을 보내었고 그런 뒤의 강청댁과 임이네 두 여자에게 향한 욕정의 광풍은 용이로 하여금 지옥의 밑바닥을 보게 했다. 강청댁이 죽고 임이네는 홍이를 낳았고 액병이 지나간 자리에 많은 죽음을 보았고 흉년을 겪었다. 그러나 고난에 이지러진 사내는 숙명처럼 나타난 월선이 앞에 다시 섰던 것이다. 마디마디에 못이 박힌 커다란 손, 흰 머리칼이 생기기 시작한 상투, 힘없이 늘어난 살가죽 이외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그러나 사내로서의 자존심은 갈등을 물고 오기도 했으나 이제는 그것마저 희미해지고 말았다. 생활의 무게를 떠밀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피곤한 그에게 아들 홍이는 따스한 빛이었다.

하얀 무명저고리에 갈매 빛으로 물들인 무명바지를 입은 홍이가 - 임이네는 남의 아이들같이 아무렇게나 옷을 입히는 법이 없었다. 밤을 지새가면서 푸새를 하고 바느질을 하여, 홍이는 그에게 자식 이상의 뜻을 가진다. 마치 수호신과도 같은 - 방그레 웃으며 한 봄날 아지랑이 같은 평화스러움을 느낀다. '저놈을 월선이가 낳았드라믄... 죽은 그 사람이 낳았거나...' 하다가 마당을 왔다갔다 하는 임이네 모습을 피하여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이녁겉이 무심하까. 그 자식이 우떤 자식이라고... 남으 씨나 받아서 낳은 거맨치로."

임이네는 자기에게 무심한 용이 태도를 아이를 앞세워 푸념하기도 했다. 한 집에서 한 이부자리 속에 지낸 것도 벌써 사 년이 지나갔다. 칡넝쿨같이 줄기찬 생활력과 물가의 잡풀같이 무성한 생명력을 지닌 임이네, 식욕과 물욕과 성욕이 터질 듯 팽팽한 살가죽에 넘쳐흐르듯 왕성한 임이네는 대지에 깊이 뿌리박은 여자, 풍요한 생산의 터전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는 접을 붙여주지 않는 꽃나무, 무정란을 품은 슬픈 새다. 용이는 홍이를 얻은 뒤 다시 자식을 바라지 않았다. 지난날 강청댁에게 그러했듯이 부부의 관계를 끊은 것은 아니었지만 정액을 밖에 쏟았다. 그의 행위는 언제나 싸늘하고 그 행위에 혐오를 느끼는 듯했다.

"우찌 그러요?"

"없는 놈이 자식 많아 머하게."

대꾸는 그 이상을 넘지 않았고 옛날 칠성이한테처럼 악악거리거나 투정하고 군소리하지는 못했다. 물론 오욕스러웠던 자신의 과거가 말을 막기도 했으나 말없는 엄격한 용이 태도는 허물 수 없는 높은 장벽이었다. 월선이 탓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자식을 낳았다 하여 월선과의 관계를 막고 나설 수 없는, 그렇게 되면 용이 어떤 결단을 내릴지 임이네는 무서운 판단을 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네 소문이 쫘하게 깔린 당혜의 경위를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은 임이네가 생각 끝에 꾸며낸 연극 같은 것이었다. 아니 저항이요 자위수단이었는지도 모른다. 당혜는 명주 한 필이 둔갑한 것이다. 염치를 무릅쓰고 동냥하다시피 뽕을 얻어다 누에를 쳤고 짬짬이 짜서 농밑에 넣어둔 명주 두 필은 과년해가는 임이 혼수였다. 그 명주 한 필을 꺼내었다. 설장을 보러 가는 용이에게 주저주저하다가

"팔아서 깔진 한 키레 사다주소. 명주 한 필 팔아서 깔진 사자 카믄 두 냥쯤 남을 기요. 그라고 오래 신거로 너무 야하지 않는 거로 사소."

했다. 용이는 명주 두 필이 임이 혼수인 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당혜는 임이 몫으로 장만하는 줄 알았다. 살인 죄인의 딸로서 의붓아비 밑에 자라는 임이 처지를 가슴 아파하는 어미 마음을 측은하게 여긴 용이는 반대할 아무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임이네는 따로 생각이 있었다. 결국 임이에게 줄 신발이지만 자줏빛에 유록색 전을 두른 예쁜 당혜를 사왔을 때

"나 평생 깔진이라고는 신어본 일이 없소. 이분 설에 내가 좀 신다가 임이 줄라요."

용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식을 낳았이니 할 수 없어서, 그란하믄 꾸중물 겉은 제집을 누가 데리고 살 기라고."

"하모 백정놈한테도 치매를 걷인 제집 아니가. 그래도 이서방이 어지니께 그렇지. 다른 남정네 겉애봐라. 자식 뺏이믄 고만 아니가. 지가 어디 가서 머라꼬 발명할 기든고?"

"대꼬 살기는 살아도 무신 정이 있겄나. 제사 때는 멧상도 안 들린다 카데."

"안 그래도 정이사 벌써 다른 데 홈싹 쏟아놨는데."

"그래도 감지덕지해야지. 집에 들앉히놓은 것만 해도 지 주제에? 피둥피둥 살이 쪄서 무슨 요조숙녀라고? 지랄 떨어쌌는 거 참말로 눈이 씨어 못 보겄더라."

이웃 아낙들의 뒷공론을 임이네는 알고 있었다. '자아, 보아라! 너거들 팔자치레한 년들, 나를 업수이 여기더라마는 내 너희 년들을 부러바하는 줄 알았더나? 너희 년들 중에 서방이 깔진까지 사다준 년 하나나 있니믄 어디 그 깔진 구겡이나 좀 하자!' 십분 거동으로 그런 말을 나타내며 임이네는 정월 초이튿날부터 당혜를 신고 이집저집을 시위하고 다녔던 것이다. 과연 마을 안에서는 의견이 들끓었다. 임이네가 노린 이상의 효과가 나타났다.

"농사꾼의 제집이 깔진은 무신 놈의 깔진고. 신고 나서는 년도 그렇지마는 사다준 이서방도 미쳤지."

욕을 했으나 멸시가 아닌 선망이었고

"전사는 우찌 되었든 오래 함께 사니께 정이 드나부제? 제집 사내란 그런 긴가."

"홍이놈이 애비 에미 근원을 붙이주었는갑다. 머시마가 좀 좋아야제? 남으 자식이라도 안아보고 저븐데."

어느덧 임이네 위치를 인정해주고 있는 것을 마을 아낙들 자신도 깨닫지 못했다. '너거년들 서방 수물 백을 모아보아라! 우리 홍이아배 한 사람들 당할 기든가. 꾸중물겉이 더러븐 년이라 하고 샐인 죄인 계집이라하고 너거 년들이 나를 설움 주고 구박하더라마는 너거 년들보다 열배 백 배 내가 못할 거 머 있노. 자아, 보믄 알 거 아니가. 홍이아배가 나를 이러크름 섬기는데 너거들보다 못할 기이 머 있노. 사램이 몇 백 년을 살 기든가. 팔자치레 못한 거를 이마빡에 붙이고 댕기든가. 정이 나한테 없다고? 나를 대수로 안 여긴다고? 정이 없고 대수로 안 여기는 제집한테 깔진 사다주겄나. 소나아가 잘나믄 계집질하기 매련이고 그까짓 뜬계집 내일이라도 가믄 고만인 기라. 그래도 우리 홍이아배는 제집한테 빠지서 살림 망해묵을 사람은 아니고 집안 것이라믄 깨 한톨도 안 가지고 가니께. 그래도 월선이 한테 정이 있다 하겄나? 실데없는 주딩이 까지 말고 너거들도 내맨치로 깔진 하나 사돌라 해보라모. , 말이 그렇지, 평생 끝발 매고 길쌈하고 그래봐야 깔진이 어딨더노? 보선목달이 한짝이라도 사다주믄 가랭이 치키들고 춤을 칠 년들이.'

설 명절 며칠 동안을 임이네는 그런 말을 거동으로 나타내고 희색이 만면하여 마을을 쏘다녔던 것이다.

"아이고오, 오싰구마요. 방에 안 들어가시고 어두븐데."

곁방살이하는 천석어미가 거리에서 팔다 남은 떡 함지를 이고 들어오며 말했다. 용이 고개를 든다. 순간 용이는 기우뚱하며 한 팔을 내저었다. 그의 눈앞에 생각지도 않았던 최치수의 얼굴이 지나갔던 것이다. 환각이었다. 사방은 어둑어둑해 있었으며 천석어미의 모습도 뚜렷하지 않았다.

"절에 갔는데 곧 돌아올 깁니다. 백중날이라꼬 재 지내로 갔이니께요. 방에 들어가시이소."

용이는 친석어미 목소리에 쫓기듯 짚세기를 벗고 마루에 오른다. 방문을 열고 얼른 방안으로 들어간다. 빈방 기운이 썰렁하게 콧가에 와서 닿는 것 같다. 갓을 벗어 걸고 중치막도 벗어놓고 용이는 피곤해진 몸을 드러눕힌다. 방바닥의 냉기가 땀에 젖은 살갗에 쩍 들어붙는 것 같다. 밖에서는 늦은 저녁을 짓느라고 허둥지둥하는 천석어미의 발자국 소리, 장독 뚜껑을 여닫는 소리, 물 푸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안은 어둡고 들창을 비쳐 들어온 희미한 밝음이 장롱 나비 모양의 주석이 조금 떠올려주고 있다.

'이상하다? 뜬금없이 서방님 얼굴이 우째 보일까?'

최치수가 죽은 뒤 두서너 번인가 꿈에 본 일이 있었다. 꿈에서 만난 최치수는 그럴 때마다 죽을 무렵의 모습이 아닌 어린 시절의 소년으로 나타났다. 한 번은 열한 살 때 마마로 죽은 누이 서분이와 함께 놀던 모습이었고 한 번은 조그마한 계집아이, 월선이의 머리 끄덩이를 잡아당기는 모습이었다. 꿈이 깨었을 때 용이는 죽을 무렵의 최치수 얼굴을 떠올려보려 했으나 희미하여 그름 잡는 듯 종내 또렷이 기억해낼 수 없었다. 그러던 최치수가 별안간 눈앞에 뚜렸이 나타났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불그스름하고 얄팍한 입술, 쏘는 듯 강한 눈동자, 도드라져서 모가 난 관골과 날카로운 콧날, 혹은 뗏목이 들어올 때 짐꾼 일을 하는 천석아비는 꽁하는 성미여서 방세 없는 석가살이가 미안하여 그랬던지 아침 일찍 저녁 늦게 돌아오면서도 월선이와 마주치기를 피해왔는데 용이 오는 날이면 더욱더 조심스러워져서 인사는커녕 쥐 죽은 듯 방속에서 말이 없는 사내였다. 천석어미가 제 남편을 보고 용이 왔다는 귓속말을 한 모양이다. 방문 여닫는 소리와 천석의 어미의 저녁 짓는 기척이 났을 뿐이다. 한참 후

"불도 안 키고... 오기는 올 긴데 저무네요."

문밖에서 천석어미가 말을 걸었다. 용이는 일어나서 등잔에 불을 붙인다.

"우리 집에서 저녁은 했는데 우짤랍니까? 더 기다리보실랍니까?"

"괜찮소."

하다가 용이는 방문을 반쯤 열었다.

"저 천석이 있지요?"

"."

"저녁보다, 미안하지마는 술을 좀."

"그러지요. 천석아!"

"."

하고 천석이 뛰어나왔다. 용이는 아이에게

"니 술 좀 받아올래? 한 되만."

"."

주머니 속에서 엽전을 꺼내어준다.

용이는 한 되 술을 다 마셨다. 그리고 술상을 밀어붙인 채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는지 눈을 떴을 때 등잔불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깜박 잠이 들었고나!' 새벽닭이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벌써 새북가?' 일어나 앉는다. '우찌 된 일이꼬? 안 돌아왔는가배?' 윗목에 뽑아놓은 곰방대 담배쌈지를 끌어당겨 담배 한 대를 넣어 붙여 물었다.

'속이 쓰리다. 우째 썰렁하구마.'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용이는 생각에 빠져 들어간다. '뜬금없이 서방님의 우째 보있이까?' 그것은 어느 가을날의 일이었다. 치수의 조모 조씨가 살아 있을 무렵이다. 최참판댁에서는 가을굿이 벌어지고 있었다. 굿을 하는 무당은 월선이네였고 용이어미도 와서 최참판댁 뒷일을 보살펴주고 있었다. 어미를 따라온 머슴애와 계집아이 그리고 치수는 시끄러운 집안에서 빠져나와 뒷산으로 올라갔다. 단풍이 한창인 산은 아름다웠다. 치수는 언젠가 산에서 벌통을 본 일이 있다면서 그것을 찾으러 가자 했다.

"지금쯤 꿀이 많아졌을 거야."

계집아이는 하아하아, 하고 숨을 가쁘게 쉬며 따라왔다. 용이는 계집아이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지만 치수가 화를 내면 어쪄랴 두려운 생각이 들어 못 본 척하고 느릿느릿 산길을 올라갔다.

"빨리 와! 뭐하는 거야!"

치수는 눈알을 굴렸다.

", 도련님."

"!"

별안간 치수는 입술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돌아보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베어낸 나무밑둘에 움이 돋아 여름내 자라서 너불너불 이파리가 벌어진 오리나무를 손가락질해 보였다. 꿩이다. 머리는 이파리 속에 숨기고 감청색으로 반들거리는 꼬리와 갈색, 녹색의 윤이 흐르는 몸뚱이는 드러내놓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 내가 저눔을 잡을 테야."

치수는 소곤거리며 두 팔을 벌리고 살며시 발을 떼어놓았다. 얼굴을 빨갛게 상기시키며 계집아이는 꿩이 있는 것도 모르고 치수의 거동이 수상하여 그 모습에 눈을 팔고 다가오다가 그만 돌부리에 채여 넘어졌다. 그와 동시 재빨리 기기 시작한 꿩은 푸드득 날아올랐다.

"이 계집애! 죽여버릴 테야!"

치수는 악을 쓰며 엉겁결에 일어선 계집아이에게 달려가 주먹으로 가슴을 쥐어박았다. 계집아이는 다시 뒤로 나자빠지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죽어버릴 테야! 죽여버려!"

연신 악을 쓰며 발길질이다.

"도련님! , 도련님!"

용이는 울면서 치수의 팔을 잡았다.

"이놈아! , 넌 뭐야! 왜 울어!"

이번에는 용이 가슴을 쥐어박았다. 용이는 우는 대신 하하, 하고 웃었다. '상놈이 우찌 양반을 때릴 것꼬.' 타이르던 어미 말을 분하게 여긴 용이였었는데 계집아이 대신 맞은 것이 기분 좋았다.

"이게 미쳤어?"

연신 쥐어박다가 치수는 맥이 풀렸던지 혼자 훵하니 산을 내려갔다. 용이는 땅바닥에 퍼질러앉은 계집아이를 일으켜 세워 치마에 붙은 마른 나뭇잎을 털어주고 입었다. 계집아이의 무게는 가뿐했다. 아마 그때 월선이의 일곱 살쯤 되었을 것이다. 용이는 꿈을 꾸듯 어린 날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이서방이 아니더믄 죽자사자 허는 사내들도 있었다든디 진작 팔자 고치고 살지 않았간디?' 영산댁의 말이 돌팔매처럼 의식 속에 뛰어들었다. '새북닭이 우는데 간밤에 안 돌아왔구나?'

갑자기 가슴이 방망이질하듯 뛴다. '절에서 잤겄지.' 여전히 가슴은 뜀다. '내가 와 이러지? , 이기이 무슨 짓인고 모르겄네.' 해괴망칙한 망상이 밀려든다. 강한 욕망이 핏줄을 흔들며 달겨든다. 질투, 의심, 사랑과 미움이 목을 눌러 죽여버리고 싶은 강포한 힘이. 용이는 배앓이하는 사람처럼 방안을 헤맨다. 월선이는 해 돋기 전에 돌아왔다.

", 우찌 오싰소."

강바람을 다 마시고 달려온 것처럼 월선이는 숨을 몰아쉬었다.

"어디서 잤노?"

가만히 월선이를 노려보며 용이 물었다. 머리칼 하나 눈빛 하나 움직이는 것이 있다면 때려잡을 듯한 기세다.

"절에서 잤소. 우쩐지 맴이 씌어서 날이 새기도 전에 절을 나섰더마는."

수줍고 기쁨에 넘치는 미소 눈과 눈이 마주쳐서 떨어지질 않는다

"언제꺼지 니는 이리 덩신으로 살 것가."

용이는 스스럽게 여자를 가슴에 안았다. '아무래도 나는 니 니 없이는 못 살 긴갑다.‘

 

 

3. 농발 없는 장롱

안채와 별당 사이에 한 그루 서 있는 팽나무 속에서 우는 걸까 찢어지게 공간을 흔들며 매미가 운다. 병수는 글을 읽다가 얼굴을 든다. 하늘에는 덩어리를 이룬 새하얀 구름뭉치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여름도 다 가는데 여태 매미가 우네? 저러다가 찬바람이 불면 어디로 갈까? 아마 죽어버릴 거야.' 병수는 늘 생각하는데 귀청이 윙윙 울리도록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가 싫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어머니 홍씨의 악쓰는 목청을 들으면 전신이 오그라들 듯 무섭고 괴로웠는데 그보다 시끄러운 매미 소리는 왜 싫지 않을까 하고 절에서는 안거라 해서 여름철에 탁발을 하지 않고 중들은 수도를 한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벌레들은 여름철에 성하기 때문에 모르게 밟아죽이는 일이 허다하므로 살생계를 범할까봐 중들은 나돌아다니지를 않고 하안거를 한다는 것이다. 길상이 한 말이었다. 언젠가 병수에게 들려준 말이다. 길상이 한 말이었다. 언젠가 병수에게는 미움이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한번은 높은 마루를 오르질 못하여 병수가 버둥거리고 있을 때 뒤에서 누가 안아 올려준 일이 있었다. 길상이었다. 그때 그의 눈에는 슬프고 따스한 것 같은 빛이 서려 있었지만 그 후 다시 무뚝뚝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병수를 대했다. 어떤 때는 미움이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한번은 높은 마루를 오르질 못하여 병수가 버둥거리고 있을 때 뒤에서 누가 안아 올려준 일이 있었다 길상이었다. 그때 그의 눈에는 슬프고 따스한 것 같은 빛이 서려 있었지만 그 후 다시 무뚝뚝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병수는 길상이 좋았다

'이슬만 먹고 사는 죄 없는 벌레니까 사람들처럼 욕심 부리고 싸우지도 않지 그리고 여름이 가면 죽는 슬픈 신세니까 말이야' 매미가 울음을 뚝 그쳤다. 다시 책을 읽으려 하는데 이번에는 이 초시의 드렁드렁 코고는 소리가 옆방에서 들려왔다. 병수는 푸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다시 바깥 하늘을 바라본다. 덩어리를 이룬 새하얀 구름뭉치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으흠으흠 큰기침하는 것 허우대 좋은 것 게을러빠진 것과 낮잠을 즐기는 버릇 이외 이렇다할 특징이라곤 없는 이초시는 병수의 글선생이다. 코를 골거나 말거나 장죽을 물고 낮잠을 자거나 말거나 별채에는 윤씨부인 생존시에 조준구네 식구들이 거처하던 곳 조준구와 홍씨는 얼씬거린 일이 없었으므로 누가 가타부타할 사람도 없다. 애초부터 병신 아들 면무식이나 하게 하자고 데려다 놓은 사람인만큼 두 내외는 이초시에 대해서는 통 관심이 없는 것이다. 자식인 병수조차 있으나마나 어떤 경우에는 있어서 곤란한 존재로 생각했으니 글선생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스러울 게 없다. 그러나 내색한 일이 없었고 설령 내색을 했다손 치더라도 알아줄 사람이 없었겠지만 병수는 이초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고향에라도 다니러 가고 없는 날이면 속이 시원하고 기분이 좋았다. 글 읽기가 싫어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글 읽기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병수는 이초시의 코고는 소리만 들으면 악을 쓸 때 어머니가 씨익씨익 숨을 몰아쉬던 소리와 혼동을 하게 된다. 코고는 소리하고 씩씩대는 숨소리는 분명 다를 터인데 그만큼 병수 의식 속에는 어머니에 대한 두려움, 혐오감이 깊이 박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서울서 열두 살까지 불구자식을 수치로 아는 홍씨에 의한 세상 구경을 못하고 어둠침침한 골방에서 자란 병수가 이곳에 온 지도 어언 4년이 지났지만 자라지 않은 채 열다섯이 되었다. 사대부집 자제로서는 성례를 마쳤어야 할 나이다. 자라지 않는 신체 그 신체와는 반대로 정신의 성장은 이상하게 빨랐다.

넓은 천지 그러니까 서울에서의 골방살이에 비한다면 사리는 넓고 넓은 천지였던 것이다. 그는 시시로 뒷산에 올라 하늘과 강물과 숲과 들판을 철따라 다양하게 변모하는 자연을 볼 수 있었고 날짐승, 들짐승 붓벌레들, 사철의 식물들을 볼 수 있었고 먼발치로 들일하는 농부들의 생태도 볼 수 있었다. 별당을 제외한 넓은 집안을 돌아다녀도 방해하거나 관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가두어진 생활에서 일시에 밀어닥친 외계의 상황은 그런 만큼 신선하고 강렬했을 것이다. 목마른 나무가 물을 빨아올리듯이 새로운 환경은 그에게 숱한 지혜를 주었고 생각을 풍부하게 해주었으며 사물을 판단하는 능력을 길러주었다. 직감은 정확했고 본능적으로 상대방의 특질을 파악한다. 단순히 선악의 기준에서 파악한다기보다 사람들 성격의 빛깔이랑까 분위기랄까. 의식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 지극히 탐미적인 요소를 띤 느낌 같은 것이라 할까, 시원찮은 선생이었으나 이초시한테 소학을 배우고 통감을 떼고 사서를 배우면서 도덕률에 의한 가치를 인간 행위의 존엄성을 헤아리는 의지를 지각하게 되었다. 실로 병수는 조상이 남겼으며 스승의 인격을 느낀 바도 없었으나 옛날 성현의 글 그 행간 행간에 배어난 위대한 사상을 가르치는 사람의 의도를 훨씬 넘어서 흡수하고 깨달으며 비약하고 상승해갔다. 물론 십오 세라는 나이의 한도에서 우수했었다는 애기다. 이러한 자질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석으로 함께 거주하는 이초시도 병수 내부에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엿보지 못했고 부모 역시 그러했다. 관심이 없었다는 것도 이유겠으나 그들은 모두 어느 면으로서든 범속한 인물들이었으니까 그토록 오랜 시일 집념으로 적대해오던 길상이가 의외로 병수의 남다른 점을 감지하고 있는 듯 세정에 밝고 처세에 늘란하며 제반사에 현통하다 하여 우이에 있는 사람들이 도금된 자신들을 높이되 진토 속에 묻힌 옥을 모른다는 것은 자신들이 옥의 동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병수 내부에 숨은 청랑한 오성을 느낀 길상은 비록 신분이 얕고 천애 고아이나 조물주께서 선험을 풍부히 부여한 운명으로 많은 장님 속의 눈뜬 사람의 하나라고나 할까, 왈 꼽추도령이요 천지바보요 오줌도 가릴 줄 모른다는 사실과 억측 속에 하여간 병수는 인간 폐물로 추호의 동정 없는 낙인찍힌 존재다.

코고는 소리가 여전했다. 병수는 책을 덮고 일어선다. 신돌과 상당히 거리가 있는 마루를 미끄럼타듯 내려선 그는 잠시 동안 코고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살금살금 걷기 시작한다. 얼굴에 부드럽고 약간의 장난스런 미소가 흘렀다. 구름뭉치는 어느새 층으로 변하여 서서히 움직이는 것 같다. 별채 모퉁이를 돌아서면 뒤켠 대숲이다. 대숲 속에 실낱처럼 가는 한 줄기 길이 있다. 사당으로 통하는 길이다. 병수는 사당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여러 번 가보려고 마음먹었으나 종내 못 가고 말았다. 옛날 대숲에 호랑이가 나타나서 포수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애기도 애기지만 별당 담장가에만 대나무가 성글었을 뿐 나머지 곳에 가득 들어찬 대나무숲이 어찌나 울창했던지 대낮에도 여우가 나타날 것 같은 무서움 증이 들었기 때문이다. 병수는 대숲 속에 난 오솔길 초입에서 오른편으로 걸음을 꺾는다. 그곳은 길이 아니었고 바로 대숲 속이지만 담장이 연이어져 대나무는 드문드문하고 햇볕이 환하게 비치는 곳이다. 마른 댓잎이 발밑에서 와삭와삭 바스라지는 소리를 낸다. 담장을 따라 한참을 가던 병수는 걸음을 멈춘다. 얼굴에 부드럽고 약간의 장난스러운 미소가 다시 지나간다. 담장 가까이로 행복해진 얼굴을 가져간다. 담벽 흙이 좀 허물어진 곳에 돌과 돌을 맞물린 사이에 조그마한 구멍이 하나 나 있다. 그 구멍에 한쪽 눈을 바싹 갖다댄다. 한쪽 눈에 비친 곳은 별당 뜨락이다. 해당화 잎이 아랫도리를 가렸으나 별당 전부가 보인다. 마루가 있고 마루 안쪽에 방이 있고 마루 곁에 있는 툇마루가 달린 큰방이 서희의 거실이다. 한데 그 툇마루에는 문짝 하나가 걸쳐져 있었다. 남치마에 흰 적삼을 입은 엉덩이까지 내려온 머리꼬리에 자줏빛 댕기가 흔들리는 봉순이 모습이다. 신돌 위에서 허리를 구부린 봉순이는 풀비로 종이에 풀칠을 하고 있었다. 곁에는 얹은머리가 부스스한 김서방댁이 지껄이고 있는 모양이다. 이윽고 두 사람은 풀칠을 마친 한지를 맞잡아 들고 툇마루에 기대어 세워놓은 문짝 앞에 가더니 문을 바른다. 그러기를 몇 차례 다 발라버린 문짝을 번쩍 치켜든 김서방댁이 별당 출입문 근처 담장에다 문짝을 옮겨놓은 뒤 사발에 떠서 들고 나온 물을 입에 머금더니 문짝에다 푸우! 하고 뿜는다.

이때 문짝을 들어내어 반듯하게 네모로 드러난 문틀 공간에 서희 모습이 나타났다. 병수 눈빛이 환해진다. 두 주먹을 꼭 쥔다. 연분홍 치마, 유록빛 회장저고리를 입었다. 서희는 문기둥에 한 손을 짚고 병수 쪽을 향해 서 있다. 서희 모습 뒤켠에 백동 장식이 반짝이는 장롱의 일부분이 보인다. '가엽은 서희......' 훤하게 트인 이마, 갸름한 얼굴 윤곽에 꺼뭇꺼뭇한 눈은 멀리서도 또렷하다. '하늘의 선녀라고 저렇게 어여쁘게 생겼을까.' 병수 눈에 눈물이 글썽인다. '내 이 병신만 아니더라면...... 이 세상 끝까지 너를 따라가겠다! 내 이 병신만 아니더라면 너도 나를 싫어하지는 않았을 거야. 가엾은 서희, 너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하리.' 눈물에 흐려 서희 모습이 물감처럼 번져난다. '부끄럽다! 부끄러워. 이 집도 살림도 땅도 모두 서희네 건데...... 우린 비렁뱅인데 말이야!'

"도련님."

용수철같이 튀면서 돌아섰다. 노기에 찬 길상의 눈이 쏘아보고 있었다.

"거기서 뭘 하시오?"

병수의 얼굴은 사색이다.

"도련님!"

평소 준수했던 모습이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낸다. 다음은 웃었다. 살기보다 무서운 모멸의 웃음이다.

"숯구리 꽁 잡아묵는다 카더마는."

"......"

"병신 육갑하다 카더마는 흥! 그 말이 조금도 그르잖구마."

", ......"

"꿈도 꾸지 마시오.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고 물어보시오. 될 법이나 한 일이요?"

", 꿈에도."

"그렇소, 꿈도 꿈도 꾸지 말라고 말했소! 천지개벽이 있어도 우리 애기씨는 안 될 기요!"

"......"

", 나는 서희가 불쌍했을 뿐이다. 꾸 꿈에도 아 아버님이 굳이 혼인하시겠다면 나, 나는 죽어버릴 테야."

길상의 눈이 차츰 가늘게 좁혀진다.

"도련님?"

속삭이듯 낮았다.

"정말로 그리 생각하시오?"

"정말이야."

"정녕 그렇소?"

여전히 속삭이듯.

"정녕!"

"그라믄 와 이런 짓을 하시오?"

", 너무 이뻐서."

길상의 얼굴은 다시 질린다.

"죽어버릴 테야. 맹세하겠어. 나는 죽어버릴 테야!"

"......"

"아무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야. 난 그걸 알어. 어째 길상이는 그걸 몰라주니?"

"알겄소."

", , 난 말이야. 누이동생이 예, 예뻐서 말이야."

"알겄소."

병수에 비하면 거인같은 큰 길상이 어두운 눈빛으로 내려다본다. 사색이 되었던 병수 얼굴에 핏기가 돌아오고 그 핏기는 얼굴에서 목덜미까지, 봄을 알기에는 아직 부드럽고 연약한 살갗이 해당화 꽃빛으로 물든다.

"길상아."

"."

"내 이 수치스런 짓 아, 아무에게도 말 안 하겠지?"

". 입밖에 내지 않겄십니다."

병수는 흐느껴 운다. 울음은 격렬해져서 경기 들릴 아이처럼 전신을 떤다. 길상은 병수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대숲을 빠져나간다. 김서방댁은 담장에 세워놓은 문짝을 손가락으로 톡톡 퉁겨본다.

"다 말랐소?"

봉순이 뒤에서 물었다.

", 햇볕이 좋아서 금시 탕글탕글 말랐다."

"그라문 가지가서 문을 답시다."

"그러까? 오늘이 칠월 스무이틀인가?"

", 스무이틀이요."

"팔월에 문을 바르믄 도둑이 든다 카니께...... 아따, 금년에는 늦기까지 매미도 울어쌌는다."

"팔월에 물을 바르믄 정말 도둑이 드요?"

"그거사 머 옛적부터 내리온 말이고, 밖에서 이 거궁한 집에 무신 도둑이 들까마는 집안 도둑이 더 무서븐 기라."

"그기이 무신 말이요?"

"말이 그렇대는 기제. , 집안 도둑이사 벌써 들었이니께."

김서방댁과 봉순이는 오래간만에 의견이 일치되어 서로 마주보며 쓰디쓴 웃음을 띤다.

"그렁저렁 추석이 오고 나믄 금년 한해도 가는데, 빌어묵을! 이래서 우찌 살 긴지 내사 통 모르겄다."

문을 달 생각은 않고 김서방댁은 풀이 듬성듬성 돋아난 땅바닥에 퍼질러 앉았다.

"이래가지고 못 산다, 못 살아."

김서방댁은 주머니 속에서 담뱃가루를 한줌 꺼내어 찢어낸 창호지에 담배를 말고 침을 칠한 뒤 붙여 문다. 콧구멍으로 연기를 뿜어내며

"서울서 올 그 연놈들은 촌에 사는 우리 겉은 사람은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는 모양이라."

"시끄럽소. 김서방댁은 여기 오서 이 말 하고 저기 가서는 저 말 하고, 안다가도 모르겄십니다."

봉순이 한마디 쏘아준다.

"사람 잡네. 내가 언지?"

"언지나 마나 늘 그란하요?"

"어맨 소리 하지 마라. 초록은 동색이요 가제는 게 펜이더라고 우찌 내가 거기 가서 저 말 할 것꼬? 니는 글리 싶어서 그러는 기지. 요새사 머 길상이놈도 서울서 온 옥이년하고 친하더마."

"듣기 싫소!"

봉순이는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모른다.

"걱정마라. 내가 니 맘 떠보니라고, 하하핫...... 머시마가 헌헌장부요 관옥겉이 생깄이니 가시나들이 딸는 것은 이치가 그리 돼 있는 기고 그래도, 우리 길상이사 넘어갈 성미가 아닌께."

"되잖은 소리도 해쌌는다."

눈을 흘겼으나 봉순이의 말투는 한결 누그러졌다.

"하여간에 서울서 온 그 연놈들은 우리 겉은 촌사람은 사람으로도 여기지 않는 모양인데 생각해보믄 주제넘는 년들 아니가? 아 그래 봉순이, 니나 내나 어디 이 집의 종년이더란 말가? 내사 본시부터 농사꾼 달이었고 죽은 우리 김서방만 해도 옛날 윤참판댁의 씨종이기는 하지만 그 댁이 천주학을 해서 종순서를 없이 해주었으며 면천한 지는 삼사십 년 전이고, 니는 그 내력을 잘 모를 기다마는 그 댁 어른이 돌아가신 마님의 친정 아부닌데 우리 김서방이 그 어른을 업고 밤길을 도주해가지고 이곳까지 왔이니께, 말을 하자믄 마님한데는 은인인 기라. 그리그리 해서 김서방이 이 댁 살림을 모두 두량하게 됐는데 수십 년을 뻬빠지게 일을 보아온 거사 천하가 다 아는 일이제. 기찰 일이다. 마님만 살아 기싰으면 우리가 이 천대를 받고 살 기든가?"

콧구멍으로부터 연신 연기를 뿜어내면서 혀를 끌끌 찬다.

"마님이 처리를 잘못하싰지, 잘못하싰어."

"지나간 일을 말하믄 머하겄소. 우리 애기씨 수모 당하시는 거 생각하믄 김서방댁 억울한 거사 소분지애씨요."

"그야 머 내 일만 가지고 하는 말은 아니다. 어느 구석을 봐도 그저 복통을 찍을 일뿐인께. 우째서 우리 꼴들이 이리 됐는지 모르겄다. 내가 문딩인가, 안에서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안 하나. 멋이 우떻고 함시로 숭만 찔찔 봄서, 옛말에 날아온 돌이 본돌 친다 카고 객이 준인 노릇한다 카더라마는 서울서 온 그 연놈들은 물도 씻어가지고 묵는가, 나를 짜잖다 카더라나? 그뿐이믄 또 좋게? 내 말 좀 들어보라고. 내가 꼴이사 이렇다마는 내 세상 밖에 나와가지고는 남으 눈 기신 일이 한분이라도 있었이믄 참말이제 앉고 못 일어 날 기다. 바늘 하나 기신 일이 없구마. 한데 그 연놈들이 내가 요전분에 깨 한 됫박 장에 팔고 온 거를 알고 안에서 퍼내간 줄 생각하는 모양이다. 세상에 그런 벼락 맞일 연놈들이 어디 있겄노? 서울서는 모두 도둑질하는 거만 보고 살았던가? 옛날부터 내가 부치묵는 밭뙈기서 나는 거는 내 맘대로 쓰게 돼 있는 거고, 아 그거사 모를 사람이 없지. 그저껜가 내가 도장 앞을 지나가니께 나를 보고 얼른 도장 문을 잠그는 거 아니가. 우찌나 괘씸하던지. 그래 지나다가 정기에 타도 들어가믄 반찬 하나 손을 못 대게 하니 더러바서 이 세상을 우찌 살겄노. 내가 그렇게도 안 살았구만. 마님 살아 기실 적에는 늘인 듯이 임석해가지고 갈라묵고 살았구만. 웃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더라고, 제 배만 부르믄 종들 배도 부른가, 손톱 밑에 끼워놓고 발발 떠는데 그것도 이녁이 모은 살림이라믄 또 모르지. 누구 살림인데? 돌아가신 우리 마님이사 당신은 절용하시도 아랫사람들한테는 얼마나 후하싰노? 남으 살림 가지고 양칠봉칠 쓰믄서."

어느덧 김서방댁은 홍씨 험담에 기승을 부리는 것이었다. 이때 삼월이 시적시적 걸어들어왔다. 어딘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걸어오는 모양이다. 봉순이는 샐쭉해지면서 마루 쪽으로 가서 앉아 버린다.

"삼월아."

"?"

"니 얼굴이 와 그렇노."

"뭐가 우떻소."

"숭년 묵은 풀째기 겉다. 그래 젖은 잘 나오나."

"잘 나기는...... 암밥 묵소."

먼 산을 바라보면 되는 대로 대꾸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서방댁은 새로운 말상대가 생긴 것이 신이 나는 모양으로 또다시 지껄이기를 시작한다. 삼수 애기며 두리 애기며.

"김서방댁! 해가 져야 문 달 기요!"

삼월이를 멸시하기 위해 마루에 뻗치고 앉았던 봉순이 기다리다 못해 팩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정신이 든 편은 김서방댁보다 삼월이었다. 멀거나 쳐다보다가 삼월이는 비실비실 나갔다.

"졸갑스런 구신이 물밥 천신 못한다 카든에 머가 바빠서 이 긴긴해에, 아이구 허리야."

김서방댁은 문짝을 옮겨놓는다.

"나 김서방댁겉이 말 많은 사람 첨 봤소!"

"아따 지랄 그만하고 자아, 문이나 달자."

책을 읽고 있던 서희가 일어섰다. 분홍 춘사치마 밑에 오복한 버선발이 내다보인다.

"다 말랐느냐?"

"."

김서방댁은 문을 달아놓고 이리저리 밀어본다. 그러더니

"애기씨."

"왜 그러느냐."

"저어, 저어 잘롱 말입니다."

서희가 돌아본다.

"본시 놀발이 있었일 긴데"

순간 서희의 낯빛이 살짝 변한다.

"와 막대기로 고이놨이까요?"

"......"

"전부터 그랬십니까."

봉순이도 김서방댁 어깨 너머 방안을 들여다본다.

"쓸대없는 걱정 하는군."

서희의 목소리는 딱딱하고 떠밀어내듯 엄격했으나 왠지 당황해지는 기색이 있다.

"차암, 나는 여태 그것도 몰랐네요."

봉순이 말이다. 김서방댁은 다시

"농발이 있었을 긴데 농발을 우짜고 농을 벵신 맨들었이까."

"나머지 문이나 달아."

". 그래도 저 좋은 농이 농발이 없어 되겄십니까. 소목꾼 불러다가 맞추도록 하시이소."

"왜 이리 시끄러우냐? 내가 알아 할 터이니 참견 말어!"

서희는 화를 낸다. 작은방의 문까지 다 끼워놓고 손을 씻으면서 김서방댁은 중얼거렸다.

"그 농은 별당아씨 혼인 때 마친건데 얼마나 좋은 농이라꼬? 언제부터 농발이 없어졌이까."

"모르겄소. 생각이 안 나네요. 옛날부터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무심코 보았는데."

"살림이 콩가리가 됐지. 집안이 망할라 카믄...... 하기사 농발 하나가 그리 대단하겄노."

"봉순아!"

길상이 부르는 소리가 담장 밖에서 들려왔다. 다급한 목소리다. 봉순이 일어나서 치맛자락에 손을 닦으며 쫓아간다.

 

 

4. 난행

밖에는 달려 나왔으나 길상이 보이지 않았다. 봉순이 이리저리 살피는데 행랑 쪽 모퉁이를 막 돌아가는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길상아! 와 그러노?"

불길한 생각이 든다.

"뭐꼬?"

뒤따라 나온 김서방댁이 목을 뽑으며 묻는다.

"모르겄소."

봉순이 행랑 쪽을 향해 급히 걸어가고 김서방댁도 엉기정엉기정 따라간다. 수동이 거처방 앞에 짚세기가 벗어 던져진 채 울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와 그카노!"

고함치는 봉순의 얼굴이 질린다.

"으흐흐흣...... 으흐흐흐흣."

김서방댁이 툇마루에 손을 짚고 방안을 드여다본다.

"갔구마는."

"머라카요?"

봉순이 땅바닥에 주저앉는다.

"쯔쯔쯔...... 아무도 종신을 못했는가배. 오래 시라아 샀더마는 그예 가부맀구나."

치맛자락을 걷어서 김서방댁은 콧물을 닦는다. 행랑 뜰에 하인들 몇이 모여들었다. 선뜻 방안으로 들어서려 하지 않는다. 기별을 받고 뒤늦게 온 복이가 방안으로 들어간다. 그는 먼저 수동이 손목을 잡고 팔을 배꼽께로 올려놓는다. 시체에서 배어난 송진 같은 진땀이 손바닥에 찍 하니 들어붙고 얼음 같은 냉기가 복이 등뼈를 타고 내려간다. 나머지 한 팔도 끌어다가 나란히 올려놓고 다음 두 다리를 쭉쭉 훑어 내려가며 바로 뻗게 한 뒤, 끝은 천장을 보게 발바닥을 반듯이 세운다. 죽음의 경직이 오기 전에. 염을 하기 전에 우선 그렇게 해야 했던 것이다. 수동이는 눈을 뜬 채 숨이 끊어져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 같다.

"눈감고 가소."

손바닥으로 쓸어서 눈을 감겨준다. 길상은 엎어진 채 울고 있었다.

"머하고들 있노? 옷부터 한 가지 내놔야제."

행랑뜰에 김서방댁 목청이 울러퍼진다.

"연이 니는 색히 뒷부석에 가서 사지밥부처 안치라. 한두 분 당하는 일도 아니겄고 전후 할 일이사 뻔한 것 아니가. 길상이는 머하고 있노? 운다고 죽은 사램이 살아오나."

수동의 무명적삼 하나가 육신에서 빠져나온 넋을 실은 듯 행랑 지붕 의로 날아 올라간다. 형식뿐인 향복들을 찍어 바르는 것으로서 목욕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히고 그러고 나서 염이 시작된다. 우우오! 우우오! 하며 팽나무에 앉은 까마귀를 개똥이 쫓고 있다. 수동의 죽음은 사랑에 있는 조준구에게로 알려졌다. 손님과 담소하고 있던 준구는 혀를 차면서 알아 할 일이지 무슨 큰일이 났다고 와서 이러느냐, 하며 꾸지람이었고 안방의 홍씨는

"속이 후련하구나. 삼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다. 그 육실 할 놈이 그예 죽기는 죽었구먼."

희희낙락이었다. 별당의 서희는 아무말이 없다. 붉은 법단에 흰무명 안을 받쳐서 염낭을 깁고 있었다.

"수동이아제 그러크름 주야로 애기씨 걱정만 하더니."

행주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훌쩍거리며 봉순이는 푸념이었다.

"신령님도 무심하시오. 애기씨를 우찌 하고 수동이아제까지 데리고 갑니까, 으흐흐......"

잠자코 있던 서희는 짜증을 낸다.

"울지 마라. 시끄러워!"

"애기씨 으흐흐......"

"씨끄럽다 안 하느냐? 하인 하나 죽었기로."

하다가 벌컥 역정을 낸다.

"그 동안 연달아 사람이 죽어 나갔어! 새삼스런 일도 아니지 않느냐? 이 집에 귀신이 들어 그렇다고들 하더구나!"

"으흐흐......"

"정말 그렇다면 나는 귀신하고 싸울 테야! 신령님네 살려주시오, 살려주시오 골백번 그래봐야 아무도 살려주진 않던걸. 구구하고 치사스러워."

놀라며 봉순이 쳐다본다.

"모조리, 다아 잡아가라지. 하지만 나는 안 될걸. 우리집은 망하지 않다. 여긴 최씨, 최참판댁이야! 홍가 것도 조가 것도 아냐! 아니란 말이야! 만의 일이라도 그리 된다면 봉순아? 땅이든 집이든 다 물속에 처넣어버릴 테야. 알겄니? 난 그렇게 할 수 있어. 찢어죽이고 말려죽일 테야. 내가 받은 수모를 하난들 잊을 줄 아느냐?"

어떻게 땅과 집을 물속에 처넣울 것인가. 치켜올라간 눈썹, 뱅글 뱅글 동아가는 입매, 가위 작은 야차를 방불케 한다. 그는 원한에 사무쳐 있었을 뿐 수동이 죽음에 대해서는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다. 봉순이는 마음속으로 야속하다고 생각한다. 서희는 버티고 앉아서 그예 염낭을 기워 뒤집었다. 지어내온 사자밥 세 그릇, 숟가락 세 개, 간장 소금이 든 항아리가 각각 하나씩 행랑 뜰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깨어진 호박도 한 곁에 놓여 있었다. 그것들은 망자를 저승에 인도해갈 사자한테 베푸는 제물이다. 연이네가 팔짱을 끼고 서서 김서방댁과 애기를 하고 있었다.

"그새 뜰아 출입도 하고 그러길래 더 살라나부다 했지."

"나는 죽을 날이 멀지 않았고나 하고 짐작은 했구마. 벌써 목이 쉰 것부터가 심상찮았고 얼굴도 부숭부숭 부어서, 아픈 사람이란 살이 빠져야 희춘하기가 쉬운 기지. 더군다나 오래 아픈 사램이 붓기 시작하믄 그렇지. 열이믄 열 사람 사는 것 못 봤구마."

"하기사 우리 먼족 일가 한 사람도 진짝겉이 붓더마는 못 살데."

"잔벵치리 효자 없더라고 길상이도 지z는가 임종도 못 봤이니."

"무신 팔자가 좋아서, 임종하든 우떻고 안 하믄 우떻꼬? 죽으믄 그만이지. 어느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겄고."

사방이 어둑어둑해왔다. 등물을 들고 행랑 문앞까지 나온 길상은 문기둥에 등을 걸어놓고 마을을 내려다 본다. 검은 안개 같은 어둠이 덮여지고 있는 마을은 조용하고 변함이 없이 거기 있었다. 어디서 나는가, 방울 소리, 아 돌아오는구나 하며 길상은 또 운다. 이틀전에 진주로 떠났던 지서방이 나귀 등에 물자를 싣고 돌아노는 말방울 소리였던 것이다.

"초상났구먼."

한마디 내뱉고 지서방은 안을 향해 소리친다.

"누구 좀 나와!"

하인들이 나귀 등에서 물자를 끌어내리고 고방에 나르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지서방은 말없이 서 있는 길상을 본체만체 했다. 이튿날 초라한 출상이 있었다. 상제도 없고 명정 하나, 그러나 텅 빈 곳간같이 낡은 상여는 마을길에 나섰다. 봉순이, 김서방댁 그리고 개똥이 하인들만 칠팔 명. 못마땅한 얼굴의 삼수도 따라간다. 길상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길거리에는 상여 구경하려고 아낙들 아이들이 나서 있었다. 쓸쓸한 상여 행렬에 실망한 빛을 띄운다. 하인의 신분으로, 더군다나 자식도 없었던 수동이고 보면 쓸쓸한 것은 당연하였고 지게송장이 되지 않았던 것만으로 다행하게 생각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사람들 마음 한구석에는 왜 그런지 수동의 비중을 크게 잡고 있었다. 윤씨부인이 간난 할멈의 장사를 크게 지내준 지난 일을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희에게 충성을 다 바친 수동이기에 마음속으로는 서희의 권능을 무시하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은 이번 장례식에 기대를 걸었던 것이지도 모른다. 봉기 집앞을 상여가 지나갈 때 삼수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내다보고 있는 두리의 하얀 얼굴을 발견했던 것이다. 두리는 당황하며 어미 등 뒤에 얼굴을 숨긴다. 삼수 입가에 차디찬 미소가 지나갔다.

'어느 때고 나는 네년을 잡아묵고 말 기다.'

상여가 용이 집 앞을 지나갈 때 괭이를 들고 용이 말없이 따라나섰다.

"서서방이나 실성 안 했으믄 상두가 부르고 앞장섰을 긴데."

"와 아니라."

"참말 고생 많이 하고 죽었다."

"그러기."

"자식 좋다는 게 다 이럴 때를 위해서지."

"그러모."

"본시는 가는 벼 재놓은 듯이 얌전한 사램이었는데 우짜다가 병신이 돼가지고."

"그렇지, 얌전한 사램이었지."

최참판댁에서는 연이네가 사자밥, 소금, 간장을 조금씩 퍼내어 문밖에 뿌리고 깨어서 조각난 호박도 여기저기 뿌리고, 하인 하나는 지붕에 올려놓은 적삼을 불태우고, 그것으로서 수동의 육신과 혼령은 깨끗하게 처리되고 말았다. 저녁때 장지서 돌아온 하인들은 길상을 제외하고 모두들 일에서 돌아온 것처럼 배부르게 밥을 먹었으며 다른 때보다 요란하게 잡담들을 했다. 의식적으로 수동에 대한 말은 삼가는 눈치다. 수삼년 동안 원인이야 어디 있었든 넌더리가 났던 인물이었고 그렇다고 흉허물을 하기에는 그들 자신 양심에 떳떳한 형편도 아니어서 되도록 수동이를 잊으려 했을 것이다.

"제어기랄! 이자 정말 송장은 그만 치웠으믄 좋겄다."

별안간 삼수가 뇌까렸다.

"그거 어렵잖은 일이제."

복이 말을 받았다.

"어렵잖다고? 그라믄 어디 불로초라도 구해놨다 말가?"

다른 하인이 말했다.

"죽어부리문 되는 기라. 뫼구덕까지 찾아가서 송장 치우라고는 안 할 긴께."

복이 말투에는 삼수에 대한 비난이 있다. 밤이 저물어서, 역시 사람이 죽어 나간 밤은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다. 저녁때까지 무심하려 했던 사람들은 밤이 되면서 무섬증을 느낀다. 절룩거리는 수동이 모습이 집 모퉁이를 돌아 나올 것 같았고 기침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부릅뜨고 노려보던 눈이 생각났고, 하인들은 모여앉아 노름으로 기분 나쁜 밤을 잊으려 한다. 입김에 가득 찬 방에는 퀴퀴한 냄새가 풍겼다.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 심지를 돋운 등잔불이 여러 겹의 원광을 만들며 흔들린다. 삼수 혼자 목침을 베고 드러누워서 천장을 보고 있었다.

'설마 어느 때고 걸리기는 걸리겄지. 내가 단념을 해? , 그렇십니까 하고 물러날 줄 믿었다가 큰코 다칠 기다. 안방에 놔둔 농짝도 아니겄고 장독간의 도자지도 아니겄고 두 다리가 멀쩡한 년이 어느 때고 한분은 나하고 부딪칠 기다.'

와글와글 떠들어대는 속에서

"삼수!"

누군가가 불렀다.

"머할라노."

"오늘 밤에는 안 나가나? 초상 친 날이라서 근신을 하는가배."

"흥 내 할애비가 죽었다고 근신을 하까."

삼수는 일어나 앉았다. 노름에 정신이 팔려 있는 하인들은 더 이상 말을 걸어오지 않았지만 방문을 열고 삼수가 나간 뒤 노름에 장단 치듯 몇 마디씩 지껄였다. 막딸네 집에 갔을 거라고들 했다. 그러고도 삼월이는 삼월이대로 새벽녘까지 잠을 못자게 하니 그놈의 양기 대단하다고 했다. 삼수는 당산으로 해서 윗마을을 빠져나왔다. 윗마을에서 아랫마을로 되잡아 내려온다. 그러니까 마을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우회한 셈이다. 삼수는 벌써 여러 날째 이런 식으로 마을 우물까지 내려왓다. 멀찌감치 서서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우물에 가까운 수수밭으로 들어가서 쭈그리고 앉으며 귀를 기울인다. 이윽고 아낙이 한 사람 그는 서서방네 자부였다.

혼자 와서 물을 길어 윗마을 쪽으로 올라가고 바람에 수숫대가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부딪는다. 사방은 보름날같이 밝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제법 밝은 편이어서 물동이를 이고 가는 서서방네 자부 뒷모습이 한참 동안 삼수 시야에 있었다. '오늘 밤도 허탕을 칠까?' 땅바닥으로부터 차가운 냉기가 엉덩이를 통하여 전시에 번진다. 삼수는 우물가에 두리가 나타나는 것을 기다린다. 낮에 물을 긷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대개 과년한 처녀들은 밤에 물을 긷기 때문에 그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 두 번인가 물을 길러 온 두리를 수수밭 속에서 보았으나 그럴 때마다 두리는 혼자가 아니어서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도란도란 지껄이는 소리,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웃는 소리는 한결 높게 들려온다. 두리 웃음 소리에 틀림이 없다. 우물가에까지 온 두 계집아이, 하나는 난쟁이 막딸이다. 키에 비하여 머리는 길어서 치마 끝에 닿을 듯, 그것만 보아도 누구나 막딸임을 알 수 있다.

'저 빌어묵을 년은 와 따라 왔노!'

화가 나서 혼자 주먹을 휘두른다. 상대가 막딸이기 때문에 더 화가 나는 것이다. 계집애들은 타래박질을 하면서 계속 웃고 애기를 한다. 그들은 마음 놓고 지껄였으나 용을 쓰고 있는 삼수 귀에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고 간간이 길상이니 수동이니 애기씨니 하는 낱말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아 오늘 낮에 치른 초상 애기를 하는 모양이다.

"애기씨가 서운할 기다. 벵이 들어도 울타리 삼아 마음으로 의지 하던 수동이 아닌가."

"만석꾼이믄 머하고 천석꾼이믄 머하겄노. 팔자도 기박하지 우리들겉이 문밖 출입을 한다 말가, 그 좋은 인물 만석 살림이 곱새 벵신한테 넘어간다니...... 얼매나 무섭고 싫겄노."

"그러기."

"옛날에도 그랬지마는, 그때사 어려븐 생각에서 그랬지마는 요새는 최참판댁이라 카믄 가깝기 가기도 싫더라. 도깨비 구신들만 사는 것 같아서."

"니사 삼수놈이 무서바서 그렇겄지. 삼수 고놈 말짱 도둑노미다. 사람 아니네라."

제 이름이 나오자 삼수, 귀가 쫑긋 선다.

"보믄 짐승 보는 것맨치로 소름이 쭉 끼친다."

"너거 아버지도 어지간하더마."

"뭐가 어지간해."

"삼수놈이 어디 보통내기가."

"보통내기 아니믄 우짤 기든고? 그놈한테 시집갈 바에야 차라리 목을 매달고 죽어부리는 기이 낫다."

두 계집아이는 깔깔거리고 웃는다.

'저런 목을 비틀어 직일 년들!'

"니 한분 더 올라나!"

허리를 젖히고 물동이를 이며 두리가 묻는다.

"우짜꼬? 물독이 찼는데, 니는?"

"나는 한두 분 더 와얄 기다. 물이 떨어진 거를 보고 왔이니께."

"한분 더 올만하믄 오고."

'한두 번 더 온다 캤제? 저눔으 가시나만 안 오믄 일이 되는 거 아니가? 삼수 가슴이 뛴다. 두런두런 애기하며 그들은 멀어져간다. '어디, 이눔으 가시나 목을 매는가 안 매는가 보자.' 깃털을 세운 투계처럼 두 어깨를 뻗쳐 올린다. 밤마다 찬 이슬을 맞으며 기회를 노리고 있는 삼수의 행위는 물론 보복을 하기 위한 것이다. 우물 앞에 다시 두리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혼자다. 삼수는 허리춤에서 수건을 뽑아 들고 수수밭을 나서며 민첩하게 마을길에 시선을 준 뒤, 발 소리를 죽이고 두리 뒤편에서 접근해간다. 인기척에 두리가 돌아보는 순간 덤벼든 삼수는 한 팔을 뒤에서 감아 가슴팍을 안고 한 손은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고함을 칠 틈도 없다. 빠른 동작이다. 물려드는 팔은 무쇠보다 강하다. 수수밭까지 끌고온 삼수는 밭고랑에다 계집애를 밀어뜨리고 입에 물린 수건을 더욱 깊게 쑤셔 박는다. 버둑거리는 다리를 무릎으로 짓누르며 허리춤에서 풀어내 허리끈으로 허공을 잡는 계집아이의 두 팔을 겨드랑이에 바싹 붙여서, 바로 어제 시체의 염을 했을 때처럼 묶는다. 키 큰 수숫대에 가려진 밭고랑은 병풍을 눌려놓은 듯 현장을 가려준다. 바람이 불어서 서걱서걱 잎이 부딪는 소리는 계집아이의 몸부림과 삼수가 토해내는 거친 숨결 소리를 막아준다. 잠시 후 막딸이 우물가에 나타났지만 삼수는 몸을 덮친 채 막딸이 돌아가기를 여유 있게 기다린다.

"야가 물동이를 갖다놓고 어디 갔이꼬?"

두리야! 두리! 하며 부르다가 어정쩡하게 서 있던 막딸이 물을 긷기 시작한다. 물을 길어놓고 다시 한 번

"두리야! 두리야!"

불렀다. 이번에는 싸아 하고 강한 바람 소리가 지나간다. 바람 소리를 탄 삼수는 손이 뭉클하게 솟은 가슴을 헤친다. 엎어놓은 사발 같이 매끄럽고 딴딴한 유방의 맨살이 손바닥에 닿는다. 손톱을 세우며 거칠게 쥐어뜯는다. 밑에 깔린 따뜻한 몸이 꿈틀거린다.

"야가 어디 갔이꼬? 이래놓고 마실 갔나?"

하다가 막딸이 물동이를 이고 가버렸다. 함정에 빠진 토끼 한 마리를 다루듯 삼수는 팔을 아래로 옮기고 가슴으로 계집아이의 상체를 누른 채 치마를 걷어 올린다.

"내가 곱게 물러설 줄 알았더나? 이 망할 년아. 뭐 목을 매달아 죽는 편이 낫다고?"

물어뜯듯 웅얼거리며 밀착해간다.

"니 신세도 이자 마지맥이다. 흐흐흐흐......"

빙글빙글 도는 불덩어리, 불꽃이 출출 쏟아지면서 얼굴을 덮친다. 불덩어리 또 불덩어리, 뒹굴고 흩어지고 모여들고 솟구치는 불덩어리가 전신을 덮친다. 캄캄한 어둠이다. 칠흑보다 더 짙은 어둠이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이다. 욕지거리, 풀무질 같은 거친 사내의 숨소리, 아무리 흔들어도 꼼짝 않는 몸뚱어리, 삼수는 바짓말기를 추킨다. 묶어던 허리끈을 풀고 획 잡아 빼는 서슬에 계집아이의 몸뚱이는 모로, 다음은 허수아비 넘어지듯 엎으러진다. 허리끈을 매고 난 삼수는 가래침을 뱉는다.

"이자는 할 수 없을 기구마. 떠들어보아야 니 망신일 기고, 그렇다고 해서 니를 데리고 갈 생각을 추호도 없이니께로 알아서 하라고, 목을 매달든가 새미에 빠지든가. 흥 네년 애비가 종놈한테 상사람 딸자식 줄까부냐고 했겄다? 그 주둥아릴 치키들고 와서 내 딸 데리가시오, 하지는 못할 기구마. 이지는 내가 딜인 밑천은 뽑았이니께 다시 상관할 필요가 없지."

몸을 흔들며 유쾌한 듯 웃어젖힌다. 사내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빙글빙글 불덩이가 돈다. 불꽃이 줄줄 떨어진다. 뒹굴고 흩어지고 모여들고 솟구친다. 욕지거리 풀무질하는 사내의 거친 숨소리, 막막한 어둠이 밀려온다. 천 길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진다.

"아아, !"

엎어진 채 두 손으로 땅을 친다.

"이 제집아가 물동이는 여기 놔두고 어디 갔이꼬? 두리야! 두리야!"

딸을 찾아 나온 어미 목소리다.

"이 제집아가 어디 갔단 말고? 두리야! 두리야!"

잠시 끊었다가

"어디 마실 갔나? 다 큰 제집아가 물동이를 내비리두고 미쳤는가배, 빌어묵을 년."

어미는 욕을 구시렁구시렁 하면서 빈 동이에 물을 길고 이고 간다. 가면서도

"이눔으 가시나 오기만 해봐라. 다 큰 제집아 년이 밤이 뭇니 마실고."

벌떡 일어나 앉는다. 하늘을 우러러본다. 별도 멀고 천지만물이 다 멀리 있다. '어매! 나 그만 죽어부릴라요. 살믄 머하겄소. 아이구우 흐흐흣......' 두 주먹으로 땅바닥을 치며 소리를 죽이고 운다. '이 원수를, 원수를, 아아 우리 부모도 알아야 할 기다. 원수를 원수를,'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기진한 몸을 끌고 밤 깊은 길을 걸어간다. '원수를, 원수를 가, 갚아야......' 집 앞에까지 당도한다. 삽짝은 잠겨져있었다.

"옴마야! 문 열어주소."

안방에 불은 켜져 있었다.

"네 이눔으 가시나!"

어미가 방문을 덜커덕 열고 ?아나온다.

"문 열어주소! 옴마."

"염치 좋은 년아! 문 열어돌라꼬? 말만한 가시나가 밤에 마실이 뭐꼬?"

"옴마, 나 주, 죽소."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아아니?"

두리네는 문고리를 끄르고 삽짝문을 열었다.

"두리야!"

엎으러진 딸을 안아 일으킨다.

", 보소!"

마누라와 함께 깨어 있던 봉기가 외마디 소리에 뛰어나온다.

", 와 그라노!"

", 기절을 했소!"

", 어서 방으로, 아아, 아니 내가 안고 갈 기니께 이, 임자는 바가지에 차, 찬물을."

축 늘어진 두 다리를 안고 봉기는 허겁지겁 방안에 끌어들인다. 불빛 밑에 보는 처참한 모습에서 봉기는 사태를 알아차린다. 다물리어진 잎술가에 피가 배어나 있었고 걷혀진 검정 치마 밑에 찢겨진 속곳자락. 물을 떠가지고 들어선 두리네도 말뚝처럼 우뚝 섰다.

"작은방의 아이들 깰라. , 아무말 말고."

봉기는 후들후들 떨며 바가지를 받아 물을 한입 머금고 죽은 듯한 얼굴에 뿜는다. 다시 다물린 채 있는 입술에 손가락을 밀어 넣어 벌리고 물을 붓는다. 두리는 몸을 뒤채었다.

"이기이 우찌 된 일고오오."

통곡을 터뜨리자 봉기는 미친 듯 바가지를 방바닥에 팽개치고 주먹으로 마누라 볼을 쥐어박는다.

"아가리 닥치라! 그란하믄 직이부릴 긴께."

"아이구 우우흐흣......"

"자석 앞길 생각거든, 소릴 내기만 해봐라! 입에 말뚝을 처박을 긴게."

말하는 봉기 얼굴은 잿빛이다.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린다.

"아가."

새까만 눈이 아비를 오려다본다.

"정신이 드나?"

"......"

"두리야!"

이번에는 어미가 딸 옆에 끓어 앉으며 몸을 흔들었다.

", 삼수놈이."

봉기는 전신을 부르릉 떤다. 짐작한 대로이다.

"새미 옆의 수수밭."

"그 목을 쳐죽일 놈이 내 자석 신셀 쫑당거렸네! 아이고오!"

주먹이 마누라 볼에 다시 날아왔다. 봉기 눈에서 마누라가 삼수로 보였던지 미치광이처럼 주먹질이다.

"지 죽고 내 죽고오 그 눔으 목을 물어씹을란다아!"

두리네 역시 아무리 쥐어박아도 아픈 줄을 모르는가, 발악이다. 방문을 박차고 나갈 기색이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은 봉기는 마누라 팔을 낚아채고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자석 죽은 꼴 볼라꼬 이러나? 집구석 망하는 꼴 볼라꼬 이러나?"

낮은 목소리였다.

"임자가 그놈을 찢어죽이지도 못할 기고 망신은 우리만 당할 긴께. 이런 일일수록 남이 알아서는 안 되는 거고 분한 생각보다 와내 자석 앞길을 먼지 안 생각는고? 당자밖에 모르는 일을 에미가 들어 동네방네 외고 댕기겄다 그 말이가?"

"아이고 으흐흐...... 이 죽일 년이 찾아 나갔이믄서도 마실만 간줄 알고 으흐흐...... 이 일을 우짤꼬."

제 가슴을 치고 소리를 죽이며 운다.

"내 말 단단히 멩심하라고. 옷부터 갈아입히고 차근차근 전후 사정을 물어보고. 저 방 아이들 깨믄 안 될 기니 자식 하나 살릴라카거든 입 딱 다물고."

중풍 든 늙은이처럼 봉기는 팔을 떨며 방문을 열고 나간다. 마루에서 또 말했다.

"임자, 아아 옆을 떠나지 마소."

". 으흐흐......"

봉기는 초롱을 들고 허둥지둥 걷는다. 우물 앞에까지 온 그는 초롱을 들이대며 샅샅이 살펴본 뒤 수수밭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도중에 미투리 한짝을 발견하고 얼른 그것을 집어든다. 초롱은 다시 수수밭을 헤치고 들어간다. 현장, 난행의 흔적이 역력한 곳에 봉기는 멈추어 섰고 초롱만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흰 수건이 떨어져 있고 미투리 한짝도 엎어진 채 굴러 있었다.

"으흐흐......"

곰같이 미련하고 뱀같이 간교하고 돼지같이 욕심꾸러기인 사내가 울음을 터뜨린다.

 

 

5. 과객

햇빛은 마루 끝에 닿을 듯 닿을 듯하면서 신돌 위에 놓인 조그맣고 하얀 가죽신발에 머물고 있다. 햇살은 두텁지만 늦가을의 공기는 차다. 어수선한 몸가짐의 삼월이 배추를 뽑고 있었다. 요량없이 닥치는 대로 뽑아 젖힌다. 이초시가 얼굴을 찡그렸지만 초봄부터 김서방댁이 부지런히 거름을 뿌린 덕택에 속이 가득 찬 배추는 먹음직스럽다.

"휴유우."

엉덩방아를 찧고 밭고랑에 주저않은 삼월이 칼을 잡아당긴다. 무꼬리만큼이나 가늘디 가는 배추뿌리를 하나 잘라낸다. 칼끝으로 흙 묻은 껍질을 서걱서걱 긁어내고 오도독 깨물어 먹으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눈 밑에서 관자놀이 까지 푸르죽죽한 멍이 퍼져 있다. 지렁이처럼 목을 휘감은 것은 손톱에 할퀸 자국이다. 뚜렷이 눈에 뛴다. 삼월이 얼굴에서 피멍이 가실 날은 없었다. 그래 그랬던지 본시부터 그런 얼굴이거니 생각하기라도 하듯 남들은 말이 없었고 본인 역시 울고 푸념하는 일이 없다. 전에도 삼수는 매질이 잦은 편이었지만 요즘 부쩍 심해졌다. 말로는

"네년 때문에 나는 밑졌다! 제기랄 과부가 제 몸 내주고 뺨 맞는다 카더만은 뻬빠지게 일봐주고 헌 계집을 물리받아? 복이놈은 아무것도 안 하고 생짜 가시나 연이를 얻었는데 내가 미친 지랄을 했제."

하는가 하면

",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르더라고 만석 살림 틀어쥔 데 내 공은 없었이까? 도로아미타불이다. 도로아미타불! ? 도로아미타불이면 좋게? 못 쓰게 된 계집년하고 애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빌어묵을! 공연히 인심만 잃고 의리 없는 인간만 되고, 불이라도 확 싸질러부릴까부다. 개멩이 되믄 종놈도 금테벙거지 쓸 거라고 함서 꿀겉은 말로 살살 꼬우더마는."

올분에 차서 씨그덕거렸으나 삼월이한테 매질을 하는 것이 반드시 울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성적 쾌감을 위한 변태다. 수수밭에서 두리를 무참하게 범한 뒤부터 그런 버릇은 한증 더 심해졌다. 삼월이는 폭행을 당할 때마다 햇병아리처럼 삑삑거리며 약한 비명을 질렀으나 날이 새면 집안의 궂은일을 스스로 도맡아서 한다. 가늘었던 허리는, 굵어지고 손끝은 뭉뚝하고 손마디는 굵어지고 말이 적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을 알 수 없었는데 사람들은 늘 반 정신이 나갔다고들 한다. 한 집안에서 조준구 홍씨를 만나는 일도 드물었다. 막일꾼이 되었으므로 사랑이나 안채 출입이 없는 때문이다. 홍씨는 삼월의 존재 따위는 잊어버렸다. 그런 점에서는 조준구도 마찬가지였다. 조준구는 삼월이를 불러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홍씨 이외 계집종들과 관계를 맺은 일은 없는 모양이다. 서울에 첩이 있었고 하동 읍내에도 다니는 기생이 있어서 그랬겠지만 몸을 아끼는 그 나름대로의 지각 때문일 게다.

배추뿌리를 우적우적 씹어먹은 뒤 삼월이는 퍼질러앉은 채 배추를 다듬기 시작한다. 다른 날보다 바깥 날씨는 밝은 것 같았다. 햇빛이 들이칠 시각은 아닌데 장지문이 환하다. 봄의 화창한 날씨를, 땅이 터지면서 토실토실한 움이 돋아나며 아지랑이가 강기슭을 흔들어주고, 착각이다. 그럼에도 병수는 좀이 쑤셔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책을 덮고 일어섰다. 방문을 열고 나섰을 때 바람은 설렁하다. 풍경은 초겨울이 지척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병수는 채마밭에 쭈그리고 있는 삼월이를 본다. 여전히 피멍이 든 얼굴이다. 어머니의 소행이거니, 병수는 언젠가 삼월에게 모진 사매질을 가했던 어머니의 무서운 형상을 생각한다. 삼월의 얼굴의 피멍도 노상 새로웠지만 그것도 볼 때마다 느끼는 어머니에 대한 두려움도 새로웠다. 어떤 때 병수는 삼월이의 멍든 얼굴이 자기 등에 짊어진 혹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등의 혹에도 저와 같은 피멍이 있고 손톱으로 할퀸 핏자국이 있으리라고 생각을 한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마당에 내려간 병수는

"삼월아!"

하고 불렀다.

"."

배추 다듬는 손을 멈추지 않고 대답한다.

"배출 뭘 할려고 그래?"

"머하기는요? 김치 담을라고요."

뻔한 일이다. 뻔한 일을 물어보는 것은 삼월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날씨가 추워졌다?"

"."

"좀 있으면 김장할 거 아냐?"

"."

병수는 빙긋이 웃는다. 무슨 말을 할까. 적당한 말이 없다. 가까이서 보는 멍은 자줏빛에 가깝다. 별안간 멍든 삼월의 얼굴을 쓸어 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울컥울컥 치미는 애정, 정다운 마음,

"밥 많이 먹었니?"

"?"

삼월이 의아해하며 쳐다본다. 바보 도련님이 하는 소리거니 하고 다시 배추 진잎을 뜯어내고 다듬는다. '엄마 같고 누님 같고...... 내 잔등의 혹같이 불쌍한 삼월이...... 우린 어쩌면 옛날옛적부터 잘 알고 있던 사이가 아닌가 몰라?'

"삼월아."

"."

"옛날에 말이야."

"......"

"장화홍련 있잖어?"

"?"

"계모 땜에 죽은 형제 말이야."

"."

삼월이는 도통 관심이 없다. 병수 역시 들어주기를 바라는 것도 안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심히 한 말은 아니다.

"삼월아 니가 그 장화 같단 말이야."

"."

덮어놓고 삼월이는 대답한다. '그러면 나는 홍련이란 말이지?' 병수는 제깐에는 우스워서 하하핫 하고 웃는다. 웃는데 아기 울음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어줍게 아이를 안은 개똥이 까불며 걸어온다. 병수는 당황하며 물러선다.

", , 애이 우우...... 젖 도움 미이이오(애기 우요. 젖 좀 먹이소)."

아이를 쳐들고 둥가둥가를 하면서 삼월이 앞에 내민다. 찢어지는 울음소리, 누더기 같은 포대기에 싼 아이 얼굴은 온통 입뿐인 것 같았다.

"젖이 나야 믹이제."

", 그라믄, , 우야이오(그라믄 우짤 기요)?"

아이를 달랜답시고

"오오하! 여겨어겨겨겨어!"

입속의 혀를 굴리며 흘러내리는 코를 들이마시곤 한다.

"이리 도고."

칼을 놓고 삼월이 아이를 받아 안는다.

"울거나 말거나 내비리두지."

젖을 물린다. 아이는 허겁지겁 젖을 빨았으나 목에 넘어가는 게 없었던지 어미 가슴에 주먹질을 하며 다시 운다. 병수는 살금살금 뒷걸음질을 펴서 개똥이한테 들키지 않고 산에 갈 참이다. 보기만 하면 제길 차자고 귀찮게 구는 때문이다. 침을 게게 흘리며, 도여이(도련님) 하는 데는 질색이었다. 하늘과 땅덩어리는 끝과 끝을 꽉 물려놓은 것처럼 몇 천 몇 만의 겁을 그러하였는지 완강하게 팽팽하게 정지하고 있었다. 세월은 도시 어느 통로를 거쳐서 지나가고 있는 것일까. 삼월이 야기를 낳았고 수동이 죽었다. 그게 세월이란 말일까? 불타 없어진 누각 빈터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병수는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팽나무에서 시끄럽게 울던 매미도 찬 서리에는 죽어 없어진 모양이고 곱게 물들었던 잡나무 숲에는 물기 잃은 마른 잎이 구른다. 탐스럽게 벼이삭이 일렁이던 들판은 회갈색 쓸쓸한 빛깔이다.

'생각할수록 모르겠어. 섣달 그믐달 밤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지 없다? 그래서 꼬바기, , 자정까지 있어도 말이야. 어디 세월이 찾아와서 한 해를 보내고 떠난다는 작별 인사를 한 일이 있었나? 어째서 세월은 간다 하는고? 정월 초하룻날 떡국을 먹으면 한 살을 더 먹는다 하는데 마찬가지 아냐? 세월이 찾아와서 한 해 동안 함께 있게 되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날마다 해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고, 그게 세월이란 말일까? 그래서 사람들은 늙어가고 죽고 또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걸까? 세월, 시간, 그게 뭐길래? 해가 뜨고 달이 뜨고 또 지고 사람이 죽고 아기가 태어나고 알 수 없군. 정말 윤회라는 게 있다면 왜 사람이나 짐승이나 벌레나 초목이나 그런 것들이 빙빙 돌아야 하는 걸가? 세월은 바람일까? 바람이 사람들을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어디로 자꾸 몰고 가는 걸까?'

산에 오르면 늘 하는 생각이다.

'아니야. 끝이 없을 건에, 시작도 없을 건데 어째 시간이 있단 말이야? 사람들은 해시니 술시니 하니 길이를 재어서 시각에 이름들을 붙이지만 이 천지가 꼼짝 않고 있는데 세월이 어디 있다고 금을 긋고 길이를 재느냐 말이야.' 금을 긋는다는 말에서 병수의 생각은 별안간 비약한다. 은전 한 닢. 칼끝으로 찢어놓은 듯 작은 눈이 벌어지면서 흰자위가 드러난 어머니의 무서운 얼굴이 바싹 다가왔다. 언제였던지 뚜렷이는 기억할 수 없다. 서울 있을 때의 일이었다. 집에 낯선 손님이 찾아왔었다. 병수는 햇빛을 따라 골방에서 마루까지 기어 나왔다. 따스한 초봄 햇빛을 받고 있었는데 졸음이 왔다. 드높은 어머니의 목청과 나지막한 여자 목소리가 안방 쪽에서 간간이 흘러나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던지 눈을 떴을 때 마루의 햇볕은 두 치 가량이나 나가버리고 병수는 그늘에 앉아 있었다.

"아이구 이게 누구야? 우리 병수 도련님이구먼."

중년의 점잖은 여인이 웃으며 말했다.

"어릴 때 내가 안아주곤 했었는데."

하다가 슬픈 눈이 되었다.

"관옥 같은 얼굴에...... 가엾은 병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형님."

등 뒤에서 병수를 노려보던 어머니는 여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자아, 병수야."

여인은 주머니 속에서 은전 한 닢을 꺼내어 병수 손에 쥐어주었다. 문밖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온 어머니는 병수를 쥐어박았다.

"하필이면 손님이 와 있는데 마루까지 나올 건 뭐람? , 창피스러워서."

병수는 은전 한 닢이 신기하여 골방 속에서 이틀을 가지고 놀았다. 골방이지만 뒷벽에 봉창이 하나 있었고 해질 무렵이면 조그맣게 뚫린 구멍에서 걷은 무지개 같은 빛줄기가 방안을 가로지르곤 했다. 심시했던 그는 방바닥에 은전을 놓고 장판지를 이어서 바른 금을 따라 은전을 찼다. 되풀이 되풀이하여, 그랬는데 세차게 찬 것이 잘못되어 은전을 잃었다. 아랫목에 놓인 큰 궤짝 밑으로 들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엎드려서 들여다보니 한얀 은전의 모서리는 보였으나 좁은 틈으로 손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병수는 은전 잃은 것을 잊었다. 다음날 어머니가 나타났다.

"너 아주머니한테 받은 은전 내놔. 뭣에다 쓰겠니."

했다. 병수는 두려운 생각 때문에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몇 번인가 쥐어박힌 뒤 궤짝 밑에 들어갔노라 했다. 어머니는 궤짝 밑에 왜 넣었느냐 하며 또다시 쥐어박았고 맹추와 함께 궤짝을 들어내어 은전을 찾은 뒤에는 빰을 두 차롄가 맞았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병수는 어머니 장롱 속에 은전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을 한 번 모았다. 아버지가 없을 때도 그 은전을 꺼내어 쓰는 것을 본 일이 없다.

'나한테 그만큼 은전이 있다면 첫째로 삼월이한테 주고 싶어. 그러면 삼월이는 애길 데리고 도망칠 수 있을 거야. 그러면 얼굴에 멍도 안 들고 목에 피딱지도 앉지 않을 거야. 왜 어머니는 삼월이를 노상 때릴까? 이젠 아기 낳은 어머닌데 말야.'

하다가 병수는 재미나는 생각이 없을까 하고 눈을 멀리 보낸다. 눈에 비치는 것을 모두가 새롭고 신기하다. 말없는 자연과 마주하고 있으면 샘처럼 온갖 공상이 솟아나 그를 즐겁게 해준다. 슬픈 일을 생각할 때도 슬프지 않다. '내가 어찌 서희한테 장가를 든단 말이냐? 나같이 병신 계집애가 있다면 색시 삼아서, 눈물도 닦아주고 신발도 신겨주고 맛난 봉숭아도 따다주고 또오......'

하다가 얼굴을 붉히고 혼자 웃는다. 담장 구멍으로 별당의 뜰을 들여다본 그때의 창피스럽던 일이 떠올랐다. 그러지 않기로 길상에게 약속을 했으나 그곳에 가고 싶고 몰래 서희 모습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삼월이는 갔을까? 갔을 거야.' 누각 빈터에서 일어서 병수는 내리막길을 어린아이 모양으로 대죽대죽 걸어 내려오는데 사랑채와 잇단 담장, 그러니까 서울서 내려온 조준구의 식솔이 들기 위해 별채를 수리했을 때, 난달이었던 별채 주변을 사랑채 담장과 잇달아 담이 쌓였던 그 담장 옆에 중키의 사나이가 서성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내도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오는 병수를 바라본다. 초라한 몰골이다. 상사람은 아닌 것 같고 몸가짐이 다소 경망해 보이지만 영락한 양반의 후예인 성싶다.

가까이 갔을 때 사내는 난처해하는 웃음을 띠웠는데 병수를 알고 있는, 그래서 난처해하는 웃음이다. 병수로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 었다. 일기가 꽤 쌀쌀한데 겹옷이 엷게 보인다. 갓도 이미 낡은 것이며 시장기가 얼굴에 역력하다.

"저어 이 댁 도령님이시오?"

웃음을 거두고 정중하게 물었으나 여전히 히죽거리는 기색이 있다.

"그렇소."

". 바로."

하다가 말을 끊고

"다름이 아니오라 조참판댁에."

"조참판댁이 아니라 최참판댁이오."

", , 그러시오. 다름이 아니오라 이댁에 우정선생,"

병수는 빙그레 웃는다. 이초시의 호가 우정이었다.

"그 우, 우정이 소생의 친구이온데."

사내도 비시시 웃는다. 자기깐에도 우정선생이라 한 것이 겸연쩍었던 모양이다. 우정선생을 우정으로 내려놓고 또 어떨까? 하고 망설이는 눈치이기도 했다. '아무튼 선생은 선생이니...... 허나 아무리 꼽추병신이지만 이런 대가댁에서 이초시 같은 글선생을 데려다놓은 것은 시시한 애기야. 이초시 말로는 내외분이 아들 면무식이나 시킬 요량이라, 그러긴 하더라만.'

"실은 행랑에 인적기도 없고 해서."

인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문간에서 삼수를 만났다. 거만한 삼수 태도에 기가 죽은 사내는 남해서 온 글선생이 여직 이댁에 있느냐고 우물쭈물 물었다. 저어기 가보시오, 하면서 삼수는 손가락도 아니요 턱으로 별채 쪽을 가리켰던 것이다.

"들어가십시오. 선생님이 계십니다."

", 저 먼저."

병수는 반쯤 열려져 있는 문을 밀고 들어섰다. 사내도 따라 들어선다.

"선생님, 손님 오셨습니다."

병수는 이초시 있는 방을 향해 말했다. 이초시는 방문을 반쯤 열고 얼굴도 반쯤 내밀었다.

"여보게 나야, 날세."

저승서 할아비를 만난 듯 반색하며 사내는 신돌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방문을 반쯤 열어놓은 채 일어선 이초시는 망건 위의 탕건을 쓰고 나서 방문을 조금 더 열었다.

"올라오게나."

", 나 진주 갔다오는 길일세."

방문을 닫고 들어선 사내는

"바로 조씨네 도령인가?"

밖에서 확인을 했으면서도 다시 묻는다. 호기심이 있어 그랬다기보다 말수가 적고 흐리멍덩한 이초시에게 그런 식으로 해서 말을 시키자는 것이다.

"여기 아랫목에 앉게."

", , 그러지. 따습구먼."

사내는 아랫목에 엉덩이를 디밀고 앉는다. 으흠, 으흠 기침을 하고 나서

"방이 따습구먼."

되풀이 말한다. 이초시는 여전히 흐리멍덩한 표정이다.

"그래 자네 제자는 그 꼴 해가지고 노상 돌아다니는가?"

"노상 돌아다녀."

"집안 망신이구먼. 거 심히 보기 거북하던걸."

"집안 망신이나마나, 그럼 어쩌겠나."

"육신만 성하다면야 금지옥엽일 터인데, 애석하구먼. 한데 아까 말일세."

"......?"

"내가 짐짓 조참판댁이냐고 물었더니 조참판댁이 아니고 최참판댁이라 하지 않겠나?"

"조참판댁이라고?"

"허 이사람아, 내가 몰라 그랬겠나."

처음으로 이초시는 웃었다.

"그래 그곳은 모두 편안들 하든가."

"내가 나올 때까지는 자네 집안도 태평하더라만 그후 일이야 낸들 알겠나. 집 나온 지가 반 년일세."

"뭘 하느라고?"

"말 말게. 내 형편이야 노상 그런 게지. 자네처럼 훈장질이나 해서 따스운 방 하나라도 차지했으면 오죽이나 좋은까? 본시 밑천이 짧고 보니 죽을 지경이야."

"......"

"곧 겨울은 들이닥칠 게고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더라면 자네 따라 서당에나 부지런히 다니는 건데."

"농사나 짓지 뭐."

"내 땅만 있다면야 까짓것 낡아빠진 의관 벗고 나서겠다만 남의 땅 얻어부치는, 그런 비루한 짓이야 굶어죽었으면 죽었지."

"......"

"날이 갈수록 세태 인심은 험악해서 전과 같지 않어. 과객한테 하룻밤 잠자리라도 내주려 않으니 말일세. 옛날 같으면야 싫으나 좋으나 문객들을 괄시 안 하는 게 장자의 풍도로서 숭상되었건만."

"그건 그랬었지."

허기진 사내의 의도를 헤아리지 못한 이초시는 덤덤히 맞장구를 친다. 알았다손 치더라도 끼니 때가 아닌데 자기를 찾아온 객인에게 상을 차려 내오라 할 수 있는 이초시의 처지도 아니었다. 한참 궁한 소리를 늘어놓던 사내는 눈을 깜박깜박하면서 화제를 획 돌린다.

"여보게, 자네 이 댁 내력은 잘 알고 있겠지?"

"내력이라니?"

"허허 최참판댁 내력 말이야."

"내력이라 하지만 내력도 하 많으니, 오대조까지 거슬러 올라가자면."

"오대조까지 올라갈 것도 없고 몇 해 전 일 말이야."

"그러니까 최치수가 그 양반의 죽음."

", 아닐세. 이 댁 며느리가 하인 놈하고 달아난 바로."

"아아."

"헌데 내가 이상한 애기를 들었네."

"?......"

"그러니까, , 그러니까 이 댁에 혼자 남은 여식아이의 생모 되는 여인네 말이세."

"그래서?"

"그 여인네가 지리산 어는 암자에 살고 있다던가?"

"?"

"여기 내가 들른 것도 바로 그 일 때문일세."

"그 일 때문에?"

"이 댁에서 그 여인네에 대해서는 깜깜소식이겠지?"

", 그런 모양이더구먼."

"그러려니 내 생각했지. 그러고 보면 내가 여기 오길 잘했구먼."

"글세, 뭐 옛날에 지나간 일, 새삼스럽게...... 이 댁 최공께서 살아 계신 것도 아니겠고."

", 아닐세. 그렇게 말할 게 아니라구."

사내는 팔을 내저었다. 그러고 나서 목소리를 줄이나.

"우리끼리니 하는 말이네만 지금 조씨네가 이 댁을 꽉 틀어쥐고 있으며 장차도 이 댁 살림을 좌지우지할 것이 뻔한데 눈 위의 혹이 그 여식이 아니겠나?"

"그런 일은 나 알바 아니고?"

"허허 내 말이나 듣게. 그러니 그 여식아이 생모가 살아서 근처에 있다는 것은 역시 그 양반한테는 찝찝한 일 아니겠나."

"글세......"

이초시는 되도록이면 그런 대기에는 깊이 들어가지 않으려 한다.

"피는 물보다 짙다고 뒷구멍으로 줄이라도 놓는다면 그거 다 귀찮은 일이지."

"설사 그 아이 생모가 이 근동에 와 있다손 치더라도 이쪽에서 지난 일을 들추어 벌을 준다‘m 모를까 그쪽에서야 뭐라겠나. 그 아이 외가에서도 코빼기를 내밀기는커녕 거처까지 옮겨가며 도통 관여를 피하는 형편인데. 그리고 이 댁 사람 양반의 처지로서는 그 아이 모친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할 수 없을 게고, 하지도 않을 게야."

"허 이 사람이 애기를 어떻게 듣나? 나야 이 댁 조씨네 편에서 하는 말 아닌가?"

"그건 알겠네만 남의 일에."

"어디 사람 사는 게 그렇든가? 지금은 꼭두각시지만 어미 지혜가 들어가면 사람 새끼로 별할 수도 있는 게고, 아무튼 자네도 그 양반 덕분에 밥술이나 먹는 형편이고 보면 걱정이라도 해주는 척, 해로울 건 없지."

"대체 무슨 애긴지."

이초시는 끝내 시치미를 뗀다.

"하기야 이런 경우는 알듯말 듯 일들이 다아 그렇게 돼 있지. 여하튼 그 양반한테 소식 전해주어서 해로울 건 없다 그 말인데, 그도 그렇고 내가 여기 며칠을 묵기로 자네가 눈치 살필 필요도 없을 게고 아, 그래도 모르겠나?"

비로서 이초시는 파안대소한다.

"진작 그렇게 말할 일이지. 꾀가 늘었네그려. 그러면 그 아이 모친이 지리산 암자에 와 있다는 건 거짓말이겠다?"

", 아닐세. 전혀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야. 오다가 중한테 들을 수도 있는 일이고 들은 사람이 객줏집 주인한테 전할 수도 있는 일이고 그러고 보면 나그네 귀에 들어올 수도 있는 일이고."

사내는 씩 웃는다. 요는 그 소문의 진부에 대해서는 책임질 수 없다는 실토요 최참판댁에 며칠 비비대고 앉아보는 데 구실로 삼자는 애기다.

"그렇다면야 자네 가서 애기해보게나."

"아닐세 아니야."

사내는 엉덩이를 뒤로 물리며 팔을 젓는다.

", 내야 면대한 일고 없고 그러니 자네가 가서, 아 말하기야 자 네 편이 예사로울 거 아니겠나? 이러저러한 친구가 찾아와서 하는 말이라 하며 슬쩍 건네 보게. 그러면 말이 있을 걸세. 나를 만나보자 든가 아니면 소식을 전하려고 일부러 수고를 했으니 좀 쉬어가라든가."

"하하하핫, 그러세."

이초시는 며칠 동안의 침식을 얻으려고 지혜를 짜낸 가난한 친구를 위해 동조해주기로 한다. 하여간에 이초시는 그 일로 조준구를 찾아 사랑에 다녀왔고 그 결과가 어찌 되었는가 알 수 없으나 나그네는 열흘을 이초시 곁에 묵은 뒤 떠났다.

 

 

6. 을사보호조약

"괴이한 소문이 있어서 소상하게 알아보아야겠다."

의관을 차려입고 초조하게 집을 나간 김훈장은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오를 무렵 마을에 돌아왔다.

"아부님, 이제 돌아오십니까."

한경이, 자부가 함께 뜰로 내려서며 인사를 하는데 김훈장은 아들 내외를 힘없이 바라본다.

"소식은 알아보시었습니까."

한경이 조심조심 묻는다. 김훈장은 시선을 옮긴다. 갓끈이 흔들리고 수염이 흔들리고 엉성한 수염에 묻힌 입술이 떨고 있다.

"망했다."

중얼거리더니 발길을 돌린다. 사랑으로 가는 김훈장을 뒤쫓으며

"무슨 말씀이신지요."

했으나 한경의 말엔 대꾸가 없었고 지름나무가 썩어서 글렁글렁 노는 마루에 올라간 김훈장은 도폿자락을 걷으며 앉는다.

"일기가 찬데 방에 드시지요."

동편 하늘을 노려보고 있던 김훈장은 주먹을 쥐고 마룻바닥을 친다.

"나라 없는 백성이 어디 있으며 나라 잃고 살아 무엇 하겠느냐! 으흐흣흣......"

통곡이다.

", 아버님! 어이 이러십니까."

마루에는 오르지 못하고 엉거주춤해 있던 한경이 혼비백산한다. 콧물 한방울이 떨어지는 것도 모른다. 그는 감기를 앓고 있었다.

"통분하다! 이런 일이 어디 또 있겠느냐? 으흐흐흐, 충간의담 한 선비들은 자결이요 내 강토를 팔아먹는 문서에 도장 찍은 역적 놈들! 앞으로 이 나라 사직은 어찌 될 것이며 백성들은 어디로 간단 말이냐. 으흐흐"

"아버님, 일기가 매우 찬데 방으로 드십시오."

"이놈아! 방이 다 무엇이냐. 방에 들어 편한 잠 자게 되었느냐? 원통한지고! 세계만방이라 하거늘 도적질하는 왜적을 견제할 만한 나라는 하낫도 없었더란 말이냐."

땅거미가 진다. 김훈장의 비통한 울음은 아랑곳없이 흐려 있던 동편 하늘에 별이 하나씩 둘씩 돋아나며 반짝거린다.

"아버님, 이러시다가 병환 나시겠습니다."

아이 울음소리가 안방 쪽에서 들려왔다. 자부도 근심이 되어 김훈장은 비뚤어진 갓을 고쳐 쓰고 도포 끈을 바로잡으며 일어선다.

"어디 가시려고 이러십니까."

"이러고 있을 수 없다."

목이 잠긴 나지막한 소리로 말하며 수건을 꺼내어 눈언저리 코 밑을 닦는다.

"날이 저뭅니다. 저녁진지도 안 드시고."

"최참판댁에 다녀오마."

허우적허우적 발을 떼어놓는다. 꺼뭇꺼뭇한 밭둑가에 흰 도폿자락이 산란하게 펄러덕거린다. 마을에 불빛이 나돌기 시작했다. 아슴히 보이는 둑길을 등짐장수가 지나가며 슬픈 가락을 뽑는다. 내일 구례 장에 대어가기 위해 밤을 도와서 가는 모양이다. 멀어지면서 가락은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고 조금씩 이어지곤 한다.

"생원님, 저녁 드싰습니까."

소를 몰고 내려오던 두만아비 김훈장에게 인사를 한다. 다른 때 같으면 서울 간 아들의 소식을 듣느냐고 물었을 것을 도폿자락만 펄러덕거리며 그냥 지나친다. 소는 방울을 흔들며 주인을 따라 간다. 주인이 멈추니 소도 멎는다. 두만아비는 무엇인가 생각하듯 발부리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돌아본다. 어느 곳에 가든지 반드시 들고 다니던 담뱃대를 김훈장은 들고 있지 않았다. 어둠 탓이겠지만 아랫도리와 윗도리가 희미하고 흰 도포만 가고 있는 것 같다. '예삿일이 아닌 모양이다. 노상 망한다 캐쌌더마는 이분에는 헛소문 아닌가배. 나라가 망하믄 우리는 어찌 될 긴고? 서울 있는 두만 이놈도 걱정이네.' 소등을 가볍게 치며 두만아비는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김훈장은 그 동안 최참판댁 문전에 발걸음을 끊은 지 일 년이 넘은 성싶다. 대문 기둥에 내걸어놓은 육각등에서 뿌연 빛이 번지고 있었다. 하인 하나가 말에서 말안장을 내리며 김훈장을 눈여겨본다.

"조공 계신가?"

잠신 목소리로 묻는다.

", 방금 돌아오싰습니다."

"내가 좀 뵙잔다고 전하게."

"."

하인이 안으로 들어간 얼마 후 신분이 뚜렷치 않은 서울서 온 지 서방인가 하는 자가 육각등 옆에 나타났다.

"어인 일로 오시었습니까."

입이 나쁜 김서방댁 말에 의하면 빨아놓은 김치 같은 사내라는 것이데, 명주바지처럼 호졸호졸한 느낌을 주는 사내다. 눈 밑으로 살살 살펴보며 불쾌하리만큼 정중하다.

"조공을 만나러 왔네."

"어디서 오시었습니까."

모를 리가 없다. 일부러 놀려먹기 위한 수작인 것이다. 김훈장은 노여움을 꿀꺽 삼킨다.

"나 이 마을에 사는 김생원이야."

", 그렇습니까. 한데 나리께서는 출타하셨다가 방금 돌아오셨기 때문에...... 수고스럽지만 다음날에라도, , 나리께서는 매우 고단하신 모양입니다."

"이노옴! 무슨 잔말이야?"

"네네, 하오나."

지서방은 두 손을 맞잡고 비벼댔으나 김훈장 기세에 풀이 꺾인 것은 아니다. 입가에 비웃음이 있다.

"썩 들어가서 내가 뵙잔다고 여쭙지 못하겠느냐."

"말씀은 여쭈어보겠습니다만."

들어간 지서방은 나오질 않았다. 김훈장은 분통이 터져서 발을 굴렀으나 눈앞에 사람은 없고 대문 기둥에 걸어둔 육각등만 땅바닥을 비춰주고 있었다. 반 시각은 족히 지난 성싶다.

"사랑에 드시라 하십니다."

발소리도 없이 나타난 지서방은 실실 웃는다. 김훈장은 어깨를 치켜들고 걸음을 옮긴다.

"나리께서 매우 고단하셔서, 이거 죄송하옵니다."

여전히 발소리 없이 따라오며 지껄인다. 조준구가 거처하는 사랑방은 옛날과 달랐다. 기방을 연상할 만큼 채색이 여기저기서, 김훈장 눈에 거슬렸다. 열 폭 병풍의 그림도 채색화였다. 돈에 아양떠는 화공의 솜씨임이 분명하고 표구는 최근에 한 듯 지질이 쌀쌀하다. 주홍빛 보료, 한복판에 깔린 호피는 옛날부터 최참판댁 낡은 궤짝에 간수되어 있었던 물건이다. 문갑 위에는 청동향료와 청자연당초문병이 놓여 있고 서안에는 백자투조필통, 그 밖에 이것저것 집물이 빽빽이 들어찬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주먹만큼 굵은 초는 백동 촛대 위에 눈물을 흘리며 타고 있다. 방안은 따스하고 달작지근한 냄새가 풍겼다. 먼 길을 모진 풍설을 맞으며 찾아온 것같이 임자 없는 빈방에 혼자 앉은 김훈장은 아랫도리가 후들후들 떨려오는 것 같았다. 울음이 꿀꺽꿀꺽 목구멍에서 넘어온다. 답답하고 괴로운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이윽고 방문을 열며 조준구는 들어섰다.

"오래간만이오."

침울한 얼굴이었다.

"소식 들으시었소? 물론 들으셨겠지요."

조준구의 침울한 얼굴은 김훈장의 고통을 얼마간 덜어주었다. 피는 물보다 짙은 법이며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을 확인한 듯싶어 일시나마 외로움은 무산하고 친애의 정이 솟았다.

", 들어소이다. 방금 동헌에 갔다 오는 길이었소."

조준구는 입맛을 다시었다.

"조공,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이오."

김훈장이 찾아와서 통분해할 때마다 날더러 어쩌란 말씀이오, 하며 남의 집 불구령하듯 대하던 조준구가 오늘은 심각한 낯빛으로 말이 없다.

"소생도 읍내에 나가서 소상히 알아보고 왔소. 듣자니까 민대감이 자결하셨다 하지 않소."

준구는 자그마한 손으로 이마빡을 밀어올린다. 주름이 밀렸다가 손을 떼는 동시 제자리로 돌아와 이마는 본시대로 팽팽해진다.

"어디 민대감뿐이겠소."

"조병세 대감께서도."

"그렇소. 팔십 노구를 이끌고 가평서 올라와 정청 하시다가 일본 헌병에게 쫓겨났다 하오. 그래 가마 속에서 음독 자결하신 모양이오."

"허허."

"홍만식 참판도 자결하고, 자결할 사람이 앞으로도 속출할 것이오"

"이런 천하에."

"약현에 있는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지르는 둥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는 둥."

"찢어죽일 놈들! 조약에 도장을 찍은 다섯 놈들을 밟아죽여야 하오."

"그네들도 그러고 싶어서 했겠소. 총칼이 한 짓이지요."

"나라가 넘어가는 판국에 제 목숨 지키려는, 으음! 목을 걸어놓고 왜 반댈 못했단 말이오. 대신 놈을 치레로 세워놨단 말인가요?"

격한 마음에 표현이 서툴다.

"그런다고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니겠고 죽는다고 대신할 사람이 없겠소?"

준구는 쓰게 입맛을 다신다.

"독안에 든 쥐 꼴이 되었지요. 일본은 오조약에 도장을 찍은 그 사람들 아니라도 얼마든지 오적을 만들어낼 거요."

"세상에 협박 공갈하는 보호조약도 있답니까?"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아니오."

조준구의 심정은 착잡하다. 친일 단체인 일진회 인사들과 어울려 다니며 주거니 받거니 친일적 언사를 농했던 것도 얼마 전까지의 일이었다. 사실 그 자신 친일파임에도 틀림없고 오늘의 사태를 예상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나라의 주권이 넘어간 보호조약이 체결되고 서울이 통곡의 도가니로 들어간 사태에 직면하고 보니 감정이 이상했다. 어느 구석인지 남아 있던 민족 의식 같은 것이 꿈틀거렸던 것이다. 언젠가 서울에서 술상을 걷어찬 이석영의 희멀쑥하고 대머리 까진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김훈장의 절망과 비통에 비하여 조준구의 우울증에는 상당한 여유가 있었던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한마디로 이 순간 조준구 가슴을 흔들고 있는 민족적 긍지는 습관에 대한 추억이다. 소위 그 사대부집 자손으로서, 하며 밀고 나오던 가문에 대한 추억이다. 말하자면 정신적 풍토의 티끌이 의식 어느 구석엔가 조금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의 친일적 언행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실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오늘 사태의 하수인도 아닌 만큼 다소는 안심하고 망국의 슬픈 감상에 젖은 것이다. 그러나 서울서 내려온 비통한 소식들이 말초신경을 자극하기는 했으나 중추신경은 역시 정세와 자기 개인의 이익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중추신경이 말초신경을 몰아낼 것은 시간문제다. 그러나 말초신경이 째릿째릿하게 울려온다는 것은 아무래도 우울한 일이다.

"대세요."

슬픈 가락으로 한숨과 함께 하마디를 떨어뜨렸다.

"대세라니? 대세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 말씀이오?"

김훈장이 다잡는다.

"그런 뜻은 아니지요."

"그렇다면?"

"받아들이고 안 들이고 간에 그것은 이미 우리들 힘이 미치지 못하는 일이 아니겠소? 상감이 협박을 당하는 지경에 아무리 울부짖고 주먹을 휘둘러보았자 그놈들은 우리를 어린애 이상으로 보지 않을 게요. 아라사를 상대로 이긴 그네들이니까."

준구는 전과 달리 신중하고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런 줄 알았소. 조공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소."

주먹을 휘두르며 대들 것 같다.

"개화를 주장하는 것도 나라 아끼는 방편이라 하더니 이제는 대세라 어쩔 수 없다 그 말씀이오? 나라 팔아먹은 대신놈들 역시 대세라 할 수 없다 그 말이면 다 아니오. 조공도 그들과 다를 바가 없지요."

"허허, 내가 나라를 팔아먹은 장본인인가요? 힘이 없는 우리 처지가 한탄스러워서 한 말 아니오."

"부끄럽소! 부끄럽소! 참으로 부끄럽소이다. 나라 없는데 내 영화가 어디 있으며 가문이 무슨 소용이오. 밤사이에 나라 넘겨주고 백성들 앞에 양반놈들, 무슨 염치로 낯짝 쳐들고 다니겠소. 내 말이 그르오?"

한동안 침묵하다가

"말씀이야 옳지요. 그르고 옳고 간에 이리 흥분한다고 무슨 일이 어찌 되겠소? 고정하시오."

김훈장은 어세를 낮추었다.

"실은 여기 내가 온 것은, , 그렇소이다. 시비하러 온 것은 아니었소. 비록 당주는 아니 계시지만, 아니 서희는 나이 어린, 그도 영식이 아니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최참판댁은 이 마을을 다스려왔었소."

당주가 아니 계시다는 말이 그 동안 숙연해 있던 준구를 자극했다.

"최참판댁이 이 마을을 다스려왔다구요? 거 식자 있는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 성싶소. 백성은 나라서 다스리게 마련, 최참판댁 백성은 아니잖소."

비쭉 솟은 어투로 당장 쏘아댄다.

"지금 사소한 말꼬리 왈가왈부할 때는 아니오. 이 마을 사람 치고 이 댁과 인연 없는 사람은 없다 그 말 아니오. 뿐만 아니라 지체를 보더라도 마땅히 마을을 이끌어나가야 할 처지인 만큼."

아첨하듯 조준구를 바라보며 김훈장은 말을 잇는다.

"다행이 조공께서 계시니, 아 어느 면으로 보나 조공이야말로 지체 높으시고 우리네들과는 달라서 새로운 문물에도 접하셨고 정세에도 소상하시며."

무슨 속셈에선지 추켜세운다.

"조공께서 재량하실 수 있는 재물도 그렇고 달리 적격자가 누구 있겠소? 조공이면 모두 승복할 것이오. 뭐니 해도 우선 사람이 움직이려면,"

하자 조준구 눈에 경계하는 빛이 돈다.

"우리 일어서야 하오. 나라 없는 백성이 어디 있으며 일찍이 왜란호란을 겪었으되 우리 주권을 빼앗긴 일은 없었고. , 이런 일은 역사에 없었소. 싸움 한번 없이 고스란히 이, 이럴 수는 없는 일이오. 이 판국에 농부들은 농사짓고 선비들은 글 읽고 해야겠소? 설령 쓸개 빠지고 썩어문드러진 대신 놈들이 나라를 파는 데 도장을 찍었다손 치더라도 백성 모르게 한 짓은 합당하지 못할뿐더러 무효란 말씀이오. 모두 나라 은덕 입고, 이 우리 강산은 내 피 내살점 아닙니까. 헌데 어찌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이오. 안 그렇소, 조공? 양반은 두었다 무엇에다 쓰겠소. 우리가 앞장서면 마을 사람은 다 따를 것이오. 그뿐이겠소? 기왕에 항거해온 의병들이 있고 우리 마을에서 일어선다면 그것으로 해서 인근에서도 일어날 것이오. 방방곡곡 백성들이 모조리 연장 들고 나선다면 무슨 수로 그놈들이 대적할 것이오?"

김훈장은 아까 이 방으로 들어왔을 때처럼 아랫도리가 후들후들 떨려옴을 느낀다. 그것을 누르려고 두 주먹으로 무릎을 꽉 누른다. 그러나 양 무릎을 누른 주먹도 부들부들 떨린다. 준구는 그런 제안을 해오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기껏해야 방바닥을 치며 통분하는 것으로, 서울 대신 놈들 욕이나 하는 것으로 끝나는 줄 알았다. '허 참, 이거 야단났구먼. 낸들 나라 망하는 것이 좋을 리 없었으나, 나를 의병장이 되라는 그 말인데 될 법이나 한 일인가?' 그러나 준구는 신중히 생각해본다. '가만 있자. 이놈의 산골에서 세상 돌아가는 것은 캄캄절벽인데 이들을 상대로 형편 이야기나 해보았자, 그러지 않아도 나를 친일파로 간주하고 있는 터에 만일 들고일어나는 날이면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겠구먼.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이런 혼란기에는 처신을 조심해야지. 동학 놈들이 일어섰을 때 제일 먼저 당한 사람들은 누구였지? 지방 관헌들과 재물 있는 양반들 아니었느냐 말이다. 어리석은 것들! 일본을 어떻게 대적하겠다는 건가. 서울서는 시골 놈들만 못해서 도장을 찍었나? 나라는 기왕 망한 건데 손가락에 불을 켜고 하늘로 올라가지, 일본을 물리쳐? 바지저고리에 상투 틀고 짚신 신고 쇠스랑 든 농부놈들 이끌고 일본을 물리쳐? 흐흐...... 가만 있자. 결과야 뻔하지만 우선, 내가 먼저 당하면? 그렇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한줄기 남은 감상적 애국심은 순식간에 무산되고 말았다. 자기 보호의 충동은 명확한 한계를 지운다. 고민할 것도 없이 그의 의식은 일본 진영으로 줄달음쳤다. 재물을 털어내고 의병 무리 속에 들어가다니, 얼마간에 재물은 내어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후환을 누가 감당할 것이며, 그러나 그 어느 것에도 협조를 아니 한다면 먼저 준구 자신에게 달려들 것이다. 준구는 숨을 가다듬는다.

"그렇다면 김생원께서는 어떤 계획을 세우셨소."

". 너무 졸지간이라 계획을 세울 겨를도 없었고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나라 사태를 알려야 할 것 같소."

'바로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르는 게로군.' 김훈장은 두려워 진다.

"그런 연후에는?".

"무기가 없으면 죽창이라도 깎아서 싸울 채비를 차려야지요."

"죽창으로."

", 기왕의 의병들도 곳곳에 적잖을 터이고 산간에는 동학의 잔당들도 수월찮이 있을 터인즉."

"동학의 잔당이라고요."

동학의 잔당이라는 말은 신경이 곤두선 조준구를 걷잡을 수 없는 공포를 몰아넣는다. 이제 조준구의 무일푼의 식객이 아니다. 만석 살림을 장악한 실권자다. 그 옛날 동학이 지르던 함성이 조준구 귀를 찢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전자야 여하튼 그네들은 왜놈들하고 싸웠소. 동학이라고 이 나라 백성이 아니겠소? 사태가 이쯤 되었으니 싸움에는 경험도 있고 하니 잘 싸울 게요."

실정을 모르는 김훈장의 계획도 황당한 것이지만 동학에 대한 조준구의 공포도 황당무계한 것이다. 이성을 잃고 흥분했다. 언젠가 최치수가 한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여 조준구는 떠들어댄다.

", 그러니 김생원께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계시다 그 말 아니오. 지금 동학당의 거두들이 어떤 줄 알기나 아시오? 동학의 접주 이용구를 말할 것 같으면 일진회 두목으로서 친일의 앞장을 선 사람이요, 손병희는 일본에서 편하게 좌정하면서 거금을 일본 정부의 헌납하고 오로지 아라사가 거꾸러질 것을 빌었다 그 말씀이오. 동학의 졸개 놈들은 또 어떠했소? 개미떼처럼 몰려나와서 일본군을 도와 철도를 깔고 군수 물자를 날라주고, 허 참 그런 동학이 일본한테 죽창을 들어요? 도대체 일본하고 싸워보겠다는 그 자체가 망동이오. 나갈 구멍도 없이 그러면 다 죽자 그 말씀이오? 서울서는 모두 김생원만 못해 도장을 찍었겠소?"

감정을 상하지 않게 잘 구슬러보겠다는 생각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본심이 둑이 터진 듯 쏟아져 나온다.

"어리석은 말은 집어치우시오. 누굴 망해먹으려고. 아 그래 내게 의병장이 되라 그 말씀이오? 낭도들을 이끌고 산에 들어가서 개죽음을 하라 그 말씀이오? 어림없는......."

뒤늦게 조준구는 아차 하며 깨닫으나. 풀이 죽으면서 부릅뜬 김훈장의 눈을 슬그머니 피한다. '의병장이 될 사람이 따로 있지. 그래도 최소한도 군자금쯤은 내 줄줄 알았는데...... 목을 쳐죽일 놈!' 김훈장은 일어섰다.

", 아니 왜 일어나시오? 약주나 함께 듭시다그려."

잡은 팔을 뿌리치고 김훈장은 밖으로 나왔다. 지서방이 따라 나왔다.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육각등 옆에 서서 실실 웃는다.

"안녕히 가십시오."

순간 김훈장은 대문짝에다 대고 툇! 하며 침을 뱉는다. 밤길을 돌아오는 김훈장은

"쳐죽일 놈!"

하고 악을 섰다. 또다시 아랫도리가 후들후들 떨리면서 힘이 빠져 나간다. 다리뼈가 해파리처럼 물컹물컹해지는 것 같다. 김훈장은 길섶에 주저앉는다. 맵고 찬 바람이 마음속 깉은 곳을 거슬러 오른다. 고독했다. 담배를 피우려 했으나 항상 손에서 놓은 일이 없는 담뱃대가 없었다. 담배는 단념하고 어둠을 뚫어보려고 김훈장은 목을 뽑아 올린다. 천지는 모두가 다 철없이 잠만 자고 있구나, 어째 한 마리 우는 소리가 없을고? 이렇게 적막할 수가, 김훈장은 조준구의 말을 생각한다. '동학의 접주 이용구를 말할 것 같으면 일진회 두목으로서 친일의 앞장을 선 사람이요, 손병희는 일본서 편하게 좌정하면서 거금을 일본 정부에 헌납했고 오로지 아라사가 거꾸러질 것을 빌었단 말씀이오. 동학의 졸개 놈들은 또 어떻고요? 개미떼처럼 몰려나와서 일본군을 도와 철도도 깔고 군수 물자도 날라다주고, 허 참 그런 동학이 죽창을 들어요?'

'상놈들이 들고일어나면 일본놈들 치기는커녕 양반들을 모조리 잡아죽일 게요.' '허허 이럴 수가 있나. 이 강산에서 핏줄을 이어온 놈들이, 상민인들 제 조상은 있을 거 아니겠나. 어째 왜놈보다 양반들이 더 밉더란 말이냐.' 수백만 군병을 읽고 홀로 남은 장수같이 김훈장은 밀어내어도 밀어내어도 달려드는 고독을 참을 길이 없다. 저 멀리서 초롱이 하나 온다. 초롱은 김훈장 쪽을 향해 온다.

"아버님."

"한경이냐?"

"."

한경이 어둠을 헤지고 가까이 다가왔다.

"여기 왜 이러고 계십니까."

"."

"날씨가 찬데 병환 나시겠습니다."

"그래 가자."

일어섰다. 버마재비같이 껑충한 옆을 비슴듬히 따라가며 발부리에 초롱불을 비춰준다.

"한경아."

"."

"너는 애비가 하자면 하자는 대로 하겠느냐?"

"."

"우리가 죽어야 한다면 그때는 어쩌겠느냐?"

"아버님 뜻대로 하겠습니다."

헤엄치듯 가는 김훈장 도폿자락이 밤바람에 나부낀다. 부엉이 울음이 들린다. 밤이 깊어졌다.

"...... 우리는 뼈대 있는 자손이니라."

이튿날 부랴부랴 채비를 차린 조준구는 서울로 떠났다. 무슨 일이 날지 불안해진 그는 처자도 버리고 잠시 피신하며 정세를 관망할 요량이었던 것이다. 한편 떠나 있으면 귀찮은 일에 관여하지 않아도 될 것이요, 후환도 없을 것이기에. 조준구가 떠난 뒤 점심때쯤 해서 마을 사람들은 타작마당으로 모여들었다. 김훈장 지시에 따른 것이다. 김훈장은 담뱃대 한가운데를 꽉 잡고 서서 꼬장꼬장한 목청으로 말을 시작했다. 소위 을사보호조약에 도장을 찍게 된 경위와 그 다섯 조목의 조약이라는 것의 내용을 아는 대로 설명하며 수천 년 내려온 이 나라가 일본 통치 밑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린다.

"그라믄 우찌 되는 깁니까, 우리는."

"생원님! 나라가 뺏깄이니 우리는 땅도 부치묵을 수 없다 그 말심입니까?"

"제사도 못 모시게 한다 카든데요."

"그예 상투도 잘라야 합니까?"

"이 사람들아! 그게 무슨 소린고? 이 철없는 백성들아!"

김훈장은 목이 잠기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이런 철없는 백성을 믿겠느냐 싶어 울음이 터졌던 것이다. 그는 울면서 목쉰 소리를 짜내며 민영환 조병세 등이 자결한 애기를 한다. 비로소 마을 사람들은 충격을 받는다. 나라의 위기를 실감한다. 오조약이 무엇인지 생소하지만 그런 큰 인물들이 자결하였다는 것, 김훈장이 울음을 터뜨렸다는 것으로 사태를 통감한다. 애석하고 분통하다 하며 와글와글 떠들어댄다.

"싸운다 카믄 나가겄십니다! 나라를 뺏깄이믄 땅도 뺏길 긴데."

한조가 소리를 질렀다. 최참판댁에서 혼자 나온 길상이는 얼굴이 벌개져서 한복이, 영만이 두 소년을 거느리고 서 있었다. 용이는 타작마등 한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만아비가 용이 곁에 다가왔다.

"용아!"

얼굴을 들고 쳐다본다.

"자네 생각은 어떻노?"

"그러세요."

"김훈장 말심으로는."

용이 말허리를 꺾는다.

"이럴 때 윤보형님이 기싰더라믄 하고 생각하고 있소, 저기 저 양반들."

김훈장과 그 옆에 손을 맞잡고 서 있는 한경이를 가리킨다.

"용하기만 했지 엄두가 나지 않을 기요."

"윤보가 있이믄 우찌한 것꼬?"

"그 형님은 아는 것도 많고 동학당 했이니께 이력이 안 있소. 무엇보다 과단이 있이니께요."

"그라믄 쌈을 해야 한단 그 말이가."

"할 형편이믄 해야겄지요."

"나는 통 모르겄다. 김훈장 말심도 그렇고...... 서울서도 쌈이 벌어졌다는 애기는 없지 않나."

"아직은 혼란해 있일 기니 그러나 가만 있기야 하겄소."

"왜놈들이 우리를 다 쫓아낼 기라 그 말인지......"

두만아비는 양미간을 모으고 한숨을 내쉬며 중치막에 갓을 쓰고 지팡이를 든 서서방을 바라본다. 서서방은 바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이리저리 사람 속을 헤치며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제가끔 지껄이고 와글대고 있었다. 이제는 김훈장의 목쉰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다. 각각 여러 패로 나뉘어져 의견백출 중구난방이다. 의견을 모아보는 사람도 없고 결론을 내리는 사람도 없다. 아녀자들만 집에 남아 있는 마을은 불안에 싸여 침묵하고 있었으며 해는 덧없이 저물고 말았다.

 

 

7. 음지에서 햇빛

이듬해 삼월 하순경 김훈장은 인근에 있는 유생들 몇 사람과 함께 마을을 떠났다. 겨울 동안 칼날 같은 강바람을 마셔가며 동분서주, 침식을 잊다시피 했으나 김훈장이 의도한 일은 성사를 보지 못했다. 허사였다. 마을에서도 그러했고 안면이 있는 유생들을 읍으로, 혹은 인근 마을로 찾아다니곤 했지만 용두사미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산간벽촌에서 대세를 어둡기로는 유생들이라고 농부들과 다를 것이 별로 없었다. 더러 개중에는 약삭빠르게 제 앞만 가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회피도 있었지만 결국 속수무책, 어떻게 할 바를 몰랐다. 그저 우왕좌왕 감정만 격노해 있었을 뿐 김훈장이 접촉한 인물이란 대개가 자기 자신과 엇비슷한, 생각도 그러려니와 군자금 한 푼 군량미 한 섬 내놓을 만한 처지가 못 되었고 한결같이 불우하게 탈락된 향반들로서 선비의 명맥, 하루 두 끼의 끼니조차 이어가기가 어려운, 김훈장의 행동 거리 속에 그런 인물들밖에 없었다는 것은 그 자신을 위해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하기는 동학 내란의 불씨를 안고 뛰어든 전봉준이 미리부터 군량미, 병기를 저장했던 것도 아니었고 돈 많은 사람들이 뒷배를 보아주었을 리도 만무다. 함에도 수만의 백성들은 백의종군했던 것을 생각할 때 유교 사상이 빠질 수밖에 없는 함정이라고나 할까, 너 죽고 나 죽자가 아니요 나만 죽겠다는, 그것도 의관을 바로 하여 욕됨이 없이 죽겠다는, 결국 김훈장이 몇 사람의 유생과 더불어 떠난 것도 그 자신으로서는 죽을 자리를 찾아간 셈이라고 할밖에 없다. 김훈장이 떠난 후 한경이는 식음은 전폐하고 불효를 슬퍼했지만 동행하지 못한 것은 전혀 본인의 의사가 아니었다.

"너는 남아야 하느니라. 선영봉사를 어찌하고 가겠다는 게냐?"

"아버님, 아니 되옵니다. 불효자식이 어찌 낯을 들고 살겠습니까."

"허허, 그렇게 타일러도 못 알아듣는구먼. 그러면 절손이 효도더란 말이냐?"

"석이가 있지 아니 합니까."

"아직 어린 것을 어떻게 믿어? 게다가 네가 없으면 모자는 명 보전하고 살아갈 수 없을 게야."

"그렇다면 아버님께서 남으시고 소자가 대신 가겠습니다."

"이놈! 그래도 잔말이구나. 나를 욕되게 할 셈이냐? 아비 말을 거역하는 것은 불효가 아니더란 말이냐?"

그리고 떠날 때 김훈장이 한경에게 거듭거듭 당부한 말은 죽은 듯이 엎드려 있으라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김훈장의 소식을 궁금해 하였다. 궁금한 나머지 어느덧 김훈장은 마을 사람들 이야기 속에서 의병장으로 등장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차츰 전설적인 인물로 변모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 자신의 자존심의 소위였다. 왕시, 김훈장을 두고 화심리에 사는 장암선생 수제자로서 학식이 깊다고 믿었으며 자랑으로 생각했던 그 심리와 흡사했던 것이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의 공통 심리였다. 꼭 믿는 것도 아니면서 자위하기 위해 믿어보는 것이다. 희망이 적은 그들의 감성적 사치였을 것이다. 한편, 한경이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두문불출이라는 소문 또한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아무리 망해도 뼈대 있는 집이라 우리네들 상사람하고는 다르지."

"뼈도 살도 안 닿았는데 법이 무섭다."

"아 뼈도 살도 안 닿았다니? 한 할아부지 자손인데?"

"그래도 머 팔촌을 훨씬 더 넘었다 카는데. 법이 무섭지, 아암 법이 무섭고말고."

그러니 양반이제. 자부되는 사람도 어찌나 요조하고 효성스럽던지, 저녁마다 목욕재계하고 시아부님을 위해 축수를 한단다. 친정도 찢어지게 기찹다고 하더라마는 법도만을 잘 가르친 모양이라."

이래서 마을 사람들은 한경이네 일을 도와주려 애썼고 제사를 모시거나 생일을 지낸 뒤면 첫째로 음식을 나르는 곳이 한경이네 집이었다. 이즈음 조준구는 큰 배를 탄 것처럼 마음 든든하게 마을로 돌아와 있었다. 서울서 그가 얻은 정보에 의하면 일본은 치안 유지에 만반태세였고 사태가 역전될 기미는 추호도 없다는 것이었으며 마을로 돌아온 뒤 전참판 민종식이 홍주에서 거병했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막강한 일본군을 대항하기에는 새 발의 피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조준구의 마음을 편하게 한 것은 하동 고을에도 일본 헌병이 주둔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오조약을 맺었을 때 우울해졌던 것이 마음에 깨적지근할 만큼 자신에게 태평성세를 가져다줄 일본에 대하여 준구는 충성심과 신뢰로 가득 차 있었고 나날은 쾌적하였다. 읍내 기생방에 가면 아낌없이 돈을 뿌렸다. 얼마간 두려워하던 홍씨에 대해서도 여유 있는 희롱을 하며 즐겼고 서희에게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만 근심걱정이 있다면 점점 몸이 비대해져서 움직이는 데 힘이 드는 일이다. 나룻배를 내리는데 나루터에 억쇠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나무 살라꼬 나왔나?"

멈추며 용이 말을 건다.

", 나무 사로 나온 것도 아니고,"

팔짱을 출고 새우눈을 깜박거리며 억쇠는 어정쩡한 어투로 말했다.

"맴이 산란스러바서 나왔더마는,"

산란스럽다는 말은 귓가에 흘려버리고 용이 안부를 묻는다.

"집안은 모두 안녕하시고, 새아씨도."

새아씨는 이부사댁에 맞아들인 며느리 말이다.

"집안이사 별일 있겄소. 나가신 양반이 걱정이지."

말해놓고 억쇠는 잠시 주변을 살핀다. 심상찮음을 느낀 용이는

"그라믄 소식을 통 못 들었다 그 말가."

얼굴이 심각해진다. 근심이 된 것이다. 이동진은 용이에게 고맙고 우러러보였던 사람이다. 어린 시절에서 청년기까지 최치수를 따라 다녔던 용이는 자연히 이동진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그들이 장암선생 밑에서 공부할 무렵 괴팍한 성미의 최치수는 곧잘 용이를 난처한 지경으로 몰아넣곤 했었는데 그럴 때마다 이동진은 용이를 감싸주었으며 상놈의 자식으로 대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어린 날의 그런 추억은 아주 소중하고 좀처럼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애정은 순수한 상태로 남아 있는 법이다.

"며칠 전에 서울 갔다오기는 왔소."

"그래서? 나으리께선."

"그기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우리 겉은 놈이 우찌 알겄소. 그렇지마는 쉬이 돌아오실 수 없일 기라카이 근심 아니요."

"와 쉬이 못 돌아오실꼬?"

"사정이,"

"벌써 나가신 지가 여러 해 아니가."

"햇수로 하자믄 팔 년 아니요. 한 분 돌아오시기야 했지마는 마님께서는 나으리를 기다리시다가 할 수 없이 큰 도련님 혼사를 치를 수밖에 없었고."

"그거야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그보다 쉬이 못 돌아오신다고 무신 말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마는 이서방이니께 내 말은 하요만 실데없이 말 퍼띠리지는 마소."

억쇠는 목소리를 죽였다.

"그러니께 작년 그 작년에 말이요, 전쟁이 안 났소? 왜국하고 노국 사이에 쌈 안 붙었소?"

"."

"그때 우리댁 나으리께서는 간도에 기싰는데 거 관리사라든가, 그기이 무신 벼슬이니지 우리 겉은 무식쟁이 모르겄소만 그 관리사나으리하고 우리댁 나으리가 합세를 해가지고 누구나라 편역을 들었었다 그 말 아니요."

", 그래서."

"그래 편역을 들어서 왜놈하고 쌈을 했다 카는데."

", ."

"노국만 이깄이믄 우리네 국량으로도 썩 잘하신 일이었지요. 그런데 형편이 어디 그러크름 되었어야 말이제."

"...... 그라믄 나으리께선 그곳에 기시다 그 말가?"

"아마 노국나라에 가싰일 기라고 말하데요. 벌떼 겉은 왜눔들 등쌀에 거기 눌러앉아 기시지는 못할 기라 캄시로."

"그라믄 우찌 되시는 긴고?"

용이 이맛살을 찌푸린다.

"말이 병정들을 모아가지고 왜눔들하고 싸울기라 캅디다."

억쇠는 곁눈질을 하며 용이 표정을 살핀다.

"그렇다믄 장한 일을 경영하시는 거 아니가."

"그러세......"

억쇠는 말꼬리를 길게 뽑으며 거만스럽게 나온다. 자랑스러움이 그렇게 나타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서방이 말을 한다 하고 소문 퍼뜨리지 말라 했으나 속셈으로는 자랑하고 싶어서 잇몸이 근질 거렸던 모양이다. 상대방 반응이 미심쩍었고 한편 상전댁 가정 형편이나 상전의 신변이 염려스러워 마음이야 산란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부사댁 나으리는 능히 그러실 수 있는 분이지."

흥분이 되어 용이 얼굴은 벌개졌다.

"듣자니께 나라 안에서도 의병들이 그곳으로 많이 빠져 나가니께 군사는 점점 커질 기고."

억쇠는 당장 거만을 때려치우고 용이와 함께 흥분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고 보믄 우리 나으리께선 나라 안으로 쳐들어오실 기구마."

"다 그런 생각을 하시고서 가싰구마. 빌어묵을, 나라 안의 썩어빠진 벼슬아치들은 이자는 아주 송장이 돼부맀는갑다."

"와 아니라요."

"우리 동네 김훈장도 동분서주 애를 썼지마는 병기나 군량은 다 관영에 있는 기고 군수는 현감이고 움직이주어야 말이제."

", 총이고 칼이고 풀어주기만 한다믄 나 겉은 것도 달리 나갈긴데 꼼짝 안 하고 있이니께 말이요. 노략질에는 눈까리가 시뻘개서 덤비더마는 이럴 때는 와 백성들 목심을 노략질 좀 안 하는고 모르겠소."

"......?"

"백성들 목심을 노략질해서 왜놈들한테 대항 안 시키노 그 말 아니요."

"하하핫......"

"사사로이는 잘도 끌어내서 노역도 시키고 하더마는 이분에사 꾸린 입도 안 떼고 참말로 한심스럽구마는."

의기상투되어 한참을 지껄이다가 그들은 헤어졌다. 용이는 오래간만에 상쾌한 기분을 맛본다. 너무 흥분했던 것이 어린애 같았다 싶었으나 그런대로 좋았다. 장날이 아니어서 장꾼도 없는 빈터를 용이는 발을 크게 떼어놓으며 간다. 빈 좌판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으며 밀어붙인 듯 한켠에 늘어선 점포만 가게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지나는 사람은 별로 없고 한가롭다. 용이는 지나치려다 눈에 익은 모습을 보았다. 기분이 썩 좋았던 판이라 슬그머니 다가간다.

"여기서 머하노?"

돌아본 월선이

"아이고."

하다가 제풀에 무안을 타고 얼른 고개를 되돌린다. 두 귀뿌리가 빨갛게 물들었다. 낯익은 가게 임자에게 민망스러웠던 모양이다. 다시 허둥지둥 되돌아본 월선이는

"저어, 먼지 가 기시오. 저어 곧 갈 기니께요."

알아들을 수도 없이 쭝얼쭝얼 지껄였다. 월선의 당황하는 태도를 본 용이도 감염이 되었는지 엉거주춤, 가게 임자를 쳐다보더니 당황히 등을 돌린다. 호기심에 찬 눈이 등바닥을 쏘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색하게 옮긴다. '그만 집에 가서 기다리고 안 있고 남 보는데.......' 지물에서부터 등잔기름, 갖가지 제수감을 늘어놓은 가게 사내는 실실 웃는다. 공연히 발끈해져서 북어 두 마리 값을 치른 월선이는 얼른 가게 앞을 떠난다. 용이는 벌써 저만큼 가고 있었다. '세상 사램이 다 나를 업수이여긴다. 하지마는 이녁만 날 안 버리믄 고맙게 생각해야겄지.' 언짢았던 마음을 달랜다. 간도에서 돌아온 후 용이를 만나 옛날의 관계를 돌아간 지도 여러 해가 지났다. 그들의 사이를 알 만한 사람이면 다 알고 있고, 한때는 주막을 차려 뭇 남자에게 술잔을 건네기도 했었던 월선이다. 그렇지만 도무지 언제까지나 자연스럽지가 못했다. 남의 눈이 두렵고 조심스럽고 죄짓는 것 같은 마음, 무당딸로 태어나서 온전하게 남편 얻어 살 팔자도 아닌데 그러면 날 어쩌란 말이냐 하고 한 번쯤 자기 자신에게 배짱을 부려볼 만도 한데 그러나 월선이의 발길을 어느덧 가벼워져 있었다. 키가 큰 용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는 마음에는 저절로 미소가 피어오른다.

만나는 순간마다 새롭고 전부였고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고 기다리는 동안의 몸서리쳐지던 고통은 아주 쉽게 잊어버린다. '우찌 저리 키가 큰지 모르겠네. 오늘은 무신 좋은 일이 있었는지 얼굴이 훤하더마.' 월선이는 용이 뒷모습을 한 번 보고는 한눈을 팔고 다시 한 번 보고는 한눈을 판다. 한눈을 파는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다만 무의식 속에서 그런 동작을 되풀이하며 간다. 집 앞에서 멈춘 용이는 기웃하니 집안을 한번 들여다보더니 망설임 없이 쑥 들어간다. 조금 후 월선이도 집안으로 들어갔다. 용이는 햇볕이 따스한 마루에 태평스러이 앉아 있었다. 망설임 없이 쑥 들어가던 용이 심리를 생각하고 월선이 빙그레 웃는다.

"와 웃노."

"?"

"와 웃노."

월선이는 대답 없이 또 웃는다.

"싱겁기는."

"집에 아무도 없네요."

"?"

하다가 용이는 자신이 놀림을 당한 것을 깨닫고 쓴 웃음을 띤다. 천석이도 없었다. 집은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용이는 곁방살이를 하는 천석이네 식구들과 영 사귀지 못했다. 사귀질 못했다기보다 그들을 두려워했다. 천석이아비도 그러하거니와 용이는 되도록 그들과 마주치기를 피한다. 본시 속마음으로야 부끄러움이 많은 사내였으나 사람 사귐이 어려운 편은 아니었고 한 시절에는 농담도 꽤 잘하는 사내로 알려지기도 했었지만 어쩐지 천석이네 식구들에겐 기를 못 편다.

사내구실을 못하는 주제, 남의 땅을 부쳐먹고 사는 가난뱅이 농사꾼이 계집을 둘이나 거느려? 그런 자기 자신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다는, 다만 그 이유 때문에 용이는 천석이 내외는 물론 나이 어린 천석에 대해서는 마음이 안으로만 옹그리어진다.

"아무도 없인께 이리 좋은걸."

용이는 새삼스러운 듯 뜰안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그라믄 천석이네 식구 내보내까요?"

월선이는 옮겨가는 용이 눈길을 쫓으며 묻는다.

", 아니, 그거는 안 될 말이제."

다급히 막아버린다.

"와요."

"나는 가끔씩 오니께, 좋고 나쁘고 그건 생각할 처지도 아니고."

"우찌 당신은 그렇게만 생각하요. 노상 남남겉이."

"혼자 있는 날이 많은데 여자가...... 그 사람들이 있이니께 든든하고 또 우짜다가 병이라도 나믄 적막해서 쓰나."

용이는 공방대를 꺼내어 담배를 넣는다. 잠자코 있던 월선이

"그 동안 별일은 없었소?"

하고 묻는다.

"별일이야 있을라고."

"여기는 왜놈들 별순사라 카든가 긴 칼 찬 사람들이 와 있어서 겁이 나 죽겄소."

"그것들도 사램인데 사람 잡아묵을까."

"그래도 남으 나라를 뺏을 놈들인데 무신 짓을 못하겄소."

단둘이만, 남의 눈이 없으니 한결 느긋한 마음으로 부부 같은 대화를 한다.

"그라고 당신도 조심하소."

"머를?"

"의병 간다고 소문들이...... 김훈장 어른이 선동해서."

"아무것도 된 기이 없었지."

"앞으로 조심하소. 들으니께 의병이라 카믄 왜놈들 별순사가 모두 잡아서 직인다 안 카요?"

"가지 마라 그 말이가?"

"."

"계집들 생각은 다 마찬가지구마."

"?"

월선이는 퍼뜩 임이네 생각을 했다. 가슴이 찡 하니 아파온다.

"동네서는 경위 바르고 후덕하다고 소문이 난 두만네 아지마씨까지, 머 그 형님이야 아지마씨가 가라 캐도 갈 사람은 아니다만."

"혼자 나선다고 뺏긴 나라를 도로 찾을 것도 아니겄고, 모두 지 앞들만 가리는데 당신이라고."

"아무리 그래싸아도 갈 형편이믄 갔겄지."

"?"

눈에 겁이 더럭 실린다.

"그는 그렇고 간도라 카는 데가 우떤 곳고?"

월선이 간도에서 돌아온 후 처음으로 용이는 간도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이다.

"와 갑재기?"

"아 오믄서 간도 애기를 들었기에."

담배 연기를 뿜어내면서 이동진에 관한 애기는 하지 않는다.

"거기 가자 카는 사램이라도 있십디까?"

별안간 월선이의 눈이 반짝거린다.

"머 그런 거는 아니지마는 살기가 우떤지 모르겄네."

"살기사 머 아무래도 여기보담사."

"왜놈이 많으까?"

"아니요. 왜놈들은 가뭄에 콩 나기고 청국 사람들이 더 많소. 그래도 우리 조선 사람한테 비하믄 아무것도 아니요."

"춥겄제?"

"춥소. 여름에는 덥고 바람도 많고, 삼월까지 눈이 오니께요."

"멋들 하고 사는고?"

"농사를 젤 많이 짓고 장사도 하고요. 거기도 여기맨치로 장날이서요."

"거기도?"

". 이렛장, 이틀장, 장이 서믄 아주 대단하요. 여기하고는 유도 아니요."

"."

"조선 사람치고는 함경도 사람들이 젤 많은데 일찍 와서 지리 잡은 사람들은 떵떵 우리고 산다 캅니다. 가난한 사람이사 어디로 가나, 그곳이라고 없겄소. 그렇지마는 눈만 밝히믄 사는 기사......."

"너거 삼촌 숙모는 아직 거기서 사시나?"

"모르겄소. 아마 기실 기요. 자리를 잡았이니께 쉽기 뜨지는 않았을 기요. 거기사 본시는 우리 조선 땅이었다 카든데 조정에서 돌보지 않고 내비리두어서 청국 사람들이 밀고 들어왔다 캅디다. 그래놓고 이자는 저거 땅이라고 우긴다 카데요. 청국 사람한테 결전 바치는 기이 뻬가 아프다 캄시로 조정의 대신 놈들 하고 욕들을 안 합니까. 청국향약의 행패도 어찌 심한지, 그들을 잘 구슬러야 한다 카든가."

"거기도 향약이 있나?"

". 그라고 또 외딴 곳에서는 살 수 없다 캅니다. 무서븐 마적단이 있어서 재물만 뺏는 기이 아니고 여자들도 뺏고 사람들도 직이고, 우리가 있었던 곳은 용정인데 큰 도방이요. 조선 사람들도 젤 많이 살고요."

월선이는 열심히 설명을 한다.

"처음에사 삼촌은 약초를 캐든지 아니믄 받아다가 장사를 하든지 할라꼬 가실 생각을 했는데 지가 따라갔이니께 그라믄 장에서 국밥장시나 해보자고, 숙모님도 기시고 해서 시작한 기 장시가 잘 되더마요. 삼촌은 전에도 와본 곳이라서 그곳 형편은 훤했고, 그래서 고생은 안 했소. 토문강은 강도 크고 기니께 나리터도 수없이 많다 갑디다. 여기랑은 달라서 소고 말이고 짐, 사람 모두 나릿선을 쓰는데 머 큰 벌이사 안 되겄지마는 그거를 모두 조선 사람들이 부리고 있고 산포수들도 조선 사람들이 많다 갑디다. 장날이믄 짐승 가죽이랑 녹용이랑 약초를 가지오는데 아닌 게 아니라 모두 조선 사람들이었소. 아금바르고 부지런하고, 나라서만 좀 뒷배를 보아주믄은."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도 못 끄는데 그럴 엄두가 났이까."

"내 정신 좀 보소. 해가 넘어갈라 카는데 저녁도 안 하고, 보소."

"."

"방에 들어가시는 기이 좋을 기요."

"나무라도 패주까?"

"저기 해 떨어진 것 보소."

"해 떨어졌이믄 떨어졌제. 밤일 갈 것까."

"석이어매가 시적 올 것 아니요?"

하고 빙긋이 웃는다. 간도 애기는 언제 했더냐 싶게.

"제법 사람을 놀리네? 재주 늘었구마는."

용이는 웃으며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월선이는 부엌으로 들어간다.

 

 

8. 봄풀과 겨울나무

나비 모양의 백동 장식을 모서리에 촘촘히 괴목함 거울을 세워놓고 머리를 빗고 있는 서희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누구 하나 별당 뜰에다 꿇어앉혀 놓고 몽둥이질이라도 실컷 했으면 속이 후련해질 것 같다. 속이 끓어 오르지 않는 날이라곤 별로 없었다. 심한 날이 있고 덜한 날이 있을 뿐. 작은방에는 기척이 없다. 하마 애기씨 하며 봉순이 건너올 법도한데 세숫물 시중을 들고 난 뒤 저도 우물에서 세수를 하는가 했더니 방에 들어간 채 아무 소리가 없는 것이다. 쌀쌀하게 굴었기로, 어젯저녁 때 숭늉이 차다고 신경질을 좀 부렸기로 지가 토라지면 어쩌겠다는 거냐 싶어 괘씸한 생각이 치민다. 요즈음에는 반드시 머리를 빗는 데 남의 손을 빌리던 것도 아니었고 도와주겠노라는 봉순이를 떠밀어내어 귀찮게 굴지 말라 하며 무안을 준 일도 이었다. 지금, 애기씨 제가 머리 땋아 드리겄십니다, 하고 봉순이 다가온대도 틀림없이 매정하게 뿌리쳤을 것이다. 그럴 것을 미리 알고 봉순이 꼼짝 않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괘씸하기로는 마찬가지다. 떠밀어내거나 볼을 쥐어 박히는 한이 있어도 시중을 드는 처지고 보면 나타나야 할 거 아니겠느냐는 것이 서희 생각이다. 아무렇게나 땋은 귀밑머리를 뒤로 넘긴다. 가늠해가며 조심조심 만져야지 그렇지 않으면 귀밑머리란 뿔이 돋는다. 아니나 다를까 비죽하니 머리가닥이 솟았다.

"아이 참!"

풀어서 다시 땋기 시작한다. 콧가에 풍겨오는 동백기름 냄새가 메스껍다. 잔뜩 찌푸린 얼굴이 명경 속에서 서희를 노려보고 있었다. 미간에 모여든 꼬막살에 심술이 뒤룩뒤룩 매달려 있다. 양미간에 잡힌 꼬막살 때문인지 바가지를 엎어놓은 듯 둥그스름한 선을 그은 이마는 한층 매끄럽고 퉁겨질 듯 팡팡해 보인다. '망할 계집애. 어디 두고 보자. 내 성미를 몰라서 그래? 하나하나 다 접어놨다가 내 그예 벌을 줄 테야. 감히 누가 내 영을 거역한단 말이냐.' 부글부글 끓는 도수가 올라가면 제 마음대로 시간을 갖는 것도, 우울해 있거나 시무룩한 얼굴을 보이는 것도 반항으로 받아들인다. 봉순의 요즘 행동거지가 다소 이완된 것은 사실이지만 거역으로 혹은 반항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날이 선 서희 신경에 더 많은 원인이 있다. 이럴 때면 반드시 길상이나 봉순에게 의지하는 자기 처지를 생각하게 되고 상대방이 그것을 의식하고 있을 것을 상상할 때 서희는 참을 수 없는 곤욕감에 몸을 떤다. 무조건 복종이면 복종이지 친근감을 갖는 것을 싫어한다. 동정하고 보호하는 기분을 가진다는 것이라면 더더군다나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도대체 저희들한테 무슨 능력이 있다는 것이냐, 아랫것이면 아랫것답게 내 명령을 좇으면 될 일이지 주제넘게 누굴 보호하며 누굴 감싸겠다는 것이냐, 수동이가 죽었기로, 머슴 한 놈이 죽었기로 내 자리가 흔들린단 말이냐, 나라가 망하여 왜놈이 득세한다고 조가가 최참판댁을 삼킨다는 그 따위 이야기는 또 뭣인고? 임금님이 산송장이 되셨다고 나도 산송장이 될 거다 그 말이냐? 그래서 나를 가엾게 여긴다 그 말이냐? 이 나를? 아랫것인 주제에 나를 가엾게 여겨? 서희의 기분은 그러했다. 옛날에는 네가 죽으면 나는 어쩌겠느냐고 봉순이한테 더러 어리광도 피우던 서희였건만. 외톨박이가 되어 헤매거나 혹은 병들거나 상처받아 힘이 약해진 맹수는 유독 사납다. 서희의 경우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외톨박이, 무수한 마음의 상처들, 불리해져가는 현실, 그러나 서희는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고 그에 비례하여 높아져가는 신경질의 증세를 비위에 거슬리는 사소한 일에다 줄기차게 원인을 찾으려 하지만, 기실 자신을 속이는 일 이외 아무것도 아니다.

여러 해 전 삼수를 묶어놓고 수동이와 길상이를 시켜 난장질을 한 일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서울서 데려온 매화가 그 비슷한 일을 당하였다. 마침 봉순이가 없었기에 서고에서 꺼내온 책들을 도로 갖다놓으라는 영을 받은 매화가 홍씨 심부름을 먼저 하고 늦게 나타났던 것이다. 서희는 매화를 별땅 뜰에 꿇어앉으라 하고 공교롭게도 삼수를 불러다 매를 때리게 했는데 삼수는 무슨 생각에 선지 서희 명령을 충실히 이행히여 매질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홍씨가 노발대발했으나 조준구는 서희 기질을 매우 두려워하여 홍씨에게 나서지 말 것을 엄명했다. 홍씨에게까지 말채찍을 휘두르려 했던 성미를 홍씨 역시 모르는 바 아니었고 자칫 잘못하면 쇠뿔을 고치려다 소를 죽이는 결과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어서 부부의 의견이 일치되고 사건은 유야무야로 덮어버렸다. 그후 혼이 난 사람은 서울서 온 침모였다. 새로 지은 서희 저고리에 다림질을 하다가 불티가 날아 불구멍을 냈는데 서희는 소홀히 생각하는 심사가 괘씸타 하여 불러다놓고 춘자저고리를 발기발기 찢어 양주댁 면상에 집어던졌다. 계집종들과는 달라서 설마한들 매질이야 할까 생각은 했으나 매화가 당하는 꼴을 본 양주댁은 그 족제비같이 생긴 얼굴에 핏기를 읽었다.

"애기씨, 잘못했습니다. 그저 잘못했습니다."

싹싹 빌었던 것이다.

"고약한 것 같으니라구!"

뒷공론이야 어떻든 모두가 서희 앞에서 쩔쩔매는 시늉을 했다. 서울 대가댁을 굴러 다니며 산전수전 다 겪어 매끄럽기가 비단결 같고 그 매끄러움을 무기 삼아 시골 양반댁들을 은근히 곯려먹는 못된 성정의 지서방도 서희는 한 수 놓고 되도록이면 걸려들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자신이 소홀하게 취급된 다는 것을 알아채기만 하면 서희는 맹수처럼 이를 갈았다. 그것은 차츰 병적으로 앙진 되어갔다. 한편, 길상이나 봉순에게 대해선 어떤가 하면 그것 또한 미묘한 갈등이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친밀하게 깊은 유대를 맺고 있다는 그들의 의식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그렇게 느끼는 것을 자신의 약점으로 보았다. 혹은 자신을 격하하는 무례로 보는 것이다.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침범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주는 벌은 소리 내지 않고 목을 조르는 방법이다. 무엇이 잘못인지 왜 그러는지 본인들도 모르는 만큼 성미라 생각하고 참지만 그러나 그들도 이제는 머리가 커졌다. 이같은 냉전의 북새는 길상이보다 신변에 있는 봉순이 주로 당한다.

"이러믄 이런다 저러믄 저런다 하고, 참말이제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모르겄다. 원 세상에 변덕스러워도 푼수가 있지."

봉순이는 길상에게 털어놓고 하소연하곤 했다.

"날이 갈수록, 전엔 그러지 않았는데 와 저러시는지 모르겄다. 뭐가 잘못되었으믄 이래저래 해서 잘못했다 하시든가, 아니면 뺨짝이라도 하나 때리는 편이 낫지 북덕북덕 괴는 세상 정말 못 살겄구마. 그만 달아나든지 해야 할까부다. 하기사 심란하니께 나한테 화풀이를 하는 것이겄지마는 하로이틀도 아니고 당하는 사람은."

포악스럽고 음험하고 의심 많고 교만한 서희, 그러나 그것이 그의 전부는 아니었다. 제 나이를 넘어선 명석한 일면이 있었다. 본시 조숙했지만 그간 겪었던 불행과 지켜보지 않을 수 없었던 많은 죽음들로 해서 그의 마음은 나이보다 늙었고 미친 듯이 노할 적에도 마음바닥에는 사태를 가늠하는 냉정함이 도사리고 있었다. 무료하고 지루한 나날, 서책에 묻혀 시간을 보내는 생활은 그를 위해 다행한 일이었으며 거기에서 얻어지는 지식은 또 지혜를 기르는 데 살찐 토양이 되어주었다. 언문으로 된 이야기책에서부터 서고에서 꺼내어온 여러 가지 한서를 읽었으며 그 중 오경의 하나인 춘추를 탐독했다. 그 밖에 서울서 발행되는 신문 조각 같은 것도 가끔 읽었다. 심지어 조준구한테 배운 일본 글로 일본 책까지 한두 권 읽었다. 이쯤 되면 여식으로 박학하고 세상 물정에 밝다 하겠는데, 그것으로 총명한 천품을 무한히 닦아갈 수도 있겠는데 서희는 그 명석함도 자기 야심과 집념의 도구로 삼으려 했을 뿐 자기에게 합당치 못한 현실에 대해서는 아무리 그 총명이 뚫어본 사실일지라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완명한 고집 앞에 이성은 물거품이 된다. 그에게는 꿈이 없다. 현실이 있을 뿐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왜곡된 현실만이 있을 뿐이다.

"애기씨! 나라가 망했다 합디다! 대신놈들 다섯이 들어서 나라를 팔아묵었다 합니다! 이렇게 되믄 우리는 우떻게 살겄십니까? 이럴 수가 있겄십니까? 모두 땅을 치고 통곡을 한다 캅니다. 충신들은 칼로 목을 찌르고 죽었다 카고요."

울며 봉순이 말했을 때,

"죽으면 무얼 해? 죽는다고 나라가 안 망하나? 충신이라는 말이나 듣자고 하는 수작이지. 그럴 바에야 왜 망하기 전에 손을 못 썼을까. 병신들 같으니라구. 초상난 것도 아니니 울지 말아라."

태연하고 냉정했다.

"애기씨, 길상이가 읍내 이부사댁에 다니왔는데요."

비밀스럽게 소곤거린다.

"이부사댁 나리 소식 들었다 안 캅니까."

"어떤 소식?"

"이부사댁 나리께서는 이분에 아리사하고 일본하고 쌈이 붙자 아라사의 편역을 들어서 아라사 땅이라 카든가 대국 땅이라 카든가 그거는 모르겄십니다마는 아무튼지 간에 아라사 편역을 들어서 군사들을 이끌고 왜놈하고 싸웠다 캅니다. 그런데 왜놈들이 이깄이니께 좀해서 고향에는 못 돌아오실 기라고 하더랍니다."

"하긴, 이곳서 벼슬을 할 형편도 아니겠고 잘되든 못되든 넓은 천지서 한분 설쳐볼 만하겠지."

역시 냉정하게 저와는 무관한 일인 듯 말했다. 꿈이 있다면, 아니 그것 역시 꿈일 수는 없다. 망상이요, 미신이다. 굳이 꿈이라 한다면 자신을 위해 완명한 고집이 일그러뜨려 놓은 꿈이라고나 할까. 자신 속에 절대적인 것이 있다는 믿음, 만일 가슴팍에 창칼이 들어 온다면 주먹으로 쳐서 부러뜨릴 것이요, 독약이 든 음식을 먹는다 하더라도 오장을 그냥 지나서 밖으로 내몰 수 있으리라는, 수동이 죽었을 적에 봉순에게 만일 조씨네 것이 된다면 땅이고 집이고 모조리 물속에 처넣어버리고 말겠다고 한 말은 진심이었다. 이같은 서희의 병적 증세는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봉순이 길상에게서도 볼수 있었다. 고집스러워지는 것, 신경질이 되는 것, 사태가 불안해지는 데 따라 서로가 복잡해지고 티격태격하는 상태, 그러나 이들에게는 서희와 달리 청춘을 앓는 심적 갈등이 보태어져 있었다. 아무튼 서희는 그들 생각이 불손하다고 혐오하고 그들대로 변덕스럽다고 불만해하고, 그러면서도 유대는 끊어질 수가 없다.

서희는 귀밑머리를 남은 머리에 모두어서 머리채를 앞으로 넘겨 다시 세 가닥으로 갈라땋는다. 하얀 당목 적삼에 뱀같이 꿈틀거리는 새까만 머리채는 때마침 들창을 통해 비쳐 들어오는 환한 아침 햇빛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머리를 엮어 내리고 하얗고 가는 손, 그것은 마물 같고 열 손가락에 오목오목하게 박친 손톱은 이른 봄날 바람에 날아 내리는 매화 꽃이파리 같다. 거울을 보기 위해 검은 눈동자는 한켠으로 몰리었고 흰자위가 넓어진 얄팍한 매가 몹시 아름답다. 길게 찢어져서 확실한 골을 이룬 눈꼬리도 또렷한 윤곽과 더불어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는 천천히 자줏빛 댕기를 머리가닥 사이에 끼워 몇 번 땋은 뒤 이빨로 입술을 지그시 물며 댕기를 감아서 졸라맨다.

한편 작은방에서도 봉순이 면경 앞에 앉아 머리를 빗고 있었다. 부글부글 끓고 있을 서희의 기분을 모를 리도 없겠는데 그는 그 나름으로 서희 성격을 이용하여 약을 올려주는 셈일까. 느릿느릿하게 빗질하는 품을 보아서는 반드시 서희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도 아닌 성싶기는 했다. 눈은 열심히, 열심히라기보다 거의 황홀한 빛을 띠고 거울 속의 제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 느릿느릿하던 빗질도 멈추고 어디선지 보내오는 미소에 답이라도 하듯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는 샐쭉샐쭉 웃는다.

"길상이는 눈도 없이까?"

나지막하게 중얼거린다.

"빌어묵을 자식."

하다가 제풀에 놀란다. 아이 아범만큼이나 나이든 길상이, 양 볼에 수염자국이 검실하고 훤칠하게 키가 큰 길상이고 보면 혼자서 한 욕이지만 어쩐지 마음에 켕겼던 것이다. '옥이년을 때깔이 빠졌다고들 하지마는 그거사 서울물을 묵었으니께 그럴 기고...... 김서방댁도 말 안 하든가배. 옥이가 봉순이 따라 올라 카믄 감감하다고. 애기씨말고 이 근동에서 내만큼 이삔 가시나는 없일 기라고...... 옥이년 지가 머.......' 김서방댁이 좋은 말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니가 그래가지고 인물값 할 기다. 저리 생깄으니 우찌 여염집 지어미가 되겄노. 제집이 인물 잘나믄 노방초 되기가 십상이고, 니 에미가 생시에 그리 노래부르는 거를 싫다고 직일 듯이 서둘더니마는, 옛말에도 부모 말이 문서더라고 자식 질엎을 알기로사 낳아서 기른 어미만 하까. 소나아 애간장을 녹일 저 낯짝이며 버들가지 겉은 허리매며 팔자치레하고 사까 싶으지 않네."

하고 김서방댁은 혀를 끌끌 찼다. 봉순이는 피식 웃기만 했다. 과히 듣기 싫은 말은 아니었다. 사내 오간장을 녹인다는 말이 철없이 마음에 들었다. '소나아 애간장을 녹일 기라 카지마는...... 머 길상이사 나를 거들떠나 봐야제. 지도 총각이고 나도 처닌데 어릴 적부터 속속들이 잘 알믄시로 와 나를 박대할꼬. 요새는 날 보기만 하믄 실실 피할꼬. 멋 땜에? 내가 미워서 그러까.' 거울 속의 얼굴을 잠시 잊고 벽을 쳐다본다. 윤곽이 서희처럼 또렷하지 않다. 살결은 서희보다 고운 것 같고 여식답게 나붓나붓하게 생긴 얼굴이다. 아지랑이가 낀 듯 화사한 봄빛이 배어날 것만 같은, 연연하다. 풍정이 있다. 나긋한 허리매는 한줌이나 될까. 언제이던가 나긋한 허리를 살짝 꼬며 아양떨 듯 연이 곁으로 다가갔을 때였다.

"니 똑 시앵 겉구나."

연이 눈에도 봉순의 교태가 사랑스럽게 보였던 모양이다. 타고난 교태가 있었다. 홍씨는 서울 친정에 가고 없었을 때 조준구도 읍내에 출타 중이었고, 날씨는 화창했다. 봉순이도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옛날처럼 뒤꼍에서 카랑한 목청을 뽑았다. 즐겨 부르던 춘향가의 한 대목이었다.

"좋아, 좋아. 광대 소리 곁방 나앉으라 칸다. 또 불러라."

김서방댁은 신이 나 했으나 못생긴 딸을 가진 시샘 때문에 그랬었던지 연이네는

", 하동 고을에 명기 하나 났고나. 인물이 절색이요 노래는 명창이라. 우리만 보고 듣기 아깝네. 하기사 양반댁에서도 집안이 망하믄 딸자식이 기생 나간다 하더라마는, 진작 그 길로 나가는 기이 좋겄구마. 무신 성씨가 있다고."

아비어미도 없는 너 주제에 그 길밖에 더 있겠느냐는 비양이다.

"하다 버릴 말이라도 무신 그런 말을 하노. 커나는 아아보고 할 말 아니구마는."

김서방댁이 감싸고 나왔다.

"아아니, 그 말이사 김서방댁도 하지 않았소? 저렇게 되믄 타고난 기라고."

"내가 운제 그러더노."

"여치네야 니도 들었제?"

주거니 받거니 했으나 봉순이는 그 말 까닭으로 마음 상해하지 않았다. 길상을 깊이 사모하면서 한편 봉순이는 그와 다른 꿈을 쫓고 있었다. 꿈은 화창한 봄날의 바람 같고 도화 같고 비단치맛결같이 간지러웠다. 그런가 하면 어린 날 오광대놀음을 구경하던 밤의 광경 같기도 했다. 훨훨 타오르는 장작불, 시커멓고 밤을 삼킬 듯 불길이 널름널름 혀를 내두르던 괴이하던 강렬한 광경이 기억 속에 다가오면서 속삭이는 것이었다.

'평생을 재미있게 살 수 있지. 부르고 저븐 노래 불러가믄시로 입고 저븐 옷도 입을 기고 분단장 곱기 해서 오늘은 이 좌석에 내일은 저 좌석에, 만천 사램이 우청좌청하믄시로, 그 인물에 그 목청을 썩이믄 머할 기고?' 평생을 비단옷에 분단장하고 노래 부르며 마음대로 사는 세상, 봉순이 마음은 그곳으로 끌려간다. 방랑벽이 있던 아비의 피 탓인지 모른다. 아니면 운봉 깊은 곳에서 명창을 꿈꾸던 봉순네 조부의 피 탓인지도 모를 일이다. 올해 열여섯 살이다. 혼기는 늦었다. 어미가 살아 있었더라면 벌써 출가를 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혼인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팔자치레 못하겠다고 근심이라도 해주는 김서방댁이 있을 뿐. 침모의 딸로 최참판댁에 매어 있는 종의 신분이 아닌 봉순이는 자유를 얻으려고 하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었고 갈 곳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외가가 있다. 그러나 외가에 가보아야 넉넉지 못한 농사 살림에 자식들은 많고 사촌들과 동등한 대접을 받는다 하더라도 사철 무명옷에 깡보리밥, 농사일을 거들어야 한다. 봉순이는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외가는 외가대로 무심해서가 아니라 최참판댁을 믿었고 남의 집에 얹혀살았어도 봉순이네는 늘그막에 본 딸 하나를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길렀으니 데려가기가 염려스러웠다.

내막을 모르는 소박한 그들은 어미가 죽었다 하더라도 장차 만석꾼 살림의 임자가 될 애기씨 곁에서 곱게 차리고 시중이나 들며 호강스럽게 지내고 있으려니 했을 것이다. 봉순이는 혼인이라든가 혼기가 늦어졌다든가 그런 일에는 관심이 없다. 길상을 사모하면서도 불안한 기대가 있을 뿐이었다. 서희의 앞날에 대해서 그러했고 길상에 대한 감정에서도 그러했고 미지의 세계, 찬란한 꿈이 있는 동경의 세계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불안한 기대. '아무래도, 아무래도 내가 맘에 없어서 그러는갑다.' 길상의 태도는 봉순이를 피하는 것이 완연했다. 몇 번이나 간절한 마음을 담고 쳐다보았으나 그럴 때마다 길상이는 눈을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괴로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떤 때는 화를 내기도 했다. '지가 먼데? 머가 그리 별수 있는 처지라고 도도하노 말이다. 남으 집에 머슴살이하는 주제에 그라믄 옥황상제 딸이라도 얻어올라 캤던가?'

하는데 봉순이 마음은 찡하니 아파왔다. 무서운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을 한 자체가 후회스럽기도 하다. '지가 먼데? 지 눈이 높으믄 우짤 기든고? 평생 각시도 안 얻고 혼자 늙어 죽을 기든가? 그럴 바에야 중이나 되지 여기 오기는 와 왔노. 아배어매가 누군지도 모르는, 머 지가 종놈의 신세보다 나을기이 어디 있노.' 길상의 처지를 깎아내리지 않고는 안심이 되지 않는다. 될 수만 있으면 더 천한 신분이기를 바랐다. 너무 잘난 것도 두려웠다. 설움이 와락 치밀어 허둥지둥 머리를 땋기 시작한다. 아슴하게 얼굴이 보인다. 행쑥해진 것 같으나 그런대로 거울 속의 얼굴은 어여쁘다. 봉순이 입에서 겨우 달콤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길상이 눈에는 꽃봉오리 겉은 저 내 얼굴이 안 뵈이까? 벵신도 아닐 긴데, 사대육신이 멀쩡함시로 본시 성질이 그러까? 오만 사램이 날 보고 참하다 카고 동리에 나서기만 하믄 총각놈들이 죽을 둥살 둥 모르고 한분이라도 더 치다볼라꼬 미치는데 길상이는 벅수란 말이까? 정 나를 이리 박대하믄은 누구 말대로 내 기생이 돼부릴 기구마. 광대가 되든지...... 아니다. 그런 기이 아닐 기다. 길상이는 남으 눈이 무서바서 그럴 기다. 소문이 나까봐 무서바서, 아니믄 부끄러바서 그러까? 지 맴이 이상할게 나 보기가 부끄러바서 일부러 성을 내는 척하고 쌀쌀한 척하고, 하기사 지 맴이 무심상하믄 그럴 기이 머 있겄노.'

"봉순아!"

마루를 통해 메어치는 것 같은 날카로운 서희 음성이 울려왔다.

"예에."

봉순이는 땋던 머리를 움켜쥐고 댕기를 찾는다.

"봉순아!"

", 애기씨."

댕기를 찾아 끼우고 묶으면서도 급히 달려간다.

"너 죽지 않았더냐?"

뼛골까지 찌를 듯한 시선이다.

"저어."

"오늘도 얼룩진 저 치마를 입으란 말이냐?"

서희는 흰 속치마를 입고 서 있었다. 어제 저녁때 신경질을 부리다가 국물을 엎질러 한두 군데 얼룩이 진분홍 명주치마가 의대에 걸려 있다.

"갈아입으실 치마 다리겄십니다."

봉순이는 무릎을 꿇고 장문을 연다. 연두색 숙수치마를 꺼내어 무서운 눈을 하고 서 있는 서희 앞에 펴들었다. 서희는 확 잡아채서 입는다. 치마를 입은 뒤 분홍 저고리에 팔을 끼면서 봉순이 버선발에 힐끗 눈을 준다.

"버선 갈아 신어. 여긴 토방 아니야."

무안을 면상에 던지고 문을 열더니 뜰로 내려가버린다.

"길상아!"

연이네가 불렀다.

"."

"니 곧 나무 하나 베서 서까래 두 개쯤 맨들어 안 줄라나?"

"멋에다 쓸라꼬요."

"장을 댈일라꼬."

"......"

"체에 걸러얄 긴데 그러자 카믄 받칠 기이 있어야제."

"장작개비 두우 개 걸쳐놓고 하믄 안 되겄소."

"야아가? , 가마솥이 얼매나 넓다고, 그것도 모르나? 장작개비라믄 퐁당 빠지뿌릴 긴데."

"집안에 막대기가 그리 없소?"

"찾아봤는데 쓸 만한 기이 없네. 개똥도 약 할라믄 없더라고. 잠시 뒷산에 톱만 가지고 가믄 될 긴데 머를 그리 세련을 부리쌌노."

봉순이는 안 듣는 척하며 연이네와 주고받는 말을 듣는다. 까대기로 들어간 길상은 톱과 낫을 찾아 들고 횡하니 밖으로 나간다. 길상이 나간 뒤 얼마 후 머리를 쓰다듬고 옷매무새를 고치고 하던 봉순이 바구니 하나를 들고 살그머니 밖으로 빠져나간다. 길상은 땅바닥에 두 무릎을 안고 앉아서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있었다. 바구니를 겨드랑에 끼고 발밑을 내려다보며 올라오는 봉순이를 발견한 길상이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선다. 엉덩이를 털고 톱을 쥔다. 가까이 온 봉순이는 허리를 꼬고 웃으며 바구니를 안 든 편의 손으로 풀을 잡아 뜯는다. 순간 앗! 하려다 얼른 삼킨다. 억센 갈댓잎에 손가락을 벤 것이다.

"여기서 머하는고?"

새끼손가락이 따끔따끔했으나 내색을 않고 어중간한 어조로 묻는다.

"나무 비로 왔다."

곧은 나무를 이리저리 찾아다니며 대꾸했다.

"나무는 머할라꼬?"

"멋을 하거나 말거나, 비다 달라 카니께."

여전히 거들떠보지 않는 대답이다.

"!"

버티고 서서 콧방귀를 뀐다. 뒤따라온 것을 길상이 알고 있는 듯싶어 부끄럽고 무안하다. 분한 생각도 든다. 손을 내린 채, 엄지손가락으로 따끔거리는 새끼손가락을 꽉 누른다. 팔뚝만한 크기의 곧은 소나무 한 그루를 고른 길상은 봉순에게 등을 돌리고 앉는다. 나무에 톱을 대었다. 그러나 봉순이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신경에 걸렸던 모양이다.

"머하로 왔노."

물었다.

"고사리 캘라꼬."

"그라믄 어서 올라가봐라. 삼신당 뒤에 가믄 고사리가 많을 기다."

서걱서걱 톱질하는 소리가 조용한 산속에 울린다. 앞뒤로 왔다갔다 하는 길상의 양어깨를 내려다보며 봉순이 중얼거렸다.

"눈도 없는갑다."

말은 없고, 톱질하는 소리뿐이다.

"멀쩡하니, 사대육신이 멀쩡해가지고 눈이 멀었나?"

"그래 눈이 멀었다. 나는 봉사다."

"봉사가 나무를 비나?"

"잔소리 말고 어서 고사리나 캐로 가아."

"누가 고사리만 캐로 왔건데?"

톱질이 계속된다. 하얀 톱밥이 쏟아지면서 이윽고 나무는 저쪽을 향해 넘어졌다. 톱을 놓고 낫을 집어든 길상은 잔가지를 치기 시작했다.

"요새 밤이믄 어디로 마실가는지 내 알구마."

"......"

"한복이 집에 가는 거를 내 알구마. 동네 머시마들 모아놓고 샐인 한 궁리를 하는가? 애기씨가 아시믄 상 주겄구마는. 나으리를 해친 놈의 자손인지 아닌지 그것도 모르더란 말이까?"

"......"

", 곱새도령하고는 또 우찌 그리 친해졌는지. 장차 애기씨 서방님 될 거로 생각는가? 그래서 미리부텀 친해두자 그 말이구마."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사뭇 시비조다.

"내 하는 일에 상관할 거 없다."

"언제부터?"

"상관 말라믄 마는 거지!"

얼굴이 시뻘개진다. 봉순이 입을 다물었다. 길상은 몽당다리가 된 나무 한끝을 들고 껍질을 벗긴다. 낫이 나무껍질을 벗겨내는 소리뿐이다. 무거운 침묵의 시간이 흐른다. 봉순이는 그 시간과 침묵의 무게로 등이 휘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낀다.

"벵신인가? 머가 그리 잘났다고 사, 사람으 맘을"

울음에 가까운 소리를 짜낸다.

"빌어묵을 가씨나!"

별안간 눈을 들었다. 핏발선 두 개의 눈이 잡아먹을 듯 봉순의 얼굴을 쏘아댄다.

"조막만한 기이 인지부터! 여시도 아니겄고 와 꼬리를 치노오! 참자참자 했더마는 해도 과하다! 내 똑똑히 말해둘 것이니 니 겉은 화냥기 있는 가씨나 싫다! 싫다 말이다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9. 걸인이 전한 말

길상은 내내 시무룩해 있었다. 해가 지면서부터 길상이 입에서 나지막한 한숨이 자주 새어나왔다. 저녁도 먹지 않았다.

"칡범같이 엉거리고 있지 말고, 저녁은 와 안 처묵노."

누군가 말했으나 길상은 그 말도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잘한 것 하낫도 없다. 너무했지, 너무했어. 그 불쌍한 거를, 볼 것 없이 그렇기까지 할 거는 머꼬?' 후회는 덜미를 잡고 떠나지 않는다. 무관하여 봉순이 버릇없이 굴기도 했었고 길상이 욕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낮에 있었던 것 같은 일은 처음이다. 돌아서면 봉순아, 길상아 하고 잊어버릴 수 있었던 그런 싸움과는 다르다. 봉순이한테 깊은 상처, 평생 잊지 못할 상처를 준 것이다. 생각하면 길상이 목에 밥이 넘어갈 리가 없다. '지가 우찌 내 맘을 알 기고. 화냥기는 어디 지한테 있었나? 나한테 있었지. 지가 울고 내리가지 않았으믄 오히려 내가 낫을 놓고 덤비들었일 긴데.'

행랑 모퉁이에 서서 우두커니 달을 쳐다보는 길상의 얼굴이 달아오른다. '책임도 질 수 없임서 우찌 내가 지 신세를 망칠 수 있단 말고. 나를 원망하고 나를 죽일 놈이라 생각하는 편이 낫지.'

"허 참, 요새 삼수놈 그놈 아무래도 환장했제."

행랑방에서 들려오는 굵은 목소리다. 길상이 힐끗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본다. 불빛이 비쳐 나오는 방문, 종이와 문살은 마치 등잔불이 깜박이듯 깜박이고 있는 것 같다.

"환장하게도 생깄지."

"?"

", 생각해보라모."

"모르겄는데."

"귀가 어둡구마. 두리가 시집 갈라꼬 날 받아놨다 안 카나."

"그런가? 하지마는 삼수놈 이자는 준다 캐도 싫다고 노상 말하던데?"

"주기는 누가 주꼬? 떡 줄 사람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마싰던 기라. 새끼까지 있는 놈이 염치없는 심보 아니가. 아무리 봉기가 제 딸을 빈치함시로 그놈을 꼬았다 하더라 캐도 지 처지를 생각하믄 나도 같은 처지, 종놈이라서 하는 애기가 아니라 계집 자식 있는 놈이 그라믄 두리가 첩 될 기든가? 어림없제. 살림 따시겄다 인물 쓸 만하겄다, 봉기 마음으로야 양반이라 캐도 딸을 첩질 시킬 생각 없일 긴데. 사램이 경위 없이 욕심 많기로는 호가 나 있지마는 자식한테사 여간 애살스러바야제."

"봉기한테 망신당한 뒤에는 두리를 차지 않으믄 지 눈을 빼라 해쌌더마는 지난 가슬부터 시죽시죽 웃으믄서 봉기가 딸 주겄다 할지도 모른다 하지마는 이분에사 내 편에서 딱지를 놓을 기라 해쌌던데?"

"무안수세지 머. 한데 욕심쟁이 봉기가 사돈을 잘못 골랐더마. 살림도 없고 신랑이라는 기이 커봐야겄지만, 열세 살이나 체묵은 기이 코를 흘리고 댕긴다 카이."

"허 참 열세 살에 장개를 가는데 우리 신세는 머꼬?"

"와 아니라."

"어디 뒷빗이 업고 올 늙은 처자가 없나?"

"그러기 말이다. 처분만 기다리다가는 몽달이구신 될 기구마."

"이런 팔자 타고났일 바에는 인물이나 잘생깄든가. 이래가지고 언지 제집 천신하겄노. 세상이 고르잖아. 길상이놈은 꼬리를 치는 가시나가 있어도 싫다 카고. 거 참, 봉순이 고기이 이름맨치로 봉숭애꽃 겉은데."

"헛심 쓰지 말라고. 삼수꼴 날 긴께."

"하기사 삼수꼴만 나까. 별당 마당에서 몽둥이 뜸질은 우짜고."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노름이나 하자."

"제어기랄 것! 판돈도 없는 노름, 신이 나야 말이제."

길상이는 발소리가 나지 않게 행랑 뜰을 지나 집을 나선다. 내리막길을 내려가는데 거슬러올라오는 밤바람이 땀에 젖어 끈끈한 이마를 스치고 간다. 화끈거리는 얼굴이 썰렁하니 식는다. 그러나 땀을 계속 흘리고 있는 것처럼 끈끈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다. 봉순이가 싫지는 않았다. 아니 좋아했다. 누이동생같이 생각해왔던 봉순이가 어느덧 여자로서 자기 앞에 서게 된 요즘 실은 당황했던 것이다. 사랑스런 누이가 여자로, 사모하는 마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여자, 다만 여자로 보여졌다는 것은, 그것은 죄였다. 봉순이에게 죄를 짓는 일이었다. 스물한 살의 건강한 사내라면 겪는 성의 고민을 길상이 역시 겪고 있는 것이다. 살풍경한 머슴방에서 잔뼈가 굵어진 길상은 성에 대하여 무지하지는 않다. 삼수와 삼월이와의 괴상한 정사는 늘 이야깃거리였고 이야기라도 해서 성욕을 발산하고자 하는 늙은 총각들의 후텁지근한 목소리는 귀를 막고 안 들을래야 안 들을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길상은 마음속으로 절에서 익힌 염불을 뇌이곤 했었다. 그네들은 가능한 방법으로 몇 번씩 경험이 있는 만큼 이야기의 내용들은 여실하였다. 그런데 이제는 귀를 막고 염불을 뇌이는 것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내부 욕구에 길상이 시달리게 됐다. 장차 봉순이를 아내로 맞을 결심만 했다면 해소의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길상은 그 결심은 할 수 없다. 봉순이를 아내로 맞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면 누구를? 길상이 자신도 모를 일이다. 다만 천근의 무게를 가진 맷돌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천근의 맷돌을 들어 올려 밑바닥을 보아서도 안 된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무서운 비밀이다. 어두운 마을길을 뚜벅뚜벅 내려간다. 짚세기 바닥이 철버덕철버덕 땅바닥을 치는 것 같다. 발끝에 밟히는 제 그림자, 그러나 아무리 크게 발을 내디뎌도 자기 그림자를 넘어설 수가 없다.

"아아"

길상은 한숨을 내쉰다.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운명만 같았던 것이다. 어느 집의 담장인가. 바로 두리네 집 담장이구나 하고 길상은 생각했다. 담 안의 감나무가 담 밖으로 가지를 내뻗고 있다. 감꽃은 벌써 져버린 모양이다. 발밑에 감나무 가지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다. 감나무는 분명 담장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데 허상이 왜 흔들리는가. 걸음을 멈추고 나무 그림자를 밟은 길상이 입에서 아아, 이번에는 신음 소리였다. 길상은 감나무 그늘을 떠나 한복이 집에 어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서 가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마을 집이 하나하나 지나간다. 삽짝이 있는가 하면 판자문이 있고 속대로 엮은 문이 있고, 울타리는 있으나 숫제 삽짝이 없어 허기진 사람의 떡 벌린 아가리같이, 역시나 문짝 없는 시커먼 부엌이 그대로 눈에 들어오는 집도 있다. 수수깡 울타리, 이엉을 얹은 흙 벽담, 돌담이 이어진 기와집을 향해 읍하듯 납짝하니 웅크리고 있었다. 우물이 바라다 보인다. 조밭이 바람 따라 쏠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달이 밝다.

"짖어봐야 별 수 없일 기구마. 똥물은 누가 디집어쓸 긴데? 헤헤헤......"

"이 천하의 날도둑놈아! 한 칼에 배를 푹 찔러직이도 내 한이 안 풀리겄다! 천하에 몹쓸 개놈아!"

"목청이 작구마는. 냉수 한 그릇 마시고 목을 다듬으소. 동네방네 다 듣거시리."

", , 이놈이!"

두리네가 타래박의 물을 뿌린다.

"이크!"

뛰어 물러난 사내는 삼수였다. 길상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하하핫핫......"

"이 노오옴 내, 내가."

", 물마시고 목청 다듬으라 카이. 동네방네 다 듣거시리. 그라믄 내가 멋을 훔칬는가 다 알기고, 그라믄 당산나무에 매달리서 맞아죽든지 읍내서 사령이 와가지고 날 묶어가든지 할 거 아니요."

"......"

"그란하믄 내가 대신해서 떠들어주까요? 날 받아놓은 가시나 새미에 빠지죽었다는 소문 좀 듣게."

두리네는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미친 듯 타래박을 우물 속에 집어던지고 물을 긷는다. 삼수는 바짓말기에 손을 찌르더니 뒤로 자빠지듯 두 어깨를 잰다. 그들은 길상이 서 있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고 삼수는 술을 마신 모양이다.

"그래 내가 머라 캅디까? 나를 건디리믄 좋잖을 기라 했지. 자는 범을 건디리믄 안 되는 기라요. 두리가 시집간다 카믄서요하며 지나가다가 점잖구로 내가 묻는데 간다든지 안 간다든지 잔칫술 마시로 오라 카든지 고이 대답을 했이믄 누부 좋고 매부 좋고 안 그렇소?"

", , , 똥만도 못한."

발을 구른다.

", , , , 천하의 몹쓸 놈아! 사람으 탈을 쓰고 이, , ."

두리네는 기가 넘어서 나자빠질 것 같았다.

"오나가나 못된 짓은 독으로 차지하구마. 술 처묵은 개라니, 갈지 말고 어서 물이나 길어 가소."

길상이 삼수를 떠밀 듯 나섰다. 지독한 술 냄새다. 처음에난 삼수도 꿈틀하며 놀랐으나 이내 게걸게걸 소리를 내며 웃는다. 별안간 두리네는 물동이를 덜렁 들고 머리에 이더니 타래박을 잡아채듯 들고 길상이 앞을 그림자처럼 슬렁 지나간다.

"XX에 구멍 난 가시나 데리고 가는 놈 거 재수 더럽겄다아! 하기사 코흘리개라 카더마는!"

두리네 뒤통수를 향해 소리친다. 길상은 머릿속에 피가 울컥 모여드는 것을 느낀다. 다음 순간.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두리네는 천년을 침묵하여왔던 바위처럼 그같은 자세로 묵묵히 걸어간다. 하얀 무명옷에 달빛이 함밖 쏟아진다.

"니는 어디 가노?"

두리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 삼수는 입을 떼었다. 솟아 오른 이마, 짙은 눈썹에 그늘진 눈이 삼수를 노려본다.

"짐승 같은......"

"허허허헛, 하기사 우리 새도 빛이 있긴 있지. 허허헛...... 받아낼 거사 내 쪽에 있다마는 너무 오래됐이니께 물시하기로 하까?"

지난날 매 맞은 일을 두고 한 말이다.

"루시! 그럴 것 없지. 달도 밝고 팔다리 묶인 것도 아닌께 어디 날 쳐봐."

당당한 체구, 완력으론 이제 당할 수 없는 것을 삼수가 모르지 않는다.

"눈이 불쌍해서 그만두겄다."

큰소리는 친다.

"속 바닥까지 썩은 인간이 누구로 보고 불쌍타 카노."

"."

하다가 무슨 생각을 했던지

"길상아."

전에 없이 다정스럽게 불렀다.

"니 아까 들었제?"

"......"

"봉기 제집이 지랄하는 것도 안 봤나?"

"......"

"하기사 지랄할 만도 하지."

"곧 죽어감서도 동곳 빼기는 싫은 모양이지."

"그러는 거를 본께 니는 아즉도 쑥이고나. 흐흐훗......"

"미친 개겉이 싸돌아댕길 거 없이 누구 덕에 호패 찰 궁리나 하는 기이 좋을 기구마. 우물을 파더라도 한 우물을 파라 카는데."

모멸에 차서 침을 내뱉고 떠나려 하는데 삼수는 길상의 소맷자락을 잡는다.

"내 비밀 하나 알리줄 것이니."

"듣고 접지 않구마."

"듣는 데 밑천 드나? 듣고 나믄 나한테 치사하고 저블기다. 니나 내나 티각태각해봤자 남한테 매인 몸, 서로의 처지는 같은 기라. 아무리 종놈이 악독한들 양반만 하까, 만석 살림을 가로채지는 못하는 법이니께. 나라 팔아 묵을 수도 없고, 가시나 치마 밑을 뒤졌이믄 뒤졌지."

"......"

"니도 영 쑥맥이다."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다.

"가시나 하나 수수밭에 끌고가믄, 니 겉은 놈이사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아 사대육신 멀쩡한 놈이 그냥이야 보낼 수 있나. 그러고나서 입 싹 씻어부리믄 되는 기라. 이래도 내 말이 안 고맙나? 밑천 안딜이고 재미 보고."

길상이 부르릉 몸을 떤다.

"우떻노. 아까 니 눈으로 봤제. 그라고 안 들었나? 꼼짝없이 안 가더나? 속으론 겁이 나서 죽을 것만 같앴일 기라. 흥 언제 난 삼수라꼬. 야 그렇소? 하고 물러날까. 흐흐흐, 그눔으 가씨나 서방 될 놈이 열세 살 코흘리개라 카이 내 생각 오지기 날 기다. 수수밭 생각이 날 기라 말이다. 싫다는 년 팔목 묶어놓고...... , 그 재미가 또 각별했거든. 그래도 날 잡아직이기는커녕 소문낼까봐 맘속으로는 파리 손을 부비고 있일기니. , 세상."

"이 더러븐 짐승아!"

"맞다. 사램이 본시 짐승이니께로. 내가 짐승이믄 니도 짐승일기고."

"짐승만도 못한 놈으 새끼!"

"부처님이라고 안 하까? 중놈이라고 어디 안하더나? 하기로는 마찬가지니께. 하하핫...... 성인군자도 그거는 한다. 절손은 불효니께로 효도할라꼬 하지. 우리사 머 효도할 부모도 없인께 억울한 나날을 잊으라 카믄 그런 재미나 봐야제. 새끼는 있는 것보다 없는 편이 좋고. 줄줄이 씨암탉을 거나리고도 양기 적은 양반 생각하믄, 흐흐흣...... 만석 살림, 아 그렇지 아직이사...... 그는 그렇고, 서울 양반 몸 애끼는 거를 보믄 불쌍한 인생 아니가. , 우리 종놈 편이 낫다, 나아. 하하핫...... 재미지게 살아보는 기다. 오늘 청춘이 내일 백발이더라고 인생이 잠깐 아니가. 니도 곰곰이 생각해보믄 내 말이 맞다 할. 기고 나중에 내 생각함시로 고맙다 할 기고. , 달도 밝다. 가서 신다 버린 헌신짝이나 실컨 두딜기...... 으 음, 그라믄 나, 나는 가네."

삼수는 너털웃음을 계속하며 간다. 환장한 사람 같다. 길상은 등골을 타고 내려가는 전율을 느낀다. 걷는데 발밑을 느낄 수 없다. 미치 허공을 밟고 가는 것 같다. 숨이 차고 머릿속에 불이 붙는 것 같다. 길섶에 주질러앉는다. 손이 닿는 대로 풀을 잡아 뜯어 그것을 찢어서 길바닥에 내던지고 내던지고 한다. 음탕한 삼수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는다. 벌떼 소리처럼 왕왕거리며 떠나지를 앉는다. 불쌍한 두리, 불쌍한 두리, 하고 몇 번이나 뇌었으나 진심에서 불쌍하게 생각하는지 그 자신 알 수 없다. 덮어놓은 불쌍한 두리, 두리, 두리를 중얼거리며 죄악감에 가슴을 치고 싶다가도 어느덧 억제할 수 없는 흥분이 그것을 쫓아버리고 전신이 나른한 환각에 빠져든다. 야릇한 환각, 아찔아찔하게 손짓해오는 것, 버선목 위의 통통하고 하얀 계집애 종아리다. 너울거리는 속곳 자락이다. 도드라진 젖가슴이다. 사지를 버둥거리는 얼굴이다. 두리 얼굴이다. 아니 봉순이 얼굴, 봉순이의 가는 허릿매다.

'벵신이가? 머가 그리 잘났다구.'

도드라진 젖가슴, 버둥거리는 사지, 두리였다. 봉순이, 아니 두리다. 여자다. '맞다. 사램이란 본시 짐승이니께로. 내가 짐승이믄 니도 짐승일기고.' 길상은 머리를 움켜쥔다. '부처님이라고 안 하까? 중놈이라고 어디 안 하더나? 하기로는 마찬가지께. 하하핫 ...... 성인군자도 그거는 한다.!' 길상이는 몽유병자처럼 삽짝도 없는 한복이 집 마당에 들어섰다.

"와 안 오는고 했다."

윗마을의 관수가 짚세기 신총을 만들다가 쳐다보며 말했다. 눈이 조그맣고 까무잡잡한 얼굴의 길상이 또래다. 다른 머슴애들도 길상이를 쳐다본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데 그들의 눈이 무섭다. 세상에 나와서 사람의 눈이 무섭기로는 처음이다. 길상은 한구석에 주질러 앉는다.

"이리 앉으소."

등잔의 심지를 돋우면서 등잔 가까이를 가리키며 집주인답게 한복이 권했다.

"아무데믄 어떻나."

자리를 옮기려 하지 않는다. 한복이, 영만이, 작은쇠 그리고 그들 보다 나이 위인 관수, 양길이, 길상이, 합한 여섯 명이 들어찬 방안은 빽빽하고 좁다. 모두 일을 하고 있었다. 짚세기말고도 작은 삼태기, 어리 같은 것을 싸리나무로 혹은 짚으로 엮고 있었다. 한복이 돌아온 후부터 길상이 이곳을 드나들게 된 것은 첫째 머슴방의 그 뭉뭉한 공기 속에서 벌어지는 노름판, 야비한 잡담을 피해서였고 한복이 이외 식구가 없는 자유스러운 분위기, 아이들이 순박하고 착실하며 길상을 형같이 따르는 인정에 끌려서였다. 책도 읽고 글도 가르쳐주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고, 말하자면 젊은 아이들의 건전한 집회요 토론 장소였다고나 할까. 길상은 글을 알고 한복이도 길상이만큼은 아니지만 어미한테 배운 바탕은 있었다. 모습이 준수하고 언행이 점잖아서 이들 모임에서 윗자리에 앉는 존재였다. 비록 식자는 없으나 윗마을의 관수도 똑똑했다. 친척을 믿고 어미와 함께 떠돌아 와서 정착한 그의 근본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아비는 장돌뱅이였다고도 하고, 갖바치였다고도 하고 혹은 동학당으로서 어디서 죽었을 거라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보면 동학당의 애기가 나올 때마다 기를 쓰고 그들이 옳았음을 강조하였고 그 조그마한 눈에 열정이 타오르던 것이 인상적이었고 양반들에 대한 비판은 신랄하고 가혹했다. 그들은 서서방의 애기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운봉할배 집에 양자 데려온 애기 들었소?"

한 살 아래건만 깍듯하게 존대하며 양길이 길상에게 말했다.

"아니."

"못사는 친척집에서 게우 젖 떨어진 애기를 그 집 아지매가 양자로 데려와서 오늘 낮에 동네 사람 불러다놓고 잔치를 했는데요."

"얄 리가 났던가배요."

작은쇠가 말했다. 양길은 콧물도 없는 코를 들이마시면서(그의 버릇이었다.)

"딴데서 낳아왔다고 그 집 아지매한테 작대기를 휘두르고 그런 난리가 없었답니다."

"운봉할배가?"

"그라믄 누구겄소. 동네 사람들이 말리믄서 대가 끊어지도 좋느냐고 막 야단을 쳤다 안 캅니까. 아무리 달래도 안 듣더마는 그 말을 하니께 들을 만하더라나요?"

"온정신이 아닌께."

"온정신이믄 그럭 허겄소? 얼매나 좋은 사람이라고.'

한복의 말이었다.

"그랬는데,"

양길이 다시 말을 이었다.

"잔치가 파해서 사람들이 돌아갈라 카니께 비죽비죽 웃으믄서 이자 나한테 지팽이가 하나 생깄다 카더라나요? 지팽이는 무신 지팽이냐고 했더니 저 머시마가 조금만 크믄 지팽이 대신 안 하겄느냐, 그러더랍니다. 남한테는 그러고 이내 아지매보고는 욕을 하고, 그리 착한 며느리가 어디 있일 기라고 효부 났다고 멀리까지 소문이 났고 옛날 겉으믄 효부상을 받아도 받을 긴데."

"효부상이기는 커녕 사똔가 원님인가, 가랭이 찢어지게 생깄다. 옛날에사 기생 데리고 뱃놀이하믄서 염치는 조금 있어서 그런 선심이라도 썼지마는."

관수는 이죽거렸다. 이때까지 조마조마하며 말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영만이가

"서울서 인편에 핀지 왔소."

풀쑥하니, 길상이에게 말했다.

", ."

하고 한복이 거들어준다. 그들은 이미 먼저 들은 애기였다.

"두만이한테서?"

". 내가 읽었소."

영만이는 길상이한테 그 동안 언문을 배워서 편지를 읽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며 코를 벌름거렸다.

"그래? 머라꼬 썼더노."

"잘 있다 캅디다. 윤보아제씨가 잘해주고 일도 가르쳐주어서 이자는 공밥을 안 묵는다 캄시로 일거리가 쉴 새 없이 있다 캅디다. 서울서도 윤보아제씨만큼 솜씨가 좋은 사램이 그리 흔치 않아서 남들은 일손 놓고 놀아도."

"음 그래. 그런데 서울 시수는 우떻다 카든고? 시끄러블 긴데......"

"서울은 잠잠하다 캅디다."

"잠잠해? 그럴 리가 있나."

"잠잠하기는 지랄이 잠잠해."

관수가 뚝배기 소리로 화를 낸다.

"그래도 잠잠하다고 씌였던데."

"집에서 걱정하까바서 그러는 기지."

"사방서 의병들이 들고일어났다 카는데 서울이 잠잠하겄나. 시끄러블 기구마."

양길이 짚을 뽑으며 관수 말에 동조했다.

"우리 동네 김훈장 어른도 의병장 했다고 잽히갔다는 소문이든데."

작은쇠도 아는 체를 한다.

"잽히갔다고? 어디로 잽히갔는고?"

영만이 불안스러워하며 물었다.

"울 아부지가 그러는데 손발을 꽁꽁 묶어가지고 왜눔 땅 대마도로 잡아갔단다. 왜눔들은 옛날 원수 같을 기라고 거죽을 벳기서."

"에키! 순 거짓말도 푼수가 있다. 김훈장이 멋이 그리 대단한 사램이라꼬."

관수는 픽 하고 웃는다.

"대마도로 잽히간 사람은 김훈장이 아니라 전에 큰 벼슬을 살았던 선빈데 나이도 팔십이나 다 돼간다 카든가."

"그런 노인네가 의병장이 됐단 말이요?"

작은쇠는 다잡듯이 물었다.

"내가 전라도 사람한테서 자시하게 들었는데 말이 의병장이지 변변히 쌈 한분 못하고...... 동학군들을 모았이믄 그러크름은 안 됐일 기구마. 선비들이 책이나 읽었지 머를 알아야 말이제. 그런데 한 가지 결전을 내지 말자고 조선팔도에다가 포고문을 냈다 카는데 그거 하나 잘한 생각이라.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그렇기만 하믄 조선 백성들을 이 잡듯이 다 잡아 직일 수는 없일 기고."

"그렇기 못하니께 속 타지."

길상이 내뱉았다.

"그렇지마는 대마도로 잽히간 김훈장 어른."

"임마! 김훈장 아니고 딴 사람이라 카이. 김훈장이사 그 양반을 찾아갔일 뿐이다."

관수는 작은쇠를 나무란다.

", 그라믄 그 잽히간 양반을 정말 가죽을 벳기는 기까요?"

"머 그런 짓이야 하까마는 직이기 쉽겄지."

"가죽은 안 벳기고...... 그냥 직이......"

작은쇠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래도 서울은 잠잠하다 카든데......"

형의 신변을 염려한 영만이는 그렇게 믿고 싶은 모양이었다.

"걱정 마라. 두만이새끼 총대 들고 의병 나갈 놈은 아니께로. 누구 아들이라고."

관수 핀잔에 영만을 붉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요담 추석에는 핵짚세기 몇 키레 삼아서 팔았이믄 돈 좀 벌겄는데."

양길이 방안 분위기를 바꾸어볼 셈으로 말했다. 평소 같지 않게 우울해 있는 길상이 하며 방안 공기가 무거웠던 것이다.

"니 솜씨에? 그기이 얼매나 구찮은 일인데."

관수는 뿔이 돋는 표정을 지었다.

"헤에기 추리낼 일이 한창이니께 잔손이 많이 가고."

말수 적은 한복이 말이었다. 핵짚세기란 짚 속의 벼를 훑어낸 줄기만 가지고 삼는 신발이다. 길상은 여전히 우울한 채 앉아 있다가 일어섰다. 왜 벌써 가느냐 고들 물었으나 대답은 하는 둥 마는 둥 밖으로 나왔다. 그곳을 나서는 순간부터 길상의 머릿속에는 다시 환상이 나타났다. 귓가에는 삼수 입에서 나온 상말이 울리기 시작했고 눈앞에는 봉순이와 두리의 얼굴 모습이 번갈아가며 나타나고, 종내는 삼월이까지 합세하여 길상이 괴롭힌다. 얼마쯤이나 지나왔을까. 정자나무 가까이 달빛을 등지고 서 있는 웬 사람을 보았다. 다가가서 보았을 때 포립을 섰으나 남루한 의복이 거지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냥 지나치려 하는데

"여보시오."

하고 거지가 불렀다.

"와 그러요."

"이 동네에 최참판댁이 있소?"

거지 행색과 달리 말씨는 부드럽고 가라앉아 있다.

"허 참, 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소?"

"그러세...... 한데, 그 댁에 지금도 길상이라는 사램이 있는지 모르겄소."

"?"

길상은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묻는다.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술이 깨는 듯한 기분이다. 바싹 다가서며 얼굴을 보려 했으나 포립을 쓰고 달빛을 등지고 있기 때문에 알아볼 수가 없다. 늙은인지 젊은인지도 알아볼 수 없다.

"그 사램이 지금도 최참판댁에 있소?"

거지는 다시 물었다.

"만고에 나를 찾을 사람은 없일 긴데 댁은 누구요?"

"그라믄 바로 댁이 길상이라는 사램이요?"

조금도 변함이 없는 억양의 목소리로 묻는다.

". 내가 길상이요. 댁은 뉘시오."

길상의 가슴은 두근두근 뛰었다.

"다만 길 사는 사램이요. 어떤 사람의 부탁을 받고."

"어떤 사람? 그 사람이 누구요?"

"그거는 나도 모르겄소. 전하라고만 했으니."

"?"

"그라믄 말해보시오."

"......"

"이 말을 서희애기씨한테 전해도 좋고 전하기가 어려우믄 안 전해도 좋고, 댁이 알아서...... 누구든 알기는 알아두어야 할 일이니."

", 그라믄 서울 외가댁에서 오시었소?"

"아니요. 그렇지는 않소. 다름이 아니라 별당아씨가 돌아가시었소."

"?"

"오 년 전의 일이었소."

", 오 년 전, , 그러면은 괴정 난 해."

"괴정에 돌아가신 게 아니고 병들어 죽, 죽었......."

거지는 말끝을 잇지 못한다.

"댁은 누구요!"

길상이 울부짖는다.

"보시다시피 거지요. 그러면."

거지는 등을 돌렸다.

"여보시오!"

길상이 거지의 어깨를 움켜잡았으나 뿌리치는 힘이 더 강하였다. 걸음을 빨리 한다.

"여보시요오!"

길상이 쫓았다. 그러나 거지의 걸음은 더 빠르다. 그림자보다 가볍고 바람같이 빨랐다.

"여보시오!"

 

 

10. 왕시의 동학 장수

"옴마! 옴마!"

방근 뒷간에 용변 보러 나간 아이가 비명을 지르듯 불러댄다.

"누구 숨넘어가나! 와 아침부터 야단이고."

", 여기 사, 사램이!"

"......?"

", 죽었다아!"

"머라 카노!"

", 사램이!"

", 사램이 우쨌다고?"

외딴 골짜기에 한 채 있는 오두막집 마당에서 수수방아를 찧던 아낙이 절굿공이를 팽개치고 급히 달려 나간다. 칠팔 세쯤 된 사내아이가 겁에 질려서 어미를 쳐다보며 손가락으로 수수깡울타리를 가리킨다.

", 거지가 죽었다.!"

아낙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과연 울타리 옆에 사람 하나가 엎어진 자세로 뻗어 있었다.

"아이구! , 이 일을 우짜겄노!"

", 옴마! , 아배도 어, 없는데."

얼굴은 땅바닥에 쳐박힌 채 있었다. 겨우 살을 가렸을 뿐인 남루한 의복으로 보아 거지임이 분명하다. 해진 짚세기 사이로 꿰어져 나온 뒤꿈치 발바닥이 가지런히, 안개가 걷혀져가고 있는 연옥색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 , 이 일을 우짜겄노! , 큰일났네. , 아무도 없는데 우, 우리꺼정, 하필이믄 여기서 사람이 죽노."

벌벌 떤다. 아이도 어미와 함께 떤다.

"?"

갑자기 아낙의 눈이 크게 벌어진다. 가지런히 하늘을 오려다보고 있던 발바닥이 희미하게 움직인 것 같았다. 다음에는 좀더 확실히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잇었다.

"아아 아!"

아이의 눈도 휘둥그레진다.

"옴마! , 살았는갑다!"

", 가만 있거라."

아낙은 아이를 떠밀고 나서며

"보소! 보소!"

땅바닥에 처박혔던 얼굴이 들린다.

"정신차리소!"

"아아"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나온다.

"여기가 어디라고, 이라고 있으믄 우짤 기요? 어 일어나소."

! 하고 숨이 트이는 듯 신음 소리도 멎고 송장이라 믿었던 몸뚱어리가 모로 돌려지고 꾸물꾸물 일어나 앉는다. 일어나 앉았을 뿐만 아니라 긴 팔을 뻗더니 굴러 있는 포립을 집는다. 천천히 그것을 망건 두른 상투 위에 올려 쓰고 낡아서 꼬질꼬질한 갓끈을 여민다. 행동거지가 분명하다. 행로병자는 아닌 성싶다. 너무 놀란 다음이어서 아낙은 화가 났다.

"사람 사는 마실에나 가서 죽든지 살든지 할 일이지. 이런 골짜기에 머할라꼬 와가지고, 죽어도 영장 치울 사람도 없단 말이오."

"......"

"나는 영장인 줄 알았구마."

한편 겸연쩍기도 하여 중얼거리던 아낙은 주먹을 쥐고 아이 머리를 한 번 쥐어박는다.

"빌어묵을 놈의 새끼! 알지도 못하고, 내사 마 아즉도 가심이 콩 뛰듯기 뛰어쌌는다."

이마빡에 부스럼이 돋은 아이는 아파서 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으나 그도 송장인 줄 알고 한 소동 벌인 것이 민망하였던지 이내 울음을 거둔다. 거지는 아낙을 쳐다보는 것도 아니요, 아이를 쳐다보는 것도 아니요, 혼자서 중얼거렸다.

"미안하게 됐소이다."

"미안하나마나 인적도 없는 산골인데 이럭 허고 있이믄 우짤 기요. 어 일어나 가소."

"여기가 어디요?"

"창석이요."

"역시...... 발이 옳게."

"? 머라 캤소?"

"아침 요기나 시키주시오."

"머라꼬? 솥에도 안 들어간 아침이 어디 있소."

아낙은 더욱더 화가 나는 모양이다.

"내 참 얄궂은 꼴을 다 보겄네. 이 산중에 얻어묵을 기이 머 있일 기라고, 하필이믄 외딴 우리집 살짝 앞에 와가지고 새북부터 사람을 십년감수시키더니, 멀쩡한 사대육신 가지고 아, 한 삼십 리 걸으믄 마실이 나올 긴데 거기 가서 얻어묵으소. 더군다나 남정네도 없는 집에 아무리 거지라 카지마는 외간남자 딜일 수도 없고."

"바깥어른이 안 계시오?"

"외간남자는 딜일 수 없다, 그렇겠구먼."

야속해하거나 비꼬는 투도 아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에게 납득을 시키려는 것처럼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새까맣게 탄 얼굴은 무쇠 빛이다. 얼마나 올해 세월 풍설을 맞으며 뙤약볕을 밟으며 정처 없는 나그네였기에 포립 밑의 흐트러진 머리칼은 햇볕에 그을고 바람에 바래어 누르께하게 바스라져서 윤기가 없다. 눈은 맑고 빛이 있었다. 신열에서 오는 빛일까. 눈동자가 젖어 보인다. 그런가 하면 무감동한 눈빛은 겨울 하늘처럼 차갑고 삭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낙은 아까 거지가 말을 했을 적에 대체 어떤 얼굴이었던지 기억해낼 수 없었다. 대관절 얼굴이나 움직이며 말을 했었는지 그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돌덩이같이 굳은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무신 사람으 얼굴이 저러까아? 밥 빌어묵고 다니는 거진데, 얼굴이...... 무신 신장 겉이 뵌다. 구신이까?' 신장을 보았을 리도 없겠는데, 아낙은 막연한 두려움을 느낀다. 일어선 거지는 피곤하고 허기진 모습은 아니었다. 의외로 뼈대는 탄탄했다. 곧은 자세는 위엄이 있었다. 얼굴을 무쇠를 부어서 빚어 낸 것처럼 더욱더 굳어 보인다. 거지는 말없이 아낙과 아이 앞을 스쳐 지나갔다. 산허리를 꼬불꼬불 질러서 내놓은 길을 올라가고 내려가며 성큼성큼 걸어간다. 마치 평지를 가듯 수월해 보이고 날래다.

"옴마, 나는 꼭 죽은 사램인 줄 알았다."

거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아이가 말했다. '거지치고는 참 이상타. 아침 요기를 시키줄 거로 그랬나?'

"옴마, 우쩐지 무섭다."

'얻어묵을 데도 없는 이런 산중에 거지가 올 리도 없일 긴데 심상찮은 일이구마. 아무래도 예사 거지로는 안 뵈이는데 내가 벌 받을 짓을 한 거는 아닌지 모르겄다.'

"아배가 어서 왔이믄 좋겄다. 우쩐지 무섭다."

"무섭기는 머가 무서바!"

불안해지는 마음을 스스로 떨쳐버리듯 아낙은 아이의 등을 밀고 얼른 집안으로 들어간다. 햇빛 한 줄기 들이치지 않는 잡목 숲, 습기가 가득 찬 푸르스름한 지대를 벗어나고 군데군데 비틀어진 소나무가 바위 틈새에서 어거지로 자라난 야산 근처를 거지로 변모된 구천이, 아니 환이는 걷고 있다. 일찍이 그의 백부 우관이 삭발 안 한 비구요 투구 없는 장수라 하며 한탄했던 환이 거지가 되어 홀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땅바닥에 엎어진 채 통곡을 하다 깬 꿈을 생각하고 있었다. 통곡은 아낙의 고함 소리에 끊어졌고, 언제나 그런 식으로 통곡하다 꿈이 끊어지곤 했었지만, 새삼스런 꿈도 아니었다. 그림자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노상 따라 다니는 꿈인지도 모른다. 잠시 출타했다가 돌아오는가 싶기도 했고 먼 길을 떠났다가 불쑥 나타나는가 싶기도 했다. 한 달 만에 혹은 두 달 만에, 어떤 때는 반년이나 지난 뒤 환이는 그런 꿈을 꾼다. 창자가 끊어지는 울음을 우는가 하면 목이 잠겨서 소리를 내지르지 못하고 가슴을 치기도 했다. 몇해 동안 반복되어온 꿈을 환이는 조금도 이상하게는 생각지 않는다. 지금 꿈을 생각하며 길을 걷는다고 해서 그의 마음이 슬픈 것도 아니었다. 산란했던 것도 아니었다. 여러 해 동안 환이는 꿈속에서 말고는 울어본 적이 없었다. 지난 밤 평사리로 잠입해서 생모 윤씨부인 묘소를 찾았을 때도 눈물을 흘리지 않이 했다. 때때로 꿈속에서나마 울지 않았던들, 그는 울음이 어떤 것인지 잊었을지도 모른다.

환이 최참판댁 소식을 들은 것은 화개 주막에서였다. 뱅어회를 고추장에 꾹꾹 찍어먹으면서 주고받는 술꾼들 애기를 무심히 듣던 중 최참판댁 애기가 나왔던 것이다.

"옛날하고는 다르네, 달라. 어진 상전 밑에는 어진 하인이 있게 매련인데 거죽은 김서방이야 좀 어질던가? 그 댁 마님이 돌아가싰어도 김서방이나 살아 있었다믄 저 지경으로는 되지 않았일 긴데."

"서울서 온 지서방인가 뭔가 어디 말이나 한번 붙이보겄더라고? 김서방이사 우리네가 통사정을 하믄 못해묵겄다 하믄서도 사정을 봐주고 했는데 작인들 등뼈 휘게 생깄지."

"작인들도 작인이지마는 최참판댁도 말심이 아니다."

"와 아니라."

"이잔 최참판댁이 아니라 조참판댁이라 캐야 통할 기구마."

"그거사 어림없는 소리고, 아무리 세상이 콩가리가 됐다 카더라도 그리 쉽게 남으 살림 들어묵지는 못할 기구마."

"이이잉 세정 모르는 소리. 여식이 하나 있기로, 비리갱이 겉은 여식아이 하나쯤 말아넣기는 누워서 떡 묵기네."

"우선은 그렇겄지. 하나 장성하고 보믄 아. 최참판댁이야 본시부터 암탉이 울던 집안 아니가."

", 아무리 암탉이 울어도 수탉이 있어주었이니께. 이젠 영영 수탉도 없어졌고 거 만석꾼 살림도 갈라 카믄 하루아침이다. 자고로 살림이 망할라 카믄 사람부터 먼지 상한다 카더마는 사랑 양반이 그리됨서부터 이미 망조는 들었던 기라. 화무십일홍이더라고 하기야 그만 했이믄 최참판댁도 오래간 셈이지."

연곡사로 가려던 환이는 발길을 평사리로 돌렸다. 어둑어둑해졌을 무렵 환이는 들일을 하다 가는, 전혀 안면이 없는 마을 사람을 만났다.

"저 최참판댁 마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는데 혹 그게 사실이지요?"

얼굴을 반쯤 숙이고 환이 물었다.

", 벌써 언제라구요."

거지꼴이지만 말씨가 정중하여 마을 사람도 순순히 대꾸한다.

"그러면 그 산소가 어딘지 아시오?"

"그건 또 와 그러요?"

"옛날...... 그 댁 마님께 은혜를 입은 일이 있어서, 지나는 길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마을 사람은 다소 미심쩍어하기는 했다

"...... , 저어기 마루터기로 돌아가믄 솔나무가 삑 둘러싸이 있는데 가보믄 알 기구마. 비석이 있이니께로."

최참판댁 선영이 있는 곳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환이는 그러려니 생각했다. 몇 번인가 돌아보곤 하며 마을 사람이 가고 난 뒤 환이는 산기슭에 앉아 어두워지기를 기다리다가 묘소로 찾아갔다. 생시 단 한 번 어머님이라 불러본 일이 없는 여인의 무덤 앞에 엎드린 환이 눈에서는 눈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다. 무념무상, 그리움도 원망도 없이 끝없는 갈대 숲을 헤치고 가는 여인의 모습이 떠오르다가 사라질 뿐이다. 여인은 윤씨 부인 같기도 했고 별당아씨 같기도 했다. 갈대숲은 때때로 진달래 숲으로 변하기도 한다. 혼미, 끝없는 갈대숲을, 진달래 숲을 더듬고 가는 혼미, 혼미는 혼미를 부르고 허무가 하나의 정열로서 고개를 든다. 아아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하며 환이는 겨우 신음하며 일어섰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흘러갔는지 달이 떠 있었다. 이름조차 기억하기 싫은 북쪽 끝트머리 어느 깊은 골짜기에 별당아씨를 묻었던 그날 밤의 달이, 얼음조각같이 써늘해 보이는 달이. 묘소에서 마을로 내려오다가 환이는 길상이를 만났던 것이다. 그는 한눈에 길상임을 알아보았다.

"여보, 절 좀 일으켜주시려오?"

여자의 몸은 가벼워서 새털 같았다. 무게를 느낄 수 없었다. 땀에 젖은 머리칼에서 냄새가 풍겨왔다.

"여보, 제 머리,"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고 밖으로 나간 환이는 소금 접시를 담은 대야 그리고 물 한 바가지를 들고 들어왔다. 양치질을 하는 동안 환이는 수수깡, 대나무 등이 드러난 흙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허구한 날 여자는 세수라 하지 않고 반드시 제 머리, 라고만 말하였다. 왜 그랬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양치질이 끝나자 환이 방바닥에 무릎을 짚고 여자 입에 물을 머금게 하고 뱉아내는 물을 대야에 받는다. 방바닥을 짚은 환이 무릎은 가늘게 흔들리었다. 물을 머금을 때마다 핏기 읽은 여자 얼굴에 부끄럽고 조금은 성이 난 표정이 떠오르곤 한다.

개울물에 대야를 부시고 깨끗한 물을 받아 다시 방으로 돌아온 환이는 수건을 빨아서 여자 얼굴을 닦아준다. 조그마한 얼굴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닦아준다. 여자 얼굴에서 어느덧 조금 성나 했던 기색은 가셔지고 부끄러움만 남는다. 다음은 손과 가는 손목을 닦아주고 버선을 벗겨 발까지 닦아주고 나면 다시 버선을 신겨주는데 물기가 있었지만 여위어서 작아진 발에 버선은 수월하게 들어간다. 맨 마지막에 머리를 풀어 얼레빗으로 빗겨주는데 환이 눈에 눈물이 돈다. 병이 들어 기동을 못하고 자리에 누운 뒤 매일 똑같은 순서로 되풀이되어 온 일이다. 그것은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경건한 의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순서를 따라 어김없이 거행하는 환이의 표정은 제관처럼 엄숙했고 구름 같은 머리를 내맡기고 있는 여자는 또한 제관에게 운명을 바친 듯 체념과 화평에 몸과 마음을 풀어놓고 있었다.

"여보."

비로소 잠긴 목소리로 환이는 여자를 불러본다.

"이제 다 되었소. 시원하시오?"

"."

새털같이 가벼운, 도시 무게가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여자를 안아서 자리에 뉘고 이불을 덮어서 다독거린다. 초가을의, 그러니까 추석을 앞둔 팔월 초이렛날이었다. 오십 리 밖 장터에 나간 환이는 약초랑 덫을 놓아 잡은 짐승 가죽이랑 팔아 약을 짓고 일용품을 사서 망태에 넣어 어깨에 메고 골자기로 돌아 왔다.

"여보, 나 돌아왔소."

목소리가 떨리어 나왔다.

"여보, 나 돌아왔소!"

망태를 팽개치고 방문을 열었다.

"여보, 당신 약 지어왔소!"

여자는 잠든 것처럼 죽어 있었다. 혼자서 죽은 것이다. 첫새벽에 떠나 오십 리 길을 가고오고, 골짜기에는 저녁의 검은 안개가 밀려오고 있다. 관솔불을 밝혀놓고 환이는 죽은 여자 옆에 앉아 있었다. 이런 날이 오리라는 생각을 안 해본 날은 없다. 그날이 왔고, 아니 왔다기보다 죽음을 짊어진 여자와 더불어 있어오지 않았던가. 새삼스러운 슬픔도 아니지 않는가. 뙤약볕에 모래성이 쌓아올려져 무덤이 되면 바람에 날리어 무너지곤 하는 의식 속에, 첫새벽에 떠났기 때문에 허구한 날 되풀이해온 세수하고 머리 빗는 그 의식을 거행하지 못한 일이 어이없이 떠올랐다.

'여보?'

'......'

'저 산새 우는 소리 안 들리세요?'

'......'

'얼마나 즐거우면 저리 명량하게 지저귈까.'

'......'

'새들도 밤이 싫은 거예요. 아침이 좋아서, 햇빛이 환한 게 좋아서 저리 지저귀나 봐요. 캄캄한 밤이 싫은 거예요. 나도 저 새들같이 한번 날아보았으면, 산속을 한번만 거닐어보았으면.'

관솔불이 미친 듯이 춤을 춘다. 그림자처럼 여자는 누워 있고 환이는 앉아 있다. 앉아서, 언제였던가 여자가 한 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이튿날 저녁때 환이는 제가 입은 저고리를 벗어 시체를 싸고 이름조차 기억하기 싫은 북쪽 끄트머리 어느 깊은 골짜기에 여자를 묻었다. 얼음조각같이 싸늘한 달이 능선 뒤에 댕그마니 걸려 있었다. 꺼무꺼무한 능선과 맞붙은 하늘을, 환이는 그 푸른 은빛 나는 하늘을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서 있었다. 환이다. 바람개비같이 돌고 있는 지나간 지상의 세월은 지금 없는 것이다. 진실로 없는 것이다. 자취 없는 허무의 아가리였던 것이다. 여자와 더불어 영원히 사라져버린 바람이었던 것이다. 능선을 감싸듯 푸른 은빛의 밤하늘, 영겁의 세월이 흐르고 있는 저 머나먼 곳에서 다시 여자를 만날 수 있는가고 환이는 자기 자신에게 물어본다.

'여보'

'......'

'나 명년 봄까지 살 수 있을는지.......'

'......'

'산에 진달래가 필 텐데 말예요.'

'그 꽃 따서 화전을 만들어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당신께, 당신께, 싶어요, 싶어요 싶어요 싶어요.......'

여자의 목소리는 진달래꽃이 파리가 되고 꽃송이가 되고 계속하여 울리면서 진달래의 구름이 되고 진달래의 안개가 되고 숲이 되고 무덤이 되고, 붉은 빗줄기, 붉은 눈송이, 붉은 구름바다, 그 속을 자신이 걷고 있다는 환각 속에 환이는 쓰러졌다. 꿈속에서 울었다. 꿈속에서 가슴을 쳤다. 여자를 부르고 달려가고 울부짖고, 여자가 죽어 이별한 뒤 환이는 줄곧 꿈속에서만 울었다.

평안도 묘향산 근처 주막에서 연추로부터 돌아오는 이동진을 우연히 만난 것은 별당아씨가 죽은 지 두 달 후의 일이다. 해가 중천에 떴을 즈음 환이는 옥수수, 콩을 심은 화전 근처에까지 왔다. 볏가리 같은 산철쭉 더미가 도량을 향해 쓰러진 그 곁의 오솔길을 따라간다. 얼마쯤 갔을 때 초막지붕이 나타났다. 환이는 햇빛이 튀고 있는 초막 뜰에 들어섰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 한 사람이 엉성한 보리똥나무 밑에 쭈그리고 앉아서 족제비 가죽을 벗기고 있었다. 덫을 놓아 잡은 모양이다. 노인은 마당에 들어선 나그네는 못 본 척 일에만 열중한다.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서 노인의 일하는 양을 바라보던 환이는

"어르신네."

하고 불렀다. 노인은 얼굴을 들고 쳐다본다. 성성한 백발과는 달리 검붉게 탄 얼굴을 팽팽하고 눈망울이 굵으며 빛이 있다. 육십이나 되었을까. 노인은 거지꼴인 행색에는 무관하는지 굵은 눈망울을 굴리며 환이의 눈을 날카롭게 쳐다본다. 그럼 다음, 무쇠를 녹여 빛은 듯 굳은 환이 같은 것이 얼굴에 스치더니 이내 사라진다.

"요기 좀 시켜주십시오."

사라졌던 의혹이 다시 한 번 노인 얼굴을 스치고 사라진다.

"기다리게."

짤막하게 말한 노인은 얼굴을 떨어뜨리고 하던 일을 계속한다. 환이는 햇빛이 튀는 땅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세운 두 무릎을 안으며 긴 손가락을 깍지 낀다. 햇볕에 얼굴을 쳐들며 먼 산을 바라본다. 산새 울음이 간혹 들려올 뿐 골짜기의 한낮은 조용하다. 개울이 작아 그런지, 비가 오지를 않아 그런지 물 흐르는 소리도 없다.

"여보게, 젊은이."

"."

"자네 몇 살인가."

일을 계속하면서 물었다.

"서른쯤 됐습니다."

"......"

환이의 옆모습을 힐끔 쳐다본다.

"태생이 어디지?"

"먼 곳입니다."

"말투는 이 고장인데? 자라기는 이곳서 자랐겠구먼."

환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족제비 가죽을 다 벗긴 노인은 가죽을 널빤지 위에 늘어놓고 내장은 뒷간에 가져다 버리고 개울에 나가서 손을 씻은 뒤 어슬렁어슬렁 돌아왔다. 환이 노인을 쳐다본다. 두 사람의 눈이 강하게 마주친다. 환이는 의아해하고 노인은 생각에 잠기는 표정이 되었다. 부엌으로 들어간 노인은 식은 강냉이죽 두 그릇과 숟가락 두 개를 들고 나왔다. 그는 꼿꼿한 허리를 굽히지 않고 숟가락을 걸쳐놓은 죽사발 하나를 내민다. 환이는 반쯤 몸을 일으켜 두 손으로 받아든다. 노인은 나무 그늘 밑에 놓인 찌그러져가는 평상에 걸터앉더니 강냉이 죽을 먹기 시작했다. 환이는 도로 땅바닥에 주질러앉아 그도 천천히 죽을 먹기 시작했다. 죽이 반쯤 줄었을 때

"자네 보통 거지가 아니구먼."

하고 노인이 말했다.

"?"

먹는 것을 멈추고 노인을 바라본다.

"거지 아니지?"

"글쎄올시다...... 남들이 거지라니까 거지겠지요."

"......."

"......"

"이상한 일이야."

"......."

"자넨 왜 묻질 않나?"

"뭘 말씀입니까."

"노인은 혼자 사시요라든가, 왜 이런 곳에 혼자 사시요라든가, 누구든지 여길 찾아오는 사람이면 어김없이 묻는 말이거든. 이런 깊은 골짜기를 지나는 사람이래야, 뭐 그리 흔했던 것도 아니지만 처음에는 내 처지 때문에, 나중엔 말하기 귀찮고 반갑잖아서 대답을 안 했네만 남들이 다 묻는 말을 자네가 묻질 않으니 오히려 내 쪽에서 궁금하군 그래."

"저도 산골자기 혼자 살았던 일이 있으니까요. 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으니 사는 건데...... 물어 뭐하겠습니까."

노인은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자네, 글은 아나?"

"제가요?"

", 식자깨나 있는 말씨구먼."

"떠돌아다니는 처지에 식자랄 것도 없지요."

"그래 어딜 가는 길인가."

"정해진 곳이 있겠습니까."

강냉이 죽을 다 먹은 노인은 담뱃대에 담배를 담아 붙여 문다. 뻑뻑 연기를 내뿜으며 천천히 죽을 먹는 환이를 유심히 바라본다. 죽을 다 먹은 환이는 사발을 한 곁에 놔두고

"잘 먹었습니다."

한마디 하고 촐랑거리며 방정맞게 달려가는 도마뱀을 내려다본다. 보다가

", 혹시 아시는지요."

"?"

"우관스님을 혹."

"우관? 연곡사의 그 땡땡이 늙은 중 말이가?"

하는데 무슨 까닭인지 노인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이 근처에 그 늙은 중을 모를 사람이 있겠나. 교분이야 없지만 말로는 많이 들었지."

"지금도 정정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정정한지 어떤지 그거는 모르겠네만 죽었다는 애기는 못 들었구먼."

"......."

"그래 그 땡땡이 늙은 중을 찾아가는 겐가?"

"글쎄올시다."

"동학군의 장수 김개주가 우관의 친동생이었지."

느닷없이 마치 칼날 모양으로 말이 날아왔다. 순간 환이 눈이 불길에 닿은 듯 격렬하게 출렁인다. 노인은 골똘히 그 눈을 쳐다본다. 숨이 막히는 순간이다. 두 사람 사이에 들린 것 같은 괴이한 침묵이 지나간다.

"자네, 김개주를 알지?"

"......."

"피에 굶주린 이리 같은 위인이라 하기도 하고 살인귀라 하기도 하고 양반님네들은 이름만 들어도 이를 갈던 그 위인 말일세."

"이 근동에서 그분 이름쯤 모를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빨 사이로부터 목소리가 밀려나왔다.

", 아암, 그럴 테지."

노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김개주는 아는 사람이면 누구든 자넬 보고 그 사내를 한번쯤 생각할 걸세."

"어른신께서는 뉘시오?"

"나 말이가?"

노인은 껄껄 소리 내어 웃는다.

"김개주를 잘 아는 동학군이었네."

"......."

"죽지 않았다면 자네만큼 됐을 테지. 김개주의 아들을 어릴 적에 본 일이 있는 늙은이야."

"......."

"그 위인이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 궁금한 일 아니겠나? 손병희 교주도 지금은 왜국에서 세월을 관망하고 계시고 이용구 등의 왜놈 앞잡이가 되어 미쳐 날뛰는 판국인데...... 하긴 김개주의 경우는 다르지, 달라. 아무래도 그 위인은 살아남지는 못했을 게야."

환이는 눈을 내리깐 채 말이 없다.

"지금도 그 피바다가 되었던 우금치의 싸움을 생각하면 뼈가 저리네. 어찌 시운이라 할꼬? 저주를 받아야 마땅할,"

우금치의 싸움이란 축멸왜양의 기치 아래 재기포한 동학군의 최후 결전으로써 시산혈해를 이룬 처참한 패전을 말한다.

"양반이라면 치를 떨던 위인이, 그러나 그 자신은 상민의 배신으로 죽었으니. 녹두장군도 그러했고."

환이는 내리깐 눈을 쳐들었다. 눈에서 불덩이가 떨어질 것 같다.

"어르신께서는 어찌 홀로 이곳에 사십니까?"

"으음, 이제 묻는구먼."

노인은 아까처럼 크게 소리 내어 웃는다.

"세상이 부끄러워 홀로 이곳에 사네."

"......."

"핍박받는 상놈, 농민들을 이끌고 나간 내가...... 내 처자식은 그 상놈들 손에 잡혀 죽었으니 어찌 세상이 안 부끄러울 수 있겠나."

노인은 껄걸 웃었다. 우는 대신 웃는지 모른다.

"백성들이란 믿을 게 못 되네. 동학군이 왜군들 신무기에 무너졌다고들 하지만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그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바지저고리였겠나? 왜군들 신무기 앞에 육신보다 마음들이 먼저 무너졌던 게야."

"......"

"내가 이 산중에 들어온 후 자네를 만나 처음으로 내 본색을 터놓았네. 자네를 보니 불현 듯 옛일이 생각나는 잠잠했던 마음에 불이 붙는 듯싶으이. 그래 오늘 밤은 여기서 묵고 가는 게지?"

"아닙니다."

"그럼?"

"떠나야겠습니다."

환이의 눈꺼풀은 다시 내리깔려 있었다.

"그래서 쓰나. 하룻밤 묵고 가게. 내 자네한테 들려줄 애기도 있고. 자네 부친."

"아닙니다. 어르신께서는 잘못 생각하고 계십니다. 저는 다만 김아무개라는 그 어른의 이름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진정인가?"

", 모릅니다."

노인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렴 어떻겠나. 자네 얼굴을 보니 지난날 그 위인 생각, 뭐 그것만으로도 감회가 새롭네."

환이는 일어섰다.

"그럼 어르신네."

"아아, 아아 잠시 기다리게."

노인은 급히 팔을 저었다. 그리고 뒤로 돌아간 노인은 짚세기 한 켤레를 들고 나왔다.

"자네 신발이 말이 아니네. 자아, 이걸 신어보게. 맞을 걸세."

환이는 우두커니 노인을 바라보다가 짚세기를 받아, 헌 것을 벗고 새것으로 갈아 신는다.

"고맙습니다."

"지나는 길이 있으면 또 들르게."

"."

환이 눈에 눈물이 글썽 돈다. 한순간이었다.

"어르신, , 안녕히 계십시오."

노인은 떠나는 환이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지나는 길이 있으면 또 들르게!"

하고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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